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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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 《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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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30) 후쿠자와 유키치 “탈아입구”의 심층 댓글:  조회:4801  추천:9  2013-10-21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30) 후쿠자와 유키치 “탈아입구”의 심층 김문학    일본의 만엔짜리 지페에 그 초상화가 오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를 떠나서 일본 근대를 리해할수 없다. 근대 일본의 최대의 계몽사상가, 교육자, 저널리스트, 문명비평가로서 후쿠자와는 중국으로 말하면 강유위, 량계초와 엄복 이 3자를 복합시킨 인물이라 볼수 있다.   “하늘은 인간우에 인간을 만들지 아니하고 인간아래 인간을 만들지 아니한다”는 인구(人口)에 회자(膾炙)한 명언들을 뿌리면서 《학문의 권장》, 《서양사정》, 《문명론의 개략》 등 명저들을 통해 메이지시대의 일본의 사상가, 계몽지식인의 제1인자로 부상한다. 그의 사상은 래디컬하지만 “메이지유신”의 기반을 만들었으며 일본인의 서양인식 및 아시아니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근대화를 정신적으로 리드해 나갔다.   후쿠자와에 대한 한국이나 중국인의 인식은 지금까지도 그 “탈아론”에만 편향되여 “아시아멸시”의 장본인으로서만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사실은 후쿠자와의 사상체계와 인물상은 그 하나만으로 결정지으려 하는것은 너무나 편협하다.    일본인으로서는 가장 빠른 시기, 26~34세에 무려 세번이나 유럽과 미국땅을 밟으면서 그 서양문화체험의 소스가 후쿠자와의 “서양문명기준”에 맞춰서 습득해야 한다는 개명적사상을 형성시킨다.   그는 일본인으로서는 세계사적시야에서 일본과 아시아를 바라본 최초의 사상가, 문명비평가였다. 《문명론의 개략》(1875)에서 그는 유명한 “문명의 류형론”을 전개한다. 그는 유럽, 미국 문명은 “최상의 문명국”,  토이기,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나라는 “반개명의 나라”로, 아프리카 등을 “야만의 나라”로 칭한다. 그 문명정도에 따른 문명류형은 현상을 돌파하는 향상심의 유무가 원인이며 아시아, 중국 등이 개혁에 등한시하고 자기자만에 빠져 세계적 력사의 리얼리즘을 망각하여 야랑자대(夜郞自大)에 질주한 결과 현실의 정체를 자초했다고 지적한다. 즉 세계사에서 자신을 탈락시켜 스스로 자기중심에 빠진 결과 쇄퇴의 인소가 되였다고 갈파한다.   그리고 그는 세계사에 있어서의 문명국인 자본주의적인 명암을 진보와 해외에는 침략이라는 발톱을 뻗쳤다고 랭철히 분석하기도 한다. 백인에 의한 식민지화가 류행병을 전파하여 저항력이 약한 현지 인민구를 감소시켰다고 기술한다.   이런 의미에서 후쿠자와는 단순 “탈아론자”는 아니였다는것을 다시 발견할수 있다. 그는 중국에 대해서 서구의 식민지로 전락됨을 예언한다. “지나와 같이 국토도 광대하여 아직 그 내지에까지 침투하진 못했지만 서구인의 족적은 해안지역에만 있기는 하다. 그러나 금후의 흐름을 추찰하면 지나제국도 그야말로 서구인의 전원으로 전락될것이다. 서구인이 미치는 곳은 마치도 토지의 활력을 끊고 초목도 그 성장을 멈출것이다. 심지어는 인종이나 인구조차도 절멸될 가능성이 있다.”  당시 후쿠자와는 그 예리한 통찰력을 구사하여 아편전쟁을 통해 국토가 영불군에 의해 점령되기 시작한 중국이 “서구인의 전원”으로 떨어지는 반식민지의 미래를 예견하고있었던것이다.  그리고난 다음 후쿠자와는 일본이 현재 다행히도 대외관계에서 극단적피해는 받지 않았지만 역시 우리가 아시아의 일국이라는것을 망각하면 서양제국주의에게 당할 재난은 엄청 지대할것이라고 경고한다.   예지와 서양문명에 대한 견식, 그리고 세계사적 흐름에서 아시아 및 일본을 바라본 후쿠자와의 관찰에는 많은 탁월한 사상과 지견이 들어있었다.   후쿠자와가 지적했던 일들은 마치 그의 각본대로 연출되는 드라마같이 중국과 아시아에서 식민제국의 식민지배가 속속이 전개되지 않았던가.   이제 그가 발안한 “탈아입구(脫亞入毆)”에 대해 다시 고찰해보자. 1885년 3월 16일자 그 자신이 창간한 《시사신보》에 유명한 “탈아론”을 발표한다.   “오늘의 목적을 위해서는 우리 나라는 린국의 개명을 기다려 같이 아시아의 흥성을 기하는 여유는 없다. 오히려 거기서 리탈하여 서양문명과 진퇴를 같이해야 한다…악우를 친하게 사귀는것은 악명에서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아시아동방의 악우(지나, 조선)를 사절해야 한다.”   그러면서 후쿠자와는 문명동참을 “홍역”으로 비유하면서 중국, 조선은 “그 홍역을 대처하기 위해 외면하면서 페쇠를 고집하고있다”고 지적한다.   당시 세계사를 아시아사와 결부시켜 넓은 시야에서 바라보고있는 후쿠자와에게 있어서 문명동참을 거절하는 량국의 “고루”,  “페쇄”는 한스러웠을것이다. 그리고 이 “탈아론”의 발표는 자신이 지지했던 조선개화파의 제자 김옥균이 비참하게 살해되고 또 그 시체까지 릉지처참 당하는 직후에 후쿠자와의 중국, 조선에 대한 철저한 실망감에서 발해진것이다. 단지 단순히 중국, 조선을 “멸시”하여 발안한 론설이 아니였다. 그리고 그의 탈아론을 단순히 아시아침략의 원초적 사상으로만 한정시키는 견해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후쿠자와의 일생에서 창도했던 일본의 선택은 바로 청국중심의 고루하고 페쇄된 조공체계에서 리탈하여 서구형 문명국가로 탈바꿈하는 길이였다.   “탈아입구”의 선택은 바로 아시아의 서구화, 근대화의 대안이였던것이다. 다시 랭철히 분석해보면 후쿠자와의 령지는 일본을 근대화로 성공시켰으며 역시 그보다 20년 뒤져 중국에서 추진했던 근대 유신파 강유위, 량계초들의 모델이 되였다. 사실 중국의 근대화의 100년, 조선의 근대화의 100년 그 본질은 후쿠자와가 창도한 아시아적 “탈아입구”사상을 실현하는 프로세스였다.   “독립자존”의 슬로건을 걸고 일본의 독립자존과 함께 조선의 독립자존을 후쿠자와는 그 자신의 정치적과제로 삼았으며 김옥균 등을 물심량면으로 지지하지만 끝내 결실을 보지 못하고 김옥균이 리드했던 조선개화파혁명의 실패와 그의 살해에 그는 격분한다.   희유의 사상가이며 근대 일본의 정신적기수였던 후쿠자와는 일로전쟁 3년전인 1901년 2월 동경에서 뇌출혈 재발작으로 66세의 나이로 파란만장의 일생을 접는다.     
30    (29) 안중근의 의거, 이토암살은 미리 예언했다 댓글:  조회:6554  추천:15  2013-10-13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29) 안중근의 의거,이토암살은 미리 예언했다 김문학     1909년 8월말. 할빈역에서 안중근의사에 저격당할 때까지는 아직 두달 남았다. 6월 14일로 한국통감을 사임한 이토 히로부미는 추밀원의장으로 피선된다. 8월 1일부터 그는 한국 황태자 이은(李垠)을 데리고 일본 동북, 북해도 지방을 순회했는데 이은의 견문을 넓힘과 동시에 이은을 중히 여긴다는것을 일본국민과 한국국민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다.   삿포로 시찰을 마친 그날 이토는 이은을 수행에게 맡기고 삿포로의 다카시마(高島)농장을 방문한다. 북해도까지 왔다면 꼭 농장에까지 와달라는 다카시마의 청탁을 받았기때문이다.   다카시마하면 근대 일본의 유명한 실업가로서 독자적인 역술(易術ㅡ점치는것)인 다카시마역단(高島易斷)의 창시자로서 메이지시대 정국을 역학으로 점쳐온 역학의 대가였다. 그는 일본 근대사의 대사건, 이를테면 일청갑오전쟁, 로일전쟁 등 명치일본의 국운을 결정짓는 중요한 정국, 전국(5遡?의 행방을 점치고 그것을 상세하게 기록, 공표하기도 했다. 또한 그의 역학의 “적중률은 거의 백발백중”이라는 정평이 나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 다카시마는 출타중이여서 이토는 지배인 호소노에게 농장을 안내하게 하고 농장구경만 하고 돌아왔다. 그날 이토는 칠언절구 한시를 쓴다.   이 몸을 버려서 국난에 대하고(蹇蹇匪躬何念歸)   만천에 싸인 안개 려장을 적신다(滿天風露濕征衣)   석수산에서 본 가을꿈은(秋宵石狩山頭夢)   흑룡강을 넘은 사명으로 완수하리(尙尙黑龍江上飛)   북해도에서 돌아온 그는 10월 12일 오아미산장에 있는 다카시마를 다시 방문한다. 만주에 가기전에 꼭뵙자는 다카시마의 청을 들어준것이다. 이토를 만난 다카시마는 이번 만주행을 중지할수 없냐고 화제를 꺼냈다. 감수성이 예민한 이토는 즉석에서 자신의 만주행에 관해 다카시마의 역점결과가 상서롭지 않음을 깨달았다.   불안감을 억누르며 이토는 그에게 역점결과를 물었다. 다카시마는 이토 히로부미와는 사돈지간이였으며(이토의 아들 박방(博邦)과 다카시마의 딸 결혼) 일생동안 절친한 지교이기도 했던터라 기탄없이 결과를 직백했다.    “결과는 간위산(艮爲山)이란 3자였다.” 이 점괘는 “피차 각각 사상을 달리하여 서로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할 시기다. 고로 이 간(艮)의 시기에는 추호도 희망을 품지 말것”이라는 의미였다. 즉 전개시키자면 이토가 제아무리 한국의 자주독립을 입에 달고 모색한다 하더라도 한국은 반발할뿐 호결과가 없다. 또한 스스로 스톱하면 좋지만 계속 나아가면 실패와 죽음을 의미한다.    다카시마는 이 점괘에는 이토의 암살되는 뜻이 있다고 직언했다. 그뒤 이 점괘는 과연 적중했다. 그리고 “간(艮)”은 즉 안중근(安重根)의 “근(根)”을 의미했다는것이 알린다.   그날 다카시미는 이토와 작별하면서 주위의 뭇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토의 손을 꼭 쥐였다고 한다. 다카시마는 이것이 금세의 최후의 리별이라는것을 확신했기때문이리라.   이토의 사위가 된 외무성관리였던 코마츠 미도리 저서 《춘무공과 함설공》에 의하면 이토는 “점괘를 리유로 국교문제의 최고 책임자가 외교적방문을 중지할수 없다”고 하며 암살의 예언을 아랑곳않고 만주로 떠난다. 춘무(春畝)는 이토 히로부미의 호이고 함설(含雪)은 야마키다 아지토모의 호이다.  아마 이토는 죽음을 각오하고 만주행을 실행했는지도 모른다. 이토 신변에 있던 비서관 후루타니(古欲綱)는 만주를 이어 그가 수개월후 “북경에 가려고 했다”고 회상하고있다. 한국에게는 적장이였지만 일본에게는 이토는 자신의 사명을 철저하게 수행하는 정치가였다.   코마츠의 회상기에 따르면 이토는 다카시마의 역을 백프로로 믿지는 않은듯 하며 늘 자신의 처신을 우선시킨 충실한 정치가였던것이다.   이토 측근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의 저택을 이토는 “창랑각(滄浪閣)으로 명명했는데 만경창파를 헤아리고 전진한다는 뜻이였다고 한다. 그가 창랑각에서 생활할 때 언제나 암살이 두려워 침대우에서 취침하지 않고 침대밑에서 잤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암살을 두려워했던 그가 할빈에서 안의사에게 암살당하고마니 이 역시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다.   기(奇)하게도 1909년 9월 15일자 미국동포들이 발행하던 《신한일보》에 “안중근의 의거”를 예언하는듯한 시사만화가 게재된다.   삼천리 강토모습이 그려진 옷을 입고 태극문양의 권총을 머리에 쓴 조선인이 두손으로 천도(天道)와 공법(公法)이란 어휘가 새겨진 십자가를 쥐고있는데 맞은켠에는 태양의 얼굴을 한 일본인이 서있는데 두손에 쥔것은 법과 무력을 상징하는 지팡이와 쇠망치였다.    일본인이 “먹을수록 맛이 좋아 나머지마저 먹겠다”고 말하자 한국인이 “옛다, 자 받아라. 하나, 둘, 셋,넷” 웨치면서 4발의 총탄을 쏘는 모습을 만화로 의인화하고있다.   이 만화에서 한국인은 마치 안중근의사의 표상이고 태양의 얼굴을 한 일본인은 마치 이토 히로부미의 표상인듯 하다. 일본제국의 한국보호의 미명으로 행해졌던 식민지지배에 경고한 만화로서 신통히고 이토를 저격한 안중근의사의 의거를 미리 예언한 감을 준다.    1909년 미국 쌘프란시스코에서 재미 독립운동 단체인 국민회의 기관지적 구실을 한 《신한일보》는 타향에서 자유롭게 일본비판을 전개했으며 그후 연해주와 청국의 땅에서도 읽히였다고 한다.   사실 이 만화가 게재된지 한달 좀 지나 할빈역두에서 의병장 안중근의사에게 저격당한 이토는 그 파란만장의 생을 접는다. 안의사가 그해 실제로 《신한일보》를 읽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을것이다.    
29    (28) 일본에서 단련된 장개석 댓글:  조회:5569  추천:6  2013-10-11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28) 일본에서 단련된 장개석 김문학   백년전의 1909년 6월, 장개석과 손문은 일본에서 첫 상봉을 이룬다. 호놀룰루에서 일본을 거쳐 싱가포르로 가게된 손문은 진기미의 소개로 장개석을 만난것이다.   중국 근대사의 두 거물의 첫 상봉은 중국이 아닌 일본에서였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당시의 사실에 대한 자상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에 그 실정은 명확하지 않지만 중화민국사의 특기할만한 상봉이라는데 의미가 있다. 손문은 그날 만났던 장개석에 대한 인상담을 진기미에게 이렇게 술회한다. “우리 혁명운동에는 장개석같은 인재가 필요하오. 그는 장차 꼭 혁명가로 성장할것요.”    장개석과 일본의 인연은 손문만큼 두텁다. 근대 일본과 중국관계사의 “산증인”으로서 일본인들은 오늘까지도 장개석에 대한 평가가 높으며 지대한 존경의 마음을 품고있다. 장개석은 일본에서 두번 류학하며 수차례 망명, 방문했는데 일본문화에 대한 그의 인식에는 독특한 부분이 있었다.     1905년 청년 장개석은 일본에서 근 일년 류학한다. 처음 일본으로 향한 배우에서 “일본인들은 아무데나 가래침을 뱉지 않고 손수건이나 티슈에 뱉어서 처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청결한 일본인 인식이 각인된다고 자신이 고백한다. 첫번째 류학기간은 짧았으나 그는 국민당 원로의 한사람인 진기미를 알게 되고 진씨의 조카들인 진과부, 진립부 형제 등 많은 혁명지사를 알게 된다.   그해 겨울 귀국한 장개석은 1906년 수석으로 보정(保定)륙군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기실 그가 여기에 입학한 목적은 바로 일본으로 재차 류학하는것이였다. 그리하여 1907년 구정을 쇠고난 그는 총망히 대련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일본 동경의 진무학교(振武.A校)에 입학하게 된다. 이 학교는 청국류학생의 군사학습을 목적으로 설립한 사관학교의 륙군예비교로서 유명했다. 중국 근현대의 저명한 군수장, 도독(都督)들이 거의 이 학교 출신이였다. 염석산(閻錫山), 채악(蔡鍔), 리렬균(李烈均), 오록정, 장백리, 풍옥상 등 수백명의 리스트가 줄짓는다.   장개석은 진무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륙군에 편성되여 1909년부터 1911년까지 니이카터현 타가다(高田)포병련대에서 근무한다. 당시 24세의 장개석은 신장 169센치메터, 체중 59.2킬로그람, 최하위 2등병으로서 일본군의 “무사도”적인 규칙아래 렬악한 환경과 엄격한 군기하에서 심신을 단련한다.      1905년 청년 장개석은 일본에서 근 일년 류학한다. 처음 일본으로 향한 배우에서 “일본인들은 아무데나 가래침을 뱉지 않고 손수건이나 티슈에 뱉어서 처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청결한 일본인 인식이 각인된다고 자신이 고백한다. 첫번째 류학기간은 짧았으나 그는 국민당 원로의 한사람인 진기미를 알게 되고 진씨의 조카들인 진과부, 진립부 형제 등 많은 혁명지사를 알게 된다.   그해 겨울 귀국한 장개석은 1906년 수석으로 보정(保定)륙군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기실 그가 여기에 입학한 목적은 바로 일본으로 재차 류학하는것이였다. 그리하여 1907년 구정을 쇠고난 그는 총망히 대련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일본 동경의 진무학교(振武學校)에 입학하게 된다. 이 학교는 청국류학생의 군사학습을 목적으로 설립한 사관학교의 륙군예비교로서 유명했다. 중국 근현대의 저명한 군수장, 도독(都督)들이 거의 이 학교 출신이였다. 염석산(閻錫山), 채악(蔡鍔), 리렬균(李烈均), 오록정, 장백리, 풍옥상 등 수백명의 리스트가 줄짓는다.   장개석은 진무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륙군에 편성되여 1909년부터 1911년까지 니이카터현 타가다(高田)포병련대에서 근무한다. 당시 24세의 장개석은 신장 169센치메터, 체중 59.2킬로그람, 최하위 2등병으로서 일본군의 “무사도”적인 규칙아래 렬악한 환경과 엄격한 군기하에서 심신을 단련한다.    겨울에는 설국이라 불린 타카다의 병영에서 일본군과 같이 랭수에 세수를 하고는 또 군마를 씻는 작업, 변소청소 등도 해야 했다. 식사사정도 백미밥은 있었으나 일본식 “오니기리”(주먹밥)에 다쿠앙(무우김치류) 세쪼각이였다.   당시 일본군영에서는 간거한 훈련방식으로서 검소한 생활을 지향하고 정신적소양과 심신의 단련을 통해 육체와 의지의 일체화를 노렸던것이다.    장개석은 바로 이같은 군대의 훈련체험을 통해 치욕과 간거한 심신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고(苦)를 락으로 삼으며 높은 사상의 경계에 도달했다고 많은 식자들이 보고있다.   그뒤 장개석은 실생활에서도 일본식 검소한 식사를 즐겼으며 담박한 일본식 생활을 지향했으며 부인 송미령의 사치한 생활양식과는 판이했다. 그가 언제나 “장까까머리”란 별명이 붙을만큼 삭발을 즐긴것도 일본식 군대의 삭발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은 까닭이라 한다.   “나는 지금까지 일본의 진충보국의 전통정신을 숭경하며 또한 부모를 존경하고 스승을 높이 모시고 협과 의를 중히 여기는 일본민족성을 사랑한다. 일본은 나에게있어서 제2의 고향이다.” (1970년 외국인 기자 회담)고 장개석은 솔직히 고백한다.   장개석은 일본의 무사도와 중국의 사도(士道)를 모두 중국 왕양명의 “지행합일(知行合一)”학설의 실천으로 보고있었으며 중일 량국의 문화적 동질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1932년 《중국의 립국정신》)   1934년 장개석이 전국민에게 호소한것이 유명한 “신생활운동”이다. 그 운동의 골자는 바로 장개석이 20대 젊은 시절 일본에서 형성된 정신세계의 일부분이였다. 일본에서 배운 “례의렴치”를 슬로건으로 중국 국민성을 개조하고 문명인, 문명국으로 탈바꿈을 지향한것이 장개석의 꿈이였다. 도덕과 지식교양의 향상을 호소한 이 운동은 중국 민국정신사에서도 평가절하시킬수 없는 한 대목이다.   장개석은 일본국민성과 비교하여 중국국민성을 “오예(汚穢), 랑만(浪漫, 산만, 규률이 없음), 라타, 퇴당(頹唐, 정신위축, 체격취약, 불량취미 등)” 등 4대 렬근성으로 꼬집고 그 치료약이 바로 “례의렴치”의 생활방식이라고 지적하며 그 실행법으로서 “정제,  청결,  간단, 소박(朴素)”의 국민성정립이라고 력설한다.   장개석의 일본인식에는 청년시기 일본에서 실체험을 바탕으로 한 “일본적정신”이라는것이 자리잡고있었다. 그는 1934년 신생활운동에 관하여 수차례 강연을 하면서 “나는 일본륙군에서 배웠으며 그 학교교육, 군대교육을 받았다. 일본인의 생활은 례의렴치에 통한다. 그것으로 일본은 부국강국으로 되였다. 우리 중국인은 포연탄우속에서 일본인과 싸우기전 일상생활에서 이미 지고있다”고 국민성 결함을 지적한다.   장개석이 창도했던 “신생활운동”은 70년대 박정희가 한국에서 대거 전개했던 “새마을운동”과 같은 맥락으로서도 포착할수 있다. 일본을 배워 문명인, 문명국으로 거듭나자는 동아시아의 “일본학습”의 형태이기도 했다. 사실 21세기의 오늘에도 장개석의 “신생활운동”의 골자는 여전히 유효하며 부유와 물질추구에 편향된 오늘 중국국민의 결함을 시정하는 정신적 “약”으로 될수 있다.   장개석의 일본인식, 일본문화 리해에는 중국 정치가치고는 투철했다. 그는 일본인의 국민성을 숙지하고있었기에 항일에 있어서는 섣부른 “암석에 계란 던지기”가 아닌 “일면교섭 일면저항”의 전략을 사용했으며 “지구전론” 역시 모택동보다 수년앞서 제기해왔던것이다.  
28    (27) 베일에 가려진 서태후 레이프사건과 의화단의 사후처리 댓글:  조회:6733  추천:11  2013-09-30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27) 베일에 가려진 서태후 레이프사건과 의화단의 사후처리 김문학   력사에는 베일에 가려진 은페된 사실(史實)이 무수히도 많이 존재한다. 필자가 력사공부를 해오면서 한중일근대사 100여년전에도 이같은 은페와 허구가 많았다는것을 발견하면서 노상 경악하군 했다. 력사교과서나 영화 《원명원을 불사르다》, 《수렴청정》에 의해 널리 각인된 8국련합군의 만행과 의화단의 애국적저항 및 서태후의 도벽행위(西巡)는 주동의 정설로 돼있다. 그러나 필자가 일본에서 발견한 사료기술에는 서태후가 사실 광서황제와 같이 피난을 가지 않고 자금성에서 100여명의 환관들과 눌러앉아있었던것이다. 영화에서는 1900년 8월 10일, 8국련합군이 북경으로 습격해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청국 궁정에서는 서쪽으로 탈출하는 “서순(西巡)” 즉 서태후, 광서황제 일행이 8월 15일 새벽 자금성을 나서 10월 26일 서안에 도착하는것으로 돼있다. 그리고 서태후도 광서황제도 한족의 평상복으로 변장하고 겨우 도벽에 성공하는 우여곡절이 전개되여 비장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은 광서황제만 피난하고 서태후는 자금성을 지켰는데 그것이 그녀의 비운을 초래한다. 《력사독본》 1992년 11월호 《선향의 불》(마스이 유키오(增井經夫), 1987년 간)의 증언에 의하면 8국련합군이 북경에 입성하여 롱성(籠城)하고있던 외국인, 중국인을 해방시키고 북경에서 야만적인 략탈과 폭행을 감행하였다. 그런 와중에 자금성에 란입한 미국병사가 서태후의 거실까지 습격하여 64세의 서태후를 레이프(강간)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대청제국의 최고실력자인 64세의 로파를 정복했다는 상징적의미로 그런 만행을 감행했다고 한다. 이 사태에 경악한 청국은 미국에 항의하였으며 미국 역시 사과했으나 그 긴급교섭에 통역으로 입회한 인물이 일본의 유명한 작가 핫토리 우노기치(服部宇之吉)교수였다. 당시 그는 동경제국대 교수로서 북경류학중에 의화단사건에 조우하여 북경롱성에 있었다. 영어와 중국어를 뛰여나게 잘한 그를 량국정부가 제3국의 통역으로 림시 요청했던것이다. 청국에 사죄한 미국정부는 의화단의 사후처리로서 청국으로부터의 배상금을 중국인을 미국으로 류학시키는 류학자금으로 하는 등 청국교육사업에 사용하도록 하는것으로 매듭진다. 당시 청국과 미국 량측으로부터 핫토리교수는 “이 사건을 30년동안 입밖으로 새나가게 해서는 안된다”는 입막음다짐을 받았다. 핫토리는 그 약속을 지켜 30년동안 아무에게도 루설하지 않았다. 그가 동경대학 동아사연구실에서 당시 그의 제자였던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노하라 시로오(野原四郞), 마스이 유키오 등 인물들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이 세사람은 현대 일본의 력사학, 고고학 분야의 쟁쟁한 학자로 성장한다. 마스이교수의 회상에 의하면 당시 일본 군부와 기자들속에 이 사건을 알고있는 인물이 다수 있었으며 단지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을뿐이라 한다. 핫토리교수는 일본의 중국학의 거물이며 1902년 북경대 전신인 경사대학당 창건시기 교습으로 최빙돼 물심량면으로 공헌한 재질과 덕을 겸비한 야심적인 학자였다. 그의 부인은 또 추근(秋謹)을 일본으로 추천한 인물이기도 하며 그의 막둥이 딸의 회상에 의하면 부인도 이 사건을 알고있었다고 전해진다. “국모릉욕사건”은 그 사건이상으로 “청국을 릉욕한” 상징적 사건이였고 중국의 반식민지의 치욕적인 근대사의 한 장면이였다. 그 배경에는 “의화단운동”이 있었으며 외국인의 “북경롱성”이란 력사사실이 있었다. 그럼 의화단운동은 왜 발생했을가? 19세기말 아편전쟁이후 제국주의렬강의 중국진출은 문화적으로 기독교 포교활동으로 전개되였다. 하여 많은 청국인들이 기독교를 신앙하게 되었는데 신도들과 중국 평민들의 충돌도 빈발하였다. 드디여 반양(反洋)교운동이 장강류역, 화북에서 과격화되며 결국 의화단운동의 단서로 된다. 의화단은 의화권술에서 온 명칭인데 권술과 주문을 터득하면 그 어떤 총칼도 막는다는 불사신의 능력이 주어진다는 민간신앙을 베이스로 발전되여 1899년 산동에서 흥기하고 1900년에는 하북으로 전파되였다,. 봄에 의화단이 북경에 입성하여 6월 20일부터 동교민항이라 불린 외국공사관구역 및 성내 북부구역에 8국 외국인과 청국신도 4천여명이 “북경롱성”의 막을 열었다. 의화단은 의화권술에서 온 명칭인데 권술과 주문을 터득하면 그 어떤 총칼도 막는다는 불사신의 능력이 주어진다는 민간신앙을 베이스로 발전되여 1899년 산동에서 흥기하고 1900년에는 하북으로 전파되였다,. 봄에 의화단이 북경에 입성하여 6월 20일부터 동교민항이라 불린 외국공사관구역 및 성내 북부구역에 8국 외국인과 청국신도 4천여명이 “북경롱성”의 막을 열었다. 일본 외무성 서기생과 독일공사가 의화단에 의해 살해되면서 의화단과 8국 렬강과의 전투가 전개된다. 지금까지 의화단에 대해 진압군을 파견하면서도 탄압할가 지원할가 망설이던 청국정부는 6월 21일 8국렬강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의화단을 전투력으로 활용하려했던것이다. 8월 8국련합군은 북경을 습격한다. 련합군은 치렬한 싸움끝에 북경에서 갇혀 “롱성”하던 외국인과 청국신도들을 구하게 된다. 그리고 8국련합군은 북경성에서 교과서에서 기술한 “필설을 다할수 없는 살인, 방화, 강간, 략탈”을 거듭하면서 원명원에 있는 국보진품, 문화재를 강탈한다. 이런 와중에 궁중에 남은 서태후가 그 만행을 당하게 된것이다. 서구군대와 대조적으로 당시의 문헌기록을 보면 일본군은 규률을 지키고 자금성을 보호하는데 기여했던것이다. 리홍장의 심복이였던 성선회(盛宣懷)는 “일본군은 로씨야군과 달라서 신뢰할수 있으며 자금성을 지켜줄것이다”고 주장한다. 서구군대들이 자금성을 포격하자고 한것을 일본군은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청국에 동정했으며 자금성을 보호하자고 했다. 그리하여 일본군의 노력으로 자금성은 략탈을 면했고 성벽에 탄환 하나 맞지 않고 수비되였다. 우리가 배운 력사에는 이런 력사의 구체적인 실상들이 탈락돼있다. 의화단이 어떻게 용감하게 맞서 싸웠으며 비장히 희생됐다는 표층적인 사실만 강조하며 그런것을 모두 “애국적행위”로 활용한 “사후기술법”이 허다하다. 여기서 발견되는것은 서태후의 청국정부가 의화단을 애국적방패로 삼아 서구렬강과 결승전을 감행하는 첨병으로 리용했던것이 큰 우(愚)였다. 결국 긁어서 부스럼을 만드는 격으로 서구렬강의 침략을 북경으로 깊숙이 침투시킨 악과를 자초했던것이다. 서구의 근대무기앞에서 주문과 칼이 무슨 소용있으랴. 1901년 11개국 렬강에 의해 맺은 《신축조약》은 청국의 반식민지화를 진일보로 가속화시켰다. 근대문명을 무시한 력사의 아이러니였다.
27    (26) 얼굴없는 국모ㅡ명성황후 댓글:  조회:6083  추천:31  2013-09-21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26) 얼굴없는 국모 - 명성황후 김문학   근대 조선사에서 가장 참혹한 회상사를 당한 인물은 김옥균과 명성황후를 꼽아야 한다. 개화파 수령 김옥균은 민비(즉 명성황후)가 파견한 동족암살자에게 상해에서 총탄에 쓰러지지만 민비는 일본인에게 참살을 당한다.    “력사상 고금 미증유의 흉악한 사건”으로 칭해진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한일량국의 근대사 및 동아시아 근대사의 루락할수 없는 일대 사건이였다.    “1895년 10월 8일 오전 5시반, 경복궁 담을 넘어 광화문을 열어젖힌 괴한들은 북단의 건천궁까지 한달음에 달려가 고종의 처소인 장안당과 왕비(명성황후)의 처소인 곤녕합을 점령한다. 고종이 그 괴한들을 가로 막지만 그들은 왕까지 밀쳐버리고 방약무인으로 전진한다. 곤녕합에서는 한 녀인이 궁녀들과 함께 장안당과 련결된 복도에 나타났다. 이때 뒤를 쫓던 괴한중 하나가 그녀의 덜미를 잡고 뒤뜰안으로 끌어내린 뒤 힘껏 칼로 내리쳤다. 비명속에 쓰러진 녀자는 바로 왕비였다.  그 칼을 휘두른 자가 일본 륙군소위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였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일왕의 명령에 따른 일본군부가 을미사변을 일으킨것이다.”(2010년 1월 11일 조선일보) 서울대 이태진명예교수가 현장에서 명성황후의 살해된 상황을 설명한 말이다.   그뒤 괴한들은 왕비의 시신을 곤녕합의 옥호루로 옮겨 사진과 얼굴 대조를 마치고는 그중 한 남자가 “동포로서는 차마 쓰기 거북한 행위를 감행했다는 보고가 있었다”고 《민비암살》(1988년)을 집필한 일본 녀류넌픽션작가 츠노다 수하코(角田房子)씨가 기술하고있다. 그 쓰기 거북한 행위란 바로 시간(屍姦)=시체릉욕을 가리킨다. 이렇게 약소국의 조선의 국모는 죽어서도 릉욕을 당하는 비운을 면치못했다. 참 슬픈 일이다.    “이어서 시신을 곤녕합 옆의 록산(鹿山)으로 운송되여 나무더미를 쌓고 그우에 올려 불로 태웠다. 타다남은 시신의 일부분을 건청궁앞 련못 행원정에 던졌지만 곧 수면으로 떠올라 다시 거두어 록산기슭에 묻었다.”(이태진. 전게신문) 최근 재일교포이며 녀류사학자인 김문자(金文子)씨가 풍부한 외교자료와 군부자료를 섭렵하여 펴낸 연구서 《조선왕비살해와 일본인》(2009년 2월)에서 지금까지 일본의 랑인, 장사(壯士)들이 민간차원에서 추진했다는 정설을 뒤엎고 일본의 군부 참모부가 관여했다는 경이로운 사실을 구명했다.    이 사건에는 당시 참모본부의 지휘관 가와가미(川上操六)와 조선공사 미우라고로(三浦梧樓)가 결탁하여 면밀한 계획하에 그것을 이토 히로부미수상, 무츠(陸奧宗光)외상이 묵인승인후 륙군의 일부, 해군 첩보장교 그리고 민간의 “장사”를 동원하여 정예군단을 결성해서 결행했던것이다. 즉 군부, 정부가 획책한 모략사건이였다는것을 실증하였다. 필자가 이 책을 통독하면서 느낀 감상은 철저한 실증주의의 립장과 방법으로 력사의 진상을 밝히는 연구자의 진지한 태도였다. “지금까지 륙군중장인 조선공사 마우라를 수모자로 한 우발적사건으로서 치우쳤던 사건이 실은 일본 정부와 군부의 합작에 의한 용이주도한 음모사건이였다는것을 실증한 이 책은 일한 량국의 근대사 연구에 큰 투석으로 되여 이 사건을 근대 한일관계를 사색하는 중대한 사건으로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력사사건을 바라봄에 있어서 사건만큼 중요한것이 왜 그 사건이 발생했냐하는 원인, 리유 규명이다. 1895년 10월이라면 일본이 청일갑오전쟁에서 승전을 거둔직후라는 배경을 감안해야 한다. 당시 일본이 승리했지만 “3국간섭”으로 인해 료동반도를 다시 로씨야측에 양보하고 로씨야와의 대립이 가시화되였다.    한편 당시 조선의 반일기운이 세차게 일어났으며 궁정과 정부에서도 반일움직임이 보이면서 왕비를 비롯한 조선은 로씨야쪽으로 인심이 기울어지고 친로정권이 탄생되였다. 왕비에게 추방당한 친일파들은 일본과 협력하여 왕비를 제거하는 모략을 획책하게 된다. 이노우에 가오루의 후임으로 공사로 부임한 미우라의 수모로 일본군과 친일세력이 함께 계획, 실행하게 된다. 왕비가 청국의 서태후와 비슷한 모략에 뛰여난 인물이라는 평도 있을정도이니 일본측에게 있어서 그녀는 자신들의 조선지배책을 가로막는 중심인물인것은 사실이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일어난것이 참혹한 왕비시해사건이다.    1897년 대한제국선포후 왕비는 명성황후로 추존되며 지금 우리가 흔히 아는 “명성황후”가 탄생된다.    서태후와는 달리 명성황후는 우리 민족에게는 그 얼굴 모습조차도 확인되지 않은,  “얼굴없는” 국모다. 교과서나 많은 서적, 자료에 “민비”, “명성황후”의 “사진”이라고 게재되군 하는 사진은 김누자씨나 여러 사학자들이 고증에 의하면 실은 황후 본인이 아니라는것이 판명되였다. 미국, 프랑스, 이딸리아에서 출판된 서적, 잡지까지 추궁하여 본 결과 그 최초의 게재 잡지는 일청전쟁중 발행한 일본의 사진화보란 사실이 밝혀졌다. 그 촬영된 녀성은 명성황후가 아니라 궁정의 궁녀였음이 판정되였다.    명성황후의 모습이라고 지칭된 사진이나 그림은 여러장 있으나 그 진가에 대한 론난 역시 치렬하지만 지금까지 황후의 진짜 얼굴을 확인할수 없다. 황후가 살해된후 고종이나 조선황실에서 그녀의 사진을 구하기 위해 현상금까지 걸어 수소문했으나 구하지 못했다고 한다.    다행히 황후를 가까이에서 접견했던 언더우드녀사는 “얼굴이 갸름하며 약간 창백한 얼굴에 유난히 반짝이는 총명스런 눈빛이 인상적이였다. 시선을 끄는 미모는 아니였지만 지적이고 예리함이 풍기는 용모였다”고 그녀의 체험기 《상투와 함께 15년》에서 황후의 모습을 묘사하고있다.   비숍녀사 역시 “약간 창백한듯한 얼굴에 몸매는 마른편인데 날카로와보이는 용모에 예리한 통찰력의 눈매는 강한 개성이 있었다”고 기술하고있다.  100여년전 유린당한 민족과 나라와 같이 얼굴모습도 확인되지 못한채 잃어버린 얼굴로 남아있는 국모의 용모, 조선민족의 깊은 슬픔을 대변하고있는듯 하다.   
26    (25) 이토 히로부미 암살 “2중저격설” 댓글:  조회:5387  추천:22  2013-09-15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25) 근이토 히로부미 암살 "2중저격설" 김문학 근 10년동안 필자가 일본에서 과외로 안중근의 사상연구에 착수하면서 섭렵한 수많은 자료, 문헌중 조우하게 된것의 하나가 “이토 히로부미 암살 2중저격설”이였다. 즉 할빈역에서 이토를 저격한 인물은 안중근의사외에 또다른 제3자가 존재했다는 언설이다. 물론 필자가 소학교시절에 자칭 만주마적단에서 활동했다는 90여세의 중국인 로인에게서 “이등박문을 암살한 사람은 안중근 말고 또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적 있으나 어른들끼리 취중에 한 말이라 어린 필자는 별관심이 없었다. 30여년후인 지금 필자가 그 중국인 로인의 이야기를 다시 먼 기억에서 회생시킨것은 일본의 “2중저격설”과 조우하면서 그 이미지가 오버랩(互搭)됐기때문이리라. 하다면 일본사회의 이토2중저격설의 책원지는 어디에 있는가? 필자의 연구에 따르면 최초로 “2중저격설”을 제기한것은 이토의 측근이였던 관료, 실업가인 무로다 요시아야(室田義文)란 인물이다. 1938년 그가 생전에 구술한 책 《무로다 요시아야옹담(翁譚)》이 출간된다. 무로다는 1909년 10월 26일 이토가 암살되는 날까지 이토의 신변에 있었던 인물로서 그의 구술로 된 회상기가 일본사회에 “2중저격설”을 전파하는 산파의 구실을 한다. 필자가 그 책을 읽어보았는데 “이토 2중저격설”의 주제는 “안티안중근저격설”이였다. 무로다는 이렇게 말한다. “진실로 이토를 쏜 인물은 이 키작은 남자가 아니였다. 역사(驛舍) 2층식당에서 아래로 경사지게 향한 불란서기병총으로 쏜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토암살의 진범인이다.” 무로다가 증언하는 이토의 피탄은 (1) 프랑스카빙총(기마총)에 의한 저격 (2) 사입(射入)각도가 오른편 우에서 경사지게 아래방향으로 된것 (3) 이토의 총상은 3발이 모두 다 기병총탄환이였다는것. “또한 3발 다 2층에서 발사한 총상이며 단연코 로씨야병의 고간에서 권총을 빼들고 쏜것이 아니며 특히 키작은 남자(안중근)는 권총을 소지했는데 이토의 암살은 프랑스기병총으로 저격한것이다”고 우긴다. 무로다는 이 주장을 평생 꺾지 않았다고 하며 자기의 손녀딸에게도 노상 이 이야기를 외웠다고 한다. 무로다는 1909년 11월 20일, 시모노세끼구재판소의 검사 타무라(田村光榮)의 청취에 대해 그가 내놓은 안의사의 사진을 가리키면서 “이 남자가 로씨야군대사이에서 한발자국 나서서 단총을 들고 자신(무라다)에 겨냥하고 발사했다는것을 인정한다”고 진술하며 “이토공작을 저격한 자는 사진의 사람(안중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한다. 당시 수행의원이였던 주치의 코야마가 법정에 제출한 심문조서에는 이토의 총상은 무로다설과 일치하지만 무로다의 사입각도가 경사진 하향(下向)인데 반해 코야마는 수평선을 주장한다. 무로다의 증언은 그뒤 일로관계악화와 범인확정의 장기화, 복잡화를 리유로 야마모토(山本權兵衛) 해군대장(그후 1913~14 수상)에게 입막음을 당하게 되며 흐지부지 무력화해진다. 그뒤 1960년 야마구치현립의대의 법의학연구자들인 키무리(木村孝子), 스에모토(增本寬)가 야마구치현립박물관에 소장된 이토가 피탄당시 입었던 속내의의 피탄흔적, 혈액 등을 분석한 론문이 발표되는데 제1, 제2탄의 저격자와 제3탄의 저격자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암시하는 결론을 내리지만 역시 유력한 증거는? 하는 질문에 정면 확답을 제시하지 못하고있다. 1966년 일본 《공학원대학연구론총》 5호에 히자가와(平川紀一)교수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둘러싸고”라는 론고가 발표되는데 기본상 무로다의 의견으로 경사진 결론을 내리고있다. 이 론고 역시 무로다의 증언을 증명하기 위한 언설을 펼치지만 유력한 증거물은 제시하지 못한채 끝나고만다. 최근 2000년이후 륙속 공표되는 “이토와 안중근”관련 연구는 “누가 진범인가”하는 테마를 둘러싸고 진행되온것이 특징적이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저작 4종을 소개하기로 한다.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의 교수 가미가이(上垣外憲一)의 《암살. 이토 히로부미》(2000년) , 넌픽션작가의 대하실기 《이토 히로부미암살사건ㅡ어둠속에 사라진 진범인》(2003년)과 일한관계사 연구자인 윤노(海野福壽)교수의 《이토 히로부미와 한국병합》(2004년), 교또대학 교수 이토 유키오(伊藤之雄)의 《근대 일본을 만든 사나이 이토 히로부미》(2009년). 최근 2000년이후 륙속 공표되는 “이토와 안중근”관련 연구는 “누가 진범인가”하는 테마를 둘러싸고 진행되온것이 특징적이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저작 4종을 소개하기로 한다.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의 교수 가미가이(上垣外憲一)의 《암살. 이토 히로부미》(2000년) , 넌픽션작가의 대하실기 《이토 히로부미암살사건ㅡ어둠속에 사라진 진범인》(2003년)과 일한관계사 연구자인 윤노(海野福壽)교수의 《이토 히로부미와 한국병합》(2004년), 교또대학 교수 이토 유키오(伊藤之雄)의 《근대 일본을 만든 사나이 이토 히로부미》(2009년). 이토 저격의 진범인설을 이들은 아래와 같은 추측으로 펼치고있다. (1) 일본국내 군부와 우익세력설 조선식민지정책로선에서점진파인 이토와 대립한 야마가다(山縣有朋), 가츠라(桂), 테라우치(寺內), 고토(后藤) 등이 막후에서 조종하여 일본군부경찰을 동원하여할빈역 2층식당에서 저격했다는 설. (2) 일본군부와 우익랑인(浪人)의 사촉하에 연해주 및 만주의 조선인 항일유지가 조선인별동대를 결성하여 집단으로 실행했다는 설. (3) 안중근은 그 조선별동대의 한 성원이였을 가능성이 크며 실제로 할빈역플랫폼에 저격자로 현장에 있었기에 여전히 그의 범행설은 성립된다는것. 특히 “안중근+그 동지설” 또는 “별동대설”은 이토 암살범인 추정으로서 꽤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하고있다. 즉 “진흉범은 안중근의 성공과 함께 도망했다”는 당시 소네아라스케 한국통감이 카프라수상에게 송전한 전보문은 범인복수설 냄새가 농후하단것을 시사해주고있다. 당시 25명의 항일혁명가가 체포블랙리스트에 오르는데 이토암살을 안의사 단독행위가 아닌 복수성원의 계획적인 행동이였다고 일본정부에서도 간주했던것이다. 이는 최근 연변의 조선족 저널리스트 리광인씨의 “안중근연구의 빈구석”에서 제기한 “안중근 동지설”과 합치되기도 한다. 안의사가 현장에서 체포된 뒤 려순옥중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할 때까지 5개월동안 당당하게 이토를 비판하고 자신의 저격을 정의로운 행동으로 주장한 그 대의가 일본인들을 감복시킨다. 동경국제한국연구원장 최서면선생은 한마디로 “무로다설은 근거없는 날조”로 일축하지만 필자는 력사의 진실은 무조건 단순히 부정할만큼 단순하지 않은 경우가 왕왕 있다는 생각을 하고싶다. 필자는 2중설의 “수수께끼”가 우리에게 사색의 공간을 제공했다는것에 의미가 있다고 인식한다. 왜냐면 홀로 그 추운 할빈역두에 섰던 안의사의 배후에는 항일투사의 동지들의 협력이 있었다는, 기뻐해야 할 민족의 힘이 있었음을 확신하기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인내부에도 조선지배를 에워싸고 지대한 모순갈등이 실재했다는 력사의 일면을 발견할수 있는것도 수확이 아닌가.
25    (24)근대의 신체는 어떻게 단련되였는가(김문학) 댓글:  조회:7347  추천:35  2010-10-11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24) 근대의 신체는 어떻게 단련되였는가김문학근대를 이룩한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의 확답은 바로 인간이다. 좀 더 정확히 정곡을 찌르자면 인간의 “사상”,  “의식”,  “정신”이다. 그런데 흥미로운것은 인간은 “근대”를 성립하는 과정에서 그 자신의 사상의 실체인 육체, 신체의 근대화로 단련시킨것이다. 전근대까지만 해도 인간의 신체에는 터브가 너무 많았으며 신체는 자유를 상실한 매인 몸이였다.  이를테면 전족, 거세, 왼손잡이의 교정 등등 신체에 대한 加工은 양의 동서를 불문하고 인간을 괴롭혔다.  사실 동아시아의 신체가 “근대”로 교육받고 단련되는 역사는 100년밖에 안된다. 역시 근대사시간과 거이 맞먹는다.    솔선으로 근대화 유신에 성공한 일본은 메이지이래 교육칙어와 제국헌법에 의해 1890년대부터 국민교육체제가 정비되면서 근대화에 안성맞춤한 “신체”의 형성에 힘을 모은다. 국민일치단합을 강조한 집단적 신체의 기민성을 강요하였다. “앞으로 나란히”하는 집단성 행진이나 운동회 등이 성행하면서 집단적 통일적 신체성이 전례없이 이룩된다.   중국에서도 서구의 열강에게 지속된 패배로 인해 강한 신체의 인민을 키워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된다. 1900년 산동을 중심으로 반발했던 의화단은 의화권이란 권술과 기공으로 몸을 단련하면 적들의 총칼을 막을수 있는 강력한 신체를 만들수 있다고 확신했던것이다.   1898년 일본에 망명한 계몽사상가 양계초는 러일전쟁때 일본에서 강조되는 “상무정신(尚武精神)”의 애국주의교육에 충격을 받고 그것을 따라배우자고 절절히 호소한다. 일본의 상무정신과 군국화적 애국심은 청국의 체육에 직접적인 지대한 영향을 준다. 1905년 청국학부가 발표한 “학부진정선시교육종지”에 “상무”를 교육방침의 하나로 주입시키면서 중국 근대교육이데올로기의 큰 줄기로 형성된다.   1905년 4월 京師大學堂에서 제1차 운동회를 개최하고 “학교 교육목표는 꼭 도덕과 체육교육을 겸한것으로 되여야 한다”고 선고하였다. 그에 앞서 일본인의 교육을 받은 대학자 왕국유는 1903년에 교육에 있어서 “지육, 미육, 덕육을 병행하며 거기에 신체훈련을 가하면 완벽한 인재를 양성할수 있다”고 력설했다.   중국의 근대 “신체”, 체육 형성에 직접 영향준 요소는 일본말고도 서양 조계의 운동회경기가 있었다. 《女界鐘》에는 조계에서 외국인들의 운동을 보면서 이해할수 없었던 중국인들의 모습이 진술된다.   “이전에 중국인이 외국녀성들이 공으로 운동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슬쩍 자신의 마부에게 물었다. ‘이런 녀자가 공을 차면 임금을 얼마나 받기에 매일 땀 흘리며 저런짓 하느냐?’고.”   그러나 서구인들의 스포츠가 중국인에게 근대 스포츠경기를 낳는 산파역할을 한다. 1890년 상해성요한대학에서 중국 최초의 육상운동회가 열렸는데 보통 이를 중국 근대 최초의 운동회로 보고있다. 중국인이 축구를 접하게 된 시간은 대체로 1902년부터라고 하며 농구, 배구도 그무렵에 서양인의 지도로 시작한다.   《중국체육사》(사사지마 츠네스케)에 의하면 근대의 중국 신체는 군사적인 공적(公的)차원에서 훈련받기 시작한것이 돋보이는데 그 리유는 서양렬강의 침탈을 막아야 하는 우국의 상황에서였다. 청나라는 서양군대의 이론과 훈련방법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독일과 일본 교습을 초빙하여 군사훈련의 일환으로 체육수업을 진행하였다. 일테면 천진수사학당에서 체육과목으로 “축구, 허들, 멀리뛰기, 수영, 스케이트, 평행봉, 등산” 등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신체가 근대교육의 대상으로 보급화되는데는 청국이 1903년 《주정학당장정》을 발표한 뒤였다. 이 《장정》에서 각급 학교에 “체조과”설치를 요구하였는데 그에 따라 체육전문학과도 생긴다. 《중국체육사》의 기술에 따르면 1904년 일본에서 유학했던 학생들이 상해에 중국체조학교를 설립하였는데 민국초기때 전국 각지에 설립한 체육학교의 창시자들이 대부분 이 학교 졸업생이였다고 한다. 당시의 체조과목을 통해 일본의 군국주의교육방식이 청조의 교육방침으로 중국으로 전파된것이다.   오늘날까지 “앞으로 나란히” 하는 식의 대열방식 역시 일본교육의 답습이다. 특히 조선반도는 일제시기 36년의 강점을 통해 수많은 일본식 교육방식이 이식되였는데 지금도 그 잔재가 구석구석 남아있다.   교육받는 신체는 체육과, 운동회, 스포츠로 변용하면서 국민자질의 향상에 적극적인 역할을 한 “근대의 신체”로 승화해간다. 1907년, 근대 최대의 운동회인 남경 제1회 련합운동회가 열린다.  전국 80여개의 학교가 참가하였으며 경기종목도 구기, 무술, 기마술, 체조, 경주 등 69종목에 달했다.   중화민국시대에 들어서서  “국민교육”의 일환으로 체육이 전국적으로 보급되면서 1912년이후 절강체육전문학교, 북경사범학교 체육전공과 등 근대 체육 학교와 전공이 설립, 설치되였고 1915년에는 체육수업외에도 봄, 가을 학교운동회의 개최를 보급시킨다. 오늘날까지 진행되고있는 학교체육운동회는 여기서 비롯된것이다.   “신체” 하면 우리는 인간 본래의 육체라고 착각하지만 기실 근대문명이라는 장치에 의해 가공, 훈련, 교육된 육체인것이다. 그것은 또한 “근대적신체”라는 이름의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근대는 인간의 신체를 이데올로기의 실체로 만들었을뿐만아니라 100년후인 현대는 올림픽 등 스포츠축전에서도 그 맥은 국가단위로 연연이 이어가고있다. “신체의 탈이데올로기”로서 현대인은 신체의 표현을 슬로건으로 신체를 자유의 표현으로 간주하고 “신체표현”의 근대성을 극한까지 추구하는 경향이 스포츠, 무용, 미술에까지 확산되고있다. 프랑스 철학자 푸코의 표현대로 “신체의 탈근대성”이라 해야 하겠다.    
24    (23)중국에 고용된 일본지성들(김문학) 댓글:  조회:6153  추천:38  2010-10-09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23) 중국에 고용된 일본지성들김문학“일청전쟁후 일본인이 교사로서 중국인을 가르친데 대해 일본인은 아무런 저항감 없이 당연한 이치로 생각했던것이다. 그러나 중국인에게 있어서 그것은 일종의 굴욕적인 일이기도 했다. 옛날 일본인이 제자였던 기억이 중국인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돼 있는 까닭이다. 특히 師弟관계를 따지는 중국인이였기에 그 굴욕감은 일본인의 상상을 추월할것이다. 하지만 메이지유신이란 기사회생(起死回生)의 대변신을 아무렇지도 않은듯(중국인의 눈에서 볼 때) 이룩한 일본은 확실히 믿을만한 하나의 기적이였다. ㅡ이대로 나아간다면 중국은 구제불능이다. 19세기말 중국의 식자는 누구나가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같은 시대에 일본의 선례는 큰 마음의 지주로 된것이다.” 저명한 재일 화교작가이며 문명비평가인 진순신(陳舜臣)(《일본적인것 중국적인것》)의 말이다.19세기말, 20세기초, 100여년전 청국이 근대화 추진의 일환으로 서양문물을 흡수한 방책에는 일본유학생 파견과 일본인 교사 초빙고용의 두가지를 병용했다. 그러나 유학에 대해서는 교과서에서는 기술이 있으나 일본인 교사초빙에 대해서는 거의 누락돼있다. 그런데 역사는 흔히 그 누락됀 공백의 구석에 수많은 진실이 숨겨져 있는 법이다.1901년 청국의 실권자 이홍장은 유학생을 일본에 파견하는것도 좋지만 일본인 교사를 청국으로 초빙, 고용하여 청국 청년들을 교육하는게 더 재정적으로도 효율적으로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 요청에 적극적으로 응한것이 당시 일본 문부대신 키구이케(菊池)를 중심으로 한 일본정부였다. 그리하여 1904년부터 다수의 일본교습(教習)을 중국 본토에 파견하는데 통계상 그 수자가 2천명에 이른다. 파견된 지역도 중국대도시뿐만아니라 몽골의 칼라친 등 전 중국지역에 파급된다. 유치원선생에서 대학교수에 이르기까지 학자, 지식인에다 군인까지 포괄되었다.일본 근대 문학거장으로 알려진 후타바데이 시메이(二葉亭四迷), 사상가 요시노 사쿠조오(吉野作造), 하버드대 교수 경력자이며 동양학 거장인 핫토리 우노키치(田岡嶺雲) 등 쟁쟁한 인물도 그속에 있었던것이다.      당시 교습(敎習)이라 불린 일본인 전문가들은 일종의 사명감을 갖고 열심히 강의하였으며 교과서, 교재도 중국 학생들을 위해 그 수준에 맞추어 편찬, 자작한것이 많았다고 한다. 북경 경사법정학당에서 교편을 잡았던 마츠모토(松本龜次郎)은 훗날 1905년에 近代 여류혁명가 추근(秋謹)을 가르친 중요한 교습이기도 했다. 그가 편찬한 《일본어교과서》나 이노우에(井上翠)가 편집한 《東語會話大成》은 중국전국의 학교에서 보편적으로 교재로 채용되며 중국 젊은이들의 일본어학습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북경대학 왕향영교수의 《청국에 고용된 일본인》에 따르면 많은 교습들은 초빙기한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좋아서 재임을 거듭했다고 전한다. 법학사 이마이(今井嘉幸)는 (그뒤 일본국회의원이 됨) 청국이 멸망한뒤에도 중국에 남아서 교수에 전념했다고 한다. 구국열에 부푼 젊은 중국 청년의 가슴에 지식과 근대화를 가르친 일본인 교습들의 기여는 괄목할만 하다.핫토리(服部宇之吉)교수는 1900년 의화단운동에 조우한 인물이기도한데 그는 1902년 북경대학당 속성사범에 총교습(교장)으로 초빙된다. 그는 사범관, 사학관 컬리큐럼(課程), 규칙제정에 참여하고 교실, 실험실, 기숙사 등 설비, 도서구입 등에도 주도하게 배려를 한다. 핫토리 등 일본인 교습이 중국의 북경대학 창설에 큰 기여를 한것은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다. 그뒤 1909년 일본으로 귀국한 핫토리교수는 동경재국대학 교수로 취임되며 “중국철학”의 제1인자로 대활약한다. 일본의 교수와 중국의 제자의 훌륭한 심벌적인 존재는 타오카와 왕국유를 들어야 한다. 근대 중국의 대학자 나진옥이 상해에서 설립한  “동문학사”라는 학교에서 당시 동서양교류사학계의 태두인 후지타(藤田豊八)와 타오카를 초빙하였다. “세계 인류로서 인간은 천하의 인도(人道)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신념을 품은 타오카는 중국에 대한 깊은 리해와 애정을 품고있는 지성이였다. 타오카가 지대한 영향을 준 중국의 젊은이가 바로 왕국유이다.왕국유하면 중국 근대의 학술거장으로서 문학, 미학, 사학, 철학, 고문학, 고고학 등 제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세계적 거물이다. 1911년 신해혁명후 일본에 망명하는 친일적인 지식인이기도 한 그는 일본과 깊은 인연을 갖고있었다. 귀국후 1927년 북경의 의화원 곤명호에 투신자살한 기인으로서도 유명하다.그런 왕씨가 쇼펜하우어적 철학사상을 갖게 되고 서양철학에 심취하게 된데는 타오카스승의 가르침으로 기인된다. 그는 《靜庵文學續編》의 서문에서 타오카의 문집을 통해 쇼펜아우어철학을 습득하고 심취하게 됐다고 고백한다. “이렇게 타오카라는 일본의 奇才는 린국 중국의 기재 왕국유의 생애를 관철할만큼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작가 진순신은 깊은 감명을 토로한다.이밖에 원세개의 군사고문 아오키(靑木官純), 그 후임으로 청국공사관 무관으로 부임된 시바고로(柴五郞)는 의화단사건시기 세계에 이름을 날리며 청국의 경찰교습소를 창설하고 중국 근대 경찰학교의 기초를 닦아놓았다.근대 백년을 조감할 때 발견되는 새로운 사실은 일본은 사제관계에서 역전시켜 중국인의 근대화로정에 길잡이가 되였다는것이다. 근 백년래 중국이 가장 많이 배우고 흡취한 상대가 바로 “원쑤” 일본이였다.중국 학자 호평(胡平)은 그의 저작 《100가지 리유. 일본과 중국》(2006년)에서 이렇게 갈파한다. “근대의 일본이 없었다면 근현대의 중국도 없었을것이다”고.
23    (22)근대 일본인은 어떻게 중국어를 학습했나? 댓글:  조회:7090  추천:36  2010-10-08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22) 근대 일본인은 어떻게 중국어를 학습했나?김문학근대 아시아의 력사는 모종의 의미에서 말하면 외래문명의 학습의 역사였다. 외래문명의 학습은 결국 외국서적의 번역과 외국어의 학습으로 직결돼있는것은 자명한 일이다.                              100년전 일본인들은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 서구언어를 열심히 습득했는데 그것은 주로 상대방의 문화를 배우기 위한 수단이였다. 그러나 중국어학습은 문화적배경을 누락시킨 실용회화를 중심으로 전개시킨것이 특징적이다. 즉 외교나 무역에 관한 실무지식으로서 간주하고 학습해온것이다. 일본인이 배운 외국어중에서도 중국어만큼 명칭이 자주 바뀐 케이스도 드물다. 옛날에는 당화(唐話), 메이지시대에는 한어, 청어(淸語), 청국어(淸國語)로 불리기도 했으며 그뒤로는 지나어, 화어(華語), 중국어(中國語)로 명칭이 빈번히 바뀐다. 오늘날 “중국어”로서 정착되여 한어란 말은 거의 새용돼지 않는다. 중국어의 호칭이 이같이 빈번히 바뀐 배경에는 그만큼 중일관계의 복잡한 역사상을 입증하고 있다.    일본의 대학 엘리트 코스에서는 중국어를 정식 교양과목으로 설치한적이 전전(戰前)에는 없었다. 중국어가 대학의 제1외국어 또는 제2외국어로 정식 설치되는 때는 1946년 현재의 동경대학 등 몇개 대학뿐이였다. 물론 “지나문학”과목은 있었으나 중국고전을 한문훈독한것이여서 직접 중국어와는 관계가 없었다. 일본에서 중국어를 정규학교에서 최초로 가르치기 시작한것은 1871년에 창설된 한어학소(漢語學所)에서였다. 이 해는 청일수호조약이 체결되고 일본과 청나라가 처음으로 정식 국교를 수립한 해이기도 하다. 외무성 관할의 한어학소는 문부성(교육부) 직할이 아닌 통역양성의 목적으로 설치됐던것이다. 청일갑오전쟁후인 1896년, 일본에서는 중국어인재가 몹시 결핍한 실정을 고려하여 제국의회에서 “로어, 지나어(한어), 한국어 등은 장래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을것이므로 현재 그 언어를 교수하는 학교가 없으므로 외교, 상업도 지장이 많다... 고로 이런 어학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상업”과 “외교”의 실용면에서 그 절박성을 강조하였으며 그 수단으로 활용하려한것이 당시 일본인의 중국어학습의 주목적이였다. 일중관계사학자 안도 히코타로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중국어를 특수어학으로서 실용면에서 언급한데는 전전에 일본이 중국대륙으로 진출한 두가지 측면에 대한 대응이다. 즉 ‘상무’와 ‘군사’ 량면이였다.” 중국연구가로 저명한 다케우치 요시미씨는 “행상지나어(行商支那語)”와 “병대지나어” 두가지 종류라고 직설적으로 설파한다. 일본인의 근대 중국어학습을 “상무”와 “군사”에 편향했던 리면에는 역시 메이지유신이래 일본인사회에 흐르고있던 “탈아(脫亞)”와 “흥아(興亞)”라는 정반대되는 조류가 있은 까닭이다. 기실 “탈아”와 “흥아”는 코인의 양면과 같았다. “탈아”를 통해 선진국행열에 뛰여든 일본인은 구미선진국에서 받는 압력으로 아시아세력과 단합하여 서구의 압력에 저항하고자 하는 입(入)아시아적 “흥아”사상이 생성되였다. “흥아”사상은 주로 미야자키 토텐(宮崎滔天) 등 재야인사들속에서 주가를 높였는데 그런 까닭으로 재야의 민간사학(私學)에서 중국어교육이 흥하게 된다. 1875년 히로베 구와시(廣部精)가 창설한 일청사(日淸社)가 중국어교육의 첫 사학이다. 그뒤 振亞社로 개칭되였는데 대아시아주의단체이기도 했다. 히로베가 편찬한 교재 《아시아언어집. 支那官話之部)》(1879년 간행)이 유명하다. 일본의 중국어교육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미야지마(宮島大八)가 남긴 공적은 누락시킬수 없다. 중국의 동성파학자 장렴경(張廉卿)에게 중국어를 배운 그는 일본에서 선린서원(善隣書院)을 설립하여 그것이 일본의 중국어 교육의 중추적구실을 한다. 그리고 1898년 고노에 (近衛篤磨)가 東亞同方會를 설립, 민권론, 국권론을 전파하면서 중국 아시아관계의 단체가 많이 생긴다. 그것은 1901년 상해에 동아동문서원이란 학교로 발전되며 1938년에는 대학으로 변신하고 일본패전후 그것은 사립 아이치(愛知)대학으로 되여 중국연구에 큰 기여를 하고있다. 100년전 일본에서 편찬한 중국어교과서는 수백종에 달하는데 비교적 유명한것으로 《관화지남(官話指南)》(1882년),《화어규보(華語跬步)》(1886년), 《急就篇 급취편》(1904년) 등이 있는데 그중 《급취편》이 가장 보급되였다. 1933년 다시 개정판을 내는데 전전 일본의 중국어교육의 상징적 서적으로서 1945년까지 무려 170여판을 중판한다. 문답회화체로 된 회화문은 일본인의 중국어 학습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일테면 “這是候有什麽魚?””差不多的魚都有。鯉魚,唧魚,花唧魚什麽的。””華唧魚好釣麽?””那哥得碰巧了。”등 일문일답 회화용어들은 매우 실용적이다.   《중국어관계서목》(1968)에 의하면 명치초기부터 1945년 패전까지 일본에서 출간된 서적이 계 1,368책이나 되는데 506책이 1937년 중일전쟁(항일전쟁)이후 출판된다. 불행하게도 “상업”과 “군사”의 실용목적으로 출발한 일본의 중국어학습은 1932년 만주국설립을 걸쳐 1930년대는 본격적인 중일전쟁으로 승격하면서 “전쟁어학”으로 급변한다. 《兵要支那語》,《日淸會話》가 《連成滿州語自修》,《兵隊支那語》로 분장되여 등장한다. 말그대로 전쟁의 병사용어다.     근대 일본인의 중국어학습, 여기서 발견되는것은 근대 중일관계 그 자체이며 중국을 동경에서 멸시, 억압의 상대로 간주했던 일본 국가주의적 또는 제국주의, 군국주의적인 조류가 살벌한 양상이다. 그리고 전쟁에 이용당한 외국어학습이 얼마나 그로테스크했고 앙상했던가를 우리는 기억해야 할것이다.  
22    (21)시모노세끼에서 부산항까지 (김문학) 댓글:  조회:7069  추천:31  2010-10-05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21) 시모노세끼에서  부산항까지김문학 시모노세끼(下關)는 한중일 근대사에서 빼놓을수 없는 地名이다. 1895년 청일갑오전쟁으로 인한 청일“마관조약”이 맺어진 곳이 바로 마관이라 불리기도 했던 시모노세끼의 춘범루(春帆樓)였다. 청나라가 이로하여 대만과 팽호열도를 일본에 할양하고 은 2억냥 배상 및 중경, 소주, 항주를 개방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당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시모노세끼항은 식민지 조선과 종주국 일본의 네트워크의 스타트지점으로서 지대한 의미를 지닌다. 한국 통감부가 설치되던 1905년 9월, 시모노세끼와 부산항을 연결하는 관부연락선이 출항하여 식민지시대 수백만을 넘는 일본인과 조선인이 이 항구를 넘나들었다고 한다.   그때 관부연락선으로 처음으로 일본땅을 밟는 조선인들은 시모노세끼가 “이놈의 새끼”로 들렸다고 한다. 지금도 시모노세끼에 살고있는 조선동포들은 식민지시대 선조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웃군 한다. 일본 본토 혼슈(本州) 육지와 일본 최대의 섬으로 구성된 큐슈(九州=후쿠오카 지역)사이의 좁은 협곡으로 센 물살이 흐른다. 시모노세끼는 바로 이 간몬(關門)해협에 자리잡고있다. 그 물살이 닿는 북쪽은 대마도, 제주도로 이어진다.   제주도에서는 근세까지만 해도 일본어가 통용됐다는 역사기술이 나온다. 조선어통역으로서 대마번수하에서 있던 마츠하라(松原新右衛門)의 1723년 조선체류경험담에는 “조선에는 사탕이 없다. 조선에는 지나(중국)의 년호를 사용하고 있다. 조선에서는 아이들이 까불면 ‘왜놈이 온다’고 말하며 혼내준다” 등 대목이 나온다. 토요토미의 조선침략전쟁때 겪은 그 공포가 여전히 많이 잔재해있는 사실을 립증해주고있다. 그리고 “제주도에서는 주민들이 대체로 일본어를 사용하고 일본어노래를 부르고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같은 기술로 미루어보아 역사상 일본과 조선의 인적왕래가 잦았으며 상호간의 밀접한 영향관계를 추찰할수 있다. 물론 그때는 영해(領海)라는 관념이 형성되지 못했으며 섬의 지배권도 근대적의미의 영토로서 확립되지 못한 부분들도 많았던것이다.        시모노세끼가 속한 아먀구치(山口)지역은 옛적부터 쵸슈(長州)로 불렸으며 조선반도와의 인연이 깊었다.   청일전쟁직후 일본의 전권공사로 조선에 주재한, 그 민비암살사건의 지휘자로 소문난 미우라고로(三浦梧樓)가 바로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晉作)의 “기병대” 출신, 야마구치사람이다.   초대 한국통감 이토히로부미는 물론, 제2대 통감 소네아라스케(曾彌荒助), 한일합방후 초대 조선통독 테라우치(寺內正毅), 근대 일본군대의 창시자의 한사람이며 이토의 후임으로 총리대신을 지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역시 쵸슈 출신이다.   그리고 전후 한일관계정상화에 큰 관심을 보인 총리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사토에이사쿠(佐藤榮作) 형제도 쵸슈출신으로서 유명하며 한국계 일본인이기도 하다.   근, 현대 일본의 총리대신이 무려 8명이나 이 쵸슈, (야마구치)지역에서 탄생된것은 이 지역인의 지도자적인 자질이 있었던것과 어딘가 조선인적인 성격이 있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한국을 정벌, 정복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은 거의 쵸슈출신의 정치가, 군인들이다. 사이고(西鄕)의 정한론의 원조는 기실 쵸슈의 기도(木護充允)이며 한국병합에 노력을 기울였던 이노우에 가오로(井上馨), 미우라고로, 가츠라 다로오(桂太郞), 테라우치, 고다마 겐타로(兒玉源太郞),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등 기나긴 조선정복자의 계보가 이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한 중요한 인물을 빼놓을수 없다. 바로 시모노세끼에 자주 나타났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다. 료마는 “메이지유신 일등공신”으로서 오늘날까지 일본인에게 절대적 일위의 인기를 확보하고있는 근대 인물이다.   쵸슈사람은 지략에 뛰여나 여우에 비유되고 사츠마사람은 전략에 능하여 너구리로, 도사사람은 왕성한 활동력으로 개에 비유된다. 료마는 바로 도사출신으로 쵸슈와 사츠마를 련결시킨 인물로서 여우와 너구리의 모든 장점을 겸비한 뛰여난 재사였다.   “일본의 100년을 바꿔놓은 영웅”이라고 국민적소설가 시바료타로에게 칭송된 료마는 1866년 사츠마와 쵸슈의 련맹 즉 사쵸동맹을 달성하여 1868년의 메이지유신의 기반을 마련한다.   메이지유신에 성공한 일본이 성급한 근대화를 이루고 마침내 예전부터 노려온 “정한론”을 보호국의 이름으로, 조선반도를 갑오청일전쟁을 통해 수중에 장악하게 된다.   한국초대 통감 이토히로부미가 조선에 남다른 감정을 품고 조선을 자신이 일본에서 성공시킨 근대화국가처럼 만들려고 한다는 야망의 상대로 삼은것도 우연이 아니다.    “정한론”의 고향이 동경도, 요코하마도 아니고 바로 일본 서부의 조선을 바라보는 바다가의 쵸슈, 큐슈였다는 점은 결코 홀시할수 없는 사연이다.   시모노세끼에서 출항하여 부산에 이른 일본의 식민지지배가 다시 부산과 시모노세끼를 관부련락선으로 끊임없이 연결됐던 네트워크.   세계 근대의 전쟁, 식민지 침략정복의 계보는 흔히 바다의 항구에서 시작된다. 시모노세끼항에서 부산항까지, 그리고 조선 8도를 누비던 일본제국의 야망은 마침내 대련항에 그 발톱을 뻗친다. 대련항은 그뒤 명실공히 일본제국지배의 만주(滿州)식민지의 열린 창구구실을 하게 된다.
21    (20) 해방된 근대의 엉덩이 (김문학) 댓글:  조회:25932  추천:39  2010-10-02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20) 해방된 근대의 엉덩이 김문학     중국 지식인들의 유머스러운 말이 있다. “수천년의 중국 華夏 역사에서 기실 두 종류의 인간밖에 없었다. 타인의 엉덩이를 때리는 인간과 타인에게 엉덩이를 맞는 인간. 民國의 가장 큰 좋은 점은 중국인들의 엉덩이에 자유를 준것이다.   손문이 창설한 중화민국(1912년 1월 1일)이라는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전근대적 인권차별의 지도였던 태형(笞刑)을 폐지한 쾌거에 대한 예찬의 목소리였다.   태형은 세계적으로 널리 진행된 형벌의 일종으로서 중국과 한국, 일본에서는 주로 엉덩이나 애들의 종아리를 매질하는것을 통해 육체적고통의 벌을 주는 행위였다.   우리 말의 “매 맞는다”, “매질한다”의 “매”란 때리는 행위중 사용하는 도구를 가리키는데 주로 곤장, 막대기, 몽둥이, 회초리, 채찍 등이 사용되였다.  “매”에 관련된 조선어의 관용구나 속담이 많이 전해지는것 역시 그 매질이 매우 보편적이였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이를테면 “매 끝에 정이 든다”, “매는 먼저 맞는 놈이 낫다”, “매우에 장사 있나”,“매맞아야 정신차린다”,“매맞은 놈이 발편잠 잔다”… 중국어에도 “매”와 관련된 속담이 많이 등장하는것은 아시아의 전근대의 “매”ㅡ형벌이 극심했다는 사회배경을 말해준다.   중국의 유명한 고전소설 《수호전》에서 양산박 영웅들의 개개인의 영웅담으로서 관아에 체포된뒤 감옥에서 한결같이 엉치를 노출시켜 “곤장 100대”의 세례를 받는 장면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거기다 뺨에 죄인의 기호가 새겨지는 굴욕마저 감내해야 한다.   이런 매맞는 엉덩이의 장면은 소설의 픽션이 절대 아니다. 명나라때부터 중국을 방문한 서양선교사들의 중국기록에는 이같은 형벌에 관한 대목들이 늘 클로즈업되군 한다. 포르투갈의 선교사 스파르다·클스(1570년대)가 집필한 《중국지(誌)》에는 감옥내 풍경을 생생하게 활사하고있다.   “(재판에서) 심문이 진행될때, 태형집행인은 한층 더 힘세게 매질하기 위해 물이 담긴 커다란 장독에 댓나무 매를 푹 담구어놓는다. 그사이 관리들은 서로 환담을 나누거나 먹고 마시고는 이쑤시개로 이를 후비면서 희희닥거린다. 매질은 대단히 잔혹하여 그 뜰안은 피자국이 낭자하다. 매질이 끝나면 마치 양을 취급하기라도 하듯 냉혹하게 범인의 한쪽다리를 잡아끌어서 로옥까지 질질 끌어간다.”   중국에서는 태형을 속칭 “타판자(打板子)”라 하며 그 력사적시원은 한나라 문제(文帝)시기인데 고대 “오형(五刑)”의 일종이다. 댓나무나 나무곤장으로서 허리이하의 엉덩이나 다리를 치는 형별이었다.   장장 수천년을 이어온 이 태형은 1911년 청국의 《대청신형률》에 의해 페지를 선포당하고 1912년 손중산의 민국에 의해 철폐당하게 된다.   그러나 1914년 여름에 발표된 북양정권의 《徒刑改遣條例》에 의해서 재다시 회복되기도 했다가 또다시 철폐당한다. 그 우여곡절 역시 태형에 대해 애착이 순순이 끊이지 않았을만큼 유구한 전통의 뉴대를 잘 설명하고있다. 중국인에게 있어서 태형철페는 녀성의 전족폐지만큼 근대적 의미를 띄는 상징적근대사상(事像)이다.   일본의 태형은 율령(律令)제도의 확립과 함께 당나라의 태형, 장형(杖刑)을 그대로 본따서 행해졌다. 그 형벌이 정비된 때는 대화(大化)개신후 천무천황시대로 추정되며 “대보, 양로” 두 율령에 태형으로서 칭하게 된다. 에도시대에도 매질하기 50회, 백회 하는식으로 중국식을 많이 답습했다. 무사(사무라이)에게는 해당되지 않았으며 명치시대에 이르러 태형, 장형이 철폐되고 그대신 “징역형”으로 대체된다.     그럼 조선은 어떠했을가?   조선왕조나 대한제국시기 형법은 명나라의 법전인 《大明律》(1397년)과 《경국大典》(1460년이후 《大典通編》으로 개칭)을 그대로 사용했는데 신체형벌 로서 태형을 수용했다.                                            그런데 1905년에 근대적벌률형식인 형법대전(刑法大典)이 시행되는데 그 내실은 대명률과 큰 차별이 없었으며 태형도 여전히 보류되였다.     1910년 일본에 의한 합병을 거쳐 1912년 데라우치(寺內)총독에 의해 “태형령”이 발포되는데 이는 조선인에게만 적용시키는것으로 데라우치의 혹독하고 야만한 통치가 엿보이기도 한다.   조선을 식민지로 보호시킨다는 일본의 지배하에 조선인의 인권과 엉덩이는 오히려 여전히 보호받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식민통치는 데라우치의 무단통치로부터 문화통치로 전환을 이룩하게 된다. 그것이 사이토(齊藤)총독의 새로운 시정책에 의해 1920년 3월, 태형은 페지된다. 그 《조선 태형령 페지 령안》은 폐지이유를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그러나 본 형벌과 같이 육체에 직접적인 고통을 가하는것은 현대문명사상에 의한 형벌의 성질과 어긋날뿐아니라 현재 조선인은 현저하게 향상자각했고 그 민도(民度)가 옛날같지 않기에 태형을 폐지하여 기본형인 징역 또는 벌금으로 임하는것도 형정상 조금도 지장이 없다고 인식한 까닭이다.”   일제시기, 중국은 그나마 “민국”을 형성하면서 “독립자주”의 국가로 거듭났으나 조선은 여전히 일본의 치하에서 신음해야 했던 비운을 안고있어야 했다.      근대와 함께 엉덩이는 해방됐지만 민족의 해방은 15년뒤인 1945년 8.15광복까지 기다려야 했다.  
20    (19)동아시아적 連帶의 사상가-김옥균 재발견(김문학) 댓글:  조회:6478  추천:33  2010-09-29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19) 동아시아적 連帶의 사상가-김옥균 재발견 김문학     동경 지하철 긴자(銀座)선 외원(外苑)전역에서 내리면 “청산영원”이라는 공동묘지에 “외국인묘지”가 있다. 그속에 김옥균의 묘비가 보인다. “金公玉均之碑”라고 한자가 새겨진 암석판은 높이 3메터, 두께 15센치, 너비 1메터나 되는 자연석이다.   비석에는 한문으로 “오호, 비상한 재능을 안고있으면서도 비상한 시기를 만나 비상한 공도 못이루고 비상한 죽음을 당하도다”라는 장문이 각인돼있다. 죽어서 그 시체가 능지처참당한 김옥균의 묘는 일본과 한국에 세군데나 널려있다. 청산영원, 동경 문쿄구의 진정사안에 그리고 한국 충남 아산 고향에도 있다.   김옥균이 상해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당한것은 1894년 3월 28일, 청일전쟁 발발직전이었다. 그의 죽음 또한 청일전쟁의 일본측의 불씨의 하나로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일본에 있는 김옥균이 상해로 온 이유는 무엇일까? 동경에서 김옥균은 청국공사이며 이홍장의 양자이기도 한 이경방(李經方)과 자주 면담하였는데 이경방의 알선으로 상해에 가서 이홍장과 면담하기위해서였다.   이미 일본에 실망한 김옥균은 조선개혁문제와 동아시아 3국이 연대하는 “화주의”를 이홍장에게 호소하기 위하여 중국행을 감행한다. 이홍장과 조선정부는 밀접한 관계였으므로 김옥균의 중국행은 죽음의 “함정”으로 들어가는 격이나 다름없었다는것을 김옥균은 각오하고 있었다.   손문을 지지해온 미야자키토텐(宮崎滔天)이 호위로 동행하겠다는것도 도야마(頭山滿)가 못가게 말리는것도 김옥균은 “호랑이새끼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고 우기면서 결행한다.   신변에 친숙하게 달라붙는 자객 홍종우의 정체를 파악했으면서도 김옥균의 우직한 성격은 그것을 아랑곳아니하게 하고 죽음을 불사했던것이다. 오로지 한중일 3국이 련합하여 조선개혁을 이룰수 있다는 신념으로 불탔던 김옥균이다.     3월 28일 오후 3시 30분경, 상해의 일본인 호텔인 동화양행 객실에서 조선이 파견한 자객 홍종우의 흉탄 3발에 김옥균은 쓰러져 절명한다. 43세의 파란만장의 생애를 타향에서 접는다. 그 시체는 이홍장의 지시로 군함 “위정호”에 실어 조선으로 운송된다. 이홍장은 김옥균의 암살성공에 대한 축전을 조선국왕에게 보낸다.     조선정부는 양화진에서 그의 시체를 릉지처참하여 몇토막으로 절단하고 수급은 양화진에 효시하고 절단한 각 부위를 조선의 5개 도의 각처 길옆에 방치하여 새나 개가 제멋대로 뜯어먹게끔 했다. 죽어서도 또다시 비극적릉욕을 당한 김옥균선구자, 그는 나중에 식민지로 토막나는 조선의 비극 그자체의 모습이였다.     그 소식이 일본에 전해지자 전 일본이 반청감정의 격랑을 일으킨다. 5월 20일, 천수백명 일본인의 김옥균 추모법요식이 거행되고 그의 유발과 의복을 청산묘지에 묻었다. 당시 일본은 매체를 총동원하여 김옥균시체처분에 대한 청국정부의 조치를 비난하고 반청감정을 환기시켰는데 일청전쟁이 김옥균의 시체문제가 쟁점인듯한 인상을 남겼다. 그 시체처분문제를 일본이 청일전쟁의 불씨로 이용했던것이다.   이제 일본에서 김옥균의 망명생활과 그의 사상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884년 12월 8일, 갑신정변실패후 12월 11일 인천항을 떠난 일본배 피토세마루를 타고 나가사키(長崎)항에 김옥균 일행은 13일 입항한다. 12월말 동경의 후쿠자와 유키치댁에 도착하여 안착한다.  김옥균에게 후쿠자와는 “잘 살아서 돌아왔다”고 반겼다. 그때 같이 망명한 개화파 인물은 서재필, 서광범, 이규완, 류혁로, 정난교, 신응희, 변수 도합 9명이였다. 그중 김옥균, 박영효(박영효는 미국에 갔다가 다시 일본으로 온다) 등은 일본에 남고 서광범, 서재필은 미국으로 가버린다.   10년에 달하는 김옥균 등의 일본망명은 실의의 련속이였다. 조선정부로부터 파견된 수차례의 암살위험에서 벗어나기도 하면서 그 생활은 결코 순탄하지는 않았다. 이누카이, 오자키 등 정치가나 실업가의 생활비지원도 있었으나 일본정부는 청정부와 조선정부의 “역적”인 김옥균에 대해 냉담해지고 오가사와자섬이나 혹까이도로 유배시켰다.   그러나 천생 락관적이고 신조를 버리지 않은 김옥균은 그 원대한 사상과 다양한 취미, 서예로 일본인을 매료시키고 구많은 일본벗을 사귀였다. 박영효의 회억에 의하면 “김옥균의 장점은 교유이다. 실로 교유에 능했다. 문장에 능하고 화술도 뛰여났으며 시, 문, 서, 화 모두 능했다. 김옥균의 결점은 덕과 모략이 모자란것이다.”(이광수 《박영효와 만난 이야기》)     일본의 친구들은 서화발표회를 열어 김옥균의 붓글씨를 팔아 빈궁한 생활에 보태게 했다. 필자가 소장하고있는 김옥균의 서예유묵을 보면 그는 중국문인에 통하는 그런 재기횡일의 글씨를 썼던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김옥균은 개화파의 선구자일뿐만아니라 당시로서는 조선개혁을 동아시아적 시야로 구상한 선구자적인 사상가인것이다. 오늘 우리가 그의 사상에 대해 잘 모르는것은 그 인물 자체에 대한 표면적 인식에 머물러있기때문이리라.   정치가로서의 그는 일본정부의 대청정책과 대조선정책의 우유부단을 비판했으며 조선에 대해서는 중립국화를 주장하면서 조, 일, 청 3국의 련대에 의해 구미열강과 맞설것을 창도했다. 그리고 조선이 봉건전제 체제를 철페하고 입헌군주제적 근대 독립국가를 지향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김옥균은 “3화주의”사상을 창안했다. 조선개혁문제를 동아시아의 시야에서 구상한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탁월한 선구적인 사상이였다. 그는 《興亞之意見(흥아지의견)》을 집필하여 “일한청 3국이 제휴하여 구미동첨의 침략을 방지해야 한다”는 사상을 소리높이 주장하였다.   재일사학자 강재언교수는 이렇게 김옥균의 사상을 평가한다. “’3화주의’는 조선과 일청 양국을 등거리에 배치하는것으로 조선문제에 대한 일청 양국의 개입을 페제하고 자주적개혁의 길을 개척하는 외교전략이였다.”따라서 그가 청국지도자 이홍장을 이 “3화주의”로 설득하여 조선 수구파에 대한 백업(지지)을 중지시켜 조선의 자주적독립의 길을 열어보자는 구상이였다. 김옥균은 늘 “일본이 아시아의 영국이라면 조선은 아시아의 프랑스가 되여야 한다”고 언급한것 또한 유명하다.   그 사후(死後) 100년이 되는 시점에서 재인식되는 안중근의 “동양평화사상”의 3국련대사상도 역시 김옥균의 3국련대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김옥균이 리드했던 100여년전의 조선자주독립사상은 그 “3화주의”사상과 함께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의미는 매우 중대하다.    
19    (18)근대조선 독립자주의 선구자 김옥균(김문학) 댓글:  조회:5731  추천:33  2010-09-27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18) 근대조선 독립자주의 선구자 김옥균 김문학      청일갑오전쟁 발발 10년전인 1884년 12월 4일, 조선근대사상 유명한“갑신정변”이 일어난다. 그 배경에는 1876년이래 기나긴 쇄국시대의 막을 접고 서구 및 일본에 의해 개항을 하게 되지만 조선(이씨조선)이 선택할 독립자주 근대화의 길은 유구한 전통의 봉건체제를 개혁하는것밖에 없었던 절박한 상황이 있었던것이다.     일본이 솔선하여 아시아에서 근대화에 성공했는데 청국이나 여타 나라가 식민지화 내지 반식민지화로 전락된 까닭은 이 근대화혁명에서의 실패다. 당시 일본이 조선을 노린것 역시 조선보다 신속한 근대화성공이였고 후진국(봉건체제) 약소조선이 그 기회를 내준것이다.    당시 외국인이 쓴 조선관찰기를 보면 조선조말기의 구태의연한 봉건시스템과 전근대적 현상은 개화파 지식인, 정치가들에게 이 절망적 현상을 개혁하여 조선을 근대화로 이끄는 혁명의 찬스를 주었다. 선각자 젊은 김옥균(金玉均)은 이때 선명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김옥균은 그야말로 조선의 근대적개혁을 완수하는것으로 그 독립자주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헌신한 선각자의 한 사람이다. 그 김옥균이 박영효의 표현을 빌면 ‘취신자립(就新自立)’ 즉 국내를 개혁하고 청국과의 종속관계에서 독립하는 목표를 표방하는 개화파 지도자로서 ‘수구의뢰’ 즉 구체제를 고수하면서 청국과 종속관계를 지속하는 수구파에 대항하여 국왕측근의 수구파를 제거함으로써 신시대를 개척하려고 한것이 1884년의 갑신정변이였다.”(재일 역사학자 강재언)   “갑신정변”의 지도자 김옥균, 그는 어떤 인물이였을가? 한국과 일본에 있는 그에 관한 전기, 자료를 섭렵해보면 그 종합적인물상이 부각된다. 김옥균은 희대의 수재라 어려서부터 명성을 날린다. 21살에 전 조선의 수재 2,000명을 소집하여 진행된 과거시험에서 수석의 월계관을 따내고 22세에 공문서관리직 홍문관 교리(교장)로 발탁, 32세에는 호조참판(재정차관)이란 고위관리에 등용된다. 그는 개화파 선학인 유대치, 오경석, 그리고 박연암의 후손인 박계수 문하에서 개화사상을 배우게 된다. 김옥균의 주위에는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 서재필, 홍영식 등 근대조선의 쟁쟁한 인물들이 모여있었다. 조선 근대화지향을 리드한 이들은 정권중추의 요직에 있은 청년관료였으며 그외에 어윤중, 김홍집, 김윤식 등 온건파 년장자 개혁자들도 가담하였다. 김옥균은 조선의 자주적개혁은 불가능하다는것을 일찍 터득하게 되면서 외부의 힘을 빌리려 했다. 동시에 김옥균은 또 일본의 근대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정열적인 지도를 받았다.   어윤중의 추천으로(1881년 방일후) 1881년 조선의 승려 이동인의 소개를 거쳐 유길준, 유정수, 윤치호(당시 일본유학중)와 함께 후쿠자와와 해후한다. 그는 후쿠자와의 소개로 또 이노우에 가오루, 시부사와 에이치, 오오쿠마 시게노부,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의 거물급인물과 면회하고 론쟁을 벌리기도 했다. 후쿠자와는 조선의 첫 한글신문 《한성순보》를 제자인 이노우에를 파견하여 창간하면서 “문명개화”를 전파하기도 한 인물이였다.     당시 3차례 방일중 김옥균이 조선의 재정핍박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정부에게 300만엔 차관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군비확장에 혈안이 된 일본정부는 조선의 재정개혁은 안중에 없었던것이다.    그런데 김옥균 등 개화파에게 절호의 기회가 온다. 1884년 청불전쟁이 벌어지면서 청국은 조선주둔군중 절반을 전쟁으로 빼돌려 조선에서의 청국전력이 대거 감소된다.     이에 국제적으로 이미 아편전쟁이래 “종이호랑이”로 날인된 청국의 이미지에서 자신감을 얻은 김옥균이 이끄는 개화파는 쿠테타를 실행하기로 결정한다. 그들은 일본공사 타케조이와 접촉해 혁명의 구상을 전하고 지원을 요청한다.  그때 2,000명 청군에 비해 개화파군(150명)과 일본군(500명)은 도합 650명이였으나 사기와 무기로 보아 청군과 대결할수 있는 수준이였다.     12월 4일, 우정국개국 축하연을 리용해 수구파 정부요인들을 살해하고 개화파주도의 신정권을 수립하는 쿠테타를 감행한다. 수구파 관료인 이조연, 한규설, 민영익과 개화파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이 미, 영, 청, 일 등 공사와 함께 연회에 참석했다. 당시 수구파들인 민영목, 민대호, 조영하 등 중신들을 참살하고 고종을 옹위하여 경우궁으로 옮겨 사실상 인질로 삼아 수구파 제거와 혁정권 수립에 성공한다.    신정권은 다음날 5일 새벽 고종의 재가를 얻어 수립되었는데 전원이 개화파관료가 내각의 충추를 점했다. 신정부는 15개항의 새 정강정책을 발표 청국으로부터의 주권동립, 신분제도의 철폐, 조세제도 개혁, 부패의 제계, 경찰순사제도 창설, 정배금고자구제, 재정일원화정책 문벌폐지,인민평등 등 근대적 국가의 형성의 필수적 조치들이 담겨있었다.   만약 그 당시 이 신정부 조치가 실현됐다면 그때부터 일본에 상응되는 근대국가가 탄생됐을것이였다. 아무튼 이 “갑신정변”을 근대조선의 획기적인 의미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막을 내린다. 민비에 의해 움직이던 고종은 창덕궁으로 돌아갔으며 민비는 청국의 힘으로 개혁파정권을 일거에 붕괘시킬 작정으로 청군의 지원을 요청했다. 청국 역시 조선을 잃고싶지않았기에 원세개가 인솔하는 1500명 군사가 창덕궁으로 진입하여 일본군, 혁명군은 숫자로 열세였으나 완강히 저항했다. 하지만 강력한 청군앞에서 전멸당하고 갑신정변은 종식되고 만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은 타케조이 공사와 함께 인천일본공사관에 이르지만 타케조이는 그들에게 냉담해진다. 12월 11일 일본의 배를 타고 망명한 김옥균 등은 기나긴 일본 망명생활이 시작된다. “개화파들은 조선을 근대화시키려는 단기적 방안의 구상에서 일본에 의존했다는 치명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우리는 김옥균에 대한 비판을 안이하게 행해진다. 그러나 비판은 안이 하지만 오늘의 우리에게 결핍한것은 그때 당시 역사로 환원시켜 역사를 발견하는 프리즘아 아닌가.   김옥균이 리드한 갑신개혁의 궤를 보면 이러한 역사를 재발견 할수 있다. 일본보다 28년이나 늦게 개국한 후진봉건제의국가 조선이 적면한 문제가 얼마나 침중한것으로 개화파들에게 파악됐으리라하는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왜 개화파가 당초 자력으로 개혁을 하려던 의도를 버리고 일본의 지원을 요구하지 않으면 안됐을까 하는 배경에는 당시 개국이 늦어지고 절박한 열강의 위협에 비해 빈약한 재정, 군사력밖에 없는 조선왕조의 근본적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단합하면 개혁을 이룰수 있었으나 사대적인 전통에 조선왕조의 근본적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단합하면 개혁을 이룰수 있었으나 사대적인 전통에 배인 민씨 일파의 수구파들이 청군을 개입시켜 탄압시긴 그러한 대륙과 해양세력에서 우왕좌왕하는 우리 민족 선대들의 한계는 치명적이다. 아직 우리 내부의 근대적 “민족””국민국가”의식이 결여한탓이었다.   
18    (17)손문의 지팡이로 된 일본인들(김문학) 댓글:  조회:6652  추천:37  2010-09-25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17)  손문의 지팡이로 된 일본인들 김문학     “손문의 혁명운동과 일본과의 관계는 근대중일관계사의 하나의 중요한 구성부분이다. 근대 중일관계를 전방위로 해명하려면 과거 전쟁의 력사 말고도 손문의 혁명운동과 일본과의 관계를 규명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일본에서는 손문연구의 일환으로서 손문과 일본과의 관계에 대하여 연구가 앞서고있지만 중국에서는 여러가지 원인으로 인해 일본보다 뒤지고있다.” 남개대학 력사연구소 유신순(兪辛焞)교수가 그의 저서 《손문과 혁명운동과 일본》(1989 일문)의 서문에서 밝힌 말이다.   100년전 근대중일관계를 돌이켜보면 손문이 일본과 조우하고 일본에 기대를 걸었으며 일본인들 또한 손문을 지원하고 스스로 그의 지팡이로 되준것은 필연적요소가 많았다.   손문이 1895년 일본을 찾은이래 십수차례 일본에 출입하면서 그 체류기간은 도합 10여년이나 된다. 스스로 일본을 혁명의 근거지로 삼은것은 김옥균, 박영효 등이 일본을 찾은 리유와 류사하다. 실제로 《손문과 코베》(진인덕, 야스이산기치 공저)를 보면 1900년 의화단운동이 치렬하던 여름 6월 21일, 코베를 찾은 손문이 망명중인 개화파 지도자의 한사람인 박영효와 만나서 회담을 한 일이 있다. 1902년 1월에도 정사량과 함께 손문은 박영효를 방문하여 아시아혁명에 대해 환담한 기록이 나온다.   거두절미하고 본제에 돌아오면 손문이 일본과의 접점은 명치유신성공을 중국혁명의 모델로 삼은데서부터 비롯된다. 근대사의 중일한 양상을 토탈적으로 보아 “억압과 피억압” 외에도 늘 상호리용구도도 존재한것을 무시못한다.   손문은 “억압과 피억압”관계에서 청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억압을 리용할 타산으로 일본인의 지원을 기대했다. 일본국가주의자의 비조이며 동아시아 련대와 침략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토야마 미츠루(頭山滿)나 정당파 수령으로 수상을 지내기도 한 이누카이 츠요시(犬養毅) 및 대륙랑인(大陸浪人)이라 불린 우치다(內田良平) 등과 정치적리념이 엇갈리면서도 손잡을수 있은것은 청조를 전복할 꿈에 드높은 의협심으로 불타는 인물들이였기때문이리라.      그리고 이 계렬의 일본인 역시 조선의 김옥균, 박영효를 적극 지원한 인물들이며 명성황후 시해와 조선병합에도 관여한 인물들이기도 하여 얽힌 력사사정만큼이나 복잡한 얼굴의 멤버들이다.   중국과 일본은 동양의 같은 문화권의 형제우방이며 이래서 급속히 현대화에 성공한 강국 일본이  자신들의 중국혁명활동을 지원해줄것을 간절히 바랐다. 그러므로 손문을 도와 청나라를 뒤엎고 같은 한자문화권안에서 아시아의 “웅비”와  “련합”을 시도했던 일본인들과 손문은 자연히 손잡게 된다.   그중에서도 “손문의 가장 친한 벗이며 협력자”는 미야자키 도텐이다. 쿠마모토 하급무사 출신인 도텐은 1898년 무술변법에 실패하여 생명이 경각에 달린 강유위 등 7인을 일본으로 망명시키는데 성공한 인물로 명성을 떨친다. 그의 형 역시 중국혁명활동을 지원하고있다가 중도에서 사망되는데 형의 유지를 이어받아 전신을 중국혁명에 다 바치게 된다. 1905년 결성된 동맹회 역시 도텐과  스에나가(末永節)들의 지원으로 흑룡회의 회장을 활용하여 수립된다. 사실 손문에게  황흥을 처음 소개시킨 사람이 곧 미야자키인것이다. 동맹회는 손문과 황흥 등이 이끈 여러 단체의 합동단체이다.   도텐의 유명한 회상기인 《33년의 꿈》에 따르면 1897년 요꼬하마에 망명한 손문을 방문했던 도텐을 향해 손문은 중국혁명은 중국인민을 위하여, 아시아황색인종, 세계인류를 위하여 궐기하는것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손문의 충천하는 혁명의 정열에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 이후 도텐은 손문과 함께 신해혁명에 정신(挺身)하여 1921년 중국에서 귀국한 뒤 병마로 쓰러져 사망된다.   중국혁명운동을 최우선으로 내세운 도텐은 “래일 먹을 쌀이 없다”고 울먹거리는 안해에게 “당신 혼자 방법대봐”하면서 질책했으며 조상전래의 밭을 팔아버리고 그 돈을 중국혁명활동자금으로 썼다.   미야자키 도텐, 히라야마, 그리고 도야마, 히라오카, 우메야 등의 물심량면의 후원으로 공상희(孔祥熙)의 말대로 “동경에서 황제같은 생활을 했다”고 한다.   손문의 라이프스타일 역시 일본식에 젖어있었으며 그가 늘 입고있던  일제학생복의 에리를 고쳐서 고안해낸것이 지금의 “중산복”이다. 오늘도 대표적인 인민복, 전통적인 중국 지도자들이 즐겨입는 복장스타일로 정착되였다. 손문의 혁명적 리상, 사상도 역시 일본에서 출발된것인데 “삼민주의”,  “5권헌법” 등으로 결실된다. 그는 1894년 청국의 실력자 리홍장에게 제출한 정치개혁보고서에서 개량주의를 제창했다. 그 내실은 명치유신후 일본을 모델로 한 립헌군주제도였으나 리홍장에게 묵살당한다.   손문이 그뒤 빈번히 주장하는  “민주주의”사상은 일본의 “평균지권”의 사상에서 기인된다. 도텐의 형이 주장했던  “평균지권”사상을 배워서 “삼민주의”의 하나로 자리매김시켰다. 따라서 런던체류중 읽은 미국경제학자 헨리 조지의 민족독립, 민권주의와 같이 일본의 “평균지권”사상을 믹스시킨 복합물이다. 일본인들은 손문을 위해 재물과 사상, 리념 등에서 여러가지 형태로 지지했으며 그가 걸어가는 지팡이로 돼주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인들의 이 지팡이는 손문의 청국왕조 타도에 도움이 된 한편 간접적으로 중국침략의 지팡이로도 된 2원적인 역할을 했다.   손문에게도 이같은 2원론적인 모순은 그의 일본인식에서 항상 탈피하지 못했다. 1919년 일본과 “21조조약”이 체결된 뒤 손문은 일본의 중국침략에 대해 인식을 달리하고 규탄하지만 그는 동시에 일본에게 기대를 걸어보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그 기대는 목적이고 비판은 목적달성의 수단이기도 했다”고 력사학자 유신순은 지적한다. 요컨데 손문이 일본인에게 기대한것은 물자, 재정적지원이였다. 하나의 큰 의문은 왜 손문이 일본인에게 큰 요망을 할만큼 중국내의 지원자가 많지 않았나 하는것이다. 중국인이 스스로 자문해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손문이 만년에 “련쏘, 련공, 호조공동”의 사상전환을 이루면서도 1924년 겨울 다시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인의 성원을 기대하는 유명한 강연 “대아시아주의”를 남길만큼 또 일본에 희망을 걸었을가?   김옥균, 박영효도 역시 같은 심경을 품고 일본에 기대를 걸었을가? 재고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일본을 둘러싼 중한의 100년의 과거, 우리들의 모습은 일본의 모습과 늘 오버랩(互搭)된다.          
17    (16) 국경을 넘은 혁명가 손문의 뒤모습 (김문학) 댓글:  조회:5671  추천:31  2010-09-23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16) 국경을 넘은 혁명가 손문의 뒤모습김문학   1911년 10월 10일, 무창봉기로 신해혁명의 총성이 울렸을 때 손문은 미국에 있었다. 독립한 청국 각 성은 파벌로 나뉘여 혁명정부의 소재지 및 지도자를 누구로 꼽을가 쟁의를 일으켰다. 무창봉기 기사를 신문에서 읽은 손문은 쌘프란시스코에서 귀국선에 올라 12월 25일 상해에 도착, 일주후인 1912년 1월 1일 남경에 나타난다. 중화민국정부와 림시대통령의 탄생이다.   손문(1866년 11월 2일~1925년 3월 12일)은 호가 “중산(中山)”이고 자는 “재원(載元)”이며 “일신”은 구미에서 알려진 그의 이름이다. 대만에서  “국부”로, 중국대륙에서는 “혁명선구자”로 널리 존중받는 손문은 “손중산”으로 통한다. “중산”이란 호는 일본 망명시절 동경의 히비야공원근처의 려관에 묵을 때 우연히 “중산”이란 집의 패말을 보고 숙박부에 적은것이다. “중산초(中山樵, 나카야마쇼)라 칭했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손중산은 혁명가로서 그 국경을 뛰여넘은 세계적인 활동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일본에 망명했다”는 간략한 서술만 나올뿐 구체적인 궤적이나 상세한 내실에 대해서는 자상한 소개가 잘 안나온다.   그의 40년 혁명일생중 3분의 1의 시기를 일본에서 활동했는데 그 부분이 자세하게 기술되지 않는것은 너무 아쉽다.   손문은 참으로 다중성격, 다층면의 얼굴을 갖고있는 근대의 거물이다. 그는 민주주의자이기도 하지만 또 친일적인 혁명가이며 또한 대아시아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는 중국혁명의 제1보를 “명치유신”으로 간주하고 제2보를 중국공화혁명으로 보고있었다.    젊은 시절의 그는 당시 일본이 아시아 각국 독립운동가들이 박해를 받으면 망명터로서 몰려드는 집결지라는 점을 잘알고 여기서 활동을 하여 “동산재기”를 하군 했다. 그가 처음 1895년 광주봉기에서 실패하자 곧 동경으로 망명한것으로 일본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그가 1905년 8월 동경에서 동맹회를 건립하고 총리로 피선, 《민보》를 창간하고  3민주의의 기치를 걸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있다.   이렇게 엄숙한 혁명가로서의 앞모습은 “교과서적”기술로 강조되지만 그의 인간적 심층이나 그 국경을 넘은 활동의 인물적인 뒤모습에 대해서는 모호하기만 하다. 그래서 피와 살이 붙은 더 인간적인 그의 모습에 접근해보자는 소박한 념원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인물상에 대해서 고찰하겠다. 이로써 앞뒤모습을 립체적으로 볼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사실 손문이 청년혁명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계기는 그가 1895년 광주봉기실패후 일본망명과 미국을 거쳐 영국에 이른다음 청국공사관에 구속되여 그 실체험을 본인이 《런던피난기》로 발표하면서부터이다.   1900년 5월, 손문은 재다시 일본에 상륙하여 친하게 사귀던 일본인 녀성과 하코네려관에 투숙한다. 일본을 근거지로 혁명활동을 재개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신해혁명 성공까지 도합 10차례의 봉기를 일으키나 번마다 실패로 끝나 “실패의 혁명가”란 라벨이 붙기도 한 인물이다. 그는 “혁명”에 불타는 욕망으로 꽉찬 인물이다. 아무튼 오랑캐의 청나라 왕조를 붕괴시키고 한족중심의 신설공화국을 수립하는것이 장대한 로맨이였다.   신장 156센치메터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그는 열변을 토하고 혁명의 리상을 도도하게 이야기하군 했는데 화교들은 그를 “손대포(孫大砲, 뻥튀기)”로 장난삼아 부르기도 했다. 그는 또한 성격적으로 급하고 정서적기복이 심한 인물이였다는 증언이 많이보인다. 그가 돈이 딸릴 때면 “박애”라는 등 글씨를 휘호하여 주위 일본인들에게 “얼마라도 좋으니까 사주세요”하면서 푸접좋게 간청하기도 했다는 에피소드 역시 일본인의 회상기에 등장한다. 덕분에 그의 유묵이 일본에 많이 남은것은 오히려 행운이 아니겠는가.   그의 활달한 성격만큼이나 휘호한 유묵 역시 가관이였다. 이누카이 츠요시(犬養毅)의 회상기에 의하면 손문이 생전에 가장 즐긴 화제는 두가지였는데 하나는 “혁명”이고 하나는 “녀성”이였다고 한다. 중국인 학자 림사운의 론고에 의하면 1895년 일본에 온 그가 동경이나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혁명활동을 벌일 무렵 “영웅호색” 이미지가 이미 주위에 각인돼 있었다고 한다. 그가 돈이 딸릴 때면 “박애”라는 등 글씨를 휘호하여 주위 일본인들에게 “얼마라도 좋으니까 사주세요”하면서 푸접좋게 간청하기도 했다는 에피소드 역시 일본인의 회상기에 등장한다. 덕분에 그의 유묵이 일본에 많이 남은것은 오히려 행운이 아니였는가.   그의 활달한 성격만큼이나 휘호한 유묵 역시 가관이였다. 이누카이 츠요시(犬養毅)의 회상기에 의하면 손문이 생전에 가장 즐긴 화제는 두가지였는데 하나는 “혁명”이고 하나는 “녀성”이였다고 한다. 중국인 학자 림사운의 론고에 의하면 1895년 일본에 온 그가 동경이나 요꼬하마를 중심으로 혁명활동을 벌일 무렵 “영웅호색” 이미지가 이미 주위에 각인돼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결혼생활에 로모정이란 안해가 있었는데 1896년 요꼬하마에서 16세의 일본녀성 오츠키(大月薰)와 결혼식을 올려 1906년 5월 그사이에 후미코(富美子)라는 딸이 태여나기도 한다. 후미코는 일본어발음으로 “후미(文)”를 따서 지은것이라고 한다. 그외 아사다라는 녀성을 사랑하여 일본 각지에 늘 동반하여 활동했는데 그녀가 죽을 때 손문은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이런 녀성관계에서도 손문의 인간다운 따스한 뒤모습을 체감할수 있다.   국민당의 청천백일기를 디자인했을 때 당시 황홍이 일본의 일장기와 류사한 리유로 반대했지만 손문은 그것을 고집하여 통과시켰다. 손문의 제자격인 호한민은 후날 회상기에서 “손선생님이 왜 청천백일기에 집착했는지 모르겠다”고 수상쩍어했다고 한다. 손문의 머리속에는 중일련대에 의한 아시아의 흥성을 지향한 원대한 목표와 구상을 이 디자인속에 담았던것이다.   손문의 리상과 정열은 일본인을 감동시켰고 공감을 형성시켰다. 물론 일본인속에서는 손문을 리용하려는 자도 있었지만 그런 일본인의 지원을 손문은 역리용했던것이다. 특히 지금돈으로 환산하면 10조이상의 일본엔을 지원한 실업가 우메야(梅屋庄吉)나 평생 손문의 절대 지지자였던 혁명가 미야자키 도오텐(宮崎滔天), 그리고 원 총리대신 이누카이(김옥균을 지원한 인물이기도 함) 등 수십명의  리스트가 줄줄이 이어진다. 지어 신해혁명때 전쟁에 자진하여 참전, 전투속에서 헌신한 일본인들도 수십명 있다.   1912년 3월, 선통황제 퇴위를 조건으로 총통의 대좌를 원세개에게 넘긴 그는 토원(討袁)혁명에 실패하고 1913~16년 일본에서 송경령과 결혼하게 되면서 혁명적반려를 얻는다. 그뒤 그는 수차례 혁명을 궐기하지만 1925년 “혁명은 아직 미완성이다”는 유언을 남기고 파란만장의 생을 마친다.   사망전인 1924년 겨울, 일본 코베에서 한 “대아시아주의”연설은 구미의 침략주의에 대해 동양의 왕도평화를 강조하지만 일본제국주의는 손문의 경계를 무시하고 중국대륙을 침략하게 된다. 국경을 뛰여넘은 손문은 세계적혁명가로서 그의 동양평화사상은 오늘에도 자못 유효적의의를 지닌다.
16    (15)100년전 조선인들은 안중근을 어떻게 평가했나(김문학) 댓글:  조회:6803  추천:18  2010-09-16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15) 100년전 조선인들은  안중근을 어떻게 평가했나김문학1909년 10월 26일 아침, 30세의 청년 안중근이 할빈역에서 일제 조선정책의 설계사인 이토히로부미를 저격 살해한 의거는 세계를 진감한 충격적 뉴스였다. 따라서 2000만 조선인 사회에 미증유의 대반향을 일으켰다. 그 반향 및 평가는 여러가지로 복잡한 양상을 나타냈다. 안중근의 의거가 1907년이후 격앙하는 민족운동의 활동속에서 일거에 발생했으므로 그의 의거 및 인물은 숭경하는 민족독립운동가의 모델, 투사로 높이 평가되였다. 그의 거사에 환호작약하는 조선인이 많았다는것은 당시의 신문보도에서도 확인된다. 우선 1910년대초기에 그에 대한 전기가 다수 출판되는 점이 주목된다. 처음 안중근의 행동을 정리한 전기는 그가 사형당한 3주후인 1910년 4월 15일자 한국에서 발간된 《근세력사》란 책자다. 안중근의 출생으로부터 의거, 공판, 사형의 순간까지 기술돼있으며 그의 의거는 동양평화와 한국독립을 지향한 거사였다고 높이 평가한다. 그때 발행된 안중근전기를 보면 선후로 1910년 김택영의 필사본 《안중근전》, 1911년 《대동위인 안중근전》(호놀루루 신한국보사), 1914년 유명한 박은식의 《안중근》(상해 대동편집국), 1914년 가을 《만고의 안중근전》(《권업신문》 해삼위), 1916년 리건승의 《안중근전》(중국 연변《해경당수초》 수록) 등이다. 그중에서도 독립운동가이며 역사학자로서 명성을 떨친 박은식의 《안중근》이 유명한데 그의 《한국통사》(1914)와 《한국독립운동의 혈사》(1920)는 조선인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거사와 평화독립지향의 정신을 찬양한데만 그친것이 아니라 그의 추모활동이나 이족을 지원하는 활동도 벌였다. 사형직후 독립투쟁을 고무하기 위해 《안중근의가(义歌)》가 창작되여 애창되였으며 1912년에는 《영웅모범가》가 그의 행위에 대해 례찬했다. 그리고 해외 동포신문들 이를테면 하와이의 한국신보사, 울라지보스또크의 권업신문 등에서는 기념캘린데를 만들고 안의사의 사진도 게재했다. 그림엽서도 안중근의 얼굴초상사진을 우에 놓고 그아래 이토히로부미의 한국통감모자를 쓴 얼굴사진을 배치해놓음으로써 “사생취의 살신성인”의 영웅모범적표상을 돌출화시켰다.     1920년 상해 대한민국림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에는 박은식의 《안중근》을 게재하여 “우리 민족을 위해 신성한 피로 조국산천을 물들이고 정의의 총탄으로 세계만방을 경이케 한 아시아 제일의협”이라고 격찬했다. 당시 만주에서 발행된 《신진소년》잡지 1926년 2월 22일 기사의 “독립군가”에서는 “을지문덕, 리순신과 함께 안중근의 의렬심을 따라배워 우리도 적을 쏘아눕히자”고 기사가 등장한다. 1928년 상해로 활동무대를 옮긴 한국 영화인들은 《애국론》이란 제목의 안중근의거 영화를 촬영, 상영하여 중국인들로부터도 공명을 일으켰다. 어디 그뿐인가. 안중근은 민족이 따라배울 영웅, 모델로 당시 조선인사회의 제일급투사로 자리매김되었다. 1926년 4월 28일, 독립운동가 송학선은 당시의 총독부 사이토 마코토를 저격하는 거사를 일으킨다. 결과 사이토는 못 죽이고 다른 부회 의원 세명을 살해했다. 체포된 그가 일본경찰의 취조에 이렇게 떳떳이 대답한다. “이등박문을 저격한 안중근을 숭배하여 그의 본을 따서 사이토를 저격했다”고. 리창봉, 윤봉길, 백정기… 안중근의 뒤를 이은 독립거사는 근대사의  “반일의거”의 큰 계보를 이룬다. 이렇게 당시 안중근투사에 대한 영웅적모범표상이 확립되고 일제제거의 민족운동의 롤 모델로 되면서 조선인사회의 큰 공명대를 이룩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100년전의 신문, 잡지, 외교자료 등을 두루 섭렵해보면 안중근의 이미지는 긍정적모델과 함께 부정적형상으로 평가된 경향도 있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한 인물을 둘러싸고 특히 한국에 깊숙이 침투된 일본의 영향이란 역사적 상황의 복잡한 배경이 있었으므로 그 평가, 이해는 복잡할수밖에 없을것이다. 당시 가장 부정적으로 평가했던것이 조선 카톨릭교회의 신자들이였다. 안중근의 행위가 살인행위이고 이토를 죽인 범인 “테러리스트”로 인식하고있었다. 그들은 순전히 “살인”이란 죄목의 차원에서만 안중근을 인식했으며 민족독립운동이란 측면에서의 인식은 결여했기때문이다. 그리고 고종은 충격을 받고 “이토는 동양의 인걸로서 실로 우리 나라의 자부(慈父)이다. 이 자부에 해를 끼친 자는 아마도 사물의 도리를 모르는 해외유랑자일것이다”(일경의 보고서) 고 말했다고 한다. 아마 부득이하게 일본정부에 대한 외교적사령으로 부인한 말로 판단된다. 당시 조선의 친일파는 이토의 죽음에 거개 동정을 표했는데 친일실업가인 박영철은 공개적으로 이토를 죽인 안의사의 행동을 “참사”로 보고 이토 암살을 오히려 “식민지화를 제공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그 장본인이 안중근”이라고 생각했다. 이토가 아무리 점진적 한국병합을 설계했다고 해도 당시 이런 판단은 보통 조선민중에게는  받아들이기가 무리였을것이다. 당시 상황이 상황인만큼 이토를 살해한 “테러”로 하여 일본의 탄압정책이 더욱 강화될것이라는 위구심이 확실히 유식자들가운데 있은것은 사실이다.                                         부평군수 이명헌은 이토 암살이 오히려 일본의 대한정책을 강경화로 나아가게 할것이라고 평하고 서양흥, 윤백헌도 동감이였다. 3.1운동후 민족운동속에서 분해된 사회주의자들도 친일파같은 부정은 안했으나 안중근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판적태도를 취했다. 윤해(사회주의운동가)는 1924년 북만조선인들에게 “조선은 안중근의 과격한 행위로 빨리 말할지어니 과격주의는 백해 무일리하다”고 발언한다. 연해주 조선인공제회 회장, 로씨야귀화인 초봉준이 일본총령사관을 찾아가서 안중근을 무뢰한, 흉한이라고 지탄한다. 부회장인 김병학도 같은 취지의 발언을 하고있다. 그들은 안중근의 행동을 비난하면서 “없었어야 할” 인물상으로 간주하고있다. 100년전 안중근에 대한 평가, 이미지가 이렇게 복잡하게 갈라지는것은 일본식민지와 피지배자의 복잡한 립장이 얽히면서 그에 따른 양상도 복잡다양해진 력사자체의 반영일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안중근의 행동속에 숨긴 독립자존, 동양평화의 숭고한 지향에 대해서 점차 인식을 가지면서 침략자 원훈 이토를 격살한 민족투사라는 인식으로 통일된다. 안중근의사 순국 100년을 계기로 그의 사상체계에 대해서 세계와 조선민족사회에서 깊은 쟁의식이 요망된다.      
15    (14)“상투는 못 잘라” (김문학) 댓글:  조회:6448  추천:34  2010-09-14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14) “상투는 못 잘라” 김문학   “1896년은 조선에 있어서 작년의 깊숙한 우울을 헤여나지 못한채로 다가왔다. 작은 반란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 각급 관료가 살해되고 서울까지 쳐들어갈 반란군도 있었다.〞   국내 전체가 동요되고 몇가진가 심각한 폭동이 일어난데는 원인이 있다. 그 원인은 바로 1895년 12월 30일 정부 칙령에 의한 ‘상투’를 자르는것이였다. 이것이 조선전역을 훨훨 타오르게 했다. 얄미운 일본이 기승을 부려도, 또는 왕비가 암살(189년 명성황후 암살사건)되여도, 국왕이 유페동연한 대우를 받아도 꾹 참아왔던 조선인들이 상투를 자르라는 왕명에는 견딜수가 없었다. 조선인에 있어서 ‘상투’는 청국인에 대한 변발보다 월등 중요한것이다. 청국인의 변발은 정부에 복종함 또는 충성심을 나타낸 징표에 불과하며 머리카락이 자란 유년기부터 태를 땋는다.” 이것은 조선을 여행했던 유명한 영국인 관찰가 이자벨라.비숍여사가 1897년 출간한 《조선기행 》의 한단락이다. 1895년 12월 30일 단발령에 대한 조선민중의 대거 반항을 관찰한 대목이다. 비숍의 글은 또 이렇게 이어진다.    “하지만 조선인에 대하여 ‘상투’는 조선인이라는 상징이며 태고로부터 전해지는 관습이며(500년전 또는 2000년전) 역사가 깊은 까닭으로 신성시했는바 이를테면 실제로 몇살밖에 안되는 아이라 해도 사회적 법적으로 성인이라는 상징이며 또한 성씨와 함께 후세에 남기는 조상의 위패에도 씌여질 두가지 이름을  갖고있다는 상징이기도 하다.   조상숭배와 함께 결혼도 ‘상투’와 밀접히 연관돼있으며 혼례에 관한 장에서 얘기하다싶이 ‘상투’가 없는 조선인은 중년이 되여도 이름도 없는 아이로 취급하게 된다. 결혼도 못하고 ‘상투’를 튼 자는 ‘반성인(절반어른)이란 레테르가 붙어졌다.”   한말 유명한 학자인 황현도 그의 저술 《기려수필》에서 단발령이 내린 시초에는 전국이 분노했고 그래서 의병의 봉기가 우후죽숙마냥 격동되었다고 밝히고있다.   조선 전통문화의 최후의 심벌이가도 한 상투, 또한 근대화앞에서 그것은 보수적인 상징이였다. 상투의 보존은 전통적인 관습, 생활양식의 보전 그자체였으며 친일내각 김홍집, 유길준 등의 명령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또한 민족주체성 그 자체와 상투는 동일시돼 있었다고 해야 할것이다.   근대를 보면 조선은 이렇게 일본이라는 여과장치를 거쳐서야 서양의 근대와 만나게 되는데 보수적인 투쟁은 따라서 근대에 대한 저항과 함께 “일본”이라는(실질적 식민지지배자) 상대에 대한 저항이란 이중성격을 띄고있다. 그것은 청말 한족이 근대화를 지향함에 있어서 근대 서양에 대한 저항(또는 수용)과 함께 이민족인 만주족에 대한 저항, 제거로 이중적인 성격을 띤것과 류형상에서는 류사한 모습이 있다.   청나라의 상투는 “번발(辯髮)”로 불린다. 동북아시아 소수민족의 전통습속으로 두발의 일부분만 남기고 깎아버리고 남은 모발을 길러서 태로 땋는 스타일이다. 만주족의 그것은 앞머리부분을 깎고 뒤머리를 길러서 타래로 땋는것이 특징적이다.   여진족(만주족)이 1644년 청조를 세울 때 순치황제는 한족들에게도 변발을 강요했다. 유교전통에서 모발을 포괄한 신체를 상처내는 일은 터브이므로 한족들은 그 변발에 저항했지만 끝내 굴복하고 말았다.   19세기에는 전국에 변발이 보급되고 점차 “중국적인 풍습”으로서 이미지를 남겼지만 서양인들에게는 “돼지꼬리”로 멸시당하는 끄트머리로 되였다. 일본인도 불과 30여년전에 자기네들도 쵼마게라는 일종의 변발비슷한 상투를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청국인을 싸잡아 “돈미(豚尾)야로”비하하기도 했지 않은가.   1911년 신해혁명승리와 함께 단발령이 내렸다. 당시 조선인이 웨치던 “상투는 못잘라!”하는 반항풍경이 여기저기서 빈발했다. “머리는 잘릴지언정 변발은 못자른다”고 근대문명에 반항했던 지식인, 관료들도 많았다.     근대화의 도도한 조류앞에서 중국의 변발은 조선의 상투, 일본의 쵼마게와 함께 잘라버려야 할 낡은 보수의 상징이였다.   중국인의 표상속에서는 세계 모든 야만인종이 변발을 하면서 문명인이 되였다고 인식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자신들의 변발도 잘려야 할 운명에 처했다. 그것이 바로 근대혁명이다.   1851년에 발발한 태평천국혁명시기 변발을 푼 홍수전 “장발적”을 탄압한지 불과 60년이 안지나 청나라는 무너지고 그 변발은 잘리우는 비극으로 끝난다. 근대혁명가로서는 청나라를 구축하는 혁명에 투신해온 손문이 솔선 변발을 잘랐다. 변발을 후지산에 빗댄 노신도 일본에서 유학시에는 변발을 잘랐지만 다시 1909년 귀국해서는 가짜변발을 쓰고 다녔다는 일화가 전해지니 변발은 역시 전통의 끈질긴 상징임이 잘 알린다. 일본인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일찍 상투(즉 쵼마게)를 자른다. 1871년 9월 23일, 명치정부에 의해 발령된 산발탈도령이 하달되자 절대다수가 리해하고 호응하였다. 따라서 서양복을 착용하고 남녀혼욕금지, 나체금지 등 서양식 생활양식을 제도적으로 급격히 도입하였다. 명치천황도 솔선하여 쵼마게를 잘랐다.   그때만 해도 육식을 안하던 일본인은 서양인을 따라배워 육식을 장려하고 우유를 먹게 되며 녀성들도 양식 스커트를 입고 모던걸로 활보하게 된다.   상투, 변발, 그리고 쵼마게.   각기 동양3국의 전통적머리스타일이 서양문명의 충돌속에서 잘리워야 하는 운명에 아우성치게 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3자의 상투가 잘린 양상과 속도가 근대화를 달성하는 양식과 속도와도 맞먹는다. 근대화는 생활양식의 근대화이기도 한것이니까.  
14    (13)일제시기 일본인의 “조선민족성론”(김문학) 댓글:  조회:5753  추천:23  2010-09-13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13) 일제시기 일본인의 “조선민족성론”김문학수년전 필자가 근대 사료를 찾다가 일제시기 1927년(소화2년)에 조선총독부에서 편집 발간한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이란 책을 접하게 되었다. 일제시대 조선통치책을 원만히 실시하기 위해서 발간된 책자로서 그 당시 “일본인이 본 한국인론”으로서는 지극히 중대한 의미를 갖춘 문헌자료이다. 지금껏 발굴된 일제강점시기 “조선인의 민족성”치고 이렇게 자세하고 광범위하게 집대성한 자료는 필자의 과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직 없는듯 하다. 자료에 반영된 시간은 1910년대에서 20년대 당시 조선인의 성격기질을 파악하는데 일정한 가치가 있다. 조선총독부가 3.1운동후 식민통치정책을 스무드하게 추진시키기 위한 조사사업의 일환으로 민속, 풍속, 문화, 국민성(민족성)종교, 신앙 등 조사를 행하여 자료집으로 발간했는데 무려 40여종이 넘는다.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도 총독방관조사과(문서과)에서 낸 그 자료중의 제20집이다. 필자가 이 책을 읽으면서 경이감을 느낀 점은 우리가 지금껏 알고 있는 조선민족의 민족기질로서의 큰 특징의 하나가 매사에 서두르고 “빨리빨리”하는식의 급한 성격인데 그때 당시의 조사로 보면 정반대로 느긋하고 매사에 서둘지 않는 유장한 조선인의 성격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정서적이고 감정기복이 심하다”는 우리의 인식과는 달리 그때 백년전의 조선인은 감정을 잘 노출하지 않고 정서적이지 않았다는 대조적 모습과 조우하게 된다. 민족성, 국민성은 역시 고정불변 하는것이 아니라 전쟁, 이민족지배 등 역사체험을 통해 변화하는것이다. 오늘날 조선민족의 정서적 기질이나 매사에 서두르는 등 성정은 이같은 역사의 시공간적 체험을 바탕으로 점차 형성된것으로 추찰된다. 이 책의 내용을 드려다 보기로 하자. 서문에서 이 책 출간의 취지를 “본집은 주로 조선인의 사상 및 그 성격을 조사연구하는 자료로 간주하여 각 방면으로 본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관을 잡연히 모아 집성시킨것에 불과하나 이것만으로도 어느정도 조선을 이해를 함에 도움될것이다”고 밝히고 있다. 본편은 (一)조선인의 개관, (二)조선인의 성정(性情), (三)조선인의 사회경향 등으로 구성됐는데 조선인의 민족성 기질은 주로 제2편에서 다루고 있다. “조선인의 일반적 성정”으로서 각종, 각분야의 사람들에 대한 관찰을 집성하여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조선인의 성벽(性癖)으로서  방종, 사치, 낭비, 사행(요행을 노림). 조선인의 주된 성격기질로서는 ①표면적, 형식적인것을 즐김 ②부화뢰동 ③모방성  ④무기력 (5)怯懦、회색、보신술 ⑤利已적 판단 ⑥진지함이 모자람 ⑦조선인의 진지함 소유 ⑧감격성의 결여 ⑨의뢰심 강하고 또한 보은성이 결여 ⑩독립심이 적고 조선독립은 그 국민성에 맞지 않는다 ⑪ 감각이 무디고 인내심이 강하여 울어도 진짜 감정에서 우러나서 우는것이 아닌듯 하다 ⑫각도사람의 심성(적성) 평안도 함경도 사람은 성질이 강경하고 용맹하여 군인에 적합하고 전라도 사람은 기예나 미술공업에 능하고 충청경기도 사람은 지모변재에 능해 정치에 적합하며 경상, 강원도 사람은 순수질박하여 문학의 재능이 있으며 황해도 사람은 理财에 우수하니 상업에 적합하다. (이것은 1920년 6월에 창간된 《개벽》잡지 1926년 7월호 青吾의 글을 일어로 번역한것임) 그리고 “조선인의 성격관”으로 이하와 같은 특성을 열거한다.①사대성 ②면종배복 ③음모성  ④허영심〝조선인의 특성〞으로서 그 특성을 또 이렇게 나열한다.①사상의 고착성, 유독성이 결여한것  ②사상의 종속성, 모든 사상을 지나(중국)에 종속시키고 그 어떤 조선의 독창성 사상으로 간주할수 있는것이 생기지 아니했다는것, 그 예로서 언어, 문학, 제도, 종교에서 모두 지나의것을 전면 수용하여 독창성이 결여하다고 판정하고 있다. ③형식주의, 도덕, 윤리상 형식을 중요시하고 그 실질을 추구하지 않는다  ④당파심, 조선인이 다수 모이면 자연히 당파를 뭇고 파쟁을 하게 된다  ⑤문약(文弱)함, 일본이 상무국인데 비해 조선은 종래로 상문의 나라이다  ⑥심미관 결여,고물보존에 있어서도 심미관이 있는 일본이 능하지만 조선은 운치의 차가 있다.  ⑦공사혼동, 이조의 피폐한 실례를 들면서 사욕에 배를 불리는 관료에 조선 가족주의 중국을 그대로 답습한데서 그 근원을 찾는다.  ⑧관용, 느긋하고 대범함, 일본인과 비교하여 이 성정은 칭찬해야 할 특성이다. 조선인의 성질은 기분이 유장하고 감정을 격심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속담에 조선인의 긴 얼굴과 긴 담배대는 기가 유장한 “三长”이라 한다. 유장은 관용과 같이 감정이 평정한 평화태연함을 상징한다. 일본인은 그와 비해 종일 바삐 돌아치고 향수할줄 모른다. 또 조선은 예의를 옛날부터 중시하고 공자다운 예의국인바 李朝에 나타난 인물도 큰 인물이 많았다. ⑨락천적인 성격, 그 발생원인으로서 유장한 성격, 본분을 지키는 성격, 긴장속에서도 여유를 찾을줄 아는것이다. 요컨데 조선인 성격사상의 결정으로서는 형식주의 비심미적, 문약, 당파심, 공사혼동의 “6대특징”이며 장점으로서는 관용·느긋함, 순종, 낙천이 “조선인의 3대우점”으로 꼽고 있다. “매사에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다”는 점은 100년전 조선을 찾은 서양인의 기록에도 수없이 많이 나타난다. 이런것으로 추찰되는것은 그때의 우리 선조들은 느긋하고 유장한 성격이었다는것이다. 이같은 느긋한 성격은 일제의 억압속에서 저항의 형태로 나타나면서 성급함으로 변질, 그리고 6.25 조선전쟁 등 수난을 체험하면서 급급히 매사에 서두르는 조급성격으로 기울어지지 않았는가 심료된다. 아무튼 일제시기 총독부 산하에서 나온 이 책은 정책적 추진을 위한 조선인의 의식구조, 민족성 파악을 목적으로 했다는 “정책을 위한 봉사”의 큰 한계를 갖고 있다. 《국화와 칼》이 미국 국무성의 일본인 점령책의 문화적 근거를 삼기 위해 여류인류학자 루즈.베네텍트가 위촉을 받고 쓴 허상과 실상이 혼합된 “일본인론”이듯 이 책의 옥석혼재에 대해서는 그 진가를 가를 필요가 있다. 이 책에는 과거 우리의 많은 허상과 함께 실상이 혼재되면서 그 허상을 물론 비판해야 한다. 또한 비판적 시각으로 우리 과거의 “거울”의 한쪼각으로 될수 있는 가치는 우리가 신중하게 재고 해야 하지 않을까.  
13    (12) 근대 “時間”의식의 생성 (김문학) 댓글:  조회:5526  추천:23  2010-09-02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12) 근대 “時間”의식의 생성김문학 1910년은 한국과 중국이 일본을 뒤이어 근대적 “시간의식”이 형성된 시기다. 현재 우리가 말하는 시간(時間)이란 단어도, 시계(時計)라는 말도 모두 일본에서 수용한것이다. 서양적 의미의 근대적 시간의식, 시각제도는 사상과 문명과 함께 근대성의 중요한 요소이다.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시간”이란 말을 도입한 사람은 유길준이다. 한국 사상 일본유학제1호인물인 그는 1895년 4월, 일본에서의 유학체험을 바탕으로 유명한 《서유견문》을 간행하여 일본문명을 통해 한국인을 계몽한 거물지식인이었다. 그는 그 책에서 “정치학” “과학” “경계” “언어”등 어휘와 함께 “시간”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근대적 시간관념이 한국에도 중국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시신(時辰)”이란 용어가 말해주듯이 동아시아 전통사회에서는 태양의 운행을 바탕으로 “신시” “말시”하는 격으로 시각을 측정하였는데 정밀한 시간관념이 있은것은 아니였다. 1601년에 마테오리치가 선교사 자격으로 북경에 도착하여 명나라 신종황제에게 선물로 자명종을 헌상했는데 중국인들을 크게 놀라게 했다. 그뒤 청국을 통해 조선황실로도 시계가 선물로 들어오는데 역시 조선인들은 신기한것으로 놀랐다는 기록이 보인다. 청나라 강희, 건륭은 모두 시계를 몹시 즐겼는데 그것을 재미로 기교지물(奇巧之物)로 보았을뿐만아니라 몸소 시계를 제작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계사용은 조정이나 왕실에 불과했고 사회전체가 “시간의식”을 갖추게 되는 때는 20세기 초반까지 기다려야 했다. 사실 중국이나 한국에 근대 “시간관념”을 보급하도록 등을 밀어준것은 일본유학생과 일본을 다녀온 식자들이었다. 일본은 명치유신후인 1872년 11월에 “개력(改历)”령을 발포하고 서양의 태양력을 도입, “표준시간”에 따라 국민의 시간의식을 보급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대도시 도쿄나 오사카에서 오포(午砲)는 시민들에게 시간을 알리는것으로 인기가 있었다. 일본에서 일본인들이 모든 생활절주를 “시간”에 맞추어 작식하고 철도교통, 공장, 학교의 근대적 시간을 엄수하는 광경을 보아왔던 유학생이나 관찰가들은 그때로부터 일본인을 본따서 서양식 일부, 시간으로 일기를 적기도 했다. 문호 노신의 일기를 보면 시간단위로 일과를 적고있었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1904년 경,직예고등공업학당의 수업풍경을 보면 교실중앙에 걸린 벽시계가 20세기초 중국에서 시계가 학교에도 이미 보급되기 시작했다는 새 사실을 알수 있다. “시간을 계량하는 장치”라는 뜻의 시계가 전근대적 느슨한 시신(時辰)속에서 대충 대충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던 사람들이 수자로 표상되는 시, 분, 초의 시간속에서 자신을 일상적으로 규률에 예속시키기로 한 근대의 삶이 시작된것이다. 중국에서는 1912년(민국원년) 1월 2일 개력이 실행되어 태음력을 폐지하고 서양적 太陽력이 채용됨으로써 세계의 표준시각제도에 들어섰다. 이리하여 사실 지금의 시계가 보급되기 시작하는데, 이때로부터 우리가 시간을 보면서 시간관념속에서 살아온것은 백년에 불과하다. 한국에서의 본격적인 “시간관념”의 생성은 1910년 일제 강제 병합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물론 그전에도 “시계”란 단어와 함께 실제로 시계가 사용되긴 했으나 근대적 의미의 시간관념은 이 시기라 하는것이 타당하다고 한다. 한말 외국인의 기록이나 일본인의 기술에도 그때 조선인이 느긋하고 유장하게 행동했다는것은 근대적인 시계에 의한 시간관념이 희박했다는 증거로도 될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1910년 4월 3일, 세간이 주목한 시계광고가 상해에서 나온다. 그 무렵 상해 최대의 백화점 혜라( 惠羅公司)가 낸  회중시계 광고이다. 《시계의 문화사》(카도야마)에 의하면 그것은 미국제로서 단가가 하나에 2.5원이었는데 성능이 좋아서 일본에서도 20년전 수입되어 잘 팔렸다고 한다. 염가시계로 하여 시계가 급격히 시민들속에 보급되며 거기에 싼 손목시계까지 등장하여 시계는 국민의 일용품으로 정착된다. 그것이 1910년대 중반이다. “시간에 쫓긴다. 매여산다”는 일상용어는 그때부터 탄생되며 오늘날의 시간관념은 바로 그때부터 생성 보급되었다. 20세기초 중국신문 《신문화보》(新聞畫報)에는 개가 사람들의 하루 풍경을 바라보는 모습을 극화한 그림이  게재되였다. 9시에 학생이 등교하고 12시 장사군이 지나가고 동냥꾼이 나타나고 4시에는 손님접대를 하고 6시에는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인간세상의 일과를 개의 눈으로 바라본 내용이다. “狗眼看人”(구안간인)의 만화로 흥미롭다. 근대 중국인의 일상은 시간의식에 지배돼있다는것을 설명해주고 있다. 동아시아에 전파된 “시간의식”은 사상 문화의 팩터와 비견되는 중대한 의식 혁명이다. 프랑스의 학자 바스두우 불기에일은 “시간의 해석과 일본의 영향”이란 논고에서 그 의미에 대해서 이렇게 갈파하고 있다. “시간을 단지 주기적, 직선적 시간의 조합으로만 생각하던 중국인이 시간을 미래와 결부시키는 감각은 원래 없었으나” ”그 역사적 거울로서의 시간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포섭한 "앞날"을 의식하게 되었다.” “중국인이 일본에서 본 표준화 시간은 과거에만 시간의 의미가 있는것이 아니라 현재가 과거보다 더 중요하며 이런 시간의식의 정신적 변혁은 젊은 중국지식인들로 하여금 과거에 대해 재고하고 자신들의 역사를 거리를 두고 생각할수 있게끔 했다.” 상고문화(尚古文化)에 비중을 둔 중국인이 “진보관념”을 통해 “진보사상관념”을 의식하게 되고 개안(開眼)하게 된것은 중국인에게는 큰 사상적 혁신이었다.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3국의 근대 역사는 이런 의미에서 ”시간”의 역사 또는 “시간의식”의 역사라고 칭할수 있다.
12    (11). 이토 히로부미와 무술변법 (김문학) 댓글:  조회:5401  추천:23  2010-08-18
<장련련재>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11)   이토 히로부미와 무술변법   김문학1898년 9월 21일. 이날은 어떤 날인가? 중국 근대사에서 가장 암흑했던 하루, 무술변법이란 유신혁명이 서태후를 위수로 한 수구파 세력에 의해 참담한 실패로 끝난 날이다.   “무술변법”으로 칭하는 이 혁명은 명치유신을 모델로 한 “무술유신”이었다. 이 역시 또한 1895년 청일갑오전쟁에서 대패를 당한 청국의 부득불한 유신이라는 배경을 감안해야 한다.   “일본과 싸워 이기자”고 외치던 주전파 관료들도 전쟁의 패북으로 그 청나라적 대국의 오만한 사고양식을 전환시킬 계기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독서인(지식인)들이 이미 양무운동의 실패에서 얻어낸 교훈을 정치지배시스템을 개혁하고 일본식의 “국민국가”로 변신하지 않았기에 서양은 물론, 작은 동양의 섬나라에게도 여지없이 완패하는 망신을 당했다는 점이다.   남방 해남의 고양파 대가로 명성을 날린 지도자 강유위는 일찍 1888년 《일본변정고》를 집필하여 일본명치유신에 따라배우자고 광서황제에게 상서하지만 보수파 관료들에게 각하당하고 만다. 그러던 1895년 4월 “마관조약” (일청강화조약)체결소식이 전해지자, 북경에서 과거시험을 보려던 강유위와 전국에서 운집해온 거인들 603명을 소집하여 연명으로 유명한 “공거상서”를 감행한다. “공거상서”는 과거수험생들이 정부에 탄원서를 헌상하는것으로써 “명치유신을 따라배워 청국을 부국강병으로 이끌자”는 개혁적 발상이었다.   그러나 약관 27세의 광서황제는 명치천황과 같이 실권이 없었고 서태후 등 수구파를 움직일 력량도 결여했다. 1884년 조선의 젊은 개화파의 리더가 지도한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나듯 무술유신도 기껏해야 백일천하로 막을 거둔다.   명치유신과 무술변법 그리고 조선의 갑신정변 이 삼자를 비교해보면 유독 명치유신이 왜 성공할수 있는 결정적인 원인은 색출해낼수 있다. 무술변법이나 갑신정변은 주위의 인재, 환경에 유연(柔软)하게 대처할 유연성이 결필했으나 명치유신은 그것이 확보돼 있는 유연구조, 명치천황과 그 주위의 영재들인 오오쿠보(大久保),기도(木戶) 가츠(勝)등이 가변성과 다의성을 갖고 동일한 행동을 보였기때문이다. 중국과 한국의 유신은 상하의 유연성 있는 연합이 결여했고 “강경한 구조”로 일방통행으로 감행됐기에 꼭 목 잘리고 피흘리는 비극으로 종말짓기 마련이다.   두나라의 유신패자들이 다 같이 일본으로 망명한 것 역시 일본은 동아시아 혁명의 중심이었다는 유연한 구조의 땅이었다는것을 설명해준다.   당시 중국이 무술유신에서 성공할 찬스는 있었다. 그런데 그 찬스를 중국은 스스로 잃어버렸다.   베일에 가려진 역사적 사실 하나를 이제 이야기하기로 하겠다.   역사를 읽는 묘미의 하나가 바로 베일에 가려졌던 모르던 역사의 장면을 캣치해 내는 그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무술변법의 특징은 곧 1868년의 명치유신을 모델로 한것인바, 명치유신으로 국민국가를 완성시키고 일본 최초의 근대헌법을 제정한 최초의 총리대신 이토히로부미는 그때 강유위, 양계초, 담사동 등 젊은 유신지도자들에게 있어서 선망의 대정치가이기도 했다.   마침 무술변법이 한창 백열화로 진행중인 1898년 6월 이토는 제3차 이토내각을 사임하고 일청전쟁후 3국정세를 알고보고자 7월 조선을 거쳐 9월 14일에 북경에 이르렀다. 그런 동아시아의 유명 정치가인만큼 이토는 유신파 인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그때 신문보도를 보아도 청년학생들이 모여들어 이토의 지도를 받고자 면회를 요망했다.   더우기 강유위의 발안으로 이토를 청국정부의 수상 (또는 정부 최초 정치고문)으로 초빙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토가 확실이 응했는지는 기록에 없어서 불투명하다.   그무렵 이토는 적극적으로 유신파들과 만나 많은 조언을 주었다.   “성급하게 표면적인 개혁을 피하고 계획있게 점차적으로 진행하도록 농.공.상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우선 교육을 정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토는 또 9월 15일 총리아문을 방문하여 “이 나라 대신, 관료들이 나라 정치보다 권력욕에 사로잡혀 황제에게 솔직한 진언을 못하는것이 안타깝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9월 20일 광서황제를 배알한 이토에게 황제가 “개혁의 순서나 방법에 대해 총리아문의 5대신들에게 지도해주십소”하는 요망에 “귀국을 위해서라면 성심 성의를 다 하겠나이다”고  이토가 답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인 21일, 서태후 등 보수파들은 이토까지 가세했다는것을 눈치채고 무술유신을 일거에 짓부순다.   만약 (물론 역사에는 “만약”이란 전제가 금물이지만) 이토가 청국유신의 최고 고문으로서 혁명을 지도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무척 흥미로운 가설이다. 가설이긴 하나, 이토의 방법대로 순조롭게 유신변법이 추진됐다면 근대사의 새 페이지를 썻을 가능성도 있을 법하다.   그뒤 이토가 일본공사관에 머므르고 있을때 서태후의 쿠테타를 피하여 비호를 요구하여 뛰어든 양계초를 이토가 보호해주었다. 이토는 일본공사관 직원에게 “양계초같은 유능한 인물을 살려주어야 한다”고 부탁하여 마침내 강유위와 함께 일본의 배에 타고 망명에 성공한다.   그들이 일본을 제2의 혁명근거지로 맹활약하게 된것도 이토의 도움이 있었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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