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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00년전 조선인들은 안중근을 어떻게 평가했나(김문학)
2010년 09월 16일 16시 43분  조회:6776  추천:18  작성자: 김문학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15)

100년전 조선인들은  안중근을 어떻게 평가했나

김문학


1909년 10월 26일 아침, 30세의 청년 안중근이 할빈역에서 일제 조선정책의 설계사인 이토히로부미를 저격 살해한 의거는 세계를 진감한 충격적 뉴스였다. 따라서 2000만 조선인 사회에 미증유의 대반향을 일으켰다. 그 반향 및 평가는 여러가지로 복잡한 양상을 나타냈다.

안중근의 의거가 1907년이후 격앙하는 민족운동의 활동속에서 일거에 발생했으므로 그의 의거 및 인물은 숭경하는 민족독립운동가의 모델, 투사로 높이 평가되였다. 그의 거사에 환호작약하는 조선인이 많았다는것은 당시의 신문보도에서도 확인된다. 우선 1910년대초기에 그에 대한 전기가 다수 출판되는 점이 주목된다. 처음 안중근의 행동을 정리한 전기는 그가 사형당한 3주후인 1910년 4월 15일자 한국에서 발간된 《근세력사》란 책자다. 안중근의 출생으로부터 의거, 공판, 사형의 순간까지 기술돼있으며 그의 의거는 동양평화와 한국독립을 지향한 거사였다고 높이 평가한다.

그때 발행된 안중근전기를 보면 선후로 1910년 김택영의 필사본 《안중근전》, 1911년 《대동위인 안중근전》(호놀루루 신한국보사), 1914년 유명한 박은식의 《안중근》(상해 대동편집국), 1914년 가을 《만고의 안중근전》(《권업신문》 해삼위), 1916년 리건승의 《안중근전》(중국 연변《해경당수초》 수록) 등이다.

그중에서도 독립운동가이며 역사학자로서 명성을 떨친 박은식의 《안중근》이 유명한데 그의 《한국통사》(1914)와 《한국독립운동의 혈사》(1920)는 조선인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거사와 평화독립지향의 정신을 찬양한데만 그친것이 아니라 그의 추모활동이나 이족을 지원하는 활동도 벌였다. 사형직후 독립투쟁을 고무하기 위해 《안중근의가(义歌)》가 창작되여 애창되였으며 1912년에는 《영웅모범가》가 그의 행위에 대해 례찬했다.

그리고 해외 동포신문들 이를테면 하와이의 한국신보사, 울라지보스또크의 권업신문 등에서는 기념캘린데를 만들고 안의사의 사진도 게재했다. 그림엽서도 안중근의 얼굴초상사진을 우에 놓고 그아래 이토히로부미의 한국통감모자를 쓴 얼굴사진을 배치해놓음으로써 “사생취의 살신성인”의 영웅모범적표상을 돌출화시켰다.    

1920년 상해 대한민국림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에는 박은식의 《안중근》을 게재하여 “우리 민족을 위해 신성한 피로 조국산천을 물들이고 정의의 총탄으로 세계만방을 경이케 한 아시아 제일의협”이라고 격찬했다.

당시 만주에서 발행된 《신진소년》잡지 1926년 2월 22일 기사의 “독립군가”에서는 “을지문덕, 리순신과 함께 안중근의 의렬심을 따라배워 우리도 적을 쏘아눕히자”고 기사가 등장한다.

1928년 상해로 활동무대를 옮긴 한국 영화인들은 《애국론》이란 제목의 안중근의거 영화를 촬영, 상영하여 중국인들로부터도 공명을 일으켰다.

어디 그뿐인가. 안중근은 민족이 따라배울 영웅, 모델로 당시 조선인사회의 제일급투사로 자리매김되었다. 1926년 4월 28일, 독립운동가 송학선은 당시의 총독부 사이토 마코토를 저격하는 거사를 일으킨다. 결과 사이토는 못 죽이고 다른 부회 의원 세명을 살해했다. 체포된 그가 일본경찰의 취조에 이렇게 떳떳이 대답한다. “이등박문을 저격한 안중근을 숭배하여 그의 본을 따서 사이토를 저격했다”고.

리창봉, 윤봉길, 백정기… 안중근의 뒤를 이은 독립거사는 근대사의  “반일의거”의 큰 계보를 이룬다. 이렇게 당시 안중근투사에 대한 영웅적모범표상이 확립되고 일제제거의 민족운동의 롤 모델로 되면서 조선인사회의 큰 공명대를 이룩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100년전의 신문, 잡지, 외교자료 등을 두루 섭렵해보면 안중근의 이미지는 긍정적모델과 함께 부정적형상으로 평가된 경향도 있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한 인물을 둘러싸고 특히 한국에 깊숙이 침투된 일본의 영향이란 역사적 상황의 복잡한 배경이 있었으므로 그 평가, 이해는 복잡할수밖에 없을것이다.

당시 가장 부정적으로 평가했던것이 조선 카톨릭교회의 신자들이였다. 안중근의 행위가 살인행위이고 이토를 죽인 범인 “테러리스트”로 인식하고있었다. 그들은 순전히 “살인”이란 죄목의 차원에서만 안중근을 인식했으며 민족독립운동이란 측면에서의 인식은 결여했기때문이다.

그리고 고종은 충격을 받고 “이토는 동양의 인걸로서 실로 우리 나라의 자부(慈父)이다. 이 자부에 해를 끼친 자는 아마도 사물의 도리를 모르는 해외유랑자일것이다”(일경의 보고서) 고 말했다고 한다. 아마 부득이하게 일본정부에 대한 외교적사령으로 부인한 말로 판단된다.

당시 조선의 친일파는 이토의 죽음에 거개 동정을 표했는데 친일실업가인 박영철은 공개적으로 이토를 죽인 안의사의 행동을 “참사”로 보고 이토 암살을 오히려 “식민지화를 제공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그 장본인이 안중근”이라고 생각했다. 이토가 아무리 점진적 한국병합을 설계했다고 해도 당시 이런 판단은 보통 조선민중에게는  받아들이기가 무리였을것이다.

당시 상황이 상황인만큼 이토를 살해한 “테러”로 하여 일본의 탄압정책이 더욱 강화될것이라는 위구심이 확실히 유식자들가운데 있은것은 사실이다.
                                        
부평군수 이명헌은 이토 암살이 오히려 일본의 대한정책을 강경화로 나아가게 할것이라고 평하고 서양흥, 윤백헌도 동감이였다. 3.1운동후 민족운동속에서 분해된 사회주의자들도 친일파같은 부정은 안했으나 안중근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판적태도를 취했다. 윤해(사회주의운동가)는 1924년 북만조선인들에게 “조선은 안중근의 과격한 행위로 빨리 말할지어니 과격주의는 백해 무일리하다”고 발언한다.

연해주 조선인공제회 회장, 로씨야귀화인 초봉준이 일본총령사관을 찾아가서 안중근을 무뢰한, 흉한이라고 지탄한다. 부회장인 김병학도 같은 취지의 발언을 하고있다. 그들은 안중근의 행동을 비난하면서 “없었어야 할” 인물상으로 간주하고있다.

100년전 안중근에 대한 평가, 이미지가 이렇게 복잡하게 갈라지는것은 일본식민지와 피지배자의 복잡한 립장이 얽히면서 그에 따른 양상도 복잡다양해진 력사자체의 반영일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안중근의 행동속에 숨긴 독립자존, 동양평화의 숭고한 지향에 대해서 점차 인식을 가지면서 침략자 원훈 이토를 격살한 민족투사라는 인식으로 통일된다. 안중근의사 순국 100년을 계기로 그의 사상체계에 대해서 세계와 조선민족사회에서 깊은 쟁의식이 요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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