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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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손문의 지팡이로 된 일본인들(김문학)
2010년 09월 25일 10시 14분  조회:6610  추천:37  작성자: 김문학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17)
 

손문의 지팡이로 된 일본인들


김문학

 

 

“손문의 혁명운동과 일본과의 관계는 근대중일관계사의 하나의 중요한 구성부분이다. 근대 중일관계를 전방위로 해명하려면 과거 전쟁의 력사 말고도 손문의 혁명운동과 일본과의 관계를 규명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일본에서는 손문연구의 일환으로서 손문과 일본과의 관계에 대하여 연구가 앞서고있지만 중국에서는 여러가지 원인으로 인해 일본보다 뒤지고있다.” 남개대학 력사연구소 유신순(兪辛焞)교수가 그의 저서 《손문과 혁명운동과 일본》(1989 일문)의 서문에서 밝힌 말이다.

 

100년전 근대중일관계를 돌이켜보면 손문이 일본과 조우하고 일본에 기대를 걸었으며 일본인들 또한 손문을 지원하고 스스로 그의 지팡이로 되준것은 필연적요소가 많았다.

 

손문이 1895년 일본을 찾은이래 십수차례 일본에 출입하면서 그 체류기간은 도합 10여년이나 된다. 스스로 일본을 혁명의 근거지로 삼은것은 김옥균, 박영효 등이 일본을 찾은 리유와 류사하다. 실제로 《손문과 코베》(진인덕, 야스이산기치 공저)를 보면 1900년 의화단운동이 치렬하던 여름 6월 21일, 코베를 찾은 손문이 망명중인 개화파 지도자의 한사람인 박영효와 만나서 회담을 한 일이 있다. 1902년 1월에도 정사량과 함께 손문은 박영효를 방문하여 아시아혁명에 대해 환담한 기록이 나온다.

 

거두절미하고 본제에 돌아오면 손문이 일본과의 접점은 명치유신성공을 중국혁명의 모델로 삼은데서부터 비롯된다. 근대사의 중일한 양상을 토탈적으로 보아 “억압과 피억압” 외에도 늘 상호리용구도도 존재한것을 무시못한다.

 

손문은 “억압과 피억압”관계에서 청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억압을 리용할 타산으로 일본인의 지원을 기대했다. 일본국가주의자의 비조이며 동아시아 련대와 침략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토야마 미츠루(頭山滿)나 정당파 수령으로 수상을 지내기도 한 이누카이 츠요시(犬養毅) 및 대륙랑인(大陸浪人)이라 불린 우치다(內田良平) 등과 정치적리념이 엇갈리면서도 손잡을수 있은것은 청조를 전복할 꿈에 드높은 의협심으로 불타는 인물들이였기때문이리라. 

 

 

그리고 이 계렬의 일본인 역시 조선의 김옥균, 박영효를 적극 지원한 인물들이며 명성황후 시해와 조선병합에도 관여한 인물들이기도 하여 얽힌 력사사정만큼이나 복잡한 얼굴의 멤버들이다.

 

중국과 일본은 동양의 같은 문화권의 형제우방이며 이래서 급속히 현대화에 성공한 강국 일본이  자신들의 중국혁명활동을 지원해줄것을 간절히 바랐다. 그러므로 손문을 도와 청나라를 뒤엎고 같은 한자문화권안에서 아시아의 “웅비”와  “련합”을 시도했던 일본인들과 손문은 자연히 손잡게 된다.

 

그중에서도 “손문의 가장 친한 벗이며 협력자”는 미야자키 도텐이다. 쿠마모토 하급무사 출신인 도텐은 1898년 무술변법에 실패하여 생명이 경각에 달린 강유위 등 7인을 일본으로 망명시키는데 성공한 인물로 명성을 떨친다. 그의 형 역시 중국혁명활동을 지원하고있다가 중도에서 사망되는데 형의 유지를 이어받아 전신을 중국혁명에 다 바치게 된다. 1905년 결성된 동맹회 역시 도텐과  스에나가(末永節)들의 지원으로 흑룡회의 회장을 활용하여 수립된다. 사실 손문에게  황흥을 처음 소개시킨 사람이 곧 미야자키인것이다. 동맹회는 손문과 황흥 등이 이끈 여러 단체의 합동단체이다.

 

도텐의 유명한 회상기인 《33년의 꿈》에 따르면 1897년 요꼬하마에 망명한 손문을 방문했던 도텐을 향해 손문은 중국혁명은 중국인민을 위하여, 아시아황색인종, 세계인류를 위하여 궐기하는것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손문의 충천하는 혁명의 정열에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 이후 도텐은 손문과 함께 신해혁명에 정신(挺身)하여 1921년 중국에서 귀국한 뒤 병마로 쓰러져 사망된다.

 

중국혁명운동을 최우선으로 내세운 도텐은 “래일 먹을 쌀이 없다”고 울먹거리는 안해에게 “당신 혼자 방법대봐”하면서 질책했으며 조상전래의 밭을 팔아버리고 그 돈을 중국혁명활동자금으로 썼다.

 

미야자키 도텐, 히라야마, 그리고 도야마, 히라오카, 우메야 등의 물심량면의 후원으로 공상희(孔祥熙)의 말대로 “동경에서 황제같은 생활을 했다”고 한다.

 

손문의 라이프스타일 역시 일본식에 젖어있었으며 그가 늘 입고있던  일제학생복의 에리를 고쳐서 고안해낸것이 지금의 “중산복”이다. 오늘도 대표적인 인민복, 전통적인 중국 지도자들이 즐겨입는 복장스타일로 정착되였다.


손문의 혁명적 리상, 사상도 역시 일본에서 출발된것인데 “삼민주의”,  “5권헌법” 등으로 결실된다. 그는 1894년 청국의 실력자 리홍장에게 제출한 정치개혁보고서에서 개량주의를 제창했다. 그 내실은 명치유신후 일본을 모델로 한 립헌군주제도였으나 리홍장에게 묵살당한다.

 

손문이 그뒤 빈번히 주장하는  “민주주의”사상은 일본의 “평균지권”의 사상에서 기인된다. 도텐의 형이 주장했던  “평균지권”사상을 배워서 “삼민주의”의 하나로 자리매김시켰다. 따라서 런던체류중 읽은 미국경제학자 헨리 조지의 민족독립, 민권주의와 같이 일본의 “평균지권”사상을 믹스시킨 복합물이다.


일본인들은 손문을 위해 재물과 사상, 리념 등에서 여러가지 형태로 지지했으며 그가 걸어가는 지팡이로 돼주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인들의 이 지팡이는 손문의 청국왕조 타도에 도움이 된 한편 간접적으로 중국침략의 지팡이로도 된 2원적인 역할을 했다.

 

손문에게도 이같은 2원론적인 모순은 그의 일본인식에서 항상 탈피하지 못했다. 1919년 일본과 “21조조약”이 체결된 뒤 손문은 일본의 중국침략에 대해 인식을 달리하고 규탄하지만 그는 동시에 일본에게 기대를 걸어보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그 기대는 목적이고 비판은 목적달성의 수단이기도 했다”고 력사학자 유신순은 지적한다. 요컨데 손문이 일본인에게 기대한것은 물자, 재정적지원이였다. 하나의 큰 의문은 왜 손문이 일본인에게 큰 요망을 할만큼 중국내의 지원자가 많지 않았나 하는것이다. 중국인이 스스로 자문해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손문이 만년에 “련쏘, 련공, 호조공동”의 사상전환을 이루면서도 1924년 겨울 다시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인의 성원을 기대하는 유명한 강연 “대아시아주의”를 남길만큼 또 일본에 희망을 걸었을가?

 

김옥균, 박영효도 역시 같은 심경을 품고 일본에 기대를 걸었을가? 재고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일본을 둘러싼 중한의 100년의 과거, 우리들의 모습은 일본의 모습과 늘 오버랩(互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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