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항아리, 어머니 그리고 재봉기
김문학
활력이 강하신 어미님이 우리를 떠나신지도 벌써 10년이 된다. 늙으신 아버님이 묵향이 배인 벼루로 방불하시더니, 어머니의 모습은 키낮은 우리 조선조의 백자 항아리로 보였다.
조선조의 백자 항아리, 우리 겨레의 반찬과 먹꺼리와 함께 겨레의 넋이 담긴 백자 항아리, 그 키낮은 소박한 항아리의 모습에서 나는 왠지 어머니의 질박하고 자애로운 기품을 읽을수 있었다.
어미님이 쓰시던 항아리는 남고, 이제 그것을 일본으로 갖고와 내집에서 소중히 쓰고있다. 이렇듯 어미님의 손때가 묻은 항아리가 아들이 물려받은것 역시 민족문화의 전승이겠지.
기실 이 항아리에는 우리 강릉김씨 가문의 가족사가 슴배어있다. 증조부때로부터 전래하는 이 백자 항아리는 말그대로 보물단지다. 일본식민지 통치시기 유학자인 할아버지는 안면이 있는 일본 지식인이 이 항아리를 꽃병으로 쓰겠다며 고가로 매입하겠다고 간청했지만, 단연코 거절하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16세 연하의 할머니와 결혼 하여 강원도에서 만주봉천(심양)으로 이주하면서 항아리를 지니고 오셨다. 그뒤 봉천에서 “대성당”( 大成堂 )이란 유명한 한방약국을 경영하셨다.
1950년 약재 구입으로 개원시골에 하향하셨다가 홍수를 조우하여 돌아오지못한 수귀( 水鬼 )로 돼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공부를 전 학년에서 항상 으뜸으로 하던 아버지는 13살 어린나이에 조실부친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장남으로서 일찍 가장의 직책을 떠매야했다.
약국경영은 어른들에게 맏기고 봉천교외로 이사하여 농사를 짓게 되였다.
그러다가 1959년 어머니와 맞선을 보고 결혼하셔, 1962년9월 장남인 내가 태어나게 된다.
내 기억속에 백자 항아리는 우아한 꽃병으로 보여진게 아니라, 집안의 고추장을 담은 고추장단지로 변신하였다.
이렇게 근대 몰락된 신사의 가문은 조부의 돌발적사망으로 생계유지를 위해 꽃병을 고추장단지로 쓰는 신세로 전락되였다.
그래도 어린 나는 항아리에서 풍겨오는 어머님의 고추장향이 무척 좋았다. 그리 맵지도 짜지도 않은 안성맞춤한 고추장의 미미( 美味 ). 문화라는것은 이렇게 가족에서 풍습의 맛으로 전승되는것이 아닐까? 내가 9살이 되던그해라 기억된다. 그 키낮은 항아리에서 고추장을 꺼내시며 어머님이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백자 항아리가 키는 작아도 속이 넓어 많이 담는단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작아도 키보다 수십배, 수백배 마음이 넓어야 한단다 …“
“네, 엄마, 알겠어요. 나 커서 우리 강릉김씨 가문을 물갈이 할꺼예요. 농민신세를 벗어난 증조부, 조부처럼 지식인, 존경받는 대학자로 돼서 가문을 바꿔 놓고야 말겠어요!”
하고 내가 대답했다. 사실 나는 농꾼인 아버지가 시내 친적들에게 얕잡아 보이는게 무척 싫었던것이다.
“야~, 너 참 대견하구나, 그런 꿈이 있어야지!”
어머님은 내 머리를 애부해주셨다.
“꼭 그렇게 할꺼예요!”
그 뒤 내가 성년이 되어 지식인으로 유명세를 타게 되자, 일본에서 일시 귀국할때마다 어머니는 내가 자랑스러워 하셨다.
“니가 어떻게 9살 어린나이에 강릉김씨 대를 가신다는 말을 할수 있었는지 신기하다…”
어머니는 늘 이렇게 되뇌이시곤 하셨다.
우리 삼남매중에서도 어머니는 맏자식인 나를 각별히 아끼셨다. 내가 천생 약골이고 병약했던 까닭이었다.
어머니는 우리 삼남매앞에서 이렇게 술회하셨다.
“내가 우리 문학이를 임신했을 무렵, 삼년재해 막바라지시기라서 식량도 귀했을 뿐만아리라, 입덧이 하두 심해서 사과한알도 변변히 못먹었지, 그래서 영양부족으로 문학이가 약골로 태어난게 너무너무 가슴이 아팠어, 지금도 너무 애처롭단다…”
어머니는 늘 우리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셨다. 이래서 집의 가사를 누이동생(진옥)과 남동생(병학)에게만 시키고, 나에게는 시킬대신 집에서 책 읽고 공부만 시켰다.
지금도 공부만 줄곧 해온 나는 대학생의 아버지가 되였지만, 가사가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 선비로 돼버렸다. 지금 아내역시 늘 “당신은 천생선비여서 눈에 책밖에 보이지 않고 일이 안보이는 우리집 황제, 선비예요. 이런 황제가 탄생한것엔 다 이유가 었었네요.” 하면서 핀잔인지 칭찬인지 내게 말한다.
사실 선비, 황제란 낱말들이 나는 싫지가 않았다. 나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늘 내 자신은 일반 애들과 같지 않은 비범한 인간이라고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것도 사실이다.
우리 강릉김씨 가문의 족보를 보면, 조선시대의 천재 김시습이나 일제시대 요절한 귀재 이상(李箱=본명 김 해경)등 쟁쟁한 문화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나는 이런 천재, 기재, 귀재로 되여 우리 족보에 이름을 새기고 싶었다.
내 삶에 있어서 아버지의 영향보다도, 오히려 어머니의 영향이 절대적으로 지대했던것이 사실이다.
아버지는 건강하시고 (현재 84세), 독서를 즐기고 과묵하셔서 변제는 무디셨으나 글씨도 달필이고 그림도 능하셨다. 그리고 관용적이여서 너그럽고 타인을 절대 욕하지 않는 성격이여서 누구나 좋아 하는 노호인 ( 老好人 )이었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어머니는 병약한 체질이었으며, 독서는 별로 하지않았지만, 명석한 두뇌를 가진 분이여서 똑똑하고 사리 밝았으며 비평가 다운 기질을 지니셨다. 그리고 아량이 있고 미래를 볼수있는 관찰력이 탁월하셨다.
내 기억속에서 어머니는 어릴적부터 한번도 “공부하라, 숙제하라”고 재촉 한적이 없엇다. 방과후 우리 세 남매는 귀가하면 무조건 당일 숙제를 다 마치고 노는게 습관이되였다.
어머니의 교육 스타일은 자식들을 무단으로 억압하는게 아니라, 스스로 공부와 독서의 낙을 찾게 하고, 흥취에 따라 공부하게끔 조언을 주는게 자신의 방법이었다.
우리 삼남매는 공부와 함께 운동도 잘했는데, 봄 가을 학교운동회 날이면 어머니는 생산대의 노동도 관두시고 도시락을 싸들고 운동회 응원을 오시곤 하셨기에 다른 애들이 부러워하였다. 그런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나는 공부도 운동에도 더 잘하려고 애쓰군 하였다.
자애로운 어머니는 우리 자식들이 원하는대로 성장하게끔 항상 넓은 흉금으로 베풀어 주시고 응원해주셨다. 내가 대학을 가던해 “아무 여자든 니가 맘에 들면 난 다 반대 안 하겠다, 니가 좋은대로 하라”고 말씀하셨다.
자유와 독립이란 낱말은 굳이 사용하지 않았고, 어쩌면 그런 개념마저도 모르셨겠지만, 어머니는 그 가치를 벌써 알고 계셨던것인 모양이다. 나는 이런 어머님께 감복하지 않을수 없었다.
“엄마두, 흑인 여자야 아니지요. 이쁜 아가씨를 며느리로 데리고 올께요…”
하고 나는 웃었다. 어머니도 따라서 웃으셨다.
어머니나 우리 가족사에서 특기 해야 할 귀중한 기물이 한가지 있다. 60년대 중국산 재봉기다.
손재주가 좋으신 어머니는 우리 일가의 옷을 이 재봉기로 자작하여 입혔다. 원근에 소문이 자자하여 동네 이웃들이나 먼 친척들도 옷을 만들어 달라고 맡기곤 하였는데, 어머니는 일절 삭전을 안받으시고 기꺼이 봉사를 해주셨다.
우리 삼남매의 등교복이나 여름셔츠까지 어머니가 재단을 하여 손수 만들어 입히는게 관래로 되였다. 매년 설 날이면 어머니가 재봉기로 만든 멋진 새옷을 입을수 있었기 때문에 설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동년시절이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
소학교 2학년 여름이였다. 그 때 나는 홍소병대표로 흰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인민공사에서 열리는 모택동사상문예이벤트에 나가게 되였다.
그런데 맞춤한 흰 셔츠가 없었다. 어머니는 부랴부랴 상점에 달려가서 흰 목당목(천)을 사가지고 와서 재단을 하여 만들었다.
목당목은 흰 눈처럼 하얀게 아니라, 누르므리한 색에 천 표면에 여기저기 풀벌레 똥 같은 조그마한 점들이 박혀있어 그리 미관은 아니였다.
그런대로 나는 어머니가 지어준 흰 목당목 셔츠를 착용하고 넥타이를 매고 그번 이벤트에 참가하여 씩씩하게 사낭송을 하였다.
귀가하는 길에 5학년의 어떤 선배 여학생이 “지금 누가 이런 누렁목당목 셔츠를 입는다냐? 히히 …”하면서 조롱하였다.
나는 그런 선배여학생이 아니꼬운대로 집에 와서 어머니께 금방있은 “옥당목사건”을 하소연 했다. 솔직히 목당목으로 인해 어머니에 대한 불만이 있었으며 서럽기도 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이렇게 차곡차곡 타이르셨다.
“그건 니 잘못이 아니라, 목당목셔츠입었다고 비난하는 선배애가 잘못이다.사실 넌 모를꺼야, 옥당목은 싰을수록 바래져서 백설처럼 하얗게 바래진단다. 근데 그 선배가 입은 흰 셔츠는 싰으면 싰을수록 누렇게 변색해버려, 사람도 마땅히 날이갈수록 마음이 깨끗한 인간으로 되여야 해, 이 옥당목셔츠처럼 말이야…”
나는 어머니에 대한 울분이 다시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힘으로 바뀌였다. 세월에 싰기고 바래워서 백설같이 결백하고 순결한 인간이 되는 꿈을 키우게 되였다.
내가 현지 그런 결백한 참인간으로 되었는지는 호언을 못하지만, 순수한 지식인, 학자로서 자신의 독립적 인격과 지조를 지키고 허위와 기만을 까발리며, 진실을 추구하는 자유정신은 그래도 구비돼있어 자못 긍지심을 갖는다.
어머니는 재봉기로 내게 흰 셔츠를 만들어 주었을 뿐만아니가, 순결한 넋, 인간적 지성의 지조를 키워주신것이다.
그 뒤 내가 일본유학길에 올라 독립적 자유주의지식인, 비판적 지식인으로 동아시아에서 알려지면서 나에 대한 일부 동포 지식인의 비방과 인신모독이 심해졌다.
이 일을 알게된 어머니는 내가 심양에 귀가 했을 때 이렇게 직백하셨다.
“참 나원, 지금은 21세기요 국경을 제집처럼 넘나들고 국적까지 바꾸는 시대인데, 무슨 ‘매국노’란 욕말이냐?! 문화대혁명도 아닌데, 그런 학자들이 이 무식한 시골 할매보다 낙후하니 내가 다 그런 학자땜에 부끄럽구나! 내가 네 문장 읽어 보니까 다 옳은 말을 했던데 뭐, 참 잘 썼구나. 몸은 왜소해도 온 민족사회를 문장으로 뒤흔들수있으니 사내 영웅이 아니냐!
거기 신경쓰지말고 니 글이나 더 잘 써라…”
이렇게 말하시며 웃으시는 어머니의 모습에는 여유와 관용, 그리고 자식에 대한 자호감과 자신만만함이 충만돼 있었다.
나도 따라 웃으면서 거듭 수긍했다.
그때 나는 시골 농꾼인 소학5학년도 졸업하지못한 어머님이 어떻게 이토록 유식한 말씀과 근대적 오픈된 의식이 있었을까 감탄했다.
이렇게 어머니는 항상 내편에 서 계셨다.
잘해도 못해도 나를 무식하게 욕을 하거나 질타한번 아니하셨다. 대신 설복과 자애로운 마음으로 늘 성처받은 나를 보다듬어 주시고 고무격려 해 주셨다.
고상하고 자애롭고 재간이 있고 교양이 슴배인 여성, 어머니, 아내, 그리고 며느리.
며느리로서 김씨 가문에 시집와서 36세에 청상과부로 된 시어머니를 섬기셨다.
할머니는 며느리에 대한 시기심이 강한 시어머니로서 손주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대신 며느리에 대한 천대가 월등 강했다.
기실 한 가족사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투쟁사이기도 하지 않은가! 할머니의 천대를 견디지 못해 우리 삼남매가 어릴적에 어머니는 동네 서쪽의 큰 호수에 빠져 자살을 할 생각이 한두번이 아니셨다고 하셨다.
그러나 어린 우리 삼남매를 두고 차마 떠날수가 없다고 하고, 훗엄마손에서 천대 받을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그대로 이를 악물고 참고 견디며 해가 뜰 날까지 살아야 한다고 견강히 버텨오신 어머님.
우리 형제가 마련해준 심양시내 고층 아파트에 이주 하면서 이제 살멋있는 만년을 즐기게 됐다고 기뻐하시던 어머니이다.
2007년 여름 심양에 가서 한달동안 어머니와 함께 있을때, 어머님이 재봉기에 마주앉아 일하시는 모습을 나는 카메라 렌즈에 담았다.
그런데 이게 어머니의 마지막 유영이 될줄이야 뉘 알았으랴!
2008년 4월 10일 입원하여 병상에 계신 어머님은 국제전화에서 이제 퇴원하면 일본에 가서 내가 좋아하는 입쌀송편을 만들어 주시겟다고 하시더니, 14일 심야 갑작스레 천국으로 가시고 말았다.
타계하시기 이틀전 꿈속에서 나는 어머니와 만났다. 어머니는 내손을 잡으며 “얘야, 내가 옛날 널 임신 했을 때 꾼 태몽이 있잖아. 그때 내가 두레박안에든 큰 구렁이를 버리고 왔으니, 너와 멀리 사는구나, 근데 나 이제 멀리 길떠야 한다.”하고 말하신다.
나는 “아니, 여기가 좋은데 어디로 떠나신다고 그러세요,엄마!”하고묻자, “아니야, 내가 꼭 가야 할 떼가 있단다. 나 먼저 가니 몸 조심하고 잘 살어라…”
새벽에 깨여난 나는 몽중의 어머니의 “작별”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하여 병실의 어머니께 국제전화를 걸어 한시간쯤 통화를 하고 나서야 안심이 되였다.
생각하면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신다는 “죽음”을 타곳으로 가서 산다는 “삶”으로 내게 고백하신 셈이다.
슬픔이란 말이 무력할 만큼 깊은 슬픔과 슬럼프에 빠진 나는 그 뒤 “죽음”에 대해 재다시 사고하게 되였다. 육체의 사라짐은 어머니에 대한 무한한 상념으로 연결해 주었다.
나는 늘 왠지 어머님의 영혼이 내 주위에서 지켜보시고 계신다는 느낌이 들었다. 부드럽고 감미로운 에네르기.
그런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이고 글도 더 열심히 쓰고 지속해가고 있는것이다.
아아! 어머님이 작고하신지도 꼭 10년이 된다.
나는 어머님을 위해 따로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단 한번도 우리 자식곁을 떠나 셨다는 느낌이 없기때문이다.
그 키낮은 백자 항아리는 영원히 어머니의 모습처럼 내곁을 지키고 있다.
작지만 소박하지만 맑은 넋을 담은 마음, 자애롭고, 지혜롭고 사리밝고 마음또한 바다 같이 넓은 어머님.
어머니의 그 재봉기 역시 우리 가문의 정신적 대물림의 심벌이다. 그렇다. 이 재봉기로 어머니가 우리의 옷을 하나하나씩 만들어 주었듯이, 이제 어머니의 재봉기는 나의 겹겹 아이덴티티의 옷을 만들어주는 창조적 지성의 보물로 되어 나와 인생을 걷고 있다.
어머니는 영원한 존재적 영혼이다. 그리고 영원한 정신이다!
2018년 3월 길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