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제3장
역사란 何오
1. 역사란 何오
- 내가 중일한 근현대사에 집착하는 이유
0.
우선 제목의 해석으로 부터 글의 서두를 시작한다.
이 타이틀은 내가 가장 숭경하는 근대 조선의 최고 지식인 춘원 李光洙 선생의 명문 를 본 따서 지은 것이다.
“문학”이 지식인(작가, 시인, 평론가 등)에 의해서 발설, 전개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역시 많은 지식인에 의해서 기술, 해석, 계승 되는 것이다.
역사를 쓰고, “창조”, 해석, 전승 시키는 것은 주역은 어느 시대든 그 나라, 사회, 집단의 엘리트들인 지식인의 몫이다.
역사가 고전적 의미의 “히스토리(이야기)”, 그리스어에서 “조사, 탐구”의 의미를 내포한 “서술되는 이야기”라고 한다면, 이 “이야기”의 서술의 주역은 항상 서민, 대중이 아닌 지식인(학자, 문학자 등)이다.
그런 “이야기”를 고급스러운 이야기라 직언한 인물은 저명한 역사학자 E.H 카아(Carr)이다. “역사란 과거가 현대의 들려주는 이야기, 고급스런 이야기”라고 찍어 말한다.
역사, 그리고 역사를 연구하는 학문적 영역으로서의 “역사학”이 지식인에 의해 창발, 진행, 전승한다는 사실 역시 하나의 “역사”, “문명사”이기도 하다.
항상 역사의 주역을 담당해 시대를 리드한 엘리트 지식인.
1.
과연 지식인은 누구인가?
역사 속에서 동양사에서는 사대부(士大夫), 독서인(讀書人)으로 칭했고, 서양에서는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sia) 및 인텔렉추얼(intellectual)로 시대를 리드 해온 계층이다.
제정 러시아 사회 안의 지식인들로서 서구 계몽사상을 바탕으로 노예제, 전체주의에서 인민 해방과 정치 시스템을 구조적으로 변혁시킨 지식인이 바로 인텔리겐치아라 일컬어진 지식인이다.
근대 유럽에서 지식과 최고의 교양을 고안해냈고 발전, 확대시킨 자가 인텔렉추얼이라 칭해진 지식인이다.
필자의 이해로서 “진정한 지식인은 사회 체제에 적응, 순응하기 보다는 변혁을 통한 발전을 시도하고 그 방향을 지적하는 것이어야 하며, 사회의 경향, 약점을 지적, 해부, 비판하고 그 해결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체제나 권력에 곡학아세 하는 것이 아닌 진정한 사명감으로 비판의 메스를 들이대며 사회의 암 따위를 제거하기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인은 체제와 기성권력에서 꺼리는 인물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지식인이 나라나 소속집단, 민족을 위해서 진짜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장악한 지식, 정보를 모르는 대다수 대중에게 전달하며, 진실을 말하는 장악한 지식, 정보를 모르는 대다수 대중에게 전달하며, 역사, 특히 다치면 터질 것만 같은 민감한 역사의 판도라 함을 열고 진실을 감히 파헤치는 의식과 용기, 그리고 대담한 실천력이 있어야 한다.
비록 체제 내에 살아 남기위한 “적응”을 꾀하더라도 환관 같은 무절조의 곡학아세 보다, 체제의 개혁, 진보를 위한 건설적 지적은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것에 지식인의 사명의 큰 아이템이라고 여긴다.
나는 조선족 지식인에 두 부류가 존재하고 있다고 인식한다.
침묵하는 연구자, 행동자와 말하는 비연구, 비행동자. 전자는 실제로 묵묵히 자신의 신조에 따라 창조적, 생산적인 연구, 글쓰기에 전념하는 지식인. 후자는 실제로 말수는 많고 잡 글은 많이 쓰지만, 일관성이 없이 창조적, 생산적 연구, 글쓰기가 아닌 어떤 “특정적 지식인의 창조적 생산적 연구, 글쓰기”에 매달려 흥분하고 비난 하는 일을 자신의 생업으로 삼는다.
나는 후자로부터 수많은 비난의 화살을 맞아온 전형모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필자는 성격상 초식동물이어서 제 풀만 먹고 그런 자질구레한 데 신경 안 쓰는 타입이다.
내가 가장 기피하고 경멸하는 것이 아무런 창조적, 생산적 활동과 글쓰기가 아닌 비창조적, 비생산적인 타인 공격의 소모전이다.
필자는 그런 에네르기를 조금이라도 자신의 신조에 따라, 거창한 이데올로기나, 슬로건이 아닌 실제로 지식인의 사명감(이데올로기를 초월한 민족, 국가 및 사회에 유익한)을 무언가 실천으로 옮기는 것에서 생의 보람을 느끼는 지식인이다.
또한 그런 자부심을 상실하지 않고서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제 갈 길을 나갈 터이다.
모든 이데올로기의 흑싸리 껍데기를 벗어 던진 진정한 지식인의 지조, 산앙, 의지에 필자는 스스로 충실하면서 껍데기를 탈피시킨 가장 진실을 말하는 자유의 지식인을 겨냥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내가 좋아하는 시구가 있다. 우리 겨레의 당대 지식인, 시인 신동엽의 명시이다. 여기서 전 시를 인용하면서 독자 제현과 共賞하고 싶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일체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인 거추장스러운 허위, 이념의 “껍데기”. 그런 모든 “껍데기”를 백안시 하는 나의 신조와 태도를 잘 대변했다.
그래서 이 땅위의 모든 “껍데기”를 제거하는 글쓰기가 필자의 국경을 초월 하면서 진행하는 실천인 것이다.
2.
이 같은 나 자신의 지적(知的)실천을 지탱하는 지조를 언명하고자 한다.
나는 우리 조선족의 척박한 지적 토양을 두고 객관화 시키면서 항상 슬픔 따위에 가까운 비애를 느끼곤 했다. 그래서 역설(逆說)적 의미에서 신조선족 지식인들이 해외나 국내에서 활발한 지(知)적 창조, 글쓰기, 연구 활동으로 불언실행(不言實行)하는 모든 것이 우리의 정신사적으로 족적을 남기는 일을 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거만한 소리라는 빈축을 살 위구를 무릅쓰고 라서도 명언하고 싶은 사연이 있다.
즉, 현재 21세기에 접어들어, 나를 포함해서 신조선족 지식인들이 펼치고 있는 모든 지적활동은 척박하고 빈약한 조선족의 정신사(문화사)에 거의 다 “최초”라는 숙명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사료된다.
어쩌겠나, 워낙 우리의 지적 풍토가 그토록 박약하고 미개척지의 처녀지가 많으니 말이다. 100년전 최남선, 이광수 등 우리 겨레의 선각자들이 진행했던 모든 문학적 활동, 글쓰기가 죄다 처녀지를 개간했다는 의미에서 우리 겨레 근대의 정신사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이정비(里程碑)적인 족적을 남기었다.
당시의 정신사를 펼치면 이광수, 최남선들이 동족의 타매와 찬성을 동시에 받았다는 양상을 똑똑히 알 수 있다. 지금도 그 타매는 여전히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우리 자신의 정신을 흐리우기도 한다.
모든 선각자는 타매 당하기 마련이다. 신조선족 지식인들이 현재 펼치고 있는 왕성한 미증유의 지적 모험은, 역시 선구적인 성격을 불가피적으로 띠고 있기에 수구파 조선족 지식인의 비난과 중상을 당하는 것이 아닐까.
3.
이제 드디어 내가 왜 한중일 근현대사에 매달리는가? 하는 졸문의 주제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우선 당연히 “역사”담론으로 시작된다.
나는 전공학문 영역이 역사학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역사에 매우 심취해 있다. 문화인류학 이론을 바탕으로 한 동아시아 한중일 비교문화를 하다 보니, 역시 “문화로서의 역사”가 꼭 문화자체를 영향주고 지탱하고 있다는 인식에 이르렀다. 따라서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우리가 옛날의 학교 교육에서 받았던 역사 교육과 역사의 진실이 너무나 상이(相異)하다는 “발견”에 항상 충격을 받곤 했다.
지금도 그런 역사 진상을 알았을 때의 충격과 지적 흥분은 여전히 20대 연애 하는 심정에 못지않다. 이렇듯 역사의 진실을 하나 또 하나씩 캐나 가는 것은 마치도 금 노다지를 캐고 산에서 산삼을 캐는듯한 희열, 경이, 흥분, 감개의 지적(知的) 쇼크의 연속이다.
따라서 나는 늘 “역사란 무엇일까?” 하는 자문자답 해보곤 하는 버릇이 있다. 이글의 제목이 가 곧 현대 우리말로 풀이하면 “역사란 무엇일까? 이다
“역사”개념자체에 대한 해석은 대단히 다양하고 잡다하다. “문화”의 개념해석만큼이나 다양한 기술로 돼 있다. 호적이 말했던가, “역사란 임의로 분장시킬 수 있는 아가씨”라고.
“아빠, 역사는 무슨 역할을 하는지, 좀 나한테 설명해줘요.” 한 소년의 소박한 질문에 유럽 사회경제가 연구의 권위자인 마르크 블록(1886-1944)이 명저 을 집필하게 된 직접 동기가 되었다. 일본의 중국사 연구에 큰 실적을 남긴 미야자기 이치사다(宮 市定)(1901-95)는 “역사학은 인간의 본능에 뿌리박은 학문이다.”라고 했다. 내가 또 상기되는 유명한 말은, 앞서 말한 영국의 위대한 사학자 E.H 카아(1892-1982)의 말이다. “역사란 끊임없이 진행하는 과정이며, 역사가도 이 과정을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백종을 넘는 개념정의에 관해, 내가 아는 범위 안에서 가장 알기 쉽게 평명한 언어로 해석한 것은 일본 동양사 연구의 제일인자로 불리는 전 동경외대의 사학교수 오카다 히데히로(岡田英弘 1931~)교수이다. 그는 이렇게 정의를 내린다.
“역사란 인간이 사는 세계를 시간과 공간, 이 양자의 축에 따라서 그것도 한 개인이 직접 체험 할 수 있는 범위를 초월한 척도로 파악, 해석, 이해, 설명, 서술하는 행위이다.” (오카다 히데히로 )
이 해석에 따르면, “한 개인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범위를 초월”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를 타인과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을 의미가 없어진다. 즉 역사의 본질은 “인식”으로서, 그것은 개인의 범위를 넘어선 “인식”이라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역사는 인간이 사는 세계와 관련된 것이다’라는 것.
인간이 존재 아니 한 곳에는 역사는 존재할리 없다. “인류의 발생이전의 지구사”라든가 “은하계 생성되기까지의 우주사”라든가 하는 것은 지구나 우주를 인간으로 견주어, 인간이라면 역사에 해당됨직한 것을 비유로서 “역사”라고 칭할 따름이며, 이런 것은 본래 역사가 아니다. 오카다 교수는 이렇게 평명한 언어로 “역사”에 대해 정의를 내린다.
4.
시공간에서 담론하여 역사는 마르크스즘이 발설한 “진보사관”에 공감을 느끼기보다 나는 오히려 진보가 아닌 “변화사관”에 찬동한다. 역사는 변화 하지만, 그것을 단순히 “진보”로 포착 할 수는 없다. “진보사관”의 대치에 또 “하강사관”이, “정체사관” 있는바 이 역시 공감 할 수 없다.
역사에 관한 학문인 역사학이 “인간에 관한 학문”이며, 또한 “인간의 세계를 해석, 인식”하는 인문 과학이라면 서술법에서는 “문학”에 끝없이 가깝다. 이른바 “과학”과 “문학”의 양극을 오가는 역사학에서 양자의 밀접한 관계를 인정한 것은 20세기 서양 역사학자들이다.
환언하여 “사실·진실”과 “문학·레토릭”이 양자는 대립되기 보다는 “同 의 惡友” 같이 공존하고 있는 격이다. 미국의 사학자 피터 게이(1923~)가 역사학에 있어서 예술과 과학이 준별되지 않는다고 지적한 것은 흥미롭다. “이 양자는 기나긴 세월 굴절된 경계를 공유하고 있으며 학문적 교역 내지 문학적 거래를 아무런 지장 없이 또한 정식 수속도 없이 자유롭게 진행되었다. ” ().
중국을 위시로 한 동아시아 역사학, 내지 역사의 해석 본질은 사마천의 식의 정통(正統)관념이며, 중국 문명의 역사관은 “정통”사관 지배아래 위정자, 통치계층이 절대적 옹호, 유리로운 봉사체계로서의 작용을 해 왔으며 또 지금도 이는 부동의 자세를 확보하고 있다.
따라서, “사마천이 쓴 는 지배계층의 정상 황제의 정통의 역사일분 세계사도, 중국사도 아니다.” 라고 오카다교수는 지적했다. 통치자, 위정자의 “정통성을 성립, 유지하기 위한 인문학적 장치로서 역사가 있었다. 그래서 이는 결국 레토릭, 상상력과 같은 맞은 문학적 서술수법이 동원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였다. 가 황제를 쓴 이야기로서 재미있는 스토리로 구성된 것도 이런 연우에서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정통”의 정사에 불복하거나, 그 허위성 레토릭에 도전한 재야 지식인들이 쓴 또는 광범히 유전해 내려오는 야사(野史)가 병존하고 있다. 왕왕히 아이러니 하게도 “정사”보다도 “야사”가 더 史實에 접근 하거나, 문학적 접근이라 해도 더 사실의 진실에 핍근한 점이 발전된다.
그래서 정. 야사를 병행 연구를 하는 역사 연구방법은 늘 근대사학자나 지식인들이 흥미진진하게 행해온 연구법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말해, 동아시아의 정통적인 정사, 그 연장선에서 오늘 교육용 교과서로서의 “역사”교육은 야사적, 즉 서민, 대중의 실제적 삶의 양상과 질 생활양식으로서의 인간의 문화 그 자체가 많이 결락되어 있는 지대한 흥을 안고 있다.
단순히 현대사에서 “정설”로 되듯이 “과거(1949년전) 중국은 암흑한 사회였고 노동인민이 헐벗고 굶주린 一 二自의 사회”였다고 기술 하고 또 이런 “정설”이 일점의 회의도 허용치 않는 관념 내지 통념으로 중국인의 뇌리 속에 각인 되어 있어 털어내기 어렵다.
그런데 이 “정설”을 지탱 할 수 있는 史實적 근거, 실증적 데이터, 수자 등 사료는 거의 기술되어 있지 않은채 누락시켰다. 그리고 그 누락시킨 공백에 발호, 횡일 하는 것은 프로파간다 적인 위정자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과대 포장, 허위, 날조, 왜곡 등 모든 레토릭, 문학 수법이 동원 된다.
5.
그래서 “역사는 이야기이며 문학”이라고 직언하는 역사학자가 많다. 앞서 본 오카다 교수에 의하면 즉, “역사는 과학이 아닌 것으로 본다. 왜냐면 과학은 거듭 실험 할 수 있는 성질이 있지만 역사는 단 한번 밖에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과학이 대상이 될 수 없다.” 라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사물을 관찰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 가의 문제.” 즉, “과학에서는 입자(粒子)의 상이점은 문제시 하지 않는다. 모두가 똑같다고 하여 그들을 지배하는 법칙을 문제 삼는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한사람, 한사람 매개 개인이 다르다. 그것이 타인에 미치는 기능 역시 다르다. 이를 기술 하는 역사를 쓰는 사람도, 역사를 읽는 사람도 모두 다 같은 인간이다.”
이런 원인으로 역사가 과학이 아닌 문학이라는 것이다. 문학으로서의 역사가 하나하나의 “작품”에는 그것이 구비된 기능이란 것이 있다. 역사를 쓰는 쪽의 입장에서 보면, 이 작품에서 역사자가 노린 목표, 효과가 있기 마련이며, 한편 역사를 읽는 쪽의 입장에서 보면 이 작품을 수용하는 독자가 갖춘 요구나 애호, 이해력 등 조건이 따른다. 역사를 사색할 때 이 양자를 나누어서 보아야 한다고 오카다교수는 지적한다.
“정통성”을 지니고 강조시키기 위한 위정자의 수요에서 역사는 엄청난 조작, 작위성을 띄게 된다. 그러므로 “신화”를 간단히 역사사실로 바꾸는 기술도 있으며, “없는 사실”을 그대로 “역사 사실”로 창작하여 만드는 것은 오히려 상투적 역사 작법이다.
일본의 《일본서기》의 천황이란 군주의 “정통성” 확보를 위한 조작이었다. 그리고 《고사기》 역시 에도시대에 이르러 국학자 모토오리 노부나가(本居 長~)가 새롭게 개찬한 것이다. 많은 일본 사학자들도 이를 지적하고 있다.
특히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의 압력으로 개국했을 때, 서양 문명에 수용, 대치하기 위해 일본인의 콤플렉스에서부터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재구축 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래서 “완전히 공상적 모이역사”가 전개되었다. 이를테면 1911년 《세계적 연구에 비롯된 일본태고사》(기무라 다케타로)에서는 일본인의 조상이 이집트인과 그리스 인이라 했다. 1924년 오야베젠이치로가 쓴 《칭키스칸은 源義經世》라는 대베스트셀러 저작에서 칭키스칸은 몽골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라고 외쳤다. 유명한《다케우치문서》(1928)에서 저자 다케우치는 천무천함보다 더 이른 시대에 “일본초고대왕조”의 천황이 전 세계를 지배하고 태평양을 건너 아메리칸 대륙까지 통치했다는 기발한 상상의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1950년대, 또 오늘까지도 奇想을 동원해 쓴 “일본역사서”가 대거 쏟아지고 있다.
자유로운 일본의 언론, 출판 사정을 설명하는 사연이기는 하나, 이처럼 공상과학소설 같은 奇書가 위정자가 아닌 민간 지식인 중에서 산출되는 것 또한 흥미로운 현상이다.
1950년대 전후 일본에서는 에가미(江上波夫)의 “기마민족 정복설”(騎馬民族整服設)이 일세를 풍미했다. 일본 황실은 북아시아 기마민족 출신인데, 기마민족이 조선반도를 종횡하고 일본열도에 건너와서 일본 황실의 조상이 되었다는 학설이다. 오카다 교수나 많은 사학자들이 이 학설은 완전히 판타지 공상이며 그 어떤 사실적 근거가 없는 에가미의 창작이고 새로운 신화 만들기라고 지적, 비판했다. 결국 이 학설은 현재 완전히 뒤엎어지고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6.
문제는 일본의 역사 조작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중국과 한국의 역사 특히 근현대사의 왜곡, 작위성이 격심한 것이다. 타자의 결함, 오류를 비판, 공격하기는 쉬운 일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허위성, 결점에 대한 비판, 성찰은 왕왕 어려운 것이다.
타자 비판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일은 우선 자기에 대한 비판, 반성이야 한다.
모두 불행과 악을 타자의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나 자신에 있는 이유, 원인 규명을 하는 것이 월등히 현명한 처사라고 나는 믿는다. 또한 그것이 성숙한 이성적인 행동으로서 자신은 물론 타자에게도 다 유리한 쪽으로 흐른다.
나는 이데올리기를 초월한 일개 자유주의 지식인이다. 이 자유주의가 나의 정신을 반거하고 있는 신앙이며 나를 나이게끔 한 정신적 최대의 요소일 것이다. 우리가 안고 있는 자신의 허위성, 결함을 지적 하는데 주위와 동족으로부터의 타매를 맞을 각오 없이는 상당히 어렵다.
특히 체제와 민족, 애국이 등호를 치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내가 “정통적” 역사관을 짖 부수고 진실을 밝히는 행위는 그 자체가 민족의 터브, 우리 역사의 터브를 깨는 것으로 직결되어있다. 그만한 용기와 담력과 함께 학문적 사료의 접근이 소요되는 작업이다.
불가사이하게도 조선족 지성사에서 조선족 역사, 이민사 및 문학사에 관한 연구나 그 접근은 많지만(또는 있지만), 역사의 터브에 정면에서 도전한 진실을 파헤치는 연구는 제로 상태다. 결국 나의 한중일 근대사 연구, 글쓰기는 뜻하지도 않게 탐험 같은 선구적 작업이 되었다.
나는 우리의 조선족 사학자, 역사 프로패셔널들이 이 작업을 해야 된다고 기다렸으나 누구하나 이 분야에서 외면할 뿐이었다. 나라도 나서지 않으면 없는가는 불평불만의 석연치 않은 심경으로 나는 십년이나 고투해왔다.
내가 하는 작업이 우리 조선족에서는 항상 첫 번째 적 일이며, 이런 작업에서 반영되는 내용과 질에 대해 조선족에서 오늘 반발, 비난은 엄청나다. 그런 비난, 반발은 작업의 내용 실체에 대한 이성적, 학문적 접근이 아니라, 이 작업을 짊어진 주인공인 나 개인의 인신공격으로 점철된다. “계란의 맛을 품평하는 일에서 계란은 외면해버리고, 계란 낳은 암탉 잡이”로 편향된다. 암탉을 죽이면 계란은 누가 낳는가?
이런 암탉 잡이가 금방 문화대혁명, 대자보의 먹물이 마르지도 않은 그 우리의 최근과거의 살벌한 계급투쟁의 광란극, 그 자체로 재연하고 있다. 소리놀이, “민족상잔의 내홍으로 비극을 빚은 역사의 교훈”을 삼는다고 하면서 역사교훈을 포기하고 피비린 역사극을 다시 스스로 재연하는 그 우(愚)를 왜 모르는가?
가장 역사, 역사를 외우고 역사를 거울로 삼자는 우리가 또한 가장 역사를 초개시 하고 역사를 망각하는 아이러니, 그래서 타자를 비난, 중상할 자격이나 있는가?
나는 “오늘도 연변이 문혁을 끝내지 않았다” 라고 한 내 말이 과히 적중한 명단(明斷)이라 자신하게 되었다.
그런 사실이 이 명단을 앞 다투어 입증해주고 있잖은가? 물론 이 같은 명단은 더 이상 없어졌으면 나는 바란다.
한 가지 중요한 연구 과제를 독자제현께 아뢰고 싶다.
“왜 연변은 문화대혁명을 계속 하는가”의 테마는 매우 멋있는, 현실적 중대한 의의를 지닌 연구과제이다. 이를테면《연변 문화대혁명 연구》또는《연변문혁의 역사적 규명》등 이런 것을 누가 한번 착수하시길 바란다. 누가 한번 곰곰이 생각하면 좋겠다. 말이 약간 새어나가서 죄송하다. 다시 본제로 돌아가자.
7.
사실 유순호씨가 최근(2010년 10월 8일자 조글로, 니카댓글, 김광림에 대한 발언) 예리하게 지적하다시피 “역사에 대한 무지한 교수, 박사와 정면에서 토론을 해도 상대가 안 되는 것이며, 그것은 끝없는 소모전에 이어질 것이라.” 하며 “시간이 증명할 것이다.”고 조선족에게 메시지를 발했다. 이 메시지의 의미를 아마 지금 조선족 지식인의 다수가 이해 할 수 없을 것이다.
고학력자일수록 경직된 사고방식과 역사인식에서 답보하고 있는 양상을 그 자신들이 스스로 나와 유순호씨, 김정룡씨 등에 대한 비난에서 폭로시켰다.
그래서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유순호씨가 “김광림 박사가 역사공부부터 하고 뉴욕에서 더 체험하고 공부하신 다음 다시 토론을 벌이자.” 라고 한 안타까움, 무위의 막무가내, 이것이야 말로 나의 심경을 대변한 것이나 다름없다.
내가 어느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나의 비난자, 반대파와 정면 학술토론을 벌일 수 없는 것은 한마디로 상대의 수준이하의 지적수준, 문혁시의 사고체계 탓이다. 그럴진대 이들과 어찌 정색해서 역사를 논하고 학문을 토론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이들은 현재 나의 이 말에 대해서도 이해 할 능력이 없는 것은 뻔하다.
그래서 “거만하다, 잘난채 한다.”는 넌센스의 언어로 일축하게 된다. 나는 이런 상대와 대화를 할 수 없는 일이 막무가내지만 이것 또한 눈앞의 현실이다. 그러나 이제 역사 공부를 부지런히 하여 수준 치에 도달하면 오히려 반대파들은 나보다 더 억척스럽게, 나보다 더 심한 “진상 규명”의 글을 쓸 것이다. 이렇게 되면 좀 좋겠다.
근대의 변법 지식인의 거물 강유위의 재밌는 에피소드를 들겠다. 강유위에게 어느 날 요평(廖平)이란 젊은 지식인이 “중국의 6경(六經)중에 하나가 위조입니다.” 라고 말했다. 이에 노발대발 한 강유위는 죽일 놈 이라고 요평과 한바탕 설전을 벌이다가 흐지부지 헤어졌다. 그런데 수개월이 안 지나서 강유위는 말했다. “6경 중에 하나가 아니라 전부다 가짜외다.”라고 그래서 탄생한 것이《新學僞經孝》,《孔子改制孝》등 명작이다. 일설에 따르면 강유위의 이런 명작은 결국 나중에 요평의 글을 표절했다고 한다.
연변 조선족의 안티 김문학파가 6개월 후 아니 6년 후라도 유위와 같은 변모가 일어 나겠는지는 아직 미지수다. 나는 같은 겨려 지식인으로서 정녕 이들의 변화를 기다리며, 그때가 오면 기꺼이 두손들어 포옹하겠다. 아버지 죽인 원수도 아닌데 원수인양 암탉 잡이 “동족상잔”을 할 필요가 있을까.
8.
그리고 미래의 화합을 위해서라도 꼭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사항이 있다.
즉 안티 김문학파 제현이 이구동성으로 내가 진술한 역사 사료에 대해 완전히 일본의 “우익”, “극우”와 등호를 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관한 사연.
아마 분명히 그들에게 있어서 내가 기술한 역사자료(근현대, 만주국 등)에 대한 서술을 다 “일본 우익의 언론과 동일하다.” 라는 틀에 박은 듯 인식하고 있는데, 사실 내가 구사하고 인용한 자료는 대부분이 중국학자, 해외 중국학자의 내 책을 진지하게 정독하지 않고 “오, 자식 나쁜 반역자구나.”하는 선입견에 치달아 학자가 갖춘 이성을 흥분으로 대체한 우를 범했다.
그래서 “우익”의 말과 내가 사용한 사료 및 서술에서 일치 또는 유사한 부분만을 단장취의해서 그 선입견을 급급히 입증하려는데 활용, 과장시킨 것이다.
나 자신은 우익의 “우”자가 어디로 향해있는지도 모를 일이며, 일본의 우익들과 어울려 글 쓸 하등의 이유도 필요도 못 느꼈다. 나를 “우”자로 억지로 연결시키는 것은 그들의 소행이었지, 나와 상관 되지 않는 사실이다.
그래, 내가 우익단체에 가입해서 “공산당을 타도하자”고 외쳤나?
그들에게 돈을 받아서 우익들 위해 활동하고 글 썼나?
왜 그들은 그렇게 “우익”에 연연하며 거기에 걸고 드는 걸까? 오히려 그러는 그들이 우익의 조폭 같은 狂信적 사고와 몽둥이를 휘두르는 면에서는 우익과 꼭 닮았지 않았을까?
민주주의 국가에서 일본은 미국과 같이 역사 기술, 역사이해에서는 다양한 견해를 허용, 존중하는 사회이다. 일본의 역사관에서도 정·반, 좌·우, 친중, 반중, 친한, 반한, 친일, 반일…. 그리고 또 아무데나 귀속하지 않는 제 3자의 의견. 이런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는 문화, 정치 풍토는 중국내에서는 상상 할 수도 없다. 실제로 독도가 일본영토라고 하는 일본인이 있는 동시에 한국영토라고 소리높이 주장하는 일본인도 있다. 그렇다고 그런 일본인을 “매국노”라고 일축하지 않은 언론자유의 세계이다.
유순호씨의 변모는 바로 미국에서 이 같은 자유의 풍토 속 에서 그 지적 자유를 향유하면서 태어난 것이다. 내가 오래전부터 유순호씨 같은 인물이 많이 배출해야 한다고 한 것은 이런 유연한 사고를 지닌 조선족 지식인이 많이 나올수록 경직된 사고를 깨고 조선족의 개방, 개화에 이바지 하는 것으로 직결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관웅씨의 나의 “우익”론에서 노정된 것은, 위정자가 일본을 비판할 때, 특히 역사인식에서 판에 박은 듯 사용하는 최대 무기 “일본 우익”을 그대로 교조적으로 원용한 것이다. 이 때 그들은 “반체제”가 아닌 “체제 옹호”, “추종자”, “맹신자”로 변해 있다.
대중을 설복시키기 위해, 나를 비난 할 때 가장 효과적인 무기가 이 “우익”내지 “우익”과 동급의 “배족”, “매국노” 같은 동족 잡기의 고깔모자가 무엇보다 효력이 클 것이라는 점을 김관웅씨는 숙지하고 있는 터다. 그러나 아이러니 할 것은 중국 위정자들이 말하는 “우익”의 개념 역시 꼭 진실성, 유효성이 구비 됐는가 하면 그렇지 만도 않다. 위정자의 “역사 정통성”에 위구심을 주는 역사관, 역사 인식 내지 역사사료, 문헌을 흔히 일본에 대해서는 “우익, 극우”라 칭하고 일축한다.
“우익”이 무섭기 보다는 근현대사에 베일에 감춰진 그 “치부”가 탄로날까봐, 또는 “정통성”에 위협 주는 역사관 자체가 무섭고 반갑지 않은 것이다.
또한 아이러니 한 것은 근대, 현대사의 진실을 캐면 캘수록, 속속 발견 되는 것은 오히려 “우익”의 사관과 일치 또는 비슷한 모습들이다. 해외에서 공간되는 사료, 역사서를 차치하고서라도 중국내에서 공간되는 근현대사의 역사서, 역사비평, 사료, 문헌은 오히려 위정자가 가장 기피하는 이른바 “우익”의 언론과 일치, 유사한 史實을 밝히고 있다.
정치인이나 정부 관계의 관리들이 이런 “우익”을 운운하면 그런 것은 그들의 일이니까 이해가 되지만, 학자라는 지식인이 같은 언론으로 소리 높이 떠든 다면 학문적 접근을 표기한 위학자라는 것을 자인 할 것 밖에 안 된다.
세계화, 글로벌 및 세계와 “제꾸이(接軌)”한다고 외치면서도 하는 행동은 완전히 국제 상실을 무시한 언어도단적인 논리의 노예로 전락된 것이다.
역사관, 역사인식이 역사학의 범주에서 학문적으로 다루어야 할 일이나, 그것이 정치의 하수가 되는 것을 역사, 역사학이란 학문의 비극이다.
지식인이라면 이 글의 서두에서 말했다시피 이러한 부조리에 도전하고 변혁을 통한 역사 감각으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체제나 권력에 곡학아세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행복 할 수 있으나,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는 것으로는 절대 아니다.
중국에서 하루속히 다양한 언론이 자유롭게 진행될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싶다.
진짜 그런 날이 오면 김관웅님들은 아마 나나 유순호님 이상으로 “자유지식인”으로 변신 할 것으로 믿는다. 김관웅님들과 나의 갭은 모종의 의미에서 민주화 나라와 비민주화 나라의 차이이기도 할 것이다.
9.
그럼 이번에는 좀 구체적 사례를 들어서 역사문제를 담론 하겠다.
우선 근대사에서 우리 민족과 일본과 밀접한 관계가 되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대한 담론을 전개하기로 하자. 조선민족의 근대사에 있어서 일본의 식민통치는 가장 큰 사건, 史實이며 양국에 모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까지 기나긴 그림자 같이 조선민족의 정신에 따라다닌다.
“조선식민지 지배”에 대한 평가는 따라서 식민지 사실만큼 중요하다. 이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한국, 조선족 측에서는 대부분 부정적, “악”으로 평가되기 일쑤이며, 객관적 평가를 하는 의식이 박약하다. 최근 객관적 평가를 하는 한국 학자들에게는 세찬 비난의 화살이 몰리기도 한다. 또한 일본의 학자 중에도 객관적 평가를 하는 학자도 많으나, 오히려 ‘제 3자 서양인의 평가는 어떨까?’ 하는 의문에서 나는 10년 전부터 이 방면의 자료 수집을 바탕으로 연구를 해왔다.
만약 역사 연구의 작법(作法)이 있다면 나는 이렇게 자신의 作法을 표명한다. “서술의작업(narration)과 문헌정보 자료 실증 작업(documentaion)이라는 관계를 그대로 연구의 현장에 가져가는 서양사학자의 작법이다. 거기다 또 보태자면 이 기초위에서 실제 생긴 일, 그 일이 무엇을 의미 하는가란 문제의식을 안고 상상을 발휘하거나 비교사학을 원통하게 평가를 내리든지, 자신의 사색을 그대로 진솔하게 적는 것이다.
이런 작법대로 진행하다 보면, “조선식민지배”에 대한 평가에서 의외로 제 3자인 서양인의 평가는 긍정적이었다는 점이 발견된다. 그리고 상당히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점에 나는 경이로움을 금하지 못했다.
영국의 신문기자 아서 매켄지《조선의 비극》, 미국 사학자 Edwin o. Reischauer의《Japan: The stry of a Nation》등 등, 많은 역사 서술을 보면 여기서 상세히 열거, 서술한 자리가 없어서 유감이나, 우리가 상상이상으로 조선 식민지 지배를 좋게 평가한다. 사실, 계량적 통계, 경제수치, 인구증장, 인플레 건설, 교육, 학교, 조선어 보급 등에 있어서 오히려 우리의 보편적 인식과 정반대인 역사를 노정하고 있어, 이 그대로 적으면 한국 근대사에 상당히 거북함을 제공하게 된다.
현재 나는 이 주제를 한권의 단행본으로 정리하려고 준비 중이다.
유순호씨가 댓글에서 언급한, 북한 현재의 독재정치의 횡포아래 인민대중의 기아와 생활의 질이 1960년 내지 65년(일제 식민지배 36년)에 비해 형편없는 저질, 최하위의 양상을 노정하고 있는 것을 여기서 하나, 하나씩 실증을 획득하게 된다.
이와 밀접히 연관된 “친일 문제”에 대한 접근 역시 많은 함정을 안고 있다. 현재 한국이나 우리가 행해지는 “친일”에 대한 접근은 윤리적, 도덕적 비판, 민족이란 척도를 구사하여 진행되는 비판적 접근은 사실 “역사 평가”가 아니다. 역사로서의 친일을 우리는 감정, 민족정서를 그대로 투영시켜 “정치투쟁”으로 오버되어 버리고, 오히려 역사 사실. 역사에 환원시켜 평가를 하는 요긴한 작업을 방치한대로 있다. 이런 면에서 노출되는 것은 역사를 그렇게 소중히 한다는 우리가 기실은 역사를 외면하고 너무 소홀히 대하는 엉성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역사로서의 일본 식민지 지배라는 환경을 주제로 친일을 접근해야 한다. 왜냐면 친일이든 반일이든 다 일본식민지 지배의 역사의 조선인이 취한 당연한 형태였기 때문이다. 사실 “친일”, “반일”, 검은 양복 아니면 흰 드레스 식의 2분법 아닌 다양한 조선인이 일제 식민지시기에 실존 한 것을 무시 할 수 없다. 오히려 역사에서 노정되는 모습은 친일에 가까운 적일(適日), 순응 자로서 대다수 조선인은 일본 통치에 순순히 적응하면서 삶을 영위 해온 것이 진실이다.
다 민족 저항파였다면 일본의 총칼에 누가 살아남았겠는가?
문화란 한 민족 집단이나 사회가 그 환경에 적응하는 최적의 적응방법으로서 창출해낸 생활양식 그 자체인데, 그 식민지 지배하의 우리 선조의 삶이 문화, 그 자체였다면 살아남기 위해 친일, 순응 한 것은 인간의 본능이며, 문화, 그 자체의 관성이 아닌가.
식민지배가 후진국에게 문명, 근대화를 가져 온 것은 포스트 식민주의(Post Colonialism) 이론의 상식이다. Rupert Emerson이 “좋든 나쁘든 식민주의는 사교양식과 기술이, 즉 서양의 정신적 및 물질적 역량이 인류의 나머지 사람들에게 작용한 주요한 경로였다.”
조선은 서양이 아닌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으면서 조선말기의 전근대적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변했다. 진보가 아닌 크나큰 변화였다.
이 말에 잘 납득이 안가고 무조건 반발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당연히 나는 그 점을 충분히 예견한다. 왜냐면 나 역시 미처 몰랐을 때는 이에 반발이 컸었기 때문이다.
반발하는 최대의 원인은 우리가 100여년전 조선말기의 사회 상황 현실에 대해 잘 모를 뿐만 아니다, 아주 좋은 사회였는데 일본이 침략해서 엉망으로 짓니겨 놨다고 착각하는 것이 일종의 민족적 통념이 굳게 고정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사실은 우리가 실제 살아보지도 못한 조선조말기의 상황은 현재 인이 상상하는 것보다 배로 비참하고 낙후한 중세적인 사회였다. 이 실상은 서양인 관찰가, 지식인, 여행가의 기록에서 에누리 없이 실증되고 있다. 노예, 노비제도, 경제의 극빈, 정치의 부패와 가렴주구…. 지어 당시 교통수단의 교량도 변변이 없어서 강을 다 인간의 다리로 건넜기에 다리와 교량이 다리로 불러진 형편이었다. 교량을 다리라 부르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 나온 말이다. 참담하고 극빈한 조선조말기의 사회실상의 사료, 문헌을 읽으면서 나는 지대한 충격을 거듭 받았다. 부패 무능한 고종에게 실망한 조선의 엘리트 정치인, 지식인들이 근대화에 앞선 일본에 시선을 주고 일부에 더 기대를 걸었던 것은 당연하겠다. 계명대 사회교수로 조선 근대사에 대해 신선한 시점에서 연구하고 있는 김기협씨는 “조선왕조가 망하고 일본이 식민 지배를 펼치게 된 사실은 당시 상황으로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볼 측면이 많이 있다. 일본의 야욕은 조선 망국의 원인 중 일부분일 뿐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돌베개)
문학적 비유법으로 얘기하자. 한국은 여성이고 일본은 남성이다. 그 여성을 보호한다는 미명아래 강간을 했다. 미구하여 이 사이에 아들이 생겨났다. 일본이란 남자는 싫어도 생겨서 난 아들은 여자가 사랑하는건 당연하다. 이아들이 곧 “근대화”이다. 아들이 크면 클수록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누군가라는 것을 알려고 캐묻는다. 지난날의 강간당한 치욕을 어머니는 덮어 감추거나, 깊은 증오, 또는 어떤 미묘한 추억, 이런 복잡한 감정이 동반된다.
피식민자의 우리 겨레의 일본에 대한 심정은 이 어머니의 심정 마냥 착잡할 것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자신의 과거를 점검 하는 일은 과거의 자신의 정체성을 점검하는 작업이다.
좋든 싫든 우리는 일본이란 他者에 의해 수동적 근대화의 산물이다. 그것을 외면하는 것은 바로 자신들의 아이덴티티에 관한 판단자체를 일그러지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일본의 조선 병합은 공식적 행위였고 국제적으로도 서양 및 타국의 인정을 받았다. 따라서 우리가 인정하고 싶든, 잘 모르든 실제적으로 당시의 조선인들은 대부분 일제 통치를 공식적으로 합법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런것들은 역사 사료, 기록에서 다 실증이 되고 있다. 결코 “일본 우익의 지론은 앵무새 같이 외우는 것” 같이 단순한 것이 아니다.
아무튼 지면의 관계로 역사 사실의 일단을 요만큼 선보인다. 착수중인 역사 연구서《세계에서 일본의 조선식민지 지배를 어떻게 평가 했나》를 단행본으로 준비 중이다. 상세한 것은 그 책이 간행 되면 일독하시길 바란다.
10.
다음으로는 중국 근대사의 사례를 들기로 하겠다.
역사에 대한 해석은 민족, 국가, 사회 및 입장에 따라 다르다. 같은 민족성원 내부에서도 여러 가지 객관, 주관적, 원인으로 개인의 사관도 또 다를 수 있다.
문학이 한 민족 집단의 정서적, 감성적 심층을 대변한다면, 역사는 문학보다 더 근엄한 의미로 한 민족 집단의 정체성에 관계되는 거울, 교과서로서 다루어지는 측면이 크다.
또한 역사관을 국가나 정부차원에서 다양성이 아닌 모종의 틀 속에 규정시킨다면, 역사관의 다양성과 자유는 곧 차단되고 말 것이다. 중국의 역사인식이 현재 정부의 “국정교과서”에서 통일적인 기술체계를 확보하고 있는데서 보이듯이, 그것은 중국민족(중화민족)이란 공통분모를 토대로, 당정부의 정통성을 유지하는데 유력한 관념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의문할 나위도 없다. 2005년 나는 일본의 저명한 역사비평가와 중국 교정교과서를 검증하는 대담집을 간행했다. 그 대담 중에서는 나는 “일본인이 역사교육이 일반적 교양으로서 취급하는데 반해, 중국은 당체제의 교육프로그램의 하나로서 중공의 정통성 확보를 위한 세뇌용으로도 사용하고 있다.”고 직언한 적이 있다.
즉 애국 교육의 일환으로 역사교육이 전개되는 특징을 갖고 있는 사실을 지적했다. 이것이 자유, 민주주의 국가와 일당 전제의 국가의 역사교육 현주소의 본질적 구별이다. 나는 중공정부를 평가 절하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 양자의 이질성을 준별하자는 문제의식을 전제조건으로 제기 하고서, 현행 역사교육 및 양구의 역사관, 역사인식의 비교고찰의 기점을 밝히자는 학문적 의미에서였다.
실제로 남경대학살기념관이나 9.18기념박물관 등 전국에 수백개 “전국애구주의 교육기지”가 있어, 역사를 애국주의 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 중국이 아닌가.
고향 심양에 갈 적마다 나는 소학생인 아들을 데리고 9.18기념박물관을 방문하여 관람하곤 했다. 아들 녀석은 제가 전반에서 처음으로 이런 항일기념관을 관람했다면서 과거 이런 전쟁이 있는 것은 알았다고, 다시 이런 불행한 과거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감상을 말했다.
대조적으로 일본은 역사명승은 수없이 많아도 그 자체를 “애국주의 교육기지”로 이용하는 발상은 통하지 않으며, 실제로 정부나 대중의 통념에서 “애국” 이마저도 사갈시하는 실정이다.
여러 의미에서 중일의 문화를 비롯해 역사교육, 역사인식, 역사관 자체에는 심대한 격차가 실존한다. 이것을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일본이 중국과 같이 교과서도 단 일종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중학 역사교과서도 8종이나 되며, 다양한 메뉴를 제공하여 교육기관에서 자유롭게 선택하라는 교육자유주의 통념이 일반화 된지도 오래다.
일본이 다 “우익”의 교과서를 배우고 “우익적”이라고 착각 하는 것은 웃기는 비상실이다.
할 말은 많으나 각설하고, 중국 근대사 인식에 관한 실례를 들어 이야기를 끌고 가자.
중국 근대사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거쳐 명랑한 근대강국으로 성장한 것과는 반대로, 피해자 이미지로 관통되어 있다. 아편전쟁이래의 근대사는 서양열강의 침략의 역사이며 근대화가 자연 된 최대의 원인도 열강의 침략으로 돌리는 인식이 보통이다.
당연히 침략과 피침럄,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사는 옳다. 그러나 이 시점만으로는 타자와 자신으로 착종하게 얽힌 근대 중국사나 관계사를 입체적으로 파악하기엔 역부족이다. 민족이나 개인이 역사에서 교훈을 섭취하고 거울로 활용하려면, 자신의 실패원인을 역사상에서 토털적으로 검증, 반성하는 것을 결락시킬 수 없다.
중국에서 근대, 현대사를 치중하는 것은 열강의 침략을 철저히 규탄하고, 그런 침략에서 대중을 구원, 해방했다는 위정자의 정통성을 돌출히 하기 위해서 인듯하다.
따라서 실패의 원인을 자신에서 찾는 것은 외면했으며, 단순히 피해자의 입장을 강조함으로써 他者를 악자로 내몰고 애국심을 환기시큰 장치로 활용했던 것이다.
즉 근현대사에 일관된 축은 침략과 저항의 관점에서 해석되었다. 사실 이 2항대립(二項對立)구도 만이 아닌 보다 다양한 다원 해석이 가능했는데도 말이다.
일테면 청나라의 실력자 이홍장이 청일 갑오전쟁에서 일본에 패북한 뒤 타협의 “마관조약”을 체결 시 모두 그를 “매국노”라 매도했다. 외국열강과의 타협, 화해는 언제나 “매국노”로 낙인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독일의 피스마르크,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와 같이 “세계3대 정치인”으로 불린 개방된 정치가였다. 매국노 운운을 어불성설!
역사의 해석은 적어도 다양한 시각에서의 해석을 허용할만큼의 드넓은 좌표축을 필요로 한다. 항일전쟁시기의 일본 괴뢰정권으로서 왕조명(왕정위)정권을 위정부라 하고 왕정위 본인을 최대의 “한간=매국노”로 매도하고 있다. 그러나 사료를 재검증해보면 일본 유학의 경험자이며 손문의 우수한 제일 제자였던 왕정위는 “일면 저항, 일면 교섭”방침을 산출시킨다. 그는 미남으로 유명했는데 그의 지식, 필력, 담용에서 탁월한 문인형 정치가였다. 물론 장개석보다 수준이 한 급 위였다.
여기서 자상한 서술을 할 여유가 없으나(사실, 책 한권의 분량이다), 그는 계란으로 바위 부딪치는 무모의 저항보다도 “평화공존”을 하면서 역량을 키워서 일본에 대적하자는 비전을 갖고 있었다. 1938년 그는 “君爲其易 我任其難”(그대는 쉬운 길을 가라, 나는 가난의 길을 가겠다)고 장개석에게 말을 남기고 일본과 평화타협의 길을 택한다. 애국적 저항은 쉬웠으며, 영웅시 되었으나, 평화타협은 “매국행위”로 규탄당한 실로 험난한 길이었다.
국내 사학계와 대만에서도 현재 왕조명을 새로 재조명하면서 “친일적 애국영웅”으로 재평가 하는 기운이 팽배하게 일고 있다.
항일전쟁 당시의 중일관계사를 전반적 시야에 넣고 이 문제를 보면, 중일관계의 새로운 양상이 노출되며, 따라서 왕씨가 간단히 “한간 매국노”로 일축할 위대한 혁명가, 정치가임을 재인식하게 된다.
동일맥락에서 근대, 현대를 중·일·한의 토탈적(total) 시야와 당시의 국제적 시야에서 재검토, 검증하면 역사의 많은 맹점, 허위성, 조작성이 드러나게 된다.
사실 나의 저작《반일에 열광하는 중국, 우호로 영합하는 일본》(2004년)은 바로 중일 근현대사의 허위성을 논한 저작이었다. 역사에 무지한 자들이 아무리 이 책을 빌미로 나를 “매국노”로 내모는 것은 일말의 힘도 없는 무지자들의 광대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무지가 무지를 낳고 왜곡이 왜곡을 재생산한다. 참으로 참혹한 21세기 조선족 지성계의 일면을 말해주는 대목이어서 가슴이 쓰리다. 그럴수록 나는 역사재조명의 사명감을 절박히 실감하고 박차를 가해야겠다는 결의가 굳세어진다.
인간은 다 자기의 수준대로 발언하는 고급영장류이다. 언설을 생업으로 하는 지식인이 토로하는 말에는 그 자신의 지적 수준이 극명히 드러나기 마련이다.
나는 조선족의 고루한 지식인이 꼭 나의 지견의 수준으로 통일시켜 얘기하자고 강압하지는 않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그 수준에서 각자 적극 발언하는 것 역시 그의 자유이다.
다만 역사를 담론할 때, 한 인물이 밉다고 무조건 감정적인 대응은 쉽게 인신공격으로 직결되기 십상이니, 그런 저질 공격은 삼사이후행(三思而後行)하는 것이 他者에게도 자신에게도 유리할 수 있다. 결국 선대의 역사가 가르치듯이, 무지에서 오는 他者에 대한 공격 타매는 다 유턴하여 자신의 몸으로 되돌아오는 법이다.
11.
이제 “역사란 何(하)오”에서 “역사를 하오”로 들어간다. 역사란 무엇일까 에서 역사를 연구, 재조명하는 일, 실천으로의 이행.
“나는 왜 중한일 근현대사에 집착하는가?”란 부제목에 대한 답을 마침내 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 질문의 행간에서 산발적으로 이 문제의 답은 여기저기 드러나 있었다.
근년에 들어 조선족과 일본, 중국, 한국의 독자들 가운데서 “왜 위험하고 민감한 역사문제에 대해 쓰게 되었나?”라고 관심어린 어조로 말씀하는 분들이 많아진다.
자주 걱정 어린 애독자 팬들의 질문을 받으니, 그에 대한 답을 내는 것도 예의이고, 나 자신 역시 이 기회에 역사인식, 역사관에 관해서 세상에 피력하고 싶다. 이래서 나의 찬성파이든, 안티파이든 통 털어서 내 개인의 역사인식의 내실을 알았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표현하게 되었다.
역사, 역사인식, 역사관에 대한 나의 태도, 작법(作法)은 다음과 같다.
○ 한 민족, 집단의 문화로서의 역사는 자신의 과거인 동시에 오늘을 직결하고 있는 자신의 아이덴티티(정체성)의 정합성(整合性)의 가장 중요한 구성부분이다. 환언하면 역사 자체가 자기와 정체성의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바로 그러기에 역사는 해석이며, 승자와 위정자가 자신의 정통성, 정체성을 만드는데 이용당한다.
따라서 역사는 가장 “작위성”과 “허위성”으로 분식 당하는 객관체이며 주관체이기도한 “문학적 이야기”이기도 하다.
○ 역사에서의 주인은 항상 자기와 他者이다. 착종한 관계 넷트속에서 여러 가지 양식, 수단으로 복잡하게 얽히면서 타의 또는 자의에 의해서 움직일 수도 있으며, 전혀 예상치 않은 方向으로 흐르는 경우도 있다. 그리하여 역사속의 자기인식은 결국 他者인식을 통해 행해지어야 하며 타자와 직결된 자신을 일방적으로 美化하거나 또한 他者를 일방적으로 丑 하는 것은 愚이다. 왜냐면 그때의 他者는 자신의 일부분일 가능성이 심대하기 때문이다. 他者否定은 즉 자기否定의 愚를 범하며, 역사의 어느 시기에 대한 자기 美化나, 허위적 조작은 결국 다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왜곡하는 격이 된다.
○ 역사에서 교훈을 섭취하고 교과서나 거울로 삼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실패 원인을 규명, 인식, 성찰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他者에게 피억압, 피지배 당했다고 해서 피해자, 피정복자의 의식만 강조하고 상대에 탓을 돌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영원히 자신의 실패원인을 호도 하기 때문이다. 타자 탓도 필요하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안에서 원인을 분석하고 규명하는 작업이다. 물론 쉽지 않으나 이는 꼭 실행해야할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
이 작업을 간력한다면 역사는 다만 “이야기”일 뿐 거울의 구실을 못하게 된다.
○ 이 우주의 체계, 세상의 체계가 열린 것과 같이, 모든 세상, 사회, 인간, 그룹 역시 인과율에 의해 돌아가고 그 내실 역시 너무나 복잡하다. 그래서 민족이나 나라와 일개인이나 오늘은 곧 과거의 산물이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다. 숙명이기 때문이다. 운명도 아니다. 運命은 글 그대로 움직일 수도 있으나 숙명은 정해져 있다. 그러므로 과거를 자기 자신의 전체의 가장 중요한 구성부분이다 라는 인식하에 그것을 기꺼이 수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자신을 부정하는 것으로 통한다.
○ 따라서 우리에겐(누구나가) 어떤 역사적 체험(식민지, 침략 등)의 치부 같은 불쾌한 과거를 안고 있다고 해서 치부, 터브로 간주하고 외면하거나 그 자체를 전면 부정한다면 곧 자신의 살과 피를 깎아버리는 것이다.
역사가 숙명체(宿命体)일진대, 자신이 못나서 식민지, 침략을 당했더라도 그것은 당연히 정해진 숙명의 과거이다. 가해자를 비판하고 혐오하는 것은 감성적으로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역사를 대하고 이해하는 것을 대체해버리면 그것은 유치함으로 끝난다. 좀 더 성숙한 차원은 가해자 vs 피해자란 二項對立積國를 탈피하여 자신을 성찰하고, 다른 넓은 시야에서 객관化시켜 인식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 이런 유치한 二項對立 구도는 오늘도 우리 겨레 자신들을 스스로 괴롭히는 망령이 되고 있다. 일제 식민지가 종식 된지도 60여년이 지난 오늘날 이런 이 대립의 함정을 파고 빠지고 있다. 우리 내부에서는 이 대립구도가 “친일 vs 반일”의 단순 구도로 전개되며, 일본이란 적이 아닌 내부의 “적”을 재생산하여 내부 소모전을 펼치고 있다. 또한 이 “친일파” 척결은 정치에 이용당한 책략적 성분이 농후하기도 하다. 결국 정녕 민족애의 넓은 시야에서 보면, 자기 민족치기의 내홍을 일제 강압 아닌 자신의 정치의 체제의 강압으로 전개되니, 아이러니의 극치이다.
‘일본이 없는데 “친일파”를 잡는다’, 이런 발상, 사고 자체가 일제 식민지의 망령에서 탈피 못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 “친일”은 사실 당시 일제식민지하에서 지극히 당연한 삶의 방식 그 자체였다. 그것은 도덕, 윤리의 차원에서 지금 현대인의 의식(민족애 따위의 간판을 들고)을 과거에 투영시켜 행해지는 희극에 불과하다. 식민지 과거의 “청산”이란 미명을 걸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식민지 “기억”, “망령”에 스스로 빠져들어 일본인 대신 자신의 “적”을 만들어서 동족상잔의 비극을 연출하는 것이다.
○ “역사를 바로 잡는다.”, “청산”한다는 슬로건은 유치한 동족잡기가 아닌 역사 자체에 대한 일그러진, 왜곡, 허위, 거짓 그 자체를 발굴, 연구 하여 “바로 잡는 것이다.” 우리의 감성적인 차원에서 혐오한 他者 비난, 친일파 재생산은 결국 더욱더 우리 자신의 역사, 과거를 비틀어지게 할 뿐이다.
○ 따라서 나는 중국과 한국 및 이것을 다 우리라고 칭하며, 우리 안의 역사왜곡, 날조, 작위성에 대해 새롭게 조명, 발굴, 인식, 해석, 평가하는 작업을 하기에 이르렀다. 비틀린 역사관으로는 비틀린 아이덴티티를 재생산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10년전부터 “문화로서의 역사 인식, 이해”라는 의식의 깃발을 들고 혼자서 不言實行의 역사연구, 재조명 탐험의 길에 들어섰다. 지금 동포들 속에서 거론되고 비난 받은 책들이 그 초기 작업이었다.
이제 10년 계획으로 “한국, 중국 역사 재조명”연구의 구체적 아이템으로 《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 《사상가 안중근》, 이광수, 윤동주나 “세계는 일본의 조선식민지 지배를 어떻게 평가 했는가” 등 등 착수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
때로는 손오공 같이 分身이 생겨 동시에 연구 작업을 전개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기만 하다.
어제 한일 보다 이제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다. 또 본업인 3국비교문화연구도 과제가 한둘이 아니다.
○ “하면 된다.”는 말보다 나에게는 “안하면 안된다”다. 중국의 유명한 현대파 시인 베이도우(北鳥)가 말했던가, “영웅이 없는 이 시대에 나는 인간이 되고 싶다”고.
이 말을 패러디 해서 표현한다면 “누가 하는 사람이 없는 이 시대에 나는 그저 하는 사람이 되겠다.”
하는 사람은 항상 안하는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는다. 이는 역사가 가르친 “인간의 법칙”의 하나이다. 좋든 나쁘든 선구자는 모험자이다. 모험은 하는 일 자체의 내용도 그렇거니와 주위에서 모험자에 대한 비난으로 수시로 날아들기 마련이다.
○ 그러나 나는 두렵지 않다.
나는 내가 실제로 뭔가 “인류를 위해서, 민족이나 아시아를 위해서”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결과적 조금이라도 상호 이해 인식에 일조라도 된다면 그것으로 무한의 보람을 느낀다.
나는 ,가끔 자신의 소년 같이 유치하다는 점을 느끼게 된다. 노회한 세속인과 달리 실 이익을 요것조것 재는 것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매달리는 지식 소년이고 싶다.
나무배에 전동기를 달아 호수에 띄우며 바다를 향한 꿈을 키우던 소년. 이 지식소년, 이 영원한 월경하는 탐험가는 오늘도 즐겁다. 나 자신은 이렇게 일종의 “역사”를 “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