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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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 《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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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71) 메이지유신 세계 희유의 문화혁명 댓글:  조회:5108  추천:32  2014-10-08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71) 메이지유신 세계 희유의 문화혁명    김문학            근대 웨스턴 인팩트(서양의 충격)에 따른 비서양권의 국가중에서 서양식근대화에 성공한것은 유일하게 일본이란 작은 섬나라뿐이였다. 일본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58~1881)의 성공으로 서양렬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아시아의 중국, 조선 등 비서양국가의 근대적모델로 부상한다.    중국의 백일유신(무술변법), 신해혁명, 조선의 갑신혁명, 그뒤 전후 아시아 4소룡의 한국, 대만, 싱가폴 등 근대화혁명속에서 메이지유신은 여전히 그들의 모델로 추앙되였다. 메이지유신이 아시아 근대혁명의 독재형혁명과 구별되는것은 사실 독재형이 아닌 유연한 혁명이였다는 점이다.   메이지유신은 “서양렬강이 지배하는 19세기 국제질서에 후발국 일본이 편입당하는 국제통합과정”인것은 두말할 나위없다. 또한 일본 지식인들의 말을 빌면 “페리제독 내항이래 막번(幕藩)체제와 신분제도와 결별한 일본이 약 50년사이에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인 돌출한 근대화를 이룩해 20세기초에는 세계의 ‘일등국’ 행렬에 들어서게” 된다.   일본의 당시의 국가목표는 압도적인 서양세력의 압력에 대응하면서 어떻게 정치적, 국가적 독립을 지키고 사회를 서양화적 근대화하여 서양렬강에 캐치업하는가 하는 외향적인 과제였다.   1840년에 전개된 청국의 아편전쟁 패북에서 지대한 충격을 받은 일본인들은 그때로부터 서양렬강의 식민지지배에 대한 위기의식이 팽배해졌다. 그러는와중 1853년~54년 미국의 페리제독에 의해 강제개국을 당하면서 그들은 맞서 게란투석형의 충동이 아닌 유연한 방식으로 수용한다. 최근 일본 학계에서는 메이지유신의 혁명기간을 1858년에서 1881년의 23년 동안으로 보며 개국인팩트에 대응하기 위한 정치체제의 재편, 국가목표의 설정수정 및 그 순위의 구체적 행동양식을 합의하는 과정으로 설정하고있다.   1858년은 일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에 따른 화란, 로씨야, 영국, 프랑스 등과 통상조약을 속속 맺고 다음해부터 본격적인 대서양무역이 시작된다. 그리고 “부국강병”론이란 정치경제구상이 형성된다. 이리하여 1881년에는 메이지천황이 9년후인 1890년에 국회를 개설하는 칙명을 발포하며 국영기업의 민영화에 따라 금융, 산업개혁이 시작되는 해가 된다.   메이지혁명은 당시 복수의 목표 즉 “부국”과 “강병”, “의회”, “헌법” 4항 목표를 병행시키면서 진행된다.   그리고 하나 특기해야 할 사항은 일본인의 특유한 “유연구조”가 메이지혁명을 성공으로 이끈것이다. 복수의 국가목표를 동시에 고려하는 유연성, 그리고 지도자들의 지적(知的)수준이 상당히 높았으며 오쿠보(大久保利通), 카츠(勝海舟), 사이고(西鄕隆盛) 등 리더들은 각기 다른 국가목표구상을 지였으나 큰 공동분모를 갖고 가변성으로 서로 단합하였다. 대립할 때는 대립하더라도 단합해야 할 대목에서는 서로 절충하고 단합한것이였다. 메이지유신에서 소규모적인 류혈혁명전투를 치르면서 바쿠후의 수구세력을 제거시켰으며 유연성있는 사츠마파와 쵸수파 등의 동맹으로 류혈을 최저한 감소하면서 혁명을 진행할수 있었다.   그리하여 메이지중반에는 헌법제정, 의회창설, 식산흥업, 대외진출 4대 국가목표가 동시에 달성하게 된다. 1881년에 이것이 이미 이룩된 토대우에서 12년뒤인 1893년에는 “세계 무비의 국가”로 성장한다. 1894년 메이지정부제의회에서 외상 무츠(陸奧宗光)가 연설에서 “수출입합계는 1868년에 비해 5배, 군함수는 4배, 륙군병수는 5배, 제로였던 철도는 3,000마일에 이른다. 아시아 최초의 립헌국으로서 유럽 각국 정부에서도 일본을 무비의 국가라고 경탄했다”고 말한다.  유연성구조와 함께 학자들은 일본의 근대화 전제조건을 (1) 정치적 통일과 안정 (20 경지면적과 생산성의 량면에서의 농업의 발전 (3) 물류의 시스템의 발전과 전국 통일시장의 형성 (4) 상업, 금융의 발전 및 그에 동반되는 부유상인층의 대두 (5) 수공업의 발전 (6) 지방정부에 의한 산업진흥 (7) 교육의 보급 이상 7개 항목으로 분석한다. 사실 이 7항조건은 현재에도 비서양국가에서도 구비된 나라가 지극히 적다. 특히 교육보급은 경이로와 메이지 근대학제가 1872년에 제정되는데 3년후인 1875년에는 전국 소학교수가 약 2,400개나 된다. 초등학교 보급률은 남자 50.49%, 녀자 18.58%. 이는 당시 세계 최선진이였다.   일본의 메이지혁명 성공의 또 하나의 리유는 외압에 대한 신속한 적응력이였다. 파벌대립은 있었으나 최종적으로는 서양을 배워 철저하게 서구화시키는것으로 목표를 통일한다. 메이지유신의 가치는 그 철저성에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철저한 서양화를 지향한 희유의 “문화혁명”이였다. 근대 영국의 외교관이며 학자로서 유명한 조지.B.샌슴(sansom)은 “일본인은 언제나 자신들이 유럽인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중국인은 언제나 자신들이 유렵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다”고 갈파한다.   1871년 메이지천황이 “육식, 단발, 양장”을 장려하는 칙유를 발표하여 서양화를 장려한다. 모리 아리노리(森有禮) 같은 지식인은 아예 영어를 국어로 하자는 래디컬한 주장도 펼친다. 아무튼 “화혼양재(和魂洋才)”슬로건을 걸지만 그 내실은 철저한 서양화를 향한 문화혁명이였던것이다.   일본의 메이지혁명과 청국의 혁명을 비교하면서 그 승패에 대해 국제학자 G.F.허드슨은 이렇게 지적한다. 아편전쟁 이래 일본도 중국도 서양세력의 압력으로 개국을 하지만 1865년 일본은 서양문명 수용의 길을 적극 선택한다. 그러나 청국은 의연히 자국우월적 배외정책을 고집한다. 이 분기가 일본의 근대화와 중국의 반동화란 이질된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허드슨은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을 지적한다. 일중분기의 심층원인은 일본은 전통적 무사가 지배한데 반해 중국은(조선도) 과거급제한 독서인 사대부가 관료층을 지배했다. 따라서 일본의 무사들은 서양의 무력에 대해 굴욕을 느끼고 그 굴욕을 푸는 수단으로 서양기술을 철저하게 습득했다. 그러나 유교적우월주의에 빠진 중국, 조선의 문인, 독서인 정권은 서양문명을 배우는것이야말로 자신들의 가치를 부정하는것으로 인식했다. 이렇게 1865년이 일중한 력사의 분수령이라고 한다.[히라이시(平石直昭)]   그리고 일본의 내발적인 내셜내리즘, 국가관이 일본의 단결을 보장했으며 중국과 조선은 그러한 유력한 내셜내리즘, 국가관 의식이 지극히 박약했던것이다.  
70    (70) 근대 동아시아 미인의 탄생 댓글:  조회:5981  추천:29  2014-09-22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70) 근대 동아시아 미인의 탄생    김문학                   미인은 용자에서 빼여난 미모적존재로 모든 사람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따라서 지극히 개성적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지극히 사회적인 존재가 된다. 왜냐면 자고로 미인은 동경과 흠모의 표적이였고 례찬의 상대로 되기도 했으며 반면 남자의 운명과 력사를 바꾼 악녀, “미인망국”의 원흉으로도, “미인박명”으로 흉조와 박행(薄幸)의 타깃으로 각인되기도 했다.   필자가 오래전부터 《동아시아 미인표상》이란 저작을 집필하기 위해 한중일의 미인, 미모에 관련된 문헌, 자료를 섭렵하면서 느낀 점은 미인, 미녀에 관한 미모관, 미인관은 시대에 따라 크게 변화하며 또한 민족, 문화에 따라 심미적기준이 이질화된다는것이다.   미인, 미모의 표상 역시 문화와 시대에 응해 만들어지며 실사회에 나름대로 기능을 해온다. 그러므로 미인, 미모의 표상만들기엔 사회성, 시대성이 지극히 침투되며 그 규정을 받게 된다.   미인, 미모에 대해 본능적으로 미를 추구하는 인간들은 으례 긍정적경우가 많은바 그것은 우선 신체적, 생리적 특징이며 선(善)의 상징으로 되는 경우도 중국사의 경우에도 잦았다.     미모는 미덕의 메타포로 간주되였으며 미인선호사상이 돌출한것은 중국 귀족계급, 사대부계층이였다.   한편 “미인박명”, “미인박행”이란 사자성구같이 부정적으로 미인을 바라보고 미인은 흉과 악의 상대로 간주해온것이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사회의 가치관의 하나이기도 했다. “경성(傾城)의 미모”가 나라를 망국으로 이끌었다는 고사성어나 에피소드 역시 최근까지도 빈번히 등장된다. 그 연장선으로 현대 아시아 소회에서도 미인을 례찬, 추구하는 반면 “미인은 성격이 나쁘다”, “미인은 덕이 모자라다”, “얼굴이 이뻐야 미인이냐, 마음이 이뻐야 미인이지” 라는것이 사회적통념으로서 정착해 있기도 하다.   “미인배척론”, “추녀장려론”이 활발해진 시기가 일본의 메이지시대에 들어서서였다. 수신(修身)교과서에 “미인은 왕왕 기고만장하고 인간의 덕이 결여하다”고 적혀있다. 《중등교과 . 메이지녀대학》에 당당히 이런 어구들이 등장한다. 근대 국가주의가 팽창한 메이지시기(1868~1911) 도덕교육현장에서 녀성의 용모는 큰 테제로 론의되였으며 미인보다 얼굴이 추해도 마음이 선량하면 좋다는 “추녀장려론”이 성세를 이룬다.(이노우에 쇼이치(井上章)ㅡ《미인론(美人論)》)   재일비교문화연구자 장경(張競)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미인, 미모를 에워싼 중국에도 “미인례찬론”과 함께 “미인불길론”이 《사기》에서부터 등장하며 《렬녀전》에는 “추부례찬론”이 범람했다고 한다. “추인고귀” 대 “미인박명”론이 성행하면서 중국과 동아시아사회에 일관해왔으며 문학작품에도 이같은 주제가 쉴새없이 등장했다고 밝힌다.   그럼 다른 화제는 각설하고 동아시아 한중일 “전통적미인상”은 어떠한것인가에 대해 관련해서 보기로 하자.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 역시 인류학적개념으로 같은 몽골로이드로서 동일 황색인종이였다. 또한 동일 한자문화권에 속한 이 3국은 문화적으로 련결성이 밀접했다는것은 자타가 승인하는 바이다. 그런데 근대까지만 해도 미인표상이 이질적이였다. 청조말기의 미인상과 에도시대의 일본의 미인, 조선족의 미인상이 각기 나름대로 선호함이 달랐으므로 판이했다. 이를테면 청조미인의 조건으로 “전족”이 있었는데 반해 일본에서는 “치흑”이라 칭해진 검은 이가 미의 기준이였다. 조선조에서는 일부에서 전족이 있었으며 서민녀성들은 가슴의 유방을 저고리 밑으로 내보인것이 특징적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전통적미인상은 중국 한자문명 영향하에 전파, 정착된 이미지가 같은 기준으로 확보하고있었던 사실은 부정할수 없다.   미모라면 우선 한자로 표현되는 명모호치(明眸皓齒), 아미(蛾眉), 류요(柳腰)였다. “이목구비의 용자단정한데다 몸매의 가는 허리”가 기준이였다.   고대 중일한에서는 쌍가풀이 아닌 가는 눈이 미인의 눈으로 되였으며 지금같이 만화녀주인공이나 헵벤같은 큰 눈망울은 좋아하지 않았다. 눈의 크기보다도 “명모(明眸)”의 표현대로 밝은 눈매가 미의 기준이였다. “세미(細眉), 백치(白齒), 적순(赤脣)” 즉 가는 눈섭, 흰 이, 빨간 입술과 함께 흰 살결이 중국 고전문학이나 일본, 한국 고전문학에 로정된 미인, 미모의 조건이였다.   중국에서는 양귀비형 비만미인과 조비연형 수척미인의 두 타입이 병행하다가 전근대에는 수척형미인이 미인기준의 절대적평가기준으로 정착되는 변용을 보인다. 일본과 한국에서도 중국미인의 기준을 한문문화와 함께 수용, 변용시키는 과정속에 중국과 류사한 미인관이 형성된다.   그러다가 백년전 서양문명에서 미의식을 수용하면서 전통적아시아의 미인, 미모관은 서양형으로 기울어진다. 전통미인형인 “눈이 크고 이글이글한 녀성은 성격이 강하다”며 가늘고 길게 올라간 눈의 “녀자가 좋은 녀성”이라고 평가했던 동아시아의 미인상은 급격히 서양형의 쌍가풀, 이글이글한 큰 눈 선호로 변한다.       그리고 몸매, 스타일에 강조하는 경향이 돋보인다. 가슴과 엉덩이를 강조하고 몸의 라인을 내는것으로 용모에서 몸의 라인을 언급하는 경향이 세진다. 1907년 진행된 일본 최초의 아가씨미인사진콩클의 입상자는 쌍가풀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일위를 차지한 스에히로 히로코는 명암이 분명한 쌍가풀의 서양형미녀였다. 문학, 미술, 회화나 광고에 나타난 중일한의 녀성은 모던걸적인 S자 체형, 신체의 라인을 강조했다. 중국 근대에 나타난 회화, 광고화에도 미인의 각선미가 강조되였으며 8두신, 10두신, 12두신격으로 다리가 비례이상으로 길게 묘사되였다. 1920년대 광고화를 보면 서양형미인의 명암이 분명한 오관에 유달리 긴 다리, 명나라 중국옷을 입었지만 몸매는 완전히 서양녀자그대로였다. 1920~30년대 경성(서울)의 신문잡지에 묘사된 신녀성의 미인 역시 같은 특징을 구현하고있었다. 1910년대 서양미인적인 동아시아미인이 그림, 광고, 문학 등에 대폭 등장하여 섹시하고 발랄하고 명랑한 미적쾌감을 준다. 19세기말 20세기초 탄생된 동아시아의 “서양화”된 미모, 미인 표상은 이처럼 근대의 조류속에서 만들어진것이다.
69    (69) 기녀들의 애국적 “첩보단” 댓글:  조회:4753  추천:30  2014-09-13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69) 기녀들의 애국적 "첩보단"    김문학             19세기말 20세기초의 청국말기에 녀성해방운동이 중국사회에 신선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녀성해방운동의 진척수준은 흔히 문화적진보를 나타내는 지표라고도 일컬어진다.   수천년이나 “남존녀비”, “부양억음(扶陽抑陰)”이라는 구도로 유전해온 전통에 구속된 녀성은 전족과 함께 신체적학대와 사상적예속에 이르기까지 녀성은 교육을 받을 권리도 박탈당했으며 사회적진출도 허용하지 않았다.     청말에 이르어 전족반대운동이 시작되며 녀성들은 건전한 신체를 되찾는다. 또한 학교의 창설과 녀자국민의식의 각성도 창도되여 녀성자립자존 인격을 갖춘 인간으로 대접받으며 참정권까지 획득하고자 노력하게 된다.     말그대로 “천지개벽”의 용어가 알맞는 녀성해방기를 맞게 된다.     중국 녀성의 지대한 변화는 주지하는바 당시 일본이란 이 근대적도가니에서 배운것이다. 북경대학의 교수 하효홍(夏曉虹)은 이렇게 지적한다.      “청말에 관해 말하면 남녀동권이라는 개념은 최초 서양의 선교사들의 손으로 중국에 전파되지만 그뒤 크게 발전하는 시기는 일본과 실로 지대한 관계를 갖는다. 청조정부는 ‘녀학당규칙’을 제정할 때 일본의 제도를 모델로 했다는것은 이미 세상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동경에서 결성한 ‘공애회(共愛會)’나 ‘중국유일녀학생회’, ‘녀자복건회’ 등 조직 또는 동경에서 출판된 《중국신녀계잡지》나 《천의(天義)》 등 잡지류는 청말 녀성사의 중요한 한 페지를 열었다. 이 시대의 녀성운동의 실적을 더 확실히 나타낸것은 수백, 수천명에 달하는 신사상을 흡수한 일본류학 녀학생들이며 그녀들은 그후 중국녀성이 본래 소유해야 할 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투쟁의 주력으로 된다. 정치, 교육, 의학 등 각 분야에서 탁월한 공적을 세웠다. 일본은 추근(秋瑾)과 같은 중국의 녀성해방선구자를 키웠으며 동시에 그후 격렬한 의론을 일으킨 ‘량처현모’론을 청말 중국에 전파한다. 이런 모든 사례는 근대 일본과 중국의 녀성운동의 사이에는 끊을래야 끊을수 없는 밀접한 련결성이 있음을 여실히 립증해준다고 말할수 있다.”(《전족을 푼 녀성들》 서문)                                                               이렇게 청말에 녀자학교의 보급과 더불어 녀성의 신문, 잡지 그리고 단체들이 우후죽순마냥 속속 생겨난다.     전술한 하효홍교수에 따르면 지금까지 알려진 청국 녀성신문의 제1호는 중국인이 처음 창설한 녀학교ㅡ상해중국녀학당의 경영자들이 1898년 7월 창간한 《관화녀학보(官話女學報)》였다. “관화(官話)”라는것은 지방어가 아닌 당시의 표준어로서 교육하던 관화의 뜻으로 널리 읽히우기 위해서였다.   당시 “녀학회”, “녀학당”, “녀학보”가 마치도 한그루 과수나무에 비유되였는데 이 3위일체의 관계로 녀성문제만 토론하는것이 아니라 학생교육, 이를테면 수신, 지식, 사상 등에서 녀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이 시기 녀성단체가 활발한 모습으로 속속 등장한다.     근대적 최초의 녀성단체는 “중국녀학회”라고 한다. 앞서 말한 1898년에 창간된 《녀학보》가 곧 이 중국녀학회의 회보였다. 이 단체의 책임자로서는 담사동의 안해인 리윤(李閏)이 학회 리사였으며 강유위의 동생 강광인의 안해 황근오(黃謹娛) 역시 초기 리사였다.(량계초 《무술정변기》)     그리고 일본류학생이 창설한 최초의 중국녀성단체는 1903년 4월에 탄생된 “공애회(共愛會)”라는 조직이였다. 호빈하(胡彬夏)가 초대 책임자였으며 류학생 유력지인 《절강조》, 《강소》 등에 “일본류학 녀학생공애회 규약”을 실어 국가관념을 구비한 녀성으로 되여 녀성국민으로서의 천직을 다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청말에 생긴 많은 녀성단체중에서도 신해혁명직전 상해에서 탄생한 기생들의 조직 《중화녀자첩보단(諜報團)》이 특기할만 하다.     혁명적 색갈을 띤 많은 녀성단체의 탄생에 따라 민간의 녀성들도 사회에 참여하고 적극 혁명에 뛰여드는 풍조가 팽배해지는 이때 상해의 기생들도 가만있을수 없었다.     상기생(桑寄生)의 “청말기녀조직정찰단”(월화보(T뗽ㅬ? 1944.12.16)에 따르면 이 기생조직은 청나라정부의 정보를 혁명당에게 제공하는 스파이활동조직이였다. 한족혁명당이 청정부를 뒤엎기 위해 반청혁명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있을 때 상해의 꽃이라 불린 기생들도 가명을 받고 자발적으로 조직된 단체였다.     발기인은 장협금(張俠琴), 곽련화(郭蓮花), 강천금(康天琴) 등 기생들이였으며 장씨가 단장을 맡았다. 당시 이 스파이단체에는 상해 기생 반수 이상이 멤버로 참가했으며 량가집 일반 녀성도 가입했다고 한다.                                             당시 혁명당원들은 대부분이 지식인이였으며 문인이 기원(妓院), 유곽 출입을 자주 하듯이 혁명당원들은 기원에서 기생을 끼고 혁명을 담론하는 때가 많았다.  늘 가까이에서 열혈혁명지식인들이 혁명리상을 열변으로 토하는것을 자주 들어 그녀들도 깊은 감명과 감화를 받았다. 서당개 3년이면 음풍영월이란 말이 되겠다.     이밖에 당시 정치활동에 적극 참여한 녀성단체들로는 1904년 1월에 결성된 “반로씨야녀성동지회”가 반로씨야운동의 기운속에서 탄생된다. 1907년 철도부설권을 로씨야에 빼앗긴 당시 “녀성국민으로서 반차관” 글들이 신문잡지에 실리기도 했다.     상해, 천진, 북경에 녀성단체가 많이 솟았는데 또하나 실례를 들면 엄복이 규약을 기초해준 천진의 “녀자교육회”(회장 려벽성(?碧城)가 설립되였으며 상해 유명한 녀의사인 장죽군(張竹君)은 “녀자흥학보험회”를 창설하여 호조호부식 자선조직형식으로 학교설립을 위한 자금을 모았다. 하여 후날 상해에서 녀자중서의학원을 창설하였다.     1903년 일본에서 일본적십자사에 입회했던 녀자류학생이 8년후인 신해혁명때 중화적십자사를 결성하여 신해혁명에 기여하는것 역시 잊어버릴수 없다. 모택동이 자주 언급한 “녀성이 절반 하늘을 떠인다”는것은 사실 백년전에 스타트라인에 서있었던것이다.  
68    (68)녀성의 발,전족에서 천족으로 댓글:  조회:4827  추천:23  2014-08-12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68) 녀성의 발,전족에서 천족으로    김문학               청일갑오전쟁의 영향으로 청국에서는 강유위, 량계초가 리드한 무술유신이 1898년에 일어나면서 청국녀성의 전족(纏足)을 푸는 운동이 녀자교육의 선진(先陳)을 이루었다. 청국의 최고 실력자 서태후는 1902년 유신변법파들이 창도한 일련의 교육을 실시하면서 만주인과 한족인의 통혼허가와 더불어 녀성의 전족금지령을 내려 수백년동안 전래한 기습(奇習)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사실은 전족금지령이 하달된후 진정으로 전족습속이 자취를 감춘 때는 민국시대에 들어서서였다. 중화민국(1912년)이 최초로 중국의 풍속개혁을 한것이라면 남성의 머리에서 그 길게 내리뜨린 변발이 자취를 감추는것이며 녀성의 발이 전족에서 풀려 천족(天足), 자연의 발로 해방되는것이다.   자료에 따르면 1931년까지 산서성, 호북성 일부에는 전족의 기습이 남아있었다고 하니 그 수세기에 걸친 전통의속의 완고한 힘을 짐작할수 있으리라.   전족이란 전근대적 풍속의 하나로서 “신체가공”의 기습의 하나였다. 전족은 인류사상 세계 그 어느 나라에서도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공전절후의 기습이며 “인체개조수술”이였다.   그럼 그것은 대체 어떤 내용이였을가? 일본의 중국학자 오카모토 류조(岡本隆三)의 《전족이야기》에 따르면 3, 4살의 유녀의 발을 헝겊으로 꽁꽁 싸매 발이 결국 10센치정도로 발육을 정지시키는 인공술이였다. 그 기술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있다. “엄지발가락을 제외한 두번째 발가락이하를 끌어당겨 똑똑 소리나게 한다음 끓인 열탕으로 따뜻하게 데워지는 사이에 발밑꿉쪽으로 접는다...긴 천쪼각 끝을 발 왼쪽의 안쪽 복사뼈의 앞쪽에 갖다대고 엄지발가락쪽으로 늘려 경사지게 돌려서 발등, 발등좌측에서 경사지게 감는다. 네발가락을 발밑굽으로 잘 굽혀서 비틀어주고 우측에서 발바닥 장심으로 옮긴다. 그런 다음에 좌측 발등에 감아올리고 우측으로 옮겨간것을 발뒤측의 우측에서 좌측으로 감아서 곧추 엄지발가락으로 향한다…”   복잡한 기술과 함께 너무나 잔혹한 인공시술이였다. 쉽게 말하여 발육기에 있는 어린 녀자아이의 지골(趾骨)과 중족골(中足骨)을 발바닥쪽으로 굽혀놓고 긴 천으로 칭칭 싸매여 발육을 중지시키는 잔인한 풍습이였다. 그리고는 작은 신을 신겨 인공적으로 기형의 발을 만들어버린다.   중국을 대표하는 양귀비와 조비연의 신사이즈가 10센치도 안되였다니 중국녀성들이 전족을 만들기 위해 당한 고통은 어찌 “소족 일쌍, 눈물 한통”에 그쳤으랴.   전족의 기원설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5대, 송조초기 예기(藝妓)들사이에서 시작하여 상류계층에 류행하여 남송에 이르러서는 일반 서민에게도 널리 정착된다고 한다.   하다면 이 잔인한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전족이 오래동안 중국녀성들사이에서 류행된 리유는 어디에 있을가?   그 사상적배경으로서 송대 유학(儒學)이 녀성의 정절을 장려한것이 지적된다.   그리고 이렇듯 중국의 녀성신체를 병신, 기형으로 가공하면서까지 금련을 선호했던 배경에는 또 하나의 지대한 리유가 있었다. 즉 그것은 중국 남성의 호색문화와 련결돼있다. 말하자면 중국 남성의 에로티시즘을 위해 성적능력 개발에 끊임없이 리용돼왔으며 남성의 성적도구로 변신했던것이다.   즉 고대 규방에서 녀성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쾌락과 탐미에 빠지기 위한 목적에서 전족이 비롯되였다고 한다. 남성들에게 전족은 녀성의 특징과 직결되였다. 깜찍한 발바닥에 옴폭 패인 자리는 마치 녀성의 치부와 같았으며 남성은 그 구멍사이로 섹스까지 하면서 음락의 극치로 치달았다.   《검진완련기(玩蓮記)》에 의하면 한쌍의 섬족(纖足)엔 녀성의 전신의 미(美)가 집대성되였다고 한다. “백설의 피부, 반달눈섭같이 수미하며 옥지(玉指)의 뾰족함, 유방의 봉긋함, 입같이 작음, 입술의 붉음, 그리고 녀성기의 은밀함도 겸비하고있을뿐만아니라 그 냄새 또한 겨드랑이와 사타구니 밑의 향기보다 그윽하고 땀냄새보다 향긋하다.”   더우기 전족은 하이힐을 신은것과 같이 혹은 발레니나가 토슈즈를 신은것과 같이 녀성의 사타구니근육을 발달시켜 국부의 신축성을 활성화시켜줌으로써 성교시 남자의 짜릿한 쾌감을 증강시켜주는 묘미를 갖고있다고 한다. 하여 생리적으로만이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남녀의 심리적 신비감을 소산시키고 성감을 높여준다고도 한다.   전족은 금련이란 애칭을 갖기도 했으며 청나라의 방현(方絢)이 저술한 《금련품조(薪蓮品藻)》라는 기서(奇書)를 보면 금련을  “5식 9품”으로 우렬을 품평했다. 또한 금련은 다음 9개 장소에 있을 때 그 아름다움이 두드러진다고 기술했다. 즉 (1) 손바닥우 (2) 어깨우 (3) 그네우 (4) 이불속 (5) 등불아래 (6) 설중(雪中) (7) 주렴아래 (8) 병풍아래 (9) 울바자아래. 흥미로운것은 전족녀성들은 금련을 남성을 유혹하는 도구로 삼았다는것이다. 고대 녀성들은 사모하는 남성을 유혹하기 위해 조그마한 3촌금련을 일부러 내보이기도 하고 내흔들기도 했다. 요란스레 추파를 던지거나 엉덩이를 흔드는것보다 섬세한 발 하나로 유혹력은 지대했다고 한다.   그면이 중국 고전소설에 늘 성적소재로 등장하는것, 이를테면 《금병매》, 《수호전》에도 금련이 사랑을 맺어주는 매개로 또는 성적쾌락의 도구로 리용되는 에로틱한 장면이 많이 보인다.   전족이 수세기동안 중국 남녀의 사랑을 받으며 유전해온 배경에는 남존녀비사상과 함께 에로스의 개발이라는 면도 숨겨져있었던것이다.   오스트랄리아의 저널리스트 버쳇트가 신중국 성립후에 쓴 《전족에서 해방된 중국》이란 책이 있다. 말그대로 전족에서 해방된 중국의 녀성은 발에서도, 사상에서도 해방을 맞게 되는것이다.   100년전 류행을 따른 신녀성과 기녀들이 전족을 풀기 시작하여 전족은 차츰 자취를 감춘다.   그러나 새시대 녀성들 발에는 또 “하이힐”이란 근대 “전족”이 기다리고있다.
67    (67)일진회는 무엇이였나? (준비중) 댓글:  조회:2849  추천:0  2014-08-12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67) 일진회는 무엇이였나?     김문학          준비중
66    (66)근대 중일한의 "아시아주의"계보 댓글:  조회:4678  추천:27  2014-07-14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66) 근대 중일한의 "아시아주의"계보       김문학             100여년전 19세기말 동아시아의 학지적, 언설적 도가니였던 일본에서 “아시아주의”사상이 생성되는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였다.   근대 중일한 동아시아력사의 흐름속에서 조감해보아도 이  “아시아주의”사상, 건설, 구상은 지대한 의미를 지녔다. 왜냐면 동아시아의 근대사가 서양렬강과의 만남과 충돌, 수용을 축으로 전개됐으니 그것을 어떻게 스므드하게 해소시키는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아시아련대적인 이 “아시아주의”가 탄생했기때문이다.   이제 다시 21세기의 오늘 빈번히 제기되는 “동아시아공동체”구상은 직언하면 100여년전 동아시아의 선각자들이 발안했고 행동으로 실천해왔던 “아시아주의”사상이 그 밑거름으로 된것이다. 최근 중한일 등 동아시아에서도 재다시 “아시아주의”적 언설이 재등장하면서 동아시아의 련대를 강조하고있는 시점에서(그것은 또한 유렵 EU련합에 대응, 방법적인 수용으로서) 옛날에 륭성했던 “아시아주의”계보를 따져보는 의미는 더 현현된다. 이 계보에서 우리가 “동아시아공동체”를 창설하는데 많은 시사를 받게 되는것은 자명한 일이다.   “아시아주의”가 일본에서 탄생된 탓으로 중국과 한국 학계에서는 늘 “화려한 미사려구로 포장한 침략사상”이라고 일축하는데 안주해왔다. 물론 “아시아주의”가 침략에 리용당한 면을 감안하면 비판해야 하는것은 지당하지만 또한 그중에는 안이하게 비판으로 일관시키지 못할 면도 실재했다는것을 망각할수 없다. 손문이 “아시아주의”의 기밝을 높이 들고 중국혁명을 통해 아시아의 련대를 소리 높이 주장한 일생을 상기하시라. 20세기 전반까지 중국의 많은 지식인, 정치가, 개혁파 그리고 한국에서도 “아시아주의”를 적극 호응, 수용하여 각기 조국의 근대화 성취에 밑거름으로 보탰던것이다.   그런 “아시아주의”는 중한일에서 기다란 그리고 끈질긴 “계보”를 이루고있다. 당연히 그중에는 서로 주어하고 비판하면서도 적극적인 요소를 수용했던것이다.   《탈아론》과 함께 획기적인 사상으로서 등장한 타루이의 《대동합방론》사상은 리상적인 “아시아주의”를 고안하여 일본과 조선이 련합하고 중국과 동맹을 무어서 서양 백인종과 대적해야 하는 구상을 주장했다.   그가 주장한 아시아주의는 일본이 아시아의 “독선”적이 아닌 조선, 중국과 련대하여 일국주의를 초월한 형식으로 로정됐다. 이속에는 또한 동일한 문화, 문명, 민족(종족) 등 화두들이 섞이면서 아시아민족들의 마음을 매료시킬수 있었다.   특히 서구렬강의 식민지배구도속에 전락된 청국(중국)에 있어서 “아시아주의”가 표방하는 서구문명과의 대항, 황색인종과 백색인종의 대결사상은 쉽게 당시의 중국 정치인, 지식인에게 공명을 불러일으킬수 있었다.   초대 주일공사 하여장(何如璋)은 일찍 “아시아주의”를 리해하고 호응해나선 인물이였다. 그뒤 량계초, 장태영, 채원배, 손문이 그 중국적 계보를 줄줄이 잇는다.   장태영은 아시아 약소민족의 련합, 동맹을 강조함으로써 황인종이 백인종에 대항해야 한다는 “아시아주의”를 표방한다. 1907년 그는 진독수 등 동지들을 모아 인도망명지식인과 함께 “아시아화친회(和親會)”를 설립하여 “반제국주의의 독립”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인생의 3분의 1 시간을 망명과 혁명활동으로 일본에서 지낸 손문에게 “아시아주의”사상은 자연 매력적이였다. 일본의 “대아시아주의”의 거울인 국가주의자 토야마(頭山滿), 우치다(內田良平) 등 “아시아주의”를 소리 높이 주장한 “대륙랑인(浪人)”들과 지극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온 손문은 “아시아주의”를 주장하는 한편 실천자이기도 했다.   또한 지극히 “친일”적인 그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성공과 그뒤 벌어진 두차례 전쟁(청일, 청로)의 승리를 기뻐했으며 “아시아주의”에서 청조를 뒤엎고 한민족국가 재건의 적극적 요소를 찾았다.   그리하여 그는 일본의 “아시아주의”에 적극 호응, 수용하여 중일련대의 아시아적 련맹을 통해 혁명전략을 실현하려 노력한다. 1912년 중화민국 성립후에도 원세개에게 밀려 반원투쟁을 전개할 때 역시 아시아주의를 빈번히 제기한다.  그뒤 일본의 침략확장에 직면해서도 손문은 끊임없이 아시아주의를 언급주장하면서 일본인에게 아시아주의를 실천하기를 원했다.     1913년 그는 일본방문시 한 연설에서 “일본의 문명체계와 민국의 문명계통은 동일하다”고 력설, “아시아인이 아시아를 관리한다”고 웨친다.   그뒤 일본의 일국독선적인 “아시아주의”를 리용한 침탈의 진면목을 보아낸 손문은 일본의 정책에 실망하나 그는 여전히 아시아주의의 향수를 버리지 못했다. 1924년 코베에서 한 연설에서도 그 역시 “아시아주의 련대”로 일본의 침략을 막아보려고 부심한 흔적이 보인다.   조선에서 “아시아주의”계보는 1884년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파 리더 김옥균에게서 공명을 일으키며 이어진다. 김옥균이 일본망명시 구상한 “3화주의”는 조선의 개혁문제를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일한청 3국이 제휴하여 구미동첨의 침략을 방어하는것”이였다.   여기서 그 소스가 된것이 바로 타루이의 《대동합방론》적인 아시아의 동맹사상이였다.   그뒤 일진회의 이용구가 적극 “아시아주의”사상을 수용하여 한일합방을 시도한다. 그는 한일동맹으로  로씨야의 남하를 막고 아시아부흥을 통해 조선의 개혁이 살아남을 길을 선택했던것이다. 일진회와 그의 합방구상은 민족사관에서 “친일매국”으로 비판하기는 쉬우나 그의 아시아주의사상의 깊이에 대해서는 아직 좀 더 깊은 인식이 필요할것이다.   1910년 안중근이 려순감옥에서 집필한 미완성원고 《동양평화론》은 김옥균의 3화주의사상이 담긴 “아시아주의”사상의 산물이였다. 생전 일본을 좋아했던 그는 로일전쟁승리때 일본의 승리를 위해 환호한 청년이였다. “한청일 3국이 련대하여 려순을 공동관리지로 정하여 동양평화의 본부를 두고”, “3국의 공동은행 설립”, “3국청년 공동군단 결성”, “두 나라는 일본의 지도아래서 상공업발전을 도모하며” 서양세력에 대항하는 구상을 그는 창안한다.   “아시아주의”적 련대사상은 100년이 지난 오늘도 의연히 적극적인 요소로 “동아시아공동체”형성을 뒤바침하는 지적(知的)지침으로 살아있다.
65    (65)동양3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대동합방론》 댓글:  조회:4951  추천:20  2014-07-07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65) 동양3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대동합방론》      김문학             백여년전 근대 중국의 거물 지식인 량계초와 후에 북경대 학장으로 되는 채원배가 “진정한 걸작”이라고 격찬한 일본인의 저작이 있었다. 또한 한국에서도 열렬한 호응을 받은 이 저작은 후날 동아시아의 “아시아주의”사상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준 원조(元祖)적 저작이기도 하다.   그가 바로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이다. 36세의 젊은 일본의 지식인, 혁명가 타루이 토키치(樽井藤吉, 1850~1922)라는 이재(異才)의 손에서 나온다. 당시 일본사회를 석권한 당세 최고의 지식인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이 1885년 발표되는데 “고루한” 조선과 청국을 리탈하여 “탈아입구”를 고취한 후쿠자와의 대극적 립장에서 같은 해에 36세의 영걸 타루이가 《대동합방론》이라는 책을 간행한다.   타루이는 어떤 인물인가? 1835년 태생인 후쿠자와에 비해 한세대 젊은 타루이는 1850년 나라현에서 출생한다. 어려서 사이고타카모리란 인물에 경도된 그는 국학을 배우며 국제적시야를 넓힌다. 동양의 덕치주의와 대외발전은 그의 정치적 지향이였다. 조선에 도항하여 혁명에 투신하려 했으나 여의치 못한 그는 동지들과 “동양사회당”을 결성한다. 평등과 공중리익을 추구한 이 당은 일본에서의 최초의 사회당이기도 하다.   그의 행위는 일본정부의 경계를 샀으며 동양사회당은 해산되고 그 역시 1년간 옥고를 치른다. 출옥후 그는 저명한 정치가 소에지마(副島種臣)의 지기를 얻어 중국과 조선으로 건너가 혁명을 지원한다. 상해의 동양학관 설립이나 조선의 개화파 김옥균 등에 대한 지원이 그의 아시아혁명 원조실적을 말해준다.   그후 일본 국회의원으로 피선되며 정계에서 활동하지만 원체 의원생활이 성격과 맞지 않아 그는 국회의원을 사임하고 재야하여 집필활동을 전개한다. 이 시기인 1885년에 집필한것이 바로 저명한 《대동합방론》이다. 만년에 그는 조선에서 광산경영에 실패하며 불운하기도 했다.       1922년 한국병합 12년만에 그는 73세의 생을 접는다.   1885년 후쿠자와의 《탈아론》에 대항하여 타루이는 조선을 “악우(惡友)”시 할것이 아니라 련대하여 중국과 같이 아시아세력으로 서양이란 공동적인 위협에 대항하자는 언설을 주장한다.   일본의 여타 사상가와 같이 타루이 역시 당시의 일본과 아시아가 놓인 상황에 대해 강렬한 위구감을 느꼈으며  후쿠자와가 서양문명을 절대적 우위의 가치로 판단한데 비해 타루이는 대조적으로 절대적가치론만 간주하지 않았다. 따라서 서양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타이루가 제기한것은 친화(親和)주의였다. 서양이 경쟁만 앞세우고 서로 친화를 망각해버린만큼 일본과 조선은 친화로 단결하여 동방의 기(氣)를 살리는것으로 서양에 없는 장점을 키워야 한다는것이였다.   조선과 일본이 지식을 발달시키고 문명개화를 달성하려면 서로 다투지 않고 단결하는 친화적으로 “합방”해야 한다. 이것이 타루이가 주장하는 포인트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것은 타루이가 주장한 “합방”은 일본이 일방적으로 조선을 삼키는 양식의 합방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합방”이란 일본, 조선 량국이 대등한 립장에서 원래의 국가체제를 유지한대로 공동의 정부를 설치하는것이다. 타루이에 있어서 조선을 침식하는 그런 불평등 식민사상이 아닌 일조 량국의 완전한 대등관계에서 하나의 국가체제를 형성시키자는 구상이였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력사는 그뒤 타루이의 구상과 지대한 주어로 나타나며 식민지통치적인 “일한병합”으로 흘러버린다.   타루이는 그 자신이 구상한 합방후의 국명을 “대동국(大東國)”으로 명명하여 아시아 동쪽의 나라라는 평등한 립장의 국가를 표방한다. 합방은 민족평등, 군사력증강에 미증유의 수준에 달할수 있으며 아시아자신을 위한 아시아로 거듭날수 있다는 지론을 펼친다.   그가 고안한 절차는 3계단식 방법이였다.   (1) 우선 일본과 조선이 합동하여 “대동국”이라는 신합방국을 창설한다.   (2) 대동국이 청국(중국)과 동맹하여 서양렬강에 대항한다.   (3) 대동국과 청국은 공동으로 남방식민지를 해방하여 대아시아련방을 실현한다.   지금 시각으로 보아도 타루아의 구상은 기우장대한 “대아시아공동체”적 아이디어를 갖고있었던것이다.   타루이는 일조의 대등적합방을 세계사적 합방의 실례를 들면서 구체적으로 이런 방안을 제시한다. (1) 공동의 군주를 두고 합방한 례로 그리스, 화란, 핀란드, 로씨야 등 (2) 련방제로 독일련방, 스위스련방, 메히꼬련방 (3) 주권을 가지고 합방한 례로 아일랜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의 실례를 들면서 일조사이 어떤 방식의 련방체제를 갖춘 합방에 대해 참고할수 있다고 한다.   타루이는 동아시아중의 청국의 중요성을 숙지하고있었으며 청국과 량호한 관계구축의 중요성을 잘 인식한 인물이였다. 일본과 청국이 “동방의 해륙 2강국”일진데 량자의 대립은 서양에게 동양침식의 기회를 줄뿐이라고 갈파한다. 청국에 있어서도 일조합방국 “대동국”과 련합하여 서양과 대적하는 길은 서로 유익한 길이라고 주장한다.   아시아의 련대, 단결. 《대동합방론》은 이것을 목표로 집필한 저작이다. 타루이는 처음부터 선명한 목표와 방법을 갖고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읽히우게끔 한문(漢文)으로 집필했다.   당초 일본 국내에서의 반응은 랭담했으나 중국과 조선에서 대반향을 일으키며 베스트셀러로 되였다. 량계초가 서문을 쓴 이 책은 청국에서 10만부나 불티나게 팔리였다. 조선에서도 천여부를 발행했는데 그래도 부족했다고 한다.    (4면에서)   조선에서는 일진회의 이용구, 송병준 등이 이 책의 영향으로 “한일합방론”을 전개하면서 실질상 “매국”적이기보다는 타루이의 사상에 공명한 대등한 합방을 창안했다.   량계초는 타루이의 “아시아주의”사상에 공감하며 1898년 유신변법당시 한림원 편집이였던 채원배 역시 이 책을 절찬하며 공명을 보인다. 사실 안중근, 감옥균의 “동양평화”사상의 루트는 타루이의 영향하에서였으며 그뒤 손문 등으로 이어진 “아시아주의”사상의 원조는 바로 이 젊은 준재 타루이의 사상에서 비롯된다.
64    (64) 일본의 “중국열” 댓글:  조회:4968  추천:21  2014-07-01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64) 일본의  "중국열"         김문학             “한국병합”의 1910년 그해 중국(청국)에 거류한 일본인수는 6만 5,434명에 이르렀다.   1890년에는 863명으였으나 청일전쟁(1894~95)후인 1895년에 1,125명으로, 일로전쟁(1904~05)이 끝나는 해인 1905년에는 일약 십배나 불어 11,090명으로 껑충 증폭한다. 신해혁명 5년후인 1916년에는 10만 4,275명에 이른다.   우의 일본인수 통계에서 확인할수 있는것은 25년 동안 120배로 증가됬다는 사실이다. 중국에 체류한 일본인수가 이렇듯 많은 수자를 확보한 배경에는 당시 일본의 지대한 “청국열”이 뒤바침해준 까닭이였다.   일청갑오전쟁후 일본정부는 명목상 청국의 “보전(保全)”, “변혁원조”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중국이 근대화하려면 일본의 부식(扶植)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이리하여 일본정부는 일본인의 청국이민을 장려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흥미로운것은 한국병합의 1910년말 조선전역에 거류한 일본인수가 17만 1,543명으로 조선을 식민지화시킨 해, 역시 중국대륙에 대한 중국열(청국열)이 거의 동시에 일어난것이다.   일본의 근대는 거의 조선반도와 중국대륙에 상관관계(지원, 침략, 강점, 원조, 동정)로 내실을 이루고있으며 그 상관관계양상 역시 착종적이다. 대립, 주어, 동경, 동정, 원조, 경멸, 침탈의 다종다양한 형태로 중, 한에 접근해왔던것이다.   중국 근대사나 한국 근대사에서 교과서적기술은 흔히  “반식민, 반봉건투쟁”, “반침략, 독립투쟁”의 구도로만 근대사를 리해하는 도식이 로정되지만 사실 력사의 양상은 이 도식보다 더 복잡하고 착종적이며 다양, 다층적이다. 보다 유연하고 다각한 시야에서 력사를 점검해보면 또 다른 새로운 력사사상(事象)들이 “발견”된다.   당시 “청국열”의 붐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던 사람들은 대체 어떤 계층이였을가? 사실 오늘날 글로벌화의 물결을 타고 출국붐이 식지 않는 중국인의 사정을 감안해도 알수 있듯이 주로 류학과 돈벌이, 그리고 무역, 상업에 종사하는 계층이 출국의 주류를 이루고있다.   마찬가지로 100년전 일본인의 “중국붐”도 류사한 양상을 보였다. 중국땅을 밟은 일본인의 압도적으로 많은 다수는 상업, 무역, 산업 계층의 사람들이였다. 물론 “재아시아주의”의 미몽에 심취하여 진짜 중국을 도와 일본과 함께 손잡고 공동체를 무어 서양과 대적하려는 일본의 랑인(浪人), 아시아주의인물도 활약하였다.   그럼 이제 당시 백년전 일본인의 “청국열”로 지대했던 중국관계양상을 구체적 실례를 들어 보기로 하자.   근대사를 조감해보면 일본인은 조선인 뒤지지 않게 세계에서도 교육열심의 민이라는것이 알린다. 일본이 메이지유신이후 근대국가로 거듭난 리유는 드높은 교육열의 덕이라는것은 누구나 주지하는 사실이다.                     이시아 근대교육의 정립은 일본이 최초, 최우수했으며 그것이 그대로 조선과 청국에도 류입된다.   일본인이 청국에 세운 학교로서는 1899년에 설립된 동문학당(東文學堂)을 꼽아야 한다. 그리고 1901년 북경에서 경영한 동문학사(東文學社), 역시 그해 남경에다 설립한 동문학당, 1905년 상해에 세운 류동고등예비학당(留東高等預備學堂) 등 저명한 근대 학교를 들어야 한다.   이들 학교의 책임자는 중국인이 맡았으나 교원은 일본인이 주로 담임했다. 지금 수준의 정규학교는 아니라도 신식 근대교육의 모델을 당시의 중국에 제시해준 의미로부터 감안하여 그 역할은 결코 작지 않았다.   북경 동문학당의 경영자 나카지마(中島裁之)는 이 학교에서 일본어를 교수하는 한편 각 분야의 전문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나카지마는 실업가이며 문학자인 기시다(岸田吟香)를 따라 중국 각지를 고찰하며 양무파의 대표적학자 오여륜(吳汝綸)에 사사하면서 훈도를 받아 학교를 설립한것이다. 학교는 인기가 높았으며 정원 30명을 초월하는 수배의 지원자가 쇄도했다고 한다. 나카지마는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지대한 문화적은혜를 수혜했다고 감사하는 마음에서 수업료를 일절 면제했다.   이에 대해 직예총독 리홍장과 그 후임이였던 원세개도 나카지마를 원조하였는데 리홍장은 기밀비에서 월 2백엔, 원세개는 월 백엔의 보조금을 제공했다. 이렇게 1906년 이 학당이 직예성관립중학당으로 개편될 때까지 수많은 우수한 인재를 배출했다.   신해혁명전야, 중국 혁명파에게 대환영을 받은 인물중 국제법의 권위 테라오(寺尾享)교수와 헌법학의 소에지마(副島義一)교수는 특기할만한 인물이다. 당시 중국 혁명정부가 헌법에 어두워 송교인이 악전고투로 헌법을 기초하려 했으나 제대로 안되였다. 이리하여 초빙된 인물이 법률전문가 테라오였다. 그는 동경제국대의 최우수 현역교수였으나 전 재산을 털어 중국군사류학생을 위해 동빈학당(東斌學堂)을 세울 정도로 중국혁명에 여생을 바친 인물이였다.   그는 “지나혁명가는 나의 동지다. 내 일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하며 교수를 사임하고 대학동료 소에지마를 데리고 중국 남경림시정부에 부임하여 략법(림시헌법) 기초에 착수한다.   당시 림시정부에 재정고문으로 시카타니(阪谷芳郞), 하라구치(原口要)가 초빙되였으며 각지의 륙군학교에도 많은 일본인 교관이 최빙되여 활약했다.   그리고 손문, 황흥, 송교인은 각기 이케(池亨吉), 노(萱野長知), 키타(北一輝)를 비서 겸 고문으로 초빙하여 중국혁명에 도움을 청한다.   1912년 1월 7일, 림시대총통으로 된 손문은 일본참모본부에서 파견되여온 후루카와(古川岩太郞) 등을 회견하고  “만일 일본에 지탱하지 않았다면 중국혁명의 성공은 곤란했을거외다”고 고백한다. 일본인의 “중국열”이 중국혁명성공에 대한 공헌을 솔직히 인정했던 력사장면이다.  
63    (63)“검디 검게 먹칠한 조선지도” 댓글:  조회:5071  추천:33  2014-06-23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63) "검디 검게 먹칠한 조선지도"         김문학               1910년 8월 29일 《한국병합조약》이 발표되면서 일본 관민이 환희의 광란드라마를 벌이며 그것을 찬미하고있을 때단 한명의 일본인이 한국병합에 대해 비판했다.                                     그가 바로 그 당시 일본의 국민적시인이였던 25세의 젊은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 1885년~1912년)였다.   8월 29일 직후의 서점에서 매스컴을 통해 한국병합을 비판하면서 조선민족에 지대한 동정을 보인 인물은 단 아시카와 한명이였다.   지도우의 조선국에 검디 검은 먹으로 칠하니 쓸쓸한 추풍이 들린다. 1910년 9월 9일에 읊은 이시카와의 단시(短詩)이다. 조선지도를 흉사에 사용하는 먹으로 검게 칠하면서 가을바람의 쓸쓸하고 매서운 오한을 느끼는 심정을 남김없이 표현한다. 일본제국의 침략에 반대하고 망국의 민이 된 조선민중에 대한 뜨거운 동정과 련민의 눈물을 타쿠보쿠는 쏟고있었다. 일본 전체가 꽃전차를 타고 룡불을 들고 희열의 극치에 달한 그 상황에서 정면에서 이의(異意)를 표하고 과감히 제국을 비판한 그 담량과 시적기량은 모두 최일급적이였다.   사실 1년전인 1909년 10월 할빈에서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했을 때 타쿠보쿠는 안중근의 영웅다운 행위를 례찬하는 시구를 썼다.   “영웅답게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의 소문 항간에 널리 퍼지네.”   “그 누가 나를 권총으로 쏘아보라, 이토같이 달갑게 죽어줄테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안중근을 “영웅답게도” 순국한 의사로 존경했으며 이토를 그토록 존경한 타쿠보쿠였지만 역시 한국의 영웅에게도 존경의 념을 표했던것이다.   당시 타쿠보쿠는 이토의 죽음을 “위대한 정치가의 위대한 심장은 신일본의 경영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고동을 멈추었다”고 가슴아파하면서도 이토를 쏜 “한인”에 대해 “아직도 진짜로 증오해야 할 까닭을 모른다”고 고백한다. 패자, 약자에 대하여 응시해왔던 타쿠보쿠는 강자 일본의 강촉한 소행이 안중근과 같은 약자들의 의거를 초래했다고 휴머니즘적 립장에서 리해를 하고있었다. 그러므로 “한인”을 “증오해야 할 까닭”이 그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만약 일본인으로서의 자기는 피지배자인 그 누가 권총을 쏘아도 기꺼이 죽어줄테다고 죄책감을 솔직히 고백한다.   타쿠보쿠는 메이지시대를 한복판에서 살아온 견증인으로서 그 당시 일본의 식민지지배침략, 팽창된 국가주의에 인식을 가하면서 약자에 대해 강렬한 동정을 품는 인간으로 변신한다. 따라서 국가주의에 의해 팽창된 식민확장, 지배에 대해서 그는 과감히 비판하는 인물이였다.   1910년 8월 29일 관보 호외(號外)에 메이지천황의 한국병합에 관한 조서(詔書)가 공표되는데 그것은 그 어떤 국민의 비판과 반발도 허용치 않는다는것을 의미한다.   당시 절대다수의 국민과 지식인들마저도 국가주의에 팽배한 동조와 영합을 보인 상황하에서 타쿠보쿠와 같은 일본 국가주의, 제국주의와의 정면대결은 너무 쉽지 않았다.   29일 그는 일본을 “시대의 페색”의 나라라고 비판하는 글을 쓰며 메이지천황의 그 조서에서 언급한 “조선총독을 설치하여 륙해군을 통솔하며 제반정무를 촹괄한다”는 군정을 실시하려는 선언에 혐오감을 느낀다.   8월 30일 《동경아사히신문》에 “대일본제국의 전 판도(版圖)”와 “신판도 조선” 지도가 게재되였다. 일본지도와 조선지도가 한가지 빨간색으로 되여있었다. 일본판도에 들어온 잃어버린 조선지도였다.   곤도(近藤典彦)의 론고에 따르면 실제로 타쿠보쿠가 조선지도를 펼치고 그 우에 검은 먹으로 칠하면서 시구를 썼다고 한다. 일본제국에 의해 삼켜버린 조선의 불행을 “지옥”으로 보면서 타쿠보쿠는 그 어설픈 가을바람을 들었다.   이어 타쿠보투는 “9월 밤의 불평”으로 제목한 단시, 전체 34수의 시에서 한국병합을 비판한 단시 몇수를 또 써내려간다.   “메이지 43(1910)년의 가을 내 마음은 더없이 참말로 구슬프구나.”   “어쩐지 야비해보이는 우리 나라 사람의 얼굴우로 가을바람 스친다.”   “가을바람은 우리 메이지청년의 위기를 슬퍼하는 얼굴 애무하며 불어온다.”   타쿠보쿠는 쓸쓸한 추풍과 비애를 모티브로 일본제국, 국가주의의 비애와 함께 일본제국주의팽창으로 식민지로 전락된 조선인의 비애를 읊는다.   1906년 사회주의자 코도쿠슈스이(幸德秋水)의 영향으로 타쿠보쿠는 자유, 평등, 박애의 사상을 바탕으로 일본의 국가주의를 비판하고 조선경멸론을 지탄하게 된다.   1911년 6월에 남긴 “코코아의 한술”이란 시에서 타쿠보쿠는 “나는 알고있다. 테러리스트의 슬픈 마음을”하고 읊고있는데 여기서 “테러리스트”란 이토를 쏜 안중근을 칭한다. 그는 공개적으로 그들의 적인 안중근에게 깊은 리해와 동정을 표했다. 그것은 전 조선민족에 대한 리해이기도했다.   일본 현재 저명한 지식인 츠루미(鶴見俊輔)는 《현대 일본 사상사》에서 이렇게 타쿠보투를 높이 평가하고있다. “이 한일병합이라는 정부의 행동이 일본인과 조선인에 대해 어떻게 심각한 결과를 가져왔는가에 대해 상상을 여러모로 구사한 력량을 갖춘 일본인은 당시 흔치 않았다. 이시카와 타쿠보쿠라는 시인은 그 흔치 않은 한사람이였다.”        이런 일본시인에 대해 한국에서도 일찍 숭모한 지식인, 시인들이 있었다. 저명한 문학자 김기진(金基鎭)은 1920년 일본류학당시 타쿠보쿠의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1932년 김상회(金相回)가 타쿠보쿠의 시집 《끝없는 의론의 그 이후》를 《신동아》에 번역하기도 한다. 1960년 한일기본조약이 체결전에 시인 김룡제(金龍濟)에 의해 《타쿠보쿠시집》이 한국에서 정식 번역출판되며 그뒤로도 대역형식으로 다수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타쿠보쿠의 사상과 인물에 대한 리해는  여전히 미개척지에 속한다. 일본의 100년의 강제병합에 대해 비판하지만 우리는 일본인중에서도 우리와 같이 일본제국을 비판한 천재적 시인이 있었던것에 너무 어둡다. 타쿠보쿠는 조선인과 피압박민족이 영원히 기억해야 하고 리해해야 할 일본인의 량지를 갖춘 희소적가치의 인물이다.  
62    (62) 1910년 8월 29일의 광란 댓글:  조회:4666  추천:21  2014-06-14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62) 1910년 8월 29일의 광란         김문학             1910년 8월 29일 《한국병합조약》이 일본과 한국 량국의 “관보(官報)”에 동시 공포된다. 이날은 그뒤 “국치(國恥)기념일”로 한국인의 마음속에 오래 동안 깊숙이 각인되게 되는 가장 슬픔의 날이 된다.  순종황제는 “칙유”를 발표하여 국가를 일본제국에 빼앗기는 비극에 대해 감내하면서 겸양한 태도로 그 비참한 마음을 애써 누르면서 담담히 표현했다. 망국의 설음을 직설적으로 표현도 못하는 그 심정, 얼마나 가슴이 터졌을가. 상상만 해도 비분강개해진다. 이 칙유탓인지 병합시 표면상으로는 한국에서 혼란이 발생하지 않았다. 경찰과 군을 동원하여 계엄령체제하에 어찌 감히 란동이 있으랴. 박은식(朴殷植)의 《한국독립운동혈사(血史)》에 따르면 망국에 못이겨 자결로 순국한 자가 28명이나 된다고 한다. 자결한 순국지사중에는 경세의 시구를 써서 유서로 남긴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8월 29일은 희열과 광란이 시작되는 날이였다. 일본 각지에서는 경축의 불도가니로 변했다. 일장기를 게양하고 손에 휘두르며 기념의 꽃전차에 서로 오르려고 다투었다. 《동경아사히신문》은 8월 31일, 그 광란을 이렇게 보도했다. “(히바야공원에 집합한 약 수만명 군중) 오후 7시반 3발의 호포(號砲)가 울리자 음악, 노래소리에 맞춰 홍백 아롱다롱한 초롱불을 든 수만명이 홍수같이 정문을 나왔다…       2렬의 대행렬은 군가와 만세를 일제히 부르며 야마시타교에서 긴자4정목으로 흘렀다. 길 량측에 모인 사람들은 인산인해를 이루며… 가족총출동으로 나와 전기불꽃을 터치고 금속대야를 요란히 두드리며… 제례보다 엄청 법석을 피우면서 만세소리로 서로 호응하는 소리는 천지를 진감할 정도였다…”   일본에서는 “쵸칭교레츠(提燈行列)”라 칭해지는, 승리를 경축하는 야단법석의 전통이 있었는데 그것이 일청갑오전쟁때나 일로전쟁 승전때도 동경에서 10만명 대중의 축승회가 있었던것이다. 성대한 초롱불대렬의 열광장면은 가히 문화대혁명때 천안문광장의 열기와 비견할수 있었으며 그보다 더 법석이였을것이다.   8월 30일 《동경아사히신문》 7면에 흥미로운 광고가 실렸다. “2천년래의 현안을 해결하였으니 기뻐해야 할 오늘, 일한합병! 초롱불행력=축화회. 마음껏 법석이고 마음껏 마시고 취해야 할 이 경사를 기념하자. 아무리 마셔도 먹어도 ‘재무’만 있으면 걱정없노라.”  이 “제무”란 일종의 청량제드링크이다. 기업광고까지도 한국병합의 광란에 편승하여 광고를 버젓이 냈던것이다.   같은 날 《중외상업신보(中外商業新報)》는 “만일 국가의 팽창발전을 국력왕성의 사실적 결과라 한다면 대일본제국의 이같은 팽창에 대해 우리 나라 국민은 누구나가 만강의 환희를 금할길 없을것이다”고 전했다.   당시 일본 전국은 병합에 의한 조선지배를 정당화하고 거국일치하게 일본정부의 식민지정책을 지지하였다.   신문에서 발신하는 병합례찬론은 “한국령토 1만 4천방리”의 획득에 따라 원래 국토의 1.5배나 되는 땅을 얻게 되였다고 국민들은 모두 기쁨의 도가니에 빠져 “대륙웅비” 즉 침략의 미몽에 취해있었다.   9월 1일의 일본 전국 소학교에서는 개학식을 리용하여 “일한합병에 관한 강화” 등을 통해 일본제국판도의 확장을 경축했다.   자유주의자이며 유명한 《무사도 》를 집필한 지식인(일본 현행 5천엔 지페에 초상이 그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니이토 베이나즈(新渡戶稻造)까지도 한국병합에 대해서는 에누리없이 례찬했다. 그는 9월 13일 제일고등학교 입학식의 교장연설에서 이렇게 연설한다. “잊을수 없는 일은 조선병합이다. 이것은 실로 문자그대로 천재일우의 일이다. 우리 나라는 일약 독일, 프랑스, 에스빠냐 등 나라보다 더 광대한 면적을 유(有)하게 됬다… 아무튼 우리 나라는 유럽의 제국(諸國)보다도 더 큰 대국으로 됐다는것이다. 제군(諸君)은 급격히 성장했던것이다.”   그는 앞서 1906년 이토 히로부미의 한국통감부 요청으로 한국 농업사정을 시찰하고 “조선에 대한 정체사회관과 민족멸시관을 품고 일본에 돌아왔으며 병합을 단순히 기뻐하였으며 제국팽창에 기대를 걸었다”고 일본인 타다카 신이치가지적한다.   일본이 조선병합의 침략을 호도하고 찬미하고 있을무렵 흥미로운 일이 조선의 학교에서 일어난다. 1910년 9월 9일 《동경아사히신문》 2면에 실린 기사다. “동맹휴교선동, 6일 경성특파원 발. 어떤자의 장난으로 공화문우체국 도장이 박힌 각 관공립학교 생도들에게 불온한 격문을 우송했다. ‘대한국은 멸망하고 우리가 일본인의 통치에 감내하고있을수 없으니 남자라면 당당하게 동맹휴교하자’고 선동했다. 하여 관립사범학교 생도들속에서 이미 동요하고있으며 다른 학교 생도들에게도 영향을 미친 행적이 보인다. 그래서 비상경계를 함과 동시에 사범학교 생도 20여명을 검거하고 엄탐중이다.”   7일 경성특파원 보도에 의하면 5일 밤 11시, 북부경찰소가 수모자 황재희를 연행했는데 황재희가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고 혈서로써 동맹페학을 선동했다고 전한다.   당시 일본의 신문보도에서 조선 열혈학생의 이같은 저항이 발견된다. 삼엄한 계엄체제속에서도 나라를 수탈당한 조선동포는 이런 방식으로 반항을 표달했던것이다.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안중근식의 단지동맹과 윤동주식의 암울한 저항의식을 로출한 조선의 동포가 어찌 한둘이였으랴!   1910년 10월 초대 조선총독부 총독 테라우치는 시정방침을 발표하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 대일본제국의 판도는 바다를 건너 동아대륙에 미치고 새롭게 1천만이상의 인구를 포괄하게 되였다만 조선의 개선을 도모하는건 제국의 안녕과 동양평화의 결실을 획득하려고 한 까닭이므로 그 승패에 따라 국위(國威)의 소장(消長)에 영향을 끼칠것이다… 현하 급선무는 신령토의 질서를 유지하고 부원(富源)을 개척하는것이다.”   조선침략의 기쁨과 함께 그 목적을 적라라하게 실토한 “제국의 야심”이였다.   조선인에게는 국치의 날이 된 1910년 8월 29일. 그러나 일본에게는 꺼리낌없이 침략을 찬미한 광란의 날이였다. 이어서 36년의 조선지배, 특히 테라우치의 가혹한 무단정치지배가 막을 연다.  
61    (61) 100년전 서양은 일본을 어떻게 평가했는가? 댓글:  조회:4840  추천:26  2014-06-09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61) 100년전 서양은 일본을 어떻게 평가했는가?         김문학               “만일 문명이란 말이 물질문명을 가리킨다면 일본인은 지극히 문명화된 민족이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일본인은 공예품마저도 증기기관차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도달할수 있는 최고의 완성도에 달했기때문이다. 그리고 교육은 유럽문명권 이상으로 보급되였다. 지나(중국)를 포함해 아시아 타국에서는 녀성들이 완전한 무지속에 방치된데 반해 일본에서는 남녀 할것없이 가나와 한자로 읽고 쓸수 있다.”   “일본인은 세계에서 제일 청결한 민족이란 점은 이론(異論)의 여지도 없다.” “이 나라에는 평화, 철저한 민족감, 풍족함, 완벽한 질서 그리고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도 잘 경작된 토지가 발견된다.”   세계의 유적발굴과 광견병 예방법 등을 발견한 희대의 지식인이며 사회활동가인 에취.슐리먼(H. schliemann)이 청국과 일본을 방문하고 저술한 책 《청국과 일본》(1865년)에 나오는 말이다. “그 어디를 가나 호흡곤란에 빠지는 먼지와 걸식자들이 있는 불결한 청국”과 비해 일본은 최고 청결의 나라로 례찬한다.   전술(前述)했듯이 대체로 백년전후의 서양인에 의한 한중일 동양 3국의 평가에서 중국과 한국이 상대적으로 낮은데 비해 일본은 우리가 불쾌를 살만큼 높다는것이다. 한중일과 세계 수많은 나라를 려행했던 비셥녀사 역시 쇠락하고 죽음에 향한 조선에 비해 일본은 “정체된 아시아”의 이미지를 일신시키는 활기찬 나라, 희망의 나라로 묘사된다. 동시대의 영국인 관찰가 조지 커든 역시 일본의 내각정치가는 “인재의 총집합체”로,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등 명치지도자를 만난후 그들이 걸출했기에 명치국가가 형성됐다고 판단한다.   당시 서양의 평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거의다 일본의 청결과 함께 “친절”, “례의바름”에 대해 경탄을 금치 못하고있다.  뽀루뚜갈인 모라에스(Mores, 1854~1929)가 쓴 《일본정신》에서는 “일본인의 그 친절한 미소”를 경악한 사례로 들면서 “극단적일만큼 친절을 베푸는것”, “자연에 숭배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믿으며” “모든 사람에 대해 늘 미소를 보이는” 등 근대 일본인의 정신을 높이 평가하고있다.   1876년에 출간한 미국인 청년교사 W.E.그리피스(Griffis, 1843~1928)는 《명치일본 체험기》에서 교육과 교양의 힘을 언급하면서 일본관료의 “례절바르고 세련된 신사앞에서 유쾌할수 있었다”고, 일본인의 철저한 친절에 가장 행복감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미국의 동물학자 에드워드.S.머스(1838~1925) 역시 일본체험기 《일본의 그날그날》에서 “인력거군의 례의바름, 일본인의 동물애호심, 일본아이의 쾌활함, 외국인에 대한 관용, 일본의 안전성, 생활 구석구석에 나타난 미적 센스와 자연애” 등에 감복한다. 흥미로운것은 그가 1902년에 쓴 《중국과 중국의 가족보기》에서는 대조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이같이 당시 중국과 조선에 비해 일본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후한 점수를 주는것이 괄목할만한 현상이다. 가슴 아프지만 이것 역시 100여년 전후 일본에 비해 “후진성”을 로정했던 실모습의 “활사”이기도 하다.   서양인들이 19세기 후반 일본에 친근감을 느끼고 례찬한 까닭은 영국식 산업사회와 같이 “문명”이 점차 침투되면서 자신들의 모습에 닮아간다는 호감에서였다. 20세기초기에 이르러 영국인들중에는 “일본이 우리보다 못하지 않다”고 단언하게 된다. 서양을 배우려는 일본인의 경이로운 호기심과 학습열에 탐복하며 그에 호응한다.   그러나 일본인의 이같은 서양학습에 긍정하면서도 한편 급격한 변화에 풍자한 서양인도 있었다. 1889년에 출간한 피에르.로티(Pierre Lot, 1850~1923)의 《가을의 일본》은 일본의 “현기증 느끼게 하는 근대의 열의에 부조화스러움”을 발견하며 경묘한 터치로 “원숭이와 같아 보인다”고 일본인의 양복차림을 풍자한다. 서양문명의 노예로 된 일본인의 심성을 지탄한 문구였다.   1904년 로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 대해 서양은 일본이 이미 영국적인 세계지배질서에 편승하였으며 일본인 역시 세계가 서양의 지배를 받게 된것은 서양인의 오유라기보다 비서양인의 후진성에서 기인된것이라는 인식이 증폭된다.     이때 애급 출신의 지식인이며 민족운동가인 M.카밀(1874~1908)의 《떠오르는 태양》이 등장한다. 근대에서 세계무대에 존재감을 과시한 일본은 일로전쟁의 승리로 주목받는 나라로 되였다. 이 제목은 당연히 당시 서양에서 “해뜨는 나라” 일본을 지칭한 단어로서 그대로 아라비아어로 번역, 사용했던것이다. 아시아에서 돌출한 신흥세력으로서 일본에 대한 상징적의미를 불어넣은것이다. “일본 발전의 비밀”에 대해 카밀은 미카드 즉 천황 이하 정부의 대신, 관료, 서민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이 횡일한 애국심(민주주의정신)과 그에 뒤받침된 교육, 정치, 경제, 군사의 근대제도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카밀은 애급이 배워야 할것은 일본의 애국심, 근대적제도이며 “해뜨는 나라 일본”과 “해저문 나라 애급”의 비교를 통해 애급국민들이 가슴에 충격을 받아야 한다고 호소한다.   서양에서 일본례찬론이 성세를 이루고 있을 때 영국인 일부에서는 일본의 모습을 회의적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일본인이 매우 속을 내보이지 않고 교활하고 거만한 민족으로 보였으며 그 애국심과 “일본정신”, “국혼”에 포함된 위험성을 위구했다. 동경대학 교수로 있던 저명한 일본연구자 배짐.체임벌린(1850~1935)은 “무사도”에 대한 영국인의 맹목적 찬탄을 부정하면서 일본의 무사도적 팽창의 위험성을 일찍 간파했다.   일본인의 서구화가 피상적 모방에 지나지 않았으며 결과 그로테스크한 “잡종”이 되였다고 평가한 서양인도 있었다. “물고기도 아니고 가축도 아닌 잡종”, “동양도 서양도 아닌 잡종”으로 일본인을 조소했다.   1907년 로일전쟁후 실질적으로 조선을 식민지로 손아귀에 넣은 일본에 대해 영국과 서양의 여론은 비판이 속출했다. 주일영국대사 맥도널드도 일본의 진면목에 우려했으며 매켄지 역시 일본의 대조선의 “잔혹함”을 고발한다.   그런데 영국은 일본이 1910년 8월 한국병합에 대해 묵시했으며 영국자국의 리익손실에만 치중했다. 영국은 일본의 조선지배를 당연시하며 조선이 이로써 효률적인 문명과 경제의 륭성을 이룩할수 있다고까지 여기게 된다. 마치 100년이 지난 오늘 북조선에 대해 미국이 견제하려는 그런 발상이 벌써 100여년전에 세계 렬강과 공범으로 존재했던것을 재발견할수 있다. 100년전의 비극은 사실 또다른 양식으로 오늘 분단된 우리 민족에 긴 연장선같이 남아있음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60    (60) 100년전 서양은 한국을 어떻게 평가했는가? 댓글:  조회:4643  추천:17  2014-06-02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60) "한국병합"에 로정된 한국의 결함분석         김문학              1910년 “한국병합” 선후의 100여년전의 평가를 보면 제3자의 시각에서 한국, 한국인 및 그 국민성, 사회상황에 대해 리해하는 좋은 소재로 된다. 또한 억울한 “한국병합” 역시 우리 민족 자신의 결함에서도 찾을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한다.   당시 서양인관찰자들은 일본을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로서 서양문명을 수용하여 충천하는 기세를 보여주었다고 하는 반면  한국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land of the moming calm)”로 아직은 전근대의 잠자는 나라로 보았다. 일본에 비해 한국은 대체로 “부패와 착취로 점철된 사회”이며 “애국심이 결핍하며 더럽고 무례하고 게으른” 표상이 주되였다.   19세기말, 20세기초 일본과 한국을 방문한 이자벨라 버드 숍(1831~1904), 조지 커즌(1859~1925), 헐리어(초대 서울주재 영국 총령사), 웨브부인, 구빈스, 존 조든(주한 영국공사) 등 여러 서양인들 눈에 비쳐진 한국은 대체로 우리의 상상을 넘어 부정적이미지가 많았다. 필자도 그들의 한국기록을 읽으면서 경악함과 충격을 금치 못했다. 일본에 대한 긍정과 한국에 대한 부정적평가는 언제나 그들에게 있어서도 대조적구도를 이루었던것이다.   1876년 헐리어는 서양인이 처음 한국땅을 밟았을 때 “근대 중국”에서 갑자기 “근세 중국”으로 옮겨온것으로 착각할만큼 “빈곤이 편재하고 게으름이 국민적특성인 나라”로 묘사했다고 말한다. 중국과 비교해도 한국은 후진의 나라란것을 그들은 발견한다. 그러므로 한국은 “문명퇴화”의 모델이였다. 1911년 한국에 왔던 웨브부부는 “무지하고 미개한” “더럽고 무식한 사람들이” “진흙과 짚풀의 오두막에서 살면서” “문명개화가 안된 농부의 나라”가 문학예술에서는 높은 수준을 창조했다고 경탄한다.   1893년 한국을 방문한 영국 정치가 커즌은 “이 작은 나라는 독립을 유지하기엔 너무 부패했고 독립을 통해 이들을 얻어내기엔 너무나 쇄약했다”고 판단하며 “한국은 가장 잘못 통치되고있는 나라”로 한국정치의 부패와 무능을 지적한다.         1905년 을사조약후 주한총령사로 부임한 헨리 코번은 고종을 비판하면서 성격적으로 우왕좌왕하는 약점이 있으며 많은 영국인들은 한국이 한마디로 기회를 스스로 놓쳐버렸고 자력할수도, 개척할수도 없다면 외부로부터라도 개혁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영국인 매크리비 브라운은 당시 저명한 애국자관료 민영환에게도 공공정신이 결여하며 일본지도자들과의 헌신적 희생과 대조적이라고 한다. 전봉준이 동학농민전쟁에서 체포된 다음 심문받는 당시 중앙정부의 탐관오리로 민영준과 함께 민영환을 꼽았다. 일제침략에 목숨을 바쳐 반항한 애국자에게도 이런 숨겨진 “악”이 있었던것은 충격적이다.   동경주재 영국령사 구빈스도 1902년 서울에 있은적 있는데 그는 한국을 “완전 붕괴상태에 있는 동양국가”로 묘사하였으며 동아시아정세에 투철한 관찰가 새토우는 “한국을 에워싼 국제적모순은 한국정부의 허약함과 부패, 당쟁싸움에 의해 조장되였다”고 지탄하면서 “토이기가 유렵의 환자”라면 한국은 “동양의 환자”라고 표현한다.   1880년대초에 일본을 방문한적 있는 비숍녀사는 한국인의 특성의 하나로 “시간관념이 박약하여 매사에 서두르는 법이 없다”고 지적한다. 한국은 쇠락하고 죽어가는 나라이며 황궁에서 최하층 빈민에 이르기까지 개혁에 집요하게 저항하는 보수주의 나라라고 꼬집는다. 그리고 그녀가 관찰한 한국의 모습은 서양문명의 “청결”이 결여된 “더러움”이였다.   “북경을 보기전까지 서울이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도시”라고 비숍은 고백한다. 서양인들은 “서울은 눈과 코가 다 괴로운 장소”라고 했으며 반면 일본은 “거지도 더러움도 없는 근대성을 나타낸 곳”이라고 례찬했다. 따라서 “일본인은 몸과 옷이 다 청결하고 한국인은 옷은 청결하나 몸에는 관심없는데 중국인은 둘 다 청결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서양인이 본 동아시아 3국 청결문명비교론은 흥미로운 지적을 하고있다.   영국인들은 한국을 “3천마리의 소를 기르면서도 30년동안 한번도 외양간을 청소한적이 없다는 그리스신화속의 ‘아우게이아스왕의 마구간’”에 빗대며 이것을 “청소할수 있는 자는 일본인뿐”이라고 판단한다.   서양인이 바라본 한국인의 국민성은 대체로 “간교하고 진실하지 못하며” “고집이 세고 도덕심이 부족하며” “남녀가 다 더럽고 씻기를 싫어하고 단정치 못하며” “누워서 빈둥거리며 생각에 잠기기를 좋아하는 사색을 즐기는 민족”이며 공통적특성은 “게으름”이라고 지적한다. 백년전 민족의 성격이 지금 우리가 인식하고있는 표상과는 너무나 괴리된 모습들이다.   비숍은 만약 한국인이 정직한 정부에 의해 산업이 흥하고 생계를 보호받을수만 있다면 진정한 의미의 “시민”으로 성장할것이라고 판단하면서 국내 정치의 부패와 착취가 원인이라고 한다.   《데일리 메일(Daily Mail)》의 특파원으로 한국에 주재한 언론인 매켄지도 한국인의 사랑스러운 면을 발견하면서 동정적이고 일본의 진면목을 알자 반일태도를 갖게 된다.   하지만 영국인에 비친 한국인은 “세상의 채찍아래서 침묵의 무관심을 고집하는, 건강하지만 무관심한 양들의 나라”로 비유한다. 따라서 특기할것은 일본인들의 지대한 애국심에 비해 동시기의 한국인에게 민족감정이 없고 국가나 집에 대해 자부심이 없다고 판단한다.   그리하여 영국인 관찰자들은 “한국이 어차피 독립국자질을 가지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린다. 백년전 우리에게 발견되는 모습은 우리가 언제나 특별히 강조할만큼 민족심이 의외로 결여했다는 사실이다. “민족”이란 말이 백년내지 80년전에 만들어진 단어이듯이 한국 민족주의도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는 과정을 체험하면서 형성, 보급된것으로 이제 다시 봐야할것이다.   “한국병합”에 대해 결론은 “왕의 무능과 부패, 일반국민의 무지와 무관심에 일관해있기에 자립이 어려우며 따라서 외부로부터 개혁이 필요하다”는것이였다. 1910년 영국의 언론은 일본식민지지배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일본이 계몽의 스승으로 한국을 지도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여전히 높았다.   1928년 한국 경성제국대학에 와서 영어교수로 있던 영국 소설가 드레이크의 발언을 보자.   “어떤 민족이 강압적통치를 받았다면 그것은 그들내부에 그럴만한 리유가 있기때문이다. 아무튼 멸망한 민족은 스스로에게 책임을 져야만 한다. 조선이 악의 무고한 희생양들이라고 심약하게 동정해서는 안된다.”   서양인의 평가, 지적은 귀아픈 소리이지만 또한 “한국평화”의 오리엔탈리즘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한 부분도 혼재돼있으나 100여년전의 국민성, 사회실정, 정치, 경제 등을 종합적으로 보아 매우 지대한 의미를 지닌 지적이다. 남의 탓, 비판도 필요하지만 우리 스스로의 자기생활은 그 이상으로 더 중대한 의미를 갖고있음을 우리는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59    (59) “한국병합”에 로정된 한국의 결함분석 댓글:  조회:5043  추천:82  2014-05-24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59) "한국병합"에 로정된 한국의 결함분석         김문학             약소국인 이웃 한국에 대한 강대제국 일본의 “한국병합”은 제아무리 “미화(美化)”시키려 해도 당한 피해자측에서는 감수하기 어려울것이다. 한국병합후 구체적으로 실시된 정책이나 운영에서의 명암에 대한 프리즘분석은 중요하며 그것은 반드시 내실을 규명하는데 필요불가결의 사항이다.   그리고 피해자측에서 가해자에 대한 비판은 당연한 리치이며 그 비극에 대해 아무리 강조해도 성차지 않을것이다. 하지만 력사의 주인공이 타자(他者)와 자기로 이루어졌을 때 타자에 대한 비판 특히 감정적 비난절하만으로 고집하면 자신에 대한 반성, 사색의 기회를 스스로 결탁시키게 되는 우를 범한다. 원인은 타자, 자기 량측에서 찾는것이 합리적이고 타당하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한국병합”에서 일본에게 병합의 구실을 준 우리 자신, 우리 민족의 100년전의 원인을 반추해봄으로써 그동안 우리가 게을리했던 자기성찰의 기회를 마련하고자 한다.   필자의 이같은 언설은 아마 지금도 일반대중들에게 수용되기 어려울듯하며 안이하게 대방의 편을 든다는 감정적비판이 동반될지도 모른다는 위구심도 있다. 그러나 바로 이같은 안이하고 감정적 리유로 반성을 태만하는 우리의 모습에 대해 자기비판의 메스는 더욱 그 필요성과 절박성을 느낀다.   필자는 력사를 해독함에 립장을 늘 아래와 같은 두가지로 취하고싶다. 하나는 “경직되고 감정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다양하고 유연한 시각에서 력사를 바라보자”는것이다. 또 하나는 “력사의 지나간 불행을 타자에게만 넘기려는 성향이 강한 우리의 사고방식을 이제 편견어뵤이 자타(自他)의 복합적시각에서 바라보는 사고방식, 력사읽기로 바꾸자”는것이다. 그리고 늘 타자 탓만 하기앞서 자신에게 원인을 찾는 성숙한 사고와 안목을 갖추어야 한다는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아는 한 “한국병합”을 당한 원인을 조선조, 한국측에 내부에서 철저히 규명한 인물은 유감이지만 지극히 드물며 또한 그런 인물은 “매국노”로 지탄받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한국병합을 세계근대사 및 동아시아 근대사의 시야에서 살펴볼 때 조선조말(구한말)이나 20세기의 초반에까지도 “문명”의 “개화”에서 수동적이였고 태만했으며 “전쟁과 혁명”이란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게 된다.   즉 일본이 “문명개화”에 대응하여 신속히 메이지유신을 통해 또한 두차례의 전쟁(청일, 로일)을 통해 국민국가라는 독립자주적으로 강유력한 나라로 탈바꿈하지만 한국은 1910년까지 여전히 일본이나 서구에서 보면  “문명”이 아직 어두운 “조용한 은둔의 나라”였다.   조선말기의 사회는 사실 우리가 지금 인식하고 또는 상상하고있는 모습과는 상당히 괴리된 모습이였다. 서양인의 기록이나 조선지식인의 기록을 종합하여 보면 알수 있는데 그때까지 조선조사회는 여전히 농후한 노예제도가 그대로 존속했다. 고려조가 정한 노비안검법, 노비환천법이 조선조에서 노비변정도감과 장예원을 설치해서 노비를 집중적으로 관리했으며 노비제도가 사회의 근본원리의 하나가 되였다. 그러나 “이런 노예제도가 근 천년을 존속해왔지만 그에 대한 피찬이 거의 없었다”고 한국 평론가 복거일씨는 지적한다. 노비제도를 없애고 조선인이 법앞에서 평등함을 이루게 한것은 사실 1894~95년 갑오갱장(甲午新張)이란 혁명적개혁이였다. 그것이 일본의 강요에 따랐다는 하나만으로 평가절하하는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기실 바로 일본의 압력에 그나마 일본을 모델로 성공했던것이 사실의 핵심이다. 만약 갑오혁명의 성과가 뚜렷하지 못했다고 비난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민비조선왕조의 수구파에 의한 탄압이여야 한다.   1883년~85년의 《윤치호 일기》를 보면 당시의 사정을 잘 알수 있다. 당대의 탁월한 개화파 지식인의 한사람으로서 조선조의 결함을 서양과 일본과의 비교를 통해 잘 인식하고있었다.                                                 “대저 우리 나라 인민은 무식하여 전재(錢財)가 아니면 꾀여쓸수 없다.” “상께서 비록 좋은것을 알고 또 행하려고 하니 하나 주저하고 의심이 많아 잠시의 평안함을 얻으려 하며 소간(小奸)들에게 현혹되여 능히 결단하는것이 별로없다.” “그러니 일의 성과는 얻기 어렵고 꾀하는것은 많으나 실적은 없게 된다. 아아, 사람으로서는 어찌할수가 없는것을 하늘의 명이라 하니 이것이 하늘의 명인가!” “서양 남녀들이 세상을 횡행하나 능히 대적하지 못하는것을 생각하니 문명의 귀중함이 부럽다. 우리가 미치지 못하는것이 가장 원통하고 우리 나라가 떨치지 못하는것이 매우 근심스럽고 일본인들이 능히 변화한것이 참으로 대견스럽다.”(이상 《윤치호 일기》 송병기 옮김)     “대저 우리 나라 인민은 무식하여 전재(錢財)가 아니면 꾀여쓸수 없다.” “상께서 비록 좋은것을 알고 또 행하려고 하나 주저하고 의심이 많아 잠시의 평안함을 얻으려 하며 소간(小奸)들에게 현혹되여 능히 결단하는것이 별로 없다.” “그러니 일의 성과는 얻기 어렵고 꾀하는것은 많으나 실적은 없게 된다. 아아, 사람으로서는 어찌할수가 없는것을 하늘의 명이라 하니 이것이 하늘의 명인가!” “서양 남녀들이 세상을 횡행하나 능히 대적하지 못하는것을 생각하니 문명의 귀중함이 부럽다. 우리가 미치지 못하는것이 가장 원통하고 우리 나라가 떨치지 못하는것이 매우 근심스럽고 일본인들이 능히 변화한것이 참으로 대견스럽다.”(이상 《윤치호 일기》 송병기 옮김)   당시 조선정부에 대해 철저히 실망한 지식인들이 눈길을 돌린 곳이 일본이였다. 조선정부가 하지 못할 모델을 국제적시야를 갖춘 그들이 서구문명수용에 성공한 일본을 배우는것은 자연스러웠다. 지금도 외국에서 류학하면서 그 선진문물을 배우는것에는 흠이 안되지 않는가.   일본식민지통치에 통렬히 비판하고 한국에 대해 가장 동정심을 품고있던 당시의 영국인 지식인 프레더릭 매켄지는 “모든 편견을 버리고 관찰하면 오늘 한국이 독립을 상실한 리유는 구조선왕조의 부패와 취약성에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제3자의 눈에서 바라본 력사비극의 책임원인이 조선인 자신에 있었다고 지적한다.   1904년에 등장한 일진회는 현재 무조건 친일단체로 일축하지만 이용구 등 인물들이 조선조, 한국의 적극적인 개혁을 회피한 정부에 실망하여 일본과 합방하여 나라를 개혁하자는 구상을 갖게 되는것은 자연적인 개혁수단의 하나였다. 김옥균 등 갑신정변의 구상과 맥을 같이하고있으며 그 적극적인 인소에 대해 재고해야 할것이다. 나라를 구하는 방법은 한가지가 아닌 다양한 양상을 로정했다는 면을 우리는 다시 인식해야 한다.   근대 한국이 일본에게 치욕적인 “병합”을 당한 우리 측의 원인을 필자는 다음과 같이 요약해본다. (1) 중국 이상으로 경직한 유교식인치(人治)체제 (2) 전근대적 등급관계, 종속관계사회 (3) 중국 유교식가치관과 맹목적인 문명우월주의 (4) 실행력이 약한 공론, 공담적 국민체질 (5) 세계인식에 대한 유연한 사고와 대응의 결여 (6) 가족, 혈통에 짓눌린 혁명의식의 결여 및 박약함 (7) 국가보다 자신의 집단보존을 우선시킨 리기성 (8) 민족의식, 자립의식의 박약 (9) 근대 국민국가의 미완성 (10) 중앙집권제의 부패성.   “한국병합”의 교훈에서 우리 자신이 성찰해야 할 결함을 분석해 보면 결국 우리 자신이 독립의 길을 일본인에게 내준 셈이 되기도 했다. 100년후인 오늘 우리는 다시한번 경건하고 겸허한 심정으로 그 리유와 함께 우리안에 내재된 치명적결함을 재사고, 재인식 해야 할 때다.    
58    (58)"한국병합"의 본질은 무엇이였나? 댓글:  조회:4501  추천:16  2014-05-19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58) "한국병합"의 본질은 무엇이였나?           김문학              일본제국에 의한 “한국병합”은 근대 아시아사에서의 한국의 불운한 “운명”으로서 그것이 100년전의 과거사의 가장 침울한 한페이지를 연 기성사실(史實)이였다. 일본제국,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을 위해 또는 동아시아 근대의 이같은 불행의 재연을 막기 위해서 그 프리즘분석을 통해 본질을 규명하는 작업은 안이한 비판 이상으로 중요한 과제이다.   최근 일본과 한국의 근대 사학자들이 근대 한일관계의 상징적인 이 병합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고 다시각적으로 전개되고있어 많은것을 시사해준다.   당시 일본의 “한국병합”은 서구렬강의 식민주의를 답습한 아시아의 식민지정책에서 기인되는데 물론 구미렬강에 대한 대항사상도 깔려있었으나 “대륙국가구상”, “대아시아주의”라는 그 우미한 슬로건은 여하튼 침략, 지배라는 구도로 행사됐던것이다.   한국병합 역시 그 맥락의 초보단계였으며 병합모델로 당시 4종류가 있었다는 분석결과가 나오고있다.   일본의 근대사학자 메이지대학 명예교수 운노 후쿠쥬의 연구에 의하면 (1) 자치식민(自治植民)모델(이토 히로부미의 병합론), (2) 련합국가모델(일진회의 합방론), (3) 위임통치모델(일본의 헌정본당의 병합론), (4) 야마카타, 테라우치, 카츠라의 한국병합론이 전개되였다.   (1)은 주지하는바와 같이 이토가 한국의 능력을 믿고 “자치육성”식이며 장차 독일제국류의 련방제로서 일한의 통합론을 구상했던것이다.   (2)는 1904년~1909년 이용구, 송병준(宋秉畯)이 주도한 한국인단체 일진회(一進會)가 1907년 제출한 일한 량민족이 대등적으로 합동하여 련방제국가를 술비하자는 리상화한 구상이였다.(일진회에 대해서는 별도로 이 책에서 론술하기로 한다.) 동아시아의 일본 일극지배적 종속관계의 패권을 노린 일본정부가 이 구상을 찬성할리 없었다.      (3)은 1909년 이토의 보호정책을 비판하면서 헌정본당이 제출한 대한국정책플랭이다. 당의 유력한 인물이며 한국통인사이기도 한 오오우치(大內暢三)는 “통치의 근본을 해결해 정무기관의 전부를 우리 나라에 위임하는것”이라 주장하며 옛 오스트랄리아=헝가리제국이 오스만제국 지배하의 보스비아.헤르체고비아지방을 30년간 위임통치한 방식을  창안했다. “그러나 헌정본당의 비판의견서나 대한정책의 전환에 관한 주장은 가츠라(桂)수상에 대하여서는 한국병합을 결의한 촉박요인이 된 동시에 병합실행의 순풍(順風)적 역할을 했으나 그 ‘위탁통치’는 결국 이토와 류사한 발상이였으므로 수용될수 없는 플랭이였다.”   이제 남은것은 제4의 방안이였다. 이토와 한고향 친구로서 정계의 라이벌이기도 했던 야마카다 아리토모(山縣有朋)는 이토의 점진적 한국지배정책을 극력 반대한 인물이였으며 일본 근대륙군의 창설자로서 그의 구상에는 군의 통치로 합병시키는것이였다.   역시 군인출신의 당시의 수상 가츠라, 륙군대장이며 야마카다의 충실한 부하인 테라우치(후에 초대 조선총독, 수상으로 되기도 한다)는 의기상투하여 이토의 방식을 면종복배하면서 부정하여 그들이 발안한 절대적군사력으로 지배하는 병합정책을 적극 추진하게 된다.   1909년 10월 이토가 암살당하자 걸림돌이 없어진 그들은 공공연히 자신들의 숙성해온 한국병합을 주장하며 실행에 착수한다.   문제는 전술(前述)했듯이 약소국 통치에도 3가지 모델이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완전히 민족을 “말살하려”는 전면 병합정책을 택했는가 하는것이다.   근대 아시아적시야에서 로정된 사실을 회고하면 이토가 사라지고 1909년 9월 10일에 림시한국파견군 약 400명이 전라도지방에서 감행한 “남한폭도토벌작전”에 의한 의병의 항일운동이 침정화추세를 보이고있었다. 그리고 1908년경 청국의 독재자 서태후가 죽고 청조의 붕괴과정이 가속화해지며 3년후인 1911년 신해혁명에 이르는 혁명세력이 강화됨으로 이 모든 정세는 일본의 대륙침략정책에 유리한 쪽으로 흘렀다. 이리하여 이 틈을 놓칠세라 성급하게 한국병합을 단행한것이다.   8월 29일 《한국병합조약》과 함께 일본이 국내외에 공포한것이 《동관련칙령》, 《제령》, 《천황조서》, 《한국황제 칙유》였으며 14개 국에 선언통지를 보냈다. 아울러 그날 조선통독부 설치, 조선에 시행할 법령에 관한 긴급칙령을 발포하며 10월 1일 테라우치의 초대 조선총독 임명(륙군대신 겸임)을 발표하며 4일 한국내각 해산식을 거행한다. 이상의 8월말~10월초의 일본정부의 한국병합운영에서 로정된 시급한 스케줄은 그들이 그 얼마나 한국을 손아귀에 넣고싶었던가 하는 제국의 야망이 남김없이 나타난다.   일본이 그 아무리 한국을 위한 병합이라고 주장해도 그 위장된 표현안의 실질을 덮어감추지 못할것이다. “한국병합에 있어서 대한제국황제가 ‘일체 통치권을 완전 또한 영원히’ 일본국황제에 양여하는것을 요구했다며 일본국황제는 ‘양여를 수락하고 또한 전연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을 승인한다’는 국제법에 의거한 형식을 갖추고있다”고 지적하며 교또대학의 근대사상연구자 야마무로 신이치(山室信一)는 이렇게 밝히고있다. “이로 의해 중국을 중심으로 성립돼온 책봉, 조공체제에 바탕을 둔 동아시아세계를 국제법에 따라 재편성하는 메이지국가의 숙원은 달성된 셈이다. 그러나 거기의 국제법이란 그야말로 키도 타카요시(木戶孝允)가 구미에 의해 구사한 국제법의 본질을 간파한 ‘약국을 수탈하는 도구’로서 리용했던것이 아닌가.”   일본제국에 의한 “한국병합”의 본질의 소재는 바로 여기에 도사리고있었던것이다. 8월 29일 발포된 메이지천황의 《조서》에는 “짐은 천양무궁의 대업을 널리하고 국가비상의 례(신분에 따른 의식, 등급)를 갖추기 위해 전 한국황제를 왕으로 책봉한다”고 직언하고있다.   이것이야말로 국제법을 미끼로 한 전근대적 동아시아질서를 책봉, 조공시스템으로 유지해온 청조의 전례를 답습한것이 아닌가. 1910년 8월 이후 일본은 약체화된 청조를 대신하여 새로운 타입의 그로테스크한 동아시아의 책봉, 조공체제의 정상에 군림하여 아시아의 침략지배를 공공연히 행사했다.  
57    (57) 1910년 8월 22일의 황혼 댓글:  조회:4681  추천:24  2014-05-12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57) 1910년 8월 22일의 황혼           김문학            1910년 8월 22일. 한국 근대사상 가장 암흑의 날이였다. 이날 황혼과 함께 바야흐로 락일(落日)무렵 무시무시한 계엄체제하에서 《한국병합조약》조인식이 진행되였다. 바로 이날 일본천황은 조선의 테라우치통감이 보내온 《한국병합조약》을 추밀원에 자문한 뒤 즉각 재가했다. 22일 한국의 어전회의에서도 병합에 반대한 이용식 학무대신이 결석한 외 이완용, 조중응, 박제순, 고영희 및 김윤식, 민병석, 윤덕영, 이병무 등 대신이 참석했으며 순종황제가 통치권양도를 선지하고 서명과 국인을 박은 전권위임장을 총리 이완용에게 넘겼다. 이완용이 조약안을 배포하고 설명을 한데 대해 출석자들은 찬동하였으며 순종도 이에 재가했다고 한다. 김윤식의 《속음청사》에 보면 “제신(諸臣)들은 서로 묵묵히 바라보며 안색을 읽었다”고 하며 자신은 “불가”로 반대를 표했으나 모두 묵인하고 슬픔에 잠겨있었음을 알수 있다.   오후 4시경, 이완용, 조중응이 통감부에 찾아가 조약체결수속을 밟기 시작했다. 일한 량국어로 된 조인서 2통을 테라우치와 이완용이 서명, 조인했다. 자신의 플랭대로 일이 성사된것에 대해 테라우치는 일기에다 “합병문제가 여차하게 쉽게 조인될줄이야. 하하”라고 기쁜 심정을 적고있다.   한국병합에 이르기까지 일본정부는 용의주도한 기획을 거듭해왔던것이다. 이토 암살전인 1909년 4월 10일, 당시의 카츠라(桂)수상, 고무라(小村)외상은 “대한방침”, “대한시설”을 이토에게 제시했는데 외무성 정무국장 쿠라치(念地鐵吉)에게 그 초안을 작성케 했던 문서였다.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병합한다”는것이 그 골자였다. “병합”이란 단어는 쿠라치가 고안한 신조어인데 합병(合倂)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극적이 아닌 이 말을 만들었던것이다. 합병(合倂)도 병탄(倂呑)도 아닌 병합(倂合)으로 평등, 공정한 뜻을 강조하기 위함에서였다.   이토가 죽은 뒤 병합정책은 장애물이 없어진것으로 성급히 진척된다. 국제적승리의 합법성의 빌미를 획득하기 위해 우선 1910년 2월 고무라외상이 로씨야와 교섭하여 로씨야정부의 동의를 얻는다. 한국병합승인을 대가로 로씨야의 청국침략을 일본에게 협력을 기대했던것이다.   이어서 1910년 5월 19일 고무라외상은 영국 주일대사 맥드날드와 병합을 타진하여 영국리익을 보장하는것으로 일본의 병합에 찬성한다.   이렇게 약소국 조선은 세계렬강이 유린하는 상대로 되였으며 병합은 렬강의 “공범”이기도 했다.   1910년 5월 륙군대장 테라우치(寺내正毅)가 아라소네 2대 통감을 제치고 제3대 통감으로 임명되는데 그는 가츠라수상의 오른 팔이 되여 한국병합기획에 적극 투신해온 인물이였다.   7월 8일 일본 내각회의에서 병합조약, 조칙안(詔勅案), 선언안(宣言案)을 승인하였다. 국명을 “조선(朝鮮)”이라고 결정했다. 조선은 옛 호칭이기도 하며 “조용한 아침의 나라”(《동국여지승람》)에 유래되며 그 리유에는 또 특별한것이 있었다. 병합한 뒤 량국이 한 나라로 합방되므로 병합후에도 일국이 존속하는 인상을 주는 “한국(韓國)”이란 명칭은 그 “국(國)”자때문에 일본정부가 기피했던것이다.(《한국병합》 운노후쿠쥬)   한편 한국에서는 정부의 경찰기구를 통감부에 흡수시키고 일본의 헌병, 경찰 제도를 군사경찰과 일체화시킨다. 일로전쟁에서 간첩전을 전개한 아키이시(明石元二郞)가 통감부 경무총장을 겸임한다.   7월 23일 한국에 부임한 테라우치는 8월 16일, 이완용수상을 불러 병합조약의 수락을 강요한다. 우선 병합은 “합의적조건”에 따라 진행해야 된다고 하면서 《병합방침각서》를 내놓았다. 이에 대해 이완용은 “국명은 의연히 한국으로 존속시키고 황제에게는 왕의 존칭을 주기 바란다”고 강하게 나왔다. 1909년 11월 이토의 추도식에 참가했던 이완용은 그때 역시 가츠라수상을 만나 한국 국왕의 존속, 한국정부 수반을 한국인으로 할것 등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이 이완용의 요구를 전부 받아들일리 만무했다. 국왕존속 등 요구는 형식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럼 《한국병합조약》, 정식으로는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의 내용은 어떤것인가? 그 전문(全文)을 보자.   한국 황제페하와 일본국 황제페하는 량국간의 특수하고 친밀한 관계를 회고하여 상호행복을 증진하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코자 하는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서는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만 같지 못한것을 확신하여 이에 량국간에 병합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고 일본국 황제페하는 통감 테라우치를, 한국 황제페하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각기 전권위원으로 임명한다. 이 전권위원은 회동합의한 뒤 아래와 같은 내용의 조약에 협정하였다.   1. 한국 황제페하는 한국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국 황제페하에게 양여한다.   2. 일본국 황제페하는 전조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 전연 한국을 일본국에 병합함을 승인한다.   3. 일본국 황제페하는 한국 황제페하, 태황제페하(고종), 황태자페하와 그 후비 및 후처(부인들)로 하여금 각기 지위에 응하여 상당한 존칭, 위엄 그리고 명예를 향유케 하며 또 이를 유지하기에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것을 약속한다.   4. 일본국 황제페하는 전조 이외의 한국 황족과 그 부인들에 대하여 각기 상당한 명예와 대우를 향유케 하며 또 이를 유지하기에 필요한 자금을 공여할것을 약속한다.   5. 일본국 황제페하는 훈공있는 한인으로서 특히 표창을 행함이 적정하다고 인정하는 자에 대하여 영작(귀족의 지위)을 수여하고 또 은금(하사금)을 준다.   6. 일본국정부는 위와 같은 병합의 결과로서 모든 한국의 시정을 담임하고 일본국에 려행하는 법규를 준수하는 한인의 신체와 재산에 대하여 충분한 보호를 하며 복리의 증진을 도모한다.   7. 일본국정부는 성의와 충실로 신제도를 존중하는 한인으로서 상당한 자격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한에서 한국에 있는 제국관리로 등용한다.   8. 본 조약은 일본국 황제페하와 한국 황제페하의 재가를 받은것으로 공포일로부터 시행한다. 그 증거로 두 전권위원은 본 조약에 기명조인하는것이다.                                                                                                                     용희 4년 8월 22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명치 43년 8월 22일 통감자작 테라우치 마사타케       《한국병합조약》 이후 1주일 동안 비밀에 붙였다가 국내외에 대한 정식 발표는 8월 29일이였다. 이리하여 조선왕조는 멸망하고 일본국의 일부가 된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멸망된 청조가 신생의 한족중심의 공화국 중화민국으로 된데 비해 조선왕조는 일본인에게 멸망당하며 그것은 조선민족의 비극이였다. 외국에 의해 강제병합의 형식으로 기나긴 36년의 식민지지배가 시작되기때문이다.  
56    (56) 한복을 입은 이토 히로부미 댓글:  조회:6500  추천:42  2014-05-05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56) 한복을 입은 이토 히로부미 김문학            1, 일본에 2, 이등박문이란 사람이 3, 삼천리금수강산을 4, 사방에서 바라보고 5, 오적을 매수하여 나라를 앗아갔기에 6, 륙연발권총으로 7, 칠발 쏘아서 8, 팔도강산을 다시 찾으니 9, 구사일생의 왜놈들은 10, 십만리밖으로 뺑소니치네.   한국통감으로 사실상 조선의 지배자로 군림했던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10월 26일 오전 할빈역두에서 조선청년 안중근에게 암살당했을 때 조선인들이 지어불렀던 수자풀이노래였다. 한국통감 이토의 지배에서 받았던 그 울분의 한을 이렇게 민중들은 풀었던것이다.   “한국통감부 통치의 명과 암”에서 기술했듯이 1905년 제2차 일한협약(日韓協約, 을사조약)에 따라 한국통감부를 설치한다. 당시 초대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에 의한 보호정치가 시작된다.   최근 한국과 일본 및 서양학자들의 연구(한명근, 이토 유키오, beasley)에 따르면 이토는 한국을 독립국으로 하여 “자치육성정책”을 실시하며 일본이 실권을 쥔 지배방식을 시도했다. 따라서 그는 의도적으로 한국인에게 친한(親韓)의 이미지를 만들려고 애썼다.   《대구물어(大邱物語)》(가와이(河井朝雄), 1929)에 따르면 1905년 11월 일본전권대사로 한국에 온 그는 한성근처의 안양에서 유렵을 즐긴적이 있다. 프록코트를 입은 이토는 백발이 성성한 한국의 농민에게 다가가서 친절하게 인사를 나누고 천진란만하게 담화를 즐겼다는 일화가 등장한다.    이같이 한복차림으로 로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등 행동에는 자신이 한국을 매우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의 소유자이며 따라서 “일본과 한국은 한집안이라는 정치적은유가 숨어있다.”(최재묵)   《이등박문전(伊藤博文傳)》(춘무공추송회(春畝公追頌會.1940)에 그가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은 에피소드가 나온다. 1906년 1월 이지용, 박희병 및 그들의 부인들과 나란히 한복차림으로 사진을 찍은 이토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에서 이토의 왼쪽 앞줄에 앉은 녀성이 이토의 부인 우메코(梅子)인데 역시 한복차림을 하고있었다.   한복이 한민족 전통의 상징이며 민족의 심벌이기도 하다는것을 이토는 숙지하고있었기에 그는 한복을 입고 한국을 사랑하고 존중한다는 표상을 적극 자작하였다. 그의 각종 전기, 회상기를 섭렵해보면 이토는 명예욕과 자부심이 유난히 강했는데 자기현시욕과 그 표현력이 강한 성격의 인물이였다.   금전욕에는 담박했으나 색욕과 현시욕에는 출중했다고 정평이 나있기도 하다.   자연히 그런 이토가 한복차림으로 자신의 “친한(親韓), 지한(知韓), 애한(愛韓)” 표상수립에 적극 자작자연했을것이리라. 영남대학 최재묵교수의 말을 빌면 “한복을 입은 이토의 행위는 한국의 제도나 전통을 존중하며 일정한 자치를 인정한다는 정치적 제스처(시늉)였다. 그것은 한국 민심향배(向背)에 부심한 일종의 계산된 정치적연기이기도 했다.”   “한복차림의 이토”, 문인답고 선비다운 풍모를 100년이 지난 우리에게도 느낄수 있는 사진이다. “한국침략의 선두주자”란 한국 교과서의 기술은 맞다. 그런데 침범하여 그가 무엇을 어떻게 했느냐 하는 구체적내용에 대해 우리 자신도 모호하다. 그리고 “극악무도”의 인물이란 평은 사실과 어긋난다. 최근 속속 등장되는 이토연구서나 전기에 의하면 필자는 우리 동포가 표상으로 막연히 인식하고있는 이토의 인물상은 너무나 조잡하고 편향적이다는것이다.   이토가 중요한것은 한국식민의 설계자적인 위치의 대극에 있은 원쑤이기때문이다. 따라서 민족교육의 “신성한” 차원에서 이토는 반드시 “악의 상징”으로 평가절하해야 하고 지어 왜곡해도 무관하다는 태세다. 력사는 단순히 민족정서나 민족의 뜻으로 풀이되는것이 아니라는 룰을 우리는 짓밟고있다.   필자가 새로 발견한 이토의 인물상, 한일관계에서 로정된 이토는 “극악무도”로 일축할 인물이 아니며 안중근이 우리 민족의 영웅이듯 그 역시 일본의 근대를 만든 영웅적거물이며 또한 일류의 정치가, 사상가, 정략가란 당대의 대표적 인물이란것이다.   이토의 이름 박문(博文)은 《론어(論語)》의 “군자박학어문, 약지이례(君子博學於文, 約子以禮)”에서 따온것이며 문을 숭상한 문인, 시인형 정치인이였다. “문명(文明)”, “립헌국가(立憲國家)”, “국민정치(國民政治)”가 그가 노린 평생의 리상이였으며 한국통치의 정치적철학은 “일본국민을 문명의 민으로 계몽하듯이 문명정치를 한국에서 실시하고싶은것”이였다.   1906년 그는 니이토베에게 이렇게 말한다. “조선인은 대단하다. 이 나라 력사를 보아도 그 진보는 일본보다 월등 앞선다. 이런 민족이 나라를 스스로 경영하지 못할 리유가 없다...인민이 나쁜것이 아니라 정치가 나빴기때문이다. 나라만 잘되면 인민은 량과 질에 있어서도 부족점은 없다.”(니이토베전집 5권)   이토는 한국의 기존 질서, 가치관을 되도록 존중하며 점진적 문명국으로 전환시킬 꿈을 안고있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한국 유교소양에 애착을 갖고있었으며 한국 유림을 활용하려했으나 한국 유교적사상이 하나의 보수사상으로 한국의 개혁을 막고있는 보수파라는것을 실감한다. 마치 중국 무술변법시 유교적인 보수파층과 같이 한국에도 중압적인 존재가 되였다. 유교에 대한 회유책을 시도했으나 드디여 실패한다. 그의 “문명화”는 유교권에서 지지를 얻지 못한채 흐지부지해진다.   그러나 이토는 한국전통과 민족성에 대해 관심을 돌려 한국에서 교육에 종사한 일본인 교사들에게 한국국민성 존중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가 한국통치구상에서 새로 발견된 메모에 다음과 같은 플랭이 보인다. “① 한국 8도에서 각 10명씩 의원을 선출해 중의원(衆議院)을 조직한다. ② 한국 문무량반중에서 각 50명 원로를 호상 선출하여 상원(上院)을 조직한다. ③ 한국 정부대신(大臣)은 한국인으로 조직하고 책임내각을 구성시킨다.  ④ 정부는 부왕(副王)의 수하에 속한다.”(《말송자작가소잠문서(末松子爵家所箴文書)》)   이토는 1909년 4월에야 한국병합을 인정하며 병합후에도 한국의 정치자치를 주장했으며 의회정치를 통해 한국의 문명화를 실현하여 장래 한일동맹을 구상했다고 밝혀졌다. 그런데 이토의 암살로 그의 플랭은 일편의 종이쪼각으로 남고말았다. 이토가 자신을 저격한 인물이 조선청년이란것을 알고 절명직전에 남긴 “바보같은 자식”이란 말의 뒤에는 자신의 진의를 모르고 자신을 원쑤로 저격했다는 뜻이였을가? 그뒤 합방이 정식 이뤄지고 이토의 구상과는 달리 데라우치(寺內) 초대 조선총독의 가혹하고 강압적인 무단(武斷)정치에 들어선다. 이토가 살았다면 조선은 어떻게 됐을가? 상상으로 그 공백을 메울뿐이다.   그러나 안중근이 이토의 진의를 몰랐다해도 그의 죄가 아니다. 죄는 수단의 여하를 불문하고 이민족을 지배하려 했던 이토에 문책해야 한다.   
55    (55) 백년전 중국인이 발견한 “일본문명” 댓글:  조회:4398  추천:32  2014-04-26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55) 백년전 중국인이 발견한 "일본문명" 김문학            아놀드.J.토인비, 사무얼. 헌팅턴, 버그비 등 20세기를 대표하는 문명사가들은 일본을 “하나의 나라로서 하나의 문명권을 이룬다”고 독특한 일본론을 전개해 왔다.   일본이 중국의 주변국임에도 불구하고 중국문명권에 귀속시킬수 없는 이질성, 독자성을 그들은 “일본문명권”으로 귀추시켰다. 1990년대 초반에 《문명의 충돌》에서 사무얼.헌팅턴은 세계를 8대 문명권으로 분류하고 일본을 중국형 유교문명권이 아닌 “일본문명권”으로 간주했다. 일본은 일본만으로 “하나의 유니크한 정신세계ㅡ문명권”을 구축했다는 주장의 계보에는 도인비, 슈펭글러, 버그비 그리고 일찍 100년전 일본에서 뼈를 묻은 라프케디오.헌[즉 고이즈미 야구모(小泉八雲)]도 있다.   그는 일본 동경대 영어교수로 부임되면서 20세기초의 일본에 매료되며 일본 녀자와 결혼을 하기도 한 인물로서 “일본통”이였다. 그는 《일본》, 《마음》(1904년) 등 저작을 통해 일본인의 내면세계, 미(美), “일본문명의 진수”를 발견한다.   같은 시기 서양인이 발견한 일본문명과는 달리 중국인은 류학을 통해 일본땅을 밟으면서 또다른 모습의 일본을 “발견”하게 된다.   서양지식인이 중국문명의 이질성에서 독자적 일본을 “발견”한데 반해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은  중국문명의 련관성에서 중국과 동질적인 일본을 “발견”하는것이 흥미롭다.   로신은 이렇게 술회한다. “당시의 류학계에서 혁명사상을 품은 자가 상당히 있었다. 실제적으로 운동에 뛰여든 자외에 신문을 낸 자도 있었으며 옛서적을 필사하는 자도 있었다. 베낀것은 거의가 중국에서 자취를 감춘 금서로 내용은 대체로 명말청초의것으로서 청년들에게 맹성(猛省)을 독촉하는 계기가 되였다.”(《략담향항(略談香港)》)   일본이란 이 동문(同文)의 린국에서 로신은 “회구(懷舊)의 념을 술회하고 옛것을 생각하는 정을 발하며 조상의 깊은 령(靈)을 빛내고 대한(大漢)의 천성(天聲)을 울리고자”하는 자유를 만끽한다.   그의 동생 주작인은 아예 일본을 중국옛날이 살아있다고 한다. 《일본지재인식(日本之再認識)》에서 주작인은 이렇게 말한다. “일본에서 받은 감각은 절반은 이역(異域)이고 절반은 고석(古昔)이며 그것도 이 고석은 우리 나라가 아닌 이역에 건재하고있는것이다.”    주작인의 회억에 따르면 그는 동향의 선배들이 동경의 거리를 거닐 때면 늘 일본집이나 가게의 간판의 서체에서 “여전히 당나라의 유풍이 존재하는것”을 느꼈다고 한다.   100년전 중국지식인들이 일본에서 발견한 일본문명은 중국 옛 “당나라의 유풍”이 의연히 남아있고 당나라의 중국옷이 “기모노”로 그대로 보존돼있는 습속전통이였다.   그런데 더 중요한것은 일본의 가시적(可視的)인 중국풍습보존뿐만아니라 중국의 고전문헌, 자료, 사료들이 무진장하게 남아있다는것을 발견하게 된다. 거기서 지대한 충격을 받는다.   일본에는 중국 청국에서는 이미 실종되였거나 자취를 감춘 금서, 기서, 희소본의 고전서적들이 잘 보존돼있었다. 견당사, 견수사 이래 중국에서 가져온 방대한 량의 고전서적을 완벽히 보존하고있었다.   중국에서는 력대 왕조의 정책에 의해 금서, 분서 처분을 늘 진행해왔으며 이데올로기에 의해 서적은 늘 피해를 받았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나 수양제의 분서 또는 청조때 중국고전문헌을 집대성한 《사고전서(四庫全書)》 편찬시에도 반청적 한족의 사상이 깃든 서적을 금서로 3천종 67만권이나 불살라버렸다. 그리고 전란과 자연재해로 서적의 소실, 분실, 파손이 엄중했다. 그리고 도둑이 들어 분실된 책도, 서양련합군에 의해 불살라버린 책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수입한 한서책을 소중히 보관했으며 따로 필사본을 남기기도 했다. 일본이 중국보다 전란이 적었던것 역시 하나의 리유이기도 하다.   아무튼 일본인은 중국서적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소중히 보관하였으며 특히 한적한 절에다 보존했다. 보존의 천재인 그들은 필사를 할 때는 좋은 일본지를 골라서 베꼈으며 진흙과 대나무로 쌓은 쿠라(일종의 창고)에 보존했는데 불, 물, 습기에도 강한 쿠라는 좋은 보존고였다.   1880~1890년대 일본에서 발견되는 중국고전서적을 찾아서 중국의 지식인들이 일본에 몰려들었다. 하여장을 따라 일본공사로 된 유명한 황준헌은 일본이 중국고전의 보물고라는 발견에 경악하며 적극 발굴, 구입하기도 한다.   제2대 일본공사 려서창(黎庶昌)은 부하이며 지식인인 양수경(楊守敬)에 명하여 수년간 일본에 산재한 고전을 발굴, 수집하게 한다. 그는 《고일총서》란 제목으로 그 책서목을 집결했다. 그리고 4년여동안 당, 송시기의 귀중본, 문헌자료 3만권이상이나 구입했다. 그중에는 《주역》 6권, 《상서자전(尙書子傳)》 잔본 5권, 《고문상서(古文尙書)》 13권, 《례기(禮記)》 20권이 포함된다.   유명한 지식인 동강(董康, 1867~1947)의 일본 방서(訪書)행적은 많은 업적을 쌓았다. 관료, 정치가, 법학가인 그는 량계초와 예전에 《시무보(時務報)》를 경영한적이 있으며 유신사상가이기도 하였는데 책을 목숨처럼 사랑한 인물이였다. 그는 1902년부터 1936년사이 무려 8차례나 일본에 가서 일본에 있는 중국서적을 수집, 구입하였는데 일본의 저명한 학자 나이토고난 등 많은 지식인과 교류하였으며 고서목록학을 위해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   이밖에 당시 청국류학생들에게 청조가 발금한 서적들 《양주10일기(楊州十日記)》, 《가정도성기(嘉定屠城記)》, 왕선산(王船山)의 《황서(黃書)》, 황종희의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 등은 귀중한 반청혁명지침서로 되였다.   근대 중국인의 고전서적 발굴, 수집에 대해 중국의 현대 사회학자들은 “문헌보급, 문물재현, 학술련의”에 지대한 의의가 있다고 언급한다.(趙欒)   그리고 또 하나 특기해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일본 근대 사상, 서적들이 중국어로 번역되면서 일본발 학지(學知)가 중국에 “신학(新學)”으로 수입되면서 중국 근대의 서양적문명개화에 막대한 영향을 행사한것이다.   이 일본문명에서 발신되는 학지를 수용한데서 형성되는 중국 근대문명에 대한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과도하지 않다. 단지 우리가 그에 대한 인식이 결여했을뿐이지 그 영향은 안일한 정서로 덮어감출수 없다. 고대 중국이 일본을 영향준것만큼 근대 중국, 조선은 같은 맥락에서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
54    (53)“문명개화”에 시작된 일본인의 육식 댓글:  조회:4983  추천:21  2014-04-14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53) "문명개화"에 시작된 일본인의 육식 김문학          메이지유신전까지 절대적으로 문명의 스승으로 모시고 수용했던 중국문명중에서 일본인이 자주적으로 결락시킨 “3대 아이템”이 있다. 그것은 거세(환관), 전족과 과거제도였다. 이 역시 일본인이 외국문명을 흡취할 때 그 좋은것만 따먹는 수용의 천재임을 스스로 자인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3대 아이템” 외에 또 한가지를 첨가해야 한다. 즉 고대 일본인이 중국에서 전형적 가축을 수용할 때 중국 고전 《순자(荀子)》, 《주례(周禮)》에 있는 가축 우(牛), 마(馬), 양(羊), 돈(豚), 견(犬), 계(鷄) 이 6축에서 양과 돼지(豚)를 루락시키고 대신 원숭이(猿)를 넣어 “5축”으로 했다.   그러므로 일본에는 중국에서 수용한 12띠갓(干支)에서도 돼지띠 대신 메돼지(野猪)가 있다. 그리고 일본 화투(花札)의 칠월 홍싸리밑에 그려진 동물 역시 돼지가 아닌 무서운 긴 이빨을 드러낸 메돼지다. 일본의 《고사기(古事記)》나 《일본서기(書記)》에도 돼지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으며 《속일본기》에도 천황이 돼지사양을 가르쳤다는 기사가 등장되지만 실제적으로 돼지를 비롯하여 소, 양 등을 육식하지 않았다고 한다. 에도시대에 와서야 돼지가 중국에서류구(琉球)를 거쳐 사츠마에 전해진다. 사츠마지역(일본 서남부)에서는 양돈과 함께 돼지고기를 먹었던것으로 추측할뿐이다.   일본인이 고대부터 육식을 기피하거나 절제한 대신  그들은 스스로 미(米)식과 “채식민족”으로 칭할 정도로 거기에 고집해왔다.   중국인과 한국인에게는 인류학적으로 기마민족, 목축업민이 혼혈되여 육식의 력사가 유구하며 어렸을 때 돼지 멱따는 장면이나 소를 죽이는 도살장면은 가끔 본 체험을 갖고있다. 그러나 지금의 일본인에게는 가축도살장면은 볼수 없었다. 돼지와 소를 잡아먹는 일이 농촌에서도 그리 흔한 일이 아니기때문이다. 그만큼 목축문화는 일본인에게 익숙한 문화가 아니였다.   일본의 육식은 근대 서양문명의 도입에서 시작된다. 한마디로 말해 서양인의 건장한 체격과 투지는 육식(소고기)에서 기인됐다는 인식이 있었던것이다.   1872년 궁중에 소고기가 납입되여 궁중주도형 육식이 스타트를 뗀다. 오츠카(大塚滋)박사에 따르면 1862년 요코하마 선술집을 경영하던 이세(伊勢)라는 남자가 소고기냄비탕집을 경영하여 육식제1호이라고 한다.   유명한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젊은시절 오사카에서 무나카다(緖方洪庵)의 서생으로 있던 시절 소냄비탕집주인이 돼지를 죽일 때 돼지다리를 붙잡았다는 일화를 회술한다.   당시 짐승을 죽이는것은 잔혹한 행위이며 가축을 살생하면 땅이 더럽혀진다는 사고가 일본인들속에 강유력히 존재했다 한다.  1872년 궁중에 소고기가 납입되여 궁중주도형 육식이 스타트를 뗀다. 오츠카(大塚滋)박사에 따르면 1862년 요코하마 선술집을 경영하던 이세(伊勢)라는 남자가 소고기냄비탕집을 경영하여 육식제1호라고 한다.  유명한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젊은시절 오사카에서 무나카다(緖方洪庵)의 서생으로 있던 시절 소냄비탕집주인이 돼지를 죽일 때 돼지다리를 붙잡았다는 일화를 회술한다.   당시 짐승을 죽이는것은 잔혹한 행위이며 가축을 살생하면 땅이 더럽혀진다는 사고가 일본인들속에 존재했다 한다. 그러나 소고기는 “문명의 약”이였다. “천효만능의 쓴 약을 먹는것이 이 소고기탕을 한냄비 먹는것보다 못하다”는 말까지 류행했다.   나가사키나 사츠마에서는 돼지고기도 소고기의 류행과 함께 대거 육식으로 보급됐다.   “육식은 문명개화의 심벌”로 굳어진다. 1877년 신수도 도쿄에서는 “소고기육식은 천자의 식탁에서 아래로는 인력거군의 립식(立食)에 이르기까지 상하사회의 류행이 되였으며 오로지 소고기가 귀하고 이것을 먹는 일이 날로 성해졌다.”(《로문진보(魯文珍報) 》)   당시 궁중은 물론 일본에서 육식의 일반 코스요리로서가 아니라 소고기냄비탕이 주체였다. 그것은 지금의 스키야기(불고기)와 비슷했다.   《동경번창기》에는 일본인이 급격히 소고기를 선호하고 소고기를 문명으로 받아들인데 대해 이렇게 기술한다. “소고기는 인간에 대해 개화의 약방이고 문명의 량제(良劑)다. 그 정신을 양성하고 그 위장을 건장히 하며 그 혈맥을 도와주고 그 피육을 비(肥)하게 한다…”  메이지말기로부터 다이쇼(大正)초년에 이른(1911~1915)사이 일반 일본인의 평균 육류소비량은 3.6그람이였다. 당시 “부국강병”의 슬로건아래 륙군은 인평균 매일 50그람, 해군은 160그람 정도의 육류를 부식으로 소비했다고 한다.(사바다토요유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그렇게 많은 량이 아니였다. 또한 육식은 “서양풍”이 아닌 일본식으로 아렌지한 “샤부샤부”(소고기냄비) 등이 위주였다.   영양학시각에서 보아 육식이 일본인에게 진짜 영양을 공급한것은 제2차세계대전후였으며 전후 경제부흥과 경제고도성장기인 1970년대에 이른 식생활의 서양화가 강력한 용수철이 되였던것이다. 1980년대에는 영양과잉으로 됐으며 현재 일본인의 평균신장(身長)이 중국과 한국을 추월하여 다시는 “소일본(小日本)”이 아니다.   소고기육식과 함께 우유 역시 일본 문명개화의 하나의 식문화아이템이였다. 1853년 미국의 총령사로 일본에 온 하리스는 “일본에는 아직 우유마시는 습관이 없으며 양우 역시 농경이나 운반도구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경악한다. 1863년 미국의 무역사무관 라이스가 혹카이도에서 유우(乳牛)로 일본인에게 착유법을 가리킨다.   1870년 동경에서 야마카다(山縣有朋) 등 정부고관이 목장경영과 착유법을 개시하며 1873년 《우유착취인심득규칙》이 동경에서 발포된다. 그리고 우유배달도구로 석으로 도금한 부리키깡통을 사용하도록 규정하였다. 1882년에 우유에 당분을 넣은 콘텐츠밀크제조에 성공하여 우유소비량이 급속히 증폭되여 전 일본에 보급된다. 1900년대초에는 각지에 밀크홀이 서고 커피와 함께 우유를 많이 소비하게 된다.   이렇게 일본의 문명개화에 성급한 정부에서는 구미문명을 받아들이는 창구로서 육식을 장려하고 우유섭취를 창도하여 일본인의 서양화에도 박차를 가해갔다.   일본의 육식은 정치에 좌우지되였으며 국민들 역시 양고기를 안먹는 “온순한 양”처럼 정부의 정책에 적극 호응하였다.  “문명개화”의 근대적정책이 일본인에게 갖다준 식문화의 혜택은 육식과 우유의 정착이였다.  
53    (52) 근대 국기디자인에 숨겨진 력사문화 댓글:  조회:4717  추천:32  2014-04-07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52) 근대 국기디자인에 숨겨진 력사문화 김문학           국가를 상징하는 국기는 근대의 산물이다. 아시아의 국기는 역시 서양의 웨스턴인팩트로 자신의 나라를 상징하는 로고표징을 기발에 담았는데 타국과 이질된 자국의 아이덴티티의 표상이였다.   근대 일본의 국기가 1870년에 일장(히로마루)로고로 탄생된데 비해 조선은 1880년까지 국기가 없었다. 근대 국제의 관례로 한 나라의 상선, 군합 등이 령해나 타국의 령해를 지날 때 반드시 국기를 게양하는것이 있으나 조선은 1875년 강화도사건때 조선의 “개국”을 목적으로 침범한 일본군함 운요(雲楊)호가 달고있던 일장기의 의미를 잘 몰랐다.   한국의 사학자이며 성공회대학 교수 한홍구는 “태극기는 정말 민족의 상징인가”라는 글에서 “조선은 원래 국기가 없었다. 그러니 일본이 일본국기를 단 운요호에 조선이 발포한것을 문제삼는것을 리해할수 없었다. 이런 곤욕을 치르면서 조선은 문호개방을 강요받았다”고 지적한다.(《대한민국사》2003)   조선에서 국기제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론의된것은 1880년 일본에서 귀국한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이 주일공사 참사관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져오면서부터라고 한다. 이 책에 로씨야의 침습을 막기 위한 조, 청의 련합을 강조하면서 최초로 조선 국기도안에 대해 언급, 청국의 속국이라는 점을 현현화시키고자 청국의 룡의 도안을 사용하자고 권장한다. 그뒤 리홍장은 조선정부에 청국의 황룡기를 쓰되 룡의 발톱을 하나씩 적은 4개짜리 룡을 그리라고 했다.   1882년 4월 청의 마건충(馬建忠)과 김홍집이 회담하였는데 그 필담내용을 기록한 《청국문답》에 따르면 마씨는 조선인이 즐기는 백색과 관리복인 청색, 왕복의 적색을 고안하여 “백저청운홍룡(白底靑雲紅龍)”도안을 제안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마씨는 흰 바탕에 태극도안을 사용하고 주위에 8괘를 첨가하는것이 좋다고 권장했다.   회담 7일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는데 제물포조약에 의해 조선은 일본에 대관을 파견하여 사죄하게 된다.  박영효의 《사화기략(使和記略)》에 따르면 일본으로 향한 배안에서 조선주재 영국 총령사 애스턴과 선장 제임스가 박영효에게 조언을 한다. 이에 따라 8괘에서 간단명료하게 4괘는 빼고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만 남겼다. 이렇게 태극기가 일본행 배안에서 탄생한다.   8월 14일 코베에 도착한 그들은 숙박지에다 태극기를 게양했으며 22일 태극기의 제정을 본국에 보고한다.  1882년 7월 미국 해군성 발행의 《해상국가의 기발》이 2004년에 발견되였는데 그속에 박영효 이전에 이미 태극기가 있었다는 가능성이 있게 된다.   아무튼 한홍구교수의 말을 빌면 “태극기는 중국인의 기본도안에 일본에 사죄하러 가는 일본국적의 배안에서 영국인 선장을 산파로 해서 태여난 조선사람들에게 선보이기도전에 일본에 나붓기는 기구한 운명을 갖게 된것이다.”   또한 “동아시아에서 근대국가의 상징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외세가 깊게 개입했을뿐아니라 그 내용도 우리 고유의 문화나 전통이 아닌 중국의 〈주역〉에서 빌린것으로 이루어졌다”고 한교수는 한탄한다.   근대 중국의 국기는 어떠한가? 근대 중국사의 변천을 대변하는 상징물로서 국기만큼 대표적인것이 있을가? 청나라의 국기는 주지하는바 황색바탕에 5개 발톱의 천자를 상징하는 청룡이 붉은 해를 삼키는 모양이 디자인되여있다.   그러다가 1906년 국민당의 전신인 손문의 중국혁명동맹회가 그 전해(1905) 동경에서 탄생하여 “청천백일”도안을 장차 설립될 중화민국의 국기로 정하기로 하였다. 그때 황홍은 일본의 일장기와 류사한데다 너무 단조롭다는 리유로 반대했다. 그리하여 류영복(劉永福)의 안해가 고안한 국기원안의 하나를 참고하여 손문이 붉은 바탕을 첨가하여 “청천백일만지홍(靑天白日滿地紅)”을 완성시켰다. 최초로 청천백일을 고안해낸 창안자는 손문의 동료인 륙호동(陸皓東)이였다. 그는 혁명봉기초기 광주에서 희생하였다.   1919년 성립된 중국국민당 당기로 제정되면서 청천백일은 1925년 최초의 국민혁명군의 군기로 사용되기도 한다. 1912년 중화민국건국후 림시 대총통으로 된 손문은 “청천백일만지홍”을 국기로 채용하려 했으나 림시참의원에서 불통과시키고 대신 예전 청나라 해군기를 기본으로 5색기(적황청백흑)를 국기로서 통과시켰다. 결국 “청천백일만지홍”은 민국 해군기로 채용되였다. 그리고 5색기는 1931년 만주국설립시 만주국기로 채용되면서 중국 국기는 복잡한 경유를 겪게 된다. 1928년 장개석남경정부때 다시 청천백일만지홍기가 국기로 된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면서 전통적국기를 일소시키고 5성붉은기를 중국 정통의 국기로 한다. 한편 대만에서는 여전히 장개석 전래의 청천백일만지홍기가 “국기”로 되고있다.         중국은 조대교체가 근대에도 빈번했으며 번마다 전조대를 철저히 부정하는 “역성(央姓)혁명”의 양식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국기 역시 빈번히 바뀌고 갱신되는 양상을 루정한것은 그 력사의 변천을 그대로 상징하였다.   일본의 히노마루, 일장기는 세계에서 제일 심플하고 명료한 로고로 알려져있다. 흰바탕에 붉은 해.  근대 이후 아시아침략시 식민지와 전쟁터에서 나붓긴 네거티브한 기억으로 아시아인에게 인상은 역시 좋지 않다. 하지만 일본인에게 있어서 일장기는 자신들의 국가적상징이며 아이덴티티이기도 하다.   수나라 황제에게 보낸 사신에서 당시의 성덕태자가 “해뜨는 곳의 천자”라고 밝혔듯이 “일본”이란 “태양이 뜨는 나라”였으며 태양에 대한 일본인의 신앙은 지대했다. 645년에 이미 일장기가 등장하며 1635년대에 히노마루기발이 사용되였다. 1854년 일미화친규약체결시 일본의 표식으로 선박에 달기도 했다. 이것이 국기의 탄생인데 서양인들은 당시 편지봉투를 밀봉하는 빨간 밀랍 같이 보인다고 비웃기도 했다. 1870년 2월 27일 국기로 제정되며 2월 27일이 “국기의 날”이다.   근대 한중일 국기의 배경에는 그 력사문화가 숨겨져있다. 일본의 죽 전승해온 문화력사의 일직선양상이 그대로 고대의 심벌마크가 수백년을 내려오면서 국기로 되였고 한국은 외세에 끼인 력사체험과 같이 외세에 의해 국기가 제정된다. 중국은 전란과 정부의 교체가 빈번했듯이 국기의 변동도 빈번했다.   국기가 상징하는것은 그 나라의 걸어온 력사와 문화이다.  
52    (51) 일한 근대의 "기폭제"가 된 한권의 중국책 댓글:  조회:4029  추천:19  2014-03-28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51) 일한 근대의 "기폭제"가 된 한권의 중국책 김문학          근대사에서 발견되는 한가지 사상(事象)은 “근대”라는 이미지, 표상이 중한일의 3자가 각기 이질적이라는것이다. 근대(modern)라는 말에 일본에서는 메이지시대의 “문명개화”란 4자숙어를 떠올리면서 하이칼라, 양복, 로쿠메이칸(鹿鳴館), 양풍건축에 철도, 과학, 학교 등 탐욕스레 흡취한 서구문명과 자본주의시스템은 풍요와 흡족의 세계로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국은 그렇지 않다. 아편전쟁의 패북으로 시작된 “근대”는 굴욕적인것과 함께 네거티브한 이미지가 우선 떠오르며 서구렬강의 침략과 식민화의 억압에 신음해야 했던 기억은 육중하고도 암울하다. 한국 역시 중국과 거의 비슷한 “근대”이미지로 뇌리들속에 깊숙이 각인돼있다.      1840년 아편전쟁으로부터 시작되는 아시아의 근대사, 또 하나 “발견”되는것은 아편전쟁에서 서양렬강의 근대문명에 굴복해야 한 충격은 당사자인 청국인이 아니라 되려 바다건너 동쪽에 있는 섬나라 일본인들이였다는것이다.      굴욕적인 《남경조약》으로 반식민지로 전락됨에도 불구하고 중국근대사연구 제일인자 서중약(徐中約)의 말대로 “아편전쟁은 중국인을 각성시키지 못했으며 중국인 스스로도 자신들의 후진성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래서 개명한 “림측서도 적과 대항할 기회가 있는데도 사임당한다.”       아편전쟁에서 중국의 패북정보는 당시 나가사키에 있는 중국상인들의 “풍설서”를 통해 이내 전달된다. 일본 바쿠후와 지식인, 일반대중에 대한 충격은 지대했다. 필자가 접한 당시 1849년에 출간된 아편전쟁을 기술한 저서 《해외신화(海外新話)》[무네다(嶺田楓江)]를 비롯해 《해외여화(海外余話)》 등은 그야말로 경이로울만큼 전쟁의 일화, 내막 등 정보가 듬뿍 실려있다. 당시 이런 책들은 일반서민들까지도 애독했다고 한다.       물론 지식인들이 받은 충격은 엄청났으며 요코이 코난(橫井小楠), 사이토(齊藤竹堂), 사토오(佐藤信淵), 타카시마(高島秋帆) 등 당대 수일의 학자들이 저서를 펴내 아편전쟁의 실패원인을 분석하고 일본 역시 교훈을 섭취하여 해방(海防)을 강화하고 서양제국의 식민지화에서 리탈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소리높이 주장한다.   1842년 사쿠마(佐久間象山)는 《해방8책(海防八策)》을 제출하여 청국의 전철을 밟지 않게 하자고 창안하며 타카시마는 정부에 포술을 개진하고 해방(海防)강화의 구체안을 제출한다. 그리고 청국병이 패한 리유는 공론(空論)때문이라고 지적하며 군사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섬나라근성”의 특징의 하나가 곧 천생적인 “위기의식”이 강한것이라고 볼수 있다. 필자가 근대사를 읽으면서 재발견한것은 이같은 위기의식은 일본인의 “정신적구조”의 하나이며 평화시기인 오늘도 “위기설”은 지식인과 대중사회에서도 끊이지 않는것이다. 지금도 매년 홍수같이 쏟아지는 “일본위기설”의 저서가 서점가를 달구는 실례가 곧잘 그것을 립증한다. 이것은 또한 중국인의 태평한 “형세대호(形勢大好)”적 무경계의식과 대조적이다.   당시 일본 전국이 아편전쟁에서 충격을 받고 서양의 침식에 미리 대처해야 한다는 해방(海防)의식이 팽배해진데는 하나의 특기해야 할 기폭제가 있은것이다.   그 기폭제로 된것이 바로 청국의 위원(魏源)의 명작 《해국도지(海國圖志)》란 책이다. 아편전쟁의 패북으로 인해 정부는 대응이 미미했지만 그래도 소수의 개명적인 지식인이 세계에 개안하고 서양지식을 배우고 연구하였다. 당시 1841년 여름 림측서가 파면되여 신강 이리쪽으로 좌천되면서 자신이 수집번역한 육필원고와 서양자료를 벗인 위원에게 맡기면서 연구하여 꼭 신저작을 써내라고 당부한다.   청말 일류의 사상가, 사학자답게 위원(1794~1857)은 림측서에게서 받은 《사국지》를 바탕으로 수집, 연구를 가하여 1842년 12월 《해국도지》 50권을 탈고, 인쇄출판한다. 1847년에는 60권으로, 1852년에는 전간 100권의 대작으로 보완시킨다. 책의 내용은 세계 5대주 수십개 나라의 력사지리지식과 해방(海防)전략전술 및 서양조선, 조포기술에 관한 론술과 도설 10여권이 포괄된다.   근대 중국인이 쓴 최초의 력사지지저작으로서 “서양의 장기로 서양을 제어하는(師夷之長技以制夷)” 사상이 돌출히 로정돼 있었다.   그무렵 같은 맥락에서 복건성 순무 서계여(徐繼LI)가 편찬한 《영환지략(瀛環志略)》 10권도 출간되였다.   그러나 위원의 이 위대한 저작은 중국에서도 널리 읽혔지만 일본에서 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일본의 오오니와(大庭修)교수에 따르면 《해국도지》가 일본에 수입된것은 1851년인데 1859년에는 그 지명도로 수입이 대폭 증대하여 일본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일본의 지식인과 정치가들은 이 책을 앞다투어 번역, 출간, 평론하며 1854~1856년 3년사이에 출간된 각종 판본의 《해국도지》가 42종에 달했으며 이는 일본출판사에서도 전례없는 다양한 판본의 양상을 보였다.   이 책은 일본지식사회에 지대한 충격과 함께 귀중한 “보물”로 추대됐고 그들의 시야를 넓혔으며 바쿠후말기 해외리해의 문화지도, 길잡이로 되였다.   일본지식인들은 이 책을 통해 서양의 웨스턴 인팩트(서양충격)하에 서양사정 리해와 함께 중국아편전쟁의 교훈으로 “해방”의식을 키웠다. 바쿠후말기의 저명한 사상가, 개국론의 창시자인 사쿠마조잔은 《해국도지》를 읽고 공명을 일으키며 “위원이야말로 나의 해외의 동지로다”고 감탄한다.   이토 히로부미의 스승이기도 한 메이지유신의 선구적 사상가, 혁명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사쿠마의 학생이기도 한데 그는 1855년 위원의 책을 탐독하고 크게 개안하며 감동받는다.   근대의 길목에 들어선 일본에 《해국도지》는 근대화의 길잡이로 되였으며 바쿠후말기 유신사상형성에 큰 기폭제가 되였다. 일본의 식자들은 《해국도지》는 일본을 서구렬강의 식민지화전략의 위기에서 구해준 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근대 조선에도 1845년 《해국도지》가 조선의 사자를 통해 국내에 류입했는데 당시 조선지식인의 지대한 관심을 환기시켰으며 세계인식 및 국가의식확립에 기여한다. 실학파 거두인 박계수는 이에 대해 보배로 여기며 그의 제자들에게 읽도록 추천한다. 김옥균, 유길준, 박영효 등 개화파 리더들도 이 책을 통해 세계인식에 개안하게 된다. 그리고 황준헌의 《조선책략》도 조선지식인에게 읽히면서 지대한 충격을 주게 된다.   중국내에서는 사실 큰 주목을 못받은 위원의 《해국도지》는 주변의 일본과 조선에 큰 영향을 과시하면서 근대에서 서양을 대응하는 지침으로 된 사실에서 근대 동양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을 찾을수 있다. 또한 근대화대응에 지연된 중국의 세계인식수준과 양상이 재발견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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