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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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 《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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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91)조선 신문학의 터전을 마련한 《신약전서》 댓글:  조회:3343  추천:41  2017-07-11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91) 김문학   조선 신문학의 터전을 마련한 《신약전서》       1900년의 세계는 격동의 한해였다. 3~4월에 조선의 활빈당이 크게 출몰한다. 5월 1일 일본 도꾜에서 전차운행이 개시된다. 8월 청국 의화단운동으로 인해 8개국 련합군이 북경을 점령한다. 12월 오스트랄리아의 위대한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가 《꿈의 해석》을 간행한다.     또 하나 특기해야 할 일이 생긴다. 즉 그해 한글로 번역된 성경 《신약전서》가 처음으로 출간된다. 이는 그저 성경출판으로만 볼 일이 아니다. 분명히 중대한 의의를 갖춘 대사건이다.     개화기의 조선반도에 밀려온 “근대”는 낯설고 이상한 푸른 눈동자의 서양인, 서양인이라는 이름의 타자(他者)였다. “근대”란 문명은 아시아에 있어서 서양이란 타이틀로 나타나면서 위협적인, 때로는 매력적인 얼굴을 지니고있었다.     우리의 통념의 하나가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있는 한글은 수백년전부터 보급되고 일반적으로 사용해왔다는것이다. 그러나 이 통념이야말로 비상식적인 착각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조선의 5백여년 이래 한글은 종주국 문명대국의 한문(漢文)의 정통성에 짓눌려 부녀자들만 사용하는 천대꾸러기 아웃사이더적 멸시의 상대였던것이다.     조선의 문자언어를 재발견하는 계기를 마련해준것은 조선인 자신이기보다는 새로 류입된 기독교였다. 서양에서 솔선 조선에 들어온 문명의 “근대”품목은 이데올로기, 사상, 신식무기 등 허다한것이였는데 기독교가 그중 중요한 품목이였다.     조선의 기독교전통은 임진왜란 당시 뽀루뚜갈의 세스페데스가 1594년 종군신부로 들어오면서 조선땅을 밟앗다.     한국의 문학비평가이며 시인이기도 한 장석주씨는 이렇게 지적하고있다. “두말할 나위없이 한글은 우리의 고유한 문자언어이다. 한국문학은 당연히 한국사람에 의해 한글로 씌여진 문학을 가리킨다. 19세기말 서구문물과 함께 들어온 개화기의 기독교는 이 땅의 낡은 전통과 유습, 페쇄적 성향을 깨뜨리고 새로운 문화를 일구던 첨병이였다.                                       그뿐아니라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의사소통이 쉽고 간결한 문자언어인 한글을 새로이 인식하게 만드는 효과까지 낳음으로써 20세기 한국문학의 발전에 이바지한다.”(《20세기 한국문학의 탐험》)     1790년대에 조선에는 기독교신도 3만명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실권자 대원군의 박해로 신도와 외국인 선교사가 참형당하는 사건이 빈발하며 1884년의 갑신혁명을 거쳐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완화되면서 기독교문화가 정착된다.     그후 언더우드와 아펜젤레 등 선교사들은 선교 및 의료교육을 보급하기 위해 서구문명을 갈망하는 조선에 신문화운동을 일으킨다. 그래서 아펜젤레는 고종의 허락으로 배재학당을, 또 다른 선교사들도 학교와 교회를 륙속 설립한다.     언더우드는 기독교를 보급시키기 위해 고심한 끝에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것이 무엇보다 좋은 방법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되였다. 그리하여 성경번역작업이 1887년에 시작되여 1900년에 《신약전서》의 한글판이 출간된다.     번역자의 한사람인 아펜젤레는 성경번역을 “두 나라를 잇는 철도부설과도 같다. 파나마운하의 개설공사가 이보다 더 어렵지 않았을것이다”고 평가한다.    문호 이광수 역시 이 업적에 대해 1917년 “예수교가 조선에 준 은혜”라는 글에서 이렇게 높이 평가한다. “아마 조선글과 조선말이 진정한 의미로 고상한 사상을 담는 그릇이 됨은 성경의 번역이 시초일것이요, 만일 후일에 조선문학이 건설된다하면 그 문학사의 제일면에는 신구약의 번역이 기록될것이다.”     1904년과 1906년에 또 《신약전서》는 부분적 개정을 하였으며 이어서 1938년에 개역이 다시 되고 1952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의해 개정판이 나온다.     장석주씨의 지적에 따르면 기독교와 한국문학의 관계에서 한국 근대시의 모태로 된 창가(唱歌) 장르의 발전에 개신교가 큰 기여를 했다고 한다. 기독교의 “찬미가”, “찬송가” 등이 조선 근대의 창가를 낳는데 결정적역할을 했다.     기독교는 또한 한국 근대 신문과 잡지 발전에 기여하는바 《독립신문》이 창간되자 나온 신문 《조선그리스도인 회보》 등 신문이나 관련 성교원리 등 책자, 신문, 출판업에 추진작용을 한다.     기독교는 조선 근대 신문학의 탄생에 큰 발자취를 남기는데 그것은 한글을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여러가지 의미에서 기독교의 활약은 한글 사용, 한글로 된 근대 조선문학의 터전을 마련했다는 공로를 부인할수 없다. 근대사에서 발견되는것은 이같이 외래문화에 따라 즉 타자가 우리자신의 문화를 추진시킨 작용을 과소평가할수 없다는 점이다. 인터넷료녕신문 2010-11-12
90    (90) 애국지사 황현의 비장한 죽음 댓글:  조회:3263  추천:28  2017-04-12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90) 김문학   애국지사 황현의 비장한 죽음     1910년 8월 29일,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이 공포, 경술국치에 이기지 못해 자결한 우국지사 선비가 있었다.     그가 바로 이 글에서 말하려는 희대의 천재적지식인 매천 황현(黃玹 1855~1910)이다.     당시의 여러 자료를 섭렵해보아도 경술국치에 비분하여 스스로 자살을 택한 우국지사는 그리 수적으로 많지 않았다.     하나의 왕조로서 조선왕조(500년 지속)는 하루 아침에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망했다. 더구나 이는 왕조의 멸망과 함께 수많은 조선동포들에게는 나라의 멸망ㅡ망국과 고유한 언어, 문화를 가진 천수백만 인구의 겨레가 이민족지배의 굴욕적인 변화였다.     매천 황현의 죽음은 많은 겨레들의 굴욕적 심경을 대변하는 사건이기도 할것이다. 필자가 20년전 일본에 류학생으로 와서 춘원 이광수와 함께 대단히 숭경하는 민족의 문인이 황현이였다. 처음 황현의 저작 《매천야록》을 접하게 된것은 1990년 일본 국서간행회에서 출간한(박상득 역) 책이였다.     한문 원문을 일본어로 역술한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 황현의 고매한 선비적인 기풍과 유머스럽고 평명한 문체로 엮어나가는 조선 근대사의 뒤면을 읽을수가 있었다.     이광수의 장편소설을 읽은 감동만큼 필자는 매천의 텍스트에 깊숙이 빠져들어갔던 기억은 오늘도 뇌리속에 새롭다.     당시만 해도 우국지사의 수준을 초월하여 민족의 렬사적의미의 인물 매천에 대한 한국내에서의 조명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하여 필자는 이곳저곳에서 나름대로 그에 관한 글이나 자료를 간신히 얻을수 있을뿐이였다.     갑오농민전쟁의 최고 지도자인 전봉준과 동년인 1855년 출생인 황현은 호가 매천(梅泉)이며 전라도 구례사람이였다.     유년시절때부터 린근에 신동으로 소문이 자자했는바 시와 글에 능하였다고 전해진다. 청년시절에는 서울에 상경하여 문명(文名)을 자랑하던 이건창(怏建昌)이나 김택영(金澤榮) 등 문인들과 친분을 쌓았다.     1887년과 1888년에 두번씩이나 과거에 응시하여 두번 다 최우수 성적을 따낸다. 그러나 임오군란과 갑신경장을 겪은 국운이 기울어져가는데도 불구하고 민씨정권에 붙어서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정신없는 관료들의 극도의 부패타락상을 보고 그는 관직을 멀리하게 된다.     그후 곧 시골고향으로 하향하여 은둔생활을 보낸다. 벗들의 재삼 출세권고를 뿌리치고 독서와 글짓기에 전념했다.     그러다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소식을 접하자 황현은 비분강개한 나머지 청나라로 망명을 시도했으나 려비부족으로 단념해버렸다.                                                    1910년 8월 일본제국의 한국합병에 56세의 황현은 이렇게 절명시를 남긴다. “나라를 위해 그 어느 누구도 순사(殉死)하는 자가 없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이냐!” 이 절명시는 장지연의 《진주경남일보》에 게재되기도 한다. 그는 고향에서 대량의 아편을 복용하여 죽음을 택한다. 그의 생애야말로 “조선 최후의 기개높은 선비”였다.     그가 남긴 유저로는 《매천집》, 《매천야록》이 있으나 전자는 친구 김택영에 의해 상해에서 간행되여 중국에서 그의 문명(文名)을 날렸다.     그리고 《매천야록》에 대하여 생전에 황현은 바깥사람에게 보이지 말라고 자손에게 일렀다고 한다. 일제강점하에 용납될수 없는 기록임을 알았기때문일것이다. 1939년 일제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가 이 기록을 발견하지만 비밀에 붙여버린다. 광복후에 이 책은 해빛을 보게 되여 1955년 출판된 이래 줄곧 조선말기 력사, 인물연구의 기초자료로 지목되여왔다.     황현이 이 책을 집필하기 시작한것은 그가 39세인 1894년이라 추정한다. 비록 제목에 야사라는 뜻의 “야록”이란 단어가 붙었으나 그 시대의 력사사건과 인물일화 등이 아주 정확하게 기록되여있어 사학계에서는 야가사 아닌 실록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일본사학계에서도 이 책은 당시 조선 인물, 력사를 인식하는 중요한 자료로 거듭 인용, 고찰하기도 한다.     이 짧은 글에서 《매천야록》의 전부를 다 소개하기는 지난(至難)한 일이지만 간단하게 말하여 조선말기의 력사사건 이를테면 임오군란, 청일전쟁, 로일전쟁이나 중요한 력사사건, 일본인에 의한 지극히 야만적인 민비(명성황후)의 암살사건, 대원군 집권기에 대원군의 인물상과 그 주변의 인물들에 관한 일화, 조선조내부의 당쟁이나 권력투쟁, 을사오적, 고종일화 등이 수록되여있다. 이 책에는 조선말기와 일제의 침략력사가 엇갈리면서 속속 이어지는 격동의 근대사드라마를 보는듯 하다.     외국인이 근대 조선을 바라본 명저로는 비숍의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새비지.랜도어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할버트의 《대한제국 멸망기》 그리고 메켄지의 《조선의 비극》 등이 있다면 같은 맥락에서 조선인 자체가 쓴 당시의 조선지, 인물사적 가치로 《매천야록》은 두말할 나위없이 명저의 반렬에 올라야 한다.       우국지사 매천 황현은 죽으면서도 우리에게 위대한 로작을 남기고 갔다. 그런 그를 한국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구례의 황현 집터에는 유품과 같이 그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있다고 한다. 한번 꼭 찾아가 참배하고싶은 곳이다. 
89    (89) '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의 또다른 모습 댓글:  조회:3679  추천:50  2017-04-12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89) 김문학   "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의 또다른 모습     필자가 소장한 동아시아 근대 명사(名士)의 친필유묵에는 손문, 리홍장, 원세개, 이등박문, 김옥균, 박영효와 함께 이완용(李完用)의 족자도 2점 들어있다.       이완용의 글씨는 과연 명필이다. “명필”이라는 말이 가장 실감나는 이완용의 글씨는 소탈하고 자유분방한 “룡비봉무(龍飛鳳舞)”의 경지에 달하고있다.   일제시기 명치천황도 그의 글씨에 매료되여 직접 본인에게 붓글씨를 써달라고 청했다는 일화는 또한 너무나 유명하다. 이런 희대의 명필가에게 또한 희대의 친일파 “매국노”라는 레테르가 붙어있다.   오늘날까지 이완용은 “매국노”의 대명사이다. 학계에서나 민간에서나 그의 업적을 조금이나마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보이면 그 당사자는 무조건 격심한 지탄을 받아 사회적으로 매장할 기세로 물매를 맞게 된다.   그런 이완용, 그는 누구인가?   1910년 8월 22일 당시의 총리로서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조선통감 테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의 위압으로 체결한 인물.   이에 앞서 1905년 일한보호조약(즉 일사보호조약)을 체결할 때도 학부대신(교육부 장관)으로서의 이완용은 조약에 찬동하였다. 그와 같이 조약체결에 찬성한 다른 4명도 악명자자한 “을사오적”으로 불리고 있다.   이완용의 “매국노”라는 고깔모자를 뒤집어보면 거기에는 또다른 모습이 드러난다.   이완용(1858~1926)은 자는 경덕, 호는 일당(一堂)으로 경기도 광주출신인데 유년시기부터 총명한 어린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가 10살 나던해 한양의 명문대가 이호준의 양자로 입양되여 이 집의 장손으로 된다. 1882년 특별 과거시험에 합격해 규장각, 사강원에서 관리로 있다가 1886년 신식학교 육영원에 입학하여 영어, 지리, 력사 등 신학문을 배웠다.   1887년부터 3년 동안 미국공사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한다. 1890 년 귀국한 이완용은 성균관, 이조, 공조 등에서 참판직을 거치며 관운이 형통해 1895년에는 학부대신으로 된다. 1896년에는 외무대신 겸 농상공부대신의 요직에 앉는다. 그뒤 독립활동으로 좌천되였다가 1905년 다시 학부대신직을 복직하게 된다. 그해 11월 을사보호조약에 솔선 서명하여 앞서 진술한바와 같이 “을사오적”의 필두로 지목되였다.   1907년 그는 통감 이토의 추천으로 내각 총리대신이 된다. 1907년말 헤이그밀사사건이 터지자 일본정부는 고종의 을사조약 위반에 분개하여 이완용을 통해 고종의 책임을 추궁했다. 이에 이완용은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키는데 성공한다. 이 일에 분노한 서민들이 이완용자택에 불을 지르며 1909년 12월 22일 이재명의 습격으로 이완용은 부상을 입게 된다.   이어서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으로 일본의 강압하에서 한국병합조약을 체결한다.   1911년 조선귀족원 회원, 1920년에는 후작, 1927년 69세 때 이재명에게 습격당한 상처후유증으로 절명하게 된다. 당시 일본에서는 “이완용후작은 동양 일류의 정치가이며 그 인격은 대중들에게 흠모할바 많았는바 그의 사망은 국가의 큰 손실이다”고 추모했다. 또한 그의 장례식은 고종 국장 이후 최대의 규모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당시 “매국노”였던 그가 조선인민의 이같은 인기를 얻었다는것 자체는 어딘가 다른 무엇을 설명하는듯 하다. 이완용의 생애를 반추해보아 그가 지금껏 교과서에서까지 매도하는 “매국노”로 나라 팔아먹은 만고의 역적으로 치부하기는 어려운 존재이다.   우선 그가 한국병합조약에 서명한것은 “조선의 전제왕조가 끝까지 문명개화를 거부하고 과도한 사치로 극빈과 기아로 허덕이는 민족을 방치한 상황을 감안해서 일본의 협력으로나마 민족의 재흥을 기하려는데서였다.” 명지대 교수이며 현재 가야대학 객원교수인 최기호씨는 《력사재검증.일한합병》에서 이렇게 언급하고있다. “그들이 당시의 조선국내의 상황에서 하는수 없이 정치선택을 한것이지, 오히려 정권담당자의 책임으로서 당연한 행동을 했을것이다”고 최교수는 덧붙인다.   필자가 섭렵한 력사자료에 따르면 친일파라는 이완용은 평생 일본어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일본인들과 영어로 대화를 했으며 만족자존심을 지켰다고 한다. 그리고 동양 최고의 명필로서 지금까지도 독립문이나 왕궁에 그의 필적이 남아있다. 그의 인격은 고매했으며 외무대신 재임중에도 로씨야의 조선병합정책을 중지시킨 공로를 세웠다.   또한 관직에 있은 그는 대부분의 기간을 정동파로서 일본 및 청나라와는 늘 거리를 두고 활동했다. 1896년 미국망명에서 귀국한 서재필을 정동파모임에서 만난후 그와 함께 독립협회를 결성, 자주독립의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1897년 1월 23일자 《독립신문》에는 이완용의 독립평화활동에 대해 “자기 힘껏 재주껏 평화토록, 조선에 큰 해 없도록 일을 조치하여 갔으니 만일 이씨가 갈리게 되면 이씨보다 나은이가 또 있을지 모르겠다”고 격찬한다. 서재필 역시 1897년 11월 11일자 독립신문에서 이완용의 애국에 대해 칭찬을 하고있다.      1919년 3.1독립운동과정에서도 이완용은 가장 먼저 민족대표로서 추천되였는데 운동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악명이 해가 될것이라는 리유로 사양했다. 당시 이완용에 대해 일부에서 욕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 조선인에게 막대한 영향력과 존경을 받은 인물로 보인다. 그는 실력양성사상을 견지한 인물로서 계란에 돌 던지기식 무단행동을 삼가하자는 방침이였다.   그의 장례식에 조선의 추모객이 10리가 넘게 이어졌으니 그의 위망과 인기를 보아낼수 있다.  
88    (88) 조선의 3대 천재 댓글:  조회:3688  추천:23  2017-03-25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88) 김문학   조선의 3대 천재      1909년 11월, 일본에서 최남선은 홍명희의 주선으로 이광수와 초대면한다. 당시 최남선은 20세, 홍명희가 22세, 이광수가 18세. 모두 혈기왕성한 청년이였다. 이것이 “조선의 3대 천재”라 불린 최, 이, 홍의 3자의 첫 만남이였다.     조선 근대사의 특기해야 할 력사적인 상봉이였다. 일설은 1906년 3자가 동경에서 처음 만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무튼 3대 천재의 만남은 그뒤 전개되는 근대 조선의 문학, 언론, 출판, 독립운동, 친일 등 령역을 통털어 3자의 동시대적 련결성이 있는 활동에서 잘 로정되고있다.     사실 1909년만 해도 18세의 이광수는 무명의 젊은 류학생에 불과했다. 그런데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듯이 최남선은 이광수와 첫 대면하면서 당장에서 조선문단의 첫손가락 꼽을수 있는 “천재”라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당시 《소년》이란 한국 최초의 잡지를 창간한 최남선은 이광수와 홍명희에게 잡지를 같이 잘 운영해나가자고 기대를 건다. 1910년 3월호 《소년》에 글을 실어 최남선은 이광수와 홍명희가 금후 잡지발행에 참여하게 돼 《소년》의 전도는 광명이라고 흔연히 말한다.     필자의 책상머리에는 지금 이 3대 천재의 사진이 놓여있다. 최남선의 사진에서 보여지는 그의 모습은 문인이기보다는 투박한 농군같은 질박한 사나이의 이미지가 앞선다. 이광수는 대단한 미남이다. 36세에 《무정》집필시기 한복차림의 얼굴사진이나 상해림시정부 《독립신문》의 사장으로 있을 때 여럿과 같이 찍은 사진에서도 이목구비가 단정한 그는 1930년대 남자배우 뺨치는 흰물가리의 미남이다. 필자의 속단이지만 조선 근대의 문화사에서 이광수를 따를 미남형은 없을것이다. 총명하고 두뇌명석한 그 빛발이 얼굴에서 뿜는듯 하다. 대조적으로 대머리에 안경을 쓴 홍명희는 로학구적인 수척형 지식인의 전형적 얼굴을 하고있다.       이들은 각기 대조적인 얼굴모습을 하고있는 대지식인, 문인이였으나 그들의 큰 공통점은 하나 있는바 바로 일본 류학과 생활체험이 있는 당시로서는 일본을 통해 서양의 최선진문물을 수용한 천재들이라는 점이다.     일본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조선의 근대에 영향을 주었으며 조선 근대의 천재 역시 일본이란 영향하에서 탄생, 활약하게 된다.     최남선(1890~1957)과 이광수(1892~1950)는 필자가 최고로 추앙하는 근대 동포문인이다. 그중에서도 이광수에 대한 애착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 두분은 한국 신문학을 낳은 량대 거두로서 이들을 빼고 한국 근대문화사를 거론할수 없다.     최남선은 근대 한국의 문화령역에서 거의 “최초”라는 모든 일을 휩쓴 인물이다. 근대시인, 시조시인, 력사학가, 사상가, 계몽가, 출판가, 수필가, 실업자, 이 앞에 모두 “최초”가 붙는다.     이광수는 한국 최초의 근대 소설가일뿐만아니라 시, 수필, 평론, 희곡 모든 분야에서 길을 개척한 문인이다. 그리고 사상가, 계몽가이기도 하다. 이광수의 박람강기, 해박한 지식, 예리한 통찰력, 선진적인 예지력, 언어적 천부 이 모든것은 조선에서 그를 따를 자가 없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재적 탁월한 재능과 애국심까지 가진 이광수에 당시 질투, 시기의 화살을 던진 자가 많은것은 당연할것이다. 그에 대해 가십거리로 씹을순 있어도 그를 정면에서 대처할 문인은 유감이지만 아직 없었다.     춘원 이광수가 1922년 5월 《개벽》에 발표한 “민족개조론”은 최초로 조선인의 국민성의 결함을 분석한 명문으로서 우리 문화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민족론이다. 이 글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친일의 글로 매도하는 자는 다시 재독하기를 권유하고싶다.     육당 최남선이 1928년 발표한 “력사를 통하여 본 조선인” 역시 조선인의 민족성의 약점을 분석한 글로서 오늘 읽어도 공명하는 부분이 대다수이다.     이광수와 최남선은 모두 해방후 “친일”의 죄로써 동족의 질타와 매도를 당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광수는 자신의 친일행위를 “민족의 보존을 위해서였다”고 떳떳이 주장한다. 이 한마디 말에 이광수의 “친일”을 푸는 공식같은것이 들어있지만 그 말에 우리는 여전히 등을 돌리고있으니 안타깝다. 좀더 침착하게 그의 말을 경청하고 분별해서 들어야 하며 이것이 이광수를 대하는 중요한 포인트가 되여야 한다.     홍명희(1888~1968)는 1924년 최남선이 창간했던 《시대일보》를 인수받아 사장을 하면서 1928~1939년 조선일보에 유명한 장편소설 《림꺽정》을 련재하여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그는 1945년 광복직후 좌익운동에 가담하여 조선문학가동맹 주요 책임자로 있었는데 월북하였다. 그리고 조선공산당정권 수립에 참여하면서 부수상의 요직에 있었던것으로 알려지나 그뒤 1968년 80세를 일기로 숨진다.     1950년 조선전쟁와중에 7월 12일 효자동자택에서 납북된 이광수는 지병이 있는 상태로 10월 25일 자강도 만포시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춘원의 3남인 이영근씨가 1991년 7월 하순 평양을 방문, 이광수의 특설묘지를 참배했다고 한다. 최남선도 1957년 67세의 나이로 서울에서 서거한다.     서울대의 교수 구인환은 “이광수의 몸은 갔어도 이광수는 이 민족과 더불어 영원히 살것이다”고 했다. 조선의 격동기를 주름잡던 3대 천재, 역시 같은 말로 그들은 “몸은 갔어도 우리 민족과 더불어 영생하리라.”
87    (87) 일제식민지시기 조선인의 일상생활은 댓글:  조회:3699  추천:25  2017-02-21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87) 김문학   일제식민지시기 조선인의 일상생활은 한일합병 100년.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한국지배 36년에 대한 력사적 기억.   식민지의 기나긴 경험은 당한 조선민족의 령혼에 지지리 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따라서 그에 대한 회억 자체도 피지배자 당사자에게 있어서는 덧나는 상처처럼 꺼내기 싫은 과거일지도 모른다.   행, 불행을 떠나서 일본의 식민통치는 조선 근대력사에서 절대적 중요성을 지닌 력사과정이였으며 조선의 그 이후의 력사를 규정짓는 큰 구실을 했던것 역시 사실일것이다.   이 책을 쓰면서 필자는 조선, 일본, 중국의 근대사 100년의 수없이도 많은 자료문헌을 섭렵하는 과정에서 일본식민통치를 당한 피식민지자의 후예로서 가슴아픈 대목들을 많이 조우했다.   그렇다고 해서 식민지력사가 우리 민족의 오늘을 이어온 과거의 아이덴티티의 피와 살이 된것이니 무조건 덮어감추거나 왜곡, 무시할수는 없다.   세계적으로도 일본과 같이 무섭게 동질적 사회, 문화를 이룬 우리 민족은 유별나게 나자신을 내세우며 우리의 반대편에 선 적, 상대에 대해 비관용적이라고 한국의 석학 이어령선생도 필자와 대담할 때 지적한적이 있다.   증오의 감정 역시 늘 동질, 균질적이여서 우리 아닌 남, 타자, 특히 일제와 같은 대상은 무조건 증오의 타킷이 되며 그 시대에 대한 모든 력사적 해석 역시 “증오”가 깔려있다. 여기에는 거의 어느 하나 누구의 이론(異論)을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 태세로 기세당당하다.   그런데 증오의 절대적 감정, “정의(正義)”에 눈가려 망각한것은 리성적인 자기 성찰과 반추라는 중요한 팩터이다.   예나 지금이나 일제강점식민시기를 다룰 때 학문적인 접근이든 대중적인 언설이든 사석에서의 잡담이든 거개가 지극히 동질, 균질적 양상을 로정한다.   즉 일제통치의 력사적시간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피부로 느낀 감각이 시간의 추이와 더불어 “풍화” 내지는 단순한 “관념화”란 려과장치를 거쳐 무조건 “저항사관” 아니면 “매국친일” 2항 대립구조로 일축해버린다   그런데 중요한것을 여기서 빼놓고야말았다. 무엇인가? 력사적 사실이 인간의 일상에 의해 지탱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상”을 담론할 여지가 우리 민족에게 없다.        식민지시대의 조선인과 일본인의 “일상생활”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고 꺼리고있다. 력사란 정치나 경제, 이데올로기도 중요하지만 많은 력사 공간시간은 오히려 그 정치체제하에서 생활해온 보통 일반인의 “일상생활”에 의해 전개해온것이 아닌가.    최근 다행히도 일제식민시기의 일상생활을 반영하는 책들이 속속 출간되여 세상의 해빛을 보고있다.  《내가 조선반도에서 한 일》(마츠오 시게루), 《일본제국이 점지해준 아이들》(카터.엣커트), 《일본통치하의 조선 진북의 력사》(사카이 도시오), 《생활자의 일본통치시대》(오선화),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타카사키 소오지) 등 저작이 나타나면서 일제식민시기의 조선인과 일본인의 일상에 대해 그 진실을 규명하고있다. 그것을 잠간 들여다 보기로 하자.   서울의 일본인은 줄지어서 타타미를 깐 일식가옥의 거리를 형성하여 살고있으며 이런 일본인사회와는 거리를 둔 조선인의 집에서는 라지오제2방송(조선어방송)에서 흘러나오는 판소리 중계를 듣고있다.   그리고 청계천에서는 아낙네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빨래방망이질을 하면서 환담하고있다. 종로거리의 영화관앞에서는 신작 영화를 관람하고자 행렬을 지어있는 조선인들. 물만두를 열심히 파는 중국인의 모습도 보인다.   손님으로 만원을 이룬 신와(信和)백화점.   까페 녀급과 환담하면서 큰 소리를 치는 남성취객.   사쿠라를 구경하는 덕수궁의 화창한 봄풍경.   학교에서 공부를 게을리해 버들회초리로 맞는 아이의 비명소리.   얼음이 석자두께로 언 한강우에서 썰매를 씽씽 타는 아이들.   길을 물어보는 일본인에게 친절히 가리키는 예쁜 조선아가씨.   이런것들이 식민지시기 당시의 하나하나의 풍경이다. 일제시기 일상생활의 기록을 종합하여 보아 일본인과 조선인의 사이는 그다지 나쁘지도 않았다. 서로 문화가 다른 민족이 같이 살다보면 알륵과 반목은 흔히 있는 일이다. 이는 인류학이 이미 실증하고 있는것들이다.   그러나 특히 도시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이 서로 반목이 심했던것 같다. 서울에서 배내밀고 딸깍딸깍 게다소리를 내며 으시대던 일본인을 조선인은 아마 덜 반가운 눈초리로 바라보았을것이다. 서로 아주 친한 사이의 일본인과 조선인도 있었다. 민족을 넘어선 우정이였다.    전후 “고향”을 찾은 식민지시대의 일본인 교사가 한국인 제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는 아름다운 일화도 전해진다.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한다. 일제시대의 력사를 굳어진 이데올로기일식의 저항, 친일, 2항 대립구도도 좋지만 그것을 넘어서 보다 생활 실제모습에 접근하는 인식방법이 필요하다고. 력사를 이룬 일상의 실상을 통해 우리와 타자의 과거를 알고 재인식하는것은 서로 유리하지 않을가. -료녕신문
86    (86) 손문과 리홍장의 “량광독립” 밀모 댓글:  조회:3812  추천:16  2017-01-09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86) 김문학 손문과 리홍장의 “량광독립” 밀모     《국부년보초고》를 보면 1894년 6월 손중산은 “륙호동(陸皓東)을 데리고 리홍장에게 상서(上書)하다”는 대목이 나온다. 국민당계렬의 손문전기에서 손문이 리홍장을 만나 직접 상서하는 이야기는 늘 등장하는 고정메뉴이다. 리홍장에게 “공상업발전, 교육제도개혁, 인재선발제도의 개혁 등 리상적인 플랭을 제기했다”고 하면서 리홍장이 “자네는 관화(북경어)도 모르는데 어찌 관리가 될수 있냐?”고 핀잔을 주며 지극히 랭담했다는 일화를 전하고있다. 이에 실망한 손문이 자체로 혁명조직을 무어 혁명에 투신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만의 대표적인 문호, 문명비평가 리오(李敖)의 《손중산연구》에 따르면 이런 일화는 국민당이 손문을 미화하기 위한 날조라고 고증하고있다.   이 진위에 대해서는 아직 결론이 내려지지 않았지만 1900년 손문과 리홍장이 련합하여 량광(兩廣)독립을 도모했다는 력사사실은 확실히 실재했다. 지금 국내 사학자들이 밝힌 자료에 의해 필자도 이를 알게 되였다.     손문은 근대 중국의 국부로 불릴만큼 민주혁명의 대선구자이며 리홍장은 청말 원로중신으로서 당시 비스마르크, 이토 히로부미와 같이 “세계 3대 제상”이라 불린 대정치가, 외교가였다.     손문과 리홍장, 이 서로 상이한 정치가들이 어떤 현묘한 관계가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근대사의 관심사가 아닐수 없다. 필자가 섭렵한 근대사자료를 종합하여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량자 사이에는 확실히 량광을 청나라에서 독립시키고자 했던 움직임이 있었던것은 사실이다.     시간적으로 보아 “량광독립”을 꾀한것은 의화단봉기와 때를 같이해 련쇄작용으로 8국련합군이 침공, 청나라정부가 대단히 약체화된 시기였다.     때는 바로 1900년이다. 일청전쟁의 패북으로 굴욕적인 “마관조약” 체결로 “매국노”로 지탄당한 리홍장은 실의에 빠진 몇년을 이겨내고 서태후의 중용으로 다시금 량광총독으로 발탁된다. 동산재기를 이룬 그는  서태후의 지시로 강(康)ㅡ량(梁)의 유신당을 탄압하는 중임을 맡은것이다.     그런데 리홍장은 강ㅡ량의 조상의 묘를 파헤치는 한편 암암리에는 강, 량과 간접적 거래를 하고 서신래왕도 했다. 관계는 참으로 기묘했다.     의화단운동의 발발로 말미암아 리홍장과 혁명당 손문의 관계 또한 복잡, 미묘하게 되였다. 의화단의 운동으로 여지없이 란을 겪고있는 사회와 조정을 노린 손문은 찬스가 도래했다고 쾌재를 불렀다.     그래서 혁명무장봉기발동을 예정한 동시에 리홍장과 손잡고 리씨가 주도한 량광독립을 밀모했다.     손문이 리홍장을 노린 리유는 무엇일가? 예로부터 그는 청정부에서 리홍장이 가장 개명하고 국제적 시야에 명석한 두뇌를 갖춘 예리한 정치가(또한 같은 한족)라고 판단하고 믿었기때문이였다. 따라서 리홍장에 대한 손문의 기대는 그만큼 지대했던것이다.     한편 량광독립을 갈망하고 적극 추진한 세력은 향항에 사는 상류계층과 광동의 상류계층이였다. 북방의 동란이 량광과 향항지역으로 파급되면 자신들의 정치, 경제적 리익에 해를 끼칠것이라고 판단했기에 리홍장을 리용하여 사회질서, 안전을 보전하고자 했던것이다.     제임스의 《일본과 손일선》에 따르면 광동상인들은 2,500만냥 현금으로 리홍장의 북상을 막고 광동에 눌러앉게 하려했다.    하계(河啓)라는 향항의 상층사회 인물은 향항총독인 블랙크와 연줄이 있었는데 그의 힘을 빌어 리홍장의 독립을 권유하였다. 우선 리홍장의 심복인 류학순(劉學詢)을 찾아 리홍장이 독립의향이 있다면 손문을 일본에서 불러오겠다고 했다.     이 지극히 민감한 계책에 대해 리홍장은 말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하여 류씨가 즉시 손문에게 서한을 보내 리홍장이 북방의 의화단란으로 광동독립의향이 있으니 빨리 오라고 전했다.     이들의 종용에 손문은 1900년 6월 11일, 일본인 미야자키 도텐과 정사량 등 조수 3명을 인솔하고 일본에서 출발하여 17일 향항에 도착했다. 혹시 리홍장이 자기를 꾀여 체포할것을 경계한 손문은 일본인 친구를 파견하여 류학순과 회담을 하게 하고 자신은 승선하여 윁남으로 왔다. 무장봉기를 준비하면서 한편 리홍장의 량광독립을 획책했다.     그런데 6월 15일 청정부는 리홍장더러 “속히 북경으로 반환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에 리홍장은 경계하여 행동을 지연했다. 이때 북경으로 갔다가는 불길하다고 느꼈기때문이였다.     드디여 6월 21일 청나라는 외국련합군과 선전포고를 했다. 리홍장과 함께 량광총독 류공일, 호광총독 장지동을 위주로 “동남호상보호”협의를 맺었다.     7월 8일 성선회의 노력으로 리홍장은 원직회복으로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으로 서태후가 재임명했다. 7월 16일 북상을 일부러 지체하던 리홍장은 광동을 떠났다.     광주에서 북상의 경로로 꼭 향항을 경유하게 되였다. 아직 리홍장에 대한 독립합작의 뜻이 남아있는 손문과 블랙크는 리홍장에게 최후의 간청을 들려 했다.     하루전날 향항해만에 도착한 손문은 리홍장과 면담을 기대했다. 그러나 향항당국은 영국정부의 지시에 따라 향항상륙을 거절했다. 단지 리홍장이 량광독립에 찬동한다면 손문의 상륙을 비준하고 면담을 허락할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졌다. 이때의 리홍장은 광동, 향항의 리익보다 자신이 장악한 중국 전토의 국면에 더 관심했다. 따라서 손문과 밀약했던 광동, 광서 량광독립은 없던것처럼 포기하고말았다. 지어 손문을 체포할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리홍장은 손문의 혁명에 리해가 부족했던것이며 눈앞의 기득리익을 포기할 자신이 없었다. 이것이 손문에 비한 그의 약점이였다.
85    (85) 손문은 동북3성(만주)을 일본에 매각하려 했다 댓글:  조회:3437  추천:20  2016-12-18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85) 김문학   손문은 동북3성(만주)을  일본에 매각하려 했다     손문(손중산)  근대사를 재독하면서 발견되는 사실 하나가 있다. 손문이 신해혁명성공과 더불어 초대 림시 대통령으로 추대되긴 했으나 곧 북경의 원세개에 의해 좌절당한다.        흔히 손문혁명의 좌절은 원세개의 “혁명과실 절취” 하는 식으로 간단하게 리해하는 성향이 있지만 사실 그 내막을 보면 사상, 이데올로기나 방침보다도 때로는 결정적요소가 다른데 있었다. 즉 금전, 자금의 유무, 다소에 따라 누가 혁명의 지도권을 장악하는가가 결정되기도 한다.   손문이 원세개에 의해 좌절당하고 또 그뒤 원세개를 타도하는 혁명(제2차 혁명)을 일으켰으나 자금조달문제로 큰 애로에 봉착했다.   일본국회도서관에는 실업가 모리가쿠(森恪)가 1912년 2월 3일 오후 6시경에 마스다(益田孝)에게 보낸 특병정보가 소장돼있다. 그 내용을 현대문으로 요약하면 대략 이런 뜻이다. “중국재정이 궁핍하여 년말까지 1,500만원이 조달되지 못하면 작전을 벌릴수 없다. 그래서 혁명정부도 혼란에 빠질것이다… 손문이 만주 매각에 관해 이미 승낙했다. 일본이 혁명군의 와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1,000만원을 차관해 준다면 손문 등은 원세개의 화해를 즉각 중지시키고 손문 또는 황흥이 일본에 즉시 와서 만주에 관한 밀약을 체결할수 있다. 만약 차관이 불가능하다면 혁명군은 곧 해산될 위기에 처해있다. 남경이 동요하면 손문이 기필코 변고가 생길것이다…”   모리가쿠(1882~1932)는 1901년부터 미츠이물산(三井物産)의 상해지사에 파견된 인물로서 선후하여 상해, 장사, 천진, 북경에서 활동한 미츠이재벌의 중국사무전문가였다. 마스다(1848~1938) 미츠이재벌의 총회장으로서 막대한 자금의 소유자였다.   무창봉기이후로 중국혁명당은 최대의 재정위기에 처해있었다. 남경림시국민정부가 창설됨에 따라 거액의 자금이 필요했는데 이 자금이 있어야 북벌을 시작할수가 있었던 상황이였다.   1912년 1월 황흥은 일본 정계의 최고 원로인 야마카다 아리토모(山縣有朋)가 마스다에게 명하여 혁명당과 동북3성(만주)을 일본 소유로 하는 밀약체결을 하게끔 지시했다.   마스타는 이 사무를 부하인 모리가쿠에게 지시하여 실행하게끔 했다. 그래서 모리가쿠는 남경에 있는 손문의 일본인 비서 야마다(山田純三郞)를 통해 손문과 손문의 외우인 미야자키 도텐(宮崎滔天), 호한민(胡漢民)을 불러모아 4자회담을 가졌다.   근대사학자 양천석(楊天石)의 고증에 의하면 1912년 2월 3일, 만주에 대한 일본의 매수조건에 대해 상담했는바 일본에 만주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손문의 혁명군에게 2개 사단몫의 무기와 현금 2,000만원(일설에 의하면 1,000만원)을 제공하기로 했다.   본문 서두에 나오는 전보문은 곧 이 회담후 모리가 상사인 마스다에게 송전한 내용이다. 모리의 진술에 따르면 이 전보문은 그 자신이 중문으로 초고를 작성하여 손문과 호한민의 수정을 거쳤다고 한다.   이 전보문의 내용에서 추측할수 있는바 손문, 황흥 등 혁명가들은 무조건 간단하게 원세개와 타협하는게 아니라 남경림시정부의 재정의 궁핍으로 북벌전쟁을 전개할 자금이 급수됐던 절박한 배경이 있었던것이다.   모리가쿠의 2월 8일자로 마스다에게 보낸 장문을 보면 그날 손문과의 회담내막을 잘 알수 있다. 회담중 일본정부의 뜻을 손문에게 전달했다. “즉 현재 세계는 황인종과 백인종의 격투인데 백인종의 로씨야세력의 남침을 제지하기 위해 일본은 자신과 동아시아의 안전평화를 위해서라도 일본의 힘으로 만주를 보존할 필요가 있다. 중국정부는 만주를 보존할수 없으며 만주의 운명은 결정된 셈이다. 혁명정부는 전도에 곤난이 많고 지리적, 력사적 립장으로 일본의 특수 원조 없이는 성공의 가능성은 묘망하다.”   모리의 진술을 들은 손문은 이렇게 말했다. “동양평화를 위하여 만주는 꼭 동양인의 수중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므로 거사에 앞서 나는 만주를 일본에게 위탁한다. 이로써 일본이 중국혁명을 지원할것을 희망한다. 단 내가 위급할 때 일본에서 발붙일려고 했으나 일본관헌은 나의 입국을 거절했다. 일본정치가는 나를 포용할 아량이 없음에 아쉽다. 지리적, 인종적 관계로 일본의 동정과 지원이 없으면 중국은 일사무성(一事無成)이다…”   손문은 혁명정부가 재정궁핍에 빠져 파산의 위기에 처했으니 음력 년말까지 군대를 유지할수 있는 자금이 필요하니 9일까지 1,500만원 경비를 조달해달라고 간청했다.   일본에서는 2월 6일, 8일, 11일 3차례나 손문, 황흥이 일본으로 와서 만주밀약체결을 독촉했다. 그뒤 답전을 보냈으나 일본에서 아무 련락이 없었다. 야마다의 회억에 따르면 륙군대신 이시모토(石本新六)의 반대로 수포로 돌아갔다. 야마가다(山縣)의 말대로 “일청, 일로 전쟁에서 보귀한 선혈을 뿌린 만주땅을 꼭 돈주고 매수할 필요없이 그냥 수중에 넣으면 그만이다”는 주장이 압도적이였다.       손문이 재정위기에서 탈출하는 수단으로 만주매각을 예정했던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선을 이미 식민지로 손아귀에 넣은 일본제국주의가 거금으로 살 필요없이 당시 이미 만주땅은 일본의 수중에 장악돼 있은것 또한 사실이다.                   
84    (84) 강유위의 두가지 얼굴 댓글:  조회:3555  추천:19  2016-11-23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84) 김문학 강유위의 두가지 얼굴   강유위   근대 중국과 세계를 진감한 무술변법의 지도자로서의 강유위(1858~1927). 강씨만큼 복잡한 얼굴을 한 근대 중국지식인도 흔치 않을것이다. 근대의 격동의 시대를 누볐던 강유위를 동아시아적 력사무대에 올려놓고 조망하면 그의 여러가지 얼굴과 그 명암이 현현된다.   강유위의 사전적인 해석은 대개 이렇다. “근대 저명한 정치가, 사상가, 사회개혁가이며 서예가, 학자이기도 하다. 자는 광하(廣廈), 호는 갱생(新生)이며 광동 남해사람으로서 ‘강남해’라고도 불린다. 주요저작으로는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 《일본변정고(日本變政考)》, 《대동서(大同書)》, 《구주11국유기(歐洲十一國遊記)》 등 다수가 있다…”   그러나 인물사전적인 해석은 강유위의 참모습, 복잡한 얼굴을 다 담기엔 아무래도 무리다. 많은 근대사자료를 탐독하면서 필자의 시야에 들어온 강씨의 참모습은 한마디로 극과 극을 달린 모순의 양상을 띤 인물이다. 즉 일언이페지하여 위대한 변혁가와 고루한 보수파이며 인물상 역시 저명한 군자인듯하면서도 옹졸한 소인, 용인(庸人)에 불과했다.   전자에 대해 세인은 추대하고 좋아하지만 후자에 대해 세인은 또 멸시하기도 한다.   1895년 “마관조약”  체결시 북경에서 회시에 참가하려던 그가 1,300여명의 거인을 련합시켜 “만언서”를 상서한 “공거상서”로 불린 일화는 전설적인 력사적사실로 중국인의 뇌리에 깊이 각인돼있다.      그뒤 1898년 광서황제를 부추켜 “무술변법”이란 유명한 개혁을 시도하나 근근히 100일천하로 끝났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본뜬 이 유신은 획기적의의를 갖추었지만 중국의 사회적원인으로 결국 불행하게 패북으로 막을 닫았다. 그러나 이 변법의 력사적의의는 오늘날 재고해도 여전히 지고한 점수를 주어야 함은 의심할바 없다.  강유위   신해혁명후 중화민국이 시작된지 1년후인 1913년 기나긴 국외망명생활을 접고 귀국한 그는 중국 최고의 보황당 수령으로서 공화제를 반대하고 청나라의 페제인 부의를 부식하여 복벽을 꾀하였다.      무술유신 실패후 그가 걸은 로정은 그의 애제자인, 역시 근대사의 거물지식인 량계초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흘러버린다. 만년 량계초와의 알륵은 한마디로 량자가 택한 로선이 근본적으로 어긋났기때문이다.   강유위의 많은 관련 력사문헌을 읽으면서 재발견되는 그의 얼굴, 그리고 열길 깊은 속.   량계초와 달리 강유위의 깊은 속에는 “군자”, “성인”의 대극에 있는 속물적인 “속인(俗人)”, “용인(庸人)”이 크게 반거하고있었다.   최근 중국사학계에서 그의 “공거상서”의 진실성 여부에 대해 회의적인 관점을 제출한 모해건(茅海建)과 같은 중견사학자도 있으나 유신파의 수령으로서의 지위는 부동(不動)할것이다. 그가 혁신파로부터 해외에 망명해서부터 보황파, 수구파로 공화혁명의 적으로 전락되는 뒤모습에는 그의 립장, 인격까지 크게 회의스러운 질책에서 탈피할수 없다.   강유위는 지식인, 문화인 답지 않게 지극히 공리를 추구하는 욕심쟁이의 일면이 그속에 도사리고있었다. 강씨의 공리성은 우선 권세에 대한 아부에서 표현된다. 1888년 북경에 향시 참가차로 갔을 때 “편알권귀(遍謁權貴)”해서 상서를 한것이 결국 북경관료들의 거절을 당했다. 물론 보수파관료의 관념탓도 있으려니와 한편 그의 아첨하는 비굴성과 “효장비도(xiao張卑蹈)”가 관료들의 반감을 샀다.   상해의 정관응, 북경의 채원배, 라가륜(羅家倫) 등 당대 일류의 지식인이나 실업가들도 강씨의 공리성에 반감을 가지고 그에 따르지 않았다.   강씨의 “호대희공(好大喜功)”의 성품에 대해 많은 식자들이 지적했으며 정치학문적인 “표절무단(剽竊武斷)”에 대해 후학들이 지탄했는데 량수명(梁漱溟)은 《동서문화 및 그 철학》에서 “강해남을 제외하고 나는 다른 사람들은 죄다 존중한다”고 직언했다. 국학거두인 전목(錢穆) 역시 강유위의 《신학위경고》는 경학대사 료평(廖平)의 글을 베꼈다고 지적한다.   “이런 여러가지 신분의 인물과 시각에서 바라본 강유위의 그 인물 및 정치, 학술활동에 대해 종합하면 하나의 련관성있는 형상을 걸러낼수 있다. 강유위의 용기와 유신사상은 긍정할만 하지만 그의 자부, 부조(浮躁), 공리심의 많은것, 게다가 지나치게 주관의지로써 행동하는것도 사실이다.”[오상(伍常)]   사실 일부다처제의 봉건제도를 비판한 강유위는 그 자신은 6명의 처첩을 두었으며 만년에는 그의 과분한 공리성으로 거액의 금전을 수중에 넣기도 해 부화사치한 생활을 즐기기도 했다.   1906년 세계 각국을 편력하던 강유위는 공리적인 상업활동에 투신했는바 메히꼬방문시 화교의 의연금으로 토지를 사들여 팔아먹음으로써 일확천금을 했다. 오늘의 값으로 치면 700만원 인민페의 거금을 하루아침에 벌었다. 그는 근대 중국에서 가장 많은 외국을 편력한 일류려행가이기도 하다.   만년에 강유위는 귀국하여 상해에 대실업가 성선회(盛宣懷)의 화원을 고가로 빌리기도 했으며 1921년에는 초호화의 원림식 주택을 거금을 들여 짓기도 했다. 그는 만면의 15년 동안 몸도 건강했으며 여기저기서 모은 돈으로 항주, 상해, 청도 등에 별장을 짓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다.   뿐만아니라 황하, 장강남북, 십여개의 산천명소를 유람하면서 만년을 무위무식으로 허송세월했다. 그러던 1927년 3월 8일, 상해에서 70고희 대축하연을 베풀고 21일 청도에 도착하여 30일에 객사했다. 광동성 불산시에 있는 강유위의 옛 집은 전국문물로서 세계적으로 소문난 명승고적으로 되고있다. 죽어서도 그는 영화를 누리고있는 희대의 인물이다.
83    (83)《점석재회보》의 경이로운 세기말 중국사회 댓글:  조회:3874  추천:41  2016-11-07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83) 《점석재회보》의 경이로운 세기말 중국사회 김문학             수년전 필자는 《점석재회보(点石齋畵報)》 영인본 한세트를 입수했다. 이 화보야말로 19세기말 중국사회상을 리해하는 보물고적인 잡지이다.     1884년 5월 8일에 창간되여 1898년 페간된 이 화보는 당시 상해에서 신보(申報)라는 근대 유력지를 창간한 영국인 메이저형제가 출판한 화보였다. 신보는 1872년 4월 30일(동치 11년)에 창간된 중국어신문으로서 1949년까지 존속한 유구한 력사를 자랑하는 중국 최고(最古)의 신문의 하나였다.     《점석재화보》는 매월 6자가 붙는 날자(6일, 16일, 26일) 3차례 발매, 매 책의 페지가 8페지였는바 신보와 같이 배달되였다.     약 14여년 동안 4천폭이나 달하는 문자설명이 달린 그림, 삽화를 내였는데 이는 청말 중국사회의 여러 분야를 리해하는 귀중한 자료이며 북경대의 문학과 교수 진평원(陳平原)의 표현을 빈다면 “희귀한 보물고”이다.     당시 창간호 서문에서 존문각주인(尊聞閣主人)이란 이름으로 발간취지를 “유럽에서는 화보가 대거 류행하고있다…그런데 중국에는 아직 이런게 없다”고 밝히면서 중국식의 그림을 통해 화보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타개하여 눈을 즐겁게 하는것, 또한 뉴스보도에 흥미를 가진 자의 고충을 돕기 위해서라고 언급한다.     《점석재화보》는 그야말로 불티나게 팔렸다. 창간호는 수일만에 매절이 되고 륙속 독자들의 요망에 의해 수천부씩이나 백넘버를 증쇄했다.     그래서 1888년과 1889년 2년 동안 상해를 넘어 북경, 남경, 항주, 호남, 광동, 사천, 산동, 귀주, 광서, 감숙 등 중국 태반에 점석재지사를 설립할 정도로 인기비등(沸騰)이였다.     아이디어적으로 탁월한 영국인 메이저는 당시 저명한 화가 오우여(吳友如)를 주필로 초빙하여 사회신문, 신선한 사건, 물건, 시민풍습, 일상생활모습, 외국의 일화, 기괴한 풍문 등 잡다한 소재로 그림을 그리게 했다.     오우여외에도 유명한 화가였던 김계(金桂), 장지영(張志瀛), 전자림(田子琳), 하명보(何明甫), 부량심(簿良心) 등이 소속으로 활약했다.     그들의 필법은 섬세하고 중국회화의 요령에 서양화의 원근, 명암법 등을 구사하여 그림의 매력을 대폭 증가시켰다.     그중에서도 특히 다작인것이 김계와 부량심으로서 각기 천점 이상의 그림을 그렸다.     《점석재화보》의 내용은 사회, 정치, 문화, 경제, 민속, 뉴스, 일상 등의 방대한 내용이 망라되여있다. 1883년 이래 청불전쟁(정식 개전은 1884년)을 계기로 화보가 가동된다. 화보의 창간호에 이미 프랑스군이 청군의 주둔지를 습격하는 장면이 그려졌다.     1894년 발발한 청일갑오전쟁의 그림 40여점이 게재되기도 했다.     《점석재화보》는 당시 시사와 사회신문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중대한 사회뉴스는 독립으로 다루었으며 집중단기련재방법을 취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리홍장이 로씨야 및 구미 각국 방문, 서태후의 50, 60탄신경축행사, 공동 3강에서 발생한 홍수재해 등을 리얼타임으로 그림으로 보도했다.     화보는 또한 시민의 풍습, 일상을 그리는데 치중했는바 청조 세기말 중국 도시생활풍경이 위주였다. 이런 그림은 청조의 사회실상과 서민의 생활을 리해하는데 지대한 도움이 되는 풍속화로서 가치가 있다.     그 실례를 들면 신혼의 왕가네 새색시가 강가에서 쌀을 씻다가 자나가는 비적 두명에게 잡혀 기생집에 팔려가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어린이가 유괴당한 뒤 인공적으로 잔지단벽(殘肢斷臂)시켜 장애인 “걸식아이”로 분장시킨 내용도 있다.      화보는 당시 서양과학기술, 선진문물을 소개, 선전하는 구실을 한다. 이외의 신생사물은 《점석재화보》가 취급한 주요 소재이기도 했는바 중국 근대에서 가장 일찌기 서양의 과학기술과 문물을 소개하는 화보식 매스컴이였다.     이를테면 광서 11년 10월 15일, 세계 각국을 편력한 과학자 언영경(顔永京)이 상해 격치서원(格致書院)에서 환등을 리용하여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피력하는 장면을 그린 내용이 있다. 그리고 독일의 방탄의, 영국의 수저터널로 기차가 통과하는 수저행차(行車), 일본의 화산지진 등을 소개한것도 있다.     이 자그마한 《점석재화보》는 많은 중국 청소년에게 영향을 끼친다. 문호 로신 역시 《점석재화보》를 즐겼던 소년이다. 그림책을 매우 즐긴 로신은 그림에서 대포를 보고 대포가 륙지용인가 아니면 해상용인가 신경을 썼다고 한다. 오우여에 대한 로신의 언급 역시 그림을 좋아한 그의 애정이 스며있을것이다.     물론 《점석재화보》에는 기생, 도박, 비적 등에 대한 묘사가 많다. 이에 대해 로신은 “국외사정에 아직 어둡기때문에 그림을 그릴 때 가끔 그럴거라는 허구의 요소도 가미된다”고 지적했다.     중국내 학자나 일본 학자들이 지적하다싶이 《점석재화보》는 글과 글미이 조합하여 연출해낸 재미있는 잡지로서 시사와 신지식, 정보를 전달하는 큰 역할을 했던것이다. “이 방대한 그림에는 서구문화와의 접촉에서 일어나는 경악, 흥분, 오해가 횡일하다. 백여년전 세기말 중국인이 구축한 세계상을 어떻게 읽어낼것인가? 미술사, 문학사, 과학사, 종교사, 사회풍속사…여러 각도에서 그 가능성을 해독할 필요가 있다.” 일본인의 한 학자가 한 말이다.
82    (82) 근대 구중국은 일궁이백이였나? 댓글:  조회:3432  추천:16  2016-10-21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82) 근대 구중국은 일궁이백이였나? 김문학     중국 현대인 특유의 과거 “암흑사관”과 함께 병행하여온 고루한 인식패턴에는 근대 낡은 중국(중화인민공화국 이전)의 사회는 무조건 “일궁이백(一窮二白)”론으로 밀어붙이는것이 있다.   필자가 유년시절 중국에서 교육을 받을 때 신중국의 오늘날과 종적비교를 하여 구사회는 “암흑”하였고 “반동적”이였으며 경제면에서는 “일궁이백”이라는 관념적교육을 늘 받아왔다. “억고사첨(憶苦思甛)”이란 신 사자숙어가 정착될만큼 오늘날의 행복한 생활을 옛날 구사회의 고통스러운 생활을 회억하면서 대조적효과를 노린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 막연한 관념교육만큼 구사회, 근대사회가 “일궁이백”의 말이 허용하는 상황이였을가?   력사를 재독하면서 재발견되는 력사는 이 관념적인 구호를 일소하기에 충분한 소재들이 도처에서 쉽게 건져낼수 있다. 필자는 우선 아래 데이터적인 수치와 사실을 렬거하기로 하겠다.   1866년 12월 양무운동에서 탄생된 중국 최초의 기계조선공장, 마위조선공장에서 서양의 기술을 도입해 1864년 중국 근대 최초의 천톤급 륜선을 제조했다.   1871년에는 중국 최초의 증기기관차가 제작 탄생된다.   1882년에는 중국 최대급 철근 목조병선이 제조된다.   1889년에는 중국 최초의 철갑군함이 제조된다.   그리고 1907년 미위조선공장에서는 외국인 기사를 사퇴시키고 자체의 력량으로 목, 철 조합구조의 선박을 제조할수 있었는바 극동아시아에서는 최대규모의 조선기지라 한다.   1919년에는 중국 최초의 쌍익수상비행기를 제조하였다.   유명한 한양병기공장은 1890년 6월 저명한 개명파 관료, 지식인 장지동이 건설했다. 철공장에 이어 총과 포를 제조하는 병기공장을 설립하였으며 1895년 여름부터 소규모생산을 하다가 88식 모젤권총을 생산하여 1896년에는 1,300정, 1901년에는 2,500정, 기병총 316정을 생산했다.   1904년 호북병기공장으로 개칭한 이곳에서는 매일 보총 생산량이 50정에 탄환 12,000발이였다. 1907년에는 년도 보총 생산량이 9,000정으로 늘었다.   중국 교과서에서는 “구중국은 일궁이백하여 서양의 성냥, 서양 못을 사용할수밖에 없었다”고 늘 기술해왔는바 이것 역시 사실이 아니였다.   일찍 1879년 광동성 불산현에 중국인 자체로 경영하는 교명(巧明)성냥공장이 있었다. 신해혁명 이후 중국의 성냥공장은 백개를 넘었다고 한다.   그중에서 1920년 상해에서 설립한 류홍생(劉鴻生)의 “홍생성냥공사”가 유명했다.   세멘트공장을 보면 1906년 주학희(周學熙)가 창설한 “계신양회공사(啓新洋灰公司)”가 유명했다. 질좋은 세멘트를 생산했기때문에 계신공사에서는 전국 중대 건축공정에 대량의 세멘트를 공급했다.   회하철도교량, 화하대교, 경한철도의 대교들, 그리고 위해, 하문, 청도, 연태 등 부두건설과 북경도서관, 연경대학, 상해우전국 등 유명건축물은 모두 앞다투어 계신공사의 세멘트를 사용했다.   항일전쟁시기까지 계신공사는 중국의 세멘트시장을 14년이나 독점했으며 그 판매량이 전국 세멘트 총판매량의 92%나 독차지했다.   조선, 증기기관차, 자동차, 비행기, 각종 기계 등 분야를 살펴보아도 중국이 “일궁이백”하였다는 평가절하는 도무지 어불성설임을 알수 있다.   상해 강남조선공장에서는 1918년에 미국의 수주로 만톤급 화물선을 4척이나 생산했으며 그 우량한 질로 인해 미국정부는 매우 흡족해했다.               아래 중국 생산의 데이터를 종 더 라렬해 본다.   1862년 중국 최초의 증기기계가 안경군계소에 의해 생산된다.   1865년 중국 최초의 륜선 “황호”호가 역시 안경군계소에서 생산된다.   1867년 중국 최초의 선반(車床)이 강남제조국에서 생산된다.   1868년 중국 최초의 근대 군함이 강남제조국에서 생산된다.   1906년 중국 최초의 대형군함이 복주선정국에서 생산된다.   “석유가 구중국에서는 나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근대사에서 중국의 석유채굴은 1896년 연장(延長)유광이 탄생되였으며 중국석유공업의 어머니라 불렸다. 1907년 4월 2일 채굴을 시작하여 일당 생산량이 1.5톤이였다. 이때 이미 중국대륙에 석유가 없다는 정설을 뒤엎은것이다.   재봉미싱을 보면 1898년 미국에서 “NEWHOMO”미싱을 청국으로 수입하게 되는바 1910년에 미국의 재봉미싱이 상해, 광주, 천진 등을 통해 대량으로 수입되였다. 1928년 상해에서 최초의 국산재봉미싱이 생산되였는데 그뒤 거룡패 등으로 해방후 엄청난 생산량을 자랑하게 된다.   이상 데이터는 “자유중국론단”에서 발취한것인바 이 단순한 경제적데이터에서 “사실은 만마디 웅변을 릉가한다”는 말과 같이 근대 구중국이 결코 현대인의 관념속에 박힌 “일궁이백”의 정설과는 반대로 오히려 경제능력이 나름대로 강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될것이다. “일궁”은 있어도 절대 “이백”은 아닐것이라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81    (81) 왜 서민들은 무술변법혁신파를 '반역자'로 알았나 댓글:  조회:3368  추천:18  2016-09-18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81) 왜 서민들은 무술변법혁신파를   “반역자”로 알았나 김문학      력사를 해독할 때 우리는 왕왕 이런 굳어진 버릇이 있다. 즉 우리 현대인의 사유와 시각을 투영시켜 백년전의 우리의 선조를 바라보고 그것으로써 력사를 해석하며 착각에 빠지고있는것이다.   이를테면 100년전의 조선사회나 중국(청국)사회가 지금같이 밝았고 좋았다는 막연한 인식을 갖고있으며 “이런 좋은 사회를 그 어떤 적 또는 반동파가 암흑으로 내몰고갔다”는 “암흑사관”. 그런데 아이러니컬한것은 이런 “암흑사관”은 단순히 우리 현대인 자신의 막연하고 근거없는 유치한 환상일뿐 력사를 바라보는데는 오히려 우리 자신의 시선을 흐리게 한다.   이제 필자는 중국 근대의 처절했던 백일유신변법 혁명가에 대한 그때 당시 일반 백성들의 인식에 대해 조명해보고자 한다. 왜냐면 당시 백성들은 지금 우리가 인식하고있는것과는 달리 강유위, 량계초나 “6군자”에 대한 인식은 전면 부정적이였기때문이다.   북경의 선무문외(宣武門外) 차이스커우(菜市口). 근대 중국의 가장 피비린내 나는 명소이다. 금년 8월 북경 방문시 들른 차이스커우에서 필자는 살기등등한 피비린내를 분명 맡을수 있었다. 100여년이 지난 오늘 이 자리에는 분명 음침하고 가슴을 억누르는 살기가 맴돌고있었다.   1898년 9월 28일이다. 바로 이곳에서 무술변법의 혁명가들인 담사동을 위시로 양예, 임욱, 양심수, 류광제, 김광인 “6군자”가 머리를 잘리면서 선혈이 충천했다.   바로 55초전에 담사동이 군기대신 강의(剛毅)에게 “할 말이 있다”고 웨쳤을 때 묵살당했다. 비분에 넘친 담사동은 앙천하며 한탄한다. “역적을 무찌를 마음만 있을뿐 무력회천(無力回天)이구나. 아아ㅡ죽어도 한이 없도다. 쾌재로다. 쾌재!”   력사의 기록에 의하면 “무술6군자”가 목잘리는 날 차이스커우는 구경군으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동명 영화에도 구경군이 물샐틈없이 둘러싼 어마어마한 장면이 보인다.   륙군자의 “칸터우”장면을 흥미진진한 구경거리로만 간주한 시민백성들은 륙군자를 가리키며 “란신적자(亂臣賊子), 서생광도(書生狂徒)들아, 저놈들의 혀를 베라! 집안에서 책을 읽지 않고 뛰쳐나와 인심을 소란시키더니 싸다! 콱 썩어져라!” “어서 빨리 목을 베라. 꾸물대지 말구!” 라고 일제히 웨쳤다. 서민들에게 있어서 무순 6군자는 극악무도한 “간신(奸臣)”에 “반역자”였다.   서민들에게 있어서 강유위를 위시로 한 무술변법의 혁명가들은 일말의 동정도 가지 않는 세상을 소란시키는 역적, 간신에 불과했다. 오늘 우리가 위대한 변법혁명가로 높이 추앙하는것과 정반대였다.   《경자기사(庚子記事)》의 기술에 따르면 무술변법 발발후 유신파혁명가들과 관계가 밀접했던 조정의 장음환(張蔭桓)이 체포, 투옥되였는데 영국공사의 간섭으로 죄를 면하고 신강으로 좌천을 당했다. 신강으로 압송하는 도중 구경군들은  “대간신을 봐라”고 쑥덕거리며 뭐가 모자라서 유신을 도모하는가고 비아냥거렸다. “강당(康黨)과 결탁했으니 간신역적이다”고 서민들은 쾌재를 불렀다.   청일갑오전쟁실패후에도 북경시내의 서민들은 리홍장을 매도했는데 이번에는 또 강유위무리들까지 매국간적(賣國奸賊)으로 싸잡아 욕했다. 1900년 8국련합군이 북경성을 습격했을 무렵에도 강유위가 서양군대를 이끌고 진공했다고 헛소문을 퍼뜨리기까지 했다.   왜 유신변법을 주도했던 혁명가들은 머리를 잘리면서도 그들의 평가는 공정하지 못했을가? 왜 서민들은 그들을 모두 역적으로만 보았을가?   조선의 근대 갑신경장을 창도했던 신예혁명가 김옥균, 박영효 등의 실패와 김옥균에 대한 릉지처참과 아울러 “친일파”반역자로 몰리였던 사례 역시 같은 맥락에서는 민족의 비극이였다.   근본적 리유는 유교전통정치, 독재를 철저하게 실시해왔던 중국(조선도 포함)정치에서 서민백성들이 진상을 알기를 꺼렸던데 있다. “민은 사역할수 있을지언정 그들에게 알릴수는 없다.”란 말과 같이. 그러므로 서민은 늘 먹을거리, 입을거리 걱정만 하면 그만이였지 국가대사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인민에게 알 권리”를 행사할 대신 철저하게 지적정보를 봉쇄해온 전제정권아래서 서민은 알아야 할것을 알수 없고 들어야 할것을 듣지 못한 “청맹과니”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사회, 민족, 국민의 일개 성원으로서의 책임감은 지극히 결여했으며 무술변법같은 혁명이 있을줄도 모르며 단지 우에서 주는 정보를 그대로 통채로 삼켜 혁명가를 단지 “역적”으로만 인식할수밖에 없었다.   당시 서양인이 “중국을 국가가 아니라 흩어진 모래알의 사회”라고 비난한것 역시 이 상태를 두고한 말이다. 당시 일반 백성들은 유신혁명의 참신한 주장을 알고 리해할수 없었으며 유신혁명가들도 광대한 서민을 향해 시선을 준적이 없었다. 위대한 유신혁명은 애초부터 대중적기반을 잃은 “모래성”에 불과했으며 그 빈약한 혁명은 따라서 대중의 호응을 획득하지 못한채 대중들(속히운 무지몽매한 대중)에 의해 혐오의 상대로 취급되는 비극에 조우하게 되였다. 조선의 갑신혁명도 이런 우를 범했던것이다. 유독 메이지유신이 성공할수 있은 리유는 광대한 대중의 호응을 얻은것도 큰 요소일것이다.      
80    (80) 중국 근대 최초의 녀성류학생 댓글:  조회:3684  추천:26  2016-09-01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80) 중국 근대 최초의 녀성류학생 김문학   1907년 원세개가 천진에서 창설한 북양녀의학당(北洋女醫學堂)의 초대 원장(당장 겸 총교습)으로 초빙된 인물이 중국 근대 최초의 녀성류학생 김아매(金雅梅, 1864~1934)이다.   김아매는 누구일가? 그의 이름은 일면 운매(韻梅)라고도 하는데 미국이름으로는 Yamei Kin이라고도 한다. 향항 명경인터넷 자료에 따르면 그녀는 절강성 녕파의 한 예수교 장로의 가정에서 독녀로 태여났다. 어려서부터 조실부모한 김아매는 중국사상 최초의 류학생으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미국 뉴욕의학원 녀자의과대학을 졸업한 그녀는 근대 최초의 공립간호학교인 북양녀자의학당의 창설자이며 중국 의학발전사에 큰 족적을 남긴 녀걸이였다.   돌이켜보면 김아매의 신세는 기구했다. 그녀가 2살때 부모들이 모두 당시 류행하던 전염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동년에 조실부모하고 중년에 리혼하며 자식까지 잃어버리는 인생의 갖가지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신세였다.   부모를 잃은 뒤 어린 김아매는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였던 녕파주재 미국령사였던 맥케티(mccartee)에 의해 양녀로 받아들여진다.   천생 령리하고 총명한 그녀를 맥케티부부는 무척 사랑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1870년 양부는 그녀를 데리고 동경으로 떠났다. 양부가 그해 동경제국대학의 외국인 교수로 초빙되였기때문이다.   만 6살의 김아매는 나서자라던 중국 대륙을 등지고 머나먼 일본으로 떠나야만 했다. 이로부터 김아매의 기나긴 월경(越境)의 이동이 스타트를 뗀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일본에서 소학, 중학 공부를 마친 김아매는 당연히 중국사상 최초의 일본류학녀학생임이 틀림없다.   1881년 양부의 지원으로 그녀는 미국에 류학하여 의학을 전공하게 된다. 이래서 그녀는 중국 첫번째 녀자류학생으로 근대사에 이름을 새기게 된다.        1885년 최우수성적으로 뉴욕의학원 부속 녀자의학원을 졸업한다. 이는 또한 중국 근대 최초의 녀자대학졸업생이란 영예가 되기도 한다.   대학졸업후에도 김아매는 미국에 남아서 계속 연구와 실습에 정진했다. 워싱톤, 뉴옥 등 병원에서 취직하여 《뉴욕의학잡지》에다 “조직학적인 현미경촬영” 등 학술론문을 발표하였다. 현미경기술을 구사하여 진행된 연구리포터였는데 당시 미국의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류학시절 그녀는 “허심하고 학습에 노력하여 각종 의료기구를 활용한 실험을 중시하는” 녀학생으로서 주위의 칭찬을 받아오기도 했다.   당시의 중국에서 “의학”은 근근히 한의학적인 “청진, 문진, 진맥” 등 의술에 불과했다. 김아매는 예리한 안목으로 근대 서양의학의 선진도구를 활용하는데 개안했다.   그녀의 전기자료에 따르면 1887년 당시 그녀는 이미 미국 뉴욕의학계에서는 명성이 자자한 녀의사이기도 했다.   그런 김아매가 갑작스레 귀국을 선택했다. 미국에서 선진서양문물을 향유하면서 질높은 생활을 하고있던 그녀가 귀국의 길을 택한 리유는 어디에 있을가?   유년시절 부모님이 몹쓸 병으로 인해 의료기술이 렬악한 중국에서 비참하게 돌아간 뼈아픈 체험이 “늘 가슴에 아로새겨져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귀국하여 자신의 힘이 닿는대로 조국동포의 병환질고를 해소하는것이 인생 최대의 소원이였다.   드디여 그녀는 1888년 중국으로 귀국했다. 우선 아모이(夏門)에서 교회소속의 의료시설에서 사업했다. 이듬해는 그녀 자신이 병환에 걸려 일본으로 도항해 치료를 해야 했다.   1905년에 귀국하여 성도에서 살다가 1907년 원세개의 초빙으로 천진의 북양녀자의원을 창설하여 당장 겸 총교습을 맡게 됐던것이다.   1908년 김아매가 꾸린 북양녀의학당은 천진 최초의 간호사양성학교이다. 학교 직속으로 북양녀의원이 있으며 산하에 산부인과, 간호 2개 반을 두었다.   《호리잡지(護理雜志)》연구원 강월평씨의 연구에 의하면 이 간호학교에서는 가난한 집안의 우수한 녀학생을 모집하였는데 교재도 국외의것을 사용했다. 또한 양성방법, 간호실천 등 규범에서 간호사제복에 이르기까지 서양이나 일본의 선진적인것을 적극 모방습수하였다고 한다. 당시 중국에서는 최첨단의 간호학교였다.   김아매는 몸소 교편을 잡기도 했으며 의학교육사업에 혼신을 다해 노력했다. 교수와 실천을 중시했으며 서양의 선진방법을 채용하였다. 또한 영국 녀의사를 초빙하여 실습교습으로 활용하였다. 그녀가 학교교장을 담임한 8년 동안, 그리고 20여년의 림상실천속에서 중국 근대 의학발전을 위해 큰 고언을 하였다.   1934년 페염으로 인해 북경의 협화병원에서 파란만장의 생을 마감했다. 현재 북경의 오탑사(五塔寺)의 석각박물관에 가면 그녀의 묘비를 볼수 있다고 한다.   청말과 미국에 걸쳐 이어진 그녀의 인생 자체가 기구한 중국근대를 말하고있는듯 하다. 녀성의 근대화를 잘 구현시킨 인물로서 김아매는 특기할만한 녀성이다.
79    (79) 청말의 일본본토 습격계획 댓글:  조회:4011  추천:28  2016-03-29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79) 청말의 일본본토 습격계획 김문학     근대 동아시아 백년사를 회고할 때 동아시아 동쪽 끝머리의 작은 섬나라 일본이 거대한 대륙 중국과 조선반도를 침략, 점령, 지배의 력사적사실은 있으나 대륙 중국과 반도가 섬나라 일본을 한번도 침략, 습격한적이 없는 중대한 사실이 눈에 뜨인다.   중국의 근현대 사학자들은 말한다. 사실 1937년부터 45년사이의 항일전쟁, 특히 1945년 일본 패망의 8월에 중국이 일본 본토까지 진군하여 일망타진할 기회는 있었다고.   당시 일본침략자를 중국 대륙에서 몰아내는데 결정적 작용을 한 요소는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중국, 로씨야, 미국, 일본의 립장에 따라 상이한 양상을 로정하고있다. 일본인은 중국군에게 패북당한것이 아니라고 고집하며 중국인학자는 중국군, 공산당군대의 력량을 높이 평가하고있다. 물론 로씨야학자는 쏘련군의 참전을 과대평가하고 미국측 학자는 미국의 원폭투하를 최대한 결정적인소로 단정하고있다.   필자는 이 4국의 요소가 서로 종합하여 일본의 신속한 패망을 초래했다고 보는편이 타당할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고싶다.   그런데 단 한가지 의문만은 여전히 전승국 국민들의 뇌리속에 남는다. 왜 당시 승승장구로 일본군을 무찌르던 중국이 일본 본토까지 침습하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이다.   복단대학 국제관계 및 공공사무학원의 교수 곽정평(郭定平)은 “기실 당시 쏘련이 일본 본토까지 습격하려 했으나 미군의 작전이 너무 신속했기에 관두었다”고 밝힌다.   이미 물먹은 담벼락처럼 무너진 일본에 대해 전면습격작전은 무의미하며 일본 역시 촨황만 보류하면 무조건 투항하겠다고 승낙했기때문에 미국과 장개석이 상담결과 일본 본토 전면 침공을 중지했다는 학자(팽훈후)의 해석이 있다.   결과 미군의 GHQ가 일본을 7년간 점령하면서 미국식 민주국가로 일본을 개조시켜버렸다.   그런데 필자가 이 글에서 쓰려는것은 100여년전 청조말기에 1894~95년 청일갑오전쟁기간 일본 본토 습격계획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건의 단서는 당시 청나라의 외교관인 송육인(宋育仁, 1858~1931)이 “일본 본토 습격계획”을 청조정부에 제출하는것으로 시작된다.   그렇다면 우선 송육인이란 인물은 누구인가로부터 실펴보기로 하자.     《송육인 사상평전》[황종개 등 저(黃宗凱 等著)]에 따르면 송육인은 사천성 자공시 출신의 청말 “신학거자(新學巨子)”로서 유신사상가, 지식인, 외교관이였다. 그의 사상은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출판, 군사, 외교, 법률 등 폭넓은 령역에 미쳤다. 1886년 문과에 급제해 한림원 서길사로 승급했으며 북경에서 유신사상을 접촉하고 황준헌 등 개량파지식인과 친분을 쌓으면서 의식의 큰 변화가 일어난다.   1887년, 그는 중국 근 30년의 양무운동의 파탄에 따른 반성을 했으며 양무파를 비판하고 유신변법을 주장한 《시무론(時務論)》을 집필해 중국이 개량의 길밖에 없다고 언급한다. 《송육인 사상평전》[황종개 등 저(黃宗凱 等著)]에 따르면 송육인은 사천성 자공시 출신의 청말 “신학거자(新學巨子)”로서 유신사상가, 지식인, 외교관이였다. 그의 사상은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출판, 군사, 외교, 법률 등 폭넓은 령역에 미쳤다. 1886년 문과에 급제해 한림원 서길사로 승급했으며 북경에서 유신사상을 접촉하고 황준헌 등 개량파지식인과 친분을 쌓으면서 의식의 큰 변화가 일어난다.   1887년, 그는 중국 근 30년의 양무운동의 파탄에 따른 반성을 했으며 양무파를 비판하고 유신변법을 주장한 《시무론(時務論)》을 집필해 중국이 개량의 길밖에 없다고 언급한다.   《시무론》은 경제면에서는 민족공업을 발전시켜 외국경제의 침략을 막아야 하며 정치면에서는 유럽의 군주립헌제를 따라 배워서 군민공치(君民共治)의 제도를 실시할것을 창안했다. 뿐만아니라 군사, 문사 등 분야에서의 개량을 소리높이 주장했다.   1889년 한림원의 검토로 되였으며 혈기왕성한 그의 문장은 뭇사람의 시기를 사기도 했지만 광서황제의 사랑을 받기도 했으며 거물급 학자 옹동화에게 소개시키기도 했다.   1891년 과거시험관으로 광서를 시찰하면서 청국개혁의 절박성을 감수했다. 1892년 공친왕에게 경제개혁, 신문개방, 교육발전 등 개혁안을 제출했다.   1894년 공사를 수행하여 유럽에 출사한 그는 외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사정을 적극 조사, 접촉했으며 그 경위를 《채풍록(采風錄)》 4권으로 출판하여 서양의 정치, 풍습, 문화를 소개하면서 유신변법사상을 강도높게 진술한다.   청일갑오전쟁 발발 당시 런던에서 중국 주 영, 불, 이, 벨기에 4국 공사참찬으로 있던 송육인은 청나라 조정에 상서를 올려 구체적인 전략을 진술했다.   황해해전 실패후 송육인은 즉시 파격적인 전략을 구상했다. 즉 영국 등 군함을 구매, 어뢰쾌속정 10척에 외국수병 2천명을 모집하여 수군려단을 무어 외국상업단체로 가장해 일본의 나가사키와 동경을 습격하는 방안이다.   이 모략을 송육인은 청나라에 보고하여 비준을 바랐으며 당시의 실력자인 장지동, 류곤일(劉坤一)과 련락하여 지원을 청원했다. 그리고 미국, 영국 등 은행가들에게 차관하여 군함과 병사를 사고자했다. 그의 피타는 노력으로 군함, 무기와 병사모집이 이미 성사되였으며 강유력한 해군을 형성시켰다. 이를 북양수사 제독 랑위(琅威)에게 주어 인솔하게끔 했다.   그러나 당시 패북한 청나라는 이미 일본과 강화할 타산을 확고히 하고있었기에 리홍장은 송육인들의 기습작전을 철저히 부정해버렸다. 서태후 역시 송육인이 “사단을 일으킨” 죄를 문책해 송을 귀국시켰다. 1895년 3월 청나라와 일본은 굴욕적인 “마관조약”을 체결했다. 송육인은 관직이 4품직으로 떨어지고말았다.   그뒤 송육인은 《차주기(借籌記)》를 집필하여 뜻을 성사시키지 못한 울분을 기술했다.
78    (78) 100년전에 예측한 상해만국박람회 댓글:  조회:4339  추천:42  2016-03-17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78) 100년전에 예측한 상해만국박람회 김문학    올림픽과 만국박람회(世博會)는 한 국가의 경제문화적 선진도를 가늠하는 바로미터로 되고있다.   아시아에서 최초로 올림픽을 개최한 나라는 일본(1964년)이며 다음은 한국(1988년), 그 다음은 현재 눈부신 성장을 과시하고있는 중국(2008년)이다. 이와 같이 아시아 근대 선진도 순위로 올림픽과 만국박람회가 세트로 개최되였다.   세계 제1회 만국박람회가 개최된 곳은 1851년의 영국 런던이였다. 박람회가 주최국의 국격과 국위발양의 큰 아이템으로 되였으며 역시 서양 근대화의 거세찬 물결을 타고 동아시아에도 그 짙은 의식이 류입된다.   100여년전인 1898년 무술정변이 실패후 젊은 계몽운동가 량계초는 일본의 배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한 사실은 주지하는 바이다. 량계초는 탁월한 지견과 아이디어를 갖춘 당대 일류급의 지식인이였으며 바로 그러한 까닭으로 명석하고도 미래를 예측하는 두뇌를 가진 엘리트문인이기도 했다.   당시 일본의 배에서 일본인 선장이 건네주는 일본의 베스트셀러 소설 《가인기우(佳人奇遇)》를 읽게 된다. 이 소설은 일본 당대의 저명한 정치가이자 소설가, 문인인 시바시로[柴四郞, 필명 동해산사(東海散士)]가 쓴 미래를 예측한 정치환상소설이였다.   소설은 미국 류학중인 일본인 청년의 행동을 주축으로 서구의 근대혁명, 동아시아 조선, 청국, 일본의 근대 백여년을 기상(奇想)을 동원하여 서술하고있으며 각국 독립운동가, 지사들도 대거 등장한다.   이에 지대한 공명을 일으킨 량계초는 소설에서 큰 계시를 얻는다. 도일후 유명한 《청의보(淸議報)》를 창간한 그는 이 소설을 번역, 련재한다. 이리하여 일본인이 쓴 정치환상소설은 중국인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킨다.   1902년 량계초는 아예 스스로 환상소설 《신중국 미래기》를 집필하였다. 이 소설을 전문 발표하기 위해서 량계초는 스스로 문학잡지 《신소설》을 창간하기도 했다. 《가인기우》의 영향으로 탄생된 이 소설은 로신의 《광인일기》보다 16년이나 앞서 집필된 중국 근대의 소설이라는 점에서 중대한 의의를 지닌다. 이 소설창작을 통해 “소설계혁명”을 선언한것도 량계초 본인이였다.   《신중국 미래기》는 약 9만자, 5회로 구성되였는데 미완성으로 끝나는 아쉬움을 남긴다. 소설은 1902년부터 1962년 60년사이의 중국의 력사적변화양상을 허구로 기술하고있다.   중국은 개혁의 방법으로 민주공화제를 실현해야 한다는 량계초적인 명확한 사상플랭이 담겨져있다.   소설은 1912년 전국 국회가 열린다고 설정하고있으며 국명 역시 “대중화민주국”으로 되있다.   픽션으로 구성된 소설이지만 량계초는 그럼에도 1902년부터 1912년 중화민국 성립까지의 예언은 경이로을 정도로 적중시킨다. 중화민국이 1912년 남경을 수도로 성립되는것도 맞혔다.   이보다 더 경이로운것은 그가 소설에서 “상해만국박람회”를 예언했던것이다. 1962년 세계 각국 지도자들이 수도 남경에 모여 중국유신50주년을 경축하는 세계적박람회를 개최한다고 직언한다.   그런데 필자가 량계초의 예지능력에 찬탄하면서 여러 자료를 섭렵해보니 사실은 량계초보다 앞서 19세기말경에 중국의 지식인들인 정관응(鄭觀應), 강유위까지도 상해박람회를 예언했던것이다.   1893년 청말 유신파사상가 정관응은 그의 명작 《성세위언(盛世危言)》에서 “부강구국”의 사상과 함께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각 분야에서의 개혁계획을 제기했으며 세계박람회를 열어서 나라를 구하는 방법도 제시했다. 또한 상해에서 개최해야 할 필요성과 의미를 언급했다.   1900년에 간행한 《진흥공예제조설(振興工藝製造說)》에서 박람회를 열어 여러 공업, 공예를 장려하는 구국방책을 내놓았다. 아마 구체적으로 세계박람회를 열어야 하는 주장을 한 인물은 정관응이 최초일것이다.    1905년 일본을 거쳐 유럽에 망명한 계몽가 강유위는 1889년에 세계만국박람회 개최시 세운 에펠철탑에 3번이나 올랐다. 그는 만국박람회의 중요성을 피력하면서 이 하늘찌른 철탑의 위용같이 프랑스의 자신과 국위에 주시했다. 그는 국가의 선전, 자신감의 중요한 의의를 여기서 깨닫게 된다.   량계초의 뒤를 이어 소설가 오연인(吳硏人)이 1905년 《신석두기(新石頭記)》를 발표하여 상해만국박람회를 예언한다.   그는 소설에서 가보옥(賈寶玉)이 다시 세상에 환속하여 구경하러 간곳이 바로 상해세계박람회였다고 쓴다. “포동(浦東)에 큰 회장을 설치했는바 이시각 여기서는 만국박람회가 열렸다. 이 만국박람회는 백년에 한번 있을가하는 소중한 기회이므로 구경하지 않을수 없다. 집문밖을 나서자 곧 회장이였는데 각국이 자리를 차지하고 건축물을 짓고 각종 화물을 진렬했다. 중국 역시 각 성별로 회장을 설치했다.”   1910년 32세의 륙사악(陸士鄂)이 소설 《신중국》에서 100년후 상해만국박람회 개최를 예언한다.   필자는 이제 100년후 중국은 어떻게 변해있을가? 세계는 어떻게 변할가?하는 테마에 관심을 갖는다. 100년후의 인류사회를 예언하는 책을 써보고싶다.  
77    (77) 로쿠메이칸 문명개화의 꽃 댓글:  조회:4366  추천:29  2016-03-07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77) 로쿠메이칸 문명개화의 꽃 김문학            동아시아 근대사는 서양문명을 따라배운 “서양화”의 력사이기도 하다. 근대, 현대 포스트 근대 등 단어 자체가 서양의 산물인바 우리는 오늘날도 서구화의 조류속에서 살고있으며 그 또한 우리의 력사이며 우리 자신의 정신과 모습 그 자체이다.   비서구사회에서 솔선 서구화를 이루고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의 근본원인은 우선 세계적으로도 탁월한 서구화, 국제화에 대한 지대한 정열과 실천력에 있다. 일본의 서구화 정열에 대해 그냥 “원숭이 흉내”로 비난하기는 쉬우나 그 서구하습력에 대해 리해하기는 쉽지 않을것이다. 일본의 근대 서양학습력을 인식하는데 상징적인 건축물이 있다.   그가 바로 로쿠메이칸(鹿鳴館)이다. 일본 문명개화의 심벌물로서 서구화의 상징적인 꽃으로 불렸다. 1881년에 착공하여 1883년에 완성된 서구 르네상스양식의 2층 건물로 된 영빈관ㅡ로쿠메이칸이 탄생된다.   록명(鹿鳴)이란 중국 《시경》의 “록명의 시”에서 따온것인데 손님을 접대하는 의미를 나타내는 뜻에서 이 명칭을 채용했다. 1883년 11월 준공되여 11월 성대한 락성식을 거행한 이래 로쿠메이칸은 일세를 풍미한 국제사교클럽으로서 국제적명성을 날린다.   로쿠메이칸을 지은 배경에는 일본의 서구화정책이 있었다. 이와쿠라사절단의 서구순방이래 1880년대 일본 메이지정부는 급격한 서구학습으로서 구화주의(歐化主義)로 불린 구화정책을 실시했다. 당시 일본인에게는 청국처럼 서구의 반식민지로 전락되는 위기를 모면하는것은 서양을 배워 서양식근대문명을 이룩하는 길이 유일무이한 선택이라는 심각한 문제의식을 안고있었다.   그리하여 메이지정부가 일본의 문물, 제도, 풍속, 습속 등 생활양식과 정신의식에서 서구식으로 습득하여 서구제국(諸國)에게 일본의 근대화를 피알하고자 했다.   당시의 외무대신이였던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주도하여 도쿠가와(德川) 바쿠후말기 구미렬강의 강압에 못이겨 체결했던 일련의 불평등조약을 수정시키고 동등한 위치에서 교류하는것이 급선무였다.   그리하여 훌륭한 건축물 로쿠메이칸을 통해 일본이 구미와 변함없는 문화국가라는것을 과시하며 구미렬강의 외국요인들을 초대하여 교류하는 근대적장소를 갖기 위해서였다.   동경의 중심부, 현재의 제국호텔근처에 세운 이 양식 로쿠메이칸은 동경제국대학 건축학과의 초빙교수로 재직중이던 영국인 콘들이 설계한것으로 유명하다. 그때로서는 지극히 이국적 정취를 물씬 풍기는 모던적 건출물이였다고 한다.   현재 필자의 수중에 있는 당시의 무도회, 연주회 장면을 활사한 그림(유명한 화가 요슈치카노부(楊洲周延)가 그린 작품)을 보아도 그 화려한 성황을 실감할수 있다.   1883년 11월 28일, 해내외의 1,200여명 인사를 초청하여 성대한 락성식이 열렸는바 일본의 젊은 미인과 부인들이 영, 미, 독 등 신사들의 품에 안기듯 서양원무곡 선률에 맞퉈 우아한 원무판을 벌였다.   연미복차림의 일본신사나 파리숙녀같은 서양장으로 화려하게 단장한 숙녀... 그뒤 련일 개최된 가면무도회, 원유회, 연주회 등 서구문명개화의 드라마를 자작자연해나갔다. “양장을 입고 양담배 권연을 꼬나물고 양주를 들이마시고 댄스를 하는”것이 전형적 일본 신사숙녀의 모습이였다.   외국인과 교제하기 위해 외국어 회화레슨도 활발히 전개되였다. 1884년 양슨이라는 외국인이 일본의 귀현숙녀의 댄스교사가 되여 댄스를 가르쳤으며 그뒤 세상을 풍미한 로쿠메이칸 가장(假裝)무도회가 빈번이 벌어졌다.   뿐만아니라 여기서는 교육자금을 모금하는 목적으로 녀자학생들이 만든 인형이나 의복을 파는 바자(자선시)도 열렸는데 이같은 자선운동은 상류계급 부인들의 사회봉사로서 류행하기도 했다.   로쿠메이칸의 무도회는 한편 정치가, 상류사회 부인들의 염문을 뿌린 스캔들의 장소로 되기도 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어색가”총리로서 외교관 도다백작의 미인부인과 스캔들을 뿌린 일은 유명하다.   그러나 일세를 풍미했던 로쿠메이칸시대 역시 일본 국민들의 반발을 사게 되여 1887년 9월 이노우에의 외상직 사직과 함께 쇠퇴의 내리막길을 걷는다. 그리고 1941년 건물 자체를 철거해 버린다.  .   서양인들은 일본인의 서구화를 극단적인것으로 보았다. 피엘. 로치는 로쿠메이칸의 무도회를 풍자하기도 한다.   기실 일련의 구화정책은 단순히 “외국숭배”가 아니고 당시 지극히 낮았던 일본의 국제적지위에 메이지정부가 위기감을 느끼고 그 해결책으로 서양문물학습의 급격한 구화정책을 택했던것이다. 그래서 일본 종래의 기능을 했던 가치까지도 부정하면서 서구적 신가치를 긍정하며 서양과 일본의 갭을 메우는것이 일본인이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라고 간주했던것이다.   이리하여 20년후 일본은 마침내 동아시아 최초의 근대국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때까지 조선은 여전히 “잠자는 은둔의 나라”, 청국 역시 “잠자는 사자”를 답습하고있을 때였다.
76    (76) 중한일 “문인”과 '무사'의 행동양식 댓글:  조회:4070  추천:31  2016-03-02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76) 중한일 “문인”과 “무사”의 행동양식 김문학   백여년전 중한일 근대사궤적을 조감하면 3국의 근대화 성공여부의 선로가 선명히 부상한다. 중국과 한국은 늘 자부감을 느낄 정도로 “문”의 사회였고 일본은 반대로 “무”의 사회였다는 점이 일목료연히 알린다. 전통적인 유교사상의 핵으로 구성된 “문인”에 의한 문치사회와 전통적상무정신의 핵으로 이뤄진 일본의 무치사회는 지극히 대조적인 사회 및 문화패턴이였으며 그 가치관, 행동양식은 역시 대조적으로 이질적양상을 로정했다.   그런데 필자가 불가사이하게 느낀것이라면 지금껏 중한일의 이 대조적인 문, 무 세계에 대해 중국과 한국에서는 여전히 “문”이 한수 우이고 우수한 반면 일본의 상무적인 “무사”문화는 “야만적”이고 “폭력적”이라는 렬세로 폄하하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근대 중국과 한국이 야만의 무사에 일시 패배한것에 지나지 않다고 오만해지며 문의 문화가 왜 무의 문화에 패배했는가 그 원인규명의 자아성찰은 거의 루락돼있다.   필자가 동아시아근대사 해독작업에서 재발견된것은 우리가 일본 무사문화를 그냥 “야만, 잔혹, 폭력”이라고 랭소적인 경멸로 일축할 사연이 아니라는 점이다.   일언이페지하면 근대 조선, 청국이 경시하던(지금도 변함없음) 무사문화의 그 실속을 모르고 그것에 패북당한것이다. 이것은 근대 중, 한이 일본에 근대화경쟁에서 지게된 결정적인 원인이기도 하며 100여년이 지난 오늘날 현대 21세기의 진로에도 이 원인에 의해 중한일의 미래가 규정당할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그럼 일본의 상무적인 “무사”의 행동양식, 가치관은 무엇일가? 력사에서 로정된 그 양상을 정리하면 그것은 “실무성”과 “혁명성”으로 귀추할수 있다. 우리가 늘 얕잡아서 미개하고 야만적이며 폭력적인 낱말로만 일축할수 없는 근대적원리가 일본의 무사문화속에 내재해있다.   이에 비교해 지극히 대조를 이루는것이 중국과 한국의 유교정신을 토대로 한 독서인, 지식인 즉 문인문화의 “공론성(空論性)”과 “문약성”으로 귀추되는 행동양식, 가치관이며 항상 앉아서 쉽게 안이하게 이루려는 비생산적인 발상이다. 일본무사가 늘 칼을 거머쥐고 생활의 현장에서 행동적인것에 반해 중, 한의 유교신사, 선비는 늘 붓을 쥐고 탁상에 앉아 론쟁을 즐기며 생의 현장에서 행동, 실천은 기피해왔다. 생각만 하고 행동은 결여했던 치명적인 결점 즉 행동력과 혁명력의 결여 그것이였다.   상대로 일본의 무사계급은 사고한 뒤 그 플랭을 실천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행동이 신속히 따랐던것이다. 상징적인 력사인물을 들어보자. 서양의 충격에 의해 개국을 하게 되는데는 중국이나 일본도 마찬가지지만 그 행동양식은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일본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타카스기 신사쿠(高杉晉作) 등 지식인이며 무사인 그들은 당시 서양렬강에 통용된 국제법저작 《만국공법》과 권총을 몸에 지니고 다녔으며 권총사격술도 익숙했다. 이렇게 국제지식과 실용적인 무기사용을 직접 장악할만큼 실무정신이 뛰여났다. 그러나 청국의 지식인들 즉 문인들은 책만 붙들고 탐독하면서 론쟁설전을 벌이기를 즐겼다. 위원, 엄복, 강유위 누구하나 실무적인 권총을 손에 쥘 생각조차 못했다. 조선의 선비들 박규수, 김윤식 등 당대 일류의 지식인 역시 사대주의적 공론에 치우쳐 부전의 양류체험을 거치면서도 실용적인 “무”가 근대화의 최우선 과제로 제기하지 놋했다.   과거제도의 시스템에 의해 문화력을 과시해온 문인지배인 중국에서는 청말 문인관료가 2만명, 무관 7,000명이였으며 총지방관원수가 200만도 안되였으나 이 소수의 문인엘리트사회가 4억 남짓한 인구를 지배해나갔다. 당시 일본은 3,300만 인구에 무사계급 189만의 방대한 체계로 일본 전체를 지배했다는것을 알수 있다.   중국의 문인관료계급은 상대적으로 작은 수자였지만 독립자주할 필요없이 매판무역에 의해 국가의 봉록으로도 윤택한 생활이 가능했다. 하지만 일본은 수출만으로 전 무사계급의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무사들은 경제, 산업개혁에 지대한 열성을 보이며 서양의 모방과 함께 “물건만들기”제조업에 힘을 기울인다. 원래 실무정신이 강한 그들은 부국을 강병의 토대로 하여 식산흥업에 혼신을 다한다. 1892년 일본 산업, 기업수는 3,065개, 총투자수는 1억 6,371만원에 달한다. 그런데 청국은 “양무운동”은 1860년에 시작해  산업의 수자, 투자수에서 일본의 규모에 비교가 안된다. 1894년 통계에 따르면 제조기업이 15개, 총투자수가 2,796.6만원이다. 양무파와 민간기업수나 투자액에서 일본과 전혀 견주지 못할 저수준에 머무렀다.   무인계층의 엘리트들이 주도한 근대 중국의 유신은 실무정신과 혁명성에서 모두 일본을 뒤따를수 없을만큼 박약했다. 일본의 근대 공업의 “물건만들기”제조업적인 실무형에 비해 중국의 경제모델은 과잉로동력, 인재, 기술 부족하에서 “배(船)를 만들기보다 배를 사는편이 낫고 배를 사기보다 빌리기가 낫다”는 안이한, 쉬운 사업원리를 고안해냈다. 그리하여 자기민족의 기간산업이 형성되지 못했으며 경제산업의 현대화는 “그림의 떡”에 그쳤다.   사실 따져보면 백년이 지난 오늘도 이같은 기업원리가 주류를 차지하면서 개혁개방 40년이 되오도록 방대한 민족기간산업이 축적, 형성되지 못하고 세계의 기업을 위해 알바를 하는 “세계공장”이란 한계를 안고있다.   그리고 근대 문인계급의 혁명, 개혁에서도 혁명의 상대를 찾지 못하고 귀족계급으로서의 자기에 대한 혁명을 완수하지 못했다. 일본의 무사들은 새로운 서양관념과 기술에 그 실무성과 혁명성을 발휘하여 익숙히 수용하여 과학과 사상을 토대로 한 근대화모델을 터득한다. 그들이 우선 목을 벤것은 자신들의 목이였다. 혁명의 목표도 뚜렷했다. 중국과 조선은 다같이 문인계급의 결정적인 결함으로 근대혁명은 산업면이나 사상면, 사회면에서도 성사시킬수 없었다.   근대 중한일의 성공여부는 사실 문인과 무사의 행동양식의 차이에서 비롯됐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두가지 문화에 대해 다시 진지하게 비교, 분석, 성찰할 의미는 매우 크다.
75    (75) 중일한 기차의 운명 댓글:  조회:4837  추천:33  2015-10-21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75) 중일한 기차의 운명 김문학         철도는 문명사회의 가시화된 표징의 하나로서 한 사회의 집결력과 인적, 물적 효률을 높이는데 불가결의 요소이다.   맑스가 19세기 인류의 2대사건이 기차의 발명과 미국의 도금산업붐을 꼽고있는것은 바로 그가 인류사회 중요한 문물의 하나이기때문이였다. 세계 지성들이 기차의 탄생을 인류문명의 중대한 발명으로 간주하는데는 이런 연유에서였다.   100년전 동아시아사회에 기적소리 높이 울리며 등장한 기차, 그러나 그렇게 중요한 산업아이템으로서의 기차, 철도가 중국과 일본에서의 운명은 그야말로 천양지별의 양상을 로정했다는것이 발견된다.   기차의 수용양상이 결국은 중일량국의 서양문명수용을 그대로 대변했다는 의미에서 오늘 다시금 백여년전 기차의 경우를 회고, 비교해보면 시사하는 바가 자못 크다.   일본에서 최초로 기차가 등장한것은 1853년 미국 페리제독이 인솔하는 “흑선” 즉 동인도함대가 일본의 문호를 두드린 다음해인 1854년이였다. 하지만 그 증기기관차는 실물의 4분의 1 사이즈의 모형이였으며 일미화친조약 체결을 위해 두번째로 일본을 방문한 페리제독이 전신기와 함께 바크쿠후장군에게 선상품으로 지참했던 물품이였다.   요코하마의 응접소 뒤골목에 설치한 레루우를 차바구니 하나를 련접한 증기기관차가 흰솜뭉치같은 연기를 토하며 칙칙폭폭 달리는 모습을 보고 바쿠후의 관리들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기차라는 서양문물에 대해 일본인들은 지대한 호기심으로 대했으며 기관차모형을 활사한 그림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일본은 뒤이어 미국에게 동경ㅡ요코하마구간의 철도부설권을 허가하였으며 여의치 않았으나 그뒤 영국에서 철도건설비용을 차관하고 기술지도를 받아 신바시ㅡ요코하마구역 철도를 개설했다. 1872년 이 철도개업식이 성황리에 열렸다. 《우편보지(報知)신문》에 따르면 2만명 관중이 열광하는 와중에 천황은 정장을 하고 정부고관들도 례복차림으로 천황의 뒤를 이어 기차 1등차에 탔다. 한시간 남짓하여 천황과 고관들을 태운 기차가 신바시를 출발해 요코하마역에 도착했다.   당시 증기선(蒸氣船)에 대한 명칭으로 기차를 “륙증기(陸蒸氣)”로 칭했다고 한다. 대중들은 달리는 기차의 모습에 열광했다. 그야말로 그것은 문명개화의 상징물로 되여 큰 인기를 누렸다.   당시 철도부설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으므로 정부의 재정을 압박했기에 민간에서 철도를 만들자는 취지에서 일본철도회사가 1881년 11월 설립된다. 우에노ㅡ아오모리구간 전선이 개통되는것은 1891년 9월 1일이다.   철도, 기차가 문명의 심벌로서 일본에서 열광적인 인기를 누린데 비해 청국에서는 어떠했을가?   사실 청국에 기차가 등장한 때는 일본보다 앞섰다. 북경에 있던 영국상인들은 청정부에 철도부설의 의미를 력설하여 1865년 북경 선무문밖에 1킬로의 레루를 부설하여 청정부에 피얼했다.   그러나 청국은 서양인의 근대화추진을 오히려 네가티브하게 “악”으로 받아들였다. 즉 서양인이 철도부설을 통해 청국을 공제하여 우리의 자원을 수탈하려는 “험악한 욕심”이 있다고 자의적으로 판단하며 단연코 거절한다. 여기서부터 일본인이 서양을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수용한데 비해 청국의 서양인식에서 로정된 경직된 가치관이 엿보인다. 무릇 대립적, 적대적으로 보려했던 세계인식의 양식은 백년이 지난 오늘날 중국인의 사고양식에 여전히 도사리고있다.   우여곡절을 거쳐 1876년 중국 최초의 정식 운수용 철도가 상해에서 탄생된다. 물론 중국 독자적인 건설이 아닌 영국상회에서 건설한 상해ㅡ오송(吳淞)구간의 15킬로 길이의 철도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년후 청정부는 정식인가를 받지 않았다는 핑게로 철도를 회수하고 파괴시켰다. 그러다가 1881년 북양대신 리홍장의 주도아래서 당산ㅡ서각장(胥各庄)구간의 철도가 부설된다. 하지만 일본에서처럼 각광을 받지 못하고 서민들의 강력한 반대를 환기시켰다. 풍수를 파괴한다느니, 지기(地氣)를 문란시킨다느니 야단법석이였다. 개명한 리홍장은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에 못미친다고 한탄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결과 어찌됬을가? 그 증기기관차를 떼버리고 대신 노새를 철도우에서 차량을 끌게 했다. 근대 중국에서 벌어진 비근대적인 롱담이 아닐수 없었다!   근대적 기관차가 다시금 그 노새에게 밀려난 아이러니는 그야말로 중국 지식인의 표현을 빌어 “다시금 만만디의 중세기로 되돌아갔다”는 신전설의 탄생이였다.   그뒤 일본은 철도를 부설한지 10여년만메 아시아 최선진국으로 탈바꿈하며 1895년 청일갑오전쟁에서 일본문명의 승리를 과시하고야 만다.   조선은 그나마 일본에 의해 철도부설이 순탄히 추진된 셈이다. 《동아백과사전》에 따르면 1896년 3월 미국인 모스가 경인간의 철도부설권을 얻어 모스가 자본주 찾기에 실패하자 1899년 그 권리를 일본에 팔아넘겼다. 그해 9월 일본은 경인철도주식회사를 통하여 제물포ㅡ노량진구간 33.2킬로의 철도를 완성시켰다. 이것이 한국 철도의 시초였다.   조선의 철도망은 첫 시작부터 일본의 손에 의해 건설, 운영되였다. 철도가 근대의 상징이듯이 조선의 “근대화는 사실 일본의 려과를 통해 조선에 건설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철도의 동아시아 3국의 운명, 그것은 바로 3국의 근대 운명의 상징이기도 했다. “철도 이 신식교통방식이 근대 중국에서의 수십년의 운명은 파란만장이다. 철도건설을 에워싼 정부의 명쟁암투(明爭暗鬪)를 통해 신생사물수용이 중국에서 간난곡절, 신구관념의 치렬한 싸움을 로정했다. 각종 정치력량의 대립, 국가와 궁정사이, 지방관리사이의 박투, 각 파벌의 투쟁 및 동일파벌내부의 내홍과 리익관계를 둘러싼 쟁탈전…그야말로 중국사회 관리사회의 ‘축영’이다.” 중국 근대사 연구의 중진학자, 중국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뢰이의 투철한 분석이다.
74    (74) '이와쿠라 사절단'의 서양순방 댓글:  조회:5011  추천:32  2015-09-28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74) “이와쿠라 사절단”의 서양순방 김문학        1871년 12월 23일(음력 11월 12일) 탄생한지 3년밖에 안되는 메이지정부는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를 특명전권대사로 하고 키도타카요시(木戶考允), 오쿠보도시미치(大久保利通)와 31세의 젊은 이토 히로부미 등 4명을 부특사로 한 정부 최고 실력자를 포함한 50여명의 견구미사절단(遣歐米使節團)을 파견한다.   1871년의 세계사년보를 보면 그해 “독일제국”이 탄생하며 파리코뮨 성립 그리고 로씨야가 청국 이리지역을 강점하며 일청수호조약이 맺어지는가 하면 메이지정부가 “페번치현(廢藩置縣)”의 근대적 행정개혁을 감행하는 등 격동(激動)의 한해였다.   “이와쿠라 사절단”이라 불린 이 구미 여러나라를 순방한 사절단은 40여명의 정부관원외에도 나카에 초민(中江兆民)과 같은 걸출한 준재와 츠다우메코(津田梅子)와 같은 녀자류학생 60여명, 합계 107명의 엘리트로 구성되였다. 수백만 딸라가 소요되는 장기간의(2년) 외국시찰을 서슴없이 추진시킨 메이지정부의 구상의 방대함에 새삼스럽게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흔히 중국과 한국에서는 일본인은 스케일이 작고 째째하다고 선입관을 안고있으나 근대아시아에 로정된 일본인은 섣불리 그런 선입관을 불허하는 장대한 스키일을 소유하고있었음이 발견된다.   이와쿠라 사절단 파견의 리유는 무엇일가? 목적은 일본의 력사서대로 기술하면 두가지였다. 하나는 당시 구미렬강과 체결한 불평등조약을 수정하며 서양렬강에게 일본도 문명개화를 실행하고있다는 메시지를 발하기 위해서였다. 또 하나는 당시 메이지 엘리트들이 캐치프레이즈로 웨치던 “세계적 콤페티션 에이지(렬강의 시대)에 대응하기 위한”  “서양을 배우자”는 철저한 서양문물수용이였다.       즉 메이지정부가 당시 “급선무”로 한 서양의 법률, 재정, 외교 3면에서 일본이 배워야 할 서양의 실황을 고찰, 학습이 이번 사절단의 주목적이였다. 서양의 근대를 모방, 수용하여 서양과 대등한 파워를 갖춘 근대국가로 탈바꿈함으로써 서양렬강에 의한 식민지화를 저지하고 일본의 독립을 확고화시킬것을 노렸다.   당초 10개월 정도 예정이였던것이 예상밖으로 시간이 대폭 연장되여 결국 22개월(1년 10개월)의 장기순방에 이르며 이 순방이 결국 근대일본사에 결정적인 전환의 의의를 남긴다.   사절단의 첫 순방의 나라 미국에서 31살의 부특사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개명을 세계에 알리는 강연을 하게 된다. 20대에 쵸수번의 영국류학생으로서 습득한 영어로 스피치를 한다. 샌프란시스코의 숙박지인 그랜드호텔에서 개최된 환영회에서였다.   “오늘날 우리 일본 메이지정부 및 국민이 열망하고있는것은 구미문명의 최고봉에 달하는것입니다. 이 목표를 위해 우리 나라는 이미 륙, 해군, 학교, 교육제도에 대해서도 서구방식을 채용하고있으며 무역도 창성하며 문명지식도 도도하게 류입하고있습니다…”라고 일본의 서구문명 학습성과를 자화자찬한 뒤 일본의 서구학습욕에 대해 강조했다.   “우리 나라 국기 중앙에 있는 붉은 일장형은 편지봉투를 필봉하는 빨간 밀랍이 아니라 명실공히 장래 본래의 의장대로 떠오르는 아침의 태양의 휘장이 되며 세계의 문명제국(諸國)의 행렬에 끼여 앞으로 전진할것입니다.”(《이토 히로부미 전기》 상권) 일명 “히노마루연설”이라 불린 이토의 영어연설은 신흥일본의 기개와 사절단의 목표를 강렬하게 표현, 서양렬강에 대한 선언으로서 깊은 인상을 주었다. 늦었지만 그래도 아시아에서는 솔선 서양렬강에 필적한 문명국으로 되겠다는 지대한 자부심을 느낄수 있다.   사절단은 미국에서 모직물공장을 비롯하여 공장, 전신시설, 학교, 공원 등을 견학하고 난 다음 수부 워싱톤을 향한 대륙횡단 철도려행에서 미국의 개척력사에 감명을 받고 일본을 회고 반추하며 조국의 빈약에 개탄하면서 그 원인을 민력의 차이에서 찾고 일본의 전근대적 “인간으로서 인간의 가치가 없는” 사정을 반성하기도 한다.   사절단은 미국, 영국, 프랑스, 벨지끄, 화란 등을 사찰하여 선진국의 문화, 산업, 제도를 조사함과 동시에 적극적으로 그 나라의 지도자, 정치가 및 일반 시민들과도 접촉하여 국제정세에 대한 지식, 정보를 입수하였다.   미국에서 8개월, 대서양을 건너 영국에서 4개월, 프랑스에서 2개월, 벨지끄, 화란, 독일에서 3주일, 로씨야 2주일, 단마르크, 스웨리예, 이딸리아, 오스트랄리아, 스위스에서 체류했다. 체류기일 순위로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인데 역시 당시 세계 최선진국에 지대한 관심을 안고있었음을 알수 있다.   귀로에서 지중해, 스에즈운하를 거쳐 아시아 각지 싱가포르, 윁남 하노이, 향항, 중국 상해를 방문하지만 서구에서 체제한 기간에 비해 무척 짧았다. 후진국에서 별 배울것이 없다고 판단했기때문이다. 이렇게 1873년 9월 13일, 출발지점이였던 요코하마항구에 도착하여 2년에 걸친 구미시찰을 마치게 된다.   사절단의 서기관 구메구니타케(久米邦武)가 집필한 《구미회람실기》라는 전 5권의 방대한 보고서가 있는데(1878년 출간) 그에 따르면 사절단은 구미선진국의 여러가지 형태의 통신시스템, 산업, 법률, 재정, 교육, 학예 등에 걸쳐 자세히 조사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들은 《만국공법》의 위력을 실감하게 되며 “문명”이란 공업과 무역에 의해 축적된 부유의 토대우에 이룩한것임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 “문명화”를 겨냥한 당시 메이지일본은 중국 유교문화체계의 “례(禮)”의 나라에서 서구문명체계질서의 “부(富)”의 국가로 변하게 된다.     당시 서양세계에서는 일본의 사절단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이와쿠라 사절단이 미국순람 당시 런던의 《타임즈》신문은 그 소식을 거듭 보도했다. 일찍 1861년 일본의 바쿠후(幕府)견구미사절단 방영시절에도 이에 대해 늘 보도했던것이다. 이번 1871년의 사절단에 대해 영국인은 “아마 이것은 지금까지 아시아나라에서 파견된 가장 주목해야 할 사절단이다”고 평한다. 또한 사절단 단장 이와쿠자에 대한 찬사가 특히 눈에 띈다. 세계는 이렇게 평가한다. “일본은 시찰을 통해 아시아선각자로 부상하는 길을 믿었다. 즉 시찰을 통해 일본은 창조보다는 모방과 개선을 추구하는것을 자각했다. 명치일본은 이같은 리해로 급속히 서구문명을 수용한다. 이런 실례는 다른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일본은 있다》)
73    (73) 100년전 서양인이 쓴 중국국민성론 명작 댓글:  조회:9534  추천:76  2014-11-17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73) 100년전 서양인이 쓴 중국국민성론 명작 김문학              문호 로신이 생전에 4차례나 꼭 번역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 외국인이 쓴 저작이 있다. 1936년 서거직전인 10월 5일(서거일은 10월 19일) 로신은 “립차존조(立此存照) 3”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이렇게 절절히 호소한다. “나는 지금까지도 누군가 스미스의 《지나인 기질》을 번역할것을 바란다. 이 책을 보면 자아성찰하여 분석하여 어떤 점들이 옳은가를 인식하게 된다. 또한 변혁하고 몸부림치고 스스로 노력하며 타인의 량해와 칭찬을 바라지 않는다는것으로 도대체 중국인은 어떤 인간인가를 증명할수 있다.”   1926년 7월 2일 《마상지 일기》에서도 스미스의《지나인 기질》을 언급하며 류의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1933년 10월 27일 도항덕(陶亢德)에게 보낸 서한에서도 일본인이 쓴 중국인론 저작과 함께 스미스의 《지나인 기질》을 언급하며 중국어로 번역해야 한다고 또한번 강조한다.   미국의 근, 현대 중국연구의 제일인자인 페어방크(중국명 비정청(費正淸))교수도 “스미스의 《지나인 기질》이 결함도 있으나 중국연구의 새로운 리정표이며 후세의 사회학 분석의 기초로 되였다”고 높이 평가한다.   현대 중국 철학자이며 문호인 림어당(林語堂)의 《중국인》이란 명작 역시 스미스의 지대한 영향하에 집필됐던것이다.   그럼 이 책은 도대체 어떤 저작이며 저자는 또한 어떤 인물인가? 왜 백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중국인 국민성론의 일대 명작으로 자리매김되면서 세계적인 영향을 끼칠수 있었을가?   미르크 폴로의 《동방견문록》(1299)이 발표된이래 수백년 동안 서양의 수많은 선교사, 탐험가, 려행가, 상인, 수부, 학자, 정치인들이 형형색색의 중국 방문기, 체험기, 중국인론을 저술하였다. 그중에서도 미국인 스미스의 《지나인 기질》(즉 《중국인의 성격, 이하 동서명을 사용함)은 중국 사회, 중국 국민성론의 최고급 명작으로 꼽는다.   아더.핸드슨. 스미스(A.H.smith, 1845~1933)는 미국의 개명한 선교사로서 중국에서 선후하여 50여년을 체류했으며 중국 이름을 명은박(明恩薄)이라 한다. 그가 쓴 중국 체험기중 가장 대표적인것이 곧 《chinese chanacteristics》인데 일본인 시부에(涉江保)가 번역한 《지나인 기질》(1896) 및 시라가미(白神徹) 번역의 《지나적 성격》(1940)이 있다. 현재 중국에서 번역한것은 《중국인 기질》(1995년, 돈황문예출판사), 《중국인의 소질》(2001년, 학림(學林)출판사) 등 10여종이 있다.   필자는 동부사대 학부생시절인 1983년, 일본의 펜팔이 우송해준 1940년판의 《지나적 성격》(시라기미 번역, 중앙공론사 발행)을 읽게 되였다. 중국 독자로서는 아마 가장 일찍 스미스의 이 책을 접한 한사람일것이다. 왜냐면 중국에서 해방후 최초로 이 책을 접하고 번역한 사람은 중국사회과학원의 장몽양(張夢陽)이며 1986년에 이 책을 접하고 번역하여 1995년 돈황문예출판사에서 최로로 번역출간됐기때문이다.   대학 3학년생이였던 필자는 그때 스미스의 명작을 탐독한 감동을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있다. 그뒤 번역출간하려고 마음먹었으나 여의치 못했다.   스미스는 중국체류 22년을 바탕으로 1890년 상해의 영문신문 《화북매일신문》에 일부 련재를 했으며 대방향이였기에 1894년 미국 뉴욕의 프레망(FLEMING)출판사에서 출간하였다. 당시 즉시로 베스트셀러로 되여 잘 팔렸다고 한다.    이 책에서 스미스는 중국의 국민성기질을 27가지로 귀납하였다. 즉 (1) 체면을 중시한다 (2) 근검절약 (3) 근로성 (4) 례절중시 (5) 시간 무시 (6) 정확성 결여 (7) 오해를 잘한다 (8) 기만성 (9) 유순한 완고성 (10) 사고의 혼돈성 (11) 행동이 느리다 (12) 외국인 경시 (13) 공공정신의 결여 (14) 수구적 성격 (15) 편의와 안일성 경시 (16) 끈질긴 생명력 (17) 인내, 견인력 (18) 지족장락 (19) 효성 (20) 인애지심 (21) 동정심 결핍 (22) 사회적 풍파 (23) 련좌법 (24) 상호 회의심이 강하다 (25) 성의, 신뢰감 결여 (26) 다원적 신앙 (27) 현실환경과 시무정신.   저자는 객관, 공평한 시각에서 중국을 바라보고 중국인의 성격기질을 기술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그는 중국인의 다면적성격기질을 투철한 관찰력으로 분석하였으며 그 본질적 렬근성에 대해서는 또한 예리한 칼날을 세우기도 했다.   스미스는 늘 공정한 시각에서 중국인의 장점과 단점을 같이 저울질했으며 립체적으로 중국인의 깊은 속을 해부했다. 한 대목을 인용해보자. “중국인은 ‘공공’에 속한 물건에 대해 흥미를 가지지 않을뿐만아니라 철저하게 지키지 않으면 곧 쉽게 잃을수도 있어 도적질의 목표물로 되기 십상이다. 길에 깐 돌을 집에 옮겨가고 성벽우의 벽돌도 한장 한장씩 훔쳐간다. 중국 모 항구의 외국인 묘지에 담벽이 있었는데 묘지를 지키는 전문인원이 없음을 알아채자 담벽의 벽돌은 다 도적질당하고 한장도 남지 않았다…”   마치 100년후의 지금의 중국에서 늘 발생하는 도적질현상을 기술하는듯 하여 낯이 뜨거워지는 대목이다. 백년이 지난 오늘 읽어도 중국인의 현실, 중국인의 국민성에 대해 새삼스럽게 정곡을 찌를 부분이 많다는 점을 느끼게 한다.   그의 글은 평명하고 직설적이며 생동하다. 물론 그의 글에는 서양인의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이 구석구석 보이지만 이러한 결함으로 책의 가치를 과소평가할수는 없다.   《중국인의 성격》은 백여년래 서양인의 중국인 리해에 지대한 입문서적, 교과서적 영향을 끼쳤으며 일본인의 중국인관, 중국국민성 리해에도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로신이 언급했던 일본인 야스오카 히데오의 《소설에서 본 지나인의 사고양식》 역시 스미스의 관점을 그대로 답습한 책이였다.   뿐만아니라 20세기 민국시대이래 중국인의 국민성반성, 개조적인식에도 스미스의 저작은 양으로 음으로 지대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로신의 중국인 국민성비판의식은 일본 류학시절 일본인이 번역한 스미스의 책을 접하고 강렬한 충격을 받으면서 형성되였다. 로신이 서거직전까지도 스미스의 책을 번역할것을 당부한 사실에는 이 명작의 절실한 가치를 대변하고있다. 스미스의 명작에 대해 가십적인 비난과 부정은 얼마든지 할수 있어도 그의 이문화적 거울에 비친 중국인의 국민성의 모습 및 그 가치성은 안이하게 부정할수 없다. 역시 명작은 불후의 력량을 지니고있기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것은 국민성을 스스로 알고 자기성찰을 해야 하는것이 아닐가.
72    (72) 서양을 석권한 미의 “재퍼니즘” 댓글:  조회:5238  추천:28  2014-10-29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72) 서양을 석권한 미의 "재퍼니즘" 김문학               중한일 동양3국을 문화적시각에서 한마디로 극명하게 그 특징을 표현한다면 필자는 이렇게 규정한다. “중국은 문장의 대국, 시(詩)의 나라, 한국은 가무의 고향, 가(歌)의 나라, 그리고 일본은 섬세한 미적감각의 나라, 미(美)의 나라”라고.   오늘날 국제적으로도 일본은 섬세하고 우아하며 심플한 디자인, 의장 등으로 그 미적센스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정평이 나있을 정도다. 일본의 제품은 그 기능과 함께 모양, 스타일의 디자인 역시 세계인들의 애호를 집중시키고있다. 일본의 산업은 그 문화속의 미적감각, 센스가 지탱하고있다고 해야 할것이다.   백녀전 서양인이 쓴 일본, 일본문화체험기를 섭렵해보아도 한결같이 이웃나라 조선이나 청국에 비해서 탁발한 미의 센스와 부드러운 미적감각의 소유자라고 일본인을 격상하고있는 대목이 대거 등장한다.                                                   실제로 우리에게 잘 모를수 있으나 100년전 서양에서는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미술공예에서 지대한 충격을 받으면서 전무후무의 재퍼니즘(japonisme) 붐을 일으켰다. 일명 재퍼네즈리(japonaiserie) 즉 일본주의, 일본취미라고도 칭해진 일본문화 붐은 유럽과 미국에 동양의 격량을 일으키며 서양문화의 변용을 일으키게 된다.   그에 앞서 일찍 17세기에 유럽에서는 중국의 전통공예품에 주목하며 18세기 중반에 시노와즈리(중국취미)가 류행한다. 1667년 느네상스시대의 환상과학자, 박물학자인 기르햐(1602~1680)가 저서 《지나도설》을 발표함으로써 동아시아의 신비로운 도판을 소개하여 유럽의 지나학을 류행시킨다.  실제로 우리에게 잘 모를수 있으나 100년전 서양에서는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미술공예에서 지대한 충격을 받으면서 전무후무의 재퍼니즘(japonisme) 붐을 일으켰다. 일명 재퍼네즈리(japonaiserie) 즉 일본주의, 일본취미라고도 칭해진 일본문화 붐은 유럽과 미국에 동양의 격량을 일으키며 서양문화의 변용을 일으키게 된다.   그에 앞서 일찍 17세기에 유럽에서는 중국의 전통공예품에 주목하며 18세기 중반에 시노와즈리(중국취미)가 류행한다. 1667년 르네상스시대의 환상과학자, 박물학자인 기르햐(1602~1680)가 저서 《지나도설》을 발표함으로써 동아시아의 신비로운 도판을 소개하여 유럽의 지나학을 류행시킨다.   재퍼니즘은 그 당시 이미 중국취미속에 섞여서 서양인들의 흥취를 자아낸다. 왜냐면 당시 중국취미속에 류입된 중국공예미술중에는 일본의 독특한 공예가 많이 끼여있었기때문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서양의 일본취미, 재퍼니즘의 류행은 19세기말에서다. 일본이 개국후 정식으로 국제박람회에 참가하는것은 1867년의 제4회 빠리박람회였다. 1885년 제3회 빠리박람회때 이미 일본 물산이나 미술공예가 소개되기도 했다.   1858년 초대 영국 주일총령사로 일본에 온 올 콕은 “대군의 도(都)”에서 일본의 미술과 문화를 소개하며 제4회인 1862년 런던박람회에다 자신이 수집한 일본미술 콜렉션을 600여점 전시, 소개하여 큰 반향을 일으킨다.   일본이 공식 출품한 제4회 빠리만박회에서는 대량의 도자기, 공예미술품, 생활기물, 서적, 우키요에판화, 화지(和紙) 등을 전시, 지대한 인기를 끌었으며 페회후 실물은 거의 다 매각되였다.   회의일정은 6개월이였는데 입장자가 160만명의 기록에 달성했으며 특히 일본 바쿠후정부에서 출품한 우키요에작품과 우다마로, 후쿠자이(北齊), 히로스에(廣重), 하루노부(春信) 등 일본 대표적 대중화가의 우키요에판화가 서로 치렬한 경쟁속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19세기말 본격적인 서양의 일본주의 붐 재퍼니즘이 막을 열었다.   여태껏 보지 못했던 서양에는 셜여한 독특의 미의식을 구현한 일본문화에 서양인이 매료된것은 당시 만국박람회의 견인력에 의해서였다. 1862년 이래 귀족이나 콜렉터가 소장한 일본미술품이 런던의 미술관에서 구입하면서 일반 미술관, 박물관에 전시, 소개되였다.   프랑스, 미국, 에스빠냐 등 서양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에 출전된 미술공예품 위주의 일본문화의 엣센스가 번마다 큰 반향을 일으키며 많은 서양의 재퍼니즘을 배출시켰다. 이리하여 이것이 19세기말 “아르 누우버이”라 칭한 신예술의 기폭제가 된다.   당시 유럽과 미국인들은 일본의 센스좋은 귀여운 공예작품, 고미술, 우케요에, 도자기, 가구, 악기, 칠보 등 전시품을 대량으로 구매하여 소장, 연구하였다.   이같은 일본 붐의 리유는 일본미술작품의 독특한 미적센스, 감각이였으며 거기에다 새로 출범한 메이지정부의 개국방침과 함께 실행된 세계 선진국 자본주의시장에 적극 참여하는 정책덕이였다. 정부에서는 일본을 알리고 알본문화를 널리 선전하기 위해 일본의 전통공예미술 수출에 힘을 경주했다.   이런 의미에서 19세기말 20세기초 서양의 재퍼니즘 붐은 서양인과 일본인의 공동합작의 결실이였다고 할수 있다.   재퍼니즘이 서양에서 뿌리박고 또 유럽의 디자인, 미술문화로서 신예술형식이 개화하는데 대체 재퍼니즘의 매력은 어디서 온것일가?   한마디로 용이하게 해석하면 일본적인 독특한 미였다. 유렵의 전통적표현에는 없었던 일본인의 자연과 인간의 감정을 표리일체로 동화시킨 미적감각 그것이였다.   일본인이 선호하는 동물에 새, 잉어, 개구리, 잠자리, 게, 나비, 식물에 나팔꽃, 등꽃, 창부, 야초, 사쿠라, 송, 죽, 매, 란 등 모티브는 서양에서는 없는것들이였다. 중국취미에 등장하는 학, 잉어, 송, 죽, 매, 국화, 모란, 작약 등은 일본 도자기에도 나타났다.   또한 당시 일본문화례찬, 일본소개 서책이 속속 등장하면서 인상파 화가들을 깊숙이 매료시킨다. 따라서 일본미술의 영향으로 서양 신예술이란 세기말 예술로 변모해간다.   그중에서 괄목해야 할 사안은 일본의 우키요에가 예술가, 콜렉터들에 큰 충격을 주며 인상파 화가들은 우키요에에서 양분을 흡취한다. 유명한 모네, 고흐, 고갱 등은 직접 우키요에를 대량 수집했으며 거기서 큰 영향을 받는다. 서양의 미술사에서 심메르트(대칭성)와 황금비례가 지배해오던것이 일본의 우키요에의 영향으로 전통이 부서진다.   일본의 회화는 안 메리트(비대칭성)구도에 있으며 대칭성일변도의 서양회화에 침입되여 서양화가들의 미술운동을 좌우지하게 된다. “좌우비대칭성으로 여백을 살린 컨포지션, 화면을 자르는 모티브의 대담한 구도, 평면적묘사와 선명한 색갈에 의한 공간성 등 다이내믹한 창조성”이 일본미술의 특징이였으며 그것은 결국 일본인의 자연주의에 뿌리내린 일상성이 그대로 예술에 승화된것이다.(미츠이 히데키)  일본적 “재퍼니즘” 붐으로 서양예술의 혁명을 일으켰으며 백년이 지난 오늘에도 일본 독특한 미의식은 세계적으로도 알려진 일본의 의장을 탄생시키며 일본의 미의식은 그 아름다운 제품과 함께 세계인을 매료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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