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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근대조선 독립자주의 선구자 김옥균(김문학)
2010년 09월 27일 16시 44분  조회:5674  추천:33  작성자: 김문학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18)


근대조선 독립자주의 선구자 김옥균


김문학


 

   청일갑오전쟁 발발 10년전인 1884년 12월 4일, 조선근대사상 유명한“갑신정변”이 일어난다. 그 배경에는 1876년이래 기나긴 쇄국시대의 막을 접고 서구 및 일본에 의해 개항을 하게 되지만 조선(이씨조선)이 선택할 독립자주 근대화의 길은 유구한 전통의 봉건체제를 개혁하는것밖에 없었던 절박한 상황이 있었던것이다.

 

  일본이 솔선하여 아시아에서 근대화에 성공했는데 청국이나 여타 나라가 식민지화 내지 반식민지화로 전락된 까닭은 이 근대화혁명에서의 실패다. 당시 일본이 조선을 노린것 역시 조선보다 신속한 근대화성공이였고 후진국(봉건체제) 약소조선이 그 기회를 내준것이다.

 

 당시 외국인이 쓴 조선관찰기를 보면 조선조말기의 구태의연한 봉건시스템과 전근대적 현상은 개화파 지식인, 정치가들에게 이 절망적 현상을 개혁하여 조선을 근대화로 이끄는 혁명의 찬스를 주었다. 선각자 젊은 김옥균(金玉均)은 이때 선명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김옥균은 그야말로 조선의 근대적개혁을 완수하는것으로 그 독립자주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헌신한 선각자의 한 사람이다. 그 김옥균이 박영효의 표현을 빌면 ‘취신자립(就新自立)’ 즉 국내를 개혁하고 청국과의 종속관계에서 독립하는 목표를 표방하는 개화파 지도자로서 ‘수구의뢰’ 즉 구체제를 고수하면서 청국과 종속관계를 지속하는 수구파에 대항하여 국왕측근의 수구파를 제거함으로써 신시대를 개척하려고 한것이 1884년의 갑신정변이였다.”(재일 역사학자 강재언)

 

“갑신정변”의 지도자 김옥균, 그는 어떤 인물이였을가? 한국과 일본에 있는 그에 관한 전기, 자료를 섭렵해보면 그 종합적인물상이 부각된다. 김옥균은 희대의 수재라 어려서부터 명성을 날린다. 21살에 전 조선의 수재 2,000명을 소집하여 진행된 과거시험에서 수석의 월계관을 따내고 22세에 공문서관리직 홍문관 교리(교장)로 발탁, 32세에는 호조참판(재정차관)이란 고위관리에 등용된다. 그는 개화파 선학인 유대치, 오경석, 그리고 박연암의 후손인 박계수 문하에서 개화사상을 배우게 된다. 김옥균의 주위에는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 서재필, 홍영식 등 근대조선의 쟁쟁한 인물들이 모여있었다. 조선 근대화지향을 리드한 이들은 정권중추의 요직에 있은 청년관료였으며 그외에 어윤중, 김홍집, 김윤식 등 온건파 년장자 개혁자들도 가담하였다. 김옥균은 조선의 자주적개혁은 불가능하다는것을 일찍 터득하게 되면서 외부의 힘을 빌리려 했다. 동시에 김옥균은 또 일본의 근대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정열적인 지도를 받았다.

 

어윤중의 추천으로(1881년 방일후) 1881년 조선의 승려 이동인의 소개를 거쳐 유길준, 유정수, 윤치호(당시 일본유학중)와 함께 후쿠자와와 해후한다. 그는 후쿠자와의 소개로 또 이노우에 가오루, 시부사와 에이치, 오오쿠마 시게노부,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의 거물급인물과 면회하고 론쟁을 벌리기도 했다. 후쿠자와는 조선의 첫 한글신문 《한성순보》를 제자인 이노우에를 파견하여 창간하면서 “문명개화”를 전파하기도 한 인물이였다.

 

  당시 3차례 방일중 김옥균이 조선의 재정핍박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정부에게 300만엔 차관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군비확장에 혈안이 된 일본정부는 조선의 재정개혁은 안중에 없었던것이다.

 

 그런데 김옥균 등 개화파에게 절호의 기회가 온다. 1884년 청불전쟁이 벌어지면서 청국은 조선주둔군중 절반을 전쟁으로 빼돌려 조선에서의 청국전력이 대거 감소된다.

 

  이에 국제적으로 이미 아편전쟁이래 “종이호랑이”로 날인된 청국의 이미지에서 자신감을 얻은 김옥균이 이끄는 개화파는 쿠테타를 실행하기로 결정한다. 그들은 일본공사 타케조이와 접촉해 혁명의 구상을 전하고 지원을 요청한다.  그때 2,000명 청군에 비해 개화파군(150명)과 일본군(500명)은 도합 650명이였으나 사기와 무기로 보아 청군과 대결할수 있는 수준이였다.

 

  12월 4일, 우정국개국 축하연을 리용해 수구파 정부요인들을 살해하고 개화파주도의 신정권을 수립하는 쿠테타를 감행한다. 수구파 관료인 이조연, 한규설, 민영익과 개화파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이 미, 영, 청, 일 등 공사와 함께 연회에 참석했다. 당시 수구파들인 민영목, 민대호, 조영하 등 중신들을 참살하고 고종을 옹위하여 경우궁으로 옮겨 사실상 인질로 삼아 수구파 제거와 혁정권 수립에 성공한다.

 

 신정권은 다음날 5일 새벽 고종의 재가를 얻어 수립되었는데 전원이 개화파관료가 내각의 충추를 점했다. 신정부는 15개항의 새 정강정책을 발표 청국으로부터의 주권동립, 신분제도의 철폐, 조세제도 개혁, 부패의 제계, 경찰순사제도 창설, 정배금고자구제, 재정일원화정책 문벌폐지,인민평등 등 근대적 국가의 형성의 필수적 조치들이 담겨있었다.

 

만약 그 당시 이 신정부 조치가 실현됐다면 그때부터 일본에 상응되는 근대국가가 탄생됐을것이였다. 아무튼 이 “갑신정변”을 근대조선의 획기적인 의미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막을 내린다. 민비에 의해 움직이던 고종은 창덕궁으로 돌아갔으며 민비는 청국의 힘으로 개혁파정권을 일거에 붕괘시킬 작정으로 청군의 지원을 요청했다. 청국 역시 조선을 잃고싶지않았기에 원세개가 인솔하는 1500명 군사가 창덕궁으로 진입하여 일본군, 혁명군은 숫자로 열세였으나 완강히 저항했다. 하지만 강력한 청군앞에서 전멸당하고 갑신정변은 종식되고 만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은 타케조이 공사와 함께 인천일본공사관에 이르지만 타케조이는 그들에게 냉담해진다. 12월 11일 일본의 배를 타고 망명한 김옥균 등은 기나긴 일본 망명생활이 시작된다. “개화파들은 조선을 근대화시키려는 단기적 방안의 구상에서 일본에 의존했다는 치명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우리는 김옥균에 대한 비판을 안이하게 행해진다. 그러나 비판은 안이 하지만 오늘의 우리에게 결핍한것은 그때 당시 역사로 환원시켜 역사를 발견하는 프리즘아 아닌가.

 

김옥균이 리드한 갑신개혁의 궤를 보면 이러한 역사를 재발견 할수 있다. 일본보다 28년이나 늦게 개국한 후진봉건제의국가 조선이 적면한 문제가 얼마나 침중한것으로 개화파들에게 파악됐으리라하는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왜 개화파가 당초 자력으로 개혁을 하려던 의도를 버리고 일본의 지원을 요구하지 않으면 안됐을까 하는 배경에는 당시 개국이 늦어지고 절박한 열강의 위협에 비해 빈약한 재정, 군사력밖에 없는 조선왕조의 근본적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단합하면 개혁을 이룰수 있었으나 사대적인 전통에 조선왕조의 근본적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단합하면 개혁을 이룰수 있었으나 사대적인 전통에 배인 민씨 일파의 수구파들이 청군을 개입시켜 탄압시긴 그러한 대륙과 해양세력에서 우왕좌왕하는 우리 민족 선대들의 한계는 치명적이다. 아직 우리 내부의 근대적 “민족””국민국가”의식이 결여한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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