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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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 《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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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0)일본인의 중국인 멸시풍조(김문학) 댓글:  조회:5825  추천:19  2010-08-06
<장련련재>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10) 일본인의 중국인 멸시풍조김문학   청일전쟁이 치열하던 1894년 8월 24일 《동경아사히신문》에 “지나인 3명 아동에게 습격당하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8월 22일, 청국상인 3명이 동경의 아카사카다거리를 걸어가고있을 무렵, 학교에서 귀가하는 어린 학생들이 “야~.챵챵한이 왔다. 이놈들은 조선 아산전투에서 도주한 놈들일거야.”하면서 청국인 3명을 향해 돌팔매질을 했다. 돌멩이는 운 나쁘게 청국인들 앞을 걷고있던 근위제3련대의 보병 두명을 명중하여 되돌아본 보병들은 바로 뒤에서 걸어오고있던 청국인이 돌을 던진줄 오해하고 그들을 타고앉아 구타를 안겼다. 크게 놀란 청국인들은 “나 투석한거 아니야”고 변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주위에서도 사람들이 욱 몰려들어 란리가 났다. 경찰서에 연행되여 취조를 받았으나 어린이들의 장난인것을 판명하고보니 그 청국인들이 너무 가여워서 경찰관이 치쿠지의 거류지로 바래다주었다고 한다. 이 기사는 청국인에게 동정했지만 투석한 어린이들에게는 비난도 질책도 없었다.   이 짧은 기사는 어린이들이 장난끼로 인해 벌어진 작은 “사건”이긴 하지만 100여년전 청일전쟁을 계기로 승전에 도취된 일본인의 중국인 멸시 내지는 아시아 멸시풍조를 노정했다.   당시의 일본 신문 잡지를 보면 어린이들이 노는 놀음에도 일본 소학생들이 전쟁놀이를 언제나 즐겼는데 동군과 서군으로 짝을 갈라서 “청국군”과 “일본군”의 전투가 주종이였다. 어린이들은 헌 등롱 밑굽을 박취하여 거기다 길고 굵은 검은 끈을 접착시켜 돈미(豚尾) 즉 돼지꼬랭이로 삼고 청국군노릇을 했다. 조선 아산에서 완패한 청국군병을 포로하여 일본군앞에 무릎꿇리고 바줄로 포박하여 처형하는 “전쟁놀이”. 청국의 변발마저 교묘하게 고안해낸 아이들의 머리속에는 아마 실제로 일본군에게 포로돼 일본에까지 연행된 모습을 보고 떠올린것일것이다. 전쟁 그자체가 아이들의 놀이에 재현된것이다.   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에 체류하고있던 청국인이 귀국하였다고 보도한다. 8월 4일《요미우리》에 보도된데 의하면 요코하마시내의 수도에 독약을 뿌린 “비열하고도 나쁜 지나인”이 당장에서 체포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러한 신문매스컴의 보도는 일청전쟁에서 보인 일본 전국민의 거국의 정열과 지어는 열광에 가까운 중국인 멸시관으로 치닫는다. 승전으로 교만해진 일본인은 일본에 살고있던 청국인을 향해 “일본 이겼다. 지나 졌다.”,“챵챵깍아머리”, “챵고로(청국인 중국어발음인 칭궈런의 변형이다)”, 돼지꼬리 등 멸시어로 매도했다. 특히 “챵고로”란 매도어는 오늘날까지도 중국인을 싸잡아 욕하는 일반용어로 고착돼있다.   하지만 일본이라고 다 중국을 무턱 폄하하고 멸시한것은 아니다. 일본인의 중국관 및 조선관은 고전문헌의 중국세계에 대해서는 숭경하고 동경에 갈망할 정도로 집착하고 연구하고 호감을 품었다. 고전의 공맹, 사서오경이나 삼국지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더욱 투철하게 연구, 활용해온것이 일본인쪽이다.   그런데 명치이래 문명의 스승을 중국에서 서양으로 전환시킨 일본은 중국, 조선을 멸시, 모멸하는 감정이 양성되고 청일전쟁 승리를 경계로 그것이 일본대중사회로 급속히 전파된다. 특히 청일전쟁을 겪으면서 일본사회에는 “돼지꼬랭이 지나인”의 차별적인 표상이 전 사회에 감염되면서 중국과 조선을 멸시하는 풍조가 형성되였다.   근대, 현대 일본을 조감해보면 일본인의 중국표상 즉 이미지, 관념은 5차례의 고조를 이루는데 제1차고조는 명치유신전까지, 제2차는 바로 1894년부터 1904년의 러일전쟁의 10년기간, 제3차는 1912년부터 1945년 패전까지, 제4차는 1970년 수교전후부터 1980년까지, 제5차는 1990년부터 지금까지 고도성장의 중국에 대한 보편적 관심이다. 지금 이 글의 해당시기가 제2차고조시기인것이다.                                                일본은 서양으로부터의 충격을 통해 서양을 발견함과 동시에 “잠자는 사자” 중국(청국)을 “재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이 “재발견”은 보다 건전하고 객관적인 중국인식에 접근하다가 청일전쟁에서 보여준 중국의 “약체적본질”에 대해 경악하고 따라서 경멸로 기울어진다. 1894년 8월 22일 《동경아사히》신문에는 “지나인의 미집(迷执)”이란 제목아래”지나인은 상하를 불문하고 풍수미신을 맹신하고 있으며 청나라와 조선은 풍수상 아주 강한 연고관계가 있다”고 쓰면서 “바보를 치유하는 약 없다는데 지나인은 바로 그런 인간들이다”고 경멸하고 있다. 그리고 유명한 《태양》잡지에 늘 특집으로 중국인(한국인도)을 표상화시켰는데 요약하면 이런 내용들이다. “지나는 국가관념이 없고”,”고대와 같이 구태의연하게 전제 정치를 실시하며” 언어로 형언키 어려울 정도로 불결하고 “지나인에 비해 조선인은 그래도 청결하나 일본인에 비하면 돼지우리같이 더럽다. 청결이야 말로 일본인의 특질이다” “지나인은 성격이 악렬한것은 세인이 다 아는 바인데 과히 자존, 보수하고 국가의식 담박히고 자사자리하며 교활산만, 야비인색, 고식우매하고 허례허식에 구애되여 있고 또 더럽다”“그러므로 오늘날 일본이 지나인을 리드하고 그 4억만 인민을 교육하는 스승으로 된다. 이래서 일본이 선생으로 되며 중국은 동생,제자로 되야 한다.” “국가관념””근로관념””청결관념”이 일본인이 아시아 여러나라를 앞선 특질이며 이것으로 일본은 근대를 달성했다고 고취한다. 사실 곰곰히 따져보면, 중국, 한국을 비하시키면서 그 민족성으로 나열한 결점 역시 과거, 최근만 해도 일본인에게 엄연히 존재했던 결함이 아닌가. 일본인의 오만함은 서양을 원숭이 흉으로 졸속히 이룩한 “근대”의 오만이며 서양에서 받아오던 동양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을 역으로 이용하여 같은 이웃 동아시아 중국, 한국에 대한 행해진 “역오리엔탈리즘”에 불과하다. 청일전쟁의 열광을 통해 일본은 이미 비문명적인 야만국으로 추락된 대국청국이란 이미지를 정착시킴으로써 그것을 후광으로 자신들의 “문명”, ”발전된 자화상”을 고안하고자 했던것이다. 이같이 형성된 중국, 조선표상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10    (9).서양인의 눈에 비친 동양3국인의 얼굴 (김문학) 댓글:  조회:6851  추천:30  2010-08-03
<장편련재>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9)   서양인의 눈에 비친 동양3국인의 얼굴   김문학   백년전, 근대화과정에 있는 한중일 3국인, 서양인의 눈으로 바라보고 묘사된 얼굴은 어떤 모습이였을까? 18~19세기에 걸쳐 명암법과 원근법을 구사한 서양의 회화는 이민족의 자료를 수집하는데 활용되였다. 정보수집에 사용된 그림은 오늘날의 사진, 비디오, 영상, 항공사진 등에 해당하는 구실을 했다.                              그림의 장르에는 스케치, 동판화, 유화, 수채화, 만화, 극화로 다양했는데 될수록 이국의 사물과 인간의 표정, 윤곽, 동작에서 풍경, 건물, 도로, 풍속습관 등을 시각화하여 타자에 대한 이해와 기억의 필수적인 수단으로 되었다.       산업혁명을 통해 새로운 비약의 선진국을 구축한 서양은 자신들의 문명체계를 비서양사회에도 강제하기 시작했다. 사이드가 예리하게 비판하다싶이 그들은 오만한 “오리엔탈리즘”시각으로 동양을 경멸하였으며 자신들의 과거 어느 시점에 대응시키는 열등한 이미지로 표상했다. 13세기의 마르크 폴로, 16세기의 마테모 리치의 뒤를 이어 동아시아의 땅을 밟은 19세기 중후반과 20세기초 서양 선교사들의 기록에도 그 무렵 서양의 근대에 비해 후발된 중국, 일본과 조선의 표상이 수없이도 등장한다.     중국부터 보기로 하자. 선교사 아서 스미스의 고전적 명작 《중국인의 성격》에서도 저자 스미스는 중국인의 열악한 민족성에 대해 22종으로 분석나열하면서 지어 곰이나 거미류의 짐승에 빗대는 발언도 한다. “더럽고 무지한 미개인”의 중국인의 이미지가 난무했다. 중국인이 서양인을 “양구이즈(洋鬼子)”라 하고 그뒤 일본인을 “동양구이즈”라고 한것과의 대극에서 서양인은 중국인을 “돼지”로 본것이 그 전형적 패턴(格局)이다. 청국인이 변발을 길게 늘어뜨린 모습을 “돼지꼬랭이”로  비하시키고있다. 누런색 얼굴에 가늘고 우로 치켜올라간 교활해보이는 눈매, 그리고 유표한 뻐드렁이는 “청국인(지나인)”의 전형적 얼굴이다.   다음으로 일본인의 얼굴을 보기로 하자. 동시기 서양인의 그림에 나타난 일본인의 모습은 안경, 길게 우로 치켜올라간 눈, 앞으로 세게 툭 튀여나온 앞니, 왜소한 체구   이런것들이 스테레오타입(鉛版)의 일본인 얼굴이였다. 명치시대 서양인 화가 G.비고가 그린 유명한 그림이 바로 “원숭이 흉내내는 일본인”이란 타이틀의 그림이다.  문명개화기  로쿠메이칸(鹿鳴館)의 무도장의 거울앞에 선 일본인 남녀(부부?)의 얼굴이 거울에서는 영락없이 원숭이로 나타난다.     이 그림을 그대로 해석이라도 하듯이 그때 일본을 찾은 프랑스인 P.로치는 그의 저술 《가을의 일본》에서 “에도의 무탑회”라 제목한 글에서 서양정장을 한 모습이 일본인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꼬면서 “왠지 일본인들은 모두가 내눈에는  원숭이로만 보인다”고 풍자하고있다.      일본여성과 결혼하여 아들까지 두었던만큼 일본을 사랑한 프랑스 화가 G.비고 역시 서양인의 “오리엔탈리즘”의 우월성 의식에서 탈피되지는 못했다. 서양에 비해 아직 미개하고 비근대적인 면이 많은 표상을 서양에 전달하기 위하여 이 그림을 제작했던것이다.     이  “원숭이 흉”그림으로 지금까지 서양은 물론 같은 동양에서도 일본인의 표상적 특징이 “원숭이”, “동양의 원숭이”로 고착돼 있게 된다.     이제 마지막으로 조선은 어떠했는가를 보기로 하자. 서양인이 조선을 관찰하고 그림으로 표상화시킨 때는 1866년 병인양요부터이다. 조선은 19세기말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은밀한 나라로서 잘 알려지지 않은 “최후의 동양”의 나라였다. 최초로 “한국의 남녀”라는 서양인이 그린 그림(프랑스 화가 셍 쏘베 1806년 채색판화)을 보면 한국인이라기보다는 완전히 동남아의 소수민족의 옷차림과 비슷한 모습이여서 경이롭기만 하다.     사실 조선이 세계사에 알려지게 된 때는 1894~95년 청일전쟁과 1904~05년 로일전쟁에서부터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두차례 전쟁의 싸움터가 된 까닭에 서양인들은 조선과 조선인에 대해 본격적으로 담론하고 관심을 갖게 된다.     1888년 12월 22일, 영국의 잡지 《그래픽》에 게재된 조선인의 모습에는 “잼과 빵을 처음 먹고있는 조선인”이란 제목이 붙었다. 그때 영국인 려행가, 선교사들이 가지고있던 서양 잼, 통조림, 빵과 뻐터 등을 처음 접했을 때 조선인이 몰려들어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접하는 얼굴표정을 활사하고있다. 아직 낯설었지만 신기하고 특별한 서양문명은 탐나는것이였다. 당시 조선인의 서양문명과의 충돌을 실감할수 있는 력사의 기억의 귀중한 한페이지다.     그때 서양인의 눈에 비친 조선인의 모습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두가지 있었다. 하나는 “흰옷”이고 또 하나는 조선남자의 상투에 쓴 “모자”였다. 백의민족의 상투를 중히 여기는 모자의 모습이야말로 한국인이 한국인이게끔 하는 특징적인 표징이 아닌가.     “조선인은 인방인 청국인이나 일본인과도 현저하게 달랐다. 얼굴모양은 아주 다양했는데 의복이 획일적이였기에 눈에 뜨이며 눈끝이 우로 올라간 몽골로이드의 눈모양… 관골은 높고 이마는 모자에 가리워져 있었지만 노출된 그것을 보았을 때는 넓고 지적인 이마가 많았다. 표정은 느긋하고 당혹감이 약간 섞인다. 얼굴새에서 관찰되는것은 힘이나 의사력보다도 명민(明敏)함이다. 조선인은 실로 얼굴생김이 아름다운 인종이다… 체격도 좋다. 남녀를 막론하고 어느 계층의 사람이든 손발이 작고 흰물가리에 고운 모양을 하고있었으며… 지능면에서 조선인은 스콧트랜드에서 ‘흡수가 빠르다’는 말에 해당되듯 천생 이해력이 빠르고 명민함은 외국인 교사들도 인정하는것이며 외국어를 즉각 습득하는면에서는 청국인이나 일본인보다 유창하고 퍽 우수한 악센트로 얘기한다. 그들은 동양의 악벽인 의심증(猜疑心), 교활, 불성실함이 있으며 남자들끼리는 신용하지 않고 녀자는 칩거하며 지극히 열세의 지위에 있다.”     인용이 다소 길어졌다. 이말은 영국의 여성여행가 이자베라.숍(하드)이 1894년 조선을 돌아보고 1897년에 쓴 600페지에 이르는 장편보고 《조선기행》의 한 대목이다.     아무튼 100년전 서양인이 활사했던 동양3국의 이미지는 서양의 우월주의적인 “오리엔탈리즘”의 프르지를 통과하면서 “불결, 가난, 교활, 추악, 탐욕, 야만, 수성(獸性)” 등 미개인과 비근대적 이미지 표상으로 충만돼있었다.     하기는 우리 동양인의 눈에 비친 서양 역시 그와 유사했던 표상이 있었던건 역시사실이  아닌가.  
9    (8)근대 “중국어”의 탄생(김문학) 댓글:  조회:6419  추천:60  2010-07-21
<장편연재>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8)근대 “중국어”의 탄생김문학  1910년 8월 16일, 상해에서 차이나호 객선이 미국으로 향하여 출항했다. 그 객선에 탄 70여명의 젊은 중국인 유학생들속에 영리해보이고 잘생긴 한샘한 청년 호적이 끼여 있었다. 도미후 호적은 코넬대학에 입학, 농학부생에서 다시 문학부로 전학, 1915년에는 컬럽비아대학 대학원에 진학하여 유명한 세계적 철학자 듀이에 사사, 1917년 귀국하여 북경대학 교수로 취임한다. 그는 노신과는 달리 한자문화권이 아닌 서양의 신생공화국 미국에서 서구문명의 바다속에서 청춘시절을 보낸다.   노신과 호적, 중국 근대문화사에 희유의 공적을 남긴 이 두 문화거두는 성격이나 사상, 생의 노정이 각기 달랐지만 그들사이에는 동질성이 두개나 있었다.  하나는 모두 문화의 경계를 넘은 “세계인”이였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 근대의 신문화운동의 리더로서 근대 중국어 탄생의 비조였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서구의 근대문학의 교양을 미국학생과 같은 레벨로 섭취한 호적은 중국 고전한문(문언문)은 있는대로의 사물 뜻을 표현할수 없다는 치명적 결함을 발견하게 된다. 한나라이래의 고전적 낱말과 문법을 토대로 하는 문언문의 전통은 형식적인 수사, 레토릭 성향이 가장 강할뿐 대중적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전달, 표달방식이나 그 능력이 미약하다는것을 의식하게 된다.   국민국가로 변하려면 역시 미국의 근대영어체계와 같이 언문일치의 구두어문 즉 백화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호적은 큰 발견을 한다. 그리하여 그는 구미의 진화론을 원용하여 중국의 전통적인 언어의식을 전변시켜 새로운 언어 즉 국어양식을 창출해야 한다는 주장에 이른다. “사대부계층=문언문, 민중계층=백화문(즉 구두어문)”이라는 전통적언어가치구조를 역전시켜 새로운 구두어 즉 새로운 국어로 진화시키는것이 젊은 호적의 파격적인 구상이었다.   그가 1916년 집필하고 이듬해 《신청년》에 발표한것이 바로 중국을 진감한 “문학개량추의”라는 논문이였다. 그리고 그뒤 1918년 5월 노신의 근대의 첫 백화문소설인 《광인일기》의 등장으로 중국에는 본격적인 근대 “중국어”(언문일치의 백화문체계)가 탄생한다.   물론 1913년 일본의 국어개혁 영향으로 문언문사대부언어의 전통적 상징인 과거제도의 페지를 뒤이어 교육부에서는 독음통일회의를 소집하여 북경어를 바탕으로 표준어 제정을 시도했다. 호적과 노신의 이론적 지도와 문학적 실천이 없었다면 근대“중국어”는 대폭 지연됐을것은 뻔하다.   호적은 또한 근대문학사에서 최초의 백화문시집 《상시집》을 1920년에 출판하여 자신의 이론을 직접 실천한다. 노신의 근대 중국어(백화문)의 실천은 사실 일찍 일본어의 영향으로 시작된다.   노신의 일본유학생활에 대해 모든 연구자들은 그와 일본과의 연관을 사상이나 문학만으로 보고자 한다.그러나 생활자로서의 노신과 일본어 내지는 그속에서 기인되는 노신의 백화문체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결락돼있다.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일본에서 유학하는 노신은 중국의 문언문에 비해 대중이 용이하게 이해, 접근할수 있는 근대 일본어같은 문체, 언어야말로 중국인이 택해야 할 국민언어라는것을 터득했다. 그의 전집을 실제로 읽으면서 발견되는 표현, 단어, 문법 등은 일본어 요소가 너무나 많이 발견되며 단순히 노신은 일본어를 통해 세계를 내다보는 강유력한 수단이였을뿐만아니라 일본어는 노신의 문학과 사상의 피와 살이 돼있었다. 노신이 남긴 장서속에 일본어 서적이 큰 비중을 차지한 사실도, 죽기전까지도 상해 우치야마서점에서 일본서적을 적극 구입했다는 사실도 이를 립증하고있다.   노신이나 노신보다 선배인 양계초 역시 일본의 신소설, 문체에서 배울것이 많다고 1920년에 요코하마에서 창간한 《청의보》 등을 통해 반복적으로 주장했던 배경에도 노신과 동일한 일본어인식에서부터였다. 문화교류란 본시 일방통행이 아니고  착작한 교차로마냥 상호적인 흐름이 그 특징이다. 근대전까지만 해도 일본에게 문화를 배워주던 “사제관계”에서 역전돼 중국은 일본에서 영향을 받게 된다.   일본유학을 통해 대륙으로 밀물같이 역수입된 일본제 한자단어, 언어들은 지금까지 중국에서 상용되고있는 사회, 인문, 철학, 과학 등 분야의 70%이상 차지한다는 통계가 있다. 1911년에 출판된 《보통백과신사전》, 1915의 《맹인할마지신명사》나 1958년 고명개(高名凱), 유정염 공편저의 《현대한어외래어사 연구》, 《현대한어중 일본에서 착용한 어휘》에 의하면 근대중국어의 언어, 문자, 정치, 경제, 과학, 교육, 법률, 풍속, 군사나 일상용어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일본어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력사, 민족, 국가, 종교, 신용, 자연, 침략 등 어휘들도 일본에서 수입된것이다.   그리고 “화(化)”를 단 성경성향을 나타내는 “민주화”, “혁명화”, “근대화”, “현대화”, “기계화”, “과학화”, “세계화” 역시 일본에서 수입한것이다. “성(性)”, “식(式)”, “형(型)”, “관”, “력(力)”, “계(界)”, “적(的)”이 붙은 표현이나 단어 역시 일본어이며 중국이나 한국에서도 일본어 신명사, 신조어가 너무나 방대하기때문에 “왜색어”로 경계하는 운동까지 일어났던것이 아닌가. 청말 개화파의 지도자 장지동이 이에 대해 어느 서류에다 “신명사를 쓰지 말자”는 글귀를 썼는데 수하의 학자 고홍명이 “‘신명사를 쓰지 말자’는 글귀의 그 ‘명사’란 단어가 바로 신명사입니다. 일본서 수입한것이지요. 장대감님.”하고 말하며 박장대소했다고 한다. 손문은 반청독립봉기를 수차 일으켰는데 그는 그 봉기를 “조반(造反)”이라 했다. 어느날 일본신문을 본 부하인 진소백이 “지나혁명당 손문”이란 글귀를 손문에게 보여주니 손문은 그 표현의 신선함에 감명을 받고 “옳거니! 이제부턴 ‘조반’이라 하지 말고 ‘혁명’이라 해야지.”하면서 무릎을 쳤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근대 한국어(조선어)의 형성에도 일본어의 신명사, 신조어들이 중국과 같이, 아니 더 이상으로 피와 살이 되였다는것은 아마 잘 알려지지 않은듯 하다. 지금도 조선족들은 아예 “벤또”, “리어카”, “앗싸리” 등 일본어를 아무런 거부감없이 우리 말로 사용하고있다. 사실 이미 우리 말로 굳어버린것이다.                         외래어 단어가 수입되여 이미 우리의 일상어로 정착, 고정됐을 때는 그것은 이미 하나의 문화와 살점으로, 피덩이로 돼버린것을 의미한다. 단어가 의사를 담은 문화의 표징물이라면 그 단어자체는 한 민족과 나라의 엄연한 문화와 함께 사고양식, 행동양식을 규정짓는 정신적재부인것이다.  
8    (7)방황하는 노신(김문학) 댓글:  조회:6873  추천:37  2010-07-16
<장편연재> 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7)방황하는 노신 김문학  중국 근대의 언어, 문학을 개척한 위대한 문호 노신이 주수인에서 노신으로 되기까지는 사실 기나긴 방황과 사색의 터널을 거쳐야 했다. 노신 년보를 보면 그가 7년간의 일본유학을 접어두고 귀국하여 항주, 절강 양급사범학당의 생리화학교원으로 되는 때가 1909년 8월 해빛 따가운 한여름이었다. 이로써 노신의 문학생애에서 긴 침묵과정을 통해 “주수인”으로부터 “노신”으로 비약하기 위한 조주단계에 들어선다.   여러가지 의미에서 노신이란 인물은 중국 근대사 그리고 일본의 근대와 떼어버릴수 없는 상관관계에서 삶을 영위해온 중국의 대표적인 국민작가일뿐만아니라 보다 보편적 의미에서 근대정신사의 상징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의 인물상은 간단하게 위대한 문학가, 사상가, 혁명가라는 장식어로 규정짓기 어려운 복잡하고 다층적 성격을 띤, 국경을 뛰여넘은 그는 우선 코스모폴리탄적인 시각을 갖춘 “세계인” 그것이다.                                           노신에 관한 연구는 중국에서도 최근들어 활발해지고 있으며 신예학자들에 의한 “노신비판”역시 예리한데 있지만 노신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분석연구는 오히려 노신을 동아시아의 대표적 작가로 높이 떠받드는 일본학계의 그것이 더 심도있다고 해야 할듯하다. 원노신박물관 관장이며 노신연구의 중견학자인 손욱도 필자와의 대담에서 동감을 표한적 있다.   필자가 노신을 통해서 관찰된것은 하나는 노신이 왜 일본유학을 중도 하차하고 귀국한 뒤 소침해지고 침묵을 지키며 갈팡질팡 정신적으로 방황기를 겪어야 했는가? 그리고 또 하나는 그가 왜 그토록 각골통한의 정념으로 중국, 중국인의 국민성의 열악성에 대해 비판을 가했으며 또한 시종 이것을 그의 성스러운 사명으로 삼았는가?   이런것들에 대한 중국내의 학자나 저널리스트에서도 정확히 말해서 중핵을 찌른 그 확답을 못찾고있다. 이데올로기나 혁명가 정신 차원으로 기울어져 표피화되고 또 그것은 하나의 규정짓는 고정적 틀이 되여버렸다. 그렇듯 노신은 그 깊은 속을 헤아리기에는 어려운 존재이기도 하다. 귀국이후의 노신의 행적을 살펴보기에 앞서 우선 그의 장장 7년반동안 일본유학의 삶에 대해서 비교고찰하기로 하자. 1902년부터 시작된 일본유학생활은 그에 있어서는 과연 생애의 황금시절이였다. 22세부터 29세의 다감한 청년기를 일본에서 보낸 그는 일본의 선진문물에 큰 컬쳐쇼크를 받게 되고 일본적인 서구문명에 개안한다. 일본에서 그는 “늘 일본기모노를 입기를 즐겼다. 외출시에도 일본 하카마를 걸치고 헌팅캡을 머리에 쓰고 가죽구두를 신었다. 유학생이 잘 안신는 게다를 잘 신었는데 게다바람으로 밤시장을 거닐기도 했다.” “간다의 중화요리집에서 중국훠투이나 두부 등 중국식품을 팔았으나 그는 한번도 산적이 없다.” “동경에서  의식적으로 일본식의 생활을 하려고 애쓴 모습이 보인다…중국식 생활양식에 구애없이 적극적으로 일본풍습에 진입하는데 무언가를 추구하려는 지향이 있었던것 같다.”(마루야마 노보루 《로신》 1965년)   노신이 평생기른 수염도 일본유행의 팔자수염으로서 그는 일본에서부터 기른 수염양식을 죽을때까지 보존하고 있었다. 학자들이 지적하다싶이 그는 철저하게 일본문화에 젖어 그속에 융화시키고자 하는 국제적인 실체험을 마침내 정신적 세계의 높이로 승화시킨다.   노신이 가장 존경한 사람 역시 일본인 스승 후지노선생이였고 평생 친구로 사귄 외우 역시 우치야마 간조였으며 아들과 자신이 수진한 의사 역시 일본인이였고 지어 그가 죽기직전 남긴 절필도 일본어였다. 그는 “친일”에 가장 가까운 문호였으며 그런 친일적경향은 모두 일본의 생활에서 비롯된다. 물론 이런 성향은 그 개인의 성격에서 나온 사생활이므로 지탄 할바 못되지만 일본의 삶은 그의 세계관, 가치관 정립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것은 사실이다.   많은 연구자들의 일본체험을 다룬 연구를 보면 노신이 “국민성 개조”에 뜻을 두게 된것은 시초 일본에서 아스.스미스의 《중국인의 성격》이나 일본인이 쓴 국민성 비판서나 잡지 특히 명치말기와 대정초기의 데모크라시 열풍을 타고 우후죽순처럼 나타나는 서양학설, 철학서를 로신은 많이 접했다. 노신은 중국일본유학생이 창간한 《절강조》, 《하남》 등 잡지에 《마라시력의 설》(1907년)  발표하여 유럽에 대한 중국의 갭을 지적하면서 개혁을 호소했다. 젊은 노신은 동생 주작인과 함께 외국번역소설도 내고 잡지도 창간하다가 실패하지만 그는 언설적, 문학적 면에서 정력적인 활동을 벌렸다.   그런데 귀국한뒤 노신은 “적막”과 소침속에서 살아간다. 그는 실제적으로 일본류학에서 학사나 석사, 박사따위 학위라는것을 획득하지 못했으며 홍문학원과 센다이의학교의 학력증명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대학에서 교수직으로 있기에는 학력부족이였다.   1912년부터 1926년사이 북경정부의 교육부 과장직으로(공무원) 친구 서수당의 알선으로 취직한다. 유학시절과 대조적으로 1918년 5월 《신청년》에 《광인일기》를 발표하기까지 그는 거의 무명의 주수인으로 통했다. 실의에 빠져 고서를 베끼거나 탁본을 정리하는것이 그의 취미생활의 전부였다. 문학으로 국민을 각성하겠다고 센타이의학전문학교시절 결의했던 그답지 않게 그는 너무 의기소침, 방황에 자신의 신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이 역시 많은 연구자들이 스쳐지나 버린 중요한 대목이다. 필자의 비교연구 끝에 찾아낸 답안은 이러하다.   그때의 노신은 본국 동포들에 대한 “후진성”에서 무한한 절망감과 지어 혐오감마저 들었다. 그는 이미 일본에서 형성된 “국제인”이다. 국제인의 심중에는 언어나 복수문화체험의 기억적 장치가 있는데 상대도 그런 장치가 구비되지 못할때에는 상대에게 큰 절망과 실의를 느끼게 된다. 또한 그는 경계를 사는 “경계인”이기도 했다. 일본문화와 중국문화의 경계를 살아가는 인물이였다. 그가 중국에서 다시 본 동포의 후진된 모습은 아마도 역적인 컬쳐쇼크를 초래했을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중국을 바라보는 프리즘에는 “열등”, “후진”, “추루”,  “아큐” 등 비판적인 개념과 이미지로 충만되어 있어  다른 이미지가 들어설 자리가 없었던것이다. 즉 일본인의 눈으로 중국인을 바라보았던것이다. 서거 수일전에도 일본조계지에서 그는 일본 벗 우지야마에게 한 말이 “중국은 미래에 사막이 보인다”는 말이다. 그의 중국인에 대한 절망감은 국제인의 안목을 갖춘 노신자신의 큰 한계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국민성비판의 최대의 작가로 부각시킨 결정적 장본인이기도 했다.  
7    (6)100년전의 일본 유학붐(김문학) 댓글:  조회:5890  추천:32  2010-07-15
<장편연재>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6) 100년전의 일본 유학붐김문학   갑오청일전쟁 이듬해인 1896년 음력 3월, 중국인 일본유학생 13명이 일본에 파견된다. 청국주일공사 유경은 청정부에서 모집한 13명의 청년을 일본문무대신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에게 위탁하였는데 그는 도꾜고등사범학교교장 가노 지고로(嘉納治五郞)에게 일임시켜 받아들이게 했다.   이것이 근대사상 최초의 중국인 일본유학생이였으며 이로부터 중국인의 일본유학사의 첫 페이지를 연다. 기실 1862년경 근대 중국 유학생의 선구자인 용굉의 권유로 1872년 120명의 학동을 미국에 유학생으로 파견했으나 그뒤 1880년대에 중지시키고 유학운동은 좌절당한다.   13명의 중국청년을 정열적으로 맞아들인 가노 지고로는 저명한 교육자, 유도가로서 중국근대사의 거물인 황흥, 로신, 진독수와 같은 인물을 제자로서 가르쳤던 일화는 유명한데 그가 유학생에게 용의주도한 배려를 한 미담도 많다..   그뒤 육속 일본에 홍수와 같이 중국유학생이 밀려갔는데 1902년에 500명, 1904년에는 1,300여명, 1905년 과거제도 폐지에 후에 7,000명으로 급증, 1906년에는 7,285명(왕향영(汪向荣)의 통계에는 7285명, 사네토 게이슈의 《중국인 일본유학사》에는 8,600명, 진청지(陈青之)의 《중국교육사》의 통계는 12,000명)의 경이로운 숫자에 이른다.   이는 당시 세계문명사상 유례없는 대규모의 유학붐이였다. 1896년~1906년사이에 동경에는 중국류학생을 위해 설립한 일본어학교만 해도 홍문학원(弘文学院), 성성학교, 도꾜동문서원 등 20개가 넘었다. 그중에서도 유일하게 최초로 중국여자유학생을 받아들인 시모다 우다코(下田歌子)가 설립한 실천여학교는 중국여자교육사에서 참신한 일장을 펼친것으로 특기해야 할 교육기관이다. 유학생들은 중국에서 배울수 없었던 일본어, 수학, 리과, 체조 등 신식과목과 함께 경제학, 교육학, 자연과학 등 근대적 학문, 교육체계를 습득했을뿐만아니라 “국민국가”를 위한 “국민교육”의 관념을 익히게 된다. 일본에서 배운 유학생에는 중국근대, 현대사의 쟁쟁한 거물중진들이 집중돼있다. 그 인물리스트를 간단히 나렬하자. 陈独秀,李大剑,黄兴,蔡锷,章太炎,鄒容,陈天花, 宋孝仁,蒋介石,汪兆铭,周恩来,董必武,周佛海,秘瑾,胡汉民,鲁迅,郭沫若,周作人,郁达夫,成仿吾,胡凤,李叔同,同扬,夏衍,田汉,高冠花,孙平化,李登辉… 그리고 유학생은 아니나,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했거나 일본의 지원을 받은 또는 일본의 서적을 사상의 영향을 깊게 받은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갖추었던 인물은 헤아릴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를테면 孙文(中山),康有为,梁启超,黄尊宝,戴秀涛,张之洞, 毛泽东, 王周维,罗振玉,溥仪,溥杰… “모택동도 일본의 영향”하면 고개를 갸웃둥 할것이나 모택동 자신의 말이 이를 설명하고 있다. 일본의 친중파 지식인 다케우치미노루(竹內實)의 《모택동노트》(1971년 간행)에 의하면 1960년 중국방문중인 일본문학대표단에 대하여 모택동은 이렇게 말했다. “마르크스주의 전파는 일본이 중국보다 앞섰지요. 마르크스주의 저작을 나는 일본으로부터 입수하여 일본책으로 공부했습니다. 교또제국대학의 교수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가 쓴 책은 지금도 우리에게 참고서로 되고있습니다…”   그런데 100년전 중국은 왜 서구화를 지향하면서 서구가 아닌 일본을 유학지역으로 택했을가? 일본이 같은 동양에서 제일 먼저 서구화에 성공한데도 있지만 또한 큰 이유는 지리적, 문화적 지근거리에 있었으므로 코스트가 쌀뿐만아니라 실용적으로 중국에 대해서 편리했던것이다. 저명한 교육자, 양무파의 리더였던 장지동은 일본류학에 가장 열심히 제창한 인물로서 1898년 3월에 저술한 그의 《권학편》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학문의 권장》에 필적하는 명저로 10일간에 3쇄, 대륙에서 2백만부나 불티나게 팔린 롱베스트셀러였다.   그 책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있다. “유학이라면 서양보다 동양(일본)이 좋다. 그 이유는 거리가 가깝고 경비도 절약할수 있으며 대량으로 파견할수 있다.”“일년 양행(유학)하는것은 양서를 5년 읽는격이 되고 외국 학당에서 1년 배우면 중국학당에서 3년 배우기보다 낫다.”   청나라 정부나 식자들은 일본류학의 절박성, 실용성에 대한 인식을 같이 하고 일본유학을 과거로 간주하여 적극적으로 유학정책을 실시했다. 일본측 역시 청국유학생, 조선류학생에 대해 정부나 민간차원에서 열정적이였고 “청국이 근대화하고 서구렬강에 대항할수 있다면 같은 동양(아시아)에 대해서도, 일본에 대해서도 반가운 일이다”는 사고가 근저에 있었다.   조선유학생이 일본에 유학하게 된것은 중국보다 20년 앞선 1876년이다. 그해 조선정부가 일본에 파송한 신사유람단과 때를 같이 한다. 류대치, 어윤중 일행과 함께 도일한 유길준(25세)과 류정수, 윤치호(16세) 등이 유학생으로 남는다. 그들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집에 머물면서 케이오의숙에 유학한다. 유길준은 한국근대 일본유학의 제1호이며 또한 미국류학 제1호 인물이기도 하다. 나중에 김옥균과 같이 갑신정변의 주역이 되기도 하는 근대 한국의 대지식인, 정치가 그리고 실업가로 성장한다.   조선은 1880년대 들어 일본에 유학생을 본격적으로 파견하기 시작, 이들 도일류학생은 한국의 근대화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전까지 김옥균은 세차례 일본에 다녀오는데 60여명 유학생을 이끌고 갔던적도 있다. 손병희도 일본 망명시 유학생 수십명을 데려갔으며 일제강점 직전에 최남선도 국비유학생의 한사람이였다. 지식인, 작가, 시인으로서 이광수, 이인직, 정지용, 오상순, 윤동주… 쟁쟁한 인물로 이룬 이들은 한국근대의 “일본유학정신사”를 이룩하고있다. 《일본외무성 기록문서》 등 여러 자료에 의하면 한국류학생은 1910년 병합시 420명, 1920년초 2,000명, 1930년대는 5,369명, 그리고 1940년대초에는 29,427명으로 피크에 달했다. 중국과 한국 근대의 일본류학은 근대 량국의 문물, 사상, 정치, 문학, 교육, 예술 등 다분야에서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그 자체가 중한일 삼국 “근대사”의 축도이기도 하다. 100여년이 지난 오늘도 일본류학의 붐이 식지 않고있는 “류학정신사”는 물론 100년전보다 파워나 질에서는 떨어진다 해도 어떤 영향이 있을가는 자못 흥미있는 과제가 다.             
6    (5)문명의 “중심”과 “변경” 교체된다(김문학) 댓글:  조회:5355  추천:34  2010-07-12
<장편연재>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5)문명의 “중심”과 “변경” 교체된다김문학    동아시아 근대를 해독 할때 발견되는것은 19세기말과 20세기 초기에 걸쳐 일본문명이 근대중국문명의 생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중대한 사상(事像)이다.        환언하면 동아시아의 문명권 중심은 중국 대륙으로부터 일본으로 이동한다는 문명사적인 대전환이 형성된다. 근대사에 들어 특히 1894년~1895년에 치른 청일갑오전쟁에서 패북의 고배를 만끽한 청국이 눈을 뜨게 된것은 “일본이 문명에서 이미 우릴 초월했다. 일본을 배우자”는 뼈져린 인식이였다. 양무파 리더인 장지동, 이홍장은 물론 유신파의 강유위, 량계초, 장병린은 모두 입을 모아 일본문명에 경탄하고 서슴없이 일본 명치유신과 그에 따른 모든 서양문물사상을 습득하자고 노력을 경주한다.   근대 동양사학의 최고 석학의 한사람으로 불린 교또대학의 대학자 나이토 고난(內藤湖南)의 그 유명한 “동양문화의 중심이동설”을 들먹일 필요없이 중국 당대의 제1급 정치가, 사상가, 지식인, 교육자들이 동양문명의 “중심”에서 “변경”으로 전락되는 위기의식이 팽배해지면서 “서양화”붐을 일으킨다. 그때가 바로 1890년대 청일전쟁후부터 1920년대다. 그 동시대의 일본류학붐이 식지 않은 역사사실을 절대 경솔하게 평가할수 없다. 모든 “국민국가”, “근대성”의 언설과 사상은 모두 그시기 일본유학을 통해 중국 대륙으로 흡수된다.   최근에 와서 중국 신세대 학자들도 “근대의 일본문화가 동시대의 중국문화를 형성시키는데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고 공공연히 주장하는 리유도 다 여기에 있다.    이것은 기(奇)하게도 20세기초기에 나이토 고난이 발설했던 “일본문화는 중국이라는 문화의 ‘서슬’이 있었기에 마침내 두부가 생기듯이 탄생됐다”는 말과 逆적인 의미에서 동일한 상황을 이야기하고있다.    4천여년동안 중국대륙안에서 면면히 맥을 이어온 한자를 공용어로 한 한족의 역사적자부심은 정말 무서운데가 있다. 하지만 극동의 변경 소국에 불과하던 근대 일본문명에 뒤져 아시아문명의 “변경”으로 밀려난데 대한 한족 지식인의 프라이드가 쉽게 그 사실을 시인하지 않은 거부감을 낳기도 했으나 력사는 프라이드만으로 풀어지는게 아니다.    중국 대륙에서 전개한 유구한 역사를 오감해 보아도 한족은 한자 서술체계를 위시로 복잡하고 고도로 발전된 농경사회를 구축했지만 늘 한족인구의 5%~10%밖에 안되는 이민족(소수민족)에게 정복당하고 문명의 변경에 놓인 사례가 한두번이 아니다.    가장 한족문명에 동화되지 않은 몽골민족이 창설한 몽골제국은 모택동이 가볍게 읊조린 활을 당겨 매를 쏘는데만 능했던것만은 아니다. 최근 세계적인 몽골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전세계의 드넓은 땅을 차지했던 몽골제국은 세계화의 추진자였고 세계의 중심이였다. 당시 최고의 정보전달시스템, 지페, 패스포트 등 최첨단의 기술과 시스템을 갖고있었다.    중국은 한문화가 주변 변방민족에게 어떤 문화적 혜택을 준것만 언급하고 외려 그쪽에서 문화를 흡수했던 사실에 대해서는 무시하든지 인식하기조차 린색해있다. 이것이야말로 심리적인 “폐쇄자”이며 문화적인 “변경인”을 스스로 자연하는것이 아닐가.638  그런데 주변 이민족에서 근대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중국에게 큰 충격을 준것이 일본이고 중국은 처음으로 아편전쟁시기에 없었던 위기의식을 품게 되는것이 모두 일본이란 “변경”의 역습으로부터 시작된다.  중국과 주변의 조선반도는 그나마 행운스럽게도 일본이란 이 작은 문명의 근대 리더가 나타나주어 분발하는데 역동력이 되었다.    1860년 일본이 명치유신으로 서양화를 가속하게 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명치”란 말은 중국 고전 《역경》의 “圣人面前充天下,向明而治”(성인은 남쪽을 바라고 천하를 듣고, 밝은 곳을 향해 다스린다)의 구절을 따온것이다. 중국이란 이 문명의 “중심”이 없었다면 일본이란 작은 “변경”도 명치 유신이후의 도약은 아마 불가능했다.     여기서 부득불 후쿠자와의 그 유명한 《탈아론》을 언급하지 않을수 없다. 그는 그 논문에서 일본이 이탈해야할 아시아(조선,중국)에 대해 “아시아의 고루”, “고풍구습”, “유교주의”, “음양오행”, “인의례지”, “외견의 허식”, “잔혹불렴치”, “고풍스런 전제”, “무법률의 나라”  등 단어로 형용하고있다.  당시 조선의 개화파(김옥균 등)가 참담한 좌절을 당하게 되는 상황을 가리킨 말이지만 이같은 “고루한 아시아”에서 이탈하지 않으면 일본도 망하고 만다고 언급, 일본은 그로부터 성급한 탈아론에서 도약하여 재빨리 서구식 근대화에 성공한다.    그러나 21세기가 10년이 지난, 한일병합에서 100년이 지나고 신해혁명으로 성공한지 100년이 다가오는 오늘날의 동아시아정세를 살펴보면 일본만이 앞서고 중국, 한국이 뒤졌다는 구도가 바뀌고 있지 않은가.          이제껏 일본인들의 인식에서 낙후하다고 생각했던 중국이 어느새 근대화를 이루어 이미 동아시아의 그 100년이상 잃어버린 문명의 중심적 위상을 탈환하고 있지 않은가!  역사는 물방아처럼 돌고 교체되는것일까. 일본이 리드해왔던 아시아 “근대의 우월”은 이제 서서히 무너지고있다.  이 상태에 대해서 일본의 당대 중국학 연구의 중진학자 전 도꾜대의 교수인 미조구치 유조(溝口雄三)는 “중국의 충격”으로 일본인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미조구치는 그의 저서 《중국의 충격》(2004년)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내가 여기서 ‘중국의 충격’이란 제명을 사용하는것은 그 아편전쟁이래의 이른바 ‘서양의 충격’을 암묵의 전제로 하고있는것이다.”  그는 일본,중국 양국의 서구화=근대화 과정은 시간적 선후차이보다는 실은 양자의 근대화과정의 타입(형태)의 차이라고 지적 하면서 일중의 우열관계는 뒤엎어진다고 단언한다.    동아시아문명의 “중앙”과 “변경”이 백년내지 백년이상의 단위로 교체되는 리면에는 문화의 “우렬구도”를 초월한 다원화, 복합의 아시아상을 재인식 하게끔하는 풍부한 시사가 숨겨있다.  
5    (4) 청일전쟁때 조선은 누구의 편? (김문학) 댓글:  조회:5751  추천:31  2010-07-03
<장편연재>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4)청일전쟁때 조선은 누구의 편?김문학    “H의 구조”란 언설이 있다. 저명한 국제정치학자 루이스 • 할레가 그의 저서 《역사로서의 냉전》(1970년)란 명저에서 조선의 역사구조에 대해 정채로운 이론을 펼친다. 그는 동아시아역사는 반도를 에워싸고 천수백년동안 특이한 역사적구조를 이루면서 전개된다고 하면서 “H의 구조”설을 제시한다. 저자는 조선반도를 “H”자모의 중간에 낀 “-”횡선으로 비유하고, 이 횡선은 늘 양측의 두 장대한 종선, 즉 중국대륙세력과 바다에서 습격해오는 해양세력에 의해 사이에 끼여서 우왕좌왕하는데, 양대세력의 어느 한쪽이 강성해져서 H자를 전부 지배하려고 할 때 우선 이 횡선인 조선반도를 지나서 팽창하게 되는 역사적 필연적인 구조를 제시한다. 청일전쟁이 대륙과 해양 두 세력의 조선반도를 통과한 그 충돌이다. 이때 청국과 일본에 대해서 질책 또는 비판을 가하는 우리의 지식인이 많으나, 외려 우리가 어떤 입장을 취했는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H자모의 “횡선”이 된 우리가 대체 청과 일 누구 편이었을까? 필자가 새삼스럽게 이 의문을 던지게 되고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H구조”를 통해 재발견되는 역사의 침울한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한것은 1894년 8월 1일, 그 12일후인 8월 13일, 당시의 무츠(陵奥)외상은 오오토리(大乌)공사에 대한 훈령에 “조선이 청국에 선전포고 하든지 아니면 대신 일본과의 동맹을 공표하게끔 조선정부와 교섭하라”고 명했다. 일본측에서는 일청량국의 교전에 조선이 “중립같은 짓”을 취하면 “타국의 간섭을 초래하기 십상이며 일본정부가 대병을 조선에 파견하는 명분이 상실됨으로” 조선이  일본편에 서기를 적극 바랬다. 바랬다기보다 제편에 서기를 무리하게 강요했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당시 정세로 보아 이 파워게임에서 강대국 청나라가 꼭 승전할것이라고 세계 각국이 짐작했던것이다. 물론 예상치 않게 섬나라가 대국을 대패시키지만, 역사는 늘 이렇게 예정된 코스로만 흐르지 않는 괴물인가보다.  대원군은 청국의 승리를 확신했으므로 일본의 요구에 반발했으리라 짐작된다.   8월 20일에는 일본과 조선사이에 “조선국의 자유독립을 공고시키고” “양국의 무역진흥, 국교친밀을 위해”《잠정합동조항(暂定合同条款)》을 체결하고 26일에는 《대일본대조선량국맹약》이 조인된다. 오오토리공사와 김윤식외상이 체결한 이 조약에는 “일본국은 청국에 대해 공방의 전쟁에 나서며 조선국은 일병의 후퇴 및 그 식량준비를 위해 되도록 편의를 도모할것이다”고 규정한다. 이것이야말로 틀림없는 공수동맹규약으로서 조선을 일본편으로 서게 한 계책이였다.   이리하여 일본군은 조선에서 마음대로 인마와 군량을 징발시키고 정부차원에서 조선을 완전히 일본의 편에 서게 했다. 그 당시 찰영된 사진을 보면 우의 맹약에 따라 조선정부군이 일본군에 종군하여 청군병포로를 감시하는 장면이 있다. 장엄한 모습을 하고있는 조선정부군의 표정과 대조적인것이 청군포로병의 겁에 질린, 수심에 찬 표정이 돋보인다.   여기에 또 잘 알려지지 않은 문헌자료가 있다. 영국 종군기자이며 화가였던 후리프가 영국 《그래픽》잡지에 1895년 3월 9일에 쓴 기사가 있다. “힘없고 불운한 조선인에 대한 청국의 태도는 대단히 고압적이였다. 그들은 조선인을 마치 정복국의 주민을 대하듯 위협했다. 특히 청일전쟁초기에는 무자비한 강간과 략탈을 감행했다.” 후리프는 기사와 함께 자신이 그린 그림을 가하여 증언하고있다. 그림에는 청군병사가 조선인을 마구 격살하고 송아지를 강탈하는 모습이 생동하게 그려져있다. 청국군이 진정으로 조선인을 사랑하고 돕고자 일본군과 싸웠다는 사실을 완전히 뒤엎는 생생한 기사와 그림이다. 일본군이 어떻게 용맹하게 싸웠고 또 청군이 전쟁에서 완패 했다는 사실만 막연히 관심 했을 뿐, 청군이 동포들에게 어떤 악행을 저질렀는지에 관해서는 아예 생각도 못했을것이다. 일본의 조선침략에 대해서만 주목하고 거기에 대한 비판, 질책으로 일관했던 우리의 시각에 반성을 추궁하는 대목들이다. “당시 청국군의 병참모부는 조직 등 여러분야에서 아주 락후하였다. 그들은 병사들에게 조선 현지 주민들로부터 식량 등 필요 군자재물자를 자체로 조달하게끔 명했다. 그래서 이에 대해 반항하는 주민들은 즉석에서 총살당하는 등 참혹한 현실이 전개됐다. 또한 청군들은 오합지졸이었고 병사로서 전쟁에 대한 관심도 부족 한것처럼 보인다.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있었으나 전투에서 나타낸 전투력은 허약하기만 했다.” 1910년 일한합병의 국치를 참지 못해 자결한 지식인 황현은 유명한 《매천야록》이란 저술을 남겼다. “청병은 음행과 략탈을 자행하여 날마다 뢰물을 요구하므로 공청과 민가를 막론하고 모두 곤경에 빠져 그들을 원쑤처럼 여겼다. 심지어는 그들이 평양에서 포위되였을 때 가산을 다바쳐 일본병을 인도한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그들이 패전하여 도주할 때 백성들은 그들이 숨어있는 곳을 다 가르쳐주었으므로 그들은 포위망을 벗어난 사람이 드물었다.”  “이 전투가 전개될때 일본병들은 모두 군수품을 자국에서 운반하고 심지어 시탄(柴炭)까지도 본국에서 운반하여 사용하였으며 일군이 가는 곳마다 음료수까지도 돈으로 사서 마셨다. 그들의 군령은 이처럼 아주 엄숙했으며 우리 나라 백성들은 그들에게서 병사라는 느낌마저도 없을 정도였다. 때문에 그들을 도와 향도(길잡이)가 되는것을 기쁘게 여기고있었다.” 일본군과 청국군의 우렬구도를 잘 그려낸 대목이다. 또한 바로 이러했기에 정부의 조약이나 맹약에 관계없이 당시 조선의 인민들은 청군에 실망하고 질서정연한 일본군에게 호감이 가고 스스로 그 편에 서게 된것이다.  이같은 감정은 아마 지금도 한국인의 심층심리에 자리잡고 있는듯 하다. 역사적 체험에서 자발된 민족의 심리이며, 일본은 거부하면서도 한편 근대화를 일본을 통해 수용한 근대의 한국인의 심성 그 자체이다.  
4    (3)"독립문"은 누구로부터의 독립인가 (김문학) 댓글:  조회:5686  추천:35  2010-07-01
<장편연재>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3)"독립문"은 누구로부터의 독립인가 김문학   서울 서대문구에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이 있다. 유명한 독립문은 바로 역에서 도보로 얼마 안 걸어 간 곳에 초연히 솟아 있다.  그런데 이 유서깊은 “독립문”, 대체 그 누구로부터의 독립인가?  한국인의 90%이상이 일본으로부터의, 식민지지배로부터의 독립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필자가 한국에서 만난 주위의 지식인, 공무원, 회사원, 학생들속에 이같은 착각을 품고 있는 사람이 십상팔구였다.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국유학생이나 또는 중국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 동포들에게 질문을 해보았는데 역시 절대 다수가 같은 착각을 하고 있었다.  생각 해보면 그럴 만도 하다. 왜냐면 일본제국의 식민지로 장장 35년을 몸으로 체험해야 했던 우리가 “독립”하면 아마도 그 극악무도의 일본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이라고 나름대로 착각 할수 있는것도 당연 할지도 모른다.  또한 포스트콜로니아리즘사회에서 식민지의 후예로 살아 가고 있는 우리 동포들에게 1945년 8.15의 일본으로부터의 독립해방의 의미는 그 무엇보다도 심장한것이 아닐까. 역시 식민지 “후유증”의 하나라 할수 있다.  그럼 이 “독립문”이 상징하는 독립이란 대체 그 누구로부터의 독립일까? 정답은 “청국으로부터의 독립”이다.  청일전쟁후 1895년 3월 체결된 《마관조약》의 제1조목이 “조선의 독립”에 관한 내용이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청국은 조선국의 완전무결한 독립자주의 국가임을 확인 한다. 고로 위의 독립자주를 손해주는, 조선국이 청국에 대한 공헌전례(贡献典礼)등은 금후 전부 폐지할지로다”  일본이 청국과 개전이유로서, 청국과 조선의 종속관계를 영원히 폐하고 그것을 명문화시킴으로써, “독립자주의 나라”조선의 보장을 선언했던것은 사실이다. 물론 그 배경에는 일본의 연속궁리가 있었지만 말이다.  여기서 하나 주목해야 할것은 우리의 기억속에서는 희미 하지만,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기본 구도는 중국대륙과 주변국가의 조공(朝贡) 및 책봉관계였다.  대륙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풍부한 문물과 선진문명을 과시하면서 변방 여러민족과 지역에 제국의 힘을 행사해왔다. 그중 일본이 당나라의 쇠락기엔 894년에 스가와 라미치자네(管原道真)는 견당사파견 중지를 요망한데서 견당사파견에 종지부를 찍는다. 그뒤 13년후인 907년에 당나라가 멸망되고 60년뒤인 960년에 송나라가 통일왕조를 세운다. 일본은 좋은 타이밍에서 대륙의 중국권위로부터 거리를 적당히 두고 “자주독립”에 성공한다.  일본은 바다라는 장벽을 여과장치로 중국의 문명을 좋은것만 따먹는데 성공시켜 외래문명 흡수의 우등생다운 본능을 발휘하였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일찍 문명으로서는 독립을 달성했기에 서양문명을 배우는데 용이했으며 그 점이 조선과의 큰 갭을 만들었다.  조선은 지리적으로 대륙과 접속된 지근거리에 있었으므로 아무런 여과장치도 없이 중국문물을 수용, 하물며 청국에서 멸한 명나라의 중화를 동아시아에서 대신한 “소중화”로 스스로 자부했을만큼 중국물에 푹 젖어있었다. 일본에서는 수용하지 않는 중국의 환관, 궁녀, 전족, 과거제도 등을 조선이 고스란히 수용하고 정착시킨것이 그 좋은 례가 된다. 아무튼 조선은 조야를 불문하고 대륙 청국의 종속국으로서 거부반응을 보이면서도 또한 거기에 순응해온 속국으로서의 역사를 수백년 이어왔다.  모택동은 1939년 그 저술 《중국혁명과 중국공산당》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제국주의 제국(诸国)은 중국을 패북시킨뒤, 중국에 예속했던 각국을 점령했다. 일본은 조선, 대만, 류구, 팽호도, 여순을 점령하고 영국은 필리핀, 부단, 향항을, 프랑스는 안남을 점령했다. ”  전근대의 동아시아를 제패했던 중화제국이 근대서양과 일본제국에 의해 속국을 많이 빼앗긴 사실을 모택동은 언급했다. 그리고 모택동의 말에서 또한 중화제국의 아시아질서를 붕괴당했다는 뉴앙스도 느낄수 있다. 鲁迅도 일본인 작품을 번역한 역사서문에서 일본에게 합병당한 조선을 두고 “원래 우리의 속국이였다”고 언급했다.  이렇게 청국의 속국에서 독립을 맞은 영구한 기념으로 독립문을 세운것이다. 높이 15미터, 너비 12미터, 화강암으로 구축된 이는 파리의 개선문 (높이 50미터)을 본따서 설계 한것이다. 그보다 키는 낮지만 위엄을 자랑하는 웅위로운 모습이다.  독립문의 고안자는 고명한 독립운동가 서재필이다. “독립협회”의 창시자의 한사람이기도 한 그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기도 했다. 1880년 17세에 일본에 유학해 후쿠자와 유키치의 지도를 받기도 한 그는 김옥균을 도와 갑신정변(1884년)을 주도하지만 실패로 인해 일본으로 망명한다. 그뒤 미국으로 재망명, 10년간 체류중 고학으로 서양의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딴다. 미국인 여성과 결혼하여 미국시민권도 획득한다.  민비(명성황후는 그뒤 추임한 명칭) 암살(1895년 10월 8일)후 청일전쟁과 때를 같이 하여 조선혁신을 추진하던 김홍집 총리가 1896년 1월 서재필을 조선으로 불렀다. 외무대신직을 의뢰했지만 서재필은 고위관리직을 탐하지 않고 사절했다.  그는 한글신문 《독립신문》을 그해 4월 7일 창간하여 독립활동을 벌인다. 지금 한국에서 4월 7일이 “신문의 날”이 된 연유는 여기서 기인된것이다. 7월 2일 이승만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활약한다.  이어서 1896년 11월 착수한것이 이 독립문이다. 당시 중국사절을 맞은 “영은문(迎恩门)”(은인인 중국인을 맞는 문)과 “모화관(幕花馆)”(중화를 숭모하는 관)이 서울 의주로에 설치되여 있었는데, 이 두 시설을 짖부스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운 의미는 심장하다. 그리고 모화관 자리에는 “독립관”을 세웠고 그것이 독립운동가의 활동거점으로도 활용되었다. 그것이 1897년 11월이다.  그러나 근대사를 돌이켜보면 이 “독립”의 내실은 일본주도의 “독립”이 불과 했던 한계가 보인다. 독립협회는 “대한제국”성립에까지 이르지만 국내 보수파의 무함으로 인해 대한제국 황제 고종에 의해 1898년 11월 폐지되고, 그 간부들도 체포된다.   결과적으로 내부적인 독립의 최후의 기회를 잃게 된다. 이리하여 결국 청국을 몰아낸 일본에게 큰 기회를 준다. 조선독립자주는 청국의 영향을 배제한 일본의 조선지배로 기울어간다. 그야말로 “호랑이를 몰아내고 승냥이를 끌어들인”격이 되었다. 
3    (2) 근대 한중일의 첫 문명충돌 (김문학) 댓글:  조회:5938  추천:31  2010-06-21
<장편연재>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2)근대 한중일의 첫 문명충돌김문학근대 동아시아 3국의 직접적인 근접적 교섭은, 공교롭게도 전쟁으로부터 시작된다.문명과 문명사이의 충돌, 또는 문화지간의 충돌은 늘상 전쟁이 그 역할을 하게 되는것이 역사다. 문명사적인 시각에서 보아도, 전쟁은 정의냐 불의냐 하는 도덕적 가치기준의 판단에 앞서 이문화사이의 교섭, 교류의 큰 팩터로서 역사의 큰 주제이기도 하다. 엄격한 의미에서 근대 중국(그때는 청국)과 일본은 대규모적인 지근거지의 접촉, (첫 접전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겠다)이 바로 1894년의 청일전쟁(갑오중일전쟁)이다. 전쟁의 이유는 무엇인가?불행하게도 그것은 우리의 조선반도를 둘러 싼 일본과 청국의 쟁탈전이 그 내막의 본질이다. 이렇게 대륙과 해양세력의 틈바구니에 끼운 민족은 역사상 늘 양측에서 습격해오는 분쟁과 문명의 바람을 다 맞아야 하는 운명은 어쩔수 없는 사연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일본과 청국의 뒤에는 또 러시아가 호시탐탐하고 있었다. 세계의 지정학자들은 이를 통털어 “지정학적인 숙명”으로 조선같은 운명을 규정짓기를 좋아한다. 최근 “지정학”을 서양중심주의적 학설이라고 비판의 화살을 맞기도 하지만, 영국의 지리학자 맥킨더가 1904년에 창시한 이 학설은 관념론이나 숙명론으로 일축할수 없는 정책과학의 하나다. 지정학은 지구전체를 늘 하나의 단위로 보며 그 동향을 괴얼 타임으로 포착해 거기서 현재의 정책에 필요한 제안을 하는 학문이다. 아무튼 타자에 의해 칼도마에 오르는 타률적인 위치에서 우왕좌왕하는 조선의 그것은 “비운”이란 낱말이 늘 뒤따르게 된다. 19세기말, 명치정부가 조선에 대한 기본정책은 조선을 완전한 독립국으로서 국교를 맺는것을 바랐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또한 지금껏 종주국으로서 군림해 왔던 청국의 권한을 공연히 부인하는것으로 이어졌다. 이리하여 일본은 명치 9년 즉 1876년 강화도조약(일조양국수호조약)이래, 조선을 둘러싸고 청국과 대립해 왔다. 1890년 제1회 제국회의에서 당시의 수상 야마가타 아리토모(山具有朋)는 조선반도의 이익을 확보키로 결정하였다. 그뒤 이윽하여 6월에 동학운동이 발발, 조선정부가 청국에 농민봉기를 탄압하기 위한 원병을 요청했다. 이도 히로부미 등 점진파들의 신중론을 누루고난 정부 급진파들은 대부대의 육군을 조선에 파견하여 청국과 조선에 있어서의 권력의 발란스를 노렸다. 청일양국의 파병으로 동학당봉기는 진압했지만, 양국의 군대는 철수하지 않은채로 주둔을 견지했다. 일본은 청국을 격퇴할 전쟁계획을 획책하고 7월 25일 아침 풍도에서 북양함대 일부대를 습격했다. 4일후 경성의 남부에 포진한 청군과 싸웠다. 결과적으로 해전, 육전에서 청국군은 대패북, 일본은 첫 근대전쟁의 대승을 거둔다. 중국측의 전쟁에 대한 기술은 이미 교과서 등을 통해서 알수 있으므로 여기서 구구한 서술은 약하기로 하고 일본측의 전쟁양상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일본측의 문헌자료들을 점검하면서 놀라운 일은 청국은 일본과 싸운 일도 모르는 민중이 많을 정도로 무관심했지만 당시 일본은 거국 일치로 전쟁을 찬성하고 응원의 파도가 파죽지세로 팽배했다는 점이다. 당시의 유명지식인인 도쿠도미소호(이광수의 스승이기도 하다), 미야케세츠레이는 물론, 코스모폴리탄 사상가로서 저명한 우치무라간조(内村镒三)와 같은 지식인까지도 《대표적인 일본인》등 저술을 통해 청일전쟁이 명예로운 “의전(义战)”이라고 례찬했다. 그 유명한 명치의 계몽가 일만엔 지폐에 오른 후쿠자와 유키치는 즉각 1만엔을 기부한다. 현재시가로 환산하면 1억엔어치의 거액이다. 더구나 일본은 당시의 모든 신문, 잡지, 방송 등 매스컴을 총동원하였다. 현장 종군기자, 화가, 작가를 파견하여 일단위로 전쟁을 보도했다. 당시 일본의 기록에 의하면 아시아 최대 대국인 청국을 두려워 했으며, 북양군벌 이홍장과 또 그 이상으로 남방의 세력의 최대권력자 장지동을 경계했으나, 장지동은 대만의 화재를 구경하듯 구경만으로 수수방관 했다.청국의 국가관념과 함께 애국의식은 박약했던것이 뻔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일본은 전쟁에 있어서 누구나가 “당사자”의 자세로 임했다. 온국민이 전쟁에 열광하고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전쟁의 체험자였다. 많은 대중들은 앞다투어 의연금을 기부하고 돈없는 젊은이들은 종군지원에 나섰다. 일본신문에는 전쟁의 영웅 미담과 함께 의연금 기부, 전쟁을 계기로 나라에 봉사하는 국민의 미담도 지면을 채웠다. 일청전쟁이란 콘텐츠는 독자를 열광시키고 신문잡지에 의한 세계인식하는 습관을 온 일본사에 정착시켰다. 신문매체의 힘은 이렇게 파워가 크며 동일가치관으로 내보는 위험성도 구비하고 있으면서 이런 배경아래서 대중사회가 이루어졌다. 100여년전의 일본과 청국이 조선의 이익을 위해 벌인 전쟁에서 이런 재발견을 할수 있다. 전례없는 근대전쟁으로, 그것은 중국에게는 당시 국민의 부재와 국민국가의 미완성, 국가 의식의 결여성을 노정했으며, 일본에게는 전사회의 극변을 가져오며, 전례없는 “국민”이란 의식과 함께 국민을 탄생시키고 진정으로 근대국가로 탈바꿈을 이룩한것이다. 그리고, 이 전쟁을 동아시아의 국제적 질서를 전례없이 동요시켰으며, 동아시아에 군림하던 청국의 제국적인 리드체계가 하루 아침에 실추한것이다. 그 이유는 한마디로 귀추하면 일본같은 “국민국가”의 일체성을 형성하지 못한 그것이다. 우리가 “근대”라고 칭할수 있는 근대는 사실 청일전쟁을 경계선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전근대와 근대의 분수령이다. 1895년 이토히로부미와 이홍장에 의해 체결된 “마관조약”에서 청국은 조선 종주국에서 이탈하고 대만을 할거당함으로써 “반식민지대륙”으로 낙인된다. 청국에 대해서는 막대한 치욕이기도 하다. 이리하여 일본이 청국대신 동아시아의 소위”지도자”로 자리매김하고 청국 수하에서 빼앗은 조선을 마음대로 식민지 유린 할수 있는 스타트라인에 선다. 청국과의 싸움에서 형성된 국민국가적 공동체의식을 청국은 또 거기서 배우게 되고, 1911년 신해혁명을 통해 청국은 멸망, 손문에 의해 새로운 국민국가적 공화국이 성립되게 된다.  
2    (1) 동아시아지도를 꺼꾸로 보면 (김문학) 댓글:  조회:6412  추천:38  2010-06-17
<장편연재>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1)동아시아지도를 꺼꾸로 보면김문학 세계지도속의 아시아지도를 펼치자. 그리고 꺼꾸로 바라보자.이제 우리는 흔히 지도를 바로 바라보는것과는 달리, 아주 신선한 느낌과 함께 이제껏 없었던 새 발견을 하게 된다. 중국과 한국(조선반도), 일본의 방위가 정반대로 배열된다.우선 일본이 지도에서 제일 서방 위치에 배치돼 있고, 그리고 조선반도, 중국대륙은 동방에 서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동아시아에서도 일본이 지리적으로 기실 서양의 미국아메리카대륙과 제일 가깝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발견된다.다음으로 동아시아의 3개의 반월형 판도를 발견할수 있다. 일, 한, 중은 각기 사이즈 차이는 있어도, 크고 작은 반월형(半月形)지형으로 서쪽에서 동으로 3개가 배열된느것이 눈에 뜨인다. 물론 대륙은 반월이기보다 거대한 만월이라해야 하는것이 옳겠다.그리고 섬나라와 반도와 대륙 사이에 끼인 바다 발해, 황해, 동해, 남해는 대륙과 열도에 둘러싸인 내해(内海)라는 점을 확인하게 될것이다.더우기 일본지도에서 흔히 “일본해”로 표기돼있는 동해는 조선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 놓여있는데 그것은 옛날 육지와 연결되었던 잔재로서, 마치도 큰 호수처럼 보인다.하나 더 빼놓을수 없는 대목이 있다. 이렇게 지도를 꺼꾸로 놓고 조망하노라면 새우처럼 생긴 일본 지형은, 바다를 경계로 대륙과 다른 지역에서 멀리 동떨어진 바다위에 떠있는 고립무원의 “외로운 섬”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첫눈에 뜨이게 된다.따라서, 일본이란 섬나라는 기실 아시아대륙의 드넓은 북방과 남방을 이어놓는 큰 교량이라는 점이 부각된다. 뿐만아니라 아시아 (동양)의 제일 서쪽끝에 (정면지도에서는 동쪽 끝0극도이라고도 함) 자리잡고 서양 북이대륙 등 사이에 놓은 거대한 교량인것이다.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생긴다. 근대 한중일 동아시아를 살펴 볼 때, 솔선 서양식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이 “문명의 교량”적인 구실을 제대로 못했다는것이 근대의 큰 “악의 꽃(恶之花)”이다.1868년 명치유신이후, 서양식의 근대국가로 탈바꿈한 일본은 바다가 인적 교류를 하는 무대라는것 대신 바다가 곧 구경(国境)이라는 관념을 국민들에게 세뇌를 하고, 고립무원의 외로운 섬을 지키자면 해외로 지향하여 식민지점령을 해야 한다는 무서운 선택을 한다.세계 중, 근세사에서 15~16세기 역사의 주역은 대륙제국으로부터 해양제국으로 바뀐다. “바다를 제패하는 자가 세계를 제패하는 시대”가 바로 대항해시대를 거쳐 다가온 근대다. 근대의 서양적 문명과 기술로 바다를 주름잡던 근대 세계의 식민지지배 원리가 바로 서양을 중심으로 한 해양제국의 가장 큰 화두였다.영국을 중심으로 불, 독, 이태지 그리고 러시아 미국 등 제국주의의 바다를 건넌 식민지침략과 강점, 약탈은 당세 세계 강자의 “약육강식”의 절대적 원리였다.1840년 아편전쟁의 패북에서 크나큰 충격을 받은것은 청국이 아니라 오히려 섬나라 일본인들이었다. 그들은 서양의식민제국의 식민지지배를 면하는 방법은 오로지 스스로 “부국강병”,”문명개화”를 실시하여 아시아의 “서양”이 되는 활로뿐이라고 신속히 알아챘다.동양 3국의 개국(开国)양상을 비교하여도 일본이 얼마나 “서양”적인것에 민감하고 솔선적으로 서양의 흉을 낸 “원숭이”라 비난받을만큼 잘 따랐는가를 알수있다.아편전쟁후, 중국은 황제를 주축으로 한 “천하”관념에 사로잡혀 공맹의 유구한 문화전통만 고집하면서 되려 그 육중한 자신의 문명에 짖눌려, 결국 근대화를 외면하는식으로 근대화의 “낙제생”이 된다. 여전히 대륙제국의 그 관성에서 탈피하기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었다. 아편전쟁에서 청국보다 더 큰 우려를 느낀 일본은 1853년 미국의 페리제독의 “흑선(黑船)래향”에서부터 유연히 대처하여 불과 15년후인 1868년에는 서양식 개혁, 명치유신을 성공시켜 근대화 국가를 정립한다.조선은 어떠 했는가? 1866년 병인 양유(丙寅洋扰) 1871년 신말양유(辛未洋扰)이후 1875년 9월 일본은 강화도에 침입하여 운양호(云扬号)사건을 조작한다. 최근에 발굴된 사료에 의하면 운양호 사건은 순전히 미국의 페리제옥의 행동을 본따서 조선영토를 침범한 일본의 도발이었다. 1876년 2월 “일조수호조약”이 체결, 부산 외 두 항구를 개항하고 일본인의 “통상왕재”등을 유리하게 보장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일본은 조선에 대해 서양 제국과 같은 입장에서 동아시아의 小西洋“소서양”을 자처하면서 군립한다. 조선은 서양과 일본 양축의 업악속에서 비자주적 개국을 시작하게 된다.물론 역사가 “인류의 삶의 세계를 시간관 공간의 두 축으로 일개인이 직접 체험한 범위를 넘은 척 도로 파악, 해석, 설명, 서술하는 영위”라는 점을 감안해, 일, 중, 한의 역사적 시간(발전속도)과 역사적 공간(지리풍토)의 이질감을 이유로 백번 양보해도 일본의 아시에 대한 “탈아입구”식 또는 “대아시아주의”를 표방한 침략, 식민지화는 그 표방이나 속은 어떻든 당하는 당사자들에게는 용납할수 없는, 또는 굴절된 업악이 아닐수 없다. 아무리 역사사상(事像)을 도덕기준으로 평가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점은 절대 당사자들의 피해자적 입장에서는 미덕이나 칭송의 가치로는 되지 못하는것이 인지 상정이 아닌가.1940년대에 중반까지 지속된 일본의 아시아지배와 침략전쟁은 무모한 아시아 태평양전쟁으로 엄청난 광란의 극치로 치달았는바, 결국 바다를 뛰어넘은, 아니 바다의 양상을 무시한 “대공영권”의 미몽은 참담한 패배로 종연된다.이제 다시금 곰곰히 지도를 응시해보자. 지리는 결국 심리(心理)이며, 심리는 곧 인간이며, 인간은 곧 文化이다. 그리고 역사는 바로 인간이 만든 문화에서 규정된다. 그 어떤 국가적 영략으로 무리하게 행해지는 의지(意志)라 해도 문화를 무시하고 지리를 무시한다면 종당엔 파탄으로 끝나고 말것이다. 역사는 이렇듯 무자비한것이다.
1    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 머리말 (김문학) 댓글:  조회:5386  추천:33  2010-06-11
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김문학) 김문학머리말 금년 2010년 (8월)은 한일병합 100년, 내년 2011년 (10월)은 중국신해혁명100주년으로 동아시아근대사의 획기적인 대전환을 이룩한지 100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가 된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근대 동양(아시아)의 문명개화(근대성)는 서양의 충격에 의해 시작된다. 중국과 한국, 일본은 서양적 근대화를 지향해 토끼와 거부기식 경쟁을 벌이고, 불행하게도 명치유신을 통해 동양에서 솔선 서양적 근대화를 달성한 일본제국의 침투와 더불어 근대사의 격투가 전개된다. 근대 동아시아 문화, 사상, 사회는 이 행불행(幸福幸)의 역사적 배경하에서 불가피적으로 억압·저항 및 적응의 다층적 구도를 구축하면서 그 명암(明暗)을 이룩해왔다. 지정학(地政学)적으로 대륙과 섬나라의 틈새에 낀 우리 조선반도는 문명사가들의 말대로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격”으로 심한 고통과 변화를 겪으면서 역사의 한가운데 서있었던것이다. “역사는 겨울이며 교훈”이라는 옛 가르침은 참으로 그른데 없다. 이같은 시점에서 100년전 근대의 명과 암에 대해 재점검, 재조명함으로써 재발견, 재사고하는것은 앞으로 미래지향의 21세기를 살아갈 우리 모두에게 자못 중대하고도 심원한 의의를 갖고있다. 역사란 무엇일까? 어제를 끈끈한 뉴대로 밀착시킨 오늘이 아닌가.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는 백년전의 근대에 대해서 어떤 이해를 갖고 있을까? 중국의 근대에 대해서는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이 그 인식의 바탕에 있지만, 우리 민족 자신의 근대에 대해서는 얼마만큼이나 알고 있을까? 또 밀접한 상토영향관계에 있는 이웃 일본의 근대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을 품고 있을까? 그리고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프리즘에도 문제가 있는것 사뭇 안타깝다. 경직되고 단순한 그 불법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좀더 다양하고 유연한 시각이 필요하다고 본다. 공교롭게도 역사란 그 어떤 특정적인 목적론, 인식론에 의해 전개되는것이 아니라, 개인과 민족, 집단 사회, 나라를 굴횡무진으로 얽히면서 시공을 누비는 과정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와 상, 이쪽과 저쪽, 자타가 서로 영향, 조화를 이루거나 아니면 반목, 격투하면서 지극이 복잡다단한 형태를 이룬다. 따라서 역사란 드라마의 주인공은 언제나 자아와 타자(他者)들로 복합적이다. 타자가 거울이 되어 자신의 모습을 비껴주는 구실을 하는것 그 자체가 역사의 참모습이 아닐까. “남을 알아야 나 자시니을 알수 있다”는 진라와 같이 100년전 한국과 중국, 일본을 비교, 조감적으로 바라보는것은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좋은 방법이다. 오랫동안 동아시아비교연구에 투신해온 필자가 본 연재글에서 근대의 3국양상을 중대사건, 문화, 예술, 사회, 일상, 풍속, 민중의 삶에 이르기까지 MRI식으로 횡당면으로 잘게 잘라서 클르즈업 환원 시킨다. 그동안 우리가 미처 잘 몰랐거나 망각했던 또는 스쳐지났을 역사의 장면들을 재발견하고 사색을 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지나간 군대의 벗과 그림자를 보아낼수 있으며, 포근하고 또한 차거울 근대의 체온을 느낄수 있을것이다. 일국사적 시각에서 벗어나 다원, 다층의 시각에서 우리와 주위를 성찰한것이 필자가 노린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그동안 연구과정에서 부지런히 수집해온 사진과 그림, 만화자료를 같이 붙여서 소개한다. 독자 여러분의 애독을 기대하면서 동시에 기탄없는 교시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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