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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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기차로 횡당해본 미국(2) 댓글:  조회:3290  추천:36  2010-09-07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보스턴통신(2)          기차로 횡단해본 미국(2)   거목 세쿼이아 7월25일, 기차가 버클리를 떠나 약 두시간 동안 캘리포니아의 평야지대를 달리다가 캘리포니아의 주도(州都)인 Sacramento 를 지나면서 구릉지대가 나타나고 그 다음에는 산림지대에 들어섰다. 캘리포니아주와 네바다주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약 4시간 동안 기차가 줄곧 산림지대를 달렸다. 지도를 보면 캘리포니아를 남북으로 횡단하는 Sierra  Nevada 산맥의 중간지대를 통과하고 있었다. 캘리포니아주는 기후가 건조하고 강우량이 적은 지역인데 의외로 산림이 많았다. 통계자료를 보면 캘리포니아 전체면적의 약 45%가 산림이라고 한다. 달리는 기차에서 차창으로 관찰해보니 산에 소나무가 많고, 사람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원시림이 많았다. 캘리포니아의 산림중에서도 자랑거리가 되고, 좋은 관광자원이 되는 것이 세쿼이아수이다. 세쿼이아(Sequoia)는 주로 캘리포니아주에서 자라는 삼나과의 수종인데 오래된 나무들은 수령 400년에서 1300년 정도가 많고 평균 높이가 80m가 된다고 한다. 해안에 인접한 지역의 세쿼이아는 보통 키가 크고, 깊은 산속의 세코이아는 몸체가 큰 것이 특징이다. 세계에서 키가 제일 큰 나무로 알려져 있는 세쿼이아는 캘리포니아주의 북쪽 해안가의 Redwood(紅木)국가공원에 있는데 키가 115m가 넘는다고 한다. 세계에서 몸체가 제일 크다고 알려져 있는 세쿼이아는 역시 캘리포니아주의 Sequoia국립공원에 있는데 직경이 11,1m, 둘레가 31,3m, 높이가 84m로 알려져있다.  또 캘리포니아의 산속에는 수령이 4847년으로 추정되는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한다. 나는 캘리포니아의 세쿼이어와 관계되는 다섯 개의 국립공원중 두곳을 둘러봤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으로 해안을 따라 차로 한 시간 쯤 가면 Muir Redwood라는 국가공원이 있는데 이 공원속에 수백년에서 천년을 넘어되는 세쿼이아가 자그마한 골짜기를 따라 수두룩하게 서있다. 거목 세쿼이아는 북부캘리포니아 지역에 무수히 많았던 것 같은데 19세기 후반에 이 지역이 개발되는 과정에 많이 람벌되었다. 그런 것이 안타까워 1905년에 세코이아가 많이 자라는 산을 하나 개인 사업가 부부가 구입하여 국가에 헌납한 것이 현재의 Muir Redwood국립공원의 유래이다. 가히 현대 환경보호사업의 시초라 할 수 있겠다. 세쿼이아수의 보호를 둘러싸고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1997년에 캘리포니아의 어느 사유지에 있는 세쿼이아 수림을 목재회사에서 벌채하려 했는데 Julia Hill이라는 23살 되는 여성이 벌채하려는 나무 외에 올라가 거기서 2년간이나 기거하면서 저항운동을 하여 끊내 목재회사가 세쿼이아 수림 벌채를 단념하게 만들었다. 그 여성은 2년사이 나무에서 한번도 내려오지 않았고 음식은 지원자들이 정기적으로 나무위에 올려주었다 한다.  또 한 곳 세쿼이아를 내가 직접 본 것이 Yosemite국립공원에서이다. 여기에도 수령 천년이상의 세쿼이아가 여기저기 많았는데 이 공원에서 수령이 제일 오래된다는 1800년 정도의 세쿼이아를 보니 말 그대로 신령이 들어있는 신목을 보는 것 같았다. 천년풍설을 이겨내고 하늘높이 우뚝 서있는 모습에 보는 이의 마음이 숙연해진다. 세쿼이아 수림을 둘러보면 기묘한 자연현상도 발견하게 된다. 수령이 수백년에서 천년이상 되는 세쿼이아가 두 세 그루씩 나란히 자라는 경우가 많았다. 세쿼이아에 대하여 상세히 알고있는 분의 설명을 들으니 이런 나무들은 땅위에서는 서로 다른 나무이나 실상 뿌리는 같다는 것이다. 나무들도 땅속의 제한된 자양분을 효과적으로 흡수하는 수단으로 이런 식으로 성장한다는 것이다. 조물주가 내려준 생명의 원리인지, 생명체가 스스로 터득하는 생존비결인지 아무튼 자연현상의 오묘함은 인간의 지혜로 다 해석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런 세쿼이아공원을 둘러보면서 나는 미국과 동아시아와의 문화적 차이에 주의를 돌렸다. 천년씩 넘어되는 고목이고 보면 애니미즘 숭배가 깊은 일본 같으면 그런 고목을 신목(神木)이라 하여 숭배의 대상으로 할 것이고 한국이나 중국에도 비슷한 현상이 있을 수 있다. 즉 신목에 빌면 장수한다든가, 소원성취한다든가 하는 민속신앙이 충분히 이런 고목앞에서 행해줄 수 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그런 현상을 볼 수가 없다. 기독교문화 권이다 보니 이런 우상숭배가 애당초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미국의 산들을 다녀보면 어디에도 자연숭배의 현장을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어떤때는 오히려 동아시아의 산신당이나 산사(山寺) 에서 손을 모아 비는 그런 정경이 그리워진다.    사막에 핀 꽃-카지노사업 캘리포니아주와 네바다주의 경계의 네바다주 측에 있는 도시 Reno(인구 20만명 미만)를 지나면서부터 네바다주의 대사막지대를 기차가 달렸다. 버클리를 떠난 7월25일 오후 5시경부터 기차안에서 잠들기 시작한 밤 12시까지 차창을 내다보니 줄곧 거의 비슷한 사막의 풍경이었다. 나는 26일 아침 5시반경에 기차에서 깨어났는데 그 때보니 산악지대가 보이고 기차가 이미 유타주 경내의 럭키산맥에 들어서고 있었다. 기차가 네바다주의 사막에서 달린 시간을 계산해보니 25일 오후 5시부터 내가 잠들기 시작한 12시경까지 7시간, 그리고 기차에서 잠자는 사이에도 지도를 보니 아마 5시간 정도는 네바다주와 유타주 경내의 사막지대를 달린 셈이다. 장장 12시간 정도 기차가 사막을 달렸으니 그 크기를 상상할 만 하다. 25일 오후 5시부터 12시 사이에 관찰해본 사막의 풍경은 다음과 같았다. 드넓은 대지에 건조한 모래와 돌맹이가 쫙 깔리고 그 위에 힘겹게 솓아나온 메마른 풀과 키가 낮은 관목이 자라고 있었다. 가끔 가다 지면에 소금이 스며나와 풀도 자라지 못하는 메마른 모래땅도 보였다. 산도 가끔 보였는데 나무가 거의 없었고, 한 여름인데도 높은 산의 정상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이 지역이 해발이 높은 고원지대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인가가 보이는 사막 속에 목초지가 나타나고 밭도 보였는데 아마 관개를 하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것 같았다. 금년 2월말부터 3월초에 미국서부지역을 1주일간 버스로 여행하면서 캘리포니아주, 애리조나주, 네바다주의 사막지대를 달려봤는데 대체 내가 기차에서 본 풍경과 비슷하였다.  사막이라 해서 아프리카의 사하라사막처럼 식물이 거의 자라지 못하는 것은 아니고 대체 메마른 풀과 키가 작은 관목은 자라고 관개를 한다면 농사도 지을만 하였다. 그래도 사막지대이니 기후가 극히 건조하고 사람살기가 쉽지 않아 어디를 가도 인가가 드물다. 이번에 기차로 네바다주와 유타주의 사막지대를 통과하면서 약 12시간 달리는 사이 정차한 기차역이 두곳밖에 없었고 그 것도 다 작으마한 시가지이었다. 캘리포니아의 번영하는 도시와 농촌지역을 보다가 이런 사막지대를 보니 환경이 인간의 생활에 주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실감이 들었다.  하나 그런 사막속의 작은 시가지에도 지극히 미국적인 풍경이 있으니 그것인즉 햄버거점이다. 미국은 어디가도 햄버거점이 없는 시가지가 없을 정도로  같은 양식의 햄버거점 안내판이 높이 붙어있다.    그러면 거의 사막밖에 없는 네바다주의 경제는 어떻게 돌아가는 것일까? 알고보니 네바다주는 광산업, 농목축업, 관광산업이 주요산업인데 관광산업은 대부분 카지노에 의지하고 있었다. 소문을 들으니 네바다주에 그럴만한 산업이 없기에 미국연방정부에서 네바다주에 특별히 카지노산업을 허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에 기차로 통과한 Reno도 그렇거니와 라스베가스는 카지노에 의지해 번영하고 있다고 절대 과언이 아니다. 나는 금년 2월말에 라스베가스를 방문했는데 찾아가기 전과 찾아본 후의 인상이 전혀 달랐다. 라스베가스를 찾아가기전에는 국제적인 관광도시인 라스베가스의 멋진 이미지만 가지고 있었는데 라스베가스 주변을 버스로 돌면서 황량한 사막의 풍경을 먼저 보고나서 라스베가스에 들어서니 전에 가졌던 멋진 이미지가 많이 사라졌다. 라스베가스의 주변은 나무가 거의 자라지 않는 황량한 산으로 둘러쌓이고 평야도 사막뿐이다. 시내도 수원이 모자라 가로수나 잔디들은 물이 주지 않으면 자라지 못한다고 한다. 아마 여름에는 대단히 더운 도시일 것이다. 그런데도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오니 그것도 흥미로운 일 아닌가? 카지노만이 느낄수 있는 짜릿한 긴장감이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것일까? 주변 사막의 황량한 풍경과 최고급호텔에서 즐기는 카지노, 그 어떤 묘한 조화를 이루는 것 같다. 라스베가스의 중심가에는 최고급호텔이 즐비하게 들어섰고 거리공연이나 극장의 쇼 등 볼거리가 많다. 거기다가 명품가게가 많아 돈 많은 사람들이 쇼핑도 즐길 수 있다. 도박산업이라 카지노는 다가가기 어려운가 생각했더니 라스베가스 시내의 어디에서도 손쉽게 카지노를 할 수 있었다. 또 소문을 듣고 제 눈으로 관찰해본데 의하면 라스베가스의 카지노업계에는 중국계 직원이 아주 많았다. 라스베가스를 찾는 관광객중에 중국대륙이나 홍콩, 대만사람들이 굉장히 많은 관계라고 한다. 중국계 여행사의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금년 봄에 중국의 어떤 부자가 카지노를 하려고 라스베가스에 찾아왔는데 샌프란시스공항에 도착하니 카지노업자가 소형전용기로 마중해서 라스베가스에 모셔갔다 한다.  그만큼  라스베가스의 카지노업에도 중국의 존재가 커지고 있다. 실지 내가 라스베가스를 방문했을 때 마침 중국의 구정( 설) 기간과 겹치는 관계도 있어서인지 호텔마다 중국어 춘련을 붙혀놓고 중국식의 붉은 색의 등롱을 걸어놓고 있었다. 좀 과장적인 표현을 한다면 라스베가스가 중국인에게 점령당한 그런 감이 들었다. 물론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누가 챙긴다는 속담이 있다싶이 결국 외국에서 번 돈을 미국에 와서 쏟아놓고 가는 셈이다.        럭키산맥의 경관 7월25일에 버클리를 떠나서 하루 밤을 기차에서 지내고 26일 아침 5시반경에 깨어나보니 기차가 이미 유타주 경내에 들어섰고 사막은 이미 않보이고 산들이 나타났다. 차창으로 멀리보니 높은 산맥이 보인다. 럭키산맥이 틀림없었다. 여지껏 황량하던 사막과는 달라 산에는 수림이 꽤 보이고 협곡에는 녹음이 우거지고 목초지가 여기저기 나타났다. 유타주의 주도(州都) 는 Salt Lake City라고 하는데 기차가 통과하기로 돼 있었다. 인구 약 18만 정도의 도시이고 2002년에는 여기서 동기올림픽이 개최되었다. 미국의 신흥종교조직 몰몬교의 총본산이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하기에 달리는 기차에서라도 한번 보고 지나고 싶었는데 내가 잠들다가 깨어나기 직전인 새벽 5시경에 기차가 거기를 통과해버려 아쉬움을 남겼다. 유타주의 주도인 Salt Lake City로부터  콜로라도주의 주도인 Denver에 이르기까지 럭키산맥을 통과하는 구간인데 미국의 철도노선중에서도 자연경관이 제일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그리하여 정신을 차리고 차창밖으로 흘러지나는 자연경관을 관찰했다. 기차가 Salt Lake City를 지나서 몇시간은 산악지대이고 수림이 보였는데 오전 8시경에 유타주의 Helper라는 산속의 마을을 지나면서부터 이번에는 사막이 아닌 모래산들이 수없이 나타났다. 그런 모래산에는 수목이 거의 자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협곡에는 자그마한 강들이 흐르고 있었고 강가에는 수풀도 자라고 가끔 가다 협곡에 밭과 목초지가 나타났다. 모래산의 경관은 황량하기는 한데 산의 모습이 천태만상이이고 미국 서부영화에서 자주 보던 낭만을 자아내는 그런 풍경이었다. 그럴조건이 된다면 멋진 말을 타고서 그런 모래산이 있는 산악지대로 마음 껏 달려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오전 11시반경에 기차는 Grand Junction이라는 산속의 자그마한 시가지에 정차했다. 알고보니 이 역부터는 이미 콜로라도주였다. 이 역을 지나면서부터 모래산이 거의 안보이고 꽤 높은 산들이 보이는데 그래도 나무들이 잘 자라지 못하는 메마른 산들이었다. 그리 넓지 않은 평야나 협곡에는 밭과 목초지가 보이는데 강냉이, 채소, 포도, 기타 과일들을 재배하고 있었다. 협곡에서는 계속 강이 흐르고 있어 수원이 모자라는 문제는 없어 보인다.  오후 한시반경에 콜로라도주의 Glenwood Springs 라는 협곡속에 자그마한 마을을 지나면서부터 불시에 산이 높아지고 협곡이 졻아졌다. 럭키산맥의 제일 깊숙한 곳을 통과하고 있었다. 여기의 협곡은 기차가 겨우 지날 것 같은 좁은 곳이고 손을 내밀면 차창밖의 벼랑가에 손에 닿을 정도였다. 협곡이 굉장히 깊어지고 협곡아래로는 맑고 가늘한 벽계수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협곡속의 어느 곳을 통과할 때 협곡에 온통 기암절벽이고 아름다운 소나무가 어우러지는 절경이 나타났다. 아마 금강산이 바로 이런 모습일거라고 감탄하면서 절경구경에 흠뻑 취했다. 기차를 타고 미국횡단 여행을 결단한 나에게 주어진 특전이 아니냐 하는 정도로 기뻤고 럭키산맥의 깊은  속살을 혼자서 본 것같이 도취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보니 이렇게 험한 협곡에 어떻게 철도를 부설했는지 그 때의 노동자들의 피땀과 희생을 잊고 지날 수는 없었다. 19세기 중기에 미국의 대륙횡단 철도를 부설하면서 중국 광동지역에서 노동자를 많이 모집했고 그 들중에 힘든 고역과 사고로 사망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미국 서부지역의 철도가 중국인들의 노동과 희생에 의하여 개통됐다고 하여고 너무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들의 공로가 인정받아 샌프란시스코 시내의 번화가에 차이나타운 설치를 허가받았고 샌프란시스코지역에서는 중국인들의 그런 공로를 상당히 인정해주는 그런 분위기가 있다고 들었다.  25일에 기차가 버클리를 떠날 때도 기차안의 방송에서 이 철도에 대하여 소개를 하면서 이 철도건설에는 중국인들의 공로가 아주 크다는 설명을 해주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미국의 이런 솔직한 모습이 좋았다. 제2차대전때 일본군의 진주만습격을 받고나서 미국서부지역에 있던 일본계인들을 아리조나주 등지의 사막지대에 강제수용했던 과거사를 훗날에 미국연방정부가 사죄하고 개인들에게 보상까지 해주었던 것이다. 일본에도 일제때 많은 조선인들이 징용당하여 광산을 개발하고, 홋카이도 철도부설에 동원됐고 그런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런 역사를 올바르게 기억하고 추모비라도 제대로 세워주었는지 의문스럽다. 오후 5시반경에 협곡이 사라지고 기차는 서서히 럭키산맥의 동쪽구간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곳부터 산과 산 사이에 넓은 분지가 나타나고 녹음이 우겨졌다. 럭키산맥의 서부가 대체 건조하고 수목이 잘 자라지 못하는데 비하면 동부는 습윤하고 수림이 울창하여 완전히 서로 다른 산같았다.  좀 가다가 Fraser-Winter라는 산속의 자그만한 시가지에 기차가 정차했는데 목재를 적재한 트럭이 보이기에 다시 산들은 쳐다보니 어디나 수림이 울창하여 임업이 충분히 가능하겠다고  짐작했다. 정말이지 럭키산맥의 서부와 동부는 자연조건이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서부 사막이나 모래산의 황량한 모습을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 울창한 산림속을 기차가 한시간 이상 달리면서 긴 터널을 여러개 지나니 불시에 드넓은 평야가 멀리 산아래에 나타나고 저녁노을이 아름답게 물들이는 콜로라도주의 주도 Denver 가 한눈에 들어왔다. 시간을 보니 오후 7시경이었다. Denver 는 도시배후에 웅대한 럭키산맥이 자리잡고 앞면에는 광활한 중부의 대평야가 펼쳐지는 인구 약 47만명의 도시인데 맑은 날씨가 많아 청천하늘이 아름답기로도 유명하다. 럭키산맥에서 기차 차창으로 내려다본 도시풍경도 가히 장관이었다. 시내 중심에 멋진 고층건물들이 들어서고 주변의 도시전체가 녹음에 뒤덮인 그런 모습이었다. 기차가 Denver역에 들어서니 오후 8시가 거의 되었다. 26일 아침 5시쯤부터 기차가 럭키산맥의 서쪽끝에 있는 유타주의 주도 Salt Lake City 들어섰는데 오후 8시경에 럭키산맥을 다 통과하여 콜로라도주의 주도 Denver에 도착하기까지 장장 15시간이 걸렸다. 미국의 철도노선중에서도 자연경관이 제일 아름답다는 구간을 이렇게 하루 종일 구경하면서 통과하였다. 기차가 Denver에서 약 40분 정차하고 다시 출발할때는 어둠이 깃들어 차창밖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잘 보면 기차가 대평야를 달리고 있었고 가끔가다  대형정미소 건물이 보였다. 이제부터 중부의 대평야에 들어서는데 밤이 깊어가니 더 볼수 없어 오후 12경에 잠 들었다. 그러는 사이 기차는 중부의 대평야에 있는 Nebraska라는 주를 달리고 있었다.                                             (2010년9월6일)    
19    기차로 횡단해본 미국(1) 댓글:  조회:4048  추천:46  2010-09-04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보스턴통신(1)                       기차로 횡단해본 미국(1)   정든 고장을 아쉽게 떠나면서 나는 일본에서 대학교 교수로 있다가 작년 9월부터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대학(UC Berkeley)의 동아시아연구소에서 1년간 방문학자로 체류했다. 1년만으로는 자신의 연구를 충실하게 하고, 영어의 벽을 넘어서기까지는 너무 짧은 시간이어서 금년 8월부터 하버드대학교 중국학연구센터(Fairbank Center for Chinese  Studies)에서 방문학자로서 1년간 더 체류하기로 했다. 그래서 7월말에 캘리포니아의 버클리에서 매사추세츠의 보스턴에 이사하게 되었다. 버클리는 미국 태평양연안에 있는 서부의 도시이고, 보스턴은 대서양연안에 있는 동부의 도시이다. 즉 미국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이사하게 된 것이다. 중국으로 말하면 신강의 서쪽 끝 도시 호탄에서 대련으로, 또는 해남도에서 연길로 이사하는 정도의 먼 거리이다. 버클리에서 보스턴까지의 거리는 대체로 4,700km인데 비행기로 6시간 정도 걸린다. 미국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이사하는데 비행기를 타고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지난 다는 것은 너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번쯤은 광활한 미주대륙을 기차로 횡단해보고 싶은 꿈이 나의 마음에 꿈틀거렸다. 그리하여 버클리에서 보스턴까지 기차로 가는 방법을 알아봤더니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샌프란시스코 외곽의 Emeryville역에서 기차를 타고 52시간이 걸려서 미국 중부의 대도시 시카고에 도착하고, 거기서 다시 기차를 바꾸어타고 또 23시간 걸려서 보스턴역까지 토착하게 된다. 기차를 타고 움직이는 시간만 75시간 정도이니 옹근 3일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거기다 침대차는 워낙 가격이 비싼데다 침대 두개나, 세개가 달린 침대방 하나를 통채로 구입하는 방식이기에 혼자서 여행하면서 침대차를 타기에는 처음부터 무리가 따랐다. 나이가 40대 후반에 들어선 내가 침대도 없는 기차에서 3일간이나 무리하게 움직이다가 혹시나 병이 들지 않겠는가 하는 근심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좋은 기회에 미주대륙을 횡단해보고 싶은 충동을 금할 수 없었다. 여러 생각끝에 기차로 보스턴에 가기로 했다.  7월25일 오전, 버클리에 1년 체류하는 사이 물심양면으로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한국 출신의 김 선일박사 (UC 버클리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하는 연구원)가 자가용차로 기차역까지 바래주었다. 오전 10시경에 내가 몸을 담은 시카고행 기차가 샌프란시스코 외곽의Emeryville역을 출발했다. 정작 기차가 서서히 떠나니 1년간 살았던 버클리에 대하여 수많은 감회가 떠올랐다. 영어도 변변히 통하지 않고, 아는 지인도 없는 낮선 곳에 공항에서 마중해주는 사람도 없이 잔뜩 긴장한 마음으로 찾아왔던 것이 바로 1년전이었는데, 와보니 너무나 좋은 곳이었고, 1년간 방문학자로 체류한 UC 버클리는 정말 좋은 대학이었다. 버클리는 인구 10만명 정도되는 샌프란시스코 외곽에 있는 도시인데 태평양을 바라보는 느슨한 산비탈을 타고 도시가 형성되어 있다. 1년 사계절이 마치도 가을과도 같이 서늘하고 태평양에서는 언제나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그 때문에 나는 일본에서 준비해간 1년 사계절  옷을 서로 바꾸어 입을 필요 없이 항상 가을 옷만 입고 지냈다. 아마 자연조건만 따진다면 이 지역만한 도시가 미국에서 그리 흔하지도 않을리라.   UC 버클리는 학생이 약 3만5천명 정도의 종합대학교인데 미국내에서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대학이기에 해외에서도 많은 유학생, 학자들이 모여오는 대학교이다. 1년간 나는 UC 버클리의 동아시아연구소에서 수십번 이상 다양한 학술활동에 참가하면서 동아시아연구의 최신연구동태를 알게되고, 미국과 중국, 한국, 일본에서 온 학자들을 많이 사귀게 되었다. 학문을 하는 경우도 자기 혼자서 책을 보고 사색해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토론하고 거기서 계발받고 아이디어를 얻는것도 굉장히 중요하다. 나는 UC 버클리의 대학생, 대학원생 수업도 자주 방청했는데 수업중에 토론이 많은 점이 동아시아의 대학들과의 다른 점이었다. 교수가 강의를 하는 도중에 학생들이 불쑥 질문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교수들도 그런데 당황해하는 기색이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학생들이 다양한 인종이나 국적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도 미국 대학교의 특색이라 할 수 있겠다. UC 버클리의 교실앞에서는 수업시간을 기다리는 학생들이 복도의 바닥에 않아서 공부를 하는 모습이 일상적으로 목격된다. 역시 미국 대학생들은 그 정도로 공부를 많이 하고 있었다. 수업을 방청하면서 재미있는 현상도 목격했다. 아무리 미국의 대학생들이라도 항상 수업이 재미있을 수만 없지 않는가? 그럴 경우 일본의 대학생들은 핸드폰을 가지고 문자메시지를 전하거나 다른 장난을 친다. 여기 학생들은 컴퓨터를 켜놓고 인터넷을 검색한다. 교수보기에는 수업에 열중하는 것 같고 본인들은 지루함이 없이 시간을 보내는 묘책같다. 버클리 성인학교의 영어교실도 나에게는 좋은 추억을 남긴다. 1년간 저녁마다 거기에 나가서 영어공부를 했는데 영어공부도 중요했거니와 중남미나 아프리카,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온 이주노동자나 난민들과 격의없이 지내면서 이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서로 마음이 통하고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된 것이다. 좀 고상하게 말하면 이문화를 제대로 체험했던 것이다. 버클리의 YWCA (세계기독교여자청년회)의 영어회화자원봉사프로그램도 나에게는 정말 고마운 존재이었다. 그 프로그램을 통하여 나는 정년 퇴직한 미국 노인과 매주 한번 씩 영어회화연습을 할 수 있었다. 이 노인은 나만이 아니라 매주 대여섯 명의 외국인을 상대로 무료로 영어회화파트너를 해주고 있었다. 자원봉사란 바로 이런것이 아니겠는가. 한두번의 이벤트를 통한 남에게 보여주는 일이 아니라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고, 또 조용하고 꾸준하게 남이 꼭 필요한 일을 해주는 그런 것이 참다운 자원봉사라 하겠다.      버클리에 1년간 있는 사이에 여러 기회가 생겨 미국 서부지역을 두루 관광하였다. 가까운 곳에 있는 샌프란시스코에는 여러번 다녀왔고, 로스안젤스, 샌디에고, 라스베가스에 가보고 서부의 유명한 자연경관인 그랜드캐니언, 요세미테 (미국의 금강산이라 불리우는 유명한 산) 도 구경하고 태평양 양안에서만 생성하는 세계에서 제일 높이 자라는 나무라는 세쿼이아 (평균 나무 높이 80m)도 보았다. 수령 1800년이 된다고 하는 세쿼이아수는 나무 그 자체에 신령이 들어있는 것 같은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이었다. 필경 나다니면서 구경하는 것, 그 자체도 하나의 좋은 공부이었다.   1년간 정든 버클리에 여러가지 상념에 젖는 사이 기차는 캘리포니아의 평야를 한창 달리고 있었다.   캘리포니아의 농업 샌프란시스코 지역은 태평양의 바닷물이 내륙으로 깊게 파고들어와 넓은 만(灣)을 이루고 있다. 기차가 출발하여 한창동안 왼켠에 호수처럼 보이는 만이 이어지고 그 다음 Sacramento라고 불리우는 큰 강이 내륙지역에서 바다를 향하여 흐르고 있었다. 버클리에 있을 때에는 산업시설이 거의 보이지 않아 의아했는데 알고보니 버클리를 좀 벗어나면서부터 만과 강 연안에 석유정제시설이 많이 보이고 바닷물과 강을 따라 대형 석유탱크가 부지런히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다음부터 캘리포니아의 풍부한 곡창지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버클리를 좀 벗어나면서부터 캘리포니아의 주도(州都)가 있는 Sacramento를 지나기까지 기차로 2시간 정도를 달리는 사이 만이나 강물외에는 드넓은 평야이고 여기저기에 채소밭, 과수원, 화혜농장, 그리고 목초지가 펼쳐진다. 목초지에서는 대체로 검은 색의 소들이 무리를 지어 풀을 뜯고 있었다. Sacrament의 평야지대는 캘리포니아에서도 유명한 곡창지대인데 여기서 남쪽으로 수백킬로 이상 평야를 따라 Central Valley라고 불리우는 거대한 농업지대가 이어진다. 나는 금년 2월말부터 3월 초순사이에 중국계 여행사의 버스를 타고 1주일간 미국 서부지역을 관광했는데 샌프란시스코 남쪽에서 고속버스로 온 낮을 달려도 드넓은 평야에 끝없이 펼쳐지는 전원풍경에 감탄을 금치못했다. 이른 봄철에 여기저기 과수원에서 과일 꽃이 피어나는데 그 끝머리가 도무지 보이질 않았다. 이번에는 버클리에서 기차를 타고 동북쪽으로 북상하면서 또 다시 캘리포니아의 곡창지대를 보게 된 것이다.    Sacrament 주변을 기차가 통과하면서 눈여겨 보았더니 논밭이 나타났다. Sacrament주변은 수원이 풍부하여 논농사를 많이 짓고 있고, 캘리포니아에서 생산되는 쌀은 대부분 여기에서 나온다고 한다. 아시아 농업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논밭을 미국땅에서 보게 되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그러나 알고보면 미국도 세계적으로 쌀을 많이 생산하는 나라이었다.   미국의 캘리포니아주이라면 사람들은 실리콘밸리의 하이테크산업이나  로스안젤스에 있는 헐리우드의 영화산업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실상 알고보면 캘리포니아의 제일 큰 산업은 농업이다. 캘리포니아는 주 하나의 면적이 일본이나 조선반도 전체의 국토면적보다 휠씬 더 크다. 캘리포니아주의 GDP가 세계 제10위라 하고(어떤 자료에는 제9위라고도 함), 농업규모가 세계 제6위라고 한다. 내가 직접 제 눈으로 본Central Valley라고 불리우는 캘리포니아주의 중심에 위치한 분지형의 곡창지대만도 남북길이가 아마 800km는 잘 되는 것 같은데 이만하면 어지간한 나라의 국토면적에 맞먹는다. 이 곡창지대에서 생산되는 농축산품도 그 종류가 미국에서 제일 많다고 한다. 곡물부터 과일, 화혜, 소고기로 대표되는 가축류, 웬만한 것은 거의다 여기서 생산된다고 한다. 다만 캘리포니아 농업에도 걱정거리가 있다고 하는데 그 것인즉 수원의 부족이다. 캘리포니아지역이 워낙 건조하고 강우량이 적기에 멀리서 수로로 물을 끌어다 하는 관개농법이 보편적이다. 그 때문에 물부족이 캘리포니아 농업을 제약하게 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미국의 국가경쟁력 가운데 두드러지는 것이 농업과 대학교육이라고 본다. 대학교육은 시대에 따라서는 다른 나라에 뒤질 수도 있겠으나 농업만큼은 미국의 천혜의 자원이어서 어느 나라가 쉽게 대체할 수도 없는 일이다. 지구의 온난화가 이어지고 이상기후 때문에 장래에는 식량문제가 전 세계적으로 제일 중요한 이슈로 떠오를 수 있는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미국은 장래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나라일 것이다. 최근에 조글로포럼에서 어느 분이 조선족은 농촌을 떠나 도시로 진출해야 한다고 주창하면서 농경문화를 페쇠적이고 낙후한 것으로만 취급하고, 그런 관점에서 구조선족, 신조선족 운운하는 것 같은데 나는 이 관점이 극히 천박하며 조선족의 미래에 전혀 책임감이 없는 공허한 소리로 들린다. 조선족이 피땀으로 개척하고 목숨으로 지켜온 소중한 땅을 기약없이 버리고 도시에 들어가서 떠도는 영세민으로 살아야만 현대적이고 문명개화인가? 또는 제땅을 다버리고 한국이나 다른 외국에 노무자로 다녀야 행복한가? 일본의 재일교포가 도시에 산다고 다 행복했는가? 전후 일본에서 재일교포들은 도시의 최하층에서 페물수거로 생계를 유지했고, 오늘날에도 직업적으로 기시를 받는 빠찐꼬업으로 살아가는 교포가 허다하다. 미국의 한인들도 세탁소나 채소가게가 이들의 주요업종이다. 이들이 꼭 일본이나 미국의 농민들보다 안정적이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나는 중국 조선족들도 물론 도시에도 진출해야 하지만 지혜를 살려서 되도록 농촌의 생활터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연변지역은 그런 농촌이 있어서 조선족 공동체가 기능하고 조선족자치주가 존립해온 것이 아니겠는가.                                                           (2010년9월3일)
18    16. 나의 가족사 찾기(3) 댓글:  조회:5705  추천:40  2010-08-17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버클리통신(16)                                                 나의 가족사 찾기(3)     140년의 가족사    나는 자신의 가족사를 찾으면서, 수선 제일 힘을 넣은 것이 1869년경에 조선 함경도 회령에서 두망간을 건너 간도로 이주한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의 인적사항을 아는 것이었다. 이들의 이름이 무엇이었고, 두만강을 건너기 전 회령에서 무엇을 했으며, 가족관계는 어떠했으며, 그들의 선조들은 또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하는 것을 알고 싶었다. 그리하여 함경도지역의 김해김씨 족보를 거의다 찾아보고, 회령과 간도지역의 향토사를 많이 찾아봤지만 구체적인 실마리를 찾아내지 못했다. 구한말정부의 北墾島視察使 李範允이 1902년에 北間島를 시찰하면서 기록한 호구조사책 52책 속에서 당시 생존해있던 나의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를 찾아내고 가족관계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의 인적사항을 찾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유감스럽게도 이 책들은 현재 행방불명이 되어있다. 또 중화민국, 만주국 시기에 작성된 간도지역의 호구부에 혹시나 나의 할아버지대의 가족관계가 기록되어 있을 수 있으나 이런 호구부들이 확실히 존재하는지 똑똑치 않다. 조선의 함경도 회령에 혹시나 고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의 호적이 남아있지 않는지 하는 생각도 들지만 현재로서는 찾을 방법이 없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가난에 찌들리다 함경도 지역의 대기근을 피해 두만강을 거너 간도로 이주한 평범한 백성의 기록이 그리 쉽게 나오겠는가하는 의문도 든다. 그리하여 족보나 향토사를 통하여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이전의 가족사를 찾는 노력을 잠시 접어두고, 나의 가족에서 전해내려오는 구전, 자료, 사진 등을 통하여 두만강을 건넌 뒤의 약 140년간의 나의 가족사가 어떠했으며, 한 가족사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생각해보련다. 나의 형제들과 일가친척에 남아 있는 가족사에 관계되는 자료, 사진들을 모으면서 나는 또 한번 비애를 느끼게 되었다. 어렸을 때에는 나의 집과 친척집들에 액틀에 넣어 벽에 걸어놓은 낡은 사진들이 꽤 있었는데 이제는 이런 낡은 사진을 찾아보기도 힘들어졌다. 중국의 국공내전이나 조선전쟁에서 받은 메달이나, 중국의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받은 표창장같은 것이 집안에 적지 않게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이번에 찾아보니 거의 다 없어졌다.  1980년대부터 중국 조선족사회가 농촌으로부터 도시로, 동북지역에서 연해지역으로, 해외로 이주하면서 옛적의 오붓하던 가족공동체가 급격하게 해체되고 가족들이 갖고 있던 낡은 사진이나 자료들이 잘 보관되지 못하고 대부분 소실되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는 문화대혁명시기에 소실되는 조선족의 가족사 자료보다 현재 소실되고 있는 자료가 더 많은 것 같다. 거기다가 조선족 사회의 세태가 낡은 것을 되도록 버리고 사망한 가족의 유골도 남지고 않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고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세대 나의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는 가문의 구전에 의하면 조선 함경도 회령군 鰲山洞에서 살고 있었는데, 1869년 경에 조선 함경도 六鎭지역의 대기근을 피하여 회령에서 두만강을 건너 달라자(大砬子)라고 불리우는 오늘의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智信에 정착했다고 한다.  1869년이면 기사(己巳)흉년때인데 이 시기에 함경도 六鎭지역에는 역사상 보기 드문 대기근이 발생하여 대량의 아사자가 발생하고, 많은 사람들이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넜다. 간도지역에 조선인들이 대량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해이다.   1869년경에 고조할아버지가 어린아이인 증조할아버지를 데리고 두만강을 건넜다고 하는데 가문의 구전으로는 가족관계도 확실치 않다. 아마 고조할아버지는 그 당시 중년이고 대기근으로 회령에서 가족이 대부분 사망하여 살아남은 아들 하나를 데리고 두만강을 건넌 것으로 추정된다. 달라자촌에서 무엇을 했는지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는데 그 당시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넌 조선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농사밖에 더 있었겠는가. 증조할아버지는 달라자촌에서 회령의 같은 동네에서 두만강을 건너온 배씨성의 여인과 결혼하여 가족을 이루었다고 한다. 증조할머니는 1945년 광복직후까지 생존했고, 오래동안 과부로 있었다는 것을 보면 증조할아버지는 비교적 젋은 나이에 달라자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가 1869년경에 두만강을 건너서부터  1885년에  청나라가 간도지역에 越墾局을 설치하여 조선이민들을 정식으로 받아들이까지 초기의 조선이민들은 불법월경자의 취급을 받았고, 조선에 쫗겨가거나 숨어서 사는 극히 불안한 생활을 해왔다. 고조할아버지의 묘소를 회령에 두었던 것을 보면 고조할아버지는  달라자에서 사망하여 고향인 회령에 매장했거나 또는 달라자에서 회령으로 귀환했을 가능성도 있다. 증조할아버지는 달라자에서 사망한 것 같다.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의 대에는 살길을 찾아 조선에서 간도로 건너왔으나 중국에 뿌리를 내렸다고 보기는 어렵고, 그들의 법적인 지위도 극히 불안정했다고 생각된다. 고조할아버지의 묘소를 회령에 두었던 것을 보면 중국에서 정착하지 않았다는 것이 방증된다.      할아버지 세대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이 나의 할아버지이고, 작은 아들이 나의 작은 할아버지이다. 할아버지는 1887년경에 달라자에서 태어났고, 작은 할아버지는 1894년에 달라자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가문의 구전에 의하면 3대가 독자라고 하는데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 형제외에 중국에 다른 친척이 없었던  것을 보면 그 구전이 신빙성이 있는 것 같다.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 형제는 20세기 초기에 달라자를 떠나 현재의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청현 백초구진 鳳林村(洞)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이 왜서 고향인 달라자를 떠나서 봉림촌으로 이주했는지 이유가 똑똑하게 알려지지 않지만 광복전의 간도지역의 조선인 농민들의 생활상으로 보아 소작문제와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즉 본인들이 소유한 땅은 없고 남의 땅을 소작짓는 농사군들이니 소작받기 쉽고, 소작료가 낮은 땅을 찾게 되고, 그러다니 새로 개척되는 마을을 찾아서 왕청현쪽으로 이주한 것 같다. 봉림촌에서는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 형제가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자식들도 대부분 거기서 나서 자라다가 1930년대 후반에 형제가 갈라져 할아버지 가족이 왕청현 西崴子村으로 이사하고, 작은 할아버지 가족이 왕청현  동광진 新興村으로 이사했다. 이들 형제가 또 다시 이사한 이유도 아마 땅의 소작과 관계가 있은 것 같다.    할머니는 고향이 달라자촌 부근에 있는 七道溝 (오늘의 용정시 元東村)라고 하는데 이 지역의 조선인들이 대체 간도의 초기이민들인 것을 보면 할머니네 가족도  조선의 함경도 지역에서 이른 시기에 간도로 건너온 것 같다.    나의 할아버지 형제는 구한말에서부터 조선이 나라가 망하고 일제지배를 거쳐 광복을 맞는 시대, 그리고 중국의 청나라말기, 민국, 만주국을 거쳐 해방을 맞는 시대를 살아왔다. 평범한 백성의 삶이었지만 이런 시대상을 그들의 삶에서 읽어 낼수 있다.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에 돈벌이로 러시아의 연해주 지역에 가서 목수일을 몇년간 했고, 일설에 의하면 연해주에서 미국땅인 알라스카까지 건너가서  노무를 했다고 한다. 그 때 익힌 러시아가 예상치 않게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1945년에 소련군이 중국 동북지역으로 진주하면서 러시아통역이 필요했는지 소련군 장교가 가끔 찾아와서 통역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현재의 도문시 석현진 永昌村에서 일본군이 도망가면서 남긴 군복을 입고다니던 촌민들이 소련군에게 체포되어 일본군으로 오해받아 위험에 처했을 때 할아버지가 통역을 잘 해서 무사히 풀려났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1948년에  왕청현 西崴子村에서 밭일을 하다가 일본군이 페기한 세균무기에 감염되어 불시에 세상을 떠났다.    작은 할아버지는 1970년에 왕청현 동광진 新興村에서 사망했는데 광복전에는 소작농이었고, 사회주의 정권하에서 땅을 분배받고, 큰아들이 1946년에 왕청현 廟嶺에서 왕청현민주동맹의 자치군으로서 토비와 싸우다가 희생하여 열사가족 칭호를 받고 본인도 노동모범으로서 정부에서 표창도 받은 분이었다.    나의 가족은 할아버지 시대에는 기본상 중국에 정착했다고 볼 수 있다. 본인들이 간도에서 태어나서 간도에서 사망했고, 자식들도 다 간도에서 자랐던 것이다. 회령에 매장한 고조할아버지의 묘소를 후에 왕청현으로 이장해온 것을 보면 이 지역에 정착할 의사가 강했다고 보여진다. 그래도 조선측과의 연계는 끈끈했던 것 같고, 그분들의 할아버지, 아버지의 고향인 회령에는 친척도 남아있어 왕래를 했던 것 같다. 나의 나이 든 외삼촌한테서 들은 얘기인데 광복전에는 간도에 사는 조선사람들의 호적이 조선으로 되여있어 호적증명은 조선의 원적지에 가서 받아왔다고 한다. 광복전에는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 가족의 호적이 회령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버지 세대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는 일곱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큰 아들이 1903년에 처음 정착지인 달라자촌에서 태어난 외에 다른 자녀들은 모두 왕청현 봉림촌에서 태어났다.  나의 아버지형제들은  조선의 구한말에서부터 일제지배를 거쳐 광복을 맞고 또 남북이 분단되는 시기, 중국의 청나라 말기부터 민국, 만주국, 국공내전을 거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시대를 살아왔고, 특히 중국의 국공내전과 조선전쟁에는 여러 형제들이 참전하여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쳐가는 중대한 고비를 맞이하였고, 전쟁후에는 형제들이 중국과 조선에 갈라져사는 이른바 이산가족의 삶을 살아왔다.      나의 큰아버지는 왕청현 鳳林村에서 살던 젊은 시절 만주에서 활동하던 조선인들의 반일유격대에 참가했으며 겨울에 사고로 한쪽 다리가 절단되면서 활동을 그만두게 되었다고 한다. 나의 아버지도 젋은 시절에 조선인들의 반일유격대의 식량을 나르는 일을 하였다고 한다.  나의 아버지는 1943년에 만주국의 동원하에 개척민으로 흑룡강성 密山縣으로 이주하였다가 거기서 광복을 맞고 1948년에 부모가 있는 왕청현 西崴子村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흑룡강성 密山縣에서 광복을 맞은 후 중국공산당의 토지개혁운동에 가담하고 국민당계의 토비들과의 싸움에서 연락원을 하다가 위험한 고비를 맞은 적도 있다고 한다. 1950년대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노동모범으로 선발된 적도 있었다. 일본이 망하고 광복을 맞이하면서 나의 아버지 형제들은 새로운 전쟁을 맞이하게 되었다. 수선 나의 작은 할아버지의 맏아들이 1945년에 왕청현민주동맹의 자치군에 참가하였는데 1946년 에 왕청현 廟嶺에서 있은 국민당계 토비들과의 싸움에서 희생했다. 나는 처음에 민주동맹과 자치군이란 어떤 성격의 단체인지 잘 알지 못했는데 가족사를 찾아보면서 이 단체를 새롭게 알게 되었다.  1945년 8월에 중국 동북지역에 소련군이 진주하고 일본이 패망한후 연변지역에서는 급속하게 공산당 계열의 조직이 형성되었고, 1945년 10월에 연변의 조선인 공산당원을 중심으로 東北延邊人民民主大同盟이 성립되고 연변지역의 각현에 동맹조직과 자치군이 설립되었다. 東北延邊人民民主大同盟은 연변지역에 중국공산당의 지방권력을 확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이 단체의 주요멤버들은 1946년에서 47년 사이에 정풍을 통하여 지방정권에서 배제되고 해방후의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설립에도 그들이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왜서 이 단체의 주요멤버들이 정풍을 당하고 지방정권에서 배제됐는지 지금까지의 조선족 역사관련의 문헌들에서는 명쾌한 대답이 나오지 않고 있다. 자기의 가족사 찾기가 조선족 역사의 가려진 그늘을 보게 된셈이다.    나의 가족에서는 1946년부터 48년 사이에 삼촌, 오촌삼촌 (작은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 큰누님이 조선의용군, 동북민주련군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인민해방군에 가입하여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국공내전에 참가하였다. 그러다가 1949년부터 1950년 사이에 조선인민군에 편입되어 조선전쟁에 참가하였고, 1953년에 조선전쟁이 끊난후 삼촌과 오촌삼촌은 조선인민군 장교로 조선에 그대로 남고, 큰누님만 중국으로 돌아왔다.    나의 어머니의 선조는 조선 함경도 富寧郡에서 살았는데 외할머니네 가족은 간도에 비교적 일찌히 이주하여 현재의 용정시 개산툰진 子洞村에서 살았고, 외할아버지는 富寧郡에서 함경도 甲山을 거쳐 1911년경에 현재의 도문시 월청진 楡基村의 친척집을 찾아왔다가 거기서 외할머니를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간도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나의 가족사를 찾아보면, 고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가 1967년경에 함경도에서 간도로 이주했고, 할머니네도 함경도에서 비교적 일찍히 간도로 이주한 집안이고, 어머니네 집안도 함경도에서 간도로 이주한 집안이다. 연변에서 오래 산 조선족의 가족사를 보면, 대체 함경도 지역에서 이민온 사람들이다.    어머니의 형제들중에서도 둘째백부가 국공내전에 참가하였고, 그 공로를 이전받아 해방후에 농민으로부터 현재의 도문시 석현진에 있는 제지공장에 노동자로 배치받았다.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의 가족사를 찾아보면서 아직도 잘 모르거나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는 일제의 지배를 직접 경험하던 세대인데 1940년대에 조선에서 실시된 창시개명이 우리 가족에도 적용된 적이 있는지 전혀 들은바가 없다. 조선에서는 강제적으로 실시된 창씨개명이 그 당시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에게는  어떻게 실시되였는가 하는 점이 똑똑히 밝혀지지 않았다. 또 하나, 나의 가족에서는 일제에 강제징용을 당했다거나 일본군에 참가하여 전쟁에 나갔다는 얘기가 전혀 들리지 않느다. 이것도 만주국의 조선인들사이에서는 적은 사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혹시 내가 이 시대 역사를 너무 몰라서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광복을 맞고나서 동북지역에서 토지개혁운동이 일어나고 국공내전이 발생하면서 나의 가족에서는 삼촌과 오촌 삼촌2명, 큰 누님까지하여 4명이 중국인민해방군에 참가하였고 (그중 1명이 전사), 조선전쟁시에는 3명이 조선인민군에 편입되어 전쟁에 참가하였다. 이들이 어떤 동기로 전쟁에 참가하였고, 이들이 이 전쟁에 대해여 어떻게 인식하였는지 가족사의 중요한 부분이면서도 정작 알고 싶을 때에는 당사자들이 다 고인이 되어버렸다. 통계에 의하면 중국의 국공내전시기 동북지역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이 약 6만3천명이 중국공산당측의 인민해방군에 참가하였고, 전사자가 3천5백여명 된다고 한다. 동북의 조선인들이 아직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으로 확정되기 이전이고, 조선족이라는 개념도 없던 시기에 조선인의로서의 의식이 농후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적극적으로 중국의 혁명에 참가할 수 있었는지, 이부분에 대하여 지금까지의 판에 박힌 설명보다 좀 더 다각적인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나의 가족에서는 조선전쟁이 일어나면서 아버지 형제들이 중국과 조선에 나뉘어져 살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이산가족으로서의 삶은 살아왔던 것이다. 또 나의 아버지 세대까지는 조선식의 생활방식과 조선민족으로서의 의식이 강하게 남아있었고, 일상생활에서도 조선식의 복장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     나의 형제들 세대    나의 부모에게는 10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우리 형제들 세대의 특징은 중국의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성장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1958년의 대약진운동,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혁명등 중국의 굵직한 사회주의 운동에 대분분 직접 참여하였고,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나의 4명의 형제들이 홍위병으로 북경에 가서 천안문광장에서 모택동의 접견을 받았다. 1950년대 중국이 소련과 사회주의 형제국으로서 사이가 좋았을 때에는 나이든 형제들은 소련의 문학작품들을 많이 읽고, 외국어도 러시아어를 공부하였다.    나의 형제들 세대에 역사적으로 큰 변화를 맞이한 것은 1980년대에 중국정부가 개혁개방을 실시하면서부터이다. 그 이전까지는 다수의 형제들이 농촌에서 농업에 종사했었는데 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도시에 들어가서 장사를 시작하였고, 그 결과로서 이제는 농촌에 남아서 농업에 종사하는 형제가 하나도 안남았다. 나의 사촌, 외사촌 형제들까지 시야에 넣으면,  1980년대에 우리 가족이 급격하게 변화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 이전에 다수가 농촌에 살던 형제들이 도시로 이주하였고, 직업이 농업에서 상업으로 바뀌고, 이제는 고향인 연변을 떠나 중국의 연해지역으로 나갔거나, 특히는 한국에 나가있는 경우가 많다.     나의 형제들 세대는 중국의 시회주의 체제하에서 성장하면서 사회주의 의식형태 교육을 많이 받아왔고, 부모들 세대에 비하면 중국화가 진척되었다. 그러나 조선식의 생활방식과 조선민족으로서의 의식은 강하게 남아있었고, 형제들 중에 조선민족외의 이민족과 통혼하는 현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과의 교류가 급속하게 증가되는 추세하에서 연변에 사는 형제들은 집집마다 한국 TV나 연예프로그램을 많이 보고 있고, 민족의식은 오히려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나의  자녀들의 세대  나의 형제들의 자식의 세대에 이르러 제일 큰 특징으로 나타나는 것이 부모들의 고향인 연변을 떠나고 있는 현실이다. 내가 일본에 유학하고 정착한 관계로 조카들의 다수가 일본에 나가게 되고, 또는 직업을 찾아 중국의 연해지역에 나가 있다. 조카들 가운데 연변에 남아있는 것은 대학교에 다니는 조카정도이다. 이런 현상은 나의 사촌, 외사촌 형제들 자식들의 경우에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다들 일자리를 찾거나, 보다 좋은 생활을 추구하여 중국의 연해지역이나 해외로 나가 있다. 이러다니 고향땅인 연변에는 나이든 형제들만 남게 되어, 우리 가족의 경우만 보아도 진짜 공동화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추세속에서 나의 자녀들 세대에는 과연 중국조선족 공동체가 제대로 존재하고, 정상적으로 기능할 지 의문이 생긴다. 나의 형제들 세대까지는 이민족과의 통혼은 전혀 없었는데 자녀들 세대부터는 하나 둘씩 이민족과의 통혼이 늘어가는 추세이다. 그리고 다시 고향인 연변땅에 모여서 옛적처럼 친척들이 오손도손 모여서 살 가능성도 거의 없어보인다.    고조할아버지가 기막힌 대기근을 피하여 어린아들인 증조할아버지의 손목을 끌고 두만강을 건너 간도로 와서 쫓겨다니고 숨어지내면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고, 할아버지대에는 소작농으로서 여기저기 옮겨다니면서 어렵게 이 땅에 정착했다. 그리고 아버지대에는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쳐가면서 이 땅의 주인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렇게 힘들게 정착한 땅을 겨우 몇세의 후손에 이르러 너무나 손쉽게 떠나버린다는 것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2010년8월13일)   *그 사이 제 어설픈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과 미안을 표시합니다. 제가 여기서 공부와 연구로 바쁘게 지내면서 원고들을 빠르게 올리지 못하여 실망을 끼쳐드렸습니다. 저는 7월말에 캘리포니아의 버클리에서 보스턴에 옮겨와서 미국에서 2년째에는 하버드대학교 중국학연구소에서 방문학자로 체류하고 있습니다. 그런관계로 다음기 연재부터는 <버클리통신>에서 <보스턴통신>으로 이름을 바꾸겠습니다. 그리고 이 글들은 미국의 한국어신문에도 연재하는 관계로 한국의 표기방식에 맞추어 썼는데 부디 양해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김 광림 올림-    
17    15. 행방불명의 호구조사책 52책 (김광림) 댓글:  조회:5404  추천:45  2010-07-05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광림의 버클리통신(15)                        나의 가족사 찾기(2)  행방불명의 호구조사책  52책 1910~30년대에 함경도지역에서 발간된 김해김씨 족보 10여종을 아무리 찾아봐도 우리 가문의 선색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의 고향인 회령에서  1930년에 발간된  『金海金氏王山世家璿源世譜』에 김해김씨의 세가문이 18세기 중엽에 경기도 양주에서, 또는 강원도 통천에서 함경도로 이주하고 19세기 중엽에 다시 간도로 이주하는 거의 200년간에 걸치는 상세한 기록이 나오는데 그 중 한 가문의 이주사가 나의 가문의 구전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얘기와 아주 흡사하였다. 그런데 그 당시 이 세 가문이 간도에 이주하여 살던 곳이 오늘의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南坪鎭 일대이고, 나의 가문이 간도로 이주한 곳이 오늘의 용정시 智信鎭일대인 것이 결정적인 차이이고,  1930년 당시 족보에 기록된 간도에 이주한 이 세가문의후손들의 이름이 당시의 나의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 아버지 형제들과 일치하지 않았고, 가족구성도 잘 맞지 않았다. 한가지 유감스러운 것은 회령에서 발간된 『金海金氏王山世家璿源世譜』가 총 18권으로 편찬되었다고 서문에 나오는데 현재 한국에서 찾아낼수 있는 것은 總編과 甲券 모두하여 5권뿐이어서 나머지 乙券, 丙券, 丁券, 終編 13권은 소재가 불명하다. 나의 가문의 기록이 그 족보의 실종된 부분에 있을 수도 있다는 일말의 기대감도 있는데 혹시나 조선 평양의  중앙도서관같은데 한국에서는 찾아낼수 없는 13권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한국의 족보전문가들한테서 들은 얘기에 의하면, 조선에서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후 족보를 봉건시대의 유물로 간주하여 모아서 다 태우려 했는데 어느 유명한 역사학자가 김 일성주석한테 귀중한 민족의 문화유산을 없앴을 없다는 간청을 하여 중앙도서관의 지하실에 다 남겨두었고, 그러나 일반인에게 공개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한편 족보에는 모든 가문이 다 기록됐을 것이라는 것도 일종의 족보에 대한 맹신에 지나지 않는다. 족보전문가들의 견해에 의하면, 족보의 편찬과정에서도 돈이 필요하고 인맥과 정보가 필요하다. 고 한다. 1930년에 아무리 회령에서 김해김씨들이 모여서 족보를 편찬하였다 하더라도  간도에 살면서 돈이 없었거나 족보를 편찬한다는 정보를 모르고 있었거나 또는 족보편찬자들과 아무런 인맥이 없었으면 아예 족보에 올려주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도서관에서 발견한 자료 그리하여 나는 족보를 통하여 가족사를 찾는 노력을 일단 접기로 하고, 함경도 회령지역과  간도 지역의 향토사, 호적관계 자료를 많이 찾아보기로 하였다.  그과정에서 간도의 초기의 조선이민에 관해서 많은 공부를 하게 되었고, 뜻하지 않게 이 부분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자료들을 발굴하는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나는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의 호적에 관계되는 자료를 찾아보려고 일본, 중국에서 가능한대로 많은 노력을 해 보았다.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의 호적에 관계되는 자료가 남아있다면 아마 1900년대부터 1950년대 일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기의 조선, 중국, 일본측의 간도에 대한 인구조사, 호적관계 자료를 찾아낼수 있는 범위내에서 많이 찾아보았다. 그런 과정에서 내가 주목한 것이  구한말정부의 北墾島視察使 李 範允이 1902년에 北間島를 시찰하면서 기록한 호구조사책 52책을 구한말정부의 內部에 제출했다는 기록이었다. 이 기록의 설명에 李 範允일행이 북간도 지역의 약 10만명의 조선인들에 대하여 호구조사를 하였다고 하니 52책의 호구조사책에는 당시 북간도에 거주하던 수천 가족 이상의 호구부가 들어있을수 있고,  혹시 그 속에  나의 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는 그 때에 이미 타계했던 것 같다)의 호구부도 들어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52책의 호구조사책을 백방으로 찾아봤는데 그 과정에서 한국의 국경문제 연구가 梁 泰鎭선생이 1992년에 편집한 『「1902年」間島邊界戶籍案』이라는 자료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 자료는 1902년에 구한말정부의 宮內府에서 만든것으로 보이는데 서간도 지역의 1,420 가족의 호구부가 여기에 들어있었다. 구한말의 호구부는 호주의 고조할아버지까지 4대 조상을 기록하고 외가집은 외할아버지를 기록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때문에 가문의 뿌리를 확인하는데는 아주 유효하다. 나는 이 자료를 보고나서 정말이지 감탄하게 되었다. 서간도이면 현재의 중국 길림성 통화지구 일대인데 거기에 오래전부터 살고있는 조선족들이라면 이 자료를 활용하면 자기들의 가족사를 많이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梁 泰鎭선생은 이 자료를 편집하면서 이 자료가 어디에서 출처했는지 밝히지 않았고 자료에 대하여 상세한 설명을 달지 않았었다. 그리고 이 자료는 서간도 지역의 호구자료이기에 북간도에 살고 있던 나의 가문과는 직접 연관이 없었다. 그래도 잘하면 이런 호구자료를 더 발굴해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됐다.     나는 작년 5월에 한국 서울대학교 규장각도서관에 가서 함경도와 간도 지역의 향토사, 호구관계 자료를 찾아봤다. 간도지역에 대해서는「간도」라는 키워드를 입력하여 찾았는데 어쩐지 새로운 자료들이 거의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 함경도 지역을 같이 조사하던 김에 키워드를「회령」이라고 입력해봤다. 그랬더니 회령에 관계되는 자료목록중에 ≪會寧郡對岸古間島田結摠數成冊≫이라는 자료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여지껏 찾아본 간도에 관한 자료중 이런 이름의 자료를 보기는 처음이었다. 이 자료는 1901년에 회령군에서 작성한 것으로 1책23장으로 구성되었고, 필사본이었다. 그래서 함경도의 다른 군들에서도 비슷한 자료를 만들었을 수있었다고 생각되어 간도와 두만강을 사이두고있는「무산」「종성」「온성」「경원」을 키워드로 입력해보왔더니 거기에도  1901년에 함경도 무산군, 종성군, 온성군, 경원군에서 두만강 대안의 간도에 대하여 토지와  호구조사를 한 자료들이 여러개 발견되었다. 즉 여기에 그 자료이름들을 들면 다음과 같다. ≪茂山郡各社對岸間島居民戶數墾土結數成冊≫ ≪咸鏡北道鐘城郡對岸古間島田今春入種民名成冊≫ ≪穩城郡越便島居民地方遠近田野墾闢直檢繕冊≫≪慶源郡越便居韓民戶摠人口及田結地方檢査成冊≫ 그리고 더 나가서「변계」라는 키워드로 입력해봤더니 ≪咸北邊界成冊≫≪邊界戶籍案≫≪邊界戶籍成冊①≫≪邊界戶籍成冊②≫등자료들이 떠 올랐고, 그런 과정에서 ≪간도에 관한 종성군향청공문서≫라는 자료도 발견하였다. 이 몇가지 자료도 1902년에서 1903년 사이에 작성된 것이었다. 그 때 찾은 자료가 종류로 모두 10종이고 규장각도서관에서 원본자료를 복사하여 모으니 한 박스가 꽉 찰 정도가 되었다. 이 10종의 자료중 ≪邊界戶籍案≫은 1992년에 梁 泰鎭선생이 자료집으로 발간한적이 있는데 나머지 9종의 자료는 내가 여지껏 어디에서 본적이 없었고, 이 자료들이 활자로 발간되었거나 학계에서 활용됐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 자료들을  작년8월에 중국 연길에서 개최된  중국조선민족사학회 제2회학술대회에서 공개했는데 조선족 사학자가운데서 반응이 좋았고, 나도 자기가 여지껏 공개안된 자료를 발굴했다는 실감이 들었다.   자기의 가족사를 찾아보려고 단순하게 시작했던 일이 조선민족의 함경도 지역으로의 이주사, 간도, 만주로의 이주사를 새로 공부하게 되고, 이 지역의 역사에 관한 자료를 발굴하게 되고, 족보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되었다. 어쩌면 가족사를 찾아보자는 노력에 의하여 조상들의 陰德을 입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때도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직도 구한말의 北墾島視察使 李 範允이 1902년에 北間島지역에서 기록한 호구조사책 52책의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 호구책이 발견된다면 나의 가족사 찾는데도 물론 도움이 되겠지만 오래전부터 연변에서 살던 조선족들이면 자기 가족사를 찾아보는데는 결정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 이 호구책은 이미 소실됐을 가능성이 크나 혹시나 한국의 어느 도서관, 정부의 문서관에서 발견되지않은채 잠자고 있는지도 모른다.                                                          (2010년7월3일)    
16    14. 오리무중속의 100년전의 가족사 (김광림) 댓글:  조회:6066  추천:51  2010-07-01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버클리통신(14)         나의 가족사 찾기(1) 오리무중속의 100년전의 가족사              나는 중국조선족 5세이다. 나의 고조할아버지가 조선 함경도 六鎭 지역의 대기근을 피하여 1869년경에 회령에서 두만강을 건너 간도로 이주하였다. 그로부터 나의 가족은 중국에서  7세대에 이르는 140년간의 가족사를 영위해왔다.140년간의 가족사이면 국가의 역사에 비추어보면 근현대사에 해당하고 그리 오래전의 일도 아니다. 그던데도 나의 가족사는 증조할아버지 이전의 역사는 약간의 구전만 남아있을뿐이다. 조선 함경도 회령군 鰲山洞에서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가 살았고, 1869년 기사(己巳)흉년 때 대기근과 돌림병에 마을사람들이 줄줄이 죽어가는 와중에 고조할아버지가 어린아이인 증조할아버지를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달라자(大砬子)라고 불리우는 오늘의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智信에 정착했다고 한다. 간도이민에 관한 자료들을 찾아보니 달라자촌은 1870~90년대 간도로 이주한 초기 조선이민들의 주요집거지였고, 청나라에서 조선정부와의 협의에 의하여 1885년에 이 마을에 통상국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청나라가 간도에서 조선이민들을 관리한  시초였던 것이다.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가 달라자촌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 우리 가문에는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구전에 의하면 고조할아버지는 달라자에서 살다가 고향인 조선 회령에 묘소를 두었다고 한다. 증조할아버지는 1869년경에 회령 오산동 같은 마을에서 이민온 裵씨성의 여인과 결혼했는데 이 증조할머니는 광복직후까지 생존해 계셨다고 한다.  증조할머니가  과부였다고 하는 것을 보면 증조할아버지는 아마 달라자에서 젊은 나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가 1869년경에 두만강을 건너서부터  1885년에  청나라가 간도지역에 越墾局을 설치하여 조선이민들을 정식으로 받아들이까지 초기의 조선이민들은 불법월경자의 취급을 받았고, 조선에 쫗겨가거나 숨어서 사는 극히 불안한 생활을 해왔다. 고조할아버지의 묘소를 회령에 두었던 것을 보면 고조할아버지는  달라자에서 사망하여 고향인 회령에 매장했거나 또는 달라자에서 회령으로 귀환했을 가능성도 있다.    우리가문은 할아버지때에 아마 20세기 초기로 추정되는데 달라자에서 汪淸縣  百草溝村 鳳林洞으로 이사하였는데 할아버지대부터는 가문의 구전이 그래도 많이 남아있어 가족사의 모습을 그려볼수 있다.  그런데 가족사를 찾아보면서 자꾸 생기는 욕구가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는 어떤 분들이었고, 그들이 간도로 건너오기전 회령에서 어떤 생활을 해왔고, 그 이전의 가족사는 어떠 했는가 알고 싶어진다.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 그리고 그 이전의 가족사를 알수 있는 방법은 족보를 찾아보는 것과 함경도 회령과 간도 지역의 향토사와 호구관계 자료를 철저히 찾아보는 것이다. 우리가문은 김해김씨라고 알려져왔고, 함경도 회령군 鰲山洞이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의 고향이라는 것외에는 가족사를 알아볼수 있는 그렇다할 선색이 거의 없다. 구전에 의하면 함경도 청진지역인지 또는 다른 지역에서 관리를 하던 어느 선조가 19세기의 어느 난에 연루하여 다른 연류자들이 대부분 사형에 처해지는 와중에 함경도 무산지역으로 정배살이를 한 것 같고, 그러다가 회령에서 살게 된것 같다고 한다. 연대를 보면 그 선조는 나의 고조할아버지의 할아버지에 해당하고, 그 분이 연루된 난은 연대와 지역을 봐서 아마 ‘홍경래의 난’인것 같다. 부끄럽기도 우리 가문에서는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가 김해김씨라는 것 외에는 이름이 전혀 알려져있지 않고, 족보상의 돌림자가 무엇인지도 잘 모른다. 1967년의 중국의 문화대혁명때까지  가문에 족보가 남아있어 가족사의 선색을 알수 있었는데  큰아버지집에 보관하고 있었던 족보가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이었던 사촌형이 불태워버리는 바람에 알길이 없어졌다.  가문의 구전에 의하면, 회령의 鰲山洞에 같이 살던 김해김씨 종친중에 현재의 조선의 지도자 김 정일장군의 어머니인 김 정숙도 들어있어, 김 정숙의 가계를 잘 찾아보면 우리 가문의 족보도 추적할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김 정숙 가계를 찾아보았는데 조선이 혁명가족에 족보를 들이대는 일도 없거니와 김 정숙 가문도 극히 가난하고 간도에 이주하여 부모가 일찍히 돌아가면서 부모의 성함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실정이다. 그리하여 2007년 여름에 연구차 서울에 갔던 김에  김해김씨중앙종친회를 찾아 가문의 족보에 대하여 자문을 구했고, 그들의 조언으로 부천에 있는 족보전문도서관을 찾아 1910~30년대에 함경도지역에서 발간된 김해김씨 족보 10여종을 조사했고, 함경도 회령과 간도 지역의 향토사, 호구관계 자료를 철저히 찾아보았다. 유감스럽게도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이전의 가족사를 명확히 밝히지는 못했지만, 가족사 차원을 넘어 간도에 이주한 초기조선이민의 토지, 호구에 관한 새로운 자료를 많이 발굴하게  되었고, 조선반도 내에서의 함경도지역으로의 이주사, 간도지역으로의 이주사에 대하여서도 족보를 통하여 많은 사실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가족사찾기가 결국 나의 학문적인 지평을 넓혔다고 할수 있다.     족보가 알려주는 사실   나는 2007년 여름에 부천의 족보전문도서관에서 일주일 정도의 시간을 들여 1910~30년대에 함경도지역에서 발간된 김해김씨 족보 10여종을 조사했다. 나의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가 1869년경에 함경도 회령에서 간도로 이주했기에 이시기에 함경도 지역에서 발간된 김해김씨 족보를 조사하면 혹시나 나의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 아버지 형제들의 명함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을 선색으로 하여  고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의 명함을 찾아내고 그 이전의 선조들까지 찾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때문이었다. 아니나다를까 1910~30년대에 함경도지역에서 발간된 김해김씨 족보들에서는 간도로 또는 만주로 이주한 사람들의 가족관계가 수두룩하게 나와 있었다.   특히 내가 새삼스레 감탄한 것은 1930년에 회령에서 발간된 『金海金氏王山世家璿源世譜』에 김해김씨의 세 가문이 경기도 양주에서 살다가 강원도 통천으로 이주해 오랜기간 정착했다가 다시 함경도 갑산, 무산을 경유하여 간도로, 또는 양주에서 함경도 명천, 경성을 거치면서 간도로 이주한 사실이다. 이 세 가문이 경기도 양주에서 또는 강원도 통천에서 함경도로 이주한 것이 대체 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엽이고, 함경도에서 다시 간도로 이주한 것이 19세기 중엽이다. 그들이 양주에서 또는 통천에서 함경도로 이주한 이유는 족보의 기록을 보면, 관리로서 파견을 받았거나 또는 유배를 받은 것이고 그 후손들이 또 다시 간도로 이주했던 것이다. 이 세 가문의 족보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내가 보기엔 기록이 거짓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18세기 중엽부터 20세기 30년대의 거의 200년이 되는 세 가문의 이주사를 아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족보를 구시대의 유물처럼 보는 경우가 많은데 족보의 기록이 때로는 역사적인 사실을 밝히거나 어떤 학문적인 연구에 굉장히 도움이 될때가 있다. 조선반도의 기록물들가운데서 아마 장르로서는 제일 많은 것이 족보인 것 같은데 이 족보들은 조선 또는 한국의 아주 중요한 문화적인 유산이라 볼 수 있다. 1910~30년대에 함경도지역에서 발간된 10여종의 김해김씨 족보들을 조사하면서  많은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함경도 지역의 여러갈래의 김해김씨의 파조가 이 지역에 이주하고 정착한것이 15세기 중엽부터 17세기 초반에 걸치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조선왕조가 함경도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척하던 시기와 맞물린다고 볼수 있다. 그리고 회령에서 발간된『金海金氏王山世家璿源世譜』이외의 다른 김해김씨 족보들에는 파조가 김해김씨의 어느 파계라는 기록이 거의 없었다. 이것은 현재의 남한의 족보들과 현저히 다른 점이다. 각 파조들이 새로운 개척지인 함경도로 이주하고 그 후세들이 기억을 더듬으면서 족보를 만든 경우가 다수이니 김해김씨라고는 알고있어도 구체적으로  어느 파계의 누구의 후손이라는 것은 거의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나의 가문의 경우, 김해김씨라고는 전해졌지만 구체적으로 어느 파계인지는 전혀 전해지지 않은 것이 아마 함경도 지역의 족보의 특성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함경도 지역의 김해김씨 족보를 통하여 초기에 간도로 이주한 조선인들이 19세기 중반에서 후반에 걸쳐서 많이 이주한 사실, 초기에 간도로 이주한 이민들은 주로 함경도 六鎭지역 출신들이라는 사실, 족보에 나오는 간도의 지명에 「○○洞」, 「○○坪」,「 ○○里」라는 중국에서는 보기드문 조선식의 지명과 「가마골(釜洞)」, 「애기골(子洞)」등 우리 민족 고유어에서 유래한 지명이 상당히 많았다는 사실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함경도 지역의 김해김씨 족보를 찾은 조사한 이유는 나의 가족사를 찾자는 개인적인 동기에서 출발했는데, 대량의 족보를 조사한 결과 학문적인 사실을 적지않게 발견하게 되었고, 그 조사연구를 토대로 하여 2008년 10월에 중국 연변대학교에서 개최된 제1회두만강국제학술포럼에서 논문발표를 하게 되었다. (2010년6월29일)
15    13.미국에서 느끼는 중국,한국,일본 댓글:  조회:5494  추천:34  2010-05-07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버클리통신 (13)                   미국에서 느끼는 중국,한국,일본   달라지고 있는 중국의 위상    국제사회에서 동아시아의 존재감이 급속하게 높아지고 있다. 세계에서 사람, 물자, 정보가 많이 모이는 미국에서 동아시아의 나라들이 각각 어떠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는지 관찰해보는 것은 동아시아의 금후의 미래를 전망해보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음직하다.   미국에서도 중국의 존재감은 극히 크다고 할수 있다. 미디어에서는 중국에 관한 보도가 눈에 띄우고 있고, 국제정치에서 미국과 중국의 2극체제라는 의미의 「G2」라는 생소한 용어까지 만들어지고 있다. 중국제품은 여기에서도 일상생활에 보편화되어 중국제품없이는 기본생활이 불가능하다는 얘기가 곧 잘 들린다.       미국에는 350만명을 넘는 중국사람들이 살고 있고, 중국사람들의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각지에 차이나타운, 중국계쇼핑센터가 설치되어 있고, 미국에서 중국레스토랑이 없는 도시를 찾기가 힘들 정도이다. 중국 유학생수도 인도다음으로 많다고 하는데 약 60만명이 되는 외국 유학생중에서 중국 유학생이 8만명 이상에 이르고 있다. 미국의 IT산업을 주도하고 있는 실리콘밸리의 연구개발자중에는 인도인과 중국인이 제일 많다고 한다.              나는 금년 2월에 미국서부지역을 여행하면서 중국에서 온 여행객이 유난히 많은 것을 보고 정말 감개스러웠다. 내가 방문한 라스베가스, 그랜드캐니언, 로스안젤스, 샌디에고 등 도시와 관광지의 어디에도 중국 단체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고, 마침 설기간이었기에 라스베가스의 호텔과 시내 도처에 중국식의 붉은 초롱을 내걸고 한자로 쓴 춘련을 붙혀놓았다. 중국계 여행사 관계자들의 얘기에 의하면 미국의 뉴욕, 위싱턴 같은 도시에 가면 더 많은 중국관광객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20여년전만해도 중국인의 외국여행이 극히 드물었는데 이제는 세계의 거의 어느나라에도 중국인들이 여행을 다니는 시대가 도래했고, 중국하면 돈이 많고 잘사는 나라라는 이미지가 국제사회에서 퍼지고 있다.       그런데「Made in China」라는 상품이 도처에 널려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고유의 브랜드상품이 아직까지는 적은 것도 현실이다. 이런 현상은 중국경제발전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며, 중국의 산업화는 이제부터 내실을 다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약진하는 한국의 모습  미국에서는 한국의 존재감도 커지고 있다. 미국에서 판매되고 있는 일반핸드폰은 약 절반정도가 삼성, 엘지의 제품이고 일본메커의 핸드폰은 찾기조차 어렵다. 일본 핸드폰메커 제품은「가라파고스현상」이라고 불릴만큰 국내시장에 몰려있다가 해외에서는 완전히 한국회사들에 선점을 당하고 있다. 단지 최근에 애플과 구글의 스마트폰이 인기를 끌면서 핸드폰시장에서는 한국회사들이 다소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텔레비,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도 일본제품이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던 시대는 사라지고, 한국제품이 일본제와 비슷하거나 오하려 그 이상의 시장점유률을 보여주고 있다. 자동차도 한국차가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어, 거리를 다녀보면 현대, 기아의 간판이 붙은 차를 찾기가 어렵지 않다.  미국에 유학하고 있는 한국유학생수는 약 7만명이라 하는데 수자상으로는 인도, 중국에 이어 세번째이지만, 한국의 인구규모로 말하면 상당히 많은 수자라 할 수 있다.  미국에는 시민권이나 영주권을 가지고 미국에 정착한 한국인이 약 140만명 있고, 한국인 특유의 민족성과 단결력을 바탕으로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다. 로스안젤스에는 한국의 시가지와 별로 다르지 않은 거대한 코리아타운이 형성되어 있다. 2007년7월에 미국 하원에서「종군위안부문제의 대일사죄요구결의」가 가결된 배경에도 한국계 시민단체의 영향력이 행사되었다고 알려져있다.  다만 한국요리는 상당히 좋은 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직 미국에서 중국요리나 일본요리처럼 보급되지 않고 있다. 요리도 결국 국가의 이미지와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한국요리(한식)의 세계화는 이제 시작이라 볼 수 있다.   좋은 이미지를 남기는 일본     중국, 한국이 미국에서 존재감을 키워가는데 비하면, 일본의 존재감은 오히려 약간 축소되고 있는 느낌이다. 때마침 도요타자동차의 리콜문제가 클러즈업하여 일본제품의 안전신화가 문제시되고 있다. 미국에서 중국인들과 한국인들이 비교적 단결하고 모국과의 관계를 끈끈하게 유지하고 있는데 비하면,  일계인(日系人)이라 불리우는 2차대전이전에 미국에 이민하여 정착한 일본사람들과 그 후손들은 모국과의 관계가 느슨하고 자체적인 네트워코가 그리 강해보이지 않는다.    일본학생들의 미국유학도 2000년대에 들어서 감소되어가고 있다. 최근에 하버드대학교 총장이 일본을 방문한 자리에서 다른 아시아 나라의 학생들이 하버드대에 많이 유학하는데 비하면 일본유학생은 손꼽아 헬수 있을 정도로 적다고 지적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미국의 대학가에서 중국과 한국에 비하면 일본유학생수는 현저히 적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미국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일본의 저력도 만만치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의 거리를 달리는 승용차를 보면 일본차가 유난히도 많아, 10대의 승용차가 있다면 아마 5, 6대는 도요타, 닛싼, 혼다 등 일본차들이다. 최근에 도요타자동차의 리콜문제가 발생하여 일본차의 이미지가 흔들리는 것이 사실이지만, 자동차만큼은 어느나라도 일본의 아성을 쉽게 허물기 어려울 것 같다. 카메라, 프린터 등 광학관련제품을 보면 일본제의 우세는 자명하고, 일상생활에서 잘 관찰안되는 전자부품, 정밀기기에서도 일본산업의 파워는 아직도 막강하다고 볼 수 있다.      미국에서는 일본요리가 건강식품으로 아주 환영을 받고 있어, 때로는 중국요리이상의 취급을 받고 있다. 그 때문에 한국인, 중국인들이 경영하는 짝퉁 일본레스토랑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일본요리라 하여도 별 것은 아닌데 나라의 이미지가 좋으니 요리의 인기도 동반상승하는 것이다.    현재는 많이 식어있지만 80년대경에는 미국에서 일본의 존재감이 크게 늘어나고 일본이 상당한 붐을 이루었던 것이다. 일본말 속담에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다싶이 미국내에서 중국과 한국의 존재감에 다소 가리워지는 면이 있지만 여전히 선진국으로 불리우는 일본의 파워는 결코 무시하기가 어렵다고 생각된다. 미국에서 동아시아의 중국, 한국, 일본의 존재감을 살펴보면서, 동아시아를 전체적으로 볼 때 그 존재감은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느낀다.  동아시아 국가사이가 보다 더 가까워지고, EU와 같은 공동체를 형성해나갈 때 이 지역의 가능성은 더욱 열려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해본다.                                              미국 버클리대학에서(2010년5월4일)  
14    12.미국에서 살아보니(2) 댓글:  조회:5197  추천:40  2010-05-05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버클리통신 (12)                   미국에서 살아보니(2)   인재가 모이는 나라   미국에 와서 강한 인상을 받은 것 가운데 하나가 이 나라에 인재가 많이 모여 온다는 사실이다. 내가 방문학자로 미국에 와 있는 사이, 중국, 한국, 일본의 최고의 명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왔거나, 유학을 마치고 미국에서 취직한 엘리트들을 아주 많이 만났다. 내가 방문학자로 있는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대학에는 중국출신의 유학생이 500여명이 된다고 하는데, 그 중 100여명 이상이 중국 최고의 명문대학으로 알려진 청화대학교의 졸업생들이라고 한다. 이 대학교의 한국유학생은 600여명이 되는데 대학원생들은 다수가 서울대학교,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한국과학기술대학교 졸업생들이었다.    외국에서 미국에 인재가 많이 모여온다는 것은 객관적인 수치로도 증명되고 있다. 현재 미국에서는 외국 유학생이 약 60만명이 공부하고 있는데, 다른 나라의 유학생수에 비하여도 그 수자가 월등히  많은 것이다. 외국 유학생수 제2위인 영국의 유학생수가 약 32만명으로 미국의 절반수준이다.      또 하나의 사실은 외국유학생들이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나서 미국에서 취직하거나 정착하는 비율도 높다는 것이다. 내가 본 어느 자료에 의하면, 80년대 이후부터 일본과 독일에 유학하여 이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중국유학생의 약70%가 미국에서 취직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미국외에서 공부한 인재들도 미국에 와서 취직하고, 정착하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나는 미국에서 취직하고, 정착한 사람들은 만나보고 그들의 모국의 입장에서 보면 솔직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국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은 젊은 사람들이 미국에 유학와서 결국 미국의 인재가 되어가는 상황이기때문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손쉽게 해외의 우수한 인재들을 미국에 유치하고 미국을 위하여 공헌하게 하고있는 셈이다.  해외인재들이 미국에 많이 모이는데는 여러가지 요인이 겹쳐있다고 생각된다.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대학의 화학연구실에 포스터닥으로 와있는 일본인 젊은 연구자를 만났는데, 그가 얘기하는데 의하면 같은 분야의 일본이나 중국의 연구실 설비는 꼭 미국만 못한 것이 아니거나 더 훌륭할 수도 있는데  미국의 실험실에는 세계 정상급 과학자가 많이 있고, 그런 사람들 밑에서 좋은 성과를 낼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최고의 두뇌가 우수한 인재들을 불러들인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서울대학교를 마치고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컴퓨터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실리콘밸리의 IT기업에 취직하게 된 유학생을 만났는데, 그가 하는 얘기에 의하면 미국의 기업에서는 수평적인 인간관계가 유지되고 있고, 창의력을 잘 발휘할수 있는데  한국의 기업에서는 수직된 인간관계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중국 유학생들이 본국으로 잘 돌아가지 않는 이유중에는 미국의 자유로운 정치적, 사회적인 환경에 끌리우는 경우도 꽤 있는 것 같다.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안젤스대학에서 컴퓨터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의 유명한 연구소에 취직한 30대 초반의 한국유학생을 만났는데, 그가 받는 월급이 9천불 정도가 된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내 나이가 40대후반이고 일본에서 대학교수를 10년을 했는데도 월급이 5천불이 약간 넘는데 박사학위를 받고 취직한 초임금이 나보다도 훨씬 많다니 놀라지 않을수가 없었다. 미국에는 특히 과학기술분야의 해외인재가 많이 모이는데 그만큼 이런 분야의 임금이 다른나라들보다 높고 그것이 우수한 인재들을 유치하는 동력이 되고 있다.     팁과 고속도로    미국에서 잘 적응되지 않는 것이 팁문화이다. 팁은 서양사회에서 보통 존재하는 사회관습이라 하지만 특히 미국에서는 팁이 광범위하게 요구되고 있다. 식당, 호텔, 택시, 미용원 등 거의 모든 서비스업종에서 팁을 받고 있다. 즉 누구한테서 서비스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팁을 주어야 한다. 그리고 팁은 보통 지출한 비용의 15%를 내야 하는데, 팁까지 포함하면 미국의 서비스분야의 물가는 결코 값싼 것이 아니다. 나자신은 여지껏 동아시아에서 살아오면서 팁문화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팁에 대한 당혹감이 적지 않아, 주어야 할 것을 주지 않거나 적당히 주어도 될 것을 많이 주는 일을 번복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아시아계 이민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팁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소 다혹감을 가지고 있고, 미국에서는 너무 많은 서비스분야에서 팁을 받는다는 불만의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고속도로를 타보면 팁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미국에는 고속도로가 워낙 많은데 미국전체 고속도로중에서 6.4%의 도로에서만 요금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니 대부분 고속도로가 무료이고, 그 때문에 여기서는 가까운 길을 가는 경우에도 손쉽게 고속도로를 이용하고 있고, 고속도로가 마치도 동아시아에서 말하는 국도처럼 사용되고 있다. 금년 2월에 나는 관광버스를 타고 일주일간 미국 서부지역 관광을 다녀왔는데 그 사이에 버스가 고속도로에서 요금을 내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미국에 여행다녀온 사람들중에 미국의 좋은 점으로 고속도로가 무료라는 점을 드는  이들이 꽤 많다.   의외로운 보수성과 어두운 구석들    대체 미국하면 개방적이고 글로벌화한 이미지가 많이 떠오르는데 여기서 살아보면 의외로 보수적인 단면을 볼 수 있다. 그 단적인 예가 도량형 (Measurement) 제도라 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도량형에 있어서 국제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미터, 킬로미터, 킬로그램, 섭씨를 사용하지 않고, 인치, 마일, 폰드, 화씨를 사용하고 있다. 그 때문에 해외에서 미국에 오게 되면  이 점에서 혼돈이 생기기 쉽고, 특히 매일의 생활과 관계되는 일기예보시에는 화씨를 계산공식에 의하여 섭씨로 바꾸어 이해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겪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는 미국의 글로벌 수준이 오히려 뒤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2008년 가을에 시작된 미국의 금융위기가 세계적인 경제불경기를 초래하면서 현재 미국의 경제사정은 좋지 못하다. 미국 전체의 실업률이 약 10%에 이르고 개인사업을 하고 있는 아시아계 이민들을 만나보면 불경기를 한탄하는 소리가 자주 들린다. 내가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시( 인구 약 10만명 정도의 도시) 의 시내 주요도로를 따라서 다녀보면 많은 가게들이 페업을 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실업률이 높다보면 생계를 이어가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생기고 노숙자들을 양산하게 된다. 아침이나 저녁에 시내 거리를 다녀보면 여기저기에 노숙자들이 밖에서 날을 새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의 기독교단체의 사회봉사활동으로 두번 노숙자들은 찾아간 적이 있다. 작년 연말에 버클리시에서 운영하는 노숙자 수용시설에 찾아가서 저녁식사를 제공하는 봉사활동에 참가했는데 그 시설에만 노숙자가 40여명이 있었다. 이런 시설에 들어가면 기본적인 생계문제는 해결되지만 수용인원과 수용기간이 제한되어 있기에 노숙자문제의 근본적인 대책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금년 봄에 또 한번 공원에 모여있는 노숙자들한테 식사를 제공하고 생활용품을 제공하는 봉사활동에 참가했는데 그 공원에만 노숙자가 수십명은 모여있었다. 특히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은 노숙자중에는 젋은이가 꽤 있고, 그 들중 마약중독자가 많다는 것이다. 미국은 세계에서 마약사용자가 제일 많은 나라로 알려지고 있고, 마약때문에 일생을 망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고 볼 수 있다. 버클리시 주변에는 미국에서도 범죄률이 높다고 알려진 Richmond와Oakland라는 도시가 있는데 이 도시에서는  마약과 총기에 의해 범죄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미국은 세계에서 제일 개방적이고 우수한 인재들이 모이는 나라인가 하면, 다른 한면으로는 빈부격차가 심하고, 선진국중에서는 국민의료보험제도가 뒤떨어지고, 총기와 마약의 문제가 심각한 나라이기도 하다.미국 버클리대학에서       2010년5월4일
13    11.미국에서 살아보니(1) 댓글:  조회:4540  추천:32  2010-03-26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버클리통신 (11)                   미국에서 살아보니(1)     개방성이 돋보이는 나라  나는 미국에 온지 이제 반년이 지났다. 그 사이 미국에서 살면서 내가 지금까지 체험했던 중국, 일본, 한국과 비교하면서 이 나라가 과연 어떤 나라인지 생각해보고 있다.   미국에서 받는 제일 강력한 인상이 이 나라에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존재하고 세계에 대하여 문호가 항상 열려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생활하다보면 이 나라에는 세계의 거의 모든 인종이 모여 있다고 해도 결코 과언같지 않다. 내가 살고 있는 버클리지역에서는 중국. 한국, 일본 사람들은 수시로 만나게 되고. 그외에도 중남미나 동아시아, 남아시아 지역 출신 사람들을 어디서도 볼 수 있다. 내가 영어공부를 하고 있는 버클리성인학교의 영어교실에는 중남미지역에서 이민으로 온 사람들이 제일 많고, 그 외에도 세계 여러나라의 출신들이 모여있다. 버클리성인학교는 두가지 점에서 미국의 개방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영어공부를 하려고 등록을 하는 때인데, 등록자의 신분증명서를 일체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니 버클리시에 주민등록을 한 사람이든 안 한 사람이든 관계없이 받아주고 있고, 미국에서 불법체류하고 있는 사람들도 여기서 공부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민간단체가 아니고, 분명히 정부가 운영하는 교육시설이 이처럼 개방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점이 놀랍기도 하다. 또 하나는 버클리성인학교의 수강생중에는 여러 나라에서 모여온 난민이 아주 많다는 점이다. 아마 세계의 주요 분쟁지역에서 생긴 난민을 거의 다 여기서 볼수 있는 것 같다. 난민을 많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은 미국의 개방성을 넘어서 미국의 도덕성까지 돋보이게 한다. 일본은 선진국들중에서 난민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 나라이고 그 때문에 국제사회의 비판도 받고 있다. 미국이 이민으로 시작된 국가이고, 국토면적이 일본에 비하여 절대적으로 넓으니 해외인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여력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난민문제에서는 미국의 개방성, 도덕성이 일본에 비해 단연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중국의 국제사회의 위상이 높아지고 때마침 미국의 경제위기로 인하여 중국의 존재감이 커져보이는 때인데, 개방성에 있어서는 중국이 미국에서 배워야 할  점이 너무 많다고 생각된다. 단지 경제활동을 개방하여 세계의 기업들이 돈벌기 좋은 그런 나라가 아니라, 진정으로 다양한 사상과 문화에 대하여 개방하고, 절박한 상황에 빠진 난민들이 중국을 안식처로 여기는 그런 때에 중국의 국제적인 리더십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겠다고 생각된다.   미국의 개방성을 엿볼수 있는 사례가 더 있다.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에 가면 여기저기에 중국의 국기인 오성붉은기와 대만의 청천백일기가 걸려있다. 중국대륙계단체는 오성홍기를 걸고, 대만계단체는 청천백일기를 거는데, 어느 단체인든 거의 다 미국 시민권자나 영주권자들로 구성되었겠는데 이렇게 버젓하게 제 모국의 깃발을 걸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캘리포니아주의 태평양 연안에 위치한  Santa Barbara군에 Solvang이라는 자그마한 마을이 있는데, 1911년에 미국으로 집단이민을 온 덴마크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마을이라 한다. 마을 전체가 덴마크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미국속의 덴마크촌이라 할수 있는데 덴마크의 쿠키나 요리로 유명하여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다. 이 마을 도처에 미국 성조기와 나란히 덴마크 국기가 걸려있는데, 덴마크의 특색으로 관광객을 유치하는 측면도 있겠지만 모국의  주권의 상징물을 미국속에서 버젓히 걸 수 있다는 것은 그 만큼 미국 사회가 개방이 되어 있고, 관용의 정신이 살아있다고 볼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개방성이 돋보이는 나라가 국가의 상징물인 국기에 대한 집착이 두드러지는 점이 의아스럽다. 미국에 와보면 정부의 공공기관같은데는 거의다 성조 기가 걸려있고 민간회사나 개인주택들에도 굳이 국가적인 축제일이 아니어도 성조기가 걸려있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세계 수많은 나라중에서 미국처럼 국기 가 많이 사용되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이런 경향은 2001년의 ‘9,1 테러사건’ 이후에 강화됐다는 설도 있지만, 세계 각지에서 모여온 다양한 인종으로 이루어진 국민을 하나의 사상이나 종교로는 통합이 어려우니 그 대신 국민통합의 수단으로 국기가 유난히 강조되는 아닌가 생각된다.       일상생활을 통해보는 이모저모    미국에 대하여 좋게 보고 싶은 점이 더 있다. 여기서 버스를 타보면 장애자에 대한 배려가 철저하게 되어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버스마다 리프트가 설치되어 있어, 장애자나 노인들이 훨체어를 타고 오르내릴수 있다. 일본의 공공교통도 장애자나 노인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는데 내가 잘 몰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버스에 리프트까지 설치되어 있는 것은 보지 못했다. 화장실에 가도 대체로 공간이 크게 만들어져 있는데 그 것은 훨체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화장실 사용을 쉽게 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자전거 사용을 권장하는 취지라고 생각되는데 전철에 자전거를 가지고 탈수 있고, 모든 버스마다  앞면에는 자전거를 적재할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 져 있다. 이런 면에서는 인권을 중시하고, 친환경적인 사회를 지향하는 선진국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쓰러기수거를 보면, 버리는 것과 재활할 수 있는 것으로 단순하게 나누어져 있어, 일본이나 한국처럼 쓰러기수거가 세분화되어 있는 않은 면도 보인다. 미국에서 반년넘게 살면서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총에 대한 두려움이다. 미국 생활이 짧아서 그렇거니 하는 생각도 하지만 수년이상씩 살고 있는 유학생들도 총에 대한 두려움을 다들 어느 정도 갖고 있다. 내가 미국에 와서도 총기난사사건이 여러번 발생했는데 아마 이 것은 미국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라 할수 있다. 그 때문에 밤에 나다니려면 항상 무서움이 든다. 오바마대통령이 100년만에 미국의 국민의료건강보험제를 실현했다고 평가받는데 총기 규제에서도 획기적인 진전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역설적으로 총이 보급돼 있으니 일반민가에서 주택의 보안에 별로 신경을 안 쓰는 면도 있는 것 같다. 도적이 남의 건물에 잘 못 들어갔다가는 총알이 날아올 수도 있으니 그리 쉽사리 건물에 침입할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미국의 공공서비스는 어떤가. 너무 나무람 할 것까지는 보이지 않는데, 일본이나 한국에 비하면 세심함 배려는 모자라는 것 같다. 내가 미국에서 텔레비전을 온라인으로 구입했는데 그 것을 배달받는데 한창 신경이 쓰였다. 택비회사에서 처음 물건을 배달해왔을 때 내가 마침 아파트에 없어서 메모를 남겨두고 갔는데 거기에 내일 다시 배달한다고만 적었기에, 어느 시간대에 가져오는지 예측할 수가 없어서 두번 째 배달도 받지 못하고 세번 째에야 물건을 받을 수 있었다. 세번 째에도 손님이 물건을 받지 못하면 자기절로 택배회사에 물건을 찾으러 가야 한다. 같은 경우 일본같으면 손님과 연락을 취하여 손님이 배달받을 수 있는 시간을 약정하여 가져다 주니 이런 번거로움이 거의 없다. 일본에서 배편으로 보내온 서류박스를 배달받을 때도 비슷한 문제가 있어 시간이 많이 걸렸다.
12    스트브 잡스의 스탠퍼드대학교 졸업식 축사 댓글:  조회:3728  추천:30  2010-01-02
       설명-제가 전번에 「뜻깊게 지낸 추수감사절」이라는 글에서 미국  휴렛패커드(HP)회사의 대학생 창업자들이 민간주택의 차고를 빌려 사업을 시작한 얘기를 했습니다. 어느 분이 댓글에서 애플컴퓨터의 최고경영자 스트브잡스의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축사 (2005년)가 좋은 글이니 읽어보라고 강력추천하기에 인터넷에서  이 축사를 찾아서 경인년 새해 첫날에 읽어봤습니다. 한 인간의 진솔하고 감동적인 인생 이야기이기에 조글로를 사랑하는 여러분들도 새해를 맞이하면서 이 축사를 같이 읽어보기를 바랍니다. 이미 읽어보신 분들도 새해를 맞이하면서 다시 읽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요. 인터넷에서 퍼 온 것을 양해를 바라며 내용의 정확성을 기하여 영문과 한글로 같이 올렸습니다.                                                                         경인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김 광림 올림  스트브 잡스의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축사    I'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for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Truth be to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저는 오늘 세계 최고 명문대학 중 하나인 스탠퍼드 대학의 학위수여식에 함께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이 제가 대학 졸업식에 가장 가까이 와본 겁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께 제 인생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드려고 싶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대단한 것이 아니에요. 그저 세 개의 이야기입니다.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six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eighteen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   ­‑첫 번째 이야기는 점(인생의 전환점)들을 잇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리드 칼리지를 6개월간 다니다가 자퇴했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학교를 그만두기 전까지 청강생으로 18개월 정도를 더 머물렀죠. 왜 제가 자퇴를 했을까요?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ve got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They said, "Of course." My biological mother found out later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go to college. This was the start in my life.   이야기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됩니다. 저의 생모는 미혼의 어린 대학원생이었기 때문에 저를 입양 보내기로 결정했죠. 제 생모는 제가 대학 졸업자에게 입양되어야 한다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태어나면 변호사 부부에게 입양되도록 모든 게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태어나자, 바로 마지막 순간에 변호사 부부는 여자아이를 입양하기 원한다고 결정한 것만 제외하고 말이죠. 그래서 대기자 명단에 올라 있던 저의 양부모님은 한밤중에 이렇게 묻는 전화를 받게 됩니다. “갑작스럽게 남자아이가 하나 생겼는데 입양하시겠습니까?” 양부모님께서는 대답하셨습니다. “물론입니다.”나중에 제 생모는 저를 입양하기로 한 어머니가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다는 것과 아버지는 고등학교조차 나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생모는 최종 입양서류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죠. 몇 달 후에 저를 대학에 보내겠다는 약속을 양부모로부터 받아낸 뒤에야 생모는 마음이 누그러졌습니다. 이것이 제 인생의 시작이었습니다.   And seventeen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But I naï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And here I was spending all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ay.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far more interesting.   그리고 17년 후에 저는 정말로 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순진하게도 스탠퍼드 대학만큼이나 비싼 대학을 선택했죠. 노동자 계층이셨던 부모님께서 저축해온 돈 전부가 제 수업료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6개월이 지나도 저는 대학을 다니는 일에서 가치를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어떤 삶을 원하는지도 몰랐고, 또 대학이 그것을 알아내도록 어떤 도움을 줄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저 부모님께서 평생 모아온 돈 전부를 축내면서 이곳, 대학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학을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고 믿기로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무척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그것은 제가 내렸던 최고의 결정들 중 하나였습니다. 자퇴한 순간부터는 흥미 없던 필수과목들을 수강하지 않아도 되었죠. 그대신 훨씬 더 흥미로워 보이는 과목들을 청강하기 시작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five-cent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seven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Let me give you one example.   하지만 생활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기숙사 방이 없었기 때문에 친구들 방의 바닥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사기 위해 콜라 병들을 반납하며 5센트씩 보증금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또한, 맛있는 한끼 식사를 얻어 먹으려고 일주일에 한 번, 매주 일요일 밤마다 하레 크리슈나 사원까지 마을을 가로질러 7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걷곤 했습니다. 그래도 좋았습니다. 그리고 나의 호기심과 직관을 따르면서 마주치게 된 많은 일들이 나중에는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calligraphed.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s-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그 당시에 리드 칼리지는 아마도 미국에서 최고의 컬리그래피 강좌를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캠퍼스 곳곳에 붙은 포스터와 서랍의 라벨들은 손글씨체로 아름답게 적혀 있었죠. 저는 자퇴를 해서 정규과목을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컬리그래피 강의를 듣고 어떻게 하는 것인지 배우기로 했습니다. 삐침이 있는 글꼴과 삐침이 없는 글꼴에 대해, 서로 다른 문자 조합들의 간격을 다양하게 조절하는 것에 대해, 그리고 무엇이 멋진 글꼴을 멋지게 만드는지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것은 과학으로는 표현할수 없는 아름답고 역사적이고 예술적으로 정교한 것이었죠. 저는 그것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at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10 years later.   이러한 어떤 것도 제 삶에 실제적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10년 후에, 우리가 최초의 매킨토시 컴퓨터를 설계할 때, 그것은 전부 저에게 되돌아왔고, 우리는 그것들을 전부 맥 안에 담아 설계했습니다. 맥은 아름다운 글꼴을 가진 최초의 컴퓨터였습니다. 만약 제가 대학에서 그 과목을 청강하지 않았더라면, 맥은 다양한 글꼴과 자간이 비례적으로 조절되는 서체를 절대 갖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윈도우즈는 그저 맥을 베낀 것이기 때문에 어떤 퍼스널 컴퓨터(PC)도 그런 글꼴들을 갖지 못했을 것이고요. 만약 제가 대학을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그 컬리그래피 수업을 청강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퍼스널 컴퓨터(PC)들은 오늘날의 아름다운 서체들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제가 대학을 다닐 때에는 미래를 보며 점들을 연결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후에 과거를 되돌아보니 그것은 너무나도 명확했습니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because believing that the dots will connect down the road will give you the confidence to follow your heart even when it leads you off the well-worn path, and that will make all the difference.   다시 말씀 드리지만, 여러분들은 미래를 내다보면서 점들을 연결할 수 없습니다. 그저 과거를 되돌아보며 점들을 연결할 수 있을 뿐이죠. 그러므로 미래에 점들이 어떻게든 연결되어 이어질 것이라는 걸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무언가에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 본능이든 운명이든 삶이든 인연이든 무엇이든 간에. 점들이 연결되어 나갈 것이라고 믿는 것은 여러분에게 자신의 마음을 따르도록 하는 자신감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사 마음을 따르는 일이 여러분을 탄탄대로에서 벗어나게 할지라도. 그리고 그로 인해 인생의 변화가 생길 것입니다.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I was lucky.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twenty. We worked hard, and in ten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We'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the Macintosh, a year earlier. And I'd just turned thirty, and then I got fired.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And so at thirty,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두 번째 이야기는 사랑과 상실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행운아였습니다. 일찍이 제 인생에서 하고 싶은 일을 발견했으니까요. 워즈와 저는 스무 살 때 부모님의 차고에서 애플 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했고, 10년 후에 애플은 달랑 두 명뿐인 차고에서 4,00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린 20억 달러 규모의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바로 전 해에 우리는 최고의 걸작품인 매킨토시를 출시했었죠. 그때 저는 막 서른이 되었고, 그리고 해고를 당했습니다. 어떻게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서 해고될 수 있을까요? 음... 애플이 성장하면서 우리는 저와 함께 회사를 경영해갈 매우 재능 있어 보이는 사람을 고용했습니다. 첫 1년 여 동안에는 모든게 순조로웠죠.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미래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갈라지게 되었죠. 우리가 갈라서자 회사의 이사진은 그의 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 나이 서른에 저는 쫓겨났습니다, 그것도 아주 공개적으로. 제 성년기 인생 전부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 사라졌고, 저는 참담했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I'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몇 달간은 정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저는 바톤이 제게 전달되는 순간 그걸 떨어뜨렸다고, 그래서 제가 이전 세대의 기업가들을 실망시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데이비드 패커드와 밥 노이스를 만나 그토록 엉망으로 만든 것에 대해 사과하려고 애썼습니다. 저는 공공연한 실패자였습니다. 심지어 실리콘 밸리를 아주 떠나버리는 것도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무언가가 천천히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여전히 제가 하던 일을 사랑하고 있었던 거죠. 애플에서의 일들은 그 마음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저는 거절당했지만 여전히 사랑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in my life.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결국 애플에서 해고된 일이 제 인생에 일어날 수 있었던 최고의 일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성공에 대한 부담감은 다시 초심자의 홀가분한 마음으로 바뀌었고, 모든 것에 대해 조금은 덜 확신하게 되었죠. 그것은 제 인생의 가장 창의적인 시기로 들어가도록 저를 자유롭게 했습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 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and I retur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And Lo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그 후 5년 동안, 저는 ‘넥스트’라는 회사와 ‘픽사’라는 회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 아내가 될 멋진 여성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픽사는 잘 나아가서 세계 최초의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인 ‘토이 스토리’를 만들어냈고, 오늘날 전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되었습니다. 놀랄 만한 반전으로 애플은 넥스트를 인수했고, 저는 애플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넥스트에서 개발한 기술은 오늘날 애플의 르네상스를 이루어낸 중심에 있습니다. 그리고 로렌과 저는 함께 멋진 가정을 이루었죠.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It was awful-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Sometimes life's going to hit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and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So keep looking. Don't settle.   저는 매우 확신합니다. 만약 제가 애플에서 해고되지 않았더라면 이런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독히도 입에 쓴 약이었지만, 환자에게는 그런 약이 반드시 필요했다는 걸 압니다. 때로는 벽돌로 뒤통수를 얻어 맞는 시련도 있기 마련입니다. 신념을 잃지 마십시오. 계속해서 제가 앞으로 나아가도록 해준 유일한 힘은 제가 하는 일을 사랑한 데 있다고 확신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사랑할 만한 일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은 연인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work)’에도 적용되는 진실입니다. 그 ‘일’은 여러분 인생의 큰 부분을 채울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만족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대단하다고 믿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단한 일을 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약 아직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계속 찾으십시오. 안주하지 마십시오. 마음으로 하는 모든 일이 그렇듯이, 여러분이 그것을 발견하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훌륭한 관계도 다 그렇듯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좋아질 겁니다. 그러므로 계속 찾으십시오. 안주하지 마십시오.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세 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제가 17세 때 이렇게 시작되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루 하루를 마치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산다면, 언젠가 당신은 분명이 옳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 말에 감동을 받고, 그때부터 지난 33년간 저는 매일 아침 거울을 들여다보며 제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내가 하려던 일을 과연 하기를 원할까?” 그 대답이 여러 날 동안 계속해서 ‘아니오’일 때마다, 저는 무언가를 바꿀 필요가 있다는 걸 깨닫곤 하죠.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Because almost everything--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제가 아는 한, 인생의 큰 결정들을 내리도록 도와주는 가장 중요한 도구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는 걸 기억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외부로부터의 기대, 자존심, 당혹감이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 이러한 모든 것들은 죽음 앞에서 오직 진정으로 중요한 것만을 남긴 채 떨어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는 걸 기억하는 것은 무엇인가 잃을 게 있다고 생각하는 함정을 피하기 위한 제가 아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잃을 게 없습니다. 마음의 소리를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It means to try and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ten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약 1년 전에 저는 암을 진단받았습니다. 오전 7시 30분에 단층촬영을 받았는데, 췌장에 붙어있는 종양이 명확하게 보였습니다. 저는 췌장이 무엇인지조차 몰랐습니다. 의사들은 거의 치유 불가능한 종류의 암이라고,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 정도만 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제 주치의는 집에 돌아가서 주변을 정리하라고 조언했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준비하라는 의사들의 신호이죠. 이 말은 앞으로 10년간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단지 몇 달 동안에 다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모든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 지어서 가족들이 가능한 편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작별인사를 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the doctor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I had the surgery, and, thankfully, I am fine now.   저는 그 진단과 함께 하루 종일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늦게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의사들은 내시경을 목 아래로 넣어 위와 장을 지나 췌장 안에 바늘을 찔러 넣었습니다. 그러고는 종양에서 몇 개의 세포들을 떼냈습니다. 저는 마취된 상태였는데, 그곳에 있던 제 아내가 나중에 말해주더군요. 현미경 아래에 있는 세포들을 검사할 때 주치의가 울기 시작했다고. 매우 희귀한 형태의 췌장암이어서 수술로 치료가 가능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수술을 받았고 고맙게도 저는 지금 괜찮습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이때가 제가 죽음을 가장 가까이 직면했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앞으로 수십 년간 살아가는 동안에 죽음을 가장 가까이 마주했던 경우이기를 소망합니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나니, 죽음이 유용하긴 했지만 순전히 지적인 개념이었을 때보다 좀더 확신을 갖고 여러분께 지금 이런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It'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s quite true.   그 누구도 죽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기를 바라는 사람들조차도 천국에 가고자 죽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인생의 종착역입니다. 그 누구도 죽음을 면하지 못했죠. 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이 만들어낸 최고의 발명품이기 때문이죠. 죽음은 삶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죽음은 새로운 세대를 위한 길을 만들기 위해 옛 세대를 처분합니다. 바로 지금, 새로운 존재는 여러분이죠. 하지만 언젠가, 지금으로부터 머지 않은 장래에 여러분도 점점 옛 것이 될 겁니다. 그리고 사라지고 말겠죠. 너무 극단적이어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그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Don't be trapped by dogma,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여러분의 시간은 유한합니다. 그러니 남의 인생을 대신 사느라고 여러분의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도그마의 덫에 빠지지 마십시오. 도그마에 빠지는 것은 다른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결론에 맞춰 사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서 나온 잡음이 여러분 내면의 소리를 압도하도록 두지 마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마음과 직관을 따르는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부차적입니다.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u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This was in the late sixtie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thirty-five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It was idealistic,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제가 어릴 적에, 라고 하는 대단한 간행물이 있었습니다. 저희 세대에게는 권위 있는 책 중의 하나였죠. 그 카탈로그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멘로 파크에 살던 스튜어트 브랜드라는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그는 시적인 감각을 가지고 그것에 생명을 불어넣어 흥미롭게 만들었습니다. PC나 데스크탑이 출시되기 이전인 1960년대 후반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전부 타자기와 가위,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이용해 만들어졌죠. 35년 전의 문고판 구글과도 같았습니다. 구글이 등장하기 전의 일이었죠. 그 카탈로그는 이상적인 사고들과 깔끔한 장치들, 기발한 아이디어들로 넘쳐흘렀습니다.   Stu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스튜어트와 그의 팀은 를 몇 회 더 발간하다가 어느 정도 출간되었다 싶었을 때 최종호를 내놓았습니다. 때는 1970년 중반이었고 제가 여러분의 나이쯤이었습니다. 최종호의 뒷면에는 이른 아침의 시골길 사진이 있었습니다. 모험심이 좀 있는 사람이라면 히치하이킹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지도 모를 그런 종류의 사진이 있었죠. 그 아래 문구가 있었습니다.“Stay hungry. Stay foolish.” 그들이 발행을 마치며 남긴 고별 메시지였습니다.“Stay hungry. Stay foolish.”(계속 갈구하십시오. 미련하더라도 계속 도전하십시오.)저는 제 자신이 항상 그렇게 살기를 바라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졸업을 하고 새로운 시작을 하려는 여러분을 위해 그것을 소망해 봅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Thank you all very much. “계속 갈구하십시오. 미련하더라도 계속 도전하십시오.”감사합니다.  
11    뜻깊게 지낸 추수감사절 댓글:  조회:7041  추천:36  2009-12-29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버클리통신 (10)                    뜻깊게 지낸 추수감사절   차고에서 시작한 거대한 사업   11월26일은 내가 미국에서 처음 맞은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이다. 추수감사절은 미국과 캐나다 특유의 명절이고, 동양에서 추석 또는 중추절(中秋節) 이 그러하듯이 여기 사람들은 추수감사절에는 온 가족이 모여서 명절을 즐겁게 쉰다고 한다. 미국에서 처음 맞는 추수감사절을 혼자서 어떻게 지낼가 은근히 근심했는데 캘리포니아지역에서 활동하는 대만계 기독교봉사단체의 도움으로 UC버클리(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대)의 중국방문학자들과 같이 추수감사절 하루를 뜻 깊게 지냈다.   추수감사절 아침에 중국에서 온 방문학자 10여명이 Union City  전철역에 모이니 보우(輔友)센터라고 불리우는 대만계 기독교봉사단체의 관계자들이 승용차 3대를 가지고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그리하여 처음 간 곳이 스탠퍼드대학 근처에 있는 휴렛패커드(HP)회사의 사업의 시초가 된 차고(車庫)였다.   1939에 휴렛과 패커드라는 두 대학생 친구가 캘리포니아주 팰러앨토에서 단돈 538딸러를 들고 민간주택의 자그마한 차고를 임대하여 음향발진기를 연구제작한 것이 휴렛패커드회사의 시작이다. 그렇게 시작한 사업이 지금에는 정보통신 분야에서 잘 알려진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했으니 미국 현대산업사의 하나의 징표라 할수 있겠다. 이 차고는 현재 미국 연방정부의 역사적기념명소로 지정되어 있고, 실리콘밸리의 발상지로 불리운다고 한다.   이 차고를 보고나서 나는 거대한 사업이 꼭 거창하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스레 느꼈다. 시작이 절반이라는 속담이 있다싶이 작은 출발이 거대한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를 우리는 역사상에서 자주 보게 된다. 그러나 그 시작이 맹목적으로 되는 것은 결코 아니고 거기엔 창의력과 열정이 따라야 하고 성공으로 이어지자면 지속적인 노력이 따라야 한다.   스탠퍼드대학과 UC버클리 캠퍼스   휴렛패커드(HP)의 차고견학을 마치고 나서 우리 일행은 스탠퍼드대학 갬퍼스로 향했다. 스탠퍼드대학은 1891년에 설립되었는데,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대학과 더불어 Big4로 불리우는 미국 최고의 명문대학이고, 캠퍼스가 크기로도 유명하다. 대학 캠퍼스가 약 8000에이커라고 하는데 알기쉽게 말하면 서울 여의도의 10배 정도이니 그 크기를 상상할만하다.   우리는 승요차로 대학 캠퍼스에 들어섰는데 입구에서부터 본관 건물까지 약 2킬로 정도 되는 공간에 건물하나 없이 나무와 꽃, 잔디가 잘 어우려져 아주 큰 공원에 들어선 감이 들었다. 캠퍼스 진입로 양측에는 남방적인 정취를 물씬 풍기는 종려수가 가지런히 늘어서  캠퍼스의 아름다움을 한결 돋구었다.   진입로를 다 통과하면 커다란 잔디밭이 보이고 그 맞은편에 그리 높지 않은 고풍스러운 본관 건물들이 나타나는데 그 중심에 교회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 교회는 기독교의 모든 종파가 집회를 가질수 있는 열려진 종교시설이라 한다.     스탠퍼드대학의 건물들은 대체로 황색 벽에 붉그스레한 색갈의 기와가 특징이고, 캠퍼스 전체가 어딘가 고풍스러움면서 질서정연하고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었다. 미국의 대학들중에서도 제일 아름다운 캠퍼스라는 소문이 헛소문이 아닌 것 같았다. 본관건물 앞 잔디밭에는 프랑스의 유명한 조각가 로댕의 ‘칼레의 시민들’조각상 이 서있었는데 인간의 고귀한 희생정신과 죽음을 앞둔 인간의 고뇌를 잘 표현한 예술작품이 스탠퍼드대학 캠퍼스의 인문경관을  빛나게 하였다.   스탠퍼드대학 캠퍼스를 보고나서 내가 현재 방문학자로 있는 UC버클리 캠퍼스와 비교를 해보게 되었다. 1868년에 설립된 UC버클리는 스탠퍼드대학과 달리 캠퍼스가 건물의 모양이나 색채가 통일을 이루지 않고 가지각색이고 한눈에 띄우는 특색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부지가 너무 크지는 않은데 건물이 많이 들어섰기에 캠퍼스가 어딘가 비좁아 보인다. 스탠퍼드대학 캠퍼스가  계획스럽게 만들어져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반면, UC버클리 캠퍼스는 좀 산만해보인다. 그러나 100년이상 되어 보이는 고목들이 두개로 갈라진 자그만한 계곡을  따라 울창하게 들어서 마치도 북미대륙의 원시림속에 캠퍼스가 들어있는 느낌도 들며 오랜 역사를 지닌 대학이라는 것을 감지시킨다.     스탠퍼드대학 캠퍼스의 로댕의 ‘칼레의 시민들’조각상이 유명하다면 UC버클리의 캠퍼스입구에 세워진 조각상도 꽤 인상적이다. 스페인의 탐험가 Pedro Fages (1734~1794) 가 1760~80년대에 캘리포니아지역을 탐험하고 개척한 사실을 형상화한 조각상인데, 지구덩어리를 둘로 쪼개여 그 내부를 보여주는 조각상이 인간의 과감한 도전정신을 잘 표현하였다.        UC버클리는 구속이 없는 자유분방함이 특징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캠퍼스의  경관속에도 그런 분위기가 녹아 있는 것 같다.                 실리콘밸리에서 말타고 꽃구경   오후에는 실리콘밸리에 소재한 정보통신회사 몇 곳을 둘러보았다. 썬마이클로시스템즈, 인텔, 브로드콤, 야후, 애플컴퓨터 등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글로벌기업의 본사였는데 추수감사절 휴일이여서 내부를  둘러보지는 못하고 회사외관만 구경하였다. 다들 세계적으로 유명한 회사의 본사인데 건물들이 5,6층 정도로 그리 높거나 크지도 않았고. 울타리가 없어 외부인들이 회사건물에 비교적 자유롭게 접근할수 있었다. 건물내부를 둘러보지 못하여 딱히 어떻다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외관만 보면 건물들이 명성에 비하여 수수하게 지어졌고. 개방성이 특징이었다.   실리콘밸리에는 수많은 첨단기술업체가 들어있다고 하는데 이런데서 기술개발을 하는 사람들은 인도인과 중국인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한다. 외국의 두뇌를 잘 활용하는 미국의 한 모습이 보여졌다.   여러 회사를 견학하면서 차로 실리콘밸리 지역을 달려보니 내가 살고 있는 버클리시보다 거리가 새롭고 환해보였으며 고급스러워 보이는 레스토랑들이 눈에 띄었다. 실리콘밸리라는 명성답게 이 지역의 생활수준도 상당히 높은 것 같았다. 우리는 실리폰밸리 지역의 중심에 위치한 공원에도 들렀는데 공원속에 교회가 있고, 교회 앞마당에는 스텐레스로 조형한 성모(聖母)상이 세워져있었다. 스텐레스의 성모상은 처음 보는데 역시 첨단기술도시 다운 조형물이었다.   자원봉사자들의 열정   추수감사절에 우리에게 스탠퍼드대학과 실리콘밸리 견학기회를 제공해준 것은 대만계 기독교봉사단체 보우(輔友)센터였다. 보우센터는 중국대륙에서 온 학자, 유학생들에게 저렴한 숙사를 제공해주고 생활상의 편리를 도모해주는 봉사단체인데 1987년에 성립되여 지금까지 많은 선행을 해왔다. 이번 추수 감사절에도 이 단체의 성원들이 서로 분담하면서 10여명이나 되는 중국 방문학자들을 하루 종일 안내해주고 자택에 청하여 점심과 저녁식사까지 대접해주었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어 보니 점심식사를 제공해준 분은 중국 광동출신인데 문화대혁명때 강을 헤염쳐 건너 홍콩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또 다른 분은 아버지가 국민당의 군인이었는데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하여 고향인 중경을 떠나 대만으로 갔다고 한다. 듣고 보면 중국 대륙에 좋은 기억만이 있는 분들이 아닌데도 거기서 온 젋은 학자들을 따뜻하게 대해주고 생활의 편의를 많이 도모해주고 있다. 같은 중국인이라는 동포의 정에 기독교의 박애정신을 몸소 실천하는 좋은 분들이었다.     이들과 얘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미국에 사는 중국인들의 자녀교육 문제가 화제에 올랐다. 미국의 화인(華人) 이민 1세들은 교육 수준이 높지 못하고 막 노동을 하면서 어렵게 미국에 정착했지만 자녀 교육에는 남다른 정성을 들였고, 그 때문에 자녀들이 좋은 교육을 받고 미국의 주류사회로의 진출이 빠르다는 것이었다. 자녀 교육에 중시를 돌리는 것은 중국인들만이 아니라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인들의 공통의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2009년11월30일) 
10    연변에서 보는 중국과 조선의 보릿고개 댓글:  조회:6979  추천:55  2009-12-25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버클리통신 (9)            연변에서 보는 중국과 조선의 보릿고개   연변에서 근심하는 조선의 농사 연변은 중국에서도 조선(북한) 정보가 제일 집중되는 지역이다. 길이가 거의 600km에 이르는 두만강을 사이두고 지리적으로 인접해있는데다, 연변의 다수의 조선족이 조선에 친척을 두고 있어 인적왕래가 빈번하다. 두만강변을 따라 여행해보면, 강의 폭이 그리 넓지 않은데다 양측에 다 같은 민족이 살고 있고, 자연경관과 건축양식이 너무 비슷하여 이 강이 과연 두나라를 가르는 국경인가 의문이 들 정도이다. 두만강 상류지역은 도랑물 정도로 졻은 곳도 있어 훌쩍 건너뛰어도 국경을 넘을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연변에 사는 조선족들에게 제일 심각하게 들리는 정보가 조선의 식량난이다. 조선의 식량난은 한해,두해의 일이 아니고 이제는 20여년도 훌쩍 넘게 지속해오고 있는 문제이다. 연변지역에 자연재해가 들면 사람들은 오히려 조선의 농사를 더 근심하곤 한다. 지리적으로 가깝기에 연변에 자연재해가 들면 당연히 강너머 조선에서도 비슷한 자연재해를 맞게 되기 때문이다. 비슷한 자연재해가 들어도 연변에서는 기근까지는 근심하지 않는데 조선은 상황이 전혀 다르다. 이 차이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자연조건도 비슷하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도 분명 다 같은 민족인데 한쪽은 20여년전에 이미 보릿고개를 넘겼고, 한쪽은 아직도 애달픈 굶주림을 면치못하여 외부의 식량원조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다. 금년은 특히 80년만의 대흉년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아 조선의 식량난이 더욱 걱정된다.      가족도급제가 바꾼 중국 농촌 20여년전까지는  연변이나 조선이나 식량조건이 그리 차가 나는 것이 아니여서 연변의 농가에서는 겨울에는 강냉이죽으로 하루 두때씩 에우고, 봄에는 양식이 모자라 배급을 받는 도시의 사람들한테 가서 강냉이나 조를 꾸어다 가을에 쌀로 되갚는 일이 일상적으로 발생했다. 그러던 것이 1982년 경부터 연변의 식량사정이 획기적으로 바뀌우기 시작했다. 그해 여름부터 나는 연변을 떠나 장춘에 가서 대학교에 다녔는데 겨울방학이 되어 고향집에 돌아오니 올해부터는 강아지에게 남은 밥을 먹이고 있고, 창고에 콩기름이 큰 통 하나에 들어있다고 어머니가 알려주었다. 어쩌면 1년사이에 이렇게도 큰 변화가 생긴다는 말인가. 정말 믿기 어려운 변화가 현실이 되었던 것이다. 그전까지는 인민공사(人民公社)의 생산대(生産隊)에서 한 가족이 한해 분배받는 콩기름이 겨우 유리병으로 두병(2kg정도)밖에 안되어 집에 손님이나 와야 기름맛이라도 볼 수 있는 형편이었다. 양식사정도 항상 여의치 않아 쌀밥을 마음 껏 먹어볼때가 별로 없었다. 1982년의 연변 농촌의 제일 큰 변화는 사회주의 집단농장제인 인민공사(人民公社)가 사실상 해체되고 가족도급제가 실시되었던 것이다. 토지소유는 국유이지만 땅을 가족별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어 개인이 영농을 할수 있게 한 것이다. 생산책임제라고 불린 이 농업정책으로 중국의 식량사정이 획기적으로 바뀌고  보릿고개란 말이 중국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가족별로 영농을 하는 생산책임제가 중국에서 처음 도입된 것은 1978년인데 그해 안휘성(安徽省)성 한 마을의 농민 18명이 인민공사의 집단영농에 의한 피페에 더 이상 참지 못하여 불법으로 시작한 것이 가족도급제에 의한 영농이었다. 이 가족 도급제가 급기야 안휘성, 사천성(四川省)의 농촌에서 보급되기 시작하고 중국 공산당에서도 농촌의 가족도급제 성과를 인정하여 전국 농촌에 보급을 권장하게 되었다.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소속되어 있는 길림성(吉林省)은 그 때까지 극좌적인 사상이 남아있어 중국의 다른 지역보다 가족도급제가 수년 정도 뒤늦게 시작됐다. 1981년에 우선 인민공사의 생산대 산하에  몇 가족씩 팀을 이룬 영농을 시험했는데 중국 농촌에서 일어난 가족도급제의 혁명적인 대세를 따라 이듬해에는 김림성 전지역에서 가족도급제가 실시되었다.    가족도급제가 실시된 첫해 봄에 연변의 농촌에서도 말썽이 꽤 많았다. 인민공사에 집중된 농촌의 재산을 나누어가지는 과정에서 수십년간 이루어놓은 사회주의 성과를 다 말아먹는다든가, 이것이 자본주의 시작이라는 불평도 들렸다. 이런 불평은  대체 인민공사의 집단농장 체제하에서 간부로 일하면서 쉽게 살았던 사람들한테서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가족도급제에 의한 개인영농이 농민들의 생산의욕을 대대적으로 불러일으켰고 그것이 생산량으로 나타났기에 가족도급제는 역사적인 대세가 되었다. 연변에서 가정도급제가 실시되던 수년간 농가 사람들은 한뙈기라도 논과 밭을 더 다루려 애쓰고 서로 경쟁적으로 농사일에 매달렸다. 마침 하늘도 도왔는지 중국의 농촌은 자연재해 없이 수년간 대풍년을 맞이하였다. 이 때부터 농촌에서는 다각경영을 하여 연간수입이 인민페로 만원을 넘기는 부유한 농가 ‘만원호’ 가 속출하기 시작하였고, ‘향진기업’이라 불리우는 농촌기업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등소평이 창도한 중국의 개혁개방은 사실상 농촌의 체제개혁에서 시작되었고, 그 것이 오늘의 중국을 번영으로 이끈 원동력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중국의 농촌에서는 80년대에 보릿고개 문제를 기본상 해결하였던 것이다.   실패로 끝난 인민공사 그러면 그 이전의 인민공사 체제하의 집단영농은 어떠하였는가? 사회주의 체제하의 중국 농촌에서 합작사란 이름의 집단농장제가 실시된 것이 1953년부터이다. 1958년부터 합작사의 집단농장 체제를 보다 강화한 인민공사가 성립되고 ‘대약진’이라는 극좌적인 사회운동이 수년간 진행되었다. 이 ‘대약진’ 기간에는 농촌의 가정에 식량이 배급되지 않고 인민공사의 식당에서 공동식사를 하는 극단적인 방식이 실시되었는데 그 당시 중국전역에서 기근으로 굶어죽은 사람이 속촐하였고 연변에서도 풀뿌리나 나무껍질로 연명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내가 철이 들었던 70년대에도 연변의 농촌은 인민공사의 체제하에 전적으로 정부의 방침과 동원에 의한 영농이었다. 봄이면 6월중순까지 모내기를 끊내라는 정부의 지침이 층층의 회의를 통하여 전달되고, 학생들과 도시의 노동자들을 총동원하여 모내기를 도왔다. 그래도 기한대로 모내기를 마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의 어느 산지가 많은 지역의 다락밭이 전국농촌의 모델로 인정되어 전국적으로 다락밭을 만들라는 지시가 내려 연변에서도 멀쩡한 땅을 파혀쳐 다락밭으로 바꾸는 우를 범했다. 인민공사 체제하의 연변농촌을 보면, 인민공사 본부에 공산당 서기, 부서기 등 생산직을 이탈한 간부가 여러명 있는데다 마을마다 생산대대가 있어 서기, 부서기 등 반전직간부가 또 여러명 있고, 생산대대 산하의 생산대마다 대장,부녀대장,회계 등 간부가 다수 있었다. 농촌의 영농은 생산대 단위로 집단으로 이루어졌고, 거의 모든 농사 계획은 상부의 지시와 동원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이러다니 정작 농업의 주체인 농민들의 영농의지와 창의성이 전혀 발휘되지 못하여 인민공사는 결국엔 실패로 인정되였고, 1978년경부터 가족도급제가 실시되었던 것이다.   베트남의 경우도 중국과 비슷한 집단농장제를 실시하였다가 실패로 인정되어 개인영농제로 바꾼 경험을 갖고 있다. 북부베트남에서는 1960년부터 농촌의  합작사를 시작하고, 베트남 통일을 이룬 후 북부베트남의 집단농장제를 남부에도 실시하였다가 그 실패가 인정되어 1988년부터 전국농촌에서 생산물책임제에 의한 개인영농을 실시하였다고 한다. 그 이듬해부터 베트남은 쌀 수출국이 되어 농촌개혁의 가시적인 성과를 과시하게 되었다.   조선에도 농업체제의 개혁이 필요 중국과 베트남의 집단농장제가 기본상 실패하고 개인영농제가 성공한 실례를 보면, 농촌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농업의 주체인 농민들이 땅의 주인이 되고, 농민들의 노동의욕과 창의력이 제대로 발휘되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해마다 주요한 농사철마다 조선에서는 학생들과 노동자, 군인들이 농사일에 동원된다는 뉴스가 종종 들린다. 정부에서는 해마다 식량생산 얼마라는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하여 인민들을 동원시킨다. 그러고도 식량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을 못보고 있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 베트남에서 이미 실패를 인정한 집단농장제를 해체하지 못하는 것이 조선 식량난의 근본원인이라 생각된다. 결코 비료가 모자라거나 생산설비가 따라 못가는 문제만이 아니다. 과감한 발상전환에 의한 농업체제의 개혁을 조선에 진심으로 바라는바이다. (2009년11월11일)
9    동아시아 대학의 국제화 댓글:  조회:6937  추천:37  2009-12-22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버클리통신 (8)      UC버클리에서 생각하는 동아시아 대학의 국제화     UC버클리의 국제화  노벨상 수상자수나 국제적인 대학평가에서 미국은 항상 압도적인 우세를 보여주고 있다. 그만큼 미국의 고등교육 수준이 높다는 의미인데,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미국에 와 있으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있다. 나는 미국 대학들의 높은 국제화 수준이 그 원인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미국의 대학에서는 약 60만명 정도의 외국 유학생이 공부하고 있고, 세계 각지에서 학자들이 모여오고 있다. 또 미국은 외국에서 모여온 두뇌를 활용하기로도 유명한 나라이다.   내가 방문학자로 와 있는 UC버클리는 미국의 명문대학교중의 하나인데, 이 대학교의 2008년도의 통계에 의하면 재학생이 35,000명이상 이고 그중에 아시아계의 학생비중이 40% 정도이며, 외국국적 유학생수 2,700여명, 외국국적 방문학자가 약 2,800여명이 된다고 한다. 미국이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나라이라 여러인종의 학생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외에 외국국적의 유학생수, 방문학자수가 수천명씩 된다는 것은 놀라울만한 수치이다.     대학의 국제화를 평가하는 기준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유학생수, 외국인 교수・방문학자수가 중요한 척도라 할수 있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UC버클리는 동아시아의 어느 대학들보다도 국제화에서 앞서 있다고 볼수 있다.  이만큼 세계 각지에서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오니 대학의 강의가 활기를  띄게 되고 다양한 사상과 가치관이 수시로 접촉하고 교류하게 된다.      동아시아에서의 대학의 국제화     동아시아의 대학들에서도 국제화는 주요화두이고 여러 방법을 통하여 추진되고 있다.   수선 각 대학들에서 유학생 유치에 공력을 많이 들이고 있다. 일본과 한국의 경우를 보면, 명문대학들은 해외 우수인재의 유치와 대학의 국제평가를 높이는 수단으로 유학생을 적극 받아들이고 있고, 보통수준의 사립대학들은 학생수를 충원하는 차원에서 해외유학생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유학생들에 대하여 각종 우혜조치를 취하거나 유학생을 많이 송출하는 나라에 대학사무소를 개설하는 경우도 보인다. 이런한 노력에 힘을 얻어 근년에 일본의 외국유학생수가 10만명,  한국의 외국유학생수가 6만명을 넘어섰다. 중국은 급속한 경제발전과 세계적인 중국어붐 덕에 2008년에 22만명을 넘는 외국유학생을 받아들이면서 세계 유수의 유학생 수입국이 되었다.   그런데 일본과 한국의 경우, 유학생의 국적별로 보면 현저한 편향이 존재한다. 일본에서는 10만명이 넘는 외국유학생의 80% 이상이 중국・대만, 한국에 집중해 있다. 한국은 6만명 넘는 외국유학생의 3분의 2 이상이 중국출신이라 한다. 중국의 경우 외국유학생의 국적이 다양한 편이나 (중국에 유학하는 학생수가 많은 나라는 한국, 일본, 미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이다), 중국어 연수만이 아니고 중국에서 대학의 정규과정을 공부하는 유학생은 아무래도 한국, 일본에 많이 집중되어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미국 대학들의 유학생 국적이 비교적 다양한데 비하면 현저한 대조가 된다. 왜서 이런 현상이 생기는가?  여기에는 미국 대학들의 교육수준이 높다는 요인외에 영어의 문제도 있는 것 같다. 이미 영어가 국제공용어가 되었으니 비영어권의 나라들에서도 영어권에 유학을 하면 언어적인 장애가 상대적으로 적다. 그리고 국제공용어인 영어를 잘 배울수 있다는 이점도 생긴다. 그런데 동아시아의 중국, 일본, 한국으로 유학을 할 경우, 해당국가의 언어를 새로 배워야 하는 힘든 과정이 필요하다. 동아시아의 대학들이 세계에서 널리 유학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주요한 원인이 바로 이런 언어적인 장벽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면에서는 영어권의 대학들이 언어적인 이점을 톡톡히 보고 있다. 영어는 해외유학생을 받아들이는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대학들의 교유수준을 높이는 필수적인 수단으로  그 중요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국제적인 대학랭킹 평가에서 홍콩이나 싱가폴 대학들의 평가가 중국, 일본, 한국보다 상대적으로 높다는 것은 이들 대학들이 영어로 강의를 하고, 영어로 논문을 발표하기에 국제적인 평가기준에 보다 접근하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교육수준, 연구능력에 있어서 중국, 한국, 일본의 대학들의 수준이 낮은것은 아니지만, 국제공용어가 된 영어라는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가지고 있는 실력을 제대로 보여줄수가 없게 되었다.      이런 언어적인 장벽을 없애려고 중국, 일본, 한국의 명문대학들에서는 영어강의를 늘리려 노력하고 있다. 100% 영어로 강의를 시도하는 대학도 있고, 학부나 전공에 따라 100% 영어강의를 도입하는 대학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대학들에서는 학생들이 해외연수를 많이 나가고 있는데, 이 경우도 영어연수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의 대학들 사이에서는 학생간의 상호교류 프로그램도 영어로 운영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동아시아의 전통사회에서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한문과 한자를 매개로 한 필담이 의사소통의 주요수단이였지만, 이제는 영어가 그런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동아시아 대학들의 영어강의 실태를 보면, 이공계열이나 경제학, 벌률 등 사회과학 분야는 그래도 실시하기가 쉬운 편이지만 인문과학 분야는 독자적인 학문체계와 전통을 이루어오고 있기에 영어강의가 쉬운 편이 아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영어강의의 내용이 부실하다는 비판도 자주 들린다. 그래도 현재의 국제사회의 현실에서는 영어가 의사소통의 필수수단이 되었기에 영어교육을 피해서는 동아시아 대학들의 국제화를 추진하기가 어렵다. 시행착오가 있더라도 대학의 영어강의를 늘리고, 국제사회에서 영어로 의사소통하고 학문적인 대화를 나누는 교육을 강화하는 것이 동아시아 대학들의 발전을 위한 필수적인 수단이라 할수 있다.     (2009년11월8일)
8    한국의 중국 인명, 지명 표기법의 혼돈 댓글:  조회:7528  추천:47  2009-12-17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버클리통신 (7)   한국의 중국 인명, 지명 표기법의 혼돈 북경올림픽에서 드러낸 혼돈의 극치나는 작년 8월의 북경올림픽을 보면서 한국과 일본의 중국 지명, 인명에 대한 표기법을 음미해보았다.그 당시 한국의 주류 미디어는 북경올림픽 주경기장을 ‘궈자티위창’, 그 애칭을 ‘냐오차오’라고 불렀는데 과연 이것이 타당한지 의문이다. 중국어로는 ‘國家體育場’, ‘鳥巢’ 이니 ‘국가체육관’  ‘새 둥지’ 라고 한국어로 알기 쉽게 풀어서 부룰수 있는데 고유명칭도 아닌 것을 하필 한국 독자에게는 의미불명한 중국어로 불러야 하는가 말이다. 일본에서 같은 명칭을 어떻게 부르는가 관찰했더니, ‘국가스타디움’  ‘새 둥지’라고  풀어서 불렀고, 영어권에서도 ‘National Stadium’, ‘The Bird’s Nest’라고 불렀다. 북경올림픽 기간 이런 식으로 외래어도 아닌 의미모호한 용어를 사용한 나라는 아마 드물 것이다. 한국에서는 1989년부터 현대 중국의 인명, 지명을 중국어 표기에 따라 부르고 있다. 이것은 1986년에 당시의 한국 문교부가 고시한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는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 중국의 인명에 대하여 1911년의 중국의 신해혁명을 기준으로 하여 그 이전에는 한국의 한자음으로, 그 이후에는 중국어 표기에 따라 부르기로 하고, 중국의 지명에 대하여서도 역사적 지명은 한국의 한자음으로, 현재의 지명에 대해서는 중국어 표기대로 부르기로 규정되어 있다. 일본의 인명, 지명에 대해서는 과거와 현재의 구별이 없이 일본어 표기대로 부르기로 되어있다. 그러나 중국 인명, 지명에 대한 이상의 규범은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특성과 한국의 한자음의 역사적 가치를 충분히 고려치 않은 면이 있고, 그 때문에 사용과정에서 혼돈이 잘 빚어지고 있다. 북경올림픽 주경기장을  ‘궈자티위창’, ‘냐오차오’라고 부르는 점이 이러한 모순을 잘 보여주고 있다.한국의 언론 매체에서는 중국의 꼭 고유명사가 아닌 단체명칭이나 시설명칭도 원음으로, 예를 들면 ‘환츄스보’ 라거나 ‘궁런체육관’이라는 식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환구시보’(環球時報)  ‘노동자 체육관’ 이라고 부르는 것이 알기 쉽다. 중국과의 체육경기를 보고할 때도 중국팀의 명칭이 고유명사가 아닌데도 원음으로만 표기하니 독자들이 무엇이 무엇인지 이해조차 하기 어렵다. 이러한 혼돈은 한국의 중국 인명, 지명의 표기과정에서 일상적으로 존재하는 문제라 볼 수 있다. 한국은 중국의 한자를 독자적인 한자음으로 수용하여 사용한 전통이 있는데, 현대의 중국 인명, 지명을 너무 지나치게 중국어 원음대로 받아들이느라면 한자음의 전통 가치가 무색해질 우려도 생긴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의 젊은층을 상대로 한 “삼국지” 만화에서는 그 속의 인명과 지명을 중국어 발음대로 표기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한 예를 더 들면, 2007년에 중국에서 달탐사로켓 ‘嫦娥1호’를 발사했을때 한국에서는 ‘창어1호’ 라고 표기했는데, ‘상아’의 전설은 한국의 고전에서도 알려진 이야기이기에  ‘상아1호’ 라고 부를수 있는 명칭이고  그것이 한국사람들에게 알기도 쉽다. 일본에 대해서 인명과 지명을 일본어 원음대로 부르는 것은 기본적으로 맞는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지나친 현상을 쉽게 발견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경단련’ 이라고 하는 일본경제단체연합회의 약칭을  ‘게이단렌’이라 하고 ‘시사통신’(時事通信)을 ‘지지통신’ 이라고 일본어 원음대로 부르는 것이 합리적인 일이라고 보이지 않는다. 일본, 조선, 중국 조선족은 한자음을 고수그럼 일본에서는 중국의 인명과 지명을 어떻게 부르고 있는가? 일본에서는 기본적으로 중국의 인명과 지명을 일본의 한자음에 따라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모순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작년 여름의 북경 올림픽 보도에서 보면 일본 TV에서는 중국 선수들의 이름을 텔레비전 화면에서 영문으로 표시하면서도 아나운서는 일일히 일본식 한자 발음으로 고쳐서 불렀다. 국제스포츠대회에서 중국선수는 자기 이름을 영문으로 표시하고 나오는데 일본에서는 그때마다 일본식 한자음으로 고쳐서 부르고 있다. 스피드가 요구되는 현대사회에서 이런 번거로움도 문제가 아닐수는 없다. 일본에서 미국이나 유럽으로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의 얘기에 의하면, 일본에 있을 때는 중국의 인명과 지명을 일본어 한자음으로 익혔는데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중국어 원음대로 표기하니 이해가 힘들다고 한다. 이와 같이 무조건 중국의 인명, 지명을 자국의 한자음으로 부르는데도 일종의 모순은 존재한다. 이러한 모순을 느끼기에 내가 2005년에 일본 항공사의 비행기를 타고 나리타공항에서 중국 광주의 백운 (白雲)공항으로 가는데 비행기 안에서 도착하게 되는 공항의 명칭에 대하여 일본의 한자어 발음인 ‘하쿠인’, 중국어 발음인 ‘빠이윈’ 이라는 두 명칭을  혼용하고 있었다. 일본의 “아시히신문” 에서는 최근년에는 현대중국의 인명에 관해서는 중국어 표기법에 따르려고 하는데 이러한 움직임은 일본에서는 아주 소수이다.  조선(북한)에서는 중국의 인명, 지명을 어떻게 부르고 있느가? 조선에서는 중국의 인명, 지명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한자음으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유는 확실치 않지만, 중국의 수도인 ‘북경’에 대해서는 ‘베이징’이라고 부르고 있다. 상대 국가의 수도라는 의미에서 원음으로 부르는지 모르겠다. 조선의 항일빨찌산들의 회억록을 읽어보면, 중국 만주의 지명에 대해서 사람에 따라서는 한자음으로, 또는 원음으로 적은 경우도 보인다. 조선에서도 중국의 인명, 지명에 대하여 자로 재듯 하나로 통일하기 힘든 것 같다.  중국 조선족은 중국에서 살고 있지만 중국의 인명, 지명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한자음을 따르고 있다. 1980년대에 중국 조선족 사회에서도 한글과 한자를 혼용하여 사용하자는 의견이 나온 적이 있지만, 혼용을 하면 중국속에 사는 상황에서 조선어의 정체성에 혼돈이 생긴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한글전용을 고수하고 있다. 중국 조선족의 언어환경에서는 주류언어인 한어(중국어)에서 수시로 새로온 용어를 받아들이어야 한다. 그 때마다 힘들지만 원음대로 표기하면서 외래어가 아니고 조선어로서 번역하여 받아들이고 있다.   그럼 입장에서 보면, 모국인 한국에서 조선족의 이름을 중국어 발음에 따라 부르고, ‘연변’을 ‘얜뺀’이라 하고, 한국 근대사에서 너무나 잘 알려진 ‘용정’마저 ‘룽징’이라 부를때에는 우리가 왜서 조선어를 지켜야하는지 하는 회의감마저 든다.    보편성이 없는 원음주의얼핏보면 한자문화권외에는 세계에서 원음주의가 보편성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각 나라마다 철저한 원음주의보다 자기들이 부르기 쉽게 부르고 있다.서양의 예를 들면, 프랑스의 수도 ‘파리(Paris)’에 대하여 영어에서는 ‘페리스’, 독일에서는 ‘파리스’, 이탈리아에서는 ‘Parighi’ 라고 하여 원음으로 통일 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작곡가 ‘모차르트(Mozark’에 대하여 영어에서는 ‘모우자아트’, 프랑스에서는 ‘모자아’라고 부르고 있다고 한다. 유럽화페인 ‘유로(Euro)’에 대하여서도 영어에서는 ‘유로’이지만, 독일에서는 ‘오이’, 프랑스에서는 ‘외로’, 이탈리아에서는 ‘에우로’ 라고 부른다 한다. 영어에서의 중국의 지명 호칭에도 비슷한 현상을 발견할수 있다. 영어에서는 아직도 중국의 ‘북경’을 ‘Peking’, ‘남경’을 ‘Nanking’이라 하고,  ‘청도맥주’라는‘청도’를 ‘Tsingtao’, ‘청화대학’이라는 ‘청화’를 ‘Tsinghua’ 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현재 중국어 발음과 일치하지 않으나 관습을 존중하여 그대로 부르고 있고, 중국에서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의 중국 인명, 지명에 대해서는 한국의 한자음으로 부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필요에 따라서는 원음으로 부르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 현명한 방안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의 중국 인명, 지명에 대한 원음주의 표기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반대의견을 제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에서 한국의 인명, 지명에 대하여 중국어 발음에 따라 부르는데 하필 한국이 중국의 인명, 지명에 대하여 상호주의를 포기하면서 중국어 원음에 따라 불러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존재한다.                                 (2009년11월2일)
7    한류에 대하여 댓글:  조회:6951  추천:35  2009-12-10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버클리통신 (6)                   한류에 대하여   미국에서 찾아볼수 있는 한류 동아시아에서 한국의 대중문화가 붐을 이루어 한류라는 새로운 용어가 생긴지도 10년이나 되었다. 일본의 대학교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가르치면서 한류의 생생한 현장을 체험해온 나이기에 미국에서도 한류가 존재하는지 관심이 있다. 미국의 미디어를 관찰해보고 서점이나 비디오가게 같은데 가보아도 아직 미국에서 한국의 대중문화가 붐을 이루고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미국내의 일본계, 중국계 서점이나 비디오 가게를 가보면, 여기서도 아시아인들 사이에 한국의 대중문화가 상당히 인기가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이런 곳에서는 한국의 드라마나 영화, 노래가 일본과 중국, 대만, 홍콩 것과 섞이어 있는데 한국 것의 비중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한류의 시작은 중국   중국의 중앙TV에서 1997년에 한국의  인기 드라마「사랑이 뭐길래」(MBC)가  방송되면서 중국 대륙에서 한류붐이 시작되었다. 「사랑이 뭐길래」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였기에 중국의 여러 지방TV에서 재방송을 하면서 중국에서 한국 드라마 전성시대를 맞이하였다. 그때부터 한국의 인기드라마는 대체 중국에서 방송되였다.나는 일본에 있으면서 2000년대에 여러차려 중국에 다녀왔는데 그 때마다, 호텔이나 친지의 집에서 한국 드라마가 방영되는 것을 목격하고서 중국에서 한국 드라마 인기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실감했다. 「한류」라는 용어도 중국에서 생긴 것이다. 1999년과 2000년 겨울 사이에 당시의 한국의 인기아이돌 그룹인 CORN, H.O.T,NRG가 연이어 베이징에서 대형공연을 하면서 중국의 대중언론매체에서 추운 겨울철에 「寒流」가 베이징을 기습하다는 표현에  빗대여 「韓流」라고 적은 것이 그 시작이다. 중국대륙에서 시작된 한류붐은 같은 중화권인 홍콩, 타이완으로 옮겨지고, 몽골, 베트남으로 퍼지면서 본격적인 한류현상이 생겨났다.   일본에서 절정을 이룬 한류  한류붐이 절정을 이룬 것은 아마 일본일 것이다.  일본에서는 1998년에 한국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가 호평을 얻었고, 2000년, 2001년에는『쉬리』, 『공동경비구JSA』가 한국영화로서는 처음으로 1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모으면서 화제를 모았다. 그래도 일본에서 한류붐을 본격적으로 일으킨 것이 드라마이고, 이미 잘 알려진봐와 같이  『겨울연가』가 그 시초가 되었다. 『겨울연가』는 2003년 여름에 일본 NHK의 위성채널에서 처음 방영하였고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사실 나는 그해 여름에 NHK가『겨울연가』를 방송하고 있는 줄 몰랐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대학교의 학생들과 과목청강생 시민들을 데리고 그해 9월에 한국으로 연수를 다녀왔는데 한 나이든 남성 시민이 연수도중 줄곧 『겨울연가』가 재미있다는 얘기를 했다. 도대체 어떤 드라마이길래 그런 얘기가 나오는가 궁금하던중 일본에 돌아와서『겨울연가로 배우는 한국어』라는 책이 서점에 보이기에 사다가 보기 시작했다. 그 책은 『겨울연가』의 한국어 대본을  일본어로 번역하고 해설한 것인데 한번 읽기 시작하니 너무나도 재미가 있어서 식사시간을 잊으면서 탐독했고, 한동안 그 책을 손에서 놓기가 아쉬울 정도였다. 마침 일본의NHK가 시청자들의 뜨거운 반응에 그해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지상파방송으로 『겨울연가』를 집중방송했다.  내가『겨울연가』를 처음 시청한 것이 그 때이고, 그 집중방송이 일본에서『겨울연가』의 인기를 폭팔적으로 높였고, 한류가 본격적으로 일본에 상륙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 무렵의 일본의 한류붐은 가히 놀라다고 할 정도였다. 도쿄의 신주쿠에 한국가게가 많이 모여있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 코리아프라자라는 한국 비디오 가게가 있다.  일본에서 『겨울연가』가 방송되기 이전에는 그 가게의 손님이 대부분 한국인들이었는데 2003년 연말경부터 불시에 일본의 한류팬 여성들이 모여들면서 붐비기 시작했고, 한 때는 이 가게의 매장에 전국각지로 발송하는『겨울연가』의 DVD가 산더미처럼  쌓여었다. 한류붐 덕분에 이 가게가 있는 지역이 근년에 급속하게 팽창하여 이제는 명실공히 코리아타운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겨울연가』는 2003년, 2004년 사이에  NHK에서 3번이나 재방송 하는 진기록을 세웠고,  드라마의 주인공 배용준과 최지우가 일본의 국민배우라도 된 듯이 인기를 얻어갔다.   이제는 일본에서 한류붐이 시들해졌다는 분석도 있는데, 일본의 비디오 가게들에 가보면, 한국드라마,영화 코너가 별도로 크게 만들어져있고, 한류붐 이전의 90년대 초중기의 한국드라마까지 발굴하여 판매하는 것을 보면 일시적 유행같은 붐은 표면상 사라졌지만, 한류의 고정팬이 많이 남아있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국어공부 열기가 지속되고 있다.   사이클처럼 도는 대중문화 붐   한류붐이 불시에 동아시아,동남아시아에서 일어나니 한국의 미디어에서 너무 과대하게 보도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은데, 실은 이 이 지역에 2차대전이후 여러차려 서로 다른 대중문화의 붐이 일어난 적이 있다. 2차대전 이후 동아시아, 동남아시아의 자유주의 국가에 헐리우드 영화, 재즈음악, 애니메로 대표되는 미국의 대중문화가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고, 70년대에 홍콩의 무술, 오락영화,, 8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일본의 영화, 드라마, 가요, 만화, 애니메가 이 지역에서 인기를 얻었다. 한류도 결국 이런 대중문화의 영향과 전파라는 차원에서 볼 수 있는 문제이다. 한국으로 여행해보면 한국인들의 옷차림이나 건축물들이 화사하고 다채로와 보인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예술적 감수성이 돋보이는 국민성을 지닌 것 같다. 이런 면에서 보면 한류는 꽤 오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                                                                           (2009년10월29일)
6    인천대교의 개통을 바라보며 (김광림) 댓글:  조회:5158  추천:36  2009-12-06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버클리통신 (5)               인천대교의 개통을 바라보며   한국의 새로운 랜드마크 인천대교가 이달 16일에 개통되어 한국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4년4개월간에 걸친 인천대교의 건설과정에 한국에 자주 드나드면서 이 대교가 만들어져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던 나로서도 감회가 깊다. 인천대교의 개통은 한국에 두가지 의미를 가져다준다. 하나는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을 찾는 사람들에게 한눈에 들어올만한 인상적인 랜드마크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길이 21.38km로 세계에서 여섯번째로 긴 다리이고, 사장교의 주탑높이가  238.5m라 하니 가히 웅장한 모습이고,  완만하게 U자형 곡선을 그으면서 서해 바다위를 가로지르는 자태 또 빼어났다 할수 있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가 이착륙할 경우 대체 하늘에서 인천대교가 보인다하고, 인천공항에서 영종대교를 거쳐 서울로 들어가는 경우에도 그 웅장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이 자연스레 시야에 들어온다. 같은 동아시아에서도 중국과 일본에 비하면, 한국에는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국가의 상징적인 건축물이 적었던 것이 사실이다. 중국은 만리장성이나 천안문하면 누구나 그 이메이지를 쉽게 떠 올리게 되고, 일본도 교토의 사찰이라거나 도쿄타워가 외국에 널리 알려져 있다. 최근년에 서울에 청계천이 복원되고, 서울 도심에 광화문광장이 생기고, 부산에 광안대교가 건설되는 등 한국의 대도시들의 모습이 많이 바뀌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 인천대교는 한국의 대표적인 관문인 인천공항과 인천항 사이에 놓이게 되어 한국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제일 처음 볼 수 있는 대형 건축물이다. 인천대교가 개통됨에 따라 송도, 영종도, 청라에 건설중인 인천경제자유구역의 건설에 활기를 불어넣게 되고, 한국이 지향하는 동아시아 물류허브의 가능성이 높아졌다.   동아시아 물류허브로서의 가능성 일본에서는 한국의 항공, 물류산업의 급속한 성장세에 충격을 받고 있다.  일본 NHK의 보도에 의하면, 최근년에 매년 약 15만명의 일본인들이 일본의 지방공항에서 인천국제공항을 거쳐 유럽이나 동남아로 다니고 있다고 한다. 일본의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국내교통편으로 멀리 도쿄나 오오사카까지 가서 거기서 해외로 나가기보다 지방공항을 이용하여 인천국제공항에 가서 해외로 가는 것이 시간과 비용을 줄이게 된다. 나도 일본 니가타에서 중국으로 여러차려 다녀왔는데 도쿄에 가서 중국항공사나 일본항공사의 비행기를 타고 중국으로 가기보다 니가타에서 대한항공사의 비행기를 타고 인천에 가서 다시 중국으로 가는 것이 편리하고 비용도 저렴하였다. 현재 인천국제공항에서 해외 161개 도시로 항공편이 통하고 있다하는데, 이것은 일본의 나리타국제공항이나 간사이국제공항에 비하여도 이변성이 단연 돋보이고 있다. 2008년 실적으로 보면 인천국제공항의 국제화물취급양은 238만톤으로 세계2위라하고, 환적화물비율도 동아시아에서 제1위라 한다. 인천국제공항은 국제공항협회의 공항서비스평가에서도 2005년부터 연속 4년간 최우수평가를 받아, 공항의 인지도가 한결 높아지고 있다. 일본 지방도시의 승객들이 대량으로 인천국제공항에 몰리는 현상에 자극을 받아, 일본에서는 국내선중심인 도쿄의 하네다공항을 24시간 이용가능한 동아시아 허브공항으로 육성하자는 제안이 최근 국토교통대신으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지리적인 위치를 보면 장기적으로 보아도 일본이나 중국의 지방도시에서 해외나들이 할 경우 인천공항 이상의 대안이 없을 듯 하다. 인천국제공항을 배경으로 송도, 영종도, 청라에 동북아시아 새로운 경제도시를 지향하는 종합프로젝트가 진행중인데 이 프로젝트의 성공여부는 아직 속단을 내리기 어렵다. 그러나 항공, 물류산업에서 보면 인천국제공항은 상당히 성공을 거두고 있고, 중국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있는 인천항의 장래도 밝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부산항의 발전도 일본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2005년의 일본 5대항구의 국제화물 취급양 전부가 부산항보다 조금 더 많은 수준이라는 통계가 나왔고, 그 후에는 일본 4대항구의 국제화물 취급양이 부산항 한 곳보다 적다는 통계도 나왔다. 현재 부산항은 세계 5위의 무역항으로서 동아시아 허부항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해가고 있다고 한다. 부산항의 우세도 인천국제공황과 비슷한 면이 있는데, 일본의 지방항구와 중국 북부지역 항구의 북미, 유럽지역에 대한 수출입 화물이 부산항을 허부항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현재는 구상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부산에서 유럽까지 통하는 한반도종단철도(TKR)가 실현되면, 한반도(조선반도)는 명실공히 항공, 해상, 육상의 동아시아 물류허브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통일신라시대에는 중국연해지역에 진출한 신라인들이 신라, 당, 일본 사이의 해상무역을 선도하였고, 그 대표자가 청해진에 거점을 두고 활약한 장보고였다. 조선왕조 시절에는 명나라와 일본사이의 비단과 은 거래가 한반도를 통하여 활발하게 진행된적도 있어 일본의 학자가 그 루트를 실버로드라고 부르고 있다. 역사적인 사례를 보아도 한반도의 동아시아 물류허브로서의 지정학적인 우세는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2009년10월26일) 
5    나의 영어공부 댓글:  조회:5446  추천:28  2009-12-02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버클리통신 (4)                    나의 영어공부     왕초보인 영어   비영어권에서는 대체 정상적인 교육을 받으면  중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까지 외국어로서 영어를 배우기 마련이고, 대학교까지 나오면 영어는 꽤 오래배우게 된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이런 상식에 맞지않는 외국어 공부를 했다. 나는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기에 중국 연변에서 중등학교,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당시의 조선족 학교들에서는 외국어교육으로 거의 일색으로 일본어로 배워주었다. 영어를 가르칠 교원이 없는데다, 일본어를 가르칠 교원은 어느 학교에서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일본어가 조선어(한국어)와 언어구조가 비슷하고, 중국의 조선족들은 한자를 잘 알기에 일본어를 배우면, 중국인이나 한국인보다 훨씬 잘 배우는 경향이 있다.   그런 관계로 나는 중등학교, 고등학교에서 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웠고, 대학교에서는 일본어를 전공하였다. 그 덕분에 1988년에 일본에 유학갔을 때 나는 언어장애 를 거의 느껴본 적이 없이 일본에서 순조롭게 적응하였고, 일본인들로부터 항상 일본어를 잘 한다는 칭찬을 받아왔다.   그대신 영어공부에는 너무 소홀했고, 지금 와서는 젊었을 때 영어를 많이 배우지 않을 것을 크게 후회하고 있다. 대학교 2학년에서 3학년사이 제2외국어로서 배웠 는데 그 후에는 대학원 입시공부외에는 영어공부를 지속적으로 안 하다니, 얼마 안 배운 것도 잊어버리기 쉬웠다. 자신의 영어실력이 엉망이라는 자각은 항상 하고 있었으나, 조금씩 하다가 그만두기가 일쑤여서 마치도 다이어트를 수시로 하다가  그만두는 격으로 시간이 지나도 영어가 전혀 늘지 않았다.   나는 2007년 봄에 일본 도쿄의 어느 국제 심포지엄에 갔다가, 일본인, 한국인, 중국인 사이에서 내가 일본어, 한국어, 중국어로는 다 대화가 통하지만, 그들이 영어로 대화를 나눌 때는 내가 끼어들기도 어렵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일본어,한국어,중국어를 다 안다고 하여도 영어를 모르면 국제사회에서 대화가 안 된다는 사실을 그 때 절실히 느꼈다.    그 후부터 나는 일본에서 New Concept English라는  교재를 가지고 영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고, 미국인 강사가 가르치는 영어회화 교실에도 다니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 미국에 왔는데도, 나의 영어실력은 왕초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Survival English도 제대로 못하는 실정이다.   대학교 강의에 나가면 거의다 알아듣지를 못하고, 강연회에 나가도 조크가 나와서 주변에서 와하고 웃을 때도 왜서 웃는지도 몰라서 자기절로 쑥스러워지곤 한다.    아무리 체면이 구겨져도 영어실력이 엉망이라는 사실은 부정못하니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배울 수 밖에 없다.    늦깍이 영어공부   나는 미국에 온 다음 이런 방식으로 영어공부를 하고 있다.   수선 아침, 저녁으로 일어나거나, 자기전에 TV를 꼭 보고 있다, 아직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광고나 생활정보, 일기예보를 많이 보고 자막이 같이 나오다나니 영어공부에 도움이 된다. 잘 알아듣지 못하여도 일단 매일 TV를 보고 있다. 공부가 점점 바빠지니 아파트에서 TV를 볼 시간도 줄어드는데, 그리하여 다른 일을 하면서도 TV를 켜놓고 조금씩이라도 보고 있다.   밖에 나가면 거리, 대학교 캠퍼스, 버스, 전철의 간판이나, 안내문, 광고등을 보고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일단 메모용지에 적어서 전자사전으로 찾아보고 있다. 그리고 밖에 나가서 걸으면서 시간이 나면, 영어회화 CD를 반복하여 듣고 있다. 간단한 영어표현이라도 귀에 못 박힐 정도를 자주 듣느라면 머리속에 들어오게 된다.   낮에는 대학교에서 일주일에 8차례 강의를 청강하고 있는데, 이 것도 영어공부가 주목적이다. 대체로 아는 내용을 영어로 듣는데 매번 강의마다 새로 배우는 영어 단어가 수두록하다. 그리고 UC버클리의 내가 방문학자로 소속되어 있는 동아시아연구소의 학술세미나에도 자주 나가는데 영어로 하는 강의나 학술세미나에서 아직도 제대로 알아듣지를 못하고 전체내용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단어는 확실히 늘어나고 있고, 영어로 듣는 시간이 늘어나면 언제가는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외국어공부는 수선 많이 듣느라면 귀가 열리고 그 다음 입도 열리는 법이다.   저녁에는 Berkeley Adult School에서 개최하는 영어교실에 가서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세시간씩 영어공부를 하고 있다. 여기서는 주로 기초적인 영어, 생활적인 영어를 공부를 한다. 나처럼 영어기초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는Adult School의 영어교육이 너무나도 고맙다. 그러나 같은 영어인데도 대학교 강의에서 배우는 영어와 너무 다른 내용이기에 영어의 다양성이 새삼스레 느껴진다.  Adult School의 영어교실에서는 영어노래도 자주 배워주는데 노래를 통하여 즐기면서 영어를 배우는 재미도 짭짤하다.   내가 일본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체험했는데 일본의 한류팬 여성들이 한국의 드라마나, 노래를 즐기는 과정에서 한국어 실력이 눈에 띄게 늘어나는 것이었다. 모든것이 즐기면서 배우는 이상의 효과는 없다. 나도 온 종일 드라마를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TV를 보면서 즐기면서 영어를 배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나 그러면 학문적인 영어와는 거리가 멀어지니 일단 힘이 들더라도 기초적인 영어, 생활적인 영어, 학문적인 영어를 동시에 배우고 있다.   40대 중반이 되어 하는 영어공부가 그리 신통치도 않고, 하루 종일 영어와 씨름하다가 저녁에 잘 때가 되면 몸이 해나른해진 것을 느낀다.  그래도 이런 방식 으로 영어공부를 하느라면 일년후에는 어느 정도의 영어실력을 갖추겠지 하는 기대감이 부프른다.                                           (2009년10월13일)
4    미국에서 즐기는 아시아적 생활 댓글:  조회:5212  추천:30  2009-11-28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버클리통신 (3)          미국에서 즐기는 아시아적 생활   동아시아 식품의 백화점 나는 미국에 올 준비를 하면서 미국에서 어떻게 입에 잘 맞지 않는 음식을 먹고 살겠는가 꽤 근심을 했다. 왜냐하면 나의 주변에서 미국 체험을 해 본 사람들은 대체로 미국 음식이 별로 맛이 없다는 얘기를 해 왔기때문이다. 그런데 실지 미국으로 와보니 내가 살고 있는 버클리 지역은 완전히 딴 판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걸어서 2분 정도의 지근거리에 Pacific East Mall이라고 하는 중국계의 대형쇼핑센터가 있는데, 여기는 말 그대로 중국인들의 천하이었다. 슈퍼에서 식당, 은행, 약방, 찻집, 서점, 노래방, 여행사 등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이 이 중국계 쇼핑센터가 모여 있었다. 그 중에서도 99 Ranch Market라고 하는 슈퍼에는 중화권( 중국,홍콩,대만), 한국, 일본의 식품이 웬간한 것은 거의다  모여있었다. 정말이지 이 슈퍼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중국이나, 일본, 한국에서 이렇게 동아시아 식품을 한 곳에 구전하게 배렬해놓은 슈퍼를 못 보았기 때문이다.       이 슈퍼에는 내가 여지껏 잘 알지도 못하는 중국 남방의 음식과 과일이 그득했고, 한국산 참외 같은 과일도 손쉽게 살수 있다. 일본에서 한국산 참외를 사자면 도쿄나 오사카의 한국계 슈퍼에 가야하는데 그 것도 극히 한정된 곳밖에 없다.    나는 이 슈퍼에서 동아시아 식품을 고루 즐기고 있다. 수선 쌀과 차는 일본 것을 구입하고 있다. 일본에 오래 있으면서 일본 맛에 익숙해 있기때문이다. 이 슈퍼에서 인기있는 쌀은 일본 품종을 칼리포니아에서 생산 한 것이고, 일본 녹차도 꽤 인기 있는 것 같다. 요리거리는 중국 것을 사거나, 아니면, 이미 만들어진 중국 요리를 사다 먹고 있다. 이 슈퍼에서는 10여종의 중국 요리를 마음대로 골라서 종이팩에 넣어서 구입할 수 있는데, 나는 미국에서 독신생활을 하면서 이런 방식으로 중국요리를 즐기고 있다. 김치나, 고추장, 국거리, 맛내기 등은 한국 것을 사다 먹고 있다.    주말에는 가끔 이 쇼핑센터안의 식당으로 가서 식사도 하는데, 중국계 식당만 해도 여러 곳이 있고, 한국, 일본, 베트남 식당도 있다.    동아시아에 있으면서도 동아시아 식품을 한 곳에서 다 즐기기 어려운데 미국에서 이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나에게는 정말 놀라움이 아닐수 없다.     일상적인 아시아적 생활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걸어서 약 15분 정도 되는 곳에 일본 식품점과 생활용품점, 식당이 모여있는 곳이 있고, 차를 타고 약 30분 정도 가면 오클랜드에 한국슈퍼, 생활용품점이 있다. 이런 곳에 가면. 일본이나 한국에 간 것같은 착각을 느낄 정도로 일본적이고, 한국적인 생활환경이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San Pablo Avenue라는 큰 거리에 나가면 도로 양옆에 중국인들이 경영하는 세탁소, 맛사지점, 한국 식품점, 일본과 한국의 카라테, 태권도 도장, 일본식 미장원 등이 여기저기 보이고 있다. 그리고 버클리대학 갬퍼스 주변에는 중국,일본, 한국, 태국, 베트남, 인도 등 아시아의 여러나라의 식당들이 즐비하다. 때로는 여기가 과연 미국이 맞는가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미국에 와서 이국적인 위화감을 그리 느끼지 않으면서 아시아적인 생활을 즐기고 있다.     여기의 중국가게에 가면 나에게는 대체로 중국어로 응대를 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미국돈 딸러의 중국식 호칭이다. 중국가게에서는 딸러를 중국식으로 왠(圓)이라 하고, 중국 구두어 발음에 따라 콰이(塊) 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센트는 모우(毛)라고 부르고 있다. 우연하게도 미국 딸러와 중국 인민페의 가치가 서로 비슷하여 딸러를 중국 인민페의 호칭으로 불러도 전혀 이상한 감이 없이 자연스럽다. 한국가게에 가도 센트는 한국식으로 전(錢)이라 부르고 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여기의 중국, 한국, 일본 슈퍼나 식품점에 가보면, 제나라 식품외에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의 식품을 어느 정도씩 꼭 배렬해놓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보면, 중국 식품점에는 거의다 중국 것, 한국 식품점에는 거의 한국 것만 있는데 식품을 하나만 보아도 미국이 다양한 인종의 나라라는 실감이 든다.                                      (2009년9월23일)     
3    미국의 첫 인상 댓글:  조회:5501  추천:30  2009-11-25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버클리통신 (2)              미국의 첫 인상   수수한 외관의 주택들 나는 미국에 온지 이제 20여일 되는데 그사이 버클리의 인근 도시 El Cerrito에서 살면서 버클리, 오클랜드, 샌프란시스코 등 북가주의 제한된 지역밖에 보지 못했다. 그래도 미국에 대한 첫 인상은 아주 깊었다.   8월31일에 샌프란시스코공항을 거쳐 El Cerrito 의 아파트에 도착한후, 주변경관을 보고 조금 놀랐다. 내가 살기로 되어 있는 아파트의 주변은 해안에 가까운 조용한 주택가였는데, 집들이 너무 수수한 외관이어서 어디 창고같아 보였다. 주택가에는 동아시아의 도시에서 보통 보이는 고층아파트가 극히 적었고, 주택도 단층짜리 주택이 아주 많았고, 주택들의 장식미가 전혀 돋보이지 않았다. 나는El Cerrito와 버클리 지역의 주택가를 여러번 둘러봤는데 해안보다 산언덕쪽으로 갈수록 고급 주택가가 널려있었다. 그런데도 대체로 여기의 주택들은 외관의 장식미를 그렇게 추구하지 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택속의 정원들도 일본의 정원처럼 아주 아름답게 가꾸어진 것 같지 않았다. 그대신 주택의 실용성을 중시하는 듯 했고, 주택가에 녹음이 많아 삷의 환경은 아주 쾌적해보였다. 버클리힐즈라고 불리우는 산억덕의 주택가를 가보고는 울창한 녹음속에 둘러싸인 쾌적한 환경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나는 일본에서 도쿄의 고급주택가를 여러 곳 가보았는데 여기처럼 녹음이 많은 주택가를 본 적이 없다. 주택의 외관은 수수하더라도, 생활의 실용성, 생활환경의  쾌적감은 빼어났다고 볼수 있다. 여기의 주택가를 보고나서 현재 동아시아 도시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고층아파트 건설붐이 과연 옳은지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한국은 아파트공화국이라고 불리울만큼 전국 각 도시가 아파트천지인데, 아파트가 사람들에게 여유로운 삶, 쾌적한 환경을 제공해주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물론 국토가 졻다는 점과 고층아파트가 상관관계가 있겠지만 그것만이 아닌 것 같다.       질서의식과 사회인프라   나는 미국에 오기전에 미국은 다양한 인종이 살고있는 나라이기에 질서의식에서 는 일본보다 많이 뒤지지 않을가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서 살아보니 그런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어디를 다녀봐도, 교통매너가 좋았고, 차량들이 보행자우선을 철저히 지키고 있었다. 쇼핑하러 가게에 가보면 손님이 많은 경우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고, 중간에 꺼어드는 현상을 아직까지 본적이 없다.   해외에서는 미국이 시민들이 총을 소유할수 있는 사회여서 무서운 느낌이 있는데, 의외로 주택들을 보면, 문에 철판을 깔았거나 창문에 쇠창살을 넣는 경우가 적었다. 일반주택들을 보면 방범조치를 너무 의식하는 것 같지 않았다. 물론 미국의 치안이 좋다고만 할수 없겠지만, 내가 지금까지 본 범위내에서는 시민시회의 커뮤니티가 건재한 것 같다.   그리고 사회의 인프라를 보아도 소위 말하는 선진국임을 실감한다. 대체 어디를 가도 물꼭지를 틀면 더운물과 찬물이 나오고, 화장실에 가면 화장지같은 비품이 꼭 준비되어 있다. 교통신호가 잘 되어있고, 도로에서 먼지가 일어나는 경우가 적다.   다양한 인종의 나라   미국에 와서 제일 인상 깊은 것이 이 나라는 다양한 인종이 살고 있는 나라라는 것이다. 어디를 가도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을 볼수 있고, 서로들 스스럼없이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에 이 것이 과연 미국의 참된 모습이라고 감탄할 때가 있다.   다양한 민족이 살고 있지만 꼭 하나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고, 각 인종이 자신들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살고 있는  El Cerrito의 아파트주변에는  중국계의 대형쇼핑센터가 있는데 거기는 말그대로 중국인들의 세상이고, 마치도 중국의 민족자치지역과도 같다. 간판에서부터 상품명, 음식메뉴 등이 모두 영어와 중국어 이중으로 표기되어 있다. 내가 살고 있는 가까운 지역에 일본가게가 집중해 있는 곳이 있고, 얼마안가는 오클랜드에 코리아타운이 있다. 이런 지역에 가보면 일본인들과 한국인들의 독자적인 커뮤니티를 쉽게 볼수 있다.   현재 동아시아의 여라나라들에서도 국제화가 많이 회자되고 있다. 그던데도 미국에 와 보니 동아시아에서 말하는 국제화에 아직도 충실히 해야 할 점이 많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낀다. 중국에서는 외적인 국제화만이 아니라 자국내의 민족간의 격차와 모순을 줄여야 하고, 한국과 일본에서는 단일민족주의를 지양해야 할 과제가 크다.                            (2009년9월22일)      
2    처음 찾은 미국 댓글:  조회:4030  추천:19  2009-11-22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버클리통신 (1)               처음 찾은 미국            동아시아 삼국이 나의 모국 나는 중국 조선민족 출신이다.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나서 자랐고, 중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한 후 연변대학교에서 2년간 일본어강사를 하다가 1988년에 일본에 유학하였다. 유학을 마치고나서 일본에서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나는 24살에 중국을 떠나 일본에서 22년을 살아왔다. 그 때문에 자기가 태어난 중국과 유학을 한 일본에서의 생활기간이 거의 비슷하다. 현재 중국 여권을 소지하고 있으며, 또 일본영주권도 취득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나는 조선민족 출신이기에 코리아에 깊은 인연과 애정을 지니고 있다. 조선에는 여지껏 한번도 방문한 적이 없지만, 한국에는 수십 번 이상 다녀왔다. 나의 의식속에서는 코리아(남북조선), 중국, 일본 삼국이 모두 자기의 모국처럼 가깝게 느껴지고 있다.    그러나 미국에는 여지껏 한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다. 40대에 이르러 처음 UC버클리에 1년간 방문학자로서 체류할 기회를 가졌다. 그로부터 나의 미국과의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영어제국이 아닌 미국  나는 전번 8월31일에 일본 나리타공항에서 노스웨스트항공편으로 샌프란시스코에 왔는데, 비행기를 타보니 승무원들이 미국, 일본, 중국 국적으로 구성되었고,  기내방송도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진행되었다. 그 때문에 영어가 잘 통하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일종의 공포에 가까운 불안감이 많이 해소되었다. 샌프란시스코공항에 도착한 후 입국심사를 기다리니, 전자안내판에  영어외에도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로 안내가 표시되고, 입국심사관은 내가 중국 여권을 소지하고 있는 것을 보고 중국어로 인사를 건네면서 친절감을 표시했다. 세관에서 소지한 돈을 신고했더니, 신고서의 영문를 잘 모르면 중국어, 일본어의 안내문도 있으니 참고를 하라고 알려주었다. 미국에서는 영어만 통하고, 영어를 잘 하지 못하면 불친절한 대우를 받을 것이라고 근심했던 것이 지나친 기우였다. 은행에서 계좌를 개설하면서 미국에서도 다양한 언어가 존중받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Bank of America에 계좌를 개설하였더니, ATM을 사용할 때 영어외에도 여러나라 언어로 조작할수 있게 되어 있었다. 혹시 이런 현상이 아시아계가 특히 많이 살고 있는 칼리포니아주의 독자적인 다언어정책일지도 모르나, 적어도 미국에서 영어만이 통할 것이라는 나의 예상이 너무나도 빗나갔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미국이 다인종으로 구성된 나라인 것을 생각하면, 다언어정책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미국에 오기까지 영어를 너무 의식하다나니 이러한 점을 고려하지 못했다.   미국에서 보는 동아시아   나는 미국에 와서 이제 일주일이 되는데 여기서 새삼스레 느끼게 된 것이 코리아, 중국, 일본이 서서히 등거리로 보여오는 것이다. 중국에 있을 때에는 중국적인 시각으로 동아시아을 바라보기 쉬웠고, 일본에서의 생활이 20년 이상을 넘게되면서 저도모르게 일본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해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혈연적인 모국 코리아에 중국, 일본과도 다른 독특한 감정과 애정을 지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동아시아 삼국에 대한 서로 다른 거리감이 서서히 사라지고 등거리감이 생겨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멀리 떨어진 태평양의 맞은편에 와 있고, 다원문화를 존중하는 나라에 와 있기에 이런 균형감각이 생겨나는 것이다.   미국은 동아시아의 코리아, 중국, 일본 어느나라와도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기에 미국에서 동아시아를 관찰해보는 것은 아주 뜻 깊은 일이다. 다른 한면, 동아시아의 시각으로 미국을 발견해보는 것도 무의미한 일은 아닐것이다.   미국에서 생겨나는 동아시아에 대한 균형감각을 소중히 여기면서 미래지향적인 동아시아공통체를 꿈꾸어 보는 것도 나의 미국에서의 1년간의 연구생활의 성과라 할수 있겠다.                                 (2009년9월7일)   
1    김광림 프로필 댓글:  조회:4543  추천:80  2009-11-22
김광림 일본 니가타산업대학교 교수. 중국연변출신. 중국에서 1986년에 동북사범대학 외국어학부 일본어전공을 졸업하고 연변대학교에서 2년간 일본어강사로 있다가 1988년에 일본에 유학. 일본 도쿄대학교 비교문학비교문화전공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고 1998년부터  일본의 여러 대학교에서 강의.  2000년4월부터 니가타산업대학교(Niigata Sangyo University) 에서 조교수, 교수로 재직. 석사학위논문: 고려신사연구 박사학위논문: 일선동조론-그 실체와 역사적 전개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외국인연구원,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객원연구원을 역임하고,  2009년 9월부터 2년간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대(UC버클리) 동아시아연구소, 하버드대학교 중국학연구센터(Fairbank Center for Chinese Studies), 런던대학교 아시아아프리카스쿨(SOAS)에서 방문학자로 체류. 주요 연구과제: 동아시아 문화사, 동아시아의  성씨・족보에 대한 연구. 이상의 연구과제외에도 세계속의 코리언의 생존전력과 문화발전에 관심이 크고, 한류, 조선족의 만주로의 이민사, 조선족의 일본, 미국 등 지역에서의 활동에 대하여 논문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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