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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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나의 論語읽기(3) 댓글:  조회:1641  추천:0  2013-02-01
설명: 공자와 제자들의 언행을 적은 ≪論語≫는  동양사회에서 제일 잘 알려진 고전중의 하나이다. ≪論語≫는 생각외로 읽기가 그리 어려운 책이 아니며, 책을 펼쳐가면서 인생의 살아가는 지혜를 많이 얻게 될뿐만이 아니라 공자의 온화한 성품과 따스한 인간애가 전해오는 훈훈한 감동도 함께 할 수 있다. ≪論語≫는 이미 수많은 해설서가 나왔지만 누구나 자신의 경륜에 맞추어 제나름대로의 해설을 가하면서 이 책을 읽어보면 새로 느끼고, 보여지는 점이 많을 것이다. 나 자신이 동양고전에 대한 공부가 모자라는 점을 느끼면서도 한번 자기나름대로 ≪論語≫를 읽어보려 한다. 여기에 연재하는 내용은 ≪論語≫의 전부가 아니고 나 자신이 관심이 있고, 여러분과 같이 읽어볼 만한 내용을 선별하였다.  ≪論語≫의 해독, 번역, 해설은 金 錫源註解≪論語≫(蕙園出版社), 吉田 賢抗訳注≪論語≫(明治書院), 金谷 治訳注≪論語≫(岩波文庫)를 참고했다. 영어번역도 올렸는데, 영어번역은A. Charles Muller의The Analects of Confucius를 인용했다.   <나의 논어 읽기>는 조선족 페이스북그룹3NEW(New Frontier, New Wisdom, New Network,정식명칭 ≪조선족글로벌네트윅&플랫폼≫에 연재했던 것을 여기에 다시 전재한다.   (7)                       子曰、温故而知新可以為師矣。              -為政篇-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옛 것을 익히고 새로운 것을 알아나가면 스승이 될수 있느니라. ”   The Master said: “Reviewing what you have learned and learning anew, you are fit to be a teacher.”             해설: 과거의 지식이나 경험을 잘 익히면서 현실에 맞추어 새로운 것을 발견해나가면 사람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과거의 지식이나 경험에만 머물러있으면 새로운 것을 보아내지 못하고, 새로운 것만 찾아다니면 허공중에 뜬 것 같이 견실성이 없어진다. 양자를 잘 조화해야 할 중요성을 짧은 말속에서 표현하고 있다. 위의 말은 공자의 학문적 자세, 진리탐구의 자세를 단적으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8) 子貢問君子。子曰、先行其言、而後従之。        -爲政篇-   자공이 군자란 어떤 사람인가 물으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말하려는 바를 먼저 행동하고, 뒤에 그 말을 하느니라.”   Zi Gong asked about the character of the noble man. Confucius said, “First he practices what he preaches and then he follows it.”   해설: 사회적으로 책임감이 있는 사람은 말보다 행동이 앞서야 한다는 지극한 도리를 짧은 말로 표현하고 있다. 옛날에도 그렇거니와 오늘날에도 이 말은 무엇보다도 시회적으로 책임있는 사람들이 명기해야 할 것이다.    (9) 子曰、学而不思則罔、思而不学則殆。         -爲政篇-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어둡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아니하면 위태로우니라.”   The Master said: “To study and not think is a waste. To think and not study is dangerous.”   해설: 넓게 배우기만 하고 잘 사색하지 않으면 제대로 배우지 못하여 사물의 이치를 파악할 수가 없고, 이에 반해서 빈곤한 지식의 범위안에서 혼자의 생각만 되풀이하고 널리 남의 말이나 사상을 배우지 않으면 소견이 좁아 위태로운 사상에 빠지기가 쉽다는 말이다. 즉 공부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배우는 것과 사색하는 것을 병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공부를 해보면 이 말보다 더 도움이 되는 말이 없는 것 같다. 배움과 사색은 언제나 같이 해야 하는 법이다.  
39    나의 論語읽기(2) 댓글:  조회:1780  추천:0  2013-02-01
 설명: 공자와 제자들의 언행을 적은 ≪論語≫는  동양사회에서 제일 잘 알려진 고전중의 하나이다. ≪論語≫는 생각외로 읽기가 그리 어려운 책이 아니며, 책을 펼쳐가면서 인생의 살아가는 지혜를 많이 얻게 될뿐만이 아니라 공자의 온화한 성품과 따스한 인간애가 전해오는 훈훈한 감동도 함께 할 수 있다. ≪論語≫는 이미 수많은 해설서가 나왔지만 누구나 자신의 경륜에 맞추어 제나름대로의 해설을 가하면서 이 책을 읽어보면 새로 느끼고, 보여지는 점이 많을 것이다. 나 자신이 동양고전에 대한 공부가 모자라는 점을 느끼면서도 한번 자기나름대로 ≪論語≫를 읽어보려 한다. 여기에 연재하는 내용은 ≪論語≫의 전부가 아니고 나 자신이 관심이 있고, 여러분과 같이 읽어볼 만한 내용을 선별하였다.  ≪論語≫의 해독, 번역, 해설은 金 錫源註解≪論語≫(蕙園出版社), 吉田 賢抗訳注≪論語≫(明治書院), 金谷 治訳注≪論語≫(岩波文庫)를 참고했다. 영어번역도 올렸는데, 영어번역은A. Charles Muller의The Analects of Confucius를 인용했다.   <나의 논어 읽기>는 조선족 페이스북그룹3NEW(New Frontier, New Wisdom, New Network,정식명칭 ≪조선족글로벌네트윅&플랫폼≫에 연재했던 것을 여기에 다시 전재한다.   (4)                       子曰、弟子入即孝、出即弟、謹而信、汎愛衆而親仁、行有餘力、即以学文。                                                          -学而篇-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젊은이들은 집에서는 효도하고, 밖에서는 공손하며, 삼가고 신의로우며, 널리 대중을 사랑하되 仁德이 있는 사람한테 가까이하여 영향을 받 것이요. 이를 행하고 남은 힘은 있거든 곧 글을 배울 것이니라. ”   The Master said: “A young man should serve his parents at home and be respectful to elders outside his home. He should be earnest and truthful, loving all, but become intimate with his innate good-heartedness. After doing this, if he has energy to spare, he can study literature and the arts.”             해설: 위의 말은 유교적 관점에서 젊은이들에게 참된 인간이 되기를 바란 것이다. 젊은이들게 수선 먼저 중요한 것이 참된 행동을 하는 것이고 그리고 나서 공부에 힘쓰라는 뜻이다.  현대사회에서는 능력이 많이 중시되고 그와반면 참된 인간이 되여야 한다는 人性교육이 홀시되는 경향이 있다. 공자의 가르침이 오늘날에도 유효한 점이 바로 이런 곳에 있다고 하겠다.  “널리 대중을 사랑하되 仁德이 있는 사람한테 가까이하여 영향을 받 것이요.”하는 말도 되새겨 볼만 하다. 좋고 훌륭한 사람을 많이 만나는 것이 젊은 시절에는 무엇보다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5) 子曰、詩三百、一言以蔽之。曰思無邪。        -爲政篇-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시경의 시 삼백편은 한마디로 말해서 나타낸 생각에 사악함이 없느니라.”   The Master said: “The 300 verses of the Book of Odes can be summed up in a single phrase: ‘Don't think in an evil way.’”   해설: 중국의 시경은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시집으로 알려져 있다. 시경은 자연을 노래하고, 연정을 서술하고, 인간세상의 고뇌를 읆은 것으로 인간의 수순한 감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 때문에 공자가 시경의 시 삼백편에는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6) 子曰、吾十有五而志于学。三十而立。四十而不惑。五十而知天命。六十而耳順。七十而従心所欲、不踰矩。         -爲政篇-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나이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에 뜻이 확고하게 섰고, 마흔에는 모든 일에 흔들림이 없게 되었으며, 쉰에는 천명을 깨달게 되었고, 예순에는 들으면 사물의 이치를 저절로 알게 되었고, 일흔에는 무엇든지 하고 싶은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게 되었느니라.”   The Master said: “At fifteen my heart was set on learning; at thirty I stood firm; at forty I had no more doubts; at fifty I knew the mandate of heaven; at sixty my ear was obedient; at seventy I could follow my heart's desire without transgressing the norm.”   해설: 위의 말은 공자가 만년에 이르러 자기의 인생과정을 회고한 것이다. 인생의 대목마다 이르어야 할 경지를 잘 설명했다고 할 수 있다. 누구나 공자가 말한 것처럼 살 수 있다면 그 인생은 아주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38    나의 論語읽기(1) 댓글:  조회:1793  추천:0  2013-02-01
설명: 공자와 제자들의 언행을 적은 ≪論語≫는  동양사회에서 제일 잘 알려진 고전중의 하나이다. ≪論語≫는 생각외로 읽기가 그리 어려운 책이 아니며, 책을 펼쳐가면서 인생의 살아가는 지혜를 많이 얻게 될뿐만이 아니라 공자의 온화한 성품과 따스한 인간애가 전해지는 훈훈한 감동도 함께 할 수 있다. ≪論語≫는 이미 수많은 해설서가 나왔지만 누구나 자신의 경륜에 맞추어 제나름대로의 해설을 가하면서 이 책을 읽어보면 새로 느끼고, 보여지는 점이 많을 것이다. 나 자신이 동양고전에 대한 공부가 모자라는 점을 느끼면서도 한번 자기나름대로 ≪論語≫를 읽어보려 한다. 여기에 연재하는 내용은 ≪論語≫의 전부가 아니고 나 자신이 관심이 있고, 여러분과 같이 읽어볼 만한 내용을 선별하였다.  ≪論語≫의 해독, 번역, 해설은 金 錫源註解≪論語≫(蕙園出版社), 吉田 賢抗訳注≪論語≫(明治書院), 金谷 治訳注≪論語≫(岩波文庫)를 참고했다. 영어번역도 올렸는데, 영어번역은A. Charles Mullerd의 The Analects of Confucius를 인용했다.   <나의 논어 읽기>는 조선족 페이스북그룹3NEW(New Frontier, New Wisdom, New Network,정식명칭 ≪조선족글로벌네트윅&플랫폼≫에 연재했던 것을 여기에 다시 전재한다.   (1)                       子曰、学而時習之、不亦説乎。有朋遠方来、不亦樂乎。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                                                       -学而篇-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하랴 ! 벗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랴 !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하여도 원망하지 않는다면 어찌 군자가 아니랴! ”   The Master said: “Isn't it a pleasure to study and practice what you have learned? Isn't it also great when friends visit from distant places? If people do not recognize me and it doesn't bother me, am I not a noble man?”         해설: 위의 말에는 공자의 학문관, 인생관이 집약되어 있다. 공자는 공부란 거듭 복습을 하고, 의미를 되새기면서 완전히 자신의 지식이 되기를 주장하고, 또 공부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고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하면 더욱 효과적이라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가진 능력을 잠시 사회에서 알아주지 않더라도 가볍게 원망하지 않는 참된 인간성을 가지도록 권장하고 있다. 자기주장에 대한 직설적인 표현이 아니고 (乎) 하는 식의 완곡한 표현도 공자의 온화한 성품을 잘 나타내고 있다. 공부에 있어서나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오늘날에도 지극히 우리의 마음에 다가오는 말이다.   (2) 曾子曰、吾日三省吾身、為人謀而不忠乎。與朋友交而不信乎。傳不習乎。                                                  -学而篇-     曾子가 말하였다. “나는 매일 세 가지로 내 몸을 반성한다. 남을 위하여 일을 꾸미되 성실하지 않았는가. 친구와 더불어 사귀되 신의가 없지나 않았는가.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을  남한테 가르치는 일은 없었는가.”   Ceng Zi said: “Each day I examine myself in three ways: in doing things for others, have I been disloyal? In my interactions with friends, have I been untrustworthy? Have not practiced what I have preached?”     해설: 儒敎는 자기반성을 중시한다. 공자의 제일제자라 불리우는 曾子는 성실함과 신의를 지키려하고, 제대로 모르는 것을 남한테 가르치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曾子처럼 철저하게 자기반성을 하면서 살기는 어려우나, 가끔씩 자기를 성찰해보고 자기관리를 잘해가는 것은 현대인에게도 필수적인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길에는 여기저기 함정도 있어 정신을 가다듬고 제 발밑을 잘 살펴 볼 필요가 있으니 증자의 말이 단지 고고한 학자들에게만 들려주는 것이 아닐 것이다.         (3) 子曰、不患人之不己知、患不知人也。                          -学而篇-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라.”   The Master said: “I am not bothered by the fact that I am unknown. I am bothered when I do not know others.”   해설: 우리는 왕왕 남들이나 사회가 나를 알아주지 못한다고 원망하는 경우가 있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내가 다른 사람이나 사회에 대하여 과연 잘 알고 있었는지 반성된다. 자기자신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사회에서 원만한 대인관계를 유지하자면 남들에 대한 이해력이 꼭 따라가야 한다. 공자의 인생은 실패와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위의 말은 그런가운데서 공자가 나름대로 터득한 인생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공자의 인생은 실패와 고생이 많았다 한다. 그런가운데서 공자나름대로 터득한 인생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공자의 인생은 실패와 고생이 많았다 한다. 그런가운데서 공자나름대로 터득한 인생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공자의 인생은 실패와 고생이 많았다 한다. 그런가운데서 공자나름대로 터득한 인생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37    내가 미국과 영국에서 만난 조선족 댓글:  조회:3991  추천:10  2012-10-18
나의 조선족 이야기2 내가 미국과 영국에서 만난 조선족   김광림    1980년대부터 중국이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한 이래, 중국속의 조선족의 제일 뚜렸한 변화가 전통적인 거주지인 동북지역을 떠나 연해지역으로, 해외로 이동하는 현상이 보편화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서 조선족의 가치관에 엄청난 변화가 생겼고, 현대의 조선족들은 보다 열린 환경에서, 다원문화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숙명처럼 되여가고 있다. 이런 환경의 대변화속에서 우리 조선족들은 가치관과 정체성의 혼돈을 많이 겪게 되고, 지금까지 잘 유지돼왔던 민족공동체에도 위기가 많이 생겼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조선족의 새로운 성공모델을 찾아서 거기서 희망을 찾아보는 경향이 비교적 짙다. 그 성공모델이란 회사경영으로 사업에 성공했다거나, 연구분야에서 중국이나 국제사회에서 인정을 받았다거나, 음악이나 체육분야에서 명성을 많이 떨쳤다거나 하는 얘기로 많이 귀결된다. 또는 과거의 조선족  유명인물들의 사적들을 발굴하여 현대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려는 경향도 뚜렸하게 나타나고 있다.    내가 오늘 이 글에서 소개하려는 몇 명의 조선족들은 아직 크게 성공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자신들의 삶을 열심히, 옯바르게 살고 있는 사람들로서 우리들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겠는가 하는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   나는 2009년9월부터 2011년8월까지 대학교의 연구활동으로 미국과 영국에서 2년간 체류하면서 현지에서 여러명의 조선족을 만나고,알게 되였다. 그 가운데서 5명의 조선족을 소개하려 한다. 글의 내용이 보다 진실성을 띠게 하기 위하여 여기서 소개하는 5명의 조선족에 대하여 실명을 들려고 한다. 틀린 점이 있으면 이들과 독자들의 아량(雅量)을 바라는 바이다.    나는 2009년 9월부터 1년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근교에 있는 버클리에 거주하면서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대학( UC Berkeley) 에서 연구활동을 했다. 그런 가운데서 주말마다 버클리의 한인교회에 다니게 되었는데 그 교회에서 조선족 출신인 김 태호, 조 정희 박사부부를 알게 되었다. 이 두분은 40대 후반으로 나와 비슷한 나이었는데, 연변출신으로 길림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북경대학교에서 석, 박사공부를 마치고 나서 90년대에 미국에 유학하여 미국에서 다시 박사공부를 마쳤던 것이다. 남편인 김 태호박사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대학교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부인인 조 정희박사는UC Berkeley의 한 연구소에서 종신직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 부부는 미국에서 두 딸애를 키우고 있었고, 가족이 미국영주권을 취득하고, 고급주택가에 집을 구입하여 살고 있었다. 학력을 보아도 가히 조선족출신들 가운데서 최고이며, 미국에서도 비교적 성공적인 정착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이 부부한테서 받은 좋은 인상은 단지 이들이 학력이 높다거나 미국에서의 정착이 순조롭다는 것만이 아니라, 이들이 확고한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그 때문에 흔들림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이였다.     나는 거의 1년 가까이  버클리의 한인교회에 다니면서 김 태호, 조 정희 박사부부와 접촉을 많이 했고, 김 태호박사와 종교에 관한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김 태호박사는 부모가 오래전부터 기독교신자였다고 하고, 본인은 북경에서 대학원에 다니면서 신앙활동을 시작했고, 부인인 조 정희박사도 남편의 영향으로 북경에서 기독교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들 부부는 미국에서 유학하는 기간에도 주말이면 꼭 교회에 다녔다고 하는데, 어떤 때는 지하철을 여러번 바꾸어타면서 교회에 나가고, 간혹 주말에 여행나갈 때는 행선지의 교회에 들러 꼭 예배를 본다고 했다. 나는 이들의 집에 초대받아 가봤는데 집안 여기저기에 기독교와 관련되는 그림이나 문구가 걸려 있어 기독교신앙이 완전히 생활화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이들 부부와 접촉을 하면서 이들이야말로 독실한 기독교신자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들은 마음깊이 하나님을 믿고, 기독교신앙을 생활의 근본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란 종교을 믿는 것도 자유이고, 안 믿는 것도 자유이며, 어떤 종교를 믿는가 하는 것도 각자의 자유이다. 그러나 올바른 종교를 믿고, 독실한 신앙생활을 한다면, 확고한 신념이 생기고, 흔들림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틀림없다. 김 태호, 조 정희 박사부부처럼 오랫동안 고향과 친지들을 떠나서 먼 이국에서 생활하면서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에 그 힘에 의하여 그들이 많은 어려움과 외로움을 이겨내고 있다고 나는 믿고 싶었다. 또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기에 강한 윤리의식을 가지고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이들이 미국사회에서 신뢰받고, 자신들도 성공적으로 미국에서 정착을 하고 있다고 믿고 싶다.    김 태호박사는 기독교신앙에 관하여 나와 대화를 많이 나누었는데, 내가 성경에서 어떤 말을 제일 좋아하는가 물으니, 그는 다음의 구절을 들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구약성서, 신명기28장)    나는 진실로 이들이 축복받은 삶을 살아가기를 바란다.    나는 2010년 8월부터 UC Berkeley를 떠나 하버드대학교에서 연구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미국 동부의 보스턴에서 거처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보스턴에는 누구고 아는 사람이 없어 어떻게 새로운 거처를 찾을까 고민하다가 내가 미국생활체험을 연재하고 있는 ≪조선족글로벌네트워크≫(약칭≪조글로≫)에서 미국생활에 관한 글을 쓰고 있던 조선족 김 만수 박사를 찾게 되었다. 김 만수박사는 그 때 하버드대학교에서 의학관련 포스터닥( 박사과정을 마친 후의 연구원과정)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메일을 보내니 대뜸 전화까지 걸어주면서 미국에서 같은 조선족을 알게 된 반가움을 표시하고  내가 보스턴에서 거처를 찾는 문제를 크게 도와주었다. 내가 보스턴에 옮겨갈 때도 역전까지 마중을 해주고, 하버드대학교에서 의학연구를 하는 조선족연구원들을 모아서 나를 위해 환영회를 열어주었던 것이다.    이런 사적인 교분에서 내가 김 만수박사에게 호감을 가지는 것은 물론이지만, 나는 김 만수박사의 근면한 노력과 과감한 도전정신을 높게 평가하고 싶었다. 김 만수박사는 연변출신으로, 연변대학교 농학원에서 수의학을 공부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기후(岐阜)대학교에서 수의학박사학위를 받고, 일본의 국립연구소에서 몇 년간 연구원생활을 하다가 미국의 하버드대학교에서 포스터닥이라는 신분으로 4년간 동물의료에 관한 연구를 했다. 일본과 미국에서 연구하는 기간에 김 만수박사는 연구성과를 많이 내고, 특허를 두개나 따내게 되었으며, 그런 성과가 인정받아 2011년 초봄에 약관 40세의 나이에 중국과학원동물연구소의 연구원, 박사지도교수로 초빙을 받았다. 김 만수박사는 처음부터 최고의 엘리트과정을 밟은 것이 아니고, 근면한 노력과 과감한 도전정신으로 한단계씩 발전한 인물이라 생각된다. 그가 일본에서 미국에 옮겨가는 과정에서 영어공부를 하느라고 집안 구석구석에 영어메모장을 붙혀놓고 있었다 하고, 하버드대학교에서 4년간 연구하는 기간에 불철주야라는 말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연구에 몰두했다고 한다. 자수성가(自手成家)라는 말이 김 만수박사의 경우에 꼭 들어맞는 것같다. 연변의 농촌마을 출신으로 부모의 후광을 크게 입은 것도 아니고,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가면서 연변대학교에서 일본유학을 하고, 다시 하버드대학교에까지 가게 되고, 중국 최고의 과학연구기관에서 당당하게 연구원, 박사지도교수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나는 미국에서 2년간 체류하면서 미국생활을 여러 미디어에 연재하게 되었는데, 그런 과정에서 미국조선족의 대표적인 인너넷사이트인  ≪조선투데이≫의 운영자인 박 영애 원장를 알게 되었다.     박 영애원장은 중국 길림성의 중의학교, 의과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지방의 여러 병원에서 근무하다가 다시 연변대학교 의학원을 졸업하고, 북경의 중의대학교에서 연수를 마치고 나서 1990년부터 미국에 이민으로 건너가서 필라델피아에서 중의원을 개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박 영애원장은 중의원을 경영하면서 미국에서 더 공부를 하여 중의학박사학위를 받게까지 되었다. 그녀의 이런 경력을 보면 상당한 학구열과 근면한 노력이 있었음을 쉽게 보아낼 수 있다. 특히 한명의 여성으로서 두 자식을 미국에서 키워서 공부시키고, 자신은 병원경영으로 성공했다는 자체가 보통일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박 영애원장을  높이 평가하고 싶은 것은 그의 사업에서의 성공보다, 그가 사업에서 성공하고 나서 나눔의 정신을 솔선하여 실천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 영애원장은 미국에서 딸애가 대학교를 다니던 과정에 방학이면 민간인들이 기부한 장학금으로 연수를  많이 다니는 것을 보고 본인도 그런 좋은 사업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겼다고 한다. 생각해보다가 자신이 미국에서 병원경영을 하는 과정에 재미한국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따져보면 결국 자신이 중국에서 조선족학교에 다니면서 조선어와 민족교육을 제대로 받은 덕분이 아닌가 생각하여 길림성 교화시 외곽에  있는 모교인 조선족소학교에 기부를 하여 우수학생과 우수교사를 지원하고, 강의용품들을 사도록 하였다. 몇 년간 모교에 기부를 해오다가 그 모교가 학생래원이 줄어들어 페교가 되자, 연변적십자회와 상의하여 도문시 농촌의 조선족소학교를 재정적으로 돕는 사업을 진행하였고, 연변1중에도 재정지원을 하였다. 그러다가 2007년부터 연변대학교에 장학금을 제공하는 사업을 시작하고, 연변대학교에서 조선족민족박물관을 짓게 되자 거기에도 자금지원을 했다.박 영애원장은 지금까지 길림성의 조선족학교와 연변대학교에 인민페로 수십만원이 넘어되는 기부를 해왔다. 미국에서 중의원을 경영한다고 하지만 수입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자금이 척척 남아도는 상황도 아닌 것 같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녀는 조선족의 민족교육에 대한 장학사업에 대단한 열성과 자긍심을 가지고 그 사업에 많은 시간과 재력을 들이고 있다.     박 영애원장은 필라델피아에서 20여년간 살아오면서 이 지역을 찾아오는 조선족들을 많이 도와주었고, 재미연변대학교학우회 후원사업도 해왔던 것으로 알고 있다. 수년전에 다른 분이 하고 있던 재미조선족의 최대인터넷사이트인  ≪조선투데이≫의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박 영애원장이 운영사업을 맡게 되었는데, 그녀는 병원경영을 하면서 자신의 자금을 들여가면서 이 인터넷사이트의 유지에도 애를 쓰고 있다.    중국에서도, 해외에서도 사업에서 성공한 조선족은 적지 않다. 그러나 박 영애원장처럼 민족의 교육사업 후원에 발 벗고 나서고, 조선족공동체의 공익사업에 열성을 붓는 사업가들이 너무 많은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이런면에서 나는 박 영애원장을 아주 높이 평가하고 싶다.    나는 작년 6월부터 3개월간 영국의 런던대학교에서 연구활동을 했는데, 그런과정에서 영국에서 또 한명의 조선족을 만나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 나와 연변대학교 외국어학원에서 동료로 있던 박 송림 선생을 영국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박 송림선생은 연변대학교 외국어학원에서 영어강사로 있다가 1990년대에 영국에 유학하여 영국중부지역에 있는 Lancaster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그 대학교에서 연구직으로 취직하고 있었다. 그는 영국에 유학한지 10여년이 넘어되고, 이미 영국에서 국적을 취득하고   Lancaster시에 정착하여 살고  있었다. 아들애가 영국중부의 대도시인 만체스터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부부간이  Lancaster에서 주택을 구입하여 비교적 안정된 이민생활을 하고 있었다.    박 송림선생의 요청으로 나는 작년 7월에 3박4일간 Lancaster에 여행가서 박 송림선생와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내가 그 한테서 제일 인상이 깊었던 것은 박 송림선생이 영국에서 정착하여 살아가면서 정직하게 살려는 의지가 강하다는 점이다. 그는 여러 번 영국에서는 사회생활에서 정직함이 우선적으로 요구되며, 요령을 부리거나 거짓이 이 사회에서는 잘 통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그런 영국의 사회환경에서 살면서 박 송림선생은 우직하다고 할만큼 정직한 삶을 추구하는 것 같았고, 또 그 때문에 그의 영국에서의 이민생활은 순조로울 것 같았다. “정직함이 지혜라는 책의 제1장” 이라는 토머스 제퍼슨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의 말이 있다 싶이,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이 결국에는 문명사회에서 살아가는 기본자세일 것이다.    이상 내가 미국과 영국에서 만난 5명의 조선족들은 박 영애원장을 제외하고는 조선족들 가운데서 거의 알려진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올바른 삶을 살고 있거나, 정직하게 살고 있거나,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면서 사는 방식, 근면하게 노력하면서 사는 방식은, 급격한 사회의 변화를 거치면서 가치관과 정체성에서 혼돈을 많이 경험하는 조선족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된다.                                               (2012년4월4일)
36    일본에서의 조선족 단체의 활동 댓글:  조회:3463  추천:13  2012-10-15
나의 조선족 이야기1 일본에서의 조선족 단체의 활동  김광림                                                                                                                              나는 1988년에 일본에 유학왔다. 25살 나이에 일본에 와서 이제 사십대 마감에 들어섰으니  20여년 넘어되는 세월을 일본에서 보내게 된 것이다. 일본생활중에서 나 나름대로 보람을 느낀 것이 90년에 여러 조선족단체의 설립에 참가하여 많은 우리민족의 훌륭한 분들과 만나고 의미있는 일들을 같이 한 것이다. 아마 일본에서 거의 처음으로 조선족의 규모가 큰 단체활동이 시작된 것은 동방학우회 모임부터 일 것이다. 1990년5월에 도쿄에서 연변대학교 교수출신자들과 북경에서 온 조선족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동방학우회》라는 유학생,학자모임이 결성되었는데 이 모임이 생기면서 도쿄지역에서 조선족들이 자주 모여 친목회를 했다. 이 모임이 생길 때 지금 연변대학교 조선언어문학학부에서 활약하시는 김 호웅선생이 통지가 가능한 도쿄지역의 조선족들에게 편지를 띄웠는데 그 편지글에 ‘자! 백의동포들이여! 우리 손잡고 뭉칩시다!!’ 하는 글귀가 참으로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 때는 유학생, 학자들마다 전화가 있은 것도 아니어서 편지로 통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면 이메일로 손쉽게 모든 통지를 할 수 있는 지금이 신선같은 시대이다.     이 모임의 보람찬 활동가운데의 하나가 1990년 여름에 오사카에서 개최된 국제고려학회에 참가한 것이고, 또 하나 같은 해 여름에30여명의 유학생,학자와 가족들이 같이 한국으로 10여일간의 모국방문을 다녀온 것이다. 그 때 고베에서 배를 타고 밤중에 대마도를 지나 아침녁에 부산항에 도착던 때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대부분의 일행이 그 때 처음 한국을 방문했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부산, 포항, 경주, 서울, 판문점을 방문했는데 그 때 같이 한모임에서 활동하던 조선족들중에서 중국의 학계에서 활약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고 인구가 그리 많지 않은 조선족에 인재들이 정말 많구나 하는 생각을 나는 자꾸 하게 됐다. 그런데 이 동방학우회는 성립되어서 1년 정도 활동이 많았지만 초기의 골간들이 일본에서의 연구를 마치고 중국으로 되돌아가면서 활동이 차츰 뜸해졌다. 이 모임이 1년만에 활동이 뜸해진 또 하나의 이유가 일본에서 활동하시던 한국의 유력한 인사가 연변대학교에 일본유학장학금을 후원해주면서 동방학우회를 부추겨 세운 면이 있어 꼭 조선족의 자체의 힘으로만 세운 것이 아니었다. 그 때 이분이 모임때마다 많은 사람들을 식사를 대접하면서 결국엔 경제적으로 장기적인 후원을 하기 여려워졌다. 그러다니 자연히 모임이 오래가지 못했다. 순수하게 자신들의 실력으로 만든 단체가 아니고 보면 결국 이런 결과가 도래하게 된다.   동방학우회 모임이 뜸해지면서 1992년 여름경에 일본에 유학, 또는 연구하던 연변대학교 교수들이《재일연변대학교학우회》를 새로 설립하였다. 그리고 나서 정기적으로 공부모임, 친목모임, 여행을 조직했는데《재일연변대학교학우회》는 그 때부터 오늘 이때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연변대학교라는 틀속에서 활동하기에 일본에 있는 조선족전체의 모임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워낙 일본에 연변대학교 출신자들이 많기에 이 모임이 끈끈하게 이어져오고 있고, 참가자가 꽤 많은 셈이며, 봄이면 야유회, 연말이면 망년회를 하고, 연변대학교에서 관계자들이 찾아올 때 같이 잘 모이고 있다. 1995년경부터 도쿄의 고락쿠료라는 중국유학생, 학자전용회관에 들어있던 조선족 여러명이 같이 모이면서 《천지클럽》을 만들었는데 이 모임이 차츰 도쿄지역의 조선족들중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998년 봄부터 《천지클럽》과 《재일연변대학교학우회》의 멤버들이 손잡고《천지클럽》을 일본의 조선족사회의 중심단체로 키워가기 시작했다. 그 때《천지클럽》이 내건 슬로건이 <교류, 협력, 공동발전> 이었는데 30대 초반에서 중반되는 조선족들이 이 모임의 골간이 되어 일본속에서 명실상부한 조선족 단체를 만들려고 많이 노력했다. 그 때도 초기에는 온라인 시대가 아니어서 많은 통지를 편지나 엽서로 했는데 그 때의 통지문들이나 회의기록문들을 지금 다시 읽어봐도 다들 얼마나 진지하게 《천지클럽》을 키우려 했느지 생생한 감동이 아직도 전해진다.    나는 초창기의《동방학우회》와 《재일연변대학교학우회》의 모임에 참가하다가 1998년에《천지클럽》의 확대, 발전기에 같이 참가하면서 이 모임이 조선족 사회에서 아주 신선하고 희망적이 요소들을 지니고 있음을 느꼈다. 일본사회에서 누구한테 의지하지 않고 자신들의 힘으로 조선족단체를 키우려는 의지가 명확했고 조선족들이 모이면 술이나 마시는 기풍을 없애려고 술모임을 거의 가지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모일때마다 참가비 500엔을 거두어 일부수익금을 중국의 조선족 청소년들의 장학금에 쓰기로 했다. 《천지클럽》은 1998년경부터 수년사이 좋은 활동들을 진짜로 많이 조직했다. 정기적인 교류회, 취직,성공경험교류회, 무도회, 야유회, 망년회 등 모임을 많이 가졌는데 그 때부터 꽤 오랜 기간 도쿄지역의 조선족사회의 중심단체로서의 역할을《천지클럽》(이후《천지협회》로 명칭이 바뀌었다)이 톡톡히 했다. 이  모임의 초창기에 같이 활동한 조선족들은 중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온 20, 30대의 젊은이들이었는데 다들 꿈이 많고 조선족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대단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나서 그 때 같이 활동하던 멤버들을 보면 사업에서 성공한 사람이 많이 나왔다.  나로서 이 모임에서 제일 인상이 깊었던 것은《천지인문이》이라는 잡지의 편집을 담당하면서 모두들 무보수로 밤늦께까지 잡지를 같이 만들고 때로는 자기들 돈을 들여가면서 잡지를 발행했던 것이다. 그 때 일본에서 처음으로 조선족의 잡지를 만들어보자는 의욕이 다들 대단했고, 순수하고 좋은 내용의 잡지를 2년정도 유지했던 것이다. 1999년에는 일본에 유학하던 연변대학 교수출신자들이 중심이 되어 《중국조선족연구회》를 설립하여 조선족에 대한 연구활동을 진행하다가  2007년에《중국조선족연구학회》로 발전하였는데 이 모임은 주로 학자, 대학원생들이 모이면서 일본에서 조선족연구단체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며 규모가 큰 학술모임도 자주 하고 있다.     나는 2000년 봄부터 니가타의 대학교에 조교수로 취직을 하면서 도쿄지역의 조선족 모임에 자주 참가하지 못했다. 마침 그 때부터 조선족단체가 다양하게 생겨나고,《쉼터》같은 온라인중심의 활동이 많아졌다. 이제는 조선족 모임들이 진짜 많아졌고 다양해지고 있으며  저마다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나는 최근에 조선족 페이스북 사용자들로 만들어져가고 있는《3NEW》네트워크에 주목하고 싶다. 아직 어떤 모임으로 발전할지 더 지켜볼 필요는 있지만, 내가 1998년경에 체험해 본 확장, 발전기의《천지클럽》같은 그런 신선한 느낌을 이 네트워크에서 받고 있다. 그리고 온라인시대의 총아답게 그때보다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조선족의 글로벌네트워크가 형성하여 가고 있어, 일본, 한국, 미국등의 조선족을 순식간에 하나로 이어갈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마침《3NEW》의 첫페이지에 백두산천지 사진이 붙어있다. 우연한 일치인지, 《천지클럽》과《3NEW》는 모두 백두산천지를 자신들의 싱징으로 하고 있었거나 있는 것 같다. 1998년부터 나는《천지인문》잡지를 편집하면서《천지클럽》이 백두산천지처럼 ‘높고, 맑고, 깊기’를 바라는 엣세이를 쓴 적이 있다.  《3NEW》에도 같은 소망을 보내보고 싶다. 즉 천지처럼 높은 기개와 자존, 젊은 사람들의 모임답게 천지처럼 맑고 깨끗함, 천지처럼 깊은 사고력과 지혜를 지닌 모임으로 거듭나기를《3NEW》바라면서 자그마하지만 나도 이 모임에 도움이 되고 싶다.   (2011년12월12일)  
35    스티븐 잡스의 명연설 댓글:  조회:3994  추천:3  2011-10-09
 스티븐 잡스의 스탠퍼드대학교 졸업 축사   I'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for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Truth be to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저는 오늘 세계 최고 명문대학 중 하나인 스탠퍼드 대학의 학위수여식에 함께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이 제가 대학 졸업식에 가장 가까이 와본 겁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께 제 인생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드려고 싶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대단한 것이 아니에요. 그저 세 개의 이야기입니다.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six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eighteen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  첫 번째 이야기는 점(인생의 전환점)들을 잇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리드 칼리지를 6개월간 다니다가 자퇴했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학교를 그만두기 전까지 청강생으로 18개월 정도를 더 머물렀죠. 왜 제가 자퇴를 했을까요?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ve got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They said, "Of course." My biological mother found out later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go to college. This was the start in my life.  이야기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됩니다. 저의 생모는 미혼의 어린 대학원생이었기 때문에 저를 입양 보내기로 결정했죠. 제 생모는 제가 대학 졸업자에게 입양되어야 한다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태어나면 변호사 부부에게 입양되도록 모든 게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태어나자, 바로 마지막 순간에 변호사 부부는 여자아이를 입양하기 원한다고 결정한 것만 제외하고 말이죠. 그래서 대기자 명단에 올라 있던 저의 양부모님은 한밤중에 이렇게 묻는 전화를 받게 됩니다. “갑작스럽게 남자아이가 하나 생겼는데 입양하시겠습니까?” 양부모님께서는 대답하셨습니다. “물론입니다.” 나중에 제 생모는 저를 입양하기로 한 어머니가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다는 것과 아버지는 고등학교조차 나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생모는 최종 입양서류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죠. 몇 달 후에 저를 대학에 보내겠다는 약속을 양부모로부터 받아낸 뒤에야 생모는 마음이 누그러졌습니다. 이것이 제 인생의 시작이었습니다.  And seventeen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But I naï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And here I was spending all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ay.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far more interesting.  그리고 17년 후에 저는 정말로 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순진하게도 스탠퍼드 대학만큼이나 비싼 대학을 선택했죠. 노동자 계층이셨던 부모님께서 저축해온 돈 전부가 제 수업료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6개월이 지나도 저는 대학을 다니는 일에서 가치를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어떤 삶을 원하는지도 몰랐고, 또 대학이 그것을 알아내도록 어떤 도움을 줄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저 부모님께서 평생 모아온 돈 전부를 축내면서 이곳, 대학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학을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고 믿기로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무척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그것은 제가 내렸던 최고의 결정들 중 하나였습니다. 자퇴한 순간부터는 흥미 없던 필수과목들을 수강하지 않아도 되었죠. 그대신 훨씬 더 흥미로워 보이는 과목들을 청강하기 시작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five-cent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seven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Let me give you one example.  하지만 생활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기숙사 방이 없었기 때문에 친구들 방의 바닥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사기 위해 콜라 병들을 반납하며 5센트씩 보증금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또한, 맛있는 한끼 식사를 얻어 먹으려고 일주일에 한 번, 매주 일요일 밤마다 하레 크리슈나 사원까지 마을을 가로질러 7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걷곤 했습니다. 그래도 좋았습니다. 그리고 나의 호기심과 직관을 따르면서 마주치게 된 많은 일들이 나중에는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calligraphed.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s-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그 당시에 리드 칼리지는 아마도 미국에서 최고의 컬리그래피 강좌를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캠퍼스 곳곳에 붙은 포스터와 서랍의 라벨들은 손글씨체로 아름답게 적혀 있었죠. 저는 자퇴를 해서 정규과목을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컬리그래피 강의를 듣고 어떻게 하는 것인지 배우기로 했습니다. 삐침이 있는 글꼴과 삐침이 없는 글꼴에 대해, 서로 다른 문자 조합들의 간격을 다양하게 조절하는 것에 대해, 그리고 무엇이 멋진 글꼴을 멋지게 만드는지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것은 과학으로는 표현할수 없는 아름답고 역사적이고 예술적으로 정교한 것이었죠. 저는 그것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at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10 years later.  이러한 어떤 것도 제 삶에 실제적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10년 후에, 우리가 최초의 매킨토시 컴퓨터를 설계할 때, 그것은 전부 저에게 되돌아왔고, 우리는 그것들을 전부 맥 안에 담아 설계했습니다. 맥은 아름다운 글꼴을 가진 최초의 컴퓨터였습니다. 만약 제가 대학에서 그 과목을 청강하지 않았더라면, 맥은 다양한 글꼴과 자간이 비례적으로 조절되는 서체를 절대 갖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윈도우즈는 그저 맥을 베낀 것이기 때문에 어떤 퍼스널 컴퓨터(PC)도 그런 글꼴들을 갖지 못했을 것이고요. 만약 제가 대학을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그 컬리그래피 수업을 청강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퍼스널 컴퓨터(PC)들은 오늘날의 아름다운 서체들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제가 대학을 다닐 때에는 미래를 보며 점들을 연결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후에 과거를 되돌아보니 그것은 너무나도 명확했습니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because believing that the dots will connect down the road will give you the confidence to follow your heart even when it leads you off the well-worn path, and that will make all the difference.  다시 말씀 드리지만, 여러분들은 미래를 내다보면서 점들을 연결할 수 없습니다. 그저 과거를 되돌아보며 점들을 연결할 수 있을 뿐이죠. 그러므로 미래에 점들이 어떻게든 연결되어 이어질 것이라는 걸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무언가에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 본능이든 운명이든 삶이든 인연이든 무엇이든 간에. 점들이 연결되어 나갈 것이라고 믿는 것은 여러분에게 자신의 마음을 따르도록 하는 자신감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사 마음을 따르는 일이 여러분을 탄탄대로에서 벗어나게 할지라도. 그리고 그로 인해 인생의 변화가 생길 것입니다.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I was lucky.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twenty. We worked hard, and in ten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We'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the Macintosh, a year earlier. And I'd just turned thirty, and then I got fired.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And so at thirty,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두 번째 이야기는 사랑과 상실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행운아였습니다. 일찍이 제 인생에서 하고 싶은 일을 발견했으니까요. 워즈와 저는 스무 살 때 부모님의 차고에서 애플 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했고, 10년 후에 애플은 달랑 두 명뿐인 차고에서 4,00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린 20억 달러 규모의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바로 전 해에 우리는 최고의 걸작품인 매킨토시를 출시했었죠. 그때 저는 막 서른이 되었고, 그리고 해고를 당했습니다. 어떻게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서 해고될 수 있을까요? 음... 애플이 성장하면서 우리는 저와 함께 회사를 경영해갈 매우 재능 있어 보이는 사람을 고용했습니다. 첫 1년 여 동안에는 모든게 순조로웠죠.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미래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갈라지게 되었죠. 우리가 갈라서자 회사의 이사진은 그의 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 나이 서른에 저는 쫓겨났습니다, 그것도 아주 공개적으로. 제 성년기 인생 전부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 사라졌고, 저는 참담했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I'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몇 달간은 정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저는 바톤이 제게 전달되는 순간 그걸 떨어뜨렸다고, 그래서 제가 이전 세대의 기업가들을 실망시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데이비드 패커드와 밥 노이스를 만나 그토록 엉망으로 만든 것에 대해 사과하려고 애썼습니다. 저는 공공연한 실패자였습니다. 심지어 실리콘 밸리를 아주 떠나버리는 것도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무언가가 천천히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여전히 제가 하던 일을 사랑하고 있었던 거죠. 애플에서의 일들은 그 마음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저는 거절당했지만 여전히 사랑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in my life.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결국 애플에서 해고된 일이 제 인생에 일어날 수 있었던 최고의 일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성공에 대한 부담감은 다시 초심자의 홀가분한 마음으로 바뀌었고, 모든 것에 대해 조금은 덜 확신하게 되었죠. 그것은 제 인생의 가장 창의적인 시기로 들어가도록 저를 자유롭게 했습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 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and I retur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And Lo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그 후 5년 동안, 저는 ‘넥스트’라는 회사와 ‘픽사’라는 회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 아내가 될 멋진 여성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픽사는 잘 나아가서 세계 최초의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인 ‘토이 스토리’를 만들어냈고, 오늘날 전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되었습니다. 놀랄 만한 반전으로 애플은 넥스트를 인수했고, 저는 애플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넥스트에서 개발한 기술은 오늘날 애플의 르네상스를 이루어낸 중심에 있습니다. 그리고 로렌과 저는 함께 멋진 가정을 이루었죠.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It was awful-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Sometimes life's going to hit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and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So keep looking. Don't settle.  저는 매우 확신합니다. 만약 제가 애플에서 해고되지 않았더라면 이런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독히도 입에 쓴 약이었지만, 환자에게는 그런 약이 반드시 필요했다는 걸 압니다. 때로는 벽돌로 뒤통수를 얻어 맞는 시련도 있기 마련입니다. 신념을 잃지 마십시오. 계속해서 제가 앞으로 나아가도록 해준 유일한 힘은 제가 하는 일을 사랑한 데 있다고 확신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사랑할 만한 일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은 연인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work)’에도 적용되는 진실입니다. 그 ‘일’은 여러분 인생의 큰 부분을 채울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만족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대단하다고 믿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단한 일을 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약 아직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계속 찾으십시오. 안주하지 마십시오. 마음으로 하는 모든 일이 그렇듯이, 여러분이 그것을 발견하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훌륭한 관계도 다 그렇듯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좋아질 겁니다. 그러므로 계속 찾으십시오. 안주하지 마십시오.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세 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제가 17세 때 이렇게 시작되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루 하루를 마치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산다면, 언젠가 당신은 분명이 옳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 말에 감동을 받고, 그때부터 지난 33년간 저는 매일 아침 거울을 들여다보며 제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내가 하려던 일을 과연 하기를 원할까?” 그 대답이 여러 날 동안 계속해서 ‘아니오’일 때마다, 저는 무언가를 바꿀 필요가 있다는 걸 깨닫곤 하죠.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Because almost everything--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제가 아는 한, 인생의 큰 결정들을 내리도록 도와주는 가장 중요한 도구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는 걸 기억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외부로부터의 기대, 자존심, 당혹감이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 이러한 모든 것들은 죽음 앞에서 오직 진정으로 중요한 것만을 남긴 채 떨어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는 걸 기억하는 것은 무엇인가 잃을 게 있다고 생각하는 함정을 피하기 위한 제가 아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잃을 게 없습니다. 마음의 소리를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It means to try and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ten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약 1년 전에 저는 암을 진단받았습니다. 오전 7시 30분에 단층촬영을 받았는데, 췌장에 붙어있는 종양이 명확하게 보였습니다. 저는 췌장이 무엇인지조차 몰랐습니다. 의사들은 거의 치유 불가능한 종류의 암이라고,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 정도만 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제 주치의는 집에 돌아가서 주변을 정리하라고 조언했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준비하라는 의사들의 신호이죠. 이 말은 앞으로 10년간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단지 몇 달 동안에 다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모든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 지어서 가족들이 가능한 편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작별인사를 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the doctor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I had the surgery, and, thankfully, I am fine now.  저는 그 진단과 함께 하루 종일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늦게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의사들은 내시경을 목 아래로 넣어 위와 장을 지나 췌장 안에 바늘을 찔러 넣었습니다. 그러고는 종양에서 몇 개의 세포들을 떼냈습니다. 저는 마취된 상태였는데, 그곳에 있던 제 아내가 나중에 말해주더군요. 현미경 아래에 있는 세포들을 검사할 때 주치의가 울기 시작했다고. 매우 희귀한 형태의 췌장암이어서 수술로 치료가 가능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수술을 받았고 고맙게도 저는 지금 괜찮습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이때가 제가 죽음을 가장 가까이 직면했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앞으로 수십 년간 살아가는 동안에 죽음을 가장 가까이 마주했던 경우이기를 소망합니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나니, 죽음이 유용하긴 했지만 순전히 지적인 개념이었을 때보다 좀더 확신을 갖고 여러분께 지금 이런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It'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s quite true.  그 누구도 죽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기를 바라는 사람들조차도 천국에 가고자 죽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인생의 종착역입니다. 그 누구도 죽음을 면하지 못했죠. 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이 만들어낸 최고의 발명품이기 때문이죠. 죽음은 삶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죽음은 새로운 세대를 위한 길을 만들기 위해 옛 세대를 처분합니다. 바로 지금, 새로운 존재는 여러분이죠. 하지만 언젠가, 지금으로부터 머지 않은 장래에 여러분도 점점 옛 것이 될 겁니다. 그리고 사라지고 말겠죠. 너무 극단적이어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그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Don't be trapped by dogma,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여러분의 시간은 유한합니다. 그러니 남의 인생을 대신 사느라고 여러분의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도그마의 덫에 빠지지 마십시오. 도그마에 빠지는 것은 다른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결론에 맞춰 사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서 나온 잡음이 여러분 내면의 소리를 압도하도록 두지 마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마음과 직관을 따르는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부차적입니다.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u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This was in the late sixtie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thirty-five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It was idealistic,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제가 어릴 적에, 라고 하는 대단한 간행물이 있었습니다. 저희 세대에게는 권위 있는 책 중의 하나였죠. 그 카탈로그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멘로 파크에 살던 스튜어트 브랜드라는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그는 시적인 감각을 가지고 그것에 생명을 불어넣어 흥미롭게 만들었습니다. PC나 데스크탑이 출시되기 이전인 1960년대 후반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전부 타자기와 가위,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이용해 만들어졌죠. 35년 전의 문고판 구글과도 같았습니다. 구글이 등장하기 전의 일이었죠. 그 카탈로그는 이상적인 사고들과 깔끔한 장치들, 기발한 아이디어들로 넘쳐흘렀습니다.  Stu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스튜어트와 그의 팀은 를 몇 회 더 발간하다가 어느 정도 출간되었다 싶었을 때 최종호를 내놓았습니다. 때는 1970년 중반이었고 제가 여러분의 나이쯤이었습니다. 최종호의 뒷면에는 이른 아침의 시골길 사진이 있었습니다. 모험심이 좀 있는 사람이라면 히치하이킹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지도 모를 그런 종류의 사진이 있었죠. 그 아래 문구가 있었습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그들이 발행을 마치며 남긴 고별 메시지였습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계속 갈구하십시오. 미련하더라도 계속 도전하십시오.) 저는 제 자신이 항상 그렇게 살기를 바라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졸업을 하고 새로운 시작을 하려는 여러분을 위해 그것을 소망해 봅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Thank you all very much. “계속 갈구하십시오. 미련하더라도 계속 도전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사진으로 보는 스티븐 잡스  
34    일본의 대지진을 안타깝게 바로보는 심정 댓글:  조회:5463  추천:30  2011-04-16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광림의보스턴통신(16)                                                                                                              일본의 대지진을 안타깝게 바로보는 심정   남의 일이 아닌 일본의 대지진 지난 3월11일에 일본 동북지역의 태평양 앞바다에서 매그니튜드9의 거대 지진이 발생한지 한달이 넘어섰다. 이미 사망자가 13,000여명을 넘었고 실종자까지 하면 28,000여명이 이번 지진에 희생을 당한 셈이다. 사람의 피해만이 아니라 가축, 건물, 산업활동의 피해까지 계산하면 일본 동부지역 전체가 피해지역이라고 할 정도로 너무나도 엄청난 재난이 일본에 닥친 것이다. 처음에 지진이 발생하여서부터 지금까지 일본 동부지역에 강진이라고 볼 수 있는 진도 5급이상의 지진만 410여차 발생했다고 한다. 거기다 쓰나미, 후쿠시마원자력발전소의 방사능사고가 겹치면서 트리플악재가 일본을 괴롭히고 있다. 원자력발전소의 방사능사고는 아직 도 그 끊이 어디가 될지 예측이 어려울 정도로 오래 지속될 것 같고, 눈에 보이지 않은 방사능에 대처해야 하기에 사회를 공황에 몰아넣고 사람들의 신경을 극도로 지치게 만든다. 나는 일본에서 지진을 여러번 경험한 적이 있고, 가족과 친척들이 일본에 남아있기에 이번 지진이 결코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아 매일 지진에 관한 뉴스를 체크하면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번 지진을 관찰하고 있다. 해외에서는 이번 지진에 대하여 일본정부의 신속하지 못한 대응방식을 비판하거나 원자력발전소 사고에 대한 도쿄전력의 무능력함을 비꼬는 기사도 보이는데 실지 이처럼 거대한 지진앞에서 어 느 나라인들 완벽한 대응을 하기 어렵고, 방사능사고에 대해서는 어느나라의 기술을 가지고도 단기간에 해결할 방도가 보이지 않는다. 진도 5급이상의 지진이면 땅이 크게 흔들리면서 사람들이 당황해지고 피해도 많이 생긴다. 이런 지진이 한달 사이에 410여차 발생하였다고 하니 그 누군들 이런 상황에서 침착하고 신속한 행동을 취할 수 있다고 장담 못한다. 실지 이번 지진의 피해지역인 이바라키현에 살고 있는 지인과 통화를 해보니 지진이 발생하여 한달사이 수시로 여진이 일어나는데 마치도 배안에서 살면서 수시로 파도가 밀려오는 느낌이고 어지럼증이 자주 생긴다고 한다.   고베지역 지진의 체험    나는 일본에서 21년을 살면서 너무나도 많은 지진을 경험했다. 인간의 감각으로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지진은 3급이상인데 이런 규모의 지진이 일본 각지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3급에서 4급정도의 지진은 땅이 흔들리고 무섭기는 하나 큰 피해없이 지나는 겨우가 대다수이다. 5급부터는 땅이 상당히 흔들리고 집안의 가구가 넘어지거나 집밖의 당장이 무너지고 사람이 상하는 피해가 생긴다. 6급부터는 땅이 세차게 흔들리고 튼튼하지 못한 건물이 붕괴되면서 인명피해가 잘생긴다. 내가 일본에서 체험한 비교적 큰 지진은 1995년의 한신아와지대지진이다. 1995년1월에 오사카남부지역에서 생긴 이 지진은 매그니튜드 7.3이었는데 사망자수가 6,400여명이 이르러 제2차세계대전후의 일본에서의 최악의 자연재해라고 불리웠고, 이 피해를 복구하는데 수년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이 지진이 발생한 당시 나는 도쿄에서 살고 있었기에 집적적인 피해는 없었는데 지진의 피해란 처음판단보다 피해가 눈덩이처럼 늘어난다는 사실을 그 때 깨달았다. 도쿄에서 아침에 학교로 강의를 나갔는데 TV에서 고베지역에 지진이 발생했다는 뉴스속보가 나오고 건물들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는 장면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그렇게 큰 피해가 생긴 것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지진의 피해가 엄청나다는 사실이 속속 들어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거나 다쳤다는 보다가 연이어 나왔다. 그 때 일본에서 지진으로 처음 고속도로가 통채로 무너져내려 기술대국의 자존심이 구겨졌다는 보도가 많았다. 그 지진으로 일본에 유학하던 중국 유학생들이 일부 사망해서 중국에서 크게 뉴스가 되고, 지진에 대한 한국인들의 지원이 일본에서 감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내가 직접 피해가가 되고보니 그리고 일본에서 나는 두차례 지진의 피해자가 된 적이 있다.   2004년10월23일 초저녁에 내가 살고 있던 니가타현의 중부지역에서 매그니튜드6.8의 지진이 일어났다. 나의 집이 마침 나가오카(長岡)라는 중부지역의 중심도시에 있었기에 그 지진의 피해를 많이 입었다. 그 지진이 일어난 후 한달사이에 6급정도의 여진이 4차례, 5급정도의 여진이 10여차례 발생하면서 사망자수가 68명이 이르고 1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피난하고 16,000 여채의 건물이 무너지거나 손상을 입었다. 사망자수는 처음 큰 지진이 일어났을 때 16명이었는데  그 후 빈번히 여진이 발생하는 과정에서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여 고령자를 중심으로 54명이 지진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그 지진이 발생한 날, 나는 니가타를 떠나 도쿄의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는데 강의가 거의 끊날 무렵에 불시에 교실이 크게 흔들렸다. 아, 또 어디서 지진이 났겠구나 했는데 생각밖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큰 지진이 생겼던 것이다. 서둘러 강의를 마치고 도쿄역에 도착하여 니가타로 돌아가는 신칸센(고속철도)을 타려고 했는데 이미 니가타행 신칸센은 운행이 중지되고 많은 사람들이 니가타로 돌아가지 못하여 도쿄역에서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가족이 지진의 중심지에 있었기에 마음이 대단히 다급해졌다. 급히 공중전화를 찾아서 아들애 핸드폰에 전화를 하니 겨우 전화가 통했는데 처음 지진이 일어난 후 밖으로 피해나와 집 근처의 도서관주차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저녁을 먹었느냐 하고 물으니 이런 와중에 어떻게 저녁을 챙길수 있는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한번 통화를 마치고 나서 다시 통화를 하려하니 지진 후에 전화통화 건수가 급증하면서 패닉이 생겨서 전화회사에서 통화를 제한하였기에 가족과의 통화를 더 이상 할 수 없었다.그러다니 마음이 점점 급해졌다. 가장으로서 가족을 지진지역에 남겨두고 도쿄에서 그대로 머무를수 없었다. 그리하여 신칸센을 타고 니가타의 도중까지 갔다가 종착역에서 기차를 타고 갈 방법이 없는가 물었더니 기차도 운행이 중지되었고, 버스와 택시를 물었더니 모두 다 운행이 중지됐다는 것이다. 즉 지진같은 대재난이 생기면 수선 거의 모든 교통이 파괴되어 외부에서 그 피난지역에 구조를 가려고 하여도, 피난지역에서 빠져나오려 하여도 생각대로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유일한 방법이 헬리꼽터를 이용하여 가는 것인데 보통사람들이 아무리 급하다고 하여도 이런 교통수단을 이용할 방도가 없는 것이다. 그 때 니가타에 가려고 기차역에, 버스회사,택시회사에 다 전화를 걸어봤는데 자기들 회사의 운행상황은 알려주어도 기차가 안 되면 버스가 통하는지, 버스가 안되면 택시라도 통하는지 이런 교통정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즉 교통기관 사이에서 횡적인 정보공유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후에 안일이지만 이런 종합적인 교통정보는 일본정부의 도로교통정보센터에 문의하여야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해외에서는 일본인들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하고 빈틈없이 처리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지 일본에서 재난을 겪어보면 일본에서도 시스템의 허점이 많고 실수를 많이 하고 있었다. 특히 횡적으로 잘 연계하고 상황에 따라서 응급적으로 대처하는데는 일본사회의 대응방식에 문제가 확실히 있는 것 같다. 니가타에서 지진이 발생한 날 니가타로 돌아가지 못하고 도쿄에서 하루밤을 새우면서 속을 많이 태웠다. 전화통화가 제한되면서 가족과 통화가 거의 되지 않았다. 그 다음날 다시 도쿄역에 갔더니 니가타행 신칸센은 여전히 운행이 중지되었지만 니가타현의 이웃현인 나가노행 신칸센은 운행이 재개되였기에 나가노현에 가서 다시 기차를 바꾸어타면 지진지역 가까이까지 갈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나가노행 신칸센을 급히 탔다. 그날 오후에 나가노에 도착하여 거기서 다시 니가타행 기차를 바꾸어타고 내가 근무하는 대학교가 있는 가시와자키(柏崎)에  도착했다. 가시와자키부터 지진의 중심지인 나가오카까지는 교통이 다 차단되어 있었는데 외조카한테 부탁하여 여러 루트를 탐색하다가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산길을 발견하여 밤중에 외조카가 차를 운전하여 가족이 있는 나가오카에 들어갔다. 그 때도 나가오카시의 외곽은 전기가 끊어져 캄캄했고 마치도 유령도시와 같았다. 도로에도 경찰차외에는 나다니는 차량이 아주 적었다. 도시 중심부에 도착하니 전기가 통하고 있었고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 들어가보니 가재도구가 마구 뒤엉켜져 엉망이었다. 집에 가족이 보이지 않기에 피난소로 정해진 인근의 학교체육관에 찾아가보니 거기에 수백명의 동네주민들이 피난해 있었다. 가족이 무사하게 있는 것을 확인하고나니 그 보다 더 기쁜 것이 없었다. 그러부터 약 1주일간은 정말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살고 있는 아파트에 전기와 물은 통하고 있었으나 가스가 정지되여 식사를 제대로 해먹을 수 없고 피난소에 가면 주먹밥과 생수외에는 더 제공되는 것이 없었다. 나가오카시의 도심에서는 그래도 전기와 수도가 지진후에 재빨리 복구되었지만 도시 주변과 외곽에서는 전기와 수도가 복구되기까지 며칠정도 걸리고 가스가 완전히 복구되기까지는 10여일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가스관은 새거나 폭팔할 위험성이 있기에 전기와 수도보다 복구에 시간이 걸린다. 아무리 재난구조의 노하우가 축적된 일본이라 하지만 지상교통이 다 파괴된 상황에서 외부의 구조물자는 헬리꼽터에만 의존하게 되고 헬리꼽터로는 대량의 물자를 나를수 없었다. 1주일간 집에서 식사를 제대로 해먹지 못하고 끊인 물로 목욕도 할 수 없었다. 가스곤로가 있어서 가끔 요리를 끓여 먹을 수 있는 것이 사치스러울 정도였다. 여진은 수시로 발생하여 마음의 안정도 이룰수 없었다. 정말 지진은 겪어보지 못하면 그 어려움을 다 알 수 없다. 여진이 너무 자주 생기니 심리적인 안정이 동요되여 언제든지 땅이 흔들리고 건물이 무너질 것 같은 지진신드롬을 겪게 된다. 그 때 외부에서 본격적인 지원이 가능해진것이 차단된 도로가 급히 복구되면서부터인데 그것은 지진이 발생하여 며칠간 지난뒤였다. 그러니 지진이 발생하여 처음 며칠간은 피해지역 주민들이 거의 고립되고 어려움을 많이 겪는다. 그 지진 후에 나는 어떤 상황에서 피해가 많은가 관찰해봤는데, 수선 집안에서는 유리제품이 제일 쉽게 깨지면서 사람들이 다치기 쉽다. 6급정도의 큰지진에서는 집안의 옷장같은 가구, TV가 대체 넘어지는데 이것을 방지하려면 벽에다 튼튼하게 고정시켜놓아야 한다. 집밖에서는 콩크리트블록으로 쌓아올린 벽들이 무너져 내리기 쉽고, 묘지, 사찰, 신사같은 곳의 비석이나 돌기둥이 대체 깨져버린다. 그러니 지진이 발생하는 경우, 담벽이나 돌기둥 가까이에 다가가지 않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일본에서는 건물들의 방진(防震)대책이 잘  되어있기에 웬간한 건물들은 잘 무너지지 않는데 오래된 건물, 부실하게 지어진 건물, 외관미를 너무 추구하면서 창문을 많이 내고 기둥과 벽면이 적은 건물들이 무너지기 쉬었다. 그 때 지진에는 달리던 신칸센이 탈선을 하면서 자칫 대규모 인명피해가 생길 번 했다. 일본에서 지진으로 하여 신칸센이 탈선하기는 그 때가 처음이다. 그 후 신칸센 선 로를 복구하고 신칸센이 정상적으로 운행하기까지 한달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니가타에서 두번째 겪은 지진  2004년에 니가타에서 큰 지진으로 고생했는데 3년 후인 2007년에 니가타의 중부지방에 또 한번 큰 지진이 발생했다. 2007년 7월16일 오전에 내가 살고 있던 니가타현의 나가오카(長岡)에서 집밖에 나가서 운동을 하는데 불시에 땅이 세차게 흔들리면서 전선대가 기울어졌다. 가까운 곳의 유리병공장에 쌓아놓은 유리병들이 와르르하면서 깨지는 소리가 들려 처음에는 그 공장에서 사고가 생겼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땅이 계속 흔들리기에 아, 지진이구나하고 판단됐다. 생각밖으로 이번에는 내가 거주하는 나가오카가 지진의 중심지가 아니고 내가 근무하는 대학교가 있는 기사와자키(柏崎)가 진원지가 됐다. 그날은 공휴일이어서 대학교가 휴식을 했는데 이튿날에 대학교에 나가려는데 나가오카에서 가시와자키에 이르는 철로, 고속도로가 다 파괴되어 통과할 수가 없었다. 나가오카에 거주하는 대학동료의 자가용차로 평소 차들이 잘 안다니는 산길을 통하여 겨우 대학교에 나갔다. 그러나 그런 산길을 통하기도 위험했다. 지진때문에 산도 뒤흔들렸기에 산사태가 발생하기 쉬웠다.  대학교는 정전이 되어 건물마다 컴컴해지고 수도도 끊기여 물을 쓸 수가 없었다. 7월중순 한 여름철에 대학교 직원들이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는 건물안에서 줄땀을 흘리면서 대학교내 안전체크를 하고 있었다. 마침 지진이 발생한 날이 일본의 공휴일이었기에 대학교내의 인명피해는 없었고 건물이 여러 곳이 파괴되었다. 대학교의 나의 연구실에 들어서니 책장과 문서궤가 여지없이 무너져내려 책과 자료들이 연구실에 어지럽게 널려져 있었다. 지진이 발생한 당시 내가 연구실에 있었더라면 아마 크게 상했을 것이다. 그 지진으로하여 니가타현의 중부지역에서 15명이 사망하고 건물 수천채가 붕괴되거나 손상을 입었다. 지진의 중심지에서는 전기, 수도, 가스가 일주일 넘게 끊겨버려 무더운 날에 대단히 불편한 생활을 했다. 내가 있는 대학교 가까이에 도쿄전력회사의 원자력발전소가 있었는데 거기서 화재가 발생하고 소량의 방사능이 유출되어 일부 원자로가 지금도 정지된 상태이다. 고속도로, 철도가 한번 크게 파괴를 당하니 그것이 제대로 복구되기까지 적지않은 시간이 걸렸다. 니가타현 중부지역에서 2007년의 지진피해를 복구하는데 수년의 시간이 걸렸다. 2004년 지진, 2007년 지진에서 집을 잃은 사람들은 공원이나 주차장에 설치한 임시주택에서 몇년씩 힘든 생활을 해 왔다.    두차려 니가타에서 지진피해를 직접겪어보니 이런 긴급상황에서 일본인들이 비교적 차분하게 행동하고 물건사재기 같은 소동이 쉽게 안 일어나는 사실도 확인했다. 일본에서는 자연재해가 많이 일어나기에 집집마다 비상식품이나 도구들을 준비해두고 있어 제일 어려운 초기대응을 하기 쉬운 편이다. 2007년 지진때는 내가 근무하는 대학교 교수들의 연구실의 책장이나 문서궤가 많이 무너져내렸는데 누가 하나 원성이 없이, 또 누구의 도움도 청하기 않고 다 자기 책과 문서들을  재정리했다. 그 때 나의 동료의 오래된 집이 크게 파괴되었기에 내가 가서 가장집물을 정리하는 일을 도와주겠다고 하니 제집의 어지러운 모습을 보여주기 싫다고 완곡하게 사양하는 것이었다. 이번과 같은 대규모 자연재해에도 일본에서 외국구조대를 대량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이런 국민성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즉 일본사람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나의 흐트러지고 어지러운 모습을 외부에 잘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 또 2007년의 니가타중부지역의 지진 후 일본정부에서 건물의 파괴정도에 따라 보상금을 지불하였는데 떠돈 소문에 의하면 보상금을 타려고 건물피해를 과장하여 신고하는 경우도 쾌 있다는 것이었다. 즉 겉모습은 모든 것이 질서정연한 것 같아도 일본에서도 이런 사회의 뒤모습은 얼마든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지진 때에 가시와자키에 있는 도쿄전력회사의 원자력발전소에서 화재가 발생하고 방사능이 다소 새나오는 피해가 발생했는데 그 때문에 도쿄전력회사와 지역주민들 사이의 알륵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근본적인 문제는 기시와자키의 원자력발전소가 지진이 잘 발생할 수 있는 활성층 지반위에 세워져 지진이 생기면 언제든지 위험하다는 문제이다. 일본의 원자력발전소는 대체 지진에 취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두번이나 겪어본 나의 지진피해를 돌이켜봐도 이번에 일본동북지역에서 발생한 지진은 그 때의 두번 지진보다고 피해규모가 엄청나게 크고 범위도 광범위하다. 규모가 큰 여진이 수시로 발생하는데다 인류사상 아마 제일 어려운 원자력발전소의 방사능사고가 겹치게 되었다. 지금 일본은 수십년래의 제일 어려운 자연재해와 악투를 하고 있고, 모두들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단기간에 수만명의 생명을 잃고 천문학적인 경제손실을 입었고 이제도 그 끊이 어딜지 모르는 방사능의 공포와 신경전을 벌여야 한다. 이런 와중에 일본사회에서 큰 사회적 소동이 발생하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사상초유의 자연재해와 싸우는 모습이 외국에서도 경탄을 자아내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대규모의 자연재해이고 원자력발전소의 방사능사고는 지구전체의 문제가 되어가고 있는데도 일본이 국제사회에 손을 내밀어 같이 문제를 풀어가는 자세가 약해보이고, 방사능사고에 대해서는 아직도 국제사회의 원자력기술자들이 총동원되어 해결책을 찾고 있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때마침 이웃나라인 한국과는 공연하게 독도문제를 불거지게 하여 일본을 도우려던 한국의 성의에 찬물을 부어놓은 결과를 만들고 있다. 이런 문제점은 있다하여도 이번만큰은 국제사회에 보다 더 적극적으로 일본을 도와나서고, 일본도 마음을 열고 국제사회의 물심양면의 원조를 받아들이고 특히 원자력발전소의 방사능 사고문제는 국제사회가 기술력을 총동원하여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2011년4월15일)        
33    나의 체험을 통해 본 일본과 미국의 조선족 댓글:  조회:6184  추천:39  2011-04-15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보스턴통신(15)                                                  나의 체험을 통해 본 일본과 미국의 조선족                                                                     전체 인구가200만명 미만인 중국의 조선족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전통적인 삶의 터전인 동북지역을 떠나 중국의 대도시나 연해지역, 그리고 해외로 이주하는 현상이 뚜렸하게 나타났다. 중국속에서 대도시나 연해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족이 수십만명이 되고 모국인 한국에 30여만명이 나가있다는 것이 통계자료로 확인된다. 그외에는 주로 일본과 미국에 많이 나가있는데 각각 수만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한국외의 다른 해외에서 조선족의 인구를 정확하게 집계하기 어려운 것은 이들이 소지하고 있는 중국여권에 조선족이라는 민족명까지 표시하지 않기에 해외에 나가있는 조선족의 정확인 수자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추산에 의하면 일본과 미국에는 틀림없이 각각 수만명 정도의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일본과 미국에서 체험한데 의하면, 일본의 상당히 많은  대학교나 일본어학원에서 조선족 학생들을 볼 수있다는 것이다. 그때문에 국적상으로는 중국인이지만 조선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민족집단의 존재를 교육사업에 종사하는 일본사람들은 대체 알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일본처럼 조선족의 존재가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뉴욕과 LA의 코리아타운에 가보면 많은 조선족들이 미국에 정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한국에 나가 있는 조선족들은 한국 미디어에 자주 오르내리고 조사와 연구가 진척되기에 비교적 실체가 파악되고 있다. 일본의 조선족에 대해서는 《조선족연구학회》가 설립되고 《천지협회》《쉼터》같은 조선족의 단체와 인터넷사이트가 있기에 대체적인 상황은 알 수 있다. 미국에서의 조선족은 이주의 역사가 짧고 아직 잘 알려지지도 않았기에 실태를 파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다행히 미국의 여러지역에서 조선족의 단체가 성립되고 있고, 《조선투데이》라는 조선족이 운영하는 사이트가 있기에 이 사이트에 조선족의 활동소식이나 조선족의 인물정보,업소정보같은 것이 나와있어 어느 정도 미국의 조선족의 실상을 들여다 볼 수 있다. 나는 1988년부터 2009년까지 일본에 21년간 거주하면서 수많은 조선족들과 만나고 교류하고 도쿄지역에서 활동하는 조선족단체의 활동에 많이 참가했다. 그러기에 일본에서의 조선족의 활동에 대해서는 생생한 체험이 많다. 2009년 8월부터 미국에 와서 서부의 버클리와 동부의 보스턴에 각각 1년씩 거주하면서 미국에 와 있는 조선족들과도 접촉을 가지게 되고《조선투데이》라는 인터넷사이트를 통하여 조선족의 활동을 관찰하고 뉴욕의 프러싱과 맨하탄의 코리아타운에 찾아가서 조선족들이 운영하는 가게들에도 들러봤다.   이 글에서 나는 일본과 미국에서 조선족이 살아가는 모습을 자신의 실제체험과 관찰,해외에서의 조선족의 실상을 정확하게 알려야 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적어보려고 한다. 일본속의  조선족나는 1988년 10월에 일본에 유학가서 처음 1년반을 도쿄외곽에 있는 쓰쿠바대학에서 연구생으로 지냈다. 그 때 쓰쿠바대학에는 4, 5명 정도의 조선족이 유학하고 있었는데 신기스럽게도 서로 누가 조선족이라는 것을 재빨리 확인하게 되고 같이 어울리면서 사이좋게 지냈다. 해외에 나오게 되면 조선족 사이의 연대감이 강화되어 서로 모르던 사이에도 인츰 친해지는 경향이 있다. 나는 1990년4월부터 도쿄대학교의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도쿄에 이주했는데 거기서 정말이지 많은 조선족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그해 5월에 도쿄에서 연변대학교 교수출신자들이 중심이 되어《동방학우회》라는 유학생,학자모임이 결성되고 정기적으로 친목적인 활동을 하고 국제학술회의에 참가하고 견학회도 조직하였다. 이 모임은 후에 《재일연변대학교학우회》라고 명칭을 바꾸어 지금까지 활동을 해오고 있다. 나로 말하면 이 모임에서 제일 인상이 깊었던 것이 1990년 여름에 30여명이 같이 한국으로 10여일간의 모국방문을 다녀온 것이다. 고베에서 배를 타고 밤중에 대마도를 지나 아침녁에 부산항에 도착던 때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대부분의 일행이 그 때 처음 한국을 방문했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부산, 포항, 경주, 서울, 판문점을 방문하고 모국체험을 깊이 했다. 그 때 같이 한모임에서 활동하던 조선족들중에서 중국의 학계에서 활약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고 인구가 그리 많이 않은 조선족에 인재들이 정말 많구나 하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됐다. 나는 1998년부터 도쿄에서 설립된 조선족단체인 《천지클럽》(후에《천지협회》로 이름이 봐뀌었다)의 활동에도 참가하였다. 이 모임은 1995년에 도쿄의 중국 유학생숙사에서 서로 알게 된 조선족 유학생들이 동족모임으로 발족한 것인데 98년부터 조선족의 공식단체를 지향하면서 도쿄지역의 조선족들이 많이 모이게 되었다.  <교류, 협력, 공동발전>을 슬로건으로 하여  정기적으로 교류회, 포럼, 조선족체육대회, 송년회, 댄스파티 등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고 한동안《천지인문》이라는 잡지도 간행했다. 그리고 천지장학금을 설립하여 중국내의 조선족청소년지원사업을 진행했다. 이  모임의 초창기에 같이 활동한 조선족들은 중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온 20, 30대의 젋은이들이었는데 다들 꿈이 많고 조선족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대단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나서 그 때 같이 활동하던 멤버들을 보면 대체 사업에서 성공한 사람이 많다. 1999년에 일본에 유학하던 연변대학 교수출신자들이 중심이 되어《중국조선족연구회》를 설립하여 조선족에 대한 연구활동을 진행하다가  2007년에《중국조선족연구학회》로 발전하였고 일본에서 조선족연구단체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는《쉼터》를 비롯하여 조선족 인터넷사이트가 여러개 개설되고 조선족여성회, 조선족축구동호회 등 단체가 새로 많이 생겨났고, 조선족에 관한 중요한 행사를 할 때는 여러단체가 공동으로 개최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내가 일본에서 20여년 사이에 관찰해본데 의하면, 일본에 중국 조선족이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인데 초기에는 중국정부에서 파견하는 학자나 유학생, 주재원들이었고 수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90년대 부터 조선족 유학생, 학자가 늘어나기 시작하고 90년부 후반부터 일본어학원에 조선족 어학연수생이 많이 오게되면서 일본에서 조선족의 인수가 급속하게 늘어났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눈에 뛰게 보이는 변화가 일본내에서의 조선족의 정착이 가속화되고 영주권이나 일본시민권을 취득하는 조선족이 많이 늘어난 점이다. 90년대까지만도 일본의 조선족은 유학생, 학자가 중심이 되었는데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회사에 취직하고 자체로 사업하는 조선족이 아주 많아졌다. 도쿄에서 나와 같이 어울리던 조선족중에서 건축설계, IT, 무역업으로 사업에 성공을 이룬 사람들이 적지 않다. 도쿄에는 조선족이 경영하는 식당도 이제는 적지 않고 그런 식당에 가면 조선족들이 모여서 회식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일본의 조선족들이 현재 비교적 많이 경영하는 사업이 미용원이거나 마사지업이라 할 수 있다. 일본에서 조선족이 정착하기 쉬운 점은 수선 일본어의 언어습득이 빨라서 언어장애가 적기때문이다. 거기다 일본이 중국과 한국과 관계가 밀접하기에 중국어, 한국어, 일본어가 다 통하고 다양한 문화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기에 일본사회에서 활동할 수 있는 폭이 너르다. 그 때문에 일본의 조선족은 이주의 역사가 상대적으로 짧은데도 정착을 빨리하고 있다. 미국에 이주한 중국의 조선족이 대체 재미한국인들과 교류가 많고 한인사회에 의지하는 경향이 짙은데 비하면 일본의 조선족은 일본사회에서의 자체적인 적응이 가능하기에 재일한국인들과의 교류가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고 상대적으로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다. 미국의 조선족나는 2009년8월에 미국에 와서도 여러 곳에서 조선족들을 만나게 되었다. 미국에 와서 처음 1년간 UC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대학)에서 방문학자로 있으면서 주변의 한국식당에 가니 주방에서 일하는 조선족여성을 만나게 되었다. 미국에 온지 10년 정도가 되고 중국에 있는 가족과 갈라져 있는 고생이 심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마 미국에서 불법적인 신분으로 체류하고 있어 마음놓고 사회에 나가 활동을 하지 못하고 가족을 만나러 중국에도 가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는 듯 했다. 중국에서는 좋은 직장에 다녔는데 미국에 와서 막노동으로 살아간다는 후회스러운 얘기도 했다. 그 분의 얘기에 의하면 주변에 한국식당에서 일하는 조선족 여성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 후 버클리의 한인교회에 나갔더니 거기에도 여러명의 조선족이 교회에 나오고 있었다. 한 조선족 가족은 부부가 중국에서 북경대학교의 박사, 석사과정을 마치고 미국에서 다시 박사학위를 받고 취직을 하여 버클리에 정착했던 것이다. 슬하에 딸애를 둘 키우고 있었는데 애들은 영어가 완벽하고 거의다 미국애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 부부는 버클리의 고급주택가에서 주택을 새로 구입하였는데 집이 비교적 크기에 한인교회의 교우들의 모임에는 그 집에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교회의 교우들중에서  제일 큰 집에 살고 있다고 다들 부러워했다. 이 가족은 미국에서 영주권도 취득하였다. 미국에 유학하여 10여년만에 이 정도로 정착을 이루었으니 아메리칸드림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내가 특히 감탄한 것은 이 가족의 부부가 기독교를 독실하게 믿고 있는 점이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성장했는데도 이미 중국에서 기독교신자가 되고 미국에 와서도 빠짐없이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뉴욕에 있을 때에는 차를 여러번 갈아타면서 교회에 나갔다는 얘기도 들었다. 이 교회에는 재미한국인과 결혼하여 미국에 정착한 조선족 여성도 있었는데 그 분은 한국에 유학갔다가 다시 미국에 어학연수와서 현재의 남편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 교회에서 만난 조선족들은 비교적 미국사회에 정착했고 교회활동을 통하여 한인사회와 관계를 깊게 맺고 있었다.   2010년 7월에 미국 서부의 버클리에서 동부의 보스턴에 옮겨오면서 여기서도 여러 조선족들을 만나게 되었다. 내가 하버드대학교에서 1년간 연구활동을 하게 된 관계로 자연히 하버드대학교에서 연구자로 있는 조선족들과의 접촉이 이어졌다. 알고보니 하버드대학교에는 의학연구를 하는 조선족연구자들이 여러명 있었다. 그들과 같이 여러번 친목모임을 하면서 알아보니 중국에서 일본과 한국에 유학했다가 다시 미국으로 연구로 왔던 것이다. 《조선투데이》라는 미국내의 조선족 사이트의 인물소개를 보아도 미국에서 활동하는 조선족 지식인들을 대부분 이공계열이고 의학연구자가 특히 많다. 반면에 인문,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연구자는 아주 드물다. 일본에서는 대학교 교수로 취직해있는 조선족이 적지 않은데 미국에 와 보니 보통 포스터닥을 수년이상씩 하는 경우가 많고 정규교수직을 가지고 있는 조선족은 아주 드물다. 그만큼 미국에서 교수로 취직하기가 어렵다고 볼 수 있다. 나는《조선투데이》라는 미국내의 조선족 인터넷사이트를 통하여 미국에 있는 조선족의 정보를 자주 알아보고 있다. 이 사이트에는 조선족의 인물소개, 업소소개, 단체활동소식이 꽤 나와있다. 인물소개에는 학자, 가수, 연주자, 목사, 사업가 등 소개가 보이는데 미군에 가입하여 2005년에 이라크에 파병되었던 조선족 여성의 소개도 나와있어 놀라왔다. 미군에 가입했으면 이미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을 것이니 이런 면에서는 일본의 조선족과 다른 이민사회 미국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에서는 시민권을 취득한 조선족이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소식을 아직 듣지 못했다. 업소소개를 보면 식당, 네일가게, 미용원, 싸우나, 철공소, 택시회사, 여행사, 한의원 등이 보이는데 서비스업종이 많고 대체 재미 한국인이나 중국인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영업을 하는 가게가 많다. 한의원을 경영하는 분이 중국 연변대학교에 기금을 낸 기사도 나왔는데 그만큼 사업에서 성공을 이루는 분들이 나오고 있다는 방증이다. 미국내에는 조선족이 많이 모여있는 지역에 《전미조선족동포회》《뉴욕조선족동포회》《가주조선족연합회》《펜실바니아조선족동포회》《워싱턴조선족총연합회》《싸이판조선족협회》《재미연변대학학우회》등 단체가 결성되어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조선족들이 미국에 이주한 기간이 일본에 이주한 조선족들보다 짧음에도 불구하고 지역별로 단체를 결성하여 활동하는데는 더 열성스러워보인다. 이것은 언어의 장벽이 높고 사회관습이 많이 다른 사회에서 단체활동의 필요성이 그만큼 생기기 때문이고 이민사회인 미국에서는 각 민족별로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경향이 강한 것과 관계이 있다. 금년 3월에 나는 뉴욕에서 조선족이 약 5천명이 모여산다고 하는 프러싱에 찾아가봤다. 프러싱은 70년대부터 한국에서 이민들이 많이 모여와서 미국내의 대표적인 코리아타운을 형성했던 곳인데 90년대부터 홍콩과 대만에서 이민들이 많이 몰려오면서 코리안타운이 차이나타운으로 바뀌어가고 있고, 한국인들의 상가는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 주변의 코리아타운에 조선족들이 경영하는 가게가 몰려있었는데 연변식식당, 꼬치구이집 등에는 조선족 손님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었다. 프러싱에서 보면 조선족들은 코리아타운에서 일하거나 코리아타운에 가게를 차려놓은 경우가 많아 보이고 일부가 차우나타운에서 일하거나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미국내의 조선족은 미국에 입국하는 과정에서부터 해외한국인들의 네트워크를 많이 이용하고, 미국에 와서도 한국인들의 업소에서 일하거나 한국인들과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생활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중국에서 성장했고 중국어가 잘 통하기에 미국의 중국인사회와 접촉하고 활동반경을 넓혀가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미국에 조선족이 비교적 많이 오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인 것 같고 아직 미국내에서의 기반이 아주 강한 것이 아닌 것 같다. 합법적인 신분이 없이 불법체류자로 있는 조선족도 많다고 한다. 그러나 필경 미국은 이민이 많이 모여오는 사회이고 조선족의 해외진출의 의지가 강하기에 금후에도 미국에서 조선족의 수자는 계속 늘어날 것 같고, 미국에서의 조선족의 정착도 빨리 진행될 것 같다. 일본과 미국에서 조선족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해보면서 조선족은 유난히 생명력이 강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어디에 나가도 적응을 잘 하는편이고 뿌리를 잘 내린다. 미국같이 산설고 물설고 언어장애가 큰 사회에 와서 단기간에 정착을 해나가는 것을 보면 정말 감탄하고 싶다. 캘리포니아의 어느 한국인 가게에서 중국의 조선족을 화제로 얘기를 했는데 가게주인이 중국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고보면 세상 어디에 가서 살 수 없겠는가 하면서 조선족의 생명력을 높이 평가했다. 잘 생각해보면 조선족은 진짜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이다.                                        (2011년4월12일)
32    일본에서 관찰해 본 중국의 변화 댓글:  조회:5770  추천:45  2011-01-21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보스턴통신(14)                                                           외부와 내부의 시각으로 본 오늘의 중국(4) 일본에서 관찰해 본 중국의 변화최근 중국의 호금도(후진타오)국가주석이 미국을 방문하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중국을 미국과 더불어 초대강국으로 지칭하는G2(Group of Two)라는 신조어가 서방세계에서 회자되다싶이 국제사회에서의 중국의 존재감은 엄청나게 커지고 있다. 1980년대부터 30년간 지속돼온 중국경제의 고도성장, 2010년에는 GDP가 일본을 앞질러 세계2위의 경제대국이 됐고 가까운 장래에 미국을 앞질러 세계1위의 경제대국이 될 거라는 예측도 많이 나오고 있다. 세계최대의 외환보유액, 미국국채의 최대구입자 등 수치도 국제사회에서의 중국의 부상(浮上)을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이 글에서는 이런 거대한 수치상의 중국만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중국의 모습과 변화를 20여년간 외국에서 거주하며서 관찰해본대로 적어보겠다. 1976년에 중국에서 모택동의 부인 강청을 비롯한 소위  ‘‘4인방’이 제거되고 문화대혁명이 정식으로 종결됐을 때 중국의 국고가  완전히 바닥이 낮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10년간의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중국경제나 사회가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졌던 것이다. 1970년대 말기부터 등소평이 주창한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중국은 우선 사회주의 집단농장을 과감하게 해체하고 개인영농을 허락하면서 농민들의 노동의욕을 불러일으켰고 이것이 농촌의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그 다음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자본주의적인 것으로 간주되던 개인장사가 허락되고, 해외화교나 외국인을 상대로 한 외자유치정책이 실시되어 중국에서 개인장사붐, 외자유치붐이 일어났다. 내가 일본으로 유학한 1988년이 바로 이런 시점이었다.  내가 1988년에 일본에 유학했을 그 당시, 중국사회가 개혁개방정책으로 많이 봐뀌어간다는 인식은 일본에서도 했지만 가까운 장래에 일본을 초과할 정도로 성장할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 때는 일본경제가 한창 버불의 절정기에 있었고, 국제사회가 일본을 보는 눈도 대단히 좋았다. 그러다가 1989년에 중국에서 천안문사건이 터졌는데 일본의 대다수 중국전문가들이 이제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이 실패하고 다시 농업국으로 회귀할 것이라 예측했다. 그러나 그 무렵 일본의 슈퍼나 옷가게에 가면 되면 중국제복장이 눈에 많이 뛰어 중국의 성장이 결코 멈춰서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 슈퍼에 가봤더니 중국제 청바지가 있어 중국도 청바지를 만드는 나라냐고 깜짝 놀랐다는 얘기를 했던 것이 그 때이다.   그러다가 1992년에 일본유학 4년만에 중국을 방문했는데 중국출신인 나로서도 중국인들의 마인드가 너무나도 바뀐 점에 놀랐다. 만나는 사람마다 돈 얘기를 하고, 사람들 사이의 인사가 돈 잘 버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 때부터 중국조선족사회에서는 한국으로 돈벌이 나가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1989년의 천안문사건이 중국인들의 의식을 크게 바꾸어 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됐다. 이 사건 이전에는 사회주의적 의식이 아직 깊이 남아있었고 정치에 대하여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천안문사건이후 중국인들 의식속에서 정치에 대한 관심이 꺼져가고 경제일변도로 바뀐 것 같아 보였다.  그 다음에도 90년대에 중국을 몇차려 방문했는데 가 볼 때마다 많이 바뀌고 있었고, 사회전체가 경제발전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그 때부터 농민들이 농촌을 많이 떠나고 농촌에 폐가가 생기고 자식들이 떠난 마을에서 노인들이 고독하게 집을 지키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이 시기에 일본에서는 값싼 중국제품이 넘쳐날 정도로 많아서 중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불렀다.  2001년에는 기회가 있어 할빈, 장춘, 연변, 내몽골, 북경을 방문했는데 중국의 도로사정이 획기적으로 좋아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미 중국의 주요도시 구간에는 도속도로가 달리고 있었다. 핸드폰이 일본못지 않게 보급돼간 것도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이다. 북경에서 놀라웠던 것은 가는데마다 주택융자를 해준다는 광고판이 나붙어있어 중국의 도시에서 마이홈시대의 열기를 실감했다. 일본과 한국의 고도성장기가 바로 이런 식이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북경에서 호텔에서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나갔는데 호텔보이가 잡아준 택시가 알고보니 정부기관의  공용차였다. 정부기관의 공용차 기사가 새벽에 일어나서 공용차로 택시운전을 하고 그리고나서 아침에 출근하는 모양이었다. 그 때는 중국의 공무원들도 부업을 많이 하는 시기여서 합법이던 아니던간에 그런 식으로 수입을 늘려가고 있었다. 2003년에 상해를 방문하니 소문그대로 천지개벽이라도 일어난듯이 상해시가 크게 변하고 있었다. 황포강(黃浦江)변의 고층빌딩에서 내려다보면 상해시의 신개발구가 마치 미래도시처럼 보이고 국제대기업의 광고가 황포강변에 많이 나붙었다. 신기하기도 하구나, 도대체 중국에 무슨 매력이 있길래 국제대기업들이 이렇게 많이 진출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쿄나 서울에 가봐도 상해처럼 국제기업들의 광고가 많지 않았다. 그 당시에 이미 상해의 번화거리는 도쿄나 서울보다 더 활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중국에 갈 때마다 상대적으로 좋은 모습을 많이 봤지만, 동시에 국영기업의 직원들이 대량으로 해고되여 살길이 막막하다든가, 가난한 사람들은 설이 다가와도 고기도 구경하기 힘들다는 얘기도 들렸다. 농촌에서는 자녀들이 다 떠나고 노인들이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도 보게 되었다. 미국에서 발견하는 중국의 존재감재작년에 미국에 와서 일본보다 다른 시각으로 중국의 존재감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처음 1년가 체류했던 UC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대)의 동아시아연구소에는 중국, 한국, 일본연구센터 등이 있는데 수적으로도 중국연구자가 많고 연구활동도 중국에 관한 것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번에 하버드대학교에 와보니 여기도 역시 동아시아연구하면 중국연구가 중심이 되고, 연구활동에 있어서도 중국에 대한 관심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하버드대 케네디행정스쿨에는 중국의 관료들이 연수차 많이 다녀가는데 중국인 스스로 케네디행정스쿨을 중국의 제2중앙공산당학교라고 농담조로 말하고 있다. 미국에서 전략적으로 중국의 행정관료들을 미국의 명문대학교에 불러서 연수시키면서 지미파(知美派)를 키우고 중국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려고 하는것으로 보인다. 단지 미국의 대학교에서의 연구나 연수에서 중국이 두드러지는 것만이 아니고 미국의 미디어에서는 중국에 관한 화제가 거의 끊기지 않고 있다. 미국정부에서도 국제사회에서의 중국의 부상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중국과의 관계설정에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는 모습이다.중국인들이 미국에 와서 투자한다거나 부동산을 구입하는 것은 이제는 신선한 화제거리도 아니다. 미국의 관광지들을 다녀보아도 가는데마다 중국인 관광객이 몰려다닌다. 중국인들이 미국에서도 활보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내부의 눈으로 보는 중국의 실상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존재감이 날로 커져가는데 비하면 실지 중국인들이 생각하는 중국의 실상은 어떤 것일까? 여기서 두가지 실례를 들고 싶다. 하나는 해외에 나와있는 중국인들이 중국에 귀환하기를 그리 반기지 않는다. 일본에 유학한 중국인들이 공부를 마치고 가능하면 일본에 남으려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 미국에 와보니 여기서도 중국인들은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나서 될수록 미국에 남으려고 한다. 왜서 일까 생각하는데 단지 경제문제만이 아니고 사회전체의 환경과 관계된다. 사회의 공평성과 투명도, 안전한 식품, 자녀들의 교육환경, 의료문제 등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일본이나 미국같은 나라들과 비하여 너무나 차이를 많이 느끼기에 귀국하기를 주저한다. 서방의 민주주의를 체험했던 유학생들이 아직도 통제사회인 중국에 가서 새초롱에 들어있는 것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꽤 있다. 또 하나는 중국에서 관료들이나 부유층가운데 자녀들을 해외에 거주시키거나 변상적인 방법으로 외국의 영주권을 취득하는 경우도 꽤 많다고 한다. 중국에서의 신분보장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니 안전판을 마련하는 셈이다. 그만큼 중국의 엘리트들이 중국의 장래에 확신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방증이다. 중국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시급히 해결해야 할 사회모순도 너무 많다. 가까운 문제로는 급속한 산업화를 위한 농촌에서의 토지강제징수문제가 농민들의 불만을 크게 사고 있고, 때로는 농민들의 생존마저 위협하고 있다. 물가와 주택가격의 급등에대한 도시주민들의 불만도 크다. 빈부격차의 확대, 관료들의 부패, 심각한 환경오염, 식품안전에 대한 불안감, 민족관계 등 오늘의 중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도 다 해결이 쉬운 문제가 아니다. 중국의 GDP가 세계2위로 됐다고 하지만 국민 1인당의 GNP는 4천불미만으로 아직도 세계하위권에 속한다. 국제사회에서 국가위상이 제고되고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과 국민의 행복지수는 꼭 직결되는 것이 아니다. 노자가 소국과민(小國寡民)을 이상사회라고 말했듯이 중국같이 과도한 인구를 가진 나라는 모든 국민이 행복하게 사는 나라를 만들기 참으로 힘든 과업이다. 그러기에 국제사회에서 위상을 올리거나 영향력을 늘이는 일보다 국민들이 보다 만족하고 행복감을 느끼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우선 순위가 아니겠는가 생각된다.                                          (2010년1월19일)
31    발전은 많고 조선족은 줄고 댓글:  조회:5333  추천:41  2011-01-19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보스턴통신(13)                                                           외부와 내부의 시각으로 본 오늘의 중국(3) 발전은 많고 조선족은 줄고2009년 8월4일 나는 북경을 떠나 연변으로 갔다. 24일에 연변을 떠나기까지 20여일간 체류하면서 두차례의 학술회의에 참가하고 친척과 지인들을 만나고 연변각지를 여행했다. 1988년에 일본에 유학한 후 연변으로 가끔 돌아갔어도 번마다 체류기간이 짧았기에 고향에 가서도 가고싶은 곳을 다 가지못하고 총총히 떠났는데 이번에는 여유를 가지고 연변각지를 돌아볼 수 있었다. 중국의 다른 지역과 같이 연변의 변화도 컸다. 외국에 오래간 있다가 연변으로 가보면  몇가지 큰 변화가 눈에 띄운다.수선 어느 도시에나 아파트가 많이 늘어났다. 이제는 어지간하면 아파트에서 사는 시대를 연변사람들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연변에서는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서 아파트를 많이 산다고 들었다. 그 다음 도로가 좋아진 것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제는 연변의 주요도로가 거의 다 아스팔트나 콩크리트 포장도로로 바뀌우고 고속도로가 통하는 시대를 맞이하였다. 내가 외국에 거주하면서 중국을 방문하면 언제나 제일 큰 변화를 느끼는것이 교통이 획기적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이제는 중국에 고속도로망이 전국에 널리고 고속철도도 보급돼가는 과정에 있다. 그런데 차로 연변각지를 달리면서 느낀것이 국도에 콩크리트도로가 쾌 많은데 이런 길에서는 차가 상하로 털렁거리기에 승객들에게는 편하게 승차할 수 있는 도로가 아니었다. 콩크리트도로가 보수비용이 적게 들어 도로를 관리하는 측면에서는 경제적이겠지만 승객을 생각하면 아스팔트가 낫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 연변의 큰 변화가 자가용차가 많아진 것이다. 이제는 연변의 도시에서는 마이카시대가 급속하게 다가온다는 느낌이 들었다. 연변대학교 교수들을 보니 아마 거의 절반은 마이카를 운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외국의 산업화국가들에서는 마이카가 오래전에 보급되었기에 신선한 얘기가 아니지만 마이카시대는 중국으로 말하면 큰 변화가운데의 하나이다. 연변각지를 다녀보면 산림이 비교적 잘 보호되어 있어 민둥산이 거의 보이지 않고 산들이 울창한 수림으로 덮어있어 좋았다. 듣자니 이제는 산림보호를 위하여 벽돌공장도 운영을 금지시키고 있다고 한다. 연변지역만큼 전지역에 수림이 울창한 곳도 중국에서는 적기에 자신의 고향이 자랑스러웠다. 친척이 정부에서 운영하는 노인양호시설에 들어있기에 찾아가봤는데 자녀가 없어 의지할 수 없는 노인들을 정부가 무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각지에 정부에서 운영하는 노인양호시설이 설치되어 있다한다. 이런면에서는 오히려 사회주의 국가의 복지정책이 돋보였다. 그러나 연변도 잘 살펴보면 어두운 그늘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농촌마다 폐가가 눈에 띄고 조선족마을에 조선족이 줄어드는 현상이 보편화되어 가고 있었다. 중국의 연해지역으로, 한국으로 돈을 벌려고 떠나면서 조선족마을에 조선족이 부재했다. 일본이나 한국을 봐도 산업화과정에서 이농(離農)현상은 다들 생기는 것이지만  문제는 소수민족지역에서의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은 그 민족의 공동체기반이 무너져내릴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연변내의 도시에서도 조선족이 줄어들기는 마찬가지여서 이제는 조선족식당에 가봐도 젊은 조선족종업원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대체 젊은 사람들은 연변에 남아있지 않고 직장을 외지에 나가서 찾는 것이 이제는 사회의 추세처럼 되었다. 그러다나니 연변에 남아있는 조선족은 노인이나 어린이들만이라는 말이 너무 과장처럼 들리지 않았다. 백두산관광을 가면서 연길시 주변의 농촌을 통과했는데 한족가이드가 설명하기를 여기의 마을들에는 원래 조선족들이 살았는데 한국에 돈벌러 나가면서 이제는 별로 남아있지도 않다고 했는데 이것이 다른 민족의 눈으로 본 연변의 현실이었다. 원래는 외지나 외국에 가서 돈을 벌어서 고향을 잘 발전시키고 고향에서 자긍심을 가지고 안착하여 사는 것이 이상적인데 오늘날의 조선족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사람이 죽으면 화장하여 유골마저 날려보내는 세태에 연변조선족의 애향심이 장구하게 남아있을련지. 부모의 산소라도 남아있어야 고향도 찾아가고 싶고 애착도 생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연길의 형님집에 거주하면서 아침마다 연변텔레비의 조선말채널을 시청했는데 7시가 되면 아리랑곡이 흘러나와 그런때만큼 반가운 것이 없었다. 또 아침이면 형님네 아파트 밖에서 ‘두비(두부) 삽소’하는 고향 아줌마의 귀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일상생활에서 조선적인 것을 누리면서 사는 삶, 이것인즉 연변에 사는 조선족의 특권이고 살아가는 재미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연변이 더 소중하게 여겨졌다. 연변을 떠나기 직전 모아산(帽兒山)정상에 올라 고향땅을 바라봤다. 급속하게 현대도시로 탈바꿈해가는 연길, 백사장을 적시면서 유유히 흘러가는 해란강, 사과배 향기 풍기는 용정의 만무(萬畝)과원, 산마다 일직자로 늘어선 낙엽송과 솔나무, 다시 보니 고향땅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우리가 너무 제 고향을 모르고 살아온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깊게 들었다.연변을 떠나는 날 연길공항은 몹씨 붐볐다. 나이든 조선족 분들이 짐을 가득 챙겨가지고 한국으로 돈벌이 떠나고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서 배웅을 하고 있었다. 한번 나가면 몇년은 쉽게 돌아오지 못할 걸음이어서 가족 사이의 작별이 애틋했다. 한세기 이전에 찢어지듯한 가난과 망국의 설음을 안고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두만강, 압록강을 건넜던 사람들의 후손들이 오늘도 또 무거운 짐을 끌고 살길을 찾아 고국으로 향한다. 조선족에게 아리랑고개는 길고도 또 길다.               두만강과 백두산 그리고 용정의 유적연변에서 두만강을 답사하는 기회를 가졌다. 먼저 용정시 삼합(三合)에서 차를 타고 두만강을 따라 인적이 드문 구간을 통과하여 개산툰(開山屯)까지 달려봤다. 두만강폭이 너르지 않아 맞은편의 조선의 마을이 훤히 보이고 강가에서 빨래하고 미역감는 사람들이 손에 닿을듯이 가까운 곳에 있었다. 두만강변에 가끔 나타나는 중국측의 마을도 대체 조선족마을이기에 서로 너무 비슷하여 국경이라는 의식이 없이 양측을 바라보면 똑같은 민족이 하나의 강을 사이두고 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 다음 개산툰에서 도문(圖們) 사이를 차로 달렸는데 이 구간은 두만강 양안의 산들이 험준하고 그 때문에 경작지가 많지 않았다. 조선의 산에는 최고지도자를 칭송하는 문구가 가끔 보이고 역전마다 김일성주석초상화가 걸려있는 것이 강건너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중국에서 60,70년대에 있던 지도자에 대한 극단적인 개인숭배가 아직도 조선에 남아있는 것이 서글펐다. 중국측의 국경도시인 도문에서는 두만강변에 관광객이 많이 모이고 두만강에 들어가 배놀이도 많이 하는데 조선쪽은 조용하고 나다니는 사람도 그리 보이지 않았다. 도문에서 다시 차로 두만강을 따라 두만강의 최하류인 방천(防川)까지 갔다. 훈춘(琿春)시가지를 지나면서 보니 소문대로 훈춘시 개발이 많이 진척되어 연변의 도시중에서는 연길이외에 제일 번화한 모습이었다. 훈춘시의 권하(圈河)세관을 통하여 조선쪽으로 화물트럭이 건너가는 모습도 목격되었다. 길이 600킬로에 이르는 두만강의 많은 구간을 답사하면서 연변의 조선족이 제 모국과 진짜 가까운 거리에서 살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그리 넓지도 않은 두만강을 사이두고 중국측도 대체 조선족 마을들이 자리잡고 있어 양측의 차이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중국 조선족이 조선반도에서 이민한지 100여년이 지나도 언어에서 문화에 이르기까지 본질적이 변화가 생기지 않은 근본원인이 바로 모국과의 근접성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두만강 대안의 조선쪽이 너무 조용하고 활기가 보이지 않은 것이 참으로 아쉬웠다. 그 쪽도 이제는 천지개벽이 일어나 두만강지역이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프론티어로 떠오르는 날도 멀지 않다고 믿고 싶었다.연변에 체류하는 사이 백두산에도 두번 다녀왔다. 운 좋게 처음 갔을 때는 천지가 똑똑히 보였는데 두번째 가니 백두산 정상에 안개가 진하게 끼어 천지가 전혀 보일질 않았다. 날 개인 날 백두산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보니 시야가 확 트이는 가운데 검푸른 수해(樹海)가 아득하게 펼쳐지고 연변의 산야가 한눈에 들어왔다. 맹자가 말한 호연지기(浩然之氣)란 바로 이런 기상을 보면서 키워가는 것이겠다 생각됐다. 백두산을  관광하면서 보니 한글간판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1987년에 처음 백두산에 갔을 때는 한글간판이 꽤 보이던 생각이 났다. 들으라니 2005년에 백두산(장백산)관할권이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길림성으로 이관(移管)되면서 한글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런 이관이 연변의 관광산업에 불리했는지 아니면 결과적으로 백두산관광을 활성화시켰는지 상세한 결과는 잘 모르겠다. 그런나 중국의 조선족들이 항상 자랑스러워하고 연변조선족자치주 경내에 있던 백두산에서 행정관리권의 이관에 따라 한글이 사라진 것은 유감스럽게 생각된다. 용정에 새로 복원된 대성(大成)중학교와 윤동주 생가도 방문했다. 여기에는 한국에서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고 복원과정에서 한국의 도움이 컸던 것 같다. 자기의 고향에 이렇게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었다는 가슴뿌듯했다. 실지 연변지역은 오래동안 동북아시아의 변방이면서도 잘 알고 보면 유서가 깊은 곳이다. 발해왕국이 여기서 건국됐고, 조선왕조, 청나라의 시조(始祖)들이 여기서 일어섰다. 일제강점기에는 백의민족의 투혼과 자존이 마지막까지 지켜진 곳도 여기이다.   남북의 만남의 장소연길에서 체류하면서 연변대학교 근처에 있는 호텔앞을 지나는데 한무리의 젊은 여성들이 모여서 체조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연길시의 어느 직장에서 직원들에게 훈련을 시키는 줄로 알았는데 알고보니 조선(북조선)에서 운영하는 식당의 종업원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조선식당으로 여러번 찾아갔다. 손님은 한국사람이 많은 편이고 그리 붐비는 식당이 아니었다. 중국의 일반식당에 비하면 종업원들의 태도가 딱딱하고 부드럽지 못했다. 의아스러운 것은 그 식당 입구에 일본식 등롱(燈籠)이 한줄로 쭉 걸려있었는데 이런 인터리어는 어디에서 나온 발상인지 궁금했다. 혹시 일본식 등롱인 걸 모르고 걸어두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길에는 조선에서 경영하는 식당이 여러군데 있었는데 어디나 한국손님이 많이 온다고 들었다. 연길의 서점에 가보면 한국과 조선의 서적, 영상물, 음반들을 한곳에서 찾을 수 있었는데 사실 해외에서 남북의 출판물들을 동시에 접할 수 있는 곳이 그리 많지 못하다. 그런면에서 연변에는 남북의 정보가 다 모이고 여러형태로 남북의 교류가 여기를 통하여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2008년10월에 연길에서 개최된 학술희의에 참가했는데 이 회의는 연변대학교와 한국과 조선의 학술기관에서 공동으로 개최하고 남북양측에서 학자들이 많이 모여서 열띤 토론을 가졌다. 역시 중국의 조선족 사회가 남북을 이어놓는 가교적 역할이 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11년1월17일)
30    너무나도 많이 변했던 북경 댓글:  조회:3471  추천:37  2011-01-18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보스턴통신(12)                                                           외부와 내부의 시각으로 본 오늘의 중국(2) 너무나도 많이 변했던 북경2009년 8월1일 곤명에서 5일간의 국제회의 일정을 마치고 북경에 가서 3박을 하면서 친척과 지인들을 만났다. 곤명을 떠나 북경에 도착한 첫 인상이 마치도 완전히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은, 발전도상국에서 선진국에 온 것 같았다. 북경공항부터 크고 화려하여 이제는 어느 나라의 공항에 비해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공항에서 차로 시내에 들어가면서 보니 2003년에 마지막으로 가본 북경과 비해도 엄청나게 변했었다. 교통이 사통발달한데다가 보통 길이 너르고 도로 양측에 호화로워보이는 고층건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어 도시가 여유로움과 풍요함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었다. 겉모습만 봐서는 이제는 북경이 국제대도시중에서 어느나라에도 못지않고 북경이나 상해만 보면 중국을 발전도상국이라 할 사람이 오히려 적을 것 같다. 2005년에 일본에서 상해에 다녀왔는데 그 때 상해의 번화하던 모습을 보다가 일본에 돌아가서 도쿄의 우에노역에 내리니 마치도 어느 지방도시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토록 북경이나 상해는 변화가 빠르고 도시가 활기가 있었다. 근년에 북경의 모습이 엄청나게 바뀐 것은 2008년에 개최된 올림픽과 관계가 깊다. 도쿄와 서울이 올림픽을 통하여 도시가 크게 탈바꿈 한 것처럼 북경도 올림픽 덕을 많이 봤다고 할 수 있다. 2010년에는 상해에서 세계박람회가 열렸으니  상해의 변화도 엄청날 것이라 예상된다. 북경에 도착한 후 먼저  ‘새 둥지’라고 불리우는 북경올림픽주경기장을 보러 갔다. 때마침 큰비가 쏟아져 가까이에 다가가 보지 못하고 차로 그 주위를 둘러봤는데 소문대로 규모가 어마어마한 경기장이었다. 경기장주변에는 중국 전통건축물의 특색을 지닌 고풍스러우면서도 호화스러운 호텔이 여러개 들어섰다. 저녁에는 북경에 있는 지인의 초대로 세계최대급쇼핑센터라는 골덴리소수쇼핑몰(金源時代購入物中心)에 가서 식사를 하였다. 이 쇼핑센터의 규모도 가히 놀랄 정도였다. 부지 면적이 68만 평방미터라니 서울 여의도의  8배, 일본 도쿄돔의  15배가 되는 셈이다. 이 쇼핑센터에는 식당만 100개가 넘고 백화점, 슈퍼, 스포츠센터, 영화관 거의 모든 상업시설이 다 들어있다고 한다. 식당에 가봐도 대체 어느 식당이나 규모가 큼직큼직하여 이 큰데 손님이 다 모일 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이나 한국에서 보면 쇼핑센터가 아무리 크다고 하여도 이처럼 큰 곳을 본 적이 없다. 미국에 와보니 규모가 큰 상업시설이 꽤 보이기에 대륙국가들의 스케일이 큰 것은 공통점것이라 납득이 갔다. 중국의 고도(古都)인 서안에서 본 진시황병마용(兵馬傭)박물관도 보통크기의 체육장 3개 정도였기에 일본이나 한국에 비하면 역시 대륙국가의 스케일이 크다는 실감이 갔다. 스케일이나 센스, 상업적 수요에 따라서 규모가 큰 시설을 짓는 것이 흠점은 아니지만 현재의 중국에서는 질보다 양을 많이 따지고 국가의 위세를 과시하는 모양으로 대표적인 건물들은 세계최대규모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꼭 규모가 커서 좋은 것이 아니고 지나친 규모는 자원낭비, 환경파괴가 뒤따르기에 좋다고만 볼 수 없다. 북경의 도시의 외모가 거창하고 화려한데 비하면 치안에는 문제가 있는것 같았다. 내가 찾아가 본 고층아파트에는 건물마다 경비원이 있고 아래층들에는 창문에 쇠창살을 해넣고 문도 보통 열쇠를 이중으로 잠근다고 들었다. 일본이나 미국에서 살아본 경험에 비춰보면 아파트마다 경비원이 있는 것이 이상해보였고 그만큼 치안이 좋지 않다는 방증인 것 같다. 북경에서 3일간 머무르면서 도시 외곽에도 가봤는데 식수(植樹)를 많이해서 어디가도 수림이 우거져 있었다.  1980년대부터 북경주변에서 식수를 대대적으로 한다고 들었는데 이제와서 그 성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북경에서는 지인들을 여러명 만났는데 대체 중국의 발전과 더불어 본인들도 괄목하게 변했다. 북경의 명문대학교에서 교수로 있는 대학교동창생 두명을 만났는데 두명 다 이제는 중국학계에서 중견학자로 자리잡고 있었고, 해외에서 열리는 학술회의에도 많이 다니고 일본이나 한국에 나가 객원교수도 경험하였다. 거기에 비하면 나의 모습이 스스로 초라해보였다. 일본에 유학하여 힘들게 공부를 마치고 대학교 교수로 취직하였지만 자그마한 지방대학교라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직장이 불안하고 학계에서도 별로 활약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급속하게 성장해가는 중국에서 자리를 잘 잡고 본인들도 나라의 발전과 같이 성장해가는 모습이 20년 가까이 거의 정체상태에 머물러있는 일본에서 별로 발전을 이루지 못한 나의 모습과 너무 대조적이었다.  망경에서 생각해본 한중관계     북경에서는 3일간 망경(望京)에서 숙박했다. 잘 알려져있다싶이 망경(왕징)은 중국내에서 한국인들이 최대로 모여사는 곳이고 북경에 사는 조선족도 여기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그러니 연변을 제외하면 중국내의 최대의 코리아타운이고 한국인과  조선족을 합쳐서 최대 약 10만명이 이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이 지역을 둘러보니 말 그대로 코리언의 세계이고 한국것이 들어와 있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로 한국화된 지역이었다. 내가 머물렀던 숙소가 한국식 레지던스호텔이었는데 방내 비품이 거의다 한국제품이고, 텔레비를 틀면 한국방송이 나오고, 텔레비옆에는 북경거주 한국인들이 발행하는 잡지가 놓여있어 오히려 한국의 호텔들보다도 더 한국적이었다. 현재 중국에는 약 100만명의 한국인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아마 중화권인 홍콩과 대만을 제외하면 외국인이 중국에 거주하는 수자로는 한국인이 제일 많을 것이다. 중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수가 2005년의 통계에 약11만명으로 나오는데 그 이후에도 획기적으로 늘어난 것 같지 않다. 그러고보면 일본인보다 9배정도는 더 많은 것이다. 중국속에 일본인들의 집단거주지가 거의 없지만 한국은 이미 북경, 청도, 연태 등 도시에 코리아타운이 들어섰고 중국의 조선족까지 합치면 중국속에서의 코리언의 존재감은 일본인보다 훨씬 크다. 망경의 코리아타운을 보면서 통일신라시기의 당나라 연해지역에 널리 분포했던 신라방(新羅房)이 생각났다. 그때 신라인들은 당시의 세계최대강국중의 하나인 당나라에 진출하여 동아시아의 해상무역을 사실상 주도했다. 북경의 지인한테서 들으니 한국인들은 중국사회에 깊게 파고들고 중국인들과 허물없이 어울리는 사이가 되는데 일본인들은 어쩐지 중국인들과 그렇게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의 정서를 이해하고 의사소통을 하기 쉬운 것은 일본인보다 한국인이 앞서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지리적으로도 중국과 가깝고 역사적으로 관계가 깊었던 것이 사실이다. 또 한가지 현재의 중국에 200만 가까운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다는 것이 한국이 중국과 접근하고 교류하는데 절대적으로 유리한 인적자원이었다.      이미 잘 알려져있다싶이 2003년에 한국의 대중수출은 양적으로 대미수출을 초과했고, 이제는 대미, 대일수출보다 대중수출이 더 많다고 한다. 한국은 중국과의 무역에서 장기적으로 흑자를 내는 많지 않은 나라가운데의 하나이다. 1990년대부터 20년정도 중국경제가 고도성장을 지속해가는 과정에서 한국은 중국의 발전을 최대한 잘 활용한 나라이다. 1997년의 IMF위기의 단기간의 극복이나 2008년의 미국발 세계경제위기를 잘 넘기것도 중국의 경제성장을 잘 활용한 것과 관계가 깊다. 일본은 1990년대부터 장기간의 정체상태에 빠지면서 한국에 비하면 중국의 발전을 그리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했고, 정랭경열(政冷經熱)이라는 말이 생겨나다싶이 양국의 외교적인 관계에서는 마찰이 자주 일어났다. 한국의 장점은 아직도 세계최강인 미국과의 외교적, 경제적관계를 잘 유지하면서그러면서도 지금까지는 중국과 뚜렸한 대립을 피하면서 관계를 잘 발전시켜왔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세계최강의 대국들인 미국도, 중국도 동시에 잘 활용하는 나라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부터인 것 같다. 한국과 중국의 관계에는조선(북조선)이라는 변수가 크게 작용하고, 또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절묘하게 평형을 유지해나갈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조선반도(한반도)의 남북관계가 잘 풀려야 하고 궁극적인 통일을 지향해가면서 그 통일이 조선반도와 중국 양측에게 서로 윈윈게임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지혜를 짜야 한다. 예술촌으로 봐뀐 공장북경의 망경에서 가까운 곳에 새로 생긴 예술촌으로 알려진 ‘789예술구’이 있어 찾아가봤다. 원래는 ‘789연합공장’이라 불리우던 군수, 방직공장이 이전을 하면서 비게된 공장의 넓은 공간을 예술가들이 창작에 활용하면서 어느사이 유명한 예술촌으로 거듭났다. 꽤 넓은 공간에 170여개의 갤러리나 아틀리에가 모여있다고 하고 유명해져가는 과정에서 아트샵, 카페같은 것이 많이 모이면서 종합오락공간으로 변모해가고 있다고 한다. 전시된 작품중에는 전위적인 것이 많아 중국의 젊은 예술가들의 반항적이고 거침없는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유리창에 둘러싸여 관람자들의 구경거리가 된 천안문, 미국의 마돈나를 옆에 끼고 싱글벙글하는 모택동, 이런 작품들속에서는 기존의 권위나 우상이 형편없이 깨여져가고 있었다. 한때는 용도폐기될번 했던 공장터가 기발한 아이디어와 창조적인 사고에 의하여 세간의 주목을 끄는 예술공간으로 탈바꿈했고, 이런 변화는 중국의 경제적인 측면만이 아닌 문화적인 활력도 보여주고 있었다.   (2011년1월15일)     
29    외부와 내부의 시각으로 본 오늘의 중국(1) 댓글:  조회:3421  추천:38  2011-01-15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보스턴통신(11)                                                           외부와 내부의 시각으로 본 오늘의 중국(1)     조국이면서 외국같은 중국    나는 중국에서 태어나 자랐고 현재도 중국국적을 소유하고 있는데 해외에서 20여년(일본에서 21년, 미국에서 2년) 거주하면서 일상생활에서 중국이 거의 외국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본인스스로 중국과 멀어지려는 것이 아니여도 생활환경이 중국과 떨어져있으니 자연히 중국실정에 어두워지고 가끔씩 귀국하여도 어떤 때는 오히려 외국에 온 것 같은 당혹감을 느낄 때가 있다. 필경은 중국이 조국이고 형제와 친척들이 다 거기서 살기에 왕래가 끊어질 수는 없고 중국이 나한테 완전한 외국일 수도 없다. 그러다니 나의 의식속에서는 중국이 조국이면서도 외국같은 그런 애매한 위치에 놓여있다. 나는 2009년 7월과 8월 사이에 학술회의차 중국에 가서 곤명, 북경, 연변에서 한달간 체류하였다. 남부의 도시인 곤명, 수도인 북경, 동북쪽 변방인 연변을 돌면서 변화해가는 오늘의 중국의 모습을 많이 관찰했다. 그리고나서 곧바로 미국에 왔다. 이 글에서는 그때 중국에서 보고 느낀 점, 일본에서 오래동안 관찰해본 중국의 변화, 그리고 미국에 와서 다시 되돌아보는 중국의 모습을 가미하면서 오늘의 중국의 실상에 접근해보려 한다.   곤명에서 열린 국제인류학・민족학대회 2009년7월27일, 나는 일본 니가타공항에서 대한항공편으로 인천국제공항에 가서 거기서 다시 대한항공의 비행기를 바꾸어타고 중국의 남부도시인 곤명(昆明)으로 갔다. 내가 곤명을 방문한 것은 국제인류학・민족학연합회 제16차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국제인류학・민족학연합회는 인류학과 민족학 분야의 최대의 국제학술조직으로 5년에 한번씩 국제대회를 개최하는데 중국에서는 2008년에 개최하기로 예정되었다가 그 해 3월에 티벳에서 대규모 소동이  발생하면서 연기됐다가 2009년에 개최하게 되었다. 운남성이 중국에서 소수민족이 제일 많은 성이고 민족관계가 비교적 안정된 지역이라는 점이 곤명시가 이 국제대회의 개최지로 정해진 주요 이유인 것 같았다. 이 대회는 중국측에서 중국인류학・민족학연구회, 운남대학교, 운남민족대학교가 공동주최를 하고 중앙정부의 민족사무부서와 운남성정부가 전폭지원을 하면서 개최되었는데 참가하면서 놀라운 것은 주최측의 계획이 너무나 방대한 점이었다. 참가자 4000여명을 예상하고 200개의 분과회를 설치하였다. 이렇게 방대한 국제학술회의가 과연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정작 참가해보니 결석자가 속출하고 분과회도 200개가 다 제대로 열렸는지 의문스러웠다. 5일간의 학술대회기간에 중국과 외국의 저명학자들의 강연이 다수 예정됐는데 정작 기대를 품고 들으러가니 부득이한 사정으로 강연자가 올 수 없다면서 직전에 취소되는 사례가 여러번 있었다. 그러면 왜서 겉모습은 방대하지만 내실이 부족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는가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규모가 좀 작더라도 알차게 학술회의를 했었으면 좋았겠다. 곤명에서학술회의를 마치고나서 연변에 가서 두차례의 학술회의에 참가했는데 그 때도 발표예정자들이 직전에 참가를 취소하는 혼동이 적지 않았다. 일본과 미국에서 학술회의에 참가해보면 특별한 사연이 없는한 발표예정자가 참가를 취소하는 경우가 아주 드물다. 미국에서 대학교 연구소에 있다보면 여기서는 한학기에 한번씩 학술회의 일정을 학기초에 미리 공개하는데 수많은 학술발표가 일정대로 진행되고 취소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사회의 내실을 다져가는 면에서는 아직도 중국과 선진국들과의 차이를 크게 느끼게 된다. 이 대회가 규모가 큰 국제회의이었기에 운남성정부가 위신을 걸고 성공을 후원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곤명시내에는 마치 올림픽이라도 개최하듯이 이 대회를 홍보하는 선전물이 많이 보이고, 대회기간중에는 참가자들이 아이디카드를 보여주면 공공교통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었고, 안내를 전담하는 경찰이 시내각지에 배치됐다. 대회장으로 사용된 운남대학교 캠퍼스에는 각 출입구마다 경찰이 배치되어 신분증을 체크하고 회의장에 출입할 때 짐검사를 하면서 안전대책을 철저하게 강구했다. 내가 참가한 ‘human migration and diaspora’ 분과회에서도 7월30일에 회의를 마치고 주변에 있는 스탭과 대화를 나누어보니 사복한 경찰이었다. 대회가 규모가 큰데다가 민족학이라는 주제와 관련있고, 중국 민족관계의 안정성을 어필하려는 의도에 2008년과 2009년에 티벳과 신강에서 민족문제로 소동이 일어나면서 보통학술회의와 달리 특히 안전대책에 신경을 쓰는 회의가 됐다. 대회기간에는 곤명주변의 소수민족촌, 곤명민족박물관, 곤명민족원(園) 투어도 개최되어 주최자측에서 중국의 안정된 민족관계를 보여주려는 고심을 엿볼수 있었다. 회의참가자들에게 소수민족촌투어가 특히 인기가 있어 예약권이 일찍히 매진되는 바람에 나도 참가하고 싶었지만 가보지 못했다. 대회 마지막 날 이 지역의 소수민족복장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꽃을 들고 나타나기에 의아했는데 알고보니 해외에서 참가한 대회주석단 멤버들에게 꽃을 증정하기 위해서였다. 국제학술대회에서 꼭 이런 퍼포먼스를 해야 하는지, 왜서 소수민족이 이런 행사에 동원돼야 하는지, 이런면에서는 중국 소수민족의 한명인  나로서는 찹잡한 심정이었다.       봄의 도시 곤명의 이모저모 곤명은 중국 남부의 고원지대에 위치해있어 일년 사계절 봄같은 기후로 하여 봄의 도시(春城) 으로 불리우는데 소문그대로 1년중 제일 무더운 계절인 7월말에 방문했는데도 전혀 덥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차로 시내를 달려봐도 건물의 벽에서 에어컨을 찾기가 어려웠다. 여기서는 여름에도 대체 에어컨을 쓰지 않는다고 들었다. 곤명은 봄의 도시, 꽃의 도시로서 중국에서 유명한데 거리에는 꽃으로 장식된 화단이 많았다. 그런데 도시의 명성에 비하면 시내의 건물들이 아름답게 조화를 잘 이루지 못하고 중국의 도시중에서도 발전이 빠르다는 느낌을 주지 못했다. 운남성은 중국에서 내륙지역으로 분류되고 경제발전이 상대적으로 떨어진 지역이다. 곤명에서 들으니 운남성 경제에서  담배산업, 약재산업, 소수민족을 주제로 하는 관광산업의 비중이 아주 크다고 한다. 곤명이 중국에서 그렇게 발달된 도시는 아니었지만 시내를 다녀보면 중국경제의 활기띤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나로서는 특히 인상깊은 것이 하루 24시간 현금을 자동적으로 입출금할 수 있는 ATM가 아주 많아 돈관리가 쉽다는 점이다. 거의 모든 은행마다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같았다. 일본이 이런 면에서는 규제가 심해서 그런지 ATM도 24시간 사용할 수 있는 곳이 그리 많지 못하다. 돈흐름이 원활한만큰 중국의 경제활동이 왕성하다고 볼 수 있다. 곤명을 방문하여 제일 어려운 것이 음식이 잘 소화가 안 되는 것이었다. 중국 출신으로서 중국음식에 익숙한 편이었지만 곤명에서는 음식이 입에 맞지않고 잘 소화가 되지 않아 고생하다가 조선족이 경영하는 한식집을 찾아서 냉면을 먹었더니 그제야 몸이 정상상태로 되돌아왔다. 삼국지에 조조의 수십만 대군이 북방에서 남방으로 진군하다가 수토가 맞지 않아 전염병이 유행하면서 결과적으로 적벽에서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에 대패하는 얘기가 나오는데 역시 전혀 다른 수토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곤명에서 학술회의차 5박을 하면서 숙박했던 호텔과 대회장인 운남대학교 캠퍼스 사이를 걸어다녔는데 하나의 역사적인 건물이 눈에 띄었다. 그 것인즉 근대중국의 유명한 사관학교인 운남육군강무당(講武堂) 이다. 1909년에 설립된 이 사관학교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원수인 주덕(朱德), 엽검영(葉劍英)  등 저명한 군인들을 많이 배출했을 뿐만아니라 조선인민군 차수(次帥)칭호를 받았던 최용건장군, 베트남인민군 총사령관을 지낸 보 응웬 지압장군이 이 사관학교를 졸업했거나 관계가 있었다 한다. 그러기에 운남육군강무당 안내책자에 삼국의 최고군사지도자가 이 학교에서 나왔다고 자랑스레 소개하고 있었다. 나라가 크다는 것이 이런 식으로 여러가지 영향력을 지니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곤명 시내 외곽에 중국 제 6대 담수호로 알려져 있는 전지(滇池)가 있어서 찾아가 보았다. 약 300평방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호수가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경관이 빼어났다. 그런데 남조(藍藻)가 너무 생겨 호수물이 짙은 쪽빛으로 물들고 조류(藻類)가 둥둥떠다니는데가 이상한 냄새까지  풍기여 관광지로서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전지는 중국에서도 유명한 호수인데 80년대부터 주변에서 산업화가  급속하게 진척되고 호수를 메우는 개발이 많이 추진되면서 환경오염 문제가 심각해졌다고 한다. 전지주변을 살펴보니 공업용 오수가 정화되지 않은채 악취를 풍기면서 방치돼 있는 것이 보였다. 전지는 곤명의 음료수원으로 활용돼왔는데 오염이 심하여 2007년부터 여기 물을 쓰지 않게 되었다 한다. 중국의 급속한 산업화과정에서 생긴 환경오염의 그늘을 전지에서 목격하게 된 셈이다.           소수민족이 유난히 많은 지역 중국이 다민족국가로서 56개 민족이 있는데 운남성에만 26개 민족이 살고 있어 중국의 민족수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 중 15개 민족은 주요거주지가 운남성인 민족이다. 내가 참가한 국제인류학・민족학연합회의 국제대회도 이런 배경하에서 곤명에서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대회의 여가시간을 타서 운남성의 소수민족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곤명시에는 운남민족박물관이 있는데 소수민족을 특색으로한 박물관으로서 유명하다. 이 박물관에 가보니 이 지역 여러민족의 복장과 장식품, 소수민족언어로 쓰여진 문헌, 생활도구, 예술품들이 아주 소상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소수민족 복장 전시코너를 보니 복장이 다채다양한 것이 마치도 현대의 패션쇼에 내놓는 복장을 전시해놓은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중국 소수민족의 복장은 대체로 다채다양하고 장식품을 많이 사용하여 현대적 감각으로 봐도 패션성이 뛰어난다. 이 박물관을 견학하면서 운남성에 왜 소수민족이 많을 까 생각해보왔는데 지형이 복잡하고 기후가 다양하며 역사상 오래동안 중국 중앙정권의 영향력이 그리 미치지 않아 각 민족들이 주류민족에 동화됨이 없이 독자적인 생활권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운남민족박물관에서는 운남성 티벳족자치지역에 거주하는 티벳족 라마(活佛)를 만났는데 이 분이 자신이 창작한 탱화(佛畵)를 전시, 판매하고 있었다. 판매수입은 전액 가난한 아이들과 고아들의 교육사업에 투자한다는 것이었다. 탱화중에서도 특히 관심을 끈 것은 이 분이 제자들과 3년에 걸쳐서 제작했다는 넓이 3미터, 길이 1000미터에 가까운 세계최대의 탱화인데 이 탱화를 한번 둘러보면 티벳불교의 세계가 한눈에 들어온다. 중국에서는 막연하게 낙후한 지역으로 이해하는 티벳이 불교를 통해서 보면 그 풍부한 정신세계는 가히 놀라울 지경이다. 급속한 산업화와 물질적 풍요가 우선시되는 오늘의 중국에서 티벳불교는 인간에게 정신적 가치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하나의 등불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됐다. 곤명에는 운남민족박물관과 가까운 곳에 운남민족원(園)이라고 하는 면적이 약 120헥타르에 이르는 대규모의 민족테마파크가 있었다. 여기를 다 둘러보는데 하루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규모가 크고, 운남성에 살고있는 26개 민족의 마을을 조성하여 주택, 생활도구, 종교시설들을 실물크기와 같게 전시하였기에 운남의 소수민족을 이해하기에 아주 좋은 장소이었다. 여기서는 주로 소수민족이 안내를 하고 민속놀이가 상시적으로 열렸다. 그런데 나도 중국 소수민족이면서도 이 민족원을 견학하면서 한가지 중대한 오해를 하였다. 소수민족마을마다 전통주택이고, 소수민족안내자들이 전통복장을 입고 있기에 아직도 운남성에서는 소수민족들이 저런 식으로 살고 있을 까 했는데 알고보니 이런 일은 민족테마파크에서나 있지 이제는 소수민족도 거의다 현대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운남 소수민족과의 만남은 유네스코의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된 석림(石林)에서도 이어졌다. 석림은 국제사회에서도 잘 알려진 관광지인데 이 지역이 운남성 최대의 소수민족인 이족(彝族)의 자치현에 위치해있어 석림관광을 안내하는 가이드가 대부분 이족과 이족의 다른 갈래라고 하는 사니족들이었다. 평평한 고원지대에 불시에 땅속으로 꺼져들어간 협곡에 나타나는 석림의 자연경관은 더 말할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약 2억5천만년의 장구한 시간을 걸쳐 해저가 솟아오르면서 석회암의 고원을 만들고, 그 위에 화산폭팔에 의하여 쏟아진 현무암이 뒤덮이고, 빗물과 지표수, 지하수가 침식을 거듭해가면서 오늘의 석림이라는 자연걸작을 만들어냈다.      아무리 예술가들이 모여서 석회암을 깍아만든들 이렇게 천만가지로 조화를 이룬 경관을 만들어낼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자연의 오묘함에 새삼 감탄했다. 석림을 구경하면서 이족 가이드와 대화를 나누어보니 이들에게도 소수민족으로서의 비애가 있었다. 이족에게는 분명히 자기의 언어와 문자가 있는데 그 언어와 문자가 잘 계승안되어 안타깝다는 것이었다. 소수자가 제 정체성을 지키기 어려움은 이 세상 어디나 마찬가지이었다. 곤명에서의 5일간은 나에게 운남성의 소수민족의 다양성과 소수민족의 다양한 역사와 문화가 지니는 소중한 가치를 체험하는 여행이었다.                                              (2010년1월14일) 
28    생활속에서 체험하는 미국과 동아시아의 차이점 댓글:  조회:3625  추천:39  2011-01-13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보스턴통신(10)                 생활속에서 체험하는 미국과 동아시아의 차이점미국문화의 뿌리가 된 기독교미국에서 2년째 체류하면서 아직 미국사회 전체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가운데서도 동아시아와의 차이점을 많이 느끼게 된다. 미국에서 살면서 수선 깊은 인상을 받는 것이 여기가 기독교문화권이라는 점이다.  어느 도시나 시골마을을 가봐도 교회나 성당이 정말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지나가다가 건물이 정교하게 지어졌거나 장중한 느낌을 주기에 잘 살펴보면 대체 교회나 성당이다. 기독교는 미국인들의 생활의 중심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어 교회나 성당이 신앙생활의 장소만이 아니라 공동체활동의 장소로서도 많이 활용되고 있다. 최근에 뉴스를 보니 필자가 현재 살고 있는 매사추세츠주 신임주지사의 취임식도 교회에서 열렸다. 미국인들의 가치관, 공공도덕, 사회부조 등 정신, 문화적인 거의 모든 측면은 기독교와 관련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미국의 기독교문화를 바라보면서 동아시아 사회는 어떤 종교인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一神敎인 기독교와 달라 동아시아는 多神敎의 종교사회이다. 각 사회마다 전통적인 토착신앙을 바탕으로 불교를 받아들여 神佛이 융합된 종교문화를 형성하였다. 중국의 경우 도교와 불교, 조선의 경우 巫俗으로 대표되는 토속신앙과 불교, 일본의 경우 신도와 불교가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전통종교로서 자리잡고 근대사회에 들어서면서 서양에서 전해온 기독교가 새로운 종교로 뿌리내렸다. 그 때문에 외견상으로는 동아시아의 종교가 다양하면서도 잡다해보이고 서양인들의 눈으로는 도대체 무슨 종교를 믿는지 헷갈릴 수 있다. 일본인들이 아이가 태어나면 신사에 가서 기원을 하고, 결혼식은 교회에서 하고 장례식은 불교식으로 하는 풍습이 동아시아인들의 다신교적인 정신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다.기독교와 동아시아의 전통종교의 외견상의 차이점이 하나 뚜렸하게 나타난다. 동아시아의 자연속에서는 허다한, 크고작은 종교시설이나 숭배물을 볼수 있는데 기독교문화권에서는 그런 것을 자연속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니 명산대천을 찾아봐도 손쉽게 기원할 수 있는 장소가 없다.     생활속에서 기독교문화와 관련을 제일 느끼는 것이  일요일이다. 일요일에 휴식을 취하는 것이 기독교문화권의 굳은 관습이 되었기에 공공시설이나 규모가 큰 상업시설들을 제외하면 대체 일요일에는 휴업을 한다. 거기에 비하면 동아시아에서는 일요일에는 꼭 휴식을 취한다는 의식이 그리 강하지 못하여 일요일에도 아글타글 일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기에 일요일은 기독교문화가 인간에게 가져다준 축복이라 할 수 있다.미국의 역사도시인 보스턴에서 살다보면 도시속에서 묘지를 자주 보게 되는데 유래가 깊은 묘지는 관광명소로 활용되고 있다. 미국에서 묘지가 사람들의 거주지와 가까운데 있는 것은 역시 기독교와 관계된다고 볼 수 있다. 서양의 전통사회에서는 교회가 묘지를 관리하고 대체 교회의 부지내에 묘소가 설치되었다. 그런관계로 묘지가 사람들의 생활공간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있다. 이런 점이 동아시아에서는 일본과 비슷하다. 일본의 경우, 사람이 사망하면 화장하여 사찰의 묘지에 납골하는 것이 관습인데 사찰이 거주지에 많이 자리잡고 있다니 자연히 묘지가 살아있는 인간과 가까이 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이나 조선에서 묘지를 사람들의 생활공간과 떨어진 곳에 쓰는 것과 많이 다른 현상이다. 죽으면 북망산으로 간다는 속담이 있다싶이 중국과 조선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일단 살아있는 사람들의 공간을 떠나는데 서양과 일본은 이면에서는 다른 것 같다. 애완견과 말하기 좋아하는 국민성  미국에 와서 또 하나 인상이 깊은 것이 애완견문화이다. 서양인들이 개를 많이 기르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애완견의 품종이 너무나도 많아 별의별 모양의 개를 다 볼 수 있을 때는 사실 놀라웠다. 주택가의 거리나 공원에 가보면 산책하는 사람들이 개를 거느리지 않은 경우가 오히려 드물다. 개가 귀엽게 생겨서 찬찬히 쳐다보거나 좋다는 말을 건네면 주인들도 아주 기뻐한다. 개를 위한 전용공원이 별도로 있고 직장에 개를 데리고 나오는 경우도 보게 된다. 이런 애완견문화이다보면 동양에서 개고기를 먹는 풍습이 혐오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미국인들의 파티에 참가하거나 공공장소에 가보면 굉장히 말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이 느껴진다. 어느 민족이나 수다스러운 면이야 다 있겠지만 미국인들의 파티에 가보면 음식을 먹으러 간다고 보기보다 대화를 나누러 간다고 할 정도로 말을 많이 한다. 필자가 가끔 찾아가는 이발소에서도 종업원과 손님 사이의 대화가 활발하여 머리를 깍는 사이에도 중얼중얼하는 말소리가 끊기질 않는다. 미국에서는 정치가들이 기본으로 갖추어야 할 소양으로서 스피치능력과 대중에 대한 호소력이다. 말하기 좋아하는 풍토가 이런 정치문화를 키우는 것으로 이해된다.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인들이 비교적 말을 많이 하는 편이다. 식사때도 말을 제일 많이 하는 것이 중국인들이다. 일본인들은 공공장소에서 말을 잘 안하는 편이다. 침묵은 금이라는 명언이 일본에서 널리 통용되다싶이 일본인들은 공공장소에서 수다스럽지 않다. 지나치게 수다스러우면 분수가 없거나 남에게 배려할 줄 모르는 인간으로 취급된다. 아마 주변을 많이 의식하고 인내를 강조하는 문화속에서 생기는 행동패턴인 것 같다. 필자는 일본의 지방도시에 살면서 고속버스로 도쿄에 자주 다녔는데 버스가 수시간 이상 달리는 사이에도 승객들은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음악을 듣거나 혼자서 생각에 잠긴다. 그런 분위기속에서 누가 수다를 떨면 환영을 받지 못한다. 조선인들은 성격이 활달한 편이지만 체면의식이 강하여 모르는 사람사이에서는 대화가 적은 편이다. 이런 차이점이 있다해도 미국인들과 비교해보면 동아시아인들은 전체적으로 말수가 적어보이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느낌을 준다. 공중욕장과 섬세함 감각미국에서 살다보면 공중욕장이나 사우나, 온천같은 곳을 찾기가 힘들다. 혹간 사우나가 있다해도 동아시아 사람들이 많이 모여사는 지역에 오픈 한 것이다. 그러기에 동아시아에서 이런 생활에 습관되다가 미국에 오면 상당히 불편한 감을 느끼게 된다. 왜서 일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미국인들은 제몸씻는 행위를 남들과 공유하기 싫어하는 것 같다. 서양에서는 기독교의 가치관에 의하여 욕장에서 몸씻는 행위를 오래동안 퇴폐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왔다고 한다. 서양인들이 근대초기에 일본을 방문하여 제일 야만스럽게 여긴것이 일본에서 남녀가 온천에서 거의 알몸으로 혼욕을 한다는 것이였다. 이런 문화가 남아있어서인지 공중욕장은 미국에서 발달하지 않았다.이런 미국의 환경에 있다보면 따분하게 느껴질 때가 많아 동아시아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술좌석을 즐기고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고 사우나에 가서 땀을 흠뻑 흘리는 그런 생활이 그립기도 하면서 또 그런 생활방식이 어딘가 속된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미국에서 서비스업종에 일하는 사람가운데 아시아인들을 자주 보게 된다. 서비스분야에서 보면 백인이나 흑인들은 대체 감각이 그리 섬세하지 못하고 어딘가 좀 거칠어 보인다. 거기에 비하면 아시아인들은 섬세하고 영리해보인다. 그리고 부지런함도 돋보인다. 아시아인들이 정교한 제품을 잘 만들어내고 현대 제조업의 중심이 아시아로 옮겨가는 것도 이런 국민성과 관계가 있지 않을 까 생각해본다.                                                                         (2011년1월11일)
27    우리 모두의 문제로서의 김 문학 댓글:  조회:5497  추천:37  2010-10-09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보스턴통신(9)                 벌거숭이 김문학-<김문학 解體新書>(5)                                       7. 우리 모두의 문제로서의 김 문학     지금까지 4회에 걸친 연재를 통하여 김 문학 저서의 대체적인 내용과 그런 저서들의 문화적, 사회적 의미를 분석하였고, 그런 과정에서 김 문학의 인간적인을 모습을 불가피하게 많이 드러냈다. 또 김 문학에 대한 비판과 지지가 어떻게 나왔는가 하는 점도 어느 정도 짚어봤다. 마지막으로 동아시아 국경을 넘나들면서 문필활동하는 김 문학의 모습에서 관찰되는 조선족 사회와 관계되는 문제들을 분석해보고 싶다.   필자가 이 연재의 첫 시작에서 김 문학은 조선족의 국제화의 제일 상징적인 면도 보여주고 있다고 적었는데 이 점은 확실하다. 1991년에 일본에 유학하고 대체 97년 경부터 일본에서 왕성한 문필활동을 하면서 일본, 한국, 중국의 국경을 넘나들면서 이 세나라에서 적지 않은 책들을 출판했다. 그런 문필활동 외에 어떤 사회적 공헌을 했는지 필자도 잘 모르나 문필활동을 통하여 동아시아 국경을 비교적 자유롭게 넘나들었다는 것은 김 문학의 인간적인 재능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고, 중한일 3개국어를 알고 있다는 점이 절대적으로 유리했던 것이다. 김 문학이 중일한 3개국어를 구사하면서 동아시아 삼국에서 문필활동을 한 것은 조선족 전체에 잠재하고 있는 언어적인 가능성, 국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고 말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김 문학은 조선족이 동아시아의 국제사회에서 어떤 잠재적인 가능성이 있는가 하는 점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었으며 이런 면에서의 김 문학의 선구적인 역할은 존중받아야 하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야 할 점이다.   그리고 김 문학이 문필활동에서 보여주고 있는 장인정신, 또는 프로정신, 즉  본인이 얘기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글로서 승부한다는 것인데 그 때문에 그는 항상 글쓰기에 精進해왔고, 지금까지 다수의 저서를  동아시아 삼 국에서 출판했고, 내용의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수량상에서는 조선족 지식인중에서 누구도 초과하기 힘들 정도의  수십권의 저서를 내놓았다. 이 점에서는 김 문학이 필자도 포함하는 조선족 지식인, 특히는 문필활동을 하는 분들이 본받을 점이라고 솔직히 말하고 싶다. 김 문학의 문필활동에서의 장인정신 또는 프로정신은 일본문인들에게서 많이 보이는 특징이기도 한데 김 문학이 일본에 유학하면서 배운 점이라 생각하며 조선족 문인들도 이런 점은 일본에서 배우자고 말하고 싶다.     김 문학의 장점을 더 들어보면 이 연재의 「김 문학은 누구인가」의 장에서 이미 언급하다싶이《벌거숭이3국지-일중한삼국비교문화론》,《일본인 중국인 한국인-신동양삼국비교문화론》, 《섬나라근성 대륙근성 반도근성》등 동아시아비교문화론 몇권은 동아시아 삼국에 대한 비교문화론이 상대적으로 적기에 특이한 존재로서 주목받는 면이 있고 일부 유명한 문화인들이 평가해주기도 한다.  꼭 엄밀한 의미의 학술저서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김 문학의 지금까지의 문필활동에서 긍적적인 평가를 받고 문화인으로 명성을 남길수 있는 것도 이런 부류의 책들이라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장점을 말하던 김에 한마디 더 하면 김 문학은 동아시아 삼국에서 책을 내면서 이런 나라들의 출판계와 두루 인연을 맺어왔고 상업성적, 또는 문화적인 저서들은 어떻게 출판을 기획하고 상품판매를 하는지 이런 노하우를 많이 익혔고, 동아시아 삼국의 출판계, 문화계를 이어놓을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은 김 문학의 인간적인 귀중한 재산이라 평가하고 싶다.    조선족 전체와 관련하여 김 문학에게서 어떤 점이 더 보이는가?   여러가지가 더 보이는데 수선 김 문학이 여지껏 제일 자랑하고 다닌 동아시아 삼국에 정통했다는 점에 오히려 맹점이 보이고 이것은 조선족 전체가 반성해보아야 할 점이다. 김 문학은 본인이 쓰는 동아시아비교문화론 또 기타 부류의 책들에서 중국, 한국, 일본의 문화는 거의 다 정통하다 싶이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책들을 잘 살펴보면 김 문학이 오히려 일본외에는 한국과 중국을 제대로 모르지 않는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김 문학의 한국비판서  《한국국민에 고한다!-일본거주 한국계중국인의 통곡의조국비판》,《또 다시 한국국민에게 고한다! -반일이라는 어리광을 그만닥치라》등 책이 진짜 한국을 잘 알고 썼다고 보기 정말 힘들다. 책 속의 내용을 보아도 김 문학의 한국체험이란 입국심사때 불유쾌했다거나, 택시를 탔는데 대하는 태도가 거치르더라거나 하는 자기체험은 극히 제한된 것이고 그 다음은 일본속에서 한국꼬집기를 한 글이거나 한국내에서 한국의 이런 점을 고쳐야된다고 하는 글, 또는 어두운 면을 지적한 글 등을 모아서 한국비판서로서 출판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조선족출신 작가 김 재국이 쓴 《한국은 없다》는 본인이 한국의 실제 체험에 근거하여 썼기에 리얼한 감이 있는데 김 문학의 한국비판서는 그런 리얼한 감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한국비판을 한다는 목표의식을 가지고 여기저기서 뼈껴다 취합했구나 하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정작 한국인들은 이런 책들을 보고 화도 나지만 조선족으로 한국을 너무 몰라서 그러는구나하여  진짜 한국인이 일본에서 이런 책을 쓰기보다 너그럽게 생각해주는 면이 있다.   그러면 여기저기서 취합하기 전의 김 문학의 한국이해란 어떤 것일까? 이런 면에서는 동세대의 다수의 조선족과 비슷한 수준이 아닐까?  중국에서 태어나서 오래동안  한국과 직접 접촉한 것도 아니고 중국에서 조선족으로 자라면서 조선족으로서 인식하는 조선이해, 중국의 남조선인식, 북조선의 남조선인식에서 월등히 벗어난 것이 없고 일본에 가서는 일본속의 긍정적인 한국론보다 소위 嫌韓론이라 불리우는 부정적인 한국론을 한국에 대한 지 식으로서 더 많이 접했을 수 있다. 일본에 있으면서 최근에는 한국에 자주 다닐 수 있으나 한국비판서들을 쓸 무렵에는 한국에 갈 기회가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실제적인 한국체험이 별로 없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비판서만이 아니라 한국문화론도 여기서 일일히 논거를 다 들 여유가 없는데 어떤 내용들을 보면 李 御寧선생의 한국문화론에서 차용한 것 같아 보인다. 상대적으로 한국문화에 대한 독창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럼 중국문화론은 어떤가? 김 문학의 중국문화론은 내용상에서 중국문화의 부정적인 또는 어두운 면을 많이 다루고 있다. 《반문화 지향의 중국인》, 《훈 (混)의 중국인-일본인이 모르는 행동원리의 심층》이라는 제목 에서 나타나다싶이 김 문학의 중국문화론에서는 중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안 생긴다. 《일중비교愚劣론-동아시아의 내분을「超克」하는 방법》에서는 이미 이 연재의 「김 문학이 욕 먹는 이유」의 장에서 언급했지만, 일본문화에 대해서는 거의 性善論적 인식에 가깝게, 중국, 한국의 문화에 대해서는 거의 性惡論적 인식에 가깝게 비교했다. 간단히 구체 사례를 든다면, 김 문학의 《일중비교愚劣론-동아시아의 내분을「超克」하는 방법》의 「제3장 일중비교우렬론」에서 「정직한 일본인과 사기적인 중국인,자기반성적인 일본인과 남의 탓만 하는 중국인,중국의 반문명의 전통적체질,(중국의)평화보다 전쟁을 선호하는 국민성,대륙적 호전성,(중국의)內訌과 自害의 역사」등 분석을 보면 과연 김 문학이 중국문화에 대하여 제대로 알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원래 사회의 어두움 면을 들어내기 좋아하니 그럴까 하기도 생각하나 일본에 대해서는 좋은 점만 많이 얘기하는 것을 보면 결국 그런 것도 아니다. 일본에서 중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하여 중국을 싫어하는 보수적인 독자들을 상대로 책을 많이 파려는 商術적인 요소가 충분히 있지만 다른 면에서는 아무래도 중국문화의 깊이를 그리 잘 이해하고 있지 않는 것 같고 피상적인 면에서의 중국의 상대적으로 낙후한 모습을 중국문화로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인식에서는 4000년의 찬란한 문화대국의 모습도 나오지 않고 현대중국의 생기발랄한 문화도 표현해내지 못하고 있다.   김 문학에게서 보이는 이런 점은 결국 우리 조선족의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약점이라 생각된다. 연변같은 지역에서 조선어로 교육받은 사람은 조선어는 잘하나 상대적으로 중국어가 약 할때가 많고 중국문화의 깊이를 그렇게 잘 모르는 경우도 많다. 한족지역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사람은 한어를 잘 하고 중국문화에 친숙하나 또 조선어를 잘 모르고 조선반도의 역사나 문화에 어두울 수 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개혁개방이전까지 중국의 조선족은 한국사회를 그리 잘 알지 못했다. 이러고 보면 조선어, 중국어를 다 알고 있어도, 조선반도에 대해서도, 중국에 대해서도 너무 잘 알지 못하는 약점을 많은 조선족들이 가지고 있을 수 있다. 필자도 일본에서 대학교수를 한다지만 한국문화를 한국인 이상으로 안다고 자신하기 어렵고, 중국문화에는 아직도 모르는게 너무 많다. 이러고 보면 본인들이 상당히 노력하지 않으면 중국문화, 조선문화 어느 쪽도 반중건중으로 이해하고 말 가능성 이 있다. 조선족이 조선어, 중국어를 알고 일본어도 아는 사람이 많지만 중한일 삼국을 다 정통했다고 자만할 수만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언어는 두루 통하지만 각 나라의 문화에 대해서는 주변인으로서의 인식에 머물러 심층까지 잘 모르고 지날 수 있다.    김 문학 본인은 항상 중일한 삼국문화를 정통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객관적으로 볼 때는 삼국을 두루 아우르면서 비교하는것은 신선한 감이 있지만 깊이가 그리 보이지 않고 여기저기 남들의 글을 취합해놓은 것이 많구나 하는 인상을 주는 것이 바로 이런 약점에서 오는 것 같다. 이러기에 너무쉽게 동아시아 삼국을 다 안다고 하지 말고 허심하게 동아시아의 서로 다른 문화를 배울 필요가 있다. 필자도 한국이 자기의 모국이지만 찾아갈 때마다 이런 것도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점이 많다. 필자의 한국이해는 아마 한국에 수년이상씩 체류한 조선족들보다 못한 곳이 많다. 그러니 조선족한테는 사실 동아시아 삼국의 문화가 어느 쪽도 이문화라고 생각하고 너무 안이한 자세로 대하지 말하야 한다. 그 다음 김 문학을 조선족 전체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김 문학이 잘 얘기하는 越境, 즉 국경넘기가 아직도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언어가 통하니 동아시아 삼국의 어느나라도 제집처럼 드나들수 있는가 생각하면 그리 쉬운 것도 아니고 각 나라에서 인정받도 성공하자면 각 나라의 현실에 맞추어야 하거나 타협을 해야 할 때가 많다. 이런 때 각자의 신념이나 지조가 튼튼하지 못하면 여기저기서 그 사회의 현실에만 영합하고 그 속에서 자기의 실리만 채우는 아름답지 못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김 문학이 일본에서 한국과 중국 비판서를 많이 낸 것은 틀림없이 일본의 보수적이고 嫌韓, 嫌華 감정에 영합하여 책을 쉽게 내고 많이 팔자는데 기본동기가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또 한국에서는 중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책, 중국에서는 한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책, 최근에는 중국에서 《新丑陋的日本人》이라는 책도 내는 것을 보면 김 문학은 실지는 동아시아 삼국의 어느 나라에도 충성심이 거의 없는 것 같고, 국경을 넘어다니면서 책이나 많이 내고 많 파는 일에 열중하는 모습이 오히려 참모습같아 보인다. 이런 김 문학의 모습을 보면서 필자도 그럼 나는 100% 그렇지 않는냐 하면 거기에는 말문이 막힌다. 필자에게도 잘 생각해보면 그런 면이 없을 수 없다. 중국 조선족은  중국에서 소수민족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조선반도에 모국이 있고 지리적으로도 가깝기에 혈연적, 문화적, 역사의식적인 연대를 줄곧 유지하고 있다. 중한수교이후에는 그 관계가 더 깊어지고 있고, 국적과는 별도로 의식속에서는 중국과 한국(조선도 포함하여)을 다 조국정도로 생각하는 조선족도 상당히 많을 것이다. 일본과는 해방전에 36년간이나 식민통치를 받았기에 좋던 그르던 관계가 깊었고 중국의 개혁개방후에 수만명 정도의 조선족이 일본으로 유학하고 진출하면서 일본과 조선족과의 관계를 깊게 하고 있다. 이러고 보면 중한(조)일 삼개국을 서로 비슷하게 모국정도로 생각하는 조선족도 확실히 늘아나고 있다.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 진출하는 조선족도 많으니 이제는 조선족의 정체성은 한마디로 규정하기도 어렵게 됐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아무리 국제화시대라해도 국가와 민족의 장벽은 여전히 남아있으며 조선족은 중국, 한국, 일본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도 아직은 소수집단이고 어디서도 주류사회를 흔들만한 영향력은 가지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더 현실과 타협을 해야 하고 그 사회에 맞추어 살지 않으면 힘들수 있다. 이러는 과정에서 각자의 신념이나 지조가 튼튼하지 못하면 지나치게 그 사회에 타협하려 하고 영합도 하려하는 과정에서 주체성을 상실할 수 있다. 조선족이 언어나 문화적인 면에서 동아시아 국경을 넘기 쉬운 반면에  의식적으로 극복하지 않으면 이런 주체성상실이 찾아올 수 있고, 이런 현상이 보편화되면 동아시아, 또는 더 너른 국제사회에서 조선족은 실리나 잘 챙기고 어느 나라에서도 충성심도 시민의식이 없는 집단으로 이해될 가능성이 있다. 양날의 칼이라고 조선족이 월경하기 쉬운 면과 그 이면에 주체성을 잃어버리기 쉬운 면, 양 측면을 잘 이해하고 각자의 신념과 지조를 튼튼히 세울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알고 보면 김 문학의 소위 친일언행도 이런 문제와 관계된다고 생각한다. 원래 일본을 좋아하고 일본문화에 심취하는 것은 사실이나 일본의 철저한 우익적인 사상을 김 문학이 마음깊이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본에 유학하면서 문필활동을 좋아하고 책을 많이 내보려는 과정에서 한국에서 중국문화를 부정적으로 묘사한 책을 내고, 한국을 비판하는 책을 내니 일본의 보수적인 성향의 출판사에서 관심을 가진 것 같고 (혹은 한국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선을 나준것 같아 보인다) 그런 출판사와 서로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에서 한국비판서가 일본에서는 잘 나가고 반응이 좋고 그래서 속편도 만들어 낸 것이라 추측한다. 그런 연장선에서 중국비판서도 여러권 냈다고 할 수 있다. 비판이 과격하여 사회에서 화제를 모을 것을 고려하면서 그 정도까지 나가는 것은 솔직히 조선민족으로서도, 중국인으로서도 양심을 어기고 양측 민족의 질책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가볍게 생각하면서 그런 방향으로 대담하게 나간 것으로 보인다. 물론 김 문학도 무모한 사람은 아니니 중국비판이 적정수준을 넘기전에 일본국적을 취득한 것이 아닐 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문필활동을 좋아하고 저서를 많이 내는데 승부심이 강한 김 문학이 그런데 너무 집착하면서 일본사회에서 상대적으로 강해보이는 보수층에 영합해가고 그런 사람들의 지지, 후원속에 한국, 중국비판을 꺼리낌없이 해가고 종국에는 일본의 한국지배, 중국침략문제에서도 어찌 저런 발언이 김 문학한테서 나오는가 의심이 들 정도로 마구 나왔다. 어찌보면 책을 빨리내고 많이 내는데 너무 빠져버리지 않았는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다보니 본인이 걷고  있는 길이 잘 보이지 않았을 수 있다. 필자가 김 문학에 관한 연재를 하면서 올라온  댓글을 보니 「이 사람이 자기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다」는 의견이 있었다. 필자의 이 연재가 김 문학에게 귀과 아프고 마음이 아픈 내용들이 많이 들어있겠으나 그 때문에 김 문학이 자기를 성찰해보고 인생의 다음 단계에서 문필활동이 보다 성숙되고 긴 안목에서 보면 그런 성찰이 있었기에 김 문학 자신이 몇단계 업그레드 됐다고 생각한다면 필자도 공연히 김 문학에게 나쁜 짓만 안했다고 위안을 얻겠다. 김 문학의 친일언행에 대해서 조선족 지식인들에게 건의를 드리고 싶다. 조선족 지식인이면 거의 누구나 그의 친일발언의 소상한 내용을 알게되면 기분이 상하고 분노를 느끼게 되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김 문학의 이런 발언들이 나온 배경을 보면 그가 일본의 우익사상가로도 보이지 않고, 단지 책을 많이 내고 많이 팔려는 과정에서 나온 것 같아 보인다. 혹시 초기에 한국,중국에 대한 책들을 내면서 보수적인 출판사들과 관계를 잘 못 맺아 본인의 의사가 아닌데도 출판사나 주변의 보수적인 인사들의 권유, 또는 강압에 의해 단지 이름을 빌려주는 형식으로 그런 책들을 냈을 가능성도 100% 부정 못한다. 일본출판계에는 필요에 따라 代筆이라는 현상도 꽤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면 그의 인간적으로 아름답지 못한 모습은 비난받아 마땅하나 너무 무게있는 정치적기준으로 이 문제를 고려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나와서 매도하는 것은 상책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각자의 역사관과 민족의식에 맞추어 개인적인 감정표시 정도에 머무르는 것이 필자로서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너무 조선족지식인 사회가 집단으로 나서서 이런 문제에 대응하면 국제화시대에 외부세계에서는 이상해 보이고 조선족 지식인 사회의 건전한 발전에도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친일파이요, 한간이요 하는 통상적인 개념도 본인이 일본국민이 되었을 때에는 의미가 없는 용어가 된다. 어디까지나 조선민족, 중국인일때 이런 개념도 성립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연재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필자가 조선족 지식인 사이에서 진행된 김 문학논쟁에 참여하게 된 동기를 솔직하게 얘기드리겠다. 필자는 1986년에 중국의 동북사범대학 일본학과를 졸업했는데 일본어학과의 1년 선배가 김 문학이었다. 대학교 재학시 같은 외국어학부의 조선족학생들의 모임에서 몇번 정도 같이 참가했던 기억이 있고, 그외에 더 깊은 접촉은 없었던 것으로 생각난다. 단편적인 기억을 더듬어보면 한번 김 문학의 침실에 일본의 작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소설이 보이기에 아 소설읽기를 좋아하구나 생각했고, 한번은 학과의 게시판에서 김 문학이 조선어로 쓴 나무의 年輪을 보고 착상해서 쓴 짧고 아름다운 시가 보이기에 혹시 김문학이 장래 윤동주같은 시인이 되지 않을 까 생각해보았다. 서로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연락도 없이 지냈것으로 기억하는데 1992년쯤인가 김 문학한테서 전화가 와서 일본교토에 유학왔다하고 연락와서 기회가 있을 때 서로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아마 필자가 재일한국인교수 김 양기선생과 접촉이 있었고, 김 문학이 일본에 가기전에 김 양기선생의 책 한권을 중국에서 번역하면서 필자의 연락처도 알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1998년에 김 문학이 일본에서 한국에서도《벌거숭이3국지-일중한삼국비교문화론》을 출판했다는 소문을 듣고나서  마침 동경에서 활동하던 조선족단체 「천지클럽」(후에 「천지협회」로 개명)에서 필자의 제안으로 중국조선족의 국제사회에서의 성공모델을 소개듣는 자리를 마련하여 그런 성공모델의 강사로서 김 문학과 중국에서 일본에 연구차 나와있던 다른 두명의 조선족 교수를 청하였다. 그러고나서 김 문학에게 갚음을 해주느라고 이틑날 동경시내관광을 안내해주었다. 그 후로는 연말이면 연하장을 주고받거나 김 문학한테서 전화로 연락이 올 때가 있었고, 어느 때인가 히로시마에서 동경에 왔다가 필자와의 관계로 재일연변대학학우회의 술모임에 잠깐 들렀다가 간적이 있었다. 그후 김 문학이 새로 낸 책 두권 정도를 출판사를 통하여 필자에게 보내준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2002년쯤인것으로 생각되는데 김 문학이 일본에서 《또 다시 한국국민에게 고한다! -반일이라는 어리광을 그만닥치라》라는 책을 서점에서 발견하여 잠깐 펼쳐보다가 전체적인 내용이 한국을 상당히 부정적인 것도 있었지만 일본식민지지배를 전면긍정하는 것 같은 내용이 들어있고, 특히 안 중근의 우상을 한국에서 해체해야 한다는 내용을 읽어봤을 때는 일순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이 사람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내용까지 쓰는가? 정말이지 서점에서 이 책을 내던지고 싶은  충동도 느꼈다. 이미 그 이전에 《한국국민에 고한다!-일본거주 한국계중국인의 통곡의 조국비판》도 읽어봤는데 전체적으로 지나치게 한국의 허물을 캐내는 책이었기에 읽고서 기분은 좋지 않았다. 그 때부터 김 문학이한테서 연락이 와도 필자가 소극적으로 대하면서 점점 연락이 끊겨 이제 거의 10년은 만난 것 같지 않다.   조글로에서 김 문학의 옹호론을 열심히 펴는 사람이, 누가 김 문학을 비판하면 김 관웅교수던 필자인던 마구 공격에 나서는데, 이 사람이 김 관웅교수를 비판하는 글에 「애족자의 허울을 쓰고 자신이 눈에 거스리는 사람들을 전부 걸고 넘어지려드는 행위」라는 표현을 사용하던데 필자가 일본에서 10여년을 살아왔는데도 안 중근을 우매한 인간으로 내리깍는 김 문학의 글을 읽고나서 분노를 느낀 것이 사실인 것을 보면 필부에게도 애족심은 있는 것이 거짓말이 아니다. 오늘 이때까지 김 문학의 친일언행이 수많이 조그로에서 공개됐는데도 김 문학의 친일언행에는 한사코 외면하려하고 김 관웅교수나 필자한테 공격을 서슴치 않은 이 사람이 과연 한국이나 중국에서 살 필요가 있는 사람인지 의문마저 든다. 최저의 애족애국심도 없다면 그런 나라에 살 필요가 무엇이 있는가, 허울로는 조선족이요, 한민족이요 하면서 말이다.       필자는 작년 11월경부터 조글로에 미국에서의 소감을 적은 글을 연재하면서 가끔 중국내의 조선족 소식도 체크해보고 다른 분들의 글도 읽어보고 있다. 그러다가 금년 3월부터 김 문학이 조글로에 등장하여 제일먼저 안 증근의사에 대하여 연재하고 그 다음 조선족에 관한 글과 100년전의 동아시아를 발견해보는 글을 연재했는데 안 중근에 대하여 아주 좋게 평가하는데 대하여 의아하여 일본에서는 안 중근을 내리깍던 사람이 이제는 180도 평가가 봐뀌는가하면서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더이상 의견을 제출한 것도 아니고 가끔가다 김 문학의 글을 읽어봤는데 사실 조선족을 논하는 글은 기분이 좋은 것이 아니었다. 구조선족,신조선족이라는 이런 개념이 왜서 필요한지도 모르겠고, 가끔가다가 연변의 김문학비판자들에 대한 공격, 또는 비아냥이 새어나오고 자기자랑도 눈에 띄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거의 10년전에도《조선족대개조론》이라는 것을 내놓으면서  조선족 지식인 사회에 찬반양론으로 불화를 조성하더니 이번에도 조짐은 좋지 않구나 하고 생각했다. 《조선족대개조론》의 경우를 보면 본인이 처음부터 의식하는지는 몰라도 결과적으로 조선족 지식인 사회를 어느 정도 시끄럽게 만들고 분열도 조성하는 면이 있었다. 그 이유는 조선족 사회에 대한 깊은 조사나 분석이 없이 생각을 마구 쏟아내고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지는 자세가 없기때문이다. 본인이 조선족사회에 던진 화제로 논쟁이 생기면 본인도 여러가지 설명을 해가면서 타협점을 찾아보도록 하기보다 던져준 화제를 가지고  조선족 사이에서 옥신각신하는 사이 정작 본인은 일본에서 다른 창작활동에 열중하면서 제 책내기에 바빴다. 그러면 찬반양론이 생기는 자체가 오히려 이상하다. 이번에도 조선족론을 펼치면서 정작 본인이 현재 어떤 국적을 가지고 있는지 이런 기본상황에 대해 설명하면 시작부터 정직해보이고 본인도 할말 안할 말 가려하겠는데 그런 절차가 없이 시작하니 내용이 헸갈릴 때가 많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도 필자는 미국에서 자기 공부가 바쁘니 조글로에 원고를 제때에 보내지 못하고, 조글로에 들어와 보지 않은 기간도 꽤 있었다. 그러다가 금년 8월부터 조글로에서 어느 사람이 김 문학에 대한 열띤 변 호를 자주 하기에 차차 그 변호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관심을 가지면서 김 관웅교수가 중국조선족문화통신에서 김 문학비판을 하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필자가 일본에 오래동안 있었다하여 김 문학의 저술활동의 내용을 소 상하게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니여서 사실말이지《친일파중국인에 의한 참을수 없는 일본질책론-「반일」에 미친 중국,「우호」를 구걸하는 일본》이라는 책이 2004년에 김 문학에 의하여 일본에서 출판된 사실도 처음으로 알았다. 생각을 바꾸어보면 이런 책들이 일본에서도 별로 화제를 모으지 못하여 필자도 전혀 들은봐가 없었던 것이다. 조글로에서 김 문학을 옹호하는 사람의 글이 빈번하게 올라오면서 차차  그런 글에 댓글형식으로 비판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특히 8월21일에 「김 문학 비판과 죽이기」라는 글이 올라온 것을 보고나서 분노가 치밀어 올았다, 김 문학이가 분명히 일본에서 욕먹을 책을 적지 않게 쓴 것으로 아는데 어찌 조선족사회에 나와서 이렇게도 당당하며, 그것도 조선족 사회를 시끄럽게 만들 글을 마구 쏟아내고, 그런데가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변호에 나오는 사람도 있단 말인가? 그 때문에 참지 못하여 그 사람의 글에 댓들도 달았다. 그 직전부터 이 사람의 김 문학옹호론에 반대의견을 표시하는 댓글이 많이 나타났다.   그러다가 이런 형식으로는 서로 의견이 평행선만 달리겠다 생각하여 조선족 지식인들이 김 문학의 저술활동, 특히는 일본에서 하는 저술활동의 전체적인 상황을 알고나서 서로 빗나가지 않고 초점에 맞춘 논쟁이 필요하겠다 생각하여 일본어판 아마존닷컴에서 찾아보니 김 문학의 일본어저서는 대체 다 소개가 올라와 있었기에 그것을 년대별로 표제사진을 올리고 제목과,출판사, 출판년도 등을 번역하여 조글로의 필자의 미니홈형식으로 올렸다. 이렀게 함으로서 김 문학의 일본어저서의 대체적인 상황은 알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댓글이 많이 올라오고 반응이 좋았지만 표제사진까지 올린 것이 저작권침해에 해당하지 않는지 하는 우려가 있었고, 아무래도 대학교 1년 선배되는 분의 찬반양론에 깊게 개입하는것이 좋을 것 같지 않아서 약간한 설명을 한후에 조글로에서 내렸다.   그랬더니 생각 외로 조글로에서 김 문학옹호론을 열심히 펴는 사람이 필자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소신이 부족하다고 비난하는 글을 올리고 그 글을 미국의 어느 조선족 사이트에서 옮겨가서 거기서도 일시적으로 필자를 기회주의자다. 이게 학자양반들의 진모습이다, 자신이 없어서 그런다 하고 욕설도 꽤 퍼부었다. 김 문학 본인도 김 관웅선생을 비판하는 글에서 필자가 자라목을 움추러드리듯이 숨어들었다는 표현으로 비난했다. 필자가 김 문학에 대한 배려가 있어서 그만두었다고는 왜 생각못하는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도 김 문학을 둘러싼 논쟁이 좀처럼 사라지는 모양이 없이 조글로와 중국조선족문화통신, 그리고 정면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미국의 어느 조선족 사이트에서 끈질기게 지속됐다. 그래서 필자가 생각한 것이 조선족 지식인들이 할 일도 많은데 언제까지 김 문학논쟁으로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 반목해야 하는가? 이런 논쟁이 생기게 되는 원인은 근본적으로 김 문학에게 있지 않는가? 처음부터 조선족 사회에 진솔한 마음으로 다가오고 자신을 과대포장한 이미지로 나타내지 않고, 겸허한 자세를 보여주었더라면 이렇게 부질없는 논쟁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많이 생각해보다 필자가 일본에 오랜 생활해왔으니 일본의 상황에도 익숙하여 한번 마음먹고 조선족 지식인 사회에 김 문학의 진실한 모습을 알려주자고 결심했다. 진실한 모습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과대포장된  허상이 드러날수 있고 허물도 드러날 수 있으나 김 문학의 실상을 제대로 아는 것이 잘 모르면서 마구 치켜세우거나 또 방향이 꼭 정확하지 않은 비판을 하면서 조선족 지식인 사회가 서로 시간을 소모하고 반목하기보다 더 생산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약간의 준비를 거쳐 9월30일부터 김문학에 관한 연재를 조글로에 올리기 시작했다.   이런 연재를 해가면서 필자자신도 김 문학의 저술활동에 대하여 새로 알게 된 사실이 다수였다. 그전까지 일본에서 필자도 자기 사는 일에 바쁘다니 김 문학이 몇권 정도의 책을 쓴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많이 쓴 것은 정말 몰랐고 욕 먹을 책이 이렇게 많은 것도 8월20일경에 일본어저서목록을 만들어보면서 처음 알았다. 김 문학이 일본에서 일본국적에 가입했다는 것도 누가 알려준 것이 아니고 본인의 책표제에 나와 있기에 안 사실이다.  이 연재를 쓰면서 마음속으로는 쉽지 않았다. 현재 살아있는 사람을 그것도 면목을 아는 사람을 내가 무슨 정신에 이런 연재를 하는지 회의감이 자주 들었다. 특히 세번째회의 연재가 나가고나서 어느 여성으로 보이는 사람의 댓글에 김 문학과 대학교 선후배같은데 그런 것도 언급없이 연재합니까? 하는 질문을 듣고서는 혹시나 김 문학씨 처가 아닐까 하면서 마음이 심하게 동요됐다. 또 조글로에 올라와 있는,서울에서 이광수 차녀와 같이 찍은 사진에 김 문학이 초췌한 모습으로 나오기에 김 문학이도 일본에서 쉬운 인생이 아니였겠다고 생각하면서 이런 연재를 하는 자신이 자책감에 시달리기도 했다.아무래도 쓰던 연재를 도중에서 팽개칠수는 없고  그래서 이제 더는 김 문학의 사진을 보지말고 이 연재를 마치기로 했다.   필자가 김 문학에 대하여 조선족 지식인들에게 알리고 싶은 것은 다 알렸다. 바램은 이 연재가 계기가 되어 김 문학논쟁이 빨리 종결되고 각자가 서로 보다 중요하고 생산적인 일에 매진할수 있으면 좋겠다. 필자도 너무 시간이 바쁘고 할일이 많으니 김 문학의 이 연재를 마치고나서 김 문학논쟁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이 논쟁과 관해서 꼭 필요한 질문에는 대답하겠으나 지엽적인 문제를 가지고 새로운 논쟁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     마지작으로 조선족지식인들이 이제 김 문학에 대할 때 이런 自問을 먼저 해보았으면 한다. 나라면 김 문학처럼 많은 책을 동아시아 삼국에서 낼 수 있었겠는가? 또 김 문학처럼 여러 나라 국경을 넘나들면서 나도 완전무결한 인간으로 남아있었을 수 있었겠는가? 물론 필자도 이런 自問을 하면서 김 문학에게 대할 생각이다.                                                               (이상 연재를 마칩니다)                                             2010년10월8일    
26    황 우석과 김 문학 그리고 맹신 댓글:  조회:4978  추천:30  2010-10-07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보스턴통신(8)                   벌거숭이 김문학-<김문학 解體新書>(4)                                       6. 황 우석과 김 문학 그리고 맹신   한국의 수의학자이고, 생명공학자이며 원서울대학교 교수였던 황 우석과 김 문학은 차원이 전혀 다른 인물이지만 어떤 사회현상을 비교분석하는데는 더 없이 좋은 분석대상이다.  그럼 둘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을 까? 황 우석은 수의학자로서 훌륭한 연구성과를 많이 내놓았고 동물복제분야에서는 세계에서도 제일 첨단을 달리는 권위자이다. 같은 의미로 김 문학을 보면 조선족 가운데서는 아직까지 누구도 따라잡지 못 할 정도로 다산작가이고  중한일 삼국의 국경을 넘나들면서 수십권 이상의 책을 출판했고 동아시아비교문화론 분야에서는 여러권의 저서를 내놓았다. 황 우석이 한 때 한국 최고의 과학자로 수많은 상을 받고 사회적으로 각광을 많이 받았던 것처럼 김 문학도 조선족 사회에서는 국경을 넘나들면서 많은 저서를 출판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조선족 최고의 문화인 정도로 평가를 받은 것 같고, 조선족 문학상도 여러 개 받았다. 그러나 황 우석은 2005년 8월에  <사이언스> 잡지에 발표한 배아줄기세포에 관한 논문이 고의로 조작했다는 의혹이 그해 11월에 한국의 MBC PD수첩에  의해 폭로되면서 결과적으로 서울대학교 교수직에서 박탈당하고 한 때 자자하던 명성이 거의다 훼손되고 말았다. 김 문학에게는 물론 그런 스캔들같은 일은 없다. 그러나 김 문학의 일련의 사회비판서는 출판되는 당초부터 여러 사람들로부터 욕을 많이 먹었고, 특히 친일언행에 대해서는 분노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필자가 황 우석과 김 문학을 비교해보자는 것은 이 들이 사회에서 비판받을 때 지지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거의 맹신에 가깝고 열광적인 비판이 거꾸로 그런 비판자들에게 돌아가고 일시적으로 그런 비판자들이 상당한 수모를 당하게 되고, 별의별 욕설을 다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황 우석 연구팀의 논문조작 의혹이 PD수첩에  의하여 폭로되어 결과적으로 황 우석이 서울대학교에서 해임되는 과정에서 황 우석지지자들이 황우석죽이기를 그만두라고 얼마나 한국사회를 소란하게 굴었는가? 오늘날 김 문학의 사회비판서중에 심각한 친일언행이 보이기에 연변대학교 김관웅교수가 비판에 나서니 김 문학죽이기를 그만두라고 맞아죽을 각오를 한다면서 조글로에 나와서 지금까지 대체 16번 정도나 김 문학옹호론 그리고 김 문학옹호를 위한 타인비판을 한 사람도 있다.   또 미국의 어느 조선족 사이트  운영자는 거기에 북치고 장구치면서 김관웅이 혼자서 벌이는 문화대혁명을 이제 그만두라고 열변을 토하고 있다. 이 두명만이 아니라도 앞에서 나서지는 않았지만 김 문학비판을 저들의 유명인콤플렉스의 발로라고 비판자를 비앙거리는 사람들로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일시적이라도 오히려 비판자가 초라해보이고 비판받는 대상이 더 당당해보인다. 황 우석도 좋고 김 문학도 좋고 분명히 비판받을 점이 있어서 비판하는데 일부 지지자들은 그것을 받아 들이려 안 한다. 물론 김 문학비판은 그에 대한 전면적인 비평보다 결점만 찾아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줄 소지도 있었다. 필자도 김 문학에 대하여 비평해보면서 알게 되는데 김 문학이 동아시아삼국을 넘나들면서 저술활동을 하기에 그의 책의 전모를 다 파악하고 책을 다 찾아서 비평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니 자연히 눈에 띄우는 책을 가지고 비평할 수 밖에 없는 상황도 있고, 일본에서 출판된 책은 비평하는데 어느 정도 언어적인 장애도 있었다.     이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황 우석과 김 문학 지지자들이 비판자들의 의견을 좀처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이면에는 자기들이 믿고 따르고 지지하던 대상에 대한 맹신이 생기여 그 대상의 심각한 문제점이 지적을 받아도 자기들의 맹신을 부정하지 못하여 그래서 오히려 일시적이라도 그런 비판자들에 맹렬한 공격을 가하는 것 같다.   김 문학비판에 의해 생긴 지지자들의 움직임을 생동하게 분석하기 위하여 황 우석이 가짜 논문으로 한국에서 비판받는 과정에서 지지자들이 보여 준 움직임을 먼저 소개해보겠다.   필자가 황 우석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2005년 초 쯤으로 생각되는데 황 우석이 일본방문차 동경의 한국학교를 방문하여 학생들에게 과학에는 국경이 없어도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취지의 강연을 한 것을 재일한국인 신문기사에서 본 적이 있다. 그 때 과학자가 어찌 이렇게 말을 잘 하는가 생각이 잠깐 들었다. 그 후 얼마지나지 않아 Newsweek誌 일본어판에 황 우석의 최첨단 생명공학연구가 소개되고 생명윤리라는 면에서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되었다. 그 때문에 필자도 황 우석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는데 그는 한 때 한국에서 대단히 유명한 인물이었다. 이 분의 생명공학연구가 성공되면 한국이 사상 처음으로 의료분야의 원천기술을 가지게 되고, 거대한 국부가 창출된다는 설이 많았다. 그래서 여야를 불문하고 대통령후보자들도 황 우석을 찾아다니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그러다가 얼마지나지 않아서 그해 11월에  MBC의 PD수첩이 황 우석교수팀이 8월에  <사이언스> 잡지에 발표한 배아줄기세포에 관한 논문이 고의로 조작됐다는 보도가 나오고 그러면서 한동안 한국사회가 이 문제로 시끌벅적하였다. 필자도 상당히 관심이 있어서 이 문제의 추이를 인터넷을 통하여 많이 관찰했는데 초기에는 한국의 보수적인 주류미디어가 이 사건을 더 이상 터뜨리지 말고 조용히 덮어두고 가기를 바라는 여론을 조성했다. 그러나 한국의 진보적인 미디어는 이 문제를 철저히 파헤치자 하고 젊은 과학자들이 가만 있지 않고 이 문제의 진상을 많이 폭로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황 우석을 크게 믿고 따른던 사람들이 자연히 지지단체를 결성하여 전국적인 서명운동을 벌이고 MBC사옥앞이나 서울의 청계천광장에 나가서 초불시위 를 벌이면서 PD수첩이 황 우석연구팀에 관한 진상보도를 그만두라고 강력히 요구하고 나섰다. 이런 지지자들의 움직임은 그후 한동안은 점점 더 거세지여 한국사회가 시끄러울 정도였다. 필자도 황 우석의 연구에 크게 기대했기에 황 우석이 그렇게 추락하는 것이 정말 안타까웠다.  그리하여 인터넷에서 찾아보다가 「아리러브 황우석」이라는 지자자들의 사이트를 알게 되어 거기에 자주 드나들면서 이 사건의 추이를 지켜봤고, 정말 황 우석이 무사하기를 기대했다. 그런 과정에서 지지자들의 극렬성도 보게 되었다. 그 극렬성이란 참으로 가관이었다. 지금 기억이 나는 대로 지지자들의 그 때 극렬한 언사들을 여기서 잠깐 재현해보겠다. 아무리 MBC사옥앞에 가서 황 우석연구팀에 관한 PD수첩의 폭로 보도를 멈추라고 지지자들이 초불시위를 벌여도 결과적으로 보도는 진행됐고, 그 보도의 결과에 따라 서울대학교는 자체로 진상조사를 벌인 결과  <사이언스>잡지에 발표한 배아줄기세포에 관한 논문이 고의로 조작됐다는 점이 발표되고 황 우석이 서울대학교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그 때 지지자사이트에서는 그 발표를 했던 서울대학교 부총장을 얼마나 인신공격했던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연구능력으로는 황 우석 교수의 발바닥에도 못가는 인간이 개기름 번듯한 얼굴을 하고서 어떻게 저런 발표를 할 수 있는가? 황 우석교수의 연구수준을 검증할 수 있는 능력이 서울대학교에 없다. 진정으로 검증하자면 국제검증단에 의뢰해야 한다 등 주장이 많이 나왔다. 그래서 지지자들이 서울대학교에 몰려가서 학교본부앞에서 매일 데모를 하고 대학교 관계자들이 나오면 욕설을 퍼부으면서 난리가 났다. 그들이 매일 하는 얘기가 황 우석교수 죽이기를 그만두라는 것이다. 너희들이  황 우석교수 능력에 따라가느냐 하는 얘기가 항상 따랐다. 그러는 과정에서 황 우석을 변호하기 위한 소위 논리가 많이도  떠돌았다. 황 우석교수가 수의출신이여서 서울대 의대교수들이 질투를 하여 죽이기를 한다. 수의대가 의대보다 힘이 모자라서 황 우석교수를 지켜주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새튼이라는 교수가 황 우석교수의 원천기술을 훔쳐가려 한다. 한국의 기독교계가 자기들의 교리에 위배된다고 황 우석교수를 말살시키고 있다. 그러는 과정에서 황 우석의 논문 조작과 오류가 명백히 들어나고 소위 배아줄기세포라는 것을 세계최초로 배양해냈다는 것이 가짜라고 판명나는데도 문제가 되던 1번줄기세포는 한국국익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인 국정원의 어느 금고에 튼튼히 보관되고 있다고「아리러브 황우석」의 운영자가 지지자들에게 성명까지 발표했다. 그래서 황 우석교수팀이 연구해낸 원천기술을 미국이 절대 훔쳐가지 못한다는 설명이 따랐다.        아무리 그래도 황 우석교수팀이  <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이 조작됐다는 것이 부정할수 없게 되고 세계최초로 배양해냈다는 배아줄기세포도 없다는 것이 판명되니 이번에는 지지자들이 황 우석교수 수하의 연구자가 조작질 해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 같이 협력한 병원원장이 사기를 쳤다 등등 너무나도 많은 설을 만들어 내고 결과적으로 황 우석은 하나도 나쁘지 않고 마치도 신적인 존재처럼 지켜려 했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이 순신장군이 임진왜란때 백의종군을 마치고 나라의 부름에 따라 다시 수군통제사로 나설때 선조대왕에게 올린 狀啓에「臣에게는 아직 戰船 12척이 남아있습니다」( 이 순신장군은 그 12척의 戰船에 戰船1척을 보태여 戰船 133척의 일본수군을 대파하여 명량대첩을 이루었다)  라고 한말을 본따 황 우석지지자들이 「황 우석교수에게는 아직 대한민국의 원천기술이 남아있습니다」라는 얘기를 너무 많이 하고 다녔기에 이 순신장군 후손들이 주의까지 주었다는 얘기가 들렸다.   아무리 지지자들이 떠들어도 결국 황 우석은 서울대학교를 떠나게 되고, 그후 오랜기간의 재판과정을 걸쳐 작년에 법원에서 논문조작을 한 사실이 인정되고 징역 2년, 집행유예3년형이 선고되었다. 황 우석은 서울대학교를 떠난후에도 민간인사들의 후원으로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생명공학분야의 연구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 필자가 이 연재를 쓰면서 정말이지 5년만에 인터넷에서 「아이러브 황 우석」이라는 지지자사이트가 혹시 아직도 남아있는지 해서 찾아보았더니 확실히 그 사이트는 남아있었고, 지지자가 극소수로 줄었지만 「초심 그대로 변함없이 우리는 간다! 끝까지!」라는 구호를 사이트 대문짝에 걸어놓고 아직도 황 우석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정말이지 감동이 다가오고 황 우석이 연구에 힘내여 이분들의 기대에 보답해드리기 바랐다. 지금 와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 때「아이러브 황 우석」같은 지지자사이트에서 매일 같이 쏟아져나온 황 우석을 지키기 위한 갖은 변명, 소위 설들이 출처가 결국 황 우석 본인한테서 나온 것이 많았던 같다. 생명공학계의 사정, 또 연구내용까지 일반지지자들은 그런 것을 알 지식도 없었다. 그 당시의「아이러브 황 우석」사이트의 운영자는 미디어사업에 종사하던 사람인데 이 사람이 황 우석의 홍보관 비슷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한치의 오차도 허용안되는 생명공학연구자로서 홍보관을 달고 다니면서 자기 홍보를 하고, 문제가 터지니까 지지자들의 열광적인 성원에 힘입어 거기서 빠져나가려 황 우석 자신이 교묘하게 지지자들을 상대로 언론플레이 한 것이다. 그래서 한 때는 황 우석비판만 하면 누구든지 욕을 먹게 되고 모욕까지 당했다. 한국 최고의 學府인 서울대학교가 한때 그런 열광적인 지지자들로 얼마나 시끄러웠는가? 그러고 보면 황 우석은 과학자로서 연구에서 엄중한 실수가 있은 것만 아니고 그 실수를 대처하는 과정에서도 과실이 있었다. 그 때문에 지지자들이 더 황 우석을 맹신하고 열광적인 지지를 했던 것이다. 그런 반면 황 우석은 오히려 한국 과학계에서 더 차가운 대접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지지자들이 황 우석을 이토록 지지하고 법원의 재판결과가 나와도 그 신조를 굽히지 않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필자도 한 때 심정적으로 황 우석지지자였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전문지식의 부족과 그래서 오는 맹신이라고 판단된다. 현대사회는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정보가 넘쳐나기에 누가 아무리 사회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도 모르는 일이 너무 많다. 그래서 사회 각 분야마다 전문가를 필요한다. 사실 황 우석지지자들 중에 황 우석이 연구하는 생명공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척추마비나 파킨슨병 등 난치병환자나 가족들이 줄기세포 연구에 의하여 난치병을 치료할수 있다는 일루의 희망을 가지고, 혹은 황 우석교수 연구팀이 연구한 한국의 원천기술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애국주의자, 황 우석이 동물복제연구에서 세계최고권위자라는데 매혹된 사람, 황 우석교수의 단정한 외관과 재치있는 말재주에 끌리운 여성들, 지지자들은 다양했지만 생명공학에 대한 전문지식은 정말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이 한번 황 우석에 대하여 맹신을 하기 시작하니 아무리 과학자들이 나서서 황 우석이 과학자로서 중대한 실수를 했다해도 귀에 들어가지 않고 한동안은 황 우석죽이기를 그만두라고 정말이지 처절한 몸부림을 부렸다.    김 문학은 아직 황 우석같이 큰 틀내에서의 사회적 영향력은 없다. 그러나 중국의 조선족 사회에서는 좋던 그르던 분명히 인지도가 있고 10년 정도 긴 시간속에 조선족 지식인들이 알게 모르게 김 문학평가를 놓고 찬반양론을 펼쳐왔고 금년봄부터  김 문학이 조글로에 등장하여 두편의 글을 연재하기 시작하고 그러는 과정에서 김 문학이 글 가운데 연변의 비판자들을 자극하는 언어표현을 자주 사용했고, 거기에  자극받았는지 김 관웅교수가 금년 5월부터 중국조선족문화통신 사이트에 김 문학이 일본에서 출판한《친일파 중국인에 의한 참을수 없는 일본질책론-「반일」에 미친 중국,「우호」를 구걸하는 일본》(祥傳社, 2004)을 소개하면서 그의 친일언행에 대한 비판을 진행하였다.     필자는 이번에 조글로와 중국조선족문화통신에서 김 문학의 글과 김 관웅교수의 글을 찾아보면서 도대체 누가 먼저 비판의 포문을 열었는가 찾아봤다. 생각밖으로 김 문학이 상대에 대한 비판의 포문을 먼저 열었다.   김 문학이 조글로에 글을 올리기 시작한 것이 금년 3월24일이고 첫 시작 글은 「131세 사상가 안 중근을 만나다」인데 3월30일까지 3회에 나누어 발표하고 나서 5월6일에《신조선족월경론》」이라는 연재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 연재의 제2회 글「포스트개조론」에서 김 문학은 김 문학비판자에 대하여 자극적인 언사를 던졌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하여 여기서 인용하겠다.    「한국이나 조선족사회에서는 저자인 필자에게 조선족 '문화기수','신세대 지성의 대표주자', '문화선구자'로 예찬했는가하면 '민족반역자', '친일파매국노', '총탄으로 저격해야 할 원쑤'라고 외친 극렬 '안티김문학' 지식인도 있었다. 유순호氏의 표현을 차용한다면 '장장 10년을 친일매국노'로 몰아부친것이다.  '개조론'의 발표는 조선족정신사의 일대 사건이며, 또한 이에 대한 센세이션에 따른 찬반의 논란 역시 일대 사건이였다.  그리고 유순호氏가 주도했던 2009년 '연변 6적'에 대한 비판은 '신조선족'의 월경하는 문화적 창조활동을 지극히 부정적 마이너스 의미로만 포착하면서 '매국역적', '반화분자'로 왜곡 중상한 일부 연변조선족의 민족주의자 (협애한 민족주의자?)에 대한 '신조선족'의 정면으로부터의 '반란'이였다.   물론 이것 역시 필자의 속단으로는 조선족 정신사의 일대 사건이며 특기할만한 한페지를 열었다고 추찰된다. (中略)   그러므로 유순호氏가 리드했던 작년의 반란은 '포스트 개조론'의 대사건으로서 조선족의 고루한 '1940년대 정풍시기'나 '전근대적 사고양식'과 '문화대혁명'의 유령으로 전신을 무장한 수구파(민족주의자?)에 대한 비판이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중대하다. (中略)     유감인 것은 근대도 아닌 '후근대성'으로 칭해지고 있는 21세기의 지금에 와서도 다시 100년전 근대로 되돌아간듯한 일부 조선족의 고루한 양상을 다시 비판개조해야되는 아이러니, '포스트머더니즘의 아이러니'에 필자는 그만큼 가슴이 쓰리다.」    이상의 비판이 아주 점잖은 상대비판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제3자가 봐도 상대에 대해 도전장을 던져다고 할 수 있다.   그럼  최근에 시작된 김 관웅교수의 김 문학비판은 언제 시작되었는가? 중국조선족문화통신 사이트에서 찾아보니 5월18일이었다. 글의 제목은「日本軍國主義의 走狗 金 文學의 代表作 소개(1) 」였다. 제목을 봐도 과격한 언사가 들어있는 것은 분명하나 김 관웅 교수에 대표되는 김 문학비판자들에 대하여 최근에 먼저 포문을 연것은 객관적인 사실을 봐도 김 문학이 확실하다. 그러면서부터 조글로에서 김 문학이 연재하는《신조선족월경론》에서 수시로 김 문학비판자들을 지칭하여 연변의 고루하고 도태되어야 할 구조선족이라 비꼬고 심지어 본인도 그 속의 일원으로 의식하는 신조선족을 「海鯨」,본인에 대한 비판을 하는 조선족 지식인들을 구조선이라는 이름으로 「鰍魚」라고 비꼬기도 했다.   사실 최근에 김 관웅교수가 중국조선족문화통신에서 하는 김 문학비판은 주로《친일파중국인에 의한 참을수 없는 일본질책론-「반일」에 미친 중국,「우호」를 구걸하는 일본》(祥傳社, 2004) 이라는 책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 책의 제목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만약 중국 주류미디어나 인터넷포털사이트에 이 책이 소개되었다면 가히 그 可恐할 후과를 연상할 수 있다. 13억의 중국인이라면 철이 못든 아이들은 제외하고 아마 10억은 격분할 만한 내용이다. 그러고 보면 김 관웅교수가 중화인민공화국공민으로서, 또 학생들을 가르키는 대학교의 책임있는 교수로서 이 책에 대해 비판에 나선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다. 다만 김 관웅교수의 비판글이 사고방식에 경직된 감이 있고, 거기다가 상대에 대한 과격적인 언사가 있어, 그런 것이 상대에 대한 인격적인 모욕에 해당할 수 있기에 이 점만 없었으면 많은 사람들이 일찍부터 호응했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그러나 김 문학도 시종일관 점잖은 말로 상대비판을 한 것은 결코 아니다. 본인을 「海鯨」, 상대를 「鰍魚」로 비유하는 것도 상대에게 모욕감을 크게 주는 표현이다. 또 상대 비판은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한마디로 물리치는 표현을 여러번 쓴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김 관웅교수의 김 문학비판에는 실명을 공개하면서 지지하는 사람이 없는데 김 문학에 대해서는 조글로에서 실명을 공개하면서 맞아죽을 각오로 김 문학을 변명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열성도 대단하여 조글로에서 오늘 필자가 이 글을 쓰는 순간까지 헤어보니 16번이나 (혹시 계산이 틀리면 이 분한테 미안하다) 김 문학에 대한 옹호론, 김 문학과 관련하여 김 관웅교수 그리고 필자를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 본인은 20번도 그런 옹호론을 쓸 생각이었다하니 아마 좀 더 대한민국 서울에서 쏘아올리는 문화미사일이 조글로사이트에 와서 작렬하면서 중국의 구조선족들의 귀청을 울려주고 포연을 자욱하게 날릴 것 같다. 이 사람이 조글로에서 김 문학을 언급한 것은 금년 5월7일에 발표한「누가 김 문학을 뜨게 했나?」라는 글에서부터이다.  5월6일에 김 문학이《신조선족월경론》」을 연재하기 시작한 그 이틑날부터 이미 이 사람의 김 문학옹호론이 시작되었고 그 다음부터 정말이지 객관적이 입장에서 보기에도 집요하다고 볼 수 밖에 없는 김 문학옹호론을 줄곧 벌이고 있다.     또 사정이 있어서 조글로에 실명을 올리면서 등장한 것은 아니지만 미국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이 본인이 운영하는 사이트에서 연변의 중견문화인들 비판과 함께 그런 문화인들의 촌스러운 문화적인 역량을 단 한번에 공중분해시킬 怪力의 소유자로서 김 문학을 학술저서 58종의 국제대학자로 치켜세우더니 조글로와 중국조선족문화통신에서 김 문학에 대한 찬반양론이 벌어지니 이 사람도 굉장히 바빠지고 양으로 음으로 역할을 많이 했다. 조글로에 공개적으로 나오지 않은 역할에 대해 구구히 언급할 필요는 없는데 정말 필자가 놀라운 것은 이 사람이 《친일파중국인에 의한 참을수 없는 일본질책론-「반일」에 미친 중국,「우호」를 구걸하는 일본》(祥伝社, 2004)에서 김 문학의 친일언행이 불보듯 뻔하다는 사실을 알고나서 본인이 운영하는 사이트에서 김 문학의 친일언행은 부정못하지만 그 친일언행은 과거문제이고  현재는 김 문학이 인권탄압을 받고 있기에 그를 지지한다는 취지의 선언문을 대문짝에 올려 놓은 것이었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도 있는가? 사실말이지 현재 누가 김 문학이를 죽이고 있고, 김 문학이 누구한테서 인권탄압을 받고 있다는 말인가? 단지 욕먹을 글을 썼기에 욕을 먹고 있고, 때로는 그 욕이 너무 직설적이니 들으면 기분이 상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선언문을 발표하는 그 당시도 김 문학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욕한 것은 김 관웅교수뿐이었다.   김 문학과 몇 안되는 김 문학지지자들이 너무나 일부 고루한 조선족 지식인들이 「장장 10년 」이나 김 문학죽이기를 한다기에 필자도 그런 죽이기의 총본부라고 할 만한 중국조선족문화통신 사이트에 들어가서 찾아보니 《반문화지향의 중국인》(이채,1999),《한국인이여 상놈이 돼라》(우석, 1999), 《조선족대개조론》(2001)를 출판했을 당시 조선족 지식인 사회에서 일시적으로 열띤 비판이 있었던 것 같았고, 그후에는 극히 간헐적으로 일부 지식인들이 비판글을 어디에다 올린 정도가 아닌가 추측된다. 중국조선족문화통신 사이트에서 현재는 과거의 그런 글들을 찾아내기도 힘들다. 김 관웅교수가 그 사이트에서 최근에 김 문학비판을 시작한 것도 필자가 이미 객관사실을 검증해보았듯이 김 문학의 도발에 의해 나선 측면도 있을 것이다.   필자가 여기까지 쓰다보면 김 문학이 조글로에 나타나면서부터 몇명 지지자들이 그를 위한 변명을 하는 과정이 너무나도 한국에서 황 우석 지지자들이  하던 행태와 비슷하다는 점에 다시 놀란다. 물론 황 우석의 과학논문조작과 김 문학의 문제점은 전혀 다른 문제이지만 김 문학의 친일언행은 마땅히 비판받아야 할 점이다. 그런데 황 우석지지자들이 황 우석의 과학자로서의 엄중한 실책에 대하여 한사코 외면하고 그런 실책을 비판하고 문책하는 사람들에 향하여 광기가 어린 저주를 퍼 붓듯이 조글로에 자주 김 문학옹호론을 발표하는 사람의 글에서는 김 문학에 대한 맹신, 김 관웅교수에 대한 너무 지나친 비판을 서슴치 않고 있다.   한편으로는 미국의 그 사람도 조글로에 나타나는 사람 이상으로 본인이 운영하는 사이트에서 아직도 김 문학변명의  구실을 만들어내고 친일언행에 대해서는 이제 더 변명을 못하겠으니 자기의 조국에 대하여 왜곡된 역사교 과서 비판을 하는 용기있는 김 문학을 정권에나 아부하는 너희들이 비판자격이나 있느냐 하는 질문을 댓글에서 던진다 .그런 과정에서 누가 쓰는 글인지 일본의 중국침략은 침략이라는 명분이 있으나 문화대혁명은 그런 명분도 없는 일이고 일본의 세균무기보다 김 관웅의 문화대혁명의 유령이 더 나쁘다는 댓글이 사이트에 올라와 필자도 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리고 또 개발되는 구실이 저서 50여종을 출간한 김 문학에게 저서 고작 몇권밖에 안되는 학자들이 나서서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얼핏 들어보면그럴듯 해 보인다. 황 우석논문조작문제를 서울대에서 조사할 때도 지지자들은 서울대는 조사할 능력도 없다고 했다. 황 우석은 동물복제연구, 생명공학연구의 세계최고의 권위자이니까 이 세상에 누가 황 우석을 조사할 능력이 있느냐 말이었다. 그래서 지자자들이 인정하는 외국의 최고의 생명공학학자들을 모셔다가 서울대 조사를 다시 재조사하라고 웨쳤다. 어쩌면 이렇게도 비슷하단 말인가? 그래 김 문학비판은 중국의 余 秋雨, 한국의 李 御寧정도가 비판하지 않으면 이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말인가?   결과적으로 황우석의 과학적 오류는, 과학자로서 성실하지 못한 자세는 한국의 소학생 정도여도 비판할 수 있고, 김 문학의 친일언행은 중국과 한국의 지각이 있는 사람들은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사람들을 이토록 집요하고 외고집스럽게 만드는가? 황 우석의 지지자들의 경우에서 이미 봤지만 한번 자기들이 맹신한 상대에 대하여 아무리 허물이 드러나도 자기들이 맹신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 하여 맹신에 맹신을 더해가는 것이 이들의 심리가 아닐까? 그리하여 누구나 분노할 만한 친일언행에도 될수록 외면하려하고 기껏 내놓는 소리가 다양한 사회에서는 그럴 수도 있지 하는 것이다. 결국 김 문학에 대한 진정어린 애정보다 자기들 자존심문제가 우선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황 우석의 지지자들은 그래도 순순한 동기가 대부분이었다. 그 위대한 우리민족의 과학자를 지켜주자는 그런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면 현재까지 김 문학옹호에 열성을 부리는 사람들은 우리 조선족의 전무전후한 저술가이고 월경하는 문화인인 김 문학이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안타까워서만 그럴까? 객관적인 사실을 보아도 현재까지 김 문학비판에 실명을 공개하고 나서 사람은 김 관웅교수이고 그 다음 필자 정도이다. 조글로에서 댓글형식으로 김 문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다 김 문학옹호론자나 필자의 글에 댓글을 다는 정도이지 그런 댓글에 죽어날 김 문학은 더구나 아니다. 또 김 문학을 비판하는 것도 김 문학의 욕을 먹을 점을 지적하는 것이지 무조건 김 문학의 저술활동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필자의 이 연재에서 알다싶이  김문학을 전면적으로 분석해보면 좋은 점도 많이 보이고 욕 먹을 점도 많이 보인다. 그래서 현재까지 과대포장되고 있는 김 문학의 실상을 제대로 알고 좋은 점은 좋은 점대로, 비판받을 점을 비판받을 점대로 나누어 보자는 것이 필자의 이 연재의 要諦 이다. 그러면 결국 죽이기는 아니지 않는가? 실상을 제대로 알고나서 김 문학에 옳바른 자세로 대하기가 무조건 올리치켜세우고 맹신하는 것보다 월등히 좋은 일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면 왜서 이토록 집요하단 말인가? 너무나도 집요하니 이런 지지자들의 동기가 의심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혹시 반대급부를 바라고 하는일, 같이 해외에 있다는 점에서의 연대감에 김 문학과의 제휴에 어떤 이상적인 기대가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닐까 생각보는데 근거없는 얘기는 더 이상 하지 않겠다.   그렇다쳐도 여기서 꼭 짚어볼 점이 있다. 황 우석지지자들이 생명공학에 전혀 전문지식이 없었기에 맹목적으로 황 우석을 지지하고 또는 황 우석과 지지자사이트 운영자의  교묘한 얼론풀레이에 놀아난 면이 강하다. 대다수 새명공학자가 황 우석이 분명히 논문조작을 했고 과학자로서 중대한 실책을 했다고 설명을 하고  한국의 대다수 국민들도 그런 설명에 수긍이 가는데 극소수의 지지자들만이 그런 설명이 귀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너무나도 무지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마침 아이러니 하게도 김 문학에 대한 비판을 하는 김 관웅선생, 그리고 필자는 중국조선족 지식인 사회에서는 그리 많지 않은 비교문화의 전문가들이고 비교문화의 책에 관해서는 그 진가를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두 사람의 김 문학에 대한 평가를 한사코 말꼬리만 잡아서 깍아내리려 하고 필자의 글에서는 말꼬리도 잡을 것이 없으니 댓글에다 이런저런 욕설을 퍼붓으면서 이 연재를 중단하기를 은근히 촉구하고 있다.  마침 알고보니 김 문학의 열성적인 지지자들이 다 문화적인 일을 하고는 있으나 그렇게 많은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소문을 어느 댓글에서 봤다. 그러면 본인들이 잘 모르는 분야도 있고 그런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지식인의 견해에도 귀를 기울이어야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까지 그러기는커녕 학자님들의 그릇이 어떻소 하면서 본인들이 그런 정도의 학자도 되지 못한 어떤 저주같은 같은 것이 이 사람들의 언사에서 스며나오고 있다. 본인이 그렇지 않다고 해도 또 본인이 의식하지 못 할 수가 있어도 글 읽는 사람들은 그런 심리를 보아낼 수 있다. 그러니 이들은 조선족 가운데서 학자라고 인정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은근히 질투심도 생기고 그런 학자들을 한꺼번에 다 날려보낼 怪力의 소유자인 다산작가이고 월경하는 문화인 김 문학한테서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도 아닐까? 이들은 또 한편으로는 해외의 대도시에 있다는 점에서 연변땅에나 남아있는 조선족 지식인들에게 일종의 우월감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서로 모순되는 심리가 묘한 방식으로 표출되는 것이 아닐까?        무지에 의한 맹신이 어떻게 무서운지 김 문학에 관하여 한번 예를 들어보겠다.    김 문학에 대한 찬반양론이 심하게 전개될 때 조글로에는 북경에서 날아온 特報같은 「김 문학 학술,언론계 초청으로 북경방문」이라는 기사가 대문짝에 올라왔고 미국의 어느 사이트에서도 거의 리얼타임으로 대문짝에 내걸었다. 그러더니 조글로에 대뜸 그 내용을 봤느냐? 그것을 보고서도 김 문학비판이냐? 졻은 연변골짜기에서 너희들은 비판해도 북경,서울같은 대도시에는 김 문학이 이렇게 대환영을 받는다 이런 뉴앙스의 글이 올라왔다. 그러니 속담에 있다 싶이 되놈이 김 상헌을 안다더냐 하는 식의 어느 정도 추궁마저 하는 기세였다. 필자가 이 연재를 쓰면서 조글로에「김 문학 학술,언론계 초청으로 북경방문」이라는 기사가 올라온 시간을 보니 8월23일0시14분이고, 위에 언급한 사람이「김 문학은 친일매국노?」라는 글이 조글로에 올라온 것이 같은 날 14시35분 이었다. 그러니 그 기사를 보고나서 그날로 글을 써서 올린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도 분명히 김 문학에 의한 어떤 의사가 존재하고 그 것을 맹신하는 모습도 분명했다. 필자도 처음에 이 기사를 보니 그럴듯해서 김 문학이 과연 대단하구나 했는데, 그 기사의 출처를 보니 중신출판사라고 김 문학의 책을 내준적이 있는 북경의 어느 출판사의, 그것도 조선족인 듯 보이는 직원이 쓴 기사였다. 그러고 아무리 다 사실이라고 해도 한 출판사의  광고였을수는 있으나 공인된 언론기관의 보도는 분명히 아니었다. 필자도 처음에 中信社 라고 나오니 중국신화사의 약칭으로 쓴 것인가 하여 과연 김 문학이 유명하구나, 신화사가 다 따라다니는구나 했는데 며칠 후 조글로에서 다시 보니 처음에 中信社라고 나오다가 다시 中信出版社라고 고쳐진 것 같아서 일순 허무맹랭해졌다. 언론사 기사도 아닌 것을 가지고 이렇게 떠드는가? 그리고 그 기사내용을 보면 현재 확실한 내용이 별로 없었다. 어떤 시리즈의 책을 어디에서 낼 계획이라든가, 인민대학교에서 특별교수로 모실 의향이 있다든가, 언제 어떤 유명한 사람들과 책이 나올 것이라든가, 대체 이런 내용이 많이 들어있고 김 문학에 대한 칭찬이 많이 소개되었다. 또 어느 조선족으로 보이는 북경대학박사가 별장에서 초대하였다 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 같은데 친구나 고향후배로 보이는 어느 젊은 박사가 북경대학교 어느 연구소차원이 아니고 개인 입장에서 초대한 것으로 밖에 안보인다. 보통 대학교 세계에서는 박사라하면 박사과정에 있는 학생이나 아직 확실한 교수직을 가지고 못있는 젊은 학자를 부르기 좋게 누구누구 박사라고 불러준다. 이러면 이 기사가 무슨 그렇게 대단한 기사여서 거기에 따라 춤춰야 하는가?  한국의 李 御寧, 중국의 余 秋雨와도 이제 문명대화집을 낼 것이라 하니 지지자들은 눈이 휘둥그래진것 같다. 그래서 더 김 문학이 하늘처럼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자도 김 문학에 관한 이 연재를 하면서 김 문학의 저서를 찾아보니 중국에서 李 御寧의 책을 두권 번역( 번역은 남한테 시키고 본인이 審稿했다) 해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李 御寧이 김 문학이 한국에서 낸 책 여러권에 서문을 써주었구나 하고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대단한 유명인들도 알고보면 다같은 인간들이니 서로 주고받는 관계가 있지 않겠는가? 余 秋雨와 중국인민대학 교수이고 노신박물관 관장과 김 문학 사이에도 비슷한 주고 받음이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김 문학이 한국이나 일본에서 이 사람들의 책을 번역하는데 주선해준다는 등 말이다. 그러면 이 기사내용에 별로 놀랄 것도 없고 이 기사때문에 그것 가지고 김 문학비판자들을 비꼬는 행위가 너무 가벼운  소행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오히려 김 문학이 왜서 출판사를 통하여 조글로에 자기 홍보를 하고, 출판사관계로 귀주일보에 자기 홍보를 하는데 정작 중국에서 상당히 영향력이 있는 環球時報나 新京報의 인터뷰요청에는 완곡히 거절했다고 나오는지 필자에게도 의문이 남는 점이다. 개인홍보에는 이런 큰 신문들이 전국적인 영향력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하나 간단한 예를 들겠다. 어제 올라온 김 문학지지자의 글에서 김 문학이 중국에서 낸 《新丑陋的日本人》이 미국의 인류학자 Ruth Benedict의 《국화와 칼》(1948)의 일본론 수준을 초과했다고 평가하는 것 같은데 그런 판단은 어떤 근거에서 나오는지? 중국에서 나온 《新丑陋的日本人》의 표제에 선전문구로 그런 내용이 나와있기는 한데 그건 어디까지나 누구의 객관평가가 아니고 출판사나 김 문학 본인이 책이 잘 팔리는 것을 바라서 달아놓은 선전문구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余 秋雨나 李 御寧이 실명을 밝히면서 이 책이 Ruth Benedict의 《국화와 칼》을  초과했다고 하면 그 것은 객관적인 평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국화와 칼》이라 하면 중국독자들은 그리 잘 아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일본 꽃집의 국화를 베는 식칼얘기인가 하고 믿는 중국사람도 많을 것이다. 오히려 이 책의 판매전략으로서는 「일본의 軍刀보다 더 예리하게 일본을 찔렀다」고 선전하는 것이  더 잘 됐을 것이다. 이 책의 일본어판 《제3의 모국 일본국민에게 고한다! 일본에 귀화한 한국계 중국인에 의한 警世的일본론》(祥伝社,2007)의 선전문구에는 아예  Ruth Benedict의《국화와 칼》을 초과했다는 얘기가 보이지도 않는다.   이러니 무지에 의한 맹신이 무섭다고 한다. 옛적에 공자께서 「苛政猛虎;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사납니라」했는데 인터넷이 발달하여 정보발신이 쉬워지고 누구나 손쉽게 마구 자기 의견을 쏟아내는 시대이니 식견과 자기절제능력이 강하지 못하면 무지에 의한 맹신에 의하여 상대공격도 서슴치 않기에 「무지한 맹신은 빈라덴보다 무섭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                                                 2010년10월6일                                              설명: 이 연재는 4회에 마치려 했는데 신중하게 논증을 하려 하고 여러 가지를 비교하여 설명하려 하니 생각외로 글이 길어져 5회까지 연재를 끌게 됐다. 필자로서도 김 문학연재를 한시라도 빨리 마치고 제 할 일을 하고 싶은데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일이 많고 한 사람에 대한 평가가 너무 쉽게 결론을 내리기도 어렵다. 아무튼 제5회까지 인내성 있게 기다려주기 바란다.  
25    김문학이 욕먹는 이유 (김광림) 댓글:  조회:5501  추천:46  2010-10-04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보스턴통신(7)                 벌거숭이 김문학-<김문학 解體新書>(3)                                         5. 김 문학이 욕먹는 이유     김 문학이는 지금까지 동아시아 삼국을 넘나들면서 책을 수십권 이상 출판하면서 조선족출신가운데서 제일 다산작가라고 불리우지만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들한테서 욕을 얻어먹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이런 욕들이 김 문학에 대한 소위 「유명콤플렉스」, 또는 시기심이라하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김 문학죽이기를 한다고 억울해한다. 비판하는 사람들도 인간이고 보면 필자를 포함하여 자기도 의식하지 않는 사이 그런 심리가 작동할 수도 있지만 그 것이 이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바로 김 문학의 인간으로서 아름답지 않은 모습에 있고, 그 것이 모든 문제의 발단이고 원인이라 단언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은 김 문학하면 극우적인 친일언행을 먼저 떠올리고 그 것에 격분하고 있다. 사실 필자도 김 문학의 친일언행에는 상당한 분노와 당혹감을 감출 수 없다. 그러나 이 문제도 잘 살펴보면 김문학의 극우적인 사상때문에 생긴다기보다 오히려 인간적인 됨됨이의 문제에서 생기는 측면이 휠씬 더 강하다.   그러면 필자가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김 문학의 인간적인으로 아름답지 못한 모습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가? 필자는 결코 김 문학의 생활모습에서 스캔들을 찾아내자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의 저술활동에 그런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고, 그가 발표하는 글에 그런 문제가 보인다고 판단한다.   김 문학의 수십개의 저서를 분류해보면 동아시아비교문화론, 중국문화론, 중국소개서, 일본소개서 등이 있지만 다른 한면으로는 필자가 사회비판서라고 분류한 소위 한국비판서, 중국비판서, 일본비판서인데 이런 책들이 수량도 적지 않거니와 김 문학이가 문필가로서 잘 팔리는 책을 써내는 비결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에 인간적인 면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존재한다.     여기서 한국비판서들을 먼저 살펴보겠다. 김 문학의 대표적인 한국비판서이란  일본에서 출간한 책들은 (1)책 제목:《한국국민에 고한다!-일본거주 한국계중국인의 통곡의 조국비판》   저자: 김 문학, 김 명학 출판사:祥伝社(黄金文庫)  출판년도:2002,4  (초판 NON BOOKBUSINES에서1999,12) (2) 책 제목:《또 다시 한국국민에게 고한다! -반일이라는 어리광을 그만닥치라》   저자: 김 문학 출판사:祥伝社(黄金文庫)  출판년도:2005,12(초판2002) (3) 책 제목:《우스개소리 일한결별선언-좋지 않으냐 억지로 친하지 않아도》    저자: 이토 테리,류 희준,김 문학 공저   출판사: 실업의 일본사    출판년도:2002,6    한국에서 출판한 책은 (1)《한국인이여  상놈이 돼라》(우석,1999)     중국에서 출판한 책은 (2)《丑陋的韓國人》(山东人民出版社, 大地出版社, 2005)( 이책은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도 출판한 것 같다) 들이다.  이런 책 제목만 나열해놓아도 이해력이 있는 분들은 문제점을 대뜸 보아낼 수 있다. 어떻게 김 문학이가 분명히 제 조상의 나라이고 모국인 한국에 대하여 이렇게 일본과 중국에서 험담들을 늘여놓을 수 있단 말인가? 많은 사람들이 먼저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런 의문을 의식하여 김 문학은 그런 책들이 한국에 대한 험담이 아니고 진정으로 한국을 사랑하기에 들이대는 비판의 매이고 중국의 문호 노신과 같은 비판정신의 발로라고 변명하는 것 같다. 진정으로 그런 것일까? 필자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진정으로 제 조상의 나라, 모국을 사랑한다면 그런 책은 한국에서만 내고 누가 일본에서, 중국에서 번역출판하겠다고 하여도 저자로서 거부할 권한을 행사하여 내지 말아야 한다. 이런 책들이 가령 한국에서는 어느 정도사람들에게 비판의식으로 받아들일수도 있지만 분명히 일본과 중국에서는 그런 책을 읽고나서 많은 사람들이 한국을 오해하고, 욕질하고 근거없이 깔보게 되는 것이다. 김 문학의《한국국민에 고한다!-일본거주 한국계중국인의 통곡의 조국비판》을 읽어본 감상이 일본의 아마존닷컴에 올라와 있는데 이런 감상을 읽어보아도 김 문학의 책이 분명히 일본과 중국에서 소위 嫌韓감정을 불러읽으킬 수는 있어도 한국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할 수 밖에 없다. 참고로 일본어아마존닷컴에 올라와 있는 이 책을 읽은 감상문을 다시 한번 적어보겠다.   아마존닷컴에 올라온 코멘트:   「일본인을 찬양하고 한국인을 죽도록 내리깍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감상에도 있지만 어떤 냄새를 맞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책은 진실의 한국민족의 특성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물론 일본인에게도 결점은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의 앞에서는 누구도 성인군자처럼 보입니다. 그처럼  문제투성이 민족입니다. 허영심, 거짓말, 이기적, 질투심, 우줄렁거림, 감정을 억지하지 못하는, 폭력적…. 오늘의 일상적인 반일폭동은 그들의 민족적 특성의 발로입니다.」 이 감상문을 읽어보면 일본인의 시각으로도 일본을 찬양하고 한국을 죽도록 내리깍았다는 것을 알수 있고, 너무 일본을 간지럽게 찬양하고 대신 한국을 죽도록 내리깍아서 그래서 이게 진실한 소리일가? 하고 의문을 가지게 되고 오히려 무언가 냄새가 난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한국에 대하여 대단한 오해, 그리고 일본인으로서의 근거없는 우월감을 가지게 만들었다는 것도 이 감상문에서 읽어낼 수 있다.  아마 중국에서 출판한 《丑陋的韓國人》을 읽어본 중국의 독자들도 비슷한 嫌韓감정을 가지게 됐을 것이다. 한국이 발전했다고 우러러 보려했더니 알고보니 여전히 옛날 조선인들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원래 번역이라는 것은 내용도 제목도 거의 원저작대로 번역하는 것이 원칙인데 만약 김 문학이한국에서 출판한 《한국인이여  상놈이돼라》(우석,1999)를 일본에서《한국국민에 고한다!-일본거주한국계 중국인 의 통곡의 조국비판》(1999), 중국에서《丑陋的韓國人》(2005)이라고 번역하여 출판한 사실이 옳다면, 번역된 제목 자체가 정직하게 번역된 것이 아니고 일본과 중국의 독자들의 충동심이나 자극하여 책 한권이라도 더 팔자는 타산이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럼 김 문학이가 왜서 이런 한국비판서를 출판하게 됐는가 살펴보자. 김 문학이가 중국에서 1985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1991년에 일본에 가기전까지 사회에 내 놓은 책은 재일한국인학자 김 량기선생의 일한문화비교에 관한 번역서 한권(1989년) 이다. 그리고 일본에 가서 자신의 산문집을 중국에서 한어로 한권( 1993년) 냈다 한다. 그러다가 김 문학이가 1997년부터 본격적인 저술활동을 시작했는데 초기의《벌거숭이3국지》(창사,1997, 이 책은 1998년에 일본어로도 번역출판),《바람난 중국인, 변화하는 중국땅》(김 문학, 김명학공저,시공사, 1997) ,《중국의 에로스 문화》(우석,1998) 등으로 동아시아비교문화론,  중국소개서 유형으로서 처음부터 마구 비판서를 쏟아낸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다가 김 문학의 저술활동에서 비판서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 1999년에 한국에서《한국인이여 상놈이 돼라》(우석),《반문화 지향의 중국인》(이채, 이책은중국문화론이라 분류할 수도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중국비판서이다)을 내면서부터이다. 이런 비판서들을 한국에서 내게 된 계기가 물론 화제를 끌어모으고 그래서 잘 팔리는 책을 내자는 동기에서 출발했겠지만 그런 충동이 생기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한국의 전 여옥의《일본은 없다1,2》(지식공작소, 1994, 1995)와 조선족작가 김 재국의《한국은 없다》(민예당,1996)에서 생긴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전 여옥의 일본비판서《일본은 없다1,2》는 한국에서 베스트셀러로 팔리면서 한 때 화제를 많이 끌어모았고, 이 책에서 이름을 본딴 것으로 보이는 김 재국의《한국은 없다》도 조선족이 한국에서 낸 책치고는 일시 주목을 받았던 것 같다. 특히 김 재국은 김 문학과 같은 조선족으로서 김 재국의《한국은 없다》가 주목받는 것을 보고서 역시 조용한 내용의 책보다 제목이 자극적이고 험담이 많이 들어간 책이 잘 팔린 다는 것을 터득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이런 생각은 필자의 억측일 수 있으나 김 문학의 저서들의 출판과정을 보면 전혀 근거없는 얘기는 아니다.     이리하여 한국에서 시작한 한국비판서, 중국비판서가 일본에서는《한국국민에 고한다!-일본거주 한국계중국인의 통곡의 조국비판》(1999),《중국인민에게 고한다!-「문화대국」이 듣고나서 억장이 무너지는 통분의 조국비판》(초판2000) 등의 더 충격적인 제목으로 바뀌어 출판되고 한발 더 나가서《또 다시 한국국민에게 고한다! –반일이라는 어리광을 그만닥치라》 (2002)를 출판하면서 한국비판의 톤을 높여갔고 그러는 과정에서 단지 현재의 한국비판만이 아니라 일제식민지지배에 대한 긍정론에까지 발전해나가고, 중국비판도 점점열을 올리는 과정에서 일본의 중국침략까지 긍정하는 듯한 발언을 마구 쏟아내게 되었다. 조선족작가 김 재국이《한국은 없다》를 쓴 것은 작가본인의 한국체험을 바탕으로 썼고 실지 많은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차가운 대접을 받은 것을 한국인들도 이해하기에 이 책을 가지고 한국인들이나 중국조선족 지식인들이 너무 혹평을 했다는 얘기는 못 들었다. 그러나 김 문학은 일본에 유학하면서 한국의 실제체험이 아주 제한 된 사람이 마구 한국을 비판하고 그 것도 일본에서는 그런 비판의 강도를 높여갔고 그런 한국비판서를 누가 번역한 것도 아니고 김 문학 본인이 스스로 일본에서 출판했으니 출판동기를 아니꼽게 볼 수 밖에 없다. 이런 격렬한 한국비판서가 한국에 대한 애정때문이라고 생각할 근거가 너무 박약하다. 진짜 애정이 넘쳐서 하는 비판이라면 그 책을 한국에서만 출판하고 일본이나 중국에서 더 자극적인 제목으로 번역출판하는 일을 그만두어야 했었지 않았는가? 결과적으로 그렇지는 않았고, 일본에서 한국비판의 강도를 더 높여간 것이 사실이다. 이러고 보면 비판서가 화제를 모으고 책이 좀 더 잘 팔린다는데 출판동기가 있었다고 볼 수 밖에 없고, 조상의 나라이고 분명한 모국을 일본과 중국에서 마구 비판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해를 하기 어렵고 정말이지 욕설을 퍼붓고 싶은 일이다. 이런 책의 출판을 잘 했다고 박수를 쳐줄 조선족이 과연 얼마나 있을 까?    그 다음 김 문학의 중국비판서들을 살펴보자.   김 문학의 중국비판서들에는   한국에서 (1)《반문화 지향의 중국인》(이채,1999, 이 책은 중국문화론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실질적으로 중국비판서이다)   일본에서 (2)《중국인민에게 고한다!-「문화대국」이 듣고나서 억장이 무너지는통분의 조국비판》(NONBOOKBUSINEES,2000, 祥伝社(黄金文庫),   2005 (이 책은 한국에서 《반문화 지향의 중국인》이  책의 한국어판인 것 같다) (3)《친일파중국인에 의한 참을수 없는 일본질책론-「반일」에 미친 중국,「우호」를 구걸하는 일본》(祥伝社, 2004) ( 이 책은 《중국인에 의한  중국인 대비판-일본은 사죄하면 안된다》는 제목으로 바뀌어 祥伝社(黄金文庫) 에서 2006년에 재판) (4)《역검정 중국역사교과서-중국인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진실한 중국사》(이자와 모토히코, 김 문학 공저,祥伝社,2005, 祥伝社 (黄金文庫) 에서 2008년에 문고본으로재판)     (5)《일중비교愚劣론-동아시아의 내분을 「超克」하는 방법》(南南社, 2007)   (이 책은 기본적으로 중국비판서이면서 한국비판도 했고 또 도처에 일본예찬을 한 성격이 복잡한 책이다),    등이 있다. 이런 비판서들을 아직 중국에서 출판했다는 정보는 없고,  한국에서는 한권뿐이고 나머지는 다 일본에서 출판한 것이다. 이런 비판서를 통해서도 사상적인 문제이전에 오히려 저자의 인간적인 문제를 짚어보고 싶다. 중국인으로서 중국비판을 못한다는 법은 없다. 그래도 진정으로 애정어리고 건설적인 비판이면 중국에서도 꼭 출판하지 못한다는 법도 없다. 김 문학의 중국비판서의 제1탄은 한국에서 나왔는데《반문화지향의 중국인》(1999)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일본에서 이듬해인 2000년에 《중국인민에게 고한다!-「문화대국」이 듣고나서 억장이 무너지는 통분의 조국비판》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고, 2005년에는 출판사를 바꾸어 재판되었다. 이 책이 한국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반향을 일으켰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본에서는 극히 제한된 범위내였겠지만 일본인들이 중국을 막연하게 문명대국으로 보는 이미지를 바꾸어 놓게 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이 책은 제목에서 이미 중국의 문화적으로 어두운 면을 폭로하는 그런 성격의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거듭하여 말하면 이런 책을 꼭 중국어권에서 내자면 중국대륙이 불가능하다면 홍콩이나 대만에서도 내는 방법은 있었을 수 있다. 그러나 김 문학이 중국어권에서 내려고 노력한 흔적은 아직 보이지 않고 손쉽게 한국과 일본에서 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가령 홍콩이나 대만에서 냈다고 하여도 중국문명비판서로서 독창성이나 신선미를 가져다 주지는 못 했을 것이다. 결국 한국과 일본, 특히 일본에서 극히 제한된 범위에서 중국문화의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보이게 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 다음에 일본에서 낸 《친일파중국인에 의한 참을수 없는 일본질책론-「반일」에 미친 중국,「우호」를 구걸하는 일본》(祥伝社, 2004) , ) ( 이 책은《중국인에 의한 중국인 대비판-일본은 사죄하면 안된다》는 제목으로 바뀌어 祥伝社(黄金文庫) 에서 2006년에 재판)이라는 책이 초판이 나오고 제목이 바뀌면서 재판이 나오는 과정에서 책 설명문에 「중국에서 출판을 거부 받은 문제의 책」「모국 중국에서 출판거부 」라는 선전문구가 들어있었다. 아마 이 것은 김 문학의 아이디어가 아니고 출판사가 책을 더 팔기 위하여 행하는 상술이라 볼 수 있지만 이런 방식은 분명히 저자의 출신국인 중국의 체면을 깍아내리는 것이다. 진짜 김 문학이 이 책을 중국에서 출판하려 시도했는데 그 것이 거부를 받았다하더라도 마음가짐을 제대로 가졌으면 이런 식으로 상술에 쓰지 말아야 하고 출판사의 아이디어라고 해도 저자가 거부할 권한은 분명히 있다고 본다.   《일중비교愚劣론-동아시아의 내분을 「超克」하는 방법》(南南社, 2007)의 책 설명문에도 「중국외교부가 제일 주목하는 책」이라는 선전문구가 달려 있는데 일본의 일개 출판사가 책도 나가기전에 중국외교부가 주목하는지 안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중국외교부가 주목해도 주목한다고 선전하고 다니겠는가? 그러니 결국 사람들의 주목을 끌어 책을 더 팔자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고 이런 의도에는 분명히 김 문학의 의사가 개재했을 것이다.  김 문학의 중국비판서에서 또 하나 마음에 꺼리는 일이 그가 중국인으로서 중국을 비판한다고 책 제목이나 표제의 선전문구에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보면 김 문학은《제3의 모국 일본국민에게 고한다! 일본에 귀화한 한국계 중국인에 의한 警世的일본론》(祥伝社,2007)에서 공개하다싶이 일본에 이미 귀화했고 이미 법적으로 일본인이 되었던 것이다. 김 문학이 일본에 귀화한 시기인데 위의 책이 출판 될 무렵에 귀화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중국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옛날같으면 틀림없이 반혁명에 몰릴 정도의 중국비판서를 2004년 경부터 아주 대담하게 일본에서 출판한 것을 보면 이미 그 이전부터 일본에 귀화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만약 그렇다면 귀화한 다음에 내는 중국비판서에는 손쉽게 「痛憤의 조국비판」「중국인에 의한 중국인 대비판」같은 용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꼭 사용할 필요가 있으면 일본에 귀화한 원중국인이라고 하면 그래도 진정성이 보인다.      여기서 김 문학의 일본비판서도 좀 언급하겠다. 김 문학의 일본비판서는 지금까지    (1)《제3의 모국 일본국민에게 고한다! 일본에 귀화한 한국계 중국인에 의한 警世的일본론》(祥伝社,2007) ( 이 책은 중국에서 《新丑陋的日本人》(译者汪培伦, 金城, 2008)으로 번역출판되었다.)  한권이다. 이 책이 어느 정도로 일본을 비판한 것인지 필자도 구체적으로 읽어보지 못하여 잘 알지 못하겠는데 아마존닷컴에 올라와있는 독자의 감상문을 보면 약 20% 정도가 외국인이기에 볼 수 있는 일본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약 80%는 좀 우익적인 관점에서 옛적의 일본이 좋다고 하면서 현재의 일본사회의 문제점을 꼬집은 내용같다. 이런 식의 일본비판은 일본의 보수적인 지식인들도 꽤 잘하는 비판이다. 참고로 아마존닷컴에 올라와 있는 감상문을 다시 한번 올린다. 아마존닷컴에 올라온 독자의 코멘트: 「중국에서 한국계3세로서 태어나 최근 일본인으로서 귀화한 저자만이 쓸 수 있는 일본을 사랑하는「독설일본론」입니다. 저자는 일본의 옛적의 좋은 시대를 실제 체험하고, 또 일본의 전통문학도 자주 읽어보고 있습니다.제가 읽어본 감상으로서는 원외국인이 아니면 쓸 수 없는 객관적인 시야에 감동한 점이 20%정도, 옛적의 일본을 사랑하는 좀 우익적인 의견이 80% 정도로서 당당치 못한 일본인보다 일본문화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알 수 있습니다.」(이하 내용이 길기에 생략)  이 책이 중국에서《新丑陋的日本人》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출판된 것을 보고 사실 필자는 깜짝 놀랐다. 일본어저서를 보니 이제 일본에 귀화하여 일본국민으로 살기로 결심했는데 아무리 일본에 비판적인 내용이 들어있다고 하여도 새로운 조국인 일본에 대하여 중국에서 이런 식의 제목으로 책을 출판해야 하는가 말이다. 분명 번역본이고 보면 정직하게 원 제목대로 하는 것이 옳을 것이고, 그렇게 해야 중국의 독자들도 이 책의 뜻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이 점에서 필자는 또 한번 김 문학에게 실망했고 은근히 근심도 든다. 이제는 한생을 살아가야 할 일본에 대하여 중국에서 이런 식으로 책을 번역하여 출판하면 여지껏 일본에서 후원해주던 보수적인 인사들이 실망하고 진짜 화를 내지 않을 지? 부질없는 杞憂이기를 바란다.    이런 문제에서 마지막으로 중국조선족론에 대하여도 한마디 해야 겠다. 김 문학의 조선족론은 2000년에 한국에서 출판한 《코리언드림-한국과 중국조선족》, 2001년에 중국에서 발표한 《조선족대개조론》, 현재 조글로 사이트에서 발표하고 있는《신조선족월경론》이 있다. 《코리언드림-한국과 중국조선족》은 한국에서 조선족을 망신준 책이라는 평판이 있으나 필자가 전혀 읽어본적이 없고, 이 책의 목록도 본적이 없기에 평가를 삼가하겠다. 《조선족대개조론》은 일본에서 오래전에 어느 일본인이 《장백산》잡지에 연재된 것을 필자에게 복사본을 보내주어 대충 읽어보았는데 수선 충격을 받은 것이 김 문학이가 이렇게 독설을 쏟아놓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 때 처음으로 알았다. 조선족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고 싶은 동기에서 썼겠다고 생각했지만 잔뜩이나 소수민족으로 살아가기 힘든 시대에 이렇게 조선족 사회에 대하여 마구 험담을  해도 되는가 하는 것이 그때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지금 와서 보면 한국에서 중국비판, 일본에서 한국과 중국 비판으로 물오른 기량을 발휘하여 조선족 사회에도 거침없이 메스를 들이대보려는 시도였는 것 같은데 그런 큰 파장을 일으키고 나서 김 문학이가 그 후과에 대하여 책임지고 조선족 사회의 여러가지 문제해결에 발벗고 나섰다는 행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던져놓은 파장인지 단지 조선족 사회에서 화제몰이로 책 한권이라도 더 내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다. 현재 조글로에서 연재하고 있는  《신조선족월경론》도 본인이 노력하는 수고는 이해할만 하지만 구조선족, 신조선족이란 생소한 개념으로 조선족 사회의 불화나 조성하고, 조선족의 전통거주지를 떠나 연해지역으로, 해외로 나가는 것을 문명화의 방향으로 간주한다면 이 것은 결과적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나 기타 조선족공동체의 붕괴에 부채질하는 언설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이미 일본에 귀화한 신분이고 보면 그런 사실을 밝히고나서 조선족론을 전개했으면 본인이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자연히 구분되고 사람들도 진정성이 들어있는 글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이상 김 문학이 일본, 한국, 중국에서 책들을 출판하고 글을 연재하는 과정을 관찰해보면 아무리 좋게보자고 해도 김 문학에게 쓴소리를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결국 이상의 문제와도 관계가 되는데 김 문학은 한국비판서, 중국비판서들에서 일본의 조선식민지지배와 중국침략문제에 관하여 코리언들과   중국인들이 정말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발언도 적지 않게 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런 문제는 자칫하면 김 문학이가 친일파나 한간으로 몰리고 크게 명예훼손이 되기에 필자로서도 조심스레 판단할 수 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분명이 있는 사실을 덮어두고 지날 수는 없다. 필자가 이런 언급을 안 해도 이미 일본에 사는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은 어지간히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수선 일본의 조선식민지지배와 관련되는 김 문학의 글 내용들을 확인하겠다.    김 문학의 한국비판서《또 다시 한국국민에게 고한다! -반일이라는 어리광을 그만닥치라》(김 문학, 김 명학공저, 초판 NON BOOKBUSINES에서1999, 재판祥伝社黄金文庫)에서 2002)의 제5장의 내용을 다시 한번 올려본다.     제5장 21세기판 한국인개조계획   -지금이야말로 북안적역사관을 세우자   일한병합을 둘러싼 세계의 상식   구미의 학자의 이론을 알았을 때 받은 충격   일한병합은 과연 피할 수 있었는가   일본통치의 35년간을 4기에 나누어 검증한다 한국국민의 역사관개조론   한국에서 허용되는 역사관은 하나밖에 없다   한국인에게 이해되지 않는 일본의 교과서사정   항일캠페인으로 하여 한국이 얻는 것은 역사에 말살된 소리없는 민중들   식민지체험자의 소리를 발굴하는 귀중한 사업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에 있은 양호한 관계   자료가 증명하는 식민지시대 역사의 진실 지금 경청해야하는 박정희의 국민개조론   박대통령의 근대화는 식민지정책의 재활용이었다   개조해야 할 점으로서 올린 한국인의 악덕   박대통령과 매국노 이광수의 불가사의한 일치  안중근의 신화를 넘어서    안중근이 일한합병을 결정하게 한 역사의 아이러니    일로전쟁에서 일본의 승리에 쾌재를 부른 안중근    왜서 병합반대론자인 이토히로부미를 쐈는가    사형을 앞둔 안중근의 최후의 말     안중근이라는 우상을 해체하고 새로운 미래로 향하자 (대체 이상의 뜻)     이 책의 제5장의 제목만 보아도 일본의 식민지지배에 대하여  긍적적인 시각으로 보려고 했다는 것을 쉽게 읽어 낼 수 있다. 오히려 이 책을 읽고나면 김 문학에게 질문하고 싶은 문제가 여러가지 생긴다. 「항일캠페인으로 하여 한국이 잃은 것이 무엇인가? 그래 자기 나라에 대한 지배에 대하여 반항도 하지 말아야 한단 말인가? 식민지체험자의 소리를 발굴하는 귀중한 사업이란 무엇인가? 그런 귀중한 사업을 하여 일본의 식민지지배하에서 행복하게 산 조선인이 다수였다는 것을 증명하여 어디에 쓰려는 것인가? 식민지시대 역사의 진실을 증명하는 자료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러면 광복후 조선반도의 남북양측이 일제시대의 진실한 역사를 숨기고 살아왔다는 말인가?  박정희 대통령의 근대화는 일본식민지 정책의 재활용이라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안 중근이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했기에 일한합병이 결정됐다는 근거는 또 어디에 있는가?  한국에서 안 중근의 우상을 해체할 필요는 왜 생기는가? 안 중근우상을 해체하지 않으면 한일관계가 미래로 향하지 못하는가?」 사실말이지  이런 질문의 하나하나가 일본의 조선식민지 지배문제의 본질과 관계되기에 말꼬리잡기를 한다거나, 질문자가 지나친 민족주의 성향때문에 하는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一笑에 부치지 말고 자료근거가 충분하고 소신있게 한 발언이면 한번 조글로에서 이상의 질문에 상세한 대답을 해주었으면 한다.   필자는 대체 2002년경에 일본의 서점에서 이 책의 제5장에서 김 문학이 안 중근이 할빈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한 것은 무지에 의한 소행이고 무의미한 행위로 폄하한 것을 읽고나서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분노를 느낀 적이 있다. 지금까지 필자가 개인적으로 김 문학을 정말 곱게 안보게 된 것이 바로 이 책의 제5장을 읽어보고나서이다. 분명 안 중근은 조국이 독립한후 본인의 유해를 조국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으며도 불구하고  7000만이나 되는 후손들이 그 유해도 찾아내여 모시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인데 조선족출신이 어찌 이런 발언을 꺼리낌없이 한단 말인가?   김 문학은《중국인에 의한 중국인 대비판-일본은 사죄하면 안된다》(祥伝社黄金文庫, 2006,12)의 제2장 「일본은 사죄하면 안된다」의 「일본의 전쟁에 자긍심을 가지라」라는 소제목하의 문장에서「예를 들면 일한의 근대사에서 안 중근과 이토히로부미입니다만, 안은 한국민족의 입장에서 보면, 항일투사이고 민족영웅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틀림없이 테로리스트입니다. 당시의 국제법에 근거해도 안은 테로리스트입니다. 이토도 일본인의 입장에서는 (메이지)유신의 元勳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만, 한국인의 눈에서는 적의 두목이겠지요.」(동서의 제114페이지)라고 언급했는데 당시의 국제법에 근거해도 안 증근은 테로리스트라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이 점도 해명을 해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이 책의 「신중국의 씨를 뿌린 일본」의 「무산된 이토히로부미수상초청계획」이라는 소제목하의 문장에서 「이토는 조선총독을 할 때도 온화하고 동정적인 태도로 나섰고 조선병합에 반대한 인물이었습니다」(동서 224페이지) 이라는 것도 이해가 쉽게 가는 내용이 아니다. 김 문학은《일중비교愚劣론-동아시아의 내분을 「超克」하는 방법》(南南社, 2007)의 제3장 「일중비교우렬론」의 「이토히로부미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이었는가」라는 소제목하의 문장에서 「이토히로부미는 한국을 병합하기보다 잠시 관리하여 약소국가를 근대국가로 발전하게끔 희망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아는 것에 의하여 역사의 본질이 보입니다」(동서224~225페이지)라고 발언했는데 이런 관점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충분한 근거를 제시했으면 좋겠다.   《일중비교愚劣론-동아시아의 내분을 「超克」하는 방법》에서 김 문학이 종군위안부문제에 대하여서도 발언한 내용이 확인된다. 이 책의 제3장「일중비교우렬론」의「한국은 왜서 반일을 하는가」의 제목의 「대일폭력과 어리광의 이중카드」라는 소제목하의 문장에서   일본한테만 책임을 지우는 불모함.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진정한 어리광은 크게 말하면 對韓지원요청이며, 작은 것은 「위안부」 노친네들에 대한 보상요구입니다. 한국의 미디어는 그 것을 크로즈업하고 의식적으로 그것을 확대하여 보도하고 있습니다. 노친네들은 그것에 응하여 악동처럼 떠들고, 아우성칩니다.  「위안부」가 가령 사실이었다하더라도 조금의 방어능력도 없는 무력한 노친네들의 드러내지 않은 상처를 고의적으로 자극하여 드러내고 새로운 고통을 느끼게 하는 것이 훨씬 더 「폭력」적이 아니겠는가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한국정부가 정말 노친네들의 고통을 이해하여 국민을 사랑한다면 오히려 정부가 솔선하여 충분한 보상을 하면 좋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언제까지도 인정하지 않는 일본정부에 보상을 조르는 행위인즉 「폭력」이고 거기다 「어리광」에 의한 사탕얻어먹기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국민조차 지키지 못한 국가의 책임을 통렬하게 느낀다면 그리고 다른 나라에 대하여 비난하는 정력이 있다면 그 나라가 보상하는 것이 지름길입니다. (동서 196~196페이지, 이하 위안부문제와 직접 관계가 없기에 생략).       이상의 내용을 확인해보면 국경을 뛰어넘어 활동하는 경계인이라는 김 문학의 이미지가 한꺼번에 다 날아가는 것 같고, 인권의식에 너무나 어두운 일본의 극우인사라는 인상밖에 남지 않는다.   김 문학이는《한국국민에 고한다!-일본거주 한국계중국인의 통곡의 조국비판》 의 「제7장 일본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가련한 나라」에서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철저한 반한친일언행을 하고 다니고, 그래서 한국에서 신친일파로 낙인이 찍혀져 있는 오선화에 대하여 선구자로 치켜세우고 그녀를 매국노라고 하는 한국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그리고《또 다시 한국국민에게 고한다! –반일이라는 어리광을그만닥치라》에서《친일파를 위한 변명》이라는 책을 한국과 일본에서 내고 한국국회에 나가서 김 구선생을 테로리스트로 인정해야 한다는 전단지를 뿌리고 다니다가 기소를 당하고 책이 한국 교육당국으로부터 유해도서로 인정된 김 완섭에 대하여서도  독불장군의 반란이라고 긍적적으로 평가했다. 본인의 친일언행도 문제인데 한국에서 널리 친일파로 낙인이 찍힌 오 선화, 김 완섭마저 변호하고 나섰으니 김 문학의 친일언행은 너그럽게만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김 문학이 공동저자로 나와있는 《우스개소리 일한결별선언-좋지 않으냐 억지로 친하지 않아도》 의 소제목에 「일본경제부활을 위하여 「38度線」쓸모가 있다!」가 들어있어 이 책이 출판된 당시 한국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이 책이 손에 없기에 구체적으로 이 책에서 누가 이런 얘기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공동저자로서의 김 문학이 이 문제에서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또 《일중비교愚劣론-동아시아의 내분을 「超克」하는 방법》의 「제1장 유연한 일본문화력」의 「일본은 왜서 언제나 不死身의 행운이 넘치는가」하는 제목의 「조선전쟁의 特需」라는 소제목하의 문장에서 「일본에는 조선전쟁이라는 새로운 행운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발언하였는데 사실이야 그렇더라도 보수적인 일본인들도 공개적으로 발언하기를 꺼려하는 내용을 조선족출신이 마구 얘기하는 것은 한마디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그런 발언을 하면서 수많은 동족이 죽어간 사실은 떠오르지 않았는지? 그럼 김 문학이는 일본의 중국침략에 대해서는 어떤 발언들이 있었는가? 이 문제에 대하여서도 문제가 너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일본의 중국침략을 변명하는 듯한 내용은  (1)《친일파중국인에 의한 참을수 없는 일본질책론-「반일」에 미친 중국,「우호」를 구걸하는 일본》(祥伝社, 2004) ( 이 책은 《중국인에 의한  중국인 대비판-일본은 사죄하면 안된다》는 제목으로 바뀌어 祥伝社   (黄金文庫) 에서 2006년에 재판)  (2)《일중비교愚劣론-동아시아의 내분을 「超克」하는 방법》(南南社, 2007)    이상의 두책에 주로 나와있는데 그런 내용이 너무 많아서 일일히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이 두책의 상세한 목록은 필자가 이미 조글로에 올린「벌거숭이 김문학-<김문학 解體新書>(1)」에 나와있다.                     현재 필자가 손에 들고 있는《중국인에 의한 중국인 대비판-일본은 사죄하면 안된다》(祥伝社(黄金文庫)  ,2006년)를 펼쳐보면서 김 문학에게 질문하고 싶은 사항이 수두룩하게 생긴다.  「일본의 중국침략시의 남경공방전의 책임은 중국에 있다고 하는데 그 의도는 무었인지? 일본이 공격을 하지 않으면 공방전도 없은 것이 아닌가? 침략자를 비난하기 전에 왜서 중국측의 장군의 강경항전을 문제삼아야 하는가? 남경대학살 30만설의 허구를 밝히려 하고 중국인에게는 애국적인 관점에서 수자를 뻥튀기하는 문화가 있다고 판단하는데 수자문제 이전에 이 참극의 엄중성에 대하여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주국은 낙원이었다, 일본점령구는 낙원이었다. 三光정책은 중국의 전통, 일중전쟁의 8년은 일본인에 의한 1년 전쟁이고 7년 경제건설이라 하는데 그런 근거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이상의 문제들은 어느 하나도 중국인들에게는 지극히 무거운 문제이고 국민감정을 크게 건드리는 문제이다. 그러니 결코 가볍게 발언 할 문제가 아닌데 김 문학의 상기의 책을 읽어보면 강연문을 묶어서 만든 책같은 내용에 이런 중대한 문제에 인용이나 주해가 별로 없이 발언들이 가볍게 나온 것들이다. 가령 인용이 있다쳐도 그런 인용이 학계에서 인정을 받는 관점인지, 어떤 극단적인 사람들의 편견정도인지 구분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김 문학의 책에서는 이런 엄밀한 학문적 절차도 없고, 중대한 문제에 대한 심각한 고민도 없이 발언이 마구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 과연 그 후과를 생각하고 한 발언인지 회의감마저 든다.  《일중비교愚劣론-동아시아의 내분을 「超克」하는 방법》(南南社, 2007)도 필자가 보기에는 상당히 문제가 있는 책이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중국비판서이면서 한국비판도 했고 또 도처에 일본예찬을 한 성격이 복잡한 책이다. 필자가 이 책을 접하고나서 김문학의 중일한삼국의 국민성비교론에 일종의 위험성을 느끼기도 한다. 이 책에서 중국, 한국의 국민성은 거의 性惡說관점에 가깝게 논하고 일본의 국민성을 또 거의 性善說관점에 가깝게 논했다. 결과적으로 중일한삼국의 국민성비교를 한 결과 일본인종이 우월하다는 결과밖에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고로 이 책 목록의 이런 내용의 일부를 여기서 다시 열거한다.   제3장 일중비교우렬론  일중국민성의 우렬비교 일중국민성의 비교로 미래를 점친다 중국은 과연 「잠자는 사자」인가 유연한 일본인과 경직된 중국인 혁신적인 일본인과 보수적인 중국인 정직한 일본인과 사기적인 중국인 단결심이 강한 일본인과 內訌력이 강한 중국 높은 소질의 일본인과 낮은 소질의 중국인 차분한 일본인과 떠들어대는 중국인 내향적인 일본인과 외향적인 중국인 자기반성적인 일본인과 남의 탓만 하는 중국인 《僞惡醜일본인》과 《추한 중국인》의 백년의 격차 공적정의감의 일본인과 사적정의감의 중국인 백년에도 변하지 않는 중국의 국민성 결점 중국의 반문명의 전통적 체질 반문화지향의 중국사 평화보다 전쟁을 선호하는 국민성 대륙적 호전성 內訌과 自害의 역사 백년전의 반일투쟁과 「일중관계신사고」 「반일」은 중국, 한국의 발전을 저지하는 두터운 장벽 일본을 이용하는 중국 한국인은 왜서 「반일」을 하는가  동방예의지국이라는 환상  해외동포에 대한 비인도적 차별과 학대  국민85%가 체벌에 찬성  내셔널리즘적폭력주의+대일폭력  한국의 감정적비민주주의  「아시아의 내홍」의 위험성  일본에 대한 질투와 콤플렉스  대국 일본에 어리광부리는 한국인의 약체성  대일폭력과 어리광의 이중카드 깔보임당하는 일본과 일본인  바보가 돼버리는 일본인  세계에서 제일 속임당하기 쉬운 국민  자기선전을 잘 못하는 일본인  세계에서 제일 평화에 취해있고 우울증적인 일본인  내향적이고 외교를 잘 못하는 일본인  조화로움의 마이너스적 장벽  「반일」은 즉 일본인의 마음속의 벽이기도 하다 중국, 한국의 역사왜곡  역사관, 역사교육의 일중한의 차이  중국, 한국의 역사교육에 있어서의 왜곡, 날조의 실태  중국에 있어서 역사는 정책의 이용도구  「僞造田中上奏文」도 중국에서는 사실이 된다  일본점령구와 해방구의 실태비교  점령구는 문화도 경제도 번영했었다  「三光政策」의 문제  한국의 역사교육의 실태  일본식민지지배과 근대화  伊藤博文의 전정한 목표는 무엇이었는가  대일순응역사의 중요성     결국 이런 식의 국민성비교는 어느 민족이 우수하고 어느 민족이 열근성을 가졌다는 것인데 어떻게 보면 인종우월주의 시대의 유령같기도 하고 문화상대주의가 중요시되는 시대정신에도 위배된다. 이러하니 김 문학이 쩍하면 얘기하는 한국인개조론, 중국인개조론, 조선족대개조론이 사람들의 마음에 진정성 있게 다가올 수 있겠는가?   김 문학은 일본의 한국지배에 대하여 대체 긍정하는 듯한 글을 쓰고 일본의 중국침략에 대하여서도 대체 긍정하는 듯한 글들을 썼다. 그 가운데서도 종군위안부문제에 대하여 기본인권을 무시하는 발언, 안 중근 의사를 테로리스트로, 그리고 무의미한 행동을 했다고 폄하하는 발언, 만주국을 만족국이라 부르는 발언, 남경대학살마저 공방전은 중국측 책임이라는 발언은 코리언과 중국인의 민족적 감정을 크게 건드리는 발언들이다. 이미 일본에 귀화하여 인본인으로서 한 발언이라치더라도 원조선족출신인 점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유감스러운 발언들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김 문학이 한국에서《반문화 지향의 중국인》(이채,1999),《한국인이여 상놈이 돼라》(우석, 1999), 중국에서  《조선족대개조론》(2001)를 냈을 때 연변대학의 김 관웅선생에 대표되는 조선족 지식인들이 이런 책들의 중국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한국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조선족 사회에 대한 몰이해와 분열을 가져올 수 있는 우려 등을 고려하여 비판에 나섰던 것으로 아는데 이 분들의 언사가 직설적이고, 오래간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살아온 관계로 정치적인 기준으로 판단하여 일부 정치적 색채가 나는 모자를 김 문학에게 씌운 면이 있었더라도  이 분들의 비판은 그 방향은 지극히 옳았다고 본다. 그 때 김 문학이가 그런 비판에 귀를 기울이고 자기가 나아가는 길에 문제가 있다고 자각했더라면 이렇게까지 일본의 극우적인 발언을 쏟아내고 코리언과 중국인들의 국민감정을 크게 자극하는 언행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면에서 오늘 이때까지도 변명이나 하고 이런 발언을 비판하는 김 관웅선생같은 분들을 무지하고 고리타분하고 도태되어야 할 연변의 구조선족이라고 대응한 점에 대해서는 마땅히 유감표명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고 조선족 사회에서 김 문학이가 계속 자기자랑이나 하고 신조선족의 선구자처럼 자처할 최저의 자격이 있는가?   김 문학이 욕을 먹는 문제의 본질은 책을 많이 내고 많이 팔고 그래서 돈도 벌고 명예도 쌓자고 하는데 있는 것 같다. 지극히 상업작가의 모습이다. 그런 가운데서 지조나 도덕문제는 뒤전에 돌리고 책만 내고 잘 팔릴 수 있다면 어떤 위험한 과제에도 도전했다고 볼 수있다.지금까지 요령좋게 동아시아 삼국의 국경을 넘나들면서 책도 많이 내고 조선족의 이름도 많이 알린 것이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조선족의 명예에도 손상을 준 것이 너무 자명한 일이다.   필자는 김 문학이가 분명히 일본을 좋아하고 일본에 도취된 것이 사실이지만 위에서 언급한 극우적이고 친일적인 발언들이 꼭 김 문학의 사상적 신조에서 우러러나온 발언같지는 않다. 이런 발언을 함으로서 일본의 보수화 의 분위기에 편승하여 책을 잘 내고 책을 잘 팔고 도처에 불리워다니면서 강연을 하면서 돈도 벌고 이름도 날리는것이 주요한 동기라고 보고 싶다. 문필가로서, 책장사꾼으로서의 진면모가 그런데 있다고 판단하고 싶다.    그러기에 필자로서는 김 문학의 친일언행에 조선족 지식인 사회가 너무 과잉대응을 하는 것은 상책이 아니라고 본다. 이제는 전쟁의 시대도 아니고 사실 김 문학이가 일본에서 그런 발언을 하여도 중국이나 한국은 끄떡없는 것이 현실이다. 오히려 그런 발언에 현혹당하여 중국과 한국을 제대로 이해못하는 일본의 일부 보수적인 사람들이 더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니 각자가 분노를 느끼더라도 말그대로 혁명적인 방식으로 김 문학과 상대하는 것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면서도 조선족 사회가 김 문학과 같은 사람들이 더는 속출하지 않도록 각성할 필요가 있다.       설명: 이제 「황 우석과 김 문학 그리고 맹신」, 「우리모두의 문제로서의 김 문학」으로 4번째회에서 이 연재를 마칠 예정이다. 김 문학씨도 이 글을 보고서 성내기 이전에 한번 자기를 자성할 기회가 되었으면 고맙겠다.                                                                                    2010년10월4일  
24    김문학 그는 누구인가? (김광림) 댓글:  조회:5448  추천:42  2010-10-03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보스턴통신(6)벌거숭이 김문학-<김문학 解體新書>(2)                       4. 김 문학 그는 누구인가?   김 문학이를 제대로 평가하자면, 김 문학이가 어떤 작가이고 또는 어떤 학자이고 그의 저서들은 어떤 성질의 작품이며 가령 학술저서라고 한다면 어떤 유형의 학문분야의 저서들인가 이런 기본적인 문제가 먼저 해명되어야 한다. 그러자면 자연히 김  문학이가 쓴 저서들을 중심으로 이런 분석이 진행되어야 하며 그의 이력서 등 자료도 보조적 수단으로 활용활 수 있다.  그럼 여기서 먼저 김 문학의 저술활동의 경과를 간단히 추적해보겠다.     필자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자료에 의하면 김 문학이 제일 먼저 저서로 사회에 내놓은것이《仮面世界与白色世界-日本文化与朝鲜文化的比较》(金良基원저, 遼寧教育出版社, 1989)인데 이 책은 본인의 창작이 아니고 재일교포학자인 金良基선생의《김치와 오신코-일한비교문화고》라는 책을 번역한 것이다. 김 문학은 1985년에 동북사범대학 일본어전공을 졸업하고 요녕사범대학에서 6년간 강사로 있다가 1991년에 일본에 유학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사이에 사회에 내놓은 책은 거의 한권의 번역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족 문예지나 또  한어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했을 수 있으나 책의형식으로 나온 것 같지않다. 그 다음 김 문학이 책으로 내놓은 것이 한어로 쓴 《裸戀》(1993)이라는 산문집이라고 김 문학이 조글로에 공개한 저서리스트에 나오는데 구체적으로 중국의 어느 출판사에서 나오고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는 정보가 없어서 확인하지 못했다.    김 문학이 본격적으로 저술활동을 시작하여 책을 많이 내 놓기 시작한 것이 1997년에 한국에서《벌거숭이3국지》(창공사)《바람난 중국인, 변화하는 중국땅》(김 문학, 김명학공저,시공사)를 내면서부터이다. 그 후부터는 이 책들을 일본에서 번역하고 새로운 책들을 다수 출간하였다. 그러고 보면 1997년이 김 문학이 본격적인 저술활동을 시작한 원년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김 문학이 출판한 책의 수량인데 김 문학 본인은 조글로에서 58종의 책을 냈다하고 일본에서 출판한 책들에서는 저자소개에서 수년전까지는 30여종이다가 2,3년사이에 50여종을 냈다고 나오는데 필자가 대체적인 통계를 해본데 의하면 약 40종에 가까운 것 같다. 필자가 아직 존재를 잘 모르는 저서들도 있을 수 있다.이 가운데는 같은 내용의 책을 한국에서 그리고 중국조선족출판사에서 낸 것이 있고, 같은 내용의 책을 한국, 일본, 중국에서 서로 번역하여 낸 것이 많기에 엄밀하게 말하면 원저들은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대단히 많은 것도 아니다.    그러더라도 현재의 중국조선족출신치고는 이처럼 많은 저서를, 그 것도 중국, 한국, 일본에서 두루 출판했다는 자체가 많은 사람들이 평가해주는 사실이고 재능도 상당히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저서를 많이 낸 김 문학을 우리는 어떤 작가 또는 학자로 평가해야 하는가? 이 점은 김 문학을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 필자는 이 문제를 해답하기 전에 김 문학의 저서를 다음과 같이 분류해보고 싶다. 여기서 특히 설명을 달지 않은 책들은 일본어로 된 저서들이다.  (1)동아시아비교문화론-《벌거숭이3국지-일중한삼국비교문화론》,《일본인 중국인 한국인-신동양삼국비교문화론》, 《섬나라근성 대륙근성 반도근성》《이래도 되는가?-일중한 표면의 얼굴, 뒷면의 얼굴》(이 책은《일본인 중국인 한국인-신동양삼국비교문화론》을 재판한 것으로 보인다) (2) 중국문화론-《호색과 중국문화-중국의 역사는 밤에 만들어졌다》,《훈(混)의 중국인-일본인이 모르는 행동원리의 심층》,《사랑과 욕망의  중국 4000년사》(이 책은《호색과 중국문화-중국의 역사는 밤에 만들어졌다》의 서로 다른 출판사의 재판인 것 같다)  (3) 중국,일본소개서-《칼을 품은 중국인》(한국에서 《바람난 중국인, 변화하는 중국땅》을 일본어로 번역 한 책 같다), 《일본문화의  수수께끼》(한국에서 낸 책), 《코리언드림-한국과 중국조선족》(한국에서 낸 책) (4) 한국비판서-《한국국민에 고한다!-일본거주 한국계중국인의 통곡의 조국비판》, 《또 다시 한국국민에게 고한다! -반일이라는 어리광을 그 만닥치라》(이상의 책들을 다시 정리하여 중국에서《丑陋的韓國人》이라는  제목으로 2005년에 山东人民出版社, 大地出版社에서 출판하고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도 같은 제목으로 출판한 것 같다. 한국에서는《한국인이여  상놈이 돼라》(우석,1999)가 이 책들과 내용이 비슷하지만 일본에서 낸것과 중국에서 낸 것과는 완전히 같은 내용같지 않다.)《우스개소리 일한결별선언-좋지 않으냐 억지로 친하지 않아도》(공저)  (5)중국비판서-《중국인민에게 고한다!-「문화대국」이 듣고나서 억장이 무너지는  통분의 조국비판》(이 책은 한국에서 《반문화 지향의 중국인》이  책의 한국어판인 것 같다. 그러나 같은 내용의 책을 중국에서 출판했다는   정보는 없다) , 《친일파중국인에 의한 참을수 없는 일본질책론-「반일」에미친 중국,「우호」를 구걸하는 일본》,《중국인에 의한 중국인 대비판-일본은 사죄하면 안된다》, 《역검정 중국력사교과서-중국인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진실한 중국사》, 《일중비교愚劣론-동아시아의 내분을「超克」하는 방법》( 이 책은 기본적으로 중국비판서이면서 한국비판도 했고 또 도처에 일본예찬을 한 성격이 복잡한 책이다),《조선족대개조론》(중국에서  조선어로 낸 책) (6) 일본비판서-《제3의 모국 일본국민에게 고한다! 일본에 귀화한 한국계중국인에 의한 警世的일본론 》(이 책이 일본에서 나온 것이 2007년이고  2008년에 중국에서《新丑陋的日本人》(金城)으로 번역되었다.   (7) 명언집, 소설,산문-《현명한 인생술-보통인의 명언이 가르친다》, 《천마의 이야기》(소설), 《裸戀》(한어로 냈다고 하는 산문집)   (8)번역-《仮面世界与白色世界-日本文化与朝鲜文化的比较》(金良基원저,遼寧教育出版社, 1989), 《日本人的缩小意识》(李御寧원저,張乃麗譯,金文學審稿,山東人民出版社, 2003),《韩国人的心,这就是韩国人》(李御寧원저,張乃麗譯,  金文學審稿, 山東人民出版社, 2007),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번역, 조선 총독부지음,북타임,2010)    이상 김 문학의 저서를 약간 빠뜨린 것이 있을 수 있으나 필자가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 조선어 저서들을 종합하여 분류해본 결과이다. 이런 종합한 결과에 의하여 분석해보면, 김 문학은 문화평론가, 사회비평가, 번역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한편, 산문집 한편도 있다. 그러나 번역이 실지 그리 많은 것은 아니고, 아직까지 소설이나 산문에서 사회에서 확실하게 인정받은 것은 아니다. 그러니 결국 문화평론가, 사회비평가가 현재까지의 김 문학의 저서에 대한 제일 합리적인  평가라 할 수 있다.    그러면 문화평론가, 사회비평가로서의 김 문학의 진가는 어떤 것이고 동아시아 사회에서 어떤 객관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인가? 필자는 김 문학의 몇권 정도의 동아시아문화론은 김 문학의 문화평론가로서의 지위를 확립시켜주는 것이고 독특한 점이 보인다고 판단한다. 그 독특함이란 동아시아의 중국, 한국, 일본을 다 아우르는 비교문화론적 저서들이 그리 많지 않기에 내용의 심도를 둘째치고더라도 일단 이런 저서들을 여러권 쓰고 그 것들을 동아시아의 여러나라에서 출판했기에 김 문학하면 사람들은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또는 중국문화,한국문화,일본문화 어쩌고 하는 소위 비교문화적인 책들을 냈다고 기억하게 된다. 필자는 일본의 어느 큰 서점에서 김 문학의 어느 동아시아문화론 저서가 '아시아를 이해'라는 좋은 책 시리지 가운데 들어가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러면 이런 책들이 동아시아의 문화계 또는 학술계에서 어떤 정도의 평가가 나오는가 알아볼 필요도 있는데 그 객관적 기준이 이런 책들이 어떤 문화상, 또는 학술상들을 받았는가 하는 점이다. 유감스럽게도 김문학이 동아시아문화론 저서로 아직 어느나라에서 어떤 확실한 문화상, 학술상을 수상했다는 정보는 없다. 본인이 조글로에 올린 저서리스트에 보면 일본과 중국에서 “일본국제기금교류상”, “연변일보문학상” “요녕신문문학상” “장백산모아모드 문학상”등을 수상했다고 하는데 “일본국제기금교류상”이란 일본에 오래 있는 나도 구체적으로 무슨 상인지 잘 모르겠다. 혹시 “일본국제교류기금상”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이 상은 상당한 성과나 연륜이 있는 사람들이 받는 것이고 그 상의 수상자리스트에서 김문학의 이름은 확인하지 못했다. 나머지 중국에서 받은 상들은《조선족대개조론》,《한국인이여 상놈이돼라》등 저서에 의하여 조선족문학상을 3개 받은 것이 아닌가 추축된다.       김 문학의 동아시아비교문화론 그리고 중국문화론도 학술적인 견지에서 보면 국민성비교가 특징적으로 나타나는데 필자는 솔직히 김 문학이 아주 정력을 넣어서 쓰고 있는 국민성비교가 학문적 방법론이나 과학적 정신이 결여된 것이 많다고 생각하며 그 때문에 취미성, 화제성은 있으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학술저서라고 판단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어느 민족도 좋고 어느 정도의 성향을 보여주는 국민성이 있기는 하나 그 것이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고 시대와 사회의 발전단계에 따라 바뀌기 쉽고 어떤 법칙처럼 나타나는 것이라 보기 어렵다. 특히 현대사회는 국경을 넘은 민족간의 교류가 아주 많아 정지된 시각으로 국민성을 판단하기 점점 더 어렵다. 예를 들면 김 문학은 중국은 대륙근성, 한국은 반도근성, 일본은 섬나라근성으로 국민성 분석을 하기 좋아하는데 현대의 많은 한국인, 일본인들의 활동공간이 이미 그런 반도, 섬나라는 지리적 환경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 그런 정지된 시각으로는 한국의 삼성이나 일본의 도요타자동차의 국제적인 활동을 전혀 분석해낼 수 없다. 또 상대적으로 국토가 그리 크지 않고 단일민족인 한국과 일본을 다민족국가이고 국토가 거대하고 풍토가 서로 많이 다른 중국과 단순하게 국민성비교를 하는 자체가 학문적결과를 도출해내기 어렵다. 김 문학은 조글로에 올린 글에서도 일본총독부가 조선인들의 성격을 분석한 자료를 보고서 놀랐다고 하지 않았는가. 김 문학은 조선인들의 성격이란 성급한 것이 특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자료에서는 식민지시대 조선인들의 성격이 悠長하다고 나와서 본인의 생각과 다르더라고 쓴 것 같다. 결국 조선인도 시대에 따라서 국민성이 다르게 나오는 것이 자명하다. 국민성 연구는 학문분야에서 심리인류학이라 불리우는데 그 대표적인 연구가 미국의 인류학자 Ruth Benedict의 《국화와 칼》(1948)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2차세계대전중에 집필한 것이어서 저자가 일본을 방문하지 못하였지만 그대신 미국내의 일본인이거나 전쟁포로들을 상대로 대량의 설문조사, 면접등을 하면서 과학적인 방법에 근거하여 일본론을 쓴 것이다. 그러더라도 필자의 이해로는 국민성연구가 현재의 문화인류학에서는 그리 주목받는 분야가 아닌 것 같다.  김 문학의 중일한 삼국의 국민성에 관한 언급들을 보면 일부 문화인들의 글에서 착상을 빌려오는 경우는 많으나 자신이 동아시아 삼국에서 사회조사를 진행하고 대량의 사람들을 면접하면서 그런 실증적인 연구활동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리얼리하게 다가오는 결론을 보여주는 경우는 겨우 없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니 내용이 취미성, 화제성은 있으나 그런 내용에서 진실로 도움이 되는 지식을 습득하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비교문화론이라 학문에 대하여서도 언급해보자. 한마디로 비교문화론이란 너무 막연한 분야이다. 인간의 문명한 삶을 다 문화라 지칭한다면 무릇 인간과 관계되면 문화란 범주에는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무슨 정신문화, 생활문화, 거주문화 등 문화란 이름을 단 개념을 거의 무수하게 사용한다. 이럴진대 이런 방대한 문화를 비교한다는 것은 언제나 비교의 대상이 명확해야 하고 초점이 잘 맞추어져야 설득력 있는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 동아시아비교문화론, 또는 중일한비교문화론이라는 것도 막연한 비교이면 취미성, 화제성이나 추구하다가 말장난으로 끝날 수 있다. 그러니 나의 협소한 풍문으로도 비교문화론으로 학위논문을 탔다는 소문을 아직 못 들었고, 미국에 와보니 비교문학, 대조언어학 등 학문분야는 있어도 비교문화라는 구체적인 학문분야는 없다고 들었다. 내가 일본의 동경대학에서 석사, 박사과정을 비교문학비교문화전공에서 공부했는데 거기서 공부하면서도 비교문학은 구체적인 학문분야로 인정되고 그런 내용에 대하여 학술논문을 많이 쓰고 있었으나 비교문화론이라는 이름으로 쓰는 학술논문을 보지 못했다. 이 정도로 학계에서도 비교문화론이란 정체성이 애매한 분야이고 오히려 문화평론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김 문학이 동아시아비교문화론을 지향하면서 잘 거론하는 두 인물이 있는데 한명은 중국의 林 語黨선생이고, 한명은 한국의 李 御寧선생이다. 두분 다 중국, 한국의 언어, 문학, 문화연구의 대가들이고 중국론, 한국론에서 잘 알려져 있는 분들이다. 그러나 이들도 너무 가벼운 비교문화론을 마구 써냈다고는 보기 어렵다. 林 語黨선생은 필자가 그분의 글을 그리 많이 읽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데, 李 御寧선생의 한국론이나 문화론은 수선 사용하는 한국어가 화려하고 현란하여 대뜸 언어의 대가라는 점을 느낀다. 그리고 아이디어가 아주 풍부하다. 그런데도 이분의 한국론이나 비교문화론을 시간이 지나서 다시 읽어보면 적지 않은 관점들이 오랜 시간의 考驗에 견디기 어렵고 그 때 그 때의 읽는 재미로 끝날 때가 많다.  한가지 사례를 들면 1965년에 한국에서 낸 《흙속에 저바람속에》가 이 분의 한국론의 대표작인데 한국이 아주 가난하고 산업화에 막 들어서기 직전에 쓴 글이어서 한국인과 한국사회를 보는 눈이 어딘가 어두운 그늘이 많이 보이고 그리 낙관적이 되지 못했다. 일본에서는 이책이《恨의 문화론-한국인의 마음속에 있는 것》 으로 번역되었는데 번역서의 이름대로 한국인의「恨」의 정서가 이 책의 한국인론의 키워드였던 것이다. 그러나 李 御寧선생도 현재의 한국인론에서는 이런 개념을 거의 쓰지 않고 있고, 한국의 젊은 세대들한테 「恨」의 정서가 그렇게 어필되는 개념이 아니다. 한류붐을 이루는 문화콘텐츠에도 밝고 명랑한 것이 주축이지 결코 어둡고, 슬픈 이미지의 「恨」의 정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恨」의 정서란  어디까지나 일제식민지의 억압, 조선전쟁의 비극을 거치면서 두드러진 정서이지 한국인의 역사속의 영원한 정서는 결코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낙관적이고 華奢함을 즐기는 풍류의식도 한국인의 역사속에서「恨」의 정서 이상으로 찾아볼 수 있다.   또 하나 사례를 들어보면 일본에서 문화인들 사이에 일본은「나무의 문화」, 「서양은 돌의 문화」라는 개념을 쓰는 분들이 많은데 내가 미국에 와보니 이런 개념이 아주 피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에서는 주택을 나무로 많이 짓고 있어서「나무의 문화」라는 개념이 설득력이 있는데 미국에서도 단독주택은 대부분 목조건물이다. 「서양은 돌의 문화」라는 개념은 서양의 궁전식 건물이나 성곽을 이미지한것 같은데 일본에서도 옛날 성곽은 거의다 돌로 지은 것이다. 그러니 일본의 주택과 미국의 주택, 일본의 성곽과 서양의 성곽을 비교해보면 너무 쉽게 일본은「나무의 문화」, 「서양은 돌의 문화」라는 단정하는 것은 피상적이라는 인상을 지울수 없다. 김 문학이 이런 개념을 인용하여 동아시아비교문화론에서 일본은「나무의 문화」,「중국은 돌의 문화」라고 하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중국에서는 돌로 지은 건물보다 벽돌로 지은 건물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다. 북경의 자금성, 만리장성까지도 돌보다 거의다 벽돌로 지었다 볼 수 있다. 이러고 보면 한두개의 키워드를 가지고 어느 특정민족의 문화를 재단한다는 것은 항상 편향성을 면치 못하고 이런 분야는 실사구시적이고 과학성이 요구되는 학문활동보다 비평론적인 성격이 강하다.   김 문학의 중국문화론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호색과 중국문화-중국의 역사는 밤에 만들어졌다》,《훈(混)의 중국인-일본인이 모르는 행동원리의 심층》,《사랑과 욕망의  중국4000년사》(이 책은《호색과 중국문화-중국의 역사는 밤에 만들어졌다》의 서로 다른 출판사의 재판인 것같다)를 분석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데 하나는 「混」이라는 키워드를 사용하여 중국인의 행동원리를 분석한 것이고, 또 하나는 중국의 성문화를 해설한 책이다. 중국인의 행동원리를 이해하는 하나의 키워드로서「混」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이 개념이 의미하는 중국인의 행동심리는 지극히 부정적인 이미지가 떠오른다. 이 책을 아직 내가 직접 읽어보지는 않았는데, 이 책에 대한 아마존닷컴의 상품설명(「BOOK」데이터베이스에서)「混」이란…적당하게 속이면서 재주있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약속을 지키는 것은 바보, 가짜천국, 계약불이행, 인명경시 등은  당연한 것, 그러한 교활하고 강한 중국인과 잘 거래하는 방법이란」소개가 나오고, 이 책의 목록도  1장 일본인이 중국을 읽어내지 못하는 이유   2장 유아기부터 성장할 수 없는 중국인   3장 신체편중으로 정신을 잊어버린 나라   4장「混」이라는 행동원리   5장 한자가 결정지은 중국인의 사유방법   6장 비적이라는 폭력원리     종장 중국 및 중국인의 숙명 (대체 이상의 뜻임)   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 중국인의 행동심리를 부정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부각시키고, 「유아기부터 성장할 수 없는 중국인」「비적이라는 폭력원리」이라는 소제목이 들어있는 것을 보면 과연 학문적인 정신으로 쓴 중국문화론일가 하는 의문도 생긴다.     김 문학의 동아시아비교문화론, 중국문화론, 중국소개서, 일본소개서를 보면 거의 어느 책마다 들어있는 것이 에로스, 즉 성적담론에 관한 얘기이다. 이런 내용들이 책의 취미성, 화제성을 보태주는 요소는 되지만 반면으로 김 문학의 문화론의 격을 떨어뜨리는 요소이기도 하다. 한번 동경의 서점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데《이래도 되는가?-일중한 표면의 얼굴, 뒷면의 얼굴》이라는 책의 제2장 「일중한삼국의 뒤면 (불륜삼국지 얼굴, 가슴, 그리고 발 등)에 나와있은 내용같은데 일중한삼국 여성들의 제일 느끼는 성감대가 얼굴, 가슴, 발의 어느 쪽인가 하는 비교가 들어있었던 같고, 일중한 남녀가 이불안에서 하는 서로 다른 행위의 특징을 저자는 다 파악해낼 수 있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한국에서 출판한 《일본문화의 수수께끼》라는 책에서도 일본여성들의 은밀한 곳의 사이즈가 10대,20대, 30대가 서로 어떠하다는 내용들이 들어있어, 이 책을 돌려본 어느 조선족 여자유학생이 아주 불쾌하더라는 감상을 나한테 들려준 적이 있다. 이런 나의 기억이 혹시 틀렸다면 나는 김 문학에게 대단히 미안하다. 그러나 틀린 기억같지는 않고 이런 내용들이 결과적으로 김 문학의 학자로서의 이미지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상과 같은 동아시아비교문화론, 중국문화론, 중국소개서, 일본소개서를 제외하면 김 문학에게는 적지않은 한국비판서, 중국비판서, 일본비판서( 지금까지는 1책으로 확인됨)가 아주 눈에 띄우고 있고, 수량적으로도 이상의 책들과 비슷하다. 한국비판서, 중국비판서, 일본비판서를 김 문학은 비교론적인 한국문화론, 중국문화론, 일본문화론이라 부르고 싶겠지만 필자는 핵심내용은 어디까지나 사회비판, 역사인식에 대한 비판에 있기에 사회비판서라고 분류하고 이런 비판을 하는 사람을 사회비평가라고 부르는 것이 합리하다고 본다. 그외에 알려진 책들가운데는 소설 한편이 있고, 산문집 한책,번역서가 약간이 있어 문학자, 번역자로서의 얼굴도 김 문학이 가지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중국조선족들 가운데서 김 문학이 학술저서 58종을 낸 국제적인 대학자로 치켜세우는 사람들도 있기에 나의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고 객관적인 자료로서 김 문학의 학계, 또는 문화계에서의 평가를 짚어보고 싶다. 김 문학이 일본에서 시간강사로 소속해 있는 후쿠야마대학의 홈페이지에서 확인한데 의하면, 문예평론지나 학술잡지에 게재한 논문이 4개로 등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들이 중국조선족문화, 문학비평, 중국조선족문학과 재일조선인문학의 비교연구, 동아시아의 天女전설에 대한 비교문학적연구 등 이다. 저술활동이 화려하게 전개되는데 비하면 실지 문예비평지나 학술잡지에 게재된 논문수가 적고 저서들에서 전개한 동아시아국민성비교, 비교문화론같은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김 문학의 현재 일본대학에서의 지위인데 일본에서 출판된 저서들에서는 히로시마문화학원대학, 후쿠야마대학의 시간강사, 또는 강사로 나오는데 아마 정확하게는 시간강사가 아닐가 생각한다. 전임강사이면 소속된 대학교의 홈페이지에 꼭 나오는데 히로시마문화학원대학의 홈페이지에서는 확인이 안되고 후쿠야마대학의 홈페이지에서는 시간강사로 나오고 있다. 그리고 동경의 방송대학의 객원교수라고도 후쿠야마대학의 홈페이지에 나오는데 그 대학의 객원교수일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이러고 보면 김 문학은 아직 일본의 대학에서 아주 안정된 교수직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 그 것은 수많은 저서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의 평가가 그리 높지 않다는 방증이 된다. 물론 운수가 좋아서 실력이 없어도 빨리 좋은 대학의 교수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도 있고, 운이 트지 못하여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으니 대학교의 자리가 학계의 유일한 평가기준은 아니다.    일본과 한국의 인터넷 백과사전 Wikipedia의 김 문학평가도 참고자료가 된다.   일본어판 Wikipedia의 김문학소개   김 문학 (남성,1962년-)은 중국조선족3세의 작가,비교문학자. 중화인민공화국 심양 출신. 1985년 동북사범대학 일본문학학과 졸업, 1994년 同志社대학 석사과정 수료, 2001년 히로시마대학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현재 吳大學 사회정보학부 강사.저서에《벌거숭이3국지》, 《한국국민에 고한다!》,《또 다시 한국국민에게 고한다! 반일이라는 어리광을 그만닥치라》, 《중국인에 의한 중국인 대비판》 등이 있다.   조선민족인데 한국인과 중국조선족의 민족성의 차이에 대하여 쓰고 있다.    한국어판 Wikipedia의 김문학소개   김문학(金文學, 1962년~ )은 재중 조선족 3세인 작가로 비교문학자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선양 출신이다. 1985년 둥베이 사범 대학(东北师范大学) 일본문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 도시샤 대학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2001년 히로시마 대학 대학원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지금은 구레 대학사회정보학부 강사이다. 형제인 김명학과 함께 일본에서 동아시아문화를 비교하는 글을 펴냈고, 일부는 한국에서도 출판되기도 했다. 이상의 인터넷 백과사전 Wikipedia의 일본어판, 한국어판은 어디까지는 담담하게 김 문학소개를 하고 있다. 김 문학의 입장에서 보면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다는 불만도 나올 수 있는 소개이지만 현재로서는 일본과 한국의 인터넷백과사전의 상대적인 객관적인 평가가 이런 내용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소속대학의 이름이 원래는 구레대학이나 현재는 히로시마문화학원대학이라는 것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 이상 분석한 내용에 근거하여 결론을 내린다면, 김 문학은 문화평론, 사회비평에서 다수의 저서를 출판했고, 조선족출신으로는 거의 전후전무할 정도로 다산작가이며 동아시아의 국경을 넘나들면서 활동하는 문필가인 것도 사실이다. 다만 이런 활성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동아시아의 문화계나 학계의 평가는 확실히 정해진 것이 아니고 그의 대부분 저서들은 엄밀함 의미로서는 학술서라고 보기 힘들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김 문학을 높게 평가하는 점이 글쓰기를 굉장히 좋아하고 문인을 천직으로 여길 정도로 문화활동에 관심이 크고, 고서수집이나 유묵수집 등 문화적 취미가 강하며 문필활동에서 장인정신이 아주 강하다는 점이다. 이런 점을 솔직히 많은 조선족 문인들이 따라배울 점이라고 판단한다.                                         설명: 필자가 쓰고 있는 이 연재는 문필가로서의 김 문학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조선족 지식인들에게 그 실상을 알리자는 데 주요목적이 있다. 그런 가운데서 과대포장된 이미지가 일부 실추될수도 있고, 인간적인 면, 사상적인 면에서 가감없는 비판이 가해질 수 있으나 그런 비판에 대하여 혹시 김 문학씨나 주변의 분들이 김 문학죽이기, 헐뜯기라고 너무 일찍히 단정하기 말고 인내성있게 연재가 마칠 때까지 기다려주기 바란다. 혹시 있을 저서의 제목이나 출판년대 등에 틀린 내용이 있어 수정이 필요하면 그런 수정에는 흔쾌히 동의하겠다.  참으로 이 연재는 필자로서도 쓰기 힘든 글이다. 살아있는 사람을, 그 것도 얼굴을 아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쓰고 어느 정도 비판을 가하기란 필자도 너무나도 인간적인 갈등을 겪어야 한다. 누구에게 덕담을 건네주거나 칭찬을 하기는 쉽지만 조금이라도 비판을 하기에는 비판하는 측도 너무나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김 문학이 분명 조선족 지식인 사회의 찬반양론의 와중에 있는 인물이고 많은 사람들이 김 문학을 제대로 알고 싶어하는 심정인 점을 고려하면 서로 마음이 아프고 뼈를 깍아내는 것 같은 고통이 있더라도  한번은 꼭 지나야 할 통과절차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 것을 통하여 김 문학이가 한단계 더 발전이 있고, 조선족지식인 사회도 소모적인 논쟁에서 해방될 수 있다면 필자에게는 그 이상의 바램이 없다. 분석대상의 객관화를 위하여 글에서 김 문학선생, 김 문학씨 등 경칭을 생략하고 김 문학이라 호칭한다.  이 점도 부디 양해를 바란다.                                                  2010년10월2일  
23    벌거숭이 김문학-김문학해체신서 댓글:  조회:5981  추천:42  2010-09-30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보스턴통신(5)              벌거숭이 김문학-<김문학 解體新書>(1)                                     1.   머리 말   김 문학은 조선족 지식인들 사이에서 상당히 특이한 존재이고, 찬반양론을 많이 일으키고 있는 인물이다.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이후 조선족 사회는 급속한 개방화, 국제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김 문학은 일본을 주요활동거점으로 동아시아의 국경을 넘나들면서 일본, 한국, 중국에서 적지 않은 책들을 출판했고 그 때문에 조선족의 국제화의 제일 상징적인 면도 보여주고 있다. 조선족들이 보통 가지고 있는 중국어, 조선어 (또는 한국어), 일본어 능력을 자유롭게 구사하면서 동아시아의 국경을 넘나들면서 많은 책들을 출판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일부 조선족들에게는 경이적인 모습으로 다가오고 극찬을 아끼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는 같은 조선족들 사이에서도 김 문학을 욕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의 저서에서 나타나는 사상적인 경향으로 하여 친일파, 또는 매국매족적인 인물로 매도를 당하기도 한다.   김 문학의 저서가 조선족 지식인 사회에서 화제를 많이 일으킨 것은 1999년에 한국에서 출판한 《반문화 지향의 중국인》,《한국인이여 상놈이 돼라》, 2001년에 중국에서 발표한《조선족대개조론》등 인 것 같다. 그러다가 금년 봄부터 김 문학이 조글로에 나타나 글을 발표하면서 조선족 사회에서는 김 문학에 대한 찬반양론이 다시 쟁점화되고 있다.   금년 8월에 조글로사이트에는 김 문학을 공개적으로 변호하는 글을 여러차려 발표한 사람도 나오고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 운영하는 조선족사이트에서 김문학옹호론을 열렬히 펼치는 사람도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금년 8월부터 연변대학 김 관웅교수가 김문학의 2004년에 일본에서 출판한 저서《친일파 중국인에 의한 참을수 없는 일본질책론-「반일」에 미친 중국,「우호」를 구걸하는 일본》을 비판하는 일련의 글을 중국조선족문화통신에 올리면서 김 문학의 친일언행에 대한 비판에 나서고 있다. 조글로에서 보면 김 문학의 글이 올라오거나 김 문학을 변호하는 글이 올라오면 반대론을 펼치는 댓글이 꽤 많이 올라오고 있는데 이 것은 그만큼 김 문학의 어떤 점에 대하여 반대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런 가운데서 필자가 느낀 점은 조선족 지식인 가운데서 아직 김 문학의 저술활동의 전체적인 상황, 특히는 일본에서의 저술활동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그 때문에 찬반양론이 서로 초점이 잘 맞지 않으면서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일본에 오래 체류하면서 김 문학의 일본에서의 저술활동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입장이기에 8월20일 경에 조글로에 김 문학의 일본어저서를 간단히 소개하는 글을 올렸다. 그 글에 대해서는 댓글도 꽤 올라왔는데 필자가 그 글을 올리면서 김 문학의 저서에 대한 저작권문제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점( 특히 저서의 표제사진을 올린 것이 저작권침해문제에 해당하지 않겠는지 하는 우려가 있었다) , 또 김 문학에 대하여 심도있게 논평을 하자면 그에 대한 비판도 동반해야 하는데 나의 대학교 1년 선배되는 분을 쉽사리 비판하기에는 인간적인 고민이 많았기에 결국 그 글을 조글로에서 내렸다. 그 때문에 김 문학변호를 열심히 하던 사람으로부터 필자를 비난하는 글이 조글로에 올라오게까지 되었다. 그런 비난이야 못 들은 척하면 그 뿐이지만 그후의 조글로, 또 기타 사이트에서 진행되는 김 문학논쟁을 보면서 이번 기회에 조선족 지식인 사회에서 김 문학에 대하여 확실하게 시비를 가를 필요가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여러가지 고민을 하다가 내가 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김 문학의 저술활동을 소개하고 김 문학의 저서들의 내용과 특징을 잘 총괄하여 조선족 지식인 사회에서 김 문학의 좋은 점과  비판받을 점이 잘 구분되고 김 문학에 대한 평가가 조선족 사회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나갈 수 있다면 여러가지 시비에 휘말리는 것을 각오하고 김 문학평가에 한번 나서보자고 결심하게 되었다.       이 문장에서는 먼저 김 문학의 저서 (주로 일본어저서)를 연대별, 내용별로 나누어 소개하고 그러고나서 이런 기본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필자의 김 문학에 대한 평가를 진행하려 한다. 김 문학의 일본어저서는 내용별로 나누어 보면, 동아시아비교문화론, 중국문화론, 한국비판서, 중국비판서, 일본비판서, 명언집, 소설로 분류할 수 있다. 그의 한국어( 또는 조선어) 저서, 중국어저서까지 시야에 넣으면 이상의 분류외에 번역, 수필, 조선족비판서 등 내용이 첨가된다. 이 문장에서는 주로 김 문학의 일본어저서를 소개하는데 그 과정에서 먼저 김 문학의 저서를 연대별로 제목을 배렬하여 소개하고, 그 다음 내용별로 나누어 제목, 목록을 번역하여 소개하고 아마존닷컴에 나와있는 저서에 대한 상품설명, 출판사 및 저자의 설명, 판매랭킹, 필요에 따라서는 저서에 대한 독자의 코멘트도 번역하여 올렸다. 그리고 꼭 필요한 저서에 대해서는 필자의 아주 간단한 해설도 달았다. 김 문학의 한국비판서, 중국비판서같은 시비가 되는 책은 목록을 가능한 상세하게 번역하여 독자들이 잘 판단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런 기본적이고 풍부한 기초자료가 있으면 그 다음 절차로 김 문학의 저술에 대하여 보다 객관적이고 설득력있는 평가를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 문학의 일본어저서에 관한 정보들은 모두 일본어판 아마존닷컴에서 찾은 것이다.       한가지 더 설명하고 싶은 것은 혹시 있을 지 모를 저작권침해문제를 우려하여 김 문학의 일본어저서에 한해서 제목과 목록을 완전한 번역보다 그런 뜻이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이런 방법은 친하게 지내는 일본인 교수의 조언에 따르는 것인데 궁색하게 느껴져도 이해해주었으면 고맙겠다. 혹시 저작권문제에 관하여 김 문학씨 또는 독자들로부터 불합리한 점을 지적받는다면 그런 점은 흔쾌히 고칠 생각이다.이 문장의 전체적인 내용 소제목은 다음과 같다.1.머리말2.김문학 저서소개3.김문학 일본어저서의 내용별 분류4.김문학 그는 누구인가?5.김문학이 욕 먹는 이유6.황우석과 김문학 그리고 맹신7.우리 모두의 문제로서의 김문학 2. 김문학 저서 소개 (일본어편)(1) 책 제목:《벌거숭이3국지-일중한삼국비교문화론》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東方出版    출판년도:1998,5(2) 책 제목:《칼을 품은 중국인》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김 명학공저, 번역:하치스가 미츠히코  출판사: 現代書館    출판년도:1995,5(3) 책 제목:《한국국민에 고한다!-일본거주 한국계중국인의 통곡의 조국비판》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김 명학 출판사:祥伝社(黄金文庫)  출판년도:2002,4   (초판 NON BOOKBUSINES에서1999,12)(4) 책 제목:《또 다시 한국국민에게 고한다! -반일이라는 어리광을 그만닥치라》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祥伝社(黄金文庫)  출판년도:2005,12(초판2002)(5) 책 제목:《우스개소리 일한결별선언-좋지 않으냐 억지로 친하지 않아도》이라는 뜻    저자: 이토 테리,류 희준,김 문학 공저  출판사: 실업의 일본사    출판년도:2002,6(6) 책 제목:《일본인 중국인 한국인-신동양삼국비교문화론》이라는 뜻  저자:김 문학 출판사:白帝社  출판년도:2003,11(7) 책 제목:《친일파중국인에 의한 참을수 없는 일본질책론-「반일」에 미친 중국, 「우호」를 구걸하는 일본》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祥伝社  출판년도:2004,2(8) 책 제목:《호색과 중국문화-중국의 역사는 밤에 만들어졌다》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일본僑報社  출판년도:2004,6(9) 책 제목:《현명한 인생술-보통인의 명언이 가르친다》이라는 뜻  편집: 김 문학 출판사:가리바북 출판년도 2005,6(10) 책 제목:《천마의 이야기》(소설) 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가리바북  출판년도:2005,9(11)책제목:《중국인민에게 고한다!-「문화대국」이 듣고나서 억장이 무너지는  통분의 조국비판》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祥伝社(黄金文庫)  출판년도:2005,1(12) 책제목:《역검정 중국력사교과서-중국인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진실한  중국사 이라는》뜻    저자: 이자와 모토히코, 김 문학 공저    출판사: 祥伝社(黄金文庫)  출판년도:2008, 2(祥伝社의 초판본은    2005,9에 출판)(13) 책제목:《중국인에 의한 중국인 대비판-일본은 사죄하면 안된다》이라는 뜻   저자:김 문학  출판사: 祥伝社(黄金文庫)  출판년도:2006,12(14) 책 제목:《제3의 모국 일본국민에게 고한다! 일본에 귀화한 한국계 중국인에 의한 警世的일본론》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祥伝社  출판년도:2007,12(15) 책 제목:《섬나라근성 대륙근성 반도근성》이라는 뜻   저자:김 문학 출판사:청춘출판사  출판년도:2007,2(16) 책 제목:《이래도 되는가?-일중한 표면의 얼굴, 뒷면의 얼굴》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祥伝社(黄金文庫)    출판년도:2007,6(17) 책 제목:《일중비교愚劣론-동아시아의 내분을 「超克」하는 방법》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南南社  출판년도:2007,6(18)책 제목:《훈(混)의 중국인-일본인이 모르는 행동원리의 심층》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祥伝社    출판년도:2008,10(19)책 제목:《사랑과 욕망의 중국 4000년사 이라는》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祥伝社(黄金文庫(한국어,조선어편)(1)《벌거숭이3국지》(창공사,1997)(2) 《바람난 중국인, 변화하는 중국땅》(김 문학, 김명학공저,시공사, 1997)  (3) 《중국의 에로스 문화》(우석,1998)(4) 《반문화 지향의 중국인》(이채,1999)(5) 《한국인중국인일본인-비교문화에서 삼국인을 찾는다》(우석,2000)(6) 《코리언드림-한국과 중국조선족》(우석,2000)(7) 《조선족대개조론》(2001)(8) 《중일한삼국인 여기가 다르다》(한국한일문화센터,2002)(9) 《일본문화의 수수께끼》(공저)(10)《한국인이여 상놈이 돼라》(11)《조선인의 사상과 성격》(번역, 조선총독부지음,북타임,2010) (중국어편)(1)《仮面世界与白色世界-日韓文化比較考》(金良基원저번역,遼寧教育出版社,1989)(2)《裸戀》(산문집,1993)(3)《中国人留学日本百年史》(上下)(공저,遼寧教育出版社,1997)(4)《日本人的縮小意識》(李御寧원저번역, 山東人民出版社, 2003)(5)《丑陋的韓國人》(金文学编者, 宋义淑译者, 山东人民出版社, 2005)(6)《中、日、韓文化比較体驗記》(中信出版社,2006)(7)《新丑陋的日本人》(作者金文学,译者汪培伦, 金城, 2008)(8)《中國人日本人韓國人》(作者金文学,译者金英兰,吕文辉, 山东人民出版社, 2008) 3. 김문학 일본어저서의 내용별 분류 (동아시아비교문화론)(1)책 제목: 《벌거숭이3국지-일중한삼국비교문화론》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東方出版    출판년도:1998,5 아마존닷커의 상품설명:(「BOOK」북데이터베이스에서) 삼국을 읽으면 세계가 보인다. 중국조선족유학생(히로시마대학대학원)작가가 삼국의 문화를 처음으로 동시비교) (「MARC」데이터베이스에서)외관적으로는 거의 분별할 수 없는 중일한 동양삼국인에 대하여 저자자신의 경험을 살려서 그 생활양식, 사고패턴, 행동양식, 언어, 사생관, 미의식 등 여러분야에 관한 비교를 했다.  Amazon 상품랭킹: 책 – 493,271위 60186위 ─   비지니스,경제373위 ─   아시아,아프리카20617위 ─   사회학개론 목록1 벌거숭이 삼국지2 문화의 삼국지3 에로스의 삼국지4 맛과 멋의 삼국지5 역사의 삼국지 (대체 이상의 뜻임) (2)책 제목:《일본인 중국인 한국인-신동양삼국비교문화론》이라는 뜻 저자:김 문학 출판사:白帝社  출판년도:2003,11 아마존닷컴의 상품설명:(「BOOK」데이터베이스에서) 다타미,의자, 온돌의 앉은 방법에서 보아낼 수 있는 일중한문화의 차이란? 생활속의 가까운 화제로부터 넓혀가는 비교문화론! 동아시아삼국인의 머리속이란?(「MARC」데이터베이스에서) 일본인,중국인,한국인 과연 이 삼국인에게는 무엇인가 동질성과 이질성이 있는 것인가? 왜 서로 다른 문화를 구축했는가? 저자의 개인체험에서 얻은 관점을 적은 가까운 화제로부터 넓혀가는 비교문화론. Amazon 상품랭킹: 책 – 673,296위 1286위-일본인론28409위-사회학개론   711위-문화인류학일반 목록제1장 일본인은 언제나 깍쟁이다(재미있는 이름의 해프닝, 삼국의 언어감각 등)제2장 중국인은 인습을 탈피할 수 없다! (불륜삼국지 얼굴, 가슴, 그리고 발 등)제3장 한국인은 허풍쟁이! (남북인가 동서인가? 다타미, 의자,온돌에 앉은 기분 등)제4장 삼국인의 표면과 뒤면  (情과 義와 理, 푸는 문화와 조이는 문화 등) (대체 이상의 뜻임) (3) 책 제목:《섬나라근성 대륙근성 반도근성》이라는 뜻 저자:김 문학 출판사:청춘출판사  출판년도:2007,2아마존닷컴의 상품설명:(「BOOK」데이터베이스에서) 일본거주 한국계중국인이기에 알 수 있는 일본, 중국,한국 문화의 미묘한 차이의 심층이란? Amazon 상품랭킹: 책 – 449,046위  109위-청춘신서 901위-일본론18677위-사회학개론 목록서장 왜서 일중한삼국은 이렇게도 다른가제1장 섬나라근성 대륙근성 반도근성제2장 나무의 나라 돌의 나라 흙의 나라제3장 조화로운 나라 싸움의 나라 정의 나라제4장 사람, 신, 자연으로부터보는 사고양식의 차이종장 일중한은 다르기에 서로 잘 나간다 (대체 이상의 뜻임) (4)책 제목:《이래도 되는가?-일중한 표면의 얼굴, 뒷면의 얼굴》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祥伝社(黄金文庫)    출판년도:2007,6 아마존닷커의 상품설명:(「BOOK」데이터베이스에서)  미인의 기준이란? 얼굴? 다리? 가슴? 앉은 것은 다타미? 의자? 온돌? 수박에는 사탕? 소금? 한자 한문자로 표시하는 義? 理? 情? 가까운 화제로부터 분석하는 중일한 문화의 차이. 보기에는 비슷해도 머리속은 이렇게도 다르다. Amazon 상품랭킹: 책 – 511,218위   389위-아시아아프리카21381위-사회학개론  253위-祥伝社(黄金文庫) 목록제1장 삼국문화의 표정(재미있는 이름의 해프닝, 삼국의 언어감각 등)제2장 일중한삼국의 뒤면 (불륜삼국지 얼굴, 가슴, 그리고 발 등)제3장 일중한 여기가 크게 다르다 (남북인가 동서인가? 다타미, 의자,온돌에 앉은 기분 등)제4장 일중한 국민성의 격차(情과 義와 理, 푸는 문화와 조이는 문화 등) (대체 이상의 뜻) 해설: 이 책은《일본인 중국인 한국인-신동양삼국비교문화론》이라는 뜻 (저자:김 문학 출판사:白帝社  출판년도:2003,11)을 祥伝社에서 재판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문화론) (1) 책 제목: 《칼을 품은 중국인》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김 명학공저, 번역:하치스가 미츠히코 출판사: 現代書館    출판년도:1995,5 아마존닷커의 상품설명:  (「BOOK」데이터베이스에서)약진하는 중국의 허허실실…중국조선족3세형제가 홀딱 벗긴다. (「MARC」데이터베이스에서)  거대하다, 위생이 전혀 되지 않았다, 중국 여자가 너무 귀엽다, 대륙의 저력은 무한… 그러한 중국, 중국인에 대하여 실상을 홀딱 벗긴다. 일중한 삼개국에 정통한 저자가 비교문화적인 시점에서 독특하게 분석한다.Amazon 상품랭킹: 책 – 1,266,743위 50993위-사회학개론 1827위-각국경제사정-중국  605위-지역연구-중국 목록제1장 대류기질,대륙의저력제2장 중국인의 처세술제3장 중국은 드넑고 볼 곳이 많다제4장 바람기 중국인, 바뀌는 중국의 모습제5장 여성상위새대-중국남녀사정제6장 중국인의 금전감각제7장 중국인과 잘 거래하는 비결 (대체 이상의 뜻) 해설: 이 책은 한국에서 출판한 《바람난 중국인, 변화하는 중국땅》(김문학, 김명학공저,시공사, 1997)를 일본어로 번역한 것 같다. 원제목이 아니고 《칼을 품은 중국인》이라고 번역된 점이 주목된다. 책 내용은 중국에 대하여 그리 나쁜 것이 아닌데 일본에서는 자극적이고 중국에 대하여 부정적인 이미지가 나오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이 점이 김문학이 금후 일본에서 어떤 방향의 책을 출판해나가는가 하는 것을 시사해주는 대목이다. 이 책은 엄밀하게 말하면 중국문화론보다 동시대의 중국에 대한 소개서이다.      (2)책 제목: 《호색과 중국문화-중국의 역사는 밤에 만들어졌다》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일본僑報社  출판년도:2004,6 아마존닷커의 상품설명:(「MARC」데이터베이스에서)   중국인에 있어서 성이란 무엇인가? 중국을 철저하게 이해하려면 정치,사회, 예술 등만을 볼 것이 아니고 그 저변에서 숨쉬는 남녀관계부터 성까지 보아낼 필요가 있다. 중국성문화를 파헤친 시도.  Amazon 상품랭킹: 책 – 834,645위 해설: 이 책은 뒤에서 소개되는《사랑과 욕망의 중국 4000년사 》라는 책과 거의 같은 내용인 것 같다. 즉《사랑과 욕망의 중국 4000년사 》이 책의 재판인 것 같다. 일본어판 아마존닷컴에는 책 목록이 보이지 않는다. (3)책제목:《중국인민에게 고한다!-「문화대국」이 듣고나서 억장이 무너지는 통분의 조국비판》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祥伝社(黄金文庫)  출판년도:2005,1   출판사/저자의 내용소개  일본인의 무던한 중국관을 근본으로부터 뒤엎는다! 이자와 모토히코씨 추천. 재일한국계중국인이기에 쓸 수 있은 진실한 중국론. 문화대국 중국의 알려지지 않은 실태. 도적천국, 공공도덕심결여, 서비스정신 전혀 없다. 일본인이 옛날부터 존경해온 중국인의 실태를 용서없이 통렬하게 파헤쳤다. 중국조선족3세이고 일본에도 정통한 저자가 처음으로 쓴 통렬한 중국비판.일본역사추리작가 이자와 모토히코의 책 소개일본인의 중국관을 수정하게 만드는 기분좋은 책이다. 일본인의 중국에 대한 감정은 복잡하다. 한편으로는 공자,노자 등 위대한 사상을 창출해낸 중국문화에 대한 깊은 경도심이 있고, 거기다가 일중전쟁에 대한 속죄의식이 겹치어 중국을 있는 그대로 평가하는 것을 아주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 책은 오늘의 일본에서는 정보로서만 전해지는 중국의 암흑면을 그것도 문화적인 암흑면을 용서없이 파헤친 것이다. 일본인의 애매하고 무던한 중국관을 근본으로부터 수정을 요구하는 책이다. 21세기에 걸쳐서 중국과의 관계가 일본의 최대의 외교과제로 될 가능성이 있기에 국민필독의 책이다.Amazon 상품랭킹: 책 – 127,158위 11345위-투자, 금융,회사경영론 144위-각국경제사정-중국 121위-祥伝社黄金文庫    목록1장 문화사막 중국의 현실2장 중국문화의 병근을 파헤친다3장 원래부터 중국은 문화의 나라인가?4장 분서갱유와 문화대혁명5장 아아 슬픈 지식인6장 중국인에 있어서 맨즈(面子)란?7장 중국인의 극단적인 이기주의8장 중국국민병진단 (대체 이상의 뜻임)해설: 이 책은 한국에서 출판한 《반문화 지향의 중국인》(이채,1999)을 일본어로 낸 것 같다. 아무튼 일본의 일부 출판계에서는 이런 중국비판서가 주목을 받는다.(4)책 제목: 《훈(混)의 중국인-일본인이 모르는 행동원리의 심층》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祥伝社    출판년도:2008,10 아마존닷커의 상품설명:(「BOOK」데이터베이스에서) 「混」이란 …적당하게 속이면서 재주있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약속을 지키는 것은 바보, 가짜천국, 계약불이행, 인명경시 등은  당연한 것, 그러한 교활하고 강한 중국인과 잘 거래하는 방법이란. Amazon 상품랭킹: 책 – 379,777위  15646위-사회학개론437위-각국경제사정-중국203위-지역연구-중국 목록1장 일본인이 중국을 읽어내지 못하는 이유2장 유아기부터 성장할 수 없는 중국인3장 신체편중으로 정신을 잊어버린 나라4장「混」이라는 행동원리5장 한자가 결정지은 중국인의 사유방법6장 비적이라는 폭력원리종장 중국 및 중국인의 숙명 (대체 이상의 뜻임) (5)책 제목: 《사랑과 욕망의 중국 4000년사》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祥伝社(黄金文庫)    출판년도:2010,2 아마존닷커의 상품설명: 내용소개: 纏足48秘技・男根이 소생한 환관, 사람고기가 정력제!? 《金瓶梅》를 낳은 중국, 맹자, 장자, 진시황부터 모택동,최신중국사정까지 많은 자료를 해독하고, 모아놓은 중국 4000년 성의 역사. 거기에 보이는 것은  난숙한 중국역사 그자체이며 중국인의 기질, 가치관이다.한국계중국인으로서 태어나 비교문학자인 저자이기에 쓸 수 있은 적나라하고 장대화려한 밤의 역사는 일본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가벼운 기분이나 흥미위주로 읽는 것도 좋고, 중국의 역사나 인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비지니스에 활용하는 것도 좋다. 놀라움과 발견의 연속.Amazon 상품랭킹: 책 – 173,882위  149위-祥伝社黄金文庫    책 표지의  선전문구: 중국역사는 밤에 만들어졌고, 경제발전의 파워는 호색에 있다! ●  황제의 첫날밤의 증거는 피가 묻은 횐색 비단●  纏足이라는 이름의 에로티즘●  사람고기가 정력제!●  미인경합대회의 원조 수나라 양제●  3000명의 남자첩을 거느린 則天武后●  경이적인 性交秘術「屋中術」이란?●  모택동과 여인들~근대중국사,유명인들의 성●  공산당정권하 공적으로 인정되는 섹스산업 목록제1장 호색의 전통제2장 영웅호걸, 호색의 향연제3장 중국의 에로스문학과 성표현제4장 중국의 역사는 밤에 만들어졌다제5장 에로스의 군대제6장 중국, 성문화혁명 (대체 이상의 뜻임) (한국비판서)   (1) 책 제목:《한국국민에 고한다!-일본거주 한국계중국인의 통곡의 조국비판》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김 명학 출판사:祥伝社(黄金文庫)  출판년도:2002,4   (초판 NON BOOKBUSINES에서1999,12) 아마존닷커의 상품설명:(「BOOK」데이터베이스에서)  조국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의 너무나도 통렬한 한국비판. 감정이 과다하고 허영심, 오만한 국민성, 이상할 정도의 차별, 융통성이 없는 경직화한 사회의 실태가 하나하나 칼도마에 오른다… 중국인으로서 민족적으로는 한국인, 일본문화연구자, 일본에 온지 8년, 일중한삼국을 객관적으로 내려다보는 저자만이 가능한 비교문화론적 시점. 아마존닷컴에 올라온 코멘트:일본인을 찬양하고 한국인을 죽도록 내리깍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감상에도 있지만 어떤 냄새를 맞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책은 진실의 한국민족의 특성이 렬거되어 있습니다. 물론 일본인에게도 결점은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의 앞에서는 누구도 성인군자처럼 보입니다. 그처럼  문제투성이 민족입니다. 허영심, 거짓말, 이기적, 질투심, 우줄렁거림, 감정을 억지하지 못하는, 폭력적…. 오늘의 일상적인 반일폭동은 그들의 민족적 특성의 발로입니다. Amazon 상품랭킹: 책 – 663,992위   212위-한국,북조선 171위-祥伝社신서27988위-지역연구-사회학개론 목록1장 어른의 나라 일본, 미숙아의 나라 한국     -너무나도 유치하고 감정적이고 왜서 온나라가 떠들어 대는가      어른의 나라 일본과 어린애 나라 한국   왜 한국인은 감정을 억제 못하는가   어린애 나라라고 비판하는 일본을 원숭이흉내내는 우스꽝스러움      한국인의 처참한 싸움 모양새     외국인이 실증내는 한국인의 제나라자랑      공자도 진시황도 조선민족이라는 해괴망측     김치가 절대로 세계적 식품이 될수 없는 이유     한국인은 한사람이면 호랑이,세명모이면 고양이     외견상 범같아 보이기는 한지만     일중한3국에서 일본만이 다른 문화의 나라     한국인이 노벨상을 타지 못하는 이유     재능발휘를 막는 획일적인 문화풍토     몰개성인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일본     애국심을 고무하기전에 해야하는 일      속옷에까지 태극기를 장식하는 이상사태     애국심이 이데오로기가 된 한국     한자배척에서 보는 편협한 국수주의   2장 동방예의지국이라 듣고서 기가 막힌다        -서비스정신 영점, 제멋대로 정 밀어붙이기      왜 서비스정신이 보이지 않는가      중국과 전혀 다르지 않는 한국의 서비스 수준      한국인이 서비스정신을 붙태울 때      한국인이 중국에서 얻어맞는 이유      북경의 골프클럽은 한국인출입금지      너무 우줄렁거려 맞고 매너를 지키지 않아 맞는다      한국인은 정말 정이 두터운 민족인가      심야12시의 갑작스러운 전화      숨이 꽉 막히는 과잉접대      두마디에 형제처럼 영원히 지내자고 하면서      저절로 머리좋다고 우줄렁거리는 바보      한국인의 피속의 과잉한 승부심       무엇이든지 아는체하면서 결국에는 큰 창피를 한다         3장 차별대국 한국의 알려지지 않은 실태       -신체장애자, 외국인,못 생긴 여자는 왜 차별 받는가       한국사회의 비극의 근원이란       내귀를 의심하게 하는 폭언       한국인의 몸에 푹 젖어있는 우리라는 개념       한집안외는 타관사람이라는 차별병       남=타관사람이라는 한심한 차별       왜 신체장애자가 차별의 대상이 되는가       화교가 뿌리내리지 못한 세계 유일한 나라       미인이 아니면 깔보는 사회       너무 쉽게 성형미용을 하는 한국여성       성형해야 하는 것은 얼굴이 아니고 의식구조       너무나도 차거운 외국인 차별실태       중국조선족에 대한 믿기어려운 학대       북조선망명자를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       화교가 한국에서 받은 수많은 보복  4장 이렇게까지 융통성이 없는 경직한 사회     -일본에 뒤떨어지는 진정한 이유       한국을 부패시키는 원흉       왜 한국인보다 일본인과 비슷하다고 불리우고 싶어하는가       중국것은 무엇이든지 섭취해온 한국       한국은 정말 민주주의사회인가       실은 발언자유가 없는 나라       택시운저수의 흉상스러운 얼굴       다케시마를 둘러싼 일한양국의 대응의 차이       왜 한국은 일본보다 독창성이 없는가       모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       모방부터 시작하여 그 이상의 것을 창조해내는 일본       반성모르는 우줄렁꾼의 비극       IMF위기로 생기를 완전히 잃어버린 한국       왜 극단에서 극단으로 치우치는가       반성을 모르고 쩍하면 다른 사람 탓을 한다   5장 왜 문화가 망하는 나라라고 할 수 있는가       -고서점,독서사정,이문화수용에서 보는 일한비교       문화국가라고 듣고서 억장이 무너지는 욕설대국       한국인이 쉽게 입에 담는 씹할이란          김포공항 입국심사에서 받은 보복       책을 읽지 않는 문화민족       전차속의 독서사정 일한비교       문화국민이라 자화자찬하는 불가사의       고서점에서 보는 일본과 한국       먼지와 손때로 어지로운 서울의 고서점       고서를 중히 여기는 일본과 마음대로 구는 한국      흉내 카피문화의 나라한국       한국인의 일본비판의 정석       나쁜 것은 흉내내지 않는 일본, 무엇이든지 모두 흉내내는 한국     6장 외견뿐이고 내실이 없는 나라        -속발하는 사고를 불러오는 놀라운 종이호랑이문화         날림공사를 하는 풍토         지진오기전에 인재로 망하는 나라한국         왜 다리가 떨어지고 백화점이 무너졌는가         기술자를 천대하는 한국의 풍토         양반이 나라를 망친다         육체노동을 극도로 싫어하는 이유란         일하려하지 않는 식당주인         장인을 존중하는 일본과 기술자를 천시하는 한국         외견에만 신경쓰는 한국인         대통령의 이름이 새겨진 손목시계         화면이 보이지 않는 초대형텔레비           왜 한국여성은 자전거를 타지 않는가         너무나도 시대에 되떨어진 유교정신         부끄러워서 죽어도 못하다고 하는 사장         7장 일본이 없으면 살 수없는 가련한 나라        -옛날에는 중국에, 지금은 일본에 사대주의가 지배한다         일본인는 정말 축소지향인가        일본이 한국보다 작다는 불가사의한 착각        설득력이 없는 학설로서의 축소지향        워크맨의 발명은 일본인의 유연성의 발로        일본은 없다는 책은 한국에 무엇을 가져왔는가        편견과 착오뿐인 한국의 대베스트셀러        조선통신사시대부터 이어져오는 터무니없는 일본멸시        선구자 오선화의 비극        한국에서 매국노라고 욕먹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인에게 모자라는 냉정한 시점         언제면 일본에서 졸업하겠는가        일한전에 져도 국치라고 떠든다        중국에는 용서해도 일본은 용서못한다        지나친 일본의식은 지금 없애야 한다 (대체 이상의 뜻)   해설: 이 책이 중국에서《丑陋的韓國人》(金文学编者, 宋义淑译者, 山東人民出版社, 2005)이란 이름으로 번역된 것 같다. 한국에서 원서의 내용 그대로 출간 또는 번역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2) 책 제목:《또 다시 한국국민에게 고한다! -반일이라는 어리광을 그만닥치라》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祥伝社(黄金文庫)  출판년도:2005,12(초판2002) 아마존닷컴의 상품설명:(「BOOK」데이터베이스에서)먼저 낸 책《한국국민에 고한다!》로 일한양국에서 대반향을 일으킨 일본거주 한국계중국인에 의한 통곡의 조국비판 제2탄. 한국의「반일」과 극단적인 내셔널리즘에 수술칼을 들이댄다.(「MARC」데이터베이스에서) 일한관계, 특히 한국의 역사인식에 초점을 맞추어 한국의「반일」이라는 「어리광」의 구조, 내셔널리즘, 폭력, 차별대국의 실태를 폭로, 비판한다. 《한국국민에 고한다!》의 속편. 아마존닷컴에 올라온 코멘트:전번에 나온《한국국민에 고한다!》의 출판에 의하여 자기 민족 동포들로 부터 친일파( 한국에서는 매국노의 의미)라는 모자를 쓰게 된 저자가  이번에는 異論을 인정하지 않는 배타적이고 광신적인 반일내셔널리즘의 병리에 칼을 들이댔습니다. 전번에 나온《한국국민에 고한다!》와 같이 한국인을 알기위한 기본도서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책과 같이 읽어보기를 권장합니다. Amazon 상품랭킹: 책 – 195,666위53위-한국,북조선7859위-사회학개론165위-祥伝社黄金文庫 목록1장《한국국민에 고한다!》일으킨 한바탕의 소동    하루밤 사이에 나는 인생이 바뀌었다    친일파, 매국노라는 매도의 태풍    중국에서도 대반향, 문화혁명시기라면 나는 총살당한다    친일파사냥 캠페인의 언어도단    중세의 마녀사냥과 비슷한 광기    항일과 친일로 이분하는 의미없는 짓    식민지시대의 현실을 너무 모르는 한국인    친일파를 위한 변명은 왜서 출간되었는가    김완섭씨 독불장군의 반란    왜 일본과 한국에서 이처럼 반응이 다른가    친일파 수괴 이광수의 영혼의 외침    민족개조론이 일으킨 미증유의 대소동    왜 조선에는 비판을 받아들이는 풍토가 없는가    21세기에도 살아있는 이광수의 정신  2장 반일이나는 어리광의 구조   -이것이 있는한 한국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낮에는 반일, 저녁에는 친일하는 한국인    일본인에 막상막하라는 한국인의 입치레와 속내    눈치라는 자기방어 기술    다른사람에게 부탁하기전에 먼저 자기자신에 반성을     대국일본에 어리광부리는 한국인    일본인에 대한 쌍욕질은 열등감의 표출    대국일본에 어린애처럼 어리광부리는 한국인    일본에만 책임을 지우는 부당성    한국에 지금도 남아있는 식민지근성    대히트한 일한역사SF영화    전후에도 일본이 경제침략한다는 해괴망칙    결국은 식민지의식에 안주하는 한국인    반일문학이라는 엉터리책들    대베스트셀러-황태자비피랍사건    대량생산되어 인기를 누리는 반일문학의 계보    자위행위에 탐닉하는 한국인의 가련함 3장 한국을 뒤덮는 내셜낼리즘이라는 도깨비 -월드컵에서 부각된 세계속의 한국의 이질성    2002년월드컵, 열광적인 한국과 냉정한 일본의 차   유명문화인이 신문에 기고한 문장의 웃음거리 붉은악마의 에너지와 내셔낼리즘 세계를 놀라게 한 한국인의 우익화와 민족주의   한국의 내셔낼리즘은 왜서 비대해졌는가 내부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체질   왜 국산마늘을 사야하는가 글로벌사회의 고아가 되지 않기위하여   한국의 애국은 정의이고 일본의 애국은 우익이라는 불가사의 한국을 지배하는 우리와 남의 절대원리   한국인의 일본인에 대한 대오해 한신대지진에 쾌재를 부른 한국인   일한동조론과 천황발원의 파문   근거가 없는 우월론을 입증하는 유일한 방법 일한동조론을 주장한 한국의 지식인들 월드컵4강부터 경제4강에로라는 망상  4장 폭력,왕따, 차별대국 한국  -왜 전근대적체질에서 해방받지 못하는가   폭력대국 한국의 알려지지않은 실감   처음 조국땅을 밝은 날의 충격   재외동포에 대한 비인도적차별과 학대 왜 교사가 책상에 몽둥이를 감추고 있는가   왜 나라를 버리는 국민이 속출하는가    왕따라는 소수자를 배제하는 논리   일본의 이지메와 한국의 이지메의 차이는   나라를 망치는 윤리도덕이라는 이름의 악마   왜 전직대통령이 꼭 단죄를 받는가   아무렇게나 해석이 가능한 윤리와 도덕 일본인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근거란   내홍의 나라 한국, 조화의 나라 일본   한국을 불행하게 하는 몇가지 시스템 공론에 의한 소모전이 내부파괴를 가져온다 한국인이 상대의 설명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이유   한국이 슬프다하는 유서    일본을 차별사회라고 비판할 자격이 없다 자살자에게 채찍질하는 야박한 보복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폭행의 실태  5장 21세기판 한국인개조계획  -지금이야말로 북안적역사관을 세우자일한병합을 둘러싼 세계의 상식  구미의 학자의 이론을 알았을 때 받은 충격  일한병합은 과연 피할 수 있었는가  일본통치의 35년간을 4기에 나누어 검증한다   한국국민의 역사관개조론  한국에서 허용되는 역사관은 하나밖에 없다  한국인에게 이해되지 않는 일본의 교과서사정  항일캠페인으로 하여 한국이 얻는 것은   역사에 말살된 소리없는 민중들  식민지체험자의 소리를 발굴하는 귀중한 사업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에 있은 양호한 관계  자료가 증명하는 식민지시대 역사의 진실  지금 경청해야하는 박정희의 국민개조론  박대통령의 근대화는 식민지정책의 재활용이었다  개조해야 할 점으로서 올린 한국인의 악덕  박대통령과 매국노 이광수의 불가사의한 일치  안중근의 신화를 넘어서  안중근이 일한합볌을 결정하게 한 역사의 아이러니  일로전쟁에서 일본의 승리에 쾌재를 부른 안중근  왜서 병합반대론자인 이토히로부미를 쐈는가  사형을 앞둔 안중근의 최후의 말  안중근이라는 우상을 해체하고 새로운 미래로 향하자    (대체 이상의 뜻)   (3) 책 제목:《우스개소리 일한결별선언-좋지 않으냐 억지로 친하지 않아도》이라는 뜻    저자: 이토 테리,류 희준,김 문학 공저  출판사: 실업의 일본사    출판년도:2002,6 아마존닷컴의 상품설명: (「MARC」데이터베이스에서) 일본과 한국, 이제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다. 언제까지나 평행선을 달리는 일한관계에 대하여 테리 이토가 두명의 한국인과 토크논쟁을 벌인다 속마음으로 나누는 새로운 일한관계가 보여진다. Amazon 상품랭킹: 책 – 851,055위 5920위-외교,국제관계 1607위-일본론론 2549위-국제정치형세 목록일본과 한국은 사이좋지 않아도 괜찮다.일본인이 과연 한국인과 친하려고 할까?여기가 이상해 한국인정치가들이여 和韓절충 김치나 먹어라!언제까지 사죄하면 용서받겠느냐?야망의 대국 중국은 日韓의 적이냐 친구이냐일본경제부활을 위하여 「38度線」쓸모가 있다! “세련”이 이기냐 “용속함”이 이기냐 홍수같은 日韓문화대결일본이 한국을 못 따라가는 18(?)가지 이유너무 깊어도 못쓴다  한국식 “情”의 진실멍청하다고 해도 일본은 「우직한 사나이가」되자!日韓대결은 복수극으로 한국이 압승!?허세와 오기로 사나이를 보여주는 한국판「사내는 슬퍼」일본인이요 제힘으로 남근(불알)을 세우라!여기가 이상해 한국인「한국미인」이 日韓관계에 혁명을 일으킨다!!日韓관계의 미래는 「여자」가 틀어지고 있다 (대체 이상의 뜻) 해설: 이 책은 2002년에 있은 한일월드컵에 의하여 일본내에서 한일관계가 좋아지는 분위기에 찬물을 붓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 같다.「한반도의 분단을 일본경제부활에 쓸모가 있다」는 내용이 들어있었기에 한국에서도 비판이 나왔고, 「일본이 한국을 못 따라가는 18(?)가지 이유」라는 내용도 일본이 성형에서는 한국 못 따라 간다 등 한국 꼬집기를 나열한 것 같다. (중국비판서) (1) 책 제목:《친일파중국인에 의한 참을수 없는 일본질책론-「반일」에 미친 중국, 「우호」를 구걸하는 일본》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祥伝社  출판년도:2004,2 아마존닷커의 상품설명:(「MARC」데이터베이스에서) 왜서 중국에서 기괴한 반일폭동이 속발하는가. 그리고 일본인은 이렇게 간단한 일을 왜서 알아채지 못하는가.「친일」때문에 일본에 대한 쓴소리와 모국 중국에 대한 비판으로 중국에서 출판을 거부받은 문제의 책.아마존닷컴에 올라온 독자의 코멘트1:한국계3세이고 중국에서 공부하고 일본에서 10년이상 체류하는 자가 아니면 쓸 수없는 내용이고, 일본인의 집필자가 중국을 비판하기보다 수배의 설득력과 무게가 있다. 그러나 저자가 4년전에 쓴《중국인민에게 고한다》와 같은 주장을 썼는데 이번에는 주해에서 일어난 집단매춘사건에 대한 비판도 들어간 최신판이다.집단매춘사건은 물론 일본인도 비판받아야 하지만 돈이라면 무엇인든지 좋다고 하는 중국의 옛날부터의 열악한 인생관의 상징이라고 저자는 정곡을 찌른 지적을 하고 있다. 한국의 종군위안부문제도 같은 문제이다. 중국인 저자에 의한 야스구니신사참배에 관한 중국으로부터의 비판에 대한 코멘트도 신선하여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라크에서 일본인피랍으로 하여 아이러니하게도 개선을 보이고 있는 애국심에 의하여 중국정신의 추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저서가 최근 늘어나는데 그 중에서도 이책은 특출하기에 무엇인가 한책을 권한다면 나는 단연히 이 책을 권장하겠다.아마존닷컴에 올라온 독자의 코멘트2:지금 이전처럼 중국예찬이나 일본의 전쟁전을 모조리 부정하는 일을 많이 없어지고 다양한 의견이 (일본)국내에서 나오고 있다. 만주건국 등 일본이 중국에서 한 행위를 단순한 침략이라 단정하는 입장으로부터 일정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행위, 또는 자위를 위한 부득히 한 반격 등 여러 의견이 교착하고 있다. 그런 중에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자란 재일중국인학자인 저자가 일본이 대륙에서 한 행위와 현재의 중국의 반일을 논평한 이 책은 이런 의론에 파장을 던져준다. 저자의 시점은 전쟁전의 일본에 대하여 아주 호의적이다. 만주건국도 그대로 진전되면 동양에 미국같은 이상국가가 만들어졌을 거다, 중국의 근대화도 일본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단지 관념적인 반일에 대한 반대론이 아니고 학자답게 많은 문헌과 실제 그 시대에 살았던 중국인을 취재한 데이터를 가지고 있는 점이 설득력이 있다. 이런 논점들은 거의 다 (일본)국내에서 이미 나왔던 것이지만 실제 중에서 자란 필자가 지적하니 놀랍게 받아들이는 독자도 많을 것이다.    (이하 내용이 길기에 생략함). Amazon 상품랭킹: 책 – 496,667위 3108위-외교,국제관계 1339위-국제정치형세목록 (이 목록은 연변대학 김관웅교수가 번역한 것을 재차 수정한 것이다) 프롤로그 : 친일파 중국인으로서의 고발제1장 중국에 있어서의 "憎日"의 심층심리- 이상하기 그지없는 "반일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리유는 (1) 일본인이 모르고 있는 "日本鬼子"일본인 "賣春"사건으로 보는 중국인들의 과잉반응우호국을 "鬼"라고 부르는 奇怪千萬한 나라馬立誠씨는 왜 《인민일보》를 쫗겨났는가(2) 국책으로서의 "反日憎日"인터넷에 올린 치열한 반일 선동문반일 프로파간다는 교육으로부터 시작되였다 눈을 감고 싶은 중국 역사교과서의 왜곡(3)모택동, 등소평 시대의 대일관계에서 배우라일본에서 강도질한 중국인 류학생의 변명공산당군대와 일본군대가 손을 잡았다는 새로운 사실 모택동은 일본에 "감사하다"고 말한 적 있다. 중국이여, 역사를 거울로 삼으라 (4) 궁극의 역사카드 "남경대학살"南京攻防戰의 책임은 중국에 있다왜 中國軍隊가 中國兵士들을 총격했을까"30만명"설은 어디서 생겨난 것인가사상자수가 뻥튀기 된 정말 중국다운 이유자국내의 대량학살에는 입을 다무는 중국정부제2장 일본은 사죄해서는 안 된다 - 自虐史觀, 당당하지 못한 외교에 대한 참을수 없는 일본질책 (1) "사죄"는 죄악이다 일본인에게서 잃어버린 당당한 자존심중국은 "약자 같은 어린애"짓을 그만두라 인근 국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사죄하지 않는 중국(2) "패전국 •日本"을 위한 변명미국에 의해 척추가 부러져버린 일본인의 정신구조 "승자=정의"라는 데는 한계가 있다 戰後의 일본인들이 정말로 반성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3) "日本의 전쟁에 긍지를 가지라 일본이 일으킨 전쟁이 가져온 아시아에 대한 대공헌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비렬한 중국과 한국(4) "야스구니(靖國)"라고 하는 일본문화야수구니신사에 낙서를 한 대학생은 "반일영웅"죽은 자를 채찍질하는 문화와 적과 제편을 같이 제사 지내는 문화중국과 한국 이외의 외국에서도 참배하고 있는 사실 제3장 일본점령하의 중국의 진실-일중전쟁 15년, 평화와 번영을 구가한 것은 어떤 쪽인가(1) "滿洲國"의 위대한 유산현대 중국이 완전히 부정하는 "滿洲國"孫文이 획책했던 "滿洲賣却"계획中華人民共和國은 滿洲國의 複寫-擴大版(2) "滿洲國"은 "滿足國"이였다 新京의 도시계획으로부터 보는 일본의 의욕과 공헌일본이 만주에 투입한 막대한 자본西洋의 識者가 보아낸 滿洲國의 眞價滿鐵시대의 기차는 지금보다 빨랐었다(3) 日本占領區는 "樂園"이였다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점령구"러브레타를 출간하여 인세수입으로 살았던 노신 너무나도 대조적인 "해방구"의 실태(4) "日本鬼子"의 진짜 모습"三光政策"이란 것은 일본에는 없는 중국의 전통興亞觀音에 기탁한 마쯔이이와네(松井石根) 大將의 념원 日華事變이후의 8년은 1년의 전투와  7년의 경제건설 제4장 新中國의 씨를 뿌린 일본 -明治이후 오늘까지 日本이 中國의 스승이였던 사실 (1)孫文과 일본 그리고 일본인일본이 없었다면 중국의 혁명은 없었다孫文과 중국혁명에 한생을 다 바친 미야자키도우덴(宮崎滔天)孫文이 주창했던 日中협력과 아시아의 단결(2) 일본어를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는 현대중국어일본어로부터 중국어에 수출된 대량의 단어들 중국문단은 일본류학생들이 만들었다지금도 진행중에 있는 일본문화의 수입 (3) 실현되지 못한 "伊藤博文首相" 초청계획"伊藤首相" 초청계획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故宮의 보물들을 지켜준 이들은 일본군대였다"敎育勅語"의 정신은 중국에서 지금도 살아있다(4) 남아서 新中國建設을 도왔던 日本人들 戰後의 中國內戰에 參戰했던 日本人들 감동을 불러일으킨 일본인 의사와 간호부들의 일하는 자세中國空軍의 기반을 다져준 하야시야 이찌로우(林弥一郞)소좌 國共兩軍의 싸움은 "日本遺産"을 쟁탈하기 위한 전쟁제5장 "日中友好"를 해체하라 - 强要와 迎合의 "友好"로부터 진정한 관계의 구축에로 나아가야 (1) "自虐"의 日本人과 "超愛國"의 中國人 일본의 교육 붕괴는 세계의 웃음거리自國의 國旗를 존경하지 않는 나라는 세계로부터 輕蔑을 당한다(2) 東京裁判과 文化大革命 文化大革命의 진정한 의도는 무엇이였는가 이미 증명되고 있는 東京裁判의 不當性洗腦政策의 呪術의 束縛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日本의 悲劇 (3) 중국은 일본을 절대로 추월하지 못한다대두하는 "中國威脅論"과 "日本沈沒論"중국에서의 自然破壞 실태의 이모저모 집단賣春사건의 진정한 원인은 무엇인가중국의 敵은 중국 內部에 있다 隣國로서의 日本이 진짜 무서운 점 (4) "日中友好"론은 왜 위험한가언제나 뒤틀리는 일밖에 없는 허위적인 "友好"관계일방적인 규탄과 일방적인 迎合으로 점철된 30년 民主主義를 모르는 중국인들이 리해할 수 없는 것들좋은 말만 하면서 영합하는 것은 “간사한 친구”이다 (대체 이상의 뜻) (2) 책제목:《중국인에 의한 중국인 대비판-일본은 사죄하면 안된다》이라는 뜻   저자:김 문학  출판사: 祥伝社(黄金文庫)  출판년도:2006,12 출판사/저자로부터의 내용소개: 모국 중국에서 출판거부! 거침없고 용서없는 중국비판과 친일때문에 일본에 대한 쓴소리 모국 중국에서 출판거부문제의 책 끝내 문고화! 「어쨌든 중국인이라는 것은 자기반성과 자기비판을 싫어하는 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를 거울로 하라고 소리높이 웨치면서 역사에 대한 반성을 하지 않는 중국입니다. 그리고 조만해서는 사죄하지 않는 문화권에 분류할 수 있습니다. 」 「문고판 서언」에서)책표제의 선전문구●일중한에 정통한 신세대문화인에 의한 「일중관계」론●왜 일부 일본인은 그렇게까지 사죄하려하는가 ●우호국을「鬼子(꾸이즈」라고 부르는 중국의 해귀망측●야스구니신사라는 일본문화를 알려고 하지 않는 중국의 오만한 내정간섭●일본의 전쟁이 미친 아시아에 대한 공헌●중국의 국책으로서의 「반일」프로판간다는 언제 시작됐는가●웃음거리 「중국위협론」、중국은 절대 일본을 따라잡지 못한다●언제까지나 어리광이질 하는 중국의 가소로움●「自虐」의 일본인과「초애국」의 중국인(「BOOK 」데이터베이스에서) 모국 중국에서 출판거부. 거침없고 용서없는 중국비판과 친일 때문에 일본에 대한 쓴소리. 일중한에 정통한 신세대문화인에 의한  새로운 「일중관계」론 Amazon 상품랭킹: 책 – 173,770위 397위-일중,태평양전쟁 440위-국제정치형세 150위-祥伝社黄金文庫 목록 ( 이책은《친일파중국인에 의한 참을수 없는 일본질책론-「반일」에 미친 중국, 「우호」를 구걸하는 일본》(이라는 뜻의 책)을 祥伝社라는 같은 출판사에서 제목만 바꾸어 문고본으로 출판한 것이기에 내용이 완전히 같아 목록을 렬거는 것은 생략한다.  (3) 책제목:《역검정 중국력사교과서-중국인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진실한 중국사》이라는 뜻   저자: 이자와 모토히코, 김 문학 공저 출판사: 祥伝社(黄金文庫)     출판년도:2008, 2(祥伝社의 초판본은 2005,9에 출판) 아마존닷커의 상품설명(「MARC」데이터베이스에서)  이렇게 날조, 왜곡 교과서를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나라에 왜서 불평을 들을 필요가 있는가!? 중국역사교육의 실태를 폭로하고 중국인과의 역사논쟁에서 지지않기 위한 반격매뉴얼을 공개한다. 출판사/ 저자로부터의 내용소개이런 나라가 역사인식을 얘기할 자격이 있는가!책처음부터 결론이 있는 날조, 왜곡천지이런 교과서로 가르치는 나라에 일본이 뭐라고 불평을 들을 필요가 없다.Amazon 상품랭킹: 책 – 39916위   30위-중국사125위-학습지도 51위-祥伝社黄金文庫책표제의 선전문구 ●중국의 교과서에는「元寇」의 기술없음●티벳의 지위를 둘러싼 놀라운 역사왜곡●중학교의 교과서에는 일로전쟁도 기재없음●공산당은 절재적 「선」, 일본과 국민당은 절대적 「악」이라는 도식 ●지금도 「조선전쟁은 미국침략」이라는 확신범적 틀린 記述●공산당에 수천만에 이르는 자국민학살에 대해서는 침묵●90년대 이후에 강화되는 「반일애국」의 편향記述●중국역사교과서의 역사왜곡과 날조의 전모를 폭로한다목록제1장 중국에서의 「역사교육」이란-중국에 사실을 전하려는 의사가 처음부터 없다(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어느쪽인가, 중국과 일본에서 역사의 개념은 이렇게 다르다 등)  제2장 국정교과서의 역사기술을 검증한다-공산당에 유리한 것이라면 어떤 엉터리도 통한다(고대로부터 근대까지 근대의 서막부터 만주사변까지 등) 제3장 교과서외에 보는 중국역사교육의 실태-급증하는 애국반일교육시설과 영화, 음악을 사용한 프로판간다( 남경대학살기념관의 괴상함, 9,18사변박물관 등)제4장 중국인 취급매뉴얼-중국인과 논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기억해야 할 일( 나는 왜서 쇄뇌교육에 물 젖지 않았는가, 일본군국주의를 반성하라고  요구받았을 때 등) (4) 책 제목:《일중비교愚劣론-동아시아의 내분을 「超克」하는 방법》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南南社  출판년도:2007,6 아마존닷커의 상품설명:(「BOOK 」데이터베이스에서)당신의 중국인관과 일본인관은 근본적으로 틀렸다! 획기적인 일중상호 대반성! 강대중국의 허약한 실상, 섬나라 일본의 유연한 문화력. 중국외교부가 제일 주목하는 책.Amazon 상품랭킹: 책 – 847,224위 12205위-정치입문       445위-아시아, 아프리카103506위-비지니스, 경제 목록 제1장 유연한 일본문화력   유연한 일본인과 일본문화     「일본인론」의 정설에 대한 비판     유연한 일본문화와 정신구조     「온화한」 제국     일본인의 이문화수용시스템     외유내강적 파워     보따리문화의 관용성    「문명의 충돌」을 환충시키는 일본적 문명     양자선택의 원리보다 공생의 원리     일본의 힘 왜 일본은 오늘도 중국과 한국의 근대화의 스승이 될 수 있었는가   백년전부터 중국, 한국은 일본근대화를 모방하고 있었다   중일 「사제관계」의 역전   반일감정의 심리적원천-일본에 대한 내심상의 탄복과 표면상의 불복의   갈등심리     중국근대화에 공헌한 일본인     田岡嶺雲과 王國維     왜 일본을 유학처로 골랐는가     일본이 없었더라면 중국의 근대화도 없다     21세기 중국의 「일본화」 섬나라일본의 문명적우수성   「문명의 해양사관」이라는 획기적인 사관   섬나라일본은 초일류강대국이다   통합하기 어려운 대륙중국   중국사회의 취약성   중국의 블랙홀적인 위험성   섬나라근성으로 이긴다   대륙중국의 결정적 약점은 무엇인가   일본의 자유력과 행복력   조선반도의 지정학적 숙명   내분이 많은 반도국가   일본은 왜서 언제나 불사신의 행운이 넘치는가   역사를 움직이는 운명의 역학  자연, 풍토가 국가의 운명을 만든다  일본의 지정학적 행운을 잊어서는 안된다  일본은 독립된 문명권이다  일본은 왜서 일로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는가  「대동아전쟁」을 세계는 어떻게 평가하는가  일본은 왜서 분렬, 분단에서 벗어날수 있었는가  「무산된 일본분할점령안」  중국은 왜서 배상요구를 포기했는가  조선전쟁의 特需  히노마루는 다시 솟는다   제2장 경직된 중국의 취약성  중국한국의 경직이념의 위험성  중국과 한국의 경직이념 사회  중국대륙과 조선반도의 문화적 근친성  일중한근대화의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일본은 나무의 문명, 중국은 돌의 문명  중국,한국은 이념의 사회, 일본은 무이념의 사회  한국문화는 중국대륙의 복사판이다  혼합적「무절조」의 나라 일본  왜서 중국, 한국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모자라는가  일본인은 관용한 민족이다  중국한국의 경직이념의 위험성 조화로운 일본과 싸움의 중국  조화를 존중하는 일본 조화로운 문화의 결정적인 약점은 무엇인가 싸움은 중국인의 전통적행동원리 정은 한국인의 생활양식 너무나도 영합하는 일본인 일중한인간관계의 동심원의 차이 일중한 집단주의의 이질성 일본식집단주의의 강점 왜서 중국,한국에는 욕설이 많은가 일본의 조화적인 사회구조    정치동물 중국인 한국인과 비정치동물 일본인 정치운동이 많은 중국, 한국 정치이념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와 정치이념이 아주 박약한 사회 일본인은 비정치적 동물 두개의 거대한 격차사회 중국    부인도 적이라는 중국인의 처참함 부인인즉 적이라는 중국식 사고 內訌이 많은 조선반도    중국의 붕궤는 경직문명의 필연성 「중국강대국가」라는 착각 약소대국-중국 중국인은 통합하기 어려운 민족이다 외화내빈의 실상, 수많은 내부모순 일당독재와 민주시스템의 차이를 고찰한다 중국의 「반일」은 또 「우호」로 돌아온다 올림픽후 10년내에 붕궤하는 원리   제3장 일중비교우렬론    일중국민성의 우렬비교 일중국민성의 비교로 미래를 점친다 중국은 과연 「잠자는 사자」인가 유연한 일본인과 경직된 중국인 혁신적인 일본인과 보수적인 중국인 정직한 일본인과 사기적인 중국인 단결심이 강한 일본인과 內訌력이 강한 중국 높은 소질의 일본인과 낮은 소질의 중국인 차분한 일본인과 떠들어대는 중국인 내향적인 일본인과 외향적인 중국인 자기반성적인 일본인과 남의 탓만 하는 중국인 《僞惡醜일본인》과 《추한 일본인》의 백년의 격차 공적정의감의 일본인과 사적정의감의 중국인 백년에도 변하지 않는 중국의 국민성 결점    중국의 반문명의 전통적 체질 반문화지향의 중국사 평화보다 전쟁을 선호하는 국민성 대륙적 호전성 內訌과 自害의 역사 백년전의 반일투쟁과 「일중관계신사고」 「반일」은 중국, 한국의 발전을 저지하는 두터운 장벽 일본을 이용하는 중국  한국인은 왜서 「반일」을 하는가  동방예의지국이라는 환상  해외동포에 대한 비인도적 차별과 학대  국민85%가 체벌에 찬성  내셔널리즘적폭력주의+대일폭력  한국의 감정적비민주주의  「아시아의 내홍」의 위험성  일본에 대한 질투와 콤플렉스  대국 일본에 어리광부리는 한국인의 약체성  대일폭력과 어리광의 이중카드 깔보임당하는 일본과 일본인  바보가 돼버리는 일본인  세계에서 제일 속임당하기 쉬운 국민  자기선전을 잘 못하는 일본인  세계에서 제일 평화에 취해있고 우울증적인 일본인  내향적이고 외교를 잘 못하는 일본인  조화로움의 마이너스적 장벽  「반일」은 즉 일본인의 마음속의 벽이기도 하다 중국, 한국의 역사왜곡  역사관, 역사교육의 일중한의 차이  중국, 한국의 역사교육에 있어서의 왜곡, 날조의 실태  중국에 있어서 역사는 정책의 이용도구  「僞造田中上奏文」도 중국에서는 사실이 된다  일본점령구와 해방구의 실태비교  점령구는 문화도 경제도 번영했었다  「三光政策」의 문제  한국의 역사교육의 실태  일본식민지지배과 근대화  伊藤博文의 전정한 목표는 무엇이었는가  대일순응역사의 중요성   제4장 아시아의 內紛을 超極하는 방법 세계사적 역사관을 수립하라  역사관은 불일치한 것이 정상이다  역사인식은 동일할 수 있는가  전후일본의 공산주의적 「반일사관」을 비판한다  국제적시야에서 역사를 보는 눈  「당신은 당신의 얘기를 하고 나는 나의 얘기를 한다」는 논리 일중한은 아시아를 위하여 역사문제를 포기해야 한다  「역사의 사체」에 매달리는 중국, 한국  「역사」를 버려야  일중한에 도움이 된다  「역사문제」의 분쟁해결방법은 무엇인가  「미래지향」의 발상에서 탈피하라  70년전에 뜨거운 화제가 됐던 「동아시아공동체」  21세기 「동아시아공동체」는 가능한가 중국한국의 빈약한 내실  중국,한국의 실태를 먼저 알아야 한다  중국인식이 너무나도 무던한 일본인  빈부의 차와 부패로 쇠망한다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중국적 시스템  만연하는 전근대적 「중국병」  실제로는 중국, 한국이 역사를 중히 여겨야 한다 반복하고 반복하는 자기주장 전술  內藤湖南은 말했다  왜서 일본인은 이렇게까지 연약해졌는가  일본은 미국의 매춘부인가  날지못하는 새가 돼버린 일본인  중국에 사죄를 요구해야 한다  「우호」라는 달콤한 환상에서 해방돼야 한다 교육입국 일본의 대전략  전후의 일본교육은 세계의 비상식  꾸지람을 상실한 일본  일본의 아름다운 전통, 우점을 젋은 세대에게  일본은 아직도 아시아 여러나라의 본보기  여유로운 교육이라는 환상  일본인의 당당한 정체성을 회복하라 일본의 국민성개조안 내향성+해양성, 외향성을 유연한 일본에 강한 역학을 더한다 젊은이는 자기주장을 시작했다 국경을 의식하고 다른 나라를 인식하는 일본인이 되라 세계의 상식으로 세계와 거래하라 (대체 이상의 뜻)    (일본비판서)  책 제목: 《제3의 모국 일본국민에게 고한다! 일본에 귀화한 한국계 중국인에 의한 警世的일본론》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祥伝社  출판년도:2007,12 아마존닷커의 상품설명:(「BOOK」데이터베이스에서)지금까지 일본국내에서 유행한 일본론이란 자기애적일본론,또는 自虐적인 일본론의 양극단이었다. 이 책에서는 그것을 뛰어넘어 자기비판적인 일본론을 전개했다. 외국의 입장에서 본 무책임, 자의적, 정서적 일본비판과는 다른 일중한을 철저히 비교연구한 신일본인에 의한 일본론.아마존닷컴에 올라온 독자의 코멘트:중국에서 한국계3세로서 태어나 최근 일본인으로서 귀화한 저자만이 쓸 수 있는 일본을 사랑하는「독설일본론」입니다. 저자는 일본의 옛적의 좋은 시대를 실제 체험하고, 또 일본의 전통문학도 자주 읽어보고 있습니다.제가 읽어본 감상으로서는 원외국인이 아니면 쓸 수 없는 객관적인 시야에 감동한 점이 20%정도, 옛적의 일본을 사랑하는 좀 우익적인 의견이 80% 정도로서 당당치 못한 일본인보다 일본문화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주 재미있게 읽었지만 극단적인 사례가 눈에 띄웁니다. 전차안에서 다들 죽은 듯한 눈을 한다, 학생의 수업태도가 최악이다 등 일부 눈에 들어오기 쉬운 극단적인 사례가 일반화되어 언급되고 있습니다. 실제 그런 풍조가 있겠지만 현재의 일본인 전체가 그렇게 부패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오만불손이라 생각되는 곳은 일본에 대한 애정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말인데 그래도 역시 극단적인 사례가 많다는 것이 솔직한 감상입니다. 여러가지 극론이 있지만 일본을 사랑하는 원외국인이 쓴 귀중서적입니다. 일본이 세계에서 인정되기 위하여 이러한 책이 많이 사회에 나오고 국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읽어주면 좋겠습니다. Amazon 상품랭킹: 책 – 538,894위  1057 위-일본론22609위-사회학개론 목록제1장 일본인의 초상화제2장 국제화를 좋아하면서 국제화가 안되는 일본인제3장 돌연이변한 일본인제4장 어른이 되지못하는 노인의 나라 일본제5장 잘사는 나라의 행복하지 못한 일본인제6장 미국 팬티를 입은 일본인제7장 타락하라! 일본인제8장 일본에 미래가 있는가 (대체 이상의 뜻)(명언집, 소설) (1) 책 제목:《현명한 인생술-보통인의 명언이 가르친다》이라는 뜻  편집: 김 문학 출판사:가리바북 출판년도 2005,6 아마존닷커의 상품설명(「MARC」데이터베이스에서)  살아가는 목적보다 살아가는 기술! 허무한 노력보다 살아가는 기술! 돈도 여자도 남자도 빠른 놈이 차지하고, 운명을 바꾸는 한줄기의 밧줄, 아첨의 테크니크 등 모든 분야의 저명인이나 무명인의 살아숨쉬는 인생술을 수록.해설: 김문학의 인생관을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필자는 김문학의 많은 저서가운데서 이 책은 한번 읽어보고 싶다.  (2) 책 제목:《천마의 이야기》(소설) 이라는 뜻  저자: 김 문학 출판사: 가리바북  출판년도:2005,9 아마존닷커의 상품설명 (「MARC」데이터베이스에서) 국경을 넘어선 연애 이야기, 연애는 물론 정치,이데오로기, 자유주의,공산주의와는 일체무연. 이 세상 모든 주의를 넘어선 주변인의 연애.해설: 이 소설은 김문학이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일본에서의 고독한 유학생활중의 일본 여인과의 짝사랑 얘기인 것 같다. 
22    기차로 횡단해본 미국(4) 댓글:  조회:3686  추천:41  2010-09-10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보스턴통신(4)               기차로 횡단해본 미국(4)   미국의 노후한 철도   7월29일, 낮에 시카고 시내관광을 잘 하고나서 저녁켠에 숙박한 호텔에 돌아가 짐을 정리하여 시카고중앙역에 갔다. 시카고중앙역은 건물외관이 유럽의 궁전같이 장엄하였는데 역구내에 들어가보니 의외로 시설이 단조롭고 승객들로 붐비었다. 기차가 떠날시간이 되면 승객들이 길게 줄을 쳐서 기다리고 또 대합실이 붐비는 모양을 보니 마치도 후진국의 기차역같았다. 실은 Emeryville역에서 시카고까지  3일간 기차로 오면서 보니 미국의 기차들은 차내시설이 비교적 노후하고, 기차안에서 세수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고 기차속도가 그리 빠른 편이 아니었다. 좋은 점을 찾아보면 좌석이 널찍하고 Emeryville역에서 시카고까지 오는 기차는 승객들이 차창밖을 잘 내다볼 수 있게 사방벽을 유리로 만든 전망차량을 별도 설치하였다.   듣자니 미국인들은 자동차나 비행기를 많이 이용하다니 기차를 이용하는 승객이 그리 많지 않아 철도회사가 적자가 많이 생기고 그 때문에 철도의 시설개량에 그리 투자를 못하고 있다 한다. 이러다니 동아시아의 기차들보다 시설이 많이 노후해보이고 속도도 그리 빠르지 못한 것 같다. 승객들은 생활형편이 그리 유족하지 못한 사람들이거나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장거리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기차좌석도 절반이상이 비어있었다.   동부의 평야와 산맥    29일 저녁 9시반경에 기차가 보스턴, 뉴욕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보스턴과 뉴욕을 가는 기차가 일정구간까지 같이 가다가 도중에서 서로 분리되어 각각의 종점으로 향하는 운행방식이었다. 기차는 시카고를 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Indiana주 경내를 통과하였지만 밤중이라 차창밖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바뀌어 30일 새벽 두시반 경에 기차가 Ohio주 경내의 Toledo역에 잠시 정차하였다. 그 후부터 기차안에서 쪽잠을 잤는데 내가 자는 사이 기차는Ohio주, Pennsylvania주 경내를 다 통과하여 아침 7시경에 일어나보니 이미 뉴욕주 경내에 들어왔었다. 밤사이에 Indiana, Ohio, Pennsylvania 세 주를 지나면서 도대체 어떤 자연경관인지 살펴보지도 못한 것이 아쉬웠다. 특히 잠자는 사이 기차는 5대호중의 하나인 Lake Erie라는 호수연안을 줄곧 달렸는데 호수 풍경을 조금도 보지 못하고 지난 것이 후회되었다.       30일 아침 7시경에 깨어나보니 밖은 여전히 평야인데 중부의 대평야에 비하면 수목이 더 많고 도시나 산업시설이 더 많은 것 같았다. 중부에서 보던 것 같은 끝없이 펼쳐지는 강냉이밭, 콩밭같은 풍경은 보이지 않고 수림속에 강냉이밭, 콩밭이나 목초지가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오전 9시경에 Buffalo-Depew역에 들어섰는데 여기부터 뉴욕주 경내였다. 기차는 계속 평야를 달렸다. 오전 10시경에 뉴욕주의 Rochester역을 지나면서부터 소택지가 많이 보였다. 오후 1시경에 뉴욕주의 Utica역을 지나면서부터 산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산이 그리 높지 않았으나 수목이 꽉차게 자라고 있었다. 오후 2시 40분경에 기차는 Albany-Rensselaer역에 도착했는데 여기서 뉴욕과 보스턴에 가는 차량이 서로 분리되었다.  이 역을 지나면서부터 수목이 더 농밀해지고 산이 높아졌다. 동부의 대산맥인 Apparachian산맥의 중심부를 기차가 통과하고 있었다. 큰 산맥인데도 기차가 통과하는 지점은 산이 대단히 높지 않아 해발 약 1000m 정도가 돼 보였다. 지도를 보면Apparachian산맥은 미국 동부의 제일 큰 산맥이고 남북으로 긴데 북부지역은 산이 그리 높지 않다. 기차가 산림지역을 통과하는 중에 자그마한 소택이 여기저기 자주 보이고 산속의 분지에는 강냉이밭이나 기타 밭, 목초지가 꽤 보였다. 동부의 산을 보면 수목들이 서부나 중부와도 다른 것 같고 수목의 밀도가 높았다. 보스턴에 도착한 후 주변의 수림을 보니 떡갈나무, 단풍나무 등 동아시아의 북부지역에서 많이 보는 수종이 이 지역에 많았다. 그런 면에서 자연 경관은 나에게 더 친숙감을 주었다. 가끔 계곡이 나타나는데 울창한 수림과 어울려 경관이 참말로 아름다웠다.   오후 4시반경에 Pittsfield역을 통과했는데 이 역부터 기차가 Massachusetts 주 경내에 들어섰다. 여지껏 오랜 노정을 여유를 가지고 달려왔는데 기차가 정작 Massachusetts주에 들어서니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가는 최종목적지 보스턴은 과연 어떤 도시인지? 나는 거기서 1년간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하겠는지? 내가 과연 하버드대학교에서 연구자들속에 제대로 끼여나 들겠는지? 하는 여러가지 생각이 떠오르면서 일종의 중압감이 밀려왔다. 그러다니 여유가 없어지고 자꾸 시계를 보면서 종점역에 도착하는 시간을 의식했다. 기차는 오후6시가 지나서 Worcester역을 지났는데 여기부터 산맥이 보이지 않았다. 오후 1시부터 산림지역에 들어섰는데 오후 6시경까지 줄곧 산림지역을 기차가 달렸으니 동부의 Apparachian산맥도 상당히 크다고 볼 수 있겠다. 그 후도 8시 직전에 Framingham역에 도착하기까지 평야지역에도 수풀이 울창하여 외관으로는 산림지역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Framingham역을 지나면서부터 기차는 보스턴 외곽에 들어선 것 같았다. 오후 8시40분에 기차는 예정시간보다 약 30분 앞당겨 보스턴 남부역에 도착했다.  25일 오전에 캘리포니아의 Emeryville역을 출발하여 30일 밤에 보스턴에 토착하기까지 6일간의 시간이 걸렸고 기차를 탄 시간만 정확하게 76시간이 된다. 정말 멀고도 먼 여정을 달려왔다. 매일 매일 보는 풍경이 새 것이니 지치는 줄 모르고 그런 풍경을 보면서 달려왔다. 여정을 마치고나니 미국에 대한 자신감이 들었다. 미국의 서부부터 중부, 동부까지 대충 봤으니 이제는 미국의 어디에 가도 자신있게 다닐 것 같고, 동아시아에 돌아가서도 미국 얘기하면 끼어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보스턴남부역에서는 하버드대학교에서 의학연구를 하고 있는 같은 조선족 출신 김 만수박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 보스턴에 옮겨오면서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어서 고민하던 터에 조글로사이트에서 김 만수박사가 칼럼을 발표하던 일이 생각나서 연락처를 찾아서 메일 보냈더니 대뜸 전화를 해주고 보스턴에서 집찾는 일을 발벗고 도와나섰다. 덕분에 마음드는 집을 찾았고 김 만수박사가 기차역까지 마중해주었다. 미국의 한국인들한테서 들은 얘기인데 한국에서 미국에 이민 오는 경우 공항에서 마중한 사람이 어떤 직업인가에 따라 이민자의 직업이 결정된다고 한다. 이런 얘기가 좀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겠지만 중국에서 대학교를 마치고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에 와서 하버드대에서 수년간 포스터닥을 하고 있는 김 만수박사가 기차역에서 나를 마중해주었으니 나도 보스턴에서 운수가 형통할 것 같아서 기뻤다.    이번에 기차로 미국횡단여행을 하면서 미국의 풍경가운데 동아시아와 현저히 다름점이 눈에 띄었다. 그것인즉 어디에 가도 담장이나 울타리를 거의 볼 수 없는 것이다. 도중의 어느 도시나 마을에서도, 기차역에서도 담장이나 울타리가 아주 드물었다. 대체 기차역은 개찰구도 없고 승객들이 제집처럼 마음대로 드나드는 그런 구조였다. 미국의 도시에서 실지 생활해보아도 그런 점을 느끼는데 대체 개인 집은 담장도 없거니와 울타리조차 아주 적다. 대학교들도 담장을 보기 힘들고 정문이라는 개념도 별로 없다. 중국, 한국이나 조선, 일본을 가보면 담장이나 울타리가 없는 집이나 공공시설을 찾기 힘들다. 대체 벽돌이나 돌, 흙으로 담장을 두르거나 나무가지로 울타리를 치게 된다. 공공시설들도 그런 담장이나 울타리에 둘러쌓이고 정문이 꼭 있기 마련이다. 왜서 이런 차이가 나타날까? 역시 정착을 특색으로 하는 농경문화와 이동을 특색으로 하는 유목문화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현상이 아닐까? 같은 동아시아에서도 몽골같은 유목민족사회에서는 사람사는 건물에는 담장이나 울타리를 보기 힘들다. 담장이나 울타리문화의 극치가 바로 중국의 만리장성이 아닐까?  동아시아의 사회에서는 현재도 사람들의 관념속에 개인집은 울타리 정도는 있어야 안정감이 있고 아담지다는 느낌이 든다. 완전히 울타리마저 없앤다면 허전한 감이 드는 것이 아닐까? 반면 미국에서는 개인집이 너무 담장이나 울타리로 둘러쌓이면 오히려 답답하게 느끼는 것이 아닐까?         하버드대의 도서관과 도토리나무 보스턴에 도착한 다음 날,  즉 7월31일에 하버드대학교 캠퍼스를 구경나갔다. 내가 버클리에서 멀고 먼 여정을 지칠 줄 모르고 달려온 최종목적지가 바로 여기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먼저 캠퍼스라도 구경하고 싶었다. 하버드대학교 캠퍼스에서 제일 가까운 역인 하버드광장역에 도착하니 사람들로 붐비고 대부분 젊은이들이었다. 보스턴지역에 종합대학, 단과대학 합쳐서 60개가 넘어되고 그 때문에 인구중에 젊은층이 특히 많다고 한다. 역에서 나가니 하버드대학교 캠퍼스가 바로 그 옆이었다. 사람들이 보통 찾아가는 하버드대학교 캠퍼스는 Harvard Yard라고 불리우는 하버드대내에서도 제일 오래된 자그마한 마당이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벽돌로 탄탄하게 지어진 붉은 색 건물들이 이 마당을 둘러싸고 마당안에는 넓은 잔디밭과 오래된 수목들이 여기저기 서 있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정갈하고 그 이상 더 특별해 보이는 곳은 없었다. 천하의 하버드대 캠퍼스가 결국 이런 것이냐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대학은 공부하는 곳이지 처음부터 관광지를 생각하여 캠퍼스를 만든 것이 아닐테지 하고 이해가 갔다. 놀라운 것은 하버드대 캠퍼스에 관광객이 거의 넘치다 싶이 하는 것이었다. 단체관광객들은 길게 줄을 지어서 가이드를 따라다니고 가족이나 친구들끼리 온 관광객도 아주 많았다. 관광객의 얼굴들을 보면 보통의 미국인이나 서양인들이 많았지만 아시아인들도 꽤 많았다. 얼굴을 잘 살펴보고 대화를 들어보면 중국대륙, 대만, 홍콩, 한국, 인도인들이 많았다. 상대적으로 일본인이 적었다. 아시아인들은 가족끼리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부모가 자식을 데리고 좋은 자극받게 하기위하여 찾아오는 것 같았다. 하버드대 캠퍼스에서도 교육열이 높은 아시아인들의 모습이 그래로 드러난다. 중국인, 한국인, 인도인 세계에서 교육열이 제일 높은 민족들이 하버드대 캠퍼스를 제일 찾는 것 같았다. 과연 말로만 많이 듣던 하버드대였다. 내가 1년간 체류하던 UC 버클리도 미국의 명문대학교이고 연구분야에서는 국제적인 평가가 대단히 높은 대학교이다. UC 버클리 캠퍼스도 아주 아름답고 입학을 원하는 학생들이 구경하러 많이 찾아온다. 그런데 하버드대 캠퍼스는 단지 학생들만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부모, 소문만 듣고오는 일반 관광객들로 매일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고, 마치도 학력숭배의 성지를 찾아오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 일등이 되라고 하고, 일등만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물론 나의 의식속에도 이런 일등지상주의, 또는 일등콤플렉스가 있었기에 하버드대까지 찾아온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일등만 바라보는 것이 과연 옳은 지 하는 회의감이 들고 일등만 찾아가는 모습이 좀 안되기도 했지만 아시아에서 온 젊은이들이 하버드대 캠퍼스에서 동경과 의욕의 눈빛이 넘쳐나는 것을 보면 일등주의도 하나의 좋은 자극과 발전의 동력이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은 하버드대를 찾아보고 이 대학교의 외관상의 다른 점이 두가지가 느껴졌다. 캠퍼스지도를 보면 도서관이 아주 많다. 하버드대 전체에 90개 이상의 도서관이 있다하는데 대학교에 도서관이 이렇게 많은 대학을 나도 처음 본다. 총장서가 1530만책이라 하고 세계에서도 네번째로 장서량이 많다고 한다. 물론 대학교의 장서량치고는 세계 제1위는 의심할 바가 없다. 역시 책이 많은 대학교가 좋은 대학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버드대학교에서 주로 공부하게 될 얜칭도서관은 동아시아전문도서관인데 이 도서관을 잘 이용하면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 어느 나라에 있기보다 동아시아연구를 하기 쉽다고 한다. 나도 그후에 얜칭도서관에 자주 가봤는데 웬간한 대학교의 중앙도서관보다 크고 동아시아의 도서들이 정말 많이 들어있는데다 귀중도서도 많았다. 그래서 동아시아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이 도서관을 선호한다. 이만큼 대학교의 진정한 힘은 우선은 책에서 나오는 법이다.   또 하나 하버드대 켐퍼스에 많은 것이 떡갈나무이다. 수령 수백년이 되는 떡갈나무가 여기저기 서있는데 가을이 되면 도토리가 거기서 와르르 떨어져 내린다. 떡갈나무는 보스턴 지역의 산야에 제일 많은 나무 같고 도시의 가로수도 떡갈나무가 제일 많다. 떡갈나무하면 동아시아에서는 어떤 인상일가? 보통은 도토리나무라고 불리우는데 산림속의 어디에도 제일 흔하게 보이는 나무이다. 나무가 수질이 튼튼하고 도토리 열매를 많이 맺고 땔나무로서 잘 사용되는데 사람들은 보통 관상수목으로서는 누구도 도토리나무를  떠올리지 않는다. 너무 흔하게 보아서 그럴까? 아니면 외관이 수수해서 일까? 아무튼 동아시아에서는 도토리나무가 시내의 가로수가 되거나 대학교 캠퍼스를 장식하는 관상수목이 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러나 그런 도토리나무를 하버드대에서 많이 보게 되니 남다른 감개가 떠올랐다. 동아시아의 근대화는 일본의 문호 나츠메 소세키가 일찍히 지적하다싶이 내발적인 것이 아니고 외발적인 요소, 서구의 문명적인 충격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그 때문에 근대화과정은 실질적으로 서구화의 과정이었고 그런 과정에서 오래동안 서구적인 것이 숭배되고 토착적인 것이 경시되었다. 오늘의 현실에서도 동아시아의 학문연구의 현주소, 특히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분야를 보면 서양에서 일어나는 학문의 유행을 따라다니기에 급하고 독자적인 학문체계가 잘 형성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버드대의 캠퍼스에서 자라는 토착적인 도토리나무를 바라보면서 내발적인 발전이란 바로 이런 것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버드대도 영국의 명문대학교들을 따라만 다녔다면 오늘의 하버드대의 명성이 있었겠는가?  보스턴의 자연속에 제일 많이 자라고 있고, 그런 토착수종을 대학교 캠퍼스의 여기저기 심어놓은, 또는 원래 있던 그대로 자라게 하는 하버드의 모습에 이런 것이 하버드대의 명성을 뒤받침하는 진정한 동력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토리나무는 분명 튼튼하고 허식이 없고 열매를  많이 맺는 나무이다.                          (2010년9월9일, 미국횡단기차여행기 이상마침)      
21    기차로 횡단해본 미국(3) 댓글:  조회:4019  추천:40  2010-09-09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보스턴통신(3)               기차로 횡단해본 미국(3)   중부의 곡창지대   7월27일 오전 6시반경에 기차에서 깨어나서 차창밖을 내다보니 양측에 끝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 강냉이밭과 콩밭이 펼쳐지고 가끔 가다가 마을과 도시, 곡물가공소가 보인다. 서부에서 보던 풍경과는 전혀 다른 중부의 풍경이 파노라처럼 펼쳐졌다. 서부와 중부사이에는 시차도 2시간이나 났다. 나는 기차를 타고 미국 중부의 풍경을 직접 보기전에는 중부지역도 건조하고 땅이 메마른 가운데 강냉이나 밀같은 곡물을 재배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실지 제 눈으로 본 풍경은 상상해보던 이미지와 전혀 달랐다. 완전히 녹색으로 뒤덮인 대평원이었다. 실은 전날 저녁에 도착한 콜로라도 주의 주도 Denver를 지나면서부터 Great Plains라고 불리우는 미국 최대의 대평원지대인데 밤중에 지나다니 그 사이 기차가 통과한 콜로라도주와Nebraska주의 대평원은 거의다 보지 못했다. 아침에 깨어나서 처음 본 중부 대평야의 풍경은Nebraska의 주도인 Lincoln을 지난 직후인 것 같았다. 오전 7시반경에 Nebraska주의 최대의 도시 Omaha에 기차가 도착하였다. 인구 40만 정도된다는 Omaha시는 내가 중부에서 처음 본 큰 도시였는데 벽돌건물이 많은 것이 서부지역의 도시들과 외관이 달랐다. 서부지역의 도시들에서는 벽돌로 지은 건물이 그렇게 눈에 띄지 않았다. 오전  10시경에 아이오와주 경내에 있는 Creston이라는 역에 도착하였다. 이 지역부터 주가 바뀌어 아이오아주 경내를 기차가 달리고 있다. 창밖의 풍경은 아침에 일어나서 본 것 같이 대평야에 줄곧 강냉이와 콩밭이 지평선 끝까지 이어지고 그런 밭들사이에 수목이 우거지고 가끔 자그마한 구릉이나 소택지가 보이며 또 간간히 마을과 도시, 목장이 나타난다. 말로 이루 다 형언하기 어려운 어마어마한 대곡창지대이었다. 오후 1시경에 큰 강이 나타나고 소택지가 많이 보였는데 Mississippi강 지류같았다. 3시경에 아이오와주의 Burlington역을 지나자 아주 큰 강이 나타나고 기차가 철교로 강을 통과하였다. 지도를 보면Mississippi강이 틀림없었다. 한여름의 우기여서 그런지 강물이 많이 불어나 제방뚝 정상까지 물이 거의 차 올랐다. 미국 중부의 곡창지대는 바로 Mississippi강이나 Missouri강 같은 큰 강들이 있어서 가능한 것 같다. 대평야에 습윤한 기후, 그리고 수원이 보장되기에 곡창지대로서는 천혜의 조건을 다 갖추었다. 기차는 오후 3시40분경에 일리노이주의 Galesburg역에 도착했다. 이 역에 도착하기 직전부터 기차가 일리노이주 경내를 달리고 있었다. 일리노이주에 들어서도 가도가도 끝없는 대평야이고 곡창지대가 줄곧 이어졌다. 오후 6시20분경에 일리노이주의 Naperville라는 역을 지나면서부터 시카고의 도시권에 들어서 밭들이 보이지 않고 시카고 외곽의 도시들이 이어졌다. 오후 7시 직전에 끊내 종점역인 시카고에 도착하였다. 기차가 예정시간보다 약 한시간 반이나 늦게 시카고에 도착하였다.  25일 오전 10시경에 캘리포니아의 Emeryville역을 출발하여 27일 저녁에 시카고에 도착하기까지 약 53시간이 걸렸다. 26일 저녁 9기경에 콜로라도주의 주도 Denver를 통과하여서부터 종점인 시카고까지  중부의 대평야를 기차가 달린 시간을 계산해보니  약  22시간이었다. 대단히 큰 평야이고 거기가 거의다 곡창지대이니 미국 농업의 저력이 새삼스레 느껴졌다. 내가 이번 기차로 미국횡단 여행을 마치고 나서 제일 인상이 남은 구간도 중부의 대평야이다. 가도가도 끊없이 강냉이와 콩밭이 보이고 기타작물이나 목초지가 보였다. 내가 특히 중국 연변의 농촌출신이기에 이런 곡창지대에 관심이 컸을 수도 있다. 그래도 식량문제는 인류의 제일 중요한 관심거리이고 이만한 거대한 곡창지대를 가지고 있는 미국의 저력을 장래에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중국에서 2006년 7월에 할빈에서 장춘까지 차로 달리면서 동북대평야를 본적이 있는데 그 때도 가는데마다 강냉이밭이었다. 미국 중부지역의 자연환경이나 풍경이 그 때 본 중국 동북지역과 비슷했다. 자세히 보면 미국 중부지역이 습윤하고 수원이 더 풍부한 것 같고, 중국보다 인구밀도가 적으니 대평야가 더 유족해보인다. 대평야를 지나면서 보니 이 지역 농촌의 풍요로움이 눈에 띄었다. 어디가도 마을들이 녹음으로 둘러쌓이고 농민들이 여유있게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시카고대학방문 7월28일, 하루 동안 시카고대학교를 방문하기로 했다. 내가 작년에 UC 버클리의 동아시아연구소에 방문학자로 오는 과정에서 추천을 해주신 시카고대학교 최 경희교수 (한국문학전공) 을 만나보고, 겸사하여 시카고대학교를 견학하기 위해서였다. 시카고대학교는 전세계 대학평가에서도 항상 7위정도에 들어가는 세계적인 명문대학교이니 시카고를 거친던 김에 꼭 들러보고 싶었다. 시카고대학교 출신중에서 노벨상 받은 사람만도  80여명 이라 하고 경제학분야에서는 항상 세계1위로 평가받고 있다. 28일 오전, 시카고시내의 숙박한 호텔을 나와 전차를 타고 시카고대학교에 찾아가서  최경희교수를 반갑게 만나고, 최교수가 대학 구내의 지하에 있는 미로처럼 복잡하고 큰 서점을 안내해주면서 이 서점이 시카고대학교의 명물중의 하나라고 설명해주었다. 역시 대학교와 책은 떼놓을 수 없는 관계이다. 대체 큰 대학교들은 다 자체의 서점을 가지고 있다.  그 다음 시카고대학교의 동양학연구소 부설박물관을 안내해주었는데 주로 이집트, 중동지 역의 문물이 소장되어 있었다. 놀라운 것은 대학교박물관인데도 미이라가 7구나 전시되어 있었다. 시카고대학교는 이집트, 중동의 고대사 연구에서  세계적인 선도적인 지위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학교회관에서 최교수의 주선으로 중국출신의 교수, 미국인 중국학 교수와 점심을 하면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약간한 학문적인 대화를 영어, 중국어,한국어를 섞어가면서 나누었다. 오후에는 시카고대학교 캠퍼스를 구경하였다. 시카고시내의 남부에 위치한  캠퍼스는 기복이 없는 평평한 대지위에 있었는데 건물들이 아주 멋지고 건물들 사이에는 수목이 우거지고 캠퍼스전체가 아주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주요건물들은 19세기 후기에 지어졌는데 서양 중세의 고딕건축양식을 복고풍으로 지은 Gotic Revival 건물이 많았다. 이런 건물들은 벽을 석회암으로 짓고 조각물이 많이 달려있으며 지붕도 뾰족하게 치솟아 전체적으로 장중한 감을 준다. 영국의 옥스포드대학교, 켐브리지대학교의 건물양식을 본받아 지은 것이라 하는데  내가 서부의 대학교 캠퍼스들에서 거의 보지 못하던  풍경이었다. 역시 서부지역은 미국에서도 좀 특이한 지역이고 중부에 들어서니 시내건물도, 대학교 건물도 여기가 서양같구나 하는 느낌을 주었다. 미국의 도시들은 일반적으로 그리 잘 정돈된 것이 아니고 어지러울 때도 있는데 대학교캠퍼스들은 완전히 별다른 세계이다. 보통 어디나 잘 정돈되고 공원같이 깨끗하다. 오후에 캠퍼스를 구경하고 시간이 남아서 도서관에 들러 장서들을 구경하고 몇시간 열람실에서 공부를 했다. 주로 동야학에 관계되는 장서들을 둘러봤는데  장서가 많은 것도 놀랍거니와 동양학 도서들은 다 한 곳에  모아놓고 있어 책 찾고 보는데 아주 편리하다. 미국의 도서관에서는 중국, 한국, 일본의 책들을 한 곳에 모아놓은 동양학도서관이 있거나 전문도서관이 없어도 보통 한 곳에 모아놓는다. 때문에 미국의 명문대학교에 오면 오히려 중국,한국, 일본보다 동양학 도서들을 찾아보는데 더 편리할 때가 많다.  동아시아의 대학교들에서는 동양학에 관한 책들을 한 곳에 모아놓지 않다니 책 찾는데 품이 많이 든다. 저녁에는 최교수의 초청으로 한국 연세대학교에서 방문연구 온 연구원과 같이 최교수의 자택을 방문하여 저녁식사를 하면서 세상돌아가는 얘기를 재미있게 나누었다.   시카고시내구경 29일에는 낮에 혼자서 시카고시내 구경을 하였다. 수선 유람선을 타고 시카고 시내를 흐르는 강과 Michigan호 관광을 하였다. 시카고 시내는 가까이에서 보면 복잡하고 비좁아 보이는데 유람선을 타고 Michigan호에서 멀리서 바라보면 정말 멋지다. 시카고는 세계적으로 고층건물이 많은 도시, 그래서 고층건물의 갤러리라고도 불리우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도시모습이 아름답고 고층건물들이 한데 어울러져 이루는 건축라인이 종합예술품같기도 하다. Michigan호는 호수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너무 커서 끝이 거의 안보이고 파도가 바다처럼 크게 일어난다. 시카고주변에 있는 5대호의 면적만도 미국의 주 두개 정도의 크기에 맞먹는 것 같다. 유람선 여행을 마치고나서 이번에는 시카고에서 제일 높은 건물인 Willis Tower를 구경하였다. 이 건물의 높이는 442m (첨단부분까지 합치면527.3m) 이고 한때는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라 불리웠다 하는데 현재는 초고층 건물이 하도 많이 지어지니 세계최고층 순위에서 많이 밀린 것 같다. 그래도 전망대에 올라서니 시카고 시내만이 아니라 중부지역의 대평야가 멀리까지 한꺼번에 시야에 들어왔다. 시카고 시내구경으로 마지막에 들른 것이 시카고미술관이었다. 미국의3대 미술관중의 하나로 꼽히는 미술관인만큼 볼만한 전시품이 많았다. 중국의 청동기나 도자기중 일부는 중국에서도 보기 어려운 국보급의 제품이 진렬되어 있었다. 이집트나 중동지역의 문물들도 볼만했다. 특히 관람객이 많아 모이고 나도 크게 감명을 받은 것이 유럽근대미술 전시실이었다. 말로 많이 들어왔고 간혹 일본에서 유럽미술전시회에서 일부작품을 본적이 있는데 시카고미술관에서는 이런  유럽의 근대미술작품을 한번에 대량으로 볼수 있었다. 고흐의 작품도 여러 폭 있고, 프랑스의 인상파 작품은 대량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하나하나 보는데 많은 시간과 정력이 필요하였다. 그 외에도 미국현대미술전시관에는 대량의 현대미술작품이 있어 미국 현대미술의 흐름은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왜 이름있는 도시들은 대체 유명한 미술관을 가지고 있는가? 결국 이런 미술관들이 그런 도시의 정신적인 GNP를 높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시카고 시내를 하루 둘러보면서 관찰하니 전철, 지하철 같은 도시 인프라기반이 노후해보였다. 미국의 전성기에는 다 좋아보였겠으나 이제는 동아시아 나라들의 발전이 너무나 빠르니 도시만 보면 미국의 우월한 점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성급한 사람은 그래서 이제 미국은 정말 볼 것이 없다는 글도 쓸 수 있는데 기차로 미국을 횡단해보면서 풍요로운 대지를 많이 본 나에게는 미국의 저력은 그런 도시만이 아니라 드넓은 대지속에서 찾아보라고 권고하고 싶다.                                                          (2010년9월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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