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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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에서 보는 중국과 조선의 보릿고개
2009년 12월 25일 05시 53분  조회:6980  추천:55  작성자: 김광림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버클리통신 9

 


   
      연변에서 보는 중국과 조선의 보릿고개


 

연변에서 근심하는 조선의 농사


연변은 중국에서도 조선
(북한) 정보가 제일 집중되는 지역이다. 길이가 거의 600km에 이르는 두만강을 사이두고 지리적으로 인접해있는데다, 연변의 다수의 조선족이 조선에 친척을 두고 있어 인적왕래가 빈번하다. 두만강변을 따라 여행해보면, 강의 폭이 그리 넓지 않은데다 양측에 다 같은 민족이 살고 있고, 자연경관과 건축양식이 너무 비슷하여 이 강이 과연 두나라를 가르는 국경인가 의문이 들 정도이다. 두만강 상류지역은 도랑물 정도로 졻은 곳도 있어 훌쩍 건너뛰어도 국경을 넘을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연변에 사는 조선족들에게 제일 심각하게 들리는 정보가 조선의 식량난이다
. 조선의 식량난은 한해,두해의 일이 아니고 이제는 20여년도 훌쩍 넘게 지속해오고 있는 문제이다. 연변지역에 자연재해가 들면 사람들은 오히려 조선의 농사를 더 근심하곤 한다. 지리적으로 가깝기에 연변에 자연재해가 들면 당연히 강너머 조선에서도 비슷한 자연재해를 맞게 되기 때문이다. 비슷한 자연재해가 들어도 연변에서는 기근까지는 근심하지 않는데 조선은 상황이 전혀 다르다. 이 차이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자연조건도 비슷하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도 분명 다 같은 민족인데 한쪽은 20여년전에 이미 보릿고개를 넘겼고, 한쪽은 아직도 애달픈 굶주림을 면치못하여 외부의 식량원조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다. 금년은 특히 80
만의 대흉년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아 조선의 식량난이 더욱 걱정된다.   

 

가족도급제가 바꾼 중국 농촌


20
여년전까지는  연변이나 조선이나 식량조건이 그리 차가 나는 것이 아니여서 연변의 농가에서는 겨울에는 강냉이죽으로 하루 두때씩 에우고, 봄에는 양식이 모자라 배급을 받는 도시의 사람들한테 가서 강냉이나 조를 꾸어다 가을에 쌀로 되갚는 일이 일상적으로 발생했다. 그러던 것이 1982년 경부터 연변의 식량사정이 획기적으로 바뀌우기 시작했다.


그해 여름부터 나는 연변을 떠나 장춘에 가서 대학교에 다녔는데 겨울방학이 되어 고향집에 돌아오니 올해부터는 강아지에게 남은 밥을 먹이고 있고
, 창고에 콩기름이 큰 통 하나에 들어있다고 어머니가 알려주었다. 어쩌면 1년사이에 이렇게도 큰 변화가 생긴다는 말인가. 정말 믿기 어려운 변화가 현실이 되었던 것이다. 그전까지는 인민공사(人民公社)의 생산대(生産隊)에서 한 가족이 한해 분배받는 콩기름이 겨우 유리병으로 두병(2kg정도)밖에 안되어 집에 손님이나 와야 기름맛이라도 볼 수 있는 형편이었다. 양식사정도 항상 여의치 않아 쌀밥을 마음 껏 먹어볼때가 별로 없었다.


1982
년의 연변 농촌의 제일 큰 변화는 사회주의 집단농장제인 인민공사(人民公
)가 사실상 해체되고 가족도급제가 실시되었던 것이다. 토지소유는 국유이지만 땅을 가족별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어 개인이 영농을 할수 있게 한 것이다. 생산책임제라고 불린 이 농업정책으로 중국의 식량사정이 획기적으로 바뀌고  보릿고개란 말이 중국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가족별로 영농을 하는 생산책임제가 중국에서 처음 도입된 것은 1978년인데 그해 안휘성(安徽省)성 한 마을의 농민 18명이 인민공사의 집단영농에 의한 피페에 더 이상 참지 못하여 불법으로 시작한 것이 가족도급제에 의한 영농이었다. 이 가족 도급제가 급기야 안휘성, 사천성(四川省)의 농촌에서 보급되기 시작하고 중국 공산당에서도 농촌의 가족도급제 성과를 인정하여 전국 농촌에 보급을 권장하게 되었다.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소속되어 있는 길림성(吉林省)은 그 때까지 극좌적인 사상이 남아있어 중국의 다른 지역보다 가족도급제가 수년 정도 뒤늦게 시작됐다. 1981년에 우선 인민공사의 생산대 산하에  몇 가족씩 팀을 이룬 영농을 시험했는
데 중국 농촌에서 일어난 가족도급제의 혁명적인 대세를 따라 이듬해에는 김림성 전지역에서 가족도급제가 실시되었다.   


가족도급제가 실시된 첫해 봄에 연변의 농촌에서도 말썽이 꽤 많았다. 인민공사에 집중된 농촌의 재산을 나누어가지는 과정에서 수십년간 이루어놓은 사회주의 성과를 다 말아먹는다든가, 이것이 자본주의 시작이라는 불평도 들렸다. 이런 불평은  대체 인민공사의 집단농장 체제하에서 간부로 일하면서 쉽게 살았던 사람들한테서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가족도급제에 의한 개인영농이 농민들의 생산의욕을 대대적으로 불러일으켰고 그것이 생산량으로 나타났기에 가족도급제는 역사적인 대세가 되었다. 연변에서 가정도급제가 실시되던 수년간 농가 사람들은 한뙈기라도 논과 밭을 더 다루려 애쓰고 서로 경쟁적으로 농사일에 매달렸다. 마침 하늘도 도왔는지 중국의 농촌은 자연재해 없이 수년간 대풍년을 맞이하였다. 이 때부터 농촌에서는 다각경영을 하여 연간수입이 인민페로 만원을 넘기는 부유한 농가 ‘만원호’ 가 속출하기 시작하였고, ‘향진기업’이라 불리우는 농촌기업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등소평이 창도한 중국의 개혁개방은 사실상 농촌의 체제개혁에서 시작되었고, 그 것이 오늘의 중국을 번영으로 이끈 원동력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중국의 농촌에서는 80년대에 보릿고개 문제를 기본상 해결하였던 것이다.

 

실패로 끝난 인민공사


그러면 그 이전의 인민공사 체제하의 집단영농은 어떠하였는가?


사회주의 체제하의 중국 농촌에서 합작사란 이름의 집단농장제가 실시된 것이
1953년부터이다. 1958년부터 합작사의 집단농장 체제를 보다 강화한 인민공사가 성립되고 ‘대약진’이라는 극좌적인 사회운동이 수년간 진행되었다. 이 ‘대약진’ 기간에는 농촌의 가정에 식량이 배급되지 않고 인민공사의 식당에서 공동식사를 하는 극단적인 방식이 실시되었는데 그 당시 중국전역에서 기근으로 굶어죽은 사람이 속촐하였고 연변에서도 풀뿌리나 나무껍질로 연명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내가 철이 들었던 70년대에도 연변의 농촌은 인민공사의 체제하에 전적으로 정부의 방침과 동원에 의한 영농이었다.


봄이면
6월중순까지 모내기를 끊내라는 정부의 지침이 층층의 회의를 통하여 전달되고, 학생들과 도시의 노동자들을 총동원하여 모내기를 도왔다. 그래도 기한대로 모내기를 마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의 어느 산지가 많은 지역의 다락밭이 전국농촌의 모델로 인정되어 전국적으로 다락밭을 만들라는 지시가 내려 연변에서도 멀쩡한 땅을 파혀쳐 다락밭으로 바꾸는 우를 범했다.


인민공사 체제하의 연변농촌을 보면
, 인민공사 본부에 공산당 서기, 부서기 등 생산직을 이탈한 간부가 여러명 있는데다 마을마다 생산대대가 있어 서기, 부서기 등 반전직간부가 또 여러명 있고, 생산대대 산하의 생산대마다 대장,부녀대장,회계 등 간부가 다수 있었다. 농촌의 영농은 생산대 단위로 집단으로 이루어졌고, 거의 모든 농사 계획은 상부의 지시와 동원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이러다니 정작 농업의 주체인 농민들의 영농의지와 창의성이 전혀 발휘되지 못하여 인민공사는 결국엔 실패로 인정되였고, 1978년경부터 가족도급제가 실시되었던 것이다 


베트남의 경우도 중국과 비슷한 집단농장제를 실시하였다가 실패로 인정되어 개인영농제로 바꾼 경험을 갖고 있다. 북부베트남에서는 1960년부터 농촌의  합작사를 시작하고, 베트남 통일을 이룬 후 북부베트남의 집단농장제를 남부에도 실시하였다가 그 실패가 인정되어 1988년부터 전국농촌에서 생산물책임제에 의한 개인영농을 실시하였다고 한다. 그 이듬해부터 베트남은 쌀 수출국이 되어 농촌개혁의 가시적인 성과를 과시하게 되었다.

 

조선에도 농업체제의 개혁이 필요


중국과 베트남의 집단농장제가 기본상 실패하고 개인영농제가 성공한 실례를 보면, 농촌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농업의 주체인 농민들이 땅의 주인이 되고, 농민들의 노동의욕과 창의력이 제대로 발휘되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해마다 주요한 농사철마다 조선에서는 학생들과 노동자, 군인들이 농사일에 동원된다는 뉴스가 종종 들린다. 정부에서는 해마다 식량생산 얼마라는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하여 인민들을 동원시킨다. 그러고도 식량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을 못보고 있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 베트남에서 이미 실패를 인정한 집단농장제를 해체하지 못하는 것이 조선 식량난의 근본원인이라 생각된다. 결코 비료가 모자라거나 생산설비가 따라 못가는 문제만이 아니다. 과감한 발상전환에 의한 농업체제의 개혁을 조선에 진심으로 바라는바이다

(2009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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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8 ]

8   작성자 : 상념
날자:2009-12-28 07:56:08
오늘 뉴욕타임즈를 읽으니 큰 기사로 한국기업연합이 프랑스기업연합, 미국-일본기업연합을 물리치고 U.A.E.에서 400억불짜리 원자력발전소 건설계약을 따낸게 보도되었다. 또 수많은 외신에서도 이 계약을 주요기사로 다루고있다. 이 계약이 올해 에너지 분야에서는 세계최대의 계약이라고 한다. 주목을 끈 것은 한국의 경쟁상대였다. 미국-일본연합, 프랑스연합 그야말로 최고의 덩치들이다. 일본 언론에서는 한국기업연합의 기술과 경제성의 승리라는 기사를 쓴 것을 읽었다.. 상당히 의미가 있는 사건이다. 문뜩 UAE를 방문했을 때 기억이 떠올랐다. 거리의 많은 한국기업 광고판들과 부유한 산유국으로 오만하다는 UAE 사람들이 한국인들에게는 친절하고 호감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곳의 한국인들은 다들 고급아파트에 살고 고급차들을 몰고있었다. 그런데 UAE 공항에 어쩌다 건설노동일로 파견된 김광림님이 얘기하는 보릿고개를 떠올리게하는 다른 한쪽의 우리동포들이 보이기도 하는데 목격한 사람의 얘기로는 같은 동포임이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로 행색이 남루하여 가슴이 몹시 아프다고한다. 노동생산성뿐 아니라 기업과 인간생산성에 승리하여 미국-일본연합, 프랑스연합을 물리친 한쪽 동포의 모습과 전혀 다른 반대의 입장에 있는 UAE공항에서 보여주는 다른 한쪽 동포의 가슴 아픈 모습은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7   작성자 : 대평원
날자:2009-12-27 17:54:57
나치스 독일군이 쏘련을 침략했을 떄 우크라이나 평원에서 끝없는 평지를 보고 무한(無限)의 의미를 느꼈다고한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평원을 갖고도 제 국민을 제대로 못 먹여 살린 게 쏘련이었다. 오래전 쏘련에서 이민 온 유대인을 미국에서 만났는데 쏘련에서 먹고살기가 힘들었다고 하기에 그러면 어떻게 쏘련 사람들 중에 뚱뚱한 사람이 그렇게 많냐고 물었더니 깔깔대고 웃으며 그건 먹을 게 없어서 감자만 먹어서 그렇다고 얘기해서 함께 웃은 적이 있다. 미국에서는 텍사스 목화밭을 지나면서 그런 무한을 느껴 보았다. 잘 정돈된 전혀 굴곡이 없는 가도가도 사방이 일직선의 끝없는 텍사스평원을 보고 엄청나다는 느낌을 가졌었다. 그런데 이 목화밭은 쏘련의 평원과는 다른 부를 가져다 주는 평원이었다. 미국은 국내 수요를 채우고도 세계 최대 면화 수출국으로 작년에 49억불 어치를 수출해 전세계 수출 물동량 120억불의 40%를 차지하고있다. 똑같은 땅덩이를 가지고 서로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제도의 차이가 얼마나 무서운가?
6   작성자 : 발상전환
날자:2009-12-27 11:40:14
김광림님이 쓴 "과감한 발상전환"이란 말 참 중요한 얘기다. 기본적으로 절대적 농경면적이 부족한 나라는 주곡(쌀,밀,옥수수,콩 등)의 생산에서는 농경면적이 넓은 나라와는 경쟁이 않되고 이를 통해 국가의 부를 이룰 수없다. 결국은 한국,일본,독일처럼 국가산업화로 돈을 벌어 국부를 이루고 식량을 수입할 수가 있다. 다른 하나는 넓은 땅이 필요없는 특수작물 재배에 주력하므로 경쟁력을 갖고 수출로 돈을 벌어들이는 것이다. 국토면적이 한국의 절반이 안되는 네델란드가 좋은 예이다. 네델란드는 꽃,토마토,고추,오이 등 특수작물 생산에 주력해 연간 농산물 수출액이 550억불로 미국, 프랑스에 이어 세계 3위이다. 네델란드 1650만 인구의 4%가 농업 종사자이나 꽃은 전세계에 거래되는 수출총액 2/3, 토마토는1/4, 고추는 1/3, 오이는 1/3 을 차지하는 놀라운 점유율을 갖고있다.
5   작성자 : 鄭仁甲
날자:2009-12-25 17:38:19
위 댓글의 첫줄이 리기영이 쓴 장편서살 '땅'을 읽은 적이..인데 코멘트하니 '땅'이란 단어가 빠져서 이렇게 보충한다..
4   작성자 : 鄭仁甲
날자:2009-12-25 17:35:07
필자는 어릴 때 조선의 저명한 작가, 조선작가동맹위워장 리기영이 쓴 장편소설 을 읽은적이 있다. 박곰손이라는 주인공이 강변의 돌을 3년간 주어내 일군 땅...으로부터 소설이 시작된다. 1945년전 북조선의 인구가 천만 정도이다. 그런데 농민들은 땅이 엄청나게 부족하였다. 지금 조선의 인구는 2400만명이고 많은 땅에 길 닦고, 공장짓고, 집짓고...말하자면 농민은 배로 불었고 땅은 곱으로 줄었다. 그런데 농촌의 땅에는 기음을 미처 매지 못해 풀이 무성하다. 그러므로 도시의 간부, 학생, 근로자, 군인, 심지어 가정주부들이 해마다 자주 농촌에 지원로동을 나가야 한다.이것만으로도 조선이 왜 굶주리는가를 알 수 있다. 농민들이 힘을 내여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집체 영농법이 15개 사회주의 국가에서 다 실패하였는데 유독 조선에서만 성공할 수 있으랴!
3   작성자 : 호도농사
날자:2009-12-25 16:35:42
캘리포니아 중앙의 남북으로 640km, 면적이 11만 평방 km에 달하는 분지는 미국의 주요농사지대로 각종 견과류(호도,알몬드,페스타치오 등), 쌀, 포도,면화,각종 과일, 채소들의 산지이다. 특히 견과류의 경우는 미국 수요의 대부분을 담당한다. 호도의 경우는 농사 면적이 800 평방 km로 미국 수요의 95%를 공급한다. 옛날에는 호도 수확을 할 때 여러 사람이 한 나무에 달라붙어 대나무를 휘둘러 호도를 나무에서 떨어뜨리면 사람들이 떨어진 호도를 줒었다. 그런데 요즘은 수확할 떄 넓은 호도밭을 딱 2대의 기계가 담당한다. 첫번째 기계가 나무를 붙잡고 지진이 날 듯이 흔들어대면 나무의 호도가 다 떨어진다. 그러면 두번째 기계가 와서 떨어진 호도들을 다 흡입해 들인다. 이런식으로 바퀴달린 기계 2대가 이동해 가며 넓은 호도나무밭 수확을 끝낸다.
2   작성자 : 농업생산성
날자:2009-12-25 15:56:02
농민이 땅의 주인이 될 때 어느 정도까지 생산성이 오를 수있을까? 거기다 기계화까지 이루어지면 엄청난 생산성의 제고가 이루어진다. 인구 3억의 세계 최대 농산물 수출국인 미국에 농사전문인구가 현재 96만명이다. 전체인구의 0.32%만이 광대한 농토를 다루는 전문농사꾼인 것이다. 미국의 많은 농부들과 얘기를 해볼 기회가 있었다. 한 가족(부부)이 최소 1000에이커(4 평방 km, 110만평)는 농사를 지어야 경비를 제하고 생활을 할 수있다고 한다. 어떤 농부는 부부가 3000에이커를 농사를 짓는 경우도 있다. 그들 얘기가 부지런만 하면 된단다. 물론 기계의 도움을 받지만 농부의 농업 생산성이 이만큼까지 오르는게 놀랍다.
1   작성자 : 대간
날자:2009-12-25 06:22:55
좋은 글이다. 대도리와 대변천을 알기쉽게 풀어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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