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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이의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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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귀성길에 떠올려보는 이야기 하나 댓글:  조회:3806  추천:2  2013-01-22
    음력설을 계기로 중국 경내에서 인구 대류동이 시작됩니다.  올해는 음력설 귀성객들이 일찍이 귀성길에 올라 인구 대류동이 지난해에 비해 일찍 시작되었습니다.  부모형제에 대한 그리움과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며 객지에서 한해를 보낸 사람들에게는 그리웠던 부모형제, 친지들을 찾아 고향으로 가는 길은 사뭇 즐겁고 마음 설레게 하는 걸음입니다.  태여나서 자란 고향, 고향은 어디까지나 잊혀지지 않는 파란 동심의 아름다운 추억과 성스런 부모님의 사랑이 살아 숨쉬는 곳입니다. 하기에 고향은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귀성길에 오르는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나 선물할가 합니다. 제가 오래전에 취재 차로 한 시골에 갔다가 들은 이야기인데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고 가끔 떠 올려보게 되는 거미에 대한 이야깁니다.  한 시골집에 만삭이 된 색시와 살아가는 한 농군이 있었는데 하루는 거미가 초가 지붕 밑에 거미줄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농군의 아내가 거미줄을 거둬내려고 하자 마루에 앉아 입 담배를 썰던 농군이 그 거미가 새끼 가진 어미거미라고 하면서 그냥 놔두라고 말렸습니다.  하루는 큰바람이 불어 거미줄이 다 날려갔습니다. 거미마저 날려갔다고 농군의 아내가 근심하니 농군이 말했습니다.  새끼 가진 거미는 쉽게 자리를 뜨지 않는다고 하면서 해가 뜨면 어디에서 나와 다시 거미줄을 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어디에 숨었는지 거미가 다시 나와 거미줄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만삭이 된 농군의 아내는 모기나 파리를 잡아서는 거미줄에 걸어주었습니다. 그도 인젠 새끼 가진 거미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하루 농군의 아내는 지붕에서 내려온 뱀 한 마리가 거미를 노리고 혀를 날름대는 것을 보았습니다. 뱀이 거미를 삼킬가바 농군의 아내는 소리 소리를 질러 뱀을 쫓았습니다. 그 날 밤 농군의 아내가 남편에게 뱀이 거미를 노리던 이야기를 해주니 농군은 새끼 가진 놈은 쉽게 당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며칠 후 농군의 아내는 뱀이 거미를 삼키는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뱀이 거미를 삼켰다고 하니 농군이 벼락같이 지붕에 뛰어 올라가 지붕 뒤로 넘어가는 뱀을 잡아 껍질을 벗기고 밸을 훑어 냈습니다. 뱀이 삼킨 새끼를 밴 어미거미를 살리려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뱀 배속에서 나온 것은 거미가 아니고 거미줄로 돌돌 말아놓은 담배진이었습니다. 거미는 뱀이 자기를 노리고 있자 농군이 담배를 썰면서 담배 써는 칼에서 긁어낸 담배진을 모아 가지고 거미줄로 얽어서 거미모양을 만들어 거미줄에 매달았던 것입니다. 그것을 뱀이 거민가 하고 삼켰던 것입니다. 미물이지만 새끼 가진 거미의 영특함에 농군과 그의 아내는 혀를 내둘렀습니다.  새끼를 깐 어머 거미는 새끼거미들의 먹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새끼거미들이 달려들어 살을 뜯어먹어도 어미거미는 미동도 하지 않고 달갑게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새끼거미들에게 살을 다 뜯긴 어미거미는 빈 깝대기만 남았습니다. 찢어진 거미줄에 걸려 바람에 흔들리는 어미거미의 빈 깝대기를 보면서 농군과 그의 아내는 감개에 젖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모신세도 저 어미거미와 다를 게 없어]  어미거미는 영특하고 이악스런 미물이지만 그 최후만은 아주 처절하고 장렬했습니다.  지금도 저는 그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거미줄에 데롱데롱 달린 빈 깝대기만 남은 어미거미를 그려봅니다.  부모님들에게 효도하러 귀성길에 오른 분들은 가끔씩은 오늘 제가 한 거미이야기를 떠올려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올해의 귀성길이 여전히 즐거운 추억으로 남을 귀성길이 되시길 바랍니다.  
23    라스베가스(제3편) 댓글:  조회:2856  추천:0  2013-01-22
   《카지노 공부》 《라스베가스 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카지노입니다. 오늘 우리가 투숙하는 호텔 역시 카지노 호텔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카지노 공부》는 카지노 이름 기원부터 시작되었다. 카지노 이름의 기원을 보면 《작은 집》이라는 의미의 이탈리아어 카자(casa)가 어원이고 르네상스 시대 귀족들이 소유하였던 사교, 오락용(댄스, 당구, 도박 등)의 별관을 뜻하는 말이다. 역사적으로는 왕국의 재원을 충당하기 위해 18∼19세기에 유럽 각지에서 개설되기 시작하였다가 후에 와서는 악덕의 온상이라고 금지되었다. 미국에서도 서부 개척 이래 도박이 활발했으나 카지노라고 하게 될 만큼 시설을 선보인 것은 19세기 중엽부터 남북전쟁 때까지 미시시피강에 200여 척의 호화판 도박선이 뜰 때부터란다. 19세기 말에는 뉴올리언스에서 과세 목적으로 공식개설이 허용되었는데 라스베가스에서 카지노 도박이 허용된 해는 1931년이다. 1930년에 시작해 1935년에 완공된 후버댐에 동원된 노동자들에게 유흥과 오락을 제공해 주기 위해 정부가 카지노 도박을 허용했다는 일설이 있다.  《라스베가스에 가면 누구나 바보 되기 십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라스베가스에 가면 세 가지 유형의 바보가 되는데 첫째 바보는 라스베가스에 와서 카지노 유혹에 돈을 따보겠다고 덤비는 사람이고 둘째 바보는 잃은 돈 찾겠다고 계속 도박하다가 있는 돈 다 터는 사람입니다. 그럼 셋째 바보는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가이드가 또 알아맞히기 문제를 낸다. 역시 와인 한 병을 경품으로 내걸고.   《다신 도박 안 하겠다고 돌아섰다가 다시 도박판에 끼는 사람.》  《역시 둘째 바보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그럼 돈 날리고 패가망신하는 사람.》  《그 역시 둘째 바보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도박 중독자!》  《첫째 바보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도박 중독자와 도박으로 가산 탕진하는 사람들이 속해 있는 첫째 바보와 둘째 바보 외에 또 다른 바보가 어떤 사람일 가? 가이드 정답이 아주 사람 웃긴다.  《라스베가스에 와서 카지노를 하지도 않고 그냥 가는 사람이 셋째 바보입니다.》  모두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가이드가 정색해서 말했다.   《라스베가스에 눈만 돌리면 시야에 들어오는 게 카지노입니다. 라스베가스의 색다른 풍경이라고 봐야지요. 공항까지도 슬롯머신이 있는 게 라스베가스입니다. 일단 라스베가스에 오셨으니 놀음삼아 카지노 한번 해보십시오. 라스베가스만 남길 수 있는 추억으로 될 겁니다. 그러나 명심하실 것은 도박과 놀이를 분명히 하십시오. 푼돈 가지고 잠깐 즐기면서 추억거리를 만든다고 생각하시고 카지노에 임해야 하지 절대 돈 딴다고 덤벼서는 안 됩니다. 라스베가스에 와서 돈 날린 원인은 도박과 놀이를 구분 못했기 때문입니다.》   가이드는 라스베가스에 와서 왕창 돈을 날린 실례를 몇 가지 들면서 대박을 터뜨린 실례도 곁들였다. 지금까지 라스베가스에서 가장 큰 대박을 터뜨린 사람은 두 번이나 대박을 터뜨린 백인 할아버지라고 한다. 이 백인 할아버지는 1989년 11월 22일 머라지 호텔 오픈 시 460 만 달러 대박을 터뜨렸고 2005년 9월 15일 또 2,110 만 달러의 대박을 터뜨렸다. 이 할아버지가 얼마나 검소한지 엄청난 대박을 터뜨린 후 호텔 고급식당에서 주문한 음식이 가장 싼 핫 도그였는데 그것마저도 반쯤 먹고 나머지는 나중에 집에 가서 먹으려고 싸들고 갔다고 일화까지 남겼다. 지금 90세를 넘은 나이 이지만 아직도 혼자서 운전을 하고 다닐 정도로 건강한 편인데 대박을 터뜨린 후부터 해마다 크리스마스 때면 이혼한 부인한테 꼭꼭 만 불씩 보내준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모두들 《오!》 하고 가벼운 탄성을 뽑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그 할아버지처럼 대박 터뜨릴 분  여기 있을지도 모르니 제가 기대해 보겠습니다. 대박 터뜨리면 저한테 팁 주시는 걸 잊지 마십시오.》  그러면서 가이드는 한국인이 대박을 터뜨린 실례를 더 들었다. 대박의 행운을 안은 사람은 성이 박 씨라는 한국인, 운이 좋았던지 블랙잭으로 4만6천8백 불을 땄단다. 꿈이냐 생시냐 하고 있을 때 멋지게 생긴 매니저 한 사람이 다가와 정중하게 인사를 하더니 《선생님, 제가 차  한잔 대접하겠습니다. 같이 가주시지요》 하며 호의를 베풀더라는 것이다. 호의를 무시할 수 없어 매니저를 따라간 방은 마치 궁전처럼 꾸며져 있었는데 매니저가 버튼을 누르니 몸매 늘씬한 미모의 아가씨 둘이 들어오더란다. 곧이어 멋진 두 아가씨가 술시중을 들었고 매니저는 호텔에서 가장 좋은 귀빈용 방을 준비했으니 쉬어가라고 권하면서 《미스터 박, 기술이 대단한 것 같은데 이번엔 액면이 좀 큰 것으로 해서 한 몫을 잡아 보는 것이 어때요?》 하니 박씨는 귀빈 예우를 받다보니 거절하지 못했는데 결국 블랙잭으로 번 돈을 몽땅 날려 보냈다는 얘기다.   《카지노 공부》가 끝날 무렵, 앞좌석에 앉은 할머니 한 분이 어떻게 하면 카지노에서 돈을 따는 가고 물었다.  《돈 따는 방법이 딱 하나 밖에 없습니다. 카지노를 안 하는 겁니다. 》  가이드 말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22    사막의 명주 라스베가스(제2편) 댓글:  조회:2939  추천:0  2013-01-14
                     라스베가스와 마피아    가이드가 먼저 마피아에 대한 정의부터 앞세운다. 그걸 글로 적으면 이러하다.  《마피아(Mafia)는 전 세계적으로 최대 범죄 조직으로 널리 알려진 범죄 단체이다. 원래는 이탈리아 마피아 조직만을 뜻하나 미국 마피아, 러시아 마피아 등도 유명하다. 마피아라는 용어가 국제적으로 사용된 것은 1875년 이후인데 그 기원에 대해서는 명확한 바는 없으나 수세기 동안 시칠리아가 무법 상태에 있을 때 강도로부터 토지를 보호하기 위해 지주들이 만든 소규모 사병 조직인 마피에(MAFIE)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고 최초의 마피아 단원은 1282년 시칠리아 만종 사건이라고 불리는 반란에서 프랑스의 앙주가문의 지배에 대항하여 싸웠던 시칠리아 기사들이었다는 설도 있다.》  다음은 아메리카 마피아 시조에 대한 소개다.  《아메리칸 마피오 두목은 알 카포네. (Alphonse Gabriel Capone) 1920년대와 1930년대 미국에서 발효된 금주법 시대에 시카고를 주 무대로 활동했던 갱스터이다. 그가 이끌었던 시카코 아웃핏(Chicago Outfit)은 미국서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대 조직으로 성장하였다. 그는 으로 군림해 1927년엔 한 해 총수입이 1억 달러인 세계 최고의 시민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1932년 체포돼 라는 죄명으로 7년간 옥살이를 치렀다. 영원할 것 같았던 밤의 권력도 투옥과 함께 끝났다. 1939년 출소 당시 이미 폐인이었던 그는 1947년 1월25일 초라하게 숨졌다. 사인은 매독과 폐렴합병증이다.》 마피아가 라스베가스와도 크게 관련이 있다는 가이드 말에 귀가 솔깃해진다. 가이드의 소개에 따르면 라스베가스를 움직인 사람으로 이름을 남긴 사람들 중 벤 자민 시겔이 바로 라스베가스에 진출한 마피아의 대표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악명이 자자했던 그는 라스베가스로 진출해 1946년 12월 26일, 현대식 시설을 갖춘 첫 카지노 호텔인 플라밍고 호텔을 오픈한 그 이듬해 6월 집에서 5발의 총탄을 맞고 생을 마감한다. 그의 일생은 워렌 비티와 아네트 베닝 주연으로 1991년 출시된 영화 《벅시(Bugsy)》에서 재현된다. 《벅시》는 마피아시절에 시겔이 겁이 없고 잔인한 살인을 잘 한다고 얻은 별명인데 시겔이 이 별명을 아주 싫어해서 그의 면전에서는 아무도 벅시라고 부르지 못했다고 한다. 영화 《벅시》 외에도 라스베가스를 주 무대로 한 영화가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비롯해 많고도 많다. 그 중 마피아를 다룬 영화도 여러 편이 된다. 필자가 본 영화는 라스베가스의 카지노와 마피아와의 관계를 보여준 《카지노》이다. 이 영화는 80년대 초반전까지 마약, 섹스, 도박의 이미지를 가졌던 라스베가스가 80년대 중반부터 가족 중심의 휴양지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벅시는 라스베가스로 진출할 때 황량한 사막을 둘러보면서 고 했습니다. 그의 말처럼 지금 라스베가스는 세계 최고의 카지노, 가족 오락 타운으로 끊임없는 성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예전의 모습은 아니지만 플라밍고 호텔에 가면 그의 동상과 업적을 기리는 기념탑이 있습니다. 한마디 더 첨부한다면 라스베가스에 진출한 마피아 대부들 거개 모두가 시겔처럼 비명에 생을 마감하지 않았으면 라스베가스에서 쫓겨나 은둔하는 신세가 되었다는 얘깁니다.》    지금의 풀라밍고 호텔 야경(필자가 투숙했던 호텔) 여기서 마피아 관련 《공부》는 끝났는데 라스베가스까지 아직 반시간 남짓한 시간이 남아 가이드는 《카지노 공부》 이어갔다.                                                            
21    사막의 명주-라스베가스(제1편) 댓글:  조회:3997  추천:0  2013-01-11
 라스베가스를 어떻게 쓸 가? 많이 고민했다. 조선의 금강산 기행문을 쓸 때도 그러했다. 너무나 알려진 명소여서 그런다. 라스베가스를 하루에 평균 10여만 명, 일 년에 4천여만 명이 다녀가고 해마다 평균 3000여 차례 대규모 컨벤션이 열린다고 하니 글 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던 차 아버님 창작생애 기념 포럼에 아들의 시각, 그것도 부전자전으로 아들도 역시 작가이기에 아들이면서 작가인 시각으로 아버님 창작생애에 관한 론문 한 편 써달라는 청탁을 받는 순간 문득 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라스베가스를 론문 격식을 본 따서 써보면 어떨 가? 한번 시도해볼만한 아이디어인 것 같다. 지금까지 소설, 연극, 시나리오, 에세이, 칼럼, 가사, 지어 무용극 대본까지 써오면서 논문은 한 편도 써보지 못했다. 그래서 중국 명문대 교수인 친구에게 론문이란 무엇이냐고 물으니 그 친구가 당신이 쓰는 소설이 뭐냐고 되묻는다. 소설이나, 연극이나, 에세이나 모든 글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글로 적은 것이라고 간단하게 대답했더니 그 친구도 간단하게 하는 말이 론문은 남의 글을 참고로 자기 글로 만든 것이라고 했다. 이 정의가 맞는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고. 많이 보지는 않았지만 몇 편 본 론문 중 한 격식을 보면 《들어가면서》로 시작돼 나중에 《나오면서》로 마감을 했다. 그런 식으로 쓰면 재미있을 것 같아 본 따본다.                                                      들어가면서     라스베가스로 들어가면서 먼저 라스베가스 력사공부를 해야 한다. 라스베가스 력사공부는 달리는 관광버스 안에서 가이드가 시킨다. 알아맞히기 식으로 경품까지 내걸고 한다. (미리 안내 말씀 드릴 것은 필자 내외가 그랜드캐년처럼 두 번이나 라스베가스를 찾았다는 점, 그러나 카지노 때문에 두 번 찾은 것이 아님을 미리 알림.) 처음이나 두 번째나 가이드가 시키는 라스베가스 략사공부는 대동소이했다. 라스베가스 력사와 관련해 들려준 가이드의 소개를 먼저 간추린다.                                                라스베가스의 연혁     라스베가스에 대한 연혁이 대략 이렇게 나온다. 라스베가스는 네바다 주의 남동부 사막에 있는 관광과 도박의 도시로 네바다 주에서 제일 크다. 1855년경에 몰몬교 신도가 거주하기 시작했으나, 20세기에 들어와 철도가 건설 되면서 현대적인 도시로 개발되었다. 초기에는 광업과 축산업을 하는 마을이었으나 1936년 당시 세계 최대의 후버댐이 완성되고 도박장이 늘어나면서 관광, 환락지로서 각광을 받게 되어 네바다 주의 최대 재원이 되었다. 후버댐으로부터 막대한 전력과 물을 공급받아 밤낮으로 관광객으로 성황을 이루는 도시가 되어 24시간 잠들지 않는 《불야성》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대도시가 되었다.   그런데 라스베가스 연혁에서 한 가지 중요한 대목이 빠졌다는 것을 필자가 발견했다. 필자의 고증에 의하면 라스베가스 초기 정착 자들 중 몰몬교 신도 외에 중국인들도 많았다. 연도별로 본 라스베가스 거주 역사를 보면 1855년부터 1857년까지 몰몬교 신도 30명이 원주민 인디언들에게 농사짓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선교하기 위해 라스베가스에 거주지를 마련하고 잠시 정착했으나 인디언의 반대로 철수한다. 그 후 남북 전쟁이 끝나고 대륙횡단 철도가 완공되면서 철도 건설에 동원되었던 중국인들이 1869년부터 대거 라스베가스에 거주하기 시작해 차이나타운을 세우고 지금까지 끈질기게 세세대대로 라스베가스를 지키고 있다. 연대별로 라스베가스 략사를 고증해 본 결과 필자는 중국인도 라스베가스의 어엿한 주인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필자가 가이드에게 필자의 고증을 피력했더니 가이드도 동감을 표했다.  《맞습니다. 중국인도 라스베가스 개척자입니다. 지금 중국인들이 라스베가스를 가장 많이 찾습니다.》  하긴 필자도 미국에 오기 전 중국인들이 미국에 오면 어김없이 찾는 곳이 라스베가스라는 말을 들었었다. 공무 차 미국에 온 방문단도 라스베가스를 꼭 방문 일정에 넣는다. 또 많은 부정부패를 일삼는 자들이 라스베가스에서 공금을 탕진한다는 소문도 무성하다.   《예전엔 석유가 많이 나는 나라의 부자들이 라스베가스에 와서 돈을 물처럼 썼는데 지금은 중국인들이 돈을 눈 뿌리듯 쓰고 있습니다. 중국인들이 돈 많습니다.》  가이드가 알아맞히기 문제 하나 냈다. 내건 경품은 와인 한 병이었다.   《라스베가스는 어떤 도시입니까?》  너무 쉬운 문제여서인지 아니면 경품으로 내건 와인 한 병 가지고 싶어서인지 너도나도 손을 들었다. 앞좌석 경로석에 앉은 바깥노인 한 분이 먼저 지명됐다.   《도박의 도시!》  가이드는 태도 표시 없이 연속 여러 명을 지명했다.  《밤의 도시!》  《사막의 진주!》   《마피아의 도시!》  《범죄의 도시!》  《환락의 도시!》  《축복받은 도시!》  이렇게 저마다 나름대로 라스베가스에 대해 정의를 내렸지만 가이드는 그냥 고개를 살래살래 젓기만 하다가 나중에 입을 열었다.  《기본상 맞는 대답이지만 정답은 아닙니다. 정답은 이제 여러분들이 라스베가스를 관광하신 후 다시 내려 주시길 바랍니다. 한 가지 해석드릴 것은 라스베가스는 한 때 마피아의 도시였고 지금도 마피아의 힘이 실리고 있는 도시지만 범죄의 도시는 아닙니다.》  가이드의 해석은 아주 간단했다. 라스베가스를 도박의 도시로 생각할지언정 범죄의 도시로 생각해선 곤란하다는 얘기다. 라스베가스 범죄율은 로스앤젤레스나 근처의 로스앤젤레스나 기타 도시에 비해 낮다고 한다. 가이드 말로는 소매치기, 빈집털이, 불량배 같은 잡범들이 설치지 못하는 까닭은 마피아가 알아서 다 정리하기 때문이란다.  《사소한 범죄로 관광객이 줄어들면 장사가 안 되니까 마피아가 경찰보다 도시 관리를 더 철저히 잘 한답니다. 소매치기 같은 잡범들이 경찰한테 걸리면 그냥 구치소로 가지만 마피아에 걸리면 그냥 아예 갑니다. 로스앤젤레스 주변이 죄다 사막이니 그냥 버려지는 거죠.》  우스개로 하는 말 같지만 듣기만 해도 섬뜩한 느낌이 온다. 가이드는 마피아 공부까지 시킨다.     
20    송년소감 댓글:  조회:3441  추천:0  2013-01-04
   [20세기 세계 백가지 대 사건 회고]라는 책을 보면 이 책에는 20세기에 주목할만한 세계 백가지 대 사건을 수록했는데 그 중 전쟁과 그 전쟁과 관련된 력사적인 회의, 그리고 랭전과 관련된 사건 등이 절대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제일 첫 자리를 차지한 것이 8국 련합군이 북경을 함락한 사건이었고 마지막 자리를 차지한것이 꼬소보 전쟁이였습니다. 그야말로 20세기는 전쟁으로 시작되어 전쟁으로 마감하는 세기였습니다.  세계 전쟁사에 남을 세계대전과 지역전쟁, 국가 간의 전쟁 만해도 백 개 대 사건 중 거의 30개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니까 20세기에 세계가 주목할 전쟁만해도 30번이나 일어났다는 얘깁니다. 굵직굵직한 전쟁만 해도 일러전쟁, 중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조선전쟁, 윁남 항미전쟁, 중동전쟁, 만 전쟁 등을 례들 수 있습니다. 세계 대전만 해도 두 번이나 일어난 20세기 력사를 잔혹한 전쟁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것입니다.  전쟁은 죽음의 향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한 전쟁은 문명에 대한 최대 악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전쟁과 평화에 대하여 기원전 5백년에 리디아의 최후의 왕인 크로에수스는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평화가 전쟁보다 낫다. 그것은 평화시에는 아들이 아버지의 림종을 지켜보지만 전쟁시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매장하기 때문이다.]  크로에수스의 이 비유를 빌어 평화의 소중함을 다시 되새겨봄도 바람직한 일이 아닐가 싶습니다.  유네스코 헌장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전쟁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평화의 방어수단이 건설되어야 한다는 것이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  말하자면 전쟁도 인간의 마음속에서 시작되는것만큼 전쟁을 이겨내고 찾아오려는 평화도 인간의 마음속에 먼저 깃들어야 한다는 뜻으로 되겠습니다. 프랑스의 시인 발레리는 [평화는 막연한 탐욕에 대항하는 덕성적이고 무언적이며 지속적인 잠재능력의 승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평화를 지향하는 세계의 량심들이 해마다 하는 기원도 역시 평화일 것입니다. 강권정치와 패권주의, 민족차별, 랭전적인 사고 등에 인한 갈등과 분쟁으로 일어나는 전쟁이 없는 평화롭고 안정된 삶의 터전에 경제부흥과 즐거운 생활이 펼쳐지기를 기원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유태인들에게는 조상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탈무드]란 책이 있습니다. 유태인들의 종교, 법률, 철학, 도덕에 관한 생활의 지침서인 [탈무드]란 이 책은 1200년 전에 편찬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마무리가 되지 않고 대대손손 계속 써 내려오는 있는 책입니다. 왜냐하면 유태인들은 세계가 완성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세계의 끊임없는 진보와 발전을 념두에 두고 시대에 따라 지침이 될만한 새로운 견해를 대를 이어 적어 넣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태인들이 시대에 따라 새로운 내용을 [탈무드]란 책에 적어 넣듯이 우리들이 해마다 적어 넣어야 할 것이라면 역시 사회진보와 발전을 위한 사건이어야 할게 아니겠습니까.  해마다 세계 대 사건에 수록될 것이 전쟁이나 랭전으로 인한 사건이라면 우리는 후세에 치욕만 남길 뿐입니다. 후세에 남을 책에 수록될 세계 대 사건들이 가급적이면 인류문명의 끊임없는 진보와 과학의 발전, 대자연과의 융합, 삶의 향상을 위한 획기적인 사건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19    새해도 마냥 거침없는 한 해가 되길 기원합니다! 댓글:  조회:3114  추천:0  2012-12-31
18    선물문화 댓글:  조회:3729  추천:0  2012-12-28
   연말이 되면 사람들은 성의가 담긴 선물을 사들고 친척이나 가까운 친구, 스승이나 선배들을 찾아가 인사드리고 덕담을 나눕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는 전화로 문안하거나 연하장이거나 달력을 보내기도 합니다. 자그마한 선물로 정을 주고받는 연말의 선물문화로 볼 수 있습니다.  선물에 대한 서양인들의 관념은 《선물은 아주 간단하게 그러나 정성이 드러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보통 서양인들은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끼리 선물을 주고받는 정도이고 친구에게 보내는 선물은 아주 값이 싸지만 그러나 정성이 담긴 것으로 선택합니다.  일전에 어느 한 신문에서 담배 한 보루에  몇 천 원을 고가 하는 초특급 담배가 나왔는데 그 비싼 담배가 잘 팔린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몇 천 원씩 하는 담배를 사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선물용으로 사간다고 합니다. 신세진 사람에게나 상사에게 금품을 주면 뇌물로 취급되지만 담배는 그래도 받는 사람이 부담이 없이 선물로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공직에 있는 사람이 값이 50달러에 가까운 선물을 받았다고 하면 그것은 선물이 아니라 뇌물로 취급하는 서양인들의 시각에는 몇 천 원이나 되는 담배를 선물로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회통념으로 상식적인 선물에 속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부정부패사건으로 피고석에 나선 공직자들을 심심찮게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습니다. 피고석에 나선 사람들의 죄를 쭉 일별 해보면 공통점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직권남용과 뇌물 수수입니다. 뇌물로 받은 금품에 대해서 그들은 그 금품이 값이 얼마이던 간에 죄다 선물로 주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았다고 변명하고 있습니다.  선물이란 값싼 것이지만 정성이 담긴 것을 그 어떤 이해 관계에서보다도 그저 인사로 정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내가 지방에 있을 때 알고 지내던 한 공직자가 하루는 생일날에 수하 직원들을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대부분 직원들이 생일축하 선물로 생화를 들고 왔는데 한 직원만은 생화에 값비싼 금반지를 선물로 가지고 왔습니다. 공직자는 그 직원을 조용히 밖으로 불러내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화는 고맙게 받을 선물이지만 이 금반지는 마음을 검게 만드는 뇌물이니 도로 가져가게.》  그 직원이 자기의 자그마한 성의라고 굳이 받아달라고 하자 그 공직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이걸 받는 순간에 우리 둘 사이엔 우정이 사라지고 적나라한 이해관계만 남게 되네. 난 그래도 우정만은 잃고 싶지 않다네. 제발 내가 정직한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도와주게.》  오히려 뇌물을 주는 사람에게 정직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해달라고 사정사정하는 공직자의 말은 참으로 뜻깊은 말입니다. 뇌물을 받는 사람이 있으니 주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겠지만 반대로 받는 사람이 없으면 주는 사람이 자연 없어질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경우에는 뇌물을 받는 사람에 앞서 주려고 하는 사람이 붙는 불에 키질하듯 뇌물 풍조의 만연에 부채질을 해주는 역할을 놀게됩니다.  정직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또 하나 있습니다. 오래된 이야긴데 한 농군이 장터에서 소 한 마리를 샀습니다. 소를 집에 끌고 와 보니 소 방울 속에 보석이 들어있었습니다. 동네사람들은 그 농군이 소 값보다 더 비싼 보석을 얻게 되어 벼락부자가 되었다고 행운을 축하해 주었지만 그 농군은 이튿날 소를 판 사람을 찾아가 보석을 돌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소를 판 사람도 소방울안에 보석이 들어 있은 줄 몰랐다면서 그 보석은 자기 것이 아니니 가질 수 없다고 했습니다. 농군도 자기는 소를 샀지 보석을 사지 않았다고 하면서 굳이 보석을 돌려주려고 했습니다. 소를 판 사람도 자기는 소를 팔았지 보석은 팔지 않았다고 하면서 보석을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소 판 사람과 소를 산 사람은 보석주인을 찾아 돌려주기로 하고 보석을 은행에 보관시켰습니다. 그리고 나서 두 사람이 나눈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소를 판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오늘 자네 때문에 소도 팔고 또 보석보다 더 소중한 정직함에 대해 배웠네.》  그러자 소를 산 사람이 말했습니다. 《저 역시 오늘 소도 사고 돈주고도 못사는 정직함도 샀습니다. 감사합니다.》  자기 삶을 정직하게 살아가려는 그 마음, 그 삶의 자세는 오늘도 우리들의 귀감으로 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한해가 정직하게 살아가는 한해가 되기를 미리 기원하는 마음입니다.
17    그랜드캐년(제4편) 댓글:  조회:3322  추천:0  2012-12-23
      우리 내외는 2007년 여름 두 번째로 그랜드캐년을 찾았다. 우리 내외가 못 가본 《신의 성지》라는 자이언캐년과 《아름다운 첨답의 향연》으로 이름난 브라이스캐년 3박 4일 관광코스에는 그랜드캐년까지 들어있다. 그랜드캐년 첫 관광을 얼떨떨한 김에 했던 차라 또 한 번 그랜드캐년을 보고 싶은 것이 우리 내외 마음이기도 했다. 첫 번 관광에서 피곤한 김에 졸다나니 모하비 사막을 경과하면서 놓친 경관을 여기서 보충한다.   그랜드캐년으로 가는 길에 중식을 먹느라고 잠깐 들러 가는 사막도시가 있다. 도시명이 바스토우는철도교통의 요충지로서 동서남북의 철도를 연결하는 철도 터미널 같은 곳이다. 화물차 차량(조선에서는 바곤이라고 한다)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이곳은 물류 집산지이기도 하다. 가이드 소개에 따르면 미국 서부와동부를연결하는철도 수송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은 산타페 철도회사 본부가 있는바스토우 도시명은 당시 산타페 철도회사 10대 회장이었던 윌리엄바스토우(William Barstow)씨의이름을 그대로 땄다고 한다. 바스토우 회장은 회사에서 은퇴한 후 간이역에서 열차의 출발, 정차를 알리는 기수 일을 했다. 가이드는 직업 귀천을 가리지 않고 근면하게 일하기를 좋아하는 미국인다운 삶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 바스토우라고 특히 강조하면서 미국의 대륙 횡단 철도 소개했다. 미국의 대륙 횡단 철도가 중국인들과 깊은 관련이 있기에 여기서 잠깐 언급해본다.1982년 7월 1일 링컨 대통령이 태평양 철도령에 사인을 한 직후 미국정부는 새로운 철도건설을 위한 돈과 땅을 확보하여 대륙횡단 철도를 완성하게 된다. 이 때 두 회사가 철도건설의 대리를 맡았다. 서쪽의 새크러멘토를 출발지로 한 센트럴 퍼시픽(Central Pacific) 회사가 철도건설을 시작하고 동쪽에서는 유니언 퍼시픽(Union Pacific) 회사가 오마하 지역에서부터 철도건설을 맡는다. 그러나 서부에서 출발한 센트럴 퍼시픽 회사는 얼마가지 않아 철도건설에서 치명적인 문제 상황에 빠진다. 당시 센트럴 퍼시픽 회사가 확보한 인력은 600명뿐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럭키산맥이 앞을 가로 막았다. 당시 유행된 말로 《가장 적 은 비용으로 가장 불만 없이 가장 위험한 일을 할 인력》이 필수였는데 선택된 것이 중국인이었다. 중국인의 미국 이민 역사는 1830년대 하와이의 사탕수수 재배와 1840년대 캘리포니아의 금광 유혹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일확천금을 꿈 꾼 중국인들 대부분이 철도건설에 동원되었다. 중국인 미국 이민사 관련 내용은 다른 글에서 상세하게 다루기에 이 글에선 약한다. 기재에 따르면 미국 대륙횡단 철도 건설을 위해 서부 쪽에서는 주로 중국인들이, 동부 쪽에서는 아일랜드 이주자들이 동원되었다. 중국인들은 처음에는 몸집이 왜소하다는 이유로 허드렛일만 하던 수준에서 마지막에는 높은 기술이나 위험부담이 많이 요구되는 일을 맡아 처리하는 철도건설의 주역이 된다. 나중에 서부 쪽 인부 중 중국인들이 90%를 차지하게 된다. 사상자도 많이 났다. 럭키산맥을 관통하는 터널을 뚫을 때 혹한이 닥쳐와 숱한 중국인 인부들이 얼어 죽었고 벼랑에서 떨어져 죽었다. 중국인들은 생명을 대가로 눈보라치는 럭키산맥, 기온이 50도를 오르내리는 사막, 소금바다에 남북을 잇는 철도를 부설해 나갔다. 지금 미국인들은 중국인들이 아니었다면 럭키산맥 관통은 물론, 미국 대륙 횡단 철도 건설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만리장성을 축조한 중국인들이 미국 땅에 또 하나의 만리장성을 축조했다》고 중국인들의 기여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중국인들의 기여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  1869년 5월 10일, 마지막으로 유타주의 프로몬토리 지점에서 황금 스파이크(golden spike)를 박는 행사로 미국철도 건설이 막을 내린다. 미국의 남북 전쟁이 남과 북을 하나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면 대륙횡단 철도는 미국의 동과 서를 하나로 연결하는 계기가 되어동부와 서부의 진정한 통합을 가지고 올 수 있었다. 이 위대한 역사의 장거가 많은 문헌으로 기록을 남기고 있지만 남북횡단 철도 개통식에 중국인 단 한 명도 참석하지 못해 당시 사진이나 기사에서 중국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지금도 큰 아쉬움을 남긴다. 그 아쉬움을 안은 우리 내외 마음을 《대자연의 서사시》로 불리는 그랜드캐년이 달래줄 수는 없을 가.    그랜드캐년에 도착해 관광 팀은 두 팀으로 나뉘어졌다. 한 팀은 도보관광, 다른 한 팀은 경비행기로 그랜드캐년을 돌아보는 코스를 택했다. 첫 번 관광에서 경비행기를 이용한 관광이 돈만팔고 별로라는 말을 들은 우리 내외는 도보관광을 택했다. 먼저 아이맥스(IMAX)영화를 보았다. 첫 관광 때에도 보았지만 아이맥스 영화가 주는 충격적인 화면을 다시 보고 싶었다. 영화는  남북 전쟁 영웅 존 웨슬리 파웰이 인솔한 탐험대가 1869년 70일간 콜로라도 강을 따라 진행한 탐험을 재현한 것이다. 아이맥스 영화 자체가 사람의 눈이 인식할 수 있는 범위를 모두 영상으로 채워서 마치 영화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데다가 영화 속에 담긴 장관적인 그랜드캐년 모습과 탐험대가 콜로리다 강 급류를 타고 내려오는 아슬아슬한 표류 장면에 경탄과 함께 손에 땀을 쥘 지경이었다.극장 옆에 당시 탐험에 사용되었던 배가 전시되어 있어 사진에 담았다.   그랜드캐년은 뜨겁고 건조한 여름에도 순식간에 기온이 떨어지고 번개가 치고 폭우가 내리는 변덕을 부린다고 한다. 다행히 우리가 재차 그랜드캐년을 찾은 그날은 쾌청한 날씨여서 마음껏 사진을 찍을 수가 있었다. 그랜드캐년은 햇빛아래 흘러가는 구름의 옅고 짙음에 따라 붉은색, 주황색, 갈색 등 여러 가지 색깔을 연출해 내고 있었다. 한 폭의 수채화를 방불케 했다. 그랜드캐년 밑바닥에는 인디언 보호구역이 있다고 가이드가 소개했다. 당시 스페인 탐험대가 그랜드캐년을 발견했을 때 아파치 인디언의 선조인 아니시지 족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인디언들은 주로 야생동물을 사냥하면서 살아왔으나 지금은 얼마 안 되는 인디언들이 나라로부터 생필품을 공급받으면서 생활하고 있다. 이 땅의 주인으로 산야를 주름잡던 인디언들이 지정된 보호지역에서 나라 구제를 받으며 생활하고 있다니 어쩐지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인디언 관련 소개는 다른 글에서 상세하게 적기로 한다.   그랜드캐년 두 번째 관광 시 찍은 사진과 첫 관광 시 사진을 대조해 보면 얼굴 표정에서나 잡은 포즈에서나 완연 다르다. 첫 관광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우리 내외는 추위에 잔뜩 어깨를 움츠렸고 표정 또한 밝지 못했다. 그 때 피곤한데다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위대한 자연 경관을 보고 얼이 빠진 모양! 두 번째로 그랜드캐년을 찾은 우리 내외의 표정은 아주 밝았고 사진을 찍을 때 취한 자세만 보아도 넉넉한 마음의 여유가 내비쳤다. 웃고 떠들며 찍은 사진만 백여 장이 된다. 미국의 관광 1번지에서 남들 앞에 버젓이 내놓을 《표준 사진》을 뽑으려는 타산도 있었다.   사진을 다 찍고 난 우리 내외는 그랜드캐년이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서 잠깐 휴식을 청했다. 그랜드캐년에서 하나뿐인 전망대는 죄다 돌로 되었는데 인디언 건축 양식으로 지었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항일전쟁 시 일본군이 중국 땅에 축조한 포태와 흡사했다. 전망대 안에는 선사시대부터 이곳에 살았던 인디언 유적과 푸에블로부족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전망대에 설치된 망원경으로 미국 대륙의 광활함을 엿볼 수 있는 세계적인 명소 그랜드캐년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중국의 장강 삼협을 떠올렸다.   중국의 장강 삼협 역시 세계적인 기관이다. 구당협, 무협, 서릉협 세개의협곡으로구성된총길이193㎞에 달하는 장강 삼협은 그랜드캐년에 비해 길이나 너비에서 짝지지만 웅장함과, 험준함, 기묘함과 고요함에 있어서 그랜드캐년보다 다르게 관광객을 매료시킨다. 더욱이는 강 양안에 즐비하게 늘어섰다고 할 정도로 수많은 명승고적과 세계적으로 이름난 산수 화랑으로 불리는 삼협의아름다운경관은 그랜드캐년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경관이다. 3국 시대 촉나라 황제 유비가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했다는 1700여년의 역사를 가진 백제성, 귀족(鬼族)의 왕도로 유교, 불교, 도교의 보고인 귀성(鬼城), 장강 삼협의 축소판인 소삼협, 전국시대 대시인 굴원을 기리는 향계하의 굴원사원, 당나라 유명한 시인 두보가 400여 수 시를 남겼다는 봉절, 삼국지 유명인물 장비를 기리는 장비사원, 너무 많아 이루다 적을 수 없을 정도다. 천혜의 관광 자원을 가지고 있는 중국이나 미국이나 축복받은 나라가 틀림없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우리 일행 중 한국에서 오신 몇 분이 그랜드캐년의 장엄한 경관을 마주하고 손을 합장 한 채 한참이나 눈을 감고 서 있었다. 불교도들이 소원을 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신비롭고 위대한 자연의 품에 안겨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꼭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우리 내외도 그랜드캐년을 굽어보면서 잠깐 묵념에 잠겼다. 아내가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아내도 내가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물어오지 않았다. 소원 발설은 금물이니까. 그랜드캐년에서 빈 소원은 지금도 우리 내외 가슴깊이 소중히 간직되어 있다. 각자의 소원이 성취되는 날 우리 내외는 다시 그랜드캐년을 찾기로 약속했다.  그랜드캐년이여 기다려주오!  
16    그랜드캐년(3편) 댓글:  조회:4316  추천:1  2012-12-20
        《오, 신이여!》  이튿날 아침 조식 후 버스는 한 참 달려 마침내 미국의 관광 1번지에 도착했다. 그랜드캐년 관광은 주로 그랜드캐년 남쪽에 있는 노스림(North Rim)을 이용한다. 이곳엔 호텔, 레스토랑, 병원, 우체국 과 아이맥스 영화관이 있다. 11월이 막가는 겨울 날씨인데다가 고지대여서 몹시 추웠고 바람도 매서웠다. 가이드는 11월이 지나면 그랜드캐년엔 눈이 많이 내려 관광이 중지되는데 관광 중지를 며칠 앞두고 그랜드캐년을 찾은 우리 일행 모두가 행운을 안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랜드캐년의 날씨가 변덕이 많으니 일광이 있을 때 먼저 그랜드캐년을 구경하고 나중에 아이맥스 영화를 구경하기로 했다. 협곡은 보통 산에 올라가서 굽어본다. 사방을 둘러보니 낮은 소나무가 눈 속에 서 있는 평지였다. 산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산도 없는 곳에 협곡이라니? 이런 의문을 달고 가이드 뒤를 따라 전망대에 이르고 보니 헉! 숨이 막혔다. 여성분들은 여성 고유의 감탄사인 《어마나!》를 연발했고. 아내는 너무 아찔해 현기증이 인다고 했다. 무섭다고 했다. 아마 자연의 위대함에 경탄하기에 앞서 자연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온 모양이다.그랜드캐년을 본 첫 느낌은 한마디로 감탄과 경탄 그 자체였다.   평지가 갑자기 사라지고 발밑엔 밑도 끝도 보이지 않는 협곡이 길게 드러누워 있었다. 갑자기 밑도 끝도 알 수 없는 낭떠러지를 만난 격이었다. 결국 우리가 서 있는 곳은 평지가 아니라 산 정상인 셈이다. 내내 해발고가 높은 고지대 사막을 경과했다는 점을 잊었던 것이다. 나는 중국의 운남성 곤명시에서 고지대 설산으로 유명한 옥룡산으로 가던 길에 끝이 내려다보이지 않는 협곡을 보고 경탄한 적이 있다. 그 때 협곡은 좁고도 깊은 협곡이었지만 눈앞에 펼쳐진 협곡은 너무나 깊고 넓어 협곡이라기보다 이 산에서 저 산을 바라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1540년, 스페인에서 파견된 탐험가이면서 정복자였던 프란시스코 코로나도의 부하였던 가시아 로페즈 데 까르데나스(Garcia Lopez de Cardenas)가 25명의 대원들과 함께 인디언들이 큰 강이라고 부르는 곳을 탐험하기 위해 가다가 상상을 초월하는 대자연의 경이로운 경관을 보고 너무 놀란 나머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무릎을 꿇고 《오, 신이여!》를 연발했다고 한다. 그들 중 대장인 까르데나스가그랜드캐년의 웅장한 경관에 경탄하면서 스페인어로 거대하다는 뜻으로 《그란데(Grande)》라고 한 것이 대협곡의 이름으로 되었다고 한다.      그랜드캐년, 말 그대로 대협곡이었다. 태고의 신비인 그랜드캐년은 지구의 역사와 함께 한 곳! 콜로라도 강이 콜로라도 고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곳에 형성된 대협곡의 길이는 길이 447km, 너비 6~30km, 깊이는 1500m로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협곡. 깎아지른 절벽, 다채로운 색상의 단층, 높이 솟은 바위산과 형형색색의 기암괴석, 도도히 흘러가는 콜로라도 강이 어우러져 장엄한 파노라마를 연출하고 있는 그랜드캐년은 1919년 미국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1979년 유네스코 자연유산에 등록되었다고 안내문에 적혀있었다. 우리 관광 팀에 합류한 한국 서울에서 왔다는 한 분이 그 안내문을 보면서 그랜드캐년 길이는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보다 길고 2000미터를 넘는 해발고도 제주도의 한나산보다 높다고 했다.  그랜드캐년을 마주하면 숨 막힐 것 같은 감탄과 함께 장엄한 자연 앞에 인간이라는 존재가 너무 작고 하찮게 느껴지기 때문에 무기력함 혹은 허망함 을 느낀다고 한다. 이런 느낌을 갖는 순간은 위대한 세월과 자연 앞에 잠시 인간의 오만을 접고 겸허함을 느끼는 순간이고 초라한 자신을 비로소 발견하는 순간일 것이다. 나는 대자연이 빚은 위대한 걸작 앞에서 경탄보다도 얼빠진 모습으로 한참이나 말없어 대협곡을 내려다보았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그랜드캐년은 자연의 위대함과 신비로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언젠가 영국 BBC가《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죽기 전 가봐야 할 곳》이라는 주제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이 그랜드캐년이었다고 한 것이 실감이 가는 순간이다. 이곳을 와본 사람들의 느낌을 모아보면 그랜드캐년은 《도무지 글로나 사진으로, 또는 그림으로 그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표현할 길이 없는 대 자연의 경이로움! 세계 자연의 불가사의 중에서도 최고의 신의 작품! 반드시 눈으로 확인하고 가슴으로 느껴야 하는 곳, 사시사철 색깔이 모두 달라지는 곳, 진한 아름다움의 극치와 감동을 주는 곳,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느끼는 감동이 다른 곳!》이다.  지각 융기와 장구한 세월을 거처 거듭 된 물의 침식과 결빙으로 인한 풍화작용으로 암반이 파여 나가며 형성된 그랜드캐년에서 지구 45억년 역사 중 20억년 지구 역사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20억 년 전 화산의 폭발 시 검은 색의 마그마가 이 지역 일대를 평평하게 만들었다가 오랜 세월, 지각의 변동과 함께 이 지역 일대가 바다 밑에 잠기는 지각 변동 후 침몰과 융기 현상이 반복되었다. 지각의 변동 중 갑자기 동쪽이 불쑥 솟았는데 그것이 해발 4,345m인 지금의 럭키산맥이다. 그 산맥에 빙하시대가 도래하고 그 빙하와 눈들이 녹아 높은 곳에서 낮은 지형으로 흐르면서 7개의 강줄기들을 만들고 그 강들이 다시 하나의 큰 강줄기로 모여 콜로라도 강을 이루게 된다. 이 강이 수억 년 흐르면서 평평했던 평지를 깎고 깎아 침식시켜 전형적인 브이 (V) 자 계곡을 만들고 이 계곡이 오랜 세월동안의 바람과 비의 영향으로 부드러운 곡선으로 변하면서 오늘날의 그랜드캐년이 약 600만 년 전에 형성 되었다고 한다. 석회암과 사암으로 구성된 단층에선 고대 조개의 화석과 바다 상어 뼈 화석이 발견되었고 계곡 바닥을 흐르는 콜로라도 강변 습지에서 수령 700여년이 된다는 바다 거북이가 서식하고 있어 이 지역이 먼 옛날 바다 밑이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어 지질학자들은 그랜드캐년을 《지질학 교과서》라고 한다. 육안으로는 그냥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황량한 사막의 계곡 같으나 1,600여종의 식물과 250종 이상의 조개류, 78종의 포유류, 18종의 도마뱀, 8 종의 방울뱀, 전갈 등이 서식하고 있어 생태학자들 또한 그랜드캐년을 생태계의 보고로 인정하고 있다. 그랜드캐년이 관광객들을 또 한 번 놀라게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관광 수입이다. 가이드 소개에 따르면 그랜드캐년으로 벌어들이는 관광 수입은 년 간 60억 달러에 달한다. 실로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어머 어마한 숫자다.     전설에는 거인이 그랜드캐년을 만들었다고 나온다. 그 거인이 미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전설 속에 나오는 폴 버년이다. 폴 버년은 항상 베이브라고 하는 색깔이 푸른 황소를 데리고 다니는데 둘의 발자국이 미네소타에 천개 호수를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폴 버년은 도끼로 단 한 번에 나무 81그루를 찍어 넘기는 괴력의 소유자다. 그는 도끼로 강 곬을 파고 미시시피 강에서 럭키산맥까지 나무를 죄다 제거해 대평원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랜드캐년도 폴 버년이 도끼로 깎아 만든 것이란다. 놀랍게도 전설의 거인이 1976년 조선반도 공동경비구역에서 발생한 《도끼사건》에서 다시 등장한다. 《도끼사건》은 조선인민군과 유엔군 공동경비구역 내에 있는 나무를 제거하는 도중 주한 미군과 조선인민군 사이에 발생한 충돌사건이다. 《도끼사건》으로 미군 장교 두 명이 숨지자 이에 응징으로 미군이 실시한 작전명이바로 《폴 버년》이다. 폴 버년이 미국인들에게 얼마나 익숙한 전설속의 인물인가를 보여주는 일례다.  전설은 어디까지나 전설이고세계 최대의 장관, 자연의 불가사이라고 하는  그랜드캐년을 만든 것이 바로 콜로라도 강이다. 수억 년 동안 콜로라도 강의 급류에 깎이고 고원이 융기하는 대변화를 겪은 끝에 탄생한 것이 그랜드캐년이다.  망원경으로 그랜드캐년을 내려다보니 골이 너무 깊어 하루 52만 톤의 황토를 싣고 흐르면서 그랜드캐년을 탄생시켰다는 콜로리다 강이 가느다란 실개천으로 보였다. 기재에 의하면 1540년 스페인 탐험가들이 황금을 찾아서사막일대를 헤매다가 이강을 발견하고 스페인어로 붉은 색깔을 띤 강이란 뜻으로 《콜로라도》라고 외쳤는데 그것이 강 이름으로 되었다고 한다. 콜로리다 강 이름 어원에 대해 한국인들에게는 한국인다운 유머가 있다. 가이드가 들려준 유머다.   조선의 세종대왕이 언젠가 미국방문길에 올랐단다. 수많은 대신들을 대동하고 모하비사막을 횡단하는데 너무 목이말라서 수행하던 내시를 보고 저기 강물이 보이는데 빨리가서물한바가지떠오라고 명을 내렸다. 내시가 강물을 떠오려고 바가지를 찾으니 아뿔싸! 밤새 카지노만 놀다가 떠날 때 호텔에 바가지를 두고 왔던 것이다. 내시가 사시나무 떨듯이 세종대왕 앞에 넙죽 엎드려 죽여주옵소서! 하니 워낙 어질고 선한 임금인지라 세종대왕 왈,《바가지가 없으면 입으로 마시지 말라는 뜻인즉 그러니 코로라도 마셔야 하지 않겠냐.》 했다고하여 강의 이름을 《코로라도》라고했다는 유머. 이밖에 또 하나의 유머가 있다. 그랜드캐년으로 가는 도중 그냥 졸던 한 할머니가 잠이 덜 깬 상태에서 그랜드캐년에 도착해 가이드 보고 묻는 말! 《올 때 버스에서 자꾸 이라고 했는데 그 개년 어디 있나?》    위대한 자연의 장관에 잔뜩 기죽은 인간들의 기분을 다소 전환시키기에는 유머가 적격인 것 같다.  
15    미국 관광 1번지 그랜드캐년(2편) 댓글:  조회:6321  추천:0  2012-12-17
   모하비 사막은 서부 개척시대 개척자들의 역마차가 굴러갔고 카우보이들이 소와 말떼를 몰고 간 역사의 현장이다. 미국 서부 영화에서 늘 나오는 말 잔등에 올라앉아 손에 포박용 로프를 흔들면서 휘파람을 부는 카우보이 형상이 떠오른다. 소몰이, 말몰이꾼에 불과한 카우보이는 미국의 서부 영화에서 애국자이고 의협심이 강한 정의의 수호자로 나온다. 카우보이가 서부극의 영웅으로 부상한데는 진 어트리라는 인물의 공적을 빼놓을 수 없다. 진 어트리는 1933년 영화 《텀블링 텀블리즈》 출연을 시작으로 1956년 은퇴할 때까지 무려 93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노래하는 카우보이로 널리 알려진 진 어트리는 서부극 발전 토대를 닦았다. 그는 서부극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카우보이 십계명》을 내놓았다. 《1. 카우보이는 그 어떤 경우에도 악당들보다 유리한 그 어떤 부당한 특혜를 받지 않는다.   2. 카우보이는 신의를 배반하지 않는다.  3. 카우보이는 항상 진실만을 말한다.  4. 카우보이는 특이 어린아이, 노인, 그리고 동물들에게 친절해야 한다.  5. 카우보이는 인종과 종교적인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6. 카우보이는 곤란한 처지에 처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  7. 카우보이는 선을 행하는 사람이다.  8. 카우보이는 자신의 마음, 생각, 언어, 행동이 건전해야 한다.  9. 카우보이는 여성, 자신의 부모, 그리고 법 질서를 존중해야 한다.  10. 카우보이는 애국자이다.》     이《십계명》은 서부극 출연자들의 정신적 지침이자 연기 지침으로 되었고 소나 말을 몰던 카우보이를 애국자이자 정의의 수호자로 변신시켰을 뿐만 아니라 미국인의 이상적인 가치관을 구현한 《십계명》으로 제2차 세계대전 후 사라져가는 민족주의를 고취시켰다.     모하비 사막을 경과하는 동안 영화에서나 본 카우보이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황막한 사막에서 부는 바람 소리가 카우보이의 채찍소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골드러시 때 수많은 동부의 개척자들이 황금을 찾아 메마르고 광활한 서부의 모하비 사막을 건너오게 된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에는 오직 말과 마차로 사막을 횡단했는데 식수, 식량 부족으로 많은 사람들이 황금을 보지 못한 채 사막에서 아깝게 목숨을 잃어갔다. 그때 주인 잃은 나귀와 말들이 야생 나귀와 말로 다시 자연의 품으로 돌아갔는데 지금도 모하비 사막 곳곳에는 그들의 후손인 야생 나귀와 말들을 가끔 볼 수 있다고 한다. 황막한 사막에서 비명에 간  주인의 환생이라는 야생 나귀와 말이 나타나 주기를 기대하는 맘으로 나는 자주 차창밖에 눈을 주었지만 사막의 《주인》은 종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날 라플린이라고 부르는 자그마한 도시에서 하루 밤을 묵었다. 라플린은 사막지대에 오아시스와도 같은 콜로라도 강이 유유히 흐르는 곳이다.라플린은 카지노업계의 대부로 불리던 단 래플린이 자가용 비행기를 이용해 라스베가스 인근지역을 비행하던 중 강가에 백사장이 펼쳐져 있던 이곳에 《 리버사이드 리조트호텔 》을 세우면서 도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카지노업계 대부가 눈독을 들인 곳이니 카지노가 필수다. 사막 가운데를 흐르는 콜로라도 강가에 카지노를 갖춘 호텔들이 들어서 있는 이 도시는 은퇴 노인이나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휴양지로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는 가이드의 소개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호텔 뒤로 나오니 바로 발밑에서 콜로리다 강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푸르다 못해 검푸른 강물 속에서 큰 물고기들이 노닐고 있었다. 카지노를 갖춘 호텔 대부분이 콜로라도 강가에 세워져 있어 콜로라도 강과 함께 그림 같은 야경을 연출해 내고 있었다. 콜로리다 강 건너편이 아리조나라고 했다. 그러니까 콜로리다 강이 네바다주와 아리조나주 경계를 긋고 있었다.    우리 관광 팀이 투숙한 호텔 역시 카지노 호텔이었다. 카지노란 말만 들었지 처음 보는 광경인데다가 너무 지친 우리 내외는 사진만 몰래 둬 장 찍고 방에 올라와 간단히 샤워만하고 잠에 떨어졌다.     
14    미국 관광 1번지-그랜드캐년 (1편) 댓글:  조회:4989  추천:0  2012-12-10
 달에서나 우주선에서 육안으로도 보이는 것이 두 대국에 있는데 하나는 중국의 만리장성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의 그랜드캐년이다. 만리장성은 인공 축조물이고 그랜드캐년은 자연 그대로다. 중국엔 《만리장성에 오르지 못하면 사나이가 아니어라》란 말이 있듯이 미국에도 《그랜드캐년을 보지 못하면 인생의 비극》이라는 말이 있다. 관광 안내 책자를 보면《인류의 역사를 초월하여 고대로부터 증여받은 선물. 지구 수억~수천만 년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  직접 가서 보면 라는 감탄사 외에 별로 할 말이 없어지는 곳. 웅장한 경관을 보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볼 수 있는 곳. 그 아름다움과 장엄함에 감동하며 유구한 시간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은 생물에 불과한 것인지 실감하게 하는 곳.》그 곳이 바로 그랜드 캐년이다. 그래서 그랜드캐년은 미국 동부의 나이가라폭포와 함께 나란히 미국의 관광 1번지다.  우리 내외는 그랜드캐년을 두 번 찾았다. 2001년 11월 26일 명예문학박사 수여식이 끝난 이튿날 강행된 미 서부 일주 관광 첫 코스가 그랜드캐년이었다. 미국 땅을 밟기 전 그랜드캐년은 우리 내외에게는 생소한 지명이었다. 장거리 비행에 시달리고 시차를 극복 못한 우리 내외에게는 미국 땅을 밟은 이튿날 또다시 관광버스로 하루 종일씩 달려야 하는 관광은 무리한 강행군이었다. 미국은 인구가 적고 땅이 하도 넓어 미국 관광은 중국 관광과 많이 틀린다. 중국의 관광 명소에 가면 이 곳 저 곳 둘러 볼 것이 많아  반날을 보낼 수 있지만 미국의 관광 명소에서는 대체로 한 시간 많이 잡아서 두 시간 내로 돌아보면서 사진 찍고는 다음 관광지로 가는데 보통 반날이 걸린다. 그래서 시간을 길에서 허비하는 게 미국 관광이라는 말이 있다.                                   모하비 사막    그랜드캐년으로 가려면 하루 종일 사막을 달려야 한다. 그 사막이 바로 모하비 사막(Mojave Desert)이었다.사막이라고 하면 모래언덕에 모래바람이 부는 그런 곳일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모래 언덕이 아니면 고비 사막이 주를 이루는 중국의 사막을 보아온 나로서는 이름 모를 마른 풀 더미가 듬성듬성 깔린 모하비 사막을 보니 사막에 대한 고정관념이 헷갈린다. 한국인 가이드의 소개에 따르면 모하비 사막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 남동부와 네바다, 애리조나, 유타 주의 일부에 걸쳐 있는 고지대 사막으로 면적 3만 8000㎢이다. 사막엔 금, 은, 텅스텐, 망간, 소금 등 광물자원이 많고 에드워즈 공군기지를 비롯한 군사 관련 시설이 많다고 한다.    사막의 이름은 아메리카 토착민인 인디언 모하비 족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사막을 한참 달리고 나면 모하비 사막 국립풍치구역이 황량한 모습을 드러낸다. 갑자기 사막에서 이상한 비닐하우스 같은 것이 수없이 펼쳐지는데 그것이 친환경 에너지사업을 전격 추진하면서 만들어놓은 모하비 사막의 태양열 발전소란다. 사시장철 내려 쬐는 사막의 풍부한 태양빛을 그대로 에너지로 만들어 버리는 미국인들의 저력을 볼 수 있다. 가이드가 모하비 사막을 경유하는 도중 모하비 사막에 대해 아주 자상히 소개했지만 피로에 지친 우리 내외는 꾸벅꾸벅 졸다나니 모하비 사막이 영화 촬영지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항공기 《무덤》으로도 유명하다는 소개만 기억에 남겼을 뿐이다. 가이드 소개에 따르면 모하비 사막은 전 세계에서 운항되던 항공기와 폐기처분된 항공기 등을 모아놓은 곳으로 유명하다. 모하비 사막에 항공기를 모아둔 계기는 1969년 후반 월남 전쟁이 끝나면서 미국정부는 폐기 처분할 항공기와 임시 보관할 할 장소가 필요했다. 미국정부는 유사시를 대비해 항공기가 부식하지 않고 50년 이상 보존이 가능한 지역을 찾다가 1년 내내 강우량이 100mm이하로 건조한 기후를 가진 모하비 사막을 최적의 항공기 보관 장소로 선택했다.     모하비사막에는 세계의 모든 기종의 항공기가 그대로 방치가 돼 있는데 쓸모가 있는비행기의 경우 다시 새 주인을 찾아 취항을 할 수 있으며 그렇지않는 경우 위탁 처분을 통해 부품의 일부가 재활용되거나 혹은 버려진다. 모하비사막에는 약 9천여 대의 항공기가 보관 혹은 폐기된 상태로 있다.   차창 밖으로 도로를 따라 사막에 쳐 놓은 철조망이 그냥 우리를 따라왔다. 목장지대에 가면 방목지에 쳐 놓은 철조망을 흔히 볼 수 있다. 삭막한 사막에 철조망이라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가이드한테 물으니 철조망은 동물보호와 관광객들의 안전을 위해 쳐놓은 것이란다. 열악한 사막에서 자생하는 희귀동물이 고속도로를 횡단하다 변을 당할까봐 만든 보호망인 셈이다. 그런데 관광객들의 안전을 위해라니? 《저 철조망 안으로 들어가선 큰 일 납니다. 모하비 사막엔 300여종 동물이 서식하고 있는데 그 중 인명을 해치는 방울뱀과 전갈이 있습니다.》   짐짓 겁주는 말같이 들린다. 그 말 믿거나 말거나, 사막을 경유하는 도중 관광버스는 딱 한 번 휴게소에 정차하고는 내처 달렸기에 관광객들은 철조망 근처에 가 보기는커녕 버스에서 내릴 기회조차 없었다. 황량한 사막을 덮은 둥근 건초 더미 같은 것이 무엇인가고 물으니 식물이라고 한다. 식물명은 덤블링트리(Tumbling tree)라고 하는데 모래벌판을 바람에 따라 뒹굴어 가다가도 비를 맞으면 뿌리를 내리고 자란다고 한다. 사막의 풀로 보이는데 미국인들은 풀이 아니라 나무라고 부른다고 한다. 모하비 사막에는 보통 12월부터 2월까지 비가 온다. 사막의 식물은 비 오기 전에는 그냥 마른 상태에서 성장을 중지하다가 비만 오면 파랗게 살아난다. 생명의 신비를 절감하게 된다. 덤블링트리 속에 가끔 선인장이 보였다. 한 해 치고 겨울에만 비가 조금 내린다는 사막에서 가장 생명력이 강한 식물이 선인장이다. 하도 생명력이 강한 식물이어서 한국인들은 증시 관련 용어로도 쓰고 있다. 예를 들면 한국 주가를 《모하비사막의 선인장과 같은 생명력을 갖고 있다》고 표현한다.  
13    사건으로 보는 로스앤젤레스(3) 댓글:  조회:6395  추천:0  2012-12-06
 앞에서 로스앤젤레스의 한 토막 역사를 만든 두 위인을 소개했으니 이번 순서는 사건이다. 먼 역사는 접어두고 근대사를 보면 로스앤젤레스에는 특기할 사건이 셋이 있다. 그것이 바로 로스앤젤레스 대지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로스앤젤레스 흑인 폭동이다.  먼저 지진 관련 당시 보도다. 《1971년 2월 9일 아침 6시경(현지 시각) 미국의 로스앤젤레스를 강습한 지진. 진원지는 시의 중심부로부터 북쪽으로 약 40 km 되는 산속으로, 규모 6.6의 중 지진이었다. 진원의 깊이가 약 10 km로 얕아서 진원지 부근에서는 진도 7, 시 북부의 샌퍼낸도 지구 등은 진도 6이 되어 참화를 입었으며, 시 중심부 등은 진도 5로 피해가 작았다. 이 때문에 로스앤젤레스지진이라 통칭되며, 정식명칭은 샌퍼낸도 지진이다. 병원, 댐, 고속도로, 학교 , 변전소, 민가 등이 피해를 입고 사망 62명, 부상 1000여 명이었다. 병원이 특히 참화를 입었는데, 사망자의 대부분이 입원환자였다. 저수지의 댐이 무너지기 직전이었으며 한 때 약 8만 명의 주민이 긴급 피난하였다. 화재는 42건으로 비교적 적었다. 큰 재해로 번지지 않은 것은 방재 활동이 신속하고 적절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로스앤젤레스에는 해마다 진도 2내지 3의 지진이 자주 발생한다. 미국 체류기간 나도 여러 번 겪었다. 한번은 로스앤젤레스 공항 부근에서 진도 5의 지진이 발생했는데 층집이 그냥 마구 뒤흔들렸다. 닫힌 창문에서 삐걱 이는 소리가 났고 머리에 어지럼증이 왔다. 그때 마침 저녁식사 중이었는데 지진을 겪어보지 않은 나는 여차하면 뛰어 내릴 작정으로 인차 창문을 열었다. 나의 거동을 보고 아내는 배를 잡고 웃었다. 한참 후에 웃음을 거둔 아내는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집이 흔들리는 정도의 지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고 했다. 잠잘 때 지진이 발생할 때도 있는데 그때면 침대가 좌우로 흔들리는데 마치도 배를 탄 것 같은 느낌이란다. 재앙을 부르는 큰 지진은 순간적으로 어쩔 수 없이 당하기에 그냥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고 아내는 체념하듯 말했다. 그래도 강진에 대비해 지진 대처법 같은 건 알아두어야 하지 않겠냐고 하니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지진 관련 교육을 받는다고 했다. 아내에게 강진이 발생하면 어쩔 거냐고 물으니 아내 대답이 강진이면 그냥 책상 밑에 들어가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긴다고 했다. 하긴 그럴 수밖에, 눈 깜박일 사이에 일어나는 게 지진이니까. 그래도 지진에 대비해 항상 비상용 비품을 갖추어 놓으라고 했다. 로스앤젤레스 해당 부문에서 권장하고 있는 비품에는 손전지, 반도체 라디오, 음료수, 식품, 비상약, 현찰, 여권 등이 포함되어 있다. 유사시를 대비해 이런 비품들은 항상 손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곳에 비치해 두어야 한다고 주의를 주고 있다.  예언가들은 머지않은 장래에 로스앤젤레스는 산타모니카 앞 바다에서 지진으로 일어난 해일로 바다 속으로 영영 잠적한다고 예언하고 있다. 그들의 예언은 미국의 재난을 다룬 영화에서도 실 상황처럼 펼쳐졌다. 해저 대지진이 일어난다. 태평양 해안도시 산타모니카 해변에 산악 같은 해일이 일어나면서 삽시간에 산타모니카를 삼키고 그 여세를 타고 로스앤젤레스까지 덮친다. 아비규환의 로스앤젤레스, 900만 인구를 가진 로스앤젤레스는 가뭇없이 사라지고 잔잔한 파도만 넘실거린다. 이것이 재난 영화에 비친 로스앤젤레스의 비극이다. 예언이 어디까지나 예언으로 그쳤으면 하는 것이 로스앤젤레스 시민들의 바람이다.   로스앤젤레스는 두 차례 하계 올림픽을 치른 도시이다. 1932년 7월 30일부터 8월 14일까지 제10회 하계 올림픽이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되었는데 특기할 것은 이 올림픽에 중국이 처음으로 《중화민국》 이름으로 참가한 것이다. 1984년 7월 28일부터 8월 12일까지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제23회 하계 올림픽에 구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4년 전 모스크바 올림픽에 불참한 서방국가들에 대한 보복으로 불참해 올림픽 사상 또 한 번 유감을 남겼다. 23회 올림픽에서 중국대표단은 사상 최초로 금메달, 종합 순위 4위를 차지하는 쾌거를 올렸다. 당시 여론은 동구권 나라 불참으로 중국이 어부지리를 보았다고 보도했으나 24년이 지난 2008년 북경 올림픽에서 중국은 실력을 과시했다. 2008년 북경 올림픽은 올림픽 사상 참가국 수, 시청률, 기자, 자원봉사자 수, 올림픽 성화 봉송 거리, 송출 시스템 등 면에서 최고를 기록한 올림픽이다. 당시 미국의 주요 언론들도 베이징 올림픽 성황을 생중계하면서 중국 붐에 열을 올렸다. 그 때 아내는 매일 나한테 전화를 걸어왔다. 북경 올림픽으로 중국인들의 어깨가 으쓱해진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 언론은 왜 비난만 하고 있냐고 그 이유를 물어왔다. 로스앤젤레스에서도 한국 TV를 시청할 수 있다. 한국의 KBS, MBC, SBS가 고정된 시간대에 방송되고 있다. 아내는 미국 주요 언론의 보도와 한국 언론의 보도가 북경 올림픽을 보는 시각이 완전히 틀린다고 했다. 미국의 주요 보도 매체는 북경 올림픽을 자국의 경사처럼 보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도 끝에 중국어 강좌를 달아 매일 올림픽 관련 중국어를 배워주고 있는 반면 한국 언론은 올림픽 보도 끝에 꼭 중국을 비하하거나 비아냥하는 말을 단다고 했다. 올림픽 개막 전 한국의 SBS가 개막식 리허설을 몰래 찍어 방송해 물의를 빚은 사건으로 중국정부까지 불쾌감을 표시했다. 일이 여기서 그치면 괜찮겠는데 한국의 일부 주류 매체는 북경 올림픽기간 경기를 보도하면서 항상 뒤 끝엔 《올림픽 후 중국 경제가 추락할 가능성이 있다》, 《올림픽 개최로 피해 입은 철거민들의 분노를 삭일 수 없어》 이런 식으로 말꼬리를 달았기에 중국의 해당 부문으로부터 《우호적이 못되는 나라 매체》 명단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중국을 보는 한국 언론의 자세가 문제되고 있는 것은 올림픽 개최기간의 일만 아니다. 중국이 한국의 제일 큰 해외 시장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일부 언론은 항상 중국의 부정적인 면만 크게 기사화한다. 《삼촌이 기와집 지으면 배 아파난다》는 심리가 작용했는지 아니면 끝도 없는 당쟁, 항상 대방의 허물만 잡고 늘어지는 정치인들의 보도에 치중하다나니 그냥 그 세태에 물젖어서인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다음, 흑인 폭동에 대한 기재를 보자.   《로스앤젤레스 폭동은 1992년 4월 29일에 시작되어 5월 4일까지 이어진 로스앤젤레스 역사상 최대 규모의 폭동이었으며 미국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왔다. 이 사건은 4명의 로스앤젤레스 경찰관이 흑인 운전수 로드니 킹을 폭행하는 모습이 TV로 공개되면서 시작되었다. 이 장면이 보도되자 인종차별이라고 여긴 흑인 청년들(라틴계 청년들도 상당수 포함)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약탈, 방화, 살인, 강간을 저지르면서 6일간에 걸친 폭동이 시작되었다. 폭동으로 인한 로스앤젤레스 전체의 피해액은 7억 1천만 달러 선으로 집계되었으며, 이중 한국인 피해액은 3억 5천만 달러로 절반에 달했다.》    이 폭동이 있기 전 1965년 로스앤젤레스 왓츠에서 유대인 상권을 내쫓는 흑인 폭동이 발생했었다. 이 폭동 관련 맥콘 보고서는 왓츠 폭동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미국 사회가 두 개의 사회로 나뉘어져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흑인과 백인 간 빈부 차이가 극복되지 않으면 이 같은  폭동이 재현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 경고가 적중했던 것이다. 4.29 폭동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역시 흑인과 백인 간 빈부 차이가 가져온 누적된 감정의 폭발이라고 해당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그런데 이 사건의 피해자인 흑인계도 가해자격인 백인계도, 시위에 동조한 남미계도 미국 사회에서 질시의 대상이 되어온 유대계도 아닌 한인사회가 폭동의 피해를 가장 많이 받았는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추측이 있다.  하나는 《음모론》이다. 폭동이 시작되자마자 미국 언론은 1991년 3월 16일, 그러니까 1년 전 로스앤젤레스 남부의 흑인 빈민 지역에서 발생한 이른바 《두순자 사건》을 집중 보도함으로써, 한국인과 흑인 사이의 인종 갈등을 야기 시켰다. 《두순자 사건》이란 상점을 운영하던 49세의 두순자 씨가 오렌지 주스를 훔쳐가던 15세 흑인 소녀와 말싸움, 그리고 이어진 난투극 끝에, 두 씨를 때려눕히고 나가던 흑인 소녀에게 총을 쏘아 숨지게 한 사건이다. 이 사건이 흑인 폭동이 일어난 직후 미국 언론에 의도적으로 크게 보도됨으로써, 마침 로드니 킹 사건으로 불만이 가득 차 있던 흑인들을 크게 자극하였다. 이는 곧 한국인, 그리고 기타 아시아인이 운영하는 상점에 대한 흑인들의 불매 시위와 보복 행위를 야기했다. 이밖에도 폭동기간 미국 경찰이 폭동 피해지역인 한인 타운엔 왜서 경찰 한 명도 배치하지 않고 백인 거주 지역에만 진을 치고 있었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다. 한마디로 백인들에 대한 흑인들의 반감과 분노를 한국인들에게 풀도록 방관했다는 것이다.    다른 한 분석은 흑인과 한국인들 간의 《갈등론》이다. 즉 흑인들은 자신들을 상대로 장사하면서 흑인 사회 공동체적 행사 참여나 기부 등 미국사회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지 않는 한국인들을 배타적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폭동 시 화풀이 주요 대상으로 되었다는 해석이다. 다시 말하면 한인들이 주 고객인 흑인에 대해 항시 인종차별적 시각을 갖고 있었고 다민족 사회에서 다민족과의 융합을 홀시한 것이 큰 화근이 되었다는 얘기다. 당시 한국인과 흑인과의 관계가 어떤 극에 이르렀는가를 보여주는 가사가 하나 있다. 힙합 음악계의 거장이며 흑인 우월주의 찬미자인 랩  뮤직 가수 아이스 규브의 음반 중 《블랙 코리아》라는 노래가 있다. 《검은 주먹의 힘을 존경하라, 한국 상인들 흑인을 도둑놈으로 취급하네. 돈 갖고 가도 의심하는 눈초리로 쳐다보니 기분이 나쁘네. 한인들 가게 불 지르고 기분 나쁜 여자 강간을 해야겠네. 한인들 한국으로 돌아가라!》  가사만 보아도 모골이 송연해진다. 이 노래는 《4.29》 사건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러나 가사를 통해 당시 흑인과 한국인들 간 관계가 어느 정도 극에 달했는가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캘리포니아 주는 120개의 다민족들이 모여 살고 있는 지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 간 갈등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산》이라는 말이 있다. 비록 흑인과 한국인들 간 관계가 버성겨진 관계라고 하지만 《4.29》사건은 어디까지나 흑인과 백인 간 《흑백 갈등》으로 터진 사건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많다. 우리말 속담을 빈다면 한국인들은 그저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 격》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한 시각은 《경제 불황 설》인데 《4.29》가 당시 경제 불황과도 연관이 있다고 보고 있다. 1990년대 초 경제 불황은 캘리포니아 주에 50년 만에 들이닥친 큰 불황이었다. 당시 불황은 주로 제조업에 종사하던 흑인들이게 가강 큰 타격을 주었는데 생활고에 시달리는 흑인들은 질투의 대상으로 되어왔던 한인 상인들에게 불황속에 억눌린 감정을 폭발시켰다. 미국으로부터 시작된 지금의 경제위기는 30년대 대공황이후로 가장 심각한 경제 불황이다. 《경제 불황 설》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경제 불황이 아직은 어울려 사는데 익숙하지 못하고 서로에 대한 불신이 존재하고 있는 민족들 사이에 어떤 파장을 가져올지 크게 우려하고 있다.  인터넷에 오른 동영상이 나한테 《4.29》 사건 현장을 재현했다. 방화, 약탈 장면이 고스란히 찍힌 화면을 보면서 내가 실감한 것은 《천사가 악마로 변하기는 순간이다.》라는 격언이다. 평소 마주치면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웃는 얼굴로 인사하던 사람들이 삽시에 폭도로 약탈자로 되어 날치는 장면을 보니 인간에 대한 비애가 느껴졌다. 더 충격적인 것은 한인 상가를 터는 흑인과 멕시코 계 약탈자들 중 몇 살밖에 안 되는 어린이들이 있는가 하면 걸음 옮기기도 힘든 노인네들도 있었다. 전대미문의 비극을 낳은 광란의 《문화대혁명》이 연상되었다. 누군가 《문화대혁명》은 궁극적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이 되기를 포기하도록 한 인류 역사의 《악몽》이라고 했다. 그 시절 명철보신을 하기 위해 나의 아버지를 감옥행으로 물어먹은 한 인간이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직접 아버지를 찾아갈 면목이 없으니 아들인 나를 찾아 사죄의 뜻으로 한 말이 인상적이다.  《그 시절 인간은 없었다.》  인간이 없으면 뭐가 남았나? 인간의 탈바가지를 쓴 악마들인가? 그 말을 떠올리면서 《악마가 다시 천사로 되는 것도 순간》이 아닐 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사실 내 생각이 아주 적중한 생각이다. 《4.29》 사건 시 방화, 약탈자자들이 지금은 천사의 얼굴을 하고 《4.29》 사건 흔적이 가셔진 코리아타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상전벽해, 격세지감이란 단어가 불쑥 뇌리를 치는 것을 어쩔 수 없다.  《4.29》 로스앤젤레스 폭동을 보는 시각의 차이점을 주목할 대목이다. 한국인들은 그냥 폭동으로 보고 있는 반면 흑인들은 지금도 《4.29》를 인종차별에 항거한 《의거》로 보고 있다. 미국 정부는 그저 《소요》라고 규정짓고 있다. 폭동이든 의거든 소요든 관계없이 한인사회는 물론 미국 사회가 이 사건을 통해 큰 교훈을 얻었다. 한인 사회는 많은 것을 잃었지만 이 사건이 발생한 후 또 많은 것을 얻었다. 우선 이 사건의 발생은 코리아타운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흑인들에게 놀란 백인들이 철수하자 그 자리에 한국인들이 《입성》했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푼다면 이 사건은 한인들을 미국 주류 사회에 널리 알리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중국계 이민사회는 19세기 철도건설로, 그 후 일본계 이민사회는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미국 주류사회에 널리 알려졌다면 《4.29》전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인들이 비로소 미국 현대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한인 사회에는 《4.29 세대》라는 말이 있다. 《4.29》를 지켜본 이민 2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로스앤젤레스 흑인 폭동이 한인사회에 남긴 가장 소중한 유산이 《4.29 세대》라고 한다. 왜냐하면 당시 부모 1세대들이 흑인들에게 형편없이 당하는 것을 지켜본 이민 2세들이 그 후로 법조계, 의료계, 정치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어느 세대보다 왕성하게 한국인 권익운동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해마다 《4.29》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지만 《4.29》 폭동 피해자들은 지금도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비록 미국 연방정부가 폭동 피해자들에게 보상대신 30년 상환 저금리 재해융자를 제공했지만 그 때 받은 융자를 17년이 지난 오늘까지 겨우 반만 갚았다고 하니 그들에게는 《4.29》는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아직도 진행 중인 소름이 끼치는 《현실》이 아닐 가.  로스앤젤레스 시장의 환영사에서 언급한 것처럼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뒤섞여 하나의 소우주를 이루는 있는》 사회에서 다양한 인종과 문화의 평등, 자유, 융합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실례가 바로 《4.29》 사건이 아닐 가 싶은 생각이 든다.  세계 이민자들의 대도시인 로스앤젤레스를 칭하는 말에 《시작의 도시》라는 말이 있다. 많은 이민자들이 미국에 첫 발을 들여놓고 새 삶을 시작하는 도시라는 뜻에서 생긴 말이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 문명이 어우러지고 독특한 생존환경이 펼쳐진 로스앤젤레스가 마냥 《시작의 도시》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12    제2회 '일,중,한 동아시아문학포럼 일본 기타규슈시에서 댓글:  조회:3228  추천:2  2012-12-03
중, 한,일 작가들의 문학 교류 행사인 제2회 '일중한 동아시아문학포럼'이  2011년 일본 기타규슈시에서 열렸습니다. 중국작가협회 주석 철응, 소설가 막언, 김훈 등 9명 작가, 평론가들과 한국에서는 시인 도종환,소설가 오정희 임철우, 이창동, 김연수, 김애란, 평론가 최원식 박재우 윤상인씨 등 12명이 일본에서는 소설가 쓰시마 유코, 시마다 마사히코, 아오야마 신지, 히라노 게이치로, 가와카미 미에코 등 20명이 참가했습니다.                                             중국작가 대표단 일행                                                  201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막언 작가와 일본 공항에서                                                                      중국작가협회 주석 철응과 대표단 성원들                                                                           관련 대회 발언을 앞두고                                         기타규슈시 작가박물관 중국작가관에서                                                                             아버님 출생지 시모노세끼 해변에서                                                                                     한국 작가대표단
11    인물로 보는 로스앤젤레스(2) 댓글:  조회:3729  추천:0  2012-12-01
   로스앤젤레스에 올 때마다  찾는 곳이 두 곳이 있다. 한 곳은 게티 센터이고 다른 한 곳은 그리피스 공원 내에 있는 천문대이다. 할리우드나 디즈니랜드는 흥미 위주나 이 두 곳은 역사와 예술, 과학의 공간으로서 두 곳의 공통점이라면 로스앤젤레스 시가지를 부감할 수 있는 산정에 위치해 있고 또 유명인사가 로스앤젤레스에 남긴 유산이라는 점이다.   게티 센터(Getty Center)는 장 폴 게티 미술관을 중심으로 예술과 문화유산을 관리하는 게티 리서치와 보존, 교육 연구소가 있는 대규모 예술 종합 센터이다. 르네상스에서 후기 인상파 작품까지 유럽의 소장품이 특히 많이 전시된 게티 센터는 석유사업으로 재벌이 된 장 폴 게티가 로스앤젤레스에 기증한 것이다.   그리피스 공원 역시 1800년대 멕시코 은광 개발과 캘리포니아 금광 그리고 남가주 지역의 부동산 투자로 일약 부동산 재벌로 등극한 그리피스 대령의 기부로 건설된 것이다.   고대 그리스 조각에서 현대 회화, 사진, 가구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게티 센터를 자주 찾는 이유는 게티 센터가 로스앤젤레스를 부감하기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고 게다가 500여종의 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꽃의 미로》라고 이름 지은 정원이 있어 역사와 만나는 장소, 명상의 공간으로 아주 적격이기 때문이다.      그리피스 공원은 나와 아내가 매주 토요일이나 일요일 아침에 찾는 등산코스다. 이곳엔 등산로가 70여개가 된다. 등산객들 중 한국인이 많은 편이다. 그리피스 공원에 있는 할리우드산 자락엔 그리피스 천문대가 있다. 방문객들에게 아름다운 우주 천체를 관측하고 공부하는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는 이 천문대에서 로스앤젤레스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데 별 밝은 밤에  로스앤젤레스를 굽어보면 시내 전체가 마치도 하늘의 별무리가 내려앉은 듯하다.     내가 즐겨 찾는 좋은 명상의 공간, 등산코스를 마련해 준 두 위인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두 위인에 대한 소개를 간추려본다.  장 폴 게티, 24살에 석유 재벌로 등극하고 1957년부터 20년 동안 세계 최고의 부자 자리를 세계적인 대부호, 재부, 경영방식, 지어 사생활까지 세계적인 이슈로 떠오른 인물. 대부호로서 남다르게 예술품 수집에 광적인 열성을 보임. 그가 본격적으로 예술품 수집에 나선 것은 1938년경. 그는 생전에 30억 달러를 들여 예술품을 사들였다. 예술품에 대한 그의 고견이다.   《미술은 그것을 창조한 사람들의 생생한 화신이다, 미술품들은 그것을 창조한 사람들의 희망과 분노와 그 작품들이 탄생되었던 시대와 장소를 보여준다. 미술작품보다 더 매혹적이고 풍요로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게티가 세운 세계8대 석유그룹에 속하는 게티 오일사는 게티 사후 7년만인 1988년 텍사코사에 흡수되어 역사 속에 사라진다. 그러나 그의 예술 소장품을 전시하고 있는 게티 센터로 하여 그의 신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젠킨스 그리피스(Griffith J. Griffith) 대령, 캘리포니아 금광사업에 성공해 1882년 4,071 에이커의 로스 펠리즈 땅을 매입한 후 1896년 12월 16일 3,015에이커의 땅을 시민들이 자유롭게 산책하고 즐기라고 크리스마스 선물로 아무 조건 없이 시에 기증한다. 그리피스 대령은 《로스앤젤레스가 깨끗하고 행복해지는 좋은 도시가 되는 게 나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며 《내가 성공한 것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은 나의 도리이다》고 생전에 밝혔다.    해발고가 495미터 높이에 있는 그리피스공원은 지금 미국 내 대도시에 인접한 자연공원 중에는 최대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한국인으로 말하면 이 공원은 서울 남산 같은, 북경인으로 말하면 향산 같은, 연변 조선족으로 말하면 모아산 같은 존재이다. 한때 로스앤젤레스에서는 거대한 공원 관리에 운영비 적자가 생겨 공원 입장료를 받으려 했으나 그리피스 가문에서 만약 입장료를 받으면 다시 공원을 돌려 달라고 강력히 항의해 무산된 바 있다. 그리피스 대령의 뜻을 받들어 시민들의 안식처가 된 그리피스 공원을 LA시의회가 2008년 1월 《역사, 문화 유적지》로 지정했다.  두 곳을 자주 찾으면서 거듭 받는 느낌을 우리 속담인 《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로 대신한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생이지만 탐욕스럽게 돈을 벌고 벌어들인 재산을 자식에게 상속하기에 급급한 재산가들에게는 장 폴 게티와 그리피스가 귀감이 될 위인이 아닐 가 싶은 생각도 해본다. 한 때 나는 칼럼리스트로 매주 칼럼을 써서 방송한 적이 있다. 칼럼 중 제목을 《관을 베고 자는 사람》이라고 달고 20년이나 30년 후 재산의 증식을 위해 묘 자리를 많이 사두는 재산가들을 혹평한 적이 있다. 그 칼럼의 한 대목을 그냥 인용한다.  《그 옛날 날아가는 새도 호령 한마디에 떨어진다는 황제들도 어마어마한 왕릉을 수축하면서도 자기 무덤이 후세에 가서 땅값이 얼마나 오를 것인가를 타진해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꾀바른 타산으로 미리 묘 자리를 사두는 사람들은 자기의 이속을 채우는 타산에는 밝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꾀바른 타산으로 하여 인간의 삶의 공간이 해마다 얼마씩 무덤으로 변해가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실 황폐화되고 사막화되어 가는 대지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자연의 무덤입니다. 그 무덤이 날로 늘어가는 상황에서 인간이 삶을 영위하고 있는 도시 공간에 자기의 묘 자리를 미리 마련해놓는 것은 자연의 무덤을 더 늘이는 소행으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내가 한국에 방문차로 갔을 때 저는 경주에서 석굴암과 세계에 유례가 없는 왕의 수중릉인 문무왕 대왕암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신라시대의 종교와 자연 그리고 예술의 응결체로 그 극치를 자랑하는 석굴암보다 바닷물 속에 무덤을 앉힌 문무왕의 대왕암이 더 인상 깊었습니다.    문무왕의 수중릉은 바닷물에 잠긴 큰 바위 돌이었습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문무왕은 자기는 죽어서도 바다로부터 침입해 들어오는 왜적을 막는 수호신으로 바다 속에 남겠다고 바다 속에 무덤을 앉히라고 유언을 남겠다고 합니다. 육지의 땅 한 치라도 차지하지 않고 바닷물 속에 남아 자기 나라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남겠다는 문무왕에 현대인을 비할 생각은 없지만 미리 묘 자리를 사두어 좁아지는 삶의 공간에 무덤을 늘여 가는 사람들이 한심해도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의 철학가  플라톤의 명언엔《인생 최대의 승리는 내가 나를 이기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플라톤의 말대로 한다면 장 폴 게티와 그리피스도 나를 이긴 승자다. 혹시 그들도 부를 이룰 때 인정, 사정, 물, 불을 가리지 않는 악착스런 자본가였을 수도 있다. 그냥 막대한 재산을 자식에게 상속하면 그들의 이름이 치부 사상 악명으로 남을 수도 있다. 자신의 이미지를 만년에 가서 바꾸려고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을 지도 모른다. 어떤 경우였든 두 분은 어디까지나 위인으로 남았고 자신의 신화를 계속 엮어가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그리피스가 후세에 남긴 것은 천문대가 아니라 《우주에 대한 도전》이라고 했다. 이런 위인들이 계속 자신의 신화를 엮어가고 있고 《우주에 대해 도전》하고 있기에 로스앤젤레스는 언제나 활력으로 넘친다.                     
10    사막과 오아시스 댓글:  조회:3525  추천:0  2012-11-30
 국가통계부문이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중국의 도서 판매 추세는 해마다 상승세를 유지하고 있으며 국민들이 도서 구매에 쓰는 소비가 처음으로 담배소비를 초과했다. 도서구매에 쓰는 소비에서 북경이 전국의 첫 자리를 차지했는데 북경 시민들이 한해에 도서구매에 쓰는 비용은 전국 인당 평균 25원에 비해 몇 배나 된다고 한다.   책은 인류가 문명에로 나아가는 지침서이다. 중국에서 도서구매에 쓰는 소비가 담배소비를 초과했다는 것은 국민들이 인류문명의 지침서를 생활과 사업의 필수로 삼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유태인들에게는 교육과 생활, 사유의 방향을 가르쳐주는 《탈무드》라는 지침서가 있다. 《탈무드》라는 말은 《위대한 연구》 또는 《위대한 학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유태인들은 5천년의 역사 속에 유태인들이 끈질기게 살아 남을 수 있은 것은 《탈무드》 덕분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다. 유태인들은 전란의 세월에 금은보화는 죄다 버릴지언정 《탈무드》 책만은 꼭 챙겨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유태인의 한 철학자는 죽음에 임박하여 자기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사랑하는 아들아, 책을 너의 벗으로 삼아라.   책장이나 책꽂이를 너의 기쁨의 밭, 기쁨의 정원으로 가꾸어라.   책의 동산에서 훈훈한 체온을 느끼려무나. 지식의 고귀한 열매를 너의 것으로 만들고   지혜의 꽃다운 향기를 맡으려무나.   만일 너의 영혼이 만족을 느끼거나 혹은 피로에 지친다면   책의 정원에서 정원으로, 밭이랑에서 밭이랑으로   또는 이곳저곳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려무나.   그러면 새로운 희망이 용솟음치고 너의 영혼에 기쁨으로 가득 차리라.》   이 유서의 내용은 지식이야말로 만족을 모르는 영혼과 새로운 희망을 부여해준다는 유태인들의 신념을 보여주고 있다.   언젠가 한 번 사업하는 친구의 집에 초청 받아 갔다가 그 친구의 부인이 남편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들었다.   《애보고 공부 잘하라고만 하지 말고 애 앞에서 몇 번이라도 책 읽는 모습을 보이세요. 정 볼 책이 없으면 신문이라도 좀 뒤적여 보세요.》   사업에 바삐 돌다나니 책을 들 시간에 없다고 변명을 늘여놓는 친구의 집을 둘러보니 값진 가구들이 빠짐없이 갖추어진 방에 유독 책장이 없었다. 이 구석 저 구석에 널려져 있는 책이라 해봤자 심심풀이로 뒤적여보고 그냥 던지는 그런 잡지들 뿐이였다.   또 한 번 다른 한 친구의 사무실에 가보니 방 한 벽을 다 차지한 책장에 세계명작, 중국명작을 망라한 새 책들이 자리를 꽉 채우고 있었다. 그러나 기막힌 것은 한 단위의 책임자로 있는 그 친구가 공금 몇 만원을 내서 한꺼번에 그 많은 책을 사다놓고는 한 권도 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친구는 책을 그저 실내장식품으로 자신의 허영을 과시하는 일종의 전시품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누군가 책이 없는 집은 사막이고 책이 있는 집은 오아시스라고 했다. 그러나 책이 있어도 읽지 않으면 아무리 오아시스라도 그것은 생령의 숨결이 없는 텅 빈 공간일 뿐이다.   한 현인은 《당신은 어떻게 되어 현인으로 되었습니까?》하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오늘날까지 먹는 기름보다 책 읽을 때 켜는 등불기름에 더 많은 돈을 들였을 뿐이오.》   현대인들도 현인의 이 말을 다시 되새겨 볼 필요가 있지 않을가. 
9    시작의 도시-로스앤젤레스(1) 댓글:  조회:3956  추천:0  2012-11-29
   로스앤젤레스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미국 영화, 나아가 세계 영화의 중심지인 할리우드와 세계 최대급 놀이공원인 디즈니랜드다. 지금 디즈니랜드는 로스앤젤레스에서 갈라져 나간 오렌지카운티 지역에 속한다. 우리 내외가 미국에서 잡은 첫 관광코스가 바로 로스앤젤레스의 1일 관광코스인 할리우드, 유니버셜 스트듀오, 디즈니랜드를 잇는 코스였다. 할리우드에 가면 세계 최정상급 영화배우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고 유니버셜스트디오에 가면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착각을 가지게 되며 디즈니랜드에 가면 동화세계, 동년의 세계로 돌아간다.  할리우드, 유니버셜 스트디오, 디즈니랜드를 내놓고도 로스앤젤레스에는 볼거리가 많다. 로스앤젤레스의 3대 유명한 비치인 싼타모니카, 환상적인 항구도시 롱비치와 카탈리나섬, 영화스타와 대부호들이 모여 사는 부의 상징인 비버리힐즈, 로스앤젤레스 상징물의 하나인 월트 디즈니 콘서트 홀, 로스앤젤레스 출생지로 불리는 올베라 거리, 차이나타운, 코리아타운, 그 외에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박물관들이 많다. 로스앤젤레스 시장도 환영사에서 이 점을 강조했다. 그의 환영사를 보면 로스앤젤레스에 대한 개괄적인 평가가 나온다.  《LA 방문객 여러분, LA는 세계 각지에서 찾아오는 방문객 모두를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뒤섞여 하나의 소우주를 이루는 LA는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고 경험할 수 있는 매우 매력적인 도시입니다. 다양한 이웃을 비롯해 무한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끝없는 가능성의 도시가 바로 LA입니다. LA 시민을 대표하여 여러분께 따뜻한 환영의 인사를 건네며, 여러분 모두의 여행이 즐겁고 편안한 경험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를 비롯한 LA시민 모두는 여러분이 LA를 계속 방문하고, 그때마다 LA가 간직한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Come "see my LA!”》  나도 매번 미국에 올 때마다 로스앤젤레스 시장이 환영사에서 언급한대로 로스앤젤레스가 무한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많고 또 방문할 때마다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도시라는 점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사람마다 로스앤젤레스를 좋아하는 이유가 틀리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할리우드가 있어 로스앤젤레스가 좋을  것이고 어린이들에게는 디즈니랜드가 있어 매력적일 것이다. 매력 자체가 거부할 수 없는 것이기에 나한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준 로스앤젤레스를 이 글에 담아볼 가 한다.                                                로스앤젤레스 연혁   지명의 유래로 보면 1779년 44명의 스페인 신도가 집단 촌락을 만들고 촌락 이름을 《우리 천사중의 여왕의 광장(El pueblo de Nuestra Senola la Reina de Los Angeles de Porciuncula)》라고 달았는데 그 이름을 줄이면 지금의 로스앤젤레스, 더 줄이면 LA이고 그 뜻도 《천사의 땅》으로 개괄됐다. 작은 촌락에서 시작된 도시가 점차 항구도시로서 발전하고 급기야 1848년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북쪽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골드러시(Gold Rush)》가 터진다. 미국의 역사와 경제 환경을 크게 바꾸어 놓은 골드러시에 대해 잠깐 언급을 해야겠다.    1848년 1월 24일 이른 아침, 새크라멘토 콜로마에 있는 제재소에서 제임스 마샬이라고 하는 현장 관리인이 근처 물방앗간 맑은 물이 흐르는 곳에서 유난히 눈길을 끄는 여러 개의 노란색 작은 물체를 발견한다. 미국 서부 개척사의 파노라마가 열리는 순간이다. 미국 전역에서 일확천금을 꿈꾼 사람들이 서부로 몰려들었다. 인구 대이동이었다. 미국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도 이민자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중국인들도 금을 찾아 이민 행렬에 끼웠다. 금을 찾아 서부로 몰려드는 인파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한 예로 인구가 불과 천여 명이었던 샌프란시스코는 2년 사이에 정착민이 25배로 폭증했다. 기재에 따르면 골드러시가 1848년부터 1855년까지 8년 동안 계속 되었는데 그 기간 캐어낸 금이 약 5억 5천만 달러에 달했다.  골드러시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널리 알려진 로스앤젤레스가 오늘날에는 뉴욕 버금으로 주변 94개 도시와 커뮤니티와 인구 950만 명을 넘긴, 미국의 두 번째 대도시로 발전한 것이 로스앤젤레스의 연혁이다.  연혁 중 어처구니없는 대목이 하나 있는데 로스앤젤레스가 속한 캘리포니아주를 망라한 서부의 여러 개 주를 미국정부가 1,825만 달러로 1848년 멕시코정부로부터 사들였다는 기재다. 기재에 따르면 1846년부터 1848년까지 있은 멕시코와 미국 간 전쟁에서 미국이 승전하면서 지금의 텍사스 일부와 뉴멕시코, 아리조나, 유타, 네바다, 와이오밍, 콜로라도 일부, 캘리포니아가 미국 땅으로 탈바꿈한다. 세계적으로 매력적인 도시 로스앤젤레스도 영토 확장을 위한 피비린 전쟁의 전리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큰 땅을 1,825만 달러를 받고 그냥 미국에 넘긴 당시 멕스코 정부에 대해 지금의 멕스코인들이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는지가 궁금해진다.  볼거리가 많고 즐길 거리가 많은 로스앤젤레스의 명소를 돌아보노라면 중국의 관광 명소를 돌아볼 때에 비해 느낌이 다르다. 중국의 관광 명소에 가면 명소에 깃든 전설이 많고 거쳐 간 명인들이 많다. 하늘의 옥황상제로부터 왕공귀족, 시인묵객에 이르기까지 명소에서 그 존재를 과시하고 있는 것이 중국 관광 명소의 특징이다. 하여 발 닿는 곳마다 전설과 위인들을 만나게 되고 옛날 옛적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미국엔 별로 전설이 없다. 말 그대로 미국에선 《옛날 옛적》이란 말이 거의 통하지 않는다.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한테는 《옛날 옛적》이나 전설이 통하겠지만. 미국 역사가 짧다고 하면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크게 노할 것이지만 미국 현대 이민사가 200여년 정도로 짧은 것만은 사실이다. 그래선지 로스앤젤레스의 관광 명소 중 천혜의 자연풍경을 내놓고는 대개 미국이란 나라가 생긴 후 축조된 것이다. 때문에 중국의 관광 명소에서는 전설을 읽고 옛말을 듣고 미국의 관광 명소에서는 어제와 오늘을 함께 만난다.  역사는 어디까지나 특기될 위인과 사건으로 후세에 남는다. 흔히 역사에 수록된다고 하지만 사실 인물과 사건이 역사를 만든다. 한 도시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로스앤젤레스가 나에게 주는 매력 역시 이 도시의 역사를 만든 인물과 사건이다.   
8    력사라는 거울 댓글:  조회:3212  추천:3  2012-11-26
   일전에 한 해당기구에서 설문조사를 진행한데 따르면 청소년들 중 력사 지식이 아주 결핍한 것으로 나타났다. 설문조사에 응한 청소년들 중 역사에 대해 흥취를 가지고 질문에 응한 비례가 27%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70%를 웃도는 부류의 청소년들이 력사에 대해 잘 모르고 지어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언젠가 한번 북경의 자그마한 식당에서 연변 룡정시에서 왔다는 젊은이들 몇을 만난 적이 있었다. 한때 룡정예술단에서 전속 작가로 있은 적이 있는 필자는 마치 고향 후배들을 만난 듯한 기분이었다. 한창 기분 좋게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필자가 윤동주 얘기를 꺼내니 뜻밖에도 고중를 나왔다는 젊은이들이 윤동주가 누군지도 몰랐다. 룡정에서 일어난 세계가 주목했던 3.13 반일시위는 더구나 몰랐다. 룡정에서 나서 자랐고 또 고중까지 나왔다는 젊은이들이 그 정도로 력사에 대해 까막눈이였다는 것이 가슴 아팠고 어쩐지 마음이 서글퍼졌다.    지난 한 시기 력사에 대한 교육을 홀시한 것도 원인이겠지만 력사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는 그 마음가짐 새가 주되는 원인이라고 필자는 생각해 봤다.    력사는 민족이 걸어온 발자취이며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비춰보는 거울이기도 하다. 이런 말이 있다. 현재는 모든 과거의 필연적인 산물이며 모든 미래의 필연적인 원인이다. 미래의 가장 좋은 예언은 과거이다.    우리가 력사를 바르게 알아야 하는 것은 지나온 옛 자취를 돌이켜보면서 오늘의 자세를 바로잡고 나아가 미래를 창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라의 미래인 청소년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력사 결핍 하다는 것은 력사에 대해 흥취가 없다고만 볼 것이 아니라 력사라는 이 거울에 오늘을 살아가는 자신의 삶의 자세를 비춰볼 생각마저 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미래 지향성적인 사고가 결핍 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 조선족의 저명한 학자이며 평론가인 정판룡 교수님은 생전에 《우리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제목으로 된 글에서 이렇게 썼다.    《나라나 민족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조국에 대한 사랑도 조국에 대한 료해가 없이 스스로는 생기지 않는다. 중국은 땅이 넓고 자원이 풍부하며 오랜 력사를 가진 문명고국이라는 그런 료해도 없이 중국을 사랑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제 민족에 대한 사랑도 제 민족의 력사, 풍속, 전통, 문화 등에 대한 깊은 리해의 기초 우에서 산생 된다.》    아주 의미심장한 말이다. 그 뜻을 헤아려보면 력사를 모르는 사람은 민족을 모르는 사람이며 또한 조국마저도 모르는 사람이란 것이다.    한 력사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력사를 알아야 하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보다 나은 력사를 창조하고 보다 아름다운 문화와 삶을 꽃피우기 위한 행위로서 만약 그 어느 민족이나 국가가 위대한 력사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력사를 빛내지 못한다면 그 민족의 번영은 기대할 수 없다.》     력사를 알아야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수 있고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야 미래를 더 아름답게 설계할 수 있다는 얘기다.    21세기에 들어선 오늘, 더군다나 21세기 주역으로 나설 청소년 일대들은 물론 국민 모두가 략사라는 이 거울을 다시한번 유심히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오늘 모습에서 미래의 모습을 그려볼 필요를 느껴야 하지 않을가.    
7    <누가 미국을 지키나>(제3편) 댓글:  조회:3736  추천:0  2012-11-25
     비자를 받은 사람은 행운아다. 그러나 비자를 받고 미국에 입국할 때 입국자들은 또 한 번 미국 이민관을 만나게 된다. 대사관의 면접관이 해외 공관에서 미국의 관문을 지켜선 첫 이라면 허리춤에 권총과 범인용 수갑에 곤봉까지 찬 미국 공항의 이민관들은 미국의 관문을 지켜선 두 번째 이다. 한 은 해외 공관에서, 다른 한 은 문전에서 미국을 지킨다. 다른 나라와는 달리 미국은 입국 시 체류 기간을 찍어 준다. 미국 비자를 받으면 만사 대필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미국 비자를 받아도 입국 허용 여부와 체류기간 설정은 미 연방이민국 이민관의 소관이기에 입국 시 미국의 두 번째 파수꾼에게 입국이 거절당하는 일이 자주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미국 입국자들에겐 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한 것은 비자 받을 때부터 입국까지 긴장 상태가 이어지니까.       입국 시 미국 영주권자이지만 미국 생활 중 주차 위반 벌금을 한 번 내지 않은 기록이 있어 재입국이 거절당한 사례가 있는가 하면 값비싼 골프채를 가지고 입국하다가 골프 치고 골프채를 여자 친구한테 그냥 두고 귀국할 것이라고 했다가 이민경향자로 취급되어 입국 거절을 받은 사람도 있다. 지어 입국 시 영어를 잘 하지 못하면서도 이민관이 묻는 말에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 만 불러 입국에 차질을 빚은 황당한 일도 있다.    가령 이민관이 당신은 고 묻는 말에 하거나 는 물음에 라고 했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 가. 이민관은 먼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당신을 정밀 조사실로 보낼 것이다. 정밀조사를 2차 조사라고 한다. 2차 조사는 입국 시 이민관의 현장 판단에 따라 받는 경우가 있고 승객이 비행기에 탑승한 후 미 연방 이민국이 항공사로부터 승객의 이름, 생년월일, 여권번호 등 정보를 사전해 입수해 심사한 후 공항 도착 전 이미 2차 조사 대상으로 분류된 경우도 있다. 9.11 테러사건이 발생한 후 입국자들에 대한 2차 조사가 강화되면서 비행기당 입국심사에 소요되는 시간도 전에 비해 두 배가량 늘어났다. 항공사 관계자들의 소개에 따르면 미국 내 장기체류가 빈번한 방문객이나 해외체류기간이 긴 영주권자의 경우 정밀조사를 받는 확률이 높다.  지금 미 연방이민국은 정확한 미국 방문 목적과 체류지에 대한 구체적인 주소를 원하고 있다. 때문에 미국 입국자는 입국 신고서에 체류지에 대한 구체적인 주소를 적어야 한다. 주소를 잘못 적거나 엉뚱한 주소를 적었다가 발각되면 곧바로 정밀 조사에 넘겨진다. 한국의 한 관광객이 미국 내 체류 주소를 기억 못해 옆자리에 앉은 사람의 주소를 그대로 옮겨 썼다가 이민관에게 발각돼 2차 심사에 넘겨져 4시간 동안 곤욕을 치렀다.  미국이 테러국가로 인정한 나라를 방문한 기록이 있는 사람도 정밀조사 대상이 된다. 예를 들면 조선을 방문한 기록이 있으면 정밀조사에서 이민관은 방문목적에 대해 묻는다. 내 경우엔 조선을 수 차 방문했지만 매번 입국통행증을 사용해 여권에 조선 비자를 남기지 않아 그 것을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섯 번째 미국 입국에서 영문 모르게 나도 정밀조사 대상이 되었다. 한국 같은 나라는 여러 번 나들면 세관 관원이 그냥 입국 날짜를 찍어주면서 좋은 여행 되십시오하고 인사를 하지만 미국은 자주 나들수록 인사는커녕 좀은 이상하게 보는 모양이다. 그 날 이민관은 내게 뭐라고 몇 마디 물었지만 나는 그저 영어를 모른다는 뜻으로 고개만 가로저으면서 왕복 항공권을 내밀었다. 영어를 못하는 나에겐 왕복 항공권은 난 그냥 왔다 귀국하는 사람이지 불법 체류할 사람 아니야라는 뜻을 이민관에게 내비치는 일종의 메시지였다.    왕복 항공권을 보고난 이민관은 뒤에 대고 손을 한 번 들었다. 그러자 인차 거  쿨진 체구의 경찰 한 명이 나한테 다가와 나를 경관복을 입은 두 사람이 컴퓨터 조회를 하고 있는 대기실로 안내했다. 그 곳이 바로 정밀 조사를 받는 곳인 줄 후에야 알았다. 일본인 중국인 여러 명이 말없이 대기하고 있었다. 한 일본인 여자는 영어를 몰라 통역을 대절해 뭔가 열심히 해석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영어를 모르는 나에게 뭔가 물으면 나도 통역을 대절해 달라고 해야 하겠는데 그 말조차 영어로 하지 못하는 신세니 참으로 코 막고 답답한 일이다. 영어를 배우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다행히도 그 날 나는 컴퓨터 조회만 받고 질문 한마디 받지 않았다. 질문을 받지 않았기에 지금도 정밀조사를 받은 이유를 알 수  없다.   후에 안 일이지만 미국에서 대통령도 법에 따라 탄핵이 가능하지만 유독 이민관한테는 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이민관들의 처사가 법에 어긋나더라도  재고를 요구할 뿐이지 법정에 세우지 못하는 게 미국이다. 자신의 판단력으로 비자신청을 결정해 버리는 이민관은 법치 국가인 미국에서 대통령보다 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권력자다.  미 국무부가 최근 발표한 2008회계연도 (2007년 10월 1일-2008년 9월 30일) 비 이민 비자 발급 현황에 따르면 한 해 동안 지구촌 전체에서 871만여 건이 신청돼 660만 건이 발급됐다. 신청서 가운데 211만 건이 거부돼 24.2%의 기각률을 보였다. 미국비자 신청자들 중에서 4명당 1명꼴로 거부당한 셈이다. 우리 내외가 비자를 신청하던 당시 하루에 북경에 있는 미국 영사관을 찾는 비자 신청자가 6백여 명이었다. 그 중 비자를 받은 비율은 20% 정도였다. 대부분이 기각되었다는 얘기다.  여기서 한번 돈 계산을 해볼 필요가 있다. 그 당시 비자 수수료가 인민폐 820원이었다. 그럼 600명이라 치면 하루에 북경에 있는 미국 영사관에만 비자 수수료가 50만 원 가량도 흘러 들어간다. 그 중 비자 받은 비율이 20%에 그친다면 비자 거절당한 480명은 거의 40만원에 달하는 돈을 그냥 던지는 셈이다. 40만원씩 일주일에 닷새면 200만원, 한 달이면 800만원, 그럼 한 해면? 입이 딱 벌어지는 수자라 계산도 하지 말자. 지금 미국 비자 수수료가 인상돼 인민폐로 거의 천원을 육박하고 있다. 비록 비자 받는 비율이 전에 비해 많이 늘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비자 신청에서 거부당하는 비율이 상당이 높은 것만 사실이다. 내 친구 한 분은 여섯 번이나 미국 비자 신청에서 미역국을 먹었다. 며칠 전 메일로 마지막으로 비자 신청하러 심양 미국 영사관으로 간다고 했다. 이번만은 비자 신청에 성공하라고 좋은 기원을 담아 메일을 보냈더니 사흘 후 이란 제목으로 메일을 보내왔다. 메일 보지 않아도 또 돈만 팔고 미역국을 먹은 것이다. 비자 신청에 관한 조언을 주었더니 이번엔 제목을 단념セ이라고 달았다. 미국행을 아예 포기한 것이다. 내 친구 경우 비자 신청이 거절당할 이유가 없다. 조선족 문단에서 크게 이름이 났고 중국 연극계에도 널리 알려진 인물인데다가 환갑 나이니 이민경향을 의심할 사람도 아닌데 왜 여섯 번이나 미역국을 먹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그저 이민관 판단 착오에 그 원인을 미룰 수밖에 없다.  이민관의 판단 착오는 미국 비자 신청자들에게 피해를 가져다준다. 비자 거절로 비자 신청자들이 받는 피해 사례는 많고도 많다. 비자 거부로 친인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사례나 결혼 상대와 견우직녀 신세가 된 사례 같은 건 개인적인 피해에 국한되겠지만 비자 거부로 양국 간 민간 교류에 영향을 미친 사례, 지어 외교 마찰까지 초래한 사례는 미국 이민관들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사례일 것이다.                  
6    <누가 미국을 지키나> (제2편) 댓글:  조회:3317  추천:0  2012-11-23
 미국을 납세자들이 지킨다고 하지만 미국을 방문비자나 여행비자로 드나드는 나에게는 미국을 지키는, 말하자면 파수꾼은 미국의 납세자가 아니라 미국 관문을 지키고 있는 이민관이다. 미국에 발을 들여놓으려면 꼭 두 번 이민 관원을 만나야 한다. 첫 이민 관원은 비자를 내주는 중국 주재 미국 대사관 영사부 직원이다. 미국 방문 관련 모든 서류를 준비해 가지고 비자 수수료를 낸 뒤 날짜를 받아 비자 관련 면담실에 가면 자그마한 뙤창 너머로 영사부 직원이 높이 앉아 내려다보고 있다. 그 앞에 서면 마치도 판사 앞에 나선 피고나 원고가 된 느낌이 든다.  비자 신청에 관해 지침이 많다. 우선 제출할 자료를 잘 준비해야 한다. 초청장 원본과 경제 담보서는 물론이고 비자 신청서, 본인의 신분증, 직업 증명서, 수입 증명서, 호구부, 부부 동반인 경우엔 결혼증, 부부 증명 관련 공증서외에도 명함도 지참해야 한다. 명함 지참을 특히 부탁한 사람은 2001년 비자 신청 시 유료로 신청서를 영어로 작성해 준 여성분이다. 그 당시 미국 영사관 곁에는 책상 하나를 앞에 놓고 비자 신청자들에게서 일정한 액수의 요금을 받고 자문을 제공하고 신청서를 대신 써주는 분들이 꽤나 되었다. 여러 사람들 중 우리 내외는 외모 상 수더분해 보이는 30대 중반의 여성을 택했다. 영어를 모르는 우리 내외 신청서를 대신 대필해 주면서 그 여성이 당부한 말이 명함 지참 필수였다. 사실 8분가량 진행된 면담에서 큰 은을 낸 것이 내 명함이었다. 그날 우리 내외를 맞은 면담 직원은 40대 초반의 남자직원이었다. 앉은키가 훌렁 커 보였고 이마가 많이 까졌는데 인상을 보면 그리 차지도 덥지도 않은 그런 모습이었다.  당시 부부가 함께 비자 신청을 하면 비자가 잘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부부 동반이면 이민 경향이 더 짙으니까. 비자 비준 여부는 중미 관계 변수도 작용한다. 한 때 미국에선 중국 유학생들이 미국 유학 중 미국의 첨단 기술을 뽑아가는 첩자로 활약하고 있다고 언론이 떠들어댔다. 2006년 미 대사관은 여름 방학에 귀국한 중국 유학생 5백여 명에게 입국 비자를 내주지 않아 큰 물의를 빚었다. 재수 없게 그 해 북경공대를 졸업한 아들이 미국 비자를 신청하게 되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대학원의 입학통지서와 대학원 총장의 친필 서한까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대사관 면접관은 제출한 서류를 대충 보고는 5분 내로 유학 동기 불순이라는 구실로 비자 신청을 거절했다. 처음 발급받은 아들의 여권 맨 마지막 폐지에 비자 거절 표시로 면접관이 낸 동그란 구멍 하나를 내려다보면서 내가 하고 소리 지르자 자존심이 크게 상한 아들이 받는 말이 였다. 아들은 그 맹세를 행동에 옮겨 그 해 몇 달 동안 일어공부를 열심히 하고는 이듬해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우리 내외가 처음 비자를 신청한 2001년은 중미관계가 마치도 우리를 대한 면접 관원의 표정처럼 그리 덥지도 차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면담 시 금기사항이다. 비자 신청을 내본 사람들이 거론한 금기사항인데 미국 비자 신청을 하게 될 분들에게 도움이 될 가 싶어 참고로 제공한다. 미국 비자 신청 시 반드시 정장을 해야 한다. 면담직원과 마주서면 우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말을 하자. 꾀죄죄한 꼴을 보여서는 안 된다. 면접관 앞에서 비굴한 웃음을 지어서는 안 되지만 무뚝뚝하거나 거만한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 미국인들은 떳떳이 쳐다보지 않으면 이상스럽게 생각하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거나 허리를 굽실거리면 혐의자로 보는 경향이 있기에 면접관의 눈을 정시하되 쏘아보거나 째려보지 말아야 한다. 조선 민족의 예의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바로 쳐다보면 결례가 되지만 미국에선 상대방을 눈을 정시하지 않고 대화하면 상대방에 대한 무시로 된다.  면접관이 묻는 말에 시시껄렁한 말을 늘여놓지 말고 간단명료하게 요점만 말해야 한다. 요점만 말하되 상대측이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은 삼가야 한다. 서로의 문화권이 다르기에 상대방이 이해가 갈 수 있는 말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말 한마디에 화를 부르는 경우도 종종 있다. 내 후배의 경우 말 한마디에 비자 신청이 기각되었다. 그 후배는 북경에서 사업체 몇 개를 가지고 있는 이사장이다. 투자 고찰 겸 세계 한상대회 참석차로 미국행을 택했는데 면접관이 명함을 요구했다. 후배는 명함을 몸에 지니지 않았다고 하니 면접관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실례지만 이사장이면 한 달 노임이 얼마나 되는가 물어왔다. 미국에서도 여자 나이와 상대방의 노임 액수에 대해 묻는 것은 몰상식에 속한다. 그러나 면접관은 이런 물음을 물을 자격이 있다. 후배는 물음 자체가 너무 몰상식하다고 생각해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난 노임이 없다고 면접관의 물음을 잘랐다. 회사가 내 것인데 노임은 무슨 노임이라는 뜻도 내포된 말이다.  미국에선 회장이라도 매달 노임을 받는다. 그런 문화권에 자란 면접관에게 노임이 없다고 하면 틀림없이 명함만 손에 들고 다니는 유령 회사 이사장으로 보일 수밖에. 하긴 지금 명함에 이사장이다 회장이다 총 경리다 제멋대로 찍어가지고 사기 행각을 펴는 유령 회사 들이 적지 않으니까. 내 후배는 그 말 한마디로 비자 신청이 기각됐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상대방이 살아온 문화적 배경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주의보로 될 사례다. 또 다음 금기 사항!  면담직원에게 거절을 당할 경우 인차 창구에서 물러서야지 그냥 붙어 서서 구구히 설명을 하지 말아야 한다. 설명 해봤댔자 들어주지 않으니까.  구구히 설명하는 실례를 내가 직접 목격했다. 첫 비자를 신청할 때 바로 내 앞에 섰던 늙은 양주다. 보통 노인네들은 아들이나 딸이 보낸 친척 방문 초청장을 갖고 비자 신청을 한다. 노인네들의 비자는 잘 나오는 편이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내 앞에 섰던 노인네는 면접관한테 를 맞았다. 두 노인네가 겨끔내기로 설명을 한참 했지만 면접관은 두 눈을 책상에 내리 깔고 서류만 정리하고 있었다. 밖에 있던 인턴 요원이 비자가 거절당했으면 3달 후 서류 잘 챙겨가지고 오라고 했지만 노인네들은 창구에서 물러서지 않고 그냥 소귀에 경 읽기로 해명만 해댔다. 노인네들의 소귀에 경 읽기는 대사관 면접관이 짜증스런 표정으로 창구의 휘장을 내려놓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듣지 않는 설명을 구구히 하는 노인네가 딱해 보였지만 휘장을 내려버리는 면접관 또한 몰인정해 보였다. 앞에 선 사람이 를 맞으면 재수가 없다는 말이 비자 신청자들 중에 유행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내외가 재수 없는 사람이 돼버렸다. 은근히 노인네들 때문에 재수 옴에 붙을 가 걱정하면서 조심스레 준비 서류를 뙤창 안으로 들이 밀었다. 이것저것 서류를 뒤적이면 면접관이 지나가는 말로 명함 있으면 보여줄 수 있겠는가고 청을 들었다. 이미 준비했던 차라 나는 제꺽 내 명함을 건넸다. 중국국제방송국이란 글자가 영어로 찍힌 명함이었다. 명함을 보고나서 면접관은 내가 제출한 서류를 한 쪽으로 밀어놓으며 다른 창구에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처음 비자를 신청한터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데 뒤에 섰던 나이 지긋한 분이 행운이군. 하면서 내 어깨를 가볍게 쳤다. 한 시간 남짓이 기다리니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비자 신청 성공이었다. 비자를 받은 후 며칠 지나 한국 대사관에서 있은 파티에서 우리 내외는 생각밖에도 우리 내외 면담을 담당했던 미국 대사관 면접관을 만났다. 와인 한 잔 손에 들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내가 비자 내줘 고맙다는 인사를 하자 그 면접관이 하는 말이 희한하다.    면접 시 면접관은 제출 서류를 보면서 몇 분 내로 나름대로 감을 잡는다고 한다. 서류야 거의 비슷하겠지만 면접관이 받는 느낌은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면접관이 감을 잘 못 잡아 비자 신청을 거절해도 할 말이 없다. (다음 날 계속 이어집니다)  
5    《세계종말》이 준 삶의 여유 댓글:  조회:3386  추천:2  2012-11-20
이 세상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말을 골라보라면 아마 세계종말이라는 말일 것 같다. 같은 의미지만 세상이 끝난다는 말보다도 세상 살아가는 인간들이 삶을 영위하는 지구가 박산난다는 말은 더 무시무시하게 안겨온다. 지구폭발, 과학 환상소설에서나 나오는 훼멸적인 무시무시한 장면을 재난 영화《2012년》이 보여주고 있다.   지구 대폭발 이론에 따르면 우주의 나이는 150억년, 태양과 지구의 나이는 각각 약 50억년과 45억년 쯤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나이가 45억년을 먹은 지구가 폭발한다고 예언한 사람이 바로 400여 년 전 의술을 호구지책으로 간주해왔던 노스트라다무스다. 그는 생전에 남긴 《여러 세기》라는 시집에서 세기말의 재난은 1999년 7월이라고 예언했다. 그 예언에 따라 이 세기 70년대에 일본의 로켓전문가인 五島勉이 전자계산기로 추산한 결과 지구의 폭발이 1999년 8월 18일에 일어난다고 했다. 그의 예언에 따르면 1999년 8월 19일 태양, 달, 지구를 제외한 태양계의 8개 큰 행성들이 십자가식으로 배열되는데 각 행성들의 힘이 태양으로 하여금 평소보다 더 많은 고 에너지 입자를 행성들에게 주는데 이 영향으로 지구에는 이상기후와 큰 재난이 와서 나중에는 지구가 폭발한다고 했다.   예언은 예언이고 망발은 망발로 그친다고 했다. 1999년 8월 18일이 이미 지났다. 태양은 여전히 머리위에서 빛나고 있고 인간을 실은 지구는 그냥 태양을 에돌고 있다.   나로 말하면 이른바 《세계종말》을 두 번 겪었다. 처음에 겪은 《세계종말》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새삼스럽지만 여기서 언급해본다. 그 때가 한국 서울을 방문 중이던 1992년 10월이다.     한국 서울에 있으면 가끔 공공장소에서 설교자들을 만나게 된다. 유람객이 모이는 공원이나 관광지에서 찬송가를 열창하는 설교자가 있는가하면 지하철이나 역전 대합실에서 남이 듣던 말든  열심히 성경을 풀이하는 설교자들도 있다. 그들은 대체로 하느님 가라사대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복음》을 전한다. 어떤 설교자들은 집에까지 찾아온다.   한번은 내가 집에 혼자 있는데 초인종소리가 났다. 장보러 갔던 아내가 왔나싶어 문을 열여 보니 낯모를 중년 여인이 서 있었다.  《누굴 찾으십니까?》  《집주인이세요?》  《전 이집 손님입니다.》  《어디서 오셨어요?》   아마도 중국의 가두 거민소조 조장 같은 역을 맡은 분인가보다.  《중국에서 왔습니다.》   중년 여인은 먹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두 손을 맞잡으며 야한 반가움을 나타냈다.  《무슨 용건이라도…》  《실례지만 잠간 방에 들어갈 수 없을 가요?》   거절할 수 없었다. 여인은 방안에 들어서자 부터 내가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냈다.  《얼마나 고생 많으셨어요. 우린 다 알고 있어요. 주님께서도 죄다 알고 있어요. 주님을 아시죠? 웃으시는걸 보니 알고 계신가보군요.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들으신 적이 있으세요? 못 들으셨다니 참 유감이네요.》   이렇게 시작한 그녀의 설교는 끝이 없었다. 내가 약속한 분을 만나러 부근 다방에 나가야겠다고 해서야 여인은 설교를 그만두었다.  《꼭 주님을 믿으시고 주님의 사랑을 받으세요.》   여인은 떠나면서 책 한권을 주었다. 그날 저녁에 찾아온 한국친구한테 그 책을 내놓으면서 성경공부 한 번 잘했다고 했더니 그 친구는 책 제목을 일별하곤 대뜸《사이비종교군.》라고 하는 것이었다.  《사이비종교란 대체 무엇입니까?》  《무신론자인 김형에게 구구히 설명했댔자 더 어리벙벙하겠으니 간단히 말하지. 진짜가 아니고 가짜종교라고만 알아두면 돼요.》   가짜면 사이비종교, 그럼 진짜는 …  《참 종교라 하지.》   주님에게도 가짜 신도와 진짜 신도가 있는 모양. 그 뒤로 며칠 후 나는 지하철에서 입에 거품까지 물고 설교해대는 설교자를 대하게 됐다. 나이가 40대로 보이는 설교자는 여느 설교자들처럼 말끝마다 주님의 사랑을 거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한테 어서 가자고 호소했다.  《이제 곧 큰 환란이 옵니다. 어떤 환란인가 우선 큰 지진이 일어나 사람 사는 육지가 바다 속으로 꺼져 내리고 도처에서 용암이 분출해서 사람들은 타죽고 숨 막혀 죽고 바다에 빠져 죽습니다. 또 다른 환란은 기근인데 그 기근이 어떤 기근인가하면 먹을 것이 없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기근입니다.》   여느 설교와는 달리 죽음을 거들며 듣는 이들에게 겁부터 주더니 나중엔 아예 사람이 사람을 먹는 식인사회로 몰고 간다.  《마지막 환란은 핵전쟁입니다. 인종은 멸하고 지구는 박산 나고…》   설교자는 아예 지구까지 우주에서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정신병원에서 도망쳐 나온 환자가 아닙니까?》   서울에서 사시는 외삼촌이 나의 물음에 나직이 답을 주었다.  《보다시피 양복입고 넥타이매고 다니는 멀쩡한 녀석인데 사이비종교에 미쳐버려서 저러는 거야.》  《가짜 종교?》   종교를 믿을 려면 믿되 미치지는 말라는 종교격언이 있다고 한다.  《저 녀석은 보통 미친 게 아니라 아주 환장했어.》   환장한 광신도는 그냥 지껄여댔다.  《세계는 종말을 맞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이 망할 때면 미리 알려 줍니다. 노아시대에 노아에게 미리 알려서 방주를 만들게 하시듯이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환란에서 구해주시고 저 주님이 1992년 10월 28일 24시에 재림합니다. 그날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 천국에 가서 만복을 누립시다.》   알고 보니 광신도는 종말론자였다. 내가 종말교 신도를 처음 대한 것은 1991년 8월 중국의 하문시 어느 호텔 로비에서였다. 그날 저녁식사를 일식으로 하자고 한국에서 온 친구와 함께 호텔에 들어가니 호털 로비 한쪽에 놓여 있는 피아노주위에 숱한 외국인들이 모여서 있었다. 우리가 커피 한잔을 들고 있는데 외국인들이 피아노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호텔 대청에서 노래를 뽑는다는 것은 그것도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스물대여섯이 합창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였다. 그 어떤 상념에 잠긴 표정을 지은 채 노래를 부르는 외국인들의 진지한 모습을 보매 술에 취한 주정뱅이들은 아니었다. 영어로 부르는 노래여서 가사 뜻을 알 수 없었다.  《저 분들이 지금 무슨 노래를 부릅니까?》   나로선 궁금증을 풀고 싶었다.  《주님께서 데려가 달라고 애원 애원하고 있어요.》   영어에 능한 내 친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곤 말을 이었다.  《저 분들은 종말교 신도들인데 세계의 종말이 온다고 주님의 재림을 맞아 천국으로 가자고 저러고 있어요.》   그날 나는 친구한테서 종말교에 대해 대충 얻어 들었다. 종말교를 일명 말세교라고도 한다. 말세란 예수가 탄생해서부터 다시 재림할 때까지의 세상을 뜻하는데 예수의 재림과 더불어 세상은 끝난다고 믿는 것이 종말교라고 한다. 예수의 재림이 언제인가, 다시 말하면 세계의 종말이 언제 어느 때인가에 대해 3세기쯤부터 서방세계 종말교 신도들은 오늘까지 셀 수도 없이 세계 종말을 예언해왔지만 지구는 그냥 생령들을 싣고 돌아가고 있다.   종말교 광신도의 말대로 1992년 10월 28일 24시에 주님이 재림한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서울에서 세계의 종말을 보게 된다. 주님만 믿으면 재림한 주님과 함께 천국으로 간다는데 나처럼 주님이 뭔지도 모르는 인간은 어디에 갈 거냐.  《지옥으로 갑니다. 주님을 맞이하지 못한 사람은 무서운 지옥에서 죽을 래야 죽을 수 없고 살래야 살수도 없는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자네 지옥 한 번 가봤어?》   외삼촌이 듣다못해 한마디 던졌다.  《가보았습니다. 너무너무 끔찍한 곳이었습니다. 흉악하게 생긴 마귀가 채찍을 들고 무섭게 매질하면서 그냥 뛰라고 채찍을 들고 무섭게 매질하면서 그냥 뛰라고 고함치기에 바닥을 보니 바늘을 꼿꼿이 세운 바늘길이였습니다. 마귀의 채찍이 무서워 뛰면 발은 바늘에 수없이 찔려 피가 샘솟듯 하고 쓰러지면 마귀가 휘두른 채찍이 살점을 뜯어내고 아- 그 고통 이루다 말할 수 없습니다.》   광신도는 몸을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남이 못 가본 지옥까지 가봤으니 자넨 세상 한 번 잘 살았군.》   외삼촌은 쓰게 한 번 웃어보였다. 그 뒤 며칠 지나지 않아 광신도가 말한 예수님이 재림한다는 날이 왔다.   1992년 10월 28일, 한국은 《세계의 종말》을 지켜보고 있었다. 해당 부분의 집계에 따르면 150여개 교회의 종말교 신도 8천여 명이 속세와 모든 인연을 끊고 주님을 맞는 예배에 들어갔다. 미친 듯이 손뼉을 치거나 방바닥을 두드리거나 소리소리 찬송가를 부르는 신도들이 텔레비전 화면에 담겨지기도 했다. 신도들 중 수억 되는 재산을 교회에 바친 신도가 있는가 하면 직장생활을 포기하고 학업을 중단한 신도도 있었고 아예 탈가한 신도들도 적지 않았다. 부산에서는 신도 20여명이 27일부터 행방을 감춰 검찰과 경찰이 동원되기까지 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은 으슥한 산골짜기에서나 혹은 그 어느 동굴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다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면 집단 자살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경찰은 수사에 나섰다.   그날 나와 아내는 종일 집안에 들어앉아 텔레비전 화면만 주시했다. 광신도들의 말대로 세계의 종말이 어떻게 오는가를 지켜봤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밤 12시, 그러니까 예수님이 재림한다는 시각이 가까워옴에 따라 텔레비전 화면에는 열광하는 종말교 신도들의 모습이 자주 비치였다.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는 신도들의 모습을 보니 어쩐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열광적으로 《충성무》를 췄던 그 시절이 생각난다.   그 시절 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일이 하나 있다. 《문화대혁명》 광란이 한창이던 어느 하루 한 정신병환자가 병원에서 도망쳐 나와 연길시 중심가인 복무대루 앞에서 퇴근하는 사람들을 막고 《충성무》를 췄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 점심밥곽이 든 가방을 땅에 내려놓고 그 정신병환자를 따라 열심히 《충성무》를 췄다. 환자 찾으러 나온 간호원이 사람들에게 앞장서 춤을 추는 사람이 정신병환자라고 하자 사람들은 오히려 그 간호원을 반혁명분자라고 그 자리에서 투쟁대회를 열었다. 한쪽에서는 정신병환자를 따라 열심히 춤을 추고 다른 한쪽에서는 간호원에게 개패를 메워 성토하는 그 광경이 지금도 가끔가다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사실 그 시절 사람들은 정치광란증에 허덕였다. 정치광란증도 일종 정신병에 속한다. 정신병환자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스스로 영원한 욕망의 만족과 환각의 경험을 체험한다고 한다. 지금도 광란증에 걸린 사람들이 어떤 욕망과 환각을 체험하고 있을 가가 궁금스럽다.   재림하는 예수님을 맞는다고 법석을 떨어대는 광신도들이 그 날 광란 끝에 맞은 것은 어떤 결말이었는지 아래에 계속 소개한다.   정각 12시. 《휴거》, 말하자면 《예수님》은 재림하지 않았다. 12시에 예수님이 공중에 나타나면 날아 올라가 예수님과 함께 천국으로 간다던 광신도들은 허탈한 모습으로 탄식만 내뿜었다.   한바탕 소동으로 끝나버린 광란, 그 광란이 남긴 것은 허탈뿐이다. 그것을 달래려고 일부 교회에서는 《연기론》을 내걸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재림하는 날짜를 연기했다》는 것이다. 자료에 따르면 한국에서도 일찍 1844년  종말론교회의 예수재림예언에 이어 1914년과 1930년에 종말계시, 예수재림예언이 있었는데 번마다 예언이나 계시가 빗나갔다. 그러자 교회 측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예수님》이 재림을 뒤로 미루었다고 했다. 그들의 말대로 《예수님》이 재림을 연기하신 탓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세계종말이 오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사실 난 그들의 말대로 세상이 망해 지옥에라도 한번 가볼 가 했는데 하하하…》   사람 사는 곳의 기분을 험악하게 만들던 소동이 끝나니 농말이라도 던져볼 여유도 생긴다.  《전 그래도 광신도들의 덕분에 천국구경이라도 한번하게 됐다고 생각했는데요.》  아내도 안도의 숨을 내쉰다. 우리에겐 지옥이나 천국이나 다 그 어떤 관광지처럼 한 번 가볼만한 곳같이 여겨진다. 전생에 덕을 쌓으면 간다는 천국과 악을 남기면 굴러 떨어진다는 지옥을 거리낌 없이 농말에 담아보는 것 또한 우리만이 가진 삶의 여유가 아닌가 싶다.   속담에 꿈에 죽으면 장수한다는 말이 있다. 그 속담대로라면 이른바 《세계종말》을 두 번씩이나 당해본 우리 내외는 장수할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에 절로 마음이 흐뭇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일명 재난 영화라고 하는 《2012》은 그래도 성경에서 나오는 《노아의 방주》까지 등장시키면서 세계 종말은 선고하지 않았다. 이 영화는 어쩌면 방금 막을 내린 유엔 기후변화대회가 취지로 삼고 있는 지구 살리기를 위한 인류에 대한 경고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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