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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이의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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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고향에 부치는 편지 댓글:  조회:1560  추천:0  2020-01-31
 신종 코로나가 무한에서 발병한 이래 항상 설마 하면서 마음을 졸였던 일이 끝내 터지고 말았습니다. 이미 중국은 물론 세계 어느 지역도 안전지대가 없다는 것을 실증해주고 있는 신종 코로나에 고향마저 신종코로나에 뚫렸습니다.   내가 태여난 보람을 걸고 인생이 첫 자국을 찍었던 곳, 딱지치기, 다마치기, 팽이놀이, 쪽발기 타기를 함께 하던 소꿉친구들이 지금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여 손주들의 재롱으로 여생을 즐기는, 내 동심이 파랗게 살아있는 고향이 어쩌면 이번에 뚫렸습니다.   어디에 가도 우리말이 정답게 들려오고 아이들이 우리글을 읽는 낭랑한 소리가 들리던 곳, 나의 삶에 나래를 달아준 정든 모교에서 내 후배, 그 후배들의 후배, 또 그 후배들의 후배들이 대를 이어 나래를 굳히던 고향이 어쩌면 이번에 뚫렸습니다.   사랑의 어섯눈을 뜨게 해주고 지금도 내가 사랑하는 분들, 또 나를 사랑하는 분들이 나를 항상 지켜봐주시고 격려의 말씀을 주시고 사랑을 나누어 주시고 있는 고향이 어쩌면 이번에 뚫렸습니다.   타향에서도 항상 두 눈에 담고 그리움을 달랬던 곳, 전근된 후 북경 생활에 적응이 되지 않아 고향의 후한 인심이 그리워 다시 환고향할 생각마저 하게 했던 마음의 전당, 지난 사스 때 여차하면 모든 걸 뿌리치고 고향 간다면서 “내 뒤엔 항상 고향이 있다”고 호언장담을 할 정도로 내 인생의 버팀목이 되여온 고향마저 어쩌면 이번에 뚫렸습니다.   마치도 느닷없이 도둑놈한테 집이 털린 느낌입니다. 허망감, 좌절감이 엄습하지만 스스로 떨쳐내고 있습니다. 워낙 고향이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백두산이 성산으로 그냥 천하를 굽어보고 만민이 성산을 우러러보고 있는 한 태고연한 고향은 힘이 있습니다.   두만강 해란강 전설의 강, 기적의 강이 그냥 옥토를 적시고 마음을 씻어주고 있는 한 기적의 고향은 힘이 있습니다.   선구자의 노래가 그냥 울리고 엄동설한을 이겨내고 봄이면 어김없이 진달래를 피우는 양지바른 언덕에서 선렬들이 미소를 짓고 굽어보시고 있는 한 영웅의 고향은 힘이 있습니다.   례절 바르고 인품이 넉넉한 분들이 고향을 지키고 있고 멀리 타향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항상 고향을 그리고 고향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고향사람들이 있는 한 마음의 고향은 힘이 있습니다.   워낙 고향이 막강한 힘이 있기에 “고향이여 힘내시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힘을 보태기만 하면 됩니다. 새해 진달래가 동토를 녹이고 다시 꽃을 피울 때가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제 꽃피는 계절이면 인적이 거의 끊겼던 거리가 활력으로 넘치고 초조와 불안, 짜증과 불만으로 주름진 얼굴에 미소와 웃음이 실리고 해빛 밝은 교정에서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꿈을 불러오고 후한 인심으로 만방의 벗님네들을 다시 불러들일 때 나는 고향의 노래를 목청껏 부르겠습니다.   고향산 기슭에 올라서니 사철 푸른 소나무 반겨주고 장원들 노래 소리 들려오누나 아 사랑스런 산천이여 아 내 정든 고향이여 조국의 변강이여…
103    “성실수신(诚实守信)” 댓글:  조회:2359  추천:0  2019-01-28
 정부는 새해벽두부터 성실하고 신용있는 국민, 정부가 되자는 슬로건을 각별히 각광시키고 있다. 이 슬로건을 한마디로 줄이면“성신(诚信)”이다.  “성신(诚信)”은 “성실수신(诚实守信)”이란 성구애서 나온 말인데 우리말로 풀이하면 성실하고 신용을 지켜야 한다는것이다. “성신(诚信)”은 이미 몇 해전 정부 총리의 정부실무보고에서 제기되였고 또 어느 해인가 대학입시의 어문시험 작문 시제로 나오기도 했는데 왜서 올해 새삼스럽게 다시 각광을 받을가? 심사숙고할 과제임이 분명하다.  성실과 신용는 민족의 종합적인 자질의 구현이자 현대 문명의 기석이고 표징이다. 인간사이에 성실과 신용이 없으면 남는것이란 거짓뿐이고 기업과 기업사이에 성실과 신용이 없으면 사기행각만 있을 뿐이며 정부가 성실과 신용를 잃으면 사회의 불안정이 초래될 뿐이다.  여기서 성실로 신용를 쌓은 이야기를 잠간 짚고 넘어갈가 한다. 세계 상계에서 백화점의 왕으로 불리운 미국의 존 와너메이커(John Wanamaker)는 어린 시절부터 성실과 신용을 가장 중히 여겼다.  소년시절 그는 담임선생한테서 책 한 권을 산적이 있다. 그 책값이 2달러 75센트인데 당시 그의 저금통에는 37센트 밖에 없었다. 비록 돈은 모자라지만 그 책은 꼭 사서 봐야 할 책이였다. 하여 그는 선생님에게 이런 청을 들었다.  “제가 매주 조금씩 돈을 갚아도 되겠습니까? 열심히 일해서 그 돈을 꼭 갚겠습니다.”  선생님은 그의 진지한 표정에 쾌히 승낙했다. 그 날 이후 그는 나머지 책값을 벌기 위해 매일 짬만 있으면 벽돌공장에 나가 삯일을 했는데 책 산 돈을 갚는데 꼬박 1년 반이 걸렸다고 한다. 꼬박 1년 반을 열심히 일해 빚진 돈을 갚고야 만 그는 커서 상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에도 성실과 신용, 그리고 친절을 생명처럼 간주했다. 그것이 바로 그를 세계 “백화점 왕”으로 되게 했던것이다.  성실하고 신용을 지키는것은 상업도덕에서 가장 중요한 규범이다. 상업경제가 비교적 발달했던 명, 청 시기에 상인들은 성실과 신용을 성공의 비결로 삼았다고 한다. 지금도 시장경제의 기본적인 신조와 준칙이 바로 성실과 신용의 원칙이다. 즉 성실로 신용을 쌓는것이다.  성실하고 신용를 지키는것은 중국의 전통적인 도덕에서 가장 중요한 규범의 하나이기도 하다. 공자는 한사람이 “성실과 신용을 잃으면 립신양명 할수 없다”고 했다.  이런 실례가 있다. 독일에서 공부하는 한 중국 류학생이 지하철을 탈 때 지하철 입구의 란간이 아주 낮은것을 보고 표를 사지 않고 그냥 뛰여넘어 들어갔다. 어느 하루 그 류학생이 면접차 한 회사를 찾아갔는데 그가 말을 꺼내기도전에 회사측의 거절을 받았다. 회사측의 거절을 받은 원인은 단 하나, 그것인즉 지하철 표마저 사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가지 않는 사람이니 회사직원으로 쓸수 없다는것이였다. 이 실례는 사소한 일에서도 성실하지 못하고 신용이 없는 사람은 사회생활에서나 인간교제에서나 모두 인정을 받을수 없다는 단적인 실례로 되겠다.  필자도 창작생애중 성실하지 못하고 신용을 지키지 않는 자들을 종종 대하게 되였고 또 그런 자들로 인해 피해를 입은적도 있다. 비록 거액은 아니지만 평소 알고지내던 사람한테 돈을 사기당한적도 있고 영화를 찍는다, 대형 다큐멘타리를 제작한다, 획기적인 예술무대를 꾸민다는 감언리설에  넘어가 시나리오, 무대예술 각본, 다큐멘타리 대본을 열심히 써주었다가 고배를 마신적이 여러번 된다. 헛고생만 했지만 필자는 사기행각을 벌인 장본인들에게 따끔한 충고를 주었다.  “작가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자는 사실 돈을 사기친 자들보다 더 비렬한 사기꾼들이야. 작가의 자존심은 작가의 존엄이니 함부로 그 존엄을 건드리지 마. 그리고 한마디 더 보탤 말은 성실과 신용를 잃으면 인간으로서의 존재가치를 잃은것이고 인간되기를 거부한것이니 이 말 명심해!”  성실과 신용은 또한 예로부터 중국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으로 되여왔다. 중국의 고대 사상가들은 성실과 신용을 천하를 다스리는 주요한 수단의 하나로 간주해왔다. 당나라시기 당태종을 보좌해 정사편찬에 큰 기여를 한 학자이자 재상인 위징(魏征)은 “성실과 신용은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고리”라고 했다.성실하고 신용있는 사회는 어디까지나 성실하고 신용있는 국민들과 정부가 꾸려나가야 할 사회가 아닐가.    
102    한해를 마감하는 길목에서 오헨리를 만나다 댓글:  조회:1994  추천:0  2019-01-19
  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겨주던 단풍이 한 잎 두 잎 락엽으로 떨어져 내리면 지나온 한해를 마감하는 길목에 들어서게 된다. 바람에 날려가고 날려오는 락엽을 밟으며 산책길에 나서면 저도모르게 락엽보다 가을의 마지막 “선물”이라는 앙상한 나뭇가지에 매달린 잎새에 눈길이 간다. 오헨리의 명작 “마지막 잎새”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페병으로 절망에 빠진 한 소녀가 창문너머로 보이는 담쟁이덩굴 잎이 다 떨어지면 생을 마감한다고 괴로워한다. 그런데 혹독한 추위에도 단 한잎만 지지않고 벽에 달라붙어 있다. 자신의 생을 마감할 그 잎이 떨어지길 기다리던 소녀는 나중에야 떨어지지 않는 “마지막 잎새”의 비밀을 알게 된다. 그 잎새는 평생 화가라는 명함 한장 내밀지 못했던 무명 화가가 마지막 유작으로 소녀에게 그려준 “생명의 잎새”였고 화가 생애의 최고 걸작이였다. 마지막 잎새까지 다 떨어지자 소녀에게 희망을 주려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 혼신을 다하여 “생명의 잎새”를 그려놓고 숨진  늙은 화가의 숭고함에 지금도 한껏 경의가 간다.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는 “꺼져가는 생명의 불꽃을 살리기 위한 무명 화가의 숭고한 예술혼이 아름답게 그려진 작품으로 오헨리의 단편소설중  가장 유명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렌리는 이 소설을 감옥에서 썼다. 은행 직원이였던 오헨리는 공금 횡령 혐의를 쓰고 타국으로 피신했다가 안해가 위독하다는 련락을 받고 귀국했지만 안해의 림종을 지키지 못하고 감옥에 갇히게 된다. 어찌보면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는 위독한 안해에게 주는 “생명의 잎새”이기도 하다. 비록 그 잎새가 오헨리의 안해에게는 “생명의 잎새”가 되지 못했지만 그 “잎새”는 희망의 상징으로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필자는 올해 가을 피치못할 사정으로 병원신세를 한 열흘간 지게 되였는데 그 때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를 또 한번 읽었다. 문학에 어섯눈이 뜨면서 명작가의 명작에 대한 호기심으로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를 첨 읽었다. 그러나 이 소설을 다시 읽으니 감회가 예전과 같지않다.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는 마치도 필자에게 주는 “희망의 잎새”가 아닐가싶은 생각이 든다. 절망한 자에게는 희망을, 허무한 생을 사는 자에게는 생의 숭고함을 알게하는것이 곧 명작임을 절감했다.  오헨리가 그린 “잎새”에 비견이 될 “횃불”이 있는데 그 “횃불”은 시인 엠마 나자루스의 시 “새로운 거상”이다. 이 시는 미국 독립 100주년 축시로 자유녀신상 받침대에 새겨졌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이다.  “지치고 가난하고 자유를 숨쉬기를 열망하는 가련한 사람들을 나에게 보내다오 폭풍우에 시달린 고향없는 자들을 나에게 보내다오 황금의 문 곁에서 내가 희망의 횃불을 높이 들리니 …”  한해를 마감해야 할 길목에서 오헨리를 만나 엠마 나자루스까지 거들게 된것이 행운이 아닐까. 지나온 한해가 “보람찬” 한해였나 아니면 “다사다난”한 한해였나를 불문하고 사람들은 또다시 새로운 기대에 젖어 “송구영신” 준비에 분주해진다. 분주함을 잠깐이나마 뒤로하고 희망을 주는 “잎새”와 “횃불”을 떠올려보면서 마음을 추스려봄도 좋을듯 싶다.  오헨리와 작별인사를 나누기전 필자가 물었다. “감옥에서 시작된 창작생애에서 무려 3백여편의 단편소설을 남기게 된 비결은?” “눈을 돌리는 곳마다 이야깃거리가 있습니다. 세상만사가 모두 작품의 소재가 됩니다. 오늘 당신과의 만남에도 이야깃거리가 있습니다.”  “아무리 일상적이고 진부한 삶이라도 진지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상상력을 독자들은 작가의 마술적 힘이라고 평가하고 있는데”  “마술적 힘이 아니고 난 그저 독자들의 가슴을 한순간이나마 따뜻하게 해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오헨리가 독자들에게 주려는 그 따스함은 생의 희망이고 용기이고 인간에 대한 사랑이 아닐가. 오헨리는 독자들에게 누군가가 “마지막 잎새”를 그려주기를 기다리기보다도 자신이 먼저 남에게 “마지막 잎새”로 남아줘야 한다는 계시를 주고 있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매달린 잎새 하나마저도 무심히 지나칠수 없게 해주고 새해에 대한 기대를 더 부풀게 해준 오헨리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101    《마지막 한 수》 댓글:  조회:3316  추천:4  2015-08-16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 동년의 추억이라고 합니다. 동년이란 어디까지나 세상을 항상 아름답게 보고 또 아름답게 보이는 세상에서 황홀한 꿈을 가져보는 시절이기에 한사람의 인생행로에서 동년은 잊혀지지 않을 아름다운 시절로 꿈같은 시절로 파랗게 살아있습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꿈을 가져라, 그것도 대담하게 큰 꿈을 가져라. 그러나 꿈을 가질 때 어느 때 가서 그 꿈이 현실로 되지 못하고 깨져버리게 될 때 오는 허무감, 절망감을 이겨낼 용기도 함께 가져야 한다.》 꿈은 꼭 깨기 마련입니다. 꿈이 깨지면 현실입니다. 어쩌면 황홀한 꿈에 비해 그 현실은 엄혹한 현실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우리는 큰 포부를 가지고 큰 사업을 시작한 사람이 그 꿈을 채 이루기전에 이런저런 사정으로 절망의 심연에 빠져버리는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하기에 황홀한 꿈과 비참한 절망은 종이장 한 장을 사이두고 있을 뿐이라는 말이 생겨났는지도 모릅니다. 언제나 이 세상을 락천적으로 살아가는 유태인들에게는 《마지막 한 수》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한 박물관에 악마와 인간이 장기를 두고 있는 그림이 붙어있었는데 악마가 인간에게 장훈을 부르고 있는 장면을 그린 그 그림의 제목이 바로 《마지막 한 수》입니다. 그러니까 악마가 궁지에 몰린 인간에게 마지막 한 수, 그것도 치명적인 마지막 한 수를 썼다는 뜻입니다. 그 그림을 감상하던 중 한 사람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그림은 제목이 잘못된 그림이야. 악마가 인간에게 마지막 한 수를 쓰다니, 이럴 수가 있어. 인간에겐 희망이 있어. 마지막 한 수는 응당 인간이 악마에게 써야 하는 거야.》 그래서 그 그림의 제목은 바뀌지 않았지만 뜻은 정반대로 인간이 악마에게 마지막 한 수를 쓰는것으로 바뀌였습니다. 악마와의 겨룸에서도 인간은 어디까지나 악마를 이길 수 있는 마지막 한 수를 가지고 있다는것, 말하자면 그 어떤 역경속에서도 인간이 그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지자면 언제나 희망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계시를 주는 이야깁니다. 이 이야기를 유태인들은 이렇게 뜻풀이를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짐승보다 다른 점은 꿈이 있기 때문이다. 꿈이 있으면 희망이 생긴다. 역경을 당해 절망하는 사람은 다만 그 희망을 찾아내지 못했을 뿐이다.》 역시 좋은 계시를 주는 뜻풀이입니다. 《마지막 한 수》, 그 한 수를 항상 남겨두시기 바랍니다.  
100    쥐와 고양이 동거 설 댓글:  조회:3799  추천:2  2015-07-01
  제가 아침마다 수영하러 가는 길에 빈터가 하나 있습니다. 부동산 회사에서 매립이 안된 땅인지 아니면 도시개발계획에 들어가지 않은 땅인지 이사 온지 몇 해 동안 그냥 빈터로 방치되여 있는 땅입니다. 그 빈터는 어느 때부터인지 몸 단련 삼아 나와 연을 날리는 곳으로 되였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빈터에서 연을 날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납득이 안 가는게 있는데 늙은이나 젊은이나 남자나 녀자를 막론하고 날리는 연이 죄다 독수리입니다. 연 날리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아침이면 하늘엔 크고 작은 독수리가 십여 마리가 유유히 하늘에서 날아 예고 있습니다. 독수리가 진짜가 아니고 가짜이지만 그 주변엔 뭇새들은 물론 도시에서 늘상 보는 비둘기마저 얼씬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비둘기 떼가 독수리 주변에서 자유로이 날아예고 있었습니다. 자연계에선 있을 수 없는 광경입니다. 듣는바에 의하면 독수리 한 마리가 하늘에서 선회하면 독수리 시야범위에 든 그 구역의 하늘엔 나는 새가 없고 땅에는 노니는 짐승이 없다고 합니다. 이젠 비둘기도 독수리가 자연계의 맹수인 진짜 독수리가 아니고 사람들 손에 쥐여진 끈에 의해 조정되는 연이란것을 안 모양입니다. 그 광경을 보니 어릴 때 논밭에 세워진 허수아비가 생각났습니다. 구멍난 낡은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두 팔을 한 일자로 벌린 채 사람들이 그려준 그 표정 그대로 밤이고 낮이고 그냥 서 있는 허수아비. 첨엔 새들이 사람인줄 알고 범접을 못하다가 후에는 아예 허수아비 머리에 앉아 깃을 다듬고 있었습니다. 허수아비는 어디까지나 말 그대로 허수아비에 불과합니다. 연으로 된 독수리나 허수아비는 가짜이기에 그렇다 치더라도 진짜 천적이 루루천년 자기 먹이로 되여온 사냥물을 무서워하는 광경은 충격적이였습니다. 지금 아파트 단지에서 애완동물을 기르는 집들이 많습니다. 애완동물에는 고양이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어느 하루 아침, 저는 애완동물로 기르는 고양이가 쥐를 무서워 주인의 품에 안기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였습니다. 별로 큰 쥐도 아닌데 고양이가 가는 앞을 가로질러 갔는데 고양이가 아예 질겁해서 주인의 몸에 달라붙는것이였습니다. 고양이가 쥐를 무서워하는걸 첨 보았다고 하니 친구중 한 사람이 하는 말이 그게 바로 뉴스 감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지금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었다면 뉴스 감이 아니지. 뉴스 감은 그것도 특종은 쥐가 고양이를 잡아먹었다는 거야.” 쥐가 고양이를 잡아먹었다는 이야기는 정경유착과 부정부패를 비꼰 정치유머에서 나옵니다. 그 유머는 이러합니다. 하루는 쥐 세 마리가 모여서 자기가 어떻게 고양이를 다루었다는 자랑을 늘여놓았습니다. 처음 입을 연 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어제 식구들을 데리고 산책을 나갔는데 공원에서 고양이를 만났지. 내가 아주 당당하게 안녕 하고 인사하니 그 녀석도 안녕하고 인사를 받지 않나.” 이 말을 다른 한 쥐가 주둥이를 닦으며 받았습니다. “나 지금 바로 그 녀석이 청한 연회에 가서 대접받고 오는 길이야. 그 녀석 대접이 이만저만이 아니더군 그래.” 세 번째 쥐가 하품을 연신 해대며 말했습니다. “아 졸려, 난 어제 밤 그 녀석하고 온 밤을 샜어. 그 녀석이 어찌나 들볶아 대는지 어제 밤 한 잠도 못 잤어. 나 지금 또 그 녀석한테 가야 해. 아마 그 녀석 덜 만족했나봐.” 바로 이 유머에서 나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금전과 권력의 결탁으로 행해지는 부정부패를 이르는 말에 “고양이와 쥐의 동거”란 말이 있습니다. 쥐에게는 고양이는 예로부터 천적입니다. 그런 천적이 천적 노릇을 못하고 오히려 자기가 잡아야 할 상대와 결탁하고 놀아난다는 이 유머는 시사해주는 바가 참으로 많습니다. 하늘을 유유히 날아 예지만 어디까지나 가짜인 독수리, 또 새를 쫓지 못하고 그냥 멍청히 자리만 지키고 있는 허수아비, 진짜 고양이는 고양이되 오히려 쥐를 무서워하는 고양이, 이런 현상과 류사한것들을 우리 인간생활에서도 흔히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입니다.
99    《청빈락도》 댓글:  조회:3038  추천:4  2015-06-09
   우리말에 청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엔 청빈이란 말을 성품이 너무 깨끗하여 살아가기가 힘들다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옛날 선비들을 가리켜 청빈한 선비라고 했습니다. 살아가기가 힘들더라도 깨끗한 성품을 고이 지켜 가는것이 선비라는 뜻입니다. 또 “청빈락도”란 말도 있습니다. 사전에 올린 말을 보면 “청빈락도”란 청렴결백하고 가난하게 사는것을 옳은것으로 여기고 즐기는것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  청빈한 선비의 이야기는 많고도 많지만 오늘은 청빈한 선비 이야기보다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곡가의 이야기를 잠깐 짚고 넘어갈 가 합니다. 세계 근대 음악사에서 가곡 창작의 왕으로 불리는 오스트리아 작곡가 슈베르트는 초기 독일 랑만파의 대표적 작곡가의 한 사람이며 근대 독일 가곡의 창시자로, 600여 곡의 독일 가곡과 실내악곡, 교향곡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째지게 가난하여 그냥 배를 곯는 신세였습니다. 한번은 배고픔을 참다못해 한 식당에 들어가 식탁 우에 놓인 신문에 실린 시 한 수에 곡을 붙여 그 가곡으로 삼은 감자 몇 알을 바꾸어 허기진 배를 달랬습니다. 그 때 그 가곡이 슈베르트가 세상을 뜬 후 30년이 지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요람곡”으로 되여 감자 몇 알로 바꾼 악보가 4만 프랑에 경매되였다고 합니다.  세상 떠날 때까지 손에 돈 한푼 없이 음악 창작에 몰두해 온 슈베르트는 생전에 명과 부를 이루지 못했지만 그는 일생을 거쳐 창작한 작품으로 세계 음악사에 빛나는 한페지를 장식했습니다. 청빈한 작곡가의 한생은 이름이 조금 알려지기 시작하면 명과 부를 탐내는 사람들에게는 자기의 삶을 비춰 보고 반성해 보는 거울이 아니겠습니까.  세월이 좋아진 지금 다시 “청빈락도”이라는 말을 떠올려 보면서 그 뜻을 되새겨 봅니다.  [
98    어린이명절 선물 –“정토” 댓글:  조회:1490  추천:1  2015-05-28
6월 1일은 어린이명절입니다. 어린이명절이 오면 부모들은 자식에게 줄 명절선물에 대해 무척 신경을 쓰게 됩니다. 베이징 석간에 실린 한 학부모의 글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언급해봅니다. 그 학부모는 어린이명절을 맞아 어린이들을 상대로 출간하는 간행물을 정기구독하도록 정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들을 상대로 한다는 그 간행물에 어린이들이 보지 말아야 할 내용들이 실렸고 그 뿐만 아니라 폭력과 비행을 묘사한 글까지 실려 그 학부모의 분개를 자아냈습니다. 그 학부모는 이런 간행물은 어린이들에게는 하나의 정신오염이라고 쓰면서 어린이들에게 오염되지 않은 “정토”를 마련해주자고 호소했습니다. “정토”란 말은 불교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정토”란 티 없이 깨끗한 곳, 말하자면 극락정토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환경을 어린이들에게 마련해주자는 것이 그 학부모의 뜻이겠지요. 지금 사람들은 어른들의 생활공간을 오염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의 생활공간까지도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오염시키는 금전만능, 도덕상실, 향락주의, 폭력, 마약 등 사회악은 어린이들에게도 그 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사회악뿐만 아니라 어른들의 일거일동마저도 어린이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얼마전 지하철에서 이런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한 어린이가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느라고 일어서자 그 곁에 섰던 한 청년이 제꺽 그 자리를 차지해버렸습니다. “어른이 애들보다 못하다”는 말이 이래서 생겨났는지도 모릅니다. 시체 멋을 낸 그 청년은 주변의 시선이 따갑게 쏠려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방에서 책을 꺼내들었습니다. 그 청년이 읽는 책은 컴퓨터와 관련된 전문 서적이었습니다. 어린이가 양보한 자리를 차지하고도 털끝만치라도 미안한 마음도 없이 전문서적을 들여다보는 그 청년을 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장차 그 청년이 성공해서 컴퓨터회사의 사장이 된다고 할지라도 그 내면 세계는 “먹이를 보면 제 배부터 채우겠다고 혈안이 되어 날치는 동물 세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리라. 한심한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자리를 양보한 어린이가 그 청년의 행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가 궁금했고 혹시 그 어린이가 그 청년의 행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 장차 커서 그 청년의 행실을 다시 되풀이 할가바 걱정이 앞섰습니다. 어린이들 생활공간에 티 없이 깨끗한 “정토”를 마련해주자면 먼저 어른들의 생활공간을 정리하고 깨끗하게 가꿔야 하고 미래주인공인 어린이들의 세계에 다문 한 뙈기라도 “정토”를 마련해 주어야겠죠. 그것이 바로 어린이명절에 주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싶은 생각이 듭니다.
97    어머님께 드리는 가장 좋은 선물 댓글:  조회:1952  추천:1  2015-05-09
   어느 때부터 생겨난 말인지는 딱히 모르지만 《발렌타인데이에는 장미꽃이요 어머니명절엔 카네이션》이란 유행어가 있습니다. 아마 장미꽃은 열렬한 사랑을 상징하기에 연인에게 주는 가장 적합한 선물이고 오래 피는 카네이션은 건강과 장수를 상징하기에 어머니명절에 우선 선택하는 선물이라는 뜻에서 이 유행어가 생겨난 것 같습니다.  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장미꽃에 비하면 카네이션은 외면당하는 편이다》. 뜻인즉 발렌타인데이에 장미꽃을 찾는 사람이 많지만 어머니명절에 카네이션을 찾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얘깁니다. 어머니명절에 즈음해 어머니의 크고 깊은 은혜에 보답하라고 가르치는 불교 경전,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 떠올려 봅니다. 부처님이 어느날 길을 가다가 제자 아난에게 길가의 뼈 무더기를 여자의 뼈와 남자의 뼈로 나누라고 명했다. 아난이 난색을 표하자 부처님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남자의 뼈는 희고 무겁지만 여자는 아기를 한번 낳을 때마다 서말 서되의 피를 흘리고 여덟섬 네말의 젖을 먹여야 하므로 뼈가 검고 가벼우니라” 이어 부처님은 어머니의 은혜로 10가지를 꼽았습니다. “임신 후 아기를 태 중에 잘 보호해준 은혜, 산고를 겪으며 아기를 낳아준 은혜, 자식을 낳고 나면 모든 고통을 잊어버리는 은혜, 입에 쓴 것은 자신이 먹고 단 것만 자식에게 먹이는 은혜, 마른자리에는 자식을 눕히고 젖은 자리에는 자신이 눕는 은혜, 젖을 물려 키워준 은혜, 손발이 닳도록 깨끗이 씻어준 은혜, 자식이 먼길 떠나면 내내 걱정해주는 은혜, 자식을 위해서라면 나쁜 일도 마다 않는 은혜, 자식을 끝까지 염려하고 사랑해주는 은혜”   그럼 자식들이 어머니에게 드리는 가장 좋은 선물은 무엇이겠습니까?  80고령인 한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명절이 따로 없다. 어머니에게 주는 가장 좋은 선물은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너들의 모습이다.》 자기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어머니에게 드리는 가장 좋은 선물이라면 또한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유일한 바람이라면 어머니의 바람을 항상 명기하고 그 바람을 행동에 옮기는 것이 자식으로서 어머니 은혜에 보답하는 현명한 처사기 아니겠습니까.  어머니명절을 맞아 조용히 불러봅니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96    나이아가라폭포엔 물보라 소녀가 있다(4) 댓글:  조회:3441  추천:0  2015-05-01
나이아가라폭포가 들려준 이야기       나이아가라폭포 관광 두번째 날 오전도 자유관광이였다. 필자는 염소섬을 조용히 산책하면서 나이아가라폭포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렸다.  염소섬엔 동상 하나가 외롭게 서있다. 나이아가라폭포를 처음 발견한 루이 헤네핀 신부의 동상이려니 했는데 알고보니 전기 발명가 니콜라 테슬라였다. 인터넷에서 니콜라 테슬라를 검색해보니 이런 글이 뜬다.  "미국의 발명가, 물리학자, 기계공학자이자 전기공학자(1856-1943). 그는 상업 전기에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전자기학의 혁명적인 발전을 가능케 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테슬라의 특허와 이론적 연구는 전기 배전의 다상 시스템과 교류 모터를 포함한 현대적 교류 시스템의 기초를 형성하였다. 그의 이러한 연구는 2차 산업 혁명을 선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가 발명한 기술은 1895년 웨스팅하우스사에 의해 나이아가라폭포 발전소 송전에 응용되여 획기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역시 나이아가라폭포와 관련이 있는 분이시다. 나이아가라폭포에 발전소를 앉히게 된 계기를 잠깐 언급해 본다. 지질학자들은 나이아가라폭포 력사가 매우 짧아 마지막 빙하기에 생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폭포의 생성기인 빙하시대, 그러니까 1만2천여년전에는 폭포가 지금의 위치보다 10Km나 떨어진 하류에 있었는데 강물에 절벽이 해마다 평균 1.4미터씩 깎이여 지금의 위치까지 왔다고 한다. 그 기세로 그냥 절벽이 침식되면 머지않은 장래에 폭포가 사라지게 될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언에 중시를 돌린 미국과 캐나다 정부는 나이아가라폭포와 그 주변지역을 주립공원으로 지정하고 폭포로 떨어지는 물량을 줄이기 위해 수로를 빼서 물량을 조절했다. 폭포로 떨어지는 원래 물량의 60-70% 달하는 물량이 폭포로 흘러가기전 수로를 통해 빠져나가 폭포 하류에 있는 수력발전소에 제공된다. 이런 조치로 지금 폭포 벼랑의 침식이 해마다 3센티미터 이내로 통제되였다. 니콜라 테슬라는 나이아가라폭포의 영구 보존을 위해 큰 기여를 한 분이였다.  니콜라 테슬라처럼 위인은 아니지만 나이아가라폭포에서 새 기록에 도전한 분들의 이야기 또한 흥미롭다. 1829년 샘 패치라고 하는 모험가가 사상 최초로 캐나다폭포에서 뛰여내렸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공식 기록엔 1901년 10월 24일 나무통안에 들어가 폭포아래로 떨어진 애니 테일러(Annie Taylor)라고 하는 할머니가 올랐다. 교사 출신인 애니 테일러는 포도주를 숙성시키는 사람 키만치 높은 오크통 안을 방석으로 푹신하게 채우고 기르던 고양이를안고 통속에 들어갔다. 통에는 구멍을 뚫고 펌프로 공기를 불어넣은 후 그 구멍을 막아버리고 강에 띄웠다. 통은 강물에 띄운지 40분 후에 폭포로 떨어졌고, 폭포아래에 대기중이던 사람들에 의해 강가로 끌어올려졌다, 통 뚜껑을 여니 애니 테일러 할머니가 "아직 폭포에 떨어지지 않았나?"하고 물었다고 한다. 애니 테일러 할머니는 몇 곳이 긁힌외에 아주 멀쩡했지만 함께 통안에 들어갔던 털이 까만 고양이가 겁에 질려서 하얀 고양이로 변했다는 일설이 있다. 또 다른 일설에는 애니 테일러 할머니가 공포에 질린 나머지 고양이를 너무 꽉 끌어안아 고양이가 질식해 죽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어쨌든 애니 테일러 할머니는 나이라라폭포에서 사상 최초를 기록한 분이시다.   ​  2005년 열기구를 타고 사상 최초 세계 일주에 성공한 탐험가 스티브 포셋은 사상 최초에 대해 "최초의 기록을 만드는 순간 누구도 열어보지 않은 새로운 세계를 향한 문이 열린다. 무언가를 최초로 이룬다는것은 단순히 경주에서 1등을 하는것 이상의 의미이다."고 해석했다. 최고 기록은 깰수 있지만 최초란 오직 한번만 있기 때문이 아닐가.  그 후로 새 기록 도전이 계속되였는데 통계에 따르면 14명이 16번 폭포에서뛰여 내렸는데 그 중 5명이 숨졌다. 도전에는 용기가 있어야지만 운도 따라야 한다는 말이 있다. 애니 할머니처럼 나무통안에 강아지를 안고 들어가 나이아가라폭포에서 떨어져 내린 분이 있었는데 정말 운이 따르지 않았는지 숨쉬는 구멍을 강아지가 주둥이로 막고 있어 질식사 했다고 한다. 지금은 법으로 폭포에서의 다이빙을 금지하고 있다. 법을 어기면 법 처리는 법 처리대로 받고 동시에 벌금 1만 달러를 내야하는데 도전에 실패해 숨져도 벌금은 벌금대로 꼭 지불해야한다나.  나이아가라폭포가 들려주는 이야기중 뭉클한 감동과 깊은 사색을 주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1859년 여름, 프랑스 출신의 곡예사 찰스 블론딘이 폭포가 떨어지는 곳에 설치한 밧줄위를 걸어 미국쪽에서 캐나다로 건너가는 장거를 해냈다. 그 날 불가사의한 장면을 보려고 5천여명의 인파가 모였는데 찰스 블론딘은 줄위에서 두 눈을 가리고 걷기도 하고 공중제비, 물구나무를 서는 등 묘기도 보여주었다. 나중에 그는 관객들에게 소리쳐 물었다.  "제가  외바퀴 자전거를 타고 건널수 있다고 믿는 분들은 박수를 쳐주십시오." 관객들은 환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찰스 블론딘은 외바퀴 자전거를 타고 쉽게 미국과 캐나다 사이를 오갔다. 나중에 찰스 블론딘은 등에 한사람을 업고 줄을 타겠으니 등에 업힐 분은 손을 들어달라고 했다. 이말에 5천명에 달하는 관객은 모두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한참후에 한사람이 침묵을 깨뜨렸다. "제가 업히겠습니다." 블론딘이 그 사람에게 물었다. "제가 성공할수 있다고 믿습니까?" "믿습니다."  확고한 대답을 한 사람은 블론딘의 친구이자 매니저인 해리 콜코드였다. 블론딘은 친구를 등에 업고 줄위에 올라섰다. 등에 업힌 친구는 블론딘의 귓전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난 자네 등에 업힌게 아니라 자네와 한몸이 됐네." ​ 역시 명언! 결국 블론딘은 친구를 등에 업고 폭포를 건너는데 성공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관객들은 환호했다. 두 사람은 사람들에게 신뢰가 뭔지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신뢰란 굳은 믿음과 의지함이다. 노래를 지어 두 사람의 장거를 노래한 호주의 가수 드론은 "두 사람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해내려고 했던것은 눈앞에 보이는 그 무엇이 아니라 스스로 갈구했던 자유와 믿음이였다"고 말했다. 블론딘은 장거를 해낸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가고 묻는 기자에게 아주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도 두려움이 있는 사람입니다. 발아래를 내려다보면 무서워 도저히 한발도 내디딜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나이아가라 경치만 보고 걸으면 무서움이 사라집니다."  아름다운 자연의 경관이 가지는 힘이 얼마나 큰가를 되새기면서 필자는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산을 등반한 한 등산가의 말을 떠올렸다.  "제가 세계 최고봉을 정복한것이 아니라 그냥 대자연의 품에 안겼을 뿐입니다."  맞았어, 우린 나이아가라폭포를 보러 온게 아니라 그 품에 안기려 온거야! 천혜의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기쁨을 느끼게 해준 나이아가라폭포였다.                                                                                                                                                                                                                폭포의 무지개    나이아가라폭포를 떠나기 앞서 필자는 가족과 함께 다시 폭포를 찾았다. 어제와 다름없이 폭포는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물안개 피여오르는 폭포가에 전날보다 많은 갈매기가 날아예고 있었다. 이 곳의 갈매기들은 폭포에서 떨어지면서 잠시 "기절"한 물고기를 먹고 산다.  북극에서 녹아내린 빙하가 도도한 흐름을 형성해가지고 성급히 흘러오다가 이 곳에 와서 벼랑을 만나 그대로 물갈기로 부서지면서 떨어져 내렸다가 또다시 도도한 흐름으로 갈길을 재촉한다. 그 모습이 처절하게 부셔졌다가 아픔을 딛고 다시 일어선 거인같다고 할 가? 아니면 온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무미건조한 생애에서 한번만은 인생 역전을 연출하는 강자의  모습이라고 할 가? 별로 시인이 된 기분이다. 대자연의 장관은 시인과 명시를 낳는다. 만약 려산 폭포를 읊은 이백이나 박연폭포를 노래한 황진이가 나이아가라폭포를 와 봤으면 어떤 명시를 지었을가? 두 분이 모두 외줄기같은 폭포를 보고도 하늘의 은하수가 그대로 드리웠다고 했거늘 나이아가라폭포는 뭘로 비유할거냐?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슬며시 웃음을 떠올려본다.      "야 무지개!"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폭포가 피여올린 물보라속에 무지개가 비끼기 시작했다. "물보라 소녀"가 가끔 무지개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고 했지. 무지개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오랫동안 무지개를 지켜보았지만 "물보라 소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무지개에 비낀 "물보라 소녀"를 직접 보았다는 사람이 간혹 있지만 그건 환각일 뿐이고 폭포에 와서 "물보라 소녀"에 대한 추억을 안고 갈 뿐이라고 한 가이드의 말이 생각났다. 옳거니, "물보라 소녀"는 마음속 깊은 곳에 정히 모시고 가는거야. "폭포의 여신"을!    
95    냐이아가라폭포엔 물보라 소녀가 있다(3) 댓글:  조회:3344  추천:1  2015-04-10
 “나이야 가라!"        ​  나이아가라폭포의 경이로움은 눈보다는 귀가 먼저 반응한다는 말이 있다. 인디언 말로 나이아가라(Niagara)는 "천둥소리를 내는 물"이라는 뜻이다. 인디언들은 나이아가라폭포를 "천둥의 신"으로 숭배해왔다. 1678년 프랑스 선교사 루이 헤네핀(Louis Hennepin) 신부가 폭포에서 몇십킬로미터 떨어진 온타리오 호수에서 폭포의 굉음을 듣고 그 소리를 따라 올라오다가 나이아가라폭포를 발견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렸다고 한다. 지금은 아니지만 당시 나이아가라폭포가 내는 굉음이 트럼펫 7만 6천개를 동시에 부는 소리에 해당했다고 하니 천둥의 신의 존재를 생각하게 할 만큼 그 소리가 굉장했던 모양이다.  폭포 소리를 들으면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한시 바삐 폭포가 보고싶어 가슴이 설렌다. 폭포 관광은 자유 관광이다. 호텔에 여장을 풀기바쁘게 우리 가족은 서둘러 폭포가로 향했다. 한번 와 보았던 기억을 더듬으며 필자가 길 안내를 맡았다.   ​ 나이아가라폭포 관광은 한마디로 하늘에서 굽어보고 땅에서 마주보고 수면에서 쳐다보는 관광이다. 헬기를 타고 나이아가라폭포를 부감하는 헬기 투어, "안개속의 숙녀호"를 타고 폭포 밑까지 가서 물보라를 맞아보는 유람선 투어, 5대호의 마지막 호인 온타리오 호수로 이어지는 나이아가라강 협곡을 따라 신나게 질주해보는 제트보트 투어, 이외에도 폭포밑에 뚫린 바람의 동굴(Cave of Winds)에 들어가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를 쳐다보는 투어가 있다. 투어마다 색다른 느낌을 주는 체험이다.  올해1월 나이아가라폭포 주변 지역인 미국 뉴욕주와 캐나다 몬타리오주에 강추위 날씨가 계속돼 기온이 령하 37도로 내려갔고 1911년이후 103년만에 나이아가라폭포가 결빙되였다. 혹한의 여파로 5월 초인데도 강물엔 크고 작은 성엣장이 수없이 떠내려오고 있어 원래 5월부터 시작되는 유람선 투어가 그냥 취소된 상태여서 유감만 씹었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크게 두개 폭포로 나뉘는데 하나는 캐나다쪽에 있고 하나는 미국쪽에 있다. 지구상의 담수 20%를 차지한다는 미국의 5대호 중 네번째 호수인 이리(Erie)호가 발원지인 나이아라강이 흘러내려오다가 강심에 있는 자그마한 섬을 만나 물길이 갈라지면서 두 개의 폭포를 만든다. 그 섬 이름은 고트섬(Goat Island), 우리말로 염소섬이다. 염소섬이라고 불리게 된 유래를 보면 글자 그대로 염소와 관련이 있다. ​ ​    이 섬에서 인디언들이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인디언들은 겨울이 오면 엄한을 피해 남쪽으로 이동했다가 봄에 다시 섬으로 찾아왔다. 솔가해 남쪽으로 이동할 때 인디언들은 가축을 섬에 풀어놓았다. 이듬해 봄에 오면 가축은 수가 줄 대신 오히려 많이 늘어났다. 가축은 인간보다 엄한에 잘 적응한다. 그런데 어느 해 겨울 혹한이 이 섬을 덮쳤다. 몇백년 동안 얼지않던 폭포마저 꽁꽁 얼어붙었다. 인디언들은 살인적인 한파에 풀어놓은 가축이 죄다 얼어 죽은줄로만 알았는데 정작 이듬해 봄에 와보니 염소만 얼어죽지 않고 유유히 풀을 뜯고 있었다. 그 후로부터 인디언들은 섬을 염소섬이라 고쳐 불렀다.  염소섬을 만나 갈라진 강물이 인차 급류로 변해 살같이 흘러가다가 갑자기 50여미터 락차를 만나 곧추 떨어지면서 천혜의 명소 나이아가라폭포를 만든다. 미국과 캐나다 국경선으로 되고 있는 폭포는 그 모양이 말발굽같이 생겼다고 해서 말발굽폭포(Horseshoe), 혹은 캐나다폭포라고 부르는데 락차는 54미터, 너비는 610미터이고 미국 폭포(American Falls)는 락차 56미터, 너비가 335미터이다. 폭포에서 1초에 떨어지는 물량은 약 3600여톤, 1시간 떨어지는 물량은 서울 시민들이 하루동안 사용하는 물량보다 많다고 한다. 한때 나이아가라폭포는 세계 제1의 폭포로 알려졌으나 이과수폭포, 빅토리아폭포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최대 폭포 자리를 내주고 북아메리카의 제1폭포로 자리잡았다.    1830년부터 나이아가라폭포는 상류층이 즐기는 여름 휴양지로 되였고 19세기 중엽부터는 관광산업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는데 오늘에 와서는 해마다 2000여만명이 다녀가는 명소로 자리매김을 했다. 19세기초 나폴레옹의 동생이 신부와 함께 신혼여행차 폭포를 찾았고 1943년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때 영국 처칠 수상이 폭포를 다녀갔으며 1951년에는 인도 네루 수상, 1951년엔 영국 엘리자베스 2세가 폭포에 자취를 남겼다. 나이가라폭포를 배경으로 많은 영상물이 제작되였는데 그중 전설적인 스타 마럴린 먼로가 주연한 "나이아가라폭포"와 크리스토퍼 리브가 주연한 "슈퍼맨 2"를 례들수 있다. 마릴런 먼로가 주연한 영화 "나이아가라폭포"는 미국 영화사에 언급될 수준의 영화가 아니지만 그 영화덕에 나이아가라폭포는 인기있는 신혼 려행지로 되였다.  신혼 부부들은 나이아가라폭포에 와서 폭포의 물줄기처럼 힘차고 영원한 행복이 깃들기를 기원한다. 신혼부부 얘기가 나왔기에 생각난다. 하마트면 폭포 하나를 빠뜨릴번 했다. 미국 폭포 바로 옆에 루나(Luna)라고 부르는 작은 섬이 있는데 루나는 로마 신화에서 나오는 달의 여신이라는 뜻이다. 섬이라기보다 전망대라고 함이 더 타당할것 같은 루나로인해 너비가 15미터밖에 안되는 자그마한 폭포가 물갈기를 날리며 떨어지고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도 신부가 결혼식장에서 쓴 면사포와 흡사하다고 “브라이달 베일 폭포(Bridal veil falls)”, 우리말로 면사포 폭포이다. 신혼 려행을 온 신혼부부들이 빼놓으면 안될 곳이다. ​ ​  나이아가라폭포를 보면서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느낌을 갖는다. 가장 먼저 나이아가라폭포를 발견한 루이 헤네핀 신부는 일기에 "나이라가라폭포는 필적할 대상이 없고 또 도저히 믿을수 없는 폭포"라고 적었다. 어떤 이는 폭포를 보는 순간 헉! 하고 숨이 막혀버렸다고 했고 또 어떤 이는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또 누구는 폭포를 보는 순간 그냥 폭포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는 환각에 빠졌다고 했다. 안해에게 폭포를 본 첫 느낌을 물으니 안해는 한참 잠자코 있다가 하는 말이 "나이아가라폭포는 마음껏 마음을 호소할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아들과 딸은 스스로 소중히 간직할 느낌이기에 말해줄수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젊은 세대다운 대답이다.  필자는 처음 폭포를 대하는 순간 어쩔수 없이 "오 신이여!"란 감탄사를 떠올렸다. 이 감탄사는 1540년 처음으로 세계 관광 1번지인 그랜드캐년을 발견한 스페인 탐험대 25명이 대자연의 장관앞에 약속이나 한듯 동시에 무릎을 꿇으며 저도모르게 뽑은 탄성이다. 나이아가라폭포 역시 그랜드캐년에 비해 못지않는 대자연의 걸작이여서 이런 감탄사가 나오지 않을수 없다. ​ ​  나이아가라에 오는 길에 가이드는 폭포에 가면 물보라를 될수록 많이 맞으라고 했다. 왜냐하면 나이아가라강은 북극의 얼음이 녹아내린 물이기에 미네랄과 음이온 성분이 많아 로화방지에 이롭다고 했다. 그러면서 가이드는 폭포를 보면서 꼭 크게 몇 번 "나이야 가라!"고 소리 치라고 했다. 그러면 하룻밤새 10년이 젊어져 자고나면 이튿날 아침 부부도 서로 몰라본다고 롱을 했다.  "나이야 가라!"가 폭포 관광에서 류행어로 된데는 재미나는 일화가 있다. 미국과 캐나다가 나이아가라폭포 주변에 각기 도시 하나를 건설했는데 두 도시 명칭이 다 "나이아가라폴스"이다. 그런데 도시 명칭이 미국식 영어로는 "나이에가라"라고 발음되고 캐나다식 영어로는 "나이아가라"라고 발음된다. 그러니 절대 미국식 발음을 해서는 안되는 것! 왜냐하면 미국식 발음대로라면 그 "나이에 가라"는 말로 들리니까. 그러나 캐나다 발음에 우리말 발음법칙인 "I 모음 순행동화 현상"을 적용하면 "나이야가라"로 발음된다고 한국의 한 언어학자가 분석했다. 그 학자는 1996년 나이아가라폭포에 와서 한국계 여행사 가이드에게 "청춘을 돌려다오"라던가 "고장난 시계"같은 노래를 부르지 말고 그냥 "나이야 가라!"고 목청껏 웨쳐보라고 했다. 그 후부터 "나이야 가라!"가 나이아가라폭포 관광 류행어로 굳어졌다고 한다.  7년전 나이아가라폭포를 처음 찾았을때 필자는 안해와 함께 "나이야 가라!"고 힘껏 외쳤었다. 했건만 나이는 줄지 않고 세월이 얼굴에 주름을 더해주며 흘러 흘러만 갔노라. 허허허…
94    나이아가라폭포엔 “물보라 소녀"가 있다(2) 댓글:  조회:2713  추천:0  2015-03-25
                                                                                           "물보라 소녀"        강가.  꽃으로 장식한 자그마한 카누에 한 예쁜 소녀가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고 있다. 소녀는 곧 폭포의 신에게 제물로 바쳐지게 된다. 검푸른 강물은 소녀의 슬픔과는 아랑곳없이 굽이치며 그냥 흐름을 재촉하고 있다.  폭포 상류에 이로궈이(Iroquois)라고 하는 인디언 부족이 살고 있는데 울고 있는 소녀는 그 부족 추장의 외동딸이다. 이름은 레라와라(LELAWALA). 이 부족은 "천둥소리"를 내는 폭포의 신령을 우러러 모셔왔다. 폭포소리가 높으면 인디언들은 폭포의 신령이 노한것으로 알고 해마다 소녀를 제물로 바쳐왔다. 제물로 바쳐지는 소녀는 제비뽑기로 결정된다. 이 해 부족의 모든 소녀가 제비뽑기에 참가했다. 추장은 제비뽑기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자신의 외동딸도 제비뽑기에 내보냈는데 그만 외동딸이 제비에 뽑히게 될줄이야.  엄마없이 자란 외동딸을 제물로 보내야 하는 추장의 마음은 찢어질듯 아팠지만 공정하게 제비뽑기로 정해진 결정에 따를수 밖에 없었다. 외동딸을 제물로 바칠 날이 다가옴에 따라 추장의 얼굴 표정은 점점 돌같이 굳어져갔다. 그러나 매일 울고 있는 외동딸 앞에서는 추장은 항상 근엄한 모습이였다.  마침내 폭포의 신령에게 소녀를 제물로 바칠 날이 왔다. 이날 추장은 돌연 어디론가 사라져 모습을 감췄다.  마을 사람들이 소녀가 타고갈 카누를 각가지 꽃으로 장식하고 소녀의 머리에 꽃계관을 얹어주었다. 생애의 마지막 길을 떠나게 되는 소녀는 하염없이 울면서 아버지를 기다렸으나 추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소녀를 태운 카누를 강에 띄울 시각이 왔다. 카누엔 노가 없다. 그냥 흐르는 강물에 실려 폭포로 향하는것이다. 소녀는 최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녀는 아버지가 어디선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녀의 눈에는 아버지 모습이 잡히지 않았다. 소녀를 실은 카누는 강물을 따라 흘러가기 시작했다. 도도하게 흐르던 검푸른 강물이 서서히 급류로 변하기 시작했다. 급류에 시작되면 폭포가 지척이다.​ ​    급류를 타고 카누가 폭포를 향해 살같이 흘러가는데 이때다.  강가 수풀속에서 한 남자가 배를 저어 나온다. 추장이다. 추장은 힘껏 노를 저어 외동딸이 탄 카누를 뒤쫓는다. 추장의 두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이윽고 카누를 따라잡은 추장은 말없이 한손을 내밀어 딸의 손을 잡아쥔다. 그가 딸에게 미소를 지어보이는 순간 두 배는 곧두박히며 폭포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그 후로 폭포가에 피여오르는 물보라에 무지개가 비끼면 예쁜 소녀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가 바로 "물보라 소녀"로 된 추장의 딸 레라와라이다. "물보라 소녀"은 그때로부터 "물보라 여신"으로 변신해 오늘까지 숭배의 대상으로 되여오고 있다.  ​ ​  이것이 지금까지 전해내려온 나이아가라폭포 전설중 가장 슬프고 비장한 전설이다. 딸의 두려움과 아픔을 같이한 아버지의 비장한 사랑은 듣는 이로 하여금 숙연해지게 한다. "물보라 소녀"와 관련된 전설이 여러 판본이 있다고 한다. 한 전설에는 "물보라 소녀"가 귀족에게 시집가라는 아버지의 강요에 따르지 않고 평소에 사랑을 나누어 오던 총각을 찾아 가기 위해 폭포에 몸을 던졌다고 하고 다른 한 전설에는 "물보라 소녀"가 마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폭포에 사는 큰 뱀에게 스스로 몸을 바쳤다고 한다.  1846년 나이아가라폭포에 첫 유람선이 운항을 시작했는데 유람선은 "물보라 소녀"의 이름인 레라와라(LELAWALA)호로 명명되였다. 지금은 "안개속의 숙녀호(Maid of the Mist)"로 명칭이 바뀌였지만 유래는 역시 "물보라 소녀"에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가이드는 나이아가라폭포에 깃든 전설을 미리 알고 가면 나이아가라폭포 관광은 일종의 의식이 된다고 했다. 제물로 바쳐진 "물보라 소녀"의 부활을 기원하는 성스런 의식이라고 했다.  
93    나이아가라폭포엔 “물보라 소녀"가 있다(1) 댓글:  조회:2804  추천:0  2015-03-15
 미국 동부 관광은 대체로 세계 정치 1번지 워싱턴, 현대 "로마"로 불리는 뉴욕, 세계 3대 명폭의 하나인 나이아가라폭포를 둘러보는 관광이다. 미국 동부 관광에서 나이아가라폭포로 가는 코스가 둘이 있다. 뉴욕에서 곧추 가는 코스와 워싱턴에서 펜실베니아주를 경유해 가는 코스이다. 7년전 필자는 안해와 함께 뉴욕 코스를 탔는데 경유지에서 인상에 남는 곳은 코닝 유리박물관(Corning Museum of Glass) 뿐이였다. 코닝 유리공장은 세계적인 대기업인데 본부를 인구가 만명뿐인 자그마한 도시 코닝시에 두고 있다. 유리로 된 예술작품 4만 5천여점이 전시되여 있는 유리박물관은 나이아가라폭포로 가는 관광객들이 휴식삼아 쇼핑삼아 들러 유리 력사를 보고 가는 곳이다. 아들딸까지 동행한 이번 미국 동부관광은 워싱턴부터 시작되였기에 펜실베니아주를 경유하게 되였다.    펜실베니아주는 크게 각광을 받고 있는 워싱턴, 뉴욕의 그림자에 가려 별로 알려지지 않은 주이다. 미국 관광에서 널리 알려진 명소만 찾는 중국인 경우엔 아예 생소한 곳이다. 보통 관광객들은 사전에 관광 목적지 관련 자료는 잘 챙기지만 경유지에 대해선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필자도 역시 그런 부류에 속했는데 펜실베니아주를 경유하면서 경유지가 때론 목적지보다 더 대단한 명소일수도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경유지에서 읽은 미국 독립 력사    펜실베니아주 경내에 들어서면 끝없이 펼쳐진 농장지역이 줄곧 시야를 채운다. 평원을 지나 완만한 구릉이 이어지는 지역에 들어서면 만발한 들꽃이 반겨주는데 들꽃중 필자가 좋아하는 민들레꽃이 가장 많았다. 그 누가 보든말든 소문없이 피여 대지를 장식하는 민들레꽃이 하도 좋아 필자는 우리 민족 녀성의 희생정신을 구가한 텔레비전예술영화 제명을 "민들레꽃"이라고 달기까지 했다. 꽃의 향연에 취해 가노라면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로 운을 뗸 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진다. 농장지역을 종일 달려 하루밤 묵어갈 도시에 들어서니 오래된 건물이 많이 보여 퇴락하고 있는 도시같은 느낌을 준다. 그런데 가이드가 이 도시가 바로 미국이 탄생한 도시 필라델피아라고 선언하듯 말한다. 필라델피아, 책에서나 읽었던 력사의 도시! 이 도시는 독립된 미국의 력사가 시작된 곳이다. 천혜의 관광지 나이아가라폭로로 가는 길에 미국의 독립 력사를 읽고 가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행운이 아닐수 없다.  ​  한때 세계를 호령하던 대영제국의 런던 다음으로 큰 도시였던 필라델피아에서 1776년 7월 4일 무슨 사변이 일어났는지 우선 짚고 넘어간다. 필라델피아 인디펜던스 홀(Independence Hall)에서 열린 대륙회의에서 170년동안 영국 식민지였던 13개 주의 대표들이 영국으로부터 자유와 자치권을 얻기 위해 독립선언문을 채택하고 미국 독립을 선언했다. 이어 7월 8일 "온 나라의 국민들에게 자유를 선언하노라"라는 성서의 문구가 새겨진 자유의 종(Liberty Ball)이 독립선언문의 공표를 축하해 처음으로 고고성을 울렸다. "법과 정의의 상징"으로 불리는 자유의 종은 미국 독립의 상징이다. 또한 미국에서 처음 "자유"를 알렸던 종이었기에 자유의 상징으로 되고 있다. 이해 최초의 미국 국기인 성조기가 게양되었는데 성조기는 이름이 로스(Ross)라는 가정주부가 손수 만들었다고 한다.  영국의 식민지 정책에 저항하는 중심지가 된 필라델피아는 독립전쟁이 시작되면서 새로운 국가 미국의 수도로 되였다. 1790년 워싱턴 DC로 천도하기 전까지 미국의 수도였던 필라델피아는 19세기에 이르러 미국의 금융, 문화, 상업, 산업의 중심지로 떠오른 뉴욕의 그림자에 묻히게 되여 색이 바래기 시작했다.  미국 독립 력사에서 미국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는 초대 대통령 워싱턴과 어께를 견줄 위인 한 분을 빼놓을수 없다. 벤저민 프랭클린! 미국 지폐 100달러에 찍힌 바로 그 분이다. 가이드는 그가 미국 지폐에서 지금까지 가장 고액 지폐인 100달러에 찍힌 이유가 1달러 지폐에 찍힌 워싱턴보다 100배 더 위대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워싱턴보다 더 위대한 분이 왜 대통령 한번 못해 봤는가고 한 관광객이 물으니 가이드는 독립선언문을 작성할 때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미 70세를 훌쩍 넘긴 고령이였고 또 본인이 굳이 대통령 자리를 사양했다고 설명했다.  프랭클린은 미국 독립선언문 작성에 참여했고 또 생명의 위험도 무릅쓰고 신생 미합중국 대사로 프랑스에 가서 프랑스의 지원과 참전을 이끌어냈으며 미국의 첫 헌법 제정에도 큰 기여를 했다. 18세기 미국 신대륙의 력사와 정신을 상징하는 인물로 칭송을 받는 프랭클린은 뛰어난 사업가이자 과학자, 정치가, 외교관, 문필가였다. 그는 또한 발명가이기도 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피뢰침은 그가 발명한 것이다. 부자이고 또한 위대한 인물이였지만 프랭클린은 항상 검소했다. 지금도 그가 스무살에 생활 지침으로 정한 13가지 "덕목"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좌우명으로 되고 있다. 그 "덕목"을 다시 새겨본다. 1, 절제-배부르도록 먹지 말자. 취하도록 마시지 말자. 2. 침묵-자타에 이익이 없는 말은 하지 말자. 쓸데없는 말은 하지말자. 3. 질서-모든 물건은 제자리에 두자. 일은 모두 때를 정해서 하자. 4. 결단-해야 할 일이 있다면 반드시 하겠다고 결심하자. 결심한 것은 반드시 실행하자. 5. 절약-나나 남에게 유익하지 않은 일에는 돈을 쓰지 말자. 쓸데없는 낭비는 금하자. 6. 근면-시간을 낭비하지 말자. 언제나 유용한 일을 하자. 무익한 행동은 금하자. 7. 진실-사람을 속이지 말자. 순수하고 공정하게 생각하자. 언행을 일치시키자. 8. 정의-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하지 말자. 남에게 응당 줘야하는 이익은 꼭 주자. 9. 중용-극단을 피하자. 상대가 나쁘더라도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말자. 10. 청결-신체, 의복 등 습관상 모든 것에 청결을 유지하자. 11. 침착-사소한 일, 일상적인 일 뿐만 아니라 불가피한 일을 당해도 흔들리지 말자. 12. 순결-감각이 둔해지고 몸이 쇠약해지고 부부의 평화와 평판에 해가 될 일을 하지 말자. 13. 겸손-예수와 소크라테스를 본받자.  한 력사학자는 "프랭클린이 위대한 리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혁신이다"고 했다. 말을 바꾸어 말하면 프랭클린은 인생의 목적을 인격 완성에 두고 산 분이였다. 우리 민족의 "선비정신"을 새삼스럽게 떠올리게 되는 대목이다. ​ 펜실베니아주엔 독립의 력사가 태동친 필라델피아외에 미국 통일 력사에서 가장 유명한 격전지인 게티tm버그가 있다. 1863년 7월 게티버그에서 련방군과 남부 련합군이 가장 치렬한 격전을 벌였는데 3일간 전투에서 사망자, 부상자, 포로, 실종자가 51.000여명에 달했고 남부 련합군은 이 격전을 계기로 패배를 거듭했다. 이 격전지는 미국 남북 전쟁의 전환점을 긋은 곳이자 링컨 대통령이 유명 연설을 한 곳이기도 하다. 링컨 대통령은 전사자를 추모하는 연설에서 "우리 민족은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자유를 갖게 될 것이며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펜실베니아주를 막 벗어나면서 스마트폰으로 이것저것 검색하던 중 놀랍게도 우리가 하룻밤 묵어간 필라델피아 인근지역이 세계 명작 "대지"의 저자 펄벅의 고향임을 알게되였다. 청나라 말기를 배경으로 중국인의 애환을 그린 "대지"로 "퓰리처상"과 미국 여작가로 사상 처음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펄벅의 출생지가 지식사전에는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 힐스보로로 기재돼 있다. 지도를 보니 웨스트버지니아주가 북부로 펜실베니아주와 인접해 있다. 그러니 두 주가 명작가 출생지를 자기네 주라고 주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여행길에서 세계 명작을 낳은 위대한 작가를 떠올리게 되었으니 작가로선 감개무량하다.  나이아가라폭포로 가는 경유지에서 미국의 력사를 읽었으니 이젠 전설을 들을 순서다.   [
92    제16편 차라리 죽기보다도 못해서 댓글:  조회:1630  추천:1  2015-02-27
     감옥살이란 어떤 것인가, 나 진짜 문화대혁명때 그 맛을 보았다. 남편이  누명을 쓰고 갇힌 후 나도 간첩죄로 잡혀들어갔다. 남편이 간첩이고 나는 무전수라나.  겨울이였는데 너무 추워서 생각다못해 신문지로 쬐꼬만 통집을 만들었다. 그 속에 들어가니 추위가 덜했다. 신문지가 그렇게 추위를 막아주는걸 예전에 전혀 몰랐었다. 그런데 그것도 하루 밤, 보초 서는 사람이 신문지에 가리워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고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다.   손톱이 길어도 깎을 가위가 없었다. 그런데 그놈의 손톱은 왜 그리도 빨리 자라는지. 어쩔 수가 없어 나는 콩크리트 벽에 대해 손톱을 갈았다. 그러니 갈 수는 있는데 모서리를 갈 수가 없어 변소에 가는 틈을 타서 유리조각을 주워왔다. 그건데 그것이 보초꾼들의 검사에 들킬줄이야.  “너 이건 물하려 들여왔는가? 자살하려구?” “자살, 아닙니다. 손톱을 깎을려구요.” “거짓말 말어! 분명 자살기도가 있는거야. 자살은 무산계급 전정에 항거하는 표현이야!” 나는 원래 자살할 생각이 없었으나 그들이 말을 하자 진짜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천대받고 살아선 뭘 해. 차리리 죽고 말지.”  모든 자유를 박탈당한 상황에서 자살은 그리 쉽지는 않았다. 칼도 없고 유리조각 하나도 주워올 수 없고 목을 매자니 목 맬 끈도 없었다. 온 밤 생각하던 끝에 이불이나 요를 찢어 못 매달 궁리를 하였다. 나는 요를 찢어 보초꾼의 눈을 피해가며 끈을 꼬았다. 정작 이 세상을 하직하자고 생각하니 생각이 착찹해졌다.  “보고 싶던 남편 얼굴 한번 못 보고, 몸살나게 그립던 애들도 못 보고 이렇게 사라진단 말인가. 그리고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이 자살을 했다면 나 스스로가 죄를 승인하는 것이 되고 후에 애들에게도 얼마나 큰 누명이 될가.”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내가 자살할 리유가 하나도 없었다. 다만 하나, 사람대우를 못받고 값없이 산다는 것, 억울하다는 것, 그것뿐인데. 지금 나처럼 억울함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가.   이런 생각을 굴리니 목 맬 이블끈을 꼬던 내 손이 멈춰졌다.   (죽을 수 없어, 죽다니 내가 왜 죽는단 말인가?)  그날부터 나는 오히려 더 떳떳해졌다. 밥도 억지로 먹고 일하려 나갈 때면 머리를 꿋꿋이 들고 다녔다. 삶에 대한 의욕이 북받친 것이다. 심사를 받을 때도 기죽지 않고 할 말을 다 했다. 물론 심사조 사람들은 나를 “완고하다” 했다. “완고”하다면 좋다. 난 오늘도 “완고”하고 내일도 “완고”하고 영원한 “완고파”가 될 것이다.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내게 죄가 없는 이상 무엇이 두려우랴!  
91    사진에 얽힌 한복 이야기 댓글:  조회:2713  추천:4  2015-02-18
  새해를 앞두고 "중국민족" 잡지사 서정옥주필님이 전화로 한복에 관한 특별기고를 부탁했습니다. “전 이날 이때까지 한복을 입어본적이 없는데요.” 제가 잘라 말하니 서주필님은 언젠가 잡지에서 저의 딸이 어린이 한복을 입은 사진을 본적이 있고 저의 아버님이 한복을 즐겨 입는줄 알고 있다고 하면서 꼭 “숙제”를 해서 바치라고 “엄명”을 내렸습니다.    사진 말이 나오니 언뜻 떠오르는 사진 한 장이 있었습니다. 그 사진이 바로 제가 한돐을 맞으며 찍은 기념사진입니다. 사진첩을 들춰보니 아하, 59년전 제가 멋진 어린이 한복을 입고 기념사진을 찍었더군요. 그 사진을 부서의 후배들에게 돌려보이니 후배들이 누구 사진인가고 물었습니다. 제가 롱조로 “50여년전 작가 지망생”이라고 했더니 모두 그 때도 이렇게 이쁜 어린이 한복이 있었는가고 놀라는 것이였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지금 어린이들이 입는 고운 한복에 뒤지지 않는 한복이였습니다. 제가 어린시절 어린이 한복을 “꼬까옷”이라고 했습니다. 일요일 어머님이 나한테 “꼬까옷”을 입혀가지고 나들이 나가면 내 또래 애들이 시샘이 났는지 저한테 “꼬까옷”이란 별명을 달아주었습니다. 그 별명을 듣기 싫어 저는 한복 입기를 거부했습니다. 나들이 가기전 어머님이 저한테 한복을 억지로 입혀주면 저는 밖에 나가 옷에 흙탕물을 끼얹었습니다. 그러면 어머님은 하는수없이 다른 옷을 갈아입혔습니다. 억지다짐으로 저한테 한복을 입히던 어머니는 제가 소선대 중대장이 되면서부터 한복을 입히지 않았습니다. 저의 왼팔에 달린 붉은 줄 두 줄이 그어진 소선대 중대장 표식이 그렇게 대견스러워 보였던지 가족사진을 찍을 때면 동생들은 꼭 한복을 입히면서도 저만은 교복을 입히고 중대장 표식이 달린 왼팔을 앞으로 쑥 내밀게 했습니다. 제가 소선대 대대장이 된후로는 어머니는 시간만 나면 저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어머니가 그처럼 대견스러워했고 자랑거리였던 대대장 표식은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아버님이 반동학술권위로 투쟁받은 그 이튿날 가차없이 떼이고 말았습니다. 그때로부터 저의 동년의 꿈은 풍비박산이 나고 15살 어린 나이에 “지식청년”으로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짓기를 3년반 하던 중 한복이 저의 눈앞에 다시 등장하는 “사변”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문화대혁명이 한창 진행되던 중이여서 한복을 더군다나 남자가 한복을 입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시절에 저의 할아버지가 하얀 한복차림을 하고 나섰습니다. 그 날은 저보다 10살위인 삼촌이 장가가는 날인데 집 마당에서 기념촬영이 있었습니다. 꼭 한복을 입으셔야 할 할머니는 그냥 밭일을 하고 돌아오는 농촌 할머니 차림새였지만 할아버지는 평소에 입지않던 한복을 꺼내 입으셨습니다. 허연 턱수염을 길게 기룬 할아버지가 한복을 입으시니 한결 늠름해보였습니다.  훗날 아버님이 쓰신 자서전을 읽어보니 할아버지에겐 한복은 자존심의 상징이였습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18살 나이에 목에 엿판을 메고 동냥길에 나섰던 할아버지는 우연하게 울산에서 일본 어선에 올라 일본으로 건너가 어부로 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몇 년 험한 바다에서 생사를 걸고 일하다가 고향에 점 찍어놓은 색시를 데리려 환고향 했는데 그날 할아버지는 양복차림에 넥타이까지 매고 거기에 시골에선 보지도 못한 승용차에 앉아 고향마을에 들어섰습니다. 촌사람들은 할아버지가 대부자가 되였다고 부러워했고 딸 가진 부모들은 사위로 삼았으면 세상 좋을 일이라고 생각했답니다. 그 후로 할아버지는 몇년 일본, 대만을 전전하다가 손에 돈이 쥐여지니 환고향해 땅 몇 뙈기 사서 농사를 지었는데 하루는 공출을 바치라고 하는 일본 순사한테 대들었다가 피터지게 맞고 며칠 유치장에 갇혔습니다. 강직한 성격인 할아버지는 며칠후 훌쩍 고향을 떠나 만주땅을 밟았습니다. 할머니 얘기로는 그때로부터 할아버지는 양복을 아예 입지않고 항상 하얀 옷차림을 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하얀 옷차림이란 한복으로 말하면 서민들이 입는 그런 평상복입니다. “양복쟁이”가 “백의민족”으로 변신한것입니다. 산에 나무하러 갈때나 약초 캐러 갈때도 하얀 옷차림을 하였는데 한번은 할머니가 산에도 왜 그런 옷차림으로 가는가고 하니 과묵한 할아버지는 “이 옷을 입으면 호랑이도 피해 가.”라고 무뚝뚝하게 한마디 했답니다. 무심히 던진 한마디지만 깊은 의미가 담긴 말씀입니다.  한복을 즐겨 입으신 아버님 사진을 일별해보니 문화대혁명전 한복 입으신 사진이 한장도 없었습니다. 영문을 물으니 아버님은 기자 취재 자주 나가고 이런 운동, 저런 운동에 말려들다나니 한복 입을 겨를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아버님이 한복을 입기 시작한건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아버님 명예가 회복된후부터입니다. 억울한 루명을 쓰고 감옥에 4년이나 갇혀 있으면서 삶의 용기를 버리지 않은 리유에 대해 아버님은 “내 마음속에 시가 있고 가족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님이 수감된 기간 구상한 장편서사시가 바로 우리 민족의 항일투쟁사를 구현한 “동틀무렵”이였습니다. 그 뒤를 이어 많은 시집이 출간되였는데 시집에 실린 아버님 사진중 가장 잘 된 사진은 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입니다. 아버님의 한복에 대한 애정은 그때로부터 열을 올렸습니다. 아버님과 어머님이 한복을 마음껏 입지 못한 한을 푼다고 70을 넘긴 나이에 한국의 춘향의 고향에 가서 리도령과 춘향으로 분장하고 찍은 사진은 지금 봐도 웃음이 절로 나오면서 어쩔수없이 노래 “청춘을 돌려다오”가 떠올려집니다.    이 글을 쓰면서 갑자기 뇌리를 강하게 치는 느낌이 하나 있습니다. 그 느낌이란 “한복에도 가족사가 깃들어 있을줄 미처 몰랐네”입니다.    저의 경우엔 한복을 입고 싶은 충동을 크게 받는적이 한번 있습니다. 저는2008년 자그마한 수술을 받다가 의외로 의료사고가 나서 하마트면 하늘나라로 갈번했습니다. 세번 수술까지 받고 나니 세상만사가 다 헛것으로 보이고 단지 한 생각만 굳혔습니다. 내 자식이 시집, 장가 갈 때까지 꼭 살아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먹고 운동했습니다. 하루는 친구 아들 잔치에 갔다가 친구가 한복차림을 한 것을 보고 나도 아들, 딸 잔치엔 한복을 입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집에 돌아와 언젠가 선물로 받은 한복을 꺼내 입고 사진을 찍어 미국에 있는 안해에게 보냈더니 내 나이에 격이 맞지 않는 한복이라고 하면서 한국이나 고향인 연길에 가면 좋은 한복으로 한벌씩 맞추자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안해는 아들과 딸이 장차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될 것 같은데 그때 양복보다 멋진 한복차림으로 미국인들 앞에 나서자고 했습니다.  미국인들 얘기가 나오니 미국인들이나 유럽인들이나 예전엔 우리 민족의 한복을 “코리안 기모노”라고 했답니다. 기모노는 일본 전통의상입니다. 왜 하필 우리 민족의 전통의상에 기모노를 붙혀야 합니까? 외국인들에게 한복의 진미를 알려주려고 한국의 한 패션 전문가가 로스앤젤레스에서 한복 패션쇼를 가졌는데 그 분이 하신 말씀이 아주 명언입니다. 그 분은 우리 민족의 전통미를 상징하는 한복은 세계적으로도 그 아름다움을 인정받는 우리 민족에게 가장 잘 어울리게 만들어진 하나의 과학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민족의 만들어낸 하나의 과학이라는 한복을 입고 당당하게 외국인들 앞에 나설 그날을 기대해봅니다.
90    제15편 임신한줄 모르고 위약만 먹어 댓글:  조회:1548  추천:1  2015-02-11
   결혼한지 얼마 안되어 나는 “위병”에 걸렸다. 병원에 가서 검사하니 의사는 내 위가 헐었다고 했다. 그래서 위약을 얼마나 먹었는지 모른다. 후에 알고보니 임신인걸 모르고 위병치료만 한 것이다. 그래서 나의 첫 아이는 배속에서 위병약만 먹고 자란셈이다.  해산 하는 날, 철없는 나는 해산 날짜를 모르고 있었다. 새벽에 갑자기 배가 아파나기 시작했다. 내가 남편에게 말했다. “배가 아파요. 어제 저녁에 드릎을 많이 먹었더니 그게 탈이 난 것 같아요.”  그랬더니 남편도 하는 말이 “글쎄, 나도 배가 아프오.”  얼마 후에 나는 이것이 해산할 징조임을 알았다. 그래서 새벽에 병원으로 향했다. 그 때만해도 해산하러 가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차도 없고 해서 걸어서 병원으로 가는데 배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 가다가는 주저앉고 그러면 남편이 “어서 일어서오, 저기 양몰이꾼이 오오.” 하면서 나를 일궈세우곤 했다.  나는 병원 문앞에서 끝내 주저앉고 말았다. 병원에서 밀차를 보내와 거기에 실려 곧바로 산실로 실려갔다.  헌데 뜻밖에도 난산이었다. 조산사가 끝내 아이를 출산시켰는데 아기는 숨이 없고 온 몸이 흙빛이었다. 나이 지숙한 조산사가 그래도 경험이 있어 아이를 꺼꾸로 쳐들고 찬물이 넣었다 냈다 하면서 아이 엉덩이를 두드렸다. 이윽고 아기 몸에 핏기가 돌더니 드디어 첫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아기 무게가 6근 반이었다. “아들을 낳았소.”  조산사가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 순간 나는 모든 아픔이 다 사라진 것만 같았다. 이렇게 낳은 아들이 바로 우리의 맏아들 김훈인데 후에 저명한 소설가, 극작가, 교수, 문학박사로 되었다.
89    제14편 결혼 첫날 밤 댓글:  조회:2622  추천:1  2015-01-29
신랑의 보모가 사는 신안진이라는 농촌에 당도해 보니 신랑 집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신랑 어미니는 반갑다고 뭘 대접하고 싶은데 대접할게 없어서 부랴부랴 엿을 만드느라고 법석이었다.   밤에 우리는 온식구 일곱 사람이 한구들에서 이불 한 채에다 발만 밀어넣고 하루밤을 새웠다. 구들장이라는게 고르지 않아 울퉁불퉁하였는데 게다가 담요도 없이 자자니 잠이 올리 없었다. 신랑은 미안해서 몇 번이나 나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하였다. 그러나 나는 신랑이 좋아서 불편한 것도 마냥 즐겁기만 하였다. 결혼 첫날밤은 이렇게 지새웠다. 어떻게 보면 우린 지금 젊은이들이 말하는 려행잔치를 한 셈이다. 우리가 연길에 돌아오자 소문을 들었는지 신랑의 문예계 친구들이 돌연 습격을 했다.  “이 자식, 결혼을 했다는게 술 한잔도 안 내?” 나는 불이나케 술상을 차렸다. 그 때 우리 집에 들이닥친 사람들은 모두 문예계 거두들이었다. 소설가 김학철, 작곡가 정진옥, 모두가 당시 한다하는 인물들이었다. 그 날 신랑 친구들은 우리 초가집에서 구들장이 꺼지도록 춤추며 신나게 놀았다.  날이 저물어 모두들 귀가길에 올랐다 헌데 김학철씨의 지팽이가 보이지 않았다. 그 때는 택시도 없는 시절인데 지팽이가 없이 어떻게 돌아간단 말인가 실로 난처했다. 모두들 김학철씨의 지팽이를 찾아 나섰다. 나중에 김치움에서 그의 지팽이가 발견되었다.                                                            당시 남편 친구들(선글라스 쓴 분이 남편)                                                          
88    제13편 공동묘지에서 속삭인 사랑 댓글:  조회:1943  추천:4  2015-01-08
  그 때만해도 남여가 더구나 처녀총각이 나란히 거리에 나서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때였다. 그렇다고 집에서 사랑을 속삭이자니 늙으신 할머니가 계셔 집을 나서야만 했다. 그래서 우리 둘은 생각다 못해 인기척이 드믄 공동묘지를 찾아갔다.  연변대학 뒷산의 공동묘지,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는 좋은 연애장소였다. 우리는 거기서 무덤을 빙빙 돌며 숨박곡질을 하였다. 아무리 크게 웃어도 소리쳐도 듣는 이가 없었다. 아주 우리만의 세상이었다. 게다가 풀까지 잔잔히 자라 뒹굴기도 좋았다. 우리는 공동묘지에서 즐기다나니 해 지는줄도 몰랐다.   우리가 연애를 한다는 소문이 나자 방애하는 사람도 많았다. 몰래 나를 엿보고 짝사랑을 하던 공안국의 한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 룡섭씨에게 다섯살짜리 아이가 있다고 헛소문을 퍼뜨렸다. 나는 그 소문을 믿지 않았다. 그의 나이가 어린데, 또 학교에서 직접 군대에 갔으니 언제 장가를 들었으며 다섯살짜리 아이가 있을수 있겠는가.   또 우리 동네의 한 아줌마는 그의 어머니가 계모이고 째지게 가난하고 식구도 많다고 말했다. 우리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그런 말은 나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편단심 오직 한 마음!  드디어 우리는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째지게 가난한 우리로서는 결혼식이 문제였다. 양쪽 집이 다 어려운 상황이었다. 궁리하다 못해 우리는 거짓말 잔치를 하기로 합의하였다. 어떻게 거짓말을 할 것인가? 연길에서는 부모님이 계시는 목단강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하고 부모님 집에 가서는 이미 연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고 거짓말 하기로 했다.   우리가 “잔치”하러 목단강으로 떠나는 날 아침 그래도 할머니는 정성껏 음식을 장만하였다. 어쩌다 이밥에 좁쌀을 절반 섞고 반찬이래야 고등어 한 마리, 떠나는 신랑 밥상이라는게 고작 이뿐이었다. 그런데 이날 아침 우리가 떠난다고 숱한 친척들이 찾아왔다. 고등어 한 마리만 밥상에 놓자니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서로 사양하다나니 고등어 한 마리가 종시 축나지 않았다. 이 광경을 본 나의 가슴은 미어지는듯 했다. 슬프고 죄스럽고 미안하고, 끝내 우리는 밥도 먹는둥만둥하고 먼길을 떠났다.    
87    제12편 나의 연애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댓글:  조회:1820  추천:3  2014-12-28
      명절날 운동대회가 열렸는데 그 총각이 마라톤 시합에 나가게 됐다. 듣자니 군대에 나가기전 학생시절에 전 동북 마라톤대회에서 2등을 한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마라톤 시합은 오후에 있는데 오전에 그 총각이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출전하기전 조용한 곳에서 잠깐 쉬겠다는 것이었다. 우리 집에서 쉬다가 가면서 그 총각은 나 몰래 내 책상 설합에서 내 사진 한 장을 꺼내 운동복 뒷주머니에 넣고 갔다.   나는 오후에 운동장에 나가 보았다. 마라톤 시합은 운동장에서 출발해 연길시 북쪽에 있는 뾰족산까지 가서 등에다 도장을 박고 돌아오는 1만미터 경기였다.   “선수들이 들어온다!”  누군가 소리치는 바람에 운동장 입구를 바라보니 눈에 익은 선수 모습이 안겨왔다. 그 총각이었다. 뒤 따르는 선수를 한참 떨궈놓고 선참으로 들어오는 총각, 그를 보는 내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는 가볍게 운동장을 세바퀴 돌고나서 종점에 들어섰다. 그는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답례했다. 나는 막 달려나가 꽃다발이라도 안겨주고 싶었다. 그러나 수줍은 처녀의 몸, 그 시절엔 그런 용기도 낼 수가 없었다. 다만 혼자서 소리치며 손만 흔들었다.   (마라톤도 잘 하고 문학도 하고, 정말 재간있는 청년이구나.)  이렇게 생각한 내 마음은 이미 그 총각에게 쏠렸다.   그 후 어느날 밤 그 총각이 우리 집에 놀러왔다. 그가 왔다간 후 그 총각의 하숙집 아줌마가 갑자기 나를 찾아왔다.  “룡섭동무가 여기 왔다 갔소?” “예. 그런데요?” “큰일났소,. 밤길에 오다가 김치굴에 빠져서 몹시 다쳤소. 빨리 가 보오!”  나는 깜작 놀랐다. 그 자리에서 그 아줌마를 따라 그 총각 하숙집을 달려갔다. 집안에 들어서보니 그 총각이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워있었다. 나는 어쩔줄 몰라 그냥 멍하니 서만 있었다.   “어서 이불을 들춰보오.”  아줌마가 이렇게 말했지만 처녀인 나로서는 총각의 이불을 들춰볼 수 없었다.   “빨리 물어보오. 얼마나 다쳤는가.”  아줌마의 독촉에 나는 약간 떨리는 손으로 이불 모서리를 들며 낮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그런데 대답이 없어 나는 또 물었다.  “다친데는 없습니까?”  그랬더니 그 총각이 갑자기 눈을 뜨며 히죽이 웃는다. 이어 벌떡 일어나 앉는다.   “보다시피 아무 일 없습니다.”  그제야 나는 얼림에 들었다는걸 알았다. 하숙집 아줌마가 우리를 대면시키려고 조작한 연극임을 알았다.   훌훌 털고 일어난 그 총각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더니 얼마후에 과자봉지를 들고 들어왔다. 뜻하지 않은 야밤의 즐거운 웃음판이 벌어졌다.   그리고 또 며칠 후 하숙집 아줌마가 또 나를 찾아왔다.   “우리 집이 비었는데 좀 와서 집을 봐주오.”  아줌마 집에 가 보니 말그대로 집은 텅 비어있었다. 내가 혼자 집을 지키고 있는데 그 총각이 문을 떼고 들어왔다.   (아이구 또 연극이였구나!)  우리 둘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라고 아줌마가 자리를 마련해준 것이었다.   그날 밤 총각의 이야기는 진지하였다. 자기의 경력과 가정상황, 모든 이야기를 자초지종 죄다 말해주었다. 그리고는 나중에 자기의 진심을 고백했다.   “나는 동무를 사랑하오. 백년가약을 맺고 싶은데 동무는 어떻게 생각하오?”  당돌한 이 말에 나는 다소 당황했으나 잠깐 뜸을 들인후 긍정적으로 나왔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고맙소! 우리 재미있게 살아보기오.”  그 총각이 나에게 청을 들었다.   “내 팔에 한번 누어볼 수 없을가?”  나는 말없이 수긍하였다. 이렇게 나는 처음으로 총각의 팔을 베고 누웠다. 가슴이 떨리고 무서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기뻤다. 후에 그 총각의 말에 따르면 처녀를 처음으로 제 팔에 눕히고 보니 천정이 빙빙 돌더라나. 나도 마찬가지. 기쁨인지 무서움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누가 당금 문을 뗴고 들어오는 것만 같아 1분도 안지나 나는 일어나 앉았다. 이렇게 우리들의 연애생활은 시작되었다.       
86    제11편 나한테 첫 고민을 준 총각 댓글:  조회:1934  추천:1  2014-12-07
  어느날 내 친구 리정희가 한 총각을 소개했다.  “이전에 우리 목단강중학교에 룡섭이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너처럼 문학도 좋아하고 달리기도 잘 하고 마음도 영 고운 사람인데 지원군에 갔다가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너 한테는 딱 맞는 총각이다.”  그 후 얼마 안지나 할머니가 점을 친 모양이었다. 내가 너무 시집을 안간다니까 하도 답답해서 동네 등곱쟁이 점쟁이 할머니를 찾아간것이다. 점쟁이 할머니는 무엇인가를 중얼거리며 생각을 굴리더니 하는 말이 “연애편지를 쓰고 그 애를 탐내는 사람이 많기는 하지만 그건 다 쓸데 없는 일이외다. 그 애의 연분은 따로 있는데 이제 얼마 안지나서 저 북쪽에서 책가방 하나를 달랑 메고 오는 청년이 있는데 그 사람이 연분을 맺을 총각이오.”  그래서 할머니는 누군지도 모를 그 총각에게 막연한 기대를 걸고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어느  일요일 날 나와 정희는 함께 거리에 나갔다. 어느 사진관 앞에서 정희가 어떤 총각을 만나 함께 사진관으로 들어갔다. 사진관으로 들어갔던 정희가 인차 나오더니 나에게   “야, 저 사람이 그 때 내가 말하던 룡섭이라는 총각이다. 지원군에서 제대되어 신문사 기자로 취직했단다.”라고 말했다.  나는 얼핏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퇴색한 군복차림에 몸에 어울리지 않은 헝겊신을 신고 있었다.  “야, 그저 수수한 사람이구나.”  나의 말투는 심드렁했다. 그 때만해도 나는 제대군인이 제일 싫었다. 왜냐하면 전쟁시기 부상한 부상병들이 우전국 책임자를 찾아와 처녀를 내놓으라고 책상을 두드리며 호통을 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전국은 처녀가 가장 많은 단위었다. 제대군인이나 부상병들은 “내가 전쟁터에서 피를 흘렸는데 까짓 처녀 하나 못 내놓는가?” 하면서 호통을 쳤다. 그래서 우전국의 처녀들은 제대군인이나 부상병을 보기만 하면 피해 달아났다. 솔직히 말해 나도 지원군에서 제대했다는 제대군인 총각이 싫었다.   이튿날 나는 정희와 함께 우리집 부근의 한 골목길에서 우연히 그 총각과 마주쳤다. 그는 정희네 집으로 놀러오는 길이었다. 나는 초면이라 인사도 못하고 있는데 그 총각이 먼저 “안녕하십니까?”하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나는 몸 둘바를 몰랐다. 다시 보니 갤편하게 생긴 얼굴에 우유독에서 빠져나온듯 하야 맑숙한 피부가 인상깊었다. 정희가 말했다.  “너 집이 조용할텐데 우리 함께 너 집으로 가자.”  그래서 나는 총각을 처음 우리 집에 모셨다. 이렇게 우리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그 후 그 총각은 자주 우리 집에 놀러왔다. 신문기자인 그는 이때부터 군복을 벗고 하얀 와이샤스바람에 왔는데  눈 여겨 보니 그가 입은 외이샤스는 낙하산천을 베어 만든 것이었다. 바느질이 서툴어서 여기저기 실밥이 삐어져 나왔다. 유심히 살펴본느 내 눈치를 알아채렸는지 그 총각이 어색하며 변명했다.   “이건 전선에서 미국 낙하산천을 주어 만든건데 천이 너무 미끄러워서 잘 만들지 못했습니다.”  “아니 보기 좋은데요.” 이날 나는 실로 뜬 이불보의 수를 매고 있었다.  “나도 같이 하면 안될까요?”  그 총각이 자진해 내 일을 거들었다.   “이걸 어디 다 치려고 그럽니까?” 나는 귀볼이 화끈해남을 느꼈다. 부끄러워 아무말도 못하고 있는데 그 총각이 말끈을 달았다. “후에 우리 집에다 치면 안될가요?” “정말 농담도 잘하시네.” 이렇게 대꾸하는 내 마음에도 이상야릇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솔직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남자다운 시원시원한 성격 소유자였다. 이때 정주간에 계시던 할머니가 말간에 끼어들었다.  “이보게 젊은이 저 애를 좀 시집 보내주게. 시집가란 말만 나오면 천길만길 뛰나까 참 답답하오. 내 눈에 흙이 들어가지전에 누구한테 맡기고 가야하는데…” “글세요, 정 맡길데가 없으면 저에게 맡기세요. “ 그 총각의 농담엔 진담이 섞여있는듯 했다. 나는 공연히 얼굴이 붉어졌다.   그 총각은 내 책상의 책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책상이래야 쬐꼬마 밥상같은건데 그 위에는 최서해의 “탈출기”며, 이광수의 소설, 이수일과 심순애 연애사를 다룬 책들이 꽂혀있었다.  “문학을 퍽 좋아하시나봐요.” “예, 좋아합니다.” “나도 좋아하는데요. 나는 시를 씁니다. 최서해 탈출기를 보셨나요?” “예, 봤습니다.” “그 책에서 임신한 아내가 귤껍질을 주어먹는걸 보고 측은하게 생각하는 남편의 마음이 인상적이지요.” 이 말을 들은 나는 작가의 마음이란 항상 자애롭고 생활의 구석구석을 잘 보살펴주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작가에게 시집가면 한평생 각별한 사랑을 받을것만 같았다. 그래서 일찍부터 대학의 물리계나 수학계 학생들이 보낸 연애편지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고 문학을 하는 사람을 은근히 찾던 중이었다.   나는 그 총각이 시를 쓴다는데 마음이 솔깃해졌다. 우리 둘 사이엔 공동언어가 있게 되었다. 우리 둘은 문학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럴즈음 할머니가 자주 그 총각 이야기를 꺼냈다. “내 보기엔 그 젊은이가 참 인사성이 있더라. 다른 사람은 우리 집에 와도 어른한테 인사도 없이 너만 찾는데 그 젊은이는 꼭 먼저 나한테 인사를 하더라. 인물도 그만하면 잘 생겼고…” 분명 할머니는 날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나도 나름대로 생각을 굴렸다.  “인물도 좋고 직장도 좋고 성격도 좋은 문학청년인데 단 한가지 맏이라는 것 나는 장차 할머니를 모셔야 할 상황인데…” 어쩌면 좋을가? 아깝기는 한데 당기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할 형편, 나의 진짜 고민이 시작됐다.         
85    문화적인 여유 댓글:  조회:2780  추천:1  2014-10-02
     국경일 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몇 해전 만해도 명절 휴일을 공원이나 영화관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문화적인 휴식공간이 많이 생겨나 선택의 여지가 있게 된 것은 물론 경제적인 사정이 많이 편해져 가족끼리 국내 관광이나 해외 예행을 가거나 체육관에 가서 신체단련과 그 즐거움을 향유한다던가 그렇지 않으면 대자연의 정취에 젖어보려고 산이나 초원을 찾는 분들도 많습니다. 휴일에 가족끼리 역사, 지리, 천문, 해양 등 지식을 늘여주는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고 합니다. 이는 사람들의 휴식문화차원이 전보다 많이 높아졌다는 일례로 됩니다.  예전엔 휴일이면 기껏해야 공원놀이를 가거나 백화상점이나 돌아보고 그렇지 않으면 집에서 죽치고 앉아 텔레비젼이나 보고 마작이나 트럼프를 놀면서 시간을 보낸 데 반해 지금은 휴일이 문화적인 휴일로 되어 휴일문화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휴일이 문화적이 되고 휴일문화를 이루고 있는 것은 특기할만한 일입니다.  누군가 일상에 쫓기고 여유가 없는 민족보다도 마음으로 느긋한 여유를 가진 민족, 말하자면 문화적으로 여유를 가진 민족이 새로운 세기의 주역으로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휴일도 문화적으로 보내고 그 휴일을 문화로 승화시켜 휴일문화를 형성하고 그속에서 삶의 원동력에 충전을 하는 것이 현대인들의 휴일문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유태인들은 휴일을 신성한 날로 간주합니다. 유태인들이 휴일을 보내는데 있어서 가장 독특한 것은 휴일에 일에 대해 얘기해서는 안된 다는 점입니다. 때문에 휴일의 화제에는 자연히 인생관이라든가 인간성, 혹은 예술이 아니면 자연, 가정 등 화제가 오릅니다. 그들은 휴일에도 사업 때문에 괴로워하고 일감을 가지고 집에 와서 서류와 씨름하는 사람을 불행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유태인들이 휴일을 신성한 날로 간주하는 것은 휴일에 사람들이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유태인들의 인생지침서인 [탈무드]에는 [휴일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지 인간이 휴일에 주어진 것이 아니다. 휴일을 쉬는 방법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적혀있습니다.  이런 실례가 있습니다. 한사람이 연휴를 맞아 등산을 가게 되었는데 일주일동안 신문을 보지 않았답니다. 왜서 신문을 보지 않았는가 하니 그 사람이 하는 말이 [그토록 아름다운 대자연의 나무를 찍어서 이처럼 추한 신문을 만들어냈으니 인간들이 자연에 저지른 죄가 크다]고 대답했습니다. 사실 그 사람은 휴일에 등산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대자연의 품에 안겨 인간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휴일을 뜻깊게 보냈습니다.  연휴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자기를 인간으로서 참답게 바라보는 뜻깊고도 마음편한 명절의 연휴가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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