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의 신사유”시리즈 대담
누구를 위하여 글을 쓰는가?
사엽신( 沙叶新)+김문학
사엽신( 沙叶新)
0.들어가면서
삶이란 아쉬움(유감)을 쌓아가는 과정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가끔 있다. 이를테면 만나고 싶은 사람과 지척에 두고도 못 만나는 아쉬움, 회한 같은것이 그렇다.
내가 대륙에서 가장 만나고 싶었던 명사중에 사엽신(沙叶新 )선생이 그 중의 한 분이다. 서로 만나자고 수차례 별렀지만, 결국 전화에서 통화 몇 번으로 끝난 우리의 아쉬움은 과연 회한이 되여 나를 괴롭히기도 한다.
2014년 봄 상해의 친구를 통해 작가 사엽신선생과 연줄이 닿았다. 우리는 전화를 통하여 서로의 정을 나누기도, 문화적 교류를 하기도 하였다.
사엽신선생은 내가 80년대 일본 유학전부터 잡지를 통해 알고 있는 극작가, 수필가였다.
연극 《내가 만약 진짜라면》《진의 시장》《예수, 공자, 레농》등은 중국 문단과 사회에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또 그는 《진짜 남자대장부를 찾아서》등이 영화, TV연속극으로 방영되면서 전국민의 마음을 진감한 주인공이기도 했다.
특히 내가 90년대 중반 그의 연극본 《예수, 공자, 레농》을 읽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은 오늘도 새롭기만하다.
반골정신, 기지로 번뜩이는 유머와 풍자, 그리고 많은 고정관념을 짓부신 아이디어는 그야말로 대륙의 일류 지식인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의 재질은 물론, 진실을 말하는 지적 용사, 정의감으로 충만된 지식인의 양심적 본보기로 나는 사선생을 내심으로부터 숭경해왔다.
그런데 그의 암질환으로 수차례 수술과 입원, 통원을 거듭하면서 우리가 만나자는 약속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리고 2018년 7월 26일 아침, 사선생은 하늘나라로 떠나시고 말았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 세상에서 못다 하신 일을 저 세상에 가셔서도 계속 하시리라 나는 믿고 싶다.
별세후, 장황한 추도회, 추모모임을 못하게끔 하시고, 그냥 일가 친족 8명으로 구성된 간단한 영결식으로 끝나게끔 자식들에 부탁하셨단다. 그리고 아들의 위챗을 보니 그렇게 간소하게 영결식을 차렸다고 한다.하늘나라로 가신길도 그렇게 사선생 다웠다.
이제 남은건 우리가 사선생의 유지를 이어 받아 어떻게 진실을 말하면서 정의로운 인간으로 살아가는가 하는 과제뿐인가 한다. 이 또한 모든 지식인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지금 내곁에는 사선생의 사인이 박힌 저작이 남아있다. 요즘 그의 저작을 재다시 찾아 읽으면서 감회가 또한 새롭다.
쟁쟁한 철골(铁骨)의 문사 사엽신! 진실을 감히 말하고 권력과 고루한 관념과 맞서 저항한 코먼센스적인 정신은 우리의 귀감으로 남아 있을것이다.
불굴의 문사 사엽신, 그는 어떤 말을 남겼을까? 사성생에 대한 추모와 정을 안고 대담을 정리 해 본다. 이 대담은 2014년에서 2016년에 걸쳐 수차례의 전화대담을 간추려 정리한 것임을 밝혀둔다.
1.당대 중국의 쉑스피어
김:서양문화의 쟝르로서 연극은 중국에서 뿌리박은지 약 100년이 좀 넘습니다. 연극 100년사에서 노사( 老舍),곽말약 등 거물이 나왔지만, 신시기(문혁이후)에 배출한 연극대가는 사선생과 고행건(高行健 )을 비롯한 극작가를 꼽을수 있습니다. 1980년 1월 당시의 현명한 지도자인 호요방은 선생님의 극본을 격찬하면서 “당대의 쉑스피어”라고 높이 평가했지요.
그럴만도 합니다. 선생님의 《진의 시장》은 중학교 교과서에 올랐고, 특히 그 걸작이라 불린 《만약 내가 진짜라면》은 과연 중국인의 심금을 울린 메가톤급 문학미사일이었지요. 근데 그게 나중에 공연금지로 되고 그게 또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잖습니까? 이 얘기부터 시작할까 합니다.
사: 아마 《진의 시장》과 《만약 내가 진짜라면》을 통해서 내가 전국적인 극작가로 선보인것 같습니다. 《진의 시장》은 유머스러운 진의 시장의 인간성을 표현했기에 정부로부터 “우수극본상”을 수상했지만, 《만약 내가 진짜라면》은 반대로 불운했어요.(웃음)
1979년 상해에서 실지로 있은 청년 사기꾼이야기입니다. 이 사기꾼은 고위간부의 자제로 둔갑해서 교묘하게 사기를 쳤는데 이 소재로 내가 79년 여름에 연극대본을 창작했어요. 이건 특이한 연극이였어요. 문혁이후 최초로 간부의 특권을 폭로, 풍자한 연극이였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송가만 불러온 전통속에서 이런 신선한 풍자극이 나오니까 큰 파문을 일으키게 됐지요. 일단 상해에서 공연하고 나중에 전국적으로 공연이 파급되였는데, 치열한 평론이 벌어졌고 1981년에 상급으로부터 “공연금지”령을 받았습니다.
김: 자료를 보니까 호요방까지 이 쟁론에 뛰어들어, 사선생님을 긍정하셨습니다.
사: 그래요! 1980년 1월부터 2월까지 “극본창작좌담회”가 개최됐는데, 나의 《만약 내가 진짜라면》을 첫머리로 토론이 전개됐습니다. 당시 화약냄새가 농후했는데, 2월 13일 호요방동지가 무려 6시간이나 장편 강화를 하셔서 작가에 대해 꼬깔모자를 씌우는 문혁식 작법을 금지하고 문예작품에 대해서도 예전같은 죄명을 덮어씌우지 않는다고 명언했습니다. 역시 현명한 호요방 동지에게 감사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내가 1984년에 중국작가협회 입회할 때, 일부 노년 우파세력의 극력적인 반대를 받았지만, 파금(巴金) 등 거물들의 추천으로 무사히 입회했고, 또 내가 입당할 때도 호요방동지의 “사동지는 입당조건에 부합되므로 입당해야 한다”는 친필추천으로 스무드하게 입당이 되였답니다.
김: 과연 호요방 총서기는 문혁이후 보기드문 지도자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현명한 인물이 우리에겐 축복이지요, 2001년에 사실 저도 《조선족 개조론》을 발표하여 조선족 내부의 일부 지식인들로부터 문혁식의 중상과 비방을 받았어요! (웃음) 그러니 조선족의 의식은 중국 일반보다도 20년 낙후하다고 전 생각듭니다.
2.왜 시대의 양지(良知)가 필요하나?
사: 조선족 지식인에 그런 엉터리 지식인도 있나요?!(웃음) 그것도 문혁이 수십년이나 지난 지금에, 지식인이 정치 몽둥이를 휘두른다는건 문혁수준으로 회귀한거를 말하지요. 당정 간부가 그런 짓을 했다면 몰라도 지식인이 그런 우둔한 짓을 한다는건 시대의 비극이고 후퇴지요!
김: 그러게요! 그래서 전 그런 수준이하의 인간들을 아예 무시해 버립니다. 자중균( 资中筠)선생도 사고차원이 다른 인간과는 아예 상종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사: 그렇습니다. 쓸데없는 소모전을 벌이기 보다는 그 시간으로 글쓰고 독서하는 일에 몰두하는게 퍽 현명한 처사지요.
김: 네, 《만약 내가 진짜라면》의 극본을 지금 다시 읽어 보았는데요. 여전히 지금의 시대에도 시효가 떨어지지 않았단 느낌입니다. 사기꾼의 행각을 통해 사기꾼에 편의를 도모해준 중국의 관료주의, 부패에 대해 79년에 이미 신랄한 비판, 풍자를 했네요.
사: 지금처럼 유행하는 “부패”란 단어는 안 썼지만, 내가 중국에서는 처음으로 고관의 “특권”문제와 체제의 병폐에 대해서 풍자를 했어요. 물론 여전히 미숙한 점이 많지만, 난 지식인은 시대의 양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양심을 지니고 용감하게 문학예술을 영위해야 하는바, 이 용감에는 두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용감하게 광명을 구가하고 또 하나는 용감하게 시대의 폐단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3.권력을 위하여 글을 쓰지 않는다.
김: 사선생님의 명언중에 “권력을 위하여 글을 쓰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정말 저의 마음에 와 닿는 명구입니다. 아마 모든 비판정신과 독립품격이 있는 지식인, 작가라면 다 이 말씀에 공감할 겁니다.
사: 왜 글을 쓰는가? 글쓰기의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아마 사람마다, 작가마다 답이 틀릴 겁니다. 명리, 금전 또는 교만으로 승급하기 위해 글을 쓰거나 그냥 낙으로, 또는 정서배설을 위해 글쓰는 자도 있을거지요.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젋었을 때는 중국 전통문예관의 영향으로 문장경국지대업(文章经国之大业 )이란 “숭고”한 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문화대혁명시기는 모택동의 문예사상인 정치를 위해 봉사한다는 의도에서 모택동의 추수기의를 노래한 연극을 쓰기도 했어요.
그러나 개혁개방후, 나는 완전히 탈태환골을 했어요. 우리는 현재 모택동시기를 탈출하여 다원적인 전민주사회( 前民主社会)에서 살고 있지요.
문학예술이 정치를 위해 봉사한다는 시기는 지났고 현재는 권력에 대한 조롱, 풍자와 비판할 수있는 시대이지요.
물론 내가 여기서 얘기하는 권력이란 국가권력을 독점한 독재, 전제권력입니다. 중국은 바야흐로 문혁과 같은 전제주의에서 벗어나 포스트전제주의사회에 들어 섰으며, 글쓰기 역시 권력의 하수인이 아닙니다.
김: 그렇지요! 정치와 권력에 곡학아세하는 지식인이 여전히 있기는 하지만, 그런 인간이나 글쓰기는 만인이 침뱉는 존재로 된지도 오라지요.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권력의 폭력같은 지배에 맞서서 저항하는 인간이야 말로 진짜 인간이고 지식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 그래요. 권력이란 원체 부패, 우매, 잔인등으로 직결돼 있고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장본인이 되기 십상입니다.
그럴진대, 한 작가가 권력을 위해 글쓰기를 한다면 그건 영낙없이 부패, 우매, 잔인을 위해 자원적으로 봉사하는거지요. 만약, 핍박에 못이겨 그렇게 했다면 리해할순 있지만, 자각적으로 그랬다면 그건 원흉을 방조한 죄악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김: 지식인가운데도 아까 말씀 드렸지만 자각적으로 정치 몽둥이로 진실을 말하는 지식인을 잡으려 하는건 더 추악하지요!
사: 그럼요! 그런 자가 더 잔인하고 우매하고 부패한 “권력의존”의 추악한 인간입니다. 중국에 이런 자가 너무 많아요. 문화대혁명 때 그런 지식인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권력에 아부하여 대신 사람잡고 밀고하고 온갖 추행을 맡아서 했잖습니까?
4.문혁전에 요문원을 질타한 청년
김: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도록 해야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하나의 조건이 되기도 합니다. 사선생님은 대학 졸업후인 1961년에 대좌파 문인으로 유명한 요문원( 姚文元)의 문장을 비탄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그 때 상황을 듣고 싶습니다.
사: 1957년에 화동사대 중문계에 입학하여 소설 둬편 써서 교내에서 이름을 날렸는데, 더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은 1961년 대학 졸업후 상해 희극학원 대학원생으로 있을 때, 쓴 논문 《审美的鼻子如何伸向德彪西 - 和姚文元商榷》입니다.
그 때 당시 아직 ”4인방”이 형성되진 않았지만, 요문원은 지식계의 대좌파 인물이므로, 그와 맞서서 비판 한다는건 권세있는 유력자를 건드린 셈이 되지요.(웃음)
김: 대단하십니다. 젊은 나이에! (웃음) 두렵지 않았나요?
사: 두렵긴요! 학술적인 비판인데요 뭐, 그 뒤 문화대혁명중 요문원은 그야말로 청운직상(青云直上)으로 권세를 자랑했으니, 내가 그를 질타한 죄명도 갈수록 커졌지요. 날 보고 문화대혁명직전에 무산계급의 사령부를 포격했다는거예요.그때는 입이 열개 있어도 변명, 하소연 할 길이 없었습니다. “4인방”이 무너진 다음, 동일 사건이라도 평판이 전혀 달라졌지요. 삽시에 문화대혁명전에 벌써 “4인방”을 무찌른 영웅으로 되였습니다.(웃음)
김: 죄인에서 일약 영웅으로 되셨네요! (웃음)
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냥 “4인방”의 박해를 받은 것만 시인하고 자신을 “4인방”과 용맹히 싸운 영웅으로 분장시키지 않았어요.
5.가장 큰 고통은 거짓말을 한다는것
김: 문화대혁명시기 사선생의 극본 《边疆新苗》가 비판을 받았지요?
사: 당시 문화부 부장이였던 우회영(于会泳)과 상해시위 문교서기였던 서경현(徐景贤)이 직접 내 이름을 지명하여 ”3돌출(三突出) “원칙을 위반했다고 비판했어요. “사회주의 문예의 근본임무”를 위배했고 , “사엽신의 심미적 코(鼻子 )는 또 자산계급으로 향했다”고 질타하면서 상해문화계층의 비판대회를 소집하여 나를 비판했습니다.
시초에 나는 심중에 불복했고 변언문을 써가지고 반항하려고 작심했어요.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암석에 계란던지는 격이라 부질없다고 생각이 들어 자기 반성문을 써서 굴복하는체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때 내 마음은 찢어지는 듯이 아팠어요. 고통스러웠던 것은 반성문을 쓴 것이 아니라 핍박으로 가짜반성, 거짓말을 한거예요.
김: 이해할만 합니다. 반골정신의 덩어리인 사선생님의 인격이니까.
사: 난 고통스러워서 정신이 분렬되고 붕괴될 듯 했어요! 그때로부터 난 절대로 거짓 반성과 거짓말을 안하기로 결심했어요. 쉽지 않지만 나는 내 양심으로 그렇게 하기로 했고 지금도 그렇게 견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체제하에서 물론 때로는 적당한 타협도 자기를 살리는 지혜이긴 하지만, 하나의 원칙, 하나의 라인이 있는데 절대 거짓말을 안 하는 것입니다.
김: 카뮤의 말이 생각납니다. “작가는 지극히 고귀한 존재로서 영원히 두 가지 간난한 개입중에 서있다. 거짓말을 거절하든지 핍박에 반항하든지”.
사: 지식인에 있어서 가장 큰 고통은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하도록 핍박하는 겁니다. 과거 여러차례 정치운동 때 많은 지식인들이 그 고통에 못견뎌 자살한것은 육체적인 고통도 있겠지만 중요한 요인은 내심적 심리적 고통때문입니다. 이게 우리 나라 전국민, 전 사회가 거듭 반성하고 다시는 이런 무서운 일이 재발하지 못하게끔 하는겁니다.
6.왜 비판이야말로 지식인의 성스러운 사명인가?
김: 지식인이란 개념이 중국에서는 체제를 위하여 해석하고 사탕발린 소리를 하는 식으로 오해 하고 있는 경향이 농후한데, 기실 “지식인”이란 그 체제를 비판하고 편달하는게 일입니다. 사선생님의 “지식인”에 관한 고견을 듣고 싶어요.
사: 김선생의 말에 나도 찬성입니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진짜 “지식인”은 사상자에 비판자이고 또한 반역자, 반골자로서 과감히 체제에 NO라고 말할수 있는 인간이여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인류의 기본 준칙이고 정의, 민주, 자유, 독립을 수호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 나라 일부 지식인, 작가, 학자를 포함해서 자신을 위하는 글쓰기를 하는데, 그건 마치도 여러사람앞에서 자위하고 섹스를 하는 추태와도 같아요.
작가가 대중의 속된 스타가 돼버리면 그냥 속물로 전락되고 맙니다! TV 대중문화의 범람으로 지식인이 변두리로 밀려났다고 해도 나는 지식인의 성스러운 사명은 여전히 체제와 사회의 병페를 비판하고 경종을 울려야 하는 것이라고 봐요.
김: 과연 탁견이십니다. 지식인이 권력과 금전에 곡학아세하고 나팔수로 된다면 지식인의 비극일 뿐만아니라 그 민족의 비극이기도 합니다.
사: 그래요. 지식인은 나발통, 거짓말쟁이가 아닌 쟁쟁한 철골(铁骨)을 갖추고 독립적인 품격과 자유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독립이란 풍격을 가리키는데, 천마가 하늘을 날듯 구애없이, 부귀와 권세에 의거하지 않고 노예나 도구로 되지 않는 것이지요. 자유란 사상을 가리키는데, 과감히 사고하고 말하고 과감히 사랑하고 증오하는 겁니다.
오늘의 지식인은 많이 추락되고 정신적 난골증에 걸렸어요. 우리 나라엔 로신도, 유고도, 채원배도 없습니다. 이런 쟁쟁한 지식인이 많이 나와야 하는데 아직 아쉽지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7.낙화생 향기속에서 피어난 문학의 꽃
김: 정말루 좋은 말씀이십니다. 이번에는 화제를 바꿔서 사선생님의 가족과 교육환경에 관한 말씀을 듣고 싶은데요. 회족의 가문에서 태어나고 어릴 때부터 문학을 즐기셨다고 알고있습니다.
사: 난 남경의 회족가정에서 태어났어요. 어머니 아버지는 문화정도가 낮았고 뭐 로동인민이라 해야 맞겠네요. 회민식당도 해보고 볶음음식( --호박씨, 땅콩, 해바라기씨 등을 볶은것)점도 차려보고 또 남경에서 좀 이름난 징반(京板)오리 회사도 경영했습니다. 그래서 2층짜리 집 두채도 갖고 있었으니, 중국사회 각계급의 분석리론에 따르면, 아마 소형자산계급으로서 혁명의 대상이지요(웃음). 지금 시체말로하면 사인기업이고 입당의 대상이 되겠습니다.
김: (웃음)그러네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네요.
사: 울 아버지는 내게 자유방치 정책을 실시했는데, 장차 커서 뭐가 되든 상관없다는거에요. 다만 성실한 인간이 돼야 하는바, 불의의 재산을 넘보거나 불의의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고 교육하셨지요. 어머니는 전형적 현모양처로서 자상하고 착한 녀성이였습니다. 아버지가 내게 준 영향은 간고분투였고, 어머니가 준 영향은 착하게 모든 것을 리해해야 한다는 것이였어요. 난 지금도 울 어머니의 젊었을 적 사진을, 이쁜 사진을 내 돈지갑에 소중히 간직하고 다닙니다.
김: (웃음)대단한 효자시군요! 근데 문학은 어떻게 좋아하게 됐습니까?
사: 우리집에서 경영하는 복음음식점에서는 낙화생, 해바라기씨를 포장하는 포장지는 거의다 낡은 책페이지나 신문지를 썼습니다. 그 포장지는 많은 고전적 작품이였어요. 보세요. 《鲁迅自选集》,《巴金自选集》이나, 현대 작가의 작품이였지요. 거기엔 심종문, 빙심, 영성도 등의 작품이 들어 있었거든요. 낙화생 향기가 풍기는 포장지를 나는 닥치는 대로 읽었어요.
현대 문학명작들은 거이 다 볶음음식점에서 읽었답니다. 그러니 지금도 난 책만 보면 자연히 낙화생, 해바라기씨의 향기를 맡을수 있습니다(웃음)
김: (웃음)낙화생 향기속에서 탄생된 문학소년이시군요! 본격적으로 문학은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8.생명의 소중함을 깨닫다.
사: 사실 난 좋은 학생이 아니였어요! 매우 까불고 장난끼가 심한 소년이였으나 악의는 없었어요. 초중에서도 난 역시 좋은 학생이 아니고 놀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때 남경의 金陵饭店뒤에 난전시장이 있었는데 거기엔 헌 책도 팔고 사주팔자도 보고 만담도 하고 대중문화를 알수 있는 좋은 장소였습니다.
난 거길 자주 가보면서 기층 중국문화와 접촉하고 영양분을 섭취했어요. 초중졸업전에 내 생명사에서 큰 사건이 돌발했어요!
김: 큰 사건이라니요?
사: 뇌막염에 걸린 거예요(웃음) 여름에 나와 전혀 생면부지의 모기 한 마리가 물어서 급성뇌막염에 전염됐지요. 그뒤 내가 문화대혁명시기에 타격을 받을 때마다 난 그 얄미운, 나를 박해한 모기를 떠올리게 됩니다!
김:(웃음)모기가 인생의 첫 박해자군요!
사: 나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어요. 입원시 한 이쁘장한 간호원 누나가 나를 잘 보살펴 주었는데 그때 푸쉬킨의 동화시집을 선물해주었어요. 그때 나는 그녀에게 “난 살아서 책을 많이 읽을래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병으로 하여 나는 생명의 진귀함을 깨달았습니다. 뇌염은 당시 99% 사망하고 생존율이 1%밖에 안되였으니
9.문학에 대한 긍지감
김: 그때의 병환으로 인해 살아서 책을 더 많이 읽어야 하겠다고 작심했군요.
사: 내가 본격적으로 문학을 하게 된 것은 고중2학년 때 부터지요. 누구나 인생에서 좋은 스승을 만나기도 하겠지만, 고중2학년 때 안휘성에서 오신 국어과 선생 무(武)선생을 만난게 내게 복이였어요. 무선생은 생동하게 가르쳤는데 중국문학, 특히 고전문학의 숭고함과 미를 우리에게 가르쳤어요.
난 그때 중국인으로서 행복감을 느꼈고 이처럼 풍부한 중국고전문학의 유산을 향유할 수있다는 데 긍지감을 느꼈어요.
김: 그때 사선생님 소설 쓰시지 않았나요!
사: 우리반에 그때 나이가 나보다 위인 두 동창이 있었는데 하나는 왕씨(현재 강소성화극단 편집)이었고 또 다른 한명은 이름이 생각 안 나네요(웃음). 그때 왕씨가 북경의 《인민문학》 잡지에 소설을 발표하고 또 전국 아동문학 1등상을 받았어요! 그래서 자극을 받은 나는 너희들이 하는데 내가 왜 못하겠냐는 배짱으로 소설을 습작했어요. 결국 《雨花》의 전신인 《江苏文艺》에 내 처녀작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상해의 《萌芽》문학지에 시 두편을 발표했는데 그 때 내 나이가 15살이었지요. 나는 자신을 작가라 생각하고 스스로 뿌듯이 느꼈어요. 그런데 왼걸 작가의 길이 이리도 험난할 줄 뉘가 알았겠어요? 일생의 노력을 경주해야 하는줄. (웃음)
김: 대학에서도 계속 소설을 쓰셨지요?
사: 아까 말하다시피 화동사대에 입학하여 대학 2년생 때 《맹아》잡지에 소설 두편을 발표하고 화동사대에서 “유명인”이 돼버렸잖아요.(웃음)
10.왜 유머는 하나의 파워인가?
김: 사선생님의 극본이나 소설, 수필, 잡문에는 비판성, 풍자성과 아울러 도처에서 해학적인 유머가 매력적입니다. 중국문학사에서 로사의 작품이나, 진종서( 钱钟书)의 소설 《围城》에 늘 기지로 넘친 유머가 있는데, 사선생의 유머는 작품을 관통하고 있어 독자의 웃음주머니를 풀어줍니다.
선생님과 전화 통화를 어러 번 해왔지만, 늘 전화에서도 순간순간 유머가 있어서 즐거웠지요. 유머는 일종의 기지와 재치, 지혜라고 보는데 서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사: 그래요. 유머는 사물의 본질을 관찰하는 능력인데, 사물본질의 모순을 통찰할수 있을 뿐만아니라 희극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실현시킨 인간의 재질이고 파워입니다.
활달하고 흉금이 넓은 인간만이 유머, 고차원의 유머를 만들 수 있어요. 난 아직 익살(俏皮)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김: 선생님의 명함에 적혀 있는 문자가 넘 유머러스했어요.(웃음)
사: 아! 그 “ 少十斤“이란 문구요. 내 이름이 沙叶新이니까. 매 글자의 왼쪽 편만 따면, 少十斤이니까요!(웃음) 그러니 내 이 사람은 분량이 별로 없어요. 절반만 깎아버렸는데도 10근이나 축 났으니까요. 그러니 내 분량은 전부해야 20근밖에 안되요.
김: (웃음)오른편은 少十斤인데, 그럼 왼편은 어찌됩니까?
사: 그건 좀 쑥쓰럽내요. 亲三口이니까요! 그러므로 나란 사람은 성명에서 보면, 하나는 분량이 가벼운 거고, 중후하지 못하지요. 또 하나는 너무 친절하여 늘 사람과 대면하면 곧 세번이나 뽀뽀를 하니까, 물론 너무 뽀뽀해도 안 좋은거죠.(웃음)
김: 그러네요! 선생님의 《阅世戏言》을 읽으면 마치도 희극을 읽은 듯이 자꾸 웃어야 되는데, 선생님의 희극작가적 직업과 관계 되는건가요?
사: 나는 천생 희극을 좋아하고 내 극작에도 희극이 많지요. 《내가 만약 진짜라면》《남자 대장부를 찾아서》그리고 《공자, 예수, 레농》도 다 희극이 아닙니까. 정극을 쓴다해도 난 늘 해학과 유머를 자연 섞어요. 《진의 시장》에도 익살이 많이 들어있지요.
유머란 DNA와 괸계 되겠지만, 여전이 후천성적인 양성이 주되겠지요. 교양과 흉금이 있어야 하지요. 유머는 교양, 지혜,문화, 정신, 그리고 관용, 리해, 선량, 사랑 나무에서 꽃피고 맻히는 열매입니다.
협애, 자사자리, 잔폭, 독재한 사람은 유머를 낳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머의 소재로는 되겠지요.(웃음)
11.진실. 유머. 용감의 리정표
김: 선생님 극작가운데서도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은 《공자, 예수, 레농》입니다. 이 작품은 대만의 거물작가 백양(柏杨 )선생님의 대륙기행에도 대서특필로 소개했는데 그 책을 읽고 다시 원문으로 읽었습니다.
과연 유머로 찬 희극이었어요. 황당한 형식으로 현대의 상황을 표현한 게 재미있었습니다. 고금동서의 유명인물들을 집합시켜서 서로 담론, 교류, 격돌시키면서 인류사회의 만연하는 배금주의, 독재주의를 풍자하였습니다.
“인생의 최고 목표는 사악을 제거하고, 령혼을 순결화하며, 사상을 단정히 하는 “테제를 표현했습니다.
이 작품은 당대 연극문학의 획기적인 거작이 아닐수 없어요!
사: 감사합니다. 내가 70년대말부터 지금까지 많은 극작품을 창작해왔지만, 역시 제일 좋아하는 작품은 《공자, 예수, 레농》이예요.
80년대 말에 내가 이 극본을 몇년이나 집필했는데, 참 힘 들었어요. 그때 난 이 연극본을 완성할 수 있다면 암증에 걸려도 후회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08년에 위암이 발견되여 수술하기도 했으니 (웃음)
내가 위안을 받은건 08년에 나의 이 작품이 《중국당대문학선집》에 입선되고, 국가교육부 중점추천의 대학교중문전업교재로도 선정된 겁니다. 정말루 난 이 작품을 사랑합니다.
김: 선생님의 몸에서나 작품에서나 우리는 당대 중국지식인의 전범(典范 )을 보았습니다.
진실을 말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정신, 유머를 통해 사회인간의 폐단을 비판, 풍자하는 재질, 그리고 자신의 량심을 지키면서 과감히 사상을 실천하는 용감한 행동력, 이런 것들이 다 중국 지식인, 문학인의 하나의 리정표로 남아 있습니다.
사: 과찬입니다. 김선생도 비판성이 있고 비교문화론적 통찰력이 있는 젊은 지식인으로서 동아시아적 의미적 지식인이지요.
나는 지식인이란 본연적인 사상자, 비판자, 반골자로서 감히 NO라고 말하고 정의와 진리, 독립을 추구하는 실천자로서 조금이나마 중국사회에 힘을 보탠다면 한이 없겠습니다.
12.고독이란 이름의 행복한 길
김: 선생님은 중국 연극문학에 큰 공헌을 했을 뿐만아니라, 지식인으로서 쉽게 할수 없는 양지(良知)를 공헌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더우기 지식인의 본보기로서, 독자와 대중들의 지지와 성원을 받는 유니크한 인물로 중국문학사에 명기 되었지요.
자신의 걸어온 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사: 난 다른 재간이 없습니다. 평생동안 필을 들고 평생동안 줄곧 사고를 해왔지요. 연극의 방식으로 진실을 남겨서 젋은 후대들에게 알려주는 게 내 사명이자 책임입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안 하고 진실을 말하고 사회의 폐단을 비판하는것이 내 큰 사명이기도 했어요.
내가 이날까지 내가 좋아하는 일, 글쓰기를 할 수 있다는 것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릅니다.
한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해서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일에 한평생 매달려 일에 쫓기는 인생도 많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소망하던 작가로서 살아갈수 있었으니, 난 누구보다 행운이라고 느껴요.
내가 영화에도 출연해보고, 연극창작하면서 상해인민예술원 원장직까지 지녔지만, 탐관으로 변질하지 않고 퇴직할수 있어 다행이지요.
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사: 글쓰기로 평생 고독하지만 좋하서 하는 일을 할수 있는 자체에 난 감사할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많은 일이나 봉변에도 태연할 수 있었어요. 2008년 위암을 검출해내고 수술을 직면했을 때도 난 태연자약하게 롱담을 할 수 있었지요.
위제거 수술할때 의사에게 “게는 무장공자( 无肠公子)인데 내 위를 다 제거해버리면 난 무위문인(无胃文人)이 되고 마니까 웃끼지 않아요” 그래서 1/4위를 남겼어요.(웃음)
위가 거의 없지만 나는 두뇌와 두 손은 건전합니다. 사고하고 글쓰기에는 지장이 없으니까요!
내는 다시 태어나도 작가를 택할 겁니다. 진실을 기록하고 세상의 병을 비판하는 필을 날릴 것입니다.
작가의 글쓰기, 행복한 인생길입니다. (끝)
대담자 소개
사엽신(沙叶新)
1939년 남경에서 출생, 회족.
중국 당대 가장 정의감과 비판성이 있는 연극작가, 수필가.
1957년 화동사범대 중문계 입학, 1963년 상해희극학원 대학원 졸업, 동년 상해인민예술극원 편집.1985년 ~1993년 동 원장, 주요 극작품으로 《假如我是真的》《陈毅市长》《孔子.耶稣.披头士列农》《寻找男子汉》.
“중국의 쉑스피어”라 불리면서, 늘 당대 연극사에서 실험적인 희극으로 연극문학계의 선봉으로 활약 함.그리고 비판성, 유머성으로 지식인 전범(典范)으로 존경받는 지식인으로 거듭남.
2008년 위암 수술후 건강악화로 고생하다가 2018년 7월 26일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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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극작가의 세계를 접하게 돼
넘 기쁩니다.
사선생의 극본을 읽어봐야 겠네요.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