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카테고리 :
나의카테고리 : 《33의 신사유》
<연재문화대담>
33의 신사유
-김문학과 중국 당대 지성33인과의 문화대담
머리말
중국은 현재 바야흐로 역사의 크나큰 전환점에 서있다.
개혁 개방 30여년동안 중국은 일사천리로 발전하여 세계 제2의 경제 대국으로 급성장 했다
그러나 오늘 중국이란 이 거대한 사회속에 안고 있는 문제점은 산적해 있다.
중국은 어떤 문제와 모순과 결함에 봉착해 있으며,어떻게 순조롭게 숙명 같은 이런 문제들을 인식하고 해결해 나가겠는가?
그리고 국내의 이미지와 세계속의 국제적 시점에서 중국은 어떻게 해석하며 인식, 해독할것인가?
이 같은 인식론적 문제의식을 안고 나는 그동안 그리고 지금도 중국을 문턱이 달도록 드나들면서 중국 당대의 33인의 지성들과 만나서 대담을 해왔고 또 해나고 있다.
화려한 “성세”의 표피를 벗기고 본 중국은 여전히 변혁을 요망하는 내실이 반거하고 있다
중국이 현 전환기에 개혁을 하여 모순들을 해결하여 자신의 지식체계와 이념을 수립한다면 세계를 리드할 가능성은 있다.19세기 영국와 20세기 미국처럼.
요는 국내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세계와 공동한 번영 대안을 찾느냐 못찾느냐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중국 대표적 현대 지성들과 이러한 문제점을 둘러싸고 신사유와 신차원으로 담론을 펼쳐 “중국 문제”를 진맥해본다.
우선은 시리즈 제1탄으로 저명한 근현대 사학자 장개석 연구의 권위인 ,양천석(杨天石)선생과의 대담을 소개하는 바이다.
왜 역사의 진실을 추구 하는가?
양천석+김문학
김문학(이하 김): 아까 양선생님의 항일전쟁 진상에 관한 강연을 감명깊게 잘 들었습니다. 긴 강연으로 피곤 하실텐데 이렇게 저와의 대담에 응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양천석(이하 양): 이렇게 상해서 뵙게 되서 나 역시 정말 반갑습니다. 황차 국제적으로 활약하고 있는 젊은 학자와 대담을 나누게 되니 나도 굉장이 기쁘지요
김: 고맙습니다. 중국 현대 사학의 최고 수준을 대표하는 역사 학자인 양선생님께 이렇게
가르침을 받게된 저야 말로 큰 영광이지요. 금년은 항일 전쟁과 세계 반파쇼전쟁승리 70주년이
되는 해지요.그래서 중국이 올 들어 거국일치 전례 없는 대규모로 기념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어떻게 항일 전쟁을 기억하고 반성할까에 관한 화제로 부터 시작하고 싶습니다.
양: 네,좋습니다. 역사 기억은 반성을 위한것이라고 생각합니다.반성정신과 실천은 역사학자와
역사인식에 있어서 제일 기본적인 소질이지요. 더구나 한 나라와 민족에 있어서 역사적 기억과
동반되는 반성은 발전하고 자신을 초월 할수 있고 에너지가 되는 법입니다.
20여년전만 해도 항일전쟁에 있어서 우리는 장개석이 항일을 거부하거나 소극적이였으며
지여는 도피했다가 항일의 결실을 절취한 그런 악자 취급을 했었지요. 그리고 항일 전쟁도
주전장(主战场)과 적후 전장(敌后战场)이란 구분법도 없었거든요.
그러나 현재의 육속 발전되는 장개석과 국민당사의 사실을 보면 우리의 섣뿌른 결론이 다
잘못됐다는 인식이 앞서게 됩니다.
김: 역사 기억은 반성을 기반으로 해야 된다는 지적은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저는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기념 역시 방법론적으로 반성을 가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가 자기와 타자의 상호
관계넷으로 이룬 정합(整合)적인 개념이므로 타자 탓만하고 타자를 비판 ,성토하는것으로만 기울어 진다면 그 속에서 안일한 기념 행사로 자기 반성, 자기 점검을 방치하기 십상입니다.
항일 전쟁의 기억을 방법론 인식론으로 따진다면 저는 일본군국주의의 침략에 대한 세부적
인식을 가해야 하며 이와 병행하여 그런 일본군에게 왜 우리가 그렇게 압도적으로 많은 인구와
국토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이 당했다는 문제에 심각히 반성을 추구해야 하는 계기가
되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쟁의 승자와 패자는 다 나름대로 여러 차원에서 각자 반성을 하는것이 바람직 하지 않을가요.
양: 역사를 기억하고 역사를 읽는 행위는 거기서 뭔가 교훈이나 경험을 섭취하기 위한것이라고
생각 해요. 그런데 역사 기술에서 진실이 가리워 졌거나 허위성으로 덮어져 있다면 그것을
과감하게 파 헤치는것이 역사학자,지식인의 사명입니다.
역사의 생명은 진실에 있습니다. 역사 연구와 인식에서 그 어떤 신화(神化)나 귀화(鬼化)도 다
마땅치 않지요.그러나 이 또한 인류의 정치 생활중에서 항상있는 현실이기도 하면서 역사
연구에서도 늘 있는 현상입니다.극복하기가 어려운 일이지요.
물론 이중에는 역사학자 자신의 문제도 있거니와 더우기는 역사학자가 처해있는 사회 환경, 즉 다시 말해 이른바 “어경(语境)”문제이지요. 어떤 환경이 한 역사적 인물은 “신화” 또는 “귀화”시키기를 원할때 어떤 사람들, 학자들은 왕왕 이런”어경”수요에 영합합니다.
때문에 사회는 자각적으로 역사 연구에 양호한 “어경”을 제공해주어야 하며 우리 역사 학자들도 역사 진실을 위하여 양지(良知)를 내세워 불량한 “어경”과 저항하는 용기가 갖춰져야 합니다.
김: 양선생님은 국내 굴지의 진실을 추구하는 역사전문가이지요.선생님의 많은 저작을 배독하면서
저는 선생님의 역사적 진실을 추구하는 양심적 지식인,비판적 지식인의 코먼센스를 읽을수가 있었습니다. 진리를 추구하고 역사적 진실을 추구하는 학문의 길에서 저 역시 양선생님과 같은 대선배와 지기가 있어서 마음의 만열을 느낍니다.
양: 그러나 역사의 진실을 추구하는 길은 결코 탄탄대로가 아니지요. 2002년 장개석을 연구한 저작 《장씨 비밀 당안과 장개석의 진상》(사회과학문헌출판사)을 펴냈습니다.이책은 장개석이 비밀리에 수장하고 있던 당안(서류)에 의존하여 장개석의 생애를 연구하는 저작이죠.
책이 나오자 마자 일부 사람들이 익명으로 중앙 영도자에게 밀고신을 써서 보냈어요.장개석이 누구인데? 장개석은 전범의 우두머리요,민족의 쓰레기(败类)요,천고의 죄인이잖아요.현재 중국사회과학원의 양천석이라는 자가 공공연히 장개석은 “민족영웅”으로 올리 추고 있으니 당중앙에서 엄격히 조사하고 엄숙히 처분을 가해야 한다고 밀고를 했어요.(웃음)
사실 내 이 책안에는 “민족영웅”이란 4자가 전혀 없어요.중앙 영도자는 중국 사회과학원 영도에게 명해 내 저작을 읽게 했습니다.그 결과 어떤줄 아세요? 결론이 이 책은”탁실한 학술 저작”이며 “학술 연구 이지 장개석을 올리춘것이 아니다.”란 것이 였어요.
그래서 내가 오늘 이렇게 김선생이라도 자유롭게 대담을 할수 있게 된거 랍니다.(웃음)
김: (웃음) 그렇네요.저도 십분 양선생님의 심경을 이해합니다.저도 똑같은 경험을 당한적이
있으니까요. 지식인은 대체로 두 부류가 있다고 봐요. 공권력에 비판하는 진실을 추구하는
지식인과 공권력에 영합하는 지식인, 후자가 늘 전자를 공격하고,공권력을 차용, 이용해서 진실을
추구하는 지식인을 무함하거나 궁지에 밀어 버리려고 합니다.어느 시대나 이런 영합과 지식인은
다 있는 법이니 저는 무시해 버립니다.전에 여추우(余秋雨) 선생님이 저랑 대담하실때 이런
인물들에게는 대꾸하지 말고 무시하라는 비법을 가르쳐 준적 있습니다.(웃음) 이말은 이쯤하고
접습니다.
그러나 저러나 양선생님은 민국사 영역에서는 제일급의 프로패셔널이시며 민국사,국민당사나
특히 장개석 연구의 권위자 이십니다.근데 근대 현대사에서도 많은 인물중에서 왜 장개석이시죠?
양: 중국 근대사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활약했지만 그중에서는 중국의 운명이나 역사의 진로를
바꾼 중심적이고 핵심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핵심적인 인물이란 쉽게 말하여 역사에 대해 특수하고 중대한 역할을 한 인물을 가리키죠. 그러나 많지는 않아요. 무술 유신 시기에는 강유위, 신해 시기에는 손중산, 5.4운동이후에는 장개석과 모택동입니다.
김: 그렇죠. 20세기 중국은 장개석과 모택동의 세기라 할수 있습니다.
양: 장개석과 모택동을 떠나서 중국현대사를 담론 할수 없지요.특히 정치적 수요로 장개석에 대한
인식과 평가에도 많은 왜곡과 허위성이 가미됐습니다. 역사의 진상이 흐리워 질때가 많듯이 인물의 실상이 흐리워 질때가 많지요.
내가 늘 얘기했지만 장개석은 중국 근대사에서 지극히 중요한 인물로서 복잡하고 공과가 겸한 사람입니다. 대공과 대과(大过)가 겸한 인물이지요. 그러니 모택동마저도 장개석에 대한 평가가 전후 판이합니다. 자 보세요.1938년 항전 초기 모택동은 연안에서 개최된 중공중앙 제6차 6중 전원 회의에서 한 보고에서는 국민당 역사상 두 위대한 인물이 있다고 판합니다. 하나는 손중산이고 다음으로는 장개석이라고. 손중산을 ”민족 영웅” “최고 통수”로 평가해요. 그러나 1945년 항전 종료후에는 모택동은 자기말을 뒤엎고 장개석은 “인민의 공적”으로 칭합니다. 현재 우리나라 인민들은 장개석에 대한 평가도 여전히 두가지 상반되는 양상을 이루고 있지요.
김: 정치의 가장 복판에 군림한 정치의 인물 역시 정치적 환경의 수요에 의한 포폄에선 자유로울수 없는 법이지요
양: 그렇습니다.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포폄으로 엇 바뀌는 이유의 하나는”올리추기(捧) ”이지요.
성인이요 태양이요 하면서 올리추지요. 또 하나는”매도(骂)”지요. 한 인물은 극악 무도한
천인이 질타하는 만고의 죄인으로 평가해버립니다.
장개석은 중국의 근、현대사에서 중심에 있는 인물로서 수많은 역사적 대사건을 겪은 인물이죠. 청년시기에는 손중산을 따라 신해 혁명,원세개 토벌,호법 운동에 투신했고 손중산 몰후에는 북벌을 통솔하고 청당,공산당 토벌,항일전쟁, 내전을 껵으면서 오랫동안 중국의 당,정,군 3면의 최고 지도자로서 “원수(元首)”로 군림했습니다. 중국 공산당과 2번이나 합작,분열을 했고 1949년에는 대만으로 쫓겨가 반공복국(反共复国),하나의 중국을 견지 해왔어요. 88세에 사망했으니 장수했죠.
장개석에 대한 평가가 양극적으로 갈라지면서 한편 신격화되면서 천고완인이요, 고훈성덕
(高勋盛德),광화용택(光华溶泽),민족영웅으로 추앙된 반면에 추화되면서 인민공적,원흉수악 (元凶首恶),민족의 쓰레기,천고 죄인으로 폄훼당했습니다.
이 양극의 찬반을 다 장개석의 진상과 괴리되었고 진실을 덮어 감추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진실을 파헤치고 싶었거든요
김: 그럼 장개석의 진실을 까발리는 의미는 어디에 있을가요?
양: 우리가 지금까지 장개석을 포함하여 진실과 위배된 역사 기록과 평가를 해온것이 사실입니다.장개석과 국민당의 진실을 캐는것은 중국 근현대사의 과학적 수준을 향상시키는데 중요한 의의가 있어요.이것이 첫번째구요.그리고 두번째는 국민당의 항일을 포함한 진실을 밝히고 긍정함으로써 대만과의 평화관계를 발전시키고 최종적으로 민족과 국가의 통일 완성에 유리로운것입니다.
김: 사실 2005년 호금도가 항전승리 60주년 기념 강연에서 중국 항일전쟁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정면 전장과 적후 전장의 작전 임무를 맡았으며 공동으로 항일을 이루었다고 언급 했지요. 중국 공산당이 처음으로 국민당의 항일 주력을 인정한것 같습니다.
여태까지 항일 전쟁하면 공산당이 절대적 주력이였고 국민당은 무조건 소극 항전 ,적극 반공이란 판에 박은 말로 밀어 붙이거든요.모택동은 어느 문장에서 항일 전쟁시기 장개석은 사천의 아미산에서 숨어 있었다. 항일의 나무를 심지 않고 물도 뿌리지 않고 있다가 현재 항일 전쟁이 승리하니까 아미산에서 내려와서는 긴 팔을 내밀어 승리의 과일을 따먹으려 했다고 야유했습니다.
역사 사실을 덮어 감추고 역사에 거짓말을 하는것은 아마 양선생님께서 지적하시다시피 사실이거든요. 그러므로 양선생님의 일련의 저작들은 학문적으로 역사 진실 규명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제가 양선생님을 진심으로 탄복하는 이유는 선생님은 체제내의 지식인이고 저는 체제외의 해외에서 활동하는 지식인인데 체제외보다 체제내의 지식인의 학술 연구 활동이 그리 쉬운건 아니지요.특히 역사,근현대사의 진실을 터치하는 작업은 많은 용기와 정의감이 필요하거든요. 양선생님의 사학 연구의 기본 자세와 방법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양: 나는 늘 역사의 생명은 진실에 있다고 주장했어요. 역사적 인물이나 역사에 있어서 늘 그에 대한 평가나 기술이 폄훼,찬반,애증등 긍정적과 부정적으로 갈라집니다.
그러나 이 자체는 괜찮습니다.요긴 한것은 사실(史实)을 청리(清理)하고 사실을 환원하는 작업이죠. 사실은 객관적 존재이므로 오로지 하나일뿐입니다. 나는 사실은 입론의 기초이고 또한 역사저작의 과학성을 점검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물론 각자 입장과 이익,정치적이나 가치관,성격,교양,지식구조등 차이로 인해 역사 사실에 대한 인식, 해석 ,평가에 큰 영향을 끼칠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한가지 우리 모두가 사실(史实)에 대해 존중하고 인정하기만 한다면 상호간 대화,토론 할수있는 기반을 마련할수 있어요. 역사 특히 정치사에는 늘 국가,민족,계급,집단,파벌과 개인과 개인사이의 투쟁으로 꽉 차 있으므로 역사 학자는 이런 문헌 자료를 널리 범독하고 역사속에 깊이 심입하여 이 역사의 투쟁을 넘어서 이해 관계나 각종 주객관 제한성을 초월해야 명확히 관찰하고 준확히 판단을 할수 있습니다.
사학이란 무엇인가? 도구인가 과학인가? 내 생각에 만약 도구라고 간주하면 기필코 실용과 이익 만족의 수요에 따라 주관 목적으로 역사를 기술하거나 은폐 또는 왜곡하는 부분도 있을것이며 때로는 어떤 사실을 과대포장하여 진실을 잃을수가 있어요.
그러나 과학이라 생각하면 기필코 역사의 진상을 추구하며 최대한으로 역사의 진 면모를 환원하는 목적에서 각종 은폐 왜곡은 피할수 있습니다.
중국은 사학을 중시하고 사학이 전인의 성패를 모색하는 감별 기능이 있다고 간주하며, 과거를 이해하고 교훈을 섭취하는 기능과 지식과 지혜를 개발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런 기능들을 과학성을 구비한 전제하에서만이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발휘 시킬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사회와 독자를 자칫하면 오도(误导)할 위험성이 있지요.
그러므로 관건은 역사 사실을 잘 정리하여 사실을 환원시키는데 있습니다.
김: 탁견이십니다. 제가 중국에 자주 들어와서 강연,학술활동으로 느끼는 중국은 제가 유학 가기전보다 많이 변한것입니다.특히 개혁 개방 이후 90년대로 접어들면서 냉전체제가 무너지고 학술 분위기가 많이 자유로와지고 개방됬다는 실감이 늘 들어요.
말하자면 매우 민감한 역사, 더우기 근현대사 연구에서도 수많은 터브를 깨고 있어 과거 문혁식 사고 방식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중에는 극 소수의 문혁식 사유에서 구태의연히 빠져 나오지 못한 지식인도 더러 있지만, 학문과 언론의 영역에서도 개인의 주장이 나오고,호적(胡适),진인각(陈寅恪)이래의 “독립 인격, 자유 정신”의 지식인이 배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아직 물질에서는 GDP 대국으로 성큼 뛰여 올랐지만 그 이면에 있는 소프트 파워(SOFT POWER) 즉 유연한 실력에서는 여전히 강대국이 아니지요. 우선 학술을 포함한 문화,문명면에서 자신의 지식 체계,이념을 확고히 세워야 세계에서 존중받는 나라가 될수 있습니다.
사학 영역에서 보면 90년대 이후 신자료 발굴, 신방법, 이론의 수입, 신 문제 의식의 제기,국제적 시야의 연구로 새로운 결론, 결실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저 역시 “문화로서의 역사 읽기” 라는 시각으로 근년에는 역시, 특히 중대한 근,현대사에 대한 해독 작업을 해왔습니다. 패자의 시각에서 역사를 읽는 작업을 시도하고 중일한근현대사의 허위성을 까발리는 작업을 벌렸습니다.
양선생님이 장개석에 관한 진실 시리즈 저작들은 새로운 자료 발굴과 문제의 제기를 위해 새로운 학문 성과를 이룬 호례가 되겠습니다. 그럼 장개석은 대체 어떤 인물이여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요?
양: 사실 중문계 출신인 제가 우연히 지난 세기 70년대부터 중화민국사 연구에 뛰여 들었습니다. 최초에는 손중산을 연구하다 보니까 필연적으로 장개석 연구에 손을 대게 됐어요. 2002년 《장씨 비밀 당안과 장개석의 진상》 출판한뒤 대만에 수차례나 건너가서 장개석이 대만에 갖고간 많은 당안 서류와 그의 일기에 근거하여 편찬한 “학기(学记)” ”곤험기(困险记)” ”성극기(省克记)”등 문헌 자료를 섭렵하고 많은 논문을 썼어요.
김: 2006년 3월에 양선생님은 미국 스텐포드 대학 호불(胡佛) 연구원에서 개방한 <<장개석 일기>>원본을 접한 최초의 중국인 학자이지요. 선생님은 수차례의 장개석 일기 원본을 손으로 베끼셨는데 사진에서 그 원지고를 보니까 1메터 이상은 되는 높이든데요. 장개석 일기가 다 진실인가요?
양: 나는 일기의 진실성을 믿고 싶었습니다. 1915년부터 1972년까지 장개석은 53년이나 줄곧 일기를 적어왔어요.그것도 붓으로 썼거든요. 장개석이 일기를 쓰게 된것은 증국번(曾国藩)을 따라 배워서 그런 거예요. 증국번(曾国藩)이 매일마다 일기를 적었으니 자신도 영웅호걸을 따라 중화민족의 모범성현이 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장개석이 일기를 쓴 목표는 개인 도덕 차원에서 였고 또 하나 이유는 그날 그날의 사업을 적고 사업을 지도하고 경험을 총화하자는것도 있었습니다.
장개석의 일기는 순전히 프라이버시를 적었어요.누구한테 보일려고 적은것이 아니니까.거짓말을 적을 필요가 없었지요.
장개석 일기의 사학적 가치는 어디에 있을가요? 중국공산당의 모택동,유소기,주은래,주덕도 일기를 적지 않았어요. 세계 정치사에서 최고 수령이 53년동안 일기를 견지한건 장개석 한사람뿐이지요.
그의 일기를 통해서 첫째로 우리는 장개석의 내면 세계를 읽을수 있고 둘째로 그 당시 정치적
내막을 탐지 할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국제 정치의 베일을 벗길수 있고 우리가 미처 모르던 역사 사실을 알수가 있습니다. 상세하게 실례를 들수 없지만 일기의 사학적 가치는 너무
귀중하지요.
장개석은 어떤 인물인가? 하면 나는 3가지로 평가하고 싶습니다.
첫째,장개석은 민족주의 자이지요.그의 일생은 민족진흥을 갈망하고. 될수록 국가의 주권을 수호한 인물입니다. 우리는 늘 장개석은 미제국주의의 주구라고 질타했는데, 장개석은 일기에서 “ 미국은 정의가 없는 나라”라고 비판했어요.
대만이 대륙을 침공할때 미국이 원자탄을 빌려 줄수 있다는 것에도 단연히 3번이나 거절을 했습니다. 조어도 영토 문제에서도 장개석은 촌토라도 쟁탈할것을 주장했어요.
두번째는 개량주의자입니다. 그는 온화한 혁명을 주장하였으며 반공하는 이유는 공산당이 사유제를 억누르데 있었으나, 그는 사유제를 보호했지요. 또 공산당이 계급 투쟁을 했지만 국민당은 계급 투쟁이 아니라 계급 합작을 원했습니다. 그리고 공산당은 무산계급의 이익을 대표하지만 그는 전 인민의 이익을 대표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장개석과 공산당의 3대 분기점이라고 자신이 말했어요.
세번째로 장개석은 중국 전통 문화、기독교 교의와 손중산 사상의 숭배자였죠.
장개석은 전통 문화를 수호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평생 숭배한 인물이 왕양명(王阳明), 증국번 등 인물이 였거든요. 1966년 우리가 “문화대혁명”을 할때 장개석은 대만에서 중국 문화 부흥 운동을 전개 했습니다. 그는 또 1938년에 한 사람이 변증법과 방법론을 모른다면 혁명을 성공시킬수 없다고 일기에 썼어요.
그는 기독교의 “박애구세(博爱救世)”를 믿고 기독교의 핵심 사업은 “애인(爱人)”이지만 공산당의 계급 투쟁은 “한인(恨人)”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장개석은 “한인”이 아니라 “애인”을 선택한다고 말했어요.
장개석의 중국과 모택동의 중국
김: 탁월한 근대 사학자인 황인우(黄仁宇)선생은 “中国大历史” “从大历史的角度读蒋介石日记”등 저작에서 장개석과 모택동을 비교 했어요. 장개석의 약점을 지적한 부분이 정채로웠습니다.
장개석 정부는 행정넷트웍, 문화 ,경제 3영역에서 절반만 구축했는바. 중앙정부,지식엘리트,도시를 기초로한 현대 경제는 운영을 잘했어요.그러나 광대한 농촌,농민을 방치해 버렸어요.황선생의 말을 빈다면, 국민정부의 중국은 고층기구에 그쳤고, 사회기층에 미치지 못했지요. 그 넒은 농촌은 공산당의 발전 기지로 제공한것입니다.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결정적 차이점은 광대한 농촌,농민의 권력 기제를 장악했냐 못했냐에 있었지요.특히 항일 전쟁시기 농촌에 침투하여 민족주의를 호소하면서 광범위한 항일 유격 근거지를 이룩 했는데. 이것은 국민당이 농촌을 효과적으로 통치하지 못한 공백을 메운셈이 되지요.
항일 전쟁후 중공은 항일 유격 근거지를 점에서 선으로 ,면으로 연결 시켜 농촌에서 도시를 포위하는 전략 전술로 도시에 있는 국민당을 포위하여 내전에서 승리를 획득하게 됩니다.
그럼 양선생님은 장개석이 대륙에서 패배한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양: 네,농촌을 장악하지 못한게 큰 원인입니다. 그리고 이밖에 민족 자산 계급을 장악하지 못한점,내전을 발동하여 경제 정책에서 과오가 빚어진것, 일당 독재, 개인 독재, 마지막으로 국민당 내부의 부패를 들수 있습니다.
사실 장개석 본인은 청렴하고 탐오를 하지 않았으며 검소한 생활을 즐겼습니다.그러나 반부패에서 철저하지 못한것이 실패의 고배를 마신거지요. 실패의 요인은 어디 있는가하면 태자당에 대해 엄격히 단속을 못한데 있습니다.
김: 장개석은 청년시기에 일본에서 사관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일본 문화속의 청렴,결백,무사도 정신에 경도 되면서 추운 겨울에도 냉수로 세수하고, 언 주먹밥을 먹으면서 검소한 생활중 강직한 군인의 성격을 키운것 같습니다.
모택동과 장개석의 서예를 보면, 그 필체에서도 두 인물의 성격이 일목요연하게 안겨오지요.. 모택동의 필체는 용비봉무(龙飞凤舞)의 시인 기질이고, 장개석은 똑 바로 개서체로서 근엄직실(谨严直实)군인의 풍격이 역력 합니다.
장개석이 혼인 생활에서도 사치부화관 송경령과 잘 어울리지 않았던것이 그의 검소질박한 생활습관에 있었다고 합니다
양: 장개석은 개인 중심주의자였고 일당독재자였지만. 그 또한 자기 반성을 끊임없이 해온 인물이였습니다.그의 장점은 의력과 지구력이 강하고, 끈기있게 분발하는것이지요. 그의 약점은 호색,조폭,의심이 많고 고벽(孤僻),자기를 아끼는것이였어요. 그리고 자식들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했지요.지금까지 그가 탐오를 했다는 증거를 하나도 찾아 볼수 없습니다.
장개석은 평생 끓인 물만 마시고 오차물도 잘 안마셨어요.
항전 승리후 국민당 요원들이 중경에서 상해로 돌아왔을때, 모두가 5섯가지를 쟁탈하기에 여념이 없었지요.집(房子),자동차(车子),금전(票子),금덩이(条子),여자(女子).당시 이것을 오자등과(五子登科)라고 칭했어요. 장개석의 아들 장위국(蒋伟国)이 와중에 별장 하나를 얻었는데 장경국(张经国)이 이 상황을 장개석에게 보고하자 그는 일기에다 이 자식은 가풍을 더럽혔다고 (此子败坏家风) 적고 있습니다.그리고 장경국을 시켜 장위국의 별장을 반환하라고 했습니다.
김: 그럼 장개석의 공죄에 대하여 간단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양: 요약하면 3대공과 3대 죄가 있어요.3대 공은 첫째 북벌인데 3년안으로 3대 군벌 그룹을 침몰시켰고 두번째는 항일을 한점입니다. 장개석은 “공간으로 시간을 바꾸고 소승을 쌓아 대승을 거두는” 지구전(持久战)을 주장했어요.장개석은 섣뿌른 계란으로 암석을 치는 전술이 아니라, 강대한 일본군앞에서 지는것이 이기는격으로, 지구전을 발안해냈습니다.1936년 이미 이런 지구전을 고안해내고, 연해에서 내륙으로 후퇴하여 사천을 기지로 삼아 세계 동맹국과 연합하여 공동으로 일본을 전승하는 전략이였지요.전면 항전인 1937년의 한해전인 1936년도에 이미 이런 위대한 비전이 있었습니다. 셋째는 대만 건설입니다.
그의 대죄는 공산당토벌이고, 또하나는 3년 내전,세번째는 대만에서 백색테러를 한것입니다
김: 정채로운 말씀 잘 들었습니다.앞으로 장개석 일기 해독 시리즈를 육속 출간하실 예정이라고 들었는데요?
양: 시리즈 제4집을 올해안으로 출간하게 됩니다. 그리고 근현대사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다른 저작들도 현재 준비중입니다.
김: 오늘 긴 대담 감사했습니다.선생님의 이채로운 역사 저작을 기대하면서 건필 하시길 바랍니다.
대담자소개
양천석( 杨天石)
저명한 역사학자. 중국사회과학원 영예학부위원, 중앙문사연구관 관원, 북경대, 청화대 겸직교수.
1936년 강소성 출생. 장기간 중국문화사, 중국근현대사, 특히 민국사, 국민당 연구에 많은 실적을
쌓았으며 장개석연구의 제일인자.
주요저작으로 《양천석근대사문존(文存)》(통5권) 《양천석문집》,《역사의 수수께끼를 찾아서-근대 중국의 정치와 인물》, 《장씨 비밀당안과 장개석진상》,《장개석의 진실을 찾아서 – 장개석일기해독》(1,2,3집). 제1집은 2008년 중국10대 도서상, 제2집은 남방독서절 최고인기역사
저작상을 수상 했음.
파일 [ 2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