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계몽은 중국사회의 유일한 출로인가?
邓晓芒(등효망)+ 김문학
0. 들어가면서
등효망은 당대 중국 인문학영역, 철학연구의 대표적 학자이며, 저명한 비판적 지식인으로서도 드높은 명성을 자랑하고 있는 인물이다.
몇해전부터 전화로 자주 연락하는 사이에 우리는 어느덧 문우로 돼버렸다. 전화에서도 들려오는 등교수의 목소리는 조용했고 교양이 높은 학자임을 알려주는듯하여 기분이 좋았다.
서로 만나서 대담을 나누자고 늘 별렀지만 여의치 않다가 2016년 11월22일 등호망교수가 계시는 무한의 화중과학기술대학 철학계로부터 나의 “중일한비교문화”주제 강연의 초청이 날아 온것이 계기가 되었다.
21일 고속철도로 무한으로 간 나는 화중과기대 국제센터에서, 그리고 등교수의 댁, 서재로 초대되어 긴 시간의 대담을 하였다. 등교수는 온화하고 겸허한 성품의 신사적학자였다. 그의 철학은 물론 미학, 동서양비교문화론, 국제국내시사비평에 이르는 다 분야의 연구와 학식은 정말 태산처럼 중후한 느낌을 주었다.
등교수가 창립한 “신비판주의” “신실천론미학” 이론은 중국학계에서도 주목받고 있으며 독일어로 쓴 철학 논문은 서양 철학계에서도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한다.
독일 고전철학이론을 바탕으로 한 그의 학식과 교양, 지견은 박식 할뿐만아니라 늘 정치(精致)롭고 독특한 견해의 섬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조용하고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등교수의 말은 사실 굵은 말발이 서 있었으며 정채로운 격언같은 말들도 매력적이었다.
대담에 앞서 등교수의 《思辩的张力--黑格尔辩证法新探》 《人之境--中西文学形象的人格结构》 《灵之舞-中西人格的表演性》 《启蒙的进化》등 저작들을 읽어두었지만 그의 박람강기와 중후한 철학적 수양과 학식에 따라가기가 힘든 느낌이 들었다.
어쨌거나 등교수와 나는 세대차가 있기는 했지만 초면치고는 너무나 의기투합하였으며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은근한 정이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게끔 하였다.
게다가 옆에서 등교수부인(역시 대학교수로, 일본어연구자)께서 우리를 잘 보살펴주어서 우리는 아무 허물없는 오랜 친구처럼 며칠동안 대담과 한담을 나눌수 있어서 너무 고마웠다.
아래 수차례의 대담을 간추려서 정리해본다.
1. 철학가의 탄생
김: 이렇게 중국의 대표적인 철학대가인 등선생님과 마주 앉아 대담을 할수 있게 되어 대단히 영광입니다. 오늘은 “중국의 계몽이 왜 필요한가?” 라는 주제를 둘러싸고 선생님의 철학전공과 개인적 편력, 그리고 중국사회, 문화와 교육에 관련시켜 여러모로 선생님의 탁견을 경청하고자 합니다.
등: 나야 말로 동아시아문화권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3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면서 학문활동과 비평활동을 벌리는 “동아시아의 귀재” 김선생과 대담할수 있는것에 영광이고 또 연분이라 생각합니다.
김: 감사합니다. 선생님은 이름앞에 많은 수식어와 타이틀이 붙지만 제 생각에 우선 철학영역의 거목으로서 철학가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글쓰기, 문학과 문화비평은 죄다 본질적 의미에서 철학적소스가 농후하게 깔려있어서 선생님의 철학전공에서 연구하는 칸트, 헤겔, 마르크스 등과 내재적 연관성이 있는듯합니다. 그러므로 흔히 일반 문화비평가나 문학평론가들에겐 없는 중후한 철학적 교양과 동서양문화비교의 방법에서 튕겨나는 탁발한 사고와 견식은 정말 일류입니다.
그럼 선생님은 어떻게 철학을 하게 되셨는지 이 화제부터 시작하고자 합니다.
등: (웃음) 이 말을 하자면 책 한권 분량이 되는데 1968년 하향지식청년으로 농촌으로 내려 간 제가 독서를 좋아 했기때문에 《레닌선집》《마르크스전기》를 뜻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읽게 되었어요.
나는 스스로 5년 학습계획을 세우고 그동안 마르크스고전저작뿐만아니라 입수할수 있는 중,외 철학저작과 문학작품을 닥치는 대로 읽었는데, 철학에 착안점을 둔 이유는 책을 구하기 쉬웠고 철학이 모든 인간의 내용을 포괄했기에 철학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철학”을 통해 나는 장차 주견이 있고 지식이 풍부한 “진정한 남아”로 성장하는것이 꿈이였지요. 1976년이후 정세가 바뀌면서 더 많은 책을 접하고 목마른 사람 물 마시듯 독서에 심취하였습니다. 77년 대학수험이 회복되자 중국사회과학원 철학사전공과 무한대학 철학계 서양철학전공 대학원 시험에 다 합격되었네요. 그러나 부모님의 “우파”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못해 정치심사에서 미끄러졌습니다.
김: 참 "문화대혁명"의 유독이 청년의 전도를 괴롭히네요.
등: 그러다 1979년에 이르러 무한대학 철학계 석사대학원에 다시 입학하면서 내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철학전공을 택하여 철학교수로 승진하여 철학을 가르치고 연구하고 글을 쓸수 있는게 너무 행복해요. 나는 일찍부터 생활, 생명을 하나의 정체(整体)로 간주해왔고 그리고 부단히 반성하여 그 정체에 귀환시키는데 매 부분마다 다 소중하고 버릴수 없지요.
난 전부생명으로 철학을 하는데, 바꾸어 말하면 철학이야말로 나의 진정한 내재적 생명이고 내 인격과 성격의 구현입니다. 인간이 어느 일에 종사하든 글 쓰든 쓰레기를 청소하든 자신이 하나의 인간이라 의식할때 진정한 인간이 될수 있으며 이런 의식은 이미 철학이 되어있지요.
2. “나는 유가(儒家)를 비판하는 유가”
김: 유명철학가, 비판적 지식인의 일원으로서 선생님은 중국 전통적 유가(儒家), 유교문화에 대한 비판을 지금까지도 견지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판방법이나 문체도 노신문체가 아닌 유교적신사의 느긋함이 있으니 유가적이라고 봅니다.(웃음)
등: 잘 보아내셨네요.(웃음) 내가 유교문화를 비판하는 이유는 유교문화가 오늘 날 자기부정의 도전에 들어서야 하며, 이 절차를 통해서만 그 자신이 계속 발전할수 있는 생명력을 보전할수 있기때문이지요.
난 늘 이런 말을 잘 해요. 오로지 전통문화를 비판해야만 진정하게 전통문화를 계승발양시킬수 있다고, 그러찮으면 결국 전통문화를 죽음으로 내 몰고 말지요.
김: 근 30년래 국내 학계에서 공개적으로 유교전통문화를 비판한 지식인중에서 문장이 가장 많고 가장 긴 시간을 격렬하게 진행한 분이 등선생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등: 그래요. 그러니 학자들중에서 난 “서양화” “편파적이고 과격하다”는 레테르가 붙어다녀요. 그러나 본질적으로 난 어차피 대인 원칙이나 일상생활에서는 유교원칙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내가 유교문화를 대거 비판할때도 유교정신에 따라 중국 전통지식인의 직책을 다 할뿐입니다.
김: 이번에 만나서 보니까 선생님은 과연 유교적 신사란 느낌을 대번에 주었습니다. 그러니 더 친근감이 갔지요.(웃음)
등: 간추려서 말하면, 나는 유교를 이렇게 대하고 있습니다. 주관적 안신입명 (安心立命)에서 나는 자기 부정, 자기반성의 유가이고, 유교를 비판하는 유가입니다. 유가사상에 대한 태도에서는 추상적인 계승법과 구체적 비판법을 갖출것을 주장하며, 유교사상과 현재 세계와의 관계에서는 중국과 서양의 2중기준으로 보아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습니다.
3. “ 신비판주의”는 무엇인가?
김: 알만합니다. 일테면 유교의 추상적 “인의예지신”등 보편적 정신은 계승하되, 구체적인 결함에 대해서는 부정, 비판하여 새로운 건설을 시도하는 것이겠네요. 그리고 자기비판, 부정을 통하여 서양의 보편적 가치관 등을 흡수하여 중국과 서양의 2중기준을 세운다는 방법론, 저도 찬성입니다.
등: 맞아요. 감사합니다.
김: 선생님의 학문적주장이나 사상의 저변에 깔린 기본바탕은 아무래도 “ 자기반성과 비판”이란 장대한 이념이라고 보는데요. “신비판주의” 테제를 들고 나오셨는데 이에 대해 말씀해주시겠어요?
등: 네. 지난 "5.4"와 80년대 “신계몽”에 이어서 90년대에는 주로 사상,문화계에서 반성과 함께 복고주의, 보수주의가 회복되고 냉정한 이성적 사고를 게을리 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나는 맞서서 “신비판주의”개념을 선언했습니다. 중국문화는 진통중에 있는데 전통문화에 대하여 자기반성과 자아비판은 어떤 문화든 다 필요한 태도이지요. 중국문화가 수천년 누적 되면서 자기비판, 자기반성이 없이 어찌 계승발전할수 있겠습니까! 진보를 이룩하자면 반드시 자기비판과 반성을 해야 합니다.
“신비판주의”는 "5.4정신"중에서 아래 3가지를 계승발전하자는거지요.
첫째. 회의와 비판정신. 신비판주의의 “신”(新)의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둘째는 "5.4"의 비판정신외에도 노신을 대표로 한 자아참회정신을 돌출화 시켰는데 이 정신은 기실 "5.4비판정신"의 내향화와 심화이지요. 셋째는 신비판주의의 또 하나의 사상 원천은 노신이 제공한것, 즉 진화론에 대한 초월이지요.
구체적 방법, 내용에 대해서는 약하겠으나, “자아반성, 자아비판”을 통해 새롭게 전통문화를 관망하고 우리 사회의 발전을 기하는것이 주목적입니다.
4. 사상이 없는 지식계
김: “자기반성. 자기비판”이 결핍한 중국에서 볼때, 저는 오히려 대중을 견인해야 할 입장에 있는 지식계, 학계의 지식인들이 더 자기비판, 반성이 결여 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인이 내야할 목소리도 못내고 위에서 주어진 윤택한 생활에 안주하여 지식인자신의 사명감을 잊은게 오늘 중국지식인의 현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등: 지당한 말씀입니다. 90년대이래 중국지식계에 전환이 일어나 추락했다는 말도 있는데 추락이기 보다는 본성의 폭로이지요. 중국의 사대부, 독서인은 종래로 다 이랬어요. 그들은 모종의 상황하에서는 대단히 정의감을 갖고 늠름했지만, 또 모종상황에 닥치면 너무 비열하고 야비하며 곰상스럽지요.
이는 뿌리 깊은 열근성인데 개인의 독립의식과 개인의 인격존엄이 결핍하기 때문입니다.
김: 그럼 선생님은 오늘의 지식인을 어떻게 보십니까?
등: 가장 주요한 결함은 사상이 없는겁니다. 사상하려고도 하지 않고 한 곳에 머물러 뱅뱅 돌면서 어떻게 이름을 날리고 실이익을 얻고자만 하니 완전히 명예와 이익의 덫에 걸렸습니다.
김: 동감입니다. 학술체제가 확실히 오늘의 지식인에게 이런 명예와 이익을 제공하는것이 현실의 경우이지요. 마라(摩罗)의 경우 중국지식인의 현실축도라고 보는데요.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5. 지식인의 “화려한 전환”
등: 마라는 《耻辱者手记》등으로 우리시대의 자기반성과 비판의 기치를 높이 든 소장 지식인이었으나 최근에 《중국인 일어서라(中国人站起来)》란 책으로 협애한 민족주의로 “세계 3분의 2의 고난속에서 허덕이는 인민을 구하는” 구세자인양 고취하고 있지요. 난 수년래 중국 지식인의 이런 “화려한 전변”에 대해 고민을 해왔습니다. 가장 근원적인것은 역시 전통중국지식인의 “열근성”과 갈라 놓을수 없다고 보지요. 유가 사대부의 이상적인 사상이든, "5.4시기"의 지식인이 유교를 비판했지만, 그 골수속에는 유교의 자아원융(自我圆融)의 고착심리에서 해탈할수 없습니다.
김: 왕소파(王小波)가 이런 말을 했어요. “지식인의 최대의 죄악은 자신을 가두는 사상감옥을 짓는것이다”고. 국가나 민족의 발전이 모종의 의미에서 지식인, 엘리트계급과 사상자들이 역사조류에 따라 관성사유의 방식을 타파하는데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독립사고, 자유정신의 상징사인 지식인이 이렇게 추락됐으니…
등: 그래요. 현재 어떤 사조는 완전히 사상해방을 반대하는 거지요. 보편적 인성, 보편적 인권사상에 대해 혐오하고 “국정(国情)”이란 방패로 이런것은 죄다 서양의 패권이라 들고 있습니다. 진보는 무엇으로 이룩합니까? 유교로 합니까? 아니지요. 현대과학정신, 기술과 사회개방, 사상해방이지요!
우리가 현대과학기술이 있다고 하여 전통으로 복귀해야 합니까? 어림도 없는 생각이지요. 이건 태평견(太平犬)의 비겁한 이상에 지나지 않아요.
6. 중국에 대학은 있기나 하나?
김: 중국에 자주 오면서 보니까 저는 예전에 백양(柏杨)선생이 “장독”이론이 연상되네요. 그 걸죽하고 오물로 가득찬 오래 침전된 거대한 장독사회에서 중국인은 하나의 생존기술을 고안해냈다고 봅니다. 문제삼아야 할 룰, 원칙문제도 여기서는 그냥 알고도 모르는척 범벅이가 되어 흐지부지 규명이나 대책도 없이 방치되고 있어요. 학계도 사회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은 중국에 “학술계”가 없다고 지적하셨는데 정말로 정곡을 찌른 말씀입니다.
등: 중국은 말그대로 혼돈의 “거대장독사회”입니다. 몇년전 청화대학 교수 왕휘(汪晖)의 저작 표절안(2010년, 남경대학 중문계 교수 왕빈빈(王彬彬)이 청화대학 중문계 교수 왕휘의 20년전의 저작 《反抗绝尘》이 표절작이라 지적하여 큰 쟁론이 일어난 사건) 역시 저자가 함구하고 의사를 표하지 않았기때문에 장화(酱化)되고 말았어요. 언설의 헤게모니를 갖고 있는 자가 침묵하고 당사자가 말 안하면 여러사람이 말해도 결국 말하나마나? 이거예요!(웃음)
“학계에서 말해야지 매스컴이 떠들어봤자 소용없다”이거죠. 그럼 학계는 누굽니까? 중국에 학계는 있기나 하나요? 30년대 어떤 이가 중국에는 전혀 학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제기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80년후인 지금 여전히 없는거지요! 중국에서 학술은 근본상 “계(界)”를 이룰수 없고 “계”가 있다면 중국에는 오직 하나 있는데 바로 “혼돈계(浑沌界)”뿐입니다!
김: (웃음) 흥미로운 말씀입니다.
등: 중국의 대학도 학술계도 다 강호(江湖)세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7. 오물로 가득찬 “상아탑”
김: 참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한가지 저의 체험을 말씀드리고 싶어지네요. 제가 상해 모대학 일어계 주임의 초빙으로 외교(外教)로 3달동안 일어계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데 정말 대학내부의 심각한 체험을 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대학 일어계 주임이란 자는 지식인, 교원이란 말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재능도, 품위도 없는 인간입니다.
그가 나를 초빙한 목적도 오로지 나를 창수 (枪手)로 이용하려는 개인의 타산에 있어요. 그가 직접 저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김선생처럼 저작이 많은 학자는 정말 부러워요. 나는 아직 부교수에 머물러 있는데 아들 둘 키우는게 벅차요. 요 1년안으로 정교수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논문2편과 저작 한권내지 역서 한권이 필요하니 나 대신 써주었으면 합니다.”
나는 속으로 앙천했어요. 지금 대학에 이런 저열한 인간도 있냐고 말입니다. 내가 완곡히 거절하니까 이 주임은 알게 모르게 나를 괴롭히고 배후에서 비방중상하여 참 이제 백일이 되어오는데 내게는 말그대로 “악몽의 백일”이지요! 그래서 곧 사직서를 내고 관둘 예정입니다.( 그후 나는 정말 사직했다. 그 주임도 자신의 비열한 목적을 이루지 못하니까 앙심을 품고 나와의 “외교계약”을 일방적으로 중지하였다. 이 일은 일어계 교수들의 의분을 초래하여 집단적으로 그 주임을 학교규률위원회에 고소하였다…)
등: 아, 참 안됐네요. 그런 너절한 사람을 만나서 김교수같은 동아시아의 저명한 학자가 저열한 소인배를 조우했군요. 그래요. 일찍 관두시고 좋은 체험을 했다고 ,글쓰기의 소재가 생겼다고 생각하면 그만입니다.(웃음)
김: 정말 글쓰기의 좋은 소재를 무료로 제공해준 그 주임한테 감사를 드려야죠. (웃음)
등: 김선생은 일본이란 조용한 학술분위기속에서 오래 계시다 보니 중국의 대학 학술부패에 대해서 모를수 있지요. 중국대학에서 아까 그 계주임같은 인물은 너무 많아요. 우리 집사람도 역시 계주임에게는 늘 업신여김을 당하여 온 가슴 아픈 체험을 갖고 있어요.
저열하고 덕(德)도 능력도 없는 저열한 인간이 대학, 학술계에 비일비재예요.
중국의 대학이 진짜 대학인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중국대학은 아문이고 기업이고 공장, 백화점, 도박장 그리고 “전선”, “토치까”이기도 해요. 물론 대학이긴 하지만 변증적으로 봐야 합니다. 대학교수는 정객같고 막료, 사장, 깡패두목같기도 하지요.(웃음)
그러니 중국의 “학계”는 오물로 찬 “상계”요 “정계”요 또한 “강호”세계이기도 합니다.
8. 조비화(粗鄙化)가 만연하는 사회
김: 아, 그렇군요! 그러니까 상해대학 일어계 주임이란 인간같이 비열하고 악질인간이 대학에 버젓이 활개치며 발호하는 웃끼는 일에 이해가 갑니다.
제가 1985~1991년사이 중국대학에서 교편을 잡을때만 해도 대학은 그래도 지성의 상아탑으로서 제구실을 했고 성스러운 배움의 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재 대학에는 물질면은 진화했지만 교수, 교육의 도덕, 품성은 오히려 퇴화 됐음을 발견했어요.
최근 중국에서 유행하는 단어에 “조비(粗鄙)"라는게 있는데 이는 중국인, 중국지식인의 집중적 추락을 나타내는 상징어라고 생각해요. 북경대의 전리군(钱理群)교수나 인민대학의 장명(张鸣)교수도 이 면에 깊은 우려를 자아 낸 말씀을 하셨지요. 어떤 의미에서 대중보다 글이나 읽었다는 지식인이 더 조비화로 타락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등: (웃음) 맞는 지적입니다. 중국이란 이 신비한 땅위에서 불가사의한 희괴망칙한 일들이 비일비재하지요. 근년에 대학에서 선생이고 학생이고 논문, 저작을 표절하고 연구비 탐오하고… 학술부패는 정치부패에 뒤지지 않아요.
김: (웃음)제가 상해대학의 체험을 통해《중국의 학술부패》를 주제로 책 한권 집필 예정입니다.
등: 아주 좋습니다. 중국에서 우선 출판발행하면 좋겠네요(웃음)
무한의 화중과기대학 동제병원의 소전국(肖传国)교수가 몇년전에 10만원으로 흉수를 사서 자신의 학술부정부패를 폭로한 방주자(方舟子)씨를 구타한 사건이 전국을 진감했습니다. 소씨는 그래서 “국가정상급 과학가로서 이런 비열한 짓을 하냐”고 입을 모아 질책을 받기도 했지요.
유명학자, 원사 후선인이 이런 골목 깡패들이 하는짓을 할수 있을까? 도덕차원에서 소씨를 질타한다면 너무 창백하지요. 중국에 학자교수들이 수중에 장악한 권력을 이용하여 타인의 성과를 갈취하고 타인을 평가하고 자신을 높이고 갖은 행패를 부리고 재질있는 인재를 압제하고 자신의 말만 듣는 친신만 발탁시키는 등등… 너무 흔해요.
그러나 소씨처럼 돈으로 흉수를 사서 야밤에 코추물과 망치로 라이벌을 대처하는 과학가는 처음이에요.
김: 학자이기에 앞서 우선 인격이 깡패군요!
등: 소씨는 뇌중에는 자신의 학술생애를 고귀한 정신노동이란 의식이 없는 강호세계의 저열한 인간이지요.
김: 그러니 제가 조우한 상해 모 대학의 계주임은 말단 소인에 불과하지요. 조비화가 지식인, 대학에도 만연하니 이게 큰 중국문제입니다. 그러니 등교수님이 늘 제창해온 “중국의 계몽”이 새로운 테제로 중국사회의 큰 과제가 되는건 언급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중국의 계몽”을 화두로 이야기를 전개하자고 합니다.
9. “계몽”이란 무엇인가?
등: 늘 하는 말이지만 중국현대사에서 두차례 대규모 계몽운동이 일어났는데 하나는 20세 초의 “5.4”운동이고 또 하나는 80년대의 “사상해방운동”입니다. 이를 또 “신계몽”이라고도 부르지요. “계몽”이란 개념자체 서양에서 수입한 것인데, “계몽”이란 무엇인가? 칸트의 정의대로 한다면 “자신이 초래한 미숙( 不成熟)상태에서 해탈하는것”이지요. 여기서 미숙상태란 “미성년상태”라고도 번역하는데, 이 상태는 “자신이 조성한것이다”또는 자기 스스로 책임이 있다는것입니다.
서양의 계몽을 두고 우리는 흔히 “자유, 평등, 박애, 민주, 공정, 개정해방”등 구호로만 보고 그 배후에 있는 심후한 토대 즉 이런 구호에 내재된 인류보편적본질의 인도주의신념을 이해하지못했습니다.
김: 미셀 푸코의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지적하다싶이 계몽은 어느 한차례의 운동으로 한꺼번에 도달할수 있는 목표가 아니지요. 그것은 “일종 태도 정신기질이고 철학생활이며 이런 태도, 정신 기질 또는 철학생활속에서 인간에게 내함적비판, 우리에 강제된 한계있는 역사적고찰인바, 이런 한계를 뛰어넘는 가능성적 실험”이라 갈파했지요. 계몽이란 이런 실험으로서 자신의 미숙한 상태을 벗어나는 과정을 부단히 탐색하는 역사과정으로 끝없는 길이라고 푸코는 주장했지요.
등: 맞어요! 그러므로 아무리 서양의 계몽이념의 구호를 내걸고 줄기차게 운동을 해도 인류의 보편적 본질의식이 없는 한 지속될수 없습니다. 서양의 계몽운동은 이점을 첫시작부터 의식하고 실천해왔기때문에 성공할수 있었습니다.
계몽사상은 늘 이성(理性)을 하나의 큰 덕목으로 삼고 지성, 용기를 가미하여 실행한것이 특징적입니다.
10. 왜 20세기 두차례 “계몽”은 실패했을까?
김: 그러니까 서양의 계몽운동은 칸트 등이 제기한 것처럼 시종 일관하나 “자기자신의 미숙상태”를 해탈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서 정신상의 미숙,미개상태를 지성, 이성으로 과감히 타개하고 타인에 의거하거나 인솔하기를 기다리는 그런게 아니였지요.
등: 네. 그렇지요! 이것으로 중국 20세기 "5.4운동"이나 80년대 "신계몽운동"을 따져보면 하나의 선명한 특점이 있는데 이 두차례 계몽운동이 다 어떤 지도자, 인솔자 즉” 지식엘리트”들이 민중의 머리위에 군림하여 그들에 향해 “계몽” “발몽(发蒙)”한것입니다.
한자의 계몽은 아동들에게 점차 배양교육하는 뜻이 있지요. 그러므로 서양 영어의 Enlightenment(볏추다) 나 독일어의 (Aufklarung )(징명-澄明)과는 합당하지 않아요.
그런 까닭에 중국에서도 “계몽”을 사상가, 지식인들이 각종 방식으로 군중을 선전, 계발, 발동하고 인솔하여 따르는 군중이 많은걸로 계몽의 성취를 재는 기준으로 삼았어요.
중국의 계몽운동이 언제나 특별히 그 표면적인 “센세이션효과”만 중요시 하고 이론자체에 대한 심입은 없었습니다.
김: 그러니 이택후(李泽厚)선생이 지적하다싶이 20세기 "5.4운동"의 제1차 계몽운동은 “구국”(救亡)적 정치에 의해 눌리웠지요.
등: 그렇지요. 우선 계몽가치는 구국보다 응급가치가 떨어졌고 조속히 효력을 보는것이 아니였고 다음으로 일부 계몽사상가들이 동일 “계몽”논리에 따라 대중숭배 내지 대중우매숭배의 기로에 들어섰기때문입니다.
제2차 즉 80년대 계몽운동은 비록 “구국” 정치요무에서 해탈됐고, 역사문화 측면에서 제1차 계몽보다 더욱 광활한 시야와 깊는 사고가 있었지만 보편적 인성에 대한 반성면에서 여전히 서양 계몽운동의 심도에 도달하지 못했어요. 특히 계몽가치의 기본표준 즉 “이성(理性)적 사고는 여전히 표면적인 논리이성차원에 머물러있었지요.
11. 노신의 결함
김: 탁견이시군요! 서양의 계몽이 고차의 이성(理性)에 의해 성공했다면 중국의 두차레 계몽은 결국 계몽을 소리 높이 부르짖었음에도 불구하고 계몽이란 문턱에서 서성거렸고, 80년대 신계몽도 역시 낡은 화제를 다시 건져올리고 번마다 빙 돌아서 원래지점으로 돌아왔으며 본질적 진척이 없었습니다.
등: 사실 중국의 계몽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아비판, 자아반성이 없이 그냥 자아전이 (转移) 자아도피에 불과했습니다. 지금 중국의 계몽이 계몽의 문어귀에서 배회하고 있는 까닭은 우리가 언제나 자주적으로 계몽을 중국전통적 반역사상과 혼동했기때문이지요. 일테면 노장은사( 老庄隐士 ),위진명류 (魏晋名流),명청이단(明清异端)이런 오랜 사조와 서양근대 계몽사조가 좀 유사한데가 있는데 주류의식에 대항하여 개성을 주장하는것이 그것이죠.
김: 그러나 중국의 이런 흐름과 근대 서양계몽은 본질적으로 이질될텐데요!
등: 그래요. "5.4계몽사상"은 바로 이를 입각점으로 많은 “신청년”을 이끌었지요. 그러나 개성해방이나 독립이나 보편적 이성(理性)을 기초로 하지 않고 그냥 개인의 기질과 성정으로 또는 청춘기의 생리적소동으로 끝난다면 그대로 소실되거나 횡류하는 물욕에 의해 추락되고 맙니다. 이런 계몽은 확실히 출로가 없지요.
노신 작품중의 여위보(吕纬浦)를 보면 당년에 그도 한다하는 “신청년”으로 열광을 보였지만 열이 식자 점차 저조기와 퇴폐기로 가라앉아 생계을 위해 시골로 하향하여 《3자경》이나 가르치고 “무가무불가(无可无不可)”의 허무주의로 전락되고 말지요. 결국 이성(理性)이 결핍한거지요.!
김: 노신 자체도 그런 약점이 있은것 같은데요?
등: 네. 노신 본인도 이면에서 결함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도 냉철한 이성으로 중국전통문화를 비판, 사고하는데는 최고차원에 도달했지만 이 무거운 전통에 대한 적개심은 늘 그냥 여조(女吊)식으로 복수단계에서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그 개인적 고독, 분개와 일종의 성정으로 돼서 동류인간들의 공명을 일으킬수 있으나 보편적 사상으로 일반인의 두뇌를 무장시킬순 없었어요. 그러니 일단 시대의 풍향이 바뀌면 사람들은 그를 따돌리고 그냥 잔소리만 하는 귀찮은 영감으로 치기 일쑤였습니다.
12. 80년대의 향수
김: 좋은 말씀입니다. 기실 우리가 거듭 언급해온 이성(理性)이란 단어도 일본인들이 만든 한자어이지요. 중국 철학에 고유한 개념은 아닙니다.
등: 그래요. 일본인이 reason 을 음역하여 한자어를 만들었는데, 지금도 웃끼는건 우리에게 이성적으로 반성하는 사유, 즉 우리의 계몽을 반성하는 “계몽에 대한 반성”이 결핍합니다. 우리는 모든것을 회의하지 못하고 자신의 이성을 제도로 감히 활동하지를 못하면서 이성을 가볍게 보는 그런 고약한 버릇이 있어요. 이게 전형적 아Q방식이 아닙니까?(웃음)
김: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저러나 선생님이나 저나 세대차이는 있지만 80년대 사상, 문화의 계몽기에 대한 공동한 문화체험을 갖고 있습니다. 30여년이 지난 현대의 지식인 내지 대중들이 사상, 소질수준은 80년대보다 오히려 후퇴된것 같네요. 80년대에 대한 공동한 문화체험, 향수가 가끔 나를 유혹해요. 80년대는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사상이 해방되고 활기를 띤 연대라고 생각합니다. 1984년은 조지 오웰이 동명소설에서 공포스러운 사회를 묘사했지만 중국에서는 신계몽이 시작된 해이기도 하지요. 사상계에서는 《미래을 향하여(走向未来)》 시리즈가 정식 간행. 중국문화서원이 설립되고 《독서》잡지의 주요독자는 청년지식인이 맡았지요.
그때 “문혁”이후 졸업한 대학생들이 독립적 표현을 하게 되고 역사무대로 진출했는바 문학, 영화, 인문연구 등 분야에서 전례없는 “신사조”가 출현되었으며 저도 늘 밤 늦에까지 책을 탐독하고 사고를 하였습니다.
등: 그래요! 정말로 80년대는 생기 발랄한 시대였고 모종의미에서 중국문화의 활성기 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현재 2010년대는 계몽과 모든 면에서 80년대와는 양상이 다르고 어떤면에서는 후퇴했다는 느낌이 드는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니 칸트, 푸코적의미의 계몽, 신계몽을 지속적으로 하는것이 우리 중국인의 과제라고 생각해요.
13. 지식인이여, 자신을 계몽하라
김: 저는 근년에 중국의 물질적진보와 인간소질이 퇴보를 “물진인퇴(物进人退)”란 4자로 표현하고 《중국인은 진화했는가?》한 일본어 저작을 출판했어요.
80년대이래 물질적부유와 함께 대중은 물론 지식인의 사상이 퇴보되었습니다. 80년대의 계몽이 실패한 이유의 하나가 지식인이 사상으로 정치를 개변하거나 또는 정치를 이용하여 계몽운동을 추진하려한 것이였습니다. 정치에 대한 환상이 너무 큽니다.나는 정치나 타자에 의거하려는 독립성부재, 사상부재, 그리고 명예와 이익의 포로가 되어 사상도, 사명도 포기한 안일한 지식인이 중국에 너무 많은것을 발견하고 놀랐습니다.
계몽이란 타자를 강제적으로 하라고 구세주, 스승인듯 군림하기보다는 장기적 사상의 질곡속에서 자기 스스로 계몽을 하고 “이성”으로 사고를 하면서 스스로 노력을 해야 한다고 봐요. 지식은 누굴 계몽하기전에 우선 자기 스스로를 계몽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웃음)
학술부패, 인격오염의 대학 지식인,교직원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굳히게 되었어요.
등: 좋은 말씀이군요. 물질인퇴의 중국은 사실 지식인의 경우를 지적한 말이기도 하다고 생각해요. 물질의 안락에 안주하여 사상을 하지 않고 명예나 이익을 갈취하고 수중의 작은 권리를 남용하여 행패를 부리는 지식인 (또는 그냥 교직생활자)이 중국에 어디 한둘입니까? 김선생이 상해대학에서 조우한 그런 주임도 빙산에 일각에 지나지 않고 너무 많지요. 그래서 내가 중국대학은 강호(江湖)이고 깡패무리라고 과격한 말을 했던겁니다.
우선 고차원의 계몽 운운하기전에 김선생의 지적대로 그런 비열한 후퇴한 지식인의 계몽이 필요하지요!
어제 김선생이 우리 철학계에서 한 《중일한 비교문화》강연은 정말 정채로웠습니다. 일본의 학술,청렴, 학자, 지식인들의 학술에만 정진하는 그런 학술을 할수 있는 자유, 독립의 분위기가 부럽기만 합니다. 우리는 일본에 대해 너무 무지하고 알면 알수록 따라 배울점이 많다는것을 정말 절실히 느꼈어요.
14. 시대는 변했다 그리고 계몽은 ….
김: 감사합니다. 여하튼 중국은 80년대 계몽이후 2000년대의 현재도 계몽이 자타로 절박히 필요한 시대라고 보는데요. 선생님은 신계몽을 어떻게 전개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등: 20세기 두차례의 계몽은 사회구조와 경제기초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층 민중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실패했지요.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국정이 변하고 자연경제가 해체되고 도시화가 국민생활의 중심으로 되였습니다.
이런한 사회구조와 경제기초가 사상기초를 만들었고 이런 상황하에서 신계몽을 하면 효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 그럼 신계몽은 어떤 특징이 있는지요?
등: 제일 큰 특징은 소수의 지식엘리트들이 국외에서 신지식체계를 수입하여 사회문화를 개조하는게 아니라 중국사회 자체가 근원적인 변화가 일어나 지식인들께 강열한 질호를 발하는거지요. 지식인으로 하여금 신생활방식을 위하여 새로운 규범과 의식형태의 근거를 제공할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과거 두차례 계몽과 비교하여 순차가 바뀌었어요. 예전에는 일부 지식엘리트들이 높은 곳에서 군중을 동원하여 사회를 개변하려 했지만 오늘은 백성들이 문제를 보고 하층에서 지식엘리트들에게 호소하지요.
김: 꺼꾸로 하층 대중이 지식인에게 요구를 하겠군요. 새로운 이론과 방법을 대라고.
등: 그래요. 그러니 지식인이 이런 호소에 호응하지 못하면 실격이 되버리지요. 두번째 특징은 전번 두차례 계몽보다 이론적으로 중요한 추진을 하여 현실생활에 적응시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애국주의, 중화민족 진흥등 이념으로 지식인들이 호소를 했는데 오늘날 백성들에게 이런 공허한 이념이 안 먹히거든요. 그러니 지금의 계몽은 대중들의 생활과 밀접히 연결되고 일상화 계몽이 선양하는 내용이 밀착돼어야 합니다.
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겠어요?
등: 첫째. 신계몽의 특점은 과학으로부터 이성(理性)으로 심입해야 합니다. 이성정신에는 회의정신은 비판적 사유를 말하는데 이게 중국인에게 가장 부족하지요. 논리사고는 추리사유를 하는것인데 이러한 이성정신은 실용목적을 초월한것입니다.
두번째는 민주에서 인권으로 심입해야 하는데 이는 민중의 생활과 직접적 관계가 있고 실제에 부합되는것입니다.
세번째는 보편적가치에 대한 총체적 파악. 보편적가치 하면 서양의 개념이라 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무지한 생각이지요. 어떠한 보편적 가치도 모종의 문화가 승재(承载)하기 마련인데 서양문화가 승재했다하여 그것을 쉽게 부정해버리면 최종적으로 보편가치를 다 부정하게 돼버리지요.
서양의 보편적가치는 중국의 전통적 보편가치보다 더욱 보편적이고 중국전통적보편가치를 포괄한것은 사실입니다.
15. 중국사회의 유일한 출로는 무엇인가?
김: 계몽의 미래상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어요?
등: 네. 우선 계몽이 해야할 일에 대해 말씀올리겠습니다. 첫째, 이성으로 천리(天理)를 대항하는겁니다. 중국전통의 천리와 이성는 판이한 개념으로서 천리는 일종 규칙인바 말로 표달하기 어려운 그런 비이성적 관습사유이지요. 이성으로 이런 천리를 타개하고 이성과 자유정신으로 천리의 “이리살인(以理杀人)”의 관습을 수습해야 해요.
두번째는 인권개념으로 자유를 재건해야 합니다. 법적으로 인간의 자유적의사와 인격의 존엄을 보호해야 하지요.
세번째는 건전한 계몽상태를 수립하는겁니다. 백성들을 미숙한 아이로 보지 말고 건전한 심성으로 계몽에 투신해야 합니다. 만일 계몽사상가가 자신의 생각을 정치적 힘으로 변질시킨다면 계몽의 이질화(异化)가 생겨요.
김: 저도 완전 동감입니다. 요즘 국내에 자주 와서 보면 “국학열(国学热)”이 붐으로 되고 있으며 이런 국학열이 계몽을 뒤덮을 기세인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등: 이건 이상할것 없어요. 왜냐하면 중국 수천년의 관성이 바로 정체(停滞)와 후퇴를 초월로 보거나 지어는 썩고 낡은것을 신기한 보배로 여기니까요.
김: 중국의 미래에 대하여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등: 장기적으로는 낙관적이지만 근기(近期)는 별로 희망을 안겁니다. 관용, 민주, 자유, 인권 이런 중요하고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팩터들이 실현되어야 합니다. 노신이 말했어요. “가장 무서운건 꿈에서 깨어나서 갈 길을 못찾는것”이라고. 오늘은 노신의 시대가 아니지요. 이미 역사환경이 거대한 변화가 생겼지요.
꿈에서 깬뒤 유일한 출로는 일상생활중 의식적으로 보편적가치를 관철하고 국제사회에 들어가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중국이 전통으로 복귀하는건 중국의 “출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건 죽음의 길이지요.
일본과 한국 그리고 대만이 전례를 보여주었듯이 세계의 일원으로 변신하는것입니다.
결론은 계몽이야말로 현대중국사회의 유일한 출로입니다!
(끝)
대담자 소개
등효망(邓晓芒)
저명한 철학가. 문화비평가. 화중과학기술대학 철학계 교수. 1948년생. 1979년 초중학력으로 무한대학 철학계 석사과정 입학. 1982년 석사학위 취득후 무한대 철학계 교수, 박사생지도교사, 서양철학연구소 소장 역임.
중화외국철학사학회 상무이사. 2009년 말 화중과학기술대학 철학계 교수.
주요연구영역은 독일 철학, 미학, 문화심리학, 중서비교문화등
중요저서로《思辨的张力》《冥河的摆渡者》《灵之舞》《人之境》《灵魂之旅》《新批判主意》《启蒙的进化》역서로 칸트의 《纯粹理性批判》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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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에 많은 잡지가 있다고 하지만 다 별 볼 문장이 없다.
그러나 조글로는 김선생 글때문에 매력이 있다.이전에 김선생 글을 연재하던 장백산 처럼.
조글로 편집진의 대담한 운영에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