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의 신사유》
문화대담(4)
왜 “ 또 하나의 중국”을 알아야 하나?
왕학태+김문학
1.“또 하나의 중국”발견
김: 현대 중국 인문학계에 “3대발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왕학태선생님의“유민문화(游民文化)”와 여영시(余英时)선생의 “사문화(士文化)”,그리고 오사(吴思)선생의 “숨은 규칙(潜规则)”을 인문학의 3대발견으로 칭하고 있지요.
물론 대만 백양선생의 “장독문화”까지 넣어서 저는 “4대발견”으로 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 되기도 합니다.
왕선생님의 “유민문화”론은 중국 지식계에 상당히 큰 충격을 주었지요. 이신지(李慎之)선생님은 유민문화를 논한 저작《유민문화와 중국사회》을 평해 “또 하나의 중국을 발견했다”고 격찬했습니다.
“유민문화사회”에 관해서 선생님과 대담을 하고자 하니 많은 가르침 부탁드려요.
왕: 천만에요. 김선생도 젊은 학자로서 이미 많은 책을 내셨고 ,특히 동아3국과 중국국민성에 관한 논저들은 중국 지식계에서도 매우 주목받고 있습니다.
김: 고맙습니다. 유민문화 연구의 제일인자인 선생님께서는 역대로 중국 지식계에서 홀시해온 유민사회,그러니까 선생님의 표현을 빌면 정통사회 즉 현성사회(显性社会)의 뒤면에 있는 비정통사회,즉 은성사회(隐性社会)에 대해 체계적으로 발굴, 연구를 해냈습니다.
1999년 제가 선생님의 《유민문화와 중국사회》를 읽었을 때 큰 감명을 받은 이유가 바로 “또 하나의 중국사회”에 대한 규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은성사회가 현재 중국에 미치는 영향과 앞으로 중국사회의 관련양상에 대해 풍부한 시사를 주고 있지요.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유민문화를 재발견하고 책을 쓰기에 이르렀습니까?
2. 하층사회의 체험이 학문으로 승화
왕: 사실 내 인생은 참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난 1960년대초 북경사범학원 중문계 학부생시절에 반동학생으로 몰리웠어요. 1975년 우파로 감옥에서3년 감방신세을 지었지요. 그러니까 옥중생활에서 난 수많은 하층사회 인간을 접하고 그들의 삶, 생각, 행동양식을 낱낱이 파악하게 되였습니다. 김선생도 문화인류학자이니까 아시겠지만, 그 사회속에 깊이 들어가 체험하는건 지식인, 학자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어요. 직접 이해하고 몸으로 느낄수 있으니까요.
하층서민은 마치 《수호전》의 세계와 같아서 거기에는 악한기(痞子气), 유망기(流氓气), 유민기(游民气)로 가득차있지요. 그래서 나는 《수호전》을 연구하는게 오히려 《홍루몽》을 연구하는것보다 중국사회를 이해하는데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감옥에서나 현실에서나 나는 방금 말한 유민, 유망, 악당들을 너무 많이 만났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도리고 이성이고 따지지 않고 무조건 폭력,주먹입니다.
김: 그렇죠. “폭력원리”는 중국역사를 관통해온 하나의 생존원리, 사회원리이기도 하지요.
왕: 맞어요. 그래서 나는 중국사회를 화려한 겉만 보지 말고 이런 유민들의 세계,은성세계에 대해 주목하게 됬고 마침내 전문저작을 써내게 되었습니다.
김: 일찍 1919년에 민국시기 도아천(杜亚泉 )선생이 유민문화에 대해 언급한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에 일본의 중국문학자 타카시마도시오(高岛俊男) 선생도 《중국의 대도적》이란 책을 간행했습니다.
왕: 도아천선생은 《동방잡지》(제16권4호)에 발표한 글에서 말했습닌다. “우리 나라 사회에서 귀족문화와 유민문화는 늘 모순적으로 공존하며 교체하면서 성쇠를 이루어왔다. 즉 귀족문화가 왕성할 때는 사회가 침체부패하고 따라서 유민문화가 그것을 대체 해버린다. 그러나 유민문화가 왕성해지면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귀족문화가 다시 이를 대체 해버린다. 이것이 중국사의 순환이다.”
두선생은 신해혁명이 성공하지 못한 원인을 중국이 귀족문화와 유민문화라는 양대세력에 빠져서 우왕좌왕했기때문이라고 지적했어요.
그러나 도선생은 중국사회의 역사적 진로와 결부하여 세밀한 분석,고찰을 하지 못한 점은 아쉽습니다. 아무튼 “유민사회”를 지적한것만으로도 큰 실적이지요.
3. 아Q는 전형적 유민이다
김: 왕선생님의 중요한 지적은 아Q의 신분에 대한 새로운 해석입니다. 아Q는 농민이 아니라고 했지요.
왕: 그래요. 1980년대부터 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에서 나는 유민문제에 대해 캐기시작했어요. 내가 우선 주목한것은 노신선생의《아Q정전》의 아Q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사실 나의 분석에 의하면 노신은 중국인의 열근성을 문학적으로 제시하려고 해서 아Q라는 인물을 등장시켰습니다.
국내 연구자들은 흔히 아Q는 낙후한 농민이라 보고 있지만, 아Q가 어디 농민입니까? 우리가 가장 간단하면서도 중대한 분석을 누락시켰어요. 아Q는 도시와 시골에 유랑하는 유민의 전형 모델이지요. 고정직업도 주소도 가정도 종법(宗法)도 없는 유민, 그리고 그의 성씨도 뭔지 몰라요. 이게 전형적 유민이 아니고 뭡니까?(웃음)
김: 그렇네요. 노신선생은 유민을 문학적 형상, 이미지로서 재현하였지만, 이론적, 학문적으로 유민문화를 탐구하지 못했습니다. 왕선생님께서 노신선생이 미처 하지 못한 학문적규명을 하셨어요.
중국사회를 이해함에 있어서 유민과 귀족 환언하여 악당과 신사 또는 비유교와 유교계층이라는 2항대립구도를 이해나는것은 대단히 중대한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즉 표면사회와 리면사회의 교체가 중국사회교체의 일종 룰이기도 하겠네요.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유민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십시오.
4.유민, 그리고 시비가 없는 세계
왕: 유민이란 말그대로 직업과 노동대상인 땅을 잃고 유동,유랑하는 사회의 무리를 말합니다.
유민이란 개념은 최초 《예기. 왕제》(礼记 . 王制)에 등장해요. 《관자》에도 나오지요. 상앙(商鞅)이 지적한 “농민이 적고 유민이 많았다”는 말과 같이 유민은 일종의 직업으로도 되였습니다.
청나라때는 유민을 무뢰한, 악당, 깡패등과 같은 취급을 했어요. 1949년 신중국 성립후 정부에서는 유민을 부정당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취급하고 “유민개조”운동을 벌이기도 했지요.
김: 그럼 유민은 굉장히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겠습니다. 선생님은 송나라때부터 유민의 군체가 생겼다고 했습니다.
왕: 선진(先秦)시기부터 유민이 있었지만, 유민군체, 유민의식의 형성은 아무래도 송조때부터라고 봐야지요.
여기서 상세한 얘기는 생략하겠으나, 정치적현실과 도시제도의 변화에 따라 유민이 무리로 생기고 유민의식도 팽배해집니다.
김: 유민의 성질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왕: 네가지 성격이 있다고 봅니다. 나는 스스로 이를 “유민성격”이라 명명했어요.
1.천연적인 반사회성, 천하가 대란에 빠지고 그 틈에 자신의 처지를 개변하려고 하지요
2.능동적인 진격정신, 즉 능동적으로 타자를 진공해요. 자신의 이익을 얻기위해 폭력, 무력으로 타인을 쳐서 빼았아 냅니다. 《수호전》의 세계가 그런 세계가 아닙니까
3.결속, 동맹 즉 자신의 이익을 위해 흔히 비슷한 사람끼리 결속하여 친구, 형제를 맺어서 같이 행동하는겁니다. 《3국연의》의 “도원3결의”가 그 간단한 형태이고 복잡한것은 비밀결사, 방회를 만드는것이지요. 그러니 폭력원리가 제일이고 “적아만 가리고 시비는 안 가린다”는 원칙입니다. 《수호전》에서도 이 점이 잘 구현되고 있어요.
4.반지성, 반문명성격, 지식, 교양, 문명을 존중하지 않고 무력,힘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세계를 바라보는 가치관, 행동양식입니다.
이것은 중국전통사상의식중 가장 암흑하고 가장 야만적인 일면이지요
5.중국역사는 유민이 만들었다
김: 중국의 귀족과 유민의 권력 다툼의 역사라는 지적과 같이, 중국사회의 계층을 관철해보면, 정통사회의 질서구조에서 배제된 계층이 늘 사회전면의 원동력으로도 되었지요.
지식인들속에도 출세의 길이 끊기고 체제에서 배척당하면 유민에 가담하는 현상도 늘 있은 일입니다.
제가 약 십년전에 《중국, 국민성의 리(里)구조의 발견》을 집필할때 선생님의 저작과 해외학자들의 유민, 도적에 관한 자료들을 많이 섭렵했는데, 역시 폭력원리는 유교의 원리와 함께 중국사를 관철한 큰 테재였습니다.
왕: 옳은 말씀이에요. 사실 중국사의 농민봉기, 이를테면 역사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진승,오광이나 명조를 세운 주원장이나 또는 명조를 무너뜨린 이자성도 태평천국운동을 발동시킨 홍수전도 다 농민출신으로서 유민을 조직하여 궐기한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김: 영국의 사회학자 P.R빌린그스리의 저작 《비적-중국의 변경과 중앙》(1988)에 따르면 1911년부터 1949년까지 중국에서 비적이 창궐하였는데 1930년에는 비적총수가 적어도 2000만이나 달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때 중국의 신문,잡지에서는 “우리 나라의 국체는 상실하고 비적의 세계로 돼가고 있다”고 질호할 정도였으니까요. 나라 전체가 강호의 세계를 이룬것입니다.
왕: 나는 최근에 “강호(江湖)”라는 단어로 “유민”을 말하기도 합니다. 유민에서 나온 “강호”는 하나의 군체, 하나의 사회를 형성하곤 했으니까요.
송조에 이르러 도시가 발달하자 유민도 군체의 형식으로 나타납니다. 유민의식도 송나라이후부터 통속소설등 문예스타일로 표현되였는데 역시 그 작자도 강호의 예인 (艺人)들이 창작한것이지요.
6.“강호” 사회의 중국
김: “강호”는 중국 전통사회를 이해하는 커다란 키워드라고 생각해요.그것은 “정통”의 대극에 있는 비체재의 민중의 세상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여기는데요. 선생님은 어떻게 보고계신지요?
왕: “강호”란 단어는 《장자(庄子)》에도 나오는데 재야의 반항정서와 역량도 포함돼 있다고 학자들은 말해요. 그러니까 체제내에서 나온, 또는 거기에 못들어간 재야, 민간의 세상이기도 합니다.
전통적 사대부들이 “묘당(庙堂)”에 있으면 군자를 생각하고 강호에 있으면 서민을 우려한다”고 했는데 조정내의 파벌,명예투쟁에 싫증이 난 그들이 강호에 오면 조용하고 음모궤계가 없고 평화로운 생활을 누릴수 있었거든요.
김: 전통적 지식인들이 입세시에 유가(儒家)가 되고 출세(出世)시에는 도가(道家)로 되는 패턴이겠네요.
왕: 그래요. 그리고 또 하나의 강호가 바로 유민의 강호이지요, 실례를 들어 《수호전》에 영웅호걸이 많이 나오는데 그들의 사회가 바로 전형적인 유민의 강호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이 강호는 사대부의 문질빈빈(文质彬彬) 한 강호와 전혀 판이해요.
음모와 폭력과 주먹,칼부림의 피비린 내나는 도광검영(刀光剑影) 세계이지요.
이런 강호는 험악한 세계, 담력, 체력이 다 필요한 세계입니다.
김: 사실 19세기 이래 청말민국 내지 신중국성립전까지 강호세력이 체제와 결탁하여 또는 직접체제내부에 들어가서 체제를 강호로 변모시킨 일도 비일비재 했지요.
방회, 비밀결사가 민국시기의 군,경찰,금융,공상계,매스컴,문예계, 서비스업계나 최하층 쿠리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 뻗어있었던것이지요.
7.왜 중국인은 무협소설을 즐겨 읽는가?
왕: 맞습니다. 중국인이 왜 《수호전》이나 김용의 무협소설을 즐겨 읽는지 아세요?
김: 중국에 확실히 강호, 비적원리의 토양이 있기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무협문예에 열중하는 심리에는 협객이 나타나서 악당을 징벌하는 그런 쾌감이 뒷받침하고 있다고 보는데요. 중국 지식인들도 협객이나 호걸의 호방한 언행에 매료당하는 사람이 많지요. 《수호전》《3국지》나 김용소설에 이어지는 협객소설의 계보에는 중국대중의 권선징악(劝善惩恶)의 낭만적 상상력을 야기시키는건 사실입니다.
거기에는 폭력에 대한 명백한 향수가 깔려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왕: 그래요. 사실 중국인의 심리에는 비건강요소가 다분히 있어서 독립자주의 정신이 결핍합니다.
중국인이 왜 단결하자, 하나로 뭉치자고 외우는가요? 똘똘 뭉치는것은 다름아닌 내홍, 내부투쟁을 벌이기 위해서지요. 그리고 내홍을 벌일때 우리는 흔히 그 이유에 정의로운 대의명분을 씌우기를 좋아합니다.
만약 누구를 욕하고 타도하기 위하여 “국가를 위하여” 또는 “인민을 위하여” 하는식으로 사탕발린 말로 자신의 투쟁의 정당성, 합리성을 돌출히 내세우는겁니다.
《수호전》이나 무협소설은 죄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내홍투쟁을 벌이는가 방법수단을 가르치는 거지요. 곰곰히 분석해보면 《수호전》중의 강호지주가 양산박 의사들을 압박했나요? 없지요. 다 우연한 사고로 양자의 적대관계를 조성하고 생사결판을 보는거 아니고 뭡니까?
예를 들어 양산박이 축가장을 습격할때, 축가장이 양산박을 토벌할 위험성이 있다고 핑계를 대요. 사실은 양산박 사람들이 축가장의 재물과 식량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거든요.
무협소설에서도 치고 싸우는 모든것은 다 계책, 묘략, 폭력위에다 “정의감”이라는 사탕을 발라놓고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독자들에게 어떻게 인간을 무함하고 곤경에 빠뜨리고 자신이 이기는가를 가르치고 있기때문에 현대 사람들이 그것을 무척이나 즐기게 되는법입니다.
8.엘리트문화 VS 대중문화
김: 대만의 사회인류학자 이역원 (李亦园) 선생이 “대전통과 소전통”이라는 이론을 제시하였습니다. 대전통은 공자를 대표로 하는 사대부, 지식인문화, 즉 정통문화고 , 소전통은 관공(关公)을 대표로 하는 인간의 문화입니다.
영국의 문화사학자 피터 버클은 그의 저작 《유럽 근대의 대중문화》에서 엘리트문화와 대중문화는 분렬 또는 대립된 문화가 아니라고 지적했어요. 그의 이론에 따르면 엘리트문화가 소전통이고 대중문화가 대전통입니다. 그런데 지배자엘리트들이 대중문화가 사회질서를 무너뜨릴 위험성이 있다고 치면, 곧바로 대중문화를 억압하거나 개조해 버립니다. 이러한 통치권력하에서 대중과 유민문화는 엘리트문화에 의해 계속 조종당하거나 개조당하는 비운에 봉착한다는 겁니다.
왕: 나의 관찰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대중의 사상문화와 사대부지식인의 그것은 큰 차이가 없고 세부에서 약간 이질된 표현이 있을 따름이지요.
어느게 좀 더 저속하고 또 어느게 좀 더 문명한가의 정도의 차이는 있습니다. 예를들어 《수호전》에 양산 호한들이 내든 “替天行道“(하늘을 대신하여 도를 행한다)라는 슬러건은 대중들속에서 나온 독창적인 의식이에요.
이는 대중의 사상이거나 또한 지식 엘리트의 사상이기도 하는 경계성에 있는 의식입니다. 대중들에게 있어서는 하층인들이 통치자들을 저항하는 무기가 되고 엘리트들에게 있어서는 제왕을 보좌하여 왕도를 행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수호전》《3국지》등 통속적 대중문예작품이 그 뒤 사회운동의 발전에 큰 영향을 준것을 우리는 부정할수 없지요.
김: 그러니까 이 양자는 상호대립이 아니라 상호보완의 공생관계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어쨋거나 피터 버클이 지적한 양자의 관계역학(力学)은 여전히 중국현실의 사회구조에 대조하여 고찰해도 적응할수 있다고 여깁니다.
제가 선생님의 노작《유민문화와 중국사회》배독하면서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는데요. 하지만 한가지 아쉬움이 남아있었어요. 쭉 역사적으로 귀중한 문헌자료를 구사하여 유민문화의 전모를 발굴, 분석한 업적은 높이 평가 하지만, 유감인것은 근현대 사회,오늘의 사회와 밀착시켜서 그 관계양상을 누락시킨 점입니다.
9.현대 사회 폭력
왕: 지당한 말씀입니다. 기실 김선생도 잘 아시다시피, 중국에서는 학술적으로도 여전히 공개해서는 안될 금기사항이 어디 한 둘입니까? 그래서 나는 처음주터 현대 민감한 금기사항은 아예 터치를 안 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내 책에서는 주로 역사상 근대이전의 문헌자료를 통해 유민문화와 중국 사회의 상호관계양상을 탐구한것이니, 근현대까지는 미치지 못했어요. 나 자신도 큰 아쉬움은 남지만 어쩔수 없어요. 내 욕심같이 적나라하게 다 썼다가는 공개출판이 어려우니까요.
김: 그러나 저는 선생님의 저작이 비록 현실터치를 하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유민의 “또 다른 하나의 중국”을 통해 중국역사의 입체적이해에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의의는 오늘 현실의 이해와 미래를 예측하는데 밝은 거울의 구실을 하고 있다고 여겨요.
현재 사회 민간 흑사회, 깡패조직의 폭력, 그리고 권력자, 이를테면 경찰의 국민에 대한 강제 폭력, 교정내의 어린이의 폭력,인터넷상의 만연하는 언어폭력… 이런 “폭력”이 중국사회 구석구석에 만연하고 있는 실정이지요.
이런 가슴 아픈 폭력에 대해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왕: 내가 유민군체의 성격을 분석할때 이미 밝혔지만, 그중 “적나라한 폭력과 야만”이 하나의 큰 특징입니다.
《수호전》에서 무송이 반금련에 대한 잔인한 폭력적 살인이나 이규의 살인마같은 살인행위가 그러 하지요.
《수호전》《3국지》의 폭력,호협,의리등 요소들이 면면히 이어오면서 중국인, 특히 조폭사회, 암흑사회, 하층유민까지 영향이 큰것은 부인할수 없습니다.
한편 고대사회에서 형벌자체가 아주 잔혹하여 목숨외에도 주로 신체, 육신에 대한 비인도적인 형벌이 많았어요. 이런 잔혹함은 하층민중들로 하여금 반항할때 더 잔혹한 수단을 쓰게 했지요. 이와같이 잔혹한 폭력문화가 사회전반에 영향이 미쳤어요. 하다못해 사람을 매도하는 욕말도 “천번 칼자국 맞아야 한다(杀千刀的)”는 등 잔혹하게 표현됩니다(웃음)
사실 현대의 폭력은 옛날 사상과 조직형식이 다 똑같고 무협소설에서 배워온것이 대부분입니다.
10. 의(义)의 비교사회론
김: (웃음) 정말 그렇네요. 모종의 의미에서 유민문화는 중국의 전통문화나 국민성을 파악하는 하나의 바러미터이기도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유민문화의 가장 중요한 핵심성격이 의(义)라고 갈파하셨는데 정곡을 찌른 지적입니다.
사실은 중국인 자체가 의를 중히 여기는 국민성을 지니고 있지요.
왕: 맞어요. 의는 여러가지 다양한 차원에서 해석할수 있는 전통도덕의 하나인데 유교에서도 의와 리(利)는 밀착되 있는거에요. 유민에게 있어서 의는 곧 리익과 직결돼있습니다.
중국인들이 지금 일상에서 한사람을 평가할때 “쟝이치(讲义气)”가 중요한 도덕의 가치기준이 되거든요. 강호유민사회에서도 의기(义气)는 서로 사귀고 신임하는 인간관계의 접착제로서 그것은 단순히 타인에 대한 봉사, 공헌이 아니라 하나의 이익을 계산한 투자이기도 합니다.
《수호전》의 송강이 바로 의협으로서 그런 전형적 인물이지요. 송강이 금전으로 강호에서 친구를 맺는데 대해 김성탄(金圣叹)이 이를 얕잡아서 “돈으로 교유한다”(以银子为交游)고 비난했지요.(웃음)
김: (웃음) 맞는 말이네요.
제가 졸저 《중일한 3국인국민성격》(홍콩삼련출판사)에서 3국의 국민성을 비교하면서 중국인의 의(义),일본인은 화(和),한국인은 정(情)의 특질이 있다고 했어요. 비교문화론적 시각에서 같은 “의”라도 중국은 이익을 강조하는 성향이 지극히 강하지만 일본은 약해요. 인간의 화를 이루기 위해 의가 베풀어지는것이에요. 중국은 그 한자같이 羊이 我에게 얻어져야 义가 이루어지는겁니다. 羊은 전통적으로 중국인의 먹는것, 재물을 뜻하거든요. 그러니 재부가 내것이 되어야 의가 통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중국인은 이익을 우선시키는 그런 국민성이 있다고 봅니다.
왕: 흥미로운 지적입니다. 그러므로”유정유의”(有情有义) 가 중국인의 선호하는 인간성이기도 하지요. 의기의 본질이 중국인이 생존을 꾀하는 도덕이라면 역시 그중에는 실제직 이익이 큰 비중을 점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 중국말에 사용빈도가 높은 이런말이 있잖아요. “出门靠朋友”(밖에서는 친구에 의거한다)라는 말이라든가 “多一个朋友多一条路”(친구가 많으면 길이 열린다)는 말이 가장 집약적으로 중국인의 의리(义利)의식을 체현하고 있습니다.
옛날뿐만아니라 이는 오늘 우리 중국인의 생활의 법칙의 하나로도 정착되고 있으니, 이것 또한 의리가 통하는 교제권안에서는 그대로 통하는 룰이 되고있어요.
11. 왜 중국인은 공공권에 익숙하지 않은가?
김: 또 국민성, 인간소질의 말인데요. 중국인에게 있어서 의리는 사실 자신의 가족,친구, 동료 등 아는 인간권(人间圈)에서만 작동이 되는거에요. 문화인류학에서 인관관계를 동심원(同心圆)으로 따지는 게 있는데,자신을 핵으로 자신과 가장 가까운 원을 “인정권”人情圈), 그 조금밖에 있는게 “의리권”(义利圈),그리고 제일 밖에 있는 큰 원이 곧 “공공권”(公共圈)이라고 일컬어요.
한국인이 제일 좁은데 인정권, 중국인은 바로 의리권, 일본인은 공공권에 익숙해 있습니다. 유교의 농도와 동심원의 사이즈가 정비례 되는데 한국인은 가족, 혈연주의의 유교가 가장 농후하고 다음이 중국, 일본순으로 되거든요.
그래도 한국인은 현재 민주화사회로 변모하여 중국인보다 공공의식은 많이 강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인은 여전히 인정권과 의리권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기때문에 공중장소에서 질서의식이 약하고 자기중심으로 방약무인의 경우가 종종 있지요. 인정권, 의리권 등 사적인 공간에서는 사덕(私德)이 강하게 존재하여 아는 사람끼리는 양보도 하고 서로 배려하지만, 공공권에서는 타인에게 그런 공덕(公德)이 없지요.그래서 공중도덕이 약하고 공중질서를 무시하고 공공서비스가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왕: 참 그렇네요. 또 한가지 중국인은 역사적으로 종법(宗法)사회에 몸을 담고 있어서 매개인의 개성이 위축되고 하나의 독립적, 성숙된 인격을 형성하기 어려웠다고 봅니다.
송조때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가족종법제도안에서 살아왔는데 한 종족의 인간들로 구성되고 일반적으로 족장은 지위가 있는 사람들중에서 선출되지요. 이 시기 행정관리와 종법이 공동으로 이같은 향토사회를 유지했습니다.
종법이란 정부적 기능이 있어서 같은 종법공동체내트웍안에서 종법성원들에게 보호와 공제하는 이중역활을 했거든요. 이렇게 되니 그 안에 있는 매개인은 개성이 줄어들고 진취심이 상실되기 마련이었어요.
솔직히 말해서 현대 중국사회도 커다란 종법사회를 모방한 그 자체이지요. "문화대혁명"때 전통적인 종법사회를 모방한것은 그 실례가 수없이도 많아요. 자, 보세요, 그때 어린이들에게 “우리는 모주석의 좋은 어린이다”고 교육한것도, “당은 친부모보다 더 가깝다”라든가 이런것들은 다 종법사회의 모방 그 이상 그이하도 아니였습니다.(웃음)
이런 관성적 사유에 물든 중국인은 자신이 생각하고 독립적으로 하기보다는 늘 위에서 어떤 새로운 지시가 있나? 잘못하면 봉변을 당하지 않을까고 위축하거든요.
그러니 진정한 공민으로 되기 어렵고 공민사회와 거리가 멀게 되지요.
12. 공민사회를 지향하여야 한다
김: 좋은 말씀이십니다.
현재 중국이 개혁개방 30여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나 한국 등 인국 동일한자문화권 나라와 비교해보면 일목요연해지는데요. 물질재부성장과 함께 인간의 소질 국민성의 향상이 정비례되지 않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중국사회의 진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며, 구경 어떤 효과적인 방법이 있는지 고견 경청하고 싶습니다.
왕: 현재 하층민중들이 경제문제, 사회곤경에 직면해 있고 고층 위정자도 많은 현실과 정책 등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와 중외의 사정을 총화하여 가장 우수한것만 따와서 사회와 접목시키고자 하지만 어디 그런 쉬운일이 있겠어요? 결국에 왕왕 결점만 따오게 되죠. 지금 개방정책으로 굶주렸던 온 국민이 밥벌이 길에서 저돌하게 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눈앞의 이익만 따지고 장원한 안목으로 보는 사유와 방법이 결핍해요. 그러니 늘 비극이 끊이지 않지요.
김: 아까 선생님께서는 공민의식, 공민사회의 말씀을 하셨는데요.
왕: 내가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었어요. 뭐니뭐니 해도 공민사회가 우리 나라에는 없습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은 공민사회를 거론하고 있지만, 대부분 공민사회단체 NPO조직,자원봉사자조직이나 자선단체등을 꼽고 있어요.
김: 그중에 가장 중요한 공민의식,공민소질이 아닐까요?
왕: 바로 이거예요
광대한 민중이 기본적인 공민소질이 구비되였느냐가 가장 핵심이거든요. 왜냐하면 공민사회는 공민소질을 갖춘 공민이라야 구성될수 있기때문입니다. 공민소질이 없이 아무리 공민사회조직을 결성해봤자 그냥 조그만 활동그룹으로 끝나고 말아요. 왜? 공민사회가 아니니까요. 공민사회의 기초는 공민자각(自觉)이에요.
공민자각이란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의식하는것에 그치는게 아니라 중요한 것은 공공사무에 적극 참여하는 공덕심(公德心)이에요.
김: 맞어요. 100여년전 양계초가 일본에서 망명했을 때 일본인과 비교하여 중국인의 공덕심, 애국심이 가장 결여하다고 한탄을 했잖습니까!
왕: 그렇습니다. 100여년지난 오늘 우리가 또 이런 같은 말을 하는자체가 하나의 비애이지만 현실이 또 그러하니 어쩌겠어요.
그래서 공덕심을 양성해서 사회의 신질서를 세워야 합니다. 매개 중국인민은 합격한 공민으로 되며 규범적으로는 법치사회로 되어야 해요. 그리고 권리적으로는 민주사회를 세워야 하는거구요. 이거야 말로 정상한 사회라 할수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이것보다 더 좋은 길이 있습니까?
공민사회, 법치사회,민주사회만이 중국의 진로라고 생각합니다.
김: 유민사회, 비공민사회에서 공민사회로 나아가는게 중국 사회의 유일한 방향이겠습니다.
대담날자: 2016년5월25일
대담자 소개
왕학태(王学泰)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연구원
중국유민, 유민문화 연구의 권위학자,
1942년 북경에서 태어남
북경사범학원(현수도사범대학) 중국문학부 졸업
주요저작으로는 《유민문화의 중국사회》 《중국인 음식문화간사》《감옥쇄기》
《또 하나의 중국을 발견하다》《중국고전시가요적총담》《”수호”시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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