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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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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실화소설 38선에서 싸우던 나날에(8)
2018년 12월 13일 10시 52분  조회:1132  추천:0  작성자: 김장혁





                    적군 포로들
      먹장구름이 뒤덮인 하늘에서 지꿎은 장마비가 구질구질 쏟아졌다.
      서울을 떠나 판문점을 향해 북으로 달니는 자동차들에는 겨릅대처럼 피골이 상접한 중조 측 포로들이 람루한 옷을 입고 비물에 푹 젖은채 맥없이 꽉 박아 서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 우묵한 눈을 맥없이 내리뜬 포로들, 쏜살같이 내달리며 흔들리는 자동차 우에서 상처가 아파 얼굴을 찡그리며 신음소리를 내는 포로들, 두 다리 없는 포로들, 팔을 잃은 포로들, 참말로 그들의 모양은 처량하고 끔찍스러웠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그 무슨 인성이요, 인도주의요, 인권을 밥 먹듯 외치쳐대는 미군, 그 머나먼 아메리카에서 조선반도에 싱겁게 기여든 미군 측에서는 중국인민지원군 포로들에게 아무런 의료처치대책도 대지 않았다.
        반면에  개성을 떠나 판문점을 향해 남으로 달리는 풍막자동차들에는 피둥피둥 살지고 불깃불깃하게 혈기왕성한 미군과 괴뢰군 측 포로들이 편안히 앉아 가고 있었다. 적측 포로들은 몽땅 회색캬바진 새 옷을 떨쳐입고 희희락락 떠들썩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꽉 차넘쳤고 수심의 그늘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이 둘러멘 배낭에는 자기가 쓰던 시계와 라이터, 만년필과 치솔, 악기 그리고 우리측에서 준 기념품 같은 것을 불룩하게 걷어넣었다. 몇몇 부상당한 포로들 곁에는 흰 위생복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약가방을 둘러메고 청진기를 목에 건 채 딱 붙어앉아 간호하고 있었다.
포로교환구에 건너갈 때 적측의 어떤 포로들은 목에 기타를 걸고 겨드랑이에 불룩한 배낭을 끼고 떨굴가봐 조심스레 느릿느릿 걸어갔다. 적측 포로들 속에는 지팽이를 짚은 포로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부상당한 포로들은 우리측 포로수용소 의료일군들이 제때에 치료했기에 사지를 끊긴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측 포로들은 제때에 처치받지도 못하고 치료받지 못해 두 팔을 잃었거나 심지어 사지를 다 잃은 포로도 있었다. 우리 측 남녀포로들은 옷을 쫄딱 벗기우고 큰거리에 끌려나가 조리돌림을 당했고 돌팔매까지 맞았다. 녀성포로들은 강간당하기까지 않았던가!
미군측에서 우리측에 건네준 18부의 두꺼운 포로사망부에는 우리측 사망된 포로들의 이름이 꽉 박혀 있었다. 미군측에서는 많이 줄여서 8,840명만 죽었다고 했지만 기실 13,814명이나 집중영에서 사망, 살해되였다.
우리측의 눈물겹고 들끓는 장면과는 달리 적측 포로접수구의 분위기는 아주 쌀쌀하였다.
적측 포로들은 우리측 사업일군들과 굳게 악수하고 갈라져 적측 교환소에 가서도 웃으면서 이쪽에 대고 손을 저었다. 포로접수소 곁에 괴뢰군과 미군 병사들이 이쪽을 노려보면서 시꺼먼 총을 부여잡고 서 있었다. 군관들은 허리에 두 손을 찌르고 포로들을 쏘아보았다. 적측 포로들은 그 놈들을 보자 웃음을 거두고 몸을 옹송그리면서 접수소 안으로 들어갔다.
괴뢰군 군관은 허리에 두 손을 지르고 다리를 거만하게 척 벌리고 서서 괴뢰군 포로들을 보고 쌀쌀하게 한마디 내뱉었다.
“자식들, 맥살도 없이 포로되다니? 저쪽에서 고생했지?”
괴뢰군 포로들은 그자에게 눈길도 돌리지 않고 휴게실천막에 들어갔다.
포로들이 우리측 수용소에 있을 때 대우를 잘 받았다는 말을 할가봐 적측에서는 취재하러 온 기자들이 자기들 포로들을 가까이 하지 못하게 제한하였다. 그자들은 전신무장한 적병들을 포치해 휴게실천막 둘레를 줄지어서서 지키게 하였고 휴게실천막으로 들어가는 길과 기자들 사이에 바줄을 매놓고 마구 드나들지 못하게 막았다. 포로들이 휴게실천막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기자들은 포로들에게 접근할 방법이 없었다.
미군 안전군관은 사전에 기자들에게 공산당에 도움이 되는 보도를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어떤 기자들은 돌아오는 포로들에게서 가만히 취재해가지고 미군의 검사를 피해 38선 이남, 남조선(대한민국) 경기도 파주 부근의 문산에 가서 소식을 보도하였다. 어떤 기자들은 일본 도꾜에 날아간 후 보도하였다.
이는 우리측에서 포로교환접수구 련합적십자회 사무실에 기자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게 하면서 취재하게 하는 것과는 완전히 딴 판이였다.
적들이 아무리 소식을 봉쇄하려고 들어도 세계 정의적인 기자들의 보도에 의해 세계인민들은 우리측에서 적측 포로들을 아주 잘 우대했다는 것을 다 알게 되였다. 심지어 적측포로들도 우리측 포로수용소를 “어디 포로수용소 같은가? 꼭 학교나 휴양소 같네.”라고 할 지경이였다.
1952년 10월, 가을의 하늘은 푸르고 높았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선들선들 시원히 불어왔다. 맑은 물에 둘러싸인 조선 북반부 벽동전쟁포로관리소 운동장 주위에는 붉은기가 휘날리고 주석대 정면 량켠에는 중조 두 나라 국기가 높이 휘날렸다.
축구장에서는 흑인포로들과 백인포로들이 섞여 축구시합을 벌리느라고 법석거렸다. 작은 체육장에서는 집단체조하는 포로들, 권투시합과 씨름을 하는 포로들, 구경하면서 하하하 하고 웃음보를 터뜨리는 포로들로 법석 들끓었다. 그들의 얼굴에서는 포로라는 수치감과 고독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황혼 무렵에 포로들은 줄을 지어 포로수용소에 들어갈 때 “동방홍”과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불렀다.
밤이 되자 포로들은 무대에 올라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으며 중조부대 선전대의 공연을 구경하기도 하였다.
12일 동안의 운동대회를 벌린 뒤 우승을 따낸 포로들에게 포로관리소의 수장이 직접 상품과 기념품을 발급하였다.
포로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번 운동대회는 정말 잘 열렸네.” , “이번 운동대회는 력사에 오를만해. 우리는 영원히 잊을 수 없네.” 라고 하였다.
어떤 포로는 “운동대회는 포로라는 걸 다 잊게 했네.”라고 하였다.
한 미군 포로군관은 “지원군은 포로관리에서 전례없는 력사를 창조하였다.”라고 하였다.
운동대회에서 상품을 탄 한 포로는 흥분된 나머지 구호까지 불렀다.
“모주석 만세!”
“중국인민지원군 만세!”
운동대회 기간에 포로들은 저마다 자기 가족에게 편지를 써서 운동대회 성황을 알렸다.
한 포로는 자기 어머니에게 쓴 편지에서 중량급권투경기에서 우승을 한 경과를 상세히 쓰고나서 집에 돌아가면 운동대회에서 탄 금빛빈침 등 정밀한 상품을 가져다주겠다고 하였다.
제네바공약 규정에 따라 우리 중조측에서는 1951년부터 포로들이 자기 가족들에게 편지나 사진을 보내게 하였다. 적지 않은 포로들은 편지에 제집 식구들에게 지원군 포로관리소에서 잘 보내기에 시름놓으라면서 “포로로 있는 것이 전선에서 싸우기보다 더 안전하다.”고 하였다.
한 포로의 안해는 남편의 편지를 받고 “줄곧 매우 건강하다고 하니 지나간 두해에 비해 마음이 놓입니다.”라고 하였다.
3년 사이에 적측 포로들은 도합 2만 9천여통의 편지를 써서 가족들에게 보냈다. 편지 거개가 포로관리소가 좋다는 말을 써넣었다. 하여 우리측 포로정책에 대한 그 어떤 모욕중상도 믿는 사람이 없게 되였다.
성탄절이 돌아왔다. 바깥날씨는 실로 박달나무가 얼어 터질 지경이였다.
그러나 적측 포로들은 봄날처럼 훈훈한 집 안에서 성탄절을 즐거이 쇠였다. 회장에는 성탄나무, 은색의 종, 빨간 초가 갖춰져 있었다. 벽에는 숱한 표어가 붙어 있고 책상 우에는 국외에서 산 권연과 사타이 수두룩이 올랐다. 실로 집 안에는 서양민족풍속과 종교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미국과 영국적 포로들은 본토에서 집식구들과 함께 성탄절을 쇠는 감을 느끼게 되였다.
만회에서 한 금발머리 포로는 제2차세계대전 때 포로돼 독일파쑈집중영에서 갖은 시달림을 받던 정경을 소개하고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독일 사람들은 천주교와 기독교를 믿지만 우리한테 성탄절을 쇠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갖은 혹형을 다해 우릴 못살게 굴었습니다. 중국 인민들은 종교를 믿지 않지만 우리한테 이렇게 성대한 성탄만회를 차려주었습니다.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중국은 세계에서 제일 문명한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온몸이 쇠기둥같이 새까만 포로가 일어나 구호를 불렀다.
“중국인민지원군 만세!”
“모주석 만세!”
장내에서는 우뢰 같은 구호소리가 울려퍼졌고 박수소리, 웃음소리, 찬탄소리 끝없었다. 서양음악에 맞춰 포로들은 춤추고 노래하였다.
에이피통신사의 한 기자가 다가와 묻자 좋은 대우를 받은 영국의 한 포로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린 중조측 포로수용소에서 뜨끈뜨끈한 구들 우에 침대에서 새 이불을 덮고 잤고 잘 먹으면서 충분한 휴양을 하고 왔습니다. 우리 든 수용소에는 철조망도 없고 때리고 욕하는 일도 보고 죽자고 해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전선에도 약품이 딸렸지만 우리한테 먼저 썼습니다. 내 두 다리는 여섯달이나 움직이지 못했는데 중국 사람들이 치료해주었습니다. 보시오.”
그 포로는 성큼성큼 걸어보였다. 그러고나서 멨던 불룩한 배낭을 벗어 풀어헤치고 여러가지 약을 꺼내보였다.
“내 다리병이 도질가봐 약까지 넣어보냈수다. 중구사람은 제일이요.”
그 포로는 엄지손가락을 흔들어보였다.
미군 군의도 미국과 영국 포로들의 신체를 검사해보고 모두 매우 건강한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42살에 나는 미군 상병자포로 상위 크린은 튼튼한 신체를 군의한테 검사맞히고 옷을 주섬주섬 주어 입으면서 기자에게 말하였다.
“나는 대전시 부근에서 남하하는 조선인민군 전사들에게 포로됐습니다. 그때 조선인민군 전사들은 비행기 폭격을 무릅쓰고 6일 동안이나 간고한 행군을 해서야 전선을 떠나 우리를 후방에 호송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들과 한집 식구들처럼 이밥에 물고기반찬을 해서 하루에 세끼씩 먹었습니다. 비행기 폭격이 심한 날에는 세끼를 먹을 음식을 두때나 한때에 다 먹었습니다. 그런데 배가 얼마만큼 크면 그 많은 걸 다 먹겠습니까? 실로 배를 두드리면서 먹을 지경이였죠.”
그 포로는 분개한 어조로 뒤말을 이었다.
“그때 젤 괘씸한 건 미군 날강도드이 날아와 기관총소사하고 폭격을 해대는 것이였습니다.”
참말로 이 모든 것은 입으로 “인도주의”와 “인성론”을 부르짖는 미제와 리승만괴뢰군이 우리 포로들을 갖은 수단으로 구타하고 릉욕하고 무참히 살해한 죄행과는 얼마나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가!
 
                  포로쟁탈전
판문점에서 33일 동안 전쟁포로를 서로 송환하였지만 아직도 중조측의 지원군과 조선인민군 포로 각각 15,000명과 8,000명, 적측의 포로 351명이 송환되지 못하고 남아 있었다.
9월 10일부터 정전협정 해당 규정에 다라 중립국 포로송환위원회의 지도아래 인도군대에서 량측 포로를 지켰다.
당시 중립국 포로송환위원회는 정전협정에 따라 인도, 체스꼬슬로벤스꼬, 뽈스까, 스위스, 스웨리예 등 5개 국으로 이뤄졌다. 인도 대표이며 인도 륙군중장 티마이야 장군이 주석으로 임명되였다.
쌍방에서는 해석대표단을 파견하여 자기측 포로들에게 90일 동안 해석사업을 하여야 했다. 이는 조선전쟁의 특정된 조건하에서 전쟁포로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세계 전쟁력사에서 전례없는 복잡하고도 특수한 투쟁을 벌리는 것이였다.
우리 측대표단에서는 지원군에서 능력과 경험이 풍부한 정치사업일군돌로 대표단 성원을 구성한 한편 지원군 포로 지도자 왕방, 위림, 손진관 등 23명 골간들이 잠시 개성에 남아 포로해석사업을 협조하도록 결정하였다.
미군측에서 우리측 포로들을 인도부대에 넘겨줄 때 우리측 해석대표단에서는 관찰대표를 파견해 철조망 밖에서 인도부대의 접수사업을 관찰하였다.
미군측에서 이른바 “되돌아가는 것을 거절하였다.”는 우리측 포로들은 모두 얼굴이 창백하고 피골이 상접했으며 “PW(전쟁포로) 글자가 박힌 헌 바지를 입고 미군식군용화를 신고 등에는 낡아빠진 담요를 말아메고 맥없이 걷고 있었다. 그들의 새 흰 적삼에는 국민당휘장이 새겨져 있었다. 그 적삼은 얼마전 대만 국민당특무 두목 방치 일당이 그들에게 준 “례물”이였는데 인도부대에 넘겨주게 되자 억지로 입힌 것이였다. 집중영에 돌아간 후 인도부대 병사들이 포로들의 적삼을 벗기고 검사할 때 그들의 가슴과 잔등에 국민당휘장도안을 새긴 것이 드러났다.
우리측 관찰일군들이 동정어린 눈길로 포로들을 여겨보면서 지나가자 포로들은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집중영에 들어가면서도 몸을 돌려 이태 남짓이 보지도 못한 지원군일군을 돌아다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이쪽을 넘어오고 싶어하면서도 겁나 넘어오지 못하는 그런 초조와 공포의 그늘이 어려 있었다.
첫날에 인도부대는 인민군포로 1,000명을 넘겨받았다.
“우릴 살려주십시오!’
갑자기 9명의 조선인민군 포로가 인도부대에서 지키는 판문점포로송환소 쪽으로 고함치며 달려왔다.
그들은 손에 쥐였던 태극기를 홱 뿌리고 인도 병사들 속에 달려들어왔다. 그리하여 그들은 인차 인도 병사들에게 호송돼 우리측 포로송환접수소로 돌아왔다.
기자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놀라운 장면을 찰칵찰칵 촬영했다.
적측에서는 인도부대가 지키는 포로들 속에 포로로 가장한 수많은 특무들을 잠복시켜 미군총부 특무기관인 CIA 쥐휘 밑에 우리측 포로들을 엄밀히 통제하고 있었다.
이밖에 거제도 제64야전병원을 옮겨왔다. 실제상 특무지휘중심을 옮겨다 직접 서울특무총부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특무들은 한 집중영의 500여명 포로들을 보고 진짜이름을 대면 공산당이기에 죽이겠다고 위협하면서 누구나 진짜명단카드를 인도부대에 넘겨주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우리측 관찰대표가 집중영에 오기만 하면 포로들더러 까만 색안경을 끼게 하여 특무들이 정체를 감추게 하였다.
특무들이 아무리 포로들을 위협했지만 9월 20일과 27일에 도합 67명의 지원군 포로들이 적들의 통제를 벗어나 인도부대의 호송하에 우리측으로 우르르 넘어왔다. 이는 판문점을 들썽케 했다.
포로들은 판문점에 이르러 차에서 내리자 대륙에 못돌아간다는 국민당과 장개석이 직접 서명한 문건을 꺼내 내동댕이치는가 하면 국민당휘장도안을 새긴 런닝을 벗어던지고 가슴팍에 새긴 국민당휘장도안을 가리키면서 국민당 특무들을 욕하였다.
“이게 바로 우리 포로를 붙잡아둔 미군과 장개석의 죄증입니다.”
우리측의 한 포로는 자동차 안에서 얻어맞아 중상을 입었다. 우리측 접수일군들이 포로를 담가에 들어내리우자 의료일군들이 인차 그 담가를 받아들고 의료실로 달려들어가 구급하였다.
여러 나라 기자들은 또 그 장면을 촬영했다.
적측 특무들의 마수에서 벗어난 우리측 포로들은 인도부대 부사령 신그 준장, 려단장 파는테르 준장을 비롯한 인도부대 장병들과 적아쌍방 기자들 앞에서 집중영 안에서 우리측 포로들을 못살게 굴고 해석사업을 파괴한 적들의 죄행을 공소하였다.
“해석사업을 할 날이 다가오자 특무들은 우리한테 ‘만약 중조 해석대표가 천막 안에 들어서기만 하면 모여들어 족쳐라. 필요하면 죽여치워라!’고 충동질하였습니다.’
이어 포로 왕모가 일어나 말했다.
“나는 제주도 제3포로집중영에서 물을 긷고 불을 때는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난  포로집중영에서 달아나 인도부대를 찾아와 보호받았습니다. 그러자 안달아난 특무들은 인도부대 한 소좌와 중위를 갑자기 붙잡아 인질로 두고 나를 내놓으라고 핍박하였습니다. 이걸 보면 포로영에 얼마나 많은 특무들이 미친듯이 활동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뒤이어 이렇게 폭로하였다.
“어떤 포로집중영에서는 특무들이 비밀전보기를 설치하고 상관과 련계를 달고 있습니다. 특무들은 몽둥이와 비수를 이불 속에 감춰가지고 포로집중영에 들어왔습니다. 어떤 자들은 가죽신바닥에 철편을 넣어가지고 들어와 콩크리트바닥에 갈아서 비수를 만들어 휴대했습니다.”
그러자 인도부대 부사령 신그 준장이 포로들에게 물었다.
“누가 그런 철편을 꺼내 보일만한가?”
한 포로가 자기 신은 미군 가죽신을 벗어 칼로 신 밑바닥을 째더니 철편 하나를 꺼내 보였다.
“정부소대장 이상 포로는 이런 철편을 꺼내 비수로 만들어 쓸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신그 준장은 철편을 쥐고 찬찬히 뜯어보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한 포로는 품 속에서 적 특무들이 준 “반해석사업질문”이란 소책자를 꺼내 흔들면서 적발하였다.
“미군 당국에서는 포로들더러 이 소책자에 찍힌 질문을 다 외워라고 강요했습니다. 우리측 해석대표들이 해석하기 시작하면 련속 외워둔대로 질문을 들이대서 해석사업을 파괴하라고 했습니다. 만약 질문이 깜빡 잊어졌을 때에는 ‘대만에 가겠다!’, ‘대만에 가겠다!’고 떠들어라고 시켰습니다. 만약 누가 떠들지 않으면 천막기둥에 목을 매 죽이겠다고 을러멨습니다.”
우리 측 포로들은 그 자리에서 포로집중영에 숨은 국민당 특무들의 이름과 특무조직을 까밝혔다.
우리측 포로 조모는 일어나서 적들에게 잘리워 절반 밖에 남지 않은 귀를 가리키고 적삼을 걷어올려 12센치메터나 째진 가슴의 상처자리를 보이면서 공소했다.
“거제도 전쟁포로집중영에 있을 때 하루는 ‘정치훈련강의’를 하는 미군 교도관이 미국의 민주를 버쩍 고아댔습니다. 내가 ‘민주를 실시한다는게 왜 그 많은 중국 포로들을 살해했는가?’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미군 교도관은 말문이 막혀 나를 쏘아보지 않겠습니까?”
그날 밤, 국민당 교도관이 그를 끌고 나가 한바탕 치고 박고 했다.
“이튿날엔 총살한다고 했습니다. 나를 포로집중영 밖에 세워놓고 한 미군 병사  보고 총을 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미군 병사가 총을 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한 국민당 특무가 흉악한 몰골을 짓더니 비수를 뽑아들고 덮쳐들어 내 오른쪽 귀를 절반이나 베갔습니다. 그 놈은 베간 내 귀를 물통에 처넣고 포로들 보고 그 물을 마시라고 강박했습니다. 내 귀에서는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습니다. 아픈 건 더 말데 있습니까. 그날 밤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는 국민당 특무놈들은 천막 속에 뛰여들어 수건으로 내 입을 틀어막고 비수로 내 배를 쨌습니다. 보십시오, 이렇게 쭉 길게 째지 않았습니까!
내 너무 아파 마구 뒹구는데 다른 국민당 특무가 들어와 ‘죽이지 말고 전형으로 둬 다른 놈들의 버릇 가르치면 더 좋아.’ 하고 을러멨습니다. 특무들은 실로 살인마귀들입니다.”
10월 2일, 지원군 포로 장자룡은 집중영천막 안에서 “난 조국으로 돌아갈테야!” 하고 고함치면서 대청통곡쳤다.
“개자식, 죽어봐라!”
살안마귀 특무 두 놈이 욱 달려들어 장자룡을 엎어놓고 걷어차고 짓밟아놓았다. 그 놈들은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 장자룡의 두 팔을 장막기둥에 뒤로 비끌어매놓고 온밤 치고 박았다. 지어 나무몽둥이로 머리고 가슴이고 다리고 마구 조겨댔다. 장자룡은 성한데 없이 피가 랑자하였다. 피비린내가 집중영천막 안에 물씬 풍겼다.
포로들은 온 밤 너무 아파 신음소리를 내는 장자룡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어 모두 머리를 두 다라 사이에 파묻었다.
“개자식, 중공 땅에 돌아갈텐가? 엉?!”
“죽어도 돌아갈테야! 어디 죽여봐라!
이튿날 날이 밝자 또 다른 특무들이 서슬푸른 비수를 뽑아들고 장자룡의 피에 젖은 옷을 쫄딱 벗겼다. 야수 같은 특무들은 이발을 사려물고 비수로 장자룡의 가슴팍에서 살을 썩 베냈다.
장자룡은 비명을 지르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놈, 오늘 회를 쳐놓겠다!”
특무놈들은 장자룡의 팔과 다리, 가슴팍에서 살점을 한점한점 저며냈다. 장자룡은 비명을 치다못해 까무러쳤다. 뒤이어 특무놈들은 장자룡의 귀를 썩뚝 자르고 손가락을 잘라냈다. 심지어 그의 머리 가죽을 칼로 쭉 오려 턱까지 쭉 벗겨 베냈다.
포로들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어 머리를 숙였다. 특무들은 장자룡의 머리가죽을 쳐들어 흔들면서 그걸 보라고 몽둥이로 포로들을 툭툭 때렸다.
살인마귀들은 비수로 장자룡의 배를 가르고 심장을 떼내 비수에 꿰서 뻘건 화로불에 바질바질 구웠다. 뒤이어 그걸 날창에 꿰가지고 포로들한테로 한걸음한걸음 다가왔다.
“개자식들, 봤지? 중공 땅에 돌아가려는 자는 이런 끝장이야!”
“이 자식들, 이걸 먹어!”
특무들은 포로들의 두귀와 코를 붙잡고 장자룡의 심장을 그들의 입에 마구 쑤셔넣더니 씹어 먹으라고 날창으로 위협하였다.
집중영장막 바깥에서 이 처첨한 광경을 본 중립국일군들은 깜짝 놀라 어리둥절해졌다.
실로 하늘 아래 사람으로서 어찌 이런 끔찍한 짓을 다 할 수 있단 말인가!
극악무도한 특무놈들은 뼈 밖에 남지 않은 장자룡의 시체를 벌판에 끌고 가 휘발유를 치고 포로들의 고무신 열컬레를 한데 태웠다. 자기들의 죄장을 덮어감추려는 것이였다.
그러나 고무 타는 냄새와 함께 사람의 살이 타는 노릿내가 네시간 동안이나 풍겼다.
적들은 나중에 재가루가 된 뼈를 파묻으면 고리를 잡힐가봐 땅에 묻지 않고 강물에 가져다 던졌다.
판문점을 들썽케 한 “장자룡학살사건”이 발생한 뒤 지원군 포로 11명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꼬 특무들의 마수에서 벗어나 인도부대 송환접수소에 달려왔다. 그들은 장자룡학살사건경과를 온천하에 폭로하였다.
우리측의 요구에 따라 인도부대에서는 27일이나 지난 뒤에야 조사하였다. 그들은 학살사건이 발생한 28호 포로집중영의 포로들을 몽땅 포로집중영 앞의 마당에 나와 모여앉게 하였다.
이때 조국 땅에 돌아가려는 16명 포로가 특무들이 위협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포로들 앞에 걸어나가 장개석 대만 특무들이 장자룡을 죽인 죄상을 폭로하면서 인증을 섰다. 살인마귀들은 생떼질을 썼지만 인도부대 병사들에게 잡혀 끌려갔다. 인증을 선 포로를 포함해 27명 지원군 포로들이 인도부대 보호를 받아 우리측 송환접수소에 돌아왔다.
미제는 저들의 모략책동에 “방애”하는 인도부대를 어떻게 해서나 2천명으로 줄이려고 미쳐날뛰였다. 그러나 인도부대에서는 미제의 압력을 물리치고 5천여명 장병들을 중립구에 파견하였다.
중립국포로송환위원회에서는 쌍방에서 제때에 포로해석사업을 하도록 하려고 미군측에 천막 32개, 큰마당 2개를 짓고 장막들에 통하는 길을 닦으라고 하였다. 그러자 미군측에서는 해석사업을 지연시켜 90일만 차면 우리측 포로들을 되끌고 갈 목적으로 30일 동안 걸려야 천막을 짓고 길을 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중조측에서는 미제의 비렬한 음모를 간파하고 그 공사를 주동적으로 맡아 나흘에 천막을 다 짓고 길을 다 뺐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20일 동안이나 중단된 해석사업은 10월 15일에야 다시 시작되였다.
이날 티마이야장군은 원 계획대로 제28호, 제31호 포로영의 1천여명 지원군 포로들에게 해석사업을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해석사업을 할 때 무력이나 위협수단을 쓰지 못합니다.”
그런데 각 집중영에서 온 포로“대표(특무)”ㄷ르은 박에 나와 해석을 듣는 것을 거절해나섰다. 그 놈들은 해석대표단들더러 천막 안에 들어와 해석하라고 해놓고 흉측한 짓을 하려고 시도하였다.
“안돼!”
티마이야 장군은 책상을 탕 치면서 당장에서 거절하였다.
“포로들은 반드시 지정된 장소에 와서 해석을 들어야 합니다. 돌아가서 포로들더러 나오 해석을 들으라고 하시오. 시그럽게 굴지 마십시오.”
여러 나라 기자들, 중립국포로송환위원회 대표들과 중조측 해석대표들이 장막에 가서 기다렸다. 그러나 오전 10시가 썩 지나도 포로들은 특무들의 위협을 받고 나오지 못하였다.  
티마이야 장군은 기자들을 둘러보면서 “만약 12시까지 나오지 않으면 필요한 조치를 대겠습니다.”라고 하였다.
12시 돼도 포로들의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도부대에서는 아무런 조치도 대지 않고 내심하게 기다렸다.
오후 4시 20분까지 애타게 기다려서야 31호집중영천막에서 500여명 지원군 포로들이 나와 32개 천막 안에 들어갔다.
천막 문어귀마다 미국 대표와 미군 군복을 입은 국민당특무들이 서서 천막 안에 들어가는 포로들을 가로보면서 위협하였다.
우리측 해석대표들은 포로들에게 인사말을 하고나서 1952년 4월 6일, 중조 두 나라 발언인이 발표한 포로문제성명과 포로들에게 알리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동지와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 팽덕회동지의 글을 읽어주었다.
“우리는 전체 포로들이 조국의 품에 돌아오는 것을 열렬히 환영할 것입니다.’
“개나발이다! 가면 투쟁하고 총살한다!”
포로들 속에 혼입한 특무놈들이 책상을 치면서 고함치자 특무들의 위협받은 포로들도 떠들어댔다.
“대만으로 돌아가겠다!”
포로들은 소학생들이 암기내듯 그 소리만 쳤다.
그리하여 해석사업을 계속 할 수 없게 됐다.
이때 미국측 관찰대표로 가장하고 문어귀에 서 있던 국민당특무가 소리쳤다.
“내 길안내를 해주겠습니다. 대만으로 가겠으면 이 문으로 나가시오.”
포로들은 특무들의 위협받고 핍박에 못이겨 그 문으로 나갔다.
첫날에 해석사업을 거쳐 겨우 14명 지원군 포로들이 우리측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인도부대에서는 포로들에게 오전 11시 전으로 지정된 곳에 나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90여명 국민당특무들이 천막 밖에다 전호를 파놓고 비수와 날창까지 들고 죽 늘어서서 지키면서 인도부대가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후 특무들의 창궐한 위협과 파괴를 받아 남영의 우리측 포로해석사업은 자꾸 중단됐다. 나중에는 아예 해나갈 수 없었다.
12월 20일 우리측과 중립국인 뽈스까, 체스꼬슬로벤스꼬의 노력하에 33일 동안이나 중단되였던 해석사업이 다시 시작되였다. 이틀간에 480명 포로에게 해석해 겨우 56명 포로들이 우리측에 송환되였다.
중조측 정전대표단 정치부 선전과 영사대에서는 륜번으로 북영의 적측포로들에게 영화를 상영하였다.
그때 중립국 포로송환위원회의 규정에 따라 정치적 색채가 짙지 않은 영화를 뽑아서 티마이야 장군의 심사를 받고야 돌릴 수 있었다.
중국측의 기록영화 “8.1운동회”는 통과되였다. 그 다음날 리해식 등은 조선 새 영화 “정찰병”을 티마이야 장군에게 심사받으러 가야 하였다.
그날 밤, 리해식은 영사대를 데리고 찌프를 타고 판문점 인도부대 군영에 달려갔다.
문 어귀에 있던 인도부대 장병들이 군례를 올렸다. 뒤이어 그들은 리해식 등이 강당에 들어가 영사기랑 장치하는 것을 거들어주었다.
강당에는 2,3백명 인도 장병이 앉아 있었다.
한참 후 훤칠하고 뚱뚱한 티마이야 장군이 몇몇 군관들의 호위하에 강당 뒤문으로 들어와 탄자를 깐 높고 큰 의자 앞으로 걸어왔다.
이때 직일관이 뭐라고 소리치자 앉아 있던 인도 장병들이 몽땅 일어섰다. 리해식 등도 덩달아 일어섰다. 티마이야 장군이 의자에 앉아 모두들 직일관의 소리치자 몽땅 앉았다.
티마이야 장군의 참모장이 리해식과 함께 긴 걸상에 앉았다.
조선 새 영화 “정찰병”은 한어로 번역하지 않은 영화였다. 그리하여 리해식이 영화를 보다가 한어로 번역해주면 영어번역원이 티마이야 장군한테 영어로 번역해주었다. 어떤 때 리해식이 좀 번역하지 않으면 참모장은 리해식 보고 빨리 번역하라고 무릎을 툭툭 치면서 재촉하였다.
영화가 끝났다. 인도 장병들은 강당이 떠나가게 박수를 쳤다. 리해식이 여겨보니 티마이야 장군도 손벽을 둬번 치는 것이였다. 심사에 통과된 셈이였다.
리해식 등이 영사기를 거둬 상자 안에 넣을 때 몇몇 인도 병사들이 우리 영어번역원과 손삿대질하면서 떠들썩하였다.
찌프에 앉아 개성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리해식은 영어번역원에게 물었다.
“금방 인도 병사들이 뭐라고 그리 떠들썩했소?”
영어번역원은 안경을 닦아 끼더니 “오- 영화를 잘 찍었다더구만. 조선인민군 정찰병들은 아주 용감한데 미군은 좀 얻어맞으면 손 드는 멍청이들이라더구만.”
“하하하.”
찌프차는 그들의 웃음소리를 싣고 밤정적을 헤가르면서 쏜살같이 내달렸다.
미군 측에서는 1개월 7일이 지난 뒤에야 북영의 자기측 포로들에게 해석사업을 진행하였다.
해석상업을 방애하고 파괴하는 미군측과는 달리 우리 중조측에서는 북영에다 난방설비와 소음제거설비까지 장치한 5개 천막을 쳐놓았다.
미군측 해석대표는 숱한 기자들과 기술전문가들을 데리고 차를 타고 북영에 와서 내렸다.
기술전문가들은 천막 밖에서 발전기 발동을 건다 장막 안에 록음기를 가설한다 하면서 맴돌아쳤다.
이때 건장한 괴뢰군 포로들이 깨끗한 새 옷을 입고 이불짐과 일용품을 가득 넣은 멜가방을 메고 장막 안에 들어와 조용히 앉아 기다렸다.
괴뢰군 군관은 손목에 찼던 손목시계를 벗어 미국제만년필과 함께 책상 우에 놓고 미국고급권연을 라이터 불에 붙여 꼬나물었다.
이때 책상 우에 놓은 록음기에서 민요 “아리랑”곡이 은은히 울려나왔다. 뒤이어 한 녀성의 울음섞인 목소리가 울렸다.
“포로오라버님들, 자유대한의 품에 안겨요. 우린 꼭 뜨겁게 포옹할 거예요.”
미군측 해석대표는 녀성의 울음소리로 포로들의 마음을 흔들려고 들었다. 그러나 포로들은 그 녀성과 아무런 관계없는지라 들었는둥만둥해하였다.
뒤이어 괴뢰군 국방부장의 유혹에 찬 록음연설이 울렸다.
“형제들, 대한민국으로 돌아오면 후한 로임을 내줄 것이며 제때에 승급시켜줄 것입니다. 절대로 ‘잘못’을 따지지 않고 그대들의 뜻에 맞게 일자리를 알선해줄 것입니다.”
뒤이어 송환돼간 포로들의 육성을 풀어놓았다.
모든 포로들은 조용히 귀담아듣고 있었다. 심지어 한 포로는 필기장에 뭔가 적고 있었다. 그것을 본 적측 해석대표는 흡족해하던 나머지 필기하는 그 포로에게 다가가 사진 몇장 꺼내보였다.
“이 포로는 한국에 간 뒤 온집식구와 단란히 모여 매우 잘 지내고 있어.”
그때 사진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곁의 한 포로가 피씩 웃더니 일어나 말했다.
“그 포로는 우리 잘 아는 백모인데요. 그는 장가도 못 가 안해도 없는데 웬 네살짜리 앤가요?”
괴뢰군관은 난처해 변명하다가 화제를 바삐 돌려버렸다.
다른 천막에서 처음으로 긴 양태를 내리드리운 한 괴뢰군 녀성포로가 해석을 다 듣고나서 이렇게 말했다.
“전 진작 갈 길을 골라놨어요. 이건 저 혼자 고른 거죠.”
“너거 부모 돌아오길 기다려. 너건 부모도 생각 안해?’
녀성포로는 핼끔 쳐다보면서 아츠런 소리를 질렀다.
“저의 부모는 미제 날강도 폭탄에 맞아 사망했어요!”
녀성포로는 슬퍼서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머금고 입술을 깨물었다.
괴뢰군 군관은 지꿎게 씨벌였다.
“너건 시집가서 편안히 안 살련?”
“저도 한국에 돌아가 편안히 살려 해요.”
괴뢰군 군관은 헤벌쭉 웃으면서 한발작 다가섰다.
그때 녀성포로가 뒷말을 이었다.
“미제 양키놈들이 한국에서 물러가야 돌아가겠어요. 리승만 괴뢰정권이 신물나게 보기도 싫어요. 미군 놈들이 당신들 양애비라도 되는가요? 왜 그 놈들 수하에서 놀아나는가요?”
코 떼운 괴뢰군 군관의 얼굴에는 대뜸 환멸의 빛이 어렸다.
어떤 포로는 일어나 군관을 손삿대질하며 소리쳤다.
“당신이나 양키놈들 구속받지 말고 북반부에 넘어오라고!”
괴뢰군 군관은 성이 꼭두까지 치밀어올라 낯이 수수떡처럼 지지벌개서 꽥 소리쳤다.
“개자식, 네깢 놈이 돌아오건말건 내캉 무슨 상관이여?”
그러고는 장막에서 훌 나가버렸다.
천막에서는 웃음보가 터져버렸다.
첫날 적측 해석대표들이 끙끙 갑자르면서 온종일 해석했지만 돌아가려는 포로는 하나도 없었다.
리승만괴뢰군 귀국작전 총책임자 백영준 준장은 일찍 “대한민국 포로 15%는 돌아오게 해석할 수 있다.”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결과를 보고는 “몇이라도 건너온다면 하늘이 구해준 거지.” 하고 말하였다.
미군측에서는 해석을 해보았자 헛수고라는 것을 알고 포로들이 해석을 거절한다는 리유로 나머지 23명 포로들에게 해석하지도 않았다.
해석사업이 끝나는 마지막 날인 1953년 12월 23일에 미군측에서는 북영 부근의 논밭에서 확성기에 록음을 풀어놓고 다시는 저희들 병사들을 보로 찾아가지도 않았다.
1954년 1월 21일, 미군측에서는 중조측 그리고 티마이야 장군을 비롯한 중립국 포로송환위원회의 견결한 반대도 무시하고 남영의 우리측 포로를 “백성의 신분”으로 고쳐 “석방”하였다.
한 미군 군관이 특무들을 만나 뭐라고 쑥덕거리더니 포로들을 몽땅 대만에 보낸다고 선포하였다. 누가 중국 대륙에 가겠다고 하기만 하면 반주검이 되게 구타한 다음에 배 우에 끌고 가서 마대에 넣어 바다에 처넣었다. 그것은 판문점 부근에서 죽이면 꼬리를 잡히기에 바다에 가서 죽였던 것이다.
특무들은 포로들 보고 으르릉거리며 으름장을 놓았다.
“23일이 지나면 인도부대는 네놈들을 돌려보낼 권리를 행사하지 못해. 누가 달아나면 우리 총이 용서하지 않어!”
특무들은 포로들을 대여섯명씩 한데 팔과 다리를 묶어 달아나지 못하게 하고는 이른바 “석방”하였다.
뒤이어 열서너대 미군 직승비행기(헬기)가 분주히 날아왔다갔다하면서 중조측의 포로 21,000여명을 몽땅 실어 남조선(한국) 포항, 군산 등지와 대만에 끌어다가 괴뢰군과 장개석비도군에 각기 편입시켰다.
14,000여명 지원군 포로를 인천항에 압송하여 배에 오를 때 미군은 중립국부대가 부두에 들어가 임무를 집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지원군 포로를 실은 첫 큰배가 황망히 인천항구를 떠나다가 그만 미군의 군함을 부딪쳐놓아 28명의 미군 병사가 물에 빠져 물귀신이 대버렸다.
지원군 포로를 실은 첫 큰 배가 대만 기륭항에 이르렀을 때였다. 백여명이나 되는 포로병 “지도자(특무)”들이 포로대오를 떠나 줄을 서서 환영하러 나온 국민당 장령들에게 거수경례하고 굳게 악수하였다.
그것을 보고서야 영국 기자는 포로들 속에 숱한 국민당 특무들이 섞여 있었다는 것을 믿게 되였다.
특무들이 아무리 엄하게 통제했지만 중국측 포로들은 대여섯이 팔을 한데 묶이운 채 인도부대 병사들 속에 끼여 우리 측으로 넘어왔다.
적측으로 넘어가지 않은 북영의 적측 포로 347명(그중 미국, 영국 등 국적포로 22명)은 인도부대가 영지를 떠난 뒤 1월 23일에 각기 중조 두 나라 적십자회에 넘겨주었다.
그날 그들은 북영을 떠날 때 에이피통신사, 국제신문사, 프랑스신문사와 인도통신사 기자들의 취재를 받게 되였다.
한 영국 기자는 한 영국포로와 한시간 남짓이 이야기를 나눈 후 “당신이 만약 돌아가고 싶으면 우리와 함께 갑시다. 밖에 차가 있는데 빨리 갑시다.”라고 권고하였다.
그 포로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감사합니다. 중국측에서도 저를 가라고 자꾸 동원했습니다. 하지만 전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이젠 우리가 자원해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믿을만합니까?”
그러자 영국 기자는 머리를 끄덕였다.
뒤이어 전체 포로들은 사전에 준비해둔, 귀국하지 않겠다는 공동성병을 엄숙하게 읽었다.
그날 오후, 적측 포로들이 차에 앉아 개성시에 이르자 개성시 인민들의 열정적인 연도환영을 받았다.
그번 포로쟁탈전에서 특무들의 통제를 벗어나 인도부대의 보호를 받으면서 우리측으로 넘어온 중조측 포로는 502명이나 되며 해석을 받고 넘어온 포로는 136명이나 되였다. 이 기간에 적측 포로는 4명이 넘아갔는데 그중에는 미군 포로 1명이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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