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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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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27)
2015년 12월 25일 15시 49분  조회:1837  추천:1  작성자: 김장혁





            12. 사꾸라관의 신음소리
       가을바람이 살벌한 명천과 우시장 땅에 써늘하게 불어왔다.
      어느 하루 오후 스즈끼는 수하들이 없는 틈을 타서 끼무라를 불러놓고 넌지시 힌트했다.
      “반일 불온분자 소탕전은 초보적으로 전과를 거뒀네. 난 이제 업동 경찰총국에 끼무라 대대장과 자위대 한길수 대대장의 공훈을 보고하겠네. 상부에서 상을 내리게 말이네. 만족하진 말게. 한 달에 불온분자 십여 명씩은 체포해 목을 매달아야 하네.”
      “십여 명씩이나?”
      끼무라는 눈깔이 뒤집힐 정도로 뚱그래졌다. 그러나 스즈끼의 안경알 밑의 살기 넘치는 눈길과 마주치자 인차 혀를 날름 감췄다가 제꺽 “하이!” 하고 대답했다.
      스즈끼는 독사와 같이 혀를 날름거렸다.
“이젠 닭을 잡아 원숭이를 훈계할게 아니라 원숭이를 잡아 닭을 훈계하란 말이야.”
“하이!”
끼무라는 벌떡 일어나 군례를 척 붙이며 고함쳤다.
끼무라는 차렷 하고 군례를 올리었다.
“스즈끼 국장님의 은공을 한평생 각골난망이올시다.”
스즈끼도 일어나 군례를 하며 희죽이 웃었다. 끼무라는 한숨을 후- 길게 내쉬었다.
스즈끼는 끼무라 옆에 다가와 어깨까지 툭툭 다독여주면서 거만하게 이상부하에게 하대 로 지껄였다.
“처음에 왔을 때 모르고 떽떽거렸는데 양해하게나. 이젠 허리를 꿋꿋이 펴고 일하게나.”
끼무라는 머리를 조아렸다.
“하이!”
스즈끼는 이번에는 춰주면서 구슬렸다.
“후에 나는 끼무라 국장이 야마모도소장과 한길수대대장이랑 거느리고 포수대 출신 항일유격대와 용감히 싸워 엄상호를 교살하고 김성칠 괴수를 부상 입히고 엄은희를 교살한 전과를 뒤늦게야 알게 되였네. 미안해. 당신은 명천과 우시장 일대 항일유격대를 숙청해버렸고 안정을 수호하는데 중대한 공훈을 세웠네. 충신을 몰라봤네.”
그만하면 끼무라의 옹이 진 속을 후련하게 풀어준 것 같아 스즈끼는 화제를 돌렸다.
“유격대를 소탕하느라고 위압을 많이 받았겠네. 업동을 떠나 객처에 오니 종종 위안부 아가씨들이 필요하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네.”
끼무라는 제꺽 눈치챘다.
스즈끼는 끼무라를 돌아보면서 슬쩍 말을 돌려 욕망으로 부글부글 끓어 번지는 속내를 덮어 감추려 했다.
“명천에는 경치 좋은 곳이 없어? 시원히 바람이라도 쏘였으면 좋겠는데.”
마른기침을 하면서 힐끔 곁눈질하는 스즈끼를 보고 끼무라는 제꺽 눈치 챘다.
(영웅도 미인관을 넘기 어려운 법인걸. 네 놈이라고 칠정육욕이 없겠느냐?)
“사꾸라관에 가서 위안부 아가씨들을 끼고 한잔 나눕시다. 명천에 이름난 기운봉, 치마봉(저자 주: 기운봉과 치마봉은 지금의 칠보산의 두 개 봉우리임)이 있지만 우리 후지산엔 짝도 되지 않습니다. 지금 가을 산에는 항일유격대 잔당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진작 술잔이라도 나누면서 스즈끼 국장님의 피로를 풀어드렸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또 주색에 빠질 것 같아 주춤, 주춤 했습니다.”
끼무라는 스즈끼의 눈치를 힐끔힐끔 곁눈질하면서 중얼거렸다.
스즈끼는 픽 냉소했다.
“그때는 반일 불온분자 숙청이 급하니까 언제 술을 마실 겨를이 있었소? 지금 큰 전과를 거뒀으니까 축배를 들만도 하지 않은가?”
“예, 예, 당연하죠. 자, 갑시다.”
스즈끼는 희죽이 웃더니 기생을 놀 생각을 하며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스즈끼와 끼무라는 수하들 몰래 사복을 하고 좋은 지프도 내버려두고 걸어서 경찰국 대문을 나섰다.
사꾸라관은 경찰국과 헌병대 울안에서 엎어지면 코가 닿을 지척에 두었다. 끼무라는 아가씨들의 생각이 나면 몇 분 사이에 달려갈 수 있게 사꾸라관을 변소 간처럼 지척에 지어 놓았던 것이다.
스즈끼가 끼무라를 따라 사꾸라관에 가 보고 군침을 꼴깍 넘겼다. 높다란 토성 안에 자리 잡은 2층 푸른 기와집으로 된 사꾸라관은 주변의 경치가 아름다웠다. 사꾸라관 앞의 자그마한 인공호수에는 연꽃이 활짝 피어있었고 호수 가에는 일본에서처럼 사꾸라나무가 우거져있어 그윽한 정취를 자아냈다. 봄이면 호수 가에 연분홍 사꾸라꽃이 활짝 피면 꽃향기가 그윽했다. 사꾸라 나무 사이로 예쁜 기생들이 화복을 입고 게다짝을 딸깍거리면서 산보를 한다, 연못의 잉어들에게 먹이를 준다 하면서 깔깔깔 웃고 떠들었다.
그녀들은 끼무라와 스즈끼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방실방실 웃으며 허리가 버들가지처럼 휘어들면서 인사를 올렸다.
아끼꼬가 사뿐사뿐 다가와 버들가지처럼 호리호리한 허리를 굽히며 “곤니찌와(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드렸다.
정자에서 호수안의 연꽃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하나꼬가 머리 들어 이쪽을 바라보더니 반겨 맞으며 생글방글 웃으며 종알거렸다.
“끼무라 국장님, 정말 오랜만인데요.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라요.” 유끼꼬도 사꾸라 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놀다가 한들한들 다가와 정겹게 인사를 드렸다.
“끼무라 국장님이 놀러 오시지 않으니 우린 다 굶어죽을 지경인데요.”
끼무라는 스즈끼 앞인지라 조심스레 “오늘 새로 오신 스즈끼 경찰국장을 잘 모셔라. 이젠 날 국장이라고 부르지 말라.” 하고 겸손하게 말했다.
“국장이 아니면 뭐라고 불러야 하나요?”
하나꼬가 눈이 동그래 물었다.
끼무라는 하나꼬에게 “난 헌병대 대대장이다. 하나꼬와 유끼꼬는 오늘 스즈끼 국장님을 잘 모셔라.”
“저희들이요?”
“음, 그래. 스즈끼 국장님 얘들이면 되겠습니까?”
스즈끼는 안경을 춰올리면서 음충한 눈길로 하나꼬의 속살까지 뚫어지게 훑어보는 것이었다.
외씨처럼 걀쭉하고 하얀 얼굴, 운우지정을 나누고 싶은 듯이 갈망과 열망으로 타 번지는 까만 눈, 색정을 담은 그윽한 갈보 년의 눈, 향수와 머리 기름으로 다듬어진 서양식파마머리아래 해 볕을 보지 못해 하얀 우유 빛 살결, 가느다란 목은 스즈끼의 게걸스런 키스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대충 감싸 드러날락 말락 한 봉긋하고 하얀 젖가슴은 할딱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배배 꼬는 탄력 있어 보이는 허리와 엉덩이는 저도 몰래 사내의 욕정을 끓어 번지게 했다. 스즈끼는 마른 침을 꼴깍 넘기면서 온 몸에 끓어오르는 욕정을 금할 수 없었다.
“참 예뻐.”
그때까지 하나꼬와 유끼꼬는 스즈끼와 끼무라를 번갈아 보다가 눈길을 끼무라에게 되돌렸다.
“뭘 해? 빨리 스즈끼 국장님을 모시지 않고!”
바빠 맞은 끼무라는 하나꼬와 유끼꼬에게 눈을 찔끔 했다.
그제야 눈치를 차린 하나꼬와 유끼꼬는 교태를 부리며 아양을 떨어댔다.
“아이유, 스즈끼 국장님은 젊고 참 멋져요.”
그녀들은 양옆에서 스즈끼 국장의 팔을 끼고 한들거리며 사꾸라관 2층으로 올라갔다.
“근력도 참 좋을 거 같아요.” 스즈끼는 입이 헤벌쭉해 연신 “그래? 그래. 너희 둘쯤이야. 헤헤헤.” 하고 그녀들의 한들거리는 허리를 양팔로 껴안고 층층계를 밟았다.
뒤에서 끼무라는 아끼꼬와 하루꼬의 살진 엉덩이를 껴안고 따라 올라갔다. 하나꼬와 유끼꼬는 스즈끼의 양팔을 양쪽에서 안고 층계를 다 올라가 방 쪽으로 굽이를 돌면서도 뒤따라 올라오는 끼무라를 핼끔핼끔 되돌아보았다.
끼무라는 눈을 찔끔해 보이면서 하나꼬와 유끼꼬를 빼앗긴 것이 못내 아쉬워 한숨을 푸 내쉬었다.
(별수 없지. 살기 위해선 어린 상전에게라도 애지중지하는 하나꼬와 유끼꼬를 내줘야지.)
벌써 전화로 예약해놓았기에 사꾸라 관에서는 하나꼬의 방에 술상을 차려놓았었다.
스즈끼는 거만하게 상좌에 앉았다. 양옆에 하나꼬와 유끼꼬가 딱 붙어 앉아 애교를 부리면서 아양을 떨었다.
“스즈끼 국장님, 술을 한잔 드세요.”
하나꼬는 끼무라가 축배를 들기 전에 주제넘게 섬섬옥수로 술잔을 들어 스즈끼에게 권했다.
“그래, 그래. 한잔 마시자.”
스즈끼는 건너편에 멍청해 바라보는 끼무라에게도 잔을 들어보였다.
“끼무라 대대장, 한잔 마시게.”
그제야 정신이 펄쩍 든 끼무라는 술잔을 들었다.
“예, 예. 마십시다. 스즈끼 국장님이 복숭아 꿈이 이뤄질 것을 축원해 한잔 듭시다.”
한잔 굽을 쭉 낸 스즈끼는 육감이 나는 하나꼬와 유끼꼬를 옆에 두고 더는 끓어 번지는 욕정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군인의 체면이고 뭐고 끼무라의 앞에서 하나꼬의 탄력있고 부드러운 허벅다리를 슬슬 매만지면서 지분거렸다.
하나꼬는 끼무라의 눈치를 슬슬 보아가면서 스즈끼의 가슴에 안기면서 섬섬옥수로 목을 살살 매만졌다.
끼무라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하나꼬를 보고 스즈끼를 잘 만족시켜주라고 눈짓했다.
끼무라는 스즈끼가 술 생각이 없는 것을 보고 “하나꼬, 스즈끼 국장을 모시고 안방에 들어가 기쁘게 해드려라.”라고 하며 고개로 안방을 눈짓했다.
스즈끼는 권유에 못이기는 척 하면서 “그래, 먼저 바쁜 일부터 봐야지. 으흠.” 하고 하나꼬를 껴안고 안방에 들어가다가 주춤 멈춰서 되돌아보았다.
그는 멍청히 앉아 자기와 하나꼬를 바라보는 유끼꼬를 보고 “넌 따라 들어오지 않고 뭘 해?” 하면서 눈알을 희번뜩 부라렸다.
“예? 나도요?”
“으흠.”
유끼꼬는 말똥말똥 쳐다보다가 “알았어요. 잘 모셔드릴게요.” 하고 일어나 스즈끼와 하나꼬를 따라 안방으로 들어갔다.
끼무라는 그제야 한숨을 후 내쉬면서 옆에 앉은 아끼꼬와 하루꼬를 양팔로 끌어안고 볼을 슬슬 비비면서 술잔을 기울였다. 안방에서는 하루꼬와 유끼꼬가 아양 떠는 소리가 들려왔다.
끼무라는 마른 침을 꼴깍 삼키더니 아끼꼬의 허벅다리를 슬슬 만지더니 손이 뱀처럼 하루꼬의 가슴에 스르르 들어가 주물럭거렸다.
“아이유, 살살 만지세요. 허벅다리가 아려요. 아아, 코 수염이 목을 찔러요. 아갸갸.”
“끼무라 국장님도 저의 안방에 가자요.”
아끼꼬와 하루꼬는 양옆에서 아양을 떨면서 끼무라의 성욕을 돋우느라고 애를 썼다.
그러나 끼무라는 음위가 온지라 욕망의 머리를 쳐들지 못했다.
아끼꼬는 옆에서 끼무라의 술잔을 빼앗다 시피 하여 자기가 쪽 들어 마시고나서 “술만 마시지 말고 오랜만인데 우리를 좀 죽여주세요.”
“오늘은 스즈끼 국장이 즐거우면 돼. 어험.”
끼무라는 음위가 와서 하지 못한다는 말은 꺼내지 않고 스즈끼에게 충성하는 척 했다.
그는 사꾸라관 당직실에 앉아있는 하루꼬를 보고 류강철을 불러오게 했다.
“자, 우리 한 잔 합세.”
그러자 류강철은 아끼꼬를 흘끔흘끔 곁눈질해보면서 술잔을 들어 쭉쭉 들이켰다.
“아끼꼬가 욕심나?”
끼무라의 물음에 류강철은 “아니, 아니, 제가 어찌 감히 국장님이 애지중지하는 아가씨를 건너다보겠습니까?”라고 하면서도 아끼꼬를 힐끔 곁눈질했다.
그런데는 눈치 빠른 끼무라는 술잔을 내려놓더니 “강철이, 나를 따라 수고 많았네. 자, 한잔 들고 아끼꼬를 데리고 놀게나.”라고 하면서 아끼꼬의 허리에서 손을 떼더니 강철의 쪽에 훌 밀어 보냈다.
“류 통역을 즐겁게 해주어라.”
아끼꼬는 싫어하는 척 하면서도 류강철의 옆에 가 앉았다.
끼무라는 “아예, 유끼꼬 안방에 들어가 놀게나.” 하고 말했다.
아끼꼬는 좋아라고 류강철을 잡아 일으켰다.
류강철은 이게 웬 떡이냐고 아끼꼬의 허리를 안고 자리를 옮겨갔다.
끼무라는 하루꼬를 껴안고 술잔을 들어 하루꼬의 잔과 마주치고 쭉 들이켰다.
“우리 오늘 특별한 재미를 보자.”
하루꼬는 버들잎 같은 눈썹을 치키면서 끼무라의 목을 끌어안고 물었다.
“어떻게요?”
“가자.”
끼무라는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하루꼬의 허리를 껴안고 아끼꼬의 안방 쪽으로 도적고양이처럼 다가갔다. 끼무라는 하루꼬를 데리고 미닫이문을 살며시 열고 방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끼무라는 고함치다가 스즈끼네 쪽을 뒤돌아보면서 다시 언성을 낮춰 강요했다.
“난 구경하는 게 더 재미있어.”
한참 후 스즈끼와 끼무라는 하나꼬의 겉방에 하나둘 돌아와 먹다 남은 술상에 마주 앉았다.
스즈끼는 해가 질녁에야 떠나기 아쉬워하면서 끼무라와 함께 사꾸라관을 나가 찌프차에 올라탔다.
그는 경찰국으로 돌아가는 찌프차에서 고개를 뒤로 돌려 끼무라를 뒤돌아보면서 슬쩍 속내를 내비쳤다.
“자넬 경찰국장으로 복직하도록 우에 주선하겠네.”
“은공은 백골난망입니다.”
“으흠.”
끼무라는 둥둥 뜨는 기분으로 헌병대 사무실로 돌아왔다.
재생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스즈끼는 그날부터 뇌물을 보낸다, 사꾸라관의 예쁜 아가씨들을 선물한다 하면서 스즈끼의 주위에서 아첨하며 돌아갔다.
그 덕분에 한달 후에 끼무라는 다시 우시장경찰국 국장으로 복직하게 되였고 스즈끼는 업동 경찰총국으로 돌아갔다.
13. 참살
끼무라는 류강철에게 병권의 약을 써보게 한 후 성기능이 아주 강하게 된 것을 알고 병권의 약 처방대로 초약을 쓰기로 했다. 그러나 병권이가 관준과 상철을 체포해 가둔 것을 아는 날이면 정말 독약이라도 자기에게 쓸까봐 슬그머니 겁났다. 그리하여 관준과 상철을 보지 못할 한쪽 구석 숙사에 병권을 연금해두었다. 그런데 병권은 아들과 손자가 경찰국 감옥에 갇힌 것도 모르고 그들의 목숨을 구하려고 약 처방대로 끼무라에게 약을 써주었다.
끼무라는 하루 빨리 사꾸라관의 기생들과 재미를 보려고 한 시간이라도 늦어 약을 가져 오면 약제사들을 들볶아대곤 했다.
“빨리 약을 가져오라. 인삼과 대추도 한보따리 하나꼬한테 가져가게. 내 뭐라던가? 병권 놈을 몇 번 감옥에서 빼줬는데 그가 나를 해치겠는가?”
끼무라의 성화와 같은 독촉에 가메다와 류강철은 인삼과 대추를 메고 사꾸라관에 찾아갔다.
그들은 하나꼬 앞에 인삼과 대추 주머니를 두 주머니나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이걸 네 XX에 잘 걷어 넣어 퍼지게 해라. 우리 끼무라 국장님이 잡숫겠단다.”
하나꼬는 인삼과 대추주머니를 보자 두 손을 맞잡고 기절초풍했다.
“이야, 야라, 야라(어마나 안 돼, 안 돼요), 이 많은걸 언제 내 요 죄꼬만 거기에 넣어 퍼지라고? 아이고, 유끼꼬와 아끼꼬에게도 얼마간씩 나눠줘요.”
가메다 소대장은 음충한 눈길로 하나꼬를 뚫어지라고 쏘아보았다.
“영광인 줄 알아라. 끼무라 대대장에게서 제일 총애 받는 기생을 누구나 하니?”
하나꼬는 버들잎 같은 눈썹까지 찡그렸다.
“총애하면 양물로 총애해야지 이따위 추잡한 일을 시켜요? 난 약도 별 약을 다 본다. 보지에 넣어 퍼진 대추를 먹으면 시든 양물이 살아날까? 늙은 두상!”
그 말에 류강철은 입을 싸쥐고 킬킬거렸다.
가메다는 류강철을 툭 치고 나서 하나꼬를 총알 같은 눈길로 쏘아보았다.
“말 조심해. 병권은 양기를 살리려면 꼭 제일 총애하는 아가씨의 질에 넣어 퍼진 후 먹어야 효과가 좋다고 해. 잔말 말구 잘 퍼지게 해. 끼무라가 네한테 오면 네 좋고 국장님도 좋을 게 아냐? 우리 좋겠느냐?”
하나꼬는 별수 없이 인삼과 대추를 두 주머니나 받아 놓으면서 두덜거렸다.
“그 조선 염소수염이 이 치사한 약 처방을 다 냈대? 나쁜 영감, 끼무라 국장도 바보야. 자기를 능욕하는 것도 모르고. 하긴 양물이 시드니 변태적으로 손가락질만 해서 어디 견디겠냐? 이거래도 먹고 양기가 살아났으면 나도 편안하겠다.”
끼무라는 병권의 처방대로 하나꼬의 질에 넣어 퍼진 인삼과 대추를 날마다 먹을 뿐만 아니라 초약을 달여 먹고 시들었던 양기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몇 달 후 늦은 가을에는 온 몸에 힘이 용용 솟구쳤다.
그때부터 그는 거의 날마다 저녁이면 사꾸라관에 기어들어가 하나꼬와 유끼꼬, 아끼꼬, 하루꼬를 번갈아가며 죽여줬다. 정말 기적이 일어나 끼무라도 하나꼬도 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사꾸라관의 아끼꼬와 하루꼬, 유끼꼬는 그 기적의 끼무라를 모시기도 무서웠다.
“그 조선 염소수염 영감쟁이 재간이 있긴 있어.”
“싹 시들어서 어쩌지 못하던 두상이 정말 놀랍게도 죽여준다.”
“글쎄 말이야. 얼마나 세기에 저 지경으로 숨이 넘어가는 소릴 지를까?”
사꾸라관에서는 사꾸라 노래와 여인의 신음소리가 섞여 자지러지게 들려오고 있었다.
어느날 이른 아침 끼무라는 한길수를 자기 사무실에 불러왔다.
한길수는 스즈끼 국장이 간 후 보복 당할까봐 끼무라를 아주 조심했다.
“무슨 지시가 있습니까?”
끼무라는 한길수를 냉소하는 눈길로 쏘아보며 으르렁거렸다.
“병권을 교수형에 처하라!”
“예?”
그 자리에 있던 가메다, 나까노라이찌로, 류강철은 그 천만뜻밖의 명령에 깜짝 놀랐다.
이윽고 류강철이 통역하자 길수는 깜짝 놀라며 자기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그는 씨무룩이 웃으면서 다시 똑똑히 들으려는 모양으로 끼무라 앞에 다가가 허리를 꿉실거리더니 “정말 죽이렵니까?” 하고 손으로 목을 자르는 시늉 했다.
“음.”
“이젠 그 영감태기 약을 쓰지 않으렵니까?”
한길수가 연신 묻자 끼무라는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나직이 말했다.
“이젠 영감태기 필요 없어. 허허허.”
그러자 한길수는 머리를 끄덕이며 말상에 간사한 웃음을 지었다.
“예~ 이제야 알았습니다. 그 영감태기 약 처방을 알아냈으니까 살려둘 필요 없지요.”
끼무라는 한길수를 보고 냉소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놈, 참새가 어찌 고니의 큰 뜻을 알겠어?”
한길수는 머리를 연신 끄덕이며 감탄했다.
“참말 고명합니다. 아예 관준이나 상철을 몽땅 목을 매 죽여 후환을 없애는 게 어떻습니까?”
끼무라의 대답은 천만뜻밖이었다.
“관준은 감옥에 가둬두고 상철은 내보내.”
“예? 참 얼떨떨합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멍청한 놈, 그 나이를 어디로 먹었어? 미끼로 병완과 성칠의 꼬리를 밟을 수 있단 말이다. 성칠과 병완은 아무리 강한 놈이래도 상철에게서 관준이 갇힌 걸 들으면 꼭 구하러 올 거야. 그때 일망타진 한단 말이다.”
한길수는 머리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는 빈정거렸다.
(개 똥 먹는 습관을 개를 떼 주겠는가? 또 그물만 치자고? 고기는 잡지 못하면서. 흥!)
한길수는 “하이! 알았습니다. 명령을 즉시 증명하겠습니다.” 하고 군례를 척 붙이고 나갔다.
한길수는 자위대를 풀어 숱한 조선 사람들을 또 무너진 경찰국옛터에로 몰아왔다. 그리고 감옥에 갇힌 최구장을 비롯한 이른바 반일불온분자들도 몽땅 압송해왔다.
늦가을의 싸늘한 바람을 맞아 마른 쑥대가 쓸쓸히 몸부림쳤다. 교수대에 매놓은 올가미가 가을바람을 맞아 무섭게 비명을 지르며 흔들거렸다.
“걸어!”
결박을 지운 병관이가 교수대 밑으로 흰 염소수염을 흩날리면서 끌려왔다.
“아버지!”
“할아버지!”
관준과 상철은 결박 당한 채 자위대에 끌려오다가 교수대 밑에 선 병권을 보고 애처롭게 소리쳤다.
끼무라는 둔덕 위에 사무상을 놓고 군도를 짚고 앉았고 그 옆에 이찌로, 가메다, 야마모도소장, 이찌분로 등이 헌병들의 호위 속에 교수대를 내려다보면서 다리를 벌리고 틀스럽게 서있었다.
한길수는 교수대 밑으로 다가가 병권에게 지껄여댔다.
“병권이, 이제라도 병완과 성칠의 행방을 대게나. 그럼 살려주지.”
병권은 먼 남산을 쳐다보았다.
“퉤! 더러운 개다리 놈 새끼! 난 일흔도 넘게 살대로 다 살았다. 나는 내 고향에 뼈라도 묻힐 수 있어 다행이다.”
그는 사람들 속에 결박 당한 채 머리를 숙이고 자기를 쳐다만 보는 관준과 상철을 내려다보면서 한탄했다.
“조선 내 고향 땅에서 일본 섬나라 오랑캐들과 개다리 놈 새끼들이 썩어지는걸 보지 못하고 죽는 게 한스러울 뿐이다.”
“당장 죽게 된 주제에 주둥이만은 여물었다. 당장 이 반일불온분자를 교수형에 처해!”
자위대졸개들이 달려들어 병권의 목에 올가미를 억지로 걸었다.
그때 병권은 “가만!” 하고 소리치더니 둔덕에 있는 끼무라를 쳐다보았다.
한길수는 말 이발을 드러내며 냉소했다.
“금방까지 죽기를 원하더니. 그래, 병완의 거처를 말하면 살려주지. 소시거우란 곳은 어디냐?”
병권은 허리를 펴더니 끼무라를 쏘아보더니 “할 말이 있다.” 하고 툭 내쏘았다.
류강철이 통역하자 끼무라는 하얀 장갑을 낀 손을 홱 저었다.
“말해!”
“내 지어준 약은 몇 해 후에 해독약을 먹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네. 나를 죽이고 누구한테서 해독약을 얻어먹겠는가?”
류강철이 통역하자 끼무라는 저으기 당황해 군도를 짚고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인차 침착성을 되찾으면서 희죽이 웃었다.
“음, 네 놈이 죽기 싫은 모양이구나. 잔꾀를 작작 부려!”
병권은 하얀 염소수염을 흩날리며 날카롭게 물었다.
“내 무슨 죄 있는가?”
끼무라는 군도를 잡고 벌떡 일어나더니 어슬렁어슬렁 교수대 곁으로 내려갔다.
한길수는 개 잡은 포수처럼 어깨를 살구고 교수대 밑에서 으르렁거리며 왔다 갔다 하고 류강철은 안경알을 춰올리며 발바리처럼 끼무라 뒤를 바싹 따라 내려갔다.
끼무라는 시퍼런 군도를 쓱 빼들어 병권의 턱을 쳐들고 을러멨다. 언제 병권에게 달라붙어 약이나 얻어먹자던 “환자”였던가 싶었다.
끼무라가 병권을 사꾸라관에까지 청해 상대접을 하면서 빌붙었다면 누가 믿겠는가?
“네 놈은 항일유격대 두목 성칠 놈과 반일불온분자 병완 놈의 행방을 감춘 하늘에 사무치는 죄를 졌다. 병완 놈은 우리 대일본제국의 경찰국 사무 청사를 이렇게 썩박나무더미로 만들어놓은 천추에 용서하지 못할 놈이다. 네놈들은 몽땅 천번 만번 칼 탕 쳐 죽여도 원수를 다 못할 놈들이야.”
병권은 눈깔을 희 번뜩거리는 끼무라를 쏘아보며 날카롭게 맞섰다.
“내 조카 성칠이 자기 고향의 산에서 사냥을 한 게 무슨 죄 있는가? 네 놈들의 경찰국 사무청사를 지어주고 길을 닦아준 내 동생 병완은 또 무슨 죄 있느냐? 우리 조선을 통 채로 빼앗아간 네 놈들이야 말로 조선 인민들 제일 큰 죄인! 날강도 놈들이다!”
바빠 맞은 끼무라는 “닥쳐! 당장 목을 매 죽여!” 하고 날강도 본성을 드러냈다.
헌병 놈들이 목에 올가미를 거는데도 병권은 몸부림치며 사형장이 떠나게 고함쳤다.
“내 조선을 빼앗은 섬나라 오랑캐 놈들이 썩어질 날 멀지 않다. 여러분, 총칼을 들고 일본 날강도 놈들을 고향에서 몰아내오. 이 강도 놈들아, 성칠이 꼭 유격대를 데리고 와 내 원수를 갚을 거다. 네 놈들을 몽땅 없애 치울 거다!”
자위대졸개들이 올가미를 조였다. 그때 양옆에 섰던 일본 헌병 놈들이 병권의 발밑 걸상을 탁 걷어찼다.
관준과 상철은 “아버지!” “할아버지!” 하고 소리쳤다. 그들은 더는 차마 볼 수 없어 머리를 숙이고 눈을 내리감았다. 병권은 일본 헌병 놈들과 자위대 졸개들의 마수에 교수대의 올가미에 처참하게 목을 매달린 채 한 많은 이 세상을 떠나갔다.
한길수는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렸다.
“보았지? 반일사상을 가진 놈들의 끝장은 이렇게 개죽음 밖에 없어. 누구든지 병완 놈과 성칠 놈 같은 반일불온분자거나 유격대를 숨겨주면 이런 끝장 밖에 없다는 걸 알아! 누가 성칠 놈과 병완 놈의 행방을 알면 우리에게 고발하면 한평생 복을 누릴 상금을 내줄테다!”
조선백성들은 모두 질겁하여 곁눈질하며 머리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고 끼무라와 한길수는 깨 고소해 음흉하게 웃었다.
최구장은 자기 막내아들 경석의 뒤를 이어 큰 사돈어른이 비참하게 돌아가는 처절한 장면을 목격하고 중용지도가 와그르르 무너지는 감을 느꼈다.
(저런 악귀 같은 일본 놈들을 보고 어떻게 놔둔단 말인가? 병완 사돈어른이나 성칠 사돈이 하는 일이 옳아. 악은 악으로 다스려야 한다. 내 고향을 찾으려면 총칼을 든 놈들과는 총을 들고 맞서는 게 옳다. 내 나가기만 해봐라.)
최구장은 속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최구장은 감옥에 갇혀 보름 전에 아들 경석의 시체도 수습하지 못한 것이 못내 속에 내려가지 않았다. 그때 성단은 기별을 듣고 달려와 경석의 시체가 다 썩어 떨어진 후에야 기별을 듣고 막내며느리와 근형과 계순이 그리고 명옥을 데리고 와서 피눈물을 흘리며 막내아들의 시체를 겨우 수습해 갔던 것이다.
놈들은 또 병권을 최구장의 막내아들 경석을 처형하였을 때처럼 교수대에 매단 채 며칠이고 썩어 스스로 떨어질 때까지 효시했다.
이번에도 헌병 놈들은 병권의 시체가 다 썩어 땅바닥에 떨어진 후에야 수습해가게 했다. 경찰국옛터의 교수대는 도살장처럼 피 비린 내를 풍겼다.
감옥에서 풀려나온 상철은 형내와 함께 보름 만에 다 썩어 퉁퉁 붓기고 살에서 물이 괴죄죄하게 내밴 할아버지 시체를 대충 칠성 판위에 들어 올린 후 수레에 실어 고향 신설동에 모셔갔다.
형내는 흑흑 흐느껴 울면서 “증조부는 ‘조선 내 고향 땅에 묻힐 수 있어 다행이다.’고 말씀하면서 나를 보았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래, 우린 할아버지 유언대로 할아버지를 고향에 모시자.”
상철은 집에 남은 어머니 태화영과 만식이, 형내와 함께 할아버지를 고향 신설동의 뒷산에 모셨다.
상철의 어머니 태화영은 “에이구, 이게 웬 일이냐? 네 아버지 아직도 감옥에 갇혀있으니 근심스럽기만 하구나.” 하고 낙루했다.
그러자 헌병에게 맞아 골병을 앓은 만식은 또 부산을 떨었다.
“보라니까. 내 뭐라 했소. 병완 시할아버지네 간도로 갔다고 훌 말했더라면 이런 일이 있겠소?”
그러자 상철은 주먹을 쳐들고 만식을 때릴 상 하면서 욕했다.
“어쩌래? 이거 그저. 부실한데 약이 없다고 이걸 어쩌니?”
그러자 댓살 되는 경학은 “아버지 부실하다. 우리 엄마를 때리긴? 씨.” 하고 입을 쫑긋했다.
그러자 만식은 경학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옳다. 아버지랑 할아버지랑 다 부실하다. 내처럼 활 말할 지.” 하고 계속 중얼거렸다.
상철은 여편네의 귀 쌈을 찰싹 갈겼다.
“주둥이를 다물지 못할까? 다 네년이 일본 놈들 앞에서 병완 할아버지 간도에 갔다고 말하는 바람에 할아버지가 살해당했어.”
만식은 볼을 싸쥐고 엉엉 어린애처럼 울었다.
“때리긴 왜 때려? 내 시할아버지를 바로 죽인 상 한다. 불알을 찼으면 시할아버지를 죽인 일본 놈들과 해낼 거지. 엉엉, 제 여편네와 센 척 해라. 엉엉~”
형내는 못 마땅한 세 귀 눈으로 후 어머니를 흘겨보았다.
신설동 뒷산 쓸쓸한 소나무밭에서는 친인을 잃은 관준 일가의 서러운 울음소리가 구슬프게 울려 퍼지고 을씨년스러운 먹구름이 감도는 하늘에서는 짝을 잃은 외기러기가 지는 해를 바라고 북으로 날아가면서 외롭게 울었다.
 
 
 
 
 
 
 
 
 
 
 
 
 
 
11 망국노의
1. 일제의 노화교육
억울한 혼들이 둥둥 떠다니는 우시장 경찰국 고문실에 끼무라가 졸개 한길수와 함께 악마처럼 도사리고 앉아있었다.
끼무라는 또다시 얼리고 닥치는 간사한 수단을 되풀이하기 시작했다.
“최구장을 끌어왓!”
한길수는 “또 썩뚝?” 하고 손으로 목을 자르는 시늉을 했다.
끼무라는 “끌어오라면 끌어 올 거지. 흥!” 하고 눈깔을 부라렸다.
류강철이 통역하자 한길수는 돌아서 나가면서 두덜거렸다.
(죄꼬만 자식이, 숱한 사람들 앞에서 뭐야? 내 무슨 세 살짜리 앤가?)
이윽고 최구장이 쇠고랑이를 절렁거리며 자위대 졸개들에게 압송돼 고문실 철문 안에 힘겹게 들어섰다.
“어, 이게 뭐요? 우리 명천에서 유명한 최구장 선생을 이렇게 박대해서 되는가?”
끼무라는 언제 잔혹한 악마냐 시피 웃음을 지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졸개들에게 손짓했다.
“어서 풀어줘.”
졸개들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멍청히 서 있다가 최구장의 손목과 발목의 쇠장갑을 하나하나 풀어주었다. 누구 명이라고 어길 수 있었겠는가.
졸개들은 머리를 홰홰 돌렸다. 끼무라의 수완을 짐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때로는 최구장을 쏘아보며 갈범처럼 고함치며 당장 잡아먹을 상을 하다가도 때로는 자기 스승이나 대하는 듯이 깍듯이 모시는 시늉을 냈다.
끼무라는 최구장을 보고 “자, 앉게나. 내 할 말이 있어.” 하고 자리를 권했다.
최구장은 떡 뻗치고 선채로 피발이 선 눈으로 끼무라를 쏘아보면서 무뚝뚝하게 말했다.
“간사하게 놀지 말고 죽이겠으면 어서 죽여라.”
끼무라는 부하들의 못 마땅해 하는 눈치를 보고 최구장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전번에 최구장의 짐을 벗겨 준 걸 알아?”
최구장은 어처구니없어 픽 냉소하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약 담배 인이 박힌 당신 막내아들은 후환거리야. 우리 대일본제국에나 최구장한테나 모두 모두 후환이야.”
(개자식, 남의 막내아들을 비참하게 살해하고서도 도와줬다고? 네 놈도 인간이냐? 약 담배를 피우는 아들이라도 난 살아 있었으면 좋겠어. 이게 천하 어시들 마음이야.)
최구장은 혀끝까지 흘러나온 말을 겨우 참았다.
“그런 놈은 살려둬서 무익하단 말이야.”
끼무라는 사무상을 탕 치며 호통 쳤다.
“난 그래도 최구장을 우시장 인근에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이제껏 살려뒀단 말이야. 당신 막내아들도 내가 죽인 게 아니라 스즈끼 국장이 죽인 거야.”
자기 수를 쓰느라고 끼무라는 상전을 헐뜯기까지 하며 분풀이를 했다.
한참 후 끼무라는 연설을 잔뜩 늘여놓았다.
“조선은 이젠 대세가 기운 나라야. 한번 기운 집이나 나라는 구할 수 없어. 우리 경찰국 청사를 보라. 병완 놈이 고의적으로 썩은 나무에 벌레까지 있는 나무를 섞어 지어서 한쪽으로 천정이 기우니 별수 없이 무너지지 않았는가? 당신은 선비기에 어림짐작해도 알 거야.”
최구장은 교활한 웃음을 짓는 끼무라의 상판을 어처구니없어 오래도록 쏘아보았다.
끼무라는 계속 늘여놓았다.
“조선 사람들이 우리 대일본제국을 떠보았자 닭알로 바위 돌을 치는 격이지. 허허허. 무슨 의병이요, 백두산 유격대요, 다 호랑이와 맞서 미쳐 날뛰는 미친개들에 불과하오. 정신이 있소? 그 놈들이. 우리 대일본제국은 이미 간도를 손안에 넣었고 이제 심양을 타고 앉아 산해관을 넘어 관내로 진군할 것이네. 어허, 허허허.”
여기까지 역설하고 난 끼무라는 흥이 도도해서 군도자루를 잡고 일어나 사무실안을 버릇처럼 뚜벅뚜벅 거닐면서 계속 으르렁거렸다.
“명지한 최구장은 똑똑한 선택을 하리라 믿네. 우리 대일본제국과 맞서서 무슨 좋은 일이 있겠는가? 병완 놈도 내 말을 듣고 점잖게 대일본제국에 붙어 목수 질이나 잘하거나 자위대 부대대장이나 시킬 때 했더라면 뭘 자기 고향에서 쫓겨났겠는가? 간도에 간들 우리 대일본제국 마수에서 벗어 날 거 같은가? 이국 타향에서 잘 살 거 같은가? 어림도 없어! 우린 소시거우에 있는 병완을 잡아다가 서울 서대문감옥에 압송해 처단할 거야.”
최구장은 얼렸다 닥쳤다 하는 끼무라의 음흉한 속심이 뭔지 알고 싶었다.
“그래, 어쩌란 말인가?”
끼무라는 홱 돌아서면서 최구장의 표정을 살폈다. 마치 그의 얼굴에서 한 가닥의 희망의 빛을 찾으려는 상 싶었다.
“그렇지. 아직 늦지 않았네. 전번에도 말했지만 난 운주동에 최구장네 서당보다 훨씬 좋은 일본학교를 차려 놓겠네.”
끼무라는 천천히 최구장의 옆에 다가와 억지로 살기띤 낯가죽에 교활한 웃음을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최구장은 명지한 선택을 하리라 믿소. 우리 일본학교에서 선생질을 해주오. 우리 대일본제국의 말을 배워주고 우리 대화민족의 훌륭한 민속과 민족전통문화를 배워주게나. 우리 대일본제국의 휘황한 력사를 가르치란 말이네.”
그제야 최구장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이 놈들, 날 보고 노화교육을 하라고? 쳇, 어림도 없다.)
끼무라는 최구장의 얼굴표정이 모질게 굳어지는 것을 훔쳐보고 너털웃음을 웃었다.
“허허허, 최구장, 난 당신과 길게 흥정할 시간이 없네. 당신 일가 십여 식솔 죽이겠쏘까? 살리겠쏘까? 병권이 죽었소. 당신 막내아들 죽었소. 보았겠지? 으흠. 당신도 죽겠쏘까?”
끼무라는 사무상에 돌아가 털렁 들어앉더니 살기띤 눈길로 최구장을 노려보았다.
최구장은 한참이나 머리를 숙이고 속궁리를 했다.
(먼저 식솔들을 구하고 보자.)
“일본 선생 하겠쏘까?”
최구장은 머리를 숙이고 무겁게 대답했다.
“예.”
끼무라는 등받이에서 잔등을 떼고 사무상에 다가앉으며 물었다.
“똑똑히 말했쏘까.”
최구장은 목소리를 조금 높여 “일본 선생 하겠소.” 하고 말했다.
끼무라는 득의양양해 줄 연설을 퍼부었다.
“그럼 그렇겠지. 최구장 명지한 선택을 했어. 대일본제국은 메이찌유신 후에 유럽의 선진적인 과학기술과 문화를 인입해 동양에서는 그 어느 나라보다도 선진국이야. 그런 일본의 선진문화를 대일본제국에 귀순한 우리 명천과 우시장의 무지한 까막눈들에게 배워주면 좀 좋은 일인가?”
류강철이 통역 뒤끝에 둬 마디를 슬쩍 보탰다.
“최 선생, 잘 했습니다. 대일본제국과 맞서서 좋을 게 있습니까? 이전에 선생은 저희들을 보고 공자와 맹자의 중용지도를 지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누구와도 싸우지도 말고 뜨지도 말라고. 날마다 하늘 천 땅 지를 배워줘 대일본제국 세상에서 어디다 쓰겠습니까? 선생님은 집 식구들도 구하고 일본 학교 선생 월급도 타고 일거양득이 아닙니까?”
그러자 최구장은 허무한 웃음을 지었다.
“난 일어를 모르는데 애들에게 어떻게 배워주겠는가?”
류강철이 통역하자 끼무라는 가재수염을 슬슬 매만지면서 최구장에게 다가왔다.
“최 선생, 의자에 앉소. 모르면 당신 학생 류 통역에게서 배워서 가르치게나. 학생이라도 누가 먼저 대일본제국의 선진문화를 배웠으면 선생이지. 이젠 당신 제자 류강철이 당신 일어 선생 됐쏘다. 알았쏘까? 하하하.”
최구장은 자기 어깨를 툭툭 다독이며 조소 섞인 말을 지껄이는 끼무라를 속으로 버릇없는 놈이라고 욕했다.
끼무라는 어깨가 으쓱해 사무상에 돌아가 앉더니 최구장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최구장, 이걸로 끝난 게 아니야. 감방의 죄수들과 온 명천과 우시장을 돌면서 일어를 배우라고 선동하게나. 그래야 난 최선생의 집 식솔들을 풀어주겠네.”
류강철은 옆에서 눈까지 찔끔해 보이면서 황급히 “선생님, 대답하시오. 살자면 무슨 고만한 거야 못하겠습니까?” 하고 귀띔해 주었다.
류강철은 끼무라를 돌아보고 “최 선생은 하겠답니다.” 하고 앞질러 말했다.
끼무라는 씨무룩이 웃으면서 “류통역은 선생을 딱 구하려고 애를 쓰는구먼.” 하고 지껄였다.
류강철은 차렷 자세로 군례를 올렸다.
“하이! 제대로 통역하겠습니다.”
최구장은 차마 자기 입으로 섬나라오랑캐들의 말을 배우라고 동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일가 십여 명 식솔들을 살리려면 마음에 없는 일을 하여야만 했다.
끼무라와 한길수는 최구장을 데리고 경찰국 감방으로 갔다.
철문을 쩔꺼덕 열자 경숙과 경민, 경욱이 철창을 잡고 이구동성으로 “아버지!” 하고 불렀다.
최구장은 이로 입술을 깨물고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끼무라와 류강철의 눈치를 흘끔 곁눈질해보고 천천히 무거운 간신히 입을 뗐다.
“얘들아, 우린 이제부터 일어를 배워야 한다. 일본의 선진기술과 문화를 배워야 한다.”
그러자 감방에 있던 기타 사람들은 모두 눈이 휘 동그래졌다.
“그래야 고향에서 살 수 있다. 옛날 한신은 남의 가달 두 새로 기어나가면서도 살아서 천하에 둘도 없는 영웅이 됐다. 우린 참고 일어를 배우면서도 살아야 한다.”
류강철은 한신의 말을 빼놓고 일어를 배워야 한다는 말을 제 나름대로 보태 끼무라가 듣기 좋게 통역했다.
끼무라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최구장의 입으로 감방안의 죄수들에게 할 수 있어 아주 흐뭇했다.
뒤이어 끼무라와 한길수 등은 최구장을 싣고 명천과 우시장의 산골까지 돌아다니면서 최구장의 입으로 조선 사람들에게 운주동에 일본 학교를 차리는 일을 공개하고 일어공부를 동원하게 했다.
한달 후 최구장의 십여명 식솔은 감방에서 풀려나왔다. 그러나 끼무라와 한길수는 경욱만을 인질로 잡아두었다.
최구장이 감방에서 나갈 때 끼무라는 살기 띤 눈길로 쏘아보면서 말했다.
“최구장, 먼저 여기 있으면서 류통역에게서 일어를 배우게. 당신 넷째아들은 여기 남아서 최구장을 거들게 하겠네. 당신, 거짓을 부리면 언제든지 먼저 넷째아들을 썩 뚝!”
끼무라는 군도를 들어 목을 치는 시늉을 했다.
“알았는가?”
최구장은 속으로 지독한 끼무라 놈에게 침을 퉤 뱉었다.
끼무라는 “새해 봄에 운주동에 새 학교를 짓겠네. 그전에 일어를 잘 배우게나.” 하고 뒷말을 이었다.
최구장은 도리머리 질 했다.
“이 늙은이가 어떻게 그리 빨리 일본 말을 배우겠습니까?”
끼무라는 딱 잘라 말했다.
“안 돼! 반년 내에 배워내!”
옆에서 류강철도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그러나 살인악마 끼무라의 앞인지라 언감 딴전을 부리겠는가.
“선생님, 반년을 배운 후 학교에서 애들을 가르치면서 짬짬이 시간을 타서 저에게서 배우십시오.”
옆에서 듣던 한길수는 외눈깔을 번뜩이면서 지껄였다.
“쯧쯧쯧, 끼무라 대대장이 알아듣지 못한다고 류통역 작작 수작을 붙이게나. 내 일어를 알았으면 자네들이 하는 수작을 통역해주겠는데.”
최구장은 울며 겨자 먹기로 경찰국 감옥이 아닌 감옥인 숙사에 갇혀있으면서 류강철에게서 일어를 배웠다. 경욱도 너무 심심해 아버지 어깨 너머로 일어를 배웠다.
최구장은 유학자로서 휘어들지언정 끊어지지 않으려고 잠시 일본 놈들의 낮은 문턱에 머리를 숙이고 들어갔던 것이다. 그는 일본 놈들을 이기려면 애들이 일어를 배워두는 것도 낭패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일본 문화의 힘을 빌어 일본 놈들을 내 조선 고향에서 몰아내야지.)
그 덕분에 최구장의 일가 십여 명 식솔들은 감옥에서 풀려나와 고향 운주동으로 돌아갔다.
기운봉 기슭은 울긋불긋 단풍이 들기 시작했다. 일본 놈들이 조선에 침입하기 전에는 늦가을이면 최구장은 아들딸들을 데리고 수림속의 밭에서 옥수수도 따오고 겨울나이 땔나무도 해왔다. 그리고 자기 위방에 차려놓은 서당에서 애들에게 한문과 조선어를 가르치었다.
그러나 감옥에서 막내아들까지 일본 놈들에게 참살 당하는 것을 보고 돌아온 최구장은 마루에 앉아 곰방대에 담배 부스러기를 꿍꿍 다져놓고 부시를 척 켜서 불을 붙여 물었다. 그는 곰방대를 뻑뻑 빨면서 누렇게 번져가는 먼 남산을 쳐다보며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생각하면 할수록 한뉘 평생 신앙처럼 믿어온 유교학설중의 중용지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내 아들을 죽인 악귀 같은 일본 놈들 앞에서 어떻게 자기를 억제하여 례에 맞게 행동한단 말인가? 악이 딱딱 나는데 그놈들의 글을 배우고 우리 조선 애들에게 노화교육을 한단 말인가? 흥!)
그는 담배를 길게 빨아 연기를 후 불어버리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가로 저었다.
그는 마당에서 장난하는 근형이랑 손자들을 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안 된다, 안 돼. 일본 말을 배우고 가르치더라도 애들에게 민족 심과 항일구국의 도리를 부어넣어야 해. 저 애들은 꼭 자기 삼촌 경석을 누가 죽였는가를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한다.”
그는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곰방대를 빨며 마루에서 왔다 갔다 거닐었다.
(혹시 구철동생이 말이 옳을 수도 있는 거야. 총칼을 든 일본 놈들과는 총칼을 들고 맞서 싸워야 한다.)
그는 아주 고통스러웠다. 일본 놈들 때문에 자기가 검은 머리 백발이 되도록 믿어온 공맹지도의 공든 탑이 하루 사이에 와그르르 무너지는 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동생은 다시 보이지도 않을까? 진달래도 몇해 동안 보이지 않고. 그 애들을 보면 저 애들을 장백산유격대에 보냈으면 좋을 텐데. 거기서 애들이 마음껏 우리 조선어를 배우고 찬란한 민족문화를 배우고 민족정신을 키워 총칼을 들고 일본 놈들을 이 조국 땅에서 몰아내야 한다.)
이때 오토바이 한대가 울 밖에 와 부르릉 거리더니 멈춰 섰다. 안경을 낀 류강철이 일본 헌병이 몰고 온 오토바이에서 내렸다.
뛰놀던 애들은 또 일본 놈들에게 붙잡혀 혼살 날까봐 구새 목과 마루 밑에 달려가서 숨어 머리를 반쯤 내밀고 이쪽을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그러나 최구장은 경숙과 함께 류강철을 마중했다.
“최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그래, 무슨 일로 왔는가?”
류강철은 안경을 춰올리면서 마루 앞에서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최 선생, 종종 찾아뵙지 못해 미안합니다. 끼무라 국장님이 전번에 말한 대로 선생님께 일어를 배워주라고 해서 왔습니다.”
그러자 최구장은 내키지 않는 듯이 마른기침을 하면서 “올라오게나.” 하고 건성으로 응부했다.
류강철이 마루에 올라오자 최구장은 웃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일번헌병은 오토바이에서 내려 여기저기 기웃거렸지만 최구장은 들어오라고 말도 하지 않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최구장은 자리에 앉자 류강철에게 “칠순이 된 늘그막에 반년내에 일어를 배워내겠는가? 되지두 않는 소릴, 쳇!” 하고 말하면서 냉소했다.
류강철은 버릇처럼 안경알을 춰올리면서 정색해 말했다.
“배우는 것만큼 배워가지고 애들에게 가르치면 됩니다. 종종 내가 와서 선생님에게 보도해주겠으니까 근심하지 마십시오.”
류강철은 바깥의 헌병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용히 말했다.
“일본제국의 세월에 일어를 배워야 합니다. 일어를 배운다고 해서 다 일본 사람들의 개다리는 아닙니다. 일어를 배워 우리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할 수도 있습니다. 일본을 알아야 우리 민족도 발전하고 일본을 따라잡고 장차 초과할 수 있습니다. 일어를 모르고 어떻게 일본 사람들과 겨뤄 보겠습니까?”
최구장은 그래두 머리를 홰홰 가로 저었다.
“거 자네 말이 어상사하지만 말이야, 일본 말을 하면 일본 사람이 되는 거지.”
류강철은 바깥을 힐끔 곁눈질해 내다보았다. 일본 헌병은 의연히 오토바이 옆에서 서성거리면서 먼 남산을 쳐다보고 있었다.
류강철은 머리를 돌리더니 두 손으로 옛 스승 최구장의 손을 잡고 정색해 말했다.
“스승님, 제가 비록 일본말을 하고 일본 경찰국에서 통역을 하지만 사실 저의 온몸에는 조선 사람들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처처에서 될수록 조선 사람들을 위해, 우리 고향사람들을 위해 한마디라도 하고 싶습니다.”
최구장은 “어험.” 하고 마른기침을 하면서 바로 잡아 앉았다. 속으로는 썩 믿어지지 않아 하는 것이 환히 드러났다.
(자식, 경석이가 잘못 될 때 한마디라도 했냐?)
그러나 최구장은 이렇게 나왔다.
“됐네. 오늘 먼 길을 왔으니까. 섬나라 오랑캐들의 말 몇 마디를 배워주게나.”
최구장이 경숙을 보고 밥상을 가져오라고 했다. 경숙이가 밥상을 가져오고 경민이가 종이와 붓을 가져왔다.
류강철은 붓으로 일어 50음표를 몇 개 써놓고 읽어보였다.
“이건 ‘아, 이, 우, 에, 오.’라고 읽는데 제일 기본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구장은 일어 음표를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얘, 이거 무슨 놈의 글이 이래? 메시를 쫏는 닭이 발로 마구 오려 놓은 거 같니?”
최구장은 하얀 수염을 매만지면서 도리머리 질 했다.
“거나 저나 따라 읽기를 해보자.”
한참 따라 읽기를 하는데 경숙과 경민, 경욱까지 구들에 들어와 따라 읽기를 했다. 나중에는 근형과 근덕, 근활 모두 아래방문에 붙어 서서 위방을 훔쳐보며 따라 읽기를 했다.
최구장은 혼자 읽어보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루에 대여섯 개를 배워서 언제 쉰 개나 배우겠는가? 아예 자네가 서당 방에 와서 애들에게 직접 배워주게나.”
류강철은 손을 내저었다.
“안 됩니다. 끼무라 통역은 어쩌고?”
“일본 놈들의 통역을 하기보다 서당 선생질 하면 낫지 않겠는가?”
류강철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 쉬었다.
“지금 일본 사람들의 세상에서 어디 뭘 하고 싶으면 뭘 할 수 있습니까?”
류강철은 점심 때가 거의 되도록 최구장에게 일어를 배워 주고 나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선생님, 며칠 후에 또 오겠습니다.”
최구장은 마루에 나가 신을 신고 바삐 오토바이에 올라타는 류강철을 보고 손을 저었다.
“그래, 자네 말대로 일본 말을 배워야 일본 놈들과 겨뤄보지.”
류강철은 울 밖에서 오토바이에 앉아 달려가면서 이쪽에 대고 손을 저었다.
최구장은 류강철이 간 후에도 그날 배운 일어 음표를 써보기도 하고 읽어보기도 했다.
성단은 그러는 영감을 보고 코웃음 쳤다.
“일본 놈들에게 막내아들이 참살 당했는데도 그런 놈들의 말을 본 따 해요?”
최구장은 바구니를 들고 근형과 계순, 명옥을 데리고 바깥에 나가는 노친을 흘겨보았다.
“아낙네들이 뭘 알아 그래? 소견머리 좁은 아낙네들이라고 원?”
최구장은 양미간을 찌프리더니 돋보기 밑으로 새로 배운 일어를 내려다보며 붓으로 쓰면서 익혀나갔다. 그러다가도 원수나 만난듯이 강철이 써놓은 일어 글씨에 대고 마구 승하기를 쳐놓고 마구 찢어버리었다. 
그는 붓까지 활 팽개치고 먹장구름이 점점 덮쳐오는 바깥 하늘을 쳐다보면서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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