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kim631217sjz 블로그홈 | 로그인
시지기-죽림
<< 4월 2025 >>
  12345
6789101112
13141516171819
20212223242526
27282930   

방문자

홈 > 詩人 대학교

전체 [ 1570 ]

690    살아있는 시는 류행에 매달리지 않고 시대를 초월한 시이다... 댓글:  조회:2245  추천:0  2017-09-02
대중적인 인기를 가진 시들의 약점들  최동호(문학평론가 고려대 교수)  쉽게 쓰여진 시가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다. 그러한 대중시는 청소년들의 정서함양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그러한 쉬운 시의 영향으로 누구나 젊은 시절 한 때 시인이 되고 싶어한다. 좋다 젊은이들에게 꿈을 꾸게 할 수 있다면 대중시도 그리 나쁜 게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를 계속 좋아하기에는 아쉬움이 많다. 젊은이들은 한 때 시원한 청량음료처럼 시를 좋아하다가 탄산수의 거품처럼 금세 사라지는 시적 정취를 다시는 거들떠보지 않게 된다. 이제 그들은 시보다 무협지나 판타지 또는 대하소설에 관심을 빼앗겨버린다.  그들이 한 때 좋아했던 그 유행가 같은 시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정말 그게 시였을까? 좋은 시는 사는 동안 가슴에 묻어둔 비문과도 같은 것이어야 한다. 언제 어느 때 꺼내어 그 반짝이는 언어를 담아봐도 싫지 않을, 그런 진정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쉽게 써진 시는 우선 감정의 처리가 값싸 보인다. 그저 말하기 좋은 고독, 이별, 사랑, 죽음, 슬픔 등의 주제에 한정되어 있다. 이러한 주제는 사실 모든 문학작품의 근원적인 문제로 많이 다뤄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만약 시인의 깊은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기보다 독자들의 인기에 영합하려고 끌어다 붙인 말초적인 감각에 의존한 것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위험한 선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결과 읽기 쉬운 시가 되어버린 이것들이 다른 이의 정서를 위축시키고 동적인 삶의 체험을 정태적으로 둔화시키는 역할을 해버리기 때문이다.  쉽게 쓴 시의 특징은 시인의 감정 처리가 안이하다. 편의주의에 감상만을 가미하여 시적 효과를 둔화시키고 자신의 감정을 국화빵처럼 찍어내듯 드러낸다. 그런 까닭에 누구나 접하기 쉬울 만큼 표현이 평범하다. 이는 지적 실험의식을 내세운 난해시의 불필요한 난삽성을 반박하는 것이 될 수 있고, 우선 읽혀진다는 점에서 독자들에게 긍정적인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런 시는 긴장이 너무 이완되고 정서적 깊이가 얕아, 잘 쓰여진 산문에 못 미치는 꼴이 되므로 경계해야 한다.  미숙한 시의 또 다른 특징이 있다면, 적절하지 않은 수사를 반복으로 감추면서 음악적 효과를 지닌 것처럼 만드는 점에 있다. 단순 반복의 리듬감이 시적 능숙함과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친화감으로 곡해되어 독자들에게 달콤하고 부드러운 위안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 이것이 참으로 우려될만한 점이다.  다원화 시대에 민중시 또는 순수시만이 의의가 있다는 주장은 억지이고 독선적인 논리일 것이다. 그리고 독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한 시가 졸렬하다는 생각도 역시 획일적인 생각이다. 나쁜 시는 유행가처럼 일회성을 가진다. 그런 의미에서 오래 읽혀지는 시는 결코 나쁜 시가 될 수 없다. 시는 인간으로 하여금 진실한 삶의 가치를 눈뜨게 하고 완성시켜주는 예술적 양식이기에 진정한 가치를 가진 시는 어느 시기에건 그 가치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시가 생명으로 숨쉬는 것이기에 살아있는 한 결코 외면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시는 어떤 시일까?  살아 있는 시는 유행에 매달리지 않고 시대를 초월한 시다. 시가 정서적 이유가 아닌 다른 목적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으면 건강하지 않은 시다. 그러나 세상살이를 정직하고 진지하게 노래한 것이라면 그 건강이 시의 향기가 되어 나타난다. 그런 시는 영혼의 울림을 줄 수 있는 시다.  끝으로 우리가 시를 쓰면서 경계할 이념들을 살펴보려 한다.  가장 먼저 순수주의를 경계할 일이다. 순수 지상주의는 애써 현실을 외면하고 독자적인 시 세계를 개척하듯 보이지만 김소월이나 윤동주같은 시 세계를 답습하는 꼴일 수 있다. 현실을 부정하고 비판하지 않으며 온갖 서정성만 그럴듯하게 발라내기로 자족하는 순수시는 게으른 삼류시와 같은 것이다.  둘째는 지나친 민중주의를 경계할 일이다. 특정 이념에 자신의 사상을 고정시켜 놓은 시각은 위험하다. 그것이 왜곡된 신념이라면 특히 위험한 일이다. 민중주의는 그릇된 역사를 바꾸고 싶어하는 정의감에 사로잡혀 다양성이 있어야 할 삶의 근본을 박탁하려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이것은 또 다른 기회주의와 다름이 없다.  셋째는 미욱한 자의 달관주의다. 달관주의는 신선사상에 근거한다. 그들은 삶의 궁극을 제대로 파악도 못했으면서 달관한 체 하기 쉽다. 이것은 극단적인 허무주의가 모습을 달리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파괴주의이다. 모든 존재는 모순으로 무너지면서 진화 발전하고 다시 생성된다. 새로운 발전을 위한 파괴는 언제나 유혹적이다. 그러나 새로운 생성을 모르는 파괴란 무의미하다. 
689    문제 시인, 유명 시인, 훌륭한 시인, 무명 시인... 댓글:  조회:2106  추천:0  2017-09-02
시인의 네 유형  임 보(시인) 굳이 세상 사람들을 몇 가지 부류로 나누어 본다면 문제아(問題兒), 유명인(有名人), 현인(賢人) 그리고 보통인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시인들의 경우도 문제 시인, 유명 시인, 훌륭한 시인, 보통 시인 등으로 구분하여 따져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문제 시인  문제를 일으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장본인들입니다.  이도 행동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와 작품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시인이 백주 대로에서 스트리킹을 했다면 이는 전자에 해당됩니다.  대개의 문제 시인들은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자들입니다.  물론 김관식이나 천상병 같은 낭만적인 문제 시인들도 없지는 않습니다.  반면 작품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는 이상(李箱)이라든지 김수영, 그리고 실험적인 작품을 쓴 80년대의 몇 시인들에게서 그 전형을 찾아볼 수 있겠습니다. 둘째, 유명 시인  이는 세상에 많이 알려진 시인입니다.  문제를 일으켜 유명해지기도 하고 처세를 잘 해서 유명해지기도 합니다.  잡지사나 출판사를 열심히 찾아다니며 작품도 많이 발표하고 상도 많이 탑니다.  신문에 글도 자주 쓰고 방송에 얼굴도 많이 내밉니다.  출판사와 궁합이 잘 맞으면 베스트셀러 대열에 끼어 광고판에 얼굴을 대문짝만하게 드러내기도 합니다.  평론가들을 동원하여 의도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언급하게도 만들고,  교과서에 작품을 실어 학생들에게 낯을 익히는데 진력합니다.  무슨 단체의 위원으로 성명서도 자주 내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감옥에 들어가는 것조차도 불사합니다.  때를 잘 만나면 국가기관의 장으로 발탁되기도 하고 비례대표로 국회위원이 되어 거들먹거리며 지낼 수도 있습니다.  물론 훌륭한 시인이기 때문에 자연히 유명해지는 경우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런 시인들은 다음의 셋째 항목의 범주에 넣기로 하겠습니다. 셋째, 훌륭한 시인  '훌륭한 시인'이란 작품은 말할 것도 없고 인품 또한 훌륭히 갖춘 시인을 뜻합니다.  훌륭한 시인 가운데는 세상에 이미 알려져 유명한 경우도 있고 아직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시인 본인이 생존해 있는 당대는 대체로 전자보다는 후자의 경우가 많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훌륭한 시인일수록 매명(賣名)에 연연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들은 사람과 작품이 공히 맑고 아름답습니다.  뜻은 높고 거동은 늘 겸허해서 난초와 같은 그윽한 향기를 품고 있습니다.  군자적 풍모를 지닌 선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넷째, 보통 시인  넷째는 첫째나 둘째의 경우가 아닌 무명 시인들입니다.  그런데 이 부류는 다시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욕심은 있지만 능력이 미치지 못해 무명으로 주저앉는 경우요,  다른 하나는 능력은 있지만 욕심을 줄여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경우입니다.  후자는 장차 훌륭한 시인으로 인정을 받아 유명해질 수도 있는 가능성을 지닌 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장차 훌륭한 시인'이 아니라 '훌륭한 시인'인데 세상이 그를 알아보지 못해 초야에 묻혀 지내는 경우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이들이야말로 공자의 저 '人不知而不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아도 개의치 않음)'의 경지에 이른 군자들이라고 이를 만합니다.  그러니 보통의 무명 시인들을 놓고 흙 속의 돌멩이 보듯 깔볼 일이 아닙니다.  그 가운데는 세상 사람들을 온통 청맹과니로 만든 무서운 '보석'이 담겨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문제 시인이나 유명 시인이 아니라 훌륭한 시인입니다.  그들은 괴로운 이들에겐 위로를 주고, 어려운 이들에겐 꿈을 심어 줍니다.  교만한 이들에겐 겸손을 가르치고, 간악한 이들에겐 사랑을 일깨우기도 합니다.  그들이야말로 세상을 보다 아름답게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문제 시인'이나 '유명 시인'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교란시키는 쪽에 가까운 무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남에 앞서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자들이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체면도 염치도 모르는 불량배들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문제 시인'이나 '유명 시인'을 마치 '훌륭한 시인'인 것처럼 잘못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안목이 없는 매스컴들이 이들의 농간에 넘어가 연일 이들의 이름만 떠들어대고 있으니 그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요사이 세상을 지배하는 큰 힘을 지닌 것은 언론 매체들입니다.  이들은 어떤 정치 단체나 법전보다도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거대한 재벌을 무너뜨릴 수도 있고,  한 무명인을 대 스타로 세상에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들의 힘을 잘 이용만 하면 '무명 시인'도 일조에 '유명 시인'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시인이란 어떤 사람들인가?  아니 어떤 시인이 바람직한 시인인가?  나는 시인이란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승화된 정신 세계의 소유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속적인 욕망을 벗어난, 적어도 떨쳐버리고자 하는 의지를 지닌 이들이어야 합니다.  진·선·미를 추구하고 염결(廉潔)과 지조(志操)를 소중히 여깁니다.  그런 기상을 우리의 전통적인 시인들은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곧 '조선정신'의 뼈대가 된 선비들입니다.  그래서 나는 바람직한 시인 정신을 선비 정신에서 찾고자 합니다.  오늘과 같은 혼탁한 시대에 시인이 해야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이 그러하니 시인 역시 부화뇌동해서 아무런 잡설이나 지껄여대면 그만일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러한 세상일수록 시인은 매서운 시정신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아직 크게 드러나지 않는 '보통의 시인'들에게 나는 다음과 같이 충고하고 싶습니다. "그대들은 흙 속에 묻혀 있는 잡석일 수도 혹은 보석일 수도 있다.  자신이 어느 편에 속하는가의 판정은  독자의 몫이 아니라 그대들 스스로가 결정할 일이다. 자신의 시정신은 무엇인가?  자신이 만들어낸 한 구절의 시가 이 세상을 보다 아름답고 맑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  그대들 스스로가 자문하면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나는 얼마 전에 오대산 계곡에 들어가 눈 속에 묻힌 월정사를 보고 왔습니다. 경내의 한 귀퉁이에 '윤장대'라는 작은 집이 있는데  나는 내리는 눈을 맞으며 그 집 앞에서 한동안 정신을 잃고 서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단청 때문이었습니다. 오색 찬란한 한 채의 다락집이 꽃보다 더 황홀하게 눈 속에 피어 있었습니다. 누가 이 깊은 산중에 저토록 고운 집을 만들었단 말인가? 그것을 만든 이의 무구한 마음이 곧 시의 마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는 이 별로 없는 이 깊은 산골에 눈부시게 피어 있는 한 채의 작은 집, 시는 어쩌면 그런 무욕의 마음에서 피워낸 한 송이 꽃일지도 모릅니다.     
시는 가장 위험한 칼 최문자 (시인, 협성대학교 문창과 교수) 벌써 오래 전 얘기다. 시 쓰는 친구가 어느 날 내게 이런 얘기를 하면서 울고불고 하던 얘기가 생각난다. “그 남자는 날 추억으로 남기고 싶어 하지만 나는 그 남자가 고통으로 남아서 견딜 수 없어, 어떤 칼로도 이걸 잘라낼 수 없다구.” 그때는 대중가요 가사쯤으로 들리던 그 이야기가 나이 들어 다시 생각해보니 깊은 의미가 담긴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억해봤자 상처만 깊이 내는 이별의 불행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잘라내지도 못하던 그녀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누구나 가슴에 말 안 듣는 칼 하나씩을 품고 살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의 의식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칼. 때로는 그 칼이 위기를 몰고 오기도 한다. 그 위험한 칼을 어떤 사람은 무심하게, 어떤 사람은 두려워해 가며 살아가고 있다. 잘 썰리지 않는 칼은 말썽만 부린다. 썰어야 할 물체의 부위 부위 상처만 내고 도마 위에 피만 낭자하게 고이게 만든다. 가끔 젊은 학생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그들이 부러워진다. 그들에게서 잘 썰 수 있는 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개인차가 있다고 하겠지만 비교적 그들은 싫증나면 버리고, 더러우면 바로 침 뱉고, 아니다 싶으면 끊고 중지한다. 자기 의식대로 잘 썰어지는, 잘 드는 칼을 자율적으로 사용한다.  나는 시인이다. 어려서부터 안 드는 칼에 익숙해져 있었다. 내 칼은 아무 힘이 없으며 그 누구의 사용 허락이 가능할 때만이 내 칼은 존재하고 작동할 수 있다고 믿어왔다. 그래서 외로움도, 소외도, 분노도, 싸움도, 심판도 이 모든 고통의 사실을 내 마음대로 썰거나 잘라내거나 수술하는 것에는 지극히 소극적이었다. 그래서 남이 사흘 앓고 일어날 고통도 나는 한 달이 넘도록 끙끙대며 앓아야 했다. 단숨에 잘라내는 성능 좋은 칼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우리의 이성을 따라 살만큼 충분한 능력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는 잠시 위안을 받을 수 있는 말이긴 하지만 오랫동안 나를 설득해내지는 못하는 말이다.  그 동안 고통의 환부를 바로 수술하지 못해서 받는 고통은 엄청나게 많았다. 때로는 잘 들지 않는 칼로 섣부르게 자르려다, 오히려 환부만 건드려 더 큰 환부를 만드는 일도 자주 겪었다. 그 때마다 뼈를 깎는 수치감, 자괴감을 추스르는데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는 여기에 멈추지 않는데 있다. 주변의 사람들이 내가 잘 안 드는 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건드리고 또 건드리고 더 건드릴 수 없을 때까지 건드린다. 폭발 직전까지 일단 건드려 본다. ‘변변치 못한 칼로 뭘 어떻게 하려고?’ ‘감히 나 같이 질기고 두꺼운 것을 그 칼로?’ 하고 얕잡아 본다. 그 잘 안 드는 칼을 도구로 삼고 그러면서 여기까지 살아왔다. 모든 인간관계, 문단생활, 학문세계, 교회생활, 결혼생활 속에서도 이러한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는 그 도구를 버릴 생각을 못한다. 그 도구 자체가 내가 갖고 싶어 가진 도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가 깊이 사고하고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 내 손에 들려준 도구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쩌지 못하고 그걸 사용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나는 가끔 신에게 이렇게 호소했었다. ‘아예, 제 손에 아무 도구도 들려주시지 않았더라면 저는 이런 어설픈 일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른 한 편, 이런 생각도 해본다. 나에게 아마 잘 드는 칼을 도구로 쥐어주었다면 수많은 것들이 잘려나가고, 또……또…… 생각만 해도 두렵고 소름 끼치기도 한다. 그 동안 크리스쳔이라는 사실, 대학교수라는 사실, 시인이라는 사실들이 내 삶에서 더욱 더 칼날을 무능하게 만들 때가 많았다. 어느 평자가 내 시를 다루면서 월평에 쓴 글이 떠오른다.  ‘날카롭고 잘 드는 칼이 스치고 사라진 곳에 그의 시는 시작된다. 그래서 그의 시 속에는 날카로움이 숨어있고 그래서 그의 시는 흐느적거릴 수 없다. 그는 푸른 날을 수면 위로 나타내 독자에게 보여주지 않지만 그의 시세계 속에는 날선 감각이 번득인다.’ 라고 했다. 부분적으로는 잘 짚은 얘기라고 보았다. ‘자기 이성이 사라진 곳에서 바로 신앙이 시작된다’라고 말한 키에르케고르의 말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박노해 시인의 시 「부드러운 페니스로」라는 시에서 ‘착한 사람도 화날 때 보면/성난 무처럼 뿔 속으로 들어간다’라는 행이 새롭게 기억된다. 가장 부드러운 부분은 언제라도 뿔이 될 수 있는 용기를 품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쇠처럼 강해 보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중의 치열한 전쟁과 고통을 치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 무딘 칼 때문에 슬픔과 절망을 통해 정화를 거치는 힘이 생성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갖고 있는 칼에 대하여 자신감을 가지고, 홍보전략을 갖는 21세기의 시점에서 나는 늘 위기를 느낀다. 요즘도 어이없게 시달리고 있다. 피만 흥건하게 괸 기분이다. 이 맘에 안 드는 보잘 것 없는 도구 때문에……. 잘 안 드는 칼은 가장 위험하다. 그래서 나는 늘 위험하지만, 주눅들지는 않는다. 뿔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새파란 무를 키우고 있기 때문에.     
나무, 詩, 천 개의 귀  마경덕(시인) 양버즘나무와 시인  그 많은 귀를 몽땅 잃어버렸다. 지난해, 찰랑찰랑 귀고리를 드리운 귀 밝은 나무는 다시 맨몸이다. 나는 목 잘린 캄캄한 나무 아래 서 있다.  봄은 가는데 어떻게, 이런 몰골을 하고 있나? 걸음을 멈추고 망연히 바라본다. 건너편 은행나무 쥐똥나무, 봄볕에 파릇파릇 머리가 젖는데 양버즘나무는 여전히 알몸이다. 번번이 참수를 당하고 잔뜩 독이 오른 나무의 몸속엔 짐승의 더운피가 흐른다. 성대가 제거된 나무들, 일제히 소리없이 울부짖는다. 몸에서 빠지지 않는 슬픔들. 옹이에 옹이를 덧댄, 끔직한 상처들로 나무는 이미 사나운 짐승이다. 허물을 벗듯 몸서리치며 껍질을 벗는 양버즘나무에 얼마나 많은 톱날이 다녀갔나. 불거진 옹이, 잘리고 잘려 뿔이 된 나뭇가지. 누구든 건드리면 뭉툭한 뿔로 치받을 태세다.  도로변에 즐비한 저 성난 뿔들, 전선(電線) 사이로 막무가내 모가지를 디미는 나무는 또 다시 헛농사를 꿈꾼다. 올해는 얼마나 농사를 지어야 하나. 몇 가마니의 그늘을 지상에 부려야하나. 목련이 피고 라일락이 지는 동안 허공에 빈 밭만 갈고 있다.  나무의 농사는 늘 적자(赤字)뿐, 한 트럭의 그늘이 실려 가고 한 트럭의 허공도 베어져 다시 빈손인 나무, 사월이 다 가도록 뭉툭한 손으로 터진 살을 꿰맨다. 한 땀 한 땀 제 몸을 깁고 있다. 나무는 끈질기다. 키를 늘리고 더 깊이 뿌리를 묻는다. 상처 많은 양버즘나무를 바라보면 가난한 시인이 떠오른다.  한 가마니의 그늘이 실려 갔다  그늘만큼 허공도 잘려나갔다  떨어뜨린 그림자를 싣고 버스는 달려가고  청소부는 돗자리만한 그늘을 쓸어 담았다  천 개의 귀를 가진 양버즘나무  찰랑찰랑 목까지 드리운  방울귀고리도 몽땅 잃어버렸다  늘 적자((赤字)인 나무의 농사법  마디마디 관절이 불거지고  욱신욱신 무릎이 쑤신다  이쯤 농사를 접으라 해도  고집쟁이 저 여자  놔두면 묵정밭 된다고  그럴 순 없다고  끙, 무릎을 일으킨다  헛농사를 짓는 양버즘나무  4월 느지막이  허공에 밭을 간다                    ―졸시 「양버즘나무」  용기를 잃는 건 사람들 뿐. 나무는 절망을 모른다. 진물 흐르는 생살 위에 금세 파란 귀를 내밀고 도시의 찌든 하늘과 매연과 소음을 천 개의 귀에 주워 담는다. 허공에 지은 집은 허공의 것, 자란 만큼 잘려지는 나무는 푸짐하고 넉넉하다. 제 발등에 무성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늙은 청소부는 돗자리만한 그늘을 자루에 쓸어 담는다.  언젠가 멋진 나무 떼를 만난 적이 있다. 한강 둔치로 가는 길, 묵은 양버즘나무들이 터를 잡고 있었는데 어찌나 머리끝이 까마득한지 그만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본디 그렇게 키가 높던 나무였다. 놔두면 절로 하늘까지 오르는 나무였다. 모두 당당하고 의젓했다. 팔을 벌려 한들한들 춤을 추고 있었다. 팔랑팔랑 바람을 주고받는 나무들, 나무들, 나뭇잎 옷자락이 푸른 하늘에 물결치고 귀고리 부딪히는 소리 찰랑 발등으로 떨어졌다. 수많은 방울귀고리를 흔들며 나를 굽어보고 있었다. 무심한 손들이 얼마나 나무에게 몹쓸 짓을 했는지, 관절을 부러뜨려 무릎 꿇게 하였는지 울컥 눈물이 고였다.  그저 오가며 허물 벗는 모습이나 바라볼 뿐. 우리가 나무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 찌든 밑동에 일련번호가 찍힌 명찰 한 장 꽝꽝 못질해 두는 것 밖에. 사철 피를 흘리며 제 생살을 벗겨내는 나무의 몸에 깊은 우물이 있을 것이다. 두레박이 텅, 떨어지는 서늘한 우물. 겨우내 물을 퍼 올려 발끝을 적시고 목을 축이지 않으면 그 혹독한 추위를 탈 없이 보낼 수 있겠는가?  아마 그럴 것이다. 이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우물이라는 슬픔의 웅덩이가 있을 것이다. 제 몸에 간직한 슬픔을 끊임없이 토해내고 그 슬픔의 힘으로 허리가 굵어지고 나이테가 새겨지고 마침내 향긋한 주검이 될 것이다. 나이테는 나무가 흘린 눈물자국, 물결처럼 파문 진 주름들이 눈물이 아니라면 어찌 죽음이 그렇듯 향기로울 수 있으랴.  우리가 무심히 지나칠 때도 나무는 물을 긷고 있을 것이다. 언 손 호호 불며 제 몸에 텅, 두레박을 던져 마지막 한 방울까지 우듬지로 끌어올릴 것이다.  시인도 한 모금의 시를 위해 깊이를 알 수 없는 서늘히 두렵고 캄캄한 우물에 몸을 던진다. 왜 시를 쓰는가? 견딜 수 없는 그 무엇이 시를 쓰게 한다. 참을 수 없는 슬픔 같은 것, 서러움 같은 것, 나를 목 메이게 하는 것, 목 타게 하는 것, 시는 나에게 막다른 골목이다. 어둡고 긴 골목을 구불구불 걸어와 닿은 막다른 골목, 더는 나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그런 막막한 벽이다. 나는 그 골목에서 절망하고 소망한다.  시는 늘 기다리라고 한다. 기다려. 기다려.… 시인들은 이미 기다림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 헛 약속에 속으며 날마다 늙어간다. 내가 조금만 더 행복했더라면 시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 전에 만난 이름 석자만 대면 누구나 다 아는 모 시인도  “나에게 오면 모두 불행해. 시를 쓴답시고 한 가지도 제대로 해 놓은 게 없어.”  하며 탄식하였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위치에서 존경받는 시인, 아니 많은 걸 가져 부러워했던 그 시인의 입에서 ‘불행’이라는 말이 서슴없이 튀어나왔다. 그때, 알았다. 시를 위해 두렵고 캄캄한 우물에 수없이 몸을 던진 분이라는 걸, 시로 인해 얻은 만큼 잃기도 했다는 것을.  끝방을 아시는가? 바닥에 닿아본 사람만이 끝을 만날 수 있다. 강미정의 끝방을 보자. 아마 이 시인도 시를 붙들고 안절부절 내려놓지 못했을 것이다. 오래오래 시를 품고 앓았을 것이다.  여러 개의 어둔 방 모서리를 돌고 돌아가  맨 끝에야 다다르는 막다른 골목 같은 방  수많은 빈 방 지키며 부르는 노래 간혹간혹 들리는  그 끝방, 가장 많이 아픈 아픔이  가장 많이 기다린 기다림이 산다는 방,                                ―강미정의 「끝방」 부분  시의 귀, 시인의 귀  시도 시인도 모두 천 개의 귀를 가졌다고 믿는다. 귀 밝은 詩. 놈이 얼마나 영악한지 상대가 저를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훤히 꿰고 있다. 그 많은 시인들이, 시야, 시야, 하고 부르지만 아무에게나 선뜻 제 살점을 떼어주지 않는다. 시 없인 못산다고, 나랑 한 살림 차리자고 붙들고 늘어지면 슬며시 마음을 열까. 그저 자나깨나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면 싸늘히 등을 돌린다. 어느 시인은 토씨 하나 때문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는데, 그 정도는 되어야 함께 놀아주지 않겠는가? 보이지 않는 바람의 마음까지 읽어내는 시인의 몸에는 얼마나 많은 귀가 달려있을까?  시인은 양버즘나무처럼 생각이 많다. 오 년, 십 년. 수십 년 마음밭을 갈고 詩를 키워 한 권의 시집을 내놓지만 공들인 것에 비해 헛농사가 대부분이다. 늘 적자뿐인 농사법(農事法)이다.  그래도 시인은 악착같이 시를 쓴다. 도무지 절망을 모르는 족속들이다. 시에 미쳐 모두 제 정신이 아니다. 멀쩡한 정신이면 몸을 허물어 시를 쓰겠는가? 나 역시 시에 빠져 애지중지 키운 화초도 죽이고 십 년 넘게 사랑한 열대어도 죽였다. 그 좋아하던 운동도 친구도 다 버렸다. 독한 시를 끊을 수 없어, 끊어지지 않아, 끊어지는 것들을 먼저 버리고 말았다.  시는 죽을 때까지 나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시를 잘 알지 못한다. 시로 인해 애태우고 있을 뿐이다. 시는 나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 아니 시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 늘 헛농사를 짓는 나에게 시가 달려와 줄 것인가?     
686    녀성의 립장에서 쓴 시와 남성의 립장에서 쓴 시... 댓글:  조회:2539  추천:0  2017-08-28
  문정희 시인과 임보 시인의 은근하고 재밌는 시, 시~~       /문학소녀           몇 년 전 문정희 시인의 라는 시가 알려지자, 그 시에 답시를 한 임보 시인의 가 알려지고,     그것이 마치 시 배틀인 양 회자되던 때가 있었다. 또한 이들을 중재한다며 중재하는 시인의 시도 몇 편 나왔던 걸로 안다. 다시 읽어봐도 어쩜 이리 적나라한 듯, 야한 듯, 예술인 듯, 능청을 부리는 듯, 술술 쓰셨는지... 웃음도 나고, 고개도 주억거리게 된다.     이런 식의 화답시틀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16세기에 백호 임제와 기생 한우가 주고 받은 시, 역시 16세기에 송강 정철과 기생 진옥이 주고 받은 완전 찐한 시... 어쨌든 의도하지 않아도 이런 시 배틀, 순수한 시로 화답하는 문인들의 글들이 가끔씩 나와 준다면 시가 어렵고, 시가 재미없는 사람들에게 시를 쉽고 가깝게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물론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적인 대결로 국한하지 않고, 성별이나 나이를 뛰어넘어서 하나의 주제나 소재로 시를 짓고 다양하게 화답시를 짓는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혼자 생각해 보고 상상해 본다.     1947년생인 문정희 시인, 1940년생인 임 보 시인... 고향이 전라남도이신 두 분 시인은 완전 솔직하신 게 공통점 같다. ㅎㅎ 여성의 입장에서 쓴 시, 남성의 입장에서 쓴 시...라는 게 확연하게 구분이 된다. 블로그 이웃님들 중에서도 이미 아시는 분이 많이 계시겠지만, 이런 시들을 어떻게 받아들이실 지 자못 궁금하다. 재밌는 두 시를 읽다가 쏟아지는 햇빛이 참 눈부셔서 잠시 눈을 감아보는 오후다.         치마 - 문정희     벌써 남자들은 그곳에 심상치 않은 것이 있음을 안다 치마 속에 확실히 무언가 있기는 있다     가만 두면 사라지는 달을 감추고 뜨겁게 불어오는 회오리 같은 것 대리석 두 기둥으로 받쳐 든 신전에 어쩌면 신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은밀한 곳에서 일어나는 흥망의 비밀이 궁금하여 남자들은 평생 신전 주위를 맴도는 관광객이다     굳이 아니라면 신의 후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자꾸 족보를 확인하고 후계자를 만들려고 애를 쓴다 치마 속에 무언가 확실히 있다     여자들이 감춘 바다가 있을지도 모른다 참혹하게 아름다운 갯벌이 있고 꿈꾸는 조개들이 살고 있는 바다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죽는 허무한 동굴?     놀라운 것은 그 힘은 벗었을 때 더욱 눈부시다는 것이다         ****************************************************************************     팬티 - 임보     -문정희의「치마」를 읽다가     그렇구나. 여자들의 치마 속에 감춰진 대리석 기둥의 그 은밀한 신전. 남자들은 황홀한 밀교의 광신도들처럼 그 주변을 맴돌며 한평생 참배의 기회를 엿본다     여자들이 가꾸는 풍요한 갯벌의 궁전, 그 남성 금지구역에 함부로 들어갔다가 붙들리면 옷이 다 벗겨진 채 무릎이 꿇려 천 번의 경배를 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곤욕이 무슨 소용이리 때가 되면 목숨을 걸고 모천으로 기어오르는 연어들처럼 남자들도 그들이 태어났던 모천의 성지를 찾아 때가 되면 밤마다 깃발을 세우고 순교를 꿈꾼다     그러나, 여자들이여. 상상해 보라 참배객이 끊긴. 닫힌 신전의 문은 얼마나 적막한가!     그 깊고도 오묘한 문을 여는 신비의 열쇠를 남자들이 지녔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보라. 그 소중한 열쇠를 혹 잃어버릴까 봐 단단히 감싸고 있는 저 탱탱한 남자들의 팬티를!      
685    걸어온 길과 걷고 있는 길과 걸어가야 할 길... 댓글:  조회:2186  추천:0  2017-08-28
세계를 항해 던지는 연애편지로서의 시들  김백겸(시인) *좋은 시란 무엇인가. 주제가 훌륭한 시, 상상력과 비유가 뛰어난 시, 가슴을 울리는 정서의 진폭이 큰 시 등 여러 시야가 있겠지만 결국은 시간에 살아남는 시가 아닐까. 시를 해석하는 주체인 사람도 시간 안에 죽는다. 준거는 아직까지 살아있는 역사상 위대한 정신(문화적으로 살아있는)의 거울에 내 시를 비추어보는 일이다. 내 시가 백년 후에도 읽혀질까. 시인은 두려운 마음으로 창작에 임해야 한다. 첨단과학이나 사회과학 쪽의 외국서 들을 보면 주제의 장이 바뀔 때마다 유명시인들의 짧은 시들이 인용된다. 시의 암시로서 주제의 방향을 드러내는데 독자는 시의 상상력에 고무된 채 본격적인 주제에 임하게 된다. 이미 암시를 받았으므로 저자의 어려운 주제도 그리 낯설지가 않다. 과거에는 국가의 흥망을 위한 전쟁이나 중대사를 결정할 때 왕들은 日官 을 불러 점을 쳤다. 그 점의 암시 때문에 고난과 역경을 감당하며 대업을 마친다. 점? 당연히 시의 형태로 제시된다. 점이 틀려도 시 속에 있는 다른 암시가 운명을 정당화한다. 프로젝트를 수행한 주체는 실패해도 신의 숭고한 뜻에 따른 영웅이 된다. 그렇게 해서 영웅의 정신과 시의 정신(사실은 신의 정신)은 불멸을 획득한다. 시간이자 거품인 인간이 계속 태어나 도도한 문화의 강을 이루는 한.    *시인은 사막이 표상하는 금욕과 은자의 생활을 통해 “신의 얼굴”을 보고 싶은 욕망을 형상화 한다. ‘피라미드’는 이집트인들이 ‘영원으로 가는 배’로 부른 건축물이며 태양신 “라”의 지혜가 들어간 타임머신이다. 시인은 ‘피라미드’의 이미지를 통해 초월을 통해 신에 이르고 싶은 열망을 노래한다. 일상의 속악한 사물에서 聖의 속성을 발견한 시인의 눈은 예언이나 찬양으로 흐르지 않는다. 비밀은 일상의 수면아래 잠겨 있으며 시인은 그 비밀을 은밀한 인식아래 감춘다.    *기호가 상징으로 읽혀야 시의 다의적 의미가 성립한다. f(x)라는 함수를 보면 수의 관계가 이세상의 모든 기초라고 주장하는 피타고라스 학파를 연상하게 한다.  현상계를 설명하는 연기론의 수학적 해석 같다. x,y,z 축의 삼차원공간에 시간 축을 추가해서 사차원이 되는 인식이 우리의 보통인식이다(인간의 경험인식이라고 해야 하겠다. 실제의 물리 우주는 매우 다르다. 초끈 이론에 의하면  수학의 11차원이 동원된다).  물리적 계산으로는 정지하고 있는 물체도 시간 축을 따라 운동 한다(상상하기 어렵지만 광속으로 운동한다고 한다. 물체의 위치에너지가 광속의 운동에너지로 변할 때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시인의 상상력은 우리의 경험인식을 넘어선 곳까지 미쳐야 이세계의 깊은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사유대신 감각위주로 쓴 시들을 보면 일단 독자가 편하다. 안마를 받을 때의 쾌감과 비슷한 느낌이 사유의 몸을 자극하는 것 같다. 독자는 작자의 안마에 정신을 맡기고 즐거운 느낌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사유시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똑같은 밥상에 물린 사람이 다른 별식을 찾는 것과 같다)  아침의 고요와 저녁노을의 정열을 감각적으로 그려내지만 노련한 바둑고수처럼 작가의 계산은 모두 뒤로 숨어있는 시. 시는 사랑에 들떠 할 말이 많은 여자의 말씀과 심장 속의 말씀을 드러내고자 하는 남자의 침묵이 모두 포함되어야 한다 *시의 암시는 인간의 생의 의지이다. 자연의 입장에서는 아침과 밤이 같고 인간들이 사용하는 가마솥이나 땅 속의 철광석이나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의 문화는 생에 유리한 상황을 선으로 인식하고 찬양한다. 쇠란 인간이 자연을 경작하는 도구의 상징이다. 쇠의 총과 칼이 정복에 나서고 쇠가 고층건물과 다리를 세운다. 시란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의식세계에 대비되는 인간정신의 총과 칼이다.   *시는 시인이 세계를 향해 던지는 연애편지이다. 사랑을 주제로 노래할 때 시인의 무의식은 현실의 연인너머에 있는 대타자를 부르게 된다. 그래서 ”시적 본질은 사랑의 본질과 닮아있다“라는 명제가 성립 한다. 나(에고)를 죽임으로서 타자와 나는 “사랑의 밖이며 안”인 차별의 세계를 극복하고 행복(유토피아)의 세계에 이를 수 있는데 시인은 현실(현상계)에 갇혀 대타자(초월계)를 향한 문을 열거나 닫는 존재이다   *시인들이 아니마를 보는 작업은 흥미롭다. 시인들의 아니마가 어떤 타입이냐가 시인들의 정서적 안경을 결정한다. 원시적 여성상, 낭만적여성상, 영적여성상, 지혜여성상(칼 융의 분류)이 있으나 주된 심리에너지의 발현일 뿐 네 타입은 같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心魂이란 자아를 초월하는 정신의 자율성이며 신성한 힘(Numinose)이며 강렬함과 자유로움을 가지고 있다‘(이부영, "아니마와 아니무스"참조))   *나무를 시의 은유로 보자. 인생의 여름이란 20대 후반에서 40까지 가을은 50대 중반까지로 볼 수 있는데 이 시기는 무성한 잎과 가지와 열매를 위한 시간이므로 욕망과 수확을 위해 바쁜 시간이다. 이 시기를 지나면 눈은 아프고 발이 피곤해진다.  벤치에 앉아 무심한 구름과 바람을 바라보는 현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아직도 詩라는 복마전을 통과해야 하는 자의 삶은 고통스럽다. 그러면서도 시인들이 고투하면서 쓴 시의 암시가 만들어내는 풍경의 오솔길을 따라 걷는 일은 즐겁다. 그 안에 ‘내가 걸어온 길’들과 ‘걷고 있는 길’과 ‘걸어가야 할 길’들이 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R.프로스트)'라는 길을 걷는자의 회한과 함께.  /출처:웹진 시인광장    
684    시어의 보고는 비어, 속어, 사투리, 은어, 구어 곧 활어이다... 댓글:  조회:2460  추천:0  2017-08-24
      23일, 오전 제13호 태풍 'HATO(天鸽)'가 광동 연해지역에 강타... =============================================== 글쓰기에 대한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다만 글쓰기를 통해서 스스로 익혀야 한다. 내가 쓴 글 속에 길이 있다. 그 길을 따라 가라. 재능은 필요치 않다. 남들보다 잘 쓰려 하지 마라. 다만 자기보다 잘 쓰려 하라.  < 시를 쓸때 꼭 지켜야 할 것들>  1. 구어를 사용하라    → 구어는 죽지 않는 살아 있는 입말이다. 그래야만 리얼리티가 살아난다. 그것에 리듬이 있다.  2. 시간, 장소, 사건을 일치시키라    → 이것을 일치시키면 한 가지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끝까지 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으면 무슨 말인지...오락가락  3. 마치 자신에게 이야기 들려 주듯    → 그러나 흥분하지 말고 차분하게...차분하게  4. 대상, 사물, 사건에 대해 내 생각의 촛점을 맞추지 말고    → 대상이 주가 되게 쓰라. 사물 속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 내는 것이 시인의 몫이다.  5. 머리 속에서 무엇을 만들려고 하지 말라.    → 한 마디 말은 던지면 말이 연상의 꼬리를 물고 날으는 상상력 속에서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6. 가장 시적인 비유는 시 자체로 이미 비유이므로 비유가 없어도 시는 시다.    → 모든 사물 속에는 시가 들어 있다. 그것을 떠오르게 하라  7. 제재 자체가 이미 비유인 글감...그것이 바로 시  8. 한 가지 이야기를 끝까지 하라    → 불필요한 설명이 개입되는 순간 그것은 시가 아니라 수필이다.  9. 상식을 뒤엎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하라  --->참신하지 못한 비유, 관념의 나열은 독자가 따라 가면서 읽을 이유가 없다.  10. 아름답고 예술적인 것을 지양하고 관념적이지 않고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하라  --->그것은 구어로 시작된다. 쉽게 와 닿는 것이 쉽게 전해진다.  < 직업시인과 아마추어시인의 차이 >  ○ 영감이 어디서 오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방송국으로부터 보내오는 전파를 잡기 위해 라디오 세트가 필요하듯이, 시인은 영감의 메시지를 잡기 위해 자기 몸 안에 장치된 일종의 예민한 기계 장치를 필요로 한다. 이 장치가 곧 시적 상상력이다.      누구나 다소간의 시적 상상력을 가지고 있지만, 시인의 상상력은 몇 가지 특수한 방법으로 발전된다. 마치 운동으로 근육을 발달시키듯이, 시인은 연습에 의해 시적 상상력을 발달시킨다.      시적 상상력을 발달시키는 한 가지 방법은 시를 쓰는 것이다. 시를 쓰는 습관이야말로 직업적인 시인과 이따금 심심풀이로 시를 쓰는 사람을 구별하는 차이점이다. 또한 시인은 마치 마술사가 무의식적으로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오른손을 가만히 두지 않듯이, 늘 단어들을 만지작거림으로써 시적 상상력을 발달시킨다.      특히 중요한 점은 시인은 응시를 통해 시적 능력을 발달시킨다는 점이다. 즉 그는 자기 밖에 있는 세계와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자신의 모든 감각을 이용해 인생의 불가사의와 슬픔과 기쁨을 느끼며, 끊임없이 인생의 밑바닥에 숨어 있는 신비적인 바탕 무늬를 잡아내려고 애쓴다.      그러나 시인이 아무리 자기 직무에 충실하더라도, 아무리 연습과 응시의 노력을 쌓더라도, 그리하여 아무리 교묘한 말의 장인이 된다 하더라도, 결코 영감을 자기 힘으로 좌우할 수는 없다. 영감은 몇 달이나 그의 곁에 머물러  있을지 알 수 없다. 몇 년 동안이나 그를 팽개쳐 둘지 모르며, 언제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  셀리 : “창조하는 정신은 꺼져가는 석탄 불꽃과 같다. 보이지 않는 내부의 힘이 변덕스러운 바람처럼 불꽃을 불어 순간적인 밝음을 보여준다.”       - 이성복 편, ‘예술의 거울’ 보유편 중 ‘세셀 데어 루이스’를 재인용.  < 시에 대한 몇가지 편견>  *  우리는 시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 손이 분명히 해보다 작지만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 있으므로 ‘해보다 손이 크다’라는 착각을 한다. 시에 대한 우리들의 편견 중에 하나가 비유가 많으면 시적이라고 착각하는 경우이다. 영화 "LONG SHIP"에서 잃어버린 황금종을 찾아 3년을 헤매다가 마지막으로 종이 있다고 하는 하얀 섬에 도달했을 때, 결국 거기서 발견한 것은 그 "섬 전체가 종"이란 것이었다. 이것은 바로 시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비유의 비유, 시 자체가 비유인 경우다. 김소월의 시에 무슨 비유가 있는가. 하지만 소월의 시는 한 편의 시 자체가 곧 비유이다. 씨리한(?) 비유를 쓸 바엔 쓰지 말아야 한다. 현실 자체가 황금종이며 이것을 발견하는 사람이 곧 예술가이다. 시적인 수필을 쓰지 마라.  *  또 ‘체험을 많이 하면 좋은 시를 쓸 것이다, 감정이 풍부하면 더 좋은 시를 쓸 것이다’ 라는 편견이 있다. 시의 3요소는 작가, 대상, 언어인데 시가 시를 쓰는 사람 아래 있다는 착각을 갖는다. 말하자면 시인의 체험과 감정에 의해 좋은 시가 탄생한다는 것. 착각이다. 그러면 대상이 우위인가? 대나무를 바라보다 병이 났다는 왕양명의 "格物致知" 일화도 있지만 대상에 대한 치밀한 탐구가 곧 좋은 시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시는 절대적으로 말에 있다. 말라르메도 시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말’이라고 했다. 말에는 온갖 현실의 오물이 묻어있다. 그러므로 말을 제대로 따라가면 현실은 저절로 드러난다. 말이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축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말은 내시경이다. 이를 통해 ‘緣起’를 따라 간다. 말을 통한 발견이 필요하다. 시에서 웅변은 가장 저급한 것이다. 눌변이 좋다. 시에서는 말이 감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따라서 시는 곧 말장난이다. 그러나 많이 드러난 말장난은 안좋다. 말장난이긴 하지만 의미있는 말장난이 되어야 한다.  *  세 번째, 시보다는 시작 노트가 더 좋은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시는 시작 노트 쓰듯이 써야 한다. 시를 쓴다는 의식 아래 시를 쓰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 좋은 시를 쓸 수가 없다. 녹차는 첫물을 걸러 내고난 뒤 두 번째가 가장 맛있다. 이는 모든 운동의 원리가 된다. 골프는 ‘힘 빼는데 3년’이라고 한다. 테니스도 어깨와 손목에 힘을 빼야 원샷을 할 수 있다. 내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말이 움직이는 게 더 자연스럽다. 시를 쓰려고 하지 말고 시작 노트 쓰듯이 써야 한다. 실제로 김종삼 시인의 라는 시는 그의 그 어떤 작품보다도 가장 아름답다.  비슷한 이야기지만, 사물을 묘사할 때는 명함판 사진을 그리려 하지 말고 스냅사진을 그리도록 해야 한다. 스냅 사진이야말로 한 순간 속에 "영원"이 들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명함판으로 봐서야 무슨 애틋한 느낌이 들겠나. 명함판 사진은 공적인 차원의 사회적 가면이다. 명함판이 가장 비시적이다. 로댕은 손의 표정을 기막히게 표현해내는 조각가인데 많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가 그런 작업을 한 것은 얼굴은 거짓말을 하지만 손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 외국 명문 극단 배우들이 가면을 쓰고 연기연습을 하는 것은 손으로, 몸짓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익히기 위해서다.  그런 차원에서 글을 쓸 때 문어로 쓰지 말고 구어를 써라. 밥 해놓고 3일 지난 게 문어다. 구어 속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 언어의 생생한 리듬이 있다. (베토벤의 일화; ‘내가 돈이 어디 있나, 이 사람아~ (♩♬♩)’ 이 가락이 유명한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 시 쓸 때 말을 혀로 굴려볼 필요가 있다. ‘얼굴’이라는 말보다는 ‘상판떼기’가 훨씬 실감나지 않는가. 비어, 속어, 사투리, 은어는 시어의 보고이며, 구어는 곧 활어이다.  자신이 지금 시를 쓴다고 생각하지 말고 얘기를 한다고 생각하라. 피아노 소리는 피아니스트의 어깨를 보면 알 수 있다. 완전히 풀려야 한다. 힘을 빼려고 하면 더 힘이 들어간다. 잡생각을 지우려면 다른 걸 채워야 한다. ‘마음을 비웠다’라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비우려면 채워야 한다. 자신에게 말하듯이, 사랑하는 이에게 하듯이, 기도하듯이 말을 하라. 결국 머리가 몸을 뻣뻣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원칙들은 모든 예술에 통한다. 예술에 통하는 것은 곧 스포츠에 통한다. 곧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683    "이 아름다운 날들이 언제까지라도 계속되길"... 댓글:  조회:2399  추천:0  2017-08-24
   (...전번 계속)흔히 키치는 사랑이나 평화 같은 보편적 가치관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그것을 통해서 스스로의 의미나 존재가치를 강화시킬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키치적인 작품이 진지한 예술, 가치 있는 예술로 잘못 평가되는 경우도 주로 이런 경우이다. 하지만 키치적인 작품에서 그런 보편적인 가치는 현실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못한다. 현실의 매개 없는 사회적 가치의 설파, 사회적 고민이나 갈등을 무화시키는 종교적 이념의 주입이 키치적인 작품의 주요 특징이다. 하지만 다음 작품은 보편적 가치를 말하지만 결코 관념적이거나 상투적이지 않다.  마른 더덕처럼 늙은 여자 하나 골목길을 바쁘게 지나갑니다  그녀의 몸안이 궁금하다는 듯 명아주와 강아지풀이 키를 높입니다  여자의 머리는 하얗고 갈옷 젖은 데는 먹색입니다  오래도록 땅의 문을 두르렸을 지팡이는 무릎 높이입니다  통통통 지팡이가 땅 속 사정을 묻는 소리  안에서는 아직 기척이 없나봅니다  바닥을 밀쳐내는 여자의 발걸음이 비꽃보다 빠릅니다  - 이대흠, 「비 그친 사이」(다층 가을호)    이 시는 살아 있는 생명에 대한 사랑을 보여준다. 살아 있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시인은 이제 살날이 얼마남지 않은 “늙은 여자”에게서 발견한다.  시에서 늙은 여자는 하얀 머리와 먹색의 갈옷으로 점점 흑백 사진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며 지나는 길에 있는 풀들마저 그녀의 생명의 한도를 알고 싶어 할 정도로 이제 꺼져 가는 생명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잠시 비가 개인 틈을 타 그녀는 빠른 발걸음으로 자신의 남은 생명력을 발산한다. 늙었다는 것은 낡아가는 것이고 그것은 삶의 영원한 어둠속으로 금방 꺼져 가는 경계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그것을 더 아름답게 볼 수가 있다. 늙은 생명이 그 생명의 마지막 힘을 보여줄 때 생명의 소중한 가치가 더욱 강조되고 그래서 더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다. 생명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인가를 한 폭의 그림으로 아주 선명하게 보여준다. 강요하거나 가르치지 않고 생명의 마지막 활기를 보여줌으로써 생명에 대한 안타까운 사랑을 선물처럼 우리 손에 쥐어주고 있다.    자연을 그리는 시 중에 키치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자연을 그려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위안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또한 생태주의니 환경보존이니 하는 가치를 실현하는 이상적 공간이 자연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인 현실에서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비현실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연의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나 언어적 표현의 참신함이 없이 자연을 그리는 것은 이발소에 걸린 물레방아 그림만큼이나 키치적인 작품이 되기 십상이다.        서로의 등과 배를 맞댄 나뭇잎    뒤의 알 무언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느낌만으로    따스한 오후    불태운다 더 이상 푸를 수 없어 누렇게 말라 바스락대는 나뭇잎 고소하게 피어오르는 고통 희망 추억 바로 이 맛이야 잿불 속에 넣어 호호 불어가며 먹던 계란 껍질로 지은 밥 톡톡 부화하지 못한 정령들이 날아오른다    날비 자 나비 버르적 벌레들이 사라지면 인간은 행복할까 나비 날개로 벌레의 눈으로 태어날 아이들을 위하여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슬어    이 아름다운 날들이 언제까지라도 계속되길……    무심중간 만져지는 뾰루지    힘껏 짜낸다 하루가 찡긋,    저물어간다        - 고성만, 「슬어」(우리시 11월호)    하지만 결코 위의 시를 키치라고 할 수는 없다. 음풍농월적인 자연예찬을 하고 있거나 자연과의 합일을 비현실적이고 탈현실적인 방식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자연과 함께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시인은 “슬어”라는 단어로 아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곤충들이 작은 알들을 한꺼번에 낳은 모습을 ‘슬다’라고 한다. 그런데 넓게 보면 우리가 자연 속에 살고 있는 모습이 바로 이 모습이다. 시인은 자연의 모습에서 같이 살고 있음을 보고 있고 그것을 ‘슬다’라는 말로 새롭게 의미부여하고 있다.    최근 산문시의 경향이 커져가고 있다. 전통적인 문법을 파괴한 산문시가 새롭고 전위적이라는 인식이 암암리에 퍼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산문시는 키치적 경향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하지만 산문시라고 키치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정제되지 못한 언어로 개인의 경험을 산만하게 나열하는 것이 최근 유행이 되고 있고 유행은 곧 키치를 낫는다. 진지한 형식적 고민과 탐구 없이 줄글을 쓴다고 그것이 새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전통적인 시적 형식과 그 형식에 따른 운율에서는 결코 느껴질 수 없는 새로운 호흡과 언어적 질서를 만들어 낼 때 산문시는 그 의미가 살아나게 된다. 다음 시를 통해 우리는 산문시가 도달할 수 있는 어떤 경지를 보게 된다.    죽은 자의 붉은 靈이 내 몸에 점점이 찍혀 이 밤은 습하다    밤이면 구름을 뚫고 가장 반짝이던 유성이 가장 먼저 물가로 내려온다 나는 당신의 천 년 전생을 이해하기 위해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물의 거울을 들여다본다 사랑했지만 단 한 번도 사랑을 말하지 못했던 불온한 한 生이 두 눈을 끔벅거리며 나를 본다 한 다리를 잃고 어깨에 피를 흘리던 젊은 병사가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나를 본다 하얀 수수꽃다리를 귀에 건 가는 팔의 누이가 한 모금의 물을 손바닥에 적시며 나를 본다 천 년 전이거나 혹은 천 년 후이거나 단단한 열매를 궁글리던 줄다람쥐 몇이 산과 들과 밭의 물가에서 풍덩, 작은 손을 맞대고 있다 한 치의 혀로 차마 발설하지 못할 것들이 밤이면 물 위에 어리어 있다    뭍의 짐승들은 나를 가끔 삵이 아니라 삶이라 부르기도 한다      - 김산, 「삵」 (우리시 11월호)    인디언들에게 있어 삵은 영적으로 ‘비밀의 지킴이’ 또는 ‘비밀을 아는 자’라는 가지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지나가다 들여다보는 작은 연못, 목말라 잠시 목추기던 시냇물, 산과 들과 밭가에 흐르고 있는 물가에는 모두 거기에 비친 많은 삶들의 흔적이 있다. 잠시의 일별이지만 거기에는 존재의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시인은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존재들의 모습이 뒤섞이는 공간이 바로 자연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멸종위기의 보호동물 ‘삵’은 그것을 알고 있는 자연의 영혼이고 자연 그 자체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러한 존재들의 삶과 그 삶의 뒤엉킴을 표현하기 위해 긴 줄글을 썼다. 그것은 정리되거나 분절되거나 체계화될 수 없는 혼돈이며 시간적으로도 동시이지만 또한 무한히 다른 시간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산문의 리듬이 바로 이러한 시적 의미를 배가하고 있다.     모든 것이 상품이 되고 문학이나 예술도 또한 팔려야만 가치를 갖게 되는 시대에 대중성이라는 것은 바람직한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바람직한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다. 많이 팔리고 많이 읽혀야 의미를 가진다는 강박관념이, 새로움으로 우리의 상투화된 일상을 괴롭게 뒤흔드는 진지한 예술적 성찰을 약화시키고, 키치라는 가짜 예술을 양산하고 문화산업이라는 이름의 예술의 카타콤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 시대에 시를 쓴다는 것은 키치에 대한 저항이다...    
682    당신들은 아버지 사타구니를 닦아본적 있으십니까?!... 댓글:  조회:3190  추천:0  2017-08-23
         아버지의 성기를 노래하고 싶다       볼품없이 누워 계신 아버지   차갑고 반응이 없는 손   눈은 응시하지 않는다   입은 말하지 않는다   오줌의 배출을 대신해주는 도뇨관(導尿管)과   코에서부터 늘어져 있는   음식 튜브를 떼어버린다면?      항문과 그 부근을   물휴지로 닦은 뒤   더러워진 기저귀 속에 넣어 곱게 접어   침대 밑 쓰레기통에 버린다   더럽지 않다 더럽지 않다고 다짐하며   한쪽 다리를 젖히자   눈앞에 확 드러나는   아버지의 치모와 성기      물수건으로 아버지의 몸을 닦기 시작한다   엉덩이를, 사타구니를, 허벅지를 닦는다   간호사의 찡그린 얼굴을 떠올리며   팔에다 힘을 준다   손등에 스치는 성기의 끄트머리   진저리를 치며 동작을 멈춘다   잠시, 주름져 늘어져 있는 그것을 본다   내 목숨이 여기서 출발하였으니   이제는 아버지의 성기를 노래하고 싶다   활화산의 힘으로 발기하여   세상에 씨를 뿌린 뭇 남성의 상징을   이제는 내가 노래해야겠다   우리는 모두 이것의 힘으로부터 왔다   지금은 주름져 축 늘어져 있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하나의 물건      나는 물수건을 다시 짜 와서   아버지의 마른 하체를 닦기 시작한다.                            ―졸시, [아버지의 성기를 노래하고 싶다] 전문   솔직히 말씀드려 이 시는 완벽한 거짓말입니다. 제 아버님은 이날 이때껏 입원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허리가 많이 안 좋으십니다만 올해도 고향에서 밭농사를 짓고 계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 시를 읽은 많은 독자가 대부분 실제상황인 줄 알고 제게 물어왔습니다. 부친을 간병하느라 고생이 많았겠다는 위로의 말을 들을 때마다 곤혹스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시는 재미교포 2세인 루이스 최가 쓴 {생명일기}(김유진 옮김, 김영사 간행)라는 간병기를 보고 제 체험인 양 가져와서 쓴 것입니다. 물론 아버지의 성기 운운하는 대목은 그 책에 나오지 않습니다. 식물인간의 상태가 된 어른을 간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여실히 기록되어 있는 그 책을 보고 만약 제 아버지가 저런 상태가 되었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상상해보면서 한 편의 시를 썼던 것입니다. 이 시가 시적 진실을 추구하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책을 통한 간접체험을 직접체험으로 슬쩍 바꿈으로써 시를 쓸 수 있었습니다. 한 인간의 체험에는 한계가 있는 법인데, 간접체험과 상상력은 그 한계를 무한정 확장해 줍니다.      
681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 댓글:  조회:2567  추천:0  2017-08-23
시의 감상   ​   (1) 감상에 대한 이해   ➊감상의 개념:감상이란 작품을 이해하고 평가하며 음미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예술 전반에 걸쳐 폭넓게 행해지는 활동이다. 시는 삶의 과정이나 자연 속에서 시인이 느낀 감동과 생각을 드러낸 것이므로, 이를 감상하는 일은 시로 표현된 시인의 생각과 감동을 이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➋소통 과정으로서의 감상:시 작품의 감상은 시인과 독자 사이의 적극적인 소통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독자는 자신의 입장에서 작품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기도 하고, 부정적으로 비판하기도 한다. 또한 자신이 가진 배경 지식을 바탕으로 시인의 의도를 파악하거나, 현실 세계를 재해석한다. 이런 모든 과정은 사회적 의사 소통 과정과 유사하다. 전달하려는 의도를 가진 발화자와 그 의미를 해석하여 수용하는 청자 사이의 의사 소통 과정이 작품을 통해서도 일어나는 것이다.   (2) 감상의 관점   문학 작품의 감상 관점은 ‘현실 세계, 작가, 독자, 작품’ 중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아래와 같이 도식화하여 이해할 수 있다.   ▶절대주의적 관점은 작품 내적인 요소만 고려한다는 뜻에서 ‘내재적 관점’이라고 하고, 작품을 둘러싼 외적 요소에 초점을 맞추어 감상하는 반영론·표현론·효용론적 관점은 ‘외재적 관점’이라고 한다.   ➊내재적(內在的) 접근 방법:어조, 운율과 심상, 표현 기법, 시상 전개 등 시의 내적 요소를 중심으로 감상하는 방법   ㉠ 절대주의적 관점:시 작품을 외부 요소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관점이다. 주로 작품 내적 요소들을 중심으로 감상하게 되는데, 표현과 문체상의 특징이나 의미 구조 등 형식적 측면과 내용적 측면을 파악할 수 있는 요소들에 주목한다.   ➋외재적(外在的) 접근 방법:작품을 중심으로 작품 밖에서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현실, 작가, 독자)을 중심으로 감상하는 방법   ㉠ 반영론적 관점:문학 작품에 나타난 현실과 실제 현실 세계의 관련성에 초점을 맞추어 감상하는 관점이다. 작품 내에 시대적 배경이나 사회상이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를 중심으로 작품을 해석한다.   ➋외재적(外在的) 접근 방법:작품을 중심으로 작품 밖에서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현실, 작가, 독자)을 중심으로 감상하는 방법   ㉠ 반영론적 관점:문학 작품에 나타난 현실과 실제 현실 세계의 관련성에 초점을 맞추어 감상하는 관점이다. 작품 내에 시대적 배경이나 사회상이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를 중심으로 작품을 해석한다.   ➌종합주의적 접근 방법:내재적 관점과 외재적 관점을 동시에 적용하여 감상하는 것을 말한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 한용운,   이 작품에서 ‘님’은 화자가 추구하는 절대적 존재로서 시의 의미 구조 형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즉, 화자의 정서가 이별의 ‘슬픔’으로부터 ‘희망’으로 변화하게 만드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내재적 관점). 또한 ‘님’의 의미는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이 스님이었음을 고려한다면 ‘부처님’으로 볼 수 있으며,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조국’으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렇듯 작품을 다양한 관점에서 수용, 결합하여 분석할 때 작품 이해의 폭이 넓어질 수 있다.   (3) 시에 나타나는 미의식   시를 포함한 문학 작품에서 창조되는 아름다움은 숭고미(崇高美), 우아미(優雅美), 비장미(悲壯美), 골계미(滑稽美) 등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➊숭고미: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냄으로써 고고한 경지를 체험할 수 있게 하는 미의식이다. 숭고미는 감동, 거룩함, 장엄함 등을 포괄하는 아름다움이다. ➋비장미:삶의 정한(情恨)과 비극적 상황 인식 등을 형상화함으로써 갈등과 대결을 통해 비장한 결의가 느껴지는 미의식이다. 타협하지 않는 꿋꿋한 의지, 좌절로 인해 극에 달한 슬픔과 한(恨) 등에서 오는 아름다움이다.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어라. //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 마침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 이육사,   일제 강점기라는 암담한 시대 현실 속에서도 강인한 신념과 의지로 맞서 싸우겠다는 단호한 결의가 나타나 있다. 비극적 상황 속에서 괴로워하면서도 타협하지 않는 의지가 드러나 있어 비장미를 느끼게 한다.   ​   ➌우아미:작품이 조화롭고 질서 있는 상태일 때 느껴지는 미의식으로 작품의 모든 부분들이 하나의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임을 의미한다. 아름다운 형상이나 수려한 자태를 묘사함으로써 자연의 멋과 풍류를 드러내는 고전 시가에서 많이 나타나는 아름다움이다.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 끝 풍경이 운다.   처마끝 곱게 늘이운 주렴에 반월(半月)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가는 밤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자주빛 호장을 받친 호장저고리   호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 내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곡선을 이루는 곳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 조지훈,   전통 의상을 입고 춤을 추는 여인의 우아한 모습을 예스러운 말투와 가락으로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➍골계미:풍자나 해학의 수법으로 우스꽝스러운 상황이나 인간상을 그릴 때 느낄 수 있는 미의식이다. 골계미는 대상과 상황이 어울리지 않는 부조화를 근거로 한 것으로 재미와 변덕스러움, 이상함과 기묘함 등에서 오는 아름다움이다.   소낙비는 오지요 / 소는 뛰지요   바작에 풀은 허물어지지요 / 설사는 났지요   허리끈은 안 풀어지지요 / 들판에 사람들은 많지요. - 김용택,   농부가 풀짐을 지고 오다가 설사가 났는데 느닷없이 소낙비는 오고, 소는 뛰고, 허리끈도 풀리지 않는 당황스러운 상황이 짧은 시행으로 표현되어 재미를 유발하고 있다.
680    시세계, 시나라 좁고 넓고 짧고 길다... 댓글:  조회:2492  추천:0  2017-08-22
  한줄 시 모음 / 일본     오래 전부터 일본에는 한줄짜리 시를 쓰는 사람들이 있어 왔다.  그들은 아무것도 가진것 없이 먼길을 여행하고 방랑하며 한줄의 시를 썼다. 길에서 마주치는 풍경에 대해, 작은 사물에 대해, 벼룩과 이와 반딧불에 대해,  그리고 허수아비 뱃속에서 울고 있는 귀뚜라미와 물고기 눈에 어린 눈물에 대해......   한줄의 시로 그들은 불가사의한 이 지상에서의 삶을 표현하고자 했다. 때로 그들에게는  한줄도 너무 길었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 하이쿠.  번개처럼, 우리들 생에 파고드는 침묵의 언어들!  (편의상 세줄로 옮김니다)     허수아비 뱃속에서  귀뚜라미가  울고있네... (이싸:1763~1827)    이 첫눈 위에  오줌을 눈 자는  대체 누구인가 ? (기가쿠)  꽃잎 하나가 떨어지네  어, 다시 올라가네  나비였네 ! (모리다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번개를 보면서도  삶이 한 순간인 걸 모르다니... (바쇼1644~1694)  나는 떠나고  그대는 남으니  두번의 가을이 찾아오네 (부손1716~1827)  한밤중에 잠이 깨니  물항아리  얼면서 금 가는 소리... (바쇼)  달에 손잡이를 매달면  얼마나 멋진  부채가 될까 ? (소칸)  이 가을 저녁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가볍지 않다... (이싸)  죽은 자를 위한 염불이  잠시 멈추는 사이  귀뚜라미가 우네... (소세키)  도둑이  들창에 걸린 달은  두고 갔구나...... (료칸)   내 앞에 있는 사람들  저마다 저만 안 죽는다는  얼굴들일세 (바쇼)  이 눈 내린 들판에서 죽는다면  나 역시  눈부처가 되리... (초수이) 인간이 있는 곳 어디에나  파리가 있고  부처가 있다... (이싸)  걱정하지 말게, 거미여  나는 게을러서  집안청소를 잘 안 하니까 (이싸)  아이들아,  벼룩을 죽이지 말라  그 벼룩에게도 아이들이 있으니 (이싸)  밤은 길고  나는 누워서  천년 후를 생각하네... (시키)  내집 천장에서 지금  자벌레 한 마리가  대들보 길이를 재고 있다 (이싸)  저세상이  나를 받아들일 줄  미처 몰랐네... 하진(죽음을맞이하며)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우산 위의 눈도  가볍게 느껴지네 (기가쿠)  내 전생애가  오늘 아침은  저 나팔꽃 같구나... 모리다케(생애 마지막으로 쓴 시)  너무 울어  텅 비어 버렸는가  이 매미 허물은... (바쇼)  눈사람에 대해 나눈 말  눈사람과 함께  사라지네... (시키)  눈 내리 아침!  얼마나 아름다운가  평소에는 미움받는 까마귀조차도... (바쇼)  쌀을 뿌려 주는 것도 죄가 되는구나  닭들이 서로 다투니... (이싸)  오래된 연못  개구리  풍덩! (바쇼)  우리가 기르던 개를 묻은  뜰 한구석에서  귀뚜라미가 울고 있네... (시키)  겨울비 속의  저 돌부처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이싸)  한번의 날까로운 울음으로  꿩은 넓은 들판을  다 삼켜 버렸다... (이메이)   나무 그늘 아래  나비와 함께 앉아 있다  이것도 전생의 인연... (이싸)  이 숯도 한때는  흰 눈이 얹흰  나뭇가지였겠지 (타다토모)  봄의 첫날  나는 줄곧 가을의  끝을 생각하네... (바쇼)  우리 두 사람의 생애  그 사이에  벗꽃의 생애가 있다... (바쇼)  너무 오래 살아  나 역시 춥구나  겨울 파리여! (인생의 마지막 시) 타요조  내가 죽으면  무덤을 지켜 주게  귀뚜라미여... (이싸)  이 미친 세상에서  미치지 않으려다  미쳐 버렸네... (시메이)  이슬의 세상은  이슬의 세상  하지만,하지만...... (어린 두 딸을 잃고 아들마저 죽은 뒤 쓴 시)이싸  사립문에  자물쇠 대신  달팽이를 얹어 놓았다 (이싸)   은하계 어디에서  기다리고 있는가  나의 떠돌이 별은... (이싸)  땔감으로 쓰려고  잘라다 놓은 나무에  싹이 돋았다... (본초)  물고기는 무엇을 느끼고  새들은 무엇을 느끼는가  한 해의 마지막 날... (바쇼)  대문 앞에 난  단정한 노란 구멍,  누가 눈 위에 오줌을 누었지? (이싸)  모든 종교와 말들을 다 떠나니  거기 자두꽃과  벗꽃이 피었구나... (난후꼬)  태어나서 목욕하고  죽어서 목욕하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임종때 남긴 시)이싸  절에 가니 파리가  사람들을 따라  합장을 하네...(바쇼)  지금부터는  모든 것이 남는 것이다  저 하늘까지도...(이싸) 쉰 살 생일을 맞아  울지마라,풀벌래야  사랑하는 이도 별들도  시간이 지나면 떠나는 것을!  너의 본래면목은  무엇이니,  눈사람아...... (소세키)     매미 한 마리 우는데  다른 매미들은 더 이상 울지 않는다  이 늦은 가을... (이싸)  뻐꾸기가 밖에서 부르지만  똥 누느라  나갈 수가 없다.... (쇼세키)정치인의 초대를 받고서 답장으로 쓴 시.  하루 종일  부처 앞에 기도하며  모기를 죽이다...(이사)  그녀가 젊었을 때는  벼룩에 물린 자리조차도  예뻤다네...(이사)  작년에 우리 둘이 바라보던  그 눈은 올해도  내렸는가......(바쇼)   
679    시는 짧은 세계, 짧은 시의 나라... 댓글:  조회:2651  추천:0  2017-08-22
'5·7·5' 3행의 17자로만 구성돼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라 불리는 일본의 전통시 '하이쿠.'   단지 열일곱 자로 이루어진 하이쿠는 세계 문학에서 가장 짧은 형태의 시다. 4백 년 전 일본에서 시작되어 오늘날에는 세계의 많은 시인이 하이쿠를 쓰고 있고, 서양에는 하이쿠 시인으로 활동하는 문인들이 증가하고 있다. 짧은 시가 가진 함축미와 선명한 이미지는 일찍이 에즈라 파운드에게 영향을 미쳐 20세기 영미시를 주도한 이미지즘 운동을 촉발시켰으며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 월레이스 스티븐스, 릴케 등도 이 시 형식에 자극을 받은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이쿠는 정통파 시인뿐 아니라 앨런 긴즈버그, 게리스나이더, 잭 케루악 같은 비트 계열의 시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이들은 영어로 된 하이쿠를 썼으며 이는 동양사상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이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 번개처럼, 우리들 생애 파고드는 침묵의 언어들!   너무 울어 텅 비어 버렸는가, 이 매미 허물은 - 바쇼 이 숯도 한때는 흰 눈이 얹힌 나뭇가지였겠지 - 타다토모 가을이 깊었는데 이 애벌레는 아직도 나비가 못 되었구나 - 바쇼 벼룩, 너에게도 밤은 길겠지, 밤은 분명 외로울 거야 - 이싸 봄에 피는 꽃들은 겨울 눈꽃의 답장! - 오토쿠니   하이쿠는 우리를 다른 시간, 다른 장소로 데려간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삶 속에 깊숙이 내려놓는다. 하이쿠는 하나의 신비, 단지 일상의 풍경을 묘사하는 것으로 사물의 본질을 분명하게 표현한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 로버트 스파이스(미국의 하이쿠 잡지의 편집자)          지금부터는 모든 것이 남는 것이다 저 하늘까지도 (쉰 살 생일을 맞아 - 이싸)     얼마나 운이 좋은가 올해에도 모기에게 물리다니! (이싸)     홍시여, 이 사실을 잊지 말게 너도 젊었을 때는 무척 떫었다는 것 (소세키)     거지가 걸어가고 그 뒤에 나란히 나비가 따라 간다 (세이 세이)     걱정하지 말게, 거미여 나는 게을러서 집안청소를 잘 안 하니까 (이싸)     이슬의 세상은 이슬의 세상 하지만, 하지만...... - 어린 두 딸을 잃고 아들마저 죽은 뒤 쓴 시 (이싸)     이 덧없는 세상에서 저 작은 새조차도 집을 짓는구나 (이싸)       몹시 춥겠지만 불가에서 몸을 녹이지는 말게 눈부처여! (소칸)     달에 손잡이를 매달면 얼마나 멋진 부채가 될까? (소칸)      저 나비, 무슨 꿈을 꾸길래 날개를 파닥거릴까? (치요)     꺽어도 후회가 되고 꺾지 않아도 후회가 되는 제비꽃 (나오조)     내 귓가의 모기는 내가 귀머거리인줄 아는 걸까? (이싸)     달팽이 얼굴을 자세히 보니 너도 부처를 닮았구나 (이싸)     '여름이라서 마른 거야'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 그녀는 이내 눈물을 떨군다 (키킨)     장마비 내리자 물가에 서 있는 물새의 다리가 짧아지네 (바쇼)     한낮의 정적 매미 소리가 바위를 뚫는다 (바쇼)     흰 이슬이여 감자밭 이랑마다 뻗은 은하수 (부손)     저 뻐꾸기는 여름동안 한 곡조의 노래만 부르기로 결정했구나 (료타)       이상하다 꽃그늘 아래 이렇게 살아 있는 것 (이싸)     인간이 있는 곳 어디에나 파리가 있고 부처가 있다. (이싸)     오늘이라는 바로 이날 이 꽃의 따스함이여 (이젠)     세상은 사흘 못 본 사이의 벚꽃 (료타)      생선 가게 좌판에 놓인 도미 잇몸이 시려 보인다 (바쇼)     밥을 지어라 산 자와 죽은 자에게 올해의 쌀로 (에자키 요시히토)     모두 거짓말이었다며 봄은 달아나 버렸다 (산토카)     두 사람의 생 그 사이에 피어난 벚꽃이어라 (바쇼)        하루 종일 부처 앞에 기도하며 모기를 죽이다 (이싸)     마음을 쉬고 보면 새들이 날아간 자국까지 보인다 (사초)     지는 벚꽃 남은 벚꽃도 지는 벚꽃 (료칸)     내가 경전을 읽는 사이 나팔꽃은 최선을 다해 피었구나 (쿄로쿠)       이 첫눈 위에 오줌을 눈자는 대체 누구인가? (기가쿠)     허수아비 뱃속에서 귀뚜라미가 울고있네... (이싸)     꽃잎 하나가 떨어지네 어, 다시 올라가네 나비였네 ! (모리다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번개를 보면서도 삶이 한 순간인 걸 모르다니... (바쇼)     나는 떠나고 그대는 남으니 두 번의 가을이 찾아오네 (부손1716~1827)     한밤중에 잠이 깨니 물항아리 얼면서 금 가는 소리 (바쇼)       이 가을 저녁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가볍지 않다 (이싸)     죽은 자를 위한 염불이 잠시 멈추는 사이 귀뚜라미가 우네 (소세키)     도둑이 들창에 걸린 달은 두고 갔구나 (료칸)     이 눈 내린 들판에서 죽는다면 나 역시 눈부처가 되리 (초수이)       아이들아, 벼룩을 죽이지 말라 그 벼룩에게도 아이들이 있으니 (이싸)         밤은 길고 나는 누워서 천년 후를 생각하네 (시키)        내 집 천장에서 지금 자벌레 한 마리가 대들보 길이를 재고 있다 (이싸)        저세상이 나를 받아들일 줄 미처 몰랐네... - 죽음을 맞이하며 (하진)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우산 위의 눈도 가볍게 느껴지네 (기가쿠)       내 전 생애가 오늘 아침은 저 나팔꽃 같구나... - 생애 마지막으로 쓴 시 (모리다케 )     너무 울어 텅 비어 버렸는가 이 매미 허물은... (바쇼)       눈사람에 대해 나눈 말 눈사람과 함께 사라지네 (시키)           쌀을 뿌려 주는 것도 죄가 되는구나 닭들이 서로 다투니 (이싸)     오래된 연못 개구리 풍덩! (바쇼)        우리가 기르던 개를 묻은 뜰 한구석에서 귀뚜라미가 울고 있네... (시키)       눈 내린 아침! 얼마나 아름다운가 평소에는 미움받는 까마귀조차도 (바쇼)     겨울비 속의 저 돌부처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이싸)       한 번의 날카로운 울음으로 꿩은 넓은 들판을 다 삼켜 버렸다 (이메이)       나무 그늘 아래 나비와 함께 앉아 있다 이것도 전생의 인연 (이싸)       이 숯도 한때는 흰 눈이 얹친 나뭇가지였겠지 (타다토모)        봄의 첫날 나는 줄곧 가을의 끝을 생각하네... (바쇼)       너무 오래 살아 나 역시 춥구나 겨울 파리여! - 인생의 마지막 시 (타요조)        내가 죽으면 무덤을 지켜 주게 귀뚜라미여... (이싸)       이 미친 세상에서 미치지 않으려다 미쳐 버렸네... (시메이)       사립문에 자물쇠 대신 달팽이를 얹어 놓았다 (이싸)       은하계 어디에서 기다리고 있는 나의 떠돌이 별은... (이싸)       땔감으로 쓰려고 잘라다 놓은 나무에 싹이 돋았다... (본초)     물고기는 무엇을 느끼고 새들은 무엇을 느끼는가 한 해의 마지막 날... (바쇼)     대문 앞에 난 단정한 노란 구멍, 누가 눈 위에 오줌을 누었지? (이싸)     모든 종교와 말들을 다 떠나니 거기 자두꽃과 벗꽃이 피었구나... (난후꼬)       태어나서 목욕하고 죽어서 목욕하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 임종때 남긴 시 (이싸)       절에 가니 파리가 사람들을 따라 합장을 하네... (바쇼)       너의 본래 면목은 무엇이니, 눈사람아...... (소세키)     매미 한 마리 우는데 다른 매미들은 더 이상 울지 않는다 이 늦은 가을... (이싸)         뻐꾸기가 밖에서 부르지만 똥 누느라 나갈 수가 없다.... - 정치인의 초대를 받고서 답장으로 쓴 시 (쇼세키)       그녀가 젊었을 때는 벼룩에 물린 자리조차도 예뻤다네... (이싸)     작년에 우리 둘이 바라보던 그 눈은 올해도 내렸는가...... (바쇼)       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 - 류시화의 하이쿠 읽기        두 사람의 생 그 사이에 피어난  벚꽃이어라 命二つの中に生きたる 哉  ‘모든 사물의 끝은 허공인데 그 끝이 허공이 아닌 것이 꽃’ 이라고 서정주 시인은 썼다. 여행 중인 자신이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고향 친구와 19년 만에 재회했을 때 지은 하이쿠이다. 이전의 벚꽃을 함께 본 사람을 다시 그 나무 아래서 만난 감회, 먼 날의 추억과 지금 이 순간에 살아 있음의 경이를 읊고 있다. 더불어 두 사람이 같은 미의식을 공유하는 정신적 기쁨까지 담겨 있다. 모두가 좋아하는 바쇼의 대표작중 하나이다. 원문의 ‘이키타루(生きたる)’는 단순히 ‘살아 있는’ 이 아니라 재회의 기쁨에 잠긴 두 사람의 눈으로 올려다보니 ‘더욱 눈부시고 생생하게 피어 있는’ 꽃의 의미이다. ‘두 개의 생’ 사이에 그 둘을 이어 주는 또 하나의 생을 가진 벚나무의 꽃이 만발해 있다. 우리가 이곳에 부재해도 꽃은 변함없이 필 것이다. ( '바쇼' 중에서/ p.10) 나비 한 마리 절의 종에 내려앉아  잠들어 있다 釣鐘に止まりて眠る胡蝶かな 언제 누가 종을 칠지 모르는 상황, 나비의 평화로운 잠과 예고된 결말의 대비가 강렬하다. 독일어로는 ‘절의 종에 / 나비가 앉아 있다 / 그 종을 칠 때까지는’으로 번역되었다. 전쟁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이 작품에 영감을 받아 마지막 장면을 대포 포신에 앉은 나비로 끝맺었다.  이 하이쿠는 불교학자 스즈키 다이세쓰가 영문판 [선과 일본 문화]에 소개해 서구에 충격을 안겨 주었다. 다이세쓰는 "우리는 나비에게 인간의 판단을 적용하려고 하지만, 우주적 무의식의 생명을 상징하는 나비는 어떤 상황에서도 분별심을 버리고 걱정과 번민과 의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절대 믿음과 두려움 없는 생을 누리고 있다."라고 해석한다. 근대 하이쿠 시인 마사오카 시키는 고서점에서 우연히 부손의 시집을 발견해 읽고는 ‘바쇼 이후 최고의 시인’이라고 확신했다. ( '부손' 중에서/ p.15) 여윈 개구리 지지 마라 잇사가  여기에 있다 蛙まけるな一茶是に有り 여름은 개구리의 번식기, 암컷을 두고 수컷들이 사투를 벌이는 계절이다. 잇사는 힘없는 마른 개구리를 응원한다. 힘내라고, 여기 너처럼 말랐지만 널 응원하는 잇사가 있다고. 강자를 선호하는 사회에 허약한 잇사의 개구리가 맞서고 있다. 파리, 벼룩, 개구리처럼 약하고 천대받는 존재를 향한 동정심과 연대감이 잇사 하이쿠의 강점이다. 그는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약자에게 친밀감을 갖는다.   이 하이쿠는 일본과 미국의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다. ‘여윈 개구리’는 잇사 자신이면서 병약하게 태어난 자신의 첫아들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 시인 옥타비오 파스 는 말한다. "잇사는 인간과 벌레와 동물과 별들의 운명 사이에 존재하는 날카롭고 고통스러운 관계를 발견한다. 그의 시에는 고통을 나누는 우주적 형제애, 인간이든 곤충이든 세계 속에 사는 유한한 생명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담겨 있다." ( '잇사' 중에서/ p.21) 몇 번씩이나 내린 눈의 깊이를  물어보았네 いくたびも雪の深さを尋ねけり 밖에서는 폭설이 내리고 있고 시인은 눈이 얼마나 내렸는지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묻는다.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이유는 몸을 움직이지 못할 만큼 병이 깊기 때문이다. 눈은 내리고 죽음을 눈앞에 둔 한겨울 고독이 깊다. 눈 내리는 풍경을 내다볼 수 있게 제자가 장지문을 유리문으로 바꿔 주었으나 시키는 얼마 후 숨을 거두었다. 하이카이로 불리던 것을 ‘하이쿠’라는 명칭으로 확립시킨 마사오카 시키는 스물세 살에 폐결핵에 걸려 서른다섯에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잊혀져 가는 하이쿠의 세계를 세상에 알리는 일에 혼과 열정을 바쳤다. ( '시키' 중에서/ p.25) 꽃잎이 떨어지네  어, 다시 올라가네  나비였네 落花枝に と見れば胡蝶かな 원문을 직역하면 ‘떨어진 꽃잎 가지로 돌아가길래 보니 나비여라’이다 . 허공에 날리며 지는 꽃잎들 중 하나가 다시 나뭇가지로 돌아간다. 놀라서 자세히 보니 나비이다! 그 순간 허무가 생명으로 도약한다. 에즈라 파운드는 이 하이쿠를 영역 소개하며 말했다. "옛날 중국의 어느 시인은 말해야 할 것을 12행으로 말할 수 없다면 차라리 침묵하는 편이 낫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하이쿠는 더 짧게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모리타케의 이미지 중첩 기법을 이용해  ‘군중 속 얼굴들의 혼령 / 젖은 검은 나뭇가지의 꽃잎들’이라는 2행시를 썼다. 그리고 긴 시보다 선명한 이미지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해 이미지즘 운동을 일으켰다. ( '모리타케' 중에서/ p.34) 손바닥에서  슬프게도 불 꺼진  반딧불이여 手の上に悲しく消ゆるか  슬픈 일은 어떤 존재가 내 손에 앉아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이 꺼지는 일이다. 그 한 가지 슬픔이 천 가지 기쁨을 사라지게 만든다. 교라이에게는 지네조라는 이름의 여동생이 있었다. 교양 있는 집안에서 자란 지네조는 재주 많은 여성이었으며 하이쿠에도 뛰어 났다. 교라이는 여동생을 무척 아꼈지만, 그녀는 불행히도 결혼 1년 만에 죽고 말았다. 이 하이쿠 속 반딧불이는 그 여동생 지네조이다. 지네조는 세상과 하직하며 다음의 하이쿠를 썼다. 쉽게 빛나고/ 또 쉽게 불 꺼지는/반딧불이여  もえ易く又消え易きか ( '교라이' 중에서/ p.140) 재 속의 숯불 숨어 있는 내 집도  눈에 파묻혀 うづみ火や我かくれ家も雪の中 불은 화로의 재 속에 있고, 화로는 나의 오두막 안에, 오두막은 눈 내리는 밤의 어두운 세상안에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중심에 내가 앉아 있다. 눈에 파묻힌 오두막은 재 속 숯불처럼 따뜻하다. 커다란 차가움과 작은 따뜻함, 큰 어둠과 작은 불빛이 공존한다.   비교문학자 히라카와 스케히로는 이렇게 묘사했다. "한 곳에 불씨가 있고, 그것을 덮은 재가 있으며, 그 위를 덮듯이 화로에 붙어 앉은 주인이 있고, 그 작은 방을 에워 싼 작은 집이 있다. 그리고 그 집을 덮은 눈이 있다. 오두막 지붕 위에는 눈 내리는 밤하늘의 어둠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따뜻함을 간직한 재 속의 불씨를 중심으로 한 줄의 시가 동심원을 그리며 우주를 향해 뻗어나간다." ( '부손' 중에서/ p.160) 다음 생에는  제비꽃처럼 작게  태어나기를 菫ほどな小さき人に生まれたし "불유쾌함으로 가득 찬 인생을 터벅터벅 걷고 있는 나는 자신이 언젠가 반드시 도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죽음이라는 경지에 대해 항상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죽음이라는 것을 삶보다는 더 편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어느 때는 그것을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지고한 상태라고 여길 때조차 있다. " (김정숙역, 나쓰메 소세키[유리문 안에서])  일본 근대 소설의 최고 작가인 나쓰메 소세키는 불행한 유년기를 보낸 뒤 도쿄대학 영문학부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문학 동료 시키를 만났다. 졸업할 즈음 가족들의 잇단 죽음을 겪으며 폐결핵과 고질적인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심한 염세주의에 빠진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 '소세키' 중에서/ p.360) 불을 켜는  손가락 사이  봄밤의 어둠 をとも 指の間の春の闇  누구나 자기만의 불을 켜고 있고, 손가락 사이의 어둠을 가지고 있다. 달 없는 봄밤, 아무것도 없는 것 같고 무언가 있는 것도 같은 어렴풋한 어둠을 응시하는 일도 삶의 한 부분이다. 방 밖의 어둠을 말하는 것이 보통인 ‘봄밤의 어둠’을 자신의 손가락 사이로 가져온 감각이 섬세하다.     눈을 감으면 / 젊은 내가 있어라 / 봄날 저녁  眼つむれば若き我あり春の宵 그 청춘의 날들, 반짝이던 봄날의 감성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기억을 꺼내다가 그 불에 데는 날들만 남아 있을지도. 다른 계절도 아닌 봄밤의 언저리,어슴푸레한 어둠속에 젊은 날의 내가 서 있다. ( '교시' 중에서/ p.387) 비처럼 쏟아지는 매미 소리 아이는 구급차를  못 쫓아오고 時雨子は 送車に追ひつけず ‘세미시구레(?時雨)’는 비처럼 한바탕 쏟아지는 매미 소리를 일컫는 말로 ‘눈물을 쏟는다’의 은유적 의미도 있다. 요란한 매미 울음 속에 윙윙거리며 달리는 구급차를 아이가 쫓아온다. 얼굴이 눈물로 뒤범벅된 채. 결국 아이는 엄마가 탄 차를 따라잡지 못하고 애타게 멀어진다. 이시바시 히데노는 교시 문하의 대표 여성 시인이었으나 전쟁 중에 폐결핵을 앓아 서른아홉에 세상을 떴다. 환자 수송 침대에 누워 운반되는 자신과 쫓아오다 뒤처진 외동딸, 그리고 슬픔을 열창하는 매미들.   봄날 새벽 / 내가 토해 낸 것의 / 빛 투명하다  春の我が吐く のの光り澄む  ( '히데노' 중에서/ p.502) 힘주고 또 힘주어  힘이라고 쓴다 つぎつぎに力をこめて力と書く 산토카와 문학적 교류를 했으며 훗날 [산토카의 생애]를 쓴 하이쿠 시인 오야마 스미타(大山澄太)가 산토카의 오두막을 찾았을 때였다. 산토카는 스미타에게 점심을 먹었느냐고 물었다. 먹지 않았다고 하자 산토카는 쇠로 된 밥그릇에 잡곡밥을 담아 고추 하나와 함께 내놓았다. 고추가 너무 매워 스미타가 눈물을 흘리며 먹는 동안 산토카는 앞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왜 당신은 먹지 않는가?" 하고 묻자, 산토카는 "밥그릇이 하나뿐."이라고 대답했다. 스미타가 다 먹자 산토카는 그 그릇에 다시 밥을 담아 스미타가 먹다 남긴 고추와 함께 먹었다. 그리고 쌀 씻은 물에 밥그릇을 씻은 다음 그 물을 텃밭에 부었다. 산토카의 바람은 ‘진정한 나의 시를 창조하는 것’과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죽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가 살아갈 힘, 시를 쓸 힘을 얻는 방식이었다. ( '산토카' 중에서/ p.541)       
678    짧은 시의 나라, 시는 짧은 세계... 댓글:  조회:2894  추천:0  2017-08-22
[ 2017년 08월 22일 08시 08분 ]     가을 / 함민복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시집 :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 창작과비평사 , 1996 ----------------------------------------------------------  고은의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정현종의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안도현의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적이 있었느냐?'   유치환의 '너의 추억을 나는 이렇게 쓸고 있다'   정지용의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픈 마음 호수만하니 눈 감을 수밖에'   ----------------------------------------------  + 짤막한 노래 / 박경원 정직하고 부드러운 빵 아름다운 푸른곰팡이를 피워내는군 자신이 썩었음을 알려주는군   ------------------------------------------ 짧은 시 모음  '木星' /박용하  확실히, 영혼도 중력을 느낀다.  쏟아지는 중력의 대양에서  삶과 죽음을 희롱하는 시를 그대는 썼는가.  삶이 시에 빚지는 그런 시를 말이다  지평선 /쟈콥  그 소녀의 하얀 팔이  내 지평선의 모두였다.  *後記 /천양희  시는 내 自作나무  네가 내 全集이다.  그러니 시여,제발 날 좀 덮어다오  *마른 나뭇잎 /정현종  마른 나뭇잎을 본다.  살아서, 사람이 어떻게  마른 나뭇잎처럼 깨끗할 수 있으랴  *그리고 삶 /이상희  입술을 깨물어도  참을 수 없이 터져나오는  재채기 삼창  에잇!  집어쳐!  kitsch!  *시멘트 /유용주  부드러운 것이 강하다  자신이 가루가 될 때 까지 철저하게  부서져본 사람만이 그걸 안다.  *서시 /나희덕  단 한 사람의 가슴도  제대로 지피지 못했으면서도  무성한 연기만 내고 있는  내 마음의 군불이여  꺼지려면 아직 멀었느냐  *사이 /박덕규  사람들 사이에  사이가 있었다 그  사이에 있고 싶었다  양편에서 돌이 날아왔다  정신은 한번 깨지면 붙이기 어렵다  *후회 /황인숙  깊고 깊어라  행동 뒤 나의 생각.  내 혀는 마음 보다  정직했느니  *별 /곽재구  모든 별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머리칼을 지녔는지  난 알고 있다네  그 머리칼에 한번 영혼을 스친 사람이  어떤 노래를 부르게 되는지도  *아침이슬 /고은  여기 어이할 수 없는 황홀!  아아 끝끝내 아침이슬 한방울로 돌아가야 할  내 욕망이여  *연탄재 /안도현  발로 차지는 말아라  네가 언제 남을 위해 그렇게 타오른 적이 있었더냐 (원문과 다름)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 /황지우  긴 외다리로 서 있는 물새가 졸리운 옆눈으로  맹하게 바라보네, 저물면서 더 빛나는 바다를  *꿈 /황인숙  가끔 네 꿈을 꾼다  전에는 꿈이라도 꿈인줄 모르겠더니  이제는 너를 보면  아, 꿈이로구나,  알아챈다  *빵 /장석주  누군가 이 육체의 삶,  더 이상 뜯어먹을 것이 없을 때 까지  아귀 아귀 뜯어먹고 있다!  이스트로 한없이 부풀어 오른 내 몸을  뜯어먹고 있다!  *방(榜) /함성호  천불 천탑 세우기  내 詩 쓰기는 그런 것이다.  *첫사랑 /이윤학  그대가 꺾어준 꽃  시들 때 까지 들여다 보았네  그대가 남기고 간 시든 꽃  다시 필 때 까지  *우주를 건느는 법 /박찬일  달팽이와 함께!  달팽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다만 도달할 뿐이다  *일기 /김형영  잘 익은 똥을 누고 난 다음  너, 가련한 육체여  살것 같으니 술 생각 나냐?  *사랑 /정호승  무너지는  폭포 속에  탑 하나 서 있네  그 여자  치마를 걷어 올리고  폭포 속으로 걸어 들어가  탑이 되어  무너지네  *사랑 /김명수  바다는 섬을 낳아 제 곁에 두고  파도와 바람에 맡겨 키우네  *눈물 /정희성  초식동물 같이 착한 눈을 가진  아침 풀섶 이슬 같은 그녀  눈가에 언뜻 비친  *不倫 /윤금초  가을날 몰래 핀 두어 송이 장미  그래도 꽃들은 감옥에 가지 않는다  위험한  이데올로기  저 반역의  開花  *행복 /박세현  오늘 뉴스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 뉴스는 없습니다  우리나라 국영방송의 초창기 일화다  나는 그 시대에 감히  행복이란 말을 적어 넣는다  *자화상 /신현림  울음 끝에서 슬픔은 무너지고 길이 보인다  울음은 사람이 만드는 아주 작은 창문인것  창문 밖에서  한 여자가 삶의 극락을 꿈꾸며  잊을 수 없는 저녁 바다를 낚는다.  *전집 /최승호  놀라워라.조개는 오직 조개 껍질만을 남겼다.  *내 청춘의 영원한 /최승자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 앵글  *세상에서 멀리 가려던 /최하림  세상에서 멀리 가려던 寒山 같은 시인도  길위에서 비오면걸음을 멈추고 오던  길을 돌아본다지난 시간들이 축축이  젖은 채로 길바닥에 깔려있다  *꽃 /조은  오래 울어본 사람은  체념할 때 터져 나오는  저 슬픔과도 닿을 수 있다.  *水墨 정원  _暮色(모색)  장석남  귀똘이들이  별의 운행을 맡아가지고는  수고로운 저녁입니다.가끔 단추처럼 핑글  떨어지는 별도 있습니다  *간봄 / 천상병  한 때는 우주 끝까지 갔단다.  사랑했던 여인  한 봄의 산 나무 뿌리에서  뜻 아니한 십 센티 쯤의 뱀 새끼 같이  사랑했던 여인.  그러나 이젠  나는 좀 잠자야?다.  *겨울산 / 황지우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덫에 걸린 쥐에게..  에리히케스트너  원을 긋고 달리면서 너는 빠져 나갈 구멍을 찾느냐?  알겠느냐? 네가 달리는 것은 헛일이라는 것을.  정신을 차려. 열린 출구는 단 하나밖에 없다.  네 속으로 파고 들어가거라. ----------------------------------------- 하늘냄새             -박희준   사람이 하늘처럼 맑아보일 때가 있다.   그 때 나는 그 사람에게서 하늘냄새를 맡는다.   도토리모자                       -문삼석- 도토리모자는 벗기면  안돼 까까머리 까까머리 놀릴테니까     풀꽃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이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부엉이        유경환 부엉이 눈속엔 / 손전등 두개  낮에는 껐다가 / 밤에만 켜는  달밤엔 파란불 / 별밤엔 노란불     봄/ 이상례 1동 108호 사는 장미는 서른 아홉살 부모 그늘에서 어기적거리다가   결혼을 못해 ?겨나고야 말았다   반면 4동408호 할아버지는 팔십 팔세인데 네 번째 결혼 파티를  한다고 한다   1동과 4동 간격을 나비가 건너고 있다   (이밖에도 좋은(재미 있는) 시들이 많습니다 . 이상례 시집("꽃의 허공이 곱다)       = 오광수 시인의 짧은 시 모음 =   ◆ 산에서 본 꽃 산에 오르다 꽃 한 송이를 보았네 나를 보고 피어있는 이름 모를 꽃 산에서 내려오다 다시 그 꽃을 보았네 하늘을 보고 피어있는 누님 닮은 꽃 ◆ 봄볕 꽃가루 날림에 방문을 닫았더니 환한데도 더 환하게 한 줄 빛이 들어오네 앉거라 권하지도 않았지만은 동그마니 자리 잡음이 너무 익숙해 손가락으로 살짝 밀쳐내 보니 눈웃음 따뜻하게 손등을 쓰다듬네! ◆ 가을햇살 등 뒤에서 살짝 안는 이 누구 신가요? 설레는 마음에 뒤돌아보니 산모퉁이 돌아온 가을 햇살이 아슴아슴 남아있는 그 사람 되어 단풍 조막손 내밀며 걷자 합니다 ◆ 홍시(紅枾) 두 알 하얀 쟁반에 담아 내온 홍시 두 알. 무슨 수줍음이 저리도 짙고 짙어서 보는 나로 하여금 이리도 미안케 하는지 가슴을 열면서 가만히 속살을 보이는데 마음이 얼마만큼 곱고 고우면 저리될까? 권함에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 낙엽 한 장 나릿물 떠내려온 잎 하나 눈에 띄어 살가운 마음으로 살며시 건졌더니 멀리 본 늦가을 산이 손안에서 고와라. ◆ 홍류폭포 수정 눈망울 살금 돌 틈에다 감추고 잠깐 햇살에 또르르 한줌물 손에담고 언제였나 오색 무지개가 꿈인듯하여 바람도 피하는 간월산 늙은 억새사이로 가을 지나간 하얀 계곡을 내려다봅니다. ◆ 가을에는 가을에는 나이 듬이 곱고도 서러워 초저녁 햇살을 등 뒤에 숨기고 갈대 사이로 돌아보는 지나온 먼 길 놓아야 하는 아쉬운 가슴 그 빈자리마다 추하지 않게 점을 찍으며 나만 아는 단풍으로 꽃을 피운다 ◆ 비 오는 밤 기다린 님의 발걸음 소리런가 멀리도 아닌 곳에서 이리 오시는데 밖은 더 캄캄하여 모습 모이지 않고 불나간 방에 켜둔 촛불 하나만 살랑살랑 고개를 내젓고 있다 ------------------------------------------------------- < 반장선거 >  내 이름을 쓸까 말까     내 마음이 몹시 흔들렸다   * 김시민 동시집에서        한국 짧은 시 모음   1. 가을 / 함민복 당신 생각을 켜 놓은채 잠이들었습니다   2. 그 꽃 / 고은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3. 섬 / 정현종 ‘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4. 너에게 묻는다 / 안도현 ‘ 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적이 있었느냐’   5. 낙엽 / 유치환 ‘ 너의 추억을 나는 이렇게 쓸고 있다’   6. 호수 / 정지용 ‘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픈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수 밖에’   7. 짤막한 노래 / 박경원 정직하고 부드러운 빵 아름다운 푸른곰팡이를 피어내는군 자신이 썩었음을 알려주는군   8. ‘木星’ / 박용하 확실히, 영혼도 중력을 느낀다. 쏟아지는 중력의 대양에서 삶과 죽음을 희롱하는 시를 그대는 썼는가. 삶이 시에 빚지는 그런 시를 말이다   9. 지평선 / 쟈콥 그 소녀의 하얀 팔이 내 지평선의 모두였다   10. 後記 / 천양희 시는 내 自作나무 네가 내 全集이다. 그러니 시여, 제발 날 좀 덮어다오       11. 마른 나뭇잎 / 정현종 마른 나뭇잎을 본다.   살아서, 사람이 어떻게 마른 나뭇잎처럼 깨끗할 수 있으랴   12. 그리고 삶 / 이상희 입술을 깨물어도 참을 수 없이 터져나오는 재채기 삼창   13. 시멘트 / 윤용주 부드러운 것이 강하다 자신이 가루가 될 때까지 철저하게 부셔져본 사람만이 안다.   14. 서시 / 나희덕 단 한 사람의 가슴도 제대로 지피지 못했으면서도 무성한 연기만 내고 있는 내 마음의 군불이여 꺼지려면 아직 멀었느냐   15. 사이 / 박덕규 사람들 사이에 사이가 있었다 그 사이에 있고 싶다   양편에서 돌이 날아왔다 정신은 한번 깨지면 붙이기 어렵다   16. 후회 / 황인숙 깊고 깊어라 행동 뒤 나의생각 내 혀는 마음보다 정직 했느니   17. 별 / 곽재구 여기 어이할 수 없는 황홀! 아아 끝끝내 아침이슬 한방울로 돌아가야 할 내 욕망이여   18. 빵 / 장석주 누군가 이 육체의 삶, 더 이상 뜯어먹을 것이 없을 때 까지 아귀아귀 뜯어먹고 있다 이스트로 한없이 부풀어 오른 내몸을 뜯어먹고 있다!   19. 꿈 / 황인숙 가끔 네 꿈을 꾼다 전에는 꿈이라도 꿈인줄 모르겠더니 이제는 너를 보면 아, 꿈이로구나, 알아챈다   20.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 / 황지우 긴 외다리로 서있는 물새가 졸리운 옆눈으로 맹하게 바라보네,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를   21. 방(榜) / 함성호 천불 천탑 세우기 내 詩쓰기는 그런 것이다.   22. 첫사랑 / 이윤학 그대가 꺽어 준 꽃 시들 때 까지 들여다 보았네 그대가 남기고 간 시든 꽃 다시 필 때 까지   23. 일기 / 김형영 잘 익은 똥을 누고 난 다음 너, 가련한 육체여 살 것 같으니 술생각 나냐?   24. 사랑 / 정호승 무너지는 폭포 속에 탑 하나 서 있네 그 여자 치마를 걷어 올리고 폭포 속으로 걸어 들어가 탑이 되어 무너지네     25. 사랑 / 김명수 바다는 섬을 낳아 제 곁에 두고 파도와 바람에 맡겨 키우네   26. 눈물 / 정희성 초식동물 같이 착한 눈을 가진 아침 풀섶 이슬 같은 그녀 눈가에 언뜻 비친   27. 不倫 / 윤금초 가을날 몰래 핀 두어 송이 장미 그래도 꽃들은 감옥에 가지 않는다 위험한 이데올로기 저 반역의 開花   28. 행복 / 박세현 오늘 뉴스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 뉴스는 없습니다   우리나라 국영방송의 초창기 일화다   나는 그 시대에 감히 행복이라는 말을 적어 넣는다   29. 자화상 / 신현림 울음 끝에서 슬픔은 무너지고 길이 보인다 울음은 사람이 만드는 아주작은 창문일 것 창문 밖에서 한 여자가 삶의 극락을 꿈꾸며 잊을 수 없는 저녁 바다를 낚는다.   30. 전집 / 최승호 놀라워라, 조개는 오직 조개껍질만을 남긴다.     31. 내 청춘의 영원한 / 최승자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 앵글     32. 세상에서 멀리 가려던 / 최하림 세상에서 멀리 가려던 寒山 같은 시인도 길위에서 비오면걸음을 멈추고 오던 길을 돌아본다지난시간 들이 축축이 젖은 채로 길바닥에 깔려있다   33. 꽃 / 조은 오래 울어본 사람은 체념할 때 터저나오는 저 슬픔과도 닿을 수 있다   34. 간 봄 / 천상병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들어 살고 있음으로 고통을 말하면 월세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35. 하늘 냄새 / 박희준 사람이 하늘처럼 맑아 보일 때가 있다   그 때 나는 그 사람에게서 하늘 냄새를 맡는다   36. 도토리 모자 / 문삼석 도토리모자는 벗기면 안돼 까까머리 까까머리 놀릴테니까   37. 풀꽃 /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이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38. 낙엽 한 장 / 나릿물 떠내려 온 잎 하나 눈에 띄어 살가운 마음으로 살며시 건졌더니 멀리 본 늦가을 산이 손안에서 고와라            
677    시를 쓴다는것은 상투적 껍질을 벗겨내는 작업이다... 댓글:  조회:2363  추천:0  2017-08-22
[ 2017년 08월 22일 08시 08분 ]     @@ 99년만에 북미주 전역에서 나타난 달이 태양을 덮어버리는 개기일식...  2017년 08월 22일 08시 08분      && 달이 태양을 덮어버리는 개기일식 미국 대륙을 관통. 99년 만의 지상 최대의 우주쇼... 시와 키치  황정산(문학평론가, 대전대학교 교수)    밀란 쿤데라는 그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주인공인 화가 사비나의 말을 통해 키치를 비판하고 있다. “나의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키치에요.”라고 말하면서 그녀는 키치가 모든 진지한 예술의 가장 적대적 존재임을 강조한다. 키치는 예술뿐만 아니라 진정성이 없는 동정심, 고상한 척, 남의 시선 의식하기, 정치인들의 애국심, 따라 하기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하면서 우리들의 삶을 끊임없이 상투화시킨다는 것이다.    흔히 ‘이발소 그림’으로 불려지는 키치kitsch는 값싼 대중적 예술을 말한다. 예술사가 아놀드 하우저는 그의 저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키치가 내세우는 요구들이 아무리 고상한 것일 수 있다고 할지라도 키치는 사이비 예술인 것이며, 달콤하고 싸구려 형식을 갖춘 예술이고, 위조되고 기만적인 현실 묘사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키치에 대한 극도의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한마디로 키치는 가짜 예술이다. 그것은 예술의 형식을 빌어 사람들에게 익숙한 가치관 상투적인 감상을 전달함으로써 편안과 위안을 주고 사회의 주류적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갖게 해준다. 그리고 현대는 바로 이런 키치의 시대이기도 하다. 많은 중산층 집안의 거실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상품이나 의복들 심지어 결혼식장이나 장례식장마저 이런 키치가 지배하고 있다.    시에서도 키치는 존재한다. 진부한 미의식, 상투적인 현실인식, 진정성이 상실된 근거 없는 감정 과잉, 사회·역사적 고민이 탈각된 자동화된 가치관 등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키치적인 시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한 시들은 때로 대중성이라는 이름으로 큰 성공을 거두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양화를 구축하는 악화가 될 뿐이다.    흔히 키치 시는 쉬운 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쉽다고 키치인 것은 아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를 보자.  서울역 앞 흡연구역 사람들 틈에 끼어  담배를 빤다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하나다  철쭉꽃 한창이다  한쪽에선 악기 연주가 한창이다  멀리 남미 에콰도르에서 왔다는 인디오  담배 잎에 물고 모두가 박수다  기다리는 순간은 잠깐이다  하나되는 순간도 잠깐이다  시간을 본다  바삐 입구로 들어서는 사람들  바삐 출구로 빠져 나가는 사람들  담배 한 대의 시간만큼  연주 한 곡의 시간만큼  멈추어 있다 떠난다  살이 있는 것들은 그렇게 오래 떠난다            - 이명수, 「몽유도」(정신과표현 9,10월호)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언어로 기차를 타러 서울역에 나가본 사람은 모두 한번쯤 봤을 익숙한 광경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결코 상투적이지 않다. 그런 익숙한 장면을 통해 다른 사람이 미처 보지 못한 삶의 모습을 포착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래 떠난다”는 아이러니한 구절에서 선명히 잘 드러나 있다. 떠남을 항상 순간이고 떠남은 오래 머물지 못함을 말하기에 이 구절은 형용 모순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담배 한 대 같이 피고 노래 한 곡 같이 듣는 시간의 소중한 의미를 생각해 보았을 때 그리고 그러한 만남이 항상 떠도는 것들 사이에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을 때 그것은 단지 순간의 일이 아니라 길고도 또 의미심장한 시간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오랜 떠남”을 통해 다른 존재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과 소통을 하게 된다. 우리가 지구 반대편에서 온 에콰도르의 떠돌이 예술가를 만나는 것도 바로 그런 계기들을 통해서일 것이다. 존재는 존재 자체로 오래 지속되고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만남과 관계를 통해 지속되는 것임을 이 시는 아주 쉬운 시어들로 우리에게 설득력 있게 얘기해 주고 있다. 익숙한 광경을 쉬운 언어로 그러나 결코 상투적이지 않게 새롭게 보여주는 시인의 경지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키치는 태도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대상을 대할 때 사물과 투명하고 순수한 관계 맺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중층적인 가치를 동시에 부여하고 있다면 그것 역시 키치가 된다. 예를 들어 진품을 모방하여 진품을 소비하는 계층의 사회적 위상을 대리체험하려고 한다든가, 예술적 묘사에 사회적 가치나 종교적 교의 또는 교육적 함의를 포함시키려고 하는 것도 모두 키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시교육 자체가 키치를 조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옷을 다 벗었는데  박박 문지르니  먼지의 옷이 벗겨진다  살비듬 옷이 벗겨진다  상처로 꿰매놓은  헐렁한 옷만 남는다  이 옷을 벗기는 데  또 얼마나 걸릴까  수련처럼 평생 물을 맞대고 살면  스르르 풀릴 실밥인데  고개를 돌려보니  물기 젖은 창 너머로  또 낙엽이 진다     - 길상호, 「목욕」 (우리시 11월호)    시를 쓰는 것은 언어에 부과된 상투적 껍질을 벗겨내는 작업이다. 이 시를 쓴 시인도 그러한 껍질을 벗고자 한다. 옷이나 먼지 살비듬은 모두 상투화된 일상이 부과한 존재의 형태일 뿐이다. 그것은 존재 자체의 속성을 보지 못하게 하고 우리를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것을 벗어나려는 끊임없는 고투를 시인은 생각하고 있다. 시인에게 그것은 시를 쓰는 행위일 것이다. 이렇게 봤을 때 이 시는 시인이 결코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시를 통해 언어의 생생함을 회복하려는 시작의 오랜 각고로 해석될 수 있다. 마지막 “또 낙엽이 진다”라는 표현이 조금은 익숙하긴 하지만 그것은 이런 과정의 시간적 영속성에 대한 비유일 것이다.    대부분의 키치는 나태한 정신과 연결된다. 세상의 진실이나 감춰진 이면을 보려고 애써 노력하기보다는 주어진 시각이나 만들어진 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심리적 편안을 느끼고자 하는 데서 키치가 만들어 진다. 그런 점에서 다음 시는 키치와는 아주 거리가 멀다.  바람은 등 구부러 바람을 낳는다.  무너지고 무너져도 무너지지 않는 앞이 나타나  모래구릉이 구릉을 벗지 못하는 것처럼  낙타 새끼는 제 어미를 빼닮았다.  태어나자마자 헌 구두처럼 너덜거리는 아가리다.  먼 물 냄새 들리는 듯,  그걸 또 우물거리며 내다보는 것이다, 저 긴 모가지를 사족 없이 걷고 걸어  단봉 꼭대기 오래 걸려 넘기까지,  터벅거리는 발자국 꾹 다문 엉덩이에서부터  뒷다리 쪽으로 뭉개는 신음 또한 벌써 붉어 구부정하다.  배밀이, 배밀이하는 배 같다.  박토의 폭염을 빨며 사막을 건너가는 구근,  낙타 새끼는 도무지 귀엽지 않다.     - 문인수, 「고구마」(현대시 10월호)    시인은 낙타 새끼를 도무지 귀엽다고 보지 못한다. 새끼나 애들은 귀엽기 마련이다. 이제 막 태어난 생명에게서는 생명의 활력이 넘치고 인간이 그렇게 연장시키고자 하는 시간적 미래가 충분히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새끼나 아이들에게서 희망과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애들을 보고 동물의 새끼를 보고 귀엽다고 생각하는 것도 다 이런 심리적 과정 때문이리라. 하지만 감춰진 이면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에는 결코 낙타 새끼가 귀엽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삶의 고통을 애초에 타고 태어난 존재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발소 그림처럼 귀여운 돼지 새끼들을 그려놓고 행운을 떠올린다거나 엄마 품에 안긴 아기의 평온한 미소를 사진으로 찍어 순수라는 관념을 부여한다면 그것은 거의 대부분 키치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 시의 시인은 그런 관용적인 관념과는 거리가 먼 낙타 새끼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 낙타 새끼는 고구마이기도 하다. 메마른 땅을 파나가며 등이 휘게 살아나가야 작은 구근이라도 맺을 수 있는 고구마나 거친 사막을 살아남아야 작은 단봉이라도 만들어 낼 수 있는 낙타가 닮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의 이면을 들춰보면 금방 깨닫게 되는 삶의 진실이다. 시인은 괴롭지만 이 진실을 바로 보고자 한다.    흔히 키치는 사랑이나 평화 같은 보편적 가치관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그것을 통해서 스스로의 의미나 존재가치를 강화시킬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키치적인 작품이 진지한 예술, 가치 있는 예술로 잘못 평가되는 경우도 주로 이런 경우이다. 하지만 키치적인 작품에서 그런 보편적인 가치는 현실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못한다. 현실의 매개 없는 사회적 가치의 설파, 사회적 고민이나 갈등을 무화시키는 종교적 이념의 주입이 키치적인 작품의 주요 특징이다. 하지만 다음 작품은 보편적 가치를 말하지만 결코 관념적이거나 상투적이지 않다.   
676    "아버지의 성기를 노래하고싶다"... 댓글:  조회:2688  추천:0  2017-08-22
시를 잘 쓰기 위한 10가지 방법 이승하 (시인, 교수) 미주한국문인협회 회원 여러분!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문학을 좋아하는 많은 애독자 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의 모국 대한민국의 많은 시인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시인입니다. 이 자리에는 저처럼 시를 쓰면서 이 이승에서의 삶을 꾸려가는 분들이 많이 와 계신 것으로 압니다. 지금 여러분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저의 가장 큰 소망은 지금까지 썼던 그 어떤 시보다 더 좋은 시를 쓰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단 한 편이라도 길이 남을 명시를 쓰고 싶은 소망 때문에 낮에는 전전긍긍하고 밤에는 전전반측하지 않습니까.  이 자리에 와서 여러분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드리는 것이 시를 쓰고 계신 여러분께 실질적인 도움이 될까 여러 날 고민을 했습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좋은 시를 쓰기 위한 방법 10가지 전수입니다. 제가 1984년에 등단한 이후 지금까지 7권의 시집을 내면서, 또 1992년부터 대학 강단에 서서 학생들에게 시작법을 가르치면서 익힌 노하우를 전해 드리는 것으로 강연을 대신할까 합니다. 거창한 강연이 아니라 아주 소박한 내용이어서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여러분과 함께 시를 감상하면서, 좋은 시를 쓰기 위한 방안을 모색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제가 인용하는 시는 졸저 {백 년 후에 읽고 싶은 백 편의 시}(시와시학사)에서 다루었던 것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즉, 그 책을 통해 했던 말을 중심으로 강연을 해볼까 합니다.  1. 시는 우리말의 보물창고이다 여러분과 함께 감상해 볼 첫 번째의 시는 김진완이란 젊은 시인의 등단작인 [기찬 딸]입니다. 칙칙폭폭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증기기관차가 달리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꽤나 옛날 일이겠지요. 시적 화자의 외할머니가 딸을, 즉 자신의 어머니를 분만하는데, 바로 그 장소가 달리는 기차 속이었습니다.  다혜자는 엄마 이름. 귀가 얼어 톡 건들면 쨍그랑 깨져버릴 듯 그 추운 겨울 어데로 왜 갔던고는 담 기회에 하고, 엄마를 가져 싸아한 진통이 시작된 엄마의 엄마가 꼬옥 배를 감싸쥔 곳은 기차 안. 놀란 외할아버지 뚤레뚤레 돌아보니 졸음 겨운 눈, 붉은 코, 갈라터진 입술들뿐이었는데 글쎄 그게, 엄마 뱃속에서 물구나무를 한번 서자, 으왁! 눈 휘둥그런 아낙들이 서둘러 겉치마를 벗어 막을 치자 남정네들 기차 배창시 안에서 기차보다도 빨리 '뜨신 물 뜨신 물' 달리기 시작하고 기적소린지 엄마의 엄마 힘쓰는 소린지 딱 기가 막힌 외할아버지 다리는 후들거리기 시작인데요, 아낙들 생침을 연신 바르는 입술로 '조금만, 조금만 더어' 애가 말라 쥐어트는 목소리의 막간으로 남정네들도 끙차, 생똥을 싸는데 남사시럽고 아프고 춥고 떨리는 거기서 엄마 에라 나도 몰라 으왕! 터지는 울음일 수밖에요. 박수 박수 "욕 봤데이." 외할아버지가 태우신 담배꽁초 수북한 통로에 벙거지가 천정을 향해 입 딱 벌리고 다믄 얼마라도 보태 미역 한 줄거리 해 먹이자, 엄마를 받은 두꺼비상 예편네가 피도 덜 닦은 손으로 치마를 걷자 너도나도 산모보다 더 경황없고 어찌할 바 모르고 고개만 연신 주억였던 건 객지라고 주눅든 외할아버지 짠한 마음이었음에랴 두말하면 숨가쁘겠구요. 암튼 그리하야 엄마의 이름 석 자는 여러 사람들의 은혜를 입어 태어났다고 즉석에서 지어진 것이라. 多惠子. 성원에 보답코자  하는 마음은 맘에만 가득할 뿐 빌린 돈 이자에 치여 만성두통에 시달리는 나의 엄마 다혜자씨는요, 칙칙폭폭 칙칙폭폭 끓어오르는 부아를 소주 한잔으로 다스릴 줄도 알아 "암만 그렇다 캐도 문디, 베라묵을 것. 몸만 건강하모 희망은 있다."  여장부지요 기찬, 기―차― 안 딸이거든요. ―김진완, [기찬 딸] 전문 (창작과비평. 1993년 여름호 신인당선작)   승객이라고는 "졸음 겨운 눈, 붉은 코, 갈라터진 입술"을 가진 농투성이들뿐이지만 이들은 낯선 아주머니의 차내 분만에 한마음으로 동참합니다. 아낙들은 겉치마를 벗어 막을 치고, 남정네들은 뜨신 물을 구해오고, "벙거지"는 미역 살 돈을 내놓고, 두꺼비상 여편네는 산파 노릇을 해 무사히 한 생명은 "으왕!" 울음을 터뜨리며 탄생합니다. 이런 여러 사람의 은혜로 태어났다 하여 엄마 이름이 다혜자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마지막 3연이 보여주는 여성적, 혹은 모성적인 건강함은 가슴 훈훈한 감동을 전하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또한 꽤 긴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1연과 3연 사이에 위치한 "으왁!"이란 의성어가 환기하는 생명 탄생의 고통과 경이로움, "기찬"과 "기―차― 안"이라는 비슷한 음을 이용한 유머 센스 등은 이 시를 명작의 반열에 올리는 데 합심하여 공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이 시의 가장 큰 매력은 산전수전 다 겪으며 살아오신 어머니가 소주 한잔 마시고 내뱉는 말, "암만 그렇다 캐도 문디, 베라묵을 것. 몸만 건강하모 희망은 있다."에 있습니다. 참 한국적인 말이라고 할까요, 서민적인 말이라고 할까요. 어머니의 힘, 아니 한국 아줌마의 힘을 나타내는 그 말이 사투리가 아니라 표준말도 되어 있다면 이 시의 맛은 반 이상 줄어들 것입니다. 저는 이 시를 읽으면 시야말로 사투리와 순우리말의 보물창고라는 생각을 합니다. 소월과 영랑이, 백석과 정지용이 왜 위대한 시인인가 하면 한국적인 정서를 한국적인 어투와 어조, 사투리와 순우리말로 표현해내는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의 가장 기본이 되는 질료인 언어를 구사할 때, 사투리와 순우리말이 지금은 쓰지도 않는 낡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가 잘 찾아내어 시에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역만리에서 모국어를 구사하는 문화의 파수꾼이며 창고지기입니다. 언어 학대가 시인의 특권인 양 언어를 못살게 구는 시인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왜 미국에서 살면서 모국어로 시를 쓰고 있습니까? 몸은 비록 미국에 있지만 시인인 이상 모국어를 잘 갈고 닦는 언어의 세공사임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2. 시는 특이한 체험의 산물이다 김광림이란 시인이 있지요. 1929년생이시니 올해 연세가 일흔여섯입니다. 함경남도 원상 출생이신 시인은 이른바 이산가족의 일원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가운데 남북분단의 아픔을 남보다 뼈저리게 느끼고 계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식으로 시가 전개되는데, 시인이 겪었던 일이 어떤 영감이나 상상력, 혹은 비유와 상징의 도움 없이 그야말로 곧이곧대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혈압 때문에 술을 끊어야겠다고 결심한 중학 동창은 마지막 대작을 위해 일부러 나를 찾았단다 반세기가 넘어도 상기 '야' '자'로 통하는 사이가 마냥 즐겁기만 하다. 한때는 혀가 굳어져 제대로 말도 못했다며 다시 굳어지기 전에 꼭 해야겠다고 느닷없이 들고 나온 한마디 ----야, 너 집 떠날 때 아버지한테 얘기했니? 국회 청문회인들 이보다 더 가슴에 맺힐까 간신히 기어드는 목소리로 ----아니 라고 대꾸하긴 했지만 금방 가슴속의 응어리가 터질 것만 같다. ----이 자슥아! 너 아버지가 누이동생을 앞세워 우리 집에 찾아오셨단 말야 너 어디 갔느냐고 물으시길래 나도 놀랐지 무슨 말씀이냐고 되물었지만…… ……'제 에미도 동생들도 다 모른다니 이놈이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야' 걱정이 태산 같으시더라. 하긴 그래 어머니는 자식이 잘 되는 일이라면 무슨 짓인들 말렸을까 남행열차를 탄 내게 마냥 손을 흔들어쌌던 누이의 모습이 지금도 삼삼한데 아버지의 노여움에 모두가 모른다고 잡아뗀 모양이다. ----야 이 자슥아 정신차려 올해 부모님 춘추 어떻게 되시니 기세가 등등해진 녀석은  취기까지 가세하여 사뭇 심문조다. ----그래 아버지가 나를 스물하나에 어머니가 열아홉에 두셨으니까 여든여덟에 여든여섯이 되셨을 거야. 그만 울먹이는 소리가 돼버렸는지 '야' '자' 하던 친구가 ----내가 괜한 소리 했나보다 ----아냐 잘했어 내 따귀 실컷 갈겨주지 않을래 이승에선 다시 못 뵈올 부모님 생각에 기어이 울음보를 터뜨리고 싶어 상기된 얼굴을 들이대자 이번엔 '야' '자'가 잘못 눈물단지 건드렸나 싶었던지 시무룩한 목소리로 ----아무래도 내가 괜한 소리 했나보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는 것을 어쩌랴. ―김광림, [괜한 소리] 전문   제목 '괜한 소리'는 혈압 때문에 술을 끊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마지막 대작을 위해 찾아온 중학 동창의 입에서 나온 두 가지 질문인 동시에, 시인 스스로 자신의 대답을 '괜한 소리'로 규정한 자탄의 목소리이기도 합니다. 동창생 노인은 마지막 대작이겠다, 술을 마신 김에 평소에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 있어 두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자 늙은 시인 친구는 울먹이는 소리로 대답하고, 급기야 울음보를 터뜨릴 듯 상기된 얼굴이 됩니다. 그러자 노인은 "아무래도 내가 괜한 소리 했나보다"라고 시무룩한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려 시의 제목이 '괜한 소리'가 된 것이겠지요.  두 가지 질문은 읽으면 읽을수록 가슴을 치고, 쓰리게 하고, 결국은 뜨겁게 달아오르게 해 눈시울까지 뜨거워집니다. 수백만 이산가족의 아픔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물음은 "야, 너 집 떠날 때 아버지한테 얘기했니?"입니다. 청년 김광림은 아버지한테 탈향(脫鄕)의 이유를, 이향(離鄕)의 전말을 말씀드리지 않고서 남행 열차에 몸을 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종적을 감춘 아들의 소식을 알아보고자 딸을 앞세워 아들 친구의 집을 찾아 나섭니다. 시인인들 그리 멀지 않은 어느 날 귀향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말씀드리지 않았지, 그것이 영원한 생이별의 순간임을 알았더라면 작별의 인사도 고하지 않고 떠나왔겠습니까. "걱정이 태산 같으시더라." 이 한 행 속에는 아버지의 정이 소복이 담겨 있는 정도가 아니라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흘러 넘치는 그 부정(父情)이 독자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두 번째 질문은 "야 이 자슥아 정신차려/올해 부모님 춘추 어떻게 되시니"입니다. 마지막 대작을 위해 찾아온 친구는 일신의 안전을 위해, 혹은 시를 쓰겠다고 아버지한테 말씀도 안 드리고 고향을 떠난 시인 친구를 공박하며, 살아 계시면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시냐고 묻습니다. 시인은 "그래 아버지가 나를 스물하나에 어머니가 열아홉에 두셨으니까 여든여덟에 여든여섯이 되셨을 거야"라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 속에는 살아 계실 확률보다는 돌아가셨을 확률이 훨씬 더 높다는 암시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앞쪽에서 "국회 청문회인들 이보다 더 가슴에 맺힐까"라고 자탄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뒤에 가서는 "내 따귀 실컷 갈겨주지 않을래"라고 자학하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시는 별다른 시적 기교를 동원하지 않고서 자신이 직접 경험했던 것을 솔직히 털어놓아 깊은 감동을 준 경우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껏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 가운데 가슴아픈 경험이 있으면 솔직하게 고백해보십시오. 수치심을 동반한 기억도 좋습니다. 그 체험이 소소한 것이건 대단한 것이건 체험은 여러분이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학적 자산입니다.  3. 시는 나의 치부를 드러내는 행위이다 이산가족으로서의 뼈아픈 체험도 시가 될 수 있지만 늙어가면서 느낀 쑥스러운 체험도 시가 될 수 있습니다. 김광림의 시에는 민족사가 담겨 있지만 박남수의 시에는 일상사가 담겨 있습니다. 시인 박남수는 미국에 이민을 와 작품활동을 하다 돌아가신 분이라 여러분 중에 교분을 나눈 분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팬티 끈이 늘어나 입을 수가 없다. 불편하다. 내 손으로 끈을 갈 재간이 없다. 제 딸더러도 끈을  갈아 달라기가 거북하다. 불편하다. 이제까지 불편을 도맡았던 아내가 죽었다. 아내는  요 몇 해 동안, 나더러 설거지도 하라 하고, 집 앞 길을 쓸라고도 하였다. 말하자면 미리 연습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가시게 그러는 줄만 여기고 있었다. 빨래를 하고는 나더러 짜달라고 하였다. 꽃에 물을 주고, 나중에는 반찬도 만들어보고 국도 끓여보라고 했다. 그러나 반찬도 국도 만들어보지는 못하였다. 아내는 벌써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팬티 끈이 늘어나 불편할 것도 불편하면서도 끙끙대고 있을 남편의 고충도.  ―박남수, [훈련] 전문   시인의 아내는 자신이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뜰 것을 예감하고서 홀아비가 될 남편을 위해 혼자 살아가는 법을 가르쳤던가 봅니다. 그런데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기도 전에 아내를 눈을 감았습니다. 이 작품은 흡사 일기를 시행으로 나눈 듯 시적 기교는 없지만 읽는 이의 가슴을 치게 하는 바가 있습니다. 박남수 시인의 젊은 날의 시 가운데 [아침 이미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금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 같은 눈부신 감각을 보여준 시를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는 노년에 들어서서 아주 솔직하게,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부끄러운 과거지사는 어떻게든 숨기려고 합니다. 하지만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말함으로써 잔잔한 감동을 주는 시를 쓸 수 있습니다.  4. 시는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을 담아야 한다 저는 성선설이나 성악설 중 어느 한쪽을 지지하지는 않습니다만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순수한 본성은 나한테 잘못을 한 타인을 용서해주고 싶은 마음, 타인의 불행을 보고 측은함을 느끼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넓게 말해 사랑이지요. 여러분은 신문을 읽으면서 혀를 차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혀를 차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되고 그 마음이 시를 쓰는 마음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타인의 불행에 오불관언하는 마음은 시인의 마음이 아닙니다. 다음에 감상해볼 시는 '95년 1월, 빚 때문에 영랑호에 와 자살한 한 가족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이곳 미국에서도 일가족 동반 자살의 뉴스가 전해지는 때가 있습니까? 한국에서는 해마다 정말 자주 듣는 뉴스가 바로 이것입니다. 일가족이 자살을 시도한 결과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아났지만 살아난 사람도 중태란 소식, 부도를 막지 못한 중소기업의 사장이 가족을 먼저 죽이고 자살했다는 소식, 또 어른은 살아나고 아이들이 죽었으니 이건 동반자살을 아니라 비속살해라는 등등. 자, 시를 읽어봅시다.  그 해 겨울 영랑호 속으로 빚에 쫓겨온 서른세 살의 남자가 그의 아내와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들어가던 날 미시령을 넘어온 장엄한 눈보라가  네 켤레의 신발을 이내 묻어주었다 고니나 청둥오리들은 겨우내 하늘 어디선가 결 고운 물무늬를 물고 와서는 뒤뚱거리며 내렸으며 때로 조용한 별빛을 흔들며 부채를 청산한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인근 모래기*까지 들리고는 했다 얼음꽃을 물고 수천 마리 새떼들이 길 떠나는 밤으로 젊은 내외는 먼 화진포까지 따라나갔고 마당가 외등 아래서 물고기와 장난치던 아이들은 오래도록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애들이 얼마나 추웠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의 뺨을 적신다 그래도 저녁마다 울산바위가 물 속의 집 뜨락에 오래 가는 놀빛을 떨어뜨리고 가거나 산 그림자 속 화암사 중들이 일부러 기웃거리다가 늦게 돌아가기 때문에 영랑호는 문을 닫지 않는 날이 많다 그런 날은 물 속의 집이 너무 환하게 들여다보였다 * 모래기는 영랑호 주변에 있는 마을 이름. ―이상국, [물 속의 집] 전문     어린아이들이야 자살에 자발적으로 동참했을 리 없고, 부모가(흔히 아버지가) 자식을 일단 살해한 뒤에 자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인은 누구로부터 들었는지 밝혀놓지 않았는데, 1995년 1월에 서른세 살의 남자가 빚 때문에 고민하다 그의 아내와 두 자식의 손을 잡고 영랑호 속으로 뛰어들어 자살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전해듣습니다. 손에 손을 잡고 함께 뛰어들었으니 그야말로 '동반' 자살입니다. 타인의 죽음이므로 시인은 1연에서 이 사실을 담담히 독자에게 들려줍니다. 담담히?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제4행 "미시령을 넘어온 장엄한 눈보라"에 이르면 시인의 안타까워하는 얼굴이 확, 다가옵니다. 그 겨울의 눈보라는 영랑호를 눈앞에 둔 한 가족을 얼마나 떨게 했을까요. 이 비정한 세상에 남편 없이 팽개쳐질 두 새끼의 목숨까지 거둘 결심을 한 젊은 가장의 굳어 있는 얼굴까지 확, 다가옵니다. 인간에 대한 안타까운 연민의 정은 시인으로 하여금 제2연을 쓰게 합니다. 시인은 자살의 현장인, 네 사람의 목숨을 삼키고도 여전히 고요한 영랑호에 고리와 청둥오리들을 보내 조문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상상합니다. 때로 조용한 별빛을 흔들며 부채를 청산한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인근 모래기까지 들리고는 했다 즉, 이제는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 가족을 시를 통해서나마 한 번 부활시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물 속에다 집을 만들어서 말입니다. 한때는 단란했을 그들,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빚이 없었던 그 가족의 지난날을 생각하니 하느님이 다 무심하다고 생각되고, 그래서 시인은 하느님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상국은 시를 구상하는 동안, 초고를 쓰는 동안, 퇴고하는 동안, 신이 되었습니다. 시밖에 쓸 수 없는, 언어의 창조주가 말입니다. 미국에서도 폭탄 테러로 어린아이를 포함한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한 적이 몇 번 있었지요. 이런 소식을 접하고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을 어쩌지 못해 시 한 편을 써보는 것입니다. 이상국 시인은 자신의 무력감이 서글퍼 제3연을 썼을 것입니다. 제3연의 마지막 행에서는 시인 자신이 느닷없이 등장해 울고 있습니다. 죽은 가족이 시인이 아는 사람들이라 비보를 접하고서 울었는지, 눈물을 글썽거렸는지, 혹은 신문 기사를 보고서 울고 싶었는지, 뭐 그런 것은 하등 중요하지 않습니다. 혹자가 이 시를 평하면서 센티멘털리즘이니 감상 과잉이니 하며 비판하는 것도 시인은 개의치 않기로 한 듯합니다. 그는 다만 자신이 그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인 시작 행위를 하되,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을 이렇게 "지금도 눈물이 나의 뺨을 적신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일가족 동반 자살 소식을 접하면 아이들을 살해한 부모의 비정함에 분노하게 됩니다. 정 죽고 싶으면 자기네들이나 죽지 왜 애들을 죽여, 어떻게 자기 자식을 죽일 수 있을까 하고 개탄한 뒤, 욕을 몇 마디 덧붙이고는 남의 일이기에 곧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이상국 시인은 젊은 부부가, 혹은 젊은 가장이 오죽했으면 그런 식으로 생을 마감했으랴 하는 생각에 이어진 연민의 정을 억누를 수 없어 물 속에다 집을 지어주고, 물 속의 집 뜨락에 놀빛을 떨어뜨리고 가게끔 하고, 화암사 중들에게까지 부탁하여 목탁을 치게 합니다.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이 없이 우리가 어찌 문학을 한다고 운위할 수 있겠습니까.  5. 시는 유머 감각의 산물이다 이상국의 시가 너무 비감하여 우리 모두를 숙연케 합니다. 이번에는 유쾌한 시를 한 편 감상해봅시다. 미학에서는 아름다움을 크게 여섯 가지로 나누고 있는데 비장미, 숭고미, 순정미, 우아미 외에 골계미가 있고, 또 하나 미와 반대개념이면서 미의 일종인 추(the ugly)가 있습니다. 우리 시는 너무 점잖고 엄숙한 경향이 있습니다. 언중유골이라고, 엄숙한 가운데서도 농담을 할 줄 알고, 농담을 하는 중에도 뜻을 새길 수 있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도 시를 읽다가 미소를 짓거나 씩 웃는 경우가 있었습니까? 팔순을 넘기신 우리 할머니 경주이씨와 칠순이 가까운 큰고모부는 의좋은 오누이 모습으로 도란도란 옛날 이야기 나누시네. 때는 봄날, 햇살은 까르르 까르르 간지러운 웃음으로 방바닥 위로 환하게 퍼져나가고 백발 장모가 권하는 일배 일배에 취한 눈멀고 귀먹어 가는 사위는 아주 오랜 옛날도 어제처럼 가까워 흥이 나네. 기억하시는교 빙모님요 막내 처제 낳고 제가 가물치 한 마리 사 가지고 찾아갔지요. 하모 김서방 그 달이 윤삼월 참으로 큰 가물치였제. 마흔 고개 힘겹게 넘어 출산한 장모 문안 가던 젊은 서른 사위, 가물치 한 마리 짚으로 꿰어들고 경남 양산군 하북면 삼감리로 걸어가는 키 큰 고모부 모습 나도 보이네. 산후조리하고 있던 할머니의 민망한 마음 보이네. 갓난애기 처제를 본 우리 큰고모부 선한 눈가 웃음도 보이네. 金粉으로 부서지는 두 분의 옛날 이야기 곁에 버릇없이 누운 나는 살아보지도 못한 저 먼 세월 어슬렁어슬렁 거슬러 올라가는 귀 큰 당나귀, 금줄 친 사립문 밖에서 百年 손님 맏사위 멋쩍게 맞으며 新羅瓦當의 웃는 얼굴로 웃는 할아버지 젊은 웃음소리 듣네. 아직도 살아 푸드득거리는 가물치 소리 생생히 들려오네. 정일근, [흑백사진―가물치] 전문 이 시는 상황 설정부터 웃음이 나옵니다. "마흔 고개 힘겹게 넘어 출산한 장모 문안 가던 젊은 서른 사위"의 이야기이니까요. 이 이야기를 풀어놓는 촉매제가 바로 가물치입니다. 장모가 마흔이 넘어 처제를 낳았으니 본인은 백년 손님인 맏사위 보기가 민망하고, 장인은 사위 맞기가 멋쩍기 이를 데 없습니다. 사위는 그래도 나 몰라라 할 수 없어 엄청나게 큰 가물치 한 마리를 사 들고 처갓집에 갑니다. 이 얼마나 우스꽝스런 상황입니까. 그런데 시인의 재능은 이러한 상황을 보여주는 데 있지 않습니다. 모든 등장인물을 아름다운 금빛으로 도금하는 언어의 연금술에 있습니다. "햇살은 까르르 까르르 간지러운 웃음으로 방바닥 위로 퍼져나가고", "新羅瓦當의 얼굴로 웃는 할아버지 젊은 웃음소리" 같은 표현도 그렇거니와, 화자의 팔순을 넘기신 할머니가 칠순이 가까운 큰고모부에게 술을 계속 권하면서 나누는 대화가 더없이 정겨워 독자는 감동하게 됩니다. 시 한 편에 사람 사이에 오갈 수 있는 따듯한 정감을 이렇게 듬뿍 담을 수 있다니, 아니 흘러 넘치게 할 수 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6. 시는 새로운 요소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그럴듯한 소재와 주제일지라도 표현 방법이 너무 진부하면 시의 맛이 사라져버립니다. 시를 쓸 때는 어느 정도의 실험정신이 시를 맛깔스럽게 하는 양념이 될 수 있습니다. 한 번 읽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한 편의 시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난 그날을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처음 시도로 글자 그대로 해석해보기로 한다. 그―①그윽한 ②그믐달 ③그림자 날―①날카로운 첫 키스(님의 침묵) ②날강도 ③날짐승 통합적으로 그윽한 면도날로 정의해보기로 하자. 그런데 나의 알 수 없는 우울증은 조금 더 강도를 높인다. 다음 단계로 그날의 사건과 정황을 그려보기로 한다. 이 단계에서 경계해야 할 점은 육신이 제거된 영혼의 교만함이 고개를 쳐든다는 점이다. 냉정함을 잃지 말라고 충고하면서 두 번째 시도로 들어간다. 정말이지, 그날 자네가 불시에 가한 엄청난 테러가 떠오른다. 정말 어찌 하라는 건지, 나 부끄러움 넘어선 견디기 힘든 굴욕감에 별들도 차가운 눈빛으로 가슴 깊이 얼음 송곳 밀어 넣는다. 바람에 상처받기 쉬운 겨울나무는 땅의 마지막 수액 한 방울도 빨아올려 단단한 겨울에 완강히 저항한다. 그런 잠 못 들기 몇 날인가, 핏발 서린 눈에선 자꾸 마른 눈물 흘러, 말라비틀어진 흔적이 영혼 깊숙이 각인된다. 그러면 육신은 무엇이며 영혼은 또 무엇인가, 영혼의 기막힌 알리바이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끊이지 않는 우울증으로 육신을 계속 괴롭힌다. 더 나아가 내 몸 구석구석 굴욕의 상처들이 바람에 제 존재를 알리는 풀잎처럼 우우, 일시에 일어나 실개울로 흘러 비굴한 시 쓰기를 관통하여 뜨거운 태양이 그대의 오만함을 녹여줄 회복기의 봄을 고대하도록 한다. 이쯤 되면 영혼의 교만함이 육체의 단순성을 비웃듯 또다시 고개를 쳐들고 나는 또다시 이 우울증의 원인 치료를 위해 그날이라는 글자 분석에 몰입한다. (ㄱ⇒무엇인가 어긋남, ㅡ⇒동물의 울음, 나⇒egoistic, ㄹ⇒물 흐르듯이;너무 랭보的이어서 나의 우울증은 더욱 심화된다) ―강성철, [그날] 전문   시인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렵지요? [그날]이란 제목을 보고 '그 어느 날'이라고 생각한 저의 기대지평은 초장에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시인은 '그날'을 달리 생각해보고자 '그'를 ①그윽한 ②그믐달 ③그림자로, '날'을 ①날카로운 첫 키스(님의 침묵) ②날강도 ③날짐승으로 해석해본 뒤, 통합하여 '그윽한 면도날'로 정의해봅니다. '그'는 ①번을 선택했으나 '날'은 세 개 중 마땅한 것이 없어 면도날을 연상한 것입니다. ①번 '날카로운 첫 키스([님의 침묵])'에서 날카롭기 짝이 없는 면도날을 연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윽한 면도날이라니요. 여기서 독자는 시인의 장난에 우롱 당했다는 당혹스런 느낌과 시인의 계산을 못 따라잡았다는 허탈한 감정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장난이냐고 못마땅하게 생각할 수도 있고요.  제2연에 접어들어서도 강성철은 계속 독자에게 미지의 덫을 놓습니다. "그날 자네가 불시에 가한 엄청난 테러"는 면도날을 휘둘러대는 상황이었던가 봅니다. 불시에 가한 자네의 행동에 나는 괴롭고 서러워 마지막 수액 한 방울도 빨아올려 겨울에 저항하는 겨울나무처럼 잠 못 드는 나날을 보냅니다. 고통과 설움은 "끊이지 않는 우울증으로 육신을 계속 괴롭힌다"는 2연 중반 끝 부분까지 이어집니다. 이런 뒤엉킴의 실마리는 아마도 이 구절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육신은 무엇이며 영혼은 또 무엇인가. 시인이 신의 존재를 믿는 종교인이라면 영혼의 불멸 또한 믿어 의심치 않겠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육신'과 '영혼'의 관계는 평생 동안 뇌리에서 지울 수 없는 화두와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설사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영혼의 불멸을 믿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일은 이 현실사회에서도 얼마나 자주 벌어지고 있습니까.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다가 온 사람이 죽어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을 봤다고 하는 경우도 있지요. 이제 대충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육신을 계속 괴롭히는 영혼의 병이 나의 큰 문제인 것입니다. 타인에 의해 늘 상처받는 내 영혼의 병인 우울증이 문제인 것입니다. 시인은 "굴욕의 상처들"과 "비굴한 시 쓰기", "그대의 오만함"과 "영혼의 교만함" 등 온갖 자극적인 언어를 동원하면서 굴욕과 비굴, 영혼의 교만함에서 벗어나기를, 고통과 설움이 끝나기를, 그 무엇보다 우울증이 완치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제2연 끝 부분에 이르러 '그날'이란 글자의 분석에 몰입했던 이유가 밝혀집니다.  나는 또다시 이 우울증의 원인 치료를 위해 그날이라는 글자 분석에 몰입한다. 불면증 환자가 잠을 청하기 위해 숫자를 백, 아흔아홉, 아흔여덟, 아흔일곱…… 하면서 밤이 깊도록 세고 있듯이 강성철은, 아니 [그날]의 시적 화자는 우울증에서 벗어나고자 '그날'이라는 글자를 분석하는 데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울증 환자의 글자 분석의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요. (ㄱ⇒무엇인가 어긋남, ㅡ⇒동물의 울음, 나⇒egoistic, ㄹ⇒물 흐르듯이;너무 랭보的이어서 나의 우울증은 더욱 심화된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게 애를 썼건만 화자의 우울증이 회복되기는커녕 더욱 심화되고 말았다니까요. 이 거대한 정신병동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이 이 괄호 속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너와 나의 관계는 늘 어긋나기만 하고, 인간은 하나님이 숨은 세계에서 승냥이처럼 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나와 타인은 다들 지독한 에고이스트들이고, 나의 우울증은 심화되기만 합니다. 읽고 곧바로 이해되지 않는 시, 여러 번 되풀이해 읽는 동안 뜻이 풀리는 이런 시가 오히려 매력적인 시일 수 있습니다. 1980년대에 한국 시단을 풍미했던 이른바 해체시라는 것에 대해서도 따뜻한 애정의 시선을 갖고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암호 풀기나 미로 찾기 같은 시 읽기이지만 그 속에 오묘한 진리가 들어 있거든요.  7. 시는 인간의 생로병사를 노래한다  인간을 포함한 뭇 생명체의 동일한 운명은 태어난 이상 마땅히 죽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로병사는 동서고금의 문학작품에 나타난 가장 보편적인 소재요 주제입니다. 제게 소설작법을 가르쳐주신 김동리 선생님은 "소설로 쓸 만한 소재가 없어 고민하는 학생은 '죽음'을 갖고 써보게. 우리에게 죽음만큼 친숙한 것은 없으니까."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실 텔레비전 뉴스나 조간신문에 누군가의 '죽음'이 보도하지 않는 날이 있던가요?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하루를 살면서 하루를 죽이는, 즉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운명공동체인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작품을 쓰다가 소재나 주제가 고갈되었다고 여겨지면 누군가의 죽음을 갖고 시를 써보십시오. 죽음이 아니면 탄생과 늙음과 질병 가운데 하나를 택해 써보셔도 좋겠습니다.  묘비들 사이로 아이가 달려온다 기억의 저편으로 아득히 건너간 생애들이 몇 줄 글자로 남아 무릎 키 세우고 있는 사이 네 살배기 아이가 무어라 소리치며 저쪽에서 뛰어 온다 Beloved Wife and Mother 1939-1980 이국 땅에서의 크고 작은 기쁨 설레임과 회한의 날들 꿈결같이 아득히 사라지고 조국 하늘 아래 한 여인의 평생은 한 줄 이국 글자 묘비명으로 남았는데 한 명의 딸과 의학박사란 칭호만이 한 남자의 사십 년 생애가 남긴 모든 것이어서 의·학·박·사 이름 위에 새겨놓은 네 글자 살아남은 자의 애달픈 마음 그 옆의 묘비는 전하는데 내가 지상에 남기고 싶은  단 하나의 풍경처럼 줄지어 선 비석들 넘어 딸아이가 온다 팔랑팔랑  꿈속 나비 같다 ―김기중, [공원 묘지에서] 전문       현대시 김기중은 외국의 한 공원 묘지에서 한국인의 이름을 발견하고서 사뭇 처연한 심사에 사로잡혀 이 시를 썼을 것입니다. 시에 나타난 가족사는 이렇습니다. 한 남자가 40년을 살아 지상에 남겨놓은 것은 한 명의 딸과 의학박사란 호칭이 전부였습니다. 즉, 의학박사의 신분으로 외국의 묘지에 묻혔으니 한 남자의 그리 길지 않은 생애에 공부가 차지한 세월이 거의 대부분이었을 것입니다. 조국의 하늘 아래 남아 있던 아내의 '평생'이 남편의 묘비에 한 줄 이름으로 남게 되었을 뿐이니 그 감회가 착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 착잡한 감회가 마지막 연에 담겨 있습니다. 딸아이는 아마도 성묘하러 온, 죽은 이의 자식이겠지요. 줄지어 선 비석들, 즉 수많은 주검을 뛰어넘으며 가장 최근에 죽은 이의 한 점 혈육이 꿈속 나비같이 팔랑팔랑 옵니다. 사서 중 하나인 {장자}에는 장주가 꿈속에서 본 나비의 고사가 나옵니다. 장주가 꿈에서 호랑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인지 호랑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꾼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라는, '물화(物化)'를 설명하는 고사가 생각납니다. 사람의 생이란 일장춘몽이며 남가일몽이란 말이 거짓이 아닙니다. 생에 아무리 집착한들 저승사자의 방문을 막을 길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게 되는 것이며, 지금 죽어가고 있는 것일 뿐일까요? 예술은, 시는 우리 목숨을 부활할 수 있게 합니다. 여러분과 저의 사후에 우리가 써놓은 시를 읽고 누군가 감동을 한다면 우리는 그 독자의 마음속에서 부활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는 영원 회귀를 꿈꾸는 것입니다.  8. 시는 문명비판을 지향한다 20세기를 풍미했던 가장 강력한 시적 사조는 모더니즘이었습니다. 모더니즘이 표방하고 있는 정신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문명비판입니다. 영화는 기술적인 면이 강하기 때문에 문명과 친화가 잘 이뤄지는데 문학은 이상하게도 문명하고는 좀처럼 어울리지를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 일상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정보를 제공하고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며 오락의 기능을 다하는 컴퓨터를 갖고 쓴 시가 있습니다. 어언 10년 전 일이 되었는데, 러시아의 한 해커가 인터넷을 통해 시티뱅크에 침투해 1천만 달러를 훔쳐간 적이 있습니다. 이제는 컴퓨터를 잘 다루면 복면을 하고 은행털이 강도로 나서지 않아도 됩니다. 미국의 10대 해커들이 뉴저지 공군기지의 한 연구소에 침투한 일이 발생, 미국 사회를 경악케 하기도 했고, 1997년 초에는 호주와 에스토니아의 해커들이 3만 통이 넘는 전자 메일을 쏟아 부어 버지니아 랭글리 공군기지의 컴퓨터 네트워크가 마비된 적도 있습니다. 이처럼 정보 전달이라는 약과 함께 시스템 파괴라는 병을 주는 것이 컴퓨터입니다. 컴퓨터가 사람의 머리와 손발을 대신하여 정보사회의 중요한 전달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의학계에서는 '테크노 의존증' 혹은 '컴퓨터 중독증'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문명병이 등장하여 급속히 확산되는 중이라고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의사들은 기기 자체에서 나오는 전자파도 문제이지만 컴퓨터를 너무 오래 사용하는 바람에 시력장애·경근완 질환(목·어깨·팔에 통증이 오는 병)·두통·소화불량 등의 신체장애는 물론 대인기피증·광장공포증·우울증 같은 정신질환이 컴퓨터를 많이 다루는 현대인들을 위협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상황이니 컴퓨터를 소재로 한 시를 젊은 시인들이 쓰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 대다수는 사실 눈만 뜨면 컴퓨터를 켜고, 컴퓨터를 꺼야 잠자리에 들지 않습니까.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이 기억력 나쁜 고물 PC를 새 걸로 바꾸기로 결심. 언젠가 PC 카탈로그에서 보았던  삼성 알라딘을 사리라 마음먹는다 내 글이 안 되는 건 순전히  도구가 용산 조립품 286AT이기 때문이라 밤마다 기도하며 써 보았지만 고매해야 할 내 시들은 언제나 날림 조립식인 걸 알라딘을 사야지! 그의 자판을 요술 램프처럼 살살 만져 주면 나만의 유능한 종이 나타나 내 명령어들을 충실히 실행할 것이다 넘치는 하드 용량, 풍만한 그의 언어는 이 미궁에서 나의 탈출을 도우리라 사실 이 느림보 286AT에도 요정이 있다 언젠가 치약으로 열심히 PC 본체를 닦다가 난 보고 말았다 디스크 드라이브에서 하품을 켜며 기어 나오는 발이 안 보일 만큼 작은 바퀴벌레 새끼를, 나를 비웃으며 다시 제 집인 양 기어 들어가는 그 자식을 향해 재빨리 플로피 디스크를  몇 번이나 쑤셔 넣었다 뺐다 하며 압살을 노렸지만 디스크만 에러났던 기억. 가끔 모니터 속의 내 글 위로 그 바퀴들이 지나가지는 않을까, 그는 너무 두렵다 내가 잠든 사이 테트리스를 즐기고 어쩌면 이전에 헥사를 지우고, 가끔씩 바이러스를 먹이는 것도 그 요괴임에 난 짙은 혐의를 두었다 베네치아 워드게임에서 '바퀴벌레'란 단어가 내려와 나를 덮칠 때, 난 확신하였다 나의 체제는 이미 위협받고 있었다 놈은 밤마다 용량 작은 하드를 기웃거리며 내 글을 비웃을 거 아닌가? 무슨 시가 이래, 하면서도 내가 방심한 사이 내 연애시를 도용해 행여 또래 암컷들을 사귀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나의 신성한 작업실에서…… 온갖 상스런 상상들이 아! 또 잡종의 새끼를 쳐서 손잡고 다니겠지 아, 나의 약한 정신은 이미 도굴되었고……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김창진, [알라딘을 사야 한다] 전문       컴퓨터는 우리의 친구이자 원수이고 상관이자 부하입니다. 컴퓨터를 소재로 한 이 시를 유심히 읽으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요술 램프를 문지르면 '유능한 종'이 나타나 소원을 들어주는 {천일야화} 속 유명한 이야기의 그 유능한 종이 알라딘이죠. 이 시에서는 삼성전자에서 만든 신형 컴퓨터의 제품명이 알라딘이므로 알라딘은 중의법으로 쓰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신형과 구형의 차이가 아닙니다. "디스크 드라이브에서 하품을 켜며 기어 나오는/발이 안 보일 만큼 작은 바퀴벌레 새끼들"에 대한 이해가 이 시를 이해하는 요체가 됩니다. 요정·바퀴벌레·요괴는 같은 존재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놈들은 시인이 잠든 사이 테트리스를 즐기고, 가끔씩 바이러스를 먹이고, 내 연애시를 도용해 암컷들을 사귀고, 나의 약한 정신을 도굴하는 존재입니다. 여기서의 바퀴벌레는 인간에게 해악을 준다고 알려져 있는 발 빠른 곤충인 그 바퀴벌레가 아닙니다. 컴퓨터 바이러스를 만들어 하드디스크 드라이브에 들어 있는 정보를 파괴하고, 제 마음대로 침입해 남의 정보를 빼 가는 자는 얼굴을 알 수 없는 익명의 존재입니다. "또 잡종의 새끼를 쳐서 손잡고 다니겠지"라는 구절로 보아 그들은 증식까지 하는 모양입니다. 그런 연후에 시인의 약한 정신은 이미 도굴되었지만,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고 힘주어 결론짓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타인을 향해서는 경고를 주고, 스스로는 각성하자고 다짐해본 것입니다. 인류의 공적(公敵)으로 등장해 암약하는 해커와 바이러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저는 이 시를 통해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이 시는 문명비판시이며 일종의 현실풍자시입니다.  9. 시는 독자 감동을 지향한다 근년에 들어 저는 광고 문구 속에 '고객 감동'이라는 말이 들어 있는 것을 몇 번이나 보고 들었습니다. 광고인들도 이제는 광고주가 만든 제품에 새로운 기능이 첨가되어 있으니 쓰던 것을 버리고 우리 제품으로 바꿔 쓰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소비자들의 욕구를 충분히 만족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음을 강조하지요. 향상된 기능으로 당신들을 감동시킬 만큼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자랑을 합니다. 그런데 시가 지향하는 최고의 미덕이야말로 감동이 아니겠습니까. 격렬한 감동이든 잔잔한 감동이든 시를 읽으며 느낀 감동은 우리의 뇌리를 좀처럼 떠나지 않습니다. 아버지 따라가 묵정밭을 맨 적 있습니다. 쇠비름풀 여뀌 바랭이서껀 이런 저런 잡초들 수없이 뽑아 던졌습니다. 검붉은 맨살의 흙이 드러나면서 밭뙈기 한 두락이 새로 나는 것 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일평생 마침내 논 서른 마지기 이루고, 그러나 송충이 같은 자식들, 그 푸르게 일렁이던 논들 다 갉아먹어 버리고 빈 들 노을 아래 서 있던…… 아버지, 일흔 중반 넘어서면서 망령드셨습니다. 처음에는 세상사 관심거리가 하나 둘 줄어들더니, 마을이나 집안 대소사는 물론 식솔들의 잦은 불상사에 대해서도 영 남의 일이 되어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버지,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나중에는 당신의 자식들, 심지어는 늘 곁에서 수발 드는 어머니 보고도 당신 누구요, 우리 집사람 못 봤소,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다음 아버지, 이미 다 닳아 치우고 없는 농토, 그 논에 물꼬 보러 간다며 나섰습니다. 없는 소, 없는 일꾼들을 부렸습니다. 품안의 새끼들을 어르고 입안의 혀 같은 당신의 아내와 자주 두런거렸습니다. 그러기를 십여 년, 어느 날 아버지, 검불같이 남아 있던 당신의 육신까지도 뽑아 던졌습니다. 그렇게 돌아가신…… 아버지, 비로소 아버지의 풀 뽑기가 마저 끝났습니다. 번듯하게 눕는 아버지의 땅, 그곳으로 드는 아버지, 아버지, 보였습니다. ―문인수, [풀뽑기] 전문     아버지를 따라가 묵정밭을 맸던 어린 날의 추억에서부터 시는 전개됩니다. 쇠비름풀·여뀌·바랭이 같은 잡초들을 수없이 뽑아 던져야 밭뙈기 한 두락이 새로 태어나는데, 아버지는 평생을 바쳐 논 서른 마지기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송충이 같은 자식들이 푸르게 일렁이던 논들 다 갉아먹고 기진맥진한 아버지는 노을녘에 서서 빈 들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슬픈 초상은 빈 들, 즉 당신의 피땀으로 일구었건만 "이미 다 닳아 치우고 없는 농토"가 된 들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으로만 그려지지 않습니다. 삶의 비애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아버지는 일흔도 중반이 넘어 노인성 치매를 앓는 환자가 되셨는데, 증세가 나날이 심해져 자기 아내도 못 알아볼 지경에 이릅니다. 망령은 들었어도 아버지는 소몰이며 땅을 일구는 일에 인이 박인 농투성이였습니다. 가지고 있는 논도 없는데 물꼬 보러 간다며 나서고, 없는 소, 없는 일꾼들을 부리는 망령을 보입니다. 그러기를 십여 년, 그간 가족의 녹아 내린 애간장이 어떤 색깔을 띠고 있는가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윤회를 믿는 불가에서는 전생의 원수들이 모여 가족을 이룬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내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가 나를 아들로 보아주지 않는 슬픔, 죽음을 목전에 두고 헛소리를 하는 아버지를 마냥 바라보고 있어야만 하는 슬픔이 목젖을 차고 오릅니다. 이 슬픔은 은유나 상징 같은 시적 기교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문인수는 그저 뭉툭한 필묵으로(평이한 필체로) 아버지의 초상화를 스케치하고 있을 뿐입니다. 잡초를 수없이 뽑아 던졌던 아버지는 검불같이 남아 있던 당신의 육신을 끝내는 뽑아서 땅에 던집니다.  아버지, 비로소 아버지의 풀 뽑기가 마저 끝났습니다. 번듯하게 눕는 아버지의 땅, 그곳으로 드는 아버지, 아버지, 보였습니다. 눈물을 감추고 있어 오히려 눈물겨운 마지막 연입니다. 한평생 풀 뽑는 일을 멈추지 않으셨던 아버지가 자신의 몸을 마지막으로 땅에서 뽑아 반듯하게 관에 드러누움으로써 생애가 완성되었습니다.   뽑혀진 풀이 흙의 일부가 되듯이 인간의 육신도 흙의 일부가 됩니다. 문인수는 아버지의 초상을 이 시에 그려놓은 것일 테지만, 저는 땅을 파며 한 생을 살다 땅으로 들어가 마감하는 이 땅의 수많은 아버지의 모습을 [풀 뽑기]라는 한 편의 시를 통해서 봅니다. 아버지의 풀 뽑기도 개간을 위한 창조 행위였고, 아들의 [풀 뽑기]도 '시'를 이룬 창조 행위였으니 그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시인은 이 시에서 눈물을 애써 감추고 있지만, 뭇 독자의 심금은 그것 때문에 울려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비장미를 미의 하나로 취급해온 것일 테지요.  영화며 컴퓨터 게임 등 재미있는 것이 무궁무진하게 많아진 오늘날 시의 기능, 시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기상천외한 실험과 발명 및 파괴로 과학적 언어로밖에 대화할 줄 모르는 우리의 인식지평을 넓혀주는 것이 첫째 역할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보의 홍수 속에서 먹고사는 문제에 부대끼느라 무뎌진 우리의 가슴에 서정의 물살을 와 닿게 해 잠시나마 감동하게 하는 것, 그 기능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서정의 물살이 워낙 약해 비록 눈물을 글썽이지는 않더라도, 이 세상에는 감동하거나 감격할 일이 너무 적지 않습니까. 감동적인 시는 이렇듯 우리의 눈시울을 적시게 하는 슬픔의 힘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10. 시는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점에서는 거짓말이다 199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의 제목은 '정동진역'입니다. 가운뎃부분에 "해안선을 잡아놓고 끓이는 라면집과/파도를 의자에 앉혀놓고/잔을 주고받기 좋은 소주집이 있다"는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 보이는 시입니다.  겨울이 다른 곳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닷가 그 마을에 가면 정동진이라는 억새꽃 같은 간이역이 있다. 계절마다 쓸쓸한 꽃들과 벤치를 내려놓고 가끔 두 칸 열차 가득 조개껍질이 되어버린 몸들을 싣고 떠나는 역. 여기에는 혼자 뒹굴기에 좋은 모래사장이 있고, 해안선을 잡아놓고 끓이는 라면집과 파도를 의자에 앉혀놓고 잔을 주고받기 좋은 소주집이 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외로운 방들 위에 영롱한 불빛을 다는 아름다운 천장도 볼 수 있다. 강릉에서 20분, 7번 국도를 따라가면 바닷바람에 철로 쪽으로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와 푸른 깃발로 열차를 세우는 역사(驛舍), 같은 그녀를 만날 수 있다. -김영남, [정동진역] 전문             김영남은 등단작의 제목을 그대로 첫 시집의 제목으로 삼았는데, 그 첫 시집의 해설을 제가 썼기에 이 시의 생산 과정을 본인한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모래시계'이던가요, 텔레비전 드라마의 촬영 장소가 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진 정동진역은, 1996년까지만 해도 해돋이 관광 명소가 아니었습니다.  그곳 경치가 제법 괜찮다는 것 정도가 몇몇 사람에게 알려져 있었지요. 어느 신문기자가 누군가로부터 정동진역 풍광이 좋다는 말을 듣고 직접 갔다와서는 '알려지지 않은 곳, 그러나 가볼 만한 곳'이라며 그곳을 소개하는 기사를 썼습니다. 김영남은 그 기사를 읽고 일필휘지하여 이 시를 썼습니다. 물론 가본 적이 없었지요. 신문기사 한 쪼가리도 유심히 읽는 관찰력이 그에게 시인이란 타이틀을 붙여주었습니다. {죄와 벌} {테스} {여자의 일생} 등 세계명작 가운데 짧은 신문기사를 읽고, 그것을 갖고 쓴 것이 아주 많습니다. 시도 소설과 마찬가지로 관찰하고 기록하기입니다. 텔레비전 드라마든 영화든 관찰의 안테나를 세우고 유심히 보면 거기서 시의 제재가 나옵니다. 친구의 이야기든 소설 속 주인공의 이야기든 유심히 들으면 거기서 시의 제재가 나옵니다. 모든 사물과 모든 생명체가 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시는 열려 있는 총체입니다. 시는 그 어떤 인접예술과도 교배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거짓말을 능수능란하게 하되 시적 진실을 표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시인이 정동진역에 전혀 가본 적이 없으면서 이런 시를 썼다고 하여 우리는 시인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앞에서는 저는 시가 시인 자신의 체험의 산물이라는 말씀을 드렸는데 한편으로는 이렇게 신문기사를 읽은 간접체험에다가 상상력을 보태어도 얼마든지 재미있는 혹은 훌륭한 시를 쓸 수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안 보고도 본 척, 안 겪고도 겪은 척, 모르고도 아는 척하는 사람이 또한 시인입니다. 시인은 신문기사를 보고도, 책을 읽고도, 영화를 보고도 시를 쓸 수 있습니다, 간접적으로 체험한 것을 직접 체험한 양 둘러칠 수 있는 능력이 시인됨의 기본 능력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시인의 자격으로 왔으니까 마지막으로 제 시를 한 편 낭송해 드릴까 합니다.  볼품없이 누워 계신 아버지 차갑고 반응이 없는 손 눈은 응시하지 않는다 입은 말하지 않는다 오줌의 배출을 대신해주는 도뇨관(導尿管)과 코에서부터 늘어져 있는 음식 튜브를 떼어버린다면? 항문과 그 부근을 물휴지로 닦은 뒤 더러워진 기저귀 속에 넣어 곱게 접어 침대 밑 쓰레기통에 버린다 더럽지 않다 더럽지 않다고 다짐하며 한쪽 다리를 젖히자 눈앞에 확 드러나는 아버지의 치모와 성기 물수건으로 아버지의 몸을 닦기 시작한다 엉덩이를, 사타구니를, 허벅지를 닦는다 간호사의 찡그린 얼굴을 떠올리며 팔에다 힘을 준다 손등에 스치는 성기의 끄트머리 진저리를 치며 동작을 멈춘다 잠시, 주름져 늘어져 있는 그것을 본다 내 목숨이 여기서 출발하였으니 이제는 아버지의 성기를 노래하고 싶다 활화산의 힘으로 발기하여 세상에 씨를 뿌린 뭇 남성의 상징을 이제는 내가 노래해야겠다 우리는 모두 이것의 힘으로부터 왔다 지금은 주름져 축 늘어져 있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하나의 물건 나는 물수건을 다시 짜 와서 아버지의 마른 하체를 닦기 시작한다. ―졸시, [아버지의 성기를 노래하고 싶다] 전문 솔직히 말씀드려 이 시는 완벽한 거짓말입니다. 제 아버님은 이날 이때껏 입원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허리가 많이 안 좋으십니다만 올해도 고향에서 밭농사를 짓고 계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 시를 읽은 많은 독자가 대부분 실제상황인 줄 알고 제게 물어왔습니다. 부친을 간병하느라 고생이 많았겠다는 위로의 말을 들을 때마다 곤혹스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시는 재미교포 2세인 루이스 최가 쓴 {생명일기}(김유진 옮김, 김영사 간행)라는 간병기를 보고 제 체험인 양 가져와서 쓴 것입니다. 물론 아버지의 성기 운운하는 대목은 그 책에 나오지 않습니다. 식물인간의 상태가 된 어른을 간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여실히 기록되어 있는 그 책을 보고 만약 제 아버지가 저런 상태가 되었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상상해보면서 한 편의 시를 썼던 것입니다. 이 시가 시적 진실을 추구하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책을 통한 간접체험을 직접체험으로 슬쩍 바꿈으로써 시를 쓸 수 있었습니다. 한 인간의 체험에는 한계가 있는 법인데, 간접체험과 상상력은 그 한계를 무한정 확장해 줍니다.  자, 그럼 이것으로써 제 강연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제 얘기를 경청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열 가지 방법론에 입각하여 전개한 제 얘기가 여러분의 시작활동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좋은 작품 쓰시길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675    "그때 사방팔방에서 저녁노을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댓글:  조회:2268  추천:0  2017-08-22
      현대시를 어떻게 읽어야 하나  강인한  좀 심한 말을 하자면 요즘 우리 나라에 시인은 많지만 독자들이 읽어주는 시인의 작품은 드물다고 한다. 또 시가 왜 그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다고들 말한다. 과연 오늘의 시는 소월이나 한하운의 시보다 어렵고, 그러므로 읽히지 않고 독자로부터 외면 당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현대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느냐고, 현대시의 이해 요령을 알고 싶어하는 이들도 더러 있다. 현대시에 무심코 접근하고자 하는 젊은 독자들을 위하여 여기에 한 가지 이론을 소개하고자 한다.  20 세기 최대의 시인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는 시의 요소를 네 가지로 설명한 바 있다. 센스, 사운드, 이미지, 톤이 그것이다. 이 네 가지 요소에 대한 이해가 해결되면 어느 정도 현대시에 접근하는 하나의 요령에 자연히 터득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1. 센스(sense)  흔히들 "그 친구, 센스가 제법이야." 하는 말을 곧잘 한다. 바로 그것이다. 단순한 감각으로서가 아니라 지적(知的)인 감각을 현대시의 한 요소로 치는 것이다.  사람들이 말한다  사람들은 입에서 거미줄을 꺼낸다  그 거미줄에 걸려 죽은 사람의 그림자가  눈감은 것처럼 어두운 세상  …… 그래도  새들이 우는 속을 알아본다  꿈으로 우는 거리를 꿈꾼다  ― 정현종의 '꿈으로 우는 거리'  사람들의 입에서 거침없이 흘러나오는 말. 그 말로 인해서 그 자신이 죽기도 하는 시대. 그것은 바로 자기도 모르게 허공을 날아가다 거미줄에 걸려 목숨을 잃은 작은 날벌레로 비유되고 있다. 사람들은 입에서 거미줄을 꺼낸다. 그 거미줄에 걸려서 죽은 사람의 그림자가 어두운 세상. 말(언어)과 거미줄의 유추라는 이 뛰어난 감각으로 후반의 약간 모호하고 처진 가락조차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는 시이다. 대체로 현대시는 범속한 상투적 표현을 멀리하고 참신한 감각을 즐겨 표현한다. 봄에 관한 글에서 아지랑이 운운, 한다든가 가을의 시에서 낙엽이 뒹구는 무상한 삶, 운운하는 따위는 우리가 혐오해 마지않는 상투적인 감각에 지나지 않는다. 적어도 참신한 감각에 갈채를 보낼 수 있는 독자들의 이해력이 요청되는 까닭에 더러는 난해하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싶다.  2. 사운드(sound)  시의 표현 재료는 언어다. 언어는 그러므로 단순한 사상 전달의 매개체가 아닌 음악성을 띤 언어라야 시어가 된다. 많은 현대시가 오로지 현대시라는 이유로 해서 음악성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반성을 요한다고 본다. 언어의 음악성은 독자에게 예술적인 흥분과 쾌감을 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좋은 시들이 이러한 음악성, 곧 운율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정형시나 동요의 가락과 같은 외형률보다 미묘한 내재율에 현대시의 묘미가 있다.  허리띠 매는 시악시의 마음실같이  꽃가지에 은은한 그늘이 지면  흰날의 내 가슴 아즈랑이 낀다  흰날의 내 가슴 아즈랑이 낀다.  ― 김영랑의 '4행시'  다 아는 바와 같이 영랑의 시는 음악적인 점에서 가장 아름답다. 물론 위에서 보인 시는 7.5조라는 운율 자체가 이 시의 주된 리듬이기도 하지만 나는 영랑의 시에서 그보다는 섬세한 언어 감각을 취하고 싶다. 영랑의 시는 얼핏 보면 여성적이고 가냘파서 우수를 느끼게도 하지만 그 우수가 사실은 매우 밝고 화사한 편이다. 왜냐 하면 대부분의 그의 시에서 볼 수 있는 시어들이 비음 ㄴ, ㅁ, ㅇ 이나 유음 ㄹ의 구사가 유려하기 때문이다. 비음이나 유음은 밝은 어감을 주는 것으로 ㄱ, ㄷ, ㅂ, ㅅ, ㅈ, ㅊ 등의 무성음 자음이 주는 어둡고 격한 어감과는 대조적이라 할 것이다. 마음실, 은은한, 그늘이 지면, 흰날, 아즈랑이… 이러한 단어들은 입술에서 구르는 영롱한 방울 소리와 같은 음악성을 느끼기에 족한 것이다.  3. 이미지(image)  이미지란 심상(心象) 또는 영상(映像), 형상(形象)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말로 시를 읽어 가는 동안 우리의 마음속에 그려지는 그림을 말한다. 현대시는 곧 이미지라고까지 극단적으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만큼 현대시에서 비중이 큰 요소라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하여 이 이미지를 함부로 남용하거나 혹사하면 시를 망칠 우려도 적지 않다. 이를테면 요리에 맛을 내는 양념과 같은 구실을 하는 것이 현대시의 이미지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이미지는 대체로 비유로써 형성되는데 이에는 직유와 은유가 대표적이다.  직유(simile)는 가장 초보적인 단계로 '앵두 같은 입술', '타는 듯한 눈빛'과 같은 비유를 말하며, 은유(metaphor)는 나타내고자 하는 본래의 뜻이 감춰진다는 데서 시가 함축적 의미를 띤다. 일반적으로 은유는 A는 B이다, B의 A, 또는 구체어+추상어 등으로써 나타난다. '괴로움을 질겅질겅 씹는 표정이었다.', '파아란 슬픔이 내리는 거리', '눈물의 빵', '꽃은 한 떨기 거울' 등과 같이 두 가지 이상의 개념이 결합되는 것인데 이게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무턱대고 혼자만이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이미지를 표현한다고 하여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비밀 암호 같은 비유를 써서는 곤란할 것이다.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어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던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뜯어라, 원통히 물어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麝香) 방초(芳草)ㅅ 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 부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 …. 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 …  스며라 배암!  ― 서정주의 '화사(花蛇)'  미당 서정주의 초기를 대표하는 시 중의 하나이다.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뱀이 되었을까.  이 시는 도입부터 충격적인 이미지를 제시한다. 푸른 하늘 아래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달변의 혓바닥 혹은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은 입술. 이러한 색채 이미지는 대단히 강렬한 원색적인 것이다. 마치 에드거 앨런 포의 환상적이며 음울한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시라 하겠다.  이미지 그 자체가 단순히 현대시라는 틀을 고수하기 위해서 쓰여진 시라면 그 시는 이미지 이상일 수 없다. 그런 시는 시가 아니라 이미지에 그치고 마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현대시라고 해서 무조건 난해해야 할 하등의 이유는 없다.  4. 톤(tone)  어조(語調), 시인의 말하는 자세. 똑같은 세 끼 밥을 먹고 살아가면서 우리 인간은 모두 다 똑같은 생활,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지는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시인들도 시인들 나름대로 인생을 보는 눈이 다 각각 다를 수밖에 없다. 어떠한 자세로 인생 또는 세계를 보는가, 어떠한 어조로 말하는가 하는 따위를 '톤'이라고 한다. 그리고 한 편의 시 속에서도 어조에 변화를 주어 표현하는 기교적인 시도를 때로 볼 수도 있다. 가령 처음부터 중반까지는 엄숙한 어조로 말하다가 종반에 이르러 갑자기 톤을 바꾸어 익살스럽게 끝내는 베이소스(bathos) 혹은 안티 클라이맥스(anti climax)라는 방법이 그러한 것이다.  누가 흘렸을까  막내딸을 찾아가는  다 쭈그러진 시골 할머니의  구멍난 보따리에서  빠져 떨어졌을까  역전(驛前) 광장  아스팔트 위에  밟히며 뒹구는  파아란 콩알 하나  나는 그 엄청난 생명을 집어들어  도회지 밖으로 나가  강 건너 밭이랑에  깊숙이 깊숙이 심어주었다  그 때 사방팔방에서  저녁 노을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김준태의 '콩알 하나'  이 시인의 작품 속에는 현대시에 으레 나타나는 이미지가 거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과연 낡은 시인가? 그렇지 않다. 기교적인 이미지나참신한 감각이 구사되지 않은 데서 역설적으로 새로움을 찾을 수도 있다. 도시의 역전 광장 아스팔트에 떨어진 콩알 하나. 도회지의 아스팔트로 대표되는 현대 문명의 거대한 폭력 앞에 떨어져 뒹구는 한 개의 콩알은 하나의 생명이며 진실한 인간이다. 그런데 이 콩알은 짓밟히며 잊혀지는 처참한 상황 속에 놓여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 생명의 존재를 알아줄 사람을. 어쩌면 그는 우리가 떠나온 농촌의 쭈글쭈글한 주름 투성이의 시골 할머니인지도 모른다. 농촌과 도시, 혹은 현대의 비인간적 폭력과 인간적 각성의 대비를 이 시는 대단히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이러한 비정한 상황 속에서 시인은 밟히며 뒹구는 소중한 생명을 안고 가서 강 건너 밭이랑에 인간성의 씨앗을 심는다. 강 이쪽의 살벌한 곳을 떠난 강 건너 저쪽이란 의미도 퍽 상징적이다. 이 시는 참다운 삶의 자세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웅변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시인이 지닌 생명에의 외경 내지 존엄성 인식이 세계를 바라보는 이 시의 톤이다. 한 편의 시가 꽃의 아름다움이나 말하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우울한 비인간화의 시대에 있어서 꽃은 아름다움 이상의 하나의 생명으로써 표현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말한 현대시의 네 가지 요소 ―센스, 사운드, 이미지, 톤을 고루 조화시킨 그러한 시를 우리는 훌륭한 시라고 비로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674    시는 활자화되기전, 랭정하게 다듬기에 온갖 피를 쏟으라... 댓글:  조회:2200  추천:0  2017-08-22
  놀이로서의 시 쓰기 / 김기택     1. 기다리기   한 편의 시가 나오기 전까지 나도 내 안에서 무엇이 나올지 모른다. 궁금해서 기다려진다. 시가 나오기를 기다릴 때 시가 어린애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이 녀석은 성질이 청개구리 같아서 꺼내려 하면 얼른 숨는다. 아무리 좋은 컨디션. 고요한 시간, 알맞은 분위기를 준비해 놓고 유혹해도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무관심한 척, 아무도 자기에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하면, 그때서야 저도 심심하고 궁금하니까 살살 고개를 쳐든다. 내가 전혀 글을 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예를 들면 펜도 종이도 없거나 만원 전철 안에 있거나 하여 쓰기 곤란한 상황에 처하면, 갑자기 나에게 놀자고 덤벼든다. 이 녀석이 스스로 찾아와 놀자고 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므로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이 녀석과 놀아주려고 노력한다. 잘 놀아주지 않으면 잘 뻗치던 상상력을 대부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래서 언제 갑자기 찾아올지 모르는 이 녀석을 위해 가방이나 주머니에 필기구와 수첩을 준비해 두어야 한다. 일을 할 때나 놀 때나 일상에 빠져 있어도 무의식적인 마음의 더듬이는 늘 세워두어야 한다. 그러나 시를 잡을 준비가 잘 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 그 녀석도 눈치가 빤해서 잡히려고 하지 않는다. 이 녀석은 내가 준비가 안 된 순간을 느닷없이 급습하여 난처한 상황에 빠져 쩔쩔매는 것을 즐기는 것 같다. 어떤 때는 새벽꿈에 찾아와 상상력에 발동을 거는데, 일어나면 신기하게도 싹 사라진다. 번번히 당하지만, 그럴 때마다 이 녀석은 그런 어수룩한 나를 보는 게 여간 즐겁지 않은가 보다. 가만히 있을 때보다는 걷거나 버스 안에서 창 밖을 보거나 움직일 때 이 녀석은 더 자극을 받는다. 그래도 때때로 나에게 제대로 걸려 꼼짝 못하고 작품이 되어 나오곤 한다.   2. 산 채로 잡기   내 시에는 묘사가 많지만, 시 쓰는 과정에서 실제로 묘사할 대상을 보는 것은 시 쓰기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 시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시각이나 인식, 마음에 따라 그것을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대상을 상상력 위에 올려놓을 때 그것은 실체를 보는 것 보다 더 생생하고 활발한 움직임을 보인다. 나는 대상을 상상의 공간에서 움직이게 해 놓고 그것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글자로 표현된 것이 내가 가상공간에서 상상했던 것과 같이 실감이 나지 않으면 그것이 생생하게 환기될 때까지 몇 번이고 수정한다. 그것이 상상 공간에서 본 것처럼 생생하게 될 때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표현하려다 보니 미세한 것까지 표현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과장과 허풍이 나오게 된다. 과장과 허풍도 인식의 소산이다. 과장이나 허풍은 평면적인 그림에서 보면 잘 보이지 않거나 지나치기 쉽거나 감춰진 것들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평면적인 사실 속에 숨은 사소한 것들 그러나 시에서는 중요한 가치들을 깨우는 것이다. 시는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지만 시 쓰기에서 가장 큰 방해자는 역시 언어이다. 언어와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의 다양한 정서 사이에는 아득한 거리가 있다.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담기에는 언어는 너무 상투적이고 단단한 외피로 둘러싸여 있다. 언어는 너무 많은 사람이 사용해 닳고 닳아 살과 피는 별로 없고 뼈다귀 같은 개념 덩어리가 대부분이다. 이것을 그대로 사용하면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는 거의 죽고, 딱딱한 관념이나 언어의 질긴 껍질만 남게 될 것이다. 읽는 이의 머리로는 전달되겠지만 몸으로 전달되지는 않는다. 몸으로 전달되지 않으면 감동은 없다.   시인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복잡하고 미묘한 개인적인 정서,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의 정서를 죽이는 언어를 숙명적으로 시 쓰기에 사용해야 한다. 시인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정서를 죽이려고 하는 언어를 사용해서 정서를 죽이지 않고, 가능하면 덜 다치게 하고, 산 채로 전달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많은 시인 선배들은 은유나 이미지, 객관적 상관물, 아이러니, 낯설게 하기 등 언어를 산 채로 잡아 생생한 그대로 전달하는 여러 방법을 만들어 사용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흉내내는 순간 다시 상투어로 돌아가려 한다. 좋은 시는 남들이 썼던 것이 아니라 제 몸에 맞는 새로운 언어, 육화된 언어를 찾아 쓴다. 표현하기 어려운 대상을 만났을 때 나의 놀이 욕구는 더 힘을 얻는다. 나는 온 힘을 집중하여 완강하게 활자화를 거부하는 대상과 싸운다. 나는 그것이 명확하고 알기 쉬운 표현이 될 때까지 물고 늘어진다. 그것이 선명하고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이 되어 내 앞에서 얌전하게 꿇어 앉을 때까지 물고 늘어진다. 그 과정이 치열할수록 시 쓰는 즐거움은 커진다. 그 표현과의 싸움에 집중할 때 나는 재미있는 놀이에 집중하는 아이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즐거운 시 쓰기도 고통이 될 때가 많이 있으니, 그것은 아둔한 재주와 헐거운 연장 때문에 능력의 한계를 절감할 때이다. 잡을 때는 산 것 같았는데, 잡아놓고 보면 죽어있을 때가 많다.   3. 다듬기   퇴고에서 내가 하는 일은 시 쓸 때의 흥분 상태를 가라앉히는 일이다. 흥분 상태에서는 못난 표현도 제 새끼들 마냥 다 예쁘게만 보인다. 군더더기에 상투적인 안이한 표현, 의도적인 오류가 아닌 습관에 의한 오류, 감정의 과잉에 의해 흘러넘친 과장 따위가 작품 속에 빠져 있을 때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때 나는 시간의 섬세한 여과작용을 이용한다. 되도록 이면 일주일 이상은 묵혀두고 시 쓸 때의 흥분도 충분히 제거시킨다. 그러면 뭔가에 홀린 눈이 조금씩 풀리고 냉정한 태도로 돌아와서 잘못된 표현이나 생각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이렇게 일정한 간격을 두고 다듬는 것이 좋은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늘 시간에 쫓겨 허둥지둥 원고를 보낼 때가 많고, 활자화된 후에야 후회하는 일이 적지 않다. 완성된 원고를 확정하는 일은 늘 어렵고 원고를 보낸 후에도 늘 꺼림칙하다.    
  시에 대한 몇 가지 생각(하) 나 태 주(시인 ․ 공주문화원장)     4. 하늘이 주는 문장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문학작품 가운데 가장 정제된 형식의 예술이라면 그것은 다름 아닌 시이다. 시는 그 출발부터가 표피적인 언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인간 내부 깊숙이, 정신 내지는 무의식 세계의 언어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니까 시에 동원되는 언어가 영혼의 언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는 꾸며서 아무렇게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의 문장 가운데는 불가항력의 요소가 들어있다. ‘바로 그것’의 표현이어야 되는 고칠 수 없는 면이 있다. 대체 불가능한 엄격성이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고칠 수 없는 문장이요 하늘이 내려준 문장이라 할 것이다.   연아 반갑다   오월이 가는 줄도 모르고 살았는데 여름이 오는 것을 네가 알려주네   연은 마음의 친구   소리 없이 왔다가 향기로만 남기고 떠나는 연은 마음의 벗님네.    이 시는 얼마 전에 쓴「연」이란 제목의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앞의 두 연은 그냥 꾸며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부분, 시인조차도 고칠 수 없는 통제되지 않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뒤의 두 연은 충분히 고칠 수 있고 다른 말로도 대체 가능한 표현이다. 바로 앞의 두 연이 신의 영역에 관한 표현이고 뒤의 두 연이 인간 영역의 표현이기에 그러하다.  이렇게 표현된 시는 독자에게로 가서 단순한 의사 전달의 기능을 넘어선 정신적 치유의 기능까지를 갖는다. 시를 읽는 사람들(독자)이 ‘아, 그렇구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생각을 가지면 이것이 감동이 된다. 감동이란 놀라운 것이다. 이 감동이 바로 인간에게 행복감과 만족감을 주는 다이돌핀(엔도르핀보다 4천배 강력한 호르몬)이란 호르몬 분비를 촉진하는 요인이 된다고 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독자 입장에서 꽃과 내가 하나라는 생각, 시(시인)와 내가 하나라는 생각, 나아가 다른 사람(독자)과 내가 하나라는 생각은 감동을 낳는다. 이 감동은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고 고달픈 마음의 위로를 주고 행복감을 주고 자존감을 높여준다. 이런 기능을 바로 시가 하게 된다면 그것은 대단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독자에 대해서 비판자나 공격자나 고문자가 아니라 위로자, 동행자, 선량한 이웃, 도반道伴의 위치에 서야만 한다. 이런 안목에서 예로 들어볼 수 있는 시가「행복」이라는 시이다.   저녁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우리가 평소 꿈꾸고 생각하듯이 ‘행복’이란 것은 그다지 크거나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사소한 것이요, 우리들 가까이에 있는 '그 무엇'이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쉽게 깨닫지 못한 것이 어리석은 일이요 오류일 뿐이다. 가령, ‘저녁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나의 행복의 바탕임을 선뜻 처음부터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렇게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사실(현실, 조건)을 아는 것도 하나의 자그만 깨달음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자기 자신이 이미 행복한 사람인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각성과 인정은 또 정신적 치유기능을 낳는다. 짧은 언어조합인 시가 여기까지 이르게 되면 그것은 결코 단순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시는 대단한 것이 되며 상당한 힘을 지닌 예술형식이 되는 것이다.      5. 시인이 받는 두 가지 유혹  시인의 길을 오래 동안 가는 길이다. 평생을 시와 함께 가는 길이요, 외롭고도 힘든 길이다. 고달픈 길이다. 이 길을 지속적으로 가기는 힘들다. 이렇게 오래 동안 시를 쓰다 보면 두 가지의 유혹을 받게 된다.  하나는 시를 그만 쉬고 싶은 유혹이 그것이다. 아예 시를 버리고 딴 길로 가고 싶은 생각도 갖게 된다. 그만큼 시의 길은 소득이 시원찮아 자기와 타협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점을 방지하기 위해 시대에 대한 열정이나 애정이 필요하다. 시에 대한 초심을 잃지 않고자 하는 노력도 있어야 한다. 시에 반했던 기억을 되살리며 시에 대한 첫사랑을 늘 상기할 필요도 있겠다.  시인의 길에서 자칫 한번 딴 길로 가면 제자리로 돌아오기가 어렵다. 돌아온다 해도 떠났던 그 자리가 아니다. 엉뚱한 자리에 멀쑥하니 돌아가기 마련이다. 시가 달라지고 사람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두 번째의 유혹은 빨리 유명해지고 유혹이다. 이럴 경우, 독자와 야합하고 세상과 타협하게 된다. 시인으로 살면서 유명한 시인이 되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이다. 그래 자칫 시낭송가들에게 어필하는 시, 독자들에 널리 읽히는 시, 유행을 따라가는 시, 상업주의와 결탁한 시를 쓰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정도가 아니다. 이런 유혹을 이기고 시의 본래의 길을 가도록 해야 한다. 어렵지만 그렇도록 해야 한다. 진짜 시인이 유명해지는 건 세상과 야합해어 유명해지는 게 아니라 자기가 평생 갈고 닥은 시 작업의 결과에 의해서 유명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전에 보다는 사후에 더 유명해질 수도 있는 일이다.  시인이 시로 쓰는 것은 시인 자신의 개별적인 경험, 특수한 삶의 흔적이다. 이것이 시작품을 통해 독자들에게 가서 세상 속의 보편성과 맞아 떨어질 때 감동적인 시가 되고 그런 시를 남긴 시인은 유명해진다.  독자들이 너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도 그렇다고 생각을 할 때 그 지지가 시인의 영광으로 이어진다. 그런 날이 올 때까지 시인은 한눈팔지 말고 자신의 길을 가고 또 가야 할 일이다. 모름지기 시인은 이상 두 가지 유혹의 오솔길을 요리요리 피하고 나아가 진정한 자기의 시와 만날 때 성공한 시인이 된다고 본다.       6. 언어의 연금술  시가 인간의 생각과 느낌을 정제된 언어로 표현하는 언어예술이라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그런데 그것이 말같이 되지 않아서 걱정이다.  시의 바탕은 물론 시인의 생생한 삶이고 경험이다. 여기서 잡다한 돌멩이 같은 언어가 나온다. 사실이미지다. 이것이 시인의 마음속에 들어가 감정과 기억으로 저장된다. 감정이미지다. 이 감정이미지는 시인의 용광로에서 충분히 녹아지고 걸러져 순금과 같은 생각과 느낌으로 탄생되어야 한다. 이렇게 태어난 생각과 느낌은 다시 시적인 언어를 만나 시로 재탄생된다.  매우 괴롭고 지루하고 짜증나는 과정이다. 빠져나오기 어려운 협곡 같은 과정이다. 이를 정리하면 삶․경험(사실이미지)→ 감정․기억(감정이미지)→ 시(시적인 이미지)가 된다.  시가 되는 삶이나 경험은 누구나 언제나 어디서나 있는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사실이다. 이것이 슬펐다, 좋았다와 같은 정선과정을 거쳐 감정으로 정리 되고 드디어 시인만이 갖는 구체적인 언어, 즉 이미지를 만나 시로서 표출되게 된다. 이를 가장 잘 표현해주는 시는 박목월의 「윤사월」이고 박용래의 「저녁눈」이다.   송화 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고 엿듣고 있다 ― 박목월,「윤사월」전문    이 시에는 다만 와 와 만 있을 뿐 시인은 없다. 시인은 시 밖에 있다. 그러나 외딴 봉우리도 꾀꼬리도 눈 먼 처녀도 시인과 무관하지 않다. 더 정확하게는 시인의 생각과 느낌과 무관하지 않다. 바로 시인의 생각과 느낌을 대변해주는 대리인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 감정의 대리인. 언어로 나타난 감정의 대리인이 바로 시이고 시의 이미지이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 박용래,「저녁눈」전문    박용래의 시는 좀 더 단순하면서 꽉 짜여진 듯한 작품이다. 네 개의 일정한 행으로 되어 있는데 각각 앞뒤에 공통적인 언어조합이 들어간다. 과 가 그것이다. 그 사이에  ‘말집 호롱불→ 조랑말 발굽→ 여물 써는 소리→ 변두리 빈터’가 끼어든다.   이러한 장치는 매우 역동적이며 시각적인 것으로 마치 글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여러 컷의 사진을 차례로 돌려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영화의 장면 전화 같기도 하다. 이 시에도 여전히 시인은 시 밖에 있다. 그렇지만 시에 등장하는 모든 사물(이미지, 언어)은 시인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과 다르지 않다. 바로 시인 자신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번번이 시를 쓸 때 시인이 느끼는 괴로움은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이 좋은 이미지를 만나 시로서 정착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마치 구름이 강물을 향해 빗방울을 던지는 행위와 같다. 구름은 강물을 향해 빗방울을 떨어뜨리지만 바람을 만나 엉뚱한 곳에 떨어질 수도 있는 일이다. 그야말로 빗방울이 강물로 떨어져서 금세 강물의 일원이 된다는 건 행운에 가까운 일이다.  그처럼 시인이 시적인 언어를 시의 나라를 향해 던질 때 좋은 시로 태어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고 행운에 가까운 일이다. 거기에는 마땅히 아픔이 있고 상처가 있고 쓰라림이 있게 마련이다. 식물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 꽃이듯이 언어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시의 언어이다. 꽃은 또 하나의 아픔이며 상처이며 쓰라림이다.  시인이 시의 나라로 시를 던질 때 진저리치며 받아주는 그 누군가가 있을 때 우리들의 시는 생력을 갖고 영원한 시로 태어나게 된다. 아, 이것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박용철의 「시적 변용에 대하여」 같은 글에는 이런 곡절이 잘 나타나 있다. 스스로 참고할 일이다. (2012) .♣.    
  시에 대한 몇 가지 생각(상) 나 태 주(시인 ․ 공주문화원장)        1. 시 일반 독자들 입에서 시가 어렵고 이해가 안 될 뿐더러 접근이 까다롭다는 말이 나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더구나 요즘에 발표되는 젊은 시인들의 시들을 읽으면 더욱 그렇다는 말들을 한다. 특히 문학잡지에 발표되는 시들이 그렇다고 한다. 그래서 독자들은 시인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말들을 한다.    여기에는 물론 독자들의 몰이해나 수준미달 같은 것들이 요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허지만 더 많이는 시인들 편에 있겠지 싶다. 시인들이 시의 본분을 망각해서 그렇다. 어디까지나 시는 짧은 형식의 글이요 많은 내용을 축약해서 쓰는 글이고 될수록 아름다운 언어를 다듬어서 써야 하는 글이다. 그것은 하나의 어길 수 없는 약속이요 전제이다. 이것을 시인들 편에서 어겼다는 말이다. 그러니 독자들이 시인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시는 어디까지나 시여야 한다. 시다운 시여야 한다. 그럼 어떻게 쓰는 시가 정말로 시다운 시일까? 이에 대한 분명한 대답은 있을 수 없다. 흔히들 한자로 된 시(詩)라는 글자를 파자破字해서 ‘시는 말[言〕의 절[寺〕이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듯한 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시는 경전과 같은 글이어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을 또 어떤 이들은 ‘시는 말이 절에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절은 스님들의 수행공간이다. 이러한 절에 말이 들어가면 어떻게 해야 할까? 스님들이 절에 들어가서 하는 일들을 떠올려보면 좋을 것이다. 스님들이 하는 일로는 우선 참선과 독경과 불경공부가 있을 것이다. 이런 일들을 할 때 스님들은 될수록 말을 줄인다. 때로는 묵언으로 일관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말을 다루는 스님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될수록 말을 줄여야 할 일이다. 긴 문장이나 말을 축약해서 표현해야 할 일이다. 또한 진리에 가까운 말을 쓰려고 애써야 할 일이다. 이것이 시와 시인이 가진 임무이며 본질이다. 이를 떠날 때, 시는 시가 아닌 그 어떤 것이 된다. 오늘날 시인들의 불행은 시인들이 시인 이상이 되려고 하는 데에 있고 시가 시 이상의 것이 되려고 할 때에 있다. 시의 소외와 고적도 또한 시가 시 이상의 것이 되려고 하는 데에서 오는 것이다. 시가 그 본분에 충실할 때 독자는 저절로 돌아올 것으로 믿는다. (“말이 절에 들어가면 시다. 말의 농축이 시다. 끝내 적멸의 세계가 시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무를 세계, 침묵의 나라를 지향한다.” 이것은 어느 날 모임에서 함께한 분이 시에 대해서 들려준 말이다. 상당한 타당성이 있어 여기에 옮기면서 잠시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2. 금잔옥대  ‘금잔옥대金盞玉臺’란 단어가 있다. 매우 아름답고 매력적인 말이다. ‘금으로 만든 술잔과 옥으로 만든 잔대’란 뜻으로 ‘수선화’를 가리키는 말이다. 흔히 주변에서 보는 수선화가 아니고 제주도나 거문도 같은 남쪽 섬에서 자생하는 수선화를 말한다. 이들 수선화의 꽃모양을 살피면 보통 육지의 수선화처럼 노랑색 한 가지로만 된 것이 아니라 하얀색과 노랑색 두 가지로 되어 있음을 본다. 하얀색 꽃잎 여섯 장에다가 가운데에 둥글게 생긴 노랑색 꽃술이 불쑥 나와 있는 형상이다. 이를 가리켜 금잔옥대로 표현한 것이다.    일찍이 추사 김정희 선생도 제주도로 유배살이할 때, 유배지에서 금잔옥대의 이 수선화를 보면서 시를 쓰기도 했고 유배생활의 고달픔을 달랬다고 한다. 이러한 금잔옥대란 말을 우리들의 시에 대입시켜보면 재미있는 생각을 얻을 수 있다. 시에서도 금잔 부분이 있고 옥대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두 부분 가운데서 우선순위는 금잔이 먼저고 옥대가 그 다음이다. 그야말로 금잔부분은 하늘이 내려주시는 언어, 신이 내린 문장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것으로도 수정 불가하다. 그렇다고 옥대 부분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금잔 부분이 있으려면 옥대 부분이 있어야 한다. 뒷받침을 해주어야 한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이것은 나의「풀꽃」이란 이름의 내 시이다. 여기서 금잔 부분은 ‘너도 그렇다’이다. 이 부분은 그 어떤 말로도 대신할 수가 없다. 시인 자신도 고칠 수가 없다. 그렇게 벼락같은 언어이다. 이 말을 위해서 앞의 말들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앞의 문장을 삭제하면 어떻게 되는가? 앞의 문장이야말로 뒤의 문장을 있게 한 원인이며 전제이다. 없애서는 안 된다. 이러한 것은 고등학교 학생들도 이내 이해하고 알아맞히는 문제이다. 앞으로 시를 대할 때 시에서 ‘금잔 부분’과 ‘옥대 부분’을 찾아보는 일은 매우 흥미 있는 시 읽기를 제공해줄 것으로 믿는다.     3. 구양수의 다상량  글 쓰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작문법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권위 있는 것으론 중국 송나라 때의 구양수란 사람이 이야기했다는 ‘삼다법三多法’이다. 많이 읽고(多讀), 많이 쓰고(多作) 많이 생각하자(多商量).    흔히 사람들은 이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 다독과 다작을 꼽는다. 많이 읽고 많이 쓰기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다. 일단은 수긍이 가는 말이다. 그런데 정작 글을 쓰는 마당에서도 그런가?    글을 오래 써본 사람들은 경험적으로 알 것이다. 글에 대한 밑그림을 제대로 그리지 않았거나 생각을 많이 하지 않고 글 쓰는 시간을 길게 잡는 경우와 오래 동안 생각하면서 밑그림을 세밀하게 그린 다음 글 쓰는 기간이 짧은 경우 어느 때가 더 성공적으로 글을 쓸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백이면 백, 앞의 경우보다는 뒤의 경우가 훨씬 더 효과적이란 걸 알 것이다. 그러하다. 생각은 길게 하고 글을 쓰기는 단숨에 써야 한다. 그 반대가 될 때는 단연코 패착이다. 어쩌면 생각과 느낌을 내팽개치듯이 빠르게 속사포로 써야 한다. 그래야만 글에 생기가 들어간다.     물론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다독과 다작이 기본이고 필수이고 선행조건이다. 그러나 실제로 글을 쓰는 마당에서는 다상량이 단연 제일이다. 어쨌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준비해야 한다.    다상량은 그냥 단순한 생각이 아니다. 그것은 글에 대한 구체적인 구상을 말한다. 글의 내용이 되는 소재를 모으고 생각을 다듬고 느낌을 새롭게 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렇게 다상량 부분을 많이 할애했을 때 비옥한 글이 되고 다상량 부분이 부족할 때 메마른 글이 되기 십상이다.    글이 시원치 않게 빠졌을 경우에는 아예 지금까지 쓴 글을 덮어버리고 다시 쓰는 것이 백번 좋은 방법이다. 공연히 시원찮게 써진 글을 붙잡고 고친다고 오랜 시간 부대껴보았자 여전히 시원치 않은 글의 범주를 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671    시는 멀리 있는것이 아니라 가까이에 살그머니 있다... 댓글:  조회:1869  추천:0  2017-08-22
   [詩論] 시는 가까이 있다 백석(白石, 1912 - 1996)     생활에서 유리된 시, 심지어는 자기 자신의 감정에서까지도 유리된 시들이 어떻게 남을 감동시키며, 어떻게 인간의 생활에 기쁨을 줄 수 있겠습니까? 누구나 다 하는 말을 자기의 말처럼 자기의 시라고 하여 적는다는 것은 시를 느낄 수 있는 깨끗하고 자랑 높은 마음으로써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들의 시에는 왜 사색이 없습니까? 작자가 자기 마음속에 늘 가지고 있는 어떤 뿌리 깊은 문제에 대한 사고가 감동의 높이에까지 이를 때, 이것을 시로 표현하여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감동 속에서 그 문제를 사색하게 하는 시를 우리는 하나도 볼 수 없었습니다.   어린 가슴에는 어린 대로 깊은 감동을 짝하는 사색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붙들 때, 우리에게는 나이 많고 적음을 떠나 깊은 충동을 받는 것입니다. 참으로 문학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우주 자연과 인간사회의 모든 아름답고 깊고 먼 것들을 두고 감동 속에 사색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림도 좋은 그림은, 그 그림 앞에서 차마 떠나지 못하게 사람의 마음을 붙드는 것이요, 시도 또한 사람의 마음을 붙들어 그 무엇인가를 오래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짧은 시라도 사람의 마음을 오래 붙들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린이의 시라도 늙은이의 마음을 또한 붙들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시에 있어서는 언제 어디서나 논의되고 검토되고 비평 되여야 할 것은 언어입니다. 이것은 작품형상의 첫 길이며, 작품정신의 안목입니다. 우리 독자들의 시 작품들에서는 개념적인 언어가 많이 쓰여 지고 있는 것이 결함입니다. 더욱이 남의 말을 자기의 말로 여기는 것은 긍지를 가진 문학학도가 할 일이 아닙니다.   시에서 자기의 세계를 찾을 때, 말도 또한 제 것이 생겨나는 것인가 합니다. 시에서 특히 어린이들의 세계와 관계되는 시에서는 그 말이 단순하여야 하며, 소박해야 하며, 순진해야 하며, 맑아서 밑이 환히 꿰뚫려 보이고, 다치면 쨍 소리가 나는 그런 말이여야 할 것입니다...(중략)...   시를 쓴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에게 거짓이 없어야 되는 것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좋은 시를 낳을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듯이, 느끼지 못한 것을 느낀 듯이 속여 본다하여도 결국은 아무도 속이지 못하고 자기 자신만을 속이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쓸까? 어떤 시를 지을까? 하고 생각하지 말고, 우선 자기 자신이 무엇을 볼 때, 무엇을 들을 때, 무엇을 꿈꿀 때, 무엇을 느낄 때 즐거우며, 흥분하게 되며, 감동을 받게 되며, 행복한 것을 깨닫게 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 감동 속에서 자기의 마음을 표현하여 보면, 이것이 시로 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많은 시들이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670    시속의 비밀은 모든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주파수를 준다... 댓글:  조회:2228  추천:0  2017-08-22
[詩論] 어떤 시의 비밀 / 송재학   1. 역설이란 비밀     시가 비밀을 품은 보석상자란 건 이 업의 종사자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보석상자를 여는 것도 쉽지 않거니와 열었다손 하더라도 그 보석의 꼴과 무늬를 풀어 헤치기는 지난하다. 말로 옮길 때 줄어드는 감각의 현저한 감소 이외에도 그건 몸으로 익혀야하는 인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의 비밀이야말로 시인이 언젠가 말해야 하는 또는 말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가깝다.       먼저 역설이란 비밀! 이건 사실 비밀이랄 것도 없는 공공연한 시적 전략이다. 이른바 낯설게 하기, 뒤집기, 오버랩 등의 문학체험이 여기에 해당된다.     열린 창이여, 나는 너를 통해 아무 것도 내 보낸 것이 없는데 이렇게 많을 것들이 물밀듯이 밀려 오는구나 - 이성복, 「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4」에서         창은 환기와 채광을 위한 구조물이다. 그 구조물은 건축물이 시작된 이래 점차 제 나름대로의 이미지를 쌓아가기 시작하여 안과 밖의 매개처의 역할을 하였지만, 언제나 안에서 밖으로 향한 시선이 창의 주체이다. 이성복의 창은 그 시선을 바꾼 것이 아니지만 대상으로서의 창이 능동적 정서를 가진다. 밖의 사물이 안의 시선에 붙잡힌 것이 이제까지의 창이 쌓아놓은 상상력의 축적이다. 이성복의 창은 그 축적된 상상력에 의문을 가지는데 있다. 보라! 밖의 사물은 창이 스스로의 의지로, 능동적으로, 셰익스피어의 멕베드에 등장하는 움직이는 ‘버넌의 숲’을 안으로 끊임없이 밀어준다. 화자가 밖을 보는 것이 아니라 창이 ‘버넌의 숲’을 이끌고 온다. 그 ‘버넌의 숲’은 안이 가진 주체에 대한 의심이며 평면적 삶에 대한 의심이다. ‘나는 너를 통해 아무 것도 내 보낸 것이 없는데’라는 창에 대한 자괴감은 세상에 대한 자괴감에 다름 아니다. 그리하여 이제까지의 창과 전혀 다른, 보태준 것 하나 없는 세상이 이토록 많은 것을 주다니!란 탄식하는 이성복의 창이 나왔다. 이성복이 삶에 대한 태도를 사랑으로 바꾼 흔적이 ‘이렇게 많은 것들이 물밀 듯이 밀려오는’ 구절에 각인되어 있다.     2. 시, 사물의 본질     경주의 향토사학자 윤경렬 씨는 경주 남산의 부처에 대해 “석수장이가 돌을 쪼아 부처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돌 속에 있는 부처님을 찾아 돌을 쪼고 있다는 시인 청마의 노래 구절”이 가장 적절하다고 강조한다. 청마의 시는 경주 남산의 석불에 대한 경외감이 만든 수사적 차원의 고백일까. 시의 비밀은 사물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은 단순한 수사적 차원일까. 수많은 시인들은 사물의 본질이 바로 시라는 것을 증명해왔다.     밤 소쩍새의 울음엔 부리가 있다 그대 뚫어줄 힘이라고는 가진 것이라고는 이것 밖에 없다고 울음으로 울음 뚫는 부리가 있다 몸이 있다 속이 다 상해서 軟骨이다. - 정진규의 「속이 다 상해서」부분         새의 부리가 가진 뾰족한 외양이 그대로 소쩍새의 본질인 슬픔으로 치환되었다. 그 핵심에 도달한 시인에게 뾰족한 소쩍새 부리야말로 슬픔 그 자체이다. 사물의 외양이 사물의 본질이라는 이 방식에 주목한 시인은 많다. 사물의 외양은 천지가 개벽한 이래 가장 합리적이고 사물의 존재에 가장 적합하게끔 진화되어 왔던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시인이 사물의 외양에 관심을 두는 것이야말로 사물에 가장 빨리 접근하는 것이다라는 건 신기할 것도 없다.     실수로 들고 있던 유리잔을 떨어뜨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유리잔은 바닥에 부딪치며 단 한 번의 파열음으로 산산조각이 나버렸지요. 소리가 빠져나간 유리잔, 그것은 꼭 혼이 빠져나간 몸뚱어리 같았습니다. 어쩌면 깨어지는 순간에 들린 바로 그 소리가 부서진 유리조각들을 그때까지 하나의 잔으로 꽉 붙잡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유리잔의 본질이란 바로 “깨어지는 순간에 들린 바로 그 소리가 부서진 유리조각들을 그때까지 하나의 잔으로 꽉 붙잡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라는 인식이다. 깨어지기 쉬운 유리의 성질을 이토록 잘 표현한 시가 있었던가.       이렇게 본다면 사물의 외양과 사물의 본질은 서로 관통하는 부분이 있다. 본질이 외양을 만든 것이다. 시의 외연과 내포가 서로 수미일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시는 사물 스스로 내뿜는 능동적 기운인 것이다. 이미 여기에 주목한 사람들이 많았으니, 조선 시대 윤춘년(1514~1567)의 성율론이 참고할 만하다.     내가 궁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내 몸 속의 궁소리가 외부의 궁소리에 상응하는 것이며, 내가 상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내 몸 속의 상소리가 외부의 상 소리에 상응하는 것이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려는 의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저절로 그 소리를 듣는 것이다 - 윤춘년,「文斷序」『文斷』(안대희,『韓國漢詩의 分析과 視角』,연세대학교 출판부, 2000년)     까마귀가 울지만 내가 울음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내 몸 속의 날 것이 불평하며 오장육부를 이리저리 헤집다가 까마귀의 희노애락을 흉내내는 것이다 까마귀를 닮은 동백 숲도 내 몸 속에 몇 백 평쯤 널렸다 까마귀 무리가 바닷바람을 피해 붉은 은신처를 찾았다면   개울이 흘러 물소리가 들리는게 아니다 내 몸에도 한없이 개울이 있다 몸이라는 지상의 슬픔이 먼저 눈물 글썽이며 몸 밖의 물소리와 합쳐지면서, 끊어지기 위해 팽팽해진 소리가 내 귀에 들어와 내 안의 모든 개울과 함께 머리부터 으깨어지며 드잡이질을 나누다가 급기야 포말로 부서지는 것이 콸콸콸 개울물 소리이다 몸 속의 천 개쯤 되는 개울의 경사가 급할수록 신열 같은 소리는 드높아지고 안개시정거리는 좁아진다 개울물소리를 한 번도 보거나 들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개울은 필사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졸시,「사물A와 B」전문         윤춘년의 성율론은 일종의 시의 리듬에 대한 성과이다. 이것을 그대로 사물의 외양과 성질이 사물의 본질과 일치한다고 한 내 주장에 대입시킬 순 없지만, 소리/사물에 대한 윤춘년의 자각은 확실히 음미해볼만 하다. 졸시, 「사물A와B」는 그 성율론에 바탕을 둔 일종의 시론인 셈이다.     3. 언어와 언어 사이     창경궁 식물원에는 소사나무 한 그루 있네/나는 가끔씩 그 소사나무驛에서 구름의 삼등칸을 탄다         박정대의「구름의 삼등칸」(『현대시』7월)을 읽으면 소사나무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진다. 어찌해서 소사나무가 驛站이 되고 어찌해서 소사나무가 구름을 부르는지 자못 궁금하다. 소사나무는 자작나무과의 낙엽소교목이다. 주로 해안의 산지에서 자라는데 꽃은 5월에 피고 열매는 10월에 익는다. 왕소사나무나 섬소사나무의 이종도 있다. 내가 본 소사나무는 모두 분재들 뿐이다. 소사나무는 교목이어서 그것들이 분재화분 속에서 장엄함을 뽐내려면 역시 눈속임에 가까운 성장기를 보내야 한다. 그리하여 내 소사나무들은 모두 불쌍하다.       두 행의 짧은 이 시는 그마저 쉼표로 연결되어 더 짧은 듯하다. 이 시를 읽고 가진 생각을 정리한다면 먼저 왜 소사나무에 역의 이미지를 보내었는가. 둘째 소사나무역에 왜 성층권이 생성․ 소멸되는가 하는 것이다. 두 개의 의문은 아마 서로 같은 고리를 가지고 있을 터이다. 소사나무에 대해 더 알아보자. “작은 가지와 잎자루에 털이 밀생하며 턱잎은 선형이다. 잎은 어긋나고 난형이며 끝이 뾰족하거나 둔하고 밑은 둥글다. 잎 길이는 2~5㎝로서 겹톱니가 있고 뒷면 맥 위에 털이 있다. 한국 특산종으로 제주 등지에 자란다. 잎과 열매이삭이 크고 큰 나무로 되는 것을 왕소사나무라고 하며, 옹진과 백아도에서 자란다. 한 꽃이삭에 꽃이 많이 달리는 섬소사나무는 한국 특산종이며, 인천 근처의 섬과 거문도에서 자란다.”는 백과사전적 지식을 뒤적여 보지만 겨우 “한 꽃이삭에 꽃이 많이 달리는” 섬소사나무에서 구름의 이미지를 희미하게 읽어볼 뿐이다. 지식이란 이럴 때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차라리 소사나무라고 입말로 읽을 때 혀와 구개와 목젖에 두 번 씩이나 작은 파도처럼 부딪치는 시옷 음가가 구름을 불렀다고 생각하는 게 더 즐겁다. 아니 시옷 음가는 부딪치디 않고 부드럽게 혀와 구개와 목젖에 일렁인다. 그의 구름 시 중 다른 한 편은 이렇다.     그녀가 내뿜는 담배연기는 잘 마른 영혼, 활엽수의 잎사귀 같네/나는 그것을 보고 쌍둥이 구름에 관한 시를 한 편 써봐야겠다고 생각했네 -「쌍둥이 구름에 관한 시」전문         박정대의 구름은 어딘가로 가고 싶은 생각, 무언가 즐거운 생각, 마음의 폐부를 찌르는 칼날 등이다. 그야말로 원래 시인이었던 사람이 쓰는 시의 질료로 구름이 선택된 것이다. 쌍둥이 구름에 관한 시」에서 시인은 ‘그녀’가 내뿜는 담배연기를 보고 있다. 그 담배연기는 ‘그녀’의 젖은 영혼을 위로해주며 다시 바깥으로 나온 ‘그녀’의 일부이다. 앞에서 말한 ‘구름’인 것이다. 원래 구름이었던 ‘그녀’와 구름의 일부로서 ‘담배연기’는 이제 쌍둥이인 셈이다. 그렇다면 소사나무에 걸린 구름은 소사나무 아래 추억이 있었다는 것, 어딘가 가고 싶은데 소사나무 아래의 추억과 함께 가고 싶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러한 분석은 그야말로 경계를 넘어버린 것, 오히려, 이 시를 읽고 앞서 말한 두가지 의문, 어찌해서 소사나무가 驛站이 되고 어찌해서 소사나무가 구름을 부르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시작노트를 뭉개버린 시인의 의도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시의 비밀 중 하나인 비의이다. 이것은 신비로운 언어의 사원 깊숙이 저장된 보석상자이다. 이건 사실 말로 설명되기 보다는 눈으로 마음으로 설명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4. 시의 논리     하루종일,/ 내를 따라 내려가다보면 그 저수지가 나오네/ 내 눈 속엔 오리떼가 헤매고 있네 내 머릿속엔 손바닥만한 고기들이/바닥에서 무겁게 헤엄치고 있네   물결들만 없었다면, 나는 그것이/한없이 깊은 거울인 줄 알았을 거네/세상에, 속까지 다 보여주는 거울이 있다고/믿었을 거네   거꾸로 박혀 있는 어두운 산들이/돌을 받아먹고 괴로워하는 저녁의 저수지   바닥까지 간 돌은 상처와 같아/곧 진흙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섞이게 되네 - 이윤학,「저수지」전문         저수지를 배경으로 한 저녁의 풍경이다. 이윤학의 시에 등장하는 풍경의 차림새는 이처럼 단순하다. 시인의 눈에 붙잡히는 사물들은 먼저 저수지, 그 밖에는 오리떼가 놀고 안에는 고기들이 논다. 어두운 산들이 저수지에 프린트 되어 있고, 문득 화자는 돌을 던진다. 돌이 저수지에 빠지자 저수지는 곧 시인의 마음을 그대로 읽어낸다, 까지가 이 시의 산문적 행간이다.        오리떼는 저수지에서 헤매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눈 속에서 헤맨다. 마찬가지로 고기들은 물속이 아니라 시인의 머릿속에서 헤엄치고 있다. 이것을 단순히 수사로만 볼 것인가. 아마도 이 시의 초고는 “내 눈이 붙잡은 오리떼……”였을 것이다. 어찌하여 그것이 “내 눈 속엔 오리떼가 헤매고 있네”로 바뀌었을까. 가만히 보면 오리와 고기뿐만 아니라 어두운 산들도 마찬가지이다. 저녁의 저수지는 산들이 프린트 되어있는데 시인은 그 어두운 산을 저수지로 인식하고 있다. 그 인식에는 아마도 시인의 삶이 밀접하게 간섭했을 터인데, 내가 몇 번 만난 시인은 삶을 마치 방기한 사내처럼 보였다. 삶이 그대를 버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삶을 버린 것. 그것은 시대의 잘못이 아니라 그 자신의 잘못된 탄생처럼 선험적인 것처럼 보인다. 문득 못가의 사람이 습관처럼 던지는 저 돌은 청개구리한테 달려가는 아이들의 장난처럼 저수지에 빨려 들어간다. 이 화자의 상처투성이는 아무렇게나 던진 돌에도 아프다. 그리하여 그 돌은 진흙 속-그것이 대뇌피질의 상징인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에 파고 들어가 결석처럼 늘 머리를 아프게 한다. 여기까지 오면 이 저수지란 바로 시인의 몸인 것을 알 수 있다. 그 몸의 눈에는 오리가 놀고 머리 속에는 고기가 들락거리는 평화로운 곳인 듯 싶지만, 자세히 보면 눈에는 거꾸로 박혀 있는 어두운 산들이 있고, 온 몸은 상처투성이, 시인은 여기까지 온 것이다.       수사적으로도 이 시는 재미있다. 1연의 오리와 고기떼들, 2연의 거울과 저수지의 비유-그것은 죄없는 자의 죄의식이 아닐까. 저수지에 던져지는 돌에 파문의 괴로움으로 표현한 것도 그 돌이 진흙 속으로 비집고 들어간 것도 모두 시인과 너무나 닮았다.     5. 시 속에 비밀이 있는 건 분명하다. 그 비밀은 모든 사람에게 각기 다른 주파수를 가지는 것도 분명하다.♣ ― [문학마당]
669    시는 진술이 아니라 언어에 늘 새옷을 입히는 행위이다... 댓글:  조회:2032  추천:0  2017-08-22
  [詩論] 쉬운 시의 어려움 / 나호열     시인들은 쉬운 시를 쓰려고 노력합니다. 독자들 또한 어려운 시를 선호하지 않는 것은 분명합니다. 名詩라 일컬어지는 많은 시들, 베스트 셀러가 되는 시집들의 대부분은 낭송하기에 알맞은 가락과 누구나 쉽게 해독할 수 있는 언어로 짜여져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시인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쉬운 시'의 매력에서 좀처럼 빠져 나오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이 ' 쉬운 시'의 명제는 결코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생각거리를 파생시키고 있다는 점을 알아두어야 합니다.   인구에 회자되는 소월의 '진달래 꽃'이나 윤동주의 '별 헤는 밤' 천상병의 '귀천'이나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우선 독자들의 일차적인 정서를 충족시켜 줍니다. 일차적인 정서라고 함은 우선 시에 나타난 의미가 독자들의 감성 내용과 일치된다는 점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恨'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하는 단순한 관념이 시에 표상되므로서 문학 예술의 두 기능인 '배설'과 '정화' 또는 '교훈의 전달'이라는 목표에 부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위에 열거된 시들은 결코 그러한 일차적 해석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의미의 확장을 가져올 수 있는 중층 구조를 내포하고 있음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말은 발화자인 시인의 의도와 독자가 체험한 내용이 일치되거나 독자가 직접 체험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이와 유사한 추체험의 형식으로 전이되는 것 이상의 영역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님의 침묵'에서의 '님'이 한 개인의 사랑의 대상이면서 그 이상의 존재 의미로 확대할 수 있으며 확대된 상태에서의 시의 구조 또한 그 논리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시는 분명히 로고스의 세계가 아닌 파토스의 세계에서 진행되므로 시인의 상상력은 비논리적인 직관에 연유함은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언술과 달리 시라는 틀에 얹힌 언술은 질서정연한 상상력의 통로를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내용과 형식의 조화라는 큰 틀에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 님의 침묵'은 하나의 연시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으며 불교적 세계관의 인식 배경을 놓고 읽어도 그 다양한 의미는 결코 훼손되지 않습니다.   시는 일반적인 진술과는 달리 언어에 옷을 입히는 행위입니다. 시인이 겪어낸 삶에서 우러나는 시의 향기는 어떤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쉬운 시'는 그러므로 삶을 벼려내는 시인의 정신이 현실과 부딪치면서 일으키는 섬광과도 같은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한 편의 시에는 고스란히 시인이 가지고 있는 삶의 태도가 담겨져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외면상으로 평이한 구조와 평범한 진술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면서 시가 함의하는 의미의 내포가 큰 시야말로 진정한 '쉬운 시'의 반열에 오른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시 한 편을 읽어보도록 합시다.   꿈꾸듯 편지를 쓴다 ①   이민 간 친구에게 짝사랑했던 그에게 가슴 저리도록 그리운 어머니에게②   요란한 자명종 소리에 아침은 깨고③   남편의 성으로 바뀌어버린 그녀에게 가을의 전설이 되어버린 브래드 피트에게 인명구조견이 되어서라도 찾아낼 것만 같았던 어머니에게④   세 통의 편지를 한 통만 부친 채⑤   이 시는 습작기에 있는 분의 라는 시입니다. 이 시는 매우 잘 짜여진 구조와 명료한 메시지가 도드라지면서 쉽게 읽혀지는 시입니다. ①과 ③, ②와 ④처럼 대구법을 사용하여 그리움의 대상을 점층적으로 묘사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암시하는 기법은 예사로워 보이지 않습니다. 숨가쁘게 돌아가는 하루 중에 밤은 안식뿐만 아니라 꿈 꿀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며, 시간인 셈이지요, 그러나 그리움의 대상에게로 향하는 날갯짓은 인위적인 자명종 소리에 깨이는 아침과도 같이 무엇엔가 끌려가는 현대인의 고독한 심상을 잘 드러내 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⑤에서와 같이 마음속에 써 내려간 편지는 부치지 못하는 무위의 행위로 그쳐버리고 만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꼼꼼하게 살펴보기로 합시다. ②에서의 친구, 그. 어머니는 현실적으로 나에게서 떠나버린 존재들입니다. ②는 내게 인식된 대상들의 상태를 말해주고 있는데 ④에서는 부재의 상태를 명료하게 하는 구체적인 인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이민 간 친구'는 이민을 감으로 해서 '남편의 성으로 이름이 바뀐' 상태이며, 짝사랑의 대상인 그는 영화 '가을의 전설' 에 나오는 영화배우 브래드 피트처럼 가까이 다가설 수 없는 존재이며 '그리운 어머니'는 내가 인명구조견이 되어서라도 찾아야할 대상으로 변화된 듯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②의 진술에서 ④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을 유의해서 본다면 ②에서 ④로 진행되는 필연적 구조가 생성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②와④는 'A는 B이다'로 지칭되는 은유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 A와 B의 의미망이 유사한 관념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을의 전설' 같은 막연한, 즉 가을이라는 심상과 전설, 이라는 심상의 결합에 있어서의 적합하지 않은 유추가 시의 멋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소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점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이 시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맹점은,- 이 점은 많은 시인 지망생 여러분이 시적 진실과 사실의 관계를 혼돈하는 데서 발생하는 문제인데- 시에 있어서의 순수성을 시의 내용과 사실과의 일치에서 찾는다는 점일 것입니다. 이 시의 작자는 실제로 세 통의 편지를 쓰고 그 중 한 통의 편지를 실제로 부쳤는지 모릅니다. 부쳐진 한 통의 편지는 누구에게 보낸 것일까 하고 글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궁금증을 갖게 하는 것도 아주 재미있는 시의 트릭이 될 수도 있겠지만, 한 통의 편지를 부쳤다는 사실로 인하여 이 시가 가지고 있는 일상의 고립감이나 허무감은 반감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점입니다. 결국 한 통의편지도 부치지 못했다든가, 부치긴 했는데 그 편지들이 수신인 불명으로 되돌아 왔다든가 하는 결말을 보여주었다면 더욱 큰 감동을 전달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닌지요.   이 시는 한 편의 시가 결코 많은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집착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는 좋은 작품일 수 있으나 누구나 일상적으로 느끼는 것 이상의 의미를 모색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시인의 현실인식의 한계를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창호지에 우러나는 저 복숭아 꽃빛같이 아무 생각없이 창호지에 우러나는 저 복숭아 꽃빛만 같이   사랑은 꼭 그만큼에서 그 빛깔만 같이   - 장석남의   이 시는 아주 평이한 어휘와 단순한 어조로 아주 쉽게 읽혀질 것 같이 보이는 시이지만 이 시의 올바른 감상을 위해서는 몇 단계의 유추의 단계를 지나가야 하는 시입니다. 현대시의 조류에 있어서 시에서의 주제와 소재의 분류 같은 의도적인 시 해석의 도구를 배제하는 경향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주제와 소재를 찾아보기로 합시다. 이 시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소재는 무엇일까요? 복숭아꽃? 뻐꾸기 소리? 그렇습니다. 이 시의 모티브는 뻐꾸기 소리입니다. 시인은 뻐꾸기 소리를 듣습니다. 어느 산에서 우는 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뻐꾸기 소리는 사랑의 실체이기도 하면서 사라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뻐꾸기 소리는 어느덧 창호지에 복숭아 꽃빛으로 물듭니다. 시인은 창호지 문 안쪽에서 차단된 저 쪽 세계의 메시지를 분홍 복숭아 꽃빛으로, 그림자로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뻐꾸기 소리 - 창호지 안에서 듣는 나 - 나에게서 발화되는 뻐꾸기 소리의 관념 - 복숭아 꽃빛 - 그림자로 어리는 창호지를 바라보는 나와 같은 의식의 흐름과 공간의 이동을 보여주면서 사랑을 뻐구기 소리로 뻐구기 소리는 복숭아 꽃빛으로 변화시키는 상상의 질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인은 '사랑'이라는 관념을 소리로 빛깔로 치환시키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의 관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상식으로부터 빗겨 서 있는 시인의 태도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으면서 사유의 깊이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감상 방식은 이 시를 읽어내는 많은 통로 중에 하나에 불과할 것입니다. 만일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다른 방식의 시 읽기를 주장하신다면 바로 그 순간에 이 시는 좋은 시로 평가될 수 있는 덕목 하나를 갖추고 있는 셈이 될 것입니다. 茶道는 보통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즐기기에는 번거로운 절차가 필요합니다. 한 잔의 녹차를 마시는 방법 중에 하나는 인스턴트 녹차를 마시면 될 것입니다. 끓는 물에 봉지 하나만 넣으면 쉽게 우리는 차를 즐길 수 있습니다. 차를 마신다는 행위에 있어서는 다도를 배우고 절차를 따르고, 다기를 준비하는 등의 번거로움은 불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기를 씻고 배열하고, 물을 적당한 온도로 끓이고 우려내는 행위를 거듭하면서 마시는 차에는 형언할 수 없는 향기가 베어있게 마련입니다.   '쉬운 시' 는 눈으로 쉽게 읽히고 가슴에 금방 와 닿는 시가 아닙니다. 시의 내용이 독자에게 쉽게 동의를 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려낼수록 깊은 향을 풍기는 차처럼 오래 가슴에 담아두고 되내이면서 새로운 의미를 재생산시키는 시를 많은 시인들은 쓰고 싶어 합니다♣
668    "온몸으로 불 밝히는 살구꽃나무 환하게 서서 있었다"... 댓글:  조회:2018  추천:0  2017-08-22
  [詩論] 시의 제목이 가져야 할 덕목 조태일     첫째-시 내용과의 조화와 통일성을 갖춰야 한다. 둘째-새롭고 참신한 것으로 독자의 관심과 호기심을 환기시켜야한다. 셋째-독자의 상상력을 자극시키고, 상상력을 발동 시키게 해주어야 한다. 넷째-추상적이고 한정 범위가 넓은 것보다 구체적인 것이 좋다. 다섯째-제목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증폭시켜주는 것이어야 한다.     1. 제목은 시 내용과의 조화와 통일 성을 갖추어야 한다. 조화로움과 통일성은 미적 장치의 원리입니다. 잘 아시다싶이 시는 하나의 구조이며, 각기 부분적 요소들이 모여서 서로 연결되고 조합되어서 이 구조를 형성합니다. 이 때 통일성과 조화로움이 구조를 이루는 중요한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구조는 '집합체'가 아니고 '전체'이기 때문입니다.   '집합체'와 '전체'가 어떻게 들으면 같은 말인 것 같으면서도 아주 다른 말입니다. '집합체'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부분들을 모아놓은 것이지만 '전체'는 서로 필연적인 관련성이 있는 부분들을 모아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시는 각기 부분들이 생물체의 기관들처럼 서로 유기적인 결합을 이루어 통일체를 이루어야 하므로 시의 제목은 주제나 의미, 정서, 분위기, 이미지 등과 서로 부합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너무 잘 아시는 윤동주님의 을 올려보겠습니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 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 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조태일님의 설명을 그대로 옮겨볼 테니 마져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란 제목은 위 시의 주제와 분위기를 잘 살려내는 데 아무런 손색이 없다. 다소 산문적인 느슨하고 평범한 진술이지만 내용이 응집되어서 탄력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 이란 제목 덕분이다. 만약에 시인이 이 시의 제목을
667    시는 언어를 재료로 하는 예술이며 미학이지 철학은 아니다... 댓글:  조회:2228  추천:0  2017-08-22
  [詩論] 시의 언어에 대하여 윤재순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카는 시의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 했다. 모든 존재가 언어에 의하여 명명되었을 때 비로소 존재의 미를 갖게 된다는 뜻이다. 언어로 이름지어지기 이전의 존재는 이미 존재로서의 가치가 없다. 아니 존재의미가 드러나지 아니한 상태인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언어는 존재를 밝히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의 힘을 빌려서 존재를 인식한다. 존재가 가지고 있는 외연뿐만 아니라 그 본질까지도 인식한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언어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시는 언어를 재료로 하는 예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는 존재 인식의 세계를 그 영역 안에 끌어들이게 된다. 혹자들은 시가 존재를 밝히기 위하여 존재해야 하는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이런 입장에서 시인은 존재에 이름을 부여하는 명명자로서 절대 권능을 갖는다. 시인은 한 편의 시로서 그가 인식한 존재의미를 드러내 보여주어야 한다. 그 인식이 얼마나 새로우며 깊이 있는가에 따라 시의 수준도 결정된다. 그러나 시는 언어예술로서 미학적 토대 위에 있어야 한다. 여기서 시의 언어는 우리가 현실에서 사용하는 일상적 언어와 다르다는 자각이 전제되어야 한다. 특히 시가 예술의 영역에 있음을 고집하고자할 때 더욱 그렇다. 언어가 가지고 있는 실용적 기능, 즉 사전적 의미인 개념 전달의 기능만으로는 미학적 진실에 도달하기가 어렵다. 존재의 시적 인식에도 방해가 된다. 시는 실재적인 것만을 지시하는 설명적 언어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비실재적 세계를 가시화할 수 있는 함축적인 언어를 요구한다.   시에서 이미지가 중요시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미지화된 언어는 시를 살아 있는 예술로 느끼게 하는 힘이 있다. 시인이 존재를 어떤 언어로 인식하느냐 하는 것도 이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존재를 개념으로 인식하느냐 이미지로 인식하느냐 하는 문제는 시와 철학을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 존재의 철학적 인식과 미학적 인식의 경계가 여기에 있다. 시인이 시에서 관념적 세계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도 시를 예술의 영역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미 기성의 관념의 때가 묻은 언어를 시인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 그래야만이 상상력의 새로운 눈으로 존재를 인식하게 되고 시적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누구도 그 사내의 얼굴을 모른다 진종일 죽은 듯 기척이 없다가 밤중이면 뚜벅뚜벅 느린 발자국 소리 시멘트 바닥을 울린다 두꺼운 벽 굵은 쇠창살 그리고 파수병의 섬엄한 총검도 그 소리만은 어쩌지 못한다.   어쩌지 못하는 그 소리는 겨울의 소리 천지가 골수까지 얼어붙는 소리 별빛이 얼음에 박히는 소리 사람들아 빙하시대에 떼죽음을 한 공룡의 무덤을 아는가 머리를 깎이운 복면의 삼손이 오늘밤도 그 무덤을 찾아가는 둔중한 발자국 소리 들린다 -이형기의 전문   이 시는 제목부터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시 대상을 뛰어넘고 있다. 여기서 복면한 삼손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을 가리키지 않는다. 변형된 의미, 또는 새로운 인식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한 창조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시를 다 읽고 나면 복면한 삼손이 시인의 독특한 안목으로 새롭게 인식한 겨울의 소리에 대한 비유적 이미지란 것을 알 수 있다. 겨울의 소리를 삼손의 이미지로 유추할 수 있기까지 시인은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명명자로서의 탐구가 있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탐구는 과학적 개념 추구를 뜻하지 않는다. 시인은 직관으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야 하고 그것을 시의 언어로 드러내야 한다. 그러면 겨울의 소리와 복면한 삼손이 시안에서 같은 의미관계로 동거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 근거의 설득력 여부가 시의 성패를 가름한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겨울의 소리에 대한 존재인식이 얼마만큼의 울림으로 시적 전달력을 갖게 되는가를 결정하게 된다. 이 시에서 겨울의 소리는 진종일 죽은 듯 기척이 없다가 밤중이면 뚜벅뚜벅 찾아오는데, 두꺼운 벽 굵은 쇠창살로도 가둘 수 없고 파수병의 삼엄한 총검도 어쩌지 못할 정도로 위력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천지를 골수까지 얼어붙게 하고 별빛이 얼음에 박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 추위의 위력을 실감하게 하는 표현이다. 이쯤되면 겨울을 세기의 역사 삼손에 비유하는 이유도 납득이 된다. 그런데 이 시는 겨울의 위력적 이미지만을 표출하지 않는다. 시인의 상상력은 빙하시대에 떼죽음을 한 공룡의 무덤을 겨울 이미지의 연장선상에서 떠올림으로써 시적 인식의 폭을 확장한다. 보이지 않는 실체이면서 위력적 존재이기에 삼손으로 비유되는 겨울, 그 겨울의 향방을 상상하게 한다. 여기에 동화적 상상력이 개입하여 미학적 구조를 형성한다.   겨울의 움직임을 복면한 삼손이 무덤을 찾아가는 둔중한 발자국 소리로 형상화하여 상상력의 폭을 넓히고 있는 것이다. 이 시가 미학적 구조 위에 있다는 것은 관념 진술의 언어가 거의 없고 시적 대사을 이미지화하는 구상적 언어가 주를 이루고 있다는데서 찾아진다. 그리고 시 전체가 내용상 기승전결의 극적 구조를 바탕으로 이미지를 전개하고 있다. 이것은 시를 구성하는 각 개의 이미지들이 하나의 주 심상을 중심으로 의미의 연결고리를 가지면서 긴밀한 내적 통일을 이루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덩쿨장미는 가시를 맞대고 아프게 뻗어 오른다 담장 위로 지붕 위로 서로 얽히면서 찌르고 찔리면서 휘어지면서 끝쯤에 이르러 꽃을 달고 얼굴을 들어 내 보인다 그러나 따로 이름은 없다 -이병훈의 전문   이병훈의 시 는 인식의 시에 속한다. 인식의 시에서는 시적 대상에 대한 관찰력의 예민함이 관건이다. 똑 같은 대상이라도 시인의 독특한 안목으로 새롭게 인식된 세계를 획득했을 때 설득력을 갖는다. 자칫 이런 유의 시가 빠지기 쉬운 함정은 누구나 쉽게 하는 평이한 인식을 평이한 진술로 드러냈을 때이다. 그 대 독자는 전연 시적 긴장을 느끼지 못한다. 시의 생명인 경이감도 창출되지 못한다. 인식의 내용이나 표현이 경이감으로 전달되지 못하면 시는 예술로서의 존재 가치를 획득할 수 없다. 시 는 서술적인 시어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부사어와 동사를 통하여 시적 대상의 움직임이나 변화과정을 묘사하거나 진술한다. 덩쿨장미가 꽃을 달기까지의 과정을 가시를 맞대고, 아프게, 서로 얽히면서 찌르고 찔리면서 또는 휘어지면서 등의 서술어를 통하여 형상화한다. 그리하여 생명 탄생의 배면에 준재하는 인고의 세월을 감지하게 한다. 찔리는 아픔과 서로 얽히는 고달픔과 휘어지는 좌절의 시간을 인내한 결과로서 하나의 생명이 존재하게 된다는 인식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이런 인식의 내용을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 덩쿨장미가 성장하는 과정을 관찰하여 형상화하는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 물론 외적 현상만을 제시하지 않는다. 상당히 내면화된 현상이다. 이 점이 시적 인식의 울림으로 전달되는 근거다. 거기에다 생명 탄생의 결과를 놓고 따로 이름은 없다고 진술함으로써 생명의 근원적 허무를 암시한다. 무릇 모든 생명적 존재는 일회성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이 시는 인식의 공명을 확보하고 있으면서도 시적 상상력의 폭은 좁다. 원거리 이미지의 연결이 없기 때문이다. 서술적 시어로는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의 확장이 어렵다는 사실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 단조로운 느낌, 어떤 틀 안에 갇힌 듯한 한계성을 느끼게 한다.   내 수첩에는 바다가 들어 있다. 파도가 싱싱한 기억을 톡톡 건져낸다.   '나의 20년' 유행가 가사가 울려 퍼지던 사춘기 시절 철 이른 비인 해수욕장은 내 퇴화된 꼬리뼈에 자꾸만 방울을 달아준다 파도가 칠 때마다 바다에서는 방울 소리가 난다   벚꽃이 도톰한 입술로 휘파람 소리를 내던 열아홉 살 작약도 별빛을 모두 삼킨 활화산이 된다. 백야의 아찔한 울렁거림으로 폭발하던 심장 소리가 들린다.   뼈 속으로 내리는 장대비를 맞던 어느 해 추운 겨울 해운대는 퉁퉁 부풀어오른 상처를 안고 넘어진다. 온종일 그 곳에서 하얀 얼굴로 내 이름을 지워낸다.   꽃샘추위에 마음을 베어버린 어느 해 새벽 무작정 강릉행 고속버스를 탄 싸락눈이 밤새 경포대에 뛰어들었다.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너를 안고 나도 바다에 뛰어든다.   수첩 속에서 바다가 꿈틀거린다. 내가 바다가 된다. - 박 윤의 전문   박 윤의 시는 생동감이 넘친다. 감각화된 시들이 그런 느낌을 더욱 입체화시키고 있다. 살아 숨쉬는 언어가 신선함으로 다가온다. 박 윤은 언어를 이미지로 갈고 닦는 조련사로서의 역량을 보인다. 물론 이 시의 언어가 일상성의 지시 기능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하는 시인의 의식으로 해서 일상성을 환기하는 지시적 기능을 일정 부분 갖는다. 그러나 그 기능에만 머무르지 않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비약적 이미지를 만드는 기법에서 이 시인의 언어를 다루는 장인적 능력을 보게 된다. 이 시에서 표현되고 있는 바다는 추억 속에 들어 있는 19살 사춘기 시절에 만났던 과거의 바다다. 그러니까 시인의 의식 속에 자리 하고 있는 이미 나와 일체가 된 바다다. 바다가 수첩 속에 있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를 내포한다. 바다는 과거의 다른 기억과 중첩되어 의식 속에서 살아 있다. 그래서 바다는 과거의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작용도 한다. 비인 해수욕장이 퇴화된 꼬리뼈에 방울을 달아준다. 또는 파도가 칠 때마다 바다에서 방울 소리가 난다는 표현은 그런 의미망을 형성한다. 퇴화된 꼬리뼈란 기억 속에 갇힌 과거의 추억일 것이고 방울소리는 그것을 자꾸 의식선상에 떠오르게 하는 바다의 작용일 것이다.   이 시가 그려 보여주고 있는 과거의 추억은 누구나 성장하면서 한번은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적인 사춘기 시절에 얽힌 이야기다. 3연에서 5연까지의 내용은 이런 고백적 진술을 이미지 속에 감추고 있다. 자꾸 말하고 싶은 화자의 의식이 잡힌다. 이 때 잘못하면 상투적인 서술적 진술로 흘러서 시적 긴장감을 해칠 위험이 있다. 그런데 이 시는 감각적인 이미지와 지시적인 언어가 적당히 조화를 이루면서 꽤 감동적으로 전달된다. 사춘기 소녀의 막연한 기대와 황홀감에 젖어 들뜨는 심리 변화과정, 그리고 상처 받고 절망하는 그 시절의 상반된 의식이 감각화된 언어 속에 용해되어 경이감을 창조해내고 있다. 그러나 시가 지나치게 감각화되면 경박해질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시인은 언어에 대한 자각이 우선되어야 한다. 언어의 효능에 대한 자각 없이 훌륭한 예술의 시는 창조되지 않는다. 예술이 표현이라는 고유영역을 고집하는 한 이 명제는 절대 진리다.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도 언어의 창조기능을 살리지 못하면 드러나지 않는다. 시적 감동도 결국 언어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시인이 존재의 집을 짓는 사람이라고 했을 때 역시 언어의 기능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시인은 새로운 존재의 집을 짓기 위하여 언어를 새롭게 갈고 닦아야 한다. 언어에 윤활유를 부어야 하고 오랜 세월 동안 묻은 관념의 때를 벗기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랬을 때 비로소 시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
666    "한줄을 쓰기전에 백줄을 읽고 독파하라"... 댓글:  조회:1963  추천:0  2017-08-22
안도현 시론       1. 한 줄을 쓰기 전에 백 줄을 읽어라   안도현 시인이 시를 쓰고 읽는 법을 자상하게 가르쳐 주는 안도현의 ‘시와 연애하는 법’을 새롭게 연재한다. 대한민국에서 시를 가장 잘 쓰는 이 중 한 사람인 안 시인의 안내를 받아 시와 연애에 빠져 보자   좋은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 곧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는 이 세 마디의 가르침은 10세기 중국 북송 때의 문인 구양수가 남긴 말이다. 자그마치 천 년 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때로 글쓰기를 가르치는 사람에 따라서 이 세 가지의 순서를 편의대로 바꾸기도 한다. 어떻게 하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세 가지를 한꺼번에 하기엔 실로 벅차기 짝이 없다. 시간도 많지 않다.   나는 시를 쓰려는 당신에게 색다른 세 가지를 주문하려고 한다.   첫째, 술을 많이 마셔라. 그렇다고 혼자 마시면 안 된다. 술이란 타인과의 소통을 위한 매개이지 주정을 부리기 위한 약물이 아닌 것이다. 술을 마시면서 지루한 일상 너머를 꿈꾸는 일은 시인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시인은 일상이라는 유리그릇을 박살내는 자가 아니다. 유리그릇에 빗금을 긋는 자이기 때문이다. 한 편의 시를 쓰려거든 백 잔의 술을 마신 다음에 쓰라. 그렇다고 해서 술이 깨지 않은 비몽사몽의 시간에 펜을 잡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 ‘취중진담’이라는 말은 있어도 ‘취중진문’이라는 말은 없다. 나는 지금도 ‘주력(酒力)은 필력(筆力)’이라는, 세상에 있지도 않은 말로 학생들을 꼬드겨 술잔을 권한다.(단, 마시기 싫어하는 사람한테는 권하지 않으며, 그런 사람하고는 상종할 일이 별로 생기지 않는다.)   둘째, 연애를 많이 하라. 천하의 바람둥이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무릇 모든 연애는 나 아닌 것들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연애시절에는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연애의 상대와 자신의 관계를 통해 수없이 많은 관계의 그물들이 복잡하게 뒤얽힌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리고 훌륭한 연애의 방식을 찾기 위해 모든 관찰력과 상상력을 동원하기 마련이다. 연애는 시간과 공을 아주 집중적으로 들여야 하는 삶의 형식 중의 하나인 것이다. 연애감정도 없이 시를 쓰려고 대드는 일은 굳은 벽에 일없이 머리를 부딪치는 것과 같다. 담쟁이넝쿨은 담하고 연애하면서 담을 타고 오른다.     셋째, 시 한 줄을 쓰기 전에 백 줄을 읽어라. 많이 쓰지 말고, 많이 생각하지 말고, 제발 많이 읽어라. 시집을 백 권 읽은 사람, 열 권 읽은 사람,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사람 중에 시를 가장 잘 쓸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초보자가 쓴 시의 성패는 분명히 독서량에 비례한다. 여기에서 시를 많이 읽는다는 것은 쓰기의 준비 단계이며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시를 접하지 않고서는 좋은 시를 선별할 수 없으며, 좋은 시를 쓸 수도 없다.(좋은 시가 무엇인가 하는 논의는 다음으로 미루자.)   조선 후기 실학자 최한기는 그의 방대한 저서 에서 “문장은 하루아침에 쌓을 수 있는 잔재주가 아니라 오랜 세월 노력이 쌓여야 한다”고 했다. 정약용은 두 아들에게 부치는 편지 형식의 글을 통해 읽기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한 바 있다.   “삼대 이상 의원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병 치료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문장 또한 그렇다. 반드시 오래도록 노력한 다음에야 능숙하게 글을 지을 수 있다. 글을 쓰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세상을 다스리는 경학(經學)을 읽어서, 문장의 기초와 뿌리를 단단하게 세워두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역사 관련 서적들을 두루 공부하여 나라와 개인이 흥망성쇠하는 근원을 알아야 하고, 일상생활에 유용한 실용 학문에도 힘을 쏟아 옛사람들이 남겨 놓은 경재서를 즐겨 읽어야 한다. …내가 말한 대로 해 본 다음에 안개 낀 아침이나 달 밝은 밤, 짙은 나무 그늘과 가랑비 내리는 때를 만나면 문득 감흥이 일어나 시를 읊게 되고, 문장의 구상이 떠올라 글이 써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과 땅, 자연의 소리가 맑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생동감 있는 글을 짓는 문장가의 창작 활동이다.”   나는 시창작 강의 첫 시간에 반드시 읽어야 할 시집 목록을 프린트해서 학생들에게 나눠준다. 모두 200권쯤 된다. 목록을 받아든 학생들의 입이 딱 벌어진다. ‘어느 세월에?’ 하는 표정들이다. 내가 강의하는 건물에는 국악과가 있어 가야금이나 거문고 따위를 들고 오르내리는 학생들이 자주 보인다. 시를 쓰는 사람에게는 시집이 악기라고 설명한다. 시집은 악기처럼 비싸지 않고, 무겁지 않고, 고장이 나지도 않는다. 시집을 읽기 위해서는 연주 연습을 하듯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정하지 않아도 된다. 언제, 어디에서든 가방에서 잠깐 꺼내 읽을 수 있다.   고등학교 때는 시집을 읽다가 마음에 쏙 드는 시를 만나면 노트에 적어두었다. 그렇게 필사한 시가 대학노트 세 권에 가득하였다. 지금도 문예지를 읽다가 좋은 시를 만나면 반드시 따로 옮겨 적어 둔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도 필사를 권한다. 아니, 거의 강요한다. 한 학기를 마칠 때쯤이면 수백 편의 시가 적힌 자기만의 시집이 오롯이 남으니, 꿩 먹고 알 먹는 격이다.     다양한 시를 읽는 것은 다양한 음식을 맛보는 것과 같다. 나는 음식 만드는 일을 좋아하는데, 이것은 내가 요리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음식을 먹으면서 거기에 들어간 재료와 음식의 빛깔과 요리방법에 대해 꼼꼼하게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다. 그래서 한 번 먹어본 특이한 음식은 집에서 혼자 요리를 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음식을 먹는 행위는 훌륭한 관찰의 소재가 되고, 그 기억은 또한 멋진 시의 재료가 되는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어본 사람이 맛있는 음식을 만들 줄 아는 법이다. 곧 맛있는 시를 많이 음미해본 사람이 맛있는 시를 쓸 수 있는 이치와 같다.   그런데 막상 주위에 시 한 편도 시집 한 권도 옆에 없다면 어찌해야 하나? 그때는 귀를 열고 들으면 된다. 세상의 여러 소리를 듣는 행위도 책을 읽는 행위와 별로 다를 게 없다. 기형도는 어릴 적에 열무를 팔러 시장에 간 엄마를 기다리며 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새어드는 빗소리를 들었다. 황동규는 (아래 시)에서 빗소리를 듣기 위해 세상 뜰 때 귀만 두고 가겠다고 한다. 손과 발과 입과 눈은 가지고 가겠다고 한다. 오직 귀만 두고 가는 이 마음 역시 세상을 귀로 읽으려는 귀한 자세다.     내 세상 뜰 때 우선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입을 가지고 가리. 어둑해진 눈도 소중히 거풀 덮어 지니고 가리. 허나 가을의 어깨를 부축하고 때늦게 오는 저 밤비 소리에 기울이고 있는 귀는 두고 가리. 소리만 듣고도 비 맞는 가을 나무의 이름을 알아맞히는 귀 그냥 두고 가리.   *   2. 재능 믿지 말고 열정을 믿어라     1970년대만 해도 아이들이 읽을 만한 잡지가 흔하지 않았다. 시골 초등학교 도서실로 다달이 오던 는 몇 해 동안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는 도서실에서 책을 정리하는 일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가 든 봉투를 처음 개봉하는 일은 내 몫이었다. 정말 한 줄도 빼지 않고 읽었다. 집으로 잡지를 가져가서 읽는 날도 있었다. 물론 도서실의 ‘권력’을 이용한 불법대출이었다. 우리 집 건너편 방앗간 할머니는 혼자 살았는데, 내가 슬픈 이야기를 읽어주는 걸 좋아하셨다. 물레를 돌리며 명주실을 뽑는 할머니 옆에서 글을 읽어주면 할머니는 자주 슬피 우셨다. 그 덕분에 나는 누에고치 속의 번데기를 얻어먹거나 가끔 십원짜리 동전을 두어 개 얻을 수 있었다.   책 읽는 것은 좋아했지만 내가 가장 하기 싫은 공부는 글쓰기였다. 독후감을 쓰기 싫어 책을 읽다가 덮어버린 적도 많았다. 매일 일기장 검사를 하는 담임선생님을 만나면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4학년 여름방학 때 숙제로 쓴 일기를 5학년 여름에는 날짜만 바꿔 제출하기도 했다. 해마다 학교에서 백일장이 열리면 나는 시(운문)를 썼다. 시가 좋아서가 아니라 길이가 짧기 때문에 빨리 쓰고 뛰어놀기 위한 속셈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교지에 처음으로 투고한 시는 심혈을 기울여 썼음에도 어찌된 일인지 실리지 않았다. 나는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혼자 함부로 단정 짓고 말았다. 좋은 시를 고르는 선생님의 안목에 문제가 있다고! 그리하여 고등학교에 가게 되면 문예반에 들어가 시를 써 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장래에 이름을 날리는 시인이 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고등학교 교지에 적어도 시 한 편만은 꼭 실리게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내 삶의 미래에 대한 설계도를 다시 그리면서 한 사람의 시인으로 살아가는 꿈을 꾸게 된 것은 30여 년 전, 거기서, 그렇게 비롯되었다.   천재 시인이 과연 있을까? 내가 보기에 천부적으로 문학적 재능을 타고난 시인이란 애초부터 없다. 어떤 시인의 재능에 대한 찬사는 작품의 예술성에 대한 찬사이지 인간으로서의 천재성을 인정한다는 말이 아니다. 천재 시인이라는 말이 랭보의 이름 앞에 붙는 것은 십대 후반의 어린 나이에 경악할 만한 상상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고, 이상의 앞에 이 말이 붙는 것은 그의 파격적인 실험정신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천상병 시인을 가리켜 ‘천상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생전에 보인 낭만적이고도 기구한 행적에다 그의 이름에서 연상된 말놀이를 결합한 결과이다.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이 자신의 문학적 재능에 대해 회의하거나 한탄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것은 자신의 게으름을 인정한다는 것과 같다.   데이비드 베일스와 테드 올랜드는 라는 책에서 예술가가 “자신이 가진 재능이 얼마나 되는지 걱정하는 것보다 더 쓸모없고 흔한 에너지 소모는 없다”고 잘라 말한다. 즉 스스로 창조하고, 스스로를 발전시켜 나가지 않으면 눈부신 천성은 망각 속으로 사라져버린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주의 깊게 볼 것은 “자신의 작품으로부터 배워 나가며 발전한다”는 대목이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 혹은 ‘시를 창작하는 사람’을 뜻하지만, 그 창작물을 통해 변화·발전하는 존재라는 말이다. 한 편의 시는 독자들을 감응시킬 뿐만 아니라 창작자 자신에게도 틀림없이 좋은 공부거리가 된다. 좋은 시든 나쁜 시든 ‘이미’ 창작한 한 편의 시에는 ‘앞으로’ 창작할 시의 방향과 원리가 다 들어 있다. 또한 어렴풋하게나마 시인이 살아가면서 지향해야 할 삶의 지침까지 들어 있기 마련이다.   시인이라는 존재의 엄숙성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시라는 양식이 원래부터 엄숙하고 고결한 품격을 타고난 것은 아니며, 그리 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럼에도 예술 창작의 결과물인 시는 하나의 창조적 생명으로서 시인을 간섭하고, 가르치고, 지시하고, 격려하고, 고무하고, 나아가게 하고, 물러서게도 한다. 그래서 한 편의 시를 완성하는 순간, 시인은 자신의 시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살아갈 운명에 처하게 된다. 이 무서운 진리 앞에서 시인은 엄숙해질 수밖에 없다.   시인으로서 타고난 재능에 기대어 시를 기다리지 마라. 그리고 재능이 없다고 펜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지도 마라. 그렇게 하면 시는 절대로 운명의 조타수가 되어주지 않는다. 시인 역시 시의 길을 여는 조타수가 되려면 선천적인 재능보다 자신의 열정을 믿어야 한다. 일찍이 이광웅 시인은 “뭐든지 / 진짜가 되려거든 / 목숨을 걸고”() 해야 한다고 했다. 열정의 노예가 되어 열정에 복무할 때 우리는 그 열정에 대한 신뢰를 가까스로 재능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시중에 ‘시는 감성으로 쓰고, 소설은 노력으로 쓴다’는 허무맹랑한 말이 있다. ‘나이가 들면 감성이 무뎌진다’는 출처불명의 유언비어도 떠돈다. 모두 세상을 어지럽히고 선량한 백성을 미혹하게 하여 속이려는 헛소리들이다. 시를 쓰는 당신은 이런 말들에 귀가 어두워져 펜 끝을 흐리지 마라.   아무리 짧은 시 한 편을 쓰더라도 단편소설 한 편을 쓰는 것에 버금가는 시간을 투자하고, 자료를 취재하고, 공력을 집중시켜라. 감성이 무뎌졌다 싶으면 나이를 원망하지 말고, 부단히 감성을 훈련하지 않는 자신의 나태를 탓하라. 청년에게는 청년의 감성이 있고, 노년에게는 노년의 감성이 있는 법이다. 감성이란 또 여성의 전유물도 아니어서 남성적인 감성도 얼마든지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부디 열정을 품고 감성을 연습하고, 훈련하라.     생명이 요동치는 계절이면 넌 하나씩 肉身(육신)의 향기를 벗는다.   온갖 색깔을 고이 펼쳐둔 뒤란으로 물빛 숨소리 한 자락 떨어져 내릴 때 물관부에서 차오르는 긴 몸살의 숨결 저리도 견딜 수 없이 안타까운 떨림이여.   허덕이는 목숨의 한 끝에서 이웃의 웃음을 불러일으켜 줄지어 우리의 사랑이 흐르는 五線(오선)의 개울. 그곳을 건너는 和音(화음)을 뿜으며 꽃잎 빗장이 하나둘 풀리는 소리들. 햇볕은 일제히 꽃술을 밝게 흔들고.   별무늬같이 어지러운 꽃이여.   꽃대궁 앓는 목숨의 꽃이여.   이웃들의 더운 영혼 위에 목청을 가꾸어 내일을 노래하는 맘을 가지렴. 내일을 노래하는 맘을 가지렴.   - < 개화 >     고등학교 때 쓴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십대 후반의 감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말하기엔 시어에 좀 징글맞은 구석이 없지 않고, 완벽한 시도 아니다. 꽃잎이 막 열리는 순간을 그리기 위해 그 당시에는 말의 선택에 꽤 고심을 했던 것 같다. ‘육신· 색깔· 물빛·숨소리· 물관부·몸살·숨결· 떨림· 빗장· 목청’과 같은 명사들, ‘요동치는· 벗는다· 차오르는· 허덕이는 ·불러일으켜·뿜으며·풀리며· 흔들고’와 같은 용언들의 매혹에 빠져 미궁을 헤매듯 어지럽던 기억이 난다.   하나의 제재를 택한 뒤에 그것을 집중적으로 궁리하는 동안 감성은 자연스럽게 훈련이 된다. 시어와 제목의 유기적 관계를 따져보고, 시어와 시어 사이의 충돌을 살피는 일, 시적인 대상과 자아와의 거리를 조정하는 일들이 모두 감성의 훈련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뛰어난 요리사는 음식의 재료와 재료의 어울림에 예민하게 주목하는 자임을 잊지 말자. 특정한 제재에 맞닥뜨렸을 때, 그것을 어떻게 장악할 것인가? 중국의 시인 아이칭(艾靑)이 그의 에서 한 말은 음미할 만하다.     “제재를 완전히 장악해야 비로소 예술세계의 통치영역을 확대하게 된다. 무릇 당신이 눈동자로 본 것, 귀로 들은 모든 것을 빠짐없이 당신의 사상체계 속에 잘 짜 두어서,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명령에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당신의 감각과 사유가 한 제재로부터 습격을 당할 때, 한바탕의 격투를 치르게 하라. 그 제재가 완전히 굴복할 때까지 싸움을 계속하게 하라.”   이 싸움의 과정은 몰입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몰입은 글쓰기의 중요한 바탕이면서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시는 온전하게 몰입할 때 온다. 시에 투자하는 물리적인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몰입하는 시간의 깊이가 중요하다. 단 한 시간이라도 시에 집중적으로 몰입해 보라. 당신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열정적인 인간으로 성장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몰입을 열정의 이음동의어라고 부르면 어떨까?   ///- 안도현 시인-·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665    시적 언어재현으로 시각적인 상(像)-이미지를 찾아 그려라... 댓글:  조회:2124  추천:0  2017-08-22
  [詩論] 이미지에 관하여 권혁웅            시의 이미지에 관한 가장 보편적인 통념은 ‘시의 언어가 재현해내는 시각적인 상像’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고작 짝퉁 초상화나 풍경화를 얻어내려고 이미지를 구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것을 오감에 확대적용하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인데, 어떤 것이든 특화된 감관이 목적으로 삼고 있는 바로 그 감각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뇌를 경유해서만 활용 가능한 간접적인 질료인데, 어떻게 코의 본래 목적인 냄새를, 귀의 본래 목적인 소리를 그 기관보다 잘 구현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약점(언어란 간접적인 것이다)은 장점이기도 해서(언어란 종합하는 것이다) 이미지는 그 모든 감관들의 통섭이자 재인, 곧 지각을 지양하고 종합하여 통각에 이르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미지에 관해서 다시 물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미지는 무엇인가? 나아가 시의 이미지란 무엇인가?        이미지가 실재하는 어떤 것을 감각 아래로 다시 불러모은다(재현)가니, 실재하지 않는 어떤 것, 감각 너머의 어떤 것을 지시한다(상징)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런 관점은 이미지를 실재하거나 실재하지 않는 어떤 것의 아래로 끌고 간다. 차라리 이미지 자체가 실재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이미지를 말하는 것은 실재하는 것과 실재하는 것의 관계 혹은 실재하는 것과 실재하지 않는 것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미지는 실체이자, 그 실체들의 관계의 체계다. 전자는 이미지가 다른 어떤 것, 이질적인 것들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들, 이질적인 것들의 구성적 계기물임을 말한다. 후자는 이미지가 서로 다른 감각들, 다른 운송체계들(이를테면 말과 그림, 소리와 건축)을 통할하는 등가적, 부등가적 교환의 체계 그 자체임을 말한다. 우리는 전자를 통해 수단(예컨대 언어)과 목적(예컨대 의미)이라는 오래된 이분법을 벗어나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이미지라는 개념을 얻는다. 실체이기 때문에 그것은 의미를 전달하는 한편으로 차단한다. 후자를 통해 우리는 이미지를 경유하여 서로 다른 예술 체계를 체계화할 수 있다. 각각의 예술 체계는 이미지를 통해서 대화적 관계에 들어간다.        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묻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미지론의 가능성이다. 이미지는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사건은 이미지 바깥에서는 감지될 수 조차 없기 때문이다)이자 그 자체가 사건(이미지가 사건들의 계기적 연쇄를 촉발하기 때문이다)이자 사건의 사건(이미지는 그런 계기적 연쇄의 체계를 이루기 때문이다)이다.        조강석은 시적 이미지를 검토하기에 앞서 ‘이미지는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을 ‘이미지는 무엇을 욕망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동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이미지는 전통적인 도상학iconography을 넘어선 도상해석학iconolgy의 소관이다. 이것은 이미지와 텍스트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분리불가능한 수준으로 상호 침투된 채로 혼융되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미지란 “사회적인 집단”을 형성하는 것. “제2의 자연”을 구성하는 것이며, 따라서 “세상에 대한 새로운 배치와 지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미지의 욕망을 탐색하기 위해서 그가 소환하는 것은 의미론이다. 해석 작용이 선행되어야 이미지가 내부에서 생산해낸 실재를 탐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시 텍스트를 하나의 ‘내적 실체’로 간주하고 그 안에서의 논리적 정합성을 통해 텍스트의 의미망을 기술하는 것”이다. “시적 이미지가 궁극적으로 내부로부터 외부로 전개되면서 자신의 욕망을 가치와 윤리, 그리고 정치라는 사회적 욕망의 차원에 기입하기 위해서는 텍스트-이미지의 내부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장소가 지정되어야 한다”는 그의 결론은 거듭해서 숙고할 가치가 있다.        이나라는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의 이미지론을 명료하고도 섬세하게 스케치해 보여준다. 위베르만은 이미지가 “이질적인 것들을 모으는 인식론적 방법”이며, 따라서 이미지를 인식하는 일은 역사를 인식하는 일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이미지에서 어떤 “불투명함”과 “모호함”을 읽어야 한다. 이미지는 단순히 상징질서를 독해하고 나면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미지는 그런 독해의 끝에 남아 있는 잔여물, 사라지는 것의 “잉여물”이다. 위베르만이 “인류학적 이미지 산물들, 정신병원의 기록사진, 교회의 제단에 바쳐진 민중의 조야한 공예품, 필름에 근근이 기입되어 있는 단역들의 형상”에서 이미지-사유를 길어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미지를 해석하는 일은 그러므로 모든 주체가 경험하고 있는 내적인 상실, 실재의 균열과 구조 내의 붕괴 가능성을 인정하는 일이다”        두 사람의 글에서 새로운 이미지-사유, 이미지-사건으로 나아갈 지평을 얻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수많은 역사적, 사회적, 개인적, 파편적인 이미지들을 채집하고 해석하고 사유하는 일이며, 그 이미지들이 우리에게 건네는 의식적 무의식적 전언에 귀 기울이는 일일 것이다.      •권혁웅: 1997년『문예중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황금나무 아래서』,『마징가 계보학』,『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소문들』,『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가 있다. 그밖의 저서로『시론』,『미래파』,『당신을 읽는 시간』,『입술에 묻은 이름』,『꼬리 치는 당신』등이 있다. 현대시학 작품상과 미당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교수, 본지 편집위원      - 월간 [현대시학] 
664    "어미를 따라 잡힌 어린 게 한마리"와 군용트럭... 댓글:  조회:2067  추천:0  2017-08-21
  [詩論] 좋은 시란 무엇인가 (하) 이재무              다섯째 시는 사실의 재현이 아니라 진실의 구현이다.      진실 구현을 위해서는 경험 현실을 재구성할 때 이를 굴절시킬 줄 알아야 한다. 사실의 재현과 진실의 구현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 두 개념을 혼동하여 사실 재현을 진실 구현으로 오인하고 있다. 더불어 과학적 사실과 문학적 진실은 다르다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아비의 평생과 죽은 엄니의 생애가 고스란히 거름으로 뿌려져 있는 다섯 마지기 가쟁이 논이 팔린 지 닷새째 되는 날 품앗이에서 돌아온 둘째 동생 재식이는 한동안 잊었던 울음 쏟고 말았다 맷돌 같은 손으로 흘러넘치는 눈물 찍으며 대대손손 가난뿐인 빛 좋은 개살구의 가문의 기둥 찍고 찍었다 동생의 아이구땜으로 “정직, 성실, 근면하게 살자” 가훈이 덜컹 마루 끝으로 떨어지고 동네 허리 감싸 안은 야산도 함께 울었다 여간한 슬픔 끝 모를 절망의 늪에 온몸 빠졌을 때도, 눈물에 인색하면서 선웃음 잃지 않던 뚝심의 동생이 썩은새로 무너지며 터뜨린 눈물로 텃밭 푸성귀들을 자지러지게 흔들던 날 예순의 머슴 아비도 죽은 엄니 초상화 꺼내 들고 아끼던 눈물 한 방울 방바닥으로 굴리셨다 팔려버려 지금은 남의 논이 된 그 논에 모를 꽂고 온 동생의 하루가 내 살아온 부끄러운 나날에 비수되어 꽂히던 달도 없던 그날 밤 건너 집 흑백 TV 브라운관 뛰쳐나온 프로야구의 들끓는 함성이 허름한 담벼락 마구 흔들어대고 있었다 - 이재무, 시, , 전문          필자가 이 시를 쓸 때 우리 집은 절대적 가난을 앓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위 시편은 가난했다는 정황을 강조, 독자에게 울림을 주기 위하여 많은 부문에서 사실을 왜곡하였던 게 사실이다. 그것을 솔직히 고백하겠다.      다섯 마지기 논이 팔렸다는 것과 가훈과 지금은 팔려버려 남의 손으로 넘어간 논에 동생이 모를 심고 돌아와 울었다는 것 등 모두가 사실을 과장한 것이다. 어떻게 하면 가난의 정황을 더욱 실감나게 표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 끝에 가상현실을 지어낸 것이다. 예외적인 경우가 없진 않겠지만 그 시절 대개는 초등학교에서 낸 숙제 때문에 가훈이 임시방편으로 지어지고는 했던 게 사실이었다. 먹고 살기 어려운 형편에 무슨 가훈 따위가 필요했겠는가. 그러나 가난의 정황을 강조하기 위하여 나는 과감하게 가훈을 지어내고 또 하지도 않은 동생의 노동 행위조차 조작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위 시와 같이 고백체에 해당하는 시에서조차 보편적 감동과 울림을 주기 위하여 자신의 경험 현실을 재구성할 때 그것을 굴절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가난했다는 사실 그것마저 조작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례는 우리 시사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최근 현대시에서는 시 속의 화자와 시인이 일치하지 않은 몰개성적인 시가 더욱 많이 쓰여지기도 한다. 이 경우 시 속의 현실은 시인의 경험 현실과는 무관하게 진술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일반인과 다르게 시인의 거짓말에는 면책특권이 주어진다. 다만 그 거짓말은 독자의 밀도 높은 정서의 환기를 위해 실감 속에서 완벽하게 구사되어야 한다.          여섯째 좋은 시는 생각의 계기를 부여하여야 한다.      좋은 문학(시)은 자신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거나 계몽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이해와 세계 이해를 위한 통찰의 계기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먼저, 영화를 가지고 설명하겠다. 좋은 영화 한 편을 보고 났을 때 우리는 감동의 휴유증을 앓게 된다. 더불어 그 영화가 주는 의미와 가치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를 갖게 된다. 이창동 감독이 작가 이청준의 단편 를 각색하여 만든 영화 이 그렇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과연 ‘용서’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화두를 안겨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해온 용서라는 통념을 다시 한 번 각인하여 성찰하게 만든 것이다.      좋은 시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이러한 통찰이 매번 거창하거나 의미심장할 필요는 없다. 비록 사소한 것일망정 아무런 자의식 없이 자동화되어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우리의 실존 안의 여러 사소하나 무시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를 부여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어디서 나왔을까 깊은 산길 갓 태어난 듯한 다람쥐새끼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 맑은 눈빛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고집할 수가 없다 세상의 모든 어린 것들은 내 앞에서 눈부신 꼬리를 쳐들고 나를 어미라 부른다 괜히 가슴이 저릿저릿한 게 핑그르르 굳었던 젖이 돈다 젖이 차올라 겨드랑이까지 찡해오면 지금쯤 내 어린 것은 얼마나 젖이 그리울까 울면서 젖을 짜버리던 생각이 문득 난다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 난만한 그 눈동자, 너를 떠나서는 아무데도 갈 수 없다고 갈 수도 없다고 나는 오르던 산길을 내려오고 만다 하, 물웅덩이에는 무사한 송사리 떼 - 나희덕, 시, , 전문          위 시편은 생명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어린것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감정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 다람쥐를 보고도 핑그르르 젖이 도는 마음이 곧 시인의 마음이다. 굳이 거창하게 생태학이니 정령신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 시를 통해 모든 생명 지닌 것들에 대한 각별하면서도 애뜻한 관심과 사랑을 다시 한 번 갖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어미를 따라 잡힌 어린 게 한 마리   큰 게들이 새끼줄에 묶여 거품을 뿜으며 헛발질할 때 게장수의 구럭을 빠져나와 옆으로 옆으로 아스팔트를 기어간다 개펄에서 숨박꼭질하던 어린 시절 바다의 자유는 어디 갔을까 눈을 세워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달려오는 군용 트럭에 깔려 길바닥에 터져 죽는다     먼지 속에 썩어가는 어린 게의 시체 아무도 보지 않는 찬란한 빛 - 김광규, 시, , 전문          개펄에서 숨박꼭질하며 자유를 살던 어린 게, 아직 생명의 꽃을 제대로 피워보지도 못하고 달려오는 군용 트럭에 깔려 비명횡사한 어린 게의 죽음. 이 시편을 대하며 필자는 몇 년 전 미군 장갑차에 치여 죽은 어린 여중생 ‘미순, 효순이’의 앳된 얼굴이 ‘어린 게’와 함께 떠올랐다. 몰론 이 시편은 지난 연대에 발표된 것이지만 시차를 뛰어넘어 오늘의 문제와 의미를 떠올리게 해주었던 것이다. 이 시는 분명 문명의 폭력성을 고발한 작품이지만 ‘군용 트럭’이란 시어 때문에 정치적 알레고리로도 읽히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좋은 시란 이처럼 우리 나날의 관성적 일상에 찬 물을 끼얹는 자각을 가져다준다. 문명이 얼마나 무참하게 생명을 짓밟고 군사 파시즘이 얼마나 소외된 민중의 일상에 광폭한지를 웅변하지 않고도 시적인 장치를 통해 실감을 실어 전해주는 것이다.          일곱 번째 좋은 시는 배제와 선택의 원리가 적용될 때 이루어진다.     바다는 육지의 먼 산을 보지 않네 바다는 산 위의 흰 구름을 보지 않네 바다는 바다는, 바닷가 마을 10여 호 마을 남짓한 포구 마을에 어린아이 등에 업은 젊은 아낙이 가을 햇살 아래 그물 기우고 그 마을 언덕바지 새 무덤 하나 들국화 피어 있는 그 무덤을 보네 - 김명수, 시, , 전문          만약 이 시에서 ‘바다의 눈’이 ‘먼 산, 흰 구름, 바닷가 마을’ 등 모두를 보았다면 과연 성공할 수 있었을까. 어려웠을 것이다. 바다의 눈은 어린아이를 업은 젊은 아낙이 새 무덤 옆에서 그물을 기우고 있는 장면만을 주목했기 때문에 비로소 시로 성공할 수 있었다. 시를 쓸 때 너무 과욕을 부려서는 안 된다. 하나의 소재만을 집중적으로 다룰 때 성공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여덟 번째 소재를 잘 찾아야 한다      시 창작에 있어 주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소재의 발굴이다. ‘그리움’이니 ‘기다림’이니 하는 추상적 주제를 시로 쓰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경우도 소재를 잘 만나면 얼마든지 좋은 시로 태어날 수 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님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 유치환, 시, , 전문          이 시는 그리움이라는 관념적인 추상어를 주제와 제목으로 삼고 있지만 ‘파도’와 ‘뭍’의 관계를 통해 그것을 그려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벼랑은 번번이 파도를 놓친다 외롭고 고달픈, 저 유구한 천 년 만 년의 고독 잡힐 듯 잡히지 않고 철썩철썩 매번 와서는 따귀나 안기고 가는 몰인정한 사람아 희망을 놓쳐도 바보같이 바보같이 벼랑은 눈부신 고집 꺾지 않는다 마침내 시간은 그를 녹여 바다가 되게 하리라 - 이재무, 시, , 전문          유치환의 시 을 뒤집은 발상이 이 시편을 낳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이 시에는 역발상이 들어 있다. 일반적 통념을 깨고 ‘파도’ 대신 ‘벼랑’을 행위와 문장의 주체, 주어로 내세운 것이다. 이 시 역시도 소재가 주제 구현에 이바지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립다는 것은 당신이 조개처럼 아주 천천히 뻘흙을 토해내고 있다는 말   그립다는 것은 당신이 언젠가 돌로 풀을 눌러 놓았다는 얘기   그 풀들이 돌을 슬쩍슬쩍 밀어올리고 있다는 얘기   풀들이 물컹물컹 자라나고 있다는 얘기 - 문태준, 시, , 전문          이 시는 그리움이란 추상어를 구체적 감각어로 한정시켜 놓았다. 또한 그리움이란 추상어를 감각적 언어를 통해 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역시 적절한 소재들을 동원하여 실감나게 주제를 구현시켰다고 볼 수 있다.          아홉 번째 좋은 시는 자기 검열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지난 연대 문학예술의 최대 공적은 체제로부터의 검열이었다. 이 때문에 많은 시인 작가들이 표현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억압적 금기와 싸우다 감옥에 가고 더러는 절필을 선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 체제로부터의 검열은 거의 사라졌다고 봐도 좋다. 하지만 여전히 자기 검열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한 이들이 많다. 그것은 체제의 눈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시인이나 작가 주변에 있는 타자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데서 비롯된다. 문학의 영토는 무한대로 확장되어야 한다. 모든 금기와의 싸움에서 지지 말아야 한다. 문학은 종교나 도덕이나 이념이나 철학 등이 아니다. 그것들은 다만 문학 안에 부수적으로 파편화되어 편재할 뿐이다. 그럼에도 이런 것들에 문학이 종속된다면 상상력의 영토는 형편없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663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것이다"... 댓글:  조회:1879  추천:0  2017-08-21
  [詩論] 좋은 시란 무엇인가 (상) 이재무              1. 패러다임에 대하여      생물학자 만하임 쿤은 패러다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패러다임이란 당시대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에 의해 기초된 것이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패러다임이란 절대적 객관적 개념이 아니라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다르게 구성될 수 있는 상대적 개념이란 뜻을 내포한다. 즉 시대마다 사람들의 합의가 달라져 다르게 구성될 수 있는 것이 패러다임이란 말이다. 이를테면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하여 그것이 하나의 과학적 패러다임으로 확정되기 이전에는 ‘천동설’이 과학에 있어 하나의 패러다임이었으나 이후 그 패러다임은 지동설에 의해 자신의 과학적 지위를 내놓을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이는 당시대 사회의 합의, 즉 그 시대의 과학적 보편성에 의해 그리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뉴턴으로 대변될 수 있는 근대적 과학주의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의 논리’ 즉 ‘신과학’에 의해 패러다임이 교체된 것도 이와 같은 사정 때문이다.      객관성과 합리성을 생명으로 하는 과학에서조차 패러다임은 이처럼 시대에 따라 달리 구성될진대 상대성과 자율성을 존중하는 인문학, 그 가운데에서도 예술 문학에서는 말할 나위 없이 얼마든지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개념이 달리 구성될 수밖에 없다.      오랫동안 군림해온 서양의 근대 계몽 이성 담론이 해체되고 그 자리에 새로운 담론들 예컨대 포스트모더니즘, 페미니즘, 생태주의, 탈 역사주의 등이 들어서고 있는 것도 패러다임이 시대에 따라 달리 구성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야기가 다소 길어졌는데 왜 시를 논하는 자리에 앞서 패러다임에 대한 개념 규정 및 성격을 먼저 논하는가 하면 시에 있어서의 정의나 성격 나아가 좋은 시에 대한 요건과 평가 역시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주지하다시피 지난 연대는 거대 담론 시대였다. 따라서 문학예술에서도 이러한 담론의 영향을 받아 굵직굵직한 주제와 소재를 즐겨 다루었다. 예컨대 ‘계급’이니 ‘민족’이니 ‘민중’이니 하는 문학적 담론이 그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 초 사회주의가 붕괴함에 따라 거대 담론에 대한 회의가 대두되었고 이에 대한 극복과 대안으로 많은 담론이 무성하게 전개되었는바 그러한 담론들의 영향을 받아 쓰여진 많은 문학 작품들 예컨대 시로서 한정시켜 말하면 진난 연대의 주류를 이루었던 노동시, 통일시, 농민시, 실험시 대신 도시시, 생태시 여성시, 내면 성찰시, 선시 등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정에 비추어 볼 때 앞으로 필자가 살펴볼 좋은 시의 요건도 어디까지나 주관적 상대적이지, 절대적 객관적 조건일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명시적으로 제시되지는 않지만 어느 시대이든지 좋은 시에 대한 묵시적 합의는 있게 마련이다. 이것은 그 시대의 패러다임의 영향 때문이다. 그 어떤 작품도 이러한 시대적 패러다임으로부터 자유롭기는 어렵다. 이런 이유로 당시대의 문학인은 그 시대의 주류적 경향이나 흐름, 동향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좋은 시란 무엇인가?        시란 장르만큼 취향과 기호의 스펙트럼이 넓은 장르도 없다. 그러므로 저마다 좋아하는 시편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와 대상에 대한 인식 차이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저마다의 인식 차이는 저마다의 유전적 형질, 계급, 지역, 성별, 세대, 경험의 총체 등의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 차이는 문체를 결정짓기도 한다.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인식했기 때문에 문체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문체의 차이는 동일한 대상을 동일하게 인식했으나 다만, 장식적 수사가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인식(세계관이나 가치관 혹은 역사관의 차이)했기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문체는 곧 그 사람의 전부라 말할 수 있다.      문학(시)에 대한 취향과 기호가 다른 것은 곧 세계관이나 인생관 혹은 역사관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취향과 기호에 대한 억압은 세계나 대상에 대한 인식 즉 그 사람의 세계관이나 가치관을 억압하는 것으로 야만적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각기 다른 저마다의 취향과 기호의 실현과 향수도 대개는 시대가 요구하는 패러다임의 자장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 말은 아무리 스펙트럼이 넓은 시 장르라 하더라도 당시대가 요구하는 묵시적 합의가 있게 마련이고 좋은 시란 이 범주 안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첫째, 좋은 시는 발견의 미학이 들어있어야 한다. 즉 견자의 태도를 지녀야 한다. 발견은 감각이나 현상 너머의 이면적 진실을 포착하는 행위 속에서 이루어진다. 예시를 통해 이를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 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 천양희, 시, , 전문          종소리 뒤편의 기도문, 화려한 마네킹 뒤편의 시침을 보는 시인의 시선이 날카롭다. 현상 너머의 이면적 진실은 우리를 아프게 한다. 현상 너머의 이면적 진실은 우리를 아프게 한다. 이미지와 실체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오랜 침묵 우려낸 종소리가 울려 펴진다. 공중에 파문을 내면서 꽃을 만나면 웃음을, 풀과 나무를 만나면 푸름을, 언덕을 만나면 굴렁쇠가 되는, 환하고 푸르고 둥근 종소리. 그러나 뒤편에는 누군가의 간절한 기구가 있다는 것을 이 시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결구의 잠언적 발언은 바로 현상 너머의 이면적 진실을 포착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심야의 고속도로 트럭 행렬을 바라본 적이 있다 그 거친 사내들은 단내 나는 더운 숨 연신 토해내며 살 맞은 짐승처럼 고함 질러대고 있었다 딱딱한 밤공기가 과자부스러기가 되어 부서졌다 하늘에 핀 별꽃들이 경기 들린 아이처럼 놀라 자지러지고 있었다 무법천지가 따로 없었다 우락부락한 다혈질의, 각진 얼굴의 사내들은 힘이 세다 그들이 실어 나르지 못할 물건은 없다 조폭의 무리 같기도 한 그들이 지날 때 함부로 그들을 나무라지는 말자 그저 절로 벌어진 입 당분간 닫지 말고 사고 없이 어서 이 위기의 시간이 지나가기를 소원하면 되는 것이다 아무리 바지런을 떨어도 생의 저속을 사는 그들은 언제든지 분노로 폭발할 수 있는 슬픔 몇 됫박씩 가슴에 지니고 산다 밤의 질주에는 그런 그들만의 사정이 있는 것이다 - 이재무, 시, , 전문          얼마 전 트럭 운전사들이 물류대란을 일으켜 일시적이나마 산업을 마비시킨 적이 있다. 그런 그들을 사람들은 사회 범죄자 취급하며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을 무조건 비난하기에 앞서 그들이 왜 그렇게 티브이 화면이나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며 원시적인 무력행사를 벌일 수밖에 없는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또한 위 시편에서 진술하고 있듯이 그들이 왜 밤의 폭주족이 될 수밖에 없는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과속이 정당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의 벌인 행위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그 행위 이면을 들여다보자는 뜻이다. 그들의 사보타지와 과속은 오로지 생의 저속을 면키 위함이다. 과속을 해도 저속을 면키 어려운 그들의 속내를 들여다보았을 때 문제에 대한 보다 객관성에 기초한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겠기 때문이다. 이처럼 발견이란 현상적인 삶 이면의 숨겨진 진실을 들여다보는 보는 행위를 말한다. 사물과 삶의 이면에는 현상에서 놓치기 쉬운 실체와 핵심 그리고 진실이 숨어있는 것이다.          둘째, 좋은 시란 ‘낯설게 하기’가 들어있어야 한다. 이것은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주창한 것으로서 ‘비록 낯익고 진부한 대상이나 세계라 할지라도 그것에 대하여 내 나름의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를 말한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먼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서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 서정주, 시, , 전문          주지하다시피 ‘국화’는 사군자의 하나로 서정주 시인 이전에는 우리 시에서 주로 ‘절조’의 표상으로 쓰여 왔다. 하지만 서정주 시인은 국화에 대한 기왕의 오랜 통념을 버리고 여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이를 낯설게 만들었다. 이 시에서 ‘국화’는 더 이상 절조를 표상하지 않고 이제는 시인이 부여한 새로운 의미 즉 ‘원숙한 생명감’을 뜻하게 된 것이다.      김소월의 시 에서 ‘진달래꽃’이라는 시어의 의미는 ‘이별의 정한’이지만 신동엽 시인의 시 에서 ‘진달래꽃’의 의미는 ‘혁명’을 뜻한다. 후세대 시인 신동엽은 전 시대 시인 김소월과 다르게 동일한 대상에 대하여 다르게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에 ‘낯설게 하기’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낯설게 하기’는 대상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뜻하는 것으로서 시 창작에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시작 행위에 속한다.          셋째, 시언어에 대한 자의식을 가져야 한다.      글쓰기란 한 마디로 줄여 말하면 언어의 선택과 배열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체 불가능한 최상급의 언어 선택으로 최선의 배열을 기하는 것이 글쓰기의 요체인 것이다. 시의 언어는 일상어와는 그 쓰임새가 다르다. 일상어는 의미 전달이나 개념을 제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시언어는 그 자체가 목적성을 띠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의 교체가 불가능하다. 가령 일상어에서는 ‘연인’이라는 말 대신 ‘애인’이나 ‘님’ 혹은 ‘자기’라는 말을 쓸 수 있지만 시언어에서는 기표마다 환기되는 정서가 다르기 때문에 교체해서 쓸 수가 없다. 서정주 시인의 시 에 나오는 시 구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었다”에서 ‘팔 할’ 대신 ‘80 %’를 쓸 수는 없는 일이다. 평론가 유종호는 그의 저서 에서 이러한 시 언어의 특성을 극도의 긴장감을 지닌 ‘글자 넣기 놀음’에 비유하고 있다.      놀이에는 특유한 긴장이 따르는 법이다. 이것이 제대로 풀릴까 하는 불확정성에서 오는 긴장은 시 쓰는 과정의 시인의 고심과 비슷하다. 한 집의 실수나 악수가 불계패를 자초할 수 있듯이 잘못 놓인 글자는 글자 넣기 놀음을 파국으로 이끌 수 있다. 시를 향수하는 독자의 입장에서도 놀이의 규칙을 알아야 제대로 즐길 수 있으며 이해할 수 있다. 글자 넣기 놀음의 재미는 한 글자라도 잘못 적어 넣으면 파토가 생겨 놀이가 완성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한 글자라도 악수가 있으면 완벽성과 완결성을 기대할 수 없다. 전후좌우에 그것 아니고서는 채울 수 없는 유일의 적정어가 놓여야 한다.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 김종삼, 시,  전문          위 시편에서 마지막 행의 ‘적막하다’라는 시어를 대신할 시어는 없다. 가령 ‘고요하다’ ‘고독하다’ ‘쓸쓸하다’ ‘안타깝다’ ‘외롭다’ 등등의 그 어떤 말로도 ‘적막하다’가 갖는 울림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플로베르가 주장한 ‘일물일어설’에 해당된다. “한 사물의 특성 혹은 한 가지 생각을 표현하는 데는 한 가지 말밖에는 없다”는 ‘일물일어설’이 뜻하는 것은 글쓰기에 있어 최상의 언어, 최적의 언어, 즉 적정한 유일어를 찾으라는 것을 말한다.      시 장르는 무엇보다 기표 위의의 장르라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언어에는 형식과 기호를 뜻하는 ‘기표’와 내용과 의미를 뜻하는 ‘기의’가 있는데 이 가운데 시는 기표를 더 중시하는 장르이다. 기왕이면 정서적 밀도가 강한 기표를 쓰는 것이 시 쓰기에서는 필요하고 유리하다.      정서적 밀도가 강한 언어에는 무엇이 있는가? ‘꽃’ ‘곡식’ ‘강’ ‘산’ 같은 일반어보다는 ‘국화꽃’ ‘‘소양강’ ‘부소산, 같은 특수어가 더 정서적 환기력이 강하다. 또한 관념어나 추상어보다는 구체적 감각어가 정서의 밀도에 강하다. 눈으로 익힌 개념어보다는 귀로 듣는 구체적 현장언어가, 표준어보다는 부족 방언이 더욱 실감을 줄 수 있다.     내 귓속에는 막다른 골목이 있고, 사람 사는 세상에서 밀려난 작은 소리들이 따각따각 걸어 들어와 어둡고 찬 바닥에 몸을 누이는 슬픈 골목이 있고,     얼어터진 배추를 녹이기 위해 제 한 몸 기꺼이 태우는 새벽 농수산물시장의 장작불 소리가 있고, 리어카 바퀴를 붙들고 늘어지는 첫눈의 신음소리가 있고, 좌판대 널빤지 위에서 푸른 수의를 껴입은 고등어가 토해놓은 비릿한 파도소리가 있고, 갈라진 손가락 끝에 잔멸치 떼를 키우는 어머니의 짜디짠 한숨소리가 있고,     내 귓속 막다른 골목에는 소리들을 보호해주는 작고 아름다운 달팽이집이 있고, 아주 가끔 따뜻한 기도소리가 들어와 묵기도 하는 작지만 큰 세상이 있고, - 고영, 시, , 전문          위 시편 속 시적 주체의 공간에는 체험을 우려낸 다양하고도 생생한 소리들이 살고 있다. 그런데 그 소리들은 아주 구체적인 형상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모두 세상에서 밀려난 작은 소리들이다. 눈으로 익힌 언어들의 대개가 개념어들인데 반해 귀에 친근한 언어군은 체험현장과 밀접한 감각 혹은 구체어들이다. 이 감각, 구체어들이야말로 시의 보고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시에서의 표현은 언어학자 야콥슨이 주장한 “일상 언어에 대한 조직적 폭력으로서의 언어”이어야 한다. 즉 일상 어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일상 어법에서 벗어난 일탈적이면서도 창조적인 언어의 사용이 필요한 것이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 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기형도, 시, , 전문          위 시편에서 셋째 행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해는 시든 지 오래”라는 시 구절은 일상 어법이 아니다. 일상 어법에서는 “날이 저물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날이 저물고 먼 곳에서 빈들이 넘어진다 무한천공 바람 겹겹이 사람은 저 혼자 펄럭이고 파도치는 거리의 집들 어딜까 어딜까 마지막 남은 햇빛 하나가 도시를 끌고 간다 - 강은교, 시,  중에서          위 시편에서 “빈 들이 넘어진다” “사람은 저 혼자 펄럭이고” “파도치는 거리의 집들” “마지막 남은 햇빛 하나가 도시를 끌고 간다”라는 구절들은 모두 일상 어법과는 다른 창조적 표현으로서의 시적 진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시적 표현은 의미가 곧바로 전달되는 일상어법이 아니라 의미가 간접적, 우회적으로 전달되는 반투명성으로서의 어법인 것이다.          넷째, 좋은 시는 구조적 차원의 비유가 적용될 때 실현된다.      구조적 차원의 비유를 설명하기에 앞서 먼저 비유의 개념부터 알아보기로 하자. 비유는 시의 구성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시의 구성 요소는 시의 주요한 배경 지식으로서 시 쓰기에 있어 언제든 창조적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운동 경기를 재미있고 실속 있게 관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경기에 대한 ‘룰rule'을 잘 알아야 한다. 이 룰에 대한 숙지와 인식 여하에 따라 관전의 쾌감이 다르고, 태도 또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관중의 태도가 이러할진대 경기의 주체인 선수가 룰을 모르고 경기장에 들어설 수는 없는 일이다. 글쓰기와 글에 대한 감상과 이해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운동 경기의 주체인 선수가 룰을 모르고 운동에 참여할 수 없듯이 글쓰기 주체인 창작자가 글에 대한 기본적인 체계와 그 구성 원리를 제대로 모르다면 제대로 된 글이 나올 수 없다.      시에 대한 일반의 생각이 있다. ‘시는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는 고정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흔히들 고등수학이나 물리학 추상 미술이나 고전 음악이 어려운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유독 시가 어렵다는 것에 대해서는 불평과 불만이 많다. 이는 분명 잘못된 태도이다. 고등수학이나 추상 미술이 그러하듯이 문학의 성취도 치열한 지적 투자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의 요소 즉, 주제의 구현과 제목 붙이기, 시의 구성, 어조의 역할과 어조 구성의 유의점, 역설과 아이러니, 상징, 비유, 인유와 패러디, 시점과 거리, 화자와 청자의 관계, 알레고리, 서술, 묘사 등의 배경지식은 시 창작에 있어 반드시 숙지해야 할 첫 번째 항목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무엇하나 소홀할 수 없지만 이 가운데 여기에서는 지면상 비유에 대하여만 설명하고자 한다.      비유는 서로 다른 사물들이나 관념들 간의 유사성에 대한 지각 행위를 말한다. 이것이 ‘차이성’에 주목하는 아이러니와 다른 점이다.      그런데 이러한 비유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형태나 모양의 유사성과 내용이나 성질의 유사성이 바로 그것이다. 먼저 좀 우스운 예를 들어 전자의 경우를 설명해보자. 평생을 아이의 천진무구한 마음과 새처럼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다 가신 천상병 시인의 프로필 사진을 두고 일찍이 고은 시인은 “천상병 시인의 얼굴은 잘못 말린 해산물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은 천상병 시인의 얼굴이 말린 해산물같이 많이 구겨져 보인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해산물과 시인의 얼굴 사이에서 ‘구겨졌다’는 형태의 유사성을 찾았기에 위와 같은 비유적 표현이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생활은 촛불이다” “내 마음은 호수다” 같은 시 구절들은 형태나 모양이 유사해서 나온 비유가 아니다. 그것은 내용이 유사하기 때문에 나온 비유이다. 생활과 촛불은 ‘언제 꺼질지 모른다’ 는 점에서 마음과 호수는 ‘맑고 깨끗하다’는 점에서 서로 간 유사성을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같은 비유의 개념을 이해했을 때 구조적 차원의 비유를 시 쓰기에 적용할 수 있게 된다. 구조적 차원의 비유는 위에서 든 예처럼 시편 속에는 구체적 비유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구체적 비유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전체 차원에서 보면 비유가 적용되는 것이 구조적 차원의 비유다.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 공광규, 시, , 전문          불을 품은 푸른 몸의 사내(소주병)가 있다. 그를 마시고 사람들은 피가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을 누군가가 다 소비했을 때 그는 비참하게 버려졌다. 바람이 세게불던 밤 시인은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에서 아버지의 흐느낌을 듣는다. 그도 어느새 잔(자식)에다 자기를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가는 아버지가 된 것이다.      위 시편은 구체적으로 시행을 통해 비유가 진술되지는 않았지만 전체적 차원에서 비유가 적용되고 있다. 즉, 아버지와 빈소주병 사이의 유사성에 주목하여 시인은 그것을 화두로 혹은 그것에서 직관 혹은 영감을 얻어 한 편의 시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 편 더 인용해 보기로 하자.     소는 죽어서도 매를 맞는다 살아서 맞던 채찍 대신 북채를 맞는다 살가죽만 남아 북이 된 소의 울음소리, 맞으면 맞을수록 신명을 더한다     노름꾼 아버지의 발길질 아래 피할 생각도 없이 주저앉아 울던 어머니가 그랬다 병든 사내를 버리지 못하고 버드나무처럼 쥐여 뜯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흐느끼던 울음에는 저런 청승맞은 가락이 실려 있었다     채식주의의 질기디 질긴 습성대로 죽어서도 여물여물 살가죽에 와 닿은 아픔을 되새기며 둥 둥 둥 둥 지친 북채를 끌어당긴다 끌어당겨 연신 제 몸을 친다 - 손택수, 시,  , 전문          소처럼 가련한 존재도 없을 것이다. 살아서는 인간을 위해 자신의 전 노동력을 바치고 죽어서는 부위별로 팔려나가고, 북이 된 가죽은 매까지 맞으며 운다. 우리들의 이전 시대 어머니들도 그랬다. 소까지는 아니지만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권력 이데올르기 속에서 일방적 희생을 강요당하고도 아무런 보상을 받을 수 없었던 존재가 우리들의 보통 어머니였던 것이다.      이 시는 이질적인 두 사물 즉, ‘소가죽’과 ‘어머니’를 연결하는 유사성의 시작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662    "아, 이거 시가 되겠네"... 댓글:  조회:1753  추천:0  2017-08-21
시를 쓰는 세 단계 / 이형기  영국의 시인이자 시론가인 루이스가 쓴 라는 책을 참고하여 이 형기님은 시를 쓰는 단계를 다음과 같이 3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는 '시의 종자'를 얻는 단계이고, 두 번째는 이 종자가 시인 정신 내부에 성장하는 단계이고. 세 번째는 하나하나 언어를 골라 거기에 구체적인 표현을 부여하는 단계 이다.  1. 첫 번째는 '시의 종자'를 얻는 단계  '아, 이거 시가 되겠다' 싶은 인상적인 느낌이 드는 것이 있으면 시의 종자가 될 수 있다. 이 종자는 반드시 노트에 적어야 한다.  그 종자를 당장 한 편의 시로 만들려고 서두를 것은 없다. 시를 쓰려고 서두르면 상상력이 종자 자체에만 얽매어 표현이 단조롭고 내용이 빈약한 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조급증을 부리지 말고 지긋하게 기다릴 줄 아는 힘을 기를 필요가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시의 종자를 붙든 순간에 펜을 들어 단숨에 한 편의 시를 써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율이 높고 성실성도 문제 되는 방법이기 때문에 부득이한 경우가 아닌한 그렇게는 시를 쓰지 말아야 한다.  또 시의 종자를 노트에 적는 것이 중요한데 시의 종자를 노트에 적지 않으면 완전 히 까먹어 종자가 싹터서 자랄 수 없는 멸실(滅失) 상태가 된다. 그러므로 노트에 꼭 적어 두어야 한다. 노트가 곧 시의 종자의 생명력을 보증하는 비망록이라고 볼 수 있다.  2. 두 번째는 종자의 성장과 시적 사고를 하는 단계  종자 얻기 과정을 거치면 다음에는 그 종자가 시인의 정신 내부에서 성장하는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종자의 성장은 며칠 동안 속성(速成)으로 자랄 수도 있고, 몇 년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성장이 느리다면 수 년 동안 시를 몇 편 쓰지 못할 것이 아닌가 하고 의문을 갖지만 우리 속에 자라는 시의 종자가 하나일 수 없다. 여러 개의 종자가 동시에 자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시의 종자가 혼자 힘으로 소망스럽게 쑥쑥 자란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제대로 싹틔우고 자라게 하려면 정성어린 노력이 필요하다. 전날 쓴 노트를 펼쳐 그 종자를 보며 거기에 자신의 상상력을 가미하게 되면 성장과 발전의 단계에 접어 들게 되는 것이다.  서정주 님은 라는 시를 쓰고 나서 이런 말씀을 그의 자서전에 남겼다.  "내가 어느 해 새로 이해한 이 정밀한 40대 여인의 미의 영상은 꽤 오랫동안 -아마 2-3년 동안 그 표현을 찾지 못한 채 내 속에 잠재해 있었다가 1947년 가을 어느 해 어스름 때 문득 내 눈이 내 정원의 한 그루의 국화꽃에 머물게 되자 그 형상화 공작이 내 속에서 비로소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서정주, 에서  그러니까 그 종자의 획득은 2-3년 동안 지속적으로 그런 이미지를 떠오를 수 있게끔 시적 사고를 거듭하면서 준비를 해온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3. 세 번째는 구체적인 언어 표현 찾기 단계  이 단계에 이르면 시를 쓰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끼게 된다. 시를 쓰려고 할 때는 가장 적합한 표현의 언어를 찾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안된다. 정신을 집중해도 척척 풀리지 않을 때, 시인들은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이를테면 뜰을 거닐거나, 목욕을 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아니면 침대에 누워 명상에 잠긴다.  를 쓴 서정주 님의 말을 빌리자면 몇 시간 누었다, 앉았다 하며 비교적 쉽게 1-2연을 썼고, 마지막 연은 좀처럼 생각이 안나서 잠 자버리고 며칠 동안 그대로 묵혀두었다가 완성했다고 한다. 서정주 님도 해산의 고통을 겪으며 를 완성했는데 하물며 시의 초심자의 경우는 어떤 자세로 시를 써야겠는가? 그러나 고통이 아무리 크다해도 작업의 결과가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되면 그로써 고통은 절로 보상된다.  
661    "장백산아, 이야기하라"... 댓글:  조회:2014  추천:0  2017-08-21
김성휘 장편서사시 《장백산아, 이야기하라》   방송시간: 《라지오책방》 2009년 8월 30일 MC : 김계월 GUEST : 석 화       ― M ―   M : 안녕하세요. 연변위성방송라지오책방의 김계월입니다. 올해는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60돐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 연변자치주 창립 기념일인 9.3명절도 곧 다가오고 있지요. 매번 이런 뜻 깊은 명절들을 맞을 때마다 우리는 오늘의 우리 행복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친 혁명선렬들의 위업을 떠올려 보게 됩니다. 혁명선렬들의 위업을 묘사하는 것은 또한 우리문학의 중대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예, 오늘은 이러한 큰 주제에 바쳐진 무게 있는 작품을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인 석화선생님을 저희들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함께 얘기 나누겠습니다.   M : 안녕하십니까.   G : 안녕하십니까.   M : 반갑습니다.   G : 예, 반갑습니다.   M : 공화국창건기념일도 바야흐로 다가오고 있고 또 우리의 자치주 창립일인 9.3명절도 이제 며칠 안 남았습니다. 정말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런 명절을 맞을 때마다 이 행복을 찾기 위해서 우리의 선렬들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을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G : 모든 것을 다 바쳤지요. 청춘도 생명도 모든 것을 다 바쳐 오늘을 이룩하였지요.   M : 오늘 소개해 주실 작품, 정말 큰 주제를 다룬 무게 있는 작품을 소개해 주신다고 하셨죠.   G : 예, 우리 연변 그리고 동북지역은 혁명투쟁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지요. 그리고 특히는 지난 세기 초반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항거하여 일떠난 조선족인민 그리고 한족인민들의 투쟁은 중국혁명투쟁사에 빛나는 페이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M : 예, 그렇지요. 오늘 소개주실 작품도 역시 이러한 큰 주제를 다룬 작품이죠.   G : 예, 그렇습니다. 오늘 제가 준비한 작품은 김성휘시인의 력작 장편서사시 《장백산아 이야기하라》입니다. 김성휘시인은 우리 “라지오책방”에서 여러번 소개하였지요. 우리 중국조선족 시문학사에서 큰 획을 그은 분이십니다. 김성휘시인은 “시내물”과 같은 아름다운 서정시도 많이 썼지만 서정서사시 그리고 장편서사시 창작에서도 큰 성과를 이룩하였습니다.   M : 예.   G : 장편서사시 《장백산아 이야기하라》는 우리 연변지역의 항일투쟁사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1979년 흑룡강인민출판사에 의하여 출간되었습니다. 장편서사시 《장백산아 이야기하라》는 김성휘시인의 시창작에서 하나의 리정비일 뿐만 아니라 전반 중국 조선족시문학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성과작입니다.   이 작품은 폭넓은 사회, 력사적 화폭으로 항일무장투쟁시기의 조선족과 한족인민들이 장백산항일근거지를 창설하고 일제침략자를 족치는 피어린 투쟁과 탁월한 승리를 담고 있습니다.   장편서사시 《장백산아 이야기하라》는 머리시와 맺음시 그리고 본장 13장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 시행은 무려 7천행에 달합니다. 그럼 이 책을 펼치고 머리시와 만나보록 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 M ―   M : 김성휘작 장편서사시 “장백산아 이야기하라”, 머리시.   ― M ―   창공을 치뚫으고 지심에 뿌리내린 이 나라 동방, 혁명의 금자탑 장백산아, 이야기하라!   산벼랑을 넘나들며 장수들 칼을 갈았다는 전설의 서사시 력사의 견증자- 장백산아, 이야기하라!   창창한 하늘에 우뚝 솟아 항시 머리를 숙이지 않음은 총칼앞에서도 굴함없는 이 나라 형제민족 절개를 지녔음이냐   울창한 송림을 키워 안고 사시정철 설레이고 설레임은 산발마다 붉은 피로 아로새겨진 이 나라 영웅들의 위훈을 자랑함이냐   백호의 용맹을 빌어 수리개의 날개를 타고 장백의 계곡에서 익힌 목청으로 내 오늘 장백의 새 전설 엮으련다   너의 수림은 나의 붓 너의 천지는 나의 먹물 너의 폭포는 나의 서정 내 장백산마루에 올랏노라   구름을 뚫고 안개를 헤치고 멀리 가까이 날아들며 눈보라속에서, 비바람속에서 내 시줄에 모닥불을 피우렸다   네 천지에 뿌리 박은 두만강 7백리 물줄기 따라 열두동강 떼가래 저으며 내 시줄에 진달래를 피우련다.   우거진 숲, 깊은 골짜기 피어린 력사의 자국을 더듬어 탄우속으로 불속으로 달리며 내 시줄에 총소리 울리련다   장백산아, 이야기하라! 아버지, 어머니, 형님, 누나들 네 산등성이에서, 네 샘물터에서 무슨 이야기를 그처럼 오순도순하였더냐   장백산아, 이야기하라! 눈물로 갈한 목 추기면서도 풀뿌리로 끼니를 에우면서도 그이들은 어찌하여 그처럼 호탕히 웃었더냐   천리 눈보라 뚫고 천년 안개 헤쳐 영웅들이 피흘리며 부른 노래를 자랑과 긍지에 찬 목청으로 노래하련다, 울며 또 웃으며   내 노래 거칠건만 어머니조국에 바치는 정성이니 산아, 가슴헤쳐 메아리쳐라 전해다오 나의 노래를 사랑하는 독자앞에!   ― M ―   M : 너무도 격정에 넘쳐서 소리 톤이 저도 몰래 높아갑니다.   G : 그렇겠지요, 지난 세기 가열처절했던 전투의 나날이 시구에 그대로 담겨져 있네요.   M : 그렇습니다. 정말 한 폭의 그림 같은 화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 갑니다.   G : 그렇네요, 그러면 우리가 이번에는 이 작품을 쓴 시인의 고백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라는 문장에서 시인은 아래와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 M ―   “내가 이 서사시에서 시도한 것은 되도록 30년대 동북항일투쟁에 궐기한 조, 한 두 민족인민의 투쟁모습의 그 어느 한 측면이라도 반영함으로써 지난날 우리인민들의 피어린 력사를 잊지 말자는 그것입니다. 우리 인민이 겪은 도탄과 인민이 쌓은 영웅업적에 비하면 너무나도 가벼운 졸작이지만 흘러간 력사의 한 모퉁이라도 적어서 후세에 력사적 서류라도 남기려 했습니다.”   ― M ―   M : 예, 이 시인의 뚜렷한 창작의도가 정말 저희들 마음에 와 닿습니다.   G : 예, 그렇습니다. 장편서사시 “장백산아 이야기하라”는 주인공 청송이와 그 주변인물들인 영란이, 슈란이 그리고 항일유격대장 양사령, 지하당원 조헌이 등 다양한 인물들의 형상으로 이 땅의 항일투쟁사의 한 페이지를 담아내었습니다.   그러면 작품의 제 2장 5절에서 한 단락 감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 M ―   으스름한 쪼각달이 등을 꾸부리고 절듯말듯 산마루에 기여드는 밤 왜놈의 군화소리 잠든 밤 내 고항 버들골은 하나같이 일떠났다   영란이도 한임, 슈란이도 한 임 조헌이도 한짐, 나도 한짐 벌통집 맏형도 배나무집 둘째도 마감집 키큰이도 언덕집 황소도 가시밭을 헤치며 마을은 간다   미시가루 닦아서 감자를 파서 옷가지를 거두어 약뿌리를 꾸둥겨 은하수 흘러간 안개골치기로 하늘의 북극성을 길잡이로 간다   세상꽃이 해빛 따르듯 우리는 별빛을 따랐다 별빛, 붉고붉은 빛이 신념의 싹을 틔워준다 자유의 날개를 키워준다   ― M ―   G : 억압받던 우리 민족 그리고 한족인민들이 드디어 일떠났습니다. 일제침략자에 항거하는 첫 걸음을 내디딘 것이지요.   M : 녀자들은 머리에 이고 남자들은 등에 지고   G : 항일유격대를 찾아 떠나는 장면이지요.   M : 그렇지요.   G : 장편서사시 《장백산아 이야기하라》는 이와 같이 방대한 구상에 기초한 형상적인 화폭을 펼쳐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30년대 장백산지구 항일무장투쟁을 중심으로 복잡한 사회상황을 폭 넓게 반영하고 있으며 일제침략자들과 인민대중의 모순을 다루고 있으며 또한 항일무장력량의 장대와 항일투사들의 성장과정을 거시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장백산항일근거지의 항일무장투쟁을 보여줌에 있어서 작품은 장백의 항일무장투쟁을 국제적인 반파쑈투쟁과 련계시키면서 중국의 전반 항일전쟁의 한 부분으로 전형화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작품의 서사적화폭의 광도와 심도를 담보하였으며 이 작품은 서사적 사건이 웅건하고 인물형상체계가 방대하고 인민대중들의 집단적 형상이 성공적으로 부각된 것으로 특징됩니다.   그럼 이번에는 이 장편서사시의 고조를 이루는 폐문골싸움에 대한 묘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M ―   쏘아라! 열방이면 열놈을 조금도 심장을 어기지 말고 직통, 직통을 쏘아갈겨라!   밭이랑에 멍에 끌다 쓰러진 할아버지의 이름으로 쏘아라! 불에 탄 형님의 이름으로! 칼에 찔린 동생의 이름으로!   쏘아라, 동지의 피를 잊지 말고 쏘아라, 얼어굳은 아낙네를 잊지 말고 쏘아라! 불에 탄 마을을 잊지 말고 쏘아라! 짓밟힌 권리를 잊지 말고   지층이 얿어 근심이냐 콩을 볶아라 경위중대 하늘이 좁아 근심이냐 무리떼로 잡아라 기관총부대여   ― M ―   M : 네, 어쩜 총탄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장면이 그대로 안겨오네요.   G : 서사시속에 묘사된 폐문골싸움은 아마 우리 항일투쟁사에서 중요한 전투로 알려진 청산리전투를 배경으로 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장편 서사시 《장백산아, 이야기하라》는 다양한 화폭, 인민들의 생활장면 그리고 가렬처절한 전투의 장면 등등 묘사로 항일투쟁을 승리에로 이끈 우리 당과 우리인민의 위대한 업적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 한 단락을 감상하면서 장편 서사시 《장백산아, 이야기하라》에서 묘사된 격정의 시대를 시인과 함께 다시 한번 되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M ―   밀림은 설레인다 청송이도 영란이도 품에 안았다 밀림은 설레인다 승리의 나팔소리 하모니카소리 울린다   창창한 밀림우에 수리게 비잉- 장백산마루에 소나무 청-청 저기 대오의 앞에 양사령동지 환한 웃음을 지으시고 성큼성큼 오신다   태공에 높이 솟은 장백산 머리에 흰 수건 동이고 번뜩이는 칼을 집고 우뚝서서 검은 하늘을 쳐다본다   봉우리, 봉우리마다에 중조민족은 어깨겯고 항쟁의 칼을 갈고있다 결전의 탄알을 재우고 있다   우레우는 산마루 번개치는 숲속 이 나라 인민은 조국의 하늘에 연안의 해를 얹으련다   피에 젖은 검은 하늘을 가르며 동터올 새벽을 맞아 장백산은 머리들고 일어서고 용사들은 노래높이 나아간다   ― M ―   G : “장백산은 머리들고 일어서고 / 용사들은 노래높이 나아간다.” 참, 오랜만에 우리 김계월아나운서의 격정에 넘치는 그런 흐름의 시랑송을 들어보았습니다.   M : 예, 그렇네요. 정말 이 시는 그런 흐름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G :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에 대하여 한 마디 덧붙인다면 이 작품은 시인이 1958년에 붓을 들어 1963년에 초고를 끝낸 뒤 1979년, 그러니깐 15년 뒤에야 비로소 해빛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연이 있었겠지요.   M : 예, 15년 동안 어떤 사연이 있었겠지요.   G : 바로 문화대혁명 동란기간이였지요. 이 기간 원고가 실종되었다가 다시 발견되어서 오늘에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참 다행스런 일이지요.   M : 정말 시련을 겪은 작품, 소중한 작품을 오늘 소개하여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G : 예, 감사합니다.   M : 라지오책방은 오늘 여기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 M ―
660    "틀에만 얽매이지 말고 틀을 벗어나 살라"... 댓글:  조회:2017  추천:0  2017-08-21
"구월이라/ 휘영청 푸른 하늘 아래/ 황금 국화 피였네/ 황금 국화에 솟아난/ 나의 고향/ 우리 연변!// 꽃송이에 때오르는/ 자색 노을은/ 지난 시절의 핏빛인가?// 꽃머리에 또오르는/ 꽃구름은/ 밝은 나날의 행운인가?// 고향 사람들/ 삼림으로 묶어져/ 당의 은덕 노래하거니// 황금 국화에 훤히 열린/ 연변의 하늘에/ 번영은 별무리처럼 빛나고// 황금 국화에 당실히 솟은/ 연변의 땅에/ 행복은 꽃떨기처럼 피여났네." 조선족 문단을 대표하는 시인 리욱이 1984년 2월 사망하기 직전에 쓴 '고향'의 전문이다. 조선족 시인 리욱 (해란강닷컴 제공)   탄생 110주년(2017년)을 맞는 리욱은 조선족 시문학의 주춧돌을 놓은 시인으로 불린다. 일제강점기 간도 문학을 대표했으며 해방 이후 중국 조선족 문학의 토대를 일구었다. 암담했던 시절, 인간과 자연, 생명을 노래했으며, 새로운 이상과 민족의 앞날을 제시했다.     그는 서정시와 서사시, 한시를 비롯해 소설, 수필, 문학 이론, 번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하게 집필 활동을 했다. 리욱은 1907년 7월 15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안촌(고려촌)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장원. 해방 전까지는 학성, 월촌, 단림, 산금, 월파 등의 필명을 사용하다가 해방 이후 리욱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1910년 길림성 화룡현 로과 호암툰으로 이주해 유년 시절을 보냈다. 만주 일대에서 저명한 한문학자인 조부와 부친의 영향으로 중국과 조선의 고전을 배우며 자라 어린 나이에 한문에 능통하고 한시를 잘 썼다고 한다. 중학교 2학년에 생활고로 학업을 중단하고 농사일에 매달렸다. 그러나 시 창작에 매진하여 1924년 17세 되던 해에 처음으로 서정시 '생명의 례물'을 간도일보에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 후 간도 지역의 진보적 신문 민성보의 기자로 일하다가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그만두고 야학에서 농민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1937년부터 1944년까지 조선일보 간도특파원으로 일하는 한편 신문, 잡지에 부지런히 시를 발표해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리욱은 시인 김조규와 함께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던 시인들의 작품을 모아 '재만조선시인집'을 간행하여 조선족 문단의 결집을 도모했다. 해방 이후 간도예문협회 문학부장, 동라문인동맹 시문학분과 책임자, 옌지중소한문회협회 문학국장, 문예지 ‘불꽃’의 편집 등을 맡아 조선족 문단을 새롭게 정비하고 조선족 문학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노력했다. 1947년 동북군정대학에 들어가 혁명이론을 학습하며 첫 시집 '북두성'을 출간했다. 졸업 후 잡지 '대중'의 주필 겸 옌볜도서관 관장을 맡았다. 1949년에는 두 번째 시집 '북륜의 서정'을 펴냈다. 그는 옌볜대학을 세우는 데 참여했고, 옌볜사범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1951년 말부터 옌볜대학 조문학과 교수를 지냈다. 베이징사범대학에서 소련문학과 마르크스주의 문예이론, 혁명적 사실주의 창작론을 공부하기도 했다. 리욱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시기 새로운 국가체제 안에서 조선족 문학의 발전을 모색했다. 1956년 조선족 작가로는 처음으로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해 중국작가협회 옌볜분회 이사로 활동했다. 그는 조선족 문학이 중국 문학의 일부로 인정받는 동시에 독자적인 문학을 구축할 수 있도록 중국 문학과의 교류에 힘썼다. 중국어로 된 작품을 창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6년부터 1976년 문화대혁명 시기에 '반동 문인,' '반동학술권위' 등으로 몰려 탄압을 받았다. 교수자격은 취소됐으며 창작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벽지 농촌으로 추방됐다. 문화대혁명의 혼란이 지나고 복권된 리욱은 다시 시 창작에 힘을 쏟아 1980년 73세의 나이로 '리욱 시선집'을 내놓았다. 리욱은 시집으로 '북두성'(1947), '북륙의 정서'(1949), '고향사람들'(1957), '장백산하'(1959), '연변의 노래'(한문. 1959), '리욱시선집'(1980) 등을 남겼고, 이론서 '현대소설의 구성'을 출판했다. 1982년 항일투사들의 영웅적 투쟁을 담은 장편서사시 '풍운기' 제1부를 펴냈고 이어 제2부를 쓰다가 1984년 2월 6일 77세를 일기로 뇌일혈로 사망했다. '풍운기' 제2부는 유고로 발표됐다. 시집 '고향사람들'은 조선족의 역사와 혁명적 전통을 소재로, 간도 개척 과정에서 발생했던 지주와의 투쟁, 만주사변 이후 장백산을 근거지로 벌였던 유격전, 항일 전쟁 이후 승리의 감격 등을 주 내용으로 하여 조선족들의 긍지와 자부심을 고취했다. 그의 시 세계는 자연물에 대한 순수한 서정에서부터 간도 조선인들이 처한 삶의 현실,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향한 열정, 역사적 항쟁과 혁명적 투지, 그리고 인생을 반추하는 명상적 내용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펼쳐져 있다. 그의 아들 리선호는 2015년 2월 9일 옌볜도서관에서 열린 '다시 읽는 우리 문학' 세미나에서 "아버지는 슬하에 10명의 자녀를 두었다. 어머니가 일자무식이였지만 항상 어머니를 존중해주셨다. 자식들이 책을 사고 싶어 할 때마다 기꺼이 사주셨다. 아버지와 함께 문학상을 받은 적 있다. 모두들 우리 집에 쌍봉황이 날아들어 온다고 기뻐해 주셨다. '너무 틀에만 얽매이지 말고 틀을 벗어나 사는 것도 좋다'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셨다"고 말했다. 리욱의 생애는 일제 치하와 중화인민공화국 정권수립, 문화대혁명 등 격변기에 시련을 겪으면서 이를 극복하고 오늘날 당당한 소수민족으로 정착한 200만 조선족의 삶과 역사를 보여 준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고국을 떠나 중국 땅에서 험난한 세월을 보낸 조선족의 피눈물 나는 이민사이며 개척사이다. '북간도'의 소설가 안수길해방 전 간도의 조선족 문단을 이끌었다. 소설가 김학철'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이자 조선족 문단의 거목   일제의 억압을 피해 북으로 북으로 떠나던 시절, 조선인이 가는 곳에 조선의 문학이 있었다. 이들은 각박한 현실에서도 조선족 문학의 꽃을 피웠다. 만주의 조선인 문학인들은 1933년 11월 '북향회'를 설립하여 동인지 '북향'을 중심으로 문단을 형성했으며 1940년대 들어서는 현지의 한글신문 만선일보를 중심으로 창작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태평양전쟁 시기 살벌한 검열과 용지난으로 책 한 권 발간이 어려웠던 본국과 달리 이들은 1940년 재만 작가집 '싹트는 대지,' 1942년 조선족 최초의 시선집 '만주시인집'과 '재만조선시인집' 등을 펴냈다. 1942년부터 해방까지 거의 유일하게 한국인이 한국어로 쓴 창작집인 안수길의 '북원'이 이곳에서 출간됐다. 조선족 문학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도 면면히 성장했다. 조선족 문단이 만들어진 지 100여 년이 흐르는 동안 한국의 문학, 북한의 문학과는 다른 조선족 문학이 형성됐다. 이들의 작품에서는 어려움 속에서도 좌초되지 않고 고난을 극복해 나가는 우리 민족의 역동성을 느낄 수 있다. 조선족 문학은 한민족 문학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것이 간도의 조선족 문학을 우리가 알아야 하는 이유이다. (김은주 /글로벌코리아센터 고문)
659    "한개 두개 세개" 동요동시야 나와 놀쟈... 댓글:  조회:2896  추천:0  2017-08-21
윤석중 동요동시선집 중에서 1.한 개 두 개 세 개   한  개, 한 개, 머이 한  개. 할아버지 쌈지 속에 부싯돌이 한 개.   두 개, 두 개, 머이 두 개. 갓난아기 웃을 때 앞니빨이 두 개.   세 개, 세 개, 머이 세 개. 아빠 화내실 때 주름살이 세 개.   2. 울기쟁이   "우리 아기 울기쟁이." "아냐." "우리 아기 울기쟁이." "아냐."   "우리 아기 울기쟁이." "으아...." "그래 그래 아니다." 뚝 그쳤지.   우리 아기 울기쟁이." "으아....." "그래 그래 아니다." 뚝 그쳤지.   3.걸음마   우리 아기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울 땐 맨드라미 빨강 비로 앞마당을 쓸어라.   4.얼마만큼 자랐나   밤새에 꽃나무가 얼마만큼 자랐나? 아기가 아장아장 꽃밭으로 가보네.   밤새에 병아리가 얼마만큼 자랐나 아기가 갸웃갸웃 닭의 어리 엿보네.   밤새에 우리 아기 얼마만큼 자랐나? 해님이 우리 마당 밝게 비춰 보시네.   5. 아기 옷   저고리 소매는 팔꿈치에 차고 바지는 바지는 무릎에 차고 배꼽이 내다보고 웃습니다.   "엄마 이건 내 옷 아냐." "아니다 네 옷이다." "자 봐 이런데."   "아니다. 너 작년에 입던 옷이다." 에걔....."   "아가 벗어서 동생이나 줘라."   6.아기는 큰다 큰다   아기는 큰다 큰다 기지개를 켤 때마다.   아기는 큰다 큰다 떼를 쓰고 울 때마다.   아기는 큰다 큰다 달음박질할 때마다.   아기는 큰다 큰다 집집마다 동네마다.   7. 먼 길1   아기가 잠드는 걸 보고 가려고 아빠는 머리맡에 앉아 계시고 아빠가 가시는 걸 보고 자려고 아기는 말똥말똥 잠을 안자고.   윤석중 동요선집/창비       윤석중이 발견한 유년의 아이 모습입니다. 알려지지 않은 윤석중의 생애와 아픈 가족사를 알고 나서 보니 자신의 어린시절을 함께 해주지 못하고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의 측은한 어린시절에 대한 보상이 아니였을까 이해되는 측면도 있습니다. 일찍이 민족해방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띄고 있는 사회주의 운동단체에서 활동을 하셨던 바쁜 아버지와 첫째부인 사이에서 난 여덟 자녀가운데  일곱째 누이와 막내로 태어난 윤석중만 살아남았는데. 윤석중의 나이 3살이였던 1913년 어머니를 병으로 잃고  누이마저 1920년에 병으로 죽어 외가에 맡겨졌다고 합니다. 재혼한 아버지는 따로 나가 사셨고 가끔 찾아뵌 아버지집은 남의 집처럼 서먹서먹한 느낌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럼에도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아버지에게 품었을 존경어린 마음과 흠모했을 거라는 짐작은  작가가 발표한 여러시 속에서 엿볼수 있다고 하네요.   그래서 그런지 관찰자시점에서 표현된 아이의 모습은 어디선가 곁에서 사랑을 담아 지켜보고 있을 엄마의 마음이 유독 잘 드러나 보이는 느낌이에요. 일찍 엄마를 잃은 아이의 그 헛헛함을 이렇게 많은 아기의 모습에 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아이의 모습을 저렇게 새심하게 동시로 표현할 수 있었던 마음과 윤석중이 표방한 명랑성이라는 부분에서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부분은 조심스럽게 이야기되면 좋겠습니다.   이야기를 충분히 담고 있는 여러편의 동시가 따뜻한 봄 날의 분위기와 잘 어울립니다.    윤석중 동시 모음   달따러 가자/ 윤석중   얘들아! 나오너라 달따러가자. 장대들고 망태매고 뒷동산으로  뒷동산 올라가 무등을 타고 장대로 달을 따서 망태에 담자. 저 건너 순이네는 불을 못켜서 밤이면은 바느질도 못한다더라 얘들아 나오너라 달을 따다가 순이 엄마 방에다 달아드리자     먼길 아기가 잠드는 걸 보고 가려고 아빠는 머리맡에  앉아 계시고, 아빠가 가시는 걸 보고 자려고 아기는 말똥말똥 잠을 안 자고    흙 손 흙 묻힌 손 뒤에 감추고 오다가 영감님을 만났네. "어른 앞에 뒷짐을 지다니, 허, 그놈 버릇 없군." 흙 묻힌 손 뒤에 감추고 오다가 뒷집 애를 만났네. "얘 먹을 거냐? 나 좀 다우." 흙 묻힌 손  뒤에 감추고 오다가 삽살이를 만났네. "뒤에 든 게 돌멩이지? 달아나자 달아나."    환합니다 방안이 방안이 환합니다. 하얗게 도배를 했어요. 마당이 마당이 환합니다. 활짝 꽃들이 폈어요. 울 아기 얼굴이 환합니다. 두 번이나 세수를 했어요.       한 개 두 개 세 개 한 개, 한 개, 머이 한 개. 할아버지 쌈지 속에 부싯돌이 한 개.  두 개, 두 개, 머이 두 개. 갓난 아기 웃을 때 앞니빨이 두 개. 세 개, 세 개, 머이 세 개. 아빠 화내실 때 주름살이 세 개.   연못 속 연못 속으로 사람이 거꾸로 걸어간다. 소가 거꾸로 따라간다. 나무가 거꾸로 쳐다본다. 연못 속에는 새들이 고기처럼 헤엄쳐 다닌다. 구름이 방석처럼 깔려 있다. 해님이 모닥불 처럼 피어 오른다. (초등학교 3학년 교과서에 실린 작품)      얼마만큼 자랐나 밤 새에 꽃나무가 얼마만큼 자랐나, 아기가 아장아장 꽃밭으로 가보네. 밤 새에 병아리가 얼마만큼 자랐나, 아기가 갸웃갸웃 닭의 어리 엿보네. 밤 새에 우리 아기 얼마만큼 자랐나, 해님이 우리 마당 밝게 비춰 보시네.     약력 호는 석동(石童)으로 1911년 5월 25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양정 고보를 거쳐 1941년에는 일본 조치대학을 졸업하고, 13세 때인 1924년에는 어린이 잡지 《신소년》에 동요 「봄」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1932년에는 첫 동시집   윤석중은 13세 때 동요 「봄」을 발표하면서 아동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2003년, 생을 마치기 전까지 1200여 편의 동시, 동요를 발표하였고, 그 중 800여 편이 동요로 만들어졌다.   3·1문화상(1961), 문화훈장 국민상(1966), 외솔상(1973), 막사이사이상(1978), 대한민국문학상(1982), 세종문화상(1983), 대한민국예술원상(1989), 인촌상(1992)을 받았고 2003년에는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어 꾸준히 문학적 업적을 인정받았다. 달 따러 가자 : 윤석중 동시집  이 책은「퐁당퐁당」,「기찻길 옆」,「우산」,「맴맴」 등 오랜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은 동요와 우리말의 리듬감과 아름다운 말의 멋을 잘 표현한 동시를 중심으로 총 56편을 골려 엮었다. 일제 강점기의 힘든 상황 속에서도 어린이에게 희망을 주고, 용기와 상상력을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했던 윤석중은 아이들에게 더욱더 소중한 친구로 다가서는 동시를 지었다. 또 1900년대 우리나라 사람들이 살아온 모습, 생활 관습과 풍속이 싱싱하게 담겨 있어 오히려 오늘을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또 다른 신선함을 준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들은 시대를 담고 있지만 시류를 타고 있지 않아 삶의 본질, 시대를 뛰어 넘은 동심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쉬운 말로 씌어 곱씹어 읽을수록 흥이 나고 가슴이 따뜻한 시들이 윤석중의 시이다. 또 이 시들은 흥과 아름다움을 넘어서 생각하는 힘과 상상력, 어려운 낱말도 쉽게 익히는 학습력, 삶에 대한 지혜까지 녹아들어 있다.   맑고 따뜻한 그림으로 보는 동시 딸아이와 함께 늘 대화하며 그림책 작업을 하는 민정영 씨의 맑고 가벼우면서 귀여운 그림이 시와 잘 어우러진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묻어 나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식물들이 등장한다. 또 엄마와 아빠, 친구들 간에 일어나는 일들을 그림으로 잔잔하게 잘 풀어 더욱 정겹다. 연필 선이 비치는 맑은 수채화는 빨강, 노랑, 파랑, 초록 등 안정감 있고 밝은 색으로 채색되어 시처럼 따뜻한 느낌을 준다.    + 어린이날 노래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우리가 자라면 나라에 일꾼  손잡고 나가자 서로 정답게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윤석중·아동문학가, 1911-2003) + 오늘은 어린이날  어린이들만큼   푸른 하늘과  고운 웃음이 어디에 있으랴  변해 가는 것들 속에서  변하지 않는  아이들의 해맑은 순수  온 누리 가득한  일체의 평화로움이 어디에 있으랴  아이들은 어른의 스승이요  나와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인생  문득 뒤얽힌 날들 속에  그 옛날  어린 시절의 마음으로 돌아가 바라보면  다시 환한 또 하나의 행복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어린 날들만큼  꿈 많은 봄 같은 계절이 어디에 있으랴  그 사랑스런 눈빛  아름다움이 또한 어디에 있으랴  (나명욱·시인, 1958-) + 다르게 크는 어린이  코가 큰 어린이는 코가 커서 귀엽고 눈이 작은 어린이는 눈이 작아서 귀엽다. 이 빠진 어린이는 이가 빠져서 예쁘고 왼쪽 오른쪽 신을 바꿔 신는 어린이는 신기해서 예쁘다. 서로 다르게 커나가는 어린이 누가 누가 잘하나? 기죽이지 말고 모두 모두 잘 하자. 용기를 주어 밝게 곧게 무럭무럭 자라게 하자.  (송근영·아동문학가) + 겨울 어린이 세수를 한다.  추운 아침에  뽀드득  뽀드득  얼굴을 씻는다.  뽀드득  뽀드득  얼굴을 씻으면  마음에도  뽀드득  뽀드득  소리가 난다.  얼음아 얼어라  찬바람아 불어라  추울수록 굳세지는  겨울 어린이  얼음아 얼어라  찬바람아 불어라  추울수록 늠름하게  자라는 어린이  해님도  뽀드득  뽀드득  얼굴을 씻고  세상을 환하게  비쳐 주신다.  (박목월·시인, 1916-1978) + 아무 것도 모르면서    아무 것도 모르면서  땅바닥에 주저앉아  발부비며 우는 철부지  어린아이이고 싶다.  사람의 냄새와  사람의 껍질을 벗고서도  또 사람이고 싶다.  작은 바람에도 살아 쓸리는 여린 풀잎,  미세한 슬픔에도 상처받아 우는 작은 별빛,  드디어 나는 나만 아는  차고 맑고 그윽한 향기를 머금고 싶다.  (나태주·시인, 1945-) + 5월의 편지 해 아래 눈부신 5월의 나무들처럼  오늘도 키가 크고 마음이 크는 푸른 아이들아  이름을 부르는 순간부터  우리 마음밭에 희망의 씨를 뿌리며  환히 웃어 주는 내일의 푸른 시인들아  너희가 기쁠 때엔 우리도 기쁘고  너희가 슬플 때엔 우리도 슬프단다  너희가 꿈을 꿀 땐 우리도 꿈을 꾸고  너희가 방황할 땐 우리도 길을 잃는단다  가끔은 세상이 원망스럽고 어른들이 미울 때라도  너희는 결코 어둠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지 말고  밝고, 지혜롭고, 꿋꿋하게 일어서 다오  어리지만 든든한 우리의 길잡이가 되어 다오  한 번뿐인 삶, 한 번뿐인 젊음을 열심히 뛰자  아직 조금 시간이 있는 동안  우리는 서로의 마음에 하늘빛 창을 달자  너희를 사랑하는 우리 마음에도  더 깊게, 더 푸르게 5월의 풀물이 드는 거  너희는 알고 있니?  정말 사랑해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어린이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보배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셔서  상으로 보내어 행복의 웃음꽃  피우게 하는 신비로운 보배  이 세상의 희망  우리나라의 희망  우리 교회의 희망  우리 마을의 희망  우리 집의 희망  알아줘야 하고  믿어줘야 하고  기대를 걸어줘야 하고  기다려줘야 하고  돌봐주고  사랑해줘야지  아, 예뻐라   (임종호·시인, 1935-)     + 어린이날  해마다 어린이날이면 비가 내립니다.  여러분의 행렬에 먼지 일지 말라고  실비 내려 보슬보슬 길바닥을 축여줍니다.  비바람 속에서 자라난 이 땅의 자손들이라,  일년의 한 번 나들이에도 깃이 젖습니다그려.  여러분은 어머님께서 새 옷감을 매만지실 때  물을 뿜어 주름살 펴는 것을 보셨겠지요?  그것처럼 몇 번만 더 빗발이 뿌리고 지나만 가면  이 강산의 주름살도 비단같이 펴진답니다.  시들은 풀잎만 얼크러진 벌판에도 봄이 오며는  하늘로 뻗어 오르는 파란 싹을 보셨겠지요?  당신네 팔다리에도 그 싹처럼 물이 올라서  지둥 치듯 비바람이 불어도 쓰러지지 말라고 비가 옵니다  높이 든 깃발이 그 비에 젖습니다.  (심훈·시인이며 소설가, 1901-1936)  + 복사꽃과 제비 - 어린이날을 위하여 불행한 나라의 하늘과 들에 핀 작은 별들에게  복사꽃과 제비와 어린이날이 찾아왔구나.  어린 것 껴안고 뜨거운 눈물로 뺨을 부비노니  너희들 키워줄 새 나라 언제 세워지느냐.  낮이면 꽃 그늘에 벌떼와 함께 돌아다니고  밤이면 박수치는 파도 우로 은빛 마차 휘몰아가고  거칠은 바람 속에 다만 고이 자라라  온 겨레의 등에 진실한 땀이 흐르는 날  너 가는 길에 새로운 장미 피어나리니  황량한 산과 들 너머  장미여 삼천리에 춤을 늘여라.  불행한 나라의 하늘과 들에 핀 작은 별들에게  복사꽃과 제비와 어린이날이 돌아왔구나.  (김광균·시인, 1914-1993) + 어린이 날       노란 풍선을 띄우는 어린이가 있다  그 풍선 위로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바다 건너 멀리 간 아빠의 얼굴  집을 나가 오지 않는 엄마의 얼굴  그 얼굴과 얼굴 사이 사이로  노란 눈물 바람이 분다 (구순자·시인) + 어린이 놀이터 어린이 놀이터에 개나리꽃이 진하게 피었다  동네 아이들은 모두 학교 가고 없고  아이들이 금그어놓고 놀다 간  사방치기 그림만 땅 위에 덩그러니 남아 있다  그 앞에 서서 폴폴짝 뛰어 건넜다  개나리꽃이 머리를 흔들며  깔깔대고 웃다가 꽃잎 몇 개를 놓친다  햇살이 위 꽃잎에서 아래 꽃잎 더미 위로  주르르 미끄러져 내린다  여기서 오 분만 걸어가면  쫓겨난 학교가 있다  이 봄이 지나면 못 돌아간 지 꼭 여덟 해가 된다  걸어서 오 분이면 가는 학교를  (도종환·시인, 1954-) + 어린이에게 평화를!  아프가니스탄의  어두운 하늘아래  포탄은 비 오듯 쏟아지고  아기를 업은 어머니가  길가에 쓰러져있다.  파키스탄의  메마른 땅위에도  총탄은 콩 튀듯 하고  들꽃을 손에 쥔 어린 소녀가  피를 흘린 채 죽어있다.  아이들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게 하고  아이들이  보아서는 안 되는 걸 보게 하고  아이들에게서  꿈과 희망  순수를 빼앗아간 전쟁!  정부군과 반군이 손에 손을 잡고  화해를 해달라고  호소하는 어린이들에게  어른들이 한없이 부끄럽구나.  우주선에서 지구를 바라보면  하나의 아름다운 푸른 별인데  사람들은 왜 땅위에 선을 긋고  총부리를 겨누어야 하는가  주님은 어디로 가고  알라신은 어디로 가고  부처님은 어디로 가고 없는가  인간이 인간의 가슴에  총을 쏘는 일을 언제까지  바라만 보고 있을 것인가  (유응교·건축가 시인) + 대한민국 어린이 헌장 어린이는 나라와 겨레의 앞날을 이어나갈 새 사람이므로 그들의 몸과 마음을 귀히 여겨 옳고 아름답고 씩씩하게 자라도록 힘써야 한다.  1. 어린이는 인간으로서 존중하여야 하며 사회의 한 사람으로서 올바르게 키워야 한다.  2. 어린이는 튼튼하게 낳아 가정과 사회에서 참된 애정으로 교육하여야 한다.  3. 어린이에게는 마음껏 놀고 공부할 수 있는 시설과 환경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4. 어린이는 공부나 일이 몸과 마음에 짐이 되지 않아야 한다.  5. 어린이는 위험한 때에 맨 먼저 구출하여야 한다.  6. 어린이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악용의 대상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7. 굶주린 어린이는 먹여야 하며, 병든 어린이는 치료해 주어야 하고, 신체와 정신에 결함이 있는 어린이는 도와주어야 한다.  8. 어린이는 자연과 예술을 사랑하고 과학을 탐구하여 도의를 존중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9. 어린이는 좋은 국민으로서 인류의 자유와 평화와 문화 발전에 공헌할 수 있도록 키워야 한다.           
658    시인은 전자아(全自我)를 대변할수 있는 화자를 발견해야... 댓글:  조회:1998  추천:0  2017-08-21
□당신은 현대시에 주로 채택되는 화자가 어떤 유형이며, 이들의 문제점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논의한 화자의 유형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건 제가 정리해 드릴 테니 답변을 준비해 두세요.  시인과 관계에 따른 유형 :   신분에 따른 유형 : , , ,   담화의 담당 층위에 따른 유형 :   정서 상태에 따른 유형 :   글쎄요, 잘 모르시겠다구요? 화자의 변천사(變遷史)를 살펴보면, 시인과 화자 관계의 경우 인 에서 출발하여 인 쪽으로 이동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바뀐 것은 문학 작품을 자아의 표현으로 보던 고전적 관점이 오락성이나 미적 탐구 쪽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신분을 살펴보면 으로, 성은 으로 이동해 왔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작품 속의 주인공들이 쪽으로 하강해 왔다는 프라이(N. Frye)의 지적이나, 고대로 올라갈수록 남성 시인이 여성화자를 택하여 노래하는 작품이 드문 반면에 현대시로 내려올수록 여성화자를 빌어 노래하는 작품이 늘어가는 점을 미루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하강 현상은 모든 장르에 나타나는 것으로서, 사실감(reality)을 강화시키기 위한 노력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에 따른 이동 방향은 리얼리즘의 강화라는 이유로는 설명이 부족합니다. 남성이 이성적이고 여성이 감성적이라고 할 때, 리얼리즘은 이성주의를 배경으로 탄생되는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일부에서는 현대시의 여성화 경향을 한국 문학에는 여성화의 전통이 있었고, 그것이 현대에 재현되고 있다든가, 일제(日帝)의 강압적인 파시즘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소극적 여성주의(女性主義)를 택한 것이 체질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비단 우리 문학에만 나타나는 게 아닙니다. 세계 각국의 시들이 대체적으로 여성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다 보편적인 현상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경제의 발달에 원인을 찾는 게 보다 타당할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기초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 재화(財貨)를 소비하던 것이 자기의 사회적 신분을 표시한 로 바뀌고, 그로 인해 실용성(實用性)이나 기능성(機能性)보다 장식성(裝飾性)과 세공성(細工性)을 중시하는 문화가 형성되면서 남성적 특질인 사상과 교훈보다 정서와 섬세함을 강조하는 여성 화자 중심의 작품이 증가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편 화자의 분열 방향은 아이러니를 중시하는 낭만주의 시대부터 로, 초현실주의 시가 등장한 뒤부터 와 쪽으로 이동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적 인물의 이동 방향은 전인성(全人性)을 상실하고 비인간화(非人間化) 내지 해체화(解體化) 쪽으로 진행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이동의 원인은 더 이상 진로가 막힌 리얼리즘 문학이 심리학의 도움을 받아 의식의 밑바닥에 숨겨진 인간상을 등장시키는 방법으로 돌파구를 찾으려 한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하여 문학사 속에서 독자적 위치를 확보하려는 작가들에 의해 가속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해체 작업은 바람직한 방향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문학작품이 사회보다 앞서 인간성을 해체하는 것은 문학의 본래 목적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독자와 작가의 관계를 파괴하고, 자아와 사회의 해체를 촉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미 변해버린 독자의 감수성을 무시하고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현대 시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전자아(全自我)를 대변할 수 있는, 그러니까 의식과 무의식, 이성과 감성, 도덕과 욕망 등을 모두 대변할 수 있는 화자를 발견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657    "그 바보들 틈에서 노는것이 마냥 즐겁기만하다"... 댓글:  조회:2179  추천:0  2017-08-20
  + 큰 바보  슬픈 일에도 해죽거리며 웃고  기쁜 일에는 턱없이 무심한 사람  그 곁을 애써 피해 가지만  걸어가야 할  먼 길  바보가 되어 가는 길 (나호열·시인, 1953-) + 바보들  동네 골목길  담벼락에 쓰인  커다란 낙서  "바보"  어릴 적  바보가  아주 큰 욕인 줄 알았다  어른이 되어서야  바보가 욕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바보"는 "순수"의  이음동의어  모든 것이 돈으로  저울질되는 오늘날  돈도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들  "바보"  그 바보들 틈에서  노는 것이  마냥 즐겁다. (이문조·시인) + 나는 바보     욕하면  그 욕을 먹을지언정  따라서 욕하지 못한다  때리면  그 매를 맞을지언정  맞서서 때리지 못한다  버리면  버림을 받을지언정  스스로 버리지 못한다  (오정방·재미 시인, 1941-) + 바보  소유에 욕심이 없고  손에 쥔 것으로 만족하며  홀로 있어도 외로움을 모르고  이웃의 미움도 받아들이고  위험에도 두려움을 모르며  가난할지라도 불평하지 않고  잘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않는  고민일랑 웃어넘기고  자존심은 땅에 묻어놓고  높은 사람 앞에서도  굽실거리지 않으며  자신의 처지를 불평하지 않고  남들을 괴롭히지 않으며  한평생 원수를 맺지 않고  하루를 살아도 감사하는 사람  바보라고 놀려도 웃기만 하고  싫어해도 등 돌리지 않으며  내일에 대하여 근심이 없는  이런 바보가 되고 싶다.  (박인걸·목사 시인) + 바보의 노래  작은 몸 하나로  겨울을 버티고 있어야 하는 자야  눈물을 가슴으로 훔치며  살아 있어 산다하는  마음은 구천같이 떠도는  가슴 아픈 자야  등에는 한 보따리 슬픔이던가  가슴에는 하나 가득 아픔이던가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허리엔 쓰디쓴 미련을 차고  밤마다 종이 펴고 그림 그리는  네가 있어 행복했던 꿈을 그리는  네가 있어 아름다운 추억 그리는  바보 같은 자야  이제 길을 떠나자  비오면 오는 대로  바람불면 부는 대로  그래도 슬프면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며 가자  외로운 산길이면  울면서 가자  산너머  그리운 마을  찾아서 가자 (김진학·시인, 경북 영천 출생) + 바보처럼 살라 하네 밤새 숨었다가  아침에 얼굴 내민 해가  웃으라 한다 시린 등 쓰다듬으며  괴롭거나 슬프더라도  웃으라 한다 그날이  그날인데 하루를 지나며 만물을 살피고  구석구석 밝혀 주며 웃으라 한다  세상이 야속타 용광로가 끓어도  서러워 말라 다독이며 날 보고 날 보고 웃으라 한다 (하영순·시인)  + 바보가 바보에게 우린 돈을 잘 모르고 세상 지위에도 관심이 없고 좋은 음식 좋은 옷  그런 것에도 관심이 없지요 특히 교만이나 아집 시기나 분노 이러한 것도  자존이나 탐욕이 별로 없으니 남의 나라 얘기 같지요 그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창을 열고 새소리를 듣지요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터로 가지요 길가는 이웃에게 "어머 오늘은 얼굴이 밝아 보여요! 무슨 좋으신 일이라도!" 반갑게 인사하고 님이 보내준 커피 한 잔 아침햇살을 받으며 가볍게 몸을 데우지요     우린 늘 누구에게나 손해를 보며 살지요 그래도 히죽 웃는 마음은  아파하기보다는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데 뭘!" 이런답니다. 그래도 한세상 살아가는 데는  이 마음 버리고 싶지 않아요 내게 주어진 것 모두 없어져도 전혀 불편하지 않아요 나를 닮은 바보가 있잖아요 그 바보가 나를 사랑하는 한 나는 평생 이 바보의 길을 갈 거예요 설령 그 바보가 계산물이 들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이 길을 갈 거예요 세상사람 전부가 날개를 달고 하늘로 훨훨 날아다녀도 나는 내 마음의 정원에 꽃을 심고 바다향기를 내 발등에 뿌리며 그냥 황톳빛 이 길을 갈 거예요 별로 날고 쉽지가 않거든요 바보는 머리가 나빠서 피곤한 일은 싫어하거든요 계산이 복잡하면 아주 싫어요 그냥 바보로 살다 죽고 싶어요. 당신도 잘 아시잖아요?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그것 어디다 쓰죠? 내게도 아주 작은 것이지만  그런 순수에의 고집은 있답니다. 호호호호! 그대도 내 손을 꽉 잡고 바보걸음을 걸어봐요 세상물결 위를 느릿느릿 웃으며 걸어봐요 마음이 무거우면 세상 물결 속으로 가라앉는답니다 그러니 가볍게 걸어봐요 내 손을 더욱 꽉 잡고!  (유국진·시인, 경북 영덕 출생) + 바보야! 그게 사랑이야       바보야!  넌 정말 바보구나  그게 바로 사랑이야  네가 어미 젖꼭지를 깨물어도  네가 어미 얼굴을 꼬집어도  네가 어미에게 칭얼거리며 떼써도  물끄러미 바라다보며 미소 짓는 마음  그게 바로 사랑이야  바보야!  차라리 바보가 되렴  그게 바로 사랑받는 비결이야  모자라는 널 감싸주고 싶고  부족한 널 도와주고 싶고  텅 빈 가슴을 채워주고 싶고  널 보면 뭔가를 해 주고 싶은 마음  그게 바로 사랑이야  바보야!  차라리 순수한 바보가 되렴  그게 바로 주고받는 사랑의 비결이야  어눌하지만 진실한 말을 하고  돌아가지만 온유한 생각을 하고  더딘 것 같지만 순리에 순종하는  너에겐 내 사랑 다 주어도 아깝지 않는 마음  그게 바로 사랑이야 (함영숙·시인, 하와이 거주) + 바보 같은 인생  내 몸이 썩어간다 신장이 썩고 위장이 썩고 항문이 썩는다 머리가 썩고 입이 썩는다 말초 신경들은 20년이 넘은 당뇨로  버티다 버티다 급기야 전의를 상실했고 위벽은 술과 담배로 거울처럼 금이 가고 항문은  먹는 것마다 활화산 용암으로 용해된 고름으로 촉촉이 썩어가는 두엄자리다 두피에서는 부스럼 딱지들로 벽이 헐고 입안은 뿌리 없이 부서진 이들로 늘 사막처럼 서걱거린다 아내는 게으른 탓이라고 한다  어머니는 담배와 술을 끊지 못해서라고 말한다 나는 내 몸의 어디부터 방어벽을 세워야할지 모른다 제 몸 하나 간수도 못하고 그 날 그 날이 좋아 산다 아내는 오래도록 함께 하지 못할까봐 내심 걱정이고 어머니는 살아생전 자식을 앞세울까봐 그게 두려워 하루가 멀다하고 전화를 하신다 그래도 난 바보처럼  술이 좋고 담배가 좋고 빨라야될 이유가 없는 적당한 게으름이 좋다  (조찬용·시인, 1953-) + 바보 촛불은 어둠을 밝히려  제 몸을 태우고 광대는 남을 웃기려 바보가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좋아하기에 우스개 소리를 하고 다른 사람이 덜 힘들게 하기 위해 내 몸을 아끼지 않는 나는 바보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쁨을 주고 웃음을 주는 나에게 바보라고 하는 소리는 나를 슬프게 합니다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을 만큼 밉고 나를 절망 속에 빠뜨립니다 날 사랑하는 이는 어디 있나요 바보이기에 사랑하기 더 어렵던가요 사랑한다는 말을 할 용기조차 없기에 뜨거운 가슴 졸이며 기다리는 나는 바보라고만 하던가요 오늘도 밤이 깊어 갑니다 내 사랑하는 이는 외로운 나에게 전화 하나 없이 깊은 밤을 망각 속에서 보내는가 봅니다 아 슬픈 바보의 노래는 촛불처럼 깜빡이는 전등불 밑에서 눈물에 젖어 휘돌아만 갑니다 (최범영·시인, 1958-) + 사람들은 모두 바보입니다     마음으로 다 할 수 없는  말을 풀어서 글을 만듭니다  가까워도 닿을 수 없는  하늘을 향하여  두 손을 모읍니다  세월이 꽃피는 계절에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지금도  마음만 간절할 뿐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바보입니다.  (정영자·시인이며 문학평론가, 1941-) + 시인은 바보인가 봐  시인은 타인들의 사랑의 아픔과  이별의 슬픔까지도  위로를 해 주고  마음을 달래주며  눈물까지 닦아주면서도  오직  자신의 아픔과 슬픔은  달랠 줄 모르고  가슴속에 두고두고  혼자서  울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바보인가 봐  (손채주·시인) + 바보 詩人  제 살 베어  제 뼈 깎아  詩를 쓰고  제 돈으로 책을 찍어  친절하게도  우표까지 붙여  보내주는 바보  경제라고는 모르는 바보  물질 만능  자본주의 시대에  경제원리도 모르는 바보  그 바보가  바로 詩人이라네. (이문조·시인) + 바보야 바보야    바보야 바보야 프로야구 텔레비전 중계나 보면서 고스톱 화투짝이나 만지면서 모두모두 잊어버려 이 바보야 거꾸로 치솟아오르는 피, 까짓거 모두모두 비워내는 게야 날마다 무너지고 깨어지는 세상 까짓거 눈감고 비켜가는 게야 당당함이라든가 위험한 적의敵意 따위는 모두 지워 버리는 게야 짖지 않고 또 짖지 않은 채 꼬리를 감추고 살아가는 게야 포장술집의 소주잔을 잔째로 기울이며 무너진 황성 옛터를 찾아가는 게야 아아, 바보야 바보야 오늘밤 누가 와서 나의 비애를 돌로 쳐 다오 (김종해·시인, 1941-) + 바보사막  오늘 사막이라는 머나먼 여행길에 오르는 것이니  출발하기에 앞서  사막은 가도 가도 사막이라는 것  해 별 낙타 이런 순서로 줄지어 가되  이 행렬이 조금의 흐트러짐이 있어도  또 자리가 뒤바뀌어도 안 된다는 것  아 그리고 그러고는 난생 처음 낙타를 타 본다는 것  허리엔 가죽수통을 찬다는 것  달무리 같은 크고 둥근 터번을 쓰고 간다는 것  그리고 사막 한가운데에 이르러서  단검을 높이 쳐들어  낙타를 죽이고는  굳기름을 꺼내 먹는다는 것이다  오, 모래 위의 향연이여. (신현정·시인, 1948-2009)  
656    시를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할수 있는 시가 재미있는 시?!... 댓글:  조회:2102  추천:0  2017-08-20
자아, 이번 문제는 좀 까다운 질문을 해볼까요? 준비하시고, 받아보세요. 쾅!  □당신이 채택한 화자는 언제나 명백하고 단정하게 말합니까, 아니면 때때로 흐트러지는 수도 있습니까?  그야 명백하고 군더더기 없이 써야 되는 게 아니냐구요? 땡, 땡, 땡. 또 틀렸습니다. 그럼 달리 여쭤보겠습니다. 어린애가 유리창을 깨뜨렸다고 합시다. 그래서 '누가 깨뜨렸어?'하고 고함치자,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큰 소리로 '제가 깨뜨렸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기막히겠지요? 또 정말로 좋아하는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한다고 합시다. 논리 정연하게, 그리고 청산유수격으로 이야기하면 오히려 거짓말처럼 들리겠지요?  말은 아무 때나 명백하게 하는 게 아닙니다. 때로는 군더더기가 있고, 더듬는 게 더 진실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시 속의 화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앰프슨(W. Empson)의 '다의성(ambiguity)의 이론'에 의해 비로소 논리화된 것이긴 하지만, 이렇게도 해석되고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는 작품이 우수한 작품이고, 서정 장르는 장르 자체가 그런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시의 기본 어법인 비유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녀는 아름답다'라는 말을 '꽃'이나 다른 것으로 치환(置換)하여 얼른 알아듣지 못하게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왜 사람을 식물의 기관인 꽃으로 비유했는가를 생각하고, 여자의 아름다움, 연약함,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생식성(生殖性) 등을 떠올릴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여자가 아름답다고 아무리 직접 이야기한들 독자는 예사로 들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동화(automatic)'되어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비유를 통해 낯설게 하기(defamilarization)를 시도하는 것입니다.  우선 명백히 말하지 않아야 할 경우는 두 가지를 상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화자가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감성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청자가 화자보다 상위라서 직설적으로 말하면 역효과가 나타나리라는 판단에서 속셈을 감추는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이럴 이 경우 화자가 겉으로 말하는 와 로 분열됩니다. 그리고, 역설(pardox)나 반어(irony)의 어법을 채택합니다.  앞에서 인용한 [진달래꽃]의 경우만 해도 그렇습니다. 보내고 싶어 보낸다는 게 아닙니다. 떠나려는 님은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라고 역설적으로 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3연에서는 꽃을 뿌릴 테니 '밟고' 가라고 한 것으로 미뤄어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자기가 버린 여자가 뿌리는 꽃을 밟고 갑니까? 그러니까, 표층적 화자는 가라고 했지만, 심층적 화자는 가지 말라는 게 이 작품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보내겠다고 말했지만 자신도 보낼 수 없고, 가겠다고 하지만 님도 갈 수 없다는 걸 알고 그렇게 말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말했다면, 이 작품은 아이러니 어법을 채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 역시 표층과 심층의 화자는 분리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니, 이 작품은 이렇게만 해석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무수하게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한번 이제까지 다른 사람들이 해석한 것과 제 나름대로 해석한 것을 열거해 볼까요?  ⑴내가 이토록 사랑하는데도 떠날 수 있느냐는 고도 수법의 만류.  ⑵'진달래꽃'이 화자 자신의 상징물이라고 할 때, 나를 밟고 가라는 뜻으로 절대 못 보내겠다는 반어적 표현.  ⑶내가 싫어 떠난다면 눈물을 흘리기는커녕 죽어도 안 붙잡겠다는 프로이트 식의 오기(傲氣) 또는 실언(失言).  ⑷화자가 님이 없는 사람이라면, 나는 싫다고 떠날 때 꽃까지 뿌려 줄 정도로 착한 사람인데 왜 날 사랑하는 사람이 없느냐는 자기 선전.  ⑸떠날 때는 막지 않을 테니 함께 있는 동안만은 마음놓고 사랑해 달라는 현실주의적 책략.  ⑹떠날 때 깨끗이 보냄으로써 잊지 못하여 되돌아오게 만들겠다는 [가시리]식 계산.  ⑺남녀간의 사랑은 한번 깨지면 아무리 울며 매달려도 회복되지 않으니 차라리 깨끗이 보내자는 체념.  ⑻어쩌면 발생할지도 모르는 미래의 이별할 때의 가정해본 자기 태도.  ⑼이별은 꿈도 꾸지 않으면서 만발한 진달래꽃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을 순순하게 받아들이겠다는 사랑의 표현.  ⑽여성의 무의식 속에 숨겨진 피학적 욕구.  시를 읽는 재미는 이렇게 해석할 수 있고, 저렇게 해석할 수도 있는 구절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완성하는 데 있습니다. 명백한 시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만이지만, 모호한 시는 자기 나름대로 상상력을 발휘하고 완성하는 기쁨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명백한 시가 좋다는 것은 자기 생각을 명백하게 전달하여 설득하려는 시인의 욕심일 뿐, 독자나 문학적인 입장에서는 결코 상찬할 만한 게 못됩니다.  군더더기가 끼어 있는 것이 자연스럽게 보일 경우는 화자가 격정에 빠졌을 때입니다. 일상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논리 정연하게 말하던 사람도 다급하거나 격정에 빠지면 횡설수설하고 어법에 맞지 않게 말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시적 담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행과 연을 비슷한 길이로 나누고 표준적인 어법을 준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화자가 격정에 빠졌을 때에는 형식이 흐트러지고 어법에 어긋나게 표현해야 더 실감이 납니다.  라이트(G. T. Wright)는 이와 같은 점을 염두에 두고, 정상적 정서 상태의 화자는 , 격정에 빠졌을 때의 화자는 로 나누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의 실수로 나타나는 문장의 혼란과는 구분해야 합니다. 그리고 작품의 첫머리부터 원시화자를 등장시키는 것도 고려해봐야 합니다. 먼저 문명화자를 등장시키고, 정서가 격앙하는 과정을 그려 준 다음, 원시화자를 등장시키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담화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에서 원시화자를 구사하여 성공한 예로는 서정주(徐廷柱)의 초기시 가운데 [화사(花蛇)]를 비롯한 몇 편을 들 수 있습니다. 좀더 자세한 분석이 필요하니 번호를 붙여가며 인용해 볼까요?  ⓐ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 아름다운 베암…  ⓒ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여났기에, 저리도 징그라운 몸둥아리냐.  ⓓ 꽃다님 같다.  ⓔ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든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 소리 잃은 채 낼룽그리는 붉은 아가리로  ⓖ 푸른 하눌이다…물어뜯어라, 원통히 무러뜯어,  ⓗ 다라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麝香) 방초(芳草)ㅅ길  ⓙ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 우리 할아버지의 안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 석유(石油) 먹은 듯…석유(石油) 먹은 듯…가쁜 숨결이야  ⓜ 바늘에 꼬여 두를까부다. 꽃다님보단도 아름다운 빛…  ⓝ 크레오파투라의 피먹은양 붉게 타오르는 고흔 입설이다…슴여라! 베암.  ⓞ 우리 순네는 스믈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흔 입설…슴여라! 베암.  ⓐ에서 ⓓ까지는 문명화자의 발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터는 갑자기 기독교 신화인 에덴 동산의 전설을 이야기하고,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결합도 일상적 감각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원시화자의 발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곱다'의 보조관념으로 동원한 '피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이나 '고양이같이 고흔 입설(ⓞ)'만 해도 그렇습니다. 피먹은 입술은 징그럽고, 고양이 같은 입술은 야옹하고 할퀼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아름답다는 의미를 보조하기 위해 차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뱀을 무슨 헝겊처럼 바늘에 꼬여 두르고 싶어하며(ⓜ), 액체처럼 입술로 스며들라고 명령하는 것(ⓝ,ⓞ) 역시 비논리적입니다. 이와 같이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폭력적(暴力的)으로 결합한 것은 화자의 정서 상태가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유사성 여부를 따질 만큼 이성적인 상태가 아님을 의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통사 구조 역시 뒤틀린 상태입니다. '너희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 내던 달변의 혓바닥(ⓔ)'이라는 구절 뒤에는 그 상태가 든지, 라는 서술부(敍述部)가 와야 합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소리를 잃은 채 낼룽거리는 붉은 아가리로(ⓕ)/푸른 하늘이다…물어뜯어라, 원통히 무러뜯어(ⓖ)'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ㅅ길/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이라는 구절 뒤에는 무엇 때문이라는 이유가 와야 하는 데 '석유 먹은 듯…석유 먹은 듯…가쁜 숨결이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 연이나 행의 배치에서도 혼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서 ⓓ까지는 각 행을 완결된 의미로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터는 한 연을 하나의 문장으로 짜는가 하면, 한 행의 길이를 2음보에서부터 7음보까지 불규칙하게 구성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화자의 정서가 적당한 단위로 의미를 분절할 만큼 이성적 상태가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에서 ⓓ까지는 이성적인 문명화자가 지배하고, ⓔ에서 ⓜ까지는 원시화자가 등장하기 시작하며, ⓝ 이후는 완전히 원시화자가 지배하는 곳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시적 담화는 적절한 비유와 완전하고 매끄러운 문장만이 시의 주무기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아어(雅語)와 율문(律文) 중심의 고전적 시어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서, 상황에 따라 군더더기를 남겨두고 흐트러트릴 수 있어야 최고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런 방식을 이론으로 설명하고 있는 저 자신조차도 매끈하게 다듬는 습관이 있어 항상 작품을 자신도 모르게 다듬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655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댓글:  조회:1884  추천:0  2017-08-19
당신의 시 속에는            이 등장합니까,                        이 등장합니까?  피이, 그것도 질문이라고 하느냐구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 체면을 봐서 그냥 대답해 보세요.  시인 자신을 등장 시킨다구요? 히히히…. 땡입니다. 만일 이제까지 그런 방식으로 써왔다면 고급 독자들로부터 낡았다고 외면을 당했어도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서정 장르는 화자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하여 탄생된 장르이고, 그래서 을 채택하고, 모든 사람들이 시인을 등장시키는 장르라고 믿어 왔으니까 말입니다.  이와 같은 서정 장르에 의 개념이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현대로 접어들어서부터입니다. 그리고, 그 이전의 작품도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결코 작가 자신이 등장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이 문제를 좀 더 정확히 알아보려면 먼저 일상적 담화의 구조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러시아 형식주의 문학이론을 출발시킨 사람 중 한 사람인 야콥슨(R. Jakobson)에 의하면, 일상적 담화는 의 역동적 관계에서 탄생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관계를 문학에 대입시키면 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학적 담화, 특히 이나 는 에 해당하는 속에 작가가 꾸며낸 인물들이 등장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다시 말해, 속에 다시 가 들어있고, 그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고 행동하는 것을 독자가 엿보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를 좀 더 알기 쉽게 그리면 다음과 같이 그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서정 장르도 등장 인물이 제한되고, 청자는 그냥 듣기만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날 뿐, 마찬가지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낡았다고 치부하는 김소월(金素月)의 [진달래꽃]만 해도 그렇습니다. 김소월은 남자 시인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싫어 떠나는 님에게 꽃을 뿌릴 테니 '사뿐히 즈려 밟고' 가라고 애원하는 여성화자(女性話者)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아니, '내 님이 그리워 밤 늦게 울며 쏘다닙니다'라는 고려 시대의 [정과정곡(鄭瓜亭曲)]도, 임금님을 님으로 비유한 조선 시대 정철(鄭徹)의 [사미인곡(思美人曲)]과 [속미인곡(續美人曲)]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문학의 3대 장르인 시·소설·희곡 등은 를 채택하고, 작품 속에 다시 가 들어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작품 속의 화자를 완전한 허구(虛構)의 산물로 보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리고 작가 자신이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교술적 장르도 정도 차이가 날 뿐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하여 꾸며 쓴다 해도 결국 작가의 경험을 재구(再構)한 것에 불과하고, 사실대로 쓰려 해도 그 작품의 목적과 구조에 맞추어 수정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실대로 쓴다고 믿는 일기(日記)를 살펴보아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기를 쓸 때에는 그 당시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들도 그렇게 생각한 것처럼 부분적으로 꾸미고, 어떤 부분을 강조하거나 약화시킵니다. 따라서 문학 작품 속의 화자는 시인 자신의 반영도 아니고, 허구적 존재도 아닌 의 절충적 존재(折衷的存在)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이론일 뿐, 을 내세운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무엇이 그리 잘못되었냐구요? 네에, 그건 제가 질문하려 했던 건데, 독자들이 먼저 하셨으니 대답할 수밖에 없군요. 우선 시인 자신이 작품 속에 등장한다고 믿으면 화제를 제한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가 경험한 것이 아니면 작품으로 쓸 수 없을 뿐더러 자신을 등장시키면 자신을 돋보이도록 만들고 싶어하는 심리 때문에 고상하고, 우아하고, 진지하고, 영웅적인 화제만 택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작품 전체를 통일시키기 어려워진다는 게 문제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도 남의 이야기처럼 하면 훨씬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왕 꾸미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시간적 공간적 배경은 물론, 거리와 어조, 어법, 어휘까지 조절할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허구적 화자를 택할 경우 자전적 화자를 택할 때보다 의미적 국면에서부터 조직적 국면에 이르기까지 훨씬 유기적인 작품이 될 수 있습니다.  머뭇거리다가는 여러분들이 다시 질문하실 테니, 먼저 질문하겠습니다. 자아, 받아보세요. 뿅!  □당신은 를 설정할 때 무얼 먼저 염두에 두십니까?  '그냥 대충…'이라구요? 그러시겠지요. 작품 속에 자신이 등장해야 한다고만 믿어 왔으니까.  제일 먼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자기가 쓰려는 작품의 주제에 적합한 인물의 ··입니다. 어떤 계층의 인물을 선택했느냐에 따라 화제는 물론 시적 공간·어조·시어· 시의 형태 등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가령 시골 여자 어린이로 정했다고 합시다. 이런 화자를 선택하면, 성이라든지 폭력 같은 화제는 다룰 수 없습니다. 소설의 경우이긴 하지만, 주요섭(朱耀燮)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만 해도 그렇습니다. '옥희'라는 어린 여자 아이를 등장시켰기 때문에 어머니가 사랑방 손님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이 빨개지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른 요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가운데 무엇보다 먼저 유의해야 할 것은 화자의 성(性)입니다. 성에 따라 지켜야 할 화자의 특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시의 의미적 국면  ⅰ) 화자의 태도와 정서 : 남성화자를 등장시키면 대상으로부터 독립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면서 이성적(理性的) 능동적(能動的)으로 대응하는 태도를, 여성화자를 등장시키면 대상과의 관계를 중시하면서 보살핌의 원리로 감성적(感性的) 수동적(受動的)으로 대응하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ⅱ) 화제의 성격 : 남성화자를 등장시키면 국가 사회 윤리 같은 공적(公的) 추상적(抽象的) 화제를, 여성화자를 등장시키면 이별 사랑 아름다움 같은 사적(私的) 구체적(具體的) 화제를 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② 시의 형식적 국면  ⅰ) 시형과 율격 : 남성화자를 등장시키면 상대적이지만 자유율(自由律)의 경우 자유분방한 시형을, 여성화자를 등장시키면 정제된 시형을 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정형율(定型律)의 경우우 남성화자는 4음보처럼 균형적(均衡的)이며 대응적(對應的)인 음보를, 여성화자는 3음보처럼 가변적(可變的)이며 대응된 짝이 없는 음보를 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ⅱ) 음성 조직 : 남성화자를 택하면 기능적이고 소박한 음성을, 여성화자를 택하면 섬세하고 장식적인 음성을 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물론,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 여성 독자들은 상당히 불만스러워할지 모르겠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여성주의자들이 남성중심주의적인 가치관을 담고 있다고 해서 반대해온 프로이드(S. Freud)와 융(C. G Jung)의 분석심리학(分析心理學)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석심리학만 참조한 게 아닙니다. 남성화자의 '대상으로부터 독립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면서'라는 조건이나, 여성화자의 '대상과의 관계를 중시하면서 보살핌의 원리'로 행동한다는 조건은 길리건(C. Gilligan)을 비롯한 여성 심리학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좀더 생각해보면 여성심리학자들의 주장은 같은 특징을 달리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대상으로부터 독립하여 옳고 그름을 따질 경우에는 능동적이고 이성적일 수밖에 없으며, 관계를 중시하고 관계되는 것들을 아낄 경우에는 자연히 수동적이고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배우자의 바람에 대한 반응을 가지고 생각해봅시다. 남자든 여자든 그런 기미를 눈치채면 분노하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 와이셔츠 깃에 묻은 루즈 자욱을 보고도 용서하는 것은 내가 이혼하면 어린 자식들은 누가 돌보나, 친정 어머니는 얼마나 상심하실까, 친구들이 뭐라고 수군댈까를 생각해서 참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타자와의 관계를 생각하고, 그들에 대한 '보살핌의 윤리(ethic of care)'로 행동하기 때문에 참는 것입니다. 그리고, 맨 날 늦게 들어오는 남편이 아내의 늦은 귀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 잘못은 돌아보지 못하고 아내의 일이 옳은가 그른 가만 따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차(性差) 무시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 차이를 인정하되 나름의 가치를 지녔다고 받아들이는 의식구조가 더 중요합니다.  다시 본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작품 속의 화자는 이와 같은 성적 특질을 그대로 반영해야 자연스러워집니다. 그것은 다음 김소월의 작품들을 비교해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 [진달래꽃] 1, 2연  ⓑ마소의 무리와 사람들은 돌아들고, 적적(寂寂)히 빈 들에  엉머구리 소리 우거져라.  푸른 하늘은 더욱 낮춰, 먼 산(山) 비탈길 어둔데  우뚝우뚝한 드높은 나무, 잘 새도 깃들어라.  볼수록 넓은 벌의  물빛을 물끄러미 드려다 보며  고개 수그리고 박은 듯이 홀로 서서  긴 한숨을 짓느냐. 왜 이다지!  - [저녁 때] 1.2연  ⓐ는 상대가 '님'인 점으로 미루어 여성화자로, ⓑ는 '-어라'와 같은 남성적 어미를 택한 점으로 미루어 남성화자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비슷한 시기에 쓰여졌고, 시인 자신이 골라 시집 {진달래꽃}에 수록한 작품인데도 전혀 다른 특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화제를 살펴보면, ⓐ는 개인적인 사랑을 다루는 반면에, ⓑ는 일제(日帝)의 토지 수탈 정책에 의해 농토를 빼앗긴 농민의 문제인 공적·사회적 화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는 님이 떠나는 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변함없는 사랑을 다짐하는 반면에, ⓑ는 한숨을 지으며 물끄러미 바라보는 행위를 통해 땅을 빼앗긴 것이 과연 정당한가 따지려 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앞에서 지적한 특징 그대로 들어맞고 있지요? 그리고, 형식과 율격 면에도 역시 달라지고 있습니다. 두 작품 모두가 4연시지만, ⓐ는 하나의 율행(律行)을 2개의 층량(層量) 3보격으로 나누고, 2개의 율행(律行)을 한 연으로 구성하여 정형성이 강하게 드러납니다. 반면에, ⓑ는 각행이 2음보(音步)에서 6음보 사이를 불규칙하게 넘나들면서 자유시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가 대응(對應)되는 짝이 없는 3보격을 규칙적으로 택한 것은 여성의 가변적(可變的)이면서도 정제된 정서를 나타내기 위해서이며, ⓑ가 자유시 형식을 택한 것은 남성의 자유분방하면서도 격렬한 정서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이런 차이는 시어와 통사 구조(統辭構造)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국어에서 화자의 행위와 정서를 잘 드러내는 문장성분은 서술어(敍述語)입니다. 이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는 전(轉)의 '가시옵소서'를 제외하고 '보내드리우리다'·'뿌리우리다'·'흘리우리다'와 같은 극존칭(極尊稱) 종결어미와 음성모음 및 활음조 현상(euphony)이 우세한 시어들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술어를 수식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는 '-져라'·'-어라'·'-느냐'와 같은 오연(傲然)한 어미와 투박하고도 실용적인 어휘들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푸른 하늘은 더욱 낮춰, 먼 산 비탈길 어둔데/우뚝우뚝한 드높은 나무, 잘 새도 깃들어라'와 같이 행 가운데 쉼표를 찍고, '긴 한숨을 짓느냐. 왜 이다지!' 같은 구절에서는 도치법(倒置法)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가 극존칭 어미를 선택한 것은 청자(님)가 화자(나)보다 상위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음성모음이 우세한 어휘를 선택한 것은 화자의 서럽고도 어두운 심정을 반영하기 위해서이며, 활음조 현상이 일어나기 쉬운 어휘를 선택하고 통사 구조를 정제시킨 것은 이별의 순간에도 아름답게 보이려는 여성적 태도를 반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가 거친 문장과 실용적인 어미를 택한 것은 남성화자의 자유 분방한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작품은 화자에 따라 의미적 국면에서부터 조직적 국면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정됩니다. 그러므로, 각 유형의 화자가 어떤 기능을 지니고 있는가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면, 그리고 화자에 맞춰 모든 것을 조정할 수 없다면 결코 좋은 시인이 될 수 없습니다.     
654    추억의 "되놀이" - 문득 "되놀이" 하고싶어짐은 또... 댓글:  조회:2157  추천:0  2017-08-18
조선족민속문화-되놀이에 대한 고찰                                            전 병 칠 중국조선족은 월경민족으로서 자기들의 고유의 민속문화를 갖고 조선반도로부터 중국의 동북지방에 정착하였다. 그네뛰기,널뛰기,씨름,활쏘기, 줄다리기,제기차기, 등 경기놀이와 장기, 바둑,윷놀이 등 겨루기놀이,연띄우기,팽이돌리기,썰매타기,바람개비놀이,숨바꼭질,자치기,줄넘기,공기놀이, 실뜨기 등 아동놀이를 포함한 허다한 민속놀이들은 중국조선족이 집거한 곳들에서 오랫동안 류전되면서 오늘까지도 그 맥락을 이어가고 있다.  조선족민속문화의 하나인 되놀이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우리 민족의 고유의 민속문화의 하나로 보고 어떤 사람들은 중국조선족의 력사에서의 자연 발생적인 산물로서 특이한 민속문화로 보고있다.                                  되놀이의 기원에 대하여 조선이나 한국의 “우리말 사전” “대국어사전” 등에는 “되놀이”란 올림말이 없으나 1973년 조선 사회과학출판사 출판으로 출판된 “조선문화어사전”은 “되놀이”(273P)를 올림말로 올리고 그 해석을  “(낟알같은것을) 여러 사람이 한몫씩 내서 그것으로 음식을 장만해 놓고 함께 즐기며 노는 놀음놀이”라고 달았다. 유감스운것은 아직까지 되놀이 기원에 관한 상세한 력사기재가 없는것이다. 필자는 되놀이 기원에 관한 상세한 력사기재를 보지 못한 상황에서 되놀이의 기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천박한 견해를 제기한다. 첫째; 되놀이의 어음적기원 리조시기의 기록에는 “되”를 “승”이라고 씌여있고 “말”은 “두”라고 씌여있다. 리조시기의 “말”은 네모난것인데 그 용량은 지금의 3.5리터정도, “되”는 말이 10분의 1이였다. “되”의 모양은 “말”과 같은데 작았다. “말”과 “되”는 낟알을 팔고 사는데는 물론 가정마다 수시로 쓰는 도구였다. 끼니마디 밥을 지을 때는 “되”로 한정한 쌀의 량을 꺼내는 일상도구로서 쌀독안에는 반드시 쌀되박이 있기 마련이였다. 지난시기 쌀되박은 나무로 만들었지만 나무대신 바가지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을 민간에서는 되바가지라고 불렀다. 되놀이를 할 때는 되놀이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저마끔  집에서 자기의 몫의 낟알을 쌀되박이나 되바가지로 떠 가지고 가서 그번 놀이에서 정해논 음식을 만들었다. 되놀이란 어원은 이로서 산생되였다. 둘째; 되놀이는 두레의 호미씻이에 기원을 두고있다. 지난날 우리 농민들은 황두, 두레와 같은 공동로력협조조직을 무어가지고 모내기,김매기,가을걷이와 같은 한꺼번에 많은 노력이 요구되고 힘이 드는 농사일을 서로 도우면서 제철에 해내였다.건삶이를 많이하던 서북조선의 별방지대에서는 황두라는 공동로력협조조직을 무었                                      (1) 고 중이남조선이나  일부 서북조선지역에서는 두레라는 공동로력협조조직을 무었다. 이러한 황두나 두레는 농호들의 로력과 축력, 농기구의 부족울 타개하고 일손이 많이 들며 시간을 다투는 모내기와 김매기를 제철에 끝낼수 있게하는데서 큰 역할을 하였다. 농민들은 공동로동과정에서 집단로동과 호상부조의 우월성을 더욱 느꼈으며 이웃사이에 더욱 화목해지고 친근하게 지냈다. 황두와 두레는 이러한 우월성으로 하여 오래동안 농촌에서 특유의 공동로동풍습으로 계승되여 왔다. 두레에는 호미씻이라는 특수한 놀이가 있었는데 김매기를 끝낸 다음 두레 일을 총화하고 여름내 농사에서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두레군들이 벌리는 놀이였다. 김매기를 끝내고 호미나 후치 등 농기구들을 깨끗이 씻어 광속에 넣어둔다고 하여 호미씻이라고 불렀다. 17세기전반기에 활동한 학자이며 관리였던 장유(호 계곡 1587-1638) 자기의 문집 “계곡집”에서 “농가에서 김매기가 끝나면 남녀로소가 다같이 모여서 음식을 함께 먹는데 세서희(洗鋤戱-호미씻이놀이)라고 하였다고 썼으며 “천일록”은 “산간지대나 평야지대를 막론하고 매년 7월 보름날에는 농가의 남녀들이 음식을 차려놓고 모여서 노는데 이것을 세서연(洗鋤宴-호미씻는 잔치)라고 하였다.”라고 전하고 있다. 알수있는바  호미씻이는 17세기이전부터 전해오는 농사와 관련된 오랜 풍습의 하나였다.자료에 의하면 호미씻이에는 공동식사와 집단적인 춤과 노래, 씨름경기 등을 하였는데 공동식사의 준비는 매 집에서 없는 살림이지만 별식들을 성의껏 차려가지고 나오는것으로 하였고 술과 고기, 떡 같은 것은 집집에서 얼마간의 낟알이나 돈을 모아가지고 준비하였다고 한다.이날 농민들은 농기가 펄럭이는 넓직한 풀밭우에서 배불리 먹고 마시며 농악에 맞추어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으며 씨름판에 뛰여들어 힘을 겨루기고 하고 꽹과리와 징을 울리면서 씨름군들을 응원도 하였다.이러한 놀이는 농민들이 여름철 쌓인 피로를 풀어주고 이웃간의 친목을 두텁게 해주는 의의있는 계기로 되였다.이러한 호미씻이는 7월 15일인 백중날에 논다하여 일명 백중놀이라고 하였으며 두레군들이 논다하여 두레놀이라고도 하였다. 두레군들이 두레놀이에 참가하기 위해 쌀되박에 낟알을 담으면서부터 두레놀이가 되놀이로 되였을수 있고 두레놀이가 점차 서북조선지역으로 옮겨지면서 “두레”가 “되”로 와전되였을 가능성이 있다. 셋째; 되놀이는 일제 탄압시기 간도땅에서 자연 발생하였다. 필자는 지난 7월 19일과 20일 행운스럽게 심양시에서 펼쳐진 “동방민족 전통민요의 현대적 재조명” 학술세미나에 참가하여 반도의 남북학자를 대상으로 되놀이에 대한 조사를 할수 있는 기회를 가질수 있었다. 아래의 도표는 조사한 내용이다. 국       가 조사인수 되놀이 경력 유 되놀이 경력 무 되놀이를  모름 조         선       5명       1명        4명       3명 한         국       5명       0명        5명       5명 도표에서 보여준바와 싶이 조사중 한국의 5명은 모두 되놀이를 모르고 있었고 그 경력도 없었다.올해 65세에 나는서울대 조동일교수는 한국경내에서 민요수집으로 남쪽땅을 다 밟은 명성있는 학자인데 시골마을을 돌며 민요를 수집할 때 혹시 되놀이라는 말을 들어본                                      (2) 일이 있는가 하는 물음에 “죄송하지만 한번도 들어 못 봤다”고 말했다. 반대로 조선의 학자들중 평양음악무용대 안병균 부학장은 되놀이를 알고 있었고 고향인 함경북도 새별군에서 어릴적 되놀이를 해본 경력을 갖고 있었다. 사회과학자협회 오영일처장은 되놀이를 직접 해본 경력은 없지만 너무나 잘 알고 있다면서 필자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조선의 위대한 항일투사  김정숙어머니는 1917년 조선 회령에서 태여나 22년도에 부모를 따라 중국 연변의 팔도의 베이궈에 갔다가 27년도에는 서산에 옮기고 29년도에는 팔도 부암동에서 살았다고 한다.1930년도 가을에 마을에서 있은 되놀이에 참가해야 하겠는데 자기 몫으로 갖고갈 곡물이 없어 김정숙어머니는 나어린 남자동생이 밭에서 뜯어온 풋강냉이를 가루내 가지고 갔다고 한다. 그런데 그 밭이 소작받고 있는 밭이라고 지주한테 걸려들어 100일간 그 지주집에 들어가서 머슴살이를 했다고 한다. 오처장은 되놀이는 함북도에서만 하는 놀일거라고 주장했다. 필자가 조사한데 의하면 조선에서의 두레놀이는 두만강과 가까운 회령, 무산, 새별 등 곳에서 많이 볼수 있었고 두만강과 멀리 떨어질수록 적거나 거의 볼수 없었다. 지난세기 한일합병후 일제는 조선의 본토에 가혹한 헌병정치를 펼쳐 반일 항쟁을 막고 우리 민족의 사소한 단합의 요소라도 철저히 탄압하였다.그러다보니 간도지방은 우리 인민들과 일제가 사활을 겨루는 주요한 곳이였다.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우리의 선구자들이 되놀이라는 이 음식놀이로 일경이나 반역자의 눈을 피해 민중의 단합의 자리를 마련하고 항일력량을 키웠을수 있다. 간도에서의 되놀이가 조선반도의 북부지역으로 흘러들어갈수 있고 항일투사 김정숙어머니의 되놀이 일화로 “조선문화어사전”에 되놀이라는 올림말이 올려졌을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수 없다.오늘까지 조선에서 출판한 민속놀이를 소개한 허다한 서적에는 되놀이라는 민속놀이가 없다. 중국동북지역에서의 되놀이의 류전과 보존 1).되놀이의 류전과 보존 구역 필자는 본 론문을 준비하는 기간 출장길로 2차에 걸쳐 연길에서 북경으로 다시 북경에서 연길로 24시간씩 기차를 타면서 근 90여명 인원들의 되놀이경력을 쉽게 조사할수 있었다. 아래의 도표는 필자가 동북3성의 부분적 사람들을 만나 조사한 내용이다. 지     역 조사인수 되놀이 경력 유 되놀이 경력 무 되놀이를  모름 길림성 연변지구       52명       50명        2명   길림성 통화지구        5명        1명        3명       1명 길림성 사평지구        4명        1명        3명   길림성 길림지구       8명        1명        7명   요녕성 단동지구       2명        1명        1명   요녕성 심양지구       6명       2명       3명       1명 흑룡강성 할빈시       5명       2명       3명   흑룡강성 상지시       1명         1명   흑룡강성 계서시       1명         1명   흑룡강성 목단강       8명       7명       1명   이상이 도표가 보여주다싶이 되놀이는 연변지구와 목단강지역의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고 또 그 경력이 있는 사람도 많았다. 연길시 영락구역의 한 휴식터에서 2차에 걸쳐 (04,7,6일,11일) 13명의 할머니들과 6명의 할아버지들을 마주하고 조사를 벌린데 의하면 이 로인들중 1명을 제외한 18명이 되놀이를 해 본 경력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 필자와 흥미진진하게 자기들의 되놀이를 하던 과정을 이야기했다. 이 로인들은 대부분 연변의 타 현시의 농촌에서 자식들을 따라 연길로 이주해 온 로인들이였다.  올해 80세에 나는 조도수(趙道洙)로인은 안도현 자흥촌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는데 15,16세때에 동네청년들과 함께 되놀이를 자주 했다고 했다. 주로는 메밀국수 되놀이를 했는데 바람이 크게 부는 날이면 사전에 준비한 삼줄그물로 새밭에 내린 꿩들을 잡아서는 꿩탕 메밀국수를 해먹었다고 했다.로인은 바람부는 날이면 새밭의 바람소리에 꿩들이 그물을 끄는 소리를 잘 못 듣기에 그물을 끌면서 힘차게 달리면 새밭에 숭어있던 꿩들이 많이 걸릴 때는 7,8마리씩 그물에 걸려들었다고 하면서 당시 추억으로 흥분했다. 되놀이라는것을 해 본 경력이 없다고 대답한 1명의 로인은 흑룡강성 계서시에서 온 할아버지였다. 그 옆의 시장에서 만난 80세나는 윤주순할머니도 경상북도 예천군에서 태여나 9살에 흑룡강성 상지시 하동촌에 이주와 평생을 농사질을 했지만 되놀이를 한 경력이 없다고 했다.  부모의 고향이 충청북도 청주시인 올해 84세인 이형봉로인은 훈춘시 량수진 출생인데 되놀이 한 경력이 많았고 어린시절 소학생시절에 메밀국수되놀이도 했고 참새를 잡아서는 참새되놀이도 한적이 있다고 했다. 북경행 기차에서 만난 73세의 방금손할아버지는 왕청 신흥향 룡천촌 태생인데 16,17세좌우에 마을 친구들과 되놀이를 자주 했는데 메밀국수 되놀이를 많이 했다고 했다. 그는 1955년 사범을 졸업하고 류하현 조선족중학교에 가서 교편을 잡았는데 류하현의 조선족들은 되놀이라는걸 몰라 그 후에는 못해봤다고 했다. 조선어문 교원으로 퇴직한 방선생님은 되놀이는 함경도풍속이기에 햠경도사람이 많은 연변에서만 류전되는것이라고 찍어 말했다. 연변의 40대,50대 60대들은 대부분 60년대와 70년대 80년대에 되놀이를 많이 해왔다. 필자는 60년대 중기와 말기 화룡시 두도진 연풍촌에 있었는데 남녀 청년들이 함께 모여 조개떡되놀이, 언감자떡되놀이 등을 많이 했다. 2).되놀이 군체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50년대와 그 전후를 포함해 되놀이를 제일 많이 하는 군체는 녀성들이였다. 아마 녀성들이 음식을 자체로 만들수 있고 또 가정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기들끼리 앉아 스트레스를 풀기에는 되놀이 그 이상이 없었던것과 관계되는가 싶다.  그다음으로 50년대 후반부터 80년대말 좌우까지는 청춘 남녀들이 주체로 민병이나 공청단조직의 이름을 달아 함께 모여서 처녀들은 떡방아를 찧고 총각들은 나무를 패거나 등 힘든 일을 했다.떡가루가 도착하면 처녀총각이 마주 앉아 떡을 만들었다.  3).되놀이의 음식                                        (4) 필자가 조사한 되놀이음식을 보면 1, 메밀국수 2,가랑잎떡(가람떡) 3,송편 4,언감자조개떡(당콩을 밖는다) 6, 만둑 7,입쌀밴새 8,시루떡(설기떡) 9,언감자밴새 10,오그랑죽 11,찰떡 12,계피떡 등이 많았고 개별적인 사람들은 김치나 참새로 되놀이를 하기도 했다. 올해 78세인 정금숙로인은 위자구 장안촌에서 살았는데 배추랑 속에 넣는 만둑떡놀이를 많이 했다고 했다. 가람떡만 그 만드는 방법을 소개한다. 먼저 집집에서 가져온 입쌀을 물에 불구어 씻은후 건기를 들이고 발방아나 절구에 가루를 낸다. 그 다음 거기에 찹쌀을 약간 섞어서 떡을 빗고 그 우에 새파란 가둑나무잎이나  깨잎 혹은 보드라운 옥수수잎사귀를 붙이고 가마에 찐다.이런 가람떡은 잘 쉬지 않고 또 맛이 특별했다, 가람떡에 당콩을 밖지않았을 경우는 따로 콩고물을 만들어 찍어 먹기도 했다. 4).되놀이 방식   되놀이기본방식이라면 입쌀, 메쌀,언감자 등 낟알들을 여러 사람이 한몫씩 낸후 미리 정해 논 집에 모여 그것으로 음식을 장만해 놓고 함께 즐기며 노는 것이였다. 되놀이끝에는 보통 모여서 북을치고 퉁소를 불면서 춤추고 노래부르고 하였는데 퉁소나 북이 없는 마을에서는 물함지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북대신 그걸 두르리면서 흥을 돋구었다.  화룡시 두도진 연풍촌부녀들은 되놀이 뛰끝이면 꼭 북장단에 맞춰 춤을 췄다. 마을에 북을 잘 치는 전고분할머니가 있었기 때문이란다. 또 되놀이끝에는 공기놀이, 윷놀이, 화토놀이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올해 79세인 오경숙할머니는 왕청현 서위자촌에  살았는데 처녀때 대부분 찰떡되놀이를 하고 되놀이 끝에는 돌을 숨기는 놀이를 놀았다고 했다. 돌을 숨긴 사람이 노래를 부르는 유희였다. 그리고 과거에는 쌀 같은 낟알을 사람마다 한몫씩 내서 그것으로 음식을 만들었으나 지금의 경우는 생활형편도 좋아지고 현금 류통이 많은지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곤 자기 몫으로 현금을 내고 되놀이에 참가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 도시 로임족들도 가끔 돈을 거두어 사전에 정해 논 집에서 개를 잡고 개 되놀이를 한다던가 또는 특별한 음식상을 차린다든가 하면서 놀음판을 벌리는데 되놀이의 잔류로 볼수 있다. 지금도 연변의 농촌들에서는 부녀들이 되놀이를  많이 하고 있다. 농촌에 청년들이 적다보니 청년들이 하는 되놀이는 매우 적다. 상대적으로  지금은 독보조로인들이 남녀 함께 하는 되놀이가 많다. 되놀이의 미학적가치   되놀이를 해 본 사람들 대부분이 똑 같은 체험을 이야기 했다 귀납해 보면 다읔과 같다. 첫째, 마음이 서로 통하는 사람들이 되놀이를 한다. 둘째, 조용한 집을 찾는데 외딴집일수록 좋다. 셋째,말성이 많거나 성질이 고약한 사람은 참가시키지 않는다. 넷째, 지나치게 가난하여 자기 몫을 내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그의 몫을 담당하거나 되놀이군들의 상의를 걸쳐 몫을 내지 않아도 참가할수 있었다.다섯째, 음식이 남으면 로인을 모시고 있는 집이나 환자가 있는 집에 우선적으로 보내주었다.  아래에 되놀이가 갖고있는 미학적가치를 적어본다.                                        (5) 1,실향민의 애환을 달래주고 고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다분히 키워주었다. 기아와 가난 그리고 조국을 빼았겨 낯설은 타국 땅에 쪽지게를 내린 우리의 1세들은 되놀이를 하면서 그리운 자기의 고향과 보고싶은 형제, 친척들을 그리며 떠난 고국에 대한 열애를 되새겼다.올해 73세인 화룡시 토산진에 산 주장권할아버지는 일찍 어렸을적에 화룡시 남평진 가마골에서 살았는데 자기의 아버지 주철운(1906년생)이 마을사람들과 함께 되놀이를 하면서 고향에 두고 온 동생들을 그리며 눈물을 흘리는걸 보아왔다고 했다. 2,반일사상을 선전하고 민중의 단합해 항일의 힘을 키워주었다.   도문시 79세에 나는 박령감은 2,30년대 되놀이는 혁명인들이  반일사상을 선전하거나 반일투쟁, 폭동 등을 조직하기 위해 모임을 가지는 주요 수단의 하나였다고 했다. 그들은 일군의 눈을 피하기 위해 항상 “오늘 저녁에 김아무개네집에서 되놀이를 하니 참가하라”는식으로 모임을 가졌다고 했다.. 3,봉건적인 세습에서 벗어나 사회에 참여하려는 부녀자들의 소박한 념원을 반영하였다.                          되놀이는 부녀들이 제일 많이 했다. 장시기 동안 우리 민족의 부녀들은 봉건적인 유교제도아래 가정에서 우로는 시부모들을 모시고 아래로는 시누이 시동생과 자기의 어린 자식들을 키우면서 허리 한번 시원히 못 펴면서 큰소리 한번 치지 못하고 꼭두새벽에 일어나 저녁 늦게까지 가무일에 시달렸다.그들에게 있어서 되놀이는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피곤이 실린 허리를 쭉 펼수 있는 더없이 좋은 자리였다. 백두산처럼 높은 시아버지, 고추 후추처럼 매운 시어머니,배추잎처럼 푸른 맏동서, 올콩볼콩 발라메이 시애끼, 벼개 벼고 눈물 짓고 이불 쓰고 통곡하던 시집살이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공명감을 주었고 또 사회적인 남녀불평등에 대한 똑 같은 원망의 마음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가 되게 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드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상에서 동네소식이며 나라소식,세계소식을 듣느것이 더없이 행복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이런 자유와 평화속에서 사회에 참여하려는 자기들의 소박한 념원을 반영하면서 마음껏 노래 부르고 춤을 췄다. 그들은 자기들의 소유한 이 소천지를 보호하기 위해 조용한 집, 외딴집을 찾고 말을 나르는 입 빠른 녀인을 싫어하면서 그런 녀자는 될수록이면 되놀이에  참가시키지 않았다.  4,자아를 찾고 인생의 향샹을 위해 노력하는 계기가 되였다.  “인생은 만남에서 이룩된다”는 말이 있다. 공자는“3인지행필유아사”(三人之行必有我師)라고 했다 .되놀이는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자리라 서로가 배울 점이 많았다. 다른 사람이 살아온 인생에 자기가 살아온 인생을 반성도 하게 되고 남의 좋은 권고와 충고로 새로운 인생 출발도 할수 있었으며 또한 남의 음식만드는 법, 노래재간 ,춤재간 등을 배워 자기를 향상 시킬수도 있었다.  5. 주위 사람들과의 친목을 도모하고 호상부조의 정신을 키워주었다. 인간은 더불어 산다고 한다. 주위 사람과의 친목을 도모하는 것은 인간의 도덕이면서 또한 지혜이다. 되놀이는 여러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음식을 만들고 이야기를 나누고 놀이같은것을 함께 하면서 기쁨과 슬픔을 주위 사람들과 함께 나눌수 있는 자리였을뿐만아니라                                        (6) 불쾌했던 일은 서로 리해해 주고 량해를 빌수 있는 자리, 숙적이였던 사람들을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다시 화해시켜 다정히 보낼수 있게 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또한 어려운 사람을 도와  묘책을 낼수 있는 자리, 도와 줄수 있는 자리이기도했다. 되거리 경력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되놀이를 할 때 지나치게 가난하여 자기 몫을 내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그의 몫을 담당하거나 되놀이군들의 상의를 걸쳐 몫을 내지 않아도 되놀이에 참가시켰다고 하면서 음식이 남으면 로인을 모시고 있는 집이나 환자가 있는 집에 우선적으로 보내주었다고 했다.로인을 존경하고 약자를 도와주는 우리 민족 미덕이 되놀이에서의 체현이 아닐수 없다.  한마디  더 이야기 하고 싶은것은 중국조선족의 되놀이에 가끔 다른 민족성원들도 끼워 우리 민족의 민족단결정신과 넓은 포옹력을 보여주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방금손할아버지는 왕청 신흥향 룡천촌에 있을 때 마을에 40%가 한족이였다고 하면서 자기들은 되놀이를 할적마다 왕상진(王尙進)이란 한족친구를 불러 함께 되놀이를 했다고 했다. 필자는 이상과 같이 조선족민속문화-되놀이를 초보적으로 고찰하면서 여러분들의 심도있는 연구를 기대하는바이다.                                                  2004년 7월 11일 초고 / 7월 29일 수개  
653    [땡... 복습시간이다...] - 중고생들 안녕하십니까... 댓글:  조회:3353  추천:0  2017-08-18
  카페 >머털도사의 즐거운 교실, 시문관 글 쓴이 정진명   중고생을 위한 시강의  제 1부   학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수업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하여 인터넷의 신나는 가상현실 속을 떠도느라 고생하시는 학생 여러분을 생각하면 기성세대로서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과 함께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런 운명은 여러분들의 몫이지만, 그 운명을 만든 것은 기성세대의 무책임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장래는 여러분의 어깨에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여러분들의 어깨에는 특별히 한국 시의 장래가 달려있습니다. 시를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에게 혹시 도움이 될까 하여 이 강의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시작하기 전에, 우선 한국에 살면서 시를 자신의 희망으로 생각하는 학생들에게 아주 반가운 소식을 전하고자 합니다. 제가 한 20년 동안 시를 쓰면서 든 생각입니다만, 한국 시의 수준은 다른 인접 갈래와 비교해볼 때 별 볼 일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소설과 비교하면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나라의 소설 수준은 정말 대단합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아도 시원찮을 작품들이 아주 많습니다. 박경리의 토지, 조정래의 태백산맥, 황석영의 장길산 같은 작품이 다 그렇지요.    그러나 시에서는 그렇지를 못해서 딱히 우러러 볼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냐면 시에 뜻을 가진 여러분이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뜻입니다. 정말 좋은, 위대한 작품이 아직 안 나왔으니, 그것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여러분에게 남아있는 것입니다. 엘리어트의 황무지 같은 작품을 쓸 수 있는 것은 현재의 시인들이 아니라 여러분의 몫입니다. 그러니 한국에서 시를 자신의 희망으로 택한 여러분은 정말 좋은 기회를 앞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막 시를 시작하려는 여러분에게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있을까요?   혹시 소설이나 드라마 같은 분야에 눈독을 들이는 학생들이 이 글을 보고 있다면 장래희망을 얼른 시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더 희망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밥벌이가 된다는 보장을 못 하지만, 이상에 한참 불타는 여러분이라면 그 밥벌이 때문에 희망을 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가 이 글을 쓴 동기는 간단합니다. 한국 시의 장래는 젊은 학생들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학교 현장에서는 시 쓰는 법을 배우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시를 올바르게 읽는 것을 배우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학교에서 배우는 시는, 평론가들이 이미 정리해놓은 이론을 시에 어거지로 꿰맞추는 작업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는 정서를 전하려고 하는 물건인데, 그것을 토막내어 내부구조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그 정서가 전달될 리가 없지요. 발 앞에서 튀는 개구리를 보자는 것인데, 그것의 안이 궁금하다고 갈기갈기 찢어놓은 꼴입니다. 시험지로 묻는 내용은 바로 그 내부 모양새입니다. 그러나 시는 그런 모양새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읽고 난 직후의 느낌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것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과정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을 보고 놀라 팔짝 뛰는 개구리의 모습을 보자는 것이지요. 이 자명한 사실을 가르치는 교재도 없고 교사도 없습니다. 입시가 원흉이지요.   시중에 나와있는 창작 안내서를 보면 창작보다는 이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 창작에서 이론은 수박 껍데기를 핥는 일에 불과합니다. 수박 맛은 껍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거든요. 이론으로 백날 설명한들 단 한 번 쓰도록 유도하는 것만 못합니다. 그런데 시중에는 그런 맛을 느끼게 할 만한 이론서가 없습니다. 이것은 제가 도서관을 뒤져서 내린 결론입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직접 쓴 시를 인용하면서 실제로 창작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제가 발벗고 나섰습니다.    글쎄요, 여러분들이 읽으면서 어떤 느낌을 얻을지 모르지만, 한 번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돈을 많이 벌면 저한테 그 돈 좀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이 원고를 좀 책으로 내게. 하하하.    학생 여러분, 반갑습니다. 한국 시의 유일한 희망인 여러분에게 저의 작은 선물을 드리고자 합니다.    참고로, 이 연재가 끝나면 여러분의 작품을 직접 봐드릴 예정입니다. 여러분이 평상시에 연습한 작품을 이 사이트의 회원 문단에 올리시면 제가 할 수 있는 한도까지 손봐드리겠습니다. 단, 학생인 경우에만 말이지요. 이미 대가리가 다 커버린 것들은, 가르쳐봤자 소용없습니다. 잔머리만 굴리거든요. 하하하.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1. 군소리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학생 여러분을 위한 시 창작 강의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고자 하니 알아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은 무엇이든 태도가 중요합니다.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느냐 하는 태도에 따라 시를 쓰는 방법도 방향도 달라집니다. 따라서 시 창작 기술을 얘기하기 전에 그 동안 제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느낀 몇 가지를 먼저 얘기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야만 시 창작 강의에서 하는 말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책탕물+1(?)     시 창작 강의라? 이건 물론 시 쓰는 법을 강의한다는 얘깁니다. 그렇기는 한데, 학생들을 상대로 이런 강의를 하자고 결심하기까지는 적잖은 고민이 뒤따랐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 쓰는 법에 관한 책이라면 이미 많이 나왔는데, 다시 한 번 더 반복해서 책탕물(?)에 또 다시 별 볼 일 없는 책 한 권을 보태어 독자들의 혼란만 가중시키는 것이 아니냐 하는 그런 고민을 했습니다. 책탕물이 뭐냐고요? 흙탕물이라는 말이 있죠? 여기에다가 ‘흙’ 대신 ‘책’을 집어넣은 것입니다.   애써 글을 썼는데 쓸모없는 책이 되면 어쩌나 하는 고민은 책을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합니다. 책이란 새로운 정보를 전하는 귀중한 방법인데, 쓸데없는 내용으로 가득 차거나 이미 남들이 다 써놓은 내용을 반복하면 그러잖아도 출판물이 홍수를 이루는 요즘 세상에 정말 처치 곤란한 쓰레기 하나를 더 보태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꽤 오래 고민을 하다가 결국은 쓰기로 결심하고 이렇게 나섰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도서관에 가서 시 창작에 관한 책들을 주욱 훑어보다가,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하게 되었지요. 뭐냐면, 지금까지 시에 관한 창작이나 이론을 써낸 책들은 모두 어른들을 위한 책이라는 겁니다. 특히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쓴 안내서나 개론서들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중학교나 고등학교에서 공부하는 여러분들이 보기에는 다소 벅찬 내용들입니다. 또 창작을 위한 책이라고 하는 것들도 내용을 들여다보면 실제로 시를 쓰는 데는 크게 필요하지 않은 이론들까지 자세하게 나와 있어서 그런 책을 봤다가는 시 쓰는 일을 오히려 더 어려워 할 것 같았습니다. 궁색하지만, 이것이 제가 이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이유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미 나온 것들의 내용이나 질서를 무시하고 그 동안 제가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느낀 방법과 이론을 중심으로 설명하되, 어떻게 하면 어렵지 않고 재미있게 시를 쓸 수 있는가 하는 방법에 대해 궁리를 해보겠습니다. 물론 그 결과는 이 책의 맨 뒷장을 덮으면서 여러분들이 판단하겠지요.     이왕 나온 김에 한 마디만 더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지금은 학생들이나 청소년들이 읽을 책이 많아졌습니다. 제 또래의 어른들이 청소년들을 위한 책을 많이 펴냈고, 또 외국의 청소년 서적을 많이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자라던 1970년대만 해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는 책이 귀해서 동화책을 읽기도 어려웠지만, 그나마 동화책을 마칠 때쯤이면 어른들이 읽는 책으로 단계를 뛰어 넘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청소년을 위한 도서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피노키오나 삼총사들이 나오는 책을 읽다가 갑자기 프로이드 심리학이나 실존철학으로 넘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그 중간에서 무협지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러니 중 고등학교 때에 우리 세대가 겪었던 공부의 어려움은 이루다 말로 할 수 없습니다. 이해가 안 가니 포기를 하던가, 아니면 아예 문장 전체를 외워버려서 어느 날 문득 머릿속에서 터득이 되는, 그런 미련 맞은 방법으로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이런 방법을 ‘독서백편의자현’이라던가요?   그런데 요즘은 청소년을 위한 좋은 책이 많이 나왔습니다. 아마도 이런 고생을 한 세대들이 어른이 되면서 다음 세대에는 이런 고생을 시키지 않고 쉽게 공부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맺은 결실이 아닌가 합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책이 많이 나오기 시작해서 1990년대는 정말 엄청나게 많은 청소년 도서가 출판되었습니다. 2천 년 대 중반에 접어든 이제는 학생들을 겨냥한 도서가 출판업계의 소득과 생존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여러분을 위해서는 아주 다행한 일이지요.   그러나 아직도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실용서 부분에서는 많이 나왔는데, 정작 중요한 인문학 분야, 즉 철학, 문학, 예술, 사회학, 경제학 같은, 여러분들이 듣기만 해도 머리가 딱딱 아픈 분야에서는 아직도 청소년을 위한 도서가 거의 없다시피 한 실정입니다. 이름도 없는 제가 이렇게 발 벗고 나선 것도 바로 이런 사정 때문입니다.   문학 분야에서도 많은 개론서가 나왔습니다만, 대부분 대학 강단에 선 교수님들이 대학생 언니들을 상대로 쓴 것들이어서 여러분 같은 청소년들이 읽을 책은 거의 없는 형편입니다. 그러니 이제 이 책을 따라가면서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여러분의 시각으로 충고를 해주기 바랍니다. 그러면 언제든지 고치겠습니다. 지금 이 책은 저 개인의 명예를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필요한 책을 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시대가 변했다     시대가 변했다는 말은 유사 이래 계속 있어온 말입니다. 이집트 피라미드 벽에도 ‘요즘 젊은 애들 싸가지 없다’는 말이 나온다니, 이 말이 진짠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럴 법한 이야기입니다. 이미 있는 것에 익숙한 어른들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의 모험에 늘 의구심을 보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요즘 시대가 변했다는 말은 다른 그 어느 때의 그 말과는 사뭇 다르다는 생각을 합니다. 정보 매체의 발달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누구나 편지를 쓰고 책을 읽었습니다. 새로운 정보를 접하는 방법은 책밖에 없었고, 소식을 전하는 방법은 편지가 유일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방식을 아날로그라고 한다는 것은 신세대인 여러분이 더 잘 알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랄 때만 해도 책 읽는 것이 새로운 정보를 얻는 유일한 창구였고, 바로 그 새로운 정보를 얻기 위해서 우리는 학교에 다녔습니다. 우리 시골 마을에 제가 중학교 2학년 때에 처음 전기가 들어왔습니다. 그 후에 텔레비전이 들어왔지요. 그러니까 우리 세대만 해도 젊은 날의 가장 중요한 때를 아날로그 방식으로 세상을 더듬은 것입니다.   바로 이 전기 때문에 세상은 확 뒤바뀌었습니다. 새로운 정보가 활자로 찍혀 나오는 데는 아무리 빨라도 몇 달이 걸립니다. 가장 빠른 것이 신문인데, 신문은 하루가 걸리죠. 그러나 책은 그렇게 빨리 나올 수가 없습니다. 조판과 제본을 하고 그리고 그것을 필요한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장사꾼의 손을 거치는 과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책 한 권이 지은이의 손에서 여러분의 손까지 도착하는 데는 아무리 빨라도 보통은 3~6개월을 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텔레비전에서는 사건이 발생하는 그 즉시 화면을 타고 안방으로 전달됩니다. 시시각각으로 새로운 정보를 전해주는 것이지요. 이 속도는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더욱 빨라졌습니다. 더욱이 인터넷이라는 온라인 체계가 일상화되면서 지구 저편의 일까지도 책상 앞에서 금새 알아보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게다가 인터넷은 한쪽에서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쌍방체계라는 것이 앞의 텔레비전과는 또 다른 점입니다. 이러니 몇 달이 걸려서 새로운 정보를 전하는 출판 매체가 사양길에 접어들 수밖에 없는 시대입니다.   텔레비전과 컴퓨터가 세상을 확 바꾸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꾸었고, 그로 인해 세상을 사는 방법까지도 바꾸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지금 시대가 변했다고 하는 탄식은 옛날에 시대가 변했다고 탄식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디지털 세대가 아날로그 세대와 가장 다른 점은 사고의 방식일 것입니다. 우리 세대는 책으로 사고 한 세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책으로 사고하기보다는 그 즉시 눈앞에 나타나는 화면을 통해 사태를 파악합니다. 즉 세상을 그림으로 읽어 들인다는 말이지요. 아프리카의 굶주림에 관해서 진단하고 해부한 몇 권의 책보다 그곳에서 찍어 보낸 사진 한 장이 여러분의 행동과 사고를 결정합니다. 우리 세대가 어떻게 하는 것이 이들을 돕는 일일까 고민하는 동안 여러분은 인터넷에서 후원회를 검색하지요. 또 애인이 필요하면 우리 때는 ‘썬데이서울’이라는 주간지의 뒤쪽을 뒤적여서 거기 나온 주소로 편지를 썼는데, 여러분은 인터넷 채팅 방에서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사진까지 보며 상대를 고르지요. 생각과 표현, 행동의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디지털 세대의 이러한 사고방식과 행동은 출판계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골치 아픈 책은 팔리지 않습니다. 팔리는 책들은 그림책이거나 만화책, 그것도 아니면 본격소설이라고 하더라도 중간중간에 그림이 들어가서 눈맛을 시원하게 자극해주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문학보다는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정도를 넘어서 스스로 영화나 드라마에 미쳐 그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하기 싫어하는 폐인임을 자처합니다. 2003년도에 라는 미니 시리즈 드라마에 미친 사람이라는 이라는 말이 그 효시이지요.   그러니 이런 열광이 문학에 큰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시인들이 내는 시집을 보지 않고 소설을 읽지 않습니다. 소설은 머잖아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에 그 때까지 기다립니다. 예술을 생각하는 기준과 가치가 달라진 것입니다. 우리 때는 시인을 아주 고상한 예술가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감수성이 조금 있는 학생들은 예외 없이 문학청년의 시절을 겪었습니다. 어쩌다가 학교에서 발행하는 교지나 청소년 잡지에 자신의 작품이 실리기라도 하면 천하를 다 얻은 듯이 자랑을 하고 자부심을 느꼈지요. 주변의 친구들도 그러는 그에게 존경의 눈길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관심 분야가 다르다 보니 이러한 세태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지금은 누구나 탤런트나 영화배우, 또는 슈퍼모델이 되는 것을 꿈꿉니다. 그러니 얼굴을 고치면서까지 그 꿈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모델이나 탤런트를 양성하는 기관이 생기고 가수를 배출하는 전문회사가 생겨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영향은 시나 문학에서 독자의 감소로 나타납니다. 영화판으로 젊은이들의 관심이 몰리자 문학판에는 텅 비어버리는 공동화 현상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래서 요새 무슨 문학상이나 신인상 같은 데 응모해오는 사람들의 연령을 보면 대부분 30대 후반이라고 합니다. 세월과 세태의 변화를 한 눈에 보여주는 일이지요.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그렇다고 해도 글의 중요성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고는 잠시 스쳐가는 영상 몇 컷이 아니라 머릿속에 새겨진 깊은 이해력과 그러한 영상을 제공하는 현실세계 속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조리 있는 사고는 대부분 글을 읽고 쓰는 능력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대가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부분입니다.     지금까지 논의한 바에 의하면 시대의 변화 때문에 시의 독자가 감소한다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은 면도 있습니다. 어차피 젊은이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문학을 배웁니다. 하기 싫더라도 거쳐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런 현실에 몸담고 있으면서 그 현실을 잠시 거쳐야 할 곳으로 생각하지 내가 앞으로 미래를 걸고 한 번쯤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까지 생각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시대의 탓만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지금 문학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문학을 너무 엄숙한 분위기로 했습니다. 무슨 상이라도 타면 마치 옛날에 과거 급제한 사람 모양으로 대접을 했고, 또 주변의 분위기가 그렇게 돌아갔습니다. 바로 이 엄숙주의가 젊은이들의 발랄한 사고를 용납하지 못한 측면이 있습니다.   사람은 무엇이든 재미가 있어야 거기에 오래 매달립니다. 그런데 엄숙한 분위기에서는 재미를 느끼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재미없는 곳에 누가 오래 머무르겠습니까? 오늘날 디지털 시대를 맞이해서 문학판이 이런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은 문인들 스스로 자초한 면도 없지 않습니다.   시도 재미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과서에서 여러분들이 배운 시, 또는 그 시를 배운 시간을 돌이켜보십시오. 과연 재미있었는지요? 아마도 그렇다고 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아직도 국어시간의 시 공부는 지루합니다. 그런 분위기가 여러분들을 시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요인이지요. 이 지루함의 원인은 앞으로 이 책 곳곳에서 지적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어떻게 같고 다른지 천천히 따라오면서 감상해보기 바랍니다 3) 학생도 변했다     앞서 시대가 변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변한 그 시대에 따라서 학생들도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런데 그 변화의 조짐이 심상찮다는 것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문예반 학생을 지도하다 보면 여러 가지 어려움에 맞닥뜨립니다. 제일 골치 아픈 것이 관청에서 주관하는 대회에 학생들을 참가시켜달라는 주문입니다. 문예반 학생들을 지도하면 그런 공문이 전부 넘어와서 학생들을 대회에 내보내라는 은근한 압력이 들어옵니다. 그러다가 학생들이 대상이나 금상이라도 타면 학교에서 전교생이 보는 가운데 시상을 하지요.   그러다 보니 그런 대회에는 일종의 형식이 있습니다. 예컨대 민족의 비극인 6.25을 소재로 한 글짓기 대회가 열리면 할아버지의 얘기를 꺼내서 당시의 아픔을 회상한 다음 다시는 그런 비극이 없도록 힘써야겠다는 식의 수필을 쓰고 시를 짓지요. 그러면 이따금 운이 좋아서 상이 따라옵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행사가 학생들의 문예활동을 망가뜨리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주최 측에서도 내보내는 학교 측에서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왜 학생들의 문예의식을 망가뜨리는 일이냐 하면, 그런 대회에 참가하면서 상 타기 위한 거짓말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문학은 일종의 거짓이 조금씩 다 들어있다는 점에서 그것을 또 합리화합니다. 그렇게 해서 몇 차례 상을 타면 그 학생은 거짓말쟁이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통해서 사람을 감동시키는 방법을 배웁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양치기 소년의 거짓부리와 같은 것이어서 나중에는 문학이 일종의 거짓을 통해 ‘진실’을 전하는 것이라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점차 문학을 잊고 맙니다. 진실하지 않은 것에 평생을 매달린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금방 지루해지고 또 남들이 봐주는 재미도 없으면 스스로 그 판을 떠납니다.   바로 이런 점을 중고등학교의 문예반에서 차단하는 것이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리고 생활 속에서 우러나는 느낌을 글로 적은 것이 문학임을 깨닫는 것이 청소년 때의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시를 보는 시각과 시를 평하는 태도를 기르는 것입니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것은 대개 시를 감상하는 법입니다. 창작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1992년에 제천상고라는 학교에서 문예반을 지도할 적에,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학생들에게 몇 가지를 주문했습니다.   먼저 본받을 만한 좋은 시집 목록을 30여권 골라주면서 구해 읽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학생들 개개인이 이 많은 시집을 사려면 용돈이 바닥날 것이니, 한 학생 당 한두 권씩 사서 동아리에 기증하고, 그렇게 해서 모은 시집을 서로 돌려서 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쓴 시를 가져와서 친구들과 돌려 읽으며 잘못 된 곳과 잘된 곳을 검토하는 법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시 창작에 도움이 될 만한 이론서를 쉬운 것으로 골라서 소개했습니다.   다행히도 당시 학생들은 잘 따라 주었습니다. 매주 토요일 날 학교에 남아서 학생들 스스로 창작한 시를 돌려 읽으며 잘못된 부분과 잘 된 부분을 지적하며 몇 달을 지내니, 학생들이 시를 보는 안목과 시 쓰는 능력이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해마다 한 번씩 시민회관을 빌려서 시화전을 했습니다.   그때 학생들의 관심은 자신의 고민과 생활의 느낌을 시로 쓰는 것이었습니다. 상을 타겠다던가 하는 다른 욕심은 있을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다가 2000년도에 대도시의 한 인문계고등학교로 전근을 왔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의 부탁으로 이미 있던 문예반을 기꺼이 맡았습니다. 그리고는 회장을 불러서 앞서 제천상고의 학생들에게 주문했던 것을 그대로 다시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1달이 가고 2달이 가도록 어떻게 했다는 소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회장을 불러서 사정을 알아보았더니, 내가 요구한 사항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학과 공부 때문에 바쁘고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학생들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습니다. 속으로 굉장히 실망을 했지요. 과연 시대가 변했다더니 애들이 어쩜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하고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새롭고 중요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학생들이 처한 환경이 10년 전과는 그 근본부터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즉 대학에서 내신 성적을 반영하여 수시로 신입생을 뽑는데, 그 내신 점수에 영향을 주는 것 가운데 하나가 전국 고교생들이 참여하는 백일장의 수상 경력이었던 것입니다. 각 대학에서 주최하는 백일장에서 대상을 타면 입학할 때 혜택을 주는 제도가 그 10년 사이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학생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 상을 한 번 타보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고, 관심이 글쓰는 즐거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상장에 온통 쏠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학생들에게는 원론에 가까운 나의 요구가 오히려 이상했던 것이지요. 문학의 기초를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장 몇 달 후에 벌어질 백일장에서 상 타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런 것을 동상이몽이라고 하지요? 한 침대에서 잠자면서도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시 쓰는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인데, 학생들은 상 타는 방법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황당하고 우스운 일입니까?   그런데 학생들의 이 같은 그릇된 열망을 채워줄 선생님조차도 일선 학교에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또 문제입니다. 대부분의 국어선생님들도 문학을 다 배워서 알고 있지만, 창작하는 법은 따로 배우지를 않습니다. 대학에서 가르쳐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창작은 순전히 혼자서 궁리해야 할 몫이지요. 그러나 장래에 국어 교사를 하겠다고 해서 창작에 나서는 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창작하는 분들은 정말 가뭄에 콩 나듯 한 일입니다.   그래서 정말 일선에서 애 타는 학생들을 위해서 누군가 그에 필요한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을 했고 몇 년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기에 재주 둔한 줄도 모르고 이렇게 나선 것입니다.     각 대학에서 주최하는 문학상에는 나름대로 다 의도가 있습니다. 인재를 확보하기 위한 방편이겠지요. 그러나 그러한 행사가 학생들에게 안겨주는 좌절감은 결코 만만히 볼 것이 아닙니다. 대상은 한 명한테 돌아가는데 거기에 참가하는 학생들은 1천명에 육박하거든요. 그러니 그 한 명 때문에 나머지 1천여 명이 재주 없는 학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백일장의 맹점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관청에서 주관하는 대회가 갖는 나쁜 점을 백일장 역시 그대로 안고 있을 수밖에 없지요.   백일장은 시를 삶의 표현으로 놔두지 않고 이벤트로 만들어서 극소수에게 엄청난 영광을 돌리고는 많은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런데도 각 대학에서는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런 일을 계속 강행하고 있지요. 그렇다고 해서 나쁜 일이라고만 단정 짓기도 어렵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그런 백일장에 응모하는 것을 보면 학생들의 관심을 모으게 하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니까요.   그러나 먼 장래를 내다보고서 말하자면 그런 기획성 행사는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습니다. 생활 속에서 자연히 우러나서 시가 되어야지 어떤 행사를 염두에 두고 거기에 맞는 작전으로 시를 쓰는 것은, 오래 우려서 국물을 내려고 하지 않고 조미료를 부어서 맛을 내려는 것과 같습니다. 입맛을 확 당길지는 몰라도 몸에 좋을 리는 없겠지요.      새 학교에 와서 이런 상황을 접하게 되자, 안타깝지만, 학생들이 시를 잘 쓰는 법을 가르치지 않을 수도 없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천천히 가는 것이 옳은 길이라고 해서 빨리 가려는 학생들에게 달리는 방법을 아예 안 가르쳐주는 것도 역시 문제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나름대로 학생들이 빨리 시 잘 쓰는 방법을 연구한 것이 이 책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서둘러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쁘더라도 원칙부터 해나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은 이 세상 살아가는 모든 분야에서 법칙으로 통하는 것입니다. 시 창작이라고 해서 그 원칙에서 벗어날 리는 없습니다.  4)어른들의 시가 재미없는 사연은?     2004년 10월부터 1년 동안 시집을 1,000여 권 읽었습니다. 손에 닥치는 대로 다 읽은 것입니다. 옛날에 읽었던 것은 물론이고 최근에 나온 것까지 손에 잡히는 대로 다 읽었습니다. 학교 도서관은 물론 시립 도서관, 그리고 시집을 갖고 있는 벗들이 소장한 것까지 빌려다가 모조리 읽었습니다.   이런 무모한 짓을 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고 또 그것은 사사로운 것이어서 굳이 밝히지는 않겠습니다만, 시집 1천 권을 읽고서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시인들은 거대담론에 집착해있다는 것과, 그 결과 시에서 가장 중요한 시 읽기의 즐거움을 시인들의 시집에서는 찾기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거대담론이란 커다란 주제라는 말입니다. 즉 민족의 장래, 국가의 통일, 이 시대 문명의 폐해나 방향,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에 끼치는 영향, 생명과 환경……, 이런 것들 말입니다. 시인들의 시와 시집에서는 이런 커다란 주제들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이런 커다란 주제를 말하면서 익살스럽고 재미있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뭐, 하자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그게 쉽지는 않겠지요. 그러니까 시인들은 너무 진지한 주제를 진지하게 이야기하느라고 시가 원래부터 갖고 있는 놀이와 재미의 속성을 너무나 많이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시가 진지하고 무겁고 부담 가는 주제를 다루게 되면서 그런 분위기를 싫어하는 보통 사람들은 저절로 시로부터 멀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인문학의 위기네 시의 몰락이네 하면서, 독자를 탓할 것도 없는 일이지요.     수수께끼 하나 내겠습니다. 한 번 맞춰보기 바랍니다.       약 오르면 빨개지는 것은?   답은 뭐지요? 답은, 고추입니다. 썰렁하다구요? 썰렁하지요. 하지만 우리가 자라던 시대에는 이런 수수께끼를 들으며 낄낄거렸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요. 이와 똑같은 수수께끼는 아니겠지만, 말장난으로 이루어진 수수께끼나 삼행시 짓기를 하면서 연인들끼리 혹은 친구들끼리 아주 재미있게 보내는 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재미는 우리 시대나 여러분의 시대만의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있는 한 이런 말장난은 우리의 생활을 재미있게 하고 삶을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너무 심하면 실없는 사람이 되겠지요? 그리고 삶을 허망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예컨대, 제가 한 학생을 혼내려고 불러서 ‘너 도대체 몇 살이야?’ 그랬더니 ‘게맛살!’이라고 하더군요. 당연히 화가 치밀어서 종아리를 때렸지요. 농담도 좋지만, 상황을 구별하지 않으면 큰 오해를 사기도 하는 것입니다. 말장난은 함부로 할 게 못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말장난이 꼭 필요한 분야가 바로 문학이고, 그 중에서도 시입니다. 시를 읽으면서 내용 때문에 감동하기도 하지만, 시에서 말이 만드는 재미를 또한 놓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살면서 먹고사는 문제로 인생의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먹고사는 일에 허덕이다 보면 어느덧 세월은 가고 살 만해지면 이미 나이가 들어서 옛날 청춘 시절에 꿈꾸었던 것들은 아득해져버립니다. 그러다 보니 삶의 모든 문제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그러다 보니 시도 이런 문제를 자꾸 다루게 됩니다. 이런 커다란 문제들은 인생사의 중요한 일이기에 시에서도 중요하게 다룹니다. 통일이라든지 민족의 장래라든지 문명 비판이라든지 환경 문제라든지, 하는 모든 것들이 시의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지금 제가 읽은 1,000권의 시집 대부분이 이런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겁습니다.   그렇지만, 시가 다루어야 할 것이 꼭 그런 것이어야만 할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는 우리가 우리 생활의 느낌을 표현하는 문학의 갈래입니다. 그러니 거기에는 우리 같은 소심한 사람들의 애환과 고민, 기쁨 같은 것이 있어야 하고, 또 그런 것을 우리 스스로 표현할 줄 알아야 하며, 그런 표현을 받아주고 발표해줄 수 있는 어떤 기관이나 잡지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요? 여러분들이 고민하는 바를 시로 쓸 수 있습니까? 일기장에 써놓은 시를 발표할 잡지가 여러분 주변에 있던가요?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시의 위기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지금의 시는 무언가 큰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교과서에서 배운 시도, 서점에서 사보는 기성 시인들의 시도 모두 큰 주제에 집착해서 시가 가진 가볍고 재미있는 부분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을 간과하고 자꾸 무거운 주제를 다룬 시들만을 좋다고 강요하다보니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이 사는 많은 사람들이 시를 싫어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시가 너무 무겁고 큰 것만을 다루지 않고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작은 느낌과 감정을 그때그때 표현할 수 있는 그런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그 방법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것이구요.   기성 시인들이 쓴 시를 읽으면 여러분은 당장 부끄러움을 느낄 것입니다. 내가 쓰고 싶은 내용은 아주 작은 것인데, 시인들이 쓴 시는 시란 큰 것을 노래하는 것이라는, 보이지 않는 압력으로 작용하니까요.   따라서 여러분은 우선 그런 생각부터 벗어 던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아주 작은 감정들을 노래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생각이 좀 더 깊어지고 시 쓰는 실력이 나아지면 그때 가서 좀 더 큰 주제를 노래해도 된다. 지금은 말장난이라도 좋으니 글을 쓰고 말을 꾸미는 재미에 빠져서 시의 맛을 느끼는 일부터 하자. 시는 놀이의 일종이다.   이것이 앞으로 시를 즐기면서 평생을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여러분들은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이와 같은 생각으로 시를 가볍게 생각하고 매일 부딪치는 감정을 일기 쓰듯 쓰기 바랍니다. 시라는 거 별거 아닙니다. 엄청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맛있는 사탕 같은 것입니다. 쓰디쓴 것을 억지로 삼키려고 할 것 없습니다. 맛있는 것부터 핥아먹기 바랍니다. 지금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도 그것이고, 마침내는 그 방법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책의 끝까지 따라가면 저절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5) 엉뚱함은 예술의 원천     혹시 평소에 엉뚱한 생각을 하거나 행동을 해서 어른들한테 혼난 적은 없나요? 아마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고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것이 많은 청소년 시절에 그런 적이 없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지요. 그런 중에도 유난히 엉뚱한 짓을 많이 해서 혼나는 사람이 있지요? 있을 것입니다. 많은 학생들이 거기에 해당할 것이고, 말과 행동은 안 해도 주변에서 혼나는 친구들을 보면서 혼내는 어른들에 대한 불만을 속으로 삭인 경우도 많았을 것입니다.   이 엉뚱함은 일상생활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여러분을 둘러싼 환경은 이미 안정된 모습을 하고 있고, 그 안정된 모습이란 가장 필요한 것만을 해서 불필요한 낭비를 없애는 방향으로 오랜 세월 발전해온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런 생각 없이 어른들의 지시를 따르는 사람들이 빨리 성공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미 있는 질서와 환경이 장애가 되고 걸림돌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그 장애를 뚫어야만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됩니다. 젊은이들 가운데 새로운 길을 뚫어서 성공하는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술에서는 그 엉뚱함이 생명입니다.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예술을 성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는 경제성을 본능에 가깝게 추구하지만 인간의 내면에는 경제성과는 상관없이 놀고자 하는 욕망도 있습니다. 노는 데는 경제성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지요. 바로 놀고자 하는 이 욕망을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킨 것이 예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성의 원칙에서 벗어나는 엉뚱한 생각과 행동이 정말로 즐거움을 주는 원천이 되곤 합니다.   그러니 평소에 엉뚱한 생각을 한다고 혼나는 학생들은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술 쪽으로 방향을 바꾸십시오. 그 엉뚱함을 예술 쪽에서 살리면 칭찬 받을 수 있고,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시에서는 이 엉뚱함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하는 것을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봄에 일제히 피는 꽃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아름답지요? 당연하지요. 봄에 피는 꽃의 특징은 잎새보다 먼저 핀다는 것입니다. 잎이 피기도 전에 꽃이 피고, 꽃이 지면서 잎사귀가 나지요.   그런데 어느 날 저는 봄꽃을 보면서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가지 끝에서 밀려나오는 꽃이 꼭 똥으로 보이는 겁니다. 꽃은 나무가 누는 똥이다. 하하하. 웃기지요? 만약에 여러분이 저녁 밥상에서 아빠한데     아빠, 오늘 꽃피는 것 보니까 꼭 똥 싸는 것 같애.   라고 하면 어떨까요? 아마도 그 아빠가 예술가가 아니라면 좋은 소리를 듣지는 못할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지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라는 사람이 다른 선생님이나 교장 선생님한테     어째 꽃이 똥으로 보이네요.   라고 한다면, 겉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속으로는,     미친 눔!   할 겁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그게 궁금하거든 옆 친구한테 한 번 그렇게 말해 보세요. 그 반응을 보면 알겠지요.   그런데도 그 발상이 너무 아까워서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저는 이것을 시로 쓰기로 했습니다. 한 번 보겠습니다.     변비   뛰어가 앉으면 나오지 않고 멫 방울 힘겹게 떨구고 나와도 뒤끝이 영 개운치 못한 내가 변비 환자라는 사실을 안 것은 요 며칠 전의 일이다. 그러고 보니 창밖의 꽃나무들도 심한 변비를 앓고 있구나. 겨우내 참고 참았던 것을 밀어내느라 목련, 개나리, 진달래, 버들강아지들 바야흐로 봄볕 아래서 끙끙거리고 있다. 힘겹게 밀려나온 꽃이 지자 파릇한 화장지까지 한 장씩 톡톡 밀어낸다.     여러분이 보기에 어떤가요? 혼날 짓인가요? 그렇지는 않겠지요. 이 작품을 보고 시가 아니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유명한 시인이라고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분명히 시지요.   이 시를 써 가지고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읽어줬습니다. 그랬더니 학생들이 배꼽을 잡고 웃더군요. 그러면서 ‘뭐, 그런 시가 있담?’ 하는 반응이었습니다. 하지만 재미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 재미로 학생들은 시에 한 발 더 가깝게 다가간 것입니다.   물론 저는 지금 제가 시를 잘 썼다고 자랑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시 중에는 이런 시, 이렇게 쓰는 시도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꺼낸 것입니다. 이 시가 잘 쓴 것인지 못 쓴 것인지는 보는 사람에 따라서 각기 다를 것입니다. 사물을 인식하는 시각의 신선함으로 보면 잘 썼다고 할 것이고, 지금 유행하는 시집들의 무거운 분위기로 보면 시가 무슨 장난이냐고 힐책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그런 말에 개의치 않습니다. 재미없는 시는 그 시가 재미없는 것을 떠나서 시를 독자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마침내는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결과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재미있는 모습으로라도 독자의 곁에 머무는 것이 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 편 더 보겠습니다. 봄에 벚꽃 피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벚꽃은 어느 날 갑자기 확 피었다가 불과 열흘을 못 버티고 순식간에 져버리지요. 불어오는 봄바람에 하얀 꽃잎이 눈발처럼 날릴 때는 황홀하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확 피었다가 급히 지는 꽃의 특성 때문에 일본 사람들은 그 꽃을 가장 좋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들의 민족성에 갖다 붙입니다만, 꽃에서 국수주의의 냄새를 읽을 필요는 없겠지요. 어쨌거나 여러분은 이런 벚꽃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아무 생각 없다구요? 하하하.   무슨 폭발이라도 하듯이 피는 벚꽃을 보고, 어느 날 저는 갑자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저거, 무슨 뻥튀기 장사가 튀밥 튀겨내는 것 같다.     쌀알을 뻥튀기면 하얀 튀밥이 되어 나오지요. 벚꽃 피는 모양이 그렇게 보인 겁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떨까요? 그래도 이번에는 아까 그 똥 연상보다는 나으니, 아빠한테 혼나는 일은 없겠지요. 그렇지만 엉뚱하다는 핀잔은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엉뚱하기는 하지만 버릴 수 없는 아주 소중한 발상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시를 썼습니다. 다음이 그겁니다.     벚꽃   4월의 봄바람에 가지를 흔드는 벚나무 뿌리 밑에서는 뻥튀기 장사가 기계를 돌리고 있는 것 같다. 맹꽁이처럼 똥똥한 몸통을 스스로 풀무질한 장작불 위에서 시커먼 숯검댕이가 되도록 궁굴리며 고압계 바늘이 허용하는 눈금까지 가까스로 참았다가 손가락으로 꼭 막은 우리들 어린 날의 귓바퀴를 뻥! 하고 때리면 하얀 콧김과 함께 헤벌어진 검정 아가리로 와르르르르 쏟아지던 튀밥과 강냉이들, 지금은 벚나무 가지에서 정신없이 터지고 있다. 뒤쫓아온 우리를 동구밖에 세워두고 황톳길로 돌아간 그 뻥튀기 아저씨일까? 우주의 손잡이를 잡고 지구를 빙글빙글 돌려 겨우내 땅속에서 풀무질 하다가 뜸 잘 들었다는 표시로 아지랑이가 오르면 앞이빨처럼 하얀 강냉이들이 폭발음을 내며 검은 가지마다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계절이 뻥틀 자루를 잡고 시간을 돌리는 벚나무 밑을 지나노라면 이 가지에서 뻥 저 가지에서 뻥 뻥뻐벙뻥 뻥뻥 뻐버버버벙뻥 뻥뻥 강냉이들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귓구멍을 활짝 열어놓는다.     정신없이 터지는 벚꽃들을 보며 강냉이를 먹던 옛날의 추억을 떠올린 것이지요.   자, 이렇게 설명해놓으니까 어떤가요? 엉뚱함도 아주 버릴 것만은 아니죠? 엉뚱함도 쓸모가 있는 겁니다. 사람의 행동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사람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합니다. 여러분들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떠오르는 공상이나 엉뚱함을 굳이 없애려 하지 말고 이렇게 예술의 원천으로 활용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런 엉뚱함이 너무 심해서 일상생활을 도저히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곤란합니다. 그러나 예술의 열정은 자기 뜻대로 되는 게 아니어서 많은 유명한 예술가들이 정신병원에서 생애를 마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짜라투스투라로 유명한 니체가 그랬고, 함형수도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삶을 마감했고, 김소월도 말년에 앓던 우울증을 아편으로 달래다가 죽음을 맞습니다. 엉뚱함의 열정이 삶을 망가뜨린 경우에 해당합니다만, 그런 엉뚱함이 이룬 예술의 성취 때문에 그 뒤를 살아가는 우리는 높은 정신의 경지를 감상하고 사는 것이지요. 개인으로서는 불행이지만, 그 뒤의 인류에게는 큰 도움이 된 것입니다. 시인이 된다는 것.     우리가 시인, 시인, 하는데 그 시인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물으면 여러분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거나, 아니면 단순하게, ‘시 쓰는 사람’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에게 붙이는 호칭입니다.   그렇다면 한 번 더 묻겠습니다. 시라고는 모르는 어떤 직장인이 술을 마시고 와서 저녁에 시를 썼습니다. 그 시는 일기장 속에 들어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시인인가요? 시인이 아닌가요?   어때요? 갑갑하지요? 앞의 말에 의하면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니 시인이 분명하고, 그렇다고 시 한 편 썼다고 시인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이를 어쩌지요?   자, 우리가 보통 시인이라고 부르는 사람과 어쩌다 시를 한 편 쓴 직장인의 사이에는 이상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제부터 그 이상한 차이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장황하게 서두를 꺼낸 것입니다.     1) 시인이 되는 방법     앞서 말한 대로 시를 쓰는 모든 사람은 다 시인입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그러나 보통 앞서 시 한 편을 쓴 직장인에 대해서는 시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우리 사회의 관습 때문입니다.   우리가 시인이라고 부르는 일군의 사람들은 시 쓰는 것을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여깁니다. 그러나 생각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시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이 되는 데는 일정한 절차가 있습니다. 그 절차란 이른바 을 말합니다. 등단이란 무대에 오른다는 뜻입니다. 시인으로 등단한다는 말은 시인으로 활동하는 시인들의 무대에 오른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시인이라는 무대에서 활동하도록 해주는 어떤 단체나 조직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맞습니다. 우리가 시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보통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일정한 절차를 거쳐서 시인이라는 인정을 누군가한테서 받은 사람들이고, 그들에게 그런 자격을 인정해주는 곳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런 일을 할까요?     보통은 문학잡지사에서 그런 일을 합니다. 잡지사에서는 문학작품을 싣는 잡지를 냅니다. 보통은 정기간행물로 내지요. 거기에는 문학 전반을 다루는 잡지도 있고, 시만을 다루는 시 전문지도 있습니다. 이런 잡지들이 출판되면 그런 잡지를 사서 읽는 사람이 생깁니다. 문학에, 또는 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겠지요. 그들 가운데 시를 쓰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잡지사에서는 추천해주겠다는 광고를 합니다. 그리고는 작품을 받아서 그 중에서 좋은 작품을 쓰는 사람이 발견되면 그 작품을 잡지에 발표해줍니다. 이런 것을 추천이라고 하지요. 이러한 관문을 통과하여 잡지에 계속 시를 발표하고 그러한 시를 모아서 시집을 내면 그때부터 시인이라는 호칭이 따라붙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추천을 잡지사에서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엉뚱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각 신문사에서도 매년 초에 이런 행사를 합니다. 이름하여 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매년 말에 상금을 걸어놓고서 작품을 모은다고 광고한 다음에 응모작 중에서 가장 좋은 작품을 뽑아서 이듬해 첫날 신문에 발표하고는 수상자를 불러서 상금을 주지요. 여기에 당선되는 것을 우리나라 문학지망생들은 가장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좀 우스운 일이지요? 그런데 그 우스운 일이 왜 전통으로 굳었을까요?     잠깐 골프 얘기 좀 하겠습니다. 골프는 유럽에서 발생한 운동인데 미국에서는 메이저 대회가 있을 만큼 인기 있는 종목으로 성장했지요. 아마도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인기 있는 종목인 만큼 그것을 즐기는 사람도 많아서 대중 스포츠로 정착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바라보는 골프는 어떻습니까? 돈이 없으면 하지 못하는 귀족스포츠지요? 왜 이렇게 됐을까요? 그것은 전파과정 때문에 그렇습니다.   미국에서는 골프가 이미 대중화되었고, 마음만 먹으면 일반 시민들도 다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얘기는 비용이 크게 들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땅이 넓은 미국에서는 얼마든지 그 용지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따라서 골프를 치고 나오면서 흘린 땀을 씻을 수 있는 샤워 실이나 한 칸 있으면 누구나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에 골프가 들어오면서 성격이 약간 변했습니다. 일본은 땅이 좁은 나라입니다. 땅을 구하기 힘들기 때문에 골프장을 짓는 사람은 거기에 든 본전을 뽑아야 하고, 그러다 보니 찾아오는 손님들이 주머니를 열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방법은 간단합니다. 부대시설을 좋게 만들어서 그 사용료를 비싸게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골프를 치기 위해 골프장에 들어서면 우선 옷을 갈아입는 곳이 있고, 대기실이 있고, 휴게실이 있고, 샤워 실이 있습니다. 매점도 만들어야겠지요. 이런 시설을 아주 으리으리하게 해서는 그만큼 비싼 이용료를 받는 겁니다. 좋은 시설에서 골프를 치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골프라는 운동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시설에서 여가를 즐기는 것도 역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점점 단가가 올라가면 일반 봉급쟁이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차원으로 올라가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골프는 일반 대중 스포츠가 아니라 귀족 스포츠가 되는 겁니다. 돈이 없는 사람들은 하기 어렵겠죠.   문제는 한국의 골프 역시 신분계층을 가르는 노릇을 톡톡히 한다는 점입니다. 웬만큼 수입이 보장되는 계층이 아니고는 골프를 즐기기 어려운 것이 우리나라의 실정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미국식 골프 문화가 들어온 것이 아니고 일본식 골프 문화가 들어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위공직자들이 골프를 친다는 고발이 뉴스에서 이따금 나오는 것은 골프 문화의 이런 속성 때문입니다.     추천제도라고 하는 관행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유럽에서는 우리나라 같은 추천제도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문단을 형성하는 어떤 장치가 있겠지만, 그것은 쌀롱이라든지 아카데미라든지 하는 식의 운영방법이 있지, 마치 옛날에 과거제도처럼 군림하는 우리나라 식의 추천제도는 없다는 얘깁니다. 그들은 시를 써서 시집을 내면 그것이 시인이 되는 길입니다. 아주 간단하지요.   우리나라에 이렇게 추천제도가 정착한 것은 일본의 제도를 본뜬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오래 전부터 그런 제도가 있었고, 일제가 우리나라를 식민통치하면서 그 제도가 그대로 들어와 정착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행을 뒷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따르는 것은 우리나라에 그런 전통이 수백 년 이어져왔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즉 과거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과거제도는 지방에서 실력이 뛰어난 후보자들을 시험으로 뽑아서 중앙으로 올려보내고 중앙에서 두 차례에 걸쳐서 시험을 치른 다음에 장원을 내는 방식으로 운영되었습니다. 그리고 벼슬길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었기도 합니다. 따라서 옛날 조선시대에는 공부를 해서 과거를 치른 다음 거기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는 것만이 선비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무언가 뽑히지 않으면 자격을 주지 않는 어떤 관행이 생긴 것이지요. 바로 이런 관행이 잡지사에서 신인을 뽑는 제도로 정착하고, 거기에 신문사까지 가세해서 오늘날의 문단이라는 세력이 형성된 것입니다.   물론 근대문학 초기에 신문사에서 문인들의 작품을 신문에 실어준 것은 당시에는 문인들이 작품을 써도 딱히 발표할 지면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소설을 실어서 신문을 한 장이라도 더 팔아보겠다는 속셈도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고,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지금도 그렇게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요.     뽑히는 자가 있으면 뽑는 자도 있는 법입니다. 신춘문예건 잡지사건 어떤 추천을 통과하면 뽑힌 나와 나를 뽑은 사람의 관계가 저절로 생깁니다. 그렇게 되면 뽑는 사람의 시각에 맞는 작품이 뽑힌다는 결론이 나오지요? 무슨 얘기냐면 누구의 입맛에 맞는 작품들만 뽑힌다는 얘깁니다. 사과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과와 배, 바나나를 주고서 고르라고 하면 당연히 사과를 고르지 않겠어요? 그렇다고 배나 바나나가 잘못 된 것은 아니거든요. 이처럼 입맛에 맞지 않는 것들은 저절로 묻히게 됩니다. 묻힌 그것이 아무런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만약에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었다면 그것을 어떻게 할까요? 신춘문예 심사에서 초심을 맡은 사람이 버린 것을 본심을 맡은 사람이 주워서 당선시켰다는 얘기가 종종 들려오는 것을 보면 이런 우려는 그냥 우려로 그칠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추천해주는 잡지사가 잡지 경영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 어떤 의도를 깔고 추천을 감행한다면 그건 더욱 큰 문제를 일으키지요. 그것은 장사꾼들이 하는 흥정과 같습니다. 자격이 안 되는 사람에게 자격증을 주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질 테니까요. 추천제도 하에서 이런 일은 안 생길래야 안 생길 수가 없습니다.   결국 추천제라고 하는 것은 옛 시대 과거제도의 잔상이 남아서 전해오는 것입니다. 이런 일에 얽매이는 것은, 부끄러운 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자랑스러울 리 없는 일이지요.     이런 관행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또 다른 방법을 찾아 나섭니다. 그 방법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동인지를 내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 돈을 걷어서 시집을 내는데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참여하여 시집 한 권 안에 여러 사람의 시를 싣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동인 활동이라고 합니다. 남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자신들의 세계를 마음껏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좋은 방법이지요. 여러분도 주변에 시 쓰는 친구들이 있으면 한 번 모여서 해보기 바랍니다. 꼭 출판사에 의뢰하지 않아도 됩니다. 두 세 명이 모여서 복사기로 복사를 해서 10부만을 해도 좋고, 아니면 부모님들의 지원을 받아서 출판을 해도 좋습니다. 미숙하더라도 어릴 때 그런 일을 해본 것이 나중에 굉장한 추억이 됩니다. 사실 이런 방법으로 시를 즐기는 사람이 많아야 시가 진정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방법은 스스로 시집을 내는 것입니다.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오래도록 시를 쓰다가 50편이 되고 100편이 되면 그것을 시집으로 묶는 것입니다. 실제로 시집을 평생에 한 권만 내고도 유명해지는 사람도 있고, 한 권도 내지 못한 채 죽고서 나중에 뒷사람들이 시집을 내줘서 유명해진 경우도 많습니다. 여러분이 저항시인으로 알고 있는 윤동주 같은 분도 생전에는 시집을 한 권도 못 냈는데, 그 뒤 해방 후에 친지들이 그가 남긴 유고를 모아서 낸 시집으로 유명해진 경우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스스로 시를 쓰는 일입니다. 그것을 남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내가 즐거워서 시를 쓰면 지금 당장은 시인이라는 이름을 듣지 못해도 나중에 언젠가는 시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시인이 들어있습니다. 그 시인을 불러내어 노래하게 하는 것이 이 책을 읽는 여러분의 할 일입니다. 지금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 숨어서 잠자고 있는 시인의 방문을 두드리십시오. 똑똑똑! 2) 시의 관행과 전통을 이해하는 방법 : 남의 시집 읽기     이 정도 하면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시인이 되는가 하는 것을 대충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일이 남아있습니다. 추천제도 같은 억지 제도가 해줄 수 없는 중요한 일 한 가지가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시라는 전통과 관습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입니다.   이게 무슨 소리냐?     시는 이미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옛날부터 써서 그것이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전통의 한 분야로 굳었습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분야라고 하는 것은 그 분야에 오래도록 종사한 사람이 있었다는 얘기이고, 그러는 과정에서 다른 분야와는 다른 그 분야의 전통과 질서가 형성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시만을 놓고 보면 시라는 전통이 섰으면 시 아닌 것과 시인 것을 구별하는 방법이 확립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시인이 된다는 것은, 문단에서 추천을 해주든 말든,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온 시의 전통을 이해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시의 역사는 아주 오랩니다. 문헌으로 기록된 것을 보더라도 고구려 2대 유리왕이 지은 ‘꾀꼬리의 노래’라는 것이 있지요. 고구려는 기원전에 선 나라이니 벌써 2000년도 넘은 세월입니다. 그 후에도 계속 한자가 들어와서 기록으로 남기는 바람에 이루 헤아릴 길이 없을 만큼 많은 시들이 있습니다. 국어시간에 배운 것들만 해도 민요, 향가, 고려가요, 경기체가, 시조, 가사, 한시 같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시의 전통을 이해하는 것이 진정으로 시인이 되는 길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시의 전통을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선배 시인들이 써놓은 시를 읽으면 됩니다. 남의 시를 읽다 보면 시라는 것은 이렇게 쓰는 것이구나 하는 판단이 저절로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런 방법을 익혀서 거기에 맞춰서 나의 감정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방법을 이렇게 시 읽기가 아닌 설명으로 배우는 중이구요.     아까 앞서서 제가 시집 1000권을 읽었다고 했습니다. 1000권이나 되는 시집을 다시 읽고 또 읽은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점, 과연 정말 좋은 시가 되려면 어떤 속성을 갖추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직접 깨닫기 위한 것입니다. 이론으로 시를 배우지만 남의 시를 읽으면서 확인을 하고, 그렇게 해서 터득한 원리로 내가 직접 써보는 것이 가장 훌륭한 방법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1000권이라는 숫자에 기죽지는 말기 바랍니다. 많이 읽는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여러분처럼 이제 막 시 쓰는 일을 시작하려고 하는 마음을 먹은 경우에는 많이 익는 것이 오히려 혼란을 부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시를 인생의 목표로 삼아서 이미 등단의 과정을 마친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프로인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무모한 짓을 한 것입니다. 프로는 프로다워야 합니다. 프로답다는 것은 자신이 택한 전문 분야의 일을 전부는 아니라도 큰 줄기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1000권에 도전한 것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 앞서 시의 전통을 배우려면 남의 시를 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에 앞서 시인들의 시집이 참 재미없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그 많은 시집을 다 읽을 수는 없을 것이고, 설령 많이 읽는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좋은 작품을 골라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점이 생깁니다. 그렇다고 1000권을 다 읽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이건 정말 고민될 일입니다. 어떡하면 좋을까요?   가장 좋은 방법은 좋은 시집만을 골라 읽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겠지요. 문제는 좋은 시집을 골라놓은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변에서 좋은 시집 목록을 골라놓은 분 보셨나요? 아마 없을 것입니다. 물론 좋은 시 몇 편을 뽑아서 소개한 책들은 있겠지요. 궁여지책으로 그런 책들을 사서 읽는 것이 가장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욕심을 내서 장래에 시인이 되고자 하는 꿈을 꾸는 사람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한 일입니다. 그런 걱정을 하는 분들을 위해서 이 자리에 그 목록을 제시할까 합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1000권을 읽고 그 가운데서 이런 건 시 쓰는 사람이 꼭 읽어볼 만하구나 하는 생각을 한 시집들입니다.   □진달래꽃□김소월,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1, 미래사, 1991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윤동주,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33, 미래사, 1991 □님의 침묵□한용운,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4, 미래사, 1991 □광야□이육사,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18, 미래사, 1991 □접시꽃 당신□도종환, 실천문학의 시집 37, 실천문학사, 1986 □농무□신경림, 창비시선 1, 창작과비평사, 1975 □뿔□신경림, 창비시선 215, 창작과비평사, 2002 □탄광 마을 아이들□임길택, 실천문학의 시집 75, 실천문학사, 1990 □나그네□박목월,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30, 미래사, 1991 □청산우체국 소인이 찍힌 편지□정유화, 시작시인선 24, 천년의시작, 2003 □땅의 연가□문병란, 창비시선 26, 창작과비평사, 1981 □지도에 없는 섬 하나를 안다□임영조, 민음의 시 94, 민음사, 2000 □도화 아래 잠들다□김선우, 창비시선 229, 창비, 2003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복효근, 경계시선 8, 문학과경계사, 2002 □대설주의보□최승호, 오늘의 시인총서 22, 민음사, 1983 □노동의 새벽□박노해, 풀빛판화시선 5, 풀빛, 1984 □정선 아리랑□박세현, 문학과지성시인선 103, 문학과지성사, 1991 □오라, 거짓 사랑아□문정희, 민음의 시 102, 민음사, 2001 □붉은 편지가 도착했다□박미라, 현대시시인선 16, 현대시, 2004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문정희, 민음의 시 119, 민음사, 2004 □적멸의 불빛□오세영, 문학사상 신작시집, 문학사상사, 2001 □너는 꽃이다□이도윤, 창비시선 113, 창작과비평사, 1993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도종환, 문학동네 시집 2, 문학동네, 1994 □입 속의 검은 잎□기형도, 문학과지성시인선 80, 문학과지성사, 1989 □만국의 노동자여□백무산, 청사민중시선 33, 청사, 1988 □난초□이병기,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8, 미래사, 1991 □세속도시의 즐거움□최승호, 세계사시인선 4, 세계사, 1990 □머나먼 곳 스와니□김명인, 문학과지성시인선 71, 문학과지성사, 1988 □우리 이웃 사람들□홍신선, 문학과지성시인선 39, 문학과지성사, 1984 □산시□이성선, 시와시학 시인선 4, 시와시학사, 2000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신석정, 창비시선 86, 창작과비평사, 1990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이면우, 창비시선 211, 창작과비평사, 2001 □제비꽃 여인숙□이정록, 민음의 시 105, 민음사, 2001 □몸에 피는 꽃□이재무, 창비시선 144, 창작과비평사, 1996 □이 짧은 시간 동안□정호승, 창비시선 235, 창비, 2004 □물 건너는 사람□김명인, 세계사시인선 21, 세계사, 1992 □어딘지 모르는 숲의 기억□박남수,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29, 미래사, 1991 □별빛 속에서 잠자다□김진경, 창비시선 143, 창작과비평사, 1996 □향수□정지용,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9, 미래사, 1991 □슬픔이 기쁨에게□정호승, 창비시선 19, 창작과비평사, 1979 □백년 자작나무 숲에 살자□최창균, 창비시선 236, 창비, 2004 □기억들□송재학, 세계사시인선 107, 세계사, 2001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신용목, 문학과지성시인선 290, 문학과지성사, 2004 □멧새 소리□백석,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20, 미래사, 1991 □오감도□이상,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19, 미래사, 1991 □사랑의 기교□오규원, 오늘의 시인총서 11, 민음사, 1975 □외롭고 높고 쓸쓸한□안도현, 문학동네시집 1, 문학동네, 1994 □길은 광야의 것이다□백무산, 창비시선 82, 창작과비평사, 1999 □가난한 사랑노래□신경림, 실천문학의 시집 50, 실천문학사, 1988 □경주 남산□정일근, 문학동네, 2004 개정판 □절정의 노래□이성선, 창비시선 96, 창작과비평사, 1991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정일근, 시와시학 시인선 15, 시와시학사, 2001 □동두천□김명인, 문학과지성 시인선 9, 문학과지성사, 1979 □거미□박성우, 창비시선 219, 창작과비평사, 2002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안도현, 현대문학북스의 시 1, 현대문학북스, 2001 □오래 말하는 사이□신달자, 민음의 시 122, 민음사, 2004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이정록, 문학과지성시인선 221, 문학과지성사, 1999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유하, 열림원, 1999 □문자들의 다비식은 따뜻하다□주용일, 경계시선 20, 문학과경계사, 2003 □천지현황□김종길,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41, 미래사, 1991 □세상의 밥상에서□김은자, 세계사시인선 69, 세계사, 1999 □내 혀가 입 속에 갇혀있길 거부한다면□김선우, 창비시선 194, 창작과비평사, 2000 □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이윤학, 문학과지성시인선 159, 문학과지성사, 1995 □조국의 별□고은, 창비시선 41, 창작과비평사, 1984 □한 잔의 붉은 거울□김혜순, 문학과지성시인선 288, 문학과지성사, 2004 □장미라는 이름의 돌멩이를 가지고 있다□정영선, 문학동네 시집 42, 문학동네, 2000 □서울의 예수□정호승, 오늘의 시인총서 21, 민음사, 1982 □무화과는 없다□김해자, 실천문학의 시집 135, 실천문학사, 2001 □내 안의 열대우림□정해종, 생각의 시 1, (주)생각의 나무, 2001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정일근, 문학사상사, 2003 □지상의 편지□조성림, 우리시대의 시인 100인 선집, 문학마을사, 2002 □강릉, 프라하, 함흥□이홍섭, 문학동네 시집 29, 문학동네, 1998 □당신의 옹이에 옷을 건다□김수우, 시와시학 시인선 19, 시와시학사, 2002 □우포 늪 왁새□배한봉, 시와시학 시인선 17, 시와시학사, 2002 □어두워진다는 것□나희덕, 창비시선 205, 창작과비평사, 2001 □개□최준, 세계사시인선 14, 세계사, 1991 □청산행□이기철, 오늘의 시인총서 20, 민음사, 1982 □세상의 모든 저녁□유하, 민음의 시 56, 민음사, 1993 □사랑의 감옥□오규원, 문학과지성시인선 102, 문학과지성사, 1991 □자신 없는 것들은 걸려있다□금기웅, 문학동네 시집 68, 문학동네, 2003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나희덕, 창비시선 125, 창작과비평사, 1994 □집은 아직 따스하다□이상국, 창비시선 174, 창작과비평사, 1998 □개같은 날들의 기록□김신용, 세계사시인선 9, 세계사, 1990 □국경의 밤□김동환,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7, 미래사, 1991 □알 시□정진규, 세계사시인선 77, 세계사, 1997 □젖은 눈□장석남, 솔의 시인 11, 솔출판사, 1998 □이용악 시 전집□윤영천 편, 창작과비평사, 1988 □푸르른 날□서정주,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23, 미래사, 1991 □무지개가 되기까지는□박정만, 문학사상한국시선 18, 문학사상사, 1987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조용미, 문학과지성시인선 283, 문학과지성사, 2004 □악어를 조심하라고?□황동규, 문학과지성시인선 53, 문학과지성사, 1993 □다보탑을 줍다□유안진, 창비시선 240, 창비, 2004 □우리 낯선 사람들□이하석, 세계사시인선 3, 세계사, 1989 □처용 이후□김춘수, 오늘의 시인총서 19, 민음사, 1982 □비단길□강연호, 세계사시인선 42, 세계사, 1994 □천년의 바람□박재삼, 오늘의 시인총서 7, 민음사, 1975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황인숙, 문학과지성시인선 69, 문학과지성사, 1988 □길안에서의 택시 잡기□장정일, 민음의 시 16, 민음사, 1988 □산정묘지□조정권, 민음의 시 33, 민음사, 1991 □풀잎□강은교, 오늘의 시인총서 5, 민음사, 1974 □쓰러진 자의 꿈□신경림, 창비시선 115, 창작과비평사, 1993 □맨발□문태준, 창비시선 238, 창비, 2004 □모래인간□최승호, 세계사시인선 101, 세계사, 2000 □우리들의 양식□이성부, 오늘의 시인총서 4, 민음사, 1974 □햄버거에 대한 명상□장정일, 민음의 시 7, 민음사, 1987 □자명한 산책□황인숙, 문학과지성시인선 281, 문학과지성사, 2003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신경림, 창비시선 172, 창작과비평사, 1998 □붉은 눈, 동백□송찬호, 문학과지성시인선 239, 문학과지성사, 2000 □추억의 푸른 이끼□장병천, 현대시 시인선 14, 현대시, 2004 □지상의 그 집□홍윤숙, 시와시학사, 2004 □나나 이야기□정한용, 민음의 시 92, 민음사, 1999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황지우, 문학과지성시인선 32, 문학과지성사, 1983 □인간의 시간□백무산, 창비시선 152, 창작과비평사, 1996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김남주, 창비시선 128, 창작과비평사, 1995 □누가 두꺼비집을 내려놨나□장경린, 민음의 시 21, 민음사, 1989 □진흙소를 타고□최승호, 민음의 시 8, 민음사, 1987 □지상의 인간□박남철, 문학과지성시인선 36, 문학과지성사, 1984 □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이윤학, 문학동네 시집 22, 문학동네, 1997 □여우를 살리기 위해□이학성, 민음의 시 58, 민음사, 1994 □낯선 길에 묻다□성석제, 민음의 시 39, 민음사, 1991 □처용□김춘수, 오늘의 시인총서 2, 민음사, 1974 □김씨의 옆 얼굴□이하석, 문학과지성시인선 35, 문학과지성사, 1984 □사랑은 늘 혼자 깨어있게 하고□한승원, 문학과지성시인선 160, 문학과지성사, 1995 □벽을 문으로□임동확, 문학과지성시인선 149, 문학과지성사, 1994 □황금 연못□장옥관, 민음의 시 44, 민음사, 1992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오규원, 문학과지성시인선 4, 문학과지성사, 1978 □무인도를 위하여□신대철, 문학과지성시인선 7, 문학과지성사, 1994 □예레미야의 노래□박두진, 창비시선 29, 창작과비평사, 1981 □별의 집□백미혜, 민음의 시 112, 민음사, 2002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이성복, 문학과지성시인선 13, 문학과지성사, 1980 □지리산의 봄□고정희, 문학과지성시인선 64, 문학과지성사, 1987 □게 눈 속의 연꽃□황지우, 문학과지성시인선 97, 문학과지성사, 1990 □자유가 시인더러□조태일, 창비시선 60, 1994 □겨울날□김광섭, 창비시선 4, 창작과비평사, 1975 □그대의 하늘길□양성우, 창비시선 63, 창작과비평사, 1987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 부는□심재휘, 제3의 시 10, 문학세계사, 2002 □내 몸이 유적이다□이순현, 문학동네 시집 62, 문학동네, 2002 □변명은 슬프다□권경인, 창비시선 181, 창작과비평사, 1998 □사무원□김기택, 창비시선 185, 창작과비평사, 1999 □유리의 나날□이기철, 문학과지성 시인선 211, 문학과지성사, 1998 □수런거리는 뒤란□문태준, 창비시선 196, 창작과비평사, 2000 □이팝나무 길을 걷다□박정남, 문학세계현대시선집 180, 문학세계사, 2001 □이형기 시 99선□이형기, 도서출판 선, 2003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허만하, 솔, 2002 □두고 온 시□고은, 창비시선 213, 창작과비평사, 2002 □버려진 사람들□김신용, 시작시인선 16, 천년의시작, 2003 □바늘구멍 속의 폭풍□김기택, 문학과지성 시인선 151, 문학과지성사, 1994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김승희, 민음의 시 99, 민음사, 2000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장석남, 문학과지성 시인선 156, 문학과지성사, 1995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이윤학, 문학과지성 시인선 241, 문학과지성사, 2000 □적멸의 즐거움□김명리, 문학동네 시집 37, 문학동네, 1999 □사물의 운명□하종오, 문학동네 시집 19, 문학동네, 1997 □뒤란이 시끌시끌해서□조달곤, 작가정신, 2004 □국토□조태일, 창비시선 2, 창작과비평사, 1975 □파천무□송수권, 경계시선 1, 문학과경계사, 2001 □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조정인, 시작시인선 37, 천년의시작, 2004 □염소좌 아래 잠들다□전명숙, 시작시인선 39, 천년의시작, 2004 □상처가 스민다는 것□강미정, 시작시인선 15, 천년의시작, 2003 □몽유 속을 걷다□김신용, 실천문학의 시집 118, 실천문학사, 1998 □열 손가락에 달을 달고□이준관, 문학과지성시인선 122, 문학과지성사, 1992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송찬호, 민음의 시 22, 민음사, 1989 □10년 동안의 빈 의자□송찬호, 문학과지성시인선 148, 문학과지성사, 1994 □혼자 가는 먼 집□허수경, 문학과지성시인선 118, 문학과지성사, 1992 □고슴도치의 마을□최승호, 문학과지성시인선 46, 문학과지성사, 1985 □그리운 바다 성산포□이생진, 동천사, 1987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오규원, 문학과지성시인선 19, 문학과지성사, 1981 □북 치는 앉은뱅이□양성우, 창비시선 23, 창작과비평사, 1980 □사평역에서□곽재구, 창비시선 40, 창작과비평사, 1983 □전야□이성부, 창비시선 30, 창작과비평사, 1981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최승호, 문학 판 시 1, 열림원, 2003 □꽃산 가는 길□김용택, 창비시선 70, 창작과비평사, 1988 □어여쁜 꽃씨 하나□서홍관, 창비시선 80, 창작과비평사, 1989 □밤의 공중전화□채호기, 문학과지성 시인선 201, 문학과지성사, 1997 □대머리와의 사랑□성미정, 세계사시인선 71, 세계사, 1997 □살아있는 날들의 비망록□임동확, 민음의 시 31, 민음사, 1990 □풍경 뒤의 풍경□최하림, 문학과지성 시인선 254, 문학과지성사, 2001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신현림, 세계사시인선 41, 세계사, 1994 □화개□김지하, 실천문학의 시집 141, 실천문학사, 2002 □섬진강□김용택, 창비시선 46, 창작과비평사, 1985 □반시대적 고찰□박남철, 세계사시인선 89, 세계사, 1999 □푸른 삼각형□강유정, 청하시선 8, 도서출판 청하, 1983 □국어선생은 달팽이□함기석, 세계사시인선 86, 세계사, 1998 □1차원 나라□박순업, 세계사시인선 25, 세계사, 1992 □난간 위의 고양이□박서원, 세계사시인선 59, 세계사, 1995 □지리산 갈대꽃□오봉옥, 창비시선 69, 창작과비평사, 1988 □자본주의의 약속□함민복, 세계사시인선 31, 세계사, 1993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이수명, 세계사시인선 62, 세계사, 1995     물론 이 중에는 여러분이 소화하기 힘든 시집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몇 권 읽어보고 어렵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선 이 중에서 구미에 맞는 것부터 골라 읽으면 됩니다. 시간이 가면서 시를 보는 안목이 발전하고 정신이 성숙하면 저절로 다 이해가 될 만한 시집들입니다. 접하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순서로 배열하려고 애썼습니다만, 그게 제대로 됐는지는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의견이 다르다면 저에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의견을 감안해서 순서를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3)일기 쓰기의 중요성      장래에 시인이 될 꿈을 꾸는 학생들을 위해서 한 가지 더 이야기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러니까 장래에 시인까지 될 필요가 없는 학생들은 읽지 않고 넘어가도 되는 부분이 되겠습니다. 단순히 남이 써놓은 시를 읽는 독자로만 남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냥 넘어가도 좋습니다.   시인은 어느 날 갑자기 태어나지 않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유명해진 것 같아도 그렇게 되기까지는 굉장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시를 쓰기 위해서는 사전에 몇 가지 생활 습관을 바꿔야 합니다. 무슨 100미터 달리기를 하듯이 준비 땅! 하고서 해도 되는 일이라면 일상생활에서 버릇까지 들일 필요는 없겠지요. 그러나 시 쓰는 일은 시의 격식과 형식에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맞추는 일입니다. 그런 훈련이 되어있을 때 시로 표현할 느낌이 찾아오면 그 순간에 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실로 시를 발상하는 순간은 몇 초에 불과하지만, 몇 초 안 되는 그 짧은 순간에 시를 만들 수 있는 능력과 기술은 그 전의 꾸준한 노력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시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크게 오해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시는 천재성에 의존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즉, 굳이 시의 형식을 배우지 않아도 천재 시인은 나타나서 위대한 작품을 쓴다는 것입니다. 시의 천재는 어릴 때부터 재주를 드러내서 굳이 시 쓰는 법을 배우지 않아도 어른이 되기 전에 위대한 작품을 쓸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어린 시절에 시를 몇 편 써보고서 뜻대로 안 되면 ‘아, 나는 재주가 없는가보다!’ 하고는 등을 돌리고 맙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착각은 없습니다. 시에는 형식이 있습니다. 아무리 천재라고 하더라도 그 형식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고, 그 형식을 배우는 데는 상당한 시일이 걸립니다. 물론 그런 형식을 전혀 모르고서도 쓸 수 있는 것이 시이기는 합니다만, 역사 이래 위대한 작품은 그런 형식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고서 이루어진 작품은 없습니다.   시인의 천재성이 발휘되는 것은, 등산에 비유할 때 9부 능선 언저리쯤입니다. 누구나 노력하고 시간을 들이면 8부 능선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 형식을 완전히 배워서 익힌 다음에 그 사람의 감수성이 절묘하게 작용하여 위대한 작품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시인들이 위대한 작품을 남기지 못하고 고만고만한 작품을 쓰고 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부분이 작용하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런 위대한 작품만을 위해서 시가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는 우리 일상생활의 즐거운 도구입니다. 감상하는 것도 이런 창작의 비밀을 알 때 정말 큰 즐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위대한 작품의 위대성을 알아보는 것 역시 위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시를 쓰기 위해서 평상시에 길들여야 할 버릇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일기입니다. 일기를 꾸준히 쓰면서 시의 감성을 닦아야 합니다. 감성이라는 것은 느낌입니다. 이 감수성은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차 줄어듭니다. 그냥 두면 20대 후반에 메말라 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감수성으로 사는 자입니다. 그래서 감수성을 갈고 닦아서 나이가 들어도 세상을 그런 감수성으로 바라볼 줄 아는 그런 자세를 길러야 합니다. 그 방법이 일기 쓰기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반인들이 쓰는 일기와 똑같이 쓰면 그건 부족합니다. 일반인들이 쓰는 일기는 보통 사건을 중심으로 씁니다. 오늘 누구를 만났고, 무엇을 했으며,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났다, 하는 식이지요.   그러나 시인 지망생의 일기는 달라야 합니다. 일기의 초점을 사건이 아니라 자신의 느낌, 즉 감수성에 맞추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아침에 일어나니 안개가 끼었는데, 그 모습이 어땠다던가, 그 하얀 안개를 보니 무슨 느낌이 들었다던가 하는 그런 방식으로 말입니다. 사건을 접하더라도 그 사건의 개요만이 아니라 그 사건을 보는 나의 느낌을 적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감성과 느낌을 중심으로 일기를 오랜 세월 쓰면 어떤 사물을 보고 어떤 사건을 접하는 순간 말해야 할 느낌을 금방 잡아내게 됩니다. 시는 사건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을 전하는 갈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일기를 ‘감성일기’라고 합니다.   시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감성일기를 꼭 써야 합니다. 이것은 너무 중요해서 백 번을 강조해도 좋습니다. 감성일기를 쓰지 않는 사람은 30 중반이 못 되어 시를 떠납니다. 감수성이 메말라서 세상을 봐도 아무런 느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 시를 쓴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지요.     약간 빗나갑니다만, 말이 나온 김에 소설가를 지망하는 학생들에게도 한 마디 하겠습니다. 역시 소설을 지망하는 학생들도 일기를 쓰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시인 지망생이 쓰는 감성일기와는 약간 다르게 써야 합니다.   소설은 사회의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문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의 변화에 따라서 변하는 사람의 의식과 풍속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감수성이나 생각도 중요하지만, 소설 지망생은 현재 자신이 몸담고 있는 시대의 변화를 꼼꼼히 적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앞서 이라는 말을 했지요? 무슨 드라마와 관련하여 폐인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2003년도의 일입니다. 그런데 한 50년 세월이 흐른 뒤에 2002년도의 사건을 소설로 쓴다고 합시다. 그런데 2002년도에는 김두한의 일생을 다룬 라는 드라마가 유행했습니다. 소설에서 2002년도의 그 드라마에 반한 사람을 등장시키는데 여기서 이라는 말을 쓰면 될까요? 안 될까요? 당연히 안 됩니다. 시대 배경이 2002년인데 그 후에 생긴 말을 쓰면 안 되지요. 또 임진왜란 때 고추장을 담갔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안 되지요. 왜냐? 고추는 임진왜란 때 일본인들이 가져온 것이거든요. 그러니 그 후에는 되지만 그 전에는 안 되는 겁니다.   바로 이 점입니다. 소설은 사회의 변화를 꼭 읽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변화를 일기에 꼼꼼하게 적어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인터넷이 발달하여 자료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만, 그것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인터넷에는 거짓 정보가 하도 많아서 그것을 걸러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자료가 가장 정확한 것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꼼꼼히 기록해놓으면 세월이 갈수록 자신에게 귀중한 소설의 자료가 됩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 한 가지, 소설 지망생이 해야 할 일은 소설을 읽고 그것을 정리하는 공책을 만드는 일입니다. 소설을 읽으면 그에 대한 정리를 하는 버릇을 길러야 합니다. 즉 제목, 지은이, 출판사, 발행년도, 소설의 시점을 차례대로 적고 줄거리를 요약한 다음, 그에 대한 느낌과 문제점을 정리하는 버릇을 기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소설을 읽는 대로 정리를 해두면 나중에 그것이 좋은 자료가 되거니와, 그런 작업을 하면서 소설에 대한 깊은 이해로 나아가게 됩니다. 깊은 이해는 창작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4) 진정으로 살아있는 시는 생활을 노래한 시이다     시인들이 쓴 시는 거대담론에 빠져서 재미가 없다고 앞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된 데는 다 사연이 있습니다. 그 사연은 우리나라의 복잡하고 한 맺힌 역사에서 비롯합니다.   일제 강점기 때에 일본군 소위였던 사람이 해방 된 뒤에 장군이 되었는데, 이 사람이 4.19로 어지러운 정국을 틈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서 대통령이 됩니다. 자신의 과거를 덮기 위해 경제 살리기에 총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죽을 때까지 평생토록 대통령을 하려는 욕심으로 헌법을 고칩니다. 그것이 저 악명 높은 유신헌법이지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1979년에 자신의 부하가 쏜 권총을 맞고 죽습니다. 20년 동안 철권통치를 했던 독재자가 죽자 우리나라 정치권은 갑자기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정국은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을 정도로 혼미에 빠졌습니다.   이 때 서울을 지키던 젊은 군인 몇몇이 흑심을 품고 또 한 번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자신들이 거느리고 있던 군대를 이용하여 서울을 장악했고,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이를 위하여 휴전선을 지키는 군대까지도 몰래 빼내어 동원했습니다. 군대가 나라를 다스리는 체제로 간 것입니다. 나라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젊은 대학생들이 날마다 거리로 나와서 데모를 했고, 많은 시민들이 여기에 동참했습니다. 전국의 각 도시는 날이면 날마다 최루탄 가스로 가득 찼습니다. 권력에 눈이 먼 이들은 마침내 칼을 뽑았습니다. 전국의 도시 하나를 택하여 본때를 보이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광주를 택했습니다.   1980년 5월의 일입니다. 다른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당시 광주는 매일 같이 학생들의 시위로 최루탄이 터졌습니다. 18일 새벽에 공수부대가 도시를 점령했고, 군인들은 물러가라고 시위하는 학생들을 공수부대들은 몽둥이로 무참히 때렸습니다. 지나가던 시민들이 분노하여 군인들에게 항의하자 군인들은 이들을 역시 몽둥이로 다스렸습니다. 그러자 그 다음날 군인들의 무지막지한 행동에 항의하기 위해 수만 명의 시민들이 도청 앞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러자 군인들은 이들에게 총을 쏘았고, 그들이 모여들었던 금남로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을 변했습니다. 이것이 저 유명한 5.18광주항쟁의 발단입니다.   그 뒤로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광주에서 피를 뒤집어 쓴 그 군인들은 권력을 잡는 데 성공하고, 친구가 친구에게 대통령 자리를 물려주며 10년 동안 한국을 주물럭거립니다. 문제는 이 젊은 군인들의 움직임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고 있던 미국이 끝내 침묵을 지켰다는 사실입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반미를 외치지 않던 나라 대한민국이 이 사태를 계기로 미국의 정체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세상을 다시 보게 됩니다. 한국의 정치를 다시 보고, 미국을 다시 보고, 그리고 진정 무엇이 조국을 위하는 길인가를 깊이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잘못된 일들에 대해서 비판을 하기 시작합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것을 그대로 두고서는 아무 것도 안 된다는 믿음이 당시 민주주의를 꿈꾸던 평범한 젊은이들을 투사로 만듭니다. 그리고 군부독재를 타도하여 민주주의를 이루자는 혁명의 길로 나섭니다. 이것이 1980년대 내내 팽배했던 사회 분위기였습니다.     여러분이 시인이었다면 이런 시기에 어떻게 했을까요? 뒷짐 지고서 한가하게 세월을 노래하고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의 아름다움을 노래했을까요? 아마 그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인은 순수한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거든요. 순수하다는 것은 욕심 없이 올바르다는 것이고, 올바른 사람은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합니다. 나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이런 고민을 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시인은 순수하기 때문에 옆에서 일어나는 불행을 그냥 보고 지나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것이 가족과 이웃과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결정하는 커다란 일이라면 목숨을 바쳐서 바로잡으려고 하겠지요. 당연한 일 아닌가요?   1980년대 이후의 시는 이런 상황을 빼놓고서는 아무 것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시인들은 당시의 독재 정권이 만드는 암울한 세태에 대해 절규를 했고, 어떻게 하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 것인가 하는 고민을 했습니다. 당연히 이런 것들이 그 당시의 가장 중요한 주제로 떠올랐습니다. 그런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시도 일정한 기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의 주제가 통일이라든가 민족, 문명, 환경 같은 거대한 주제를 다루었던 것입니다.   어른들의 시가 재미없어진 것도 바로 이런 분위기와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루도 아니고 10년이 넘게 매일 같이 조국의 장래를 걱정하고, 통일을 해야 하고, 인간을 황폐화시키는 도시 문명을 비판하는 분위기가 이어져온 것입니다. 좋은 얘기도 한두 번이지 10년이 넘고 20년이 넘도록 들으면 어떻겠어요? 지겹지요? 그래서 최근 들어서는 이러한 경향에 반발을 보이는 시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주제들이 틀렸다거나 잘못된 것이라고 받아들이면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통일이 되고 진정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날까지 가장 중요한 시의 주제가 될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그러한 주제들이 너무 강해서 상상력이 딱딱해지고 그 바람에 시의 즐거움이 많이 줄었다는 것과 그런 영향으로 인해 시가 일반 독자들로부터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시는 자신이 고민하고 있는 현실의 내용을 다루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1980년대의 시인들이 그러한 거대담론을 주제로 삼은 것은 그 당시에 그들의 고민이 거기에 집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떨까요? 여러분도 그런 주제에 깊은 고민을 하고 있나요? 그렇다면 여러분들도 그런 내용을 시로 써야 할 것입니다. 어떤가요? 그런가요? 날마다 조국의 장래를 걱정하나요?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조국의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겠지만, 그게 여러분 고민의 전부는 아닐 겁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어떻게 하면 성적을 더 올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고민할 테고, 아니면 어떻게 하면 예쁜 여학생과 사귈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멋쟁이 남학생을 사귈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할 것입니다. 아니면 어떻게 하면 용돈을 더 올려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극히 사소하지만 중요한 고민들을 하며 지낼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것을 시로 써야 할까요? 답은 자명하지요? 시는 여러분들의 고민을 담아야 합니다. 당연히 공부 때문에 걱정하는 내용이 시에 담겨야 하고, 이성 친구에 대한 관심이 시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여러분의 나이에 써야 할 내용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이 평생토록 그런 내용으로만 시를 쓰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관심은 계속 바뀝니다. 그러면 시의 내용도 바뀌겠지요. 대학에 가서 운동권이 된 학생은 조국의 장래를 노래할 것이고, 평범한 주부가 된 사람은 평범한 주부의 일상을 노래하는 시를 쓸 것이고, 그럴 것입니다.   제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억지로 감정을 만들어서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를 쓸 때는 그 당시의 고민을 솔직하게 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고민하는 것을 쓰는 일에 익숙해지면 나중에 조국의 장래를 걱정하는 순간이 오고, 그때 조국의 장래를 걱정하는 아주 감동스런 시를 쓸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프로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자기 주변의 일과 감정을 시로 쓰면서 시의 재미를 느끼다가 나중에 가서 실력이 쌓이고 재능을 발휘하게 되면 저절로 시인이 되는 겁니다. 진정한 시의 즐거움과 발전은 프로페셔널리즘이 아니라 아마튜어리즘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시의 그런 즐거움을 만끽해야 할 나이이고 그런 때라는 것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5) 시평 하는 법     여러분들이 시에 관심을 갖고 살다보면 주변에서 그런 친구들을 만납니다. 시도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라 혼자서 하는 것보다는 여러 사람과 함께 나누는 것이 훨씬 진도가 빠릅니다. 재미도 있구요. 그래서 혹시 주변에 그런 친구들이 있으면 머뭇거리지 말고 동아리를 만들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매주에 한 번씩 모여서 자기가 쓴 작품을 보여주고 그들의 견해를 들으면 혼자서 고민하고 쓸 때에는 볼 수 없던 여러 가지를 보고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를 쓰는 사람들은 굉장히 콧대가 높습니다. 그래서 칭찬을 해주기를 바라지 단점을 지적 받는 것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그래서 시평을 하다가 크게 상처를 받고 싸워서 그예 시를 그만두고 마는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누구 손핸가요? 그만 두는 사람 손해겠지요? 남의 지적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발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시평을 하는 방법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고 넘어가겠습니다. 저는 26살이 되던 1985년에 시를 처음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제가 몸담고 있던 이라는 문학 동아리가 있었는데, 거기서 시평 하는 방법을 처음으로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면서 시평 하는 방법을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창문학에서 하던 그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방법을 소개하려고 하는데, 만약에 나중에 더 좋은 방법을 찾게 되면 그때 가서는 그 새로운 방법을 소개하지요.     ① 자리를 둥글게 배치한다.   먼저 자리를 둥글게 배치하는 게 좋습니다. 그래야만 모든 사람을 볼 수 있고, 어느 한쪽이 논의를 주도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둥근 배치가 어려우면 네모난 배치를 해서 될수록 가운데를 향해 집중하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사회자는 사회 보기 편한 자리에서 합니다.   사회자는 보통 모임의 회장이 합니다. 회장이 없을 때는 연장자나 부회장이 맡게 되지요. 사회자는 특별히 할 것이 없고 회의 진행을 원만하게 하면 됩니다. 대개 논의가 시작되면 두 패로 나뉘어 격론을 벌이기 쉽습니다. 그러면 사회자는 눈치를 봐가면서 그 논쟁이 개인의 감정을 상하는 단계까지 나가지 않도록 적절히 조절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행을 위한 발언 이외에는 될수록 아끼는 것이 좋습니다.     ② 시를 미리 복사해온다.   시는 모임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복사해옵니다. 사회자가 미리 확인을 해서 시를 쓴 사람에게 복사해오라고 하던가 시를 미리 받아서 복사해둡니다.   지금은 복사하기가 편해서 좋지만, 옛날에는 칠판에 쓰고 그것을 노트에 옮겨 적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복사해서 보는 것보다는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기도 합니다. 쓰여 있는 시를 맨눈으로 볼 때와 손으로 한 번 옮겨 적는 것은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눈으로 읽을 때 눈에 띄지 않던 것들이 손으로 적으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복사 얘기를 했지만, 가장 좋은 것은 시를 자신이 직접 손으로 적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집을 읽다가도 유난히 좋다고 느껴지는 시가 있으면 꼭 한 번 공책에 적어두기 바랍니다. 눈으로 대충 읽을 때와는 다른 모습이 많이 발견됩니다.     ③ 시를 돌려주고서 5분가량 읽는 시간을 준다.   시를 돌리면 그것을 읽느라고 조용해집니다. 그 상태로 5분가량 둡니다. 그러면 시를 받아든 사람은 시를 읽으면서 자신이 말해줄 부분을 표시하고 내용을 정리해둡니다. 그리고 발표할 시간이 되면 발표합니다.     ④ 사회자의 지시에 따라 지은이가 한 번 소리 내어 읽는다.   반드시 소리를 내어 읽어야 합니다. 옛날에 시는 노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리듬이 잘 살아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대부분 잊고 삽니다. 시를 소리 내어 읽을 때하고 그냥 눈으로 읽고 말 때하고는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를 느껴보는 시간이 되기도 하고, 또 시 낭송의 즐거움을 이런 때가 아니면 누리기 어렵습니다. 보통 때에 우리는 시집을 사서 눈으로 읽지 그것을 입으로 소리 내어 읽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지은이 자신이 읽는 것은 혹시 글로 적는 과정에서 잘 못 적은 것이 있는가 확인하는 차원입니다.     ⑤ 지은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한 번 더 낭송한다.   지은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한 번 더 읽습니다. 아무나 읽고 싶은 사람이 읽도록 하고, 자원자가 없을 경우에는 사회자가 지정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⑥ 자유롭게 시에 대해서 견해를 발표한다.   두 번 낭송이 끝나면 이제 사회자는 시에 대해서 자신의 견해를 밝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그 시의 문제점을 발표하기 시작합니다. 순서는 굳이 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나 한 사람의 발표가 끝나면 다른 사람이 발표하면 됩니다. 종종 서로 발표하려는 수가 있는 그 때는 사회자가 교통정리를 해주면 됩니다. 또 반대로 모두 침묵을 지키는 수가 있는데 그때도 사회자가 눈치를 봐서 시키면 됩니다.   중요한 건 이 부분입니다. 한 번 이야기가 시작되면 시의 단점을 지적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왜냐하면 습작기의 여러분이 완벽한 작품을 쓸 리 없기 때문이지요. 시의 초보자인 여러분이 쓰는 시에는 아무래도 미숙한 부분이 많이 있기 마련이고, 그런 부분은 시의 전문가가 아니라도 금세 눈에 띕니다. 그래서 그런 단점을 지적하는 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적을 당하고 나면 시를 쓴 사람은 큰 충격을 받는 것이 보통입니다. 자신은 잘 썼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경험을 처음 하면 약이 얼마나 오르는지 그날 밤에 잠을 못 이루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자존심이 너무 강한 사람은 그날 당장 시를 때려치우지요. 실제로 그래서 시를 그만 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 손해인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 것입니다. 처음부터 완벽한 사람은 없고, 완벽한 시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래서 남이 지적하는 단점을 겸허히 받아들여 더 좋은 작품을 쓰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 정도도 받아들일 수 없는 지경이면 그 사람은 시가 아니라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미워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부분을 고치라고 지적하는 것이 시평의 의도이기 때문입니다.   시평을 해주는 사람도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시를 비평하는 것은 그것의 잘못 된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인격과 관련하여 상처를 받을 듯한 발언은 절대로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시에 잘못된 점이 발견되었을 때 그 점을 지적한 뒤에 반드시 자기의 체험을 말해주어야 합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이런 문제점을 이렇게 해보니까 시 쓰기에 훨씬 좋더라, 하는 식으로요. 말하자면 그것을 고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사회자는 논쟁이 격해지면 특히 조심해서 운영해야 합니다. 논쟁이 너무 뜨겁게 진행되면 식혀주어야 하고, 너무 진행이 안 되면 잘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논쟁과정에서 개인이 상처를 입을 듯한 상황이 오면 재빨리 제지를 해서 좋게 풀도록 해야 합니다. 시평이 개인의 인격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좀 더 성숙된 토론의 장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단점을 지적해주는, 그래서 오히려 격려해주는 것이라는 점을 계속 부각시켜주어야 합니다.     ⑦ 더 이상 새로운 견해가 없으면 마친다.   모임이 진행되다 보면 잠잠해지는 순간이 옵니다. 할 이야기가 대부분 나왔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눈치를 봐서 시평을 마칩니다. 이때 사회자가 대충 총정리를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한 가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작품 발표자입니다. 작품을 낸 사람은 발언권이 없습니다. 시평이 끝날 때까지 일체 한 마디도 하지 못합니다. 만약에 글 쓴 사람에게 발언권을 줘놓으면 이상하게도 변명을 하게 됩니다. 자기가 작품을 쓴 동기가 어떻고, 어떤 구절은 어떤 의미로 썼으며, 이런 말을 하려고 했다. 뭐, 이런 얘기를 하지 않겠어요? 그러니 그건 변명이 되지요. 작자가 그렇게 얘기를 해놓고 나면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하겠어요. 시평이 진행되지 않습니다. 만약에 반박을 하면 시인을 욕하는 것이 되고요. 이래서 작품을 낸 사람에게는 일체 발언권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총무를 뽑아서 총무가 이 시평의 내용을 정리해두는 것이 좋습니다.     ⑧ 뒤풀이를 한다.   시평을 마친 뒤에 반드시 뒤풀이를 합니다. 우리는 신분이 대학생이었기 때문에 주로 막걸리를 마셨습니다만, 중고생인 여러분들은 그러면 안 되겠지요? 빵집에 가서 빵을 사먹든가, 아니면 음료수와 간단한 먹을 것을 사다가 먹는 것도 좋습니다.   왜 이것을 해야 하냐 하면, 시평을 하다 보면 감정이 상합니다. 아무리 상대의 인격을 존중하더라도 단점을 지적하는 것인데, 서로 기분이 좋을 리는 없지요. 그래서 말은 안 해도 속이 편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바로 그런 찜찜한 기분을 없애주는 것이 뒤풀이입니다. 음료수를 마시면서 시평에서 못 다한 이야기도 하고, 시평에서 마음이 상했으면 위로도 해주고, 생활하면서 겪는 고민도 털어놓고 또 고약한 성미를 지닌 선생님들 흉도 보고, 하면서 마음을 푸는 겁니다. 그러면서 한 층 더 친한 친구가 되는 것이지요.     자, 이상 장황하게 시평하는 절차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이상의 논의를 간단히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자리를 둥글게 배치한다. ② 시를 미리 복사해온다. ③ 시를 돌려주고서 5분가량 읽는 시간을 준다. ④ 사회자의 지시에 따라 지은이가 한 번 소리 내어 읽는다. ⑤ 지은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한 번 더 낭송한다. ⑥ 자유롭게 시에 대해서 견해를 발표한다. ⑦ 더 이상 새로운 견해가 없으면 마친다. ⑧ 뒤풀이를 한다.     자, 지금까지 사설이 좀 길었지요? 이제부터 진짜 시 쓰는 법으로 넘어갑시다.   3.시 창작의 원리와 실제     시를 쓰는 방법은 모두 3가지입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① 빗대어 쓰기 ② 그리듯이 쓰기 ③ 직접 말하기     애개개! 겨우 세 가지 뿐이예요? 시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데 방법이 모두 세 가지 뿐이라구요? 뭐,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은 충동이 마구 일어나지요?   그러나 사실입니다. 위의 세 가지 방법만 기억하면 어떤 내용이든지 원하는 것을 모두 시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다른 책에서는 뭐라고 설명하는지 모르겠으나 제가 한 20년 넘게 시를 쓰다 보니 이 정도로 나누면 되겠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실은 이것도 많이 늘려서 얘기한 겁니다. 아예 두 가지로 줄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하면 이론으로 설명하기는 좋아도 실제로는 조금 불편하니 그대로 두겠습니다.   너무 간단하지 않냐구요? 하하하. 별 걱정을 다 하는군요. 바둑 두는 분들의 말씀을 들으면 바둑판에서 벌어지는 전략과 계획은 무한대라고 하는군요. 바둑알은 색깔이 많아서 작전과 전략이 많은가요? 단 두 가지 색깔인데도 바둑판에 드러나는 정신의 질서와 배열은 무한대로 확대됩니다. 시 역시 그렇습니다. 이 세 가지가 혼자서, 또는 서로 섞이면서 만드는 시의 양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무한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한 가지씩 보면서 연습을 하겠습니다. 1)빗대어 쓰기 : 비유와 상징     빗대어 쓰기란 시를 비유의 방법으로 쓰는 것을 말합니다. 비유는 내 생각을 다른 것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상대가 알고 있는 것을 토대로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시는 시인이 보고 느낀 것을 노래합니다. 그런데 시인이 보고 느낀 것은 그 사람만의 체험에서 나옵니다. 특수한 것이죠. 그 특수한 체험을 그대로 쏟아놓으면 혼잣말이 되기 쉽습니다. 이렇게 혼자 느낀 내용이 어렵거나 복잡할 때 그것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이미 익숙한 것에 빗대어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자는 사바나 지역에 살기 때문에 온대 기후에 사는 우리 조상들은 볼 수 없는 짐승이었습니다. 만약에 그 옛날 우리네 할아버지들이 외국에 가서 이것을 보고 왔다면 사자가 뭐냐고 궁금해 하는 이웃들에게 뭐라고 알려주었을까요? 이거 궁금하지 않은가요? 나는 무척 궁금하던데……. 사자를 본 사람은 사자를 보지 못한 사람에게 이렇게 설명할 겁니다.   먼저 사자는 맹수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짐승에 비유할 겁니다. 조선의 호랑이가 먼저 얘기되겠죠. 그런데 사자와 호랑이는 여러 모로 다릅니다. 그래서 먼저 전체 모습이 비슷하다고 한 다음에 부분부분의 다른 점을 열거할 겁니다. 우선 목둘레에 긴 털이 수북이 난다는 것이 호랑이와는 다릅니다. 그래서 머리가 훨씬 더 크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큰 얼굴 때문에 눈이 더 강조되죠. 뭐라고 하겠어요? 왕방울 만하다고 하겠죠. 거기다가 커다란 입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되겠지요. 머리통은 몸의 절반쯤이나 되게 크고, 목엔 목도리처럼 털이 달렸고, 입은 귀밑까지 찢어지고, 두 눈은 왕방울만하고…….   이와 같이 새로운 사물에 대해 설명할 때는 그것과 비슷한 것을 통해서 재구성하도록 듣는 사람이 잘 아는 것과 비교합니다. 그래야 빨리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비유의 기능입니다. 이를 토대로 비유를 정리해보면 비유는, 이미 있는 것을 토대로 낯선 것을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앞서 사자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면 설명을 듣고서 우리 조상들이 떠올린 사자의 모습을 알 수는 없을까요? 있습니다! 어디에? 탈춤에! 탈춤에 나오는 사자들이 우리 조상들이 말로만 듣고서 머릿속에 그려본 그것입니다. 이제 알겠지요? 탈춤의 눈에 왜 커다란 방울이 달렸는지를요! 사자의 큰 눈을 보고 왕방울 만하다고 누군가 표현했고, 그 말이 비유인 줄을 모르는 순진한 할아버지가 진짜로 커다란 방울을 달아버린 것입니다. 우리 할아버지들의 머릿속에서 그려진 사자는 두 눈에 방울이 달린 괴상망측한 모습이었습니다. 하하하.     이 비유는 같은 문학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갈래 예컨대 소설이나 수필, 희곡보다 시에서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물론 다른 분야에서도 쓸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시에서 가장 화려하고 멋있게 쓰입니다. 시의 전유물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옛날부터 시인들이 써온 방법입니다. 그래서 시를 배우는 첫 번째 항목에서 이 방법을 다루는 것입니다.   비유는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비유와 상징이 그것입니다. 보통 문학이론서나 시 개설서에서는 비유와 상징을 많이 다른 것으로 다루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제가 시를 오래 쓰면서 보니까 이 두 가지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조금 다른데 시를 쓰는 원리와 방식은 동일합니다. 그래서 같은 항목으로 묶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론가와 시를 쓰는 사람은 다릅니다. 이론가는 이미 나타나있는 현상을 설명하는 사람이고, 시인은 없는 것에서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저는 지금 시의 이론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고 시 쓰는 방법을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론가들의 생각과는 어긋날 수도 있습니다.   먼저 비유를 살펴본 다음에 상징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비유는 한자로 라고 쓰는 데 이 나 는 모두 옛날 한문에서 쓰이던 표현법입니다. 비는 좀 과장되게 표현하는 것이고, 유는 하고픈 말을 직접 하지 않고 슬쩍 돌려 말해서 상대가 말하는 이의 의중을 눈치 챌 수 있도록 하는 표현법입니다. 메타포라는 서양의 이론을 번역하면서 이 두 가지를 합쳐서 라고 한 것이지요.   비와 유의 뜻을 보면 비유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직접 말하지 않고 그와 비슷한 다른 상황이나 사물에 빗대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좀 과장을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여러분의 말로 좀 뻥을 치는 것이지요.   우리 집 아이가 어렸을 때 음악 책의 악보를 보더니 꼭 콩나물 같다고 말하더군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음악 책의 음표가 하고자 하는 말이고, 콩나물이 빗대어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밤중에 켜져 있는 가로등을 보고서도 역시       아빠, 저거 콩나물 같아.   라고 말하더군요. 그러니까 가로등의 모습과 콩나물의 모습이 비슷하게 생긴 것이고, 그것을 연결시켜서 말한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비유의 시초이고 시의 출발점입니다. 누구나 새로운 풍경을 보거나 사물을 보면 이런 연상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비유는 새로 발견한 것을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 바꾸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는 콩나물을 먹었기 때문에 이미 익숙한 것이죠. 그런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음악 책에서 악보에 그려진 음표를 봤습니다. 얼마나 신기했겠어요? 그러니까 자기가 알고 있는 것 중에서 그것과 비슷한 것을 찾아내서 얘기한 겁니다. 이것이 비유의 의미이고 기능입니다.   따라서 비유는 특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재주이고 기능입니다. 다만 시에서는 그것을 최대한 활용할 뿐이지요.     자, 그러면 이번에는 비유를 활용해서 시를 쓰기 위한 예행연습을 한 번 해보겠습니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요? 그런데 사랑이 뭐냐고 물으면 누구나 머뭇머뭇 거립니다. 그건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딱히 뭐라고 설명하기 힘들어서 그런 것이죠. 그런 상황에서 비유보다 더 잘, 그리고 더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가장 흔한 것은 그냥 마주보고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죠. 그러면 받아들이는 사람은 사랑하는가보다,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러나 편지를 쓸 때는 사정이 달라집니다. 편지를 쓰는데 달랑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렇게만 달랑 써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여간 날씨는 어떻고 어쩌고 하면서 분위기를 잡은 다음에 사랑 얘기를 꺼내야 하지 않겠어요? 일종의 기교가 필요하다는 얘깁니다. 그때 비유는 사랑을 표현하는 아주 좋은 방법이 됩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라고 쓰는 것보다   내게 당신은 별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내 영혼 속에서 언제나 반짝반짝 빛나기 때문이지요.   라고 쓴다면 그것을 받아본 사람은 그냥 사랑한다고 쓴 것보다는 훨씬 더 감동을 할 것입니다. 이렇게 감동의 진폭을 크게 만들어주는 손쉬운 방법이 바로 비유입니다.   비유는 하고자 하는 말을 직접 하지 않고 다른 것에 빗대어 표현하는 거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 한 번 연습을 해보겠습니다. 앞에서 말한 사랑을 표현해보겠습니다. 먼저 사랑은 ~이다, 라고 해놓고 그것에 대해 설명을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사랑은 사닥다리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유를 말해봅니다. 한 번 해보세요. 사랑이 왜 사닥다리일까요? 제가 한 번 해볼까요?   사랑은 사닥다리다. 왜냐 하면, 높이 있는 당신에게 다가가게 해주니까.   어때요? 그럴듯한가요? 별루라고요? 하하하하. 그러면 여러분들이 좀 더 좋은 해석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 더 합니다.   사랑은 가로등이다. 왜냐 하면 당신에게 가는 길을 환히 밝혀주니까.   어때요? 이번에도 시원찮았나요? 자꾸 그렇게 구박하면 곤란합니다. 자, 여러분도 한 번 해보세요. 아무거나 갖다 붙이고서 그것을 설명해보는 겁니다. 엉뚱하면 엉뚱할수록 좋습니다. 해보셨나요? 그러면 제가 생각나는 대로 한 번 나열할 테니 여러분은 그 뒤에다가 이유를 써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동전이다. 왜냐 하면, ~   사랑은 유리창이다. 왜냐 하면, ~   사랑은 봄바람이다. 왜냐 하면, ~   사랑은 느티나무다. 왜냐 하면, ~   사랑은 이쑤시개다. 왜냐 하면, ~   사랑은 빵이다. 왜냐 하면, ~   사랑은 폭탄이다. 왜냐 하면, ~   사랑은 참새다.  왜냐 하면, ~   자, 해보셨나요? 이 밖에도 여러분이 얼마든지 만들어서 설명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주 재미있습니다. 이런 재치가 시를 잘 쓰는 바탕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비유를 활용해 보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 비유의 성질을 좀 설명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국어시간에 시를 배우면서 이것에 대한 설명을 많이 들었을 거예요. 지루하겠지만,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복습을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비유는 내 생각을 다른 사물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에 따라서 다시 두 가지로 나눕니다. 그 두 가지는 다음입니다.     -직유:   -은유:     이 차이는 엄청난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을 말로 하다 보니 그것을 연결시켜주는 말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 연결사가 있으면 직유, 없으면 은유입니다. 예를 들어 앞서 살펴본 대로 라는 생각을 한 번 보겠습니다. 이 생각을 나타내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사랑은 사닥다리 같다.     -사랑은 사닥다리이다.     무슨 차이가 있나요? 와 의 차이지요? 는 생략해도 됩니다. 이 차이를 두고 직유와 은유라고 합니다. 직유는 위에서 보듯이 라는 연결사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연결사가 들어가지 않으면 은유라고 하지요. 은 인데 곧장이라는 뜻이고, 은 인데 숨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직유는 문장의 겉으로 직접 드러난다는 뜻이고, 은유는 그런 연결사가 문장 뒤로 숨어서 안 보인다는 얘깁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직유 : ~처럼, ~같이, ~인 양, ~답게, ~하듯     -은유 :     이것이 교과서나 이론서에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시를 창작하는 사람들 쪽에서 보면 이런 것은 굳이 구별하자고 따지지 않아도 됩니다. 결국 같은 발상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을 붙이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시 쓰는 사람에게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발상을 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이번에는 앞서 제시한 비유를 시의 모양으로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기억이 안 나요? 그러면 아래를 봅시다. 앞서       사랑은 사닥다리다. 왜냐 하면, 높이 있는 당신에게 다가가게 해주니까.   라는 놀이를 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놓으면 발상은 될지언정 시가 되지는 않습니다. 시가 되려면 이 생각을 좀 더 다듬어야 합니다. 다듬는다는 것은 이 엉뚱한 연결을 그럴 듯하게 생각하게끔 살을 붙이는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살을 붙여야 할까요? 한 번 살을 붙여보겠습니다.   당신은 내게 늘 높은 곳에 계십니다. 나는 당신에게 다가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나에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은 사닥다리입니다. 나는 나의 사랑으로 높이 있는 당신에게 다가갑니다. 당신이 나를 돌아보지 않아도 나는 내가 만든 사랑으로 당신에게 날마다 다가갈 것입니다. 내게 사랑은 사닥다리입니다. 당신에게 다가가는 사닥다리.   자, 이렇게 써놓으면 어떤가요? 잘 쓴 것까지는 못 되어도 그럭저럭 시라고 할 만큼은 되지 않았나요? 시가 아니라구요? 떼끼! 하하하.   웃지만 말고 발상법을 배우기 바랍니다. 이렇게 비유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알맞은 상황을 만들어서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이 시의 기초입니다. 알맞은 상황이라는 건 비유된 두 가지 사이의 닮은 점을 계속 찾아내는 겁니다. 그러면서 찾아낸 그것을 연관 지어 설명하면 묘한 긴장을 이루면서 시가 됩니다. 이건 시에 남다른 재주가 있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시에 조금만 관심이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지금 당장 해보시기 바랍니다. 재주의 문제가 아니라 관심의 문제라고 방금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나 시인입니다. 방법을 몰라서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지요.   앞서 제가 제시한 사랑에 대한 비유 가지고 한 번씩 시를 만들어보기 바랍니다. 사랑은 동전이라는 것 갖고 한 번 더 해볼까요?   사랑은 동전입니다. 내가 앞면이면 당신은 뒷면 그래서 완벽한 사랑을 만듭니다. 내가 향하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이 향하고 당신이 향하지 못하는 곳으로 내가 향하여 당신과 내가 동그란 한 세상을 만듭니다. 둥글게 만든 그 세상으로 우리 사랑의 길을 갑니다. 만지면 만질수록 빛나는 우리 사랑은 동전입니다.     시는 이런 식으로 쓰는 것입니다. 전혀 어렵지 않지요? 어려운가요? 몇 번 연습하면 아주 쉽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누구나 시인이 한 명씩 들어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잠시 머리를 식힐 겸해서 작품 한 편 보고 넘어가겠습니다.   할미꽃   할미꽃을 보면 우리 할머니 같다.   할머니를 보면 할미꽃이 생각난다.   내 친구 할미꽃은 장미보다 예쁘다.   할미꽃 내 친구 할미꽃이 좋다.   우리 할머니 같으니까…….   난, 할머니가 좋다.     할미꽃의 모습에서 자신을 친근히 감싸주는 할머니를 연상하고 이렇게 쓴 것이겠지요. 할미꽃을 할머니에 빗대어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습니다. 여러분이 보기에는 어때요? 잘 썼나요? 못 쓴 것은 아니지만, 썩 잘 쓴 것 같지 않다구요? 제 눈에는 이것이 아주 잘 쓴 것으로 보입니다. 내막을 알면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이 학생은 한글을 잘 모르는 중학교 1학년 학생입니다. 초등학교 때 미처 한글을 떼지 못한 채 중학교로 올라온 것이지요. 특히 받침을 제대로 적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족한 부분은 지금 열심히 배우고 있으니, 머지않아 다 깨우치겠지요. 그럼 어떻게 시를 썼느냐구요? 시화전을 할 테니까 시를 써보라고 하고 난 뒤에, 마음에 걸리는 것이 이 학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학생에게는 시를 말로 쓰고 옆 학생에게 받아쓰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런 말을 옆 학생에게 했고, 옆 학생이 받아 적어서 가져온 것입니다.   어때요? 그래도 못 쓴 시로 보이나요? 아주 잘 썼지요? 저는 이 학생에게 칭찬을 많이 했습니다. 시화전을 무사히 마쳤고, 아주 즐거운 시화전이 되었습니다. 이 학생의 명예가 걸린 일이기에 이름을 밝히지는 않겠습니다만, 굳이 이 얘기를 하는 것은, 시는 특별한 사람만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그것을 일상 생활 속에서 즐기는 것이 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임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시를 더 감상하기 전에 한 가지만 더 공부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를 꺼낼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한 동안 고민했습니다. 비유와 관련하여 그 원리를 설명하는 일인데, 주로 이론가들이 즐겨 다루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이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이것까지 말하면 너무 어려워질 것 같아서 그냥 지나갈까 하다가, 아무래도 그냥 지나치면 여러 가지로 문제가 생길 듯하여 일단을 설명을 해볼까 합니다.   비유는 두 가지를 전제로 합니다. 내가 하려는 말이 있고, 그것을 표현해주는 대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라고 할 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랑이고, 그 사랑을 꾸며서 상대방이 쉽게 알아듣게 해주는 것은 동전입니다. 이것을 일러서 원관념과 보조관념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 두 가지를 구별해야만 나중에 시가 어떻게 쓰이기 시작했는가 하는 원리를 설명할 때 아주 편합니다. 여기서 사랑은 원관념이고, 동전이 보조관념이지요.   그런데 저는 이론서나 시 안내서를 읽으면서 늘 못 마땅하게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뭐냐면, 뭐든지 서양에서 들어온 이론이라고 해서 전부 이상한 말로 번역을 하는 겁니다. 대부분 일본에서 쓰던 번역어를 그대로 베껴다 씁니다. 철학이니, 문학이니, 과학이니, 하는 것들이 다 그런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그래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대부분 다 알아듣는 것이지만, 택배니, 구좌니, 하는 말들은 아직도 생소합니다. 우리가 만들어서 쓴 것이 아니라 일본인들이 영어권에서 쓰는 것을 자기들 실정에 맞게 번역해서 쓴 것을 우리가 아무런 생각 없이 가져다 쓴 결과입니다. 학문에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학자들이 쓴 논문을 읽으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는데,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기초 용어의 낯섦 때문에 그런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 원관념과 보조관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마음에 안 드는 말들입니다. 좀 더 쉽고 친근하게 번역하면 어디가 덧나는가요? 예를 들어 원관념은 원래 전하고자 하는 생각이란 뜻이고, 보조관념은 그것을 쉽게 전달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과 라고 번역하면 안 되나요? 이란 말이 여러분에게 얼마나 어려운 말인가를, 어른들은 잘 모릅니다. 그러면서 이라고 쓰면 우스워 보이죠. 참 이상한 관행이 어른들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과연 지금 이 자리에서는 어떻게 할까 보통 고민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다른 사람이 쓴 시 이론서를 보면 전부 원관념과 보조관념이라고 나올 텐데, 나만 원생각, 도우미라고 쓰면 여러분들이 고생할 거란 말입니다. 이를 어쩌지요?   해서, 일단 여러분을 덜 고생시키는 방향으로 하겠습니다. 다른 책에서 쓰는 용어를 쓰는 것으로 하고 중간중간에 여러분이 어렵지 않게 제가 만든 용어를 쓰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겠습니다. 됐지요? 자, 그러면 시작하겠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물건들이 있고, 생각들이 있습니다. 나무, 책상처럼 눈에 보이는 것도 있는가 하면 손으로는 만질 수 없는 사랑, 믿음, 꾸지람 같은 것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이름 붙은 것을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예를 들어 김철수라는 학생이 있으면 그 김철수라는 이름은 그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시켜주는 노릇을 합니다.   꼭 사람의 이름만이 그런 건 아닙니다. 장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미는 다른 꽃으로부터 그 꽃을 구별시켜주는 일을 합니다. 장미란, 해바라기나 깨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모든 이름은 그 이름이 담는 내용을 다른 이름으로부터 구별해줍니다. 세상의 만사 만물을 구별 짓기 위해서 사람이 이름을 갖다 붙인 것이지요.   그런데 세상엔 다른 점만 있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공통점도 많습니다. 비유는 바로 이와 같이 구별하도록 이름을 지은 사람들의 생각을 반대로 이루어지도록 하는 방법입니다. 세상에 전혀 관련이 없는 사물들 사이에서 같은 점을 찾아내는 방법이 비유입니다. 그래서 비유는 세상을 모두 같은 것으로 보는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앞서 라는 시를 소개했을 겁니다. 꽃과 똥을 같다고 보는 것입니다. 꽃과 똥이 같을 리 없지요.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을 나타낸 말입니다. 구별을 하기 위해서 붙인 이름이죠. 그러나 그렇게 다른 것에서 공통점을 보는 것도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고, 그 공통점이 남들이 생각을 하지 못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질 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감동을 합니다. 그 감동의 원인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세상에 꽃을 똥과 같다고 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그 공통점을 찾아내잖습니까? 남들이 미처 보지 못한 공통점을 찾아내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관련이 있고 공통점이 있다고 보는 것이 시의 생각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한 형제고, 세상의 모든 만물이 한 바탕 위에 있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세상은 한 송이 꽃이라는 말입니다. 이쯤 되면 이제 철학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거지요? 시의 철학. 우리는 지금 너무 진도를 많이 나갔네요. 시를 많이 쓰다 보면 시의 영역 바깥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 만큼 넓은 세상을 보게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에게 그 길을 안내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라는 시를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변비   뛰어가 앉으면 나오지 않고 멫 방울 힘겹게 떨구고 나와도 뒤끝이 영 개운치 못한 내가 변비 환자라는 사실을 안 것은 요 며칠 전의 일이다. 그러고 보니 창밖의 꽃나무들도 심한 변비를 앓고 있구나. 겨우내 참고 참았던 것을 밀어내느라 목련, 개나리, 진달래, 버들강아지들 바야흐로 봄볕 아래서 끙끙거리고 있다. 힘겹게 밀려나온 꽃이 지자 파릇한 화장지까지 한 장씩 톡톡 밀어낸다.     다시 한 번 얘기하지만, 제가 이 시를 인용한다고 해서 이 시가 잘 썼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깁니다. 잘 썼다던가 못 썼다던가 하는 평가는 어떤 관점과 믿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방법만을 보기 바랍니다.   꽃과 똥을 원관념과 보조관념으로 나누면 다음과 같이 되겠지요?   원관념 : 꽃 보조관념 : 똥     이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꽃이 피는 모습입니다. 그것을 똥이 나오는 상태와 비슷하다고 보고 똥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지요. 원생각은 꽃이고 그것을 여러분에게 전달해주는 도우미는 똥인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생각하는 것을 다른 것에 견주어서 표현하는 것이 시의 아주 중요한 방법입니다. 그 방법을 알아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을 잊지 말고서 이제부터는 작품을 감상해보겠습니다. 먼저 직유부터 볼까요?   봄이 되면                김준옥(3-1)   방긋방긋 들녘 길가에 피어나는 진달래는 상진이의 얼굴을 닮았고 막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는 성식이의 흰머리를 닮았네.   들녘에서 농부들이 한해 농사가 잘 되기 기원하는 마음은 마치 노총각이 올해는 장가를 갈 수 있을까 하는 마음과 같고   밤하늘에 초롱초롱 떠있는 별들은 개나리를 꼭 닮았고 사람이 아기들을 낳듯 식물들은 싹을 틔운다.     한 행마다 비유가 나오지요? 같은 매개어로 다 연결되었습니다. 그러면 원래생각과 그것을 전하기 위해 도우미로 나선 것들을 분류해보겠습니다.   원관념 상진이 얼굴 성식이 머리 농사꾼 마음 별 싹 보조관념 진달래 아지랭이 노총각 마음 개나리 아기   이렇게 되겠지요? 상진이가 누구인지 성식이가 누구인지 굳이 알지 않아도 이 시를 감상하는 데는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몰라도 그들과 같은 사람들이 여러분들의 주변에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는 이름까지 써서 아주 특수한 사람을 끌어들인 것 같지만, 잘 살피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은 그 이름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보편성을 갖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의 비유를 거꾸로 유추하면 상진이는 얼굴이 곧잘 벌게지는 사람이고, 성식이는 머리에 새치가 많이 있는 학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지요. 나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다 아는 것들입니다.   이 시에서 생각할 것은 이 시가 어디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시골입니다.  사람들이 도시로 빠져나가는 바람에 농사지을 사람이 부족하고, 쓸 만한 처녀들은 힘든 농사꾼에게 시집을 오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농촌에 사는 총각들은 장가도 못 갑니다. 이 학생이 이런 말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이 시에는 그런 정경이 잘 나타나있습니다. 농촌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고 있다는 뜻입니다. 솔직함보다 더 큰 힘과 감동도 없습니다. 그래서 시에서 억지로 꾸미려 하지 말고 솔직하게 쓰라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정답습니까? 이렇게 주변에서 찾아보는 것이 쉽고도 좋은 방법입니다.   이 작품은 특별한 기교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학생이 무슨 시의 대가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학생인데, 이렇게 빼어난 시를 쓴 것은 눈에 보이는 대로 정직하게 썼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시의 본성이 숨어있다는 뜻입니다. 자기 주변에서 눈에 보이는 것을 끌어다가 서로 연결시켜 본 것이 이 시의 원리입니다. 서로 다른 것을 연결만 시켜 놓아도 이렇듯 감동이 옵니다. 아주 쉬운 방법이면서도  큰 감동을 줄 수 있는 방법입니다. 적극 활용하기 바랍니다.     학생의 이름 뒤에 이라고 나오지요? 제가 한 동안 근무한 학교입니다. 그런데 전화로 내북중학교라고 말하면 듣는 사람은 꼭 다음과 같이 되묻곤 합니다.       내복이요?   그러면 저는 웃으면서 다시 교정해줍니다. 내복이 아니라 내북이라고요. 그래도 잘 못 알아  들어서 몇 번은 다시 얘기하죠. 한자로는 이라고 씁니다. 내복은 이죠. 속옷이라는 뜻입니다. 그래도 내북은 낫습니다. 충북 단양에는 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거기에 사는 학생에게       너 어디 사니?   하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가리요.     내북이라고 하면 어딜 가서든 이름 때문에 꼭 한 번씩 웃습니다. 내복이 연상되기 때문입니다. 전교생수는 32명(2004년 현재)이고 한 학급에 열 명 안팎입니다. 그래도 정말 내복처럼 따뜻한 학교입니다. 해마다 봄이 되면 국어시간에 학생들을 이끌고 뒷산에 올라갑니다. 뒷산을 한 바퀴 돌고 오면 딱 한 시간이 흘러갑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 시간에 한 마디 하지요.       얘들아! 시 쓰자.   그러면 아이들은 괴성을 지릅니다. 그리곤 곧 잔잔해집니다. 지난 시간에 산에 가서 봄꽃을 본 풍경이 눈에 선해지기 때문입니다. 그 느낌이 선명하게 살아있기 때문에 10분이면 시 한 편을 씁니다. 그리고는 다시 떠들지요. 그래서 이렇게 쓴 작품으로 해마다 5월이 되면 시화전을 합니다. 자기가 쓴 시로 자기가 도화지에다가 그림을 그려서 전시회를 하는 것입니다. 시는 미리 써놓았으니 작품을 만들기만 하겠지요?   이 책에서 소개되는 시들은 모두 그런 시화전에 출품되었던 작품입니다. 따라서 소속을 표시하지 않은 학생들은 모두 내북중학교 학생으로 이해해주기 바랍니다. 다른 학교 학생들의 작품일 경우에는 소속을 밝히겠습니다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닮았네 닮았어             김준석(2-1)   중국에서 날아온 황사는 제성이의 싹스를 닮았고 산에서 깝치는 토끼는 희성이를 닮았고 외양간에서 미치광이처럼 날뛰는 염소는 연호를 닮았네.   들판에서 피어나는 아지랑이는 영어선생님의 흰머리를 닮았고. 마당에서 뼝알거리는 병아리는 병덕이를 닮았고. 부엌에서 냄새나는 누룽지는 제성이를 닮았네.   비광에서 우산 들은 바보는 남주의 모습을 닮았고. 드라마에서 멋있는 원빈은 윤표를 닮았고. 김칫독에서 각이 진 깍두기는 봉진이를 닮았네.   “짱”에서 나오는 “현상태”는 영근이의 맞짱 실력을 닮았고. 학교에서 회장인 방제연은 국어선생님의 카리스마를 닮았고. 교실에서 주접떠는 정근이는 이성진을 닮았네.   학원에서 공부하는 현자는 조선시대 망나니를 닮았고. 학교에서 눈이 찢어진 순실이는 엽기토끼를 닮았고. 학교에서 잠자는 현진이는 호빵맨을 닮았네.   투성이지요? 잘 보십시오. 어떻게 시를 썼는가를. 주변의 인물들을 모두 다른 사람이나 사물이 빗대어 나타내본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이 학생 주변의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생활하는가 하는 것이 눈에 잡힐 듯이 드러나지요? 여기에 나오는 이름의 주인공들이 어떤 사람들인가까지 알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비슷한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이렇게 다른 시각으로 한 번 비춰봄으로써 내가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표현해보는 것입니다. 각 구절마다 얼마나 정겹고 새롭습니까?   병덕이가 뼝알거린다는 것은,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인데, 병덕이라는 이름 때문에 뼝덕 뼝덕 하고 불렀겠지요. 그래서 종알거린다는 말을 변형시켜 뼝알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없는 말을 함부로 만들면 안 됩니다만, 여기서는 아주 정겹게 잘 쓰였지요. 방제연은 학생회 회장을 한 녀석인데, 늘상 머리에다 뭘 바르고서 폼 잡고 다녔습니다. 빳빳하게 선 머리 때문에 카리스마라고 별명이 붙었고, 방 카리스마가 줄어서 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표현입니다.   엽기토끼, 망나니, 호빵맨은 별로 좋지 않은 내용으로 이루어졌지요? 이걸로 보아 여학생들을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이런 표현을 선택했겠지요. 남녀 합반이거든요. 얼마나 귀여운 발상입니까? 여기서 원관념이니 보조관념이니 하는 말을 떠들 필요는 없겠지요? 한 눈에 들어오는 일이니까요.   그러면 다음에는 나열이 아니라 좀 더 깊은 관찰을 담은 시로 넘어가겠습니다.   진달래 사스              박은범(2-1)   산에 사스가 유행한다. 진달래만 걸리는 사스   우리는 산에 문병을 갔다. 생각했던 것 보다 심한 사스 유행   모두들 사스가 무서워 나오지 않는다. 그나마 어쩔 수  없이 나온 진달래꽃   사스 걸리기 전에 광놈 민호와 철한테 죽는다. 불쌍한 진달래꽃들.     산에 갔다가 진달래가 피어있는 모습을 보았겠지요? 붉게 핀 진달래에서 무엇을 연상했나요? 뜨거움을 연상했지요. 뜨거움에서 다시 자신이 감기 걸렸던 경험을 떠올렸을 겁니다. 그리고 좀 더 뻥을 치느라고 최근에 중국에서 유행한 유행성 괴질인 사스라고 한 겁니다. 감기에 걸리면 얼굴이 열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모습에서 진달래가 핀 것을 그것과 연관 지은 것입니다. 시의 발상 과정이 이해가 되나요? 지금 이렇게 조리 있게 설명하지만, 이 발상은 정말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친 것입니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그 즉시 받아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달래 핀 것을 감기 걸린 것으로 하고 나니, 산에 가는 것은 저절로 문병이 되는 것이지요. 한 가지 연상 작용이 다른 연상으로 금방 넘어간 겁니다. 그렇게 해놓고서는 자기 체험을 적었습니다. 민호와 철이라는 친구가 진달래를 꺾었겠지요. 감기 걸린 데다가 그나마 꺾여 버렸으니, 얼마나 안타깝겠어요. 은 그래서 나온 결론입니다.   이란 말이 나오지요? 아마도 이것은 만든 말인 것 같은데, 은 미칠광(狂)자겠지요. 미친놈이란 뜻인데, 친구한테 미친놈이라고 하면 평상시야 그렇게 하겠지만, 그래도 시를 쓴다고 하는 마당에 그냥 미친놈이라고 하면 여러 가지로 민망하고 불편하니까 슬쩍 바꿔 표현한 것이겠지요. 바람직한 일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냥 애교로 봐줍시다.   자, 광놈이라는 표현을 보면 민호와 철이가 진달래를 어떻게 꺾었을까요? 곱게 꺾지는 않았겠지요? 아마 장난삼아 난폭하게 꺾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나이의 남학생들은 대개 그렇잖아요?   우리 학교의 봄                 이순실(3-1)   봄이 되니 왕눈을 가진 홍석영 선생님처럼 큰 눈을 가진 개구리가 울어대고   봄이 되니 손 매운 과학 선생님처럼 매운 고추들이 밭에 심어지고   봄이 되니 우리학교 공주님 조경애 선생님처럼 꽃들이 예쁜 옷을 입고   봄이 되니 우리교실을 청소하시는 체육 교생 선생님처럼 우리들의 마음마저 깨끗해지고   봄이 되니 이 모든 것들을 미술 선생님께서 봄이라는 하얀 도화지에 그려 넣으신다.     재미있지요? 봄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을 학교의 선생님들에 비유해서 시를 썼습니다. 이 역시 자기 주변에서 소재를 찾아서 썼다는 점에서 크게 칭찬 받을 일입니다. 위의 시에 선생님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 역시 어떤 이름이든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느 학교에든 그와 비슷한 분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특수한 사실이 흔한 사실을 가리키는 기능을 잘 해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시에 나왔으니 재미 삼아 한 번 알아보고 갈까요?    시의 표현대로 홍석영 선생님은 눈이 큼지막합니다. 눈 크고 얼굴은 갸름하고 키는 작달막하고 살빛은 하얗고……. 어떤 모습이 떠오르나요? 아주 예쁜 선생님입니다. 게다가 처녀 선생님이고, 집은 서울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들을 아주 좋아한다는 겁니다. 사회 과목인데 늘 아이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주려고 노력합니다. 시골의 아이들에게 인기 있지 않겠어요? 이 시에 등장한 뒤 1년쯤 지나서 결혼을 했고, 다시 1년 뒤에 아들을 낳았답니다. 개구리 울음소리에서 눈 큰 개구리를 연상하고 다시 눈이 큰 선생님을 연결시킨 것입니다.   과학 선생님은 몸집이 아주 좋은 분입니다. 그리고 한시도 자리에 앉았지를 못하고 산으로 들로 돌아다닙니다. 수업시간에도 애들을 데리고 들로 나가서 나물을 캐곤 합니다. 산과 들을 얼마나 뒤지고 돌아다녔으면 학교 근처에서 새끼손가락만한 산삼을 다 캤겠어요? 또 학교 옆 공터를 삽으로 뒤집어서 밭을 만들었습니다. 상추도 심고, 고추도 심고, 하지요. 그런 선생님의 동작에서 봄을 연상한 것입니다. 손이 맵다는 것을 고추와 연결시켰는데, 고추가 맵기 때문이겠지요? 선생님은 몸집이 좋아서 손도 큽니다. 좀 뻥을 튀기면 솥뚜껑 만합니다. 그리고 그 손을 잘 활용하여 아이들을 통제합니다. 그 큰 손으로 떠드는 놈의 등을 쾅 내려치면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지요. 안 맞아본 학생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매운 손맛에서 고추를 연상할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그런데 덩치 큰 사람이 마음은 비단결 같은 법이어서 이 선생님도 그렇습니다. 아이들이 하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만큼 마음이 여리고 좋답니다.   조경애 선생님은 메일 아이디가 입니다.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 이지요. 어떤 분위기를 풍기는 선생님인지 금방 연상할 수 있지요? 나이는 마흔 안팎인데, 옛날에는 꽤나 공주병이 심했겠다 싶답니다. 발랄하고 자존심 강하고 아이들과 잘 어울리고, 나이 마흔 줄에도 곳곳에서 고운 자태와 애교 넘치는 마음씨가 엿보이는 분이랍니다.   고동춘이라는 교생 선생님이 한 달 동안 다녀갔습니다. 사춘기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했겠습니까? 학교가 작아서 아이들 수가 적다 보니 선생님은 아이들하고 매일 축구하고 과자 사주고 그랬습니다. 여러분들 말로 인기 짱이었죠. 그리고 교생 때에는 아이들이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그래서 정말 아이들이 해달라는 것을 다 해주고 싶은 시절이지요. 그 열정과 사랑을 아이들은 느낍니다. 이 시에서처럼 아이들 교실 청소까지도 같이 하는 분입니다. 지금은 발령을 받아서 아마 어디서 훌륭한 선생님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의 주변에 있는 선생님들을 봄을 표현하는 데 끌어들였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친근하게 살아났습니까? 마지막 연에 이것을 미술로 그리는 동작으로 통합까지 했으니, 시로서는 완벽에 가깝게 마감 처리된 것이지요. 앞에서 비슷한 구조로 나열한 다음, 그것을 다시 통합시키는 발상입니다.   발가락            유제성(3-1)   다섯 명의 가족이 살고 있는 양말 속   발가락 중에 제일 큰 아빠 발가락 두 번째로 큰 엄마 발가락   그리고 아빠를 닮은 세 번째 발가락 또 네 번째 발가락은 엄마를 닮았네.   그럼 다섯 번째 발가락은 누굴 닮았을까?   그건 바로 아빠 발가락과 엄마 발가락을 모두 닮은 잘 생긴 막둥이 발가락이다.     가지런히 모여 있는 발가락의 모양을 보고 가족을 연상했지요? 그리곤 각각의 발가락을 가족구성원들에게 갖다 적용시켰습니다. 제일 큰 건 아빠, 그 다음 큰 건 엄마, 그리고 주욱 나가야겠지만, 이미 예측되는 것이기 때문에 생략하고, 마지막 새끼발가락으로 건너뛰었습니다. 전개와 생략이 잘 조화된 작품이지요.   대부분 학생들은 자신이 시를 써놓고서 그게 잘 쓴 건지 못 쓴 건지 판단을 못합니다. 이 학생도 상을 받을 때까지 자신의 이 시가 좋은 작품인지 모르고 있다가 시상식을 할 때 이름을 부르니까 놀라서 뛰어나간 경우입니다.   분필가족              정철(3-1)   분필가족이 평화롭게 지내고 있다. 우리가족의 가장은 아빠다. 아빠의 몸은 하얀 피부 엄마는 노랗게 뜬 피부 나는 뻘건 피부 동생은 파란 피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시끄러운지 아빠가 직장을 나가신다. 아빠가 다니는 직장 이름은 칠판 그런데 너무 시끄럽다. 그러다가 우리엄마가 나가신다. 우리엄마가 키 작은 여자선생님한테 잡히셔서 높이 들린다. 얼마 후 내가 그 선생님한테 잡혀서 높이 들린다. 아이들은 모두 벌을 받고 조용하다.     가족과 분필을 대비시켰습니다. 분필은 칠판 밑에 모여 있죠. 종이컵에 담겨있거나 바닥 홈에 나란히 누워있죠. 옹기종기 모인 그 모양에서 가족을 연상한 것입니다. 한 가지 색깔만이었다면 이런 상상은 어려웠겠죠? 그런데 분필의 색깔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 중에서 하얀 색 분필을 가장 많이 쓰지요. 하얀 색이 아빠가 된 사연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분필이 움직이는 공간을 가족이 움직이는 공간으로 만들어놓고서 그 상황을 서로 이은 것입니다.   선생님이 앞에서 칠판에 글씨를 쓰는 동안 이 학생은 이런 엉뚱한 상상에 빠져서 혼자서 빙긋이 웃었겠지요. 그런데 그런 엉뚱함이 그냥 낭비가 아니라 이렇게 시를 만나서 좋은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여러분의 엉뚱한 생각이 시에서는 가장 중요한 글감이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이런 시들은 발상만으로도 반은 성공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에서는 발상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얼마나 정겹습니까? 자기 주변에서 소재를 찾아 쓴 것도 칭찬 받을 일입니다.   나무는 청개구리              양영주(3-1)   나무는 나무는 청개구리 우리학교 운동장의 나무도 청개구리 산에 있는 나무와 모든 나무도 청개구리   더운 여름에는 벗고 있어야 할 옷을 가지각색으로 입고 있어서 나무는 청개구리   추운 겨울에는 입고 있어야 할 옷을 뼈만 앙상하게 벗고 있으니까 나무는 청개구리   청개구리처럼 거꾸로 행동하지만 우리에게 꼭 필요한 소중한 자연의 하나이지요.     엉뚱한 생각이지요? 생각이 엉뚱할수록 그것을 연결시키는 논리가 많이 드러납니다. 이 시에서도 그렇습니다. 청개구리는 부모님의 말을 안 듣다가 나중에 후회하지요. 개구리 아들이 하도 거꾸로 행동해서 개구리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죽어서 자신이 물가에 묻힐까봐 걱정하면서 죽은 뒤 물가에 묻어달라고 하지요. 그러면 매번 거꾸로 행동하는 아들은 당연히 양지바른 언덕에 묻지 않겠어요? 아들의 그런 뒤잡이 심성을 미리 예측하고 남긴 유언이지요. 그런데 매번 아버지의 말과 반대로 행하던 아들이 이번에는 마지막 소원이라도 들어드리겠다고 진짜로 냇가에 묻었습니다. 비가 오면 어떻겠어요? 빗물에 쓸려가겠지요? 그래서 걱정이 돼서 개굴개굴 우는 거랍니다. 이런 이야기를 시에 적용시켰습니다.   나무는 추운 겨울에 옷을 벗습니다. 더운 여름에 옷을 입지요. 잎새가 나무에게 옷인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학생은 그렇게 생각한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거꾸로 된 겁니다. 이 거꾸로 된 것에서 개구리 이야기를 떠올린 것이고, 행동을 거꾸로 하는 청개구리의 특성과 나무의 행동을 연결시킨 것입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비유의 방법에 실려서 시를 만든 경우입니다.   봄의 무도회              김이슬(3-1)   봄이 오면 산과 들에 무도회가 열려요.   여기 저기 노랑 옷, 분홍 옷 … 초록 옷. 알록달록 옷을 입고 기지개를 피며 얼굴을 내밀어요.   현진이네 뜰에서도 미란이네 마당에서도 정훈이의 마음에서도   봄이 오면 모두 색동옷을 입고 나와 온 세상이 무도회장이 돼요.     이슬, 이름이 참 예쁜 학생이지요? 실제로도 예쁩니다. 예쁜 애들은 예쁜 짓을 하느라고 운동을 잘 못하는데, 이 학생은 오래 달리기를 하면 꼭 전교 1등입니다.   간단한 원리가 눈에 보이나요? 봄이 오는 것을 무도회의 광경과 연관 지었습니다. 무도회는 춤추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아름다운 복장을 하기 마련입니다. 나무에게도 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지요. 그래서 예쁜 차림으로 나서는 무도회의 상황에다가 연결시킨 것입니다.   1연에서 봄을 무도회라고 전제해놓고, 2연에서 그 이유를 말한 다음에, 3연에서 장소를 말하고, 마지막으로 그래서 무도회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지요. 특히 3연에서 장소를 말할 때 1행과 2행에서는 실제 장소인 과 을 말하다가 3행에서는 실제의 장소가 아닌 사람의 마음속을 말하는 것은 아주 기발한 방법입니다. 사물에서 관념으로 생각을 확산시키는 방법이지요.   물론 이 학생은 이 이론을 알고 쓰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씁니다. 이것은 시가 요구하는 어떤 아름다움의 질서가 사람의 마음속에 다 들어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그런 질서를 알든 모르든 세상을 정직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보려고 하고 시를 쓰면 그것을 실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의 형제             김경수(1-1)   비는 여러 형제가 있다. 제일 큰 장마비 둘째 소나기 막내 이슬비   장마비는 말썽쟁이 아주 많은 비를 내여 많은 사람들을 아프고 힘들게 하는 비   소나기는 착한 둘째 사람들이 물 부족으로 힘들어하면 가끔씩 내려주는 착한 비   이슬비는 소심한 비 사람들이 물 부족으로 힘들어하면 아주 조금만 내려주는 소심한 비   가끔씩 비가 와서 우리 마음이 우울할 때 창문으로 흘러내리는 빗방울과 이야기를 나누어요.     비의 다양한 모습을 형제에 빗대어 표현해본 경우입니다. 먼저 형제의 관계임을 설명한 뒤 각 비의 모습을 다시 사람에 빗대어 구체화시켰고, 다시 이것을 끝에서 종합해서 정리했습니다. 아주 논리 정연한 구조와 전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표현을 통해서 각 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잘 보여줍니다. 비가 사람에게 미치는 관계와 영향을 평소에 체험하지 않으면 쓰기 어려운 시죠.   발상을 보면, 시를 쓰자고 했을 때 제일 먼저 비 온 날 창문에 흘러내리는 모습이 인상에 남았는데, 거기서 흘러내리는 비를 보다가 빗방울을 연상했고, 빗방울에서 다시 빗방울의 상태에 따라 여러 가지 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상합니다. 그리고 같은 빗방울인데도 사람들의 반응이 각기 다르다는 사실을 떠올립니다. 그래서 같은 형제이면서도 각기 다른 특징을 보이는 점과 같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거기에 비유를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발상의 과정이 이렇게 해서 정리됩니다. 결코 시를 쓰는 발상이 어려운 일이 아니죠.   빨래                       김선영(1-1)   빨랫줄에 빨래가 걸려있습니다. 남자 빤스 여자 빤스   아우 민망해 남자 빤스가 말합니다.   맞아 여자 빤스가 말합니다. 맞아 사람들이 한 번씩 힐끔힐끔 보고   정말이지 이해가 안 가 무슨 물건이라도 된다고   아우 기분 나뻐. 그래도 우리는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썬탠을 합니다.     의인화시켰지요? 의인화란 사물을 사람에 비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에 비유한다고 해서 비유가 아닌 건 아닙니다.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원리입니다.   팬티는 가장 은밀한 곳을 감추는 옷이기 때문에 빨래가 널려있어도 사람들이 뚫어지게 쳐다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힐끔거리며 볼 것은 다 보고 가지요. 하하. 마음에 은근히 걸리면서도 피할 수 없는 그런 심리를 아주 잘 잡나냈습니다.   는 가 표준어겠지요? 그러나 시에서는 그런 것이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오히려 누구나 사용하는 빤스라는 말이 더 시를 살립니다. 시에서는 맞춤법이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분위기를 전하는 데는 오히려 사투리나 맞춤법에 안 맞는 말들이 더 잘 어울릴 때가 많습니다. 도 마찬가지죠. 틀린 표기이지만,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주차장        김경애(마산 무학여고 3)   흰 선으로 둘러싸인 바둑판에 고수인 아저씨의 흰 알 초보인 아빠의 검은 알이 놓여있다. 한참 헤맨 끝에 찾았는데 서툰 아빠… 흰 선 안에 바둑알을 놓는 게 여간 쉽지 않다. 아저씨는… “뭐가 어렵냐”며 성화다. 날마다 늘어나는 한숨과 조여드는 삶의 공간에서 아빠는 흰 선과의 보이지 않는 사투를 벌이고 있다.   아빤 오늘도 바둑알을 놓을 바둑판을 찾고 있다.                2003년 경남대 제32회 전국고교생 한마백일장 운문 차상1)     주차장에서 차를 대는 상황을 바둑판의 상황에 빗대어 표현했습니다. 가지런하게 그어진 하얀 주차 선은 바둑판의 선으로 보인 것이고, 그 위에 놓여있는 차들은 바둑알로 보인 것입니다. 바둑알은 흰 색과 검정 색 단 둘 뿐이죠. 그런데 차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양한 색깔이 있는데, 주차 선을 바둑판으로 인식한 순간 나머지 색깔은 보이지 않는 것이죠. 이렇게 무리한 적용이 갑갑하고 어색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 시에서 필요합니다. 이미지를 단순화시키기 위한 것이죠. 초보 운전인지 주차에 서툰 자신의 아빠와, 숙련된 솜씨로 주차를 하는 아저씨를 비교하고서 바둑의 초보와 고수를 거기다 갖다 맞추었습니다. 전체의 시상이 바둑판의 상황과 주차장의 상황을 겹쳐놓는 방법으로 전개되고 있어서 비유를 활용한 시 쓰기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전에 무슨 운동을 하다가 목을 삐끗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형외과에 가서 엑스레이 사진을 찍었는데 의사 선생님이 형광등을 켜고 사진을 달아놓으니까 신기하게도 나의 몸속에 들어있는 등뼈의 배열이 나타나더군요. 그때 처음으로 내 등뼈의 속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등뼈의 배열은, 내가 아기들에게 보여주던 공룡의 그림책에 나오는 공룡들의 뼈와 똑같더군요. 그때 ‘아하, 내가 짐승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그리고서는 문득 느낀 바가 있어 다음과 같이 써 내려갔습니다. 길어도 이런 시 쓰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습니다.     공룡   나는 내가 여태까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오늘 알고 보니 공룡이다. 살가죽으로 뼈대를 싸고 그럴 듯한 헝겊으로 몸뚱이를 덮었지만 정형외과의 형광벽에 비친 나는 쥐라기나 백악기 어느 한 지층 속에 납작하게 박혀있어야 할 한 마리 공룡. 목에서부터 등마루를 거쳐 꼬리까지 날개처럼 돋친 스테고사우루스의 화려한 뼈들이 흑백의 필름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수억 년 내력의 탐욕과 난폭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 뼈들의 행렬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니 이제서야 모든 의문이 스르르 풀린다. 이만하면 되었다 싶은데도 마음속에서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던 물욕과 옷 밖으로 송곳처럼 치밀던 공격성, 그리고 약자한테 강하고 강자한테 약한 비굴함까지 도대체 내 마음 어느 구석에서 말미암는지 여태까지 좀처럼 알 수 없던 것들이 공룡의 뼈들 사이로 분명히 드러난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큰 코 다칠 것이라는 것을 예고하며 등줄기 따라 톱날처럼 뻗어간 우람한 뼈들. 가장 중요한 무기였던 꼬리 끝의 뿔은 엉덩이 밑의 꼬리뼈 속으로 완전히 감추었지만 수십 억 년이 지난 지금에도 전혀 진화하지 못한 채 한 마리 공룡이 내 몸 안에서 으르렁거리고 있다.     발상법을 알겠지요? 이 시에서 이야기하는 바는 인간의 탐욕성입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무언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탐욕성이 들끓는데,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공룡을 떠올린 것이고, 그 계기를 엑스레이 사진을 본 것에서 얻은 것입니다.   먼저 공룡의 뼈와 나의 뼈가 같다는 것에서 출발해서, 공룡의 난폭한 성질과 탐욕성을 나의 그런 특성을 나타내기 위해 이용했습니다. 시상을 전개시킨 순서 역시 뼈의 모양에서 심리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겉모습의 동일성에서 성격의 문제까지도 이끌어냈다는 것입니다.   운명   전생의 어느 먼 우주를 떠돌 때부터 당신은 내게 점지된 별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 마음속에서 이렇듯 아름답게 깜빡일 리 없지요.   전생의 어느 먼 우주를 떠돌 때부터 당신은 내게 점지된 달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 삶의 중심까지 이렇듯 인력으로 끌어당길 리 없지요.   전생의 어느 먼 우주를 떠돌 때부터 당신은 내게 점지된 해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 삶의 모든 곳을 이렇듯 환하게 비추어줄 리 없지요.   전생의 어느 먼 우주를 떠돌 때부터 당신은 내게 점지된 바람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 마음속에 이렇듯 힘차게 나부낄 리 없지요.     이번에는 사랑에 관한 시를 골라 봤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냥 맺어진 것이 아니고 무언가 뗄 수 없는 어떤 질긴 인연이 운명처럼 엮여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마음이 절실할수록 사랑은 무언가 그럴 듯한 운명에 의해 연결되었다고 믿는 것이지요. 그래서 옛날에도 삼신할미나 월하노인 같은 어떤 신이 맺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랑에 관한 시 중에는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라 무언가 보이지 않는 손길인 운명이 작용한다고 노래한 것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감정이 아주 애절하게 잘 전달되는 특성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누구나 그런 이상에 가까운 아름다운 사랑을 그리는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태까지 잘 따라온 학생은 이 시의 비밀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변치 않는 어떤 존재들에 잇따라 연결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한 것이죠. 따라서 원생각은 사랑하는 당신이지만 당신이라는 그 존재를 알리기 위해 도우미로 나선 말들은 별, 달, 해, 바람입니다.   비슷한 구절과 구조가 반복되면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익숙함을 느낍니다. 음악에서 아주 중요한 요인이죠. 시에서는 그것을 운율이라고 합니다. 일종의 가락인 셈입니다. 이 시에서도 별, 달, 해, 바람으로 바뀌어 나타나지만, 각 연의 구조는 똑같습니다. 읽으면서 속도가 붙기 마련이죠. 그 속도에 빨려들어 갑니다. 사람에게 시를 익숙하게 하는 방법 중의 한 가지입니다.   은행   전생의 쥐라기 하늘에서 띄운 내 영혼의 꽃가루가 무수한 기억의 퇴적층을 뚫고 활짝 편 당신의 가지에 내립니다.   받아주셔요. 내 고단한 사랑을. 당신이 아무리 먼 곳에 있어도 당신이 아무리 먼 세월 뒤에 있어도 내 영혼은 꽃가루가 되어 당신의 사랑을 찾아갑니다.   받아주셔요. 전생의 쥐라기 하늘에서 당신께 띄운 내 영혼의 꽃가루를.     우리가 흔히 보는 은행나무는 참 독특한 식물입니다. 우선 오래 산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500년, 1000년도 삽니다. 청주에는 고려 때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장수하는 이면에는 병충해에 강하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그런데 은행나무가 이런 장수를 누리는 데는 지구가 주는 시련을 몇 억 년째 이겼기 때문입니다. 은행나무는 공룡이 살던 시절에도 있던 나무랍니다. 놀랍지요? 공룡은 쥐라기, 백악기 때 최전성기를 누리지요. 그리고는 어느 순간 전멸하고 맙니다. 은행나무의 또 다른 특징은 암수가 서로 다르다는 점입니다. 물론 암컷 나무에서만 열매가 열립니다. 그러면 주변에 수컷 나무가 있어야 수정이 된다는 얘기겠죠. 어떻게 수정을 할까요? 암컷 나무에서 꽃이 피기 시작할 때 수컷 나무에서는 꽃가루를 뿌리는 겁니다. 그러면 꽃가루가 바람을 타고 암컷 나무에게 날아가서 수정되는 것이죠.   나무에게 암수가 있다는 사실과 마치 동물처럼 꽃가루를 날려서 수정을 한다는 사실. 무언가 신경을 탁 건드리는 바가 없나요? 나는 그런 은행나무에서 오래 된 사랑 법을 느꼈습니다. 천 년을 살고 수억 년 전부터 목숨을 버티어 오늘까지 살아온 은행나무의 특성을 이용해서 사랑을 노래한다면 무언가 절실한 느낌을 주겠지요. 그래서 쓴 것입니다.   1) 이재무 유성호 편, 전국고교백일장수상작품집, 천년의시작, 2003 이하 청소년백일장 작품들은 모두 이 책에서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자, 한 편을 더 살펴보고서 다음 단계인 상징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수렵도          박윤배   달리는 흰 말의 안장 위에서 상반신을 뒤로 젖힌 채 작은 체구의 사내가 달리고 있다. 우둔한 20대의 화살촉을 뽑아 아직도 푸르게 뛰는 수렵도의 사내처럼 펄떡펄떡 살아있기로 한다. 청년기가 지나더라도 포획된 용기와 젊음을 남기기 위하여 은밀히 은밀히 그려놓는…… 부장품으로 남길 시를 쓰는…… 내 스무 살의 수렵도.   나는 내 시대의 젊음을 위하여 수렵도를 그린다. 탄피 흩어진 이 터의 숲을 무너뜨리고 넝쿨로 기어드는 어둠 따위는 쏘아 넘기고 한숨뿐인 포획물을 끌고 돌아올지라도 저녁노을 뭉개는 어둠 자락을 빈 도시락 가득 채워올지라도 달아나는 노루와 사슴을 겨누고 있다. 불멸을 끌고 산 속을 달려 황산벌의 갈대숲 새떼들 날리며 달려 백두까지 오르고 있다. 그렇게 젊은 날을 살아있던 날의 함성을 부장품으로 남긴 한 사내의 수렵도.     이 작품은 1985년 어느 대학의 신문에 실린 작품입니다. 대학문학상의 수상 작품이죠. 상을 받았으니까 잘 썼다는 뜻이겠죠? 여러분이 보기에 어떤가요? 발상법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겠죠?   시인은 수렵도를 보고 있습니다. 수렵도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는 것이 유명합니다. 벽화 중에서도 무용총이라고 하는 벽화의 수렵도가 제일 유명하죠. 여러분도 많이 보았을 겁니다. 무용총은 벽화에 춤추는 인물들을 그려 넣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순 우리말 쓰기를 좋아하는 북한에서는 춤 무덤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수렵도는 어때요? 수렵도 역시 북한에서는 사냥그림이라고 합니다. 수렵도라는 말에 이미 익숙해진 사람에게는 사냥그림이라는 말이 어쩐지 좀 늘어진 듯한 느낌을 주지요? 말의 습관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뭐, 어느 수렵도를 보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요는 시인은 수렵도를 보고 있고, 그 수렵도를 보면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엉뚱한 생각이란 무엇인가요? 수렵도는 힘찹니다. 당연하지요. 짐승을 사냥하는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화면에는 사슴과 범이 있습니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는 쉽지 않은 사냥이죠. 그런 힘찬 기상이 넘치는 그림을 보면서 무얼 떠올릴까요? 절망이나 우울함 같은 것은 아니겠지요? 당연히 힘찬 기상과 관련이 있는 내용일 겁니다.   시를 읽어보면 시인이 떠올리는 것은 자신의 젊은 날입니다. 수렵도는 힘찬데, 바로 저것처럼 자신의 젊은 날도 힘차게 살아야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하면서 사는가요? 이 시인이 젊은 날에 이루고 싶은 꿈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시를 쓰는 일입니다. 좋은 시를 쓰는 일이지요. 이것이 이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발상은 이렇게 된 겁니다. 먼저 수렵도를 봅니다. 그림이 힘차지요. 거기서 무언가 강한 힘을 느낀 겁니다. 그 힘은 곧 젊음을 떠올립니다. 젊음이 이루는 것은 희망이지요. 그 희망 중에서 자신이 하고픈 것, 즉 시를 쓰는 일입니다. 그래서 먼저 수렵도의 사내 모습을 보여준 다음에 그 사내처럼 나도 힘찬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고 뒤이어 시를 쓰고 싶다는 욕심을 말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시에서 정작 하고픈 말은 앞부분의 1연에 다 나옵니다. 뒷부분의 2연은 이러한 희망을 한 번 더 반복해서 보여준 것이 되겠습니다. 과 까지 나아간 것은 용맹한 기상으로는 다 좋은데 너무 많이 나가서 좀 허풍스럽다는 생각도 조금은 듭니다. 그러나 전체의 흐름을 보면 허물이라고 보기는 좀 어렵겠죠. 그런 기상은 젊음의 특권이랄 수도 있으니까요.   자, 한 가지 문제를 내겠습니다. 맞춰보기 바랍니다. 이 시에는 문장 구조상 앞 뒤 문맥이 잘 맞지 않고 어긋나는 부분이 둘 있습니다. 어디 어디가 그런지 한 번 맞춰보기 바랍니다.   우리가 완벽한 시를 보고 많이 배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 완벽하면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시작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시를 배우는 단계에서는 좀 허술하고 잘 정리가 안 된 작품들을 보는 것이 시의 원리를 배우는 데 더 많은 것을 얻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약간 문제가 있는 작품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형편없는 작품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작품은 발상만으로도 대단한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여러분이 확인할 수 있잖습니까? 다만 여기서는 그런데도 간간이 보인 허점을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작품의 발상이 좋아도 때로 허물이 있는 법이고, 그것을 찾을 줄 알아야 시 쓰는 법을 빨리, 그리고 잘 배울 수 있습니다.   자, 찾아봤나요? 잘 안 보인다구요? 당연하지요. 잘 안 보여야 정상입니다. 이 시 속의 문제점을 찾아낼 정도이면 여러분은 정말 눈이 매우 날카로운 사람입니다. 평론가로 나서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먼저 1연 1~3행에 문제가 있습니다. 뭐라구요? 다시 봐도 안 보인다구요. 하하하. 당연하지요. 이렇게 가르쳐 주어도 잘 안 보이는 것이 시 속의 단점입니다. 자, 보겠습니다.   달리는 흰 말의 안장 위에서 상반신을 뒤로 젖힌 채 작은 체구의 사내가 달리고 있다.     어때요? 밑줄을 쳐놔도 모르겠어요? 달리는 동작이 겹쳤지요? 달리는 말 위에서 사내가 달린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얘깁니다. 사내는 가만히 있고 말이 달리는 것입니다. 달리는 말 위에서 또 달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분명히 틀렸지요? 지은이도 미처 눈치 채지 못한 부분입니다.   또 한 군에 있는데 찾아보세요. 못 찾겠다구요? 4행에 있습니다. 그래도 못 찾겠죠?       우둔한 20대의 화살촉을 뽑아     그래도 못 찾겠어요? 그럼 가르쳐 주죠. 이 문젭니다. 그래도 몰라요? 무얼 뽑았나요? 화살이 아니라 화살촉을 뽑았지요? 화살촉을 뽑으면 어떡하나요? 화살을 뽑아 쏘아야지 화살촉을 뽑아 쏘면 안 되잖아요? 그렇죠?   웃기죠? 전문가 시인들도 이따금 이런 실수를 한답니다. 그런 실수를 통해서 우리는 배우면서 날카로운 눈매를 길러 가는 겁니다. 그런 눈매를 갖추면서 자신의 작품에 생기는 실수를 줄여 가는 것이죠.   이 시인도 나중에 이런 실수를 깨닫고 시집에 실을 때는 고쳤습니다. 하하하.   시를 읽다가 참 잘 쓴 시를 만나면 오래도록 그 이미지가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감탄에 감탄을 하다가 나중에는 질투가 납니다. 왜 나는 저런 시를 쓸 생각을 못했을까? 수렵도를 본 것은 이 시인만이 아니잖습니까? 나 자신도 맨날 수렵도를 보면서 왜 그것을 이 시인처럼 시로 쓸 생각을 못했을까 하고 탄식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은근히 질투가 나서 그보다 더 좋은 시를 한 번 써보겠다고 벼르는 것이죠. 그래서 1985년에 이 시를 접하고는 마음속으로 언젠가는 한 번 수렵도를 소재로 이보다 더 좋은 멋진 작품을 쓰리라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꿈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발상을 먼저 빼앗겼기 때문이지요. 시에서는 발상이 제일 중요합니다. 동일한 소재라고 하더라도 어떤 발상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서 작품의 수준이 천차만별이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좋은 발상으로 쓴 시를 보면 질투가 나는 겁니다. 언젠가는 쓰고 말아야지! 하고 결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1985년에 이 작품을 봤으니 실로 20년만에 저도 라는 작품을 썼습니다. 그러나 제 작품이 위의 작품보다 더 잘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발상을 먼저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한 번 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절대로 발설은 하지 마십시오. 만약에 어느 작품이 안 좋다고 말한다면 박시인이나 저, 둘 중의 하나는 상처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속으로만 판단하고 한 번 빙그레 웃고 말기를 바랍니다.   수렵도   내 안에는 커다란 동굴이 있다. 컴컴한 그곳으로 들어가면 깊은 어둠에 익어 가는 속도로 개이는 눈앞에 벽화가 나타난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또 할아버지가 연꽃 하늘 위의 북두칠성에서 걸어나와 내 젊음의 뒷편에 그린 수렵도.   왼여밈 한 허리를 질끈 동인 사내가 디귿(ㄷ)자로 굽은 활을 가슴 가득히 끌어안고 굽이치는 산봉우리를 훌쩍 뛰어넘는다. 꽁지로 달겨드는 헛살 소리에 달아나던 범이 놀라 고개를 돌릴 찰라 이마 한 복판의 임금 왕짜 무늬에 꽂히며 나뒹군 포획물에서 부르르 깃을 떠는 대우전. 방금 넘어온 산봉우리들이 말발굽 아래 엎드려 등성이 너머로 새벽을 쏘아 올린다.   뭉툭한 명적(鳴鏑) 하나 가만히 산 너머로 날리면 어둠 속 곳곳에 박혀있던 젊은 날의 꿈들이 매화포처럼 와아 솟아오르고 반구비로 날아오르던 명적 소리, 어두운 밤하늘의 배경으로 올라가 지상의 길을 비추는 별이 된다. 그 별빛 속으로 영혼의 더듬이를 내밀며 비로소 중심을 잡는 청춘의 뼈.   세월은 흘러도 벽화는 남는다. 흘러간 세월의 길이만큼 동굴은 스스로 더욱 깊어져 지상의 덧없는 꿈들이 사위어갈 때 마늘과 쑥을 먹으며 인간을 꿈꾸던 첫새벽의 빛과 말발굽 소리로 지평선 저쪽을 발 밑까지 끌어당기던 할아버짓적 기상이 천장과 벽의 딱딱한 돌 속으로 파고든다.   동굴 속으로 들어간 나의 일은 가없는 화폭 속에 얼어붙은 꿈을 깨우는 것. 할아버지의 영혼이 새겨놓은 수렵도 속의 꿈을 불러 달리다 멎은 그의 말발굽을 지상에 옮겨놓는다. 그러면 시위처럼 팽팽해진 벌판 위로 동굴 벽에서 방금 살아난 꿈들은 쏜 살 같이 달려나가고 그 꿈을 타고 달려간 사내들과 함께 무용총의 벽으로 돌아올 때까지 나는 달리는 말의 안장 위에서 가슴 가득히 활을 당긴다.     그러면 상징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빗대어 쓰기의 두 번째 방법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론가들은 비유와 상징을 다른 것으로 설명합니다만, 시를 쓰는 쪽에서 보면 같은 원리에 해당합니다. 다만 시에 나타나는 결과는 다르게 보입니다.   비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1:1로 대응합니다. 즉       사랑은 사닥다리다.   라고 했으면 이 비유는 의 대응이 쉽게 눈에 띕니다. 말하고자 하는 원생각이 사랑이라면, 사닥다리는 그것을 전해주기 위한 도우미이지요. 로 정확히 맞습니다.   그러나 상징은 그렇지 않습니다. 상징은 1:1이 아니라 입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나는 어려서 어렵게 자랐어. 그래서 내게는 어둠이 많아.   라고 했다고 칩시다. 여기서 은 무슨 뜻인가요? 아픔? 돈 없음? 쪼들림? 마음의 상처? 아픈 추억? 괴로움? 가족이 없음? 이 중에 무엇일까요?   자, 이와 같이 이 어둠이라는 말은 한 가지 뜻으로 정리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문장 때문에 그렇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은 사실을 가리키는 말인데, 뒤의 어둠이란 말은 그것을 뭉뚱그려 나타내는 비유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직유나 은유처럼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1:1로 대응하는 것도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1:1로 대응한다면 비유라고 하면 되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안 되고 1:여럿이 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그리고 원관념이 없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읽는 사람이 알아서 짐작할 뿐이죠.   이렇게 앞 뒤 정황을 참작해서 여러 가지 뜻을 한꺼번에 지니는 것을 상징이라고 합니다. 잘만 쓰면 시에서는 굉장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상징이란 말은 영어의 심볼(symbol)을 번역한 것입니다. 한자로는 이라고 씁니다. 이 은 원래 하늘에서 천체가 움직이면서 나타내는 조짐을 뜻합니다. 은 천체의 움직임에 따라서 땅에 나타나는 기운의 양상을 말합니다. 하늘의 기운에 따라서 지상에 기후가 변하고 그에 따라 생물들이 나타내는 변화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둘을 합쳐놓은 상징은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나타나는 조짐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죠.   그러면 앞서 말한 이 내포하고 있는 것은 무슨 뜻일지 알아봅시다. 그런데 이것은 그 말을 한 사람 이외에는 이것이다, 라고 분명하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그 뜻을 유추할 뿐이죠. 그러니까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안 좋게 생각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고 보면 되겠죠. 예를 들면 가난, 불화, 굶주림, 이별 같은 것들이 이 범주에 들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상징은 느닷없이 나타나서 많은 뜻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잘만 쓰면 비유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잘못 쓰면 애매모호해서 오히려 시의 분위기를 망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막 시를 배우려고 하는 여러분들은 함부로 아는 체하면 안 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꼭 기억하기 바랍니다.     7월 중순에 3학년 교실에 수업을 하러 들어갔습니다. 보통 7월초에 기말고사를 보니 기말고사가 끝나면 방학이 코앞에 다가와서 대부분 분위기가 어수선합니다. 게다가 7월 중순이면 무더위가 시작되는 때지요. 가만히 앉아 있어도 더워서 헉헉거리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수업이 제대로 될 리가 없지요. 제가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한 학생이       선생님, 우리 물놀이하러 가요!   하는 겁니다. 그러자 마치 메아리라도 울리듯이 교실 전체가 떼를 쓰는 분위기로 변하더군요. 아무래도 이놈들이 작전을 짰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더군요. 관찰 수업한다고, 체험 학습한다고 학교 뒷산으로, 들로 몇 차례 데리고 나갔더니 저를 만만하게 보고서 그러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게다가 그 전전달에는 애들을 데리고 학교 앞개울에서 물고기까지 잡은 적이 있거든요. 국어시간에 말입니다.   그러나 물놀이하러 가자는 것은 앞개울이 아닙니다. 한 20분쯤 걸어가면 꽤 큰 개울이 나옵니다. 거기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멀리 가는 데다가 물놀이를 하면 위험까지 동반되기 때문에 관리자인 교장은 허락하지 않기가 쉽습니다. 이 일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마찰이 있어야 할 듯한 일입니다. 그래도 평상시에 수업에 관심도 없던 놈들이 무얼 하자니까 신이 나서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좋다. 가자! 총대는 내가 메지.   그러자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리고는 밖으로 뛰어나갔고 나는 허락을 맡으러 교장실로 갔습니다. 아이들이 바깥에서 웅성웅성 거리니까 다른 학년 아이들이 밖을 내다보고는 물놀이 간다는 소리에 다른 선생님한테도 떼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전교 세 반 중에서 한 반이 물놀이 간다는데 다른 두 반의 수업이 제대로 되겠어요? 그래서 교장 선생님한테 허락을 받고 나오니, 전교생이 다 나와서 기다리고 있더군요. 그래서 전교생을 데리고 물놀이를 하러 갔습니다.   여기서 를 멘다고 할 때의 총대가 바로 상징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요? 총대를 멘다는 것은 결과에 대해서 감당을 하겠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이 말이 이런 뜻을 갖는 데는 총대라는 말이 그 전부터 그와 비슷하게 쓰였기 때문입니다. 총대는 총을 얘기하는 것이고, 총은 전쟁에서 쓰는 무기입니다. 그러니까 총대를 멘다는 것은 전쟁터에 나간다는 얘기고, 전쟁터에 나간다는 것은 자신을 희생시켜 공동체를 지킨다는 뜻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목숨은 하나인데, 누가 전쟁터에 나가서 목숨을 바치려 하겠어요? 올바른 일인 줄은 알지만 목숨을 바쳐가면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죠. 그래서 외부의 적이 쳐들어오는데 감히 나서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때 총대를 멘다는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남을 위해서 적과 맞서 싸우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의 연장선상에서 총대를 멘다는 뜻이 그와 유사한 상황에 적용되어 쓰이는 겁니다.   내가 총대를 메겠다는 것은 학생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학교 관리자는 막으려 들 것이고, 막으려는 학교 관리자와 불편한 관계를 감수하면서 그 일과 관련된 모든 책임을 진다는 얘기지요. 모든 책임이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렇게 총대란 말에는 많은 것들이 들어있습니다. 이렇게 한 가지 말에 여러 뜻이 담기는 경우를 상징이라고 하는 겁니다.   뒷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은가요? 그렇게 돼서 전교생이 물놀이를 갔습니다. 장소는 도리비라는 곳입니다. 이름이 참 아름답지요? 라니! 이곳은 물길이 둥글게 돌아나가면서 만들어진 기슭에 동네가 들어섰고 그런 까닭에 동네 이름이 도리비입니다. 안동 하회마을의 본이름이 물도이동인 것을 보면 이 도리비도 물이 돌아나간다는 뜻과 관련이 있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5, 6교시 두 시간 연이어서 아이들은 신나게 물놀이를 했습니다. 애들끼리 서로 물속에 집어넣고 발버둥치는 여학생들까지 끌고 들어가서 온통 물귀신이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양복 입은 남녀 선생님들까지 붙잡혀서 몽땅 물에 빠진 새앙쥐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신나게 노는데 방송사의 차가 오더니 멀리서 촬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 무더위가 오니까 시원한 여름을 보낸다는 보도 기사의 화면으로 내보내려는 거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물속에서 손으로 V자를 그리며 흔들어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는 무사히 물놀이를 마쳤는데, 물에서 나오면서 방송국 카메라가 찍은 곳에 가서 보니 무슨 표지판이 있고 그 표지판을 가만히 읽어보니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수 영 금 지   다음날 학교에 출근하니 학교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어제 오후에 찍힌 그 화면이 텔레비전의 지방방송 뉴스에 나왔답니다. 물론 화면이 좀 흐릿하게 처리되어 사람을 정확히 알아볼 수 없게는 했습니다만, 그 위치라든가 상황을 보면 단번에 알 수 있는 것이거든요. 게다가 여름철이 다가오면서 익사 사고의 위험이 높아진다며 자료 화면으로 내보냈다니 기가 막힐 일이지요. 저 대신 애꿎은 일과계 선생님이 교장실에 불려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꾸중 비슷한 넋두리를 들었답니다. 당사자인 저를 부르지 않은 것은 제가 그날 몇 분 늦게 간 탓도 있지만, 울뚝불뚝한 저보다는 고분고분한 여 선생님이 더 만만해 보였기 때문이겠지요? 하여간 한 바탕 소란이 일면서 저보다는 일과계 선생님한테 불똥이 튀어(이 불똥도 상징입니다.) 덕분에 예쁘고 맘씨 착한 홍선생님이 애를 먹었습니다.   출근하는 나를 보더니 애들이 먼저 긴장을 하고서 어떡하느냐고 걱정을 하더군요. 그래도 사고 안 났으니 괜찮다고 교장선생님은 더 이상 문제를 확대시키지 않고 조용히 넘어갔습니다. 그나마 학생들을 야외로 데리고 나가면서 하는 수업에 대해 나름대로 깊은 이해를 하고 있는 분이 교장으로 계셨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큰 소란으로 이어질 뻔한 일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교장 선생님의 이름을 밝히는 것도 괜찮겠지요? 그 분의 이름은 안응락입니다.     그러면 박윤배 시인의 에서 상징이 어떻게 쓰이는가 하는 것을 보겠습니다. 2연 앞부분에서 찾아보겠습니다.   나는 내 시대의 젊음을 위하여 수렵도를 그린다. 탄피 흩어진 이 터의 숲을 무너뜨리고 넝쿨로 기어드는 어둠 따위는 쏘아 넘기고 한숨뿐인 포획물을 끌고 돌아올지라도 저녁노을 뭉개는 어둠 자락을 빈 도시락 가득 채워올지라도 달아나는 노루와 사슴을 겨누고 있다.     여러분이 한 번 찾아보시죠. 어떤 것이 상징에 해당하는 말일까요? 잘 모르겠어요? 잘 모르는 게 당연한 겁니다. 모르겠다고 너무 절망하지 말기 바랍니다. 처음부터 잘 알면 굳이 배울 필요도 없겠지요. 모르는 것을 배우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모르면서도 아는 것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지요. 모르면 세 살배기 아이한테도 머리 숙이고 배워야 합니다.   답은 입니다.       넝쿨로 기어드는 어둠 따위는 쏘아 넘기고   의 말입니다. 여기서 어둠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이 시 전체의 상황을 전제로 해서 유추해내야 합니다. 이 시의 상황은 수렵도라는 그림을 보고서 내 젊음 역시 그처럼 우렁찬 기백으로 시를 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수렵도의 사내처럼 우렁찬 모습의 시를 써야 하는데, 막상 살다보면 그게 안 되는 상황이 생길 겁니다. 그것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외부의 조건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그런 시를 쓰는 데 방해가 되는 요인이 있겠지요. 그런 모든 요인을 두루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즉 내 젊은 날 좋은 시를 쓰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 전부가 이 어둠에 포함됩니다. 예를 들면, 시간이 없어 쫓기는 것, 아니면 둔한 재주, 아니면 성실하지 못한 태도, 뭐 이런 모든 것들이 이 어둠에 다 포함됩니다.   이상에서 보듯이 상징은 어느 한 가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뜻을 안에 간직합니다. 그래서 잘만 쓰면 굉장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뜻을 많이 끌어안을 수 있는 만큼 자칫 잘못 쓰면 오히려 시 전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를 만큼 모호해지는 수도 있으니 어설프게 알고서 흉내 내면 안 됩니다.   다음의 짧은 시를 보겠습니다.     맹수   ①맹수가 사라진 곳에 ②맹수가 산다. 온갖 ③맹수들 다 쫓아내고 ④맹수인 줄도 모르는 채 저희들끼리 으르렁거리며 ⑤맹수로 산다.     이 시를 보면 맹수란 말이 모두 다섯 번 나옵니다. 번호는 제가 임의로 붙였습니다. 이 중에서 어떤 것이 같고 어떤 것이 다를까요? 한 번 짝을 지워보기 바랍니다.   이 시의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①의 맹수는 그냥 사나운 짐승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범, 사자, 악어 같은 짐승들 말이지요. 그 맹수가 사라졌으니, 그 다음에 나오는 맹수는 틀림없이 ①의 맹수는 아니겠네요. 그러니까 ②의 맹수는 우리가 아는 그런 사나운 짐승을 쫓아버린 존재들을 나타내는 것이 되겠지요. 사나운 짐승들까지 쫓아내는 그런 짐승이 무엇이 있을까요? 현재 지구상에는 인간들 밖에 없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짐승들과 공존을 꾀하지 않고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서 다른 짐승들의 멸종을 생각지 않는 그런 인간세계를 비꼰 것이라고 볼 수 없을까요? 그렇다면 ③은 맹수지만, ④의 맹수는 그냥 짐승이 아닙니다. ⑤역시 ④와 같지요. 그러면 이 시 속의 맹수라는 말은 단순히 그냥 사나운 짐승을 가리키는 뜻이 있고, 사나운 짐승이 아닌 무언가를 암시해주는 뜻이 있습니다. 이상의 논의에 따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되겠지요.   사나운 짐승의 맹수 : ① ③ 다른 존재를 암시하는 맹수 : ② ④ ⑤     그러면 다른 존재를 암시하는 맹수는 무엇일까요? 위에서는 그냥 인간이라고 추정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이 이 맹수 속에 다 포함될까요? 잘 생각해보면 다른 종류의 맹수와 공존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 다른 종족의 멸종을 전혀 생각지 않은 탐욕스런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다 포함된다고 보기는 좀 어렵겠죠? 그렇습니다. 이 맹수는 인간들 중에서 탐욕에 찌든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탐욕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 이상은 아마도 읽는 사람이 알아서 추측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어떤 특정 범위를 정해주지 않고 읽는 사람이 무한정 추정해 들어가야만 그 뜻이 확연히 정리가 됩니다. 이런 방법을 상징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이러한 방법을 활용할 수 있을까요?   비유는 앞서 보았듯이 1:1로 대응을 시킵니다. 어떤 것을 보니 무엇을 닮았더라, 하는 생각이 들면 그 둘의 공통점을 찾아서 설명해주면 됩니다. 닮은 그것과 원래의 그것을 연결시켜주면 되지요.   그러나 상징은 1:1이 아니기 때문에 조금 달리 해야 합니다. 원리는 비유와 같습니다. 그러나 원관념을 정하는 방향이 조금 다릅니다. 상징 수법을 활용할 때의 원관념은 한 가지로 정리되지 않는 생각으로 정해서 그것을 잘 나타내줄 수 있는 어떤 대상을 찾습니다.     예를 들면 젊은 시절에 저는 무언가 세상과 자신에 대한 불만과 분노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존심이 아주 강해서 남들이 싫은 소리 하는 것을 싫어했고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옳지 않은 일로 저에게 강요를 하면 한 판 붙었습니다. 절대로 물러서지 않고 대들어 싸웠습니다. 싸움은 승산이 있어서 이길 때 해야 하는데, 젊어서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상대가 다치고 내가 죽더라도 싸웠습니다. 내가 죽더라도 저 놈은 다칠 것이고, 그러면 아플 것이니 내가 죽더라도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생각이었지요. 죽기 살기로 산 것입니다. 그러니 남들이 저를 볼 때 어떻겠어요? 어느 정도 분위기가 험악해지면 한 발 물러서는 것이지요. 자, 이렇게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사소한 불의를 참지 못하는 이 불끈거리는 심사를 무어라고 하면 좋을까요? 불평불만? 정의? 분노? 화? 신념? 열등감? 치기? 어느 것으로 갖다 붙여도 적당한 것이 없지요? 그렇다고 관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씩은 다 관련이 있어요. 그렇지만 딱히 이거라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딱 부러지게 이거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머릿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들어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을 표현할 때 상징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 복잡한 심사를 나타내줄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찾아서 설명하는 겁니다.   저는 위에서 말한 그런 저의 심란한 심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어느 날 그 감정이 송곳이나 뿔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을 찔러서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그런 도구를 떠올린 것이지요. 송곳이나 뿔은 얌전한 것이지만 상황에 따라서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뿔은 그렇지요. 그래서 ‘야, 바로 이것이구나!’ 하고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습니다.     뿔   한창 때 내겐 뿔이 하나 있었다. 그 뿔은 젊음만큼이나 영롱한 빛을 냈고 우람한 그 만큼 무엇이든 들이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세상 어느 구석에도 그 뿔보다 더 크고 드센 뿔이 있으리라는 가정을 전혀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말하자면 내 뿔은 최고였다. 어쩌다 호락호락치 않은 뿔이 나타나면 그 뿔보다 작을지언정 섬뜩한 점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을 때까지 뾰족하게 갈고 또 갈았다.   지금도 그 뿔이 있다. 어쩌다 난폭한 말을 함부로 내뱉으며 스쳐 가는 나보다 더 젊은 친구들을 보면 오랫동안 잊고있던 그 뿔이 기억의 퇴적층을 뚫고 불끈 돋는다. 그러나 삼십대란 뿔의 상처를 헤아릴 줄 아는 나이 어르고 다독거려서 잠시 돋은 뿔이 가라앉을 때쯤이면 곰곰이 생각한다. 이 뿔을 좀 더 따스한 곳에 쓸 수 없을 것인가를.     이곳의 뿔은 어떤가요? 사람에게는 뿔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자신에게 뿔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뿔은 짐승의 뿔은 아니겠지요. 그러니까 무언가 다른 것을 나타내주는 그런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 뿔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만약에 이 뿔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한 가지여서 뿔과 그 한 가지가 1:1로 대응하면 무엇이 되나요? 그렇죠! 비유죠. 만약에 1:1 대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건 무엇이라구요?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상징인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그 뜻을 찾아보겠습니다.   이 시의 뿔은 크고 드셉니다. 그리고 뾰족하기도 하지요. 섬뜩합니다. 난폭한 말을 뱉는 사람들을 보면 사라졌던 뿔이 돋아납니다. 다독거려서 달래면 또 가라앉기도 합니다. 자, 이렇게 해놓으니 뭐가 뭔지 모르겠지요? 어쨌든 딱 한 가지 뜻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마음속의 어떤 복잡한 감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상징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상징으로 봐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잘 읽어보면 뿔은 용도에 따라서 무례한 젊은 친구들을 무찌를 수도 있고, 또 방향을 바꾸기만 하면 따뜻한 곳에 쓸 수도 있습니다. 남한테 상처를 줄 수도 있고, 좋은 뜻으로 쓸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몸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고 돋았다 가라앉는 것으로 보아 몸 안에 있으면서 감정에 따라서 생기고 말고 합니다. 무엇일까요? 틀림없이 감정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정의감이나 혈기왕성함, 나아가 못 마땅한 것을 참지 못하는 어떤 심리상태를 가리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정도로 뜻을 파악하면 되지 않겠어요?   이 시에 대한 설명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대신에 어떤 방법으로 이런 상징을 쓰는 것인가 하는 것은 한 번 더 앞으로 돌아가서 확인해두기 바랍니다.   소 망                  장미(3-1)   저 깊은 숲 속을 걷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이리저리 미처 보지 못했던 곳까지 바라본다.   바라보지 못했던 곳에는 작은 꽃이 열매를 맺는다.   그 열매 속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작은 소망들이 담겨있다.     열매라는 말을 잘 살펴보기 바랍니다. 언뜻 보면 그냥 열매일 것 같은데, 앞의 상황이 약간 다릅니다. 늘상 보던 곳에 있던 열매가 아니라 평상시에는 바라보지 못했던 곳에서 발견한 열매입니다. 시에서는 이쯤 되면 아 무언가 있구나 하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 평상시에 보지 못했던 곳에서 발견한 꽃이 피운 열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열매 속에 무엇이 들었나요? 소망이 들었다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소망이 무엇인지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려면 천상 지은이에게 물어보던가 아니면 내 체험을 바탕으로 그것을 재구성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은이에게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니, 이 상황을 염두에 두고서 읽는 사람이 재구성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미를 해석하여 재구성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바로 상징입니다.   열매는 꽃과 관련이 있습니다. 꽃은 화려하지만 속이 없지요. 반면에 열매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알찹니다. 꽃의 화려함은 결국 이 알찬 열매를 맺기 위해서 식물이 취한 동작입니다. 열매의 가장 큰 임무는 종자를 퍼뜨리는 것이지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꽃이 맺는 열매는 희망을 안으로 가진 것일 수밖에 없지요. 그 희망은 여건이 주어지면 곧 싹을 틔워서 아름다운 꽃을 보여줍니다. 희망은 곧 소망입니다.   평상시에 보지 못하던 것을 이 학생은 숲에 와서 바로 그런 새로운 것을 자신도 모르게 보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 학생이 이러한 생물의 순환 과정까지 계산을 하고서 이 시를 쓴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이 굳이 그렇게 의도하지 않더라도 우주의 섭리 속에서 살기 때문에 사람의 관찰 속에는 뜻밖으로 우주의 깊은 섭리가 담기는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멋을 억지로 부리려는 허황한 생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솔직하고 정직하게 바라보는 자에게 우주는 자신의 비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겨울밤      이윤정(포항 유성여고 3)   할머니는 화롯가에 앉아 내 스웨터를 짜셨다.   한 올은 나뭇꾼 이야기로 한 올은 선녀 이야기로 돌리고 빼고 엮으면 밤은 숯칠 한 채 익어 가는 소리만 투둑투둑  할머니 무릎을 울리고 입혀주신 옷은 낮게 웅성이는 말들로 엮여 진눈깨비 졸음을 가렸다.   까치밥으로 남은 감이 마당가에서 쉬쉬거리며 겨울 바람을 쫓고 있을 때   따뜻한 베갯머리 맡에서 우리 할머닌 내 겨울을 짜고 계셨다.                    2003년도 배재대 청소년 소월문학상 운문 대상     여기서는 스웨터를 잘 살펴보기 바랍니다. 이 스웨터는 그냥 옷이 아닙니다. 할머니와 관련된 추억이 담겨있습니다. 스웨터는 두꺼운 겨울옷입니다. 추위를 막아주는 기능을 합니다. 할머니가 손주에게 스웨터를 손수 짜 줄 때는 사랑을 전제로 합니다. 그런데 추위를 막는다는 것은 단순히 온도가 차갑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세상의 추위까지도 함께 한다고 읽어야 합니다. 할머니는 나에게 스웨터를 짜주는데 그것은 곧 추위에 노출될 손주를 생각하는 할머니의 마음이 아니고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직접 짜는 스웨터는 단순히 겨울바람만을 막는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늑한 사랑과 그 스웨터를 짜는 할머니를 바라보던 나의 추억까지도 입혀주는 기능을 합니다.   할머니는 스웨터를 짜면서 나무꾼 이야기를 해주었겠지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곤 했습니다. 할머니와 맺은 좋은 추억이지요. 따라서 스웨터를 보면 할머니의 추억이 떠오르고 그런 옷을 입으면 단순히 가게에서 산 옷과는 다른 느낌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추위라든가 하는 것은 누구한테나 같은 조건이지만, 추위를 느끼는 것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따스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추위를 덜 느끼겠죠. 추억에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의 스웨터는 그냥 추위를 막는 장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할머니의 추억을 돌이켜 주는 그런 기능까지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 가지 뜻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분위기를 한꺼번에 보여주기 때문에 스웨터는 상징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와 비슷한 발상을 시인의 작품에서 보겠습니다.   궤짝에서 꺼낸 아주 오래된 이야기                                 송찬호   우리 집에는 아주 오래된 얼룩이 있다 닦아도 닦아도 잘 지워지지 않는 누런 냄새, 누런 자국의,   우리 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그 건망증이다 바스락바스락 건망증은 박하 냄새를 풍긴다 얘야 이 사탕 하나 줄까, 아니에요, 할머니, 할머닌 벌써 십 년 전에 돌아가셨잖아요!     버릇이나 행동 특성이 세대를 넘어서 이어지는 수가 있습니다. 예컨대 우렁손톱이 자식에게 연결되고 손자에게 이어지는 경우가 있지요. 이와 같이 습관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건망증 같은 경우도 그렇죠. 이 시에서는 집안 내력으로 건망증을 말하고 있습니다. 건망증은 노망든 할머니에게서 나타났겠죠. 그런데 그것이 얼룩, 박하 냄새, 냄새, 자국에 비유되었습니다. 분명히 이것은 비유를 사용한 시입니다. 그런데 그 건망증이 나나 식구들에게 나타난다면 그것은 할머니와 나를 이어주는 매개체 노릇을 합니다. 따라서 시인은 자신이나 혹은 다른 식구들이 겪은 건망증을 보면서 할머니를 떠올린 것이고, 건망증에 걸린 할머니와 맺었던 추억까지 아울러 떠올린 것입니다. 여기서 건망증은 나와 할머니를 이어주는 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징이죠. 그러니까 비유와 상징이 동시에 들어있는 시입니다.   아버지의 휴대폰                     임태운(전주 영생고 3)   태양처럼 붉은 벽돌에 자식의 하루를 짊어져야 하는 아버지의 허리 같이 안테나가 휘어진 그 핸드폰은 언제나 꽃씨를 날리지 못하는 꽃잎이었다.   벌떼들처럼 온갖 소리들이 금 간 안전모 사이로 촉수를 뻗는 공사 현장도 하루살이 같은 내 희미한 목소리로는 닿을 수 없는 모래 화단이었고 찢어진 꽃잎처럼 깨어진 액정은 방향을 잃은 문자 메시지만이 먼지처럼 쌓여 있는 아버지의 휴대폰에는 동그란 종료 버튼만이 잎맥을 지운 채 닳아 있었다.   귓가에 와 닿는 몇 개의 구멍 너머 아버지의 낡은 생은 내 플라스틱 버튼으로는 뿌리를 내릴 수 없는 그 어느 수신 지역에 피어 있는 것일까. 질 때를 알고 고이 지는 꽃잎처럼 아버지의 휴대폰은 늘 기본요금을 넘어서는 법이 없었지만 아버지의 휴대폰이 더 짙은 향기를 뿜어낼 수 있기를 바라는 나는 오늘도 나만이 특수문자로 나비를 만들어 아버지에게 송신해본다. 그 작디작은 나비의 더듬이를 아버지가 볼 수는 없을 테지만 아버지의 핸드폰 안에 피어있는 꽃잎 속에서만큼은 힘차게 날갯짓할 수 있도록.                  2003년 인하대 제9회 인하백일장 운문 장원     아주 재미있는 발상이 돋보이는 시입니다. 휴대폰을 통해서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휴대폰의 사용법을 잘 모르는 아버지와 휴대폰 없이는 살 수 없는 나 사이에는 간격이 있습니다. 나는 휴대폰 속의 이미지나 언어를 잘 활용하지만 아버지는 거기에 익숙지 않아서 휴대폰을 끄고 켜는 것밖에는 모릅니다. 말하자면 보통 전화기의 용도 이외에는 활용할 줄을 모르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아버지는 나의 삶을 책임집니다. 그런 책임을 맡은 아버지의 노력 위에서 나는 휴대폰을 사용하는 세대죠. 그래서 아버지에게 휴대폰으로 내 생각을 전달하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볼 줄 모릅니다. 세대 간의 단절된 거리를 휴대폰의 상황으로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런 단절을 다시 휴대폰을 통하여 해결하려는 의지가 아버지에게 문자메시지를 날리는 노력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휴대폰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잇고 갈등을 해결하는 구실을 합니다. 당연히 상징입니다.   가는 비 온다                    기형도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은 떨어지고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 저 식물들에게 내가 그러나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지금은 한 여자가 그 집에 산다 그 여자는 대단히 고집 센 거위를 기른다 가는 비……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 적실 뿐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음성은 이제 누구의 것일까 이 상점은 어쩌다 간판을 바꾸었을까 도무지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우산을 쓴 친구들은 나에게 지적한다. 이 거리 끝에는 커다란 전당포가 있다, 주인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간을 빌리러 뒤뚱뒤뚱 그곳에 간다. 이를테면 빗방울과 장난을 치는 저 거위는 식탁에 오를 나날 따위엔 관심이 없다 다는 안다, 가는 비……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며 누구도 죽음에 쉽사리 자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버리는 가는 비……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     여기서 가 나타내는 바는 무엇일까요? 죽음이라고 재빨리 대답한 사람들은 앞의 설명을 아주 잘 이해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앞으로 시에서 얼마든지 이 상징 기법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짝짝짝!   그렇다고 무슨 특별한 눈이 있어서 쉽게 알아본 건 아닐 겁니다. 앞의 시를 읽어보면 그렇게 해석하도록 상황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죽음은 시를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납니다. 그때부터 그 사람의 시간이 흐르죠. 그 시간의 흐름은 언뜻 보면 한 방향입니다. 자, 여러분은 지금 16세 안팎일 겁니다. 한창 나이죠. 16세라면 여러분들은 한 살이라도 더 살았노라고 제 나이를 속일 나이죠. 그러니까 여러분은 16년을 살아왔다고 말할 겁니다. 그러면 시간으로 환산해보겠습니다. 16년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면 한 번 묻겠습니다. 만약에 사람이 70세까지 산다고 가정을 하면 이 사람에게 남은 시간은 54년이겠죠. 그러면 살았다고 대답한 이 16년은 시간을 줄여온 것인데, 산 게 맞나요? 아니면 죽어온 건가요? 시간이 줄어들었으니, 분명히 명줄이 짧아진 겁니다. 그러면 그게 죽은 것이죠. 어때요?   특별한 해결책이 없는 한 사람은 이와 같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그러니 이대로 가다가는 저절로 다음을 알 수 없는 컴컴한 구멍으로 빨려들겠죠? 그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들이 위 시에는 여러 가지 나옵니다. 떨어지는 낙엽, 인질극, 식탁에 오를 나날에는 관심이 없는 거위……. 이렇게 무심한 듯이 묘사하고 있지만, 죽음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작용하도록 시인이 배치한 이미지들입니다.   는 속담이 있습니다. 소낙비나 장마비는 굵기 때문에 바깥에 나가면 금방 젖는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안개의 경우는 어떤가요? 또 안개보다 입자가 조금 더 굵은 는개는 어떨까요? 만약에 는개 속에 있다면 옷이 눅눅하다고 생각할 뿐, 비에 젖는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가랑비도 마찬가지죠. 신경 쓰지 않고 나돌아 다니면 어느 새 젖어있는 것이 가랑비입니다. 시간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은가요? 16년을 살아온 줄 알았는데, 조금씩 조금씩 시간은 흘러가 버린 것입니다. 드디어 죽음이 다가오죠. 이렇게 죽음으로 젖어 가는 것이 삶의 모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린다고 직접 말까지 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가랑비가 곧 죽음을 의미한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빌리러 전당포로 간다고 표현하고 있으니 이 정황은 분명한 것입니다.   이 시의 는 존재하는 것을 무로 바꾸어버리는 어떤 존재를 나타냅니다. 거기에는 죽음도 있고 시간도 있고 허무도 있습니다. 그래서 상징입니다. 이 중에서도 죽음이 가장 중요한 의미로 들어있죠.   대답 없는 바람            조수현   내가 바람에게 물어 보았다.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그러나 바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굳어있는 바위처럼 또 내가 바람에게 물어 보았다.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그러나 바람은 역시 아무 말이 없었다. 나무로 만든 인형처럼 다시 또 내가 바람에게 물었다. 바다 건너 들을 질러 산을 넘는 동안 무엇을 얻었으며, 잃었느냐고 그리고 이 세상 다 휘돌고 난 끝에 무엇을 얻겠으며 잃겠느냐고. 그러나 바람은 이미 내게서 보이지 않을 만큼 들리지 않을 만큼 멀리 멀어져 가고 있었다.     여기서는 바람을 잘 살펴보기 바랍니다. 이 시의 바람이 무엇일까요? 우선 나는 삶에 대해서 궁금하게 여기고 있지요? 바람은 어디서 오는지 알 수도 없고 알려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이 이와 같지요. 그래서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람이 답을 할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 시인은 누구에게 묻는 것일까요? 아마도 자신에게 묻는 것이 분명합니다.   시의 끝에서 바람이 멀어져 가는 것으로 봐서는 답을 얻었나요? 못 얻었지요. 원래 얻을 수 없는 답입니다. 그런데 답을 얻지 못해도 궁금한 것이 삶의 의미입니다. 자신에게 끝없이 되묻는 것이 그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바람은 무엇일까요? 자신이 궁금해 하는 질문에 대해 답을 해줄 수 있는 어떤 가상의 존재일 것입니다. 신일 수도 있고, 자신의 내면에 깃든 본성일 수도 있으며, 아니면 질문하는 사람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딱히 어떤 존재라고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렇고 저렇게 보면 저렇습니다. 그렇지만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니죠. 분명히 무언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상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1989년의 일입니다. 한 후배가 찾아와서 부탁을 하나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자기네 동네에 어려서 소아마비를 심하게 앓은 사람이 있는데, 거동조차 불편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혼자 있을 때 시를 쓰곤 한다는 거예요. 시가 뭔지도 모르면서 말이지요. 그래서 답답하다는 겁니다. 혹시 주변에 시를 쓸 줄 아는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그 부탁을 받은 후배는 나한테 와서 그 사람에게 시 쓰는 법도 알려주고 실제로 시를 봐달라고 당부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어려울 것 없으니, 그리 하겠다고 답했습니다. 그 사람이 움직이기 어렵기 때문에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요즘이야 인터넷으로 대화도 하고 사진도 보내고 하지만 1989년에는 286컴퓨터가 막 나오는 시점이었고, 컴퓨터를 접하기가 쉽지 않은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니 편지로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그 분의 주소를 받아서 시를 쓰는 데 필요한 몇 가지 마음가짐과 시 쓰는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그 분한테서 답장이 오고, 그 때부터 편지로 하는 시 창작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읽고 있는 이 책의 창작법이 대부분 그때 뼈대가 잡힌 것입니다.   열흘에 한 번 정도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면 그에게서 두세 번에 한 번씩 답장이 왔고, 그때 자신이 쓴 시를 한두 편 보냈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 시를 평해서 고칠 점을 다시 써 보냈죠. 이렇게 한 1년 남짓 편지 강의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어느 시점부터인가 편지가 끊겼습니다. 아마도 제 쪽에서는 시 창작 강의의 중요한 부분을 거의 다 했기 때문에 저절로 편지를 중단한 것으로 기억납니다. 그리고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을 즈음에 다시 그 후배를 만났습니다. 반갑게 만나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그 사람 소식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오래 전에 세상을 하직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머릿속이 텅 비면서 윙윙 소리가 들리더군요. 저와 편지를 나누기 시작한 1년쯤 뒤에 작고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저한테 답장을 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저는 그것을 모르고 계속 편지를 썼던 것이고, 답장이 오질 않자 제 풀에 꺾여 그만두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맨 막바지에 보낸 편지 몇 장은 그가 아니라 그의 영전으로 배달되었겠지요.   이 이야기를 할까 말까 많이 망설였습니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사람의 이름을 거명하여 혹시 그를 욕되게 하는 일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와서 시 한 편이라도 남긴다면 그것은 그가 이 세상에 드리운 아름다운 인연의 자취일 것이고, 그런 인연을 저버린다면 또한 그를 영원 속으로 묻어버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한편으로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랜 고민 끝에 이렇게 이야기를 꺼낸 것입니다. 이 책의 첫 출발은 그에게서 비롯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 세상에 남긴 시와 함께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도 아름다운 인연의 마지막 결산이라고 믿고 15년이 지난 시점에서야 뒤늦은 명복을 빌면서 시인의 이름을 밝힙니다. 조수현 씨. 이승에서 못 다 이룬 시인의 꿈을 저승에서는 꼭 이루기를 빕니다. 2)그리듯이 쓰기 : 이미지     지금까지 비유를 활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제부터는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쓰는 방법을 배우겠습니다. 이것은 이미지를 활용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려면 우선 이미지가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알아야겠지요?     이미지는 물론 영어입니다. 라고 쓰지요. 이것을 심상(心象)이라고 번역하여 씁니다. 심상이란 마음속에 그려진 그림이라는 뜻입니다. 이 이미지가 중요해진 것은 서양에서 20세기 들어 일어난 시의 한 유파 때문입니다. 즉 시에서 이미지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활용하여 쓰기를 주장한 사람들이 이미지즘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습니다. 에즈라 파운즈, 흄, 그리고 그들의 뒤를 이은 엘리어트 같은 시인들이 그들입니다. 이들은 여러 이미지 중에서도 특히 눈에 보이는 시각 이미지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이미지즘이라는 시사의 중요한 문예사조가 등장하는데 영향을 끼친 것은 동양의 시들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세력이 한참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양의 시인들에게 일본의 시가 많이 알려졌습니다. 거기에 중국의 한자 문학이 가세를 한 형편이지요. 서양의 시인들이 일본의 시와 중국의 시를 보니까 희한하게도 깔끔하게 풍경묘사가 된 거예요. 그러면서도 아주 절제된 풍경 묘사만으로도 주제를 잘 전달합니다. 그 원리가 무엇일까를 골똘히 연구하고 고민한 결과 그들은 일본과 중국의 옛 시인들이 이미지를 아주 잘 활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곧 그 방법을 시에 적용시켰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이미지즘이라는 문예사조입니다.     그러면 이미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자, 제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젓가락!   이렇게 말하면 이 말을 들은 여러분의 머릿속에는 젓가락이 한 짝 떠오를 겁니다. 안 떠오르는 사람은 졸았거나 딴 짓 하던 사람이죠. 하하하. 바로 이렇게 말을 듣고서 머릿속에 떠올린 그것을 바로 이미지라고 합니다. 이것을 심상이라고 번역한 이유를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말을 듣거나 글을 읽고서 머릿속에 떠오른 사물이나 상황을 이미지라고 하는 겁니다.   이해 다 했지요? 그러면 한 가지 묻겠습니다. 방금 제가 젓가락이라고 했을 때 여러분의 머릿속에 젓가락이 떠올랐는데, 그 젓가락은 옆에 앉은 친구의 머릿속에 떠오른 젓가락과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를 겁니다. 다를 수밖에 없지요. 자기가 평소 쓰는 젓가락이 쇠젓가락인 사람은 쇠젓가락을 떠올릴 것이고, 거기에다가 황금을 입힌 금젓가락이면 금젓가락을 떠올릴 것이고, 일본에 자주 가는 사람은 네모난 나무젓가락을, 중국에 자주 여행하는 사람이면 길다란 대나무젓가락을 떠올릴 것입니다. 짜장면을 자주 시켜먹은 사람은 두 개가 들러붙은 배달용 나무젓가락을 떠올리면서 머릿속에서 여전히 두 가닥을 짜개고 있을 것이고요.   이미지를 이해하는 것은 그 사람의 체험과 관련이 있습니다. 똑같은 이미지를 제공해도 그것에 반응하는 것은 그 사람의 경험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독자의 체험이 시의 감상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뜻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미지즘 시인들은 이러한 개인차를 최대한 극복하고 상황을 가장 효과 있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미지를 선택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주로 느낌을 말로 전하는 그 전의 시에 대해서는 객관성이 부족하다고 비판했습니다. 사실 맞는 말이지요. 그래서 그 후로 이미지는 시에서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미지가 체험에 의존하여 해석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암시합니다. 내가 이렇게 시를 써도 그것을 읽는 사람은 내가 의도한 대로 읽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엘리어트는 ‘의도의 오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는 것이죠. 독자에게는 그렇게 읽을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를 쓰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표현이 독자에게 어떤 이미지를 떠올릴 것인가 하는 것까지 감안을 해서 써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도 문제는 여전히 남겠지요. 그렇지만 시를 쓰면서 오해의 소지를 줄일 수 있는 방향으로 시를 써야 한다는 교훈은 남습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의도를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점점 개발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시인에게 남겨진 숙제입니다. 그리고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사이의 어긋남 현상을 최대한 자극하여 이미지가 부릴 수 있는 최대한의 효과를 추구하는 방법이 있기도 합니다. 이 점은 앞으로 여러분들이 시를 많이 접하고 쓰면서 점차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는 이미지의 종류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이건 뭐 그토록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미지에는 다음과 같은 종류가 있습니다.   -시각 이미지 -청각 이미지 -후각 이미지 -촉각 이미지 -공감각 이미지     이것은 감각을 어디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결정한 겁니다. 무슨 필연성 때문에 한 것이 아니라 편의상 나누어본 것이죠.   시각 이미지는 눈으로 인식하는 이미지를 말합니다. 청각은 듣는 것으로 인식하는 이미지를, 후각은 냄새와 관련된 것을, 촉각은 접촉과 관련된 것을 말하고, 공감각 이미지는 이상의 이미지가 둘 이상 결합한 경우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시각 이미지 : 빛나는 아침 햇살 -청각 이미지 : 짹짹짹 참새소리 -후각 이미지 : 고소한 누룽지 냄새 -촉각 이미지 : 꺼끌꺼끌한 마룻바닥 -공감각 이미지 : 수정처럼 빛나는 목소리   어려운 것 없으니 공감각 이미지만 설명하겠습니다. 공감각 이미지는 두 가지 이상의 이미지가 결합한 것입니다. 를 보면 빛난다는 것은 눈으로 인식하는 것이고, 목소리는 귀로 듣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각과 청각이 결합한 것이죠. 이런 것을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중요합니다만, 이 중에서도 시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시각 이미지입니다. 다른 것과 다르게 시에서는 시각 이미지만으로도 한 편의 시를 쓸 수 있습니다. 다른 이미지들은 하나만으로 시를 쓰기가 쉽지 않습니다. 청각 이미지인 소리만으로 시를 쓰려면 참 어렵겠지요. 그러나 시각 이미지는 그림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묘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지에 의한 시 쓰기라고 하면 시각 이미지라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이 단원의 제목을 라고 한 것입니다.   작품을 보겠습니다. 강아지          배형준(2-1)   얼마 전 태어난 새끼 강아지   9 마리의 강아지가 와글와글 북적북적   젖 달라고 우는 소리 깨갱깨갱   제일 귀여운 새끼 강아지 쓰다듬어 주고 만져주는데   내 손가락을 쪽쪽 빤다. 간지러운 가운데 손가락   그러다 내 손가락 깨물면 한 대 때려준다.   9 마리의 귀여운 새끼 강아지.     이 시를 읽고 나면 그림 같은 장면이 떠오르지요? 갓 태어난 강아지들이 꼬물꼬물 움직이고 있고, 한 아이가 거기서 강아지들을 만집니다. 사람과 강아지가 어울린 한 폭의 풍경화가 연상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눈에 보이듯이 그리는 것도 아주 중요한 시의 방법입니다.   그런 걸 누가 못 쓰냐고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한 번 해보세요. 어떤 풍경을 눈에 쏙 들어오도록 묘사한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절감하게 될 겁니다. 먼저 무엇을 그려야 할지 선택하기가 참 애매합니다. 선택을 해도 어떤 것을 그리고 어떤 것을 빼야 할지 선택하기가 힘들어요.   예를 들면, 이 시에서도 무슨 강아지인지 알 수가 없지요. 그냥 똥개인지, 사냥개인지, 시베리안 허스키인지, 불독인지, 발바리인지 알 수 없어요. 그런데도 강아지를 귀여워하는 한 소년이 장난치는 모습을 드러내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지요. 만약에 불독이라든지 해서 강아지의 종류를 밝혔다면 오히려 더 어색해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또 개집은 어떤 모양인지 전혀 안 나타나 있어요. 그래도 상황을 이해하는 데 불편함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꼭 필요한 부분만 선택해서 보여주었다는 것이 이 시의 장점입니다.   물론 이 시를 쓴 학생이 일부러 이렇게 계산해서 썼을 리는 없습니다. 그냥 강아지가 귀여우니까 생각나는 대로 보인 대로 쓴 것이겠지요. 꼭 이론을 공부하지 않아도 아주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은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절묘한 감각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잃어버립니다. 그리고서 어른이 된 뒤에 한 번 시를 써보라고 하면 엉뚱한 묘사만 잔뜩 하다가 괴상망측한 시를 내지요. 이런 감각을 잃지 않고 되찾는 일이 시인이 되는 길입니다. 그걸 배우는 것이 창작법이고요.   사실 배우지 않아도 순수한 마음으로 본 세상을 정직하게 적으면 그게 감동을 주는 시가 된답니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하기 바랍니다. 무슨 엄청난 기술을 배워서 시를 쓰려고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던 깨끗한 영혼을 회복하는 것이 좋은 시를 쓰는 가장 좋은 기술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합니다.   병아리                 김은지(2-1)     어미 닭 쫓아다니느라, 나들이 나가느라, 정신없는 병아리.   소풍가는 아이들처럼 때지어 쫓아다니고,   까만 눈 속에 흑진주 박은 듯이 반짝거리며,   합창하듯이 ‘삐약’거리는 귀여운 병아리.   노란 원피스가 잘 어울리는 유치원 아이들처럼   노란 옷이 잘 어울리는 사랑스런 병아리.     비유가 일부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이 작품의 전체 흐름은 병아리의 모습을 묘사하는 데 있습니다. 연노란 색 털이 보송보송한 병아리를 보면 누구나 귀엽다는 생각을 합니다. 병아리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아주 잘 잡아내고 있지요. 봄에 눈에 잡힌 한 풍경을 그렸는데, 바로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 병아리를 보면서 감탄했던 순간으로 안내합니다. 딱히 병아리가 어때서라기보다는 그런 상황에 처한 자신의 체험을 떠올리기 때문에 감동하는 것이죠. 그런 순간은 아주 순수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으로 독자를 끌어들였다는 것이 이 시의 장점입니다. 이렇게 어떤 상황을 깔끔하게 그려놓기만 해도 좋은 시가 된다는 사실을 이 시는 보여줍니다.   부처님 오신 날              장미(2-1)   지금 목탁소리가 들린다.   스님들이 부처님 앞에서 절을 하고 있다.   불경소리가 들린다. 불경을 외우는 스님 옆에서.   사람들이 부처님께 절을 하고 있다.   어린아이에서부터 머리가 하얀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모두 부처님께 절을 하고 있다.   부처님은 행복을 바라는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지.   우리 모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신다.     절에 간 체험을 간략하게 잘 요약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미소를 짓고 있지요. 부처님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서 그 미소의 의미를 나름대로 제시했습니다. 부처님이 왜 미소를 짓고 있는지는 아무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설명했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 사람의 설명일 뿐인 것입니다. 부처님은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오신 날 사람들이 많이 가서 소원 비는 것을 보니까 그런 마음을 부처님이 아시는 거라고 추측한 것입니다. 그 추측이 생뚱한 것이 아니라면 시에서는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사물을 새롭게 해석할 권리가 있고 의무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해석한 장면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여주듯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건이나 사물에서 자기 나름대로 새로운 면을 찾아내어 노래하는 것 역시 시의 중요한 방법입니다. 이 시는 그런 방법에 충실한 것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의 절터 풍경이 손에 잡힐 듯이 떠오르지요? 이렇게 생활의 느낌을 보이는 대로 그리듯이 쓰는 것도 시의 한 방법입니다.   요즘 나는             정해남(제천상고 3)   친구들이 남자친구 이야기를 하면 난 힘없이 고개를 돌리고 맙니다.   친구들이  자기 집안 얘기를 하면 난 무척 바쁜 양 딴청만 피웁니다.   친구들이 심술궂은 내 짝 이야기를 하면 난 어디를 가는 척 슬며시 뒤로 물러 나와버립니다.   친구들이 조기 취업 이야기를 하면 난 나와 무관하다는 듯 하품만 해 버립니다.   무언가에  속하지 않으면 딴 세상 사람이 되어야 하는 세상의 법칙.   요즘 나는 이렇듯 모든 것에서 예외인 아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외톨이가 되어 가는 학생의 모습이 아주 깔끔하게 묘사되었지요? 정말 군더더기 하나 없습니다. 이란 말이 나오네요. 이 말은 실업계 학생들에게 해당하는 얘깁니다. 실업계 학생들은 3학년 2학기 때 현장실습이라는 것이 있어서 공장이나 회사에 취업을 나갑니다. 이때 각 업체에서 추천해달라고 주문이 들어옵니다. 그러면 성적을 보거나 생활 태도를 보고서 점수에 따라 순서대로 취업을 내보냅니다. 못 나가거나 늦게 나가면 전에는 못난이 취급을 하곤 했습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요. 그것을 말한 것입니다. 열등감이 있는 학생의 심리와 행동을 아주 잘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이 학생만의 이야기 같지만 사실 알고 보면 당시의 이런 환경에 처한 학생들은 열에 아홉은 이런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니 마치 자기 얘기인 것처럼 말했지만, 이것을 읽는 사람은 마치 자기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이야기를 해도 남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시입니다.   이 시에서 보듯이 그리듯이 쓰는 방법은 어떤 것을 그릴 것이야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노릇을 합니다. 남들이 별로 공감할 수 없는 것을 아무리 충실하고 빼어나게 그린들 사람들이 반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지요. 그래서 시인들은 고민을 하는 겁니다. 과연 어떤 부분을 그릴 것인가? 정답은 늘 자신에게 있습니다. 자신에게 절실한 것은 남에게도 절실한 것입니다. 그런 부분을 흥분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려주는 것이 좋은 작품을 쓰는 비결입니다.   5연에는 이란 말이 두 번 나오는데, 이 중에 하나는 다른 말로 바꾸어주는 것이 좋겠죠? 불필요한 반복은 시에서 단점으로 봅니다 농무                신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서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조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농무는 시골에서 농사꾼들이 상모를 돌리면서 한 바탕 추는 춤을 말합니다. 물론 장구라든가 북 같은 도구들이 따라 나오지요. 이 시는 그런 시골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이 시를 쓰던 상황의 시골을 보면 농사를 지어도 비료 값도 안 나오죠. 사는 게 답답하고 고달픕니다. 시골 살림이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런 어려움에 찌든 사람들이 나와서 춤을 추는 것입니다. 나 는 조선 중기 사람들입니다. 벽초 홍명희가 소설 을 썼는데, 거기에 나오는 인물들이죠.   답답하고 살기 어려운 시골의 정경이 잘 요약되었습니다. 그런데 하고 많은 풍경 중에서 하필 사람들이 버리고 떠나는 시골을 상대로 이렇게 세세하게 묘사를 했을까요? 여기에 시인의 의도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농촌은 날로 피폐해졌습니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그 속도는 점점 빨라졌지요. 우리나라는 농사를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하고 하늘처럼 떠받들며 살아온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어요. 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농사는 이제 사람을 먹여 살리는 기능을 도시에 떠넘긴 겁니다. 그러면서 점점 사람들이 시골을 떠나지요. 이렇게 되면 수 천 년 동안 이어져온 농촌이 파괴됩니다. 그러나 거기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잘 살 수 있을까요? 그 반대입니다. 떠나지 못해서 하는 수 없이 삽니다. 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래도 농촌을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 시는 그런 사람들의 애환을 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모습을 충실하게 그린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사람들에 대한 시인의 동정심을 겉으로 드러냈다면 이 만큼의 감동을 주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한 감정을 살짝 감추고서 안타까운 풍경만을 슬며시 그려서 제시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감동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미지로 그림 그리듯이 쓴 시가 어떤 효과를 내려고 하는 것인지 잘 알겠죠? 감정이 직접 드러나지는 않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그 그림 전체를 머릿속에 그린 후에 한꺼번에 감동이 밀려드는 것입니다.   주막                      백석     호박잎에 싸오는 붕어곰은 언제나 맛있었다     부엌에는 빨갛게 질들은 팔모알상이 그 상 위엔 새파란 싸리를 그린 눈알만한 잔이 보였다     아들아이는 범이라고 장고기를 잘 잡는 앞니가 뻐드러진 나와 동갑이었다     울파주 밖에는 장꾼들을 따라와서 엄지의 젖을 빠는 망아지도 있었다     제목이 주막입니다. 나그네들이 오가는 길목에서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옛날 숙박업소를 말합니다. 백 시인은 평안북도 사람입니다. 해방 전에 자신의 고향집 풍경을 그린 것이죠. 풍경만 그려놓았을 뿐 가타부타 무슨 말이 없습니다. 이렇게 풍경만 제시해도 그것을 읽는 사람의 머릿속에는 그림이 떠오르면서 어떤 감성을 불러일으킵니다. 친구 엄마가 운영하는 주막에서 친구가 호박잎에다가 잘 고은 붕어를 가져다준 모양이죠? 장꾼들이 망아지를 끌고 와서 밥을 먹고 가는 그런 추억의 풍경들이 고스란히 살아나서 그런 정황을 아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묘한 향수를 자극하게 됩니다. 이렇게 풍경을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시를 쓸 수 있습니다.   불국사                 박목월   불국사 자하문   달안개 물소리   대웅전 큰보살   바람소리  솔소리   범영루 뜬그림자   흐는히 젖는데   흰달빛 자하문   바람소리 물소리.     이 시는 묘사의 극단까지 나갔지요? 불국사에 대해서 시를 쓰는데, 자신의 의견을 모두 버리고 눈에 보이는 대로 적었습니다. 그것도 거의 명사만을 썼습니다. 어떻습니까? 불국사의 분위기가 잘 전달이 되나요? 읽는 사람은 이 명사들이 나타나는 대로 불국사의 정경을 떠올리면서 따라갑니다. 그의 머릿속에는 불국사의 정경이 그림처럼 나타나겠지요?   사실 절에 대해서 시를 써보면 만만찮습니다. 절이란 부처님이 사는 곳인데, 그곳에 대해서 섣불리 말했다가는 망신만 당하기 일쑤입니다. 불교의 사상이나 철학이라는 것이 쉽게 접근해서 얻기 어려울뿐더러 설령 얻었다고 해도 문자 밖의 세계이기 때문에 말로 하기 참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놀러왔다는 듯이 묘사를 해 가지고는 또 절의 그 신성한 모습이 담기지를 않거든요. 그래서 아주 절제된 감각으로 불교의 신앙체계와 관련이 있는 이미지들을 끌어들이기가 쉽습니다. 그런데도 설명을 자꾸 하게 되어 짧은 지식을 드러내곤 하지요. 이렇게 명사만 나열해서 시 한 편을 이루어야겠다고 판단한 것 자체가 굉장한 고수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듯이 쓰기의 극치를 보여주는 시입니다.   살다보면 우리는 때때로 잊을 수 없는 장면이나 상황을 마주치는 수가 있습니다. 예컨대 5.18 광주항쟁 때 열 살 안팎의 한 아이가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안은 채 제 품에 안은 사진틀에 턱을 괴고 앞을 바라보는 사진 한 장이 신문에 실려 전 세계인의 가슴을 찡하게 만든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광주 사태를 떠올릴 때 그 사진이 먼저 떠오릅니다. 한 장면이 그대로 한 사건의 인상을 결정해버린 것입니다. 비단 이런 커다란 사건만이 아니라 개인에게도 이런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장면은 특별한 설명 없이 제시만 해주어도 큰 울림을 갖습니다. 바로 이와 같이 어떤 전형이 될 만한 사건이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기에 가장 좋은 시의 방법이 바로 입니다.   디지털 세대인 여러분들이 이런 효과를 가장 많이 그리고 쉽게 접하는 것은 광고일 것입니다. 10초의 미학이라는 말이 있듯이, 광고는 가장 짧은 순간에 시청자의 뇌리로 파고들어야 하기 때문에 옛날식으로 물건의 쓰임새나 효과에 대해 시시콜콜 설명했다가는 당장 리모콘이 다른 번호를 눌러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장면을 제시해주는 방법을 많이 씁니다. 바로 이 광고식 보여주기 수법을 연상하면 시에서 쓰는 이 방법을 이해하기 좋을 듯합니다. 시를 오래 쓸수록 이 방법의 위력을 점점 더 느낍니다. 3)직접 말하기     위의 두 가지 방법은 무엇엔가 의탁해서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그런 만큼 어느 정도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시에는 이런 것을 전혀 몰라도 쓸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각나는 것을 정리해서 수필 쓰듯이 쓰는 것입니다. 체험하면서 느낀 점을 담담하게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라고 이름을 붙여봤습니다.     이 방법은 가장 흔하게 쓰이는 방법이고, 또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생각나는 것을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쓰는 것입니다.   시는 언어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언어는 사람의 생각을 상대에게 전해주는 기능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의 본래 속성대로 내 생각을 전해주는 수단으로 여기고 자신의 생각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어는 사람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인데, 막상 글을 쓰면 이상하게도 생각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을 말로 적을 때의 감정까지도 전달됩니다. 시는 바로 이 점을 노린 겁니다. 생각을 전달하되, 거기에다가 최대한 많은 감정이 실리도록 쓰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글을 쓰는 사람이 그렇게 감정이 잘 실리도록 써야 합니다. 그러니까 언어 자체에 시의 속성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언어가 감정을 최대한 갖고 가도록 쓰는 방법에 시의 속성이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방법을 잘 터득할 수 있는가? 그건 딱히 어떻다고 말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말로 설명하자면 너무 어려워집니다. 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 왼쪽 신발을 먼저 신었던가 오른쪽 신발을 먼저 신었던가를 말하라는 것과 비슷합니다. 잘 쓰면서도 왜 그렇게 썼느냐고 물으면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시입니다.   다만, 이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이 읽고, 또 많이 쓰면 저절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쓰는 요령은 이렇습니다. 자신이 겪은 일 가운데서 새로 깨달은 부분을 과장되지 않고 솔직하게 적으면 됩니다. 그런 일을 자꾸 반복하다 보면 점차 숙련이 됩니다.   그러면 작품을 보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내 안의 적                    김민지(3-1)   이번만은 꼭 하겠다고 이번만큼은 해 내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말일뿐이다. 생각일 뿐이다.   몸과 마음은 서로 적이다. 그래서 인지 마음이 말을 듣지 않는다. 이상한 현상이다.   진실하게 말하자면 나도 몸이 하는 행동을 알면서도 모른 척 하는지 모른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인지 몸과 마음을 구별할 수 있는 시기가 온 것 같다.     자, 이 시에 앞서 배운 어떤 표현이 있나요? 없지요? 특별한 기교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학생이 현재 고민하고 있는 생각의 질서만이 나타날 뿐입니다. 그래도 자신의 갈등을 아주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간략한 정리 역시 생각의 질서를 나타내는 것이고, 그런 생각의 질서를 아무런 꾸밈없이 드러내는 것 역시 시의 중요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라고 제목을 붙인 것입니다. 말 그대로 자신의 생각을 직접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학생의 작품을 한 편 더 보겠습니다. 겉모습은 많이 다른 것 같지만 원리는 같은 시입니다.   나들이 가던 날           김민지(3-1)   어미 닭과 그 뒤를 졸졸 따르는 병아리들처럼……   우리도 선생님 뒤를 따라 쫑쫑거리며 봄나들이를 간다.   우리가 나들이 왔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곤히 자던 잠을 깨고 눈을 비비며   서로서로 먼저 나올려고 발버둥을 친다. 할미꽃은 허리 많이 아픈지 고개를 들을 생각도 않는다.   진달래는 우리를 환영하기 위해 줄지어 서서 바람을 따라 산들산들거린다.   진달래가 샘이 났는지, 소나무와 다른 나무들은 우리를 막아서서 못 가게 가시를 이용해 마구 찔러댄다.   우리는 ‘아야’ ‘아야’ 하며, 화를 내지만 우리는 알 수 있다.   샘이 나서가 아니라 관심을 끌기 위해서란 걸…….     중간 중간에 비유도 나오지만 이 시를 잘 보면 선생님을 따라서 산으로 봄나들이 간 체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봄나들이야 누구나 다 하는 일이지요. 그런데도 이것이 시가 되는 것은 이 학생이 경험한 느낌을 적었기 때문입니다. 체험은 같을지 몰라도 그것을 느끼는 것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선생님을 따라갔기 때문에 이 학생만 간 건 아닙니다. 다른 학생들도 다 갔지요. 그런데 이 느낌은 이 학생만의 것입니다.   앞서 자신의 느낌을 적으라고 했던 것 기억날 겁니다. 자신의 느낌이라는 것을 유달리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 때문입니다. 느낌은 사람마다 다 다르고 시에서는 사람마다 다 다른 그런 느낌을 존중합니다. 사람마다 느낌이 다 같다면 시라는, 나아가 문학이라는 예술이 성립할 수도 없습니다. 예술은 독자성이 그 생명입니다.   가는 도중에 꽃도 구경하고, 바람도 느꼈고, 나무들에게 찔렸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들이 사람의 사랑을 받으려고 샘을 냈다고 썼습니다. 아마 그 날 산에 가서 본 것은 이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구름도 봤을 것이고, 동네도 봤을 것이고 무덤도 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시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시에서 자신의 체험을 쓸 때 모든 것을 다 쓰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몇 가지만 추려서 쓴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경험 중에서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요약해서 제시하는 방법이 바로 지금 우리가 세 번째의 방법으로 제시한 방법입니다. 어떤 다른 표현법을 사용하지 않고 체험을 추려서 중요한 부분만 직접 말하는 것입니다.   이 시에서는 비유도 들어있지만, 전체의 흐름은 자신의 체험을 말하는 것이라고 미리 말했습니다. 그래서 의 범주에 넣은 것입니다.   4연 첫 행의 는 가 맞는 것이겠지요? 그렇기는 합니다만, 시에서는 그런 거 너무 골치 아프게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나중에 말하겠지만, 그런 거 시시콜콜 따지다가는 정작 생각이 끊겨서 시를 잘 못 씁니다. 그리고 이런 틀린 표현이라고 하더라도 실제 생활에서 그렇게 발음하고 쓰면 그게 오히려 더 시의 분위기를 살려줍니다. 시에서는 맞춤법보다 어감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아래 5연을 보면   진달래가 샘이 났는지, 소나무와 다른 나무들은 우리를 막아서서 못 가게 가시를 이용해 마구 찔러댄다.   는 굳이 없어도 되는 말입니다. 그렇지요? 없어도 앞 뒤 의미 연결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있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되는 건 아닙니다. 이렇게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을 경우에는 없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합니다.   계속해서 작품을 보겠습니다.   시 쓰는 친구들             김봉진(2-1)   지금은 국어시간. 노는 시간이라 착각하고 놀고있는 친구들   병덕이는 나무에 매달리고. 광섭이는 돌아다니며 시를 자랑하고. 연호는 노래를 리매이크를 하고. 제연이는 “방카”의 카리스마를 자랑하고. 팔장 끼고 돌아다니는 윤표. 시를 쓰고 들어오는 정근이와 희성이 춤을 추며 들어오고.   우리 반은 시 쓰는 시간이 체육시간보다 쬐금 재미있다.     시를 쓰라고 시간을 주면 얌전히 앉아서 쓰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자꾸 떠들려고 하지요. 한 번은 시상을 떠올려야 한다면서 밖으로 나가자고 하더군요. 말하자면 야외수업을 하자는 겁니다. 그래서 모르는 체하고 허락을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시 쓸 생각은 안 하고 엉뚱한 장난만 하면서 놀더군요. 그래도 그냥 두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들이 해놓은 말이 있으니까 뒤가 켕겼는지 집에서 써왔습니다. 이 시도 그 중의 하나죠.   국어 시간에 시 쓰는 친구들의 모습이 자세히 묘사돼있죠? 여기서 병덕이니, 광섭이니, 연호니 하는 학생들이 누구인가를 굳이 알 필요는 없겠지요? 왜냐하면 여러분의 경험으로 보아 어떤 상황인지 모두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름은 특수한 명사이지만, 이렇게 독자로 하여금 연상할 수 있는 상황에서 쓰이면 보통 명사처럼 쓰인답니다.   이 시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어떤 상황을 잘 요약한 겁니다. 특별히 화려한 표현도 없고, 재미있는 표현도 없지만, 시 쓰라고 준 시간을 활용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눈에 잡힐 듯이 보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이 살고 행동하고 느끼는 것을 잘 요약하여 옮겨놓으면 그것이 그대로 시가 되는 것입니다.   맨 마지막 줄에는 재미있는 심리가 드러나 있지요? 남학생들에게 체육시간보다 더 재미있는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도 국어시간이 재미있다고 말하는 것은 미안한 마음이 투영된 것이겠죠? 앞부분에서 제시했듯이 시를 쓴다고 하면서 엉뚱한 짓을 하는 데도 혼내거나 뭐라고 잔소리를 하지 않으니까 일종의 아부를 한 것이겠죠. 그런 순수한 마음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 마음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 시의 장점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애개개! 이런 정도는 누가 못써? 이런 생각을 하는 학생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 학생들은 여태까지 약간 잘못된 고정관념에 빠져있던 것입니다. 시는 무언가 그럴 듯한 것을 표현해야 한다는 그런 고정관념 말입니다. 그런 고정관념은 틀림없이 교과서의 시에서 배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학생들처럼 자신의 생활을 노래하는 과정을 충분히 거쳐서 그런 시에서 시의 재미를 느끼게 된 다음의 일입니다. 시는 결코 특별한 것을 노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소박하게 담는 훌륭한 그릇입니다. 바로 이 점을 깨닫는 것이 시를 잘 쓰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무시무시한 놀이터              이세호(1-1)   놀이터는 위험을 주는 곳 항상 조심해야 할 곳.   시소는 무척이나 재미있다. 하지만 엉덩이가 다칠 수도 있다.   그네도 무척이나 재미있다. 하지만 뒤에 있다가 부딪칠 수도 있으며 떨어질 수도 있다.   미끄럼틀도 재미있다. 하지만 굴러 떨어질 수 있다.   놀이터는 언제 다칠지 모르는 위험한 곳.     재미있지요? 놀이터를 재미있는 곳으로만 생각했지, 위험하다고 노래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듯합니다. 그러나 내막을 살펴보면 정말 그렇지요. 누구나 놀이터에서 다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이터라는 머릿속의 개념 때문에 그런 위험을 노래한다는 생각을 미처 못 한 것입니다. 이 학생은 놀이터라는 선입관을 버리고 자신이 처했던 위험한 경험을 시로 쓸 생각을 했습니다.   이와 같이 남들이 흘려버리기 쉬운 것을 한 번 깊이 생각해서 옮겨 놓는 것도 좋은 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너무나 많지요.   시작과 끝 부분에 비슷한 말을 반복하면 의미를 강조하는 효과를 냅니다. 물론 이 학생이 그러한 시의 이론을 알고 썼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잘 정리하면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는 명쾌히 몰라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바로 이와 같이 자신의 내면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것이 시를 잘 짓는 것입니다. 시의 이론을 배운다고 해서 시를 잘 쓸 수는 없습니다. 이와 같이 생각이 움직이는 방향을 면밀히 살피면 복잡한 시의 이론에서 설명하는 효과를 나도 모르게 시에서 발휘하게 됩니다.   봉진이                김준석(2-1)   우리 반의 실장 우리 반의 덩치 얼굴에는 여드름 꽃.   얼굴에는 하얀 미소를 띠고 귀에는 항상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부르네.   내가 놀리면 도끼눈을 뜨고 나는 도망을 가네. 잡히면 죽으니까.     사람의 특징을 아주 짧게 요약하여 보여주는 것도 시의 좋은 방법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무수히 만나면서 살고 사람 사이에서 감정을 느끼고 살아갑니다. 그런 감정들을 소홀히 하지 않고 주위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서 그들의 특징을 노래하는 것 역시 즐거운 일입니다.   맨 끝에 보듯이 장난을 많이 치는 관계인가 봅니다. 잡히면 죽는다는 표현은 좀 과장된 것이겠지요? 하지만 이렇게 표현하는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만큼 친하게 지낸다는 뜻입니다. 장난치고 도망가고 하는 두 사람의 관계가 눈앞에 선하게 떠오르게 상황을 아주 잘 요약했습니다.   내 필통               채희성(2-1)   내 필통은 갈곳 없는 볼펜들의 종착점 갈곳 없는 볼펜은 다 내 필통으로 온다.   교실에 굴러다니는 볼펜도…… 복도에 굴러다니는 볼펜도……   내 눈에만 띠면 전부 다 내 필통으로 모여든다. 그래서 내 필통에는 내 볼펜 조금. 줏은 볼펜 하나 가득.     우리가 자랄 적에는 연필도 귀했고 볼펜은 더더욱 귀했습니다. 그래서 보통 잉크를 펜촉으로 찍어서 썼지요. 그런데 잉크는 병에 담겨서 가지고 다니면 아주 불편합니다. 깨지는 수도 있고 엎질러지는 수도 있고, 또 펜촉은 너무 날카로워서 찔리는 수도 있습니다. 연필 같은 경우에는 쥐고 쓸 수 없을 정도로 짧게 닳으면 볼펜깍지에 끼워서 썼습니다. 종이도 그렇습니다. 그때는 질도 나빴고 귀했습니다. 교과서도 몇 해를 건너면서 빌려다 보아야 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요새는 물자가 너무 흔해서 탈입니다. 연필은 절반도 쓰기 전에 잃어버리기 일쑤이고, 볼펜 종이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학생들이 돌아가고 난 교실에 가보면 볼펜이나 공책 따위는 쉽게 주울 수 있습니다.   이 학생은 볼펜을 줍는 버릇이 있는 모양이지요? 자신의 그런 습관을 잘 묘사한 작품입니다. 옛날 같으면 남의 볼펜을 주워서 자기 필통에 넣기 쉽지 않습니다. 도둑놈으로 몰릴 테니까요. 그런데 요즘이야 물자가 흔한 세상이니 설사 다른 사람이 가져간다 해도 그거 돌려달라고 할 사람 거의 없을 것입니다. 흘린 것이니 말이죠.   이와 같이 자신의 습관을 소재로 표현하는 것도 중요한 재미입니다. 그래서 늘 자신의 버릇이나 생활을 꼼꼼히 살피는 것이 시를 잘 쓰는 지름길입니다. 시는 주변에 대한 관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3년 마지막 행의 은 이 맞겠지요? 그러나 이런 거 함부로 따지면 안 된다고 아까 말했죠? 그 사람의 말버릇이라고 봐도 되기 때문입니다. 시에서는 개인의 그러한 소소한 버릇까지도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우유             길영근(2-1)   월 화 수 목 금 토 매일 매일 나오는 매일 우유   화요일엔 정근이 얼굴처럼 검은 초코 우유   금요일엔  소풍을 가고 싶던지 피크닉 우유   우리 학교엔 언제나 3가지 맛! 우유가 찾아온다.     요새는 학교마다 거의 우유를 먹습니다. 옛날에는 상상도 못하던 일이지요. 면장 아들이라든가 아니면 최소한 양조장 주인의 조카쯤은 되어야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우유 역시 흔한 것이 돼놓으니, 이젠 잘 먹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학생들이 돌아간 뒤에 교실에 가보면 교탁에는 꼭 우유가 몇 개씩 남아있습니다. 그 만큼 흔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각 학교에서는 성장기에 있는 학생들이 우유를 먹도록 갖가지 꾀를 냅니다. 그 중에 좋은 것이 입맛을 당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흰 우유를 주다가 어떤 때는 딸기 우유, 초콜렛 우유같이 다른 맛이 나는 우유를 주기도 하지요. 어떻게든 먹여보려는 선생님들의 노력입니다.   이 시는 그렇게 해서 배달되는 우유를 보며 장난삼아 쓴 것입니다. 매일 우유, 초코 우유, 피크닉 우유. 이렇게 오는 우유 이름을 갖고 나름대로 해석을 붙여본 것이죠. 매일 오니까 , 초코 우유는 밤색이니까 친구의 얼굴색을 닮아서 , 피크닉에서는 소풍을 연상하고는 , 모두가 친근하고 엉뚱한 생각입니다.   발상이 참 재미있지요? 그런데 잘 보면 비유도 있어서 시 전체의 균형을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체의 흐름은 매일 공급되는 우유에 대해서 쓴 것이기 때문에 비유에서 다루지 않고 이 단원에서 다룬 것입니다. 이렇게 재미를 느끼면서 시를 쓰다 보면 나중에 저절로 훌륭한 작품을 쓸 수 있게 됩니다. 그전에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이렇게 생활 주변에서 재미있는 시의 소재를 찾는 일입니다.   처마 밑 고드름                   노은희(1-1)   언제 녹아서 고드름이 되었는지 처마 밑엔 고드름이 줄지어 서있다.   누가 더 키 크나, 누가 더 뚱뚱하나 대결하기 바쁘다.   제일 큰 고드름은 뽐내다가 어느 개구쟁이의 손에 떼어지고   두 번째로 큰 고드름도 뽐내다가 두 번째 개구쟁이의 손에 떼어진다.   이렇게 처마 밑의 고드름들은 개구쟁이 손에 하나 둘씩 떼어져 간다.   언제 녹아서 고드름이 되었는지 처마 밑엔 고드름이 줄지어 서있다.     이 시에도 역시 비유가 나오지요? 그렇지만, 비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고드름을 보고서 그것을 관찰했다는 것이 이 시의 장점입니다. 고드름은 추녀 끝에서 땅 쪽으로 자라지요. 추울수록 굵기도 굵어지다가 햇빛을 받으면 물을 뚝뚝 흘립니다. 아이들이 이것을 신기하게 여기고서는 똑똑 떼어서 먹기도 하고 차버리기도 합니다. 그런 과정을 눈에 보이는 대로 정리하여 적은 것이지요. 어른들의 눈에는 보일 리 없는 현상입니다. 세심한 관찰이 이룬 일이지요.   그림                정윤섭(3-1)   하얀 백짓장 위에 색색깔로 그림을 그린다. 살색으로 얼굴을 그리고 검은색으론 머리를 그리고 파랑색으로는 옷을 그리고 회색으로 바지를 그리면 나의 모습 완성   옆에서 누군 줄 모르는 사람을 그리고 그 사람을 향해서 빨간색을 날린다. 누군 줄 모르는 사람이 나를 보고 웃는다. 그 사람이 누굴까?   다음 장으로 넘기고 그림을 한 장 더 그린다. 이번엔 그 사람이 보인다. 누구지? 아직 내가 모르는 사람 그 사람이 나에 사랑에 상대 그 사람의 색깔을 모르겠다. 나는 사람에 색깔을 모르는 아직 애송이다.     사춘기 학생이면 누구나 이성에 대해서 사랑을 느낍니다. 대부분 그것이 부끄러운 것인 줄 알고 숨기지요. 그리고는 혼자서 끙끙 앓습니다. 표현력이라도 좋고 배짱이라도 좋으면 과감하게 자기감정을 표현하면 되는데,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것도 여의치 않습니다. 그래서 속을 속 태우지요. 그런 감정을 시로 쓴 것입니다. 그것을 그림에다 비유를 했고, 그림을 보면서 완성하고픈 사랑을 노래한 것입니다. 사춘기의 섬세한 감수성이 아주 잘 나타난 경우가 되겠습니다.   시험             김영주(2-1)   시험은 나에게 어려운 문제 시험을 보면 틀릴까봐 마음이 콩닥콩닥.   풀고도 걱정되어 또다시 풀어보고 수학시험을 보면 내 마음은 긴장하듯   시험은 왜 어려울까? 아이들은 고민하네. 틀린 문제 싫어   시험을 부모님께 보여 주면 부모님이 나에게 하시는 잔소리.     자, 이 시는 학생들의 절실한 고민을 담은 시지요? 무슨 기법이나 기술을 가지고 쓴 시가 아닙니다. 성적을 두고 걱정되는 생각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그저 시험 때문에 애간장 타는 심정을 있는 그대로 적은 것이지요.   이렇게 자신의 심정을 직접 말하듯이 쓰는 방법이 있습니다. 마음이 간절할수록 시는 감동을 줍니다. 아주 많은 시들이 이 방법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모기향                엄유진(안양예고 1)   초등학교 1학년 정식이,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친구들과 얼음땡을 하고 들어와서는 얼굴과 손, 발에 물만 대충 묻히고 잔다 땀냄새 때문에 극성을 부리는 모기 소리에 찡얼대며 일어난 준식이는 미색바탕에 백합 무늬가 그려져 있는 이빠진 접시 위에 모기향을 피워 동생 머리맡에 놓는다. 그래도 형이라고.                     2003년 경남대 제32회 전국고교생 한마백일장 운문 장원   이 시의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한 형이 동생을 위해 모기향을 피우는 사연을 동작이 이어지는 대로 묘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시를 시답게 해주는 것은 마지막 구절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를 맨 마지막에 제시함으로써 앞에서 무심한 듯이 묘사해온 구절들을 한 순간에 시로 만들어줍니다. 그럼으로써 동생을 생각하는 형의 마음을 아주 잘 나타냈습니다.   이런 시를 보면 좋은 시를 쓰는 것은 글재주가 아니라 주변의 사소한 일들에 대한 관심과 관찰력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 시에서도 특별히 엄청난 기교나 재주가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동생을 생각하는 한 아이의 행동을 관찰하여 그것을 시로 써볼 생각을 한 계기가 좋은 시를 낳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말을 이 학생이 시를 쓰는 재주가 부족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안 되겠죠? 이 상황을 이만큼 간략하면서도 필요한 말들만 골라 쓸 줄 아는 것도 아주 대단한 능력입니다. 그리고 오랜 연습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죠.     앞서 살펴본 두 방법, 즉 1)빗대어 쓰기와 2)그리듯이 쓰기는 나름대로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세 번째 방법인 직접 말하기 수법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살아가면서 느낀 점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쓰면 됩니다. 물론 어떻게 쓰면 시가 단단해지고 군더더기 없이 자기의 생각이 잘 전달될 것인가 하는 것을 익히고 연습하는 숙제가 남아있습니다만, 달리기 연습을 많이 한 학생이 잘 달릴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은 많은 작품을 쓰면서 조금씩 숙달시켜 가면 될 일입니다.     금강산   글 깨나 한다는 사람치고 읊지 않은 사람이 없고 그림 깨나 그린다는 사람치고 그리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런 작품을 위해 나도 기꺼이 절망의 순간을 맞고 싶다.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것은 조화옹의 손길 앞에서 절망한 나머지 시 한 구절 읊조리지 못하고 그냥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그리움이 너무 긴 나머지 막상 보았을 때 조화옹의 솜씨가 그 동안 꿈속에서 그려낸 내 작품만 못하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순전히 생각만으로 썼습니다. 비유도 없고 상징도 없고 이미지도 없습니다. 그냥 금강산을 생각하는 마음뿐입니다.   금강산은 우리나라, 아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이지요. 그런데 분단으로 인해서 남쪽에서는 가볼 수 없는 땅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금강산에 다녀온 옛날 분들한테 금강산 칭찬을 들으면서 나름대로 금강산을 머릿속에 그려봅니다. 너무 오랜 세월 동안 가장 아름다운 형상으로 금강산을 마음속에 만들었습니다. 분단의 세월이 깊어가면서 그 그림 역시 화려해지지요. 한 사람의 상상력을 최대한 가동해서 그렸으니까요.   그러다가 몇 해 전부터 북한 금강산을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배를 타고 가기도 하고 얼마 전부터는 육로로도 가지요. 그래서 지금은 갈 수 있는데도 이제는 겁이 나는 겁니다. 만약에 ‘내가 생각한 금강산보다 실제 금강산이 못하면 어쩌나?’ 하는 엉뚱한 생각이 나는 겁니다. 오랜 분단이 사람의 마음속에 만들어놓은 상처지요. 이런 상태를 있는 그대로 생각 따라 적은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만을 적어도 시가 된다는 것을 말하려고 이 작품을 소개했습니다.   이 작품은 비유나 이미지가 없이 생각으로만 썼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이 꼭 순수하게 생각만으로 쓰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의 생각을 직접 말하는 방법으로 시를 쓰더라도 그 안에 이미지도 나타나고 비유도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 더 흔한 방법입니다. 한 번 보겠습니다.   몇 년 전에 우리 가족이 서울 나들이를 간 적이 있습니다. 방학을 이용해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롯데월드를 가서 놀다 오자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기차를 타고 청량리역에서 내려서 잠실 가는 지하철을 탔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아내, 그리고 아이 둘, 해서 모두 넷이었습니다. 낮이어서 그랬는지 자리가 비는 바람에 우리 넷은 나란히 앉았습니다. 몇 시간 기차에 시달리다 보니 피곤했는지 옆에 앉은 아내가 꾸벅꾸벅 졸다가 제 어깨에 머리를 대는 겁니다. 곧 이어서 아이들도 엄마 옆구리에 끼여서 졸더구만요.   그런데 저는 졸 수가 없는 겁니다. 넷 중에 행선지를 아는 사람은 저뿐이고 만약에 제가 졸다가 역을 지나치면 낭패를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졸음이 쏟아지는데도 저는 졸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마음속으로 내려야 할 역을 꼽으면서 기다렸지요.   그런데 그 순간 묘한 생각이 떠오르는 겁니다. 이거 상황이 꼭 제가 살아가는 것과 똑같은 것처럼 느껴진 것입니다. 남편이라고 아빠라고 한 가족이 저를 따라나섰는데, 저 자신도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잘 알 수 없고, 그러면서도 한 가족을 이끌고 그들을 어디론가 데려가는 제 처지가 생각난 겁니다. 순간 순간의 내 결정에 따라서 이들의 삶도 바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묘한 상황입니까? 사는 게 뭔지도 모르고 흘러가는 것이 내 인생인데, 그런 인생에 또 다른 인생 여럿이 딸려서 지금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입니다. 갑자기 가슴이 콱 막히면서 막막해지더구만요. 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 나이 마흔 아저씨가 어디 울 수가 있나요? 한 동안 고개를 떨구고 있는데 머릿속에서 갑자기 시의 회로가 작동하기 시작하더군요. 그래서 담담히 속으로 이 시를 썼습니다. 그리곤 집에 와서 정리했지요.     지하철에서   그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 운이 좋게도 우리 식구 넷이서 나란히 앉았다. 잠시 후 아이들이 졸고, 양쪽 옆구리에 아이들의 몸을 받친 아내도 존다. 롯데월드 가는 길, 나는 잠이 오질 않는다. 우리 식구가 누릴 한 때의 즐거움을 향하여 지하철이야 잠실에서 끝나겠지만, 그곳에서 끝나지 않을 또 다른 길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살아갈수록 길은 험하고 흐려지는데 방향을 물어도 분명해지는 건 없고 캄캄한 창 밖은 불빛이 번뇌처럼 스쳐간다. 종착점과 방향을 분명히 모르는 한 가장과 그 가장을 철썩 같이 믿고 따라나선 곤한 식솔들을 태우고 지하철은 덜컹거리는 어둠 속을 달린다. 롯데월드 가는 길 간간이 서는 간이역을 잊은 채 식솔들은 곤히 잠들고 나는 잠이 오지 않는 지하철에서.     비유도 나오고 이미지도 나오지만 시의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은 지하철을 타고 롯데월드를 찾아가던 체험입니다. 이 체험의 과정에서 깨달은 내용을 독자들이 알기 쉽게 설명해준 것입니다. 이렇게 직접 말하기의 수법으로 시는 써집니다.     라는 창작 방법을 마치기 전에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말하기는 누군가 듣는 것을 전제로 하고 속삭이듯 쓰는 것입니다. 산문 중에서 그러한 방법으로 쓰는 것이 바로 입니다. 따라서 편지의 어법을 시에서 활용하면 아주 좋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예를 보겠습니다.   해바라기의 사랑                 최희정(제천상고 2)   당신의 뒷모습에서 빗물이 묻어납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형태를 흐리게 하고 내 마음을 흐리게 합니다.   언제나  뒷모습만을  바라보며 서 있는 기다림의 마음을, 그것만으로도 행복과 슬픔을 모두 느낄 수 있는 해바라기의 사랑을 당신은 모르십니다.   바람이 세차어도 꺼지지 않을 촛불 하나 가지고 있지만 당신에게서 묻어나온 빗물에 내 가진 촛불 하나 슬픔으로 가물거립니다. 이젠 돌아서서 날 보아주지 않으시렵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쓴 편지의 투를 흉내 낸 시입니다. 누군가에게 말하는 형태로 쓰였지요? 물론 이 시의 원리는 비유를 활용한 방법입니다. 해바라기는 해를 바라보면서 삽니다. 해와 해바라기의 관계를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관계로 바꿔놓고서 쓴 시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그 비유가 아니라 말투입니다. 편지에 쓰이는 말투로 쓰면 시를 쓰기가 굉장히 편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시를 써야 할지 막막할 때는 편지투를 사용하는 것도 좋습니다.     신혼 초에 주말부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일요일 날 새벽에 떠나서 토요일 날 오후에 오는 것이죠. 사랑하니까 함께 살자고 하는 것이 결혼인데, 결혼을 하자마자 떨어져서 일주일에 한 번 보니 얼마나 애절하겠어요? 월요일마다 아내는 눈물바람입니다. 그런 아내를 보는 저의 심사는 어떻겠어요. 감정이 북받칠 밖에요.   그런데 현실이 현실이다 보니 아내를 위로해야 할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가끔 편지를 썼지요. 그런데 감정이 애절하다 보니 써놓은 편지를 읽어보면 시 같은 거예요. 그래서 이참에 시를 쓰자 마음을 먹고 그날 그날의 느낌을 시로 썼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그것을 엽서에 적어서 보냈습니다. 아내가 무척 감동하더군요. 그러면서 그 어렵던 시절을 건넜습니다. 옛날에 냈던 시집에서 두 편만 소개합니다.   완행열차   좌석표가 이미 매진이 되어 하는 수 없이 완행열차에 올랐습니다. 긴 의자 두 줄뿐인 맨 뒷칸으로 가니 텅 빈 것이, 속도에 떠있는 것은 덜컹거리는 고요와 나 혼자 뿐입니다. 느긋한 마음에 늘어질 대로 늘어져 긴 의자에 네 활개를 펴고 누웠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편할 수 없습니다. 당신에게 가는 길은 언제나 이렇게 마음 편하면 좋겠습니다. 마음의 허리띠를 한 칸 늘여놓고 돌아갈 그 어떤 곳이 있다는 것은 이 각박한 세상에 당신이 내게 내린 커다란 축복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투명한 햇살과 시원한 봄바람이 열린 창으로 손뼉 치듯 쏟아집니다.     이 시는 정말 편지 그대로지요? 일요일 날 아내를 헤어져서 돌아오다가 기차를 타고서 느낀 것을 있는 그대로 적은 것입니다.   꽃   아름다움이란 개나리, 튜울립, 장미 같은 꽃들을 염두에 둔 말이지요. 그러나 복숭아, 살구 혹은 사과나 배꽃도 그에 못지않게 아름다운 것들임을 이 아침 과수원 길에 잠시 서서 깨닫습니다. 목적에 가려진 아름다움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인지 삶의 그늘에 가려진 아름다움을 어느 날의 당신에게서 문득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듯이 아름다움이 목적인 꽃나무들보다 더 아름다운 과일나무의 꽃들 앞에서 감탄사를 연발하는 아침입니다. 꽃이 지면 그저 풀일 뿐인 꽃들과 가지마다 풍성한 가을의 예감을 매달고 있는 과일나무의 아름다움을 잠시 생각하곤 이 시간 생활의 먼지 속에 가려져 있을 당신의 빛과 풍성한 당신의 사랑을 생각했습니다.   여기에는 비유가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비유 얘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편지투로 된 방식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점을 살펴보기 바랍니다.  자, 이렇게 해서 시를 쓰는 원리 세 가지를 다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시를 이렇게 분류한 것은 이전에는 없던 일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한 것입니다. 이것이 칭찬 받을 일인지 비난  받을 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읽고서 실제로 시 쓰는 데 도움을 받으면 칭찬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비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고 저러고, 이렇게 세 가지로 분류를 했는데, 그냥 이렇게 설명만 해놓으면 좀 무책임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방법에 대해 간단한 이름을 한 번 붙여볼까 합니다.   세 가지 방법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제일 먼저 는 내 생각을 다른 것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입니다. 비유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비유라고 하는 것은 서로 다른 두 사물 사이에서 같은 점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생각과 같은 것을 골라내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것은 서로 다른 사물의 사이에서 동일점을 찾아내는 것이기 때문에 ‘동일시의 시학’이라고 이름 붙이면 어떨까요?   두 번째 는 이미지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미지로 말을 한다는 것은 마음의 그림을 그린다는 얘깁니다. 따라서 쉽게 ‘그리기의 시학’이라고 하겠습니다.   세 번째 는 자기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쓰는 데는 듣는 사람을 전제로 합니다. 말하자면 이야기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야기의 시학’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이렇게 해서 서툴지만 나름대로 이름을 붙여봤습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빗대어 표현하기 - 동일시의 시학 ②그리듯이 쓰기 - 그리기의 시학 ③직접 말하기 - 이야기의 시학  4)변형과 종합     시를 쓰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라는 것이 여태까지 말해온 지론이었습니다. 방법상으로 보면 분명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런 방법을 섞어서 쓰는 또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실제로 그렇습니다. 이 방법을 둘 또는 세 가지를 모두 섞어서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원칙은 세 가지이지만, 이 섞어 쓰는 정도에 따라서 다시 몇 가지로 더 나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변형과 종합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그 변형의 방법에 대해 한 번 훑어보고 가겠습니다. 그냥 참고로 하기 바랍니다. 어차피 위의 세 가지 원칙만 알면 나머지 변형은 그 세 가지를 가지고 적당히 섞은 것이기 때문에 다 알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순수하게 위의 방법 한 가지만으로 쓴 시들이 있을 것입니다.   [1] 순수한 동일시의 시학 [2] 순수한 그리기의 시학 [3] 순수한 이야기의 시학   여기에다가 두 가지를 섞어서 쓴 것이 있을 수 있으니, 그 경우의 수를 만들어보면 다음 네 가지를 만들 수 있습니다.   -[1+2] -[1+3] -[2+3] -[1+2+3]     관찰력이 민감한 학생은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1+2]와 [2+1]은 다른 것 아니냐고요. 맞습니다. 그런데 수학에서는 맞는데 시에서는 이 두 가지가 섞인 양상이 거의 비슷합니다. 물론 동일시의 시학을 주로 하고 그리기의 시학을 곁들이로 하는 것과, 그리기의 시학을 주로 하고 동일시의 시학을 곁들이로 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이지만, 막상 그 정도로 정확하게 구별해서 섞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섞이나 저렇게 섞이나 다 비슷한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것은 [3]을 뼈대로 하고 거기에 [1]이나 [2]를 추가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접하는 시의 한 7~80% 가량이 이런 형태에 속합니다. 자신이 살아가면서 느끼거나 깨달은 것을 담담히 서술하면서 거기에다가 신선한 비유와 상징, 또는 이미지를 곁들여 쓰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자세한 구별이 필요하다면 더 자세히 나누어도 됩니다. 다만 그렇게 너무 세세히 구별하면 시 쓰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 이런 정도로 그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방법이 섞인 시를 보겠습니다. 유성음            -야학일기 3.-                               강규선   저무는 날. 처음부터 우리들은 흔들림이었고.           Ⅰ 비틀대는 수업을 가로지르며 네가 다가왔다. 썬생니, 수업을 하노라면 흐르는 시간 따라 떠돌던 마음도 문득 깨어나, 그렇지 너도 읽어야지, 국어 책을 읽히고, 순간 깜빡이는 불빛으로 불안하던 눈동자들.   저무는 바람 속. 무심히 드러누운 활자 사이를 더듬으며 비틀대는 반신불구, 네 혀 주위로 우뚝 솟아오르는 한 어둠을 보았다. 종결어미 없이 스러지는 너의 말 끝으로 부끄러이 스며드는 한 얼굴을 보았다. 견고하게 아름답던 세상 풍경마저 비스듬히 돌아누워 아 우 어 우 으, 으, 으.   결국은 소리죽인 울음으로 끝나가던 책 읽기. 끝없이 응고하며 주저앉는 너의 침묵이 크낙한 말의 벽으로 일어서는 역설 앞에서 웅웅대며 흩어지던 시야 끝 돌연 반신불구처럼 뒤틀며 키득이던 아이들.              Ⅱ   모든 우리들은 어디에도 없어. 오늘 국어시간. 하루의 안전을 확인하듯 조심스레 출석을 부르면, 너의 번호 위에서 언뜻 비틀대는, 붉은 두 줄의 확고함. 꿈꾸듯 걸어온 나의 실족들을, 꼭꼭 디디며 이어서는 너의 빈자리. 사실 산다는 것은 흔들림 이외에 또 무엇인가. 살아있는 우리들은 잠시 역설일 뿐이라며 교탁을 후려치는 불빛.     그러나 이제 책을 펴야지. 가진 것 너무 많은 우리여서 서글픈 확신 하나, 아는 것이 힘. 어둠 저 너머로 별 하나 흐르듯 자 찔끈 두 눈 감고 오늘은 유성음을 공부할 차례. 저…… 선생님. 유성음(流星音)이란 우리들처럼 어디에도 없는 소리인가요. 아 아니야 유성음(有聲音)은 떨려, 떨리는 음. 코를 잡고 발음해 봐, ㄴ-ㄹ-ㅁ-ㅇ- 그래 너희들처럼 코가 울리지 울리는 너희들이 유성음.     이라는 부제가 달린 것으로 봐서는 연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야간학교 생활을 다룬 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은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용을 추려보면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발음을 잘 못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발음이 잘 안 되니 국어시간에 곤란하겠지요. 그 때문에 아이들은 웃고요. 당사자는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상황을 바라보는 교사의 마음은 너무나 아프고 게다가 그런 상황을 어찌 해줄 수 없다는 무력감이 교사를 괴롭히고 있는 상황입니다.   야간학교는 일반 학교를 갈 여건이 못 돼서 다니는 학교입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배우고자 하지만 그게 여의치 않은 사람이 있는 겁니다. 이와 같은 체험이 시의 중요한 줄기를 이루고 있지요. 직접 말하기를 택하는 입니다. 그런데 섬뜩하면서도 날카로운 표현들이 들어있습니다.   무심히 드러누운 활자 말의 벽 반신불구처럼  너의 번호 위에서 언뜻 비틀대는, 붉은 두 줄의 확고함 유성음(流星音) - 유성음(有聲音) 울리는 너희들이 유성음.     이런 표현들은 비유에 바탕을 둔 표현들입니다. 의인화도 들어있고요. 또 자세히 보면 상징도 들어있습니다. 다음이 그런 구절들입니다.   처음부터 우리들은 / 흔들림이었고 우뚝 솟아오르는 한 어둠을 꿈꾸듯 걸어온 나의 실족들을, 꼭꼭 디디며 이어서는 너의 빈자리.   의인화니 상징이니 하는 것들은 빗대어 쓰기의 수법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는 에 이 결합된 경우입니다.   이렇게 시는 어느 한 가지 방법으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방법이 결합하면서 다양한 표정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학생의 작품을 보겠습니다.   대망석재                박미라(옥천고)   바닥에 널린 돌조각들 밟고 선 아버지의 신발 속으로 불편한 시간이 들어가 있다 아버지는 돌을 깎는다 살점 떨어져나갈수록 더 선명한 눈물자국 보여주는 대리석에 형의 숨소리 박아넣는다 돈을 벌어오겠다며 뛰쳐나간 형은 석재상의 간판 주름처럼 거미줄이 생기고 색 바래가도 돌아오지 않는다 아버지는 형을 기다리며 날마다 무딘 망치소리 사이에 흐느끼는 신음 채워넣는다 전기톱이 살을 뚫고 오는 소리에 톱날을 물어버리는 대리석 돌가루 날리는 허공에 물 뿌려보지만 뿌연 그리움은 쉽게 진정되지 못한다 아버지의 닳은 옷소매에 채워지는 기다림 털어도 헤진 자리 깊숙이 파고 들어가 털어지지 않는다 망부석처럼 말이 없는 석상 앞에서 아버지는 굳게 다문 입으로 바람 드나드는 것 허락하지 않은 채 구름도 멈춰선 하늘을 오래 바라본다 신발 속에서 뒤척이는 돌조각들 서로 부딪혀 모서리 헐어내고                         2003년 배재대 청소년 소월문학상 운문부 우수     이 시는 석재상을 운영하는 아버지의 삶을 요약한 시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거의 묘사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돌을 깎아서 석물을 만들면서 이루어지는 동작을 동원시켜서 말을 하고 있지요. 그런데 거기에 할 말이 사이사이 끼어들어서 읽는 사람에게 설명을 해줍니다. 돈벌이가 안 되는지 형은 돈을 벌어오겠다며 뛰쳐나갔습니다. 그 만큼 아버지는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지요. 그런데 시인은 아버지의 생활이 힘들고 어렵다고 쓰지를 않았습니다. 그것을 석재상의 여러 도구와 작업으로 대신 묘사를 하면서 중간 중간에 자기가 하고픈 말을 곁들인 것입니다. 묘사와 할 말이 적당히 배합된 작품입니다.     시의 형식을 보고서 발상법을 구별하자면 한이 없습니다. 예컨대 비유를 사용하는 동일시의 시학에서도 가짓수를 무제한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동일시의 시학은 비유이기 때문에 비유하는 것과 비유 당하는 것 두 가지가 나타나게 마련이지요. 그것을 원관념과 보조관념이라고 한다는 것은 앞서 설명한 대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원관념을 더 많이 드러내느냐 보조관념을 더 많이 드러내느냐에 따라서 시의 모습이 많이 달라집니다. 원관념만 많이 드러내고 보조관념은 조금만 드러낸 시와, 원관념은 조금 드러나고 보조관념이 많이 드러난 시는 분위기가 많이 다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아주 조화를 이루어서 균형 잡히게 드러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를 구별하면 다음과 같이 되겠지요.   -원관념을 더 많이 드러낸 시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비슷하게 드러난 시 -보조관념을 더 많이 드러낸 시   이렇게 하면 셋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 사이사이에도 무한정으로 종류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무지개는 일곱 색깔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 사이사이에 무수히 색깔이 들어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컨대, 이런 식이지요.   -원관념 10% + 보조관념 90% -원관념 20% + 보조관념 80% -원관념 30% + 보조관념 70% -원관념 40% + 보조관념 60% …………… -원관념 90% + 보조관념 10%     물론 이 사이에도 계속 숫자를 잘게 나눌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게 현실 속에서 정확히 그숫자만큼 달아서 시를 판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요. 이론상으로는 그렇다는 얘깁니다.   게다가 이것을 위의 분류와 결합시키면 시의 가짓수는 무한대에 가깝게 많아집니다. 그것을 다 다루어 볼까요? 어때요? 머리가 딱딱 아프지요?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있습니다. 앞서 말한 세 가지 방법만 기억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상황에 따라서 섞여서 나타난다고 보면 간단합니다. 5)퇴고하기     시에서 이미 써놓은 작품에 손을 대거나 고치는 것을 퇴고(推敲)라고 합니다. 물론 한자말이죠. 이 말은 중국의 한 고사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아니! 이 어려운 말은 쉬운 말로 바꿔 쓸 생각을 안 하셨나요? 더욱이 남의 것을 갖다 쓰는 것은 더 싫어하시면서. 이렇게 물을 사람이 있을 법도 합니다. 없다구요? 없으면 말구요. 하하하.   사람이 하는 일이 전문화가 이루어지다 보면 불가피하게 어려운 용어가 등장합니다. 저는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입니다.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말을 쓰지 않고 전문용어를 쓴다고 해서 내용이 달라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자꾸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무언가 다른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일반인들이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자기들이 하고 있다는 식의 권위를 세운다든지, 그것을 바탕으로 일반인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서 자신들의 영역을 확보한다든지 하는 것 말입니다. 법률 용어나 의학 용어를 보면 이런 혐의를 지울 수 없습니다. 문학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가피한 경우도 없지 않겠지만 영어나 한문 같은 어려운 말을 써서 일반인들이 따라가기 참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언뜻 보면 이 퇴고라는 말도 그렇게 보입니다. 어려운 말이지요. 그 말이 생겨난 사연까지 알아야 하는 경우니까요. 그런데 이 말에 작품을 고치는 어떤 아름답고 인간미 넘치는 사연이 들어있다면 어떨까요? 그런 사연으로 인해서 시 쓰는 사람들 사이에 관습으로 전해졌다면, 그 아름다운 사연을 기억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어요? 그런 말들은 좀 어렵더라도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그 사연을 좀 보겠습니다.     옛날 당나라 말기에 가도(賈島)라는 중이 있었습니다. 이 중이 나귀를 타고 가다가 기가 막힌 시 한 구절을 얻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새는 연못가 나무에 깃들고,(鳥宿池邊樹)     중은 달빛 아래 문을 두드린다.(僧敲月下門)   어때요? 길을 가다가 저녁때가 되면 시인으로서 이런 생각을 할 법하지 않은가요? 그런데 써놓고 나니 이 자가 문제였습니다. 중이 문 앞에 서서 인기척을 낼 때 두드린다고 하는 것이 더 좋을까, 민다고 하는 것이 더 좋을까 잘 판단이 서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귀 위에서 직접 동작을 해보았습니다. 미는 동작을 했다가 두드리는 동작을 했다가, 이렇게 혼자 움직이고 흥얼거리며 어떤 글자를 쓸까 골똘히 고민하는 사이 나귀는 등에 탄 사람이 방향을 가르쳐주지 않자 엉뚱한 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나귀가 간 곳은 공교롭게도 경윤의 행렬이었습니다.   경윤(京尹)은 요즘으로 치면 서울시장쯤 됩니다. 당시 서울을 관리하는 최고 책임자가 호위군사를 대동하여 지나가는 행렬로 밀고 들어간 것입니다. 당연히 소란이 일었지요. 으리으리한 원님 행차가 지나가는데 그 위에 탄 사람은 어디에 온 줄도 모르고 밀고 두드리는 동작을 하면서 흥얼거리고 있으니 미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겠어요? 시위들이 당장 붙잡아서 경윤 앞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러자 그 경윤은 어찌 된 사연이냐고 물었고, 가도는 시 구절에 들어갈 말을 고르지 못해서 골똘히 생각을 하다가 그랬다고 사연을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경윤은 어떤 구절이냐고 물었고, 가도는 앞의 두 구절을 말해주었습니다. 그 구절을 한참 생각하던 그 경윤은 가 더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 경윤은 누구냐 하면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유명한 한유라는 선비였습니다. 다행히도 그 나귀는 가도라는 이름 없는 한 중을 당시의 대학자이자 높은 벼슬아치에게 데려가 소개를 해준 셈입니다. 아주 묘한 인연이지요. 사정이 이쯤 되니 이 둘 사이의 관계는 어떻겠어요? 당연히 친해졌겠지요? 이 사연을 전해주는 이야기책의 끝 구절이 ‘드디어 함께 고삐를 나란히 하여 돌아갔다’(遂與竝轡而歸)고 하는 것으로 봐서는 그 뒷이야기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한유의 권유로 이 중은 환속하여 나중에 벼슬생활을 합니다. 이 사건으로 한유의 명성 덕분에 단숨에 유명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시가 지닌 경향은 다소 달랐습니다. 한유는 당나라 말기의 시 풍조가 화려한 표현을 좋아하는 쪽으로 흘러가자 그것을 비판하면서 꾸밈이 없는 옛날 한나라 때의 순수한 분위기로 돌아가자는 쪽이었고 가도는 당시 화려한 재주를 한껏 뽐내며 멋을 부리는 쪽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친다는 뜻으로 쓰는 라는 말은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가도가 로 할 것이냐 로 할 것이냐 고민하듯이 정성 들여서 고친다는 뜻이 담긴 말이지요. 이 정도면 아름다운 일 아닌가요? 그래서 라는 말보다는 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기억하는 일이야말로 시를 생각하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퇴고를 하는 방법에 무슨 왕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그리고 많이 쓰다 보면 저절로 고치는 요령이 생기는 법입니다. 이런 일에 수학 문제 풀 듯이 어떤 방법이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죠. 시는 이 세상에는 없는 마음속의 느낌을 언어에 담아서 질서화 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많이 쓰다 보면 저만의 어떤 원칙이 생기는 것이고, 그것을 창작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무언가 기댈 언덕은 있어야겠죠? 먼저 시를 쓸 때는 발상을 메모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메모를 마친 다음에 그 시에서 무엇을 말할 것인가 하는 것을 찾아봅니다. 쉽게 말하면 주제를 찾는 것입니다. 처음 시상이 머릿속에 떠올랐을 때는 주제가 분명하게 잡히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냥 상상만으로도 존재하는 경우가 많죠.   그런데 대부분의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제입니다. 나머지 표현 방법들은 이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표현은 이 시의 주제를 잘 전달하기 위해서 작용한다고 보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발상을 메모했으면 주제를 한 번 더 생각하고, 그 주제에 맞는 내용을 보충합니다. 이 때의 내용이란 주제를 보충해주는 할말도 포함되고 거기에 필요한 표현이나 장식도 포함됩니다.   이렇게 하고 나서는 다시 처음부터 읽어가면서 주제를 전달해주는데 잘 어울리는 이미지들은 놔두고 나머지는 과감하게 잘라버립니다. 라고 하는 것은, 표현이 아깝다고 그대로 두지 말라는 얘깁니다. 시를 쓰는 사람들은 표현을 굉장히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평상시에도 이런저런 좋은 표현들을 머릿속에 담아두었다가 시에 필요할 때 쓰죠. 좋은 표현을 얻는 일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애써 얻은 구절들은 버리기 아까워하죠. 그렇다고 그대로 두면 바로 그 아까운 구절 때문에 시 전체의 초점이 흐려집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버린다고 해서 영원히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나중에라도 다시 쓰는 날이 생기니 염려 말고 지금 당장은 과감하게 버리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는 다시 읽어가면서 부족한 부분은 표현이든 주제든 추가시킵니다. 그리고 다시 읽어 가면서 다듬으면 됩니다. 그리고 반드시 소리 내어 읽어야 합니다. 몇 차례 소리 내어 읽다 보면 읽어가면서 가락도 생기고 눈으로 볼 때와는 또 다른 단점들이 눈에 띕니다.   이상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① 발상부터 재빨리 적는다. ② 초고를 보면서 시의 주제를 명확히 정한다. ③ 그 주제를 중심으로 이미지를 재배치한다. ④ 불필요하거나 조금 거리가 먼 이미지나 표현은 과감하게 잘라낸다. ⑤ 다시 읽으면서 부족한 주제나 표현을 보충한다. ⑥ 세밀한 부분을 다듬는다. ⑦ 몇 차례 소리 내어 읽는다.   그러면 퇴고의 과정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앞에서 비유로 쓰는 동일시의 시학을 소개하면서 이란 작품을 소개했습니다. 그 작품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목이 삐끗해서 정형외과에 가서 엑스레이 사진을 찍었고 내 몸 속의 뼈가 드러난 그 사진을 보면서 쓴 시입니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어떤 할 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을 대충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내가 여태까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오늘 알고 보니 공룡이다. 흉측한 모든 뼈대를 살가죽으로 덮고 헝겊으로 잘 싸기까지 한 저 백악기나 쥐라기의 한 공룡이다.   정형외과에서 찍은 엑스레이 사진에 내 본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등뒤로 살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지만 목뼈부터 등뼈까지 날개처럼 돋친 스테고사우루스 뼈들의 나열. 엑스레이 앞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러니까 이제야 풀린다. 옷으로 덮어도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던 탐욕과 주머니에 든 송곳처럼 밖으로 치솟던 공격성과 난폭함 이런 것들은 공룡한테 당연한 것이다. 어디서 말미암은 것인지 분명해진다.   수 억 년이 지났는데도 완전히 퇴화하지 못한 채 내 살과 가죽 속에서 으르렁거리며 한 마리 공룡이 깃들어있다.     먼저 형광 사진에서 본 뼈를 통해서 나를 공룡으로 규정을 하고, 그 모습의 실상을 제시한 다음에, 내 속의 난폭성이 공룡에서 왔음을 말한 다음에, 그런 공룡이 내 몸 속에 들어있다고 제시하고자 한 방법입니다. 그 순서대로 정리됐죠.   그런데 좀 거칩니다. 이렇게 제시하면 뭐 시라고 못 할 것까지는 없지만 잘 썼다고 보기는 힘들겠죠. 이렇게 네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독자가 아무런 불편도 느끼지 못하고 저절로 따라가게 하려면 이 비약과 비약 사이를 좀 더 매끈하게 연결시켜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제입니다. 이 정도에서도 주제가 분명하기는 합니다. 육식공룡의 탐욕성이 내 안이 있다는 것이죠. 그 탐욕성에 대한 설명이 그냥 뼈대만 나와 있어요. 그래서 공룡과 인간의 탐욕성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부분에 대한 추가설명과,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표현하는 것이 이번 퇴고의 목적이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쳤습니다.   나는 내가 여태까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오늘 알고 보니 공룡이다. 약육강식이 판을 치던 저 쥐라기나 백악기의 한 지층에서 살아온 한 마리 육식공룡임을 정형외과에 와서 알았다. 엑스레이선이 통과한 뒤 형광불로 밝혀진 벽에 드러나는 나의 본모습. 비록 살가죽으로 뼈대를 싸고 그럴듯한 헝겊으로 덮기는 했지만, 정형외과의 형광벽이 흑백으로 밝혀주는 나의 본모습이 드러난다. 살에 가려서 거울로는 볼 수 없었지만 목에서부터 등을 거쳐 꼬리까지 날개처럼 돋친 스테고사우루스의 화려한 뼈들이 엑스레이 필름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제야 모든 의문이 스르르 풀린다. 내 마음속엣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던 탐욕과 옷으로 덮어도 송곳처럼 밖으로 치밀던 공격성, 약자한테 강하고 강자한테는 약한 비굴함까지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 불분명하던 것들이 질서정연한 뼈와 뼈 사이로 가지런하게 이제야 분명하게 드러난다. 가장 중요한 무기였던 꼬리의 뿔은 꼬리뼈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지만 수십 억 년이 지난 지금에도 내 살과 살갗 속에서 으르렁거리며 한 마리 공룡이 깃들어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연을 없앴다는 겁니다. 연은 의미와 이미지를 구성하는 한 매듭입니다. 대개는 연을 넘어갈 때 상상력의 비약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상상력의 비약이라고는 두 단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 몸의 뼈 배열이 공룡의 뼈와 같기 때문에 공룡의 탐욕성이 내게도 남아있다는 두 가지입니다. 그러니 이 두 상황을 설명하려면 시가 길어질 것이고, 시가 길어진 것에서 굳이 연을 나누어야 좋은 효과를 얻기 어렵다고 본 것이죠. 차라리 설명하듯이 끌고 나가면서 두 가지를 서로 대비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연을 없애고 좀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놓고 나니까 좀 더 상황이 자세하게 설명되었고, 또 이 시를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주제도 명확히 잡혔습니다. 그런데 너무 길어졌고, 또 설명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앞쪽의 든가 든가, 다든가, 라든가 하는 것의 거의 산문 수준입니다. 그래서 산문 투의 문장을 없애고 군더더기를 조금 덜어내는 작업이 남았습니다. 아래의 작품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드러날 것입니다.     공룡   나는 내가 여태까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오늘 알고 보니 공룡이다. 살가죽으로 뼈대를 싸고 그럴 듯한 헝겊으로 몸뚱이를 덮었지만 정형외과의 형광벽에 비친 나는 쥐라기나 백악기 어느 한 지층 속에 납작하게 박혀있어야 할 한 마리 공룡. 목에서부터 등마루를 거쳐 꼬리까지 날개처럼 돋친 스테고사우르스의 화려한 뼈들이 흑백의 필름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수억 년 내력의 탐욕과 난폭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 뼈들의 행렬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니 이제서야 모든 의문이 스르르 풀린다. 이만하면 되었다 싶은데도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던 물욕과 옷 밖으로 송곳처럼 치밀던 공격성, 그리고 약자한테 강하고 강자한테 약한 비굴함까지 도대체  내 마음 어느 구석에서 말미암는지 알 수 없던 것들이 공룡의 뼈들 사이로 분명히 드러난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큰 코 다칠 것임을 예고하며 등줄기 따라 톱날처럼 뻗어간 우람한 뼈들. 가장 중요한 무기였던 꼬리 끝의 뿔은 엉덩이 밑의 꼬리뼈 속으로 완전히 감추었지만 수십 억 년이 지난 지금에도 전혀 진화하지 못한 채 한 마리 공룡이 내 몸 안에서 으르렁거리고 있다.     문장의 배열 구조가 바뀌고 위치가 바뀌면서 좀 더 단정해졌다는 느낌이 올 것입니다. 형광벽에서 공룡의 뼈를 연상하고 그것을 정신세계까지 연장하여 욕망과 탐욕에 시달리는 나, 나아가 인간의 속성을 고발하고자 한 작품이 된 것입니다. 큰 뼈대는 변하지 않았지만, 중간중간의 말투나 문장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 바뀐 과정을 면밀히 살펴보면 시를 고치는 방법에 대한 암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스스로 많이 써나가는 과정에서 이런 점들을 터득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앞에서부터 시에 천재가 없다고 자꾸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같은 과정 때문입니다. 발상은 천재성으로 얻는 것일 수 있지만, 이런 것은 천재성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실하지 않으면 천재 역시 아무 것도 아닙니다.     충북 보은에 가면 장안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인내천을 기치로 내건 동학의 출발점이 된 곳이죠. 원래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은 경주사람이었습니다. 창시자 최제우의 후계자였죠. 그런데 동학을 혹세무민하는 종교로 규정한 관청의 탄압을 피해 깊은 산중으로 숨었습니다. 북으로 올라가서 소백산 기슭의 마을에 숨었다가 다시 백두대간 줄기를 타고 내려오다가 보은의 깊은 산 속에서 오랜 세월 동안 숨어 지냅니다. 교세가 확장되자 신도들은 억울하게 죽은 그들의 초대교주 최제우의 죄를 풀어달라는 신원운동을 합니다. 초대교주 신원운동을 하려면 2대교주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그러려면 그가 사는 곳으로 모여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각 지역의 동학 지도자들은 최시형이 살던 보은으로 모여듭니다. 그리고는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논의를 하게 됩니다. 바로 그곳이 장안입니다.   이 신원운동을 시발점으로 하여 한국의 근대사는 벌집을 쑤셔놓은 모양으로 요동을 치기 시작합니다. 이른바 동학농민전쟁이 그것입니다. 정부는 백성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탐관오리들은 날뛰고 하니 참을 수 없는 백성들은 무기를 들고일어납니다. 그리고 청나라와 일본군까지 가세한 정부군을 상대로 몇 년에 걸쳐 전쟁을 하지요. 그리고는 쫓기고 쫓긴 농민군이 다시 보은의 북실이라는 곳에 와서 마지막으로 궤멸 당하고 맙니다. 이 북실이라는 곳은 장안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있습니다. 동학농민전쟁의 시작과 끝이 충북 보은이라는 곳에 있는 셈입니다.   지금 북실에는 종곡초등학교가 있습니다. 종곡은 한자로 이라고 쓰는데 북의 골짜기라는 뜻이죠. 당연히 을 한자로 번역한 것입니다. 동네 이름도 종곡리입니다. 이 학교에 볼 일이 있어 들렀다가 그곳이 바로 그 북실임을 알고는 머릿속이 텅 비면서 한 가지 시상이 문득 스쳤습니다. 북실, 북처럼 생긴 동네. 그런데 북은 소리를 내서 무언가를 알려주는 도구입니다. 그렇다면 그 북은 천지개벽을 알리는 것으로 볼 수 있고, 그것은 우리가 역사에서 배운 동학의 의미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동학은 잠든 백성들의 마음속에 천지개벽의 기쁨을 알리는 종교였고, 그들이 마지막으로 죽은 곳이 북실이라면 그들의 행동과 사상을 북이라는 도구에 상징화 시켜서 시로 쓴다면 아주 적절한 비유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퍼뜩 스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재빨리 그 발상을 메모지에 썼습니다.   천지개벽을 알리는 커다란 쇠북이 이 골짜기 어딘가에 묻혀있다네. 저 어두운 세상에 누군가 남아있을까 두려워 귀머거리도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를 내기 위하여 온 신명으로 소리를 내려다가 깨진 북. 여기까지 오는데 100년이 걸렸네. 100년 전의 자취 찾아볼 수 없어도 어디선가 쇠북소리 들리네. 지나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들리고 여인의 소맷자락에서 들리고 소달구지, 뛰노는 아이들 골짜기 전체가 큰 북이 된다.   이렇게 썼습니다. 중요한 것은 골짜기 전체를 북으로 묘사하고 그 북을 천지개벽을 알리는 어떤 상징물로 활용한다는 것입니다. 그 점을 요약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북을 상징물로 사용하되 거기에 어떤 주제를 넣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동학농민전쟁은 백성들의 자신들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일어선 것이고, 그것은 곧 민주주의를 뜻할 것입니다. 그런데 100년이 지난 지금도 백성들은 관료들과 정치인들의 눈치를 보면서 삽니다. 완전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탓이죠. 입으로는 백성들의 심부름꾼으로 자처하면서도 국회의원이 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뇌물 받아먹다가 검찰에 붙잡혀가고, 대통령이 되고 나면 공약은 기억도 하지 못합니다. 이런 일들이 소란스럽게 일어나는 꼴을 우리는 매일 안방의 텔레비전에서 봅니다. 그렇다면 이 시에서도 당시의 실패한 혁명을 얘기하면서 우리가 진정으로 이루어야 할 민주주의 내지는 백성들의 나라에 대해서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방향으로 내용을 대폭 추가시켰습니다.   천지개벽을 알리는 커다란 쇠북이 이 골짜기 어딘가에 묻혀있다네. 새로운 시대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저 어두운 세상에 누군가 남아있을까 두려워 귀머거리도 듣게 하기 위하여 온 신명으로 소리를 내려다가 깨진 북. 그 북소리 다시 들으려 만장의 물결 앞세우고 여기까지 오는데 100년이 걸렸네. 한 번 열린 세상은 다시 닫히지 않는 법이니 만장의 물결 따라 어디선가 북소리 들린다. 처음엔 두근두근 심장 박동소리 같다가 한 사람의 한 발자국 모으고 두 사람의 두 발자국 모아서 조금씩 커진다. 개벽을 알리기 위해 기꺼이 깨진 100년 전의 북이 공명을 일으키다가 마침내 하늘을 모신 마음속에서 둥 두둥 운다. 마음의 골짜기에서 큰 북이 울다가 골짜기 전체가 큰 북이 된다.   이 정도 되면 일단 주제는 확정됐고, 발상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셈입니다. 2000년에 보은에서 작은 행사가 열렸습니다. 동학군들의 넋을 추모하는 행사였습니다. 그러니 거의 100년만에 보은에서 죽은 동학군들을 위로하는 행사가 열린 것이지요. 는 것은 그것을 암시하기 위해 집어넣은 말입니다. 그렇지만 시에서는 꼭 그 사건이나 행사를 얘기하는 것만은 아니고, 이 시를 쓰거나 읽는 사람들의 현재와 연결시켜주는 구실을 하지요.   그런데 어딘가 좀 산만하지 않은가요? 할 말만 제시되어 그렇습니다. 이 산만함을 없애려면 상상해간 방향을 뚜렷이 드러내야 하고 그에 따라 주제를 아울러 더 드러내야 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시상의 전개 방법과 순서를 좀 더 뚜렷이 하는 것입니다.   북실에서 천지개벽을 알리는 북을 떠올렸습니다. 그 북소리를 사람들은 듣기도 하고 못 듣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들어야 할 내면의 소리입니다. 그 소리를 들으러 북실에 왔고, 민주주의의 의미를 기억하는 현재의 시점으로 보면 100년만에 그들을 그런 의미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만이 그렇게 보겠죠. 현재 북실에는 그들의 흔적을 찾아볼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 상황도 아울러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분명히 의미가 있다는 얘기도 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을 설득하면 안 되고 북이라는 상징물에 실어야 하지요.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북이라는 사물을 묘사해주면 됩니다. 앞의 글도 그런 방향이 어느 정도 잡혀있지만, 조금 불투명하지요. 그래서 시가 좀 산만한 겁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생각을 좀 더 자세하게 정리하면서 이렇게 완성했습니다.   북실   천지개벽을 알리는 커다란 쇠북이 이 골짜기 어딘가에 묻혀있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새 세상 밖에 누군가 남아있을까 두려워 귀머거리라도 들을 큰 소리를 내려고 온 신명으로 부딪다가 깨진 북. 그 북소리 다시 들으려 만장의 물결 앞세우고 여기까지 오는데 1백년이 걸렸다. 솔잎죽창이 삭풍과 싸울 뿐 백년 전의 자취 찾아볼 길 없어도 한 번 열린 세상은 다시 닫히지 않는 법이니 눈을 감고 가만히 귀 기울이면 어디선가 북소리 들린다. 처음엔 두근두근 심장 소리 같다가 모여드는 발자국들 따라 공명을 일으키며 커지다가 마침내 세상을 삼켜버리는 큰 울림. 개벽을 알리기 위해 백년 전에 깨어진 북이 묻힌 마음의 골짜기에서 북이 운다. 큰 북이 울리며 골짜기 전체가 큰 북이 된다.     한결 단정해졌음을 느낄 것입니다. 이런 뼈대를 만들어 가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오랜 훈련을 거치고 연습을 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잘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자꾸 반복하다 보면 저절로 요령이 생깁니다. 여러분은 갑자기 천재가 되려 하지 말고 꾸준히 연습해서 좋은 시를 쓰는 그런 사람이 되려고 해야 합니다.     송나라 때 적벽부라는 유명한 시를 쓴 소동파라는 선비가 있습니다. 이름은 식이고 동파는 호죠. 그런데 이 사람은 평소 자기가 시의 재주를 타고났다고 큰소리 쳤던 모양입니다. 하루는 친구들이 찾아갔는데, 시를 보여주더랍니다. 그게 저 유명한 적벽부라는 시입니다. 삼국지의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한 그 적벽인데, 그곳을 유람하고 난 뒤의 소감을 시로 쓴 것입니다. 친구들이 명작이라고 모두 찬탄을 했습니다. 그런데 소동파는 그것을 단 한번의 가감도 없이 한 달음에 써 내려갔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천재성을 자랑하려고 했던 것이죠. 그 말을 들은 친구들은 더욱 감탄했습니다. 그러는 벗들을 바라보며 우쭐거리는 소동파의 모습에 눈앞에 선합니다. 잠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소동파가 다른 일로 잠깐 자리를 비웠습니다. 그 사이에 친구들이 혹시 다른 글이 없나 하고서 소동파가 앉았던 자리를 살펴보니 방석 밑으로 무슨 종이가 삐죽 나와있는 겁니다. 꺼내보니 거기에는 방금 보여준 적벽부를 고친 흔적이 역력한 글들이 수북이 쌓여있더랍니다. 적벽부를 고치다가 친구들이 오자 얼른 방석 밑으로 숨긴 것이죠. 소동파 역시 자기 재주를 한껏 자랑하고픈 마음을 지닌 평범한 사람임을 이런 데서 깨닫습니다.   아무리 천재라고 하더라도 고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말로 퇴고의 이야기를 마칩니다.  
652    [땡... 복습시간이다...]- 와- 동시를 쓰는 방법을 배워준대... 댓글:  조회:2383  추천:0  2017-08-18
동시 잘 쓰는 법   < 시 쓰는 요령 요약 > 리듬이 살아있게 쓴다. 쉽고 간결하며 아름다운 말을 사용한다. 연과 행을 꼭 나누어 써야 한다. 알맞은 비유와 감각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착한 마음으로 솔직하게 쓴다.   동시를 쓰는 방법 ① 글감은 무엇이든 좋습니다.   - 주위의 사물을 관심 있게 바라보며 지나쳐 버리기 쉬운 것에서 글 감을 찾아냅니다. 눈에 보이는 것, 마음을 스쳐 가는 짧은 생각, 늘 그 자리에 있는 자연 속의 일부분도 좋은 글감이 됩니다. 무엇을 쓸 것인가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무엇이든 동시의 재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둡시다. 착하고 고운 마음에서 동시도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됩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관찰력과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어린이다운 정서 속에서 글감을 찾아냅시다.   ② 거짓없이 솔직한 감정을 표현합니다.   - 동시는 맑고 깨끗한 마음의 글입니다. 억지로 기교를 부리거나 가식적으로 표현한다면 생명을 잃게 됩니다. 어린이의 마음은 때묻지 않은 순수함으로 부끄러움이나 잘못도 정직하게 표현하고, 사물을 바라보는 착한 마음으로 동시를 씁니다.   ③ 남의 글을 흉내내지 말아야 합니다.   - 동시는 짧은 글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다른 사람의 것을 암기했다가 모방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될 경우, 습관이 되어서 창작활동에 방해가 됩니다. 스스로 생각해 내어서 나만의 글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낱말 하나도 신중하게 생각하고, 행 하나, 연 하나에 정성을 다해 자신의 표현을 찾아냅니다.   ④ 리듬이 나타나게 씁니다.   - 동시는 노래에서 비롯된 글입니다. 노래처럼 아름다운 리듬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짧게만 쓰면 된다는 생각에 운율을 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음악처럼 율동을 가지고 노래를 부르듯이 쓰는 동시에서 동시의 참맛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설명하거나 이야기하듯이 쓰여서는 안 되며, 일정한 리듬과 흥겨운 가락이 숨어 있어야 합니다.   ⑤ 연과 행을 바르게 나누어 씁니다.   - 산문과 시의 구별은 연과 행의 구분에 있습니다. 동시는 산문과는 달리 글자와 글자가 효과적으로 이어져야 하며, 행과 연이 구분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의성어나 의태어도 사용하고 반복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같은 말을 자주 사용하게 됩니다. 의미가 비슷한 행들이 모여서 각 연을 이루고, 이 연이 모여 한 편의 동시가 완성됩니다. 제멋대로 나눈 행과 연은 호흡이 끊어지게 되므로 잘 짜 맞추어 나누어야 합니다.   ⑥ 알맞은 비유를 사용합니다.   - 짧은 글 속에서 많은 내용을 표현해야 하므로, 다른 것에 견주어 표현하는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비유를 사용하면 읽는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효과적으로 시를 표현하게 합니다. 직유는 두 개의 사물을 견주어서 '-같이, -처럼' 을 사용하는 것이며, 은유는 다른 사물로 그 의미를 대신 나타내어 원래의 의미를 감추는 것입니다. 이처럼, 비유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아름다운 의미를 찾아냅니다.   ⑦ 감각적인 표현을 사용합니다.   - 동시는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의 감각이 모두 동원되어야 합니다. 마음속에 간직한 것이나 사물의 모습을 눈에 보이는 것 외에 더 새롭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감각을 표현하는 것을 자신의 느낌으로 새롭게 표현합니다.     좋은 동시를 쓰는 요령   ① 다른 사람의 시를 많이 읽어야 합니다.   - 동시를 잘 쓰기 위해서는 윗사람이나 친구들의 좋은 시를 자주 읽고 암기하여 그 의미를 파악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내 나름대로 그 시를 소화시켜서 자기의 감정으로 만들어 둡니다.   ② 자주 써서 정리해 둡니다.   - 동시의 글감이 될만한 것이 있으면 그때마다 써 둡니다. 막상 새롭게 쓰려면 안 되는 경우가 있으니, 계절이 지나기 전에 그 계절의 감상을 써두고, 기쁜 일, 슬픈 일 등을 겪고 난 뒤에 곧바로 동시로 표현합니다. 처음부터 잘 쓰려면 무리를 하게 되어, 좋을 글이 나오지 않습니다. 자주 메모하듯이 시의 구절을 써두면, 꼭 필요할 때 정리하여 좋은 동시를 쓰게 됩니다.   ③ 사물을 바라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 계절이 변화하면, 온갖 자연의 모습이 바뀌며, 새 학년에 올라가면 친구들의 얼굴도 바뀝니다. 그러한 변화를 자주 찾아내어 자신의 감정으로 만들어 둡니다. 다른 사람이 찾지 못하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는 일이 동시 쓰기에 도움이 됩니다. 남들이 미처 찾아내지 못하는 자기만의 생각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면 좋은 동시가 됩니다.   시의여러가지 표현방법 ① 의성법; 소리를 비슷하게 흉내 내어 표현함으로써 그 소리가 직접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불러 일으켜 생동감을 더해 주는 방법입니다.   예) 귀뚜라미 귀뚜르르   ② 의태법; 사물의 모습이나 동작을 비슷하게 흉내 내어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예) 반짝반짝 빛나는 별   ③ 의인법; 사람이 아닌 것이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의인법은 무생물이 생물처럼 살아 움직이는 표현을 하므로 활유법에 속합니다.   예) 부끄러움을 가득 안은 아카시아 꽃   ④ 생략법; 낱말이나 구절을 빼어 버리거나, 간단하게 줄여서 여운을 남기도록 하는 표현법입니다.   예) 네 손을 잡듯…….   ⑤ 반어법; 문장에 나타난 뜻과 실제의 뜻을 서로 반대되게 나타내는 표현법입니다. 예) 아이, 얄미워라. (여기서 '얄밉다'는 귀엽고 예쁘다는 뜻)   ⑥ 역설법; 얼핏 보기에는 이치에 맞지 않는 듯하나, 실제로는 그 속에 진리가 담기도록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예)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   동시’란 어린이를 위한 시로, 동심(어린이의 마음)의 세계를 표현한 시이다. [동시의 특징] 1. 짧게 줄여 쓴 글이다. 2. 글쓴이의 상상력과 느낌 등이 담겨 있다. 3. 다양한 표현 방법을 사용한다. 예) 빗대어 표현하기, 말의 순서 바꾸기, 사람이 아닌 것을 사람인 것처럼 표현하기, 흉내내는 말 사용하기, 반복되는 말 사용하기 등 4. 연과 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시 짓는 방법] 1. 시의 글감을 정한다.  -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하고, 생각한 것들이 모두 글감이 될 수 있다.  2. 떠오르는 생각이나 느낌을 적는다. - 어떤 내용을 쓸지, 먼저 자유롭게 글로 표현하여 본다. 3. 한 폭의 그림을 그리듯이 재미있는 말로 표현한다.  - 빗대어 표현하기, 말의 순서 바꾸기, 사람이 아닌 것을 사람인 것처럼 표현하기, 흉내내는 말 사용하기, 반복되는 말 사용하기 등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해 본다. 4. 솔직하게 쓴다. - 꾸미지 않고 솔직한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살아 있는 시를 쓸 수 있는 방법이다. 5. 시에서는 움직일 수 없는 것이라도 살아 있다고 표현할 수 있다.  - 시에 나오는 물건들을 살아 있다고 표현해서 재미있게 나타낸다. 6. 리듬을 살려 써 본다. - 리듬을 살리기 위해서는 글자 수를 일정하게 되풀이 하거나 소리나 모양을 흉내내는 말을 쓸 수 있다.  7. 행과 연으로 나눈다.  - 내용과 리듬에 따라 행과 연을 알맞게 나눈다.  8. 다 쓴 다음에는 다시 한 번 살펴본다. - 시를 다 쓴 다음에는 사실과 느낌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문맥상 잘 어울리지 않는 표현은 없는지 등을 살펴서 고치고 다듬는다. 9. 제목을 붙인다.  - 제목은 시를 쓰기 전에 정해도 좋고, 시를 다 쓴 다음에 정해도 좋다. 시의 내용에 가장 잘 어울리는 제목을 정해 본다. [동시를 잘 쓰려면] 1. 무엇이든지 관심을 갖고 바라본다. 2. 꾸미지 말고, 솔직한 마음을 표현한다. 3. 사물을 살아 있는 사람처럼 생각하며 쓴다. 4. 그림을 그리는 마음으로 동시를 쓴다. 5. 사물을 볼 때 새로운 방향에서 보고 느끼도록 한다. 6. 책을 많이 읽고, 동시를 많이 써 본다. 비유법이란 표현하려는 대상이나 내용을 독자가 알기 쉬운 다른 대상이나 내용에 빗대어서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표현 방법이다.   [비유법의 목적] 비유법의 목적은 나타내고자 하는 내용을 더욱 정확하고, 참신하고, 힘 있고, 생동감 있게 표현하려는 데에 있다.  [비유법의 종류] 1. 직유법 표현하려는 대상과 비슷한 특성을 가진 다른 대상에 직접 빗대어 나타낼 때, ‘~처럼’, ‘~같이’ 등의 말을 사용하여 표현하는 방법이다. 예) 달 달 무슨 달 쟁반 같이 둥근 달 → 달을 쟁반에 직접적으로 빗대어 나타냄. 2. 은유법 표현하려는 대상과 비슷한 특성을 가진 다른 대상을 간접적으로 빗대어 나타낼 때, ‘~은 ~이다.’의 말을 사용하여 표현하는 방법이다. 예) 내 마음은 호수요. → 내 마음을 호수에 간접적으로 빗대어 나타냄. 3. 의인법 사람이 아닌 것을 사람인 것처럼 나타내는 표현 방법이다. 예)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 햇발과 샘물이 마치 사람인 것처럼 속삭이고 웃음 짓는다고 표현함. 4. 풍유법 속담이나 격언, 우화는 대부분이 풍유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비유하는 말만 드러내 숨은 뜻을 넌지시 나타내는 방법이다. 예) 공든 탑이 무너지랴. →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한 일은 그 결과가 반드시 헛되지 않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5. 대유법 부분으로 전체를 대신하거나, 밀접한 연관이 있는 사물로 대신하여 전체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예)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 여기에서 ‘빵’은 ‘음식’을 대신하여 나타낸 것임. 6. 의성법과 의태법 의성법이란 실감나는 표현을 위하여 사물이 내는 소리를 그대로 흉내내어 표현하는 방법이고, 의태법이란 사물의 모양이나 행동을 그대로 흉내내어 나타내는 표현 방법이다.  예) 시냇물은 졸졸졸졸 / 고기들은 왔다갔다 / 버들가지 한들한들  
651    시적 상상력을 어떻게 구사할것인가... 댓글:  조회:2271  추천:0  2017-08-18
  【시적 상상력을 구사하는 몇 가지 방법】  / 고재종 범속한 사물과 일상 속에서 생의 의미를 들여다보고자 갈망하는 이들이야말로 시인이다. 그들은 이 겨울 산야에서도상고대며 설화며 인동초며 동백꽃 등 갖가지 꽃들이 風光 속에서 눈부시게 명멸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가만히 시를기원한다. 세상의 외진 한 귀퉁이를 여리게나마 밝히는 등불 같은 시도 기원한다. 그것들은 시인의 삶의 절절한 체험속에서만 탄생한다. 그러나 아무리 절절한 삶의 체험이라도 그것이 상상력을 통한 시적 체험으로 올라서지 않는 한우리는 그러한 시들에서 삶의 의미와 꿈은커녕 일상의 지루한 설명만 듣게 되는 것이다.  우선 다음 상상력의 기본을 잘 구사한 시 두 편을 보자.  (0) 재로 지어진 옷 - 나희덕  흰나비가 소매도 걷지 않고  봄비를 건너간다  비를 맞으며 맞지 않으며  그 고요한 날갯짓 속에는  보이지 않는 격렬함이 깃들어 있어  날개를 둘러싼 고운 가루가  천 배나 무거운 빗방울을 튕겨내고 있는 것이다  모든 날개는 몸을 태우고 남은 재이니  제 마음 몇 배의 돌덩이를 굴려 올리면서도  걸음이 가볍고 가벼운 저 사람  슬픔을 물리치는 힘 고요해  봄비 건너는 나비처럼 고요해  비를 건너가면서 마른 발자국을 남기는  그는 남몰래 가졌을까  옷 한 벌, 흰 재로 지어진  흰 재로 지어진 옷 한 벌을 남몰래 가진 사람은 비를 건너가면서도 마른 발자국을 남긴다. 소매도 걷지 않고 봄비를건너가는 나비의 고요한 날갯짓 속에는 사실 얼마나 격렬한 삶의 욕망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날개를 둘러싼 고운 가루가 천배나 무거운 빗방울을 퉁겨내면서 비를 맞으며 비를 맞지 않으며 가는 나비! 그 나비는 제 마음 몇 배의 돌을굴리면서도 걸음이 가볍고 가벼운 사람과 같다. 봄비 건너는 나비처럼 무거운 슬픔을 물리치는 힘도 고요히 간직한사람이다. 한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모든 날개는 몸을 태우고 남은 재인 것처럼 그 사람도 이미 흰 재로 지어진옷 한 벌을 남몰래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결국 재 혹은 흰 재인데, 이건 삶의 허무나 혹은어떤 큰 지혜를 가르키는 바, 그런 걸 소유한 사람은 역시 남보다 몇 배의 무거운 돌멩이를 굴리면서도 나비처럼 고요하고 가볍게 한 세상을 건널 수 있지 않겠는가. 참으로 빗속의 나비날개와 흰 재와 그것을 무욕의 사람과 연결시키는상상력이 놀라울 뿐이다.  (0) 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 - 문인수  지리산 앉고  섬진강은 참 긴 소리다.  저녁노을 시뻘건 것 물에 씻고 나서  저 달, 소리북 하나도 중천 높이 걸린다.  산이 무겁게, 발원의 사내가 다시 어둑어둑  고쳐 눌러앉는다.  이 미친 향기의 북채는 어디 숨어 춤추나  매화 폭발 자욱한 그 아래를 봐라  뚝, 뚝, 뚝 듣는 동백의 대가리들.  선혈의 천둥  난타가 지나간다.  이 시는 강가에서 북을 치며 판소리가락을 내뽑는 사람의 모습을 일단 표현한 것인데, 그 소리꾼은 지리산으로, 북은중천의 보름달로, 터져 나오는 노래는 섬진강 긴 자락으로, 그 노래의 한은 시뻘건 저녁놀로, 북채는 폭발하는 매화향기로, 그리고 선혈의 난타는 뚝뚝뚝 듣는 동백의 대가리로 상상을 한 시로 가히 우주적이다. 상상력의 전범을 보여준 시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 모두 상상력을 잘 구사할 수 있게 하는 몇 가지 시적 전략을 생각해 보자.  1. 발견, 그 새로운 눈  발견이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발명과 달리 고작해야 이미 존재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수많은 삶의 편린들속에서 시가 될 수 있는 특정한 편린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뒤샹이란 화가가 있다. 그는 한 전시회에서 수세식 변기를그대로 전시장으로 옮겨 놓고는 그것을 이라고 이름 붙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이 작품을 두고 사람들은 숱한 입방아를 찧었다. 더러는 예술을 모독한 것이라고, 어찌 변기를 이 신성한 예술 전시의 공간으로 끌어들였느냐면서 당장 철거하라고 발광을 했다. 더러는 천재적인 예술가의 등장으로 예술의 영역이 한없이 확장될 것이라고 조심스런 전망을 내리기도 했다. 더러는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은 결코 선을 긋듯이 명확한 것이 아니며, 다만 예술이란제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면 모든 것이 예술임을 피력하기도 했을 것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다음 시를 보자.  (1) 숙자는 남편이 야속해 - 황지우  길중은 밤늦게 돌아온 숙자  에게 핀잔을 주는데, 숙자는  하루종일 고생한 수고도 몰  라주는 남편이 야속해 화가  났다. 혜옥은 조카 창연이  은미를 따르는 것을 보고 명  섭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이모는 명섭과  은미의 초라한 생활이 안쓰  러워…  어느 날 나는 친구집엘 놀러  갔는데 친구는 없고 친구 누  나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친  구 누나의 벌어진 가랑이를  보자 나는 자지가 꼴렸다. 그  래서 나는…  (2) 掌篇 - 김종삼  작년 1월 7일  나는 형 종문이가 위독하다는 전달을 받았다  추운 새벽이었다  골목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허술한 차림의 사람이 다가왔다  한미병원을 찾는다고 했다  그 병원에서 두 딸아이가 죽었다고 했다  부여에서 왔다고 한다  연탄가스 중독이라고 한다  나이는 스물둘, 열아홉  함께 가며 주고받은 몇 마디였다  시체실 불이 켜져 있었다  관리실에서 성명들을 확인하였다  어서 들어가보라고 한즉  조금 있다가 본다고 하였다  시 (1)은 (하오 9시 45분)라는 부제가 달려있는데 말할 것도 없이 이 시의 전반부는 신문의 TV프로 안내에있는 프로그램 소개문이다. 그리고 후반부는 공중변소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저질 낙서이다. 시인은 이두 가지 글을 빌려와 나열해놓았을 뿐 시인 자신의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두 종류의 글이어떤 시적 연관을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이 시의 의미는 무엇인가? 시인은 앞의 글과 뒤의 글이 같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결국 저질연속극을 신랄하게 야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의 소재 자체는 우리가 흔히 일상에서 체험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발견적 상상력이라는 엄격한 시선이 이 시를 관장하고 있고, 또한 그 밑에 시대상황 혹은 시대정신에 대한 주제의식이 치열하게깔려 있어 시로서 성공한 것이다. 사실 이 시는 어떤 의미에서 시의 폭력이다. 시인과 독자가 맺은 약속의 공간을 과감하게 일탈해버린 시라고 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한 면책은 오로지 시적 진실로서만 가능하다.  시 (2)는 매우 드라이한 시이다. 형 종문에 대한 병문안을 가다가 추운 새벽 골목길에서 만난 허술한 차림의 사람을 만나 병원까지 가다가 들은 이야기를 시적 주체의 그 어떠한 반응도 생략한 채 간략하게 기록했을 뿐인 시이다. 그러나 그 시적 내용은 천둥벼락이라도 쳐서 무너져 내릴 듯한 것이다. 꽃다운 나이에 공장에 다니다가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죽은 두 딸을 찾아가는 아버지의 마음을 무엇으로 표현할 것인가. 그 내용의 참담함을 시적 주체가 아무리 긴절한 언어로 표현한다 해도 미치지 못할 것임을 시인은 잘알기에 오히려 간략한 사실기록 형식을 취했을 것이다. 더구나 끝의 두 행, 곧 “어서 들어가보라고 한즉/ 조금 있다가 본다고 하였다”라는 함축적인 표현을 통해 그 아비의 끝없이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잘드러내고 있는데 어쩌면 이 시는 바로 위 두 행 때문에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 시도 흔히 겪을 수 있는 일상의 체험을 시로 옮긴 것인데 바로 시의 끝 두 행의 예리한 발견을 통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사실 발견적 상상력은 소재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다. 한편의 문학작품을 읽을 때 독자들은 일정한前理解을 갖게 마련이다. 전이해는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전이해란 일종의 선입견으로,동시대의 삶의 상황과, 시와 시인에 대한 기대 그리고 언어지식, 자신의 인생관 등등이 얼크러져 있는 인식의 배경이다. 한편의 시를 읽을 때 그 시에 대한 전이해가 중요한 해석의 수단이 된다. 그러나 전이해가 그대로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작품 속의 구체적 사실들의 의미를 전이해를 통하여 해명하지만, 그 부분들은 다시 이해의 틀을 수정한다. 즉, 전체의 의미는 부분들의 의미를 밝혀주지만 그 부분들의 의미는다시 전체의 의미를 변환시킨다. 그러므로 독자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전이해에 아무런 변화를 요구할 수 없는 시는 새로움이 없는 시다.  2. 관찰, 갈망으로 들여다보기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며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정말 그럴까. 별이 떨어지는그 짧은 순간에 소원을 빌기 위해서는 그 바람을 언제라도 가슴에 담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갑작스런 유성의 낙하 앞에서 간절하게 그 바람을 간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와의 사랑이 이루어지길’ 언제라도 기원할 수 있는 그 갈망, 그 열망이야말로 희망을 현실로 바꾸는 원동력이다. 그 갈망이있을 때에야 늘 범속한 사물과 일상 속에서도 생의 의미를 들여다보고 관찰해낼 수 있는 것이다.  (4) 공터 - 최승호  아마 무너뜨릴 수 없는 고요가 .  공터를 지배하는 왕일 것이다  빈 듯하면서도 공터는  늘 무엇인가로 가득 차 있다  공터에 자는 바람, 붐비는 바람,  때때로 바람은  솜털에 쌓인 풀씨들을 던져  공터에 꽃을 피운다  그들의 늙고 시듦에 .  공터는 말이 없다 .  있는 흙을 베풀어주고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무심히 바라볼 뿐.  밝은 날  공터를 지나가는 도마뱀  스쳐가는 새가 발자국을 남긴다 해도  그렇게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늘의 빗방울 자리를 바꾸는 모래알들,  공터는 흔적을 지우고 있다  아마 흔적을 남기지 않는 고요가  공터를 지배하는 왕일 것이다  (5) 둑 - 김춘수  봄이 와 범부채꽃이 핀다.  그 언저리 조금씩 그늘이 깔린다.  알리지 말라,  어떤 새가 귀가 없다.  바람은 눈치도 멀었다. 되돌아와서  한번 다시 흔들어 준다.  범부채꽃이 만든  (아무도 못 달래는)  돌아앉은 오목한 그늘 한 뼘.  점점점 땅을 우빈다.  시 (4)의 대상은 ‘공터’이다. 아무도 없는 여름 한낮 그 공터의 한쪽 귀퉁이에 앉아 시인은 적요와 적멸이 아니라, 동그란 세모와도 같은 역설적인 텅 빈 충만을 지켜보고 있다. 고요의 지배 아래 공터에는“자는 바람, 붐비는 바람” 풀씨들을 던져 꽃을 피우는 바람으로 가득 차 있다. 또 거기에는 밝은 날 지나가는 도마뱀과 스쳐가는 새발자국과 빗방울과 그 빗방울에 자리를 바꾸는 모래들이 있다. 그러나 공터는 이 존재하는 것의 고통스런 생로병사에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그저 흙을 베풀고 “무심히 바라볼뿐”이다. 그리고 이 공터에는 어떤 흔적조차 오래가지 않는다. 그 흔적은 “하늘의 빗방울에 자리를 바꾸는 모래알들”로 지워져 버리기 때문이다. 고요 아닌 그 어떤 것도 공터를 지배하지 못하고 고요만이왕인 것이다.  이 시에 내재된 기본적인 상상력은 유추이다. 하나의 대상을 구축함으로써 넌지시 다른, 정작 말하고자하는 또 다른 대상을 환기시키는 상상력 말이다. 그렇다면 이 시 곧 공터를, 고요가 지배하는 공터를 통해 시인이 건네고자 하는 진짜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공터라는 대상의 즉물적인 세계가 아니라 인간적인 세계임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인간적인 세계는 어떠한 세계인가? 구체적인 단서는 ‘늙고 시듦’에서찾을 수 있다. 그것은 생로병사의 인생의 四苦를 의미한다. 더욱이 이 시 전체 흐름이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이항대립을 넘어서 있다는 점에서 현저히 불교적인 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텅 빈 충만’이라는 역설적인 세계인식이 도처에서 드러나며, 따라서 이 시에서 유추해낼 수 있는 인간적 세계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살이인 것이다. 이 세상살이를 한 차원 높은 ‘빗방울’을 내리는 하늘의 관점으로 들여다보면, 지독히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 세상에서 삶의 진정한 주인이란 오히려 적요와 적멸뿐이라는 것이다. 色卽是空이라는 인식이 견고하게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거늘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그 삶의 흔적인 생의 자취란 잠깐 남기는 도마뱀, 스쳐가는 새의 발자국이자 조만간 작은 모래알로 지워져버릴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유추적 상상력보다 더욱 선명한 이미지로 드러나는 것은 관찰로서의 상상력이다. 그 관찰은 보이지 않는 ‘고요’를 보게 할뿐만 아니라 ‘붐비는 바람, 잠드는 바람’도 보게 한다. 무엇보다도 “하늘의 빗방울에 자리를 바꾸는 모래알들”이란 관찰은 얼마나 정교하고 놀라운가. 그 미세한 움직임조차 또렷이 형상화함으로써 시인은 이 세계의 놀라운 추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시 (5)에서는 시적 주체가 사라진다. 시적 대상에 반응하는 시적 주체의 마음이나 감정이나 생각이 전혀없다. 그리고 오로지 이 시에는 눈, 관찰의 눈, 투명한 관찰의 눈만이 존재한다. 어쩌면 이 관찰의 투명한 눈 속에 시적 주체가 들어가 있다. 우리의 모든 서정시에 공식처럼 얘기되는 주관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봄이 오는 날 시인은 둑에 피는 범부채꽃을 본다. 그러나 그가 강조하는 그 언저리에 깔리는 그늘이다. 이 그늘은 존재의 비애를 표상한다. 그러기에 이른 봄 속의 해질 무렵이고, 새도 귀가 없는 새이고, 바람도 눈치없는 바람이다. 이 바람이 흔드는 것은 범부채꽃이 아니라그늘이고, 땅을 후비는 그늘 한 뼘이다. 이 그늘 한 뼘이 세상이고 그의 내면이라면 결국 모든 존재는 비애의 존재이고 그 비애는 시시각각으로 점점점 더 우리를 후빈다.  다음 시에서 관찰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살펴보라.  작약꽃이 한창인 아파트 단지의  화단을 나비 한 마리가 날고 있다  어린 후박나무를 지나 향나무를  지나 목단을 넘고 화단 가장자리의  쥐똥나무를 넘어 밖으로 가더니  다시 속으로 들어와  한창인 작약꽃을 빙글빙글 돌더니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혼자 훌쩍 날아올라 넘더니  비칠대는 온몸의 균형을 바로잡고  날아넘은 허공을 뒤돌아본다  뒤돌아보며 몸을 부풀린다  ―(6)오규원의 「나비」  관찰만 예리하게 잘 하여도 시의 절반은 이룬 셈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관찰은 시적 묘사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묘사가 없는 시가 있을 수 없듯이 관찰이 없는 묘사 또한 있을 수 없다. 위의 시는 순전히 관찰만으로 막막한 아파트 단지의 생명성과 존재의 비의를 환하게 드러내주는 수일한 시이다.  3. 연상, 사랑에 관한 단상  사랑은 시와 흡사하다. 사랑이 시와 흡사한 것은 양자가 모두 논리의 대척점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이남자가 누구의 남자인가는 아랑곳없이 마음의 길이 언제나 그에게 향하고, 그에게 맞닿아 있듯, 남들이보기에는 하잘 것 없는 왜소한 존재임에도 바닥 모를 깊이로 몰두한 채 시의 길도 달리고 있는 것이다.콩깍지가 씌어도 몇 겹으로 덧씌웠는지 알 수 없을 만치 혼미한 가운데 연인들과 시는 앞 다투어 마음의길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에 빠졌을 때, 이 주체할 수 없는, 나 아닌 또 다른 존재를 향한 갈망 또한 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시 역시 다른 존재를 향한 짙은 그리움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시는 망망한 밤하늘의 한점 불빛이다. 반짝반짝 또 다른 살아 있는 정신에게 보내는 간절한 신호인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가로놓인 섬을 넘어서서 마침내 따수운 손길을 부여잡고자 하는 갈망에 찬 몸짓이 시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곤혹스러운, 무어라고 규정할 수 없는, 예전엔 느껴 본 적도 없던 이 독특한 감정이야말로시와 다르지 않다. 무어라고 딱히 명명할 수 없는, 망명하는 순간 이미 그것이 아닌 다른 것으로 변질되어 버리는 느낌, 사랑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표현한 순간 그저 범속한 사랑이 되어버리는 절망감, 공동변소와도 같은 그런 통속적인 ‘사랑’이라는 단어로는 결코 자신만의 설렘과 두근거림을 표현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 사랑이라는 범속한 단어 그 근처에서 기미라도 알아차리게 만드는 단어를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사랑을 전해줄 언어를 모색하는 지난한 과정, 이것이 시쓰기의 심부에닿아있는 작업인 것이다.  오직 자신만의 관점으로 세계를 보는 완벽한 주관성, 자신의 세계를 방기할 정도로 타자에 몰두하는 전적인 沒我. 그 어떤 언어로도 자신을 드러낼 수 없다는 절망과 모색 등이야말로 시와 사랑의 교차지점이다.이들 특성은 견고한 세계의 질서를 모두 자신의 열망 안으로 끌어들이며, 외적 대상 자체로부터 사유를시작하는 바탕을 이루며, 직접적인 제시 대신 함축적인 은폐를 기도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모든 독특한갈망들을 연상은 너끈히 감당한다. 연상이야말로 의미를 은폐하고 세계를 자신의 내부로 끌어들이는 유효한 방법이며 모든 세계를 한 곳으로 끌어 모으는 힘인 것이다. 사랑에 빠진 여자는 모든 존재하는 대상들을 그 남자와 연결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7) 산수유 - 정진규  수유리라고는 하지만 도봉산이 바로 咫尺이라고는 하지만 서울 한복판인데 이거 정말 놀라운 일이다 정보가 매우 정확하다 훌륭하다 어디서 날아온 것일까 벌떼들, 꿀벌떼들, 우리집 뜨락에 어제오늘 가득하다잔치잔치 벌였다 한 그루 활짝 핀, 그래, 滿開의 산수 유, 노오란 꽃숭어리들에 꽃숭어리들마다에 노랗게취해! 진종일 환하다 나도 하루종일 집에 있었다 두근거렸다 잉잉거렸다 이건 노동이랄 수만은 없다 꽃이다! 열려 있는 것을 마다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럴 까닭이 있겠는가 사전을 뒤적거려 보니 꿀벌들은 꿀을 찾아 11킬로미터 이상 往復한다고 했다 그래, 왕복이다 나의 사랑도 일찍이 그렇게 길 없는 길을 찾아 왕복했던가 너를 드나들었던가 그래, 무 엇이든 왕복일 수 있어야지 사랑을 하면 그런 특수망을 갖게 되지 光케이블을 갖게 되지 그건 아직도 유효해! 한 가닥 염장 미역으로 새까맣게 웅크려 있던 사랑아, 다시 노오랗 게 사랑을 採蜜하고 싶은 사람아, 그건 아직도 유효해!  꿀벌떼들이 찾아온다. 서울 한복판에 벌떼들이 뜨락의 만개한 산수유를 찾아온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얼마나 정보가 정확하기에 아파트숲과 소음과 시멘트와 먼지 속을 뚫고 꿀벌들이 찾아왔을까. 그 꿀벌 떼들의 꽃숭어리 잔치에 시인도 하루종일 두근거리고 잉잉거리고 노랗게 취한다. 그걸 지켜보다가 시인은결국 사전을 뒤적인 끝에 ‘왕복’이라는 단어를 찾아낸다. 산수유와 벌떼들, 그 둘을 하나로 이어주는단어, 왕복! “그래, 왕복이다” 우리들의 사랑도 왕복인 것이다. 길 없는 길을 찾아 왕복하는 것이다.그런 사랑을 하게 되면 자연히 사람도 특수 통신망인 광케이블을 갖게 되어서 네 속을 드나드는 것이다.특수 통신망 광케이블이라는, 시에는, 더구나 사랑시에는 너무나 비시적인 언어로 충분한 낯설게 하기를감행하면서 시를 고양시켜 나간다. 이 시의 절정은 ‘염장 미역’이란 비유다. 자신의 내면에 빼빼 마르고 까맣게 졸아든 채로 웅크려 있는 염장 미역 같은 사랑이 사랑의 물을 만나면 바가지 가득 부풀다가,마침내 바호밥나무처럼 무성하게 자라 어린 왕자의 별을 휘감게 되는 것이다. 산수유 꽃숭어리와 벌떼들로부터 연상해낸 사랑은 마지막 행에 이르러 ‘노오랗게 사랑을 채밀하고 싶은 사람아’라는 호소력 있는호명으로 모든 대상을 하나로 결합하며 시적 화자 자신을 명료하게 드러내고, 다분히 김수영을 연상시키는 “아직도 유효해!”의 ‘!’로 시를 끝맺고 있다. 더더욱 이 시가 감동적인 것인 시적 화자의 나이가60살 가까이 된, 이젠 사랑보다는 생을 관조해야될 나이에 이런 연상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살아온 삶의 허망함처럼 “아직도 유효해!”라고 외치는 그 사랑도 필경 허무로 끝날지 모르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사랑은 그만큼 생을 맹목적이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8) 明鏡 - 박형준  강나루 가에는 커다란 버드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나는 소매에서 책을 꺼내 읽었다  여인들이 버드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여인들은 잎이 무성한 버드나무를 꺾었다  배에 올라탄 남정네들에게  버드나무 가지를 둥글게 구부려 정표로 주었다  배가 떠날 시간이었다  내려서 뒤돌아보지 말고 걸어야 했다  책갈피에 버드나무 잎이 끼여 있었다  저녁 무렵 잠깐 잠이 든 사이였다  꿈속에서 한 권의 책을 손에 쥐고 있었다  꿈속에서 해가 지고 있었다  그 책은 이승에서 내가 평생 써야 할 시였다  이 슬프면서 아름다운 우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저녁 무렵 잠깐 잠든 사이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도 해가 질 무렵이었다. 꿈속에서 한권의 책을 손에 쥐고 읽고 있었다. 그런 그 앞에선 버드나무 아래서 여인들이 울고 있고, 배가 막 떠나려 하고 있고, 배에 올라탄 남정네들에게 여인들은 사랑의정표로 버드나무 가지를 둥글게 구부려 주고, 그 버드나무잎이 그의 책갈피에도 끼여 있지만, 배에서 내려서도 뒤돌아보지 말고 걸어야만 하는 슬픔이다. 어쩌면 인생은 덧없는 꿈이라는 상투적인 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다. 여기서 배는 인생이고, 그 인생 속에서 우리는 사랑과 이별을 할 수밖에 없고, 그중 이별은 강을 건너는 행위 곧 이승과 저승으로 나뉠 수밖에 없는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의 눈물을 뒤로하고 오연하게 앞으로 나아감으로 성취될 수 있는 그 무엇이 시라고 말하는,저승까지 가져갈 것이 시라면, 뒤집어서 이승에서도 평생 써야할 시는 그 책갈피에 낀 버드나무잎같이 생생한 사랑과 이별의 변주인 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꿈속에서 본 이별의 광경을 통해 시인이 끝내 써야할 시가 무엇인가를 조용히 연상케 하는 시인 것이다. 이제 다음 시를 보자.  먼저 그대가 땅 끝에 가자 했다/ 가면, 저녁은 더 어둔 저녁을 기다리고/ 바다는 인조 견 잘 다려놓은 것으로 넓으리라고/ 거기, 늦은 항구 찾는 선박 두엇 있어/ 지나간 불륜 처럼 인조견을 가늘게 찢으리라고/땅끝까지 그대, 그래서인지 내려가자 하였다// 그대는 여기가 땅끝이라 한다, 저녁놀빛/ 물려놓는 바다의남녘은 은도금 두꺼운/ 수면 위로 왼 갖 소리들을 또르르 또르르/ 굴러다니게 한다, 발 아래 뱃소리 가르릉거리고/ 앞섬들 따 끔따끔 불을 켜대고, 이름 부르듯/ 먼 데 이름을 부르듯 뒷산숲 뻐꾸기 운다/ 그대옆의 나는 이 저녁의 끄트막이 망연하고/ 또 자실해진다, 그래, 모든 것이 이 땅의 끝/ 벼랑에 서처럼 단순한 투신이라면야…// 나는 이마를 돌려 동쪽 하늘이나 바라다보는데/ 실루엣 을 단단하게 잠근 그대는이 땅 끝에 와서/ 어떤 맨처음을 궁리하는가 보다, 참 그러고 보니/ 그대는 아직 어려서, 마구 젊기만 해서/ 이렇게 후욱 비린내나는 끝의 비루를/ 속 수한 것들의 무책을 모르겠구나/ 모르겠는 것이겠구나―(9)이문재의 「해남길, 저녁」  이문재의 시는 적어도 가식이 없다. 자신이 직면한 고통에 솔직하게 대면하고 있다. 그는 사랑의 끝이 땅끝과 마찬가지로 벼랑의 투신처럼 자명하기를 바란다. 망연자실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삶이란 얼마나 너절한 것인지. 인연이란 얼마나 질긴 것인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속수무책일 수밖에없는 것이다. 아직 어린 그대가 끝의 비루를 알지 못하는 것이 그나마 다행인 것이다. 땅끝에서 손쉽게건져 올린 사랑의 끝을 생각하는 이 시는 풍부한 묘사와 함께 한자 성어를 적절하게 분리시킴으로써 자신의 내면을 풍자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 드러냄은 미화될 여지조차 있다. 그러나 그것은 미화될 성질의것이 아니다. 그저 그렇고 그런 불륜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지독한 사랑의 끝은 비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것이 존재이유가 되어 버릴 때도 불륜이 비루일 수 있는가.  4. 투사, 삶의 본질에로의 날카로운 진입  시적 대상이 있다. 그 대상을 바라보는 서정적 주체가 있다. 주체는 반드시 주체의 관점을 통해서 대상을바라본다. 그 관점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그럼에도 그 주관은 삶의 본질을 날카롭게 가로지르는 주관이자, 어떤 객관적인 언술로도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향해 비약하는 주관이다. 그 주관은 일체의 과정을과감하게 생략함으로써 획득된 것이며 순간적으로 지각된 느낌을 명징하게 드러냄으로서 이루어진 것이다. 다라서 그 어떤 논증적인 결론에 뒤지지 않는 심정적인 깨우침을 안겨준다. 그리고 독자는 이 당연한주관성을 엿봄으로써 공감을 느끼거나 부적절함에 대한 반감을 토로함으로써 시적 상상력에 개입한다. 무엇보다 이 내밀하고 주관적인 관점이 우리에게 건네는 공감이야말로 시의 아름다움이 갖는 본질적인 표딱지인 것이다. 여기에서 이 주관을 가능케 하는 힘을 투사라고 한다. 이 투사는 또 직관력을 절대로 필요로 한다.  (10) 墨畵 - 김종삼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11) 自尊 - 이시영  화창한 가을날  벌판 끝에 밝고 환한 나무 한 그루  우뚝 솟아 있다  모든 새들이 그곳에서 난다  시 (10)은 회화적이다. 이는 첫 행과 두 번째 행을 통해 누구의 눈에라도 확연히 그 풍경을 지각할 수 있다. 저물 무렵, 아마도 깡마른 손임에 분명한 할머니 손이 물먹고 있는 소의 목덜미를 어루만지고 있는외딴집 울타리 속의 풍경. 제목이 묵화이듯이 어떤 묵화를 바라보고 썼거나, 거꾸로 풍경과 人事의 여러자잘한 가지를 생략해버리고 고단위의 긴장과 절제의 방법으로 여백과 농담의 미가 충만한 묵화의 세계를지향했거나 상관없다. 이 시는 묘사적 풍경에서 멈추지 않는다. 3행으로 넘어가면서 직바로 본질로 진입해 가는 시인의 날카로운 주관적 투사, 곧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적막하다고,” 말해버림으로 물먹는 소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지는 단순하고도 객관적인 풍경이 소와할머니 사이에 지극한 교감으로 바뀌고, 또 단순하고 객관적인 풍경이 생의 비애, 존재의 고통의 면모를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투사로서의 상상력은 한 존재가 맞닥뜨린 생에 대한 자각과 그에 반응하는 섬세한 존재의 울림을 고스란히 확인케 함으로써 우리를 천박하고 저열한 우리의 그저 놓여진 일상을 새롭게 충전하는 것이다.  시 (11)도 이 점에선 시 (10)에 한 점도 뒤지지 않는 시이다. 오히려 시 (10)이 3행부터의 투사적 진술이우리를 깨우치긴 하지만 존재와 풍경이 감추고 있는 아득한 비의를 약간은 깨버린 듯한 인상을 주는 데비해 시 (11)은 그렇지 않다. 이 시에서도 너무도 확연한 그림 하나를 볼 수 있다. 화창한 가을날이면 하늘은 높고 햇살은 순금빛으로 쏟아지고 대기는 맑다 못해 푸르른 날일 것이다. 그런 날 벌판 끝에 그 햇살을 받고 나무는 역시 황금빛으로 빛나는 은행나무도 좋겠고 투명한 갈색으로 빛나는 느티나무도 좋겠다. 얼마나 밝고 환할 것인가. 그것이 우뚝 솟아 있다. 황금나무다. 세계수다. 은행나무라면 땅에서 하늘로 팔 벌린 상태일 것이고 느티나무라면 둥그렇게 마을을 감싸는 모습일 것이다. 은행나무나 느티나무나모두 지상과 하늘을 매개하는 영매이다. 어쨌든 그것은 얼마나 신비롭고 아늑하고 정정하고 성성하고 밝고 환할 것인가. 여기까지는 객관적 풍경의 언어적 그림이다. 이에 덧붙여 연을 달리한 마지막 한 줄이투사적 진술을 감행한다. “모든 새들이 그곳에서 난다”라고. 객관적 사실은 모든 새들은 그곳에서 날수도 있고 날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밝고 환한 나무에서 새가 날지 않고 어디서 날겠는가. 새는자유, 순수, 평화 등 모든 것을 상징한다. 그 새는 인간의 비상의 꿈을 하늘로 치솟음으로 상징해준다.그러나 들판의 새는 대개 옆으로 난다. 여기 밝고 환한 나무에서 나는 새도 그 나무에서 솟는 새이기도해야 하지만 그 나무를 가로질러 나는 새이기도 해야 한다. 그래야 나무의 수직과 새의 수평이 이루어지는 것을 상상치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시는 이런 모든 췌사를 불필요하게 만든다. 풍경에 대한 언어의 선연한 그림과 이에 날카로운 투사적 상상력을 보탬으로 존재의 비의를 한층 더 깊게 만드는,말을 침묵에 가깝게 줄임으로 되레 수많은 말을 가능케 하는 시의 진경이 여기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12) 어린 게의 죽음 - 김광규  어미를 따라 잡힌  어린 게 한 마리  큰 게들이 새끼줄에 묶여  거품을 뿜으며 헛발질할 때  게장수의 구럭을 빠져나와  옆으로 옆으로 아스팔트를 기어간다  개펄에서 숨바꼭질하던 시절  바다의 자유는 어디 있을까  눈을 세워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달려오는 군용 트럭에 깔려  길바닥에 터져 죽는다  먼지 속에 썩어가는 어린 게의 시체  아무도 보지 않는 찬란한 빛  (13) 직관 - 고재종  간밤 뒤란에서  뚝 뚜욱 대 부러지는 소리 나더니  오늘 새벽, 큰 눈 얹혀  팽팽히 휘어진 참대 참대 참대숲 본다  그중 한그루 톡, 건들며 참새 한 마리 치솟자  일순 푸른 대 패앵, 튕겨져오르며 눈 털어낸 뒤  그 우듬지 바르르바르르 떨리는  저 창공의 깊숙한 적막이여  사랑엔, 눈빛 한번의 부딪침으로도  만리장성 쌓는 경우가 종종 있다  김광규의 시는 밑바닥에 깔린 첨예한 시대의식을 감지할 수 있다면, 그의 투사적 직관력이 시에 얼마나큰 힘을 부여하고 있는가를 수일하게 짐작할 수 있다. 투사력이라 해도 좋고 직관력이라 해도 좋은 이 상상력은 무릇 시인치고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지만 이걸 얼마나 잘 갈고 닦느냐에 따라 좋은 시를 쓸 수있는가 없는가 판가름이 난다. 필자의 「직관」이라는 시도 함께 살펴보기 바란다.  5. 유추, 빗대어 말하기  시란 다른 질서 안에서 존재하는 사물을 자신의 질서로 바라보는 것이다. 시는 타자를 자신의 질서 안에재편할 뿐만 아니라, 타자의 질서를 통해 자신의 존재가 뿌리내리고 있는 본질적 의미를 역설적으로 깨닫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타자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는, 혹은 자신의 질서 안으로 타자를 끌어들이는시적 관계 양상을 유추라고 명명할 수 있다.  유추는 두 대상을 나란히 마주 세움으로써 시작된다. 물론 그 한편에는 항상 인간의 삶이 있다. 이솝우화에 등장하는 여우는 여우가 아니라 사람이다.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에 등장하는 나폴레옹이라는 시커먼 돼지 역시 탐욕스런 인간의 상징적 대체물이다. 이 두 상징이 얼마나 엄밀히 조응하는가에 따라 유추의 효과는 그 빛을 발한다.  일반적으로 유추를 통해 획득되는 시적 인식은 계몽적이거나 풍자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유추의 대상을통해 삶이 무엇인지를 배우라고 말하고 싶거나, 삶이 얼마나 비루한 것인지 잔뜩 조롱하고 싶은 것이다.그러나 유추가 삶 전체를 통해 무차별적으로 열려 있지만은 않다. 시가 문제 삼는 삶은 특정한 삶이지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추상으로서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가 어떠한 삶을 풍자하거나 외경스러워하는지를 무엇보다 명료하게 인식해야 한다.  (14) 느티나무 여자 - 안도현  평생 동안 쌔빠지게 땅에 머리를 처박고 사느라  자기 자신을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가을날, 잎을 떨어뜨리는 곳까지가  삶의 면적인 줄 아는  저 느티나무  두 팔과 두 다리로 허공을 헤집다가  자기 자신을 다 써버렸다  그래도 햇빛이며 바람이며 새들이 놀다 갈 시간은  아직 충분히 남아 있다고, 괜찮다고,  애써 성성한 가지와 잎사귀를 흔들어 보이는  허리가 가슴둘레보다 굵으며  관광버스 타고 내장산 한 번 다녀오지 않은  저 다소곳한 늙은 여자  저 늙은 여자도  딱 한 번 뒤집혀 보고 싶을 때가 있었나 보다  땅에 박힌 머리채를 송두리째 들어올린 뒤에,  최대한 길게 다리를 쭉 뻗고 누운 다음,  아랫도리를 내주고 싶을 때가 있었나 보다  그걸 간밤의 태풍 탓이라고 쉽게 말하는 것은  인생을 절반도 모르는 자의  서툴고 한심한 표현일 뿐  (15) 오징어 3 - 최승호  그 오징어 부부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부둥켜안고 서로 목을 조르는 버 릇이 있다  시 (14)는 태풍이 지나간 뒤 쓰러진 느티나무의 모습에서 모든 유혹을 물리친 채 온갖 고생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온 농촌여성의 내면에 깃든 광포한 욕망을 읽어내는 시인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다. “가을 날,잎을 떨어뜨리는 곳까지가/ 삶의 면적인 줄 아는/ 저 느티나무” 같은 구절은 얼마나 의미심장한가. 또스러진 느티나무를 여자에 비유하며 “최대한 길게 다리를 쭉 뻗고 누운 다음,/ 아랫도리를 내주고 싶을때가 있었나 보다”처럼 표현한 구절은 얼마나 짓궂은 유머를 담고 있는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걸 간밤의 태풍 탓이라고 쉽게 말하는 것은/ 인생을 절반도 모르는 자의/ 서툴고 한심한 표현일 뿐”이라고 한대목에서 이 시인의 경우바른 성실함이 물씬 묻어난다. 비유가 극명하게 드러난 시이지만 사실 비유조차도 유추적 상상력을 통한 삶의 진실을 드러내는 방법인 것이다.  시 (15)는 3행으로 이루어진 시다. 이 짧은 시의 대상은 ‘오징어 부부’이다. 그 오징어 부부는 사랑을표현하는 방식이 남다르다. ‘부둥켜안고 목을 조르는 버릇’은 결코 사랑의 자연스런 방식이라고 볼 수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 표현은 오징어의 여러 개의 긴 발의 형상에서 취한 상상력인데, 그러나 이러한부부는 그 오징어 부부만이 아니라는 현실 때문에 표현의 성공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류의 사랑은 많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정작은 숨이 턱에 닿을 때까지 목을 조르고 있지는 않았던가.교묘하게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구속하고 억압하고, 풍부한 인간적 감성을 마모시키지나 않았던가. 결국그 오징어 부부는 우리들 사랑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욕망으로 뒤덮인 인간이며 그 사랑의 방식은 우리들이 항용 지니고 있던 버릇이었던 것이다.  안도현과 최승호의 시는 모두 인간적인 세계가 아닌 자연의 세계 혹은 우화의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다.한데 이런 유추는 현실과의 접촉면이 현저히 차단된 채 자연 세계의 환멸과 동경만을 가능케 할뿐이다.어떻게 한 편의 우화를 통해 삶의 현실성을 획득할 수 있겠는가. 고작해야 즉자적인 찬탄과 모멸이라는양극단의 감정적 대응만이 가능할 뿐이다.  (16) 개밥풀 - 이동순  아닌 밤중에 일어나/ 실눈을 뜨고 논귀에 킁킁거리며/ 맴도는 개밥풀/ 떠도는 발끝을 물밑에 닿으려 하나/ 미풍에도 저희끼리 밀고 밀리며/ 논귀에서 맴도는 개밥풀/ 방게 물 장군들이 지나가도/ 결코 스크럼을 푸는 일없이/ 오히려 그들의 등을 타고 앉아/ 휘파 람 불며 불며 저어가노나/ 볏짚 사이로 빠지는 열기/ 음력 사월 무논의 개밥풀의 함성/ 논의 수확을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함부로 버리며/ 우리의자유를 소중히 간직하 더니/ 어느날 큰비는 우리를 뿔뿔이 흩어놓았다/ 개밥풀은 이리저리 전복되어/ 도처에서 그의 잎파랑이를 햇살에 널리우고/ 더러는 장강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어디서나 휘몰 리고 부딪치며 부서지는/ 개밥풀 개밥풀 장마 끝에 개밥풀/ 자욱한 볏짚에 가려 하늘은 보이지 않고/ 논바닥을 파헤쳐도 우리에겐 그림자가 없다/ 추풍이 우는 달밤이면/ 우리 는 숨죽이고 있다/ 옷깃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귀뚜라미 방울새의 비비는 바람/ 그 속 에서 우리는 숨죽이고 있다/ 씨앗이 굵어도 개밥풀은 개밥풀/너희들 봄의 번성을 위하 여/ 우리는 겨울 논바닥에 말라붙는다  이 시 또한 다르지 않다. 이 시의 화자는 분리되어 있다. 전반부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개밥풀이란 수생식물의 생태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후반부에 들면 관찰자의 관찰에 응답이라도 하듯, 개밥풀 자신의 목소리로 한 떼의 여리고 작은 이파리들의 헌신을 노래한다. 여름에서 가을로, 다시 겨울로 이어지는 계절의 변화 안에서 그들이 어떻게 몸을 부리며, 마침내 어떻게, 그리고 왜 논바닥에 말라붙는지를 노래한다.물론 이 개밥풀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유추의 원형질은 민중이다. 김수영의 풀보다 더욱 미천하고 더욱낮은 대상에까지 천착하여 형상화함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이름 없는 무지렁이 민중들과 그들 민중의 삶구석구석에 연결된 자그마한 살아 잇는 모든 것이 얼마나 견고하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그들은 단지 헌신과 희생의 속성만이 연결될 뿐만 아니라 자잘한 생태적 순환들까지도 완벽하게 일체가됨으로써 자연의 순환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의 긴밀한 유대와 삶의 동일성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자연으로부터 삶의 지혜를 배운다’는 말이 있다. 이 간명한 명제야말로 시적 상상력을 튼실하게 받치고 있는 또 다른 한 축인 것이다. 느티나무, 오징어, 개밥풀 등 이 모든 세상을 구성하는 존재들로부터이 세상을 구성하는 다만 또 다른 하나의 존재에 불과한 인간들이 삶의 철학과 방법을 배운다는 것이다.그러나 이제 우리는 위의 명제를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삶을 배운다’라고 수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6. 전복, 뒤집어보기 꿰뚫어보기  헤겔은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며,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이다’라는 아리송한 말을 『법철학』에서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 말은 헤겔의 상속인들이 좌파와 유파로 갈리게 되는 헤겔 사유에 내재한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마르크스를 비롯한 좌파들은 이 말의 앞부분에 방점을 찍고, 우파들은 이 말의뒷부분에 방점을 찍는다.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란 곧 인간의 사유가 언제라도 현실로 전화될수 있다는 것으로 철학의 실천적 의미를 극대화한 주장이다. 이성적 사유는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이론적 실천으로 전화될 수 있다는 이 주장은 마르크스의 이론을 단순히 이론이 아닌 실천으로 이끌어내는 강력한 동기가 되었다. 반면에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이란 명제는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자체로 이성적 사유의 결론이라는 주장으로 현실을 정당화할 논거를 마련해주고 있다. 실제 헤겔은 반동적인 독일의 정치적 현실을 이상화함으로써 진보의 반대편에 서고, 그 결과 한동안 파산선고를 받은 채사상사의 변경에 서 있어야 했다.  그러나 잠깐이라도 눈여겨보면, 헤겔의 보수적 선회는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실적인 것, 곧 존재하는 것이 이성적 사유의 결과일 수 없음은 명확하다. 현실은 오히려 지극히 비이성적인 탐욕의 결과이거나, 반이성적인 폭력으로 은폐된 허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상적 삶에 파묻혀 사는 우리는 안타깝게도이 허위와 위선에 더 이상 분노하지 못한다. 그 분노가 우리의 현실적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것을 현명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는 잠언에 몸을 떨지만 오히려 지금에 와서는 ‘진리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리라’는 자각에 몸을 비켜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다르다. 시인은 진리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리라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그 고통에 기꺼이 온몸을 바치는 사람들이다. 비록 그 진리가 영원히 자유와는 무관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온몸으로 예감하면서도 시인은 단호하게 거부하고 저항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존재해야 할 것들을즉각적으로 이끌어내며 또 표출한다. 그 표출이 불러일으킬 고통이 실핏줄 구석구석을 터질 듯이 메워 갈지라도 기꺼이 그 고통 아래에 목을 늘어뜨린다. 이 또한 상상력의 일종이다. 현상을 통해 현상의 이면에숨죽이며 떨고 있는 본질을 드러내는 사유의 힘, 그것이 꿰뚫어보는 상상력이며 뒤집어보는 상상력이며,일체의 허위를 전복하는 상상력인 것이다.  (17) 받들어 꽃 - 곽재구  국군의 날 행사가 끝나고  아이들이 아파트 입구에 모여  전쟁놀이를 한다  장난감 비행기 전차 항공모함  아이들은 저희들 나이보다 많은 수의  장난감 무기들을 횡대로 늘어놓고  에잇 기관총 받아라 수류탄 받아라  무서운 줄 모르고  서로가 침략자가 되어 전쟁놀이를 한다  한참 그렇게 바라보고 서 있으니  아뿔사 힘이 센 304호 아이가  303호실 아이의 탱크를 짓누르고  짓눌린 303호실 아이가 기관총을 들고  부동자세로 받들어 총을 한다  아이들 전쟁의 클라이막스가  받들어 총에 있음을 아이들은 알지 못한다  떠들면서 따라오는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과 학용품 한아름을 골라주며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 앞에서  나는 얘기했다  이름답고 힘있는 것은 총이 아니란다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과 별과  나무와 바람과 새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서 늘 피어나는  한 송이 꽃과 같은 것이란다  아파트 화단에서 피어난 과꽃  한 송이 꺾어들며 나는 조용히 얘기했다  그리고 그 꽃을 향하여  낮고 튼튼한 목소리로  받들어 꽃하고 경례를 했다  받들어 꽃 받들어 꽃 받들어 꽃  시키지도 않은 아이들의 경례소리가  과꽃이 지는 아파트 단지를 쩌렁쩌렁 흔들었다  (18) 北魚 - 최승호  밤의 식료품 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 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열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시 (17)은 전복적 상상력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중 아파트 어귀에서 전쟁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과 마주친다. 아이들은 우리가 항용 마주치는 아이들이 그러하듯 시끌벅적하게서로 한껏 총질을 해대며 ‘죽어, 죽어!’를 외치고 있었을 터이다. 그것이 현실이다. 이 현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섬뜩하고 짠하다. 아이들의 노는 방식이 섬뜩하고, 왜 아이들이 이렇게 놀고 있을까 하는 원인에 대한 탐구는 분단된 내 조국의 아픈 상채기 하나를 만지는 듯해 서글프다. 그러나 그저 그렇겠거니,어른들이 그렇게들 살고 있으니 아이들이라고 무어 다를 것이 있겠어 하고 외면해버릴 우리와 달리 시인은 이 현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는 아이들을 아파트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받들어 총’이 아니라 ‘받들어 꽃’이라고, 죽음의 놀이가 아니라 작은 생명에 대한 지극한 외경의 의식을 행하기를 요구하고 있는것이다. 폭력에 대한 굴종 대신 생명에의 축복으로 아이들 놀이가 바꾸어져야 한다는 것을 부드럽게 주장한 것이다. 주변에 널려 있는 수많은 왜곡과 은폐의 더께를 걷어내고, 그 자리에 빛나는 삶의 진정성을일구어 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전복적 상상력의 탁월한 기능이다.  시 (18)은 참 재미있는 시이다. 식료품가게 꼬챙이에 꿰어진 채 널브러져 있는 북어를 직접 들여다보고있는 듯이 형상화하고 있다. 더욱 세밀한 묘사가 계속 이어지다가 ‘가슴속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꿈꾸는 가운데 교묘하게 북어가 사람으로 대체되어 있다. 헤엄쳐 가기를 원하는 것은 북어가 아니라 사람인것이다. 그 순간 느닷없이 커다란 입을 벌린 북어들이 큰소리로 ‘너도 북어지!라고 귀가 먹먹하도록 계속 부르짖는 눈부신 전복으로 시를 끝맺고 있다.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말라 찌부러진 요즈음의 우리들 자신인 것이다.  (19) 銀山鐵壁 -오세영  까치 한 마리  미루나무 높은 가지 끝에 앉아  새파랗게 얼어붙은 겨울하늘을  엿보고 있다.  銀山鐵壁.  어떻게 깨뜨리고 오를 것인가.  문 열어라, 하늘아.  바위도 벼락맞아 깨진 틈새에서만  난초 꽃대궁을 밀어 올린다  문 열어라, 하늘아.  은산철벽이다. 은산철벽이라 함은 禪家에서 禪僧들이 화두를 참구하는 데서 오는 막막함이다. 온 산이 온통 흰 눈으로 덮이고 얼음으로 짜 올려져 철벽을 이룬 상태인 바, 세상의 分別智 정도로는 도대체 그걸깨뜨릴 수 없다. 한마디로 백색 절망의 상황인 것이다. 이런 상황 속의 까치 한 마리, 곧 선승은 홀로 미루나무 높은 가지 끝에 앉아 있다. 백천간두에 처해있는 것이다. 한 발만 까딱 잘못 재겨 디뎌도 수천 수만 리 허공으로 추락해버릴 그 자리. 그 한계상황을 박차고 하늘로 치솟아 올라야 하는데, 그 하늘조차새파랗게 얼어붙어 있다. 은산철벽을 먼저 깨트려야 되는데, 그래야 그나마 새파랗게 얼어붙은 하늘로 오를 생각을 해볼 수 있는데, 상황은 여전히 암담하다. 전후좌우를 헤아려보고, 차가운 이성과 불같은 감정을 동원해보고, 피투성이의 몸부림을 해봐도 눈에 보이고 귀로 열리는 것은 추호도 없다.  안 된다. 안 된다. 그렇다면 에라이 모르겠다. “문 열어라, 하늘아,” 호통칠 수밖에 없다. 분별지 같은걸로 어림없는 세계. 직관력 아니고는 어림짐작할 수도 없는 세계. 결국 선승으로서는 일대 전쟁을 감행할 수밖에 없이 하늘하고 상대를 하는 것이다. 이모저모 따질 것 없이 곧바로 하늘하고 맞붙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늘이 문을 여는가.  결국 “바위도 벼락 맞아 깨진 틈새에서만/ 난초 꽃대궁을 밀어 올린다.”라는 깨달음에 이른다. 은산철벽 속 어떠한 고통이라도 감수하고 이를 극복하는 데서만 비로소 난초 꽃, 곧 삶의 극적인 진실이 열리는것이다. 그것도 “문열어라, 하늘아”라고 다시 한번 호통치는 그 용기로 인해서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막다른 골목에 몰리는 고통에 처했을 때 마지막 뚝심으로 돌아서서 그 몰아대는 자를 악착같이 물어버리는 대전복이 청천벽력처럼 일순간에 일어나는 것이다.  진실의 근원이라고 여겨지는 하늘에다 대고도 호통칠 수 있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깨달음. 그러기에 시형식도 여러 진술이나 묘사를 생략하고 간명한 막대기 같은 언명만 필요하다. 이런저런 군더더기 없이 팽팽한 긴장과 절제의 언어만이 필요한 것이다. 어쩌면 불립문자의 세계를 말하기 때문에 여타의 모든 말들은 언어도단이 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뒤틀린 현실을 전복하고자 할 때 전복적 상상력은 비판적 세계인식을 드러내는 유효한 무기가 된다. 따라서 이것은 앞의 발견적 상상력과 함께 리얼리스트들의 중심적인 상상력을 형성한다.  7. 종합, 상상력의 유대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시적 상상력의 개진 방식들은 사실 추상화되어 있다. 한 편의 시는 모름지기 단 하나의 주도적인 상상력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섬세한 발견과 관찰, 날카롭게 대상의 본질을길어 올리는 투사와 유추, 분리된 것을 결합하는 연상과 현실을 부정의 눈으로 확인하는 전복의 상상력들은 사실 한 편의 시에 긴밀하게 습합되고 용해된 채, 하나의 시적 세계를 튼실하게 엮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편의상 이런 분리는 상상력의 실체를 더욱 선명하게 들여다보기 위한 장치라는 점에서 놓칠 수 없는 이점들을 갖는다. 더욱이 상상력들은 동일한 깊이로 시적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주도적인 상상력이 전면에 배치된 채 여타의 상상력들은 후경에서 마치 삼각형의 꼭지점을 위한 밑변과 옆변을 형성하는 것처럼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시들을 보면 이러한 결합의양상은 더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20)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황지우  映畵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群을 이루며  갈대숲을 이륙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매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매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이 시에는 다채로운 상상력이 사용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이 시의 모티브로 존재하는 것은 현실에서의 경험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이 시를 쓴 80년대는 영화가 시작되기에 앞서 줄곧 애국가를 틀어주었다. 어쩌면 김남주의 말대로 세금고지서와 징병통지서 밖에 가져다 주지 않는 조국에 대한 애정을 강요하기라도하는 듯 틀어주던 애국가였다. 그런데 이 일상적 경험은 사실 발견적 상상력에 속한다. 영화 속의 한 화면을 그대로 시적 경험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 시의 중심적인 시상에는 이 발견에 대한, 시적 인식으로서의 투사가 중핵을 이루고 있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날아오르는 새들이 ‘어디론가 날아간다’는 객관적 사실을 ‘세상을 뜨는구나’라는 주관적인 인식으로 슬그머니 환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명백히주관적인 의식의 투영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투사가 가능하며 이는 과연 충분한 공감을 자아내는가? 이 시가 1981년에 발표되었음을 생각해 보라. 광주항쟁을 겪었고, 군사독재가 한층 더 강화되고 있던그때, 시인을 비롯한 깨어있는 모두가 시의 이면에 그 아픔의 흔적과 고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 고통 안에서 심지어 그 고통의 현실과 무관한 새들조차 이 한반도의 남쪽을 벗어나고자 할 것이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끼룩거리면서” “낄낄대면서”로 투사된 채. 이러한 웃음 역시 남겨 두고 떠나는 세상에 대한빈정거림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한없는 모멸을 남긴 채 새들이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떼어 매고” 앞 화면에서 비추었던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뜨는 것이다. 그런데 이 투사는 시의 후반부에서 짝을 이루는 유추로 정교하게 반복된다. 우리 역시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다시 말해 빈정거리면서,야유를 퍼부으면서 썩어빠진 세상을 떠나 깨어있는 우리들끼리라도 “우리들의 대열을 이루며” “이 세상 밖”의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새들은 날아갈 수 있으나 우리들은 날아가지 못한다. 그 부푼 꿈이 애국가가 끝나자 “각기 자기 자리에 앉는다.” 그냥 앉는 것이 아니라 어쩌지 못한채 주저앉는다. 영화관의 자리에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광주에, 현대사의 고통의 심부에, 썩은 세상에 주저앉는 것이다. 한마디로 의식에서의 꿈이 애국가가 끝나는 현실로 돌아오면서 그만 전복이 되는 것이다.전복적 상상력인 것이다. 뜬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결코 낄낄거리거나 깔쭉대지 못한 채 고통과 눈물로 우리들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한편의 시에는 발견과 투사, 유추와 전복이 다채롭게 융합되어 있다. 이제 다음의 시를 보라.  (21) 성모성월․1 - 이성복  그날 꽃들은 부끄러운 가슴과 눈물겨운 뿌리를 쓰다듬으며 피어오르고 봄은 달아나는 애 인처럼 꽃 속에묻혀 자꾸 죽고 싶어했다 봄은 아랫도리를 가리지 않은 아이처럼 길가에 방뇨했고 후후, 뜨거운 입김을뿜으며 음료수 가게로 달려갔다 아름다운 오월 건조한 고기 압의 땅에서 우리는 자꾸 죽고 싶었다 그날사마리아 여인들과 함께 미사를 볼 때 버드나 무 꽃가루가 창을 넘어 들어왔고 우리는 자꾸 죽고 싶었다,죽을 생각은 없이 천주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여…늙은 양들의 기도는 간절했고 우리는 자꾸 죽고 싶었다 흰 나룻배보다 긴 꽃잎 속에 몸을 감고, 눈부시고 목메어 고개 흔들며 아무도 밟지 않은땅을 가고 싶었다 아름다운 오월 버드나무 꽃가루가 눈을 덮을 때 미사는 끝났고 붉은 제 단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사랑의 어머니,  당신의 이름을 힘겹게 부를 때마다  임종의 괴로움을 홀로 누리시는 어머니,  불러주소서  그 눈짓, 그 음성으로  죄의 한 아이를…  이 시는 ‘성모성월’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 아마도 시의 내용으로 볼 때 성모성월은 5월일 터이다. 5월은 우리에게, 적어도 80년 5월을 깨어있는 정신으로 대면해야 했던 이들 모두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로존재한다. 이는 현대사의 질곡일 뿐만 아니라 개인의 상처로도 남아 있는 것이다. 이 시는 그 상처를 어루만지고자 하는 시적 대응이다.  시는 크게 두 부분으로 어우러져 있다. 앞의 길게 이어지는 진술과 뒤의 기도문의 형식을 빈 간구로. 그런데 진술은 이성복 특유의 자유로운 연상을 주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더욱이 그 연상 안에서 이루어지는다양한 수사들은 특정한 상상력의 유형으로 묶어두기에는 지나치게 분방하다. 예컨대 첫 번째 문장의‘봄’과 ‘꽃들’은 유추의 틀 안에서 이후에 연결되는 ‘우리는’과 동류의 ‘사람들’로 읽어야 한다.그리고 이들은 공통적으로 ‘죽고 싶었다’는 고통에 찬 정서의 토로로 묶여 있다. 따라서 유추일 뿐만아니라 시적화자의 정서를 통해 모든 대상을 전일적으로 인식하는 투사 역시 개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투사는 “붉은 제단에서 식은땀이 흘렀다”는 묘사로 완결된다. ‘죽고 싶다’는 자괴감이 고스란히 신의 제단에도 전달되었고, 그 전달은 계시를 내리는 대신 고통의 몸짓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절망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이어지는 기도는 산문적인 진술 전체에 가름하는 집약적인 제시일 뿐만 아니라 산문적인 진술의 진전이기도 하다. 고통에 찬 기도에 스스로의 괴로움으로 화답하는 ‘사랑의 어머니’는 인간과 신의 세계를 간구와 긍휼의 세계로 서로 연결하며, 죄로부터의 구원을 단서를 열어 보이고 있는 것이다. “불러주소서”란 소명에의 간구야말로 단순한 죄씻음에 그치지 않고, 참담한 시대에도 의연히 자신을 세울 수 있는 자존을 향한 갈구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이 후반부의 기도문은 특정한 상상력으로 명명하기 힘들만큼 내면의 심경이 그대로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역시 현실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새로운모색에 전율하는 전복의 상상력이 존재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22) 昇天 - 이수익  내 목소리가  저 물소리의 벽을 깨고 나아가  하늘로 힘껏 솟구쳐 올라야만 한다  소리로써 마침내 소리를 이기려고  歌人은  심산유곡 폭포수 아래서 날마다  목청에 핏물 어리도록 발성을 연습하지만  열길 높이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쉽게 그의 목소리를 덮쳐  계곡을 가득 물소리 하나로만 채워버린다  그래도 그는 날이면 날마다  산에 올라  제 목소리가 물소리를 뛰어넘기를 수없이 기도하지만,  한번도 자세를 흐뜨리지 않는 폭포는  준엄한 스승처럼 곧추 앉아  수직의 말씀만 내리실 뿐이다  끝내  절망의 유복자를 안고 下山한 그가  발길 닿는 대로 정처없이 마을과 마을을 흘러 다니면서  소리의 昇天을 이루지 못한 제 恨을 토해 냈을 때  그 핏빛 소리에 취한 사람들이  그를 일러  참으로 하늘이 내리신 소리꾼이라 하더라  시 (22)도 관찰과 유추와 투사와 전복적 상상력이 종합적으로 융해되어 있다.  시적 상상력을 통해 시를 읽고, 나아가 시를 쓰는 일은 사실 시의 전부라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다만시라는 작은 세계의 커다란 진실을 들추어보는 하나의 조촐하고 소박한 매개가 될 따름이다. 무엇보다도이러한 틀을 통한 시읽기와 시쓰기가 아니라 이러한 틀의 이면에 잠복해 있는 시정신일 터이다. 이런 시적 상상력도 중요하지만 ‘시는 온몸으로 쓰는 것이다’라는 김수영의 거친 갈파에서 확인되는 시정신이더욱 소중한 것이다.* 
‹처음  이전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