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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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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0    화룡 두만강역 로과籍 - 방홍국 시 쓰다... 댓글:  조회:2235  추천:0  2017-12-16
[시] 화로 / 방홍국   화로 방홍국     륙남매 막내 나조차 집 떠나 보낸뒤 화로 너만이 남아 아버님 어머님을 따스히 해드렸구나   숯불에 데이고 데이여 찌그러지고 쪼그라졌어도 곱기만 하구나   아  화로 ================== 석인골을 생태골로 만들자 작성자: 방홍국   차도 있고 토,일마다 쉬는데 갈곳이 맞같지 않다. 너도 나도 그저 모아산, 모아산이 몸살이 날 지경이다.   사람들 오게 하려면 첫째는 도심과의 거리다. 아무리 좋아도 멀면 잘 안간다. 대도시는 차로 편도 한시간이내 거리가 좋다고 한다. 연길은 반시간좌우가 좋다. 석인골이 연길 도심에서 불과 30키로 반시간좌우다.   다음은 산도 있고 물도 있고 산에 나무가 우거지고 물에는 고기가 헤염치고 산에가서 나물 캐고 열매 따는 재미도 있고 물에서 반디하고 낙시하고 하는 재미도 있고 물가에 녹음 진 나무들이 있어 빙 둘러 앉아 놀 자리도 있는 그런 곳이여야 한다. 석인골이 물가에 나무 없는것 빼고는 그렇다.   셋째는 동네가 깨끗해야 한다. 지금 연변의 농촌 마을위생이 말이 아니다. 돼지,소,개변과 쓰레기가 넘쳐나 다시 가고픈 생각이 살아진다. 옛날 우리의 고향들은 얼마나 깨끗했던가!   넷째,시민들이 올망졸망 재벨로 남새 심고 곡식 심어 먹을수 있는 주말농장 같은 것을 할수 있는 밭까지 있으면 금상첨화다.   다섯째,돈 받지 말아야 한다. 유람,하면 큰 투자를 해서 온갖 시답잖은 시설을 만들어 놓고 입장료를 받아야 하는 줄 안다. 정부가 세금 거두어서 그 세금으로 뭘 만들어서 또 시민들 돈지갑이나 털던 시대는 지났다. 정부란 세금으로 돈 벌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을 위해 돈 쓰라고 있는 것이다. 중앙에서 입이 다슬도록 말하는 복무형정부로 바뀌라는 말이 바로 그말이다. 그런데 아직도 어떤 정부는 세금가지고 돈 벌려고만 한다. 석인골을 생태골로 만든다고 뭘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저 촌민들이 자기 집과 마을을 깨끗이 하고 마을과 강가에 나무를 심도록 장려 하고 사람들이 제멋대로 나무를 베고 물을 오염 시키지 않도록 감독하고 이미 있는 연집하 저수지까지 되여 있는 포장도로를 더 넓히고 아직 포장되여 있지 않은 저수지부터 석인골 마을들까지 흙길까지도 포장하고… 그래 주었으면 시민들도 촌민들도 정부에 대단히 고마워 할것이다.   나라에서 환경보존,향촌관광을 크게 장려하고 있다. 연변 석인골을 중국에서 가장 자연친화적인 생태골로 만들테니 돈 좀 줍시사 청을 들면 나라에서 돈 줄것이다.   ㅡ연길에서 ====================== 개에게 옷 입히면 좋아할까? 작성자: 방홍국   인간의 위대함은 인간의 보잘것 없음을 아는데 있다. 어느 철학가가 그랬다.   개들에게 옷을 입힌다. 개가 미워서가 아니라 너무너무 사랑해서   개가 고마워 할까 싫어 할까 아주 추운날에는 좋아 하겠다. 온 겨울 내내는? 날씨에 따라 두껍고 덜 두껍고 얇은 옷 더운 날에는 옷 벗기고 그러면 좋아 할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어떤 날이 개에게 맵짜고 춥고 그저 그렇고 안 춥고 더운지? 그리고 개들도 기왕 옷 입는거 요모양 조모양 옷 모양 타발을 하지는 않을런지?   분명한것은 개에게 옷 입히면 옷 입힌 사람은 좋아 한다는 것이다. 내가 좋으니 너도 입어라,좋다! 이거다.   엄마와 아들이 제일 많이 싸우는 소재다. 아들은 싫다고 하고 엄마는 춥다,입어라. 여기서 가상한것은 입는 아들이 싫으면 싫다고 감히 뿌리친다는 것이다.   양반들은 못 그랬다. 임금이 긴소매 옷을 입으라면 찍 소리 못하고 입어야 했다. 상놈들이야 말할것도 없다. 너덜너덜한 옷을 입어야지 양반행세 했다간 큰코 다쳤다.   비단 옷 뿐이랴?! 조정에서 머리를 기르라고 하면 길러야 했다. 청조 수백년 남자들이 머리를 길러 머리에 두르고 다녔으니   엄마든,왕이든,황제든 말은 다 니들을 사랑해서 좋은것을 시킨다고 했다.   옷 입히고 총 쏴서 사람 죽이라면 죽여야 한다. 군대니까,전쟁이니까. 옷 입히고 지식분자를 끌어내라면 끌어내야 했다. 홍위병이니까,고린내 나는 지식분자니까 옷 입히고 노래하라면 노래해야 한다. 단위활동이까,령도가 해라니까   옷 입고서 애완견 해야하는 개나 옷 입고 무슨 “장” 무슨 “님”행색 하는 사람이나   어느때든 옷 입는 자의 느낌은 중요하지가 않았다. 입히는 자의 멋대로다.   앞에 철학자의 말보다 이말이 어떨까 “인간의 위대함은 옷 입고 안 입어야 되는 때를 아는데 있다.”     ㅡ연길에서 ================ 윤동주는 누구시길래 작성자: 방홍국   간밤에 눈이 내리고 기온이 뚝 떨어 졌습니다. 바람까지 날을 세우고 불어 옵니다.   스무나문명 사람들이 명동촌 윤동주 생가 뜰에서 님의 탄생 97주년를 기립니다. 지붕에 쌓인 눈이 바람에 날려 사무치게 님을 부르는 시인의 얼굴과 원고지를 때립니다. 그래도 누구하나 움츠리는 사람 없습니다.   보아하니 저 나무는 어려서 님을 모를것 같습니다. 마당에 돌들은 이사를 와서 모를것 같습니다. 개울은 알것 같습니다. 그런데 얼어 붙어서 말씀이 없습니다. 집 뒷편에 언덕과 마을 앞 먼산이야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뜰에서 문익환이랑 뛰놀던 님을 보셨겠지요. 큰 구름이 몰려 옵니다. 구름에게 님을 물어 봅니다. 하늘에게 님을 물어 봅니다.   님은 누구시길래 님을 못 잊어 합니까     ㅡ연길에서 =============== 모아산은 대리석을 원치 않습니다 2008년 05월 03일 13시 51분  조회:3027  추천:113  작성자: 방홍국 모아산은 대리석을 원치 않습니다   우리의 행정은 늘 이렇게 결정을 내고 나서 시민들에게 통보하는 식이지요. 알기나 하고 좋든 궂든 받아 들여야만 하는 “주인들”   미리 이런 저런 계획을 여차여차하게 실행하련다고 공포해서 의견 수렴을 하는 따위 “시간 소모”는 하지 않지요.   모아산 등산로 2기 공사를 7월에 마무리 한다면 벌써 시작했겠네요. 이제 말해 봐야 “행차뒤 나발”인줄 알면서도 행여나 하는 마음에 소견을 말씀 드립니다.   우선 모아산은 두메터 폭의 등산로를 내기에는 작은 산입니다. 지금대로 좁은 흙길이 산과 어울리는 것이지요 기존의 길을 정성스럽게 조금씩만 손질하면 충분합니다.   “6.3키로 평균 2메터 폭에 대리석과 황강암”을 깔면 연길에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 생겨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까요   자주 다녀서 아는데 려산호텔부터 오르는 코스에는 위험한 곳이 별로 없습니다. 간혹 있는,몇발자욱 되지 않는 급경사에는 양옆에 이쁘게 말뚝 박고 바줄을 늘여놓으면 되고   올라가는 중에 5개의 관광명소 개발이라니 소웃다 꾸레미 터질 소립니다. 자기 안해 이쁜줄 모르고 동네집 마누라가 고와 보여서 억지로 성형 수술 시켜 "양귀비를 곰보딱지"로 만들려는 소리지요.   산이 좋아하는 것은 나무와 꽃입니다. 모아산의 “옥의 티”는 수종이 단조롭고 특히 꽃나무들이 적은 것입니다. 등산로 양편에 어느 한구간은 진달래꽃길로 어느 한구간은 살구꽃길로 하는 식으로 구간 구간 다양한 나무들과 꽃들을 심어 색과 향기를 보태여 준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일것입니다.   여기에 가끔 가다 아름다운 시편들이나 등산과 관련한 좋은 말들을 목판이나 돌에 새겨 놓아 두면 한결 우아하겠지요.   그리고 려산호텔에서 정상 가는 장장 10여리 코스에 화장실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빈속에 등산 할 수는 없는 일이고 그러니 아무데나 싸댈수 밖에   “以人爲本”의 根本은 먹고 배설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제일 편한 것이 뭔지 아십니까 지하철이요?아닙니다. 어디가든 화장실을 쉽게 찾을수 있는 것입니다.   아마 이정도면 당초 예산한 1000만원에서 웬만한 공장하나 지을 돈은 남을 것입니다.  ============================= “만주”란 없소 작성자: 방홍국 방홍국   “만주 찬공기 밀려와 국지성 호우 초래” (한국매일경제신문 2007년 8월9일자)   만주가 어디요 중국에 만주란 없소 세계지도 어디를 봐도 만주란 없소   중국 동3성을 만주라 한다오 한국에서 일제때 부르던 이름인데 습관이 되어서 계속해서 만주라 한다오 이게 어느 때인데   중국에서도 그때는 그리 부르는 사람들 있었겠소만 우리는 일제를 몰아내면서 그 더럽고 치욕스런 이름을 던져 버린지 오래오   어릴때 힘없고 못 살아서 똥개로 불리던 당신을 처자식 앞에서 똥개라 부르면 어떻겠소   알면서 왜 그리 남의 감정과 역사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부르오   습관이 되어서 딴 뜻은 없다구요 물론이겠지요 거기다 딴 뜻까지 있다면 큰 일이 나게   그럼 우리도 습관대로 서울을 한성으로 부르라오 동해를 일본해로 부르라오 괜찮겠소   이러지들 마오 대접 받고 싶으면 먼저 대접해 주라질 않소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질 않소   또다시 텔레비나 신문에 중국 동북지역을 만주라 하면 그땐 요렇게 얌전하지 않을 것이요 ========================== "만주"를 없앱시다 /방홍국   전에 “만주란 없소!” 했는데 고집스런 한국 언론들이 아직도 만주 만주 합니다.   세계 어느나라 지도(한국을 포함하여)에도 “만주”란 없는데 유독 한국 언론과 다수의 국민들 속에서만 “만주”가 있습니다.   해서 중국에와 “만주”찾다 망신당하는 한국인들도 꽤 있습니다.   “만주”란 일제때 중국 동북3성을 일컬으던 말입니다. 중국인들에게는 기분 나쁜 호칭입니다.   외교상에서도 “만주”운운하는 것은 중국인들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하니 한국 언론들이 “만주”를 “중국 동북지방”으로 고쳐 부르도록 한국 언론들에 줄이 닿는 분들 모두 기회 될때마다 주장을 하기 바라마지 않습니다.   ㅡ서울에서    ================= 방홍국 프로필 ----------- 1964년 연변 화룡 로과 출생 남개대학 졸업. 천진 한국신로유한공사 근무. 연변일보사 기자 력임. 연길시정협 근무. 연변조선족자치주 통전부 해외련락처 처장 력임 연변조선족자치주 서울대표처 종합처 처장 력임 현재 주경제합작국 부국장 0433-2536515 13943399626 서울전화:01090597027 fanghg@hanmail.net    
889    <섬> 시모음 댓글:  조회:2232  추천:0  2017-12-14
    ◆  + 섬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시인, 1939-)  + 섬  스스로의 生 지키기 위해  까마득히 절벽 쌓고 있는 섬  어디 지랑풀 한 포기  키우지 않는 섬  눈 부릅뜨고  달려오는 파도  머리칼 흩날리며  내려앉는 달빛  허연 이빨로 물어뜯으며.....  끝내 괭이갈매기 한 마리  기르지 않는 섬  악착같이 제 가슴 깎아  첩첩 절벽 따위 만들고 있는 섬.  (이은봉·시인, 1954-)   + 무명도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뜬눈으로 살자  (이생진·시인, 1929-) + 섬 등이 가렵다 아무도 없는데 자꾸만 등이 가렵다 오른팔 왼팔 아무리 뒤로 꺾어 보아도 닿지 않는 한 구석 긁히지 않는 그곳을 매번 놓치고 마는 손끝 (허은희·시인, 1966-)   + 섬 파도가 섬의 옆구리를 자꾸 때려친 흔적이 절벽으로 남았는데 그것을 절경이라 말한다 거기에 풍란이 꽃을 피우고 괭이갈매기가 새끼를 기른다 사람마다의 옆구리께엔 절벽이 있다 파도가 할퀴고 간 상처의 흔적이 가파를수록 풍란 매운 향기가 난다 너와 내가 섬이다 아득한 거리에서 상처의 향기로 서로를 부르는, (복효근·시인, 1962-)   + 쓸쓸한 섬 우리는 서로를 보지 못했는지 모른다 서로 바라보고 있다고 믿었던 옛날에도 나는 그대 뒤편의 뭍을 그대는 내 뒤편의 먼 바다를 아득히 바라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섬이다 그대는 아직 내릴 곳을 찾지 못해 떠도는 저녁 바다 갈매기다 우리는 아직 서로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내 밤은 오고 모두 아프게 사무칠 것이다 (정일근·시인, 1958-)   + 섬 마음속에  섬, 하나 자라고 있다 때로는 밀물에 떠밀려 아득히 먼 수평선 끝자락에서 보일 듯 말 듯, 애를 태우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해일처럼 다가와 미역 자라듯  가슴속에 뿌리 내리고 태산처럼 자라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해당화도 피우고 마냥 슬퍼 보이는 갯메꽃도 피우면서 (최원정·시인, 1958-) + 어머니의 섬  늘 잔걱정이 많아  아직도 뭍에서만 서성이는 나를  섬으로 불러주십시오. 어머니  세월과 함께 깊어가는  내 그리움의 바다에  가장 오랜 섬으로 떠 있는  어머니  서른세 살 꿈속에  달과 선녀를 보시고  세상에 나를 낳아주신  당신의 그 쓸쓸한 기침소리는  천리 밖에 있어도  가까이 들립니다  헤어져 사는 동안 쏟아놓지 못했던  우리의 이야기를  바람과 파도가 대신해주는  어머니의 섬에선  외로움도 눈부십니다  안으로 흘린 인내의 눈물이 모여  바위가 된 어머니의 섬  하늘이 잘 보이는 어머니의 섬에서  나는 처음으로 기도를 배우며  높이 날아가는  한 마리 새가 되는 꿈을 꿉니다. 어머니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사슴섬의 뻐꾸기 - 소록도에서 뻐꾸기 한 마리 숲속에서 울고 있었다. 고운 햇살 온몸에 감고. 손을 내밀어 가만히 잡아주고 싶은  목이 긴 사람들이 사는 섬. 사슴섬. 미움도 없고 시새움도 없는 아! 이곳은 아픈 당신들의 천국이었구나. 어릴 때 함께 뛰놀던 친구들 모두 고향에 다 두고 보리피리 불며 서럽게 찾아온 땅 소록도여! 그는 죽어 뻐꾸기가 되었는가. 뻐꾹 뻐꾹 뻐꾹. 솔숲에 숨어 꽃잎에 붉은 울음을 토해 놓고 있었다. (오순택·아동문학가, 1942-)                     * 사슴섬: 전남 고흥군 도양면에 있는 섬으로 모양이 어린 사슴을 닮았다고 하여 소록(小鹿)도라고 한다. 나병에 걸린 한하운 시인의 시 ´보리피리´가 새겨진 시비가 있다.        산시(山西, 산서)성 지(吉)현 황허(黃河, 황하)강 후커우(壺口)폭포 꽁꽁...
888    "이 섬에서 저 섬으로 가고 싶다"... 댓글:  조회:2664  추천:0  2017-12-14
 시인 정현종 시 모음             사물(事物)의 꿈 1 - 나무의 꿈                        그 잎 위에 흘러내리는 햇빛과 입맞추며 나무는 그의 힘을 꿈꾸고 그 위에 내리는 비와 뺨 비비며 나무는 소리 내어 그의 피를 꿈꾸고 가지에 부는 바람의 푸른 힘으로 나무는 자기의 생(生)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슬픔                                                       세상을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사람을 만나기도 하였다. 영원한 건 슬픔뿐이다.   덤덤하거나 짜릿한 표정들을 보았고 막히거나 뚫린 몸짓들을 보았으며 탕진만이 쉬게 할 욕망들도 보았다.   영원한 건 슬픔뿐이다.       나는 별아저씨                                    나는 별아저씨 별아 나를 삼촌이라 불러다오 별아 나는 너의 삼촌 나는 별아저씨 나는 바람남편 바람아 나를 서방이라고 불러다오 너와 나는 마음이 아주 잘 맞아 나는 바람남편이지 나는 그리고 침묵의 아들 어머니이신 침묵 언어의 하느님이신 침묵의 돔(Dome) 아래서 나는 예배한다 우리의 생(生)은 침묵 우리의 죽음은 말의 시작 이 천하(天下) 못된 사랑을 보아라 나는 별아저씨 바람남편이지.         갈데없이                                                    사람이 바다로 가서 바닷바람이 되어 불고 있다든지, 아주 추운데로 가서 눈으로 내리고 있다든지, 사람이 따뜻한 데로 가서 햇빛으로 빛나고 있다든지, 해지는 쪽으로 가서 황혼에 녹아 붉은 빛을 내고 있다든지 그 모양이 다 갈데없이 아름답습니다...      그림자의 향기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그림자를 따온다 영원히 푸르다 바람에 흔들리는 꽃 그림자를 따온다 마르지 않는 향기       마른 나뭇잎                                                마른 나뭇잎을 본다. 살아서, 사람이 어떻게 마른 나뭇잎처럼 깨끗할 수 있으랴.          물방울의 말                                                나무에서 물방울이 내 얼굴에 떨어졌다 나무가 말을 거는 것이다 나는 미소가 대답하여 지나간다   말을 거는 것들을 수없이 지나쳤지만 물방울-말은 처음이다 내 미소-물방울도 처음이다         부질없는 시                                          보아라 깊은 밤에 내린 눈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아무 발자국도 없다  아, 저 혼자 고요하고 맑고  저 혼자 아름답다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앉아 있거나 차를 마시거나 잡담으로 시간에 이스트를 넣거나 그 어떤 때거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그게 저 혼자 피는 풍경인지 내가 그리는 풍경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다          비스듬히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歌客(가객)                                               세월은 가고 세상은 더 헐벗으니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새들이 아직 하늘을 날 때 아이들은 자라고 어른들은 늙어가니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동안 무슨 터질 듯한 立場입장이 있겠느냐 항상 빗나가는 구실 무슨 거창한 목표가 있겠느냐 나는 그냥 노래를 부를 뿐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는 동안 나그네 흐를 길은 이런 거지 저런 거지 같이 가는 길 어느 길목이나 나무들은 서서 바람의 길잡이가 되고 있는데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사람들이 乞神걸신을 섬기는 동안 하늘의 눈동자도 늘 보이고 땅의 눈동자도 보이니 나는 내 노래를 불러야지 우리가 여기 살고 있는 동안         사랑의 꿈                                                   사랑은 항상 늦게 온다. 사랑은 생 뒤에 온다. 그대는 살아 보았는가. 그대의 사랑은 사랑을 그리워하는 사랑일 뿐이다. 만일 타인의 기쁨이 자기의 기쁨 뒤에 온다면 그리고 타인의 슬픔이 자기의 슬픔 뒤에 온다면 사랑은 항상 생 뒤에 온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생은 항상 사랑 뒤에 온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아이가 플라스틱 악기를 부~~ 부~~ 불고 있다 아주머니 보따리 속에 들어 있는 파가 보따리 속에서 쑥쑥 자라고 있다 할아버지가 버스를 타려고 뛰어 오신다 무슨 일인지 처녀 둘이 장미를 두 송이 세 송이 들고 움직인다 시들지 않는 꽃들이여   아주머니 밤 보따리, 비닐 보따리에서 밤꽃이 또 막무가내로 핀다          상처                                                         한없이 기다리고 만나지 못한다. 기다림조차 남의 것이 되고 비로소 그대의 것이 된다. 시간도 잠도 그대까지도 오직 뜨거운 병으로 흔들린 뒤 기나긴 상처의 밝은 눈을 뜨고 다시 길을 떠난다. 바람은 아주 약한 불의 심장에 기름을 부어 주지만 어떤 살아 있는 불꽃이 그러나 깊은 바람 소리를 들을까 그대 힘써 걸어가는 길이 한 어둠을 쓰러뜨리는 어둠이고 한 슬픔을 쓰러뜨리는 슬픔인들 찬란해라 살이 보이는 시간의 옷은          섬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좋은 풍경                                                   늦겨울 눈 오는 날 날은 푸근하고 눈은 부드러워 새살인 듯 덮인 숲속으로 남녀 발자국 한 쌍이 올라가더니 골짜기에 온통 입김을 풀어놓으며 밤나무에 기대어 그 짓을 하는 바람에 예년보다 빨리 온 올 봄 그 밤나무는 여러날 피울 꽃을 얼떨결에 한나절에 다 피워놓고 서 있습니다          얼굴에게                                                  내 얼굴이 억제하고 있는 동안 궁둥이는 모름지기 폭발하고 있다 하하  나는 내 얼굴이 때때로 궁둥이여서 불안할 때가 있다         빨간 담쟁이덩굴                                         어느새 담쟁이덩굴이 붉게 물들었다! 살 만하지 않은가. 내 심장은 빨간 담쟁이덩굴과 함께 두근거리니! 석류, 사과 그리고 모든 불꽃들의 빨간 정령들이 몰려와 저렇게 물을 들이고, 세상의 모든 심장의 정령들이 한꺼번에 스며들어 시간의 정령, 변화의 정령, 바람의 정령들 함께 잎을 흔들며 저렇게 물을 들여놓았으니, 살 만하지 않은가, 빨간 담쟁이덩굴이여, 세상의 심장이여, 오, 나의 심장이여.         흰 종이의 숨결                                           흔히 한 장의 백지가 그 위에 쓰여지는 말보다 더 깊고, 그 가장자리는 허공에 닿아 있으므로 가없는 무슨 소리를 울려 보내고 있는 때가 많다. 거기 쓰는 말이 그 흰 종이의 숨결을 손상하지 않는다면, 상품이고 허공의 숨결로 숨을 쉰다면, 명품이다.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그래 살아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떨어져도 튀는 공이 되어 살아봐야지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 탄력의 나라의 왕자처럼 가볍게 떠올라야지 곧 움직일 준비 되어 있는 꼴 둥근 공이 되어 옳지 최선의 꼴 지금의 네 모습처럼 떨어져도 튀어오르는 공 쓰러지는 법이 없는 공이 되어.           나무에 깃들여                                            나무들은 난 그대로 그냥 집 한채 새들이나 벌레들만이 거기 깃들인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면서 까맣게 모른다 자기들이 실은 얼마나 나무에 깃들여 사는지를!              정현종 鄭玄宗, (1939.12.17~  )                              1939년 12월 17일 서울시 용산구에서 3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3세 때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으로 이사 가서 청소년기를 이곳에서 보냈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문학과 음악·발레·철학 등에 심취하였다. 1959년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였으며, 재학 시절 대학신문인 《연세춘추》에 발표한 시가 연세대 국문과 박두진 교수의 눈에 띄어 1984년 5월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았다. 1965년 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해 3월과 8월에 각각 〈독무〉와 〈여름과 겨울의 노래〉로 《현대문학》에서 3회 추천을 완료하고 문단에 등단하였다.   1966년에는 황동규·박이도·김화영·김주연·김현 등과 함께 동인지 《사계》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1970∼1973년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로 일하였고, 1975∼1977년에는 중앙일보 월간부에서 일하였다. 1977년 신문사를 퇴직한 뒤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가 되었으며, 1982년부터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가 되었다.   1972년 첫 시집 《사물의 꿈》을 출간한 이후 꾸준한 작품활동을 하였다. 초기의 시는 관념적인 특징을 지니면서 사물의 존재 의의를 그려내는 데 치중한 반면, 1980년대 이후로는 구체적인 생명 현상에 대한 공감을 주로 표현하고 있다.   1990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외 6편의 시로 제3회 연암문학상을 수상하였고, 1992년 〈한 꽃송이〉로 제4회 이산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또 1995년 〈내 어깨 위의 호랑이〉로 제40회 현대문학상, 1996년 〈세상의 나무들〉로 제4회 대산문학상, 2001년 〈견딜 수 없네〉로 제1회 미당문학상 시 부문을 수상하였다.   그 밖의 주요 시집에 《나는 별아저씨》(1978),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1984),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1989), 《갈증이며 샘물인》(1999)을 비롯하여 시론집 《숨과 꿈》(1982) 등이 있으며, 크리슈나무르티의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와 네루다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등의 번역서가 있다.   .................................................................................................................................     ■ 작가 이야기     자아와 사물이 이루는 교감, 그 충만한 기쁨 정현종은 사물과의 합일을 꿈꾸는 시인이다. 때문에 그의 시세계에서는 자아와 사물과의 교감이 충만한 기쁨 속에 재현된다. 사물과의 에로스적 합주(合奏)를 통해 빚어내는 축제의 교향곡이 정현종 시의 주조음을 이루는 것이다. "한가함과 한몸/천둥과 한몸/비와 한몸/뻐꾸기 소리와 한몸으로/나도 우주에 넘치이느니."('여름날')에서 보여지듯 세상의 모든 것과 한 몸을 이루려는 시인의 욕망은 결코 대상을 가리는 법이 없다. 또한 억압적인 사물의 질서에 숨통을 열고 생기를 불어넣는 그의 시혼은 "부서진 내 살결과 바람결이 같아지고/살결과 물결이 和答하"(죽음과 살의 和姦)기를 간절히 바란다. 말 그대로 그의 시는 사물과 '화간(和姦)'함으로써 사물의 속살 속으로 시적 상상력의 촉수를 내뻗고 애무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육감'을 가진 시인이다. 인간의 오관(五官)을 초월하는 '식스 센스'의 소유자인 셈이다. 어떠한 대상이든 가리지 않고 교접하여 질퍽하게 몸을 섞는 정현종 특유의 사랑법이 바로 그의 시적 육감의 실체이다. 바로 이 시적 '육감(六感/肉感)'을 통해 그는 삶의 무거움을 털어 버리고 자유롭게 대상 속으로 스며들어 사물과 쩌릿한 합일을 이룬다. 그리고 시인은 바로 그 순간의 '생의 희열'을 예찬한다.   일찍이 김현이 '바람의 현상학'이란 글에서 포착한 것처럼, 시인은 시적 자아를 무한 확장 ·팽창시켜 '바람'처럼 세상의 구석구석에 두루 번지기를, 퍼지기를 갈망한다. "퍼지고 퍼져/무한 허공과 솔기 없이 이어"('달맞이꽃')지기를, "생명의 저 맹목성을 적시며/한없이 퍼져나"('무슨 슬픔이')가기를 강렬하게 희원하는 것이다. 이렇듯 나와 사물, 나와 세계 사이의 모든 경계가 가뭇없이 사라진 곳에는 "바깥은 가이없고/안도 가이없다/안팎이 같이 움직이며/넓어지고 깊어"('몸이 움직인다')지는 신묘한 시공간이 탄생한다.   가두리가 없는 번짐의 미학, 서로가 서로를 끌어안는 황홀한 친화력, 이 가공할 언어의 전염성! 그래서 그의 시의 언어들은 정해진 의미의 감옥을 견디지 못하고 언제나 요동치고 들썩거린다. 다채로운 사물들과 한바탕 신명나게 몸을 비비며 도취의 '카니발'을 만끽한다. 아마도 시인은 삶과 죽음, 주체와 객체, 인식과 대상이라는 극명한 대립의 칸막이조차 사뿐히 뛰어 넘는 '번짐의 시학'을 온몸으로 체현함으로써 구획과 분별, 질서와 나눔의 근대적 기획이 얼마나 커다란 무명(無明)의 산물인가를 보여주려 했던 모양이다. (류신/문학평론가) ■ 대표작       『고통의 축제』 | 민음사      『견딜 수 없네』 | 중앙일보사      『한 꽃송이』 | 문학과지성사                                       갈데없이 /정현종                             사람이 바다로 가서                             바닷바람이 되어 불고 있다든지,                             아주 추운데로 가서                             눈으로 내리고 있다든지,                             사람이 따뜻한 데로 가서                             햇빛으로 빛나고 있다든지,                             해지는 쪽으로 가서                             황혼에 녹아 붉은 빛을 내고 있다든지                             그 모양이 다 갈데없이 아름답습니다...           물방울의 말 /정현종  나무에서 물방울이  내 얼굴에 떨어졌다  나무가 말을 거는 것이다  나는 미소가 대답하여 지나간다  말을 거는 것들을 수없이  지나쳤지만  물방울-말은 처음이다  내 미소-물방울도 처음이다           기다림에 관한 명상 / 정현종  메시아가 오시면  이 세상이 살까  천만에  우리는 그를 다시  못박을 거야  란 항상 못박힌다는 뜻이고  영원히 오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그렇다면?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게 되지  자기 자신을 기다리게 되지  내가 메시아가 아닌데?  자기 자신을 기다리지 않으니  영원히 메시아가 없지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건 자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정당화하는 일이기 쉽거든.  메시아가 다 해 주실 것이고, 대신 죽어 주실 테니까.)  궁핍에 처형된 우리들의 삶.  하긴 오지 않는 자, 오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데가 이 세상이야.  오지 않는 걸 기다리는 동안 --- 그게 우리 일생이지.           날아라 버스야 /정현종  내가 타고 다니는 버스에  꽃다발을 든 사람이 무려 두 사람이나 있다!  하나는 장미 - 여자  하나는 국화 - 남자.  버스야 아무데로나 가거라.  꽃다발을 든 사람이 둘이나 된다.  그러니 아무데로나 가거라.  옳지 이륙을 하는구나!  차체의 이 가벼움을 보아라.  날아라 버스야!           그대는 별인가 - 시인을 위하여 /정현종  하늘의 별처럼 많은 별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은 모래  반짝이는 건 반짝이는 거고  고독한 건 고독한 거지만  그대 별의 반짝이는 살 속으로 걸어 들어가  '나는 반짝인다'고 노래할 수 있을 때沮? 기다려야지  그대의 육체가 사막 위에 떠 있는  거대한 밤이 되고 모레가 되고  모래의 살에 부는 바람이 될 때까지  자기의 거짓을 사랑하는 법을 연습해야지  자기의 거짓이 안 보일 때까지.           견딜 수 없네 /정현종  갈수록, 일월(日月)이여,  내 마음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傷痕)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개들은 말한다 /정현종  개들은 말한다  나쁜 개를 보면 말한다  저런 사람같은 놈.  이리들은 여우들은 뱀들은  말한다 지네 동족이 나쁘면  저런 사람같으니라구.  한국산 호랑이가 멸종된 건  개와 이리와 여우들 탓이 아니지 않은가.  한국산 호랑이의 멸종은  전설의 멸종  깨끗한 힘의 멸종  용기의 멸종과 더불어 진행된 게 아닌가.  날 기운의 감소  착한 의지의 감소  제정신의 감소와 더불어 진행된 게 아닌가.  한국산 호랑이의 멸종은 하여간  개와 이리와 여우들 탓은 아니지 않은가.           불쌍하도다 /정현종  詩를 썼으면  그걸 그냥 땅에 묻어두거나  하늘에 묻어둘 일이거늘  부랴부랴 발표라고 하고 있으니  불쌍하도다 나여  숨어도 가난한 옷자락 보이도다           비스듬히 /정현종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상처 /정현종  한없이 기다리고  만나지 못한다.  기다림조차 남의 것이 되고  비로소 그대의 것이 된다.  시간도 잠도 그대까지도  오직 뜨거운 병으로 흔들린 뒤  기나긴 상처의 밝은 눈을 뜨고  다시 길을 떠난다.  바람은 아주 약한 불의  심장에 기름을 부어 주지만  어떤 살아 있는 불꽃이 그러나  깊은 바람 소리를 들을까  그대 힘써 걸어가는 길이  한 어둠을 쓰러뜨리는 어둠이고  한 슬픔을 쓰러뜨리는 슬픔인들  찬란해라 살이 보이는 시간의 옷은           시간의 게으름 /정현종  나, 시간은,  돈과 권력과 기계들이 맞물려  미친 듯이 가속을 해온 한은  실은 게으르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런 속도의 나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보면  그건 오히려 게으름이었다는 말씀이지요)  마음은 잠들고 돈만 깨어 있습니다.  권력욕 로봇들은 만사를 그르칩니다.  자동차를 부지런히 닦았으나  마음을 닦지는 않았습니다.  인터넷에 뻔질나게 들어갔지만  제 마음속에 들어가보지는 않았습니다.  나 없이는 아무것도  있을 수가 없으니  시간이 없는 사람들은 실은  자기 자신이 없습니다.  돈과 권력과 기계가 나를 다 먹어버리니  당신은 어디 있습니까?  나, 시간은 원래 자연입니다.  내 생리를 너무 왜곡하지 말아주세요.  나는 천천히 꽃 피고 천천히  나무 자라고 오래 오래 보석 됩니다.  나를 하지만 마시고  내 느린 솜씨에 찬탄도 좀 보내주세요.           여름 저녁 /정현종  여름 저녁에 젖으려고  필경 흠뻑 젖으려고  농원 식당 배나무 아래  맥주 한잔 하고 있는데  종업원 아가씨가 저 아래 집 안에서  창 밖을 향해 뭐라고 소리친다.  그 소리  여름 저녁 그 시간 속으로  여름 저녁 그 공간 속으로  쨍―  퍼지는데,  내 가슴 네 가슴  허공의 가슴  싸아―  퍼지는데,  그 소리  안팎이 아득하여  아득한 것들을 쟁쟁  수렴하는데,  생명 만다라, 오  그 목소리의 여름 저녁이여  비치지 않는 게 없는 공[球]이여.           헐벗은 가지의 에로티시즘 /정현종  겨울나무에 보인다 말도 없이  불꽃 모양의 뿌리  헐벗은 가지의  에로티시즘  그래 천지간에 거듭  나무들은 봄을 낳는다  끙끙거리지도 않고  잎 트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를 내며  낳는다  항상 외로운 사랑이  사람 모양의 아지랑이로 피듯  내 사랑  헐벗은 가지의 에로티시즘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887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댓글:  조회:2505  추천:0  2017-12-14
▲ 영부인 김정숙 여사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13일부터 취임후 첫 중국 국빈방문을 시작했다. ‘영부인’ 김정숙 여사는  중국 시낭송 플랫폼을 통해 중국 인민들에게 한국 시가 낭송을 선보이고 양국 국민들이 서로 진심으로 대하고 함께 미래로 나아갈 것을 희망했다.     중국 언론에 따르면 문재인 대통령의 4일간 중국 국빈방문 기간 중국 시낭송 플랫폼 "웨이니두스(爲爾讀詩·The Poem For You)"가 한국 주요 인사들이 한국 시를 낭송하는 '한국 문화 주간' 특집을 송출해 중국 청취자들에게 한국의 시를 전하게 된다. 제1회는 바로 김정숙 여사가 전하는 한국 당대 유명 시인 정현종의 시 '방문객'이다.   이 시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김정숙 여사는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예전이나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계속 지속될 것이며 또한 양국의 관계와 두 나라 국민들 간의 관계 역시 그러하다고 말했다.   ▲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김정숙 여사에 이어 시인 겸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도종환, 여러번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른 한국의 유명 시인 고은 선생, 그리고 중국 바둑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창호 바둑 9단 기사도 시를 낭송해 중국 청취자들에게 한국 시가의 정취를 전하게 된다   이번 '한국 문화 주간' 특집은 웨이니두스와 한국 문화체육관광부·주중한국문화원이 공동 기획 추진했다. "웨이니두스" 공동 창시인 장현(張炫)총재는 한국은 우수한 대중 문화를 갖고 있으며 이번 한국 문화 주간은 시 낭송을 통한 문화와 마음의 교류를 시도했다고 밝혔다.   전문가는 한국 주요 인사들이 중국 청취자들에게 시를 낭송하는 것은 한국 각계가 문재인 대통령의 이번 방문에 큰 기대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그 기대는 바로 중한 양국이 상호 신뢰를 회복하고 양국 민중들의 우호적인 감정을 더 깊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디어펜=김소정 기자]문재인 대통령이 국빈 방중하는 13일 김정숙 여사가 중국 소셜미디어에 정현종 시인의 시 ‘방문객’을 낭송해 중국 국민과 첫 인사를 나눌 예정이다.    중국의 소셜미디어는 ‘웨이니두스’(爲爾讀詩)로 중국의 시낭송 플랫폼으로 ‘너를 위해 시를 읽는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매일 한편씩 시 낭송을 업로드해 약 7억회의 열람을 기록한 바 있다. 시 낭송에 펑리위안 여사를 비롯해 첼리스트 요요마, 배우 탕웨이, 덴마크 여왕 마가렛 2세, 지휘자 주빈 메타 등 많은 저명인사가 참여하기도 했다.   ‘웨이니두스’는 문 대통령의 중국 국빈방문을 맞아 12월13~17일까지 5일간을 ‘한국문화주간’으로 정하고 한국의 시를 차례로 소개한다.   13일 김정숙 여사가 읽는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을 시작으로 14일 바둑기사 이창호가 마종하 시인의 ‘딸을 위한 시’, 15일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본인의 시 ‘담쟁이’를 소개한다.    16일에는 배우 추자현이 이해인 수녀의 ‘열두 달의 친구이고 싶다’를 읽고, 마지막으로 17일 고은 시인이 자신의 시 ‘소년의 노래’를 중국 독자에게 들려줄 예정이다.   김 여사는 우리말로 시를 낭송하며 웹사이트에 시 원문과 간단한 인터뷰가 중국어로 소개된다.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은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로 시작된다.   김 여사는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이 시를 읽으면 만남과 인연의 소중함에 새삼 마음을 가다듬게 된다. 만난 분들과 눈을 맞추고 악수하며, 나의 마음과 진심을 다했을 때 그들의 마음이 나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배운다”라며 “한국과 중국도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오랜 인연으로 함께 이어집니다. 양국이 서로 진심을 전하여 미래를 함께 하자는 생각으로 이 시를 선택했다”고 밝혔다.   또 김 여사는 “이번 시 낭송이 중국 국민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라며 기회를 제공해 준 중국 측에 고마움을 전했다. 김 여사가 낭송한 시는 웨이신(위챗), 웨이보 등 중국의 SNS를 통해 중국 청중들을 만날 예정이다.      -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덤으로 더...              '문재인 아침 식사'를 입력해 나온 중국 모바일 사이트 캡처 (기사 중) 문 대통령은 이날 중국에서 일상화돼 있는 모바일 결제시스템으로 식대를 결제하면서 날로 발전하고 있는 중국의 핀테크 산업을 체험했다. 문 대통령은 주중 대사관 직원으로부터 모바일 결제시스템에 대해 설명을 듣고, 테이블 위에 찍힌 바코드를 스마트폰으로 스캔해 총 68위안(한화 약 1만880원)을 결제했다.   문 대통령은 모바일 결제시스템에 관심을 보이며 “이걸로 다 결제가 되는 것이냐”고 물었고, 노영민 대사는 “중국은 대부분 모바일 결제를 한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중국은 교통은 물론 쇼핑 영역에서도 모바일 결제시스템이 일상화되어 있으며, 노점상에서 파는 1위안(한화 약 160원)짜리 간식도 모바일 결제가 가능하다. ------------ 문대통령의 국내외를 가리지 않는 서민적인 행보가 정말 보기좋고 고맙습니다. ===================================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가 얼후 연습을 하고 있다. [사진 청와대] ///////////////////////////////////////////////////////   중국을 국빈 방문중인 문재인 대통령 부부는 14일 오전 8시쯤 아침 식사를 위해 베이징 조어대 인근의 한 현지 식당을 찾았습니다. 중국인들이 즐겨 먹는다는 요우티아오(油条)와 도우지앙(豆浆), 샤오롱바오(만두), 만둣국(훈둔)이 이날 메뉴. 요우티아오는 밀가루를 막대 모양으로 빚어 기름에 튀긴 꽈배기 모양의 빵입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말랑말랑 합니다. 일반적으로 중국식 두유인 도우지앙에 적셔 먹는데, 중국 시민들의 대표적 아침 메뉴라고 합니다. 문 대통령은 중국인들의 평범한 일상을 잠시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 노영민 주 중국 대사 내외와 함께한 이날 아침은 중국인들에게 다가설 기회였습니다. 문 대통령이 식당 관계자들과 ‘엄지 척’ 기념 사진을 찍는데, 옆에서 식사를 하던 시민들이 일어나 휴대전화로 촬영하는 모습이 이어졌습니다. 또 대사관 직원의 도움으로 테이블 위 바코드를 스마트폰으로 스캔해 68위안을 결제했는데요. 우리돈으로 11,178원 정도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모바일 결제 시스템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걸로 다 결제가 되는 것이냐”는 문 대통령의 질문에 노영민 대사는 “중국은 대부분 모바일 결제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중국에서는 길거리에서 파는 1위안(약 160원)짜리 간식도 모바일 결제가 가능하죠. 아침 식사 한 끼에 나날이 발전하는 중국의 핀테크 체험까지 이뤄진 셈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14일(2017년 12월), 오전 숙소인 댜오위타이(釣魚臺·베이징에 있는 국빈관) 인근 서민 식당에서 조찬을 하며 베이징 시민들을 만났다.     세계 1위 중국 핀테크 결제 체험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부인 김정숙 여사, 노영민 주중 대사 등과 함께 아침 식사 전문점 ‘융허셴장(永和鮮漿)’에 ‘깜짝 등장’해 중국인들이 아침식사로 즐겨 먹는 유탸오(油條)와 더우장(豆醬)을 주문했다. 유탸오는 밀가루를 막대 모양으로 빚어 기름에 튀긴 빵으로, 중국식 두유인 더우장에 찍어서 먹는다.     청와대 관계자는 “중국 서민들의 아침 일상을 잠시나마 체험함으로써 중국인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위한 일정이었다”고 말했다.     [출처: 중앙일보] 문 대통령, 베이징 서민 식당서 유탸오로 아침식사 … 식대는 모바일 결제   ======================== [베이징=미디어펜 김소정 기자]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는 14일 방중 이틀째 아침 베이징 시내 한 서민식당을 찾아 중국 시민들이 먹는 평범한 아침식사를 체험했다.   문 대통령 부부는 이날 아침 중국 국빈관인 조어대 인근의 한 식당을 찾아 중국인들이 즐겨 먹는 아침식사 중 하나인 꽈배기(유탸오)와 두유(더우장), 만두(샤오롱바오), 만둣국(훈둔)으로 식사했다.   유탸오는 밀가루를 막대 모양으로 빚어 기름에 튀긴 꽈배기 모양의 빵으로 겉은 바삭하고 속은 말랑한 식감이 특징인 중국 일반시민의 대표적 아침식사이다. 대개 중국식 두유인 더우장에 적셔서 먹는다.   문 대통령이 찾은 용허셴장(永和鮮漿)이라는 식당은 1996년에 개업한 전통 중국 조식 전문점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중국을 방문한 문 대통령이 베이징 시내에서 아침식사를 한 것에 대해 “중국 시민들 사이에서 중국인들이 즐겨 먹는 메뉴를 함께함으로써 중국인들에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 관계자는 “이날 문 대통령은 아침식사를 모바일 시스템으로 결제해 중국의 핀테크 산업도 체험하는 계기로 삼았다”고 덧붙였다.   또 문 대통령은 베이징 시민들 사이에서 식사를 하고 담소를 나누는 등 중국 서민들의 아침 일상을 잠시나마 체험함으로써 마음으로 중국인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문 대통령 부부는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오기 전 식당 관계자들과 '엄지척'을 하며 기념사진을 찍었고, 문 대통령 옆에서 식사를 하던 시민들이 일어나 문 대통령 부부를 휴대폰으로 촬영하는 등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문 대통령은 모바일 결제 시스템에 큰 관심을 보이며 "이걸로 다 결제가 되는 것이냐" 물었고, 노영민 주중 대사는 "중국은 대부분 모바일 결제를 한다"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중국에서 일상화되어 있는 모바일 결제시스템으로 식대를 결제하며 나날이 발전하는 중국의 핀테크 산업도 체험할 수 있었다. 모바일 결제는 중국 계좌가 있어야 하므로 중국 대사관 직원 휴대전화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중국은 쇼핑, 교통 등 모든 영역에서 모바일 결제시스템 이용이 일상화되어 있으며, 노점상에서 파는 1위안(한화 약 160원)짜리 간식 등도 모바일 결제가 가능하다고 한다.       ▲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는 14일 방중 이틀째 아침 베이징 시내 한 서민식당을 찾아 중국 시민들이 먹는 평범한 아침식사를 체험했다./사진=청와대 제공 //////////////////////////////////// 식당 찾은 시민들과 담소 나누며 식사…"서민일상 체험으로 중국에 다가가" 모바일 결제 시스템으로 계산, 대중화된 핀테크 산업도 체험 문재인 대통령이 14일 중국 베이징의 한 서민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 것으로 중국 국빈방문 이틀 째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는 이날 오전 숙소인 베이징 조어대 인근의 전통 중국 조식 전문점으로 1996년에 문을 연 용허셴장에서 중국인들이 즐겨 먹는 아침 메뉴 중 하나인 유탸오와 더우장으로 식사를 했다고 청와대가 밝혔습니다. 유탸오는 밀가루를 막대 모양으로 빚어 기름에 튀긴 꽈배기 모양의 빵으로, 겉은 바삭하고 속은 말랑한 식감이 특징입니다. 중국식 두유인 더우장에 적셔서 먹는 중국 일반 시민의 대표적인 아침 식사입니다. 문 대통령 내외는 식당을 찾은 중국 시민들과 담소를 나누며 식사했으며, 이를 통해 중국인들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갈 기회가 됐다는 게 청와대 설명입니다. 청와대는 "문 대통령 내외는 베이징 시민 사이에서 식사하고 담소를 나누는 등 중국 서민들의 아침 일상을 잠시나마 체험함으로써 마음으로 중국인들에게 다가갈 기회를 가졌다"고 말했습니다. 문 대통령은 식사를 마친 뒤 중국에서 일상화된 모바일 결제 시스템으로 음식값을 치르며 날로 발전하는 중국의 핀테크 산업도 직접 체험했다고 청와대는 전했습니다. 중국은 쇼핑·교통 등 모든 영역에서 모바일 결제 시스템 이용이 일상화돼 있으며, 노점에서 파는 1위안(한화 약 160원)짜리 간식 등도 모바일로 결제할 수 있습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한중 경제무역 파트너십 개막식에 참석하고, 오후에는 조어대에서 시진핑 국가주석과 세 번째 정상회담을 합니다. 이러한 문재인 대통령의 행보에 중국 아침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매일경제에 따르면 중국 사람들은 아침을 거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만 집에서 아침을 먹지 않고 대개 밖에서 사먹는 것이 우리와 다른 점이며 우리 돈 1,000원이면 든든하게 아침을 챙겨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 상하이식 꽈배기인 유탸오/ 사진=한빛라이프 유탸오와 더우장은 카스텔라 빵과 흰 우유 같은 환상의 짝궁으로 더우장은 단맛이 나는 두유인데, 주로 뜨겁게 먹습니다. 차가운 더우장은 여름에 판다고 합니다.    ↑ 단맛이 나는 두유인 더우장/ 사진=한빛라이프 상하이식 꽈배기로 겉은 바삭하고 속은 쫄깃한 유탸오는 묽게 반죽한 밀가루를 길게 늘려서 튀깁니다. 빵의 결과 조직이 성겨 유탸오 안에 구멍이 송송 나 있습니다. 맛과 식감은 크루아상과 비슷합니다. ======================== 지난 14일 중국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하루를 열어준 아침식사는 스마트폰으로 해결됐다.     당시 서민식당에서 중국식 꽈배기 빵과 두유 등으로 아침식사를 한 문 대통령은 대사관 직원이 테이블 위 바코드를 스마트폰으로 스캔해 68위안(한화 1만1200원)을 지불하는 것을 지켜봤다. 스마트폰을 통한 모바일 결제는 문 대통령이 “이것으로 다 결제가 되는 것이냐”고 물을 정도로 단숨에, 아주 간단하게 밥값 지불을 마쳤다.  문 대통령을 놀라게 했던 모바일 페이는 중국에서 단기간에 급성장해 서민식당에서도 불편 없이 사용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중국은 인터넷 결제 단계를 뛰어넘어 모바일 시대로 진입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중국 모바일 지급결제 시장 규모는 5조5000억 달러로, 미국 모바일 결제 시장 규모(1120억 달러)의 50배에 이르렀다.   중국은 신용카드 보급률이 낮아 모바일 등 핀테크 중심으로 지급결제 정책을 추진해왔다. 여기에 알리바바의 ‘알리페이’, 텐센트의 ‘텐페이’ 등 간편 결제 플랫폼이 모바일 결제 보편화 시기를 앞당겼다. “중국에서는 걸인도 모바일 결제로 동냥을 받는다”는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 중국보다 속도가 더디긴 하지만 국내에서도 모바일 결제의 성장 속도는 눈부시다.  그러나 모바일 결제의 플랫폼을 들여다보면 마땅히 있어야 할 ‘전통적 강자’의 역할이 아쉽다. 모바일 기반의 간편 결제 시장은 카드사 등 ICT 업체보다 유통ㆍ제조업체가 성장을 주도해왔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안에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받아 사용하는 신용카드는 올 상반기 일 평균 이용실적이 579억원에 이르렀다. 2년 전과 비교하면 112.1% 증가했다.   지난 2015년 1분기부터 올해 2분기까지 반기 평균 성장률은 20%대에 달한다. 양호한 성장세라 할 수 있지만 모바일 결제 플랫폼의 대세인 ‘간편결제’로 집중해 보면 아쉬운 대목이 있다. ICT 업체의 간편결제 일평균 이용금액은 지난 2분기 기준으로 149억6000만원으로 지난해 1분기보다 108% 증가했다. 같은 기간 유통ㆍ제조업체의 간편결제는 같은 기간 72억원에서 416억9000만원으로 560% 증가했다.   ICT 업체의 대표적인 사업 모델인 모바일 신용카드 이용실적은 반기 평균 성장률이 20%인데 비해, 유통사의 간편결제 이용실적은 성장률이 30%다.   증가 속도나 규모 모두 ICT업체들이 유통ㆍ제조업체들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경향은 국내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외국도 모바일 결제의 물꼬를 트고 확대시킨 것이 유통ㆍ제조업체들이었다. 중국의 알리바바와 텐센트, 미국의 페이팔이 선두주자 역할을 했다. 그러나 모바일 페이 시장에 대한 인식을 보면 ICT 업체들의 성적이 더 향상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최근 캡제미니와 BNP파리바의 공동 설문조사에 따르면, 지급결제 시장의 당면 과제에 대해 금융회사들은 사이버 보안(65%)이나 개인정보보호(55%) 등을 가장 많이 꼽았다.  개인정보 보호와 보안이 가장 우려된다는 것이다. 반면 ‘OO페이’ 등으로 플랫폼 주도권 싸움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는 핀테크 기업들은 ‘새로운 업무방식 적용에 대한 운영상의 신속성 결여(65%)’나 ‘새로운 발전에 맞춘 조직구조의 신속한 최적화가 잘 되지 않은 점(48%)’ 등을 우려했다.  물론 보안에 대한 신중한 접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핀테크라는 고지를 넘는 태도가 ICT업체들은 방어적, 수동적이라는 것이 한 눈에 보인다.   ‘OO‘페이를 앞세운 핀테크 기업들은 더 빠르고 능동적으로 사업을 진행하려는 의지가 드러난다. 플랫폼 주도권이 어느 쪽으로 기울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지난해까지 금융사들은 저금리 덕분에 방석에 앉아 돈을 세는 손쉬운 장사를 했다.  카드사들은 2%대 금리로 돈을 끌어다 14~20%대로 대출을 내주며 알짜 수익을 챙겨왔다. 올해 가맹점 수수료 인하, 이자율 인하 등의 난관을 맞게 되자 수익률 저하가 그대로 드러났다. 수수료 재산정 이슈가 있는 내년은 더 힘들 것이란 앓는 소리도 나온다.  수수료, 이자율이 당장 굴릴 돈을 갖다주기는 해도, 미래 먹거리는 아니다. 새 시절 먹거리는 경쟁자라 인식하지도 못했던 유통ㆍ제조사들이 찾아 먹고 있다. ‘      전당포식 영업’을 한다는 지탄을 받는 은행들도 KT, 카카오 등 IT 업체들이 ‘메기효과’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식탁에 뛰어들거라 생각은 못했을 터다.   카카오페이, 네이버페이 등 모바일 결제 시장에서의 ‘메기효과’는 이미 진행중인데, 금리와 수수료의 굴레에 갇힌 카드사들은 메기가 도랑을 헤집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있다.  /도정현 기자 ======================== 그런데 그 이야기가 아니고,   요즘 뜨거운 가상화폐도 마찬가지지만 돈과 화폐에 대한 개념이 빠르게 변하고 있구나  실감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거지도 모바일 결제로 구걸을 한다지요..   식당에서는 메뉴판도 필요없고,   테이블 가운데 붙어있는 QR코드를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면, 해당 식당을 주문사이트로 이동하고, 메뉴선택 >  주문(주문 내역은 주방에 실시간 전송) > 결제까지 종업원의 도움없이 스마트폰 앱으로 진행된다고 합니다.    손님은 현금이나 신용카드를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고 식당은 주문받는 직원과, 카운터 직원을 둘 필요가 없습니다.   모바일 결제등 핀테크 기술이 중국을 비롯하여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신용카드 인프라가 워낙 확산되어 있어서 그런지, 기술의 변화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문재인 대통령 모바일 결제 체험 에피소드가 주는 계시가 크다...
886    시인은 "쉽고 편안하면서도 아름답고 품격있는 시"를 써야... 댓글:  조회:2488  추천:0  2017-12-14
[인터뷰] 시인 강원석, 시와 삶으로 내딛는 따뜻한 동행 시인 강원석이 윤동주의 '서시'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강원석 페이스북) 시인 강원석은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침묵 뒤 어렵게 뱉어낸 그의 말에는 물기가 배어 있는 듯했다. "어느날 그 아이가 제 넥타이, 우리 아이 선물과 함께 긴 편지를 보내 왔더군요. '아저씨, 제가 아르바이트해서 돈을 벌고 있으니 이제는 보내지 마세요'라는 내용이었죠.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을 참 많이 했죠. '도움을 주기보다는 내가 위로 받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강원석은 최근 CBS노컷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계속 한다면 그 아이에게 큰 부담을 주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사연인즉슨 이랬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올해로 창립 20주년을 맞은 민간의료봉사단체 '열린의사회'를 매달 후원하면서, 관련 봉사활동을 위해 몽골에도 두 차례 다녀오는 등 동행을 이어오고 있다.  "봉사라는 것이 자기 돈을 쓰면서도 큰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는 시인은 열린의사회를 통해 한 소녀가장을 만나게 됐다. 병으로 인해 거동이 불편한 홀어머니와 동생을 보살펴 온 학생이었다.   "그 아이가 중학교 3학년 때인가 알게 됐는데, 제 딸도 함께한 자리에서 처음 만나 식사를 했어요. 그 아이보다 제 딸이 네 살 어린데, 서로 친하게 지내면서 좋은 인연을 이어가게끔 해 주고 싶었죠. 그 이후로 그 학생에게 매월 20만 원씩을 후원했습니다." 학생은 대학에 가서 심리치료를 공부하고 싶어 했다. "불우하게 자란 만큼, 자기보다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는 어린 아이들을 돌보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고 시인은 전했다.  "실제로도 관련 학과에 들어갔어요. 후원한지 3년쯤 지난 때였죠. 대학 졸업할 때까지 돕겠다는 마음이었어요. 그러던 어느날 그 아이가 긴 편지를 보내 왔어요. '저 이제 아르바이트도 하고 학교 생활도 잘하고 있다.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아저씨 넥타이를 샀다'고요…."  앞에서 설명했듯이 강원석의 후원은 그렇게 멈췄다. 그리고 '꼭 참석하겠다'고 마음 먹고 있던 그 학생의 대학 졸업식이 다가왔다.  "안타깝게도 제가 졸업식에 갈 수 없는 상황이 생겼어요. 대학 졸업하고 취직하면 출근 때 입을 정장 한 벌 사주려고 생각했기에 돈을 보냈습니다. '부담 갖지 말고, 여성 정장이 얼마인지 잘 모르니 적으면 보태고 많으면 다른 데 쓰라'고 했죠. 지금 그 아이는 한 아동복지단체에 다니면서 굉장히 보람 있는 삶을 살고 있어요. 자주 연락하며 인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우리네 삶은 언제나 바람에 직면해 있다"  시인 강원석의 시집 표지(사진=구민사 제공) 강원석은 지금까지 두 권의 시집을 냈다. 시집 제목은 각각 '그대가 곁에 없어 바람에 꽃이 집니다'와 '바람이 그리움을 안다면'이다. 제목에 공통적으로 '바람'이 들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람이라는 시어는 어떠한 의미인가'라는 물음을 시인에게 건네자, "유난히 좋아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인생도 그렇고 모든 것이 바람과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디서 불어와 어디로 불어가는지 모르는 것이 인생과도 닮았잖아요. 바람은 어떤 때는 땀을 식혀주는 좋은 바람도 되지만, 어떤 때는 추위와 아픔을 줍니다. 우리 삶이라는 것이 언제나 바람에 직면해 있는 셈이죠. 아프고 힘든 바람이 불더라도 굳건하게 서 있으면 자신과 주변을 지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지난 20여 년간 공직자로 산 그는, 은퇴 이후 시인의 삶을 택하면서 전국에 있는 공공기관·기업 등 단체를 대상으로 강연을 하고 있다. "시집이 팔리는 것 외에 강연 요청이 많이 들어오더군요. 시를 통해 잃어버린 꿈도 찾고 직장생활의 활력도 찾고 가정의 행복도 추구하는, 누구나 들었을 때 마음이 훈훈해지는 강의를 하려 애쓰고 있죠. 어떤 때는 몇 명이 모인 단체를 상대로 무료 강의도 합니다. 돈 벌 생각보다는, 시가 어렵지 않고 우리네 삶에 행복이 된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마음이니까요."  이러한 시인의 활동을 SNS 등으로 접해 온 열린의사회 측은 그에게 홍보대사를 제안했고, 강원석 역시 보람 있는 일이라고 여겨 받아들였다. "사실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봉사하기는 더 어렵다는 생각을 해요. 결국 아픔을 공감할 줄 아는 분들이 봉사를 하잖아요. 열린의사회에는 젊은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홍보대사 위촉식이 있던 날, 그들에게 존경을 표하는 헌시 '저녁 하늘에 바람은 그림을 그리고'를 낭독했죠."  '산머리 위로 서풍을 둘러업고/ 석양을 거슬러 날개를 펴는 구름의 비상// 해가 지는 하늘에/ 바람이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린다// 문득 하던 일 내려놓고/ 그림 앞에 서있는 푸른 나// 언제 하늘이 저처럼 고왔었나/ 한참을 넋 놓아 보고 있으면// 쇠기러기 떼 지어 날아올라/ 비질하여 노을을 쓸어 담고// 들녘에 눕는 산 그림자/ 나를 밀어 저녁으로 데려가네// 그림 같은 하루는 저물어도 빛났어라/ 내일은 또 어떤 날을 보게 될까// 오늘처럼 다시 그림이 된다면/ 청춘은 가난해도 행복하여라' 시인은 "'오늘처럼 다시 그림이 된다면/ 청춘은 가난해도 행복하여라'라는 구절 등을 통해, 그들의 작은 행위가 우리 사회에 아주 큰 기쁨을 주고 있다는 의미를 시에 담았다"고 설명했다.  ◇ "나는 오늘도 밤을 새워 시를 쓰겠다"  지난 30일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 마련된 사인회에서 시인 강원석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강원석 페이스북) 강원석의 꿈은 전업작가로 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글쓰기 만으로 생활이 돼야 하는데, 그것이 몹시 어렵다"고 시인은 고충을 털어놨다. "작가들이 글쓰기만으로는 생활을 이어가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예전처럼 독서가 권장되는 분위기도 아니에요. 손쉽게 여가를 즐길 수 있는 다른 매체에 그 자리를 내주고 있으니까요. 많이 읽히지 않으니 책을 팔아 생활하기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는 "제 경우 공직자 출신이어서 적게나마 연금이 나오니, '적게 벌고 적게 쓴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며 "열심히 문학을 하면 길이 열릴 것이라고 본다. 이제 2년 됐는데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고 싶다"고 역설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시인은, 지난 30일 서울 광화문에 있는 교보문고에서 사인회를 열었다. 직접 독자들을 만나면서 '내가 이 시를 어떻게 쓰게 됐는지' 등을 공유할 수 있는 자리를 많이 만들자는 생각에서였다.  "강연과 사인회 등을 통해 독자들과 소통하면서 '시가 어렵지 않고 위로가 되고 생활에 활력이 된다'는 독자들도 많아졌습니다. 그렇게 시가 어렵지 않고 우리 생활에 유익한 문학이라는 것을 꾸준히 알리고 싶어요. 독자들이 시인과도 가깝게 만나면서 문학을 더욱 친근하게 여기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강원석의 시 가운데 '아가와 별'은 노래가 된 작품이다. 그의 표현을 오롯이 빌리면 "시로 태어나 노래가 된" 경우다.  '유리 창밖 하늘가에/ 꼬마별이 모여들면// 엄마의 자장가 소리는/ 잔잔히 방안을 흐르고// 옹알거리며 누운/ 아가의 눈망울에도/ 별이 반짝입니다// 별빛이 눈부셨나/ 아가는 잠들지 못하고// 엄마는 졸리운 듯/ 노래 속에 하품이 섞이고// 토닥거리는 손짓에/ 살며시 사랑이 녹아 들면/ 아가는 별빛 타고/ 스르르 꿈속으로 떠납니다'  그는 "새 시집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출판사에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제 시가 너무 좋아서 곡을 붙이고 싶은데 가능하겠냐는 내용이었다"며 "전화를 건 사람은 이화여대 작곡과 학생이었다. 그렇게 제 시가 가곡으로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강원석은 "저의 시는 생활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보편적 시어들, 보편적이고 편안하고 어렵지 않은 시어들"이라며 "하지만 감동을 주는 문장을 추구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저 시인은 쉽고 편안하면서도 아름답고 품격 있는 시를 쓴다'는 평을 얻고 싶다"며 "저로 인해 시가 사람들에게 한층 더 다가갈 수 있다면 나는 오늘도 밤을 새워 시를 쓸 것"이라고 강조했다. //노컷스 이진욱 기자
885    반도에서 최초의 성교육 동시집 "응아~" 태여나다... 댓글:  조회:2101  추천:0  2017-12-12
      정성수시인 대한민국 최초 성교육 동시집 ‘꽃을 사랑하는 법’ 출간           중견 시인 정성수씨가 대한민국 최초 본격 성교육 동시집 ‘꽃을 사랑하는 법’을 고글 출판사에서 출간(2017년 3월)했다. 동시집은 4부로 총 100여편의 시가 실려 있다. 그는 시인의 말에서 ‘이번에 쓴 동시들은 주로 성에 관한 것들이다. 성적인 이야기는 입에 올리기도 조심스럽고 글로 표현하기도 어렵다. 시대가 바뀌어도 성에 관한 동시는 금기시된 것이 사실이다. 이제 누군가는 성에 관한 동시를 써야 한다는 생각으로 오랜 시간 자료를 모으고 그것을 토대로 어린이들의 올바른 성교육에 일조를 하기 위해서 성에 관한 동시를 썼다.’고 피력하고 있다.     서평을 쓴 이준관 시인은 ‘어린이들의 성에 관한 이야기는 잘못 다루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 상처 입기 십상이다.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 어린이들의 성을 다룬 동시는 거의 없다. 우리 동시단에서 거의 다루지 않은 분야를 본격적으로 다루어 ’꽃을 사랑하는 법‘이라는 제목을 붙여 성교육 동시집을 펴냈다는 것은 동시단의 획기적인 일로 그 의미가 남다르다고 했다.       전)국민대교수 문전자 한국학교보건협회명예이사장은 ‘요즈음 사회적 이슈는 단연 성 관련 문제들이다. 성추행, 성폭력 등 성범죄가 급등하여 정부차원의 성폭력 대처 및 예방교육은 물론 성 관련 신고 센터가 설치 운영되고 있다. 여기에 피해자에 대한 지원이 강화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특별법을 제정하여 이에 대처하고 있다. 이런 시대적 요청에 맞추어 성교육용 동시집이 발간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고 표사를 썼다.       한편 보건교사인 하송 아동문학가는 ‘어린이들의 성 문제를 좀 더 넓은 시각으로 바라보면 일상적인 삶과 직 ․ 간접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올바른 성가치관 정립을 위해서는 초등학생 시기의 성교육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요즘은 학교에서 보건교사를 중심으로 체계적인 성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가정 ․ 학교 ․ 사회가 함께 힘을 합쳐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초등학생을 위한 성교육 동시집 ‘꽃을 사랑하는 법’ 출간은 시의 적절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 동시문학회장이자 아동문학가인 이준섭씨는 ‘우리나라 동시 문단에서 특정 전문 분야에 대한 동시집 시대가 열린지 15년이 지났다. 꽃, 새, 나무, 스포츠 … 여러 분야에 대한 전문 동시집들이 나왔지만 본격적인 성교육 동시집은 처음이다. 그 무엇이든 처음은 개척이요 설렘이요 눈부신 꿈의 세계다. 예로부터 성 문제는 말로 하기도 어렵거니와 글로 표현하기에도 조심스럽다. 동시로 형상화하여 예술작품으로서 탄생시킨 성교육 동시집을 발간한 정성수시인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며 아울러 우리 동시문단의 큰 경사임을 자랑하고 싶다.’고 했다.       정성수씨는 문단에 나온 후 55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동시집은 ‘할아버지의 발톱’을 비롯해서 9번째이며 시집 21권, 시곡집 5권, 동시곡집 8권, 산문집 4권, 실용서 2권, 논술서 5권, 장편동화 1권 등이다. 수상으로는 대한민국교육문화대상, 한국문학예술상, 세종문화상, 12소월시문학대상, 대한민국사회봉사대상정부포상, 공무원문예대전동시부문최우수국무총리상, 대한민국환경문화대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문학창작기금수혜 등이 있다.        
884    모든 시인은 "자연파"이다... 댓글:  조회:2466  추천:0  2017-12-12
[유성호의 문학의 길목] 꽃의 심상과 현대시 2017-04-10     동서고금을 통틀어 시적 상상력의 가장 오래된 수원(水源)은 자연이었을 것이다. ‘산’이나 ‘강’, ‘바다’, ‘하늘’ 혹은 ‘비’, ‘눈’, ‘해’, ‘별’, ‘달’ 등 자연 사물들은 그 자체로 시적 상상력의 오랜 광맥이었다. 특별한 별칭을 붙이지 않아도 모든 시인은 사실상의 ‘자연파’였던 것이다. 지상에서 목숨을 부여받고 살아가는 식물군(群)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오랫동안 시적 제재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온 범주다.      ▲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이는 식물이 가진 여러 속성을 서정시가 지향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꽃’으로 대표되는 식물의 생태가 인생을 은유하기에 더없이 적합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처럼 ‘꽃’이 감당해 온 시적 상상력의 원천으로서의 역할은 매우 지속적이고도 견고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개나리는 보통 3월 중순이나 하순에 피기 시작해 ‘봄의 전령사’로 불린다. 그 후로 진달래, 벚꽃이 차례대로 핀다. 봄꽃이 피는 순서를 옛사람들은 ‘춘서’(春序)라고 불렀는데, 봄이 오는 과정을 꽃의 생태적 흐름에서 찾았던 것이다. 그 순서는 동백과 매화를 시작으로 목련, 개나리, 진달래, 벚꽃, 철쭉 순을 취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춘서가 무색할 정도로 꽃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피는 일이 흔해졌다. 전 지구적 기후변화에 따른 겨울철 이상 고온과 봄철 이상 저온이 원인이라는 진단이 있다. 어쨌든 한반도 곳곳에는 지금도 봄꽃이 각양각색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피고 진다. 그 아름다움과 덧없음 때문에 ‘꽃’은 여전히 시적 상상력의 핵심에 놓인다.   한국 현대시에서 브랜드가 된 ‘꽃’의 목록은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그 세목은 김소월의 ‘진달래꽃’, 이병기와 정지용의 ‘난초’, 김영랑의 ‘모란’, 서정주의 ‘국화’와 ‘영산홍’, 이용악의 ‘오랑캐꽃’, 함형수의 ‘해바라기’, 권태응의 ‘감자꽃’, 박목월의 ‘산도화’ 등으로 한없이 이어졌다. 동요에서도 ‘과꽃’, ‘채송화’, ‘박꽃’, ‘달맞이꽃’, ‘할미꽃’이 무시로 불렸다. 이러한 ‘꽃’의 목록은 한국 현대시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심상으로 오래도록 군림해 온 것이다. 그 밖에도 ‘꽃’은 ‘불꽃’이나 ‘눈꽃’, ‘성에꽃’ 등의 파생 심상으로 번져 가면서 외연을 넓히기도 했다. 우리가 ‘꽃’의 원형 심상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름다움’일 것이다. 어느 대중 가수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고 노래할 때 그 전제에는 이미 ‘꽃=미’라는 관념이 가로놓여 있다. 청년 나르키소스가 죽어 피어난 수선화도 ‘꽃=미’라는 전통적 관념을 선명하게 담고 있다. 그만큼 ‘꽃’은 아름다움이라는 원형 심상을 견고하게 지니고 있다. ‘양귀비’나 ‘장미’, ‘백합’ 등이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쓰이고 있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방증한다. 다른 한편으로 ‘꽃’은 숙명적인 한시성을 원형 심상으로 거느린다. 낙화 과정을 통해 생의 덧없음 혹은 모든 존재자들의 죽음을 은유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원형 심상을 연결하면, 결국 ‘꽃’의 본성은 ‘짧은 절정의 아름다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혹독했던 근대사에서 ‘꽃’은 이육사의 ‘매화 향기’나 신석정의 ‘꽃덤불’, 이용악의 ‘오랑캐꽃’, 신동엽의 ‘진달래 산천’ 등으로 이어지며, 구체적 역사와 접속해 새로운 심상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렇듯 ‘꽃’은 시적 상상력의 항구적인 광맥이요 보고(寶庫)다. 그것은 다양하기 그지없는 형상으로 나타나 생성과 소멸의 반복적 순환 과정으로 그리고 역사적 상상력의 비전으로 작용했다. 우리의 시인들은 “내려갈 때 보았네/올라갈 때 보지 못한/그 꽃”(고은, ‘그 꽃’),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나태주, ‘풀꽃’)라고 노래했다. 우리도 이 봄이 가기 전에 꽃을 하염없이 바라보자. 개화와 낙화의 순간이 주는 아름다움과 덧없음을 오래도록 간직하면서 말이다. 2017-04-11 30면///서울신문에서...
하이퍼시10대촉구 7.하이퍼시는 감정이 아니라 감각을 촉구 2017년 12월 10일 10시 작성자: 최룡관 감각(感觉)이란 어떤것이고 감정(感情)이란 어떤것인가?  감각이란 느끼여 깨닫는것, 외부 또는 내부작용에 의하여 일어나는 느낌이라고 사전에 씌여있고, 감정이란 사물에 느끼여 일어나는 심정, 기분 즉 기쁨, 슬픔, 성남, 놀람 등을 느끼는 마음이라고 사전에 씌여있다. 이 두언어의 차이는 감각은 느낌이고 감정은 느끼는 마음이라는것이다. 감각은 오관을 통하여 사물의 외부를 느끼는것이고, 감정은 심리를 통하여 희로애락을 느끼는 마음이다. 하이퍼시는 감정을 쓰는 일이 아니라 감각을 쓰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시는 감각과 감각의 조응을 쓰지 감각대 감정이 아니고 감정대 감정은 더구나 아니다. 감각과 감각의 조응으로 도에 도착하는것이다. 도란 사물의 근본리치이고 양과 음의 작용에 의하여 새로운 사물이 생성되고 성장하고 소멸되는것을 말한다. 감각을 신체라 할수 있고 감정은 피라고 할수 있다.  피는 신체속에서 흘러야지 신체밖으로 나와서는 아니 된다. 신체밖으로 피가 나오면 아프고 많은 피가 나오면 생명이 위독하게 되는것이다. 그러므로 시에서 감정을 삼가하여야 하는것이다. 어떤것이 감정의 발로인가? 나는 시를 사랑한다. 장미여 사랑의 상징이여, 봄은 꽃들이 피여나는 계절, 당신의 추억은 나를 울린다. 새는 하늘을 날고 고기는 물속에서 헤염친다…이러한 시구들은 우선 시인만의 상상의 표현으로 될수 없다. 그리고 자신의 어떤 감정을 그대로 쏟아놓은것으로 된다. 보는대로 느끼는대로 있는 그대로 씌여져서 함축이 보이지 않는다. 감정이 피로 되여야 한다는것은 드러냄인것이 아니라 감춤이며, 있는 그대로인것이 아니라 변형이며 생성이다.  (.142쪽.)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오늘도 정확하다고 봐야 할것이다. 이 말은 감정의 발로를 억제하라는 말이다. 시속에 가 등장하는것은 시인자신이 아닐수도 있다. 하지만 한가지만은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등장하는 는 새로운 변형을 끌어내기 위하여, 새로운 생성을 도출하기 위하여서만 시에 등장해야 한다는것이다. 오직 이렇게 하여야만 피하게 되는것이다.  피하지 않는것은 남을 믿지 못해서, 남이 자기의 뜻을 리해하지 못할가봐 하는 짓이라겠다.  또 시는 객관화를 기하는것이 좋다. 객관화를 기하려면  피하는것은 순수시쪽으로 가는것이고 피하지 않는것은 이데올로기시쪽으로 가는것이다. 피하는것은 독자에게 시의 해석을 맡기는것이고 피하지 않는것은 독자를 자기의사대로 움직이려는것이다. 피하는것은 시의 여러가지 의미를 흔상해보게 하는것이고 피하지 않는것은 한쪽해석으로만 몰아부치는것이다. 시는 피해야 시의 기능을 발휘할수 있게 된다. 피하지 않는 시는 산문처럼 의사전달에만 국한될 위험성이 대단히 크다. 피하게 하는것은 민주이고 자유이며 자률성이고 피하지 않게 하는것은 강요이며 독단이며 독재이다. 하이퍼시에서 를 죽이는것은 시를 살리는 길이라고 할수 있겠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말을 더 빌어보자. (207쪽) 여기서 우선 류의하여야 할것은 과 의 관계이다. 이란것은 변형으로 표현된 사물을 말한다. 시적인 힘은 변형된 사물을 다고 하는데 이끌게 되면 는것이다. 실은 이 에 반작용을 하기도 하여 을  강력하게 발휘시키기도 한다. 도 새겨봐야 할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소위 다원적이란 여러차원을 말한것으로써 하나의 사물에 고정된 기술인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사물들에 대한 기술인것이다. 이란  새로운 깨침이 있기에 즐거움이 생긴다는 말이 되겠다. 새로운 깨침 즉 새로운 감각은, 즐거움을 새롭게 맛보게 한다는것이다. 도 그저 지나칠수 없는 말이다. 감각의 섬세함속에서 한감각과 다른 감각이 조응하게 되면 그 새로움에 의하여 는것이다. 잠에서 깨여나게 되는 조응은 새로운 깨침을 얻게 된다는 의미이고 감각의 섬세함이란 을 말함이라겠다. , 이질적사물들이 서로를 아우르면서 어울리는것을 말함이라겠다. 이렇게 되면 언어의 밀도가 치밀해지면서 언어의 긴장이 생기고 언어의 탄력이 생기게 되며 시의 개성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시를 읽는 독자는  의 단맛을 보게 될것이며, 를 깨닫게 될것이다. 그러므로  이란것을 잊지 말아야 할 일이라겠다.(인용한것들은 46쪽)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감각하고 감지할수 있는 사물은 4프로밖에 안된다고 한다. 그것도 최상의 과학자들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실제상 혼돈의 세계에서 살고있는 셈이 된다. 우리의 사위는 암흑의 세계인것이다. 시에서 감각의 세계를 중시하게 되는것은 암흑세계속의 사물의 존재를 현시하는 일이고 존재의 근원을 파보는 일이라고 할수 있다. 감정은 시간과 장소와 대상에 따라 변하는 불확실한것이다. 지금 정확하다고 하는 모든것들이 정말 정확하다고 확신할수 없다. 림시정확은 있어도 영원한 정확이란 누구도 보증할수 없는것이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모든것을 의심하란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시인은 늘 쇄신을 꿈꾼다. 그 쇄신이 감각적이며 상상적이며 환상적인것으로써 허상에 속하는것이다. 그렇게라도 시인은 이 카오스세계에서 존재를 찾아보려고 몸부림을 치고있다고 하겠다. 시를 감정화가 아니고 감각화 되게 하려면 시창작기교를 련마하여야 한다. 기교를 련마하지 않으면 말을 타고  광야를 달린다는것이 뜨락에서 맴돈격이 된다고, 깊은 우물을 길어먹으려는데 드레박줄이 짧아서 길어먹지 못한다는 류협의 지적은 옳았던것 같다. 시기교의 근본은 시인이 새로운 상징을 만들어내는것이다. 시가태여난 날부터 오늘까지도 상징이라는것은 변함이 없다. 문학의 시대마다 상징을 만드는 방법이 다를수 있다. 상징을 만드는 방법이 다름에 따라  시문학의 풍격이 다를수 있다. 오늘은 오늘의 기교가 있는것이다. 오늘의 기교는 구조주의언어학이라고 할수 있다. 구조주의언어학만이 오늘의 쇄신을 불러오게 될것이라고 필자는 믿고있다. 무엇이 오늘의 쇄신인가? 오늘의 쇄신은 한마디로 말하면 예술의 내용이다.  (. 204쪽)필자가 하이퍼시 창작방법에서 이러한 예술의 내용을 여러가지 각도에서 피력하였으므로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력사박물관에서 강의를 듣고 나오는데 마당가미루나무숲의 매미들이 한꺼번에 미륵미륵미륵, 미르미르 르르르 흘린다   염소에게서 배웠나, 매해해 얌얌 염소 입술을 뾰죽이 내밀어 매매매하는 그그그 미 매하는 미, 매미이이이를   플랫홈에 혼자 두고 기차가 소리 한번 매앵! 지르고 바퀴를 자글자글 굴리며 떠난다   맴맴맴 매애애 매앵매앵 앵앵앵 미잉미잉 잉잉잉          김규화  전문   김규화시인의  시는 청각적감각이 시전반에 넘쳐흐르고있다. 1련에서는 미륵의 강의로부터 매미울음소리로의 전환을 성립시켰고,  2련에서는 염소의 매매소리로부터 다시 미륵의 소리와 매미소리로의 련상을 떠올리게 한다. 3련에서는 기차의 기적소리로부터 바퀴들이 굴러가는 소리를 끄집어내고있다. 4련에서는 우의 모든 소리들의 대합창이다. 사물들에서 울리는 청각적감각을 주선으로 부동한 사물들의 등장을 주선하면서 시인은 한수의 하이퍼시를 창출해 내고있다. 시에서 나타나는 사물 모두가 시각적인 사물로서 감각적이다. 감각적이라고 하는것은 그러한 사물들에 시인의 어떤 감정이나 주장이 개입되지 않아서 사물자체가 스스로 나타났다가 스스로 사라진다. 그것은 사물들에 시인의 감정이 용해되였기 때문이다. 김규화시는 가히 청각으로 쓴 력작이라고 할수 있겠다. 시가 감각적이 되게 하려면 오관의 작용을 령활하게 리용하는것이 중요하다. 특히 시각과 청각을 잘 기용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기용이 어떤 의식의 지배속에서가 아니라무의식의 작용속에서 진행되여야 한다. 시에 의식이 작용하기만 하면 시는 값이 싸지지게 되며 자연스러움을 잃게 되며 인위적인것의 산물이 되여 이데올로기를 피면하기 어려울것으로 알고있다. 하이퍼시는 이데올로기를 수용하지 않는다. 시인의 창조력을 수용할뿐이다. 그 창조력으로 하여 시가 대중을 리탈하는 경우가 있는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시는 대중속에 빠져서 대중과 호흡을 함께하는것이 아니라 고리가 그물을 끌어당기듯이 대중을 앞으로 끌어당기게 된다. 끌힘이 없는 시는결코 좋은 시로 될수 없을것이다. 시의 끌힘이란 바로 사물생성으로 인한 몽롱성이며 기이성이라고 하겠다. 이 시에서 류의할 점이 하나 더 있다. 매미소리, 염소소리, 기차소리 등이 시인의 청각의 판단에 의하여 달라질수 있으며 달라져도 무방하다는 점이다. 매미를 미륵미륵미륵, 미르미르 르르르 운다고 하고, 염소는 매해해 운다고 하기도 하고, 매매매운다고 하기도 하고, 기차의 기적소리를 매앵한다고 한다. 이러한 청각에 의한 소리들의 의성어는 시인자신의 감각에 의하여 만든 소리라고 할수있다. 시인은 시를 쓰면서 꼭 상투적인 청각언어를 써야 한다는 법은 없다. 조기천은 범을 따웅하고 운다고 하였는데 필자가 북경동물원에서 들은 범의 울음소리는 야웅이였다. 범이 고양이과에 속하는 짐승이여서 그런지 아무리 다른 소리로 들으려 해도 그냥 야웅이였다. 조선의 한 가사에 하는 말이 있는데 종달이 우는 봄언덕에서 필자가 들어본데 의하면 종달새는 절대 하는 소리를 내는것이 아니였다. 필자의 청각에는 삐리삐리 삐르르르로 들리기도 하고 또르르로 들리기도 하였다. 하여튼 지종은 절대 아니였다. 의성어를 쓸 때는 상투적인 소리로 쓸수도 있지만 시인이 자작하여 쓸수도 있다는것이다. 어떤 사물은 소리를 내지만 우리 귀가 부실하여 듣지 못하는 소리도 있다. 이런 사물의 소리는 시인의 상상에 의하여 자작할수 있다는것이다. 이것이 김규화시인의 시가 우리에게 시사하는바라고 생각된다.   봉선화   봉선화 씨앗이 튕깁니다 8형제가 뛰쳐나와 자아소개를 합니다   하늘이라 부릅니다, ☰ 성은 건(乾)*이고 바람이라 부릅니다, ☴ 성은 손(巽)*이고 진동이라 부릅니다, ☳ 성은 진(震)*이고 불이라 부릅니다, ☲ 성은 리(离)*이고 물이라 부릅니다, ☵ 성은 감(坎)*이고 산이라 부릅니다, ☶ 성은 간(艮)*이고 련꽃이라 부릅니다, ☱ 성은 태(兑)*이고 땅이라 부릅니다, ☷ 성은 곤(坤)*이고   진흙땅우에 남긴 개발자국들이 8형제라고? 네놈 팔자도 사납구나 8년전에 간을 잃고 지금은 알쪽을 떼야겠으니 나는 의사다! 의사면 뭘해! 전립선암이 이미 고환에 전이 되였는데 두달후 너도 지진으로 다 죽을거야! 서쪽묘지 옮기면 지진은 종지부 찍을꺼야   봉선화가 계속 방울을 튕깁니다 8형제들이 결합되여 64형제 낳고… 봉선화방울들은 우주핸들을 잡았습니다    *건:하늘 남성 남편, 손:바람, 진:진동 우뢰, 리:열 전등 무지개  감:물 눈 ,간:산,  태:비 우물 소택지,  곤:지구 녀자 엄마   방산옥시인이 쓴 시 `의 전문이다. 봉선화와 주역을 혼연일체로 만든 재미 있는 시로서 자연물, 주역, 의학 등 여러가지 측면들이 어울려있어 주목을 끌만한 시라고 하겠다. 김규화시인의 시를 청각적감각으로 씌여진 시라 한다면 방산옥시인의 시는 시각적감각으로 씌여진 시라고 할수 있다.  봉선화씨앗들이 팔괘로 변형되는것이 자연스러울뿐만 아니라 선명한 이미지로 눈앞에 나타난다. 봉선화씨앗이 첫알이 튕기면 하늘이 되고, 두번째 알이 튕기면 바람이 되고, 세번째 알이 튕기면  우뢰가 되고, 네번재 알이 튕기면 불이 되고, 다섯번째 알이 튕기면 물이되고, 여섯번째 알이 튕기면  산이 되고, 일곱번째 알이 튕기면 연못이로 되고, 여덟번째 알이 튕기면  땅이 된단다. 련해련속으로 새로운 사물, 시각적인 사물들이 생성되는  렉시아수법이다. 고렇게 작디작은 봉선화씨앗에서 파생되여 튀여나오는 세상만물들이 설득에 별무리없이 나타난다. 봉선화씨앗으로부터 8형제, 8형제로부터 8괘로 넘어가는것이 자연스러울뿐만 아니라 그 수법이 교묘하고 재치스럽다.  3련에서는 8괘와 의학, 주역중의 풍수까지 점철이 되였다.  는 마지막시구는 형상적이고 철학적이여서 유난히 돋보인다.  이란 시각적인 언어는 시인이 창조한 언어로서 천금같은 언어이다. (주역인문학. 뒤면 )다고 김승호주역전문가는 말하고 있다. 확실히 주역은 세계의 탄생과 발전과 변화를 말하는 학문이다. 그런 거창한 도리를 시각화한 언어 로 표현한것은 변형의 도리를 우수하게 리용한것이라고 할수있겠다. 김규화시인의 시 에서 여러가지 사물이 생생하게 살아있는것이나 에서 팔괘를 끌어내는것 모두가 기이하고 오묘하다고 하겠다. 감정의 발로 같은것은 구중천으로 날려보내고 감각을 중시하고 감각적으로 조화를 이루는것은 당면 우리 시단에서 꼭 류의할바라고 생각한다. 시에서 감정의 값은 한푼도 않되지만 감각의 값은  천만원 주고도 사기 어려운것이라는것을 시인은 잊어서는 안된다. 인류최초의 문자로 적혀진 의 글들은 다 감각적으로 씌여진 글들이다. 건너금을 양이라 하고 가운데가 끊어진 건너금을 음이라 한다. 주역에서는 이 두개의부호로 글을 만드는데 이부호를 효라고 부른다. 주역에서 건너금이 세개로, 수직으로  구성된 글자를 건(乾:☰)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하늘이라는 뜻이란다, 건이란 지금말로 하면 돌이나 나무처럼, 강이나 산처럼 시각적감각에 속하는 언어가 된다. 이 글자의 함의는 광범하다. (주역, 7쪽)라고 하였다. 그리고 , ,, ,, , , ,,  이렇게 열가지로  해석하고 있다. 해석에 따르면 내용이 방대하고 심원하기 이를데  없다. 건괘의 상징성은 14가지가 있단다.(주역머리말, 66쪽). 8괘의 이런 의미를 합치면 도합 백열한가지가 된단다. 주역은 자체가 은어이고 시라고 할수 있다. 8괘든 64괘든 모든 언어들이 명사들 결합으로 된 감각적인 언어들이다. 시에서는 감성보다 감각이 중요하다고 하는것을 서양식인가 하는데 실은 우리의 전통이라고 할수밖에 없다.  
882    노을아, 나와 놀쟈... 댓글:  조회:3499  추천:0  2017-12-09
    노을   최영철     한 열흘 대장장이가 두드려 만든 초승달 칼날이 만사 다 빗장 지르고 터벅터벅 돌아가는 내 가슴살을 스윽 벤다 누구든 함부로 기울면 이렇게 된다고 피 닦은 수건을 우리 집 뒷산에 걸었다        ―시집『찔러본다』(문학과지성사, 2010)           쑥국     참 염치없는 소망이지만 다음 생에 딱 한번만이라도 그대 다시 만나 온갖 감언이설로 그대 꼬드겨 내가 그대의 아내였으면 합니다 그대 입맛에 맞게 간을 하고 그대 기쁘도록 분을 바르고 그대 자꾸 술 마시고 엇나갈 때마다 쌍심지 켜고 바가지도 긁었음 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지금의 그대처럼 사랑한다는 말도 한번 못 듣고 고맙다는 말도 한번 못 듣고 아이 둘 온 기력을 뺏어 달아난 쭈글쭈글한 배를 안고 그래도 그래도 골목 저편 오는 식구들을 기다리며 더운 쑥국을 끓였으면 합니다 끓는 물 넘쳐흘러 내가 그대의 쓰린 속 어루만지는 쑥국이었으면 합니다.       이암의 그림 와 최영철의 시     햇살 꽂힌다 잠든 척 엎드린 강아지 머리에 퍼붓는 화살 깼나 안 깼나 쿡쿡 찔러본다   비 온다 저기 산비탈 잔돌 무성한 다랑이논 죽었나 살았나 쿡쿡 찔러본다   바람 분다 이제 다 영글었다고 앞다퉈 꼭지에 매달린 것들 익었나 안 익었나 쿡쿡 찔러본다 - 전문   =========================같이 공유하여 시공부 해봅시다...     한 열흘 대장장이가 두드려 만든 초승달 칼날이 만사 다 빗장 지르고 터벅터벅 돌아가는 내 가슴살을 스윽 벤다  누구든 함부로 기울면 이렇게 된다고 피 닦은 수건을 우리 집 뒷산에 걸었다            시를 읽는 것은 어쩌면 시인의 뛰는 심장 안으로 들어가서 혼자 즐기는 관음증을 앓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러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분주하면 사물이 자기를 불러 세우기 힘들다고, 게으름은 유용하다고 말합니다. 모든 창의적인 것의 밑천은 게으름이라 했던가요. 시인은 창의적이기 위해 게으름 피우고 있다합디다. 만사 다 빗장 지르고. 둥근 보름달을 한 열흘 깎아서 대장장이가 두드려 만든 칼날이, 무뎌진 가슴을 스윽! 베자 서녘하늘이 붉게 물드는 거라는군요. 무료하고 무능한 자기 존재에 대한 수치심을 거두어가는 망각이 없다면 게으름은 지속될 수 없다고, 피 닦은 수건을 산 뒤에 걸고 경고를 합니다. 해가 넘어간 보이지 않는 뒤쪽에서는 더욱 붉고 강렬한 선혈이 뚝뚝 흐를 것 같습니다. ///박정옥 시인 © 경상일보 =================================== 노을에 대한 강박(强迫) / 전영관  돌이켜 보면, 내가 키운 짐승이다  시뻘건 아가리로 들어갈 것은 나의 懷疑뿐 나무들은 잎을 접고 어둠 속 하나로 뭉쳐지는 데 가로등은 거부 못할 일이라는 듯 환히, 머리를 조아린다  공포는 피하고만 싶던 방향에서 시작되는 법  서쪽만 바라보는 내 습성을 알아챈 저 짐승이 하구언 근처로 서식지를 결정했을 것이다 제 종족을 맞이하겠다고 도주하던 그림자는  가로등 불빛에 족적을 들킬 때마다 흔들린다 이미 몇몇을 집어삼켰다는 증거가 강물에 번들거리는 지금  가능한 도피 방법은 이 자리를 지키는 것뿐 역광으로 찬연했던 억새들이 허리 숙이고 홀로 선 버즘나무도 몸 떨며 제 잎을 떨어트리고 마는 것이 두려움 아니라 철 이른 바람인 까닭을  나는 밀려들 어둠이 황망해 알아채지 못했다 경계병처럼 하늘을 배회하던 구름이  저 짐승의 아가리를 짙은 윤곽으로 강조해 주지만  낭자한 출혈 끝에 먹히고 말 일 자신은 캄캄한 포만감으로 세상을 덮은 채 숙면하는 동안  응시하는 것 외에 다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자들은  나처럼 웅크린 불면을 供物로 바쳐야 할 것이다 오늘도 나는 저녁마다  나를 먹어 치우는 짐승을 사육하고 있다  소 떼 울음소리 뒤의 저녁노을 / 서상만  덩구덩 북소리가 섞여 있다, 가죽회초리에 뚜들겨 맞아  게거품 물고 바다는 미쳐서  갈기갈기 제 옷을 찢어발겨 흔든다  한 무리 눈알 부릅뜬 소 떼 울고 간 저녁바다 물결 위에 시뻘건 노을이 엎질러져 뉘엿댄다  수 만 번 불러도 말 못하는 것이 끝없이 흘러가는  저 피 묻은 서쪽하늘  또 날이 저문다, 푸른 묘등 위로 길이 저문다  수평선 멀리 굼실대는 돛배 하나, 또 다른 저녁을 향해 한 점 먹물로 번진 겁 없는 목숨들의 징징거림도 보인다  가끔 부글부글 끓어오르다가, 차갑게 식었다가, 바람에 스스로 제 몸을 맑히는 먼 불국의 목어처럼 간기에 젖어 눈 멀어버린  백발의 파랑을 치다가 어느 뭍으로 스며들어 하얀 소금꽃이 되고 싶은, 덩구 덩덩 북소리 들리면 바라만 보아도 찔끔찔끔 눈물 나는 소 떼 울음소리 뒤의 저녁바다  들판의 노을/ 한성례 지평선 너머로 지는 꼭두서니빛 노을은 서서히 번지는 땡감물처럼 발끝으로 스며든다 온 세상이 낮도 밤도 아닌 어스름녘 세상의 변혁도 구원도 모두 남의 어깨너머로 내다보았듯 텅 빈 들판에서  나는 그림자 하나 만들지 못한다 멀리 깜박깜박 불빛 한둘이 웅크린 짐승처럼 숨죽이며 눈을 반짝이고 있어 그나마 피가 도는 세상이라고 믿는다 아직은 눈을 감고 있어야 한다 땅 속 깊이 숨쉬는  깊고 뜨거운 열기가 대지를 향해 솟아오를 날을 기다리며 일상은 청동색으로 흘러가고 있어  무거움을 이기고 고개 들어 노을을 보면 역설처럼 모두가 한 주먹 깃털로 가벼워진다 문득 숨을 고르며 내려가던 노을이 요염하게 타오르며 얼굴을 붉히는 순간 그 배면에 얼비치는  파르라한 슬픔의 빛깔이  시선을 붙잡으며 훅 달려든다 뒤를 좇을 수 없는 아득함 유년의 배들평야 만석보 뚝길에서 바라보던  현기증 일던 노을 그 황홀함에 갇힌 채 나는 지금껏  길을 잃고 서 있다    노을 만 평 / 신용목  누가 잡아만 준다면 내 숨 통째 담보 잡혀 노을 만 평쯤 사두고 싶다 다른 데는 말고 꼭 저기 폐염전 옆구리에 걸치는 노을 만 평 갖고 싶다 그러고는 친구를 부르리 노을 만 평에 꽉 차서 날을 만한 철새 한 무리 사둔 친구 노을 만 평의 발치에 흔들려줄 갈대밭 한 뙈기 사둔 친구 내 숨에 끝날까지 사슬 끌려도 노을 만 평 사다가 친구들과 옛 애인 창가에 놀러가고 싶네 노을 / 이영혜 맨입으로 먹어야 제맛을 알제 구순이 넘은 외할머니 달그락거리던 틀니를 빼고 합죽합죽, 오물오물, 쪽쪽 홍시를 드신다 애써 오므린 쪼글한 입술 사이에서 가끔씩 검버섯 같은 씨앗이 똑똑 떨어진다 저녁 해, 늘어진 괄약근이 움찔움찔 하더니 터진 홍시처럼 좍 벌어지고 우듬지 까치밥 몇 알 더 붉어진다 너무 무거운 노을/ 김명인  오늘의 배달은 끝났다  자전거를 방죽 위에 세워놓고 저무는  하늘을 보면  그대를 봉함한 반달 한 장  입에 물고 늙은 우체부처럼  늦기러기 한 줄  노을 속으로 날고 있다  피멍든 사연이라 너무 무거워  구름 언저리에라도 잠시 얹어놓으려는가  채 배달되지 못한  망년(忘年)의, 카드 한 장  노을 형무소 / 이병철 노을을 훔친 내 눈이 수의를 입는다 먼 마을에서 흔들리는 눈빛은 눈동자에 수인번호를 새긴다 수런거리는 것들은 전부 노을 너머에 있고 혼자된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다 ‘먼 마을’과 ‘노을 너머’에 있는 ‘수런거리는 것들’ 속에 내가 들어가지 못하고 이만큼과 저만큼의 ‘거리’라는 공간적 경계에 서 있을 때가 있다. 그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기도 한 것이어서 시시때때로 느끼게 되는 외로움이란 건 필경 그 탓일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해질 무렵에 그립지 않은 것이 있는가 말이다. 우리의 귀소본능 만으로도 해질 무렵이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혹은 저쪽에서 이쪽으로 돌아가고 싶어지는 것 아니던가 말이다. ‘나’의 죄라면 ‘수런거리는 것들’을 좇아간 것뿐이다. 그것들은 전부 ‘노을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가중 처벌을 내린다면 그 또한 ‘혼자된 사람은 누구나 죄인’인 탓 정도겠으나 노을까지 훔쳤으므로 ‘나’와 ‘당신’ 유죄임을 인정하자. 그리하여 저, 노을 형무소를 향해 오늘도 뚜벅뚜벅 걸어들어 가지. 봄날 외로움에 극형을 언도하자. -최광임- 노을 / 조태일 저 노을 좀 봐.  저 노을 좀 봐.  사람들은 누구나  해질녘이면 노을 한폭씩  머리에 이고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서성거린다.  쌀쌀한 바람 속에서 싸리나무도  노을 한폭씩 머리에 이고  흔들거린다.  저 노을 좀 봐.  저 노을 좀 봐.  누가 서녘 하늘에 불을 붙였나.  그래도 이승이 그리워  저승 가다가 불을 지폈냐.  이것 좀 봐.  이것 좀 봐.  내 가슴 서편 쪽에도  불이 붙었다.  석양의 출구 / 김진돈 노을이 출하되고 있다 저녁의 출구에서 흘러나온 노을은 어디로 가는가 귀가를 서두르는 하루의 얼굴에 낙관을 찍는 시간,  소강상태로 닳아버린 장마는 어깨를 적시지 못해 흥건한 노을, 저녁에 넘친 저녁놀의 출구는 서쪽이다 저편의 낯빛이 흔들린다 강변을 내려다보던 바람이 강을 윤슬로 물들이고 새들은 저녁 한 톨을 물고 둥지로 날아간다  머리를 검붉게 염색한 자전거의 무릎들이 사열하듯 굴러간다 석양의 출구는 아직 남아있는가 아침의 입구에서 길을 잃은 사람은 도착하지 않았다 노을이 어둠을 잡아당긴다 점점 출구가 닫힌다  해질 무렵  천도화  길 위에서 무작정 기다린다 의자 하나 없는 오지 버스정류장 한 곳만 바라보고 서 있다 ​ 산마루에 노을이 흩어지고  불안한 마음이 파문처럼 번진다 늘 보았던 노을도 낯설다  ​ 지친 하루도 슬며시 산의 어깨를 넘어가는데 길은 보이지 않는다  ​ 오가는 노선이 텅 비었다  ​ 낮과 밤의 경계에 서서  끊어진 길을 이으려고 하염없이 나를 달래며 기다린다  저녁을 말하다 / 임향자 ​ 머리부터 시작한 문장이 발목까지 내려가면  정독한 하루를 끌고 누군가 골목을 걸어온다 서쪽은 낮과 밤의 점이지역 잠깐의 증거가 선명하다  그 붉은 흔적마저 사라지면  담장은 무늬를 지우고 골목의 낯빛도 어두워진다  숟가락이 닳도록 마주친 저녁의 얼굴  늘 어둠에 스미거나 빛에 소멸되어 한 번도 보지 못했으나, 어둠의 피는 뜨거워 다시 재생되고 비행하던 말들이 내려앉으면 행간을 넘어 밤은 왔다 그는 늙지 않는 시간 밖에 있었다 GPS를 달고 시작한 빌딩 숲이 불을 끄고  귀가를 서두를 때 그는 길 밖으로 비켜서거나 두 갈래로 제 몸을 가르곤 했다 두 다리에 각주를 매달고 먼 길을 돌아온 지루한 하루는 단문으로 요약되고 밤은 갖가지 어구가 달린 만연체여서 호수도 풍경을 지우고 수면을 닫는 시간, 저녁의 무늬들이 태어나고  밤은 검은 탁본을 뜨기 시작한다 흔들리는 밤 / 임향자 ​ 불투명한 미래처럼 깜깜한 밤을 달리는 야간버스* 나를 깨워서 낯선 곳으로 데려가는 곳은 어디인가 세상의 길이 모두 지워진 시간 여러 길 위에서 헤매던 젊은 날처럼 나는 흔들리며 가고 있다 먼 이국땅에서 지도 한 장 들고 밤새 달리는 길 내가 걸어온 길이 마치 흔들리는 길이었으니 더러 돌부리에 넘어지고 더러 차를 놓치기도 하며  지나온 시간, 내가 놓쳐버린 역은 얼마나 될까  잠시 멈춘 간이역도 많지만 결국 이 막차를 타기 위해 이렇게 달려온 것이다 흔들리며 흔들리며 놓쳐버린 것들 사랑과 열정 놓쳐버린 이름을 생각하며 열 시간을 달린다 아직 어둠은 거치지 않았고  이 어둠의 깊이는 얼마나 될까 종착역이 없고 마침표가 없는 나를 기울게 하는 흔들림이 길을 만들어간다 붉은 노을을 지나 어둠속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 노을이 사라졌다고 진정 사라진 것이 아니듯 내 가슴엔 아직 내일이 떠있다 * 터키의 카파도키아에서 파묵칼레까지 11시간 이동하는 야간버스 ​ 무렵이라는 말 조경숙  어슴푸레한 이 말, 철들 무렵, 동틀 무렵, 해질 무렵 무렵이란 굳이 무엇으로 완성되었다는  그런 단단한 언어가 아니다  아침 점심 저녁 사이  살짝 요깃거리 같은  하루 잠깐의 쓸쓸한 마음 같은 ​ 한 그루 나무가 서 있는 풍경, 그 어딘가의 언저리 같은 해를 바라보며 노을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허기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암시 같은  ​ 손을 호호 불며  주전자에 뜨거운 찻물을 끓인다 수증기 속에서 국화꽃잎이 제 형태를 갖출 무렵  계절은 기억의 냄새를 풀고 나의 두 손은 온기를 안고  그분이 오실  그 무렵의 시간을 기다린다 말뚝 / 장요원 초록이 접힌 들판에 겹겹이 바람을 껴입은 느낌표 하나 서 있다  어스름이 내릴 때까지  제 그림자를 묶어두고 있다  몸집 큰 바람이 그림자를 넘어뜨릴 때도 있지만 그림자는 한번도 줄을 놓지 않았다  어린 그늘에  스스로 묶였던 기억을 떠올리곤 했을 것이다  수만 겹의 바람이 묶였다 가는 곳 말뚝은 처음 묶였던 목덜미를 기억한다  가끔 바람을 타고 온 굽소리를 되뇌이며  느릿한 되새김질을 한다  그때마다 머리에선  구부러진 각질 덩어리가 자라곤 한다  애기덩굴 한 줄기가  더딘 걸음으로 뒤늦게 노을을 감는다  허리 굽은 저녁을 끌고 누군가 말뚝을 쑥 뽑아 풀숲으로 던진다  흩어졌던 풀벌레들이 누운 말뚝 근처로 모여든다  풀숲이 와글와글 소란스럽다  속이 다 타버린 것을 어둠이 뒤꿈치로 비벼 끈다  한 개비의 저녁이 꺼져가는 풀숲  말뚝이 사라진 들판엔  캄캄한 씨앗들이 뿌려질 것이다  나무들이 일제히 바람의 고삐를 풀어주고 있다  소금 창고가 있는 풍경 외 1편  ​ 조완춘 ​ 실핏줄이 드러난 바다의 맨몸, 소금기 머금은 낭금갯벌은 온통 청자 빛이다  위성이 찍은 고향 갯벌 피돌기 하는 물길 끝 암록청의 바둑판들, 염전이다 교실에 파머머리 계집애가 들어왔었다 간척공사에 따라온 인부의 가족이라 했다 완공도 되기 전,  가로막은 허술한 제방을 세찬 밀물이 밀어버린 날 밀가루 급료를 받던 삶들 함께 무너져  들어올 때처럼 또 가볍게 떠나갔다, 그 후  소금밭에 남은 한 사내가 땡볕 내내 수차를 밟고 밀대를 밀었다 몇 번인가 소금꽃 피고 염판 위로 솟아오른 하얀 소금산들 소슬바람 불어오면 소금철은 빨리 끝나버렸다 정산포를 넘어가는 석양빛에  녹슨 소금창고는 붉고  소금기를 털어내는 사내의 정강이도 붉고… 미루나무 하나 없는 허허 벌판, 붉은 함초길을  말간 계집애를 무등 태운 사내가 노을 속으로 오래오래 걸어가고 있었다  ​ 명선이라 했던가 갯벌 생채기로 남은 무너진 제방 위 내 기억의 녹슨 창고에 또렷하게 살아나는 붉은 점 하나  ​ ​ 시간의 주름 ​-원양제전元陽梯田* ​ 조완춘 ​ 구름이 감도는 숲은 태고의 비밀처럼 신성하고 그 숲이 내리는 물은 은총이었다  마른 풀씨처럼 산기슭에 생을 기댄 사람들  ​ 여인들은 물길을 가두기 위해 돌을 나르고 흙을 다졌다  등에서 잠들던 딸들과 또 그의 딸들은  어미의 생을 복사하고 강물 같은 길을 아득하게 흘러왔다  ​ 다랑다랑 조각보를 기워낸 억겁의 시간들 좁은 어깨로 짐을 지어 나르던 여인들, 가벼이 날고 싶었을까 영롱한 잠자리, 나비며 매미, 온갖 날개의 무늬로  광활한 대지가 일시에 날아오른다 ​ 한 삽의 흙, 한 동이 물로 시작한 밑그림은 이제 골짜기 가득한 풍경화가 되었다 물이랑은 하늘의 마음을 읽어 노을이 젖어들고 사계절이 지나가고 ​ 자불자불 잔물결 일어 윤슬에 눈부신 아침 물소를 따라나서는 오리 떼 한가로운데 시간을 측량하는 등고선 그 주름이 조밀하다 ​ *유네스코에 등재된 중국 윈난 성의 하니 족 마을. 해발 600~2000m의 산을 1,300년에 걸쳐 3,700여 계단식 논을 개간해서 친환경 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  데칼코마니 / 박주용 ​ 경계란 참으로 가깝고도 먼 그리움인가  소금쟁이가 연못 위를 미끄러지며 생의 균형을 잡으며 간다 경계에 푸른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수양버들도 수면에 닿을 듯 말 듯 삶의 촉수 내민다 물 위에 떠 있는 연잎에 나도 손바닥 대어본다 노랗게 불을 켠 손금 같은 잎맥들이 표면장력으로 달려 나오고 덩달아 셀 수 없는 물이랑이 자맥질하며 내 나이 자꾸 건져 올린다. 그리움은 접어도 그리움인가  허리 숙여 연못 속을 들여다본다 목덜미 물렸는지 하늘은 온통 노을빛이다 하늘은 흐르고 꽃그늘이 머문 구름 속엔 우물거림으로도 잘 씹히지 않는 살아온 신발 자국이 숨바꼭질처럼 웅크리고 숨어 있다 어둠과 빛살 가득 담긴 신발을 펴 운동장에 활짝 펼쳐보면 내 나이는 신기하게 거꾸로 걷고 있고 몰린 피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나는 가끔 철봉에 발 얹기도 한다 하늘에 뿌리를 둔 탯줄이 연잎을 둥글게 경계로 밀어 올리는 지금 소금쟁이보다 짠하게 물 위를 걷고 있는  간간한 내 나이가 반으로 접히고 있다. 결 / 장요원 ​사과는 조각을 내어 깎는 게 예의라지만 나는 사과를 둘둘 풀어내는 걸 좋아해 짓무른 부위를 풀어낼 때면 상처를 감싸고 있는 붕대를 풀고 있는 것 같아 진물에 찌든 붕대를 풀어줘야 할 것 같아 ​머그잔 속의 커피를 돌려보렴 물레성형처럼 커피를 돌려보렴 나도 모르게 커피를 왼쪽으로 돌리고 있는 건 어젯밤 우리가 공원 호수를 왼쪽으로 돌았기 때문이야 ​호수에 내리꽂히는 빗방울들 동그랗게 말고 있는 몸을 점점 커다랗게 풀어가는, 풀다가 사라지는 빗방울들 비 오는 날 호수에는 빗방울의 나이가 겹겹이 자라고 있지 ​오늘 아침 창밖은 잘 구워진 노을빛 부풀어 오른 구름이 페이스트리처럼 접혀 있네 접혀진 주름과 주름 사이의 바람이 바스라지지 않도록 한 겹 한 겹 풀어내야지 ​세상의 무늬들은 주름들은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자라나지​  달리는 이불 정와연 이삿짐 트럭에 실려 가는 이불  검은 밧줄이 필사적인 빨랫줄이다  반듯하게 개켜진 이불의 한쪽이 들썩거리는  달리는 이불은 지금 어떤 잠자리인가 어느 방에서 또 어느 방으로 뒤척여지고 있는 것일까 집 밖으로 나온 이불을 보며 왜 으스스하게 몸살 앓았던 기억들이 떠오르는 것일까 민망한 내면의 몸살을 덮어주던 이불 잠의 냄새가 아닌  을씨년스런 백주의 냄새 이부자리를 끌어당기는 바람의 발목이 앙상하다 지금 달리는 저 이불 속엔 뒤척거리는 바람이 잠자고 있다  세간을 실은 적재함이 추운 방 한 칸이다 지금껏 자신을 덮고 있는 것들이 다름 아닌 저런 요동치는 바람이었다는 것일까 이사를 오래 다닌 살림살이에는  그곳만큼 차곡차곡 쌓은 방도 없을 것이다 달리는 이불을 뒤따라가 보면 저녁 무렵의 서쪽하늘 노을을 끌어 덮고 있는 것을 본다  노을을 뒤따라 어둠 한 채가 깔리고 그 고요 속에는  뒤척거리는 뼈가 자라고 있다  모래 화풍  ​ 이해원 ​ 사막은 커다란 모래화폭 종일 사막에서 그림을 그리는 바람의 붓끝은 유연하다  수시로 지우고 그리는 모래그림 바람은 움직이는 풍경을 좋아한다  ​ 노을 위에 발자국이 포개진다 배경으로 그려놓은 신기루는 증발되고  수많은 별이 조문객처럼 찾아온다  ​ 돌아 갈 수도 멈출 수도 없는 곳 손끝 따라 변하는 스케치에 사구는 늘어난다 낙타의 방울소리가 매장되고  모래파도가 출렁인다 건조한 바다에 물결무늬가 찍힌다  ​ 바람도 목이 마를 땐  숨어버린 물소리를 찾아 구렁을 깊이 파기도 한다 때론  종적을 감춘 자의 흔적이 화폭을 뒤지는 바람의 붓끝에서 발굴된다 ​ 같은 듯 다른 사막의 무늬 노련한 화가는  똑같은 무늬를 그리지 않는다 ​ 그릴 수 없는 건 낙타 울음뿐이다 어미를 찾는 새끼 낙타의 울음소리에 사막은 늘 미완성이다 호박죽 / 김복연  늦여름 저물녘 호박죽을 끓인다  부엌창에 내린 노을  겉보다 속이 더 붉은 노을 한 자락  쓰-윽 베어다 죽 솥에 넣은 것 누가 알까  우주 한 귀퉁이가 풀어지고 엉키고  붉게 솟구쳐 올라  나무주걱 쥔 내 손도 붉고  지금 막 몰려드는 어둠 죽 솥에 눌러 붙을까  걱정하시는 칠순 어머니도  한 십 년은 붉어  잘 익은 단내가 온 집안 진동이다  마당가에 엎드린 개와  어깨에 앉은 어스름 갈기를 손질하던 나무도  지금은 다 부엌 쪽 향해 경배 중이다  아직 돌아오지 않는 식구들 몫까지  식탁 가득 붉은 호박죽  우주로 창을 낸 저녁이다  나무 램프 / 조영민 추억이 어두울 때면 나무 하나를 켭니다 플라타너스는 빛이 가장 환한 혈족이지만 기름이 떨어져도 어둠으로 불을 켤 수 있지요 그 어둠으로 골방을 비추면, 곧장 사라지는 것들의 빨간 내복이 보입니다 선반 위 기도하는 인형과 머리맡에 누워있는 할머니의 타구 안쪽까지 환하게 어둠을 켜 놓으면 그런데, 할머니는 왜 가까운 미래를 소등했을까요 주름 골짜기 사이마다, 언뜻언뜻 켜져 있던 민가의 불빛들도 이제 더는 보이지 않아요 저수지 속으로 유성들이 하나, 둘 꺼지고 나면 낯선 풀벌레 소리는 점점 환해지곤 했지요 언제나 정전된 과거를 과다 복용하는 할머니 싱싱한 염문들 모두 말라버린 빈집 마당 같은 치마폭에 얼마 남지 않은 시든 풀잎들이 얼비치곤 했어요 불 꺼진 노을은 다음 생으로 가는 플랫폼인가요 가끔 골방의 적막을 열 때마다 오래전 떠나간 등 굽은 시간들과 재회하는 기분이예요 그녀, 진통제 같은 집 한 칸 마련하려 서둘러 후생의 램프를 장만했던 것인지, 밥알 흘리는 할머니가 오래 앉았던 그늘 밑엔 문고리도, 유리창도 죄다 그녀를 따라가고 없네요 이런 날이면 나는, 가끔씩 나의 길도 단 한번 멀리까지 열어보기 위해 잔가지 무성한 나무를 켜듭니다 벌써, 내 주변은 온통 타들어가는 것들 천지네요 봄이 오기 전 / 김두일  남으로 가는 기차를 타겠습니다. 더딘 열차에서 노곤한 다리, 두드리는 남루한 사람들과 소주잔을 나누며 지도에도 없는 간이역 풍경들과 눈인사를 나누겠습니다. 급행열차는 먼저 보내도 좋겠습니다.  종착역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자운영이 피고 진 넓은 들을 만날 수 있다면. 들이 끝나기 전, 맨발로 흙을 밟아 보겠습니다. 신발을 벗어들고 천천히, 흙내음에 한참을 젖겠습니다. 쉬엄쉬엄 걷는 길, 그 끝 어디쯤에 주저앉아 혼자 피어있는 동백이며 눈꽃이며 키 작은 민들레의 겨울 이야기를 듣겠습니다. 서두르지 말고 봄이 깊기를 기다리라고 이르기도 하겠습니다.  기차가 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봄이 오는 소리에 귀를 열고 해지는 들에서 노을 한 개비를 말아 피우겠습니다. 이제껏 놓지 못한 시간을 방생하겠습니다.  봄이 오기 전, 완행열차를 타고 남으로 가겠습니다. 남녘 어디라도 적당합니다.  바람의 역설 / 최규철 바람은 연체동물이다. 인사동 어느 카페 골목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문득 벌거벗은 몸으로 큰 거리를 나선다 투명한 살결에  전혀 부끄럽지 않은 유연한 몸짓으로  가로수 등걸에 올라가 불을 켠다 바람의 모세혈관에 흐르는 피가 노을 되어  저녁 하늘에 불기둥으로 머물었다가 홀연히 바다 속으로 뛰어든다 밤새 거친 바다 속에서 몸을 씻고 날이 샐 무렵에야 다시 파도를 헤치고 구름기둥으로 솟아오른다 바람은 불다가 오던 길로 다시 돌아서는 천국의 숨결 같은,  하늘을 가득 채울 만큼 크고 바늘구멍으로도 빠져나가는 작은 익살이다 봉인된 무덤에 들어가 살을 입히고 뼈대를 살리며 때로는 보이지 않은 곳으로부터 다가와서 키 큰 포프라 나무에서 바람의 뼈로 일어서는 척추동물이 된다 은밀한 매복 / 이해리 (2003년 토지문학상 수상 보조작품)  이상하지  늦게 귀가한 와이셔츠를 받아걸면  한 마리 축 처진 톰슨가젤이 생각난다  축 처진 것을 걸고도 빳빳한 옷걸이는  톰슨가젤을 단숨에 사냥한 치이타일까  고요하고 하얀 달의 숨소리  이상도 하지  술 냄새를 풍기는 와이셔츠를 바라보면 왜  세렝게티 초원의 바람소리가 들리는 거지  점점 밀림이 되어가는 도시  넥타이를 풀어헤친 사막과 창 밖으로 몸 던지는 빌딩의  추락음이 들리는 거지  발톱을 세운 의자들이 의자를 할퀴고  몰카를 매단 자동차들이 어두운 구석에 숨어  누군가를 노리는 눈알을 빛내고 있는 거지  아무 일 없다는 듯 고요해서 더 팽팽히 긴장되는  섬유올 속 촘촘한 불안의 숨구멍  턱 언저리에 푸른 노을을 묻힌 채  혼곤한 잠 속에 빠져드는  시달린 수사자가 보이는 거지  참 이상도 하지  늦게 귀가한 와이셔츠를 받아 걸면     폐선 / 정순 (2011년 평사리 문학대상) 저녁의 딱딱하고 고단한 파도 한 켠에 세월 하나 뒹굴고 있다 부력의 한쪽을 추억으로 비워낸 듯 기우뚱 균형을 놓아버리고서는 낡은 부피를 달래고 있다 얼핏 보아 고기들의 길을 단념한지 오래인 듯한, 따라온 길 파도에 녹이 슬어 보이지 않는다 저 배도 한때는 사랑을 했거나 어느 이름 모를 추억 속에서 며칠이고 향긋한 정박을 했을 것이다 불 켜진 환락의 깊이를 쏘다니거나 가슴 속으로 저며드는 이름 모를 물살들에게 운명을 맡기며 추억을 탕진했을, 나 이쯤에서 저 배의 소멸들에 대해 받아내려 한다 기억 속 깊이 끼어 있는 몇 줌의 항해일지와 폐유 같은 어둠 저쪽에서 환락을 장만하던 나폴리 마르세이유 요코하마의 날들과 며칠이고 정지된 엔진 근처에서 뜬눈으로 보내던  불임의 위도와 경도를 짚어보려 한다 이튿날이면 폐유처럼 떠오르던 희망이라는 낯선 부력의 위로는 어느 해협에서 배운 악몽이었을까 나는 조용히 언젠가의 서풍이 불어와 가슴 속에서 일러주었던 말이라도 실천하듯 관념 속 무례한 부력을 내려놓고서 노을이 내주기 시작하는 저녁 쪽으로 어스름한 귀향을 한다 축제 / 권정일  그랬다, 순식간 허공을 점령하는 가창오리 떼를 보며 예민한 저들의 신호체계를 나는 울음으로 들었다 한 놈의 수상한 날갯짓이 수십 만 마리 한점 노을이었다가 회귀하는 바람의 획, 나는 공포였다 솟구쳤다, 내리꽂히는 저들의 생태계, 깃털하나 다치는 일 없이 일사분란하다 누가 새대가리라 조롱하는가 천수만을 점령하고 남한강을 점령하는 저 기막힌 활공을 보라, 오차 없는 날개와 날개의 틈을 서로 잇대어 어느 한 놈 낙오 없이 풍경을 거두는 싱싱한 먹이사슬의 자유, 저들은 한 끼의 운행을 노래하지 않는다 그랬다, 한 끼를 위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나는 너에게 칼을 겨냥했고 하나의 의자를 위해 평화라는 이름으로 너를 추락시켰다 새대가리만도 못한 머리를 굴리며 사람 사이를 비행하는 사람인 나는 거둘 것 없는 너무도 불편한 저녁 축제를 보고 있다 지느러미 여자/ 서동인  밤새 수평선을 지킨 등대처럼  충혈된 눈알을 좌판 위에 깜박거리는  저 여자, 그 옛날 파도가 삼켜버린  남편이라도 건져 올렸을까  하루종일 염하듯 물을 끼얹다가  울컥, 하얀 포말을 토해낸다  게처럼 어시장을 어기적거리는 행인들  봄 햇살을 떨이하자 물간 생선  거적같은 비닐 봉지에 주워 담으며  구시렁, 구시렁 물고기 숨쉬듯  담배 연기 허공으로 말아 올리는 저 여자,  밀물지는 눈동자에 첫날 밤  꽃이불 같은 저녁 노을 붉게 퍼진다  닳아버린 지느러미 꼼지락거리며  반지하 어항 속으로 투숙한다는 저 여자,  비린내 흘리던 자리에 알을 스는 비늘들  귀갓길 저녁 별로 투두둑, 박힌다  독수리를 말한다 / 김남권 그러니까 독수리는 산 것을 먹지 않는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죽은 짐승의 시체만 먹는다 하늘의 제왕帝王이지만 겁을 주지도 않고  함부로 날개를 퍼덕이지 않는다 참새 한 마리도 우습게 보지 않고  날개가 없다고 깔보지도 않는다 새들을 불러 모아 짐승을 공격할 줄도 모른다 죽어가는 토끼를 놀리거나 위협하는 법도 없다 바람의 방향을 알고 빈 나뭇가지에 홀로 내려앉는 법도 없다 산 밑을 내려올 때는 강이 흘러가는 길을 먼저 생각한다 강물 가까이 물고기 웃음소리에 귀 기울이며 물결무늬 수繡를 놓기도 한다  강물 속 물고기들이 노니는 수초들의 흔들림까지도 숨죽여 지켜보다가  구름이 일러주는 하늘길에 무늬를 새겨 넣는다 무리지어 다니지 않아서 외로울 때도 있지만 고독한 정신으로 깨달음을 찾아낸다 상처 주는 일을 가장 두려워하며 상처받는 일에는 두려움을 모르는 각시붓꽃처럼  노을이 타는 강가에 홀로 앉아 참을 수 없는 슬픔을 먹물처럼 머금고 바보 같은 새 그러니까 독수리는 함부로 사랑을 버리지 않는다  고수(高手) / 양해열  1.1에서 2.9 사이의 난이도로 입수하는 비오리 공중에서 세 바퀴 반을 굴러 산 그림자가 놀라지 않게 물풀이 다치지 않게 날개 접고 다리 뒤로 뻗어 몸의 곡선을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방금 사선으로 잠수한 비오리 강물의 속살을 뜯어 물면서 푸우, 쏟아낸 하늘 몇 모금 구시렁구시렁 살아나 수면 위로 피어오르더니 꽃, 꽃, 꽃, 물꽃을 딛고 피라미가 비오리 혀, 독설을 물고 훨훨 타는 갈밭 위로 붉은 노을 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든 찰나 아, 공중사리탑 그가 낡은 처마 끝으로 갔다 고난도의 다비식, 전광판도 기록하지 못했다 상처는 여전히 붉다 / 정용화    나는 그 새 이름을 알지 못한다 깃털만 만져도 가슴에 상처 하나씩 갖게 된다는    그 새는 내 입 안 깊은 동굴 속에 살다가 무심코 입을 벌리자 기어이 세상 밖으로 빠져 나왔다 새가 빠져나간 자리, 허공이 자꾸 아프다    햇빛의 온기가 남아있는 돌 위에서 새는 아까부터 견고한 비밀을 쪼아대고 있다 저녁은 어두워지게 내버려두고 오래도록 물어뜯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처음엔 그저 작게만 보였던 새 걷는 것이 전부인 듯 보이더니 날개가 생겼다 날카로운 발톱이 생기고 부리가 점점 커져 닥치는 대로 먹어 치웠다    어둠도 가둘 수 없는 새가 날아간다 무엇으로도 저 새를 잡을 수 없다    새가 날아간 자리 두고 간 소문만 무성하고 노을 너머 상처는 여전히 붉다 사라지는 오렌지 최호일  오렌지 나라에서는 오렌지가 사람  사람의 투명한 옷을 입고 의심하고 이해한다 오렌지가 되려면 오렌지의 크기와 색깔과 색다른 구두가 필요하고  열 개의 손가락이 당장 필요하다  만일 당신에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한다면  그건 오렌지의 감정  문을열고들어가비와사람의단추를누르면주렁주렁열리는팔과다리들오렌지는사람들을박스에넣어선물한다  당신과나사이를주고받는어느선물  상자 속 사람들이 지하철에서 빠져나온 옆구리처럼 걸어 다닌다  뒤돌아보았을 때  일정한 높이와 냄새와 수만 개의 눈을 가지고  오늘 계단은 몇 개의 기분일까  백만 년 전 우리는 허리를 숙이다가 누군가의 호주머니에서  굴러떨어진 노을이었지 그걸 주우려다 또 떨어뜨린 노을빛  저녁은 가장 오래된 물질  죽은 척하고 놓여 있는 이 오렌지는 지워진 안개와 강물이 다 사라지는 오후와 다른 사람이 사는 마을을 거쳐 여기 희미하게 굴러 온 것  가보지 않은 여행지를 천천히 다녀온 사람들로  아는 얼굴로  ​      한용운의 '지는 해' 외     + 지는 해     지는 해는  성공한 영웅의 말로(末路) 같이  아름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창창한 남은 빛이  높은 산과 먼 강을 비치어서  현란한 최후를 장식하더니  홀연히 엷은 구름의 붉은 소매로  뚜렷한 얼굴을 슬쩍 가리며  결별의 미소를 띄운다     큰 강의 급한 물결은 만가(輓歌)를 부르고  뭇 산의 비낀 그림자는 임종의 역사를 쓴다  (한용운·시인, 1879-1944)       + 노을     산 밑  교회당  + 에  노을이 내렸다.     어미새가  + 에 앉아  저녁 기도 드리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     마을은  노을 속에 아늑하다.  (김영일·아동문학가)       + 노을    봄이 오는 산개울에 두런거리는 소리    오늘은  또 누가 다비茶毘를 하는가     서쪽 하늘엔 슬픔마저 타는 저 찬란한 빛 저녁노을. (하청호·시인, 1943-)       + 노을  보아주는 이 없어서  더욱 아리따운 아낙이여. (나태주·시인, 1945-)       + 노을     한 열흘 대장장이가 두드려 만든  초승달 칼날이  만사 다 빗장 지르고 터벅터벅 돌아가는  내 가슴살을 스윽 벤다  누구든 함부로 기울면 저렇게 된다고  피 닦은 수건을 우리 집 뒷산에 걸었다  (최영철·시인, 1956-)       + 남은 빛 모두 거두어     어느 저녁 바다에  내 남은 빛 모두 거두어  붉게 빠져들고 싶다     황홀한 노을 잠깐이겠지만  그렇게 누군가의 품에서  잔잔하게 저물고 싶다  (권경업·산악인 시인)       + 노을    어디서부터 울려 퍼졌나 꿈결처럼 아련한 노랫소리 영원인 듯 먼 지평선 아래로 잦아드는 화음 마지막 발자국 지우며 사막 끝으로 장엄히 사라져간 부족의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노랫소리 (조향미·시인, 1961-)       + 황혼    온종일 건너온 고해를 피안의 테두리 안으로 밀어 넣는 이승과 저승이 만나는 곳    수평선 위에 바닷새 한 마리 불타고 있다    하루의 제물을 바치고 있다 (조옥동·시인, 충남 부여 출생)       + 선문답禪問答    뜨거운 물음이네 서녘 하늘 붉은 것은    활활 태워 버리고 가진 것 하나 없이    산너머 머나먼 여행 떠날 준비 됐느냐는.    말없는 대답이네 산 그림자 짙은 것은    듣지 않는 아우성 속으로만 삼키려니    두 팔을 가지런히 하고 나를 따라 하라는.    그대도 모를 거고 나 또한 알 수 없네 한 생을 건너가면 모든 의문 풀리는지 하늘도 산도 아니면 바다는 알고 있는지. (구금자·시인)       + 어느 해거름    멍한,  저녁 무렵    문득  나는 여섯 살의 저녁이다    어눌한  해거름이다  정작,  여섯 살 적에도  이토록  여섯 살이진 않았다  (진이정·시인, 1959-1993)       + 저녁 노을 어두워지며 썩은 강에 검은 산이 소리 없이 조선 망하듯 누울 때 앞논에 개구리야 뒷산에 소쩍새야 빚진 빚진 나라 울지 마라 한 사십 년 가문 사랑 탓하지 마라 오늘 저녁 부끄러움에 멍든 가슴들이 저렇게 다란히 피워 올리는 너무 찌들려서 아름다운 저녁밥 짓는 연기를 보아라 밥 먹고 어디 머리 둘 곳 없을지언정 끝없이 살아 우리 현대사 내려다보는 노을 아래 우리가 씨 뿌린 곡식같이 당당하게 살아 이 땅을 잠들지 않게 하는 내 아버지 붉은 얼굴과 더불어 살아 (안도현·시인, 1961-)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손광세의 '서쪽 하늘' 외     + 서쪽 하늘    빨간 사과 껍질이 널려있다. 드문드문 귤껍질도 섞여있다. (손광세·시인, 1945-)       + 노을을 적다     노을이 저 혼자 붉다  바다는 놀빛을 당겨  물위에 적는다  좋은 시 한 편  공양받은 하늘 한쪽이 붉다  하늘도 때로 취할 때가 있으니  하루에도 몇 번  길을 내는 바다를  누가  바라만 보라고 바다라 했나  보라  넘치지 않는 건 저것뿐이다  하늘을 안고 있는 건  저것뿐이다 저런!  (천양희·시인, 1942-)       + 노을    우리 집 개가 막내 놈이 콩밭에 눈 똥을  훌떡 삼켜버렸다 그리고 내게로 와서 맨발을 핥았다 걷어차지 못했다 물리치지 못했다 부르르 떨고 있는 늦가을 목련나무를 한참 쳐다보았을 뿐, 옆에 서 있는 미친 대추나무에 막걸리 서 되 받아주고 나도 한 잔 마셨다 (우대식·시인, 1965-)       + 일몰 앞에서    저 일몰 끝에 발목을 내려놓은 그가 앉아 있다 눈멀고 귀멀어 그는 아무리 소리쳐도 대답하지 않는다 그와 나는 시소 타는 사람 같고 해와 달 같아서 누가 먼저 궁둥이를 털고 일어나면 툭 떨어진다, 하늘 아래로 곤두박질친다 저 뜨겁고 차가운 해와 달을 '시소 타는 남녀'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유홍준·시인, 1963-)       + 석양    거대한 군불을 쬐려고 젖은 새들이 날아간다  아랫도리가 축축한 나무들은  이미 그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매운 연기 한 줌 피어오르지 않는 맑은 군불,  새들은 세상을 떠돌다 날개에 묻혀온  그을음을 탁탁 털어내고 날아간다  깨끗한 몸으로 쬐어야 하는 맑은 군불,  어떤 거대한 혀가 몰래 천국의 밑바닥을 쓱 핥아와  그것을 연료로 지피는 듯한 맑은 군불,  숨막힐 듯 조여 오는 어둠을 간신히 밀쳐내고 있는 맑은 군불,  그곳으로 가서 새들은 제 탁한 눈알을 소독하고 눈 밝아져  아득한 허공을 질주하면서도 세상 훤히 내려다보는 힘을 얻는다  저 거대한 군불 앞에 놓인 지구라는 제단,  그 제단 위 버둥거리는 사람이라는 것들,  누구의 후식인가  살짝 그슬러 먹으려고 저리 거대한 군불을 지폈나  (김충규·시인, 1965-2012)        + 노을 꽃     피는 꽃만  예쁜 게 아니다    지는 꽃도  못지 않게 예쁘다     가만히 보면 지는 꽃이 더 예쁘다    슬퍼지니까 가슴 아리도록 예쁘다.    해 뜨고 질 때의 노을도  꽃이랑 비슷하다    새 아침 새 희망을  노래하는 아침 노을보다도     저무는 하루를 속삭이는  저녁 노을이 더 곱다    아롱아롱 눈물 너머 가슴속 파고들며 곱다.     어느새 이제  나의 생도 지는 꽃이요    해 저물녘  노을 쪽으로 기운 모양이다. (정연복·시인, 1957-) [출처] 노을 시 모음|작성자 곰말   ======================  허락된 과식 이렇게 먹음직스러운 햇빛이 가득한 건 근래 보기 드문 일 오랜 허기를 채우려고 맨발 몇이 봄날 오후 산자락에 누워 있다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햇빛을 연초록 잎들이 그렇게 하듯이 핥아먹고 빨아먹고 꼭꼭 씹어도 먹고 허천난 듯 먹고 마셔댔지만 그래도 남아도는 열두 광주리의 햇빛! (나희덕·시인, 1966-) + 햇빛이 말을 걸다 길을 걷는데 햇빛이 이마를 툭 건드린다 봄이야 그 말을 하나 하려고 수백 광년을 달려온 빛 하나가 내 이마를 건드리며 떨어진 것이다 나무 한 잎 피우려고 잠든 꽃잎의 눈꺼풀 깨우려고 지상에 내려오는 햇빛들 나에게 사명을 다하며 떨어진 햇빛을 보다가 문득 나는 이 세상의 모든 햇빛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강물에게 나뭇잎에게 세상의 모든 플랑크톤들에게 말을 걸며 내려온다는 것을 알았다 반짝이며 날아가는 물방울들 초록으로 빨강으로 답하는 풀잎들 꽃들 눈부심으로 가득 차 서로 통하고 있었다 봄이야 라고 말하며 떨어지는 햇빛에 귀를 기울여본다 그의 소리를 듣고 푸른 귀 하나가 땅속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권대웅·시인, 1962-) + 햇살에게 이른 아침에 먼지를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먼지가 된 나를 하루종일 찬란하게 비춰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호승·시인, 1950-) + 햇빛 바람 손가락에 침 발라 쏘옥 쏙 쏙 장에 가는 엄마 내다보려 문풍지를 쏘옥 쏙 쏙 아침에 햇빛이 반짝 손가락에 침 발라 쏘옥 쏙 쏙 장에 가신 엄마 돌아오나 문풍지를 쏘옥 쏙 쏙 저녁에 바람이 솔솔. (윤동주·시인, 1917-1945) + 햇살의 분별력 감나무 잎에 내리는 햇살은 감나무 잎사귀만하고요 조릿대 잎에 내리는 햇살은 조릿대 잎사귀만하고요 장닭 벼슬을 만지는 햇살은 장닭 벼슬만큼 붉고요 염소 수염을 만지는 햇살은 염소 수염만큼 희고요 여치 날개에 닿으면 햇살은 차르륵 소리를 내고요 잉어 꼬리에 닿으면 햇살은 첨버덩 소리를 내고요 거름더미에 뒹구는 햇살은 거름 냄새가 나고요 오줌통에 빠진 햇살은 오줌 냄새가 나고요 겨울에 햇살은 건들건들 놀다 가고요 여름에 햇살은 쌔빠지게 일하다 가고요 (안도현·시인, 1961-) +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햇볕에 드러나면 짜안해지는 것들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햇살이 닿으면 왠지 슬퍼진다 실내에 있어야 할 것들이 나와서 그렇다 트럭 실려 가는 이삿짐을 보면 그 가족사가 다 보여 민망하다 그 이삿짐에 경대라도 실려 있고, 거기에 맑은 하늘이라도 비칠라치면 세상이 죄다 언짢아 보인다 다 상스러워 보인다   20대 초반 어느 해 2월의 일기를 햇빛 속에서 읽어보라 나는 누구에게 속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진다 나는 평생을 2월 아니면 11월에만 살았던 것 같아지는 것이다  (이문재·시인, 1959-) +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을 아시는가 이것은 나락도 거두어 갈무리하고 고추도 말려서 장에 내고 참깨도 털고 겨우 한가해지기 시작하던 늦가을 어느 날 농사꾼 아우가 한 말이다 어디 버릴 것이 있겠는가 열매 살려내는 햇볕, 그걸 버린다는 말씀이 당키나 한가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은 끊임없이 무언갈 자꾸 살려내고 싶다는 말이다 모든 게 다 쓸모가 있다 버릴 것이 없다 아 그러나 나는 버린다는 말씀을 비워낸다는 말씀을 겁도 없이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욕심 버려야 보이지 않던 것 비로소 보인다고 안개 걷힌다고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아니다, 욕심도 쓸모가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마음으로 보면 쓸모가 있다 세상엔 지금 햇볕이 지천으로 놀고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뜻을 아는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다 사람아 사람아 젖어있는 사람들아 그대들을 햇볕에 내어 말려 쓰거라 끊임없이 살려내거라 놀고 있는 햇볕이 스스로 제가 아깝다 아깝다 한다 (정진규·시인, 1939-)     + 노을 누군가 삶을 마감하는가 보다 하늘에는 붉은 꽃이 가득하다 열심히 살다가 마지막을 불태우는 목숨 흰 날개의 천사가 손잡고 올라가는 영혼이 있나보다 유난히 찬란한 노을이다. (서정윤·시인, 1957-) + 노을    저녁노을 붉은 하늘 누군가 할퀸 자국 하느님 나라에도 얼굴 붉힐 일 있는지요? 슬픈 일 속상한 일 하 그리 많은지요? 나 사는 세상엔 답답한 일 많고 많기에 … (나태주·시인, 1945-) + 석양 바닷가 횟집 유리창 너머 하루의 노동을 마친 태양이 키 작은 소나무 가지에 걸터앉아 잠시 쉬고 있다 그 모습을 본 한 사람이 '솔광이다!' 큰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좌중은 박장대소가 터졌다 더는 늙지 말자고 '이대로!'를 외치며 부딪치는 술잔 몇 순배 돈 후 다시 쳐다본 그 자리 키 작은 소나무도 벌겋게 취해 있었다 바닷물도 눈자위가 볼그족족했다 (허형만·시인, 1945-) + 노을 해는 온종일 스스로의 열로 온 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여 놓고 스스로 그 속으로 스스로를 묻어간다 아, 외롭다는 건 노을처럼 황홀한 게 아닌가. (조병화·시인, 1921-2003) + 노을    보내고 난 비인 자리 그냥 수직으로 떨어지는 심장 한 편 투명한 유리잔 거기 그대로 비치는 첫이슬 빨갛게 익은 능금나무 밭 잔잔한 저녁 강물 하늘에는 누가 술을 빚는지 가득히 고이는 담백한 액체 아아, 보내고 나서 혼자서 드는 한 잔의 술. (홍해리·시인, 1942-) + 노을 바이올린을 켜십시오 나의 창가에서 타오르던 오늘 상기된 볼 붉은 빛 속에 가만히 감추고 사랑의 세레나데를 연주해 주십시오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주십시오 곧 다가올 달빛 함께 가벼운 춤 출 수 있게 고운 선율로 복숭아 빛 그대 볼 감싸 안게 다가오십시오 떠나버린 한낮의 뜨거움을 새악시 외씨버선처럼 조심스레 산등성이에 걸어 놓고 또다시 돌아올 아스라한 새벽 빛 맞으러 길 떠날 수 있게 사뿐한 사랑으로 그대 내게 오십시오 (전은영·시인) + 황혼까지 아름다운 사랑 젊은 날의 사랑도 아름답지만 황혼까지  아름다운 사랑이라면 얼마나 멋이 있습니까 아침에 동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는 태양의 빛깔도 소리치고 싶도록 멋이 있지만 저녁에 서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지는 태양의 빛깔도 가슴에 품고만 싶습니다 인생의 황혼도 더 붉게 붉게 타올라야 합니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기까지 오랜 세월 하나가 되어 황혼까지 동행하는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입니까. (용혜원·목사 시인, 1952-)     [출처] '해(태양), 노을'에 관한 시(모음)|작성자 국어공부    
881    평화야, 어서 빨리 오너라... 닐리리 우리 함께 놀아나 보쟈... 댓글:  조회:2211  추천:0  2017-12-09
   + 아름다운 세상  이름도  생김새도 다른  참새 비둘기 갈매기들이 한데 어울려  모이 쪼는 광경을 봅니다  서로 싸우지 않고  양식 나누는 그 모습이  너무도 어여쁩니다  오갈 데 없이 남루한 흑인 하나가  느긋한 표정으로  먹이 봉지 안고 서서  한 줌씩 천천히 뿌려줍니다  아, 우리가 진정 원하는 세상이란  바로 저런  조화가 아닐까요  (이동순·시인)  +담쟁이덩굴  비좁은 담벼락을  촘촘히 메우고도  줄기끼리 겹치는 법이 없다.  몸싸움 한 번 없이  오순도순 세상은  얼마나 평화로운가.  진초록 잎사귀로  눈물을 닦아주고  서로에게 믿음이 되어주는  저 초록의 평화를   무서운 태풍도  세찬 바람도  어쩌지 못한다.  (공재동·시인)  + 평화  누구라도 그를 부르려면  속삭임으론 안 된다.  자장가처럼 노래해도 안 된다.  사자처럼 포효하며  평화여, 아니 더 크게  평화여, 천둥 울려야 한다.  그 인격과 품위  그 아름다움과 평등함  그가 만인의 연인인 점에서도  새 천년 이쪽저쪽의 최고인물인  평화여 부디 오너라고  사춘기의 순정으로  피멍 무릅쓰고 혼신으로  연호하며 불러야 한다.  (김남조·시인)  + 평화나누기  일상에서 작은 폭력을 거부하며 사는 것  세상과 타인을 비판하듯 내 안을 잘 들여다보는 것  현실에 발을 굳게 딛고 마음의 평화를 키우는 것  경쟁하지 말고 각자 다른 역할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  일을 더 잘 하는 것만이 아니라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  좀더 친절하고 더 잘 나누며 예의를 지키는 것  전쟁의 세상에 살지만 전쟁이 내 안에 살지 않는 것  총과 폭탄 앞에서도 온유한 미소를 잃지 않는 것  폭력 앞에 비폭력으로, 그러나 끝까지 저항하는 것  전쟁을 반대하는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이 평화의 씨앗을 눈물로 심어 가는 것  (박노해·시인)  + 내 손과 발로 무엇을 할까  세끼 밥 굶지 않고 나 혼자 등 따뜻하다고 행복한 게 아닙니다.  지붕에 비 안 새고 바람 들이치지 않는다고 평화로운 게 아닙니다.  내가 배부를 때 누군가 허기져 굶고 있습니다.  내가 등 따뜻할 때 누군가 웅크리고 떨고 있습니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발걸음 옮길 때 작은 벌레와 풀잎이 발 밑에서 죽어갑니다.  남의 허물을 일일이 가리키던 손가락과  남의 멱살을 무턱대고 잡아당기던 손아귀와  남의 얼굴을 함부로 치던 주먹을 거두어야 할 때입니다.  가진 것을 나누는 게 사랑입니다.  사랑해야 우주가 따뜻해집니다.  내 손을 행복하게 써야 할 때입니다.  내 발을 평화롭게 써야 할 때입니다.  (안도현·시인)  + 평화平和에 대하여  풀어 말하자면  세상이 잔잔한 수면처럼  고르고 평평하여  수확한 벼를 여럿이  나눠 먹는 일이 평화다.  그래서 전쟁을 겪어본 사람만이  벼와 밥이 평화라는 것을 안다.  심각한 얼굴로 승용차를 타고  바삐 달려가는 도시 사람에게  세상은 아직 전쟁 중이고,  올해도 황금 풍년이 찾아온  은현리 들판은 여전히 태평성대다.  농부 한 사람 느릿느릿  논두렁길을 걸어가며 활짝 웃는다.  그 얼굴이 평화다  (정일근·시인)  + 평화의 걸음걸이  1.  1950년 늦여름  지리산 어느 마을에서의 일이다  새벽녘 동구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마을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그 외길을 지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한다  국군과 인민군이 총구를 겨누며 대치하고 있는  양쪽 산자락 사이 좁은 오솔길,  주민들은 숨죽이고 총탄의 여울을 건너갔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외쳤다  아가, 뛰지 마라, 절대 뛰어서는 안 된다!  천천히, 천천히 걸어야 한다!  그 외침을 방패 삼아 걷고 있는 소년 앞으로  한 청년이 겁에 질려 뛰기 시작했다  문득 총성이 들렸고 청년은 쓰러졌다  숨죽여 걷는다는 일,  그것이 소년에게는 가장 어려운 싸움이었다고 한다  2.  평화의 걸음걸이란  총탄의 여울을 건너는 숨죽임과도 같은 것  두려워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두려움과 싸우며   총탄의 속도와는 다른 속도나 기척으로 걸어가는 것  심장을 겨눈 총구를 달래고 어루만져서 거두게 하는 것  양쪽 산기슭의 군인들이 걸어 내려와 서로 손잡게 하는 것  그 날까지 무릎으로 무릎으로 이 땅의 피먼지를 닦아내는 것   (나희덕·시인)  + 만일 통일이 온다면 이렇게 왔으면 좋겠다  여보야  이불 같이 덮자  춥다  만약 통일이 온다면 이렇게  따뜻한 솜이불처럼  왔으면 좋겠다  (이선관·시인)  + 받들어 꽃  국군의 날 행사가 끝나고  아이들이 아파트 입구에 모여  전쟁놀이를 한다  장난감 비행기 전차 항공모함  아이들은 저희들 나이보다 많은 수의  장난감 무기들을 횡대로 늘어놓고  에잇 기관총 받아라 수류탄 받아라  미사일 받아라 끝내는 좋다 원자폭탄 받아라  무서운 줄 모르고  서로가 침략자가 되어 전쟁놀이를 한다  한참 그렇게 바라보고 서 있으니  아뿔사 힘이 센 304호실 아이가  303호실 아이의 탱크를 짓누르고  짓눌린 303호실 아이가 기관총을 들고  부동자세로 받들어 총을 한다  아이들 전쟁의 클라이맥스가  받들어 총에 있음을 우리가 알지 못했듯이  아버지의 슬픔의 클라이맥스가  받들어 총에 있음을 아이들은 알지 못한다  떠들면서 따라오는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과 학용품 한아름을 골라주며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 앞에서  나는 얘기했다  아름답고 힘있는 것은 총이 아니란다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과 별과  나무와 바람과 새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서 늘 피어나는  한 송이 꽃과 같은 것이란다  아파트 화단에 피어난 과꽃  한 송이를 꺾어들며 나는 조용히 얘기했다  그리고는 그 꽃을 향하여  낮고 튼튼한 목소리로  받들어 꽃  하고 경례를 했다  받들어 꽃 받들어 꽃 받들어 꽃  시키지도 않은 아이들의 경례소리가  과꽃이 지는 아파트 단지를 쩌렁쩌렁 흔들었다.  (곽재구·시인)  + 평화를 주세요  촛불 하나 밝히며  소원을 빕니다.  예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평화를 주세요  이 땅에  이라크에  온 우주에  눈물나도록 아름다운  당신의 평화를 주세요  (박분도)  + 평화 오, ...여  나로 하여금 당신의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범죄가 잇는 곳에 용서를  분쟁이 있는 곳에 화해를  잘못이 있는 곳에 진리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오, 하나님이시여,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게 하시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게 하시고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주는 가운데서 받고  용서하는 가운데서 용서받고  죽는 가운데서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시스)  + 평화의 기술자들  평화의 성령이여, 오소서.  그리고 우리에게 용서하는  기술을 가르쳐 주소서.  화해하는 기술,  인내의 기술,  서로 존경하는 기술,  서로 나누는 기술,  단결하는 기술,  모든 사람을 받아들일 줄 아는  기술을 가르쳐 주소서.  그들을 적으로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  내 형제 자매로 받아들이는  기술을 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당신 평화의 나라를 건설하는  그런 기술자들이 되도록 이끌어 주소서.  아멘.  (꼰솔라따 도회)              
880    작은것과 큰것... 댓글:  조회:2413  추천:0  2017-12-07
   + 이슬 곁에서  안간힘을 쓰며  찌푸린 하늘을  요동치는 우주를  떠받치고 있는  저 쬐그만 것들  작아서, 작아서  늘 아름다운 것들,  밑에서 밑에서  늘 서러운 것들.  (조태일·시인)  + 작은 것  웅덩이가 작아도  흙 가라앉히면  하늘 살고  구름 살고  별이 살고  마당이 좁아도  나무 키워 놓으면  새가 오고  매미 오고  바람 오고  (황 베드로)  + 쌀 한 톨  쌀 한 톨 앞에 무릎을 꿇다  고마움을 통해 인생이 부유해진다는  아버님의 말씀을 잊지 않으려고  쌀 한 톨 안으로 난 길을 따라 걷다가  해질녘  어깨에 삽을 걸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  (정호승·시인)  + 너는 꽃이다     나는 오늘 아침  울었습니다  세상이 너무 눈부시어  울었습니다  어디서 날아왔을까  아파트 10층 시멘트벽 물통 사이  조막손을 비틀고 붉게  온몸을 물들인 채송화 하나  그래도 나는 살아 있다  눈물인 듯 매달려 피었습니다  무릎을 꿇는 햇살 하나  그를 껴안은 채  어깨를 떨고 있었습니다  (이도윤·시인)  + 가끔은 작고 아름다운 것이  냇물이 흙에 스미며  스스로 제 몸을 조금씩 줄이는 일  가끔은 저렇게 작고 아름다운 것이  내 가슴을 칠 때가 있네  시인이 시를 쓰려고 만년필 뚜껑을 여는 일  저녁이 되어 세상의 아낙들이 쌀을 씻으려고  쌀독의 뚜껑을 여는 일  착한 소와 말들이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마구간에서 고단한 눈을 감는 일  저 작고 아름다운 것이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크고 거룩하게 보일 때가 있네  (이기철·시인)  + 거인의 나라  '모두들  큰 소리로만 말하고  큰 소리만 듣는다  큰 것만 보고 큰 것만이 보인다  모두들 큰 것만 바라고  큰 소리만 쫓는다  그리하여  큰 것들이 하늘을 가리고  큰 소리가 땅을 뒤덮었다  작은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고  아무도 듣지를 않는  작은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아무도 보지를 않는  그래서  작은 것 작은 소리는  싹 쓸어 없어져버린  아아,  우리들의 나라 거인의 나라  (신경림·시인)  + 작은 것들  작은 물방울  작은 모래알,  그것이 큰 바다가 되고  그리도 아름다운 옥토가 된다.  작은 때의 한 순간 한 순간  그것이 비록 보잘것없다 해도,  그것은 영원이라고 하는  큰 시대가 된다.  작은 친절,  작은 사랑의 말,  그것이 지구를 에덴으로 만든다.  마치 하늘나라처럼.  젊은이의 손에 의해 뿌려진  작은 자신은 자라  머나먼 이국에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푼다.  (줄리아 카아니)  + 작은 기쁨  우리들의 대부분은  큰 상을  받지 못한 채  인생을 삽니다.  퓰리처상  노벨상  오스카상  그러나 우리 모두는  인생의 작은 기쁨을  누릴 수는 있습니다.  등을 두드리는  격려의 손길  귀의 뒷편에 받는  가벼운 키스  낚시로 잡은  4파운드의 농어  보름달  바스락거리는 모닥불  황홀한 일몰  따뜻한 국  시원한 맥주  인생의 큰 상을 잡으려고  조급해하지 말고  아주 작은 기쁨을  즐기세요.  우리 모두를 위해  충분히  준비되어 있습니다.  (글래이 매터)  + 모든 것은 하나부터      한 곡의 노래가 순간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  한 자루의 촛불이 어둠을 몰아낼 수 있고,  한 번의 웃음이 우울함을 날려보낼 수 있다.  한 가지 희망이 당신의 정신을 새롭게 하고,  한 번의 손길이 당신의 마음을 보여 줄 수 있다.  한 개의 별이 바다에서 배를 인도할 수 있다.  한 번의 악수가 영혼에 기운을 줄 수 있다.  한 송이 꽃이 꿈을 일깨울 수 있다.  한 사람의 가슴이 무엇이 진실인가를 알 수 있고,  한 사람의 삶이 세상에 차이를 가져다준다.  한 걸음이 모든 여행의 시작이고,  한 단어가 모든 기도의 시작이다.  (틱낫한·스님)  +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텔레비전을 끄자  풀벌레 소리  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어온다  어둠 속에서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  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다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  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  브라운관이 뿜어낸 현란한 빛이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 동안  그 울음소리들은 수없이 나에게 왔다가  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갔을 것이다  하루살이들처럼 전등에 부딪쳤다가  바닥에 새까맣게 떨어졌을 것이다  크게 밤공기 들이쉬니  허파 속으로 그 소리들이 들어온다  허파도 별빛이 묻어 조금은 환해진다  (김기택·시인)  + 작은 것  내 마음의 풍경을  바꾸어 놓는 것은  결코 큰 일이 아니라  거창한 것이 아니라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작은 것들이다  찰나에 스친  누군가의 다정한 눈빛에  내 마음은  따스한 모닥불이 되고  가시 돋친  누군가의 싸늘한 말 한마디에  내 마음은  한여름에도 겨울이 된다  여리고도 여린  사람의 마음이여  (정연복)   
879    [사투리공부] - 시 "진달래꽃"를 강원도 사투리로 보기 댓글:  조회:2472  추천:0  2017-12-06
강원도 대표작물이라고 할 수 있는 옥수수가 얼마 전 사투리로 무엇인지 맞추는 것이 TV에 나왔는데요. 우연찮게 보게 된 건데 '하숙집딸들'에서 배우 이미숙씨가 엉뚱한 답을 하길래 한참 웃기도 했습니다. '옥덱기'가 옥수수의 강원도 방언입니다.  '자박서이'는 '머리카락'이라는 뜻이고, '진갈비'는 '진눈깨비'라는 뜻입니다. 이렇듯 모르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사투리들이 꽤 됩니다. 맛있는 '알밤'을 '차래기'로 부르기도 합니다. 총을 겨누다 할 때 '겨누다'는 강원도말로 바꾸면 '존주다'라는 말이 됩니다. 지난해 한식대첩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지렁물'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는데, 이건 '간장'을 뜻하는 말입니다.  다음은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을 강원도 사투리로 바꿔본 것인데, 약간 과장이 들어가 있기는 합니다. 재미로 보세요. ^^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신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나 보는 기 매해서, 들구번질 저는 입두 쩍 않구 신질루 보내 드릴 기래요 영변에 약산 빈달배기, 참꽃 한 보탱이 따더 내재는 질가루 훌훌 뿌레 줄 기래요 내걸리는 발자구 발자구 내꼰진 참꽃을, 찌져밟구 정이 살패가시우야 나 보는 기 재수바리 읎서 내 쮤 저는 뒈짐 뒈졌지 찔찔 짜잖을 기래요 - 강릉 사투리 보존회 작품 -  
878    {쟁명} - 하이퍼시는 두차례 이상의 "도주"가 있어야... 댓글:  조회:2969  추천:0  2017-12-01
하이퍼시 10대 촉구 6. 하이퍼시는 고정이 아니라 도주를 촉구 2017년 11월 30일 작성자: 최룡관   시간은 도주를 하고있다. 한초도 쉬지 않고 도주를 하고 있다. 시간의 도주는 어떠한 힘으로도 어떠한 물질로도 막을수 없는 도주이다. 시간의 도주를 따라 모든 사물들도 따라서 도주한다. 사람도 도주한다. 정자와 란자가 만나는것도 도주하다가 만나는거고 만나서 엄마의 자궁속에서 자라 애기가 되는것도 도주이고, 어머니배속에서 나오는것도 도주이고, 애기로부터 아이가 되고 소년(소녀)으로 되고 , 소년(소녀)로 된 다음에는 청년으로 되고 장년으로 되고 로인으로 되고 죽어가고 이 모든것은 다 도주이다. 식물들도 도주한다. 접시꽃이 씨앗에서 새싹이 나오고, 잎이 피고 ,줄기가 껑충하게 자라다가 꽃을 피우고, 꽃이 이울고, 열매를 맺고 익히고, 접시꽃자체가 말라들어 죽고, 또 썩어서 흙이 된다. 이 모든것이 도주이다. 이런 도주는 혈통이 있고, 선후가 있고, 체계가 있고, 력사가 있다. 시는 이런 도주와는 다르다. 혈통도, 선후도, 체계도, 력사도, 인생철학과도  관계가 없는 도주이다. 도주를 통하여 (210쪽)   별자리 바람자리 이마 짚어보며 기록한 25시간의 기상관측 나무잎사이에서 솔깃 지구의 률동소리 엿듣는 큰 귀 작은 귀들   신록의 가지끝새 수락한 영상통화 남극의 고래가 전해온 계속되는 비행접시의 방랑   월드컵축구경기 환호성속에 아프리카여인의 절앓이 소리 이른 봄 3월에 언발   빠리패선박람회로 달리는 비행기 그뒤로 동해의 폭풍을 퍼붓는 노르웨이 전나무숲 붉은 머리 기차 길들이 떠있는 허공을 달린 미지의 플래트홈   바스락바스락 낙엽이 잠들기 좋은 러시아녀인들의 치마자락   제 1회 리상화문학상을 받은 려순희 시 의 전문이다. 제목은 이지만 내용은 결코 고요하지 않다. 거이 행마다 새로운 사물들이 뛰쳐나와 얼굴을 내밀거나 엉덩이를 비쭉 하고는 사라진다. 여러마리 올챙이들이 겨끔내기로 물우에 머리를 내밀었다가 물속으로 쏙 들어가는 경상이다. 한마디로 도주이다. 시적인 도주가 어떤것인가? 하나의 물질에서 그와는 관계가 없는 새로운 물질이 생성되고 움직이는것이라고 할수 있다. 사물들의 도주로 하여  하이퍼시가 태여난다고 할수 있다. 도주는 행과 행사이에서 벌어지기도 하고 련과 련사이에 벌어지기도 하고 한행에서 벌어지기도 한다.   월드컵축구경기 환호성속에 아프리카여인의 절앓이 소리 이른 봄 3월에 언발    의 제3련이다. 행마다 다른 이미지다. 월드컵경기 환호성과 아프리카여인의 젖앓이 소리는 왕청같이 다른 이미지다. 제3행도 위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이다. 이렇게 련계도 안되는 물질들의 움직임의 련속을 도주라고 한다. 상기한 련은 행과 행사이에서 벌어지는 도주라고 할수 있다.   빠리패선박람회로 달리는 비행기 그뒤로 동해의 폭풍을 퍼붓는 노르웨이 전나무숲 붉은 머리 기차 길들이 떠있는 허공을 달린 미지의 플래트홈    제 4련이다. 찬찬히 읽어보면 앞의 한행이 하나의 도주이고 뒤의 두세행이 하나의 도주이고, 제4행이 하나의 도주이고, 5,6행이 어울려 하나의 도주이라고 할수 있다.  도주를 나누는 표준은 내용이라고 할수 있다. 내용이 달라지면 도주가 변한다고 하겠다. 즉 차원의 다름이다.   한행에서 도주가 형성되는 경우는 두가지가 있다겠다. 한가지는 처럼 현실에서 초월로 도약하는 경우라고 하겠다. 다른 한가지는 초월에서 초월로 이어지는 경우라겠다. 이런 시행이 있다고 하면 초월에서 초월로 도주한것이라고 하겠다. 란것이 하나의 도주이고, 그위로 는 앞의 초월에서 새로운 초월이 산생된것이라고 할수 있다.  여기서 현대시와 하이퍼시의 구별이 산생된다. 현대시는 한번도주한것으로 시를 만들수 있지만  하이퍼시는 한번의 도주로 시가 아니된다. 하이퍼시는 여러번의 도주를 집성하여 시를 만들게 되는것이다. 그리하여  현대시는 일반적으로 하나의 주제를 추구하지만 하이퍼시는 여러가지 주제를 추구하게 된다. (.397쪽. 들뢰즈. 가타 리) 인간만 절편적인것이 아니라  사물도 절편적이다. 절편된다는것은 도주가 있기때문이다. 모든 절편은 새로운 절편을 낳게 되는것처럼 모든 도주는 새로운 사물을 낳게 된다. 절편되는것은 련계되기 위함이고  련계되는것은  절편되기 위한것이다. 절편과 련계는 대립통일을 이루는 모든 사물의 공동의 성질이라고 할수 있다. 시속의 사물은 흐르는 물처럼 그냥 움직이게 된다. 움직이기만 하면 새로운 사물이 생성되는데 이것은 새로운 절편의 생성으로서 시 쓰는 기교이다. 당신은 이런 도주를 생각하고 상상하고 시에 리용한적이 있는가를 정신을 가다듬어 생각해볼 일이다. 사물과 사물사이에 모순이 있기에 도주가 일어나게 된다. 도주는 운동이다. 한사물이 다른 사물로 되는 운동이다. 이러한 운동은 계통성이나 체계성 및 력사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454쪽)이다. 이런 소통은 모방도 아니고 동일화도 아니고 통일화도 아니고 새로운 생성이고 새로운 집합이라고 할수밖에 없다.  하이퍼시는 모순속에서 새로운 모순이 나타난다. 항상 새로운 모순이 나타나는것은 도주의 조건이고, 한사물이 다른 사물로 둔갑하는것은 도주의 완성이며 결실이다. 완성과 결실은 또다시 새로운 도주를 바라게 된다. 그래서 도주는 끝이 없다. 한국 이선시인이 쓴 을 보면 도주가 명백해지리라 생각된다.   딸아이, 까만 눈동자 낙타가 사막위를 뜀박질하오 “히힝” 기쁜 소리들이 어제 펴놓은 이불위에 뽀드득, 발자국을 남깁니다 사막여우눈속, 깊은 샘에서 덜자란 호수속에 반짝이는 초승달이 박혀있다는 깨달음   내일 아침밥은 아내눈속에서 지는 저녁놀 나는 맨발로 출근합니다           ㅡ전문   이선시인의 시 은  도주의 한 본보기라겠다. 도주란 한 사물에서 다른 사물로 뛰여넘기라고 할수 있다.   딸아이, 까만 눈동자 낙타가 사막위를 뜀박질하오 “히힝” 기쁜 소리들이 어제 펴놓은 이불위에 뽀드득, 발자국을 남깁니다   첫련이다. 딸의 까만 눈동자뒤에 사막위를 뜀질하는 락타가 나오고, 그담에는 기쁜 소리가 나오고, 그담에는 어제 펴놓은 이불위에서 뽀드득거리는 발자국이 나온다. 시에 등장하는 모든 사물은 도주하기에 바쁘다. 이 사물들은 동일성이나 동질성이 작용하여 도주하는것이 아니라 언어의 통사론적기능에 의하여 도주한다. 뒤에 사물은 앞의 사물과 관계도 없고 련계도 없이 자유롭게 등장하고있다. 이 자유로운 등장이 바로 도주의 표징이며 이 사물에서 저 사물로 뛰여가기이다.이런 도주는 어떠한 기준도 없다. 시인의 상상에 의하여 자유로운 도주만이 있을뿐이다. 도주에는 링크(련결)가 알리는 도주와 링크가 알리지 않는 도주가 있다. 이선의 시는 링크가 알리는 도주이다. , ,  등이 각련에 배치되여있는데 을 링크로 볼수 있다. 시의 내용이 눈이라는 동일한 사물에 의거하여 흘러가고 있는것이다. 이것은 체언의 경우이다. 도주는 체언을 중개로 도주할뿐만 아니라 용언을 중개로 도주하기도 한다.   눈물 김춘수   남자와 녀자의 아래도리가 젖어있다 밤에 보는 오갈피나무 오갈피나무의 아래도리가 젖어있다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새가 되였다고 한다 발바닥만 젖어있었다고 한다.          ㅡ 전문 김춘수의 의 경우가 바로 용언을 중개로 도주하는 경우이다. 는 용언이 중개로 되여 눈물이라는 시가 씌여졌다고 볼수 있다. , ,  모두가 는 용언과 관계를 맺고있는것이다. 어떤 하이퍼시는 이와 완전히 다르다. 아무런 련계를 가지지 않고 무작정 엉뚱하게 리좀들의 도약과 쇄신만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전형적인시는 조향의 인데 많은 사람들이 론하였기에 우리는 한국 위상진시인의 시를 한수를 보자.   여름감기 위상진   의사가 목안으로 스텐막대를 밀어넣을 때, 비는 내리고 푸른 곰팡이는 벽으로 번지고   지하철스크린도어앞에서 나는 주머니속에서 빠져나간 줄시계처럼 늘어졌다   불편한 자세로 키스를 하고있는 얼음조각같은 녀인들 그림 없는 액자밖에는 부엉의 날개모양의 이파리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죽은 사람의 전화번호처럼 납작해진 길고양이 바닥을 할퀴고 물의 무덤으로 끌려간 두개의 발   붉은 웅덩이를 이어붙인 검회색 하늘 구름은 내 가방으로 흘러들었다. 목쉰 소리를 내며   축축한 시간은 강으로 버려지고 나는 물의 얼굴을 빠져나가지도 못했다 현기증나는 약봉지는 흰죽처럼 번졌다                     ㅡ 전문   위상진시는 마침표가 없어서 독자들이 계속 아래를 써내려갈수도 있다는 공간을 내주고있는 같다. 모두 여섯련으로 되였는데 통일되는 어떤 언표가 없다. 려순희 시 도 이와같은 맥락이다. 온갖 몽타쥬가 다 허용되여있다는것은 이런 시를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2련을 제외하고는 한개련에 둘이상의 이미지가 겹쳐져있다. 그것도 차원이 다른것들이다. 조향의 처럼 이색적이라고 할만한것 같다. 이렇게 아무런 조건도 없이 차원을 달리하는것도 도주라고 하겠다. 이런 도주를 초링크라고 말함이 적당할것 같다.  도주는 시의 공간확장에 속한다. 어떤것이 공간확장인가? 의 첫련만 보아도 잘 알린다.    의사가 목안으로 스텐막대를 밀어넣을 때, 비는 내리고 푸른 곰팡이는 벽으로 번지고   여기서는 시가 세가지 사실로 구성되여 있다. 는것이 한개 사실이고, 가 다른 한개 사실이고, 가 또 다른 한개 사실이다. 이 세가지 사실은 도주로 형성된것이고 한개련에 집성된 사실이다. 첫내용은 현실이라고 말할수 있지만 그담 두가지 사실은 가상현실이라고 할수 있다. 현실이든 가상현실이든 각각 차원이 다르다. 차원이 다르기에 공간이 넓혀졌다고 하겠다. 하이퍼시는 현대시토양에서 태여났지만 현대시와 예술적으로 각이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차원이 다른 여러가지 도주로 표현되기 때문일것이다. 이 명제에 리해를 돕기위하여 연변 조룡남시인이 쓴 현대시 한수를 더 보기로 하자.   옥을 파간 자리 조룡남   내 가슴에는 웅덩이 하나 그것은 오래전에 옥을 파간 자리 나는 모른다 그 옥이 지금은 누구의 머리를 장식했는지   내 가슴에는 웅덩이 하나 그것은 오래전에 옥을 파간 자리 오늘도 웅덩이엔 허연 소금이 돋치여 마를줄 모르는 비물 눈물이 고여있다.                 ㅡ 전문   중국조선족시단으로 말하면 현대시의 명시에 속하는 시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하이퍼시관념으로 보면 이 시는 현대시일뿐 하이퍼시에 속할수 없는 시다. 왜 그런가? 시종 라는 이 변형 한가지를 중심으로 시가 시작되고 전개되고 종결되였기때문이다. 이런 시는 한번의 도주밖에 없고 차원의 변화가 없다. 하이퍼시는 반드시 두차이상의 도주가 있어야 하고 차원이 달라야 한다. 련을 대상으로 하든 행을 대상으로 하든 완전히 각이한 이미지로 시가 구성되여야 하는것이다. 이쯤 말하면 도주가 리해되리라 믿는다, 하이퍼시에서는 항상 사물이 움직이고 무언가 도주하고 있다는것이 중요한 명제의 하나이다. 다음 장으로 건너가 보자. ================== 절대 만나서는 안 될 남자 유형 20 작성자: 계화 1. 연애에 목숨 거는 눈물겨운 인간 접착제. ‘Mr. 기생충’  2. 볼 때마다 늘 술에 취해 찌들어 있다. ‘Mr. 술고래’  3. 목적은 오직 하나. 섹스에 죽고 산다. ‘Mr. 비아그라’  4. 최면술로 여자를 혼란에 빠뜨리는 요상한 남자. ‘Mr. 사이비교주’  5. 세상 여자는 다 내 거야. 건들지 마라. ‘Mr. 카사노바’   6. 24시간 입만 열면 나불나불. ‘Mr. 주둥이’   7. 입만 열면 허풍. 신용도 없고 의리도 없다. ‘Mr. 뻥쟁이’   8. 죽어도 비싼 옷을 입고, 비싼 차를 타야만 직성이 풀리는 유형. 겉으로 드러나는 멋을 최우선 순위로 두는, 폼에 살고 폼에 죽는다. ‘Mr. 폼생폼사’  9. 말솜씨만 예술적 경지. ‘Mr. 음유시인’   10.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실속 없는 백과사전. ‘Mr. 아는 척’  11. 법보다 주먹이 앞선다. ‘Mr. 주먹대장’   12. 따뜻하게 미소 짓지만, 입만 열면 날카로운 면도칼. ‘Mr. 비평가’  13. 넘치는 친절 뒤에 숨어있는 검은 속셈. ‘Mr. 엉큼이’  14. 동네방네 신출귀몰. 바쁘다, 바빠. ‘Mr. 공사다망’  15. 넌 오직 나 혼자만의 것, 누구도 접근 금지. ‘Mr. 독점욕’  16. 타고난 에고이스트, 불치의 왕자병 환자. ‘Mr. 나르키소스’  17. 내 마음 갈 곳을 잃은 우물 안 개구리. ‘Mr. 길잃은 철새’  18. 앞뒤 좌우 꽉꽉 막힘, 그를 보면 열통 터진다. ‘Mr. 벽창호’  19. 세상만사 뜻대로 맘대로, 무책임의 달인. ‘Mr. 헐렁이’   20. 엄마 품에 안주하는 영원한 10대 소년. ‘Mr. 마마보이’  ///문화일보
877    "미안합니다, 동주"... "윤동주를 려행하다"... 댓글:  조회:2787  추천:0  2017-11-30
[해외기별] 영화와 뮤지컬로 윤동주를 만나다 (ZOGLO) 2017년11월29일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 일본 릿쿄대학에서 행사에서 강연을 해주신 분들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영화・심포지엄 《새로운 과거로의 려행 - 다큐멘터리와 무대에서 만나는 윤동주》행사가 지난 11월 23일, 일본의 릿쿄대학에서 있었다 릿쿄대학 이문화커뮤니케이션학부가 한국 연세대학 윤동주기념사업회, 서울예술단과의 공동주최로 이번 행사를 펼쳤다.‘동아시아에 있어서의 다문화 공생사회의 구축과 문화교류’를 테마로 이향진교수(릿쿄대학 이문화커뮤니케이션학부)의 지도하에 학생들 자체가 이번 심포지엄을 기획하고 진행을 맡았다. 릿쿄대학 요시오카 도모야(吉岡 知哉)총장의 인사말과 주일 한국문화원 김현환 문화원장의 축사에 이어 2016년 한국 KBS 창사 43주년을 기념해 특별제작한 영화 《불멸의 청년, 윤동주》의 상영으로 제1부가 시작되였다. 윤동주의 성장 과정부터 죽음까지를 추적하며 영화의 사이사이에 그의 대표작을 내레이션해주는 형식의 영화는 윤동주 시의 미학과 사후 70년이 지나도록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시인의 문학세계를 조명하였다. 이어서 릿쿄대학 한국사무소 유시경 소장의 사회하에 와세다(早稻田)대학 명예교수 오오무라 마스오(大村 益夫), 영화 《불멸의 청년, 윤동주 》의 프로듀서인 한국KBS 제작본부 박병길, 작가이며 전 NHK 프로듀서인 타고 키찌로(多胡 吉郎),“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회” 창립인중의 한 사람인 야나기하라 야스코(楊原 泰子)의 강연 및 좌담회가 있었다. 이향진,오오무라교수(왼쪽 세번째 네번째)와 행사에 참가한 일부 재일조선족들 사상 최초 윤동주 무덤의 발견자이며 중국문학과 조선문학 연구학자인 오오무라 마스오교수는 라는 제목의 강연중에서 원고(시인의 습작노트)로 문학작품을 읽는 작업이 윤동주의 정본시집을 완성하는데 홀시할 수 없는 과정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원고는 시집으로 완성되여 가는 과정에 있다. 원고의 퇴고 흔적을 따라가야만 한걸음이라도 더 가까이 작품에 접근하고 작가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다가 갈수 있다.” “윤동주의 원고들은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고 시집도 많다. 원래 무명시인이였던 윤동주가 서서히 민족시인으로 정착되여 간 것은 윤일주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다. 그 정착과정에 윤동주의 짙은 개성과 지방색채가 희석되여 갔을 가능성이 있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수많은 이들이 윤동주의 시를 론하고 있다만 근본적으로 어떤 형태의 윤동주 시를 기반으로 론하고 있는지 알수 없는 경우가 있다. 말하자면 텍스트문제, 분명히 말씀 드리자면 완벽한 윤동주의 정본 시집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 《불멸의 청년, 윤동주 》의 박병길 프로듀서는 입사 5년차에 맡았던 짧은 두달미만의 영화제작과정을 회고하면서 “80년대 이전까지만해도 한국학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윤동주의 시가 1986년에 이르러 연구열을 보이게 되였고 많은 사람들이 윤동주가 애국시인이라는 것을 그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였다. 이런 점을 보아도 한국의 윤동주연구가 일본보다 뒤떨어져 있음을 느끼게 되였다.”라고 하면서 “제작과정에 윤동주는 한국 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시인이며 훌륭한 시와 훌륭한 예술에는 국경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그의 시가 증명해 주었다.”고 말했다. 시극《미안합니다, 동주》의 한장면 이날 행사 제2부에서는 릿쿄대학 이문화커뮤니케이션학부 학생들이 제작한 단편영화 《윤동주를 려행하다》가 상영되였고 한국 연세대학과 일본 릿쿄대학 재학생들에 의해 만들어진 시극 《미안합니다, 동주》가 출연되였다.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갖게 된 윤동주 심포지엄을 통해 선배인 윤동주를 모르는 재학생들에게 국가와 민족을 뛰여 넘어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을 이어 주는 윤동주를 알리고 그의 시의 매력을 같이 느끼고 싶었다는 제작자들과 출연자들의 열정과 정성이 돋보이는 작품들이였다. 뮤지컬
876    징그러워 보이기도 하면서 아름다운 예술세계... 댓글:  조회:4707  추천:0  2017-11-28
데이미언 허스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데미안 허스트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1965년 6월 7일 ~ )는 영국의 현대예술가로, 토막낸 동물의 시체를 유리상자 안에 넣어서 전시하는 그로테스크한 작품들을 주로 선보이고 있다. 영국 브리스틀 출생으로 리즈에서 성장하며 1986년 ~ 1989년 런던 골드스미스 대학 졸업 후 골드스미스 대학 학생들과 함께 기획한 프리즈 전시회를 기획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91년 첫 전시회에서는 죽은 상어를 포름알데히드를 가득 채운 유리 진열장에 넣어 전시한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육체적 불가능성》을 선보여 논란을 일으켰는데 사치 갤러리를 소유한 광고 재벌 찰스 사치와 갤러리 화이트 큐브를 소유한 제이 조플링의 후원을 받아 미술 시장 기록들을 갈아치웠다. 2005년과 2008년에는 미술전문지 아트리뷰가 선정하는 세계 미술계 영향력 있는 1위에 까지 오르기도 했고[1] 그의 나이 마흔 살에 1억 파운드의 경제적 가치가 있는 인물로 평가 받았다.[2] 1995년 런던 테이트 갤러리에서 터너 상을 수상했으며 베네치아 비엔날레, 로열 아카데미 등에서도 충격적인 작품들을 선보이며 논란을 낳았다. 주요 작품[편집]1990년. 유리 진열장에 피가 흥건한 소의 머리와 파리, 구더기, 설탕, 살충기, 물을 넣어 구성한 작품[3] 1991년. 포름알데히드 용액에 상어 사체를 넣은 허스트의 대표작[4] 2007년. 중세시대의 신원 미상의 유골에 8,601개의 다이아몬드를 박아 만든 작품[5] 참고[편집] 이동↑ 이영란 기자. 英데미안 허스트,‘땡땡이그림’ 신년대방출? 《헤럴드경제》 2012년1월25일. 이동↑ 도널드 톰슨 지음. 김민주, 송희령 옮김. 《은밀한 갤러리》83쪽. 2010년 출판. 리더스북출판사. ISBN 978-89-01-11604-4 이동↑ 서정임 기자.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가장 애절한 것은 무엇인가《경향신문》2012년6월27일 이동↑ 곽아람 기자.  전시실 밖으로 나온 '원반(원반 던지는 사람)'… 런던은 벌써 '문화 올림픽' 《조선일보》2012년7월23일 이동롯데갤러리 잠실 데미언 허스트 '다이아몬드 해골' 전시 2013년10월24일 =========================덤으로 더...   제작시기 1953년 가격 $137,500,000(1442억 6000만 원)1) 작가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 1904~1997)   윌렘 드 쿠닝, 〈여인 3〉, 캔버스에 유화 / 172.7×123.2cm “몇몇 화가나 비평가가 ‘여인’ 시리즈를 안 좋게 말합니다. 그런데 그건 그들의 문제일 뿐 내 문제는 아니에요. 나는 스스로 추상 화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이미지 같은 것들을 추상적인 이미지로 만든다는 건 어찌 보면 이상한 일이에요. 그런데 요즘은 모든 그림을 추상화냐, 추상화가 아니냐로 분류합니다. 추상적인 이미지를 안 그리는 것이 더 이상한 게 돼 버렸어요.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가 두렵습니다.” -윌렘 드 쿠닝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에는 윌렘 드 쿠닝의 그림이 두 점 나오는데 두 작품 모두 판 사람과 산 사람이 같다. 판 사람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영화 엔터테인먼트 사업가 데이비드 게펜이다. 바로 앞에 나온 폴록의 〈넘버 5〉를 판 바로 그 사람이다. 8000만 달러(839억 3000만 원)에 거래된 재스퍼 존스의 〈부정 출발〉과 6350만 달러(666억 2000만 원)에 거래된 드 쿠닝의 〈가제트 형사〉도 이 사람이 가지고 있다 판 것이니, 그가 얼마나 거물 컬렉터인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이 그림을 산 사람은 뉴욕의 헤지펀드 억만장자인 스티븐 코언이다. 컬렉터로서 스티븐 코언은 데이비드 게펜보다 더 유명하다. 스티븐 코언이 초고가의 미술품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2000년 무렵으로, 다른 유명 컬렉터들에 비해 그 기간이 짧다. 하지만 약 10년 동안 그림을 사는 데 10억 달러(1조 490억 원) 이상 쏟아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4년에 1200만 달러(126억 원)를 주고 데이미언 허스트의 유명한 설치 작품 〈상어(원제는 ‘The Physical Impossibility of Death in the Mind of Someone Living’)〉를 사서 세계 언론에 대서특필로 보도된 사람이 바로 스티븐 코언이다. 스티븐 코언은 ‘미술 시장’에 발을 늦게 디뎠지만 크리스티와 소더비 경매를 비롯해 세계적 갤러리들을 다니며 비싼 그림들을 싹쓸이했다. 그 덕분에 어떤 역사적 컬렉터 못지않게 훌륭한 컬렉션을 갖추게 되었다. 그가 한창 미술계의 주목을 받을 때 〈뉴욕 타임스〉는 1면을 할애해 ‘갑자기 떠오른 거물 컬렉터 스티븐 코언’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고, 뉴욕 소더비는 그의 컬렉션만 모아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는 2013년 기준 순 자산 93억 달러(9조 7570억 원)로 《포브스》가 집계한 세계 부자 순위 106위에 올라 있다. 이 두 사람의 그림 거래를 중개한 이는 래리 개고시언으로 알려졌다. 그는 한 해 매출액이 11억 달러(1조 540억 원)이며 세계 최고 갤러리로 꼽히는 개고시언 갤러리의 설립자이자 대표다. 이렇게 사고파는 과정에 등장하는 인물들 이름만으로도 입이 벌어지는 그림들은 비싼 그림 순위에서 충분히 높은 자리를 차지할 만하다. 게다가 〈여인 3〉은 스티븐 코언과 데이비드 게펜이 소장하기 전인 1994년까지는 테헤란 미술관 소장품이었다. 그림을 누가 가지고 있다가 어떤 경로를 통해 내놓았는지를 알 수 있는 ‘소장 기록(Provenance)’은 그림을 사고팔 때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이 그림은 참으로 뛰어난 소장 기록을 갖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거래에 얽힌 사람들이 대단하다는 것은 이 그림의 작가가 대단하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드 쿠닝은 폴록과 함께 추상 표현주의의 액션 페인팅 작가로 분류되지만, 그림에서 보다시피 스타일은 폴록과 완전히 달랐다. 사실 추상 표현주의 작가들은 모두 뉴욕에서 활동했고 추상화를 했다는 공통점 때문에 ‘뉴욕 스쿨’이라 불리지만, 작품 스타일은 천차만별이었다. 특히 드 쿠닝은 다른 추상 표현주의 작가들과 달리 종종 이 그림처럼 구상화에 가까운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1950년부터 1955년까지 여인을 소재로 그렸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이 그림처럼 우악스러운 초상화인 ‘여인’ 시리즈 대작으로 모두 여섯 점이 있다. 이 그림에서는 화가 자신이 여자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는지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다. 드 쿠닝의 아내 엘레인도 추상 표현주의 화가였는데 이들의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결혼 생활 대부분을 별거 상태로 살았으니 사실상 남남이나 다를 바 없었다. 드 쿠닝은 “여자는 가끔 짜증 난다”고 말했다. 그의 생각을 나타내기라도 하듯 이 그림에서 눈, 코, 입은 지나치게 크고, 이를 드러내고 웃는 표정은 괴기스럽다. 지나치게 큰 가슴을 드러낸 것도 보기 편하지 않고, 몸매는 일반적인 여성 모델에서 볼 수 있는 형태가 아니다. 한마디로 왜곡되고 비뚤어진 여인 초상이다. 그런데 단순히 드 쿠닝이 개인적으로 여성을 혐오했기 때문에 이렇게 뚱뚱하고 못생기고 무섭기까지 한 여인상을 그린 것은 아니다. 1950년대 미국은 소비가 팽창하고 각종 광고에서 여성의 상업적 이미지가 넘쳐 나던 때다. 여성은 언제나 상냥하고 예쁘고 섹시하게 그려졌다. 여성의 이런 이미지가 당연히 받아들여지던 시절에 드 쿠닝은 “이건 어때?”라며 이와 같은 그림을 내민 것이다. 즉 이 그림에는 드 쿠닝의 개인사 및 당시 사회 분위기와 얽힌 많은 감정이 들어 있다. 폴록의 드립 페인팅에서처럼 이 그림에서도 전후의 불안과 긴장감, 공포와 희열이 섞인 다이내믹한 시대 상황이 느껴진다. 드 쿠닝은 다른 추상 표현주의 작가들과 달리 여인 초상을 즐겨 그렸다. 뉴욕에 있는 화가들 모두가 구상화를 집어던지고 완전한 추상화만 그리던 1950년대에 ‘뉴욕 스쿨’의 핵심 멤버이던 드 쿠닝이 구상화, 게다가 닳고 닳은 소재인 여인 초상화로 다시 돌아간 것은 용감한 시도였다. 하지만 그의 여인 초상화는 결코 과거의 그림이 아니었다. 오히려 섹시하고 전형적인 과거의 여성 초상화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혁명적인 그림이었다. 시대를 잘 반영하면서도 작가의 개인사와 내면이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는 그림이라 드 쿠닝의 ‘여인’시리즈는 아주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그 ‘여인’ 시리즈 여섯 점 중 다섯 점은 미술관에 있고 이 작품만 유일하게 개인 컬렉터 손에 있었다. 그래서 이 그림이 1억 3750만 달러(1442억 6000만 원)라는 엄청난 가격에 팔릴 수 있었던 것이다. 데이미언 허스트(Damien Hirst, 1965~) 영국의 세계적 현대 미술 작가로, 1990년대에 이른바 ‘YBA(Young British Artists)’라는 그룹으로 불리며 전 세계 미술계를 놀라게 한 새로운 영국 아티스트들 중 최고의 위치에 있다. 죽은 동물, 알약 등 엽기적인 소재로 작품을 만들어 ‘미술이 될 수 있는 소재’의 경계를 허물었다. 그의 엽기적인 작품들은 시장에서 종종 수천만 달러(수백억 원)에 거래되어 생존 작가 작품의 가격 한계도 허물었다. 데이미언 허스트는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아주 독특하고 엽기적으로 풀어내는 것으로 특히 유명하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산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에 대한 물리적 불가능성〉은 죽은 상어를 포름알데히드 용액 속에 넣은 ‘상어 박제’다. 일명 ‘상어’라고도 불리는 이 작품은 그가 즐겨 만드는 죽은 동물 시리즈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을 작가는 1991년에 만들었고, 뉴욕의 유명한 컬렉터인 스티븐 코언이 개고시언 갤러리를 통해 2004년 말에 1200만 달러(126억 원)에 사들여 외신에 크게 보도가 되었다. 이후 자기 작품 수백 점을 직접 경매에 내놓았고, 세계 최고의 상업 화랑인 개고시언 갤러리와 맺은 17년간의 계약을 끝냈으며, 자신이 직접 운영하는 갤러리를 열겠다고 발표하는 등 미술 시장의 관습과 통념으로부터 벗어나는 특이한 일을 많이 해 세계 미술 시장에서 끊임없이 이슈가 되고 있다. ///////////////////////////////////     브리스톰에서 출생하여서 리즈에서 성장했습니다 미대를 졸업하고 막막한 미술가 지망생이 였는데 1991년에 죽은 상어 시체를 사서 유리진열장에 넣고 살아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육체적 불가능성 이라는 제목을 달아 발표합니다         이 작품은 놀랍게도 엄청난 논란을 일으키고 신선한 새도운 시도라는 평가를 받고 사기꾼이라는 평가도 받을정도로 다양한 평가가 나왔습니다 이 작품은 무려 800만 달러가 넘는 금액에 팔려나가게 됩니다         이후에는 다양한 작품을 내놓았는데 특히 신의 사랑을 위하여 라는 작품은 백금을 입힌 인간의 두개골 표면에 8601개의 다이아몬드를 때려 박았는데 이 작품은 5000만 파운드에 거래됩니다 한화로 보면 900억입니다         허스트의 작품은 죽음이라는 주제를 가지면서 상당히 파격적이면서 충격적인 묘사를 합니다 죽은 동물의 시체나 인간의 해골 심지어 사람 장기모형 파리 시체로도 작품을 만들기도 합니다 찬가라는 장기모형 작품은 장기 모형을 그대로 사람보다 더 크게 만들기도 합니다       출처: [아트몬 스토리] ==========================      
875    독일 유대계 녀류시인 - 넬리 작스 댓글:  조회:2655  추천:0  2017-11-21
      넬리 작스 [Sachs, Nelly (Leonie), 1891.12.10~1970.5.12]   독일의 유대계 여류시인. 1891년 12월 10일 베를린에서 출생하였다. 부유한 가정의 딸로, 음악과 무용을 배우며 성장하였다. 일찍부터 독일 낭만파와 스웨덴의 S.O.L.라게를뢰프의 영향 밑에서 시작(詩作)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스톡홀름으로 망명하였으며, 그후로는 결코 독일 땅을 밟지 않았다. 세계대전의 가혹한 경험으로 유대 민족의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으며, 또한 이 현실을 구약성서의 유대인의 운명과 겹쳐, 투명하고 애처로운 예언자적·묵시록적인 많은 시가 우러나오는 근거가 되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시신(屍身)의 집에서 In den Wohnungen》(1974) 《별의 침식 Sternverdunkelung》(1949) 《도망과 변신 Flucht und Verwandlung》(1959) 《찾는 여인 Die Suchende》(1966) 《열려라, 밤이여 Teile dich Nacht》(1971) 등의 시와, 《이스라엘의 수난》에 수록된 신비극 《엘리 Eli》(1951) 등이 있다. 1966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       밤이여, 나뉘어라   - 넬리 작스     1. Diese versch Tu"r (굳게 닫힌 문)   그 뒤에서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너는 그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본다. 너의 두 눈은 네 몸에서 떨어져 나와 있는가? 아니면 이미 죽음 속에 있는가? 죽음은 열려 있고 비밀들은 그 뒤에 비로소 살아있다.     2. Vor meinem Fenster (내방 창밖에서)   지저귀는 새 말라붙은 창밖에서 지저귀는 새 너는 그 새를 본다 너는 그 새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다르게 나는 그 새를 본다 나는 그 새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다르게 똑같은 태양계 안에서 하지만 다르게     3. Teile dich Nacht (밤이여 나뉘어라)   너의 빛나는 두 날개는 경악으로 떨고 있다. 나는 이제 떠나려 하고 네게 피비린내 나는 밤을 돌려주게 될것이기에         그때 소하르의 저자는        - 넬리 작스   그때 소하르의 저자는 글을 쓰고  낱말의 피의 그물을 열어  보이지 않게 흐르며, 오직  갈망으로만 불 밝힐 수 있는  별들의 피를 흘려 넣었다     알파벳의 시체가 무덤에서 일어나고,  글자의 천사, 창조의 물방울이 담긴  태고의 수정,  그들이 노래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루비와 히야신스와 돌이 희미하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그때 돌들은 아직 부드럽고  꽃씨처럼 흩뿌려졌다.     그리고 검은 호랑이, 밤은  울부짖고; 상처인 낮은  불꽃으로 피 흘리며  몸부림쳤다.     빛은 벌써 침묵하는 입이었고  다만 가느다란 입김이 영혼의 신을 고백했다.           나는 너를 다시 보았다      - 넬리 작스  나는 너를 다시 한번 보았다,  연기가 너의 형상을 그렸다,  죽어가는 실체에서  번데기의 껍질을  너는 벗어던졌다,  사라진 태양,  네 사랑의 끈에  제비날개의  접혀진 비상처럼  솟아오른  밤이 빛났다.  나는 바람의 지푸라기 하나를 붙잡았다,  유성 하나가 거기 매달려 있었다......         구원받은 사람들의 합창     - 넬리 작스       우리들, 구원받은 사람들, 죽음이 우리의 텅빈 뼈로 피리를 만들고, 우리의 힘줄로 활을 켜고...... 우리의 육체는 끊겨진 음악으로  아직도 탄식하고 있다. 우리들 구원받은 사람들, 우리의 목에 감길 올가미는   아직도 우리 앞에, 푸른 허공에 늘어져 있고...... 아직도 시간은 우리의 떨어지는 핏방울로 채워지고 있다. 우리들 구원받은 사람들, 아직도 공포의 구더기들이 우리를 갉아먹고  우리들의 별들은 먼지 속에 파묻혔다.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은  너희에게 비노니 너희의 태양을 우리에게 천천히 보여다오. 걸어서 우리를 별에서 별로 이끌어가라. 우리로 하여금 고요히 삶을 다시 배우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어쩌면 어느 새의 노래나  샘터에서 물동이를 채우는 것이  잘 닫혀지지 않은 우리의 고통을 갑자기 열어 흘러넘치게 할 것이다......  우리는 너희에게 부탁하노니: 우리에게 아직 물어뜯는 개를 보여주지 말아다오 우리가 혹시, 우리가 혹시 먼지로 부서져 흩어질지도 모르니...... 너희의 눈 앞에서 먼지로 흩어질지도 모르니. 그러면 무엇이 우리의 끈들을 붙잡아 줄까? 숨결이 없어진 우리들, 사람들이 순간의 방주 안으로 우리의 육체를 구하 기 훨씬 전에 우리의 영혼은 한밤중으로부터 그에게로 도망갔다. 구원받은 우리들은, 너희와 악수하고 우리는 너희의 눈을 알아본다...... 그러나 우리를 붙잡고 있는 것은 결별뿐이니, 먼지 속의 결별이 우리를 너희에게 결속시킨다.           멈춰진 시간  -넬리 작스     고통으로 멈춰진 시간. 죽음당한 자들과 죽음에 가담한 자들이 뒤섞이고, 뒤따르던 자들은 숨을 죽인다.   축 늘어진 아이들의 검던 눈동자는 어제보다 더 희어지고 남아있는 사물들은 서로 발톱을 내세워 모두를 위협한다. 고통스런 몸짓으로 날개짓하던 나비들의 행렬이 물 속으로 침몰하고,   곧 빛을 잃고 소멸하는 태양.        침묵 - 넬리 작스     무덤가를 떠돌다 모래위에 흩뿌려진 머리카락. 희미한 불꽃에도 한올한올 타들어 가고 타다만 머리카락은 발자국에 짓밟힌다. 머리카락이 모래와 섞여 사방으로 흩어지면 무덤속을 헤매던 낡은 그림자가 이제는 침묵하리니.            너는 창가에 앉아 있다     -넬리 작스 너는 창가에 앉아 있고 눈이 내린다. 너의 머리는 희다 네 두 손도- 그러나 네 흰 얼굴의 두 거울 속에는 여름이 남아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 속으로 격상된 초원을 위한, 땅- 밤을 향한 그림자, 노루들을 위한 시내. 그러나 탄식하며 나는 너의 백색 속으로 가라앉는다. 너의 雪 속으로- 그곳으로부터 삶은 그렇게 가만가만 멀어져 간다 최후에 올려진 기도가 끝난 것처럼- 오, 너의 雪 속에서 잠드는 것 세계의 불 같은 입김 속에서 모든 고뇌를 지닌 채, 네 두상의 부드러운 선들이 새로운 탄생을 위해 이미 바다의 밤 속으로 가라앉는 동안.         갑자기 예언자들이 들어온다면           - 넬리 작스       밤의 문을 열고 예언자들이 갑자기 들어온다면. 습관의 밭에 그들의 말씀으로 아픈상처를 씻으며 날품팔이꾼을 위해 멀리서 곡식을 가져온다면 그는 이미 저녁에 기다리지 않지만   밤의 문을 열고 예언자들이 갑자기 들어온다면 고향에서 처럼 귀 귀울이라 소리친다면   쐐기풀 우거진 인류의 귀여, 너는 들을 것인가?   ....   작은 소리들로로 가득 찬 인류의 귀여, 너는 들을 것인가?           아이들이 죽는 그곳에서는 언제나           - 넬리 작스  아이들이 죽는 그곳에서는  언제나  가장 소리없는 사물들도 집을 잃는다.  고통의 외투를 휘감은 저녁 노을  그 안에 지빠귀새의 검은 영혼이  밤이 다가옴을 슬퍼하고  떨고 있는 풀잎 위로 가느다란 바람이 불고  빛의 파편들을 끄고  죽음을 뿌리며 다가오는 밤.....  아이들이 죽는 그곳에서는  언제나  밤의 불의 얼굴들이  비밀 속에 외로이 타오르고  아무도 죽음이 보낸  표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생명의 나무의 냄새,  낮을 단축시키는 수탉의 울음 소리  아이들의 방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가을 새벽의 마술 시계.....  어둠의 해안에 밀려 오는 물결.  사락사락 소리내며 잡아끄는 시간의 잠.....  아이들이 죽는 그곳에서는  언제나  인형의 집에 거울들은  입김으로 흐려지고,  어린아이들의 춤을 뒤집어 쓴  난장이 인형들의 춤을 이제는 비추지 못한다.  망원경으로 보는  달빛어린 세상처럼  고요히 멈추어 있는 춤.  아이들이 죽는 그곳에서는  언제나  돌과 별과  그리고 그렇게도 많은 꿈들이  집을 잃는다.                      
874    [쟁명] - 하이퍼시와 "다수"와 "소수" 그리고... 댓글:  조회:2500  추천:0  2017-11-20
하이퍼시 10대촉구 5.하이퍼시는 다수가 아니라 소수를 촉구 2017년 11월 20일 작성자: 최룡관                            세계에는 백여개의 나라가 있으므로 미국도, 중국도, 러시야도 소수이다. 채소시장에 가면 배추도 소수이고, 토마토도 소수이고, 무우도 가지도 고추도 소수이다. 우주엔 별들이 무성한데 태양계도 소수이고 지구도 소수이다. 예술로 말하면 작가도 화가도 음악가도 시인도 죄다 소수이다. 각분야의 소수파들이 모이면 전체가 되고 어떠한 하나가 될수 있겠다. 문학에서 특히 시에서 소수파가 되려면 언어에서 특색이 있어야 하며, 작가자신의 개성적인 언어가 따로 있어야 한다. 언어를 이렇게 중시하는것은 작품은 결국은 언어이기 때문이며, 작가가 무의식에 기대여 언어로 글을 쓰기때문이라겠다. 작가가 자기 언어를 수립하지 못하면 개성이 없어지고 풍격이 돋으라지지 못하게 된다.  언어의 소수파가 되는 방법을 이렇게 말한 석학이 있다. 을 야기시켜 는것이다. 시가 독자의 력사적심리와 문화적 심리, 그리고 취미, 가치관, 기억 등과  충돌이 발생한다는것이다. 시인이 새롭게 떠올리는 참신하고 당돌한 이미지들은 독자의 상상력을 초월하므로 독자는 시의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그런 시야 말로 시의 향락을 누리게 하는 시라고 한다. 그것은 시속에 독자가 알수 없거나 알기 어려운 비밀이 잠재해 있기때문이다. 비밀은 열쇠로 열어보아야 한다. 열쇠는 단 하나 시를 흔상해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열쇠는 독자의 흔상수준과 정비례한다.  시를 쓴다음 시인들은 자신의 쓴 시가 독자들에게 결락감을 안겨줄수 있는 향락의 텍스트가 될수있겠는가를  심사숙고해 볼일이 아니겠는가!  소수파가 되는 시는 향락텍스트라고 해야 할것같다. 향락텍스트는 쾌락텍스트보다 더 우아하고 심도가 더 깊고 추동력이 더 강하고 공간과 시간을  더 확대하고 예술성이 더 깊은것이라고 할수 있을것 같다. 그래서 류협은 지인은 천년에 한번 통한다고 하였을것이고, 밀턴은  을 쓰고 백년후에야 알아 볼것이라고 하였고, 단테는 을 쓴다음 밀턴처럼 100 년후에야 알아볼것이 라고 하였으리라. 진짜  과  은 100년후부터 알아보았다고 한다.                                                                                                                                                                                                                                    우리 겨례문단에서 근대시와 현대시에서 제일 먼저 소수파가 된 시인은 최남선이였다. 그는 라는 자유시 를 처음으로 발표한 시인이였다. 이 시로하여 시조만 있던 우리 겨례문단에서 서정시의 길이 열리게 되였다. 두번째는 정지용 이라고 할수 있다.  바람소리를 말들이 달리는것으로 표현하거 나 밀물과 썰물을 보고 도마뱀떼가 재재 발렀다고 한것은  류례 없던 언어혁명이였다고 할수 있다. 그후 리상, 조향을 거쳐 하 이퍼시를 주장하는 문덕수와 심상운 등 시인들은 모두가 소수 파라고 할수 있을것 같다. 신세훈시인은  라는것을 발견하여 소수파로 되였다. 문학은 이런 소수파들에 의하여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고 앞물결이 뒤물결을 당기며 도도히 흘러왔고 흘러가고 있는것이다. 소수파라는 언어는 문학을 놓고 고민할줄 알고 새로운 길을 개척할줄 아는 작가에게 해당하는 칭호라고 생각된다.  아무나 다 소수파가 되는것은 아니다.  이것은 문학발전의 일반적인 기률이다. 소수파는 홀로서기이다. 고독하고 외롭게 묵묵히 자기의 길만 간다. 소수파는 새롭게 나오는것으로써 한획을 긋게 된다. 그 획이 점차 자라서 새로운 전통을 만든다는것은 간과 할수 없는 일이다.  일시적으로 환호를 받는다고 하여 정말 좋은 작품인것은 아니다. 그래서 중국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머얜은 베스트셀러에는 명작이 없다고 하였다.  중국조선족시인들에게서 정말 좋은 작품을 뽑아내자면 극 소수뿐이다. 어떤 시인들은 수십년을 시를 썼지만 한수도 골라낼것이 없다. 참으로 애달픈 일이지만 별수 없다. 시인들은 우선 상을 받을 작품을 쓰느라고 애를 쓸것이 아니라 소수파가 되는 작품을 쓰기 위하여 분투하여야 한다. 상안에 상이 없고 상밖에 상이 있는 경우가 너무 빈발하는 상주소를 고칠 때도 되였다고 생각하게 된다. 작가는 글로 말하는 사람이다. 글로 말한다는 말은 작품으로 말한다는 말이겠다. 새로운 창의가  없는 작품은 발표되는 시간이자 죽는 시간이다. 장송곡을 울리는 작품에 흥취를 가질것이 아니라 금방 태여난 아기의 울음소리를 울리는 작품에 모를 박아야 한다. 그러자면 공부하는 길밖에 없다. 아는것은 공부할 필요가 없다. 자기가 모르는 새것을 배우고 배우고 또 배우는자만이 마지막에 웃는 소수파로 될것이다.  =============================       중국 동남연해 동부전구 육군 모 해안 경계 여단{필자 주: 사진감상}...  
873    [시문학소사전] - 풍시조(諷詩調)란?... 댓글:  조회:2629  추천:0  2017-11-19
  풍시조(諷詩調)              諷詩調라 이름하는 시지(詩誌)를 받았다. 발행처는 조선문학사였고 5호째였다. 이런 간행물이 있었던가? 나의 과문함을 탓하며 등록일자를 찾아보니 없다. 장원의 주간의 머리글을 읽고『조선문학』별책으로 나오는 부정기간행물임을 알았다. 표지제호 윗머리에 제시한 ‘위트 펀 컨시트와 순수한 痛懲의 미학’이라는 어휘들이 시지 諷詩調의 성격을 대변하는 구호인가보다. 내용을 일별했다. 우선 쉽고 재미있고 세 줄씩 세 줄씩 시가 짧았다. 많은 문인들이 참여했고 풍시조가 지향하는 취지에 걸맞게 정치풍자 사회풍자를 중심으로 일정수준 좋은 실험결과물을 보여 주었다. 나로서는 처음 접하는 풍시조가 어느새 우리 시단에 이렇게 많이 확산되었는지, 그럼에도 내가 모르고 있었다니 참으로 나의 시읽기의 협소함이여. 부끄러웠다.   풍시조, 우선 이름만 들어보면 평시조니 엇시조니 사설시조니 할 때와 같이 시조의 한 갈래로 들린다. 그러나 글자를 들여다보면 시절가(時節歌)를 뜻하는 시조(時調)가 아니고 시조(詩調)다. 그러니까 諷詩調는 시조형식(3행시)에 담은 풍시 곧 풍자시라는 뜻인가 보다. 다시 말해 시조형식으로 쓴 풍자시 뭐, 이런 뜻이리라. 어쨌든 전통과 현대를 엮어주는 새로운 이름의 장르가 아닌가.   유구한 문화민족인 우리는 멀리 신라의 향가를 비롯해 고려의 속요와 하여가 조선조의 시조와 가사문학을 발전시켜 왔다. 하지만 근세에 들어 우리는 자유시라는 이름으로 서구의 시풍과 시론을 받아들여 현대성의 수용이라는 차원에서 모더니즘이니 쉬르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무의식의 자동기술이니 어쩌니 해서 윤리적인 일체의 반성도 없이 20세기를 풍미했다. 그 결과 일정수준 시가 넓어지고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우리시가의 실종 내지 정체성에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입히고 무의미한 잔소리, 피폐한 난해성으로 시를 몰고 간 과가 없다 못할 것이다.   아무렴, 살아 꿈틀거려야 할 문학의 흐름이 100년이면 큰 물줄기가 바뀔 때도 되었다. 새천년의 첫 세기에 우리 시단에도 어떤 큰 변화가 일어나야 되지 않겠냐고 모두들 알게 모르게 새로운 장르를 모색하고 갈구해 오던 차제에 諷詩調의 출현은 일단 긍정적으로 검토해봐야 할 사안으로 생각된다.   풍시조는 평시조의 3장형식을 따르긴 했지만 평시조 가락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음수율(음보)는 자유시와 다를 게 없다. 3행시에 담긴 주제 또한 순응적인 평시조와는 사뭇 다르게 거의 사회비판적이고 권위뒤집기다. 다시 한 번 풍시조 5호를 숙독해 본다. 시의 미학적 표현 기법으로 위트와 펀 유모와 아이러니 메타포들로 풍시조 5호는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번 호에 소시집을 낸 이소희 시인의 그 첫 번째 작품「진흙과자」를 읽어보자.   TV화면에 나오는 아이티 아이들 좀봐! 진흙과자를 먹고 있잖아? “나의 새해 목표는 살빼기다”   아이티 아이들의 진흙과자와 나의 살빼기 사이에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일견 아이티 아이들은 먹을 게 없어 할 수 없이 진흙과자를 먹고 있는데 약 올리듯이 웬 살빼기타령이냐 하겠지만 이것은 타자의 기아를 보면서 자아의 비만을 부끄러워하는 양심이다. 시인의 양심은 살빼기로 조금씩 모여진 적은 양의 식량일지라도 굶주린 아이티 아이들에게 돌아기기를 바라는 동정어린 나눔의 박애정신, 이 뭉클한 휴머니티! 2행과 3행 사이에 심연 같은 함축과 생략, 우리의 눈을 번쩍 뜨게 하는 아이러니와 반전, 무릎을 탁 칠만하지 않은가. 이것이 시의 울림이요. 시의 감동이다.   풍시조는 비꼬고 꼬집고 뒤집고 비트는 정치풍자나 사회풍자만이 아니고 세계인이 불시에 당하는 재해나 우리가 안고 있는 당면한 시사(時事)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어루만져주는 시치료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간명하고 적절한 장치를 지닌 나무랄 데 없는 장르로도 성공적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새로운 장르를 연구 창안하고 끝없이 실험하여 벌써 풍시조로만 6권의 시집을 내고 각고의 노력으로 諷詩調 시지를 내는 등 풍시조 보급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는 박진환 시인의 창의정신과 지칠 줄 모르는 그 노고에 박수를 보내며 풍시조가 우리 시사를 발전시킬 전기가 되어주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덤으로 더...     풍시조(諷詩調)의 지향점                                                     靑岩  鄭日相   요즘 풍시조가 유행하고 있다. 시(詩)에는 여러 형식이 있지만 여기 풍시조(諷詩調)가 지향하는 점과 그 정신을 살펴보고자 한다. 풍시조는 시로써 감행하는 시(詩)의 복수다. 풍시조는 시대적 부조리, 사회적 부정이나 부패 그리고 악행에 감행하는 복수로서의 통징(痛懲)을 생명으로 하고 있다.   이 풍시조(諷詩調)의 지향점은 관념유희, 정서유희를 극복, 시적 징벌로서의 통징(痛懲)이 카타르시스를 통해 이 시대의 답답한 정신적 체증을 해소해주는 복수의 시(詩)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시단(詩壇)에 풍시조(諷詩調)를 보급한 원로시인 박진환(문학평론가)씨에 따르면 “풍시조는 풍자쪼나 투로 쓴 시를 일컫는 새로운 명명이다. 그 때문에 풍시조의 바탕은 풍자시와 무관하지 않는 동질적 맥락 내지는 혈통을 같이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고 지적했듯이 우리 고유 해학(諧謔)의 문학과 맥을 같이 하고 있고 많은 옛 시인들이 사회의 비판시를 쓴 맥락과 또한 그 궤(軌)를 같이 한다 하겠다. 그는 이어서 “인간생활, 특히 주어진 시대나 살아가는 현실 및 사회에서 자행되고 경험하게 되는 악행이나 우행, 악덕이나 비리, 부조리에 대해 비꼬고, 조소하며 깎아내리고 부정하며 고발·비판하는 통징의 감행이 풍시조의 시적 역할이다.”고 했다.   이렇게 볼 때에 통징을 감행하는 시의 복수 이면에는 악을 교정하여 선을 깨닫게 하고자 하는 개선의 의도가 분명히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고 소홀히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잘못된 시대의 사회상을 봤을 때 이를 바로 교정해 주어야 하고, 따라서 이 교정을 통해서 이 사회가 아름답고 살기 좋은 터전이 되어야 하므로 그 염원은 시인이 시를 쓰거나 평론가가 시평(時評)을 쓰거나 할 때 이 고발하고 비판하는 통징의 역할을 외면만 해서는 안 된다는 정신이 바로 이 풍시조(諷詩調)의 정신의 일단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풍시조의 역할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다.   가령 요즘의 사회상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부각되어지고 있는 정치적 부조리나, 공직자 비리, 의문부호가 따르는 종교적인 미개안과 회의, 민족과 국체를 잃어버린 이념갈등의 유발, 세계문명과 사조로부터의 일탈과 길 잃은 방향으로의 이끌음, 인간의 악행을 일삼아 통분을 일으키는 사안 등과 도덕적 정신적으로는 비리, 부조리의 온상으로서의 현실이며 그 악폐· 우행· 악행으로서의 현실일수도 있고, 문명적으로는 자연의 파괴와 생명의 위기의 초래, 패권주의와 약소국가간의 갈등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국가·사회·인종·경제·정치·종교·기업·생명에 이르기까지 그 무수한 부정적 축면들 모두가 이 풍시조(諷詩調)의 대상으로 삼고 제시될 수 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풍시조(諷詩調)의 생명은 시(詩)의 복수라고 할 수 있는 통징에 있다. 악과 비리와 부조리에 감행하는 시의 복수로서의 통징은 풍시조의 생명이자 존재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통징(痛懲)의 감행 없이 풍시조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여기 어느 시인의 풍시조 한 두수를 소개 하여 보면,   (1) 해용백천(海容百川)이라, 바다는 더러운 물, 깨끗한 물 다 수용      세상은 악인(惡人), 선인(善人) 함께 공존, 이게 다 하늘의 질서      여기 오직 분별(分別)과 선택의 삶, 자기 몫이니   (2) 관홍뇌락(寬弘磊落)마음 너그럽고 크며 사소한일 신경 안 쓴단 뜻      2011년 키워드, 관용(寬容), 화해(和解), 정의(正義), 책임, 정직      공정한 사회로 가는 길, 나 먼저 준법정신 솔선수범(率先垂範)해야   여기서 생각해 보면 (1)에서 본봐와 같이 그 시어(詩語)에서, 비록 더러움과 악과 몸 섞어 살면서도 ‘분별과 선택의 삶’은 자기 몫이라 하였듯이 이는 더러움과 악에 물들지 않고 몸 섞지 않음을 의미하고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2)의 풍시조에서 지적했듯이 남의 허물을 탓하기 전에 스스로 법(法)을 지키고 솔선수범하는 곳에 어찌 불법과 비리와 탈선이 존재 할 수 있겠는가라고 전제하면서 곧 스스로의 허물을 볼 줄 모르고서야 어찌 남을 탓하겠느냐는 뜻도 담겨있으니 ‘자기의 눈썹은 보지 못한다(目能見而步之外而不能他見其睫)’는 한비자(韓非子)의 말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 또한 자정(自淨)과 정화(淨化)에 값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위에서와 같이 풍시조(諷詩調)를 통해 통징(痛懲)하는 미학(美學)은 시조의 글속에 잠겨져 있는 통징(痛懲)은 곧 일종의 순수한 통징으로서 형이상시의 시법과 궤를 같이 하며, 여기서 ‘순수한 통징’이란 육체적 제약이나 물리적, 법적 제재에 의한 징벌이 아니라 문화적 징벌 곧 시적 엄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시적(詩的) 감동이나 감화에 의해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게 하여 정신적 감화, 곧 카타르시스를 체험하게 하여 잘못을 개선하게 하는 문화적 수단의 징벌이 되는 셈이다.   여기서 지난날의 풍자시가 떠오른다. 곧 박노해의 오적(五賊) 시이다. 그는 이 오적시 하나로 시인이 되었고 일약 민주 투사가 되었다. 시인들 중에는 스스로 시인이기 보다는 투사로 불리기를  더 갈망하는 김남주나, 그리고 노동 시인 박노해. 백무산. 등도 투사가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김남주를 위한 시와 사회상의 “피여 꽃이여 이름이여”이라는 핏빛 책자에 사실상 해설과 평론이 필요 없는 그의 완벽한 시에 평론가 시인들이 하나같이 부연했듯이 찬사의 글줄을 써댄 것을 보면 쓰지 않으면 적으로 몰릴지 몰라서 인지 몰라도 한결같이 적색 일색이다. 반사회적이었다. 이런 시들은 의도적으로 징벌의 대상을 공격하고 헐뜯고, 비아냥대고, 깎아 내리고, 비판과 고발하는 등의 공격성을 뛰지만 이 풍시조에서는 악의 교정이라는 따뜻한 휴머니티가 작용하게 된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뛴다 하겠다. 즉 이 풍시조에서의 형이상시의 시법이기도 한 ‘순수한 통징’은 일체의 공격성을 지양하고 정신적 깨달음이나 깨달음을 통한 시정이나, 시정을 통한 스스로의 정화를 체험하게 한다는 관점에서 보아 법적이거나 물리적 육체적 통징을 지양(止揚)하게 된다.   우리나라 역사와 학문의 영역 내에 시문학(詩文學)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었으며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18세기 이래 심지어 판소리가 등장하면서 서양의 침략과 내부적 혼란이라는 현실아래 위기의식과 구국의지는 이 시기 문학의 기본인 주제가 되었고, 이에 따라 해학문학과 더불어 사회상을 풍자하고 비판과 통징의 성격을 뛴 시문학 또한 상당히 발달하였었고 그 정신이 이 시대에 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하겠다.   이 풍시조(諷詩調)는 국민을 위한 국민의 목탁으로서의 역할과 사회의 올바른 길로의 진행과 정화를 위한 통징의 정신을 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아무튼 풍시조는 시로써 감행하는 시(詩)의 복수라는 새로운 영역을 차지해가고 있으며, 시대적 부조리나 사회적 부정이나 부패와 해악, 그리고 악행 감행을 향한 교정과 복수로서 비판적 의도를  분명히 한 신랄미와 심각미를 시법으로 한 시(詩)요 덕목을 지니며  통징(痛懲)을 생명으로 하고 있다. 이 시의 영역은 사회를 정선(正善)한 덕율(德律)로 바로 세우려는 염원을 따 담아, 한편으로는 전통적으로 이어내려 오고 있는 우리 고유 해학(諧謔)의 문학과 맥을 잇고 있고 많은 옛 시인들이 사회의 비판시를 쓴 맥락과 또한 그 궤(軌)를 같이 하는 정신 또한 닮아있고 그 정신들이 살아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덤으로 참고하기... 풍시조는 박진환 시인이 개척한 시의 한 장르다. 풍자투로 쓴 3행시라는 것 외에 자수율 등의 규칙은 없다. 박 시인은 “풍시조는 시대적 비리나 악행, 부조리에 문화적 징벌인 통징(痛懲·엄하게 벌함)을 내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의 소재는 늘 신문에서 찾은 것. 그래서 풍시조는 일견 신문의 만평과도 닮아 있다. 박 시인은 “3행이라는 제한을 받기 때문에 기발한 착상과 함축성이 더욱 필요하다”고 말했다. =============================
872    누구나 시인이 될수 없다?... 있다!... 댓글:  조회:2739  추천:0  2017-11-18
시창작 강의 / 박진환 시 창작 강의를 듣기 위해 찾아온 분들을 대상으로 어떻게 해서 이 강의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물으면 세 가지 유형의 대답을 한다. 첫째는 시를 좋아해서 둘째는 시를 써 보고 싶어서 셋째는 시를 잘 쓸 수 있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 대답을 거꾸로 바꿔보면 이런 질문이 성립된다.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이해 할 수 있는가, 어떻게 써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럴 때 당혹스러운 것은 마치 시란 무엇인가를 물어왔을 때 어떻게 대답해 줘야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줄 것인가 하고 고심하는 것과 같은 답변의 궁색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어느 질문에도 한 마디로 속 시원하게 대답해 줄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대답 해 줄 수 없다는 것은 수강자 입장에서 보면 답답한 일이겠으나 정작 답답한 쪽은 한 마디로 궁금증을 풀어줄 수 없는 쪽이다. 부득이 역설적으로 대답해 줄 수밖에 없는데 이럴 때 흔히 다음 네 가지로 대답해 주곤 한다. 첫째, 시에 미쳐라. 둘째, 시를 많이 읽어라. 셋째, 시 이론을 이해하라. 넷째, 시 쓰는 이론을 지속적으로 하라. 이 네 가지는 단순한 해답이 아니라 시를 알고자 하고 시를 쓰고자 하는 분에게, 특히 시를  잘 쓰고자 하는 분에게는 시를 쓰기 이전에 거처야 할 필 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 필수 과정을 거친 다음 그래도 시를 쓸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면 그때 비로소 시 창작이라는 싸움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 이 말은 시에 대한 관심이 막연한 낭만이나 취향, 멋, 사치로서가 아니라, 절실하고도 필수적인 자기표현 욕구의 충족을 위한 문화적 행위임을 자각하고 필생의 작업으로 받아들여 전 생애를 투자해야 한다는 뜻이다. 대 부분의 경우, 시집 몇 권울 읽고 또 몇 편의 습작 체험을 통해 시란 시시한 것이 구나 한다든지, 이와는 반대로 자신은 시적 자질이나 재능이 없다고 판단한 나머지 헌신짝 버리듯 시를 외면하는 분들이 상당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가 예술인 아상 시적 자질이나 재능이 요구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특수한 시적 재능의 소유자만이 시인이 될 수 있다고 그릇된 판단을 내리는 사람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시인은 특별한 재능이나 자질을 타고난 것이 아니다. 즉, 시적 천성을 타고난 사람은 달리 없다는 뜻이다.  누구나 노력하면 시를 쓸 수 있고 또 훌륭한 시인이 될 수 있다. ㅡ 계속 ...   일찍이 C. D. 루이스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시인이었다고 피력한 바 있고, R∙M 릴케는 시인 아닌 사람은 없다고 진술한 바 있다.  이 말은 누구나 시적 자질이나 재능을 천부적으로 타고 났다는 뜻이 되고, 이는 젊은 사람은 시적 감성, 시적 정서, 시적 상상력이 그 어느 때 보다도 풍부하다는 뜻이 된다. 시인이 될 재능이나 재질은 타고난 것이 아니며, 더구나 특별한 시적 재능이란 있을 수 없다. 과거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는 시를 천성(天性)의 미학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남달리 시적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 시적 재능의 소유자라고 보았던 것이다. 누구나 꽃을 보면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기쁜 일이 있으면 기뻐하고 슬픈 일을 당하면 슬퍼한다. 이것은 조물주가 인간에게 천부적인 감성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희로애락의 정서 반응을 하고 또 정서에 의탁하여 감정을 표현하게 마련이다. 시인이라 해서 달리 특별한 감성을 가지고 태어나고, 남보다 다른 정서 반응을 환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잘못이다. 다만 시적 감성이 깊다보면 정서 반응을 남과 달리 하게 되어 특수한 정서를 표출 할 수 있게 되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 더구나 요즘 시는 정서 반응이나 정서의 환기가 아니라 이를 이미지로 대체하는 의도적 제작을 요구한다. 의도적 제작이란 언어를 조형하고 정서를 형상화하는 일종의 기술적 제작을 뜻한다. 기술은 연마하고 ,수련하기에 따라 개발되며 세련되고 특수한 기법으로 발전한다. 이 말은 시도 수련하고 연마하면 얼마든지 기술적으로 좋은 시를 풀 수 있다는 해석과 통한다. 기술은 부단한 노력과 집념 그리고 하면 된다는 신념에 의하여 얼마든지 획득되고 실현될 수 있다. 여기서 재능이니, 자질이니, 천부적 천성이니 하는 따위의 시인에 대한 특수성 논급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대신 시에 집착하고 도전하며 무단히 습작하는 노력만이 시인을 탄생시키는 조건이라는 것을 염두 해 두어야 할 것이다. 이 조건을 충족하고 실천함으로써 시인이 되고자 하는 뜻을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기러기 위한 첫째 조건인 ‘시에 미쳐라“다. ㅡ 계속 ... 시에 미쳐라.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넉넉잡고 한 10년쯤 미쳐라. 그도 아니라면 한 3년쯤 그렇게 된다면 시인은 안 될지라도 적어도 시란 무엇인가, 시를 어떻게 스는 것인가에 대한 해답은 스스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보너스로 어떻게 하면 서로 보다 더 잘 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자기 진단까지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시에 미친다는 것은 한마디로 시적 광기가 아니라 시만이 유일한 벗이요, 희망이요, 보람이요, 삶이며 생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종의 믿음이다. 이 믿음은 진실에 대한 시적 약속이고 또 시에 대한 약속의 이행으로서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견고한 시 정신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일찍이 프랑스의 비평가 R. M. 알베레스는 시인은 믿어야 한다.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고 강조 하면서 시인은 일종의 신앙 앞에 서 있어야 한다고 피력한 바 있다. 이 말은 시인이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는 뜻인데, 이때의 신앙은 내세를 믿고 천당이나 극락의 세계를 믿듯이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믿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새로운 세계란 지상 밖의 별개의 세계가 아니라 시인이 상상력을 통해 만들어낸 창조적 세계를 의미한다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이런 믿음 없이 시인이 존재한다면 항용의 존재 이상일 수 없게 된다. 항용의 존재는 주어진 삶을, 주어진 세계를 충실히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시적 삶이란 이 항용의 삶을 보다 새로운 삶으로 전이시키거나 치환, 변용함으로서 기존의 삶을 극복하고 지향하며 승화, 초월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삶은 상상력을 빌어 창출한 세계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여기에서 믿음은 앞서 지적한 미친다는 것과 같은 맥락을 갖게 된다. 시적 세계에 대한 탐구나 투구가 광기와 같은 맥락의 해석을 성립시키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계가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 굳이 새로운 세계를 추구할 필요가 없고, 또 추구하고 실현한다고 해도 믿지 않는다면 한낱 가공의 세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보자. 미쳐라. 미쳐도 최소한 한3년쯤 미쳐라. 그러다 보면 시가 무엇이고, 시인의 길이 무엇이며, 또 어떻게 쓰고, 어떻게 써야 보다 잘 쓸 수 있는가의 실제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 체험이야말로 신앙에 값하는 거시이며 더구나 체험 적 신념이란 점에서 단순한 의지 지향과는 다른 차원의 신념이 된다. 그러나 미쳐도 곱게 미쳐야 되는데 무작정 시 만이 최고, 시는 내 인생, 시 이외의 것은 의미가 없다는 식의 맹목적 광기는 인간으로서 의 삶이 불가능한 상황을 불러온다. 시에 미친다는 것은 오직 시에만 경도되는 절대 집념을 의미한다. 시 외적인 것은 외면하고 오직 시에만 빠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삶을 시적으로, 미적 세계를 빌어 보다 고상한 세계로 이끌어 올린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시적 관심이나 시적 생활이 없이는 시에 접근할 수 없으며, 시에 경도 되었을 때에만 시에 접근하게 되고, 시를 만나게 된다는 뜻이다. 이런 미칠만한 접근방식 없이 시를 이해하기란 힘들다. 더구나 시인이 된다 해도 별 볼일 없는 시인 밖에 될 수 없을 것이다. 보다 철저히 미치기 위한 노력만이 보다 빨리 시의 길에 들어서는 첩경이 된다.  음악에 심취하려면 음악 외의 소리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 그렇게 해야 음악의 가장 깊은 곳에 투신하고 익사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철저히 음악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이와 같이 시에 미치기 위해서는 시를 쓰는 일에 미쳐야 하고, 시라는 영혼의 깊은 늪에 빠져들어야 한다. ㅡ 계속 ...   시를 많이 읽어라. 시를 많이 읽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루에도 몇 권의 시집을 독파할 수 있는 독해력을 갖추고 있어야만 시를 많이 읽는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요구하는 시집 읽기는 단순한 독서로서가 아니라 올바른 시에 접근하는 좋은 시와의 만남을 위한 독서이다. 그 때문에 단순히 읽고 끝나는 항용의 독서와는 다르다. 그렇다면 시와 만나기 위한 시집 읽기는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을 대신해서 다음과 같이 권하고 싶다. 첫째. 시집을 정독하라.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을 위한 것. 심심풀이를 위한 것 등 여러 가지 목적을 갖는다. 시집을 읽는 것도 멋으로 심심 하니까, 우연히 손에 잡혔으니까, 하는 식의 진정 독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건성으로 읽기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시는 의미의 전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시속에 함축된 암시나 상징 그리고 늬미의 변용이나 치환을 통한 정서적이고도 감각적인 미적 감동을 전달하는 일종의 변용, 치환, 전이의 미학이다. 그래서 시집을 읽는 것은 시인의 미적이고 감동적인 체험을 빌어 시인이 체험했던 감동을 간접 체험을 통해 획득하는 행위이다. 시는 내포적(內包的) 언어미학에 의존한다.  다시 말하면 시는 사물의 해석이나 사실을 밖으로 드러내 설명하는 과학적 진술과는 달리 사실이나 진실을 안으로 감추어 암시나 상징으로 드러내는 의사진실이다.  그 때문에 시는 의미로 해석 되는 것을 거부하고 논리로서 증명되는 것을 초월한다.  그것은 시가 메타언어를 동원하고 있기 때문인데, 메타언어는 어떤 사물을 지시하고자 했을 때 밖으로 드러나는 의미를 버리고 그 뒤에 감추어진 뜻, 즉 숨은 비의(非意)를 빌어 나타내는 언어다. 그뿐만이 아니라 약속된 의미망을 벗어나 초월적 의미를 동원하거나 차용한다. 그래서 시는 좀처럼 감춘 뜻을 드러내지 않고 함축된 암시나 상징으로 드러낸다. 산문이 사실을 보다 사실적으로 명중하기위해 설명하고 또 설명해서 논리를 성립시키고자 한다면 시는 논리를 버리거나 초월한다. 그 때문에 시를 읽고 밖으로 드러난 의미에만 접근하려 한다면 십중팔구는 실패한다.  여기서 정독이 요구된다. ㅡ 계속 ...   시를 이해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속에 감춰진 함축적 의미를 발견하여 짐짓 시인이 드러내고자 한 것이 무엇이었던가를 발견해 보라.  그것은 시의 이해가 아니라 시가 주는 충격적 감명을 체험하게 해 줄 것이다.  한 편의 시가 의미로 드러나지 않고 사물로 진열되어 변용의 미학을 보여 주었을 때, 이를 발견 해 느끼는 감동은 충격적인 것이다. 이러한 충격적 감동은 시를 읽고 또 읽으며 음미하는 과정에서 하나씩 터득되는 것으로서 정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두 번째, 감동을 준 부분을 다시 읽고 재해석 해 보라. 시집을 읽다보면 그 몇 편에 유독 친근감이 가고 또 감동을 받는 시가 있다.  왜 이 시가 내게 감동을 주고 마치 내가 쓴 것 같은 친근감을 주는 것인가 하고 사람들은 생각하게 된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무엇인가 그럴만한 이유가 발견되게 마련이다. 그것은 분명 그 시적 체험을 스스로 체험했던 적이 있었다는 것에 연계된다. 달리 말하면 그 시를 쓴 시인의 체험과 읽는 이의 체험이 유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독자는 곰곰이 생각 할 것이다. “그래 이와 유사한 체험을 나도 한 적이 있었지. 그 때문에 친숙한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거야.” 하는 말을 자기도 모르게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체험의 유사성을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시인이 이 체험을 시로 승화시켰는가 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이 관심으로 한 편의 시를 akc; 스스로가 쓴 듯이 뜯어보고 분석해 보며 다시 재조립해 보아야 한다. 이때 “아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왜 이런 상상력을 동원하지 못 했을까, 왜 이런 사물을 동원하지 못했을까, 왜 이런 의미로 전환하고 이동시켜 보지 못했을까.”하는 아쉬움이 생길 것이다. 이 아쉬움은 곧 깨닫게 하여 자신감을 상실하게 자기의 무능력함을 깨닫게 하여 자신감을 상실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면 “나는 자질이 없어, 글렀어.” 하고 괴로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자신의 무능력함을 깨달았다는 것은 그 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미처 개발하지 못했다는 뜻인데, 이는 자신의 잠재력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잠재력을 개발하지 못했던 것은 재능이나 능력 부족이 아니라 이를 자기화 하는 능력부족, 훈련의 부족이었던 것이다. 이 부족한 훈련을 남의 시를 통해 체험함으로써 이미 독자는 훈련의 한 과정을 겪은 것이 된다. 이것이 시를 재해석하는 데서 얻는 창작 체험이다. 셋째로는, 좋은 부분, 즉 마음에 드는 행위나 연이 있으면 그냥 좋다고 하지 말고 노트에 옮겨 써 보는 일이다. 홂겨 쓰는 과정에서 문득 새로운 시어를 동원하여 가필 한다든지, 몇 단어를 생략 해 본다든지, 혹은 새로운 이미지를 첨가 해 본다든지 하는 식으로 자기 나름의 창작 연습을 해 보는 것도 매우 유익하다. 혹은 좋다고 여겨지는 부분에 유사한 체험을 동원해서 나름대로 재구성해 보면 필시 ‘아, 이렇게도 형상화가 가능 하구나.’ 하는 자신감이 생길 것이다. 이 자신감을 살려 내친걸음에 시 한편을 써 보라. 그러면 그것이 오작이었건 창작 이었건 간에 시를 쓰는 행위가 되고, 이 시는 시를 창작하는 경험으로 이어질 것이다. ㅡ 계속 ...   넷째로는 시집을 읽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 시와 만나면 그냥 던져 버리거나 넘어갈 것이 아니라 어느 한 부분이라도 관심을 갖고 곰곰이 생각하고 이해하고자 노력 해 보라.  그러면 어떤 현태의 해석이든 자신의 접근 방식이 나타날 것이다. 이 해석은 다른 모호한 부분을 해석하는 단서가 되어 영 흥미 없던 시가 흥미의 대상으로 전환될 것이다.  이러한 꾸준한 노력과 인내는 시를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 시를 해석하고 분석하는 능력을 개발 시키고 동시에 좋고 나쁘다는 분석의 안목을 길러 자신의 시의 적용시키는 간접적 효과로 시 창작을 도울 것이다. 한 권의 시집을 읽는다는 것은 이와 같이 여러 시적 간접체험을 갖게 한다. 어떤 시집을 막론하고 그 중에는 가작에 속하는 좋은 시가 있게 마련이다. 이 가작만을 대상으로 이 시는 어떤 체험을 어떻게 어떤 기법으로 형상화 했는가를 익혀 든다면 시를 이해하고 쓰는 데 절대적으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시 이론을 이해하라 시의 이론을 이해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이유는 이론을 통해 알 수 있음은 물론이고 시가 어떤 경로를 통해 오늘 날에 이르렀는가를 조감 해 볼 수 있는 안 목을 길러 주기 때문이다. 이론에는 시의 본질론, 방법론을 비롯해서 시 해석론, 감상론, 비평론 등 실로 다양하다.  특히 시 창작 론을 빠뜨릴 수가 없는데, 이는 이 글이 시를 쓰고자 하는 분들을 대상으로 하기 있기 때문이다. 시 창작 론은 각 장을 거듭하면서 하나하나 밝히겠지만, 이 중에서도 중요할 부분은 시가 어떤 경로를 통해 이르렀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사(詩史)를 통해 오늘의 시가 어떻게 발전. 전개 되어 왔는가를 조감 할 수 있어야만 현대시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고, 또 어떻게 표현되기를 희망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부분은 시 창작에 매우 유익한 이론을 제시해 줄 것이다. 흔히 오늘에 살면서 19세기적 낭만주의시를 쓰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솔직히 말한다면 시를 쓰기를 희망하는 분들의 대 부분은 낭만주의 발상에서 시를 출발시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말은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들 대 부분이 시적 발상으로 정서를 빌어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을 의미 한다. 오늘의 시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수긍이 가고 납득이 가게 된다. 납득하고 수긍하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구시대적 발상을 고집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현 시대가 무엇이며 어떻게 표현되기를 희망하는가 하는 현시의 요구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시의 전개 과정을 조감 해 보는 시사의 이해는 시 창작에 매우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본다. ㅡ 계속 ...   시의 본질이 변한 적은 없다. 그러나 주어진 시대마다 표현의 방법을 각기 달리 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마치 각 시대마다 인생관, 세계관이 달랐듯이 시에 대한 요구도 시대마다 달랐기 때문이다. 쉬운 예로 사랑을 예시 해 보자. 우리 조선 시대의 사랑은 사랑의 감정을 안으로 감추어 드러내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알았다. 그래서 사랑하는 임을 만나도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소를 흘리는 것으로 입가에 사랑을 표현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랑 표현은 어떠한가. 만나자 마자 주변에 누가 있건 없건 껴안고 뽀뽀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이는 사랑의 본질이 변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 다름을 말해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도 시대를 거듭 하면서 시 자체가 변한 것이 아니라 시법에 따라 표현하는 방법을 달리 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시가 어떤 경로를 어떻게 각기 달리 표현되어 왔는가 하는 점을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오늘의 시가 이렇게 표현될 수밖에 없다는 필성을 깨닫게 되고, 또 이 깨달음을 통해 오늘의 시 작법에 신뢰를 갖게 될 것이다. 간략히 시사를 정리해 보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그러나 시사를 정리 한다는 것은 엄청난 작업이기 때문에 그 방대함을 수용한다는 것은 본 장으로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 시대마다 무엇을 주체로 무엇을 어떻게 해석하고 진술 하고자 했는가 하는 발췌, 진열함으로써 시 흐름의 역사 적 경로를 밝히는 것으로 대신 하고자 한다. 시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시는 한마디로 미, 질서, 지혜의 미학 이었다. 이 시대의 세계관이나 인생관은 인간의 운명을 신탁에 의해 결정하는 운명론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 때문에 산과 같은 밝은 지혜를 갈망하고 현세적 삶을 중시하는 정치와 연애와 술을 즐겨 주제화 했다. 또 미를 사랑하고 질서를 존중하는 삶을 중시했다. 그래서 그리스 문학은 미. 질서. 지혜를 발상 근저로 했다고 할 수 있다. 또 그들은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으로 인간의 힘이나 지혜로써는 도저히 극복 할 수 없는 또 다른 힘이 있다고 믿었는데, 그것이 곧 신의 존재였다.  그 신은 제우스로 대표되는 다산주의로서 신은 제각기 인간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운명에의 의탁은 필연적으로 현세적 삶을 즐기려는 정치, 연애, 술과 같은 쾌락 원리로 작용했다.  이 시대를 표현한 시도 예외 없이 이런 삶들을 주체화함으로써 이성의 통제보다는 열정적 표출을 필연 화할 수밖에 없었다. ㅡ 계속 ...   중세에 오면 상황은 변한다. 그리스 로마의 다산주의가 유일신으로 대체되고 신과 공존하던 그리스 로마 시대의 생활 방식이 신과 인간을 종속 관계로 주종 화함으로써 신의 절대 권력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찬양이나 사제의 행적을 중시하는 그리스 로마의 개인적 정서에서 종교적 교권주의의 틀에 얽매이게 된다.  모든 삶의 가치는 신을 위해서, 신에 의해서 부여받게 되고 인간의 지혜나 감정의 허용이 통제된다. 필연적으로 교권 사상이 시의 발상이 될 수밖에 없게 된다. 신과 인간의 이러한 종속 관계는 다시 유마니즘에 의해 종속관계의 철회를 통한 인간의 평등한 행복을 추구 하는 인간정신주의로 전환된다. 인간과 인간의 본성에 눈 뜨고 인간을 존중하며 인간의 자유와 평등의 발전에 기여 하고자 하는 인간의 해방을 구하기기에 이른다. 이른바 르네상스이다. 르네상스는 신 만능의 중세를 거부하고 인간의 자유, 인간의 해방, 인간의 군위를 주장하는 운동으로서 비로소 인간에 의한 인간의 구가라는 주제를 설정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자유 만능의 사상, 인간의 자유분방한 해방은 이를 질서화 하기 위한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기에 이르는데, 그것이 고전주의 체제이다. 고전주의는 일종의 이성 우월주의로서 의해 통제의 질서가 요구된 시대 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자유와 해방의 방종을 질서화 하기 위한 통제의 원리를 이성으로 보았던 데서 제기된 질서의 원리라 할 수 있다. 그리스 로마와 같은 질서의 원리를 중시하기 때문에 그들의 세계관이나 인생관은 이성적 해석에 의존하게 된다. 역시 문학도 이성의 원리가 발상 차원으로 작용된다. 달리 말하면 인간이 인간에 의해 해석되는 해석의 기준이 이성에 의탁 된 셈이다. 이로써 고전주의는 이성이 지배하고 이성에 의해 세계를 해석하는 이성 중시의 문학이 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이성주의는 다음 시대인 낭만주의에 거부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인간은 이성과 함께 감성을 천성으로 부여 받고 있다. 달리 말하면 이성과 감성의 공존 적 관계, 이의 조화로운 화해의 원리에 의해 해석되기를 희망한다는 뜻이다. 이성중심의 경향이 감성주의로 전환되면서 인간의 자연성 회복을 부르짖는 낭만주의 시대를 열기에 이른다. 낭만주의는 이성에 의해 억압 된 감정의 해방을 통해 인생을 해석 하고자 하는 19세기를 지배한 문학의 원리이다. ㅡ 계속 ...   이 원리는 이성의 통제를 벗어만 자유분방한 감정이 이상향으로 설정된 동경의 미학에 바탕하고 있다. 동경은 영원한 이상향인 미래치인 통시적 동경과 이국 취향의 국제주의가 주축이 죈 수평적 동경으로 교직되고 여기에 내적 동경인 사랑이 대별된다. 이러한 동경은 일종의 고정을 거부한 유동의 미학으로서 낭만적 아이러니를 본질로 한다. 낭만적 아이러니는 성취한 꿈의 세계를 파괴하고 보다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이율 성을 발상 차원으로 하면서 동시에 양극화 현상을 부단히 하나로 합일하고자 하는 극성(極性)의 미학을 근간으로 한다. 이러한 유동이 수반하는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고정화가 요구 되는데, 그것이 20세기 시를 대표하는 모더니즘 시학의 요체이다. 견고한 이미지를 빌어 모호한 관념을 구상화 하고자 하는 회화적 이미지즘 시이다. 모더니즘은 정신적 광원(光源)을 지성에서 찾으면서 기계문명에 마멸되고 황폐화해가는 인간의 정신의 어둠, 즉 삶 속의 죽음을 밝혀 줌으로써 정신적 사양화(斜陽化)를 극복하고자 하는 일종의 광원의 시학이다. 이러한 정신 본질과 함께 모더니즘이 추구한 시는 관념과 정서의 회화화라는 시각 미학을 추구했고, 이는 강렬하고도 투명하여 견고한 이미지를 중시하는 이미지즘을 표현 본질로 하고 있다. 일종의 정서의 감각화라고 할 수 있는데, 정서의 감각화는 체험시론으로 연계된다. 체험시론은 감각 기능을 동원한 실념주의를 바탕으로 한 존대의 탐구나 발견이고자 한다. 즉, 체험시론은 일종의 물화(物化)를 근간으로 한다. 물화는 존재의 확인이며, 존재의 변용이며, 존재의 탐색을 통한 새로운 재현이다. 감각에 의해 체험한 사상(事象)은 우리의 뇌리에 인화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인화는 언제이고 재생이 가능한 이미지를 성립 시킨다. 이미지가 그림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해석은 이미지의 발원이 체험에 잇대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시를 이미지로 규정 하고자 하는 것은 곧 현대시를 체험시론으로 해석하게 하는 근거를 제공하게 준다.  체험은 관념에 대한 실념이고, 가공에 대한 실제이며, 즉자적 해석이 아닌 대자적 시각에 의존하는 생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 그 때문에 체험은 시를 견고한 이미지로 결구시키는 역할을 하며 투명한 사물화로 구상화 하는 존재에서의 해석을 용이하게 해 준다. 따라서 시란 정서는 물론 사상이나 감정, 심지어는 의식까지도 사물로 대체하는 철저한 즉물 적 표현 이라는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여기에서 현대시는 두 경로의 또 다른 방법론을 요구 하는데, 그 하나는 메타화이고 다른 하나는 메타피지컬 포위트리다. ㅡ 계속 ...   흔히 현대시를 메타언어라고 규정하는데, 메타란 두 의미론적 해석을 요구한다. 하나는 언어의 초월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뒤에 감추어진 비의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의 초월적 기능은 의미의 확장이자 의미의 고정화를 거부하는 일종의 암시나 상징적 기능에 의탁한다. 그리고 비의는 드러나지 않는 것을 포착 해 내는 일종의 새로운 의미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의 속성을 우리는 병치적 메타라고 하고, 후자적 속성을 치환적 메타로 규정한다. 구체적으로 풀이하면 이질성 속의 동질성을 찾아 결합한다. 동질성 속의 이질성으로 이동한다든지 하는 일종의 변증법적 결합이다. 이러한 결합은 의미로는 도저히 불가능하고 대신 의미의 초월이나 의미의 암시에 의존 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의미의 물화나 의미의 이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메타피지컬 포위트리는 시적 변증법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관념이나 사상을 중시하면서도 표현은 메타화에 의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이상 시는 리얼리즘의 현상학적 권태로움을 초월성이나 신비로 대체하고 여기에서 고도화한 상상력을 요구한다. 동시에 상상력은 기발한 착상의 컨시트를 창출해 낼 수 있게 한다. 컨시트는 상대성을 초월하여 초자연적인 대자적 시각을 극복함으로써 형이상적 속성을 지니게 된다. 또 이러한 상상력은 기존의 물화를 빚어 형상화한 이미지의 단조로움을 극복, 아이러니, 풍자, 패러독스, 도착적 표현 등으로 종합적 효과를 획득하는 기법상의 진보도 가져다주었다. 또한 현대시를 아이러니 생각하는 엘리엇의 견해를 진일보시킨 풍자에까지 이르게 하고 있다. 이러한 형이상 시는 단순한 기법상의 문제가 아니고 현대의 복잡다기한 분열상, 정치와 과학의 분화, 복잡한 문화 현상 등을 반영하기 위한 복합적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이상의 개관에서 볼 수 있듯이 시는 그 본질의 변화가 아닌 시대가 요구하는 것에 따라 그 표현 방법을 달리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살면서 19세기적 낭만주의 시를 쓰고자 한다거나 이미지즘을 신봉하는 외고집을 부리고자 한다는 것은 참으로 넌 센스다. 우리에게 당면으로 주어진 시학은 시의 메타화이거나 컨시트와 아이러니, 풍자와 같은 형이상적 시에의 접근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오늘에 살고 있는 이상 오늘의 시가 요구하는 시법에 충실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지각 있는 독자라면 이러한 당면을 외면 할 수 없을 것이고 현대시에 동참할 것으로 믿는다. 이상의 여러 조건들은 시를 쓰고자 하는 이들이 시를 쓰기 전에 갖추거나 터득해야 할 기초적 정석이란 점을 강조해 두고 싶다. ㅡ계속  
871    현대시 = 비유 댓글:  조회:2941  추천:0  2017-11-18
현대시와 비유 /박진환 1. 비유란 무엇인가? 어떤 의미에서 비유는 언어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한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일상적인 언어생활이나 문장에서 많이 쓰이고 있기 때문인데 이는 비유가 모든 언어 속에 편재하고 있는 수사의 한 원리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시 창작에 있어서는 필수적인 것이어서 시 자체라고까지 확대 해석할 수 있는 본질적 기능이자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언어는 그 소리 값과 의미와 대상을 드러내고 표현하며 지시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언어는 한정되어 있는데 반해 나타내고 표현하며 지시하고자 하는 대상 사물은 무한하므로 그 대상 사물을 다 표현할 수가 없게 된다.  다행히도 언어는 사물과 떨어져 독립하고 있으면서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는데, 이를 언어의 가동성(可動性)이라 한다. 이 가동성은 언어의 유한적 한계성을 극복, 표현의 무한한 가능성을 다 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 된다. 비유나 상징 등이 발생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고 동시에 시가 창조되는 발상 차원도 여기에 근거한다. 이러한 배경을 전제로 비유에 대한 해석을 보다 구체적으로 곁들여 보자. 비유는 일단 넓은 의미의 비유와 좁은 의미의 비유로 양분해서 설명될 수 있다. 넓은 의미로는 문체, 수사와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는바, 즉 독자의 관심과 흥미를 끌고 문장에 변화와 정체를 더하기 위한 수사 형식 일반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좁은 의미의 비유는 구상적∙회화적 비유 표현 특히 메타포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 다시 풀어보면 어떤 사물이나 의미를 다른 사물이나 의미에 유추하여 표현하는 직유∙은유∙의인∙제유∙환유∙풍유∙중의법 등을 포괄하게 된다.  이쯤에서 여러 정의들을 중심으로 다시 해석 해 보기로 하자. 몰튼은 비유를 회화적인 비교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부모의 은혜를 태산이나 바다에 비교하는 것이나 사랑하는 연인을 나의 태양과 나의 마돈나 하는 것이나 사랑의 맛을 꿀 맛 같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비록 사 비유이기는 하나 다 회화적 비교에서 비롯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특히 로버트바르는 사랑과 장미를 비교하여 좋은 시적 비유를 획득 하고 있다. 어떻든 그것이 회화적 비교이건, 의미적 비교이건 그 성립 조건이나 원리가 비교에 있다는 것은 비유가 두 가지 다른 사물이나 의미의 비교에서 성립된다는 것을 말한다. ㅡ계속 ...   시인이 무엇인가를 표현하고자 하는 본래의 것을 보다 구체적이고 정확히 표현하기위해서 또 하나의 사물이나 의미, 즉, 관념을 끌어 들였을 때만 가능해 진다. 이것을 두고 흔히 비유의 성립조건에서는 본래의 것을 원관념, 동원된 것을 보조관념이라 하는데 리처즈는 원관념을 본의(本意)라고 하고 보조관념을 유의(有意)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비유를 성립시키는 원리를 중심으로 비유에 접근해 보자. 첫째, 비유에는 두 가지 사물과 두 가지 의미의 비교가 있어야 한다. 흔히 있는 비유지만 ‘무지개는 사닥다리처럼 하늘에 걸려 있고’ 한다든지 ‘구름 땀은 포도송이처럼 가을로 영글고’ 했을 때 무지개와 사닥다리, 땀방울과 포도송이라는 두 사물이 동원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무지개와 땀방울은 원관념 인 본의에 해당되고, 사닥다리와 포도송이는 보조관념인 유의에 해당된다. 곧 비유를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두 가지 사물이나 의미, 즉 원관념과 보조 관념이 있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둘째로, 비유를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본의와 유의가 이질적인 것이어야 한다. 앞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무지개와 사닥다리, 땀방울과 포도송이는 서로가 다른 이질적인 사물이다. 그 때문에 무지개는 사닥다리가 아니다. 땀방울은 포도송이가 아니라는 부정이 있어야 성립 된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장미 같은 여자’ 했을 때, 장미는 여자가 아니라는 부정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본의와 유의가 서로 같았을 때는 그것이 비록 어법상 비유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설득력을 상실한 약한 비유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나 ‘바위같이 강한 남자’ 했을 때는 종류의 차이를 달리 함으로써 이질적인 점에서 설득력이 강한 비유로 적용한다. 엘리엇에 의하면 폭력적 결합이요, 콜리지에 의하면 통합적∙마술적 상상력에 의한 비유다. 셋째는 이와 같이 서로 이질적인 두 사물은 어딘가에 어떤 유사성과 관련성이 있어야 성립된다. 달리 말하면 이질 속의 유사∙관련성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보면 ‘달은 청상의 세운 눈썹이다가/시린 칼날의 은장도로 빛난다.’ 했을 때 달과 눈썹의 관련성은 여성 이미지이면서 시린 칼날의 은장도는 여성의 청결을 지키는 호신용이기 때문에 이미지의 관련성을 갖게 된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비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있어야 하고 이때 원관념과 보조관념은 서로 이질적이어야 하며, 이질성 속의 동질성이라는 유사성이 있어야 성립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비유의 원리가 ➀본의 ➁유의 ➂이질성 ④유사성의 네 가지 조건에 의해서 성립된다는 점을 알 수 있게 한다. 이쯤에서 비유를 종류별로 구체화해 보자. ㅡ계속 ...   2. 직유의 방법 직유를 흔히 명유라고도 하는데, 이는 하나의 사물, 즉 하나의 관념을 다른 사물, 즉 다른 관념과 직접 비교하는 비유법이다. 그래서 ‘~처럼, ~같이, ~듯이 ~인 양, ~하듯’과 같은 조사를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에 끼워 넣어 성립 시키는 비유의 형식을 위한다. 예를 들면 ‘꽃처럼 붉은 울음’한다든지, ‘왕방울 같은 눈을 굴리는 황소’ 한다든지, ‘구름에 달 가듯이’ 또는 ‘다정도 병인 양’ 했을 때에서 볼 수 있듯이 연결어를 사이에 끼고 성립되기 때문에 비유의 성격은 분명하고 직접적이나 그 밀도는 빈약하게 마련이다. 이때 직유는 사상을 선명하게 기술하는 목적으로 하는 기술적 직유가 있고, 사상을 선명하게 기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강의 적 직유가 있다. 기술적 직유는 다시 단일 직유와 확충 직유로 나눠지는데, 단일 직유는 간결한 비교를 서술하는 형식을 취한다. 예를 들면 ‘코스모스같이 가는 허리의 소녀’와 같이 단일하고도 간결한 성격을 띠고 있고, 확충적 직유는 직유의 부분, 즉 도입된 보조관념 부분이 길게 확장하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에서 볼 수 있듯이 ‘내 누님 같이’의 원관념을 그 이전의 보조관념이 길게 확장되어 있는 비유의 형식이다.  그리고 강의 적 직유는 두 가지 사상을 기술적으로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뜻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직유다. 특히 이때 속담 적 성격을 띤 말이 많이 동원 되는데, 예를 들면 ‘스크루지 같은 수전노’, ‘백 길처럼 가난한’ 한다든지, ‘개처럼 벌어서’ 등이 그 예이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직유는 원관념을 보다 잘 드러내기 위해서 두 사물이나 관념 사이에 ‘~처럼’, ‘~같이’와 같은 조사를 끼워 넣어 직접 비교하는 형식을 취하는데, 이때 두 사물의 상사성과 유사성을 근거로 하여 보다 본의를 구체화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이쯤에서 직유의 방식을 시로 실제화해 보자. ㅡ계속 ...   [실제] - 배경설정 비유는 가능한 한 직유를 피하고 은유로 쓰고자 한다. 그것은 직유로는 도저히 드러낼 수 없는 이질성 속의 동질성을 찾아 폭력적으로 결합하고자 하는 기법들을 터득하고 있고, 이때의 결구력이 직유보다 확실히 강한 설득력으로 작용하는 체험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초심자의 경우 은유보다는 직유를 즐겨 동원하는데, 솔직히 말하면 대부분 직유에 의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 날 낙엽 길을 걷다 나란히 걸터앉은 벤치에서 사랑을 고백 했다고 치자.  그때 노오란 은행잎 하나를 주워 그의 책갈피에 끼워주면서 사랑의 증표로 삼자고 했을 때 그녀의 눈에 완연한 서운함이 감돌았다고 치자.  주머니를 뒤져도 마땅한 증표가 될 만한 것이 없다. 그렇다고 쓰다 만 볼펜을 건 낼 수도 없다. 하는 수 없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사랑의 약속으로 걸었다고 치자.  종종 있는 일이고 더러 사랑의 체험으로 간직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날 이후 새끼손가락의 의미는 사뭇 달라진다. 그것은 사랑의 의미나 중량 그리고 약속의 고리를 다이아몬드처럼 끼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다 성숙하면 이 사랑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고 추억으로 남게 됐다고 치자. 그래서  어느 날 그 낙엽 길 벤치에 앉아 옛날을 회상했다고 치자. 무엇인가 가슴에 시려오는 사랑과 추억, 그리움 같은 것과 만났으리라.  이런 배경을 시로 써 봤다고 치자. 지그시 걸었던 보석처럼 빛나는 약속을 새끼손가락은 끼고 있다. 그리운 날엔  가슴에 품어 체온을 불어 넣기도 하고 서러운 날엔 한 잎 낙엽처럼 뽑아 던져도 보았지만 그대 더운 숨결로 건네주던 새끼손가락의 추억은 오늘도 진주처럼 반짝인다. 대충 이렇게 썼다고 치자. 이 시는 예외 없이 ‘처럼’, ‘같이’를 동원한 직유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ㅡ계속 ...   이 시는 일상적 어법의 비유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단조로운 비교의 형식 이상을 획득해 내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같이’나 ‘처럼’이 본인이 유의를 이어주는 조사 적 한계의 연결 고리 이상을 해 주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거기다 직유 이상으로 작용하지 못함으로써 사 비유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비유가 시적 비유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시적 직감과 내적 체험이 언어 속에 형상화 될 수 있도록 조사 아닌 상상력을 동원해야 하는데, 이 시에서는 단순한 사물로 사물을 잇는 이음새 역할밖에는 해 주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유사성만 동원됐을 뿐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는 데는 실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른 한 편의 시를 대비 했을 때 이해를 도울 것으로 본다. 추억보다 슬픈 사랑을 끼고 있다. 온 몸과 마음으로 매어달린 무게를 새끼손가락은 끼고 있다. 악수론 건넬 수 없는 지극한 사랑을 약속으로 걸고 어미손가락보다 당당한 맨 끝의 짧고 가는 손가락 세끼손가락의 추억과 새끼손가락의 사랑과 새끼손가락의 약속은 아름답다. 보이지 않는 고리 하나를 끼고 늘 보석처럼 빛나는 새끼손가락 사랑과 추억과 약속의 마디가 흰 새끼손가락은 체중보다 무거운 사랑을 가누고 있다. 「새끼손가락」이라는 졸 시의 전문이다. 이 시에서도 ‘추억보다’, ‘어미손가락보다’, ‘체중보다‘에서 볼 수 있듯이 직유를 쓰고 있다. 그러면서도 앞의 시에 비해 단순 비교가 아닌 시적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은 새끼손가락으로 걸었던 사랑의 의미를 계량하는 중량감으로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종연에서는 약속을 보이지 않는 고리로 보석의 의미를 부여하고, 새끼손가락을 단 순한 손가락이 아닌 사랑과 추억으로 마디가 굵은 손가락으로 구상화하고, 여기에 체중보다 무거운 사랑의 중량감을 매달아 줌으로써 단순 비유가 아닌 치환과 병치적 은유의 효과를 얻고 있다. 이 때문에 이 시는 앞의 시가 극복해 주지 못한 단조로움을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이는 앞서 지적한 시적 직감과 내적 체험을 결구시킨 상상력을 동원하고 있기 때문인데 직유이건 은유이건 비유를 통해 획득한 이미지는 상상력에 의해 결구된다는 사실을 환기시켜 두고 싶다. 결국 비유가 이미지를 성립시키는 원리이지만 역시 상상력에 의해 보다 구체적 이미지를 창출한다는 점에 관심했으면 한다. 다음은 비유의 대표적 양식인 은유를 제기해 보자. ㅡ계속 3. 은유의 방법 은유는 암유라고도 한다. 또한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에 조사를 끼워 넣지 암ㅎ고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동일한 것으로 보는 비유로서 ‘메타퍼’라고 명명한다. 메타 퍼의 mete는 초월 및 벗어남의 뜻이고, phor는 이동한다는 뜻이다. 이로써 보면 메타퍼는 어떤 사물관념, 의미나 감정이 다른 사물이나 의미로 옮겨진다. 전자의 것이 후자의 것으로 유사성이 없더라도 결합될 수 있는 폭력적 결합이 가능하게 되고, 폭력적 결합에 의해 창조적 관련을 창출하게 된다. 이를 보다 극명히 하기 위해 몇몇 은유에 대한 견해를 제시해 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은유란 어떤 사물에 다른 사물의 이름을 부여하는 것으로 그 전이는 속(屬)에서 종(種)으로, 종에서 속으로 혹은 종으로 또는 유추를 토대로 하여 이루어진다고 그의「시학」에서 말하고 있다. 또 G. 휠라이트의 지론에 의하면 은유는 어떤 한 가지 세상과 심상 또는 상징이 이와 다른 심상, 상징 등을 함축 내포함으로써 그 의미를 명료화하는 복합 확장을 꾀하는 응축된 언어 관계로 제시하고 있다. 이때 원관념은 생략되고 보조관념만을 내세우게 되는데, 이 때문에 은유는 더러 상징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최창호(崔昌鎬)는 메타 퍼와 직유의 차이를 비유의 효과적인 차이로 보면서 시밀 리가 축약된 것이 메타 퍼이고, 그와 반대로 메타 퍼가 부연된 것이 시밀리라고 말 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 시밀리가 두 사물을 직접 비교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비해, 메타 퍼는 두 사물 중 하나를 다른 것과 순간적으로 동일시하거나 한 사물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결국 최창호의 지론은 은유가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동일한 것으로 보는 비유의 형식임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든다면 직유가 ‘놋날 같은 비’라고 했을 때, 은유는 ‘놋날의 비’로, 또 직유가 ‘파도 같은 군중’ 했을 때, 은유는 ‘군중의 파도’로 원관념과 보조 관념 사이에 끼워 넣었던 ‘같은’이란 조사를 생략한다.  따라서 은유는 직유가 생략된 형태, 즉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동일시하는 비유의 형식이다.  이때 은유는 조사가 생략됨으로써 언어는 축약되고 의미는 강조되는 의미의 함축 및 확충이란 시적 효과를 배가 시킨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메타퍼는 현시대를 대표하는 표현 양식이면서 동시에 일종의 광범위한 언어 현상으로서 원래는 구상적 사물을 가리키는 언어가 추상적∙사유적으로 사용 되었을 때 메타퍼가 되는데 이 때문에 전이적 언어는 모두 메타퍼라 할 수 있다. ㅡ계속 ...   오늘 날 시를 흔히 메타언어라고 하는바, 이 때의 메타언어는 시적 은유를 의미하는 것으로써, 특히 기교를 사용한 메타퍼를 말한다. 이러한 견해는 뉴크리티시즘에서 시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은유를 보는 데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나 메타퍼는 교묘하게 사용하면 묘사를 살리고 감명을 깊게 하지만 자칫 남용하게 되면 일종의 컨시트가 되어 거꾸로 묘사를 해칠 우려가 있다는 점에도 관심해야 한다. 메타퍼의 종류는 주로 리처즈가 주지와 매체로 보는 이분법을 적용하나 브룩스와 같은 신비평가들이 매체가 주지를 단순한 형식으로 나타내는 설명적 메타퍼는 가치가 없는 것으로, 양자의 유기적 결함에서 생기는 기능적 메타퍼를 가치 있는 것으로 규정한다. 어떻든 메타퍼를 현대시를 성립시키는 가장 생명력 있는 언어의 원리를 보는 것도 이 때문인데, 달리 말하면 시는 본질 적으로 은유적 속성을 지녔다는 뜻이 된다. 이를 시에 실제화 했을 때 메타퍼에 대한 이해는 보다 쉬워지리라 본다. [실제] - 배경설정 두 여인이 퇴근길의 공원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치자.  불행히도 남자 족에서 먼저와 기다려 주기를 기대 했으나, 몇 분 늦게 도착한 여성 쪽에서 약속한 30분이 지나도록 상대가 와 주지 않았다고 치자.  몇 번이나 서성이며 시계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 보다 그만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다고 치자. ‘오기만 해 봐라. 용서하지 않을 테다.’하고 몇 번이나 다짐하면서 기다렸으나 1시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는다. 내심 겁이 덜컥 날 것이다.  ‘행여 변심한 게 아닐까?’ ‘아냐, 교통사고라도 난 개 아닐까?’, ‘설마 회사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하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약속한 시간에서 1시간이 훨씬 넘어섰다.  그만 포기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 눈물이 글썽한 눈에 나뭇가지 사이에 걸려 있는 초승달이 들어온다.  부글부글 끓던 심시가 갑자기 외로움으로 뒤 바뀌면서 쓸쓸히 돌아설 수밖에 없다고 치자.  차를 타고 갈 기분이 나지 않는다.  톡톡 하이힐 소리를 내며 골목으로 접어드는데 뒤를 돌아보니 초승달이 따라오다 멈춰 선다. 이런 체험은 한 번쯤 해 봤던 것들로써 이런 배경을 일기로 쓰듯 시로 썼다고 치자. ㅡ계속 ...   기다림은  곱게 내려 간 上弦의 눈썹 기다리다 지친 분노는 치켜 뜬 下弦의 눈썹 사랑은 만월이었으나 은장도로 베어다 창에 건 초승달과 그믐 달. 이렇게 썼다고 치자. 이 시에서 1연의 기다림은 곱게 내려 깐 초승 달 같은 눈썹으로 전이되고, 2연에서는 기다리다 지친 분노로 감정이 전이 되면서 눈썹을 치켜 뜬 그믐달로 이동된다. 3연에서는 다시 그리움이 사랑으로 이동되면서 감정의 전이에 다라 만월이 되는데, 삭이지 못한 화가 그만 은장도를 꺼낸다.  그리고 끝내는 은장도로 만월을 베어다 창에 건 초승달과 그믐달로 옮겨지는데 이는 사랑의 감정을 눈썹으로 전이시켜 비유를 성립시킨 것으로 보아진다. 즉 관념을 사 물로 대체시킨 병치 은유라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원관념과 그리움과 사랑이 전이에 따라 곱게 내려 깐 다소곳한 표상의 눈썹으로, 분노의 감정으로 치켜 뜬 하현의 세운 눈썹으로 자리바꿈을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순종과 분노의 대립 감정이라는 사랑의 속성을 초승달과 그믐달의 이미지로 전이시키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결국 이 시는 잘 되고 못 된 것을 차지하고 사랑과 사랑에 따른 애증을 눈썹이란 별개의 사물로 이동시킴으로써 은유를 성립시켜 주고 있다는 데 습작의 의미가 있다. 이 시 보다 철저한 메타퍼로 재구성했을 때 실제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길 들이다  잘 못 세운 눈썹 짝 잃은 외로움으로 건  귀걸이 돌아선 등 가려주는 목걸이 시린 칼 날로 가슴에 품은 은장도 졸시 「초승달」의 전문이다. 이 시는 사랑이나 그리움의 감정까지도 배제한 채 여성의 속성을 달에 비유, 철저히 객관적 상관물만을 동원하고 있다. 그 때문에 의미나 감정의 개입을 통제하고 다만 이미지로 대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달에 눈썹. 귀걸이. 목걸이. 여성의 원형상징이고 보면, 이 시는 거꾸로 여성의 속성을 달에 비유, 메타화 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메타퍼는 랭거의 지적처럼 시의 원리이자 가장 생명력 있는 언어의 원리가 된다는 점에 동의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현대시의 드러냄을 대표하는 양식으로 비유를 꼽고 있는데, 비유 중에서도 은유는 시를 광채 있게 하는 표현 양식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ㅡ계속 ...   4. 치환 은유와 병치 은유 은유의 현대적 구조는 치환 은유(置換隱喩)와 병치 은유(竝置隱喩)로 대표되고 있다. 치환의 뜻은 바꾸어 자리바꿈을 의미하고 병치는 나란히 놓는다는 병렬적 진열을 의미한다. 이를 구체적으로 해석하면 치환은 원래의 의미를 다른 사물의 의미로 바꾸는 일종의 자리바꿈의 은유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병치은유는 사물이나 의미네 관련 없이 서로 별개의 독립성을 지닌 사물이나 존재를 동원, 대립과 갈등으로 팽팽한 김장을 유지하면서 나란히 자리하게 한 비유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치환 은유가 의미의 이동을 성립 조건으로 한다면 병치은유는 관련이나 연관을 배제한 대립 갈등의 이질적인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사물이나 존재의 진열 형식을 취한다고 할 수 있다. 일종의 충격적이고도 폭력적 결합에 의해 성립된 비유의 형식인데 비유를 형성하는 두 관념은 그 뜻이 이질적이면서 팽팽한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치환 은유는 이런 원리를 성립의 원리로 동원하고 있고, 병치은유는 서로 상관성이 배제된 비동일성의 사물이나 존재로 병치시킴으로써 상호 거부, 대립, 갈등을 유발, 폭력적 결합이 아니고는 비유를 성립시킬 수 없게 된다. 예를 들어 두 사랑하는 남녀가 한 번 만나서 사랑에 골인했다면 이 때의 사랑은 싱겁기 그지없다. 그러나 한쪽이 끌면 한쪽이 달아나거나 반대로 한쪽이 달아나면 한쪽이 끌어당기는, 끌고 당기는 팽팽한 긴장이 유지될 때의 사랑은 사랑의 감정을 고조시키고 성취욕 또한 강하게 작용한다. 그래서 한 번에 골인한 사랑은 쉬이 권태나 대립. 갈등을 초래할 위험이 있으나 후자의 경우는 일단 골인하게 되면 견고한 고리가 걸어져 풀어지지 않는다. 이 비유를 다시 시에 대입하면 전자 적 의미는 직유에 가깝고 후자적 경우는 은유의 양식에 가깝게 된다. 맥스 블랙머가 비유를 상호 작용으로 풀이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런 김장과 대립의 병치성과 원래의 의미를 다른 사물의 의미로 이동. 전이시키는 치환 은유의 특성을 지적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정리 했을 때 치환은유와 병치은유의 본태는 드러날 것으로 본다. 치환 은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 상호간에 어떤 유사성을 토대로 하여 그 의미를 전환시키는 것으로써 일종의 잘 알려진 것과 덜 알려진 것의 종합을 통한 의미의 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외형상의 것만이 아니라 내적이고도 전신적이며 정서적 전이를 통한 동일성을 결합의 원리로 한다는 점을 추가해야 한다. ㅡ계속 ...   병치 은유는 치환은유가 한 사물이 다른 사물로 이동하는 자리바꿈이 아니라 두 사물을 그냥 대조적으로 진열. 배치해 놓는 형식이다. 유사성이나 동일성이 아닌 비유사적이고 비동일성인 각기 다른 독자적 존재나 사물의 폭력적 배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일종의 이질적인 것의 폭력적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치환 은유와 병치 은유는 다른 사물과 사물간의 동질성을 획득하려는 측면과 오히려 상호 이질성의 충돌을 폭력적으로 결구시키는 충격적 결합을 시의 미학으로 수용하려는 상반된 방식을 원리로 하고 있다. 이쯤에서 시를 제시했을 때 치환 은유와 병치 은유에 대한 보다 극명한 이해에 접근할 것으로 본다. [실제] ▶ 치환 은유 은행나무는 지가 무슨 은행이라고  황금 주머닐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가 거지같은 바람이  손만 내 밀어도 황금 지폐를  한 묶음씩 쥐어준다. 졸시「은행잎∙1」의 전문이다. 은행(銀杏)과 은행(銀行)은 동음의 이다. 그래서 편에 해당된다. 그러나 은행잎이 황금 빛깔을 하고 있다고 하는 점에서 보면 황금의 본적지인 뱅크로서의 은행과는 산호 맥락 적 관계를 갖게 된다. 낙엽을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로 보는 것이나, 낙엽을 ‘액면 없는 수표’로 보는 것은 다 그런 맥락에서 발상한 것이다. 또 낙엽의 황금 빛깔을 빌어 빛깔의 동질성인 황금으로 보면서‘ 중량 없는 황금’으로 해석하는 것도 같은 맥락의 것이다. 이런 맥락성에서 보면 황금 이파리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은행잎은 마치 황금 주머니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 황금 주머니는 바람에 나부껴 떨어지기 마련인데 이를 ‘거지같은 바람이/ 손만 내밀어도/ 황금 지폐를/ 한 묶음씩 지어준다.’ 고 상상력을 개입시킨 것이다. 그 때문에 본의는 은행잎을 그리려 한 것인데 그 결과는 엉뚱하게도 은행으로 둔갑하고 또 은행잎이 황금주머니로 둔갑하는 의미의 이동을 감행했던 것이다. 곧 치환 은유에 대한 원관념이 전혀 새로운 관념으로 이동되는 비유의 형식을 취하게 된다. ㅡ 계속 ...   ▶병치 은유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에 갈앉은 놋쇠항아리다. 이 시는 김춘수(金春洙)님의 시「나의 하나님」의 일부다. 이 시에서는 원관념인 비애가 ‘커다란 살점’과 ‘놋쇠 항아리’로 제시되고 있다. 관념으로도 사물로도 또는 존재로도 동일성에 잇댈 근거를 제공 해 주지 않고 있다. 도대체가 하나님의 비애와 살점, 놋쇠 항아리는 철저한 비 동일성의 것으로서 유사성이나 연관성을 찾아볼 수 가 없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여기서 매우 충격적인 당혹감을 느길 것이고, 이 당돌한 병치에 대한 심한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도대체가 “무슨 놈의 소린지 일 수 없다”며 불평이나 푸념을 하게 마련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병치형식의 폭력적 결합 뒤에는 우리를 놀라게 할 만한 결합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굳이 풀어본다면 ‘하나님의 늙은 비애’란 것은 슬픔의 극대화를 위한 묘한 착상이다. 달리 말하면 슬픔을 극대화 해 놓고 그 슬픔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제공했을 때 확산 될 효과를 미리 계산 했다는 뜻이다. 어떻든 비애가 늙어 쪼그라들 만큼의 슬픔이었다면 그 원인을 해명해야 이 시는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살점이나 놋쇠 항아리는 이를 풀어 주는 데 도운이 되는 사물들이 아니다. 되레 엉뚱하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풀어보자. 하나님의 슬픔이 살점 때문이라는데, 어째서 살점이 비애의 원인인가? 현대를 물신 시대라고 한다. 달리 말하면 모든 가치 척도가 물질로 척도 된다는 뜻이다. 이 말은 물질이 정신에 대응된다는 점에서 정신적 가치 기준이 상실되고, 그와 대응되는 육체 중심의 관능주위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비유적 진술이 된다. 육체는 힘을 비유하고 관능은 쾌락을 비유한다. 이렇게 보면 현대는 힘에 의한 폭력, 쾌락에 의한 관능주의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이치가 성립된다. 또 육체는 기실 정신에 대응시키면 살덩어리나 비곗덩어리에 불과하다. 이로 인한 육체 ∙관능주의는 슬픔이 아닐 수 없게 된다. 일종의 정신이 소멸된 데 따른 슬픔이다. 이 육욕주의를 푸줏간에 걸린 살점으로 메타화, 비애와 병치시켰던 것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비애의 1차적 원인은 규명된다. ㅡ계속 ...   두 번째 비애는 ‘놋쇠항아리’ 때문인데 어째서 놋쇠항아리가 비애의 원인이 될 수 있는가? 놋쇠는 청동으로 금(金)의 원형이다. 금 이전에는 청동이 최고의 값어치를 지녔던 귀금속이었던 것이었다는 뜻이다. 이 점에서 청동, 즉 놋쇠항아리는 금에 대유된 비유의 사물이다. 현대를 물신 시대라 하는 것은 그 가치 척도가 금으로 측정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금, 곧 황금이 모든 물질의 가치 척도가 된다는 뜻이다. 이는 놋쇠와 황금이 본질적으로는 다르나 원형인 놋쇠가 청동기 시대의 최고치라는 점에서 또 황금이 현대의 최고치라는 점에서 등가물이 된다. 이러한 이치는 배금주의∙황금만능주의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어 정신적 진단으로는 분명 비극이 아닐 수 없고, 이 비극은 곧 비애의 원인 제공이 되거나 간접적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할 때는 물욕이나 육욕보다는 정신 지상주의를 계산했던 게 분명한데 세상 돌아가는 꼴은 이와 반대로 정신을 버리고 물욕∙육욕이 난무하니 이것이 비애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과학적 진술을 김춘수는 하나님과 살점, 놋쇠항아리를 병치시킴으로써 철저히 은폐했던 것이다. 앞서 비유를 은폐적 형식이라고 말했던 점에 동감할 것으로 본다. 이쯤에서 치환 은유와 병치 은유에 대한 이해에 접근했을 것으로 본다. 다음은 비유의 또 다른 형식인 의인법을 제시해 보자. ㅡ 계속 5. 의인법 의인법은 직유∙∙은유와 더불어 가장 오래된 비유법의 하나로서 활유(活喩)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인간 이외의 사물이나 추상 개념에 인격적 요소를 부여해서 표현하는 수사법으로써 은유의 특별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조명해 보면 먼저 인간 이상인 신 또는 영적(靈的) 존재를 인격화 하는 것에서 발생, 그 다음으로는 비인간적인 존재, 무생물∙추상 개념을 인격화 하는 것으로 발달 해 왔다. 전자는 의인관(擬人觀)에 해당하며 종교적 의식의 소산이고, 후자는 비의식의 소산이다. 분류별로는 첫째, 불완전 의인법 둘째, 완전 의인법  셋째, 추상개념의 의인화 등으로 구별할 수 있다. 첫 번째의 불완전 의인법은 의인화 방법이 철저하지 못한 것으로 그 인격성은 단지 연상에 의해 시사된 정도이며, 인격적 이미지가 전체로써 투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둘째, 완전 의인법은 대상의 인격이 전체적으로 선명하게 나타나 있으며 특히 신화적 배경을 갖고 표현된 해∙달∙별∙바람 등의 의인화가 그것이다. ‘산이 병풍을 치고 날 가두 네’ 라든지, ‘아침 태양이 강물에 얼굴을 씻고 있다’ 등은 그 예로써 완전 의인법이다. 셋째, 추상개념의 의인법은 진리∙사랑∙희망∙이상 등이 의인화된 것으로써 ‘희망의 손짓’, ‘역사의 눈’ 등이 그 예인데 특수한 은유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분류는 웰렉과 워렌에 의하면 이분법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의인법은 대체로 신비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의 상상력을 요구하는데, 이 태도는 외계의 생명 없는 인간의 감정을 투영하기도 하고, 자연을 정령화(精靈化)하거나 자연에 인간과 같은 생명을 부여하기도 한다. 이와는 반대로 생명이 있는 것을 비정령화 (非精靈化)하고 혹은 비인간화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모든 비유적 표현은 주관적 극치와 객관적 극치라는 두 극단 사이에 모두 망라되는 것으로 보인다고 피력한 것이 된다. 또 의인법을 감정적 오류(感情的 誤謬)라고도 하고 감정이입(感情移入)이라고 일컫기도 하는데, 감정적 오류는 감정이 없는 무생물을 마치 감정이 있는 것처럼 인식하는데서 오는 오류라고 보아 그렇게 말하고 감정이입은 한 예술작품을 대할 때 그것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을 뜻한다. 즉 감정 없는 예술 작품이나 자연의 대상 때문에 결과적으로 의인화의 경향을 띨 수밖에 없게 된다. ㅡ 계속 ...   이와 같이 의인법은 여러 유형으로 분류할 수도 있는데, 어쨌건 사물이나 사람이 아닌 생물에 사람과 같은 성질을 부여해서 표현하는 일종의 은유로 본다면 틀림없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 이상인 존재, 즉 신이나 절대 존재에 적용했을 때는 종교적 의미를 갖게 되고, 인간이하의 대상 사물에 적용 했을 때는 예술적 표현이 된다. 이러한 의인법은 오늘날의 현대시에서도 예외 없이 즐겨 사용하고 있는 표현기교라 할 수 있는데, 이를 시로 실제화해 보자. [실제] ▶배경 설정 여름이 지날 무렵, 가을 산을 올랐다가 잠시 산허리에 앉아 시는데 마침 멀리 호반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고 치자. 들락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하자. 그런가 하면 산자락은 마치 호반에 허리가 잠긴 것처럼 보이고 또 호면에 얼비쳐 얼굴을 드리운 것처럼 보였다고 하면 이미 의인화가 성립되는 것이다.  여기에 상상력이 동원 되면서 마치 남녀의 교접 성으로 보였다고 치자. 이때 시상이 떠올랐고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썼다고 치자. 산은 두 가랑이를 벌리고  거인처럼 누워있다. 허연 허벅지를 드러낸 호반이 두 팔로 허리를 휘감고 있었다. 한 때의 교접으로 드러낸 등을 숲은 가려주지 못했다. 체위가 바뀐 채 하체를 드러낸 산의 발기를 얼굴을 비춰보던 하늘이 난처해하며 외면하고 있었다.  발상의 배경을 정리해 이런 시를 썼다고 치자. 산과 호수가 남녀로 비교적 분명하게 의인화되어 있다. 일종의 완전 의인법을 동원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ㅡ계속 ...   1연에서 산은 두 가랑이를 버린 거인으로,  2연에서 호반은 허벅지를 드러낸 여인으로 의인화되어 있고,  3연에서는 남녀의 교접으로 구체화 되고 있다. 그리고 종연에서는 이를 지켜보던 하늘까지 의인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비교적 대상의 인격이 전체적으로 선명히 드러나고 있는데 적절히 의인법을 구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유사한 배경, 유사한 발상으로 의인법에 의탁한 다른 한 편의 시를 대조해 보자. 산은 몇 조각 구름을 베고 누워 두 가랑이를 벌리고 있었다. 물 묻은 치맛자락을 끌며 무시로 호반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운우의 장대비가 그친 뒤 허옇게 드러낸 등을 숲은 가려주지 못했다. 그 밑에 허리 째 잠긴 하체가 체위가 바뀐 채 깔려 있었다. 젖혀진 치마폭 사이로 잉태한 하늘이 언뜻언뜻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이 시는 「호반」의 전문이다. 앞의 시와 별로 차이가 없으나 다소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앞의 시가 그냥 거인으로 의인화된 것에 비해 뒤의 시는 구름을 베고 누운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앞의 2연이 허연 허벅지를 드러낸 여인으로 의인화 되었다면, 뒤의 시는 치맛자락을 끈 여인으로 여인의 이미지를 더 구체화하고 있다. 또 앞의 시가 7연에서 남녀의 교접으로 산과 호반을 의인화한 것에 비해 뒤의 시는 운우로 교접을 간접화하고 있고, 종연에서는 앞의 시가 교접의 현장을 하늘에 들키는 의인화로 현장성을 강조한 것에 비해 뒤의 시는 운우를 교접으로 얼비친 하늘을 잉태의 형식으로 의인화하고 있다. 어떻든 두 시가 다 같이 의인법을 즐겨 차용하고 있는 점에서 같은 맥락을 갖고 있으나 다만 표현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ㅡ계속 ...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생명이 없는 사물을 사람이 아닌 생물에 사람과 같은 성질을 부여함으로써 성립되는 의인화는 달리 생명을 생명이 없는 사물로 만들어 표현하는 은유가 있는데, 그 때문에 의인법과는 반대의 성격을 갖는다. 이를 결정법(結晶法)이라고도 하는데 시를 통해 이해에 접근 해 보자. 무슨 말을 하여 피를 돌게 하랴 돌의 생애를 살아 있게 하랴 말만이 아니라 혼까지 들어가 돌 속의 침묵 금이 되리라. 이렇게 썼다고 치자. 이때의 은유는 외계의 생명 없는 사물에 인간의 감정을 투영하기도 하고, 자연을 정령화 하거나 자연에 생면을 부여하는 것과는 달리 생명이 있는 것을 비 정령화 및 비인간화하는 경우에 해당된다. 달리 말하면 사물 자체로 환원되는 존재의 즉자화(卽自火)라고 할 수 있다. 실존을 초월, 사물 자체의 존재로 환원되는 비인간화, 비 생명화가 그것이다. 이상으로 현대시와 비유에 대하여 대략 설명이 됐을 것으로 본다.   현대시와 상징 1. 상징이란 무엇인가? 비유가 현대시를 성립시키는 구성의 원리라면 상징은 비유로써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현대시의 대표적 표현 기교라 할 수 있다. 사전적 해석을 빌면 어떤 감각적 대상이 다른 대상을 표시하거나 본래의 고유한 의미 외에 비 본래의 의미를 표현하는 수사법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를 줄여 말하면 ‘다른 의미로 표현하는 그 무엇’이 되겠는데, 구체화하면 본래 표현하고자 한 본의를 다른 무엇을 빌어다 표현하고자 한 유의다. 이때 유의는 일종의 사인, 즉 표적이나 징표가 된다. ㅡ 계속 ...   1. 상징이란 무엇인가? 브룩스와 워렌은 공저 「시의 이해」에서 상징을 표적으로 재기하고 있는데, 그 지론에 의하면 상징은 원관념이 생략된 은유다. ‘소녀들의 장미 동산에 있는 여왕 장미’하면 은유지만, 시인이 단순히 그가 취급하는 사랑의 성질을 암시하기 위해 장미를 기리 킬 뿐 비유적인 틀을 지시하지 않는다면, 그는 장미를 상징으로 바꾼 것이다. 우리는 비유적인 전화(轉化)를 강조할 때 은유라는 말을 쓴다. 예컨대 ‘소는 장미다’라고 하면 장미의 특질은 소녀에게 전환된다. 그러나 다른 어떤 것을 대신하는 것으로서의 대상이나 행동을 생각할 때 우리는 상징이란 말을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징은 의미를 지적하는 사인인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상징을 사인으로 본 것은 언어적 해석에서도 가능하다. 상징은 그리스어인 ‘심발레인(symballein)'에서 온 것인데 동사는 ;함께 던지다. 비교하다’라는 뜻이고, 명사는 ‘표시’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 표시는 표적, 즉 사인의 다른 표현이 된다. 좀 더 알기 쉽게 이야기 식으로 풀면 이러하다. 중국 육조 때 진후주는 정사를 외면하고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기 때문에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국운은 날로 기울어 갔다. 반면에 수나라 양견을 세력을 확장, 중국 전역을 통일 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런 처지를 잘 알고 있던 진후주의 딸 낙창공주의 남편 서덕언은 국운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음을 알고 대책을 세우고자 아내에게 “만약 서로 헤어지게 되면 ‘서로 정표를 지니고 있다가 정월 보름날에 시장에 나가 팔도록 합시다.’ 그러면 그것을 사 가는 편에 소식을 전할 수 있지 않겠소.” 하며 거울을 반으로 쪼개 그 반쪽을 아내 낙창공주에게 건넸다. 이 이야기는 거울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는 사인이 되는데, 이 때 거울은 반쪽으로서는 의미가 없고 반드시 두 쪽이 결합됨으로써 약속은 이행되고 성취된다.  이와같은 상징이란 어떤 진술이나 이미지가 한쪽으로는 의미가 없고 다른 한쪽, 즉 보조관념으로 대체해 버린 나타나지 않는 원관념과의 결합에 의해 성립됨을 고사를 통해 알 수 있게 한다. 이 이야기는 상징을 성립시키는 조건으로 본의와 유의가 있어야 함을 말해 주는데, 은유와 다른 점은 비유를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 즉 본의 ∙유의 ∙유사성∙이질성 중 오직 유의만이 밖으로 드러나고 다른 세 요소는 모두 안으로 숨어버리는데 있다. 여기에서 상징과 상징되어지는 것과의 관계는 어떠한 것이냐는 의문이 제기되는데, 이때 언어의 상징적 속성이 제시된다. ㅡ 계속 ...   리처즈는 언어를 무엇인가의 다른 것으로 대신하여 자기 이외의 사물을 가리키는 기호로서 의도적이며 체계적인 상징으로 보고 있다. 그런가하면 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언어 자체를 관례적 상징이라고 말하고, 웰렉과 워렌도 은유가 여러 차례 되풀이되어 관례화하면 원관념이 쓰여 지지 않고 상징이 된다는 요지를 피력하고 있다. 여기에서 언어 자체를 상징으로 보는 것은 언어가 자신 아닌 다른 어떤 관념을 암시하는 경우를 일컫는 것이다. 그 때문에 단지 유사성이나 이질성 속의 동질성을 드러내는 은유적 한계를 벗어나 신비∙초월∙추상성을 띠게 된다. 이 신비∙초월∙추상은 다 같이 형이상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상징(象徵)에서의 상자는 지상적이고도 가시적인 표상이 아니라 재천성상(在天成象), 즉 하늘에서 이루어진 상으로 초월적 세계 표상이란 의미로 「주역」에서는 해석한다. 이는 곧 지상적인 것이 아닌 천상적인 것으로서 초월적 표상으로 해석된다. 이 때문에 상징은 가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내면적인 것. 물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정신적인 것으로 드러내는 표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점에서 보면 상징은 단순한 물체를 다른 물체의 대용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사상과 가정을 표현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영상(영상)을 사용하는 것이 된다. 일찍이 말라르메가 상징주의를 정의 하면서 하나의 사물로 하여금 점차적으로 어떤 기분을 드러내도록 하는 예술 이와는 반대로 어떤 사물을 선정해서 그것으로부터 ‘영혼의 상태’를 끌어내는 예술로 규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왜냐하면 앞의 추상적 사상이나 감정이나 영혼의 상태는 다름 아닌 초월적∙비가시적 세계로 본의에 해당되고 이를 표현하기 위해 구체적 영상을 사용한다는 영상은 유의에 해당된다. 상징주의를 초월적 상징주의로 명명하는 것은 바로 이 초월적 상징주의를 두고 하는 말이다. 물론 초월적 상징주의는 불완전한 현실세계에 대응되는 이상향에의 심벌로 사용된 것이지만 이상 세계가 초월의 세계이고 보면 역시 상징에 해당됨도 사실이다. ㅡ계속 ...   시인들을 흔히 예언자∙선견자∙계시자 등으로 부르는 것도 따지고 보면 현실계의 물체∙들의 배우나 그것들 너머에 존대하는 이상계에 숨겨져 있는 중요한 것들을 볼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고 있다는 뜻에서 명명된 것들이다. W.M 울반에 의하면 상징을 성립시키는 네 원칙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를 중심으로 상징은 해석될 수 있다. 첫째. 모든 상징은 무엇인가를 지시한다. 둘째. 모든 상징은 2중의 지시를 갖는다. 셋째. 모든 상징은 진실과 허구를 포함한다. 넷째. 모든 상징은 2중의 적절성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첫째는 상징이 비록 본의를 감추고 있으나 무엇인가를 드러내 보인다는 것으로서 일종의 암시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고, 둘째는 이 암시적 드러냄이 하나는 감춘 지체로서의 본의에 의해, 다른 하나는 감춤을 드러내기 위해 동원한 유의에 의해 드러내냄으로써 2중의 지시가 될 수 있다. 셋째, 진실과 허구는 짐짓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본의로서 이는 진실이 허구가 되는 셈이다. 고로 상징은 이 둘을 다 포함하는 것이 된다. 끝으로 넷째, 2중의 적절성은 본의와 유의가 비록 진실과 허구로 제시되기는 하나 상징이 이를 둘 다 포함한다는 점에서 보면 안과 밖, 즉 본의와 유의가 꼭 맞아 떨어져야 한다는 조건으로서 추상 사상이나 감정의 영상화가 조화롭게 결구되어야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는 것이 된다. 조금만 사려 깊게 읽어 본 독자라면 이쯤에서 상징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을 파악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 설정은 상징주의에 대한 조명에서 보면 극히 측면적이고도 원칙적인 것의 일부에 불과하게 된다. 우선 기초적 이해를 돕기 위해 은유와 상징을 시의 실제를 통해 비교해 보기로 하자. ㅡ 계속 ...   2. 상징과 비유의 차이 은유의 속성과 상징은 분명히 그 본질을 달리하면서도 또 동질적 속성을 많이 지니고 있는 점에서 본다면 유사관계를 설정하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가끔 이 둘을 구별하기 힘들다고 실토하기도 한다. 또 앞서 은유에서 지적한 바 있듯이 어떤 한 가지 사상∙심상 또는 상징이 이와 다른 심상∙상징 등을 함축 내포함으로써 그 의미의 명료, 복합 확장을 꾀하는 응축된 언어로 은유를 해석한 것에서 메타퍼는 마치 상징과 같다는 뜻을 지니게 된다. 또 메타퍼나 심벌이 다 같이 본의나 유의를 성립의 기본조건으로 하고 있고, 여기서 유사성, 비유사성을 동원하여 기본요소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은유와 상징을 역시 그 한계나 개념 설정을 모호하게 한다.  그러나 시를 제시, 실제를 빌어 조명했을 때 훨씬 쉽게 이해 될 것으로 본다. 그의 머리는 최상의 순금이며 그의 머리는 텁수룩하고 까마귀처럼 검구나. 이 시는 밀턴의 「실락원」에서 노래된 구약 중 「아가(雅歌)」로서 비유와 상징을 비교하기 위해 즐겨 동원되는 시다. 이 시에서 ‘머리는 순금’이라 했을 때는 은유를 성립시키고 있고, 그런가 하면 다음 행인 ‘머리는 까마귀처럼’에서는 직유를 사용하고 있다. 1행은 왕관을 쓴 머리이고, 2행은 왕관을 쓰지 않은 더부룩한 머리의 형상 그대로를 진술하고 있다, 2행은 비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으나 1행은 머리를 순금으로 표현하여 왕관을 쓴 왕의 머리를 암시하고 있다. 이 점에서 상징적 요소가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상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독자는 당황하게 된다. 자세히 보면 왕관은 순금으로 되어있고, 또 이를 머리에 쓰고 있기 때문에 왕의 머리를 유사 사물인 순금으로 비유한 그 이상의 뜻은 없게 된다. 적어도 상징이 성립 되려면 순금이 왕관 이상의 그 무엇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시에서 순금은 이런 징표가 되어주지 못하고 있는데, 그것은 순금의 머리가 다만, 왕관을 진술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왕관과 본질적으로 관련이 있는 유사 사물인 순금은 본의와 유의를 결합 시키고 있는 것 외엔 다른 뜻이 있지 않기 때문에 상징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이 시는 은유와 직유를 동원한 비유가 된다. 그러나 다음 시에 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ㅡ계속
870    현대시 = 이미지 댓글:  조회:2405  추천:0  2017-11-18
        현대시와 이미지 /박진환 1. 이미지의 개념 설정 현대시를 한마디로 집약하라고 한다면 서슴없이 이미지라 할 것이다. 그만큼 현대시는 이미지를 표현 본질로 하고 있고 또 이미지의 결 구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이미지스트였던 파운드는 수많은 시를 쓴 것보다 일생 동안 단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 좋다고 할 정도로 이미지를 중시했다. 이미지에 대한 설명은 여러 가지로 제세 되고 있다. 흔한 말로 이미지를 심상이라고 한다. 이는 어떤 인상이 마음에 새겨져 있다는 뜻인데, 흔히 사물로 그린 그림이라고도 하고 말로 만들어진 그림 혹은 언어의 회화라고도 한다.  이런 단편적인 정의를 제시 했다고 해서 이미지의 개념이 설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풀이했을 때 이미지에 대한 이해를 도울 것으로 본다. 이미지는 일단 광의의 개념과 협의의 개념으로 육체적 지각작용에서 이룩된 감각적 현상이 마음속에 재생된 것으로서 이를테면 장미 한 송이를 보았을 때 마음속에 그 장미꽃이 사상(寫像)된다. 그것은 인간이 경험하는 주관적 감각이 그 장미꽃을 표면적 복사 내지 모사(模寫), 인화시키기 때문이다. 시란 바로 이러한 이미지를 언어로 형상화한 것인데, 이때 감각적 이미지와 동등한 지각적 이미지가 상호 연관되어 연결 통합되게 마련이다. 이를 이미지와 총체적 결합인 이미저리라고 한다. 이때 필연적으로 언어는 이미지를 제작해 내는 이미지 제조기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러한 광의의 개념은 다시 협의적 세분화에 의해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데, 이때 세 측면을 제시할 수 있다. 하나는 훈련 심상이라고 하는 정신적 이미저리이고, 두 번째는 비유적 이미저리, 세 번째는 상징적 이미저리이다. 이를 구체화 했을 때 이미지에 대한 개념 및 정의는 설정 될 것이다. ㅡ 계속 ... 첫째, 정신적 이미저리부터 설정해 보자. 정신적 이미저리는 독자가 시를 읽었을 때 일으키는 공감각적 효용을 중심으로 성립되는 이미지의 해석이다. 독자가 시를 읽었을 때 그 시 속에서 내용에 따른 정서의 전이나 체험의 복합성에 딸린 메인 이미지는 무엇이며, 이 메인 이미지를 뒷밭침하고 있는 이미지들은 무엇이며, 이것들이 어떻게 결합되어 이미저리를 형성하는가를 계산해 볼 수 있는 것이 시각적 이미지다. 두 번째의 비유적 이미저리는 어떤 대상이나 사물을 드러내고자 할 때 이를 보다 더 잘 나타내기 위해서 그와 유사한 사물의 본질, 양태, 속성들을 연합, 결합, 통합함으로써 비유를 비어 본래의 것을 이미저리로 창조해 내는 것을 말한다. 셋째로 상징적 이미저리는 첫 번째 이미저리처럼 감각적 체험을 통해 정신 안에 인화된 상을 시 속에 문자로 재생, 나열 하거나 두 번째의 경우처럼 어떤 주제를 사물을 빌어 비유하거나 아니면 이 두 경우를 복합적으로 사용, 심리적 연상의 힘을 빌어 여러 2차적 상징들을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시인은 정신적, 감각적 이미지를 문자화하는 능력 뿐 아니라 자신의 관심, 취향, 기질, 여러 가지 기준, 환상 등을 이미저리로 나타나게 해 주며 동시에 시 속의 이미지들을 반복적으로 나타나게 해 준다.  따라서 이미지의 패턴들이 시의 어조를 만들기 위하여도 발생되고 또 문맥의 구조나 상징의 방법을 나타내기 위해서도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저리는 서로 독립된 별개의 것이 아니고 엇갈려 있으면서도 연관되고, 연관되면서도 분화되는 변증법 적인 과정을 거쳐 총체적으로 결합된다. 이는 시의 전체적 이미저리를 성립시킨다고 보아야 온당하다. 이상의 설명에서 볼 수 있듯이 이미지 이미지에 대한에 대한 이런 구체적 해석에도 불구하고 이미지에 대한 선명한 이해를 획득하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지에 대해 더 구체적 설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쉽게 풀이하면 이미지란 사물로 그려지는 대상 사물이어야 한다. 그것이 나무이건, 강이건, 사람이건 간에 1차적 경험함으로써 이 경험을 고리로 엮어내는 기능인 상상력을 동원, 언어로 재생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미지는 체험의 산물이고, 체험을 성립시키는 대상 존재나 대상 사물에 의해 떠 올리는 상상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관념으로 드러내는 것을 체험으로 드러낸다는 뜻이다. 체험이 주로 감각에 의존되고 보면 이 뜻은 관념을 사물로 드러낸다는 뜻이 된다. 일종의 관념의 물화이고, 관념의 대상화라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이미지는 관념을 극복하기 위한 즉 19세기적 미학을 새로운 실념의 미학으로 대체 하고자 하는 시대적 요청이 있다고 할 수 있다. ㅡ 계속 ...   이상의 선언을 종합했을 때 몇 가지 핵심적 주장에 접근할 수가 있다. 첫째, 언어의 축약 적이고도 함축적인 경영. 둘째, 과학적 논거나 칠학적 사유 그리고 관념어의 배제, 감각적 이미지의 동원을 통한 체험적 진술이다. 이 지적에서 언어의 축약 적이고 함축적 경영은 간결한 표현을 의미하기 보다는 의미의 함축성, 즉, 암시나 상징과 같은 의미라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의미로 전달하는 것은 대신 사물로 제시, 이미지를 성립시키게 하는 도 다른 요청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과학적 논거나 철학적 사유 그리고 관념어의 배제는 바꾸어 보면 추상이나 관념, 사유나 사상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체험의 중시는 견고하고 투명한 이미지의 시를 강조한 것으로 풀이 해 볼 수 있다. 이쯤에서 이해력이 빠른 독자는 이미지가 사물로 그린 언어의 회화라는 점에 쉽게 동의 할 것으로 본다. 이를 시로 실제화 해 보자. (실제) - 배경 설정 이미지를 중시하는 모더니즘 시를 흔히 의도적 제작이니, 기획된 제작이니, 심하면 현대적 기획이라고까지 한다. 이 말은 의도적으로 이미지를 만들어 이를 결합시켜 한 편의 시를 성립시킨다는 뜻과도 통한다. 이런 사전 전제는 시의 실제, 즉, 이미지를 시의 표현 본질로 하고자 했을 때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것은 흔히 시를 쓰고자 하는 분들이 시상이나 관념의 표출을 중시하고자 하거나 정서적 환기를 시로 표출하고자 하는 기존의 미학적 발상에서 시를 출발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때 시를 쓰고자 하는 분은 스스로가 품은 생각이나 느낌에 만족 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를 의도적 제작으로 사물화 하고자 하거나 이미지화 하고자 했을 때는 경우가 사뭇 달라진다.  그것은 생각이나 느낌을 형태. 빛깔. 향기. 맛. 소리 등으로 나타내야 하는 곧 관념이나 의식 그리고 의미를 모습을 갖춘 사물로 형상화 하고자 하기 때문에 매우 어려움을 겪고 그 때문에 몹시 난감 해 하기 마련이다. 무엇보다도 우선 생각을 형태로 바꿔야 한다는 초보단계에서 당혹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더구나 이런 기법에 길들여지지 못한 습작기에는 아예 재주가 없는 것으로 낙담하기도 한다. 이를 시로 실제화 해 보자. ㅡ 계속 ...   우선, 지난여름 바다에 다녀온 기억이 되살아나 한 편의 시로 쓰고 싶어졌다고 치자. 이때 떠오르는 바다의 이미지는 파도, 갈매기, 통통배, 짠 소금기, 모래사잔 등 실로 시각적이고도 청각적이며 미각적인 이미지들이 금방 동원 될 것이다. 그래서 이런 감각적 체험을 동원, 이미지화하고 싶은 욕심은 앞서나 뜻대로 이미지가 만들어지지 않아 고심 끝에 이렇게 썼다고 치자. 『파도는 성낸 고래같이 흰 이빨을 드러낸 채  달려들고 놀란 갈매기는  끼르륵 끼르륵 겁에 질린 울음을 토해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통통배는 포구로 돌아왔다 떠나고 백사장은  고래 밥이 된 채 굽은 등을 오므렸다 폈다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잘된 시는 아니지만 형상화 한 노력은 역력히 드러나고 있다. 그것은  1연에서 파도를 성낸 고래 등과 성난 고래 이빨로 사물화하고 있고, 2연에서는 무심코 운 갈매기 울음을 마치 밀고 들어오는 고래의 위협에 놀라 토해내는 울음으로 1연에 연계, 구체화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3 연에서는 통통배 한척을 동원, 바다의 현장성을 가시화하고, 종연에서는 굽은 해안선을 마치 등을 구부린 허리로 의인화, 고래가 잡아먹는 것으로 변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접에서 이 시는 아마추어 수준에서 노리는 이미지화에 다소 접근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1연의 파도의 이미지를 고래에 접근시킨 점은 이미 다른 시인에 의해 시도 되었고,  2연은 청각적 이미지라기보다는 사실을 다소 다른 해석으로 치환해 내는데 그친 이미지의 미숙함이 드러나고 있다. 그런가 하면 3연에서는 현장성을 구체화하는 가시력을 돕고는 있으나 파도의 이미지에 연계되는 구상성에서 이탈하고 있고, 종연에서는 다소 신선한 이미지로 해석할 수 있으나 이 또한 다른 시인에 의해 바다의 이미지로 사용한 적이 있어 설득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이는 사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 즉 새로운 체험이 없었기 때문에 기존의 체험에만 의존 했다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ㅡ 계속 ... 2. 시각적 이미지 시에 있어서 관념시는 의미나 정서의 전달을 중시하는데 반해 이미지는 일종의 보여주는 시, 즉 관념이나 정서를 사물로 바꿔 보여주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시각적 이미지는 이미지를 성립 시키고 제시 하는데 있어 그 대표적인 것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시를 마음으로 그린 그림. 사물로 그린 그림 혹은 언어의 회화라고 하는 것도 다 시각적 이미지를 중시하는데서 붙여진 해석들이다. 의미의 전달을 통한 감동에 대해 이 감동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그림으로 그려 달라는 주문이 이미지 시학이다.  회화가 선과 색의 조화라면 이때 시는 언어가 매체이고, 그 때문에 언어로 구상하고 채색하며 조화를 창출하는 언어의 회화가 된다. 문제는 언어로 그린 그림을 성립시키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언어 이전의 매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언어로 그린 그림이란 이 매체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역할 이상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매체가 무엇인가, 그것이 곧 이미지다. 우리가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을 보았다고 하자, 1차적으로 일으키는 것이 정서의 환기일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 아름답다는 생각과 느낌은 서서히 소멸해 버리고 아름답다는 느낌 대신 아름다운 꽃의 느낌만 떠오르게 된다. 이는 아름다운 꽃의 형상이 시각적 체험을 통해 우리의 뇌리나 의식 속에 지워지지 않고 형상으로 인화 돼 있기 때문이다.  이를 시각적 체험이라 하는데, 이때 지워지지 않는 꽃의 모습이 곧 이미지다.  그래서 잊혀 지지 않는 꽃에 대한 감동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지만, 이 지워지지 않는 이미지를 재생함으로써 꽃의 모습은 물론 그때의 감동까지도 환기시켜 볼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이미지는 단순한 기억의 재현이 아니라 그때의 감동까지를 재생시켜 준다는 점에서 단순한 기억의 재현과는 다르게 된다. 현대에 있어서 시인이 자기의 주요한 목적 그리고 시의 가장 특징적인 것으로 새로이 기도하고 있는 것을 새롭게 솟아나온 이미지라고 생각했던 콜리지의 견해도 바로 시의 회화나 사물로 그린 그림을 강조했던 것으로 풀이해 볼 수 있다. ㅡ 계속 ...   이와 같이 현대시는 전달이 아닌 구체적 드러냄을 그 본질로 하고 있다. 이 때문에 무엇인가를 들어내기 위해서는 체험을 통한 새겨진 상으로 드러내야 하는데, 그 상을 보존 유지 하는 것이 이미지다.  더구나 우리들의 지각활동 중 가장 많은 부분이 시각에 의존되고 있고 보면 시각적 이미지는 그 무엇인가를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기능을 맡고 있는 것이 된다. 그 때문에 시각적 이미지는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유리하고도 대표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현대시가 사물만이 아니라 의식이나 감정, 나아가서는 심리적 작용 까지도 모습으로 드러내기를 희망하고 있고 보면 시각적 이미지는 대표적 이미지의 자리에 놓이게 된다. 이쯤에서 시각적 이미지를 시의 실제에 적용해 보자. [실제] - 배경설정 농사철 무렵 시골에 볼일이 있어 하행 열차를 탔다고 치자. 차 창 밖으로 들녘의 하늘이 가득히 펼쳐질 것이다.  소를 몰아 쓰레질을 하는 광경, 일렬로 허리 굽혀 모를 심는 모습,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뒤뚱 거리며 논둑을 바삐 가고 있는 아낙의 모습이 들어올 것이고,  그 배경으로 펼쳐진 도열한 포플러가 마을로 접어들수록 난쟁이 키를 하고 있는 원경도,  삐삐 꽃이 하얗게 핀 둑에 방목돼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황소와 염소의 모습이 눈에 뛸 것이다. 달리는 기차에서 순간적으로 포착된 이러한 풍경은 산허리를 돌면서 뒤에 남겨지게 되고, 한가롭고 느긋한 평온 감 같은 느낌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눈으로 체험했던 정경들만 선하게 떠오를 것이다.  그러면서도 지워지지 않는 그 무엇이 남아있게 되고, 이를 언어로 표현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이때 초보자들은 들녘에서 느낀 감동이나, 눈에 비친 정경을 시의 대상으로 설정, 형상화하고자 할 것이 뻔하다. 달리 말하면 보고 느낀 대로 쓰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할 것이란 뜻이다. ㅡ계속 ... 차창 넘어  굽은 신작로를 돌아 포플러는 마을로 들어서고 하얗게 삐삐 꽃이 핀  둑길에는 늙은 황소 한 마리와 턱수염이 긴 검은 염소 몇 마리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엉덩이를 흔들며 광주리를 인 여인네가 논두렁을 뒤뚱이며 걸어가고 들녘엔  일제히 구부린 허리들이 모를 심고 있었다. 이렇게 썼다고 치자. 물론 아마추어 솜씨지만 한가한 농촌의 풍경이 비교적 장 담겨 있고 또 시각적으로 포착한 정경들이 서경적으로 잘 펼쳐져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 시는 본 그대로 드러내는 데는 별 무리가 없었으나 새로운 해석을 곁들여 드러내주고 있는 점은 전혀 없다. 그래서 시각으로 체험한 들녘을 있는 그대로, 본 그대로 해석한 것 이상을 보여 주지는 못 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언어로 그려진 그림 이상은 아니란 뜻이다. 시가 언어로 그려진 그림이란 점에서 보면 물론 이 시도 그림으로 그려졌다는 점에서 시일 수 있다.  그러나 새롭게 솟아나온 이미지, 참신하고 풍부한 이미지가 동원되지 못 했다는 점에서는 단순한 서경으로서의 그림을 대비했을 때 독자들은 시각적 이미지에 대한 이해를 극명히 할 것으로 본다. ㅡ계속 ... 둑길엔  하얗게 삐삐꽃이  피어 있었다. 꽃밭엔  주인 없는 자전거가 한 대  서 있었다. 왕방울 눈을 굴리며 암소 한 마리가 주인대신 자전거를 지키고 있었다. 제 또래의 검정 염소들이 삐삐꽃이 흰머리를 흔들 때마다 늙고 검은 턱 수염을 흔들었다. 들녘엔 한결같이 구부러진 허리들이 가을을 심고 졸시 「이앙기」의 전문이다. 이 시는 앞의 시와 배경이 같고 또 발상 기저도 동일하다. 다만, 같은 대상이나 배경을 두고 그 표현이 다를 뿐이다. 앞의 시에서는 시의 구도가 원경과 군경으로 포착 되면서 차창에 비친 들 전체를 대상으로 했다면 뒤의 시는 근경만을 포착,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앞의 시가 주로 시각에 비친 서경적 구성이었다면, 뒤의 시는 시각에 비친 들녘을 직관적 언어의정수를 가미, 새롭게 해석 하고자 한 상상력을 동원, 이미지로 결구시키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특히 뒤의 시에서는 둑길에 핀 삐삐꽃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놓고 거기에 배치한 암소와 자전거라는 전혀 무관한 상관물을 병치시키고 있다.  이 무관한 관계를 유기적 관계로 전환시키기 위해암소의 특징인 왕 부리 눈을 강조하고 주인 없는 자전거를 지키게 하는 상관관계로 이동시킴으로써 치환을 성립 시키고 있다.  그런가 하면 4연에서는 하얀 삐삐꽃과 검은 턱 수염의 염소를 배치시켜 의미 아닌 사물의 대비로 병치 시키고, 종연에서는 구부러진 허리들이 모를 심는 것이 아니라 일제히 가을을 심고 있다고 도착시킴으로써 당혹감을 갖게 하는 아이러니를 구사하고 있다. 이 점에서 앞의 시는 감각적 체험의 재구성을 통한 치환과 병치의 은유적 기법을 가미함으로 써 상상력에 호소하는 그림으로 이동시키고 있다. 루이스가 시적 이미지를 문맥 속에서 인간의 정서를 저류로 가진, 어느 정도 은유적인 언어를 사용한 다소의 감각적인 회화라고 한 이미지에 대한 피력을 음미해 볼 만하다. 다시 “감각적인 이미지”로 나아가 보자. ㅡ계속 ...   3. 감각적 이미지 감각적 이미지를 복합적 감각으로 드러내는 것이 감각적 이미지다. 감각적 이미지란 청각적 이미지는 물론 미각적 이미지, 후각적 이미지, 근육 감각적 이미지, 역학적 이미지 그리고 색채 적 이미지와 같은 여러 이미지가 복합적으로 연계되고 하나로 섞여져 동시적 효과를 드러내는 이미지다. C.D. 루이스가 시를 공감적 체험의 재생이라고 말한 것이나 최창호가 시의 전체적인 내용과 정서는 각개의 이미지들의 유기적인 결합에 의해서 형성되는 전체적인 이미지를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 것으로 피력한 것은 각기 표현은 다르지만 공감각적 이미지를 두고 하는 말일 듯싶다. 시를 단순한 회화라 하지 않고 감각적인 회화라 하는 것이나, 감각체험의 재현이라고 하는 것은 현대시가 이미지에 의존하면서도 특히 공감각적 이미지에 의해 창출, 형성된다는 뜻으로 해석하게 하는 지적들이다. 르네 웰렉과 워렌이 그들의 공저인 「문학의 이론」에서 지적인 이미지라고 하는 말은 반드시 시각적일 필요는 없고 과거 감각상의, 혹은 지각상의 체험을 지적으로 재생한 것이다. 즉 기억을 뜻한다고 피력한 것은 감각적 이미지를 강조하는 뜻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듯싶다. 그것은 반드시 시각적일 필요는 없다는 부분에서 잘 말해 주고 있다. 또 브룩스와 워렌은 시에 있어서 어떤 감각 체험의 재현을 이미저리라고 부른다. 이미저리는 단순한 마음의 그림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감각의 어떤 것에 호소한다는 지적에서 볼 수 있듯이 이미지는 단순한 그림이 아닌 감각적 체험을 통한 감각적 호소에 연계시키고 있다. 이 말도 감각적인 이미지를 말하는 것으로서 단순 이미지에 대응시킨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시각적 이미지 쪽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따지고 보면 시각적 이미지도 감각적 이미지의 범주에 편입시킬 수 있다. 어떻든 감각적 이미지의 개념은 설정됐다고 보고 감각적 이미지란 무엇인가라는 정의를 내려 보기로 한다. ㅡ계속 ...   감각적 이미지는 우리 신체 구조상 외부의 사물에 대한 체험을 통해 일으키는 직감적 반응. 즉 시각, 청각, 촉각, 후각감각, 미각, 근육 감각, 기관과 같은 감각 기관을 통하여 지각될 수 있는 사물이거나 사물을 통해 상상적으로 끌어들여 드러낼 수 있는 사물의 상을 말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시각적 이미지는 사물의 형태, 빛깔, 대소, 동태와 정태 등을, 언어를 빌어 회화화한 것이다. 청각적 이미지는 사물의 냄새를. 촉각적 이미지는 사물이 피부에 와 닿는 때의 감각적 느낌을.  기관 감각 이미지는 우리의 운동, 생식, 호흡, 소화, 영양기관 등에서 나타나는 호흡, 맥박, 고동, 소화 등의 감각을. 그리고 근육감각 이미지는 근육의 수축이나 긴장 등에 따르는 변화 등이 내적 자극에 생기는 감각을 언어로 나타내는 것이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감각적 이미지는 모든 감각 기능으로 체험한 사물의 상을 언어를 빌어 나타내는 것으로서 이 때문에 이미지는 언어로 그린 그림이 되는 것이다. 이쯤에서 감각적 이미지를 시로 구체화해 보자. [실재] - 배경설정 봄낭 울타리에 노랗게 핀 개나리가 도열해 있고, 밭이랑에서는 비비 베베 종달새가 울고 있었다고 치자. 나무마다 파릇파릇 싹이 돋아 눈앞에 보이던 까치집이 멀리 보이고 이름 모를 새들이 한 나절을 비비비 울고 있었다고 치자. 그리고 겨우내 얼어붙었던 실개천이 녹아 흐르면서 또르륵 또르륵 간헐적인 물소리를 내고 있었다고 치자. 이러한 배경은 봄날 시골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고 또 우리는 이런 풍경 앞에서 본 경험을 많이 가지고 있다. 더구나 한나절이 기울면서 이런 분위기는 한가로움을 더해주고 이 한가로움을 벗 하면서 봄의 흥취에 자극된 우리의 정서들은 다투어 반응하게 마련이다. 이때 문득 시흥이나 시의 착상이 떠올랐다고 치자. 그래서 다음과 같은 한 편의 시를 썼다고 하자. ㅡ계속 ...   노란 개나리꽃으로 울타리를 친 봄이 동네를 다시 포위하고 있었다. 종다리는 하늘높이 매달려 비비 꼬르르 아지랑이를 비비 꼬아 올리고 있었다 갓 나온 나무 잎새들이 까치집 입구를 막아 시야에서 지워 버렸다 비비새 몇 마리가 한나절을 울음으로 굴리고 겨우내 얼어붙었던 실개천이 도란도란 속삭이며 흐르고 있었다. 초보자의 시 치고는 제법 맑은 시각을 동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울타리 가에 개나리가 피어있는 것을 봄이 울타리를 치고 마을을 포위한 것으로 변용한 것이나, 종달새의 울음소리를 빌어 비비 아지랑이를 꼬아 올린다고 본 시각적 해석.  그리고 새 잎이 돋아나 까치집을 가리고 있는 것을 까치집 입구를 막았다고 본 시각이나,  비비새 울음을 빌어 한나절을 굴리고 있다고 청각을 시각으로 이동시킨 솜씨가 제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끝 연의 시냇물 소리를 도란도란 속삭이는 것으로 청각적 언어로 포착한 것도 예외는 아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화자는 봄의 시각적 이미지와 정경을 주로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로 동원, 구체화 하고 있다. 청각적 이미지를 시각적 이미지로 변용하는 솜씨가 돋보이는 시다. 그래서 시각과 청각의 동원은 감각적 이미지를 빌어 시를 썼다는 점에서 감각적 이미지의 시로 해석할 수 있게 한다. 여기서 시각과 청각, 근육감각, 기관 감각을 동원한 공감각적 이미지의 시를 비교시켰을 때 독자들은 감각적 이미지의 실제에 접근 할 것으로 본다. ㅡ계속 ...   봄을 타종하던 노란 종소리가 개나리 울타리를 흔들고 있다 비비 꼬아 올린 아지랑이 끝에 종다리는 목을 매달고 있다 까치집도 날개가 돋아났는지 한사코 시계 밖으로 물러섰다 노곤한 한나절이 비비새 울음을 베고 누워 곤히 잠들고 겨우내 체했던 낮은 개울이 연거푸 토악질을 해댔다 졸시 「봄」의 전문이다. 이 시는 앞의 시가 시각과 청각적 이미지에 의존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시각, 청각, 근육, 감각, 기관감각과 같은 보다 다양한 감각적 이미지를 동원하고 있다. 첫 연에서 봄을 타종한 노란 종소리는 기실 개나리꽃의 형상이 마치 종과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고 또 봄의 첫 소식을 알리는 것이 개나리꽃이기 때문에 꽃의 형상을 빌어 시각적 이미지를 청각적 이미지로 전환시키고 있는 것이 된다. 2연에서는 종다리가 높이 떠 우짖는 것을 마치 아지랑이가 꼬아 올린 새끼줄이나 노끈에 목을 매달고 있는 것으로 환기시키고,  3연에서는 새파란 나뭇잎이 돋아나 까치집을 가려버린 것을 마치 까치집에 날개가 돋아 멀리 날아간 것으로 근육 감각 화 하고, 4연에서는 봄볕이 노곤히 풀린 한낮의 봄을 비비새 울음을 베고 누운 것으로 엮시 근육 감각으로 병치 시키고 있다.  그리고 끝으로 종연에서는 꽁꽁 얼어붙었던 개울이 봄이 되자 풀리면서 도랑도랑 흐르고 있는 것을 겨우내 체했다 토해내는 토악질로 기관 감각의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뒤의 시는 여러 감각적 이미지를 동원, 공감각으로 형상화하고 있음을 볼 수 있고 그 때문에 앞의 시 보다 구상화된 것은 물론 앞의 시에서 느낀 단조로움을 극복해 줄 수 있는 결 구력까지 읽을 수 있게 한다.  곧 감각 상호간의 호소력을 획득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쯤에서 독자들은 감각적 이미지가 무엇이고 어떻게 시에 실제화 하는가를 익혔을 것으로 본다.  다음은 절대 심상으로 넘어가 보자 ㅡ계속 ... 4. 절대 심상 시각적 이미지나 감각적 이미지가 객관적 삼ㄹ애서 체험함 감각 체험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새로운 정서를 환기사키고 동시에 주관적 해석까지도 객관화 시킴으로써 시를 회화하는데 이바지하고 있음을 보나왔다. 동시에 내면적 의식이나 심리까지도 사물화 함으로써 구체적 이미지로 제시하는 그림과도 만나보았다. 이와는 반대로 그것이 시작이든 공감적이든 관념이나 의식의 형상화라는 이미지를 깡그리 거부하고 이미지 자체를 무의미한 기호로 제시하거나 이것을 서로 대립적으로 병치시켜 휴희화 하며 그 분위기를 읽게 하는 사물시의 경향도 있다. 김춘수의 지적에 따르면 사물을 감각적으로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은 원시적인 태도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관념(의미)이전의 관념이 장차 거기서 태어날 관념의 제로 지대이기도 하다. 이 지대에서 이야기되는 사건들은 질서가 엇ㅂ는 듯하지만, 그것은 관념의 쩍에서 바라볼 때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고 「존재 감각과 의미의 시」에서 말하고 있다. 이 말은 관념, 즉 의미가 배제된 순수한 사물의 이미지인 관념의 제로화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원래 관념이란 의미론적 해석이다. 그리고 이 관념을 드러내는 언어는 그래서 의미의 결정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언어에서 의미를 배제해버린 사물 자체만 남게 되는 일종의 환원주의가 성립 된다. 우리가 한 사물을 해석 하고자 했을 때 저 나무는 어느 과에 속하고 어떤 용도로 쓰이며 어떤 꽃과 열매를 맺고 어떤 속성을 지니고 있는 가 등의 의미로 해석 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의미에 의해 해석 된 고정화된 관념을 적용 시킨다. 그러나 한 그루 나무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해방시켰을 때 비로소 자유로운 나무의 본래의 것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고 이때 관념의 제로지대에 서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관념 이전의 사물 세계 혹은 사물 자체로 환원 시켰을 때 비로소 순수에 이르게 되고, 이 순수의 이미지를 동원했을 때 절대 심상에 이르게 된다. 다시 김춘수의 이론을 빌어보자. 집이면 집, 나무면 나무를 대상으로 좌우의 배경을 취사선택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대상의 어느 부분을 버리고 다른 어느 부분은 과장한다. 대상과 배경과의 위치를 실지와는 다르게 배치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실지의 풍경과는 다르게 배치한다는 뜻이다. 논리와 자유 연상이 더욱 날카롭게 개입하게 되면 대상의 행태는 부서져 마침내 대상마저 소멸된다.  무의미의 시가 이렇게 탄생한다고 김춘수는 의미에서 무의미까지에서 피력하고 있다. 그래서 무의미시는 절대 심상을 동원한 일종의 언어유희가 되고, 그 때문에 언어의 의미성이나 감각성을 모두 배제한 언어의 기호화나 사물화와 같은 전위적 실험 성까지 수반하게 된다. 이상의 설명을 통해 절재 심상이 무엇이라는 것에 대한 개념은 설정됐을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이를 시로 실제화 해 보자. ㅡ계속 ...   [실 제] - 배경설정 한 여름, 한 점 바람도 까딱 않는다. 축축이 젖는 등골 사이로 연신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대체로 짜증을 내게 마련이다. ‘어휴 덥다. 이 놈의 바람들은 다 어디로 갔담.’ 하면서 부채질을 하거나 옷섶을 흔들어 바람을 일으킬 것이다. 바람이 마주한 산에 숨어 있는지 나뭇가지들이 흔들리는 기미가 보인다.  그런가 하면 뻐꾸기도 지쳐 늘어졌는지 울음소리의 꼬리가 사뭇 더 길어진다. ‘뻐꾹’이 아니라 ‘삐어어꾹’이다. 이럴 때 우리는 이놈의 바람이 어디로 숨어 버렸나 한다든지.  오다가 뒈져 버렸나 하면서 공연한 짜증을 토해내게 마련이다.  하는 수 없이 멱을 감는다든지 한 바탕 세수로 더위를 몰아낸 뒤 정신을 차려본다. 이때 산들 바람이 스쳐 지나면서 물기를 식혀주고 멀리서 뻐어꾹 하고 뻐꾸기 울음이 따라온다. 제법 여름의 풋내 나는 흥취가 있고, 늘어진 한가로움이 있고, 닦아낼 수 없는 고적감이 있다. 이럴 때 파한으로 잡은 것이 펜이고, 이 펜을 움직여 여름 한때를 소묘하는 한 편의 시를 썼다고 치자. 바람이 길을 잃었나 하긴 꼬불꼬불한 시골 길을 제대로 찾아올 리 없지. 아냐 저 칼날 세운 억새풀이 막고 선 언덕길을 넘다 목이 자려 나갔을 거야. 살아남은 놈들은  숲으로 삼십육계 도망을 쳐버린 게야. 모르는 소리 알몸으로 지나가기가 부끄러워 어둠을 기다릴 거야 너무 대낮은 밝아 뻐꾸기가 뻐어꾹 바람의 꼬리를 물고 놓아주지 않을 거야. ㅡ계속 ...   이렇게 써 놓고 보면 불어오지 않는 바람에 대한 해석이 여러 가지다.  1연에서 시골 고부란 길을 찾지 못해 길을 잃었기 때문에 바람이 불어오지 않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고, 2연에서는 무성한 잎으로 도열해 선 칼날 같은 억새풀 숲을 빠져나오다 목이 잘려버렸기 때문에 올 수 없는 것으로, 3연에서는 살아남은 바람마저 숲 속으로 도망쳐 버렸기 때문에 불어오지 않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고, 4연에서는 걸친 것 없는 알몸을 드러내기 부끄러워 몸을 숨긴 것을 대 낮이 너무 밝기 때문으로 해석 하는가 하면, 종연에서는 바람의 꼬리를 뻐꾸기가 물고 늘어지면서 놓아주지 않기 때문에 바람이 올 수 없는 것으로 해석하여 바람이 불어오지 않는 이유를 여러 경로로 설정하고 있다. 아마추어 솜씨치고는 제법 근사하고 퍽 풍풍한 상상력을 동원한 해석이라 할 수 있다. 기실 바람이 불어오지 않는 것은 자연 현상으로서 여름에는 바람의 기류가 형성되지 않고 또 형성된다 해도 빈약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평범한 사실을 여러 이유나 원인을 제시한 상상력으로 동원, 제법 원인이나 이유의 의미를 성립 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때 성립된 이유나 원인이 시실을 근거로 한 실증적이고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전부의미가 비 사실 적이고 비논리적이며 유희적이다. 그것은 바람이 관념이나 시실, 논리로 해석하고자 한 의미로부터 일탈되고 있기 때문이다. 의미로부터 도피이거나 의미의 배제란 뜻이다. 부득이 의미론적 해석을 버렸을 때 언어는 회화한 사물 유희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그래서 바람의 의미나 바람의 해석은 관념이나 논리에서 해방됨으로써 자유로워지는 바람 자체를 획득하는 것이다. ㅡ계속 ... 여기에 다른 한 편의 시를 동원 했을 때 이 점 훨씬 극명해 질 것으로 본다. 억새풀에 목이 잘린 채 나자빠져 있었다. 풍선처럼 부풀었던 복부가 터진 채 엎어져 있었다. 요행히 목숨을 불어넣은 무리들은 산발로 비틀 거리며 숲을 헤매고 있었다. 포복으로 들녘을 빠져 나가기엔 대낮은 너무 환했다. 패주 뒤의 정적 소람거리는 나무들이 기습을 예비하는 바람의 음모를 수화 신호로 보내오고 있었다. 말갈기를 세워 질주하던 기마 전술의 게릴라들은 지금은 은신 중이다. 일진의 내습을 기다리는 동안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뻐꾸기만 울고 있었다. 이 시는 졸작 「바람」이란 시의 전문이다. 앞의 시와 발상∙분위기∙배경이 흡사하고 소재 자체도 거의 동일하다. 다만, 뒤의 시가 바람을 게릴라로 보아 지금은 은신 중이기 때문에 몰려오지 않는 것으로 보는 시각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앞의 시와 뒤의 시는 사뭇 바람에 대한 해석과 바람이 불어오지 않는 원인이나 이유에 대한 진술을 각기 달리하고 있다. ㅡ계속 ...   앞의 시 1연이 바람이 불어오지 않는 이유를 꼬불꼬불한 시골길을 찾아오다 길을 잃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는 것에 비해 뒤의 시 1연에서는 숲을 헤켜 나오다 억새풀에 목이 잘렸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또 앞의 시2연에서는 역시 뒤의 시 1연의 이유를 거의 같은 발상으로 하고 있다. 뒤의 시 2연은 풍선처럼 부푼 바람이 복부가 터진 채 엎어져 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앞의 시 3연은 요행히 목숨을 부지한 바람이 숲 속으로 줄행랑을 쳤기 때문으로 보고 있고, 뒤의 시 3연은 이를 다소 구체화, 살아 돌아간 바람을 머리를 풀고 비틀거리며 숲을 헤매는 상처 입은 바람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앞의 시 4연이 바람이 알몸을 하고 있어 하도 낮이 밝아 지나갈 수 없는 것으로 본 것에 비해 뒤의 시는 숨어서 지나가기에는 한낮이 너무 밝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끝으로 앞의 시 종연이 마치 뻐꾸기가 바람의 꼬리를 물고 필사적으로 놓아주지 않기 때문에 불어오지 못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반해 뒤의 시 5연은 바람을 패잔병으로 보고, 이 패잔병이 다시 기습의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을 알려주는 나무 수화신호로 보고 있고, 이어 6연에서는 기습을 예비하는 게릴라로 보고 있다. 앞의 시에서 뻐꾸기가 바람의 꼬리를 물고 있는 것과는 달리, 뒤의 시 종연은 게릴라의 내습이라는 긴박한 상황에 아랑곳없이 그저 무심히 뻐꾸기가 울고 있는 것으로 각기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이러한 두 시의 해석상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두 시가 드러내고 있는 바람의 이미지가 예외 엇ㅂ이 상상력에 의탁되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달리 말하면 바람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림으로써 바람의 해석을 넘어선, 순수 사물만이 유희 화 되고 있다는 점에 관심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관념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비로소 사물 자체로 환원되고, 환원된 시물의 이미지를 동원했을 때 기존의 해석을 넘어서는 절대 심상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869    시문학공부는 끝이 없다... 댓글:  조회:2987  추천:0  2017-11-18
최룡관 편저       서언       현대시어록은 유명한 현대시 시인이나 학자들을 핵심으로 일생을 분투하면서 새겨올린 영원한 야광주이다.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시인들이나 평론가들의 자대이며, 지남침이다.   시의 뿌리를 알게 하기위하여 고대서양의 아리스토 텔레스, 플라톤, 롱기누스의 명언들과 고대동향의 류협의 명언들을 현대시어록에 삽입하였다. 현대시는 하늘에서 떨어진것도 땅에서 솟아난것도 아니다. 현대시는 문학발전의 필연적 결과로서 한 단계이며 력사이다.   현대시어록은 오늘에는 물론 먼 장래에도 시를 학습하는 교과서가 되리라 믿는다.   시에 대한 필자의 천박성으로 하여, 자료의 부족으로 하여, 풍부한 내용의 일부를 다루었으리라 생각되여 부끄럽기도 하지만 이 일부라도 한마디 한마디가 죄다 금싸락이거나 다이야몬드이리라.       시인에 대하여     [시인이란 아는자, 즉 초월하는자, 그리고 그가 아는것을 증명하는자이다]... [절대적인 창조가 없다면 시가 없는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몽상의 시학]선언 [시의 리해] 293-294페지   [시인은 비균일적인것들의 상호 충돌에 의해 운동하게 되는 말들에 그 주도권을 양도한다]...[무한히 리듬이란 마치 말피아노건반들을 손가락으로 탐문하듯 연주는것과 같이, 적합한 심지어는 일상적인 말을 사용하는데서 생겨난다] 주지하다시피 말라르메는 그의 시들중 다수를 언어충동에 따라 썼거나 혹은 언어충동이 지시하는대로 갈겨쓴 초고를 다시 개작하였던것이다. ([]안에 말은 말라르메 말)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179페지   시인은 공포나 사랑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들을 보여준다. 옥타비오 빠스 [시와 력사] 동상 113페지   관습이나 , 복종이나, 법률의 평평한 바닥에서 썩는것이 무엇이든 그는 결코 썩지 않게 한다. 복종이 그를 지배하지 않고 그가 복종을 지배한다. 월트 휘트먼 [풀잎]서문 동상 120페지   가장 위대한 시인은 하찮음을 좀처럼 알지 못한다. 전에는 조그맣다고 생각되던였던것이 그가 입김을 불어넣어주면 그것은 우주의 웅장함과 활력을 가지고 팽창한다. 그는 예언자요 개인이요 완전자다. 동상동명 121페지   가장 위대한 시인은 미래의것의 일관성을 과거의것과 현재의것으로 형성한다. 그는 죽은자들을 관에서 끌어내여 다시 세워놓는다. 그는 과거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를 표현할수 있도록 일어서서 걸어가라. 그는 교훈을 배운다. 미래가 현재가 되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 가장 위대한 시인은 인격과 장면들과 정열에 눈부시게 빛을 던질뿐만 아니라 마침내 올라가 모든것을 끝마친다. 아무도 그것이 무엇을 위한것인지 그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말할수도 없는 철탑들을 보여준다. 제일 끝에서 잠시 빛을 발한다... 가장 위대한 시인은 도덕의 의의를 덧붙이거나 도의를 직용하지 않는다. 그는 령혼을 알고있다. 령혼은 그자체의 교훈이외에는 어떤 교훈도 인정하지 않는데에 있는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있다. 동명동상 124페지   작가, 학자, 음악가, 발명가, 미술가들의 특성중에서 새로운 자유형식으로부터 발전해 나오는 말 없는 도전보다 더 멋진것은 없다. 동명동상 125페지   시인들은 자유의 목소리이며 해설자이다. 시대를 초월하여 그들은 웅대한 생각을 가질만 하다. 도명동상 127페지   위대한 작가, 특히 위대한 시인을 내고있지 않는한 그들의 언어는 퇴화할것이며 그들의 문화도 퇴화하고, 그리고 보다 강대한 문화에 흡수당하는 일도 있을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있는것이다. 토마스 스턴즈 엘이어트 [시의 사회적기능] [시의 리해] 150페지     가장 위대한 시인들은 즉시는 빛을 발하지 않는 경향을 가지고있다. 수세기뒤의 시인들에게 직접 영향을 끼침으로써 그들은 계속해서 산언어에 영향을 끼치고있는것이다... 그자신이 처해있던 시기에 있어서 그 언어를 새롭게 만든 시인들을 잘 연구하여야 할것이다. 동상동명 151페지   곧 모든 시인은 그자신의 독자계층을 갖고있는 법이다... 시인은 독자의 수요를 최대한 제한하려고도 한다. (가령 몇몇 상징주의자들 같이) 얀 무카로브스키 [시인이란 무엇인가] [현대시리론] 39페지   시인은 매우 정당하게 추측의 매혹적인 미로에 자신의 사고를 방황하게 한다. 샤를르 보들레르 [빅토르 위고] [시의 리해] 221페지   있는것을 그대로 묘사하는 시인은 스스로를 타락하여 교사의 수준으로 내려간다. 동상동명 223페지   한편의 좋은 쏘네트를 완성하고 난후 작가는 10년의 휴식을 취할 권리가 있다. 폴 발레리 [시에 대한 담화록] [시의 리해] 245페지   시인에게는 특별한 자질, 일종의 고유한 개인적에너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무한한 가치의 순간에 그에게 나타나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순간에 불과할뿐, 이 상위의 (다시 말해서 인간, 인간의 다른 모든 에너지를 합해도 그것을 구성할수 없고 대체할수도 없을 정도의) 에너지는 짧고 우발적인 발현에 의해서만 존재하거나 작용할수도 있습니다.   그것(에너지)이 우리의 령혼의 눈에 조명시켜주는 보물들, 그것이 우리 내부에서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개념이나 형태들을 외부적시선에 대해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합니다-을 덧붙혀야 하겠습니다.   무한한 가치를 지니는 이 순간들, 자신이 만들어내는 관계들과 직관에 보편적품위를 부여해주는 이 순간들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거나 전달할수 없는 가치를 역시 풍부하게 지니고있습니다. 우리에게만 가치가 있는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이것이 문학의 법칙입니다. 최고의 상태들은 진짜 부재상태들로서 , 그런 상태에서만 존재하는 자연 그대로의 경의들이 그안에서 서로 해후하는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의들은 여전히 순수하지 못한것들입니다. 천박하거나 쓸데 없는것들, 무의미하거나 외부의 빛에 저항할 힘이 없는것들, 열광의 섬광속에서 번쩍이는것이 모두 금은 아닙니다.   결국, 어떤 순간들은 우리가 최상의 상태로 존재하는 심원함으로서가 아니라 형상 없는 질료와 뒤죽박죽이 된 파편들, 이상하고 조야한 단편적인 형상으로 우리앞에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쓰레기더미에서 귀금속 성분을 분리해내고 , 그것들을 함께 용해시켜 어떤 보석을 만들어내는데 신경을 써야 합니다. 폴 발레리 [시에 대한 담론] [시의 리해] 246-247페지       우리 시대의 어떤 위대한 서정시인도 6편에서 8편이상의 완성된 시작품을 남긴 사람은 없습니다... 이 여섯편의 시를 위해서 30년내지 50년을 고행과 고통, 싸움을 벌이는것입니다. 고트프리트 벤 [서정시의 제문제] [시의 리해] 334페지   시인은 미지의것에 도달한다. 비록 자기자신의 환영들을 끝내 리해하지 못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시인은 그것들을 직관하였다. 시인은 전대미문의 그리고 이름을 붙일수 없는 사물들을 통한 거대한 비약의 과정에서 파멸해도 좋다. 왜냐하면 다른 무시무시한 일군들이 나타나서 그자신이 좌초해 버린 저 지평선에서 다시 시작하기때문이다. -랭보 후고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87-88페지   전언되는바에 의하면 랭보는 ‘나의 우월성은 어떠한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데 있다’ 라고 말한다. 랑만주의시의 느끼는 감정들은 그에게 역겨움을 준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96페지   현대시인의 탈 형상화의지는 추를 무연관의 세계로 내려보낸다. 동상108 페지   만질수 없는것을 포착할줄 모르는 사람은 시인이 아니라고 그(애드거 앨런포)는 단언하곤 했다. 자기 또한 기억의 주인이며 언어의 지배자인 사람만이, 그리고 언제나 훑어볼수 있는 자신의 감정들이 기록된 등록대장을 가진 사람만이 시인이라고 단언하곤 했다. 보들레를 [꿈꾸는 알바트로스] 98페지   하찮은것으로 치장할줄 아는 이 경의로운 특권을, 파리와 스페인의 녀인에게 주어진 이 특권을, 시인은 누구보다도 많이 갖고있다. 동상 99페지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렇겠지만, 참된 시인이란 기이하게 치장을 한 진실이며 겉보기에는 모순되게 보이는 존재이다... 석양의 불꽃놀이가 끝날무렵에는 아주 먼 동방의 나라로 달려가는 자이다. 동상 100페지   시인이 도덕목적을 추구했다면, 그는 자기의 시적력량을 감소시켰다고 나는 단언한다. 그의 작품이 형편 없을것이라고 내기를 걸어도 경솔한 짓이 아니다. 동상 102페지   비규범적인 언어로써 진술하기 위해 미지를 추구하는 시인은, 그러나 비웃음을 사거나 아니면 배척을 받아 고독속에 떨어지게 된다. 후고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196페지   모든 작가는 그 이름에 값하는자라면, 여태까지 씌여졌던 모든것을 대항해서 써야 한다.   -F.R. 퐁주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220페지     시인이란, 뚜렷하게 심미지향적인 발화를 창조하는 사람이다. 얀 무카로브스키 [시인이란 무엇인가] [현대시리론] 21페지   만일 시인이 감동효과의 범위를 거부한다면 배타적인 시(상징주의 시와 같은) 시를 초래하게 된다. 시인의 영속성을 거부한다면 , 의도적으로 시사성이 강한 작품 (예컨대 정치적인 시)을 낳게 된다. 동상동명 29페지   우리가 개괄해온 시인에 대한 개념은 ,,, 모든 방면에서 압력을 가하면서 서로 대립되여가는 힘들의 변화가능한 교차점으로 다루고있는것이다. 따라서 문학적 주도권은 이들 수많은 대립들을 독자적인 배렬(이는 조화롭다는것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로 조직한다는 사실에 있다. 얀 무카로브스키 [시인이란 무엇인가] [현대시 시론] 40페지   시인은 의미상으로 분명하게 경계를 정하는 단어들을 피하고 이미지면에서 정서적으로 련상작용이 풍부한 표현을 택한다. 동상도명 55페지   시인은 불가시물의 설교자이다. w. 스티븐즈 [후기 작품집] [세계명언대사전] 752페지   시인의 과제는 참으로 막중하고 위대하다! 모든것을 파괴로부터 구해내며, 죽어야만 하는 인생들에게 영생을 부여한다. 루카누스 [시민전쟁] [세계명언대사전] 753페지   위대한 시인들의 작품은 이제까지 읽혀지지 아니하였다. 위대한 시인들만 그것들을 읽을수 있기 때문이다. H.D 도로우 [국가론] [세계명언 대사전] 753페지   시인들은 자신도 리해하지 못하는 위대하고 현명한것들을 지껄인다. 플라톤 [국가론] [세계명언대사전] 753페지   시인들은 모든 감각을 막대히, 오래, 신중하게 대폭교란시킴으로써 자신을 환상가로 만든다. A. 랭보 [P. 데메니에게 보낸 편지] [세계명언대사전] 754페지   아무도, 정신에 어떤 이상이 없으면 시인이 될수도 , 시를 즐길수도 없을것이다. T.B 머콜리 [수필집] [세계명언대사전] 754페지   그(시인)가 한번 붓을 대면 그가 하는 말은 움직인다. 자기가 데리고 가는 사람을 꽉 붙잡고 전에 가보지 못한 생생한 지역으로 데리고 간다. 거기서부터 휴식이 없다. 옛지점과 빛을 죽은 진공상태로 변화시키는 공간과 말로 표현할수 없는 광채가 보인다. 그와 동행하는 자는 별들의 탄생과 전진을 바라보고 하나의 의미를 배운다. 월트 휘트먼 [풀잎서언] [시의 리해] 131페지   시인의 의무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데 있는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 즉 개연성 또는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 가능한 일을 이야기하는데 있다는 사실이다. 아리스토 텔레스 [시학] 62페지   시인은 모방하기 때문에 시인이요 동상 65페지   현대적감각에 맞는 단어를 만들어내는것은 예나 지금이나 시인의 권리입니다. 계절이 바뀌면 나뭇잎도 바뀌여 옛것은 떨어지고 새것이 돋아나듯 단어도 낡은것은 시들고 새로운것이 나타나 마치 새로 태여난 사람들처럼 생(生)을 구하게 마련입니다. 호라티우스 [시학]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177페지   진짜 시인은 한편의 훌륭한 시를 창작해 내기위해서는 가난도 , 절망도, 세상의 랭담한 대우도 아부도 일체 상관하지 않고 말없이 참아가야 합니다. 이것으로 만족한다는 때는 없고 어디까지나 조금씩 더 좋은 시를 쓰려고 하는것입니다. 세실데이 루이스 현대인 교양전서 30권 261페지   시인이라는것은 원래가 천성적으로 신비스런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며 죽음은 더욱 큰 하나의 신비입니다. 동상동명 331페지       시에 대하여     모든 시는 잔치이며 순수한 시간의 응결이다. 옥타비오 빠스 [시와 력사] [시의 리해] 112페지   시는 또 하나의 이미지이며, 또는 분활할수 없는 이미지의 성좌이다. 동명동상 114페지   시는 모르는 곳으로 뛰여들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시가 만약 잔치라면 그것은 시기에 맞지 않는 때에, 사람의 발길이 드문 곳에서 행해진 잔치 - 지하축제이다. 동명동상 115   아름다움의 결실은 우연히 되는것이 아니다. 생명처럼 필연적인것이다. 중력처럼 정확하고 똑 바르다. 시각에서 또 하나의 시각이 생기고 청각에서 또 하나의 청각이 생기며 목소리에서 사물과 인간의 조화를 영원히 알고싶어하는 또 하나의 목소리가 태여난다... 시의 즐거움이 멋진 운률과 직유와 소리를 지니고있는 시들에 있는것은 아니다. 월트 휘트먼 [풀잎서문] [시의 리해] 123페지   위대한 시는 아주 오래동안 공동의것이고, 모든 계급과 얼굴색을, 모든 부문과 종파를, 남자만큼이나 여자를, 여자만큼이나 남자를 위한것이다. 동상동명 131페지   모든 시작품속에는 혼돈의 미광이 가득해야 한다. -노발리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45페지     시적창조는 해득할수 없는 신비지요. 사람이 태여나는 신비와 마찬가지입니다. 말하자면 어디서 오는지 모를 소리를 듣습니다. 그소리가 어디서 오는지 숙고하는건 쓸데 없는 일이지요. 내가 태여난것에 대해서 근심하지 않듯이, 죽는것에 대하여서도 근심하지 않아요. 옥타비오빠스 [바가리아와의 대화] [시의 리해]108-109 페지   시는 어둠속으로 들어가야 하며 인간의 심장을 만나야 하고, 여자의 눈, 거리의 나그네들, 황혼녘이나 별이 빛나는 한밤에 적어도 한수의 시의 필요를 느끼는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이렇게 예기치 않는 사람들을 방문하는 일은 가본일이 있는 먼곳, 잃은 모든것, 배운 모든것 전부에 값한다. 파블로 네루다 [시에서] 동상111페지   시는 이 주요목적 -즉, 해방-에 있어서 다른 예술들과 같다. 에즈라 파운드 [시의 지혜] [시의 리해] 133페지   교훈시는 점차 도덕적인 훈계시, 그렇지 않으면 독자에게 어떠한것에 대해 시인의 견해에 설복시키기 위한 시로 국한되여 버렸다. 토마스 스턴즈 엘리어트 [시의 사회적기능] [시의 리해] 145페지   그것은 맑게 개인 하늘을 날고있는 새나 비행기의 모습을 따라가면서 바라보는것과 같은것이다. 만일 그것이 아주 가까이에 나타났을 때 보기 시작해서 그것이 점점 멀리 가는대로 계속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본다면, 우리들은 굉장히 멀리 갈 때까지 그것을 볼수가 있는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우리가 그 위치를 가르쳐 주려고 해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는것이다. 동명동상 152페지   시는 다만 한 언어로써만 표현할수 있고 다른 언어로는 번역할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언제나 상기시키는것이다. 동명동상 153페지   참다운 시는 개개 예술가의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자체이고 우주는 영원히 완성을 지향하는 하나의 예술이다 월리스 스티븐스 [가치로서의 상상력] [시의 리해] 156페지   시는 신앙을 그 내용으로 하지 않는다. 동상동명 163페지   시는 그러나 그러한 문맥속에서의 느낌과 태도에 특히 초점을 모으는것이지 있는 그대로의 행동이나 관념에 초점을 모으지 않는다. 그리고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하다. 클리언스 부르크스 [말하는 한 방법으로서의 시] [시의 리해] 177페지     시는 다양화될 때에야만 통합된다. 가스통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 선언 [시의 리해] 312페지   시란 실존의 모습뒤에 숨겨진 신비한 뜻을 자신의 본질된 음률을 되찾은 언어로써 표현한것이다. 시는 그래서 현세의 우리 머뭄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하나뿐인 령적업무의 근본을 이룬다. 스테판 말라르메 [서한] [시의 리해] 223페지   시는 자신의 형식속에서의 재생을 지향한다. 시는 우리의 령혼에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재구성하라고 부추긴다. 폴 발레리 [시에 대한 담화론] [시의 리해] 243페지   시가 금전의 종말을 포고하고, 혼자서 하늘의 빵을 이 지상을 위하여 쪼개여 나누어주는 때가 오리라. 앙드레 브르통 [초현실주의 제1선언] [시의 리해] 253페지   화가는 의미를 그리는것이 아니다. 작곡가는 음악에 의미를 붙혀주는것도 아니다... [의미]를 가지는 기호가 지배적인 힘을 누리는 령역-그것이 산문이다. 그러나 시는 차라리 회화나 조각이나 음악편이다. 장 폴 싸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시의 리해] 266페지   시라는것은 인간의 [신화]를 창조한다. 그런데 산문은 인간의 초상을 그린다. [시의 리해] 272페지 주해에서   시란 하나의 형태를 락서하는 령혼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시적이미지의 현상학] [시의 리해] 284페지   시는 끊임없이 그의 원천을 넘어서며 기쁨과 슬픔속에서 더 멀리 나아가 작품들을 빚어냄으로써 더 자유롭게 되는것이다... 시는 자유롭게 있는 법이다. 그의 운명을 우리는 결코 우리자신의 운명속에 가두어두지 못할것이다... 자기의 창조적인 령감이 자기의 욕망보다 더 멀리 자기를 이끌고 가리라. 피에르 장 주브 [대지와 시] [시의 리해] 293페지   시는 몽상가와 그의 세계를 동시에 구축한다. 가스통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 서문 [시의 리해] 303페지   한편의 시는 시를 꾸며진 대상과 시를 쓰고있는 자아와의 맞섬이며, 말하자면 외면의 풍경과 내면의 련관성인것입니다.   시의 모호함이 독자를 혼란시킴만큼이나 매혹시키며, 갈피를 못잡긴 하지만 그 말의 마법과 신비스러움에 강제적으로 끌려든다. 그러므로 엘리엇이 한 평론에서 [시는 리해되지 않고도 전달될수 있다] 라고 말한것은 그와 같은 의미에서이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28페지   시의 본질이 리해시키는데 있다면 그 누구도 시를 쓸수 없으니라. 동상   현대시는 그것들을 익숙하지 않는곳으로 데리고 가서 낯설게 만들며 변형시켜버린다... 시창작의 세가지 방식- 느낌, 관찰, 변형-중에서 현대에는 마지막것이 지배적이며, 그것은 객관세계에서뿐 아니라 언어와의 련관에서도 그러하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29페지   현대시는 종래의 의미를 인간성, 체험감상, 그리고 심지어 개인적자아마저도 도외시해 버린다 동상 30페지   사물적인 소재 정신적인 소재 할것 없이 시는 이질적인 요소들을 혼합시키며, 변의의 인광을 발하도록 한다. 동상 43페지     시는 일상적 삶에 대한 방벽이며, 그 상상력은 모든 현상을 뒤섞어놓는 자유를 누린다. 시는 예감과 마술을 본질로 하는 시적인간들이 견디기 어려운 관습의 세계에 맞서는 노래하는 저항이다. 공허한 리상속에 토대를 둔 시는 불가사이한 신비성을 창조함으로써 현실로부터 리탈하게 되며, 그런만큼 언어마술에 의해 보상될수 있다. 동상 73-74   문제는 력사속에서 지닐수 있는 시적인것을 빼내는 일이다. 즉 일시적인것에서 영원한것을 끌어내는 일이다. 보들레를 [꿈꾸는 알바트로스] 49페지   모든 건강한 인간은 이틀동안 먹지 않고 지낼수 있지만 시 없이는 결코 지낼수 없다. 동상 97페지   시는 가장 큰 수확을 가져다주는 예술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시는 나중에야 리익금을 만지는 그런 종류의 투자다. 하지만 그 리익금은 두두룩하다. 동상 동쪽   서정시는 도약한다. 하지만 늘 탄력적인 움직임으로, 물결의 너울과 같은 움직임으로 도약한다. 동상 102페지   시는 사장(死葬)되거나 몰락하는 한이 있더라도 과학이나 도덕과 하나가 될수 없다. 시의 대상은 진리가 아니다. 시는 자기자신밖에 가지지 않는다. 보들레를 [꿈꾸는 알바트로스] 101페지   시의 순수성의 전제조건은 그러므로 탈 사물화이다 보들레르 [꿈꾸는 알바트로스] 180페지     현대시의 근본특성의 하나는 그것이 자연적인 삶과 점점 더 분리된다는데 있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147페지   시는 은자의 예술이다. -코트 프리트 벤 후고 프리드리히[현대시구조] 195페지   파편문체는 현대시의 특징이 되었다. 동상 259페지   참된 시란 그 세계가 독창적이고 생동할수록, 은밀한 류사관계가 이루어지고있는 대립이 더욱더 상반적으로 된다. -체코의 랑만주의자 마챠 [현대시리론] 5페지   시 전체는 하나의 큰 거짓말이여서, 처음부터 넉살좋게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시인은 가치가 없다. 로만 야콥슨 [현대시 리론] 8페지   어떻게 시성이 시를 표현하는가? 시성은 언어가 언어로 느껴지고 이름 불리여진 대상이나 분출되는 정서의 단순한 표현이 아닌 경우에 존재하게 되며, 또한 언어들과 그 구성법, 언어의 의미, 언어의 외적형식과 내적형식등이 무심하게 현실을 가리키는 대신에 그것들 나름의 무게와 가치를 획득할 경우에는 존재한다. 로만 야콥슨 [시란 무엇인가] [현대시 리론] 18페지   세계의 수많은 시에서 가장 뛰여난것은 대부분 자유률로 창조된것이다. 현대시에서 가장 흥미로운 일련의 운동은 엄격한 률격 없이는 최악의것이였거나 최상의것이였다. 벤야민 흐루쇼브스키 [현대시의 자유률] [현대시 리론 ] 117페지   화려한 행위는 고도의 황홀경을 불어넣고, 모든 정복자는 시신을 창조한다. E.월터 [나의 보호자에게 보내는 송시] [세계명언 대사전] 743페지   시는 인류의 모국어이다. J.G.하만[투케이 아네스테티카] [세계명언사전] 746페지   시는 인간이 자기자신의 경의를 탐구하는 언어이다. C. 프라이 [타임]지에서 [세계명언대사전 ] 746페지   시는 그 주제가 진실이 아니라 진실과 같은 사물들의 시 G.채프맨 [부쉬당부와의 복수] [세계명언대사전] 746페지     시는 정서의 느슨한 변환이 아니라, 정서로부터의 도피이며,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의 도피이다. T.S. 엘리어트 [전통과 개인의 재능] [세계명언 대사전 ] 747페지   시는 인정받지 못한 세계의 립법자이다. M.W. 셀리 [시의 번호] 동상 [세계명언대사전] 747페지   시는 단순히 사물을 말하는 가장 아름답고 인상 깊고, 광범한 효력을 가진 양국이요, 여기 그 중요성이 있다. M. 아롤드 [비평론] [세계명언대사전] 747페지   소네트(14행시)란 무엇인가? 그것은 소곤거리는 먼 바다를 말해주는 진주조개요, 신비롭고 갈고 닦은 보석이며, 또한 잘 그린 예쁜 그림이다. R.W.길더 [소네트] [세계명언대사전] 747페지   참된 시는 리해하기전에 통할수 있다. T.S. 엘리어트[단테론] [세계명언사전] 750페지   시는 의미해서도 안되며, 있어야 한다. A. 머쿨리시 [달나라의 거리] [세계명언 대사전] 751페지   왜 이 모든것이 필요한가? 왜 기호가 대상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특별한 관심을 두는것이 필요한가? 왜냐하면 기호와 대상의 일치(A는 A1이라는)를 직접적으로 인식하는것말고도, 그러한 일체의 부적절성(A는 A1이 아니다)에 대해서도 직접적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기때문이다. 로만 야콥슨 [시란 무엇인가] [현대시리론] 18페지   시는 력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는 보편적인것을 말하는 경향이 더 강하고, 력사는 개별적인것을 말하기때문이다. 아리스토 텔레스 [시학] 62페지   그대들은 오랜 시간을 두고 꼼꼼히 손질하면서 잘 깎은 손톱으로 열번씩 음미해보지 않은 시일랑 물리치시라. -호라티우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195페지   시는 그림과도 같습니다. 어떤것은 가까이서 볼 때 더 감동적이고 어떤것은 멀리서 볼 때 그렇습니다. 동상 199페지   훌륭한 시라는것은 어느것이나 모두 실제로 평범한 일상생활의 기슭에서 저쪽 미지의 세계의 기슭으로 걸쳐놓은 교량같은것입니다. 세실데이 루이스 현대인 교양전서 30권 354페지     상상력에 대하여     파스칼은 상상력은 세계의 주인이라고 말했다. 월리스 스티븐스 [가치로서의 상상력] [시의 리해] 156페지   상상력은 사물의 가능성에 대한 마음의 힘이다 동명 동상 158페지   형의상학자로서의 상상력은 우리를 어느한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예술로서의 상상력은 또 그와는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동명동상 158페지   상상력은 위대한 인간의 능력의 하나이다. 랑만주의는 이것을 왜소한것이 되게 한다. 상상력은 마음의 자유이다. 랑만적인것은 자유의 활용에 실패한 경우를 지칭한다. 동명동상 159페지   상상력만이 최고의 천재이다. 그것은 대담하고 열렬하여 , 그 최고의 업적은 추상에 있다. 동명동상 160페지   상상과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토의는 삶의 목적을 위하기보다는 예술과 문학의 목적을 위한것이다... 삶에 중대한것은 실재 그대로 보여주는 진리인데 대하여, 예술과 문학에 있어서의 중요한것은 우리가 보는바의 진리이다. ... 예술과 문학에 있어서의 상상의 가치는 심미이다. 동명동상 165페지   시적가치는 ... 지식의 가치도 아니고, 믿음의 가치도 아니다. 그것은 상상의 가치이다... 시적가치는 직관적인 가치이며, 직관적가치는 정당화될수 없기 때문이다. 동명동상 166페지   상상력은 현실속에 비현실을 도입하는 기능이며 그 가치는 신의 리념을 인간의 리념에 투사하는 사고의 방책이 갖는 가치이다. 그것은 원본과 따로 있는 영상들을 만들어낸다...다양성은 상상력의 특성이다. 동명동상 167페지   상상력은 누를 도리가 없는 혁명가이다... 비정상속에서 정상을, 혼란속에서 혼란의 반대를 알아볼수 있게 하는 힘이 상상력이란 점이다. 동명동상 168페지   상상력은 론리의 기적이며, 그 미묘한 예감은 , 리성의 결론내의 계산이듯이, 분석을 넘어서는 계산이라고 할수 있다. 동명동상 169페지   문학의 입구 즉 상상의 입구를 정상적인 사랑, 정상적인 아름다움의 장면으로 볼수 있다는것자체가 대단한 상상력의 발휘이다. 동상동명 170페지   상상력에 의한 시는 물질계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날카롭게 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상황과 행위의 정서적, 지적, 도덕적 함축에 대한 감각을 깊게 한다. 동명동상 181페지   인간의 상상력이 만든것이면 진실되지 않는것이란 없다고 나는 믿는다 마르셀 레이몽 [보들레르에서 초현실주의까지] [시의 리해] 203페지   나는 소박한 환각에 길들었다. 앙르 튀르 랭보 [언어의 연금술] [시의 리해] 226페지   만약 그가 (철학자) 시적상상력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연구하려 한다면, 지금까지의 그의 지식을 잊어버려야 하고, 그의 모든 철학적연구의 습관들을 버려야 한다. 가스통 바슐라르 [이적이미지의 현상학] [시의 리해] 279페지   시의 철학이 있다면 ... 이미지의 새로움에서 오는 법열 그자체가운데, 태여나고 다시 태여나야 하는것이다. 동명동상 동페지   이미지를 재현하는게 아니라 현출(現出)하는 창조적상상력은 오직 한번 언급되여있을뿐이다. 동명동상 296페지   상상력은 그의 생동하는 활동력에 있어서 우리를 과거와 현실에서 동시에 떼여낸다... 비현실의 기능쪽이 완전치 못하면, 창조적인 정신활동은 얽매이게 된다. 상상함이 없이 어찌 예견할수 있겠는가?... 순수한 승화의 이 정상에서 바라본다면, 재현하는 상상력은 더 이상 대단한것이 아님을 알수 있다. 요한파울리히터는 이렇게 쓰고있지 않았던가?- 재현하는 상상력은 현출하는 상상력의 산문인것이다. 동명동상 297페지   상상력과 기억을 분명하게 구분하지 못한다면 창조적상상력의 심리학을 세우지 못하리라고 우리는 자주 말했다. 가스통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서문 [시의 리해] 307페지   상상되는 세계는 몽상의 깊은 일치를 야기시킨다. 동명동상 310페지   상상력의 산물을 객관적이고 론리적인 합당성의 척도로 잰다든지 혹은 단순한 공상과 애써 거리를 유지하여야 할 필요성은 없다. 상상력은 절대적인것이기 때문이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39페지   상상력은 공간의 질서를 전도시킨다, 례를 들면 다음과 같은것들이 있다. 마차들은 하늘위에서 달린다, 호수의 바닥에 살롱이 있고, 드높은 산정에서 태양이 출렁거린다. 철도레일이 호텔을 통해서 호텔위로 달린다.   그러나 상상력은 인간과 인간사이의 관계도 전도시킨다. 법무관이 그의 시계줄에 걸려있다.   상상력은 가장 련관이 먼것, 구체적인것과 상상적인것을 강제로 결합시킨다. 아침 우유의 중얼거림, 지난 세기밤의 중얼거림 때문에 죽도록 슬픔에 잠기다.   상상력은 실제 사실에 부합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더욱 낯설계 만드는 비실재적인 색채들을 창안하는데 이는 보들레르의 의도에 부합되는것이다. 푸른 화란냉이, 푸른 암말, 록색옷의 피아니스트, 록색웃음, 록색의 하늘빛, 검은 달들.   아득한 령역으로 돌진하는 상상력은 오직 단수로만 존재하는 사물들을 복수화시킨다. 애트나 화산들, 프로리다들, 말강들, 이런것들은 복수화 됨으로써 더욱 감각적이 되지만 그와 동시에 현실로부터 멀어진다...[모든 달과 모든 도살 모든 눈(雪)], 복수화 및 이러한 총칭화는 현실을 마음껏 헤집고 배척함으로써 새로운 초현실을 만들어내는 상상력의 강력한 수단이다. ... 상상력의 깊은 심층에서 마술적인 아름다움은 무와 하나가 된다 동상 111페지   어휘상의 날카로운 불협화 즉 이질적인 사실들이나 가치들을 극도로 좁은 언어공간에 몰아넣는 단어군들로 나타내기도 한다. 타르를 마시는 태양, 겨울에도 재맛이 나는 7월의 아침, 구리종려들, 비둘기 똥과 같은 꿈들, 아늑하고 안락한 느낌은 대개 시의 종결부에서 갑작스런 일격, 혹은 야수적이거나 비천한 말의 돌발적인 출현에 의해 저지된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112페지   인간에게 색과 윤곽 소리와 향기의 정신적의미를 가르치는것은 바로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태초의 유추와 은유를 창조한다. 상상력은 모든 창조물을 해체하고 령혼의 가장 깊은곳에서만 그 기원을 찾을수 있는 법칙에 따라 축적되고 배렬된 자료들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며, 새것에 대한 감각을 만들어낸다. 보들레를 [꿈꾸는 알바트로스] 74페지   상상력은 사물의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관계를 , 그리고 사물의 조응과 류사함을, 철학 방법들을 떠나서 무엇보다도 먼저 감지하는 신과 같은 능력이다 동상 76페지   작품은 다 써놓고 보면 흔히 처음에 자기가 생각햇던것을 절반밖에 표현하지 못했음을 깨닫게 된다. 왜 이런가? 그것은 문학적구상은 흔히 상상에 의존하기에 아주 쉽게 기발한 생각들을 하게 되지만 언어는 비교적실재적이여서 교묘하게 구성하기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류협 [문심조룡] 397페지   상상력, 그것은 사실상 절대력의 변명에 불과하며, 명석한 통찰력이요, 마음의 너그러움이며, 승화될 상태에 있는 리성이다. w. 워즈워드 [서곡] [세계명언 대사전] 743페지   [가상을 만드는것에 불과하지 진실로 존재하는것을 만드는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좋은 말이야. 바로 맞추었네] 플라톤 [시론] 아리스토 텔레스 [시학] 219페지   그렇다면 모방술은 진실에서 멀리 떨어져있네. 동상동명 224페지   젊은이여, 말에 위엄과 장대함과 긴장감을 가장 많이 부여하는것은 상상이오. 롱기누스 [숭고에 관하여] 아리스토 텔레스 [시학] 313페지       변형에 대하여     알송달송한 의미의 가능성이 결국 아무 의미도 없는것으로 판명됨에 따라 순수한 언어의 효과가 뚜렷하게 두드러지게 된다. 올리언스 부르크스 [말하는 한 방법으로서의 시] [시의 리해] 171페지   소네트의 은유와 리듬은 그 진실이 우리에게 [산 진실]로 오도록 한다. 동상동명 182페지   직선의 규률에 복종해야 한다면 시란 존재할수 없으리란점을 지적해 둡시다. 사람들은 여러분들에게 가르쳐줍니다. 비가 온다고 말하고싶으면 , 비가 온다고 말하십시오! 라고. 그러나 시인의 목적이 비가 내린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것은 결코 아니며 또한 그럴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시가 언어의 기능을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함축하고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들지 않습니다. 폴 발레리 [시에 대한 담화론] [시의 리해] 242페지   무의식적 회상에 정주한채 , 직관의 대상주위에 떼지어 몰려드는 표상들을 대상의 분위기라고 한다. 발터 벤야민 [보들레르에 있어서의 몇 개의 모티브에 관하여] [시의 리해] 364페지   만일 그들이 그것을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유일한 현실성의 세계, 즉 개인의 고유한 감수성의 세계에 관련시킨다면 이런 환상은 진실이 될수 있는것이다 동명동상 367페지   모든 구조주의적활동의 목적은 , 그것이 사유적이든 시적이든 간에, 하나의 대상을 재형성하여 그 재형성가운데서 그 대상의 작용태규칙들(기능들)이 나타낼수 있게끔 하는것이다. 따라서 구조는 기실 대상의 모사simulacre인 셈인데, 그러나 어느 방향으로 관심이 지향되고 표명된 모사이다. 왜냐하면 모사로 이루어진 대상은 자연속에 보이지 않는것, 또는 차라리 불가능한것으로 머물러있던 어떤것을 나타내기때문이다. 구조적인 인간은 현실을 취해서 분해하고 재구성한다... 롤랑 바르트 [구조주의적 활동] [현대문학 비평론] 165페지   창조 또는 사유는 세계에 대한 독특한 ‘인상’이 아니라 정녕 그것과 닮은 한세계를 제작하는것이고, 그것은 전자의 세계를 복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리해가능한것으로 하기 위해서이다... 동명 동상 165페지   구조주의는 ... 구조의 유사성에 토대(사실주의라고 하는 예술에서처럼) 아니라 기능의 유사성(레비스트로스가 상동성이라 부르는)에 토대를 둔 그런 모사에 속하는것이다. 동상   예술을 정의하는것은 복사대상의 성격이 아니라 (그러나 그것은 모든 사실주의 끈질긴 편견인데) 인간이 그것을 재형성하면서 거기에 덧붙이는것인것이다. 기술이야 말로 모든 창조의 존재자체이다. 동상 166페지   대상을 재구성하는것은 기능들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며, 말하자면 방법이 작품을 만들어내는것이다. 구조주의적 작품이라기보다는 활동이란 말을 해야 하는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 [구조주의적 활동] [현대문학비평론] 166페지   단순병형의 경우에는 설명어가 하나밖에 없고 따라서 단 하나만의 주어가 있는데 반해, 복합변형의 경우에는 설명어 둘이 있어서 이것이 주어를 하나 또는 둘이 있게 하는것이다. 츠베탕 도토로브 [서술변형] [현대문학 비평론] 258페지   작품들이 그 섬세한 오묘함을 드러내고 우리를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움직이려면 상상적인 직관속에서 나타나기만 하면 족하다. 로만 인가르든 [현상학적미학, 그법위 설정을 위한 시도] [현대문학비평론] 291페지   독창적인 직관과 고된 작업의 로고는 병행되여야 하며 이들의 조화가 일치하지 않을 때에는 기법상으로 실패한 실체를 얻게 된다... 근본적인 직관이 상실되면, 아무리 기법이 뛰여나다 하여도 완성된 작품에는 그 직관이 불러일으킨 미적으로 가치있는 특성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동상동명 292페지   하나의 변형결과로 인해 아무것도 의미가 없던 단계로부터 모든것이 의미를 가지는 단계에로의 이행이 이루어진다. 자끄 데리다 [인간과학중심의 담론에 있어서의 구조와 기호놀이] [현대문학 비평론] 519페지   탈형상화된 현실소재의 모든 구성성분은 보통 감각특성을 가지는 단어군들로써 표현된다. 하지만 이러한 단어군들은 객관적으로는 결합불가능한것들을 비정상적으로 결합시키기때문에 감각적특성들로부터 비실재적인 형상체가 생겨난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108페지   별들의 숲에서 떠오르는 육고기꽃들, [목제 신발을 신은 목동의 시들이 정원에서 으르렁거린다] [옆방에서 램프가 선회할 때, 마치 거울처럼 붉고 검은 도시들의 불결한 진창] 이 모두는 감각적현실의 요소들이긴 하나 추측, 생략, 위치변경과 새로운 결합에 의해 초현실성을 획득한다... 그 현실성은 오직 언어속에서만 존재하는 세계안에 있는것이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109페지   무는 전적으로 리상주의적인 기원에서 나온 존재론적 개념이다. 말라르메가 주목한것은 모든 현실적존재의 불충분성이다. 리상주의적 사고만이 현실로 주어진 모든것을 불충분한것으로 경험할수 있다. 동상 166페지   1948년 르베르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인에게는 아무런 대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자신속으로 파고 든다. 시작품은 자신의 불연속성 그리고 결합 불가능한것을 서로 련결시키는 조작방식의 근거를 아무도 모르게 함으로써 더욱더 가치있게 된다]. 스페인 시인 살리나스는 순수의 조건은 시가 가능한 한 사물과 테마로부터 벗어나는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때서야 비로서 언어의 창조적운동이 자유로움을 가지기 때문이다. 대상은 시의 수단일뿐이다. 동상 199페지   중요한것은 탈인간화이다. 그것은 자연적인 감정상태들을 배제시키고 , 인간을 그이상 낮은 단계로 밀려나게 하며, 종래까지는 타당했던 사물과 인간사이의 단계질서를 역전시키고, 인간을 가능한 한 인간으로 보이지 않게 하는 시각에서 인간을 기술하게 한다. 현대예술가의 미적향유는 인간적인것에 대한 바로 그러한 제압(승리)에서 생겨난것이다. 동상 223페지   시정신을 자기 자유를 충분히 누리기 위해 자기자신의 자연성을 소멸시키고 , 세계로부터 추방되며, 또한 세계를 추방시킨다. 이것이 탈인간화의 기묘한 역설이다. 동상 227페지   문학적 사색을 잉태함에 있어서 그요체는 허심함과 조용함에 있으며 마음속의 선입관을 깨끗이 쓸어버리는데 있다. 바로 이렇게 해야만 정신이 순수하고 깨끗해지게 할수 있다. 또한 학식을 쌓음으로써 진귀한 보물을 저장하고 사리를 분명히 가리는것으로 재능과 학식을 풍부히 하고 경력을 연구하는것으로 철저한 관찰을 진행하고 문학적사색을 따라 아름다운 문학언어를 끌어내야 한다. 그런 다음에라야 신묘한 도와 깊게 통한 심령으로 하여금 성률에 맞춰 문학언어를 안배할수 있는데, 이는 마치도 식견이 있는 장인바치가 심상에 의존하여 창작을 진행하는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는 문학적사색을 구사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며 작품의 구성에서의 중요한 발단이다. 류협 [문심조룡] 377페지   비란 비부(比附)이고 기흥이다. 비부 즉 사물의 리치를 련결한다는것은 비유를 사용하여 사물을 련결한다는 의미이다. 기흥은 즉 사물에 의탁해서 어떤 정서를 불러일으킨다는것은 어떤 의미를 아주 은근하게 내포하고있는 사물에 맡긴다는 뜻이다...비란 격분의 감정을 품은채로 잘못을 지적하는것이고, 흥이란 완곡한 비유를 사용하여 그것에다 숨겨진 의도를 의탁하는것이다. 일반적으로 시간의 추이에 따라 감정과 생각은 변하기마련이니 , 시인들이 지향하는 표현수법에는 항상 그 두가지가 포함돼있었다. 동상 501페지   비라고 부르는것에 대하여 설명하자면 사물을 묘사하여 비유하는것으로써 자신의 의도를 명백하고도 정확하게 설명하는것이다. 그러므로 금과 석으로 아름다움을 비유하였고, 나나니벌이 명령을 양육하는것을 례로 자식을 깨우치는것을 비유했고 , 매미의 울음소리를 례로 시끄러운 웨침에 비유했고, 때묻은 옷을 마음의 근심에 비유했고... 동상 503페지   그것 (자연풍경)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 창조된 바로 그것이며, 인간에게 있어서는 미지의 섬의 아무도 발을 들여놓지 않은 밀림과 흡사한 감추어진 령역인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95페지   변형이란 일부분은 그대로 남아있고 일부분은 시인이 조작한 말이다. 아리스토 텔레스 [시학] 127페지   오직 한사람 당신만이 보거나 느끼는것이며 타인에게는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것을 비전이라고 합니다. 직관은 진실도 거짓도 아니며 오직 현존할뿐입니다. SK.랭거 예술이란 무엇인가 [현대인 교양전서] 제29권 281페지       언어에 대하여     사실 시인은 대뜸 [도구로서의 언어]와는 인연을 끊을것이다. 그는 단연히 말을 기호로서가 아니라 [사물]로 간주하는 시적태도를 선택할것이다... 전자에 있어서는 말은 이미 길들여져있다. 후자에 있어서 말은 야성 그대로다. 전자에 있어서는 그것은 유용한 약속이고, 차츰 소모되여 마침내 쓸모 없이 되어버렸을 때는 버리고 마는 연장이다. 후자에 있어서는 말은 초목과 같이 지상에 자연적으로 자라나는 자연물들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언어는 외부세계의 한 구조물이다. 장폴 싸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시의 리해] 267페지   시어는 그자체가 하나의 소우주인것이다... 말이라는 이상한 거울속에는 하늘과 땅과 작가자신의 생명이 비치고있었다. 마침내는 말이 [사물들] 자체로 된것이다. 동상동명 269페지   언어는 우리의 껍질이며 촉각인것이다. 언어는 남에게 대하여 우리를 보호해주고, 남에게 관한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그것은 우리이 감각령역이다. 우리들은 신체속에 있듯이 언어속에 있다. 동상동명 275페지   -그렇다. 정말, 말들이 꿈꾼다. 가스통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서문 [시의 리해] 305페지   말은 꿈꾸는걸 방해하는 아주 무거운 짐인양 의미를 던져버린다. 말들은 그때 자기들에게 그걸 짊어질 권리가 있다는듯 다른 의미를 띠게 된다. 말은 어휘라는 숲속으로 새로운 무리 나쁜 무리를 찾아간다. 동상동명 304페지   시적이미지는 언어의 떠오름이며, 언제나 의미하는 언어보다 약간위에 있는것이다... 실용적인 언어의 통상적인 선을 빠져나오는 그 언어의 도약들은 축소판생의 도약들인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시적이미지의 현상학] [시의 리해] 289페지   시적언어는 지배자의 이름을 전승시키기 위하여 그 언어를 리용하려고 하는 모든자를 거부하는것이다. 이러한 거부의 근거는 시의 밖에 있는것이 아니라 시 그자체안에 있다. 이로서 결정적인 론점에 이른것이다. 한스 마구누스 엔? 스버르거 [시와 정치] [시의 리해] 385페지   시의 작업은 시어의 일반적인 노력이 언어를 자연화하고 사물화하려고 하는만큼, 지적인 동기를 지워버림으로써 더 물리적인 따라서, 상상력에 대해서 더 직접적으로 매혹적인 련상을 가능케 하는데 있게 된다. 제라르 쥬네트 [낯. 밤] [현대문학비평론] 213페지   시행이란 [여러 말들을 가지고 , 언어에는 낯선 새롭고 전체적인 그리고 주술같은 한마디 말을 재창조하는]것이다. 동상동명 216페지   언어는 치료의 기구이기도 하다... 무질서가 정리되며 무의미가 의미를 갖게 되고 꿈은 현실적인 원천에까지 거슬러올라가게 된다. 이봉 발레리 [정신분석학과 문학비평]의 서문 [현대문학비평론] 368페지   시인은 말을 마치 건반인것처럼 사용한다. 후고 프리드리히[현대시구조] 44페지   신언어는 어떤 모습이여야 하는가? 아플리네르의 대답은 개략적으로 말하자면 난폭하고 불협화적인 언어, 그리고 다시 신성화된 언어를 암시하고있다. 모음이 없는 자음들, 무딘 폭팔음을 내는 자음들, 신언어는 돌발적이며 전율하는 신神이다. 동상 200페지   마술적작용, 주술적비법으로서의 언어와 글쓰기에 대하여 보들레르 [꿈꾸는 알바트로스] 102페지   말라르메의 시어는 현대의 조급한 읽기에 저항하면서 말이 그 원천과 항성속으로 되돌아가는 령역을 창조하려고 시도한다. 이러한것의 문장을 파편들로 파괴함으로써 가능해진다는것은 특기할 사실이다. 결합이 아닌 불연속성, 련결대신에 병렬, 이것들의 내적불련속성, 불가능의 경계상에 있는 진술의 문체적특성이다. 파편은 이룩되여가는 완전성의 상징이라는 지위를 획득한다. 파편들은 리념들의 결혼표징이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미학의 근본표징이기도 하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157페지   시속에서 언어자체가 무를 광범위하게 현재화시키는데 그것은 현실적소멸을 통한 무의 생성에 비례한다. 동상 67페지   경험의 외피를 벗어버린 현상들은 절대시선에 의해 좌우된다. 자신을 담아줄 그릇을 향하고있는 이 절대시선은 현상들을 상징으로만 사용하며, 이에 의해 자신의 운동을 자유롭게 조직하는것이다. 동상 182페지   언어는 시인의 재료이므로 예술적재구성의 대상이 된다 얀 무카로브스키 [시란 무엇인가] [현대시 리론] 29페지   시적언어는 감정이 표현을 드러내는 언어인 정서적언어와도 다르다... 표현의 정감에서 리탈한것이 문학에서 계획된 요구사항이 되는 시대조차 있었다. 동상동명 44페지   시적언어는 구상성에 언제나 이끌린다기보다는 구상성과 비구상성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고가는것이다. 이것과 련관해서 비유적본질도 무조건 시적언어의 특징이라고 말할수 없다는 점을 지적해야만 하겠다. 동상   시적언어는 기능에 의해서만 영속적으로 규정될수 있다. 그러나 기능이란 속성이 아니라, 어떤 주어진 현상의 속성들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동상 46페지   학자들은 시어를 표준적인 문어가 변형된것들중의 하나로, 즉 상부구조의 일반적규칙에 좌우되는 한 변형으로 론의함으로써 이 련관관계를 설명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정확히 언어장치들이 단 한가지 령역에 대한 제창은 문학에 어울리지 않는것이다. 동상 49페지   시에서 가장 놀랄만한 언어창조인 신조어가 표준문어에 뿌리내린다는것은 거이 어렵다. 얀 무카로브스키 [시적언어란 무엇인가] [현대시리론] 51페지   문학의 언어란 무엇인가? 조각의 금속이나 돌과 같은 ,또 미술에서 도료와 화판재질같은 재료다... 예술작품에서 언어 또한 다듬어지고 재구성되는 과정을 겪어야 하는것이다. 동상동명동쪽   시적언어의 갱신은... 언어에 대한 일종의 왜곡으로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시적언어의 변형적성격에 대해 언급하게 된다. 동상 54페지   시적인 신조어는 이러한 필요(소통가능한)에서 출현하는것이 아니고 ,오히려 거꾸로 신어의 창조라는 바로 그 사실에 주의를 끌 목적에서 이미 알려져있는 사물의 일반적명칭을 대치하는 경우가 흔하다. 동상 81페지   표현(과장-편자주)들이 마음속의 깊고도 신비한것들을 펼쳐보이면 울적한 마음을 날려보낼수 있으니 , 안맹한 소경으로 하여금 눈을 뜰수 있게 하는 빛남을 갖고있고, 귀머거리로 하여금 소스라쳐 놀라게 할 소리를 갖고있다고 하겠다. 류협 [문심조룡] 517페지   작품의 언어적표현속에 어떤 광채를 숨기게 되면 안광이 평범한 사람들은 어리둥절해 할것이고, 어떤 예리함이 언어적표현속에 드러나게 되면 식견이 높은 사람들은 크게 놀라게 될것이다. 동상 557페지   앞서 말한 여러가지 시어체와 복합어와 방언을 적절하게 사용하는것도 주요한 일이긴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것은 은유에 능한것이다. 이것만은 남에게서 배울수 없는것이며 천재의 표징이다. 왜냐하면 은유에 능하다는것은 서로 다른 사물들의 유사성을 재빨리 간파할수 있다는것을 뜻하기때문이다. 아리스토 텔레스 [시학] 134페지   상투적문구나 기술에 있어서는 잇단 은유만큼 표현력이 풍부한것은 아무것도 없소. 롱기누스[숭고에 관하여] 아리스토 텔레스 [시학] 356페지   말의 울림은 번쩍번쩍 빛난다 세실데이 루이스 [현대인 교양전서] 제 30권 264페지   언어의 끊임 없는 재창조라는것이 그 얼마나 중요한 작업인가 동명동상 265페지   단어는 시의 가장 기본적인 재료입니다. 시인이 단어를 망치로 다듬어 이것을 견고하고 아름다운 무늬로 단련시키는데 사용하는 방법을 [시적기술]이라 부릅니다 동명동상 279페지       기능에 관하여     시인이 그 시기의 한 대중적인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고 해서 나쁜 시가 일시적으로 유행하는 수도 있는것이다. 그러나 참다운 시는 대중적인 생각이 변화할뿐만 아리라 그 시인이 열정적으로 관여했던 문제에 대한 흥미가 완전히 사라진뒤에도 잔존하게 되는것이다. 호마스 스턴즈 엘리어트 [시의 사회적기능] [시의 리해] 146페지   첫째 우리들이 확언할수 있는것은 시는 즐거움을 주는것이여야 한다는것이다. 동상동명 147페지   우리는 시를 대중적인 시에만 국한해서는 안될것이다... 시인의 직접적인 임무는 그의 국어에 대한것이다. 즉 첫째로는 그의 국어를 보존하고 , 둘째로는 그것을 확대, 향상시키는 일이다. 동상동명 149페지   시인이 매우 급속히 많은 독자를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의심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들에게 그 시인이 진정으로 새로운 일을 하고있지 않고, 또 대중들이 벌써 알고있는것, 따라서 그들이 벌써 전시대의 시인들에게서 받은것을 다만 주고있는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만드는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올바른 소수의 독자를 가져야 한다는것은 중요한 일이다. 동상동명 151페지   문학은 철학이나 신학이나 종교의 애용물이 아니다. 문학은 자신의 고유한 임무를 가진다. 그러나 이 임무는 사변적인것이 아니고 감정적인것이기 때문에 문학은 사변적으로 결정될수는 없다. 엘리어트 [1927년 한 론문에서] [시의 리해] 376페지   독자에게 낯설은 사상이라고 생각되는 이상한 주제는 저자의 잠재적존재를 가리켜준다. 볼프강 이제르 [독서과정: 현상학적접근] [현대문학비평론] 247페지   문학의 기능의 하나는 바로 그 과학적언어를 정복시키는것이다. 그러므로 문학이 공격하는 바로 그 언어의 도움으로 문학을 완전히 읽어낼수 있다고 주장하는것은 지극히 모험스러운 일이다. 그런 주장을 한다는것은 문학의 실패를 전제하는것과도 같다. 츠베탕 토도로브 [어떻게 읽을것인가] [현대문학 비평론] 247페지   작품제작에 재주 없는것을 , 이목을 끌게 마련인 정치적암시로 벌충하는것이 특히 열등한 문인들의 버릇으로 점점 굳어졌다. 시, 소설, 평론, 희곡, 모든 문학생산품이 이른바 [경향]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엥겔스 1851년 10월 MEL.P.119)   ...재주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확신을 드러내려 극단적으로 경향성 쓰레기를 보여주는 하찮은 친구가 있는데 사실은 독자를 얻기위해 그러는것이다. (엥겔스 1881년 8월 MEL 123) 레이몬드 월리엄즈 [제휴와 참여] [현대문학 비평론] 569페지   경향문학은 ... 정치적제휴로서의 참여였다. 인간을 위해서로부터 인민을 위해서로, 다시 혁명을 위해서로, 당을 위해서, 그리고 (변화하는) 당로선을 위해서로 협소해져간것이다. 동상동명 571페지   참여는 이데올로기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것이다. 동상 573페지   공고라는 시가 외부세계와 내부세계의 정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질수록 그 가치가 증대한다고 확신한다. 그는 전달가능한 감정들이 배제될 때 비로소 나타나는 순수한 무용의 미를 사랑하였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197페지     시의 리해는 소수의 대가에게만 속하는 령역이다... 시는 아름다운 소리만 내며, 어떤 의미도 련관도 갖지 않는다. 기껏해야 각양각색의 사물들의 순전한 파편들인양 몇구절 정도 리해나 될뿐이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44페지   보들레르는 [악의 꽃]을 저항에의 열정적인 욕구, 그리고 증오의 산물로 칭하면서 시가 [신경쇼크]를 유발시키도록 권장하고 독자를 자극시켜 더 이상 리해하지 못한것을 자랑한다. 한때 기쁨의 무한한 샘이였던 시적인 의식은 이제 무진장한 고문도구들의 병기창이 되었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64페지   [일루미네이션]은 독자를 고려하지 않는 시이다. 이 시는 리해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것은 환각적인 자기방출의 뢰우이며, 기껏해야 위험에 대한 사랑의 전원적인 위험에 대한 두려움을 일깨운것으로 만족한다... 어느 문장이 말하듯 [다른 모든 선구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업적을 남긴 창시자]임을 확인시켜준다. 이 시는 절대화한 현대적상상력의 최초의 위대한 기념비이다. 동상 113페지   나는 언제나 문학과 예술은 도덕과는 무관한 목표를 추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자신은 상상과 문체가 아름다운것으로 충분합니다. 보들레르 [꿈꾸는 알바트로스] 51페지   그리고 끝으로 몽상을 예술품으로 만드는 작업을 전혀 리해하지 못하는 이 무능력을 나는 결코 참아낼수 없었습니다. 동상 58페지 (1857년)   많은 사람들이 시의 목적은 어떤 교육적인것에 있고, 시는 때로는 의식을 강화시켜야 하고, 때로는 풍습을 향상시켜야 하고, 또 때로는 어떤 유용성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는 자기자신 밖에는 다른 어떤 목적도 가지지 않는다. 시는 다른 목적을 가질수가 없다. 단지 한편의 시를 쓰는 즐거움을 위해 씌여진 시보다 더 위대하고 고귀하며 진실로 시라는 이름에 값하는 시는 없을것이다 동상 102페지   언어행위의 시성(詩性)은 의사소통이 제일 중요한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백히 하기때문에 여기 ‘검열’은 느슨해지고 부드러워질수 있다. 로만 야콥슨 [시란 무엇인가?] [현대시리론] 13페지   시적표현의 목적은 미적효과에 있다. 그러나 시적언어를 지배하고 있는 (다른 기능언어에서는 부수적현상에 불과할뿐) 미적기능은 언어기호자체에 주의를 집중시킨다. 따라서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이라는 목표를 지향하는 실제의 방향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게 된다. 얀 무카로부스키 [시적언어란 무엇인가?] [현대시리론] 46페지   한작가의 작품이 갖는 진정한 가치를 정확하게 리해하는 지음을 만날수 있다는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음은 확실하게 리해하기 어렵고 또 그런 지음을 만나기는 더욱 어려운것이다. 작품에 대한 진정한 리해력을 갖춘 사람인 지음을 만난다는것은 천년에 한번 있을가말가한 일이다. 류협 [문심조룡] 685페지   지나치게 심오하다고 탓을 하랴! 문제는 식견과 감별력이 차한데 있다... 마음의 눈으로 작품의 사상과 감정을 관찰하는 일은 육안으로 사물의 형체를 관찰하는것에 비유될수 있다. 아주 밝은 눈으로 보면 분간할수 없는 사물이 존재하지 않을것이다... 오직 심원한 인식능력과 감별능력을 지닌 사람만이 작품의 심오함을 포착해 낼수 있고 그로인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희열을 느낄수 있을것이다. 동상 695페지   만일 작품전체에 함축적의미가 결여돼 있다면 그것은 마치 로유(老儒)에게 학문이 없는것과 같아서 경우에 따라서는 단 한번의 질문에 밑바닥이 드러나게 되고, 숱한 구절들이 경구가 없다면 그것은 마치도 고대광실에 진귀한 보물이 없는것과 같아서 몇번 묻게 될 경우에는 얼굴색이 질리게 된다. 류협 [문심조룡] 557페지   그가 사용했던 유사한 테마 주제들이 빅토르유고가 아닌 다른 시인의 손에 들어가면 너무 쉽게 교육적인 형태를 취하게 되는데 이는 진정한 시의 가장 큰 적이다. 샤를르 보들레르 [빅토르 위고] [시의 리해] 222페지   사람들은 공리 뻔한 사실의 방아를 찧고 또 찧는다. 그속에 들어갔던것밖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발생적사상을 위해 그 전통을 벗어나는 순간, 시, 지혜, 희망, 미덕, 학식, 일화 그 모든것이 몰려와서 도와준다. R.W.에머슨 [문학적윤리학] [세계명인 대사전] 743페지     시는 의미하지 않고 오직 존재해야 한다. 시의 매체는 말이기 때문에 시는 그의 의미를 통해서만 존재할수 있다... 시는 실용메세지와 다르다. W.K.윔사트 몬로 C.비어즐리 [현대문학비평론] 29페지   아름다운것은 성공적인 직관의 표현이고 추악한것은 그 표현이 성공하지 못한 례라는것이다. 동상동명 32페지   의미의 애매함은 ... 시의 필연적인 구결점인것이다. 우리는 엠프슨과 더불어, 의미의 애매함의 조작은 시의 뿌리의 자체에 있다는것을 되풀이해 말하고자 한다. 제라르 쥬네트 [구조주의와 문학비평] [현대문학비평론] 187페지   문학의 가장 높은 효률성은 독자들의 기대와 , [세계의 모든 기대를 릉가하는] 기대리탈의 놀라움, 독자들 바라고 예견한 [진실임직한것]과 창조의 예측불가능한것, 둘사이의 미묘한 작용에 놓여있다. 하지만 예측불가능자체가, 위대한 작품들의 무한한 충격자체가 그 온 힘으로 진실함의 음밀한 심층에서 반향하는게 아닌가?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한바 있다. [위대한 시인은 창조하는자이기보다는 발견하는자이다.] 제라르 쥬네트 [구조주의와 문학비평] [현대문학비평론] 191페지   한 요소는 기능을 바꾸면서 유지될수도 있고 또한 반대로 제 기능을 다른 요소에 넘겨주고 사라져버릴수도 있다. 동상동명 194페지   문학작품을 이루는 참된 삶은 계속적인 기능의 변화가운데서 나타나는것이다... 유산은 통상아저씨에게서 조카로 전달되며, 발전은 하위갈래를 정통으로 해놓는다. 동상 195페지   한편의 시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물어보는것은 한송의 수선화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질문하는것과 마찬가지로 불필요한것입니다. 세실데이 루이스 [시를 읽는 젊은이들을 위하여] [현대인 교양전서] 제 30권 340페지       예술에 대하여       작품의 예술성여부는, 훨씬 높은 차원의 진동도에 기인하는것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107페지   예술의 기능은 지각의 능력을 만족시켜 그것을, 례컨대, 고정된 분위기라든가 고정된 사상, 인습과 같은 방해물로부터, 그리고 자연의 필연적법칙때문이 아니라 경험자의 우둔성때문에 유도된, 흔하지만 불필요한 경험들의 결과들로부터 해방시키는것이다. 에드라 파운드 [시의 지혜] [시의 리해] 135페지   불가사의란 언제나 아름답고, 그어떤 불가사의도 아름다운것이며, 불가사의가운데는 아름다운것만이 있을따름이다. 앙드레 부르통 [초현실주의의 제1선언] [시의 리해] 249페지   우주적몽상은 우리를 기획의 몽상에서 떼여놓는다. 그것은 우리를 세계속에 자리잡게 하지, 사회속에 자리잡게 하지 않는다. 가스통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 서문] [시의 리해] 302페지   몽상이 우리에게 한 넋의 세계를 보여준다는것, 시적이미지가 자기세계, 자기가 살고자하는 세계, 자기가 살만한 세계를 발견해 낸 한 넋을 증언한다는것을 입증하는것이다. 동상동명 303페지   우주에 대한 몽상가는 책임감이 필요 없는 몽상, 즉 증거를 요구하지 않는 몽상을 알게 된다. 끝으로 우주를 상상한다는것은 몽상의 가장 자연스러운 운명이다. 동상동명 311페지   개인이 학교에서 익힌 모든 습관들을 꿰뚫고 모든 느낌을 초월하여 자기소리의 저 깊숙한 바닥까지 내려갔을 때에야 비로소 그는 예술과 가까운 진정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즉 예술가가 되는것이지요. 이것이 유일한 척도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현대시] [시의 리해] 316페지   예술이란 하나의 방법이며, 목적은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예술이 외계의 모방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이러한 불행한 생각은 언제나 사라지지 않을것입니다. 사실, 그러한 상황이리면, 예술가들이란 , 남자들이 무장을 하러나가는 동안에 프럼프패로 집을 짓거나 알록달록한 유리공의 광채에다 멍청한 미소를 비춰보는 어린애들이거나 백치들과 같을테지요. 동상동명 316-317페지   예술은 부지중에 서둘러 삶과의 밀접하고 필연적인 관련성을 보이려고 애씁니다. 그래서 시대의 가장 눈에 띄는 현상들에 불안스러이 집착하고서, 전쟁을 찬양하고 , 왕을 찬양하여, 심지어는 사소한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당의 리해관계에 봉사하기까지 합니다. 즉 예술이 경향성을 띄게 되는것이지요. 그런데 예술이 바로 이렇게 하여 정당성을 부여받고-터놓고 이야기한다면- 유용성을 부여받기 시작한다면 가장 덜 예술적으로 되어버립니다. 왜냐하면 분노나 갈채의 몸짓으로 시대의 일시적인 의미없는 사건들을 따르는 예술이란 - 그것이 아무리 애국적이라 할지라도- 운을 맞추거나 색을 칠한 저널이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교육적이고 문화적인 가치를 덜부여할수 없지만- 그러나 예술은 아닌것입니다. 노래를 좋아하는 독일에서, 바로 서정시가 이런 교육적이고 문화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현대시] [시의 리해] 317페지   예술이 미를 추구하고 , 단순하게일지라도 그 미를 재현하는것인 점에서, 예술은 미를 (파우스트가 헬레나를 불렀던것처럼) 시간의 심연으로부터 불러낸다. 그러한것은 기술적인 복제속에서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복제 내에서는 미의 자리란 없다) 발터 벤야민 [보들레르에 있어서의 몇개의 모 티브에 관하여] [시의 리해] 366페지     미학에 있어서 체계의 강요만큼 해로운것은 없다. 신중한 현상학적방법이 가장 진척이 빠르다. 한스 애곤 홀투젠 [시문에 나타나는 아름다운 진실] [시의 리해] 378페지   예술가는 현실의 어느 한 요소도 자신이 발견한 그대로는 사용할수 없다. 쉴러 [현대문학비평론] 99페지   현실과의 불일치는 가상의 모습을 띠고있지만, 그러한 가상은 예술의 본질에 속하는 필수가결한 가상이다. 게오르기 루카치 [예술과 객관적 진리] [현대문학비평론] 104페지   예술작품의 완결성이란 운동과 역동성 상관관계속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과정의 반영이다. 동상동명 105페지   사진복사적인 삶의 디테일의 예술적진리는 순전히 우연적이고, 자의적이며 주관적인것이다... 그것은 객관적필요성이라는 심오한 문제를 지나치거나 객관적필연성의 존재마저 부인하는것이 된다. 가오르그 루카치 [예술과 객관적 진리] [현대문학비평론] 111페지   천재는 번쩍거리는 오류들을 주위에 흩뿌린다. 자신의 리념의 독수리 날개짓에 압도되여 천재는 어떠한 리성도 진입할수 없는 성곽들을 건설하며, 그의 창작품들은 시와 마찬가지로 그가 사랑하는 자유로운 결합으로써 나온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41페지   예술적충동은 일그러진 낯선 세계의 얼굴을 남긴다. 그것은 강제적행위이고 , 랭보의 말을 빌리면 잔인한 행위이다. 동상 48페지   끔직한것이 예술적으로 표현되여 아름다움이 되고, 고뇌가 박자와 운률을 얻어 정신을 고요한 기쁨으로 가득 채우는것은 예술이 가진 엄청난 특권가운데 하나이다. 동상 52페지   예술은 아름다움에 대한 일종의 자동기억법이다. 그런데 정확한 모사는 기억력을 손상시킨다. 동상 72페지   근대적개념에 따른 순수한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주체와 객체를, 그리고 예술가의 외적세계와 예술가자신을 동시에 내포하는 암시적인 마술을 창조하는것이다. 보들레르 [꿈꾸는 알바트로스] 123페지   철학적으로 명료해지기를 원할수록, 예술은 더욱 질이 떨어지고 유유한 상형문자로 거슬러 올라갈것이다. 반대로 한층 교육계로부터 멀어질수록, 예술은 한층 순수하고 초연한 아름다움을 향하여 상승할것이다. 동상 129페지   예술가는 자기자신에게만 귀속되여 있다... 예술가는 자식이 없다. 동상   작품을 제작할 때 선명성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꿈의 언어를 아주 명료하게 표현하기 위함이다. 동상   의혹 또는 신념과 소박함의 결핍은 이 시대의 독특한 결함이다... 소박함이란 기법에 있어서 기질이 집행한다는것으로, 거이 모든 이들이 상실한 신의 특혜인것이다. 동상 130페지   나는 무를 발견한후에야 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말라르메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154페지   우리 예술가는 모두가 나름대로의 표현형식을 취한다는 결단을 내려야 하는 사명을 띠고있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젊은 시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112페지   자유시는 자유를 웨치는 함성이지만 예술가는 자유가 없습니다... 이는 예술가의 언어재료를 조직하는데서 예술가의 내면적책임을 강조하고 있는것인데, 언어재료를 구성하는것은 - 많은 증거에 의하면- 률격적인 기본틀의 뒷받침이 없다면 상당히 힘든 법이다. 벤야민 흐루쇼브스키 [현대시의 자유률] [현대시의 리래] 115페지   항상 사색의 칼날을 방금 갈아놓은것처럼 유지해야 한다. 류협 [문심조룡] 595페지   예술은 세계를 뒤바꾸는 격렬한 반전(反轉)이며, 영원한것에 귀환하는것에 지나지 않는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97페지   예술속에 몰입하면 할수록 , 보다 촉박한것, 불가사이한것을 성취할 책임을 느끼게 된다는것이 예술의 무서운 점입니다. 동상 102페지   예술은 대상을 초월한 미묘한 전진이며 자연속의 모든것이 나타내고있는 [존재]라고 하는 기대의 차분하고 , 보다 고차원의 실현인것입니다. 동상 110페지   예술가는 모델보다 더 나은것을 그리지 않으면 안된다. 아리스토 텔레스 [시학] 156페지   예술의 특정한 발전기는 결코 사회일반적인 발전과는 직접적인 관계에 있지 않다. -맑스 [현대문학비평론] 124페지   예술은 예술작품이 현실로서 인정될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레닌 [현대문학비평론] 109페지   예술작품들이 보다 높은 차원의 질서를 갖게 되는것은, 예술이 현실세계와 분리되였기 때문이고 또 전체와 부분의 관계를 자신의 필요성에 따라 다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 [예술과 사회의 관계] [현대문학비평론] 145페지   예술작품이란 생생히 살아있는 그자체의 고유한 삶을 가지고있다는 점에 류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삶의 특성이란, 그것이 인간이나 자연이 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말을 한다는 점에 있다. 동상동명 145페지   예술작품이 외부세계와 소통한다는것은 실제로는 의사소통을 하지 않기때문에 가능하다고 할수 있는데, 왜냐하면 예술은 행복해서 그렇듯 아니면 불행해서 그렇듯 간에 외부세계로부터 자신을 차단시키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예술작품이란 현실과 차단되고 현실로부터 굴절된것이라고 할수 있다. 동상동명 146페지   예술적처리방식의 발전은 사회적발전과 맞아떨어진다는 주장은 나름의 론리가 없는것이다. 동명동상 147페지   모든 예술작품은 하나의 순간이다. 동명동상 149페지   일반체험과는 다른 예술의 측면을 함께 느껴야만이, 우리는 재료의 굴레에서 벗어날수 있고, 또 무차별적으로 현실세계에 빠져드는 경향으로부터 예술 그자체의 존재를 구제할수가 있는것이다. 동명동상 149페지   예술에서의 비현실적인 모멘트나 비존재적인 모멘트는 존재와 무관한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대로 설정된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유롭게 창안된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존재의 여러요소의 상호배합에 의해서 생겨난 일종 구조주의이다. 그리고 존재의 여러 요소사이의 이러한 배합은 스스로 현실적존재의 불완전성과 곤궁함, 현실적존재의 모순과 잠재 가능성을 지니고있다. 동상동명 151페지     심미적기법은 감정의 의식적객관화이며, 그중의 한 본질적부분에 비평적계기라고 말한다. 예술가는 객관화가 적절하지 못할 때 그것을 수정한다. W.K.윔사트 몬로 C. 비어즐리 [의도론의 오류] [현대문학비평론] 35페지   예술적인것이란 작가에 의하여 창작된 텍스트를 말하며, 미적인것이란 독자에 의해 이루어진 구체적실현을 일컫는다. 볼프강 이제르[독서과정: 현상학적접근] [현대문학비평론] 454페지   예술은 주관적 경험을 객관화하고 자연계의 외부적 경험을 주관화한다 S.K. 랭거 [예술이란 무엇인가] [현대인 교양전서] 제 29권 288페지           이미지에 대하여   시는 항상 사물과 사물을 비교하고있습니다. 세실데이 루이스 [시를 읽는 젊은이들을 위하여] [현대인 교양전서] 제 30권 279페지   이미지라는것은 독자의 상상력에 호소하는 것으로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묘사된 언어의 그림을 말하는것입니다. 세실데이 루이스 [시를 읽는 젊은이들을 위하여] [현대인 교양전서] 제30권 285페지     시적이미지의 고유한 기능은 우리에게 갈등하는것으로 보이고 바꿀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이얼리티를 하나의 통일체로 변용시키는것이다. 옥타비오 빠스 [시와 력사]에서 [시의 리해] 113페지   [이미지]는 일순간에 지적이고 정서적인 복합체를 나타내는것이다... 그러한 복합체는 순간적으로 드러냄은 갑작스런 해방의 의식, 시간적한계와 공간적한계로부터의 해방의식, 그리고 우리가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앞에서 경험하는 갑작스런 성장의식을 고취시킨다. 많은 양식의 작품을 내놓는것보다 일생에 거쳐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하는것이 낫다. 에즈라 파운드 [이미지즘] [시의 리해] 138페지   피에르 르베르디가 이런 말을 쓰고있다. 이미지란 순수한 정신적창조물이다.   이미지는 어떤 비유에 의해서 태여나는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멀리 떨어져있는 두가지 현실을 접근시키는데서 태여난다.   접근된 두가지 현실의 상호관계가 멀면서도 적절한것일수록 , 이미지는 더욱 강력한것이 될수 있고, 보다 더 강력한 감동력과 시적인 현실성을 얻게 될것이다... 문외한들에게는 수수께끼같아 보이겠지만 이 말은 대단히 강력한 시사성을 지니고있어 , 나는 이 말을 오래동안 숙고해 보았다. 앙드레 부르통 [초현실주의 제1선언] [시의 리해] 253페지   우리는 새로운 시적이미지와, 무의식밑바닥에서 잠자고있는 원형사이와의 관계에 언급할 때에라도, 우리는 그 관계가 엄밀히 말해 인과관계가 아니라는것을 리해시키도록 해야 하게 될것이다. 시적이미지는 충동적인 힘에 예속되여있는게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메아리가 아닌것이다. 사정은 차라리 그 역이다. 이미지의 번쩍임에 의해 먼 과거가 메이리로 울리고있는것이며, 그리고 그 메아리들이 얼마만큼의 길이에까지 반향하며 사라지게 되는지 우리는 거이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의 새로움과 그의 약동속에서 시적이미지는 그 자체의 존재와 그 자체의 힘을 가진다. 그것은 직접적인 존재론에 속하는것이며, 우리가 지금 연구의 노력을 기울이려 하는것은 바로 그 존재론에 대해서이다... 이미지가 인과관계를 벗어난다고 말하는것은 아마도 그나름의 중대성을 가지는 선언일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시적이미지의 현상학] [시의 리해] 280페지   시적이미지란 사실 본질적으로 변용적인것이다. 그것은 개념처럼 구성적인것이 아니다... 이미지는 그의 단순성가운데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미지란 사상에 앞서는것이란것을 정확히 밝히기위해서는 , 시란 정신의 현상학이 아니라 차라리 령혼의 현상학이라 말해야 할것이다. 동상동명 282페지   현상학적인 두 자매어 방향과 울림의 차이는 뚜렷해야 한다... 울림은 말하자면 존재의 전환을 이룩한다... 한 시작품의 표면적인 풍요로움과 내면적인 깊이는 언제나 자매적인 방향과 울림의 현상이다... 그의 새로움으로써 시적이미지는 전 언어활동을 흔들어 시작되게 한다... 그것은 우리자신의 언어의 새로운 존재가 되게 하고, 우리를 그것이 표현하는것으로 만듬으로써 우리자신을 표현하는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표현의 생성인 동시에 우리 존재의 생성이기도 하다. 이 경우 표현이 바로 존재를 창조하는것이다. 동상동명 285-286페지   위대한 시행은 그것이 속하는 언어의 령혼에 큰 영향을 줄수있는것이다. 그것은 잊혀진 이미지들을 다시 일깨워놓는다. 그리고 동시에 말의 예측불가능을 認可한다. 말을 예측불가능한것으로 한다는것, 그것은 바로 자유를 닦는게 아니겠는가! 시적상상력은 표현에 대한 검열을 무시해 버리는데 얼마나 큰 매력을 느끼는가! 동상동명 290페지   시행은 언제나 움직임을 가지며, 이미지는 시행의 선속에 살며시 끼여들어 상상력을 끌고 간다. 동상   언어위에, 통상적인 언어위로, 떠올라나타나는 이미지가 시의 의식을 남김없이 삼켜버리기 때문에, 시적이미지와 더불어 시적의식이 너무나 새로운 언어를 말하기 때문에, 인젠 과거와 현재의 상관관계를 살펴본다는것이 유용할수 없는것이다. 동상동명 292페지   시에 있어서 비지식은 하나의 근본적인 조건이다. (비지식이란 무지가 아니라 초월이라는 어려운 행위)... 이미지의 삶은 전적으로 그의 번개같은 치솟음속에, 이미지가 감수성의 모든 여건의 초월이라는 그 사실속에 있는것이다. 동상동명 295페지   이미지의 효능속에서 살아나는 추억들은 우리의 삶을 어느 순간에는, 특히 나이들었을 때는, 복잡한 몽상의 원천이며 자료이다. 기억은 꿈을 꾸며 몽상은 추억한다. 가스통 바슐라를 ([몽상의 미학]서문) [시의 리해] 307페지   이미지계기의 네단계는 다음과 같다.   1. 그것은 근본적현실의 반영이다. 2. 그것은 근본적현실을 감추고 도착한다. 3. 그것은 근본적현실의 부재를 감춘다. 4. 그것은 어떠한 현실에도 관계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자체의 모형이다.   첫번째경우, 이미지는 좋은 나타남이다. 표상은 성사(聖事)의 성격을 갖는다. 둘째번경우, 이미지는 나쁜 나타남이고 악사(惡事)의 성격을 갖는다. 세번째경우, 그것은 나타남의 놀이를 한다. 그리하여 요술의 성격을 갖는다. 네번째, 그것은 나타남의 세계에 속하지 않게 되고 시물레이션(흉내내기)의 령역에 속한다. 무엇을 거짓 감추는 기호로부터, 아무것도 없다는것을 거짓 감추는 기호에로의 변화는 결정적인 전환점을 이룬다. 장 보드리야르 [모양과 모양 만들기] [현대문학비평론] 546-547페지   모양의 흉내는 진리를 감추지 아니한다. 진리가 없다는것을 감추는것은 진리이다. 흉내낸 모양이 곧 진리이다. 동상 541페지   너의 노래로부터 현실을 추방하라. 그것은 비천한것이다... 시작품은 존재하지 않는 사물에 대한 말을 만들어내는것이다. -말라르메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164페지   가능하지만 믿어지지 않는것보다는 불가능하지만 있음직한것을 택하는 편이 좋다. 아리스토 텔레스 [시학] 144페지   이미지는 일종 의식이다. 싸르트르 [상상심리학] 22페지   걸상의 이미지가 걸상이 아니고 걸상일수도 없는것이다. 동상 24페지   지각에서의 인식은 서서히 형성되지만 이미지에서의 인식은 순간적이다. 동상 28페지   이미지의 대상이 최초에는 사물들의 세계속에서 형성된다고 가설되지만 이 과정이 지나가면 이미지는 이 세계를 떠난다. 동상 33페지   이미지는 일종 신앙이라고도 할수 있고, 가정적활동이라고도 할수 있다. 이 활동은 네가지 형식만 있을뿐 다른것은 있을수 없다. 그것은 대상이 존재하지 않거나 현장에 있다고 할수 없다. 그것은 자기속에 있는것으로서 대상이 존재한다고도 가정할수 없다. 싸르트르 [상상심리학] 33페지   그러나 직관은 인과성의 인식에 의하여 매개된다는 리유로서, 객관과 주관의 사이에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있다고 하는 엄청난 오해를 하여서는 안된다. 쇼펜하우 훗살 [세계사상대사전] 제 17권 84페지   직관은 오성에 의해서만이 또 오성에 의해서만이 존재한다. 동상 95페지   은유는 일종 지름길입니다. 세실데이 루이스 [시를 읽는 젊은이들을 위하여] [현대인 교양전서] 제 30권 282페지         기교에 대하여     시의 기술은 사고에 본질적인것, 이 역동적인 분자들, 또는 이런 말이 가능하다면, 이 라듐을 낱말들의 멜로디(듣는 이의 정서를 낱말들의 의미와 가장 일치하게끔 해주는)와 결합시키는데, 그것들을 형식(지(知)를 가장 즐겁게 해주는)과 결합시키는것이다. 내가 말하는 멜로디란 강세의 변형을 포함한 음질의 변형을 의미한다. 에즈라 파운드 [시의 지혜] [시의 리해] 136페지   무엇을 드러내지 않는 , 불필요한 낱말이나 형용사를 쓰지 말것, [어렴풋한 평화의 땅]과 같은 표현은 쓰지 말아라. 그런것은 이미지를 둔화시킨다. ... 아무런 장식도 쓰지 말거나 아니면 훌륭한 장식만 쓸것. 에즈라 파운드 [이미지즘] [시의 리해] 139페지   묘사적이 되려고 하지 말라... 쉐익스피어가 [가랑잎빛갈의 오후를 걸친 새벽]이라고 말할 땐, 그는 화가가 제시하지 못한것을 나타내려는것이다. 그의 이행에는 묘사라고 부를수 있는것은 없다-그는 나타내려한다. 동상동명 140페지   기억은 재생산의 힘을 필요로 하고, 앞을 내다보는 일은 창조의 힘, 즉 예상의 힘을 필요로 한다. 동상동명 163페지   인간은 세계를 파악하기 위해서 형식들을 창조한다. 심지어 지각행위조차도 아주 복잡한 경로를 통한 형식의 창조이다. 클리언스 부르스크 [말하는 방법으로서의 시] [시의 리해] 171페지   의미와 시 사이의 가장 확실한것은 은유이다. 동명동상 174페지   은어와 은유를 통해서 하나의 언어는 끊임 없이 그자체를 젊게 한다. 동상동명 175페지   시의 목소리는 필경 하나의 창조이지 자연적이고 자발적인 분출이 아니다. 쿨리언스 부르스크 [말하는 한방법으로서의 시] [시의 리해] 187페지   형식은 내용의 확장에 다름 아니다. 찰스올슨 [추진적임][진동적임][전망적임] [시의 리해] 190페지   어느 시에서건 언제나, 언제나 한지각은 [보다 다른 지각으로 움직여야만] 한다 한다 한다! 동상 동명 191페지   자신이 만들어낸 사물이 자연히 다른 사물들과 나란히 자리잡도록 하기에 충분한 정도의 진지성을 부여하는 일이다. 이는 쉽지 않다. 동상동명 197페지   나로서는 오래동안 무속에 깊숙이 내려가 본 경험이 있어 단언하지만 [그 밑에는] 오직 아름다움이 있을뿐이요. -그리고 아름다움의 완벽한 표현은 하나밖에 없소, 시뿐이요. 스테판 말라르메 [서한] [시의 리해] 235페지   몇개의 발성으로, 마치 주문(呪文)과도 같이 세속언어와는 별개의 새롭고 온전한 어휘를 재창조하는 싯귀는 말의 완전한 독립을 이룩한다. 스테판 말라르메 [언어론 서문] [시의 리해] 237페지   겉으로 모순되는 꿈과 현실이라는 두가지 상태가 언젠가는 일종의 절대현실, 말하자면 초현실로 해결될것임을 나는 믿는다. 내가 나가는것은 바로 이와 같은 초현실의 정복을 위해서이다. 앙드레 부르통 [초현실주의 제1선언] [시의 리해] 252페지   형식을 골똘히 생각하게 된다는것이, 기이하고 낯선 느낌을 주는 형식들을 만들어내게 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현대시] [시의 리해] 324페지   새로운 형식이란 단지 발견될수 있을뿐이지 모색될수 있는것은 아니다. 동상동명 325페지   [나는 작품자체보다 작품의 형상화나 완성에 훨씬 큰 흥미를 갖고있음을 고백합니다] 라고. 이것이 하나의 현대적특징이라는 점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트프리트 벤 [서정시의 제문제] [시의 리해] 328페지   형식이 바로 시입니다... 형식은 존재이며, 예술가의 실존적 당부이며 그 목적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슈타이거의 [형식은 최고의 내용]이란 말은 제대로 파악할수 있겠습니다. 동상동명 336페지   내면적방랑이란 시를 창출해낼수 있는 예술이 곧 현실적방랑과 변화이며 그효과는 수세대에 의해 계속되면서 이미 리해된것, 정지된것에서 보다, 자극하는것, 매혹하는것에서 훨씬 더 바람직스러운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됩니다. 동상동명 337페지   시인은 우연히 침입, 가능한 방해요소들에 맞서서 자신의 시를 밀페시켜야 합니다. 동상동명 339페지   매혹을 불러일으키는 형식속에는 정열, 자연, 그리고 비극적체험의 본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있습니다. 고트프리트 벤 [서정시의 제문제] [시의 리해] 340페지     우리 질서는 정신이며, 그 법칙은 표현, 각인, 문체라는것입니다. 다른것은 몰락입니다. 추상적인지, 조률이 없는지, 초현실적인지, 그것은 형식의 법칙이며 우리를 초월하는 표현창조의 필요성입니다. 동상동명 340페지   시문은 철학적 혹은 학문적판단속에서나 종교적인 신앙원칙들속에서 표현될수 있는것이 아니고 [아름다운 운률적창조]속에서만이 표현될수 있는 독특한 성향의 인식능력으로 리해되고있다. 한스에곤 홀투젠 [시문에 나타나는 아름다움과 진실] [시의 리해] 371페지   어떤 특정의 개념에 따라 운률적 음성적 배렬, 즉 [의미]가 불확실하면 불확실할수록 그 체험가치가 더욱더 확실한 감각과 직관의 억양이 시속에 환기되여야 한다. 동명동상 373페지   기법은 작가가 자기 주제를 발견, 탐색하여 발전시키고, 그 의미를 전달하며, 최종적으로 그것을 평가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따라서 어떤 기법은 다른 기법보다 더 예리한 도구로서 더 많은 주제를 발견할수 있고, 자기 주제를 기법상으로 엄격히 살필수 있는 작가가 가장 만족스러운 내용을 가진 작품, 가장 알차고 울림이 큰 작품, 반향을 일으킬수 있는 작품, 최대의 의미를 지닌 작품을 창작할수 있다는 확실한 결론이 나온다. 마크 쇼러 [기법으로서의 발견] [현대문학비평론] 49페지   기법만이 예술의 소재를 객관화한다. 따라서 기법만이 소재들을 평가할수 있다. 이것은 자명한 공리이다. 동상동명 56페지   내용이란 형식이 내용으로 전화된것에 다름 아니고, 형식 또한 내용의 형식으로 전화된것에 다름 아니다. -헤겔 [현대문학비평론] 113페지     형식이란 내용을 가장 집중적으로 응부하는 방식이고 내용의 최고도의 추상이며, 또 내용의 제규정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것이다. 형식이란 또한 개별적 제 규정사이에 적절한 비률을 만들어내는것이자, 예술작품이 반영하고있는 삶의 개별적모순들 사이의 중요도를 자리매김하는것이다. 게오르그 루카치 [예술과 객관적 진리] [현대문학비평론] 118페지   상징의 원천은 무의식속에 존재한다. 이봉 벨라발[정신분석학과 문학비평]서문 [현대문학비평론] 369페지   새롭다는것은 미적범주만이 아니다. 새로운것은 혁신, 놀라움, 릉가, 재편성, 혹은 소리와 같은 형식주의리론이 전적으로 그 의미를 부여했던 그러한 요소들을 통해 등장하는것이다. 새로운것은 또한 력사적범주가 되기도 한다. 한스 로버트 야우스 [문학리론에 대한 도전으로서의 문학사] [현대문학비평론] 433페지   만일 환상의 형성이 없다면, 친숙하지 못한 텍스트의 세계는 낯선채로 남게 된다. 환상을 통해서 텍스트에 의해 제공된 경험은 우리가 가까이 하기 쉬우니, 그 까닭은 그것이 다만 환상이기 때문이다. 볼프강 이제르 [독서과정; 현상학적 접근] [현대문학 비평론] 467페지   형식주의는 모든것을 흡수하는 전제적시신(詩神)으로 보인다. 폴드만 [기호학과 수사학] [현대문학비평론] 523페지   현대리론가들의 기본개념인 기습, 낯설게 함이 보조를 마춘다. 기습적으로 경악시키려는 자는 무엇보다도 비정상적인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31페지   문학의 핵심적인 두자질은 초자연주의와 반어법이다. 보들레르 [꿈꾸는 알바트로스] 103페지   령감이 나날의 노력과 자매지간임은 분명한 일이다. 동상   언제나 시인이 되라 산문을 쓸 때 조차도 동상   명사는 실제의 위엄성을 띠고, 형용사는 맑고 연한 덧칠처럼 명사를 덮고 단장하는 투명한 의상이 있고, 률동의 천사인 동사는 문장에 자극을 준다. 동상 121페지   주도적기법중의 하나는 한 단어의 의미에다가 그 가까이에 있는 단어의 의미를 섞어넣는것이다. 그가(말라르메) 강력적으로 선언한바에 의하면 단어들은 그 상호교체적인 투영에 의해서 빛을 발한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156페지   시작품과 그 영향의 알맹이는 그 기법에 있다. 에너지들은 거이 전적으로 문체에 집중된다. 문체는 언어를 통한 실행으로써 현실과 규범에 대한 거대한 변형을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낸다. 동상 198페지   은유는 인간이 소유한 가장 위대한 힘이다. 그것은 마술에 접근한것이며, 신이 그 피조물속에 잊어버리고 내버려둔 창조의 도구같은것이다. 마치 산만한 외과 의사가 수술환자의 몸속에 내버려둔 기구와 마찬가지로. 동상 270페지   문학행위에서 도식주의가 차지할 자리란 없다. 얀 무카로브스키 [시란 무엇인가] [현대시리론] 25페지   작가가 기교를 장악하여 작품을 다루는것은 바둑명수가 바둑두는 기술을 정통하고있는것에 비유할수 있다. 기교를 포기하고 주관적인 생각에만 따르는것은 마치 도박군이 놀음에서 요행수만 바라는것과도 같다고 할수 있다. 만약 도박군처럼 창작에 림한다면 우연적인 요행수에 의존하여 앞에서 한두번은 성공할수 있겠지만 그 성공을 뒤에서도 계속 지속시킬수는 없는것이다. 류협 [문심조룡] 617페지   문학의 사상에는 정해진 규범이 있을지 모르나 창작원리는 언제나 변함이 없는것이라네. 동상 621페지   비유의 수법에 있어서 비유의 대상이 언제나 일정하지 않다. 비유된 두 사물이 비록 북방의 호인이나 남방의 월인만큼이나 서로 관련이 없더라도 그것들 일단 합쳐지면 간과 슬개처럼 가깝게 된다네... 기흥은 외부의 형상을 묘사하여 그 뜻을 뽑아오므로 말의 사용은 반드시 과감하게 해야 한다... 다양한 종류의 비와 흥의 사물들을 노래속에 모아놓으니 문학적언어는 강물의 흐름처럼 생동하도다. 동상 509페지   호랑이나 표범의 가죽에 무늬가 없다면 그것은 개나 고양이의 가죽과 다르지 않을것이며, 코뿔소의 가죽으로 갑옷을 만들려면 거기에 붉은색을 올려야만 한다. 이는 내용이란 형식을 필요로 한다는것을 보여준다. 동상 437페지   정리는 문학작품의 날실이며, 언어적표현은 씨실이다. 날실이 올바르게 배렬되여야 비로소 씨실이 제대로 오가면서 천을 짤수 있듯이, 정리가 확정된 다음에라야 비로소 문장이 류통해질수 있다. 이것이 바로 작품구성이 기본이 되는것이다. 동상 443페지   문학작품들 가운데 정화라 곱힐만한 명작들에는 은隱 과 秀가 있기마련이다. 은이란 글밖에 함축된 말밖의 뜻을 가리키며, 수란 작품안에서 가장 두드러진 말을 가리킨다. 은은 문면에 드러나지 않는 의미의 복잡함과 미묘함을 통해 그 섬세함을 획득하고, 수는 한 작품안에서 여타 다른 부분들과 비교되는 특출함을 통해 그 아름다움을 획득한다. 동상 551페지   은의 특징은 글밖에 뜻을 갖고있다는것이다. 그것은 마치 은밀한 음향이 옆에서 들려오는것과 같고, 숨겨진 문채가 어둠속에서 반짝이는것과 같은데 이는 효상의 변화가 호체안에 포함돼 있는것에 비유될수 있고, 흐르는 강물속에 주옥이 숨겨져있는것에 비유될수 있다. 즉 호체안에서 호상의 변화가 사상 (四象은 사물의 음, 양, 강, 유를 표시)을 이루고, 주옥은 강물속에 깊이 감추어져있기에 물결이 여러가지 변화를 일으키는것과 같다. 동상 553페지   작품속에서 갑자기 일어나는 물결을 수라고 한다. 그것은 민첩하고 교묘한 손이 아름다운 악곡을 연주하며 표일한 자태가 밖으로 드러나고, 또 먼산에 구름과 노을이 피여오르고, 미녀들이 예쁜 용모를 드러내는것에 비유될수 있다. 동상 555페지   자기자신의 내면으로 깊숙이 들어갈것, 그리고 제마음의 한가운데 던져진 과제를 순간에 완성할것, 오직 이것뿐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시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106페지   표현은 사상의 의복이며, 잘 어울리면 더욱 고상하게 보인다. 포우 [비판론] [세계명언대사전] 743페지   첫번째이자 가장 중요한것은 ... 위대한 구상능력이요, 두 번째는 강력하고도 열광적인 감정이요. 롱기누스 [숭고에 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285페지     오직 한가지 주의점만 명심해 두어야 한다. 시인의 목표는 창작행위순간에, 즉 시의 기법자체에 의해서 판단되여야 한다. W.K.윔사트 C.비어즐리 [현대문학비평론] 29페지     기이성, 이것은 모든 아름다움의 필수불가결한 조미료이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기이하다..의도성이 없는 순진하고 무의식적인 약간의 기이성을 품고있고, 바로 그 기이성이 그것을 유난히도 아름답게 한다는것이다 보들레르 [꿈꾸는 알바트로스] 50-51페지     시적 엄밀성이란 다름 아닌 새로운 언어관용, 새로운 낱말들, 비정상적인 은유들을 추구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몽롱하게 되는것이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235페지     비평에 대하여     그들자신이 주목할만한 작품을 쓰지 못하는 이들의 비평엔 귀를 기울이지 말아라. 에즈라 파운드 [이미지즘] [시의 리해] 139페지   문학비평가들이란 모두 이 시적이미지의 예측불가능성에 대해 충분히 명확한 의식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데, 바로 이 예측불가능이야 말로 통상적인 심리적설명안을 뒤엎어버리는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시적이미지의 현상학] [시의 리해] 293페지   문학사회학으로서의 문학비평은 그 대상에 눈이 멀어져서 오직 그것의 외적인 면만을 인지할뿐이요, 다루는 작품의 질에 대해서는 다루는 일이 행해지기도 전에 이미 그 범주들의 선택으로써 그 질의 판단을 포기해 버리는것이다. 한스 마그누스 엔 스버르거 [시와 정치] [시의 리해] 385페지   (브레히트 시 [바퀴갈기]를 례로들면서) 시는 정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이 시는 정치가 그것을 마음대로 할수 없다는것을 모범적으로 말해주고있나니, 그것이 이 시의 정치적내용이다. (바퀴갈기 /브레히트 나는 길가의 비탈에 앉아있다/ 운전사가 바퀴를 갈아끼운다/나는 내가 떠나온 곳이 싫다/나는 내가 가고있는 곳이 싫다/어찌하여 나는 바퀴를 갈고있는것을/초조하게 보고있는가 ) 동상동명 390페지   시와 정치는 사물령역이 아니라 력사적과정인것이다. 하나는 언어를 매개물로 한 과정이요, 다른 하나는 권력을 매개물로 한 과정이다. 동상동명 391페지   상황에 따라서 어떤 텍스트도 그것이 (차라리) 관상물로 받아들여지는가 또는 (차라리) 전언으로 받아들여지는가에 따라 문학일수도 있고 문학이 아닐수도 있게 된다. 제라르 쥬네트 [구조주의와 문학비평] [현대문학비평론] 176페지   비평이 그의 구조주의적인 소명을 뚜렷이 드러내여 구조적인 방법을 확립하도록 요청되여있지 않는가하는것이다. 동상동명 129페지   비평이 전적인 독자성을 가질 때 그것은 존재리유를 잃어버린것이고, 그와 똑같이, 그것이 일상적언어에 예속될 때에 그것은 어떤 불모상태에 떨어질것이다. 츠베탕 토도로브 [어떻게 읽을것인가] [현대문학비평론] 247페지   우리 세기는 시학의 연구가 러시아형식주의 , 독일의 형태학파, 잉글로잭슨의 신비성, 프랑스의 구조적연구(나타난 순서로) 등등 몇몇 비평의 류파에 결부되여 새롭게 나타남을 보았다. 위의 비평의 류파들은 (그들사이의 차이가 어떠할지라도) 그것들의 텍스트의 의미를 규명하려는게 아니라 그 구성요소들을 묘사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일체의 다른 비평의 경향이 위치하고있는 차원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에 놓여있다. 츠베탕 토도로브 [어떻게 읽을것인가]   만약 문학연구가 과학이 되려고 한다면 방식을 그 유일한 주역인물로 인정해야 할것이다. 즉 문학적언술의 작용태를 묘사하는 개념들로써 이루어질것이다. -야콥슨 [현대문학비평론] 236페지   시학의 대상은 개별적인 작품들로서 보다는 훨씬 더 문학의 방식들, 새로운 텍스트는 그것을 산출한 조합률 자체를 변모시키며, 규칙들의 적용순서만을 변화시킬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성격마저 변화시키는것이다... 이에 대한 유일한 례외는 [대중문학]이라고 부르는것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은 그앞서 이미 발현되였던 그대로의 그들 장르에서 출발하여 전적으로 연역될수 있는것이다. 작품이 그것을 산출시키는 체계를 어떻게 변형시키는지를 묘사한 수단을 가지지 못함으로써 , 묘사는 모든 문학이 [대중문학]에 속한다고 암암리에 주장하는 셈이다... 실제에 있어서 한 시작품의 묘사는 텍스트의 체계를 공간적인 조직의 형태로써 나타내보이는 도해로 귀결되게 된다. 츠베탕 토도로브[어떻게 읽을것인가] [현대문학비평론] 240-241페지   상황을 변화시키는 모티브는 역동적모티브라 불리고, 변화시키지 않는 모티브들은 정태적모키브라 불린다. -토마체프스키 [현대문학비평론] 252페지   계몽주의 기본적인 선입견은 계몽주의 선입견자체에 반대하는 선입견인것이다. 이는 계몽주의가 지닌 힘으로부터 전통을 빼앗는것이다. 한스 게오르그 가다미 [진리와 방법] [현대문학비평론] 307페지   해석의 본질은 하나의 기호체계(줄여서 말하면 텍스트)로부터 눈에 보이는것 이상의것을 읽어내는것이다. E.D.허쉬 [해석학의 세차원] [현대문학비평론] 328페지   해석의 기준은 리론에서 나오는것이 아니며, 리론은 우리가 이미 선호하는 해석의 기준을 사후에 체계화시키는것이라고 본다. 동상동명 329페지   십삼년전 (1934년) 지난번의 대회에서 나는 거울의 단계라는 개념을 제기했다. 자끄라깡 [[나][Je]의 기능형체로서의 거울의 단계] [현대문학비평론] 349페지   어떤 천재의 출현은 늘 지배적인 규범을 깨뜨리고, 그때까지 종속되여있는 과정이나 진행에 힘을 부여하는 문학적혁명과도 같다. [현대문학비평론]주해 446페지   문학사회학에 관한 흥미가 정당화될수 있는 중요한 방식에는 두가지가 있다. 정당화의 첫번째 형태는 (이 말의 형식론적의미에서) 이얼리스트의 그것이다... 둘째 형태는 실용주의자의 그것이다... 사회적인 요인을 강조하는것은 특수한 정치립장에서는 유용하며 소망스러운것이다... 사회산물이라는것은 너무나 태평스럽게 광범위한 범주로 보인다. ‘경제산물’이란것이 꼼짝 못하게 협착한 범주이듯이 말이다. 테리 이글턴 [문학사회학: 두접근] [현대문학비평론] 596페지   ‘사회학적’비평가는 력사와 문학 량쪽 모두에 대해서 실용주의자가 될수 있고, 력사에 대해서는 리얼리스트이지만 문학에 관해서는 실용주의자가 될수 있고, 량쪽 모두에 대해서는 리얼리스트가 될수 있다. 동상동명 597페지   정치를 위해 인식론을 포기한다는것은 소망스럽지 못한것이 아니라 불가능하다. 정치적관심자의 진술은 언제나 은밀한 현실리론이다. 동상동명 598페지   20세기 유럽시로 통하는 안락한 길은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수수께끼와 모호함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놀라울 정도로 생산적이다. 후기 릴케와 크라클에서 코트프리트 벤에 이르는 독일시인들 , 아폴리네르에서 생종페르스에 이르는 프랑스시인들, 가르시아 로르까에서 기엔에 이르는 스페인 시인들, 팔라체스키에서 운가레티에 이르는 이딸리아의 시인들, 예이츠에서 엘리엇까지 이르는 영국시인들, 이들의 작품의 중요성은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27페지   19세기전환기에 이르기까지, 부분적으로 그후에 이르기까지 문학은 사회의 공명상자였으며, 일정한 소재나 상황에 대한 리념적인 형성, 그리고 악마적인것을 표현함으로써 얻게 되는 효과적인 안으로서 기대되였다. 동상 33페지   시는 여타 문학과 반대립장을 취하면서 준엄한 상상력, 무의식으로 확대된 내면성 그리고 공허한 초월성과의 유희가 부여해주었던 모든것을 무제한으로 가차없이 말하는 자유를 자기것으로 하였다. 동상 34페지   독일, 프랑스, 스페인, 영국에서 간행된 현대시에 관한 글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핵심어들을 추려볼수 있다... 방향성상실, 익숙함의 해체, 상실된 질서, 불일치, 파편주의, 전도가능성, 라렬문체, 탈시화 (脫詩化)된 시, 파괴의 섬광, 단절적인 형상, 야수적인 돌발성, 탈구, 나시적관점, 낯설기하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스페인시인(다마소알롱소)의 명제인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예술을 부정적인 개념들로써 명명하는것외에는 달리 다른 보조적수단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1932년에 씌여진것인데 1955년에도 변함없이 적합한 견해로서 반복될수 있었다. 동상 36페지     그로데스크는 미술용어중의 하나였으며... 이제는 모든 령역에 걸쳐 기괴한것, 익살스러운것, 뒤틀린것, 그리고 비범한것을 포괄하게 되었다. 동상 49페지   불협화의 미, 심정을 시의 주제로부터 배제시킴, 비규범적의식상태, 공허한 리상성, 탈사물화, 언어의 마술적인 힘과 절대적인 상상력에서 생겨나서 수확의 추상성과 음악의 곡선에 접근하고있는 비밀성, 이것들에 의해서 보들레르는 미래의 시에서 실현될 가능성을 예비하였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79페지   좀 기형이 아닌것은 잘 감지되지 않는것 같다. 이로 인하여 파격성, 다시말해 예상밖의 현상이 주는 놀라움은 아름다움의 특징이자 본질적인 부분이 되는것이다. 보들레르 [꿈꾸는 알바트로스] 51페지   천재성이란 표현을 위해서 남성적인 강력한 기관을 갖춘, 확실하게 형성된 어린시절에 지나지 않는다. 동상 70페지   인간은 신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자 곧 불가항력적인 도덕률에 의해서, 그는 현재의 자기본성보다는 낮은 곳으로 추락했다. 동상 80페지   모든 인간에게는 신에 대한 기원과 악마에 대한 기원이 동시에 존재하고있다. 신에 대한 기원(또는 정신성)은 상승하려는 욕망이고, 악마에 대한 기원(또는 동물성)은 하강하는 즐거움이다. 여자에 대한 사랑과 개와 고양이같은 짐승과의 은밀한 대화는 바로 이 악마에 대한 기원에 귀속시켜야 한다. 동상 82페지   삶은 모든 환자들이 침대를 바꾸고싶은 욕망에 사로잡혀있는 병원이다. 동상 87페지   초현실주의자들의 직접적선구자는 아폴리네르이다. 초현실주의자라는것도 그에서 유래한것이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251페지   다양한 시대의 절충주의는 항상 자기가 옛날의 학설들보다 훌륭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런 공평한 태도는 절충주의자의 무능력을 입증한다. 그렇게 광범위한 사고의 시간을 갖는 사람들은 온전한 인간들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열정이 결여되여있다. 인간의 주의력은 편협할수록 그리고 관찰의 령역을 스스로 한정시킬수록 더 강렬하다는것을 절충주의자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보들레르 [꿈꾸는 알바트로스] 131페지   존재하는것을 재현하는것은 쓸모 없고 지겨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사실적인 천박함보다는 내 환상의 괴물들을 더 좋아한다. 동상 146페지   비평가가 시인이 된다는것은 엄청난 일이겠지만, 한 시인이 자기안에 어떤 비평가를 갖지 않는다는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동상 151페지     짧게 요약하면 유머는 비개연성을 고안하고 분리된 시간과 사물들을 강제로 결합시키고 모든 생존하는것을 낯설게 함으로써 현실을 파괴한다. 유머는 하늘을 찢고 공허의 바다를 보여준다. 유머는 인간과 세계사이의 불일치며 비존재자(존재하지 않는것들)의 왕이다. 우리는 그것이 현대시의 한 변이체에 다름아님을 보게 된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256페지   진실이니 본질이니 하는 미명으로 시인을 비난하는 평가를 믿지 말아야 한다. 실상 그가 행하는바는 모두 하나의 시파를 거부하려는것이다. 로만 야콥슨 [시란 무엇인가] [현대시리론] 8페지   우리가 표방하려는것은 (실생활 또는 사회와) 예술의 분리론이 아니라 미적기능의 자율성이다. 동상동명 17페지   진실성의 문제는 미적기능이 우세한 시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동상동명 48페지   문장의 사상과 감정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여섯가지 사항에 대해 검토해 보아야만 한다. 그 여섯가지란 첫째 작품의 전체의 안배를 볼것, 둘째 문장이나 말의 배치를 볼것, 셋째는 작품에서 전통과 계승과 새로운 변화의 추구를 볼것, 넷째는 표현상의 정아함과 기이함을 살필것, 다섯째는 사류의 응용에 대해 살필것, 여섯째는 성률을 살필것. 류협 [문심조룡] 693페지   문학에는 황소밖에 없다. 가장 큰 황소가 천재들이다. -즉 지치지 않고 하루에 18시간을 애쓰는 자들이다. J. 르나르 [일기] [세계명언 대사전] 743페지   그의 질서는 무질서가 되고 그의 무질서는 어떤 질선가를 갖게 될것이요. 롱기누스 [숭고에 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331페지   위대한 재능들은 다름 아닌 자신들의 위대성 때문에 늘 위험에 처해있는것이요... 위대한 탁월성이야 말로 설사 그것들이 작품전체에 걸쳐 같은 수준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언제나 상을 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동상동명 361페지   시대의 소동 한 가운데서 자기존재의 저 깊은곳에 있는 고독속으로까지 귀를 기울이려는 최초의 노력이후로, 현대시가 존재하고 있는것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현대시] [시의 리해] 316페지   사물들의 신비는 그의 내부에서 그자신의 심오한 감각들과 융해되여, 마치 그자신이 동경이나 한것처럼, 그에게 알려집니다. 이런 내밀한 고백의 풍성한 언어는 아름다움입니다. 동상동명 318페지   사실주의가 자연주의에서 퇴조하고 나자... 사람들은 슬며시 사물에 대하여 말하는 대신에 사물들을 가지고 말하기 즉 [주관적]으로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인간은 이전에 회적인 환경을 관찰할수 있었던것처럼 이제는 자신의 령혼을 관찰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고트 프리트 벤 [서정시의 제문제] [시의 리해] 320페지   기본적인 원칙으로서 [처럼]이 항상 지니고있는 소설적인 요소, 신문의 문예란적 요소가 서정시로 끼여든다는 사실, 언어의 긴장감이 이완되고 창조적인 변형이 약하다는 사실에 주목할수 있습니다. 동상동명 333페지   정결한 톤이란 어떤 세속적인 극복도 아닌 , 오히려 세속적인 앞에서의 도주입니다. 동상동명 334페지   [... 그리하여 옹색한 시대에, 시인의 사명은 무엇인가?] 여기서 시대라함은 우리자신이 아직도 매여있는 시대, 바꿔말하면 세계라는 때를 말한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나타났다가 희생이 되어 죽음으로써 신들이 지배하던 시대는 막을 내린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것이다. [삼위일체]를 이루고있던 헤라클레스, 디오니소스, 그리스도가 세계를 떠난뒤부터 세계라는 때는 땅거미가 짙어 밤으로 기울고있다. 세계의 밤은 어둠이 짙어간다... 신의 부재 신의 결여라고 이름 지을수 있다. 마틴 하이데거 [시인의 사명은 무엇인가?] [시의 리해] 341페지   세계의 밤이라는 옹색한 시대는 오래 걸린다. 동상동명 343페지   만일 신이나 다름 없는 이 한가닥 숨결이 우리 몸에 와닿지 않았던들, 아니 신비한 가락모양 우리 입술에 닿지 않았던들, 우리는 누구라고 가릴것 없이, 이제는 숲속에서 헤매고있는 짐승과 무엇이 다를바가 있겠는가 동상동명 351페지   선각자란 미래로 앞질러 들어가는 자가 아니다. 미래에서 찾아드는것이다. 그리하여 선각자의 말이 미래에서 찾아들 때라야만 진정 미래라는 시대는 제대로 현재에서 살게 된다... 선각자는 후세사람들이 따라 잡을수 없는 노릇이다. 마찬가지로 선각자는 불만의 존재이다. 동상동명 354페지   상상적차원에서 관념적차원으로의 이행은 항상 일종의 비약으로 이룩된다. 싸르트르 세계사상대전집(50) 302페지   상(象)은 언제나 하나의 사물이다. 싸르트르 세계사상 대전집(50) 305페지.     참고서   시학 ;아리스토텔레스 외. 한국문예출판사 현대시구조; 후고 프리드리히. (주)도서출판사 한길사 현대문학비평론; 김용권, 유종호, 이상옥 외 공역. 한신문화사 시의 리해; 정현종, 김주연, 유평근 편저. 민음사 현대시의 리론; 로만야콥슨 외. 지식산업사. 꿈꾸는 알바트로스; 보들레르 잠언집. 동아출판사. 상상심리학; 싸르트르. 중국 광명일보출판사 쇼펜하우어 훗살; 세계사상대전집(17). 대양서적 세계사상 대전집 (50) 대양서적 현대인 교양전서 (30) 금성출판사 현대인 교양전서 (29) 금성출판사 세계명언대사전;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868    "낯설게하기"시공부 1 2 3... 댓글:  조회:2634  추천:0  2017-11-16
낯설게 하기(시치미떼기)    낯설게 하기는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된 용어로서 일상화되어 있는 우리의 지각이나 인식의 틀을 깨고 사물의 모습을 낯설게 하여 사물에게 본래의 모습을 찾아 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낯설게 하기란, 그런 점에서 형식을 난해하게 하고 지각에 소요되는 시간을 연장시킴으로써 표현 대상이 예술적임을 의식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양식인 셈이다. 낯설게 하기는 궁극적으로 독자의 기대 지평을 무너뜨려 새로운 양식을 태동시키게 된다. 의미 심장한 내용을 작가가 모르는 체하며 이야기하는 수법이다.    최인호의 '영가',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 최인훈의 '총독의 소리', '서유기', 이인성의 '낯선 시간 속으로' 등의 작품이 이러한 낯설게 하기를 보여 주는 작품들이다.  1. 낯설게 하기란? 낯설게 하기는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된 용어로서 하나의 문학적 장치에 한정적으로 사용되기보다는 오히려 문학이나 예술 일반의 기법에 관련되어 있는 용어로 보는 편이 더 옳다. 일상화되어 있는 우리의 지각은 보통 자동적이며 습관화된 틀 속에 갇혀 있다. 특히 일상적 언어의 세계는 이런 자동화에 의해 애초의 신선함을 잃은 상태이며 자연히 일탈된 언어의 세계인 문학 언어와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지각의 자동화 속에서 영위되는 우리의 일상적 삶과 사물은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 채 퇴색되는데, 예술은 바로 이러한 자동화된 일상적 인식의 틀을 깨고 낯설게 하여 사물에게 본래의 모습을 찾아 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낯설게 하기란 그런 점에서 오히려 형식을 난해하게 하고 지각에 소요되는 시간을 연장시킴으로써 한 대상이 예술적임을 의식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양식인 셈이다. ※참고사항 -전경화와 배경화-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낯설게 하기'는 체코 구조주의에서 '전경화'라는 개념으로 전환된다. '낯설게 하기'를 한 결과로서, 낯선 부분은 '전경화(foregrounding)'가되고, 친숙한 부분은 '배경화(backgrounding)'가 된다고 본다. 2. 소설 속에 낯설게 하기 서사체에 있는 스토리를 플롯화 할 때 낯설게 하기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독자가 어떤 유형의 이야기에 대해 이미 선지식을 가지고 있으므로 작가는 이야기를 낯설게 변형시킨다는 것이다.  예) 도미부인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든 한국인이라면 이미 그 내용(스토리)은 알고 있다. 이에 한 작가는 이를 새로운 형태(플롯)를 사용해 소설화하고 그 결과 그 이야기는 낯선 형태로 독자들에게 다가오는 효과를 발휘한다. 또한 기법 적인 측면에서 소설 속의 낯설게 하기는 몽타주 기법, 콜라주 기법, 근대에 나타난 입체적 인물이 독자에게 던진 충격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나타나기도 하며, 독자들의 기대지평을 좌절시키면서 새로운 형식을 창출하며 낯설게 하기를 실현한다.  ◎콜라주 기법의 예 : 최인호의 의 마지막 결말부에 주인공에게 배달되는 편지가 그대로 옮겨져 있어 화자로 하여금 설명을 줄일 수 있게 해 주면서 현실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주어 독자에게 충격을 준다. ◎독자들의 기대지평 좌절의 예 : 장정일의 와 같은 소설은 기존의 도덕적 권위에 친숙해져 있던 독자들의 지평에 대해  '나'라는 재수생의 사랑과 성편력, '록'에 대한 경도등 대담한 풍속 묘사를 통해 방황하는 섬세한 자아의 초상을 보여 주는 새로운 성장 소설을 보여준다. 이 외에 옴니버스 연작 소설로 , 이인성의 가 있고, 최인훈의 등의 실험소설도 낯설게 하기의 기법이 두드러진 예로 제시할 수 있다. 현대 소설에서 두드러진 현상 중 하나가 형식적 정형에 대한 거부와 해체의 움직임이라고 한다면 낯설게 하기는 이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포스트 모더니즘 계통의 소설은 그 자체가 외국 문학에서 도입된 외적 형식의 모방에 치우친 감이 있는 데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다.  3 시에서의 낯설게 하기 ① 비유 : 쉬클로프스키는 시적 비유를 정서를 전달하기 위한 시적 담화에서 독자의 습관적 반응을 차단하기 위해 사용되는 낯설게 하기의 장치라고 보았다.      예1) 광화문은            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종교 -서정주, 위의 시에서 '광화문'이라는 구체물을 '종교'라는 추상적 관념으로 바꾸고 있다. 여기서 시적 은유는 하나의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 치환하여 의미 차가 나도록 만들고 독자로 하여금 왜 유사성이 없는데도 그렇게 바꾸었는가를 주목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예2)       새는 사철나무 키 작은 나무가지 끝에, 바람은 멀리멀리 낮달과 함께, 혹은 막 잠깬 골목길 입구 손수레 곁에, 하느님은 어린 나귀와 함께 이번에도 동쪽 포도밭 길을 가고 있다. 해가 뜨기 전에,                                                             김춘수, 전문 이 작품의 주된 의미는 로 이어진다. 새가 사철나무 가지 끝에 앉아 있다든지, 골목길에 손수레 곁에 바람이 분다는 것은 경험상으로 연접된 감각이지만, '바람'과 '하느님'은 서로 단절된 감각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비유한 이미지의 배열 과정에서 인과 관계를 차단하는 방법으로도 얻을 수 있다. ② 리듬 : 고정적인 정형율에 얽매인 작품은 낭독할 때 휴지, 장음화, 축약과 같은 '율격 이외의 시간'을 설정할 여지가 없어지고, 독서 과정에서 독자의 기대를 계속 적중시켜 주어 오히려 자동화되기 때문에 리듬도 '규범으로부터 이탈'하는 부분을 설정하여 탈자동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예) 현대시의 자유율 ③ 어휘 : 시어의 의미의 선명도에 따라 로, 어휘 탄생 배경에 따라서  ,계층에 따라서 같은 대립된 짝으로 이루어진다. 어느 한 쪽을 기준으로 삼은 다음 여기서 이탈된 어휘를 결합하여 낯설게 한다. ④ 음성 : 사향 박하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라운 몸둥아리냐                                                               서정주 중에서 으로 음성을 변화하여 그 어휘들의 의미와 뉘앙스를 주목해 주게 한다. ⑤ 통사 : 문장의  배치에 따라  문자의 길이에 따라 통사론적 반복 여하에 따라 등을 대치시켜 표현하여 낯설게 한다. ⑥ 해체 : 시의 구조적인 틀을 깨고 시의 형식에 새로운 틀을 보여줌으로써 낯설게 한다 이상의 시처럼 띄어쓰기를 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글의 어법상의 해체, 영어를 섞어 쓰는 등의 언어에 대한 해체, 글씨 크기나 연과 행의 변형을 통한 형태의 해제, 타장르를 시에 끌어들이는 장르간에 해체 등이 현대시에 주로 쓰이고 있는 낯설게 하기이다. 예) 나는 시를, 당대에 대한, 당대를 위한, 당대의 유언으로 쓴다.     上記 진술은 너무 오만한다 ( )     위풍당당하다( )     위험천만하다( )     천진난만하다( )                                       황지우, 중에서 하지만 낯설게 하기는 그 작품 자체의 구조와 조직만으로 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 시대의 문학적 관습과 그 시인의 관습, 그 시인의 일반적 관습과 그 작품만의 관습, 다시 그 작품을 지배하는 일반적 질서와 어느 한 부분의 일탈 같은  등의 기준에 의해 결정된다. 예) 환상이라는 이름의 역은 동해안에 있습니다. 눈 내리는 겨울 바다- 거기 하나의 암호처럼 서 있습니다. 아무도 가본 사람은 없습니다. 당신이 거기에 닿을 때, 그 역은 홍을 맞아 경련합니다. 경련 오오 존재, 돌이 파묻힐 때, 물들은 몸부림칩니다. 물들의 연소 속에서 당신도 당신의 몸부림을 봅니다. 존재는 끝끝내 몸부림 속에 있습니다. 아무도 가본 사람은 없습니다. 푸른 파편처럼, 바람 부는 밤에 환상이라는 이름의 역이 보입니다.                                                           -이승훈, 전문 이승훈의 를 이 시대의 일반적 관습과 비교할 때 산문적 어법으로 말하고 대상을 모방하는데 그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낯설다고 할 수 있다. 4. 연극에서의 낯설게 하기 낯설게 하기 이론이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제안한 연극 기법인 낯설게  하기 효과에 관한  이론이다. 연극론에서의 낯설게 하기는 자명한 사건이나 인물을 낯설게 보도록  만들어 그 배후의 사상을 깨닫도록 하는 기법이다. 그러나 그 기법이 겨냥하는 궁극적인 효과에 비추어 볼  때, 연극론이라는 그릇은 그  기법의 의의를 담기에  협소하다. 왜냐하면 낯설게하기  기법은 기존의 연극뿐만 아니라, 미학과 예술론에도 적용되는 미학적 입안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반영으로는 자신의 존재를 쉽게 확인할 수  없는 시대에는 좀더 구조화된 방식이 요청된다. 즉, 주어진  현실을 모순된 채 일시정지 시킴으로써  이상하게 보이게 하는 반감정이입론이다        
867    시작은 고정관념을 파괴해야 생명력을 낳는다... 댓글:  조회:3370  추천:0  2017-11-16
낯설게 하기의 다양한 방식들 10   1. 고정관념을 파괴한다. 예) 마르셀 뒤상의 변기  이것은 샘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파이프 외 초현실주의적인 그림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 작품 잘 살펴 보기~   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세잔, 아니면 피카소? 서양의 미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를 손꼽으라면 누구를 지목할까? 모두 정답일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20세기 이후, 그러니까...     이미지의 반역 캔버스에 그려진 것은 명확하다. 담배를 피울 때 사용하는 파이프 한 개. 그리고 그 밑에 있는 프랑스어 “Ceci n'est pas une pip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파이프를 그려놓고...     붉은 모델 르네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는 추상 회화의 위협에 대한 대응으로 ‘따분하지 않은 방법으로 구상 회화를 만드는 법’에 관한 고민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의 초현실주의...   르네 마그리트 피레네의 성, 골콩드, 데칼코마니, 이미지의 반역, 잘못된 거울, 인간의 조건, 붉은 모델, 심금, 교장, 레슬러의 무덤, 위대한 가족, 백지위임장, 꿈의 열쇠, 사랑의 노래, 유     2. 작은 것을 크게 확대해서 본다 vs  큰 것을 작게 축소해서 본다. 예) 잠자리 눈만 확대해서 보기      현미경으로 확대하듯 묘사하기 3. 문학이 아닌 다른 학문 분야의 언어나 생각을 접목한다. -다른 직업(전문가)의 눈으로 본다. 예)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과학적 언어의 사용으로 특이한 제목 붙이기 예) ~의 위치, ~의 방법 * 김행숙 중 "목의 위치"-기이하고 생경스러운 감각과 느낌을 그린 시 일부를 아래에 소개합니다~ ... 목에서 기침이 터져나왔습니다. 문득, 세상에서 가장 긴 식도를 갖고 싶다고 쓴 어떤 미식가의 글이 떠올랐습니다. 식도가 길면 긴 만큼 음식이 주는 황홀은 천천히 가라앉을까요, 천천히 떠나는 풍경 은 고틍을 가늘게 가늘게 늘리는 걸까요, 마침내 부러질 때까지 기쁨의 하얀 뼈를 조심조심 깎는 중 일까요. 문득, 이 모든 것들이 사라져요. 소용없어요, 목의 길이를 조절해봤자. 외투 속으로 목을 없애봤자, 그래도 춥고, 그래도 커다란 덩 치를 숨길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목을 움직여서 나는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지 않습니까. 다리를 움직여서 당신을 떠나듯이. 다리를 움직여서 당신을 또 한 번 찾았듯이. 4. 시간을 세분화 해본다. -일상을 세밀화한다. -찰나의 순간을 디테일하게 묘사하면 익숙한 일상이 낯설게 보인다. 예) 잠자리가 파리를 잡아먹는 순간을 묘사 5. 감정을 세분화하여 시각적으로 묘사해 본다. -이 때 주의할 점은 감정을 직접적 단어로 묘사하지 않는 것. -명확함보다는 암시적 표현을 추구할 것. 6. 평범하고 일상적인 단어의 의미에서 상상력을 발휘한다. -"이게 뭔지 모르는 사람은 이걸 뭐라고 쓸까?"라고 생각해 본다. -단어에서 심리를 발견한다. -심경이 묻어있는 문장을 떠올려 본다. -반대의 역할을 생각해본다. 예) 신발=?(다양하게 낯선 생각들) -어느새 커져 버린 신발-> 커져 버린 아이 -신발이 이동한다-> 신분이 이동한다/ 내가 이동한다/위치가 이동한다 -더러운 신발-> 흙투성이 신발 -내가 신발을 신는다->신발이 나를 길들여 준다 -나는 구두를 샀다-> 나는 새장을 샀다->그것은 감옥이다 (송찬호-구두)   문장의 두가지 종류 1. 현실적이고 단순하고 직접적이고 사실적인 문장-fact 자체-상상력을 불러 일으키지 않는 문장 2. 상상의 여지를 열어두는 문장-고정관념을 파괴하는 문장-심경이 묻어있는 문장-fact에서 심리를 발견하는 문장 -모순이나 위선을 드러내는 문장(궁금증을 불러 일으키는 문장)   일부분을 소개합니다~ 현관을 나설때마다/ 꼭 한번은 몸 기우뚱거린다.... 기우뚱거리며 생을 가늠해보는/ 이 아침의 의식(이진숙-신발을 신으며) 해진 신발 한 짝/ 꿈꾸는 길섶(오세영-신발 한 짝) 길을 걷다 불편하거든/ 무거운 신발 벗어던져라 (손희락-신발론) 내 마음의 안식/ 아내의 신발/ 언제까지 저기 저 자리에/ 놓여 있을까 ( 이문조-아내의 신발) 내 작은 키만큼/ 낮은 구두 굽에/ 왠지 모를/ 편안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 안숙자-신발장 앞에서) 갑자기 나도 저 신발처럼 진열장에 놓이고 싶다 (최범영-지체 높은 신발) 내 삶의 무게를/하늘에 걸어 두고/구름의 신발을 신겨 주고 싶다 (차수경-구름의 신발) 비스듬히 닳은 구두 뒷굽을 보면서/ 내 인생도 저렇게 비스듬히 닳은 것을 깨닫는다 (윤수천-구두 뒷굽을 갈며) 문득/ 누군가를 위해/저토록 굽이 닳도록/헌신한 적이 있는가를 (김상현-헌신짝) 나는 새장을 하나 샀다/그것은 가죽으로 만든 것이다/ 날뛰는 내 발을 집어넣기 위해 만든 작은 감옥이었던 것 (송찬호-구두) 7. 수식을 많이 가져온다고 좋은 건 아니다. 이미지만 불러 일으켜주면 된다. 예) 오색허브꽃 비빔밥
866    낯설기용법= 신선함 "회복창조"하는것, 새로운 시세계 구축... 댓글:  조회:3359  추천:0  2017-11-15
낯설게 하기의 효용성                                            최균선     이 시대는 양식화된 창신을 고창하는 시대이다. 그 창신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 타나고있는것이 현대시다. 현대시에서 낯설게 하기란 까다롭게 리해할것도 없이 진부 하지않고 비반복적인 생신한 표현수법이라 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것이다. 말하자면 직유를 은유로, 묘사를 상징으로, 재현을 이미지로…그러나 후세대들에게 낯설게 하기를 선양하는것은 현실생활, 인간의 심령을 리드하는데 어떤 의미가 있을가?     다시점(多視点)에서,현상학적립장에서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감수한것을 기초로 대상을 주체의 사상과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이미지로 구성하는 사물시(事物诗)가 지리멸렬하여 이제 시인들의 단순한 감정표출로는 독자들을 감동시키지 못한다고 인 정하여 낯설게 하는 방법의 시쓰기가 나오게 된것이란다.     그것이 바로 모순어법, 낯설게 하기 또는 시적애매성이라는것으로서 현대시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이라 한다. 그동안 획일화, 관습화, 전통, 일상적언어로서는 신선함, 아름다움, 창의성 등을 발견할수 없다면서 극단에로 치달은것이다.“계속 아름다운것 은 우리들을 질리게 한다.”는 말인가? 조금 낯선 시를 보자.     가는 비여 가는 비여/가는 저 사내 뒤에 비여/미루나무 무심한 등치에도/가는 비여/스물도 전에 너는 이미 늙었고/바다는 아직 먼 곳에 있다/여윈 등지고 가는 비 가는 겨울 비/잡지도 못한다. 시들어 가는 비 ”     김사인이라는 시인의 “비” 전문이다. 낯선듯 싶으면서도 찬찬히 생각해보면 결코 생판 낯선것도 아니고 조금 애매모호한것 즉 몽롱미를 현시하고있을뿐이다. 겨울비속을 걸어가는 수척한 사내의 쓸쓸함,안쓰러움의 정서를 표현하고있는 시로서 “가다”의 “가는”에는 가는(行), 가는(細),가는(離別), 가는(야위여가다,) 즉 중의(重意)적으로 중첩되고 시상전개가 함축되고 절제된 언어표현이 시도되고있다.     그리고 “비”라는 주도어를 반복함으로서 “비" 그것도 ”겨울비“에 대한 정서를 시각적으로 미끄럽게 구사하고 있는데 이 시의 사상전개법은 “비 ”, “가는”의 호응관 계로서 가버리는 혹은 리별한 사내의 등뒤에서 내리는 비(리별, 사랑)를 느낄수 있게 했다. 의도적 낯설게 하기의 전형이라지만 전통시의 가독성도 구비하고있는것이다.     모순된 어법으로 낯설게 하기가 난해시로 되게 하는것은 표현의 기법일세 사유, 정감의 모순성은 리해불능이 된다. 현실속에는 애매모호한 현상들이 많지만 그것을 보는 시인의 시각은 애매모호할수 없으며 더구나 사유활동이 어릴벙벙할수는 없다. 이 시점에서 무작정 애매모호성이 현대의식의 한 형태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한국의 어떤 시인은 통속적인 시를 일반적으로 비전문적이고 대체로 저속하며 일반대중에게 쉽게 통하는 시라고 단정하던데 기실 상아탑속에 자아도취로서 아무도 알아들을수 없는 말을 혼자 중얼거리는 사람을 현실에서는 이상한 눈길로 보며 응 대하지 않는다. 문학의 “통속성”을 고상한 예술성이 결여된 즉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부정적인 존재로 여겨진다는 제기법은 너무 무단적이다. 작품의 다양성과 진실한 정신을 저애하는 존재로, “고상”한 독자에게는 비도덕적이고 질낮은 작품의 특징으로 여겨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사이비도 아닌 얼토당토이다.     또한 통속적인 문학작품은 보편적으로 지적,정서적수준이 낮은 대중이 선호하는 감정 혹은 정서를 졸렬하게 반영한 렬악한 작품이라고 평가해야 한다는 설법은 얼 마나 황당무계한가. 대중은 무지몽매하다는 말이 아닌가? 선택된 사회정영들만을 위 해 시쓰기를 한다면 선경에서 신선들과만 산다는 말과 같다. 어떤 시를 써내든 시인은 우주인이 아니며 적어도 진공상태에서 사는 특종생명이 아니지 않는가?     그들은 가로사대, 통속성을 즐기는 대중은 예술적심미가치에 주목하지만 예술가들과 같은 심미안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이며, 지적훈련을 받지못한 사람들이며, 그래서 대중은 세련된 교양이 결핍한 존재라고 할수 있으며, 그래서 예술이 알기쉬운 소재나 자극적인 소재로 형상화되였을 때에만 흥미를 느끼는“무리”라고 말을 하는 시인은 구름우에서“구름사탕”을 먹는 신선인가? 엉터리도 아닌 허황 그 자체이다.     문학장르중 대중들과 거리가 가장 먼 장르는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시라고 할 때, 문학의 꽃이자 문학의 원형인 시가 왜 “대중”들의 시야밖으로 밀려난것일가? 여러가지 리유가 있겠지만 어렵기때문이라고만 간주한다면 대중 전체가 석두라는 말이 된다. 전문인 시인들조차 읽기가 어렵고 터득이 막연하다고 할 정도라면 그것이 숭고함이고 자랑인가? 어지간한 지적,정서적훈련으로는 현대시를 리해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데 “현대시독해학원”이라도 꾸려야 하지 않겠는가?     낯설게 하기=모르게 하기가 아니다. 낯설게 하기는 로씨야형식주의자들에게도 우리의 지각이나 인식의 틀을 깨고 사물의 모습을 낯설게 하여 사물에 본래의 모습을 찾아주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낯설게 하기란 그런 점에서 형식을 난해하게 하고 지각에 소요되는 시간을 연장시킴으로써 표현대상이 예술적임을 의식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양식으로서 궁극적으로 독자의 기대지평을 무너뜨려 새로운 양식을 태동시키는것이지 금성철벽밖에 방치하는게 아니다. 독자가 아예 모르게 하기위해 쓰는 시는 그 목적성부터 희망사항인“공명성”이 없어 글러먹었다는 얘기가 된다.     낯설게 하기는 시문학의 예술적장치에 한정적으로 사용되기보다는 오히려 문학이나 예술일반의 기법에 관련되여있는 용어로 보는편이 더 옳다. 일상화되여있는 우리의 지각은 보통 자동적이며 습관화된 틀속에 갇혀있다. 특히 일상적언어의 세계는 애초의 신선함을 잃은 상태이고 자연히 일탈된 언어의 세계인 문학언어와는 본질적으로 다를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시에 깜깜한“무지자”들과 도전하는식으로 나와서는 안된다. 물이 없이는 준치라도 곧 죽는다, 복합적독자군은 망망대해가 아닌가?       낯설게 하기는 그 작품자체의 구조와 조직만으로 따질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 리가 겪는 경험의 법칙이나 상식을 뒤엎는 일탈된 표현에도 진실성은 내포하고 있어야 하며 독자가 감동하고 시적진실을 깨닫게 하는것이 시의 목적이여야 한다. 낯설 게 하기는 일상적인 언어의 틀을 깨고 새롭게 표현하는 기법일뿐으로서 그 무슨 천국의 언어인양 신비화할것까지는 없다. 장막안에서 북치고 장구치고 해도 무슨 무당굿인지 전혀알수 없다면 그게 제멋에 겨운 헛푸닥거리가 아니겠는가?     1) 깃발이 펄럭인다. (사실적진술>)        깃발이 전진을 부르며 절규한다.     2) 사람이 술을 먹는다.        사람이 술잔속에 익사한다.     상술한 두가지 표현에서 후자의 기법에도 선택된 상상력이 필요없다. 이런 낯설게 하기라면 소통불능이 아니고 사회효응도 바람직할것이다. 하다면 정말 인문학적인 지식이 없이는 현대시를 짓기는커녕 리해하고 감상할수도 없어야 할가. 백명의 독자 에게 읽히는 작품보다 선발된 한명의 독자에게 백번을 읽히는 작품만이 예술이며 진정 우리가 지향해야하는 문학일가. 우문과 함께 소통의 가능성을 꿈꾸며 자신을 당 당하게 내세우는 시인이 오히려 사랑받는 시인이 될것은 의심할바 없다               애인에게 버림받고 돌아온 밤에               아내를 부둥켜안고 엉엉 운다               아내는 속 깊은 보호자답게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등 두들기며               내 울음을 다 들어주고               세상에 좋은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세월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따뜻한 위로를 잊지 않는다               나는 더 용기를 내서 울고               아내는 술상까지 봐주며 내게               응원의 술잔을 건넨다               이 모처럼 화목한 풍경에               잔뜩 고무된 어린것들조차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노래와 율동을 아끼지 않고               나는 애인에게 버림받은 것이 다시 서러워               밤늦도록 울음에 겨워 술잔을 높이 드는 것이다               다시 새로운 연애에 희망을 갖자고               술병을 세우며 굳게 다짐해보는 것이다.        ‘삼류 트로트 통속 연애시인’ 이라고 부르는 류근시인의 시이다. 이 시는 지극히 통속적인 소재인“외도”를 통해 웃지 못할 가족애를 그리고있다. 보편적으로 통속적인 시는 거짓위안과 환상을 제공하여 현실을 도피하게 만든다고 비판을 받는다. 아주 틀린말은 아니다. 우리는 억압적인 상황에 직면했을 때 자유로워지길 원하며 상상적 해결을 꿈꾸기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의 시적화자는 대책없는 랑만 즉 련애를 꿈꾸 고있지만 직면하거나 직시하고 있는것은 가족이다. 이것은 현대인의 감정정서이다. 무엇을 나무릴게 있는가? 그래서 외도가 외설처럼 느껴지지 않으며 이른바 시의 격을 떨어뜨렸더라도 오히려 자연스럽게 시적정취를 선물하고있지 않는가?     어떤 고명한 이들의 견해대로 저급예술과 고급예술의 이분법을 항거하는 의미에서, 스스로 저급예술이라는 전통시를 쓰는 사람은 절필해야 하는가? 전통시를 쓰면 시를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던데 어처구니가 없는게 아니라 한심할뿐이다. 어떤 시인의 선언이 독자에게 감동을 선물하겠다는 용기와 오히려 통속적인것으로 인 위적인 난해성을 지향하는 문학을 전복하고싶은 역설의 정신이 분발할듯싶다.     밀란 쿤데라가 “극소수의 귀족이 향유하던 예술은 숭고하다. 그 예술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향유될 때 더욱 숭고해진다”고 말했다. 어쨌든 예술의 본질은 소통에 있으며 그 소통의 폭은 넓어져야 한다는 의미일것이다. 소통은 필연적으로 대상을 필요로 한다. 어떠한 예술작품도 그 존재자체만으로 어떠한 의미도 지닐수 없다. 작품과 독자가 만났을 때 비로소 예술은 온전한 의미를 지닐수 있게 된다. 이것은 식은 죽이 마시기 좋으면서 원맛은 잃지 않고있다는 말처럼 절대 진실이다. 아닌가?                                                         파도                                                      최 병 수        바다는 목에 걸린 세월을/울컥울컥/모래사장에 토해낸다/벌거벗고 누워있는 수줍 은 모래톱/전력질주 짝짓기 시도하지만/대양(大洋)의 기세로도 오르지 못하고 /가시 걸린 세월만 내 뱉는다 (중략)     강자의 론리를 파도에 빗대어 쓴 시다. “‘파도’라는 사물의 속성을 이미지로 형 상화함으로써 시적자아의 형이상학적의식을 잘 그려주고있다” 그러나 “현대시의 핵심인 ‘낯설게 하기’가 완벽하면서도,시적진실의 리얼리이티가 있는 시이다. 이런 시는 시전문이 아닌 사람이라도 외면하지 않을것이다. ‘파도’ 는 바다를 배경으로 강자의 론리를 파도, 모래사장 등에 투영해 약자에 대해 노래했으며 약자와 강자의 론리가 세상을 지배하는 현실에 가슴아픈것을 파도에 빗대고 시적대상을 향해 강렬한 심상을 표출하고 있는것이다. 이런 경우, 직설적인 시가 개탄하며 절로 물러갈것이다.     시나 산문이나 문학이나 비문학이나 언어조합이지만 그중에서도 시가 시로 되는 리유는 일상적인 의미를 벗어나 함축적이고 내포적인 2차적인 의미의 확대를 꾀하는 언어조합이기때문이라는것은 기성리론이다. 그런데 로씨야에서 일련의 학자들은 언어의 근본적인 형식인 운률과 구조를 연구하면서 문학의 문학스러움이나 시가 시다운 근본적특징이 바로 언어의 특이한 용법에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들은 문학의 내용 즉 리념성을 강조하던 시기에 문학성을 언어형식에서 찾고자 했기때문에 형식주의라고 했지만 대표적리론가인 야꼽슨, 쉬끌로브쓰끼 등의 기본립 장은 문학성의 발견에 있었으며 그 해결책은 전통적인 대답이나 림시변통적인 방식이 아니라 근본적인 문학성의 본질과 소재에 대한 해명이여야 한다는 립장이였다.     이들은 현대시학에서 금과옥조로 여기고있는 이미지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였다. 시의 경우에 있어 비유, 리듬, 독특한 구문, 어려운 낱말등은 그러한 정신의 절약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정신노력을 더욱 강요할뿐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시어의 변별성, 즉 시를 시답게 하는 근본적인 어법은 일매지게 낯설게 만들기만인가? 전경화로 설명할수는 없는것인가? 낯익음과 낯설음은 아무래도 변증관계를 벗어나지 못할것이다. 시의 문학성은 시어의 낯설음의 구조에 있다고 하더라도 친숙한 의미의 이미지가 아니라 생소한 충격을 주는 이미지, 뭔가 새롭게 생각하고 느끼도록 활력을 주는 언어의 창조가 바로 낯설음이며 산문과 구별되는 시어의 정수가 된다는것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시어나 산문적인 언어들은 바로 낯선언어가 아니라 눈에 익은 언어이고 낯익음의 이미지였고 낯익음의 형식이었다는 말이된다. 사실 고전주의나 랑만주의에서 시에 대한 인식이나 시어의 기능은 효과적인 전달이나 경제적인 표현이라는 목적에서 설명되고 있는것이다. 실용주의시대에 현대시도 실용적이야 할텐데…     포프는 시의 재치는 늘 생각하면서도 그처럼 잘 표현할수 없는것, 즉 어려운것을 적절히 표현하는것이라 하였고 워즈워즈는 낯선 세계를 인간에게 친숙하도록 만드는 기능이라고 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친숙한 통념에 반작용하는 낯설은 현실을 제시 하는것으로서 여러번 곱씹어 더 생각하도록 지각을 연장시키는 효과가 있지만 너무 심하게 “낯설어버리면” 상상력의 “부재자”나 언어표현에 보수적인 많은 사람들이 남의 사돈이야 가건말건 지나칠 가능성이 다분하다는것을 제시한것이다.     시적대상을 습관적인 표상에서 굴절시키고 언어표현에서도 일상의 문맥을 본질 적으로 다른 개념들로 대체함으로써 시인은 대상들의 감각적인 결(结)을 고양된 상태에서 인식하도록 해야만 하는것이다. 따라서 시어는 낯선용법을 창조하여 지각의 신선함을“회복”시키는것이지 불소통속에 매장시키는것이 아니다. 깊이 숨김으로써 그것이 현대시의 시적발견이 되고 해방된 새로운 시세계의 구축이 될수는 없다.     쏘쉬르의 근원주의 언어관은 말하는 화자의 관념이나 아이디어에 의미가 있고 그 의미를 전달하는 기능으로서 존재하는것을 말한다. 그러나 구조주의가 말하는 언어는 요소들간의 체계적인 관계들속에서 의미가 만들어진다는것이 핵심이다. 쏘쉬르는 인지체계내에 존재하는 언어적의미와 밖에 존재하는 언어적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전혀 의미불통의 시가 시로서 존재할 리유가 나변에 있는가? 물론 확답을 기대할수 없는 우문이므로 혼자의 우답으로 남겨두자. 그래서 장문(长文)이지만 아쉬운 대로 결말이 없는 횡설수설이 되여도…                                               2013년 10월 30일 [출처] 낯설게 하기의 효용성-최균선 - 모이자 커뮤니티  
865    "자화상"에서 "낯설게하기" 찾아보기... 댓글:  조회:2498  추천:0  2017-11-15
낯설게 하기와 우리 서정시 / 서채화 - 네 시인의 동명의 시《자화상》을 중심으로 1  로씨야 형식주의의 주요용어인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란 말을 처음 제시한 사람은 로씨야의 쉬클로프스키라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로씨야 형식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문학과 다른 학문(즉 사회학, 철학, 심리학, 력사 등) 사이를 구분해주는 특징이 무엇인가 연구하던 중 그 차이는 문학과 다른 학문들이 언어를 다루는 방식에서 찾아야 된다는 것을 발견해내게 된다. 즉 문학을 문학답게 하고 다른 학문 령역과 문학연구 령역을 변별시켜주는 특징을 문학성이라고 할 때 그 문학성은 문학이 사용하는 언어적 특질(말하는 방식)과 관련되며 그것은 바로 낯설게 하기에 의해 특징지어진다고 했다.  낯설게 하기는 축자적으로는 “이상하게 만들기(make strange)”를 의미한다. 쉬클로프스키에 따르면 문학은 일상언어와 습관적인 지각양식을 교란한다. 문학의 목적은 재현의 관습적 코드들로 인해 지각이 무디어지게 놓아두는 것이라기보다는 “대상을 친숙하지 않게 만들고, 형태를 난해하게 만들고, 지각 과정을 더욱 곤란하고 길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술/문학/시에서의 이상화(異常化; estrangement)는 리듬, 음성학, 통사법, 플롯 같은 형식상의 기제 즉 “예술적 기법”에 의해 생겨난다. 쉬클로프스키는 낯설게 하기의 한 례로 스토리의 내용을 “이상하게 만들기” 위해 말(馬)의 시점으로 구사한 레브 똘스또이의 「콜스토메르」를 들고 있다.     그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일상적인 보행과 발레를 비교한다. 걸음을 걸으면서 자신의 걸음걸이의 의미를 하나하나 생각하고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지만 일상적인 걸음걸이를 낯설게 만들고 구조화한 발레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여기서 시는 “발성기관의 춤”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낯설게 하기”를 통해 발레는 걸음 하나하나에 주의를 집중시키고 그 의미를 생각게 한다. 그러나 일상적인 보행은 그렇지 못하다. 문학의 언어 역시 일상언어와 다른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독자들의 일상적인 지각을 막고 언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 생생한 지각과 의미에 접하게 한다.     문학 텍스트의 내용과 형식은 서로 분리될 수 없고 형식의 새로움은 지금까지 기계적으로 지각되었던 바로 그 내용의 새로움, 내용의 생생한 전달, 즉 핍진성을 목표로 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문학이 일상언어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일상언어로는 경험할 수 없는 충격적인 것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함이다. 우리의 언어와 우리가 접하는 삼라만상의 인상과 그에 대한 판단이 이미 낡고 관습화되어 있어서 모든 것은 추상화되어 있고 평판화되어 있는데 문학은 여기에서 전혀 새로운 충격과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한다.     쉬클로프스키는 이를 위하여 낯설게 해야 하며 “해”라고 부르던 사물을 새로운 이름으로 불러서 전혀 낯선 사물로 새로이 깨닫게 해야 하며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제언을 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순수하게 자신의 경험으로 발견할 것.  -비일상적 시각을 동원할 것.  -현미경적 시각으로 관찰할 것.  -인습적인 인과관계에서 벗어나 역전적인 발견을 할 것.  -낯선 대상과 병치함으로써 낯선 인상을 줄 것.  “낯설게 하기”란 이 말은 비록 로씨야에서 나오긴 했지만, 우리 문학에서도 전혀 찾아볼수 없는것은 아니다.《자화상》이란 제목의 시는 여러 시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데, 내면적 자아의 모습을 그린 것일 터이므로 시인의 정서, 사상을 리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자료이다. 필자는 모두《자화상》을 주제로 한 윤동주, 서정주, 박정웅, 남철심의 시를 통하여 우리 서정시에서 표현된 “낯설게 하기”에 대하여 다루어보도록 하겠다.  2 시의 목적은 사물들이 알려진 그대로가 아니라 지각되는 그대로 그 감각을 부여하는 것이다. 시의 여러가지 기교는 사물을 낯설게 하고, 형태를 어렵게 하고 지각을 어렵게 하고 지각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을 증대시킨다. 지각의 과정이야말로 그 자체로 하나의 심미적 목적이며, 따라서 되도록 연장시켜야 하는 것이다. 시란 한 대상이 시적임(시성)을 의식적으로 경험하기 위한 한 방법이다.      “낯설게 하기”는 시에서 시어와 일상언어의 대립에 의해 나타난다. 시에서는 일상언어가 갖지 않거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리듬, 비유, 역설 등 규칙을 사용하여 일상언어와 다른 결합규칙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우선 윤동주(만주)의《자화상》을 보기로 하자.  자 화 상              산 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  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또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1939년 9월  이  시는 일제 말기라는 암울한 시대 상황에서 적극적인 의미의 무장 독립 투쟁에 가담하지 못하고 국내에 남아 있는 자신을 끝없이 반성하고 부끄러워하는 성찰의 과정에서 쓰여진 고독과 내면 성찰의 시이다. 1939년에 쓰여진 이 시에는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면서 느끼는 젊은 시인의 자기 련민과 미움이 나타나 있다. 화자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 그 안을 가만히 들여다 보는 것은 자신을 들여다 보고 성찰하는 행위이다.  화자가 들여다보는 우물속은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는 곳으로 얼핏 보면 매우 행복하고 평화롭게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서  “한 사나이” 즉,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려는 화자에게는 현실 속에서 보이지 않던 자신의 미운 모습이 보인다. 그래서 그는 돌아간다. 가다 생각하니 그 미운 사나이가  “가엾어” 돌아오게 되고 다시  “미워져”돌아가다가  “그리워”져 다시 돌아오게 된다. 화자는 자신에게 미움을 느끼고 그 미움은 련민으로, 련민은 그리움으로 변하는데 이런 변화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반성하고 내면을 응시하는 가운데 일어난 감정이다. 우물 속은  “달”과  “구름”과  “하늘”과  “바람”과  “가을”이 있는 또 다른 세계이고 그 안에는 “추억”이라는 또 다른 시간의 흐름이 화자의 진정한 성찰과 인간적 고뇌 속에 존재 하고 있다.      높은 것일수록 깊은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우물물은 동시에 밝은 것을 어둠에 의해서 보여주는 의미론적 역설도 함께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우물속에 비친 하늘은 밤하늘이며, 그 계절 역시 가을로 되어있다.  태양이 있는 대낮의 봄하늘과는 상반된다. 시내물은 주야가 따로없이 쉬임없이 흘러가지만 그런 류동적인 물을 한 곳에 가두어 고이도록 한 것이 바로 우물물이다. 그것처럼 윤동주의 우물속에 비치는 달, 구름, 바람 역시도 그 의미의 공통적인 요소는 다같이 물처럼 흐르는 것이지만 한 공간안에 유페되어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 시는 분명 《자화상》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으면서도 우물속에 비친 그의 모습을  “나”가 아니라  “한 사나이”라고 낯설게 부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영상(映像)을 하나의 실체로 생각하고 있는 것까지 같다. 윤동주는 마치 그  “사나이”가 우물속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파아란 바람”이라고 촉각적이미지를 시각적이미지로 전이시켜 통각적이미지로 표현한것 역시  “낯설게 하기”로 볼 수 있다. 일상적인 표현으로 하면  “바람”은  “파아란 색”을 띨 수가 없다.     또한 이 시는  “나르시시즘”1)을 바탕으로 한 자기성찰을 쓴것인데  “거울”과 같은 의미로 통하는 “우물” 속의 자신의 모습을 보고 불쌍한 자신에 대한 련민에 빠지게 된다. 시에서 반영된  “나르시시즘”  이 경향도  “낯설게 하기”로 볼 수 있지 않은가 싶다.  다음은 서정주(한국)가 쓴 《자화상》이다.  자 화 상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숫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1939년      미당 서정주의 시가 지닌 가장 큰 의의는 우리 시에서 시어사용의 폭을 넓히고 상상력의 령역을 확대하여 시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보였다는 데 있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 “대추꽃이 한 주 서있다” “틔워오는 아침” “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 등 시어들은 일상언어와는 다른 결합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들에게 상상의 공간을 마련해준다. 또한 "애비는 종이었다"는 첫 행은 실제의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이 시가 당시의 독자들에게 준 감동의 힘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당시의 독자들은 일제 강점하에서 자신들의 처지를 련상시키며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아침 이마 위에 얹힌 몇 방울 피섞인 이슬” 은 괴로움의 삶 속에서 창조된 열매란 뜻으로 고뇌의 승화를 뜻하고 있다. 구속받고 멸시받으며 현실을 어렵게 사는 화자를 “죄인”, “천치”, “수캐”에 비유하면서 이런 은유로 투영된 언술이 아무래도 시의 멋을 더해주고있는것 같다.  같은 제목으로 쓴 박정웅(연길)의《자화상》을 보도록 하자.                                    자 화 상                         그림자처럼                무시당하고 짓밟히는 사람                그림자처럼                수상하고 불길한 사람                그림자가 길어                외롭고 지쳐보이는 사람                마침내 자신이                그림자로 되여가는 사람                                                        2001년       이 시에서는 일상언어에서는 불가능한 것들을 강제로 결합시키고 새로운 문법 질서를 확립함으로써 시의 언어를 낯설게 하고 직접적인 의미를 넘어선 시적인 의미로 전환시킨다. 시인은 그림자와 “무시당하다” “짓밟히다” “수상하다” “불길하다” “외롭다” “지쳐보이다”를 강제로 결합시킴으로써(그것도 “그림자처럼”이라고 비유) 그림자를 일상적인 의미가 아닌 다른 의미로 전환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림자와 이런 표현들사이에는 거의 류사성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작자의 의도를 우리가 보아낼수 없는것은 아니다. 이런 낯설은 표현들은 우리들의 상상을 거쳐 낯익은 모습-힘없고 외롭고 지친 자신(시인)의 모습으로 전환된다. 또한 마지막련에서의 아예 사람이 그림자로 되어간다는 표현은 그 어떤 역전적인 발견일수도 있는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철심의《우리들의 자화상》을 보기로 하자.                            우리들의 자화상                                             남철심(도문)         찬물을 많이 마셔         도리여 뜨거운 가슴         물옆에 살아         물농사 지으며         하얗게 마음을 헹구는 사람         물 같은 술에         풀어보는 한(恨)과         술 같은 물에         적셔보는 원(怨)         찬물을 많이 마셔         오히려 뜨거운 눈물                                                                                 2001년         이 시는 첫련부터 역설로 시작된다. 찬물을 많이 마셨으면 응당차가와야 할 가슴을 도리여 뜨겁다고 표현한다. 이와 조응되는 마지막련에서도 “찬물을 많이 마셔 오히려 뜨거운 눈물”이라고 표현되고 있다. 눈물은 원래 뜨거운 것이나, 시인의 의도로 보면 찬물을 많이 마셨으면 눈물도 의례히 차가와 할 터인데 오히려 뜨겁기 때문에, “차가운것”과 “뜨거운 것”의 대조 그것 역시 역설로 보아야 하겠다. 사실 일상에서 그 누구도 찬물을 많이 마시는것과 가슴이나 눈물이 뜨거운것을 련계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시인은 이런 역설적인 표현들로 “낯설게 하기”를 성공적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직설적인 표현이 아닌, 일상적인 지각을 막고 시인의 경험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다음 리듬적으로 볼 때, 이 시는 고정적인 틀에서 벗어나 2행, 3행, 4행, 2행의 파격적인 구조를 갖추었다. 하지만 필자의 좁은 생각으로는 시의 3련에서 “풀어보는 한과”에서의 “과”자는 사족으로,  없었으면 오히려 운률조성에 더 맞지 않을가 싶다.  3  세계의 사물들에 익숙하게 길들여진 존재가 바로 “우리”이다. 이러한 상투적 일상에 감염된 우리의 의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는 것이 시가 지닌 사명감이기도 하다. 달리 말해 낯익은 것들을 낯설게 바라보는 시선이 시가 지닌 역할이다. 일상을 전복하기, 전도된 일상을 형상화하기가 시인의 숙제이다. 규격화되고 도식화된 세계를 휘저어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한 고통이 시인의 숙명이다. 이와 같은 숙제를 성공적으로 하기 위하여 필요한 요소들에는 세계와 자아에 대한 애정, 섬세하고 차분한 관찰, 낯설게 바라보는 시선, 일상에 대한 치열한 반칙의식, 평범을 거부하는 비범한 수사학 등이 있다. 시란 결국 권태로운 일상을 초월하여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도록 자극하는 촉매제이므로 윤동주, 서정주, 박정웅, 남철심의  《자화상》은 일상을 거부하는 비범한 의식과 표현이 우리의 각질화된 상상력을 물렁물렁하게 연성화시켜주는 작품들이였다.       낯설게 하기는 문학언어를 일상언어와 구별시킬 뿐만 아니라 문학 내부의 력학(力學)을 가리키기도 한다. 한 지배적인 문학형식이 지나치게 자주 사용되어 당연하게 여겨지고 일상언어처럼 취급되면 종전에 종속적인 위치에 있었던 형식이 전경화되어 그 문학적 상황을 낯설게 만들고 문학 발전과 변화를 야기하게 된다. 즉 문학에서는 하나의  “낯설게 하기”가 보편화, 표준화되면 새로운  “낯설게 하기”를 창조해야 한다.  참고서(문):  1.「문학비평방법론」             김호웅    연변대학출판사    2000년  2.「아이러니와 역설」            이건주  (문학가산책)  3.「낯설게 하기와 의미론적 연관」김송배  (문학가산책)  4..「낯설게 하기의 시학」        양병호 
864    낯설게하기란 기존의 코트를 해체, 파괴하는 용감한 행동이다 댓글:  조회:2356  추천:0  2017-11-15
열린시론/“낯설게 하기” 글쓴이 최갑표(어울림교회 목사, 전북대학교 고고문화인류학 강사)    [2014년2월호]     물리적인 시간을 똑같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 시간에 특별하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성찰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는 의미도 깊어진다. 갑오년인 올해에도 설날을 맞이했다. 설날은 음력 새해의 첫 시작이다. 묵은해를 정리하여 떨쳐버리고 새로운 계획과 다짐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는 첫날이다.‘설날’은 순수 우리말로써 그 말의 뜻에 대한 해석이‘서럽다’에서 연유했다는 것과 나이를 댈 때 사용하는‘살’에서 비롯되었다는 등등 구구절절 하다.‘설익다’에서 유래했다고 하기도 하고, 겨울이라서 눈을 볼 수 있어서‘설(雪)날’이라고 불렸다는 이야기도 있다.‘선다’라는 말에서 연유한 것으로‘새해 새날이 시작되는 날’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선날’이 연음화 되어 ‘설날’로 변했다는 것이다. 또는‘삼가다’,‘사리다’또는‘조심하여 가만히 있다’라는 뜻의 옛말인‘섧다’에서 그 어원을 찾기도 한다. 완전히 새로운 시간의 질서에 통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언행을 삼가하고 조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설날에 대한 그 많은 해석 중에 나는‘낯설다’는 말에서 나왔다는 해석에 가장 공감한다. ‘설다’‘낯설다’의‘설’이라는 어근에서 나왔다는 것이다.‘새해에 대한 낯설음’과 ‘아직 익숙하지 않은 날’이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해석이다.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 혹은‘거리두기’(distanciation)란 용어가 있다.‘익숙해져 있는 사물을 낯설게 하면 그 사물의 본질이 보인다’는 것으로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처음 사용한 문학용어이다. 우리의 지각이 보통은 습관화된 틀 속에 갇혀있어 일상적인 삶과 사물은 본래의 의미를 잃고 퇴색하여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낯설게 하기’는 이러한 인식의 틀을 깨고 낯설게 하여 사물의 본래의 모습을 찾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는 뜻의 개념이다. 우리가 낯설음을 잃고 익숙해지면 대하기가 쉽고 편하다. 그러나 점점 편해지고 익숙해지면 그냥 모든 것에 순응하고 더 이상 세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으며 불의한 현실에도 저항하지 않는다. 꿈을 잃어버린 채 체념과 절망에 길들여진다. 그렇게 되면 삶의 어떤 모험도 감행하지 않는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편한 것만 받아들이는 동안 침묵과 방조를 통해 거대한 사회 구조의 폭력에 동조할 수도 있다. 자신이 경험한 세계를 전부로 알고, 그것을 재고의 여지없이 보편적인 기준으로 삼으려고 할 때 무리가 발생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정보와 경험이 세계의 모든 현상을 해명해줄 수 있다는 믿음은 극단주의를 낳고, 그 극단주의는 충돌과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불행하게도 오늘 한국은 그런 극단의 논리들이 횡행하고 있다. 한편의 시각에서 다른 한편을 일방적으로 규정해버린 데서 불행한 역사가 만들어진 것이다.  파타 모르가나(Fata Morgana)현상이라는 것이 있다. 일종의 북극권에서 발생하는 신기루 현상인데, 특정 기상 조건이 발생하면 빛의 반사로 인해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이 반사되어 하늘에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본다거나 숨이 가빠지는 것을‘파타 모르가나(Fata Morgana)현상’을 겪는다고 한다. 지금 부정선거로 등장한 불의한 권력의 정치 조건이 만드는 현상은 보이지 않아도 될 것들은 너무나 잘 보이고 잘 보여야 할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 세상이 되어 국민들이 숨을 쉬기가 너무 어렵다. 정치적 억압은 한시도 쉬지 않고 있으며 국민들을 길들이고 체제 순응을 강요하고 있다. 국민들이 서로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왜곡하고 상호멸시와 반감을 품게 한다. 권력과 자본에 의해 국민의 삶이 위협 받는 세상, 국민을 그만두고 싶다는 표현들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설날을 맞이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낯설게 해보는 것이다. 모든 것을 새롭게 보라는 외침이기도 하다. 세상과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들을 새롭게 보는 것이다. 그것은 거짓을 찾는 일이고, 그로부터 사실이라고 버릇처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들을 새롭게 밝히고, 그 길에서 착각하게끔 만든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맞닥뜨린 여러 가지 낯선 사건들은 이해할 수 있고 예상할 수 있는 사건도 있지만 인간의 이해와 계획을 벗어나기도 한다. 우리는 낮과 밤의 교차, 계절의 순환, 꽃의 피고 짐, 달의 차고 기움 등과 같이 우리가 아는 것과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우주 창조, 신, 죽음과 같이 낯설고 모르는 것들을 안고 함께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삶은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이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로운 세계를 향해 떠나는 두렵고 설레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여행의 진정한 의미는‘일상과 낯설게 하기’이다. 두렵지만 설레는 여행, 때로는 당혹스럽지만 즐거운 여행이 될 수 있는 까닭은, 낯선 곳에서 낯선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익숙하게 잘 아는 사실을 접하고, 늘 반복되는 삶을 사는 가운데서도 분명히 삶의 묘미를 맛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낯설고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는 기쁨,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새롭게 누리는 기쁨은 우리의 삶을 더욱 매력적이고 풍요롭게 한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든 낯선 이들을 찾아, 낯선 곳으로 떠나며 우주와 자연과 사람에 대한 통찰이 깊어질수록 나날이 살아서 숨 쉰다는 것이 기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낯설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우리가 겪은 경험의 세계로는 결코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맞게 되는 데서 오는 두려움과 당혹감이 있지만 동시에 그 낯선 상황을 경험하고 알아 가는 큰 즐거움이 있다. 영화가 재미있는 까닭은 현실과 다른 낯선 맥락을 끌고 들어오기 때문이고, 축제가 즐거운 이유는 낡은 일상을 낯설게 하기 때문이다. 익숙해져 있는 것을 낯설게 하면 그 본질이 보인다. 낯설게 하기는 기존의 코드를 해체하는 것이다.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비판하고 그 너머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다. 낡은 관념의 틀을 깨고 전혀 새로운 세계를 창출해 내는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질서가 갖고 있던 낡은 형식을 파기하고 새로운 시대를 예견하는 인간 해방적 삶의 태도이다. 습관적이고 일상적인 것을 낯설게 하고 끊임없는 의문을 제기하여 우리의 삶에 진정한 반전과 새로움과 황홀감이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863    러시아 문예학자 - 시클로프스키 = "낯설게하기" 댓글:  조회:4692  추천:0  2017-11-15
요약 "낯설게 하기"는 예술기법의 하나로 러시아의 문학자이자 형식주의자인 빅토르 시클로프스키가 개념화했다. 그는 사람들이 매일 마주치는 일상적이고 친숙한 것보다 새롭고 낯선 대상으로부터 미학적 가치를 느낀다는 사실에 착안했다. ‘낯설게 하기’라는 개념을 받아들인 브레히트는 예술이 심미주의로 흐르거나 이데올로기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지 않고 실천적인 가치를 창조하는 이론으로 정착시키는 데 기여했다.   일상적이고 익숙한 사물이나 관념을 낯설게 하여 전혀 새롭게 느끼도록 하는 예술기법의 하나. 빅토르 시클로프스키(Viktor B. Shklovsky)가 제안한 이 기법은 러시아 문예사조의 하나인 형식주의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고, 독일의 연극 연출가이자 시인인 베르톨트 브레히트(B. Brecht)에 이르러 중요한 결실을 맺게 되었다. 빅토르 시클로프스키 러시아 형식주의자 빅토르 시클로프스키(victor shklovsky) 1935년 러시아에서 메이란팡(梅蘭芳)의 중국 경극을 관람한 브레히트는 이를 통해 기존의 서양 연극이 가진 관습을 전복시키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다. 이른바 서사극이라 부르는 이 경극이 브레히트에게는 매우 낯설게 보였다. 이 연극의 요체는 관객이 연극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극의 현실에 거리를 두도록 하는 것이었다. 브레히트는 종종, 배우들로 하여금 연극이 끝난 뒤 관객을 향해 이렇게 말하도록 했다. “여러분, 하지만 현실에서는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 거리 두기의 목적은 관객이 몰입을 통해 지배 이데올로기 속으로 자연스럽게 빠져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는 분명하고 명백한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놀라움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연극적인 시도였다. 러시아의 형식주의자들이 ‘낯설게 하기’를 언어, 특히 시어(詩語)의 효과로 받아들인 데 반해 초현실주의자들은 이것을 사물의 효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초현실주의자들은 사람들이 사물을 낯설게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특별한 오브제를 사용했다. 이들은 무의식 속에 습관화된 이데올로기나 매일 보는 일상적인 대상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경이로움을 느끼도록 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대표적인 예로 마르셸 뒤샹의 를 들 수 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변기를 화려하고 우아한 미술관에 전시함으로써 변기는 전혀 낯설고 새로운 대상이 된다. 이때 변기는 변기의 용도를 넘어, 변기 그 자체로서 독립적인 대상물로 인지하도록 하여 보는 이의 이목을 환기시키고 신선한 충격을 준다. 시클로프스키=낯설게 하기       러시아의 문예학자 빅토르 보리소비치 시클로프스키Victor Borisovich Shklovsky(1893-1984)가 예술창작 이론으로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용어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는 일상적으로 접하는 익숙한 상황도 어린 아이가 세상을 보듯 낯설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낯설게 하기는 익숙한 세계를 낯선 시각으로 보면서 다시 구성하는 것입니다. 익숙한 이야기 구조는 수용자들에게 스토리를 쉽게 이해하고 친근함을 느끼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보편적인 이야기의 틀을 빌려올 수는 있지만 이것이 단순히 반복되기만 한다면 지루함을 줄 뿐입니다. 흥미나 긴장감이라는 반응을 유발시키기 위해서는 낯설게 하기 기법이 요구됩니다. 시클로프스키는 모든 기교성artfulness은 낯설게 하기의 기법이라고 했으며, 예술이란 그 기교성을 경험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문학을 문학답게 하는 문학성은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과 관련된다고 생각했고 이때 낯설게 하기의 방식에 의해 문학적 특성이 드러난다고 했다.  낯설게 하기는 시와 소설 등 그 장르적 특징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시에서는 일상 언어가 갖지 않거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리듬, 비유, 역설 등의 규칙을 사용하여 일상 언어와 다른 결합 규칙을 드러내고, 소설에서는 사건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플롯을 통해 낯설게 하고 주의를 환기시킨다.       ====================덤으로 더 공부하기...   1. ‘낯설게 하기’와 분행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에 의하면 리듬과 律格은 엄격히 구별된다. 율격은 이미 정해져 있는 기계적 형식이다. 이는 韻과 더불어 리듬을 형성하기 위한 부수적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리듬은 傳統律格을 파괴하여 소리와 의미에 충격을 주는 形成的 원리다. 이는 시의 다른 요소들과 관련해서 한 편마다의 시가 언제나 새롭게 형성되는 것이다. 리듬은 언제나 動的이다. 전통율격이나 표준 언어는 圖式化 되어 있어 낯익은 것이지만 이런 自動化를 파괴한 시는 신선한 충격을 준다. 낯설게 하기란 바로 예술의 본질이다. 리듬이란 이런 낯설게 하기의 산물이다.   山에는 꽃 피네 / 꽃이 피네 / 갈 봄 여름없이 / 꽃이 피네 // 산에 / 산에 / 피는 꽃은 /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 산에서 우는 작은 새요 / 꽃이 좋아 / 산에서 / 사노라네 // 산에는 꽃이 지네 / 꽃이 지네 / 갈 봄 여름없이 / 꽃이 지네 // - 김소월 -     이 작품은 3음보(3.3.4조의 음수율)의 전통율격에 의해 시어들이 조직화돼 있다. 그러나 소월은 3음보를 한 행으로, 때론 2행, 3행으로 배열하여 변화를 준다. 이런 변화가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형식주의 관점에서 보면 는 반복성과 대치성의 구조다. 4개 연의 끝이 모두 감탄형 종결어미 ‘~네’로 통일된 유사성을 띠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연은 의미론적으로, 行갈이에서 대칭구조를 이룬다. 미시적으로 1연의 생성과 4연의 소멸이 의미론상 대칭되고, 2연의 고독과 3연의 화합이 대칭된다. 거시적으론 1연과 4연의 외재연과 2연과 3연의 내재연이 대칭을 이룬다. 곧 외재연의 행갈이에 있어 3음보가 2행으로 分行되고, 의미론상 시공의 확산을 보인 반면, 내재연은 3음보가 1행으로 배열되거나 3행으로 배열돼 있으며 시공의 축소를 보인다. 산유화는 3음보의 등가체계로써 행을 분할하는 것을 파괴한 낯설게 하기의 기법이 구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반복과 대립이 얽혀 있는 규칙성을 보이는 것이다. 分行과 分聯은 근본적으로 일상 언어를 파괴하는 낯설게 하기의 기교다. 같은 구문을 분행했을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사이엔 의미의 차이가 발생하고 이는 운문과 산문의 차이가 되는 것이다.   낯설게 하기는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현대 자유시는 과거 자유시에 대해서 낯설게 하기의 산물이 되었으나 자유시에 익숙해진 오늘 날엔 더 이상 충격이 되지 않는다. 자유시가 자동화, 인습화 되고 있는 것이다.   2. 자유시와 산문시  정형시는 시의 정통성을 지키는데 있다. 이런 정형성을 파괴하고 이탈하는 형태가 자유시와 산문시다.   자유시는 유기적 형식이라는 낭만주의 관점에서 유래한다. 주어진 형식의 틀에 내용이 담겨지는 것이 아니라 내용에 맞는 형식이 자연스럽게 형성된다는 것이다. 낭만주의 관점에서 형식은 아직 불확실하고 미규정적이다. 시람 삶의 과정과 상응해야 하고 의미(관념)가 경험의 과정 가운데 있기를 원한 낭만주의 詩觀에서 - 내용이 형식인 정형시처럼 - 일정한 형식이 미리 주어 있지 않았다. 자유시의 자유란 - 운율, 행, 연의 규칙성에서 자유인 것이다.   산문시는 자유시를 지향하는 운동의 한 부분이다. 우리의 경우 육당의 , 춘원의 등 개화기 신체시에서 그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산문시가 자유시 운동의 일환으로 일어났다고 다 같이 전통 정형성을 파괴했다는 점에서 자유시와 산문시를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산문으로 씌어 진 이런 시는 일종의 잡종이다. 산문시는 짧고 압축됐다는 점에서 ‘詩的 散文’과 다르고, 행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자유시와 다르고, 보통보다 명백한 운율과 소리효과, 이미저리, 표현의 밀도를 갖춘 점에서 짤막한 산문의 토막과 다르다. 중간 운과 율격적 연속을 지닐 수도 있다. 자유시는 행(연)이 구성단위가 되지만 행 구분이 없는 산문시는 단락이 구성단위가 된다. 율격적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율격적 연속을 갖추어야 한다.   자유시나 산문시나 정형성에서 이탈한다는 점에서 비정통적이지만 엄격한 언어의 선택, 비유적 상징적 언어사용, 극적 수단과 표현의 밀도 등을 갖춘 점에서 시의 정통성에 닿아 있는 것이다.   3. 리듬의 현대적 의의   파운드(E Pound)는 시를 음악시, 회화시, 논리시로 구분했다. 음악시(melopoeia)는 음아적 성질을 통하여 직접적 호소력를 지니는 시고, 회화시(phanopoeia)는 시각적 이미지를 중시한 시고, 논리시(logopoeia)는 말의 이미지적 용법으로 이루어지는 아이러니컬한 특성을 지닌다.   현대시의 미학적 중심은 음악적 차원에서 시각적 차원으로, 지적이며 논리적 차원으로 변모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시에서 정서를환기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의 하나는 시의 음악적 성격이다. 현대시가 이를 외면한다는 것은 감수성의 분리가 아니라 정서의 상실을 의미한다. 정서의 상실은 시를 소외 시키는 원인이 된다. 결국 한 편의 시는 리듬, 이미지, 의미의 3요소의 유기적 결합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862    시는 낯설음의 미학이다... 댓글:  조회:2813  추천:0  2017-11-15
시와 낯설게 하기 김동수(시인, 백제예술대학 교수) 1. 직관과 감동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란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러시아의 형식주의자쉬글로브스키(shklovsky)이다. 이는 낯익은(familiar) 기존의 습관을 파괴(de)하여 경험의 세계를 새롭게 인식케 하는데 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일상 언어는 이미 익숙하고 진부하여 독자의 주의를 끌지 못한다. 그만큼 낯익고 낡은 언어라는 뜻이다. 그래서 시인들은 일상 언어로는 경험할 수 없는 낯선 언어, 곧 표현 형식을 다양하고 새롭게 시도하여 보다 신비롭고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고자 노력한다. 일상 언어는 내용 전달이 목적이지만, 문학 특히 시는 보다 짧은 시간에 감동을 불러 일으켜야 하는 간결ㆍ압축된 표현 형식이다. 그러므로 찰나의 움직임을 영원화하고 무한의 고요함을 찰나의 움직임으로 표현, 그러면서도 장황하게 서술하는 전체가 아니라 특수한 구성으로 압축된 전체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이처럼 독특한 언어 구성을 통해 시인들은, 단순한 듯하면서도 비약되고 평범한 듯하면서도 비범한 언어 형식으로, 사물을 새롭게 보면서 그 속에서 우주적 생명과 순일(純一)한 감동을 만나게 된다. 봄이 온통 벚나무 가지에 붙어 있다. 멀리서 보면 솜사탕을 꽂아 놓은 듯 가까이서 보면 팝콘을 튀겨 놓은 듯 봄이 온통 벚나무 가지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작자 미상 위의 시에서도 ‘봄이 온통/ 벚나무 가지에 붙어 있다.’고 낯선 표현을 하고 있다. 이는 현실 세계(actuality)에서 이루어지는 객관적 사실(fact)의 세계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주관적 해석과 느낌에 충실한 표현이다. 느낌, 그것은 어떤 대상을 총괄적으로 이해하는 지름길로서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는 정서적 바탕이 된다. 인간의 삶이란 객관적 사실보다는 그 사실을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이고 있느냐 하는 주관적 자세에 보다 큰 영향을 받게 된다. ‘봄(꽃)이 꽃나무 가지에 붙어(피어) 있다.’는 낯선 표현 또한 이러한 시인의 느낌에 충실한 표현이 아닌가 한다. 당신에게서 구겨진 물들이 걸어 나온다. -조연호, 「사라진 그녀들」 부분 난해한 듯한 이 싯구 또한 ‘당신이 얼굴을 찡그리며 울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시인은 이를 슬쩍 ‘구겨진 물(고통으로 일그러진 눈물)’ 그리고 ‘물들이 걸어 나왔다(눈물이 흘러 내렸다).’로 시적 변용(deformation)을 하면서 새로운 감동을 주고 있다. 이처럼 ‘낯설게 하기’란 갈 수 없는 길을 가고, 가능하지 않는 일들을 꿈꾼다. 그래서 그 길은 언제나 우리에게 낯설고 새로운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오솔길이 되기도 한다. 뻐꾸기가 울었다, 낭산을 도르르 말아 올린다. 경운기 끌고 탈,탈,탈 노랑나비 한 마리 오고 있다 노랑나비를 타고 온 낭산 하늘이 잠시 파르르 떤다. 무논에 콸콸콸 어린 봄이 재충전 되고 있다 왜가리 한 마리 진흙 묻은 자전거 타고 둑길로 오고 있다 뻐꾸기가 울었다, 둑길의 애기똥풀이 아장아장 봄나들이 간다, 낭산이 도르르 풀리고 있다 -김성춘, 「5월, 들」 전문 주객일체, 물아일체의 경지가 드러나 있다. 노랑나비가 경운기를 끌고 오기도 하고 농부가 노랑나비가 되어 탈탈탈 날아오르기도 한다. 이는 사람과 나비의 경계가 사라진 장자(莊子)의 물화계(物化界)와 다름이 아니다. 뻐꾸기가 커튼을 ‘도르르 말아 올리’자 한 폭의 그림처럼 낭산의 봄 풍경이 다가온다. 메말라 있던 무논에 간밤에 비가 내려 모처럼 ‘콸콸콸 어린 봄(물)’들이 재충전되면서 그 에너지가 퍼져 하늘도 ‘잠시 파르르 떤다.’ 저 둑길에선 흰 옷을 입은 키가 껑충하고 깡마른 그러면서도 허리가 굽은 늙은 농부, 그가 왜가리인지, 왜가리가 농부인지, ‘진흙 묻은 자전거를 타고 둑길로 오고’, ‘낭산이 도르르 풀리’면서 봄기운이 온 들녘으로 퍼져간다. ‘애기똥풀이 아장아장 봄나들이 가고’ 있다는 변주(變奏) 또한 물아일체를 배경으로 한 의인적 상상력이다. 이처럼 한 편의 시가 온통 은유와 의인법으로 낯설게 엮어져 신선한 감각과 충격으로 다가온다. 초여름 밤 무논에서 개구리들이 목청껏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소리로 엮은 새끼줄이 팽팽하다 갑자기 왼쪽 논 개구리들의 환호성 소리 폭죽을 터뜨린다 방금 오른 쪽 논의 개구리 소리줄이 왼쪽으로 기울었나 보다 -강명수, 「줄다리기」 전문 여름 밤 양 쪽 무논에서 울어대는 ‘개구리들의 울음 소리’를 시인은 ‘줄다리기’로 받아들이고 있고 있다. 이는 시적 변용(deformation)이요 또한 은유적 치환이다. ‘개구리 울음 소리’를 개구리 울음 소리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어떤 선입견도 없이 백지의 상태로 방임한 상태에서 만나게 되는 현상학적 환원이다. 그것은 경험적ㆍ객관적ㆍ과학적 인식의 세계가 아니라 판단 중지를 통한 선험적 태도로의 전회(轉回)에서만이 만나게 되는 순수, 곧 직관에 의한 순일(純一)한 감동의 세계가 아닌가 한다. 결국 시적 언어란 이처럼 순수 직관으로의 전회, 그리하여 기존의 언어와 관습적 인식에서 벗어나 사물을 얼마나 새롭게 인식하고 디자인(de+sign)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시인을 새로운 언어의 창조자요 디자이너(language designer)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2. 연기론(緣起論)적 인식과 상상력 시에서 흔히 보게 되는 반전(反轉)과 기상(奇想), 역설(逆說), 의인(擬人) 등, 곧 낯설게 하기의 배경에는 불교의 연기론적 인식이 그 기저에 깔려 있다고 본다. 예컨대, 구름이 비가 되고, 비가 내려 식물의 뿌리와 줄기에 스며들어 꽃이 된다. 그것이 열매가 되고 또 맛있는 과일로 익어가는 끊임없는 변전(變轉), 그것은 동일성(identity)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면 그리 놀라운 기상(奇想)도 반전도 역설도 아닌 순차적 변화 과정의 다른 이름들일 뿐이다. 하나의 동일선상에서 인연(因緣)에 따라 그때 그때 풀이 되고 나무가 되고 열매가 되어 형상(옷)을 달리하고 있을 뿐, 그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정체성(identity)에는 변함이 없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구름이 과일’이 되고, ‘고통이 영광(No pain, no crown)이 되며, ‘침묵이 변해 말씀(Speech is the change of silence)’으로 변해가는 이러한 일련의 연속적 과정, 그러고 보면 현대시에서 ‘낯설게 하기’란 시적 변용은 결국 연기론의 변화 과정의 한 단계에 다름 아니라 하겠다. 이별은 새벽 3시다. - 박민규,「이별」 부분 ‘이별은 슬프다’. 혹은 ‘이별은 쓸쓸하다’가 아니고 ‘이별이 새벽 3시’라니, 참으로 낯설고 돌발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이를 좀더 그 속뜻을 짜분하게 음미해 보면 참으로 기가 막힌 은유가 아닐 수 없다. 박민규는 대학 1학년이다. 아마 사랑하는 여자 친구와 어느 날 갑자기 원치 않은 이별로 잠을 이루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 학생의 심리적 추이 과정을 헤아려 보면 ‘이별의 상처와 충격 - 잠을 이루지 못하고 - 날이 새도록 뒤척이며 괴로워 함 - 뒤척이며 괴로워하다 보니 어느새 새벽 3시가 됨- 새벽 3시처럼 앞이 캄캄하고, 아무도 없고, 나를 봐 주는 이 하나 없는 - 어둡고 적막한 마음’ 이었으리라. 이 같은 심리적 변모 과정의 흐름을 압축하고 줄이다 보니 ‘이별은 = 새벽 3시’라는 낯설고 신비로운 하나의 은유가 탄생하게 된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 「국화 옆에서」전문 이 시 또한 불교의 연기론(緣起論) 혹은 인연설(因緣設)에 기초하여 한 송이의 국화가 피기가지의 인과 과정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불교에서는 어떤 일이 발생한다고 할 때, 그것이 단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강한 힘을 부여하는 직접적인 인(因)과, 거기에 간접적인 힘을 보태는 연(緣)과의 상호 결합의 결과로 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는 국화 자체의 힘은 인(因)이 되고, 소쩍새 울음(봄), 천둥(여름), 무서리(가을) 등은 연(緣)이 되어 하나의 국화라는 결과물이 탄생되기에 이른다. 이들은 모두 국화의 개화에 참여하는 전 우주의 협동 과정을 상징하는 대유물(代喩物)이다. 이러한 우주적 협동 과정의 연기(緣起)를 통해 비로소 ‘국화 =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라는 창조적 상징의 은유가 탄생되기에 이른다. 사나이 가는 곳 어디나 다 고향인데 (男兒到處是故鄕) 그 누가 오래토록 객수에 젖어 있나 (幾人長在客愁中) 한 번 큰 소리로 온천지를 뒤흔드니 (一聲喝破三千界) 눈 속에 핀 복사꽃도 흐드러져 날리네 (雪裏桃花片片飛) -한용운, 「오도송 悟道頌」 만해가 오세암에서 겨울 좌선할 때, 무슨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문득 깨치게 되었다는 오도송이다. ‘객지’가 ‘고향’이고, ‘눈 속’에서 ‘복사꽃’이 핀다. 이 또한 분명 기상(conceit)이고 역설이며 낯설고 이질적인 결합의 은유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우주적 질서와 선의(禪意)의 입장에서 보면 인생 자체가 하숙생이요, 나그네에 지나지 않는다. 봄에 피는 꽃도 실은 겨울의 눈 속에서 이미 배아(胚芽)되어 개화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라는 불교 연기론의 순환적 과정에서 깨치게 된 통찰의 세계라 하겠다. -전략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이육사, 「절정」부분, '문장',1940 육사는 일제의 혹독한 탄압과 감시에 쫓겨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는’ 북방고원으로 내몰리게 된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서 조국 독립의 꿈을 꾼다. ‘강철 같은 무지개’, 그것은 차갑고 완강한 식민지 현실이며 동시에 그런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조국 독립의 꿈’을 꾸는 그의 확고한 의지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겨울이란 시련은 오히려 그의 이상을 실현해가는 토대가 되고 씨앗이 되기에 ‘겨울 = 무지개’라는 은유적 추론이 가능케 된다. 강철처럼 차가운 겨울, 하지만 그 겨울을 잘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봄의 무지개가 됨을 그는 우리에게 역설적으로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 =============== 김(동수)[이하 같음] 교수는 먼저 "예술의 최대 적은 매너리즘"이라고 단언하면서, "예술가는 끊임 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하고 이 안에서 '낯설게 하기'가 나온다"고 말했다. 이어 '낯설게 하기'란 말은 곧 낯익은 기존의 습관을 파괴하여 새로운 경험의 세계를 새롭게 인식케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평범한 현상이라도 일상적 언어로 표현하지 않고, 표현방식과 형식을 달리하면 '낯선 것'이 나오고, '낯선 것'은 곧 '새로운 것'으로 생명을 가진 문학이 된다는 뜻이다. 김 교수는 "일상 언어는 내용 전달이 목적이기 때문에 전달 형식, 매개 수단이 그리 중요하지 않지만 문학 그중에서도 특히 시는 그 전달 매체인 언어가 곧 생명이기 때문에 형식이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또 "사람은 같은 사람인데 옷과 머리모양이 달라지면 다른 사람으로 보인다"며 "글 역시 은유법, 직유법 등 그 표현에 따라 내용까지도 다르게 느껴진다"고 주장했다. 형식의 새로움이 내용의 새로움, 곧 감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당신에게서 구겨진 물들이 걸어 나온다'는 시구절을 소개하면서 "일상적 표현으로 한다면 '당신이 얼굴을 찡그리며 울었다'는 내용이 된다"며 "일상적 표현을 탈피하기 위해 은유적으로 변화를 시킨 '시적 변용(deformation)'을 이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시적 변용'과 '낯설게 하기'란 갈 수 없는 길을 가고, 가능하지 않을 일들을 꿈꾸는 언제나 우리에게 낯설고 새로운 전인미답의 오솔길이 된다고 표현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강의를 듣는 이들에게 디자이너가 될 것을 주문했다. 이에 대해 "결국 시적 언어란 기존의 언어 전달 방식에서 벗어나 얼마나 사물을 새롭게 인식하고 새롭게 언어를 디자인하여 전달하느냐에 달려 있다"며 "이런 의미에서 시인을 언어 디자이너(language designer)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김 교수는 강의에 앞서 "바쁜 일상 속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어렵다"며 "전에는 '이 시가 좋다' 또는 '나쁘다' 평가를 했지만 이제는 시를 쓰는 그 마음만으로도 고맙다"고 말해, 문학적 여유를 즐길 수 없는 세태에 대한 씁쓸함을 표했다. 그러면서 "원문협이 문학으로써 메마른 사회에 단비와 같은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861    시인은 무대(시)뒤에 숨어버린 감독이여야... 댓글:  조회:2591  추천:1  2017-11-15
민속촌에서 어르신들이 초가지붕에 이엉을 얹고있다... 예전에 고향에서 할아버지, 아버지도 이엉을 얹던 모습이 지금 이 시각 그리워남은 또,ㅡ  시와 이미지(Visual Image)  시는 개념으로 생각하고 시각적 이미지로 느낀다. 러시아의 형식주의자 쉬클로프스키(V.Chklovski)도 ‘예술의 목적은 대상의 감각을 인식이 아니라 이미지로 부여하는 것이다.’고 했다. 시는 이처럼 관념 혹은 감정의 진술이 아니라 어떤 사상(事象)을 그림을 그리듯 이미지로써 상황묘사(描寫)하는 노력에서부터 시작된다. 마치 화가가 되기 위해 데상(dessin)에서부터 미술 공부를 시작하듯 묘사(描寫)는 습작기에 반드시 거쳐야할 소중한 시창작의 바탕이 된다.  그러기에 시인은 감독처럼 무대(시) 뒤에 숨어버리고 대신 시인이 제시한 객관적 상관물을 통한 이미지 제시로써 독자를 울려야 한다. 배우가 먼저 웃는 코미디가 없듯 시 속에서 독자보다 시가 먼저 울어야 되겠는가? “시가 스스로 울음으로써 독자를 먼저 울리려고 하는 시가 있다. 그런 경우 우리는 그러한 치기(稚氣)를 웃을 수밖에 없다.”는 김기림의 지적은 이런 의미에서 새겨볼 만하다.  *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  T.S 엘리어트가 주장한 시작(詩作)의 한 방법. 표현하고자 하는 어떤 정서나 사상을 그대로 나타낼 수 없으므로 그것을 대신 나타내주는(그것과 닮아 있는) 어떤 객관적 사물, 정황, 혹은 일련의 사건들을 선택하여 그것들을 유기적으로 결합해 놓음으로써 독자의 정서를 자극하는 표현기교.  1. 시는 이미지에 의한 정서적 환기다.  시인이 ‘외롭다’거나 ‘불안하다’는 심정을 전달하고자 할 때, 이를 직접적으로 ‘외롭다, 불안하다.’ 라고 진술하거나 토로할 것이 아니라 ‘외로움’과 ‘불안’의 정서를 자아낼 수 있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그려(제시하여)줌으로써 ‘외로움’과 ‘불안’의 정서가 효과적으로 유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는  *이 아니라 →   o. 그 여자는 예쁘다. → 그 여자는 모란꽃처럼 탐스럽다.  추상적 설명 구체적 감각(Visual 이미지)  o. 그는 성질이 냉정하다 → 그는 성질이 칼날이다.  추상적 설명 그림(Visual 이미지)  o. 나는 지금 나는 지금  몹시 불안하다. → 무너지는 절벽 위에 서 있다.  추상적 설명 구체적 상황(Visual 이미지)  o. 나는 외롭다. → 널따란 백사장에  추상적 설명 소라  오늘도 혼자랍니다. (구체적 상황제시)  2. 대상(對象)은 이미지로 인식한다.  -추상이나 개념보다 이미지가 앞선다.-  우리가 ‘어머니의 사랑’이란 단어를 떠올릴 때, 우리의 머리 속에 먼저 떠오른 것은 과거 경험 속에서 몸소 체험했던 그 어떤 구체적 영상 이미지가 클로즈업 되면서 비로소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예1) ‘어머니는 고맙고 사랑스런 분이다 ’  - 추상적 관념적 시어로서 구체적 체험의 재현이 없으므로 별다른 감동이 없다.  예2) ‘겨울날 학교에서 친구와 돌아오는 길에 길가에서 생선을 팔고 계시는 어머니’  - 구체적이고도 감각적인 영상 이미지가 재현됨으로써 우리를 위해 온갖 수모와 희생을 감수하시는 어머니상을 느끼게 된다.  예3)  들녘이 서 있다.  밤새 한숨도 못 잔 얼굴로  부시시  그러다 못해  앙상하게 말라버린  날카로운 촉수로  굳어버린 우리의 겨울은  보이지 않은 우리의 겨울은  차가운 들녘 위에  영하의 긴 침묵으로  꼿꼿이들 서 있다.  -김동수의 「겨울나기」, 1986년  자신이 처한 현실적 불행 상황을 ‘겨울’의 다양한 감각적 이미지로 형상화(形象化) 하여 독자들에게 그의 불행한 처지를 호소력 있게 전달해주고 있다.  겨울’이라고 하는 일반적 추상 의미가 흐릿한 관념의 틀 속에 가려(갇혀) 있지 않고 그가 맞고 있는 겨울이 보다 구체적이고도 생생한 현장감(Presence)으로 드러나 있다. ‘밤새 한잠도 못 잔 부시시한 얼굴’이거나, ‘앙상하게 말라버린 날카로운 촉수’, ‘영하의 긴 침묵’, 그러면서도 ‘꼿꼿이 서 있는’ 그러나 ‘보이지 않는 우리의 겨울’등 의인적 시각 이미지가 부정과 실의의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눈 감지 않는 오기와 집념으로 생동감 있게 살아 있다.  이처럼 관념, 개념, 사상 등도 정서와 더불어 시의 주요 내용이긴 하나 이것들이 감각적. 구체적으로 형상(이미지)화되지 못하면 예술적 감동이 죽거나 감소되고 만다.  예4)  무릎 앞의 소유는  모두 껴안고도  외로움의 뿌리는 깊어  사람이 부르면  날짐승처럼 운다.  어느 가슴을 치고 왔기에  사람이 부르면  하늘에 들리고도 남아  내 발목을 휘감고야  그 울음 그치나  -최문자의 「산울림」에서  자칫 관념적이고 상투적 인식에 그치기 쉬운 산울림(메아리)에 대한 개인적 인식의 정도가 남달리 개성적이고 치열하다. 활유법에 의한 역동적 표현, 그러면서도 이를 응축된 정서적 시어로 탄력 있게 이미지화 하여 외롭고 허망한 산울림의 내면적 속성을 호소력 있게 전달하고 있다.  3. 관념의 형상(이미지)화  추상적 관념을 소재로 하는 시에 있어서 관념어(사랑, 그리움, 슬픔 ....,)을 그대로 설명하거나 진술하는 것이 아니고, 한 폭의 그림을 보듯, 혹은 현장감 있게 구체적 이미지를 통해서 실감나게 표현(시각화, 청각화 등)하고 있는 것이 관념의 형상(이미지)화이다.  그러나 형상화는 단순히 겉모양을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안고 있는 본질적 특징이나 상징적 사건을 중심으로 시대적 풍경화를 포착하였을 때 시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 곽재구의 「沙坪驛에서」중에서  행상(行商)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막막하고 고달프게 살아가고 있는 변방인(서민)들의 고달픈 일상과 그 표정들을 ‘막차’, ‘간이역’, ‘밤새 퍼붓는 눈’, ‘톱밥 난로’, ‘대합실에서 졸고 있는 사람들’, ‘기침에 쿨럭이는 사람들’,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 등의 객관적 상관물(客觀的相關物)에 의해 꼼꼼하게 그려주고 있다.  출렁일수록 바다는  頑强한 팔뚝 안에 갇혀버린다. ---------절망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이미지화  안개와 무덤, 그런 것 속으로  우리는 조금씩 자취를 감추어 가고 --------존재의 소멸  溺死할 수 없는 꿈을 부등켜 안고  사내들은 떠나간다.  밤에도 늘 깨어 있는 바다 ----------- 포기할 수 없는 꿈  소주와 불빛 속에 우리는 소멸해 가고 --------- 존재의 소멸  물안개를 퍼내는  화물선의 눈은 붉게 취해 버린다. ------- 포기할 수 없는 꿈에 대한 안타까움  떠나는 자여 눈물로 세상은 새로워진다 ---극적전환(형이상학적 깨달음)  젖은 장갑과 건포도뿐인 세상은 ------을씨년스럽고 건조한 현실상황  누구도 램프를 밝힐 순 없다  바닷가 기슭으로 파도의 푸른 욕망은 돋아나고 -- 꿈에 대한 새로운 의지  밀물에 묻혀 헤매는  게의 다리는 어둠을 썰어낸다 ----------- 현실극복을 위한 행동개시  어둠은 갈래갈래 찢긴 채  다시 바다에 깔린다.  떠나는 자여  눈물로 세상은 새로와지는가 --‘눈물’을 통한 새로운 세계의 확신  우리는 모든 모래의 꿈을  베고 누웠다  世界는 가장 황량한 바다 -------- 그러나 아직 삭막한 현실상황 재인식  - 윤석산, 「바닷속의 램프」에서  절망적 상황에 갇혀버린 자신의 우울한 심사를 ‘출렁일수록 바다는/완강한 팔뚝 안에 갇혀버린다 ’거나 ‘어둠은 갈래갈래 찢긴 채/ 다시 바다에 깔린다.’ 혹은 ‘모래의 꿈을/ 베고 누워 있다.’등의 구체적 형상의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가 한 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인의 자기 고백이 아니라 시인이 제시한 시적 정서에 젖어들고 싶어함이다. 이는 한 편의 시가 시인의 주관적 감정의 발로이지만 그가 제시하고자한 그 주관적 감정을 향수하기 위해선 독자가 공유할 수 있도록 객관정서로의 제시 장치, 곧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 을 통한 주관적 감정의 객관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4. 좋은 이미지란?  1. 신선하고 독창적이다.  2. 차원이 높고 깊이가 있다.  3. 주제와 조화를 이루며 이미지들 간에 상호 유기적 상관성이 있다.  4. 이미지가 체험과 관련되어 구체적이고도 감각적이다.  6. 강한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환기성(喚起性)이 있다.  5. 이미지 창조의 방법  1.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볼 때 새로운 진실이 발견된다.(deformation)  2. 시는 실제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시인의 철학적 인식에 의해 선택된 주관적 감정이다.  3. 이미지가 시의 정서를 표현하는데 기여하지 않다면 과감하게 그것을 버려야 한다.  4. 불필요한 낱말이나 형용사는 가급적 쓰지 말 것. 그것들이 추상과 구체를 뒤섞으면서 이미지를 둔화시키기 때문이다.  5. 진정한 이미지는 부분적인 한 行, 한 句보다도 ‘시 전체의 그림’ 속에서 그 가치가 발휘되는 것이다  6. 이미지의 종류  1) 시각적 이미지  [대상을 - 시각적 이미지로]  o. 구름은 보랏빛 색지(色紙)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의 장미(薔薇) - (김광균의 )  * 구름 = 보랏빛 색지/ 한 다발의 장미  o. 초록 치마를 입고  빠알간 리본 하나로 서 있는 少女 -(박항식의 )  * 코스모스 = 빨간 리본의 소녀  [청각을 - 시각적 이미지로]  o.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 (김광균의)  * 종소리 = 흩어지는 분수  o. 꽃처럼 붉은 울음 -(서정주의 )  * 울음 =붉은 꽃  [관념을 - 시각적 이미지로]  o. 인생은 풀잎에 맺힌 이슬 (인생 = 이슬)  o. 그리움이란  내가 그대에게  그대가 나에게  서로 등을 기대고 울고 있는 것이다.  * 그리움= 등을 기대고 울고 있는 모습  o. 내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가도 그림자 지는 곳 - (김광섭의 )  * 마음 =고요한 물결  o.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라. - (김동명의 )  * 마음 =흔들리는 촛불  2) 청각적 이미지  [사물을 - 청각적 이미지로]  o. 워워, 꼬끼오, 짹짹, 졸졸, 돌돌  o. 윙윙, 쏴아아 쏴아-, 주륵 주륵  [상황을 - 청각(공감각)적 이미지로]  o.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정지용의 )  *차가운 밤바람 소리 = 말 달리는 소리  o. 우우 몰려 왔다  포말(泡沫)지는  하얀 새떼들의 울음 -(김동수의 )  *물거품 사그라지는 소리 = 새떼들의 울음  [시각을 - 청각적 이미지로]  o. 피릿소리가 아니라  아주 큰 심포니일거야 -(박항식의 )  * 눈 = 심포니  o. 발랑 발랑 발랑 발랑  조랑 조랑 조랑 조랑 - (박항식의 )  * 포풀러 = 발랑 발랑  [관념을 - 청각적 이미지로]  o. 산이 재채기를 한다. - (박항식의   * 청명 = 재채기  *청명: 춘분과 곡우 사이에 있는 24절기의 하나(양력 4월 5. 6일 경)로 봄이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됨.  o. 어쩌다 바람이라도 와 흔들면  울타리는  슬픈 소리로 울었다. -(김춘수의 )  * 부재= 슬픈 소리의 울움  ===================================================================     ―정재학(1974∼ ) 바다에 가라앉은 기타, 갈치 한 마리 현에 다가가 은빛 비늘을 벗겨내며 연주를 시작한다 소리 없는 꿈…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만 부끄러워져 당분간 손톱을 많이 키우기로 마음먹는다  백 개의 손톱을 기르고 날카롭게 다듬어 아무 연장도 필요 없게 할 것이다 분산(奔散)된 필름들을 손끝으로 찍어 모아 겹겹의 기억들 사이에서 맹독성 도마뱀들이 헤엄쳐 나오도록 할 것이다 달의 발바닥이 보일 때까지 바다의 땅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나도 나의 사정거리 안에 있다 네가 고양이처럼 예쁜 얼굴을 하고 딸꾹질을 하고 있는 동안 나는 보라색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생선이 되어 너의 입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아무 미동도 없이, 고요하게 어른이 되고 싶었다       화자에게 삶은 음악의 형상으로 전해지고 그 연주가 삶의 형식이다. 화자 자신이기도 하고 화자가 생을 표현하는 도구, 가령 시이기도 한 기타. 그 기타 바다에 가라앉아 버렸단다. 아연실색 망연자실이련만 ‘현에 다가가’는 화자다. 한 마리 갈치가 되어서라도 기타를 버리지 않고 전신으로 ‘은빛 비늘을 벗겨내며 연주를 시작한’단다. 하지만 역시 ‘소리 없는 꿈’,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망가진 악기, 망가진 삶. 무엇이 화자를 이런 악몽에 처하게 했을까. ‘네가 고양이처럼 예쁜 얼굴을 하고 딸꾹질을 하고 있는 동안’, 이 구절의 ‘너’는 예쁘고 앙큼한 어떤 여인이거나 그 여인으로 의인화한 이 사회다. 딸꾹질하는 그녀는 만취한 걸까, 격렬하게 울고 있는 걸까. 어쩌면 그녀는 대화할 의사가 없음을 딸꾹질로 교묘히 숨기고, 혹은 드러내는 것인지 모른다. 아무튼 그녀가 딸꾹질을 해대는 ‘동안’ 화자는 ‘보라색을 뚝뚝 흘리고 있었’단다. ‘보라색’은 세상이든 자기 자신이든 가리지 않고 파헤치고, 가차 없이 채찍질하고 담금질하겠노라 맹세하는 둘째 연에 붙으면 피 같은 선율이 되고, ‘생선이 되어 너의 입속에 들어가고 싶었다/아무 미동도 없이,/고요하게’에 붙으면 나약한 눈물이 되리라. 영국의 작곡가이며 색소폰 연주자 존 서먼의 곡목에서 딴 제목이다. ‘어른이 되고 싶었다’…. 4월 16일, 오늘의 궂은 날씨만큼이나 마음이 안 좋다. 이만 줄여야겠다.
860    시인은 조탁능력이 있는 연금술자가 되여야... 댓글:  조회:2455  추천:0  2017-11-15
■ 시인이 싸워서 이겨야 할 것들 환경에 적응하며 살다보면 '콩은 밭에서 나고, 고기는 물에서 난다'라는 공식 비슷한 것이 우리의 뇌에 입력된다. 이런 관습이 모여서 덩어리를 이루는데 바로 고정관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는 이미 굳어진 예전의 생각에서 조금씩 이탈하는 가운데 발전을 지속 하여온 역사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옛사람들은 예전의 생각을 씻어내어 새로운 생각을 부른다는 뜻의 '탁거구견 이래신의(濯去舊見 以來新意)'해야 발전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 말은 지금도 유효하고, 특히 시를 쓸 때는 너무나도 필요한 생각인 것이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점점 파도의 속삭임에 익숙해지면 그 소리에 감동하지 않는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우리들이 말하는 내용이 이미 알고 있는 친숙한 것일 때는 그 말에 사람들은 귀 기울이지 않는다. "낯익은 사람끼리는 서로 바라보지만(look) 서로를 주의 깊게 쳐다보지(see)않는다" 이 말은 유명한 형식주의자이면서 시의 문학성(文學性/literariness)을 낯선 이미지의 구조로 보는 그 유명한 '낯설게 만들기'의 주창자인 러시아의 쉬클로프스키(V. Shklovski)의 시론이다. 그는 '언어의 친숙화는 가장 비시적(非詩的)인 것'으로 규정하였다. 나는 그동안 기회있을 때마다 우리의 고정관념을 탈피한 낯선 언어로 시를 쓰자고 강조한바 있다, 반면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거나 누구에게나 친숙한 것들은 시를 맹물로 만드는 주범이라고 지루하리만치 강조하여 왔다. 그러나 우리 시사모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 아직도 이 기초적인 시작법을 이해하거나 익히지 못한 것인지 그리움타령, 사랑타령, 꽃타령, ~하노라 등의 고어체나 교조적, 지시적, 확정적인 옛 시인들의 시풍을 흉내내는 글이 많다. 시인이 대항해서 투쟁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친숙함과 일상의 고정관념을 이기는 일이다. 상투적 표현과 습관적 문맥에 치명적 일격(致命的 一擊/coup degree)을 가해서 심미안(審美眼/아름다움을 살필 수 있는 안목)으로 새로운 결(texture)을 만드는 작업이 '시짓기'인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도 중요하여 다른 말로 다시 강조한다. 시짓기의 목적은 사물들이 알려진 그대로가 아니라 새로운 감각을 부여하는 것이고, 우리의 행동, 개념, 물체 등이 지닌 특성을 그것과 다르거나 상관없는 말로 바꾸어서 간접적이며 은유적으로 나타내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시 짓기의 가장 기초적 작법인데 영어로 메타포(metaphor)라고 한다. 위와 같은 언어의 용법은 무카로프스키(J. Mukarovsky)에 의해 체계화된 전경화(前景化/foregrounding)로 설명되기도 한다. 전경화란 탈선(脫線/deviation) 즉 규칙과 인습에 대한 위반이라는 개념으로 해석된다. 즉 일상적인 언어들은 배경화(背景化/back grounding)하고 낯선 시어들을 전면에 제시(전경화)하는 작법이다. 이것은 언어의 조탁능력(彫琢能力)이기도 하다. 언어가 잘 조립되어야 시(詩)가 완성되는 것임은 두 말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언어 조탁시 참고할 네 가지 1, 감동이 있어야 하고, 2, 말의 품격이 있어야 하며, 3, 시대를 읽을 줄 알아야 하며, 4, 시인의 진술이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는 쓴 커피와 같다. 쓴 커피를 처음 마셔본 사람들은 '이런 것을 왜 마시지?'라는 의구심이 들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커피를 마시다 보면 커피의 맛을 알게 되고, 더 좋은 향이 나는 커피를 찾게 되는 것이다. 시도 그렇다. 시의 깊은 맛을 모르는 사람은 언어를 새롭게 하거나, 언어의 조탁에 필요한 요소들을 무시한다. 그들은 달고 목으로 넘기기 좋은 시를 선호한다. 그런 시가 좋은 시라고 가르치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다. 물론 그런 시 중에 좋은 시도 있다. 그러나 현대시가 추구하는 시작법과 조탁능력을 기르지 않으면 깊이있는 시를 쓰기가 쉽지않다. 그런 사람들에게 시의 가벼움을 지적하면 오히려 대들기도 한다. 이것은 마치 언어의 정화능력이 없는 어린아이들이 비속어로 대화하는 것을 나무라는 어른에게 대드는 것과 같다. 자기들끼리 잘 통하고 재미있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항변한다. 이런 사람들은 불량식품 같은 시를 쓸 가능성이 많다. 또한 언어의 조탁능력이 있는 시인이 아무리 좋은 시를 썼다고 할지라도 삶이 엉터리인 사람, 인격이 피폐한 사람은 시 만드는 기술자(글쟁이)이지 시인이 될 순 없다. 그 시는 공허한 것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우리나라 시의 정부(政府)라고 일컬음을 받는 서정주 시인이 잠깐의 엇길 행각으로 인해 그의 시를 공허하게 보는 사람이 많은데 하물며 삶이 제대로 받혀주지 못하는 사람이 쓴 글이랴. -이어산,
859    글쓸 때 시집을 한쪽켠에 놓고 글써라... 댓글:  조회:3190  추천:0  2017-11-15
  ▲  고종석의 글쓰기 강좌       고종석의 한국어 글쓰기 강좌 1권, 2권 읽기... "좋은 글은 명료합니다. 그리고 아름답습니다. 명료하고 아름다운 글이 좋은 글입니다." 저자는 명료하고 아름다운 글의 대표적 사례로 김현 선생의 '말들의 풍경을 시작하며'라는 글을 추천합니다. 저자는 자신이 진행하는 한국어 글쓰기 강좌에서 김현 선생의 글을 독자들과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단순히 좋은 글을 읽은 소감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말들의 풍경을 시작하며'를 마치 해부학 실습을 하듯이 한 문장 한 문장씩 끊어서 내용과 형식을 자세히 파악하고 명료함과 아름다움의 사례를 살펴봅니다.  섬세한 글을 쓰고 싶으면 '시'를 읽어라 ...글쓰기 팁 중 하나는 '시를 읽어라'와 '사전을 곁에 두고 활용하라'입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먼저 '시를 읽어라'는 섬세한 글을 쓰려면 시를 읽는 것이 좋다는 겁니다.  "시인들은 소설가나 에세이스트 같은 산문가들보다 말을 고르는 데 굉장히 신중하거든요. 물론 어떤 시인은 어떤 산문가보다 언어감각이 더 못할 수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시인이 산문가보다 언어감각이 한결 예민하고 심세합니다." - 본문 중에서 시를 읽다보면 말의 리듬감이 몸에 배고 산문을 쓸 때도 리듬감 있는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를 읽을 때는 리듬감이 몸에 배일 수 있도록 소리내서 읽는 것이 좋고, 자기가 쓴 글도 소리내어 읽어보는 게 좋다고 합니다. 또 좋은 글을 쓰기 위한 중요한 원칙 하나는 '사전 활용'이라고 강조합니다. 늘 잡문이나 쓰는 저는 한 번도 사전을 곁에 둬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다. 가끔 컴퓨터로 국어 사전을 찾아보거나 맞춤법을 확인하기는 하지만 사전을 곁에 두고 확인해야 한다는 철저함이 몸에 배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글을 쓸 때는 항상 사전을 옆에 비치하세요. 조금이라도 불확실한 것은 반드시 확인한다. 확인이 되지 않으면 쓰지 않는다. 이런 원칙을 세우고 지키십시오. 틀린 말을 쓰느니 아예 안 쓰는게 좋아요." - 본문 중에서 여기서 사전이란 그냥 국어사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의어사전, 반의어사전, 연관어사전 같은 것을 갖추는 것이 좋다는 겁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말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머릿속에 다 담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사전을 곁에 두고 활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표현의 자유가 특권이 되어서는 안 된다 2권에서도 실전 강의를 위한 예제 텍스트는 저자의 전작인 입니다. 에 포함된 여러 글을 인용하면서 때로는 새로 다듬기도 하고, 고쳐쓰기도 하며 마치 강독 하듯이 긴 설명을 덧붙이기도 합니다.  그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내용 중 하나는 저자가 '표현의 자유'에 대하여 언급한 부분입니다. 저자는 강정구 교수와 사르트르를 예로 들면서 '표현의 자유'가 선별적으로 적용된 사례라고 평가합니다.  악법을 폐지하기 위해서는 악법을 계속 어겨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그 악법이 유명한 사람이나 지식인들에게는 특별히 관대하게 적용되는 일이 많기 때문에 오히려 법치주의가 흔들리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표현의 자유를 넓혀야죠. 거의 무한대로 넓혀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표현의 자유를 넓혀야 합니다. 자유가 특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 본문 중에서 예컨대 그것이 관례든 법이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악법을 어기는 것보다 악법을 고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2권에서 눈여겨 봐야 할 주제 중 하나는 '구별짓기와 차이 지우기'입니다. 소비생활에 '과시효과'(잘난 체하기)가 있는 것처럼 글쓰기에도 그런 특성이 배어 난다는 것입니다.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도 비슷한 개념이라는 겁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보다 낮은 계급의 사람들과 취향을 구별지으려고 애씁니다. 그리고 반대로, 낮은 계급의 사람들은 그 차이를 지우기 위해 무리를 해서라도 상류층의 취향을 따르려고 합니다." - 본문 중에서 대중적인 운동인 축구에 비하면 골프는 구별짓기에 해당되는 운동이고, 맥주에 비하면 와인이 구별짓기에 해당되는 술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언어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표준어와 대략 일치하는 서울, 경기 지방언어를 익히는 모습이 그와 비슷하다는 것이지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프랑스, 일본어에서도 그와 같은 특징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네요. 그런데 특이한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이른바 표준어뿐만 아니라 방언도 주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영남방언 즉 경상도 사투리라는 겁니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한 사회의 최상류층과 최하류층은 자기가 태어나서 배운 언어를 어지간해서는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영남방언이 해당된다는 것이지요.  이런 구별짓기의 욕망이 잘 드러나는 사례로는 기자, 의사, 변호사 혹은 전문직 종사자들이 사용하는 전문용어들이라고 합니다. 그 사회에서 힘을 가진 세력들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짓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라는 것이지요. 과거 학생운동 활동가들에게도 이런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지요.  구별짓기 글쓰기 사례 - 전혜린, 양주동, 피천득 말뿐만 아니라 글에서도 이런 구별짓기와 차이 지우기가 많이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구별짓기의 나쁜 예로 '작가 전혜린'을, 독보적인 구별짓기 문체 사례로 '양주동'을, 천박한 글쓰기의 사례로 '피천득'을 들었습니다. 이 책을 읽어면서 처음 깨닫게 된 내용도 있었는데 바로 '으르렁말과 가르랑말'에 관한 것입니다. 새뮤얼 이치예 하야카와라는 미국 언어학자가 쓴 책에 나오는 선전언어를 분류하는 기준인데요. 가치중립적인 말이 아니라 감정이 많이 들어간 말인데 부정적인 감정이 섞인 말이면 으르렁말이고, 긍정적인 방향이면 가르랑말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예컨대 저자는 신앙인, 교인, 예수쟁이라는 말 가운데 신앙인은 가르랑말에 가깝고, 예수쟁이는 으르렁말에 가깝다는 겁니다. 중매인과 뚜쟁이, 스파이나 정보요원 같은 단어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물론 가장 대표적인 으르렁말은 '욕'이고 전형적인 가르랑말은 연인들의 '밀어'라고 합니다.  이 시대에 가장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사례들에 속하는 노빠, 안빠, 박빠 같은 말이나 종북, 좌빨, 수꼴 같은 말들은 으르렁말의 대표적인 사례라는 것입니다. 광고 카피와 추도사 등에 널리 사용되는 사례를 소개하는데, 브루투스와 안토니우스의 추도사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전략적 글쓰기를 위해서는 으르렁말과 가르랑말을 적절히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긍정적인 방향이든 부정적인 방향이든 사람의 감정이나 마음을 움직이는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는 두 가지 표현방식을 적절히 구사하는 게 효과적이라는 겁니다.  으르렁말과 가르랑말도 생소하였지만, 저의 경우 로마자표기법과 외래어 표기법에 대한 공부도 처음이었습니다. 저자는 영어가 언어 세계의 최강자가 되고, 로마자가 문자 세계의 최강자가 된 까닭을 말해줍니다.  으르렁말과 가르랑말 활용하기 그리고 한국어의 로마문자 표기 방식이 매큔-라이샤워식, 문화부식, 예일식이 있다는 사실로 나아갑니다. 세 가지 표기법의 특성에 대하여 꽤 복잡한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결론은 '정부의 표준안'을 따르자는 것입니다.  글쓰기 이론 강의에서는 심리형용사의 인칭 제약, 한국어의 재귀 표현, 띄어쓰기에 관해 이야기 합니다. 약간 어려운 이야기들도 있지만 거칠게 요약하자면 모두 매끄럽고 자연스러운 표현을 강조합니다.  띄어쓰기에 대해서는 "각 단어는 띄어 쓰되 조사는 붙여 쓴다", "조사는 앞단어에 붙여 쓰고 어간과 어미도 붙여 쓴다"와 같은 아주 기본적인 원칙만 지킨다면 언어 직관에 따라 써도 된다는 겁니다.  글쓰기 이론 강의를 하나만 더 소개하면 '은유와 환유'에 대한 설명입니다. 글쓰기는 결국 논리학과 수사학으로 이루어지는데 수사학은 은유와 환유가 핵심이라는 것이지요. "제가 오늘 수사학에 대해 얘기하면서 주제를 은유와 환유로 한정지은 것은, 수사학의 요체가 비유이고 비유의 요체가 은유와 환유이기 때문입니다." - 본문 중에서 은유와 환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러시아 출신 언어학자 야콥슨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더군요. 야콥슨 이론의 요지는 "은유는 본관념과 보조관념의 유사성에 기초하고, 환유는 본관념과 보조관념의 인접성에 기초한다"라고 합니다.  언어학자의 연구를 요약한 설명은 좀 어렵지만 책에 소개하고 있는 사례를 보면 낯설지 않습니다. 예컨대 '내 마음은 호수' 같은 표현이 은유이고, '요람에서 무덤까지'와 같은 말들이 환유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널리 사용되는 환유적인 표현에 대하여 상세하게 소개하면서 좋은 글쓰기를 위해서는 숙어를 많이 알수록 유리하다고 강조합니다.  첫 문장을 잘 쓰기 위한 고종석의 전략 이 밖에도 외국인의 이름을 표기할 때 역사 인물과 현대인을 다르게 표기해야 하는 까닭, 지명과 나라이름 등을 표기할 때 엔도님과 엑소님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사례들을 설명하는데, 널리 알려지지 않은 외국인의 인명과 외국의 지명을 쓸 일이 흔치 않아 자세히 기억해두지는 않았습니다.  훗날 그런 일이 생기면 을 다시 찾아 읽게 되겠지요. 1권에 이어 저자가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은 바로 '첫문장'입니다. 저자는 1권에서도 글쓰기에서 첫문장과 끝문장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한 바 있지요. 저자는 청탁을 받아 글을 쓸 때 첫문장을 시작했던 경험들을 들려줍니다. 첫째 옛날 경험 돌아 보기, 둘째 시사적 사건, 친구와의 대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주제와 관련된 거리 모으기, 셋째 해당 주제와 관련된 에피소드로 시작하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어사전을 펼쳐놓고 주제와 관련된 연관개념 찾아보기로 시작하기입니다.  어떤 주제나 소재에 관해 쓰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막상 글을 쓰려고 앉았는데, 첫 문장부터 막힌 기억이 있다면 저자의 경험담을 기억해 두었다 참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행갈이를 하여 문단을 나누라거나 분량이 제한된 글쓰기를 연습해보라는 조언도 새겨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간결하고 아름다운 글을 쓰기 위해서는 분량을 제한하는 연습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이 밖에도 글쓰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요? 글의 주제는 어떻게 잡나요? 창의성과 독창성은 어떻게 기르나요? 글감은 어떻게 찾나요? 같은 글쓰기 강좌 수강생들과 주고 받은 즉문즉답도 정리되어 있습니다.  특히 그는 글감을 어떻게 찾느냐는 질문에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매순간 순간이 모두 글감이라고 말하면서 조금만 생각을 하면서 삶을 한 번 돌아보라고 충고합니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으면 글을 쓰라   흔히 사람들은 생각이 정리되어야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저자는 생각이 정리된 후에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면서 생각이 정리되었던 경험이 훨씬 많았다고 강조 합니다.  저자 고종석은 인터넷이라는 도구가 '글쓰기의 민주화'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합니다. 인터넷 덕분에 기자, 작가, 저자 같은 계급장이 없어도 글을 쓸 수 있고 사람들에게 읽히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글을 쓰는 사람들은 삶은 글을 쓰지 않는 사람들에 비하여 그 자체로 훨씬 아름다고 풍요로울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글을 안 쓰는 사람보다는 글을 쓰는 사람이 더 좋은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물론 글을 안 쓰더라도 뭐, 몹쓸 삶은 아니죠. 그래도 글쓰기가 전제하는 책읽기나 생각하기 같은 것들이 영혼을 고양시키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 본문 중에서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글쓰기가 타고 나는 재주가 아니라 연습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자가 1권부터 강조했듯이 꾸준히 연습하면 누구나 나아진다는 것이지요. 타고난 재주보다 꾸준한 노력과 연습으로 충분히 좋아질 수 있다는 저자의 이야기에 여러분도 희망을 걸어보시기 바랍니다. /// 오마이뉴스 ======================덤으로 더... 통영 출신의 김춘수(金春洙: 1922 - 2004) 시인이 ‘귀향(歸鄕)’이란 시에서 윤이상(尹伊桑; 1917 - 1995) 작곡가와 전혁림(全爀林: 1916 – 2000) 화가를 말한 부분을 읽는다.  ..그날  뇌조(雷鳥)는 뇌조의 몸짓으로 멀리멀리 사라져 가더라고 했다. 그건 구(球)도 원통(圓筒)도 원추(圓錐)도 아니더라고 했다. 그건 빛이며 빛이 아닐까 전혁림은 그날 그런 생각을 해봤을까, 오랜만에 와보니 윤이상은 또다시 촛대마냥 말라 있다... 학교에서는 '뇌조는 빛'이라는 구절은 은유(隱喩)로, '촛대마냥'은 직유(直喩)로 설명했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다.  시를 그렇게 문법으로 분석하며 읽는 것은 재미를 반감시키기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직유도 하나의 은유“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직유도 하나의 은유라는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修辭學)’에서 한 말이다.  은유를 설명하는 많은 책들 가운데 눈에 띄는 책이 내게는 철학자 김형효 교수의 책(‘마음 혁명’)이다.  저자는 ”백합화 같은 소녀는...했다”라는 문장을 예로 들며 은유법은 백합화 즉 현장에는 없는 숨은 단어로 소녀를 설명하는 수사법이라는 말을 한다.  이에 비해 “술 마시자“는 말을 ”술 한 잔 하자”로 표현하는 것에 쓰인 환유법(換喩法)은 술과 술잔의 상호 인접성에 근거를 둔 수사법이다.  은유가 현장에는 없는 것을 끌어들이는 수사법이라면, 환유는 술을 현장에 함께 있는(인접해 있는) 술잔으로 표현하는 수사법 즉 장소를 바꾸는(치환하는: 換) 수사법이다.  수사학은 세상을 인간 중심으로 더 잘 이해하려는 소유욕의 일종이라 말하는 저자에 의하면 은유는 정신적 소유를, 환유는 물질적 소유를 의미한다.  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글이 최현식 교수의 ‘감응의 시학’에 나온다.  저자에 의하면 은유(적 언어체계)는 오로지 주체의 관점에서 대상을 동일화하는 데 반해 환유(적 언어체계)는 한 개체와 다른 개체의 인접 관계 즉 연관성에 주의한다.  저자는 서정(抒情)을 모든 것을 자기화하는 권력적인 것으로 정의한다.  김형효 교수가 말한 소유를 이해할 글로 “서정은 이미 말해지거나 의도된 욕망을 넘어서는 감각의 운동”이며 “실재계를 끊임없이 배반하며 차이와 위반을 생성하는 감응 행위”라는 문장을 들 수 있다.(‘감응의 시학’ 15 페이지)  진리, 구조, 가치 등 우리가 사용하는 학문적 용어들까지도 은유라는 말을 한 사람은 니체이고, 두 관념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유지될 때라야 은유는 의미를 지닌다는 말을 한 사람은 김애령(철학자)이다.(‘여성, 타자의 은유’ 75 페이지)  은유 없이는 그 어떤 글쓰기 작업도 불가능하며 극단적으로 말할 경우 모든 글이 은유적인 글인지도 모른다.(최문규 지음 '문학이론과 현실인식' 35 페이지) 읽는 것이 인생(Lesen ist leben)이라는 독일어가 있다. 쓰기가 인생이라는 말도 가능할 것이다. 읽기나 쓰기가 인생에서 절대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읽기(쓰기)는 닮은 듯 다르게 이전 것을 반복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인생과 닮았다는 의미이다.  모든 사람은 섬(고립된 존재)이지만 어느 누구도 섬이 아니다. 즉 전적으로 고립되어 있지 않다.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타인과 연결되어 있고 그 관계 안에서만 의미 있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김애령 지음 '여성, 타자의 은유' 5, 6 페이지)  전적으로 고립되지 않은 것을 닮은 것으로, 고립된 것을 다른 것으로 볼 여지가 있을까? 아니 그렇게 보고 싶다. [출처] 은유와 환유, 닮은 듯 다르게|작성자 치자꽃근처
858    시작은 "은유와 환유"라는 두 녀자를 사귀러 가는것이다... 댓글:  조회:3261  추천:0  2017-11-15
경기 안산의 누에섬 저녁 일몰 풍경.  가을 끝자락의 하늘의 표정도 가을이다. ///사진가 -김성일-(필자 주; 같이 감상하는 나눔의 공유도 봉사이며 비움의 행동입니다...) ■ "나의 두 여자, 은유와 환유"/ 이빈섬  우린 늘 언어와 문자에 골몰하면서도 그걸 쉽게 경멸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말 잘하는 놈을 보면 밸이 틀린다. 뭔가 번지르르한 말결 속에 교묘히 허수를 숨기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시나 수필을 쓰면서도 은유와 환유가 풍겨내는 지분냄새같은 것을 지독하게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기름끼 다 빼고 정말 언어의 견결한 골조만 남은 시, 수필을 쓰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런 것이 가능할까? 문학에서 은유와 환유가 들어올린 공간을 모두 제거해버리는 일이? 물론 그건 번답과 화려가 본질을 가리고 진의를 에두른 적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다이어트의 희원임을 모르진 않는다. 그러나 그건 은유와 환유가 좀더 평상어에 가까운 방식으로 슬림해지는 것이지, 그것들에 대한 무차별의 삼제가 될 수는 없다.  문학의 심연은 어쨌든 문자가 들어올린 그 여지의 활기와 비의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교환을 위한 통상의 문자들만을 줄세워 문학을 할 수는 없다. 그건 문학의 순정성의 증표가 아니라, 문학을 압살하고 경멸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평상어의 눈으로 시와 산문을 재단하려는 모든 기도를 나는 반대한다. 복잡한 문장, 섬세한 뉘앙스에 대한 가차없는 경멸. 여기엔 정말 심각한 무지와 오해가 있지 않나 싶다. 우선 우리나라 국어교육과 언어사회학의 죄악이다. 논리를 즐길 줄 아는 교육을 받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논리가 돼야 수사학이 된다. 무슨 뜻인지 파악하는 눈과 귀가 없는데 어떻게 그게 즐거울 수가 있으랴? 또 많은 달변가들과 문자쟁이들이 사람을 현혹시키고 본질을 어지럽히는데 그 재능을 써오기도 하였다. 그러니 지레짐작 말 잘하는 놈은 의심부터 하고 볼 일인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마음이 중요하지, 그것을 표현하는 재능은 별 거 아니다. 기본적인 말만 할 줄 알면 되는 게 아닌가. 이런 통념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먹혀들어가면서 그것과 대립되는 능력인 화술과 언어재능과 시적감각들이 세상살이에 별로 소용없는 물건으로 치부되게 되었으리라. 그러나 과연 그게 옳은 생각인가. 누군가에게서 몇 마디 날카로운 지적을 받으면 그것을 논리적으로 풀기 전에 얼굴부터 벌개져서 입이 꽉 닫히는 일. 아주 치열한 논리적 공방을 바라보면 그 풍경에서 시정잡배의 멱살잡이 만을 떠올리며 그걸 뜯어말려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일. 몇번씩 뒤틀어 표현한 복잡하고 섬세한 문장들에 대해서 아예 손사래부터 치며 왜 해골을 복잡하게 하느냐고 화내는 일. 이런 언어습관이 유통되는 사회에서 시가 존재하기란, 혹은 문학이 당위를 인정받는 일이란 얼마나 간고한 일인가. 문학이란, 혹은 시란, 평상어로부터의 고의적인 일탈이다. 좋게 말해서 일탈이지 솔직히 말하면 멀쩡한 언어판을 뒤흔들어 개판으로 만들어놓는 일이라 할 수 있다. 화폐와 같이 정직한 교환가치를 인정받는 평상어는, 인간의 언어욕망 모두를 채워주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그러니 허전한 뭔가를 채우기 위해 인간은 시, 혹은 문학을 기웃거린다. 평상어들이 득세하여 문학적 언어들을 핍박하고 경멸하는 사회. 이것이 우리 사회의 인문적 지형도다. 인문학의 위기, 인문주의의 위기라는 표현 또한 실용이라는 담론에 경도되어 오래된 인류의 낙원을 스스로 폐기처분하고 있는 이 시대의 경박에 대한 경고다. 은유란 뜻밖에도 발이 넓다. 어쩌면 문학 전부가 은유란 그릇 안으로 들어와 앉아도 자리가 남을 정도다. 은유에 대한 성찰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찾아올라가야 할 만큼 묵은 내력을 지닌다. 인류는 일찌감치 언어의 별세계를 찾아냈다. 저 그리스 아저씨의 을 잠시 훔쳐보자. "은유란 유에서 종으로, 또는 종에서 유로, 또는 종에서 종으로, 또는 유추의 관계에 의해서,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전이시켜 적용하는 것이다." 유니 종이니 하는 말 때문에 지레 따분해질 필요는 없다. 일본사람과 게다신발을 생각하면 된다. 이때 게다는 종이며 일본사람은 유이다. 일본사람을 그냥 게다짝이라고 멸칭하기도 하고, 그것을 신은 모양새를 데려와 쪽발이라고 욕질하기도 한다. 이것도 고전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은유이다.(실은 환유이지만.) 앵두같은 입술이라 할 때 앵두와 입술은 붉음이란 특징을 매개로 한 유추의 관계다.(이건 은유 중에서도 직유라고 불린다.)그러니 은유가 가능한 경우를 아저씨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다. 여기서 귀담아 두면 좋을 것은,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전이시켜 적용한다는 표현이다. 무엇과 무엇을 연결시켜 어떤 효과를 자아내는 행위. 이같은 은유론은 많은 학자들의 성찰을 거쳐서 체계적으로 다듬어져 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지금까지도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적시하고 있다. 은유는 너무 평범하고 진부해서도 안되며 지나치게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가 되어서도 안된다. 은유가 평범하고 진부한 표현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 까닭은 언어의 은유적 사용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즉 개똥이는 개똥이가 아니라 말똥이라고 말하는데서 생겨나는 즐거움, 즉 우회해서 말하는데서 생겨나는 수사적 즐거움-을 보장받기 위해서이다. 또 수수께끼가 되는 걸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자칫 은유를 통한 언어의 우회적 움직임이 그 출발점을 잊어버리고 길을 잃게될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이 아저씨가 은유를 너무 멀리서 이끌어내서는 안된다고 여러번 강조하고 있는 까닭은 은유의 유추적 즐거움이 언어의 수사적 기능, 말하자면 담론을 통해 타인을 설득시키는 것에 종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서 살피자면 은유는 낱말과 낱말 사이의 거리이다. 유사성의 거리라고 할까. 너무 가까우면 재미없고 너무 멀면 딴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 그 알맞은 거리의 긴장과 탄력이, 좋은 은유를 만들어낸다. 쓰다보니 문자 사이의 건조함이 목구멍을 칼칼하게 한다. 은유에 관한 날렵한 성찰들을 살핌으로써 물기를 뿌려보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말은 나를 사로잡았다. "은유는 아마도 인간의 가장 다산적인 잠재력일 것이다. 그것의 효력은 마술에 접해있고, 그것은 신이 인간을 만들었을 때 그의 피조물의 몸 속에다 깜박 잊어버리고 놓아둔 창조의 도구처럼 보인다." 요컨대 은유는 인간이 지닌 조물주의 능력, 즉 창조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수술가위를 몸 속에 놔둔 채 꿰매는 멍청한 외과의사로 신을 조롱한 죄가 가볍지 않아 보이지만 은유에 대한 예찬을 이 정도로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리쾨르의 얘기도 들을 만하다. "은유는 낱말 차원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에서 발생한다. 즉 술부에서 발생한다. 의미혁신은 주부와 술부가 이어지면서 낱말이 사전적 의미를 어느 정도 이탈하면서 발생한다. 은유는 어떤 말을 통해서 다른 말을 하려고 하는 말이다. 한번 꼬여서 간접으로 무엇을 겨냥한다. 여기서 언어혁신이 일어난다. 언어에 들어있는 뜻이 아니라 언어가 새로 만들어내는 뜻이다. 말이 새로운 뜻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은유는 이라 할 만하다."  라캉도 거든다. 그는 프로이드를 데려오면서 인간의 무의식의 지형은 은유와 환유의 기법이 차용되어 있다고 말한다. 꿈 속에 등장하는 많은 것들은 비슷하거나 근접한 무엇들의 변용이 아니던가. 크리스테바는 말한다. 텍스트에서 첫 출발하는 주체는, 에고의 가장자리에서 기호계의 검은 물결이 흘러넘치는 절벽 위에 대롱대롱 매달린채 그것에 교란받는 주체이다,라고. 데리다는 은유를 이렇게 말한다. "이성중심주의를 희석시키는, 아버지의 집으로부터 떠나가는 한없는 이방의 여행이다." 제 생각이 없으면 이렇게 글에 귀신들이 들끓는다. 남의 생각에 의지하여 앵무새같은 개념들을 늘어놓는 일이 자신의 새로운 생각을 매만지는 일보다 훨씬 쉽기 때문이리라. 그런 비난들이 더 커지기 전에 내 얘기들을 좀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은유의 서양말인 메타포 (metaphor)는 그 말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메타페레인이란 그리스어를 만나게 된다. 메타는 "위로" 혹은 "너머로"라는 뜻이고 페레인은 "옮기다" 혹은 "나르다"의 뜻이다. 은유란 말이 처음 쓰일 때의 생각은 "한 말에서 다른 말로 그 뜻을 실어 옮기는 것"이었을 것이다.  어느 영화에서 어떤 소년이 말한다. 인생은 구두와 같다고.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묻는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처음엔 맞지 않지만 조금씩 발을 맞춰가듯 맞춰가는 게 인생이 아니냐고, 소년은 짐짓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아버지는 되묻는다. 그래? 그럼 인생은 장갑과도 같은 것이군. 그것도 맞춰야 하잖아? 아냐 인생은 모자와도 같은 것이야. 아니 내복과 같은 게 아닐까? 아버지의 조크는 소년의 은유가 지닌 약점을 정확하게 포착한 것인지도 모른다. 은유가 생동감을 얻기 위해서는 두 사물의 유사성이 참신하고도 설득력있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소년은 그의 은유를 충분하게 잘 설명하지 못했는지 모른다. 인생은 구두와 같다. 참신한 비유가 아닌가? 이런 비유를 만났을 때, 우린 인생과 구두가 지닌 유사점에 대해서 고민하고 성찰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은유의 힘은, 구두라는 매개개념을 데려와, 인생이란 의미를 좀더 풍요롭게 파악해가는데 있다.  개미같은 허리라고 하면 우린 아예 개미를 떠올리지 않고도 가는 허리를 생각하게 된다. 그 은유가 오랜, 잦은 사용으로 진부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우초밥같이 생긴 여자라고 말한다면 우린 한참 고민하게 된다. 도대체 어떻게 생겼단 말인가? 쉽게 답이 안나온다. 이 수수께끼가 의미의 미로에서 너무 오래 헤매면 그건 일단 성공적인 비유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새우초밥 여자가 들어있는 문장의 맥락에서 그가 가슴에 겨자빛 반점을 지닌, 불그죽죽한 새우무늬의 숄을 걸치기 좋아하는 여자라면 그건 설득력있는 은유일 수 있다. 이렇게 문맥 속에서 살아움직이는 두 개념 간의 피돌기가 자아내는 효과, 이것이 은유의 힘이 아닐까 싶다. 새우초밥같은 여자라고 말했을 때, 그 여자는 새우초밥에서 건너오긴 했지만 새우초밥을 넘어서있는 뉘앙스이다.  내가 아까 불러온 귀신들의 말로부터 받았던 인상들을 종합하자면, 은유란 것이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본질적인 무엇이라는 놀라움이다. 수사학은 출발과 끝이 은유에 싸인 하나의 거대한 봉지사탕인지 모른다. 문학이란 은유 욕망들의 다채로운 결과물이기도 하다. 통상적인 언어에서 빠져나온, 바람난 언어들의 춤이다. 시는 평상적 언어에서 새나가는 뉘앙스들을 수배하러 나선 또다른 언어들의 그물망이다. 언어를 올라탄 언어, 문자와 문자의 교미, 낯익어서 이미 긴장이 풀려버린 언어들의 나사를 풀어 낯선 다른 언어를 끼워넣음으로써 새롭게 하는 작업들. 은유란 일렬로 선 낱말들을 교란시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본능적인 유희가 아닐까 싶다. 신은 인간에게 의사소통을 위해 언어를 선물했을 테지만, 인간은 그것을 즐기는데에 쓰기 시작했다. 이 유희의 한 지류가 문학이며 레토릭이며 또, 은유행위다. 두루뭉수리하게 통상 언어의 일탈 모두를 은유라고 부르던 아리스토텔레스식 분류법이 은유와 환유라는 보다 섬세한 일별법으로 진화하게 된 것은 언어학자 야콥슨의 공로다. 야콥슨에 이르면서 은유와 환유는 치열한 대립쌍으로 거듭나게 된다.물론 그 전에도 은유와 환유는 구별지어지는 개념이었다. 라틴수사학의 한 경전인 1세기경의 이란 책에서는 환유를 " 그 자신의 이름에 의해 지칭되지 않은 어떤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표현을 근접한 요소로부터 빌어오는 문채(文彩)"로 설명하고 있다. 환유를 뜻하는 미토니미(metonymy)는 그리스어 미토니미아를 어원으로 가지는 말이다. 그 뜻은 이름을 바꾼다는 뜻이다. 그래서 혹자는 환유를 아예 전의(轉義)라고 부르기도 한다. 야콥슨은 은유가 유사성에 기댄다면 환유는 인접성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한다. 은유가 초현실주의나 낭만주의 상징주의와 손을 잡는다면 환유는 고전주의나 리얼리즘과 관계를 맺는다고도 말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나는 요즘 황지우를 읽고 있다, 고 말할 때, 나는 황지우의 시를 읽고 있다는 뜻이다. 라는 인물의 한 부분인 그의 시작품을 가리키는데에 황지우 모두를 데려와버린다. 반대도 가능하다. 한쪽 팔이 없는 사람을 외팔이라고 부른다. 돌아온 외팔이란 영화도 있지 않았던가. 외팔이란 팔이 없다는 특징 만으로 어떤 사람을 특칭한다. 환유와 제유라는 분류로 더 섬세하게 구분도 하지만 이 모두를 환유라 하자. 환유는 언어를 사용하는 효용성과 크게 관련지어져 있다. 군대시절 고참이 어디에 사느냐고 물었을 때, 신병인 나는 서울에 산다고 말했다가 혼쭐이 났다. 서울이 모두 네 집이냐며 기합을 주는 것이었다. 이런 썰렁한 유머는 군대에서 하나의 관습을 이루는 것들인데, 여기에도 환유에 대한 나름의 성찰이 숨어있다. 우린 서울에 산다고 말하지, 서울시 중구 순화동 7번지 우리집에 산다고 말하지 않는다. 서울이라는 대표지명으로 구체적인 지명을 환유하는 것이다.  한 글벗은 한때 환유법을 능란하게 활용하는 문장들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어떤 모임의 후기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거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독특한 호칭으로 불러 문장의 윤기를 낸 것이었다. 예를 들면 그의 낭군이 된 글빛하늘이라면 그중의 한 낱말인 으로 표현하고, 산돌이 아이디를 가진 사람은 으로 표현하고는, 산이 빛의 손을 흔들어대고 있었다,는 식의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악수 장면이 새로운 기의를 발하면서 놀라운 참신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은유는 비슷한 성질을 이용한 낱말의 연결인 반면, 환유는 어떤 사물과 인접한 무엇을 데려와 그 사물을 대치하는 기법이다. 김동인의 붉은 산은 황량하지만 버릴 수 없는 이 나라에 대한 감동적인 대치물이다. 블루칼라는 노동자들이 입는 옷으로 그 노동자 집단 전체를 의미한다. 어떤 말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그것과 근접한 무엇으로 표현하여 어떤 쾌감을 얻는 언어행위이다.  은유는 유추과정을 통해 유사성을 찾아내지만, 환유는 특정한 맥락에서 생겨나는 연상을 기초로 잇는다. 비약적 마술적인 것으로 지적되는 은유와는 달리, 환유는 오랜 시간을 두고 생겨난 연관관계나 관습에 따른 연상에 기댄다. 지극한 효녀를 심청이라 부르는 것, 말을 듣지 않고 반대로만 하는 사람을 맹꽁이라 부르는 것, 제격에 맞지 않는 행동을 강요받는 경우를 억지춘향이라 부르는 것 등은 바로 이런 예라 할 만하다. 은유는 시적인 표현에서 많이 등장하고 환유는 산문적인 문장에서 많이 등장하는 것은 은유의 초현실주의적 생리와 환유의 리얼리스틱한 생리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은유가 가부장 담론의 특성이라면 환유는 페미니스트 담론의 특성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여성은 아이를 자기 몸 안에 아홉달 동안 담고 있고 낳은 후에도 곁에 두고 기르기에 모자관계는 환유적이며 부자관계는 은유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라캉의 말이다.  은유는 남자의 문자현상을 특징짓는 기법이라면 환유는 여성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성적인 글쓰기는 만져지는 무엇을 비롯한 근접한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이 강한 특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환유적 욕망이 승한 특징을 보이기 쉽다는 지적을 하기도 한다. 너무 도식적인 분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일면 공감되는 부분도 없지 않다. 은유란 무엇인가를 보다 생생하고 풍성하게 이해시키기 위한 방식이라면 환유는 한 개체를 그 개체와 관련된 다른 개체로써 말하는 방법이다. 은유는 다른 말을 데려와 함께 서있지만 환유는 다른 말을 데려온 뒤 자신은 숨어버린다. 그 숨어있음의 쾌감이 환유의 특징이며, 은유는 두개의 말이 나란히 서서 비교됨으로써 합성되고 증폭되는 쾌감이 특징이다.  환유는 또한 보다 현대적인 서술방식으로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은유는 지난 시대의 낭만주의와 결부된 낡았지만 아직도 튼튼하게 살아남은 기법이다. 최근의 비평가들은 당대 시인들과 작가들의 환유성을 찾아내고 그것의 얼개를 파악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는 형편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황지우의 많은 참신함은 그의 환유에 힘입고 있다.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있을 거다)는 진술에서 뚱뚱한 가죽부대는 내 몸의 구조와 형질을 경멸적인 사물적 특징으로 치환하고 있는 표현이다. "사춘기 때 수음 직후의 그/죽어버리고 싶은 죄의식처럼,/그 똥덩어리에 뚝뚝 떨어지던 죄처럼,"(수은등 아래 벚꽃)이라 했을 때 똥덩어리에 뚝뚝 떨어지는 건 "죄"가 아니라 다른 무엇이었지만 거기 느닷없이 "죄"라는 추상어를 데려옴으로써 삶의 심각한 본질을 환기시킨다. 그것은 다시 벚꽃의 만개와 겹치면서 아름다움과 죄악을 현란하게 교직한다. 그의 환유는 이 시의 중심시축이다. 은유와 환유는 시나 문학의 주민등록증같은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들이 시나 문학을 몹쓸 존재로 인식하게 하는 딱지이기도 하다. 마구 뒤섞어놓은 은유들의 실끄트머리를 찾아내어 상상력으로 끊어진 다른 지점과 조심스럽게 이어야 하는, 비유 해독의 고단함은 난해라는 두건을 뒤집어쓴 작품들에서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돌리게 한 원흉이기도 했다. 뿐만인가. 꼭 집어 그냥 말하면 좋을 얘기를 굳이 에둘러 말해버리는 저 환유의 내숭과 음흉함은 문자속 전부를 내숭과 음흉으로 인식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은 문학의 즐거움은 바로 그 묻힌 의미들을 발굴하는 쾌감이며, 낯선 의미들이 충돌하여 피흘리는데서 돋아나는 생기이며, 매복한 개념들이 낮은 포복으로 언어의 습지를 기어가는 장면을 영화처럼 감상하는 재미이기도 하다. 은유와 환유는 글쓰기라는 욕망의 가장 핵심이기도 하지만, 글을 읽는 독자들이 행간 속에서 즐길 수 있고 교감할 수 있는 쾌감의 지평이다.  문학은 이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두 여자, 내 딸들에게 붙여주어도 좋았을 이름, 은유와 환유라는 두 여자와 사귀러가는 은밀한 아지트가 아닐까 싶다./빈섬. (Binsom Lee/ 시인, 작가, 스토리텔러)    
857    시는 "광기적 드라마"이다... 댓글:  조회:2453  추천:0  2017-11-15
중국 강소성 계동앞바다에서 혹등고래 사체가 해안으로 들어올려지고 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이 혹등고래는 사흘 동안 세 번이나 해안에 좌초되었다. / 2017년 11월 15일, 중국 계동에서 은유와 환유   김재성  (산에 '산불조심'이라고 쓴 플랜카드)  숲의 나무와 나무 사이에 사각의 끈으로 연결한 흰 바탕에 붉은색으로 '산불 조심' 이라고 고딕체로 쓰여 있다. 괸심이 끌리는 기표를 한참 동안 의식한다.  '산불조심'이라는 문장은 수평적인 구성이고 '산'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우리는 나무, 잎, 골짜기, 숲, 바위, 짐승, 흙 등을 동시에 연상하거나 기억하게 된다. 또한 '산불' 하면 산에 불이 나서 불꽃이 휘여져 올라오는 모습이나 헬리곱터가 산불을 진화하는 모습,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며 진화하거나, 산짐승들이 불을 피하기 위해 몰려다니는 아프리카의 장면과 활활 타며 번지고 있는 불길에서 타고 있는 나무를 촬영하는 카메라 등을 연상한다. 그리고 '조심'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삶에 있어서의 인간관계와 기계 혹은 대상관계에 있어서도 다 양하게 생각하게 한다. 징검다리를 조심스럽게 건너가야 하고 위험물건도 조심스럽게 취급해야 하며 자기 자신과 또는 타인과의 대화와 행위에 있어서도 항상 배려와 거리를 조심스럽게 판단해야만 한다.  따라서 '산불조심'하면 이렇게 많은 생각을 유도하게 하는 신념인 기표의 효과들이다.  로만 야콥슨은 전자를 환유로 후자를 은유라 부르면서, 언어가 구성되는 기본 원칙이라 했다. 이 두 가지의 언어구성법칙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심각한 실어증에 걸린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밝 혔다. 부언하면 사실주의, 자연주의, 큐비즘에서는 환유가 은유보다 더 많이 사용되고, 반면에 낭만주 의 초사실주의, 다다이즘에서는 은유가 더 많이 기용되고 있음을 문학 텍스트를 통해 증명했다. 야콥슨은 실어증 환자에게 결핍된 것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과정에서 은유와 환유의 두 축 중 어느 한 가지가 빠지면 말을 못한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은유와 환유를 분류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것이고 추상적인 것이지 실지로 삼박하게 분류되지 않는다. 야콥슨과 비트겐슈타인같은 사람들도 시어와 보통어 은유와 환유와의 차 이를 논하는 지점에서는 뒤걸음질을 칠 만큼 어려운 문제다. 그리고 신비평가들도 모두 시어와 보통어와의 구별에 궁구했지만, 뒤돌아보면 허사였다. 모법답안을 작성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은유와 환유와의 차이성을 온갖 현란한 말로 가르고 분류하려 하지만, 눈 감고 가슴의 소리를 듣는다면 이것이 얼마나 헛된 작업인가를 알 수 있 을 것이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지시켰듯이, 시어(은유)란 보통어(환유)없이는 불가능하다. 환유는 예전에는 모두 은유였고 오래 사용되어 닳으면 환유가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했고, 라캉은 기표를 무시하는 행위는 인간의 운명을 무시하는 것 이라고 경고 했다. 기의와 기표는 단절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했지만, 또다른 한편으로는, 환유에서 만들어지는 은유와 라랑그를 우선시 함으로써, 기표가 기의를 가진다는 것을 유도한다. 이는 의식과 무의식이 만난다는 것을 뜻한다. 이미 야콥슨이 해명했듯이 은유는 무의식의 언어, 환유는 의식의 언어로 생각한다.  라캉에 따르면 나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연상은 무한대로 뻗쳐 확장된다. 영국 참나무, 플라타너스, 구약이 제시하고 있는 상징적인 나무, 황페해진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의 그림자, 나뭇가지의 분열된 것을 보고 분열 그 자체, 농신(Saturn)의 나무, 달의 여신 다이아나의 나무, 벼락에 맞아 죽은 나무에 걸려 있는 수정 등등 … 우리의 연상은 끝임없이 펼쳐지는데, 이는 마치 불에 태운 거북 등이 예측불허한 우리의 운명을 밝혀주었듯이, 기표는 불현 듯 환유의 차원에서 서서히 느리게 진행하는 존재의 축으로부터 명명할 수 없는 암흙을  '언어의 빛'으로 솟아오르게 한다. 기표의 흐름과 이것이 일으키는 연상의 포물선은 거의 광적이지만, '영원성의 한 순간을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광택의 소나기'로 가져온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기의가 없던 기표가 기의를 갖게 되는 순간이다.  글을 쓰는데 필요한 도구인 펜이 존재한다는 남근임을 나타내지만, '희작이 될 때까지'라는 말을 분 명히 웃음, 익살, 농담, 재치를 시사한다. 프로이트가 밝혔듯이 우리의 무의식이 표출되는 순간 이것 이 쥬이상스이다.  여성주의자들은 예전에는 남근을 상징하는 펜으로 글을 썼지만, 요즈음은 개인용 컴퓨터의 자판으로 글을 쓴다. 이것은 마치 여성 몸 전체를 애무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요즈음 글쓰기는 여성적이라며 위의 라캉 주장에 반격한다.  기표는 타자임과 동시에 결핍이며, 증오이며, 무지이며, 사랑이며, 말의 장소인 동시에 타자의 담화 이다. 또한 최초의 기표는 무의식을 뜻하고 이원적 기표는 언어로 대표적 표상화를 뜻한다. 첫 번째 단일한 기표는 영상을 뜻하며, 대기표는 무의식의 주체를, 보편적인 기표는 상징적 논리를, 비환원적인 기표는 무의미를, 그러나 동시에 기표는 무의식의 폐쇄를 뜻한다. 그러나 좀더 집요하게 라캉 어휘의 미끄러짐을 추적하노라면, 우리는 결국 이 타자는 이성임을 알게된다.  '광기여, 당신은 현인들의 난공불락의 공포로 가득찬 숨겨진 곳을 장식했던 애매모호한 칭찬의 대상 이 아니다. 만약 현자가 바로 거기에서 머무를 집을 찾았다면, 이는 끝임없이 터널을 뚫고 있는 가장 훌륭한 대리인, 그가 충성을 다해 섬기는 이성, 바로 로고스 이외에는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자들이 섬기는 이것은 '이성이 전개하는 사업' 즉 '변증법'으로 '광기의 드라마'이지만, 진리를 접근하고 있다. 이 타자의 말은 주체를 통해 언어 밖 혹은 언어를 초월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체를 초월해서 말로부터 온다. 이는 '완전한 말' 바로 기독교 하나님 말씀에 버금가는 말이다.  라캉의 심리분석 임상으로 본다면, 분석자는 피분석자의 이야기에 동의 고무하는 대신, 차단시키거나 아니면 벙어리나 죽은 사람처럼 침묵을 지켜야 한다고 한다. 이유는 일상적으로 우리가 하고 있는 말은 타자의 소리이기에, 분석자 그리고 피분석자 둘의 이야기도 타자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두 개의 타자의 목소리(의식의 언어)가 서로 합쳐져 동의를 하게 되면, 피분석자의 의식은 무의식으로부터 이중으로 소외 분열된다는 것이다.  라캉은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가 결코 떨어진 것이 아니라, 순환적이며 비대칭적이라 한다. 그리하여 주체는 기표 즉 환유와 은유가 꾸미는 알리바이이며, 단순히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기표 혹은 타자의 메카니즘에 불과하다. 더욱이 주체는 언어에 의해 진행되는 의미화의 구성 인이 누구인지 모른다. 시인의 주체는 시인이 아니라 그가 쓴 시(詩)가 된다.  (데리다의 정신분석학 해체 + 주관적 해석)   
856    시는 은유와 환유의 몸부림이다... 댓글:  조회:3467  추천:0  2017-11-15
    상하이(上海, 상해) 충밍(崇明)에서ㅡ      은유와 환유       은유와 환유는 그것이 쓰이는 역사적 맥락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 한 시대에는 환유로 취급받던 것이 다른 시대에는 은유로 취급당한다. 이를테면 이라는 표현은 요즘 은유로 쓰인다. 라는 말은 원래 설사를 한다는 뜻으로 환유적 표현이었으나 요즘에는 은유적 표현으로 쓰인다.    은유와 환유는 특정한 시대와 관련을 맺기도 한다. 역사 철학자 지암비스타 비코는 에서 은유를 비롯한 환유, 제유를 단순히 비유의 차원을 넘어 언어사와 문화사를 재는 잣대로 삼았다. 신의 시대에는 어느 비유보다 환유가 지배적으로 쓰였고, 영웅의 시대에는 제유가 압도적이어서 이 무렵 인간은 곤잘 주피터 신의 아들로 자처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어떤 비유보다도 은유가 가장 널리 쓰였다.     이탈리아 기호학자 에코는 심층적인 면에서 은유와 환유가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은유적 메커니즘과 환유적 메커니즘은 서로 상호작용을 하게 마련이다.       축어적 관념과 비유적 관념 사이에 상호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은 이미 이 둘이 환유적 관계를 맺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비유는 은유로 봐야 할지, 환유로 봐야 할 지 경계선이 모호하고 애매하여 분류하기가 쉽지 않다. 한 이론가는 아예 라는 용어로 부른다. 메타프토노미란 바로 메타포(은유)와 미토노미(환유)를 합하여 만들어낸 합성어다.     은유가 한 사물의 다른 사물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라면, 환유는 한 개체를 그 개체와 관련 있는 다른 개체로써 말하는 방법이다. 은유의 기능이 주로 사물이나 개념을 이해하는 데 있다면 환유는 사물이나 개념을 지칭하는데 그 기능이 있다. 은유가 이해를 위한 장치라면 환유는 지칭을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비유는 어떤 사물의 가치를 그 자체에 고정시키지 않고 다른 것에서 유추한다. 미국 철학자 어번(W.M.Urban)은 언어와 현실에서 언어의 가동성을 강조했다. 사물과 언어관계는 거리가 있으므로 부단히 움직인다고 본 것이다. 이는 언어의 추상성과 언어 의미 사이에 무한한 가능성을 뜻한다. 한편에서 비유는 진리를 전달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인식도 있었으나, 18c 말엽부터는 비유는 필수적이며 세계를 인식하는데 꼭 필요한 도구로 보고 있는 태도가 강하다. 비유는 인생관이나 세계관과 맞닿아 있어 인간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형식이 되는 것이다.       은유는 매개어의 개입 없이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결합되어 의미의 轉移와 새로운 의미를 환기시키는 비유법이다. 은유를 이해하려면 유사성을 파악해야 하지만 동일성과는 별 관계가 없다. 예를 들어 아리스텔레스는 '인생의 황혼'으로 노년을 표현했다. 수학적 비례로 치환시시켜 a/b=c/d 따라서 ad=bc이나 노년의 인생에 대한 관계가 황혼이 하루에 대한 관계와 정확히 같지는 않다. 유사성은 바로 흡사한 것이기 때문에 이같은 관계가 성립한다. 은유는 일종의 수수께끼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뜻을 유추하기 힘들다. 은유의 장르라 할 만한 시를 두고 새뮤얼 코울리지가 고 얘기한 것은 바로 이같은 맥락이다. 윌리엄 엠슨은 은유가 가능한 것은 애매성 때문이라고도 했다. 은유는 우리를 당혹하게 하지는 않지만 이제껏 보지 못한 유사함을 밝혀 우리를 일깨워주고 매료시킨다.       환유는 원관념을 연상되는 다른 말로 바꾸어 한 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낸다. '그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라든가 '십자가와 초승달' 등이 그 예이다. 환유는 상징의 발생에 주요한 역할을 한다. 깃발이나 십자가, 베일 같은 상징은 실재를 환기시키는데 상징과 실재가 모두 같은 문화에 있기 때문이다. 문화가 변하면 상징이 사라지는 것처럼 환유는 확고한 문화적인 관습에서 설득력이 생긴다. 환유는 최근에 들어와 주목받기 시작했다. 환유의 어원인 미토노미아는 '이름을 바꾼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일상 생활 언어에서 은유보다 환유가 더 많이 쓰이고 언어학자들은 환유쪽에 더 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다.           20C 미국의 야콥슨은 은유와 환유의 성격을 밝혀내는 데에 크게 이바지한 학자이다. 그것을 실제 비평에 적용해 문학의 스타일도 은유나 환유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고 밝혀냈다. 18C에서 19C 낭만주의 예술에서는 은유적 성격이 강하고 19C 중엽부터의 리얼리즘 예술에서는 환유적 성격이 강하며 세기말의 문예 사조라 할 상징주의에서는 은유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또한 문학 장르에 있어 시는 은유적이고 소설은 환유적이며 연극은 은유적이고 영화는 환유적이라 주장한다.       이탈리아 기호학자 움베르트 에코는 이 둘의 관계가 깊이 연관성을 띠며 상호작용을 하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어떤 비유는 은유로 보아야 할지 환유로 보아야 할지 그 경계선이 굉장히 애매하고 모호하다. 메타프토노미라 하며 은유, 환유 동시 성격으로 규정하기도 한다.좋은 예로 밀양 아리랑이 있다.       정든 임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벙긋     이 경우 입을 벙긋거리는 행위로 웃는 행위를 나타낸 것은 '환유'이나 이것이 행복하다는 마음을 나타내니 '은유'가 되는 것이다. 은유는 한 사물을 다른 사물의 관점에서 말하는 방법이고 환유는 한 개체를 그 개체와 관련 있는 다른 개체로써 말하는 방법이다. 은유는 개념 이해의 방법으로 많이 쓰며 환유는 지칭하는데 많이 쓴다. 은유와 환유는 그 역사적 맥락과 연관되는데 한 시대의 환유가 다른 시대 은유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서양에서 이 예전에는 환유였으나 현재는 은유이다. 사람이 죽은 뒤에는 얼굴 빛이 희게 변하기 때문에 결과로써 원인을 나타내는 환유였으나 추상적 관념인 죽음을 의인화하여 그 얼굴 색깔이 희다고 하는 은유로 현재 쓰는 것이다.       제라르 주네트·새뮤얼 레빈·존 설 같은 이론가들은 환유를 은유의 하위 갈래로 여기기도 하지만 이 둘의 형식에는 차이가 있다. 은유가 유사성에 의존한다면 환유는 인접성에 기초한다. 환유는 은유와 비교하여 인간의 경험적 토대가 크다. 흔히 은유는 추상적인 느낌이 강하고 환유는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느낌이 강하다. 영국 이론가 호미 K.바바는 최근 은유와 환유를 포스트식민주의 문학 이론에 적용했다. 은유적으로 읽으면 의미의 보편성에 주목하게 되고 환유로 읽으면 보편성보다는 개별성이나 특수성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바바에 따르면 피식민지 주민을 문학 작품 속에 재현하는 것은 를 재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은유화하면 등가의 원칙을 끌어들이고 이 원칙은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추상적 명제로 환원할 위험이 있다고 염려한다. 이는 다시 말해 제국주의나 식민주의의 담론에서 은유가 많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은유를 폭력의 언어, 환유를 저항의 언어로 볼 수도 있다. 전통적인 제도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것은 환유의 수사적 장치가 적당하고, 영원불변하고 본질적인 것과 연관되는 은유는 기존의 폭력적 성격의 것들을 표현하는데 적절한 것이다. 은유는 모든 현상을 하나로 뭉뚱그려 동일성에 무게를 싣고 환유는 인간을 모든 구체적 현상 속으로 낱낱이 파헤쳐놓는다. 김욱동 교수는 그 예를 문정희의 시 「작은 부엌노래」와 정현종의 시 「부엌을 기리는 노래」로 설명한다. 문정희의 시는 남성 가부장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보이며 환유가 지배적인데, 정현종의 시는 남성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은유가 많이 쓰이고 있다. *      
855    내전 중에 희생된 "철뚜기와 신비한 베일"에 싸인 시인 댓글:  조회:4350  추천:0  2017-11-14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가르시아 로르카 상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ía Lorca, 1899년~1936년)는 스페인의 시인·극작가이다. 유럽 여러 나라의 연극의 영향 밑에 놓여 있었던 스페인 연극을 혁신하고, 더욱이 외국의 극단에도 영향을 끼친 대작가 로르카는 가장 애도해야 할 스페인 내전 중의 희생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라나다 근처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총살된 이 시인은 미국을 여행한 후, 1931년에 극단 '바락카'를 조직하고 스페인 고전연극의 부흥에 분투, 이어 3대 비극 (1933), (1913), (1934)을 완성했고, 시와 극이 융합하는 경지를 민족적인 소재 중에서 실현했다. 이것은 오늘날 세계 연극의 중요한 상연 종목이 되어 있다. 스페인의 전통적 서정을 현대적으로 표현했으며 향토인 안달루시아의 마을을 초현실주의 수법으로 드라마틱하게 노래했다. 최초의 (1927)에 이어 (1927)에서 그의 시는 성숙해졌다. 작품도 실험적인 시도를 구사했으며 항상 민중을 떠나지 않았다. 시는 주제나 그 형식과 수법이 잡다하고 음악적·연극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데 용어에 있어서는 어느 때는 철없이 보이고 어느 때는 신비한 베일에 싸여 있다. =====================================   출생 1898. 6. 5, 스페인 푸엔테바케로스 사망 1936. 8. 19/20, 그라나다 국적 스페인 요약 스페인의 시인·극작가. 목차 개요 생애 평가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ía Lorca) 개요 죽음을 주제로 한 시와 3부작 희곡인 〈피의 결혼식 Bodas de sangre〉(1933)·〈예르마 Yerma〉(1934)·〈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La casa de Bernarda Alba〉(1936)으로 유명하다. 스페인 내란이 발생한 직후 민족주의자들에게 암살당했다. 생애 농부인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한 어머니는 직접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가족이 그라나다 시로 이사한 뒤 그곳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 다녔다. 아버지의 강요에 못이겨 그라나다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곧 그만두고 문학·회화·음악에 몰두했다. 조숙한 작곡가이자 뛰어난 연주가로서, 친구들 사이에서 '음악가'로 통했다. 1918년 카스티야 여행에서 영감을 얻어 〈인상과 풍경 Impresiones y paisajes〉이라는 산문집을 펴냄으로써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 이 책은 '작가'로서의 가르시아 로르카를 예고해주었다. 1919년 스페인 수도의 문화적 중심이던 마드리드대학의 기숙사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화가 살바도르 달리, 영화제작자 루이스 부뉴엘, 시인 라파엘 알베르티를 비롯한 그와 같은 세대의 예술가 및 작가들과 사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인 후안 라몬 히메네스를 비롯한 기성세대 저명인사들과도 만났다. 대학 기숙사에서 보낸 첫 2년 동안 스페인 문단 전체에 가르시아 로르카의 시가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출판한 시는 거의 없었는데, 그것은 "시는 입으로 읊어야 한다. 책 속의 시는 죽은 것이다"라는 그의 생각 때문이었다. 따라서 대학 기숙사와 마드리드의 여러 지역에서 중세 음유시인처럼 자신이 쓴 시와 희곡을 낭송했다. 그리하여 작가생활 내내 그의 작품은 출판되기 훨씬 전부터 입으로 창작되어 전파되었다. 이당시 그는 뒷날 〈시집 Libro de poemas〉(1921)·〈첫번째 노래 Primeras canciones〉(1936)·〈노래 Canciones〉(1927)로 엮어져 나오게 될 실험시들을 쓰는 한편 첫 희곡 〈나비의 장난 El maleficio de la mariposa〉을 쓰고 있었다. 이 희곡은 1920년 마드리드의 에슬라바 극장에서 처음으로 무대에 올려졌으나 첫날 공연 뒤 막을 내리고 말았다. 가르시아 로르카는 1922년 그라나다에서 열린 민속음악축제(Fiesta de Cante Jondo)에서 저명한 작곡가 마누엘 데 파야와 공동으로 작업한 것이 계기가 되어, 자신이 지닌 천재성을 깨닫게 되었다. 민속음악과 집시음악의 전통 속에서 자신의 음악적·시적·영적 충동의 해답을 발견한 듯했다. 〈칸테 혼도의 시 Poema del cante jondo〉(1922 집필, 1931 출판)와 〈집시 노래집 Romancero gitano〉(1924~27 집필, 1928 출판)은 이러한 해답을 서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집시 노래집〉에 실린 18편의 시에는 전통 시형식인 스페인 발라드(romance)가 지닌 전통적인 매력과 새롭고 놀라운 이미지가 결합되어 있다. 그 예로 〈스페인 민병대의 발라드 The Ballad of the Spanish Civil Guard〉에서 민병대가 집시 마을을 향해 불길하게 진군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검은 말들/검은 편자/검은 망토 위에 번들거리는/잉크와 밀랍 얼룩/두개골이 납으로 되어/그들은 울지 않네/칠피 가죽으로 된 영혼을 달고/그들은 길을 따라 내려가네" 〈집시 노래집〉을 쓰면서 그는 희곡도 썼다. 1927년 살바도르 달리가 무대를 꾸며 시적이고 낭만적인 운문극 〈마리아나 피네다 Mariana Pineda〉를 바르셀로나에서 공연함으로써 극 부문에서 처음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같은 해 역시 같은 도시에서 대중을 상대로 한 그림전시회도 열었다. 1928년에 펴낸 〈집시 노래집〉은 하루아침에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으나 행복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단순한 집시 기질을 과장된 신화로 만든다고 불쾌하게 여겼으며, 그 스스로 "내 평생 가장 고통스러웠던 상태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 정서적 위기에 시달린 끝에 위안과 새로운 영감의 샘을 찾아 1929~30년을 미국과 쿠바에서 보냈다. 이 여행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 1940년 그의 사후에 발간된 〈뉴욕의 시인 Poeta en Nueva York〉이다. 이 작품에서는 기계화된 문명에서 느끼는 생명의 말살을 잔인하고 뒤틀린 이미지들의 부조화스러운 결합을 통해 표현한다. "숟가락으로/그는 악어의 눈을 파냈다/그리고 원숭이의 엉덩이를 때렸다/숟가락으로" 1931년 그는 스페인으로 돌아와 나중에 〈타마리트 시집 Diván del Tamarit〉(1936)으로 펴내게 된 시들을 쓰기 시작했으며, 다시 희곡을 썼다. 어렸을 때부터 지녀온 꼭두각시에 대한 열정을 표출하여 〈빌리클럽 꼭두각시 Los títeres de cachiporra〉와 〈돈 크리스토발의 인형극 Retabillo de Don Cristóbal〉이라는 2편의 인형극을 썼다. 이 인형 소극(笑劇)까지도 우울한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스페인 공화국의 출범으로 가르시아는 연극 부문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수 있게 되었다. 문교부는 교육받지 못한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고전희곡 가운데 명작들을 접할 수 있게 해준 학생극단 '바라카'(La Baraca)에 보조금을 지급했다(1932~35). 가르시아는 바라카의 설립자·지도자·연출자·음악가로서 로페 데 베가, 칼데론 데 라 바르카, 세르반테스의 작품을 무대에 올려 폭넓은 연극경험을 쌓았다. 이러한 결실이 민속극 3부작 가운데 제1편인 〈피의 결혼식〉(1933)이다. 이 작품은 결혼식날 신부가 몰래 사랑해온 남자와 달아나는데 결국 두 경쟁자는 싸우다가 서로 상대방의 손에 죽었다는 뉴스 기사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가르시아의 희곡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비운의 인물들로, 원초적인 열정과 문명사회의 단호한 명예규범 사이에서 갈등을 겪다가 결국은 죽고 만다. 1934년 자신의 친구였던 한 투우사가 쇠뿔에 받혀 죽은 사건을 바탕으로 〈이그나시오 산체스 메히아스를 애도하며 Llanto por Ignacio Sánchez Mejías〉(1935 출판)를 썼다. 이 시는 그의 가장 뛰어난 시이며 현대 스페인 문학뿐만 아니라 세계문학에서도 가장 뛰어난 애가로 손꼽힌다. 여기에서 "오후 다섯 시에"(A las cinco de la tarde)라는 공허하고 슬픈 후렴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오후 다섯 시에/정각 오후 다섯 시에/한 소년이 참회자의 흰옷을 샀네/오후 다섯 시에/한 바구니의 석회는 이미 준비되었다네/오후 다섯 시에/나머지는 죽음 그리고 죽음뿐이네/오후 다섯 시에" 1934년말 발표한 〈예르마〉는 3부작 가운데 제2편이며, 〈피의 결혼식〉과 더불어 20세기에 성공을 거둔 몇 안되는 시비극(詩悲劇) 중 하나이다. '비극적 시'인 이 희곡은 아이가 없는 것에 절망해 불임 남편을 죽이는 한 여자의 고통을 다루고 있다. 가르시아는 1936년 6월의 어느날 밤 친구들의 집에서 3부작 가운데 마지막 작품인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을 발표했다. 거의 모두 산문으로 쓴 이 희곡은 독재적인 어머니에 의해 상가(喪家)에 갇혀 지내는 4자매가 분노와 욕망으로 몸부림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1936년 7월 내전이 터지자 불안을 느끼고 마드리드를 떠나 그라나다로 갔다. 그러나 작품에 계속 등장하는 참혹한 죽음의 전조는 운명으로 다가왔다. 그라나다에서 지내던 어느날 밤 그는 재판도 받지 않은 채 민족주의자들에게 총살당했다. 평가 작품의 소재는 지역적이지만 작품에 계속 나타나는 주제는 보편적인 것으로서 사랑, 욕망, 죽음, 모성애,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에 대한 형제애를 비롯해 무엇보다도 원초적인 욕정이 인습 때문에 좌절되었을 때 그 결과로 생겨나는 잔혹함, 폭력, 죽음 등을 다루었다. 그의 시에서는 근원적인 욕망이 대개 구체적이고 관능적이며 격앙되고 전율을 느끼게끔 표현되었는데 때로는 초자연적으로 병렬된 이미지와 상징을 통해 표현되기도 한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     강의 백일몽 (헤닐 강)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포플러 나무들은 시들지만   그 영상들을 남긴다.         (얼마나 아름다운       시간인가!)     포플러 나무들은 시들지만   우리한테 바람을 남겨 놓는다.     태양 아래 모든 것에   바람은 수의를 입힌다.         (얼마나 슬프고 짧은       시간인가!)     허나 그건 우리한테 그 메아리를 남긴다.   강 위에 떠도는 그걸.     반딧불들의 세계가   내 생각에 엄습했다.         (얼마나 아름다운       시간인가!)     그리고 축소 심장이   내 손가락들에 꽃핀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뉴욕에서 달아나다: 문명을 향한 두 개의 왈츠 - 작은 빈 왈츠」    빈에는 열 명의 소녀와 하나의 어깨가 있다. 그 어깨 위에서 박제된 비둘기 숲과 죽음이 흐느끼지. 성에 낀 박물관에는 아침 잔영이 남아 있지. 천 개의 창이 있는 살롱이 있지.   아이, 아이, 아이, 아이! 쉬잇, 이 왈츠를 받아 줘.   이 왈츠, 이 왈츠, 이 왈츠, 바다에 꼬리를 적시는 코냑과 죽음과 “좋아요!”의 왈츠.   널 사랑해, 널 사랑해, 널 사랑해, 우중충한 복도 언저리, 안락의자와 죽은 책까지; 여기는 백합의 어두운 다락방, 달이 있는 우리의 침대에서 거북이가 꿈꾸는 춤 속에서, 사랑해.   아이, 아이, 아이, 아이! 부서진 허리의 이 왈츠를 받아 줘.   빈에는 너의 입과 메아리들이 노는 네 개의 거울이 있지. 소년들을 푸른색으로 그리는 피아노를 위한 하나의 죽음이 있지. 지붕 위로는 거지들이 있지. 통곡의 신선한 화관들이 있지.   아이, 아이, 아이, 아이! 내 품 속에서 죽어가는 이 왈츠를 받아 줘.   왜냐하면 널 사랑하니까, 널 사랑하니까, 내 사랑아, 아이들이 노는 다락방에서. 아이들은 따스한 오후의 소란한 소리들을 듣고 헝가리의 오래된 빛들을 꿈꾸고, 네 이마의 어두운 고요를 느끼고 눈빛 백합들과 양떼들을 본단다.   아이, 아이, 아이, 아이! “영원히 널 사랑해”하는 이 왈츠를 받아 줘.   빈에서 나는 너와 춤을 추리라, 강의 머리를 그린 가면을 쓰고. 히아신스 꽃이 가득한 나의 강변들 좀 봐! 내 입을 너의 두 다리 사이에 두고, 내 영혼을 사진들과 수선화들 사이에 두리라. 그리고 네 발등의 어두운 물결에는 내 사랑아, 나의 사랑아, 바이올린과 무덤, 왈츠의 테이프를 선사하리라. (번역: 민용태)                                         ● 시_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 1898년  스페인 그라나다 근처 마을 푸엔테 바케로스에서 출생. 시집 『시 모음』『노래집』 『집시 이야기 민요집』『이그나시오 산체스 메히아스의 죽음』 등. 희곡  「피의 결혼」「예르마」「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등. 1936년 8월 19일 생을 마감함 (스페인 내전 초기, 공화주의자였던 로르카는 파시스트 반란군에 체포돼 사흘 뒤 총살당함).      ● 낭송_ 한동규 - 배우. 연극 , 등에 출연.   ● 출전_ 『로르카 시 선집』(을유문화사)    ● 음악_ 권재욱    ● 애니메이션_ 이지오    ● 프로듀서_ 김태형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뉴욕에서 달아나다: 문명을 향한 두 개의 왈츠 - 작은 빈 왈츠」를 배달하며   로르카 시를 제대로 만난 건 민용태 선생님이 번역해서 《현대시학》에  게재한 ‘로르카 특집’(아마도)에서였다.   “파랗게 사랑해 파랗게./파란 바람, 파란 잎가지./ 바다에는 배/산에는 말./  허리에 어둠을 두르고/ 베란다에서 꿈꾸는 여인,”(「악몽의 로맨스」 부분)   시들을 홀린 듯 읽으며 비수로 가슴께를 슥 베이는 듯했는데 그 시린 통증의  절반 남짓은 질투심이 유발한 것이었다. 내가 지적 근기 없는 인간이 아니었더라면  스토커처럼 그의 시들을 캐고 다녔으련만. 더 이상 알지도 못하면서 “로르카 최고!”  “내 로르카!”만 남발하고 다녔나보다. 그로부터 일 년쯤 뒤,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쯤 전,  그라나다에 들른 친구로부터 달랑 한 문장 적힌 엽서를 받았다. “로르카가 참혹하게  죽음을 당한 곳, 나는 전율한다!”   그즈음 한 술집에서 레너드 코헨 노래를 들었다. 그 애절한 노래에 달콤하게 휘감겨  발끝을 까딱거릴 때 소설가 이인성 선배가 “저 가사 로르카 시야.”라고,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일러줬다. 아!?   앨범을 구해 몇 날 며칠 그 노래만 듣다가 열 개의 카세트테이프를 그 노래로 채우고  열 장의 종이에 가사를 옮겨 적었다. 열 명의 친구들에게 선사하고 싶어서.   어휘 하나하나가 어둡고 향기롭다. 로르카 시가 대개 그렇듯 죽음이 있고, 숨 막힐 듯한   꽃향기가 있고, “아이, 아이, 아이, 아이!” 통곡소리가 있고. 문학집배원 황인숙 / 출처 :  / 새벽산책 시와 그리움       
854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시조문학교과서 4 5 6... 댓글:  조회:3186  추천:0  2017-11-14
民 調 詩 論 ​ - 서 재 석(한국문인협회 민조시분과위원장) - ▣민조시(民調詩) 작법요령을 중심으로 ​ 민조시 작법에 따른 주요요소라면 언어의 직조,  함축 ,간결 ,조화 ,가락 ,장단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요소들을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일상어에 접목시켜 얼마만큼 뭉클하게 마음을 울릴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특정인이 주로 쓰는 제한적인 언어의 편중도 아니요, 일부 지식인이 쓰는 언어 또한 아니다. 「민조(民調)」의 단어 첫 글자인 국민 민자(民)에서 풍기는 예측대로 우리 국민들이 일상생활에서 활용하고 있는 보통사람의 평범한 언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시작법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언어의 「음가수」구조를 이해하는 일이다.   「언어란」심중에 담고 있는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표현하고 상대방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에게 전해줄 언어의 직조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그러므로 「민조시」를 쉽게 접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쓰는 언어의 마디가 「3 ,4 , 5 , 6조」로 이루어져 있음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좋을 성 싶다. 즉, 언어의 음절과 가락 , 장단이 「3 ,4 , 5 ,6」글자 수에 접목 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다. 다시 말해 수리학에 있어서 선천적인 수 「1 , 2 , 3 ,4 , 5 ,6 ,7 ,8 , 9」와 후천적인 수 「2 , 3 , 4 , 5 , 6 , 7 , 8 , 9 , 10」에서 선천적인 숫자의 중심축은 다섯 (5)이다. 반면, 후천적 숫자의 중심축은 여섯 (6)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향가 ,농요 ,가요 ,무가 , 민요 ,시조 등 분야 또한 다양하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민족의 뿌리인 「한사상」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한사상이란」우리 민족이 생활 속에 담고 있는 우주본체사상인 자연사상을 말한다. 좀 더 이야기를 부연한다면 사물의 이치를 거슬리지 않고 자연의 이치와 진리를 조화롭게 다스리고, 이동하고, 포용하는 정신과 힘이 곧 한민족의 우수한 민족정신인 「한사상」인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가위/바위/보」문화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이 놀이의 활용 면을 들여다봐도 용이하기 그지없다. 개인적인 일이나 단체모임 등에서 일어나는 일들 즉, 물건 나르기, 편 가르기, 심부름, 기회부여, 물건의 선택 등에서 다양하게 활용되는 우리의 순수한 놀이 문화로서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는 놀이요, 강하고 약한, 높고 낮음이 없는 놀이요, 좋고 나쁨, 손해와 이익 등을 3가지 본체를 통해 포용하고 수용하는 놀이임에 틀림없다. 즉, 「가위」는 「보」를 이기지만 「바위」를 못 이기고, 「바위」는 「가위」를 이기지만 「보」를 못 이기며, 「보」는 「바위」를 이기   지만「가위」를 못 이기는 것을 보더라도 일의 진행과 기회를 아우르는가 하면 전체를 포용하는 이 놀이야말로 우리 민족만이 가질 수 있는 혼 뿌리요, 정신사상이다. 그 밖에도 삼세번 / 원방각(○ ․ □ ․ △)사상 / 품앗이 / 두레 / 3 , 5 , 7 ,9 … 21 … 49제/ 9층탑 / 삼신사상 / 5행사상등 생활습관에 묻혀있는 가짓수 또한 다양하다. 이와 더불어 우리의 언어 또한 이러한 사상에서 잉태된 의사 전달의 도구임에는 틀림없다. 보다시피 우리의 언어는 가락 ,장단이 3/4또는 4/4박자인 트로트풍을 지니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한 사상의 기본 수치인「3」을 들 수 있다. 이「3」이야말로 한사상에서 연유된 중심 숫자이다. 반복 강조되는 말이지만 3세번 / 성과 이름의 석자 / 하늘 , 사람 , 땅의 삼신 사상이 그 좋은 예라 하겠다. 이는 민족정신이 녹아있는 숫자로 마음의 넉넉함과 너그러움 , 기원 ,기회부여 등을 두루 내포하고 있는 숫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민족 혼 뿌리인 바람에서 기인된 「3 , 4 ,5 ,6」의 언어수치를 가지고 주도면밀하게 그리고 아름답고 맵시 있게 직조된 것이 「민조시(民調詩)」인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민조시」를 깔끔하게 그리고 마음에 들게끔 쓸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민조시인이라면 한 번쯤 고심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아마「민조시」공부를 하는 사람의 공통적 심리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민조시」하면 글자 수를「3 , 4 ,5 , 6」자 틀 속에 둔다는 점에서 우선 위축감 , 구속감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심적 제한 요소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감과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즉, 언어의 직조 ,간결 , 함축 , 조화 ,가락, 장단 , 언어의 선택 ,창출 등 제한요소에서 많은 연구와 숙달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점들을 해소하며 쉽게 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하는 측면에서 몇 가지  핵심적 요소를 제시하고자 한다.   • 첫째 : 「시어(詩語)가 풍부해야 한다.」 시어가 풍부하지 못하면 자   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을 글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설사 표현   한다 해도 글이 느슨하거나 글자 수에 어긋나는 현상 등 이런 저런    일로 고심이 많다. • 둘째 : 아름다운 언어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언어 또는 시어의 생상기법이 필요하다고 본다.」어떻게 보면 거창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조금만 연구하고 고심하면 쉽게 자기 생각에 맞는 언어를 창출 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 셋째 : 「시어는 남이 쓰지 않은 신선함이 배어 있어야 한다.」   아무리 글을 잘 쓰고 언어의 직조 그리고 가락 , 장단이 조화 된다고   해도 이는 한계가 있고 자신이 추구하고자하는 뜻을 부각시키지 못    하는 문제점을 낳는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소하는 방법을 구체적으    로 알아보기로 한다.   1.「합성어(合成語)」를 창출해야 한다. 합성어란 어근과 어근이 합쳐진 단어를 말한다. 예를 들면“물걸레”/“가죽신”등이다. 여기서「물+걸레」/「가죽+신」으로 이루어진 것을 의미하는데 특히 다른 한쪽의 어근을 수식하는 합성어들은 언어의 맛을 더해주는 느낌이 크다. 뿐만 아니라 몇 가지 장점을 들면 다음과 같다.         • 언어의 의미와 폭을 확산시켜 준다.         • 언어의 뜻을 명확하게 해준다.         • 언어의 깊이 ,느낌을 확산시켜 준다.         • 언어의 선택 및 활용 폭을 넓혀준다.        • 가락 ,장단을 증폭시킨다.     2.「관용어(慣用語)」를 창출해야 한다. 관용어란 보통일반인들이 관습적으로 쓰는 말로서 문법이나 어법으로 규정할 수 없는 말이지만 어근들이 완전하게 융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바늘방석” / “바가지 쓰다” / “시치미 떼다”등이다. 즉, 「바늘+방석」/「바가지+쓰다」/「시치미+떼다」로 합성된어 다른 언어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면이 있다. 즉, 언어의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 합성어의 특징이다. 따라서 「관용어」는 단어와 의미부여에 많은 공헌을 할 수 있는 오묘한 맛을 지니고 있는 분야로 은유 ․ 비유법에 기여도가 크며 언어의 표현 기법을 확산시키는데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3. 「파생어(派生語)」를 창출해야 한다. 파생어란 「접속어와 어근」으로 이루어진 단어로 단어의 색다른 맛과 향기를 풍기는 단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시어(詩語)사용에 있어 시어의 맛과 향기 , 깊이 ,공간의 폭을 잘 조화시킬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면 “풋사과” / “풋고추” / “검붉다”등이다. 즉 「풋+사과」/「풋+고추」로 이루어진 단어들이다. 특히 「파생어」는 언어의 색감 , 질감 , 감각을 돋보이게 하며 언어의 맛과 생동감을 확산 시키는데 적절한 단어들이다.   4. 명쾌한 이미지 부여가 필요하다. 「이미지」란 어떠한 사물의 이름을 듣거나 봤을 때 그 사람 머리에 떠오르는 모습 , 영상 ,심상 등을 말한다. 즉, 감각을 재현하는 감각적 표현을 뜻한다. 이러한 「이미지」를 활용하는 방법은 각자가 지닌 오감(五感 : 시각 ,미각 ,청각 , 후각 , 촉각)이다. 예를 들면 「푸른 바닷가(시각) /뱃고동 소리 뚜우 (청각) / 비릿한 바닷냄새(후각) / 입맛 당기는 생선회 (미각) / 만져보니 미끈(촉각)」. 제시된 예문에서 보다시피 「이미지」표현은 보다 구체적이고 생동감이 요구된다. 다시 말해 「단일 감각적」인 표현보다는 「공감각(共感覺)적」인 표현이 시(詩)를 쓰는데 필요한 요소라고 하겠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문 (1) ,(2)를 들기로 한다.   • 예문(1) : 「나는 화가 났다.」를「성난 호랑이처럼 으르렁 포효하며」로 표현한 문장을 비교해보면 단일감각적인 시각적 표현에서 청각적 ,생동감을 추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예문(2) : 「종소리」를 「푸른 종소리」로 표현 했다고 하자. 본래의 종소리는 청각적이고 푸른 종소리는 시각적요소를 추가하고 있다. 즉, 「청각을 시각화」하는 것을 전이(轉移)라고 하는데 이러한 기법을 「공감각(共感覺)기법」이라 한다.   따라서 명쾌한 이미지를 부여하는 데는 수식어 선택은 물론 깔끔한 문장을 전개할 수 있는 문장기술 또한 중요한 요소요, 관건이라 하겠다. 이렇게 제시한 “예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민조시」를 쓸려면 「글자수 제한이 있어 못 쓰겠다.」「시어(詩語)가 궁색해서 못 쓰겠다.」하는 것은 하나의 핑계이고 궁색한 답변 밖에 될 수 없다. 앞에서 제시한 「합성어 , 파생어 , 관용어 , 명쾌한 이미지 부여 , 문장전개」등의 요소를 깊이 연구하고 활용한다면 남이 쓰지 않은 새로운 시어창출은 물론 시의 맛과 향기 그리고 차원 높은 시 구상을 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러한 형식과 요소는 일찍 한자(漢字)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변문(騈文)」이다. 이 변문을 다른 말로 변려문(騈儷文) /사륙문(四六文)/사륙변려문 (四六騈儷文)이라고도 하는데 이 변려문은 후한(後漢)때부터 일어나 육조대(六朝代)에 와서 절정에 달했으며 송대 (宋代)초까지 이러졌다. 이 「변문」은 글을 쓰는데 있어 가급적 아름답게 표현하고자 하는데 그 의미를 두고 있다. 민조시에 있어서 글자 수를 「3 , 4 ,5 , 6조」에 제한을 두듯이 “한자”에 있어서도 통상 이러한 글자의 제한을 두고 있다. 즉 「4 ,6자」의 기본 틀인 것이다. 그리고 한 구(句)에는 4자 또는 6자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예를 들면 「4-4-6-6」,「4-6-4-6」의 기본형식을 뜻한다. 하지만 4자와 6자만으로는 단조롭고 또한 아름다운 글과 명확한 의미를 부여하지 못해 「1글자」또는 「2글자」를 추가하는 일, 그리고 6자를 「3 ,3」으로 나누어 표현하는 기법을 말한다. 그리고 「변문」전체는 대구(對句)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면 「4-4-6-6」의 형태에서 「4와4」「6과6」이 “대구” 이다. 또한 「4-6-4-6」에서도 1구씩 건너뛰어 대구를 형성한다. 따라서 변려(騈儷)의 뜻은 「짝」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의 정형시 만엽(와까/하이꾸)이 「5-7조/7-5조」로 구성되어 있고, 한자는 「변문」에서 보다시피 「4 ,6조」, 민조시는 「3-4-5-6조」로 구성되어 있는 현상을 발견한다. 어쩌면 한자의 「변문(文)」에서 「만엽」이 발전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낳게 하는 것도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지금가지 「민조시」를 보다 쉽고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합성어 , 관용어 , 파생어 , 명쾌한 이미지부여」의 내용에서 주요 요점 및 장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구  분 내    용 장    점 합성어 • 어근과 어근이 합쳐진 단어 -물걸레/가죽신(물+걸레/  가죽+신) •언어의 의미를 증폭시켜 준다. •언어의 뜻을 명확하게, 그리고 구체화 시킨다. •언어의 깊이 ․ 느낌 ․ 공간을 확산시켜준다. •언어의 선택 및 활용폭을 넓혀준다. •언어의 리듬 , 가락을 완충시킨다. 관용어 •어근이 완전하게 하나로 융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바늘방석/ 바가지 쓰다/ 시치미 떼다.(바늘+방석/바가지+쓰다/시치미+떼다) •가락 , 장단을 더욱 매끄럽게 해준다. •은유 ,비유법 활용에 기여도가 높다. •언어의 표현기법을 확산시켜준다. •의미부여가 깊어진다. 파생어 •접사어와 어근으로 이루어진 단어 -풋사과/풋고추 (풋+사과/풋+고추) •언어의 색감 , 감각을 돋보이게 한다. •언어의 맛과 생동감을 증폭시킨다. •의성어 ,의태어 활용에 기여한다. 이미지 부여 •오감(五感)활용 •공감각(共感覺)적 표현 •오감의 조화 및 공감각적 표현을 통한 언어의 색감 ‧ 질감 ‧ 감각 ‧생동감등을 확산시키고 언어의 깊이 ‧ 느낌 등을 살릴 수 있다.   다음은 「민조시 작법 요령」 및 장 ‧ 단점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민조시」를 크게 나누어 보면 「단민조시/연민조시/장민조시」로 나눌수 있다. 이들에 대한 장 ‧ 단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1. 단민조시 : 단민조시란 음수 즉, 글자 수가 「3 ,4 ,5 ,6조」로 종료되는 시, 다시 말해 기본자수가 18자로 마감되는 짧은 정형시를 말한다. 따라서 단민조시를 쓰려면 매「행」이나 「연」에 의미부여가 명확한 시어가 필요하고 글자의 함축미와 조율의 기교가 선행되어야 하며 시에서 풍기는 느낌이 강하게 와 닿는 간결성과 명확성이 뒷받침 돼야하는 부담도 없지 않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간결함에 부담이 없다는 느낌이 지배적이고, 조율되고 함축된 언어의 맛을 느낄 수 있으며, 의미부여를 통한 느낌 ‧ 감동이 강하게 와 닿는 점이 무엇보다 큰 장점이라 하겠다. 반면 단점이라면 사전에 함축된 시어준비 그리고 간결 ‧ 명확한 의미부여가 준비되어 있을 때, 시의 느슨함을 방지할 수 있고 시의 단조로움으로 인해 역사시나 과정전개시 같은 「장시」에는 자신이 담고 있는 뜻을 완벽하게 표출 시킬 수 없는 제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단점이라 하겠다.   2. 연민조시 : 연민조시란 단민조시가 2회 이상 4회 미만 연속되는 시를 의미한다. 즉, 18자로 종료되는 단민조시를 「1수」로 봤을 때 3수(18+18+18)이상 진행되는 민조시를 뜻한다. 이 연민조시는 단민조시에 비해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과 의미가 자유로운 면이 있어서 「3, 4, 5 ,6조」의 시어(말마디)를 중첩 사용할 수 있어“의미부여의 강조”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더불어 자기가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부여와 결론”을 여유 있게 내릴 수 있는 것도 장점이라 하겠다. 반면 단점으로는 여유로움으로 인해 참신한 시어대입과 행과 연의 직조 , 함축미가 느슨해 질 수 있는 단점 또한 배제할 수 없다. 어떻게 생각하면 「민조시」를 처음 접하는 자는 오히려 단민조시보다는 연민조시를 기본으로 삼아 숙달,연마, 연구하여 단민조시를 숙달시키는 것이 부담을 적게 하는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3. 장민조시 : 장민조시란 단민조시 (18자)한수가 4회(18+18+18 +18)이상 연속되는 시를 말한다. 따라서 장민조시는 작가의 작법숙달이나 쓰고자 하는 주제 ,제목 , 과정 ,의미부여 등의 요소에 따라 차이는 있겠으나 주로 역사적인 시 또는 긴 과정을 전개하는 詩 또는 여러 사건을 전개할 시에 적용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장민조시는 단민조시와 연민조시에서 표현 못하는 내용을 충족시킬 수 있는 여건을 부여하고 행 ,연의 중복을 촌해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세세히 표출할 수 있으며 어떤 사물을 대상으로 한 느낌 , 감정 , 깊이에 대해 공간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것이 장점이라 하겠다. 반면 단점이라면 언어의 조율 ,선택 , 함축성 등의 요소가 느슨해져서 자칫하면 산문식의 말장난이 되지 않을까 염려스러운 점이 있다. 지금까지 「단민조시 / 연민조시 / 장민조시」에 대해 개략적으로 장 , 단점을 알아봤는데 이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구  분 내             용 단 민 조 시 장점 •「3, 4, 5 ,6조」종결에 따른 간결함이 덧보인다. • 시어의 단단함이 있다. • 행, 연의 신축성과 함축미가 있다. • 시의 의미부여가 강하다 단점 • 시어선택 , 함축성, 탄력성 , 조율에 대한 부담이 있다. • 은은하고 잔잔한 맛이 적다.       구  분 내             용 연 민 조 시 장점 • 단민조시에서 표현 못하는 내용을 충족시킬 수 있다. • 행, 연 중복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강조할 수 있다. • 사물의 느낌 , 감정 ,깊이 ,공간의 폭 등을 넓힐 수 있다. • 은은하고 잔잔한 맛이 있다. 단점 • 자칫 시의 간결함, 시어의 단단함 , 함축미 ,조율등을 상실할 수 있다. 장 민 조 시 장점 • 계속적 전개를 요하는 역사시 또는 이야기가 긴 단계별 과정 전개시가 적절하다. • 단 , 연민조시에서 부여 못한 내용을 전개할 수 있다. 단점 • 장황한 이야기로 인한 언어의 조율 , 율조 , 직조 ,함축미가 상실될 수 있다. 민 조 시 공 통 점 장점 • 가락 , 장단 ,리듬의 맛이 있다. • 간결함에서 풍기는 신선한 맛이 있다. • 시어의 조율 ,함축성 ,깊이 ,공간미 등이 덧보인다. • 글이 짧다는 점에서 심적 부담이 적다. 단점 • 민조시작법(조율 ,언어선택 ,의미부여 등) 미숙시 시가 길어진다. 더불어 연과 연의 경중(輕重)이 심하다. • 언어직조, 조율 미숙에 따른 간결함 , 단단함 , 함축미등이 느슨해질 수 있다.     다음은「민조시」작법요령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민조시는 먼저 쓰고자 하는 글자 수에 따라 단민조시 / 연민조시 / 장민조시로 구분 짓고 또한 시의 선택에 따라서 시어 , 직조 , 조율 , 간결성 , 함축미 , 가락 ,장단 등 제반요소를 적절히 고려하여 전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무튼, 민조시 작법의 기본 틀은「3 , 4 , 5 ,6조」이다. 작법 요령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예문」을 들어 설명하기로 한다. 제시하는 「예문」은 2007년 「문학저널」4월호에 실은 본인의 민조시 2편으로 예문 “1”「눈꽃」과 예문 “2”「春芽」이다.   예문“1” 예문“2”         눈 꽃         雪花木         가짓살         白花滿開         一枝春*이다.         허울레,         겉치레         벌없는 바람 꽃. *一枝春 : 매화         春 芽         몸부림         産苦 끝에         몽울 몽울         봄을 낳는다         빨강         노랑         하양         봄꽃물 눈물빛       • 예문 : “1”은「눈꽃」이다.   이 시(詩)는 보는 바와 같이 2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제 1연은 4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 제1행 : 3 / 제2행 : 3 / 제3행 : 4 / 제4행 : 5의 글자 수로 종결         짓고 있다.         •제2연은 3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행 :3 / 제2행 : 3으로 여섯         글자(3+3)를 이루고 있으며 제 3행에서 6글자로 종결짓고 있다. •예문 : “2” 는 「春芽」이다.  이 시(詩) 또한 보는 바와 같이 2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제 1연은 4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 제1행 : 3 / 제2행 : 4 / 제3행 : 4 / 제4행 : 5의 글자로 종결 짓         고 있다.         • 제2연은 12글자로 4행을 이루고 있다. 즉, 제1행: 2 / 제2행 : 2         / 제3행 : 2글자로 1 , 2 ,3행(2+2+2)을 모두 합친 글자 수가 곧         6이 되는 것이다. 제4행 : 여섯 글자(6)로 종결짓고 있다. 예문 「“1”         ,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여섯(6)글자로 종결짓지 않고 다시 한번         6(여섯 글자)을 거듭 쳐준 것이 두 예문 시(詩)의 특징이라 하겠다.   「예문 “1”과 “2”」의 두 작품에서 보는바와 같이 시의 문장 첫머리가3(세 글자)으로 시작하여 6(여섯 글자)으로 종결짓고 있는 것을 알 수 있고 전체적인 시(詩)의 틀을 보면 행의 자수율이「3 ․ 4 ․ 5 ․ 6조」의 글자 수로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행갈이 / 연갈이」는 작자의 작법, 익숙도 또는 작가의 특성 등에 따라서 그 형태 또한 다양하게 변화될 수 있으나 보편적으로 시의 함축성, 조율된 시어와 의미부여 등의 연건에 따라 행과 연을 가르는 것이 무난하다고 본다. 의무부여 또는 강조를 위하여 반복적인 용어나 시어를 쓸 경우 행이 길어지고 늘어나서 결국 「연갈이」에 있어 연의 편중과 불균형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시의 무게 ․ 깊이 ․ 폭 ․ 공간 등의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사전에 시의 제목, 시의 선택 (단민조시/ 연민조시/ 장민조시), 조율, 함축성, 행과 연의 숫자 구성 등을 잘 간파하여 균형 있고 짜임새 있는 글을 전개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더욱이 글을 많이 써보지 않은 사람이나 작법에 익숙치 못한 사람은 연갈이 또는 행갈이를 하는데 있어 많은 고심을 하게 된다. 아무튼, 행과 연갈이는 일정한 형식이나 법칙 ․ 규정을 제한 할 수는 없다. 따라서 강조하고 싶은 말은 글을 구성하고 있는 행 ․ 연의 독립적 요소를 갖추고 있거나 의미부여가 충족되었을 경우에 하는 것이 좋다. 시에 있어서 어떻게 행과 연을 가르느냐에 따라서 시의 균형과 신선함을 더해주는 요소이므로 신경을 써야할 부분이다. 특히 연갈이에 있어서는 전체시 구성에 있어서 연과 연의 균형과 무게 ․ 공간미가 치우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밖에 시(詩)를 보다 깔끔하게 마무리 짓기 위해 준수해야 할 숫자 ․ 부호 사용 시 올바른 표기법, 시작법시 염두 사항을  두어야 한다...     [출처] 民 調 詩 論|작성자 하이디
853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시문학교과서 1 2 3... 댓글:  조회:3041  추천:0  2017-11-14
시 쓰기의 귀납적 방법과 표현 ​       김 기 덕     시인들은 많지만 표현의 방법을 제대로 알고 시를 쓰는 시인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자신의 관념을 전달하기 위해 주제의 통일이나 의미의 나열에 치중하여 시를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는 언어로 그리는 그림’이라는 시의 개념을 생각한다면 언어를 통해 그림을 그리듯이 시를 표현해야 할 것이다. 그림 속에는 화가가 나타내고자 하는 주제성이나 메시지가 있겠지만, 그림 자체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보는 사람에 따라 그림 속에 담긴 관념을 금을 캐듯 채취하는 것이다.하나의 시 속엔 철학의 광맥이, 관념의 광맥이 필요하다. 그 관념성은 지상에서 볼 수 없는 광맥처럼 숨겨진 존재이다. 잘 표현된 시 속엔 철학과 사상, 이념의 고차원적인 광맥이 숨겨져 있어야 하되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때 시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표현 속에 관념을 감추고 심오한 생각의 깊이를 보여주기 위해선 표현의 방법을 알아야 한다. 시의 표현은 하나의 단어로도 가능하지만 대부분 문장에서 시작된다. 그 문장은 이미지로 결합된 문장이며, 설명이나 관념의 기름기가 빠진 순수 사물적이거나 감각적이어야 한다.     1. 시 쓰기의 귀납적 방법의 필요성   지금까지 우리의 시 쓰기는 대부분 연역적 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연역적 방법은 간접추리와 직접추리와 같은 연역적 추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간접추리는 일반적으로 둘 이상의 명제로부터 새로운 명제를 이끌어내는 것을 말한다. 예) “모든 유대류는 척추동물이다.” “모든 캥거루는 유대류이다.” 그러므로 “모든 캥거루는 척추동물이다.”   직접추리는 하나의 명제에서부터 새로운 한 명제를 이끌어 내는 방식이다. 예) “모든 사람은 이성적 동물이다.” 그러므로 “어느 비이성적 동물도 사람이 아니다.” 예) “어느 자유주의자도 전체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어느 전체주이자도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시는 증명이 아니기 때문에 논리학의 방법으로 생각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을 수 있으나 시 쓰기의 방법적 차원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연역적 방법은 일반적인 원리를 가지고 구체적이고 특수한 사실을 증명하는 방법이다 예) 모든 동물은 죽는다. -대전제(일반적 원리) 사람은 동물이다. -소전제(구체적 사실) 그러므로 사람은 죽는다. -추론(구체적 원리)   연역적 방법의 시 쓰기는 하나의 주제의식, 즉 결론적 의미를 이끌어내기 위해 자연이나 사물, 정황의 의미, 철학성, 교훈성, 유희성 등등의 대전제를 세우고 감성적 정서나 이야기 등의 소전제를 덧붙여 시인의 시적 의도를 나타내는 방식이다. 연역적 방법의 시는 연역법적 증명의 형식을 갖는 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의 발상에서부터 완성에 이르는 과정에 있어서 전체적인 흐름을 의미한다. 대전제는 시에 대한 발상을 얻고 어떤 주제로 써나갈 것인가에 대한 구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소전제는 이 주제에 대한 많은 이미지와 이야기 등의 표현을 빌려와 주제성을 뒷받침하는 것을 의미한다. 추론은 결론적 감성의 증명, 새로운 차원의 제시, 상승된 시심의 도출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시는 정확한 논리적 증명을 위한 글은 아니지만, 그 방법적인 면에서 볼 때 대부분 연역적 방법을 취해왔던 것은 사실이다. 시는 비논리의 논리이다. 오류에 빠질 수 있는 비논리와 상상력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논리적 사고로 이해하려 한다면 시의 접근성이 차단될 수도 있다. 지금까지 연역적 방식의 시들은 시간성, 인과성, 예상가능성의 원리들을 통해 생각을 펼치며 개인적 정서의 증명을 해왔다고 볼 수 있다. 첫 문장을 보면 시의 가능성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첫 문장이 표현되었느냐의 문제도 있지만, 앞으로 생각이 뻗어갈 수 있는 씨알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 씨알은 주제의식을 나타내며 시적 정서를 증명하기 위한 대전제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들은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 내용을 거의 다 알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의 표현방법을 말하면서 접근법을 끌어들인 것은 표현을 위한 근본적인 방법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자에게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의도에서 시 쓰기를 시작한다면 시에 대한 표현보다는 관념성에 갇히게 된다. 물론 숨겨진 관념을 나타내기 위해 잘 표현된 시들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표현에 어려움을 겪는 시인들에겐 시 쓰기의 근본적인 접근 방법을 바꾸는 것도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시 쓰기 방법은 하나의 사물이나 풍경, 이야기 등을 통해 착상이 이루어지면 연못에 던져진 돌의 파장처럼 이미지를 확장해 가거나 굴착기 같은 생각의 압력을 통해 사고의 지반을 꿰뚫으려 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시작점은 착상의 중심이고, 시의 전개는 이 중심의 확장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고 보니 정방향의 일방적 시 쓰기가 되어 예상이 쉽고 의미가 드러나 식상한 맛을 주었다. 시는 어려워야 하나? 라는 질문을 받는다. 시는 어려워야 할 필요가 없다. 단지 깊이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랜 기간 반복하여 써온 시의 정서들이 이제는 식상한 공식이 되었다. 첫줄을 읽고 다 알아버린 시의 맛은 맹물 같은 것이다. 대하소설을 읽는데 그 내용이 예상된다면 누가 시간을 들여 읽으려하겠는가. 초보적 시 쓰기에서 벗어난 고수들의 바람은 신선한 접근과 파격적 전개는 아니라 해도 우려먹어서 맛이 다 빠진 녹차 잎 같은 시는 아닐 것이다. 시를 어렵게 쓰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한 편의 시 속에 많은 이미지와 생각의 씨알을 담는다면 당연 시는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편하게 읽혀서 감동을 주는 시도 있지만 그 속에 안주해서 감동도 없고 신선함도 없는 시들이 너무 많다. 새로운 실험을 통해 과감히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기존의 방식을 버려야 할 것이다.     2. 시 쓰기의 귀납적 방법   이러한 기존의 연역적 시 쓰기 방식에서 벗어나는 방법 중에 하나가 귀납적 방법이다. 시 쓰기의 귀납적 방법은 연역적 방식과 접근법에서 상반적인 방향성을 갖는다. 연역의 추리는 그 전제가 참이면 결론도 필연적으로 참이지만, 귀납적 추리는 전제와 결론 사이에 필연성이 없다. 귀납적 추리는 그 전제에서 결론을 이끌어 낼 때 개연성(꼭 단정할 수는 없으나 대개 그러리라고 생각되는 성질.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에 의한 귀납적 비약이 반드시 따른다. 이러한 논리학의 논리가 시에 도입되어 활용될 때는 연역적 전개의 반대적 방향성을 갖는다. 귀납법은 여러 가지 구체적인 사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을 통해 일반적인 원리를 이끌어내는 방법이다.   예) 사람은 죽는다. -구체적 사실 소도 죽는다. 돼지도 죽는다. 개도 죽는다. 사람, 소, 돼지, 개는 동물이다. 그러므로 모든 동물은 죽는다. -추론(일반적 원리)   다시 말하면 연역법은 일반적 원리를 근거로 구체적, 개별적 문제에 대한 결론을 이끌어 낸다. 하지만 귀납법은 구체적, 개별적 사실들을 논거로 하여 일반적인 원리를 이끌어 내는 방법이다. 귀납적 시 쓰기의 방식은 연역법의 대전제와 같은 의미, 철학성, 교훈성, 유희성 등을 세우기 이전에 관찰적 근거들을 모으듯 이미지를 뽑는 작업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먼지라는 소재를 통해 시를 쓴다면, 연역적 방법은 ‘먼지를 통해 인간은 한낱 먼지에 불과하다’는 주제성을 통해 접근한다든지, ‘먼지로 인한 폐해’와 같은 문제성으로 출발할 것이다. 하지만 귀납적 방법은 먼지라는 하나의 소재를 가지고 관찰적 근거가 되는 주변 이미지를 뽑으라는 것이다. 먼저 유사한 이미지들로 모래, 재, 진드기, 꽃가루 등을 찾았다면, 인접성의 이미지 침대, 방, 진공청소기, 걸레 등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상징적 이미지인 사람, 별, 나뭇잎, 구름 등을 찾아 순서를 정한다.귀납적 시 쓰기의 방식은 확장된 이미지, 팽창된 의식에서 집중된 이미지, 집약된 의식으로 가는 수축의 과정이다. 먼지와 연결된 이미지가 세상엔 무수히 많다. 이 무수히 많은 이미지들을 취사선택하여 집약된 정서적 논증을 이루어야 한다.     ⑴ ‘먼지’를 소재로 한 구체적 시 쓰기 방법   먼지라는 소재를 대상으로 시를 쓰겠다는 생각을 했다면 먼저 먼지에 대한 책을 한 권 정도 읽어볼 필요가 있다. 먼지에 대한 기본 지식이 갖추어진 다음에 이미지를 뽑게 되면 미처 알지 못했던 많은 이미지들을 뽑을 수 있다. 인간은 아는 만큼 생각하고 아는 만큼 말할 수 있다. 하나의 시를 쓰면서 논문이나 책을 통해 그에 연관된 방대한 양의 지식을 얻을 수 있다면, 또한 한 편의 시 속에 책 한 권 분량의 지식과 상징을 압축할 수 있다면 대단한 시가 될 것이다. 한 줄 문장 속에 책 한 권을 압축하기 위해선 상징적 이미지의 활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상징적 이미지 속엔 천년 은행나무의 씨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최대한 많이 뽑을수록 좋다. 그것을 다 활용하지 않아도 연관된 사고의 확장을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② 뽑은 이미지에 대한 문장 만들기 뽑은 이미지를 가지고 문장을 만들 때는 벌이 꽃에서 단물을 빨아 몸에서 침과 함께 숙성시켜 꿀을 생산해 내듯 그 이미지를 자신의 경험과 정서적 지식을 통해 숙성시켜 시적표현으로 토해내야 한다. 그래서 똑같은 이미지라도 시인마다 다르게 표현되며, 다른 맛과 색깔을 나타낼 수 있다. 그렇다면 먼지에 대해 유사성, 인접성, 상징성으로 뽑은 이미지를 가지고 나의 정서적 사고의 숙성을 통한 문장을 만들어 보고자 한다.   꽃가루: 꽃 입술에서 나온 꽃가루들이 거울 같은 세상을 지운다.   화산재: 성층권까지 치솟는 분노의 화산재.   모래: 변심한 애인의 모래바람.   중금속 입자: 중금속으로 살던 입자들이 알레르기를 일으키며 나를 깨운다.   석면가루: 석면가루의 말들이 진폐증을 일으킨다.   진드기: 진드기나 박테리아들과 한 이불 덮으며 살아도   침대: 침대 밑 쥐며느리나 개미들처럼 껴안지 못하고 진공청소기를 돌린다.   책상: 책상 위에 쌓인 중금속들이 비둘기로 날아간다.   창문: 유리창에 달라붙은 꽃가루들이 자동차가 되어 달린다.   나: 나는 몇 억만 년 전에 피어난 소금방울이고 화산재였나.   벽: 벽을 통과해 내 몸 속에 둥지 틀고 먼지들이 기침을 한다.   구름: 구름방울, 빗방울로 살다가 지상 위에 날개를 접는다.   별: 반짝이는 먼지들로 가득한 은하계에 바람이 인다.   화장터 연기: 아지랑이처럼 흩어지는 내 안의 미립자들.   지구: 먼지별에 가득 찬 먼지들 서로 껴안고 몰려다닌다.   노을: 굴절과 산란을 만들며 노을처럼 흩어진다.   빛: 나뭇잎마다 수북이 쌓이는 빛     ⑵ ‘먼지’를 소재로 한 시 쓰기의 완성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나온 문장들을 적절히 배합하고 배치하여 한 편의 시로 만들면 되는데, 하나하나의 문장이 거의 독립적이기 때문에 배치순서가 달라도 크게 문제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신이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이 있거나. 사고의 대소, 현실과 이상 등의 차이에 의해 다르게 배치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렇게 만들어 놓고 나서 부족한 부분들은 좀 더 보충하여 매끄럽게 다듬는 과정이 필요하다. 다음의 시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내 나름대로 완성한 시이다.   먼지 보고서   먼지별에 가득 찬 먼지들 서로 껴안고 몰려다닌다. 바람의 미세 혼령들 한통속으로 몸을 드나들며 구름을 일으킨다. 성층권까지 치솟는 분노의 화산재 변심한 애인의 모래바람 꽃 입술에서 나온 꽃가루들이 거울 같은 세상을 지운다. 불을 피우고, 물을 뒤집어쓰며 풀풀 먼지만 피우다가 연기로 사라지는 미세먼지들 벽을 통과해 내 몸속에 둥지 틀고 기침을 한다. 어젯밤 꿈으로 분해된 초미세먼지의 빙의 아 무서워, 현실의 악몽들은 중금속으로 살던 입자들이 알레르기를 일으키며 나를 깨운다. 분해결합하며 공간 이동한 에어로졸들은 또 거미가 되고 세균이 되겠지. 진드기나 박테리아들과 한 이불 덮으며 구름방울, 빗방울로 살다가 아지랑이처럼 흩어질 내 안의 미립자들 쥐며느리나 개미들처럼 껴안지 못하고 진공청소기를 돌린다. 책상 위에 쌓인 중금속들이 비둘기로 날아간다. 유리창에 달라붙은 꽃가루들이 자동차가 되어 달린다. 나는 몇 억만 년 전에 피어난 소금방울이고 화산재였나. 석면가루의 말들이 진폐증을 일으킨다. 메트로놈의 파장이 엔진을 돌린다. 먼지로 왔다가 먼지로 돌아가는 날개들의 소리 없는 퍼덕임 굴절과 산란을 만들며 노을처럼 흩어진다. 반짝이는 먼지들로 가득한 은하계에 바람이 인다. 나뭇잎마다 수북이 쌓이는 빛. (먼지보고서 전문/ 김기덕)   3. 귀납적 시 쓰기 방법에 있어서의 표현 문장 만들기 귀납적 방법의 관찰적 근거들로 찾은 이미지들은 완성된 시의 정서적 증명을 위한 핵심요소들이다. 이 핵심적 근거들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시의 정서적 증명을 위한 표현의 방식이 달라진다. 하나의 문장 속엔 이미지의 뼈를 세우고 생동하는 활력의 살을 붙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이미지가 있는 명사를 선택해야 한다. 관념적 명사를 제외시키고 이미지적 명사를 주어로 해서 문장을 만들어야 한다. 말씀보다는 성경을, 권력보다는 총과 칼을, 사랑이라는 관념보다는 하트나 눈물 같은 이미지를 문장의 주어로 써야한다. 이러한 사물적 단어를 주어로 끌어오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사물 속에 이미 담겨 있는 관념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조심해야 할 점은 사물 속에 담긴 죽은 관념을 봐서는 안 된다. 그 관념은 사물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어야 하며 자기만의 깨달음, 의미 부여가 되어야 한다. 빨간 신호등은 정지를 나타낸다. 이 정지의 관념은 누구나 다 아는 관념이기 때문에 이 관념을 염두에 둔 빨간 신호등을 끌어온다면 이미 죽은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이다. 빨간 신호등은 신선한 시의 이미지를 쓰기 위해선 새로운 관념의 옷을 입혀야 한다. 내 앞에 켜진 빨간 신호등은 나의 관점에서는 정지이지만 다른 방향에 있는 차들의 관점에서는 소통이 될 수 있다. 이렇듯 하나의 사물을 끌어와 문장의 주어로 쓸 때는 새로운 관념의 차원을 생각해야 한다. 시에서의 핵심적 문장은 주어+동사의 문장이다. 이미지로 선택된 사물의 주어에 어떤 동사를 배치해야 살아있는 표현이 될까? 시는 결국 언어로 그린 사물적 이미지의 조합을 통해 인간 정서를 표현하는데 있다. 그렇다면 사물적 그림을 그리되 그 그림 속에서 인간적 정서를 느껴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동사의 쓰임이 더욱 중요하다. 만약에 먼지라는 이미지의 사물을 선택했다면 먼지를 주어로 해서 동사를 배치할 때 인간적 정서가 있는 동사냐 아니냐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먼지들이 떠다닌다.’라는 문장과 ‘먼지들이 어깨동무하고 몰려다닌다.’라는 문장은 차원이 다르다. ‘먼지들이 떠다닌다.’라는 문장은 1차원의 문장이라면 ‘먼지들이 어깨동무하고 몰려다닌다.’라고 하면 2차원, 3차원의 의미를 갖는 문장이 된다. 그래서 동사의 정서적 배치는 시의 상징적 관계를 만들며 다양한 해석을 갖게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인들이 인간적 정서의 연결고리가 있는 동사를 사용하지 못하고 1차원적인 주어에 대한 서술만을 하기 때문에 표현의 문장 만들기에 실패하곤 한다. 몇 가지 인간적 정서의 연결고리가 있는 동사의 사용에 대한 예를 든다면 ‘달이 밝다’는 ‘달이 웃는다’로, ‘낙엽이 진다’는‘낙엽이 투신한다’로, ‘별이 반짝인다’는 ‘별이 윙크한다’와 같은 표현들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표현 방법은 이미 활유법이라는 방법으로 사용되어 온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시의 문장을 씀에 있어서는, 즉 사물적 언어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단순한 활유보다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정서적 동사를 사용할 수만 있다면 증명하고자 하는 정서적 결론을 쉽게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정서적 문장 표현에는 동사의 활용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깨동무한 먼지’, ‘웃음 짓는 달’, ‘투신하는 낙엽’ 등과 같이 직접 주어를 꾸며줄 수도 있지만, 이것 역시 큰 틀에서 동사의 활용방법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이미지의 언어로 그림을 그리는 이러한 표현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사람에 대한 표현은 사물로 바꾸어주는 과정이 필요하다. 물론 사람과 사물은 공존하고 영향을 주기 때문에 하나의 그림 속에 넣을 수 있지만, 심층적 조화와 고도의 상징적 표현을 위해선 사람을 사물로 변환시켜서 표현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사물로 변형된 인간이 아닌 존재로 시에서의 등장은 사물과 인간의 경계를 긋고, 의미가 드러난 관념 쪽으로 이끌 수가 있다. 예를 든다면 ‘여자가 서있다’라는 문장에서 여자를 사물로 바꾸어 준다면 ‘느티나무 같은 여자가 서있다’와 같이 바꾸어줄 필요가 있다. 여자를 사물로 바꾸어주는 과정에서 직유든, 은유든, 상징이든 상관없다. 단지 감쪽같은 접합을 위한 언어적 풀질의 테크닉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느티나무 같은 여자’든, ‘느티나무 여자’든, ‘느티나무’든 그것은 시인의 역량에 따라서, 또는 표현하고자 하는 상황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내가 근골의 팔을 내보인다’라는 문장도 표현의 문장으로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지만, ‘플라타너스 같은 사내가(플라타너스 사내가/ 플라타너스가) 근골의 팔을 내보인다’로 사내를 사물로 바꾸어준다면 자연스런 언어적 표현의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근골의 팔을 내보인다’라는 표현에서도 이미 사내는 나무로 변환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근골’이란 단어 자체가 뿌리와 뼈를 접합시키는 이미지이며, ‘근골의 팔’도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자연적 사물을 인간적 정서와 연결시킨 표현이기 때문이다.   4. 귀납적 시 쓰기의 결론 귀납적 시 쓰기의 방식은 기존의 수목적 사고의 방식에서 탈피하여 유목적 사고의 방식을 추구하는 구체적 방법 중에 하나이다. 사고는 흐름과 방향성을 갖는다. 그 흐름과 방향성은 그냥 놔두면 관습적인 쪽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나무에 매달린 사과는 항상 땅으로만 떨어진다. 시에서의 사과는 땅이 아닌 하늘로 떨어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만유인력의 법칙과 같은 관습적 사고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뿌리에서 줄기로, 줄기에서 가지로, 가지에서 잎으로 뻗어 온 우리의 사고, 시적 전개의 방식을 과감히 탈피하여 잎에서 가지로, 가지에서 줄기로, 줄기에서 뿌리로 접근하는 방식의 추구가 바로 귀납적 시 쓰기의 방식이다. 내가 무엇에 대해 시를 쓸 것인가 하는 대전제를 세우고, 많은 이미지와 스토리를 끌어와 작자의 의도대로 정서적 결론을 이끌며 도출하던 시의 방식에서 이제는 탈피해야 한다. 이미지든 사건이든 시적 대상을 잡았다면 먼저 이미지를 뽑고, 이미지적 문장을 통해 언어의 그림을 그려줌으로써 독자들이 생각하고 유추해 갈 수 있는 시를 써야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표현적 문장을 자유롭게 배치하고 조합하는데 묘미가 있다. 하나의 화폭에서 풍경화나 정물화를 그린다고 가정할 때는 나름대로 그리는 순서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그림들이 분해되어 재구성 될 때는 순서가 필요 없다. 여러 가지 관찰적 근거들이 모여 하나의 사실을 증명하듯 나름대로 주제성을 느끼며 재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기 때문이다. 주제적 큰 틀을 표현하고 정서적 증명을 위해 연관된 많은 사실적 근거의 이미지를 찾고, 이미지들을 인간적 감성의 연결고리가 있는 동사들로 표현의 문장을 만들어 뒤섞인 퍼즐적 조합을 통해 시를 썼을 때 독자들은 퍼즐을 맞추는 것과 같은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이러한 귀납법적인 방법에 의한 표현적 시 쓰기는 식상해진 관념적 시의 탈피를 위해 도전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시의 생명은 표현이기 때문이다.    인쇄 블로그 카페 북마크 메모 폴라 보내기  댓글 쓰기                   [스크랩] `하이퍼 시`의 시사적 위상과 그 미학/오양호  시창작론숲  2017. 11. 3. 17:48 http://blog.naver.com/shunzi75/221131924811 전용뷰어 보기   하이퍼 시’의 시사적 위상과 그 미학                                                                        오 양호(문학평론가. 인천대 명예교수)    ‘하이퍼 시’는 월간 『시문학』지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현대시 혁신 신시운동이다. 현재 한국문단에는 근 3백여 종류에 이르는 문예지가 발행되고 있지만 ‘하이퍼 시’라는 이름의 시 갈래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시문학』의 이런 신시운동은 이 잡지가 내걸고 있는 ‘현대시의 길 닦기, 길 잡기, 길트기’와 호응한다.  문학은 종적인 지속성과 횡적인 변화 속에 존재한다. 앞 시대의 문학적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한 시대의 변화를 수용한다. 그러니까 문학은 과거의 것이면서 동시에 현재의 것이다. 한국 현대시사에서『시문학』이란 이름의 시 전문지는 3개다. 첫 번째는 1930년 박용철이편집 겸 발행인으로 창간한 동인지『시문학』이고, 두 번째는 1965년 4월에 문덕수가 주재 편집하고, 정태진이 발행한(청운출판사)『시문학』이며, 세 번째는 1971년『현대문학』(현대문학사)의 자매지로 조연현 주간으로 발행된『시문학』이다.  첫 번째 『시문학』은 박용철, 정지용, 김영랑, 정인보, 이하윤 등이 중심 멤버였고, 두 번째는 순수심리주의 경향, 또는 현실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반영하는 시적 미학으로 내면세계를 개척하고 있던 교수시인 문덕수가 신진의 적극적 육성, 시단의 전위적 역할을 내세우며 발행했던 문예지다. 1966년 12월 통권 20호로 종간된 이 시 잡지를 통해 시단에 나온 시인으로 양왕용, 홍신선, 오순탁, 민윤기 등이 있다.  세 번째 『시문학』은 통권 제 24호부터 현대문학사서 독립하여, 발행인 김규화, 주간 문덕수에 의해 시문학사에서 발행해 오고 있는 문예지다. 2012년 10월 현재 통권 495호를 발행했다. 이 문예지를 통해 시단에 나온 문인을 열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현대 한국시단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시인을 거의 다 열거해야 하는 까닭이다.  세『시문학』을 관통하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그 첫째는 순수시의 지향이고, 두 번째는 전위 시의 지향이다. 한국시문학사에서 ‘시문학파’로 지칭되는『시문학』은 우리가 잘 알듯이 카프의 목적성, 도식성, 획일성에 반대하여 순수문학을 옹호한 모태가 된 동인지다. 정지용으로 대표되듯이 이 잡지는 한국시사에서 시를 언어의 예술로 자각하고, 그것을 심화시키는 창작 활동과 함께 모더니즘을 수용하여 한국시를 변화 발전시키는 기수 역할을 했다.  두 번째, 세 번째 『시문학』은 실재로 문덕수의 시 쓰기로 대표된다. 두『시문학』을 관리한 문덕수의 도저한 순수지향의 글쓰기를 여기서 논하는 것은 췌사贅辭이다. 한국문단이 다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문덕수가 앞서고『시문학』출신 시인 일단이 그와 동행하고 있는 현재의 ‘하이퍼시 클럽’의 시 쓰기는 사정이 다르다. 1930년대 이래『시문학』이란 이름을 단 세 종류의 잡지가 모두 그 나름의 전위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고, 하고 있지만 ‘하이퍼 시’만큼 한 시대의 시에 전위성이 강한 창작 활동을 집단적으로 벌린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또 이 일단의 시인들이 생산하고 있는 새로운 형식의 시를 상당수의 사람들이 예의주시하고 있는 까닭이다.  1930년대 박용철의 『시문학』이 목적문학의 대척점에 있었듯이 문덕수의『시문학』은 참여문학과 맞서면서 한국 시문학의 한 축을 떠받쳐 왔다. 이런 점에서 1930년대의『시문학』이 남긴 문학사적 위상을 현재의『시문학』이 계승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런 연유로 나는 현재 시문학 출신 시인 일단이 전개하고 있는 이 ‘하이퍼 시 클럽’을 편의상 ‘신시문학파’로 명명한다. 1930년대의 시문학이 모더니즘 실현으로 시단의 전위 역할을 하였듯이 현재의 시문학도 하이퍼 시로 동일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렇게 선언적 진술을 한다. 그러나 문제가 간단한 것은 아니다. 30년대『시문학』의 모더니즘은 한국현대시사에서 아주 뚜렷한 의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지만, 현재『시문학』의 신시운동은 범 문단의 공인 속에 그런 양식의 시 쓰기가 아직 확대, 심화되는 조짐을 발견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점을 신시문학파의 엔솔로지『하이퍼 시』(시문학사, 2011)를 중심 텍스트로 그 시사적 위상과 미학을 간단히 검토해 보겠다.  1, 하이퍼 시의 정체성   하이퍼 시는 공간적으로 서정시와 동일 상한象限에 놓여있고, 시간적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병치되어 있다. 그리고 창작 방법으로는 사물시를 모태로 한다. 그렇다면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이 사물시事物詩·physical poetry다.  ‘사물시’란 무엇인가. 모두 주지하고 있겠지만 논리 전개상 이 용어에 대해 간단하게라도 언급해야겠다. 사물시는 랜섬J,C Ransom이 형이상시metaphysical poetry에 반대되는 시를 사물시physical poetry와 관념시platonic poetry로 구분하면서부터 규정지어진 용어다. 사물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로 이루어지는, 곧 언어에 의한 조형의 시가 사물시다. 사물시의 대표적인 예가 이미지즘 시이고, 이 이미지즘 시의 기법은 흄T.E.Hulme, 파운드E.L.Pound의 이론으로 대표되듯이 이 시는 관념보다 시어의 시각적 이미지를 강조한다. 시에서 주관적 주체인 시적 자아는 뒤로 물러나고, 사물들이 객관적인 진술을 통해 엄격히 묘사되는 이런 시의 기법은 릴케R.M.Rilke의『신시집』(1907)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한국의 경우 김춘수의 초기 시가 그러하고, 문덕수의 시가 이런 시학에서 출발하였고, 지금은 21C의 시의 키워드로 사실, 생명, 현장을 제시하면서 시인의 사상, 관념을 배제하고 ‘사물’에서 새로운 시의 원점을 찾는 진중한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1)  사정이 이러하다면 ‘하이퍼 시’는 현대시의 적통嫡統의 자리에 서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우선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과 동일 상한에 서 있는 공간성이다.  포스트모던이 무엇인가. 그건 바로 이 시대 예술전반을 통어하는 전위성이 아닌가. 그렇다면 하이퍼 시는 언어예술로 나타나는 전위시 운동의 한 현상이라 하겠다. 전위성이 아직 익숙하지 못한 것이고, 그래서 관습에서 멀고, 이해가 어려운 것이라면, 하이퍼 시의 정체는 이런 신기성新奇性·novelty, 곧 ‘전위성’과 관련된다. 하이퍼 시의 한 수용자가 이 시를 비판한다며 글의 표제를 ‘아방가르드 시의 몰락’이라했다는 사실이 하이퍼 시의 이런 성격을 반영한다.  한국이 IT 강국이 되어 PC가 널리 보급되던 1990년대 중반부터 몇몇 앞서가는 문인들에 의해 ‘신기성’의 하이퍼텍스트 문학, 특히 하이퍼텍스트 시가 제기되었다. 이것은 말의 컴퓨터 입력과 동시에 hyper text makeup language(HTML)라는 컴퓨터 언어로 변하는 시다. 이런 시는 하이퍼링크, 곧 연결기능이 들어있어 그것이 텍스트 화면의 뒤에 숨어 있다가 독자의 선택에 의해 기계적으로 나타난다. 이런 글쓰기를 그 때 몇 몇 문인들이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글쓰기는 시가 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단순히 언어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곳의 언어는 컴퓨터 부호로의 변신을 독촉 받고 있는 언어다. 중심 매체가 붕괴된 문화적 장르에 대하여, 단순히 언어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문학이라고 이름 할 수 있을까?2)  사정이 이러하지만 오남구, 심상운, 최진연, 이솔, 안광태, 송시월을 중심으로 한 신시문학파, 특히 하이퍼 시의 미학을 줄기차게 탐색하고 있는 심상운은 하이퍼텍스트 시의 이런 폐기선언에 새로운 시학으로 맞서며 ‘종이 하이퍼 시’를 들고 나왔다. 그는 언어구조 속에서 구현될 수 있는. 디지털의 감각과 이미지의 결합, 하이퍼텍스트의 문학적 기능을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이다...(  )...하이퍼+시는 현실을 바탕으로하는 허구, 즉 기존의 시적 공간을 허물어버림으로써 작품의 주제나 목적성을 지워버린다. 다만 작품의 내면에 숨어 흐르는 시인의 의식이 시적 생명력의 바탕이 된다.3)  심상운의 이 말을 요약하면 그가 주장하는 하이퍼 시는 ‘극사물시’ 또는 ‘극하이브리드 시’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극사물시’를 ‘완전한 탈 관념 지향 시’로 ‘극하이브리드 시’를 ‘이질적 이미지의 폭력적 결합’ 또는 ‘이질적 이미지의 과감한 결합에 의한 시의 무의미화 기법’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런 시의 기법은 아직 ‘신기성’으로 기호분해가 되지 않는 상태에 놓여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사물시’가 랜섬, 흄, 파운드, 릴케와 관련되어 있고, 우리의 경우 이런 하이브리드hybrid문제는 시문학파의 이미지즘으로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고, 그것이 조향, 김춘수, 문덕수로 수용, 변화, 지속되면서 그 적통성이 이어졌다고 할 수있지만 오늘의 하이퍼 시는 경우가 좀 다르다. 극하이브리드성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신시문학파의 시학은 ‘이방가르드’성의 긍정만이 아니라, 그 변화와 굴절이 너무 강하여 독자와 시가 이반될 부정적 요소도 함께 가지고 있다.  3. 하이퍼 시의 몇 가지 문제점   1) ‘하이퍼 시’ 란 용어  하이퍼 시는 컴퓨터에서 구현되는 전자 하이퍼텍스트 시와 종이(책) 위에서 구현되는 종이 라이퍼텍스트 시로 구분된다.4) 그런데 전자 하이퍼텍스트 시는 바로 위에서 보았듯이 ‘언어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문학이라’하기는 어렵다며 이미 폐기된 글쓰기 형식이다. 그러나 심상운으로 대표되는 신시문학파는 종이 하이퍼텍스트 시를 ‘하이퍼 시’로 발전시키면서 이 포스트모더니즘적 신시창작 기류를 ‘현대시 혁신의 뜨거운 대열’ 이고, ‘하이퍼적 몸짓은 한 마디로 경이롭다’5)며 자평하고 있다.  사정이 이러하지만 이 현대시 혁신의 대열에 참가하고 있는 시인은 신시문학파 외에는 별로 눈에 뜨이지 않고, 연구자들도 하이퍼텍스트 시 연구를 하면서 전자하이퍼텍스트 시만 대상으로 삼고 있다.6) 이런 현상은 하이퍼 시의 시미학과 관련되는 문제겠지만, 그것보다 종래의 한국 서정시와의 심한 편차성 문제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사실 오늘의 많은 독자는 아직도 관습적 시 읽기, 가령 서술시적 시에 익숙해져 있다.  80년대, 저 시에도 ‘역시 문제는 리얼리즘이다’라고 외치던 현실주의 문학의 그늘이 아직 우리문단에 짙게 깔려있고, 실재로 거의 일 만 명에 육박할 시인들이 그런 분위기 속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신시운동을 전향적 반성 위에 공격적으로 논리개발을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  2) 하이퍼 시의 상이한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에 의한 다선구조로 초래되는 무의미성; 하이퍼 시의 내력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김춘수의 무의미 시, 문덕수의 이미지의 상호충돌의 전위성과 관련된다.  김춘수의 경우 시의 언어는 기호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그림과 같이 어떤 실재로서 만들어진 사물로서 그냥 거기에 존재시켜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싸르뜨르가 ‘시의 언어는 사물이다’는 산문의 언어와 다른 조립된 언어가 시의 언어이며, 이 언어들은 무엇을 의미하기 위하여 성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추상화된 구성물로서 단지 거기에 존재하고 있을 뿐이란 그런 논리에 따르고 있다. 이렇게 자존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시는 의미론적으로 어디에도 연관되어 있지 않고 자유롭게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언어를 균형과 불균형의 결합으로 시를 조립했다7). 와 같은 작품이 전형적인 예다.   물또래야 물또래야   하늘로 가라   하늘에는   주라紀의 네 별똥 흐르고 있다.   물또래야 물또래야   금송아지 등에 업혀   하늘로 가라.                 천 구백 팔십 일년 봄                              大餘 金 春 洙8)   ‘물또래’와 ‘주라기의 별똥’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것은 ‘금송아지 등에 업혀 하늘로 가라’는 것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렇게 관계가 없는 이미지들을 ‘ 하늘로 가라.’고 되풀이함으로써 무의미의 리듬을 형성시킨다. 모순된 이미지가 겹쳐져서 사물자체가 그냥 거기에 존재하고 있듯이 설명할 수 없는 시인의 내면 풍경이 존재하고 있다. 어떤 의미가 전제되어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몇 개의 이미지들이 병치되어 있을 뿐 그것들의 통일된 의미는 없다. 시간적 원리에 입각한 언어의 통사적 기능을 배제하고, 이미지들을 하나의 동시성의 공간 속에 둠으로써 그것들의 자유로운 움직임, 곧 무의미 뒤에 음향적인 잔상만 남아있는 형태다. 의미의 인식보다는 주술적 율동이 더 강함으로써 독자들은 ‘별똥, 주라기, 금송아지’ 등의 이미지를 통해 자기 나름의 의미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문덕수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는 벌써 20대부터 ‘맑은 허무’ 또는 ‘이름 붙이기’ 등으로 불리는 시를 썼고, 자신은 그런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미지가 내포하는 철학적· 인생론적 관념을 찾으려 한다는 것은 오히려 이미지를 불순케 하는 심리적 과욕이라고 생각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 자체가 하나의 실재이다9).  이미지를 하나의 실재로 보는 점은 김춘수와 같고, 이런 작품을 허무의 응시, 가치중립, 불명의 존재로 보는 점도 김춘수와 다르지 않다. 이런 점을 한 연구자는 이렇게 평한다.   서로 이질적인 이미지를 병치시키며 그 이미지의 상호충돌에 의해 돌발적인 의미의 충격을 주는 수법을 구사하는 것이 그의 시법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이러한 시 작법은 당연히도 시인의 주제의식이라든가 세계관을 작품에 선행시키지 않는다. 어느 정도, 무의미 내지 탈의미의 시가 시도되는 것이다.10)   사정이 이렇지만 김춘수가 말년에 ‘나의 무의미 시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되었다. 나는 여기서 또 의미의 세계로 발을 되돌릴 수밖에 없게된11) 그런 변용이 문덕수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정제되어 가는 상태다.  그래서 마침내 문덕수는 한국시는 이제 ‘사물자체가 아니라 사물이 거느린 관념을 보는 경향이 우리문화나 시창작의 대세가 되어 있습니다. 이 폐단은 개혁되어야 합니다’12)라는 탈관념의 단계에 다다라 있다. 그는 이런 시쓰기 기법을 장시「우체부」에 적용함으로써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2012년 시월 바로 현재 이 하이퍼시 운동을 ‘현대시 혁신의 뜨거운 대열’로 평가하면서 하이퍼시클럽이 벌리는 ‘본의의 세계에서 유의의 세계로 초월transcendence하고, 다시 두 세계를 통합하는 본의의 세계로 돌아오는 하이퍼적 몸짓은 한 마디로 경이롭다’고 극찬한다.  3) ‘탈관념은 시가 아니다’는 반응에 대한 반론의 시학. 곧 보편성적 시론 형성 문제  하이퍼 시 쓰기와 이론을 병행하는 심상운은 이 창작 기법을 ‘의식의 흐름이 들어있는 옴니버스omnibus 기법’으로 명명한다. 그는 30대의 문덕수가 쓴 문제적 평론 이 키워드로 내건 ‘대상에서의 해방’을 내면세계의 무의식의 표출이라면서 이것을 하이퍼 시 운동의 원천으로 삼는다. 그의 시작 노트를 참고 해 보자.   하이퍼 시는 현실적인 공간과 시간의 질서를 뛰어넘는해방된 상상과 공상의 세계를 시에 담아보려는언어작업의 산물이 된다. 그 작업은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난 관념의 제로지대로부터 출발한다. 여기에서 현실이 배제된 순수한 이미지를 형성하는 기호의 세게가 초현실의 새로운 이미지의 세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존재의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에서 너무 동떨어져서 객관적 공감을 얻지 못할 때, 언어의 박제剝製가 되어 허무 속으로 빠져버릴 수 있는 위험성을 노출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공상의 세계, 객관적 공감, 언어의 박제’ 이다. 가령 해리포터 시리즈가 공상소설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권선징악이란 주제가 깔려있다. 시에서의 객관적 공감 역시 리어리즘의 논리가 완전히 배제되면 이해불가능이 된다. 언어의 박제도 의미의 소통이 완전히 차단된 상태다. 시가 이렇게 나타날 때 아무리 무목적의 목적이 목적이라 하더라도 그런 시는 결국 독자로부터 멀어진다. 심상운은 이런 문제점을 이미 간파하고 있다. ‘언어의 박제’현상을 피해야 한다고 스스로 경고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상 이런 3가지 점을 전제하면서 하이퍼 시 몇 편을 통해 현재의 실상을 검토해 보겠다.   4. 하이퍼 시의 현장.    이 글의 중심 텍스트가 된 하이퍼시 클럽의 엔솔로지『하이퍼시』(시문학사. 2011)에는  시인 20인의 작품 100수가 수록되어있다.『시문학』은 그간 하이퍼 시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해 왔다. 2008년 5월부터 2009년 7월까지의 , 2009년 11월부터 2010년 2월까지 기획 특집으로 발표한 가 그렇다. 그러나 이 그룹의 합동시집이 간행된 바는 없다. 이런 점에서 이 엔솔로지는 시사적 자리가 유별나다. 우선 시의 기법이 종래의 그것과 아주 다른 변화refraction에 기인하는 참신성 때문이다.   나의 가방은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지   내 몸의 태엽을 풀어 놓고   나는 권태로운 생일을 관리한다.   지하철 입구 젖은 양동이에 담겨   나이 수대로 계산되는 꽃송이처럼   나는 국수를 세며 먹는다.   혼자 듣는 뻐꾸기 소리는 저녁과 함께 사라졌다.   등을 보이지 않는 소리의 끝을 따라   나는 거울 속을 통과하고 있다.                                위상진 7~10연 이 작품은 현대 대도시인의 소외(‘나는 국수를 세며 먹는다’), 가방 속에 들어간 탁상시계 같은권태(‘내몸의 태엽을 풀어 놓고’) 를 문제로 삼으면서 그런 사회의 문명을 비판하고 있다.  감성보다 이성이 강하여(‘등을 보이지 않는 소리’), 주지적이고, 진술에 의하지만 시적 긴장이 늘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주제의식이 다선구조로 교차됨으로써 시적 상상을 여러 갈래로 풀어 재미를 준다. 도시의 삶을 문제 삼는 종래의 시가 감성에 너무 기대는 것과 많이 달라 감정의 추락을 막는다. 그래서 주지적이다. 이 엄혹한 현대를 감성으로 산다면 살아남을 자 얼마나 될까.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이 시대의 앞자리에 서 있다.  신시문학파 중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한다고 할 수 있는 심상운의 경우는 어떤가.   한 청년이 공원 풀밭에서 통조린 캔을 툭하고 딴다. 그 속에 꽁치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유통기  한이 찍힌 주검이 눈부신 5월의 햇살 속에서 검푸른 살을 드러낸다. 눈감고 있던 맨살이 꿈틀 거린다.      물에 젖은 살에서 하얀 거품을 일으키는 비누의 살을 만진다. 비누는 아무에게나 포동포동한 맨살의향기를 풍기며 몸뚱일 비틀다가도 가끔 미끄러져 나와 세면대 바닥에서 통통거린다.      누가 바다를 유리병 속에 넣고 어항이라고 했을까? 열대어 두 마리 맨살 번득이며 유유히 지느러미를 흔들고 있는 오전 11시 20분 한 쌍의 남녀가 산호초 화려한 바다 속을 보며 어께를 감싸고 있다.     (                                                                                     )                                                           전문 이 작품은 네 연으로 되어있다. 제1연의 중심 이미지는 ‘주검이 눈부신 5월의 햇살’이고, 제2연은 ‘맨살의 향기’며, 제3연은 ‘산호초 화려한 바다 속’이다. 그러나 제 4연은 (  )로 비어있다. (  )로 구성된 부분은 독자가 링크할 연이다. 그래서 작자는 작품 끝에 ‘* ( ) 안은 당신의 상상이 들어가는 공간입니다. 링크해서 펼쳐 보세요. 그러면 당신의 마음이 반짝이며 나타날 것입니다.’ 라는 주를 달아 놓았다. 이 작품은 하이퍼 시의 작법과 감상법의 기법의 한 제시로 보인다. 하이퍼 시의 시성詩性poeticity 담론을 충실히 수행하는 시 쓰기, 곧 상이한 이미지의 충돌에 의한 다선 구조, 독자와의 소통, 공간이동, 연결고리link로 주관적 의미와 정서로부터 탈출을 모색하면서 시적 상상력 확산에 의해 가독성可讀性 촉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작에 오면 이런 현상이 심화, 확대된다.     기원전 7세기 그리스 신전神殿의 원형을 복원한 화려한 채색 조각상 그래픽이 TV모니터 속에서 가볍게 빙빙 돌고 있는 오전 10시 30분   횡단보도를 건너온 30대 여인의 손에 들려있는 구겨진 풍경화風景畵에서 청계산 숲속 산새 몇 마리 나와 삐삐삐 쪼로롱 삐삐삐 쪼로롱 허공에 반짝이는 초록물방울 뿌리며 빌딩사이를 지나 푸른 하늘로 날아간다   K화백이 지난 밤 하얀 화선지 위에 내려놓은 검은 묵향墨香의 산 속에서는 걸망을 맨 한 사내가 나와 사방을 둘러보다 징검다리를 건너 빨간 노을이 물든 여진女眞의 마을 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나는 이른 봄 햇살의 눈부신 바늘들이 촘촘히 박혀있는 저수지 수초 속에서 발가숭이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나오는 그림을 그리다가 채소장수의 확성기 소리에 창밖을 본다                                                         전문 이 시는 의식의 흐름이 중심이 된 옴니버스omnibus 기법이라 하겠다. 현실적 공간과 시간의 질서를 뛰어넘는 상상과 공상, 현실성이 배제된 이미지가 형성하는 초현실적 세계, 관념의 제로지대를 무의식의 표출에 의해 형상화하고 있다. 마치 한 사발의 물을 증류수로 만드는 작업과 같다. 도덕, 관념, 일상의 잡다한 현실이 사상捨象된 속에 한 이미지의 순수성이 다른 이미지와 병행되면서 그걸 뛰어 넘는 또 다른 유의의 세계 형성을 지향하고 있다, 이런 점은 대상에서 해방되고, 현실의 통제에서 벗어난 자율적인 순수이미지를 시적 가치로 삼고 있다는 점, 특히 하이브리드hybrid를 통한 단선구조의 탈출이라는 면에서 문학적 성취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증류수는 미네랄이 없는 죽은 물이라 우리 몸에 무해무득하다.  이 시는 대체적으로 외래적 체취에 휩싸여 있다. 시제詩題에서부터 ‘그리스 신전’, ‘빌딩’, ‘여진 마을과 같은 어휘들이 그러하다. 그리고 시 전체를 지배하는 어조語調·tone 역시 외래(서구)적 성향을 띄고 있다. 얼른 조향의 의 시적 취의趣意·sense가 감지된다. 이런 점에서 이 시는 다분히 문화에서의 변화refraction의 축이 그 중심부에 가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굳이 프레이저Frazer의 논리13)를 끌어오지 않더라도, 문학은 과거의 것이면서 오늘의 것이다. 지속과 변화, 이 원리는 시인이나 작품이 갖추어야할 역사성 그 자체다. 이런 점에서 심상운의 시 기법은 앞 시대의 조향의 어떤 면을 연상시킨다. 이런 성격은 그 나름의 지속성이라 해도 좋겠다. 그러나 조향의 시는 한국의 전통시 미학으로 보면 여러 가지 한계점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심상운의 시 역시 그런 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는 이런 모더니즘의 전형前型에서 벗어나 가상현실을 현실과 같은 차원에서 인식하면서 언어구조 속에서 구현될 수 있는 디지털의 감각과 이미지를 결합하는 과정을 벌써 통과했고, 이제는 하이퍼 시라는 새로운 기법을 단단히 구축해 가고 있다. 사정이 이렇게 도전적 전위성을 띄고 있다. 그러나 그의 하이브리드적 시 쓰기는 그가 우려하는 것처럼 ‘언어의 박제’ 위험 앞에 놓여 있다.  이 문제를 문덕수의 경우를 통해 검토해 보자. 우리가 잘 알듯이 문덕수의『우체부』의 기본 기법은 하이퍼 시의 그것이라 하겠다. 이 시의 캐릭터 우체부가 현실(현상)의 실상을 ‘불연속적인 공의 변화’라는 랜즈를 통해 응시하고 있다는14) 심상운의 지적에 우리는 동의하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지만 문덕수의 최신 시집『아라의 목걸이』(시문학사,2012)는 경우가 다르다. 이 시집에는 하이퍼 시의 기법에 기대고 있는 시가 많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시도 많다.   칼칼하면 몽고정 물 한 모금으로 족하고   땀 밴 옷 홀랑 벗어 애들처럼 다 내어놓고   합포만에 알몸 던지리   저만치 돌섬을 헤엄쳐 네댓번 안아보고   중앙부두 쯤에선 그날의 의거의 발자국을 따라   우체부 가방 덜렁거리며   남성동 비탈길이 다 닳아 내려앉도록 오르내리리   내 꿈의 무지개 마산서   우체부로 떠돌고 싶다                                에서  나는『아라의 목걸이』에서 를 가장 인상적으로 읽었다. 우선 쉽고 재미있다. 누가 그건 당신의 시 감상수준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 문제는 시인과도 관계가 있다. ‘감상수준’ 이란 말을 한 속내에 은근한 부정적 요소가 도사리고 있는 까닭이다. 한 시집이 명편으로만 이루어질 수는 없다. 그리고 명편은 독자가 만든다. 평론가도 독자고, 일반 독자도 독자다. 독자가 많으면 명편에 가까워진다. 내가 왜 이 시에 강하게 끌렸을까. 아마 그건 내 무의의식 속에 잠재된 한국시의 지속적 요소, 어떤 의미의 발견 때문일 것이다. 아니 그 보다 이 시의 캐릭터 우체부가 내뿜는 무상의 행위, 다르게 말해 도덕 이전의 세계, 불가사의한 삶의 원리에 끌리는 언어 이전의 정서가 내 속의 낭만적 기질bohemian temper을 자극한  때문인지 모른다. 낭만적 기질은 인간의 본성, 본질적 의미가 아니던가.  한 시대 문화가 외래적인 변화만 중시되고, 종적인 지속을 상실한다면 그것은 전통의 단절이 된다. 상이한 이미지의 상호 충돌에 의한 다선구조가 아닌 무엇, 쉽게 잡히는 주제가 독자를 끌어안았다고 한다면 그건 뒤진 정서 때문이라기보다 이 시가 내포하고 있는 보편적  인간 감성, 불변의 가치 때문일 것이다.  사정이 이렇지만 이런 성격은 이 시집에 많은 시조가 수록된 사실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시조가 가장 한국적인 시형식이라고 할 때 그 기법이 비록 하이퍼 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비한국적인 것이 될 수는 없다. 한국시의 미학을 대표하는 기본형식을 벗어날 수 없는 까닭이다. 문덕수는 이와 같이 지속과 변화를 은밀히 아우르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는 우리의 주목에 값한다.  이 시집『아라의 목걸이』의 서문은 단 세 문장인데 그 두 문장은 ‘수록 시가 모두 하이퍼라고는 할 수 없지만 관련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자연발생적인 부분도 있으나 시는 “가치의 기록”이라고 생각한다’이다. ‘가치 있는 기록’이란 무엇인가. 이런 점을 말년의 김춘수가 ‘나의 무의미 시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되었다. 나는 여기서 또 의미의 세계로 발을 되돌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그런 진술과 같은 의미로 본다면 비약일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문덕수가 하이퍼적 시 쓰기만 하지 않기에, 나 같은 뒤처진 독자도 자신의 팔로워follower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시는 일차적으로 향수享受되어야 한다. 극 하이브리드 시가 독자와 거리를 둔다면 그건 언어의 박제와 유관한 현상일 것이다.  이 솔의 하이퍼 시는 하이브리드로 인한 이런 우려는 없어 보인다.   부드러운 막에 싸인 까만 눈으로 날 보고있다   도우넛 모양의 알다발 속에서 까만 눈을 굴리며   소주에 취해 이선생 몸보신으로 넘어간다   이선생은 촉촉한 그 까만 눈을 보지 못한다   인도 델리역 깡마른 짐꾼은 짐을 이고 뛰듯 간다   붉은 상의 터번 아래 검고 깊은 눈동자   맨발의 어린 소녀는 “기브 미 원달러”를   인도의 검은 눈동자는 모두 축축하게 번져 있다   검은색이 흙빛을 만나면 살아난다   알다발 속에서 까만 눈으로 마주하는   터질 듯 미끈거리는   인도의 그 생명으로   검은 껍질을 트고 꽃이 된 너 그리고 나                                에서 이 시를 이루는 중심 이미지인 눈은 3개다. 첫째는 소주와 함께 이선생 몸보신으로 넘어가는 눈이고, 둘째는 인도인의 검은 눈이고, 셋째는 검은 껍질을 트고 꽃이 된 눈이다. 첫째 눈은 죽음의 눈이고, 둘째 눈은 비애에 젖은 눈이고, 셋째의 눈은 소통하는 상생의 눈, 생명의 눈이다.  하이퍼 시의 특성을 ‘일상적으로 세계를 넘어선, 또는 초월의 등의 의미’, ‘틈이 있는 두 세계(일상적 의식에서는 결합될 수 없는 두 세계)가 연속 연결되는 형식’이라고 할 때15) 이 시는 이런 하이퍼성이 다소 약화된 상태다. 하이퍼 시의 극순수성, 언어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는 탈관념, 증류수와 같은 절대무의미성의 상황이 아니다. 세 개의 눈은 결국 생명의 눈, 죽음의 검은 빛을 트고 나와 꽃이 되었다. 단 한 순간일 뿐인 순수의 상태 자체에 시인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의 고귀함을 누리기는 하지만 그 정도가 극 탈관념에 이르지 않고, 가치 있는 기록, 곧 이 시는 생명의 고귀함을 테마로 삼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숨을 돌려 하이퍼 시 일변도의 논리를 뒤 돌아 보자. 신규호는 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문제는 하이퍼 시도 시인만큼 시다워야 한다는 명제에 관한 나의 견해가 무엇이냐 하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하이퍼 시’가 표현해야 하는 IT시대의 시적 진실이 무엇이냐 하는 점을 먼저 명확히 파악해야 한다. 다음에 이전 시대와 달라진 영상시대의 정서적 특질을 찾아서 그것을 새롭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16) 위의 인용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부분은 ‘하이퍼 시도 시인만큼 시다워야 한다’는 말이다.  ‘··· 시도 시인만큼 시다워야 ··’는 말이 순한 논리의 모순에 빠져 있긴 하지만, ‘시다워야 한다’는 말의 밑바닥에 깔린 시의 의미가 하이퍼 시가 지향하는 탈관념시, 무의미시를 지칭하지는 않는 것은 분명하다. 다음 두 문장의 핵심어가 ‘표현’, ‘정서’이고, 시의 창작 ‘방법’이고, 이글의 결론이 ‘어디까지나 실험은 실험에 불과하다는 것과, 그러면서도 문화적 격변기에 구태를 벗고 새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시를 창작하고자 실험한다는 것은 시사적으로 뜻있는 일’이라며 시대와의 호응하려는 시도 자체에 더 큰 의미를 두기 때문이다. 하이퍼 시를 어디까지나 실험적 시 쓰기로 간주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솔의 작품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그는 무의미 세계의 탈출, 가치 있는 기록을 선언하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 문덕수처럼 지속과 변화를 아우르는 상한象限에 그의 시가 자리 잡고 있는 까닭이다.  이상 논의한 작품들 외에도 논의할 대상이 많다. 특히 하이퍼 시가 주로 산문시 형태를 취하고 있는 점인데 이 문제는 하이퍼 시가 캐릭터를 등장시키고, 소설적인 서사를 활용하고, 현실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것을 초월하는 시의 영역을 확대하려는 시도는 아주 문제적이다.   5. 마무리  지금까지 신시문학파가 중심이 되어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고, 그들이 간행한 문제적 합동시집『하이퍼 시』를 중심으로 그 문학적 위상을 내 나름대로 고찰해 보았다. ‘내 나름’이란 말이 문제일 수도 있지만 논의된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하이퍼 시의 전위성·실험성, 새로운 기법의 모색은 30년대 시문학파가 순수문학을 옹호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일이 문학이 일차적 과제로 삼아야한다는 그 전위적 성격과 동일함이 발견되었다. 이런 점은 한국 시에 변화refraction을 주면서 한국시의 세계성, 곧 보편성을 추구하는 도저한 창작행위라는 점에서 시사적 의미가 크다.  둘째, 하이퍼 시는 포스트모더니즘 문화현상에 호응하는 시의 반응이라는 점, 그리고 하이퍼텍스트 문학이 폐기처분한 글쓰기 기법을 종이 하이퍼 텍스트 문학으로 변용 수용함으로써 한국의 시문학의 외연을 확장하고, 그것을 의식의 흐름과 링크하여 인간의 심층감정을 소설적 서사를 활용하여 묘사하는 점은 다른 시가 시도하기 어려운 시적 기법이다. 이런 점에서 그 전위성을 평가할만하다.  셋째, 하이퍼 시적 기법을 활용하면서 극순수·극탈관념과 다소의 거리를 두는 시 쓰기가 독자와의 거리를 좁히는 효과가 있음이 드러났다. 이런 점은 극하이브리드적 시가 언어의 박제가 될 수 있는 한계를 극복한 하이퍼 시의 다른 변화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마지막으로 조심스러우나 꼭 지적해야할 문제는 문학의 큰 패러다임을 지속과 변화의 틀로 이해할 때, 하이퍼 시는 변화의 축이 너무 비대하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전통성이 약화된 작품을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 이것은 30년대의 시문학파가 당시의 모더니즘을 수용하면서도  한국적 감성과 정서를 더 강하게 지속시켰다. 우리는 정지용의 시에서 시적 성취를 이룬 그 모범적 사례를 본다. 신시문학파의 경우도 시문학파와 같은 경우의 시인과 작품이 없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한계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 더 많은 것을 부인할 수 없다.   1) 문덕수, 『오늘의 시인총서-문덕수 시 99선』(2004) 후기 참조   2) 정과리,『컴퓨터와 문학-문학의 새로운 이해』(문학과 지성사,1996) 참조   3) 심상운,『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푸른사상. 2010). 110쪽 참조   4) 심상운, 위의 책,109쪽   5) 문덕수, 한국 하이퍼시클럽,『하이퍼 시』(시문학사,2011). . 209쪽   6) 이성우,『한국 현대시의 위상학』(역락,2007). 류현주,『하이퍼텍스트 문학』(김영사,2000).    김종국 ,(대구대 교육대학원. 2009) 등이 모두 그런 예이다   7) 권기호, 『김춘수 연구』(학문사, 1982) 참조.   8) 대여가 붓으로 쓴 이 시는 오양호가 액자로 보관하고 있다. 1981년 陶南 趙潤濟선생 문학상 기금 마련을 위해 제출된 두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시인 이기철이 구입했는데 그 작품은 글자 하나가 잘못되어 X 표를 하고 다시 옆에 그 글자를 썼기에 ‘물또래’를 구입했다. 그런데 이기철의 것은 보관을 잘못해서 상당히 망가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오양호의 것이 대여가 남긴 유일한 액자이다. ‘물또래’는 ‘사전을 뒤지다가 우연히 발견한 작은 곤충의 이름’이라고 말함.   9) 문덕수, 『사상계』. 1966년 3월호   10) 이숭원, 『문덕수 문학연구』(시문학사,2004). 107쪽   11)『김춘수 시 전집』」(현대문학사,2004). ‘서문’   12) 문덕수, ,한국하이퍼시 클럽,『하이퍼시』(시문학사,2011). 200쪽.   13) 프레이저Frazer, sir James George,『황금가지 The golden bough,1890』가 핵심논리로 하는 지속conventional과 변화refraction의 이론. 13권의 이 방대한 문화인류학의 연구 결과는 20세기 모든 학문, 특히 정신분석, 철학, 역사,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고, 문학비평의 경우 원형비평, 신화비평의 근간을 이룬다. 그러니까 문학작품을 분석심리학의 원형무의식 이론으로 원형을 찾아내었고는데 그 원형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간직하고 있어 그것이 시대마다 다른 형태로 변형되어 나타난다는 논리다. 같은 시기에 T·S 엘리어트의 『황무지』J·조이스의『율리시즈』가 간행되었는데 이 저서들이 프레이저의「황금가지」에 큰 영향을 받았거나, 그 저서에 나오는 중요테마들을 모티프로 삼았다.   14) 오세영 외,『우체부 평설』(시문학사, 2009). 58쪽   15) 문덕수, 앞의 글. 194쪽   16) 신규호, 『한국현대시』(한국현대시인협회,2012·상반기호). 248쪽    인쇄 블로그 카페 북마크 메모 폴라 보내기  댓글 쓰기                   詩論/하이브리드/오남구  시창작론숲  2017. 11. 3. 17:42 http://blog.naver.com/shunzi75/221131920015 전용뷰어 보기                하이브리드     오남구     1. 잡종강세    하이퍼텍스트는 구조적으로  여러 기능을 갖는  하이브리드이다. 세간에서 “너나 잘하세요.” 이렇게 기존의 화법을 깨뜨리고 ‘하대하는 말과 높임말’을 뒤섞어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포스트모던 한 사회현상으로 기존의 순수한 언어가 뒤섞인 일종의 하이브리드라고 할 수 있다.  하이브리드는 생물학적인 용어로서, 식물이나 동물을 육종하는 사람들은 원하는 특정의 형질들을 가진 순종(純種) 2종류를 교잡하여 잡종강세를 개발한다. 이때에 부모에 비해 자손의 크기나 성장속도 등이 강하게 되는데 잡종 생장력(hybrid vigour)이라고도 한다. ‘너나 잘 하세요’는 이런 ‘잡종 생장력’의 현상이 일어나듯이 원래의 말보다 메시지의 기능이 크게 증폭되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크게 무안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기존의 텍스트와는 다른 새로운 언어의 기능을 확인하게 되는데 그 문장 구조를 살펴보면 하이퍼텍스트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말에는 다음과 같은 ①과 ②의 2종류의 언어가 있다. ①은 하대하는 말이고 ②는 높임말이다.   ① 너나(A) 잘 해(B) ② 당신이나(C)  잘 하세요(D)    말들을 구성하고 있는 마디를 ① A, B  ② C. D로 나누어 마디를 서로 뒤섞어 놓는다. 그러면 A, B와 C, D의 마디가  다음과 같은 말이 된다.   ③ 너나(A) 잘 하세요(D) ④ 당신이나(C) 잘 해(B)    여기서 ①과 ②의 문장을 순수한 것이라 할 수 있고, ③과 ④의 문장을 순수함이 깨뜨려져 있는, ‘높임말’과 ‘하대하는 말’이 뒤섞여 있어 잡종 즉 하이브리드의 문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모습은 말의 마디가 서로 비꼬여서 ‘비틀기’가 되어 있고 파편화된 말의 마디가 (A)에서 (D)로 뛰어(hyper) 하이퍼텍스트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이 문장을 달리 보면 ‘해체된 말마디가 다시 통합된 문장’으로 볼 수 있다. 한마디로 교잡에 의한 통합으로서 새로운 텍스트이다.     2. 하이퍼시의 하이브리드     새로운 텍스트는 현실이다. 문덕수시인의 ‘종이하이퍼텍스트와 전자하이퍼텍스트(월간『시문학』4월호, 2008년)’는 하이퍼시('하이퍼텍스트+시'-하이퍼시로 명명-시향29호)의 논리적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요즘 담론이 되고 있는 이상옥 시인의 ‘디카시’ 는 디카로 순간 포착한 사진과 기호(언어)가 섞인 시를 발표한다. 디카시는 하이브리드적인 종이하이퍼텍스트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텍스트와 사진이 하이퍼성(하이퍼텍스트의 특성-탈 중심, 탈 경계, 탈 관념 등)을 갖지 못하고 기존의 텍스트와 같다면 결과적으로 기존의 포토포엠과 구별되지 않는다. 하이브리드는 이미 기존의 시속에 들어와 있었다. 현대에 이르러 컴퓨터의 발달로 하이퍼미디어 시대가 열리고 소리, 영상, 기호의 소통이 가능하게 되면서 이러한 인터넷의 텍스트를 철학자 넬슨이 ‘하이퍼텍스트’라고 명명하였다. 그래서 하이퍼텍스트라고 하게 되면 통상적으로 인터넷 상의 텍스트를 말하게 되는데, 문덕수 시인은 이것을 전자하이퍼텍스트라고 말하고 제2의 하이퍼텍스트라 한다. 제1의 하이퍼텍스트는 종이하이퍼텍스트라고 하는데 종이책을 매체로 하는 기호(언어)는 실재와는 관계가 없는 가상현실(버추얼)로서 하이퍼텍스트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하이퍼시론의 논리적 기반이 되고 있다. 여기서 기호만의 텍스트를 순수로 보면 영상(사진, 그림이미지) 등이 섞인 텍스트는 하이브리드(잡종) 적이다. 미래의 신개념의 종이(필름)에 소리가 함께 섞어 나오는 텍스트나, 제2의 하이퍼텍스트는 당연히 하이브리드로 분류될 것이다. 그런데  앞의 잠종강세의 예문에서 보듯이  기호만의 텍스트에서도  ‘높임말’과 ‘하대하는 말’이 뒤섞여서 하이브리드 적인 하이퍼텍스트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런 하이브리드 현상은 원래 생명의 존재방식이기도 한 것이다. 산이나 들에 집합되어 있는 나무와 풀이 한군데 뒤섞이어 존재한다. 여러 기능의 중심이 없는 탈 중심 그리고 탈 경계가 자연스럽다. 일찍이 자크 데리다가 자연의 사물을 텍스트로 보았는데 나에게는 자연의 이미지가 하이퍼텍스트로 다가온다.      (1) 탈 경계, 탈 중심의 이미지/ 신발   다음의 「신발」은 삶의 현장에서 찾은 하이브리드의 탈 경계, 탈 중심의 이미지가 있다.     1    시장 정육점 갈고리에 생고기와 나란히 걸린 가죽, 가족?   *       2    냉장고 쇼 케이스 안의 내 신발은 260미리입니다 아내의 신발은 235미리입니다 아들은 나와 똑같은 260미리입니다       *sbs 동영상 갭쳐  — 「신발」 전문    위의 그림이미지는 실재 TV에서 방영한 동영상에서 캡쳐한 것이다. 정육점에 신발과 생고기가 갈고리에 걸려 있다. 정육점도 아니고 신발가게도 아닌 하이브리드의 ‘신발정육점’이다. 이처럼 생활공간에서 경계가 무너지는 하이브리드의 현상은 흔하게 볼 수 있다. 컴퓨터, 전자제품, 자동차 등은 말할 것도 없으며 생활 언어 속에도 나타나고 있다. 인용한 「신발」의 그림은 설명이 필요 없이 독자가 바로 알 수 있는 하이브리드의 이미지이다. 그리고 이 이미지는 기호(언어)와 섞여 있다. '하이브리드의 하이퍼시' 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생고기와 신발을 본 작가의 직관이 ‘가죽’이라는 본질의 링크를 발견하게 되고,  ‘가죽’이 ‘가족’으로 기표가 흘러가고, 정서가 경로를 따라 흘러가 시의 맥락을 이룬다. 쇼 케이스 안에 든 신발 가족은 곧 시인의 가족이 되며 알 수없는 아련한 삶의 모습이 배어난다.    (2)마당놀이의 해학과 조소 / 피켓   문화의 공간으로서 마당은 무대의 원형일 것이다. 판소리의 마당은 광대와 청중이 창을 하고 추임을 하면서 한자리에 어울려 공연이 완성된다. 이렇게 관객이 공연에 동참함으로써 ‘관객과 연기자’라는 경계가 없다. 이러한 소리 ‘판’은 남녀노소 신분이 다른 사람들이 뒤섞여 있다. 원시 ‘하이브리드 판’이라고 보아진다. 판을 만들어 가는 것은 ‘놀이’다. 놀이의 바탕에는 유희와 해학과 조소 등이 있고, 유희성이 없는 놀이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근래는 시위도 하이브리드 한 놀이 문화로 바뀌어 축제를 벌이고 있다. 촛불 문화축제는 그 예로서 손자와 아들과 며느리와 할머니가 한자리에 모여 촛불로 하트 모양을 만들거나, 광장에 수십 킬로나 되는 불길을 만들어 놓고 즐긴다. 이때 피켓은 소통의 도구로서 공간에 있는 하나의 미디어이다. 다음의 텍스트는 이런 피켓을 들고 있는 광장의 이미지(사진)와 기호가 나열된다. 순수 기호의 시에  대한 상대적인 것으로서 하이브리드이다.                2MB = 2 Mega Byte (약 3.5원) 2MB = 2 Micro Byte (가격산출 불가능) 2MB = 2 Mad Bull(미친 소) MB = My Bush(나의 부시) 2MB = 2 M(멍청하고) B(부지런한) 놈 2MB = 2(이) M(뭐) B(병) -> 이거 뭐 병신도 아니고... MB = Moues Baby  — 「피켓」 전문      놀이마당에 들고 나온 피켓. 이니셜 2mb를 하이퍼텍스트로 읽어본다.  2와 M과 B는 각기 마디가 되고, 마디와 마디 사이 숨겨진 링크을 걸면 많은 언어를 상상하여 읽어낼 수 있다. 그래서 위에 나타난 7가지 외에도  무수히 많은 의미의 경로가 나타나게 되는데, 독자는 읽고 싶은 대로 여러 방법으로 읽어가면서 유희하고 카타르시스 한다.      3,순수와 하이브리드     유전공학으로 만들어낸 하이브리드의 철쭉이 종로의 거리에 나와 있다. 명품이라고 내놓는 것을 보니 가지에 티 없이 깨끗한 바탕의 흰 꽃들이 무리지어 피어 있고 같은 가지 속에서 진분홍의 꽃 몇 개가 피어 있다. 그런데 진분홍 또한 티 없이 맑은 바탕을 하고 있어서 순수/(순종,true)하기 이를 데 없다. 언뜻 보기에 한그루 철쭉 조화 같다. 여기에 다른 화려한 작품들을 비교하니 호화로우나 곧 싫증이 나고 산만하다. 결국 티 없이 순수한 격조 높은 두 가지의 특성이 명품의 하이브리드로서 탄생하고 있었고 절제된 심플한 구성이 예술성을 높이고 있다. ‘하이퍼시’에서 절제된 심플한 하이브리드의 구성이 요구되는 것이 이렇듯 자연한 이유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순수/(순종,true)는 하이브리드의 바탕이 된다. 격조가 높고 개성이 뚜렷해야 한다. 하이퍼텍스트가 여러 가지 특성을 싣는 수레라고 볼 때에 열린 개념의 또는 탈 관념의 대승적 기능을 하고 있다. 곧 하이브리드의 프레임은 하이퍼텍스트이다. 그래서 종이하이퍼텍스트의 언어(기호) 예술은 격조 높은 하이퍼시를 만드는 바탕이다. 다음의 「사과」는 언어의 순수한 하이퍼텍스트이다.   배들녘은 풋벼의 바다, 아침 고요로운 지평선에 풍! 떠올랐다가 풍선처럼 서서히 내려오고 있는 붉은 사과, 동진강 하구에서 쌀을 실으러 거룻배가 들어왔었다는 ‘배들이’ 들판! 손에 든 들판은 피켓! 손해난 '배 들이'어서 빚으로 들들 볶일 판 피켓 들고 전봉준이 들이칠 판, 숨을 멈추고 있는 풋벼의 바다 황혼에 내가 주먹 속에 받아 쥔 해 사과를 굴린다, 굴러가며 가르마 같은 선을 긋는다 선을 따라 불이 화~ 화~ 일어난다    —「사과」전문   배들녘은 동진강 상류가 흐르는 들녘. 여기에 만석보가 있다. 조병갑이 보를 쌓고 물세를 받다가 농민들이 저항하여 동학란이 일어났다. 손에 든 들판, ‘피켓’은 시위 현장의 미디어이다. 이 하이퍼텍스트는 ‘시위 현장’과 ‘동학란’이란 배경의미가 시인의 의식 밑바닥에 깔려 있어서 언어와 언어의 마디를 링크시킨다. 그래서 기표가 자유자재로 ‘판’이 들의 ‘들판’으로, 손에 들고 있는 ‘들판’이 ‘피켓’으로, 그리고 붉은 사과(과일) → 해(日) → 사과(謝過)로 흘러가면서 상상의 무한한 이미지 공간이 확보된다. 그래서 붉은 사과가 굴러가면 선을 만들고 선에서 붉은 불이 일어난다. 감각적인 이미지 드림(imige-dream)이다.   하이브리드의 잡종강세 같은 새로운 기능을 확인한다. 순수는 바탕이 되고 격조가 높고 개성이 뚜렷했을 때에 명품의 하이브리드가 탄생한다. 절제된 심플한 구성이 예술성을 높일 것 같다.             *오남구(1946.11.20 ~)  시인, 문학평론가. 본명 오진현. 에 1975년 추천 완료. 시집  외5권. 시론집 , .. 제26회 시문학상 수상(2001), 현재 계간 시향발행인        인쇄 블로그 카페 북마크 메모 폴라 보내기  댓글 쓰기                   탈관념의 꿈꾸기/오남구  시창작론숲  2017. 11. 3. 17:36 http://blog.naver.com/shunzi75/221131915579 전용뷰어 보기   [하이퍼텍스트 시론 1]   탈관념의 꿈꾸기(Image-dream) ― 시집 「실험실의 미인」을 중심으로     吳南球 (시인, 평론가)     ❙ 들어가며 ❙현대시가 ‘해체에서 통합’으로 가고 있다. 해체된 언어(조각, 유니트)가  다시 통합되는 원리는 무엇인가?,'탈-관념의 꿈꾸기(Image-dream)'는  일종의 초현실로서 저절로 통합되어 자동기술 되는 ‘탈-관념'의 시 쓰기이다.     1976년, '시인의집' 모임에서 현대시의 ‘수학적 존재 증명’을 얘기하곤 했다. 모임이 활기를 띠기 시작할 무렵 한성례씨가 찾아왔다. 분위기가 갑자기 환하게 느껴지는 용모였다. 가까운 문우들에게 필자가 이 모임을 탈관념의 ‘실험실’이라고 말했는데, 그의 시를 살펴보니 ① 탈관념의 선언에 영향을 받은 존재론적인 것과 ② 탈관념의 언어여행, 또는 감각여행의 감성훈련 과정에서 비롯된 것과 ③ 탈관념 그 습작과정에서 쓰여진 것과 ④ 수학여행이라는 네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시고(詩稿)들을 읽어보니 모던이스트 중에서도 모던이스트로 그 문명비평적인 쎈스의 풍자와 기지들은 많이 지나칠 정도여서 내게 씨(氏)가 시골사람이라는 걸 아조 잊어버리게까지 하고 있다.”   미당(서정주)이 한성례씨의 시집에 붙인 서문의 글이다. 이 말이 아니라 해도 시를 읽어보면 독자는 깨뜨려진 어떤 낮선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그의 시는 표백제로 얼룩진 물감을 탈색해서 이제 막 내어놓는 옥양목 같다고나 할까, 고정관념이 깨뜨려지고 있는 시어들은 낯설고 싱싱하다.     한 가름, 탈관념 선언에 영향을 받은 시   당시 탈관념의 실험을 시작하면서 모임에 내세울 새로운 이슈를 선언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미당을 찾아가서 자문도 구하고 노장사상(老莊思想)도 읽었다. 동경대전(東經大全)도 다시 읽었다. 숙고한 끝에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평소의 소신대로 한국적인 사상에 기초한 선언문을 작성한다. 그 해가 1980년 1월 무렵이었다. 후에 그 일부가 경구(警句)처럼  동인지 표지에 한동안 게재된다. 그 표지에 써 놓은 글은 이러하다.   “신은 시인 앞에 오면 한 낱의 낱말이다. 시인은 낱말을 죽이고 또 창조한다.”   이 같은 문구는 동인들 중 크리스천들에게는 충격적이 아닐 수 없었다. 필자는 시를 쓰는 ‘주체’에 대해서 ‘신이 아니라 사람, 즉 시인’이라는 등, 시의 본질이 되는 요인들을 하나하나 담론해 갔는데, 물론 그 선언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내용이었다. 그것이 바로 다음 항에서 말하는 탈관념의 논리를 구축해 가는 ‘쓰레기통 문답’ 또는 ‘함수f(x) 시론’인데, 지적이고 논리적이던 한성례씨는 이러한 시론을 좋아했다. 이 무렵 그는 갈등하며 시적인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당시 크리스천이었던 그는 ‘관념적 허구’로서 절대자를 파악하게 된다. 그래서 ‘허무감’을 느꼈고, ‘막막한 신천지에 서듯’ 외로움을 타고, 불안・초조 등의 실존주의적 경향이 나타났다. 다음의 시를 보면,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그가 드디어 동양적인 사고로 ‘직립’하여 바로 서는 자존적인 자의식을 갖게 된다. 그래서 서구화된 우리 현실을 바로 직시하고 절망과 고뇌를 반복한다.     1.「무풍대에서」에 나타난 자아, 그 직립   「무풍대에서」그가 자아의 눈을 뜨고 바라본 진실은 무엇인가? 시를 보자.   종소리 속에서 느릿느릿  뚝 뚝 떨어져 내리는 관성만 남은 일상 더듬이가 필요한 날에는 볕이 드는 쪽과 음지를 혼동한다.   낯선 바람 원점 향해 위치 변동 꽉 채우고 있는 물먹은 공기 빠져나갈 출구가 없다. ─「무풍대에서」중에서    첫째, 사고가 신의 세계에 갇혀 “종소리 속에서 / 느릿느릿 / 뚝 뚝 떨어져 내리는” 그런 관성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 그래서 정작 옳고 그름의 이성적인 ‘더듬이’의 가치 판단이 필요할 때마다 그 관성으로 인하여 그 판단이 혼동된다. 둘째, ‘낯선 바람’조차 불지 않는 곳이라고 파악되는 ‘무풍대’이지만 ‘낯선 바람’이 태동한다. ‘낯선 바람’이란 시인이 의식한 ‘새로운 것’ 즉 서구적이 아닌 동양적인 의식의 ‘새 바람’이다. 그런데 우리 삶의 현실이란 서구 정신문화가 포화된 상태로서, “꽉 채우고 있는 / 물 먹은 공기”로서, ‘새바람’의 출구도 없는 무풍지대로 인식된다.   구겨져 쓰레기통 속에 곤두박질하는 멍한 하늘 그 언저리는 꼭  지평에 맞닿아 숨죽이고 있다.   직립한 바람은 직립한 바람끼리 손잡고 있는 무풍대에서    껌딱지로 도배된 기지촌의 포도처럼 사인 코사인의 귀를 맞추며 덕지덕지 하품으로 이어 놓는다. ─「무풍대에서」중에서    셋째, 그는 이 현실을 직시하면서 절망을 느낀다. “구겨져 쓰레기통 속에 / 곤두박질하는 멍한” 하늘을 본다. 또 죄지은 듯이 “꼭 / 지평에 맞닿아 숨죽이고” 있고, ‘기죽은 초라한 자아’ 그 실존의 위기를 본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시인으로서 ‘직립’ 하여 ‘바로 서는’ 자의식의 입지(立志)를 한다. 물론 ‘기지촌’, ‘껌딱지’의 서구적 극한 상황에서도 의연한 의지로 견디어야 하는 숙명이다. 이제 그는 무풍대에서 직립한 바람의 존재로서 홀로 서 있다.     2. 「벼랑 끝에서」의 춤   신을 ‘관념적 허구’로 파악하고 ‘절대자’를 부정했으나, 그는 아직 확고하지는 못하다. 그래서 실로 한성례씨는 두려움 속에 있다. 신천지에 서듯 막막함과 불안・초조의 벼랑에 서게 된다. 이때 ‘춤’을 추게 되는데, 불안・초조로부터의 극복과 탈출을 위한 몸짓이다. 이 절대 고독상황에서 손잡아 주는 것은 새로운 의식의 ‘어설픈 바람’ 뿐이며, 그 절실한 모습에 비장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낭떠러지에 서서 춤을 춘다. 동작보다 언제나 한 템포 느린 음악   아래로부터 걷어 올라온 바람이 어설프게 손잡아 준다.   언제부터였을까  엄청난 배반의 현실에도 때때로 풋풋한 여명을 맛보곤 한다.   내 가슴 속에 출렁이는 배 한 척 무거운 방황은 젊은 날의 피를 낭비하는 것이라 해도 음울한 예정론에 기대를 걸고 출항을 서둘렀다.   이제 나이 드는 것이 타락의 나이테라면 차라리 돌아가지 말아야지   벼랑 끝에서 느릿느릿 춤을 춘다. ─「벼랑 끝에서」전문     3.「불완전 명사의 저녁」에 나타난 존재   눈을 뜬 자아, 그래서 막 태어난 '불완전 명사'로 나타난 존재! 그 직립에 의한 행보는 방황과 갈등이다. 벼랑에서 새로운 출항을 하게 되지만 이는 불안한 항해로서 익숙지 못한 실존주의자의 삶이다. 좌절과 불안과 머뭇거림의 연속이다. 그의 사상은 불투명한 상태로 “시침을 살피며 얼룩진 돛”을 내리는 “머무는 일이 불투명해서” 늘 갈등 한다.   터널로 빠져 드는 녹슨 연기 시침을 살피며 얼룩진 돛을 내린다. 철분의 붉은색 앙금으로 가라앉히고 머무는 일이 불투명해서 늘 자맥질처럼 움직인다.   퇴색된 석양 언저리에서 태우며,  가늘게 남은 내 생의 나머지 끈을 푸는 저녁   줄자로 잴 수 없는 문화의 어정거리는 습성  그 물결을 거스르지 못한다.   터널로 빠져드는 녹슨 연기 아우성으로 떠는 흐느낌이다. ─「불완전 명사의 저녁」 중에서   그러면서, “가늘게 남은 내 생의 / 나머지 끈을 푸는 저녁”으로 그의 존재(存在)를 확인하며, “줄자로 잴 수 없는 / 문화의 어정거리는 / 습성”을 꼬집어 “물결을 거스르지 못한다”고 스스로 질타한다. 존재자의 갈등! 바로 진실과 연민을 느끼게 하는 시인, 그 인간다움이다. 이러한 그는 「도편수의 노래」에서 스스로의 배-새로운 출항을 위한 도편수가 되기도 하고, 줄타기 하는 삶의 곡예사로서 ‘땅에 발 디디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다.      두 가름, 언어여행 또는 감각여행의 감성훈련에서 비롯된 시   이렇듯 그가 사물에 대한 일상적인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실험을 했는데, 그것은 ‘최면을 통한’ 자동기술(自動記述) 훈련이었다. 그 한 가지 내용을 보면,   “자, 자세를 가다듬고 눈을 감는다. 편안히 호흡을 고른다. 깊이 숨을 들이 마신 후에 아랫배에 지긋이 힘을 모은다.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숨을 쉰다. 1초, 2초, 3초……. 이제 감각여행을 떠난다. 태양! 태양을 마음에 그린다. 태양을 향해서 몸이 둥둥 떠간다. 경비행기 속도로 간다. 빛의 속도로 간다고 생각한다. 1초, 2초, 3초…. 태양! 태양이다! 느껴본다. …뜨겁다. …탄다!…… 눈을 뜬다.”   대강 이런 식으로 실험을 했는데 그 성취는 괄목할 만 했다. 눈을 떴을 때는 대체로 들뜬 상태가 아니면 착 가라앉은 상태였다. 공통점은 한결같이 마음이 가벼워졌고 바라보는 사물들이 움직인다고 했다. 여기서 ‘움직인다’는 것은 느낌을 말한다. 몇 분 전만 해도 무심히 무감각하게 보아 넘겼던 커피잔, 스푼, 화분, 의자 등이 새로운 정서로서 움직인다. 그 성취 정도는 사람들마다 각기 달랐다. 불교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비교적 강렬하고 빠른 반면에, 서구적인 종교와 철학, 지식의 깊이가 강한 사람은 그 성취가 느렸다. 그의 시 「태양을 향해 날아갔다」는 그 즈음 겪은 갈등과 실험을 꾸밈없이 쓰고 있는데, 드디어 관념이 깨어지는 그의 꿈꾸기(Image-Dream)는 ‘황홀한’ 첫 시적 경험을 한다.   태양을 향해 날아갔다 태양으로 떠난다 해서 따라나섰다.    ─ 타버린다 ─ 는 감각은 없어지고 경비행기로 출발한 우주여행은 그저 행위로만 남았다   기착지는 태양 뜨거움보다는  황홀한 색채에 질식당했다. ─「태양을 향해 날아갔다」 전문   당시 그는 자동기술의 감성훈련에 적응이 늦었던 것 같다. 개성이 강할 뿐만 아니라 지적인 서구적인 합리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 자신의 곤혹스런 입장을 “태양으로 떠난다 해서 따라나섰다”로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턴가 늘 도로(徒勞)의 작업이던 ‘꿈꾸기’가 첫 느낌을 얻게 된다. 자연스러운 “기착지는 태양”으로서, 첫 시적(詩的) 체험인 “황홀한 색채에 질식” 당하는 희열을 맛본다. 이후 그는 초현실적인 감각의 시 쓰기가 익숙해진다.「구의역에서」,「변주곡에 대한 상상 연습」 등의 다양한 시각을 갖게 되고, 또한「방」,「장마」에서는 빗줄기의 기하학적인 선(線)이 꿈처럼 펼쳐지며 새로운 시세계를 열고 있다.     1.「구의역에서」의 우주적인 시점   이러한 ‘탈관념의 꿈꾸기’를 체험한 사람들은 우주적 감각인 둥둥 떠가는 ‘느낌’이 자유로워진다고 한다. 「구의역에서」는 시점의 ‘일상성 벗기’라는 ‘감성훈련’으로 빚은 큰 성과다. 그가 바라보는 사물(역, 길, 사람 등)이 둥둥 떠다니며 지구의 자전에 따라 시각이 바뀐다. 낮에 바로 서 있던 물건이 밤이면 거꾸로 처박히는 모습이 된다. 이 시는 바로 우주적인 시각에서 본 움직임인데, 탈관념의 꿈 중 하나이다. 한성례씨에게는 그녀 인생의 무대, 그 지구가 자전함에 따라 바로 서기도 하고 거꾸로 서기도 한다.   둥둥 떠가는 구의역 내 앞에 누워 있는 길. 뱉어낸 사람들 물살로 흘러 흘러서 무시로 흩어져 간다.   질주하던 길이 문득 산 밑에 가서 머문다. 시선 끝으로 길 한 줄기 붙잡으면 녹음이 앞서 무질러 오고 밀려드는 차 물결   쏟아질 듯 곤두박힐 듯 가로수 함께 일렁이다가 몇 개로 틀어지고 조각난 풍경 판토마임의 내가 거꾸로 서서 자막 속을 걸어간다. ─「구의역에서」중에서    그는 우주적인 감각이 자유로워졌고, 그에 따라 무한하게 시의 세계가 확장된다. ‘가로수와 함께 일렁이기도’ 하는 판토마임 속의 자신을 확인하면서 눈을 뜬 현실로 되돌아 와서 다음과 같이 ‘구의역’을 직시한다.     잠시 눈 뜬 플랫폼, 흘러 흘러서     투사되듯 입력(入力)되는 곳 구의역.  ─「구의역에서」 중에서     2.「변주곡에 대한 상상 연습」의 전전반측   전전반측(輾轉反側)하는 시인의 정(情)은 무엇일가? 그는 밤을 지새우고 있다. 그러면서 갈증 같은 향수를 느끼고, 그때 “기지개 켜는” 의식이 꿈꾸기를 한다.     산과 들, 강물 걸어 넘는다.   그 끝은 평행선 한 가닥 분실된 몇 낱 낯선 어둠에 섞여 보이지 않고 ─「변주곡에 대한 상상 연습」 중에서   몽롱한 의식 상태의 그의 ‘꿈꾸기’는 비몽사몽간 눈앞에 고향산천을 그려보지만 원근 속에 하나의 점이 되어 소멸돼가서 끝이 보이지 않고, 다만, “멍든 석양의 조각들이 / 도시 꼭대기에 차양처럼” 매달린 메커니즘의 현대문명 속의 삭막함만이 남는다. 현대인의 짙은 외로움이 드리워져 있다.      3.「장마」에서의 기하학적인 선   1980년대의 답답한 현실은 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현실을 탈출하려는 꿈꾸기가 이루어지는데, 이때에 기하학적인 선으로 나타나는 빗줄기는 대단히 시원하고 자유분방하다.     빗줄기 속에서 뻗어 내린 흰 꼬리 화살 화살은 내게 일제히 달려든다.  몸짓으로 털고 몸짓으로 도망하고 또는 몸짓 거부로 넘어지는 행위   시대의 재채기 최루탄의 화살이 쏟아져 내린다. ─「장마」중에서    그의 시는「장마」에서 안정(安定)되고 한 단계 더 세련되었다. 빗줄기로 시작한 ‘꿈꾸기’가 “시대의 재채기 / 최루탄의 화살이 쏟아져 내린다”로서, 현실과 이어져 있다.     세 가름, 탈관념의 자동기술된 시   1. 수학적 시론의 전개   탈관념의 ‘꿈꾸기(Image-dream)’는 일상적인 고정관념을 깨뜨리는데 있어 새로운 질서의 공감각과 방향이 있어야만 망상이 되지 않는다. 필자는 그 질서는 ‘자연’에서, 그 방법은 ‘직관’이라고 설명했는데, 이것은 실험에 의한 체험적 소신이었다. 고정관념의 ‘깨뜨림’은 습작을 위한 중요한 과정으로서 상당기간 대화법으로 실험을 도왔다. 그때 집약된 내용이 ‘쓰레기통 문답’ 또는 ‘함수f(x) 시론’이었다. ‘쓰레기통 문답’은 이러했다.   ‘꽃 한 송이를 들고 신인들에게 보인다. “이게 뭡니까?”라고 묻는다. “꽃입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때 필자는 쓰레기통에 꽃을 던진다. 그리고 “쓰레기입니다”라고 말한다. 누군가 그 얘기를 듣고 와서 “쓰레기입니다”라고 대답하면 “이게 왜 쓰레기통입니까? 꽃이죠!”라고 무안을 주었다.’   이 쓰레기통 문답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첫째, 사물에 대한 일상적인 고정관념을 깨뜨려서 신선한 충격을 경험하게 하고 둘째, ‘꽃’이라는 이름이 쓰레기통(박스) 속에 들어가면 순간 ‘쓰레기’가 됨으로써 허무하게 관념(의미)이 바뀌는 것을 보여 준다. 셋째, 청각이나 시각 등 오감으로 느낀 사물에 대한 정서와 감정이 시시각각 변하며 각기 다른 언어로 표출된다는 것을 쉽게 이해시킨다. 그럼으로써 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체가 각기 다른 ‘의식의 함수 f(x)다’ 라는 가설로 유도시킨다. 당시 한성례씨는 이러한 수학적 시론의 전개를 신선한 충격으로 공감하고 받아들였다. 필자는 보다 체계적으로 시론을 정립해 가며, 그 가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설명했다.   “시인의 삶이 f(x)면 시는 그 도함수(기울기)이다. x는 ‘만남(사물)’의 변수, y는 의식 공간이다.”             2. 의식의 단면   어느 날 좌표평면 상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타나는 순간변화(의식의 단면)를 발견했다. 수학적 시론의 가설을 구체화시켜 x축과 y축으로 하는 평면좌표를 그렸는데, x축은 시간의 만남(시간적인 흐름 속에서의 만남)이고, y축은 그때그때의 ‘의식 공간’으로 구성했다. 다음은 한 ‘시인(한성례씨)’과 남산’의 ‘만남을 함수관계’로서 그 의식(체험)을 나타내 보았다.   [예] 만남의 요소-남산   ① 20대의 한 시인이 1974년 1월 처음 남산을 보았다. 이후 계속 보게 된다. 그 높이를 300m쯤으로 직감한다. 이를 y축 3에 표시한다. ② 그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동진강변의 평야지대에 살았다. 그가 산을 보아온 일상적인 의식체험은 100m 쯤의 야산들이었다. 이를 y축 1에 표시한다.             위의 ‘가나다라’ 선은 시인이 사물을 만나서 느낀 의식의 그래프이다. 이것은 의식(체험)의 한 단면이고, 여기에서 수평을 이루고 있는 선분 ‘가나’와 ‘다라’는 늘 바라보았던 일상적인 것인데, ‘반복된 사건의 일상성’이다. 그런데 상경하여 남산을 접한 어느 순간, 그 일상성이 깨뜨려지는 수직의 선분 ‘나다’가 나타난다. 이 순간의 의식(느낌)은 긴장이나 시적 충동으로 설명될 수 있다. 나는 이를 ‘일상성의 깨뜨림’이라 했고, 수평의 선분 ‘가나’ ‘다라’를 반복된 사건의 고정관념을 나타내는 ‘일상성의 직선’ 이라고 했다. 이로써 좌표평면 상에 시의 존재(기울기)가 나타나는데, 바로 선분 ‘나다’로서 긴장의 정도를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이 ‘나다’의 선분은 앞의 가설인 함수 f(x)의 ‘시간 x축’과 ‘의식 공간 y축’으로 하는 좌표 상에 나타난 ‘순간변화’이다. 그래서 이것을 의식의 ‘순간변화’ 또는 ‘순간변화율’이라고 이름 붙였고, ‘느낌의 기울기’라고 했다.  이렇듯 '만남의 자극과 반응’으로 나타난 ‘순간변화율’로서 그 존재를 확인하고, ‘만남이라는 사건’에 착안하여 집합과 조합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시공에서 사물과의 만남은 무수히 진행되고 의식은 집합적으로 결합된다.’ 이처럼 시공의 개념에서 접근하여 수학적인 방법으로 좌표 위에 '나'의 존재(의식)를 나타내고, x축을 시간의 흐름, y축을 의식공간으로 표시하였다. 그리고 x축과 y축 사이에 무수히 진행되는 ’만남의 사건‘을 변수 x로 가정하였다. 그래서 자동기술의 시는 무수히 사물과 만나면서 이뤄진 체험이 잠재했다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는 것을 알았고, 이것은 초현실주의 작품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초현실 시 쓰기인 탈관념의 ‘꿈꾸기’를 하면서 시의 ‘질서는 자연에서, 방법은 직관’이라는 방법론을 제시하게도 되었다. 여기에서 ‘자연스럽게’란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자연스러움’은 곧 시를 평가하는 척도가 되었다.     3. 그 습작과정에서 쓴 시,「서울의 큐비즘」   그는 그때까지 ‘매끈한 시’, ‘잘 다듬어진 시’가 좋은 시라는 소박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고등학교에서 문예부장으로 활동하며 고교생 대상의 여러 시문학상도 수상하고 나름대로 시에 식견이 있다고 여겼던 그에게 탈관념은 커다란 충격과 혼란이었다. ‘깨뜨림’을 당한 멍한 상태라고 할까, 아무튼 이로 인하여 시적방황이 시작되었는데, 그 와중에서 처음으로 자동기술 되어 나온 작품이 ‘서울의 큐비즘’인 것으로 기억된다. 이어서 ‘지하도 풍경’도 발표했는데, 두 작품이 각각 문학지 ‘신인문학상’과 ‘대학 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에게는 기념비적인 작품들이다.     핏빛 바람 갈대숲 안고 달아나는 소나무 하늘은 꽃씨 눕힌다. 누이의 속치마 능선을 타고 호랑나비 하늘을 앓는다. 소나무 허리 껴안은 거문고 울음과   한강변 세 살 난 잠실동 아이의 맏연습  아파트 아파트 우리 집은 아파트 충무로 1가에서 떠돌던 바람 소리 내어 돌아가고   호랑나비 푸득 푸드득 날개 짓 하는 하오는  종합전시장 앞 14차선 도로 악을 쓰며 누워 있다. 맨드라미 노을 넘실거리고   서울의 꿈은 유리알 맑은 모래처럼 내 온몸을 휘감는다. 남산 중턱에 해가 허리를 반쯤 걸치고 앉아 있다. ─「서울의 큐비즘」 전문   우선 시에 나타난 어휘들을 집합(集合)해 보면, "달아나는", "앓는다", "울음", "맏연습", "떠돌던", "악을 쓰며", "허리를 반쯤 걸치고" 등의 말들이 모이는데, 이것들은 모두 그 즈음의 그의 갈등에서 생성된 것으로서 인위적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표출, 순열(順列)된 것이다. 시 자체는 좀 생경스러우나 일대 혁신의 작품으로 받아들여졌다. 미화되거나 인위적으로 포장됨이 없이 시인의 솔직한 진실(감정)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감이나 확신이 없다. 긍정 반 부정 반의 자세로서 엉거주춤한데,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남산 중턱에 해가 허리를 반쯤 / 걸치고 앉아 있다”의 표출이 그것이다. 그의 신경세포가 ‘반쯤’의 어중간한 상태를 자의식하고 있는 가운데, 해의 한 시점인 반쯤 앉은 상태가 강한 이미지로 입력되었다가 자동기술(순열)된 것으로 이해된다.     네 가름, 삶 언어의 집합・조합・순열의 묘    1. 언어의 표현   시인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물과 만나며 느끼는 자극(느낌→의식)을 y 라고 하고, 사물과 만나는 시간 x를 변수로 하는 의식의 함수 y= f(x)를 가정할 때, 어느 시점의 자극(만남)과 반응(의식)을 나타내는 순간변화율(기울기)이 있다. 즉 사물과 만나는 '의식(느낌)의 변화율'이 있다. 이것을 필자는 '의식의 기울기'라 하고, '긴장' 또는 '흥분' 등의 파동을 나타내는 '시의 순간 변화율'이라고 했다. 곧 시를 어떤 순간 변화율인 '생명의 파동'으로 보았다. 그래서 언어로 표현 기술되었을 때, 이 기울기(시라는 순간변화율)는 생명적이므로 의식 또는 잠재의식 속의 언어(하이퍼텍스트)는 어떤 생명의 존재질서 위에 있으며 이것은 자연스럽게 집합, 조합, 순열된다. 그래서 벤다이어그램으로 이를 도표화해서 보면 ‘언어A, 언어B, 언어C’의 표현을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그림]언어의 집합   도표를 살펴보면, 언어의 합집합인 최대공배수 ①A∪B∪C와 공통집합인 최대공약수 ②A∩B∩C 등의 모양이 나타난다. 합집합은 세 단어가 나타낼 수 있는 의미 내용의  최대로서 표현의 L.C.M이고, 세 단어가 의미 내용을 공통으로 가지는 빗금 친 부분의 공통집합은 표현의 G.C.M이다. 이 G.C.M으로써 보편적인 언어의 의미가 구성된다. 그러나 이 의미는 독자(평론가)에게 수용되고 물론 그의 체험에 의해 재구성된다.   2. 시 해설은 적분   이상의 수학적 시론의 전개는 동인들에게 거의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고, 이것을 바탕으로 실험습작을 했다. 그에 따른 시의 성취나 그 가치는 별도로 하고, 당시 탈관념의 ‘꿈꾸기’에 몰두했던 한성례씨의「지하도 풍경」의 한 예문을 분석해서 정리해보겠다.   범람하는 성욕의 용설란들 남아프리카 지도가 피를 흘린다. ─「지하도 풍경」 중에서   위의 예문에 “범람/ 성욕 / 용설란 / 남아프리카지도 / 피” 다섯 개의 단어가 있다. 이것은 시인이 사물과 만남(사건)으로써 생긴 단어들인데 긴장과 흥분 등 느낌의 기울기(미분)를 갖는다. 이것은 삶의 한 시점이 미분된 것이고 의식 또는 잠재의식 속의 언어(하이퍼텍스트)이다. 이 단어들이 독자(평가)에게 수용되고 해설될 때 시적체험이 되고 시인의 삶이 된다. 그러므로 해설은 곧 ‘적분’이다. 표현되는 내용은 집합, 조합, 순열된다. 여기서 표출되는 내용을 도표화해 보면,                         예문의 ‘집합① 범람하는 성욕의 용설란들, 집합② 남아프리카 지도가 피를 흘린다.'를 보자. 그림 ①처럼, ‘범람∪성욕∪용설란’의 집합과 그림 ②처럼, ‘남아프리카 지도∪피’ 의 합집합은 단어들이 갖는 상징과 이미지 등 표현의 모든 범위를 갖는다. 그리고 단어들의 내용이 겹치는 부분인 공통집합(빗금)은 특별한 의미를 만들고 공감을 얻는다. 그런데 집합 ③에서 한 행 한 행의 내용 표현이 문장을 이루고, 다시 조합, 순열로서 한 편의 시를 완성해 간다. 이와 같이 언어, 즉 의식 또는 체험으로 연결된 잠재의식 속의 단어(하이퍼텍스트)는 시인을 통해서 다시 집합, 조합, 순열해서 통합된 하나의 질서를 이룬다. 그림과 같이 ‘범람∩성욕∩용설란’으로 공통집합 되면 시인 개체 안에서 자동으로 이미지나 의미가 결합되어 생명의 질서(정서)를 갖고서 표출된다.    3. 언어의 징검다리 건너기   이렇듯 해체에서 통합으로 가는 원리는 미래 시의 새로운 항해에서 나침판이 되어줄 수도 있다. 구문론을 과감하게 파괴(탈-관념)하는 시가 길을 잘못들 경우 난해한 미로에 빠져들 위험이 있다. 그래서 해체된 언어들은 어떤 질서로 통합되어야 한다. 그의 시 ‘옵니버스 율’은 시인(생명)의 어떤 질서를 내포한 무의식의 흐름이고, 그 흐름의 경로(항해 -‘탈-관념의 꿈꾸기’)가 나열됨으로써 정서(질서)가 표출되었다.   햇살 빠른 음률이 피어 회부럭담 아이들 어깨 너머로 프리즘에 갈리는 하얀 겨울 햇살은 나비의 눈물같이 산 빛 초록초록 꽃밭동 머슴애의 논갈이 뒤꿈치에 펼치어 흔들리는 들판 새까만 기적의 음률이 간다   ─「들판」 전문   ‘산 빛 초록촉록 꽃밭동’ 에는 조사가 없다. 다른 행에서도 주어, 술어 등의 구문론이 다수 파괴되어 있다. 그래서 일반적인 시에서 보이는 선형성(線形性)이 없다. 비선형적이다. 또한 앞뒤의 문장이 원인과 결과, 논리가 없고 순차적이지 않다. 이 텍스트는 전통적인 텍스트에서 벗어난 하이퍼텍스트 적이라 할 수 있다. 끊어져 있는 마디가 무작위로 배열되어 있다. 그래서 독자가 이 시를 읽을 때는 징검다리를 건너가듯 언어의 마디와 마디를 뛰어 읽어가야 한다. 이때 독자는 단절된 마디와 마디 사이의 틈을 뛰는 스릴을 맛볼 수 있고, 그 공간에서 자신만의 상상을 펼칠 수도 있다. 또한 시의 행갈이 순서도 자유로워서 역순 뿐 아니라 얼마든지 행을 뒤섞어 읽어도 이미지가 선명하다.   새까만 기적의 음률이 간다 펼치어 흔들리는 들판 머슴애의 논갈이 뒤꿈치에 산 빛 초록초록 꽃밭동 햇살은 나비의 눈물 같이 프리즘에 갈리는 하얀 겨울 회부럭담 아이들 어깨 너머로 햇살 빠른 음률이 피어   그는 이러한 시들의 묶음을 ‘옴니버스 율’이라고 했는데, 행이나 구문에 이미지나 표현이 묶이지 않고 한 행 한행 독립적으로 배열된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옴니버스이므로 한 줄 한 줄 독립된 이미지의 마디를 다시 독자가 재배열해서 읽어도 된다. 그런데 위와 같이 역순으로 배열된 텍스트가 더욱 선명한 이미지를 보이고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원본 텍스트보다 역순 텍스트인 메타텍스트가 더 하이퍼텍스트 적이고, 특히 선형성과 순차적인 배열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가 행한 이 실험은 모더니즘 시의 한 가닥 새로운 길을 열고 있다.     ❙ 나가며   탈-관념의 꿈꾸기는 우주적(하이퍼) 공간이다. 그의 시「구의역에서」에서 보이는 부유하고 있는 모습이 그러하고,「태양을 향해 날아갔다」에서도 현실감각이 사라진 공간이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시적 꿈꾸기는 사이버세계의 ‘경로’로 이해할 수 있다. 별과별을 잇는 상상의 ‘링크’가 있고, 그 링크를 계속 따라가는 궤적과 같은 그런 경로다. 은하계의 ‘북두칠성’을 보자. 하나하나는 멀리 떨어진 별이다. 우리의 상상은 일곱 개의 별을 이어 놓고 이 별자리에 ‘북두칠성’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의 시를 이처럼 우주 공간의 ‘경로’로 이해해도 되고, 봄날에 꽃과 꽃을 옮겨다나며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나비의 ‘경로’에 비유해도 된다. 이러한 시 쓰기는 인간의 뇌 속에 잠재해 있는 기억의 소자(원소)들 사이를 흐르는 의식의 흐름과 흡사하다. 시를 ‘의식이 흐른 하나의 경로’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참 흥미롭다. 현대시가 ‘언어를 해체한다’고 해도, 해체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시인의 의식을 표출하는 그 무엇이 되어야 한다, 그 중에서 특히 경로를 통해 표출된 정서나 음률은 시의 바탕을 이룬다. 한성례씨의 탈-관념된 시가 정서와 음률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그의 시는 시대를 뛰어 넘어 언제든 수준 높은 독자와 만나게 될 것이다.(完)        인쇄 블로그 카페 북마크 메모 폴라 보내기  댓글 쓰기                   탈관념시학 [스크랩]  시창작론숲  2017. 11. 3. 17:06 http://blog.naver.com/shunzi75/221131891267 전용뷰어 보기   탈관념의 시학                     유니트 [제001]     직관의 시학은 이웃과 창을 열고 정해본 제목이다. 지금 밤 3시 일어나 앉아 조용한 명상의 시간을 갖고 있다. 시인으로 살아가는 길이 있다. 물론 많은 길이 있을 것이다. 그중 하나의 길인 내가 가는 길은 아마 마음을 다스리는 길이라고 하면 좀 추상적이지만 직관을 이해하기 쉬울 듯하다. 마음은 시의 바탕이 되고 이 공부는 심안을 갖게 한다. 아니, 공부라는 표현을 시를 수련한다는 말로 강조한다. 시인으로 살아가는 길이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심학은 수사학(비평,지식)의 공부와는 아주 별개의 것!) 이것은 나를 찾는 것이며 나의 시 나의 색깔을 갖기 위한 그 첫발이다. 오늘 명상 속에 나를 바라보고 사물을 바라보고 조용히 마음가는대로 시상을 떠오르게 하라 ​ ​ 탈과념의 시학                    유니트 [제002]   나를 바라보고 사물을 바라보고 조용히 마음가는대로 시상을 떠오르게 하려면 직관력을 키워야 하고 그래서 직관상(直觀象)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직관과 직관상은 "탈-관념의 이해"(심상운 논문)를 참고하기 바란다. 먼저 그 글을 간략히 요약해서 노트하고 충분히 이해해 둘 필요가 있다. 이것은 시인이면 기본적으로 알아야 되는 중요한 것.) 직관(탈-관념)의 시쓰기인 '염사(念寫)'도 직관상을 묘사하여 서술하므로, 마임을 보듯이 독자의 마음속에서 이미지나 표상을 떠오르게 한다(수용미학 참조). 나는 염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무아지경으로 명상하고 있다가 떠오르는 무의식의 세계를 체험했다. 어떤 문제를 가지고 집중하면 깊이 잠재했던 세계가 스크린에 나타나듯 선명하게 떠오른다. 심지어는 거울에 보이듯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기도 한다. 이 때 나타나는 영상은 임의대로 수정되거나 생각이 끼어들지 않는다. 이런 내면세계‘염사’를 혹자는 초현실주의니 자동기술이니 하는데, 자동기술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자동기술은 말 그대로 임의로 시를 쓸 수 없고, 질서도 없고 통제도 할 수 없다. 그리고 자연 발생적이다. 반면에‘염사’는 자연발생이 아니다. 자기 최면 또는 선(禪)에 들면, 임의로 on/off가 가능하고, 컴퓨터를 켠 듯 무아지경의 맑은 의식 상태에서 본다. 그러나 컴퓨터와도 또 다르다. 나만의 폐쇄회로이며, 영상이 일회성으로 거품처럼 곧 사라진다.                탈관념의 시학                      유니트 [제003]   직관력을 어떻게 키우는가? 요즘 말하는 사람이 없다. 후배에게 직관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설명해 주는 사람이 없고, 그래서인지 잘 나간다는 신인들의 시에 직관이 보이질 않고 말, 말 뿐이다. 소위 산문화된 담론적인 말자랑, 지식의 나열로 넘친다. 그 이유는 체험, 즉 경륜 있는 선생이 없이 나 홀로 정보와 지식만 있기 때문.  실제로 직관력을 어떻게 키우는가? 시인 나름의 체험이 있다. 그 선험적 체험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면 많은 시간을 절약하고 시를 발전시켜갈 수 있다. 그래서 선배나 스승이 필요하다. 비유를 들어 보자.   나는 등산을 즐긴다. 한번은 홀로 북한산 향로봉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가는 것을 멀리서 많이 보아 왔으므로 별 생각 없이 기어갔다. 그런데 얼마를 신이 나서 가다보니 눈 아래가 천 길처럼 아슬히 내려다보여 점점 다리가  떨리더니 겨우 일 미터의 간격을 건너가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렸다. 등산에 관한 지식을 많이 숙지하고 있었는데도 아무런 도움이 안됐다. 그때 앞에 어떤 산악인이 손을 잡아주어 건너갔다. 그런데 다른 산사람들은 평지를 가듯이 갔다. 이와 같이 시는 살아있는 현장이며 발발 떨고 있던 느낌!, 그래서 체득하여 자유로워져야 하는 것. 실제 많이 습작하지 않고 시론이나 수사학을 강의만 하는 분들이 시를 잘 쓰지 못한다. 내가 벼랑 앞에서 얼어붙듯이, 탈관념의 시학                     유니트 [제004]     직관(直觀)은 분별을 넘어선 세계다. 인간의 이성을 넘어선, 이성이 완전히 잊혀진 곳에서 흘러나오는 그 무엇이다. 이성으로는 직관을 수신할 수 없다.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저 너머’의 세계에 거처한다. 진리를 원하면 들어가라! 밖에서 머뭇거리지 마라!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이면 이를 본능이라고 하고 영혼이 자연스럽게 움직이면 이를 직관이라고 한다. 이 둘 사이에는‘마음의 전문가’인 이성이 자리한다. 본능과 직관의 세계를 이어 주는 다리이자 통로다. 현대인들은 이 다리 위에 앉아서 자신이‘존재의 집’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존재의 집은 다리 건너편에 있다!  ‘오쇼의 편지’에 있는 이러한 말들은 직관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물론 다음의 철학적인 일반 개념도 중요하다.     *참고자료* [直觀 intuition ]   철학에서 추리나 관찰, 이성이나 경험으로는 얻지 못하는 인식을 얻을 수 있는 힘을 뜻하는 용어. 직관은 다른 원천에 의해 얻지 못하는 인식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근원적이고 독자적인 인식 원천으로 여겨진다. 필연적 진리와 도덕원리들의 인식은 종종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설명된다. 몇몇 필연적 진리, 예컨대 논리학이나 수학의 진술은 다른 진리로부터 추론되거나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진술이 모두 그런 식으로 도출될 수는 없으며 공리(公理)처럼 다른 명제로부터 도출되지 않는 진술도 있다. 뿐만 아니라 공리로부터 다른 진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체계의 상호연관성은 이미 여러 추론규칙을 전제하고 있다. 공리들의 진리성과 기본 추론규칙들의 타당성 자체는 추론이나 관찰로 확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추론에는 이미 이 공리와 규칙이 전제되어 있고 관찰은 필연적 진리를 확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공리와 규칙은 직관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공리는 누가 봐도 뻔한 진리명제이므로 자명성을 직관의 특징으로 보는 데는 별 문제가 없는 것 같다. 한 진술이 다른 진술로부터 도출되거나 어떤 특정 추론이 타당하다는 것을 '본다'면 우리는 그러한 종류의 모든 추론의 타당성을 '직관적으로 귀납'할 수 있다. 이밖에 가령'어떤 사물도 전 표면이 동시에 빨간색이면서 푸른색일 수는 없다'와 같은 비형식적 필연적 진리도 직관적 귀납명제로 볼 수 있다. 누구든 특수한 사례를 통해 그 명제의 보편적·필연적 연관을 확인할 수 있다. 조지프 버틀러에서 G. E. 무어까지 많은 도덕 철학자들은 도덕적 언명이 무언가 특별한 종류의 인식내용을 담고 있다고 주장했다. 행위의 옳음(무어의 견해로는 어떤 사태의 선함)을 인식하는 것은 관찰능력이나 논리적 원리를 직관하는 능력에 비길 만한 특별한 도덕적 능력이다. 논리적 원리들이 직관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이론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이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도 도덕적 주장이 지니고 있는 자명하고도 의심할 수 없는 성질이다. 이러한 두 이론에 대한 비판은 똑같은 하나의 논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논리와 도덕의 공리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특별한 인식 원천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공리들은 사실의 발견에 관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공리가 담고 있는 내용은 세계와 인간의 본성에 관한 사실이 아니라, 담론이나 행위를 할 때 취하는 결단·관습·태도에 관한 것이다. 이밖에도 직관이라는 용어에는2가지 전문용법이 있다. 하나는 이마누엘 칸트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비록 관찰의 도움은 받지만 관찰에 근거하지는 않는 모든 사실인식의 원천을 가리킨다. 다른 하나는 스피노자와 앙리 베르그송이 사용한 의미로서, 과학이나 일상적 관찰에 의해 얻어진 단편적인 '추상적' 인식과 달리 상호연관 되어 있는 세계 전체에 대한 구체적 인식을 가리킨다. 탈관념의 시학                     유니트 [제005]     직관은 생각을 하지 않고 “바로 본다.”는 뜻이다. 즉 판단 추리 경험 따위의 간접 수단에 따르지 않고 대상을 직접 파악하는 일 또는 그 작용이다. 이를 직각(直覺)이라고도 한다. 나는 이렇게 비유를 들어서 말한다. “흙탕물은 그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흙탕처럼 생각은 본질을 가리게 된다. 흙탕이 가라않으면 맑은 물의 바닥이 보인다.”  시인에게 이렇듯 직관력을 키우는 일은 중요한 문제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키워야 하는가? 선이나 기도는 직관력을 증진시킨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적 수련으로서 시인의 일상적 생활에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방법론으로서 많은 시작법이 탄생한다. 나의 “접사와 염사”는 그런 방법의 하나다. 기능적으로 생각을 제거하고 사물을 바로 보는 방법으로서, 원근법이나 방위감각에 끼어든 오염된 관념을 제거하여 외부세계의 사물을 직관하고 생생하게 한다. 지금 앞에 유리컵에 바짝 눈을 대어보면(접사의 기법) 일상적인 컵의 모습은 갑자기 사라지고 유리만 보인다. 새로운 질감과 함께 긴장감을 느낀다.  바로 일상적인 시각의 고정관념(생각)을 깨뜨리고 직관하는 것이 된다. ​     탈관념의 시학                     유니트 [제006]   시는 알고 이해하고 체득해야 한다. 안다는 것은 좋은 시를 보아 알고 그 시(시론 등)를 이해하고 그 시를 습작을 통해서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을 다시 줄이면 시를 느끼고 쓴다고 하고, 단 한마디로 ‘터득한다’ 한다. 그렇다. 머리로 이해만 하면 시가 써지는 것이 아니다.   시는 무엇을 보고 느끼고 쓰는가, 또 어떻게 보고 느끼고 쓰는가, 즉 '무엇를' '어떻게'로 좁혀지게 된다. 내용과 표현 문제로 남게 된다. 표현은 수사학이고 내용은 의미이다(무의미도 의미). 그래서 신인들에게 사물(나뭇잎 등)을 주고 그 사물을 하루 이틀..., 계속 집중하여 보라고 한다. 나는 이것을 “사물과 눈 맞추기” 라고 하는데, 오직 어떤 사물에 집중하여 오래 동안 눈 맞추고 있는 것은 마치 무념무상의 명상에 든 것과 같은 효과를 본다. 계속 집중하고 있다보면 많은 생각이 떠오르고, 그 생각들이 다 사라질 때 어느 순간부터 전에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느낌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영감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사물과 교감이 되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직관의 세계로 가는 한 방법.   유니트 [제007]     내가 시를 가르치는 일이란 사물 하나를 주고 나서 다음에 만나면 보았느냐?, 느꼈느냐?, 그러면  깨달았느냐?묻는 일이다. 그리고 어떻게 쓰고 있는가 일기처럼 쓴 묘사를 확인하는 것이다.   수사학은 스스로 체득하는 길밖에 없고 느끼는 것 또한 체험할 수밖에 없다. 수사학 공부는 좋은 시들을 찾아 읽고 다른 제목을 가지고 모사해 보는 것도 지름길이다. 이렇듯 여러 가지 시쓰기 방법들이 있으므로 수사학은 나름대로 혼자 할 수 있다.   그러나 느끼는 공부, 즉 내용 공부는 혼자서 어렵다. 이것은 감성을 키우는 일로서 사물을 만나고 직관을 하고 느끼고 깨닫는 일.특히 일상적인 시각에서 보고 듣는 고정관념을 깨트리는 일은 쉽지 않다. 졸저 ‘꽃의 문답법’은 사물과 눈 맞추기를 하고 그 문답을 정리한 것.      인쇄 블로그 카페 북마크 메모 폴라 보내기  댓글 쓰기                   [스크랩] 주역과 시 / 김기덕  시창작론숲  2017. 10. 28. 16:42 http://blog.naver.com/shunzi75/221127325553 전용뷰어 보기   주역과 시 /김기덕   8. ䷇ 수지비(水地比)   수지비는 위에 水(☵:坎)가 있고, 아래에 地(☷:坤)가 있는 모양으로 물과 땅이 친하여 서로 돕는 관계를 이룬다. 比는 두 사람이 나란히 서있는 형상으로 서로 의지하며 돕는다는 뜻이 있다. 比는 하괘가 坤(땅)이니 순하고 어질며, 상괘는 坎(물)이라서 아래로 흐르니, 땅 위에 물이 있는 것 같이 서로 밀접하게 친한 것을 말한다. 덕망 높은 군주를 위해 어진 신하들이 보필하며 친함으로 서로 협력하는 상이다. 64괘는 배치의 관계를 알아보는 방법이다. 시의 소재나 주제의식을 잡고 시를 쓰고자 할 때 무턱대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소재나 주제의식에 대한 유사적, 인접적, 상징적인 사물을 찾은 뒤 적절한 배치관계를 찾고, 정해진 배치관계에 따라 표현하고자 하는 방법이 바로 64가지인 64괘인 것이다. 이 64가지를 다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다. 기존에 쓰던 주제의 통일적인 중천건괘의 방법이나, 중지곤괘의 방법 등을 비롯하여 몇 가지만 익혀서 활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주역을 통한 시쓰기는 혼자만의 생각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생각과 방법을 활용하여 쓰는 것이기 때문에 64가지를 다 익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본 책을 교재로 삼아서 시를 쓰면 굳이 외울 필요도 없다. 또한 주역적 시쓰기가 공식처럼 경직되어 창작의 자유가 제한되지 않나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지괘나 호괘, 도전괘, 배합괘, 착종괘 등의 다양한 변화를 추구할 수 있으니, 이러한 변화는 시인의 의지에 따라 무한한 창작의 자유를 추구하고 누릴 수 있는 부분이다. 효로 풀면 첫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는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주제와 정서의 음적 통일을 이루고 있다. 다섯 번째 배치에서 변화를 꾀한 뒤 여섯 번째 배치에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기승전결식의 방법이다. 다섯 번째는 轉에 해당하는 것으로 사고의 확장과 변환을 이루었다가 다시 주제의식으로 모아지는 통일된 내용의 시쓰기이다. 사상으로 보면 地(⚏:노음)는 약하고 부드러운 존재이나 슬픔, 아픔 등을 끌어와, 人(⚏:노음)에서 음의 감정을 더욱 발전시켜 가다가 天(⚍:소음)에 와서 내적 아픔이나 설움, 절망 등의 음의 감정을 절제하여 표현하는 방법이다. 팔괘로 표현하면 첫 문장의 배치는 坤(☷)괘로서 땅을 상징한다. 유순하고 후덕하여 모든 것을 품는 어머니와 같은 정서이다. 둘째 문장의 배치는 이러한 여성적인 감정에 상처를 입고 아파하는 마음을 보듬어주고 모아주는, 따뜻함과 갈등의 승화가 있는 정서의 시쓰기 방법이다.    比는 人자가 두 개 나란히 서있는 모양으로 사람들이 서로 모여 정답게 협조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수지비(水地比)는 땅 위에 물이 있는 형상이다. 대지는 물을 안아주고 물은 땅을 적시며 친애하고 협력하여 생성하고 화육하며 아름다운 자연을 형성하듯 여성적이고 모성적인 감정으로 아름다운 정서를 노래하는 긍정적 표현이다. 수지비의 호괘는 ䷖ 산지박(山地剝)으로 땅 위에 높은 산이 있는 상이다. 배합괘는 ䷍ 화천대유(火天大有)로 인군자리에 올라 천하를 얻는 상이며, 도전괘, 착종괘는 ䷆ 지수사(地水師)로 무리를 모아야 함을 상징한다. [출처] 8.수지비|작성자 김기덕   9. ䷈ 풍천소축(風天小畜)   풍천소축은 天(☰:乾)이 아래에 있고, 위에 風(☴:巽)이 있는 괘상으로 하늘 위에 바람이 부는 모양이다. 유약한 음이 위에 있어 아래의 강건한 양을 그치게 하여 쌓으니 소축이다. 소축은 작게 쌓아 올라간다는 뜻으로 畜은 밭에 물건을 높이 쌓아 까마득하다는 뜻이다. 양실한 물건을 쌓아올림에 흔들림이 없어야 하는데 바람으로 인해 위가 약간씩 흔들리니 많이 쌓을 수가 없다는 의미이다. 소축은 안으로는 강건한 乾이 있고 밖으로는 부드러운 巽이 있어서 외유내강의 덕을 갖추고 있다. 강함을 상징하는 모든 양효 가운데 오직 하나인 음효가 상승하는 양의 기운을 막아 모두를 축적하지 못하고 일부만 축적하는 상이다. 효를 가지고 시를 만들면 첫 번째에서 세 번째 배치까지 양효로 구성되어 가볍고 메마른 감정 위주로 진행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음의 배치를 해주는 방법이다. 가운데에 음의 감정을 배치함으로써 밝고 명랑한 분위기에 뭉클한 감동이 느껴질 수 있도록 어둡고 탁한 분위기를 설정하는 방법이다. 사상으로 보면 地(⚌:노양)는 한 여름이나 오후와 같이 생기가 있고 기쁨이 있다. 人(⚍:소음)은 봄의 정취와 같다. 또한 해가 뜨는 아침과 같이 상승하는 양의 기운을 퍼지게 하여 天(⚌:노양)에서 한낮과 같은 양의 문장으로 끝맺는 방식이다. 시가 전체적으로 밝으나 무게감을 두어 내면의 아름다운 상처를 한가운데 보석처럼 드러나게 하는 기법이다. 팔괘로 살펴보면 처음의 배치는 天(☰)괘로서 밝고 명랑하고 강건함으로 자칫 공허감을 줄 수 있는 남성적 감정 다음에 巽(☴)을 배치하여 부드럽고, 섬세하여 귀여운 여동생과 같은 감정을 배치함으로 잔잔한 여운이 남도록 쓰는 방법이다. 주역적 시쓰기의 특징은 색깔의 배치이다. 소재에 따라, 또는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에 따라 색깔을 배치함으로 정서의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시 창작이다. 양의 색은 밝고 화려하며 따뜻하다. 음의 색깔은 어둡고 탁하며 차갑다. 언어로 그리는 그림에도 이런 다양한 색깔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감정의 깊이 및 의도의 정확성을 분명하게 나타내 줄 수 있을 것이다. 전체를 밝게 칠한다면 중천건(䷀)이 될 것이고, 전체를 어둡게 칠한다면 중지곤(䷁)이 될 것이다. 그 외에 어떤 부분을 어떻게 칠하느냐에 따라 각각 64괘의 모양을 이루게 될 것이다. 전체가 밝은 시만 좋은 시는 아닐 것이다. 전체가 어두운 시가 치열한 시는 아닐 것이다. 다양한 색깔, 다양한 배치가 더욱 낯설고 개성적인 시의 영토를 확장해 나갈 것이다. 풍천소축의 호괘는 대칭적, 대조적 기법의 ䷥ 화택규(火澤睽)이며, 도전괘는 형이상과 형이하의 마주보기적 배치인 ䷉ 천택리(天澤履), 배합괘는 하나의 통일된 시각의 표현인 ䷏ 뇌지예(雷地豫), 착종괘는 여성적 시각의 밝은 표현인 ䷫ 천풍구(天風姤)이다. [출처] 9. 풍천소축|작성자 김기덕   10. ䷉ 천택리(天澤履)   천택리는 위로 天(☰:乾)이 있고, 아래로는 澤(☱:兌)이 있는 모양으로 하늘이 연못에 비치듯 하늘의 이치를 밟아 행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履는 회복함(復)을 주장하는(尸) 뜻이 있으니 인간의 욕심을 버리고 하늘의 뜻을 따라 예를 회복해야 함을 의미한다. 履는 하괘가 兌(연못)이므로 안으로 함께 기뻐하고, 상괘가 乾(하늘)이므로 밖으로 굳건히 실천하는 모양이니, 기뻐하고 화합함으로 행하는 중정의 도가 있다. 또한 위에 하늘이 있고 밑에 못이 있으니 상하의 나뉨과 귀하고 천함의 구별이 있어 예로 회복을 실행하는 괘상이다. 효로 풀이하면 첫 번째와 두 번째 배치를 양의 문장으로 한 다음, 세 번째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배치하였다가, 그 이후 문장을 양의 문장으로 표현해주는 방법이다. 하늘의 구름과 달과 별들이 음의 물속에서 반사되듯이 표현된 방법이다. 데칼코마니적인 방법이기도한 이 기법은 하늘의 차원과 물속의 차원이 다르며, 정신적 세계와 현실적 세계가 다르듯이 상하의 복합적 배치, 또는 형이상과 형이하의 배치와 같은 마주보기적인 거울 기법이다. 사상으로 접근하면 地(⚌:노양)는 호수에 비친 풍경처럼 맑고 깨끗하며 명랑하다. 人(⚎:소양)은 겉은 기쁘고 생기에 차있지만 속은 슬픔과 아픔으로 가득하고 병들어 있다. 天(⚌:노양)은 청명하며 움직임이 있고 크다. 하늘은 맑고 땅은 생기에 가득 차있어서 양의 색깔로 채워지지만, 인간은 내면의 슬픔을 어쩌지 못한다. 팔괘로 풀면 기쁨이 가득한 兌(☱)괘가 밑에 있고, 강하고 밝은 덕이 위에 있어 서로 비추며 마주보는 유사성이 있다. 처음엔 하늘의 단락이 있고, 다음에 하늘을 비추는 연못의 단락이 있어서 유사성의 이중구조를 이루고 있는 시쓰기 방법이다. 천택리는 하늘은 위에 있고 땅은 아래에 있으며 태양은 하늘에 있고 물은 낮은 데로 흐른다는 원리의 질서를 나타내고 있다. 밤이 새면 낮이 오고 겨울이 가면 봄이 오는 것처럼 혼란이 없고 뒤바뀜이 없다. 시쓰기에서 두 개의 유사성이 결합하여 호수의 하늘과 같이 서로를 조명해 줄 때 하늘엔 하늘의 원리가, 호수에 호수의 원리가 질서를 유지하며 독단적인 내용을 갖고 공존해야 한다. 그래서 두 개의 단락으로 나뉘어 유사하지만 다른 내용을 형성하고, 다른 이야기지만 같은 의미를 갖고 있어야 한다. 천택리의 응용을 위해 천택리의 성격이나 재질의 구분은 호괘인 ䷤ 풍화가인(風火家人)으로, 반대편에서 본 입장인 도전괘는 ䷈ 풍천소축(風天小畜), 반대상황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배합괘인 ䷎ 지산겸(地山謙), 상‧하의 입장변경을 표현하는 착종괘는 ䷪ 택천쾌(澤天夬)이다. [출처] 10. 천택리|작성자 김기덕   11. ䷊ 지천태(地天泰)   지천태는 위에 땅(☷:坤)이 있고 아래에 하늘(☰:乾)이 있는 모양으로 천지가 사귀어 만물이 열려 나오는 상이다. 하늘의 기운은 아래로 내려가고 땅의 기운은 위로 올라 교합하여 태평한 세상이 된다. 泰는 父, 母, 子의 세 사람을 뜻하며, 부정과 모혈로부터 어린 생명이 탄생함을 의미한다. 안으로는 乾의 굳세고 건장한 덕이 있고 밖으로는 坤의 순한 덕이 있으니 외유내강의 상으로 나아가게 된다. 하늘의 기운은 올라가고 땅의 기운은 내려가서 서로 통하니 형통하는 상으로 정월괘이며 새봄이 되는 때를 이른다. 음효와 양효가 각기 셋으로 음양의 이치가 고르게 배치되고 있어 안정된 모습이다. 효로 살펴보면 양의 문장이 첫째, 둘째, 셋째로 나오고 다음에 음의 문장이 넷, 다섯, 여섯 번째 나오는 형식으로 음과 양이 대조를 이루는 방식이다. 만약에 얼굴을 표현한다면 돌출된 이마나 코, 광대뼈와 같은 곳을 양적으로 밝고 강하게 표현한 후 입이나 귓구멍, 콧구멍 같은 곳을 음적으로 어둡고 연약하게 표현하여 서로 대조를 이루게 하면서도 통합된 의미를 모을 수 있도록 나타내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물에는 음과 양이 공존한다. 이러한 음과 양의 대조를 통해 대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노양)는 여름이나 한낮의 표현과 같이 강렬하며 극적인 표현을 의미하며, 人(⚍:소음)은 강하고 극적이던 표현이 약하고 부드러워지면서 겉과 속이 표리를 이루는 표현을, 天(⚏:노음)은 겨울이나 한밤중 같은 부정적이며 차가운 대조의 표현을 이루는 방법이다. 팔괘로 풀면 강하고 굳세며 정신적인 의미의 乾(☰)이 밑에 있고, 나약하고 부드러우며 육체적인 의미의 坤(☷)이 위에 있는 형상으로 형이상적이면서도 형이하적인 면이 서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시쓰기이다. 천택리는 유사성을 통해 서로 마주보는 데칼코마니적인 기법이라면 지천태는 대조적인 것이 서로 마주보면서 있는 형상이기도 하며, 인간의 앞모습과 뒷모습을 순차적으로 보여주는 것과 같은 방법이다. 지천태의 표현은 땅의 기운이 하강하고 하늘의 기운이 상승하는 형상으로 하늘과 땅이 화합하여 만물을 기르는 것이며, 상하가 서로 화합하여 하나로 모이는 이치와 같다. 속의 강한 뜻을 부드럽게 표현하는 기법이기도 하며 핵심에는 군자를 변두리에는 소인을 배치한 것과 같은 대조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또한 동시에 정신과 육체, 이상과 현실, 사물과 그 안의 상징성 등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를 인과관계로 끌고 가고자 한다면 지괘를 선택해야 한다. 지괘는 뽑은 괘중에서 노양은 음으로, 노음은 양으로 변하기 때문에 노양과 노음이 변한 괘가 바로 지괘이다. 노양과 노음이 나오지 않았다면 지괘는 없는 것이며 당분간 본괘가 지속될 것임을 나타낸다. 지천태의 호괘는 이질적인 관계의 연결을 만드는 ䷵ 뇌택귀매(雷澤歸妹)이며, 도전괘, 배합괘, 착종괘는 조화와 상생의 ䷋ 천지비(天地否)이다. [출처] 11. 지천태|작성자 김기덕 12. ䷋ 천지비(天地否)   천지비는 위에 天(☰:乾)이 있고 아래에 地(☷:坤)가 있어 상하로 막혀 머물러 있을 뿐 소통이 되지 않는 상이다. 하늘은 위로 올라가려는 성질을 띠고 땅은 아래로 내려가려는 성질을 띠기 때문에 둘 사이는 멀어질 뿐 소통하려 하지 않는다. 否를 보면 만물은 호흡과 생명활동을 구멍으로 하는데, 그 구멍(口)이 막혀(不) 곤궁한 모습이다. 위의 乾(☰)은 실하나 아래에 坤(☷)이 허하니 서로 교합하지 못하고 만물이 닫혀 있는 상이다. 하늘과 땅이 통하지 않고 아비와 자식이 갈등하며, 임금과 백성의 뜻이 통하지 않으므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반목, 질시하는 형상을 보여주고 있다. 지천태와 매우 유사하지만 지천태는 조화와 상생의 관계를 말하지만 천지비는 갈등과 반목, 부조화를 내면에 깔고 있다. 효로 살펴보면 첫째, 둘째, 셋째의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치밀하고 꼼꼼하며, 어둡고 탁하며, 비천하고 낮은 의미를 갖지만, 넷째, 다섯째, 여섯째의 내용들은 엉성하고 명랑하며, 움직임이 있고, 밝고 맑으며, 높고 귀한 의미를 가짐으로 내면과의 갈등을 표출하고 상하의 부조화를 나타내는 방법이다. 시는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지지만 반대적인 입장에서의 접근이나 시각차를 나타내는 시쓰기이다. 사상으로 보면 地는 지극한 슬픔에 빠져 있지만 하늘은 기쁨으로 충만한 상이다. 人은 그 가운데에서 강한 척 하지만 불안과 좌절을 격고 있는 모양이다. 계시가 없는 신앙인과 같으며, 꿈이 없는 사람과 같으며, 주인이 없는 애완동물과 같은 형상이다. 시적인 형식에 있어서도 상하의 상관관계를 갖지 못하고 배반관계, 또는 대치관계를 갖는다. 팔괘로 보면 신적 질서인 天이 인간세상인 땅에 관여하지 않고 동물적 질서인 땅은 인간 영혼의 교감이 있는 하늘에 구하지 않음으로 답답한 정서적 고립을 이루고 있다. 마주 의지하여 일어서는 人자의 형상처럼 사람은 서로 도우며 사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否卦는 이러한 인간의 본성이 거부된 상태이다. 하늘과 땅이 막히고 사람과 사람 사이가 막혀버린 관계이다. 천지비는 내괘가 음이고 외괘가 양인데, 이것은 내심은 유약하면서 외면은 강한 것처럼 꾸미는 것으로 기만과 속임수가 있다. 문장과 문장, 단락과 단락 간에 의미의 연결을 이루지 못하고 정반대의 파국으로 치닫는 부정적 배치관계를 갖고 있다. 주제의 통일을 중시하는 시쓰기에서 단락 간에 의미가 상충한다면 통일성은 깨어질 것이다. 마인드맵에서 서로 반대되는 가지의 방향으로 뻗어감으로 의식이 확장되듯 천지비의 시쓰기는 가지에서 둥치 쪽 방향으로 주제의식이 모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확장되고 퍼짐으로 난해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천지비의 호괘는 점점 의식의 확장을 이루는 ䷴ 풍산점(風山漸)이며, 도전괘, 배합괘, 착종괘는 음양의 이치가 고르게 균형을 이룬 ䷊ 지천태(地天泰)이다. [출처] 12. 천지비|작성자 김기덕   13. ䷌ 천화동인(天火同人)   천화동인은 위에 天(☰:乾)이 있고 아래에는 火(☲:離)가 있는 모양으로 하늘에 해가 떠올라 만물이 생동하며 서로 모이는 형상이다. 同人의 의미는 사람들이 뜻을 하나로 하여 함께하는 것을 말하는데, 유일한 음인 六二(효의 두 번째 음효)를 중심으로 양들이 모이게 된다. 내면은 밝고 외면은 강건한 덕이 있으니 밝은 지혜로써 힘차게 도를 행하는 괘이다. 남과 내가 하나가 되는 형국이며, 세상의 모든 사물과 내가 하나를 이루어 교감을 갖는 관계에 놓여 있다. 두 번째에 놓인 음의 효는 나를 상징하며 나를 중심으로 모든 양들이 집중하고 있는 모양으로 시에서는 서정적 시쓰기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서정적 시쓰기의 특징은 나라는 존재의 주관적 감정을 통해 세상의 모든 사물을 자신의 의도대로 끌어오고 요리하며, 서정적인 주제의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천화동인의 괘는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쓰기 형식이다. 효를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六二의 나는 여성적이며 부드러운 감성의 소유자이다. 이런 풍부한 감정을 바탕으로 전체적인 시의 분위기를 밝고 아름답게 쓰고 희망과 비전을 제시하는 긍정적인 양의 시각이 담겨 있다. 시인의 존재는 약간 우수에 잠길 수 있어도 그의 메시지는 세상을 끌어안고 사랑을 나누는 행복한 세상이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따뜻한 세상을 담고 있다. 그 문장들이 나를 향해, 곧 글 쓰는 시인을 향해 주제의 통일을 이루고 있다. 사상으로 보면 地(⚍:소음)는 땅에서 새싹이 움트는 형상이다. 밝게 확장되어가고 성장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人(⚌:노양)은 긍정적이며 행복한 상황을 의미하며, 天(⚌:노양)도 역시 맑고 투명하며 소망으로 가득 차있다. 마인드맵 천 ‧ 인 ‧ 지의 줄기에서 가지를 뻗어갈 때 긍정적이며 건강한 의식으로 확장해야 한다. 팔괘로 살펴보면 하늘에 해가 떠있는 상이다. 그래서 색깔이 밝고 환하다. 천지는 광명으로 가득 차있고 만물은 생기가 넘친다. 시인의 순수한 내면을 통해 밝고 아름답게 세상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항상 높은 곳에 있는 하늘과 높은 곳을 지향하는 불은 서로 같은 성질을 지니고 있다. 同人은 남과 뜻을 같이한다는 의미가 있는데, 뜻이 같은 것들, 즉 유사한 것들을 모아 하나의 주제를 지향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는 곧 주제의 통일을 의미하며 사물의 유사성과 인접성을 통해 접속하는 방법이다. 천화동인의 호괘는 음의 대상을 양적인 표현으로 이끄는 ䷫ 천풍구(天風姤)이고, 배합괘는 남성적 시각의 슬픔이나 고통과 같은 음의 배치인 ䷆ 지수사(地水師)이며, 도전괘, 착종괘는 태양처럼 밝고 환한 ䷍ 화천대유(火天大有)이다. [출처] 13. 천화동인|작성자 김기덕   14. ䷍ 화천대유(火天大有)   화천대유는 위에 火(☲:離)가 있고 아래에 天(☰:乾)이 있는 괘상으로 해가 중천에 뜬 모양으로 크게 소유함을 이른다. 안으로는 강건하고 밖으로는 밝은 상으로 모든 만물을 밝히는 상이다. 六五(효의 다섯 번째 음효)의 음이 왕위에 올라 상하의 여러 양들과 응하니 크게 형통하는 괘상이다. 태양이 하늘 높이 솟아있는 상으로 대유는 크게 있다는 뜻이다. 하늘 높이 솟은 태양처럼 세상만물을 비추며 모든 것을 포용하고 있는 모양으로 태양이 없이는 세상에 생명이 하나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태양만큼 고마운 것이 없으며 태양만큼 필요한 것도 없을 것이다. 화천대유는 태양처럼 크게 이 세상에 존재함을 의미한다. 효로 풀이하면 왕, 대통령, 사장, 아버지의 위치인 五爻가 음이고 모두 양으로 되어 있는 괘이다. 임금인 五爻에 모든 포커스를 맞추고 밝고 아름답게 쓰는 시로 경축시나 칭송시로 비쳐질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왕 같은 사물, 왕 같은 대상이 음으로 가득 차 있어서 긍정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첫 문장에서 네 번째 문장까지 밝은 분위기로 진행되다가 다섯 번째 여성적이며 우울한 심정을 나타낸 후, 그리고 여섯 번째 문장에서 밝게 끝내는 시쓰기의 기법이다. 사상으로 보면 삼재인 地는 初爻인 양과 二爻인 양이 만나 노양(⚌)이 되었다. 初爻인 地는 흙, 땅, 지구를 상징하는 것이므로 형이하적인 사물이나 물체를 끌어오는 것이 필요하다. 二爻인 地도 지옥이나 어둠과 같은 세계일지라도 양적인 형이상적 실체의 접근이 필요하다. 人은 三爻인 양과 四爻인 양으로 이루어진 노양으로 형이하적인 동물적, 육체적인 접근과 영혼, 정신적인 형이상적 접근을 긍정적이고 밝게 함으로써 양적인 힘을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天은 五爻의 음적인 문장이 오고 六爻엔 양적인 문장이 옴으로써 어둡고 구름이 가득한 하늘이지만 그 속에서 영혼의 세계인 천국과 극락을 바라보는 이상적인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팔괘로 보면 상괘인 외괘는 火(☲:離)이고 하괘인 내괘는 天(☰:乾)으로 이루어져 하늘 위에 해가 떠있는 형상이다. 외괘는 오후, 외적인 것, 쇠퇴, 해체, 성장, 얼굴, 객체, 대상을 상징하는데, 이러한 외괘가 태양과 같으므로 밝고 긍정적이며 행복한 접근이 필요하다. 내괘는 오전, 내적인 것, 도래, 창조, 탄생, 몸, 주체, 나를 의미하는데, 여기서 내괘는 강건하고 광명하며 건조한 의미인 天이므로 적극적이며 지배적인 힘을 띠어야 한다. 화천대유의 시쓰기는 부드럽고 자애로운 왕과 같은 사물이나 존재에 대한 긍정적인 접근, 칭송이나 찬양과 같은 형식으로 밝고 아름답게 쓰는 방식이다. 지상 최대의 태양과 같은 존재인 시적 대상을 향해 신을 모시듯 격조를 높여 표현하는 기법이다. 화천대유의 변화를 살펴보면 호괘는 양적 묘사에서 마지막 음의 묘사로 뒤집는 ䷪ 택천쾌(澤天快)이며, 배합괘는 정답고 조화로운 표현인 ䷇ 수지비(水地比), 도전괘, 착종괘는 서정적 주제의 통일을 이루는 ䷌ 천화동인(天火同人)이다. [출처] 14. 화천대유|작성자 김기덕   15. ䷎ 지산겸(地山謙)   지산겸은 地(☷:坤)가 위에 있고 山(☶:艮)이 아래에 있는 괘상으로 높은 산이 땅보다 아래에 있으므로 겸손함을 상징한다. 겸은 산같이 높은 덕을 내면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보다 못한 땅 같은 자의 아래에 있으니, 자신의 능력을 내세우지 말고 남을 존중함이 필요하다. 겸손은 남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마음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상태이므로 시쓰기에서도 자신의 의도대로 쓰지 않고 독자의 의도에 맞추어 쓰는 방법이다. 독자의 의도에 맞추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시각이 필요하고, 모든 시가 그렇지만 특히 독자가 상상하며 유추할 수 있도록 설명하지 말아야 한다. 효로 풀이하면 九三만 양이고 모두 음으로 이루어져 있는 괘이므로 첫 번째, 두 번째 문장은 음의 문장을 쓰고, 세 번째 문장은 양의 문장을 쓴 후 나머지는 모두 음의 문장으로 써야 한다. 겸괘에서의 핵심은 九三이다. 九三이 다른 존재에게 겸손해야하지만 다른 존재들도 역시 九三에게 겸손해야 한다. 그것은 곧 시에서 시의 핵심을 세 번째 문장에 오게 하는 것이다. 이 핵심은 음 중에서 양이며, 슬픔 중에서 기쁨이며, 어둠 중에서 빛이며, 절망 중에서 희망인 것이다. 그러나 산은 땅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양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은근히 내면적으로 존재함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상으로 풀면 天(⚏), 地(⚏)는 음으로 가득 차있다. 그렇게 어둡고 절망적인 상태이지만 시인만은 내면의 강함(⚍:소음)으로 새싹처럼 고개 내밀고 있다. 고개 숙인 새싹들처럼 겸손한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게 내면을 감춘 모습엔 희망이 담겨져 있다. 또한 부드럽고 순한 여성적인 정서 속에 남성적 강함이 숨겨져 있는 모습이다. 시인 자신의 의도나 감정도 숨겨져서 객관성을 갖게 해야 한다. 팔괘로 보면 어머니를 의미하며, 유순함과 서남방과 소, 신체 중의 배를 상징하는 땅(곤괘)이 위에 있고, 산을 의미하며, 소남(小男), 정지, 동북쪽, 신체 중의 손, 개를 상징하는 산이 아래에 위치해 있다. 아래는 산으로 이루어진 단락을 의미하며, 위는 땅으로 이루어진 단락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첫째 단락은 막힘과 단절, 심리적 답답함을 표현해야 하며, 둘째 단락은 유순함과 부드러움, 그리고 여성적인 정서로 이러한 단절과 막힘, 삶의 아픔과 절망을 포용하며 순응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고난 속에서 참고 인내하는 어머니와 같은 자세의 시쓰기이다.    보름달은 기울고 초승달은 커가는 것이 세상이치이고, 높은 곳의 흙은 깎이어 낮은 곳으로 퇴적되며, 물은 평면을 유지하려고 아래로 흐르는 것이 세상 원리이듯이 위대한 시인은 가장 낮은 자세로 세상을 바라보고 겸허한 마음으로 사물을 표현해야 한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았다고 감탄하며 들뜰 것이 아니라 벌레 같은 마음으로 시를 쓸 때 그 시는 산을 품은 땅과 같은 큰 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낮은 자세로 절망하며 흐느끼는 세상을 바라보라. 그리고 그들의 아픔에 대해 내 입장을 숨기고 그들의 입장에서 쓰는 것이 지산겸의 시쓰기이다. ䷎ 지산겸(地山謙)의 호괘는 자연스런 감정표출을 의미하는 ䷧ 뇌수해(雷水解)이며, 도전괘는 다른 하나의 시각으로 전체를 표현하는 ䷏ 뇌지예(雷地豫), 배합괘는 데칼코마니적 기법인 ䷉ 천택리(天澤履), 착종괘는 절해고도의 시인 ䷖ 산지박(山地剝)이다. [출처] 15. 지산겸|작성자 김기덕   * 단락의 변화에 대한 다양한 시각   단락의 변화에서 다룬 것이 본괘, 호괘, 도전괘, 배합괘, 착종괘, 지괘이다. 여기에서의 단락 변화는 내용의 새로운 흐름 전개를 말하며, 바라보는 시각의 또 다른 방향이나 새로운 차원을 말한다. 본괘는 쓰고자 하는 시의 본질적 대상에 대한 기본적인 접근을 말한다. 예를 들어 선풍기에 대해 시를 쓴다면, 선풍기의 모양이나 성격, 기능, 작동법, 디자인, 바람의 세기, 가격 등과 같은 선풍기의 기본적 대상에 초점을 맞추어 묘사하는 방법이다. 호괘는 시적 대상에 대한 내면성이나 내면적인 재질 ‧ 부품이 갖는 정신적인 상징성에 대한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위와 같이 선풍기에 대해 예를 들면 더위를 식혀주는 성질이나 시간에 맞게 돌아가고 꺼지는 자기조절, 내부적인 모터의 회전에 대한 상징성 등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호괘는 단순히 내부에 있는 부품이라고 해서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내면성을 말하는 것으로, 시적 대상이 의미하는 형이상적인 것, 또는 상징적인 것을 말한다. 도전괘는 반대편에서 본 입장을 말하는 것으로 사물의 감춰진 모습이나 다른 입장에서 바라본 모습, 또는 상대적인 측면에서 본 시각에서 시적 대상을 묘사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선풍기의 감춰진 뒷모습이나 선풍기와 상관없는 책의 입장이나 에어컨의 입장에서 바라본 시각을 가지고 쓰는 방법이다. 배합괘는 반대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시적 대상이 처한 상황과 반대되는 상황에서 바라보고 접근하여 표현하는 기법이다. 예를 들어 선풍기를 시적 대상으로 잡았다면 히터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든지, 겨울의 상황에서 선풍기를 묘사하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착종괘는 상하의 입장을 바꾸는 방법으로 거꾸로 보기의 일종이다. 선풍기에 대해서 본다면 거꾸로 놓고 선풍기의 모양이나 쓰임새를 묘사한다고 볼 수 있다. 역전된 시각, 내려다보기나 올려다보기의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지괘는 흐름의 종료, 결과를 말하는 것으로 하나의 사물이나 사건의 존재 결과나 진행 방향이 어떻게 흘러갈지에 대한 결과를 말한다. 인과관계라고도 할 수 있고, 결론적인 도달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나의 시적 대상을 이러한 여러 각도로 접근하면서 단락을 바꾸고 묘사, 표현한다면 글쓰기의 정해진 룰과 같은 하나하나의 괘들이 다양한 변화와 발전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64괘의 방법이 다섯 가지의 변괘를 만나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글쓰기가 가능해질 것이다. [출처] 단락의 변화에 대한 다양한 시각|작성자 김기덕     16. ䷏ 뇌지예(雷地豫)   뇌지예는 위에 雷(☳:震)가 있고 아래에 地(☷:坤)가 있는 괘상으로 땅을 뚫고 초목이 밖으로 움터서 즐거워하는 모양이다. 豫는 안으로 유순하고 밖으로 움직여 나아가는 모양이니 순히 움직여 나아가는 것이다. 豫는 오직 한 개인 양효가 모든 음효와 호응하는 형태여서 도리에 순응하여 움직이면 형통하는 괘이다. 하늘과 땅도 자연의 도리에 따라 순응하고 움직이듯 나라도 도리에 순응하면 크게 발전함을 의미한다. 시에서는 하나의 시각으로 사물을 표현함을 의미한다. 돌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듯, 강의 시각으로 세월을 보듯, 바람의 시각에서 낙엽과 인생을 보듯 하나의 주체적인 사물을 통해 활유적, 상징적으로 접근하는 표현 방법이다. 효의 시각에서 살펴보면 뇌지예(雷地豫)는 九四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음효로 이루어져 있다. 九四는 재상, 대신, 간부급 및 교생, 몸통, 몸의 앞부분, 형, 40대의 위치를 의미한다. 또한 九四는 사물의 중심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물의 관점을 중심으로 쓰되 나머지 효가 모두 음이므로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시가 되어야 한다. 다시 한 번 부연한다면 음의 문장은 右, 地, 母, 女, 柔, 靜, 下, 偶, 重, 濁, 暗, 後, 末, 逆, 小, 卑, 枝, 老, 哀, 惡, 慾, 病, 死, 緻密, 消極的, 陰凶 등을 나타낼 수 있는 문장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보면 하늘(⚏:노음)과 땅(⚏:노음)이 모두 노음인데, 사람만 소양(⚎)이다. 이는 천지만물이 음으로 둘러싸여 있고 세상을 보는 사람 또한 음의 상태지만, 내면의 음을 감추고 양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그 양적인 시각이 자신을 내세우지 못하고 사물의 시각을 빌려 음의 세상을 표현하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팔괘로 풀이하면 위에 온 震은 二陰 속에 一陽이 처하여 문이 열려있는 모양으로 一陽이 밖으로 강건히 움직여 변화를 이루는 상이다. 우레가 진동하는 형상이며, 땅 속의 초목이 움트는 상이다. 오행상 양목에 속하며, 물상으로 발(足), 용, 큰길 등을 상징한다. 아래에 온 地는 모두 음으로 이루어져 지극히 유순하고 광활하며 습하다. 안이 비어 물건을 담을 수 있는 모양으로 만물을 생육, 번성시키는 땅을 의미한다. 어머니, 오장육부를 담은 배, 유순한 소 등이 여기에 속하며, 평탄한 대지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땅 위에 울리는 우레와 같은 모양으로 겨울 동안 움츠렸던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지각을 뚫고 힘차게 땅 위로 오르는 기상을 갖고 있다. 현실의 미성숙을 내면의 강함으로 극복하고 변화시키고자 하는 힘을 느끼게 해야 한다. 뇌지예(雷地豫)의 변괘에서 인과관계로 가자면 지괘를 살펴보아야 하고, 내면의 변화는 호괘인 ䷦ 수산건(水山蹇)으로, 반대 입장은 도전괘인 ䷎ 지산겸(地山謙)괘로, 반대상황은 배합괘인 ䷈ 풍천소축(風天小畜)괘로, 상하의 입장변경인 착종괘는 ䷗ 지뢰복(地雷復)괘로 확장하여 쓸 수 있을 것이다. [출처] 16. 뇌지예|작성자 김기덕   17. ䷐ 택뢰수(澤雷隨)   택뢰수는 위에 澤(☱:兌)이 있고 아래에 雷(☳:震)가 있는 형상으로 아래에서 震이 움직임에 따라 위에서 연못물이 즐겁게 일렁이는 모양을 이루고 있다. 隨는 때를 따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해가 동에서 떠서 남을 거쳐 서에서 지듯이 해의 운행에 따라 만물이 좇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내면에는 움직이는 성질이 있고 밖으로는 기뻐하는 덕이 있으니 실천에 옮겨서 기쁜 결실이 있게 되는 괘이다. 효의 위치를 보면 음과 양이 반반으로 섞여 있는데, 첫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시작하여 두 번째, 세 번째는 음의 문장으로 표현된 후, 네 번째, 다섯 번째는 양의 문장으로 표현하여 음양의 조화를 이룬 다음, 음의 문장으로 마무리를 하는 형식이다. 시의 정서를 통일시키는 데 있어서 슬픔과 기쁨의 감정을 어떻게 한꺼번에 표현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음과 양의 관계는 배치의 관계로 양지와 음지를 동시에 그리는 그림과 같다고 생각해야 한다. 즉 양의 문장과 음의 문장의 관계는 음영을 표현한 미술의 빛과 어둠의 기법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빛이 살기 위해서는 어둠이 있어야 하고, 어둠이 돋보이기 위해서는 빛이 존재해야 하듯 배치관계에서의 음양의 조화를 통해 언어적 그림의 선명한 감정전달을 표현하는 기법이다. 사상으로 보면 천 ‧ 인 ‧ 지가 모두 음과 양으로 구성되어 있다. 地(⚍:소음)는 내면은 강하고 외면은 부드러운 모습으로 형이상적인 땅의 모습보다는 현실적인 땅의 모습에 치중되어 있는데, 天(⚍:소음)도 마찬가지로 상징적인 하늘보다는 현실적인 하늘이 강조되어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人(⚎:소양)은 현실적인 면보다는 이상적인 면이 강하고, 종교나 제의에 치우쳐 있다. 이는 현실을 표현하면서 정신적인 고뇌와 신적인 아타락시아를 추구하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팔괘로 풀이해 보면 밑에는 우레가 진동하며 초목이 움터 나오는 형상인데, 위에는 연못이 출렁이며 기쁨을 누리는 형상이다. 팔괘의 두 단락으로 보면 첫째 단락은 생동하며 초목이 움트는 것 같은 활동성을 표현하고, 둘째 단락은 연못의 물이 춤추며 기뻐하는 것 같은 이미지의 표현이다. 택뢰수는 강한 자가 유순한 자를 따르는 형태인데, 유순한 자는 이를 기쁘게 받아들임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서로 화합하는 모양을 이루고 있다. 우레가 못 속에 잠겨 있는 상으로 이는 평화와 안정을 의미한다. 이러한 고요함은 애수와 석양의 따사로움을 연상케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물결이 일며 생성과 발전의 분위기가 5월의 풀향기처럼 감도는 싱싱하고 젊음이 가득한 고요함이다. 차분하고 잔잔하지만 희망이 넘치는 시쓰기의 방법이다. 택뢰수의 호괘는 점점 커지는 확장적, 상승적 묘사인 ䷴ 풍산점(風山漸)이며, 도전괘, 배합괘는 순탄한 논리의 배반적 기법인 ䷑ 산풍고(山風蠱), 착종괘는 이질적인 문장이나 단락을 연결하는 ䷵ 뇌택귀매(雷澤歸妹)이다. [출처] 17. 택뢰수|작성자 김기덕   18. ䷑ 산풍고(山風蠱)   산풍고는 山(☶:艮)이 위에 있고 風(☴:巽)이 아래에 위치해 있는 상으로 산 아래 바람이 불어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지는 형상이다. 蠱는 그릇(血) 위에 세 마리 벌레가 있는 모양으로 그릇을 좀먹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巽은 한 음이 생하는 모양이고 艮은 두 음이 자라는 모양이니 음이 성하는 가을의 때와 같다. 안으로는 순하고 밖으로는 그침의 덕이 있으니 산과 같은 덕으로 백성들을 교화하는 형상이다. 효로 살펴보면 백성이나 신입사원, 신입생, 10대와 같은 初爻가 음으로 시작하고, 재상, 간부, 몸통, 40대와 같은 四爻, 왕, 대통령, 사장, 아버지, 50대와 같은 五爻가 음으로 이루어진 산풍고는 병들기 쉬운 인생의 고비를 상징하고 있다. 10대의 사춘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따라 인생의 미래는 달라진다. 또한 40대, 50대는 인생에 대한 회의와 허무로 인해 병들기 시작하는 때이다. 병적 허무와 정신적 공황기의 절망적 감정을 시의 내부에 심음으로써 벌레 먹은 듯 감정적 천공을 만드는 시쓰기이다. 즉 양의 바탕 위에 음의 요소를 구멍 뚫듯 배치하는 것이다. 사상으로 보면 하늘(⚎)과 땅(⚎)은 같은 소양으로 이루어져 있고 사람(⚍)만 소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늘은 형이상적인 천국, 영혼의 세계를 그리고 있고, 땅 또한 지하의 형이상적인 세계인 지옥, 어둠의 세계를 그리고 있으나 人의 세계만 물질적, 육체적인 지향성을 갖고 있다. 이는 건전한 정신세계의 병들음이며, 푸른 잎의 구멍과 같다. 하나의 동질적 바탕 위에 이질적 요소의 구멍 뚫기와 같은 시쓰기이다. 팔괘로 풀이하면 산(☶:艮)인 一陽二陰이 위에 있어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그치는 상인데, 小男, 집지키는 개, 작은 길, 작은 돌 등이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아래에는 一陰이 二陽 아래 엎드려 숨어 있는 모양으로 공손 ‧ 겸양하여 자신을 낮추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長女, 노끈, 닭 등이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산 아래 바람이 부니 낙엽이 떨어지는 형상이다. 첫째 단락은 나무나 풀과 같이 부드럽고 순탄하며, 땅에 뿌리내리기와 같은 시쓰기이다. 하지만 두 번째 단락은 이러한 순탄함이 막히면서 절망과 좌절의 아픔이 짓누르는 듯한 형상을 가지고 있다.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느낌이 들 수도 있으나 순탄한 논리의 배반이 군데군데 역설적으로 도입됨으로써 아름다운 단풍잎이 아니라 벌레 먹어 구멍이 뚫려 감정을 더욱 자극하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의 젊은 시기를 보내고 노년의 후회와 허무, 삭막함을 표현하는 시쓰기도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산풍고의 변괘 중 호괘는 ‧䷵ 뇌택귀매(雷澤歸妹)이며, 도전괘‧배합괘는 ䷐ 택뢰수(澤雷隨), 착종괘는 ䷴ 풍산점(風山漸)이다. [출처] 18. 산풍고|작성자 김기덕   19. ䷒ 지택림(地澤臨)   지택림은 위에 地(☷:坤)가 있고 아래에 澤(☱:兌)이 있는 모양으로 땅에 못물이 고여 모든 만물을 기르는 상이다. 臨은 모체 속에서 양이 자라, 나올 때가 임박한 상으로 어머니가 아버지의 기운을 받아 수태한 후 품성을 갖추어 만물이 나오는 상이다. 안의 兌는 기쁨의 상이고, 밖의 坤은 순한 모양이니 기뻐하면서 순하게 나아가는 형상이다. 절기로는 한겨울인 12월이며, 새로운 한 해가 임박하는 때이다. 復괘는 양이 처음 나오는 괘로서 하늘의 문이 열리는 때라면, 양이 하나 더 자라 땅의 문이 열리는 때이고 곧이어 만물이 생겨나는 형상이다. 귀한 양으로 復(䷗)에서 더 발전하여 백성에게 임하니 크게 형통하고 이로운 것이다. 효로 이 상을 풀이하면 初爻와 二爻는 양의 문장으로 구성되고 나머지 효들은 모두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지는 구성이다. 이 모양은 여러 개의 음이 꽃받침처럼 받쳐주고 그 속에서 양의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두 개의 양의 문장은 꽃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운 양의 모양을 띠어야 하고 나머지 음의 문장들은 이 두 문장을 뒷받침하는 꽃받침과 같이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양의 문장은 꿈이나 이상과 같은 것이며, 음의 문장은 이 꿈과 이상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현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양의 문장은 형이상적이요, 음의 문장은 형이하적이어서 두 개의 양의 문장에 초점을 두고 나머지 문장은 배경적인 구성을 하는 시쓰기 기법이다. 사상으로 보면 地는 노양(⚌)이고, 人은 노음(⚏)이며, 天도 노음(⚏)이다. 땅에 속한 나무나 짐승, 곤충들은 생기로 가득 차 있지만, 하늘은 아직 흐리고 기온이 풀리지 않았으며, 사람들도 생기를 찾지 못하고 절망과 좌절 속에 있다. 하늘과 인간은 침체되어 있지만 땅만은 새로운 봄을 준비하며 부지런히 얼음 속으로 물이 흐르는 모양이다. 땅의 위대함을 통해 사람과 하늘이 회복되어 가는 희망적 시쓰기 기법이다. 팔괘로 보면 땅(☷) 속에 못(☱)이 있는 모양으로 깊은 연못을 상징한다. 깊은 연못은 인간에게 여러 가지 영감과 교훈을 준다. 깊고 푸른 연못의 맑은 물을 보면 청춘이 즐겁고 인생에 희망이 샘솟는다. 아직 땅은 어둡고 축축하며 무거운 감정이다. 하지만 그 땅 속에서 숨 쉬는 연못은 희망을 비춰준다. 깊고 심오한 영감으로 현실의 어둠을 극복하고 맑고 고요한 심성의 깨달음으로 희망을 찾는 모양이다. 첫 단락은 삶의 기쁨과 깨달음의 고요가 거울 같은 수면처럼 차분하게 나타나야 하고, 둘째 단락은 이러한 깨달음의 세계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암울한 현실과 미완의 세계를 그려야 한다. ䷒ 지택림(地澤臨)은 바닥에 생명처럼 솟아나는 원천이 있다. 고요히 정지하여 있지만 물은 항상 새롭다. 그래서 부패하지도 않고, 시끄럽지도 않고, 격돌하지도 않고, 순조롭고 자연스러우면서 묵은 것과 새것을 교체하면서 변하지 않는다. 음의 문장 속에서 양의 문장이 새로운 꿈과 희망을 제시하며 기쁨을 갖게 하는 시쓰기이다. 지택림의 변괘 중 호괘는 근본을 회복하여 새롭게 나아가는 ䷗ 지뢰복(地雷復)이며, 배합괘는 형이상적인 시를 의미하는 ䷠ 천산둔(天山遯), 도전괘는 군자의 교화가 세상을 감화시키는 ䷓ 풍지관(風地觀), 착종괘는 산문시적인 ䷬ 택지취(澤地萃)이다.   20. ䷓ 풍지관(風地觀)   風地觀은 風(☴:巽)이 위에 있고 地(☷:坤)가 아래에 있는 상으로 땅 위에 바람이 불어 만물이 이를 따라 흔들리는 형상이다. 觀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두루 살피는 모양이니 시적 대상에 대한 관조적인 접근으로 마치 황새가 창공을 날면서 먹이를 찾는 것과 같다. 안으로 지극히 유순하고 밖으로는 부드러운 덕이 있는 모양이니 군자가 마음을 비우고 극한 경지로 들어가 관찰하고 연구하는 괘이다. 또한 땅 위에 바람이 불어 모든 초목이 흔들리는 모양이니 군자의 교화가 세상에 감화를 일으키는 형상이다. 효로 풀이하면 첫째 문장에서 네 번째 문장까지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지고, 다섯 번째 문장과 여섯 번째 문장이 양의 문장으로 구성되는 형태이다. 觀의 살핀다는 의미처럼 음의 시각으로 시적 대상을 자세히 관찰, 세밀하게 묘사하다가 결말 부분에서 양의 문장으로 마무리를 짓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슬픔이나 절망, 고통과 같은 음의 성격으로 진행되다가 희망이나 꿈을 불어 넣는 식의 양의 결말로 끝부분을 마무리하는 시의 형태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풀이하면 삼재 중 地는 ⚏(노음)으로 겨울이나 한밤중과 같은 상황을 의미한다. 어두운 현실이나 암담한 미래와 같은, 현실적인 사실이나 사물의 위치, 상태 등이 지극히 쇠퇴해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 또한 人도 마찬가지로 ⚏(노음)으로 상황뿐만 아니라 시인이나 시의 주체적 인물이 음의 극적 상황에 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슬픔이나 절망, 고독의 감정을 가지며 지극히 음의 세계에 빠져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天에서 ⚌(노양)으로 급반전함으로써 세상의 변화와 심리적, 정신적인 변화의 새로운 이상을 꿈꾸는 형식의 시쓰기이다. 팔괘로 보면 땅 위에 바람이 부는 형상으로 세상을 관찰하는 의미를 가진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시쓰기의 형태로 관조적인 시쓰기이다. 몰입이 되어서 사물의 내면과 일치하는 치열함보다는 조금 떨어져서 관찰하고 지켜봄으로써 어둡고 답답한 현실의 음적 상황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꿈을 나누는 관조적 묘사를 의미한다. 풍지관의 바람은 얼핏 폭풍이나 태풍과 같은, 나무를 부러뜨리고 지붕을 날려버리는 사나운 바람을 연상하거나 꽁꽁 얼어붙은 겨울날 매섭게 나무 끝을 불어가는 삭풍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풍지관은 그러한 사납고 어지러운 바람이 아니라 풀잎도 꽃봉오리도 즐겁게 어루만져 주는 봄바람이거나 햇살에 눈부시게 쏟아지는 신록의 바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둡고 차가운 현실을 밝고 따뜻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희망적 꿈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풍지관의 변괘 중 호괘는 ䷖ 산지박(山地剝)이며, 도전괘는 ䷒ 지택림(地澤臨), 배합괘는 ䷡ 뇌천대장(雷天大壯), 착종괘는 ䷭ 지풍승(地風升)이다.   21. ䷔ 화뢰서합(火雷噬嗑)   火雷噬嗑은 火(☲:離)가 위에 있고 雷(☳:震)가 아래에 있는 모양으로 雷電이 합하여 빛나고 두 물건이 서로 함께하여 합하니 火雷噬嗑이다. 噬는 씹는 것이요, 嗑은 다물어 합하는 것이니 입 속의 물건을 씹어 합하는 의미가 있고, 위턱과 아래턱 사이에 물건이 들어 있는 괘의 모양을 하고 있다. 상괘의 離는 번개이고 하괘의 震은 우레로서 번개치고 우레가 따름으로써 서로 모여 합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아침이 지나 한낮이 되는 때이며, 봄철이 지나 여름이 되는 시기이니 만물이 통하는 이치가 있다. 효로 풀이하면 첫 번째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되어 있고, 두 번째, 세 번째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네 번째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이빨 사이에 끼어있는 음식과 같이 핵심적 요소(시적주체)가 오고 다섯 번째는 음의 문장, 여섯 번째는 양의 문장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에 문장이라고 명명된 부분은 꼭 하나의 문장만을 의미하지 않고 여러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는데, 중요한 것은 내용적인 의미의 통일체를 말한다. 즉 하나의 시적 대상을 음과 양의 시각으로 씹듯이 밀도 있고 다양하게 표현하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보면 地는 소음(⚍)으로 이루어져 내면은 강하지만 외면은 부드럽고 약한 모양을 갖고 있다. 人과 天은 소양(⚎)으로 이루어져 속은 부드럽고 약하지만 외면은 강하고 밝은 모습을 갖고 있다. 여기에서 시인의 의식은 외향적인 하늘과 내향적인 땅의 가운데에서 합하여져 음과 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태이다. 번개가 치고 그 뒤를 천둥이 따르듯이 시인의 의식 속에 하늘과 땅이 합하여 통합된 주제의식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는 형이상과 형이하의 조화이며, 정신과 물질의 조화, 음과 양의 조화가 있는 시쓰기이다. 팔괘로 풀이하면 번개가 친 다음에 우레가 있는 모양을 이루기도 하고, 하늘에서 번개가 치자 땅에서 우레가 울리는 형상이다. 하지만 시쓰기에서 첫째 단락이 우레의 의미를, 둘째 단락이 번개의 의미가 있는 의미의 배치를 갖기 때문에 이는 역인과적 관계를 의미하며 결과 후 과정을 쓰는 것과 같은 기법이다. 하지만 이들의 섞임은 음식물을 씹었을 때처럼 잘 섞여야 한다. 윗니 아랫니가 음식을 끊고 씹으며 서로 맞닿아 조화를 이루듯이 剛强을 상징하는 양괘인 震과 유화를 상징하는 음괘인 離가 합력하는 긍정적인 시쓰기이라고 할 수 있다. 火雷噬嗑의 호괘는 슬픔과 우울에 침잠된 ䷦ 수산건(水山蹇)이며, 도전괘는 의식의 절제를 의미하는 ䷕ 산화비(山火賁), 배합괘는 정서와 사상의 우물파기인 ䷯ 수풍정(水風井), 착종괘는 다양한 묘사와 풍성한 의식의 ䷶ 뇌화풍(雷火風)이다. [출처] 21. 화뢰서합|작성자 김기덕   22. ䷕ 산화비(山火賁)   산화비는 山(☶:艮)이 위에 있고 火(☲:離)가 아래에 놓여 산속에 불이 있는 모양이다. 생장의 과정을 마치고 아름답게 결실을 맺는 의미를 갖고 있어서 山火賁이다. 賁는 종자가 다 여물어 열매 맺는다는 뜻으로 열매(貝)가 많이 매달린(卉) 모양으로 ‘빛나다, 꾸미다, 열매 맺다’라는 뜻이 있다. 안으로 밝고 화려함에도 밖으로 그치는 덕이 있으니 꾸밈의 소박한 절도를 지켜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순리에 따르는 형상을 이루고 있다. 효로 풀이하면 첫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이루어지고, 둘째 문장은 음의 문장, 셋째는 양의 문장, 넷째와 다섯째는 음의 문장, 여섯째는 양의 문장으로 배치되어 있다. 산화비의 여섯 효를 압축하면 ☲(火)의 형태를 갖는데, 이는 내면의 아픔을 감추고 밖으로 아름답게 승화된 시쓰기이다. 그래서 첫 문장과 끝 문장을 양의 문장으로 배치하고 중간에 음의 감정을 내비침으로 전체적으로 내면의 고통은 안으로 숨기고 밖으로는 이러한 진실을 꾸밈으로 더욱 아픔을 절제하는 모습을 갖고 있다. 내면적인 절제의 정한적 요소와 형식적인 절제의 방식과는 차이가 있지만, 이는 배치를 통한 절제된 내면을 나타내고자 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풀이하면 地는 소음(⚍)으로 강한 내면을 감추고, 유약하고 부드러운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독자에게 감정적 호소가 되어야 한다. 이 감정적 호소는 낭만주의적인 쏟아놓음이 아니라 절제 속의 호소여야 한다. 이의 구체적인 방법은 땅의 사물적 효는 양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지만 땅의 정신적 효는 음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양적 사물 속에서 음의 감정 및 정신을 표현하는 방법이 필요하다. 이러한 방법이 人의 소음(⚍)에서도 계속되다가 마지막 단계인 天의 배치에서 음적인 감정을 뒤엎고 양의 감정으로 승화시켜 희망적인 색채를 띠게 하는 방법이다. 팔괘로 풀이하면 산이 불을 가두고 있는 형국이다. 불은 밝히 드러내고자 하는 감정이며, 여러 가지를 표현하고자 하는 과잉적 의식이다. 이러한 의식을 산이 막고 있다. 산은 그친다는 뜻과 가로막는 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 산화비(山火賁)의 모양을 통해 풀이해 보면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을 가로막고 있는 상이다. 그래서 의식이 절제되어야 하고 슬픔이나 절망의 음적 감정이 수면에 잠긴 채 고요하고 잔잔한 바다와 같은 모습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내면의 아름다움, 절제된 감정의 열매 맺음을 통해 함축적인 표현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산화비의 변효 중 호괘는 감정표출의 시인 ䷧ 뇌수해(雷水解)이며, 도전괘는 음양의 조화를 이룬 ䷔ 화뢰서합(火雷噬嗑), 배합괘는 절망적 현실을 표현한 ䷬ 택수곤(澤水坤), 착종괘는 하이퍼적 기법인 ䷷ 화산여(火山旅)이다. [출처] 22. 산화비|작성자 김기덕   23. ䷖ 산지박(山地剝)   산지박은 산(☶:艮)이 위에 있고 地(☷:坤)가 아래에 놓여 땅 위에 높이 솟은 산이 아래가 깎여 무너지는 모양이어서 山地剝이라고 한다. 剝은 근본 종자를 의미하는 彔(근본 록)을 刂(선칼 도: 칼, 낫 등)로 베어 열매를 거둠을 이른다. 剝은 안으로 유순히 행하고 밖으로 두터이 드러내지 않으니, 음에 의해 박락(剝落) 되는 때를 알아 밖으로 나아가지 않고 때를 기다려 머무는 덕이 있다. 박괘는 늦가을로서 음이 극성해지는 상강 절기에 해당하니, 낙엽이 지고 열매가 떨어지는 때이며, 대지가 비바람에 침식되어 높이 솟아 깎이는 모습이다. 시에서는 높은 산에 홀로 선 듯한 고독과 절개, 세속에 물들지 않은 고고함의 시이다. 또한 외로움이나 사회적 왕따, 궁지에 몰린 자와 같은 절해고도의 시라고 할 수 있다. 효로 풀이하면 첫 문장에서부터 다섯 번째 문장까지 음의 문장으로 구성되다가 마지막 여섯 번째 문장에서 양의 문장으로 끝맺는 방법이다. 전체 분위기에서 양의 문장은 중심이 되는 의식이지만 사라져야 할 의식, 아쉬움의 표현인 의식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음의 감정은 살고 마지막 남은 양의 감정은 떨어져 나가는 낙엽처럼 아름답지만 허무한 것이다. 이 양의 감정은 아쉬움이며, 허무이며, 또한 다음해를 기약하는 결실이며 씨앗이기도 하다. 지속되는 음의 감정이 종국적인 양의 감정을 밀어내고 있다. 사상으로 풀이하면 地는 노음(⚏)으로 시기로 보면 한겨울이고, 때로 보면 한밤중이며, 정신으로 보면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 이러한 음의 기운이 人(⚏:노음)에서도 지속되다가 天(⚎:소양)에서 언뜻 양의 기운이 나타나지만 한밤의 유성과 같이 사라져버릴 것을 예감함으로 극적인 긴장감을 갖게 하는 시쓰기이다. 이는 강물 위에 살얼음과 같으며 튕겨져 나가기 직전의 샴페인 병마개와 같은 상태이다. 그 속에서 극적 긴장감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일몰 직전의 잔광을 그리는 것과 같거나, 엄동설한 직전의 가냘픈 햇살과 같은 시쓰기이다. 팔괘로 보면 땅 위에 솟아 있는 산의 형상을 갖고 있는데, 柔가 剛을 변질시키려 하고 있다. 소인의 세력이 강대해져 바른 정치를 하려 해도 되지 않는 상황과 같이 음적 정서가 팽배해져 양적인 정서가 사라지고 마지막 남은 양마저 변질시켜버릴 듯한 기세다. 짝수, 땅, 어머니, 여자, 부드러움, 고요함, 아래쪽, 우측, 무거움, 탁함, 어두움, 끊어짐, 들어감, 나중, 끝, 반대, 작음, 천함, 가지 등과 같은 음의 배치를 이룬 후 마지막 연에서 양의 문장을 배치하여 극적인 상황을 만드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산지박의 변괘인 호괘는 여성적 감정의 표현인 ䷁ 중지곤(重地坤)이며, 도전괘는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는 ䷗ 지뢰복(地雷復), 배합괘는 양적 시각의 막판 뒤집기인 ䷪ 택천쾌(澤天夬), 착종괘는 독자의 의도에 맞추는 ䷎ 지산겸(地山謙)이다. [출처] 23. 산지박|작성자 김기덕   24. ䷗ 지뢰복(地雷復)   지뢰복은 地(☷:坤)가 위에 놓이고 雷(☳:震)가 아래에 놓인 괘상으로 땅 속에서 양이 생기기 시작하여 회복하는 모양을 이루니 地雷復이다. 復은 종자인 한 양(日)이 깊은 땅 속에서 서서히 움터 나오는(⼻, 行, 也) 뜻을 가지고 있다. 내면에는 움직임이 있고 외면으로는 유순함의 모습을 갖추었으니 움직여 나아감이 순조로운 모양을 이루고 있다. 復卦는 동짓달(음11월)괘로서 음이 극성한 때이다. 땅 속에서 초목이 발아하는 모습인데, 근본을 회복하여 새롭게 출발하는 의미를 가지며, 서두르지 않고 어려운 과정을 이겨내 사람의 본성을 회복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효로 풀이하면 初爻만 양이고 모두 음효로 이루어진 모양으로 첫 문장만 양의 문장으로 배치하고 나머지는 모두 음의 문장으로 배치하는 방법이다. 음으로 가득한 세상에 작은 양의 새싹이 움트는 형국으로 절망 중에 희망을 묘사하는 시이며, 혼탁함 속에서 근본을 찾고자 하는 시이다. 얼어붙은 강물 속에서 소생하는 봄의 물줄기가 흐르고 있는 정신, 현실, 의지를 표현하는 시쓰기로 새로운 시작의 모양을 뜻하고 있다. 사상으로 표현하면 땅에 속한 물질적인 존재의 미미한 변화만 감지될 뿐, 땅의 형이상적인 형태나 人의 형이상적인 면이나 형이하적인 면들은 모두 음의 상황이다. 또한 하늘도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하늘이나 추상적인 하늘이 모두 음의 상황으로 채워져 있다. 그림으로 그린다면 하늘도, 사람도, 땅도 다 어두운데 땅 속에서만 미미한 생명의 움직임이 감지되는 등불을 그리는 것과 같다.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더 자세히 설명한다면 실질적이든 형식적이든 세 개의 단락으로 구성되며, 시의 제목이나 주제의식에 맞는 하늘적인 요소(눈에 보이는 sky든 정신적인 이상세계든)와 사람과 연관된 삶이나 관념, 또한 땅에 속한 모든 사물과의 차원적인 관계에서 땅의 사물적 요소만이 양으로 표현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양의 사물은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양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소금과 같은 존재의 사물이다. 팔괘로 보면 우레의 에너지가 땅 속에 살아있는 것이 復의 괘상이다. 겹겹이 쌓인 여러 음효 밑에 다만 한 개의 양효가 있는데, 중첩된 음의 기운 속에 양의 기운이 살아나고 있는 상태를 보이고 있다. 이는 일몰 직전의 잔광과 같은 산지박의 시쓰기의 정반대로 극한의 벽을 뚫고 빛이 보이는 새벽과 같은 새로운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한 줄기의 어린 광선이지만 그것은 장차 천지를 지배하며 음기와 암흑을 정복하여 퍼져가는 광명이다. 첫째 단락은 변화하고 생동하는 우레의 형상을 그리고, 두 번째 단락에서는 암흑과 얼음으로 둘러싸인 땅의 형상을 그림으로써 잠에서 깨어나는 천지만물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지뢰복의 변괘 중 호괘는 여성적 정한의 감정인 ䷁ 중지곤(重地坤)이며, 도전괘는 세속에 물들지 않은 고고함의 ䷖ 산지박(山地剝), 배합괘는 음적 대상도 아름답게 표현한 ䷫ 천풍구(天風姤), 착종괘는 환유적 표현인 ䷏ 뇌지예(雷地豫)이다. [출처] 24.지뢰복 |작성자 김기덕   * 문장 및 단락 구성에 대한 다양한 시각   효의 입장에서 시의 형식을 보면 여섯 개의 문장으로 구성된 듯이 보이지만, 하나의 효가 꼭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효가 두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으며 세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것은 내용적 연결 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여섯 개의 효가 압축되어 세 개의 효로 구성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重天乾(䷀)은 乾(☰)으로, 重地坤(䷁)은 坤(☷)으로, 山澤節(䷨)은 離(☲)로, 雷風恒(䷟)은 坎☵과 같이 압축될 수 있기 때문에 세 개의 문장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다. 또한 이 세 개의 문장도 乾(☰)은 양(⚊)으로, 坤(☷)은 음(⚋)으로, 離(☲)는 음(⚋)으로, 坎(☵)은 음(⚋)으로 압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배치의 형태를 참고하여 자유로운 변화를 추구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하나의 시 전체를 천 ‧ 인 ‧ 지의 시각으로 접근한 것이다. 이는 차원의 구분이며, 인간을 중심으로 한 우주만물의 차별적 시각이다. 이 천 ‧ 인 ‧ 지 속에 우리가 쓰고자 하는 모든 시적 대상들이 다 들어 있다. 그 대상을 차원에 따라 구분하여 시의 배치에 적절하게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구분과 재배치의 효율성은 논리마인드맵 기법을 통해 더욱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마인드맵 기법은 둥치에서 줄기, 줄기에서 가지, 가지에서 잎이나 열매로 분화되듯이 주역적 시쓰기에서는 태극에서 양의, 양의에서 사상, 사상에서 팔괘, 팔괘에서 육십사괘로 분화되는 과정을 공부했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태극이 양의, 사상, 팔괘, 육십사괘가 되듯이 하나의 문장이 두 문장, 두 문장이 네 문장, 네 문장이 여덟 문장, 여덟 문장이 육십사 개의 문장으로 변화될 수 있으며, 반대로 육십사 개의 문장이 한 문장이 될 수도 있고 두 문장이 될 수도 있으며, 여덟 개의 문장이 두 개의 문장, 네 개의 문장으로 변화될 수가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엄밀한 법칙이 존재하고 그 법칙에 의해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사상은 기본적으로 세 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진다. 사상의 기본적 요소는 태양(⚌), 소음(⚍), 소양(⚎), 태음(⚏)이지만 이 네 가지의 상이 육십사괘에서는 천 ‧ 인 ‧ 지의 여섯 개의 효 구조로 배치되기 때문에 세 개의 단락을 형성한다. 이 단락은 표면적인 단락과 이면적인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기 ‧ 서 ‧ 결이나 서론 ‧ 본론 ‧ 결론의 구조를 가질 수도 있다. 팔괘의 시각으로 살펴보면 육십사괘는 乾 ‧ 兌 ‧ 離 ‧ 震 ‧ 巽 ‧ 坎 ‧ 艮 ‧ 坤의 팔괘가 중첩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하나의 팔괘는 세 개의 효로 이루어져 세 개의 문장으로 만들 수도 있고, 이 세 개의 문장을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육십사괘는 다시 팔괘가 될 수 있고, 팔괘는 사상이 될 수 있고, 사상은 하나의 태극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사실상 자유로운 확장과 분화, 팽창이 가능하고, 또한 수축과 압축, 절단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육십사괘의 설명과정에서 문장이나 단락으로 표현된 것들은 정확무오한 문법적 해석을 통한 명칭이 아니라 보다 확산되고 재조명된 유연한 명칭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출처] 문장 및 단락 구성에 대한 다양한 시각|작성자 김기덕   25. ䷘ 천뢰무망(天雷无妄)   천뢰무망은 위에 天(☰:乾)이 있고 아래에는 雷(☳:震)가 와서 하늘 아래 우레가 울리는 모양으로, 뇌성벽력이 울리면 누구나 하늘을 두려워하고 스스로를 반성하듯이 천도를 따라 바르게 행하므로 无妄이다. 无妄은 하늘의 마음을 갖고 여색을 멀리하며 본성 그대로 행한다는 뜻이 있다. 본성을 회복하면 망령됨이 없음을 의미하고 있다. 위에 있는 하늘은 강건하고 아래에 있는 우레는 진동하니 강건하게 나아가는 덕을 갖춘 상으로, 하늘과 같이 공정무사하고 강건한 도로써 본연의 마음을 지켜 하늘에 순응하는 상이다. 효로 풀이하면 첫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두 번째, 세 번째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배치한 후 나머지 네 번째에서 여섯 번째까지 문장은 모두 양으로 배치하는 형식이다. 망령됨이 없이 하늘의 뜻을 따라 쓰는 방법으로 시인의 감정을 최대한 줄이고 하늘의 큰 진리를 쓰고자 하는 방법이다. 자칫 관념적으로 치우치기 쉬우나 절대적으로 시는 언어로 그리는 그림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상으로 보면 地(⚍:소음)와 人(⚎:소양)이 대립적인 관계를 갖고 있어서 서로의 생각이나 표현이 통일을 이루기가 어려우나 天(⚌:노양)이 밝고 강건하므로 하늘의 뜻을 따라 행하면 다툼이나 거침이 없고 통일된 주제 의식을 보여 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시의 전개가 형이상적이고 관념적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사물을 끌어와 배치관계를 이미지적으로 만들어 주도록 해야 한다. 사물의 속성이나 시인의 생각에 치우치지 말고 보다 넓은 보편적 진리나 원리를 생각하여 작품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팔괘로 살펴보면 첫째 단락은 우레를 의미하는 것으로 변화가 많고 흔들림이 많은 것이지만 생기가 가득한 단락이다. 두 번째 단락은 지적이고 강건하며, 하늘의 큰 이치가 담긴 단락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레는 땅을 의미하고, 안을 의미하며, 물질적인 형이하를 의미하지만 乾은 하늘을 의미하고, 밖을 의미하며, 형이상을 의미한다. 형이상적인 단락과 형이하적인 단락이 대치를 이루나 형이상적인 단락이 시의 주제성을 이끌고 중심역할을 함으로써 하늘의 뜻을 따르는 시쓰기이다. 천뢰무망은 하늘을 의미하는 건괘가 위에 있고 우레를 의미하는 진괘가 아래에 있어 우레가 하늘에서 크게 진동하고 있는 모양을 상징한다. 이는 하늘의 엄한 뜻이며 세상을 호령하는 하늘의 명령인 것이다. 하늘의 시각에서 세상과 인간을 향해 우레 같은 의미의 시를 표현으로 나타내 주어야 하는 시이다. 天雷无妄의 변괘 중 호괘는 점점 의식의 확장을 꾀하는 ䷴ 풍산점(風山漸)이며, 도전괘는 스케일이 크고 웅장한 시 ䷙ 산천대축(山天大畜), 배합괘는 대지를 뚫고 나오는 나무의 기상을 간직한 ䷭ 지풍승(地風升), 착종괘는 강렬한 남성적 정서에 대한 여성적 정서의 조화를 이룬 ䷡ 뇌천대장(雷天大壯)이다. [출처] 25. 천뢰무망|작성자 김기덕   26. ䷙ 산천대축(山天大畜)   산천대축은 山(☶:艮)이 위에 있고 天(☰:乾)이 아래에 있어 물건이 흔들림 없이 견고하게 높이 쌓이는 모양이다. 대축은 크게 쌓는다는 뜻으로 아래의 하늘은 大 ‧ 玄, 위의 산은 田의 모양이다. 안으로는 강건하고 밖으로는 그침이 있으니 산에 하늘의 도가 밀려와 크게 쌓이는 이치가 있다. 흙이 크게 쌓여야 큰 산을 이루고 사람도 학문과 경험이 쌓여야 큰일을 행할 수 있듯이 글을 씀에도 크게 쌓은 사람과 쌓은 것이 없는 사람과는 근본적으로 같을 수가 없다. 효를 분석해보면 첫째, 둘째, 셋째 효는 양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강하고 튼튼한 받침대를 형성하듯이 안정적이어야 한다. 감정과 정서, 의지의 표현이 긍정적이고 강해야 한다. 넷째, 다섯째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유약한 음이 합하여 모이는 형식이다. 하늘의 양기가 아래로 내려 모이는 것이 대축이다. 또한 밑의 세 양은 흐르는 강물과 같지만 위에 있는 두 개의 음이 가로막음으로 흐르지 못하고 고이게 된다. 마지막 상구는 막혔던 것이 넘침으로 한 순간 세상을 범람하게 되는 막강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산천대축의 효를 통한 시쓰기는 初九, 九二, 九三의 격앙된 감정이 六四, 六五에서 절제되고 응축되어 고인 내적 감정이 마지막 문장에서 승화되어 흘러넘치는 시의 맥락을 형성하고 있다. 사상으로 풀이하면 地는 노양(⚌)으로 강하고 건실한 힘이 넘친다. 人은 소음(⚍)으로 내면은 강하지만 외적인 표현은 부드럽고 연약하다. 그래서 유약한 감정이 넘치려 하지만 天이 이러한 감정을 억제하고 누르면서 강하고 희망적인 승화의 과정을 나타낸다. 大畜은 장애요소가 클수록 큰 감정을 싹틔우고 큰 감정이 승화되어 보다 더 큰 감동을 만들어 내는 시쓰기이다. 팔괘로 살펴보면 산 속에 들어 있는 하늘이다. 산 같은 사람의 마음에 들어 있는 하늘의 큰 뜻이다. 이러한 큰 뜻은 인생의 풍상을 견디고 산같이 살아온 사람일수록 많이 쌓여 있다. 깊은 내공을 쌓고 그 내공을 풀어내는 시쓰기이다. 산이 그 속에 하늘의 큰 에너지를 받아 축적하고 있는 상태이다. 산은 현실이나 사물적인 것이지만 하늘은 이것들 속에 존재하는 정신적이며, 형이상적인 상징성을 의미한다. 산 속에 감추어진 하늘의 뜻을 발견하고 드러내는 시적 표현이 요구되는 방법이다. 비행기를 타고 밀림지대를 날아보면 나무의 바다, 풀의 바다가 펼쳐진다. 대해의 물굽이처럼 끝없이 펼쳐져 있는 풀과 나무들을 키우는 산의 힘은 얼마나 크고 위대한가? 산이 기르는 힘, 축적된 에너지의 강한 시심을 풀어내는 상징적인 접근 방법이다. 山天大畜의 變卦 중 호괘는 이질적인 문장이나 단락을 이어주는 ䷵ 뇌택귀매(雷澤歸妹)이며, 도전괘는 하늘에 순응하는 시쓰기인 ䷘ 천뢰무망(天雷无妄), 배합괘는 산문형식의 시인 ䷬ 택지취(澤地萃), 착종괘는 철학적, 종교적 시각인 ䷠ 천산돈(天山遯)이다. [출처] 26. 산천대축|작성자 김기덕   27. ䷚ 산뢰이(山雷頤)   산뢰이는 山(☶:艮)이 위에 있고 雷(☳:震)가 아래에 있는 모양으로 산 아래 초목이 길러지며, 인체로는 턱의 형상으로 위턱은 그쳐있고 아래턱은 움직임으로써 물건을 씹어 몸을 기르는 상이 山雷頤이다. 頤의 의미를 풀이하면 臣(신하신)은 六二부터 六五까지의 음효를 의미하며, 頁(머리혈)은 上九 양효가 머리가 되어 뭇 효를 기른다는 뜻이다. 上九 양효가 위턱이 되고 初九 양효가 아래턱이 되며, 중간의 음효들이 이빨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頤는 음식을 씹어서 몸을 기를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수양하여 자신을 기르고 남을 기르는 修己治人의 의미를 가진다. 효로 풀이하면 아래턱과 위턱을 의미하는 처음 문장과 마지막 문장만 양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빨을 상징하는 두 번째에서 다섯 번째까지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형식이다. 이는 언어를 삼가고 음식을 절도 있게 먹듯 艮으로 그치고 아래의 震으로 동하며, 가운데는 비어있는 입의 모양이다. 마음을 비우고 언어를 절제함으로 시를 써야 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산뢰이는 대나무와 같은 모양을 이루고 있다. 강하고 단단함이 표면을 감싸고 있지만 내부는 텅 비어서 가볍고 휘어질 수 있는 덕이 있다. 강직함과 절개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욕심을 비우고 푸른 정신으로 꼿꼿한 선비정신과 같은 기질의 시쓰기이다. 또한 속이 빈 피리의 소리와 같이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은 인내와 의지가 담긴 양의 문장이지만 두 번째에서 다섯 번째까지의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서 피리는 강하지만 그 소리는 구슬프고 가냘프듯 시의 형식도 그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 산뢰이는 ☲의 상으로 땅과 하늘은 양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사람만 음으로 가득 차 있다. 이는 형이상적인 정신세계와 형이하적인 물질세계가 양적요소로 생기가 가득하지만 시인 자신만 음의 감정에 충일해 있음을 의미한다. 이 음의 감정은 슬픔과 절망에 찬 것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 자신을 죽임으로써 나타날 수 있는 空의 세계와 같은 것이다. 비어 있음으로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있듯, 물질과 정신 속에서의 새로운 깨달음을 통해 내면 비우기와 같은 시이다. 팔괘로 보면 산뢰이는 턱의 모양을 가지고 있다. 맨 아래와 맨 위의 양효는 잇몸과 같고 그 안에 있는 네 개의 음효는 이빨처럼 보인다. ☶(산)은 위턱, ☳(우레)는 아래턱과 같은데, 산은 그친다는 뜻으로 움직이지 않는 위턱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우레는 움직인다는 뜻으로 씹을 때 움직이는 아래턱과 같은 이치를 담고 있다. 이렇게 씹음으로써 생명이 유지되고 성장이 가능할 수 있다. 기른다는 의미의 산뢰이는 물고기를 기르는 바다와 같고, 나무를 기르는 숲과 같으며 새를 기르는 하늘과 같은 것이다. 기르기 위해서는 자신을 비우고 남에게 양분을 공급해야 한다. 이렇게 기르는 마음으로 마음을 비워 쓰는 시가 山雷頤의 방법이다. 산뢰이의 호괘는 ䷁ 중지곤(重地坤)이며, 배합괘는 처음의 의도가 새롭게 변함으로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는 ䷛ 택풍대과(澤風大過), 착종괘는 음적 요소들이 주변을 이루고 있지만 정작 시인은 양에 가득찬 시쓰기의 ䷽ 뇌산소과(雷山小過)이다. [출처] 27. 산뢰이|작성자 김기덕   28. ䷛ 택풍대과(澤風大過)   택풍대과는 澤(☱:兌)이 위에 있고 風(☴:巽)이 아래에 있는 상으로 兌(西方金)에 의해 아래의 巽(東方木)이 金克木을 당하여 멸실되며, 本과 末이 虛하여 전도되는 모양을 이루고 있다. 大過의 大는 큰 하늘을 의미하며, 過는 지나감을 뜻하니 天道가 변하는 중천과도기를 의미한다. 대과는 두 가지의 뜻을 가지는데, 하나는 큰 허물이 있음을, 다른 하나는 지나간다는 뜻이다. 대과에는 하늘의 도가 크게 변함을 의미하는 뜻이 담겨 있어서 선천에서 후천으로 넘어가는 때로 정신문명에서 물질문명으로 본말이 전도되는 오늘날과 같은 시기를 말하기도 한다. 대과는 강한 양이 중간에 끼어 있어서 견실함이 있으나 아래와 위가 허한 음으로 이루어져 본말이 전도되는 상으로, 過는 나아가는 과정(辵:쉬엄쉬엄 쉬어갈 착)이 지나쳐 입이 삐뚤어짐(咼:입이 삐뚤어질 괘)을 의미하여 변하는 속도가 빠름을 말한다. 시에서는 처음의 의도가 끝에서 새롭게 변화됨으로써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는 방법으로 조금은 엉뚱하고 의외성이 있는 작품을 말한다. 효로 살펴보면 처음과 끝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졌는데, 두 번째에서 다섯 번째까지는 양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음의 문장에 비해 양의 문장이 많음으로 인해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태이다. 진리의 비진리, 참에 대한 거짓, 논리에 대한 비논리, 의미에 대한 무의미의 추구와 같은 형식으로 의외성이 있거나 비틀기가 있는 작품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는 소양(⚎)으로 흙, 땅, 지구 등의 형이하적인 요소 중 음의 요소를 취하되 地의 형이상적인 지옥, 어둠의 세계와 같은 것들은 양적인 요소를 취함으로 개인적인 해석에 치중되어 있다. 또한 人은 노양(⚌)으로 동물적, 육체적인 형이하뿐만 아니라 정신이나 영혼의 형이상적인 면까지 양적인 문장, 해석으로 접근되어 있다. 거기에 天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天의 세계를 제외한 우주적인 형이하의 세계를 양의 세계로 표현하고 다가감으로 지나친 개인적 해석과 주관적 감정에 의해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는 의미를 갖고 있다. 大過卦는 양이 지나쳐서 균형이 맞지 않는 상태이니 시인의 감정과 상상력을 극대화하여 주관적으로 치우친 시쓰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용적 무리가 따를 수 있으며 균형적 배치에 부합하지 못하는 불균형의 형식을 가질 수 있다. 팔괘로 접근하면 바람(☴:巽) 위에 놓인 연못(☱:兌)과 같은 모양으로 물 위에 거센 바람이 불어 어지러운 풍파를 일으켜 놓은 듯한 혼란과 불안의 상태이다. 또한 형상이 네 개인 양효와 위아래로 갈라져 있는 두 개의 음효로 되어 있어서 음양의 조화를 잃고 있다. 예를 들면 남녀관계에서 첫효는 사효와 상응하는 관계이므로 늙은 여자가 어린 여자를 사랑하는 격이요, 육효는 삼효와 상응하는 관계이므로 늙은 여자가 젊은 남자를 사랑하는 격이니 음양의 조화가 맞지 않듯 시에서도 균형과 조화보다는 불균형과 부조화, 그리고 지나친 자기감정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택풍대과의 변괘 중 호괘는 ䷀ 중천건(重天乾)이며, 배합괘는 ䷚ 산뢰이(山雷頤), 착종괘는 주변 사물로 인해 힘을 얻는 ䷼ 풍택중부(風澤中孚)이다. [출처] 28. 택풍대과|작성자 김기덕   29. ䷜ 중수감(重水坎)   중수감은 위와 아래에 모두 물(☵:坎)이 중첩한 상으로 거듭 험난한 데 빠져 있는 모양이다. 坎은 흙이 파여 구덩이를 이룬 모양으로 어렵다는 뜻과 물이 흐름으로써 흙이 쓸려 파이게 되는, 흐르는 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감은 안팎으로 어려운 상태이나 위와 아래의 중에 양이 거하여 중심을 잡아줌으로 양의 강건함이 물 흐르듯 하여 주제의 통일을 이루어 주는 형상이다. 효로 풀이하면 첫 문장과 셋째 문장은 음의 문장이지만 두 번째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중심을 잡아 주고 있다. 또한 넷째, 여섯째 문장도 다섯째 문장이 중간에서 양의 문장으로 기둥 역할을 함으로써 주제에서 어긋나지 않도록 붙잡아 주고 있다. 즉 음의 문장으로 사고의 확장과 변형을 꾀하더라도 중심 문장인 양의 문장에서 시인의 생각과 의식을 잡아 주고, 사고를 한 점으로 모아 줌으로써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고 집중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人은 노음(⚏)으로 자신의 지나친 감정에 빠져 있는 상태이지만, 天(⚍:소음)과 地(⚎:소양)가 중심을 잡아 줌으로써 균형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해 주고 있다. 人(⚏:노음)의 음적 상상력이 天과 地의 양에 의해 제한되어서 주제의식이나 시적 의도에 갇힘으로써 정서적 안정, 내용적 균형을 이루어 주고 있다. 팔괘로 풀이하면 위에도 물(☵:坎)이요, 아래도 물이므로 두 가지 물이 하나로 잘 섞이는 상태이다. 그래서 첫째 단락과 두 번째 단락이 의미상 크게 달라지지 않고 하나로 모아져야 한다. ☵의 모양을 살펴보면 단락 속에 하나의 핵이 들어 있는 모양이다. 이 핵은 주제적 묘사일 수도 있고, 으뜸 되는 철학일 수도 있고, 가장 강렬한 표현일 수도 있다. 이러한 핵을 가진 단락의 중첩을 통해 의미를 강조하고 이미지를 집약할 수 있다. 중수감의 변괘 중 호괘는 ䷚ 산뢰이(山雷頤)이며, 배합괘는 음이 중심을 잡아주는 ䷝ 중화리(重火離), 도전괘와 착종괘는 부도전괘인 ䷜ 중수감(重水坎)이다.     30. ䷝ 중화리(重火離)   중화리는 상과 하에 불(☲:離)이 거듭된 모양으로 해와 달이 하늘에 걸려 있는 형상이다. 離는 짐승의 발자국이 흩어져 있는 모양으로 새(隹)와 산짐승(离) 등이 그물에 걸림을 뜻하며, 해와 달이 하늘에 걸려 돌아감과 같이 ‘떠나다’, ‘환하다’, ‘흩어지다’ 등의 의미로 쓰인다. 안팎으로 밝고 환한 세상을 이뤄 만물을 기르는 모양이다. 시간적으로는 밝은 한낮의 때이며 중천을 의미한다. 괘의 모양을 보면 중수감과 반대의 상황이며, 음과 양의 역전을 이루고 있다. 이를 중수감의 해석과 연관하여 생각해 본다면 중수감은 왕성한 음의 감정을 모아 양의 문장이 기준을 잡고 문장 및 내용의 통일을 이루었다. 반면 重火離는 강한 양의 감정을 음의 문장이 중심을 잡고 음의 감정으로 문장 및 내용의 통일을 이루는 방법이다. 양의 감정은 자칫 들뜨기 쉽고 긍정적이며 순응적이어서 평범할 수 있으나 음의 비판적이고 자기성찰적인 요소가 주제의식이나 철학성을 세워 비범하게 해 주는 시쓰기이다. 효의 시각에서 보면 양의 문장들 가운데 음의 문장을 놓아 차분한 감정의 전개가 이루어지도록 했다. 확장하고 퍼져가고자 하는 양의 성질을 응집시켜 집중시키는 역할을 음이 해 줌으로써 주제의식이나 철학성에 따른 통일성 있는 시쓰기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사상의 시각으로 보아도 人(⚌)의 노양이 天과 地의 음에 막혀 절제되고 함축되는 의미를 갖는다. 팔괘로 보면 離는 불탄다는 뜻으로 해와 달은 하늘에 걸려 있고 온갖 곡식과 초목은 땅에 정착하여 자라고 있다. 그럼으로 천지는 생명과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광명의 세계가 된다. 날마다 새로운 빛, 한결 같은 정열, 젊음과 생명이 약동하는 밝은 세계를 그리되 그 안에서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어둠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불이 타는 불 속에는 재가 생기고 구멍이 생기듯이 눈부시게 빛나기만 하면 가까이 할 수 없다. 밝고 아름답기만 한 사물 속에서 어찌 깊은 철학을 느낄 수 있겠는가? 진정한 생명의 글은 밝은 빛 속의 그늘이나, 어둠 속의 한 줄기 빛과 같은 것이다. 중수감이나 중화리의 글쓰기는 주제의 통일이나 핵이 되는 묘사를 통해 시적 감정을 통일시키는 기법이다. 중화리의 변괘 중 호괘는 ䷛ 택풍대과(澤風大過)이며, 배합괘는 ䷜ 중수감(重水坎), 착종괘, 도전괘는 부도전괘인 ䷝ 중화리(重火離)이다. [출처] 30. 중화리|작성자 김기덕   31. ䷞ 택산함(澤山咸)   택산함은 산(☶:艮) 위에 못(☱:兌)이 있는 모양으로 산의 양기는 아래로 향하고 못의 음 기운은 증발하여 위로 올라가 서로 통하는 형상이다. 산과 연못의 기운이 상통하고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상이니, 咸은 서로 느껴 함께하는 뜻이다. 咸은 서로의 마음을 다하여 하나로 합하는 ‘다 함’의 뜻을 갖고 있다. 感이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라면 咸은 보다 포괄적인 뜻으로 모든 음양의 기운이 서로 느끼는 것을 말한다. 자연적으로는 하늘의 양기는 산을 거쳐 땅으로 내리고 땅의 음기는 못을 통하여 하늘로 올라가 교통함을 의미한다. 인간적으로는 소남과 소녀가 느끼는 것으로 교합을 의미하며, 수도로는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도통하는 것이 咸이다. 효로 살펴보면 첫 문장, 둘째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셋째에서 다섯째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이루어졌다가 다시 마지막에 음의 문장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는 음과 양이 교합하여 감정을 주고받듯 서로 상통하는 감상적인 시쓰기이다. 사상으로 보면 地는 노음(⚏), 人은 노양(⚌)으로 이루어지고 天은 소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地는 음적이어서 받아들이고, 人은 양적이어서 발산하고, 天은 강함을 순하고 부드러움으로 조화시켜 서로의 감정을 하나로 만들고 있다. 팔괘로 풀이해 보면 하늘의 성기인 산이 아래에 있고 땅의 성기인 못이 위에 있는 상으로 서로 기운이 통하는 상태이다. 시쓰기에서도 사람과 세상 모든 만물이 통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내용적으로는 감상적이며, 서정적인 것을 의미하며, 기법적으로는 활유적인 기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독자와의 소통뿐만 아니라 자연과 인간과 세계가 통할 수 있는 시쓰기로 지적인 배치가 아니라 정서적인 배치를 이루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감동을 줄 수 있는 시쓰기가 되어야 한다. 咸은 感과 같다. 즉 느낀다는 의미로 음과 양의 두 에너지가 감응하고 협력하여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택산함의 변괘 중 호괘는 음의 대상에 대한 양적표현을 이룬 ䷫ 천풍구(天風姤)이며, 도전괘는 항구한 이치를 발견하고 쓰는 시인 ䷟ 뇌풍항(雷風恒), 배합괘, 착종괘는 헌시나 찬양시인 ䷨ 산택손(山澤巽)이다. [출처] 31. 택산함|작성자 김기덕    뇌풍항(雷風恒)   뇌풍항은 雷(☳:震)가 위에 있고 유순한 風(☴:巽)이 아래에 있어서 함께 순응하여 움직인다. 천지의 법칙은 항구하여 그치는 일이 없다. 하나가 마치면 하나가 시작된다. 해와 달은 하늘의 항구불변의 원칙을 얻었고, 춘하추동의 사계절은 항상 변화하며 있기 때문에 영원한 순환을 계속할 수 있다. 성현도 그 도를 지켜 항구해야 비로소 천지교화가 가능할 것이다. 항구한 것을 깊이 관찰함으로 천지만물의 실상을 볼 수 있듯, 천지만물의 이치를 발견하고 그 진리에 맞는 시쓰기가 바로 뇌풍항이다. 恒은 천지간(二)의 日, 月(日)이 서로 짝하되 끝없이 왕래 순환함으로써 영구히 주야를 밝히듯, 서로의 마음을 합하여 부부로서 항구한 도를 갖춤을 의미한다. 안으로 음목이 뿌리박고 밖으로 양목이 뿌리를 뻗어 장구히 생장하는 모양이며, 인사적으로는 장남이 위엄을 보이고 장녀가 공손히 집안일을 주장하는 상으로 부부의 도를 이루고 있다. 효로 살펴보면 처음에 음의 문장이 오고 양의 문장이 두 번째에서 네 번째 문장까지 온 후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음의 문장이 와서 음과 양의 조화와 균형을 통한 항구적 성장을 표현하고 있다. 사상으로 보면 地(⚎)는 뿌리를 박고, 人(⚌)은 성장하고, 天(⚏)은 씨앗을 맺음으로 항구적인 법칙을 말하고 있다. 항구한 법칙의 원리를 통해 변함없는 진리의 표현을 의미한다. 팔괘로 살펴보면 우레와 바람은 만물을 흔들고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잠시도 머무르는 일이 없다. 모든 것은 움직임으로, 곧 살아 있음으로 그 상태를 지속할 수 있고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정지되고 고정된 것이 계속되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살아 있는 시, 마음을 움직이는 시가 영원할 수 있다. 그것은 사고의 정지와 고정이 아닌 변화와 새로움이며 형식의 낯설게 하기이다. 뇌풍항의 호괘는 ䷪ 택천쾌(澤天夬)이며, 도전괘는 ䷞ 택산함(澤山咸), 배합괘, 착종괘는 위에 것을 덜어서 아래에 보태주는 ䷩ 풍뇌익(風雷益)이다. [출처] 32. 뇌풍항|작성자 김기덕   33. ䷠ 천산돈(天山遯)   천산돈은 위에 天(☰:乾)이 있고 아래에 山(☶:艮)이 있는 모양으로 세상을 피해 은둔하며 하늘이 부여한 명을 지키는 상이다. 遯은 돼지(豚: 돼지 돈)와 같이 어리석은 체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도를 닦는(辵-쉬엄쉬엄 쉬어갈 착: 점차 움직여 나아감) 의미가 있다. 괘상에서도 아래의 두 음(소인)이 자라 점차 네 개의 양(군자)을 핍박하는 형상이다. 遯은 안으로 산과 같이 굳건한 절개와 자제를 행하고 밖으로는 하늘과 같이 강건한 도로써 소인을 교화하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시에서 보자면 천산돈은 소인배적인 생각, 즉 형이하적인 감정을 억제하고 형이상적인 생각으로 뻗어감을 의미하는 형이상시라고 볼 수 있다. 형이상시는 신이나 절대자의 존재인식과 철학적인 것과 관련이 있는 시로 철학적, 종교적 경향을 지니게 된다. 형이상시의 중요한 특징은 기상(奇想-conceit)을 중심으로 한 구조인데, 기상은 두 가지 사물이나 개념을 교묘하고 대담하게 연결하여 뜻밖의 유사성을 발견하려는 시 수사법이라고 할 수 있다. 효로 풀이해 보면 첫 문장이나 둘째 문장은 형이하적인 사물을 끌어오지만 셋째에서부터 여섯 번째까지는 끌어온 사물과 연결되는 추상적 이미지를 배치시키는 방법이다. 밑에 두 개의 음효는 형이하적인 것이며 사물적인 요소이지만 이 요소들이 억눌리면서 형이상적이고 추상적인 이미지들로 대체되는 모양을 이루고 있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는 노음(⚏)으로 현실적인 생각, 범속한 것이나 비천한 것을 의미하는데 人과 天은 노양(⚌)으로 성에 속한 것이나 정신적인 것, 고귀하고 고차원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 이는 곧 사물의 평범성을 땅에서 취하여 시인의 고결한 정신을 통해 새로운 정신세계를 창출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물질적이고 비천한 것은 억제되고 정신적이고 고결한 것은 상승하는 시쓰기이다. 팔괘로 보면 산인 첫째 단락과 하늘인 둘째 단락의 배치를 통해 유사성을 발견하려는 방법이다. 천산돈은 선비적 은둔사상의 발로가 되었다. 은둔 속에 세상을 피해 자신만의 도를 닦기 위한 뜻이 담겨 있다. 이는 곧 물질이나 사물 그 자체에서 벗어나 새로운 철학, 새로운 추상적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는 의도의 시쓰기 방법이다. 천산돈의 변괘 중 호괘는 음의 대상에 대한 양의 표현을 이룬 ䷫ 천풍구(天風姤)이며, 도전괘는 강한 남성적 출발에 여성적 마침을 가짐으로 음양의 균형을 꾀하는 ䷡ 뇌천대장(雷天大壯), 배합괘는 생수처럼 솟는 원천의 시인 ䷒ 지택림(地澤臨), 착종괘는 웅장한 스케일의 ䷙ 산천대축(山天大畜)이다. [출처] 33. 천산돈|작성자 김기덕   34. ䷡ 뇌천대장(雷天大壯)   뇌천대장은 아래에 天(☰:乾)이 있고 위에 雷(☳:震)가 울리는 모양으로, 안으로는 강건하고 밖으로는 크게 움직여 씩씩한 상을 나타내고 있다. 大壯의 大는 하나(一)가 둘(人)로 늘어나 커지는 것이며, 壯은 문무를 겸비한 장부(士)가 방패(爿: 널빤지, 방패)를 들고 전진함을 뜻한다. 하늘 위에 뇌성이 울리는 괘상으로 양기가 크게 성장하는 모습이다. 시기적으로는 2월(음)로서 양기가 성장하여 초목이 움터 나오려는 때이고 방위로는 동방인 묘에 해당하니 출문하는 의미가 있다. 시에서는 너무 강렬한 의식의 일방적 진행은 시적 정서를 떨어뜨리고 양적 요소에 치우침으로 구호적 성격이 되기 쉽다. 이러한 측면을 보완하기 위해 끝에서 여성적인 정서를 끌어와 남성적 이미지의 상쇄를 꾀하는 방법이다. 효로 풀이하면 첫째 문장에서 네 번째 문장까지는 양의 문장으로 배치하고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엔 음효를 배치함으로써 상승된 격정적 감정을 눌러주고 차분한 이미지로 마무리하고 있다. 또한 긍정적이고 밝은 이미지에서 마무리를 어둡고 부정적인 색깔로 처리함으로써 밝은 모습으로만 뻗어가려는 흐름을 끊고 있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와 人은 노양(⚌)으로 물질이나 심리상태가 모두 양이다. 이런 양적 요소에 노음(⚏)인 天을 배치하여 독자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감정으로 끝을 맺었다. 이는 상반된 감정을 끌어와 불타듯 왕성한 의지적 이미지를 억누름으로 보다 더 양의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는 모양을 이루고 있다. 팔괘로 접근하면 하늘 위에서 우레가 울고 있다. 크게 뻗어가는 상이며 번창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렇게 뻗다보면 교만해지고 또 가벼워질 수 있는 상태에서 음적 요소로 끝맺음으로 무게와 깊이를 더해 주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뇌천대장의 변괘 중 호괘는 양의 일관된 진행에 대한 마지막 뒤집기의 ䷪ 택천쾌(澤天夬)이며, 배합괘는 군자의 교화와 같은 ䷓ 풍지관(風地觀), 착종괘는 하늘에 순응하는 시쓰기의 ䷘천뢰무망(天雷无妄)이다. [출처] 34. 뇌천대장|작성자 김기덕   35. ䷢ 화지진(火地晉)   화지진은 땅(☷:坤) 위로 불(☲:離)이 나온 모양으로 태양이 지평선 위로 떠올라 나아가는 일출과 같다. 晉은 밝은 기운(日)이 地間(二)에 나타나 환히 밝힘을 가리키니 ‘나아가다’, ‘눈동자’의 뜻이 있다. 晉은 안으로 유순하고 밖으로는 밝은 덕이 있으므로 해가 땅 위에 떠올라 세상을 두루 비추는 일출의 모양이니, 본래의 성품을 밝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효로 풀이하면 地의 첫째, 둘째, 셋째 문장은 모두 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地의 세 음은 어두운 땅과 같은 현실을 의미한다. 이 어두운 땅, 이슬 젖은 눈물의 땅을 태양이 떠올라 밝게 비추듯이 地의 세 문장은 음의 문장을 이룬다. 이 음의 문장이 있은 다음 네 번째로 양의 문장이 와서 어둠을 가시게 하고 젖은 눈물을 말려 주게 된다. 다섯째 문장에서는 아직 덜 마른 땅처럼 음이 남아 있고, 여섯 번째 양의 문장으로 마무리를 밝고 희망적으로 배치함으로 힘을 내 정진하는 형식의 시쓰기이다. 사상으로 보면 地는 노음(⚏)으로 어둠과 눈물의 땅이지만 人에서 소양(⚎)은 내적 어둠을 묻고 밝은 빛으로 나타남으로 희망적으로 전진하게 되며, 天도 마찬가지로 소양(⚎)으로 차츰 어둠을 걷고 밝아지는 느낌의 방식이다. 팔괘로 살펴보면 晉은 進과 같다. 밝은 태양이 지평선 위에 나타나 순차적으로 하늘에 올라 大明의 세상을 이뤄가는 기상이다. 하늘로 오르는 태양은 아침의 태양이다. 어둠을 밝히는 세상만물을 따뜻하게 감싸는 꿈과 희망의 시가 바로 火地晉이다. 화지진의 변괘 중 호괘는 꿈과 희망을 밝히는 화지진의 내면은 슬픔과 고통의 극복임을 의미하는 ䷦ 수산건(水山蹇)이며, 배합괘는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염원의 ䷄ 수천수(水天需)이고, 도전괘 및 착종괘는 절명시나 비탄시의 ䷣ 지화명이(地火明夷)이다. [출처] 35. 화지진|작성자 김기덕   36. ䷣ 지화명이(地火明夷)   지화명이는 위에 땅(☷:坤)이 있고 아래에 불(☲:離)이 있는 상으로 해가 져서 땅 속으로 들어간 모양으로 밝음이 어두움에 묻힌 상태이다. 明夷의 明은 日과 月의 會意字로서 해와 달이 주야로 밝힘을 의미하며, 夷는 大+弓 으로 큰 활로 인해 상처를 입음을 의미한다. 明夷는 안으로는 밝으면서도 밖으로는 유순함으로 행하는 상이다. 시에서는 밝은 감정을 숨기고 우수와 고뇌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효로 살펴보면 첫째와 셋째 문장만 양의 문장으로 배치하고 나머지 문장은 모두 음으로 배치하여 해와 달이 사라진 암흑과 같은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절명시나 비탄적 감정의 시로 꿈과 희망이 없는 세계를 표현하는 기법이다. 사상으로 보면 地와 人은 소음(⚍)으로 안으로는 밝은 모습을 가지고 있으나 밖으로 밝게 표현하지 않고 어둡고 음침하게 표현함으로 음적인 감정표현이 된다. 또한 天은 노음(⚏)으로 음적인 감정이 발전 심화됨으로 어둠은 더욱 어둡게, 슬픔은 더욱 슬프게 표현되어 절망적인 비탄의 감정이 지배하게 된다. 팔괘로 풀이하면 첫째 단락은 해나 달 같은 밝음이 오지만 두 번째 단락에서 지하에 갇히게 됨으로 기쁨이나 행복은 사라지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감정만 남아서 어둠을 표현하고 있다. 밝은 감정도 어둡게 몰아가는 방법으로 감정의 극적인 효과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또한 고난을 참고 견디는 모양으로 인내하고 견디는 고난극복의 상이다. 明夷는 태양이 땅 속에 들어간 상태, 고난에 처한 상태이며, 밝은 것이 패하는 현실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므로 밝고 아름다운 세상보다는 어둡고 험한 세상을 표현하고, 그 속성에 맞는 사물의 배치를 이루어 절망적으로 나아가는 시쓰기이다. 지화명이의 변괘 중 호괘를 살펴보면 ䷧ 뇌수해(雷水解)이며, 배합괘는 ䷅ 천수송(天水訟), 도전괘, 착종괘는 ䷢ 화지진(火地晉)이다. 변괘에 대해 너무 어렵게 생각할 수 있으나 변괘는 본괘에 대한 다른 방향의 시각이라고 생각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본괘라는 하나의 사물이 있다면 옆에서 보고, 위에서 보고, 밑에서 보고, 속에 들어가서 봄으로 그 사물에 대한 다양한 표현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에 시의 다양성을 표현할 수 있다. [출처] 36. 지화명이|작성자 김기덕   37. ䷤ 풍화가인(風火家人)   풍화가인은 안으로 불(☲:離)이 있고 밖으로 바람(☴:巽)이 불어 바람을 타고 불이 성하는 모양이며, 밖에서 들어와 안을 밝히는 의미가 있다. 아래의 離(☲)는 밝은 생명력을 뜻하는 人이요, 위의 巽(☴)은 안을 가지런히 정돈함을 의미하니 齊家의 家에 해당한다. 또한 장녀(巽)가 위에서 가사를 이끌고 중녀(離)는 아래에서 밝게 응하니 가인이다. 가인은 집안을 바르게 하는 괘이다. 집안을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제 몸을 먼저 닦아야 하듯 한 편의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마음의 수양과 깨달음이 필요하다. 가인의 시는 자신을 돌아보는 시이며, 내면의 깨달음과 자성의 시이다. 효로 살펴보면 긍정과 부정, 희망과 절망의 반복 속에서 내일의 희망을 발견하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첫 문장의 배치는 양의 문장, 둘째는 음의 문장, 셋째는 양의 문장, 넷째는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지다가 다섯째, 여섯째에서 양의 문장으로 마무리하는 방법이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와 人(⚍)은 양과 음이 섞여서 갈등과 고민, 번뇌의 모양을 이루다가 天(⚌)에서 긍정과 화합과 깨달음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다. 이는 속과 성이 섞인 세상의 삶에서 성을 깨닫고 성적인 삶을 추구하는, 종교는 아니지만 종교적인 성향의 자기성찰적인 시쓰기이다. 팔괘로 보면 家人은 집안사람이란 뜻으로 가족을 의미한다. 바람과 불을 가정의 심볼로 표현했는데, 불이 타면 바람이 생기고 바람은 다시 그 불을 부채질하여 확대 발전된다. 이는 가정이 잘 다스려지면 바른 길이 시작되고 국가와 사회로 뻗어가 큰 발전을 이룸과 같다. 시에서는 가정의 바른 도는 수신에서 시작되듯이 자신을 돌아보고 깨달음으로써 시의 큰 발전은 시작되는 것이다. 바로 풍화가인의 시쓰기는 내면으로 돌아가 근본을 살펴봄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풍화가인의 변효 중 호괘는 비정석적, 비상식적인 부조화의 배치인 ䷿ 화수미제(火水未濟)이며, 도전괘는 어긋남에 의해 강조되는 시인 ䷥ 화택규(火澤睽), 배합괘는 강한 감정표출의 ䷧ 뇌수해(雷水解), 착종괘는 불을 때듯 하는 간절한 시의 ䷱ 화풍정(火風鼎)이다. [출처] 37. 풍화가인|작성자 김기덕   38. ䷥ 화택규(火澤睽)   화택규는 연못(☱:兌)이 아래에 있고 불(☲:離)이 위에 있는 모양으로 밖의 불은 위로 타오르고 안의 연못물은 아래로 고여서 서로 어긋나게 나아가는 상이다. 괘상으로 볼 때 離는 日行을 뜻하고 兌는 月行을 가리키는데, 일행도수에 비해 월행도수가 어긋나는 것이 규이다. 나무를 구부리고 깎아 활과 화살을 만들어 세상에 보임은 睽卦에서 取하였다고 한다. 활을 쏠 때 활줄은 뒤로 당기고 활대는 앞으로 밀면서 생기는 힘이 화살을 격발하게 하니 비록 처음은 어긋나나 그 어긋남에 의해 힘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시에서 어긋남에 의해 시가 강조되고 강렬해져 깊은 감동을 주는 경우를 의미한다. 대칭적, 또는 대조적인 표현 기법을 통해 감동을 더해 주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효로 풀이하면 도입부인 첫 번째와 두 번째의 문장만 양의 문장이 오고 셋째는 음의 문장, 넷째는 양의 문장, 다섯째는 음의 문장, 여섯째는 양의 문장이 와서 양의 문장과 음의 문장이 교차하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이는 서로 어긋나는 반대 방향의 시각, 표현을 통해 도입부에 제시한 표현을 강조하고 의미를 확장시키는 시쓰기이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는 노양(⚌)으로 확실한 주제적인 표현을 내걸고 그 표현에 대한 다양한 시각의 표현을 人(⚎)이나 天(⚎)에서 대조적, 대칭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의미의 확장을 꾀하고 표현의 다양성을 추구하면서 처음의 주제적 표현을 강조해 주는 시쓰기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불(☲)과 연못(☱)은 불과 물의 관계처럼 서로 상극이라고 할 수 있다. 연못은 아래로 흐르는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불은 위로 솟아오르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서로의 향하는 방향이 반대 방향이다. 이는 강한 반발심을 의미하며 반항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다. 睽라는 한자의 뜻이 ‘사팔눈’, ‘노려보다’, ‘등지다’의 의미이듯 삐딱한 시각, 거꾸로 보기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물론 창작자의 의도가 ‘삐딱하게 보기’이며, ‘거꾸로 보기’라고도 할 수 있다. 많은 시인들이 ‘삐딱하게 보기’나 ‘거꾸로 보기’를 외치고 있지만 정작 그 구체적인 방법을 아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음과 양의 시각으로 사물을 보고 끌어오거나, 오행의 상극의 관계를 알고 사물을 끌어온다면 ‘삐딱하게 보기’나 ‘거꾸로 보기’, 또는 ‘반대적인 접근’, ‘대칭적인 관계’ 설정이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시의 정서나 의미를 강조하여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화택규의 변괘 중 호괘는 윤리적이며 정석적인 ䷾ 수화기제(水火旣濟)이며, 도전괘는 내면의 깨달음과 자성의 시인 ䷤ 풍화가인(風火家人), 배합괘는 슬픔과 우울에 침잠된 정서의 ䷦ 수산건(水山蹇), 착종괘는 대결구도적 배치의 ䷰ 택화혁(澤火革)이다. [출처] 38. 화택규|작성자 김기덕   39. ䷦ 수산건(水山蹇)   水山蹇은 水(☵:坎)가 위에 있고 山(☶:艮)이 아래에 처한 모양인데, 험한 것을 보고 안에서 그쳐 나아가지 않는 것이다. 만일 이를 어기고 전진한다면 큰 난관에 빠지므로 경계하여 蹇이라 하였다. 蹇의 의미를 살펴보면 외괘인 坎은 北方水로서 추운 겨울철에 해당하여 寒이고, 내괘인 간은 그치는 것이므로 발(足)이 얼어붙어 나아가기 힘든 상태를 말한다. 시에서 蹇의 상황은 큰 난관에 부딪혀 절망에 빠져있는 감정을 의미하며 슬픔과 우울함에 침잠된 감정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효로 살펴보면 첫째와 둘째 문장엔 음의 문장이 오고, 셋째는 양의 문장, 넷째는 음의 문장, 그리고 다섯째는 양의 문장이 온 후 여섯째는 음의 문장이 오는 형식이다. ‘첫째 문장’이나 ‘둘째 문장’과 같이 표현하고 있는 문장의 개념은 표면상의 한 문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상, 내용상의 문장을 의미하기 때문에 ‘첫 번째’라고 표현했더라도 두 개, 또는 세 개의 문장으로 구성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야 한다. 蹇의 여섯 효는 山戰水戰의 험난한 역경을 겪은 괘상이며, 산 위에서 비를 만나는 상황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삼효와 오효가 양효로 이루어져 있는데, 삼효는 산의 꼭대기, 곧 높은 이상과 같은 것이고, 오효는 자아를 상징하므로 높은 이상의 자아를 가지고 있으나 현실은 절망적이기 때문에 그 절망감은 더욱 큰 느낌을 가지게 된다. 사상으로 풀이하면 地는 노음(⚏)으로 한겨울과 같으며, 人과 天은 소음(⚍)으로 새싹을 기다리는 봄과 같다. 이는 한겨울의 땅 속에 뿌리를 박고 봄을 열망하지만 현실은 아직 얼어붙은 동토의 극심한 어려움을 표현하고 있다. 시에서도 새벽이 오기 전에 가장 어둠이 짙듯이 봄을 기다리는 한겨울의 삭막한 감정이 더욱 절박한 것과 같은 절망적 표현을 의미한다. 팔괘로 보면 산과 물이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험난한 형국으로 첫째 단락은 山(☶:艮)으로 막힘이 있는 정서의 답답함을, 둘째 단락은 水(☵:坎)로 구덩이에 빠져 오도 가도 못하는 것과 같은 심정을 표현하는 절망적 표현기법이다. 수산건의 변괘 중 호괘는 ䷿ 화수미제(火水未濟)이며, 도전괘는 ䷧ 뇌수해(雷水解), 배합괘는 ䷥ 화택규(火澤睽), 착종괘는 ䷃ 산수몽(山水蒙)이다. [출처] 39. 수산건|작성자 김기덕   40. ䷧ 뇌수해(雷水解)   뇌수해는 위로 움직임이 있는 우레(☳:震)가 動하고, 아래에는 험한 물(☵:坎)이 있어 움직임으로써 험난함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외괘인 震은 밖으로 움직여 나오는 것이니 童牛의 뿔(角) 형상이다. 내호괘인 離는 伐兵의 상으로 刀가 나오며, 中虛하여 심성이 유순한 牛로 나타나기도 한다. 解는 험한 내적 과정을 지난 후 밖으로 순순히 풀려나오는 것을 상징하는 괘인데, 시에서는 가슴에 맺혔던 감정을 밖으로 술술 풀어내는 감정표출의 시를 의미한다. 일부는 측상의 시, 배설의 시라고도 하지만, 여기에는 감정의 절제와 언어의 조탁이 기본적으로 밑바탕이 되어야 하며, 자신의 감정표현에 대한 적절한 묘사가 필요하다. 효로 풀이해 보면 첫째는 음의 문장, 둘째는 양의 문장, 셋째는 음의 문장, 넷째는 양의 문장으로 구성되며 다섯째와 여섯째는 음의 문장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뇌수해의 모양을 보면 이효와 사효의 양이 열린 입과 같고, 삼효는 입안의 여자 혀와 같은 형상으로 쏟아내는 감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보면 地와 人은 소양(⚎)으로 이루어져 안에 맺힌 것들이 풀려 나오는 형상이지만, 아직 天은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이는 天(마음)에 맺힌 감정들이 人(언어)과 地(행동)로 표출되고 있는 과정을 나타내 주고 있다. 팔괘롤 풀이하면 뇌수해의 우레는 움직이는 것이고 물은 험난한 것이므로 험난함에서 벗어남을 상징한다. 봄 우레에 봄비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우레가 울고 봄비가 내리면 얼었던 세상이 풀리며 온 세상에 초목이 피어나듯이 해는 풀리는 감정을 의미한다. 첫째 단락은 坎으로 고난이나 심적 갈등에 대한 표현을 의미하며, 두 번째 단락에서는 변화에 대한 도약적 감정의 표현을 통한 감정표출의 시이다. 뇌수해의 변괘 중 호괘는 정서적 안정을 이룬 높은 성취도의 ䷾ 수화기제(水火旣濟)이며, 도전괘는 큰 난관의 ䷦ 수산건(水山蹇), 배합괘는 내면의 깨달음과 자성의 시 ䷤ 풍화가인(風火家人), 착종괘는 험한 가운데 새로움이 움트는 ䷂ 수뢰둔(水雷屯)이다. [출처] 40. 뇌수해|작성자 김기덕   41. ䷨ 산택손(山澤損)   산택손은 산(☶:艮) 아래 연못(☱:兌)이 놓인 상황으로 아래에 있는 연못의 기운이 발하여 산에 덜어주는 상이다. 윤택한 못의 기운이 산속의 풀과 나무와 짐승들에게 생기를 공급하고 활력을 주듯 안을 덜어서 밖에 도움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損은 물건의 수효(員:수효원)를 손으로 헤아려 덜어주는 뜻과, 어린 생명(具)이 모태(口) 밖으로 나오는 것을 손(手)으로 받아내는 뜻이 있다. 시에서는 힘과 용기를 주거나 위로를 줄 수 있는 찬양시, 헌시, 칭송시 등과 같은 것을 말한다. 損은 아래 백성의 것을 덜어 위(政府)를 더해 주어 백성의 입장에서는 손해를 보는 것과 같다. 이는 위를 의미하는 부모나 선배, 선생님이나 상사, 떠받드는 애인 등으로 덜어 주는 정신적 감정의 표현이 바로 산택손의 시쓰기이다. 효로 살펴보면 첫째와 둘째 문장엔 양효가 오고 셋째, 넷째, 다섯째 문장엔 음효가 왔다가 마지막 여섯째 문장엔 양의 문장 배치로 끝맺는 형식이다. 첫째, 둘째 문장에서 희망적이고 긍정적이며 의지적인 장점이나 강점을 배치하고, 삼, 사, 오효에서 열악한 현실이나 부정적 현실을 끌어와 대치시킨 후 마지막에서 찬양적이고 긍정적인 메시지를 담아 기쁨과 힘을 줄 수 있는 시쓰기의 방법이다. 사상으로 보면 地는 노양(⚌)인데, 이는 넉넉함이고 풍요함을 의미한다. 한낮의 태양과 같은 뜨거운 열기이며, 한여름과 같은 왕성함이다. 地의 이 왕성함이 노음(⚏)인 人이나 소양(⚎)인 天에게 덜어 줌으로써 삶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팔괘로 풀이하면 損의 형상은 澤(☱:兌)의 삼효가 음효로서 그 모습이 마치 아래에서 삼효를 떼어내어 위의 山(☶:艮)에 있는 사효, 오효의 음에 보태어 주고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이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봉사하는 의미와 같은 것이다. 산택손의 반대인 풍뢰익(䷩)은 위의 것을 덜어서 아래에 보태 주는 의미로 사용된다. 첫째 단락은 기쁨과 풍요함이며, 둘째 단락은 막힘과 부족함이 있어 채워지는 느낌의 시쓰기 방법이다. 산택손의 변괘 중 호괘는 중첩된 음의 기운 속에 양의 기운이 살아나는 ䷗ 지뢰복(地雷復)이며, 도전괘는 꿈과 희망의 시인 ䷩ 풍뢰익(風雷益), 배합괘, 착종괘는 감상적이며 정서적인 교통을 이루는 ䷞ 택산함(澤山咸)이다. [출처] 41. 산택손|작성자 김기덕   42. ䷩ 풍뢰익(風雷益)   풍뢰익은 바람(☴:巽) 아래 우레(☳:震)가 일어나는 모양으로 바람은 아래로 내려오고 우레는 위로 올라가 서로 부딪히며 만물이 크게 동요, 진작하여 유익함이 생기는 상이다. 益은 초목을 고무 진작시켜 가지가 무성히 성장하는 상인데, 震은 양목으로 뿌리부터 줄기를 뻗어나가는 것이요, 巽은 음목으로 가지에 꽃과 열매가 열리는 모양이다. 益은 위의 것을 덜어서 아래에 보태는 것을 상징한다. 또한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위하여 성의와 노력을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태양이 땅 위의 모든 생명들이 원하는 열과 빛을 보내어 생성 발전시키듯이 고난에 처한 사람이나 아랫사람, 아니면 서민이나 죄인, 불우한 현실의 사람들을 위해 희망이나 빛이 될 수 있는 시를 풍뢰익의 시라고 할 수 있다. 효로 살펴보면 첫 문장은 양의 문장이지만 둘째, 셋째, 넷째 문장이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아래쪽이 부족함을 상징하지만, 다섯째, 여섯째 문장에서 양의 문장이 옴으로 넉넉함을 덜어주며 희망적인 결말을 가져오고 있다. 사상으로 풀이하면 地는 소음(⚍)으로 쇠퇴해 가고 있는 상황이며, 人은 노음(⚏)으로 지극히 어렵고 힘든 상황을 맞고 있다. 여기에 天이 노양(⚌)으로 강하고 왕성한 기운을 가지고 있어 아래쪽에 힘을 더해 줌으로 유익함이 있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팔괘로 보면 위의 바람은 동남방을 의미하며 순조로움을 상징한다. 동남방에서 불어온 봄바람은 만물을 싹틔우며 이롭게 하는 것이다. 아래에 있는 우레는 움직임이고 변화여서 쉽게 받아들이고 유익해짐을 상징한다. 첫 단락은 震괘로 아랫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의미하며, 즐겁게 하고 감동받게 할 수 있는 표현이나 메시지라면, 둘째 단락의 風은 그들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부드러운 바람으로 결실을 이루게 하는 손길이며 유익과 행복을 줄 수 있는 표현이 되어야 한다. 풍뢰익의 변괘 중 호괘는 세속에 물들지 않는 시인 ䷖ 산지박(山地剝)이며, 도전괘는 아래를 덜어 위를 보태주는 헌시나 찬양시인 ䷨ 산택손(山澤損), 배합괘와 착종괘는 천지만물의 이치를 발견한 ䷟ 뇌풍항(雷風恒)의 시쓰기이다. [출처] 42. 풍뢰익|작성자 김기덕   43. ䷪ 택천쾌(澤天夬)   택천쾌는 연못(☱:兌)의 기운이 증발하여 하늘(☰:乾) 위에 있는 모양으로 여섯 번째 효인 음이 아래 다섯 양에 의해 처단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夬는 아래로 하늘의 강건한 덕이 있고 위로는 연못의 기쁨이 있어서 마지막 남은 문제를 척결함으로써 완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시적으로 하나의 소재나 주제의식에 대한 양적인 일관된 묘사를 하다가 끝에서 뒤집어 버림으로 강렬한 마무리를 갖는 시쓰기이다. 효로 풀이하면 첫 문장에서 다섯 번째 문장까지는 한 시각의 일방적인 묘사나 철학적 접근이 마지막 문장에서 뒤집어지거나 새로운 결론, 또는 생경한 표현으로 마무리하는 방법이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와 人은 모두 노양(⚌)으로 강한 이미지의 표현, 또한 긍정적 접근이 이루어지지만 天에서 소음(⚍)이 옴으로 지속되던 긍정적 감정을 감추고 부정적이거나 아니면 낯설게 하기, 또는 전체를 아우르는 확실한 강조의 표현으로 마무리함을 의미한다. 팔괘로 보면 澤天夬(䷪)는 모든 양효 위에 한 개의 음효가 위치하고 있어 모든 선을 누르면서 악의 세력이 높은 지위에 군림하고 있는 상태이다. 夬는 ‘결단한다’, ‘결행한다’는 뜻인데, 악의 발효를 배려하기 위해 궐기하고 준비하는 상태와 같다. 이는 하괘인 天(☰)과 상괘인 못(☱)으로 나뉘어 두 개의 단락으로 구분되는 것 같지만, 실은 다섯 개의 양과 한 개의 음으로 나뉘어 형식적, 또는 실질적 두 단락으로 구분되는 형식의 시쓰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첫째 단락은 긍정적 진행의 묘사가 이루어지고 두 번째 단락에서 이를 뒤집는 간략한 문장, 또는 한 문장의 핵심을 찌르는 반어적 결론의 시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택천쾌의 변괘 중 호괘는 힘 있고 밝은 시인 ䷀ 중천건(重天乾)이며, 도전괘는 음적인 대상을 밝고 강한 남성적으로 표현한 ䷫ 천풍구(天風姤), 배합괘는 고고함의 경지인 ䷖ 산지박(山地剝), 착종괘는 욕심을 버리고 하늘의 도리를 따르는 ䷉ 천택리(天澤履)이다. [출처] 43. 택천쾌|작성자 김기덕   44. ䷫ 천풍구(天風姤)   천풍구는 하늘(☰:乾) 아래 바람(☴:巽)이 부는 모양으로, 가장 아래에 처한 一陰이 다섯 양을 쫓고 있는 형태이고, 또한 음이 처음 상태로 음을 거느리는 后가 되는 상을 의미한다. 姤는 안으로는 유순한 가운데 밖으로 강건함이 있으니 위의 강건한 乾父의 명을 좇아 아래에 巽長女가 그 도를 따르는 괘로서 하늘로부터 바람이 불어와 만물에 두루 파고드는 상태이다. 절기로 보면 夏至인 한여름으로 음력 5월경이며, 하루는 가장 환한 정오 무렵이라고 할 수 있다. 시에서는 여성적인 음의 시작으로 어두운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효가 음인 여성적 시작을 의미하는데, 둘째 효부터 여섯째 효까지 양의 효로 이루어졌으므로 여성적인 음의 시작이지만 절망이나 고통, 분노와 같은 것이 아닌 밝고 희망적이며, 아름다운 시각의 모성적 따뜻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즉 음의 대상을 양적으로 표현하는 시쓰기이다. 그렇다면 음의 문장과 양의 문장은 어떻게 만들고 구분할 수 있을까? 첫째는 음적인 사물들의 결합이며, 둘째는 음적인 상태나 감정, 분위기의 형성이다. 사람의 얼굴에서 보면 이마, 콧날, 치아, 광대뼈와 같은 것들은 양적인 요소이지만, 콧구멍, 귓구멍, 입과 같은 부분은 음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양적 ‧ 음적 요소와의 결합을 통한 양의 문장, 음의 문장이 있다. 또한 여기에 양적 ‧ 음적 감정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문장도 양의 문장, 음의 문장으로 나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든다면 ‘이’는 양적 요소이지만 어떤 감정이나 상태와 결합하느냐에 따라 음이 될 수 도 있고 양이 될 수도 있다. “이가 반짝였다.”라는 문장은 양적 요소에 양적 상태가 결합되어 양의 문장을 만들어 주지만, “이가 부러졌다.”라는 표현은 양적 요소와 결합했지만 상태가 음적 요소이므로 음의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물에는 음과 양이 공존하기 때문에 양적인 요소라 해도 그 안에는 음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장의 음과 양의 구분은 사물적 요소보다는 상태나 감정적 요소에 의해 좌우됨을 알 수 있다. 사상에서 天, 人, 地는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형식적 의미의 단락일 수도 있으나 天(성) - 人(성과 속의 공존) - 地(속)의 차원이나, 천(형이상) - 인(공존) - 지(형이하)의 구분과 같은 내용적인 단락이 될 수도 있다. 姤의 地는 소양(⚎)으로 밝음을 지향하고 있으며, 人과 天은 모두 태양(⚌)으로 한낮과 같은 밝은 정서를 나타내고 있다. 하늘에서 부는 바람은 음산하고 무서운 바람이 아니라 밝고 환하며, 초목을 생장시키는 유익한 바람이다. 그러므로 천풍구의 시는 밝고 아름다운 감정의 유익하고 정감 있는 접속이라고 할 수 있다. 팔괘로 보면 姤는 만난다는 뜻이다. 한 柔가 다섯의 剛을 만난 형태로 많은 남자들 사이에 한 여자가 있어서 조종하는 형상이다. 그러므로 여자의 주도하에 매사가 진행되며, 남성 못지않게 강한 여자의 입김에 세상이 휘둘리게 되는 상이다. 이는 시에서 여성적인 시각의 주도적 진행을 의미하며 남성적인 강하고 밝은 분위기의 연출이라고 할 수 있다. 천풍구의 변효를 살펴보면 호괘는 밝고 강한 ䷀ 중천건(重天乾)이며, 도전괘는 양의 진행을 뒤집어 의외의 음적 결말을 맺는 ䷪ 택천쾌(澤天夬), 배합괘는 본성을 회복하고, 근본을 회복하는 ䷗ 지뢰복(地雷復), 착종괘는 양 가운데에 음을 배치하여 부드러움을 더해주는 ䷈ 풍천소축(風天小畜)이다. [출처] 44. 천풍구|작성자 김기덕   45. ䷬ 택지취(澤地萃)   택지취는 땅(☷:坤 ) 위에 물이 고여 연못(☱:兌)이 된 모양으로 사방의 물이 두루 합하여 모이는 것을 말한다. 萃의 뜻을 보면 병졸들이 모이듯 초목(艹)이 무성하게 우거져 어우러진 의미가 있고, 읽을 때에는 췌가 아닌 취로 발음한다. 萃는 안으로 지극히 유순하고 밖으로는 기쁨의 덕이 있어 물이 대지를 흐르며 합쳐져 마침내는 큰 바다를 이루어 출렁이는 모양을 나타낸다. 이는 시쓰기에서 대하를 이루는 듯한 흐름의 산문시를 의미하며, 형식이나 틀이 없이 이미지의 숲을 이루는 방법이다. 물은 물끼리 모여 흘러가듯 주제의 통일을 이루어야 하며, 정서의 동질적인 결합이 필요하다. 이야기의 서사적 구성도 택지취의 시라고 할 수 있다. 택지취의 효를 살펴보면 초효에서 삼효까지는 음의 문장으로 구성되고, 실질적인 리더인 사효와 오효가 양으로 구성되어 강력한 힘의 구심점을 이루어 나아가는 상이다. 그러므로 이 시의 핵심은 사효, 오효이며, 강한 주제의식으로 집중된 시이다. 사상으로 보면 地는 노음(⚏)으로 다양한 사물적 요소일 수도 있고, 흩어진 생각의 단편들일 수도 있다. 人(⚎)에서 모아져 표출되었다가 天(⚍)에서 강하게 마무리 짓지 않고 여운을 남기듯 끝맺음을 하였다. 천 ‧ 인 ‧ 지의 의미는 넓게 보면 세상만물을 상징한다. 하늘과 인간과 세상의 관계를 모두 아우른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물도 다 끌어올 수 있고 결합, 배치가 가능하다. 또한 작게 보면 사람의 얼굴과 같은 것이다. 눈썹 위로부터 이마는 天이요, 눈썹부터 코끝까지는 人이요, 인중부터 턱까지는 地로 구분하여 초년, 중년, 말년으로 관상을 보듯 그 응용의 세계는 무한하다. 팔괘로 풀이하면 취는 모이는 것의 상징이다. 아래에선 유순하고 위에서는 즐거워한다. 강건한 군주와 유순한 신하가 도리를 지키고 서로 호응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모든 인재가 모이고 복된 것이 모여온다. 시에서도 다양한 사물과 다양한 사고들이 하나의 핵심 주제로 모여 장구한 흐름을 만드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긍정적 사고의 흐름을 이루고 감동을 줄 수 있는 시이다. 모이는 데는 특별한 형식이 없다. 자석에 쇳가루가 모이듯 시인의 강한 정서의 힘에 이끌린 사물과 의식들의 일관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택지취의 변괘를 보면 호괘는 점차적으로 사고의 확장과 차원의 상승을 추구하는 ䷴ 풍산점(風山漸)이며, 도전괘는 땅 속에서 싹이 움트는 형상인 ䷭ 지풍승(地風升), 배합괘는 축적된 에너지의 강한 시심을 풀어내는 ䷙ 산천대축(山天大畜), 착종괘는 기뻐하며 순하게 나아가는 모양인 ䷒ 지택림(地澤臨)이다. [출처] 45. 택지취|작성자 김기덕   46. ䷭ 지풍승(地風升)   지풍승은 땅(☷:坤) 속에 초목(☴:巽)이 뿌리를 박고 움터오는 모양을 이루고 있다. 升은 안으로 순하고 밖으로는 유순함이 있어 음도가 성숙해가는 과정이며, 음물이 점차 쌓여 오르는 상이다. 아래의 巽은 나무를 의미하는데, 바람이 안으로 파고들 듯 땅 속에 뿌리를 내리는 모양이다. 위의 곤은 초목을 생육시키는 땅이니 땅 속에서 싹이 움터서 나오는 형상이다. 시에서의 기법은 희망적 감정이나 현실의 꿈을 상징하는 씨앗을 내면에 싹틔우고 암담한 현실, 또는 절망적 상황의 대지를 뚫고 나오는 기상이 있는 배치의 시쓰기이다. 첫 문장은 음의 문장인데, 둘째, 셋째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땅 속에 묻혀 있는 씨앗과 같은 존재이다. 이 씨앗들이 땅(☷)에 숨겨져 아직은 밖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고 살짝 모습만 비추고 있는 형상이다. 핵심적인 의식이 모여 있는 문장으로 화분(음의 문장들) 속에서 살짝 고개 내밀기 시작한 새싹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다. 地(☷)는 화분의 흙과 같은 존재로 덮어주고 감추어주는 역할을 하며, 핵심 내용을 드러내기 위한 토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의 화분은 크게 보면 전 지구적인 땅이며, 소우주적인 몸이며, 영원한 세계로 향한 우리의 정신적 토대를 의미한다. 地風升의 시적 분위기는 땅 속에 나무가 있어 싹이 트고 마침내는 큰 재목이 되는 상으로 구이, 구삼의 두 효가 바르고 깊은 뜻을 담고 있어 전체적인 시의 성장을 이루게 하는 형식이다. 사상의 시각으로 보면 地는 소양(⚎)으로 땅 위로 솟아오르는 강한 힘이고, 人의 소음(⚍)은 솟아오르고자하는 힘을 억누르고 있는 상이다. 天은 노음(⚏)으로 이러한 의식이나 상황을 덮고 있는 존재로 아직은 뚜렷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 있다. 웅비하는 시의식의 감춰짐이나 내면의 배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팔괘로 살펴보면 升은 땅을 의미하는 坤卦가 위에 있고 바람(나무)을 의미하는 巽卦가 놓여서 크게 발전하는 것을 상징한다. 부드러운 새싹이 때를 맞춰 성장하는 상태로 종순한 태도로 순리에 따르는 상이다. 아직은 어리고 약한 새싹이라서 사나운 비바람을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새싹은 무럭무럭 자라 머잖아 의젓한 나무가 될 것이다. 이러한 발전적인 감정을 담고 있는 시가 바로 지풍승의 시이다. 지풍승이 변화될 수 있는 여러 가지 모양을 살펴보면 호괘는 이질적인 것들의 결합을 추구하는 ䷵ 뇌택귀매(雷澤歸妹)이며, 도전괘는 대하를 이루듯 흐르는 산문시인 ䷬ 택지취(澤地萃), 배합괘는 강건한 도로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 천뢰무망(天雷无妄), 착종괘는 어두운 현실을 따뜻하게 녹여줄 수 있는 시쓰기의 ䷓ 풍지관(風地觀)이다. [출처] 46. 지풍승|작성자 김기덕   47. ䷮ 택수곤(澤水坤)   택수곤은 위에 연못(☱:兌)이 있고 아래에 물(☵:坎)이 놓여 연못의 물이 마른 모양으로 곤궁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困卦는 剛爻가 柔爻에 의해 가려져 험난함을 나타내는데, 못에 물이 없어 곤궁한 상황으로 고난을 상징하고 있다. 시에서도 곤궁한 상황, 절망적 현실 묘사의 방법으로 희망적인 것을 과거나 미실현의 단계에 놓고 절망적인 요소를 현재나 현실 진행단계로 놓아 음적인 요소가 양적인 요소를 지배, 또는 덮어버림으로써 현실의 절망을 강조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채송화, 맨드라미 웃음 짓던 토담은 허물어지고, 꿈에 부풀던 항아리들은 깨어져”와 같은 구절에서 양의 요소들이 음의 요소에 의해 허물어지고 깨어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음효와 양효의 대조적인 상황에서 음이 양을 덮어버림으로 음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시쓰기이다. 효로 풀이하면 첫 문장은 음의 문장이고 둘째는 양의 문장, 셋째는 음의 문장, 넷째, 다섯째는 양의 문장, 여섯 번째는 음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양의 문장을 포위, 덮어버림으로 음적인 상황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첫째 단락인 地는 소양(⚎)으로 음을 기반으로 해서 양이 뻗어 나오고 있는 상이다. 둘째 단락인 人 또한 소양(⚎)으로 음의 토양에서 양이 자라고 있는 모양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마지막 단락인 天에서 소음(⚍)이 되어 지금까지 기반이 되었던 양적인 요소들이 부정되고 음적인 요소로 변함으로써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감정이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감정으로 변화되게 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팔괘로 보면 곤괘는 연못 아래에 있는 물로 물이 마른 연못을 상징한다. 困은 곤란, 곤궁, 곤고한 상태이니 口(상자) 속에 木(나무)이 들어 있는 상이다. 나무는 두텁고 넓은 땅에 뿌리 내리고, 높고 시원스런 공간으로 줄기를 펴고 가지를 뻗으면서 막힘도 거리낌도 없이 자라는 것인데, 형틀에 갇힌 형상을 이루어 곤고한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시적 감정을 통해 물이 마른 연못의 곤고함 같은 마음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택수곤의 變卦들을 살펴보면 호괘는 마음의 수양과 깨달음이 있는 ䷤ 풍화가인(風火家人), 도전괘는 음양이 교차한 맑은 샘물 같은 시의 ䷯ 수풍정(水風井), 배합괘는 내면의 아름다움, 절제된 감정의 열매 맺음을 의미하는 ䷕ 산화비(山火賁), 착종괘는 절제된 시어, 함축적 운율의 시쓰기인 ䷻ 수택절(水澤節)이다. [출처] 47. 택수곤|작성자 김기덕   48. ䷯ 수풍정(水風井)   수풍정은 나무(☴:巽) 위에 물(☵:坎)이 있는 모양으로 아래로 井자의 나무를 놓아 샘물이 위로 솟아오르는 우물의 형상이다. 井은 안으로 겸손하고 밖으로 과감히 행하는 덕이 있으며, 땅 속의 물을 끌어올려 두루 우물물의 혜택을 베푸는 괘이다. 땅을 깊이 파야 맑은 샘물이 나오듯 마음을 가라앉히고 맑게 하여 정신과 육신이 청정함으로 만사를 통하니, 시에서도 마음을 맑게 하여 깊은 샘을 파듯 심오한 정신의 깨달음을 표현하는 우물과 같은 시쓰기이다. 효로 살펴보면 첫째 문장은 음의 문장, 둘째, 셋째는 양의 문장, 넷째는 음의 문장이며, 다섯째는 양의 문장, 여섯째는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형식이다. 이 형식은 첫째 음의 문장, 둘째 양의 문장, 셋째 음의 문장인 ☵의 형태로 압축될 수도 있다. 시는 정서와 사상의 우물파기이다. 음과 양이 교차한 감정의 직조를 통해 맑은 샘물 같은 시를 쓰고자 하는 방식이 바로 수풍정의 시쓰기라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는 소양(⚎), 人과 天은 소음(⚍)으로 음과 양이 하나씩 교차하고 있다. 이는 섞어 짜기와 같은 직조의 모양이다. 나무로 우물 정자의 침목을 만들 듯 음과 양의 문장이 교차를 이루어 샘물과 같은 진리를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생 ‧ 로 ‧ 병 ‧ 사 ‧ 애 ‧ 오 ‧ 욕, 이 모두가 기쁨과 슬픔으로 섞어 짠 삶이듯 세 개의 단락이 감정의 교차, 표현의 교차, 욕망의 교차를 이루며 심오한 인생의 철학이 있는 시를 쓰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팔괘로 살펴보면 井은 우물이다. 한 고을은 옮길지라도 우물은 옮길 수가 없다. 줄기차게 샘솟는 근원이 땅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우물은 항상 맑은 물을 담고 줄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는다.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누구에게나 자유롭게 갈증을 해소하게 하고 생명을 키워 준다. 이러한 우물처럼 시는 누구나 읽고 깨달음을 얻으며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우물의 생명력처럼 시 속엔 영혼을 살리는 생명력이 있어야 한다. 수풍정의 시쓰기는 영혼의 우물파기이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두레박을 통해 맑은 물을 퍼 올리듯, 또한 나무(☴)들이 땅에 뿌리를 박고 줄기를 통해 물을 끌어올려 잎을 피우고 꽃을 피우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듯 결실하는 시이다. 수풍정의 특색은 진리의 샘물과 같은 깊은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음과 양의 섞어 짜기가 있어야 한다. 또한 꽃이나 열매와 같은 긍정적 향기나 삶의 갈증을 시원하게 해 줄 수 있는 후련함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수풍정의 변괘 중 호괘는 어긋남의 대칭적, 대조적 기법인 ䷥ 화택규(火澤睽)이며, 도전괘는 음의 요소가 양을 지배하는 절망적 상황의 ䷮ 택수곤(澤水困), 배합괘는 형이상과 형이하의 조화, 신 ‧ 구의 조화, 남녀의 조화와 같은 상반된 관계의 조화를 의미하는 ䷔ 화뢰서합(火雷噬嗑), 착종괘는 흩어놓기 기법인 ䷺ 풍수환(風水渙)이다. [출처] 48. 수풍정|작성자 김기덕   49. ䷰ 택화혁(澤火革)   택화혁은 연못(☱:兌)이 위에 있고 불(☲:離)이 아래에 놓여 연못 속에 불이 들어있는 상이다. 위의 물은 아래로 흐르고 아래의 불은 위로 타올라 水 ‧ 火가 서로 대결하는 상태이다. 물은 불을 끄려하고 불은 물을 말리려 하는 가운데 상대를 고쳐 변하게 하니 革이다. 革은 안으로 밝고 밖으로 기쁨이 있으며, 여름(☲)을 지나 가을(☱)에 이른 괘로 곡식이 익어 결실하는 때를 의미한다. 시에서는 대결구도적인 배치를 통해 새로운 변화와 상승을 꾀하는 방법으로 더 넓은 사고의 확장과 이미지의 다양성 추구를 위한 것이다. 하늘을 선명하게 그리기 위해 어두운 땅을 배치한다든지, 아름다운 여인을 그리기 위해 야수를 배치하는 기법과 같은 것인데, 언어로 그림을 그리는 시의 전체적인 조화와 새로움을 위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택화혁을 효로 접근해 보면 첫 문장은 강한 양의 문장으로 위로 올라가 革하려는 강한 이미지이나 뒤에 음의 문장이 옴으로 상비관계를 이룬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문장에서 양의 문장이 와서 革하려는 시적의식이나 이미지의 창출에 강한 힘을 보탠다. 마지막 여섯 번째 문장에서 배치되는 음의 국면을 전개시킴으로 강렬한 시심을 표출하고자 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의 革은 기존의 보편적인 이미지나 정서, 보편적 의식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풀이하면 地와 天은 소음(⚍)으로 내적인 양이 밖으로 표출되지 않고 숨어 있는 象이다. 地와 天은 시적 대상이 되는 세상만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내적 소용돌이가 밖으로 표출되지 않고 정체되어 있는 모양은 바로 보편적인 사물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地와 天에 비해 세 번째, 네 번째 효인 人은 강한 양이 두 개인 노양(⚌)이다. 여기에서의 노양은 강한 변화의 욕구이며 새로운 시각의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시적 대상에 대한 보편적 인식에 새로운 변화의 강한 양적 의식을 부여하는 상이 택화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평범한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끌어와 혁명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방식이다. 모든 시쓰기가 혁명적인 인식의 변화를 추구하지만, 대조적인 기법을 통한 혁명적 배치라고 할 수 있다. [출처] 49. 택화혁|작성자 김기덕   50. ䷱ 화풍정(火風鼎)   화풍정은 아래에 나무와 바람(☴:巽)이 놓여 위로 불(☲:離)을 피우는 모양이다. 괘체로 보면 巽下絶(첫째 효의 끊어진 음효)은 아래의 갈라진 솥발과 같고, 離虛中(다섯 번째 효의 음효)은 빈 솥의 형상이니 화풍정이다. 火風鼎은 안으로는 순순히 따르며 받아들이는 덕을 이루고 밖으로는 환히 밝히니, 스스로를 가다듬어 밖을 밝히며 솥 안에 음식물을 넣고 삶는 형상이다. 시에서는 음적인 소재를 선택하더라도 그 소재를 푹푹 삶고 고아서 맑고, 영양가 있게 우려내는 솥과 같은 시쓰기이다. 화풍정은 치열한 시의 불때기를 의미하며, 사골을 고듯이 깊은 뜻을 우려내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불로 귀하게 삶은 음식은 제일 먼저 신께 드렸듯이 그 안엔 기도와 같은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 효로 풀이하면 첫째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어려운 현실이나 부정적 요소라고 할 수 있으나 두 번째 문장에서부터 네 번째 문장까지 양의 문장을 놓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감사의 마음으로 재해석해 초월적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다섯 번째 문장에서 다시 한 번 음의 문장을 통해 현실을 재인식하지만, 여섯 번째 문장을 통해 음의 세계를 극복하고 양의 세계를 구축함으로 강렬한 희망적 메시지를 남기는 방법이다. 화풍정의 문장 하나하나에는 펄펄 끓는 절규와 간절함이 필요하다. 그 절규와 간절함이 관념적이어서는 안 되지만, 무의미의 이미지 나열 또한 피해야할 부분이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天과 地가 모두 소양(⚎)으로 이루어져서 내면의 소극적인 의미나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출하여, 人(노양:⚌)의 강렬함이 삶아지고 드러날 수 있도록 솥과 같은 배치를 이루어야 한다. 天과 地의 초점은 人에게 맞추어져 있다. 그 초점은 태풍의 눈과 같은 것이며 블랙홀과 같은 흡입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모양은 시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사물들이 시인의 긍정적 의식에 집중되어 있다. 팔괘로 풀이하면 鼎은 솥을 상징하는 모양으로 나무로 불을 때서 삶고 익힌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 단락인 巽(☴)은 바람과 나무를 상징한다. 불을 때기 위한 준비단계이며, 본격적인 주제의식을 삶기 위한 도입적 요소이고, 중심에 대한 진입과정이다. 두 번째 단락은 첫 번째 단락에서 진일보한 내용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본격적인 불때기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 불때기는 고기를 삶는 것이며, 쇠를 녹이는 것이며, 감정을 들볶는 것이다. 이렇듯 두 개의 단락이 계층을 이루어야 하고, 감정의 진일보가 있어야 한다. 즉 두 개의 단락이 수평적 관계가 아니라 수직적인 관계를 이루어야 한다. 불과 나무와 바람은 서로 호흡이 맞는 팀 멤버와 같아서 서로가 필요한 관계요 상보적인 존재들로 하나의 시적 감정을 나타내기 위한 팀워크가 필요한 협력체이다. 화풍정의 변괘를 살펴보면 호괘는 일관된 묘사를 하다가 끝에서 뒤집어버리는 ䷪ 택천쾌(澤天夬)이며, 도전괘는 대결구도적인 배치를 통해 새로운 변화와 상승을 꾀하는 방법인 ䷰ 택화혁(澤火革), 배합괘는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깝다는 의미처럼 험한 가운데 새로움이 움트는 ䷂ 수뢰둔(水雷屯), 착종괘는 자신을 돌아보는 시이며, 내면의 깨달음과 자성의 시인 ䷤ 풍화가인(風火家人)이다. [출처] 50. 화풍정|작성자 김기덕   51. ䷲ 중뢰진(重雷震)   중뢰진은 아래 위가 모두 우레(☳:震)로 이어진 괘로 우레가 거듭 쳐서 만물을 크게 요동시키며 발전시키는 象으로 땅 속에 숨어 있던 초목의 싹이 밖으로 움터 나오는 모양이다. 진은 해 뜨는 동방을 의미하며 동방의 기운으로 만물이 움터 나옴을 의미하는 괘이다. 시에서는 새싹이 나듯 중첩된 우레의 모양(☳ ☳)은 양의 중심 이미지에 음의 부분적인 이미지들이 움터 나오듯 배치되는 방법이다. 또한 중심 사물이나 개체가 제시되고 그 아래 의성어나 의태어, 세부적인 표현이 전개되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개구리가 개굴개굴”에서 ‘개구리’는 시의 중심 이미지인 첫 효인 양이고, ‘개굴개굴’은 두 번째, 세 번째 효인 음과 같다. 하나 더 예를 든다면 “거인 나무가 쓰러져 잠들어 있다. 코를 골 때마다 귀를 닮은 잎들만 들썩거릴 뿐, 바람이 가지를 흔들어 깨워도 꿈쩍하지 않는다.”와 같은 표현이 있다면 중심사물인 ‘거인나무’는 첫 효인 양과 같으며, 중심사물인 거인을 세부적으로 묘사해 나가는 귀를 닮은 ‘잎’이나, 바람이 흔들어 깨우는 ‘가지’의 묘사는 六二, 六三 효인 음과 같은 것이다. 효로 분석해 보면 첫 효는 새싹이 움트는 나무의 몸체일 수도 있고 새싹이 나오는 땅일 수도 있다. 둘째, 셋째 음의 효는 새싹과 같은 것으로 몸체에서 파생되는 세부적 이미지나 중심 사상에서 파생된 보조적인 의미나 개념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레(☳:震)는 움직임이고 변화이고 잘게 쪼개짐이다. 중심 이미지나 중심 사상에 대한 변화, 새로운 뻗어감이나 분화라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는 소음(⚍)으로 양의 기운이 땅 속으로 뻗어가는 뿌리의 모양을 이루고 있다. 人은 소양(⚎)으로 내면의 의식이 양의 기운을 따라 밖으로 표출되고 있는 象이다. 天은 물방울과 같은 개체들이 가득 흩어져 있는 모양을 이루고 있다. 이는 중심 이미지의 분화, 확산을 의미하며, 중심사물이나 개체에 대한 구체적 표현이나 지엽적인 접근을 의미한다고 말 할 수 있다. 팔괘로 보면 우레가 거듭거듭 겹쳐오는 것이 중뢰진의 괘상이다. 두 개의 단락이 반복적일 수도 있고, 별개의 묘사일 수도 있지만, 대지를 뚫고 나오는 새싹들처럼 주된 대지의 이미지에 종된 새싹들이 피어나는 관계를 이루어야 한다. 천둥은 고대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현대전쟁의 어마어마한 포탄소리를 듣지 못한 그들에게는 천둥이야말로 최고의 공포였을 것이다. 우레는 오늘날의 포탄과 같은 것이다. 수류탄이 터지듯 하나의 양의 효에서 분화되는 음의 파편들을 연상케 한다. 이는 하나의 상징적 사물에서 분화, 확산되는 상징성이기도 하다. 상징성으로 폭탄이 터지듯 확산하는 의미나 이미지를 표현하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중뢰진과 관련된 변괘를 살펴보면 호괘는 슬픔과 우울함에 침잠된 감정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 수산건(水山蹇)이며, 도전괘는 重雷震의 반대적인 글쓰기로 지엽적인 문장이나 표현을 앞에 두고 뒤에 전체적이고 결론적인 내용이나 핵심 표현을 놓는 방법인 ䷳ 중산간(重山艮), 배합괘는 여성적 어조의 글쓰기인 ䷸ 중풍손(重風巽), 착종괘는 ䷲ 중뢰진(重雷震)이다. [출처] 51. 중뢰진|작성자 김기덕   52. ䷳ 중산간(重山艮)   중산간은 아래 위가 모두 山(☶:艮)인 괘로 산이 거듭 중첩된 상이다. 艮은 안팎으로 거듭 그치는 덕이 있어 첩첩산중과 같이 어려운 모양을 이른다. 그러나 제 위치에서 본분을 지키고 때를 알아 처사하면 허물이 없다. 艮은 동북 방향에 속하니 아침 해가 솟는 뿌리에 해당하므로 만물의 종시가 艮方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시에서 重山艮은 重雷震의 반대적인 글쓰기로 지엽적인 문장이나 표현을 앞에 두고 뒤에 전체적이고 결론적인 내용이나 핵심 표현을 놓는 방법이다. 논술과 같은 비문학에서는 결론이 뒤에 있는 미괄식 글쓰기와 같고, 시에서는 핵심표현이나 주제의식이 담긴 문장, 또는 전체를 아우르는 포괄적 표현을 뒤에 쓰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효로 살펴보면 첫 문장과 둘째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셋째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형성되어 뒤쪽으로 갈수록 의미나 표현이 강하고 확장적이라고 할 수 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음의 문장과 여섯 번째 양의 문장으로 반복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논증적인 관계로 본다면 귀납법적인 형식의 전개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는 노음(⚏)으로 음적인 요소로만 이루어져 있다. 이 음적인 요소는 감정이나 사물의 관계뿐만 아니라 궤의 모양으로 볼 때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여러 예시와 같으며 뒷받침 문장과 같다. 人의 소음(⚍)은 강한 핵심이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졌다가 天의 소양(⚎)에 와서 내적인 것들이 밖으로 드러나며 강한 핵심을 표현해 주고 있다. 팔괘로 본다면 산이 겹쳐져서 서로 교통하지 못하고 그치는 상을 이루고 있다. 두 개의 단락을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으로 나타낼 수도 있으며, 작은 봉우리와 같은 중간 점검 후 더 큰 봉우리 같은 최종 결론적인 형식을 취할 수도 있다. 그침이라는 것은 결론이며, 핵심이며, 최종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그침이 여러 겹을 이룰 수도 있고, 여러 계단처럼 계층을 이룰 수도 있다. 중산간의 변괘 중 내부적 정황이나 성격, 심리, 사건의 내막을 말해주는 내부적 시각의 호괘는 ䷧ 뇌수해(雷水解)이며, 본괘의 단락에 대해 정반대적인 내용이나 묘사를 의미하는 도전괘는 ䷲ 중뢰진(重雷震), 아이러니나 역설적인 표현을 의미하는 배합괘는 ䷹ 중택태(重澤兌), 잘라서 새로운 조합을 통해 바라보는 착종괘적 표현은 ䷳ 중산간(重山艮)이다. [출처] 52. 중산간|작성자 김기덕   53. ䷴ 풍산점(風山漸)   풍산점은 바람(☴:巽)이 위에 있고 산(☶:艮)이 아래에 놓여 산 위에 나무가 점점 자라는 象이다. 漸은 산 위에 바람이 불어 초목과 금수가 미동하며 점진하는 괘상이며, 人事로는 여자가 집안(☶:친정)에서 부덕을 쌓은 후 혼기(☴)가 이르러 시집가는 모습이다. 또한 입춘 절기로부터 입하 절기로 나아가는 봄의 과정이니 만물이 땅 속으로부터 나와 점차 자라는 때를 이른다. 漸은 시에서 정신에 뿌리박은 하나의 시상이 점점 자라는 과정을 거쳐 의식이 확장되거나, 사고가 깊어지거나, 이미지의 농도가 짙어지거나, 형이상적 차원이 상승하여 점점 표현의 무게와 밀도, 깊이, 높이가 커지는 방향적 진행의 묘사를 의미한다. 효로 풀이하면 첫째, 둘째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지고, 셋째 문장은 양의 문장이 와서 하나의 계단을 이루고, 다시 음의 문장이 와서 수평을 유지했다가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양의 문장이 와서 비약적 상승을 꾀하고 있다. 사상으로 풀이하면 더욱 정확한 발전형태를 볼 수 있는데, 地의 노음(⚏)에서 人의 소음(⚍), 天의 태양(⚌)으로 그 기운이 상승하면서 점차적으로 강해지고 있다. 단계별로 상승하는 점층적인 표현과 같은 것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점차 소멸해가는 점강적인 기법도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든다면 ‘방황’을 “나무들의 가지가 흔들린다./ 사람들이 어깨가 떨린다./ 하늘의 구름이 소용돌이친다.”라고 표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표현은 단계별로 차원과 강도가 달라지고 있다. 이렇듯 漸은 점점 더 발전하고 강해지는 시적 표현의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팔괘로 살펴보면 풍산점(䷴)은 산 위에 심겨진 나무와 같다. 산에 심겨진 나무는 눈, 비, 바람을 맞으며 서서히 자라게 된다. 급하게 자란 나무는 태풍에 쓰러질 수밖에 없다. 급격한 비약, 과장적인 건너뛰기를 지양하고 한 단계, 한 단계 철학적 시상을 키우거나 표현의 밀도감을 더해 가는 언어의 드로잉이다. 풍산점의 변괘를 살펴보면 호괘는 정석적이지 못하고 비상식적이며, 비정서적, 부조화의 관계적 배치를 의미하는 ䷿ 화수미제(火水未濟)이고, 도전괘, 배합괘는 이질적인 문장이나 이질적인 단락 간의 연결 관계를 만들어 주는 형식의 ䷵ 뇌택귀매(雷澤歸妹), 착종괘는 산과 같은 덕으로 백성들을 교화하는 형상인 ䷑ 산풍고(山風蠱)이다. [출처] 53. 풍산점|작성자 김기덕     54. ䷵ 뇌택귀매(雷澤歸妹)   뇌택귀매는 위에 우레(☳:震)가 있고 아래에 연못(☱:兌)이 놓인 상으로 兌의 少女가 위 震의 장남을 좇아 시집오는 궤이다. 귀매는 안으로 기뻐하며 밖으로 움직임이 있는 모양으로 어린 소녀가 위의 장남을 좇아 시집오는 형상으로 서방에 속한 兌가 동방에 속한 震에게 시집오는 과정이다. 시간상으로는 저녁을 지나 아침에 이르는 과정을 의미한다. 결혼은 이질적인 가정의 풍속이나 가문 간의 문화적, 혈연적인 연결 관계를 맺어주는 행사라고 할 수 있다. 시에서는 이질적인 문장이나 이질적인 단락 간의 연결 관계를 만들어 주는 형식의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효의 관계를 통해 살펴보면 첫째와 둘째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다섯째와 여섯째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이질적인 관계에서 셋째와 넷째 문장이 서로 자석처럼 끌어당김으로 이질적인 전체의 관계를 연결시켜 주고 있다. 세 번째 효와 네 번째 효는 이질적인 관계를 묶어 주는 끈이나, 붙여 주는 접착제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성분이나 다른 차원의 사물을 이어 주기 위해서는 접촉점을 찾아야 한다. 암수의 코드와 같은 연결점을 통해 이질적인 요소들이 결합하여 새로운 의미나 이미지를 창출하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는 노양(⚌)이고 天은 노음(⚏)이라서 상대적으로 대립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나 人이 소양(⚎) 이어서 地의 노양은 인의 음이 끌어당기고, 天의 노음은 人의 양이 끌어당김으로 서로를 완충시키고 새로운 의식과 이미지를 창출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유사관계 간의 접속이 아닌 상이한 관계 간의 접속이며 반대적, 대립적인 관계 간의 연결, 그리고 아주 먼 유사성의 사물이나 사건들 간의 연결을 꾀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이한 것들 간의 연결을 꾀하기 위해서는 내부적인 미세한 연결고리를 찾아야 하며, 연결의 끈을 찾아야 한다. 팔괘로 본다면 아래의 연못과 위의 우레는 서로의 유사관계를 찾아볼 수 없지만 연못의 셋째 효인 소녀와 우레의 첫째 효인 장남이 만나 관계를 이루고 결혼을 하는 상이다. 하나의 단락과 또 하나의 단락이 크게 유사한 내용이 없지만 그 단락 속의 한두 줄의 문장을 통해 서로 연결하고 이어질 수 있도록 접속, 긴밀한 관계를 만드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뇌택귀매의 관계는 병치의 관계와는 다르다. 병치는 유사한 사물이나 상황의 단어나 문장을 병치시킴으로 건너뛰기를 하는 방법이지만, 뇌택귀매의 방법은 이질적이고 비전도적인 관계의 사물이나 상황을 풀칠하여 붙이듯 접속시키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풀 역할을 하는 것은 주제나 제목, 또는 이미지들이라고 할 수 있다. 뇌택귀매의 변괘 중 호괘는 정석적이지 못하고 비상식적이며, 비정서적, 부조화의 관계적 배치를 의미하는 ䷾ 수화미제(水火未濟)이며, 도전괘, 배합괘는 의식이 확장되거나, 사고가 깊어지거나, 이미지의 농도가 짙어지거나, 형이상적 차원이 상승하여 점점 표현의 무게와 밀도, 깊이, 높이가 커지는 방향적 진행의 묘사를 의미하는 ䷴ 풍산점(風山漸), 착종괘는 차분하고 잔잔하지만 희망이 넘치는 ䷐ 택뢰수(澤雷隨)이다. [출처] 54. 뇌택귀매|작성자 김기덕   55. ䷶ 뇌화풍(雷火豊) 뇌화풍은 아래에 火(☲:離)가 있고 위에 雷(☳:震)가 있어 번개가 친 후 우레가 울리는 상으로 밝음으로써 움직여 나아가 행하는 까닭에 風大하여진다. 괘상으로는 번개(☲)가 친 후 뇌성(☳)이 상응하는 상으로 同聲相應의 이치를 이른다. 이는 마치 수탉이 홰를 치면 모든 닭들이 따라서 함께 우는 이치니 서로 응하여 합하다 보면 풍성해지는 법이다. 시에서 뇌화풍은 하나의 주제나 제목을 향한 다양한 시각의 묘사적 접근을 통해 풍성한 의식이나 이미지를 창출하는 데 있다. 다양하지만 통일성이 있어야 하고, 통일성이 있지만 하늘과 땅, 인간 사이의 여러 이야기나 묘사들이 접목되어 풍요함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효로 살펴보면 첫째와, 셋째, 넷째는 양의 문장으로 이루어지고, 둘째와 다섯째, 여섯째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서로 상응하는 관계를 만들고 있다. 첫째의 양과 둘째의 음이 상응하고, 셋째, 넷째의 양이 다섯째, 여섯째의 음과 상응관계를 이루어 다양한 관계를 만들고 있다. 사상으로 풀이하면 하늘과 사람, 땅이 모두 제각각으로 다양하지만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어 풍요함을 나타내 주어야 한다. 地는 소음(⚍), 人은 노양(⚌), 天은 노음(⚏)으로 천 ‧ 인 ‧ 지가 제각각의 소리를 내고 있다. 이러한 다양함이 하나로 묶여 풍요함을 나타낼 수 있는 글쓰기이다. 자칫 여러 종류의 나열만 나타낼 수도 있지만 부챗살처럼 여러 조각이 하나의 주제나 큰 틀의 이미지로 모아져 다양성을 갖게 해야 한다. 팔괘로 보면 아래에 번개가 먼저 있은 후 위에 우레가 놓여 나중에 천둥이 뒤쫓는 형상을 이루고 있다. 하늘에 번개만 친다면 그 무서움은 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번개 후에 우렁찬 천둥이 울릴 때 그 무서움은 배가되듯이, 번개 같은 하나의 단락에서 상응하는 천둥 같은 두 번째의 단락을 통해 풍대함을 갖게 해 주는 방식이다. 그 풍대함의 표현이 빛과 소리로 나타나고 있다. 빛만 밝은들 이 둘의 조합보다는 그 풍대함은 적을 것이다. 뇌화풍의 글은 바로 이런 상승효과를 노린 다양함의 조합이며 효율적인 표현의 협공이라고 할 수 있다. 뇌화풍과 관련된 변괘를 살펴보면 호괘는 시에서는 처음의 의도가 끝에서 새롭게 변화됨으로써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는 방법으로 조금은 엉뚱하고 의외성이 있는 ䷛ 택풍대과(澤風大過)이며, 도전괘는 일정한 원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리저리 떠돌 듯 연결되는 건너뛰기가 있는 하이퍼적인 글쓰기의 ䷦ 화산여(火山旅), 배합괘는 주제의 통일이나 의미의 연결, 이미지의 조합에 신경 쓰지 않고 따로따로 흩어놓는 기법인 ䷺ 풍수환(風水渙), 착종괘는 형이상과 형이하의 조화이며, 정신과 물질의 조화, 음과 양의 조화가 있는 시쓰기인 ䷔ 화뢰서합(火雷噬嗑)이다. [출처] 55. 뇌화풍|작성자 김기덕   56. ䷷ 화산여(火山旅) 화산여는 山(☶:艮)이 아래에 놓이고 火(☲:離)가 위에 위치하여 산 위에 불이 붙은 象으로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와 같이 산등성이의 불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모양을 이루고 있다. 旅는 안으로 그치는 절제가 있으며 밖으로는 밝은 덕이 있으니, 해와 달이 일정하게 주야왕래하며 사시를 운행하는 현상이다. 시에서 旅는 일정한 원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리저리 떠돌 듯 연결되는 건너뛰기가 있는 하이퍼적인 글쓰기이다. 태양의 뜨고 짐은 일정하지만 굿은 날도 있고 맑은 날도 있고 바람 부는 날도 있듯이 일정한 원칙이 있지만 그 원칙 속에서의 많은 변화를 추구할 수 있는 시쓰기이다. 산 위에 부는 바람에 따라 산에서 산으로 건너뛰듯이 정서적, 상징적 표현의 이동을 꾀할 수 있다. 만물의 도나 인생의 삶 역시 정처 없는 나그네의 길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떠날 수 없는 불역의 방도가 있듯 변화무쌍하지만 하나의 원칙을 가지고 있는 형식이다. 효로 살펴보면 첫째, 둘째 문장은 음의 문장이고 셋째와 넷째는 양의 문장, 다섯째는 음의 문장, 여섯째는 양의 문장으로 음, 음, 양, 양, 음, 양으로 원칙이 있지만 음양의 변화를 이루고 있는 형태이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의 노음(⚏)과 人의 노양(⚌)이 큰 변화를 이루는데, 여기에 天의 소양(⚎)이 둘에 상응한 원칙을 가지고 중심을 잡고 있는 象이다. 人은 인간적이며 정서적이지만 地는 사물적인 것을 의미한다. 사물에 따른 인간적인 정서의 큰 변화를 天의 원리, 즉 형이상적인 원리가 지주가 되어 人과 地를 포괄하고 있는 모양이다. 天의 형이상적인 원칙 아래 인간의 정서나 육체, 삶은 地의 사물적인 것과의 많은 거리, 상이성 등을 좁혀 人에서 地로, 地에서 人으로의 변화와 건너 뜀, 오고감의 관계를 이루어 쓰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팔괘로 풀이하면 旅는 산(☶:艮) 위의 밝은 불(☲:離)을 의미한다. 불도 밝게 널리 비추는 것인데 산 위에만 있지 않고 확산되고 옮기는 것이기 때문이 旅다. 첫째 단락은 그침이 있는 산이다. 그침은 원칙이며, 대전제이며, 결론적인 마침이다. 둘째 단락은 확산적인 불이다. 이 불은 사방으로 퍼져가는 욕망이고, 열정이고, 진리이다. 불의 변화된 몸짓은 이리저리 옮겨 붙는 상징적 접속이고 배치이다. 하나의 원칙을 세운 보리 줄기에서 많은 뿌리들의 표현과 이미지가 뻗어나가듯이 旅의 글쓰기는 옮겨 붙는 불의 배치적 시쓰기라고 할 수 있다. 화산여의 변괘를 살펴보면 호괘는 처음의 의도가 끝에서 새롭게 변화됨으로써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는 방법으로 조금은 엉뚱하고 의외성이 있는 ䷛ 택풍대과(澤風大過)이며, 도전괘는 하나의 주제나 제목을 향한 다양한 시각의 묘사적 접근을 통해 풍성한 의식이나 이미지를 창출하는 ䷶ 뇌화풍(雷火豊), 배합괘는 연못에 담겨진 물처럼 물은 담기는 그릇에 따라 모양을 갖추고 절제를 하듯 시쓰기에서도 절제된 언어의 선택, 정해진 운율, 함축적 표현이 있는 형식을 의미하는 ䷻ 수택절(水澤節), 착종괘는 내면의 아름다움, 절제된 감정의 열매 맺음을 통해 함축적인 표현을 이루고자하는 ䷕ 산화비(山火賁)이다. [출처] 56. 화산여|작성자 김기덕   57. ䷸ 중풍손(重風巽)   중풍손은 상하로 거듭 바람(☴:巽)이 부는 象으로 바람이 서로를 따라 합하듯 공손한 덕으로 한 몸을 이루는 모양이다. 巽은 안팎으로 순하고 부드러운 겸손의 마음이 바람과 같이 안으로 파고드는 형상으로 시에서는 여성적 어조의 글쓰기이다. 바람(☴)은 장녀를 뜻하는데, 장녀가 겹쳐짐으로 강조된 여성성을 상징하고 있다. 효로 풀이하면 첫 문장은 음의 문장이고 둘째, 셋째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이루어졌으며 넷째 문장은 음의 문장, 다섯째, 여섯째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음의 문장은 두 양의 문장을 리드하는 여성적 감성이며, 시 전체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지침이 되고 있다. 두 양의 문장 또한 음의 문장을 따르며 보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지극히 부드럽고 순화된 언어의 문장을 이루어야 한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는 소양(⚎)으로 사물의 밝은 부분을 선택하여 人을 소음(⚍)의 마음으로 여성화함으로써 하늘의 밝은 뜻을 드러내는 형상을 갖게 하고 있다. 天은 양의 강한 추상성, 또는 형이상의 차원을 이루고 人과 地는 서로 받아들임으로 순화되고 하나 되어 己+己+共의 뜻을 이룬다. 팔괘로 풀이하면 바람(☴)이 겹쳐있다. 巽은 장녀를 의미하며, 나무나 풀을 상징하고 들어감을 뜻한다. 장녀는 여성성을 의미하며, 나무나 풀은 바람에 흔들리는 여심과 같으며, 들어감은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며, 외적인 사회성보다는 집안에서 이루어지는 규방적인 정서를 의미한다. 첫째 단락과 둘째 단락이 똑같은 여성적 정서를 통해 이루어지며 서로의 관계가 하나의 시적 대상에 대한 유사적 접근을 형성하고 있다. 중풍손에 대한 변괘를 살펴보면 호괘는 활을 쏠 때 활줄은 뒤로 당기고 활대는 앞으로 밀면서 생기는 힘이 화살을 격발하게 하니 비록 처음은 어긋나나 그 어긋남에 의해 힘을 얻는 것을 의미하는 ䷥ 화택규(火澤睽)이며, 도전괘는 기쁨이 충만한 시를 의미하기도 하고, ☱☱가 물결이 치는 큰 바다 같은 상을 이루고 있어 음률이 있는 시도 여기에 속하며, 물 흐르듯 청산유수격의 시도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 중택태(重澤兌), 배합괘는 새싹이 나듯 ☳☳가 양의 중심 이미지에 음의 부분적인 이미지들이 움터 나오듯 배치되는 ䷲ 중뢰진(重雷震), 착종괘는 ䷸ 중풍손(重風巽)이다. [출처] 57. 중풍손|작성자 김기덕   58. ䷹ 중택태(重澤兌)   중택태는 위와 아래가 거듭 연못(☱:兌)을 이루어 큰 연못을 이룬 괘로서, 물이 고여 일렁이듯 밖으로 기쁨을 표출하는 象이다. 兌는 방위상으로 서방이고 계절상으로는 결실기인 가을철을 의미하니 풍요와 기쁨이 가득한 것을 상징한다. 상하로 기쁨이 가득하니 안팎으로 기쁨을 함께 누리는 모양으로 아직 시집가지 않은 어린 소녀를 의미하여 동심의 세계에서 즐거이 노니는 때를 상징한다. 또한 ☱는 구멍이 열린 象으로 口舌, 무당 등을 뜻하기도 한다. 시에서는 기쁨이 충만한 시를 의미하기도 하고, ☱☱가 물결이 치는 큰 바다 같은 상을 이루고 있어 음률이 있는 시도 여기에 속하며, 물 흐르듯 청산유수격의 시도 바로 중택태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효로 풀이하면 첫째와 둘째의 양(⚌)은 충만한 물의 형상이며, 셋 번째 효인 음(⚋)은 물결이 출렁이는 파도의 형상을 이루고 있다. 이 음은 음의 문장으로 해석되기보다는 춤추는 파도와 같은 문장으로 풀이되어야 할 것이다. 흥을 돋우는 추임새나 후렴구, 또는 문장과 같은 것으로 덩실덩실 춤추는 동작의 글쓰기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는 노양(⚌)으로 이루어졌고, 人은 소양(⚎), 天은 소음(⚍)으로 구성되어 물속에 가라앉은 물체의 모양을 이루고 있다. 가장 강한 것은 맨 아래에 놓이고 그 다음 강한 것이 그 위에 오르고, 더 가벼운 것이 맨 위로 올라와 물속에 가라앉은 물체의 비중을 보는 것 같다. 마음의 연못 속에도 앙금은 가라앉고 기쁨은 밖으로 표출되듯, 삶의 앙금은 가라앉히고 기쁜 감정, 즐거운 시상을 밖으로 표현하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팔괘로 살펴보면 첫째 단락도 기쁨이며, 둘째 단락도 기쁨이 가득한 글쓰기이다. 그렇다고 기쁨의 감정이라고 해서 배치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설명적 언어의 나열을 이룬 기쁨과 환희의 들뜬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닌 장구하면서도 도도히 흐르는 강물과 같은 내적 희열의 몸짓을 표현해야 할 것이다. 중택태의 변효를 살펴보면 호괘는 자신을 돌아보는 시이며, 내면의 깨달음과 자성의 시인 ䷤ 풍화가인(風火家人)이며, 도전괘는 여성적 어조의 글쓰기인 ䷸ 중풍손(重風巽), 배합괘는 지엽적인 문장이나 표현을 앞에 두고 뒤에 전체적이고 결론적인 내용이나 핵심 표현을 놓는 방법인 ䷳ 중산간(重山艮), 착종괘는 ䷹ 중택태(重澤兌)이다. [출처] 58. 중택태|작성자 김기덕   59. ䷺ 풍수환(風水渙)   풍수환은 위에 바람(☴:巽)이 오고 아래에 물(☵:坎)이 놓여 물 위에 바람이 부는 상으로 잔잔한 수면에 파문이 흩어지는 괘이다. 손순한 덕으로 안의 중심을 지키면서 밖으로 그릇된 것을 흩어내는 이치가 있고, 배를 띄움에 있어 조류와 바람의 이치를 이용하는 의미도 있으나 詩에서는 각각을 주제의 통일이나 의미의 연결, 이미지의 조합에 신경 쓰지 않고 따로따로 흩어놓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효로 살펴보면 첫 문장은 음의 문장, 둘째는 양의 문장, 셋째, 넷째는 음의 문장, 다섯째, 여섯째는 양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셋째, 넷째에서 음이 겹치고, 다섯째, 여섯째에서 양이 겹치고 있으나 배치만 음적이고 양적인 요소의 중복일 뿐 반드시 내용상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용에 상관없이 이미지를 배치하여 이미지의 확산, 사고의 확장, 통일된 주제의식 등을 흩어놓고 분산시키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접근해 보면 地는 소양(⚎)이고, 人은 노음(⚏), 天은 노양(⚌)으로 천 ․ 인 ․ 지가 각각 다른 모양을 형성하고 있다. 이는 天과 人과 地가 각각 다른 이미지, 다른 사고, 다른 표현의 기법을 사용할 수 있다. 반드시 주제를 일치시킬 필요가 없지만, 제목에 따라 확장의 폭을 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세 개의 단락으로 형성된 표현이 각각 다를 뿐만 아니라 이질적인 내용을 갖게 됨으로 아주 낯설고 어리둥절한 표현을 만드는 방법이다. 팔괘로 살펴보면 물 위에 부는 바람의 상으로 바람이 물결을 흩어놓는 상태를 의미한다. 하나로 모아지고 뭉쳐지게 하는 주제의식이나 통일된 이미지에 대한 의도적인 분해, 흩어놓음, 산만하게 하기와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 연관관계가 없는 것들을 배치시킨다면 시로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질 수가 있다. 하지만 이는 분열된 현대인의 의식구조에 대한 반영이며, 자칫 광인의 중얼거림이나 몸짓 같은 것을 의미하여 비정상의 정상화를 꾀하는 시쓰기라고 할 수 있다. 풍수환의 변괘 중 호괘는 ䷚ 산뢰이(山雷頤)인데, 頤는 기르는 것을 의미한다. 재물이나 덕을 두루 베풀어 흩어야 하니 이것이 기르는 道라고 할 수 있다. 도전괘는 ䷻ 수택절(水澤節)이다 渙은 흩어지는 것이니 흩어지다 보면 어딘가에 걸려 멈추기 때문에 節이 되는 것이다. 배합괘는 渙의 반대인 ䷶ 뇌화풍(雷火豊)이고, 착종괘는 ䷯ 수풍정(水風井)으로, 渙은 흩어지는 것이지만 井은 두레박으로 샘물을 끌어올리는 象이라서 시의 다양한 변화를 꾀할 수 있다.   [출처] 59. 풍수환|작성자 김기덕   60. ䷻ 수택절(水澤節)   수택절은 물(☵:坎)이 위에 있고 연못(☱:兌)이 아래에 놓인 象으로 차면 넘쳐흐르게 하고 비면 고여 모이게 하는 것과 같다. 또한 연못에 담겨진 물처럼 물은 담기는 그릇에 따라 모양을 갖추고 절제를 하듯 시쓰기에서도 절제된 언어의 선택, 정해진 운율, 함축적 표현이 있는 형식을 의미한다. 節은 서방을 거쳐 북방에 이르는 괘상으로 저녁을 지나 밤이 오고 가을을 지나 겨울이 오는 때라서 일을 마치는 마디를 의미한다. 신체의 관절, 초목의 마디, 24절기 등이 모두 節의 이치이며, 절도, 절제 등을 뜻한다. 효로 살펴보면 첫째, 둘째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이루어지고, 셋째, 넷째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다섯째는 양의 문장, 여섯째는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양, 양, 음, 음, 양, 음으로 통일된 절제를 가지고 있다. 내호괘 震(☳)은 대나무가 뻗는 象이요, 외호괘 艮(☶)은 마디를 맺는 象이다. 시의 전체적 형식에 절도가 있고 대나무의 마디와 같은 함축적 끊음이 있어야 한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는 노양(⚌)이고 人은 노음(⚏) 며, 天은 소음(⚍)인데, 天 ․ 人 ․ 地가 각각 다른 모습을 이루어 확연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이는 대나무가 마디를 이루어 뻗어가듯 한 단락마다 함축적 절도를 이루고 있어서 압축된 표현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팔괘로 보면 연못에 가두어진 물을 의미하는데, 흐르는 성질의 물을 가두어 하나의 형태를 만들듯 유려한 언어의 흐름을 막고 꼭 필요한 형태의 이미지를 절도 있게 그리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연못의 형태는 여러 가지이다. 네모질 수도 있고, 동그랄 수도 있고, 길쭉한 타원형일 수도 있다. 이러한 연못의 모양이 시인이 그리고자 하는 이미지이다. 연못의 물은 언어다. 언어를 통해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연못을 그리는 방법이다. 언어의 절제와 함축적 표현이 필요하고 선명한 이미지를 그릴 수 있어야 한다. 수택절의 변괘를 살펴보면 호괘는 ䷚ 산뢰이(山雷頤)인데, 시작하고 마치는 주기를 뜻하니 이로 말미암아 節의 度數가 있게 된다. 도전괘는 분열된 현대인의 의식구조에 대한 반영이며, 자칫 광인의 중얼거림이나 몸짓 같은 것을 의미하여 비정상의 정상화를 꾀하는 시쓰기라고 할 수도 있는 ䷺ 풍수환(風水渙)이며, 배합괘는 건너뛰기가 있는 하이퍼적인 글쓰기인 ䷷ 화산여(火山旅), 착종괘는 ䷮ 택수곤(澤水困)으로 못 속의 물이 아래로 스미어 땅이 마르니 곤궁한 象이다. [출처] 60. 수택절|작성자 김기덕   61. ䷼ 풍택중부(風澤中孚) 풍택중부는 위에 바람(☴:巽)이 놓이고 아래에 연못(☱:兌)이 있는 象으로서 안으로 기뻐하고 밖으로 부드럽게 행하니 중심이 미더운 모습이다. 孚는 마치 어미닭이 알 속에 들어있는 어린 새끼(子)를 부화시키기 위해 발톱(爪)으로 이리저리 굴리며 품고 있는 뜻이 들어 있는데, 中孚의 象은 강한 양에 의해 유약한 음이 안으로 길러지는 모양으로 부모의 품에서 어린 생명이 자라나는 현상을 상징한다. 시에서 풍택중부는 자연이나 주변 사물, 또는 상황에 의해 시인 자신이나 인간의 유약한 마음에 대한 에너지 공급과 같은 시쓰기이다. 그런 만큼 자연이나 주변 사물은 강하게 그려지고 시인 자신이나 인간은 한없이 나약한 존재로 표현된다. 효로 살펴보면 첫 문장과 둘째 문장, 다섯째와 여섯째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구성되고 중간에 있는 셋째, 넷째 문장만 음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외부적인 자연이나 사물은 강하고 크지만 시인이나 다른 인간의 존재는 나약하고 작은 존재로 표현되어 자연이나 외부적 사물에 의해 힘을 얻고, 꿈과 희망이 키워지는 형태의 시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접근하면 地는 노양(⚌)이고 天도 노양(⚌)인데, 人만 노음(⚏)으로 人은 절망과 어둠에 처한 상황이지만 주변의 地와 天은 광명한 태양과 같아서 강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 또한 풍택중부는 가운데가 빈 배와 같은데, 가운데가 비었기 때문에 바다를 건너고 강을 건널 수 있다. 이는 마음을 비운 사람과 같아서 세상의 바다를 건너는 데, 어려움이 없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마음을 비운 시쓰기도 중부에 속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팔괘로 보면 연못 위에 부는 바람이다. 기쁨이 가득한 연못 위에 부는 부드러운 바람은 기쁨을 배가시키며 삶에 지친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주기에 충분하다. 주변 환경이나 사물에 의해 힘을 얻는 배치가 중부이며, 힘과 위로를 얻는 시쓰기이다. 풍택중부의 변괘를 보면 호괘는 ䷚ 산뢰이(山雷頤)인데, 기르는 양육의 공이 있는 상이다. 頤는 上下의 두 양이 안의 음들을 기르는 것이요, 중부는 안의 두 음이 허한 상태로 양들을 미덥게 좇는 것이다. 배합괘는 ䷽ 뇌산소과(雷山小過)로 소과는 산 위에 나무가 자라는 象으로 일단 그쳤다가 조금씩 밖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착종괘는 ䷛ 택풍대과(澤風大過)로 本未가 허약해 엎어지는 象을 이루고 있다. [출처] 61. 풍택중부|작성자 김기덕   62. ䷽ 뇌산소과(雷山小過)   뇌산소과는 위에 雷(☳:震)가 있고 아래에 山(☶:艮)이 놓여 있는 상이다. 안으로 그치고 밖으로 움직이는 힘이 있으므로 일단 멈추었다가 나아가게 되니 소과이며, 二陽四陰의 괘로서 陰(小)이 과도하니 小過가 된다. 小過의 互卦가 大過임을 미루어 볼 때 모든 것이 소과하는 가운데 대과를 이루니 하루가 30번 거듭하여 한 달이 되고(小過), 한 달이 12회 거듭하여 한 해를 이룸(大過)과 같다. 소과는 작은 일은 가능하고 큰일은 가능하지 못하여 나는 새가 소리를 남김에 올라가는 것은 마땅하지 않고 내려오는 것은 마땅한 듯하면 좋은 상황이다. 시에서는 시인 주변에 음의 배치가 많지만, 주변에 영향을 받지 않고 정작 시인은 희망이 가득한 상태의 글쓰기이다. 절망적 상황,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어머니와 같은, 슬픔과 고통의 현실을 덮는 눈의 부드러운 빛깔이 색칠하는 것 같은 표현을 의미한다. 효로 풀이하면 첫째와 둘째 문장은 음의 문장이며, 셋째와 넷째는 양의 문장, 다섯째와 여섯째는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음적 요소가 강한 배치를 이루고 있다. 또한 소과는 六二와 六五의 柔가 중을 얻고, 강은 中正을 얻지 못했으니, 큰일은 할 수 없고 작은 일은 가능하듯 시의 흐름이 부드럽고 여성적이며 작고 소심한 감정의 전개를 이룸이 특징이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와 天은 노음(⚏)이며, 人만 노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천지만물은 음으로 가득 차 있지만 사람만 양으로 이루어져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는 네 음이 두 양보다 많은데다 음이 중을 얻고 양은 중을 잃었으니 음이 형통하는 상황이다. 사람이 양을 추구하려 하나 세상과 하늘의 이치는 음 쪽으로 기울어 있어서 큰 뜻을 이루기가 어렵고 막힘이 있는 모양이다. 첫째와 셋째 단락은 음의 단락을 이루고, 둘째 단락만 양의 단락을 이루어 전체적으로 음적 배치의 강세를 이루고 있다. 팔괘로 풀이하면 뇌산소과는 상괘와 하괘가 서로 등을 지고 있는 모습이다. 서로 지향하는 것이 다르고 서로의 마음이 괴리하고 있다. 훌륭하고 능력 있는 지도자는 지위를 얻지 못하고 소인배들만 기를 펴고 있어서 악이 선을 압도하는 상황이다. 과잉의욕을 버려야 하고 확대 전진을 시도하지 말아야 하므로 소극적, 여성적 내용의 시쓰기이다. 또한 이 괘는 나는 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양효인 삼, 사효는 새의 몸을 의미하며, 나머지 음효는 각각의 좌우 날개를 상징한다. 여기에서 나는 새는 위로 오를 수 없다. 그것은 대기의 압력을 거슬러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래로 내려오는 것은 순조로워서 땅의 인력에 편승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연에 역리하여 거스르지 말고 순순히 세상을 받아들이는 자세의 글쓰기이다. 뇌산소과의 호괘는 ䷛ 택풍대과(澤風大過)인데, 대과는 크게 나아가는 뜻이 있는 양의 지나침이요, 일월의 운행을 의미하기도 한다. 배합괘는 ䷼ 풍택중부이며, 착종괘는 ䷚ 산뢰이(山雷頤)이다. 산뢰이는 一陽이 始發하여 一陽이 終止하기까지의 과정으로 산 아래 초목이 길러지는 상이다 [출처] 62. 뇌산소과|작성자 김기덕   63. ䷾ 수화기제(水火旣濟)   수화기제는 물(☵:坎)이 위에 있고 불(☲:離)이 아래에 놓여 있는 象으로 물은 달을 상징하며 불은 해를 상징하여 日月이 서로 만나 밝게 비추는 水昇火降을 이루고 있다. 또한 卦體의 모든 효들이 제 위치에 바르게 처하고 서로 응하니 旣濟이다. 효의 正位를 따진다면 초효는 양, 이효는 음, 삼효는 양, 사효는 음, 오효는 양, 상효는 음으로 이루어지는데, 수화기제는 모든 효들이 제 位를 바르게 얻어 음양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시에서는 감정과 지성의 조화, 격정과 인내의 조화, 어둠과 밝음의 조화, 남과 여의 조화와 같은 윤리적이며 정석적인 시쓰기를 의미한다. 효로 살펴보면 첫 문장은 양의 문장, 둘째는 음의 문장, 셋째는 양의 문장, 넷째는 음의 문장, 다섯째는 양의 문장, 여섯째는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형식으로 정 위치에서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정 위치라 함은 상식적이며, 윤리적이며, 원칙적인 관계를 말하며, 합리적인 배치 및 조화로운 색채의 조합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계에서는 마음의 정서적 안정과 편안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형식으로 완성도가 높은 시쓰기이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와 人과 天이 똑같은 소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음은 內剛外柔의 성질로 시에서는 강한 감정의 절제적 표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첫째 단락, 둘째 단락, 셋째 단락의 흐름에 차이가 없으며, 안정적이고 심도 있는 감정의 표현을 이룰 수 있다. 팔괘로 보면 수화기제는 물을 의미하는 坎卦가 상괘로 놓이고, 불을 의미하는 離卦가 하괘로 되어 있다. 물은 아래로 흐르는 성질이 있고 불은 위로 타오르는 성질이 있다. 물은 위에 있으므로 그 마음은 아래로 향해 있고 불이 밑에 있으므로 그 마음은 위로 향하고 있어서 서로 만나 교합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솥에 물을 붓고 불을 때면 물과 불의 기운이 합쳐져 물건을 삶고 익히듯이 기제는 각기 정당한 위치를 얻고 서로 협력하는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에 시쓰기에서도 정석적인 배치를 통해 타당한 관계를 만들고 정서적, 지적 관계를 충실히 엮어 감동을 배가시키는 시쓰기의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수화기제의 변괘를 살펴보면 호괘, 도전괘, 배합괘, 착종괘 등 모든 괘가 ䷿ 화수미제(火水未濟)를 이루고 있다. 기제는 모든 효가 제 位를 바르게 얻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으나, 내괘는 불이고 외괘는 물로 이루어져 먼저는 밝으나 나중은 험난한 일이 생김을 의미하듯 수화기제의 변괘는 모두 서로 화합치 못하는 화수미제로 이루어져 있다. 정석적 시쓰기에서 변형된 것은 다 변칙적인 시가 됨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출처] 63. 수화기제|작성자 김기덕   64. ䷿ 화수미제(火水未濟)   화수미제는 위에 불(☲:離)이 놓이고 아래에 물(☵:坎)이 놓인 象으로 불은 위로 타오르고 물은 아래로 흘러 서로 사귀지 못하는 모양을 이루고 있다. 또한 모든 효가 정상적인 제 위치를 얻지 못하고 부정한 상태에 있으므로 未濟(일이 아직 끝나지 않음)이다. 효의 정 위치는 초양, 이음, 삼양, 사음, 오양, 상음의 관계를 이루어야 하는데, 그 반대로 초음, 이양, 삼음, 사양, 오음, 상양의 관계를 이루어 완전히 상반된 모양을 갖고 있다. 이는 시에서 정석적이지 못하고 비상식적이며, 비정서적, 부조화의 관계적 배치를 의미한다. 효로 살펴보면 첫 문장은 음의 문장, 둘째는 양의 문장, 셋째는 음의 문장, 넷째는 양의 문장, 다섯째는 음의 문장, 여섯째는 양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三陰三陽이 모두 바른 위에 처하지 못하고 있다. 내괘가 坎水이므로 험난한 데 빠져 건너지 못하는 형국이며, 외호괘도 坎水이므로 橫流하는 상이다. 불은 불대로 물은 물대로 향하는 성질로 상극을 이루고 있지만 물이 불을 끄고 불이 물을 하늘로 오르게 하듯 그 속에 또 다른 상생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어 시쓰기에서도 반역적인 관계, 뒤집는 관계, 도전적, 역전의 배치를 통해 의미를 강화시키고 표현을 도발적, 충격적으로 이끌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보면 天과 人과 地가 모두 소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양은 內柔外剛, 內貧外富적인 모양으로 심리와 표현의 격차, 의지와 도전의 격차를 만들며, 배치의 관계가 상이하고 비범하며 생경한 상태를 말한다. 첫째 단락과 둘째 단락, 셋째 단락이 같은 형태를 이루며, 의식적인 불편한 관계를 만들고, 무언가 새로운 조합과 새로운 정비 및 시작이 필요한 관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팔괘로 살펴보면 불이 물 위에 있는 상태로 위치가 적당하지 못한 것을 말한다. 이 괘의 형태는 주역의 논리에 한 개도 적당한 위치에 있지 않다. 천지와 일월에 이르기까지 제 위치를 얻는 것처럼 중요한 일은 없다. 뒤죽박죽된 관계를 의미하며 아직 미완성을 상징한다. 주역의 법칙은 영원히 미완성이며 인생도 영원히 미완성이다. 또한 시도 영원한 미완성이며, 영원한 미스테리인 것이다. 시의 정석은 없다. 사고의 원칙은 없다. 완벽한 시를 쓴 것 같지만 실은 거기서부터 시는 걸음마 단계의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진다. 사물의 배치에 정석은 없다. 불완전한 배치, 비뚤어진 배치가 곧 시의 시작이며 사고의 중심인 것이다. 화수미제의 변괘는 호괘, 도전괘, 배합괘, 착종괘 모두 수화기제이다. 기제는 미제를 낳고 미제는 기제를 낳아 끝없이 운행한다. 주역 上經의 머릿괘인 乾 ․〮 坤은 도전괘, 호괘, 착종괘가 모두 불변이고 다만 서로 배합관계만 이루므로 乾坤이 부동의 본체임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기제, 미제는 상호 끝없이 변동하여 오가니 건곤은 不易의 몸이요, 기제 ․ 미제는 交易의 本이라 할 수 있다. [출처] 64. 화수미제|작성자 김기덕     * 주역적 시쓰기에 대한 기대   이상으로 64괘의 시쓰기 방법을 제시했다. 64가지의 시쓰기 방법에서 변효의 방법까지 더하면 실상 시쓰기의 방법은 320가지의 방법으로 나뉠 수 있다. 여러 가지 방법이 좋은 시를 쓰는데 꼭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한 가지의 방법으로라도 제대로 시를 쓸 수 있다면 그 또한 훌륭한 시인일 것이다. 현 시대의 시인들은 저마다 자신에 맞는 방법으로 시를 쓰면서 형식보다는 내용에 치중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적절히 표현하여 전달하는 데 초점을 둔 시에서는 다양한 방법들이 무의미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의도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일방적인 설득의 시는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일방적이던 TV나 라디오 등의 매체들이 이제는 쌍방의 소통을 중시하고 있다. 시도 일방적인 자기감정의 전달에서 벗어나 쌍방소통을 이루기 위해선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게 되었다. 일방적인 전달의 시는 주제의 통일이 가장 중요했다. 하지만 독자가 먼저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시는 주제성보다는 회화성이 중요하다. 언어로 그린 그림을 보고 독자들은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그림은 색의 배치이며, 사물의 구도인 것이다. 이러한 구도를 만들고 색을 다양하게 배치하기 위해선 다양한 시쓰기의 방법이 필요하고, 배치에 대한 변화가 필요하지 않을 수 없다. 위에서 열거한 주역적 방법은 배치의 변화이다. 주역적 시쓰기는 배치의 다양한 변화를 통해 새로운 구도를 잡고 천변만화의 그림을 그리기 위한 것이다. 기의 흐름에 따라 천지만물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이치를 밝힌 주역을 해석하고 괘의 모양에 따라 언어를 배치함으로써 시인이 의도하는 무궁무진한 세계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하나의 방법에 대해 예가 될 수 있는 시를 제시할 수 있었다면 더 설득력이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다. 기존의 시에선 이 방법들을 뒷받침할 만한 적합한 시를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일일이 예시를 쓰면서 이론을 정리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증명되지 않은 시창작법처럼 치부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론을 먼저 정리하기로 하였다. 앞으로 남은 나의 시간들은 이 이론을 증명하기 위한 시를 쓰는데 채워질 것이다. 또한 이 이론에 공감하는 많은 시인들이 나타나서 더 많은 연구를 하고 미비한 점들을 채워나갈 것이라고 확신한다. [출처] 주역적 시쓰기에 대한 기대|작성자 김기덕    인쇄 블로그 카페 북마크 메모 폴라 보내기  댓글 쓰기                   [스크랩 ] 배치의 이론과 마인드맵의 시쓰기 /김기덕  시창작론숲  2017. 10. 27. 22:13 http://blog.naver.com/shunzi75/221126893131 전용뷰어 보기   [스크랩 ] 배치의 이론과 마인드맵의 시쓰기               김기덕(시인)     한 시학도에게 주는 공개편지 문덕수 함께 시를 쓰는 입장에서 시에 관한 이야기라면 이러한 공개 서한도 주고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론이나 시학에 관한 것도 물론입니다. 나는 우선 김기덕 형에게 많이 독서하고 많은 고전(古典)을 읽으며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음에 대하여 사랑과 경의를 표합니다. 소박한 감정을 즉흥적으로 노래하던 옛날과는 달리 현대의 시는 많이 독서하고 많이 공부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시는 구한말 이후 지금까지 관념일변도(觀念一辺倒)로 흘러왔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사의 기술이나 비평도 관념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역사를 자본과 노동, 권력과 소외라는 2분법으로 보거나 헤겔이라는 철학자가 말한 주인과 노예의 대립구조의 연장 선상에 있는 관념주의로 보아 온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장하는 하이퍼시 운동은 시 자체가 관념화에 너무 깊이 빠지는 사태에 쐐기를 박고, 역사를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하나의 관념으로 도색(塗色)하는 것을 용인할 수 없는 데서 출발한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역사 안과 역사 너머에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이퍼시만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시라고 보지 않으며 하이퍼시의 이론만 유일무이의 시학이라고 우기는 것도 아닙니다. 배재학당에서 한 달에 한 번 열고 있는 금요시론포럼도 이제는 꽤 오래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법 그 형식과 전통도 갖게 되었습니다. 하이퍼시의 이론이 계기가 되어서 또 다른 이론도 파생할 수 있습니다. 나는 김기덕 형의 『이미지의 공식』을 다 읽어 보았습니다. 이 글의 제목인 ‘공식’에 대해서 정말 공식이라는 것이 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시를 위한 이미지를 창조하는 공식이라는 것이 정말 있을까 하고 생각하고 말입니다. 김형의 글에서 김형의 광범위한 독서량을 생각하면서 일종의 사랑의 생각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김형께서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저서를 읽은 것을 먼저 거론하고 있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들뢰즈와 가타리는 수목상(樹木狀)에서 장구한 서양 철학사에서 철학적 사유의 모델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수목상에서 일자중심(一者中心)에서 2항 대립형으로 진화한다는 것을 보이고 있고, 이러한 발전형태에서 벗어나야 하며, 그러한 이론을 위하여 리좀(rhizome)을 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리좀에 대한 김기덕 형의 이해도 대체로 이와 같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리 눈앞에 있는 한 그루 나무를 봅시다. 나무를 보면 하나의 큰 줄기가 있고, 줄기에서 가지가 나와 있습니다. 그 가지에는 또 작은 가지가 갈라져 나 있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본 것은 이러한 수목상의 조직이 철학을 비롯해 인간의 사유라든지 사회조직의 모델로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화도식에서 말하는 계통수(系統樹)라고 말합니다만 이 나무에서 초월적인 일자(一者)인 이 줄기를 중심으로 이항대립(二項對立)으로 진행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변증법이나 분석적 사유는 트리(tree) 조직의 원리와 같다고 본 것입니다. 리좀은 근경(根莖), 지하경을 의미한다고 사전에 적혀 있습니다. 칸나나 고구마 덩어리처럼 어떤 중심이 없이 이질적인 선이 교차하면서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 망상조직(網狀組織)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뇌의 신경조직도 리좀이라고 합니다. 스크럼, 럭비, 크세나키스(Iannis Xenakis 1923~ )의 악보(미케네 a) 등도 리좀적이라고 합니다. 조금 더 인용해 보겠습니다. “전통적으로 사유나 글쓰기에는 하나의 중심이 주체가 되어 자신의 관념들을 표현한다. 예컨대 언어에는 기본적인 구조나 문법이 존재하고, 그것이 프랑스어, 독일어, 인도어와 같이 상이한 방식으로 표현된다고 본다. 이런 사유와 글쓰기의 스타일은 판명한 질서와 방향을 생산하기 때문에 수목(나무 같은)인 것이다. 대조적으로 리좀학(이 책의 저자는Rhizome과 Rhizomatics을 구별해서 쓰고 있다. 인용자)은 임의적이고 탈중심화 되며, 증식하는 접속들을 만들어낸다. 언어의 경우 우리는 근원적인 구조나 문법이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단지 상이한 발화 체계들과 스타일들이 있다는 것, 이런 모든 차이들에 대한 ‘나무’ 혹은 ‘뿌리’를 찾는 시도가 사후적 발명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리좀적 방법은 근거와 결론, 원인과 결과, 주체와 표현 사이의 구별이나 위계에서 출발하지 않는다”(클레어 콜브락 지음, 한정헌 옮김 『들뢰즈 이해하기』 크린비, 2007, 32쪽). 다시 말하거니와 김기덕 형도 리좀에 대해서는 대체로 이와 같이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또 하나 ‘배치’ 문제가 있습니다. 김 형께서는 “시는 적절한 배치에 의해 그 차원을 달리 한다. 배치는 계열과 달리 어떤 개개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것이라기보다 연결된 전체를 포괄하려는 개념이다”라고 말하고 그 다음엔 “진달래꽃 하면 김소월이 생각날 것이다.…… 진달래꽃이 김소월의 시에서처럼 길과 접속한다면 이별이나 영접을 상징할 수 있다. 만약 진달래꽃이 여자의 머리와 접속한다면 장신구가 되거나 정신이상이 될 것이다. 진달래꽃이 병이나 도자기와 접속하면 진달래주가 될 것이고, 쌀가루나 밀가루와 접속하면 화전이나 꽃밥으로 전환될 것이다.”라는 대목으로 연속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에 대해서 한 마디로 ‘배치’ (agencement)에 관한 책이라고 합니다만, 굳이 이 말을 인용하는 것은 김기덕 형의 독서 범위가 넓음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에게선 이 배치를 계열화(mise en séries)라는 개념과 함께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종의 훌륭한 철학서인 『노마디즘』 (이진경, 자유, 2002)에서는 여러 가지 축구공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축구공 이야기는 김 형의 여러 가지 배치 이야기와 유사합니다.(동서, 58쪽) 사람, 물건, 동물, 글자 등의 어떤 것과도 연결되어 어떤 의미를 만드는 계열을 만든다고 말합니다. 김 형은 “배치 안에서 각 항은 접속하여 새로운 이미지나 상징을 만든다”라고 말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너무 얘기가 길어짐을 염려하면서 「주역」 (周易) 쪽으로 넘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는 김 형께서 어째서 「주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하이퍼시의 이론 정립을 위해 하이퍼시의 구조 중에 주역의 기본 이론과 하이퍼시가 관련이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또 주역의 괘(卦)의 도형과 기호(sign)는 밀접한 관련이 있지 않는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주역」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습니다. 따라서 주역에 관한 김기덕 형의 글을 잘 모르겠으나 다만 시의 구조와 「주역」 원론의 접점 같은 것이 더욱 밀도 있게 연구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김 형께서는 더욱 건강하고 조신(操身)하면서 치열하게 연구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나는 건강이 안 좋아서 손도 떨리고 글도 조리 있게 쓰지 못합니다. 이 글을 발행하고자 하는 책 머리에 서문 대신에 편지 형식으로 놓아도 무방합니다. 내내. [출처] 한 시학도에게 주는 공개편지|작성자 김기덕 수목적 시쓰기 수목적 시쓰기는 순차적, 인과적, 논리적인 글쓰기로 선형적 전개를 이룬다. 나무의 뿌리에서 줄기로, 줄기에서 가지로, 가지에서 잎으로 확장하든지, 그 반대로 축소되는 형식을 갖는다. 수목적 시의 특징은 주제의 통일이다. 하나의 시엔 하나의 주제가 필요하고, 주제에 어긋나는 내용은 제거된다. 예를 들면 정원사가 기린 모양의 나무를 만든다면 기린의 모양을 벗어난 가지는 잘라내어야 한다. 시어들은 주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유사성이나 인접성에 의해 동원되며, 그 접속관계는 대부분 1:1의 관계를 이룬다. 이1:1의 관계는 진달래꽃이 배치에 따라 여러 각도의 이미지로 사용될 수 있지만, 김소월의 시에서처럼 길과 배치되어 이별의 관계로만 접속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또한 1:1의 관계로 접속되었다 하더라도 완전히 독립적인 개체가 아닌 유사성이나 인접성에 의한 요소들의 집합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수목형의 대표적인 시는 서정시이다. 서정시의 장르적 특징은 외적으로 리듬과 장단을 갖추고, 내적으로는 구조나 사상 및 정서 등의 요소와 깊은 관련을 맺는다. 내용적 특징으로는 음악성, 서정성, 주관성을 가지며, 주제도 한 가지이고 사상, 감정도 한 가지로 이루어진다. 서정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면화된 주관적 서정이며, 내적 체험의 표현이다. 객관적 현실을 주관적 체험으로 전환시켜 표현함으로써 세계와 자아가 대립하거나, 융합하거나, 세계를 자아의 내면으로 몰입하게 하는 것이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바람은 머리 풀고 울었습니다. - 중략- 탄환을 쫓는 비명 소리가 절벽에 메아리로 박힌 뒤 터진 틈새로 포연이 솟아올라도 수의처럼 상처를 가리는 안개 군화 발굽에 실신한 백사장은 하류를 따라 허연 나신(裸身)을 드러내고 뭉개진 젖가슴 위로 술 취한 시대가 비틀거리며 지나갑니다. 굽이굽이 한 서린 강물 속으로 백골은 뜨물같이 풀어져 긴 그림자를 끌며 자지러지는 포말 -김기덕의 「한탄강」 일부 필자의 시 「한탄강」은 한탄강을 주관적인 감정으로 재해석하여 쓴 것이다. 「한탄강」처럼 수목적인 시는 시인의 생각이 선명히 드러나야 하고 기, 승, 전, 결이든 기, 서, 결이든 정해진 방식을 통해 주제의 통일을 추구한다. 다양하게 외적, 내적으로 변형된 형식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서정성을 바탕으로 한 근본형식을 토대로 한다. 그래서 시인의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고, 이해하기 쉬워서 머리로 생각하기보다는 가슴으로 느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나의 중심에서 줄기로, 가지로, 잎사귀로 뻗어간 사고의 단순성이 이제는 식상한 시대가 되었고 진화된 현실세계를 표현하고 반영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출처] 수목적 시쓰기|작성자 김기덕   유목적 시쓰기 배치를 통한 시쓰기는 정주적 사고에서 벗어나 이질적인 모든 것에 대한 새로운 접속 가능성을 열어놓고 다양성을 추구하는 리좀적 글쓰기이다. 유목적이란 단순히 정주성에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사고의 확장과 무한한 연결 가능성을 통해 다양체를 추구함을 의미한다. 서정시에서의 유추나 상상력을 통한 사고의 확장은 주제를 뒷받침하기 위한 한계 내에서 직유적, 은유적, 상징적 기법들을 통해 구현되어 왔다. 이러한 의식의 확장을 위해 유사성이나 인접성의 원리가 적용되었고, 아이러니나 패러독스 같은 방법이 동원되었다. 직유나 은유는 본의가 비유의 대상인 유의와 거의 1:1의 관계를 이루고 본의와 유의가 드러난 상태지만, 상징은 1:1의 관계를 형성하며 유의만 남고 본의는 숨어 있는 것이다. 표면에 드러난 유의 속에 숨겨진 본의는 명백하거나 확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대신 되거나 암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징은 다양체가 내적으로 숨겨져 있는 것이며 관념성을 통해 의미망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다양체를 만드는 토대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유목적 글쓰기에서의 다양체는 첫째, 차이가 차이 자체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동일자의 운동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셋째, 차이가 어떤 하나의 중심, 일자로 포섭되거나 동일화되지 않는 존재여야 한다. 이러한 원리로 볼 때 다양체는 서정시의 비유나 상징적 기법에서 쓰이던 인접성과 유사성의 끌어오기 기법에서 더욱 멀어진 의미의 관계망을 요구하고 있다. 서정시는 예를 들면 화폐의 척도나 획일적인 발견을 통해 이질적인 것이 나타났을 때 다양체 확장 계기보다 사고의 다양성을 묶는 단순화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하나의 원리로 환원되지 않는 이질적 집합을 이루고 하나의 추가가 전체의 의미망을 크게 다르게 할 수 있는, 접속되는 항들에 따라 그 성질과 차원 수가 달라질 수 있는 글쓰기를 유목적(리좀적) 글쓰기라고 말할 수 있다. [출처] 유목적 시쓰기|작성자 김기덕 1)     리좀이론 rhizome은 뿌리줄기라는 말로 하나의 중심뿌리에서 중간뿌리로, 중간뿌리에서 잔뿌리로 연결되는 관계가 아니라 하나의 줄기에서 옥수수나 보리의 수염뿌리처럼 중심뿌리가 없이 분기되고 접속되는 관계를 말한다. 둥치에서 큰 가지가 뻗어나가고 큰 가지에서 잔가지가 뻗어서 잎이 나오는 구조가 아니라 단번에 근원에 닿아 있는 구조로서 모양이 다를 뿐 모든 것이 똑같은 실체인 것이다. 고전적 글의 구성방식은 뿌리(결론)로 귀착되는 나뭇가지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리좀적 글쓰기는 하나의 결론으로만 끌고 가지 않는 모호한 집합의 다양체이며 언표행위의 집합적 배치이다. 질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에서 언급하고 있는 리좀적 특징을 본다면 나무의 뿌리와 달리 리좀은 어떤 지점에서든 다른 지점과 연결 접속한다. 반드시 자신과 동일 본성을 가진 특질과 연결되지 않으며, 하나로도 여럿으로도 환원될 수 없다. 리좀은 단위로 이루어지지 않고 차원들 또는 방향들로 이루어져 있다. 리좀은 시작도 끝도 갖지 않고 중간을 가지며 중간을 통해 자라고 넘쳐난다. 고른 판 위에서 펼쳐질 수 있는 선형적 다양체를 구성하며, 자신의 차원을 바꿀 때 본성이 변하고 변신한다. 리좀은 선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일대일의 대응관계의 집합에 의해 정의된다. 분할선들 성층작용의 선들이 여러 차원을 이루고 도주선 탈주선을 따라 본성이 변하며 변신한다. 리좀은 변이, 팽창, 정복, 포획, 꺾꽂이 등을 통해 나아간다. 항상 분해될 수 있고 연결 접속, 역전, 수정될 수 있는 지도와 관련되며 나무형태와는 완전히 다른 모든 관계이다. 말하자면 모든 종류의 생성(되기)이다. 논리를 세우고, 존재론을 뒤집고, 기록을 부숴버리고, 시작도 끝도 무화시키는 방법으로 사물들 사이에서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가거나 반대로 가는 위치를 정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 출발점도 끝도 없는 시냇물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출처] 리좀이론|작성자 김기덕   리좀적 글쓰기의 활용 리좀적 이론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글쓰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무한히 분할 증식해 가는 중간줄기와 같은 글쓰기는 큰 틀에서 보면 비슷한 개체들의 나열과 같아서 의미나 형태의 수직적 관계를 이루기보다는 수평적 관계를 만든다. 하나가 여럿이 되고, 여럿이 하나가 되는 관계가 아닌 1:1의 접속관계를 만드는 관계는 나열적 수평관계를 만든다. 대등한 관계는 상하관계가 될 수 없으며 속하기도 하고 포괄하기도 하는 크고 작은 관계가 없다면 밋밋한 바닥, 의식의 층이 상실된 평평한 판에 불과할 것이다. 무한히 증식하고 번식해 나간 잔디밭과 같은 것으로 의식의 확장, 다양체의 생성은 가능하나 깊이와 높이를 따지고, 하나의 개체에 속한 크고 작은 기관들, 그 기관을 구성하는 미세적 요소와 같은 의식의 수직적 관계망을 엮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또한 보리나 옥수수와 같은 식물이 수염뿌리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 이 수염뿌리 전체를 하나나 둘로 잡아주고 묶어줄 수 있을 때 수염뿌리의 증식은 의미가 있다. 다양체의 존재는 이 다양체를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철학이나 메시지,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보다 큰 이미지나 배치가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다양체의 존재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서로 아무런 연관 없이 연결된 이미지들을 보고 우린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다양체를 묶어줄 수 있는 줄기는 눈에 보이지 않되 존재해야 하는 것이며, 그것은 결국 하나로 통일된 주제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생명력이 강한 다육식물, 그리고 꺾꽂이나 휘묻이 할 수 있는 식물은 결국 뿌리를 만들고 줄기를 만들고 잎을 만들어 통일성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온전한 리좀적 글쓰기만을 구현하기는 쉽지 않으며, 구현한다 해도 산만하기 쉽고 그 깊이를 보여주기는 어려운 일이다. 리좀적 요소를 하나로 묶어주고 큰 틀을 형성해 줄 수 있는 숨겨진 철학적 요소, 아니면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대표적 요소(주제나 이미지)가 필요하다 [출처] 리좀적 글쓰기의 활용|작성자 김기덕   3) 하이퍼시 현재 일고 있는 하이퍼시의 핵심은 리좀적 글쓰기를 통한 다양체의 추구와 탈관념의 실현이다. 구체적인 내용을 본다면 단선구조의 틀을 다선구조의 틀로 만들며, 시인의 독백적 서술을 객관적 이미지로 표현하며, 정적 이미지를 동적이미지로, 시인을 시의 주체에서 이미지의 편집자로, 고정된 관념에서 다양하게 확산되는 상상으로, 읽고 생각하는 시에서 보고 감각하고 사유하는 시로 바꾸어보려는 현대시의 개혁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시는 대부분 하이퍼성을 띄고 있다. 은유나 상징적 기법들도 하이퍼적인 요소로 사고의 건너뛰기, 확산과 다양성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이퍼시와 은유나 상징시와의 차이는 무엇일까? 은유나 상징은 표현으로 되어 있으나 그 속에 많은 관념을 포함하고 있다.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시구에서 내 마음은 호수로 환치, 건너뛰기를 했으나 그 안에는 넓고, 푸르고, 맑고, 깊은 등등의 관념을 담고 있다. 하지만 하이퍼시의 확장은 이미지만 남고 관념은 사라지는 탈관념의 시이다. 그러나 모든 이미지 자체에는 관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완전한 탈관념의 실현은 불가능하다. 최대한의 관념배제를 통해 시를 읽고 생각하게 하기보다는 그냥 느끼고 감각하게 하려 한다. 그래서 하이퍼시를 읽고 나면 크게 마음에 남는 느낌이 없는 듯할 수 있다. 또한 여러 이미지를 끌어와 복잡하게 만들었는데 그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생각은 단순하고, 단선적이라는 것이다. 형식의 다양체는 이루었으나 내면의 다양체는 만들지 못한 시들이 하이퍼운동의 시들 속에서 엿보인다. 읽기만 복잡하지 생각할 것은 없다는 지적도 많다. 진정한 하이퍼시는 내적, 외적 건너뛰기이며, 탈관념, 즉 관념이 숨어서 보이지 않지만 다양한 관념이 매몰된 이미지의 추구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은유시나 상징시와 무슨 차이가 있는가? 거기엔 결합의 관계, 결합의 방법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관계는 배치의 관계이며, 배치의 합성을 통한 새로운 이미지의 해석을 만드는 것이다. 배치는 방사형으로 퍼져 있으며, 형이상과 형이하, 힉스에서 우주로 연결되어 무한한 사고의 확장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직선적 배치는 서정시의 주류이며, 상징시나 초현실주의적인 시들도 몇몇의 선들로 배치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하이퍼시는 보다 복잡한 배치선들로 구성되며, 평면적인 배치에서 벗어나 무수한 수직선들의 결합인 방사형(상징성의 집합) 배치의 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출처] 하이퍼시|작성자 김기덕   진화된 시쓰기의 목표 진화된 시쓰기는 기존의 수목적 시쓰기의 틀에서 벗어나 유목적 시쓰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유목적 시쓰기는 배치를 통해 다양성을 추구하며, 리좀적 이론을 활용하되 증식하고 확장하는 수염뿌리를 묶어줄 수 있는 줄기와 같은 철학이나 주제성을 추구한다. 이러한 주제나 철학은 보이지 않게 묻혀 있는 매몰된 관념이 되어야 하며 커피 속의 크림처럼 녹아 있어야 한다. 다양체의 선정과 확장의 방법은 유사성, 인접성의 연결과 상징, 욕망의 선 및 탈주선의 활용, story의 변화, 주역적 접속점 찾기 등을 통해 그 방법을 모색한다. 상이한 접속점들의 연결방법은 콜라주 기법이나 파워포인트 기법, 데칼코마니 기법, 마블링 기법, 시퀀스 기법, 주역점의 기법 등을 통해 짜깁기 형식을 취함으로써 단순한 사진찍기에서 벗어나 양탄자를 직조하듯 언어의 직조와 사고의 직조를 꾀한다. 이러한 언어의 구체적 직조방법은 마인드맵을 통해 지도화(地圖化) 한다. 표현의 방법은 설명이나 관념을 없애고 이미지만을 추출하여 이미지의 결합을 이루어야 한다. 그 이미지를 결합하기 위해 이미지에 속하는 단어만 시어라인을 통해 구별하고, 언어의 상징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표면적 이미지의 결합뿐만 아니라 이면적 상징, 의미의 결합을 이룰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원리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빙산이론’인데, 수면 위에 보이는 것은 이미지이지만 수면 속에 잠긴 부분은 이미지에 담긴 상징성이나 관념을 의미한다. 시를 쓰는 것은 수면 위의 빙산을 보여주는 것이고, 수면 속에 잠긴 빙산은 숨겨져서 지식과 경험의 척도에 따라 독자가 파악하고 느껴야 할 부분이다. 시의 내용이 시인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고 독자가 리드하고 주역이 되는 객관적 시가 되어야 한다. 구체적 표현을 위해 문장구성을 위한 선명한 이미지의 명사를 선택하고 동사의 많은 대등항 속에서 살아 있는 생선처럼 펄펄 뛰는 언어의 선택이 필요하다. 또한 설명의 문장을 표현의 문장으로 바꾸는 작업을 통해 표현의 내용적 연결을 추구할 수 있다. 진화적 시쓰기의 중점은 얼마나 많은 접속점을 찾아 자신이 원하는 모양대로 연결하고 표현하느냐이다. 어린아이들의 블록놀이처럼 연결점이 많을수록 자신이 원하는 모양을 만들 수 있듯이 언어에서도 많은 연결점을 찾아 다양하고 자유로운 이미지의 창출과 시적 의미의 확장을 꾀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이런 다양한 접속점의 발견을 위해 기존의 신화·역사적인 시각, 철학적, 종교적, 과학적, 예술적 시각 등등의 시각에서 한국의 꿈풀이 및 주역적 시각을 추가하여 무한한 접속점의 발견으로 다양체의 생산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다양체의 생산은 수평적 시쓰기의 형태에 머물지 않고 수직적, 횡단적 시쓰기가 되어야 하며, 클릭으로 원하는 이미지를 맘껏 끌어올 수 있는 컴퓨터적 가상공간의 시쓰기가 되어야 한다 [출처] 진화된 시쓰기의 목표|작성자 김기덕  배치 시는 적절한 배치에 의해 그 차원을 달리 한다. 배치는 사건이나 계열화와는 달리 어떤 개개의 의미를 포착하려는 것이라기보다 연결된 전체를 포괄하려는 개념이다. 배치 안에서 각 항은 접속하여 새로운 이미지와 상징을 만든다. 여러 접속으로 만들어진 배치가 다른 것들과 관련하여 하나의 커다란 상징을 만든다. 이 과정에서 접속항이 달라지면 절단, 채취의 흐름이 변화하면서 다양체를 형성하게 된다. 하나의 시 속에 많은 다양체가 형성된다면 그 시는 입체성을 띄게 된다. 평면적 시쓰기는 복잡한 현실세계를 보다 예술적인 차원으로 접근, 표현하는 데 미흡하지 않을 수 없다. 한눈에 들어오는 수채화적인 글쓰기보다 피카소적인 글쓰기가 필요하다. 예술의 차원은 복잡도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차원은 소재나 제목을 통해 얼마나 많은 다양체를 보여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다양체는 다양한 종류의 나열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소재나 제목을 통해 얼마나 많은 이미지나 상징의 단면을 보여줄 수 있느냐이다. 평면적인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감각은 단순하지만, 입체적인 대상에서 느낄 수 있는 감각은 다양하다. 밑면을 보고, 윗면을 보고, 안과 밖을 보듯 느낌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입체적 글쓰기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배치를 통해 많은 상징과 이미지를 표현해야 한다. ‘진달래꽃’하면 김소월이 생각날 것이다. “영변에 약산” ,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등으로 표현되는 진달래꽃을 무엇과 배치시킬 수 있을까? 진달래꽃이 김소월의 시에서처럼 길과 접속한다면 이별이나 영접을 상징할 수 있다. 만약 진달래꽃이 여자의 머리와 접속한다면 장신구가 되거나 정신이상이 될 것이다. 진달래꽃이 병이나 도자기와 접속한다면 진달래주가 될 것이고, 쌀가루나 밀가루와 접속한다면 화전이나 꽃밥으로 전환될 것이다. 총이나 군화와 배치한다면 전쟁으로 인한 죽음이나 피를 상징할 것이다. 또한 바람과 배치하면 낙화와 같은 허무를, 강물과의 배치는 자살과 같은 이미지나 상징을 만들게 될 것이다. 질 들뢰즈는 접속항이 달라지면 절단, 채취로 흐름의 변화가 이루어지는데, 이를 기계로 표현한다. 입은 먹는 기계이고, 말하는 기계이고, 섹스의 기계이고, 토하는 항문의 기계가 되기도 한다. 하나의 붉은 깃발이 배치되는 바에 따라 구조신호가 될 수 있고, 혁명군이 될 수 있고, 위험신호가 될 수 있듯이 배치에 따라 새로운 상징과 이미지가 탄생한다. 시의 첫줄을 읽고 마지막 줄을 읽어 그 의미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시라면 평면적인 글이요, 아메바적인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진화된 시쓰기는 변화이고, 새로운 의식의 물고를 트는 것이며, 다이아몬드의 다양한 각을 입체적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출처] 이미지의 공식- 배치|작성자 김기덕 마인드맵을 이용한 시쓰기 1. 논리 마인드맵의 필요성 인간의 두뇌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이들은 복잡한 신경세포로 연결되어 정신활동을 지배하고 있다. 좌뇌는 언어학(말하기, 읽기, 계산, 작문), 논리적, 계열적 과제에 우세한 반면 우뇌는 비언어적, 공간적, 창의적 능력 및 음악, 얼굴 익히기, 자유로운 연구 등에 우세하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인간의 이러한 능력을 최대한 동원하여 한 편의 시 속에 옷감을 직조하듯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상상력, 음악적, 미술적 요소 및 모든 능력을 총 집결하여 하나의 주제나 사물을 개인의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동안 시는 개인적 감정의 흐름대로 써온 것이 주류였다. 시는 개인적 정서를 표현하는 것이기에 당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쓴 시를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시각, 객관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자신의 감정에 치우친 시는 한 쪽으로 기울거나 치우쳐 시의 객관성과 균형을 유지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지나친 의욕으로 가분수가 될 수도 있고, 시심을 뒷받침 해주지 못해 미성숙의 시나 절름발이 시가 될 수도 있다. 또한 구상을 통한 구성을 제대로 하지 않고 시를 쓰게 되면 첫째로 흘러가는 방향을 잡기가 쉽지 않고, 둘째는 중간에 막히게 되면 그 막힌 것을 뚫고 나가기가 쉽지 않게 된다. 셋째로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보고 적절한 조화와 배치를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논리 마인드맵 기법은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고 보완하기 위한 것이다. 시를 쓰기 전에 충분히 자료를 모으고, 방향을 설정하고, 다양한 시각의 변화와 무한한 상상력을 동원하기 위한 것이다. 집을 짓는데 필요한 재료를 미리 준비해서 정리를 해 놓고 집을 짓는 것과 필요할 때마다 그때그때 구해서 짓는 것은 차이가 크다. 또한 재료가 준비되어 있다고 해도 정리가 되지 않고 여기저기 널려 있다면 집을 짓기 위한 시간보다 재료를 찾는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시각으로 사물을 보고 다양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쓰기 전에 다양한 시각적 사고가 있어야 하며 그 분야에 대한 자료 찾기가 필요하다. 써나가는 과정은 직선적인 과정이다. 그래서 전후좌우를 돌아보며 취사선택하기가 쉽지 않다. 쓰기 전에 얼마나 많은 다양성의 재료와 변화 있는 설계가 있느냐에 따라 평면적 시쓰기가 아닌 심층적 시쓰기가 이루어질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시각으로만 사물을 보면 자신의 감정과 지식, 경험에 의해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시각을 버리고 정해놓은 여러 개의 구멍으로 사물을 바라본다면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하게 된다. 철학적 시각의 구멍으로 사물을 보라. 그 사물은 인생의 의미를 던질 것이다. 음악적 시각의 구멍으로 들여다보라. 언어의 운율과 사고의 리듬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미술적 시각으로 바라보라. 구조와 대칭, 색조의 아름다움을 보게 할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접근을 통한 통합된 감정 및 이미지, 의미의 재료들을 총동원하여 한 편의 시를 건축한다면 그 시는 짓다 만 듯한 집이나, 엉성한 집이 아니라 그 방향, 그 분야에 최고의 예술성을 간직한, 균형과 조화와 아름다움을 간직한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  [출처] 논리마인드 맵의 필요성|작성자 김기덕   2. 마인드맵의 정의와 시에서의 접목 마인드맵은 두뇌의 기능을 파악한 후 그 기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학습에 이용하고자 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을 활용해 공부하게 되면 효과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쓰기에도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 이유는 첫째 책 한 권의 분량을 A4용지 한 장에 정리하여 담을 수 있기 때문에 내용을 압축할 수 있다. 둘째는 마인드맵을 그릴 때는 이미지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기억이 잘 되고 설명적인 것을 이미지화시키는 습관을 갖게 된다. 시쓰기는 이미지화 작업이다. 시는 언어로 그리는 그림이라고 볼 때 마인드맵은 자연스럽게 이미지를 끌어오고 조합하여 그림의 설계도를 그려준다. 설계도가 잘 그려져야 훌륭한 집을 지을 수 있다. 하나의 소재나 주제를 선택하고 창조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미지를 끌어와 그물망처럼 엮다 보면 전체적인 밑그림이 그려진다. 세밀한 부분까지 꼼꼼히 설계도를 그렸을 때 시를 쓰는 시간은 단축될 수 있다. 그리고 시를 쓰다가 막혀서 중단하는 일이 없게 된다. 어쩌면 시를 쓰는 시간보다 마인드맵을 통해 자료를 모으고 분류하여 전체적인 방향과 밑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훨씬 중요하고 시간도 많이 소요된다. 작품에 대한 욕심과 급한 마음으로 마인드맵을 소홀이 하고 성급히 시작(詩作)에 임하면 더 많은 시간적인 낭비와 완성의 어려움을 겪게 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마인드맵의 과정을 통해 선명한 소재나 주제에 대해 충분히 공부하고 자신의 경험과 다양한 시각을 동원하여 뒤집어보고 파헤쳤을 때 심도 있는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다. 자신의 감정에 끌려 안일하게 시작한 한 방향적인 시쓰기가 아닌 다양한 절도와 천의 시각에서 한 편의 시 속에 엑스레이처럼 뼈 속까지 표현해 내는 다양체의 글쓰기가 필요하다 [출처] 마인드 맵의 정의와 시에서의 접목|작성자 김기덕   3. 마인드맵의 구조 마인드맵의 구조는 나무의 형태를 취한다. 첫째 쓰고자 하는 핵심 소재나 주제를 항상 중심 이미지로 놓고 시작한다. 곧 나무의 둥치가 되어 이 둥치로부터 많은 생각이 뻗어가게 해야 한다. 시를 쓰기 위한 중심을 잡을 때는 가급적 이미지가 있는 소재를 선택하는 것이 유리하다. 주제를 먼저 잡으면 생각이 경직되고 주제의 한계를 벗어나기가 어렵다. 소재를 선택하고 이미지를 선택할 때 그와 연관된 이미지를 뽑을 수 있고, 이미지를 만들며 생각의 줄기를 뻗어갈 수 있다. 둘째는 중심 이미지에 관련된 주요 이미지는 둥치에서 뻗은 줄기처럼 연결하여 표현한다. 둥치에서 나온 줄기는 가지와는 다르게 개략적인 것으로 방향을 잡아주어야 한다. 나무가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서는 줄기가 튼튼하고 균형을 잘 잡아주어야 하듯 풍성한 이미지를 뽑고 다각도의 시각으로 조명해 주어야 한다. 자신의 감정에만 몰입된 시쓰기는 한쪽으로 치우친 나무처럼 쓰러지게 된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감정을 가진 사람은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보다 객관적이고 심도 있는 다양체를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다. 셋째, 가지들의 연결은 핵심 이미지와 핵심 단어를 통해 확산된다. 줄기에서 갈라져 나온 무수한 가지들은 다양한 이미지들의 집합이다. 줄기와 연관된 모든 이미지나 단어들이 여기에 속한다. 유사한 것들과 연관된 것들, 그리고 속한 모든 것들을 이미지로 뽑아야 한다. 관념으로 뽑으면 나중에 그림이 되지 않기 때문에 많이 뽑은 것 같지만 정작 시를 쓸 때는 하나도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 무성한 가지를 만들어 놓아야 많은 사고의 집을 지을 수 있다. 넷째는 계속 이어지는 이미지들은 나뭇가지의 마디마디가 서로 연결되지 않는 듯한 구조를 취한다. 표면적 이미지의 크기나 생각하는 내용물의 대소는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세밀하고 깊이 있게 접근하느냐의 분류에 따라 가지들은 더 미세하게 뻗어가고 분기된다. 세밀한 가지까지 그려준 나무형태의 마인드맵을 그릴 때, 시는 풍부해지고 다양해진다. 막상 시를 쓸 때 찾은 재료를 다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쓰는 시와 모르고 쓰는 시에는 차이가 있다. 이상의 네 가지 형태를 설명했는데, 나무의 형태를 취했기 때문에 수목형 시쓰기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마인드맵으로 찾은 내용을 순서대로 쓴다면 물론 수목형 시쓰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재료들을 찢어 붙이는 콜라주기법처럼 맘대로, 다양하게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뿌리와 뿌리들이 서로 분기·접속하는 리좀적 시쓰기가 가능하게 된다 [출처] 마인드 맵의 구조|작성자 김기덕   4. 마인드맵을 그리는 방법 마인드맵을 그리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한국부잔센터에서 지은 『반갑다, 마인드맵』의 내용을 참조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백지를 준비한다. A4용지나 그보다 더 큰 용지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줄이 쳐진 종이는 다양한 생각을 펼치는데 제한을 주기 때문에 대뇌피질의 표현 능력을 종이 위에360도 돌아가게 표현해 주는 데 도움을 주는 백지가 필요하다. 2. 백지 표면의 공간은 풍경화를 그릴 때처럼 자유롭게 사용한다. 단어나 이미지를 측면으로 시계방향에 따라 이동하여 이용하므로 공간이 충분하다. 그래서 책 한 권의 분량도 압축하여 넣을 수 있다. 3. 종이를 가로로 펴놓고 지면의 중심에서부터 시작한다. 중심은 가장 시의 핵심이며 정신세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중심에서 발원하여 시의 강이 흐르게 된다. 중심은 시작이고 또한 본체인 것이다. 4. 쓰고, 생각하려는 내용에 대해 이미지를 정해야 한다. 이미지 안에는 이미 관념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만약 슬픔을 표현하려 한다면 눈물이나 비, 손수건 등의 이미지를 정해 그림으로 나타내야 한다. 그림은 몇 천 개의 관념어보다 값어치가 있다. 이것은 결합의 시초로써 무수한 접속점을 갖고 있으며, 생각의 초점을 맞추어주고 머릿속에 잘 기억되도록 단순화시킨다. 5. 핵심 이미지에 대해 적어도 세 가지 이상의 색상을 사용한다. 색상은 두뇌의 상상력을 유발시키고 주의력을 끌게 한다. 6. 이미지를 열어둔다. 틀을 미리 만들고 생각하게 되면 단조로움을 주고 생각을 막을 가능성이 있다. 7. 선은 단어의 길이와 같게 한다. 단어보다 긴 선은 생각의 연결을 단절시키지만 단어 길이와 같은 선은 연결을 강하게 해준다. 8. 핵심이미지에 연결된 쪽의 선은 그 보다 세부적인 내용을 담을 가지의 선보다 두껍고, 선의 형태는 유선적이며 유기적이어야 한다.  [출처] 마인드 맵을 그리는 방법|작성자 김기덕  마인드맵의 구성요소 1) 둥치 둥치는 첫 번째 잡은 시상이다. 이 시상을 가장 중심에 놓고 이 시상으로부터 뻗어가는 생각을 그리게 된다. 시상은 시가 될 만한 씨앗이어야 한다. 관념을 선택한다면 씨앗을 싹틔우고 줄기와 가지를 뻗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관념은 죽은 씨앗이다. 파종하기 위해 실한 씨앗을 보관하듯 싹이 틀만한 이미지를 잡아야 한다. 또한 마인드맵은 한 알의 은행이 싹이 터서 천년 묵은 열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되듯, 하나의 생각 덩어리를 중심에 놓고 생각의 줄기를 뻗고 가지를 내고 잎을 피워 열매를 따는 과정을 하나의 백지 속에서 이루어 내는 것이기 때문에 둥치를 결정하는 하나의 씨앗에서 천년의 은행나무를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심미안의 눈으로 소재를 보고 마인드맵의 둥치를 정했을 때 산 같은 시, 바다 같은 시를 쓸 수 있다. 시의 성패는 둥치에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큰 둥치는 많은 생각의 줄기와 가지를 뻗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랑이라는 관념을 둥치로 선택했을 때 많은 이미지를 만들기는 쉽지 않지만, 바다라는 이미지를 끌어온다면 바다에 대한 많은 이미지를 끌어와서 줄기와 가지를 쉽게 그려갈 수 있을 것이다. [출처] 마인드 맵의 구성요소|작성자 김기덕 줄기   줄기는 둥치로 정한 하나의 씨알을 싹틔워 사방으로 뻗어가게 하는 방향설정이고 분야를 쪼개는 다양한 시각이다. 하나의 사물을 상, 하, 동, 서, 남, 북의 시각으로 나누어 묘사한다든지 하나의 대상을 철학적, 예술적, 역사적, 과학적, 종교적, 음악적, 미술적 또는 천·인·지 등등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구분을 말한다. 시상으로 잡힌 하나의 이미지나 대상을 이렇게 나누어 본다면 책 한 권을 쓸 정도로 많은 상상력을 동원할 수 있다. 나누어 보지 않고 전체를 본다면 깊이 파고 들어갈 수 있는 생각은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쪼개고 나누어 생각할 때 새로운 줄기, 새로운 가지와 무수한 잎을 피울 수 있다. 줄기는 다양한 분야를 제시하고 내용에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평면적이고 확산적일 수 있지만, 심층을 만드는 계단이기도 하다. 모양은 시계 속의 숫자와 같으며 진행 방향도 같다. 시계 속의 숫자는 하루가 도면처럼 펼쳐진 것이지만, 시간 속에서 일어난 구체적인 사건은 취하지 않는다. 다양한 생각의 줄기를 만들어야 한다. 판타지든, 리얼리티든, 형이상이든, 형이하든 자신이 모르는 부분에 과감히 줄기를 만들고 자료를 채취해야 한다. 이미지가 없는 자료, 관념과 지식적인 자료는 시에서 대부분 쓸모없거나 방해자가 된다. 풍경이 그려지는 자료, 오감을 자극하는 자료를 꺾어야 한다. 유사한 이미지를 찾고 인접한 것들을 모아야 한다. 별처럼, 불가사리처럼, 십자가처럼 뻗어있는 뿔은 전 세계, 전 우주로 향한 무한대의 상징인 것처럼 줄기는 사고의 무한대로 향하는 화살표이며 풍향계이다 [출처] 줄기|작성자 김기덕 가지    가지는 줄기에서 나누어지는 세부적인 사항으로 보편적이지만 특수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상식적인 내용이나 지식적인 구체성을 띄어야 하지만 그 안에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과 연결고리를 걸고 있어야 한다. 그 연결고리는 접속점으로써 크게 표면적 접속과 이면적 접속으로 나눌 수 있다. 표면적 접속은 유사성이나 인접성으로 나타나며, 이면적 접속은 상징성이나 욕망의 선, story 등으로 나타난다. 가지는 자세하고 세밀해야 하며, 확산적이면서 심도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가지를 만드는 데는 통찰이 필요하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까지 보고 그려야 한다. 나뭇가지 끝들은 미세해져서 하늘과 연결되듯이 마인드맵의 가지들은 하늘처럼 배경이 되는 철학이나 주제의식과 맞닿아 있어야 한다. 주제의식이나 철학의 관념은 보이지 않아야 한다. 배경 속에 녹아서 보이지 않지만 설탕물처럼 맛보면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가지는 그러한 배경과 연결되지만, 이미지로 얽혀야 한다. 이 가지 저 가지가 얽혀서 부채 모양을 만들고 기린 모양을 만들고 우산 모양을 만들 듯 무질서한 것 같지만, 큰 틀의 질서를 가져야 한다. 하지만 큰 틀의 질서를 위해 생각의 가지는 자르지 말아야 한다. 마인드맵의 과정은 큰 틀을 초월해 있는 것이지만, 시를 쓸 때는 큰 틀 안에서의 취사선택이다. 큰 틀은 결과이지 사전에 정해 놓은 경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큰 틀은 처음 보는 모양이 될 수 있고, 존재하지 않는 모양일 수도 있다. 가지를 뻗을 때 어떤 모양을 생각하고 뻗는 나무는 없다. 맘껏 뻗다보니 자연스러운 각각의 모양이 되었다. 시도 이런 자유분방함 속에서 높은 예술성이 탄생한다. 남들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차원을 만들 수 있다. 가지는 지상의 리좀이며 생각의 그물망이다. 맘껏 접속하고 분기하여 촘촘한 이미지의 그물망을 짜야 한다. 그리고 그 안에 숭어 떼 같은 상징들이 가득해야 한다. [출처] 가지|작성자 김기덕 잎 많은 가지들을 찾은 후에는 잎을 만들어야 한다. 잎은 가지 위에 있는 이미지를 문장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미지를 주어로 하여 목적어, 동사를 찾아 문장을 완성시켜야 한다. 이 때 문장은 표현이 되어야 하는데, 표현을 위한 언어, 곧 시어로써 문장을 만들어야 한다. 시어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으나 반드시 이미지어와 관념어를 구분해서 써야 한다. 표현은 명사와 동사에서 결정된다. 명사는 관념어 대신, 보고 느낄 수 있는 사물이나 상황이 되어야 한다. 동사는 구체적이며 살아 있는 언어이어야 한다. 또한 여러 대등항 중에서 가장 적합한 동사를 선택해야 하는데, 적합성의 기준은 살아 있는 이미지를 표현해 주되 둥치와 연관시키기 위한 표면적, 이면적 연결고리가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의 문장은 둥치를 연상시키거나, 둥치를 보조해주거나, 둥치를 풀어주거나, 묘사해주거나, 표현해 줄 수 있는 문장이어야 한다. 아무리 철학적인 문장, 아무리 금언의 문장이라고 해도 둥치와의 연간성이 전혀 없다면 그것은 이미 낙엽이며, 시의 나무와는 상관없는 존재일 뿐이다. 표면적인 연결이든, 상징적인 연결이든 아주 미세하더라도 둥치로부터 영양분을 받고 또 광합성한 영양분을 둥치로 보내 의식의 저장, 철학과 주제성을 몸통에 비축하는 하나하나의 잎들이 전체적인 시의 나무를 장식할 수 있어야 한다. 문장에서 부사와 형용사는 최대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불필요한 수식은 무조건 빼야 한다. 군더더기는 건강한 문장을 갉아먹는 벌레와 같다. 싱싱한 잎, 건강한 잎을 가지마다 달아야 한다. 이런 건강한 잎들이 연결 문장을 만들고, 연결 문장이 모여 하나의 단락을 이루고, 단락들이 모아져 한 편의 짜임새 있는 시가 된다 [출처] 잎|작성자 김기덕 시 쓰기   시쓰기는 가지마다 매달린 많은 문장들을 적절히 배치하고 연결시키는 것이다. 마인드맵은 시의 씨알인 둥치에서 줄기가 나고, 줄기에서 가지들이 분화하여 영양분을 둥치를 통해 잎으로 전달하는 확산운동이다. 하지만 시쓰기는 그 반대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 잎의 문장들을 모아 가지로 이어진 문장을 만들고, 여러 가지의 문장이 만나 줄기의 단락을 만들어 하나의 시가 완성된 둥치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곧 잎에서 광합성을 통해 양분을 만들고, 그 양분을 모아 가지와 줄기를 통해 둥치에 모아져 거목이 되듯, 주제의식, 철학의 양분이 결집되어 완성된 시의 나무를 보여주어야 한다. 시쓰기에서는 분기하고 확산하던 사고들이 모아져야 하고, 구심점을 향해 결집되어야 한다. 태극이 양의가 되고, 양의가 사상이 되고, 사상이 분화하여 팔괘가 되고, 육십사괘로 나뉘어 세상만물로 분화된 것이 다시 모아져 태극으로 돌아가는 과정이 바로 시쓰기이다. 완성된 시는 하나의 개체가 되고, 사물이 되고, 인격이 되어 만물 속의 일부로 다시 돌아간다. 하나의 시 속엔 우주만물의 비밀이 담겨 있고, 시가 완성되는 과정은 곧 우주만물의 변화 주기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출처] 시 쓰기|작성자 김기덕 사고의 분화   마인드맵을 통해 사고의 분화과정을 살펴보았다. 둥치에서 줄기로, 줄기에서 가지로 쪼개지는 과정에는 분화의 법칙이 존재한다. 일정한 법칙이 없이 아무렇게나 뻗어갈 수 있는 사고는 공상과 같은 것으로 허황될 뿐, 통일된 의식을 보여주지 못한다. 공상은 에너지가 없다. 새로운 창조를 만드는 동력이 되지 못한다. 유추와 연상을 통해 만들어지는 창조적 상상력엔 끈 이론이 존재한다. 양성자, 중성자를 묶어주는 핵력과 강력이 있다. 세포가 분화하여 나누어지지만, 그 안에는 같은 유전자가 존재한다. 언어의 분화, 이미지의 확산에도 유전자가 필요하다. 그 유전자는 유사성이며, 인접성이며, 상징이며, 욕망의 선이며, story이며, 주역적 변화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시어가 분화하여 새로운 시어를 만드는 과정엔 이러한 유전자를 토대로 하여 사고의 확장을 이루어야 한다. 이러한 원리를 가지고 확장되었을 때 다시 하나로 모으는 시쓰기의 과정에서 접속점을 찾을 수 있다. 접속점이 많을수록 블록을 연결하듯 원하는 모양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 사고의 분화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원칙을 가지고 해야 한다. 그래야만 독자들이 해석의 길을 추적해 갈 수 있고, 창작자가 의도하는 바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사고의 분화|작성자 김기덕 1. 유사성   유사성을 통하여 사고의 확장과 이미지의 변화를 이룰 수 있으며, 또한 선택을 통해 새로운 결합을 이룰 수가 있다. 하지만 교사, 스승, 교원, 교수 같은 유사성은 시의 이미지 확장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명칭의 유사성이나 의미의 유사성과 같이 유사하지만 확연히 드러난 것들은 시적 사고의 확장 및 선택, 결합의 예술적 조건에 적합하지 않다. 유사성은 은유적 표현의 원리인 만큼, 보다 예술성이 있는 은유성을 만드는 데는 감추어진 유사성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꽃과 여자는 유사하지만 ‘꽃 같은 여자’는 너무 드러난 유사성 때문에 식상한 비유관계를 만들게 된다. 보다 참신하고 심도 있는 예술성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유사성의 새로운 발견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이 써본 적 없는 유사 이미지를 동원하여 시를 쓴다면 그 시는 참신하고 매혹적일 것이다. 하지만 남들이 다 쓴 유사 이미지는 시든 꽃이며, 생명 없는 나무와 같은 것이다. 또한 유사성의 거리가 멀수록 그 관계는 더욱 긴장되며 팽팽해질 것이다. 시에서의 유사성은 본의와 유의와의 관계를 만들어 은유적 표현을 만들기도 하지만, 배치에서의 유사성은 병치적 관계를 이루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병치는 은유적 관계보다는 좀 더 건너뛰기한 것으로서 참신성과 함께 사고의 확장을 이루어 준다. 또한 병치는 구절 간의 관계에서 이루어지지만, 리좀적 시쓰기의 관계에서는 뿌리 하나하나가 큰 줄기에 연결되어 있듯이 주제성이나 철학성의 줄기에 잔뿌리처럼 연결되는 상징관계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유사성을 통한 건너뛰기는 과거와 현제와 미래의 시간적 건너뛰기 및 지역적, 사상적, 종교적 결합을 만들어 구심점을 만드는 역할을 가능하게 한다. [출처] 유사성|작성자 김기덕 2. 인접성   인접성은 공간적인 관계를 만들어준다고 할 수 있다. 산과 인접한 것에 속하는 것을 본다면 나무, 돌, 계곡, 폭포, 꽃, 새, 마을 등의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런 요소들은 공간화를 갖게 해주는 요소들이다. 시에서의 인접성은 공간적 이미지를 만들고 그림과 같은 시각성을 보여준다. 주제를 잘 드러낼 만한 개체들만 취사선택하여 사용하기 때문에 정물화를 그리는 것 같은 기법이며, 절제된 원리가 필요하다. 인접성은 유사성처럼 대등한 관계를 만들지 않으면 수평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단지 입체적인 공간을 구성하기 위한 배치적 요소다. 인접한 요소들을 어디에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그림의 구도는 달라진다. 시 속에서의 인접한 요소들의 배치는 환유적 표현의 원리가 되기도 한다. 원인과 결과, 용기와 내용물, 소유물과 소유주, 산지와 산물, 출신지와 그 사람, 기호와 실체, 건물주와 건물명 등의 관계를 표현하기도 한다. 또한 부분이 전체를, 전체가 부분을 표현하는 제유도 인접성에 의한 표현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인접한 것들의 관계는 유사성의 건너뛰기보다는 한 구성체의 주변적 요소를 끌어오는 것이므로 그 폭이 좁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표현하고자 하는 요소에 대한 단순화가 가능하며, 단순화를 통한 상징적 요소를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종이비행기’라는 소재를 가지고 시를 쓴다면, 무엇과 종이비행기를 인접한 관계로 연결시켜주느냐에 따라 시의 공간성은 달라진다. 종이비행기를 장애아, 아파트, 창문, 아스팔트와 인접시켜준다면, 무한한 자유를 꿈꾸는 영혼을 상징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학생, 교실옥상, 푸른 하늘 등과 인접시킨다면, 푸른 미래를 꿈꾸는 젊음을 상징하게 될 것이다. 인접성은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주고, 그 공간 속에서의 조화를 통해 새로운 상징을 만들어 준다. [출처] 인접성|작성자 김기덕 3. 상징 상징은 건너뛰기이다. 한 방향이 아닌 여러 방향으로 한꺼번에 건너뛸 수 있는 기술이다. 상징의 깊이를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더 복잡한 관계의 접속을 만들 수 있지만, 그 깊이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단순한 건너뛰기가 될 수도 있다. 유사성은 수평적 건너뛰기를 만들고, 인접성은 주변의 공간성을 만들어주지만, 상징은 방사형으로 확장될 수 있는 시의 폭탄적 기법이다. 그래서 단 하나의 상징어가 많은 사람들을 감동으로 무릎 꿇게 할 수 있다. 상징은 유사성이나 인접성의 건너뛰기와는 그 폭과 차원이 다르다. 유사성이나 인접성은 수족관의 물고기와 같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관계를 만든다면 상징은 천길 물속의 깊고 다양한 관계 만들기이다. 상징으로 접속된 시는 그 깊이를 파악하기가 힘들지만, 그 만큼 많은 다양체를 건져 올릴 수 있다. 무수히 많은 다양체들의 접속점을 찾아 이미지를 연결한다면 한 편의 시 속에 천 개의 고원이 펼쳐질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의 상징기법은 기존의 서정적 상징과는 구별이 필요하다. 서정시의 상징은 관념성이 내포되어 있어서 상징을 이용한 시쓰기를 하면 관념시가 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상징에 대한 해석도 상징물 자체에 한정된 해석을 하지만, 배치를 통한 상징은 배치되는 배치물과의 관계에 따라 함께 짝을 이뤄 해석되며, 배치물을 끌어오기 때문에 이미지 간의 관계 만들기가 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관념성은 숨고 사물 간의 관계를 통한 상징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렇게 사물과의 접속점을 통해 상징이 확장되기 때문에 방사형의 사고 확장을 이룰 수 있으며 관념화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시쓰기가 가능하게 된다. [출처] 상징|작성자 김기덕 4. 욕망의 선   욕망의 관계에 의하여 사물을 맘대로 끌어오고 결속하는 관계를 말한다. 사물 하나하나에 감정을 부여하여 욕망을 불어넣고, 욕망의 관계를 통해 결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기독교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감사와 찬양으로 바뀐다. 감사와 찬양의 욕망 안에서 신의 피조물인 만물은 포함될 수 있으며, 그 어떤사물도 결합이 가능하게 된다. 예를 들면 ‘갈대들은 춤추고, 바위들은 기도하고 있다’와 같이 구체적 관련이 없어도 서로 묶을 수 있다. 아무리 관련 없는 사물일지라도 자신의 감정과 욕망 안에서 새롭게 변형시킨다면 충분한 연관관계를 형성할 수있고, 새로운 감정 선을 이을 수 있다. 이별 뒤에 세상이 다 슬프게 보인다든지, 기쁨에 가득 차 바라보는 풍경들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을 때 그 어떤사물을 끌어와도 한 무리, 한 성격의 집합으로 묶을 수 있다. 사물들은 저마다의 욕망을 가지고 있다. 바늘은 찌르고자 하는 욕망을, 풀은 붙이고자 하는 욕망을, 악기는 소리를 내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다. 이 욕망을 통해전혀 유사하지 않아도 접속이 가능하다. 욕망의 선을 찾기 위해선 깊은 관찰이 필요하다. 사물의 성격이며 성질을 잘 살펴봄으로써 그 내면의 욕망을 들여다 볼 수 있다. 또한 욕망은 시인의 마음속에서 창출되는 것이다. 바늘이 찌르기 위한 것인지, 상처를 꿰매기 위한 것인지, 가시를 빼기 위한 것인지, 문신을 새기기 위한 것인지, 바느질을 하기 위한 것인지 어떤 곳으로 욕망의 선이 뻗느냐에 따라 다음 접속관계는 달라질 것이다. 이러한 욕망은 모양이나 기능, 성분 등에 의해 자유자재로변화할 수 있으며, 보는 시각에 따라 그 차원도 달리 할 수 있다. 이 욕망의 선은 둥치 안의 주제성이나 철학성과 연관이 많다. 한 곳으로 시선을 모으고 정신을 집중하게 하는 화살표와 같다. 흔해빠진 욕망의 선으로 끌고 가지는 말아야 한다. 새로운 욕망의 선을 만들고 과감하게 탈주선을 그려야 한다. 평평한 대지에 습곡을 만들고 산맥을 형성해야 한다. 밋밋한 의식에 칼날 같은 감각을 세우고 새로운 욕망의 그물 안에 가두어진 세상만물을 맘껏 요리해야 한다 [출처] 욕망의 선|작성자 김기덕 5. 스토리(story)   스토리(story)는 이야기의 진행에 따라 접속이 가능한 형태를 말한다. 시에서는 날아다니는 의식의 확장, 이미지의 변화가 가능하기 때문에 이야기의 접속에 따라 새로운 방향전환이 가능하다. 여기에서의 접속은 곧 분기할 수 있다는 의미이며, 분기는 또한 접속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춘향이와 이도령이 만나는 장면에서 견우와 직녀가 등장할 수 있고, 갑자기 도적 떼가 나타나 죽일 수도 있고, 호랑이와 곰이 쑥과 마늘을 먹으며 기도할 수도 있다. 이야기의 진행 방향이 어떻게 전환하고 꺾이느냐에 따라 새로운 신화와 역사, 에피소드나 허구적 환타지가 연결될 수 있다. 이 결합에서 이야기의 유사성이나 상황의 비슷함에서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사건의 끼어들기가 가능하다. 이것은 수목형 시쓰기가 아닌 유목형 시쓰기, 배치를 통한 언어의 직조에 의한 시쓰기이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기법이다. 토막 난 우화들의 연결이나, 지역적 신화의 바꿔치기 및 동시대의 역사적 사건의 섞어짜기, 현대적 사건과 과거적 사건과의 겹치기 기법은 바로 이 story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사건이나 이미지를 겹쳐 놓거나 섞어 놓을 때 우리의 사고는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를 오가며 새로운 의미와 이미지를 만든다. 이러한 story 간의 분기와 접속을 통해 다양체를 만들기도 하고, 하나가 되기도 하는 기법을 story 기법이라고 한다. [출처] 스토리|작성자 김기덕 리좀적 표현의 방법   1. 빙산이론   수면 위에 떠있는 빙산은 드러난 부분보다 감춰진 부분이 더 많다. 드러난 부분만 보고 가까이 다가가면 배는 충돌하여 난파될 것이다. 하지만 오랜 경험을 가진 유능한 선장은 수면 위에 뜬 빙산만 보고도 수면 속의 빙산을 눈치 챈다. 배에 탄 여행객들은 수면에 뜬 빙산만 볼 뿐 감춰진 부분을 보기는 어렵다. 시쓰기는 빙산의 보이는 부분을 그리는 것이다. 고급 독자는 빙산의 보이는 부분만 보고도 유능한 선장처럼 수면 속에 잠긴 부분을 읽을 줄 안다. 시는 수면 위에 뜬 빙산의 일부를 그리는 것이지만 그 밑에는 어마어마한 상징의 얼음이 잠겨 있어야 한다. 잠긴 부분까지 다 보여주려 하지 말아야 한다. 잠긴 부분은 유능한 선장인 독자들이 각자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수면이라는 수평선상의 위로 드러난 부분은 이미지가 있는 시어이지만 가라앉은 것은 관념이다. 그래서 이미지가 있는 시어로 그림을 그려주면 그 언어 속의 관념들이 가라앉아 수면 속에 많은 의미를 감추게 된다. 이미지어와 관념어의 구분선은 빙산이 떠있는 수평선이다. 수평선에 의해 이미지와 관념이 나누어지듯 우리의 마음속에도 엄격한 수평선을 긋고 시를 써야 한다. 아무리 욕심이 날지라도 관념어는 쓰지 말아야 한다. 관념어는 땅이 다 파헤쳐진 밭에 드러난 고구마와 같은 것이니 더 이상 상상의 여지가 없다. 고구마 밭의 줄기와 잎의 표현을 빌려야 한다. 그 줄기와 잎을 보고 농부는 튼실한 고구마를 상상한다. 물에 잠긴 부분까지 다 드러내려고 하게 되면 그 빙산은 녹아서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이다. 차갑고 투명하면서 돌처럼 굳어진 시의 결정들은 풀어져 맹물 같은 시가 될 것이다. 이미지의 결합으로 고농도의 압축된 시는 얼음덩어리 같지만, 관념으로 풀어진 시는 맹물같이 무덤덤하고 싱거운 것이다. 독자를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설명해야 이해할 것 같은 인식은 이미 자신이 풀어져 물같이 된 것이다. 작은 빙산을 수면에 띄우고 수면 속에 산 같은 덩치를 키워야 한다. 작은 빙산을 보고 섣불리 다가왔던 배들이 파손될 수 있도록 엄청난 무게와 파워를 키워야 한다. 그 무게와 파워는 상상의 크기와 깊이에서 결정될 것이다. 수면 속에 감추면 감출수록, 해저로 가라앉으면 가라앉을수록 빙산은 더 무서워진다. 무서운 빙산처럼 다가오는 시, 수면 위에 작은 단면을 보고 감이 상상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시를 써야 한다. [출처] 빙산이론|작성자 김기덕   2. 시어라인   시어라인은 하나의 제목이나 소재를 놓고 마인드맵을 통해 관련 언어를 찾았을 때 이미지가 있는 단어는 시어가 되지만, 관념으로 이루어진 단어는 시어가 될 수 없다는 구분을 갖게 하는 구획선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레드 와인’을 가지고 마인드맵을 통해 관련 언어를 찾아본다면, 레드와인은 마인드맵의 둥치가 될 것이다. 이 둥치에서 각자 나름대로 줄기를 뽑을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과거, 현재, 미래, 유사성 등의 줄기를 설정하고 가지를 뽑아보자. 과거의 줄기엔 포도밭, 햇빛, 바람, 거름, 포도, 장화, 오크통 등의 관련 이미지들이 나왔다면 이 이미지들만을 시를 쓰는데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포도밭, 햇빛, 바람, 거름 등은 밑바탕이라든지, 본능, 원초성을, 장화는 밟히고 으깨어짐을, 오크통은 어둠이나 감옥, 절망 등을 내포하고 있다. 시를 쓸 때는 이미지 속에 들어 있는 관념어를 쓰지 말고 관념어 대신 관념어를 담고 있는 이미지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줄기에서 이미지를 뽑아본다면 포도주, 코르크, 입술, 글라스 등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이미지어가 시어가 되고, 이 이미지 속에 들어 있는 포도주의 정신인 열정이나 자유, 코르크의 억압이나 질식, 입술의 사랑이나 열정, 글라스의 투명함이나 맑음과 같은 관념은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래의 줄기에서 이미지를 뽑는다면 찢어진 라벨, 빈병, 쏟아진 피와 같은 것을 찾을 수 있다. 짖어진 라벨은 처녀성의 상실이나 파괴를, 빈병은 죽음이나 허무를, 쏟아진 피는 전쟁이나 상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유사성의 시각에서 본다면 입술이나 피, 볼, 낙엽, 노을 등을 찾을 수 있다. 입술은 사랑이나 정열을, 피는 죽음이나 생명을, 볼은 수줍음이나 취기를, 낙엽이나 노을은 사라짐과 같은 관념을 포함하고 있다. 이상의 열거는 개략적인 것이다. 더 복잡한 관념을 끌어낼 수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이해를 돕기 위해 최소한에 머물렀다. 시를 쓸 때는 관념을 쓰지 말고 관념을 포함하고 있는 이미지를 써야 한다. 그래서 이미지 속에 들어 있는 관념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사물 속의 관념을 읽고 관념 대신 사물로 자신의 관념을 대신 나타내는 것이 시적 표현의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을 자유자제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상징성을 알아야 한다. 상징이 빠진 시는 상상할 수 없다. 생명이 빠져나간 시체요, 마른 나무에 불과하다. ​ 상징성을 품고 있는 이미지와 상징성이 드러난 관념과의 구별이 곧 시어라인이다. 마인드맵을 통해 줄기에서 가지로 분화될 때 이미지로만 그리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관념의 가지를 만들기 때문이다. 가지는 반드시 이미지의 가지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마인드맵을 만든다면 자연스럽게 시어라인은 형성될 것이다. 또한 동사의 사용이 중요하다. 추상적인 동사들은 좋은 시를 쓰는데 적합하지 않다. 구체적인 동사를 끌어와서 명사와 짝을 이루게 해야 한다. 예를 들면 ‘먹다’라는 단어는 추상적인 동사이다. “그녀는 밥을 먹는다.”라는 문장의 ‘먹는다’라는 동사는 시쓰기에 적합한 언어가 아니다. ‘먹는다’를 구체적으로 표현해 주어야 한다. “맷돌을 갈듯 밥을 자근자근 씹는다.”라든지, “볼때기가 터지도록 밥을 퍼 담는다.”와 같은 구체적인 이미지가 동반될 수 있는 동사의 사용이 중요하다. 이미지적인 명사에 구체적 묘사의 동사가 결합될 때 문장은 표현의 문장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문장을 만들기 위한 명사와 동사의 채취 ‧ 절단이 가능한 구역의 경계가 바로 시어라인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시어라인|작성자 김기덕   3. 시의 상징성   상징은 존재와 의미의 2가성, 다의성 또한 모호성이나 밝혀짐의 기대를 갖는 것을 본질로 한다고 김기붕은 『프랑스 상징주의와 시인들』중에서 언급하고 있다. 상징은 하나의 기호이며 동시에 의미를 갖는 것으로 현상은 곧 무언가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기호의 의미의 우호적인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유추관계가 긴밀히 작용하기 때문이다. 분명한 유사성이 아니라 막연한 암시에 의해 다른 것을 뜻하거나 표현하는 것이다. 낭만주의는 감성체계에 바탕을 둔 서정적 산물로서 우주의 중심을 주관적, 개인적 관념에 두고 있다면, 상징주의는 감성체계와 이성체계에 근거를 둔 이념적 정화를 중심으로 하고 인간까지 포괄하는 우주 자신을 중심에 두고 감각과 이념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모든 현상은 자족적,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지만, 여기에 인간의 인식이 첨가되면 경이로운 의미와 가치가 부여된다. 그래서 하나의 사물은 존재하지 않고 그 안에 여러 가지 의미와 속뜻을 갖게 된다. 시는 언어로 그리는 그림이라고 볼 때 의미나 관념으로 표현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현상이나 사물을 그리기 위해서는 이미지어가 필요한데, 그 표현된 언어의 그림이 아무런 의미가 없고 속뜻이 없는 것이라면 그것을 읽으려고 하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이미지어가 갖는 자체의 상징성, 또한 같은 이미지라 해도 여러 사람의 감정이나 시각차에 따라 달라지는 의미는 시의 모호성을 극대화 시키는 요소이다. 모호성은 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다양체적 요소이며, 나와 세상 모든 현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시의 필연적 요소가 아닐 수 없다. 현상 속에 담긴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 의도된 현상을 만들고, 의도된 사물의 조합을 이루어 다양한 형식의 작품 세계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 작품 세계는 다층적이고 다면적이어서 보다 많은 현상을 유추하게 만들고, 그 속에서의 많은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상징주의자들은 “가시세계는 불가시 세계의 껍데기일 뿐”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감각적 대상 속에 정신적 현상의 상징적 요소가 공존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언어로써 생각하게 하는, 또는 자신의 생각을 전하려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감각적 언어들 속의 상징들을 꿰뚫고 있지 않으면 자유자재로 감각적 언어를 요리할 수 없을 것이다. [출처] 시의 상징성|작성자 김기덕   4. 상징과 리좀적 관계   하나의 이미지는 여러 상징적 관계를 만들어 분화되고 확장되는 기능을 한다. 예를 들어 십자가라는 상징물은 구원의 상징이 되기도 하고, 사형의 형틀이 되기도 한다. 또한 플러스의 의미도 되며, 우주나 영원한 세상을 상징하고 부처님 가슴에 있는 길상을 의미하는 卍으로도 볼 수 있다. 이렇게 하나의 십자가가 네 개의 상징물로 분화되었다면, 이 네 개의 분화점은 곧 접속점이 될 수 있고, 이 네 개의 접속점은 다양한 배치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 구원의 상징으로 배치한다면 교회, 미사, 성경책, 천국, 천사, 베드로 등등으로 분화되고 여기에서 또 다시 수없는 분화가 가능할 것이다. 형틀의 의미로 배치한다면 로마, 죄수, 사형장, 못, 창 등으로 분화될 수 있을 것이고, 플러스의 의미로 배치된다면, 드라이버, 계산기, 수학책, 양지, 저축 등으로 확장될 것이다. 또한 卍 으로 배치된다면 절이나 나치, 우주 등과 같은 새로운 접속점을 만들 것이다. 이렇듯 십자가라는 하나의 이미지는 무수히 많은 접속점을 만들고 다양한 형태로 변화되며 다양체를 만든다. 이것이 몇 번 더 확장되면서 분화된다면 세상의 모든 사물과 맞닿게 될 것이고, 연관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이렇듯 세상의 모든 사물은 상징적인 관계를 통해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고, 리좀의 뿌리처럼 뒤얽혀 있다. 하나의 사물이 하나의 의미로만 사용되는 1:1의 관계는 없다. 하나의 사물 속에는 미처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많은 연결고리와 접속점을 가지고 있다. 시인은 이것을 발견하고 찾아서 서로 분기 ‧ 접속시킴으로써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고, 다양체를 만들어서 그 안에 새로운 의미나 진리, 주제의식들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 세상에 나를 비롯한 하나하나의 사물들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물망 같은 상징으로 촘촘히 엮어져 있다. 이 많은 분기 ‧ 접속점들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이 분기 ‧ 접속점을 원하는 대로 찾을 수 있을 때 우리의 시쓰기는 막힘이 없고 그 차원을 달리할 것이다. [출처] 상징과 리좀적 관계|작성자 김기덕   5. 기호학파적 접근과 상징의 적용   소쉬르가 처음으로 체계화한 기호들은 문학작품의 언어적 의미를 보이지 않는 언어의 관계성을 강조하며, 이것은 공시적인 관계에서 파악되어야 한다고 했다. 언어를 사고의 표현에서 언어를 기호의 체계로 이해하면서 기표인 시니피앙과 기의인 시니피에 사이의 관계를 이끌어 왔다. 기호는 세 가지로 기표와 기의 그리고 기표와 기의가 결합하여 만든 새로운 요소인 기호이다. 기표와 기의의 결합은 의미화 작용이라 하고, 외부세계가 공급하는 기표, 마음이라고 하는 내부세계가 공급하는 기의가 결합되어 표상의 세계에 편입하는 기호가 탄생된다. 문학적 기호는 다중의미체이다. 다중의미성은 기표에 기의가 자의로 연결되는 경험에 따라 여러 가지 뜻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기호의 다중매체가 바로 상징적 요소이며, 다양체의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바르트는 신화체계 속에서 메타언어를 찾고 있다. 바르트는 1차질서, 그리고 2차질서로 구분하면서, 1차질서는 의미작용에서 현실의 수준, 자연의 수준이라 하고, 2차질서는 문화의 수준이라고 했다. 1차질서는 기호의 모호함이 없는 객관적, 직접적 자연의 의미를 가지며, 현실의 외연적 의미만을 생산한다고 했다. 2차질서는 두 가지로 하나는 함축이고, 다른 하나는 질서로 구분한다. 함축은 기표가 기의의 형태를 결정하는 것으로 모든 사람의 문화적 배경과 체험에 따라 천차만별의 함축의미를 일으킨다. 예를 들면 달에서 얼굴을 생각한다든지, 배를 상상한다든지, 백동전을 연상하는 것이다. 신화란 함축적 기의들로 엮인 고리의 체계를 말한다. 신화는 함축의 의미체계로 끊임없이 변화하게 된다. 이러한 언어들의 조합을 통해 로만 야콥슨은 언어의 시적 기능을 설명하고 있다. 야콥슨은 은유/환유의 의미론적 양분법을 바탕으로 그의 시각을 전개하는데, 양극성과 등가성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양극성이라는 개념은 언어 운용의 연합적 축과 통합적 축을 말한다. 전자는 선택의 영역이며, 후자는 결합의 영역이다. 이때 “선택의 근간은 등가성, 유사성, 상이성, 동의어와 반의어 따위가 있고, 결합 곧 배열의 순서를 이루는 밑바탕은 인접성”이라고 말하지만, 모든 상징적 요소들의 결합에도 적용될 수 있다. 야콥슨의 수직적 차원과 수평적 차원에서 수직적 차원은 언어저장고에서 한 단어만을 선택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 때는 은유에 의해서 일어난다. 또한 수평적 차원에서는 환유에 의해서 결합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즉 하나의 문장을 만드는데 있어서 주어+동사의 문장이라면, 주어의 위치에 놓일 여러 대등한 단어들 중 가장 적합한 것을 선택하고, 동사는 대등한 환유적 요소들 중에서 선택되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배치의 리좀적 시에 있어서는 은유적 요소가 또 다른 상징적 요소로 전환되어 문장과 문장으로 접속될 수 있다. 예를 들면(도랑물이, 개여울이, 강물이, 시냇물이) 중 하나와 (소리 지르다, 노래하다, 달려간다, 흐른다) 중 하나가 선택되어 만약에 ‘강물이 흐른다’가 되었다면, 강물에 대한 상징(세월-달력, 정화-목욕탕, 식수-수도꼭지, 발전-전구) 등의 여러 상징물 중에서 선택하여 새로운 배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배치는 또 다른 문장이어야 하고, 그 거리감이 너무 멀거나 이어짐에 어려움이 있을 때에는 단락을 띄워 결합할 수 있다. 야콥슨의 선택 ‧ 결합의 방법을 활용하여 시의 문장을 만드는 능력을 갖추고, 이에 대하여 상상적 요소들의 활용능력을 키운다면 의식의 확장과 이질적인 이미지들의 결합을 이룬 새롭고 참신한 시를 쓰게 될 것이다. [출처] 기호학파적 접근과 상징의 적용|작성자 김기덕   6. 상징에 대한 케빈 베이컨의 6단계 이론 접목   케빈 베이컨의 6단계 이론은 한 사람이 평생 살면서 알고 지내는 사람의 숫자가 적게 잡아 100명이라고 가정한다면 다시 그 100명이 또 다른 100명, 그러면 10,000명이 다시 100명해서 여섯 단계만 거슬러 가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과 통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상징관계에서도 이렇게 단계를 거듭해 나가면 모든 사물이 다 통할 수 있다는 가정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상징을 통한 이미지의 접속은 어떤 사물이든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단지 그 과정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뿐이지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의식을 확장해서 사물을 연결, 접속시킬 수만 있다면 시의 구성은 한결 쉬워질 것이다. 또한 사고의 분기, 분화도 더 다양하고 세밀하게 만들어 감으로 의식의 무한한 확장이 가능해질 것이다. 1단계에서 2단계로 분화한 상징은 눈에 보이도록 그 관계가 확연히 드러나 있지만, 3단계, 4단계로 더 확장해서 이미지가 분화한다면 복잡해지고 쉽게 눈치채기 어려운 깊은 단계의 상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징단계를 활용해 시를 쓴다면 바다 같은 시, 우주 같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상징에 대한 케빈 베이컨의 6단계 이론 접목|작성자 김기덕   7. 상징 연구의 필요성   시쓰기에서 상징을 꿰뚫고 있다는 것은 큰 재산이다. 하나의 이미지를 통해 다양한 상징성을 발견할 때 여러 다양체의 접속을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물 속에는 이미 많은 상징들이 들어 있다. 공중적이든, 원형적이든 삶 속에서 습득되고 인지된 의식에 의해 우리는 사물 속의 상징들을 감지하고 있다. 이 상징의 종류를 많이 알고 있다면 여러 접속점이 있는 장난감 블록으로 원하는 형태를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시쓰기에 매우 유리하다. 만약 십자가를 구원의 상징으로만 본다면 십자가를 통해 시를 전개 할 때 그 만큼 단순한 전개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동안 우리는 칼 구스타프 융의 개인적 상징, 공중적 상징, 원형적 상징을 공부해 왔고, 프로이드의 꿈의 해석을 통해 여러 상징적 요소들을 접해 왔다. 우리의 인식 속에는 이미 이러한 상징들이 고정관념처럼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이미지를 보면 그 속에서 여러 상징적 요소들을 유추하게 된다. 예를 들면 뱀이라는 사물을 보면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한 것과 저주 받아 배로 기어 다니는 것을 연상하게 된다. 또한 갈라진 혀로 인해 두 마음을 가진 자 및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사람을 상상한다. 하지만 불교적 시각으로 보면 우리와 똑같은 중생으로 전생에 죄가 많아 뱀으로 환생한 것일 뿐이다. 프로이드의 꿈의 해석으로 보면 남자의 성으로 상징되기도 하지만, 한국의 꿈에서는 조상이나 지혜로운 자녀의 태몽이 되기도 한다. 하나의 뱀이라는 이미지를 시 속에 끌어 오기까지는 이러한 상징성을 다 생각해야 할 것이다. 서정주의 ‘화사’에서 “스며라, 배암!”은 순이를 대상으로 한 성적 관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질 들레즈가 깃발을 통해 말한 배치 관계를 보면, 붉은 깃발이 배와 배치되면 구호신호를, 데모하는 군중과 배치되면 혁명을 상징한다고 했다. 여기에서의 붉은색은 무질서, 위험, 열정, 희생, 피를 원형적 상징으로 갖고 있기 때문에 배치가 달라짐으로써 해석이 달라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배치관계에서 상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상징성은 신화나 종교, 역사, 이야기 등을 통해 생성 발전되었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상징성의 연구가 필요하다. 나는 우리나라의 방대한 꿈풀이 사전을 통해 한국인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원형적 상징을 연구해 왔다. 방대한 양의 꿈해석을 다 거론할 수는 없지만, 다른 장에서 꿈에 대한 해석을 통해 시를 위한 상징성을 확장하고자 한다. [출처] 상징연구의 필요성|작성자 김기덕   시쓰기의 기법   1. 문장 구성을 위한 언어의 선택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선 언어의 선택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첫째는 얼마나 좋은 이미지어를 쓰느냐에 따라 시의 생명력은 달라진다.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이지만, 시에서 사랑이라는 말을 쓰면 그 시는 미적 가치를 상실한다. 그 이유는 표현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사랑을 보여주어야 한다. 추상적인 사랑을 읊조리던 시대가 있기도 했지만,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시를 쓰는 사람은 절대적으로 관념어는 쓰지 않겠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사랑을 쓰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랑이라는 관념어를 대신할 수 있는 이미지어를 찾아야 한다. 하트라든지, 보석이라든지, 꿀물이라든지 사랑을 대신할 수 있는 사물을 찾아서 표현해 주어야 한다. 하나의 사물로 표현이 안 된다면 정황을 만들어서 그 정황을 통해 보여주어야 한다. 서정주 시인의 ‘동천’을 보면 “내 마음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문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나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라고 표현했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없지만, 그 안에는 님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담겨 있다. 둘째는 대등항의 언어를 최대한 동원한 후 그 중에서 최적의 언어를 선택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너의 눈 속에서 하늘을 보았다.”라는 문장이 있다면 여기에서 핵심은 생략된 주어 ‘나’가 아니라 너의 눈 속에서 본 ‘하늘’이다. 이 하늘에 대한 대등항을 최대한 찾아 적합한 단어를 선택하는 것이다. 하늘을 대체할 수 있는 단어에는 무엇이 있을까? 야콥슨은 유사성으로만 가능하다고 보았지만, 나는 상징어의 대체가 가능하다고 본다. 하늘은 천국, 남자, 남편, 아버지, 서북쪽, 대평원, 늦가을, 머리, 말, 이상세계, 하늘색, 꿈, 무지개, 구름, 비행기 등등의 상징어를 끌어올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언어 중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에 맞는 최적의 언어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최적의 문장을 만들었을 때 한 문장 한 문장 살아있는 시를 쓸 수 있다. 시의 치열함은 내용에서도 오지만, 대부분 문장의 함축과 적절한 표현에서 오는 것이다. 셋째는 동사의 환유적 선택에 의해 생동감 있는 표현을 할 수 있다. “너의 눈 속에서 하늘을 보았다.”에서 ‘보았다’에 대한 환유적 대등항을 찾으면 “너의 눈 속에서 하늘이 (녹아 내렸다, 웃었다, 흘러갔다, 불탔다) 등의 여러 가지 경우가 가능할 것이다. 동사는 말 그대로 움직임씨다. 동사의 활용에 따라 그 문장의 활용성이 달라진다.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에 가장 적합한 동선을 이 동사가 그려준다. 적절한 동사의 환유를 통해 감정이입과 더불어 시에 생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완성된 하나의 문장은 살아 있는 문장이 될 것이며, 시의 표현 의도를 적절히 반영해 줄 수 있는 보석 같은 문장이 될 것이다. [출처] 시쓰기의 기법-문장 구성을 위한 언어의 선택|작성자 김기덕    2. 설명의 문장을 표현의 문장으로 고치기       의외로 설명과 표현을 구분하지 못하는 시인들이 많다. 또한 표현하려고 했지만 설명적인 시를 쓰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설명과 표현의 차이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적절한 표현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의 꽃이 있다고 치자. 이 꽃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은 아름다움이라든지, 향기로움, 순수함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사물과 사물 속의 관념으로 나누어 볼 때 사물 속의 상징적인 뜻을 드러내서 쓴 시는 설명적이고, 사물 속의 상징적인 뜻을 숨기고 사물만 가지고 쓴 시는 표현된 시라고 할 수 있다. 즉 사물 속에 내포된 상징적인 뜻은 관념이다. 예를 들면 별이라는 이미지 속에는 영원성이라든지, 밝음, 빛남 등의 관념성을 포함하고 있다. 시에서 영원성이나 밝음, 빛남의 언어가 필요할 때 영원성이나 밝음, 빛남을 그대로 쓰지 않고 별이라는 사물을 끌어와 대신 쓰는 것이 시의 표현 방법이다. 그래서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관념을 대신하는 사물 찾기가 필요하고, 의도한 관념에 적합한 이미지를 찾아서 대체했을 때 그 시는 표현된 시가 된다. 또한 의도된 관념의 폭은 좁았지만 그것을 이미지로 대체하고 나면 그 이미지의 상징성 때문에 관념의 폭은 확장된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별이 영원함과 밝음 및 빛남의 상징물이라고 해서 아무 때나 끌어올 수는 없다. 시는 언어로 그리는 그림이기 때문에 본인이 그리고자 하는 그림에 어울릴 때는 별을 끌어올 수 있지만,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림을 만든다면 다른 대체 이미지를 찾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의도된 그림, 의도된 어리둥절함의 그림이라면 이런 논리는 부질없는 것이다. 오히려 비논리적이고 언밸런스적인 이미지를 찾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나는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리.”라는 의도의 문장을 쓰고자 한다면, 이 문장은 설명적 문장이기 때문에 시에서는 적합하지 않다. 그러므로 표현된 문장으로 바꾸는 작업이 필요하다. “나는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리.”에서 ‘나는’이나 ‘당신을’도 비유적인 사물로 바꿀 수 있지만, 일단 이것은 놔두고 ‘영원히’와 ‘사랑하리’를 바꾸어 표현해 보자.‘영원히’의 관념을 대신할 이미지(별, 돌, 보석, 태양 등등)들 중 하나를 선택하여 그 이미지에 맞도록 ‘사랑하리’를 고쳐주어야 한다. 만약 ‘별’을 선택했다면 “나는 별이 되어 그대 창가에 뜨리.”나, “나는 별이 되어 밤마다 그대 모습 비추리.”와 같이 바꾸어야 한다. 관념에 대한 이미지를 찾기 위해서는 사물의 상징성을 보아야 하고, 상징적 의미를 통해 사물을 취사선택해서 시 속으로 끌어와야 표현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관념에서 표현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그리고자 하는 밑그림과 조화시켜 만든다면 한 구절 한 구절 설명적 요소를 없애고 표현으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설명의 문장을 표현의 문장으로 고치기|작성자 김기덕   4. 데칼코마니 기법   데칼코마니는 화면을 접어 밀착시킴으로써 물감의 흐름으로 생기는 우연한 얼룩이나 어긋남의 효과를 이용한 기법이다. 즉 종이 위에 그림물감을 두껍게 칠하고 반으로 접거나 다른 종이를 덮어 찍어서 대칭적인 무늬를 만드는 회화 기법이다. 시에서는 하나의 이야기나 사건을 끌어와서 충실히 묘사한 후 단락을 바꾸어 대칭적인 이미지와 사건을 만들어주는 기법이다. 이 대칭의 관계는 사건 대 사건일 수도 있고, 현실 대 비현실일 수도 있으며, 사실 대 추상일 수도 있다. 물감을 짜듯 단순한 묘사나 간단한 이야기 전개로도 충분하지만, 대칭적 관계가 만드는 사고의 폭이 이승과 저승의 관계처럼 넓어질 수 있다. 호숫가에 비친 산그림자의 관계처럼 단순하지만 현실과 비현실의 관계를 대칭적으로 보여주듯 의도하는 바에 따라 그 차원을 달리할 수 있다. 원면과 접혀진 면이 따로 구분되기도 하지만 하나의 형태로 보여지듯, 이야기나 사건이 서로 다르더라도 전체적인 象, 즉 하나의 주제의식이나 철학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녀의 골반」이라는 석류화의 시를 보면 1 나비 꿈을 꾸고 엄마는 날 낳았다 흰 꿈, 엄마는 치마폭에 날 쓸어 담았다 커다란 모시나비, 손끝에 잡혔다가 분가루 묻어나갔다 –중략- 나비 날개엔 먼지가 끼지 않았다 한 꿈, 계단 입구에서 두 날개 맞접고 오래 기도하고 있었다 환한 꿈, 나는 오래전 그녀의 골반을 통과한 나비였다.2  초음파상 골반뼈는 하얀 나비 같았죠 그녀의 골반뼈에 종양이 생겼을 때 보았던 그 나비, 그러니까 그녀의 꺼먼 엉덩이살 안에 나비 날개가 굳어 있었던 거죠 나는 잘 벌어지지 않는 날개 사이로 미끄러져 나왔던 거죠 –중략- 이 지상 마지막까지 날고 있을 나비, 그러니까 내 속을 빠져나간 어린 나비는 지금 내 앞에서 폴짝폴짝 날아오르고 있는데요   나비가 엄마의 골반과 일치하고 있다. 이렇게 두 개의 사물이나 상황을 대칭적으로 배치하여 묘사하는 기법을 데칼코마니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데칼코마니 기법|작성자 김기덕   5. 마블링 기법   마블링은 종이 따위에 대리암 무늬를 만드는 기법으로 물 위에 유성물감을 떨어뜨려 저은 다음 종이를 물 위에 덮어 묻어나게 하는 방법으로 시에서는 여러 개의 관점으로 한 대상을 휘젓듯이 묘사하거나, 여러 대상을 뒤섞어서 묘사하는 방법을 말한다. 대리암의 무늬처럼 불규칙적인 형식의 연결로 내용이 난해하고 어리둥절할 수 있지만, 이미지들 간의 상징적 연결로 사고의 확장을 꾀할 수 있다. 추상적이며 모호한 리좀적 뿌리들의 연결로 처음도 끝도 없는 고원들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대리암의 물결무늬를 통해 혹자는 새를 읽을 테고, 혹자는 구름을 읽을 테고, 혹자는 바람과 세월을 읽을 것이다. 그 만큼 보는 각도에 따라 상징의 깊이가 깊다고 할 수 있으며, 아무나 읽거나 쓸 수 없는 고난도의 기법이다. 건너뛰기의 상징적 폭은 그 만큼 넓을 수밖에 없다. 새의 날개인 줄 알았는데 구름이었고, 구름인 줄 알았는데 손바닥이었고, 손바닥인 줄 알았는데 강물이었고, 강물인 줄 알았는데 화살이었던 것처럼, 물결 같은 하나의 공통점으로 만든 무수한 무늬들의 집합과 같은 이미지들의 배치 및 결합을 만드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마블링 기법|작성자 김기덕   6. 꼴라쥬 기법   꼴라쥬는 주변에 보이는 일반적인 사물을 화폭에 붙여서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주로 납작한 곡물이나 씨앗, 모래, 합판, 종이, 천, 나무껍질, 장판지, 스티로폼, 노끈 등 다양한 재료를 이용하여 크기에 맞게 자르거나 모자이크처럼 부숴서 붙이는 방법이다. 시에서 꼴라쥬 기법은 여러 이미지들을 끌어와서 큰 틀의 그림(주제의식이나 철학성)을 위해 조각조각 붙이는 작업을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무관한 것 같지만 연관이 있어야 하고, 무질서한 것 같지만 질서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상징적 연관관계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밑그림은 붙이는 사물에 지워지듯이 주제의식이나 철학성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야 하고, 전체를 통해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 기법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유사성이나 인접성의 사물을 끌어오는 것을 피하고 상징성이 통하는 사물을 끌어와야 한다. 전혀 다른 재료들을 붙이기 함으로써 재료 간의 경계를 만들 듯 상징물 간의 격차로 인한 거리감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조각조각 희망을 끼워 넣으며 가족들은 제 몸에 맞는 무늬를 고르지만 목소리 큰 아내 곁에서 무능한 남편은 늘 모자이크 처리된다. 땅엔 크고 작은 나라들이 세력을 맞추고 하늘엔 완성된 은하의 별들이 총총히 채워지는데 빈 구석이 많아 나는 평생 성경 속의 구절들을 꿰맞춰왔다. 예수와 붓다와 공자와 소크라테스, 하지만 미완인 나의 퍼즐엔 아버지가 없다. 김기덕, 「퍼즐놀이」의 일부   이 시는 서로 연관관계가 없는 생소한 사물들인 돌고래, 태권V, 재건축단지, 가족들, 별, 성경, 성인들, 불경 등이 모아졌지만, 전체적인 주제의식이 통일을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서로 사물들 간에 유사성이나 인접성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상징적인 요소들의 연결로 인해 자연스럽게 전체적인 그림을 통일성 있게 그려주려 했다. [출처] 꼴라쥬 기법|작성자 김기덕   7. 시퀜스 기법   시퀜스 기법은 여러 개의 화면을 겹쳐서 표현하는 방법이다. 이 화면 겹치기 방법은 유사한 것일 수도 있고, 서로 완전히 다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시각에서 보았을 때 하나의 통일된 의식을 보여 주어야 한다. 이 통일된 의식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버리면 어리둥절해질 것이고, 너무 가까이 두면 식상해질 것이다. 예를 들면 4.19 학생의거 사건의 화면에 통합민주당 사진과 SNS 휴대폰 사진을 겹쳐서 놓는다면 유사성은 없지만, 통일된 상징성을 느낄 수 있다. 여기서의 방향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 화면들을 순차적으로 짜는 겹치기 방식이다. 4.19 학생의거 사건에 대한 내용을 첫째 단락으로 쓰고, 둘째는 통합민주당 사진, 셋째는 SNS 휴대폰 사진의 순으로 단락을 배치하는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4.19 학생의거 사진과 통합민주당 사진, SNS 휴대폰 사진을 섞어서 직물을 직조하듯 짜는 방식이다. 이러한 경우는 세 화면을 넘나들면서 단락에 상관없이 쓰는 방식이다. 좀 더 복잡하고 난해할 수 있지만, 시의 상징성이 강화될 수 있다. 하지만 첫 번째 방식은 이해하기 쉽고, 한 눈에 들어오는 장점이 있지만, 나열하듯 화면을 이어붙인 느낌이 들어서 긴장감이 떨어질 수 있다. 이 기법은 단락 간의 내용이나 이야기가 이어지지 말아야 하고, 전 단락의 어떤 묘사에 대한 확장이나 축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유사한 것들의 집합보다는 생소하고 거리감이 멀수록 시퀜스 기법은 효과가 있다. 아주 동떨어진 것 같지만 상징적 연결고리로 묶여지고 소통해야 한다. 교집합이나 공집합적인 관계보다는 독자적이고 개별적이지만 손을 맞잡은 연인과 같이 한 방향을 바라보아야 한다. [출처] 시퀜스 기법|작성자 김기덕   8. 퍼즐 맞추기 기법   퍼즐 맞추기 기법은 하나의 제목이나 주제와 관련된 모든 이미지를 끌어온 뒤 그 이미지들을 전체의 큰 그림(주제성)에 맞게 하나하나 끼워 맞추는 방식이다. 예를 들면 빛이라는 제목의 시를 쓴다면 빛과 연관된 이미지 성냥, 연탄, 장작, 유성, 별, 반딧불, 달, 태양, 얼굴, 베드로, 예수, 유리, 피, 눈빛, 하루살이, 화살, 총탄, 질주의 무리, 자동차, 광야의 외치는 소리 등등의 많은 관련이미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들을 이용하여 하나의 커다란 주제의식에 맞도록 문장을 꾸며주는 것이다. 빛은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는 ‘진리’라는 주제의식을 밑그림으로 그리고 싶다면 위에 열거된 이미지들을 주제의식에 맞는 모양으로 변화시켜 끼워 넣는 방식이다. 만약 ‘번지점프’라는 제목으로 시를 쓴다면 관련 이미지 날개, 곤돌라, 하늘, 강, 끈, 아프리카 부족, 땅, 물, 나무, 꽃, 낙엽, 열매, 아파트, 다이빙, 안전장치, 부도 등을 찾은 후 ‘인생의 부침’과 같은 큰 그림을 표현하고 싶다면 그 그림에 맞는 부분만 오려서 사용하는 방법이다. 하나의 이미지에는 여러 상징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각도를 나타내고 있지만, 여기서는 자신이 나타내고자 하는 밑그림에 맞는 용도로만 사용하는 것이다. 기법은 좀 다르지만 서정적 특징인 주제의 통일을 이루는데 적합하며 주관적 몰입이 가능한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퍼즐 기법은 꼴라쥬 기법과 아주 흡사하지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꼴라쥬는 찢어서 붙이듯 끌어온 이미지가 상징적이고 낮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양이 일정하지 않고 임의적이기 때문에 약간은 억지스러운 면도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퍼즐 기법은 다 재단된 이미지를 끼워 넣는 것이다. 그래서 상징성보다는 유사성이나 인접성의 이미지들이 동원되고 자연스러운 연결 관계를 만들어 준다고 할 수 있다. 미묘한 차이이기 때문에 개념은 구분하지만, 실재 쓰임에 있어서는 혼용해서 사용하는 것도 바람직한 시쓰기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의 시들은 이러한 방법을 이용해 시늉한 저자의 작품들이다. 고도의 집중력을 가진 여러분들은 더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출처] 퍼즐 맞추기 기법|작성자 김기덕   판판한 판과 골진 판에 대하여   우리에게는 고정관념이 있다. 고정관념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려는 생각이다. 산에 비가 내려 물이 흐르게 되면 계곡으로만 흐른다. 산등성이를 타고 물줄기들이 거슬러 흐르는 경우는 없다. 오랜 지각변동으로 융기, 침강하면서 생긴 계곡으로 수천 년 이 물줄기는 흘러왔다. 오랜 경험과 누적된 지식으로 우리의 뇌 속엔 수많은 계곡들이 패여 있다. 그것은 손금 같기도 하고 주름살 같기도 하다. 평평한 판은 물이 어디로 흐를지 알 수 없는 판이다. 고정된 의식세계가 없이 개방되고 자유로운 사고의 방목이다. 우유가 한 방울 떨어질 때 생긴 왕관현상처럼 사방으로 뻗고자 하는 말미잘 같은 촉수들이 살아 있다. 옥수수나 보리처럼 한 사고의 줄기에서 확장하여 무수히 뻗는 수염뿌리의 리좀이다. 사고의 바닥을 평평하게 가지라. 세월 속에서 나도 모르게 빗물에 깎이고, 도랑물에 패여 주름처럼 사고의 골이 늘어나고 깊어진다. 골이 좀 더 깊어지지 않도록 새로운 지식으로 메우라. 오그라들면 주름지고, 펴지면 팽팽해지듯이 움츠러들지 말고 사고를 확장하라. 그리고 사고의 스피드를 늘려라. 빨리 달리는 자의 앞길은 대평원이고, 벌판이고, 고속도로다. 생각의 속력을 늦추면 늦출수록 언덕과 절벽이 가로막는다. 과감히 대륙과 대륙을 횡단하라. 자신의 사고 영역에서 탈출하여 하늘로, 지하로, 지평으로 뻗어서 수직적, 수평적 광활한 공간을 확보하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너의 작품은 자유를 얻으리라. [출처] 판판한 판과 골진 판에 대하여|작성자 김기덕   횡단적 문학의 이해   문학은 다른 종류의 삶을 창안하는 것이다. 새로운 삶을 만드는 생산기계이다. 변용, 촉발로 포획되는 삶의 방식을 막스, 스피노자, 니체, 들뢰즈, 가타리가 살아왔다. 그들의 말은 섞이고, 우리의 말도 삶 속에서 섞인다. 들뢰즈는 이미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것을 섞어 제3의 사유를 만들었다. 리얼리즘의 덫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고자 했다. 욕망은 힘의 작용에 방향을 부여하는 의지적 성분이다. 능력은 힘을 수반하고 있는 잠재적 상태이다. 삶은 욕망의 내재적 장이며, 문학은 능력이 글의 형태로 표현된 것의 집합이다. 배치는 요소들이 계열화에 의해 표시되는 사물의 상태이며, 기계는 특정한 효과를 반복하여 생산하는 것의 집합이다. 문학을 한다는 것은 다른 삶을 창안하는 것이고, 다른 삶을 사는 것이다. 평범한 삶에서 특이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며, 평균적 삶에서 극한적 삶을 사는 것이며, 주어진 삶을 넘어선 삶을 사는 것이다. 욕망과 권력은 항상 배치로 존재한다. 욕망은 삶의 특정한 방향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욕망의 배치가 권력의 배치이다. 욕망은 다른 욕망과 조우, 부딪히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방향으로 전진한다. 새로운 요소와 접속하여 새로운 계열을 형성한다. 철학, 문학, 예술은 형식 없는 내용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는 순간 내용은 전개하는 특정한 형식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내용 없는 순수형식은 수학자, 논리학자의 공상 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표현은 내용으로 환원되지 않는 층위를 이룬다. 내용과 표현은 하나의 작품을 구성하지만(상관성), 서로 자율적이고 환원불가능하다. 소수자들은 현재 상태에 삶의 흐름을 고정하려는 권력에 반하는 성분의 집합이다. 다수성은 그 반대로 현재의 권력에 부합하는 성분의 집합이다. 다수자는 주류적, 지배적이며, 소수자는 거기에서 벗어난 억압, 무시세력이다. 치열한 작품을 쓰는 자들은 소수자들이다. 작품은 삶의 과정에 들어가는 특정한 배치 안에서 작동하는 기계다. 작품을 쓴다는 것은 다른 삶을 사는 것이며, 어떤 삶을 살려는 욕망, 능력의 표현이다. 그것은 생산한 욕망과 능력이 작용하는 기계이며, 그런 욕망에 의해 방향 지워지는 삶의 반복, 출현하는 장소, 외부요소들, 독자와 환경, 다른 책과의 접속 항들에 따라 다른 효과를 생산한다. 작품은 삶의 다른 과정에 들어가는 특정한 배치 안에서 작동하는 기계다. 이러한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작가인데, 작가는 다른 삶의 구성에 결부된 모든 것을 향해 열린 사람이며, 잠재적으로 그것과 결합하고 있는 기계이다. 작가는 독신자 기계로서 어떤 것과 결합할 수 있는 기계로 잠재적인 결합을 할 수 있는 존재이다. 작가가 만드는 다른 종류의 삶은 기존의 삶에 대한 변화와 갱신의 욕망에 의해 추동된다. 불평과 불만, 고통, 불편을 수반하는 현재의 삶에 대한 변환을 추구한다. 니체는 기존의 지배적 삶의 질병을 진단, 치유하여 새로운 삶을 만들고자 했다. 이들이 만든 작품의 의미는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어떤 기계가 규정되며, 기계의 의미는 기계의 용법에 의해 규정된다. 또한 문학은 언표행위의 집합적 배치이다. 아무리 조그만 소리로 말해도 어떤 삶에 대한 언표행위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이 다른 종류의 삶이라 할 수 있는 것은 특정한 집합적 배치 안에 있으며, 집합적인 언표행위이다. 문학은 이러한 삶을 제안하는 것이며, 집합적 욕망의 표현이다. 문학은 삶과 결부된 집합적 욕망의 배치의 표현이며 그것의 언표행위이다. 문학은 비인칭적 특이성으로 펼쳐지는 형식을 갖는다. 나로 진행되든, 너로 진행되든 상관없는 삶에 관한 언표들의 집합이다. 방향과 강도에 의해 삶의 흐름을 방사하거나 끌어들이는 비인칭적 특이성이다. 문학에 있어서 적극적 의미의 문학, 혁명적 문학은 횡단적이다. 힘과 욕망의 흐름을 기존의 삶의 틀 안에 가두고, 통합하는 경계를 넘어서고, 가로지른다. 경계는 흐름의 가변성을 제한하고, 고정하는 조건을 말하며, 경계를 따라 삶의 홈이 파인다. 여기서의 횡단은 수직적, 수평적으로 삶의 표면을 구획하고, 경계를 가로지르고, 넘어서는 것이다. 혁명적이라 함은 혁명에 대해 수없이 많은 말을 하는 문학보다 기존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 더 중요하다. 횡단은 경계가 지어진 하나의 영토에서 다른 영토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영토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토를 만드는 것이다. 횡단적 문학은 기존의 것과 다른 삶의 방식, 부재하는 삶의 방식을 만드는 것이다. 횡단적 문학은 기존의 삶과 부재하는 삶의 사이에 있다. 곧 상이한 삶 사이에 있는 문학이다. 횡단적 문학에서 횡단성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문학성은 커진다. 횡단성의 크기는 그것이 넘어설 수 없는 이질성의 폭과 비례한다. 여기에서의 경계는 내부를 고정하고 통합하며, 동질화시킨다. 또한 외부와의 차별성을 갖게 하고 이질성을 극대화 시킨다. 하나의 경계 안은 이질성의 폭이 협소하다. 횡단계수는 경계의 수에 비례하고 수용 가능한 이질성의 폭에 비례한다. 문학성은 문학기계의 능력이다. 문학의 미적 성질은 아름다움에 대한 고전적인 내적 범주에 의한 구분으로서 보들레르는 추함 자체가 문학의 대상이었고, 표현주의는 신체의 표면에 새겨진 추함을 통해 삶을 가시화했다. 기존의 미학주의적 잔재를 걷어내야 한다. 문학성 내지 예술성에 대한 반미학주의적 개념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문학기계의 능력은 무엇인가? 문학기계의 능력은 다른 종류의 삶을 생성할 수 있는 능력이다. 스스로 다른 종류의 삶의 일부로서 표현하며, 그것을 통해 다른 삶으로 촉발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다른 삶을 생성하는 능력이다. 생성 능력의 강렬도에 따라 단순한 문장이지만 강렬한 힘의 글이 있고, 잘 다듬어졌지만 추동의 힘이 미약한 글이 있다. 이러한 문학은 접속에 의해 이루어진다. 문학기계 능력은 접속하여 작동할 수 있는 기계들의 폭에 의해 외적으로 정의된다. 접속은 접속하는 이웃 항에 따라 다른 기계가 되고 변환 능력을 갖는다. 예를 들면 위는 식도에 접속하여 영양소의 흐름을 절단, 채취한다. 입은 성대를 통해 소리의 흐름을 절단, 채취하며, 생식기와 접속하여 섹스기계가 되고, 토하여 항문기계가 된다. 위와 입을 비교하면 위보다 입의 탈영토화 계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변환 능력은 탈영토적 능력인데, 탈영토화 잠재력은 다른 기계에 접속하여 다른 배치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다. 탈영토화 하는 횡단적 문학은 모델화하거나 전형화하기 보다는 거기서 벗어나는 탈영토화의 성분을 통해 펼쳐진다. 새로운 삶의 방식이며, 새로운 영토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는 평범성, 평균성을 벗어날 때 효과적으로 성취가 가능하다. 이들의 문학을 소수적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소수성과 다수성은 숫자적 구별이 아니다. 하나의 척도는 기준이고 잣대인데, 이미 작용하고 있는 권력을 내장하고 있다. 척도는 언제나 주류를 형성하고, 지배적 위치를 점하며, 다수성을 확보하고 있다. 이런 것에서 다른 것이 되는 것이 소수화 되는 것이다. 소수성은 주변성과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주변성은 동일한 척도를 전제한 가운데 중심과 척도에서 멀리 떨어진 어떤 상태이며, 다수성의 대칭적 짝이다. 이에 비해 소수성은 척도를 공유하지 않으며, 척도로 표시되는 지배적 상태에서 벗어나 있다. 소수문학은 다수적 언어의 소수화를 수반한다. 다수자들의 언어 안에서 변형시키는 방식이지 소수자들이 사용하는 자신만의 언어가 아니다. 이는 자기만의 언어 세계에 숨어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무기 삼아 다수 안에 들어가 휘젓고 다니며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 것이다. 자신만의 순수한 언어로 주변의 삶을 묘사하라. 다수적 언어의 내부에서 그것을 변형시켜 새로운 언어 창조,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하라. 횡단적 문학은 소수적 문학이다. 이상 『들레즈와 문학-기계』 중 이진경 교수의 「문학-기계와 횡단적 문학」의 압축을 통해 새로운 사고의 탈영토화를 생각해 보았다. 이미지의 횡단, 사고의 횡단을 추구하는 시쓰기가 필요하다. 오진현 시인의 『첫 나비의 아름다운 「의미의 비행」』에서 언급한 탈관념의 실현도 새로운 시쓰기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출처] 횡단적 문학의 이해|작성자 김기덕   시쓰기의 미래   우리의 삶은 컴퓨터나 TV, 휴대폰 등과 뗄 수 없는 관계를 이루고 있다. 현실세계의 삶이 점차 가상공간이라는 비현실과 상상의 세계로 확장되고 있다. 클릭 한 번으로 우리는 산을 끌어오고, 바다를 끌어오고, 무한한 우주 속을 유영하기도 한다. 이러한 전지전능함을 바탕으로 우리의 사고는 변화무쌍하며 무한한 사고의 팽창과 수축이 가능하게 되었다. 현대는 가상과 현실의 모호함뿐만 아니라 계절의 구분, 지리적인 경계, 시간의 흐름, 남과 여의 역할 등을 나누던 구획선들이 사라졌다. 그 만큼 현대인의 정신도 복잡해졌고, 빠른 변화의 물결 속에서 확신하고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고나면 새로운 제품들이 쏟아지고 새로운 용어들이 생겨난다. 날마다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지 않으면 적응할 수 없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몸과 생각은 반응속도가 빨라지며 복잡해져간다. 머릿속에 존재하던 단순 이미지들은 깨어지고, 서정성의 자연은 파괴되어 인공적인 도시공간을 만들어간다. 시는 자연성의 파괴와 기계화되어가는 감성을 회복하고자 노력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시는 향수를 불러왔고, 애수에 젖어 변하는 세상을 한탄하며 농경적인 삶을 그리게 했다. 자동차의 부품과 같은 복잡함보다는 간결하고 단순한 풍경의 이미지를 추구했다. 그러다 보니 아날로그적인 세대들에게는 설득력을 얻었지만, 디지털 세대들에겐 공감을 얻지 못했다. 물론 형식의 복잡함으로 독자를 멀어지게 한 이유도 있지만, 그 후로 시는 일부 세대의 전유물처럼 전락했고 고립되기 시작했다. 시는 문학을 선도하고 세상을 앞질러가야 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만이 시는 살 수 있다.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미래를 꿈꾸게 하는 시는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아니다. 생동하고 성장하는 무한 상상의 세포분열이어야 한다. 그 분열은 지극히 미시적이며, 거시적이어야 한다. 힉스입자의 반응에서부터 무한 우주로 뻗어가는 상상력이어야 한다. 그러한 시를 쓰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마인드가 바뀌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현대인들, 특히 고급독자들의 감각은 대단이 발달되어 있다. 많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세상 구석구석을 꿰뚫어 보고, 복잡한 공식들을 풀어간다. 원하는 대로 로봇이 되고 슈퍼맨이 된다. 하나의 사물에 대한 많은 이미지를 검색하며 자신의 용도에 맞는 모델을 고른다. 단순성의 반복, 정해진 룰의 식상한 게임은 아웃될 수밖에 없고, 정복된 후 버려질 수밖에 없다. 변화에 적응된 사고들은 새로운 세계를 원한다. 시도 이제는 아날로그적인 수목형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유자재로 클릭하며 맘껏 산을 끌어오고, 바다를 끌어와야 한다. 여러 개의 창을 열어 놓고 한꺼번에 작업할 수 있는 다중의 마인드가 필요하다. 그 복잡한 과정들을 독자들이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속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저만치 독자들을 앞서가야 한다. 이제 시는 이발소적인 그림으로 표현할 수 없다. 비슷한 그림, 비슷한 색칠이 독자를 못 견디게 만든다. 자연만을 고집하지 말고 과감히 컴퓨터 속으로 뛰어 들어가야 한다. 가상과 현실을 연결하여 제2, 제3의 세계를 창조해야 한다. 여러 개의 창을 열어놓고 한꺼번에 세상을 내려다보며 클릭 한 번으로 시공을 초월해야 한다. 변화무쌍한 현실공간을 날아다니는 무소부재의 하나님이 바로 미래의 시쓰기가 되어야 한다. [출처] 시쓰기의 미래|작성자 김기덕      인쇄 블로그 카페 북마크 메모 폴라 보내기  댓글 쓰기                   하이퍼시의 현주소 - 김규화  시창작론숲  2017. 10. 18. 22:12 http://blog.naver.com/shunzi75/221120090156 전용뷰어 보기   하이퍼시의 현주소 - 김규화     우리는 컴퓨터, 핸드폰, TV 등의 IT기기로 둘러싸인 환경 속에서 생활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3차원의 현실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3차원의 현실 공간을 초월한(hyper) 고차원의 환경에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 철학자 보드리야르는 이를 ‘제2의 현실’이라고까지 말하였다.   시는 당대를 반영한다고 하는데, 이러한 시대를 사는 우리 시인의 오늘의 시가 변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되어 2008년 봄, 타계한 오남구, 그리고 심상운, 내가 함께 전자 디지털시대에 걸 맞는 새로운 방법의 시를 쓰자고 합의하였다. 새로운 시의 명칭을 ‘하이퍼텍스트시’라고 하려다가 텍스트와 시는 같은 의미로서 중복이 되고, 또 사이버공간 안에서의 ‘하이퍼텍스트시’와도 같은 명칭이어서 우리는 그것들과 구분하기 위해 <하이퍼시>로 이름을 정했다. 따라서 우리는 전자 하이퍼텍스트의 특성을 살리되 전자를 떠난 오직 종이 위에서 쓰는, 하이퍼텍스트성(性)이 있는 시를 쓰기로 한 것이다.   하이퍼텍스트란 말은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hyper(건너편의, 초월․과도한)와 text를 합성하여 만든 컴퓨터 및 인터넷 관련 용어로서 1965년 컴퓨터 개척자 넬슨이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미국 브라운대 교수 P.란도도 그의 저서 에서 ‘하이퍼포엠’이라는 말을 썼다.   하이퍼텍스트는 컴퓨터 화면에 보이는 텍스트에 그림이나 밑줄 친 부분을 마우스로 누르면 다른 텍스트가 연결되어 화면에 나오는데(그래서 하이퍼텍스트를 파상텍스트라고도 한다) 이렇게 다른 텍스트로 연결해주는 것을 하이퍼링크라 하고 하이퍼링크로 연결된 쌍방향성 복수의 텍스트 전체가 하이퍼텍스트다. 일반 텍스트는 이용자의 필요나 사고의 흐름에는 상관없이 계속 일정한 정보를 순차적으로 쓰는 반면에 하이퍼텍스트는 이용자가 연상하는 순서에 따라 비순차적으로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면 전자 상의 하이퍼텍스트의 특성을 종이 하이퍼시에 어떻게 살려야 할까. 종이 위의 하이퍼시는, 컴퓨터 화면에서가 아니면 입력할 수 없는 그림, 소리, 동영상, 그래픽, 음악 등을 쓸 수 없는 대신 이들 요소를 언어로써만 표현해야 하는데, 물론 전자 하이퍼텍스트시에서 보이는 순차적 질서나 위계적 구조를 안 지킨, 혼란스럽기까지 한 비선형성-어쩌면 인간의 사고 과정이나 의식의 흐름을 닮은-과 그리고 수목(樹木)과 같은 논리적 체계가 아니라 감자 뿌리 같은 근경(根莖)처럼 사방으로 마구 이동하여 중심이 없는 그물 상태를 만들어내는 리좀(rhizome)성과, 그로 인한 일방향성이 아니라 쌍방향적인 네트워크를 종이 하이퍼시에 도입하여야 한다. 하이퍼시를 이루는 마디(node;단어, 행, 연)들은 동시적으로 나열하여 존재하게 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을 무화하거나 초월(hyper)하여 무한한 상상․공상의 세계를 펼쳐 보여야 한다. 심상운 시인은 하이퍼시의 창작 방법을 다음의 9가지 항목으로 요약하였다.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한다. 2.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좀)를 형성한다. 3. 다시점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캐릭터(또는 사물)를 등장시킨다. 4. 가상현실의 보여주기는 소설적인 서사를 활용한다. 5. 현실을 바탕으로 현실을 초월한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6.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시킨다. 7.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한다. 8. 의식세계와 무의식세계의 이중구조가 들어가게 한다. 9.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   종이 하이퍼텍스트시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발달된 컴퓨터기술의 특성을 종이 위의 문자면에서 살려 인간의 상상력을 무한히 확대해 나갈 수 있는 시 형태이다. “이런 기능의 확대는 의미(관념)에서 해방된 언어의 자유스러운 쓰임과 가상공간의 무한한 허용이라는 상상의 확산에 의해서 시적인 언어공간으로 구현된다. 따라서 종이 하이퍼텍스트시는 현실을 바탕으로 허구, 즉 기존의 시적 공간을 허물어버림으로써 작품의 주제나 목적성을 지워버린다. 다만 작품의 내면에 숨어서 흐르는 시인의 의식이 시적 생명력의 바탕이 된다”고 심상운은 말하고 있다. 상상 혹은 공상의 확대로 인해 언어는, 기의가 아닌 기표로 흐르게 되고 기표는 소쉬르가 말한 시니피앙으로서 자연히 기존의 주제나 관념은 지워지게 된다. 아니 관념의 제로지대에서 시작한 하이퍼적 상상력에 의해 새로운 관념, 보다 신선한 사물과 정신이 태어나게 된다. 이것이 하이퍼시의 주제라면 주제다.   2008년 봄부터 쓰기 시작한 하이퍼시는 기존의 3명의 동인으로 구성되었지만 그 중 한명은 병고에 시달렸고 사실상 2명의 시인으로는 동인 구성을 할 수 없어서 동인(회)의 울타리를 제치고 뜻이 있는 많은 시인들의 동참을 촉구했다. 그리하여 <하이퍼시 특집>, <확산 하이퍼시 1,2,3>, <새로운 시운동⁄하이퍼시>라 이름하여, 20명의 시인들이 도합 82편의 작품을 발표하게 되었다....
852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동시세계에서 뛰여 놀쟈... 댓글:  조회:2920  추천:0  2017-11-13
  지리산 자락 어느 한 감나무에서 빨갛게 익은 감을 쪼아 먹고 있는 직박구리... -------------------------------------------------- <동시심화과정> 수업자료 / 권영세   제2강 시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   시는 역사가 쓰여지기 이전부터 존재했다. 인류의 역사가 문자로 기록되기 이전에도 인류에게 역사가 있었고, 이때의 역사는 대체로 종족이 살아온 내력, 혹은 종족이 이동해 온 흔적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런 이야기는 훌륭한 이야기꾼에 의해 전승된다. 그런 점에서 문자로 기록된 역사 이전에 이야기가 있었고, 이 이야기는 이야기꾼에 의해 전승되었다. 그러나 후대로 올수록 이야기꾼들은 그들의 종족에 대한 이야기를 후대에 전하기 위해 단순히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이야기를 기억할 수 있는 기술을 필요로 했고, 이런 필요 때문에 이야기꾼들은 이야기에 리듬을 부여하여 같은 낱말이나 문장을 반복하게 된다. 시는 이렇게 이야기를 기억하기 위한 기술과 함께 발전한다. 우리가 말하는 정형시의 기법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각운과 어구 반복은 이런 사정을 배경으로 태어난다. 그런 점에서 시가 최초로 태어난 곳, 말하자면 시가 온 곳은 이야기이고, 각운과 반복은 이야기를 기억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차츰 이런 수단과 함께 긴 이야기는 짧게 축소되거나 압축되기 시작한다. 결국 시는 간단히 정의 한다면 응축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 고대 시가인「공후인箜篌引」혹은 「공후도하가公無渡河歌」로 불리는 다음과 같은 노래를 생각해도 알 수 있다.   님이여 그 물을 건너지 마오 (公無渡河) 님은 마침내 물속으로 들어가셨네 (公竟渡河) 물속에 빠져 죽은 님 (墮河而死) 아아 저 님을 어찌 다시 만날까 (將奈公何)   위의 노래는 슬픈 이야기를 미적으로 승화시키고, 따라서 이 시가를 읽을 때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비록 슬픈 이야기를 동기로 하지만 정형률과 낱말의 반복이 주는 즐거움, 각운이 주는 즐거움이고, 이것이 시 읽기 나아가 시 쓰기가 우리에 즐거움을 주는 이유이다. 그런 점에서 시는 감동이고 기쁨이고 가난한 영혼을 채워주는 정신의 양식이다. 많은 이론가나 시인들이 시를 ‘여과된 삶’ 혹은 ‘순수한 삶’이라고 부르는 것은 시가 거대한 삶의 이야기들을 걸러 그 핵심을 보여주고, 이때 여과된 것, 곧 최초의 이야기보다 강력한 호소력을 띠기 때문이다. 시는 고대부터 존재했고, 그것은 이야기를 간략하게 전달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했다. 이런 고대 시가의 특성은 시를 처음 쓰려는 사람들에게 암시하는 게 많다. 예컨대 처음부터 시를 쓰지 말고 자신이 체험한 이야기를 산문으로 적고, 이 산문을 줄이고, 정형률에 맞게 표현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여옥이 부른 ‘공후인’의 경우도 남편이 전한 이야기를 토대로 하지 않았는가? 또한 이야기는 정서를 동반해야 한다. 물론 시는 역사적으로 각 시대에 맞는 시의 유형을 소유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비록 각 시대가 그 시대에 고유한 시를 생산하지만 모든 시가 크게 보면 동일한 세계를 지향한다는 점이다. 요컨대 모든 시인이 말하는 것은 ‘내가 혹은 우리가 경험한 것은 이렇다’로 요약된다. ‘이렇다’는 것은 자신만의 시각으로 본다는 뜻이고, 따라서 시를 쓰거나 읽을 때 우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를 배우고 체험하게 된다.   이승훈,『이승훈의 알기 쉬운 현대시작법』(북인, 2011) pp. 15-17    위의 내용과 관련하여 다음 동시를 읽고 감상해 보자. 아무도 거짓말 안 했다 김마리아   여러분, 오늘은 거짓말에 대한 수업을 합니다 잘, 생각해 보고 손 드세요 솔직하게   지금까지 거짓말 한 번도 안 해 본 사람 손들어 보세요   나는 고개를 돌리며 옆을 봤다 친구들도 두리번거렸다   조용했다   손을 든 사람 아무도 없었다   우리 반 아이들은 아무도 거짓말 안 했다 그 시간에는     내가 더 좋다 권영세   식사 때마다 조심조심 앉으려 해도 쿵쾅 쿵쾅 소리 내는 우리 집 식탁 의자   엄마가 시장에 가서 예쁜 꽃이 달린 의자 양말 사 오셨다   그제야 발이 편한지 소리 없이 살짝 내딛는 양말 신은 식탁 의자   이제는 아파트 마당에서 아래층 호랑이 할머니 만나도 눈치 보지 않아서 참 좋다   고운 양말 신은 식탁 의자보다 내가 더 좋다                 제3강 시의 기능은 무엇인가?   시에는 고대 시가가 그렇듯이 사회적‧현실적 효용성이 있다. 고대 시가는 이야기를 쉽게 기억하고 후대에 전하기 위한 실용적 수단이었다. 고대의 시인들은 종교나 정치의 영역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고, 사회를 하나로 통합시키는데 기여했다. 좀 더 나은 수확과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시인들은 노래하고, 이 노래가 사회를 끌고 나가며, 시인들은 또한 전쟁의 역사를 노래하고, 권력을 비판하고, 그 무상함을 노래하고 신들을 찬양했다. 그렇기 때문에 포악한 왕은 시인들을 죽였고, 반대로 훌륭한 왕은 시인들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시의 이런 기능은 현대라고 해서 달라진 것이 아니고 다만 그 표현 형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그러나 현대에 오면 시인들은 이런 권력이나 실제적‧현실적 효용성보다는 근대 미학의 특성인 이른바 순수 예술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현실적 효용성보다는 시 자체의 아름다움, 그러니까 현실에 대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혹은 현실과 다른 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일에 몰두한다. 이렇게 현실과 거리를 두고 시 자체를 사랑하는 태도가 현실과 다른 시의 공간을 낳고, 이런 공간은 일상적이고 이성적인 사고가 아니라 상상력을 낳는다. 예컨대 주요한은 가 아닌 상상의 공간을 노래한다.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뜰 위에 속삭입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 - 주요한,「빗소리」부분   이 시는 봄밤에 내리는 빗소리를 노래한다. 일상인들의 시각에서 빗소리는 빗소리로 들릴 뿐이다. 그러나 시인은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 소리’로 상상한다. 뿐만 아니라 밤은 어미닭처럼 깃을 벌리고, 비는 어미닭 품에서 지껄이는 병아리가 된다. 요컨대 ‘뜰 위에 내리는 비’가 이 시에선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처럼 속삭인다. 봄밤에 내리는 비는 이렇게 다정하고 기쁘고 따뜻하다. 시는 이렇게 상상력의 세계를 강조하고 상상력의 세계는 과학적 진리도 아니고 종교적 진리도 아닌 이른바 미적 진리를 추구한다. 그런 점에서 현대시의 기능은 상상력에 의한 미적 공간을 창조함에 있다. 그러나 이런 근대 미학이 심화되면서 시인들은 이렇게 현실과 다른 시적 공간을 사랑하는 태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언어 자체에 관심을 두게 된다. 시인들은 부패한 일상적 언어를 순화하고 정화시키는 일도 하지만 일상적 언어의 가치나 기능과는 다른 시적 언어의 가치와 기능을 추구하고, 심하면 일상적 언어를 파괴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파괴가 노리는 것은 일상적 언어를 초월하는 전혀 새로운 언어이고,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시인들이 추구하는 게 그렇다. 앞에서 보기로 든 ‘빗소리’는 일상어를 순화한, 그런 점에서 때 묻지 않은 언어이다. 그런가 하면이 시의 언어, 곧 시적 어법은 일상적 어법과 다른 시적 어법을 보여준다. ‘밤’을 어미닭에 비유하고, ‘빗소리’를 병아리 소리에 비유하는 게 그렇다. 그러므로 시적 언어는 시적 어법을 뜻한다. ‘병아리’라는 낱말은 일상인도 사용하고 시인도 사용한다. 그러나 사용하는 방법이 다르다. 일상인의 경우 ‘밤’은 그대로 ‘밤’이지만 시인의 경우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린다’ 그러니까 말하는 방법, 어법이 다르다. 비유는 시적 어법의 출발이고, 이런 비유가 발전하면 상징, 아이러니, 역설 등 여러 가지 어법이 드러난다.이 문제는 뒤에 다시 살필 예정이다. 결국 시가 언어 예술이라는 자각이 심화되면서 우리는 시적 언어의 특성에 대해 공부해야 하고, 이런 언어의 가치와 기능에도 관심을 두어야 한다.   이승훈,『이승훈의 알기 쉬운 현대시작법』(북인, 2011) pp. 17-19.    위의 내용과 관련하여 다음 동시를 읽고 감상해 보자. 그림자에도 빛깔이 있네 하청호   봄날이네 벚꽃나무 밑에 아기가 곤히 자고 있네 그림자가 이불처럼 아기를 덮고 있네   이불 위로 벚꽃송이 떨어지네 수놓듯 수놓듯 그림자에 분홍 꽃 곱네   그림자에도 아름다운 빛깔이 있네.       철없는 개나리꽃 엄마 권영세   기다리던 새봄과 늘 함께 와서 정말 반가웠는데   생뚱맞게 겨울 나뭇가지에 노란 꽃송이 몇 개를 피워 놓을 게 뭐람.   저 어린 것들을 찬바람 쌩쌩 부는 바깥에 내 보내 입술 파르르 떨게 하는   요즘 개나리꽃 엄마는 참 철이 없어.   제4강 시인이란 무엇인가?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시인을 보는 사람, 견자見者, 광기에 홀린 사람으로 정의한 바 있다. 이때 본다는 것은 시인의 사유와 영감이 시인 자신을 초월해서 자신도 모르는 어떤 초월적인 것에 근거함을 의미한다. 이렇게 자신도 모르는 어떤 힘에 의해 사물을 보고 세계를 보기 때문에 시인은 광기에 홀린 자가 되고, 신비한 영감에 지배받는 자가 되고, 이른 바 견자가 된다. 따라서 시인은 일상인보다 크고 높고 귀중한 힘이 부여된 자로 인식된다.   시인에 대한 이런 인식은 틀린 것이 아니다. 사실 시인은 일상인과는 다르게 세계를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상상한다. 그러나 이런 특이한 감각, 정서, 사유, 상상은 따지고 보면 모든 인간에게 조금씩 있게 마련이고 시인은 이런 이상한 능력을 일상인들 보다 더 신뢰하고 믿고 개발할 뿐이다. 그리고 이런 능력은 그 후 낭만주의 시대에는 상상력이라는 이름으로, 현대에는 무의식이나 환상이라는 이름으로 바뀌면서 아직도 시인의 기본 조건으로 간주된다. 그런 점에서 시인에 대한 인식 역시 시대마다 다르고 이 시대적 차이가 중요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근대 문학 초기만 하더라도 이광수가 말한 것처럼 시인 혹은 문인의 조건은 대학을 중퇴할 것, 연애에 실패할 것, 폐결핵을 앓을 것,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울 것, 장발이고 얼굴이 창백할 것, 가난할 것 등으로 요약된다. 이런 조건들은 일종의 세기말 퇴폐주의를 반영하고 당시 일제 식민지 시대의 병든 청춘들의 내면을 반영한다.   그러나 오늘날 이 땅의 시인들은 이와는 다르지 않은가? 1960년대를 살던 시인들이 다르고 오늘날 21세기를 사는 시인들이 다르다. 사실 오늘 이 시대의 시인들은 누가 시인이고 누가 은행원이고 대기업 사원인지 모를 정도로 구별이 안 된다. 지금 시인들의 외모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사실 모든 외면은 내면을 반영하고, 얼굴은 마음을 반영하고, 스타일은 영혼을 반영한다. 요컨대 시인을 그가 살고 있는 시대의 현실과 문화에 의해 정의된다.   이 시대 시인들은 건강한 육체와 정신으로 살 수도 있고, 우울증에 시달릴 수도 있고, 보이지 않는 정신적 외상, 트라우마에 시달릴 수도 있다. 넥타이를 맬 수도 있고 매지 않을 수도 있고, 술을 마실 수도 있고 전혀 못 마실 수도 있다. 담배를 피우는 시인도 있고, 금연을 단행한 시인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시대엔 시인의 상투형, 그러니까 시인 하면 떠오르는 개성이 사라지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엔 시인과 일상인이 같아진 것인가? 그리고 모두가 시인이란 말인가? 사실 이 시대엔 시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다만 자신의 감정과 사고를 운문으로 혹은 시적 표현으로 전달할 수 있는 자가 시인일 뿐이다.   최소한 시인은 일상인들과 다르게 사물을 보고 사물들을 낱말로 연결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물론 이 시대엔 시만 쓴다고 시인이 되는 게 아니라 신춘문예, 문학잡지라는 제도를 통과해야 하고, 아니면 시집을 내야 시인 행세를 한다. 이건 근대 문학이 가진 근대 제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의 황진이는 신춘문예에 당선한 적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이런 사회 제도와 관계없이 시인은 본질적으로 상상력이 있어야 하고, 상상력은 훈련에 의해 개발되고, 시 쓰기도 훈련에 의해 개발된다.   이승훈,『이승훈의 알기 쉬운 현대시작법』(북인, 2011) pp.21-22.    다음 시를 읽고 감상해 보자. 편지 천상병   점심을 얻어먹고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옛날에도 더러 있었던 일, 그다지 섭섭하진 않겠지?   때론 호사로운 적도 없지 않았다. 그걸 잊지 말아주기 바란다.   내일을 믿다가 이십 년!   배부른 내가 그걸 잊을까 걱정이 되어서   나는 자네한테 편지를 쓴다네.       공룡이 되고 싶은 날 노원호   너무 심심해서일까 오늘은 괜히 공룡이 되고 싶다.   날개가 달려 하늘은 나는 공룡이라면 더 좋겠지만 그게 아니면 티라노사우루스가 되어 횡단보도를 뚜벅뚜벅 걷다가 달려오는 자동차를 멈추어 보고 지팡이를 짚고 오는 할머니를 보면 훌쩍 안아서 횡단보도고 건너 주고 할머니가 고맙다고 과자라도 주면 야금야금 맛있게 먹어도 보고 그래도 심심하면 어기적어기적 뒷동산으로 올라가 크게 소리도 질러보고 그러다 푸른 하늘이라도 활짝 열리면 나는 드디어 공룡이 되었다고 크게 한 번 외치고 싶다.     제5강 왜, 시 읽기와 시 쓰기인가?   시인이 되기 위해 혹은 시인으로서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은 시를 많이 읽는 일이다. 그것도 잘 읽는 일이다. 잘 읽는다는 것은 시를 시로서 읽어야 함을 의미한다. 시집은 신문이나 과학 교과서가 아니다. 신문을 읽을 때 관심을 두는 것은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 말하자면 객관적 사실에 대한 정보이고, 과학 교과서를 읽을 때 관심을 두는 것은 과학적 진리나 법칙에 대한 이해이다. 그러나 시집에 실린 시를 읽는 것은 이런 읽기와는 다른 것인데, 어떻게 읽어야 할지 각자 한 번 생각해 보고 함께 이야기 나누어 보자.    나는 시를 이렇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 ................................................................................................................................................................................. 발 권오삼   나는 발이지요. 고린내가 풍기는 발이지요. 하루 종일 갑갑한 신발 속에서 무겁게 짓눌리며 일만 하는 발이지요. 때로는 바보처럼 우리끼리 밟고 밟히는 발이지요.   그러나 나는 삼천리 방방곡곡을 누빈 대동여지도 김정호 선생의 발 아우내 거리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던 유관순 누나의 발 장백산맥을 바람처럼 달렸던 김좌진 장군의 발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의 발   그러나 나는 모든 영광을 남에게 돌리고 어두컴컴한 뒷자리에서 말없이 사는 그런 발이지요. 풀잎 박성룡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하고 그를 부를 때는, 우리들의 입 속에서는 푸른 휘파람 소리가 나거든요.   바람이 부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몸을 흔들까요. 소나기가 오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또 몸을 통통거릴까요.   그러나,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 ‘풀잎’하고 자꾸 부르면, 우리의 몸과 맘이 어느덧 푸른 풀잎이 돼 버리거든요.             제6강 시 쓰기엔 재주가 있어야 하는가?   선천적으로 뛰어난 재주를 타고난 사람을 천재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재주는 개발하기 나름이다. 천재가 탁월한 재능을 타고났다고 하지만 역사상 위대한 천재들은 재주에 앞서 일상인보다 더 노력한 사람들이고 고독한 사람들이고 근면한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천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천재는 만들어진다. 영국 속담에 ‘천재는 일종의 정신병’이란 말도 있다. 이런 말이 암시하는 것은 천재는 일상인과 다르게 사물을 보고 느끼고 상상하고, 이런 상상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자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천재는 자기의 능력을 특별한 렌즈로 초점을 맞추는 자이고, 재주를 낭비하지 않고 언제나 집중하는 자이고, 남들이 볼 때 다소 이상한 자이다. 사실 상상력이란 일종의 정신병, 곧 일상적 사유에서 이탈하고 이성적으로 수용될 수 없는 것들을 수용하고 종합하는 이상한 정신능력이다. 그리고 이런 정신세계를 탐구하는 자들은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고독하다. 그러면 상상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어딘가 소리 있는 곳으로 귀 기울이는 예쁘디예쁜 열린 창이여   꽃이슬 젖은 새벽길 위에 서서 그 많은 소녀들은 아직도 기다리고 있을까   단 한 번인 목숨 누구를 위하여도 죽을 수 없는 그 자라가는 소녀들의 열린 창이여 - 김춘수,「곤충의 눈」             김춘수의「곤충의 눈」이다. 이 시에서 시인이 노래하는 대상은 ‘곤충의 눈’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을 이상하게도, 말하자면 일상인들과는 다르게 ‘열린 창’에 비유한다. 시인은 ‘곤충의 눈’을 보면서 ‘열린 창’에 비유한다. 시인은 ‘곤충의 눈’을 보면서 ‘열린 창’을 상상하고, 2연에서 이런 상상은 ‘새벽길 위의 소녀’들로 발전하고, 마침내 3연에 오면 ‘곤충의 눈’은 ‘자라고 있는 소녀들의 창’이 된다. 물론 이때 ‘창’은 ‘눈’을 암시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도대체 어떻게 ‘곤충의 눈’이 ‘열린 창’이고 ‘자라고 있는 소녀들의 창’이란 말인가? ‘빗소리’에서 ‘병아리’를 연상하는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런 상상은 시인의 고독과 남다른 직관과 사유의 소산이고, 자신의 삶에 대한 지속적 성찰로 매개한다. 요컨대 시의 천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시 쓰기를 좋아하고, 꾸준히 시 쓰기에 노력하고, 언제나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기 때문에 고독한 자가 있을 뿐이다. 물론 시 쓰기에는 어느 정도 시에 대한 재능, 재주도 요구된다. 그것은 언어에 대한 남다른 감각과 상상력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재주는 살아가면서 대부분 낭비되기 때문에 재주보다 중요한 것은 지속적인 노력과 훈련이다. 따라서 재주라는 말보다 경향, 혹은 취향, 재미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다. 사실 시는, 그리고 모든 예술은 고독한 놀이이고, 시인은 이런 놀이를 좋아하는 자이다. 축구 선수가 축구가 좋아서 볼을 차고, 과학자는 실험이 좋아서 밤늦도록 실험실에서 실험을 한다. 어디 운동선수와 과학자뿐인가? 사업가는 돈 버는 게 좋아서 사업을 하고, 학자는 공부하는 게 좋아서 공부를 한다. 돈을 벌려고 공부하는 게 아니고 이름을 내려고 공부를 하는 게 아니다. 시도 좋아서 쓴다. 좋지도 않고 취미도 없다면 돈도 안 생기고 괴로운 이 작업을 왜 하는가? 시인 혹은 시인을 지망하는 사람은 재주보다 시 쓰기에 취미가 있어야 하고, 재미를 느껴야 하고, 취향이 그래야 한다. 물론 사람마다 기호나 취미는 다르다. 시인은 시에 취미가 있는 자이고, 이 취미는 단순한 취미의 영역이 아니라 창조의 세계를 지향한다. 창조란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을 남들과 다르게 보고 이 사물들을 언어로 남들과 다르게 연결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시를 쓰는 이유나 동기는 시인마다 다를 것이다. 도대체 그렇게 많은 시간을 시 쓰기에 소비하는 것은 무슨 가치가 있는가? [참고 문헌] 이승훈,『이승훈의 알기 쉬운 현대시작법』(북인, 2011) pp.23-25.      다음 시를 읽고 함께 이야기 나누며 감상해 보자. 꽃을 보려고 정호승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고 고요히 눈이 녹기를 기다립니다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잎을 보려고 흙의 가슴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립니다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엄마를 만나려고 내가 먼저 들에 나가 봄이 됩니다 새들처럼 이옥근   파란 하늘이 자꾸만 높아지던 어느 날   느티나무 단풍 든 잎새들이 - 우리도 새들처럼 날아 보자   바람 타고 함성 지르며 새가 되어 날았습니다   제7강 시인은 감각이 예민해야 한다    이미지의 유형   시는 관념이 아니라 감각을 강조한다. 관념을 전달하는 경우에도 직접 진술하기보다는 감각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지가 중요하다. 이미지는 지각, 기억, 환상, 공상, 연상에 의해 태어난다. 하지만 모든 이미지는 감각에 호소한다는 특성을 공유한다. 인간만 해도 그렇다. 어떻게 태어났는가? 이런 문제도 중요하지만 태어난 인간들이 공유하는 특성도 중요하다. 탄생 과정도 중요하고, 탄생한 존재들이 공유하는 특성도 중요하다. 인간은 물론 어머니에게서 태어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인간은 안방에서 태어나고, 병원에서 태어나고, 새벽에 태어나고, 아침에 태어나고, 저녁에 태어나고, 깊은 밤에도 태어난다. 순산인 경우도 있고, 난산인 경우도 있다. 태어나는 과정은 이렇게 다양하다. 그러나 이렇게 다양한 과정을 겪으며 태어났지만 인간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남성과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차이가 있다. 혹은 이런 성적 차이와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이성적으로 사유하고 도덕적으로 행동하고 감성적으로 사물을 지각한다는 특성이 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이성, 양심, 감성을 공유한다. 이 세 가지 특성가운데 어느 것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이성적 인간, 도덕적 인간, 감성적 인간이 나타난다. 이런 분류는 시각이나 기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이미지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미지도 지각에 의해 태어나고, 기억에 의해 태어나고, 환상에 의해 태어나고, 공상‧연상에 의해 태어난다. 그런 점에서 그 탄생의 과정은 복잡하고 차이가 난다. 그러나 감각적 실체 혹은 감각적 현실이라는 점에서 모든 이미지는 같다. 이 감각의 세계를 어떻게 나누느냐에 따라 여러 유형의 이미지들이 존재한다. 우리 신체의 감각기관은 눈, 귀, 코, 혀, 피부 등 다섯 가지이다. 이 다섯 기관을 이른바 5관官이라고 부른다.그러므로 이미지에는 시각적 이미지, 청각적 이미지, 후각적 이미지, 미각적 이미지, 촉각적 이미지가 있다. 물론 이밖에도 운동적(기관적) 이미지, 근육감각적 이미지, 공감각적 이미지 등이 추가된다. 이런 이미지들은 감각적 경험 자체를 전달한다. 이렇게 감각적 경험만을 목표로 하는 이미지를 시론詩論에서는 이른바 정신적 이미지라고 부른다. 이와는 달리 어떤 관념을 전달하거나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는 이미지는 비유적 이미지, 이미지가 상징이 되는 경우는 상징적 이미지 혹은 상징이라고 부른다.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   첫째로 시각적 이미지는 눈에 보이는 사물들의 사물성, 말하자면 사물에 대한 관념이나 개념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현대시는 음악보다 회화의 특성을 강조하고, 따라서 많은 현대 시인들은 회화성, 곧 시각적 이미지를 강조하고 나아가 이런 이미지로 한 편의 시를 구성하기도 한다. 다음은 시각적 이미지로 한 편의 동시가 구성된 보기이다.   서쪽 하늘에 붉은 노을 떴다 드넓은 호수에도 붉은 노을   누구일까!   하늘과 호수에 똑같이 찍어낸 저 엄청난 그림   데칼코마니. - 하청호,「데칼코마니」전문   둘째로 청각적 이미지는 귀에 들리는 소리를 있는 그대로 옮기는 것이다. 그렇지만 시각적 이미지처럼 이미지 자체만으로 한 편의 시가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설명적 기능을 하는 비유적 이미지인 경우가 많다. 다음은 청각적 이미지로 구성된 동시이다.   늦은 밤 부엌에서 보글보글, 보글보글…….   그게 무슨 소린지 넌 알겠니?   일 나간 우리 아빠 돌아오셨다고 찌개냄새가 좋아서 노래하는 소리야. - 문삼석,「보글보글」전문 [참고 문헌] 이승훈,『이승훈의 알기 쉬운 현대시작법』(북인, 2011) pp.51-21. 제8강 시인은 감각이 예민해야 한다    냄새, 맛, 촉각의 이미지   셋째로 후각적 이미지는 코에 닿는 감각을 강조한다. 시인이 후각적 이미지, 특히 향기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그러니까 향기의 상상력에 의해 한 편의 시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후각적 이미지나 상상력으로 한 편의 시를 짓는 일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다음 하청호 시인의「아버지의 등」을 읽고 후각적 이미지가 어떻게 한 편의 동시로 구성되었는지 살펴보자.   아버지의 등에서는/ 늘 땀 냄새가 났다.// 내가 아플 때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지만/ 아버지는 울지 않고/ 등에서는 땀 냄새만 났다.// 나는 이제야 알았다/ 힘들고 슬픈 일이 있어도/ 아버지는 속으로 운다는 것을/ 그 속울음이/ 아버지 등의 땀인 것을/ 땀 냄새가 속울음인 것을.// - 하청호,「아버지의 등」전문   이 동시는 후각적 이미지를 제시하기 보다는 이런 이미지, 특히 냄새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 편의 시로 구성하였다. 즉 아버지의 등에서 나는 땀 냄새, 즉 땀 냄새라는 후각적 이미지라는 말보다는 후각적 상상력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시인은 아버지의 등에서 나는 땀 냄새를 중심으로 상상력을 전개한다. 따라서 시인은 아버지가 힘들고 슬픈 일이 있어도 겉으로 소리 내어 울지 않고 속으로 운다는 것을, 그 속울음이 아버지 등의 땀이고, 그 땀 냄새가 바로 속울음이라고 상상했다. 넷째로 미각적 이미지는 혀에 닿는 감각의 전달을 목표로 한다. 이런 감각 역시 여간 세련되지 않고는 단순한 설명의 차원에 머무는 수가 많다. 다음은 김영기 시인이 쓴「단비와 쓴비」이다. 미각적 이미지가 어떻게 쓰였는지 살펴보자   가뭄에 목마를 때/ 찾아온 비는 단비/“야, 그 비 참 달다.”/ 물꼬 내러 가는 아빠// 달다고/ 말은 못해도/ 춤을 추는 나뭇잎.// 태풍을 등에 업고/ 오는 비는 몹쓸 비/“야, 그 비 참 쓰다.”/ 과수밭을 보신 아빠// 쓰다고/ 말은 못해도/ 눈물 맺은 이파리.// 김영기,「단비와 쓴비」전문   이 동시는 ‘달다’, ‘쓰다’라는 맛을 나타내는 형용사를 써서 가뭄의 단비와 태풍과 함께 오는 비를 중심으로 시를 구성하였다. 여기서 비가 ‘달다’, ‘쓰다’라는 표현은 식물의 입장이 아닌 단지 시인의 상상일 따름이다.즉 가뭄에 와서 식물에 고마우니까 ‘단비’이고 세찬 비바람을 몰고 와서 식물에 해로우니까 ‘쓴비’이기 때문이다. 다섯째로 촉각적 이미지는 신체, 주로 신체 표면에 닿는 감각을 전달한다. 부드럽다, 딱딱하다, 물렁하다,단단하다, 꺼칠하다 등으로 표현되는 이미지이다. 다음은 권영세 시인의 동시「손때」이다. 이 동시에 촉각적 이미지가 어떻게 쓰였는지 살펴보자.   시골집 농기구 광 속에/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적 연모들이/ 가지런히 벽에 걸려있다.// 지금은/ 일손 없어 쉬고 있는/ 겹겹 손때 묻은/ 괭이, 삽, 가래, 호미……// 이제는/ 그 날의 주인도 떠나고 없는/ 괭이로 텃밭을 고른다.// 이마에는 어느 새 땀방울이 맺히고/ 문득 손바닥으로 전해 오는/ 어느 할아버님의 손길인가.// 잠시 일손 멈추고/ 얼굴은 모르지만/ 손잡이에 스며있는/ 따스한 정을 느껴 본다.// 권영세,「손때」전문   이 동시에는 어느 곳에도 촉각적 이미지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다만 ‘문득 손바닥으로 전해 오는/ 어느 할아버님의 손길인가.’ 와 ‘손잡이에 스며있는/ 따스한 정을 느껴 본다.’에서 밑줄 친 ‘손길’과 ‘정’이라는 말에서 촉각적 이미지를 짐작할 수가 있다. 시인은 앞의 ‘손길’과 ‘정’이라는 두 말을 중심으로 시의 메시지를 설정하고 있다. 이 말 외의 시적 표현들은 결국 ‘시골집 농기구 광속에 있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적부터 겹겹 손때가 묻은 농기구’를 통해 조상의 손길과 따스한 정을 시에 담고자 하는 상황 전개를 위해 사용되었을 뿐이다.   [참고 문헌] 이승훈,『이승훈의 알기 쉬운 현대시작법』(북인, 2011) pp.51-21.   제9강 우리는 비유 속에서 산다   시인은 감각이 예민해야 한다. 그렇지만 시 쓰기는 감각적 능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사물에 대한 감각적 수용이 시인의 잠재적 능력이라면 이런 능력을 언어로 구현해야 한다. 따라서 시인에게는 특수하게 말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시 쓰기는 일상인들과 다르게 말하기, 다르게 쓰기에 지나지 않는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시인은 말을 잘못 사용하는 자이고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는, 하지 않는 자이다. 일상인들은 ‘장미가 피었어’라고 말하지만 시인은 ‘장미는 타오르는 램프야’라고 말한다. 흔히 이런 말하기를 비유라고 한다. ‘장미는 타오르는 램프야’라는 표현에서 ‘장미’는 ‘램프’에 비유된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일상인의 시각에서는 말이 되지 않고, 그런 점에서 비유적 표현은 일상적 어법에서 이탈하고 벗어나는 이상한 말하기가 된다. 그러나 이런 말하기를 통해 우리는 ‘장미’에 대한 새로운 감각, 새로운 의미를 알게 된다. 또한 답답한 세상을 신선하게 바라보고 느끼고 생각한다. 이런 표현을 통해서 시인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교육에 의한 사유를 통해 세상을 경험하지 말고 스스로 경험하라는 것, 그것도 사물을 새롭게 경험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하면 이런 비유적 표현은 시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우리의 삶은 비유 속에서 비유에 의해 비유와 함께 수행된다. 비유는 우리 주위를 감싸고 우리는 비유와 함께 삶을 영위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사물들의 이름을 생각할 수 있다.         ▪ 괭이갈매기         ▪ 물총새          ▪ 딱따구리       ▪ 칼새                  ▪ 집게발톱        ▪ 강아지풀       ▪ 비단풀               ▪ 애기풀           ▪ 할미꽃   위에 보기로 든 본래의 각 사물들은 모두 다른 사물에 의해 비유되었다. 이런 비유를 통해 우리는 각 사물들의 특성을 좀 더 명료하고 신선하고 구체적으로 이해한다. ‘괭이갈매기’의 경우, 갈매기는 괭이 곧 고양이에 비유되고, 그것은 이 갈매기 울음소리가 고양이 소리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물총새’의 경우엔 물새가 총알에 비유되고, 그것은 이 새가 물가의 나뭇가지에 앉아 있거나 공중의 한 자리에 떠서 물을 살피다가 총알처럼 날쌔게 물속으로 들어가 고기를 잡아먹기 때문이며, ‘딱따구리’의 경우엔 이 새가 딱딱한 부리로‘딱딱’ 소리를 내며 나무에 구멍을 내어 그 속의 벌레를 잡아먹기 때문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런 표현은 비유가 아니라 소리 상징에 속할 수도 있다. 그러나 ‘딱딱’ 소리를 그대로 새의 이름으로 한 점에서 이 새는 소리를 비유한다고 할 수도 있고 상징 역시, 비유의 한 유형이기 때문이다. ‘칼새’는 새가 칼에 비유되고, ‘집게발톱’은 발톱이 집게에 비유되며, ‘강아지풀’은 풀이 강아지에 비유된다. 그것은 이 풀이 여름에 강아지 꼬리 같은 이삭이 나오기 때문이다. ‘비단풀’은 바다 속에 자라는 풀로 비단에 비유되고, ‘애기풀’은 풀이 애기에 비유되고, ‘할미꽃’은 꽃이 할미에 비유된다. 요컨대 이런 이름들은 비유적 특성을 보여주고, 이런 비유적 표현이 강조하는 것은 각 사물의 특성에 대한 명료한 이해이다. 그런 점에서 비유적 표현은 결코 시인만이 독점하는 독과점적 표현 형식이 아니다. 일반인도 이런 표현, 곧 비유 속에서 산다. 이렇게 비유 속에서 산다는 것은 다른 삶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이름들, 이런 사물들, 갈매기, 물고기, 풀, 새들은 얼마나 많은 다른 상상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하는가? 그런 점에서 이런 사물들은 바로 시이고 혹은 시가 아니다. 아무튼 이런 사물을 통해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사물에 대한, 세계에 대한, 삶에 대한 생생한 감동이다.    다음 시를 읽고 비유적 표현에 대해 생각해 보자. 빨래집게 한상순   난 입이 있어도 누굴 흉보지 않아   누가 뭐래도빨래 줄에 빨래가 널리면   그때 내 입은 번쩍 열리게 돼   그리고 덥석 문 빨래 함부로 뱉지 않지             내가 가지고 싶은 생각 조기호   내 생각은 동그랬으면 좋겠다. 굴렁쇠처럼 동네방네 맘껏 구르다가 누구라도 어깨동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 생각은 빵빵했으면 좋겠다. 공처럼 통통 튀어 오르다가 높다랗게 둥지 하나 틀었으면 좋겠다.   내 생각은 단순했으면 좋겠다. 한곳 깊은 땅속을 흐르다가 맑은 샘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참고 문헌] 이승훈,『이승훈의 알기 쉬운 현대시작법』(북인, 2011) pp.67-69.   제10강 직유도 직유 나름이다   비유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지는 바 우리는 그것을 취의와 매재라고 부른다. ‘괭이갈매기’의 경우 ‘갈매기’는 취의이고, ‘괭이’는 매재이다. 취의란 비유의 주체, 말하자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대상을 뜻하고 매재는 비유되는 사물을 뜻한다. 취의란 본래 말하려는 것을 의미하고 매재는 이 본래의 사물을 말하기 위한 수단, 즉 수레라는 의미이다. 또 하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비록 우리의 삶이 비유로 이루어지고 비유 속에서 영위 되고 비유를 통해 전개된다. 하나 이미 우리가 알고 사회적으로 공유되고 있는 경우, 그런 비유를 상투적 비유 혹은 죽은 비유라고 한다. 한편, 상투형에 속하는 비유의 경우에도 관점에 따라서는 신선한 비유가 될 수도 있다. 직유는 말 그대로 두 사물을 유사성을 토대로 비교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직유는 흔히 취의와 매재 사이에‘-처럼’, ‘같은’, ‘-듯’ 등의 낱말들을 사용해서 비교되는 두 사물의 관계를 분명하게 알려준다. 그런 점에서 직유는 은유와는 다른 시적 효과, 이를 테면 사물에 대한 설명적‧해설적 기능이 강하다. 그러나 처음 시를 쓰는 초심자들은, 상상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시를 어떻게 쓰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직유적 표현부터 공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직유도 나름이다. 직유라고 해서 모두 사물에 대한 설명(‘우리 아내의 손은 솥뚜껑 같다’)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월의 더딘 해 고요히 내리는 화단// 하루의 정열도/ 파김치같이 시들다/ 바람아, 네 이파리 하나 흔들 힘이 없니!// - 오일도,「오월의 화단」부분   불 피어오르듯 하는 술/ 한숨에 키어도 아아 배고파라.// 수 접듯 놓인 유리컵/ 바쟉바쟉 씹는 대로 배고프리. - 정지용,「저녁 햇살」부분 폭탄처럼 벌거벗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눈을 크게 뜨고// 보아라/ 우리는 불안과 죄의/ 바다를 건너/ 드디어 폭발했다// - 이승훈,「사랑 1977」전문   위의 보기는 사물이나 관념에 대한 산문적 설명의 차원을 극복하고 뛰어넘고 또한 같은 직유라 해도 서로 다른 특성을 보여준다. 오일도의 경우, ‘하루의 정열’(취의)이 ‘파김치’(매재)에 비유되고, 이런 비유는 나른한 5월의 정서를 매개로 한다. 특히 5월의 화단, 바람도 불지 않고 해만 하염없이 내리는, 노곤한 그런 5월의 화단을 보면서 시인이 느끼는 정열은 정열이 아니라 정열의 소멸이고 정열이 시들어가는 느낌이다. 이런 느낌을 매개로 ‘파김치’가 선택된다. ‘파김치가 되었다’는 말은 기운이 몹시 지쳐 나른하게 되었음을 비유한다. 이 시에서는 취의가 정서나 관념으로 되어 있고 매재가 사물 혹은 이미지로 되어 있지만, 정지용의 경우에는 취의가 사물(술)이고 매재도 사물(불)로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취의와 매재의 관계는 (1) 사물/사물 (2) 사물/관념 (3) 관념/사물 (4)관념/관념   같은 유형으로 나타나고, 시 쓰기의 초심자들은 (1)부터 단계적인 훈련을 해야 한다. 사물을 사물에 비유하기는 사실 쉬운 것 같지만(‘우리 오빠는 전봇대처럼 키가 크다’) 정지용의 시에서 알 수 있듯이 그렇게 쉬운 것도 아니다. 쉬운 것은 대체로 설명의 차원에 머물고 쉽지 않은 것은 사물에 대한 신비한 의미를 알려준다. 그런 점에서 정지용의 경우에는 은유적인 특성이 나타난다. 이 시에서 말하려는 것은, 취의는 ‘술’이라 했지만 다시 읽어 보면 표제 ‘저녁 햇살’을 전제로 할 때 취의는 이고, 따라서 시인은 ‘저녁 햇살’(취의)을 ‘술’(매재)에 비유한다. 그리고 이 ‘술’은 다시 ‘불’에 비유되기 때문에 결국 저녁 햇살(취의)/술(매재), 술(취의)/불(매재)이라는 이중적 직유 형식이 나타난다. 요컨대 저녁 햇살을 보면서 술을 생각하고, 이 술이 불처럼 피어오르는 것은 그것이 붉게 타고 있는 저녁 햇살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유는 모두 ‘갈증’을 매개로 한다. 그러나 이런 술, 저녁 햇살, 피어오르는 불을 한숨에 마셔도 시인을 배가 고프다. 갈증은 계속된다. 그렇다면 밥을 먹어야 하나? 다음 이승훈의 시에 나오는 직유는 앞의 두 시인과는 다르다. 이 다름의 차이도 중요하다. 두 얼굴(취의)이 폭탄(매재)에 비유된 것은 ‘벌거벗다’는 낱말을 매개로 한다. 그러나 ‘폭탄처럼 벌거벗은 얼굴’이라는 표현은 난해하다. 그것은 이 시를 쓸 즈음 시인은 초현실주의 미학에 빠져 이성과 의식보다 무의식을 강조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 시를 그림에 비유하면 바다에 떠 있는 두 얼굴이 서로 맞대고 있고, 이 얼굴에 폭탄이 오버랩되거나 병치되는 이미지이다. 문제는 ‘폭탄’이다. 폭탄은 폭발한다. 그러니까 이 시는 사랑의 아름다움, 따뜻한이 아니라 ‘불안과 죄의 바다’를 건너 폭발하고 만 사랑을 노래한다. 한편 ‘벌거벗은’은 ‘폭탄’과 ‘얼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이른바 양행 걸림 기법이다. 한편 여기서의 ‘벌거벗은’은 어떤 가식, 장식, 속임, 꾸밈이 없음을 의미한다. 이런 직유는 두 사물의 결합이 의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일종의 초현실주의적 기법에 속하고 초현실주의는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 억압된 무의식, 욕망을 노래한다.    다음 동시를 읽고 주제와 관련하여 생각해 봅시다. 뜻밖에 권영세   길을 가다가 뜻밖에 너를 만났지.   생각지도 않았는데 너무너무 반가웠어.       늘 만나는 그들과도 뜻밖에 너를 만난 듯   그렇게 반가웠으면 정말정말 좋겠어.   [참고 문헌] 이승훈,『이승훈의 알기 쉬운 현대시작법』(북인, 2011) pp.67-69.   제14강 리듬은 시의 숨결이다   시 쓰기는 일상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하지만 한편 그의 이탈 행위, 곧 시 쓰기는 반복되고 시의 내용과 형식 역시 반복된다. 시의 주제나 소재 가운데 새로운 것은 별로 없고 옛날이나 오늘이나 비슷한 주제이고 시라는 형식 역시 크게 보면 소설이 아니라 시라는 점에서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그렇다면 시 쓰기에서의 반복은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   1. 낱말을 반복하라 반복은 시뿐만 아니라 산문, 연설 등의 경우에도 사용되고 이런 사용에 의해 미적 효과, 시적 효과, 주제 전달의 효과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의 경우 반복이 주는 미적 효과 및 시적 효과는 무엇이고 어떤 유형으로 나타나는가?   나비 나비 노랑나비   꽃잎에서 한 잠 자고, 나비 나비 노랑나비   소뿔에서 한 잠 자고, 나비 나비 노랑나비   길손 따라 훨훨 갔네. - 김영일,「노랑나비」전문   이 동시는 전체가 여섯 개의 연으로 구성되었지만 의미구조로 보면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나비/ 나비/노랑나비’를 각 부분의 앞에 두고 그 뒤에 ‘꽃잎에서/ 한 잠 자고’ 와 ‘소뿔에서/ 한 잠 자고’, 그리고 ‘길손 따라/ 훨훨 갔네’라는 짜임이다. 동시를 소리 내어 읽으면 자연스레 운율이 살아나는 것은 ‘나비/ 나비/ 노랑나비’의 반복과 그 뒤의 글자 수를 같게 한 때문이다.   2. 구와 절을 반복하라 낱말이 아니라 구와 절이 반복되면서 한 편의 시가 완성되고, 시로서의 통일성과 리듬을 획득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런 구와 절은 시에서 주제를 암시하거나 계속 반복됨으로써 독자의 관심을 끈다. 구는 둘 이상의 낱말로 구성되지만 주어와 동사의 형식을 띠지 못하고 다만 절이나 문장을 수식하는 문장의 한 요소로 드러난다. 명사구, 동사구, 형용사구, 부사구 등이 있다. 한편 절은 주어와 동사의 형식, 곧 문장의 형식을 띠지만 완전한 문장이 되지 못하는 경우, 예컨대 주절, 종속절, 대등절 등이 있다. 먼저 구가 반복되는 경우,   밭을 갈아 콩을 심고 밭을 갈아 콩을 심고 꾸륵꾸륵 비둘기야   백양 잘라 집을 지어 초가삼간 집을 지어 꾸륵꾸륵 비둘기야   대를 심어 바람 막고 대를 쪄서 퉁소 뚫고 꾸륵꾸륵 비둘기야 -박목월,「밭을 갈아」일부   시의 전반부이다. ‘밭을 갈아 콩을 심고’는 대등절에 해당하지만 여기서는 다음 절이 생략된 형식이고 그러나 이런 절이 각 시행마다 반복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명사구 ‘꾸륵꾸륵 비둘기야’가 각 시행마다 반복된다. 이런 반복을 흔히 후렴구라고 하는 바 이 시의 미적 효과는 절의 반복과 구의 반복, 특히 후렴구가 성취한다. 다음과 같은 명사구가 반복되지만 형식을 같고 내용은 일부가 변주되는 경우,   제일 높은 돌 위에 올라가 누운 제일 큰 자라. 제일 높은 돌 위에 올라가 제일 큰 자라 등판 위에 올라간 그 다음 큰 자라. 제일 높은 돌 위에 올라가 제일 큰 자라 몸통에 몸을 기댄 세 번째 자라. - 박찬일,「웃기는 자라」부분   시의 앞부분이다. 네 개의 시행으로 되어 있지만 크게 보면 이 시는 ‘제일 높은 돌 위에 올라가 누운 제일 큰 자라’라는 명사구가 세 번 반복되면서 변주된다. 단순한 반복이 반복과 반복 사이를 강조한다면 이렇게 변주되는 반복은 변주 자체가 시적 의미를 암시한다. 시의 후반 역시 크게 보면 이런 형식의 변주로 구성된다. 다음 명사구의 반복의 경우,    날 만든 것은 사랑 날 맞아준 사랑 날 요정으로 만들어준 사랑 그래 어디로 가버렸나 내가 사랑했던 그이 내게 기쁨을 주고 내게 꿈을 주고 날 춤추게 해주던 그이 …(중략)… 날 만든 것은 사랑 날 맞아준 사랑 날 요정으로 만들어준 사랑 나는 당신들을 짐승으로 만든다 기분 내킬 때마다 당신들의 사랑은 우스운 것 …(중략)…     날 만든 것은 사랑 날 부순 것도 날 버린 것도 사랑 내가 사랑했던 그이 어디로 가버렸나 어디로 가버렸나 어디로 나버렸나 - 프레베르,「날 만든 것은 사랑」 (김종호 역) 부분   시의 2,3,4연이다. 1연만 빼면 이 시는 명사구 ‘날 만든 것은 사랑’이 각 연마다 반복되고, ‘날 맞아 준 사랑’, ‘날 요정으로 만들어준 사랑’은 2회 반복된다. 그런 점에서 이런 명사구의 반복이 시의 주제를 암시하고 시에 통일성을 주고 리듬을 준다. 1연에서는 태어남과 삶에 대해 말 하는 바 ‘나’는 발가벗고 태어났고 태어난 대로 산다는 것. 다음은 절의 반복,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 박용래,「저녁눈」전문 박용래의「저녁눈」이다. 이 시에서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은 이른바 주절에 해당하고, 이 절이 각 시행마다 반복되고, 또한 서술어 ‘붐비다’로 각 시행이 완성된다. 한편 이 시는 같은 문장 형식이 반복되는 보기도 된다. 절의 반복 역시 변주되면서 반복되는 경우도 있다.   내가 맨 처음 그대를 보았을 땐 세상엔 아름다운 사람도 살고 있구나 생각하였지요   두 번째 그대를 보았을 땐 사랑하고 싶어졌지요   번화한 거리에서 다시 내가 그대를 보았을 땐 남모르게 호사스런 고독을 느꼈지요   그리하여 마지막 내가 그대를 만났을 땐 아주 잊어버리자고 슬퍼하며 미친 듯이 바다 기슭을 달음질쳐 갔습니다 - 조병화,「초상」전문   시의 전문이다. 각 연마다 종속절 ‘내가 그대를 보았을 땐’이 반복된다. 그러나 일반 문장에서는 이런 절이 종속적 기능으로 끝나지만 시의 경우 특히 이렇게 반복됨으로써 그대를 보는 순간이 강조되고 시에 통일성이 주어진다. 이 시에서는 ‘그대를 보는 때’가 순차적으로, 말하자면 시간적 순서로, 통시적으로 반복되지만 공시적으로는 반복되는 경우도 있다.   너를 본 순간 물고기가 뛰고 장미가 피고 너를 본 순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너를 본 순간 그 동안 살아 온 인생이 갑자기 걸레였고 갑자기 하아얀 대낮이었다 너를 본 순간 나는 술을 마셨고 나는 깊은 밤에 토했다 - 이승훈, 「너를 본 순간」부분     이 시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같은 표현의 반복이지만 앞의 시와 이 시가 다르다는 점이다. 앞의 시는 시간적 순서를 따르고 이 시는 그런 순서가 아니라 공시성, 혹은 동시성을 강조하고 따라서 ‘너를 본 순간’에 나를 찾아오는 복잡한 정서, 상상, 관념을 노래한다.   3. 문장과 연을 반복하라 이상에서 한 편의 시가 낱말, 구, 절의 반복에 의해 통일성을 획득하고 미학을 획득하고 리듬을 획득한다는 것, 따라서 시에서 반복의 기법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끝으로 문장과 연의 반복,   거기서 무얼 하시나요 작은 아씨여 갓 꺾은 꽃을 들고 거기서 무얼 하시나요 처녀여 시들을 꽃을 들고 거기서 무얼 하시나요 고운 여인이여 떨어지는 꽃을 들고 거기서 무얼 하시나요 늙은 여자여 죽어가는 꽃을 들고 승리자를 기다리고 있답니다 - 프레베르,「꽃다발」(김화영 역) 전문   시의 전문이다. 1연에서는 시인 혹은 화자가 여인에게 묻고 2연에서는 여인이, 혹은 여인들이 대답한다. 시에는 한 여인이 아니라 여자의 일생을 압축하는 네 여자, ‘작은 아씨’, ‘처녀’, ‘여인’, ‘늙은 여자’가 나오고 네 여자가 ‘승리자를 기다리고 있다’고 대답하는 것이 유머러스하고 슬프고 사랑스럽다. ‘거기서 무얼 하시나요’는 반복되고 ‘작은 소녀여’는 변주된다. 그러나 문장이 변주되지 않고 반복되는 경우도 있다.    강가에 키 큰 미루나무 한 그루 서 있었지 봄이었어 나, 그 나무에 기대앉아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지   강가에 키 큰 미루나무 한 그루 서 있었지 여름이었어 나, 그 나무 아래 누워 강물 소리를 멀리 들었지 - 김용택,「나무」부분   시의 1,2연이다. ‘강가에 키 큰 미루나무 서 있었지’라는 문장은 5연까지 각 연의 첫 행에서 반복되고 이런 반복이 이 시의 통일성을 부여한다. 가을에는 기대서서 멀리 흐르는 강물을 보고, 겨울에는 강물에 눈이 오고, 다시 봄이 오면 그냥 기대 앉아 있었다는 것. 이상은 문자의 반복이고 다음은 연이 반복되는 경우, 배꽃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가네   경주군 내동면 혹은 외동면 불국사 터를 잡은 그 언저리로 배꽃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가네 - 박목월,「달」전문   이 시는 불국사 터를 잡은 언저리를 배경으로 달이 가는 풍경을 노래하지만 같은 연의 반복이 문제이다. 1연에서는 달이 강조된다면 3연에서는 불국사 터를 배경으로 가는 달이 강조된다. 따라서 같은 달이지만 1연에서는 달이 전경에 드러나고 3연에서는 달이 배경으로 드러난다.    그대 날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대 날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렇게 잠이 들었다     이런 반복은 내용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이 시의 경우 시간은 변하지만 아무 사건도 발생하지 않는, 따라서 한결같이 지속되는 정서나 관념의 흐름을 강조한다. 내가 그대를 기다리는 마음이 아니라 그대가 나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러니까 그대의 마음과 내 마음이 하나가 되는 마음으로 잠이 드는 사람들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고 아름다운가? 대체로 많은 사람들은 나만 그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잠이 들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이승훈,『이승훈의 알기 쉬운 현대시작법』(북인, 2011) pp.85-103.   [출처] 평생교육원 <동시심화과정> 수업자료 / 권영세|작성자 하이디  
851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동시와 언어는 쌍둥이... 댓글:  조회:3156  추천:0  2017-11-13
동시 감상 길라잡이  / 권영세   동시와 시적 체험    동시도 우선 하나의 시작품이다. 동시가 시작품이기 위해서는 우선 시적 요건이 제대로 갖추어져야 한다.그러면 시적 요건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시인에 있어서 시적 체험을 시로 형상화할 수 있는 능력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동시라고 쓴, ‘이른바 동시인’이 쓴 것이라 하여도 시인의 안목으로 작업을 한 작품이 아닌 것이 있다. 단순히 어린이의 눈으로 또는 어린이의 입장에서 써 낸 글과 다름이 없을 때, 여기서 결여된 것이 바로 시적 체험의 형상화이다. 비록 동시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시이기는 하나, 어린이도 읽어서 어떤 시적 감동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읽는 이의 가슴에 시적 감흥이 배어나오지 않는다면, 그런 동시는 문학으로서의 가치를 못 가지는 것이다. 이 시적 감흥은 작품 속에 형상화되어 있는 작가의 시적 체험만이 전달시킬 수 있는 것이다. 작품 속에 구현되어 있는 시적 체험과 그것을 독자가 읽으면서 스스로 느끼는 자기의 발상과 조화가 이루어질 때 시의 감흥이 일어나는 것이다. 아무리 동시라 해도 어른 시인이 어린이의 눈과 사고방식, 그리고 어린이의 단순한 입장으로만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순수한 어린이가 귀여운 상상으로 쓴 어린이의 글이 더 훌륭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동시라 해도 반드시 시인의 시적 체험이 녹아들어 있어야 한다. 물론 어린이의 능력으로서는 시를 이해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즉 어린이가 감상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는 바로 시와 동시를 구별하는 한계이다. 하지만 결코 동시는 시가 못 되는 쉬운 시나 시와는 본질상으로 다른, 쉽게 쓰는 시가 아니다. 시적 체험의 폭은 동시와 시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그것은 어린이가 이해할 수 있는 체험의 반경(半徑)과 어른들이 가진 체험의 반경과의 상당한 차이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도 시적 체험이라는 원점에서는 일치하는 시작품으로서의 필요조건이다. 다만, 충분조건에 있어서, 어린이가 이해할 수 있는 시적 체험이냐, 어른이 이해할 수 있는 시적 체험이냐를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이것도 획일적인 구별은 어렵다. 그러므로 어린이는 동시를 읽지만 어른은 동시도 시도 그 감상이 모두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어른이 읽어서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즉 시작품으로서 아무런 감동이나 시적 분위기마저 느낄 수 없는 글이라면 동시라고 하기에는 어렵다. 그러한 글은 감동이 시적 체험의 결여에서 오는 것이든, 그것이 성숙된 시적 분위기를 구현시키지 못한 것이든 단순한 어린이의 정서만으로 쓸 수 있는 글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 이 글은 유경환 저 『한국현대동시론』(배영사)에 있는 것을 재구성한 것임. 다음 두 편의 동시를 읽고 오늘의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   꽃비 먼 산에 꽃비 비그르르 돌아 마을에 내려서 살구꽃이 된다. 살구꽃 환한 마을을 비그르르 돌아 뜨락에 내려서는 나비가 된다. 먼 산에 꽃비 내 눈 속에 꽃비. - 김사림(1968)   씻어준다는 것   어느 누구의 몸을 씻어준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의 거친 발을 씻어준다는 것도 사랑한다는 것이다   쉼 없이 흘러가며 제 몸을 씻는 저 강물도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이다   가장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도 아닌 제 스스로를 씻는 일이다 저 투명한 강물처럼 끊임없이 씻어내는 일이다. - 하청호(2017)   동시 감상 길라잡이  시의 언어   시는 문학이고, 문학의 매체는 언어임이 자명하다.  따라서 언어란 무엇인가를 알아 두는 일이 시를 이해하는 데 가장 선결문제라 할 수 있다. 언어는 ‘음성으로 생각을 표출하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다. 바꿔 말한다면, 형식조건으로서의 음성과 내용조건으로서의 생각이 결합된 상태를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언어를 보다 완벽하게 정의할 때는 다음 다섯 가지 항목이 포함된다. 첫째, 사람만이 가지고 있다. 둘째, 그 형식은 음성이다. 셋째, 그 내용은 생각이다. 넷째, 역사성을 가진다. 다섯째, 사회성을 가진다. 이 다섯 항목 중에서 ‘역사성’과 ‘사회성’이 소위 언어를 공적(公的)인 것으로 이끌어 온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의 매체를 언어라고 한다면 시의 언어 즉 시어는 어떤 특성과 기능을 가지는지 알아보자. 첫째, 시어는 일상 언어와 달리 독특한 기능을 부여받는다. 둘째, 시어는 대상의 지시기능보다 정서의 환기기능을 중시한다. 셋째, 시어는 시인의 독특한 창조적 정신세계를 드러내기 위해 작품 전체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재구성된 언어로서, 전혀 새로운 의미로 변환되어 나타난다. 넷째, 시어는 사실의 정확한 제시와 논리적 구성을 추구하는 과학적 진술과 달리, 논리를 초월하여 어떤 태도나 정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환기하는 데 역점을 둔 역설적 언어 혹은 의사진술(擬似陳述)이라 규정된다. 다섯째, 시어는 사전적 의미와 같이 이미 일반의 공인을 받고 있고, 고착된 대상을 지시하는 언어의 외연적 의미보다는 유추나 상상력의 개입을 통해서야 은폐되어 있는 복합적, 함축적 의미가 올바르게 파악될 수 있는 내포적 의미로서 존재한다. 여섯째, 시어는 그 개념이나 대상과의 관계가 엄격하게 정의, 규정되어 있는 과학적 언어나 되도록 명쾌한 의사전달을 지향하는 일상 언어와 달리, 복잡 미묘한 심리․정서를 표현하는 애매성을 의식적으로 추구한다. 이 애매성은 시어 자체의 애매성이자, 시의 주제와 관련하여 드러나는 의미의 다양성(함축성)이기도 하다.이런 용법의 애매성을 신비평가들이 말하는 긴장, 반어, 역설과 유사한 개념이 된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발행『문학의 이해』(1984, 형성출판사)      다음 시를 읽고 오늘의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정호승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꽃잎에도 상처가 있다 너와 함께 걸었던 들길을 걸으면 들길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보면 상처 많은 풀잎들이 손을 흔든다 상처 많은 꽃잎들이 가장 향기롭다   엄마 마음 권영세   시골집 텃밭에서 손수 가꾼 채소 한 보따리 싸가지고 우리 집에 다니러 오신 할머니   엄마를 힐끗 보고는 - 아이고 애비야! 와 이리 삐쩍 말랐노?   할머니 그 말에 잠시 할 말을 잊고 멍해진 아빠 요즘 체중이 너무 불어 땀 뻘뻘 흘리며 금방 운동하고 왔는데   할머니 눈에는 아빠가 그렇게 보였나 보다.   여치집 안도현   여치를 잡아 여치집 속에 가뒀더니   여치 소리만 뛰쳐나와 찌릿찌릿 찌찌 찌릿 풀밭에서 우네   개의 고민 최영재   사람이 개 목줄을 잡고 걸어 가다가   호들갑을 떨며 목줄도 내려놓고 휴대전화로 신나게 통화한다   - 나 원 참 개는 사람을 두고 혼자 갈 수도 없고 목줄만 끌고 혼자 가기도 창피해   안절부절 우왕좌왕               동시 감상 길라잡이  시의 형식과 리듬   형태적 형식으로 본다면 시는 단어‧구‧행‧연으로 되어 있다. 이런 구조를 갖춘 언술을 우리는 일단 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표현은 어떤가.   물은 수소와 산소의 화합물 순수한 상태에서는 냄새도 없고 빛깔도 없고 맛이 없는 투명한 액체.   동물과 식물체의 70% 내지 90%를 차지하며, 생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된다. 온 지표 면적의 약 72%를 하지하고 [하략] ―「물」   「물」은 국어사전의 낱말풀이 일부분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시의 형태적 구조에 맞추어 운문화한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물」은 과학적으로 탐구되고 실증된 사실을 근거로 하여 물의 속성소[H2O]와 필요성, 그 존재 양태를 설명이라는 언술 형식을 사용하여 정의한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러니까 위의 내용은 수사학적 언술 형식으로는 설명이며, 언어의 기능적 분류상으로는 정서적 표현과는 구분되는, 과학적 진술이다. 과학적으로 진실이 실증된 이 정의를 두고 시로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최소한 시적 진실에 둔감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심리적‧정서적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본 경험이 거의 없는 사람에 속한다고 단언할 수가 있다. 그러나 얼마나 오묘한가. 앞의 예문 내용이 과학적 진실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 예문이 담고 있는 구조적 형식 어디엔가 시의 울림이 있다. 그 울림은 예문 내용이 시적 진실이 아닌 과학적 진실이라는 사실을 알거나 모르거나 상관없이 울린다. 느낌의 차이는 앞의 사실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에게 각각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울림을 의식한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이 울림은 시라는 한 예술 양식 자체가 우리의 미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요소를 저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식의 구조는 그것이 아무리 시대에 뒤지고 상투화되었다고 해도, 한 양식의 탄생을 현실화시킨 예술적 에너지를 어떤 형태로든 최소한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물」은 과학적 진실 때문이 아니라 시라는 한 양식이 지닌 본래의 생명 감각인 시행의 리듬 때문에 시적으로 울린다. 시인은 이 생명 감각인 리듬을 사랑한다. 초보자의 대부분은, 그러나 이것 대신 외형적 그 형식에만 기댄다. 이 점을 알기까지만 해도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행이며 연이라는 형태적 형식은 시적 진실이 살아 움직여 생긴 율동감이 아닐 때, 그것은 한갓 기계적 울림 또는 관습적 울림일 뿐이다. 결국, 진정한 리듬은 시인이 발견한 시적 진실의 힘, 그 힘에 의하여 생명을 얻는 것이다. 오규원『현대시작법』(문학과지성사,2011)    다음 동시를 읽고 오늘의 주제와 관련하여 생각해 보자. 지하철 손잡이 OOO   발 디딜 틈 없는 지하철 안 넘어질까 발돋움하고 겨우 손잡이 붙잡았다.   내 옆에 할머니도 붙잡고 섰다. 때마침 앞에 빈자리 하나 생겨 얼른 할머니 앉혀 드렸다.   할머니가 잡았던 그 손잡이를 옮겨 잡았다. 아직도 온기가 모락모락 남아있었다.   그 속에 OOO   작은 도토리 그 속에 떡갈나무 들었다.   아주 작은 그 속에 떡갈나무 그 속에 더 많은 도토리 도토리들. 그 속에 가득한 참나무 숲.   황사 OOO   창문 닫아라 황사 들어온다 하늘은 온통 누런 모래 바람으로 덮여 있어요   밖에 나갈 때는 꼭 마스크를 쓰고 나가라 엄마 말씀 따라 마스크를 쓰고 학교 가니 친구들도 다 쓰고 왔어요 교실 창문을 다 닫았어요   그 높고 푸른 우리 하늘 우린 볼 수가 없어요   중국 고비사막에서 일어나는 누런 먼지 황사가 오는 날   참나리 OOO   주근깨 송송 깨순이 깨순이   아이들이 놀려서 얼굴은 홍당무.     동시 감상 길라잡이    시적 묘사  묘사의 특성   시를 이해하려는 사람이 만약 묘사의 중요성을 모른다면, 그것은 마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데생이 미술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모르는 것과 유사하다. 그만큼 묘사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묘사란 수사학에서 말하는 언술 형식의 하나이다. 수사학에서 언술 형식은 네 가지로 나누고 있다. 설명‧논증‧묘사‧서사가 그것인데, 이것들은 각각 독자적인 성질을 가지며 서로 관련된다. 설명은 비교‧대조‧실례‧분류‧정의‧분석 등을 통하여 주제를 밝히는 형식이다. 논증은 증거에 의한 객관적 논리로 우리를 확인시키는 형식이다. 설명과 논증 사이에 설득이 있는데, 이는 우리들의 태도‧감정‧정서의 공통적인 바탕에 호소하여 발화자의 의도를 현실화시키는 형식이다. 위의 세 가지 언술 형식상의 차이는 설명은 설득이 아닌 이해가 그 목표이며, 설득은 감정적 호소로, 논증은 논리적 호소로 어떤 주장이나 진리를 궁극적으로 자신의 의도대로 현실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논증에 보다 접근해 있는 이 설득을 독립시킨다면 다섯 가지 언술 형식이 되는 셈이다). 우리들의 일상적인 언술은 그러므로 대체로 설명의 형식이고, 신문의 논설은 설득이며, 어떤 명제를 논리적으로 실증하고자 하는 모든 종류의 언술이 논증에 속하는 셈이다. 묘사는 서사는 위의 형식들과는 좀 다른 성질을 지닌다. 묘사란 사물이나 현상이 지닌 성질, 인상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언술 형식이며, 서사는 사건의 의미 있는 시간적 과정을 제시하는 형식이다. 설명‧설득‧논증이 이론적 성향의 언술인 데, 비해, 묘사와 서사는 감각적‧암시적 성향이다. 시가 묘사를, 소설이 서사를 그 주된 표현 형식으로 차용하고 있는 것도 이들 언술과 문학 양식의 특성이 깊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란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느낌을 직접 제시하는 언술 양식이고, 소설이란 느낌을 스토리로 제시하는 양식이다. 느낌을 직접 제시하는 시는 필연적으로 지배적인 인상을 표현하는 데 적절한 묘사를 적극 수용하게 되고, 스토리를 제시하는 소설은 인물과 행위와 시간적 과정을 구성적으로 제시하는 서사와 만난다. 그렇기 때문에 시를 지배적 인상의 구체적 모습인 이미지라고 하기도 하고, 소설을 서사적 허구라고 부르기도 한다. 시가 힘을 가지게 되는 근원을 “추상적인 상상이 아닌 구체적으로 그려진 본질”에 있다고 한다면, 그 구체적으로 그려진 본질은 묘사에 의해 획득된다.   오규원『현대시작법』(문학과지성사,2011)    다음 두 편의 동시를 읽고 오늘의 주제와 관련하여 생각해 보자. 소년 정호승   아빠의 마음속에는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소년이 있어요 엄마가 짜준 앵두빛 스웨터를 입고 하루 종일 눈사람을 만들다가 그대로 눈사람을 따라간 소년이 있어요   엄마의 마음속에도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소녀가 있어요 저녁밥도 먹지 않고 밤새도록 별을 바라보다가 새벽별을 따라간 소녀가 있어요   아, 언제부터인지 나에게도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소년이 있어요 혼자 울며 쓸쓸히 외갓집으로 가다가 돌멩이 하나 지구 밖으로 내던지며 가슴속에 고래 한 마리 키우는 소년이 있어요                 눈 안도현   돌담 아래 쌓인 눈 쌓였다가 소리 없이 녹는 눈   마당가 목련 가지에는 볼록한 꽃눈 꽃을 피우려고 점점 커지는 꽃눈   마루 밑에는 새끼들 내려다보는 누렁이의 눈 어미를 올려다보는 강아지들의 눈       동시 감상 길라잡이    시적 묘사  설명적 묘사와 암시적 묘사   A) [……] 네 번째, 큰 지리적 사실은 이 군도群島가 두 개의 큰 호형(弧形 : 활모양) 으로 나누어지게 되는데, 바깥쪽은 석회석의 호형이고, 안쪽은 화산석의 그것이다. 석회석의 지역은 낮고, 화산석의 지역은 비교적 높거나 매우 높다. 몇몇 섬은 석회 석과 화산석의 두 가지 모양을 다 갖고 있다. (스미스, 필립,「북미北美」)   B) 그는 한 손으로 담배를 흔들면서, 굵은 반지가 끼여 있는 가운데 손가락 밑의 살 갗이 엷게 변해 있는, 다른 쪽 손바닥을 편 채, 호레이스의 얼굴 앞으로 내밀 었다. 호레이스는 그 손을 잡고 흔든 다음 놓아주었다. “옥스포드에서 기차 B)-1 탈 때 알았습니다만, 좌우간 좀 앉을까요?” 하고 말하는 그의 다리는 이미 호레이스의 무릎과 닿고 있었다. 그는 외투―푸르스름한 재생 모직에다 기름기 가 번지르한 벨벳깃이 달린―를 좌석 위에 벗어던지고 앉았다. 그러자 기차가 멈추었다. “그럼요, 나는 언제나 친구와 만나기를 좋아하지요. 언제나……” 그 는 호레이스의 맞은편에서 허리를 굽혀 창밖을 응시했다. 규모가 작고 지저분한 정거장  B)-2, 게시판에 백묵으로 무엇인가 씌어져 있었으나 알 수 없었다. 화물차 안에 쓸쓸해 보 이는 철망 닭장 속의 두 마리 닭, 작업복을 걸친 사나이 서넛이 벽에 기대어 껌을 씹으며 시름없이 앉아 있었다. “물론 선생께서야 우리 고장에 더 있지 않겠지만, 한번 사귄 사람은 언제나 친구인 법이지요. 어디에 투표하든 말입니다. 친구는 친구니까 그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든 없든 말입니다.” 그는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손가 락 사이에 끼고, 몸을 뒤로 젖혔다. (W. 포크너,「성소聖所」)   A)는 지리적 특성을 열거하여 일정한 대상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고자 하는 설명적 묘사이다. B)는 A)와는 또 다르다. B)는 포크너의 소설의 한 토막이지만 고딕체로 된 부분은 묘사문이고, 나머지는 서사문이다. 그러나 B)의 고딕체로 된 묘사문도 그 성격이 다르다. B-1)은 서사, 즉 이야기의 전개를 돕는 설명적 묘사이고, B-2)는 서사에 묶여 있지만 B-1)과는 또 따른 암시적 묘사의 특성을 발휘하는 부분이다. B-2)는 차가 멈춘 정거장에 대한 정보 제공이 목적이라기보다 정거장에 관한 지배적 인상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배적 인상은 대상의 성질을 암시한다.   규모가 작고 지저분한 정거장 게시판에 백묵으로 무엇인가 씌어져 있었으나 알 수가 없었다. 화물차 안에 쓸쓸해 보이는 철망 닭장 속의 두 마리 닭, 작업복을 걸친 사나이 서넛 벽에 기대어 껌을 씹으며 시름없이 앉아 있었다.   그러므로 이렇게 다른 형식으로 적으면 분명히 드러나듯이, 이 소설의 한 부분은 한적한 어느 시골 정거장의 풍경을 그린 시로 바뀐다.(시는 이런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르고, 또 다른 곳에 있다는 식의 사고는 관습적 인식의 하나이다. 작품이 좋든 그렇지 않든 모두 시이고, 이 소설 속의 한 토막도 담백한 풍경시이다.) 그것은 B-2)가 지닌 암시적 묘사의 성격 때문이다. 즉 규모가 작고 지저분한 정거장, 게시판에 씌어진 백묵 글씨, 화물차 안의 철망 닭장 속의 닭 두 마리, 무료하게 껌을 씹으며 일감을 기다리는 작업복 차림의 사내, 이들은 이 초라한 정거장 뒤에 숨겨진 삶을 암시하는 특정한 의미의 정황인 것이다. 시가 주로 사용하는 것은 물론 암시적 묘사이다. 오규원『현대시작법』(문학과지성사,2011)    다음 두 편의 동시를 읽고 오늘의 주제와 관련하여 생각해 보자.     건널목에서 오하룡   아이도 사방 둘러보고 천천히 자동차도 사방 둘러보고 천천히   자전거 탄 사람도 그냥 걷는 사람도   이쪽저쪽 둘러보고 천천히 사방 둘러보고 천천히           운동화랑 발이랑 문인수   새 운동화를 며칠, 또 며칠 신다 보니 발이 아주 편해졌어요 엄지발가락도 안 아프고, 뒤꿈치 물집도 이제 깨끗이 없어졌어요   자주 다투다 보니 어느새 마음이 서로 잘 통하게 된 짝꿍 사이처럼 걷거나 뛰거나 운동화랑 발이랑 사뿐사뿐, 친해졌어요     [출처] 동시 감상 길라잡이 / 권영세|작성자 하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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