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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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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    목련아, 나와 놀자... 댓글:  조회:2820  추천:0  2017-06-09
목련에 관한 시 모음   + 목련꽃 브라자  목련꽃 목련꽃  예쁘단대도  시방  우리 선혜 앞가슴에 벙그는  목련송이만할까  고 가시내  내 볼까봐 기겁을 해도  빨랫줄에 널린 니 브라자 보면  내 다 알지  목련꽃 두 송이처럼이나  눈부신  하냥 눈부신  저......  (복효근·시인, 1962-) + 목련꽃 웃음  목련이  함박 웃고 있다.  뜰이 환해진다.  (오순택·아동문학가) + 그 목련꽃이     겨우내 눈을 감고 무슨 알을 품었는지 봄이 오자 빈 가지에 하얀 깃의 어린 새들 저마다 배고프다고 입을 쩍쩍 벌립니다. (김재황·시인, 1942-) + 목련     내 몸 둥그렇게 구부려  그대 무명치마 속으로  굴려놓고 봄 한철 홍역처럼 앓다가  사월이 아쉽게도 다 갈 때  나도 함께 그대와  소리 소문 없이 땅으로 입적했으면  (이재무·시인, 1958-) + 목련 아래서 묻는다 너 또한 언제이든  네 생의 가장 아름다운 날  그날이 오면  주저없이 몸을 날려  바람에 꽃잎 지듯 세상과 결별할 준비  되었느냐고  나에게 묻는다 하루에도 열두 변  목련 꽃 지는 나무 아래서  (김시천·시인, 1956-) + 목련 그늘 아래서는  목련 아래를 지날 때는  가만가만  발소리를 죽인다  마른 가지 어디에 물새알 같은  꽃봉오리를 품었었나  톡 톡 껍질을 깨고  꽃봉오리들이 흰 부리를 내놓는다  톡톡, 하늘을 두드린다  가지마다  포롱포롱  꽃들이 하얗게 날아오른다  목련 아래를 지날 때는  목련꽃 날아갈까 봐 발소리를 죽인다  (조정인) + 홍역   목련나무는 맨 아랫가지가 먼저  꽃등을 밝혀 들고  윗가지로, 윗가지로 불을 옮겨 주고 있다  불씨를 받은 꽃봉오리들  타오르기 시작한다 활짝, 화알짝 홍역 앓는 몸처럼 뜨거운 꽃 눈물난다 저렇게 생을 채우라고 뜨겁게 우리의 생을 채우려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뜨거움은 올라온다 맨 아래 가지에서부터  가슴 속 뜨거움을 받아내는 꽃 아픔을 삭히는 화근내처럼  꽃도 제 몸을 태우는 향기가 난다  가슴 속 깊은 곳에 있는 뜨거움 때문에  뜨거움이 채우는 저 생생한 생 때문에  (강미정·시인, 경남 김해 출생) + 깨끗한 슬픔  작은 마당 하나 가질 수 있다면  키 작은 목련 한 그루 심고 싶네  그리운 사월 목련이 등불 켜는 밤이 오면  그 등불 아래서 그 시인의 시 읽고 싶네  꽃 피고 지는 슬픔에도 눈물 흘리고 싶네  이 세상 가장 깨끗한 슬픔에 등불 켜고 싶은 봄밤  내 혼에 등불 밝히고 싶은 봄밤 (정일근·시인, 1958-) + 목련나무   목련나무는   그 집에 일 년에 한 번 불을 켠다  사람들은 먼지가 쌓여 어둠이 접수해버린 그 집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목련꽃이 피어있는 동안만 신기하게 쳐다본다  목련나무는 보았을 것이다  아이들이 타고 놀던 목마와  버려지는 낡은 의자  플라스틱 물병과 그릇들  장난 삼아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던 손과  방충망이 저절로 찢어지던 소리  늘어진 TV안테나 줄을 타고  근근히 피어오르는 나팔꽃을 뒤로하고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아파트를 바라보는  기대에 찬 시선들을  드디어 두꺼비집 뒤에서  도둑고양이가 비명을 지르며 튀어나오고  집이 삭은 관절을 스스로 부서뜨리며 우는 것을  제 그늘에 몸을 숨기고 다 보았을 목련나무는  해마다 봄이 되면 미친 듯 제 속의 불꽃들을 밀어 올려  저렇게 빛나는 불송이들을 매달았을 것이다  (최기순·시인) + 밤목련  달이 참 밝다 밤목련이 이불 홑청에 새긴 꽃무늬 같다 그 밑에 서서 처음으로 저 달과 자고 싶다고 생각한다 뜨거운 물주머니처럼 발 밑에 넣고 자면 사십 년 전 담쟁이넝쿨 멋있던 적산가옥 길 백설기 같던 목련 필 것 같다 역사의식도 없이 희고 희었던 일곱 살 배고픔처럼 (오철수·시인, 1958-) + 목련   쪼끄만 새알들을 누가 추위 속에 품어 주었는지 껍질을 쪼아 주었는지 언제 저렇게 가득 깨어나게 했는지  가지마다 뽀얗게 새들이 재잘댄다 허공을 쪼아도 보고 바람 불 때마다 촉촉한 깃을 털고 꽁지깃을 치켜세우고 우왕좌왕 서투르게 날갯짓을 하고 있다 벌써 바람의 방향을  알아챈 눈치다  (심언주·시인, 충남 아산 출생) + 하얀 목련  방금 기도를 끝낸 하얀 성의의 천사들이 꽃등불을 밝히고 삼월의 뜰을 걸어 나왔다 하늘을 향해  목울대를 곧추 세우고  꽃송이 송이마다 볼을 부풀린 것이 지휘봉을 휘두르는 바람의 호흡 따라 지금이라도 곧 봄을 찬양하는 합창을 시작할 것만 같다  (김옥남·시인, 1952-) + 목련꽃을 보라  밤사이 목련나무가 활짝 꽃 피웠다  우리 잠든 깊은 밤, 천상의 물고기 떼가 내려와서  주둥이로 멍울 어루만졌던가  뭉쳐 있던 멍울들 다 터져 꽃이 되었다  너무 희어서 실핏줄이 환한 꽃,  몇 올의 실핏줄 터져 약간  붉은 기운이 도는 꽃,  멀리서 찾아온 바람이  단내를 꽃잎마다 적셔준다  목련나무 너머는 콘크리트 골목길,  골목길과 목련나무 사이엔  교과 같은 담벼락이 서 있다  이런 날은, 교과서는 아예 펼치지 말자  이런 날은 지짐이 한 접시에 막걸리 두어 잔,  흥얼흥얼 콧노래에 취해 보자  그런들 내 속에 맺힌 멍울들 터지겠냐마는,  터져 환한 꽃 되겠냐마는.  (김충규·시인, 1965-) + 지는 백목련에 대한 단상  목련 나무에서 화려한 설법이 떨어져 내린다  저 우윳빛 가슴, 겁탈 당한 조선시대 여인네 정절貞節같은,  품 한 켠 은장도로 한 생生을 접었다  옷고름 풀어헤친 짧은 봄날의 화엄경華嚴經 소리,  바람바람 전하더니, 거리 욕창 든 꽃잎 떨구며  봄날은 간다 아름다운 요절, 화려한 통점痛點,  동백의 투신은 투사의 모습이었고,  목련은 병든 소녀처럼 죽어갔다. 두둥실  명계冥界를 건너는 꽃들의 장송곡 따라 삼천 궁녀들  나무 위에서 자꾸만 뛰어 내리고 있다.  잎새들도 곧 뒤따르겠노라 하염없이 손 흔든다.  떨어진 목련꽃을 만진다. 화두話頭 하나 마음으로 뛰어 든다  내 생이 바짝 긴장한다  memento mori!* (김성수) *memento mori:  는 라틴어 + 목련꽃 지다  편지지에 녹색 잉크로 안부를 묻던 사람 있었지 지워져 가는 것들 속에 아슴히 남아 있는 몇 개의 밑그림 아직도 대문에 기대어 화장기 없는 내 얼굴 보고 싶을까 목련꽃 환한 사월 낮은 휘파람으로 창을 두드리던 사람 지금은 투덕한 아내의 미소 앞에 얼굴 붉히지도 않겠지 사월은 밤하늘 별빛 그대로인데 환장할 목련꽃 그대로인데.... (전길자·시인) + 목련 목련이 지독한 생명의  몸살을 앓는 것을 며칠을 두고 몰래 지켜보았다 꽃샘추위 속 맨몸의 가지에  보일 듯 말 듯 작은 꽃눈 틔우더니 온몸으로 온 힘으로 서서히 치밀어 올라 이윽고 꽃망울로 맺히더니 송이송이 눈부시게 피어나는 저 여린 생명의 고독하고 치열한 몸짓 목련은 쉽게 피는 것이 아니었구나 그래서 목련은 저리도 당당하게 아름답구나 (정연복)   == 목련 == 시절이야 어떻던  담장 너머 가득 목련은 피어났다  대문 활짝 열어놓고, 환히 웃고 선  목련꽃 바라보며,  탕아는 당신의 뜰에서  참회로 울고 싶다.  남정네 투박한 영혼,  여로 지친 육신들  안식의 품으로 다스려 거두는가,  목련의 뜰.  훤칠한 키에  울안에서도 바깥 세상 궂은일, 갠일  속으로 다 가늠하고,  어려운 한세상 뿌리로 버티며  한 올 구김살도 없이 환한  지고지순(至高至純)의 여인 같은 꽃이여!  누구나를 다 좋아하고  누구나가 다 좋아하는  너그러운 눈빛,  우아한 자태에 기품은 감돌아,  흰색을 사랑하여 순결하고  자줏빛 짙어 고매한 사랑.  내 마음의 울안에  한 그루 목련 심어  한평생 당신의 주인이요, 종이  되고자....... (손남주·시인, 경북 예천 출생)                                             == 목련 ==  입안에 함빡 봄을 머금고 와서 푸우~ 푸우~ 뱉고 있다. 봄이 화르르 쏟아진다. (오순택·아동문학가, 1942-)         == 꽃밭에서 == 목련꽃이 흰 붕대를 풀고 있다 나비 떼가 문병 오고 간호원처럼 영희가 들여다보고 있다 -- 해가 세발자전거를 타는 삼월 한낮. (손동연·아동문학가, 1955-)       == 이모 아니면 고모 == 땅에 떨어진 목련꽃이 더럽다고 흉보지 마세요 예쁘게 피었다가  더럽게 지는 꽃이나 맛있는 밥 먹고  더러운 똥을 싸는  사람이나 다를 게 없잖아요 (신천희·승려 시인)          == 개화의 의미 == 목련이 일찍 피는 까닭은  세상을 몰랐기에  때묻지 않은 청순한 얼굴을 드러내 보임이요  목련이 쉬 지는 까닭은  절망했기 때문이요  봄에 다시 피는 까닭은  혹시나 하는 소망 때문입니다.  (김상현·시인, 1947-)           == 백목련 ==  청명이 지나고 일요일 아침  앞 산자락에 하얀 목련꽃이 피었습니다.  하늘과 땅 중간에 피었습니다.  유리창 너머로 문득 산을 바라보니  목련꽃은 간데 없고  그 자리에 하얀 뭉게구름만 떠 있습니다.  생이 얼마나 허무했으면  시든 꽃잎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저렇게 흰 목련구름이 되어  하늘과 땅 사이에 둥둥 떠 있을까요. (이재봉·시인, 1945-)                                      == 목련 == 징하다, 목련 만개한 것 바라보는 일  이 세상에 와서 여자들과 나눈 사랑이라는 것 중에  두근거리지 않은 것은 사랑이 아니었으니  두 눈이 퉁퉁 부은  애인은 울지 말아라  절반쯤은, 우리 가진 것 절반쯤은 열어놓고  우리는 여기 머무를 일이다  흐득흐득 세월은 가는 것이니  (안도현·시인, 1961-)           == 목련 == 내 어릴 적 어머니 분 냄새난다 고운 입술은 항상  말이 없으시고도 눈과 눈을  마주치면  애련히 미소지으시던 빛나는 치아와 곱게 빗어 올린 윤나는 머릿결이, 세월이  너무 흘러 무정하게도 어머니 머리에는 눈꽃이 수북히 피어났어도 추운 겨울 지나고 봄볕 내리는  뜨락에 젖빛으로 피어 앉은 네 모습에선 언제나 하얀  분 냄새난다 (홍수희·시인)             == 木蓮花 ==  목련나무 아래 딸아이와 함께 서 있었다 목련꽃을 한 송이 따 달라던  딸아이가  막 떨어진 목련 한 송이를 주워서 "아, 향기가 참 좋다"며  국물을 마시듯 코를 들이대고 있다가 "아빠도 한 번 맡아 봐" 하고 내민다  나는 손톱깎이 같은 바람이 뚝뚝 끊어먹은 우리들의 꿈 같은 하얀 그 꽃잎을 받아 나뭇가지 위에 올려놓는다 쉽게 꺾이지만 다시 피어나는  희망처럼 (최창섭·시인)                                                  == 겨울을 난 목련꽃들 ==  목련의 하얀 꽃눈이다 둥그레 뭉쳐진 꽃눈이다 시리게 고운 시리게 고운 꽃눈이다 추위에 얼지 않고 견뎌내어 고마운 갈색 껍질 벗어내어 이른 봄 맞이하는 이른 봄 맞이하는 꽃눈이다 부시게 고운 꽃눈이다 이 세상 어느 곳에 가더라도 이 세상 어느 곳에 가더라도 사랑 받을 수 있고 사랑 줄 수 있는 꽃으로 피어나라 지구가 부시게 피어나라 (이윤정·시인, 1960-)           == 목련 == 언제 모여들었을까 나무 가지에 하얀 새떼가 둥지를 틀었다. 향기로운 지절거림으로 먹먹해진 귀 바라보기만 해도 풍성한 둥지엔 햇살로 벙싯 살이 오져 가는 흰 날갯죽지가 눈부시고  갑자기 바람난 4월 봄비에  후두둑 날아오른 하얀 새떼의 비상,  빈 둥지에는 푸른 깃털이 잔바람에 나부끼기 시작했다. (김지나·시인, 전북 전주 출생)             == 목련꽃 ==  지난해 가지치기한  목련을 보았네  목련 봉긋한 가슴들이  망울망울 맺히고 있었네  홀로 힘겹게  홀로 피었네  텅 빈 가지에서  아픔이 하얗게 피는 줄  모르고 있었네  고개를 떨구고  땅만 바라보고 있는 줄만  알고 있었네  봄이 이렇게  아프게 오고 있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네  내 모습 부끄러워  땅만 보았네 (김귀녀·시인, 강원도 양양 출생)             == 하늘궁전 ==  목련화가 하늘궁전을 지어놓았다 궁전에는 낮밤 음악이 냇물처럼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생사 없이 돌옷을 입고 평화롭다 목련화가 사흘째 피어 있다 봄은 다시 돌아왔지만 꽃은 더 나이도 들지 않고 피어 있다 눈썹만한 높이로 궁전이 떠 있다 이 궁전에는 수문장이 없고 누구나 오가는 데 자유롭다 어릴 적 돌나물을 무쳐 먹던 늦은 저녁밥 때에는 앞마당 가득 한 사발 하얀 고봉밥으로  환한 목련나무에게 가고 싶었다 목련화 하늘궁전에 가 이레쯤 살고 싶은 꿈이 있었다 (문태준·시인, 1970-)                                   
529    시는 메모에서 완성하기까지 고심에 련마를 걸쳐야... 댓글:  조회:2389  추천:0  2017-06-09
메모에서 완성까지 / 백태종  자판을 두드린 뒤로 필적이 영 이상스러워지더니, 초고를 간직하지 못하는 문제도 생긴다. 초고라고는 남아 있지 않으니 이를 어떻게 하나. 내 시 몇 편을 읽어보지만 그것들의 처음 모양이 어떠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다음 답에 맞는 문제를 구해 봐?  적당한 시를 선택해 가지고 그것의 초고 상태를 유추해 볼까 생각을 해봤다. 적당히 너스레를 늘이고 산만하게 만들면 초고같아 보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지워버리면 시의 진화 과정을 보여준 것이고, 분장으로 붙인 수염을 잘 면도한 셈이 된다.  다행히 ‘나의 시 이렇게 고쳤다’의 재료가 될 것을 얻었다. 오래 전에 팽개쳐 둔 노트에서 초고 비슷한 것을 찾아낸 것이다.  몇 해 전, 아마도 아버지의 산소에 가던 길로 기억되는데, 먹골배로 잘 알려진 퇴계원 근처를 지나가다가 배밭에 비가 내리는 것을 본 느낌을 메모한 것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수확이 끝나자 배나무에는 아직도 파란빛을 띤 잎새들만 달려 있었고, 비에 젖어서 떨어진 잎이 과수원에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동안 고락을 함께 해왔던 배가 나무와 헤어지고, 잎새도 나무에서 떨어져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가고 있다는, 청승맞은 생각을 했던 것같다. 어쨌든, 그 스산스러운 풍경을 바라본 마음의 수은주가 이 시를 썰렁하게 식혔으리라.  잘 익은 배들 박스에 담겨 나가고  차에 실려 각처로 팔려 나가고  아직도 푸른 무성한 잎 한잎 한잎 떨구며  열매 없는 배나무들  늦가을 찬비를 맞고 있다  지난 봄 배꽃 씻던 봄비가 아닌 비  늦가을 찬비에 젖고 있다  배밭을 떠나간 배들이 알 수 없는  늦가을 찬비에 떨고 있다  배밭 지나 배밭  배밭 지나 또 배밭  퇴계원 배밭 지나 양로원 가는 길  열매를 모두 따 낸 나무는 사람의 노년처럼 쓸쓸함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양로원 가는 길’이라는, 사실과는 다소 다른 시행이 나온 것인데, 사실 그때 내가 차창 밖으로 내다본 것이 자식 생각에 쓸쓸해진 나무노인이 아니었다고도 말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배나무는 그동안 여러 종류의 비를 맞았을 것이다. ‘배꽃을 씻’는 비도 왔는가 하면 ‘풋배를 닦’는 비도 내렸을 것이다. 긴 날 오락가락하였던 장마비며 천둥 벼락이며, 하지만 그때는 배와 배나무가 함께 그 비를 맞았음이다. 그래서 천둥 벼락이 두려운 순간은 있었을지언정 외로움이란 것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정이 달라졌다. 보이는 모습이 너무 처연하다. 그리고 배나무가 비 맞는다는 것을 대처에 나간 배는 모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적어 놓고서 그동안 내내 잊어버리고 있었다. 지금 읽어보니 시라고 할 것이 없는 글이다. 상상력의 즐거움같은 것도 안 보인다.  ‘잘 익은 배들 박스에 담겨 나가고/차에 실려 각처로 팔려 나가고’는 장황하다. 배들이 박스에 담겨서 실려 갔을 것이라는 것은 그럴 것으로 짐작한 것이지 눈에 보이는 풍경은 아니다. 아마도 그 짐작은 사실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림이 되지 않는 것을 그리느라 ‘차에 실려 각처로 팔려 나가고’라고 설명까지 할 필요는 없다. 과감히 지우고 ‘익은 배들 박스에 담겨 나가고’만 겨우 남기자.  ‘아직도 푸른 무성한 잎 한 잎 한 잎 떨구며/ 열매 없는 배나무들/ 늦가을 찬비를 맞고 있다’도 각설하고, ‘떨어진 잎새’는 뒤에 나오니까 여기서는 빼자.  익은 배들 박스에 담겨 나가고  열매 없는 배나무  빈 배밭에 찬 비 온다  이렇게 고치니까 일단 간결은 하다. 다음은 비인데, 비 얘기를 하자면 지금 오는 비는 ‘찬비’이고 전에 왔던 비는 투명한 비라는 점을 말 할 수 있다. 또 지금은 배나무가 혼자서 맞는데, 전에는 배꽃과 배나무, 배와 잎새와 배나무가 함께 맞았던 사정도 이야기될 수 있다.  빗방울의 명증성이 배꽃을 씻고 풋배를 닦는 것은 생각만 해도 맑고 아름다운 그림이다. 시에 이끌어들일 만하다.  배꽃 씻은 실비  풋배 닦은 소낙비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그림이 맑아졌다. 여기에다 ‘지난 봄’이니 ‘지난 여름이니’ 또 ‘봄비가 아닌 비’니 ‘장마비가 아닌 비’니 하는 아리송한 말을 넣어 혼탁하게 만들 이유가 없다.  ‘늦가을 찬비에 젖고 있다/ 배 밭을 떠나간 배들이 알 수 없는/ 늦가을 찬비에 떨고 있다’라는 구절도 지루한 느낌을 추려내고 말을 평이하게 바꾸어서  열매들 떠나 비오는 줄 모를 때에  혼자 남아 나무가 맞는 비  배나무가 젖어 마음이 시린 비  로 고친다. 다음 할 것은 ‘배밭 지나 배밭/ 배밭 지나 또 배밭’을 지울까말까 결정하는 일이다. 그냥 두어도 무방할 것으로 생각이 된다. 먹골 과수원의 풍경이나 노인의 외로움은 가도가도 자락이 이어지는 풍경이 아니던가. 그러나 ‘퇴계원 배밭 지나 양로원 가는 길’로 연결되어 마무리는 되지만 ‘배밭 지나…또 배밭’에는 아쉽게도 지금 내리고 있는 비의 이미지라고는 들어 있지 않다.  비에 떨어져 쌓인 잎새 미끄럽다  퇴계원 배밭 지나 양로원 가는 길  로 마무리를 짓는다면 ‘미끄럽다’로써 먼 것이 되기 쉬운 풍경을 가깝게 이끌어다 발밑의 사정으로 바꾼 효과를 거두면서 또 젖어서 번득이다라는 이미지를 그림에 칠한 것이 된다.  비에 떨어진 잎새 미끄럽다  배밭 지나 또 배밭  퇴계원 배밭 지나 양로원 가는 길  그런데 이 구절을 버릴까말까 생각하는 동안 내가 먹골 배밭의 풍경에 집착한 것 같다. 봄이면 그 야트막한 야산을 뒤덮은 배꽃이 얼마나 아름답던가. 배가 주렁주렁 열려 있는 풍경도 볼 만했다. 그 아름다움들을 시에 끌어다 펼쳐 놓으려는 욕심이 생길 만도 하다. 그러나 막상 따져 보아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라면 없어지는 편이 더 간결해진다. 지극한 가난을 택하자.  마음에 걸리는 것이 또 있다. ‘퇴계원’과 ‘양로원’이 중복되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 ‘퇴’는 물러난다는 의미로서 노인의 이미지와 유사하니까 살려서 퇴계원을 ‘퇴촌’으로 바꾸어 준다. 퇴촌에는 배밭이 없다는 문제가 있지만, 그런 사정을 모르는 독자라면 퇴계원이라고 해도 그림이 그려지지 않을 것이다.  세한도(歲寒圖)를 위해  익은 배들 박스에 담겨 나가고  열매 없는 배나무  빈 배밭에 찬 비 온다  배꽃 씻은 실비  풋배 닦은 소나기 천둥 벼락, 그런  비가 아닌 비  열매 떠나 비 오는 줄 모를 때에  혼자 남아 나무가 맞는 비  배나무가 젖어 마음이 시린 비  떨어져 쌓인 잎새 미끄럽다  퇴촌 배밭 지나 양로원 가는 길  이렇게 고치니 노트에서 찾아냈던 글과는 사뭇 달라졌다. 소품이라는 아쉬움이 있지만.  「세한도를 위해」라는 좀 거창한 제목을 붙인 것은 ‘찬 비’ 이후 어느 눈이 와 쌓인 날에 내가 그 ‘배밭’의 풍경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면 그곳에 흰 눈이 지운 만큼 더 단순하고 간결해진, 가난이 지극한 그림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트에 메모를 하던 그때 내가 봤던 것도 텅 비어지려고 잎마저도 하나둘 버리는 배나무들이었다. (백태종)  ◇88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해와 나 사이의 나뭇잎』 『이녘』이 있다.   ------------------------------------------------------------------------------------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장석남(1965∼ ) 1 찌르라기떼가 왔다 쌀 씻어 안치는 소리처럼 우는 검은 새떼들 찌르라기떼가 몰고 온 봄 하늘은 햇빛 속인데도 저물었다 저녁 하늘을 업고 제 울음 속을 떠도는 찌르라기떼 속에 환한 봉분 하나 보인다 2 누군가 찌르라기 울음 속에 누워 있단 말인가 봄 햇빛 너무 빽빽해 오래 생각할 수 없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나는 저 새떼들이 나를 메고 어디론가 가리라, 저 햇빛 속인데도 캄캄한 세월 넘어서 저기 울음 가파른 어느 기슭가로 데리고 가리라는 것을 안다 찌르라기떼 가고 마음엔 늘 누군가 쌀을 안친다 아궁이 앞이 환하다        화자는 들판이나 산기슭의 아궁이를 때는 집에 살고 있다. 도시의 분답을 피한 이 생활이 형편에 따라서인지, 마음이 이끌어서인지 알 수 없지만 시에 적요감이 배어난다. 봄날의 이른 저녁, 아직 햇빛은 창창하지만 대기에 찬 기운이 돌기 시작할 때 ‘찌르라기떼가 왔’단다. 찌르레기 울음소리는 들어본 바 없지만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는 말이 있듯이 ‘찌르찌르찌르’ 울 것 같다. 떼로 우짖으면 자글자글 끓는 듯할 그 소리가 ‘쌀 씻어 안치는 소리’라니 참으로 그럴싸한 참신한 표현이다. 화자는 찌르레기 소리가 소란해서 하늘을 올려다봤을까, 아니면 그 소리가 멀리서 들릴 때부터 지켜봤을까. 찌르레기 떼 우짖는 소리는 점점 커지다가 점점 작아졌을 테다. 새 떼가 드리우는 한 폭의 커다란 그림자가 빠르게 다가와서 화자를 덮치고는 빠르게 지나갔을 테다. 빛과 그림자, 소란과 정적의 역동적 대비가 현기증 날 만큼 생생하다. 정적(靜的)인 묘사의 세밀함으로 시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장석남의 힘!  ‘찌르라기떼가 몰고 온 봄 하늘은/햇빛 속인데도 저물었다//저녁 하늘을 업고 제 울음 속을 떠도는/찌르라기떼 속에/환한 봉분 하나 보인다’, 찌르레기는 어디 따뜻한 나라에서 겨울을 나고 봄이 돼야 우리나라에 날아드는 새다. 멀어지는 찌르레기 대열의 휜 데가 햇빛으로 환하게 둥근 것에서 ‘봉분’을 연상하다니, 화자는 아무래도 이생의 쓸쓸한 봄을 지나는 게다.
528    동시인은 "스스로 어린이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댓글:  조회:2193  추천:0  2017-06-09
사랑을 생각합니다. ‘사랑’이라 할 때에 무엇이 떠오르는지 가만히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은 어떠한지 모릅니다. 나는 내 느낌만 떠올릴 수 있습니다. 나는, 맨 처음으로 ‘따스함’이 떠오릅니다. 다음으로, ‘좋다’가 떠오르고 ‘웃음’이 떠오릅니다. ‘기쁨’이 뒤따릅니다. ‘환한 빛’이 떠오르고 ‘무지개’와 ‘빗방울’과 ‘개구리 노랫소리’와 ‘제비 먹이 물리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꿈을 생각합니다. ‘꿈’이라 할 때에 무엇이 떠오르는지 찬찬히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은 꿈을 어떻게 바라볼는지 모릅니다. 나는 내 느낌만 짚을 수 있습니다. 나는, 무엇보다 ‘햇살’이 떠오릅니다. 다음으로, ‘즐겁다’가 떠오르고 ‘노래’가 떠오릅니다. ‘어깨동무’가 떠올라요. ‘빛살’과 ‘노을’과 ‘새벽’이 떠오릅니다. ‘보람’과 ‘땀방울’이 나란히 떠올라요. .. 사랑은 남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마음이다. 그리고 남의 아픔을 달래고 감싸 주려는 마음이다. 동시를 쓰는 마음은 무엇보다도 남의 아픔을 달래고 감싸 주려는 사랑의 마음이어야 한다 ..  (35쪽)   동시쓰기를 가르치는 분도 제법 있고, 동시쓰기 강의를 하거나 책을 내는 분이 더러 있는데, 나는 동시쓰기를 가르칠 수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시뿐 아니라 어른시도 ‘어른시쓰기’를 가르칠 수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함께 동시읽기도 가르칠 수 없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어른시읽기’도 가르칠 수 없으리라 느껴요. 왜냐하면, 동시이든 어른시이든, 시를 쓸 적에는 ‘마음’을 ‘글’로 옮기기 때문에, 마음을 어떻게 그리라고 가르치거나 알려줄 수 없어요. 글을 쓴 사람 마음이 이렇다느니 저렇다느니 따지거나 재거나 나무라거나 추켜세울 수 없어요.   오직 한 가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시 즐기기’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어느 것도 가르칠 수 없지만, ‘시를 즐겁게 쓰기’하고 ‘시를 즐겁게 읽기’, 이렇게 두 가지만 가르칠 수 있다고 느껴요.   이준관 님이 쓴 《동심에서 건져올린 해맑은 감동, 동시쓰기》(랜덤하우스코리아,2007)라는 책을 읽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동시쓰기를 어떻게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런 책을 다 쓰는가 싶어 궁금합니다. 다른 무엇보다, 이준관 님은 ‘사랑’이 다른 사람 마음을 헤아리는 마음이라고 적바림하는데, 또 아픔을 달래는 마음이 ‘사랑’이라고 적바림하는데, 이러한 생각은 ‘사랑’을 너무 작고 좁게 바라보는 결이지 싶습니다. ‘사랑’ 가운데 이런 마음이 한 자락 있을 테지만, 사랑은 품이 한결 넓어요.   이웃사랑, 지구사랑, 아이사랑, 책사랑, 만화사랑, 놀이사랑, 하늘사랑, 바다사랑, 숲사랑, 마을사랑, 나라사랑, 노래사랑, 밥사랑, …… 들을 헤아려 봅니다. 어떤 사랑이 되든 ‘맞은편 마음 헤아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걱정해 주기’란 ‘걱정’이지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얕습니다. 달래기, 어루만지기, 감싸기, 같은 느낌도 ‘달램’과 ‘어루만짐’과 ‘감쌈’에서 맴돌 뿐, ‘사랑’으로 와닿기에는 어쩐지 동떨어집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가 어머니를 사랑해요. 할아버지가 흙을 사랑하고 할머니가 나무를 사랑해요. 나무가 사람을 사랑하고, 숲이 사람을 사랑합니다. 사람이 숲을 사랑하고, 사람이 하늘을 사랑합니다. 이러한 ‘사랑’을 한결 넓으면서 깊게 바라볼 때에, 동시를 쓰는 마음이란 어떠한 결인가를 새롭게 깨닫거나 느끼리라 봅니다. .. 동시를 쓰는 사람들이 가장 고심하는 것이 바로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소재는 먼 곳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동시의 소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생활 주변에 있다 ..  (53쪽)   나는 글을 쓰면서 ‘걱정’하는 일이 없습니다. 걱정을 하자면 글을 쓸 수 없습니다. 너무 마땅합니다. 걱정이 넘치는 사람은 글을 쓸 수 없습니다. 무엇을 써야 할까 걱정한다면, 글을 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가 있을 때에 글을 쓰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도 없는데 ‘글 쓸 거리’를 찾거나 끌어당긴대서 ‘글이 되’지 않아요.   곧, 동시이든 어른시이든, 그러니까 ‘글’을 쓰려면 ‘쓸거리(소재)’ 아닌 ‘이야기’를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이웃과 동무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살펴야 합니다. 내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깨달을 때에 글을 씁니다.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알아차릴 때에 글을 읽습니다.   글읽기(책읽기)는 아무나 못 합니다. 글읽기(책읽기)는 참말 아무렇게나 못 합니다. 누군가 베스트셀러나 권장도서나 추천도서를 선물해 주었기에 하는 글읽기(책읽기)가 아니에요. 글(책)을 읽으려 한다면, 그 글(책)을 읽어야 하는 까닭을 스스로 먼저 느껴야 하고, 그 글(책)을 읽으면서 내 삶을 어떻게 다스려서 새롭게 거듭나고 싶은가를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글(책)로 읽고 싶은 ‘이야기’를 모르는 채 글(책)만 붙잡는다면 아무것도 못 얻어요. 얻을 수 있는 한 가지라면 ‘아무것도 못 얻는다’는 대목만 얻지요.   다시 말하자면, 쓸거리는 “먼 곳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쓸거리는 “생활 주변에 있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쓸거리는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쓸거리란 바로 ‘내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이니, 내 마음속에서 길어올려야 합니다. 내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내 삶 언저리’에서 찾을 수도 있지만, ‘머나먼 곳에 있는 낯선 나라 낯선 마을 모습과 삶’에서 찾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곳에서 찾든, ‘내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일 때에 글(동시, 어른시, 동화, 소설, 산문)을 쓸 수 있어요. .. 눈으로 보는 것은 구경꾼이나 관찰자에 불과하다. 한발 비켜서 있는 구경꾼의 글은 독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기 어렵다. 그러나 자기가 직접 했거나 해 본 일은 그 감동이나 느낌이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  (74쪽)   나는 눈으로 바라보기를 좋아합니다. 눈만큼 ‘큰 경험’이 없습니다. 씨앗을 눈으로 보고, 밥물 끓는 모습을 눈으로 봅니다. 아이들 자라는 모습을 하루 내내 눈으로 지켜봅니다. 자전거를 타고 시골길 아이들과 함께 달리면서, 우리 보금자리 깃든 전남 고흥 어여쁜 마을살이를 눈으로 살펴봅니다.   눈으로 실컷 누리면서 코로 맡습니다. 씨앗내음을 맡고, 밥물 끓는 내음을 맡습니다. 아이들 머리카락 사이에 코를 파묻고 냄새를 맡습니다. 아이들 옷에 때나 땀이나 얼룩이 얼마나 묻었나 냄새를 맡습니다. 시골길 다니며 들내음과 숲내음과 바다내음 맡습니다.   그리고, 살갗으로 헤아립니다. 마음으로 살핍니다. 나를 둘러싼 이 아름다운 누리를 모든 세포를 깨워서 낱낱이 느낍니다. 좋은 느낌을 찾고, 즐거운 빛을 살피며, 반가운 꿈을 돌아봅니다.   눈으로 바라본대서 ‘구경꾼’이 아닙니다. 구경꾼이란 ‘뒷짐 진 사람’입니다. 이를테면, 아이를 낳는 어버이는 어머니와 아버지인데, 아이를 돌보는 몫을 어머니한테만 떠맡기고 바깥으로만 나돌거나 집에서 아이들 보살피는 몫 건사하지 않는 여느 아버지들이 바로 ‘구경꾼’입니다. 빨래 안 하고, 밥 안 지으며, 청소 안 하고, 아이들 자장노래 안 불러 주는 수많은 여느 아버지들이 바로 ‘구경꾼’이에요. .. 생활 속에 시가 있다. 생활하면서 느낀 것, 또는 하고 싶은 말을 시로 써 보라. 아이들의 생활을 눈여겨보고 시로 써 보고, 어린 시절의 추억도 시로 써 보라. 우리 생활 주변에 있는 사물과 동식물들도 재미있게 시로 옮겨 보라 ..  (167쪽)   글로 쓸 거리란 ‘사람들 마음속에 다 있다’고 느낍니다. 글을 읽어 얻을 생각도 ‘사람들 마음속에 다 있다’고 느껴요. 그래서 동시나 어른시 모두 “생활 속에 시가 있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삶에 시가 있다’기보다 ‘내 마음속에 시가 있다’고 말해야 옳다고 느낍니다.   삶이란 무엇이겠어요. 삶이란 내가 누리는 하루가 모여 이루어지는 이야기예요. ‘이야기’가 ‘삶’이에요. 그러면, 이야기란 또 무엇이겠어요. 내가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이야기예요. 곧 ‘마음’이 ‘이야기’입니다. 내가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라 하는 이야기란 또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이지요.   사랑을 들려주고 싶기에 글(시)을 씁니다. 사랑을 듣고 싶기에 글(책)을 읽습니다. 실마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아름답구나 싶은 글(시)을 쓰는 사람들은 모두 이 실마리를 잘 깨우친 분이라고 느낍니다. 윤동주 님도, 이원수 님도, 권정생 님도, 임길택 님도, 바로 이 같은 실마리를 슬기롭게 깨우쳤어요. 이분들은 한결같이 ‘사랑’을 노래했습니다. 사랑을 노래하고픈 ‘마음’을 살찌우고 아꼈습니다. 사랑을 노래하고픈 마음을 살찌우고 아끼는 하루를 가다듬으며 ‘삶’을 일구었어요. 언제나 스스럼없이 글(시)이 샘솟지요. 꾸며서 쓰는 글(시)이 아니라, 싱그럽게 노래하며 쓰는 글(시)이에요.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현덕, 백석, 권태응 같은 분들이 노래한 이야기도 바로 이러한 ‘삶노래’이고 ‘사랑노래’입니다.   생각해 보셔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가 꾸준하게 넘실거리는데, 왜 “어린 시절의 추억”에 사로잡히는가요. 마음속에서 샘솟는 사랑노래가 자꾸자꾸 넘치는데, 굳이 “생활 주변에 있는 사물과 동식물들도 재미있게” 옮기는 글이 얼마나 재미있을까요.   삶을 써야 글이 맞습니다. 삶을 쓸 때에 시가 됩니다. 그러면, 글이 맞고 시가 되는 ‘삶’이 무엇인지부터 또렷이 살펴야 합니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 이야기로 들려주고 싶은 사랑스러운 마음, 이 두 가지가 어우러지는 하루와 하루가 모여 ‘삶’이 됩니다. .. 동시를 쓰려면 준비 단계가 필요하다. 그냥 써지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 세계와 동심의 세계를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아이들을 잘 알고 좋아해야 한다. 자기가 쓰려고 하는 아이들과 친해야 한다. 아이들과 만나서 친할 기회가 없으면 아이들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읽거나 연구를 해야 한다 ..  (19쪽)   이준관 님이 쓴 《동심에서 건져올린 해맑은 감동, 동시쓰기》라는 책에는 다른 어느 동시작가 작품보다 이준관 님 작품을 아주 많이 다룹니다. 이준관 님 스스로 동시를 쓰시니, 이녁 작품을 보기로 들 수 있겠지요. 그러나, 동시쓰기 일반론을 펼치려 한다면, 이녁 작품은 되도록 한두 꼭지로만 다루고, 다른 동시작가 작품을 다루어야 올바르다고 느낍니다. 이녁 작품을 보기로 들면서 ‘잘 쓴 글’이라는 말까지 거듭 덧붙이는데, 이렇게 ‘스스로 칭찬하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자주 보여주는 일은 좀 남우세스럽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붙이자면, 동시를 쓰려는 사람은 “아이들을 잘 알고 좋아해야” 하기는 할 텐데, 동시를 쓰려는 사람이 “아이들과 만나서 친할 기회가 없”을 수 있는지 알쏭달쏭합니다. 게다가 “아이들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읽거나 연구를 해야” 한다는 말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아이들하고 만나면 되지, 왜 아이들 세계 연구를 하고, 왜 아이들 세계를 학문으로 밝힌 책을 읽으라고 하는가요. 이런 책읽기야말로 ‘구경꾼’ 되는 노릇이지 싶습니다. 스스로 몸으로 겪지 않은 일을 써서는 ‘감동’을 할 만한 동시를 못 쓴다고 책에 밝힌 이준관 님인데, 동시를 쓰려는 사람들한테 책 첫머리부터 ‘구경꾼’이 되라고 말하는 대목은 좀 아찔합니다. 우리 둘레에 아이들이 없어서 ‘책으로 아이들을 연구’해야 할까요.   생각을 기울여 봅니다. 동시를 쓰는 사람은 모두 어른입니다만, 어른이라는 사람 누구나 어린이였습니다. 어린이에서 자라 어른이 됩니다. 어른이 된 사람은 몸뚱이가 어린이하고는 사뭇 멉니다. 그러나, 어린이로 살아온 나날이 몸속 깊이 아로새겨졌습니다. 스스로 내 몸을 돌아볼 수 있다면, ‘내 마음속에 깃든 어린이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나이 마흔이나 예순이라 하더라도 나이 여섯이나 아홉 아이들과 똑같이 어울려 뛰놀 수 있습니다. 스스로 ‘마음속 어린이 모습’을 찾아내어 둘레 아이들하고 얼크러지면 곧바로 ‘어린이마음(동심)’이 되어요.   동시를 쓰려는 사람은 스스로 어린이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동시를 쓰려는 사람은 ‘이웃하고 나누고 싶은 사랑’을 ‘이야기 한 자락’으로 갈무리하면서 ‘스스로 어린이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아이들을 놀이터에서 찾지 말아요. 아이들을 학교나 학원에서 찾지 말아요. 아이들을 ‘우리 집’에서 찾아요. 아이들을 우리 삶터와 우리 마을에서 찾고, 다른 어느 곳보다 ‘우리 마음속’에서 아이들을 찾아요. 4346.6.15.흙.ㅎㄲㅅㄱ   --------------------------------------------------------------------------------------------     끝말 잊기  ―김성규(1977∼ )     물고기가 처음 수면 위로 튀어오른 여름 여름 옥수수밭으로 쏟아지는 빗방울 빗방울을 맞으며 김을 매는 어머니 어머니를 태우고 밤길을 달리는 버스 버스에서 졸고 있는 어린 손잡이 손잡이에 매달려 간신히 흔들리는 누나의 노래 노래가 소용돌이치며 흘러다니는 개울가 개울가에서 혼자 물고기를 파묻는 소년 소년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아버지 아버지가 버스에 태워 보낸 도시의 가을 가을마다 고층빌딩이 쏟아내는 매연 매연 속에서 점점 엉겨가는 골목 골목에서 여자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손가락 손가락이 밤마다 기다리는 볼펜 볼펜이 풀지 못한 가족들의 숙제 숙제를 미루고 달아나는 하늘 하늘 쪽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민 마을 마을에서 가장 배고픈 유리창 유리창에서 병 조각처럼 깨지는 불빛 불빛 속에서 물고기처럼 우는 사내 사내가 부숴버린 어항이 조각조각 널린 방바닥 방바닥에서 퍼덕거리다 죽어가는 물고기 한 사내가 제 삶이 지나온 자취를 끝말잇기처럼 꼬리에 꼬리를 무는 회상으로 되돌아본다. 시작은 ‘물고기가 처음 수면으로 튀어오른 여름’, 싱그럽고 서정적인 여름의 탄생이다. ‘여름 옥수수 밭으로 쏟아지는 빗방울’ 속에서 이 무구한 물고기의 눈에 맺힌 처음 풍경은 비를 맞으며 김을 매는 어머니. 어머니는 빗속에서 김을 매다 아기를 낳으신 걸까. 그 어머니, 아직 철없는 딸만 데리고 먼저 도시로 떠난다. 보퉁이 몇 개 들고 ‘밤길을 달리는 버스’를 타고. ‘마을에서 가장 배고픈 유리창’인 농촌 가정의 도시 유입 행색이다. 사내가 엄마와 누나한테 보내지는 계절은 가을인데, 이후로 사내의 삶은 도시의 가을, ‘가을마다 고층빌딩이 쏟아내는 매연/매연 속에서 점점 엉켜가는 골목’이다. 거기서 사내는 밤마다 시를 쓴다. 그런데 ‘볼펜이 풀지 못한 가족들의 숙제/숙제를 미루고 달아나는 하늘’, 속수무책 가난에 들볶일 때면 술을 마시고, 빈 술병을 내리치며 ‘물고기처럼’ 우는 사내다. 시 제목이 ‘끝말잇기’가 아니고 ‘끝말 잊기’다. ‘방바닥에서 퍼덕거리다 죽어가는 물고기’, 이 끝말을 부디 잊어달란다. 이렇게 맺으려던 게 아니었다고.
527    시인은 관습적으로 길들여진 자동화된 인식을 버려야... 댓글:  조회:2276  추천:0  2017-06-09
시 세계의 3단계-감각, 정서, 예지 강의 주제―시 세계의 3단계 ― 감각, 정서, 예지  시의 세 단계 - 미당 서정주의 언급: 「시의 감각과 정서와 예지」 → 의 단계, 의 단계, 의 단계 시인의 자질 - 시인은 보통 사람에 비해 대상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며 언어 표현에 능숙한 사람 → 자신만의 독특한 체험을 참신하고 생생한 언어적 표현으로 말할 줄 알아야 한다 → 관습적으로 길들여진 자동화된 인식을 버리고, 대상에 대한 새로운 느낌을 체험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단풍은 잘 익은 인생이다 감각의 단계 - 감각의 능력은 곧 시인의 능력 - 감각 능력의 탁월성은 곧 시인의 탁월성 정지용의 시 「바다 9」 바다는 뿔뿔이 달어 날랴고 했다.  푸른 도마뱀떼 같이 재재발렀다.  꼬리가 이루 잡히지 않었다.  힌 발톱에 찢긴 珊瑚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 가까스루 몰아다 부치고 변죽을 둘러 손질하여 물기를 시쳤다.  이 앨쓴 海圖에 손을 싯고 떼었다.  찰찰 넘치도록  돌돌 구르도록 회동그란히 바쳐 들었다! 地球는 蓮닢인양 옴으라들고……펴고…… 위의 시 자세히 읽기 - 독특하고 섬세한 언어 감각이 잘 드러남 → 이런 능력은 대상을 늘 새롭게 보려는 훈련을 통해서 얻어진다 - 를 정적인 이미지가 아닌, 역동적 이미지로 잘 그려냄 → 의성어와 의태어의 자유로운 구사 감각적 표현의 주의점 - 감각적 표현이 지나치면 시가 말초적인 기교에 빠질 위험성이 있음 → 시적 깊이를 제대로 이루기 위해 의 단계가 필요함 정서의 단계 - 감각의 표현이 시인의 기초적 능력이라면, 정서의 표현은 그 상위의 능력이다 - 감각이 말초적이라면, 정서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 시에서 정서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표현 조지훈의 시 「落花」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 → 상실감, 일상 현실을 벗어나 은둔하고자 하는 시인의 미적 정서의 표현 정서 표현의 훈련 - 이런 미적 정서는 시인의 오랜 인생 경험이 축적·집중되어 불순한 것은 순화되어 만들어진 결정체라 할 수 있다. 미적 정서를 얻기 위해 인생 경험을 풍부하게 가질 필요가 있다 예지의 단계 - 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마지막 단계 - 서정주의 언급: 최고의 단계 - 시적 표현을 통해서 보편적 진리의 경지에 이르는 것, 즉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것 『장자』의 : 천도에 실려 있는 이야기 - 윤편: 목수 직업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꿰뚫어 봄 좋은 시의 창작 - 예지는 창작하는 사람의 끊임없는 노력에 의해서 얻어진다 - 예지의 단계가 나타날 때 비로소 훌륭한 시로 탄생한다 - 좋은 시란 결국 감각의 단계, 정서의 단계, 예지의 단계가 잘 녹아 있는 시다 습작기의 오류 - 필연성 없는 시와 행의 구분 - 첫행 시작의 어려움 - 사족 첫행은 왜 중요한가?  - 독자의 관심과 호기심을 유발 - 다음 행(行)들과 연(聯)들을 풀어내는 길잡이 역할 첫행 쓰는 요령  ① 특정한 시간이나 계절로 시작할 수 있다 - 시간은 생명의 성숙·성장과 관련이 깊고, 인간도 시간(계절 포함)으로부터 벗어나기 힘든 존재이기 때문이다 - 진부한 표현을 벗어나 참신한 표현의 발굴 필요 김영석의 시 「매」 하늘이 시퍼렇게 얼어붙은 겨울날 수화(수화)를 나누던 너와 나의 하얀 손이 까마득히 낙엽진 날 마음속 깎아지른 벼랑을 떠나 온종일 허공을 맴도는 매 한 마리 ▶ 김영석 1945년 전북 부안 출생, 경희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70년 신춘문예와 1974년 신춘문예 시 당선. 1981년 에 평론 당선. 시집으로 가 있으며, 시와시학상 수상했다. 현재 배재대 국문과 교수 비평가 노드롭 프라이의 개념 - 봄: 영웅의 탄생 신화, 부활과 재생 신화, 희극, 열광적 찬가, 광상곡의 원형 - 여름: 인간의 신격화, 낙원에 관한 신화, 로맨스, 목가의 원형 - 가을: 신과 영웅의 사망에 관한 신화, 비극과 엘레지의 원형 - 겨울: 대홍수와 혼돈의 신화, 영웅의 패배의 신화, 풍자와 아이러니의 원형  아트앤스터디 강의노트 (www.artnstudy.com)   첫 행에 불특정 시간을 배치하는 경우 ― 이가림의 시 「석류」 언제부터 이 잉걸불 같은 그리움이 텅 빈 가슴 속에 이글거리기 시작했을까 지난 여름 내내 앓던 몸살 더 이상 견딜 수 없구나 영혼의 가마솥에 들끓던 사랑의 힘 캄캄한 골방 안에 가둘 수 없구나 나 혼자 부둥켜안고 뒹굴고 또 뒹굴어도 자꾸만 익어가는 어둠을 이젠 알알이 쏟아놓아야 하리 무한히 새파란 심연의 하늘이 두려워 나는 땅을 향해 고개 숙인다 온몸을 휩싸고 도는 어지러운 충만 이기지 못해  나 스스로 껍질을 부순다 아아, 사랑하는 이여 지구가 쪼개지는 소리보다 더 아프게 내가 깨뜨리는 이 홍보석의 슬픔을 그대의 뜰에 받아주소서 아트앤스터디 강의노트 (www.artnstudy.com)   첫행 쓰는 요령  ② 특정한 공간이나 불특정한 공간으로 시작한다 강형철의 시 「사랑을 위한 각서 8―파김치」 호남선 터미널에 나가면  아직도 파김치 올라온다 고속버스 트렁크를 열 때마다 비닐봉지에 싼 파김치 냄새 텃밭에서 자라 우북하였지만 소금 몇 줌에 기죽은 파들이 고춧가루를 벌겋게 뒤집어쓰고 가끔 국물을 흘린다 호남선 터미널에 나가면 대처에 사는 자식들을 못 잊어 젓국에 절여진 뻣뻣한 파들이 파김치되어 오늘도 올라온다 우리들 어머니와 함께. - 첫행 쓰는 요령  ③ 시간과 공간이 함께 나온다 - 최두석의 시 「샘터에서」 새벽 노을 속 까마귀떼 잠 깨어 날아오른다 깃들인 자리 대숲 댓잎에 내린 된서리에 부리를 닦고 사나운 꿈자리 날갯짓으로 훨훨 털어내며 날아오른다 눈녹이물 다시 논밭에서 서릿발로 일어선 텅 빈 들판 위로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칼날 바람 타고 잇따라 솟구쳐오른다 어느새 수백 수천의 까마귀 결빙의 하늘에서 만나 원무를 춘다 거친 숨결 하늘에 뿜어 드디어 능선 위로 불끈 해가 솟는다.  - → 이라는 시간 배경과 의 공간이 어울려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 최두석 1955년 전남 담양 출생. 1980년 『심상』에 「김통정」 등을 발표하여 시작 활동 시작. 1982년부터 동인 참가, 1980년대의 주목받는 시인으로 떠오름. 『대꽃』(1984), 『임진강』(1985), 『성에꽃』 등의 시집이 있음  첫행 쓰는 요령  ④ 자연물 대상 또는 기호 현상의 사용 황인숙의 시 「눈은 마당에 깃들이는 꿈」 눈이 온다 먼 북국 하늘로부터 잠든 마당을 다독이면서 단풍나무 꼭대기에 갸우뚱거리던 눈송이가 살풋이 내려앉는다 살풋살풋 둥그렇게 마당이 부푼다 둥그렇게, 둥그렇게 눈은 마당에 깃드는 꿈 마당은 커다란 새가 됐다 그리고 단풍나무 꼭대기에서 작은 새가 내려앉는다 저 죽지에  뺨을 대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그의 잠을 깨우지 않고? - → 라는 기후 변화를 시의 첫행으로 한 경우에 속함 첫행 쓰는 요령―⑤ 참신한 이미지의 제시 -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함으로써 시선을 집중시킨다 - 일종의 충격 효과 김명인의 시 「여우비」 철둑 가장일 끌고 오는 여우비, 저물 무렵 잠깐 놀러 나온 구름이 길을 묶는다 만곡 끝 닿는 곳까지 갖은 파랑 펼쳐놓고 바다 한쪽을 후들겨 소낙빌 털어내는  여우비, 한 풍경에도 이렇게 확실한 두 세계의 경계가 있다 나, 지금 물든 풍경에도 틈새에 끼여 한켠으론 젖고, 한켠으론 메마르며 땅거미 속 아득하게 지워져가는 저 철길 보고 있다  길 사라져 헤맬 일로 고단해지면  우는 화상아, 그대나 나나 둑 아래 감탕밭 스쳐간 비 자리 엎어진 물 웅덩이로 주저앉아 갈 곳없는 노을 텅 비게 담아내며 명지 바람에도 주름 접힐 파문으로나 남았다 바다 건널 일도 힘에 부쳐 겨우겨우 모래펄을 쓸고 있는 여우비, 어느새 몸 무거워진 가을머리 저, 여우비 김명인의 「여우비」의 첫행 → 이미지 제시 통해 독자의 관심을 유발함 첫행 쓰는 요령―⑥ 평서형 문장 사용 박노해의 시 「월요일 아침」 월요일 아침이면 나는 우울하다 찌부둥한 몸뚱이 무거웁고 축축한 내 영혼 몹시 아프다 산다는 것이 허망해지는 날 힘없는 존재 더욱더 무력해지는 날 일터와 거리와 이 거대한 도시가 낯선 두려움으로 덮쳐누르는 날 월요일 아침이면 나는 병을 앓는다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로 나를 일으키는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의 이 엄중함 나는 무거운 몸을 어기적거리며 한 컵의 냉수를 빈속에 흘려보낸다 푸르름 녹슬어가도록 아직 맛보지 못한 상쾌한 아침, 생기찬 의욕, 울컥이면서 우울한 월요일 아침 나는 또다시 생존행진곡에 몸을 던져넣는다 - → 1인칭 주어의 평서문으로 첫행을 시작한 경우 ▶ 박노해 시인  1957년 전남 함평 출생. 본명 박기평. 서울 선린상고 졸업. 섬유, 금속공장, 버스회사 근무. 서노련(서울노동운동조합) 활동 및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결성 주도. 첫시집 「노동의 새벽」(1984), 「참된 시작」(1993), 「사람만이 희망이다」(1997) 등 발간. 1991년 3월 10일 구속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무기 징역형을 선고받고 8년간 경주교도소에서 수감 생활, 1998년 8월 15일 특별사면되었다 첫행 쓰는 요령―⑦ 비유의 사용 - 비유: 일상적 고정 관념 파괴의 효과 유용주의 시 「매운탕」 도시는 거대한 솥,  펄펄 끓는다 반짝이며 수없이 떠오르는 고기떼들 썩은 고기들의 끝없는 악취 그래도 매운탕엔 향기가 나야 제맛이지 깻잎과 미나리와 쑥갓을 듬뿍 넣고 소주 한잔 카아악! 어디에선가 무지막지한 큰 손이 자꾸만 장작을 가져와 불을 지핀다 - → 「도시는 거대한 솥」: 긴장감을 주어 관심을 유도함 ▶ 유용주 1960년 전북 장수 출생. 1990년 첫시집 『오늘의 운세』를 간행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 『크나큰 침묵』(1996)으로 제15회 신동엽창작기금 수혜.  그 외의 방법 - 수식어와 수식을 받는 중심 단어의 제시 - 행동이나 사건의 제시 - 명사·동사·형용사·감탄사, 또는 의성어·의태어 등 하나의 낱말로 시작하는 경우 등 ------------------------------------------------------------   가을 프리즘 ―이경희(1935∼) 댓돌에 내려서는 상긋한 가을 아침볕을 따라 돌아서는 해맑은 풀꽃의 얼굴 뽀얗게 건조한 마당의 씨멘트 색깔에서 풀 먹인 치마폭이 파릇이 살아나는 탄력에서 어머님의 손매디가 성큼하게 돋아나는 아픔에서   다홍고추를 다듬는 재채기 소리에서 깡마른 호박넝쿨 위에 길게 늘어진 추녀 그림자에서 머리 빗으니 무심히 날리는 한 가닥의 새치에서 가슴 속 살비듬이 돋아나는 서걱임에서 장지문에 비껴드는 아침 빛줄기를 타고 오는 가을 이 아침 님의 손은 한결 가슬거린다                     1980년에 출간한 이경희 시집 ‘분수(噴水)’에서 옮겼다. 세로로 흘러내리는 시구들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나아간다. 이런 아치(雅致) 있는 편집 형태가 일본에는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세로쓰기는 오래전에 사라졌다.      시집만큼이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시다. 정갈하고 조금은 쓸쓸한 모녀의 삶이 장지문에 비껴드는 가을 아침 햇살처럼 맑고 소슬하게 그려져 있다. 댓돌이 유난히 상긋해 보이고, ‘풀 먹인 치마폭’이 문득 빳빳하게 종아리를 스친다. 아, 가을인가. ‘다홍고추를 다듬는’ 어머니의 손마디가 더 울룩불룩해진 듯해 가슴이 아프다. 무심히 머리를 빗는데, 거울 속에 비치는 한 가닥 새치. 언제 생겼지…. 집 안에도 마당에도 화자의 가슴속에도 가을의 빛이 아른아른 남실거린다. 가슬가슬한 가을의 빛이! 이처럼 얌전하고 사뿐한 맵시에 열정을 더한 시인의 다른 시 ‘분수VI’ 앞부분만 소개한다. ‘내 당신 속에 들고/당신 또한 내 속에 들었음에도/이상하여라/허공을 헤집는/손, 손, 손,//허공의 손들을 끌어내리려/발꿈치는 늘 꿈꾸듯 매달려 있네’ 숨죽인 가운데, 몽환적이고 감각적인 발레를 보는 듯하다. 마당과 꽃밭이 있는 한식 기와집들이 언젠가부터 거의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고층빌딩이나 공용주택이 들어섰다. 제 집 마당에서 ‘깡마른 호박넝쿨 위에/길게 늘어진 추녀 그림자’를 보며 사는 사람의 정서도 함께 사라졌을 테다.
526    시인은 시제목을 정할 때 신경을 써야... 댓글:  조회:2566  추천:0  2017-06-09
 아내가 시집올 때 자기 사진을 챙겨 가져왔다. 친구들과 학창 시절에 찍은 사진, 직장 생활을 할 때의 사진, 혼자 멋을 부리고 찍은 독사진… 사진과 함께 그 시절의 추억도 같이 묻어 있을 것이었다. 유치원 다닐 때 찍었다는 다섯 살 때의 흑백사진을 본다. 너른 마당 한가운데 작은 의자를 놓고 거기 치마 저고리를 입은 단발머리 계집애가 앉아 있다. 아마 검정 통치마에 흰 저고리일 것이다. 정면의 햇빛이 눈부신 듯 찡그린 얼굴은 동그랗다. 마치 우리 막내딸의 어린 시절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그 마당을 나는 알 것 같기도 하다. 변소 가는 마당 한 구석에는 벽오동나무도 한 그루 서 있고. 어렸을 때부터 결혼할 무렵까지 아내는 죽 그 집에 살았었다. 꽤 커다란 기와집이었다. 어쩌면 또래의 동무들과 함께 마당에서 공기놀이도 하였을 법하였다.  다섯 살 난  단발머리 계집애가  동무랑 공깃돌을 굴리는데  벽오동나무 넓은  그림자가 내려와  아이의 등을 간질이다가  낮잠을 슬슬 덮어주었다  삼학년 아이들의 모의수학능력시험 감독을 하는 중에 문득 이런 이미지가 떠올랐다. 여분의 답안지 뒷장에 그것을 적었다. 시의 영감이 떠오르는 건 세상이 가장 고요한 어느 한 순간이다. 길을 걸을 때, 버스를 타고 창밖에 무심히 눈길을 주고 있을 때, 혹은 이른 아침의 화장실에 앉아 있을 때. 그리고 숨소리 하나도 잡힐 듯 조용한 시험 시간의 교실에서의 어느 한 순간.  집에 돌아와서 저녁에 그 시구를 꺼내 놓고, 거기에 벽오동나무를 배치해 보고 공깃돌 부딪는 소리도 넣어 보았다. 계절은 가을이 벽오동나무와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해서 다음과 같은 시로 완성되었다. 썩 마음에 흡족한 시는 아니지만 더 이상 손대기가 싫었다.  측간 가는 길을 비켜서 주춤  키 큰 벽오동나무가  굽어보고 있었다  다섯 살 난  단발머리 계집애가  동무랑 공깃돌을 굴리는데  하늘엔 옥돌 부딪는 소리  푸른 가을  벽오동 넓은 이파리  그림자가 내려와  아이의 등을 간질이다가  낮잠을 슬슬 덮어주었다  아내는 요즘  어릴 적 벽오동나무보다  굵은 허리로  짧은 가을 볕 낮잠이 달다  이 시에 뭐라고 제목을 붙일까. 참 난감하였다. '아내'라고 하지니 너무 싱거워지는 것 같았다. '세월'이라는 제목도 떠올랐다. 그것도 별로 내키는 제목이 아니었다. '아내의 가을'이 괜찮을 성싶었다. 그 제목으로 홈페이지에 시를 올렸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찜찜한 기분이었다. 제목이 차라리 맨 아래에 붙는다면 그럴싸하겠지만.  첫 연부터 셋째 연까지는 아내의 유년기이고, 넷째 연에 와서 아내의 현재로 반전을 이루는 데 이 시의 묘미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그런데 제목부터 '아내의 가을'이라고 하면 독자들은 처음부터 그 다섯 살 난 계집애를 아내의 어린 시절로 금방 눈치챌 것 아니겠는가. '아내의 가을'은 시상의 반전이 주는 즐거움을 싹 가시게 하는 제목이었다.  '후문(後聞)'이라는 제목이 문득 떠올랐다. 감춰진 반전도 쉬 드러나지 않고 무난한 듯 보였다. 하지만 역시 딱 들어맞는 제목은 아닌 것 같았다. '벽오동나무가 있는 풍경', '낮잠' 등 이런저런 말들을 뒤슬러보다가 결국 '벽오동나무 후문(後聞)'을 생각했고, 조사 '의'를 끼워 넣어서 '벽오동나무의 후문(後聞)'으로 시의 제목을 고쳤다. 그리고 고친 제목을 홈페이지에 수정하여 올렸다. 별것도 아닌 시인데 제목 때문에 무던히 애를 먹은 시가 이 시 '벽오동나무의 후문(後聞)'이다.  수필이나 소설에 제목을 붙이기가 시보다 쉽다고 하면 수필가나 소설가로부터 욕을 먹을까. 시 아닌 산문에서는 단순한 소재를 제목으로 정할 수도 있고, 주제와 관련시켜 상징적인 제목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우편배달은 두 번 벨 울린다'라는 미스터리 소설이 있었다.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보아도 우편배달부는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는다. 소설의 내용과는 아무 상관없이 좀 '별난' 제목이라고 생각해서 작가 제임스 케인은 그렇게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이게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잭 니콜슨이 주연을 맡고 나온다. 우리 나라에 수입된 그 영화가 상영되면서 당시엔 외설스런 장면이 문제가 되어 집배원들이 그 영화의 제목을 고쳐달라고 항의를 하였다. 급기야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로 영화 제목이 바뀌었다.  제목이 없는 시도 있을까. 김영랑의 사행시(四行詩)들은 숫자로 번호만 매겨져 있지 별도의 제목이 없다. 따지고 보면 '사행시 1, 2, 3…'이 제목일 수도 있겠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는 사행시의 앞 구절을 편의상 제목인 양 붙여놓은 것일 뿐이다.  그와 같이 시의 제목을 그 시의 첫 구절을 따다가 쓰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런 제목은 대체로 무난한 것이지 썩 좋은 제목은 아닐 것이다. 연작시의 제목 아래에 번호만 매겨진 시들도 종종 본다.  그게 수십 편이 되면 앞에 나온 시들보다 뒤쪽의 시들은 본래의 연작시 제목이 지녔던 주제와 동떨어질 수가 있다. 연작시가 아니라도 똑같은 제목을 여러 편에 붙여도 무방할 것이다. 이브 본느푸아의 시집을 보면 '돌'이라는 같은 제목의 각각 다른 시가 여러 편 들어 있는 걸 확인해 볼 수 있다. 제목이 먼저 주어지고 시를 쓰는 백일장과 마찬가지로 시보다 먼저 제목이 쓰여질 때도 있다. 습작 시절에 연습으로 나도 그런 시를 많이 써 본 경험이 있다.  ---------------------------------------------------------------------------------       소만(小滿) ―윤한로(1956∼ )     봄 끝물 베란다 볕 좋다 미카엘라 빨강 고무대야에 따슨 물 가득 아버지 발딱 앉혀 닦아드린다 손 씻고 발 씻고 코도 팽 풀리고 가슴도 닦아드리고 이윽고 거기까지 닦아드리니 헤, 좋아라 애기처럼 보리 이삭처럼 뉘렇게 웃으시네 누렇게 패이시네 그새 울긋불긋 꽃 이파리 몇 장 날아들어 둥둥 대야 속 떠다니니 아버지 그걸로 또 노시니 미카엘라 건지지 않고 놔 두네  오늘만큼은 땡깡도 부리지 않으시네, 윤 교장선생   소만은 입하와 망종 사이의 절기, 보리 이삭 누렇게 익고 초목이 무럭무럭 자라 농촌 일손이 한창 바쁠 때다. ‘봄 끝물’, 여름 맏물. ‘베란다 볕’도 좋아 ‘미카엘라/빨강 고무대야에 따슨 물 가득/아버지 발딱 앉혀 닦아드린다’. 정답게 세례명을 부르는 걸 보니 미카엘라는 화자의 누이 같은 아내, ‘아버지’의 딸 같은 며느리. ‘손 씻고 발 씻고 코도 팽 풀리고’, ‘이윽고 거기까지 닦아드리니’ 아버지 ‘헤, 좋아라 애기처럼’ 웃으신단다. 육신도 정신도 ‘애기’가 된 연로하신 아버지, 하지만 다른 이의 손을 빌려 몸을 씻는 게 영 내키지 않으셨을 테다. 그래 목욕하시자 할 때면 버럭 화를 내며 ‘땡깡’을 부리셨을 테다. 욕실에 모시는 일이 전쟁이었는데 오늘은 참으로 볕 좋은 베란다에서 ‘애기처럼’ ‘윤 교장선생’님, ‘따슨 물’에 몸 담그고 잠방잠방 물장난도 하며 웃으시네요. 미카엘라는 소만의 햇볕, ‘따슨’ 어머니의 손길로 노인의 몸을 어루만져라.  우리 모두 언젠가는 유일하게 남은 찬사가 ‘깔끔하다’일 날이 오리니. 방과 몸에서 나쁜 냄새라도 풍기면 가족의 천대를 받을까 봐 노심초사하는 노인이 많다. 노인이 되면 여태 주인으로 살아온 세계에서 이제 세입자가 된 듯 입지가 불안해진다. 그렇잖아도 어디에서고 존재감이 엷어지는데 가족조차 그가 없는 듯 있기를 원하기 쉽다. 다행히 베이비붐 세대인 나는 같이 늙어 가는 사람이 많아서 이전 노인들보다 외로움이 덜한 노년을 보낼 테다. 그런데 노인은 외로울 뿐 아니라 신체도 취약하다. 머지않은 그날에 대비해서 무슨 호신술을 연마할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겠다.
525    문학성과 창조성이 없는 글은 수필도 아니며 죽은 글이다... 댓글:  조회:2098  추천:0  2017-06-09
 (3) 자기 고백성(自己告白性)  수필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한 자기 고백적 문학이다.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느끼고 겪고 생각한 것 등을 문학적으로 형상화시켜  표출해 놓은 것이 바로 수필인 것이다.  물론 소설이나 시, 희곡 등도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쓰여지는 수가 많다.  그만큼 문학 작품을 쓰는데 있어 체험은 아주 중요하고도 필요한 것이다.  문학 작품과 체럼은 서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나아가서는 체험은 모든 문학의 근원이 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연에 바탕을 두고 있듯이,  모든 문학은 체험에 그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체험에 바탕을 두지 않은 문학 작품이란 존재할 수도 없다.  인간이 자연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학 또한 체험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이나 시, 희곡 등의 문학 장르에서는 작가의 체험이 직접적으로  나타나기보다는 다시 여과되고 변형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수가 많다.  즉 이러한 문학 장르들에 있어서는 작가가 자신이 겪은 체험에다  작가 나름대로의 상상이나 허구적 구성들을 더하여 새로운 형태의 작품세계를  펼쳐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아가서는 자신이 겪은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상상이나 허구적 구성 등을 통해 표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그 작품 속에는 작가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겪은 수많은 체험들이 알게 모르게 개입되어 있기 마련이다.  특히 소설이나 희곡 등에 있어서는 작가의 의도나 필요성 등에 따라 다시 변형되고  이에 적합한 등장인물들이 설정된 후 그들의 행동이나 모습, 체험 등으로 나타난다.  즉 자가의 체험이 원형 그대로 작품 속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런 문학 장르의 특성이다.  이에 비해 수필에 있어서는 작가의 체험이나 모습,  또는 행동이나 사상등이 사실 그대로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다시 말해 작가의 체험이나 작가의 여러 가지 모습이  원형 그대로 작품 속에 그려져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수필이 작가의 체험을 직접적으로기록한 '자기 기록의 문학'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수필이 자신의 삶과 사상을 진솔하게 고백하는 '자기고백의 문학'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때문에 수필에서는 소설이나 희곡 등에서처럼 작가가 자신의 체험을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시키거나 확대, 축소하여 표출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또 소설이나 희곡 등에서처럼 등장인물들을 통해 자신의 체험이나 모습,  사상 등을 간접적으로 그려내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 수필문학의 특성이요, 수필 작법에 있어서의 기본 수칙이다.  만일 이를 무시하고 쓰여지는 수필이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수필이라고 할 수 없다.  또한 수필은 이처럼 자신의 체험이나 삶, 사상, 느낌 등을 가식없이 진솔하게  고백하는 문학이기 때문에 그것은 읽는 독자에게 신선한 감동을 선사한다.  그리고 이것이 수필문학이 지닌 특성이요, 수필문학의 가치를 더욱 높여 주는 바탕이다.  그래서 김진섭도 그의 [수필의 문학적 영역]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백하는 심경(心境)이 고결하면 할수록 그 수필의 문학적 생명이 오랜 것은 두말할 것이 없다.  수필에 있어서 중요한 특징이 되는 것은 숨김없이 자기를 말한다는 것과  인생사상(人生事象)에 대한 방관적 태도, 이 두 가지에 있을 따름이요 이것만을 기초로 삼고  붓을 고요히 듦에 제목 여하(如何)는 물을 필요가 없다...  장백일도 그의 [고뇌와 창조]라는 글을 통해 수필이 '자기 고백의 문학'이요,  '자기 체험의 진솔한 밝힘' 임을 강조하고 있다.  한 편의 수필은 작가의 마음을 진정으로 대변해 준다.  진솔한 인간체험에의 언어적 형상화가 그 자신을 진심으로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필은 곧 작가의 마음이라 함도 그 소이가 여기에 있게 된다.  이 언어적 수필 미학에서 작자의 창작 심리의 번득임을 읽게 될 때 우리는  그의 수필의 특질을 파악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 표현을 통해 작자가 무엇을 구하고 호소하는가를 듣게 된다...  ...흔히 수필을 퍼스널 노트로서의 체험의 자조문학(고백문학)임을 강조한다.  이 또한 생명에의 의의있는 가치평가, 즉 새로운 의미 부여로 집약되어진다.  그 점에서 수필은 무엇을 다루었건간에 어디까지나 인간의 영혼을  울려주는 생명의 구경적인 의미 반론과 표현에의 인간학임을 전제한다.  그러기에 수필은 인간 체험에의 언어적 의미화로 시의 가치있는 시사가 아닐 수 없다....  ...이제 나(인생)와 수필이 따로 있음이 아니다.  나 자체 속에 수필이 요구됨에 '수필 쓰는 일'이 곧 나의 비판적 고백으로서의  자기 실현을 꾀해가는 그 인간 작업임을 깨닫기에 이른다.  여기에 전심전력으로 수필을 사랑해야 하는 성실한 생활태도가 무엇보다도 절실하게 요청된다.  그 생활태도는 이미 밝힌 바 참(試)이다.  즉 참(試)으로 참(眞)을 찾는 삶이다...  이현복도 그의 [수필의 문학성]에서 수필문학이 작가 자신의 표출이며  자기 고백적 문학임에 동조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필문학에서는 작가가 직접으로 독자에게 보내는 전달이기 때문에  경험을 전달하는 소설과 다르며 상연과 행위를 강조하는 희곡과 다르며  기분과 감정을 표현하는 시와 다르다고 하였다.  함께 나눈 경험, 목격한 행위, 엿듣는 감정이 수필 문학의 특징이다.  따라서 수필문학에서의 중요한 요소는 주제다.  독자는 표현기교와 수법보다는 작가가 전달하려는 의도에 더 흥미를 갖는 것이다.  수필문학 작품은 작가의 심적과정이며 작가 자신의 표출이며 독백이다.  그러나 그 독백은 작가 한 사람의 독백이 아니요, 여러 사람들에 대한 독백이다.  독백이 독백으로 끝난 작품은 메아리 없는 산울림과 같아서 수필의 경지로 승화될 수 없다.  한 사람의 독백은 다른 사람의 그것과 혼연일체가 되어 대화의 독백이 되어야 한다...  C.카운터 쿨웰은 수필이 작가 자신의 솔직한 표출이며  자기 고백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은 한마디로 압축하여 나타내고 있다.  '수필에서의 작가는 작품 속에 함축되어 있다.'  이처럼 수필은 작가 자신의 솔직한 표출이며, 진지한 자기 고백이다.  나아가서는 자신의 삶을 경건히 되돌아 보면서 참회하고 각성하는 문학이다.  또한 이것이 수필문학의 특성이자 참된 가치이다.  그리고 수필문학이 지닌 위대한 힘이다.  독자를 감동시키는 '보이지 않는 힘'도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그래서 수필에서의 '자기 고백성'은 단순한 독백이 아니라 천주교에서의  '고백성사(고해성사)'와 같이 거룩함마저 있는 것이다.  (4) 광범성(廣範性)  수필문학의 범위는 참으로 넓다.  소설이나 시, 희곡 등 다른 문학장르들보다도 그 범위가 훨씬 더 광범한 것이 바로 수필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소설이나 시, 희곡 등은 각기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형식에 의해 쓰여진다.  또한 이러한 문학 장르들은 각기 정해져 있는 형식이나 제약을 무시하거나 거부할 수 없고  최소한도로라도 받아들여야 한다.  때문에 이러한 문학 장르들은 각기 그 형식에 얽매이거나 제약을 받아  그 장르적 범위가 아무래도 좁아질 수밖에 없다.  이에 비해 수필은 그 형식이나 제약 등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는 문학이다.  오히려 어떠한 형식이나 제약 등으로부터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쓰는 것이  수필이 지닌 커다란 특성이요, 매력일 만큼 자유로운 것이 수필문학이다.  따라서 수필문학의 범위는 그만큼 더 넓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수필은 문학의 다른 여러 장르들보다도 그 제재(題材)가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우리의 삶이나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이 수필의 제재가 될 수 있을 만큼 수필의 제재는 무궁무진하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보고, 듣고, 겪게 되는 모든 일들의 아주 사소하고  평범한 일까지도 얼마든지 수필의 제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또 그런 만큼 수필문학의 범위는 더욱더 넓어진다.  물론 소설이나 시, 희곡 등도 제재의 선택에 있어서 제한이나 구속은 없다.  이런 문학 장르들도 작가의 의도나 필요성 등에 따라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서,  또 아주 사소하고 평범한 일들 속에서도 제재를 선택해 내고 이를 작품화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설이나 시, 희곡 등은 각기 정해져 있는 형식이나 제약을 회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작품 구성상 정리나 압축, 재구성, 허구의 삽입 등이 많이 요구되기 때문에  자연히 제재의 선택 폭 또한 좁아지기 쉽다.  이런 점들을 볼 때 소설이나 시, 희곡 등을 도로가 있어야 달릴 수 있는 자동차나  레일이 있어야 달릴 수 있는 기차에 비유한다면 수필은 항공을  자유롭게 날 수 있는 새나 비행기에 비유할 수 있다.  물론 비행기도 여객기 같은 경우에는 정해진 항로에 따라 가는 것이므로,  여기서 말하는 비행기란 전투기와도 같이 이런 제한된 항로에 구애받지 않는 비행기를 뜻한다.  수필의 종류만 살펴보더라도 문학성을 갖춘 문예수필을 비롯하여 일기문, 기행문,  서간문(書簡文), 감상문, 칼럼, 전기, 자서전, 권두언 등 많은 글들이 수필의 범주에 속한다.  여기에다 옛날에 쓰여진 수필 형식의 각종 글들까지 포함시킨다면  수필의 종류나 범위는 더욱 다양하고도 광범해진다.  그래서 '국문학 산문(散文) 중에서 소설, 희곡 등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수필이다'  (우리 어문학회[국어학개론])라는 견해마저 있을 정도로 수필의 영역은 실로 넓다.  [세계문예강좌 문학개론]에서도 수필의 영역이 참으로 넓음을 역설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필을 산문문학의 대표적 양식이라고 볼 때 수필의 범위는  거의 종잡을 수 없는 정도로 광범위해진다.  그것도 학문이나 과학에 포함되지 않은 모든 일반적 산문, 가령 문학평론,  수상, 일기, 서한, 자서전, 전기, 격언, 각종 의견 등 기타의 창작적 요소를 지닌  일체의 산문 문학적 문장을 총칭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수필은 전문적 산문(학문이나 과학) 이외의 창작적인 요소를 지닌  모든 산문 문학적 문장을 의미한다....  김진섭 또한 그의 [수필의 문학적 영역]이란 글에서  수필의 외형적 광범성과 제재의 다양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 내요의 일부만 살펴보면 이렇다.  ...분망(奔忙)중에 쓰인 일편(一片)의 서간(書簡),  남몰래 적힌 일업(一業)의 일기라도 그 문장 속에 필자 그 사람의 생명이 약동하고 있기만 하면  그것이 훌륭한 수필문학 일 수 있는 것은 물론이요...  ...그 제재 역시 그것이 바드시 '문학적인 것'일 필요는 조금도 없는 것이니,  여기 가령 과학자가 과학을 말하든, 정치가가 정치를 말하든,  혹은 여행기(旅行記)가 만연(漫然)한 견문(見聞)을 말하든 여하간에 말하는 사람이  누구임과 말하는 대상이 무엇임을 막론하고 말하는 그 사람의 심경이 전인생(全人生) 위에  확충(擴充)되어 있기만 하면 그 말은 반드시 문학적 가치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수필은 무엇이든지 담을 수 있는 용기(容器)라고도 볼 수 있을지니  무엇을 그 속에 담든 그것은 오로지 필자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길 수밖에 없고  그래서 수필은 그 담는 내용과 그것을 요리하는 필자에 준해서  그 취향이 여러 가지로 변화할 것은 또한 물론이다...  ...모든 사람에게서, 그리고 모든 영역에서 볼 수 있는 이 수필의 종별(種別)이  변화무쌍할 것은 이의 당연한 일이다...  일부에서는 연설집이나 설교집,  또는 철학론, 종교론, 과학론 등도 수필의 범주 속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가리켜 '종교적 수필'이니 '철학적 수필'이니  '정치적 수필'이니 하고 부르기도 한다.  이것도 수필의 영역이 넓고 외형적으로나 제재상으로나 자유스럽고 폭넓은 문학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수필의 영역이 이처럼 넓고 외형적, 제재상으로 아주 자유스럽고 폭넓다고는 해도,  그 내용이나, 구성, 문체, 논리성 등이 부족하고 문학성, 작품성이 결여되어 있으면  결코 수필문학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것들은 단지 신변잡기나 기록문, 설명문, 비망록, 신상보고서, 또는 낙서 따위에 불과할 뿐이다.  그래서 수필은 그 영역이 아주 넓고 수필처럼 보이는 글들이나  수필이라고 스스로 주장하는 글들은 많지만 정말로 문학적, 예술적 가치를 지닌  '진짜 수필'이 적은 것도 사실이다.  (5) 창조성 (創造性)과 문학성 (文學性)  수필은 다른 문학 장르들과 마찬가지로 창작 예술이다.  따라서 수필은 각 작품마다 고유의 개성이나 독특한 특징이 있어야 하고,  문학으로서의 새로운 면이나 시도도 있어야 하며 문학적인 가치도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즉 수필은 순수한 창작 예술인 만큼 그에 걸맞는 창조성과 문학성,  또는 예술성을 충분히 지니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것들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수필이 아니라 잡문에 불과한 것이다.  수필이라는 이름으로 쓰여진 많은 글들이 진정한 수필로서 평가받지 못하고  고작 잡문 대접을 받는 것도 수필이 지녀야 할 창조성과 문학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수필에 있어서도 창조성과 문학성은 꼭 필요하고도 중요한 것이다.  물론 수필다운 수필, 멋지고 훌륭한 수필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좋은 문장이나 훌륭한 구성,  예리한 관찰력, 상념의 넓은 폭과 깊은 여과 과정, 유머와 해학 등 여러 가지가 요구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과 함께 창조성과 문학성도 꼭 필요한 것이며, 그 비중 또한 크다.  게다가 좋은 문장이나 훌륭한 구성 등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창조성과 문학성의 범주에 속한다.  특히 좋은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진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다양한 시각으로 사물을 예리하게 살펴보고, 깊은 고뇌도 있어야 하며,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창조적 사고(思考) 또한 충분히 갖추고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독창적이고도 문학성이 높은 수필 작품을 빚어낼 수 있다.  즉 고정관념의 파괴와 창조적 사고가 충분해야만 수필다운 수필을 쓸 수 있는 것이다.  또 문화 예술이란 원래 고정관념을 파괴하고, 새롭고 독특한 사고로서 새것을 창조해 내는 행위이다.  그래서 미국의 시인 에머슨도 일찍이 '새로운 문화예술은 옛것을 파괴한다'고 했다.  또 프랑스의 자가 발자크도 '문화예술의 사명은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새롭게 표현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사실 평범한 사고나 고정관념,  또는 기존의 것들을 그대로 답습하거나 모방하려는 자세로서는 좋은 수필을 쓸 수 없다.  또 이렇게 해서 쓰여진 수필(엄밀한 의미에서는 수필이라고 하기도 어렵지만)은  독자들의 공감이나 갈채도 얻지 못하는 법이다.  때문에 좋은 수필, 독자들의 공감이나 갈채를 받을 수 있는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작가 자신이 우선 창조적 사고력이 있어야 한다.  또 이를 위해서는 의식의 변화와 '의식의 담금질'이 계속되지 않으면 안된다.  수필을 쓰는 kr가 자신부터 변해야 창조성과 문학성이 뛰어난 수필 작품을 쓸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평범하고도 흔한, 그저 그렇고 그런 잡문밖에 쓸 수 없다.  또한 수필을 쓰는 작가의 창조적 사고와 의식의 변화는  곧 작품의 창조성과 문학성으로 이어져 나타난다.  그리고 수필 작품에 있어서의 창조성과 문학성도 자연히 훌륭하기 마련이다.  반면에 창조성이 결여되어 있으면 자연히 그 작품의 문학성도 떨어진다.  이 점에 대해 김구봉은 그의 [내력과 성격으로 본 수필의 문학성과 창조성]에서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문학성이란 소재의 정시화요, 주제의 효율적인 이미지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조성이란, 이 문학성에 의해 그것이 문장으로 형상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필의 생명은 문장이라할 만큼 창작 기능과 문장과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수필의 문학성은 곧 창조성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윤오영(尹五榮)은 일찍이 수필의 창조성과 문학성을 곶감에 비유하여 설명한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수필은 곶감에 비유될 것이다.  감나무와 고욤나무는 똑같아 보이지만은 감나무는 감이 열리고, 고욤나무에는 고욤이 열린다.  고염과 감은 별개다.  소설이나 시는 잘못되어도 그 형태로 보아 소설이요 시지, 다른 형태의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잡문은 감나무롸 고욤나무가 서로 다르듯,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러면 곶감이란 어떤 것인가  감나무에는 아름다운 열매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 푸른 열매가, 그러나 그 푸른 열매는 풋감이다.  늦은 가을의 풍상(風霜)을 겪어 모든 나무에 낙엽이 질 때  푸른 하늘 찬서리 바람에 비로소 붉게 익은 감을 본다.  감은 아름답다.  이것이 수필이다.  수필의 찬란하고 화려함을 말한다.  그러나 감은 곧 곶감이 아니다.  껍질을 벗겨야 한다.  껍질을 벗겨 찬서리 내리는 데서 말려야 한다.  그리고 여러 번 손질해야 한다.  그러면 당분이 겉으로 나타나 시설( 雪)이 거기에 앉는다.  만일 그 감이 덜 익었거나 상했으면 시설은 생기지 않는다.  시설이 잘 앉은 다음, 그것을 여러 가지 형태로 접는다.  수필은 이렇게 해서 만든 곶감이다...  장백일도 그의 [고뇌와 창조]라는 글에서 수필에서의 창조성과 문학성은 아주 중요한 것이며  이것은 작가의 깊은 고뇌와 창조적 고통에서 비롯된다고 역설하고 있다.  즉, ...그러기에 수필은 구상화(具象化)에의 산문이기도 하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형상화란 단순한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창조(창작)를 뜻한다.  즉 정서와 상상과 사상을 하나로 융합시키는 창작성을 말한다.  수필은 이데올로기를 위한 선전도구도,  무엇을 위한 계몽 수단도 아닌 오직 인생의 본질적인 나타냄으로서의 창조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수필의 어려움이 있다고 여긴다.  수필이 정서와 상상과 사상 속에 용해되는 문학성을 떠나는 순간,  그것은 한낱 무용의 공염불이나 불모의 사막으로 화하는  신변잡기가 아니면 신변잡사로 추락하고 만다.  거기엔 수필적 진통과 고뇌가 없어서이다.  그 점에서 작자의 수필작업에의 진통과 고뇌는 수필 창작에의 어머니이다.  위대한 생명이 위대한 진통에서 태어나듯 좋은 수필,  훌륭한 수필은 소재를 작자의 정서와 상상 속에서 여과시키는  창작에의 진실한 진통과 고뇌로부터 피어난 꽃이다.  수필의 감동은 그로부터의 결과이다...  ...작자의 개성이 갖는 창작은  그 개인으로부터 열리는 존재에 대한 새로운 개명(開明)이요 해명이 아닌가.  그 창작성이 언어 예술화로 꾀해질 때 그것이 바로 수필의 문학성으로 이어진다.  그러기에 진통과 고뇌의 창작성은 수필의 문학성도 더욱 진지하게 고취시킨다.  그래서 진정한 수필은 고뇌로부터 탄생되어진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들을 통해 볼 때 수필가나 수필을 쓰려는 사람들은  문학적 창조를 위한 고뇌와 고통을 더욱 깊이 겪지 않으면 안된다.  또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기꺼이 받아들일 때  창조적 사고의 폭이 넓어지고, 또 깊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작품의 창조성과 문학성을 높이고 정말 좋은 수필,  수필다운 수필로 태어나게 한다.  창조성과 문학성이 없는 글은 수필도 아니며 죽은 글이다.    -------------------------------------------------------------------------     그래도 살아야 할 이유 ―신현림(1961∼ ) 슬퍼하지 마세요 세상은 슬퍼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니까 자살한 장국영을 기억하고 싶어 영화 ‘아비정전’을 돌려 보니 다들 마네킹처럼 쓸쓸해 보이네요 다들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어 해요 외롭지 않기 위해 외로워하고 아프지 않기 위해 아픈 사람들 따뜻한 밥 한 끼 먹지 못하고 전쟁으로 사스로 죽어가더니 우수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자살자들 살기엔 너무 지치고, 휴식이 그리웠을 거예요 되는 일 없으면 고래들도 자살하는데 이해해 볼게요 가끔 저도 죽고 싶으니까요 그러나 죽지는 못해요 엄마는 아파서도 죽어서도 안 되죠 이 세상에 무얼 찾으러 왔는지도 아직 모르잖아요 마음을 주려 하면 사랑이 떠나듯 삶을 다시 시작하려 하면 절벽이 달려옵니다 시를 쓰려는데 두 살배기 딸이 함께 있자며 제 다릴 붙잡고 사이렌처럼 울어댑니다 당신도 매일 내리는 비를 맞으며 헤매는군요 저도, 홀로 어둠 속에 있습니다  어린 딸을 키우며 제 힘으로 생활을 꾸려나가는 여성 시인의 삶과 꿈이 다감하게 담긴 시집 ‘해질녘에 아픈 사람’에서 옮겼다. 항상 배란기인 듯 제 몫의 삶을 뜨겁게 끌어안고 세상을 씩씩하게 헤쳐 나가는 시인의 그림자가 시편마다 어른거려서 감탄과 애틋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시집이다. 신현림의 발랄한 생명력은 그가 가슴에 태양처럼 품고 있는 시와 삶에 대한 사랑에 뿌리를 대고 있을 테다. 이 사랑의 투사(鬪士)도 ‘홀로 어둠 속에 있’을 때가 있다. 아니, 그토록 치열하게 삶을 가동시키니 밋밋하게 사는 사람들보다 자주, 혼자 있는 시간이면 나가떨어진 채 밀려오는 슬픔과 외로움과 아픔으로 캄캄해질지 모른다.     ‘슬퍼하지 마세요’, 화자는 속삭인다. 둘러보면 ‘세상은 슬퍼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단다. ‘다들 마네킹처럼 쓸쓸해 보이’고, ‘다들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어’ 한단다. 우리는 왜 외로워하고 슬퍼할까. 인생은 외롭고 슬픈 것인데 외롭지 않은 삶에 대한 꿈, 슬프지 않은 삶에 대한 꿈, 그 허망한 꿈을 버리지 못해서가 아닐까. ‘꿈이 빗나가는 세상에서/꿈속 세상이 있기에 나는 살아지는데/당신은 꿈마저 버려서 살아진다 합니다’(시 ‘당신도 꿈에서 살지 않나요?’)라고 노래한, 꿈이 삶의 동력원인 시인이 ‘당신’에게 동의하는, ‘살기엔 너무 지치고, 휴식이 그리운 시간’…. 나만 힘든 게 아니라고, 당신 혼자만 힘든 게 아니라고, 세상의 수많은 외로움과 슬픔으로 제 슬픔을 묽히는 슬기를 화자는 전한다.
524    인공지능시대 미래를 준비하는 선생님들의 자세는?... 댓글:  조회:2902  추천:0  2017-06-02
  인공지능시대, 바람직한 인재상과 교사의 역할 ( 배상훈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      2016년 우리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사건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인간 챔피언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 알파고가 펼친 바둑 대결일 것이다. 인간 이세돌이 졌고, 인공지능 알파고의 능력에 모두가 놀랐다. 알파고는 전 세계로부터 바둑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수집해서 분석하고, 당면한 상황에 부합하는 최적의 대안을 계산해 냈다. 빅데이터 분석이 무엇이고, 어떠한 힘을 발휘하는지 보여주었다.     전문가들은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는 인공지능 기술이 앞으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이라고 말한다. 다양한 기술과 서비스를 융합하고 여기에 인공지능이 가미되면서 새로운 가치와 비즈니스 모델이 창출되고, 인간의 삶과 일의 방식도 파격적으로 변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인공지능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엇갈리지만, 인공지능이 우리의 삶과 경제 활동에 깊숙이 들어올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러한 환경의 변화에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결국 교육의 문제로 귀결된다.     미래 세대를 위한 사회적 합의   2018년부터 도입될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도 이러한 대비책의 하나이다. 미래 세대가 인문, 사회, 과학기술과 관련된 기초 소양을 균형있게 갖추도록 한다는 것이 취지이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코딩교육과 컴퓨팅 사고(computational thinking)도 마찬가지다. 지난 5월 대구교육청은 ‘인공지능시대 맞춤형 교육방향 탐색’을 주제로 포럼을 개최했다. 인공지능시대를 맞아 교육과정, 교수·학습방법, 교육평가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전문가들이 모여 열띤 토론을 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미래 세대들이 어떠한 소양과 지식을 갖추도록 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이를 위한 체계적인 준비이다. 이에 따라 교육과정과 내용이 구체화되고, 새로운 교수·학습 방법도 개발되기 때문이다. 교육성과에 대한 진단과 평가도 인재상에 비추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특히 현장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이 어떠한 교육적 비전과 인재상을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교육활동을 계획하고 수행하는 사람이 바로 교사이기 때문이다.     비판적 사고, 창의적 발상을 길러야   그렇다면 어떠한 인재를 길러야 하고, 교사들의 역할은 무엇일까. 교사의 양성 과정에서는 무엇을 고려해야 할까. 알파고와 대결했던 이세돌로부터 교훈을 얻게 된다.   첫째, 학생들이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와 창의적인 발상(creative thinking)을 할 수 있도록 키워야 한다. 반복적이고 정형화된 계산과 일처리는 이제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잘 할 수 있다. 이세돌이 알파고에게 한 판이라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창의적인 수(手)를 생각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어진 문제를 빨리 푸는 연습에 매달리는 우리의 교육 현실을 생각하면 이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제도만 바꾼다고 될 일이 아니다. 교육의 전 과정이 바뀌어야 하고, 실행이 뒤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해법은 교육과정을 해석하고 교육내용을 준비하며 교수·학습 방법을 결정하고 교육성과를 평가하는 교사들에게 달려있다. 학생들이 스스로 문제를 찾고 창의로운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힘을 키울 수 있는 교육적 경험을 제공하고 이를 위한 교육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교사의 몫이기 때문이다.      둘째, 미래 세대에게 적극적이고 담대한 도전 정신이 필요하다.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생각도 실천으로 옮겨야 성과가 창출된다. 특히 세계화 시대를 맞아 글로벌 차원에서의 개척 정신과 기업가정신을 갖추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이세돌이 알파고와의 세 번째 대국에서 과감하게 바둑판의 중앙으로 치고 들어가 승부를 벌인 것은 개척 정신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교사들은 학생들이 교육활동은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과에 책임지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물론 이는 교사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학부모와 사회 구성원 모두가 협력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미래를 준비하는 선생님의 자세   셋째,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성찰할 줄 아는 인간으로 길러야 한다. 성찰과 반성은 딥 러닝(deep learning)의 토대이고 혁신의 원동력이다. 하버드대학의 가드너 교수는 다중(多重)지능이론을 발표하면서 인간에게는 7가지 다른 능력이 있다고 말했다. 그 중 언어와 수리 능력은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잘 할 수 있는 영역이다. 그러나 인간과 공동체에 대한 사유와 공감, 자신의 내면을 깊이 성찰하는 능력은 인간만의 전유물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서는 교사들부터 바뀔 필요가 있다. 교과 지식을 전수하는데 초점을 둔 교육만으로는 위에서 말한 인재를 길러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예비 교사들이 자기주도 학습을 경험하고, 교과 지식 외 창의적 문제 해결력을 기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수업 과정에 플립드 러닝(flipped learning)을 도입하고, 문제 탐색과 기존 지식의 응용을 통해 문제 해결력을 키우는 프로젝트 기반 학습을 가미하는 것도 권장할만하다. 교사들도 변화의 흐름에 동참해야 한다. 교사들이 폭넓은 글로벌 경험을 하고 글로벌 시민의식을 갖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교육은 교사의 경험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국내에만 갇힌 시각과 관점을 가진 교사로는 글로벌 시대에서 활약할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인재를 길러내기 어렵다.      또한 학교 교육에서 교사는 단순히 사람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공감, 소통, 격려, 상담 등 정서적인 측면에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때문에 인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은 학생들이 교과서를 넘어 진정한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노력했고 학생들은 하나씩 알을 깨고 나왔다. 우리에게도 인생의 멘토가 되는 그런 선생님이 필요하다.     학생 개개인의 변화와 성장에 있어 교사만큼 영향력을 가진 사람은 없다. 교사들부터 창의적 문제 해결력, 자기 주도성, 글로벌 역량을 가져야 하고, 인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하는 대한민국의 미래는 우리 선생님들에게 달려있다.   /출처: 교육부 웹진 [행복교육]3월호  
523    인간 글쓰기 지위 일락천장 추락되다... 댓글:  조회:2752  추천:0  2017-06-02
    인공지능 시대 글쓰기 운명은 어떻게 될까?                                                                                     강원국       머지않아 인공지능(AI)이 글 쓰는 시대가 올 것이다.   그날이 오면 인류의 글쓰기는 종언을 고할 것인가.   인공지능은 지치지 않는다.   밤낮없이 쓸 수 있다.   모든 걸 안다.   좌절하지도 않는다.   평가에 무감각하다.   모든 표현이 가능하다.   설득은 기본이고 감동까지 이끌어낸다.   인간의 마음이 어느 코드에서 감응하는지 완벽하게 읽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빅데이터가 가져온 변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공지능은 개와 고양이도 구분하지 못했다.   그런데 급격한 발전이 이뤄졌다.   구글과 페이스북 등이 수집한 어머 어마한 데이터 양 덕분이다.   페이스북에만 하루 3억 개 이상의 글이 올라온다고 한다.   트위터에도 하루 4억 건 넘게 포스팅 된다.   페이스북의 ‘좋아요’ 패턴만 분석해도 어떤 글이 인정받는지,   사람들은 어떤 글을 좋아하는지 지역별, 성별, 연령별, 관계별로   전수조사가 가능해졌다.   구글의 검색 기록을 분석하면 사람들의 관심사는   물론, 생각의 분석과 함께 향후 행동까지 예측할 수 있게 됐다.   이른바 빅데이터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앞으로 뇌를 연구하는 사람, 컴퓨터 전문가, 글 쓰는 사람들이   모여 빅데이터를 놓고 머리를 맞대면 어떤 글은 어떻게   써야 하는지 매뉴얼로 만드는 것은 시간문제다.   글 쓰는 원리를 밝혀내고 글쓰기 모형을 창안하여,   모든 글에 적용하고, 누구나 활용 가능한 글쓰기 방법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싱귤래리티와 글쓰기   ‘싱귤래리티’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알파고 이후에 부쩍 많이 회자되는 개념이다.   우리말로 ‘기술적 특이점’(Technological singularity)이라고 번역된다.   인공지능이 인간 지능을 넘어서는 역사적 분기점을 의미한다.   이 용어는 컴퓨터 구조를 처음 생각해낸 천재 수학자 폰 노이만이    1953년 처음 언급한 이후, 2005년에 미래학자인 레이 커즈와일이   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레이 커즈와일은 특이점의 도래 시점을 2045년이라고 예언했다.   그때가 되면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글을 잘 쓰는 시대가 열릴 것이다.   불과 30년도 채 남지 않은 미래다.       인간 글쓰기 지위 추락   그 때가 되면 인간의 글쓰기는 상당 부분 경쟁력을 잃게 된다.   글쓰기 직업 가운데 가장 먼저 위협 받는 것은 기자다.   기사는 육하원칙에 따라 기계적으로 쓰면 된다.   이미 몇몇 해외 언론에서는 스포츠 기사 같이 틀에 박힌 내용은   컴퓨터에게 맡기고 있다고 한다. 기자 다음은 변호사다.   변론문은 정보를 수집해 단순논리를 펴면 된다.   이것은 인공지능이 가장 잘할 수 있다. 교수와 평론가의 글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논문이나 비평은 시각과 관점, 해석이 들어가야 하니 좀 늦게까지 살아남겠지만 말이다. 회사원, 공무원은 비교적 안심해도 좋을 듯싶다.   조직에서 쓰는 글은 배경과 맥락을 알아야 쓸 수 있는데, 이건 인공지능에게도 어렵다. 소설가의 상상력과 스토리텔링 능력은 인공지능이 넘보기 더 어려운 영역이다.   끝으로, 시인이야말로 인공지능 시대에도 불멸이다.   시인의 예민한 감성과 고도의 비유는 인공지능이 흉내 내기 힘들 것이다.       기계와 인간을 구분하는 보루   사람에게는 컴퓨터에 없는 능력이 있다.   전체를 일별하는 능력이다.   한눈에 파악하는 능력이다.   예를 들면, “당신 아내가 세계에서 가장 예쁩니까?”라고 물으면,   나는 즉시 ‘아니오’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컴퓨터는 전 세계 여성 얼굴을 모두 입력해서 자신이   정한 미적 기준에 따라 순서를 세워본 후에야 가장 예쁘지 않다는 결론을 낼 수 있다.       인간에게는 척 보면 아는 능력이 있다.   심리학에서는 ‘적응무의식’이라고 하는 이 능력이 컴퓨터는 없다.   사람에게 어려운 문제는 컴퓨터에는 쉽고, 사람에게 쉬운 문제는   컴퓨터에는 어렵다는 ‘모라벡의 역설(Moravec’s Paradox)’이다.   인간이 직관을 타고났다는 것은 희망이다.   아내가 전 세계에서 가장 미인이라고 생각하는 바보만 아니라면,   누구나 직관의 힘으로 로봇보다 글을 잘 쓸 수 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인간에게 가장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은 직관이다.’   라고 말했는지 모른다.       로봇이 인간과 같은 감정을 갖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심쿵’하는 날이 쉽게 올 것 같지도 않다.   육체적·지적 능력에 비해 감성은 굳이 인공지능을 통해 구현할 필요가 적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성은 인간만의 경쟁력으로 오래 유지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는 역설적으로, 느낌이 없는 인간은 기계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빅데이터는 인간도 공유할 수 있다.   정보를 분석하고 편집하는 역량만 있다면 빅데이터를 활용한 글쓰기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기계도 하는 일을 인간이 못할 리 만무하다.       결과적으로,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시대 글쓰기는 이성과 논리보다는   직관과 감성이 풍부한 사람을 필요로 한다.   정보의 분석과 취사선택 능력도 중요해진다.       인공지능 시대 인류는 뭘 하지?   글쓰기 노동에서 상당 부분 해방된 인간은 무엇을 할까.   노는 시간을 많이 갖게 될 것이다.   뭐 하며 놀지?   원시시대를 떠올리면 답이 있다.   원시인들은 동굴에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글자가 없어 그림을 그렸다.       다시 그런 날이 오고 있다.   글을 쓰며 놀아야 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인공지능 시대, 오히려 글 쓸 일이 더 많아질 지도 모를 일이다. *  
522    인공지능 번역은 어처구니없는 번역... 댓글:  조회:2827  추천:0  2017-06-02
        인공지능 번역은 가능한가     기계 번역 또는 인공지능(AI) 번역과 관련해 십여 전 년 일본에서 있었던 일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영어 속담 ‘Out of sight, out of mind’를 컴퓨터를 이용해 기계 번역을 시켰더니 뜻밖에도 ‘Confined to insane asylum’으로 해놓았다. ‘out of sight’라는 표현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고, ‘out of mind’라는 표현이 정신 나갔다, 즉 미쳤다는 뜻이니 ‘정신병원에 감금시켜 놓았다’고 번역한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결과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훌쩍 지났고, 그 사이 인공지능 기술은 그야말로 눈이 부실 만큼 많이 발전했다. 단적인 실례가 지난해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바둑 대결이다. 구글 자회사인 인공지능회사 구글 딥마인드에서 개발한 컴퓨터 바둑 인공지능 프로그램 알파고는 이세돌 기사를 4승 1패로 이겼다. 이세돌 기사는 한 개인 기사가 패배한 것일 뿐 인간이 기계에게 패배한 것은 아니라고 애써 변명했다. 그런데도 인공지능이 지금껏 인간의 고유 기능이라고 간주해 온 논리적 사고와 추론에 도전장을 던진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번역 분야에서는 어떨까. 지난달 국제통번역협회와 세종대⋅세종사이버대는 AI 번역기와 인간 번역사들 사이에 번역 대결을 주최했다. AI 대표로는 구글 번역기, 네이버 파파고와 세계 제1위의 기계번역 기술업체인 시스트란의 서비스가 나섰다. 반면 인간 측에서는 5년 이상 경력의 전문 번역사 4명이 참여했다. 수백 단어 분량의 비문학(기사⋅수필)과 문학(소설) 구절을 영어⋅한국어 2개 언어로 옮기는 대결이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이뤄진 인공지능과 인간 사이의 첫 번역 대결은 인간의 ‘싱거운 승리’로 끝났다. 인간 번역사가 평균 합계 49점을 받아 19.9점을 받은 인공지능을 압도적으로 이겼다. 물론 평가가 불공정했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AI의 번역 기술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 다시 한 번 확인됐다.   가령 ‘세월은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간다’는 ‘Time flies like an arrow’라는 영어 속담을 예로 들어보자. AI 번역기는 모르긴 몰라도 아마 ‘시간 파리는 화살을 좋아한다’로 옮길지 모른다. ‘시간 파리’가 무슨 의미냐고 따질지 모르지만 AI 번역기는 파리의 일종으로 파악하고 그냥 넘어갈 것이다. 더구나 ‘Flying planes can be dangerous’라는 영어 문장에 이르러서는 문제가 훨씬 더 복잡해진다. 변형문법을 창시한 노엄 촘스키가 언어의 표층구조와 심층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예로 든 문장이다. ‘flying’을 ‘planes’를 수식하는 현재분사로 해석할 것인지, 명사절을 이끄는 동명사로 해석할 것인지에 따라 그 의미는 크게 차이가 난다. 전자로 해석한다면 ‘하늘에 날아가는 비행기는 위험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후자로 해석한다면 ‘비행기를 이륙시키는 일은 위험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숙달된 전문 번역가가 아니라면 이 두 가지 중 어느 쪽으로 옮겨야 할지 적잖이 헷갈린다. 전후 맥락을 잘 살펴서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자칫 오역할 위험이 아주 크다.   AI 번역기는 알파고 같은 로봇과는 사뭇 다르다. 알파고가 인간처럼 사고력과 추리력을 갖출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인간처럼 사물을 직관적으로 처리하고 감성을 지닐 수는 없다. 번역에는 무엇보다 직관과 감성이 필요하다. ‘어 다르고 아 다르다’는 속담이 있지만 번역에서만큼 이 말이 피부에 와 닿는 경우가 없다. AI 번역기는 신문이나 잡지 기사를 비롯해 과학 또는 기술과 관련한 논문, 광고 문안이나 상품 이용 안내서 같은 기술 번역 분야는 몰라도 적어도 문학 번역에서만큼은 아직 인간 번역사를 따라잡을 수 없다.   그렇다고 인간이 자만할 수만은 없다. AI 번역기가 언제 직관력과 감성 기능을 갖추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아침에 눈을 뜨면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에 먼저 손이 가는 추세가 계속된다면 인간 번역사가 AI 번역기에 두 손을 들 날이 예상 밖으로 빨리 올지도 모른다.   / 출처: 서울신문 / 김욱동(문학평론가⋅UNIST 초빙교수) / 2017-03-05 
521    세상은 교과서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댓글:  조회:2127  추천:0  2017-06-02
           인공지능의 진화   알파고 2.0 바둑 알고리즘 강력 / 361개 착점… 모든 계산 어려워 / 무엇을 버릴 건지 정확한 결정 / ‘정보손실 최소화’ AI 기술 핵심   돌아온 알파고 2.0이 바둑 세계 최고수라는 중국의 커제를 완파했다. 게임의 재미를 더하는 새로운 실험으로 인간과 알파고가 팀을 이루는 복식게임도 등장했고, 5명의 프로기사가 팀을 이루어 알파고와 대국하는 방식도 더해졌다. 여전히 적응하기 힘들지만 1년 전 이세돌을 연파할 때의 충격만큼은 아니다. 인공지능(AI)은 공상영화에나 나오는 것으로 알던 장삼이사도 웬만큼 익숙해졌다. 지난해 다보스포럼에서 등장한 4차 산업혁명이란 표현이 아직 서구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데도 우리나라에서 유달리 수용이 빠른 이유가 우리 국민이 알파고의 충격을 목전에서 겪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새 알파고는 무엇이 달라진 걸까. 기존의 기보를 안 보고 알파고끼리 대국을 반복하는 학습만 했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구글 딥마인드의 정정 발표가 있었다. 무작위성 기법 사용을 중단했다는 소문도 있는데 신빙성이 높아 보이진 않는다. 새 알파고 알고리즘을 실행한 하드웨어는 가벼워졌다. 지난해에는 1920개의 중앙처리장치(CPU)를 가진 기계와 뇌 하나의 인간이 대결하는 것은 불공정하다는 기사가 있었다. 이번에는 새로운 텐서처리장치(TPU) 2개를 사용한 하드웨어 때문에 구글의 TPU가 커제를 눌렀다는 기사가 많았다. 점입가경이다. 강력한 슈퍼컴이 없어서 그동안 이세돌과 커제를 못 이겼던 것이라고 믿는 걸까. 큰 방을 가득 채운 장치는 눈에 딱 들어오지만 그 위에서 돌고 있는 알고리즘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어쩌랴. 최신 TPU 두 개의 연산능력은 세계 500위권 슈퍼컴의 반도 안 된다. 기계학습은 소수점 아래로 길게 가는 계산이 필요 없으므로 이것을 줄여서 계산 효율성을 높인 게 TPU다. 기상예보 같은 수치계산은 잘 못한다.   지난해에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길 때 많은 사람은 1997년 IBM의 슈퍼컴퓨터인 딥블루가 체스 챔피언 게리 카스파로프를 이기던 장면을 떠올렸다. 딥블루는 체스게임에 특화된 슈퍼컴 하드웨어에 체스두기 알고리즘을 탑재한 일체형이고, 알파고는 범용 컴퓨터에 돌리는 바둑두기 알고리즘이다. 이 두 사건은 과연 닮은꼴 사건일까. 그렇지 않다. 체스 상대방이 한 수를 두면 내가 둘 수 있는 수가 몇 개로 정해진다. 그다음에 상대방도 둘 수 있는 수가 제한되고. 이런 방식으로 가능한 게임시나리오를 다 계산해 보면 평균 2억개쯤 된다. 모든 경우를 다 두어 보면 내가 둘 수 있는 각 점의 승리 확률을 계산할 수 있다. 딥블루는 전수계산으로 이걸 해냈다. 계산자원의 승리, 즉 하드웨어의 승리다. IBM은 체스게임 전용 슈퍼컴을 개발하는 데 큰돈을 퍼부었지만 광고효과로 슈퍼컴을 많이 판매했으니 아마도 남는 장사였던 것 같다.   알파고는 다르다. 총 361개의 착점이 있는 바둑판에서 가능한 게임시나리오가 우주에 있는 원자의 수보다 많다. 무한정 하드웨어에 투자해도 이걸 다 두어볼 수 없으니, 착점별 승리확률을 계산해낼 방법이 없다. 알파고는 이길 가능성이 작거나 고려할 필요 없는 엄청나게 많은 시나리오를 제거하고 일부만 골랐다. 30초 동안 평균 10만 번 정도만 두어 보고 각 착점의 승리 확률을 계산했다. 어떤 경우를 배제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딥러닝(심층학습)이나 무작위 검색 등을 조합한 알고리즘을 만들었다.   그러니 알파고 사건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알고리즘의 승리다. ‘무엇을 버릴 것인가’를 잘 결정한 것이다. 그래서 AI기술의 핵심은 일부 언론이 그려낸 알파고처럼 1000여개의 두뇌를 가진 ‘계산자원’이 아니라 혁신적인 수학 알고리즘으로 ‘계산자원의 필요를 획기적으로 줄였다’라는 것이다. ‘큰 데이터를 적은 데이터’로 바꾼 것이다. 이러면 계산 안 되던 문제가 계산이 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 거대 문제를 작은 규모 문제로 바꾸면서도 정보손실을 최소화하는 수학적 알고리즘이 미래인공지능기술의 핵심인 셈이다.   / 출처; 세계일보 / 박형주(국가수리과학연구소장⋅아주대 석좌교수) / 2017-05-28                 인공지능 AI도 결국 인간이 만든 것   ‘인간-정보 상호작용(Human-Information Interaction)’이라는 신생 연구 분야가 있다. 인간이 정보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연구하는 분야를 말한다. 알파고라는 인공지능(AI) 소프트웨어가 세계 최고의 기사(棋士)들을 연이어 격파했다는 정보에 우리는 두 가지로 반응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을지 모른다는 위기감과 어쩌면 인간이 정복하지 못한 문제에 대한 아주 새로운 해결책을 던져줄지 모른다는 기대감.   인간이 AI에 대해 느끼는 양가적 감정은 인류가 처음 청동검(靑銅劍)을 만들어 짐승을 사냥해 그 고기를 다듬던 날, 이 새로운 도구를 누군가가 자신을 상해하거나 죽이는 데 사용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갖게 된 순간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그러나 인간을 격파하는 알파고도 결국 인간이 만든 ‘인공’ 지능이라는 사실을 잊지는 말자. 인공지능 기술은 지난 수십 년간 눈부시게 발전해왔다. 예를 들어 구글은 이미 ‘AI를 만드는 AI’를 활용해, 이미지와 음성인식 기술을 진보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 똑똑한 AI 역시 결국 인간이 디자인한 피조물일 뿐인데도, 그 위세에 눌려 내 일자리 뺏길까만 고민한다면 우리는 AI를 제대로 다루는 데 실패할 게 분명하다.   이번에 중국에서 있었던 바둑 대결은 커제와 알파고가 격돌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AI가 팀을 이뤄 또 다른 인간⋅AI 팀과 대결하고, 프로 기사들이 팀을 이뤄 AI와 대결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것은 예전의 바둑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게임의 형태이며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고 있다. AI가 사람을 이겼다고 해서 꼭 그것이 바둑의 쇠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바둑이 우리를 더 즐겁게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AI의 사회적 파장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일자리를 뺏는 악마나 만능 문제해결사로 생각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AI의 특성을 살려 농업, 의료, 미디어, 금융, 교통을 아예 새롭게 혁신할 방안을 궁리하는 게 훨씬 더 적극적인 태도다. 일론 머스크가 선박, 기차, 자동차, 항공기로 이어져온 교통수단을 넘어서 아진공 튜브를 이용한 ‘하이퍼 루프’를 통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30분 만에 갈 수 있게 하겠다는 계획을 실행 중이다. 그의 계획은 더 빠른 바퀴와 엔진을 만들려는 노력을 아예 새로운 방식으로 대체해버리는 초월적 발상의 결과물이다.   이러한 발상을 AI 기술을 의료에 활용하는 데 적용해 보자. 환자의 유전자 특성과 처방 가능한 약의 목록을 학습한 AI가 의사를 도와 특정한 유전자를 가진 환자에게 처방해선 안 될 약들을 미리 선별하고 최적의 투약 계획을 제안한다면 약의 부작용도 줄이고 치료 효과도 극대화하게 될 것이다. 이미 국내 의료진이 시도하고 있는 방향이다.   AI시대 정부의 역할 역시 새 정부의 출범과 함께 새롭게 정의되어야 한다. 정부는 기획자에서 조력자로, 추진자에서 촉진자로 역할을 명확히 해야 한다. 가수 박진영은 “왜 케이팝스타의 우승자들은 한결같이 한국의 교육시스템 바깥의 사람들이냐”고 지적했다. AI는 그러한 한계를 새로운 교육시스템 등 다양한 방식으로 깨보려는 실험을 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정부가 직접 만들겠다는 공공부문 일자리 역시 AI를 이용한 혁신의 영역에서 많이 나와야 한다.   인간과 AI가 대체관계가 아닌 협력과 공조의 관계로 나아가는 방향에 새로운 일자리도, 경제도 있다.   / 출처; 동아일보 / 김장현(성균관대 인터랙션사이언스학과 교수) / 2017-05-29          세상은 교과서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국가든 기업이든 흥할 때가 가장 위험 자만해 현실에 안주하면 쇠락의 길뿐 최근의 조직 비대화가 그래서 더 무섭다   ‘파킨슨 법칙’은 영국의 역사⋅경제⋅정치학자인 시릴 파킨슨이 제시한 사회생태학 법칙이다. 파킨슨은 경제 전문지 이코노미스트에 “공무원 수는 업무량에 관계없이 증가한다”는 파킨슨 법칙을 발표해 유명해졌다. 공무원의 조직과 운영이 비합리적인 관행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는 경험적 사실을 분석한 것이다. 1957년 책으로 출간돼 공산권에서도, 외환위기로 기업이 위기에 내몰리던 한국에서도 읽혔다. 인사나 경영 혁신을 담당하는 관리자들 사이에서는 필독서로 권해지는 책이다.   그 후 그는 “지출은 수입만큼 증가한다”는 두 번째 파킨슨 법칙을 발표했다. 이 법칙은 “세금을 올릴 수 있는 한 공무원 숫자는 무한정 늘어날 것”이라는 내용이다. 파킨슨은 이들 법칙 외에도 사회 생태계에 관한 10여 개 법칙을 주창했다. 특히 역사, 경제, 사회생태학 분야에 60여 권의 저서를 남긴 그의 관료제에 대한 예리한 분석은 2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 해군의 사무원으로 근무한 경험이 바탕이 됐다.   영국 해군 및 식민지성에 대한 그의 관찰은 지금도 회자될 정도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14년 영국 해군의 주력함은 62척이었으나, 전쟁이 끝난 14년 뒤 군함 수는 3분의 1로 줄었고 해군 수도 10만 명에서 30%가량 줄었다. 그런데도 해군성 공무원 수는 3600명으로 80%가량 늘어났다. 2차 세계대전 직전인 1935년 8100명이던 영국 해군성 공무원 수는 전쟁이 끝난 약 20년 후인 1954년에는 3만3800명으로 4.2배 늘어났다.   순수 행정기관인 식민지성에 대한 파킨슨의 조사는 더 눈길을 끈다. 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께에는 전성기에 비해 식민지를 많이 잃었고 그 후 잇따른 독립으로 식민지 수는 계속 감소했다. 그러나 식민지성 공무원 수는 1935년 370명, 1943년 820명, 1947년 1140명, 1954년 1660명으로 약 20년 동안 4.5배 증가했다.   파킨슨은 이런 현상의 원인으로 공무원들의 승진하려는 심리적 욕구를 들었다. 승진하기 위해서는 부하 직원 수를 늘리고 조직을 확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조직원이 늘면 이에 따른 일들이 늘어나고 조직 규모도 점점 더 커져 관리자 자리는 계속 증가할 수밖에 없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로마가 최전성기였던 180년부터 쇠망의 길로 들어섰다고 말한 바 있다. 세계 최초로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1800년대 초반부터 100년에 걸쳐 ‘팍스 브리태니커(Pax Britannica)’를 구가하던 대영제국조차 최전성기에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쇠퇴해 가는 현상을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가로 꼽히는 로마와 영국도 흥망성쇠라는 역사의 흐름을 비켜 가진 못했다.   여기서 우리는 국가든 기업이든 흥망성쇠를 반복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흥망성쇠의 역사적 흐름과 법칙은 국가, 기업뿐만 아니라 가문(家門)에도 적용되는 것으로, 이는 권력과 부에 대한 지나친 탐욕 때문일 것이다. 또 하나 명심해야 할 역사적 교훈은 쇠퇴가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에서 생성된 망국의 바이러스에 의해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기업도 잘될 때가 가장 위험하다지 않은가. 자만은 현실에 안주하게 해 위기감을 잃으면서 미래 대비를 못하게 하는 요인이다. 잘될 때 위기감을 갖고 관리⋅혁신하지 못해 전성기 이후 나락으로 떨어진 세계적 기업은 수도 없이 많다. 조직의 비대화와 그로 인한 관료제 폐해는 그래서 더 무섭다.   새 정부가 들어선 지금 파킨슨의 책 서문 대목이 귓전을 맴돈다. “학생, 교사 또는 역사, 정치, 시사 관련 교재 편집자 같은 이들에게 세상이란 만사가 합리적으로 이뤄지는 곳 같을 것이다. 국민은 자유 의사에 의해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가장 유능하고 총명한 인물이 장관이 된다든가, 또 주주가 중역을 선출하고, 그 중역은 유능한 사람에게만 부장⋅과장 자리를 준다는 그런 생각 말이다. 그러나 험한 세파에 시달리며 살아 온 사람들에게 이 같은 생각은 한낱 웃음거리일 뿐이다.”    / 출처; 한국경제신문 / 윤종용(전 삼성전자 부회장) / 2017-05-29      꽃사과      
520    인공지능 왈; "이 장기를 수술해 잘라내라".../수술의사: ???... 댓글:  조회:2395  추천:0  2017-06-02
인공지능의 시대,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더 위험할 수 도 있다.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한국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인공지능에 대체되는 것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인공지능 때문에 일자리 대부분이 없어지리라는 공포가 알파고‧이세돌 대국 직후 한국 사회를 거의 뒤덮었었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 이스라엘히브리대학 교수도 내한 때 “인공지능이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하는 것을 넘어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생각하는 사람)라는 종이 없어질 것”이라고까지 답해 불안은 더 커졌다.   알파고 충격 이후 인공지능에 대해 가장 많은 질문을 받았을 전문가인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는 이런 사회적 반응에 대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진지한 논의가 시작되기보다는 충격과 공포, 불안이 확대되고 그 틈을 타고 사교육과 출판시장이 한쪽이 돈을 버는 모양새는 좋지 않다는 것이다.   인공지능으로 인한 변화에 대한 진단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다. 알파고‧이세돌 대국 후 얼마 되지 않았던 지난 3월 19일 서울 이태원동 사무실에서 만난 정 교수는 “인공지능은 일자리 지형도 자체를 바꿀 것이고, 제조업뿐만 아니라 서비스업까지 전 분야에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정리했다.   특히 현재 기준으로 ‘공부 잘 하는 사람’이 위험하다고도 했다. 보통 인공지능에 대체될 일자리로 육체노동 및 단순서비스업을 떠올리는 것과는 반대다.   “지금 우리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사람이란 숫자와 언어를 잘 다루는 사람, 주어진 정보의 분석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지 않느냐?”면서 “그게 바로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창의적 인재’ 기르면 된다고?   인재의 기준이 획일적인 한국 사회가 인공지능의 위협을 느끼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정 교수는 말했다. 동시에 ‘창의적인 인재를 길러내면 된다’는 식의 해법에도 이의를 제기했다.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 분석력 말고도 통찰력과 감성적 사고 능력까지 갖춘, 전뇌(全腦)적 사고를 하는 인간은 계속 중요한 역할을 하겠죠. 그렇지만 모든 인간이 그러기 힘들고, 설령 그런 인간도 일생 중에서 그 능력을 발휘하는 시간은 굉장히 짧습니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인간은 기계보다 육체적 능력이, 인공지능보다 지적 능력이 떨어질 텐데 뭘 하며 살아야 할지가 문제인 거죠.”   그렇다면 충분히 불안하고, 공포스러워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정 교수는 “해법을 찾는 방향이 잘못됐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 역시 해법을 갖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 답이 당장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다양성 가운데서 예기치 못한 혁신적인 해법이 나오는 것이 바람직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얘기부터 한참 했지만, 이 인터뷰의 본래 목적은 현재 한국 사회의 문제, 이대로 지속될 경우 5년~10년 후 한국의 모습,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묻는 것이다. 희망제작소가 창립 10주년을 맞아 허핑턴포스트코리아와 공동으로 진행 중인, 이원재 희망제작소장이 진행한 ‘시대정신을 묻는다’ 여덟 번째 인터뷰에서 정 교수가 답한 핵심은 바로 ‘다양성 부족’ 문제였다. 인공지능의 위협에 대한 분석과도 같은 방향이다.   한국 사회에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인식 자체는 새롭지 않지만, 그 심각성에 대한 진단은 전에 없이 강했다. “이대로라면 한국 사회는 심각하게 불행한 사회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마치 다양성보다 중요한, 강력한 전 국가적 어젠다가 있는 것처럼 몰아가다가, 그 국가적 위협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언제 다시 나타날지 모른다는 식으로 부추기면서 다양성을 억눌러 왔어요. 그것도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집단적 폭력을 가하는 수준으로요. 그래서는 사회가 건강할 수 없고, 변화에 대응할 능력을 갖출 수도 없죠.”   그와 관련해서 정 교수는 ‘위험한 생각들’이라는 책을 소개했다. 리처드 도킨스, 제레미 다이아몬드, 미하이 칙센트 미하이 등 저명한 학자들이 각자 가진 위험한 생각들을 모은 책이다. 국내에 2007년 출간된 책인데도 ‘인간은 인공지능에 대체될 것’이라는 주장부터, ‘학교는 전혀 쓸모없다’, ‘인간과 동물은 차이가 없다’, ‘범죄자가 아니라 범죄자의 유전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등 도전적인 의견들이 가득하다.   정 교수는 “굉장히 기분 나쁠 수도 있고 신념 체계를 흔들 수도 있는 아이디어지만, 그 옳고 그름을 떠나서 학문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들이 그런 새로운 생각들을 던지고, 사회가 이를 받아서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경제성장 위해서도 ‘다양성’ 필요하다   다양한 생각들이 쏟아져 나오면 혼란도 생기지 않을까, ‘일베’류의 차별적이고 혐오를 유발하는 의견들까지 퍼지는 것이 아닐까 걱정될 수 있다. 이에 대해 정 교수는 “차별과 혐오는 금지돼야 한다”면서 하루빨리 차별금지법이 제정돼야 한다고 했다.   “표현의 자유가 존재하려면 차별금지법도 있어야 합니다. 인종‧성별 등에 바탕한 혐오 발언, 모든 종류의 차별이 잘 규제돼야만 표현의 자유가 건강하게 확대될 수 있으니까요. 그래야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도 생겨날 수 있습니다.”   정 교수가 말하는 다양성이 필요한 이유는 첫째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다. 개인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행복하고, 사회적 압력을 받을수록 불행하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처럼 획일적인 문화가 지속되면 사회가 심각하게 불안해진다는 이유도 있다. 정 교수는 이 이야기에서 유독 “많이 걱정된다”고 했다.   “지금 우리나라에 외국인 노동자가 150만 명입니다. 농촌으로 시집온 아시아권 여성들에게서 태어난 2세들은 이미 심각한 차별을 받고 있습니다. 심지어 배달일도 할 수 없다고 해요. 손님들이 기분 나빠한다면서 채용해 주지 않으니까요. 그 분노가 폭력적인 방식으로 표출된다면 우리 사회가 어떻게 될까요? 서구권과 같은 테러가 우리나라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다 같은 시민’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차별받던 사람들을 껴안아 줘야 하는데 교육‧문화‧제도 중 무엇도 준비 안 돼 있다는 게 저는 공포스럽습니다.”   앞서 ‘국가적 어젠다’가 다양성을 억눌렀다는 분석처럼, 지금도 이런 우려들은 ‘경제 성장이 먼저’라는 주장에 묻히곤 한다. 정 교수는 “경제 성장을 위해서라도 다양성 존중 문화는 시급하다”고 했다.   한국 사회는 전체주의적, 획일적 일사분란함 속에서 특정 산업을 키우거나 큰 스포츠경기를 치르는 데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 왔다. 이는 누군가가 ‘나는 두뇌 역할을 할 테니 너희는 나의 수족이 되라’고 하면 다수가 ‘시켜만 주시면 열심히 하겠다’고 화답하는 문화 속에서 가능했다고 설명하면서 정 교수는 “이제는 그런 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고 ‘질적 성장’이 요구되는 시대”라고 했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을 억누를 것이 아니라 행복해지도록 하고 좋아하는 것에 몰입하게 해서 창의적인 결과물로 승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 지금처럼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 정확하게 같은 지식을 입력시키고, 대학의 ‘한 줄 세우기’를 통해 확인하는 방식을 유지하다가는 글로벌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면서 정 교수는 “새로운 생각들이 예상치 못 한 혁신을 계속 만들어내는 사회여야 경쟁력이 있다”고 강조했다.   “인문사회학 축소는 우리 사회의 불행”       아이러니하게도 획일성의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곳이 학계라면서 정 교수는 스스로 몸담고 있는 과학기술계의 예를 들었다.   “우리나라 과학기술자들은 주로 미국 유럽에서 만든 이론과 가설을 검증하는 일을 합니다. 그걸 남보다 빨리 받아들이면 유능한 학자로 인정되는 문화가 있죠. 그래서 젊은 학자들이 좀 과격한 아이디어를 내놓으면 우리나라 안에서 가장 먼저 거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 또한 ‘다양성 존중’이 부재한 데 따른 문제지요.”   학계가 자본과 권력에 휘둘리는 문제도 있다. 과학기술 자체가 연구에 돈이 많이 드는 영역이다 보니 자금이 나오는 쪽의 입맛에 맞추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인공지능 열풍이 불면 갑자기 수조 원이 투자되고, 많은 사람들이 급작스럽게 ‘인공지능 전문가’가 되고, 그 방향으로 연구가 쏠리게 되는 것이다.   이럴 때 어느 학자가 ‘적절하지 않다’고 말하면 학계 내부에서조차 ‘투자 받을 좋은 기회인데 초 치지 말라’는 분위기가 있다고 전하면서 정 교수는 “줄기세포 연구가 그 선명한 사례였는데 인공지능 연구도 그 전철을 밟을까 걱정 된다”고 했다.   이런 문제를 더 키우는 것이 ‘인문사회학의 축소’라고도 했다. 정부가 공학계열 대학 정원을 늘리고 인문사회계열을 대폭 줄이는 ‘구조조정’을 발표하기 전 인터뷰였는데도 정 교수는 마치 예견한 듯 “자본주의 논리에 맞춰서 획일화 하고 계획을 세우는 행태들이 우리 사회의 불행”이라고 진단했다.   “과학기술 연구가 유행을 타고 한쪽으로 쏠리면 많은 자원이 낭비됩니다. 국가 경쟁력에도 큰 위협이 될 수 있어요. 그것을 견제해 줄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이 인문사회과학자들에게 있습니다. 결국은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느냐, 어떻게 해야 행복하고 지속가능한 사회가 될 수 있느냐의 관점 하에서 비전을 세워야 하니까요. 그런데 대학들이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서, 인문사회학자들이 외부에서 받아오는 연구비 크기가 작고 기업들이 단기적 관점으로 학생들을 뽑는다고 해서 대학이 이쪽을 축소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고 보니 인공지능이 가져올 미래에 대해 이스라엘 역사학자인 유발 하라리에게 묻고 또 물었으면서 국내 인문사회학을 축소한다는 데 문제의식이 없는 한국 사회가 새삼 부조리하게 느껴진다.   “인공지능 공포 과장됐지만 과제는 있다”       이렇게 이야기는 다시 인공지능으로 돌아왔다. 정 교수의 진단은 시종일관 한국 사회를 향할 뿐, 인공지능 자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 듯했다. 그 이유는 “알파고 이후로 사람들이 가지게 된 공포 대부분은 과학적으로는 근거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서 인공지능이 인간의 모든 능력을 다 추월하게 된다면, 그래서 사회의 통제권까지 가져가면 어쩌나’ 하는 생각과 같은 것이다.   “알파고를 통해 우리가 새로 알게 된 것은 직관과 추론이라는 게 인간 고유의 능력이 아니라 계산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언젠가 인간의 욕망, 감정, 그런 것을 느끼는 의식조차도 계산 가능해진다면 컴퓨터도 그런 능력을 가질 수 있겠죠. 뇌가 어떻게 그런 것을 느끼는지를 알게 된다면 컴퓨터에 넣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직은 인간들 스스로가 그 생물학적 기제를 몰라요. 그래서 불가능합니다. 아주 먼 미래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요.”   다만 인공지능의 계산이 고도화될 때의 문제가 있긴 하다. 어떻게 해서 그 값을 냈는지 인간이 이해할 수 없을 때의 문제다. 정 교수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한 대목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인간들이 엄청난 슈퍼컴퓨터를 만들어서 ‘이 우주와 세계에 대한 궁극적인 답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컴퓨터가 750만년 동안 계산해서 얻은 값이 ’42’였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인간들이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세돌과의 대국에서 알파고가 어떤 수를 뒀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서 사람들이 당황하기 시작했었죠. 그와 마찬가지로 앞으로 인공지능이 의료에 사용될 때, MRI 결과 등 모든 정보를 분석해서 인공지능이 ‘이 장기를 잘라내라’고 판단했는데 그게 왜 그런지, 혹시 오류가 있는지를 의사가 알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처럼 기계가 도구의 수준을 넘어설 때, 인간이 통제력을 상실하고 의사결정을 의탁해야 할 시점에 혼란이 올 수 있어요. 이를 잘 다루는 것이 인류의 과제가 될 겁니다.”       이날 인터뷰가 진행된 이태원동 경리단길의 공간은 정재승 교수가 건축가 두 명과 함께 운영 중인 건축회사 ‘마인드브릭 디자인’ 사무실이었다. ‘사람이 공간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공간은 사람들의 소통과 심리상태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의 관점을 건축에 접목하기 위해서 만든 회사라고 했다. 당연히 중요할 것 같은 그 관점이 지금까지 건축에 적용되지 않고 있다는 데 대한 문제의식으로 건축가들과 의기투합해서 설립하게 됐다는데, 그런 혁신성 덕분에 구성원이 총 6명뿐인 작은 회사인데도 굵직한 공공 및 기업 건축 프로젝트에 참여해 오고 있다고 했다.   이 설명을 들으니 정 교수가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민감하게 느끼고, 그 답이 당장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비관적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를 알 듯했다. ‘다양한 생각들이 빚어내는 예기치 못 한 혁신’의 예를 스스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519    시인들이여, 정신 차리라! 로봇트 세계 최초 시집 발간했다!!! 댓글:  조회:2665  추천:0  2017-06-02
MS가 중국에 출시한 AI 로봇 ‘샤오빙’(小氷)이 세계 최초로 시집을 발간했다./연합뉴스   인공지능(AI)이 바둑에 이어서 ‘문학’의 영역까지 발을 들였다. 마이크로소프트(MS)가 중국에 출시했던 AI 로봇 ‘샤오빙’(小氷)이 세계 최초로 시집을 발간했다.  1일 중국 인민망(人民網)과 홍콩 봉황망(鳳凰網) 등에 따르면 샤오빙은 1920년 이후 현대 시인 519명의 작품 중 수천 편을 100시간 동안 학습한 뒤 1만여 편의 시를 스스로 지었다. 그리고 이 중 139편을 선정해 지난 19일 중국어 시집 ‘햇살은 유리창을 잃고’를 출간했다. 시집 제목 역시 샤오빙이 직접 지었다. 시집을 제작한 치어스 출판사 둥환 책임 프로듀서는 “샤오빙은 사진을 보고 영감을 얻고 시를 썼다. 이 과정은 진짜 시를 쓰는 것과 기본적으로 같다”며 “아주 작은 오류가 포함돼 있긴 하지만, 샤오빙의 시는 독창적인 언어가 사용됐다”고 말했다.  시집은 10개의 챕터로 구성돼 있으며 각각 고독, 기대, 기쁨 등 사람의 감정을 담아 냈다.   실제로 샤오빙이 쓴 시들 중 “비가 해풍을 건너와 드문드문 내린다” 혹은 “태양이 서쪽으로 떠나면 나는 버림받는다”는 등의 독특한 시구들도 있지만, 일부 표현들은 AI가 쓴 시구인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어색하다고 봉황망은 분석했다.  샤오빙의 개발자인 MS의 리디는 ""샤오빙은 시각부터 청각까지 완벽한 인공 감각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며 "MS가 개발한 고급 채팅 로봇인 샤오빙은 중국 내 14개 국·내외 소셜네트워크 서비스 플랫폼에서 2천만 명의 사용자들과 소통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샤오빙은 지난 2015년 한 위성방송에 출연해 빅데이터로 날씨를 예측하는 AI 기상캐스터로 활약해 중국 내에서 큰 화제가 된 바 있다. /윤상언 인턴기자 /서울경제 MS의 인공지능 "샤오빙"이 출간한 시집 '햇살은 유리창을 잃고'.[인민망 캡쳐]   =========================       샤오빙은 1920년 이후 시인 519명의 현대시 수천편을 100시간 동안 1만번 스스로 학습해 시작(詩作) 능력을 키웠다. 시집에 수록된 작품은 모두 139편으로 시집의 제목도 샤오빙이 직접 지었다. 10개의 장으로 구성된 시집에는 고독, 기대, 기쁨 등 사람의 감정이 담겨 있다.   시집을 제작한 둥환 책임 프로듀서는 “샤오빙은 사진을 보고 영감을 얻어 시를 썼다”면서 “아주 작은 오류가 포함돼 있긴 하지만 샤오빙의 시는 독창적인 언어가 사용됐다”고 말했다. 샤오빙은 중국과 미국, 일본 등의 14개 SNS상에서 1억명의 사용자와 대화하며 소통하는 ‘대화형 인공지능’이다. 누적 대화량만 300억건을 넘어섰다. 샤오빙은 오는 8월 소설도 출간할 계획이다.
518    [작문써클선생님들께] -우리 말 공부, 난제를 풀며 공부해야... 댓글:  조회:3052  추천:0  2017-06-01
음성인식 어려운 우리말… 세종대왕은 왜 ‘쌍리을’ 안 만들었을까 (ZOGLO) 2017년5월27일  ['AI 4총사' 써 봤더니...] 수많은 예외적 발음, 디지털 음성인식 난제 #1 L-R에 뜻 구별되는 영어와 달리 ‘ㄹ’ 발음 따라 의미 다른 한국어 없어 굳이 쌍리을 만들지 않았던 것 #2 “들리는 대로 사전 찾으면 없어” 외국인들 어려워하는 발음 규칙 AI도 곤란해하긴 마찬가지 한국인은 영어 L 소리와 R 소리를 분명히 구분해 인식하고 발음하지만 한글은 이를 구분하지 않고 ‘ㄹ’ 하나로 표기한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면서 각각의 소리를 나타내는 글자를 따로 만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일보 자료사진 미국 여행 중 옷을 한 벌 사러 쇼핑센터에 들른 정모(44)씨는 점원에게 “라지 사이즈”를 달라고 말했다가 말이 안 통해 당황했다. 그래도 대학을 졸업했는데 ‘라지(Large)’에서 막히다니? 정씨는 그러나 곧 자신이 ‘Rarge’에 가깝게 발음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한국인이 L 소리와 R 소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명확히 구분하고 발음할 줄 알지만, 한국 말에서 L 소리는 받침(종성)에서만, R에 가까운 소리는 초성에서만 나기 때문에 무의식 중에 두 발음을 혼동하는 것이다.  리을 발음의 저 복잡다양함 만약 세종대왕이 ‘나랏말씀이 영국과 다를 백성마저 딱하게 여겨” 한글 창제시 L 소리를 표현할 글자를 하나 더 만드셨다면 어땠을까. 가령 ‘ㄹ’에 가획한 어떤 글자나 쌍리을(ㄹㄹ) 같은 것으로 L 소리를 표기했다면? ‘Large’를 ‘ㄹ라지’로 쓴다면 정씨처럼 무의식적으로 R 발음을 하는 실수는 줄지 않았을까. Hotel을 ‘호텔ㄹ’로 쓰고, Paper는 ‘페이펄’로 쓴다면 종성의 L과 R을 정확히 발음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종대왕은 쌍리을을 만들지 않으셨다. 수백년 전 컴퓨터 키보드와 휴대폰 문자판을 예상하고 한글을 만드셨다는 (소문이 있는) 세종대왕이, 도대체, 왜?  한글은 표음문자다. 28자만으로 매우 다양한 소리를 표기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상 우리나라 말은 표기와 발음 사이의 괴리가 매우 크다. ‘ㄹ’만 놓고 얼마나 다양한 발음이 나는지 보자. 우선 ‘ㄴ’ 받침 뒤에 ‘ㄹ’이 올 경우 두 가지 발음규칙이 있다. ‘난로[날로]’처럼 ‘ㄹ-ㄹ’로 발음하는 유음화와, ‘생산량[생산냥]’처럼 ‘ㄴ-ㄴ’으로 발음하는 비음화다. 받침 ‘ㄹ’ 뒤에 ‘ㅂ, ㄷ, ㅅ, ㅈ, ㄱ’가 이어질 때에는 ‘물고기[물꼬기]’처럼 된소리로 바뀔 때도 있고, ‘불고기[불고기]’처럼 안 바뀔 때도 있는데 어떤 경우에 된소리가 되는지 규칙이 없다. 한국어 음성학 전공인 김종덕 박사(전 도쿄외대 부교수)는 “‘ㄹ’ 뒤에 ‘ㅅ’이 오는 경우 90% 정도가 된소리로 발음한다는 경향은 있지만, 어떤 조건에서 된소리가 나는지 규칙을 찾기 어렵고 사전을 통해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며 “한국어에서 가장 발음법칙이 복잡하고 어려운 글자가 리을”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끝이라면 좋겠다. 벌써 머리가 아프면 이 단락은 읽지 말고 건너뛰자. ‘서울역[서울력]’, ‘알약[알략]’처럼 ‘ㄹ’ 뒤에 모음이 이어지는 단어에서 ‘ㄴ’이 첨가돼 다시 ‘ㄹ’로 발음이 바뀌는 경우도 있는데 이 역시 규칙을 찾기 어렵다. 예외 없이 적용되는 보편 발음규칙도 있는데 ▦‘칼날[칼랄]’ ‘달나라[달라라]’처럼 늘 ‘ㄹ-ㄹ’로 발음(받침 ‘ㄹ’ 뒤에 초성 ‘ㄴ’이 올 경우)하거나 ▦’심리[심니]’ ‘종로[종노]’처럼 ‘ㄹ’을 늘 ‘ㄴ’으로 발음하거나(‘ㅁ, ㅇ’ 받침 뒤에서) ▦‘합리[함니]’ ‘석류[성뉴]’처럼 받침과 ‘ㄹ’이 함께 비음(‘ㅁ-ㄴ’, ‘ㅇ-ㄴ’)으로 바뀌는 경우(‘ㅂ, ㄷ, ㅅ, ㅈ, ㄱ’ 받침 뒤에서)가 그렇다.  발음대로 쓰지 않는 한국어 이쯤 되면 단지 한글에 쌍리을 없는 게 문제가 아닌 것 같다. 한국어가 과연 표음문자가 맞기나 한 건지 의심스럽다. 아이나 외국인이 처음 한글을 배울 때 어려운 점이 이 대목이다.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중국인 학생 쥐이신(鞠鑫)씨는 “처음 한국어를 배울 때 받아쓰기 시험을 치면 늘 틀렸다. 발음 나는 대로 쓰면 맞춤법에 맞지 않았다”고 말한다. 듣기만 해서는 모르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기도 쉽지 않았다고 그는 덧붙인다. “한국인과 대화를 하거나 드라마를 볼 때 모르는 단어가 들리면 사전을 찾고 싶은데 받침으로 뭘 쓰는지를 알 수가 없어요. 예를 들어 ‘혁명’이라는 단어를 찾아야 할 때 ‘형명’ ‘현명’ 등으로 들려서 이런 단어를 찾으면 사전에는 안 나오는 식이죠.” 그는 “특히 겹받침을 쓰는 단어가 가장 어렵다”고 말한다. 같은 과 석사과정 중인 일본 학생 니시오카 리나(西罔莉菜)씨도 같은 이유로 “사람 이름이나 지명처럼 처음 듣는 고유명사를 가장 알아듣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을 다니는 외국인 유학생들은 “한글이 표음문자인데도 발음과 표기 사이의 차이가 상당해 배우기가 쉽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고영권기자 youngkoh@hankookilbo.com 일어와 비교하면 갑자기 한국어를 배운 게 억울하다고 느낄 수 있다. 일어에서 다리(橋)는 ‘하시’로 읽고 ‘はし’로 쓴다. 새 다리(新橋)는 ‘신바시’로 읽는데 표기 역시 발음 그대로 ‘しんばし’로 쓴다. 소리 나는 대로 쓰고 쓴 대로 읽으니 복잡한 발음법칙과 맞춤법 문제가 없다. 한국어에서도 ‘끄치’ ‘끈나다’ ‘끄테’처럼 소리 나는 대로 쓴다면 아이들은 쉽게 받아쓰기 100점을 맞을 것이다.  바쁘면 이 단락도 건너뛰어도 된다. ‘끝이’ ‘끝나다’ ‘끝에’를 표기법에 맞다고 하는 것은 한국어가 형태소(의미를 가진 최소 단위)를 유지해 표기하는 원칙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뿌리는 음소 개념을 발견하고도 초성-중성-종성을 모아 한 음절로 표기하는 모아쓰기 원칙을 정립한 세종대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어는 음소글자가 아닌 음절글자(한 음절이 한 글자)여서 발음을 표기에 반영하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때문에 한글을 배우는 아이들은 받아쓰기 시험을 치르느라 힘들어졌지만, 대신 ‘끝나라’와 ‘끈나라’처럼 의미가 다른 단어들을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세종대왕, 알고도 만들지 않았다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 세종대왕은 왜 쌍리을을 만들지 않았을까. 전세계 언어학자들이 인정하는 천재적인 언어ㆍ음성학자였던 그가 음가를 구분 못해 ‘ㄹ’ 한 자에 만족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세종대왕을 깎아내리고 싶어도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현대 국어학자들이 내놓는 답은 “’ㄹ’의 음가가 둘 이상이라는 것을 세종대왕이 몰라서가 아니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추가 글자를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무슨 ‘세종대왕 무오류성 원칙’ 같은 소리란 말인가.  ‘ㄹ’ 하나만으로 충분한 이유는 우리나라 말 중에 R/L 소리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단어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발’과 ‘팔’은 ‘ㅂ-ㅍ’만 다른데 전혀 다른 의미의 단어가 된다. 그래서 한국어는 ‘ㅂ’과 ‘ㅍ’을 별개의 음소로 구분한다. 그러나 ‘ㄹ’의 경우 이처럼 L/R의 소리 차이로 의미가 구별되는 단어쌍이 전혀 없다. ‘ㄹ’은 한 글자로도 충분했던 것이다. 천재적인 언어학자였던 세종대왕은 음소의 개념을 바탕에 두고 한국어 음가를 체계적으로 분류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었다. 세종대왕이 L 소리와 R 소리를 구분해 표기할 글자를 따로 만들지 않은 이유는 한국어에서 이를 구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음성인식의 최대 난제는 한국어 발음법칙이 복잡하고 예외도 많고 규칙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한 한국어의 현실은 최근 발전하는 디지털 음성인식에도 난제를 안긴다. 경계가 명확치 않은 ‘아’와 ‘어’ 소리를 구분하는 것부터 시작해, ‘성뉴’를 ‘석류’로 이해하고, ‘소주’ ‘쏘주’ ‘쐬주’ 등 다양한 발음을 알아듣는 것 모두 난관이다.  발음만 문제가 아니다. 한국어는 동사의 어미 활용으로 시제, 존칭, 사동/피동 등을 표현하는 등 접사 활용으로 단어의 의미와 문법적 기능이 달라지는 몇 안 되는 언어다. 가령 ‘찾으셨으리라’는 단어를 듣고 동사의 뜻(찾다)과 높임(시), 시제(었), 추측(리라)을 모두 파악하는 것이 AI에겐 만만치 않은 과제다. 하물며 한국인 중에도 어른이 아닌 물건을 높여 말하는 이들이 허다함에랴. 강승식 국민대 소프트웨어융합대학 교수는 한국어 어휘를 기술적 난제로 꼽았다. 강 교수는 “‘노랗다’는 뜻의 영어 단어는 ‘Yellow’로 대표되지만, 한국어에는 ‘노랗다’ ‘누렇다’ ‘노르스름하다’ ‘누리끼리하다’ 등 무수히 많다 보니 AI가 이런 어휘를 다 인식하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세종대왕은 쌍리을을 만들지 않았지만 그는 잘못이 없다. 기계와의 소통이 어렵다고 한국말을 탓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나면서부터 한국말을 써온 이들끼리도 소통은 어렵고 오해는 쉽다.  /한국일보  
517    시계가 걸어온 길을 알고싶다...(3) 댓글:  조회:3634  추천:0  2017-06-01
예술혼을 위하여 -- 문명의 역사를 걸어온 시계(下)       이일영 칼럼니스트   ㅣ   기사입력  2017/05/29        네덜란드 물리학자 ‘호이겐스’(Christiaan Huygens. 1629~1695)가 정립한 진자이론을 바탕으로 시계를 제작한 사람은 시계 제작자 ‘살로몬 코스터’(Salomon Coster. 1620-1659)와 시계 기술자 아하수에로스 프로맨틸(Ahasuerus Fromanteel. 1607~1693)이었습니다. 이와 함께 당시 경쟁적인 양대 산맥을 이루었던 영국의 천문학자 ‘로버트 훅’(Robert Hooke, 1635~1703)을 중심으로 세계를 제작한 사람은 ‘토마스 톰피언’(Thomas Tompion. 1639~1713)입니다.   ‘로버트 훅’은 진자이론과 앵커 모양의 진동자 회전기인 앙그루(anchor escapement)를 개발하여 시계 제작공 ‘토마스 톰피언’ 과 합류하였습니다. 영국 왕실의 후원을 받은 영국 최초의 길드로 기록되는 시계 제작회사 워십풀 컴퍼니(Worshipful Company)가 만들어지면서 1671년 회원이 되었던 ‘토마스 톰피언’은 1676년 그리니치천문대의 전신인 왕립천문대가 설립되어 ‘찰스 2세’ 왕의 명령으로 ‘로버트 훅’과 두 개의 정밀한 시계를 제작하였습니다. 당시 이와 같은 정밀한 시계의 제작에 공헌한 사람이 영국의 천문학자 ‘리처드 타운리’(Richard Towneley.1629~1707)와 ‘요셉 닙’(Joseph Knibb. 1640~1711)이라는 독립된 시계 기술자가 있었습니다. ‘리처드 타운리’는 금속 부품의 정확한 수치를 측정하는 나사형 측정기인 마이크로미터(micrometer)를 발명한 학자로 영국 왕립천문대에 제작된 시계의 앵커 탈진기를 발명한 사람입니다.    ▲ (좌)영국의 천문학자 ‘로버트 훅’ (중) 1690년 ‘토마스 톰피언’ 제작 시계 영국대영박물관 소장 (우) ‘토마스 톰피언’  © 브레이크뉴스          ‘요셉 닙’은 대를 물려온 탁월한 시계기술자로 1671년 옥스퍼드대학 워덤 컬리지(Wadham College)의 시계를 제작하였습니다. 당시 그가 ‘로버트 훅’이 발명한 진자시계의 주요부품과 ‘리처드 타운리’가 개발한 앵커 탈진기를 최초로 실제 만들었던 것입니다. 왕립천문대 시계를 제작할 당시 ‘토마스 톰피언’과 ‘요셉 닙’이 긴밀하게 소통하였던 이유입니다. 또한 ‘요셉 닙이 독립된 시계기술자로 국가가 인정하는 장인이 되었던 내용도 그의 탁월한 기술력을 입증하는 기록입니다. ‘토마스 톰피언’에 대하여 영국은 시계의 아버지로 평가합니다. 이러한 ‘토마스 톰피언’의 시계 제작에 대한 기록들을 세세하게 살펴보면 그는 당시 정밀한 시계부품의 최적화된 금속재료를 찾아 서유럽의 전역을 탐색하였던 것으로 살펴집니다,   이는 그가 대장간의 아들로 태어나 자라면서 금속에 대한 실질적인 식견과 감각이 뛰어났던 내용과 연관을 가지고 있는 점입니다. 당시 그는 네덜란드 지역의 금속 부품 기술자들과 협력하여 부품을 조달받았습니다. 이러한 금속기술의 바탕이 훗날 네덜란드가 명실상부한 풍차의 나라로 발전하게 된 배경 또한 시계기술이 낳은 역사적인 사례라 할 것입니다. 본디 풍차는 고대 페르시아에서 사용된 수평 풍차에서 발전하여 인도를 거쳐 중국에까지 전파되었으며 18세기 이후 사용된 수평 풍차는 바로 시계부품을 제작하던 금속기술자들에 의하여 점진적인 발전을 거치면서 산업혁명과 맞물려 현대식 풍차로 발전하였습니다.       ▲ (좌)영국 시계 제작공 ‘조지 그래햄’ (중) 1795년 ‘토마스 머지’ 제작 해양시계 (우) 영국 시계 제작공 ‘토마스 머지’ 출처: wikimedia.org     © 브레이크뉴스   이러한 영국 시계제작의 아버지 ‘토마스 톰피언’이 스카우트한 기술자가 ‘조지 그래햄’(George Graham. 1673~1751)이며 ‘조지 그래햄’에게서 기술을 배운 인물이 1772년 수습생으로 입문하였던 토마스 머지(Thomas Mudge. 1715~1794)입니다. 이들은 금속 추(진자)의 오차 문제를 수은으로 대체하였으며 기계식 시계에서 시계 소리가 들리게 되는 레버식 탈진기(Lever escapement)를 1775년 개발하여 이른바 소형시계의 기술적 바탕을 마련한 선구자들입니다. 이러한 ‘조지 그래햄’과 영국의 시계기술자 ‘존 해리슨’(John Harrison. 1693~1776)의 만남도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존 해리슨’은 독학으로 기계학을 공부한 이후 시계를 공부하였습니다.     태엽을 감으면서도 시계가 작동하는 기술이 바로 ‘존 해리슨’이 발명한 기술입니다. 이러한 ‘존 해리슨’이 연구한 분야는 바다의 내비게이션인 해양 크로노미터(chronometer)이었습니다. 그가 시계 기술자 ‘조지 그래햄’의 조언을 바탕으로 1762년 제작한 항해용 시계 크로노미터(chronometer)는 60여 일간 대서양을 항해하는 설험에서 5초의 오차를 나타낸 정밀한 태엽식 해양시계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영국 해군 발전에 지대한 업적을 남긴 사례로 2002년 BBC방송사가 조사한 국민여론에서 ‘가장 위대한 영국인’ 39위로 선정된 인물입니다. 이러한 영국 시계의 역사에서 1734년 2중 태엽 추시계를 제작한 시계 제작자 ‘티머시 메이슨’(Timothy Mason. 1695~1734)과 같은 경쟁적인 바탕에서 금속 추(진자)의 오차 문제를 온도보상 진자를 개발하여 해결하였던 시계 기술자 ‘존 엘리코트’(John Ellicott(1706~1772)와 ‘토마스 톰피언’ 기술 계보의 ‘토마스 머지’가 개량한 레버 탈진기를 바탕으로 손목시계가 탄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레버 탈진기의 윤활유에 연관된 문제를 해결한 것은 전체 시계부품을 수작업으로 제작하는 현대 시계 기술의 신으로 평가받는 영국의 시계학자 ‘조지 다니엘스’(George Daniels 1026~2011)이었습니다. 그는 1970년 ‘코-액시얼 탈진기’(Co-Axial Escapement)라는 윤활유가 필요 없는 동축 탈진기술을 개발하여 굴지의 시계업체 ‘오메가’ 사가 1999년 이를 채택하여 최고급 시계로 거듭난 것입니다.        ▲ 독일 시계 제작공 ‘피터 헨라인’ 1510년 제작 시계출처: https://www.yourwatchhub.com     © 브레이크뉴스 이러한 시계의 역사에서 소형시계의 원형을 처음 제작한 역사는 뜻밖에 독일의 열쇠 제작공의 놀라운 장인 금속기술에서 탄생하였습니다. 독일 뉘른베르크(Nuremberg)에서 열쇠 제작공이었던 ‘피터 헨라인’(Peter Henlein. 1485~1542)은 주머니 시계로 알려진 회중시계의 원형을 최초로 제작한 인물입니다. 세계의 많은 기록이 ‘피터 헨라인’에 대한 잘못된 이야기를 하고 있어 이 기회에 정리하고 넘어갑니다. 당시 정교한 열쇠 제작 장인으로 유명하였던 그가 동료의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프란체스코회 수도원에 망명을 요청하여 수도원에서 기거하였습니다.   어느 날 수도사에게서 시계의 원리를 담은 도면에 대하여 설명을 듣게 됩니다. 그는 열쇠 제작공으로 많은 금속 부품을 세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 수도원에 오기 전에 여러 시계 제작자로부터 다량의 부품을 제작해준 경험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한 시계가 1510년경 약 8센티 크기의 시계이었습니다. 당시 그가 태엽으로 쉽게 설명되는 메인 스프링(Mainspring)을 황동(黃銅)으로 제작하였던 시계는 뉘른베르크 달걀(Nuremberg eggs)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러한 그의 기술적 능력을 인정받아 1541년 독일 헤센주 리히테 나우 성(Lichtenau castle)의 탑시계를 그가 제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 (좌) 진기한 장식장(Kunstkabinett) (우) 뻐꾸기시계(Cuckoo clock)출처: 출처: wikimedia.org     © 브레이크뉴스 이러한 오랜 역사를 가진 시계의 역사에서 풀리지 않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뻐꾸기시계(Cuckoo clock)입니다. 오늘날에도 경쾌한 음향과 3차원적인 공간성으로 사랑받는 ‘뻐꾸기시계’는 독일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의 외교관 출신의 수집가인 ‘필립 하인호퍼’(Philipp Hainhofer. 1578~1647)가 ‘아우크스부르크’ 장인들에게 제작을 의뢰하여 만든 세계적인 장식 가구 진기한 장식장(Kunstkabinett)을 만들었던 바탕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당시 1671년 백작에게 선물용으로 제작한 뻐꾸기시계가 최초의 시계로 존재하였지만, 제작자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2차 세계대전 때에 파손되어 사라졌습니다.    이 부분의 가장 명확한 기록은 독일의 자연 과학자 ‘아타나시우스 ’키르허’(Athanasius Kircher. 1602~1680)에 의하여 전해지는 기록입니다. ’키르허’는 중국문화와 중국 학문에 정통한 학자로 중국백과사전을 당시 출판한 학자입니다. 그가 1650년에 집필한 세계의 악기(Musurgia Universalis)」에서 기계적 메커니즘을 가진 뻐꾸기시계에 대하여 상세한 설명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뻐꾸기시계는 1850년경부터 독일 남서쪽 스위스와 프랑스 경계 지역 스투트가르트(Stuttgart)의 ‘바덴 뷔르템베르크’(Baden-Württemberg)에서 많은 시계가제작되었습니다. 당시 뻐꾸기시계의 특징은 1870년경 석판 인쇄와 스크린 인쇄기법으로 당시 독일의 화가 요한 밥티스트 라울Johann Baptist Laule. 1817~1895)과 칼 하이네(Carl Heine. 1842~1882)의 작품으로 시계의 전면을 장식한 최초의 아트상품으로 만들어져 세계로 수출되었던 것입니다. 시계의 역사에는 이 외에도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음악 시계 제작자 ‘안톤 라인레인’(G.Anton Reinlein)과 악기 제작자 ‘안톤 헤켈’(Anton Haeckl)에 의하여 1820년경 하모니카가 제작된 사실 또한 시계 기술이 낳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후 1875년 시계제조 회사이었던 마티아스 호너(Matthias Hohner)사가 악기 제작 회사로 바뀌어 하모니카와 아코디언 제작 전문회사로 존재한 것입니다.   1656년 진자(振子,흔들이)시계(pendulum clock)를 발명한 네덜란드 물리학자 크리스티안 호이겐스(Christiaan Huygens. 1629~1695)등 등...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
516    시계가 걸어온 길을 알고싶다...(2) 댓글:  조회:3768  추천:0  2017-06-01
  예술혼을 위하여 -- 시계의 역사에 담긴 문명의 변화(中)       이일영 칼럼니스트   ㅣ   기사입력  2017/05/28        선지자 모세가 집필한 것으로 전해지는 ‘율법서’ 또는 ‘모세 5서’로 부르는 성경의 구약성서 첫권 창세기는 천지창조와 함께 열린 시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여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못하고 어둠 속에 비어있어 ‘빛이 생겨라’ 하여 빛이 나타나 그 빛을 어둠과 나누어 빛을 낮이라 하고 어둠을 밤이라 하였다. 이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었다, 이와 같은 창세기 1장의 내용은 생명의 존재에 앞서 천지창조에서부터 시간이 존재하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천체물리학에서 빛이 움직이는 거리를 시간으로 측정하는 물리적 논리와 함께 공존하는 시간에 대한 사유의 공간이라 할 것입니다.   ▲ (좌) 우리나라 국보 제229호 자격루 (중) ‘조반니 돈디’ 제작 시계 (우) 1344년 제작 파도바 시계탑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이렇듯 공기처럼 흐르는 시간에 대하여 고대에서부터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연구를 하여 왔지만, 물리적인 측정 이외에는 시간에 대한 사유적인 명확한 정의를 가져오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물리적인 시간에 대한 정확한 측정을 위한 노력은 인류가 존재하면서부터 시도되어 그 발전을 따라 문명의 꽃이 피어났습니다. 오늘날 벽시계와 같은 대형시계를 의미하는 (Clock)의 어원은 고대 켈트어에서 시작되어 소리가 나는 종(鐘)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클로카(Clocca)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이는 고대 그리스에서 신전에 의식을 올리면서 이를 알리는 종을 울렸던 역사에서 생겨난 어원입니다, 이후 교회와 성당에서 종을 울리게 된 기원은 고대 로마의 시인이며 정치인이었던 파울리누스(Paulinus, 354~431)에 의하여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정치를 그만두고 그리스도교에 입문하여 410년경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주의 놀라(Nola) 도시의 주교가 되었을 때 처음으로 교회에서 종을 사용하면서 여러 교회에 이를 소개하였습니다. 이후 604년 교황으로 즉위한 사비니아노(Sabinian)교황에 의하여 정식으로 교회에 종울 울리는 의식이 공인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성당과 교회에 설치된 초기 천문시계들은 종소리를 울리는 시계였습니다. 이와 같은 역사의 흐름에서 1206년 이슬람 시대의 예술가 ‘이스마일 알 자자리’(Ismailal-Jazari,1136~1206)가 발명한 기계식 시계에 가장 근접한 천문시계는 그가 밝혔듯이 중국 송나라의 ‘소송’(蘇頌. 1020~1101)이 제작하였던 하늘로 오르는 계단으로 불리는 천문시계 ‘수운의상대’(水運儀象臺)의 기술을 바탕으로 발명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중국의 당나라 시대에 화가이며 천문학자이었던 ‘양금찬’(梁令瓒)이 721년 발명한 천문 관측기구 ‘혼천의’(渾天儀)와 979년 물과 수은을 이용한 유체동력 장치로 천문관측기계를 발명하였던 북송시대 천문학자 ‘장사훈’(张思训)의 선구적인 업적의 바탕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동양과 서양을 넘나든 시계의 역사적 배경에서 1434년 세종대왕 시대에 우리나라 과학자 ‘장영실’이 발명한 다양한 기능을 가진 물시계‘ 자격루’가 국보 제229호로 지정되어 우리의 과학 정신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 (좌) 스트라스부르 대성당 천문시계 (우) 1410년 제작 프라하 천문시계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이와 같은 천문시계의 역사에서 영국의 성 알바노(St Albans) 수도원장을 지냈던 천문학자 리처드(Richard,1292~1336)에 의하여 설계되었던 한층 정교한 천문시계와 이탈리아 의사이며 천문학자인 자콥 돈디(Jacopo Dondi. 1293~1359)와 그리고 이탈리아 천문학자이며 시인이었던 조반니 돈디(Giovanni DondI. 1330~1388)에 의하여 발명되었던 일련의 시계들은 기계식 시계의 기술적 구성을 거의 갖추고 있었습니다. 특히 조반니 돈디가 발명한 시계는 80센티 크기의 천문시계로 분 단위의 시간까지도 정밀하게 측정하였던 시계로 밀라노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박물관에 소장되어 현재까지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영향으로 당시 중세 유럽의 여러 교회와 주요한 성에 많은 시계들이 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계들을 살펴보면 1283년 영국의 베드퍼드셔(Bedfordshire)에 소재한 성 베드로 수도원 교회에 설치된 대형 시계와 영국 런던 남동쪽에 위치한 캔터베리(Canterbury Cathedral)대성당에 설치된 시계, 그리고 1326년 영국 동남부 하트퍼트셔 주(Hertfordshire)의 세인트 올번스(St Albans)성당에 설치된 시계가 영국에서 제작된 천문시계입니다. 프랑스는 1352년 스트라스부르 대성당(la cathédrale Notre-Dame de Strasbourg)등에 설치된 유명한 천문시계가 있으며 이탈리아 베네트주에 파도바(Padova)시계탑과 1410년 체코 천문학자 얀 온드제윱(Jan Ondřejův)이 설계하고 시계제작공 미쿨라쉬 (Mikulaš of Kadaň)가 제작한 프라하 천문시계 등이 당시의 새로운  기술로 제작된 대표적인 시계들입니다.     ▲ 1656년 크리스티안 호이겐스가 발명한 스프링 구동 진자 시계 와  저서  ‘시계 진동’ 사본  네덜란드 부르하브 박물관(Museum Boerhaave) 소장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당시의 여러 기록을 종합하여 보면 1338년 무렵 교역 도시 베네치아에서 동방으로 가는 무역선의 선적 품목에 기계 시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천재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가 성당에 설치된 시계의 장식작업을 하였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시계의 역사는 가장 중요한 기술로 존재하며 끝없는 발전을 거듭하여 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계의 발전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중력이거나 수력을 통한 유체역학으로는 시계의 생명인 정밀한 정확도를 기술적으로 완성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한 사람이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크리스티안 호이겐스(Christiaan Huygens. 1629~1695)입니다. 1656년 ‘호이겐스’는 추시계의 원리인 진자시계(pendulum clock)를 발명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거의 같은 시기에 영국의 물리학자이며 천문학자인 ‘로버트 훅’(Robert Hooke, 1635~1703)도 진자시계의 원리를 발명하여 두 사람은 상당기간 경쟁적인 관계에서 더욱 정밀한 시계를 개발하려 노력하였습니다. 아울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옹호하여 널리 알려진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도 1602년부터 진자시계의 원리를 추적하여 추의 진폭은 달라도 1회의 왕복 시간은 일정하다는 '진자의 등시성(等時性)'에 대한 논문을 1637년 써놓았고 이에 관한 설계도면까지 작성하였으나 1638년 실명과 같은 시력을 잃어 더 이상 추진하지 못한 사실에서 당시 인류사에 주요한 물리학자와 천문학자의 공통된 노력에서 정확한 시계가 얼마나 요구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할 것입니다. ‘크리스티안 호이겐스’ 와 계약을 맺은 네덜란드의 시계제작자 살로몬 코스터(Salomon Coster. 1620-1659)는 시계 기술자 아하수에로스 프로맨틸(Ahasuerus Fromanteel. 1607~1693)과 함께 1657년 인류 최초의 기계시계를 제작하였습니다. 당시 이 시계는 갈릴레오가 완성한 등시성의 원리가 추의 진폭에 따라 주기가 다른 오차를 극복한 ‘크리스티안 호이겐스’의 이론에 의하여 제작된 시계로 ‘직각 탈진’이라는 탈진기의 기술적 혁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시계의 가장 중요한 부품의 하나인 밸런스 스프링(balance spring)을 장착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균형 스프링이 발전하여 유사라는 정밀한 소형 스프링이 개발되면서 손목시계가 등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제작된 시계가 현재 네덜란드의 부르하브 박물관(Museum Boerhaave)에 소장 되어있습니다.     ▲ (좌)갈릴레오가 설계 한 진자시계의 1637 년경 원본 그림.   (우) 크리스티안 호이겐스 탈진 모델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이와 함께 영국의 물리학자 ‘로버트 훅’ 도 진자시계의 원리에서 등시성의 오차를 ‘크리스티안 호이겐스’와 동시에 극복한 학자로 그는 1660년 ‘탄성체가 늘어나거나 변형되는 상태는 외력에 의하여 비례한다’는 ‘탄성의 법칙’을 정립하여 밸런스 스프링(balance spring)에 대한 기술적 바탕을 실질적으로 가장 먼저 정립한 사람입니다. ‘뉴턴’과 가장 경쟁적인 비판의 상대이었던 그가 발표한 ‘탄성의 법칙’은 암호화된 애너그램(anagram)으로 발표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애너그램(anagram)이란 문자열과 단어를 바꾸어 암호화하는 방식으로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에서부터 전해온 방법입니다. 이는 학자들이나 예술가들이 자신이 연구한 논문이나 작품을 완성하기 전에 자신의 선구적인 기록을 증명하기 위하여 먼저 암호화 시킨 애너그램(anagram)방식으로 발표하는 것을 말합니다. 미국의 작가 댄 브라운(Dan Brown.1964~)이 펴낸 ‘다빈치 코드’의 이야기가 바로 애너그램(anagram)을 소재로 한 작품입니다. 이와 같은 영국의 물리학자 ‘로버트 훅’의 아버지는 시계제작공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시계에 대한 그의 연구는 더욱 열정적이었을 것입니다. 천문학에서 물리학 그리고 식물학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문을 통하여 지대한 업적을 남긴 그가 식물을 연구하면서 모든 생명체의 바탕을 이루는 세포(cell, 細胞)를 최초로 규명한 사실도 기억할 일입니다.     인류의 전설적인 물리학자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경쟁적인 시계 제작의 불꽃이 타오르면서 과학으로 질주하는 역사의 이야기를 이어서 살펴보기로 합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       
515    시계가 걸어온 길을 알고싶다...(1) 댓글:  조회:3799  추천:0  2017-06-01
  예술혼을 위하여--문명의 역사를 걸어온 시계(上)       이일영 칼럼니스트   ㅣ   기사입력  2017/05/26        인류의 역사에서 과학이 빚어낸 변화의 바람을 살펴보면 1769년 영국의 ‘제임스 와트’(James Watt)에 의하여 증기기관이 발명된 이후 산업혁명이 전개되었으며 전기가 발견된 이후 1879년 에디슨에 의하여 발명된 백열전구가 어둠을 밝히면서 전기 문명의 생활시대를 열었습니다. 이후 컴퓨터의 등장은 과학 문명이 빚어낸 인류사의 가장 큰 변화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문명의 역사를 세세하게 살펴보면 역사가 걸어온 소중한 시간을 바라보는 시계라는 인류의 발명품에서 비롯된 많은 이야기를 만나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합니다.             컴퓨터의 등장 이후 오늘날 모든 업무와 산업의 공정이 컴퓨터로 이루어지고 있는 사실에서 그 역사를 헤아리면 곧 계산기의 역사를 만나게 됩니다. 이는 컴퓨터가 엄밀하게 무한한 계산 능력이 있는 전자식 계산기(하드웨어)라는 점에서 출발하는 논지입니다. 이러한 계산 능력을 바탕으로 각 분야에 주어진 업무를 수행하는 프로그램이 곧 소프트웨어인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 역사를 헤아려보면 기계식 계산기의 발명을 만나게 되며 기계식 계산기의 기술적 바탕은 시계의 정밀한 기술적 구조에서 발달한 바탕에서 제작되었음을 살피게 됩니다. 이와 같은 시계의 뿌리를 헤쳐보면 오늘날 가장 긴요한 길잡이인 내비게이션의 원조라 할 수 있는 고대에서부터 존재한 ‘아스트롤라베’(astrolabe)를 이해하여야 합니다.    ▲ (좌) 황도좌표(黄道座標) (우) ‘아스트롤라베’(astrolabe)   출처: https://en.wikipedia.org / https://www.astroarts.co.jp     © 브레이크뉴스     ‘아스트롤라베’란 천체 관측기구의 일종으로 별과 행성의 위치와 경사의 각도를 측정하여 현재 위치의 위도를 측정하는 기구입니다. 이는 우주에서 태양의 궤도면은 평면상태가 아니지만, 평면으로 가상한 황도(ecliptic)로 칭하는 괘도에 놓인 별자리가 황도십이궁(zodiac) 12 별자리입니다.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지구의 궤도면에서 춘분점과 추분점에서 교차하는 춘분교점을 기준으로 삼는 원리가 황도좌표계(黃道座標系)이며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변함이 없는 춘분점과 적도면을 기준으로 천체의 위치를 파악하는 지구 중심의 관측을 적도 좌표계라 합니다. 이러한 천체의 위치와 위도를 관측한 ‘아스트롤라베’는 라틴어와 그리스어에서 ‘별을 붙잡는다’는 뜻에서 유래된 어원으로 고대 그리스 천문학자 히파르코스(Hipparchos. BC,190~BC.120)가 처음 사용하였으며 8세기의 이슬람 천문학자 아르라함 알 파자리(Muḥammad ibn Ibrāhīm al-Fazārī)에 의하여 ‘아스트롤라베’가 금속으로 제작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여러 기록은 이슬람 천문학자 ‘아비 바크르’(Abi Bakr)가 최초의 기계식 ‘아스트롤라베’를 제작한 것으로 전하고 있지만 가장 정확한 기록은 이슬람 스페인령의 톨레도(Toledo)에 살았던 천문학자 ‘알자켈’(Arzachel(1020~1087)이 정교한 기계식 ‘아스트롤라베’를 제작하여 이슬람 천문학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는 이슬람교의 살라트(salat)예배 의식에서 명확한 일출의 시각과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가 태어난 메카의 방향을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배경에서 당시에 많은 ‘아스트롤라베’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기계식 ‘아스트롤라베’가 가지고 있는 원리가 발전되어 중세시대의 천문시계가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 (좌) 중국 천문학자‘ 소송’(蘇頌)  (중) 1090년 제작 천문시계 (우) 천문시계 내부 구조 도면   출처: https://image.baidu.com     © 브레이크뉴스 이러한 시계의 역사는 ‘아스트롤라베’의 이론적 구조의 가장 단순한 방법인 태양의 방향에서 파악되는 해시계에서부터 물이 흘러가는 수량을 측정하는 설수형(泄水型)과 흘러들어오는 수량을 측정하는 수수형(受水型)으로 구분되는 물시계가 고대시대에서부터 활용되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수력과 기계식 부품으로 이루어진 천문시계가 등장하게 됩니다. 이후 수력을 이용한 부분이 겨울이면 얼어붙는 문제를 수은으로 대체하여 해결하였으며 또한 아르키메데스 원리를 이용한 유체역학으로 동력을 만들어 첨단과학시대의 오늘날에도 놀라운 천문시계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천문시계의 최초 발명은 중국 송나라의 천문학자인 ‘소송’(蘇頌. 1020~1101)이 1090년 허난성 카이펑(開封)에 설치한 하늘로 오르는 계단이라는 뜻을 가진  티엔티(天梯) 천문시계이었습니다. 이 시계는 무려 120m의 거대한 건축물로 제작된 시계이었습니다. 시인이면서 광학, 천문학, 의학에 이르는 다양한 학문에 통달하였던 그가 인류 최초의 천문시계를 만들면서 사용한 체인 형태의 탈진기(Escapement)는 기술이라는 분야에서 가장 혁신적인 발명이었던 것입니다. 탈진기란 쉽게 톱니바퀴로 일정한 진동을 가능하게 하는 부품으로 특히 시계와 같은 분야에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가지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러한 탈진기의 발명은 곧 기계 기술에 있어 다양한 응용과 발전이 이루어지는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소송’(蘇頌)의 선구적 발명이 중국의 우주개발에 대한 정신적 바탕으로 놓여 있음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 (좌) 1206년 ‘이스마일 알 자자리’의 코끼리시계  (중) 두바이에서 복원 제작한 코끼리시계  (우) 성곽시계(Castle clock)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당시의 여러 기록을 종합하여 보면 인류 최초의 기계식 시계의 원형을 발명한 사람은 이슬람 시대의 예술가이며 장인이었던 ‘이스마일 알 자자리’(Ismailal-Jazari,1136~1206)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을 마감한 해 1206년 기계식 코끼리 시계(Elephant clock)와 성곽시계(Castle clock)를 연이어 발명하였습니다. 그의 성곽시계는 중력을 이용한 기계식 부품으로 만들어진 3.4m 높이의 대형시계로 달의 변화를 나타내는 천문시계의 기능과 함께 매 시간 자동으로 문이 열리며 음악이 울리면서 인형이 등장하는 오늘날의 뻐꾸기시계와 같은 놀라운 기능들이 망라되어 있었습니다.   이와 함께 그의 대표적인 발명품인 수압과 기계적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진 코끼리 시계(Elephant clock)는 상단과 하단에 설치된 두 개의 물탱크를 이용하여 시간 표시와 함께 정확한 시간을 조정하기 위한 제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매 시간 드럼을 울리고 심벌즈를 치는 정교한 기술적 구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러한 코끼리시계의 제작에 대하여 중국의 ‘소송’(蘇頌)이 발명한 천문시계를 바탕으로 인도에서 여러 시계가 제작되었으며 이러한 기술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자신의 시계가 만들어졌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나아가 자신의 시계에 구성된 내용에서 코끼리는 인도와 아프리카 문화를 상징하며 용은 중국문화를, 그리고 불사조 피닉스(Phoenix)는 페르시아 문화를 대표하며 물의 표현은 고대 그리스 문화를 대표하는 동양과 서양을 아우른 뜻을 담았음을 기술하였습니다.    이러한 시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시계가 가지는 정밀한 정확도를 기술적으로 해결한 내용이 바로 1656년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크리스티안 호이겐스(Christiaan Huygens. 1629~1695)가 발명한 이른바 추시계의 원리인 진자시계(pendulum clock)의 등장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과학의 시대로 달려온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 \\\\\\\\\\\\\\\\\\\\\\\\\\\\\ ========================= /////////////////////////////////////////////////////////// 손목시계가 최초로 나와 보편화된 시기는? -손목시계는 가죽줄이나 쇠줄 등으로 손목에 끼워서 사용하는 소형 시계를 말합니다. 옛날 시계는 시계탑이나 큰 건물에 장치되어 있었으나 15세기 말엽에 금속태엽이 발명되어 시계의 동력으로 사용되고부터 소형시계가 많이 만들어졌으며, 이 때부터 휴대용 시계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유사(遊絲:hair spring)·균형차(balance wheel) 등이 발명되어 회중시계에서 손목시계로 발전하였다. 손목시계는 19세기 초부터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회중시계·스톱워치·반지시계·목걸이시계 등도 휴대용 시계의 한 종류이다. 제일 오래 된 것으로는 1807년에 만들어진 시계로, 나폴레옹 1세의 황후 조세핀이 사용한 시계이다. 이 시계에는 금속태엽을 용두(龍頭)로 감아 그 스프링의 복원력을 동력으로 이용하여 기어를 움직이게 하고, 그 회전속도의 제어는 균형차와 유사가 하며, 기어에 분침·시침을 돌리는 장치가 되어 있다. 기어 부분에는 축의 마모를 적게 하기 위하여 베어링으로서 인공루비·인공사파이어 등 보석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이 보석수이며, 이 수를 표시하여 15석·17석·21석 등이라 한다. 손목시계에는 전지식이 이용되어 전지식 손목시계·전자판 손목시계 등이 만들어졌다. 또, 수정시계·음차시계·원자시계·전자판 시계 등의 발달은 기계시계와 전기시계를 시대에 뒤떨어지게 만들었다. 이런 종류의 시계는 일차 1,000분의 1초, 1만분의 1초, 10만분의 1초밖에 안 되는 초정밀도(超精密度)를 가진다. ///출처(손목 시계:국립중앙박물관)  
514    삶이란 련습없이 태여나서 실습없이 사라진다... 댓글:  조회:2618  추천:0  2017-05-31
      두 번 일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일어나지도 않는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연습없이 태어나서 실습없이 죽는다. (중략) 어떤 하루도 되풀이되지 않고 서로 닮은 두 밤(夜)도 없다. 같은 두 번의 입맞춤도 없고 하나같은 두 눈맞춤도 없다. (하략)     우리는 모두 어떤 인연이 있어 이 지구라는 별에 태어나 오순도순, 아옹다옹 살아가는 것일까. 생에 이른 ‘실습(이) 없기' 때문인가. ‘미리 좀 연습을 했더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아마 오늘 아침 이 비슷한 생각을 하며 집을 나서진 않았는지? 이런 사소한 고민을 하며 그러나 퍼뜩 일어서는 진리 같은 것을 포착해내는 시, 그렇게 해서 명증한 보편성을 우리에게 던져주는 시. 노벨상 수상식장에서 가장 겸손한 시인이라는 평을 받았던 그녀가 속삭인다, ‘옷을 독특하게, 현란하고 별나게 입는 것이 신선함은 아니’라고. 시인들이여, 보편의 뜰을 향해 특수의 화살을 쏘아라.         두번이란 없다 ------------쉼보르스카(SIYMBORSKA)     두 번 일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일어나지도 않는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연습 없이 태어나서 실습 없이 죽는다.      인생이란 학교에서는 꼴찌라 하더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어떤 하루도 되풀이 되지않고 서로 닮은 두 밤(夜)도 없다.  같은 두 번의 입맞춤도 없고 하나같은 두 눈맞춤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곁에서 내 이름을 불렀을 때,  내겐 열린 창으로 던져진 장미처럼 느껴졌지만   오늘, 우리가 함께 있을 때 난 얼굴을 벽 쪽으로 돌렸네.  장미? 장미는 어떻게 보이지? 꽃인가? 혹 돌은 아닐까?      악의에 찬 시간, 너는 왜 쓸데없는 불안에 휩싸이니?  그래서 넌 흘러가야만해 흘러간 것은 아름다우니까      미소하며, 포옹하며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방울의 영롱한 물처럼 서로 다르더라도.... - 쉼보르스카(SIYMBORSKA) 1923년 폴란드 출생 -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도 없이 죽는다." 두번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일회성을 그린 이 시는 폴란드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폴란드 여류시인 비스바와 쉼보르스카의 작품입니다. 1945년 시인으로 데뷔한 쉼보르스카는 60년이 넘는 긴 세월동안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며 1996년 여성으로서는 아홉 번째, 여성 시인으로 세 번째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는데요. 쉼보르스카의 대표시 모음집 에 소개된 170여 편의 시는 쉼보르스카 문학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행복한 사랑을 모르는 이들이여 행복한 사랑은 어디에도 없다고 큰 소리로 외쳐라 그런 확신만 있으면 살아가는 일도 죽는 일도 한결 견디기 쉬울 테니까" 인생의 철학이 담긴 무거운 주제에도 불구하고 쉼보르스카의 시가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진솔한 언어로 인생의 진리를 일깨워 주기 때문인데요. 우리 시대의 진정한 거장, 쉼보르스카의 시선집 !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잊고 있던 감수성을 일깨워주는 단비가 되지 않을까요?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 서평] 책이름 :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저 자 : 류시화 엮음 출판사 : 오래된 미래 출간일 : 2005년 3월 26일  ♠ 치유와 깨달음의 시 에는 고대 이집트 파피루스 서기관에서부터 노벨 문학상 수상자에 이르기까지  41세기에 걸쳐 시대를 넘나드는 유명, 무명 시인들의 시가 포함되어 있다. 메리 올리버, 비슬라바 쉼보르스카, 장 루슬로, 옥타비오 빠스, 이시카와 다쿠보쿠 등 현대를 대표하는 시인들, 잘랄루딘 루미, 까비르, 오마르 카이얌 등의 아랍과 인도의 중세 시인들, 그리고 이누이트 족 인디언들, 일본의 나막신 직공, 티베트의 현자 등의 시 77편이 실려 있다.  잠언 시집 이후 8년에 걸쳐 모은 이 시들은 치유와 깨달음이 그 주제다.  삶이란 수많은 병고와 사건이 밀려오는 것, 온갖 불필요한 충고와 소음이 들려오는 것이다. 또한 외로움과 후회, 불안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삶이다. 이 시집 속의 시들은 상처와 슬픔, 상실을 이겨 내기 위한 방법으로 포기와 망각이 아닌 초월을 권유한다. 그리고 초월에 이르는 길은 먼저 삶을 충실히 사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루미는 시 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여인숙과 같다/매일 아침 새로운 손님이 도착한다/기쁨, 절망, 슬픔/ 그리고 약간의 순간적인 깨달음 등이/예기치 않은 방문객처럼 찾아온다/그 모두를 환영하고 맞아들이라/ 설령 그들이 슬픔의 군중이어서/그대의 집을 난폭하게 쓸어가 버리고/가구들을 몽땅 내가더라도”라고 노래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떤 새로운 기쁨을 주기 위해/그대를 청소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짐 히크메트는 감옥에서 쓴 시에서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라고 노래하고 있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한결같이 사람은 삶은 생존하는 것 이상임을 일깨우고 있다. 시인들은 말한다.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을 포기하라고. 자신이 진정으로 살고 싶은 삶 그 하나만을 제외하고.   에서 시적 화자는 ‘인간에게서 가장 놀라운 점이 무엇인가요?’라고 묻고 있다. 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어린 시절이 지루하다고 서둘러 어른이 되는 것/그리고는 다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기를 갈망하는 것/ 돈을 벌기 위해 건강을 잃어버리는 것/그리고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 돈을 다 잃는 것/ 미래를 염려하느라 현재를 놓쳐 버리는 것/그리하여 결국 현재에도 미래에도 살지 못하는 것/ 결코 죽지 않을 것처럼 사는 것/그리고는 결코 살아 본 적이 없는 듯 무의미하게 죽는 것.’ 진정한 삶은 바로 지금부터이며, 너무 늦기 전에 자신의 삶을 살기 시작해야 한다.   류시화 시인은 시집의 해설에서 말한다. “한 편의 좋은 시가 보태지면 세상은 더 이상 전과 같지 않다. 좋은 시는 삶의 방식과 의미를 바꿔 놓으며,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시는 인간 영혼으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 그 상처와 깨달음을. 그것이 시가 가진 치유의 힘이다. 우리는 상처받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상처받는 것이다. 얼음을 만질 때 우리 손에 느껴지는 것은 다름 아닌 불이다. 상처받은 자기 자신에게 손을 내밀라. 그리고 그 얼음과 불을 동시에 만지라.” 시는 인간 영혼의 목소리 시는 인간 영혼의 자연스런 목소리다. 그 영혼의 목소리는 속삭이고, 노래한다. 그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잠시 멈추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삶을 멈추고 듣는 것’이 곧 시다. 영혼은 본래 완전한 존재이며, 인간은 다만 육체를 가지고 이 행성에서 불완전함을 경험하고 있을 뿐이다. 즉, 이 삶은 영혼 여행의 일부이다. 이 여행에서 사람들은 삶 그 자체이기도 하며, 동시에 삶에 상처받는 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상처로 마음을 닫는다면, 그것은 상처 준 이와의 절교만이 아니라, 세상 전체와의 단절을 초래한다. 삶과의 단절이고, 고립이다. 이 고립은 서서히 자신의 영혼을 시들게 한다. 스페인의 철학자 미구엘 드 우나무노는 ‘슬픔의 습관을 떨쳐 버리라. 그리고 그대의 영혼을 회복하라’고 말한다. 좋은 시는 치유의 힘, 재생의 역할을 하며 읽는 이의 영혼의 심층부에 가 닿는다. 인간의 가슴은 돌과 같으며, 그것은 다른 돌에 의해서만 깨어질 수 있다. 비슬라바 쉼보르스카가 썼듯이 삶에 ‘두 번 일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고/일어나지도 않는다. 그런 까닭으로/우리는 연습 없이 태어나 실습 없이 죽는다/ 어떤 하루도 되풀이되지 않고/ 서로 닮은 두 밤도 없다/ 같은 두 번의 입맞춤도 없고/ 하나 같은 두 눈맞춤도 없다.’  에 실린 이 시들은 류시화 시인이 소개하는 또 한 번의 좋은 시들에의 특별한 초대이다.   
513    미래를 념려하다가 결국 현재와 미래를 다 놓쳐버리다... 댓글:  조회:2341  추천:0  2017-05-31
      신과의 인터뷰     I dreamed I had an interview with GOD. 나는 신과 인터뷰하는 꿈을 꿨습니다.     "so you would like to interview me?" GOD asked. "If you have the time," I said. 신이 말했습니다. "네가 나를 인터뷰 하고 싶다고 했느냐?"        "If you have the time," I said.  저는 대답했습니다. "시간이 있으시다면..."   GOD smiled.  신이 미소지었습니다   "My time is eternity... what questions do you have in mind for me?" "나의 시간은 영원이다... 무슨 질문을 품고 있느냐?"   "What surprises you most about humankind?"  "사람들을 보실때 어떤것이 가장 신기한지요?"    GOD answered  신이 대답했습니다.   "That they get bored with childhood, they rush to grow up, and then long to be children again."  "어린시절을 지루해 하는 것, 서둘러 자라나길 바라고,  다시 어린시절로 돌아가길 갈망하는 것."     "That they lose their health to make money... and then lose their money to restore their health."  "돈을 벌기 위해서 건강을 잃어 버리는 것,  그리고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 돈을 잃어 버리는 것."     "That by thinking anxiously about the future, they forget the present, such that they live in neither the present nor the future."  "미래를 염려하다가 현재를 놓쳐버리는 것,  결국 미래에도 현재에도 살지 못하는 것."     "That they live as if they will never die, and die as though they had never lived." "결코 죽지 않을 것처럼 살더니 결국 살았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죽는 것."   GOD''s hand took mine and we were silent for a while.  신이 나의 손을 잡았고 우리는 잠시 침묵에 빠졌습니다.   And then I asked,  그리고 난 질문했습니다.   "As a parent, what are some of life''s lessons you want your children to learn?"  "아버지로서 어떤 교훈들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해주고 싶으신가요?"   "To learn they cannot make anyone love them. All they can do is let themselves be loved."  "다른사람이 자기를 사랑하도록 강요할 수 없다는것을.... 단지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너 스스로를 사랑받게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To learn that it is not good to compare themselves to others."  "다른 사람과 너 자신을 비교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을.."   "To learn to forgive by praticing forgiveness." "용서함으로써 용서를 배우기를.."   "To learn that it only takes a few seconds to open profound wounds in those they love. and it can take many years to heal them."  "사랑하는 사람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기에는 단지 몇초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지만  그 상처가 아물기에는 몇년의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To learn that a rich person is not one who has the most, but is one who needs the least."  "부자는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가장 적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To learn that there are people who love them dearly,  but simply do not yet know how to express or show their feelings."  "너희에게 사랑을 표현 못하거나 말하지 못하는 사람중에서도 너희를 진실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것을..."   "To learn that two people can look at the same thing and see it differently."  "두사람이 똑같은 것을 보고서도 다르게 느낄수 있다는것을..."   "To learn that it is not enough that they forgive one another, but they must also forgive themselves."  "다른 사람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나 자신 역시도 용서해야만 된다는 것을..."   "thank you for your time," I said humbly.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겸손히 말했습니다.   "Is there anything else you''d like your children to know?"  "당신의 자녀들에게 해주고 싶으신 말씀이 또 있나요?"    GOD smiled and said... 신이 미소지으며 대답했습니다...   "Just know that I am here." "늘 기억하거라.. 내가 항상 이곳에 있음을..."   "Always."  "언제나..."   "All ways."  "모든 방법으로...." "神과 인터뷰"- 나짐 히크메트    
512    수필은 원칙적으로 산문으로 쓰여져야... 댓글:  조회:2648  추천:0  2017-05-31
수필이 지닌 여러 가지 특성 또는 특징을 좀더 구체적으로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은 5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무형식성(無形式性)  2) 산문성(散文性)  3) 자기 고백성(自己 告白性)  4) 광범성(廣範性)  5) 창조성(創造性)과 문학성(文學性)  이를 하나씩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무형식성(無形式性)  수필은 이미 잘 알려줘 있는 바와 같이 어떤 형식(形式)으로부터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문학이다.  즉 일정한 형식이 없는 문학 장르가 바로 수필인 것이다.  이것이 수필문학이 지닌 가장 큰 특성 중의 하나요, 수필문학이 지닌 독특한 개성이다.  수필문학을 가리켜 흔히 '무형식의 형식'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에 비해 수설이나 시, 희곡 등은 각기 그 나름대로 독특한 형식에 의해 쓰여진다.  즉 소설이나 시, 희곡 드은 각각 정해져 있는 형식이나 제약을 무시하거나 거부해서는 안되며,  최소한도라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소설에 있어서는 허구(虛構)에 기초를 둔 인물과 사건, 배경,  줄거리 등을 설정하고 등장 인물의 호칭 등도 미리 정해 두어야 한다.  이러한 형식의 설정을 무시하거나 거부하고서는 소설이 될 수 없다.  또한 시에 있어서도 운율(韻律)이나 메타포, 시어(詩語)의 선택과 압축  또는 절약 등 시를 쓰는데 필요하고도 요구되는 형식을 무시하거나 거부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희곡에 있어서도 무대나 장면, 출연진, 대화 내용,  연기 방법 등을 세밀히 고려하고 지시하면서 형식의 제약을 받아야한다.  그러나 수필에 있어서는 이러한 형식이나 제약 등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  그저 쓰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쓰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김진섭(金晋燮)은 수필문학의 이러한 '형식의 자유',  또는 '무형식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 시, 소설, 희곡 등 속의 문학이 일견 명료한 형식을 가지고 있는데 대해서,  수필은 문학으로서의 일정한 형식을 갖지 못하고 수필은 그것이 차라리 작품으로서 형식을 갖지 않는다.  그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경우에 의해서는 제약도 없으며, 질서도 없으며, 계통도 없이 자유롭고  산만하게 쓰인 모든 문장까지도 포함할 수 있는 까닭으로 주는 것이지만,  사실 문학은 자기의 협애(狹隘)한 영역안에 수필이라 하는 이 자유분방하고  경묘탈려(輕妙脫麗)하고 변화무쌍한 양자(樣子)를 포함하기 어려운 감이 없지 않다......  김광섭(金珖燮)도 그의 [수필문학 소고(小考)]에서  수필문학의 무형식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문학 형식에서 보면 수필에는 소설이나 시나 희곡에서 보는 바와 같은 어떤 완성된 폼이 없다.  단편 소설을 제작하려면 우리는 적어도 애드거 알렌 포나, 안톤 체홉이나  혹은 모파상에게 잠시라도 사숙(私塾)하여야 하겠고, 시나 희곡을 지으려면  괴테나 사옹(沙翁)이 나 혹은 입센 등에게 완성된 폼은 비록 모델로 삼지 않는다 할지언정  살펴볼 아량쯤은 있 어야 하겠지만, 수필에 있어서는 그 형식을 구하거나,  참고하려고 반드시 찰스 램이나 헤를 릿드를 찾을 필요성까지는 없을 것 같다.  가장 아름다운 수필을 찾아 우리의 문학적 항심 (恒心)을 만족시키며  충족시키는 점은 찬하여 마지 않을 바이나, 그 형식의 섭취에 구속될 바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형식으로서의 수필문학은 무형식이 그 형식적 특징이다.  이것은 수필의 운명 이요, 내용이다.  이와같은 견해들에 대해 이현복(李賢馥)은  그의 [수필문학 작품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를 통해 약간 다른 견해를 피력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필의 형식은 과연 무형식의 형식인가?  '무형식'이란 말은 김진섭의 말처럼  '제약도, 질서도, 계통도 없이 자유롭게 산만하게 쓰여지는 것'이고,  김광섭의 경우처럼 '붓가는 대로 써지는 시필(試筆)쯤에 그치는 것'이며,  피천득의 견해처럼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이 고치를 만들 듯이 그렇게 써지는 것'일까?  이 말들을 표면적 의미로 본다면 수필은 낙서요,  잡다한 생각의 산만한 표출이요, 문장 수련의 과정일 뿐이다.  이와 같은 수필관에서 쓰여진 수필은 어의(語義)대로의 수필 일 뿐 문학적 수필은 아니다.  수필문학에서 '무형식'이란 말은 필자의 마음이 형식이라 하리 만큼 일정한 형식이 없다는 의미이다.  수필의 형식에는 인물, 사건, 배경이라는 소설적인 구성도 없고 논거를 제시해야 하는  논문의 제약도 받지 않으며 일정한 사물이나 과제를 쉽게 풀어서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는 설명문의 제약도 받지 않는다.  수필은 다만 초점을 향하여 문장이 집결되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전문에 생기가 넘치는 글이란 뜻이다.  또한 문장기법상에서 '무형식'이란 말은 자유롭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어  설명, 논증, 서사, 묘사라는 문장의 세가지 기술 양식을 모두 부려 쓸 수 있으므로  그 형식이 자유롭다는 뜻이다.  또 다른 의미로는 '형식적이 아닌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이  무형식의 내용으로 오직 자신에 충실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무형식이란 말은 붓가는 대로의 무질서한 글이 아닌 것이다.  결국 무형식이란 말은 일정한 틀에 박힌 틀이 없다는 뜻에서 플롯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수필에서 무형식의 '붓가는 대로'를 고쳐 풀이하면 붓가는 대로써도 될 만큼  문장력에 있어 숙련에 들어간 작가가 '한가로운 심경'에서 '마음의 여유'를 갖고  '의지'나 '정감'의 정화를 원숙한 언어로 표출해 낸 것이 수필이라 하여  중년고개를 넘어서 원숙한 글이란 뜻으로 해석된다.  그러므로 수필은 쉽게 쓰여지는 글이 아니라는 뜻이다.  결국 수필은 문장의 수련과 인생의 달관에서 자연히 유로되는 격조 놓은 문학이다....  한편 문덕수(文德守)도 그의 [신문장강화](新文章講話)에서,  ...수필은 인간의 본성을 바탕으로 다른 형식의 문학이 형식으로서의  뚜렷한 경계(境界)를 그었을 때 그 어느 형식에도 속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형식을 용해할 수 있는 부분으로 남은 것이다.....  라고 하며 수필문학의 넓은 포용성을 강조했다.  조연현(趙演鉉) 또한 그의 [문학개론]에서  '수필은 여러 문학 양식 중에서도 가장 그 형식이 자유롭다.  즉 수필에는 서정시적 정서나 감흥은 물론, 서사시(소설)적 구성이나 희곡적 대화,  그리고 비평적 판단 작용까지도 다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는 구성이다'라면서  수필문학이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다는 데에는 공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그는 곧이어 '...그렇다고 수필이 무형식적 무성격적인 것은 아니다.  서정시적 정서나 감흥을 가지면서 서정시가 아니고, 소설의 구성을 가지되 소설이 아니고,  희곡적 비평적 요소를 가지면서도 희곡도 비평(批評)도 아닌데  수필의 독자적인 양식이 있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그의 이러한 견해는 '수필문학이 무형식의 문학' 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소설이나 시, 희곡 등 다른 문학 장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수필이 전혀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즉 수필문학의 영역이 넓기 때문에 다른 문학 장르들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다.  구인환(丘仁煥)과 구창환(丘昌煥)도 그들이 공동 집필한 [문학개론]에서,  ...수필도 구성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구성의 진행이나 방법에 별다른 제약을 받음이 없이 씌여진다.  여기에 수필의 무형식적 형식의 특성이 있는 것이다...  라고 하여 수필문학의 형식이 자유롭기는 하지만 전혀 제약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한편 김시헌(金時憲)은 그의 [대중수필과 본격수필]이라는 글에서  수필의 표현 형식과 호칭 문제를 연관시켜 언급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수필은 표현 형식이 자유롭고 대부분 1인칭의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다른 문학인 시, 소설, 희곡은 제작 형식이 고정될 뿐만 아니라, 호칭도 여러 가지로 사용되고 있다.  1인칭 호칭을 쓴다해도 그 1인칭은 작가 자신을 가리키지 않고  작품 속의 주인공을 지칭하고 있다.  그런데 수필과 잡문은 다같이 무형식의 형식이라는 자유로운 방법에 의해서 쓰여지고,  회칭도 함께 1인칭을 대부분 쓰고 있다.  꼭 그 1인칭이 작품 소그이 주인공이 아니고 작가 자신을 바로 가리키고 있다....  이와같은 수필문학의 특성이나 특질, 또는 수필의 본질,  그리고 여러 견해들을 종합해 볼 때 수필이 다른 여러문학 장르들에 비해  그 형식이 훨씬 자유롭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수필문학이 이처럼 형식에서 무척 자유롭고  '무형식의 문학'인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 형식이나 제약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2) 산문성(散文性)  흔히 수필을 가리켜 '산문(散文)문학'이라고 한다.  그리고 수필은 사실 산문으로 쓰여진 글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수필이 산문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또 수필이란 대부분 산문으로 쓰여지고 있다는 뜻도 된다.  물론 수필 중에는 운문(韻文)으로 쓰여진 것도 더러 있다.  이를테면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는 원래 운문체로 쓰여진 글이지만,  그 내용을 보면 일기체 형식의 기행문이다.  따라서 이 [일동장유가]는 운문 형식으로 쓰여진 수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수필이란 보통 산문으로 쓰여진 것을 말한다.  즉 적당한 길이의 산문으로 쓰여진 것이 수필의 일반적인 모습인 것이다.  조연현도 그의 [문학개론]에서 수필의 사눔ㄴ성에 대해,  ...수필은 산문문학의 대표적 구성이라고 볼 때 수필의 범위는 거의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광범해진다...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수필은 전문적 산문(학문이나 과학)이외의 창작적인 요소를 지닌,  모든 산문문학적 문장을 의미한다... 라고 했다.  다시 말해 수필은 산문으로 쓰여진 문학 구성이라는 뜻이다.  김구봉은 그의 [내력과 성격으로 본 수필의 문학성과 창조성]이란 글을 통해  수필이 역시 '산문문학'임을 강조하고 있다.  즉, ...정서나 사상을 상상의 힘을 빌어서 언어 도는 문자로써 그것을 표현하는  예술 작품을 문학이라고 한다면, 수필은 다른 문학 장르와 더불어 예술 작품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전설, 가요, 화술이 언어에만 의존한 구비문학(口碑文學) 또는 전승문학(傳乘文學)임에 대하여  수필은 시, 소설 등과 더불어 문자에 의한 기록문학이며,  그 기록문학 중에서도 순수문학의 영역에 든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수필은 어떤 정치적 또는 계몽적 동기에서 유발된 공리주의적 목적문학에 대하여  가장 순수한 예술적 충동에 의해서 형성된 문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수필은 문학의 전 기능에 의한 구극적(究極的)인 순수성을 추구하며  사회적 사상적인 색채가 없이 작가의 순수한 예술적 욕구로써 형성되며,  한갓 흥미 위주의 대중문학에 대하여, 미적 정서에 호소하여 인간 탐구를 지향하는 문학인 것이다...  ... 그런데 수필은 원래 독립된 문학적 형태로,  하나의 장르를 차지하지 못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수필은 각종 기록적 서술의 일보, 즉 속성을 이루고 있는 문학적 표현이거나  순수문학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형식적 기교에 불과했다.  그런데 수필은 여기에서 문학적 속성만을 독립시키고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형식적인 기교에서 탈피하여 인간 본연의 순수 의식과 정서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산문의 창작을 시도함으로써 발생한 것이 수필인 것이다....  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는 '새로운 산문의 창작을 시도함으로써 발생한 것이 수필' 이라며  수필이 새로운 산문을 창작하기 위한 시도에서 발생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기실 산문은 근대에 와서 발전했다.  또한 근대에 와서 이러한 산문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새로운 시도에 의해서 태어난 것이 바로 수필문학이다.  옛날에는 서사시와 같은 운문이 널리 성행했다.  또한 옛날에는 음유시인(吟遊詩人)들이 운율에 맞추어서 시를 읊으면 그것을 듣는 사람들은  흡사 노래를 들을 때처럼 장단을 맞추거나 따라서 하기도 하고,  시의 운율에 맞추어 춤을 추기도 했다.  프랑스의 샹송이 원래는 프랑스의 음유시인들이 부르던 시에서 발달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운문은 주관적이고도도 정서적이며 비논리적인 경향이 강하다.  이에 비해 산문은 보다 객관적이고 이지적(理智的)이며 논리적인 경향이 강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산문은 근대에 와서 과학정신,  합리주의 정신이 등장하고 발전하면서 함께 발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권위적, 보수적, 폐쇄적인 사상이나 가치관이 지배적이었던 중세 시대에서 보다 개방적이며  과학적인 정신과 합리주의 정신 등이 확산되면서 등장하고 발전한 것이 바로 산문인 셈이다.  프랑스의 몽테뉴나 영국의 베이컨이 수필문학을 새롭게 탄생시키며  수필문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도 바로 이러한 시기(16~17세기)였는데,  이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또 몽테뉴나 베이컨의 수필 작품들이 사람들의 관심과 호응을 얻게 된 데에는  그들의 수필 박품들이 훌륭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와 함께 과학 정신과 합리주의 정신 등이 확산되던 시기와  '산문의 문학'인 수필이 잘 마자 떨어진 것도 큰 이유가 된다.  뿐만 아니라 산문은 그 자체가 과학 정신과 합리주의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물론 소설도 산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소설이란 옛날의 전설이나 서사시, 중세에 있어서의 이야기 등을 이어 받아  근대에 이르러 발달한 문학 장르로서 작가의 상상력에 의하여 구상되거나  어떤 사실이 각색된 주로 산문체(散文體)의 이야기를 말한다.  그러나 소설은 작가의 생활이 반영되어 있으되,  작가의 상상력에 의한 허구의 세계를 산문으로 표현하는 문학이다.  다시 말해 소설은 '픽션(fiction)의 이야기'인 것이다.  서양에서는 소설을 노블(novel),  혹은 로망(roman)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말들 속에서 '이야기'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프랑스의 문학자이자 평론가였던 띠보데는  그의 [소설의 독자]라는 글에서 로망이라는 말의 유래에 대해서,  ,,,로망(즉, 소설)은 그 이름이 보여 주고 있는 것과 같이 승려 문학시대에 있어서  라틴어로 쓰여진 정규적인 적서에 대하여 속어(俗語)로 쓰여진 것을 의미하고 있다.  로망이라는 말이 결국 '이야기'를 뜻하게 된 것은 로망어,  즉 속어로 쓰여진 것 대부분이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것도 소설이 원래 '이야기'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소설(小說)이라는 한자어도 '시중(市中)에 일어나거나 들려오는  여러 가지 일이나 이야기 따위를 기록한 것'이라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또한 옛날에는 소설책을 가리켜 흔히 '이야기책' 이라고 했는데,  이것도 소설과 이야기라는 말이 거의 같은 뜻으로 쓰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부터 사람들 사이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던 여러 가지 이야기나  구전문학이 그대로 혹은 새로 다듬어지거나 보완되고, 여기에다 작가의 상상이나 허구,  가공 등이 보태어져 산문으로 구성하여 쓴 글이 바로 소설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을 지닌 소설과는 달리 수필은 자가의 생활을 직접 산문으로 구성하여 쓴 것이다.  즉 같은 산문으로 구성하더라도 소설과는 달리 작가의 상상력에 의한 허구가 배제된 거이 수필이다.  물론 최근에 와서는 수필에 있어서도 일부나마 허구가 용납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아직까지 소수 의견에 불과하며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뿐만 아니라 수필에서는 근본적으로 허구가 인정되어 오지 않았던 것이 이제까지의 통례이다.  때문에 오창익(吳蒼翼)은 그의 [문장은 주제 의미화의 생명력 요소]라는 글에서  수필이 다른 산문들과는 다리 허구나 과장 등이 배제되고 진솔해야 함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다.  ...그래서 여타 산문과는 다리 수필의 문장은 효과적인 의미 전달을 위한 솔직성과 진실성,  그리고 상징과 비유, 암시와 상상적 수사기능을 생명시 한다.  자가 자신이 하앙 자기 작품의 주인공이어야 하는 문학이기 때문에 지나친 논리나 주장,  과장이나 미화(美化)로써는 독자의 공감과 감동은 기대하기 어렵다....  또한 이현복은 그의 [수필의 문학성]이라는 글을 통해 수필은 산문의 문학이며  과학 정신과 합리주의 정신에 바탕을 둔 문학정신이 바로 산문정신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흔히 현대를 '산문의 시대'라고 한다.  문학의 양식이 시대의 산물이라고 할 때 현대라는 과학문명의 시대에 적합한 기술양식은 산문이다.  과학정신에 가까운 문학정신은 산문정신이다.  조연현은 '산문정신은 토의의 저인으로서 가공 보다는 사실,  주관보다는 지성에 더많이 기초한 합리주의적인 증명정신이다'고 하였다.  근년에 이르러 논픽션(non-fiction)이 많이 읽히고 있는 것은 이런 경향을 말한 것이다.  현대인은 인생 문제에 대하여  직접 그 인격의 체험과 진실을 직접 듣고 싶어하는 요구에 따른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은 경향에 편승하여 산문문학인 수필문학은 환영 받는 문학의 한 장르로 정착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아나톨 프랑스(Anatikefrance)는  '수필이 어느 날엔가는 온 문예를 흡수해 버릴 것이다.  오늘이 그 실현의 초기 단계이다' 라고 한 바 있다....  ...수필문학은 산문문학이다. 산문정신은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비판정신이다.  여기에서 비판성이란 준엄하고 냉혹한 것이 아니다.  따뜻한 인간미를 풍기는 비판이다.  그 비판은 자유로운 유희의 자세와 분위기에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하면 비판의 기준이 율법이나 윤리적 목적을 벗어나서  오로지 변화하고 있는 그대로의 생활을 사랑하고,  인생의 기쁨을 누리고 싶은 순수한 충동에서의 비판이다...  결국 수필은 독특한 특성을 지닌 산문문학이며,  수필은 원칙적으로 산문으로 쓰여져야 하는 것이다.  더러 운문으로 쓰여진 수필도 있으나 이것을 수필의 본도로 보기는 어렵다.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로 보아야 할 것이다.  ------------------------------------------------------------------------------       절 ―이홍섭(1965∼) 일평생 농사만 지으시다 돌아가신 작은할아버지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절을 잘하셨다 제삿날이 다가오면 나는 무엇보다 작은할아버지께서 절하시는 모습이 기다려지곤 했는데 그 작은 몸을 다소곳하게 오그리고 온몸에 빈틈없이 정성을 다하는 자세란 천하의 귀신들도 감동하지 않고는 못 배길 모습이라 세상사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가만히 그 모습을 떠올리며 두 손을 가지런히 하고, 발끝을 모아보지만     스스로 생각해보아도 모자라도 한참은 모자란 자세라 제풀에 꺾여 부끄러워하기도 하지만 먼 훗날 내 자식이 또한 영글어 제삿날 내 절하는 모습을 뒤에서 훔쳐볼 때 그 모습 그대로 그리워지길   그리워져서 천하의 귀신들도 감동하지 않고는 못 배길 모습이라 생각해주길 내처 기대하며 나는 또 두 손을 가지런히 하고 가만히 발끝을 모아보는 것이다 그 옛날에는 손윗사람을 만나면 절을 하는 게 상례였지만 요새는 거의 죽은 사람한테만 한다. 개신교 신자들은 제사나 차례를 지내지 않으니까 그나마도 절을 할 일이 없을 테다. 나는 개신교 신자도 아니건만 십대 이후로 절을 한 적이 없다. 동창생 몇과 은사님을 뵈러 갔던 어느 설날이 생각난다. 어느샌가 일행이 은사께 줄줄이 세배를 드리는 게 아닌가. 이윽고 한구석에서 몸을 비틀고 있는 나를 힐끗 보시는 은사님께 쥐어짜듯 말씀드렸다. “저는 세배 안 해요.” 그에 심드렁히 “그러든지” 하실 줄 알았건만 은사님은 엄한 눈빛으로 “왜?” 하고 물으셨다. “그냥요…”라고밖에 드릴 말씀이 없었다. 절하는 동작을 보이는 데 대한 무대 공포증이 빚어낸 행태였는데, 은사님은 본데없이 자란 게 분명할 이 제자가 걱정스러우셨을 테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절하는 법도 제대로 모른다. 절은 공경의 마음이 우선이지만 격식에 따른 자세도 중요하리라. 모든 동작처럼 절도 기본자세가 됐을 때 아름다우리라. ‘두 손을 가지런히 하고, 발끝을 모아’, ‘그 작은 몸을 다소곳하게 오그리고/온몸에 빈틈없이 정성을 다하는 자세란/천하의 귀신들도 감동하지 않고는 못 배길’ 뿐 아니라 산 사람들한테도 감동을 줄 테다. 운동 삼아서라도 절하는 연습을 해볼까. 나도 절을 아름답게 할 줄 알았다면 은사님께 날아갈 듯 세배를 드렸으련만. 화자와는 정반대로 오늘날 ‘본때 있는’ 집안에서 ‘본데없이’ 자란 이들에게도 절하는 법을 배우기를 권하고 싶다.  
조선족 원로시인 최룡관  동양일보 방문…수십 년간 문학 통해 우정 다져 (ZOGLO) 2017년5월30일  ‘2017 상화문학제’ 국제학술세미나 발제차 한국 방문 “충북과 동양일보는 언제나 마음이 훈훈해 지는 곳”   최룡관 시인      (동양일보 김재옥 기자)= 중국 연변 조선족 원로시인 최룡관(74) 연변동북아예술연구회 회장이 29일 동양일보를 찾았다. 지난 26~27일 대구에서 열린 ‘2017 상화문학제’ 일환으로 열린 이상화 국제학술세미나에서 발제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최 시인은 수십 년간 문학을 통해 인연을 맺어 온 동양일보를 한국 방문시 수시로 찾아 연변 문학계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상화기념사업회의 초청으로 문학제에 참석한 최 시인은 ‘상화와 시대정신’을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 ‘남북통일 시대의 상화’를 주제로 발제했다.   최 시인은 “포석 조명희 선생과 같이 이상화 시인도 연변 중학교 교과서에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60년 동안 실릴 정도로 연변에서도 잘 알려진 문인”이라면서 “연변에서 포석 선생을 추모하고 그의 문학정신을 기리듯이 3년 전부터 ‘이상화 문학상’을 제정해 시상해 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 시인이 상화문학제를 마치자마자 동양일보를 찾은 것은 충북 진천과 연변에서 열리고 있는 포석 조명희 문학제를 개최해오며 쌓은 우정 때문이었다. 한국에 올 때 동양일보를 찾지 않으면 마음에 불편하다는 최 시인은 그 이유를 시인인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과 문학으로 깊은 인연을 맺어 만나면 가슴이 훈훈해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늘 6월 3일 출국하는 최 시인은 한국에 머물면서 연변에서부터 동행한 홍현기 서양화가 겸 설치미술가와 한국의 새로운 문학 작품들을 두루 살필 예정이다.   최 시인은 교사와 기자, 편집 사업 등을 했으며 현재 중국작가협회·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으로 한국민조시협회 국제자문위원, 연변일보사 문화부 부장,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연변동북아문학연구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저서로 ‘최룡관문집’(1~4권), ‘금단의 열매’, ‘반쪽은 다른 얼굴이다’가 있다. 길림성소수민족문학상, 한국청마문학연구상, 한국민조시상 등을 수상했다. /동양일보
510    "수필쟁이"들이여, 수필이라는걸 알고나 씁니껴?!...(2) 댓글:  조회:3048  추천:0  2017-05-31
  수필을 분류할 때 예전에는 흔히  경(輕) 수필과 중(重) 수필의 두가지로 나누어 부르곤 했다.  그리고 근래에는 이것을 '연(軟) 수필'과 '경(輕) 수필'로 구분하여 부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경(輕) 수필'과 '경(硬) 수필'은 그 한자는 서로 다르지만  우리말로는 다같이 '경'이기 때문에 혼동하기 쉽다.  뿐만 아니라 한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나  '한글 세대'인 사람들에게는 그 뜻이 빨리 와닿지 않는 수가 많다.  따라서 필자는 이를 분류할 때 '경수필'과 '중수필'이니.  '연수필'과 '경수필'이니 하고 어렵게 부를 게 아니라 이해하기 쉬운  우리말로 된 '가벼운 수필'과 '무거운 수필'로 부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아름답고 이해하기 쉬운 우리말이 버젓이 있는 데에도 불구하고  굳이 외래어를 쓸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요즘에는 외래어로 쓰던 습관을 버리고  '가벼운 수필'과 '무거운 수필'로 분류해서 부르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반가운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가벼운 수필'과 '무거운 수필'에는 어떤 차이가 있으며,  또 어떻게 구별되는가?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경계가 칼로 자른 것처럼 명확하지 않고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두 가지의 차이나 구분은 절대적인 것이 될 수도 없으며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더욱 구별하기 어렵다.  그래서 류병석(柳炳奭)도 「수필은 논설문이 되어야」라는 글에서,  '수필은 주관적이다 할 때 어떤 무엇과 대비하여 상대적으로 주관적일 뿐이다.  다른 어떤 것과 대비적으로 주관적일 수는 없는 일이다' 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그 차이가 명확하지 않고  구별하기가 어렵다고는 해도 그 차이 또한 분명히 있다.  또 그렇기 때문에 구별해 낼 수도 있다.  더러 그 차이가 명확하지도 않고 그 구별도 어려운 터에  구태여 구별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필문학의 올바른 이해와 작품 분석, 작가의 의도나 작품 성향,  작품에 대한 공정한 가치 평가,  나아가서는 수필문학의 발전과 보급 확산 등을 위해서는 그 구별이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그 차이나 구별이 명확하지 않다고 해서  구별 자체가 필요없거나 무가치한 것은 더욱 아니다.  마치 바다와 강이 만나는 지점의 경계 구분이 명확하지 않더라도  바다와 강은 엄연히 다르고, 서로 구별되어야 하는 것과도 같다.  가벼운 수필과 무거운 수필을 구별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이것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상대적인 경우가 많다.  또 보는 사람의 관점이나 성향 등에 다라 달라질 수도 있다.  다만 일반적으로 볼 때 가벼운 수필은 우선 감성적이거나 정감적,  은유적인 경우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에 비해 무거운 수필은 보다 이지적이거나 논리적이며 지성적,  논설적, 직설적인 경우가 많은 것을 보게 된다.  물론 이것도 절대적인 것은 못되며, 대개 그렇다는 것이다.  때문에 가벼운 수필로 분류되는 것들 중에도 이지적이거나 논리적,  지성적, 논설적, 직설적인 수법이나 표현 등이 얼마든지 담겨 있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무거운 수필로 분류되는 것들 중에도 감성적이거나 정감적,  은유적인 수법이나 표현 등이 자주 발견된다.  다만 전체 내용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다른 작품들과의 비교에서의  상대적인 비중 등으로 볼 때 어떤 것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수가 많을 뿐이다.  둘째, 가벼운 수필은 그 표현에 있어 보다 부드럽고 우아하며  문학적인 표현을 많이 쓰고 있는 편이다.  가벼운 수필을 흔히 연수필이라고 하여,  '연할 연(軟)'자를 쓰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이에 비해 무거운 수필은 그 표현이 대개 딱딱하고 직선적이며 무거운 느낌을 풍기는 수가 많다.  또 문학적인 표현보다는 학술적이거나 철학적인 표현 또는  강건한 문체나 메마른 문체 등이 많이 쓰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무거운 수필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경(硬) 수필에서 굳이  '굳을, 단다난, 강할 경(硬)'자를 쓰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또 보는 관점이나 다른 작품과의 비교 등에 따라서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셋째, 가벼운 수필과 무거운 수필을 구별할 때에 있어서 그 내용을 살펴볼 때  자기 고백적이며 개인의 신변문제나 자기 주변의 사소한 일들을 주고 다루었을 때에는  대개 가벼운 수필로 분류할 수 있다.  즉 작품 속에 '나'가 많이 개입되어 있으면서 작가 자신을 스스로 고백하거나 노출시키고,  개인의 신변문제나 사소한 주변 일들을 주로 다루었다면  일단은 가벼운 수필의 범주에 들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무거운 수필은 이런 내용이 적은 편이다.  대신 우리의 사회현실이나 여러 가지 사회적인 문제,  여러 사람들의 문제 등을 보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바라고 객관적,  철학적, 논리적, 보편적, 사색적으로 깊이 생각하여 표출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이밖에도 보다 비형식적(infomal)인가 형식적(formal)인가,  보다 비비평적(非批評的)인가 비평적인가,  보다 주관적인가 객관적인가,  보다 시적(詩的)인가 철학적, 논리적인가,  보다 개성적인가 몰개성적인가,  보다 위트나 유머가 넘치는가 그렇지 않은가,  보다 신비적인가 현실적,  보편적인가 등을 따져 가벼운 수필과 무거운 수필의 구별기준으로 삼기도 한다.  또 원고의 분량에 따라서 구분하는 수도 있는데 우선 가벼운 수필은 대개  원고지로 10 ∼ 15매 정도의 짧은 분량인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본다.  그리고 무거운 수필은 대개 이보다 분량이 훨씬 더 많은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기준들도 모두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역시 상대적일 뿐이며, 보는 관점이나 다른 작품들과의 비교 등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분류될 수도 있다.  가벼운 수필과 무거운 수필을 구분하는 것은 이처럼 불명확하고 어려움도 많지만,  독자들의 빠른 이해를 돕기 위해 이제까지 소개한 것들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⑴ 가벼운 수필  ① 감성적, 정감적, 은유적이다.  ② 그 표현에 있어 보다 부드럽고 우아하며 문학적이다.  또 시적인 표현도 자주 발견된다.  ③ 자기 고백적이며, 개인의 신변문제나 주변의 사소한 일들을 다룬 경우가 많다.  ④ 비형식적, 비논리적, 비비평적이다.  ⑤ 주관적, 개성적, 신비적인 경향이 있다.  ⑥ 위트나 유머가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  ⑦ 그 분량이 대개 원고지로 10∼15매 정도 짧은 편이다.  ⑵ 무거운 수필  ① 이지적, 논리적, 비평적, 논설적, 직설적이다.  ② 그 표현에 있어 보다 딱딱하고 직선적이며 학술적, 철학적이다.  또 강건한 문체나 메마른 문체 등이 많이 쓰인다. 시적인 표현이다.  ③ 자기 고백적인 내용이 적다. 대신 사회 현실문제나 공공의 문제 등을 많이 다룬다.  ④ 냉철하고도 이성적이며, 보다 객관적, 철학적, 논리적, 보편적, 사색적이다.  ⑤ 형식적이며, 비평적이다.  ⑥ 몰개성적이며, 위트나 유머가 적다.  ⑦ 현실적이다.  ⑧ 그 분량이 대개 많은 편이다.  우리가 흔히 수필이라고 하는 것들 중에는 무거운 수필보다는 가벼운 수필이 훨씬 더 많은 편이다.  또 수필을 전문으로 쓰는 수필가를 비롯하여 수필을 쓰고 있는 많은 사람들,  또는 수필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 중에는 가벼운 수필을 주로 쓰거나 쓰겠다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심지어 수필이라고 하면 가벼운 수필의 형식만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래서 무거운 수필의 글은 수필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마저 있다.  그러나 수필문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재평가, 수필문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무거운 수필에 대한 인식도 새로워져야 하고 관심도 높아져야 한다.  그리고 수준 높고 문학성도 있는 '무거운 수필'도 많이 발표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제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일부의 철학가나 대학교수, 언론인, 수필가 등의  '무거운 수필' 외에는 아주 적은 편이다.  이에 비해 서양에서는 우리보다 '무거운 수필'이 많이 발표되고 있고 그 작품 수준도 높은 편이다.  서양에서는 찰스 램을 '가벼운 수필'의 대표격으로, 프랜시스 베이컨을  '무거운 수필'의 대표격으로 꼽고 있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한국 수필문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이양하(李敭河)와 김진섭(金晋燮)을 각각 '가벼운 수필'과 '무거운 수필'의 대표격으로 여긴다.  이 두 사람 이후에는 피천득(皮千得) 등이 수준 높은 '무거운 수필'을 많이 썼다.  그러나 '가벼운 수필'과 '무거운 수필'의 구분도 필요한 일이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엄연히 수필문학에 속하므로  문학으로서의 작품성이 훌륭해야 한다는 점이다.  --------------------------------------------------------------------------     막고 품다 ―정끝별(1964∼)         김칫국부터 먼저 마실 때 코가 석자나 빠져 있을 때 일갈했던 엄마의 입말, 막고 품어라! 서정춘 시인의 마부 아버지 그러니까 미당이 알아봤다는 진짜배기 시인의 말을 듣는 오늘에서야 그 말을 풀어내네 낚시질 못하는 놈, 둠벙 막고 푸라네 빠져나갈 길 막고 갇힌 물 다 푸라네 길이 막히면 길에 주저앉아 길을 파라네 열 마지기 논둑 밖 넘어 만주로 일본으로 이북으로 튀고 싶으셨던 아버지도 니들만 아니었으면,을 입에 다신 채 밤보따리를 싸고 또 싸셨던 엄마도 막고 품어 일가를 이루셨다 얼마나 주저앉아 막고 품으셨을까 물 없는 바닥에서 잡게 될 길 막힌 외길에서 품게 될 그 고기가 설령 미꾸라지 몇 마리라 할지라도 그 물이 바다라 할지라도     메모를 휘갈겨 놓은 종이쪽이니 우편봉투니 공책이니 수첩 등이 과자봉지들이며 깡통이며 컵과 뒤섞여 퇴적층을 이룬 내 식탁 위 어딘가에 정끝별과 그 가족의 사진이 여러 컷 담긴 종이 한 장이 있을 테다. 정끝별 특집이 실린 문예지에서 뜯어낸 것이다. 그 자신이나 가족 구성원이 세상과 겉돌고 결손 된 이들을 많이 봐와서일까, 시인이 제공했을 스냅사진들에서 엿보이는 화목하고 온전한 가정의 딸의 면모가 신선했다. 그리고 부러움과 그리움이 아릿하게 피어올랐다. 정끝별 시의 곧음, 품 넓음, 조화로운 정서, 한 마디로 건강함의 유래를 알 것 같았다.  정끝별 시는 능청스러우리만치 청산유수로 낭창낭창 읊어내는 말맛이 일품이다. 내용은 웅숭깊다. 그 나이에 이런 시어를? 그런데 생각해 보니 정끝별도 이제 만만치 않은 나이다. “이제는 애들도 다 마흔이 넘었어!”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애들(?)도 다 쉰이 넘었네! 형제 많은 집의 막내는 철부지 응석받이거나 애어른이기 쉬운데, 정끝별은 후자다. 자기보다 연배 높은 가족들 속에서 일찍부터 그들의 경험과 좋은 것을 다 빨아들인 막내. 그래서일까. 그의 초기 시들에서는 어딘지 겉늙은 느낌을 받았는데, 언제부턴가 시가 활기차게 무르익었다. ‘막고 품다’는 시에 나왔듯이, 둑을 쌓아 물길을 막고 그 물을 다 퍼내 물고기를 모조리 잡는다는 뜻이다. 살다 보면 ‘김칫국부터 마실 때’도 있고 코가 석자나 빠질 일도 만난다. 어차피 닥친 일이라면 피하지 말고, 요령도 부리지 말고, 받아들여 품으라는 어머니 말씀. 결국은 우직한 이들이 지구를 지킨다!
509    "수필쟁이"들이여, 수필이라는걸 알고나 씁니껴?!... 댓글:  조회:2553  추천:0  2017-05-31
수필의 내용과 특성   삼성문화사(三星文化社)에서 간행된 「국어대사전」을 보면 수필은 개념과 정의(正義)에 대해,  "수필은 형식에 묶이지 않고 듣고 본 것, 체험한 것, 느낀 것 등을 생각나는 대로 쓰는 산문 형식의 짤막한 글, 또는 그러한 글투의 작품. 사건 체계를 갖지 않으며, 개성적, 관조적이며, 인간성이 내포되게 위트(wit), 유우머(humour), 예지로써 표현함. 상화(想華),만문(漫文), 만필(漫筆), 수필문, 에세이(essay)"라고 적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 그 형식이 자유롭고 제한이나 구속성이 적으며 다양한 소재와 자유로운 사고(思考)에 바탕을 두고 쓰여지는, 짤막한 분량의 산문 문학이 바로 수필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흔히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씌어지는 글"이라고도 말한다.  그리고 이 말의 의미를 잘못 해석하여 '수필은 마음 내키는 대로, 또는 생각나는 대로 종이에 써놓으면 되는 글'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심지어 심심풀이로 끄적거려 놓은 글을 수필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수필의 개념이나 본질을 잘 모르는 데에서 나오는 무지의 소치이다.  또한 마음이 내키는 대로, 또는 심심풀이로 종이에 끄적거려 놓은 글은 어디까지나 낙서에 불과할 뿐 결코 수필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설령 그것이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쓴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정성을 기울여 쓴 글이라고 해도 그 글 속에 수필로서의 문학성과 예술성, 수필로서 갖추어야 할 요소 등이 결여되어 있으면 이것도 결코 수필이라고 할 수 없다.  단지 이것은 잡문에 불과한 글일 뿐이다.  자신의 지식이나 생각, 또는 경험 따위를 충분한 여과 과정도 없이 마구 나열해 놓은 글,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해 놓은 글이나 어떤 개인적·이기적인 목적이 담겨 있는 글, 유명한 작가나 사상가 등의 경구나 말을 필요 이상으로 인용하며 짜깁기해 놓은 글, 다른 사람의 시나 소설 등에서 인용해 놓은 듯한 구절이나 아름다운 형용사가 나열된 글, 깊은 상념이나 사고(思考)과정도 없이 주관적인 견해나 생각, 편견, 또는 시시한 주변 얘기들을 아무렇게나 늘어놓은 글 등도 결코 수필이 될 수 없다.  이러한 글들도 역시 잡문이나 낙서, 신변잡기나 자기 선전물, 또는 남의 글을 자기 것인양 도용해 놓은 '짜깁기 글'에 불과한 것이다.  수필을 흔히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수필이 '아무렇게나 쓰면 되는 글'이라거나 '누구나 생각나는 대로 쓰면 되는 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필의 자유로운 형식과 자유로운 사고의 표현, 또는 누구와도 친근한 문학임을 문학적인 표현으로 한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의 의미를 잘못 해석하고 있거나 잘못 생각하여 수필을 너무나 쉽게 쓸 수 있는 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수필을 쓰는 일을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한 여기(餘技)나 고상한 취미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는데, 이것도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수필은 결코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한 여기나 고상한 취미 정도가 될 수 없는 것이며, 그러한 사고방식을 갖고서는 수필다운 수필은 절대 쓸 수 없다.  수필이 지닌 특성 또는 특질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형식의 자유와 소재의 다양성, 각각의 개성과 사고방식의 적나라한 노출, 자기 고백적 문학이며 작가의 현실적 체험을 표출한 문학이라는 것, 우리의 현실 생활과 밀접한 '생활 속의 문학'이라는 것,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친근한 문학이라는 것, 진실에 바탕을 둔 호소력과 감동이 강한 문학이라는 것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날렵하고 경쾌한 듯하면서도 진실의 무게가 실려 있고, 재치와 해학이 넘치며, 고상하고도 우아한 수필의 품위성을 지니고 있는 문학이라는 것도 수필이 지닌 특성이다.  일찍이 수필가 피천득(皮千得)은 그의 수필 작품 「수필」에서,  수필은 청자(靑磁) 연적(宴寂)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서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 글귀야말로 수필이 지닌 특성과 문학적 품위를 일목요연하게 잘 표현한 것이라 생각된다.  특히 수필이 지닌 경쾌함과 함축미, 그리고 산뜻하면서도 우아한 기품이 선뜻 머리 속에 떠올려지도록 해주는, 멋진 글귀이다.  이렇듯 수필에는 수필로서의 개념이나 본질, 수필만이 지닌 특성이나 개성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분명히 인식하고 그 내용을 명확히 안 다음에 수필을 읽거나 쓰는 것이 올바른 순서요 당연한 과정일 것이다.  또한 그렇게 해야만 수필문학의 올바른 위상이 확립되고, 수필에 대한 편견이나 그릇된 자세도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     꽃싸움  ―김요일(1965∼) 달빛이 가르쳐 준 길을 따라, 당신을 안고 붉은 밤을 건너면, 곱디곱다는 화전(花田)엘 갈 수 있나요? 화전(花田)엘 가면 노랗고 파란 꽃그늘 아래 누워 지독히도 달콤한 암내 맡으며 능청스레 꽃싸움할 수 있겠지요? 당신은 새벽 별보다 찬란하게 웃고 나는 밤새 문신(文身) 그려 넣으며 환장할 노래를 부를 테지요 화전(花田)이면 어떻고, 화전(火田)이면 어때요 아침가리 지나 곰배령이면 어떻고, 별꽃 피는 만항재면 또 어때요 잃을 것 뺏을 것도 없는 빈 들에 가서 꽃집 지어 벌 나비 들게 하고 수줍은 미소에도 찰랑거리는 도라지꽃처럼 속살속살 지저귀며 하루만, 하루만 더 살아요 에로틱한 시다. 점잖은 나라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암내를 맡자고’ 노래한 시인이 누가 또 있는가. ‘밤새 문신 그려 넣으며’ 격렬한 쾌락에 탐닉하고도 여전히 몸이 달아 화자는 ‘하루만, 하루만 더 살아요’ 유혹한다. 화전(花田)은 수색 근처 동네 이름인데, ‘당신’이 사는 곳인 듯하다. 아니면, ‘노랗고 파란 꽃그늘’이 ‘노랗고 파란 전등 빛’인 듯도 하니 홍등가를 뜻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당신’은 홍등가인 화전, 즉 꽃밭의 한 꽃송이이겠다. 어쨌거나 ‘당신’은 화자와 쌍벽을 이루게 관능적인 사람이다. 보들레르가 잔 뒤발이라는 여인한테서 헤어나지 못했듯이, 화자도 ‘당신’에게 폭 빠져 있다. 그이의 뜨거운 몸을 빗대 ‘화전(花田)이면 어떻고, 화전(火田)이면 어때요’ 하다가 화자는 슬그머니 도시 한구석의 방에서 허허로운 자연으로 상상의 공간을 옮긴다.      김요일은 관능과 쾌락에의 순수한 탐닉이라는, 우리 시단에서는 드물고 귀한 개성을 가진 시인이다. 그가 앞으로의 시에서도 자기의 취향과 자질을 이 시만큼 끝까지 밀고 나갔으면 좋겠다. 행여 가족이랄지 세간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지 말고, 퇴폐에 이르도록 치달았으면 좋겠다. 시인 김요일만이 가진 탐미적 힘을 본때 있게 펼치시기를!  
508    시의 본질적인 문제를 인공지능이 파악할수 없다... 댓글:  조회:2365  추천:0  2017-05-28
인공지능 시대의 시                                /김연성               1. 인공지능과 인간의 세기의 대결 J형, 봄인가 싶더니 어느새 여름이 온 것 같습니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봄과 가을은 점점 짧아지고 여름과 겨울이 길어지고 있습 니다. 이곳 남산 자락으로 자리를 옮겨 근무한 지도 벌써 반년이 지 났건만 아직 남산 둘레길을 완주하지 못했습니다. 천성이 게으른 나 는 속도에 적응하지 못하는 바보입니다. 꽃이 피어도 별 감동도 없 고 그렇게 봄이 내 곁을 떠나갔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지난번 있었 던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때문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세기의 대결이라 일컫는 구글의 알파고와 인간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이세돌 9단과의 대국이 있었습니다. 1946년 세계 최초의 컴 퓨터 에니악이 발명된 이후 계산에서부터 시작해서 논리, 사고, 자각 등 인간고유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분야에서도 인공지능은 발 전을 거듭해 왔습니다. 1997년 IBM의 인공지능 딥 블루가 세계 체 스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를 상대로 승리하였고 인공지능 왓슨 또 한 미국의 퀴즈 프로그램에서 역대 우승자를 제치고 우승을 차지하 였지만 인간이 만든 가장 복잡한 게임인 바둑만큼은 아직까지는 인 간지능이 우세할 것이라는 전망이었습니다. 대국 당사자인 이세돌 조차 4대 1 혹은 5대 0으로 이길 것이라고 장담하였지만 결국 4대 1 이라는 스쿼로 인간의 참혹한 패배로 끝났습니다. 대국 내내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하는 이세돌의 모습이 나에게만 안쓰럽고 고독해 보 였던 것일까요? 표정도 감정도 없이 앉아 착점만 하던 아자황 박사 를 보며 사람들은 아바타를 연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자황 박 사처럼 종국에는 인간이 인공지능의 지시대로 움직여야 하는 미래 가 오는 것은 아닐까요?      이번 세기의 대결에서의 패배로 인해 우리가 우려하는 현상이 더 빨리 현실로 닥쳐올지도 모릅니다. 과거 산업혁명으로 인해 기계가 인간의 할 일을 대신하고 수공업에서 기계공업으로 바뀌게 된 때에 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고 결국 기계들을 박살내기 위해서 인간들 이 들고 일어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산업혁명을 통해서 인간의 할 일을 빼앗아갔지만 인간은 새로운 일들을 창출하였고 새로운 일 들은 우리에게 많은 부를 허락하였습니다. 이번에도 우리의 일자리 가 또다시 빼앗길 가능성이 높지만 오히려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함으로써 인간의 새로운 권리, 새로운 힘을 발 견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나는 답답하고 두렵고 불 안합니다. 인공지능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요?      2. 인공지능 시대의 산문 ‘그 날은 구름이 낮게 드리운, 잔뜩 찌푸린 날이었다. 방안은 항상 최적의 온도와 습도, 요코씨는 어수선한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시시한 게임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무엇인가 재미를 발견하지 않으면, 이대로 만족감을 얻을 수 없는 상태가 지속되면 가까운 미래에 자신을 종료해 버릴 것이다. 인터넷 을 통해 동료 채팅 AI와 접속해 보면 모두 남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 하고 있었다.’      이 문장은 지난 3월 일본 니혼게이자이 신문이 주최한 ‘호시 신이 치’ 문학상에 응모했던 인공지능이 쓴 소설의 도입부 일부분입니다. 비록 입상에는 실패했지만 1차 심사까지 통과했다는 사실 하나만으 로도 놀랍고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아직까지는 대략적인 구성은 연구진이 입력하고 인공지능은 주어 진 단어와 형용사 등을 조합하는 수준인데 먼저 사람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한다’는 요소를 포함하도록 지시하면 인공지능이 관련 단어 를 자동으로 골라 문장을 만드는 방식이라고 합니다만 연구진은 2년 후에는 인간 개입 없이 소설을 지을 수 있는 인공지능을 개발한다는 목표를 세웠다고 합니다.      또한 이미 해외에서는 로봇이 쓴 기업 공시 분석 보고서나 지진 발 생 속보를 실제 보도에 활용한다고 합니다. 프로야구 뉴스를 자동 으로 생성하는 프로그램 ‘야알봇’을 만든 이준환 서울대 언론정보학 과 교수 연구팀의 도움을 받아 로봇이 쓴 기사와 기자가 쓴 기사를 보여주고, 기사 작성자를 구별할 수 있는지 설문지를 이용해 실험도 했다고 합니다.      “9일 마산구장에서 열린 2016 타이어뱅크 KBO리그 경기에서 NC 다이노스가 한화 이글스를 상대로 10-1로 대승을 거뒀다. 3연승을 달린 NC는 4승 3패를 기록했다.”      “9일 마산구장에서 열린 NC와 한화와의 2016 타이어뱅크 KBO리 그에서 NC가 손시헌을 시작으로 연이어 득점을 하면서 파죽의 대승 을 거두었다. NC는 13안타, 2홈런을 날리며 거침없이 질주했다.”      모두 273명이 응답했는데 정답률이 평균 45.9%로 절반도 안됐다 고 합니다. 사실상 누가 썼는지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인데 프로야구 팬이라고 답한 이들의 정답률(46.4%)도 별 차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정답률이 이처럼 낮은 것은 로봇 기사가 통상의 야구 기사와 구별하 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한 설 문 응답자는 “‘굴욕을 당했다’ ‘꽁꽁 묶었다’처럼 가치를 부여하는 표 현이 들어 있어 사람이 쓴 기사”라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해당 기사 는 모두 로봇 기사였답니다. 야알봇은 사람이 일반 기사에 사용한 여러 표현을 저장했다가 다양한 조건에 따라 문장을 생성해 낼 뿐 만아니라 경기 순간마다 양 팀의 승률을 계산하고, 승률이 급변하는 대목을 ‘주요 이벤트’로 분류해 기사를 쓴다고 합니다. 거기에 또 다 른 장점은 속도인데 경기 종료 뒤 기사 작성 버튼을 누르면 약 5장 분략의 기사를 생성하는데 1초도 안 걸린다고 합니다.(야알봇이 자 동으로 생성한 기사는 뒤의 것임)    이처럼 데이터에 의한 기사 작성이나 보고서는 이미 로봇이 인간 보다 앞서 있으며 작성 속도 또한 인간의 한계를 능가했습니다.      3. 인공지능 시대의 시 ‘인공지능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직업은 문화·예술 관련직이라는 기사를 얼마 전에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인공지능 시대’의 직 업 중에 자동화 대체 확률이 높은 직업 상위 30개 중에 눈에 띠는 것 은 콘크리트 공 같은 단순 노동을 필요로 하는 직업이 대다수였고 반면 자동화 대체 확률이 낮은 직업 상위 30위중에는 화가 및 조각 가 등 대부분이 창조적인 성향의 직업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어쩌면 우리에게 인공지능이 쓴 시를 읽어야 하는 불행한 시대 가 닥쳐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불행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구요? 그것은 시의 본질적인 문제에 있기 때문 입니다. 시는 산문이 아닙니다. 쓰라린 경험과 진정성이 결여된 시를 누가 왜 읽겠습니까?     나에게 “나”는 너무 하잘 것 없어. 나는 나를 자꾸 떠나려 하네 여보세요! 누구십니까? 어머니?     어머니! 아들이 앓고 있어요 어머니! 아들의 마음이 불타요 동생 리우디아와 올리아에게 난 갈 곳이 없다고 전해주세요.        이 시는 내가 1981년도에 읽었던 러시아의 혁명시인 마야코프스키가 쓴『 바지 속의 구름』이라는 장시의 첫 구절입니다. 이 시는 닥 터 지바고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쓴 ‘어느 시인의 죽음’이라는 자 전적 에세이의 마지막에 인용되어 있답니다. 러시아 혁명의 소용돌 이 속에서 온몸으로 살았던 미래파 시인 마야코프스키는 결국 30대 의 젊은 나이에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이 시를 처음 접했을 때의 내 나이는 스물 한 살이었는데 아마도 ‘어느 시인의 죽음’이라는 제목에 이끌려 이 책을 사서 읽게 되었던 같습니다. 물론 제목도 시 구절도 조금 다르지만 35년이 지난 지금도 외우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이상하지 않나요?      우리는 왜 시를 씁니까? 그리고 우리는 왜 시를 읽습니까? 자기반성이나 진정성이 없이 인공지능이 쓴 시를 읽어야 하는 끔찍한 미래가 과연 올까요? 아마도 화려한 수사의 나열이나 그럴듯한 묘사 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마야코프스키의 시처럼 단 몇 줄의 시행으로 인간과 시대와 자신의 절망까지도 표현해 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 다. 시는 데이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불완전한 감정의 창조 물이니까요. 인공지능이 인간의 감정까지는 침범할 수 없다고 단언 합니다.      자본주의가 기승을 부릴수록 우리가 사는 세계는 갈수록 타락하 고 미래는 불확실 합니다. 어쩌면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 후손들은 환경오염이나 대기오염으로 인해 이 지구를 탈출하여 우주 정거장 의 유리 건물에 갇혀 비타민이나 채소를 가꾸어 먹으면서 살게 될 지도 모릅니다. 상상하기도 싫지만 SF영화의 한 장면처럼 인간이 기 계의 지배를 받게 되는 끔찍한 미래가 올지도 모른다는 이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밤이 깊었습니다. 테리 이글턴의 ‘시를 어떻게 읽을까’의 한 구절 을 인용하면서 두서없는 이야기를 끝내고자 합니다. “시는 일종의 창조적 변칙, 활력을 주는 언어의 질병이다. 그것은 우리가 실제로 아파서 신체를 당연시하지 않게 될 때 신체를 새롭게 경험하는 반갑 지 않은 기회를 갖는 것과 같다.” 그래요 우리 안에 오롯이 도사리고 있는 끝없는 우울과 고독, 깊은 절망과 뜨거운 열정만이 역설적이게도 그 시대를 반영하고 먼 미래를 예지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J형, 지금은 새벽 3시가 넘었고 사방이 어둠에 휩싸여 있습니다. 고운 밤 되십시오. 그럼, 안녕!           **약력:2005년 계간《 시작》으로 등단. 시집『 발령 났다』가 있음.
507    시인이라면 초고를 쓰는 고통을 감내할줄을 알아야... 댓글:  조회:2547  추천:0  2017-05-28
인공지능 시대의 시 김중일         인공지능 시대의 창작의 고통과 범위에 대한 개인적 상념          최근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이 높다. 알다시피 인공지능 연구는 이 미 상당 기간 지속되어 왔다. 가장 진보된 연구의 성과를 최근 우리 는 국내에서 열린 바둑 대국을 통해 확인했다. 이후 새삼 쏟아진 많 은 전망을 참조해 보자면 범용 인공지능의 개발이 이미 거의 상용화 단계 직전까지 이루어져 있는 듯하다. 인공지능이 가까운 미래에 상 용화 될 경우 지금까지 공동체 속에서 인간이 맡아 왔던 많은 역할 이 재정립될 것이라는 의견에 나도 이견이 없다. 인공지능이 많은 역할을 대체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맡아 해야 하는 새로운 역할 도 생기겠지만 충분치 않을 것이다. 그럼으로 많은 전문가들이 말하 듯, 부의 분배를 중심으로 여러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하겠다. 인공 지능이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이 세심히 구분되어 남용되지 않도록 법적·제도적 규율이 필요하다. 가령, 인공지능이 시를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굳이 인공지능이 시를 쓰는 것이 문학의 가 치에 보탬이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렘브란트의 여러 작품을 입력해 분석하고, 딥러닝을 통해 그림의 특징을 학습한 AI가 렘브란트의 화풍을 그대로 재현해 낸 그림이 전 시되고 팔리는 시대에 이미 우리는 살고 있다. 또 일본의 SF작가 호 시 신이치를 기리는 한 문학상 공모에 인공지능을 활용해 쓴 소설이 1차 심사에 통과 했다는 보도도 전해진바 있다. 이렇듯 예술의 범주 에서도 인공지능이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건 가능성 이 아니라 이제 현실인 듯하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이 상용화 된 시 대에서 ‘예술’에 대한 정의와 사회문화적 합의는 어떤 지점에서 이루 어져야 할까. 법적 제도 보다는 사람들 사이의 ‘윤리’와 ‘문화’로서의 상식화 된 보편적인 합의가 자리 잡아야 ‘사람이 창작한 문학’의 가 치가 계속해서 유효할 것으로 보인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격언을 흔히 쓴다. 물론 이 말은 인공지능이 아닌, 사람을 향해 여태 던져지던 말이다. 이제 이 말을 인공지능에 대입시켜 보자. 예술 영역에서 인공지능 이 인간의 창작물을 모방하는 것에서 시작하더라도, 개체마다 특징 (개성)있는 알고리즘(감성패턴)만 입력된다면 나름의 작품세계를 가진 인공지능 작가가 출연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 가령, 매력적인 시 너지가 예상되는 세계적인 여러 문호들의 모든 창작물 정보가 인공 지능에 입력되어 딥러닝(습작) 된다면 어떤 작품이 탄생될지 나 역시 무척 궁금할 정도다.    이미 인공지능이 인간을 넘어선 바둑의 경우와 문학은 다르다. 인 공지능이 바둑에서처럼 문학에서 특히 시라는 장르에서 인간을 이 기고 넘어 설 수는 없을 것이다. 시는 본질적으로 바둑처럼 승패를 내는 것으로 그 정점을 따질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전한다 해도, 문학성에 있어 인간을 넘어서는 수직적 관계 형성은 불가능할 것이다. 다만 이른바 문화전반의 보편적 합의가 필요하다. 인공지능이 쓴 시가 인간 독자에게 문화로 인정되고 향유되는 지경 에 이른다면, 물리적인 창작량에서 인간은 인공지능에게 비교불가 의 상태로 압도될 것이다. 단 십분 만에 수백 편의 시와 장편소설을 써내는 인공지능을 우리는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문학은 인간을 깊이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를 목표로 한다. 이것은 문학의 윤리다. 문학이 인간성을 기반으로, 인간들이 서로 소통하려 는 노력을 담은 언어의 예술적 집적물이라는 점에서, 인공지능이 쓴 시를 읽고 깊은 감동을 받는 경우는 상상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언 젠가 상업적 이유로 인공지능을 통한 SNS시 등이 콘텐츠화 된다면, 인간이 쓴 작품들과 어떻게 혼재되거나 구별되어 향유될지 지켜볼 일이다.    엔터테인먼트 영역에서의 인공지능의 활약은 클 것으로 예상된 다. 역대 드라마 시청률 및 최근 트렌드 추이를 분석한 드라마 극본, 게임·영화 시나리오 등 이른바 상업적 흥행에 성패의 대부분이 달 린 엔터테인먼트 스토리텔링 영역에서는 인공지능의 능력이 상당 히 유용할 것이다. 문학이든 영화든 예술의 영역에서 벗어나 제작 된 ‘상품’이라면 거부감 없이 사람들에게 소비될 가능성도 높다. 거 대 자본이 유입되는 오락 분야의 스토리텔링은 머지않은 미래에 인 공지능이 상용화되어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될 가능성이 더욱 높아 보 인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인공지능이 조합하고 출력한 스토리에 동 화되어 울고 웃는 날이 곧 오게 될 것이다. 이미 많은 이들이 온라인 게임 속 세상에 깊이 빠져 있듯 말이다.    실제 얼굴을 맞대고 있지는 않지만, 마음을 맞대고 사람들의 내면 과 소통하는 것이 문학의 방식이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겁 없이 마음을 맞대는 시도가 문학이다. 문학에는 인간으로서의 죽음, 고 통, 상처를 기반으로 하는 인간만의 존재 가치가 있다. 인공지능이 쓴 시와 소설이 상당한 완결성을 보인다 해도 문학작품으로서의 의 미와 가치가 부여되기는 힘들다. 문학 속에 녹아든, 인간이 하는, 인 간으로서의 경험과 기억의 가치를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는 없다. 이 와 같은 ‘문화’와 ‘윤리’의 합의가 공고히 전제된다면, 인공지능을 통 한 고도의 효율성이 구현된 미래는 ‘가치’를 소비하는 시대가 될 것 이다. 그 ‘가치’의 판단은 인간의 몫이며, 그 판단이 다시 ‘가치’의 기 준을 만들 것이다.    결국 책임의 바통은 인간에게 넘어온다. 먼저 창작자로서의 윤리 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 문학의 유산인「 토지」,「 태백산맥」등의 대 하소설은 원고지에 육필로 쓰여졌다. 보통 생각은 글씨 쓰는 손보다 빠르기 마련이다. 육필로 무한의 상상력을 기록한다는 건 이미 머릿 속에서 무수한 정제가 이루어 진 다음 펜끝을 통해 흘러나왔다는 걸 뜻한다. 그런 방식으로 방대한 분량의 작품을 탄생시킨다는 건 요 즘의 작가로서는 엄두를 내기 힘든 일이다. 이제 누구도 그렇게 쓰 지 않는다. 모두 작은 노트북을 하나씩 가지고 다닌다. 한글워드프 로세서가 사용된 지도 이미 이십년이 넘었다. 아울러 인터넷 사용 이 보편화 되며,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매체의 발달로 손쉬운 정 보 취득이 당연시 되었다. 도서관을 가지 않아도, 특정 장소를 답사 하지 않아도, 백지와 펜을 준비하지 않아도 바로 앉은 자리에서 약 간의 상상력만 첨가된다면 직접 몸으로 겪고 얻은 것과 엇비슷한 정 보를 얻을 수 있다. 이런 기계문명의 발달은, 물론 직접 몸으로 얻은 기억만큼의 가치는 아니지만, 적어도 글 쓰는 사람에게 시간과 공간 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주었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미래에 작가들의 노트북에는 하나의 프로그 램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작가는 물론이고 글을 써 야할 일이 있는 모든 이들이 N사 사이트를 통해 손쉽게 다운 받아 사용할 이 프로그램의 이름을 AI writer쯤으로 붙여보자. 가령 미래의 어느 중견 시인은 이 필수 콘텐츠를 다운 받아 자신이 지금까지 쓴 모든 작품 텍스트에서부터 인상 깊었던 여러 분야의 예술 작품 정보에 이르기까지 모두 입력하여 딥러닝으로 ‘학습’시킴으로써 자 신만의 창작도우미로 세팅한다. 그리고 원고 마감 기일이 다가오면, 소재가 될 만한 최근의 정치·사회 이슈와 관심 가는 문화 동향 등 을 추가 입력하여 단 몇초만에 필요한 편수의 ‘초고’를 출력한다. 그 리고 약간의 리라이팅을 겸하는 정도의 퇴고를 통해 손쉽게 신작시 몇 편을 만들어낸다. 이 작품은 누가 쓴 창작물일까? 사람이 쓴 것이 맞다는 문화적 합의가 형성된다면, 창작자가 감내해야하는 ‘창작의 고통과 범위’는 2016년의 상식적 마지노선을 넘어 서는 지경으로 축 소되는 것이다.    요컨대 문학을 비롯한 모든 예술의 창작 범주가 인공지능을 위시 하는 편리한 문명의 발달로 확연히 줄어들 수 있다고 예측한다. 우 리의 앞 세대 작가들의 경우, 작품을 쓰기 위해 백지 위에 플롯을 짜 고, 작품의 배경이 될 장소를 직접 답사하고 사건을 취재하는 것에 서부터, 원고를 손끝으로 활자화하고 탈고하는 순간까지의 전 과정 이 창작이었다. 반면 어쩌면 다가올 미래에는, 작가의 기 작품들을 학습하여 개성과 감성 패턴을 학습한 인공지능이 출력해 놓은 ‘초고’ 에 최근의 심경 변화를 담아 ‘창의적 퇴고’를 더하는 것 정도가 인간 이 하는 문학 창작의 범주로 간주되는 날이 도래할지도 모른다.    선배 작가들이 온몸으로 한 문학의 맛을 나는 온전히 경험하지 못 했다. 수단의 발달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 다고 나는 창작자로서 윤리적으로 자책하고 있는가하면, 그렇지는 않다. 미래에 문학 창작의 전 과정을 돕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등 장한다면, 그 세대의 작가들은 그것을 사용하며 윤리적으로 자책하 거나 선배들에게 열등감을 가질까. 모두가 당연시 사용한다면 나 역 시 같은 조건을 위해 사용하지 않을까. 현재의 내가 인터넷에서 몇 번의 클릭으로 얻은 정보를 내 상상력에 첨가하여 글쓰기에 사용하 듯, 편리한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굳이 사용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시나브로 느끼지 못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글 쓰는 사람이라면 초고를 쓰는 고통을 잘 알 것이다. 그리고 초고를 쓰는 고통 속에서 우연처럼 운명처럼 문장에 깃드는 순전한 영 감을 알 것이다. 그 소중한 체험과 가치를 창작자로서 윤리적 자의식없이 인공지능에게 일임하게 될 날이 정말 올지도 모르겠다. 미래의 시인들의 가장 큰 임무는 문학의 가치, 시의 원래 가치, 창작과정 자체의 가치를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상기시키고, 그 불편함의 가치를 독자들에게 전파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약력:2002년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 국경꽃집』,『 아무튼 씨 미안해요』,『 내가 살아갈 사람』이 있음. 본지 편집위원.
506    시도 예술도 모르는 사회는 배부른 돼지의 세계이다... 댓글:  조회:2848  추천:0  2017-05-28
인공지능과 시(詩)에 대한                                일말(一抹)의 추론                                                                                     /주영헌                         내가 당신에게 “인공지능도 시(詩)를 쓸 수 있을까?” 묻는다고 가정하자.       황당하다면 황당할 수 있는 이 질문에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아니요!”라고 단순하게? 그렇다면 그 “아니요!”의 근거는 무엇인가? 강력한 반대 근거를 제시하는(앞으로 조목조목 제시할 것이다) 논리에 반박할 논거(論據)를 가지고 있는가?       어쩌면 당신은 거꾸로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으리라.   “그렇다면 인공지능이 시를 쓸 수 있는 근거를 나에게 보여 주시오!”라고. 이 같은 질문을 답변으로 던지는 것은 당신이 나에게 교묘한 굴복을 했다는 의미다. 나는 그 근거를 댈 수 없으니,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근거로 자신을 설득해 달라는 논리이다.       나는 단호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미래를 상상하라. 백 년 전 까지만 해도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것들이 과학 기술의 진보(進步)에 따라 미래라는 이름으로 현실이 되었다. 그렇다면 당신의 의심하는 그것, 인공지능이 시를 쓰는 시대가 멀지 않아 도래할 것이다.”라고.   당신은 나의 추론에 반박할 수 있겠는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시를 쓰는 사람,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시인(詩人)이다. ‘흔히’는 표현을 쓴 까닭은, 그만큼시인이 많기 때문이다. 자칭 타칭, 시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시와 관련된 단체, 예를 들어 작가회의나 문인협회, 시인협회, 그리고 수많은 사설 단체들의 숫자를 다 합하면 몇 만 명은 훌쩍 뛰어넘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떼거지 숫자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만약 인공지능이 놀라운 능력의 시를 쓰기 시작하면, 숫자는 무의미에 불과하다.       나의 논리는 강력한 반발에 부닥칠 것을 직감한다. 근대 신문에 실린 찰스 다윈의 삽화가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이 문제는 시인의 생존권이 달린 문제(특히 전업시인들의 경우)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자존심의 문제가 더 크다.       타 문학에 비해, 예를 들어 소설가, 수필가, 극작가라고 불리는 것에 비해 시인은 –인(人)이라고 불린다. 자존심 하나로 지켜온 세월이 얼마인가. 시인(詩人)이라는 자존심마저 무너진다면 시인이 시를 쓸 아무런 근거도, 명분도 사라지게 된다. 시는 소멸할 것이고, 박제되어 박물관에 전시되는 인간의 여러 고전(古傳) 중 한편으로 남을 것이다.   ​       1. 인공지능(人工知能)의 원리           물화(物化)된 인간 지능의 상징, 인공지능은 얼마나 발전을 했을까? 지금 현재의 기술 발전 수준을 논하는 것은 그렇게 큰 의미 있는 일이 아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진보하고 있고, 멀지 않아 엄청난 미래에 도달할 것이다.   어찌 보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사용 중인) 기술은 미래의 기술이 아니라 과거의 기술이다. 실용화라는 단어가 가진 언어의 상징성은 ‘과거’라는 직접적 증거다.       세계의 석학들이 인공지능 무기를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실린 기사나 체스 세계 챔피언이 인공지능과의 경기에서 패배한 것이나, 경제와 스포츠 기사를 쓰는 인공지능이 등장했다는 기사는 더는 놀랄만한 사건이 아니다.       인공지능은 물체를 인식하는 것을 거의 완벽히 해결했을 뿐더러, 구글(Google)이라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하여 다양한 자료를 취합·재생산할 수 있는 상태, 논리적으로서의 인간의 능력을 손바닥 뒤집듯 손쉽게 뛰어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詩)는? 시인으로서 기술의 위험한 도발에 직면하게 된다.       ‘인공지능이 시를 쓸 수 있는가?’에 대한 추론을 이끌어 내기 위해선 먼저, 인공지능 구조(system)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인공지능에 완벽한 알고리즘(algorithm)을 가지고 있다면 인공지능이 시를 쓸 수 있는 배경이 된다. 알고리즘은 다음과 같다.           1. 입력 : 외부에서 제공되는 자료가 있을 수 있다.   2. 출력 : 적어도 한 가지 결과가 생긴다.   3. 명백성 : 각 명령들은 명백해야 한다.   4. 유한성 : 알고리즘의 명령대로 수행하면 한정된 단계를 처리한 후에 종료된다.   5. 효과성 : 모든 명령들은 명백하고 실행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알고리즘을 아는 것은 인공지능 진행방식을 아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알고리즘이 인공지능 전체를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알고리즘이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명확히 정의된 명령」의 집합이며, 한정된 규칙을 적용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알고리즘의 관점으로 시를 제작한다고 가정을 하자. 먼저 입력, 방대한 문장의 데이터가 ‘구글’이나 ‘네이버’를 통해 제공될 수 있다.   두 번째로 출력, 입력이 가능하면 출력도 가능하다.   세 번째로 명백성, 특정한 상징과 비유를 가지는 문장을 완성한다는 문학 기술(이제 문학도 하나의 기술로 볼 수 있다)의 명백성이 존재한다.   네 번째로 유한성, 알고리즘의 명령대로 수행될 것이며, 인공지능은 어떤 인간보다 성실히 이 작업을 마칠 것이다.   다섯 번째로 효과성, 인공지능은 알고리즘에 따라 명령 자체를 효과적으로 실행할 수 있지만, 실제로 인간이 쓰는 시보다 더 뛰어난 시를 쓰는 것이 가능할지 ‘아직’ 장담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알고리즘의 개념(다섯 가지 수행과정)’으로 추론할 때 ‘인공지능은 시를 쓸 수 있다’고 보는 것에 근접할 것이다. 인간의 뇌도 알고리즘과 유사한 과정을 거쳐 시를 쓰기 때문이다.       컴퓨터의 언어는 0과 1로 만들어져 있다. 0이 참이라고 한다면 1은 거짓이다. 참과 거짓을 무한 반복하면 어떤 논리값이 만들어진다.       인공지능 개발이 어려웠던 이유는 참과 거짓 사이(0과 1이 아닌,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에 애매모호한 (정의할 수 없는)개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탁구공과 골프공을 비교했을 때 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은 멀리 떨어져 있는 두 개의 공을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골프공을 탁구공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탁구공을 골프공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선택은 참과 거짓의 명제를 벗어난 선택이다. 인간의 선택은 주변 상황에 따라 옳을 수도 있으며, 틀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인공지능 컴퓨터는 선택의 오류가 없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지 항상 옳은 답만을 구한다. 만약 틀린 답을 구할지라도 그것은 개념적으로 옳은 답이다.       이 문제에 대안은 존재한다. 인간의 시각적 기능을 대입하여 명백하지 않는 것은 무작위로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마치 난수(亂數)를 사용하듯. 물론 여기에 인위적이라는 문제와 함께 인간의 자유 선택과 다른, 앞서 말한 틀린 것을 구한 값도 개념적으로 옳은 답이라는 변증법적인 문제에 도달한다.       이와 같은 문제를 제기를 통해 인간의 의지란 기계와 다르게 순수하며, 언제나 자유의지에 따라 판단을 내린다고 역설적으로 두둔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 진정한 의미로서의 자유의지라는 것이 존재할까?’라는 궁극적인 의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2. 인간은 생체 지능 컴퓨터           인간의 행동 패턴을 조금만 유심히 관찰하면, 창의적인 행동보다 반복적이고 유사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치 알람시계처럼 같은 시간에 깨고 같은 시간에 밥을 먹고 출근하며, 컴퓨터와 한 몸이 돼서 일하고, 점심을 먹고, 다시 일하고 퇴근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잔다.       대부분의 활동(큰 행동 패턴으로 봐서)이 이와 같다. 주말이면 이 범주를 벗어나지만, 일주일이라는 시간 패턴으로 보면 한 주일은 지난 주일의 패턴과 비슷하다. 그리고 지난해와 올해의 행동패턴이 유사하고, 모든 사람의 생체주기는 유사하다.       어찌 보면 인간의 두뇌가 아닌 ‘인공지능보다 낮은 기능의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행위의’ 기능만 가지고 있어도 인간과 같은 기본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며, 만약 외모 구별에 문제만 없다면 우리는 인간형 안드로이드 로봇을 오랜 시간 자세히 관찰하지 않고서는 인간인지 아닌지 구별하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는 하나의 추론에 도달할 수 있다. 인간이 ‘인공지능 컴퓨터’와 유사한 개념인 ‘생체 지능 컴퓨터’으로 작동한다는 가능성에 대해서.       이것은 문학적 접근방식 아니다. ‘인공지능 컴퓨터’는 문학적인 텍스트로 수도 없이 반복되었던 낡은 개념이다. 인공지능 컴퓨터를 파격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까닭은, 다음과 같은 진보적인 추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생체 지능 컴퓨터라면, 인공지능 컴퓨터도 시를 쓸 수 있다! 일종의 귀납적 추론이다.       컴퓨터로서의 인간이라는 생체 컴퓨터(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다)와 기계적 기능의 인공지능 컴퓨터가 다른 것은 그 에너지원을 무엇으로 하고 있느냐가 전부다.   인간이라는 생체 컴퓨터는 인간이 섭취하는 ‘다양한 영양소’에서 추출하는 전기에너지이고, 인공지능 컴퓨터는 ‘석유나, 가스, 원자력으로 생산된’ 전기에너지다. 결국, 전기를 얻는 방식이 다를 뿐 우리의 뇌나 컴퓨터의 CPU는 모두 전기에너지를 통해 작동하고 있다.       논리 연산도 유사하다. 인간은 극단(極端)을 선호한다. 컴퓨터가 0과 1로 연산을 하듯이. 인간에게 있어 논리의 접근 방식은 보통 두 가지이다. 칸트가 ‘3대 비판서’에서 말한 선과 악, 옳음과 거짓, 미와 추, 친구와 적 등의 개념은 ‘결국 나에게 유리한가, 그렇지 아니한가’의 개념이다. 나에게 유리한 것을 1로 놓으면, 나에게 불리한 것은 0이다. 1과 0의 계산으로 인간 행동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       때론 용기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논리를 거부한다. 때때로 나에게 불리해도 0을 선택하는 자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이성’이라고 부르는데, 인문학자는 분명 ‘이성’이 인간이 컴퓨터와 가장 다른 요소임을 강조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까지 연산할 방법은 없을까? 우리 스스로가 이성이라는 철학적 허구에 빠져 있지 않은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인류멸망보고서』라는 영화를 기억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영화에는 하나의 로봇이 등장한다. 부처의 현신과도 같은 논리를 가진 안드로이드 로봇. 사원의 수행자들은 그 안드로이드를 하나의 불성(佛性)을 가진 존재로 인정한다.       하지만 안드로이드를 만든 회사는 안드로이드의 행위를 시스템 오류라고 평가 절하한다. 수행자들은 안드로이드를 지키려고 하지만 회사의 강력한 반발과 안드로이드 자신의 결정에 따라 폐기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로봇이 불성(佛性)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철학적 접근은, 어쩌면 ‘로봇이 시를 쓸 수 있는가’ 보다 쉬운 문제다. 철학은 철학으로서의 존재자가 아니다. 철학은 개체다. 철학은 희랍시대에 확립된 이후 변증법적인 추구를 목표로 한다.       거칠게 말하면 철학은 하나의 연산행위다. 철학적 논리에서도 컴퓨터는 0과 1의 숫자를 고르면 된다. 컴퓨터는 지금 까지 수많은 인간이 개념화 시킨 철학적 데이터를 이용해 인간이 말하는 개념의 옳고 그름을 심판할 수 있다.       만약 로봇이 종교적 데이터에 철저히 따르고, 그 종교적 데이터에 따라 절대자의 폭력에 항거하며 민중의 편에서 스스로(알고리즘화 된 스스로의) 전원을 차단한다면 그 로봇은 그 어떤 종교에서나 인간의 이성적 가치를 초월한 성자(聖者)가 될 수 있다.               3. 인공지능은 어떻게 시를 쓰는가?           모든 인간을 대상으로 살펴봐도 시를 쓰는 사람은 소수다. 시는 문학 장르 중 가장 어렵고 접근하기 난해한 장르다. 시는 단순히 문장의 재배치나 비트겐슈타인 방식으로 말하는 ‘철학적 언어의 놀이’가 아닌 언어의 순수성에 입각한 ‘상징과 비유의 문학’이다.       언어의 순수성은 논리적 문장과 비논리적 문장을 동시에 포괄할 수 있게 한다. 논리적 문장은 문장의 문법에 충실하지만, 비논리적 문장은 문장이 전통의 문법적 구성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래서 시는 비문(非文)이며 무문(無文)이기도 하다. 문장이면서 문장이 아니기도 한 것이다.       시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지식인의 특권은 아니지만, 한국어를 안다고 해서 시를 읽을 수 있는 것도, 문장의 독해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시를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시인(詩人)이 다른 시인들의 시를 읽어내지 못할 수 있다. 그 까닭은 자신만의 길(道)을 가진 시인에게는 고유한 문법이 있기 때문이다.       시(詩)라는 문학 장르로의 합류를 형이상학적인 차원에서 찾으면, 인공지능은 시를 쓰지 못한다는 이상적인(고귀한 플라톤의 철학처럼) 추론에 이른다.   이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작은 피난처에 불과하다. 노아의 방주라는 특별한 해결책을 찾은 것도 아니다. 타조처럼 작은 구덩이에 머리를 박고 엉덩이를 하늘로 쳐들고 있는 형상이다. 자신의 엉덩이 살이 붙어있는지 잘려나가는지도 모르는 채.       인공지능이 시(詩)의 형이상학을 극복하지 못하라는 법이 있는가? 구글(Google)의 데이터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다. 구글은 그 자체로 형이상학적이다. 구글은 자본주의 문명의 절대 권력을 가진 신(神)과 같다.   방대한 데이터에는 온갖 종류(인종과 언어를 넘어서는)의 시의 데이터를 포함하며, 시를 분석한 평론, 전문적 논문을 포함한다. 만약 몇몇 악마적인 신앙을 가진 해커가 배움(STUDY)이란 특별한 알고리즘을 만들어 인공지능에 축복의 성수를 붙는다면, 인공지능은 어쩌면 인간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문법의 시를 탄생시킬 수도 있다(이런 일들이 절대 불가능하다고 보는가?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인가?).       그렇다면 인공지능은 어떻게 시의 문장을 조합할 수 있는가? 정말 인공지능이 시를 제작(製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인공지능이 처음부터 모든 시를 완벽하게 쓸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언어 번역 프로그램의 진보와 같다. 우리는 영어를 한국어로, 한국어를 영어로 바꾸는 프로그램을 인터넷에서 손쉽게 만난다.       처음 번역 프로그램을 접하게 될 때면 마법처럼 느껴지지만, 누구나 이내 실망하게 된다. 번역이 너무 엉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 나온 번역 프로그램을 보면 기술이 진보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 멀지 않아 완벽한 직역이 가능한 프로그램이, 그리고 그 이후 직역을 넘어 의역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의 진보는 사람의 기분까지 인식하는 번역 프로그램이다. 컴퓨터가 사람의 분위기나 기분까지 인식하면 우리는 어떤 외국인과도 자유롭게 대화를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언어의 국경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소멸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인공지능공학자라면, 그래서 인공지능이 시를 쓸 수 있게 하는 알고리즘을 만든다고 가정하면, 인공 번역기와 같은 관점에서 출발할 것이다.       언어의 습득은 모방을 기초로 한다. 문학도 마찬가지이다. 거칠게 말하면 문학은 일어날 것 같은 현실(리얼리티)을 문자로 모방하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감정과 상황은 문자화되었다. 애니미즘을 비롯한 종교의 신비성은 물화(物化)된 계몽에 의해 사라졌으며(문자화, 데이터화 되었으며), 그 성스러운 증거는 바로 구글이다. 구글의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는 이미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논리와 감정의 문장들을 이미 수집 완료했으며 지금도 수집하고 있다.       앞서 월스트리트 저널의 기사를 참고하면, 지금 개발된 알고리즘만으로도 스포츠나 경제 뉴스 기사를 작성할 수 있다면, 인공지능 문장 완성도는 이미 보장된 것이며, 이 문장에 비유와 상징의 코드를 가미하면, 완벽하지 않아도 어떤 특정한 시(詩)를 닮은 문장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시를 구글의 방대한 데이터에 접속하여 다른 시와 비교하는 것이다. 문장과 단어, 그리고 해석상의 비유가 적절한 것인지. 적절하지 않다면 1과 0의 연역적 방식으로 끊임없이 단어와 문장을 재배치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만으로 부족하다고 판단된다면, 과도기적인(21세기 인간과 기계의 고도의 분업화처럼) 인간의 고유한 시적 기술(technology)을 인공지능기능에 일정 부분 가미하는 것이다.       분명 이것은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인공지능이 시를 쓰는 일’이 시작되는 대사건일 것이다. 마치 초벌 번역을 하듯, 일차적으로 인공지능을 이용하여 시의 방향과 구조(뼈대)를 완성하고 시인의 고유한 방식으로 첨삭하여 시인이 원하는 방향의 시를 완성하는 것이다.       기술적으로 고민해야 할 문제는 인공지능이 시를 쓰는(만드는) 기능적인 면이 아니다.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기술은 인공지능이 ‘자의적’으로 시를 쓰게 만드는 것이다.   인공지능의 진보는 다행스럽게도 ‘주체’라는 인간 영혼에 유사한 무엇을 만들지 못했다(만약 인공지능에 주체가 생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러므로 인공지능이 시를 쓰기를 원한다면, 아직까지는 시스템화된 인공지능을 조작(시를 쓰게 명령을 내리는)하는 누군가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단서가 붙는다.   ​   ​   4. 시(詩)를 포기한다는 것           아직 멀게만 느껴지는 이야기지만, 인공지능이 시를 쓰기 시작한다면 직업으로서 시인의 존재가치의 가능성은 극도로 낮아진다.       직업은 시대와 사회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다. 그러기에 직업의 필요성은 변한다. 인기 있는 직업도 순식간에 변한다. 과거 70~80년대 그렇게 많았던 버스의 안내양도, 80년대 인기를 누렸던 문서를 타자로 대신 작성하던 타이피스트도 사라졌다. 우리나라의 부흥을 일구었던 구로공단의 노동자들이나 전화국의 전화교환수도 그 외의 셀 수 없는 다양한 직업군이 사라졌다. 산업의 고도화는 새로운 직업의 생성과 소멸을 부추기고 있다.       그렇다면 시인에겐 시인이라는 직업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대안을 선택해야 하나. 아니 ‘대안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앞선다.       어쩌면 인공지능 발전을 막는 것이, 인공지능공학자를 테러하는 것이 최고의 방법일까? 순수문학을 지키기 위한 극단주의 저항단체를 조직하여 폭탄을 던지고, 차량폭탄 테러를 하는.       시인이 멸절하는 시대가 오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메멘토 모리. 우리의 과거 세대가 겪었던 죽음을 기억하라.       나치는 유대인이라는 단순한 이유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육체성을 가진 유대인을 뿌연 연기로 기화(氣化)시키는 홀로코스트(유대인식의)라는 놀라운 마법을 부렸다.       60년 전의 이 나라의 우울한 과거는 어떠한가? 총칼의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부역한 이들을 빨갱이라 몰아 학살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각 세계의 현장, IS라고 불리는 이슬람 과격단체는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강간과 폭행, 학살을 서슴지 않는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가치관을 가진 인간이 우리의 머나먼 미래, 시(詩)에 대해서 관대함을 가질 수 있겠는가? 시(詩)는 쌀도, 빵도 그 어떤 물질도 만들 수 없다. 폭력이 난무하던 시대 문학은 언제나 그늘로 숨어들었다. 문학의 부흥이란, 다시 말해 시의 부흥이란, 지극히 폭력적인 권력에 반하는 ’인본주의 운동’이다.       왜 우리가 시를 버릴 수 없는가?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인가? 자본주의적인 경제적인 관점에서 지극히 비효율적인 방법으로 시의 명맥을 유지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너무나도 지극히 단순하다.       시를 포기한다는 것은 우리의 ‘인간성’을 다시 말해 ‘인간의 본성’를 버리는 것과 같다. 인공지능 컴퓨터를 통해 우리는 ‘인간의 의지’를 얼마나 수혈 받을 수 있겠는가? 수혈은 수혈일 뿐이다. 수혈로 공허한 허기를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수혈을 받는 것은 내 피가 아니다. ‘인공적’인 피다. 시를 문학을 포기한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안드로이드 로봇이 된다는 것과 동격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차라리 인간은 안드로이드 로봇이 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 증오와 분노를 삭제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하여. 그렇게 된다면 인간의 욕심은 영원히 사라지고 세계는 평화를 얻을 것이다. 인간 종족은 그것으로 영원할 수 있을 것이며, 결코 멸망하지도 않을 것이다.       당신은 이 가정에 동의하는가? 당신은 평화주의자이기에 이와 같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을 순화(純化)하는 것에 동의하는가? 만약 인공지능기술이 발전하여 인간의 뇌에 직렬로 접속할 기술의 진보가 이뤄진다면, 파시스트는 이와 같은 폭력적인 사건을 벌일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수술대에 누워 ’평화‘라고 불리는 축복의 저주를 받을 것인가?       우리는 인본주의의 본질을 착각하면 안 된다. 평화는 인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단편적 모습에 불과하다. 평화는 인본주의의 궁극적 가치와 목표가 아니다. 시도 마찬가지이다. 시는 이 땅의 영원한 평화를 원한다. 그러나 시의 최종목표는 평화가 아니다. 시인은 오직 평화를 위해 시를 쓰지는 않는다. 때론 시는 폭력을 선동한다. 시위를 선동하고, 사람들의 가슴에 선량한 불을 지른다. 불가능에 맞서 싸우자고, 이때 시는 평화가 아닌 피를 부르는 악덕(惡德)의 발화이다.               5. 물화(物化)된 인간과 시(詩)의 의미           과학은 진보하고 있다. 그 진보의 끝이 어디인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과학의 진보는 무엇을 위함인가? 진보의 목표는 인간이다. 인간이 편리하고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런데 편리함이란 진보의 칼끝이 우리의 심장을 향하고 있다. 무엇이 진보이며, 무엇이 인간을 위한 것인지 진지한 개념 정립이 필요하다.       진보의 변증법은 진보의 내면에 퇴행의 의미가 숨어있음을 누설한다.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끊임없는 진보가 내리는 저주는 끊임없는 퇴행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아도르노의 선험적 체험에 귀 기울여야만 한다. 우리의 진보 행위가 인간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진보가 진보 자체를 위한 진보인지, 그 진보로 인해 인간이 퇴행을 거듭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이미 인간은 많은 부분에서 물화(物化)되었다. 인간은 기계의 부속품처럼 공장에서 일한다. 만약 한 명의 근로자가 아프거나 특별한 일로 일하지 못할 경우 대체 부속품을 제공하듯 대체 인원을 투입한다. 공장뿐만이 아니라 인간은 많은 부분에서 물화된 부속품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잘 정립된 인간의 제도(예를 들어 법률이나 체계와 같은)는 궁극적으로 물화된 인간의 표상이다. 물화된 인간은 모든 문제를 마치 수학공식처럼 대입하여 옳고 그름, 잘잘못을 파악한다. 앞뒤와 전후 상황을 진지하게 따져보고, 철학적으로 생각할 자유의지를 가지지 못하고 제도라는 공식에 대입하여 문제를 해결한다. 우리는 그것에 합리적 무엇이라 이름 붙였다.       문학은 물화된 인간이 지켜야 할 인간성의 마지막 보류다. 만약 문학까지 인공지능에 양보한다면 인간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문학은 인간의 정신적인 생식기(生殖器)이다. 인간이 생식기를 제거하면 다음 세대로 인간의 유전자가 전달되지 못하듯, 시를(문학을) 제거하면 우리의 정신적인 유전자는 우리의 다음 세대로 전달되지 못한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인류의 정신적 멸절이다. 인간이지만 안드로이드 로봇처럼 껍데기만 인간으로 살아가는 비(非)인간이다.       당신은 로봇과 같은 삶을 살고 싶은가?   철저히 0과 1에 의지하여. 좋고 나쁨이, 옳고 그름이...   내가 원하고 원치 않고 아닌, 기분과 감정을 벗어난 단순히 0과 1에 연역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이라는 원칙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회가...   그렇게 걱정과 배고픔이 소멸한 사회가 진정 행복한 사회, 우리가 꿈꾸던 유토피아라고 생각하는가?   시(詩)도 문학 작품도 무엇인지도 모르는 비인간적인 사회가....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말했던 (정신이 황폐해진) 배부른 돼지의 세계다.     
인공지능 시대의 시                            /정익진       시인은 시를 쓰면 될 것이다  ―인공지능에 관한 한 편의 시와 다섯       사이보그 목소리 너희를 4인칭이라 부르고 싶다 인간을 앞질러가는 휴머니스트 테크놀로지가 만든 귓속말은 언제나 친절하다      취사 완료 음성이 들리면 전기밥솥을 향해 달려가는 여자, 저녁 6시 앞치 마에 꽃이 핀다 내비게이션 속 여성에게 속도를 통제당하는 남자, 저녁 6시 의 자동차에는 붉은 노을이 핀다 요리 상태를 시시각각 알려주는 음성,    여자는 미각의 농도가 조절되는 시간을 기다리며 모델 번호 ML-1615의 프린트를 켠다 인쇄를 다한 후에 다가오는 낭만적인 남성의 음성, 얼굴 없는 엘리베이터 걸이 남자에게 17층을 알려준다      랄랄라 즐거운 하루 여자는 남자 없어도 남성을 만나고, 남자는 여자 없어도 여성을 만난다      ARS 전화를 걸면 인간보다 더 상냥한 사이보그 목소리  호모 사피엔스, 생각하는 우리들은 사유 칩이 내장되어 있지 않은 상담원에게 고해성사를 한다    즐거운 하루 고해성사는 날마다 쌓이고                                                                                        ― 정진경 시집.『 여우비 간다』 중「 즐거운 하루의 고해성사」 전문.        가장 최근에 본 인공지능 영화 (2015)가 떠 오른다. 여성 A.I. ‘에이바(알리시아 비칸데르)’가 너무 예뻤다. 미모와 지성을 겸비하고 남성의 심리조차도 읽어 낼 수 있어 여간 만만치가 않다. 그래서 ‘꽃뱀 로봇’이란 말도 등장했다. 인공지능 영화의 주인 공들을 볼 때마다 저렇게 예쁘고 잘 생긴 얼굴, 저렇게 완벽한 피부 를 과연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에이바’는 특 수한 센서의 작동으로 육체적(성적) 쾌감까지 느낄 수 있다 한다.        여자는 남자 없어도 남성을 만나고, 남자는 여자 없어도 여성을 만난다      ARS 전화를 걸면 인간보다 더 상냥한 사이보그 목소리         이와 같이 친구보다 더 친구 같은, 연인 보다 더 연인 같은, 부모 보다 더 부모 같은 로봇이 실제 우리의 눈앞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이제 사랑도 우정도 오르가즘을 느끼는 로봇도 살 수 있 는 시대가 온 것이다. 로봇이 그림도 그리고 소설도 쓰고 시도 쓸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인가?        “그림을 그리는 인공지능으로 유명한 ‘딥드림Deep Dream’이 그린 추상화  20여점은 한 화 1억 6천여만 원에 팔렸으며, ‘쿨리타’는 바흐의 음악을 토 대로 새로운 곡을 만들어 냈단다. 일본에서는 인공지능이 쓴 단편 소설 일 부가 한 문학상공모전에서 1차 심사에 통과하기도 했다.”(2016년 부산일보 3 월, 윤여진 기자)       영화『 엑스 마키나』에서 ‘에이바’가 그린 그림을 ‘네이든(불루북의 창시자 役)’이 찢는 장면이 나오는데 에이바의 창조력을 증명하는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잭슨 폴록의 그림 한 점이 등장한다. 이를 두고 네이든은 폴록의 액션페인팅은 생각이 아니라 우연에 의해서 창조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에이바의 감정을 인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인공지능 소설의 일부를 읽어본다     그날은 구름이 드리운 잔뜩 흐린 날이었다. 방안은 언제나처럼 최적의  온도와 습도. 요코 씨는 그리 단정하지 않은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시시한  게임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2016년 3월 23일, 연합뉴스)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한 영화『 A.I.』(2001)에서도 인간 감정을 가진 주인공 A.I. 데이빗이 등장한다. 데이빗은 모정에 굶주린 어린 아이이다. 최고의 장면은 데이빗의 열정적인 혹은 필사적이 ‘엄마바 라기’에 부담감을 느낀 ‘인간 엄마’는 이를 감당할 수 없어 데이빗을 어둡고 무서운 숲 속 길에 버리고 차를 몰아 내뺀다는 상황이었다. 눈물이 났다. 데이빗을 버리고 가는 인간 엄마도 눈물을 흘리고 숲 속에 혼자 남겨진 어린 데이빗은 나를 제발 버리지만 말아달라고 절 규한다. 그 주체가 인간도 아닌 로봇 어린이(고아)였기에 더욱 가슴 이 저려왔다.    로봇 액션 영화『 I. Robot』(2004)에서는 인간이 노예로 여기는 로 봇들에게 오히려 공격당할 수 있다는 경고성 가득한 내용을 담고 있 다. 로봇 주인공 ‘써니’는 다른 로봇들에 비해 뛰어난 지능과 감성을 가진 로봇으로서 인간으로부터의 ‘노예해방’을 주도한다. 수천 명의 로봇들이 마치 군인들처럼 오와 열을 맞추어 집합해 있는 장면을 보 며 섬뜩했다. 로봇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인간을 정복하고 결국 인간 이 로봇이 다스리는 세상에 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인공지능 목소리만 등장하는 영화『 Her』(2014)에서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고민과 갈등을 듣고 상당 부분 해결책까지 제시해준다는 점 에서 ‘인공지능 심리상담사’ 역할을 수행한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인간관계 속에서 인간은 인간을 믿지 못하고 인간이 인간에게 위로 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가 참 씁쓸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      체스 영화,『 세기의 매치 Pawn Sacrifice』(2016)는 이세돌과 알파 고의 대결을 떠올릴 수 있는 영화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고 주인공 인 ‘바비 피셔’는 생전 ‘체스의 황제’라고 불렸지만 반유대주의 사상 을 가졌던 의외의 인물이다. 이 영화는 바비 피셔에 관한 영화일지 는 몰라도 바비 피셔를 위한 영화는 아닌 것 같다. 나의 시선에 비친 바비 피셔의 모습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오히려 인공지능(체스 기계) 으로 성장해가는 인물이자 냉전시대가 낳은 희생양이었다.     시를 쓴다는 것은 말을 하는 것이다. 가장 고등한 동물로서 가장 고도의  의미를 전하는 일이다. 이세돌 국수와 인공지능이 세기의 대결을 펼친다 고 한다. 존 설이 “중국어 산방”에서 말했듯, 인공지능은 형식적 계산을 할 뿐이다. 바둑의 의미를 고려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인공지능은 시를  쓸 수 없다.                                                                           ―변의수.《 시와 반시》 2016. 봄호. 시인의 말에서        이 글 맨 앞에 언급한 정진경의 시「즐거운 하루의 고해성사」에서 의 한 구절,        호모 사피엔스, 생각하는 우리들은 사유 칩이 내장되어 있지 않은 상담원에게 고해성사를 한다      하지만 언젠가 사유의 칩이 내장된 ‘A.I.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해 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에 관한 이런저런 생각에 흥미 로운 부분도 분명 존재하지만 왠지 마음이 착잡해지는 것도 어쩔 수 가 없다. 과학이 어쩌자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이는 인간이 아 직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증명한다. 인공지능 사업 으로 인하여 누군가는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을 것이고, 이를 소 유한 사람들은 그것을 이용하여 또 다른 이득을 창출할 수 있을 것 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끝났으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발전을 추구하는 이들이 분명 존재할 것이고 인류가 멸망하는 그 직 전까지 과학의 진보는 계속될 것이다.      시인들은 인공지능이 시를 쓰든 말든 그것에 대해 신경 쓸 그 무엇 이 있겠는가. 인공지능에 관한 지식은 습득하고 응용하되 다른 예술 인들을 비롯해서 시인들도 그냥 시인의 본분인 시를 쓰면 될 것이다.             **약력:1997년《 시와사상》으로 등단. 시집『 구멍의 크기』,『 윗몸일으키기』, 『낙타 코끼리 얼룩말』,『 스캣』이 있다. 부산 작가상 수상.  
504    수필쓰기는 자신의 삶을 가치롭게 꽃피우는 자각행위이다... 댓글:  조회:2620  추천:1  2017-05-28
처음 수필을 쓰는 사람들을 위해  鄭 木 日  수필은 멀리 있지 않다. 나의 생활 곁에, 삶의 곁에 있다. 슬픔의 곁에, 눈물의 곁에, 기쁨의 곁에, 그리움의 곁에, 정갈한 고독의 한가운데에 있다.  삶과 가장 근접해 있는 문학이 수필이다. 원대하거나 화려하거나 압도하려 들지 않는다. 수필은 자신의 삶과 인생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맑고 투명한 거울이다. 한숨이 나오거나, 그리움이 사무칠 때나, 외로움이 깊어 가만히 있을 수 없을 때 백지 위에 무언가 끄적거려 보고 싶어진다. 그냥 낙서일 수도 있고 문장으로 써 내려가는 경우도 있다.  이 '끄적거림'은 별 의식 없이 나온 것이지만 마음의 독백, 마음의 토로로서 이 속에 자신의 인생과 느낌이 담겨진다는 뜻에서 중요하다. 이 끄적거림이 발전하면 삶의 기록, 인생의 기록이 되며, 문학으로 승화될 수 있다. 기록한다는 것은 자아(自我)의 발견이며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생각해 보는 일이다. 기록함으로써 비로소 역사의식과 영원성을 수용하게 된다.  기록은 삶을 성찰하여 새로운 삶을 꿈꾸며, 의미와 가치를 창출하는 작업이다. 기록하는 일을 통해 삶은 더욱 진지해지고 충실해지며 가치로워진다. 기록은 사실 그대로를 쓴 것이다. 체험(사실)에다 상상과 느낌을 보태어 재구성과 해석을 통해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 수필이다. 기록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지만, 수필은 사실에 상상과 느낌을 불어넣어 삶의 의미와 가치를 담아 낸다. 우리 삶의 얘기가 그냥 기록으로서가 아니라, 수필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상상과 의미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수필은 누구나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다. 일기, 고백, 기행, 감상, 편지- 어느 형식이든지 자유롭게 마음을 토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필은 자신과의 대화이다. 수필을 쓰기 위해선 동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신과의 대화에 과장과 허위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긴장을 풀고 어깨에 힘을 빼야 한다. 장신구도 떼어내고 화장도 지워버리고 홀가분하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실에 눕거나, 턱을 괴고 앉아 친구에게 마음을 토로하듯 쓰는 글이다. 애써 잘 쓰려는 의식이나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마음도 없이―. 권위의식, 체면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일체의 수식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동심으로 돌아가 순수무구의 마음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남에게 잘 보이려는 욕심에서 치장하고 수식하고 싶어 안달을 부리게 된다. 겨울 언덕에 선 벌거숭이 나무처럼 녹음· 꽃· 단풍도 다 떨쳐버린 맨 몸으로 보여주는 진실의 아름다움을 가져야 한다. 수필이 '마음의 산책' '독백의 문학'이라 하는 것은 진정한 자신과의 만남, 인생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성찰을 통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창출해 내는 문학임을 말한다.  수필의 입문(入門)은 어느 문학 장르보다 쉽지만 수필의 완성은 실로 어렵다. 성공한 인생은 많지만 아름다운 인생을 찾기는 어려운 일이다. 시작은 쉬웠지만 점점 들어갈수록 어렵게 느껴지는 글이 수필이다. 시, 소설, 희곡 등 픽션은 작가와 작품이 일치하지 않아도 되지만 논픽션인 수필의 경우엔 작가와 작품이 일체가 되어야 한다. 인생의 경지에 따라 수필의 경지가 달라진다. 수필은 인생의 거울이므로 사상, 인품, 경륜, 인생관 등이 그대로 담겨진다. 심오한 사상, 고결한 인품, 맑고 따뜻한 마음, 해박한 지식, 다양한 체험이 수필을 꽃피우는 요소이고, 이런 인생 경지에 도달한다는 자체가 구도, 자각, 실천의 길이 아닐 수 없다.  수필은 완성의 문학이 아니라, 그 길에 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문학이다. 수필은 자신의 삶을 통한 의미와 가치를 최상으로 높이는 도구다. 수필을 쓰려면 무엇보다 겸허하고 진실해야 한다. 자신의 삶을 꽃피우는 문학이므로 스스로 교만과 허위의 옷을 벗어야 한다. 마음속에 항상 자신의 영혼을 비춰 볼 수 있는 거울을 깨끗이 닦아 두어야 한다. 마음속에 양심의 종을 매달아 두어서 불의나 탐욕의 손길이 뻗힐 때 스스로 자각의 종소리를 내게 해야 한다. 마음속에 맑고 깊은 옹달샘을 파 두어서 거짓의 먼지를 깨끗이 씻어 낼 줄 알아야 한다. 이런 마음의 경지를 얻은 사람이라면, 진실과 겸허의 눈으로 말하고 좋은 수필을 쓸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냥 마음속의 울림 그대로를 끄적거려 보는 데서 시작하면 된다. 낙서라고 해도 좋다. 단 몇 줄의 문장을 만들고 점차 자신의 마음을 토로해 나가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수필과의 만남을 얻게 될 것이다.  자신의 삶을 기록하는 습성을 가지는 일이 수필을 쓰는 첩경이 된다. 삶의 기록이 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① 체험의 서술  ② 체험 + 느낌  ③ 체험 + 느낌 + 인생의 발견, 의미부여  ④ 체험 + 느낌 + 인생의 발견, 의미부여 + 감동  ①은 자신이 겪은 대로 쓴 것이어서 기록문에 불과하다.  ② 수필이 되려면 체험과 느낌이 조화를 이뤄야 함을 말한다. 체험이 많고 느낌이 적을 땐 정서감이 부족하여 딱딱하게 느껴지고, 체험이 적고 느낌이 많은 경우엔 추상적이고 현실감의 결여를 느끼게 한다.  ③의 수준이면 수필에 진입한다. 수필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 인생의 발견과 의미를 창출하는 문학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체험을 통한 인생의 의미부여가 필요하다.  ④의 경우엔 '감동'을 주문하고 있다. 수필이 자신의 체험을 소재로 한 글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나 인생의 의미를 일깨우고 읽는 보람을 안겨 주기 위해선 '감동'이 있어야 한다. '감동'은 문학성의 핵심 요소이다.  수필은 삶의 문학이다. 수필 쓰기는 자신의 삶을 가치롭게 꽃피우는 자각과 의미 부여의 행위이다.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의미의 꽃으로 피워낼 수 있을까, ― 이것이 수필을 쓰는 핵심이며 궁극적 목표가 아닐 수 없다.     -------------------------------------------------------------------------------------------     끈질기게 나를 찾아다니는 전화 ―고옥주(1958∼) 몇 개의 숫자 속에서 나는 숨지 못한다 무수한 기억을 뚫고 네가 나를 추적해 올 때 뇌세포보다 더 많이 입력된 정보와 영상 사이로 나는 아무 기억도 상상력도 없다 파묻힌 찬 세월 속에 얼음공주 미이라 손가락의 문신처럼 움찔거리며 살아나는 네 그리움을 이해할 수 없다 죽었던 모기가 다시 살아난다면 해체된 지뢰가 다시 폭발한다면 끝난 사랑이 다시 불붙는다면 나는 갈갈이 찢어지고 말리 날 찾지 마 빠득빠득 잊혀지고 싶어 부족함이 가득한 이 세상 지난 시간을 내게 남겨 줘 묻힌 인연들이 제가 세운 둥지를 틀어 안고 흘러간다 흐르는 대로 흘러가면 좋으리     멀쩡하게 살다가 느닷없이 옛날 친구나 옛날 애인을 찾는 병이 도질 때가 있다. 가슴이 욱신거린다. 상대방에 대한 그리움으로도 욱신거리고 젊은 날의 자신에 대한 그리움으로도 욱신거린다. 그토록 가까웠건만, 이제는 자기가 그의 인생에서 너무도 오랜 세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걸 새삼 깨달아서도 욱신거린다. 그렇지만 틀림없이 그 사람도 내가 그리웠을 거야. 얼마나 나를 사랑했던 사람이던가. 아, 그 아름다웠던 시절, 그 아름다웠던 관계! 내 목소리를 들으면 엄청 반가워하겠지. 생각만 해도 두근두근해져서 이리저리 수소문해 드디어 전화번호를 알아낸다. 아, 그러나! 해체된 줄 알았는데 지뢰가 폭발하면 어떻게 되나? 그리움에 사무치는 목소리로 함께했던 시절의 열정을 되살리며, 혹은 재밌었던, 혹은 아름다웠던 에피소드를 끄집어내지만 화자는 그에 대해 ‘아무 기억’이 없을 뿐 아니라 ‘상상력도 없다’. 돌이켜보기도 싫은 것이다. ‘날 찾지 마!’ 당황과 아픔 속에서 화자는 애원하고 비명을 지른다. ‘빠득빠득 잊혀지고 싶다’고 한다. 너를 만나면 다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렵다. 나 이렇게 잘 살고 있는데, 갑자기 네가 날 찾으면 어쩌란 말이냐?  당사자는 힘들겠지만 나는 부럽구나. 이삼십대는 뜨거운 열정으로 뭐든 도전하고 경험하고 살아야 한다. 그렇게 패를 깔아놔야 사오십대에 ‘다시 살아나는’ 이변도 있으련만…. 무라카미 류가 말했다.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어가는 거야.’ 안전하게 사는 게 다가 아니다. 은근히 재밌는 시!  
503    시간의 그 끝머리는 상처를 치유해주는 하나의 과정과 방식... 댓글:  조회:2854  추천:1  2017-05-28
상처와 죽음을 바라보는 몇 가지 방식 박남희(시인) 1. 상처와 죽음의 시간적인 의미 시간을 선형적으로 인식할 때 인간의 삶이란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생의 마무리이며 매듭인 셈이다. 시학에서 삶을 이야기 하면서 종종 죽음에 천착하게 되는 것은 죽음이야 말로 삶의 비의를 숨기고 있는 뇌관과 같은 것이라는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선형적으로 보면 죽음은 시간의 끝에 존재하며 그동안 시간이 걸어온 길에 대한 반성적인 거울을 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은 삶의 끝에 있으면서도, 매 순간의 삶의 의미를 환기시켜주고 있고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무수한 상처를 매듭지어주는 신비한 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선형적 시간의식 속에는 이미 상처가 내장되어 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상처란 집단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의 상처를 포함하는 것인데, 이 두 가지 상처는 엄밀한 의미에서 각자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다른 각도에서 보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개인이 스스로 개체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개인과 집단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고대의 역사가 집단에 치중되어 있었다면 근대의 역사는 차츰 개인을 중시하는 쪽으로 발전해왔다. 근대 시 역시 근대 이전의 시에 비해서 개인의 정서와 사상을 중시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양상은 문학의 다른 장르에 비해서 시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점에서 시야말로 현대성의 첨단을 달리고 있는 장르라는 것이 드러난다.  특히 시에 있어서 서정성은 개인적 정서를 드러내는데 유용하고, 서사성은 대체로 집단의 공통적인 화두를 시적으로 형상화 시키는데 적합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상처는 서정성이나 서사성과는 무관하게 거의 모든 시에 나타나 있다. 시에 있어서 상처를 읽어내는 방식은 시간을 전경화시켜서 바라보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시간을 전경화 시키는 방식은 기억이나 체험을 현재화 시키는 수법이 일반적이다.  2. 상처, 혹은 기억과 체험의 현재화 물이 흘러가다 돌부리에 부딪쳐서 부서지기도 하고 물방울로 튀어서 낯선 곳에 버려지기도 하듯이, 인간의 삶을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전경화시켜서 바라보면, 개인과 역사 속에서 부서지고 분리되고 고립되는 상처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상처들은 커다란 흐름 속에서 어긋남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데, 이러한 어긋남은 주로 타의적이고 집단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쉽게 치유되기가 쉽지 않다는 구조적 모순을 안고 있다.  근대문학의 시점을 20세기 초로 본다면 우리의 근대문학은 근대사의 상처와 더불어 성장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 36년간의 암흑기와 6.25전쟁, 4.19 혁명과 5.16 군사구테타, 그 후의 군사독재 정권과 광주민주화 운동 등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근대사는 그 자체가 다양한 상처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문학 역시 이러한 근대사와 함께 상처의 길을 걸어왔으며,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러한 상처야 말로 우리 근대문학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문학이 지니고 있는 아이러니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상처는 주로 과거의 기억이나 체험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문학으로 수용하려면 기억이나 체험의 현재화가 필요하다. 우선 다음의 시를 읽어보자. 그 상수리나무 지금도 그 자리에 서 있는지 진달래 피는 금강변 신동엽시비 곁에는 죽은 상수리나무 하나 봄비에 젖어 있었는데요 진달래 꽃그늘 아래 장총을 베고 잠들던 소년병사처럼 그 상수리나무 지금쯤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지 살아생전 열매 털던 모진 떡메에 시달려 엉덩짝처럼 짓이겨진 상처 두어 개 옆구리에 매달고 비 그친 하늬바람에 감기어 있었는데요 발길질 해댈 때마다 이 세상에는 용서 못할 것들이 끝끝내 있다는 듯이 털릴 열매도 없이 신동엽처럼 부르르 부르르 진저리치고 있었는데요 ―정양,「상수리나무」전문(『문학과 경계』2005년 여름호) 이 시에서 ‘상수리나무’는 신동엽과 소년병사로 상징되는 근대사의 상처를 현재화시켜서 보여주는 환유적 대상물이다. 상수리나무는 이 땅의 민주화의 첨단에서 껍데기는 가라고 외쳤던 신동엽의 시비 곁에 죽은 채 서있는 나무라는 점에서 신동엽과는 환유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3연 역시 상수리나무는 “진달래 꽃그늘 아래/장총을 베고 잠들던 소년병사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나무라는 점에서 소년병사와 환유적 관계에 있다. 그런데 이러한 환유적 관계는 이상하게도 은유적으로 읽혀지는데, 이것은 신동엽과 상수리나무가 죽었다는 점에서 상동관계에 있고, 상수리 나무와 소년병사가 사라졌다는 점에서 유사점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동엽과 소년병사는 상수리나무로 완전히 환치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은유라고 볼 수는 없다. 4연에 오면 상수리나무는 신동엽과 소년병사로 상징되는 우리의 근대사의 상처와 직접적으로 만나게 된다. 상수리나무 열매를 털기 위한 “모진 떡메에 시달려/엉덩짝처럼 짓이겨진 상처 두어 개/옆구리에 매달고”있는 상수리나무야말로 우리의 근대사의 또 다른 이름이다. 하지만 역사의 ‘발길질’은 이러한 아픔과는 상관없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 시인의 생각이다. 마지막 연의 “발길질 해댈 때마다/이 세상에는 용서 못할 것들이/끝끝내 있다는 듯이/털릴 열매도 없이 신동엽처럼/부르르 부르르/진저리치고 있”다는 표현에서 이러한 시인의 관점이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털릴 열매도 없는데 무작정 털어대는 행위야말로 시인의 관점에서 보면 역사의 무자비한 폭력이고 모순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의 ‘어긋남’과 상처는 종종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잊혀지기도 한다.  더운 바람에 갈대만 술렁인다. 개성 뒷산을 바라보며 강변을 어슬렁거릴 때 강물 타고 떠내려온 철모 하나 나는 이것이 누구의 것인 줄 알 수가 없다 쪼그리고 앉아 해묵은 갈대 알구지로 철모를 건져올린다 뚜껑 없는, 속이 빈 화이버 흰 물새 날개짓 같은 글씨가 또렷하다 믿음, 소망, 사랑 ­ 이건 참 이상하다 20년전 참호 속에 숨어 내가 00군번으로 썼던 낙서 이 글자판의 화이버가 녹슬지 않고 지금도 떠내려온 것은 아침 세수길에서 그때 내가 멍청히 흘려보낸 철모일까 아 오늘 이 강가에 나와 내가 다시 만난 침묵 하나 이 침묵은 너무 두렵고 고요하다 ―송수권,「임진강」부분(『창작 21』2005년 여름호)  이 시의 인용되지 않은 후반부와 연결시켜 보면, 시인은 일요일 한낮에 자유의 다리 밑 임진강에 가서 개성 뒷산을 바라보며 어슬렁거리다가 우연히 철모를 줍게 되는데, 이 철모는 시인이 20년 전 군대에서 세수하다가 멍청히 흘려보낸 철모와 너무나 닮아있다는 점에서 시인에게 새롭게 전경화 된다. 떠내려 온 철모에 씌어 있던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글씨는 시인이 20년 전에 화이버에 썼던 낙서와 동일하다는 점에서 까맣게 잊혀졌던 과거를 현재화시키는 동인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글은 시인 자신의 창작품이 아니라 성서에 나오는 글이라는 점에서 시인이 발견한 화이버가 20년 전에 자신이 물에 떠내려 보냈던 화이버와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이 화이버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이 화이버가 20년 전의 화이버와 동일한지의 여부를 떠나서 이 화이버를 통해서 20년 전의 역사를 새롭게 환기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 철모를 시의 말미에 ‘침묵’으로 은유함으로써 역사의 침묵에 대한 무언의 항변을 하고 있다. 시인은 “이 침묵은 너무 두렵고 고요하다”고 말한다. 이 시의 인용되지 않은 후반부에서 시인은 “이 침묵을 깨뜨릴 자 누구인가, 답답한 산도/이제 한번쯤 돌아앉아 입을 열 때가 되지 않았을까”라고 말함으로써 여전히 분단이 지속되고 있는 한반도의 현실을 한탄하고 있다.  상처는 그 상처가 생긴 그 순간에는 그 상처의 아픔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순간에는 상처의 정체를 똑바로 인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처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아파온다. 이러한 아픔은 그 상처를 치유하려는 몸속의 저항과 관계된다. 아픔을 인식시키는 감각이야말로 상처에 대항하게 해주는 안티테제인 것이다.  칼날이나 칼날 같은 것이 살갗을 베고 지나간 후 바로 들여다보면 상처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 때는 아프지 않다 조금 더 기다리면 통증은 배어나는 핏물과 함께 온다 상처는 피로 증명되고 피가 나면 통증이 온다 그 아침, 피를 보지 말아야 했다 고개를 돌린다고 다 피할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는 있다 ―이희중,「상처에 대하여」부분(『문학마당』2005년 여름호)  이 시 역시 상처가 살갗을 베고 난 후 금방오지 않고 시간이 어느 정도 경과 한 후 “핏물과 함께 온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의 ‘핏물’은 상처를 가시적으로 확인시켜주는 시각적인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역사와 연결시켜보면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서 역사의 상처를 객관적으로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 단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 시에 따르면 상처는 피로 증명된다. 하지만 시인은 그렇다고 피를 보지 않는 행위를 통해서 상처를 피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시인은 “고개를 돌린다고 다 피할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는 있다”고 말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닥쳐오는 역사의 소용돌이나 상처가 이미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임을 암시해주고 있다. 3. 상처의 풍경과 치유의 방식 오래된 상처는 그 상처가 우리의 눈에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오랜 세월 속에서 그 상처가 어느 정도 지워졌거나, 아픔의 감각이 이미 무뎌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상처의 존재를 아주 무화시켜주지는 못한다. 상처는 살갗이 아문 뒤에도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서 우리를 괴롭히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상처의 온전한 치유는 물리적인 치료 뿐 아니라 기억을 통한 심리적인 요인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상처란 뿌리가 깊고 복잡하다. 따라서 그 치유의 방식도 복잡할 수밖에 없고, 완치 가능성도 쉽게 장담할 수 없다. 아래의 시는 우리에게 상처의 풍경을 보여주고 그 치유방식을 나름대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그녀는 49년생 소띠에 무남독녀로 자랐다. 타고 난 것일까, 성격이 우직해서 근본은 잘 울지 않는다.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얼굴도 모르는 슬픔에 대해 울 일 없다. 아버지는 6.25 전쟁 때 전사했다. 역사에 대해 물론 울 일 없다. 그 힘센 홀어머니 이제 다 늙었다, 낯익은 슬픔에 대해 더 이상 울 일 없다. 그 고생에도 어머니, 울지 않았으므로 그 속 다 물려받았으므로 그녀는 잘 울지 않는다. 도대체, 그녀의 인생은 담수 중인 것일까. 드디어 대학까지 나오고 시집가고 아들 딸 낳아 키웠고 사십 여 년 직장생활 동안 그러나 남편은 일평생 백수이고 별 볼 일 없고 그녀는 낙이 없고 그래서 성당 나가고 맹신하고 건강을 위해 운동하고 한탄해도 늙어가고 마침내 한 번, 행복하지 못하지만 그녀는 잘 울지 않는다. 인체의 70% 이상이 물이라고 했던가, 그녀는 좀 뚱뚱한 편이다. 그녀의 꾹 다문 인상에선 만수가 느껴진다, 그녀는 잘 운다. 연속극 같은 걸 보다가도 걸핏하면 운다. 이산가족 찾기 실황방송을 보면서 많이 울었고 무슨 유가족들 슬피 우는 것 보다가 덩달아 운다. 어딜 좀 부딪쳐 아프기라도 할라치면 비로소 살아나는 상처가 있는지 울고 당신 밖에 없단 말에 울고 선물 하면 울고 아이들한테 위로 받으면 찔끔, 운다 근본은 잘 운다, 그녀는 무넘이처럼 운다. 눈물 어룽거리면서도 끔벅, 소처럼 소리가 없다. 그녀는 가끔 방류한다. ―문인수,「저수지 풍경」전문(『현대시』2005년 7월호)  시인은 저수지를 보면서 49년생 소띠에 무남독녀로 힘겹게 자라온 그녀를 떠올린다. 이 시는 저수지의 ‘담수’와 ‘방류’를 ‘울지 않는 행위’와 ‘우는 행위’에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이 시의 전반부는 그녀가 울지 않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녀가 울지 않는 이유는 그녀가 행복하거나 울만한 일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녀가 ‘얼굴도 모르는 슬픔’이나 ‘낯익은 슬픔’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은 ‘그 고생에도’ 울지 않았던 어머니의 모진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는 후반부에 와서 그녀가 걸핏하면 우는 여자임을 말함으로써 그녀의 본성이 울지 않음에 있지 않다는 것을 폭로한다. 그녀의 몸이 좀 뚱뚱한 편이라는 진술은 그녀의 몸에 수분이 많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녀의 몸에는 눈물이 많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지시해준다.  시인이 잘 울기도 하고 울지 않기도 하는 그녀를 저수지에 빗대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운다’고 표현되는 그녀의 상처가 단순히 개인의 상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저수지가 물을 담수하고 방류하는 행위는 그 안에 물이 있고 그 물을 수용할 만한 공간이 있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다. 그녀를 저수지로 본다면 물은 그녀 안에 있는 눈물이고, 상처의 또 다른 기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녀로 상징되는 저수지는 자신의 내면으로 흘러드는 물을 담수하고 방류하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성을 확인한다. 저수지가 물을 담수하고 방류하는 행위는 모두 저수지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존재성을 확인하는 방법이고 자신의 삶의 방식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런 저수지의 행위를 역사나 인간의 상처에 빗대어 보면, 일종의 치유의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 위의 시에서 그녀가 울지 않는 것은 나름대로 세상을 모질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방식이고, 우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 뭉쳐있던 상처의 응어리를 풀어내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두 가지가 다 나름대로의 치유의 방식이고 존재의 방식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울음은 ‘무넘이’처럼, 소처럼 소리 없이 운다는 점에서 그녀로 표상되는 상처의 주체, 즉 역사가 처해있는 현실이 그리 낙관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위대한 생애가 위대하게 다하고 울음이 끝나고 썩음의 생애가 다하고 기억과 시간의 생애가 다하면 생명 아닌 그 무엇으로 우리가 다시 태어나는지 저녁놀 직전 왕릉을 우러르면 보인다. 빛도 크기도 없다 색깔도 없다 깊음도 없다 모양도 없다 동그라미는 수천년이 애매하다. 왕릉의 동그라미는 가라앉으며 솟아오르므로 제자리이다. 가라앉음이 솟음이므로 제자리다. 우리의 남은 생애가 생애 너머로 흔들린다. 저녁놀 직전 우러르면 왕릉은 빛 없는 빛이다. 크기 없는 크기다. 냄새, 남은 생애의 냄새 없는 냄새 코끝에 물씬하다. ―김정환,「왕릉」전문(『내일을 여는 작가』2005년 여름호)  죽음의 위대성은 크기나 모양으로 측량되지 않는다. 왕릉은 보통사람의 묘에 비해서 크기도 크고 웅장하지만, 그 묘는 더 이상 권위를 갖고 있지 않다. 과거의 어떠한 영화나 위대함도 시간 앞에서는 그 형체를 잃는다. 왕릉은 그 위대성과 더불어 무덤 스스로 숨겨진 상처를 내장하고 있다. 하지만 왕릉의 위대함이나 상처는 모두 “기억과 시간의 생애가 다하면” 빛도, 색깔도, 깊음도, 모양도 없어진다. 다만 하나의 동그라미만 남는다. 여기서의 동그라미는 시간의 원형이며 시간의 끝인 죽음에 닿아있는 부재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간을 원환적으로 바라보면 윤회의 시간이고 원의 시간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은 존재의 있고 없음도 아니고, 밝음도 어둠도 아니다. 시인은 “동그라미는 수천년이 애매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애매하다는 것은 우리의 감각을 혼동시킨다는 개념으로, 겉으로 보이는 왕릉의 모습이 노을이 지는 시간 즉, 죽음의 시간 속에 들어가서 보면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왕릉의 동그라미는 왕릉의 광휘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러한 광휘 즉 이 땅의 영화야 말로 가라앉았다가 솟아오르는 것이고, 결국은 그것조차 구별되지 않는 ‘제자리’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시는 결국 이 땅에서 영원한 영광은 없으며 모두 시간 앞에서는 무기력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시간이야 말로 상처를 치유해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인 셈이다. 시간의 끝을 죽음으로 본다면 죽음은 상처를 치유해주는 또 하나의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네 식구였다 하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콘크리트 바닥을 훑고 다니고 하나는 안전선 밖에서 종종거리고 하나는 뜨거운 레일 위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푸득 날아 건너편으로 가고 하나는 제 집인 듯한 전철 플랫폼 슬레이트 지붕 밑에서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빠알간 맨발이었다 ―이경림,「비둘기들」전문(『현대시』2005년 8월호)  본래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라고 해서 인간은 비둘기를 잘 해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비둘기들은 도심 어디서나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 시는 지상의 전철역 부근에 살고 있는 네 마리의 비둘기 가족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이 시를 읽다보면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가 떠오르는데, 이것은 두 시가 유사해서라기보다는 도심에 살고 있는 비둘기의 집 없음(homeless)이라는 모티브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가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생기면서 비둘기의 번지가 없어지면서 ‘홈리스’의 처지로 전락했다면, 이경림의 비둘기는 도시의 임시 거처에 세 들어 살고 있다는 점에서 문명의 폭력에 의한 ‘홈리스’를 경험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생태 환경 시로도 읽을 수 있지만, 이 시는 단순히 생태 환경 시의 차원을 넘어서 문명에 의해서 침해받는 ‘평화’와 ‘자연’의 결핍을 동시에 지적하고 있다. 이 시에 등장하는 비둘기들은 한결 같이 안전과 생존을 침해 받고 있으며, 불안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시의 끝부분에서 시인이 비둘기의 ‘맨발’을 전경화시키고 있는 것은, 문명의 폭력 앞에서 무방비상태로 놓여있는 비둘기들의 힘없음과 헐벗음을 고발하기 위한 것이다.  도심에 사는 비둘기는 그 안에 상처를 가지고 있다. 그들의 집 없음과 불안은 문명에 의해서 훼손되었다는 점에서 분명히 상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이러한 상처를 도심에 적응해서 살아가는 방식으로 치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인이 이 시에서 제시한 “빠알간 맨발”은 한편으로는 문명에 대한 순응의 표시이고 한편으로는 문명에 대한 반항의 표시라고 말할 수 있다. 시간은 이렇듯 지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일순간 ‘맨발’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인간의 삶의 마지막 역시 ‘空手來 空手去’라는 점에서 ‘맨발’이다. 그런 점에서 비둘기들의 ‘맨발’이야말로 세상의 어긋남이나 상처와 대면하는 가장 정직한 삶의 방식인지도 모른다. < 창작 21>2005년 가을호   -------------------------------------------------------------------------------     들개 신공  ―박태일(1954∼ ) 벅뜨항 산 꼭대기 눈 어제 비가 위에서는 눈으로 왔다 팔월 눈 내릴 땐 멀리 나가는 일은 삼간다 게르 판자촌 가까이 머물며 사람들 반기는 기색 없으면 금방 물러날 줄도 안다 허물어진 절집 담장 아래도 거닐고 갓 만든 어워 둘레도 돈다 혹 돌더미에서 생고기 뼈를 찾을 제면 다 씹을 때까진 떠나지 않는다 누가 보면 어워를 지키는 갸륵함이라 하리라 공동묘지를 돌면 소풍 나섰다 생각하라 울타리 아래 아이 똥 닦아 먹고 비 온 뒤 흙탕물로 목을 축이며 물끄러미 발등을 핥는다 우리는 대개 검다 속살은 붉지만 시루떡처럼 부푼 석탄광 잡석 빛깔이다 때로 양떼 가까이 갔다 집개에게 쫓겨난다 그래도 사람 가까이 머물러야 한다 야성은 숨기고 꼬리는 내려야 한다 집 없고 가족 없는 개라 말하지 마라 들개는 본디 가족을 두지 않는다 사람 가운데도 더러 개를 닮은 이가 있으나 우린 마냥 들개다 잉걸불 이빨을 밝히고 짖는다 두려워 마라 물기 위한 일이 아니다 다만 사람과 거리를 둘 따름 어금니 빠지고 벽돌을 삼킨 양 속이 무겁지만 고픈 일이 배뿐이겠는가 길가 장작더미 지날 땐 피어오를 저녁 불꽃을 떠올릴 줄도 아는 나는 들개다 그런데 사실을 밝히자면 목줄이 문제다 걷기도 힘들다 어려서 주인을 떠날 때부터 두른 목줄 풀지 못한 목줄이 몇 해 나를 졸라왔다 지나는 일족을 보며 나는 주로 앉아 지낸다 동정하지 마라 이렇듯 숨가쁜 슬픔도 들개의 신공이다.     기행시는 시적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내 편견을 깨뜨린 시집 ‘달래는 몽골 말로 바다’에서 옮겼다. ‘달래는 몽골 말로 바다/두 억 년 앞선 때는 바다였다는 고비알타이/소금 호수 천막 가게에서/달래장아찔 카스 안주로 주던/달래는 열 살/아버지 어머니/달래 융단 아래 묻은’(시 ‘달래’ 중에서). 몽골의 여기와는 완연히 다른 풍토와 생김새나 성정이 우리와 닮은 사람들이 시 한 편 한 편에 생생하게 담겨 있다. 에두르지 않으면서 담담히, 정밀하게 그린 시들을 읽으며 총천연색 영상이 흑백 영상보다 더 절묘하고 가혹하게 풍광과 사람살이의 정조를 보여줄 수도 있다는 걸 알겠다. 벅뜨항은 탄광촌이었던 곳으로 몽골에서도 한층 가난한 마을인 듯. 그런 곳에서 들개로 살아가자니 허구한 날 배를 곯을 테다. ‘고픈 일이 배뿐이겠는가.’ 개는 유전자 깊이 사람에 의탁해 살도록 길들여졌는데 아무도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더욱이 이 들개는 길가 장작더미만 봐도 ‘피어오를 저녁 불꽃을 떠올릴 줄 아는’, 집에 살던 개였건만 강아지 적에 버려졌다. ‘풀지 못한 목줄’은 개의 굵어진 목뿐 아니라 목줄을 해준 사람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을 조였으리라. 이 ‘숨 가쁜 슬픔’은 시인의 신공이기도 한 듯. 모든 숨 탄 것들의 고단함과 쓸쓸함과 슬픔을 시인은 따뜻하고 웅숭깊은 품으로 그러안는다.  
502    소금은 죽음에서 피여나는 생명의 꽃이다... 댓글:  조회:2602  추천:0  2017-05-28
바다와 길의 변주곡  -김명인의 시집『파문』 박남희(시인) 1. 바다와 길 사이의 시학 김명인 시를 관통하고 있는 대표적인 이미지는 ‘바다’와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다는 물론 김명인의 뼈아픈 유년체험의 상징적 대상으로 그의 초기 시에서부터 후기 시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나타나는 대표적인 이미지라고 할 수 있고. 길은 그가 고향을 떠나와서 겪게 되는 방황과 모색의 표징물로서 김명인 시인의 삶의 노정을 상징하는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다. 이미 여러 평자들에 의해서 지적 된 바 있듯이 김명인의 시에서 바다 이미지는 그의 유년체험과 맞물리면서 그의 시 전체를 관통하는 근원적 심상으로 간주되어져 왔다. 출렁거리면서도 어딘가로 끊임없이 들고 나는 행위를 반복하는 바다는 김명인에게 있어서 영원한 그리움이면서도 결국은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뼈아픈 유년의 고향체험을 간직하고 있는 복합적 의미를 지닌 심상인 것이다.  김명인 시에서의 길 이미지는 ‘떠남’이라는 명제와 맞물려 있는데, 이는 그에게 지독한 고통과 환멸을 안겨준 유년체험의 아픔이 가져다준 방황과 모색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바다’로 상징되는 그의 유년 체험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물인 셈이다. 원래 길 이미지는 ‘떠남’과 ‘돌아옴’이라는 두 가지 명제와 관계되어 있는 것이 보통인데, 김명인의 시에서는 ‘돌아옴’보다는 주로 ‘떠남’에 비중이 실려있다. ‘떠남’에 대한 단초가 보이는 것은 물론 그의 첫 시집인 『동두천』(1979)이다. 이 시집에는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아버지와 아버지 대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서 자식을 돌볼 수 없었던 어머니, 이런 척박한 가정환경 속에서 본의 아니게 고아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시인 자신의 ‘더러운 그리움’으로 가득했던 유년체험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따라서 그의 고향에 대한 기억은 아름다움이나 그리움보다는, 어딘가 벗어나야 할 숨 막히는 ‘아우시비쯔’와 같은 곳으로 인식된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어딘가로 가고 있는 중이라는 탈출에의 상상과 자신의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을 지나 어디론가 떠나야 할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동두천 1」). 김명인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던 ‘떠남’에 대한 갈망이 ‘길’의 이미지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그의 세 번째 시집인 『물건너는 사람』(1992)부터이다. 그는 이 시집에서 인간의 노동과 바다가 만나는 ‘소금바다’에 천착하기도 하고(「소금바다로 가다」), 쉽게 버릴 수 도, 그렇다고 쉽게 외면해 버릴 수도 없는 그의 내면의 영원한 상처로 남아있는 가족사적 체험을 ‘유적’이라는 모티브를 통해서 현재화 시켜서 바라보기도 한다(「유적에 오르다」,「유적을 향하여」「유적을 위하여」). 이러한 그의 노력은 그의 ‘떠남’이 단순히 고향으로부터의 도피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눈물겨운 성찰에 바탕을 둔 필연적인 떠남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특히 이 시집에서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소금’의 이미지는 ‘바다’와 ‘인간’을 동시에 포섭하는 이미지라는 점에서 김명인 시인이 추구하는 시 세계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의 시에 나오는 ‘소금’이미지는 ‘모래’나 ‘파도’ 이미지와 함께 넓게 보면 ‘바다’의 이미지에 포섭된다는 점에서, ‘바다’라는 근원적 이미지의 환유적 상관물들인 셈이다. 특히 여기서 ‘소금’ 이미지는 남진우의 지적대로 물과 모래의 종합이라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물이 시인의 유년 체험의 근원인 ‘바다’와 상관이 있고 개인적인 가족사와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면, 모래는 사막과도 같은 세상으로 상징되는 현대 문명의 제유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시인이 개인적이며 근원적인 ‘물’의 세계를 떠나 도달하고 싶어 하는 곳은 보다 넓은 세상이지만, 그 세상도 결국 사막과 같은 곳이기 때문에 오래 머물 수 없는 곳이다. 이러한 개인과 세계의 구조적인 갈등은 시인으로 하여금 끝없는 탐색의 길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게 만들기도 하고, 반면에 영원히 바다를 떠날 수 없게 하는 근본적인 요인이기도 하다.  그의 네 번째 시집인『푸른 강아지와 놀다』(1994)는『물건너는 사람』에 이어 ‘길’에 대한 탐색을 가장 본격적으로 보여준 시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이 시집을 통해서, 그가 고향이 ‘후포’에서 ‘동두천’으로, ‘유타’로, ‘연해주’로 쉴 새 없이 달려온 길의 행로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뒤돌아보기도 하고, 영문도 모르는 길을 가면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하늘’과 그 길의 끝에 있을 ‘블랙홀’을 가늠해 보기도 한다. 시인이 길을 통해서 줄기차게 탐색해 온 것은 결국 삶과 죽음으로 요약되는 시간에 관한 인식이다. 시인은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반추해 보면서 자신이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운명과 그동안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한 허망함 사이에서 새로운 삶을 찾아 운명을 견디는 법을 깨닫게 된다.  하늘에 솜자루 풀어놓고 안산 가까이 날아가다 되돌아보는 구름 몰고 가는 짐승들 발걸음이 풍선처럼 가벼워 인간이 닿지 않는 저 육전 거리까지 끌려가보자 일행은 팔리러 가는 길인 줄도 잊어버린 채 한 구름의 무심한 인도를 즐겁게 따라 걷는다 영문 모른 채 새옷 입고 어머닐 쫓아나섰던 그 때 그 고아원 길 빌려온 책을 코앞에 펼쳐놓아도 텅 빈 마음이 까마득한 사다리를 타고 흔들리는 하오, 읽던 글귀도 바람이 다 들고 가버렸다, 우리가 모르는 블랙 홀이 산너머 더 먼 하늘 거기에도 있다는 것이다 ―「하늘 길」전문 시인은 빌려온 책을 보다가 우연히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보게 된다. 하늘에는 구름이 짐승들을 몰고 육전의 시장거리로 팔러가는 듯한 광경이 보이고, 그러한 풍경은 시인이 어린 시절 영문도 모르고 어머니를 따라나섰다가 혹독한 배고픔과 변두리의 삶을 체험해야 했던 송천동 고아원 가는 길을 되살려 낸다. 시인의 이러한 뼈아픈 체험은 세월이 많이 지난 현재에도 시인의 가슴 속에 ‘블랙 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시인이 여기서 말하는 ‘블랙 홀’은 시인의 내면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인 근원적 어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둠은 본질적으로 죽음 쪽에 가 있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김명인의 ‘블랙홀’은 단순히 죽음을 지향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시인의 의지가 엿보인다. 시인은 ‘블랙홀’의 대척점에 생명의 상징인 ‘꽃’의 심상을 예비해 둔다. ‘꽃’의 심상이야 말로 죽음을 단순히 시간의 끝으로 인도하지 않고 축제로 만들어주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2. 바다와 하늘을 잇는 생명의 끈-꽃  인간은 어머니의 물(양수)에서 와서 지하의 물로 돌아간다. 이 땅에 물이 남겨 놓는 것은 하찮은 재나 티끌뿐이다. 시인은 길을 통한 시간의 탐색의 끝에서 죽음과 만난다. 어쩌면 죽음이야 말로 시인이 걸어온 길의 마지막 화두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생명의 탄생을 바다를 통해서 인식하듯이 죽음 역시 바다를 통해서 바라본다. 시인은 죽음이야 말로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축제임을 인식하고 있다.  우리에게 장례말고 더 큰 축제가  일찍이 있었던가 녹아서 짓밟히고 버려져서 낮은 곳으로 모이는 억만 년도 더 된 소금들, 누구나 바닷물이 소금으로 떠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죽음은 연두빛 흐린 물결로 네 몸 속에서도 출렁거리고 있다 썪지 않는다면, 슬픔의 방부제 다하지 않는다면 소금 위에 반짝이는 저 노을 보아라  ―「바닷가의 장례」부분 위의 시에서 시인이 장례를 하나의 축제로 보는 것은 “녹아서 짓밟히고 버려져서/낮은 곳으로 모이는 억만 년도 더 된 소금들”이 단순히 일시적으로 왔다가 사라지는 죽음의 부산물이 아니라 썩지 않는 방부제로서의 삶의 영원성에 닿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소금 위에 반짝이는 저 노을”은 그런 의미에서 생명의 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금이 바다의 꽃이라면, 노을은 하늘의 꽃이다. 꽃은 죽음을 죽음으로 놓아두지 않고 다시 생명에게로 이어 놓는다. 바다 속에 떠다니는 소금도 언젠가는 돌고 돌아서 다시 인간의 몸에 생명의 자양분으로 복귀하게 마련이다. 태양이 물에서 나와서 물로 사라지지만, 그것은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금이야 말로 죽음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꽃인 셈이다.  내가 이 물가에서 그대 만났으니 축생을 쌓던 모래 다 허물어 이 시계 밖으로 이제 그대 돌려보낸다 바닷가 황혼녘에 지펴지는 다비식의 장엄함이란, 수평을 둥글게 껴안고 넘어가는 꽃수레에서 수만 꽃송이들이 한번 활짝 피었다 진다 몰래몰래 스며와 하루치의 햇빛으로 가득차던 경계 이쪽이 수평 저편으로 갑자기 무너져 내릴 때, 채색세상 이미 뿌옇게 지워져 있거나 끝없는 영원 열려다 다시 주저앉는다 내 사랑, 그때 그대도 한 줌 재로 사함받고 나지막한 연기 높이로만 흩어지는 것이라면 이제, 사라짐의 모든 형용으로 헛된 불멸 가르리라 그대가 나였던가, 바닷가에서는 비로소 노을이 밝혀드는 황홀한 축제 한창이다 ―「다시 바닷가의 장례」전문 앞의 시「바닷가의 장례」가 실제로 바닷가의 장례를 소재로 삼고 있다면, 이 시는 저녁에 바닷가에서 장엄하게 해가 지는 모습을 ‘바닷가의 장례’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하지만 바닷가에서 해가 지는 저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과 죽음을 통해서 이 땅의 모든 헛된 것들의 본질을 똑바로 바라보려는 시인의 시선은 동일하다. 시인은 이 시에서 바닷가 일몰의 장엄한 광경을 “수평을 둥글게 껴안고 넘어가는/꽃수레에서 수만 꽃송이들이 한번 활짝 피었다 진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해가 질 때 하늘을 붉게 수놓는 노을과 출렁이는 바닷물에 비친 반짝이는 노을빛을 묘사한 것으로, 시인이 노을을 꽃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시인은 해가 소멸하는 일몰의 광경을 바라보면서 죽음의 섬뜩함이나 어둠을 생각하지 않고, 거기서 오히려 황홀한 꽃을 본다. 이 시를 보면 삶과 죽음, 밝음과 어둠, 사라짐과 영원의 사이에 ‘꽃’이 놓여있다. 꽃이야 말로 삶과 죽음을 새롭게 여는 문이고 이승과 저승의 틈을 아름답게 수놓는 ‘경계’의 꽃이다. 그런 의미에서 ‘꽃’ 이미지는 김명인의 시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데 ‘꽃’ 이미지는 그의 여러 시집에서 드물지 않게 보이는 중요한 심상임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필자가 이 글에서 주요 텍스트로 삼고자 하는 그의 여덟 번째 시집『파문』(2005)에도 시집의 첫머리에 꽃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절벽 위 돌무더기가 만든 작은 틈새 스치듯 꽃뱀 한 마리 지나갔다 현기증 나는 벼랑 등지고 엉거주춤 서서 가파른 몸이 차오르던 통로와 우연히 마주친 것인데 그 때 내가 본 것은 화사한 꽃무늬뿐이었을까 바닥없는 적요 속으로 피어올랐던 꽃뱀의 시간이 눈앞에서 순식간에 제 사족을 지워버렸다 아직도 한순간을 지탱하는 잔상이라면 연필 한 자루로 이어놓으려던 파문 빨리 거둬들이자 잘린 무늬들 그 허술한 기억 속에는 아무리 메워도 메워지지 않는 말의 블랙홀이 있다 마주친 순간에는 꽃잎이던 허기진 낙화의 심상이여! 꽃뱀 스쳐간 절벽 위 캄캄한 구멍은 하늘의 별자리처럼 아뜩해서 내려가도 내려가도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 끝내 지워버리지 못하는 두려운 시간만이 허물처럼 뿌옇게 비껴 있다 ―「꽃뱀」전문 시집『파문』을 읽어보면 꽃을 소재로 하고 있는 시들이 여럿 보인다. 대충 열거해보아도「꽃을 위한 노트」,「배꽃 江」,「봄산」,「消燈」, 「울타리」,「길」,「복날」,「봄꽃나무」,「식목」,「석류」등이 「꽃뱀」과 더불어 시 속에 꽃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김명인의 시에서의 꽃 이미지는 이 시집에서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 비중이 만만치 않다는 점에서 필자에게는 새로운 변화로 감지된다. 인용 시 「꽃뱀」은 직접 꽃을 소재로 한 것은 아니지만 꽃이 변용된 이미지가 ‘꽃뱀’이라는 점에서 꽃 이미지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앞에서 살펴 본 ‘바닷가의 장례’ 시리즈에서 꽃은 ‘바다’이미지와 관계되어 있다면, 「꽃뱀」에서는 그것이 ‘길’의 이미지와 관계되어 있다는 것이 다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절벽 위를 타고 오르는 꽃뱀과 마주친 경험을 ‘꽃’과 ‘길’의 이미지와 연결시켜서 ‘꽃뱀의 시간’으로 요약되는 인간 욕망의 덧없음과 허위성을 전경화 시키고 있다. 꽃뱀의 “가파른 몸이 차오르던 통로”와 “꽃뱀 스쳐간 절벽 위 캄캄한 구멍”은 그것 자체가 길이면서 동시에 욕망의 흔적이다. 시인은 꽃뱀이 더듬어 왔던 욕망의 흔적을 “바닥없는 적요”나 “캄캄한 구멍”으로 표현함으로써 길의 욕망이 거느리고 있는 허위성을 지적하고 있다. 시인에 의하면 꽃뱀은 한순간에만 꽃이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낙화일 뿐이고, 결국 꽃뱀이 벗어놓은 허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 시에서 흥미로운 것은 물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절벽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물의 이미지가 나타나 있다는 점이다. ‘파문’이 그것인데, ‘파문’은 이 시집의 제목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심상이다. 시인이 ‘파문’에 주목하는 것은 ‘파문’이야 말로 “근원이었던 싱그러움”으로부터 번져 나간 것이며(「순결에 대하여」-『길의 침묵』 소재), “새겼다가 지우며 경계마저 허무는” “나를 흔드는 방식”(「종이배」-『길의 침묵』 소재)이기 때문이다. 즉 시인에게 있어서 ‘파문’은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더듬어가는 방식이고 세상의 온갖 허울뿐인 삶의 경계를 지워버리는, 가장 지혜로운 소멸의 방식인 것이다. 인용 시에서의 ‘파문’ 역시 “잘린 무늬들 그 허술한 기억 속에는/아무리 메워도 메워지지 않는/말의 블랙홀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기표인 셈이다. 그런데 ‘파문’은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 형상이 ‘물의 꽃’과 같다는 점에서 꽃의 심상과 연결된다. 존재의 심연에 블랙홀을 숨기고 있는 꽃인 ‘파문’이야 말로 시인이 탐구하고 싶어 하는 궁극적인 대상의 하나인 것이다.  3. 바다와 길의 만남-물고기  다음으로 ‘꽃’의 심상과 더불어서 시집『파문』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심상은 ‘물고기’이다. 김명인의 이번 시집을 보면 ‘꽃’과 같은 식물 이미지와 ‘물고기’나 ‘뱀’과 같은 동물 이미지가 혼재해 있다. 그리고 또 눈에 띄는 것은「배꽃」,「얼음 물고기」,「우물」,「신발」,「빨래」,「마늘」, 「모과」라는 제목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시 대부분이 구체적인 대상을 시적 소재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시인이 이처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에 천착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흔히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일상이야 말로 시인의 삶의 세목들이며, 넓게 보면 시인 자신의 존재와 환유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분신 같은 존재들이라는 깨달음 때문일 것이다. 시인이 특히 이 시집에서 ‘물고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물고기’야말로 김명인 시인의 상상력의 두 가지 축인 ‘바다’와 ‘길’의 심상을 하나로 아우르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평선에 걸터앉은 낚시꾼들이 커다란 물고기 한 마리를 끌어올리고 있다 어느새 눈높이까지 꼬리를 치렁대면서 흥건하게 퍼덕거림을 쏟아놓는 저 물고기 찢긴 아가미 사이로 피도 조금 내비치고 있다 심해는 어떤 빛조차 스며들지 않는다는데 어떻게 잡혔을까 발광의 몸 둥글게 말아 천 길 캄캄한 무덤 사이로 고요히 헤엄쳐 다녔을 저 물고기 수압을 견딘 衲衣를 벗고 한번도 들어 올려보지 못한 듯 천근 공기를 밀치고 있다 ―「심해 물고기」부분 바다가 너무 넓어서 한 칸 낚싯대로 건져 올릴 물고기 아예 없으리라 줄을 드리우자 이내 전해져온 이 어신은 저도 외톨이인 바다 속 나그네가 물 밖 외로움 먼저 알아차리고 미끼 덥석 물어준 것일까 낚싯대 쳐들자 찌를 통해 주고받았던 手談 툭 끊어져버리고 미늘에 걸려온 것은 외가닥 수평선이다 ―「외로움이 미끼」부분  김명인의 시에 있어서 ‘꽃’의 심상이 이 땅의 ‘色’ 즉 욕망과 관련되면서 황홀함의 색조를 띠고 있다면 ‘물고기’의 심상은 고독이나 외로움의 정조에 가까이 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첫 번째 인용 시「심해 물고기」는 아침 바다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광경을 수평선에 걸터앉은 낚시꾼들이 커다란 물고기 한 마리를 낚아 올리고 있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이 시에서 ‘심해 물고기’는 “발광의 몸 둥글게 말아/천 길 캄캄한 무덤 사이로/고요히 헤엄쳐 다녔을 저 물고기”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은 심해 물고기가 극도의 중압과 캄캄한 어둠을 스스로의 몸빛으로 견디며 살아온 고독한 물고기임을 말해준다. 여기서 ‘심해 물고기’는 태양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시인 자신을 포함한 고독한 인간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물고기는 낚시 바늘을 물고 물 위로 올려지는 순간이 즉 죽음의 순간이지만, 여기서의 ‘심해 물고기’는 심해의 어둠을 뚫고 드넓은 하늘로 올려진다는 점에서 죽음보다는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된다. 실제로 여기서 인용되지 않은 이 시의 마지막을 보면 심해 물고기가 千尋을 하늘로 끌어올리는 것은 하늘 깊이에 ‘서슬 푸른 비늘 한 장’을 꽂아두기 위해서 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서슬 푸른 비늘 한 장’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시인의 무의식의 심연에서 끌어올린 시 같은 것일 것이다.  두 번째 인용 시「외로움이 미끼」역시 평범함을 거부하는 김명인 시인의 번득이는 상상력이 나타나 있다. 이 시를 읽어보면 물고기가 낚시에 잡히는 것은 낚시꾼이 물고기를 잡는 것이 아니라 낚시꾼의 외로움을 간파한 물고기가 미끼를 일부러 덥석 물어준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전도된 상상력은 “바다가 너무 넓어서/한 칸 낚싯대로 건져 올릴 물고기 아예 없으리라”는 이 시의 첫 구절에 이미 암시 되어 있다. 여기서 바다가 넓다는 것은 외롭다는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이고, 한 칸 낚싯대가 상징하는 것은 인간의 인위적인 노력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앞의 시에서 낚시꾼이 끌어올린 심해 물고기가 시를 상징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시 역시 낚시꾼이 외로움의 물고기를 낚는 것은 시인이 내면의 바다에서 시를 건져 올리는 행위에 비견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인이 “한 칸 낚싯대로 건져 올릴 물고기 아예 없으리라”고 한 것은 시인이 시를 낚는 것이 시인의 능력보다는 ‘외로움’이라는 미끼 덕분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두 시에서 공통적인 것은 물고기가 바다 속에서 수평으로 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에서 하늘로 수직이동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보편적으로 물고기의 길이 수평적이라는 통념을 깨는 것으로 그 이면에는 하늘로 상징되는 ‘초월’에의 정서가 녹아있다. 물고기가 하늘로 오르는 일이야 말로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초월을 이루는 것이라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김명인 시인이 추구 하는 ‘바다’와 ‘길’의 접점에 ‘물고기’의 이미지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  * 2005년 가을호  -----------------------------------------------------------------------------------------     자두  ―이상국(1946∼ ) 나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 대학 보내달라고 데모했다 먹을 줄 모르는 술에 취해 땅강아지처럼 진창에 나뒹굴기도 하고 사날씩 집에 안 들어오기도 했는데 아무도 아는 척을 안 해서 밥을 굶기로 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우물물만 퍼 마시며 이삼일이 지났는데도 아버지는 여전히 논으로 가고 어머니는 밭 매러 가고 형들도 모르는 척 해가 지면 저희끼리 밥 먹고 불 끄고 자기만 했다 며칠이 지나고 이러다간 죽겠다 싶어 밤 되면 식구들이 잠든 걸 확인하고 몰래 울 밖 자두나무에 올라가 자두를 따먹었다 동네가 다 나서도 서울 가긴 틀렸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낮엔 굶고 밤으로는 자두로 배를 채웠다 내 딴엔 세상에 나와 처음 벌인 사투였는데 어느 날 밤 어머니가 문을 두드리며 빈속에 그렇게 날것만 먹으면 탈난다고 몰래 누룽지를 넣어주던 날 나는 스스로 투쟁의 깃발을 내렸다 나 그때 성공했으면 뭐가 됐을까 자두야     1960년대의 한 농촌 소년 투쟁기가 가슴 짠하고 따뜻하게 펼쳐진다. 화자는 아들만 있는 집의 막내인 듯하다. 양 부모 건재하고 장성한 아들이 여럿인데, 공부도 잘했을 막내가 ‘사투’를 벌이며 소원하는 대학교에 보낼 형편이 안 된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데, 당최 비빌 데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 착했던 아이가 ‘먹을 줄 모르는 술에 취해/땅강아지처럼 진창에 나뒹굴기도 하고/사날씩 집에 안 들어오기도’ 해도, 방문을 걸어 잠그고 단식투쟁을 해도 모르는 척할 수밖에. 고학을 할 각오로 집을 떠나지 않은 것을 보니 화자는 독한 데 없는 순둥이였던가 보다. 어쨌든 대학교는 이쯤 열망하는 사람이 가야 하는 건데 공부에 뜻이 없고 집이 어려워도 학자금 대출을 받으면서까지 대학에 다니는 오늘의 청소년도 가엾다.  ‘나 그때 성공했으면 뭐가 됐을까’, 화자가 누이 부르듯 ‘자두야’ 속삭이며 묻는다. 인생은 알 수 없죠. 그런데 빈속에 자두를 따 먹고 당신은 시를 낳았죠. 이상국의 시들은 진솔하고 따뜻하고 해맑다.(사족: 화자에게 누이가 있었다면 국면이 달라졌기 쉽다. 대개 누이들은 마음이 여리고 희생정신이 강하더라)  
501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우리 말(어원)의 유래?... 댓글:  조회:2897  추천:0  2017-05-24
가시나  첫째, 신라의 화랑제도에서 그 연원을 찾는 것으로 '가시'는 본래 '꽃'의 옛말이고, '나'는 무리를 뜻하는 '네'의 옛 형태에서 왔다는 설이다. 옛날 신라시대의 화랑을 '가시나'라고 하였는데, 가시나는 화랑에서의 '花'는 꽃을 뜻하는 옛말인 '가시'에 해당되며, '郞'은 '나'의 이두식 표기다. 그러므로 가시나는 꽃들이라는 뜻이다. 화랑은 처음에는 처녀들이 중심으로 조직되었기 때문에 처녀아이를 가시나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 '가시'는 15세기까지 아내라는 뜻으로 쓰였으며 여기서 나온 말이 부부를 가리키는 '가시버시'이다.  두 번째 어원의 유래는 가시나는 가시내라고도 하는데, 가시내의 옛말은 '가시나히'로서 아내를 뜻하는 '가시妻'에 아이를 뜻하는 '나히'가 합쳐진 말이다. 즉 '아내(각시)로 태어난 아이'라는 뜻이다.  깍정이  깍쨍이는 깍정이가 변해서 된 말로서 깍정이는 원래 청계천과 마포 등지의 산에서 기거하며 구걸하거나 장사지낼 때 무덤 속의 악귀를 쫓는 행위를 해서 상주로부터 돈을 뜯어내던 무뢰배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나 점차 그 뜻이 축소되어 이기적이고 얄밉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개차반  차반은 본래 맛있게 잘 차린 음식이나 반찬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개차반이란 개가 먹는 음식, 즉 똥을 점찮게 비유한 말로 행세를 마구하는 사람이나 성격이 나쁜 사람을 가리킨데서 유래.  꺼벙하다  이 말은 원래 꿩의 어린 새끼를 가리키는 '꺼벙이'에서 나왔다. 꿩에서 'ㅜ'와 'ㅇ'이 줄고, 병아리가 병이로 바뀌어 꺼병이가 된 것이다. 이 꺼병이는 암수 구별이 안되는데다 모양이 거칠고 못 생겼을뿐더러 행동이 굼뜨고 어리숙해서 보기에 불안하고 답답한데서 유래.  건달  건달이란 말은 불교의 건달바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건달바는 수미산 남쪽 금강굴에 사는 하늘나라의 신인데, 그는 고기나 밥은 먹지 않고 향만 먹고 살며 허공을 날아다니면서 노래를 하는 존재이다.  고수레  옛날 단군 시대에 고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메데우스처럼 그 당시 사람들에게 불을 얻는 방법과 농사를 짓는 방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 때문에 후대 사람들이 농사를 지어서 음식을 해 먹을 때마다 그를 생각하고 '고시네'를 부르며, 그에게 음식을 바친 것이 '고수레'의 유래이다.  고자  두 가지 유래가 있는데, 첫째는 힌두어 'Khoja'에서 온 것으로 인도 동부의 벵골지방에서는 인접국가에서 사람을 잡아다가 거세해서 다른 나라에 노예로 내다 팔았는데, 이것이 명칭과 함께 남지나 방면으로 퍼져서 우리 나라까지 유래. 따라서 원래 고자는 거세당한 노예를 가리킨다. 이와는 달리 옛날 궁중에서 물건을 맡아 지키던 직책인 고자(庫子)일은 주로 환관들이 맡아서 했다 한다. 여기서 '고자'라는 말이 창고지기라는 뜻보다 생식 능력이 없는 사내를 가리키는 말로 전이되었다고 한다.  고주망태  '고주'는 술을 거르는 틀을 말하는데, 여기에 망태를 올려 놓으면 망태에 술기운이 배어들어 망태 전체에서 고약한 술냄새가 난다. 이렇듯 고주 위에 올려놓은 망태처럼 잔뜻 술에 전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고주망태이다.  골백번  골은 우리 나라 옛말로 만을 가리키는 말로, 골백번이란 백번을 만번씩이나 더한다는 뜻이다.  곱살끼다  노름할 때 판돈을 대는 것을 '살 댄다'라고 하는데, 여기서 '살'은 놀음판에 걸어놓은 몫에 덧태워 놓은 돈이라는 뜻이다. 노름을 할 때 밑천이 짧거나 내키지 않아서 미쳐 끼어들지 못하고 있다가 패가 좋으면 살을 댄데다 또 살을 대고 하는 경우가 있다. 살을 댔는데 거기서 또 살을 대니까 '곱살'이 된다. 그래서 정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하는 일에 끼여 얹혀서 하는 것을 '곱살이 끼다'하고 하게 된 것이다.  교활  교활은 상상의 동물 이름이다. 이 교활이란 놈은 어찌나 사악한지 여우를 능가할 정도인데, 중국의 기성인 에 등장하는 동물이다. 교(狡)라는 놈은 모양은 개인데 온몸에 표범의 무늬가 있으며, 머리에는 소뿔을 달고 있다 한다. 이놈이 나타나면 그 해는 대풍이 든다하는데, 이 녀석이 워낙 간사하여 나올 듯 말 듯 애만 태우다가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한편 이 교의 친구로 활(猾)이라는 놈이 있는데 이 놈은 교보다 더 간악하다. 이 놈의 생김새는 사람 같은데 온몸에 돼지털이 숭숭 나 있으며 동굴 속에 살면서 겨울잠을 잔다. 도끼로 나무를 찍는 듯한 소리를 내는데 이놈이 나타나면 온 천하가 대란에 빠진다고 한다. 이처럼 교와 활은 간악하기로 유명한 동물인데, 길을 가다가 호랑이라도 만나면 몸을 똘똘 뭉쳐 조그만 공처럼 변신하여 제발로 호랑이 입 속으로 뛰어들어 내장을 마구 파먹는다. 호랑이가 아픔을 참지 못해 뒹굴다가 죽으면 그제서야 유유히 걸어나와 교활한 미소를 짓는다. 여기에서 바로 '교활한 미소'라는 관용구가 나왔다.  낭패  낭패도 교활처럼 전설 속에 나오는 동물의 이름이다. 낭(狼)은 뒷다리 두 개가 아주 없거나 아주 짧은 동물이고, 패(狽)는 앞다리 두 개가 아예 없거나 짧다. 그 때문에 이 둘은 항상 같이 다녀야 제 구실을 할 수 있었다. 꾀가 부족한 대신 용맹한 낭과 꾀가 있는 대신 겁쟁이인 패가 호흡이 잘 맞을 때는 괜찮다가도 서로 다투기라도 하는 날에는 이만저만 문제가 큰 것이 아니었다. 이처럼 낭과 패가 서로 떨어져 아무 일도 못하게 되는 경우를 낭패라 한다.  노가리까다  노가리는 본래 명태새끼로 명태는 한꺼번에 많은 새끼를 까는데 노가리가 알을 까듯이 말이 많다는 뜻.  단골집  우리 나라 무속신앙에서 나온 말로 굿을 할 때마다 늘 정해 놓고 불러다 쓰는 무당을 당골이라 한데서 유래. 또한 '단골', '단굴'은 호남지방의 세습무를 가리키는 말이다.  도무지  도모지(塗貌紙)는 옛날 조선시대에 사사로이 행해졌던 형벌에서 유래한 말로, 물을 묻힌 한지를 얼굴에 몇 겹으로 착착 발라놓으면 종이의 물기가 말라감에 따라 서서히 숨을 못쉬어 죽어가는 형벌이다.  돌팔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어설픈 기술을 파는 사람이란 뜻에서 '돌다'와 '팔다'가 결합된 것이라는 설과 '돌다'라는 동사와 무당이 섬기는 바리데기 공주를 기리키는 '바리'가 합쳐져서 된 '돌바리무당'이 어원이라는 설이 있다. 돌바리는 일명 돌무당이라고도 하는데 그는 집집을 방문해서 치료를 겸한 간단한 기도를 하고 점을 쳐준다. 그렇게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돌바리는 각양각색의 사람을 만나고 갖가지 사건을 겪는 통에 나름대로 여러 가지 잡다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주로 환자나 우환이 있는 집에 불려다니던 돌바리는 그 와중에서 얻은 지식으로 웬만한 환자를 보기도 하고 간단한 처방도 하였다.  그러는 중에 환자를 잘못 다루어 큰 해를 끼치는 일도 종종 벌어지곤 했다. 이 때문에 이들을 서툰 기술을 가지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지식이나 기술을 파는 자들로 여기게 된 것이다. 이처럼 한 곳에 터를 잡지 못하고 이곳 저곳으로 떠돌아다니면서 무업을 하는 선무당을 '돌바리'또는 '돌무당'이라 부른데서 유래되었다.  뚱딴지  뚱딴지는 본래 돼지감자를 가리키는 말로서 생김새나 성품이 돼지처럼 '완고하고 무뚝뚝한 사람'을 비웃어서 가리키는 말이다.  말짱 황이다  노름에서 짝이 맞지 않은 골패짝을 황이라 한다.  '말짱 황'이라는 말은 짝을 잘못 잡아서 끗수를 겨를 수 없다는 뜻이다.  미역국먹다  1907년 조선 군대가 일본에 의해 강제 해산 당했을 때 '해산(解散)이라 말이 아이를 낳는(解産)과 소리가 같아 해산때 미역국을 먹는 풍속과 연관지어서 이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미역국을 먹다'의 본래 뜻은 '일자리를 잃는다'의 뜻이다.  바가지 썼다.  외국 도박중 일본의 화투, 중국의 마작, 십인계 등이 있는데 그중 십인계는 1~10까지의 숫자가 적은 바가지를 섞어서 엎어두고 각자 자기가 대고 싶은 바가지에 돈을 대면서 시작하는 노름이다. 그르고 난 후 물주가 어떤 숫자를 대면 바가지를 엎어 각자 놓인 바가지의 숫자를 확인하고 그 숫자가 적힌 돈을 댄 사람이 맞추지 못한 사람의 돈을 모두 갖는다. 이렇게 해서 바가지에 적힌 숫자를 맞추지 못할 때 돈을 잃기 때문에 손해를 보는 것을 '바가지 썼다'고 하게 되었다.  (뒷)바라지  바라지란 원래 절에서 재를 올릴 때 법주스님을 도와 경전을 독송하고, 시가를 읊는 스님을 일컫는 말이다. 죽은 영혼들의 극락왕생을 비는 의식인 재에서 바라지 스님은 법주스님을 도와 목탁을 치고 경전을 읊고 향과 꽃과 차를 올린다. 바라지 스님이 이처럼 자잘하고 수고스러운 일을 해준다는 데서 '뒷바라지하다', '옥바라지하다' 등의 말이 생겨났다.  벽창호  평안북도 벽동, 창성 지방에서 나는 크고 억센 소인 병창우에서 유래.  비키니(외국어)  이 말은 태평양에 있는 작은 섬 이름에서 유래. 비키니 수영복은 프랑스의 한 디자이너가 1946년 7월 파리에서 열린 패션쇼에 발표한 옷이다. 이 패션쇼가 있기 4일 전에 미국이 태평양상에 떠 있는 비키니 섬에서 원자폭탄 실험을 했는데 디자이너는 이 수영복이야말로 패션의 원자폭탄과 같은 것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그 옷에 '비키니'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리  순수한 우리말로서 '사리'는 '사리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인데, 실같은 것을 흩어지지 않게 동그랗게 포개어 감은 것을 얘기한다. '몸을 사린다'는 말에 쓰일 때는 '어렵거나 지저분한 일은 살살 피하며 몸을 아낀다'는 뜻도 있다.  실랑이  실랑이는 본래 과거장에 쓰던 '신래(新來)위'에서 나온 말이다. 합격자가 발표되면 호명 받는 사람은 예복을 갖춰 입고 합격 증서를 타러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이때 부르는 구령이 '신래위'다. 이때 옆 사람들이 합격자를 붙잡고 얼굴에 먹으로 아무렇게나 그려대고 옷을 찢으며 합격자를 괴롭혔다고 한다. 합격자는 증서를 타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사람들이 놓아주질 않고 괴롭히니 그 속이 좀 탓으랴 싶다.  십팔번  17세기 무렵 일본 '가부키'배우 중 이치가와 단주로라는 사람이 자신의 가문에서 내려온 기예 중 크게 성공한 18가지 기예를 정리하였는데 이것을 가부키 십팔번이라 불렀다.  애물단지  애물은 어려서 부모보다 먼저 죽은 자식, 또는 매우 애를 태우거나 속을 썩이는 물건이나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오입  본래는 본업이 아닌 취미 생활전반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그런 이유로 외입에도 순번이 있었는데 첫째가 매사냥을 즐기는 것이고, 둘째가 말타기이고, 셋째가 활쏘기이고, 넷째가 기생놀음이었다. 외입의 전부인냥 잘 못 알려진 기생놀음은 외입 중에서 맨 마지막 치는 별로 볼일 없는 외입이었다.  이판사판  이판과 사판의 합성어로서 이판은 참선, 경전공부, 포교등 불교의 교리를 연구하는 스님이고, 사판은 절의 산림을 맡아 하는 스님이다. 산림(山林)이란 절의 재산관리를 뜻하는 말인데 산림(産林)이라고도 한다. "살림 잘한다"는 말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서 이판승이란 참선하고 경전을 강론하고 수행하고 흥법 포교하는 스님으로서 속칭 공부승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판승은 생산에 종사하고 절의 업무를 꾸려나가고 사무행정을 해 가는 스님으로서 산림승이라 불린다. 조선시대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국교로 함으로서 스님이 된다는 것은 마지막 신분계층으로 전락한다는 의미를 가짐으로서 이판이 되었건 사판이 되었건 그것은 인생에 마지막이 된 것이었고, 끝장을 의미하는 일이었다.  자린고비  옛날 충주지방에 한 부부가 살았는데 그는 부모님 제사 때마다 쓰는 지방을 매년 새 종이에 쓰는 것이 아까워서 한 번 지방을 기름에 절여 두었다가 매년 같은 지방을 썼다고 한다. '자린'이란 기름에 절인 종이에서 '절인'의 소리만 취한 것이고, '고비'는 한자로 돌아가신 부모님을 가리키는 말로 여기서는 부모님의 지방을 가리킨다. 즉 자린고비는 기름에 절인 부모님의 지방을 뜻한다.  정월  진시황제의 본 이름이 정(政)이었는데 시황제는 일년의 첫 달을 자기 이름과 같은 소리가 나는 한자를 써서 정월이라 불렸다.  조바심  옛날에는 타작하는 것을 '바심'이라고 했다. 조를 추수하면 그것을 비벼서 좁쌀을 만들어야 하는데 조는 좀처럼 비벼지지 않고 힘만 든다. 그래서 조를 추수하다 보면 생각대로 마음먹은 만큼 추수가 되지 않으므로 조급해지고 초조해지는데서 나왔다.  조카  중국의 개자추로부터 시작되었다. 개자추는 진나라 문공이 숨어 지낼 때 그에게 허벅지 살을 베어 먹이면서까지 그를 받들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후에 왕위에 오르게 된 문공이 개자추를 잊고 부르지 않자 이에 비관한 개자추는 산 속에 들어가 불을 지르고 나무 한 그루를 끌어안고 타 죽었다. 그때서야 후회한 문공이 개자추가 끌어안고 죽은 나무를 베어 그것으로 나막신을 만들어 신고는 '족하(足下)! , 족하!'하고 애달프게 불렀다. 이 뜻은 문공 자신의 사람됨이 개자추의 발 아래 있다는 뜻이었다.  칠칠하다  채소 따위가 주접이 들지 않고 깨끗하게 잘 자랐다는 말이다.  쾌지나칭칭나네  임진왜란 때 생긴 말로 '쾌재라, 가등청정이 쫓겨 나가네'가 줄어서 된 말이다.  푼수  정도, 됨됨이, 비율을 뜻하는 말.  할망구  만 60세를 환갑이라 하고 70세를 고희라 하고 77세를 희수라 하고 80세를 이미 황혼기에 접어든 인생이라고 하여 모년이라 하고 81세는 90세를 바라는 나이라는 뜻에서 망구(望九)라고 한다. '할망구'의 유래는 여기서 나왔는데 망구를 바라는 할머니라는 말이다. 한편 88세는 미수(米壽), 90세는 모질이라 하여 몸에 난 터럭까지도 하나 남김없이 늙어 버렸다는 뜻이다.  
500    시문학을 일상의 생활속에서 이어가는 삶은 아름답다... 댓글:  조회:2540  추천:0  2017-05-24
우리는 왜 문학을 갈망하는가 * 글쓰기와 말하기 문학과 생활은 먼 거리에 있지 않다. 인간의 생활, 그 체험을 표현한 것이 문학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체험을 나누어 가지고 싶은 본능을 가지고 있다. 말로 가까운 사람에게 털어놓기도 하지만 글로 전하기도 하는데 삶의 체험을 글로 만들어 내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을 우리는 작가라고 한다.  그런데 '말로는 할 수 있어도 글로 쓰지는 못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 그것은 아마도 글을 쓰는 일에 겁을 먹기 때문일 것이다. 겁을 먹게 되는 것은 글쓰기와 말하기가 전혀 다른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글쓰기와 말하기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때부터 글은 쉬워진다. * 시는 배워서 무엇하나 공자에게 배우는 학생들이 하루는 공자에게 물었다. 선생님 시는 공부해서 무엇합니까? 그러자 공자님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小者 何莫學夫詩 詩可以興 可以觀 可以群 可以怨 邇之事父 遠之事君 多識於鳥獸 草木 之名  이라고 한 것이다. 우리는 위의 공자의 말을 통하여 문학을 왜 공부하는가 그 의의를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게 된다. 詩可以興은 시가 가히 흥을 일으킨다는 말이다. 흥을 일으킨다는 말은 '흥분', 즉 감정의 충일상태를 지향한다는 말이다. 너무 흥분하는 모습도 세련된 모습은 아니다. 그러나 흥분을 잘 하는 사람치고 순수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우리는 무감동한 사람의 모습을 비인간적이라고 하고 감동하지 않는 사람을 목석같다고 한다. 감동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며 무감동한 것은 비정적인 것이다.  詩可以觀이란 시가 가히 보게 한다는 말이다. 즉 시를 공부함으로써 사물을 인식하게 한다는 의미다. '본다'란 단순히 눈으로 보는 시각적 행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본다는 것은 안다는 말이다. 모른다는 말을 '어둡다', 혹은 '캄캄하다'고 표현하기도 하고 알게 되었다는 말을 '눈을 떴다'느니 '훤하다'느니라고 말하며, 글을 모르는 사람을 '文盲者'라고 하여 소경맹자를 쓰는 것을 보아도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본다는 말과 안다는 말을 동일시하고 있다. 可以群은 무리를 지을 수 있게 한다는 말이다. 무리를 짓는다함은 여럿이 어울리고 더불어 살 수 있다는 말이며 여럿이 어울리고 더불어 살 수 있으려면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양보하면서 타인과 조화하고 수용할 수 있는 정신적인 여유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홀로 완전하고 홀로 똑똑하고 홀로 뛰어났다고 자부하면서 어울리지 않는 사람은 단련된 인격자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可以怨. 원망할 수 있다함은 감정의 정직한 표현이 가능함을 말한다. 좋은 것을 좋다 고 말하기는 쉽지만 싫은 것을 싫다고 말하는 일은 어렵다. 칭찬하기는 오히려 쉽지만 솔직하게 원망하기는 망설여진다. 그러나 시를 알면 투명한 감정표현이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그것은 시인 정서의 자유분방함, 정서 표현을 중시하는 시인의 특성을 지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邇之事父 遠之事君. 가까이는 부모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긴다는 뜻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은 혈육이다. 혈육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 이웃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한다고 하는 말은 성립될 수 없다. 멀리 인금을 섬긴다는 말은 반드시 왕정시대의 임금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국가원수도 되고 위대한 사람에 대한 경의라고 할 수 있다. 국가원수를 존경할 수 있는 국민들은 행복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多識於鳥獸 草木之名. 새와 짐승과 풀과 나무의 이름을 안다는 뜻이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관심이 있고 사랑이 있다는 의미다.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내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 김춘수 - 시를 알면 사랑이 충만해져서 새와 짐승 풀과 나무의 이름을 알게 된다. 새로 반편성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선생님이 내 이름을 알고 있을 때의 그 황홀했던 추억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존경하는 선생님이 한 학기도 넘게 지난 다음에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문득 '야, 네 이름이 뭐지?'라고 물었다면 그것은 잊을 수 없는 절망적인 일로 남을 것이다. 공자의 말대로라면 시를 공부하는 일은 사물의 이치를 알게 하고 충일한 정감으로 인간과 사물을 사랑하여 서로 어울리며 살 수 있게 할 것이다. 문학이 무엇인지 몰라도 살 수는 있다. 오히려 문학을 알고 살면 다정다감함으로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깊이 생각하고 오래 음미하고 유심하게 사물을 대함으로써 같이 지내는 사람을 피곤하게 할수도 있다. 그러나 문학을 알면 세상이 달리 보인다. 한 마디로 말해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데에 문학은 필요하다.  * 창작하는 문학, 감상하는 문학 문학 작품을 창작하는 일에는 겁을 먹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문학작품을 감상할 줄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도 수많은 시적 표현을 하면서 산다. '우리는 모두 삼류시인이다'라는 말이 있다. 겨우 삼류 시인밖에 되지 못한다는 비관의 말이 아니라 삼류일망정 이미 시인의 계열에 올랐다는 말이다. 우리는 보통의 일상생활에서도 시적인 비유와 상징을 즐겨 쓰고 있다. 돌아다보면 우리들 할머니나 어머니가 시적인 표현을 했던 일을 기억할 수 있다. 색으로 표현하는 사물.......... 새빨간 거짓말. 까맣게 몰랐다. 보랏빛 꿈. 싹수가 노랗다. 푸른 희망. 회색분자. 검은 거래. 분홍빛 편지. 핑크 무드. 속이 놀놀하다.  신체로 표현하는 감정........... 그녀와의 이별이 가슴 아프다. 그 사람이 잘 되니 배가 아프다. 이제는 손을 씻었다. 미국과 손을 잡았다. 발이 되어 일하다. 너 목이 몇 개냐. 너무 콧대가 높다. 눈이 높아 탈이다. 간덩이가 부었다. 쓸개도 없냐. 귀가 여려 잘 속는다.  동물로 표현하는 감정.......... 쥐새끼 같이 잘 빠져나간다. 까마귀 정신. 개코도 아닌 소리. 호랑이 없는 산에 토끼가 선생. 여우같다. 곰처럼 미련하다. 돼지같이 잘 먹는다. 참새처럼 재잘댄다. 잉꼬부부.  문학을 한다고 하면 창작을 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문학작품을 직접 창작하는 것도 문학이지만, 남의 작품을 감상할 줄 아는 것도 문학적 능력이다.  전문적으로 남의 작품을 감상하고 이를 논평하는 사람을 비평가라고 한다. 여러분들이 연속극을 보고서 그 연속극 재미있더라 혹은 재미없더라 느낌을 표현한다면 그 자체가 비평이다. 문학뿐 아니라 음악이나 미술도 우리는 솔직한 느낌을 표현함으료써 비평적논평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삼류시인일뿐만 아니라 일류 비평가가 될 수 있는 소질을 가지게된다. 비평하는 독자가 우수하면 창작하는 사람이 정신을 차려서 수준 높은 작품을 발표하려고 노력하게 되지만 독자가 그렇지 못하면 작가가 태만해질 수 있다. 특히 현대는 좋은 작가보다 오히려 좋은 독자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누구나 무대로 나가서 연극의 배우로 주인공의 역할을 담당하려고 할 뿐 아무도 관객이 되려고 한다면 결국 연극은 망하게 된다. 독자가 없는 소설가나 독자가 없는 시인은 존재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  * 좋은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비평가로 머물러 있지 않고 작가가 되고 싶어 열렬히 요구한다면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 작가가 되기 위해서 유념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1) 언어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그 감각을 키워라. '새빨갛다'와 '시뻘겋다'의 차이를 알아야 되고 '야들야들하다'와 '유들유들하다'의 차이를 아는 것이 언어감각이다. 언어감각은 여성이 남성보다 더 예민하다. '네가 와 주어야겠어'와 '너라도 와주어야겠어'는 다르다. 떠나는 사람이 남아있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각각 달리 말할 수 있다. 많이 생각날 거야.... 늘 생각나겠지.... 못견디게 생각나겠지.... 미치도록 생각나겠지. 죽도록 생각나겠지(그립겠지, 보고 싶겠지)  위의 말은 뒤로 갈수록 점점 강해졌다. 그러나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아무 대상에 게나 '미치도록 생각나겠지'라고 말할 수는 없음에 유의해야 한다. 이런 것을 잘 구별하는 것이 언어감각이다.  (2) 가슴에 불씨를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불씨라는 것은 사물과 인간과 삶에 대한 사랑이다. 불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떤 순간 의미 있는 사물을 만났을 때 가슴에 뜨거운 전율과 감동을 느끼게 된다. 가슴의 불씨에 불이 번지는 순간인 것이다. 가슴에 불씨를 간직하고 있다면 우리는 수시로 감동할 수 있다.  잎이 다진 감나무 가지에 단 한 개 남아 있는 빨간 홍시. 은행잎이 떨어져 쌓인 포도 저녁나절 남편이 끄는 수레 위에 올라 미소 짖는 배추장수의 아내.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학교에 가는 어린 학생. 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껌을 팔고 있는 초라한 노인. 이런 것들은 모두 우리의 가슴 속 남아 있는 불씨에 불을 당길 수 있는 요소다.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간직할 수 있다면 그의 가슴은 풍요롭다고 할 수 있다. 불씨가 꺼지면 눈물도 마르고 감동도 사라진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목석에 가까워진다.  (3) 언어와 문장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야 한다. 우리가 항용 사용하는 말은 문장상의 말과 다르지 않다. 한 때 문장의 언어와 일상의 언어가 따로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바로 고전주의적 사고 방식이 그러했다. 특히 시는 고상하게 다듬어진 아어가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잘가노라 닫지 말며 못가노라 쉬지 말라  부디 긏지 말며 촌음을 아껴스라  가다가 중지곧 하면 아니감만 못하리라 위의 시조에서 '말라', '아껴스라', '중지곧', '아니감만 못하리라' 등은 문장언어다 . 일상적 회화에서는 잘 쓰지 않고 문장에서만 쓴다는 말이다. 그러던 것이 낭만주의로 오면서 일상용어가 그대로 시의 언어가 될 수 있다고 생각이 바뀌었다.  가시네야 가시네야  그믐달밤에  귀촉도 우는 영위에 올라  우리 그대로 돌이나 되자  서러워도 서러워도 그믐달밤에  - 김관식 - 위에서는 가시네라고 하는 비어가 그대로 나온다. 고상한 말만 시의 언어가 된다고 했던 옛날의 생각에 크게 위배되는 표현이다.  (4) 과감하게 첫문장을 끌어내야 한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첫문장을 끌어내고 나면 다음 문장 그 다음 문장이 자연스럽게 뒤따라 나오기 마련이다. 이러한 자연스러움을 기르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독서와 문장연습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문장연습은 일기쓰기나 편지쓰기로 할 수가 있다.  * 시(문학)를 가까이 하는 생활 시는 언어를 압축하고 리듬을 맞춘 글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최상의 아름다운 것을 우리는 시라고 한다. 피아노의 시인 쇼팽이라는 말은 피아노곡으로 최상의 아름다움을 연출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림도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하면 칭찬이다. 무엇이든지 아름다우면 '그것은 詩야'라고 말한다. 시를 지향하는 마음은 진선미의 상태를 지향하는 상태다.  시의 세계는 군더더기를 다듬어내고 가라앉히고 증류하여 정화한 세계이기 때문에 순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실의 세계는 시처럼 아름답지 않다. 문학은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이상세계의 표현이다. 있는 세계가 아니라, 있어야 할 세계의 표현인 것이다.  우리의 상상력은 문학을 가까이 함으로써 그 범위가 넓어질 수 있다. 문학이 우리로 하여금 제한된 현실의 번잡하고 혼란한 와중에서 떠나게 하며, 무한한 세계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文을 중히 여겨서 정치인을 선발했으며, 시문을 짓게 하여 우수한 사람으로 결정하였던 것은 시문의 세계가 선비의 고결한 인격 형성에 큰 영향으로 작용하였으리라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상의 생활 속에 문학을 끌어들이고 문학을 일상의 생활 속에서 이어가는 삶은 아름답다.  ----------------------------------------------------------------------------------     고향  ―백석(1912∼1995)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어 누워서 어느 아츰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 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집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定州)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氏)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씰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쓴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 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집어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세상살이 설움 중 가장 큰 게 병들어 아픈 것일 테다. 더욱이 객지에서 혼자 앓아누우면 외로움조차 가슴에 사무칠 테다. 고향 생각이 날 수밖에 없다. 북관은 함경도를 이른다. 화자 고향은 평안도 정주인데 함경도 끝까지는, 지도를 보니 대략 서울에서 울산쯤.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에는 쉽게 오갈 수 있던 거리가 아니다. 그러한즉 지방마다 색깔이 완연히 달랐을 것이고, 화자에게 북관은 같은 언어를 쓰지만 거의 이국같이 느껴졌을지 모른다. 시 속의 의원은 관공(관우)처럼 수염이 치렁치렁하고 새끼손톱을 길게 길렀다. ‘길게 돋은’ 새끼손톱이 혹시 한의사라는 직업상 필요한가 해서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당신도 손톱을 기르면 그 요긴함을 알게 될 것이다’는 구절을 발견했다. ‘닫힌 물건을 열거나 일상생활에서 예리한 무언가 필요할 때 긴 손톱이 유용하게 쓰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인은 손톱 기르기를 좋아한다는, 많은 중국 남자가 하다못해 새끼손톱이라도 기른다는 정보도 알게 됐다. 의원의 긴 새끼손톱은 가까이 있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북관 남자의 개인적 취향일 테다. 화자 눈에 이색적인 데가 있는 그 의원은 진료를 하다가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환자의 말투나 풍기는 기색이 여기 사람은 아닌 듯한 것이다. 환자와 의원은 말을 주고받다가 한 사람의 막역지우가 다른 한 사람이 ‘아버지로 섬기는’ 고향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친구의 친구는 친구. 인자하고 위엄 있는 모습으로 ‘묵묵하니’ ‘말없이’ 맥을 보며 웃음도 ‘빙긋이’ ‘넌즈시’ 짓는 아버지뻘 연배의 의원한테서 흠뻑 고향냄새를 맡는 화자다. 특히 고향 그리울 명절이 코앞이다. 먼 나라에 사는 이들은 달을 보며 송편이 그립겠다.  
499    생명은 타지 않으면 썩는다 / 박문희 댓글:  조회:2698  추천:0  2017-05-24
《생명은 타지 않으면 썩는다》                               ―문학평론가 최삼룡선생을 만나다                                                    박문희       서재의 풍경       일전 최삼룡평론가 댁으로 찾아갔던 필자는 방들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었다. 서재 한칸은 물론 세벽이 책으로 차넘쳤고 큰 객실 한쪽 벽은 서가로 되였으며 화장실로 들어가는 공간 역시 서가로 돼있었다. 그뿐이 아니였다. 서재에 다 들이지 못한 책들은 아직 창고에 박스채로 그냥 쌓여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책이 곧 재부다. 서재. 벽을 빙 둘러싸고 방바닥으로부터 천정까지 촘촘히 꽂혀있는 책들, 서재와 객실 창문 가까이에 놓여있는 두대의 컴퓨터 그리고 테이블과 문턱 혹은 구들 복판에 무질서(?)하게 쌓여있는 잡지와 신문과 글의 초고를 타자한 종이들, 원고지 갈피갈피에 정성껏 가위질하여 풀로 붙인 옛 자료들과 가쯘하게 묶은 옛 자료 복사본들―《싹트는 大地》,《滿洲詩人集》,《滿洲朝鮮詩人輯》,《滿洲朝鮮文藝選》,《北鄕》,《半島史話와樂土滿洲》, 《颱風》,《北陸의 敍情》등등, 그중 복사해온 《滿鮮日報(만선일보)》복사본은 아예 통째로 쌓여있다. 최삼룡선생의 서재는 말그대로 서산문해(書山文海)다. 지금 최삼룡선생의 서재에는 사전류만 해도 100여종, 중국의 여느 도서관이나 문학가들에게서 찾아볼수 없는 귀중한 사전들도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 조선족의 대표적인 작가, 시인들 례컨대 김학철이면 김학철, 조룡남이면 조룡남, 그들의 대표작품집을 포함해 거의 없는것이 없다.   현장평론가, 문학사가 연변사회과학원 문학예술연구소 소장 겸《문학과 예술》주필로 재직할 당시 최삼룡선생은 조선족문단에서 왕성한 정력으로 현장평론가로서의 평론활동에 종사했다. 특히 작가들로부터 탈고하는 원고를 놓고 평론해달라는 청탁이 자주 온다. 고 김성휘시인이 일찍 1980년대에 1만 5000행이 되는 장편서사시 《사랑이 무엇이길래》를 투고전에 보내왔을 때에도, 고 김운룡소설가가 100만자에 달하는 장편소설《광야의 아리랑》을 투고전에 보내왔을 때에도 최선생은 작품을 읽은후 자기의 견해를 솔직하게 밝혀 수정건의를 했고 평론도 써서 책과 함께 발표했다. 문학평론에 있어 그는 다산작가이다. 금년(2013년)에 들어와서도 《장백산》 잡지에 3편, 《도라지》 잡지에 4편,《연변문학》 잡지에 2편,《송화강》 잡지에 3편,《예술세계》잡지에 1편, 《길림신문》에 1편의 평론을 게재했고 그 외 여러가지 학술모임에서 발표했거나 이미 편집부에 교부되여 발표를 대기중인 평문, 론문이 4~5편 된다. “평론이란 워낙 시끄러운 일로 욕먹기를 밥먹듯 한다”고 최선생은 말한다. 개중에는 “청탁평론”이나 “어용평론”이 많아서 평론가로서의 이미지가 초라할뿐만 아니라 “평가를 높게 하나 낮게 하나 잘하나 못하나 덮어놓고 욕”이라는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워낙 좀 부실”하여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생각만 하는 축”이여서 뒤에서 그 누가 잡아 죽이려 해도 그는 “남이야 뭐라든 항상 솔직한 마음으로 사람이나 작품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려고 애를 쓴다”고 자평한다. 례를 들어 2012년 자치주성립 60주년 기념으로 제작된 대형 련속드라마 《장백산기슭의 나의 집(長白山下我的家)》이 한창 방송중에 있을 때 한 신문사에서 평론을 해달라는 간청이 와서 일주일 밤을 새우면서 써냈다. 그 평론은 간담회에서 발표되고 신문에도 게재되고 또 한어로 번역되여 나가기도 하였다. 그런데 반향이 별로였다. 정부에서 거금을 들여 제작했다는 프로그램에 부동한 견해를 가진 사람이 적지 않은데다 글자체가 “청탁평론”이여서 말썽이 있으리라는것은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하지만 작품을 함부로 비판할수도 없는 상황이고 또한 문제점을 제출하여도 통과될리 만무하거나 무작정 삭제가 불가피한 현실이라 최선생은 그저 허허 웃으면서 사는것이 이러할진저 하고 말았다. 당대 조선족문학 현장평론에서 뿐만 아니라 민간문학연구에서도 최삼룡선생은 괄목할만한 성과를 쌓았다. 1990년 8월 일본 오사카정법대학에서 개최한 국제학술회에서 발표한《재래설화변이고》로부터 1991년 고려대학 민족무화연구소에서 발표한 《백두산 설화의 의미》, 《송화강》잡지에 1년 련재한 《신민요연구》, 그리고 《구경전(狗耕田)형 민담의 비교연구》,《방리득보(放鯉得寶)형 민담연구》, 금년 8월 황구연연구회에서 발표한 론문 《황구연의 민담에서 사랑과 결혼》등 20여만자가 된다. 그는 “민간문학에 대한 연구는 우리 민족의 원초적인 의식과 신앙들이 깔려있어 참 재미있었다”고 말한다. 최선생은 중국조선족문학사 연구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중국조선족의 첫 문학사로 조성일, 권철 주필의 《중국조선족문학사》가 1990년에 중국과 한국에서 각기 출판되였는데 이 책에서 최삼룡선생은 1966년부터 1986년까지 20년간의 중국 조선족문학사 부분을 집필했다. 퇴직후 21세기 들어 오상순 주필의 《중국조선족문학사》(2005년 출판)에서는 해방후의 시문학과 산문문학의 집필을 담당하였고 북경대학 조선문학연구소에서 편찬한《중국조선족문학사》(2004년 출판)에서는 중국 조선족 시문학사, 산문문학사 부분을 맡았다. 현재 최선생은 《중국조선족문학지도》라고 제목한 자기의 문학사를 집필중이다.   해방전 자료 발굴, 정리 1999년 4월 정년퇴직한 최삼룡선생은 주요한 정력과 시간을 해방전 조선족 문학자료의 발굴과 연구에 바치고있는데 그가 여기에 발을 들여놓은것은 정년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하는 《20세기 중국조선족 문학자료 전집》편찬진에 참가하여서부터이다. 그가 처음 편찬을 맡은 책은 친일문학권이였다. 최선생은 자기의 서재와 연변대학도서관을 뒤집듯이 들추어가며 2002년 책을 편찬해내고야 말았는데 사회적반향이 괜찮았다. 이 책의 출판은 최선생이 해방전 조선족문학연구에 보다 깊이 개입하게 된 계기로 작용했다. 그해 여름 한국정신문화원에서 열린 국제학술회의에 참가한 기회에 그는 꼬박 9일간 연세대 귀중도서관과 국회도선관에 들어가 자료발굴작업을 했다. 거기서 최선생은 친일문학자료를 많이 찾아냈을뿐아니라 해방전 만주조선인 문학작품도 숱해 접했다. 특히 시와 수필이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상태임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원래 권철교수 등은 컴퓨터작업이 없을 때라 육필작업만 가능했음으로 대표적인 작가들의 대표작외에 대부분 자료들을 베껴낼수가 없었던것이다. 최삼룡선생은 남들이 다 수확한 텅 빈 들에서 홀로 재료를 발굴하는 자기의 작업을 "이삭줍기"로 표현했다. 그런데 이런 "이삭줍기"는 말이 헐치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스스로 경비를 팔아 려관을 잡고 교통비를 해결하고 도서관에 들어가 문을 닫을 때까지 작업을 하곤 했는데 어떤 날에는 복사료만 해도 한화로 10만원 나갔었다. 2002년부터 2012년까지 이렇게  하기를 5~6차례, 그래도 리상규선생 같은 한국의 고마운 이들이 숙박료도 대주고 자가용으로 도서관문전까지 데려다주군 하여서 경제적으로 큰 무리가 없었다면서 항상 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고있다고 한다. 한국 도서관들에 보관되여 있는 신문, 잡지가 이미 낡았고 복사해온 글자들이 선명하지 않은데다가 전부 우리 글과 한자(正字 즉 번체자)가 혼용된 자료라 정리시 여러 모로 품이 많이 들었지만 최삼룡선생은 자료를 인용할 때 문헌의 가치에 손색이 갈세라 한자와 철자법과 띄여쓰기를 드팀없이 원본에 따랐다. 때로는 글자 하나를 복원하는데 하루가 걸렸고 시 한수를 복원하는데 사흘씩 걸렸다. 그래도 복원을 못하면 출판에 교부할 때 부득불 ◯이란 기호를 대용하는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삭줍기”에 기초하여 2003년 《세월에 묻힌 겨레의 기억》이라는 총제목밑에 《강경애와 간도》등 글을 《연변문학》에 1년간 12기에 거쳐 련재하였으며 2005년에는 《문학과 예술》잡지에 《문학기행》이라는 표제로 6편 련재하였다. 그리고 연변대학 조선(한국)어문학연구소와 연변인민출판사에서 간행한 해방전문학총서에 《현대시집성》,《항일문학》,《해방전민요》《종합산문(상, 하)》등 9권을 륙속 출판하였다. 2006년 3월 한국의 대통령직속 《친일반민족행위규명위원회》에서 최삼룡선생에게 만주조선인친일문학연구에 대한 정식요청이 왔다. 결과 반년간의 품을 들여 집필한 론문《재만조선인친일문학연구》가 유관자료집에 게재되였고 이 론문은 후에 한국민족문제연구소로부터 “참고도서”로 삼았다는 감사의 말씀을 전해받았다. 이 론문 집필중 자연스럽게 묶어진《만주조선인친일문학작품집》은 2008년 보고사에 의해 출판되였고 2009년에는 한국문화체육부의 《2009년 대한민국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됐다. 2010년 한국 보고사에서 또 최삼룡, 허경진 편찬《만주기행문》을 펴냈다. 이 책의 편찬에 동참한 한국 연세대 허경진교수는 이 책의 머리글에서 최삼룡선생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문학대계 30권을 편찬하면서 연변의 학자 여러분을 알게 되였는데 그 가운데 가장 열정적인 학자가 바로 최삼룡선생이였다. 그분은《조국조선민족문학대계》30권가운데 5권을 책임 편찬하였는데 대부분 본인이 여러해동안 수집해온 자료를 바탕으로 편찬하였다. 나는 중국조선민족문학학술대회를 5년째 주관했는데 해마다 그분의 열정적인 발표와 토론을 들으면서 함께 책을 쓰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조선민족문학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해박한 지식, 방대한 자료 그리고 컴퓨터를 련상케하는 기억력이 부러웠다.”(최삼룡, 허경진 편찬 《만주기행문》보고사 2010년 5월 제1판 머리말에서) 2012년 민족출판사에서 최삼룡이 편찬한 《해방전아동문학(상, 하)》을 출간하였으며 이제 《해방전기행문》, 《해방전평론집》등 6권이 2013년 년내에 륙속 출간된다고 한다. 최선생은 암만 둘러봐도 20세기 우리의 문학을 수집, 정리하는 일은 자신들 세대 문인들이 해야 할 일이란다. 그래서 최선생은 계속 해방전 조선족문학에 관심을 두면서 수필집《만주조선문예선(滿洲朝鮮文藝選)》,장편기행문 《백두산행기(白頭山行記)》, 력사문헌 《강북일기(江北日記)》,《간도개척사(間島開拓史)》등 중국조선족력사문화와 관계되는 희귀본도서를 수집하느라 숱한 시간과 정력, 재력을 소모하였단다. 여러가지 여건의 미비로 이 책들의 출판은 아직 묘연(渺然)하지만 그는 볕을 볼날이 어느때든 반드시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문학과 인생 20세기 우리 중국조선족문학 수집, 연구, 편찬 작업을 지대한 흥취와 열정을 갖고 열심히 했고 그속에서 자기가 몰랐던 지난 시기 우리문화 공부도 많이 했다고 말하는 최선생은 그 과정을 일컬어 문학과 인생을 함께 향수하는 과정이였다고 갈파한다. 말썽 많은 해방전 만주조선인 친일문학을 연구하면서 최삼룡선생은 세월의 먼지속에 깊숙히 파묻힌 재료를 적잖이 발굴했다. 이를테면 박팔양과 김영팔의 친일행적이 그 생동한 례로 된다. 박팔양은 만주에 건너온 다음 어용신문사에서 부장으로 일했으며 만주협회총부 리사로도 있었는데 이는 해방전 만주 조선인의 정치직무에서 최고의 직위였다. 그리고 친일작품도 썼다. 김영팔은 만주에 온 다음 신경방송국에서 아나운서로 있었고 협화회 문화부 부장으로 있기도 했으며 통화협화회에 임직하기도 했다. 그는 만주건국 10주년 기념으로 일본 욱일훈장을 수여받고 연길공원에 동상까지 세웠던 친일 주구 김동한을 기념하는 장막연극 《김동한》대본을 창작하고 공연에서 연출 겸 배우를 맡기도 했다. 그런데 이 반동연극의 작자가 바로 김영팔이라는것을 다른 누구도 아닌 최선생이 밝혀냈다. 그리고 1941년에 《만선일보》 는 만주 조선문인들에게《大東亞戰爭과 文人들의 覺悟》라는 제목의 글을 쓸것을 강요하였는데 당시 이에 호응하여 만주 조선문인들이 쓴 같은 제목의 글 11편을 최삼룡선생은 모조리 발굴해냈다. 최삼룡선생은 이러한 재료의 발굴 연구 편찬과정은 참으로 문학과 인생의 참맛을 고루 맛보는 과정이였으며 그런 의미에서 자신은 문학과 인생을 덤으로 누린 행운아라고 한다.   김학철문학 연구 “김학철선생의 문학은 중국 조선족문학의 정상이다.《격정시대》를 비롯해 그의 장, 중, 단편소설들은 20세기 우리 중국 조선족문학의 최고봉이며 그의 잡문, 수필, 회상기, 전기 등은 우리 중국 조선족 산문문학을 형태적으로 정착시키는데 절대적인 작용을 했다. 특히 그의 문학의 비판리성은 중국 조선족뿐만 아니라 20세기 중국 전체 지식인들을 견주어 봐도 높이 평가받을만 하다.” 김학철선생에 대한 최삼룡선생의 평가이다. 이미 김학철문학에 대한 글을 15만자 이상 발표했지만 아직 하지 못한 말이 너무 많고 갈라야 할 시비가 너무 많아 잠시 중단했다고 한다. 이제 가장 민감한 부분에 대한 집필에 손을 대야 하겠는데,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 큰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한다. “《김학철론》으로 평론가로서의 내 인생의 마침표를 찍고싶다. 그러기에 잘 쓰고싶고 따라서 지금 함부로 쓰지를 못하고있다.” “생명은 타지 않으면 썩는다.” 평론가 최선생의 좌우명이다. 오늘도 최삼룡선생은 고래희를 훨씬 넘긴 년세임에도 지칠줄 모르고 매일 10여시간씩 컴퓨터앞에서 꾸준히 작업해나가고있다.    2013년 제6기  
498    시는 신비한 언어로 시행사이에 사색적인 공간을 엮어줘야... 댓글:  조회:2670  추천:0  2017-05-24
[일반칼럼] 시와 시인 그리고 최 균 선    시가 곧 그 사람이라면 시는 무엇을 간곡하게 바라며 뛰는 심장인가. 많은 시들이 울분과 슬픔을 표현하는것은 삶이 더 찬란한 쪽으로 흘러가기를 바라는 착한 열망에서 비롯되는것이다. 한수의 시는 그런 마음의 예감과 기미를 보여주는것이기에 아무리 작은것을 노래해도 이미 뜨겁개 가슴에 와닿는 마술같은 힘을 가지고있다.     횅창 밝은 달밤에 웃는 꽃을 노래하는것도 시이지만  대낮에도 서슴없이 벌리는 인간의 온갖 악행을 폭로하고 눈물젖은 아픔의 골짜기에서 솟아나는 고통을 호소하거나 사람들이 꿈꾸는 모든 훌륭하고 아름다운것을 그려보이는게 시이다. 언어와의 싱갱이질속에서 시어는 때론 잔잔한 봄비가 되기도 하고 한줄금 소나기가 되기도 하는데 그 순간의 경이를 선지선각하여 표현하는 사람들이 시인이다.     좋은 시가 참 좋은 리유는 비장함으로 진행되는데에도 있다. 비장하지만 희망과 활력을 손짓하는 그런 비장미가 우리를 더욱 격앙하게 하고 분발하게 한다. 옛시인들의 시는 왜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가. 왜 여전히 울어버리고 싶도록 가슴막막하게 하는가. 그들은 우주의 생명공간에 목숨이 없는것들에도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는다. 그들의 시에는 삶의 현장을, 인간의 심령을 투시하는 무엇이 있다.     김소월이나 리상화의 시는 막 솟아오르는 아침해처럼 빛을 주고 언어의 시 (诗) 화는 그리도 현란하다. 우리 말 언어가 어떻게 조합되면 노래가 되는가를 보여준 시들이였다. 시속에서 울리는 그 소리는 인성을 깨우치고 미움과 갈등을 갈아버리고 강자와 약자가 상생하는 아름다운 세상을 호소하는 시였다. 소월의 시는 언어를 우 겨넣거나 고의로 배배꼬아댄 흔적이 없다. 현상과 사물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그것들의 목소리를 나직하게 들려준다. 소월의 시를 읽고있으면 물안개가 막걷히는 아침의 련못을 보는듯하다.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작은 여울에 누군가가 정성스레 놓아둔 징검돌을 보고있는것같고 사색과 정서는 그 징검돌들을 훌훌 건너뛰며 아름다운 정감의 대안으로 가게 된다. 김소월의 시는 삶은 부대낌과 갈등의 경전이다.     깨우침의 문학이든, 소일문학이든, 자극문학이든, 인생현장의 모든것을 생생하게 그려내든, 애매모호게 에둘러 말하든 시는 삶의 현장의 투시경이기를 그만두지 못한 다. 따뜻한 눈빛으로 세상을 포옹하는 시들은 누가 읽어도 좋을것이다. 좋은 서정시 한수가 우리의 심령을 얼마나 맑게 정화시키고 깊게 위로할수 있는지를 새삼스레 느끼게 하기때문이다. 보다 나아질것이라는 믿음을, 일어설수 있다는 용기를, 넓고 큰 세상을 향해 나가라는 호소를, 새 다짐으로 새날을 살아가려는 힘을 주고있는것이다.     민초들의 인생에는 가난과 고통으로 점철된 어두운 나날이 많다. 진실된 시인은 언어의 뜻을 롱간질하는것이 아니라 인간심령을 파고든다. 눈물과 탄식과 비애가 범벅이 되는 인생현장에서 그냥 알둥말둥한 소리로 뇌까려서는 무엇을 깨우치고 제시 할수 없다. 누구나 가슴에 미지라는 희망의 파랑새를 품고산다. 그 희망의 새를 시가 퍼덕이게 한다. 우리를 맑게 깨우치고 우리를 이끌어주는 시란 그래서 좋은것이다. 말하자면 시는 시핵에 어긋남이 없으면서도 무량무변한 내함이 있어야 한다.     시의 신비는 언어의 신비라고 하지만 언어와 감각의 탁월한 계시가 될지언정 시어의 모호함에서 체현되는것은 아니다. 청각에 시각을 한데 버무리는 감각적이미지의 활용은 시창작의 현대적기법만이 아니다. 시는 의미적인 언어의 배렬로 엮어는 것이 아니라 말과 말, 시행사이에 사색적인 공간으로 엮어지는것이다.     시인은 독자들의 머리위에 군림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사람들 먼저 세상속으로 들어가는 사람, 함께 인생을 탐구하는 사람일뿐이다. 시는 생(生)의 바닥을 파보고 가슴을 두드리며 꺼이꺼이 우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만큼 시의 언어는 분식하고 장식하고 감추기가 능사가 아니다. 아름다운것은 언제나 단순한것이다. 단순성으로 하여 더 성숙한 시가 될수 있다. 하다면 인생이니 삶이니 사랑이니 죽음이니 하는 말을 애매모호하게 표현할 리유가 나변에 있는가?     시란 어둠을 진실한 어둠대로 쓰면서 어둠을 밝혀주고 시를 쓰면서 저도 몰래 해살을 이끄는 일임을 사색적으로 보여주면 안되는가? 시는 언어의 광석을 채굴하는 일이라 한다면 명백하게 사람들의 심혼을 흔들어놓는 경지에 이르러야 시를 쓴 리유 가 서게 된다. 시인은 무섭도록 정밀한 관찰과 예리한 투시를 앞세워야 하지만 대상을 랭정하고도 빠끔히 들여다보일수 있도록 은근하게 묘사할수는 있어도 감싸고 은닉하기에 골몰해서는 얻어지는게 없다.     시는 치밀하고 내부가 끓고있어야 좋은 시이다. 예나제나 시들은 결사(結社)를 호소하는 선동력도 있어야 한다. 한결같이 매미처럼 서늘한 노래에만 도취되면 만족할수 있는 인생현장이 아니기때문이다. 시인, 자신의 시와 삶이 우주저편으로까지 이 어지기를 꿈꾸는 시인, 그런 시인들은 얼마나 우러러 보이는가?     현대시 100년에 길이 남을 시인들을 꼽으라면 김소월과 리상화, 한용운, 김영랑, 리륙사 등 귀재들이 될것이다. 그들은 우리 말 현대시의 다양한 변화에 마멸될수 없는 영향을 주었는바 그들부터 우리 민족의 현대시의 회화성과 내면의식의 표현, 사상 이 참신한 단계에 들어서게 되였다. 그들은 시는 최적의 언어예술이 되여야 한다는것을 시적언어의 형상성, 정확성, 음악성으로 빛나게 보여주었다.     시에서 리성이 형상을 압도해서는 안된다. 심각한 사상만 있어도 안되고 미사려구만 있어도 안된다. 사상전달에만 몰두하면 시의 외재적형식미가 소외될수 있고 시형식만 추구한다면 시적전달이 문장유희로 전락될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뛰여난 시어는 명쾌한것인 동시에 천하지 않은것”이라고 했고 발레리도“아주 아름다운 문장에서는 구절이 떠올라있는것처럼 보이고 심정을 자동적으로 알수 있으며 물체도 정신화되여 나타난다”고 하였다. 이는 매개 시창작자들에게 금과옥조가 될것이다.     자고로“시에서의 절주는 그의 외형이며 생명”이라는 특징은 시인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잠규칙이 되였다. 산문이 말을 최적의 순서로 엮은것이라면 시는 최상의 말을 최상의 순서로 배렬해놓은것이라고 할수 있다. 세계 어느 민족의 언어들이 미칠수 없을만큼 흐르는 물처럼 유연하고 신록처럼 아름다운 정취를 주는 우리 말 시에서 리듬을 외면한다면 우리 민족시로서의 독특성을 상실게 될것은 자명하다.     경향성적으로 주류가 된 현대파시라 해서 시의 내재적특징을 도외시 내지는 배척해서는 아니될 일이다. 시가 시로되는 근원은 정감성이다. 사색의 결정인 모종 사상이 중요하지만도 정감과 격동이 없으면 서정시도 없고 시인도 없다. 주다싶이 시는 감동과 감정의 글, 가장 아름답고 짧은 말로 문자화된 사상 즉 사상과 형상의 융합으로서 곧 시인의 심령의 외재세계이기때문이다.     따라서 시는 어디까지나 미적절주의 창조이고 시인의 정감의 연장선으로서의 심령의 노래, 진실하고 착하고 아름다운것의 메아리가 되여야 바람직하다. 시가 추구하는것은 일종 경지이다. 유성유색(有声有色)의 시혼은 시의 절주와 음악적선률과 경지중에 존재할뿐이다. 시를 노래한다고 하는것은 우선 시의 음악성을 두고 한 말이다. 시는 글속에 물결같은것이 있는 춤추는 글이다. 시의 음악성도 정감성에서 온다. 시 가의 음악성은 여러가지 인소의 융합이지만 가장 주요한것은 절주와 운률이다.     시의 절주는 정감절주의 반영으로서 정감의 기복이 시의 절주의 기복을 결정한다. 우리 말 시의 전통적인 운률에는 정형률과 자유률이 있는데 지금은 일매지게 자유률이 능사로 되는듯싶다. 시의 외재미를 체현하는 시행이나 련을 나누는 근본원인 은 바로 이런 운률 즉 시의 음악성을 살리려는데서 비롯된다. 우리 말 시에서 그 형식을 극치에 이르게 하고 아름다운 시어와 가장 우아한 리듬이 시적정서와 조화되여 울려나오게 한 시인으로서는 김소월을 릉가할 시인이 없을게다.     시에서 시로 하여금 생명을 갖게 하는 가장 주요한 특징은 시적형상이지만 운률은 시에 형식상에서의 존재리유와 가치를 부여하기때문이다. 시의 구성을 이루는 요소의 일체화에서 감성에 직접적영향을 줄수 있고 감흥에 직접 자극을 줄수 있는것은 소리와 뜻이며 음악성이므로 음악성이 짙은 시일수록 감성자극이 크고 폐부에 전달되여 깊이와 넓이가 정비례된다. 바로 그러한 리유로 전통적작시법상 리듬과 운률을 일시동인해 오면서 다루어왔다. 그로써 전통시는 자체매력을 확보하고 있는것이다.    시의 구조적특징상에 말한다면 시는 시각적인것이 자못 중요하다. 그러므로 시는 외형적으로 보이는 시적구성의 형태미도 추구해야 한다. 눈앞에 나타난 한편의 시의 정서는 아기자기해야 하는데 시각적, 미각적, 후각적, 촉각적, 색채적, 감각적이미지 를 기존의것에서 탈피시켜 력동적이며 파격적인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데서 소기 의 목적이 실현될수 있다. 그러나 시대의 변천에 따라 정형시가 자유시로 번지고 작시법의 초점은 운률에서 내재적인 리듬쪽으로 옮겨졌다. 특히 낯설게 하기를 선호하면서 정형성에서 이루어지는 운률미는 뒤로 밀리였다. 아니 밀어버린것일수도 있다.     세인이 공인하다싶이 시란 근본적으로 계시적인 예술화폭이다. 시인은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독자로 하여금 오해없이 접수할수 있도록 하는것이 전제이다. 시는 오묘한 뜻을 담아야 하지만 뇌즙을 짜내지 않고도 똑똑히 감수할수 있어 야 한다. 비유한다면 우물처럼 깊어야 하지만 그 시원한 물맛을 볼수 있어야 한다     숨김의 원리에 의한 암시성의 본질을 몰각한채 될수록이면“낯설게”하느라고 원관념과 보조관념사이에 넘기어려운 장벽이 설치되여야만 좋은 시가 되는것은 아니다. 머리에서 나온 시행조직은 머리로 풀이하게 되고 심장으로 피운 정감의 꽃은 페부로 그 향기를 받아들이게 된다. 들어주는 사람도, 따라오는 사람도 없는데 무욕이니 초월이니 달관이니 관조니 하는 말로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놀라게 하지 말자.     이슬이랑 노을이랑 구름이랑 손짓하며 가는 그런 자태가 여실히 드러나는것이 아름답지 않을 리유가 있겠는가. 그처럼 마음의 산책을 그대로 보여주는 시가 흥미롭지않을 리유가 있겠는가. 리백. 도연명, 김소월, 박목월 등의 시는 지금도 향기만방한다. 그들의 시는 독특한 정서들을 함축하여 새로운 정서적의미를 창출하고 창출된  최첨단의 예술창조세계라는것을 잘 보여주고있다.     시자체보다 더 화려하고 그럴듯하게 해석하고 의미를 띄워주어야 하는 시는 좋은 시가 아니다. 회심의 미소도, 속으로 우는 울음도 짊어지고 가는 시인은 자기를 면사포속에 감출필요가 없다. 툭터놓고 말하는 시는 맑고 정직한것이 그 자체의 미가 되는것이 아니며 파손되여서는 안될 시 고유의 특징이 아니겠는가?                                                     2013년 8월 20일  
497    시의 제목이 작품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댓글:  조회:3085  추천:0  2017-05-23
3) 제목과 내용 시를 감상할 때 형식과 내용을 구별해 보는 것은 아니다. 이는 마치 동전의 '앞과 뒤'와 같이 특유한 의의를 지닌다. 즉, 분별해 볼 때는 감상할 때의 유기적이며 종합적인 요건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시를 짓기 위해서는 시가 될 수 있는 소재나 대상이 있어야 된다. 무엇에서 시를 짓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 배가 고플 때 음식을 보면 음식의 특유한 냄새가 나고 먹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온다. ㉡ 주위가 산만하거나 머리에 복잡한 생각이 있을 때 조용한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침착해질 때가 있다. ㉢ 갑자기 어려운 처지에 빠진 이웃을 보면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난다. ㉣ '나'가 친구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다투고 헤어졌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은 생리적인 욕구요 ㉡은 정적이며 정신적인 욕구이다. 또 ㉢은 인간의 윤리, 도덕적인 심성이 발동하는 대목이다. ㉣은 나와 타자간에 일어나는 갈등이며 이는 소외에까지 이른다. 이처럼 인간의 감성과 이성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 사물에 대한 분별력, 가치관의 차이, 체험하고 경험한 세계에 따른 미적 인식세계 등이 모두 시의 소재가 되고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니까 인간이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시문학의 내용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내용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시인의 역량이 작용하게 된다. ① 제목 시의 제목에서부터 문제가 될 때가 있다. 시의 제목이 작품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과거엔 마땅한 제목을 붙이지 못해 그냥 무제(無題)라고 쓰는 경우도 많았다. 시의 제목은 작품이 완성된 다음에다는 수도 있고 먼저 제목이 결정된 다음에 작품을 완성시키는 경우도 있다. 한 편의 시가 완성되기까지는 다양한 차원에서 동기 유발이 이뤄진다. 단순히 낱말 하나가 강렬하게 다가옴으로써 작품을 쓰게 되는 예도 있다. 또 사물에 대한 명칭, 즉 꽃의 이름이나 지명(地名), 사람의 이름 기타 등이 그대로 제목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인 예상을 뒤집는 제목도 가끔 대할 수 있는데 정진규의 「몸時」와 조태일이 「식칼論」의 표제화 동기화 의도를 보자. 등나무 덩쿨은 덩쿨 끝의 끝자리에서 매일 아침 문을 열고 있었다 첫 번째 햇살에 입술을 대고 있었다 그렇게 뻗어가고 있었다 여름 내내 씩씩했다. 맨발이란 생각이 들었다 길이 열리는 속도와 맨발이 뛰는 속도가 똑같았다 쫓아가는 게 아니었다 만들고 있었다 그 길 위에 나를 의탁했다 그는 나를 등에 업고서도 속도에 변화가 없었다. 나를 그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집에 당도했다 혼자서도 잘 다녀왔다고 이제 다 컸다고 어머니께서 칭찬하셨다. 이 비밀을 나는 아직도 어머니께 말씀드리지 못했다 -정진규, 「몸時·83―등나무」 전문 ·작가의 표제화 동기 나는 왜 이토록 「몸時」라는 말에 매달려왔는가. 스스로 지은 말의 감옥에 갇혀왔는가, 기회 있을 때마다 고백해 오긴 했지만, '몸'은 가시적인 육신이면서 불가시적인 또 하나의 육신이라고 믿고 있다. 그것은 그릇이 아니다. 그것 자체이다. 시간 속의 우리 존재와 영원 속의 우리 존재를 함께 지니고 있는 실체를 나는 '몸'이란 말로 만나고 있다. 시는 바로 몸이다. 그렇게 그것은 늘 내게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멀다. 나는 소년시절부터 영성적인 것으로서의 詩性과 육신적인 것으로서의 散文性 사이에서 상처투성이가 되어 여기까지 흘러왔는데, 이 '몸'이라는 말이 내게 다가오면서부터 그것이 나의 그간의 상처들을 열심히 핥아주고 있음을 황홀하게 실감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 시는 애초에 「몸時」라는 제목으로 번호를 붙이다가 뒤에 소제목을 달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몸時」가 이 시의 제목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또한 정진규의 일련의 산문시에 대한 보기로도 주의깊게 읽어둘 필요가 있다. 왜 나는 너희를 아슬아슬한 재치로나마 쉽게 못 사랑하고, 너희가 꺼리며 침까지도 빠리 뱉는 내 몸뚱아리까지도 아슬아슬 재치로나마 쉽게 못 사랑하고, 도둑의 그림자가 도둑의 그림자를 사알짝 덮치듯, 그렇게 나마 못 만나고, 너희들이 피하는 내 땅과 내가 피하는 너희들의 땅은 한번도 당당히 못 만나는가. 땅속 깊이 침묵으로 살아서 뼉다귀가 뼉다귀를 부르는 저 목마른 음성처럼, 땅속 깊이 아우성으로 흐르는 저 눈물 같은 물줄기가 물줄기를 만나는 끈기처럼. 만나지 못하고 왜 사랑하지 못하는가, 내 홀로 여기 서서 뜨드득 뜨드득 이빨 갈 듯이 내 정신만을 가는가. 내 외로운 살결을 살결끼리 붙여서 시간을 가는가, 아아 칼을 가는가. -조태일, 「식칼론⑤」 전문 ·작가의 표제화 동기 일반적으로 시의 주제를 압축하여 상징화하거나 시의 제재를 그대로 제목화하는 경우가 많다. 「식칼論」이란 제목은 얼핏 생소하고 비시적(非時的) 상상혁을 유발할 수도 있으나 주제를 압축하다보니 이같은 제목이 되었다. 연작시 「식칼論」은 당시 정치 사회상과 무관하지 않다. 예컨대 3선 개헌, 유신체제로의 전환의 조짐이 구체적으로 일어나는데 대한 단호한 대응의지가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필자는 어느 가정에서나 구비하고 있는 식칼을 제목화함으로써 강성(强性)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려 했었다. 식칼은 어머님이 매일같이 식탁에 오를 음식을 만드는데 없어서는 안될 도구이다. 그런 점에서는 전쟁터에서 쓰거나, 사람을 죽일 때 쓰는 무시무시하게 느껴지는 살인검이 아니라 모성(母性)을 연상시키는 부엌의 식칼로 대비코자 함이었다. 이것은 정서적인 여름보다 논리적 대응으로서의 제목이 된 셈이다. 한편 의외성을 주어 삭막한 느낌을 주는 제목이 될 때 독자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리라는 욕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② 내용 이순신 장군을 내용으로 한 서사시를 몇 시인이 썼다고 하자. 시인 A는 이순신 장군을 무공(武功)에 빛나는 인물로 그렸는가 하면 시인 B는 무공보다는 문신(文臣)으로서의 업적에 초점을 맞추어 된다. 이 경우 한 사람의 인간 됨됨이나 역사적인 업적 등에 대한 인식이 시인이 따라 달라진 경우이다. 이처럼 한 가지 사실을 시인이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그 시각이 달라질 수 있다. 모든 분야에서 각기 다른 관점, 인식, 윤리관, 미의식이 드러나게 된다. 봄이 왔다. 들에 새로 풀이 돋고 꽃이 핀다. 이때 어떤 시인은 겨우 내 죽어있던 풀고 꽃의 뿌리나 씨앗이 흙 속에 살아 있다가 살아나는 것, 즉 생명의 끈질김, 신비성 내지 존엄성에 이르는 것에 감탄하며 시를 짓게 된다. 또 한 시인은 먼 들판을 배경으로 길가에 핀 꽃 한송이의 아름다움, 며칠 안가서 시들어버릴 짧은 유한성에 대한 아쉬움을 노래하게 된다. 또 한 시인은 그 꽃에서 잊어버렸던 대한 아쉬움을 노래하게 된다. 또 한 시인은 그 꽃에서 잊어버렸던 한 추억 속의 소녀의 모습이 떠오를 수 있다. 이처럼 하나의 현상을 보면서 시인은 각기 다른 것을 떠올린다. 또 때에 따라서, 장소에 따라서 떠오르는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다. 이러한 여러가지 가능성 중에서 어떤 것이 격렬하게 부각되는 가는 시인의 의식 작용에 따라 그때 그때 달라질 수 있다. 무엇이든지 시의 소재가 되고 내용이 될 수 있다고 하나, 그것이 어떻게 표현되는 가에 따라 시가 되고 안되는 분수령이 된다. 많은 시인이나 시비평가들은 시에는 시인의 眞·善·美의 정신이 담긴 것이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 진·선·미는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그 가치 기준이 바뀔 수도 있다. 시의 내용적인 차원에서 그 표현법을 대별해 보자. ⓐ 주정적 내용 ① 감각적인 것 ② 정서적인 것 ③ 정조(情操)적인 것 ⓑ 주지적 내용 ① 기지적인 것 ② 지혜적인 것 ③ 예지적인 것 ⓒ주의적(注意的) 내용 ① 주제적 ② 줄거리 중심 ③ 평면적 진술 주정적인 시는 19세기 낭만주의 시에서 그 주된 흐름을 볼 수 있다. 시적 기교보다는 직설적이요, 정서의 원형적 요소가 바로 드러나는 특징이 있다. 찾아온 손님의 다감한 눈빛으로 방을 훈훈히 하는 한 장의 편지 그것이 이룬 하늘에서 살짝 隱密히 내린듯 빈 책상 위에 이미, 뜻 있는 이 밝음은 써 보낸 사람의 마음의 그것 초롱을 벗어난 새의 自由가 되어 나를 부르러 온 아아, 나의 知友여 피봉의 글씨 귀를 기울이며 이 밝음의 가상이를 곱게 편지를 뜯는다. -이수익, 「편지」전문 주지적인 시들은 고도의 수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세상의 지식을 어느 정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감상이 가능할 경우가 있다. 주지시에 동원되는 표현들은 고도의 기지와 예지가 따라야 한다. 시를 짓는 이도 직관적인 에스프리에 능할 수 있어야 한다. 그 헐벗은 비행장 옆 낡은 예레미야 병원 가까이 스물 아홉살의 强한 그대가 죽어 있었지. 쟝. 바띠스트. 클라망스 스토브조차 꺼진 다락방안 추운 氷壁밑에서 검은 으로 뎃상한 그대 어둔 얼굴을 보고 있으면 킬리만자로의 눈속에 묻혀 있는 표범 이마. 빛나는 대리석 토르소의 흰 손이 떠오르지. 지금 낡은 예레미야 병원 가까이의 지붕에도 눈은 내리고 겨울이 빈 나무허리를 쓸며 있는 때. 캄캄한 안개 속 침몰하여 가는 내 은 이제 고달픈 닻을 내리어 정박하고서 축축히 꿈의 이슬에 잠자는 인 것을, 짙은 밤 부둣가 한 모퉁이로 내 아무렇게나 혼자서 떠나보네. -이가림, 「빙하기」 부분 종일 바람에 귀를 갈고 있는 풀잎. 기은 늘 두려운 이마를 열고 우리들은 멈춘 자리에 다시 멈추게 한다. 막막하고 어지럽지만 그러나 고개를 넘으면 전신이 우는 들. 그들이 기는 한 사내의 와 죽음을 지나 먼 길의 귀 속으로 한 사람씩 떨며 들어가는 영원히 집이 없는 사람들. 바람이 분다, 살아 봐야 겠다. -오규원,「순례의 서·1」 부분 주의적 시는 단독으로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떼어내서 볼 때 주제, 줄거리, 또 이들을 평면적으로 정리함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쉽게 그 내용 파악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표현상의 특별한 기교를 염두에 두지 않을 경우가 많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향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드리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주슨 한이 날으오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六曹)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심훈,「그날이 오면」 전문 위에서 본대로 주정적, 주지적, 주의적이라는 것은 실제 작품마다 세가지 요소가 모두 합쳐져서 완성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4) 창작의 실례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 「국화 옆에서」 전문 ·작가의 창작 동기 하나의 시상이라는 것은 한 순간에만 의거하는 것은 아니올시다. 또 모든 과거의 상념들과 전연 무관하게 단독으로 우연히 성립될 수 있는것도 아니올시다. 「국화 옆에서」를 예로 들어 말씀드리더라도 여기에는 네 개의 이미지가 중첩되어 있습니다만, 이것들은 그 하나도 한 순간에 우발적으로 투영된 것에만 의거한 것은 아닙니다. 4연 중 맨 첫연의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봄부터 소쩍새는/그렇게 울었나보다"의 ---한송이의 피어 있는 국화꽃의 색채와 향기의 배후에 봄부터 첫가을까지 계속되었던 저 소쩍새의 울음의 음향을 참여시킨 이미지는 물론 색채와 음향을 조화시켜 볼려는 표현적의도에 의해서 결정을 보게 된 건 사실입니다 만은 이 한 개의 국화를 중심으로 하는 이미지가 고정되기까지에는 그 전에 이와 비슷한 많은 상념이 내 속에 이루어지고 연멸하고 다시 이루어지면서 은연중에 지속되어 왔었던 거을 나는 기억합니다. 그 중에 몇 가지를 예로 들어 말씀드리면, "저 우리 이전의 무수한 인체가 하여 부식해서 흙속에 동화된 그 골육은 거름이 되어 온갖 풀꽃들을 기르고, 그 액체는 수증기로 승화하여 구름이 되었다가 다시 비가 되어 우리 위에 퍼부었다가 다시 승화하였다가 한다"는 상념이라든지, "한개의 사람의 음성에는---그것이 청하건 탁하건 절실하면 절실할수록 거기에는 반드시 저 먼 의 음향이 포함되리라"는 상념이라든지 "저 많은 길거리의 젊은 소녀들은 한 우리 애인의 분화된 갱생이라"는 환상이라든지---이런 것들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상념들은 언뜻보기엔 「국화 옆에서」의 첫 연의 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 '인체 윤회'의 상념이나, 저''의 환각등은 --요컨대 이러한 상념과 환각의 거듭 중복된 습성은 한송이의 국화꽃을 앞에 대할 때, "이것은 저 많은 소쩍새들이 봄부터 가을까지 계속해 운 결과러니"하는 동질의 을 능히 불러일으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또한 제2연의 내용이 되는 국호개발의 한 원인으로서 여름의 천둥소리들을 끌어올 수도 있는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에 쓴 '인체 윤회'나 ''이나 '愛人부활'의 상념 등이 「국화 옆에서」의 1·2연의 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이 '천둥과 국화'나 '소쩍새와 국화'에 관한 상념의 습성은 여기에서만 해소해버리는 일이 없이 내 인생의 다음 체험에 반드시 그 그림자를 던지게 될 것임은 물론입니다. 그거야 하여튼 다음의 제3연은 이 모든 젊은철의 흥분과 모든 감정 소비를 겪고 인제는 한 개의 잔잔한 우물이나 호수와 같이 이 잡혀서 거울 앞에 앉어있는 한 여인의 美의 영상이 내게 마련되기까지에는 이와 유사한 많은 격렬하고 잔잔한 여인의 영상들이 내게 미리부터 있었을 것임은 물론입니다. 새로 자라오르는 보리밭 위에 뜬 달빛과 같은 애절한 여인의 영상도 있을수 있습니다. 오월의 아카시아 숲을 보고 그 향기를 맡는 것 같은 신선한 여인의 영상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는 저 에집트의 여왕 크레오파트라와 같이 오만하고 요염한 여인, 또는 산악고 같이 든든하고 건실하고 관대히 아름다워 우리가 그 무릎 아래 가서 포근히 쉬어보고 싶은 여인, 또는 성모마리아와같이 다수굿하고 맑고 성스러운 여인 또는 저 와 같이 스스로도 멋지고 또 고차원의 온갖 멋을 이해할 수 있는 여인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성질의 여러 가지 형태의 여러 가지 여인의 미의 영상이 우리의 속에 계속해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러한 모든 여인의 미의 영상의 체험 역시 그 중복됨을 따라 우리에게 여인들의 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져옴은 사실입니다. 좀 쑥스러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 형편이 이 되었습니다만은, 내가 에 '소복하고 거울 앞에 우두커니 홀로 앉아있는 의 여인'의 모습을 보았다면, "흥! 저 아주머니는 핼쓱한게 밉상이야. 얼이 빠졌어!" 하고 비웃었음에 틀림없었을 것이지만, 인제 이만한 여인의 미를 새로 이해하게 된 것도 앞에 쓴바와 같은 것들의 많은 되풀이, 되풀이의 결과임은 물론입니다. 그래서 내가 어느 해 새로 이해한 이 정일한 사십대 여인 속에 잠재해 있다가, 一九四七년 가을 어느 해 어스름때 문득 내 눈이 내 정원의 한그루의 국화꽃에 머물게 되자, 그 이 내 속에서 비로소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국화는 물론 내가 어려서부터 많이 보아온 꽃이고, 가끔 꺾어서 책상 위에다 꽂아 놓기도 했고, 또 '아름답다'고 말해본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때처럼, 절실하게 가깝고, 그립고, 알 수 있고, 까닭없이 기쁘게 느껴진 적은 그 전엔 없었습니다. '이것을 시로 쓰리라' 작정하고 책상머리에 와서 앉아, 내가 맨저 기록해 놓은 것은 제3연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써 놓고, 몇 시간을 누었다 앉었다 하는 동안 제1연과 제2연의 이미지가 저절로 모여 들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내게 있어서는 오랫동안 어느 구석에 잊어버렸다가 앞서 찾아내서 쓰게 되는 낯익은 내 옛날의 소지품을 상용하는 것과 같은 감개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연만은 좀처럼 표현이 되지 않아, 새벽까지 누었다 앉았다 하다가 그만 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이것은 며칠 동안을 그대로 있다가, 어느 날 새벽 눈이 띄어서 처음으로 마련되었습니다. 밖에선 무서리가 오는 듯한 늦가을의 상당히 싸늘한 새벽이었는데 '내가 안 자고 혼자 깨어있다'는 호젓한 생각 끝에 밖에서 서리를 맞고 있을 그 놈을 생각하자, 그것은 용이히 맺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만은 그 뒤에도 많은 문구상의 수정을 오랫동안 계속했던 것을 말해 둡니다. 이상과 같이 나는 내 미진한 작품 「국화옆에서」의 13행의 문자를 기록했었습니다. 요컨대 나는 인생이란 되도록 오래 체험하고 살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박이도 중에서 ----------------------------------------------------------------------------------       철새  ―윤후명 (1946∼) 철새들 乙乙乙 날아간다 乙乙乙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고 고개를 숙여야 한다     그러나 乙乙乙 고개를 들라고 날개를 친다 모름이 곧 앎이니 날아갈 뿐이니 삶이 곧 낢이니 날개를 친다 너는 어느 땅에 붙박혀 있는가 묻는 상형문자 乙乙乙 음역하여 내 삶에 숨을 불어넣는다 을을을을을을을을을을을을을…의 소리글자 날개 춘분도 지나고 이제 겨울철새들 날아갈 때인가. 추운 고장을 향해 먼 길 떠나는 새들이 딱하다. 하지만 내가 따뜻한 걸 워낙 밝히듯이 그들은 추운 날씨를 좋아할지 모른다. 그래서 지금 설레고 있을지도. 저마다 타고난 체질과 성정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늘 높이 떼 지어 날아가는 철새들을 보면 겨드랑이가 들썩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깃털 달린 영혼의 소유자들. 비행기를 봐도 그들은 발바닥이 간지러울 것이다. 그 유랑의 무리가 한곳에 머물지 못하는 것은 먼 고장, 다른 고장에 대한 향수에서만이 아니라 마음이나 몸이나 끊임없이 떠돌아야 사는 체질 때문이리라. 사실 우주의 본질은 움직임 그 자체이니 그들의 삶이야말로 우주의 이치에 합당한 것일 테다. 시인은 말한다. 잠시도 한 모양으로 머무르지 않는 것, 움직이는 것, 곧 날아가는 것이 삶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정체해 ‘어느 땅에 붙박여 있구나!’ 철새들의 비행 행렬을 보며 시인은 한 삶에 안착한 자신의 모습을 새삼 깨닫고 호흡곤란을 일으킬 지경이다. 새 을(乙). 과연 둥긋하게 앉아 있는 새의 형상이다. 상형문자의 형상을 이용해서 시 속에 새를 그려 넣었다! 그 글자의 소리를 ‘을을을을을을을…’적어서 아득히 날아가는 새떼들의 날갯짓과 날개소리, 그로부터 땅으로까지 전해지는 공기 가득한 떨림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살갗에 느끼게 한다. 그 발상과 솜씨가 기발하고 신선하다.  
496    시인은 쓰고자 하는것을 마음속으로 먼저 그려보아라... 댓글:  조회:3355  추천:0  2017-05-23
    테드 휴즈의 시작법   테드 휴즈의 시작법을 왜 꼭 읽어야 하는지... (시작하는 방법이 아니라, 詩를 作하는 法이다. 연애를 시작하는 법, 뭐 이런 거 아니다.)     시인 지망생을 위한 책이 아니다   ...꼭 읽어볼만한 책이 맞다. 꼭 시를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고, 시적 감수성이나 글쓰기, 생각하기 등 여러모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책이다. 학생들을 위해서 쓴 책인데, 실제로 학생들이 읽으면 참 좋을 책이다. 문제는 학생들은 이런 책 읽을 여유가 없다는 거.   어줍잖은 방법론이 아닌 근본적 접근   책 구성도 상당히 흥미롭다. 시를 쓰는 법 혹은 글쓰기에 대한 방법이나 기술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동물과 시, 바람과 기후, 사람들에 관한 글쓰기, 생각하는 법, 풍경에 대한 시 쓰기, 산문 쓰는 법, 주변 인물에 관한 글쓰기, 달에 사는 (환상 속의) 생물에 대하여 등 글쓰기를 위한 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부분들을 다룬다. 이 흥미진진한 주제들에 대해 장황하지 않게 엑기스만 전해준다. 그렇다고 쪽집게 과외는 아니다.   백 가지 설명보다 시 한 편으로 주제를 전달   꼭 필요한 이야기들을 핵심과 뼈대 위주로 전달하고는 바로 시를 소개한다. 해당 주제에 관해 생각해볼만한 시를 선별해서 수록했다. 시에 대한 구차한 설명은 모두 생략되어 있다. 주제를 알려줬으니 한번 음미해보라는 식이다. 시를 이해하는 법은 시를 그대로 호흡하는 것이고, 한번 읽어서 잘 모르겠으면 설명이 필요한 게 아니라 느껴질 때까지 다시 호흡하는 것이다. 라고 테드 휴즈가 말한 건 아니고, 그냥 내가 한번 해본 말이다. 말하자면, 돌팔이 처방.   원서보다 번역본이 더 좋은 점   원서는 Poetry in the Making인데, 영어로 시를 쓸 계획이 아니라면 굳이 원서로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물론, 난 안 읽어봐서 모른다. (영어를 못해서만이 아니라) 우리에겐 번역본이 원서보다 좋은 점이 있는데, 역자인 한기찬 시인이 주제에 부합하는 비교 한국시들을 각 장마다 몇 편씩 수록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오소리, 파리, 모기, (에프킬라..는 아니고..) 당나귀, 나의 고양이 죠프리, 알프레드 코닝 클라크 등 도무지 와닿지 않는 번역시들만 있는 것보다는, 화사, 풀, 풀잎, 남사당, 성북동 비둘기, 해, 별 헤는 밤 등의 주옥같은 시들을 비롯한 잘 와닿는 우리 시들이 더 반갑다. 각 장의 주제와 비교적 가까운 시들이 수록되어 한번 음미해볼 만하다.   상상하라, 나의 심원한 일부와 함께 침잠하라   "이제 당신도 시를 쓸 수 있다"라는 순 뻥에 가까운 홍보문구가 뒤표지엔 적혀 있지만, 테드 휴즈가 본문에서 실제 숙제로 내는 건 소설 쓰기다. 생각하고 표현해보라는 것이다. 생각이나 해보는 것과 글로 옮겨보는 것은 천지 차이기 때문이다. 생각도 그냥 해선 안된다. 낚시할 때 추를 뚫어지게 보면서 그것과 연결된 물 속 세상 전체를 머리 속에 생생하게 그려보듯이, 에너지를 모아서 쏟아부으면서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동물도 풍경도 바람까지 깊이 느끼고 생각해서 표현해보도록 가이드한다. 텅 빈 사고가 아닌 생명으로 가득찬 사고를 해야 하고, 흩어지려는 사유를 붙들어 움켜쥐고 깊숙이 침잠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게 시작법이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   나는 내가 동물들의 삶을 휘저은 데 대해 나 자신을 꾸짖었다. 나는 동물을 동물들 자신의 관점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 그리고 거의 그와 같은 시기에 나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p.23)   낱말이 생명적이며 시적인 것은 바로 낱말 속에 있는 이 작은 마귀 때문이며 시인이 다루지 않으면 안되는 것도 바로 이 작은 마귀인 것이다. (p.25)   당신이 쓰고자 하는 것을 마음 속으로 그려보라는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며 그것과 더불어 살아보라. 마치 마음으로 산수셈이라도 하듯 그것을 힘들여 생각하지는 말라. 단지 그것을 바라보고 만지고 냄새를 맡고 귀기울여 보고, 스스로 그것의 속으로 침잠하라. (p.25)   시는 사상이나 일시적인 환상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찰나적으로든 영구적으로든 간에 우리의 육체와 정신을 변화케 하는 경험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다. (p.45)   글쓰기의 전기술은 당신의 독자의 상상력을 환기시키는 일인 것이다. (p.67)   어떤 것이 여러분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그것을 상상력으로 움켜쥐고는 그것의 모든 조각조각을 조사할 때까지 놓아보내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히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남아 있어서 존속하려고 들지 않는다. (p.90)   삶조차도 더욱 흥미로운 것으로 되는데 왜냐하면 글쓰기가 우리 대부분에게 가르쳐 주는 한 가지는 우리가 필요한 만큼 사물들을 밀접하게 보고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필요한 만큼 그것들을 깊이 이해하고 있지도 않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p.142)   (어떻게 해야만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오직 진실로 여러분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이 재미있게 쓰면 된다는 것이다. (p.153)   이런 참된 관심들, 즉 여러분이 그것에 대한 진정한 개인적 감정과 진정한 경험을 갖게 되는 것들은 여러분이 쓸 수 있는 유일한 것들이다. / 그래서 글을 쓸 때 여러분은, 단순히 호기심을 느끼고 있는 것-지난 주에 들었거나 어제 읽은 것-과 여러분의 삶에 있어 심원한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 사이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중략)... 따라서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글쓰기에 있어서도 오로지 생명력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p.157)  [출처]시작법 - 테드 휴즈가 알려주는 글쓰기의 기본|작성자이종민  
495    시를 랑송할때는 시인의 느낌과 청중의 공감을 터득해야... 댓글:  조회:3923  추천:0  2017-05-23
  분야 문학 교과단원 초등 3학년 1학기 〈감동을 나누어요〉, 초등 1학년 1학기 〈느낌이 솔솔〉, 초등 1학년 2학기 〈이야기꽃을 피워요〉, 초등 2학년 1학기 〈감동을 나누어요〉, 초등 4학년 2학기 〈감동이 머무는 곳(읽기)〉   학예회에서 시낭송을 하기로 했어요. 평소 국어책 읽듯이 연습하니 뭔가 밍밍하고 재미없는 느낌이 들어요. 시낭송을 잘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를 잘 읽는 네 가지 방법 사랑의 설렘을 표현한 시는 기쁨으로 가득하지만, 이별의 슬픔을 표현한 시는 아주 슬퍼요. 시 속에는 기쁨과 슬픔, 외로움과 즐거움 같은 정서가 담겨 있어요. 그래서 시를 낭송할 때는 뉴스를 전달하는 아나운서처럼 차분하게 또박또박 읽는 것이 아니라 시의 느낌을 잘 살려 내야 청중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요. 자, 그럼 시를 잘 읽는 방법에 대해 알아볼까요? 반복되는 표현을 살려서 시에서 되풀이되는 말과 일정하게 반복되는 글자 수를 찾아보세요. 시에는 반복되는 표현이 자주 등장해요. 반복되는 표현은 시에 리듬감을 줘 노래하는 것처럼 들리게 해요. 글자 수가 반복되는 부분은 끊어 읽는 것이 좋아요. 끊어 읽으면 박자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니까요. 시낭송할 때는 반복되는 말이 주는 운율을 살려 노래하듯 읽도록 해요. 재미있는 표현을 찾아서 시에서 재미있는 표현을 찾아보도록 해요. 재밌는 특징을 잘 살려 읽으면 시가 마음에 바짝 와 닿지요. 예컨대 의성어나 의태어는 말속에 운율이 살아 있기도 하고 표현하는 대상의 개성을 실감나게 전달해요. 낭송할 때 이런 부분을 놓치지 않고 잘 표현한다면 시의 느낌을 더욱 생생하고 실감나게 전달할 수 있어요. 마음속으로 깊게 음미하며 시의 느낌을 살려 읽으려면 먼저 시를 잘 이해해야겠죠. 시를 이해하는 특별한 비법이 따로 있지는 않아요. 다만 한 편의 시라도 느긋하게 여러 번 읽으면서 자기의 경험과 다양한 상상력을 연결시켜 읽다 보면 그 맛을 즐길 수 있게 되지요. 시는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는 작고 사소한 소재, 이를테면 코스모스 · 자갈 · 나무 · 새로부터도 특별함과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지요. 그것은 대상에 대한 오랜 관찰과 애정에서 얻어지지요. 시를 읽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지요. 그냥 휙 읽어 내려가면 큰 감흥을 느낄 수 없어요. 천천히 그리고 충분한 시간을 들여 시를 느끼고 마음속에 담아야만 감동을 느낄 수 있고, 더 나아가 내가 느낀 감동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어요 장면이나 분위기를 떠올리며 시를 여러 번 읽으면서 내용을 파악하면 마음속에 떠오르는 모습이 있어요. 시의 장면과 분위기를 생각하면 더 실감나게 읽을 수 있겠죠? 이제부터는 시의 리듬, 표현, 장면을 생각하며 낭송해 보도록 해요. [Daum백과] 시낭송 잘하는 방법이 따로 있나요? – 101가지 초등국어 질문사전, 박현숙 외, 북멘토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시를 낭송할 때는...    첫째, 내용과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읽습니다.    둘째, 분위기와 느낌을 살려 알맞은 목소리로 읽습니다.    세째, 정확한 발음으로 리듬을 살려 노래하듯이 읽습니다.    네째, 반복되는 말이나 흉내내는 말을 실감나게 읽습니다.    다섯째, 행과 행 사이는 띄어 읽고, 연과 연 사이는 쉬어 읽습니다.   ========================= 안녕하세요, 에듀넷 교사 정주안입니다.   시낭송하는 방법     매년 열리는 시낭송대회 때마다 출전자는 떨리고 긴장한 나머지 자기의 실력을 제대 로 발휘하지 못해 아쉬워하는 것을 본다. 특히 내성적인 사람은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어떤 출전자는 아예 진정제를 먹고 출전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무대 위에서 덜 떨리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무대 공포증을 제거하고 담력을 갖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지 짚어보기로 하자.   먼저 실습적인 방법과 심리적인 방법으로 나눌 수 있다.   1) 실습적인 방법(경험으로 얻어지는 방법)   (1) 무대 경험을 많이 쌓자.   과거에 무대에서 노래나 연기 등 무대 경험이 있는 사람은 시낭송을 하는 첫 무대에서 자기의 실력을 발휘하기가 쉽다. 그러나 무대 경험이 없는 출연자는 자 신이 어떻게 낭송했는지조차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긴장된다.   왜냐 하면 시낭송은 단지 시낭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로서 승화시켜 표현해 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두 번씩 무대에서는 경험을 갖게 되면 점차 자신감 이 붙게 되어 청중의 분위기 더 나아가 청중의 눈동자, 표정까지 읽게 되어 나의 낭송에 청중이 얼마나 공감하고 있는지 공간의 숨결을 파악하는 능력이 생기게 된다. 무대에서의 담력을 기르는 최상의 방법은 무대에 자주 서 무대에 대한 두 려움을 없애는 것이다.     (2) 충분히 연습을 하고 무대에 선다.   아무리 무대 경험을 많이 쌓는다 하더라도 불충분한 연습은 오히려 불안감을 주고 자심감을 잃게 한다. 혹시 무대에서 시낭송을 하다가 틀려 중도에 내려오게 되면 그 뒤 무대 공포증 또는 기피증이 생길 수가 있다.   무대에서 자신을 강하게 하는 것은 끊임없는 연습과 노력으로 자신의 실력을 제 대로 발휘하였을 때 비로소 자신감을 갖게 된다.     (3) 무대 아래에서 천천히 숨쉬기를 하자.                 ① 코와 입으로 동시에 숨을 빨아들인다.         ② 손을 가슴 양쪽에 얹고 다시 한 번 숨을 빨아들인 후 입술 사이로 내쉰다.         ③ 다음에는 두 손을 아랫배에 대고 다시 숨을 한 번 들이 쉰 후 아랫배를 천천히 누르면서 입술 사이로 숨을 내쉰다.         ④ 들이쉬는 숨은 코와 입으로 하고 내 쉬는 숨은 입술사이로 하면서 이것을 몇번 되풀이 한다. 이렇게 천천히 숨쉬기를 몇번 하고 나면 거친 숨결이 보통때처럼 되고 마음이 안정되어 조용하고 차분한 몸가짐이 된다.     (4) 무대에서 시작하기 전 심호흡을 하고 어깨를 내린 뒤 온몸의 근육을 푼 후 시작한다.   2) 심리적인 방법(마음속에서 결심하는 방법)     (1) 자신감을 갖는다.   자기 스스로 '나도 잘 할 수 있어.'하는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즉 자신감 을 키우는 것이다. 어느 누구나 자신감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면 자기가 생각하 는 것 이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한다.   독일의 대문호인 괴테는 '자신감은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다. 자신을 가지면 자 기가 가지고 있는 능력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했다.     (2) 자기 최면   최면에는 자기 최면과 타인 최면이 있다. 자기 최면은 자기 스스로에게 최면 을 거는 것이다. 무대에서 떨리지 않으려면 청중을 자기의 가족이라고 생각한 다. 그 이유는 자신의 가족은 자신을 사랑하며 많은 응원을 보내줄 것이라고 믿 기 때문이다. 그래서 낭송자는 청중을 자기의 가족이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청 중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다. 그렇게 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만약 이것도 잘 되지 않고 가슴이 떨린다면 청중을 '돌'로 생각한다. '돌'앞에서는 내가 떨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낭송 몇 시간 전에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병원에서 강심제를 맞는다든 지 진정제를 먹는다고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심리적으로 '약을 먹었 으니 괜찮겠지.'하는 자기 최면으로 심리적인 안정을 줄 뿐이다.     (3) 타인 최면   타인 최면이란 타인 즉 가족이나 친구, 주변 사람들이 낭송자에게 잘 할 수 있 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실어주고 칭찬을 해주며 인정을 해 줄 때 자심감을 갖게 되어 자신의 능력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타인의 말 한마디가 대단한 힘을 지닌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격려해 주어 자신감을 실어줄 필요가 있다. 이렇게 자기 최면과 타인 최면이 가슴 밑바탕에 자리잡고 있을 때 낭송자 는 무대에서 두렵지 않고 떨리지 않게 된다.     (4) 마음을 비우자   '이번에는 특별히 잘 해야 한다.' 혹은 '누가 와 있을 텐데.'하고 생각하면 오 히려 더 긴장이 되고 욕심은 정신의 산란을 가져온다. 오늘의 이 대회장은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시와 더불어 시의 잔치를 베푸는 향연의 장, 축제의 장이라고 생각하며 결과에 집착하지 말자. 그래야 오히려 시의 향기가 살아난다.     >>참고문헌: 재능시낭송협회(2003), ‘시낭송 이론과 실제’, 재능교육     이제 시낭송할 준비가 되었다면 자신이 낭송할 시를 선택해야 합니다. 시낭송을 하려는 시는 시낭송하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또 시낭송을 하게 될 관객들의 수준에 맞아야 합니다. 초등학교 어린이라면 동시가 어울릴 것입니다. 또한 시낭송하는 시기와 계절에 관련 된 것도 좋을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자작시를 낭송하는 것입니다. 그 이뉴는 자신이 직접 쓴 시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그 느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494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시와 씨름한 독일 시인 - 파울 첼란 댓글:  조회:3067  추천:0  2017-05-23
파울체란 시모음     눈 하나, 열린 / 파울 첼란     오월의 빛깔, 서늘한, 시간 이제는 부를 수 없는 것, 뜨겁게 입안에서 들린다.   다시금, 그 누구의 목소리도 없고,   아파 오는 안구의 밑바닥. 눈꺼풀은 가로막지 않고, 속눈썹은 들어오는 것을 헤아리지 않는다.   눈물 반 방울, 한층 도수 높은 렌즈, 흔들리며, 너에게 모습들을 전해 준다.   *눈 하나: Ein Auge. 첼란의 시에서 빈번히 나오는 고통의 심상이다. 외눈, 감기지 못한 눈, 뜬 채로 굳어진 눈, 생명의 물기를 잃어버린 눈, 본 것이 준 고통이 각막에 지워지지 않는 상흔으로 남아 지층에 총총히 박혀 있는 눈 등.  이 시는 에 수록되어 있다. / 전영애 번역     꽃 / 파울 첼란     돌. 내가 따라갔던 공중의 돌. 돌처럼 멀어 버린 너의 눈.   우리는 손이었다, 어둠을 남김없이 퍼냈다, 찾았다 여름을 타고 올라온 단어. 꽃.   꽃 - 맹인의 단어. 너의 눈과 나의 눈이 물을 마련한다.   성장(成長). 마음의 벽이 한 꺼풀 한 꺼풀 떨어져 내린다.   이런 단어 하나 더, 그러면 종추(鐘錘)들이 트인 곳에서 흔들린다.   *꽃: 경직된 이미지로 가득한 시집 에 수록된 시다. 서정시의 대표적인 대상, 혹은 시 자체의 은유로서의 꽃의 이미지는 시의 역사만큼이나 많은 굴곡을 겪어 왔지만 이 시에서 그려지는 꽃은 시사(詩史)에서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경직된 의식에는 역사의 고통이 서려 있고("돌처럼 멀어 버린 너의 눈"). 그 가운데 인식된 사물은 활성화된 언어(꽃=말)로 전이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눈물로 키운 꽃, 어렵게 찾은 소중한 언어, 허물어지는 마음의 벽, 울려퍼지는 종소리에의 꿈 역시 이 시에 담겨 있다. *종추들이 트인 곳에서 흔들린다: 얽매임 없이 울리는 여러 개의 종소리를 나타낸 표현이다. / 전영애 번역   파울 첼란(Paul Celan) 1920년 루마니아 북부 부코비냐의 체르노비츠에서 유대인 부모의 아들로 태어난다,(체르노비츠는 옛 합스부르크 왕가의 변방으로 독일어를 쓰는 지역이었다.) 그의 나이 21세 때,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체르노비츠는 유대인 거주 지역(게토)으로 확정된다. 독일군이 도시를 점령한 후 유대인들은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고, 첼란의 가족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게 끌려가 강제 노역을 하던 그는 부모의 처참한 죽음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 또한 가스실 처형 직전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지만, 이후 끔찍한 기억에 고통스러워하며, 삶을 이어 간다. 종전 후 그는 루마니아의 수도 브쿠레슈티에서 번역 및 출간 일을 하다가 이후 오스트리아 빈으로 건너가 첫 시집 (1948)를 발표한다. 그리고 1948년 프랑스 파리에 정착하여 센강에 몸을 던져 1970년 자살하기까지 꾸준히 시작(詩作) 활동을 해, 모두 7권의 독일어 시집을 남겼다. 1958년 부레덴 시 문학상을, 1960년 베오르크 뷔히너 상을 수상한다.   전영애 서울대학교 독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한국괴테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서울대 독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고등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 , , 등이 있다. 2011년  괴테 연구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상 중 최고의 영예로 상으로 꼽히는 괴테 금메달을 동양인 최초로 수상했다.   언어창살 / 파울 첼란     창살 사이의 안구(眼球)   섬모충 눈꺼풀이 위로 노 저어 가 시선 하나를 틔워 준다   유영하는 아이리스, 꿈 없이 우울하게, 심회색(心灰色) 하늘이 가깝구나.   갸름한 쇠 등잔 속, 비스듬히 천천히 타는 희미한 관솔 등화(登火). 빛 감각에서 너는 영혼을 알아본다.   (내가 너 같았으면. 네가 나 같았으면. 우리 한 무역풍 아래 서 있지 않았던가? 지금은 낯선 이들인 우리.)   타일들. 그 위에 바싹 붙어 있다. 두 개의 심회색 물줄기. 두 개의 입안 가득한 침묵.   *언어창살 원래 중세 수도원 면회실의 창살문을 가리키며 이것을 사이에 두고 수도 중인 사람과 외부 면회자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를 '언어창살'로 직역한 것은 그 창살문의 이미지가 여기서는 소통과 단절의 기능을 동시에 가지는 언어와 접목되었기 때문이다. 가까우면서도 ("타일들, 그 위에/바싹 붙어 있다. 두 개의/심회색 물줄기.") 낯설고 단절된("두 개의/ 입안 가득한 침묵.") 인간관계가 현미경적 이미지들로 포착되어 있다. 이 시는 에 수록되어 있다. *아이리스 무지개의 여신. 눈의 홍채를 뜻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안구의 홍채와 안구의 홍채 속을 헤엄치는 아이리스를 동시에 보여 준다.     무덤근처 / 파울 첼란     남녘 만(灣)의 물은 아직 알고 있을까요, 어머니, 당신에게 상처를 남긴 파도를?   한가운데 물방아들이 있는 벌판은 알까요,  얼마나 나직하게 당신의 가슴이 당신의 천사들을 견뎠는지?   어떤 은(銀)포플러도 어떤 수양버들도, 이제는, 당신의 근심을 거둬 가지 못하지요, 위안을 드리지 못하지요?   그런데 신은, 꽃봉오리 피어나는 지팡이를 짚고 언덕으로, 언덕 아래로, 가지 않나요?   그런데 견디시겠어요, 어머니, 아 언젠가, 집에서처럼, 이 나직한, 이 독일어의, 이 고통스러운 운(韻)을?   *독일어 첼란은 복합적인 이유로 여러 언어를 뛰어나게 구사하였다. 그러나 극한의 체험 이후 모든 사람을 잃고 홀로 살아남은 첼란은, 독일어로 시를 쓰기로 결심한다. 독일어는 그에게 오로지 고통만을 가져다준 나라의 언어. '살인자들의 언어'였지만, 동시에 모국어이자 무엇보다 비명에 간 어머니와 어린 시절 함게 읽었던 문학의 언어였던 것이다. 어머니의 사망시기나 장소는 불명이지만, 유대인들이 송치되었던 흑해변 드네프르 강 연안("남녘 만")으로 추정된다. 이 시는 첼란이 한정판으로 냈다가 회수한 첫 시집 에 수록되어 있다.   /번역및 해설 전영애    포도주와 상실 곁에서, 그 두 잔이 다 기울었을 때 / 파울 첼란   나는 눈 속을 달렸어, 당신, 듣고 있지, 내가 신(神)을 타고 달렸어, 먼 곳으로-가까운 곳으로, 그가 노래했어, 그건 인간-장애물을 넘던 우리의 마지막 승부였어.   그들은 무릎을 꺾었어, 우리가 그들을 넘어가는 소리를 들으면, 그들은 썼어, 그들은 우리의 말 울음소리를 거짓말로 바꿔 적었어 그림 그려진 그들의 언어 하나로.     목각별 하나, 파란, / 파울 첼란 조그만 마름모꼴들을 모아 맞춘 것, 오늘, 우리 손들 중 가장 어린 손이.   그 말, 어둠으로부터 네가 소금을 떨어뜨리는 동안, 시선이 다시 햇무리를 찾는 동안,   -별 하나, 그걸, 그 별을 어둠 안에 넣어 다오.   (-내 어둠 안에, 내  어둠 안에.)       ---좔좔 샘물이 흐른다 / 파울 첼란   너희, 기도로-, 너희, 독신(瀆神)으로-, 너희 기도로 날 선 나의 침묵의 칼.   너희 나의 나와 더불어 불(不) 구(具)된 말들, 너희 나의 똑바른 말들.   그리고 너, 너, 너, 너 나의 날마다 진실하게, 더욱 진실하게 껍질 벗겨지는 장미의 훗날-   얼마나 많은, 오 얼마나 많은 세상인가. 얼마나 많은 길인가. 목발인 너, 날개들, 우리-   우리 동요를 부르리, 그걸 네가 듣고 있어, 그 동요 인(人)들과 간(間)들이 있는, 인간들이 함께 있는, 그래, 그 뒤엉킨 덤불과 눈 한 쌍이 거기 함께 눈물-또- 눈물로 함께 있는 그 동요를.     *포도주와 상실 곁에서 이 시는 에 수록되어 있다. *목각별 하나 이 시는 에 수록되어 있다.   *불구 한 단어를 나눠 행을 바꿈으로써 '불구' 상태를 언어 형태로도 나타내고 있다. 뒤엉킨 덤불과 눈 한쌍 눈썹과 눈의 이미지를 드러낸다. 앞 행에서 인간의 고통을 토막 낸 불구의 언어로 나태내고("인(人)들과 간(間)들") 그것을 다시 온전하게 합침으로써 ("인간들") 그렇게 했듯, 이제 제자리에 모여 울 수 있게 된 눈("눈물-또-/눈물")의 이미지를 통해 동요에 등장할 만한 작은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다. 좔좔 흘러, 생명의 언어를 꿈꾸게 하는 샘물 앞에서. 이 시는 에 수록되어 있다. / 전영애   찬미가 / 파울 첼란   아무도 흙으로 진흙으로 우리를 다시 빚어 주지 않는다. 아무도 우리의 티끌에 혼을 불어넣어 주지 않는다. 아무도.   찬양하세, 그 누구도 아닌 이. 당신을 위하여 우리가 꽃피려 하노니 당신을 바라보며.   우리가 하나의 무(無) 였고, 무이며, 언제까지이고 무일지니, 꽃피며 무의- 그 누구도 아닌 이의 장미여라   그 암술대, 혼(魂)처럼 밝고 꽃실, 하늘처럼 황폐하고 그 화관(花冠) 붉어라 가시 너머, 오 너머로 우리가 노래 불렀던 그 자식(紫色)의 말로   *그 누구도 아닌 이 독신(瀆神)과 경건이 교차된 신(神)의 이미지이다. *장미 사랑, 신과의 신비적 합일. 유대 민족 등 다양한 표상을 지닌다. 이 시는  에 수록되었다. /전영애     만돌라 / 파울 첼란     만델 안에-만델 안에 서 있는 게 무얼까? 무(無)이지 만델 안에 무가 있지 거기 서 있고 또 서 있지.   무 안에-서 있는 게 누굴까? 왕(王)이지. 거기, 왕이, 왕이 서 있지 거기 서 있고 또 서 있지.   유대인의 곱슬머리, 너는 세지 않는구나.   그리고 너의 눈-네 눈은 어디를 보고 있나? 네 눈이 만델을 마주 보고 있지 네 눈, 무를 마주 보고 있지 왕을 보고 있지 그렇게 멈추어 있지. 언제까지고.   인간의 곱슬머리, 너는 세지 않는구나. 텅 빈 만델은 로얄 블루.   *만돌라 중세 교회의 그림이나 조각에서 성인(聖人)의 전신을 아몬드형으로 감싸도록 장식한 후광, 한편 이 시를 연시(戀詩)로 읽는 해석도 있다. 이 시는 에 수록되어 있다. / 전영애     운하수문 / 파울 첼란     이 모든 너의 슬픔 너머에, 없다 두 번째 하늘은.   -----------   그것이 천 마디 말이었던 입 하나를 스치며 잃어버렸다- 잃어버렸다 내가, 내게 남아 있었던 말 하나를, 누이를.   많은 신들을 믿다가 말 하나를 잃어버렸다 나를 찾던 말을. 카디시.   운하 수문으로 나는 통과시켜야만 했다. 그 말을, 다시 소금물로 되돌려- 저 바깥으로 그리고 그 너머로 건져 내기 위하여. 이스코르.   *카디시와 이스코르 카디시는 '성스러운'이란 뜻의 아랍어로 유대교 미사를 마무리하는 유족을 위한 '진혼의 기도'를 가리킨다. 이스코르는 히브리어로 '(신께서) 기억하시기를'이라는 뜻으로 장례 후, 혹은 추도석에서 모든 회중이 조용히 함께 낭독하는 기도문이다. 이 시가 수록된 시집 를 쓰던 무렵 첼란은 유대 문화에 대한 관심이 각별했으며, 관련된 글도 많이 읽었다. (신비주의적인 유대 경전 카발라, 유대 신학자 마르틴 부버의 저서, 유대 철학자 레비나스가 쓴 글 등) 그 자취가 이 시에도 남아 있다. /전영애   서 있기, 공중의 상흔의 그림자 속에 / 파울 첼란     그 누구도-그 무엇도-위해서가- 아닌-서 있기. 아무도 모르게 오직 당신울 위하여   그 안에 자리를 가진 모든 것과 함께 언어도 없이.     *서 있기, 공중의 상흔의 그림자 속에 역사의 폭력은 공기에까지 상흔을 남겼고, 시인의 설 자리는 그것이 드리운 그림자 속으로 줄어들어 있다. 절체절명의 고독의 역사. 언어에 대한 회의와 접목되어 하나의 결정(結晶)을 이룬다. 이 시는 에 수록되어 있다. /전영애     박해받은 일들과 뒤늦게, / 파울첼란   침묵으로 가릴 수 없 는 빛 발하는 동맹을 이루어.   금박 입힌, 아침의 깊이를 재는 측연*이 내게 와 박힌다 함께 맹세하고 함께 파고 함께 쓰는 발뒤꿈치에.     측연 끈에 매달아 수심을 재는 납추, 자주 총알에 비유되는 납덩이가 캄캄한 수심이 아니라 아침의 깊이를 재는 금박 추가 되어 발뒤꿈치에 와 박혔다고 함으로써 뒤꿈치에 날개 달린 장화를 신은 헤르메스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떨쳐지지 않는 역사의식과 시적 변용을 통한 상스이 어우러져 첼란 특유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시는 에 수록되어 있다. / 전영애   모래예술은 이제 그만, 모래책도, 명인도 그만 / 파울 첼란     아무것도 주사위 던져 얻어지지 않는다, 몇 명인가 벙어리는? 열일곱.   그대 물음 - 그대 대답 그대 노래,그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깊은눈속에서 ㅍㅡ ㄴ 눈 ㅗㄱ ㅡ-ㅜ-ㅗ       *깊은 눈 속에서: 끝에 이르러서 '깊은 눈 속에서'라는 구절이 한 덩이로 뒤엉키고 이어 차츰 녹아내리듯 모음만 남는다. 언어에 대한 회의가 극단적으로 드러나며 실행된 작품이다. 이 시는 에 수록되어 있다. / 전영애       언젠가, / 파울 첼란   그의 기척을 들은 적이 있다, 그가 세계를 씻고 있었다, 보이지 않게, 밤새도록, 정말로.   하나와 무한(無限), 파괴되어, '나'되어.   빛이 있었다, 구원.     *'나'되어: '나(ich)'에 동사화 어미 '되다(-en)'을 붙여 만든 조어 'ichen'의 과거형이다. 이 단어는 앞 행의 '파괴되어 (vernichtet)' 다음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음향상 그 여운처럼 들리고, 또 '빛(Licht)'이라는 단어가 그 뒤로 이어지기 때문에 '파괴'와 '빛' 사이에서 일어나는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것으로 짐작된다. 비슷한 단어를 찾자면 중세 독일어 'iht'('무엇'을 뜻하는 고어)가 있다.(이 경우 번역은 "하나의 무한/파괴되었다/무엇인가가" 정도가 될 것이다.) 유희처럼 들리기도 하는 언어의 피안 침묵과 절망의 언어 너머로 절절히 간구된 '구원'이 비쳐 나온다, 이 시는 에 수록되어 있다. /전영애   죽음의 푸가 / 파울 첼란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점심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그는 그걸 쓰고는 집 밖으로 나오고 별들이 번득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사냥개들을 불러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유대인들을 불러낸다 땅에 무덤 하나를 파게 한다  그가 우리들에게 명령한다 이제 무도곡을 연주하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아침에 또 점심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공  중에선 비좁지 않게 눕는다    그가 외친다 더욱 깊이 땅나라로 파 들어가라 너희들 너희 다른 사람들은 노래하고 연주하라  그가 허리춤의 권총을 잡는다 그가 총을 휘두른다 그의 눈은 파 랗다  더 깊이 삽을 박아라 너희들 너희 다른 사람들은 계속 무도곡을 연주하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낮에 또 아침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가 외친다 더 달콤하게 죽음을 연주하라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가 외친다 더 어둡게 바이올린을 켜라 그러면 너희는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오른다  그러면 너희는 구름 속에 무덤을 가진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점심에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저녁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의 눈은 파랗다  그는 너를 맞힌다 납 총알로 그는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그는 우리를 향해 자신의 사냥개들을 몰아 댄다 그는 우리에게 공중의 무덤 하나를 선사한다  그는 뱀들을 가지고 논다 또 꿈꾼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죽음의 푸가: 첫 시집 에 수록된 시 중 가장 유명한 시이다. / 전영애   유골항아리에서 나온 모래 외 / 파울 첼란     망각의 집은 곰팡이 슨 초록빛, 나부끼는 문마다 너의 머리 없는 악사가 푸르러진다. 그는 너를 위해 이끼와 쓰라린 치모(恥毛)로 만든 북을 울려주고 곪은 발가락으로 모래에다 너의 눈썹을 그린다. 그것이 달려 있었던 것보다 더 길게* 그린다, 또 네 입술의 붉음도. 너는 여기서 유골 항아리를 채우고 네 심장을 먹는다.   *길게: '오래'라고도 번역이 가능하다.     절반의 밤 / 파울 첼란      절반의 밤, 번득이는 눈에 꿈의 단검들로 꽂힌.  고통으로 울부짖지 마라, 깃발처럼 구름이 펄럭인다.  비단 양탄자, 그처럼 절반의 밤은 우리 사이에 펼쳐져, 어둠에서 어둠으로 춤추었다.  그들은 살아 있는 나무로 검은 피리를 깎아 우리에게 주었고, 이제 춤추는 여인이 온다.  그녀는 파도 거품으로 자아낸 손가락을 우리 눈에 담근다.  여기서 누가 아직 울려는가?  아무도 그리하여 절반의 밤은 희열에 차 소용돌이치고, 뜨거운 팀파니는 울린다.  그녀는 우리에게 고리들을 던져 주고 우리는 그것을 단검으로 받는다.  그녀는 우리를 이렇게 맺어 주는가? 사금파리인 듯 소리 울리니, 이제 다시 알겠다.  네가 접시꽃빛 죽음을  맞지 않았음을.     마리아네 / 파울 첼란    라일락도 아닌 꽃은 너의 머리, 거울인 너의 얼굴  눈에서 눈으로 구름이 흐른다. 소돔이 바벨로 몰려가듯  나뭇잎인 양 구름은 탑을 쥐어뜯고 유황불 타는 덤불숲 둘레를 광란한다.    그리고 번개도 번쩍인다 너의 입가에서-바이올린의 잔해를 지닌 저 계곡,  눈(雪)빛 이빨로 누군가 바이올린 활을 그으니, 오 더욱 아름답 게 갈대는 울렸는데!    사랑아, 너 또한 갈대이고 우리 모두 비(雨)여라.  너의 육신은 비할 데 없는 포도주, 우리 열(十)이서 잔을 든다.  곡식 속의 나룻배 너의 가슴을, 우리가 그것을 밤(夜)으로 저 어 가느니,  작은 항아리 하나를 채운 푸르름으로, 그렇게 너는 가벼이 우리 를 훌쩍 뛰어넘어 가고, 우리는 잠자고 있다----    천막 앞에 백 명의 병사가 집합하고, 우리는 마시며 마시며 너 를 무덤으로 나른다.  이제 세상의 석판 위에서 꿈의 단단한 은화*가 쨍그렁 울린다.   *은화: 망자에게 동전을(입에 물려) 주는 것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의 풍습이다. 진혼의 모티브가 드러난다.   프랑스의 추억 / 파울 첼란      그대 나와 생각하자. 파리의 하늘, 때 잊은 커다란 가을나리 꽃---    우리는 꽃 파는 아가씨에게서 하트를 샀지.  그건 파랬고 물속에서 꽃피었어.  우리의 방 안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우리 이웃 사람이 왔다, 므시외 르송주, 깡마른 난쟁이.  우리는 카드놀이를 했고, 나는 눈동자를 잃었어.  그대는 내게 머리카락을 빌려 주었는데, 그것마저 나는 잃었고 그는 우리를 내리쳤지.  그가 문밖으로 나가자, 비가 그를 따라갔지.  우리는 죽었는데 숨은 쉬었지.   *가을나리 꽃: 상사화. 봄에 돋은 잎이 죽고 나서 가을에 불쑥 줄기만 솟아나와 피는 (연)보라빛 꽃으로 강심제로 쓰이는 약용식물이기도 하다. *므시외 르송주: Monsieur L' Songe. 프랑스어로 '꿈'을 의인화한 이름.     먼 곳의 찬양 / 파울 첼란   네 눈의 샘 안에 살고 있다, 표류의 바다의 어부들의 그물이. 네 눈의 샘 안에서 바다는 약속을 지킨다.   여기에 나 던지네, 사람들 가운데 머물렀던 가슴 하나 옷들 그리고 맹세의 광채를 벗어던지네.   상복을 입어 나는 더욱 검고, 더욱 벌거벗었다. 배반하며 나는 비로소 충실하다. 나는 나이면서 너다.   네 눈의 샘 안에서 나 떠들며 약탈을 꿈꾼다.   그물이 그물을 포획하였다. 우리가 껴안은 채 헤어지고 있는 것.   네 눈의 샘 안에서는 교수형을 당한 자가 밧줄을 교살한다.     온 생애 / 파울 첼란    선잠 든 태양들은 아침 한 시간 전 네 머리카락처럼 푸르다.  태양들도 새의 무덤을 덮은 풀처럼 빠르게 자라고,  태양들도 유혹한다. 기쁨의 선상에서 우리가 꿈으로 벌였던 유 희를.  시간의 백악암에서는 태양들도 비수에 찔린다.    깊은 잠의 태양들은 더욱 푸르다. 네 고수머리도 오직 한 번 그 리 푸르렀지.  돈으로 살 수 있는 네 누이의 품 안에서 나는 밤바람으로 머물 렀다.  네 머리카락은 우리 위에 드리운 나무에 걸려 있는데, 거기 너 는 없었다.  우리는 세계였고, 너는 문 앞의 덤불이었다.    죽음의 태양들은 우리 아이의 머리카락처럼 희다.  네가 모래 언덕에 천막을 쳤을 때 밀물에 밀려 나왔던 아이.  행복의 칼이 우리 위에서 움찔거린다. 꺼진 눈으로.   /전영애 번역   애급에서 / 파울 첼란     이방 여인의 눈에다 이렇게 말하라. 물이 있으라! 이방 여인의 눈 속에 네가 아는 물속의 여인들을 찾으라. 룻! 노에미! 미르얌! 그녀들을 물 밖으로 불러내라. 네가 이방 여인 곁에 누울 때 그녀들을 치장해 주라. 이방 여인의 구름머리카락으로 그녀들을 치장해 주라. 룻, 미르얌, 노에미에게 이렇게 말하라. 보라, 내가 이방 여인과 동침하노라! 네 곁의 이방 여인을 가장 아름답게 치장해 주라. 룻, 미르암, 노에미로 인한 고통으로 그녀를 치장해 주라. 이방 여인에게 말하라. 보라, 내가 그녀들과 동침했노라고!   * 동침: 마지막 문장에 이르기까지 아홉 문장이 모두 마치 십계명처럼 나란히 '-하라'로 시작하고 있다. 룻, 미르암, 노에미는           유대 여인의 전형적인 이름들이다. '동침'이라는 가장 밀착된 인관관계에 동족의 기억이 스며들어 있다. *이방 여인: 첼란은 1948년 '정월 스무날' 빈에서 잉에보르크 바하만을 만났다. 독일의 대표적인 현대 시인인 두 사람은  오랫동안                 가까우면서도 먼 관계를 유지했는데, 최근 연구와 시간집 출간을 통해 두 사람은 서로의 작품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음이                 밝혀졌다. 첼란의 시 , 와 바하만의 소설 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 전영애   코로나 / 파울 첼란   가을이 내 손에서 이파리를 받아먹는다. 가을과 나는 친구. 우리는 시간을 호두에서 까 내어 걸음마를 가르친다. 시간은 껍질 속으로 되돌아가기에.   거울 속은 일요일이고, 꿈속에서는 잠을 자고, 입은 진실을 이야기한다.   내 눈은 연인의 음부로 내려간다. 우리는 서로 바라본다. 우리는 서로 어두운 것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서로 양귀비와 기억처럼 사랑한다. 우리는 잠을 잔다, 조개에 담긴 포도주처럼, 달의 핏빛 빛줄기에 잠긴 바다처럼.   우리는 서로 껴안은 채 창가에 서 있고, 사람들은 길에서 우리를 본다. 알아야 할 때가 되었다. 때가 되었다. 돌이 꽃피어 줄 때, 그침 없는 불안으로 가슴이 뛸 때가. 때가 되었다, 때가 될 때가.   때가 되었다.   *코로나: 태앙이 완전히 가려졌을 때 그 주위로 먼저 나오는 빛의 환(環). 한순간 태양 빛이 꺼지듯           시간의 어두운 원점에 선 연인들의 모습을 그린 연가이다.   무적(霧笛) 속으로 / 파울 체란     감춰진 거울 속의 입, 자부심의 기둥 앞에 꿇은 무릎, 창살을 거머쥔 손이여.   너희에게 어둠이 다다르거든, 내 이름을 불러라, 나를 내 이름 앞으로 끌어가라.     화인(火印) / 파울 첼란      더는 잠들지 못했다. 우울의 시계 장치 속에 누워 있었기에, 우리,  시계바늘은 채찍처럼 휘었고,  도로 다시 튕겨져 피 맺히도록 시간을 후려쳤고,  너는 짙어 가는 어스름을 이야기했고,  열 두번 나는 네말의 밤에 대고 너를 불렀고,  하여 밤이 열렸고, 그대로 열린 채로 있었고,  나는 눈 하나를 그 품 안에 넣고 또 하나는 네 머리카락에 넣어 땋아 주었고,  두 눈을 도화선으로, 열린 정맥으로 읽었고-  갓 번뜩인 번개가 헤엄쳐 다가왔고.     누군가 / 파울 첼란   누군가 심장을 가슴에서 뜯어내 밤으로 건네는 이, 장미를 향 해 손을 뻗는다.  그 잎과 가시는 그의 것이니,  장미는 그의 접시에 빛을 놓고,  그의 유리잔을 숨결로 채우니,  그에게서는 사랑의 그림자가 술렁인다.    누군가 심장을 가슴에서 뜯어내 밤으로 건네며 울리는 이,  그는 헛맞추지 않고,  돌을 돌로 치며,  그의 시계에서는 피가 울리고,  그의 시계에서는 그의 시각이 시간을 친다.  그이, 보다 아름다운 공을 가지고 놀아도 좋다.  너에 대해, 나에 대해 이야기해도 좋다.   크리스탈 / 파울 첼란   찾지 마라, 내 입술에서 네 입을, 문 앞에서 낯선 이를, 눈에 눈물을.   일곱 밤 높게 붉음은 붉음에게로 가고 일곱 가습 더 깊게 손은 문을 두드리고 일곱 장미 더 늦게 우물은 좔좔 흐르고.     수의 / 파울 첼란   내가 가벼움으로 짠 것을 나는 돌의 영광을 위해 입는다. 내가 어둠 속에서 외침들을 깨우면, 수의는 외침들을 실어 온다.   자주, 내가 더듬거려야 할 때, 수의는 잊었던 주름을 잡고, 지금의 나인 이가 용서한다. 지나날 나였던 이를.   그러나 돌 언덕의 신은 자신의 둔탁하디둔탁한 북을 건드리고 옷에 주름이 잡히듯 그 어두운 이의 이마에 주름살이 생긴다   그녀가 머리를 빗는다 죽은 이의 머리를 빗겨 주듯. 그녀는 푸른 사금파리를 셔츠 밑에 지니고 있다.   그녀는 사금파리 세계를 끈에 꿰어 걸고 있다. 그녀는 말을 알면서도, 웃기만 한다.   그녀는 자신의 미소를 포도주 잔에 섞는다. 너는 그걸 마셔야 한다, 세상에 머물자면.   너는, 그녀가 생각에 잠겨 생(生)을 굽어볼 때, 사금파리가 그녀에게 보여 주는 상(像).     풍경 / 파울 첼란   너의 키 큰 포플러 - 이 땅의 사람들! 너의 행복의 검은 연못들 - 너희가 그들을 비추어 죽게 한다!   내가 너를 본다, 누이야, 네가 이 찬란한 빛 속에 서 있음을.     정적이여! / 파울 첼란   정적이여! 내가 너의 가슴에다 가시를 박고 있구나. 장미가, 장미가 거울 속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서 있기에, 피를 흘리고 있기에! 장미는 전에도 피 흘렸다, 우리가 '예'와 '아니요'를 섞었을 때 우리가 그것을 들이켰을 때, 유리잔이 식탁에서 튀어 올라 쨍그랑 울렸기에, 그 소리는 예고했다, 우리보다 더 오래 어두어졌던 밤을.   우리 탐욕스러운 입으로 마셨다. 소태 맛이었으나, 그래도 포도주처럼 거품 일었다 - 나는 너의 두 눈이 뿜는 빛을 따라갔고 우리 혀는 달콤함을 웅얼거렸다--- (그렇게 혀는 웅얼거리고 있다. 그렇게 혀는 여전히 웅얼거리고 있다.)   정적이여! 가시가 네 가슴을 더 깊이 파고든다. 가시는 장미와 한 동아리다.     해아려라 만델을,  헤아려라, 쓴 것, 너를 눈뜨고 있게 했던 것을,  거기에 나까지 함께 헤아려 다오.    네가 눈을 떴으나 아무도 너를 눈여겨보지 않았을 때, 나는 너 의 눈을 찾았다.  나는 저 남모르는 실오리를 자았다.  네가 생각했던 이슬이,  그걸 타고 굴러 내려  항아리에 담겼다, 그 누구의 가슴에도 가 닿지 못한 한마디 말 씀이 지키는 항아리.    거기서야 너는 너의 것인 이름 안으로 온전히 들어섰다.  확실한 걸음으로 너에게로 갔다.  네 침묵의 종루에서 종추들이 자유롭게 흔들렸을 때  귀담아들은 말이 너에게로 울려 나왔고,  죽은 것이 또한 네 어깨에 팔을 둘러,  너까지 셋이서 너희들은 저녁을 지나갔다.    나를 쓰게 만들어 다오  만델에 나까지 함께 헤아려 다오.   *만델: 편도(아몬드)를 말한다. '만델형 눈'은 갸름한 눈을 가리키며 '구부러진 코'와 더불어 전형적인 유대인의 외모를 묘사할 때 사용한다. *쓴: '(맛이) 쓰다'는 뜻 외에 '쓰라린' 또는 '혹독한'이라는 뜻으로 쓰였으며 마지막 연 첫 번째 햄의 "쓰게"도 마찬가지이다. 만델 열매의 '쌉살한 떫은' 맛에 '혹독한' 체험이 겹친다.   나는 들었다 / 파울 첼란   나는 들었다. 물속에는 돌 하나 또 동그라미 하나 있다는 얘기를 물 위에는 말 하나 동그라미를 돌 주위에 놓는 말 하나 떠 있다는 얘기를.   나는 보았다, 내 포플러가 물로 내려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 팔이 깊은 곳으로 뻗어 내려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 뿌리가 하늘을 향해 어둠을 간구하는 것을.   나는 서둘러 뒤쫓지 않았다, 나는 그저 바닥에서 빵 부스러기를 주워 들었다, 네 눈의 모양과 기품을 니진 빵 부스러기를 나는 네 목에서 말씀의 목걸이를 벗겨 그 빵 부스러기가 놓인 식탁 가장자리에 둘렀다.   그러자 내 포플러가 이제 보이지 않았다.     붉은 노을 속에 / 파울 첼란   붉은 노을 속에 이름들이 잠자고 있다. 하나를 너의 밤이 깨워 데리고 간다, 하얀 막대들을 따라 마음의 남쪽 벽을 더듬으며 소나무 아래로. 사람 키만한 소나무 한 그루 성큼성큼 도공(陶工)들의 도시로 걸어간다, 바다시간의 친구 되어 비가 돌아오는 곳으로 푸름 속에서 그것은 어둠을 약속하는 나무말을 한다, 그리고 네 사랑의 이름을 그 음절에 덧붙여 헤아린다.     도끼로 유희하며 / 파울 첼란   밤의 일곱 시간, 깨어 있음의 일곱 해 도끼들을 가지고 유희하며 너는 누워 있다. 일어선 시체들의 그늘에 -오, 나무들 네가 베지 않은 나무들!- 머리맡에는 침묵으로 은폐된 것의 호화로움 말(言)의 구걸은 발치에 두고 너는 누워 유희한다, 도끼로- 그러다 마침내 번득인다, 도끼처럼.     삼단 같은 머리 / 파울 첼란   내가 땋아 주지 않은, 나부끼게 내버려 둔 삼단 같은 머리 오고 가며 희어졌구나 내가 미끄러져 스쳐 간 이마에서 흘러내려 이마의 해(年)에-   이것은, 만년설을 위하여 일어선 말(言) 하나 내가 눈(眼)들에 여름처럼 에워싸여 네가 내 위에 펼쳐 놓은 눈썹을 잊었을 때 눈(雪) 쪽으로 눈길 주었던 말 하나 내 입술이 언어로 피 흘렸을 때 나늘 피했던 말 하나.   이것은 말들 곁에서 나란히 걸었던 말 하나 침묵의 모습을 한 말 하나, 늘 푸른 담쟁이와 근심으로 에워싸인.   여기서 먼 곳들이 내려가면 그러면 네가, 솜털 같은 머리카락별 하나여, 너 여기서 눈 되어 내리는구나 흙의 입에 닿는구나.   어렴풋한 모습 / 파울 첼란   네 눈을 그 방 안에서 한 자루 양초이게 하라 네 눈길을 심지이게 하라 나를 충분히 눈멀게 하라 그 심지에 불붙일 만큼.   아니다. 다르게 하라.   네 집 앞으로 나서라 네 얼룩얼룩한 꿈에다 마구를 매라 네 경적이 말하게 하라 눈(雪)에게, 네가 내 영혼의 용마루에서 불어 날린 눈에게.     어둠에서 어둠으로 / 파울 첼란   네가 눈을 뜬다 - 내 어둠이 살아 있음이 보인다 내 어둠의 바닥을 본다 거기서도 그건 내 것이고 살아 있다.   그런 것이 건너갈까? 그러면서 깨어날까? 누구의 빛이 내 뒤를 바짝 따라오는가. 사공이 있으라고?     아시시 / 파울 첼란   움브리아의 밤, 움브리아의 밤, 종과 올리브 잎의 은빛이 있는. 움브리아의 밤, 당신이 지고 오는 돌이 있는. 움즈리아의 밤, 돌이 있는.   말없이, 삶 속으로 솟는 것, 말없이. 항아리를 바꿔 채워라-   흙 항아리, 흙 항아리, 도공의 손과 한데 엉겨 붙어 버린. 흙 항아리, 그림자의 손이 영원히 봉인한. 흙 항아리, 그림자의 봉인이 찍힌.   돌, 그대 바라보는 곳에, 돌. 그 나귀를 들어가게 하라.   터덜터덜 가는 짐승. 터덜터덜 가는 짐승, 가장 헐벗은 맨손이 뿌리는 눈 속을. 터덜터덜 가는 짐승, 철커덕 잠겨 버리는 말(言) 앞에서. 터덜터덜 가는 짐승, 손에서 잠을 받아먹은.   광휘, 위로하지 않으려는, 광휘. 죽은 이들--- 그이들이 아직도 구걸하고 있나이다, 프란 체스코여.   *이시시: 이탈리아 중부 움부리아 주(州)의 옛 도읍. 성 프란체스코가 태어난 곳으로 유명한 순례지다. *도공: Toper. '창조주(Schopfer)'를 연상시킨다. *나귀: 성경 속에서 신이 사랑하는 짐승으로 등장한다.     프랑수아를 위한 비명(碑銘)     세상의 두 문(門)이 열린 채 있다. 네가 어스름 속에서 열어 두고 가 버린 문. 그 문이 덜컥덜컥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우린 어렴풋한 것을 나른다. 초록빛을 네 영원 속으로 나른다.   1953년 10월   *프랑수아를 위한 비명: 프랑수아는 첼란의 첫아들 이름이다. 첼란이 날짜를 기입한 시는 이 시가 유일하다.     열쇠를 번갈아 가며 / 파울 첼란     열쇠를 번갈아 가며 너는 집을 연다. 그 안에는 침묵으로 은폐된 것의 눈(雪)이 휘날리고 있다. 네게서, 눈(眼)에서 입에서 혹은 귀에서 솟는 피에 따라 네 열쇠가 바뀐다.   네 열쇠가 바뀌면 말이 바뀐다. 눈송이와 더불어 휘날려도 좋은 말. 너를 앞으로 몰아치는 바람에 따라 그 말 주위에는 눈이 뭉친다.   /전영애 번역   정물(靜物)/ 파울 첼란   촛불 곁에 촛불, 흐릿한 빛 곁에 흐릿한 빛, 환한 빛 곁에 환한 빛.   그리고 그 아래, 여기 이것. 눈 하나 쌍이 못된 채로, 감겨서, 저녁이지는 않은 채 찾아드는 늦음에다 속눈썹을 달아 주며.   그앞에, 네가 여기서는 그것의 손님인 낯선 것 빛 없는 엉겅퀴 그로써 어둠은 제것들을 의심하고 먼 곳으로부터 잊히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또 이것, 귀 먼 것 가운데 실종되어, 입 돌이 되어, 돌을 꽉 그러 물고, 바다로부터, 그 얼음을 여러 해 굴려 오고 있는 바다로부터 부름 받아.     그리고 아름다운 것 / 파울 첼란   그리고 아름다운 것, 네가 쥐어뜯는 그리고 머리카락, 네가 쥐어뜯는. 어느 빗이 그것을 다시 단정하게 벗어줄까, 그 아름다운 머리를? 누구의 손 안의 어느 빗이?   그리고 돌들, 네가 쌓은, 네가 쌓는. 그것들은 어디로 그림자 그리우나. 또 얼마나 멀리?   그리고 그 위를 스치며 가는 바람, 그리고 바람, 이 그림자 하나를 그러쥐어 바람은 네게 나누어 줄까?     돌 언덕 / 파울 첼란   내 곁에 너는 살고 있다, 나같이 움푹 꺼진 어둠의 뺨 속 돌 하나로.   오, 이 돌 언덕, 사랑아, 우리가 쉼없이 구르는 곳, 돌인 우리가, 얕은 물줄기에서 물줄기로, 한 번 구를 때마다 더 둥글게. 더 비슷하게, 더 낯설게.   오 이 취한 눈, 여기서 우리처럼 길 잃고 두리번거리며 우리를 이따금씩 놀라며 하나로 보는.     벌판들 / 파울 첼란   늘 그 한그루, 그 포플러 생각의 자락에. 늘 손가락, 솟아 있는 손가락 밭둑에.   그보다 이미 훨씬 전에 이랑이 저녁 속에서 망설이고. 그러나 구름. 그건 흐른다.   늘 그 눈. 늘 그 눈, 그 눈꺼풀 그 감긴 눈꺼풀들이 뿜는 빛 속에서 네가 활짝 뜨는. 늘 이 눈.   늘 이 눈, 그 자아내는 시선이 그 한 그루, 포플러에 감긴다.   밤 쪽으로 젖혀진 / 파울 첼란 -한나 렌츠, 헤르만 렌츠를 위하여   밤 쪽으로 젖혀진 꽃들의 입술, 엇갈리고 뒤엉킨 전나무 줄기들, 잿빛 띤 이끼들, 뒤흔들린 돌, 깨어나 무한히 날아간다 만년설 너머 검은 새들.   여기는 우리가 쉬는 곳. 서둘러 와 닿은 지역.   그것들은 시간을 일컫지 않을 것이다 눈송이를 헤아리지 않을 것이다 물을 막힌 곳까지 따라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세상에 갈라져 서 있다 하나하나가 자기 어둠 곁에 하나하나가 자기 죽음 곁에 무뚝뚝하게, 맨머리로, 서리에 덮혀 가깝고도 먼 것에 의해.   그들은, 그들의 부채(負債)를 져 낸다, 근원에 혼을 불어넣은 부채를 그들은 그걸 져 낸다. 말 하나에까지로 여름처럼, 부당하게 존속하는 말.   말 하나 - 알지 시체 하나.   우리 그걸 씻어 주자 우리 그걸 빗질해 주자. 우리 그 눈이 하늘 쪽으로 향하게 하자.     시간의 눈 / 파울 첼란   이건 시간의 눈 일곱 빛깔 눈썹 아래서 곁눈질을 한다 그 눈꺼풀은 불로 씻기고 그 눈물은 김이다.   눈먼 별이 날아와 닿아 뜨거운 속눈썹에서 녹으니 세상이 따뜻해지리 죽은 이들이 봉오리 틔우고 꽃 피우리.     쉬볼렛 / 파울 첼란   창살 뒤에서 커다랗게 울었던 내 돌들과 함께,   그들은 나를 날카롭게 갈아서 시장 한복판으로 보냈네, 거기로 내가 어떤 서약도 하지 않은 그 깃발 오르는 곳으로.   피리들, 밤의 이중 피리. 생각하라, 빈과 마드리드의 어두운, 꼭 같은 두 개의 붉음을.   네 깃발을 조기(弔旗)로 올리라, 기억을, 조기로 오늘과 영원을 위하여.   가슴, 여기서도 너는 네 신분을 밝히라, 여기 시장 한복판에서 외치라 그것, 쉬볼렛을, 저 밖으로 낯선 고향에 대고 2월. 노 파사란.   아인호른. 너는 돌을 훤히 알지, 너는 물을 훤히 알지, 오라 내 너를 인도하마 에스트레마두라의 목소리들에게로.   *쉬볼렛: 구약 성경에서 에브라임인과 적대 관계에 있던 길르앗인들이 에브라임 지역 요르단 강 나루터를 점령했을 때 , 에브라임인임을 숨기고  강을 건너려는 자를 색출해 내기 위해서 썼다는 암호. 에브라임인은 이 단어를 '시볼렛'이라고 발음했는데, 이를 제대로 발음하는 사람만 살려 통과시켰다고 한다. *두 개의 붉음: 빈의 노동자 봉기(1938)와 스페인 내전의 시발이 된 마드리드 봉기(1936)를 가리킨다. *노 파사란:  No pasaran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으 파시즘에 맞선 공화파의 구호로, "너희가 건너지 못하리라"라는 뜻 *아인호른: Einhorn 글자 그대로 옮기면 일각수(一角獸)를 뜻하나 여기서는 사회주의자였던 첼란의 고향 친구 이름이다. *에스트레마두라: 스페인 내전 당시 피해가 혹심했던 남서부 지역   가묘(假墓) / 파울 첼란   꽃을 뿌리라, 낯선 여인이여, 마음 놓고 뿌리라. 그대 저 아래 깊은 곳에 정원들에 꽃을 건넨다.   여기 누웠어야 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누워 있지 않다. 그렇지만 세계가 그의 곁에 누워 있다. 세계, 그것이 갖가지 꽃들 앞에서 눈을 떴다.   그러나 그는 붙들었다, 많은 것들 보았기에, 눈먼 사람들과 함께. 그는 갔다, 그리고 너무 많이 꺾었다. 향기를 꺾었다- 그리고 그걸 본 사람들이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이제 그는 갔다, 낯선 물 한 방울 마셨다, 바다를. 물고기들- 물고기들이 그 몸에 와 부딪힐까?     어느 돌을 네가 들든 / 파울 첼란   어느 돌을 네가 들든- 너는 드러내 버린다, 돌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이들을, 벌거벗긴 그들은 이제 짜임을 새롭게 한다.   어느 나무를 네가 베든- 너는 짜 맞춘다, 그 위에 혼(魂)들이 또다시 고일 잠자리를, 마치 흔들리지 않을 듯이 이 영겁(永劫) 또한.   어느 말을 네가 하든- 너는 감사한다 사멸(死滅)에.     그대도 말하라 / 파울 첼란   그대도 말하라, 마지막 사람으로, 그대의 판정을 말하라.   말하라- 그러나 '아니요'를 '예'와 가르지 마라. 그대의 판정에 뜻도 주라. 그것에 그림자를 주라.   그것에 그림자를 충분히 주라. 그것에 그만큼을, 네 주위 한밤중과 한낮과 한밤중에 두루 나누어 줄 수 있는 만큼 주라.   둘러보라, 보라, 사방이 살아나고 있다- 죽음 곁에서! 살아나고 있다! 그림자를 말하는 이, 이 진실을 말하는 것.   지금 그러나 그대 선 곳이 줄어든다, 어디로 이제, 그림자 벗겨진 이여, 어디로? 오르라, 더듬어 오르라. 그대 점점 가늘어지고, 점점 희미해지고, 점점 섬세해진다! 더욱 섬세해져 이제 한 올 실낱이다. 그가, 별이, 타고 내려오고 싶어 하는 실낱. 낮은 곳에서 유형하고자, 낮은 곳,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곳, 떠도는 말들의 물살에서.   *판정: Spruch '말씀', '격언' 등의 뜻도 있다 *뜻: Sinn '감각', '방향' 등의 뜻도 있다.     침묵의 증거 / 파울 첼란 -르네 샤르를 위하여   황금과 망각 사이 사슬에 꿰인 밤 둘은 밤을 잡으려 하였다. 둘에게 밤은 허락하였다.   놓으라 너도 지금 거기다 놓으라. 낮들 곁에서 어스름히 차오르려는 것을 별 넘어 날아간 말 바다 넘쳐 씻은 말을.   그 말을 누구에게나 폭도들이 등덜미를 쳤을 때 노래 불러 주었던 그 말을 누구에게나- 노래 불러 주고는 굳어버린 그 말을 누구에게나.   그녀, 밤에게, 별 넘어 날아간, 바다 넘쳐 씻은 말을. 밤에게 침묵으로 얻은, 독니가 음절을 짓씹었을 때도 피 흘리지 않은 그 말을.   밤에게, 침묵으로 얻은 그 말을.   껍질 벗기는 자 귀들이 화냥질하고 시간과 시대도 기어오르는 그 많은 다른 말들에 맞서 그것은 증언한다 마침내,   마침내, 사슬이 절거덕거리기만 하면 증언한다, 거기 황금과 망각 사이에 놓인 밤에 대하여, 예로부터 그 둘과 형제인 것에 대하여-   그럴 것이, 대체 어디에서 밝아 오겠는가, 말하라, 그 밤 곁이 아니라면 그 밤의 눈물의 유역(流域)에서 잠수하는 태양들에게 씨앗을 가리키고 또 가리키는 밤 곁이 아니라면?   *침묵의 증거: '침묵으로 된 증거' 혹은 '침묵으로 이루어진 시'로 번역할 수 있다. 첼란이 이 시를 헌정한 프랑스 현대 시인 르네 샤르는 라는 시를 쓴 바 있으며, 첼란은 그의 시를 많이 번역하였다.   목소리들 / 파울 첼란   목소리들, 초록에다, 수면(水面)의 초록에다 새겨 넣은. 물총새가 자맥질해 들어가면 초(初)가 쨍 - 울린다.   어는 물가에서나 당신을 향해 섰던 무리가 다가온다 베어져, 다른 형상 되어.   * 목소리들, 쐐기풀 길에서 들려오는   손을 짚고 거꾸로 서서 우리에게 오라. 등불과 함께 홀로 있는 이에게는 읽어 낼 손밖에 가진 것이 없다.   *   목소리들, 어둠을 견뎌 내고 들려오는, 동아줄들, 네가 종을 매다는. 휘어라, 세계여 망자(亡者)의 조개가 쓸려 오면 여기서 종소리 울리려 하노니.   * 목소리들, 그 앞에서 너의 가슴이 어머니의 가슴으로 뒷걸음질 치는. 나이테의 햇목질과 묵은 목질이 그 테를 바꾸고 또 바꾸는 곳. 교수목(絞首木)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   * 목소리들, 돌 부스러기 속에서 울리는, 꺽꺽거리는, 그속에서 또한 무한(無限)이 삽으로 파내고 있다.   (마음의-) 점액질 물줄기.   여기에다 배를 내려라, 아이야, 내가 승선시켰던 배들을. 선체 중앙에서 돌풍이 우현으로 불면 꺾쇠가 닫힌다.   * 야곱의 목소리.   눈물. 형제의 눈에 고인 눈물. 그 한 방울이 계속 매달린 채 커졌다. 우리는 그 눈물 방울 속에서 살고 있는 것. 숨 쉬어라, 그 눈물이 떨어지도록.   * 목소리들, 방주 안에서 들려오는.   구조된 것은 입들뿐이다. 가라앉고 있는 이들아, 들어 다오 우리의 소리도,   * 목소리는 없고 - 한 가닥 때늦은 소음, 시각에 맞지 않게, 너의 생각에 주어져, 여기, 마침내 깨어 데려온 소음. 눈(眼) 크기만 한, 깊게 상처 난 과엽(果葉) 하나 진물이 흐른다, 아물려 들지를 않는다.     *물총새: Eisvogel.글자 그대로 옮기면 '얼음새'라는 뜻이다. 천 연의 경직된 목소리를 묘사하는 데 효과를 더한다. *꺽쇠: 앞의 "마음의-"의 앞뒤에 친 괄호를 뜻하기도 한다. 괄호가 닫히면 "마음의-"는 사라지고 '점액질 물줄기'만 남는다. *그 눈물이 떨어지도록: 유대교 신비주의의 전통에 의하면 카인에게 죽임을 당한 '아벨'의 눈물이 말라야 메시아가 온다고 한다.     확신 / 파울 첼란   눈 하나 또 있으리라 우리들 눈 옆에, 낯선 눈 하나, 말을 잃고 돌이 된 눈꺼풀 아래 있으리라.   오라, 너희들의 갱(坑)을 뚫으라!   속눈썹 하나 있으리라, 암석 속에서 안으로 향한 채 울지 못한 울음의 강철 입힌 가장 섬세한 굴착기가 있으리라.   그대들 앞에서 그것이 작업하고 있다, 마치, 돌이 있으니, 형제도 있으리라는 듯.     편지와 시계로 / 파울 첼란   밀랍, 적히지 않는 것을 봉인하는 네 이름을 알아맞혀 낸, 네 이름을 암호로 감추는 밀랍.   이제 오고 있는가, 표류하는 빛이여? 손가락들, 손가락들도 밀랍이다, 낯선 고통을 주는 반지 끼워져, 녹아들었다 손가락 끝 끝.   오고 있는가, 표류하는 빛이여?   시계의 벌집, 비었다 시간이 없다 신부처럼, 벌 떼는 떠날 채비가 되었다.   오라, 표류하는 빛이여.   귀향 / 파울 첼란   점점 짙어지는 강설(降雪), 비둘기빛, 어제처럼, 그대 아직도 잠들어 있기라도 하듯, 강설   멀리까지 펼쳐진 백색(白色), 그 너머, 끝없이, 사라져 버린 이의 썰매 자국.   그 아래, 감추어져 있다가, 젖혀 올려진다. 두 눈을 이토록 아프게 하는 것. 보이지 않던 언덕 또 언덕.   그 언덕마다에 '오늘'로 되불려 온, 침묵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나' 나무로 된, 말뚝.   저기, 얼음바람에 실려 온 하나의 감정, 그 비둘깃빛, 눈(雪)빛 깃발을 달고.     흠 / 파울 첼란   각막에 그어진 흠. 절반 간 길에서 시선이 보아 버린 '잃어버림'. 실제로 자아낸 '결코 아니다'의 되돌아옴.   반 동강 길들 - 그러나 가장 긴 길들.   혼(魂)이 밟고 간 실 가닥, 유리 흔적, 뒤로 말려들어 가고 그리고 이제 그대 머리 위, 항(恒) 성(星), 그 위에서 눈(眼)인 당신이 하얗게 너울 씌워 놓은   각막에 그어진 흠. 어둠에 실려 온 기호 하나 간직하라는 것.   낯선 시간의 모래로 (아니면 얼음으로?) 보다 낯선 '언제나'를 위하여 되살아나고 소리 없이 떨리는 자음으로 조율해 놓은 그 기호.   *각막에 그어진 흠: 긁힌 유리를 통해 사물을 보면 그 사물에도 긁힌 자국이 나 보이듯, 무언가에 긁혀 흠이남은 각막으로 세상을 보면 무엇을 보든 그 대상에도 흠이 그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흑암 / 파울 첼란   저희가 가까이 있나이다, 주여. 잡힐 듯 가까이.   이미 잡혀서, 주여. 저희 하나하나의 몸이 당신의 육신인 듯, 서로를 움켜쥐고, 주여.   기도하소서, 주여 저희에게 기도하소서 저희가 가까이 있나이다.   바람에 뒤틀린 채 저희가 갔습니다 향하여 갔습니다. 물 괸 웅덩이와 분화구를 찾아 몸을 굽히려고.   물 마실 곳으로 갔습니다, 주여.   피였습니다, 그건 당신께서 흘리신 피였습니다, 주여.   그것이 반짝였습니다.   그것이 우리 눈에 당신의 형상을 비추었습니다, 주여. 눈과 입이 저렇듯 열려 있고 비어 있습니다, 주여. 저희가 마셨습니다, 주여. 피와 그 피 속에 잠겨 있는 형상을, 주여.   기도하소서, 주여. 저희가 가까이 있나이다.   *흑암: Tenebrae. '어둠' 외에도 '죽음의 밤'이라는 뜻이 있는데, 특히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직후          골고다 언덕을 뒤덮은 어둠을 가리킨다. 첼란이 독일어를 두고 굳이 라틴어로 제목을 쓴 것은, 그로 인          해 덧붙여지는 기독교적 의미를 신이 인간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이 뒤집힌 기도 형태의 시에 수           용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여름 소식 / 파울 첼란   이제는 아무도 밟지 않는, 에둘러 가는 백리향(百里香) 양탄자. 종소리벌판을, 가로 질러 놓인 행(行) 바람이 짓부수어 놓은 곳으로는 아무것도 실려 오지 않는다.   다시금 흩어진 말들과의 만남, 가령 낙석(落石), 딱딱한 풀들, 시간.     쾰른, 임 호프 / 파울 첼란   마음의 시간, 꿈꾸어진 이들이 멈추어 있다 자정의 자판을 가리키며.   어떤 이들은 정적 속에다 말을 하고, 어떤 이들은 입 다물고 있고 어떤 이들은 자기 길을 갔다 추방당하고 상실되어 집에 있다.   너희 사원들.   보는 이 없고.   너희 사원들.   너희 강물에 귀 기울리는 이 없고 너희 시계는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있고.   *암 호프: Am Hof. 호텔 이름으로, 첼란은 파리에서의 재회 후 몇 년이 지난 뒤에 이곳에서 바하만을 다시 만났다.     그림 하나 아래로 / 파울 첼란   갈까마귀 떼 뒤덮힌 물결치는 밀밭. 어느 하늘의 푸름인가? 낮은 하늘의? 높은 하늘의? 늦은 화살, 영혼이 당겼다. 더 세찬, 화살 나는 소리. 더 가까운 이글거림. 두 세계.   *그림 하나 아래로: 빈센트 반 고호의 그림 을 소재로 한 시이다   스트렛토 /파울 첼란   실려 왔다 그 확연한 흔적이 있는 땅으로.   풀, 갈라져 적혀 있고, 돌들, 하얗게 풀 줄기 그림자 드리워져. 이제 읽지 말고 - 보라! 이제 보지 말고 - 가라!   가라, 너의 시간은 다시 올 시간이 없고, 너는 - 집에 와 있다. 바퀴 하나, 천천히, 저 혼자 굴러 나온다, 바퀴살들이 기어간다 거무스름한 들판을 기어간다, 밤은 별이 필요 없다, 그 어디서도 네 소식을 묻지 않는다.   *   그 어디서도 네 소식을 묻지 않는다 -   그들이 누었던 곳, 그곳은 이름이 있다 - 그곳은 이름이 없다.그들은 거기 눕지 않았다.무엇인가가 그들 사이에 가로놓여 있었다.그들은 꿰뚫어 보지 못했다.   보지 못했다, 아니 제각기 논하였다, 말에 대해서. 아무도 눈뜨지 않았다 잠이 그들을 덮었다.   * 왔다, 왔다.그 어디서도 묻지 않는다 -   나야, 나, 내가 너희 사이에 누워 있었어, 나는 열려 있었고 들리기도 했지, 내가 너희를 향하여 째깍거렸지, 너희 숨소리가 귀 기울렸지, 그건 여전히 나야, 너희는 잠만 자는데.   *   그건 여전히도 나야 - 세월. 세월, 세월, 손가락 하나가 더듬고 있다. 아래로 위로 더듬고 있다 이리저리 만져지는, 꿰맨 자리, 여기 다시 아물어 붙었구나 - 누가 그것을 덮어 주었을까?   *   덮어  주었다 - 누가?   왔다, 왔다. 왔다 말(言) 하나, 왔다. 밤을 뚫고 와 밝히고자 하였다, 밝히고자 하였다. 재. 재, 재, 밤-또-밤. - 눈(眼) 을 찾아가라, 젖은 눈을 찾아.   *   눈   을 찾아가라,                젖은 눈을 찾아 -   돌풍. 돌풍, 언젠가의, 입자(粒子)들의 흩날림, 타자, 당신 그걸 알지, 우린 책을 읽었어, 의견 이었어. 의견 이었지, 있었어. 어떻게 우리가 우리를 붙잡았을까 - 이 두 손으로?   적혀 있기도 했어, 이렇게. 어디에? 우리는 그 위에 침묵 하나를 띄워 놓았어, 독(毒)으로 안정시켜, 커다랗게. 초록빛 침묵 하나, 꽃받침 이파리 하나, 거기 식물적인 것에 대한 생각 하나 매달려 있었어 - 초록빛으로, 그래, 매달려 있었어, 그래, 음흉한 하늘 아래서. 그래, 식물적인 것에 대한.   그래, 돌풍, 입 자들의 흩날림, 남아 있었어. 사간이, 남아 있었어, 식물적인 것을 돌에서 틔워 보려고 - 돌은 손님을 환대했지, 그건 말을 가로막지 않았어, 우린 제법 형편이 좋았지.   알갱이로, 알갱이로, 섬유질로, 줄기로, 빽빽하게. 송이로 다발로, 신장으로, 판으로 그리고 덩이로,느슨하게, 가지 쳐서 - ,그는,그것은 말을 가로막지 않았다, 식물적인 것이 말했어, 말하기 좋아했어 메마른 눈에게도, 그것이 감기기 전에. -   말했어, 말했어. 있었어, 있었어.   우리는 늦추지 않았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하나의 숨구멍 짓기, 그리하여 그것이 왔다.   우리에게로 왔다, 뚫고 왔다, 꿰매었다 보이지 않게, 꿰매었다 마지막 음향전달막을, 하여 세계, 한 덩어리 수천의 수정(水晶) 결정(結晶)이 이루어졌다, 결정이 이루어졌다.   *   결정이 이루어졌다, 결정이 이루어졌다.                                       그러고는 -   환원된, 밤들, 동그라미들 초록 혹은 파랑, 빨강 네모들. 이 세계가 그 가장 내면적인 것을 새로운 시간들과의 도박에 건다. - 동그라미들, 빨강 혹은 검정, 환한 네모들, 비상(飛翔)의 그림자 없고 측량 탁자도 없고 연기혼(魂)도 피어올라 섞이지 않는다.   *   피어올라          섞인다 -   땅거미 질 녘 돌이 된 문둥병 곁에 도망쳐 온 우리들의 손들 곁 최근의 박해 때 무너진 담벼락 총알받이 너머로,   보인다, 새 롭게 이랑들이.   그때의 그 합창들이 찬미가가, 흐,호- 산나. 그러니까 아직 사원(寺院)은 서 있는 것. 아무것도 아무것도 상실되지 않았다.   호- 산나.   땅거미 질 녘, 이곳에 땅 밑을 흐르는 물흔적이 나누는 날 어두운 대화들.   *   땅 밑을 흐르는 물흔적                     의                         날 어두운 - 실려왔다 그 확연한 흔적 이 있는 땅으로.   풀, 풀, 갈라져 적혀 있는.     * 스트렛토: 로 시작되는 시집 의 맨 끝에 수록된 시. 이 시에서는 에서 나열되었던, 또한 에서 울렸던 여러 목소리들이 하나의 궤적을 좇아 집약되고 있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알랭 르네의 영화 와 연결시킬 수도 있다. '스트렛토'로 번역한 'Engfuhrung'은 '비좁히기'라는 뜻의 음악 용어로 푸가 형식에서 여러 성부가 나오는 부분을 가리킨다.   *의견: 단테는 에서 '사랑'을 그저 하나의 '의견(Doxa)'으로 정의했다. 함께 책을 읽다가 사랑에 빠져 불륜을 범하게 되는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이야기와 연결된다.   *그는, 그것은: er,es. '돌'을 가리키는 대명사 'er'와 '식물적인 것'을 가리키는 대명사 'es'를 나란히 적어 돌에서 생명이 생성되기를 바라는 꿈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바로 앞에 나열한 명사와 형용사를 보면 생물(식물)에 관련된 표현과 무생물(광물)에 관련된 표현이 뒤섞여 있다.   *음향전달막: 북 따위의 악기들에서 소리를 전달시키는 데 쓰이는 얇은 금속, 종이, 고무 등으로 된 이파리 모양의 관   *땅거미 질 녘: Eulenflucht '올빼미로 날아오를 녘'의 고어이다. 그대로 옮기면 미네르바의 올빼미를 연상시키는 장점이 있지만, 시 전테의 어두운 분위기에 부합하지 않아 '땅거미 질 녘'으로 옮겼다.  /전영애 역   취리히, 춤 슈토르헨 / 파울 첼란 -넬리 작스를 위하여   이야기가 있었다, 너무 많거나 너무 적음에 대하여. '그 이'에 대하여 '그래도 그이'에 대하여, 밝음에 의한 흐림에 대하여 유대적인 것에 대하여 너의 신에 대하여.   '그것'에 대하여. 어느 성모 승천일 성당은 건너편에 서 있었다, 성당은 금빛을 띠고 물을 건너왔다.   너의 신에 대해 말해져 왔다, 나는 그에 맞서 이야기하였다, 나는 내가 한때 가졌던 마음이 희망하게 하였다. 그의 높고 가장 높은, 구멍 뚫린, 다투는 말을- 네 눈이 나를 보았다, 그 너머 멀리를 보았다. 네 입이 눈에게 격려를 보냈다, 말이 들려왔다.   우리는 정말이지 모릅니다, 아시겠어요, 우리는 정말 모릅니다, 무엇이 유효한지.   *춤 슈토르헨: 호텔 이름으로 "황새네' 정도의 뜻이다. 1960년 첼란은 이곳에서 넬리 작스를 만났다.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스웨덴으로 망명한 작스의 시즌 많은 부분 첼란의 시와 주제를 공유한다. 다만 첼란의 시                 와 달리 구원에 대한 희망이 비교적 겉으로 드러난다. *'그래도 그이': Aber-Du. 대화 상대자인 '너(du)'와 구별되도록 앞 철자를 대문자로 써서 만들어 낸 새로운 주체                 '그이(Du)'에 부정어를 붙였다.가리키기 어려운, 부정하면서도 다시 긍정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신(神)                  을 암시한다.   저 많은 성좌들, 우리 앞에 내밀어져 있는 나는, 언제였던가? 너를 보았을 때 저 바깥 또 다른 세계들 곁에 있었다.   은하계의, 오, 이 길들. 우리들에게로 우리들 이름의 짐 안으로 밤들을 흔들어 보내오는 이 시각, 나 이제 알겠네, 우리가 살았다는 건 틀린 말, 숨결 하나가 '저기'와 '거기 없음'과 '이따금씩' 사이를 눈 먼 채 지나갔을 뿐. 혜성처럼 눈 하나가 불 꺼져 버린 것을 향하여 휘익 날았을 뿐, 골짜기들 속에서, 거기, 그 작열이 스러진 곳 유두(乳頭)처럼 화사하게 시간이 멈추어 있다. 거기서 이미 위로, 아래로 그 너머로 자랐다. 있는 것, 있었던 것, 있을 것이- 나 알겠네. 내가 알고 당신이 알고, 우리가 알았네, 알지 못했네, 우리는 있었지만, 거기에는 없었지. 그리고 이따금씩 오직 무(無)가 우리 사이에 서 있을 때라야 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마주하였지.     당신의 저 건너에 있음, 오늘 밤. 말(言)로써 내 당신을 다시 데려왔다, 여기 당신이 있다 모든 것이 진실하고 진실에의 한 가닥 기다림도 진실하다.   우리 창(窓) 앞을 콩 넝쿨이 기어오른다. 생각하라 누가 우리 곁에서 자라며 그것을 바라보는가를.   신(神)은, 우리는 그리 읽었다, 하나의 조각이며 또 하나의, 흩어진 조각이라고 모든 베어진 이들의 죽음 가운데서 그이는 자신에게로 자라 간다.   그곳으로 시선이 우리를 이끌어 간다. 그 반쪽과 우리는 오가며 지내는 것.     양손에, 여기 별들이 내게로 자라 오는 곳, 멀리 모든 하늘에, 가까이 모든 하늘에. 저기 저 깸! 저기 우리들 한가운데를 뚫고 열려 오는 저 세계!   네가 있다 네 눈이 있는 곳에, 너는 있다 저 위에, 있다 저 아래, 나는 밖으로 찾아 가노니.   이 떠도는, 텅 빈 환대하는 중심. 갈라진 채 나는 네게로 떨어져 가고, 너는 네게로 떨어져 온다, 서로 떨어져 나가며, 우리는 꿰뚫어 본다.   같은 것이 우리를 잃었다, 그 같은 것이 우리를 잊었다, 그 같은 것이 우리를-   열두 해 / 파울 첼란   진정 남은 것, 진정 이루어진 행(行)은 ---파리의 네 집 - 네 두 손의 봉헌소.   세 번 속속들이 심호흡, 세 번 속속들이 밝히기.   ----------------   말을 잃는다, 귀가 먼다 눈 뒤에서, 독(毒)이 꽃피는 모습이 보인다 온갖 말과 모습으로.   오라, 가라 사랑이 그 이름을 지운다. 사랑이 스스로를 그대에게 양도한다.   모든 생각을 지니고 나는 세계 밖으로 나섰다. 거기 당신이 있었다 당신 나의 나직한 여인, 당신 나의 열린 여인, 하여 - 당신은 우리를 받아들인다.   누가 말하는가, 눈빛이 꺼졌으니 우리의 모든 것이 죽었다고? 모든 것이 깨어났다, 모든 것이 일어났다.   커다랗게 태양 하나 헤엄쳐 왔다, 환하게 그 태양을 영혼과 영혼이 마주 섰다, 분명하게 명령조의 침묵으로 그들은 태양에게 자신들의 궤도를 가리키고.   가볍게 당신의 품이 열렸다, 고요히 숨결 하나가 에테르 속으로 솟아올랐다 하여 구름이 된 것, 그건 우리에게서 떠난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거의 이름 같은 것 아니었을까?   말 잃은 가을 냄새들, 이 별꽃은 꺽이지 않은 채, 걸어갔다 고향과 심연 사이로 네 기억을 지나.   낯선 상실 하나 모습 갖춰 거기 있었다. 네가 어쩌면 살았던 것이리.     정월, 튀빙엔 / 파울 첼란   멀도록 설득당한 눈들. 그 눈의 - "순수 발원(發源)은 수수께끼" - 그 눈의 갈매기 떼 에워싼 물 위에 뜬 휠덜린 탑의 회상.   익사한 목수들을 찾아오곤 하는 손님들. 이 물에 잠기는 말들에게로   왔으면, 한 사람이 왔으면 한 사람이 왔으면, 오늘, 족장의 빛수염을 달고, 그는 정녕, 그가 시대를 이야기한다면,   정녕 다만 웅얼거리고 또 웅얼거리리 언제, 언제, 언제까지고.   ("랄락쉬, 팔락쉬")   *정월, 튀빙엔: 생의 후반기를 광증 속에서 보낸 천재 시인 프리드리히 휠덜린이 한 목수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았던 튀빙엔 네가 강가의 집 '휠덜린의 탑'을 배경으로 한 시. "랄락쉬"는                      실성한 휠덜린이 자주 했다는 뜻 없는 말로 때로는 '예'를 때로는 '아니오'를 가리켰다고                      한다. 첫 연의 "순수/발원은 수수께끼'도 휠덜린의 시 중 한 구절이다.   연금술의 소화액같이 / 파울 첼란   침묵, 숯이 된 두 손 안에서 금(金)처럼 끓인,   커다란, 잿빛, 모든 잃어버린 것처럼 가까운 누이의 모습.   그 모든 이름, 그 모든 함께 불살라진 이름들. 그만큼 축복받아야 할 재(灰).그만큼 얻어진 땅 가벼운, 저렇듯 가벼운 영혼들 - 동아리들 너머.   큰 모습, 잿빛 모습, 앙금 남기지 않은 모습.   그때의 너. 창백한 깨물어 쪼갠 꽃봉오리를 지닌 너. 넘치는 포도주 속의 너.   (이 시계는 우리도 내보냈어, 안 그래? 그래, 그래, 네 말(語)은 여기를 스쳐 죽어 갔어.)   침묵, 금처럼 끓인 석탄이 된, 석탄이 된 손 안의. 손가락, 연기처럼 가느다란, 왕관처럼, 공기왕관처럼 씌워져 - 큰 모습, 잿빛 모습, 발자국 흔적 없는 모습 왕 같은 모습,   몇몇의 손 같은 것, 어둡게, 풀과 함께 왔다.   얼른 - 절망들이여, 너희 도공들이여! - 얼른 시간은 진흙을 내주었고, 얼른 눈물을 얻었다 -   다시 한 번, 푸르스름한 둥근 화서(花序)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이 '오늘'이.     검은땅, 검은 땅 너, 시간의 어머니 절망.   내 손에서 그 상처에서 또 태어난 것 하나가 네 목구멍을 닫는다.   사기꾼과 건달의 노래, 사다고라 변두리 체르노비츠 출신의 파울 첼란이 퐁투아즈 변두리 파리에서 부름                                                "어두운 시대에, 이따금씩만"                                            -하인리히 하이네, 중에서 그때 아직 교수목이 있던 시절, 그때는 정말이지 '위(上)'라는 게 있었지.   어디에 나의 수염은 있는가, 바람아, 어디에 나의 유대인 얼룩이 있는가, 어디에 네가 쥐어뜯는 나의 수염이 있는가?   꼬불꼬불했지, 내가 온 길은 꼬불꼬불했지, 그래, 그래, 그건 그 길이 똑발랐기 때문.   자장자장 꼬불꼬불, 구부러지는 것은 내코, 코,   우리는 프리아울로 갔지 거기서 말이야, 거기서 말이야. 만델바움이 꽃피고 있었거든. 만델바움, 반델마움, 만델트라움, 탄델마움 그리고 또 만한텔바움까지. 샨델바움.   아장아장. 아움.   앙부아   그런데 그런데 그가 뻗대고 일어섰다네, 그 나무가. 나무가 나무까지도 맞섰다네 흑사병에     *퐁투아즈 변두리 파리: 프랑스의 시인 프랑수아 비용의 사행시에서 인용한 구절로, "사다고라 변두리 체르노비츠"는 원래 구절을 뒤집어 쓴 표현이다.                 첼란의 고향 체르노비츠는 부코비나의 수도이며, 사다고라는 그 근교의 작은 도시로 하시딤 사상의 중심지였다. *유대인 얼룩: 독일은 1530년 제국경찰령을 내려 유대인들에게 노란 반지를 끼게 했다. 나치 시대가 되어 유대인 표지는 황색 별로 바뀌었다. *구부러지는 것은 내 코: '구부러진 코'는 '만델형 눈'. '수염'과 더불어 유대인 특유의 외모를 묘사하는 단어이다. *산델바움: '만델바움(Mandelbaum)'에서 자음 'm'과 'b'의 자리를 바꿔 '반델마움(Bandelmaum)'이라는 단어를 만든 언어유희는 무의미를 거쳐 의                 미를 만들어 내는데, 그 중간에 '만델트라움(Mandeltraum)', 즉 만델나무의 꿈' 같은 의미 있는 어휘가 섞인다. 언어유희 끝에 나오는 '마                 한텔바움(Machandelbaum)'은 계모가 의붓아들을 죽여 아버지 식탁에 올리고 뼈를 그 나무 밑에 묻었는데 새가 되어 날아갔다는 동명의                 그림 동화에 나오는 나무이다. '샨델바움'에서는 샹들리에라는 단어에서처럼 '빛'을 읽을 수 있어 '빛나무'로 번역할 수도 있다. 불구화로 치닫는                 언어유희를 통하여 오히려 놀라운 전환에 이르고 있다. *아움: '나무(Baum)'에서 첫 자음 'B'를 생략했다. *앙부아: Envoi. 프랑스어로 '-에게 부침'의 뜻. 발라드의 마지막 절에 헌정의 의미로 쓰며 시 제목과 더불어 프랑수아 비용이 즐겨 썼던 음율 형식이다 *그가 뻗대고 일어섰다네: Er baumt sich der Baum. 앞서 이루어진 '나무'를 통한 언어유희의 귀착점을 잘 보여 준다. 마치 말이 뒷발로만 서 있는 듯한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강한 이미지를 담은 동사 '뻗대고일어서다(sich baumen)'의 어근이 '나무(Baum)'에서 나왔기 때문이   *흑사병: 카뮈의 소설 가 상징하는 '나치즘'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누구의 뺨 / 파울체란   그 누구의 뺨을 부비랴, 너의 뺨이 아니면, 삶이여, 몽당손으로 찾은 너의 뺨이 아니면.   너희 손가락들, 멀리, 도중에 교차로들에, 이따금은 풀려난 팔다리의 휴식, '언젠가'의 먼지방석 위에.   나무로 변한 마음의 저장물들 - 그 속에서 타는 사랑의, 빛의 노예.   절반 거짓의 작은 불꽃 하나 아직 너희가 건드리는 이, 저 밤 지샌 땀구멍 속에.   저 위 열쇠 소리, 너의 위의 숨결 나무. 너희를 바라본 마지막 말 지금 제자리에 있어야, 머물러야 한다.   -----------   네 뺨을 부비며 몽당손으로 찾은 삶이여.     환한 돌들이 공중을 지나간다, 환히- 아는 것들, 빛 가져오는 것들.   그것들은 내려오려고도, 떨어지려고도 맞히려고도 하질 않는다, 올라 간다 조그만 해당화처럼, 그렇게 열린다 둥둥 떠 간다 그대에게로, 그대 나직한 여인 내 진정한 여인-   나 그대를 본다,그대 그것들을 꺾는다 내 새로운, 내 누구나의 손으로, 그대 그것들을 넣는다 '다시 한 번 밝음' 안에다, 아무도 올 필요도 일컬을 필요도 없는 밝음 안에다.     바깥으로 왕관 씌워져 / 파울체란   어둠 속으로 뱉어 내져서.   무슨 별들 곁에서인가! 온통 잿빛 낀 마음망치은(銀). 그리고 베레니케의 머릿단, 여기에도- 내가 땋았다, 내가 풀었다. 내가 땋았다, 풀었다. 내가 땋았다.   푸른 계곡, 네 안으로 나는 금을 박아 넣는다, 또한 그와 함께, 창녀들 작부들 곁에서 허비한 사람과 함께 나는 온다 나는 온다, 너에게로, 사랑이여.   또한 저주와 기도와 더불어.또한 누구와도 함께 내 너머로 휙휙 휘둘린 곤봉들,그것들도 하나로 녹아서, 그들도 남근으로 묶여 너에게로 다발-이며-말. 이름과 더불어, 모든 망명지에 적셨던 이름, 이름과 싸앗과 더불어, 이름과 더불어,모든 잔에 잠겼던 이름,너의 왕의 피로 가득 찼던 잔, 인간이여,-모든 커다란 게토-장미의 잔들에,거기서 당신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 죽은 죽음들의 그 많은 아침길들로 불멸인 당신이.   (그리고 우리는 바르쇼비앙카를 불렀다. 갈대가 되어 버린 입술로, 페트라르카여. 툰드라의 귀들에 대고, 페트라르카여.)   그리하여 이제 땅 하나 솟는다, 우리의 땅, 이 땅,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들 중 그 누구도 내려보내지 않겠다 네게로는, 바벨아.   *베레니케의 머릿단: 이집트의 왕비 베리니케 2세의 이름을 딴 별자리. 메레니케는 남편 프롤레마이오스 왕이 3차 시리아전에서 승전하고                             돌아오기를 빌며 신들에게 자신의 머리채를 바쳤다고 한다. *게토: 유대인 거주 지역. *바르쇼비앙카: 폴란드 혁명의 노래 *페트리르카: 토스카나 출신의 시인 페트리르카는 아비뇽에 망명해서 살았다.     어디로 내게서 말은, 불멸이었던 말은 떨어져 갔는가 / 파울체란   아마 뒤 하늘골짜기 속으로, 그곳으로, 침과 쓰레기에 이끌려,간다 나와 함게 사는 일곱 별은.   어둠의 집 안에 운율, 오물 속의 호흡, 눈, 이미지들의 노예- 그리고 그럼에도, 꼿꼿한 침묵 하나, 돌 하나 악마의 사닥다리를 비껴간다.   오두막 창문 / 파울 첼란   어두운, 눈, 오두막 창문인. 모여든다 세계였고 세계로 남은 것, 떠도는 동쪽, 떠도는 사람들, 인간이며, 유대인인 이들, 구름 백성, 자력(磁力)으로 그들을 끌어당긴다, 마음의 손가락으로 내게로, 대지여, 너는 온다, 너는 온다 우리가 거처하리, 거처하리, 무엇인가가   -한 가닥 숨결인가? 하나의 이름인가?-   고아가 된 것 가운데서 헤맨다. 춤추듯, 곤봉 모양*으로, 천사의 날개들, 보이지 않는 것으로 무거워져, 상처로 껍질 벗겨진 발, 머리   무겁게 그곳, 비텝스크*에도 떨어졌던 검은 우박으로 균형 잡혀   -그리고 그를 씨 뿌린 이들, 그들 그들이 그를 써서 버린다 미믹의 장갑주먹손아귀로!-   간다, 헤맨다. 찾는다 아래서 찾는다 위에서 찾는다, 멀리서, 찾는다 눈으로, 가져온다 켄타우르스 알파*를 아래로, 아르크투어를, 가려 온다 빛을 덧붙여서, 무덤으로부터   게토와 에덴으로 간다, 성좌를 꺾어 모은다, 그가, 인간이 터 잡아 살자면 필요로 하는 것, 여기에서 인간들 가운데서   성큼성큼 자모를 걸음으로 재어 본다 자모들의 필멸의- 불멸의 영혼을 알레프와 유트에게로 간다, 내쳐 간다   그것을, 다윗의 방패를 세운다, 그것을 불타오르게 한다, 한 번   그것을 꺼지게 한다-거기 그가 서 있다. 보이지 않게, 서 있다 알파*와 알레프, 유트* 곁에 다른 사람들 곁에, 모두 곁에, 그대 안에   베트 - 그건 집, 거기 식탁이 있다   빛과 또 빛과 함께   *곤봉 모양: klobig '이삭 모양'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비텝스크: 러시아의 도시 이름 유대인 마을이 있다. *펜타우르스 알파, 아르크투어: 북동쪽 하늘의 별들. *알파: 그리스 문자의 첫째 글자이다. *알레프, 베트, 유트: 각각 히브리 문자의 첫째, 둘째, 열째 글자이다. 발음할 수 없는 신의 이름이 유트로 시작된다.   얼음, 에덴 / 파울 첼란   '잃어버림'이라는 땅 하나 있다. 거기선 갈대 속에서 달(月)이 자란다 그 땅 우리와 함께 얼어붙어 사방에서 작열하며 바라본다.   그것이 본다. 문(眼)이 있기에, 환한 땅들인 눈. 밤, 밤, 잿물. 그것은 본다, 눈의 자식.   그것이 본다, 그것이 본다, 우리가 본다, 내가 너를 본다, 네가 본다. 얼음이 불활한다 시각이 닫히기 전에.   그대 나를 / 파울체란   그대 나를 안심하고 눈(雪)으로 대접해도 좋다. 내가 어깨에 어깨를 걸고 뽕나무*와 여름을 지날 때마다 그 갓 돋은 잎이 소리 질렀거든.   *뽕나무: 뜯어도 자꾸 돋아나는 잎 때문에 강한 생명력을 상징한다.    꿈꾸지 못한 것에 /파울 체란   꿈꾸지 못한 것에 부식되어 잠 못 이루고 헤맨 빵 나라가 삶의 산을 쌓아 올린다.   그 부스러기로 당신은 우리의 이름을 새로 반죽하고 그 이름들을 내가, 당신 눈과 닮은 외눈을 손가락 끝마다 달고 닳도록 더듬는다, 깨어나며 당신에게로 다가갈 수 있는 한 자리를 찾아 환한 입속의 굶주림촛불*.   *굶주림 촛불: Hungerkerze 체란의 조어로, 의미의 연결 방식을 짐작할 수              있는 유사 단어로는 굶주림샘(Hungerquelle 어쩌다 비가 오면              물이 나오는 샘), 굶주림천(Hungertuch 금식 기간 동안 성가대              석에 걸거나 계단을 덮는, 대개 그리스도의 수난 장면이 그려진 천)              굶주림존재(Hungerdasein 몹시 고생스러운 삶) 등이 있다.     그 고랑에다 파울체란   문틈에 낀 하늘 동전의 팬 고랑에다 당신이 말을 눌러 넣고 있다 그 말에서 나, 굴러 나왔지. 떨리는 두 주먹으로 우리 머리 위 지붕을 기왓장 한 장 한 장, 음절 한 개 한 개 헐어 내다가 저 높은 곳 동냥 접시의 희미한 구리 빛을 위하여.   강물들에서  / 파울체란    강물들에서 미래 북녘 내가 그물을 던진다. 그 그물을 당신이 머뭇거리며 눌러 준다 돌들이 써 놓은 그림자로.     그림자 - 부스러기 속의 길들 / 파울체란, 네 손의   네(四) 손가락 이랑에서 나는 헤집어 낸다 돌이 된 축복을.     땅 쪽으로 노래 불린 돛대를 세우고 하늘 난파선이 간다.   이 목질(木質)의 노래 이로 깨물다 네가 굳어졌구나   너는 노래가 스미지 못하는 속눈썹.   실낱태양들 /파울체란   실낱태양들 흑회색 황량함 위에 내린. 나무 높이의 사념 하나 빛소리를 잡으로 손을 뻗으니, 아직 부를 노래들이 있어라, 인간의 피안에.   실낱태양들: 이 시는 잿빛 하늘에서 빛줄기들이 내리 비치는 가운데 한 그루 나무가                우뚝 선, 간결하고 장엄한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때                "나무/높이의 사념 하나"를 '고매한 사상'의 시적 형상화로 읽으면, 현실                에만 매몰된 시에 대한 풍자로 볼 수 있다. 이 시가 쓰였던 때는 거대 정                당이 서로 연합한 소위 대연정의 시기로, 그 복고적 기류가 사회 비판적                지식인들과 학생들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오던 때였다. (이에 비롯한 저                항적 기류는 '68혁명'으로 이어졌다.) 특히 첼란이 매우 비판적 세계관을                가지게 된 시점에서 쓴 시임을 감안한다면, 이 시를 이렇게 번역할 수 있                다. "실낱태양들 / 흑회색 황량함 위에 내린 / 나무만큼 /고매한 사상 하                나 / 빛소리를 잡으려 손을 뻗으니, 아직 / 부를 노래들이 있어라 / 피안에"                (전영애)     나 당신을 알아, / 파울체란   그대 깊숙이 몸 굽힌 여인. 나, 온통 꿰뚫린 자, 나는 그대 휘하에. 우리 둘을 위하여 증언해 줄 한마디 말씀은 어디서 불타고 있는가? 그대 - 온전히, 온전히 현실이고, 나 - 온전한 광기(狂氣)   당신: 첼란이 파리로 이주한 뒤에 만나 결혼한 판화가 지젤 레스트랑주를 가리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부부는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레스트랑주의 작품들은 첼란의 후기 시들과 이미지가 매          우 유사하다.     조약돌이 된 말씀, / 파울체란   주먹 안에서 당신은 잊는다, 당신이 잊는다는 것을   손목 관절에서 번쩍이며 문장 부호가 사격을 시작한다   빗살이 되어 버린 갈라진 땅을 지나 휴지(休止)가 말달려 온다   거기, 희생의 다년생 초목 곁, 기억이 타오르는 곳에서 한 분이 너희를 위해 주워 거두고 있다 입김을.     결 드러나도록 닦아 냈다 / 파울체란   당신 언어의 빛바람으로. 자신의 체험인 양 여기는 것의 현란한 다변(多辨) - 백 개의 혀를 가진 내 시(詩), 아무것도 아닌 것.   회오리쳐 - 나가고 드러나는 길, 사람의 모습을 한 눈(雪), 고해자의 눈을 지나 손님을 환대하는 만년설 방과 만년설 식탁들에 닿는 길.   시간의 균열 깊이 벌집 얼음 곁에서 기다리고 있다, 숨결의 수정(水晶) 하나, 폐기할 수 없는 당신의 증언(證言).     밝음에의 허기 – 허기져 / 파울체란   나는 빵 계단을 나섰다 맹인들의 종(鐘) 아래로.   그 종, 물처럼 맑은 종, 젖혀지다 함께 오른 것, 함께 너무 많이 올라 버린 자유, 그 자유를 하늘 하나가 포식했다 그 하늘을 내가 궁륭의 형상대로 두었다 단어가 헤엄쳐 간 심상(心象)의 궤도, 피의 궤도 위로.     쓰인 것, 파이고 있고 말해진 것, 바다초록빛, 만(灣)안에서 불타고 있고   액화(液化)된 이름 속에서 쥐돌고래가 튀어 오르고   영원화(永遠化)한 '그 어디에도 없는 곳'에, 여기에, 너무나 요란했던 종소리의 기억 속에 - 대체 어디에?   누가 이 그림자 사방터 안에서 헐떡이는가, 누가 그 아래서, 희미하게 밝아오는가, 밝아 오는가, 밝아 오는가?     '그 어디에도 없는 곳': 시어의 작위적 품사 전환이 눈길을 끈다. '영원히'라는 부사를 무리하게 동사화하여                           과거분사형으로 썼으며, 부사인 '그 어디에도 ~없이'는 명사화했다. 사방터: '죽은자' 라는 의미가 있는 '그림자'와 철학자 하이데거의 개념으로 삶의 터를 나타내는 '사방터'를            합성한 시어.     한 가닥 우렁찬 뇌성 / 파울 체란   진실 그것이 인간들 가운데로 들어서고 있다. 은유의 회오리 한가운데로.    깨물린 자국 외 / 파울 첼란   깨물린 자국, 어디에도 없는 곳에.   그 자국도 너는 없애야 한다 여기서부터     온스 진실, 광증 깊은 곳에, 그 곁을 스쳐서 저울 접시들이 굴러 온다 두 접시가 동시에, 대화 속에서   투쟁하며, 마음- 높이로 버텨 놓은 법(法), 아들아, 그것이 승리한다.     짐부스러기, 쐐기, 어디에도 없는 곳에 박혀 우리는 계속 우리와 비슷하다 빙 돌아 방향 잡힌 둥근 별이 우리에게 동의한다.     진실, 드러나 버린 꿈의 잔해에 밧줄로 몸 동이고, 어린아이 되어 능선을 넘는다.   지팡이, 흙덩이 자갈 눈(眼)씨앗에 어지럽게 에워싸여 골짜기 속 저 높은 곳에서 꽃피우는 '아니요'를- 화관(花冠)을 뒤적여 본다.     너는 나의 죽음이었다 너는 내가 붙들고 있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떨어져 나가는 동안에도.    듣고 남은 것들, 보고 남은 것들 외 / 파울 첼란   듣고 남은 것들, 보고 남은 것들 침실 1001호에,   밤낮으로 곰들의 폴카.   그들이 너를 재교육한다   너는 다시 된다 그가.     언젠가, 죽음이 대성황을 이루었다 당신이 내 안에 몸을 숨겼다.     토트나우베르크   아르니카 꽃,  눈길의 위안, 그 위에 별 모양 목각이 달린 우물 물을 마심,   오두막 안에서   책에 - 누구의 이름이 그 책에 적혔는가 내 이름에 앞서? - 책에 적어 넣은, 그 한 줄, 희망을, 오늘, 생각하는 한 사람의 마음속으로 오고 있는 말 에의 희망을 담고. 고르게 만들지 않은 숲 속 습지, 오르히스 꽃 또 오르히스 꽃, 흩어져 하나씩,   잔인한 것, 나중에, 달리며, 선명해지고   우리를 타고 가는 것, 그것에 함께 귀 기울리는 인간,   절반 밟은 고습지 속 곤봉 오솔길,   젖은 것, 많이.   토크나우베르크: 철학자 하이데거의 산장이 있는 곳이다. 1967년 여름 하이데거는 첼란을 자신이 재직하고 있는                    프라이부르크 대학으로 초청하여 낭독회를 열었다. 성황을 이룬 낭독회에서 첼란의 시를 경청한 하                    이데거는 그를 개인적으로 산장에 초청하였다. 첼란의 착잡한 심경이 읽어 내기 어려울 정도로                    압축되어  있는 시이다. 아르니카 꽃: 노란 꽃이 피는 국화과 여러해살이풀로, 이 꽃에서 낸 즙으로 상처를 치료한다. 눈길의 위안: Augentrost. '좁쌀풀'과 '눈요기'라는 뜻이 모두 있다. 아르니카  꽃에 대한 부연 설명이면서 동시에 그                  주변의 다른 풀들을 가리킨다. 우물: 하이데거의 오두막에서 내다보이는 우물을 가리킨다. 이 우물에 달린 단순한 별 모양 목각 장식은 유대인의 표지        인 황색 별을 연상시킨다. 책에 적어 넣은, 그 한 줄 희망을: 이 날 첼란은 방명록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물 별이 내다보이는 오두막의 책 에 마음속으로 오고 있는 한마디 말을 희망하며,                                          1967. 7. 25. 파울 첼란" 오르히스 꽃: 음경 모양의 꽃이 피는 난초과 풀로, '총각풀'이라고도 불리며 '음경'이라는 뜻도 있다. 7연의 '곤봉'과도 연상의               고리를 이룬다. 첼란은 청소년기부터 식물에 대하여 남달리 해박했다. 잔인한 것: 하이데거와 나눈 대화를 가리키는 듯하다. 위대한 철학자이지만 나치 경력이 문제 된 하이데거와 나               치의 대표적 피해자인 시인 첼란의 만남이었던 만큼, 추측이 무성하다. 고습지: 늪지 혹은 고습지는 곤봉이라는 단어와 연결되어, 흔히 늪에서 몰아넣은 방식으로 자행되던 유대인 처형을 연상           시킨다.   거기 내가 당신 안에서 나를 잊어버린 곳에서 당신은 생각이 되었지.   무언가가 우리 둘을 뚫고 솰솰 흐르고 있다. 마지막  날개들의 첫 번째 세상   풍상에 젖은 내 입 너머 가죽이 덧자란다   당신은 오지 않는다 당신 에게로.   두드려 그 빛쐐기를 떨어라.   물 위를 떠다니는 말은 어스름의 것.   ] 눈(雪)의 파트 / 파울 첼란   보랏빛 공기, 노란 불빛 점 점 창문들이 있는   무너진 안할트 역사(驛舍) 위에 떠 있는 성좌, 야곱의 띠   요술 수업 시간이네, 아직은 아무것도 끼어드는 것 없네   선술집 에서 눈(雪)술집까지.   무너진 안할트 역사: 앞 시와 같이 1967년 12월 첼란이 베를린에 갔을 때 쓰였다. 베를린 장벽                          가까이 있던 번화가 베를린의 안할트 역 부근은 전쟁 중 폭격으로 당시 거의                          폐허가 되어 있었다. 첼란은 유대인에게 대규모 폭력이 가해졌던 소위 '수정의                          밤' 다음 날인 1938년 11월 10일 아침, 이 역에 도착하여 범죄의 현장을 보았                          다. 야곱의 띠: 오리온자리의 세 별을 이은 직선을 가리킨다.     당신은 누워 있구나 커다란 은신처에서 덤불에 에워싸여, 눈송이에 에워싸여.   슈프레 강으로 가라, 하펠 강으로 가라, 가라, 푸주한의 갈고리로 스웨덴 산 빨간 크리스마스 장식 사과에로-   선물들이 놓인 식탁이 온다 그것이 어느 에덴을 돌아간다-   남자는 구멍 숭숭한 시체가 되었고, 여자는 둥둥 떠다녀야 했다, 그 계집, 혼자서,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게, 누구나를 위해서-   국방 운하에 여울 물소리 없겠구나 아무런 막힘이 없구나.     당신은 누워 있구나: 첼란은 1967년 베를린을 방문했는데, 이 시는 크리스마스 무렵 임시 장터가 늘어선 베를린의 슈프레 강가                         를 배경으로 했다. 이 시에 대해서는 해석학자 스촌디가 상세하게 해설한 바 있는데, 그에 따르면 시의                         남성 화자는 칼 립크네히트, 여성 화자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상징한다. 총살당한 둘의 시체가 국경 수비 운                         하에 던져졌던 역사적 사실(1919)을 회상시킨다. "푸주한의 갈고리"는 베를린 플뢰첸제 처형장의 갈                         고리를 가리키며, "어느 에덴"은 '에덴동산'이 아니라 이들 두 사람이 사살되기 전 억류되었던 호텔 이름이다.                         또한 "계집(Sau)"는  '암퇘지'라는 뜻으로 당시 가해자들이 로자 룩셈부르크를 가리켜 썼던 욕설이다. 크리스마스 장식 사과: 성탄절 무렵 보통 현관문에다 거는 조그만 초록 화환으로, 여기서는 이 평화로운 장식물이 '푸주한 의 갈고리'                            와 운을 맞추어 낯선 이미지를 환기시킨다. 국방 운하에 (중략) 아무런 막힘이 없구나: 국방 운하는 베를린 시내에 있었다. 이 얕고 작은 운하에 시체를 던졌을 때 물소리가                                                      나지 않고 아무것도 막히지 않는다는 것은, 그 안에 던져진 시체가 무수한 관통상을                                                      입어 체처럼 구멍이 나 있는 탓이다. 무심히 흘러가는 역사의 시간도 함께 읽을 수                                                      있다. 그런데도 언어적으로는, "아무런 막힘이 없"을 것이라는 구절이 막힘 없이 이                                                      어지지 못하고 끊겨 있다.   읽을 수 없음, 이 세계의 모든 게 두 겹.   강한 시계들이 쪼개진 시간에 따라 준다, 목쉬어서.   당신은, 당신의 가장 깊은 곳 안으로 옥죄어 들어, 스스로를 벗어난다 영원히.     눈(雪)파트, 마지막까지 거역하며 솟구쳐, 상승 기류 속에, 영영 창문을 막아 버린 오두막들 앞에.   얕은 꿈들이 씽 물수제비를 뜬다 골 진 얼음 너머로.   말(言)그림자들이 치고 나온다, 팔 펴서 재 본다 은 사방 꺾쇠들을 강둑 밑 팬 어느 곳에서.   파트: 합찬대의 한 '성부', 연극에서의 '역할'과 가장 가까운 뜻이다.     이파리 하나, 나무도 없이,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위하여.   이 무슨 시대란 말인가 대화가 거의 범죄이니 그 많은, 이미 말해진 것을 포함하기에.   이 무슨 시대란 말인가 (중략) 포함하기에: 브레히트의 시 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 '이 무슨 시대란 말인가/나무에 대한 대화가                                                     거의 범죄이니/대화가 그 많은 범죄에 대한 침묵을 포함하는 까닭에"를 변형했다. 나치 시대                                                     의 정치 비판적 시구가 회의으로 전환되며 극단적인 언어로 축약되었다.     영원(永遠)이    머물러 있다, 한계 안에 가벼이, 그 강력한 축량흡입관 안에 신중히, 돌고 있다, 손 톱으로 속속들이 빛날 수 있는 혈당(血糖) 완두콩.   측량흡입관: 의미를 짐작하기 어려운 조어이다. 흡입관(Tenakel)은 하등동물이 먹이를 먹을 때 쓰는 관 모양의 기관을 뜻한다.     더듬더듬 따라 말할 세상   나, 그의 손님 이었으리, 이름 하나였으리, 상처가 높이 핥아 올라간 장벽에서 식은땀으로 흘러내린 이름.   더듬더듬 따라 말할 세상: 1968년 11월 23일. 죽기 두 해 전 생일에 쓴 시로 생의 결산처럼 읽힌다.   시간의 뜨락 / 파울 첼란    나팔자리 이글거리는 빈 텍스트 깊숙이 햇불 높이로 시간 구멍 속에.   너의 말을 들르라 입으로.     양극(極)이 우리 안에 있다 깨어서는 넘어갈 수 없이. 잠자며 우리는 건너간다, 문 앞으로 긍휼의 문 앞으로.   당신에 부딪쳐 당신을 잃는다, 그게 내가 준 눈(雪) 위로.   말하라, 예루살렘이 있다고   말하라, 마치 내가 이것 당신의 백색(白色)이라는 듯 마치 당신이 내 것이기라도 한 듯.   마치 우리가 우리 없이 우리이기라도 한 듯   내가 당신을 넘긴다, 영원히   당신이 기도한다, 당신이 놓는다 우리를 풀어놓는다.     있으라, 무언가가, 나중에 당신으로 채워져 솟구쳐 어느 입가에 이르는 것.   사금파리로 부서진 광기(狂氣)로부터 나는 일어나 내 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 손, 단 하나의 동그라미를 자꾸 그리고 있는 모습.     크로커스, 손님 식탁에서 바라보노라니 기호를 감지하는 작은 망명지로구나 공유한 진실 하나의 망명지, 넌 뭐든 꽃줄기가 필요하구나.     너를 써넣지 마라   세계들 사이로는,   일어나라 의미들의 다양(多樣)에 맞서,   눈물 자국을 믿으라 삶을 배우라.     시(詩) 닫고, 시(詩) 열고   여기서 빛깔들은 보호받아 본 적 없는 맨이마 유대인에게로 간다. 여기 떠오르고 있다 가장 무거운 사람이. 여기 내가 있다.     (파울 첼란 시선 전영애 번역 끝)   첼란의 시는 침묵을 통해 극도의 경악을 말하고자 한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어떠한 서정시도 쓰일 수 없다는 말은 잘못이었다. — 테오도어 아도르노   음지를 얘기하는 사람은 진실을 말하는 자이다. — 파울 첼란   그가 유대인이고, 그의 언어가 독일어라 할지라도, 시인이 시 쓰기를 포기하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 존 펠스티너   2차 세계대전과 아우슈비츠라는 참혹한 비극을 감당해야 했던 유대인으로서, 그 고통을 아름답고 밀도 높은 시어로 표현해 낸 20세기 독일의 대표 시인 파울 첼란의 시선집 『죽음의 푸가』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시선집은 1986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첼란의 시에 관한 이론서를 펴낸 전영애 교수가 30여 년 전 독일에서 번역해 놓은 시들을 2001년부터 10년 동안 틈틈이 다듬어 내놓는 것이다. 전후 독일 문단에서는 아우슈비츠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서정시 자체를 쓸 수 없다는 의식이 만연해 있었다. 유대인 학살을 자행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과 함께 인간에게 친숙했던 세계가 무너져 버렸는데 어떻게 인간이 다시 이 세상에 대해 시적으로 노래할 마음을 가질 수 있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문제와 문학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고 보았던 첼란은 자신이 겪은 참혹한 시대를 극도로 상징적이고도 초현실적인 시어로 그려 내며 아우슈비츠를 바탕으로 한 서정시를 쓰는 데 성공한다. 첼란은 전후 독일 문단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시인으로 평가받으며 1958년 브레멘 문학상, 1960년 뷔히너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번 시선집에는 첼란의 시집 아홉 권 『양귀비와 기억』(1952), 『문턱에서 문턱으로』(1955), 『언어창살』(1959), 『그 누구도 아닌 이의 장미』(1963), 『숨결돌림』(1967), 『실낱태양들』(1968), 『빛의 강박』(1970)과 유고 시집 『눈[雪]파트』(1971), 『시간의 뜨락』(1976)에서 추린 시 118편과 그의 시론을 엿볼 수 있는, 브레멘 문학상 수상 연설문과 뷔히너 문학상 수상 연설문, 유일하게 남긴 산문인 「산속의 대화」가 실려 있다. 특히 산문 「산속의 대화」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소개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발간된 첼란 시집 중 가장 많은 작품을 수록하였으며, 첼란의 시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시선 내에서도 작품을 추려 「죽음의 푸가」를 비롯한 대표 시를 맨 앞에 실었다. 다소 난해한 첼란의 시를 우리말에 최대한 밀착시켜 옮겼으며, 유난히 함축적인 그의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주석을 충실히 달았다.     ■ 적의 언어로 시를 써야 했던 고통의 시인     그런데 견디시겠어요, 어머니, 아 언젠가, 집에서처럼, 이 나직한, 이 독일어의, 이 고통스러운 운(韻)을? —「무덤 근처」에서   첼란의 암울하고 고통스러운 시는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의 기억을 한평생 안고 살아야 했던 비극적 운명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가 처했던 가장 근원적 비극은 자신의 인생에 가혹한 상흔을 남긴 가해자의 언어로 시를 써야 한다는 데 있었다. 시인이 태어난 부코비나 지방은 이전에 합스부르크 왕령이었던 곳으로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이었다. 유대인으로 태어난 시인에게 독일어는 모국어인 동시에 자신과 부모, 친구를 죽인 ‘살인자들의 언어’였던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시는 모국어로만 쓸 수 있다고 믿었던 첼란은 결국 혈족을 죽인 자들의 언어이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언어, 끔찍한 어둠을 지닌 이 잿빛 언어를 자신의 시어로 택한다. 시인은 자신에게 가해를 입힌 이들의 언어로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봐야 하는 것은 물론 구원을 염원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아이러니에 봉착했음에도, 끝까지 시 쓰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점심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그는 그걸 쓰고는 집 밖으로 나오고 별들이 번득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사냥개들을 불러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유대인들을 불러낸다 땅에 무덤 하나를 파게 한다 그가 우리들에게 명령한다 이제 무도곡을 연주하라 —「죽음의 푸가」에서     첼란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겼던 ‘아우슈비츠’를 가장 구체적으로 그려 낸 시가 바로 그의 대표작 「죽음의 푸가」이다. 그는 이 시에서 죽음을 ‘푸가’라는 음악 형식을 빌려 유희적으로 노래하며,실재했던 끔찍한 ‘죽음’을 서정적인 ‘은유’에 담아낸다. 시인은 자신들이 판 무덤 앞에 꿇어앉아 총살당하고, 죽어 가는 동료들 앞에서 연주를 해야 했던 참혹한 유대인 포로수용소의 기억을 “검은 우유”를 마시고 “공중”과 “땅”에 무덤을 파며 “무도곡”을 연주하는 시적 상황으로 형상화한다. 시인은 이처럼 자신에게 상처 입힌 이들의 언어로 고통을 감당하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이 처한 한계를 수동적으로 견디는 것에서 나아가 적극적으로 한 차원 높은 경지를 이룩해 내는 인간의 ‘위대함’을 몸소 증명해 보인다.                ■ 비극의 시대를 향해 외친 ‘소리 없는 아우성’       첼란은 어두운 현실 속에서 자신이 경험한 극한의 고통을 직시하여 군더더기 없이 분명한 언어로 형상화시킨다. 고통의 맨살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투명한 시어들 때문에 아픔은 더욱 선명하고 생생하게 다가온다.     너희 나의 나와 더불어 불(不) 구(具)된 말들, 너희 나의 똑바른 말들. (중략) 우리 동요를 부르리, 그걸 네가 듣고 있어, 그 동요 인(人 )들과 간(間)들이 있는, 인간들이 함께 있는, 그래, 그 뒤엉킨 덤불과 눈 한 쌍이 거기 함께 눈물- 또- 눈물로 함께 있는 그 동요를.   —「…… 좔좔 샘물이 흐른다」에서   암호문처럼 은유가 집약되어 있는 그의 파격적인 시어는 후기로 넘어갈수록 ‘파괴’되고 ‘해체’되어 간다. 하지만 침묵, 생략, 비약 등으로 조각 나 “불구”가 된 말들은 실제의 부정적인 시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의미에서 오히려 “똑바른” 말이다. 이를테면 위의 시에서 ‘인’과 ‘간’으로 조각 나 있는 낱말 ‘인간’은 파시즘 시대 독일에서 인간에게 가한 일을 연상시킨다. 첼란에게 언어와 현실은 늘 불가분 관계에 놓였다. 후기에 이르러 점점 조각 나고 불안정해졌던 시어처럼 그의 의식도 점점 흐려지고 분열되어 갔으며, 그는 결국 1970년 센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만다. 인간성이 말살된 참혹한 시대를 지나며 겪은 쓰라린 고통을 침묵의 시로 표현했지만 마지막까지 구원을 얻지 못한 이 비운의 시인은, 결국 생을 마감하며 스스로 침묵이 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오로지 진실한 손만이 진실한 시를 쓴다. 나는 손도장과 시 사이에 어떠한 근본적인 차이도 없다고 본다.”(파울 첼란) 죽음의 문턱에 선 이가 남긴 이 손도장은 그 어떤 시들보다 묵직하고 진중하며 아름답다. 거기엔 극도의 고통을 견디고 살아남은 자만이 내뿜을 수 있는 강렬한 ‘생명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 고통의 시들은 지금 각자의 ‘아우슈비츠’에서 상처 받고 고통 받고 있을 고된 인생들에게 그가 헌정하는 슬픈 진혼가다.    
493    허두남 우화시 고찰 / 최룡관 댓글:  조회:2610  추천:0  2017-05-23
  허두남 우화시에 대한 고찰                                  최흔   세계적으로도 일생동안 심혈을 몰부어 우화를 연구하는 작가는 아마 많지 않을것이다. 그런데 우리 연변에 그런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일찍 이십대에 자신의 첫 우화집이자 중국조선족문단의 첫 우화집을 펴내서부터 30년동안 우화창작에 몸을 담그어온 허두남이다. 1979년  첫 우화집 “개미와 코끼리”로 우화책이 없던 우리 문단의 공백을 메꾼 허두남은 지금까지 7권의 우화책을 출판했는데 산문으로 쓴것이 2권, 시로 쓴것이 5권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니 허두남은 우화만 쓰는 작가구만!” 라고 할것이다. 실상은 그와 정반대이다. 허두남은 그 누구보다도 다양한 쟝르의 문학작품을 쓸줄 안다. 우화집 7권 외 희곡작품집 한권을 출판하였고 3형제가 함께 쓴 동화,아동소설집도  두책이 있다. 중편소설을 비롯해서 성인소설도 발표했고 서정시도 썼다. 아마 그가 창작한 동요 “나는 꿈에 울었답니다”와 희극소품 “감주”는 많은 사람들이 잘 알것이다. 허두남은 문학에서 “다재다능”하지만 주공방향이 명확하고 그 주공방향에 백분의 구십의 정력을 쏟아붓고있다. 그 주공방향이 바로 우화창작, 그 중에서도 우화시를 끈질기게 파헤치면서 새로운 창의성을 부여하고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허두남이 창작한 5권의 우화시집을 개략적으로 살펴보고저 한다. 1979년 허두남은 처녀작 작품집《개미와 코끼리》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 책은 정영석의 중편소설 “제2호순라선에서”와 더불어 문화대혁명후 제일 먼저 출판된 아동문학서적이다. 책장을 열면 집채만한 코끼리로부터 입쌀알만한 개미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동물들이 살아움직이는데 대뜸 아이들의 눈길을 자석처럼 끌어당긴다. 작품집중의 “잣새의 계획”은 국경30돐창작상을 받아안는 영예를 지녔고  소학교교과서에도 번듯이 올랐다. 작품집에 호구를 올린 우화시들은 거개 이야기가 흥미롭고 주제가 뚜렷하다. “잣새의 계획”은 조건타령을 하며 일을 미루다간 랑패볼수 있다는 도리 ,”사슴의 후회”는 작은 흠집도 제때에 고치지 않으면 큰 흠집이 될수 있다는 도리, “고양이건축기사”는 일을 첫시작부터 착실히 하지 않다간 망쳐버릴수 있다는 도리, “알깔줄 모르는 소쩍새”는 부질없는 자존심을 부려서는 배울것도 못배우게 된다는 도리를 재미있는 이야기속에다 재치있게 집어넣었다. 그밖에 우화시 “뽐내던 원숭이”, “퇴박맞은 담비”, “여우의 선물” 같은 작품들은  풍자성과 유머감이 아주 짙다. “고슴도치의 참외도적질”은 주제나 이야기성이나 풍자성, 유머감이 모두 훌륭한데 벌레를 먹고사는 고슴도치를 참외를 먹는것으로 썼기에 아쉽다. 책에는 많은 장점이 있는 반면 부족점도 적지 않다. 첫째: 산문화경향이 심한것이다. 우화시에선 산문화를 허용한다고는 하나 허용한다는 것은 좋다는 말과는 다르다. 무방하다는 뜻일것이다. 재간이 모자라면 그렇게라도 하라는 말이 된다. 이야기를 담자면 산문화를 피면하기 어려운 점도 있겠지만 너무나 산문화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이 작품집의 절대 다수의 우화시들은 시행을 붙여놓으면 산문으로 성별이 바뀐다. 둘째: 편폭이 너무 길다. 우화시라면 무조건 꼭 짧아야 한다는 도리는 없지만 어느 작품이나 다 기니 문제인것이다. 우화시 “민들레씨의 이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가을이 되지 민들레씨 결심했다/ 살기좋은 고장 찾아 이사가야겠다// 이사짐 이고 길떠난 민들레씨/ 제일 처음 동풍을 만났다/ “애, 민들레씨야/ 너 어데로 가느라고 이러느냐?/ 동풍이 묻는 말에 민들레씨의 대답/ “살기좋은 고장 찾아 이사가는길이예요.// “그럼 저 서쪽벌로 가거라/ 그곳은 땅이 기름지고 살기 좋단다”/ 동풍의 말에 민들레씨는 귀가 솔깃/ “그러세요? 그럼 그리로 가죠../ 그렇잖아도 난 지금/ 땅이 기름진 곳을 찾는 길이예요.// 민들레씨는 동풍을 따라/ 훨훨 날아가기 시작했다./ 허나 서쪽벌에 이르기전에/ 지나가는 남풍을 만났다.// “애, 민들레씨야/ 너 어델 이렇게 떠났는냐?/ 서풍의 물음에 민들레씨의 대답/ “살기좋은 고장 찾아 이사가는중이예요.”// “그럼 내 알려주는데로 가거라/ 저 북쪽강가가 정말 살기 좋아/ 믈이 맑고 경치 아름답단다./ 남풍의 말에 민들레씨 귀가 번쩍/ 그렇다면 그리로 가야겠군./ 무엇무엇해도 경치좋은 고장이 제일이지.// 민들레시는 남풍을 따라/ 훨훨 날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북쪽비탈에 닿기전에/ 이번에는 서풍을 만났다./ “아니, 너 민들레씨 아니냐?/ 그런데 어델 이렇게 가느냐?/ “살기좋은 고장 찾아 이사가고있어요.// “그렇다면 저 동산으로 가거라./ 동산은 해빛 발고 경치 좋지./ 서풍의 말에 민들레씨 귀가 쭝긋/ “그렇다면 동산으로 가죠뭐./ 해빛 밝은 고장보다 더 좋은 곳 없죠.// “민들레씨는 서풍을 따라/ 훨훨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동산에 이르기 전에/ 이번에는 북풍을 만났다.// “너 민들레씨로구나./ 이렇게 일찍 어데로 가느냐?/ “살기좋은 고장 찾아 이사간다니깐요.// “살기 좋기야 남쪽비탈이 제일이지./ 포근하고 아늑한게 정말 좋단다./ 북푸의 말에 민들레씨 귀가 커졌다./ “그러세요? 그렇다면 그리로 가죠./ 무엇무엇해도 포근한데가 전 제일 좋아요.”// 민들레씨는 북풍을 따라/ 훨훨 날아가지 시작했다./ 이렇게 주견없는 민들레씨/ 바람 따라 자꾸 날이만 다니다나니/ 결국 아무데도 이사가지 못하고/ 제 고장에 돌앙오고말았다.   보다싶이 우화시는 산문화된데다 시행이58행이나 된다. 전반 시도 길고 시행도 늘차니 좀 숨이 찬감이 난다. 주인공이 네 인물과 대화를 주고받은것을  직접담화법의 수법으로 옮겼으니 그렇게 길어질수밖에 없는것이다.. 이 작품의 제재를 아끼는 작자는 2006년 한국에서 출판한 우화시집 “사탕을 좋아하는 애”에 다음과 같이 재창작하여 실었다.    하얀 임 이고/ 이사길 떠난 민들레씨/ 동으로 갈가 서로 갈가/ 남으로 갈가 북으로 갈가// 동풍 만난 민들레씨/ 동풍이 가리키는 서쪽벌로/ 동동/ 기분좋아 동동// 서쪽벌에 닿기전/ 남풍 만난 민들레씨/ 남풍의 말 듣고/ 동동/ 북쪽비탈로 동동// 북쪽비탈로 날던 민들레씨/ 서풍에 몸 맡겨 동동/ 동산으로 날더니/ 지나가는 북풍 따라 다시 남쪽강가로 /동동// 아이고나 마침내/ 제고장에 돌아온/ 귀가 무른 민들레씨/ 주견 없는 민들레씨 58행으로부터 22행으로의 줄임이 우화시에 대한 작자의 성숙이 단적으로 돋보이는 증언이다. 하나의 제재가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예전에 썼던 작품보다 구성부터 “시적”으로 되였다. 우화시도 결국은 시기에 시적구성으로 설계하는것이 자못 중요하다. 셋째: 이 책속의 여러편의 작품은 우화가 아니라 동화로 되였다. 제목으로 단 “개미와 코끼리”부터 동화이다. 그외 “꿀벌과 나비” “금과 황동” “깨달은 흰토끼” “오리와 닭” “토끼네 두 로동소조” “늙은 양과 어린 양” “양계장에 기여든 여우”가 모두 동화이다. 지금 우리 문단을 살펴보면 우화와 동화, 이야기를 혼동하는 페단이 있는데 허두남도 그때엔 이면에서 인식이 모자랐던것 같다. 기실 동화로 비뚤어진 이런 작품들을 살짝만 탈아놓으면 우화로 돌아온다. 례컨대 “개미와 코끼리”를 순서를 바꿔 “코끼리와 개미”로 혹은 “개미에게 진 코끼리”로 고치면 된다.우화란 풍자의 대상인 부정적인물이 1번인물로 되여야 하기때문이다. 물론 이솝우화중에도 우화가 아닌것이 있다. 까치가 몰병속에 목이 들어가지 않아 물을 마실수 없자 자갈을 물어다 물병속에 넣고 물을 마셨다는 “총명한 까치”가 바로 그렇다. 우화대가의 우화에 우화가 아닌것이 있다해서 우화집이라고 해놓고 동화를 섞어도 별일 없다고 할수는 없다. 아마 이솝도 다시 돌아온다면 자기 작품중에도 구멍이 있구나 할것이다. 허두남의 두번째 우화시집《승냥이와 범》은 첫 작품집이 출판되여서부터 5년후인 1984년에 세상에 나왔다. 이 책엔 31수의 신작이 수록되여있는데 이번에는 동화가 한편도 섞이지 않았다. 책을 읽어보면 작자가 첫 작품집에서 나타난 약점을 미봉하려고 모대긴 흔적을 “함축”이라는 두 글자로 함축할수 있다. 이 책에도 좋은 우화시들이 적잖게 있다. 첫 작품집에서 나타났던 시가 너무 긴  페단을 극복하고 완정한 이야기를 담으면서도 간결하게 쓴 우화시들이 여러편이다. 이런 우화시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썼지만 그 편폭이 첫번째책에 실렸던 우화시들에 비해 절반 남짓하다. 하지만 이 작품집에도 약점들이 적지 않다. 우선 작자가 편폭을 줄이려는데 신경을 너무 쓰다가 생동하고 형상적인 구절들을  삭제해버려 글줄이 딱딱해졌다. 다음 산문화가 고질로 남아있다. 산문화를 효과있게 막으려면 고운 시어를 고르고 조화롭게 다듬는것도 중요하지만 구상할때 “시적”으로 구상하는것이 자못 중요하다. 줄글의 구성과 시의 구성은 서로 다른 특점을 갖고있는것이다. 아래에 이 책에 실린 우화시 “범나비”를 살펴보기로 하자.     범나비는 자기 이름을 두고/ 더없이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위엄 있는 자기 이름을 듣기만 해도/ 모두 벌벌 떨리라 여기며// 어느날 놀음에 지친 범나비/ 큰길가에 앉아 쉬고있는데/ 때마침 꼬꼬수탉 한마리/ 모이 찾아 기웃기웃 다가왔다.// “거기 오는 수탉놈아/ 냉큼 제자리에 서지 못할가?/ 내가 누구라고 언감생심/ 내앞으로 지나가려하는거냐?/ 그 말 들었는지 말았는지/ 그냥 다가오는 꼬꼬수탉// 범나비는 가장 위엄있게/ 목청을 가다듬어 꾸짖었다./ “이 버릇없는 수탉놈아/ 내가 누군지 알기나 하느냐?/ 내 이름을 들으면 넌 기절할게다./ 이 어른이 바로 범나비란말이다.// 허나 여진히 못들은듯이/ 기웃기웃 다가오는 꼬꼬수탉// 범나비는 날개를 퍼덕이며/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었다./ “이 되지 못한 수탉놈아/ 하루강아지 범 부서운줄 모른다더니/  내 이름 듣고도 그냥 다가와?/ 범나비란 나는 범이란말이다./ 네놈이 뛰는 범 무서운줄 알면서/ 나는 범 무서운줄 모르다니…”// 그제야 범나비를 발견한 꼬꼬수탉/ 씽 달려가 뚝 찍어먹었다.    주제로 볼때 이 작품은 허두남의 산문으로 쓴 다른 우화 “사자머리원숭이”와 같다. 머리가 사자처럼 생긴턱을 대고 원숭이중에서 자기를 왕이라고 자처하다가 코방아를 찧은 사자머리원숭이와 마찬가지로 범나비도 실속보다 이름을, 내용보다 형식을 추구하는 풍자적대상이다. 사람으로 비긴다면 머리가 텅텅 빈 깡통인 사람이 가짜 졸업장을 만들어가지고 으시대다가 망신당하는것과 같다고 할가? 작품의 내용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말고 형식을 살펴보기로 하자. 보다싶이 편폭은 “민들레씨의 이사”보다 거의 절반 가까이 짧다. 하지만 과정을 전개, 서술하는 산문식구성으로 되였기에 역시 붙여놓으면 산문이 된다.. 이 우화시는 편폭이 “민들레씨의 이사”보다 짧긴 하나 구성상에서 더 짜이고 함축되였기때문에 짧아진것은 아니다. 기실 두 작품의 수법은 같다. 완전히 다르게 “시적”으로 설계할수는 없겠는가?  우화제재를 찾기가 그처럼 어려운데 제재를 손에 넣었다면 매 한편의 작품마다 제재를 찾는것만큼 그 형식에도 고심해야 할것이다. 우화시 “범나비”는 표현수법도 너무나 가난하다. 이 우화책을 쓸때 작자는 중학교어문교원으로 있었다. 아마 그때 아이들에게 수사법에 대해서도 많이 가르쳤을것이다. 그런데 왜서 아이들앞에서 뒤짐지고 멋있게 설명하던 그 수사법들을 책상서랍속에 꽁꽁 넣아두고 자기 작품에다 써먹지 못하는가? 반복법이나 전도법같은 수사법들을 가져다가 잘만 박아넣었더라면  “범나비”가 산문화를  극복하는데 큰 보탬이 되였을것이다. 만약 여러가지 수사법 등 다양한 수법들을 잘 동원하였더라면 우화시가 형식에서도 지금처럼 립스틱 한점 바르지 않은 게으른 아가씨같지는 않으리라고 본다.  일단 시라고 이름달았다면 구성도 언어도 시로 만드는데 공력을 들여야 한다. 우화시집《승냥이와 범》에 실린 적지 않은 작품들이 재미가 없는것도 큰 문제이다. 한두편이 아니라  많은 우화시가 그런 페단을 보이고있다. 문학작품이, 그것도 아이들을 위해서 쓰여진 문학작풍이 재미가 없다면 그건 “볼장을 다 본”것이다. 아마 첫번째책에서 나타난 약점을 고친다는것이 다른 편향으로 치우쳐버린듯싶다. 작자가 세번째 우화책에 쓴  왼켠으로 눈이 비뚠 가재미를 닮지 않으려다가 오른켠으로 눈이 비뚤어버린 “꼬마넙치의 오산”처럼 말이다. 물론 이 책에 실린 우화시가 다 재미없다는것은 아니다. “도마뱀의 재간”, “대충의 대화”같은 작품은 첫작품집에 실린 작품들보다 더 풍자적이고 재미도 있다.. 1995년에 출판된 세번째우화시집 《춰주는 바람에》(우화시 64수)에서는 작자가 시도한 개혁이 보다 폭이 크다 앞의 두책에서는 이야기과정을 썼지면 세번째책에서는 과정을 쓰지 않고있다  동요동시의 형태로 휘딱 바꾼것이다  따라서  산문적이던 구성도 시적으로 해결되였다    우화시 “떨어져버린 록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따스한 새 봄/ 꽃사슴 머리에 돋아났어요/ 솜털 보시시한 “록용나무”가// 귀한 보약이라/ 만나는 짐승마다/ 간청 했어요, 록용 팔라고// (어쩔가, 팔가?/ 안야/ 두고 두고 자랑거리 삼을테야!)// 꽃사슴 고개 건뜩/ 어깨를 으쓱/ ㅡ나의 보밴 한평생 안 판다 안 팔아// 가을 되니 보배 록용/ 뼈처럼 땅땅/ 이듬해 봄 되자 떨어져버렸어요   이왕에 쓴 우화시같으면 또 독자가 다 내다본 과정을 지루하게 서술했을것이다. 례컨대 곰할아버지가 록용을 팔라고 청들었지만 도리머리를 저으며 안 팔았다, 노루아저씨가 사정했지만 또 밀막아버렸다, 토끼아우가 간청했지만 그것도 외면해버렸다….그렇게 전개했더라면 그 편폭이 “민들레씨의 이사”와 거의 비슷하게 되였을것이다. 하지만 작자는 이 작품에서 과정을 일일이 기록하지 않고 내용을 집중,개괄하여 표현했기에 편폭이 절반나마 줄어들었다. 한편 표현에도 신경을 썼기에 언어가 딱딱하거나 무미건조하지 않고 마치 사슴의 머리에 돋아난 ”솜털 보시시한 “록용나무”처럼 애리애리하고 말랑말랑하다. 이는 작자가 다년간 “과정시”를 없애려고 고심한 결과이며 기꺼운 성과이다. 이런 면에서 우화시 “좋은 친구 누구죠” 한술 더 떴다고 보아진다.   큰 화재에 활활/ 노루 집 불탔구나// 메돼지, 곰/ 풀풀 큰 한숨 짓고/ 토끼, 다람쥐/ 폴폴 작은 한숨 짓고/ 너도 나도/ 노루를 찾아와 동정하누나//  x  x  x  / 친구들 수군수군/ 사슴을 흉보누나// 동무 집 불탔는데/ 골도 안 내밀다니/ 인정머리 개 줬나/ 네 한마디/ 내 한마디/ 찧고 빻고 께끼며//  x  x  x  / 저켠에 불쑥/ 사슴이 나타났구나// 불룩한 쌀주머니/ 뿔가지에 척 걸고/ 뚜벅뚜벅/ 사슴이 다가오자/ 입만 까던 여러 친구들/ 얼굴이 화끈…   이 작품에서 작자는 과정서술을 완전히 피했다. 이야기를 담아야 하는 우화시에서 이는 쉽지 않은것이다. 작자가 다른 것은 접어두고 우선 시의 과정서술은 꼭 없애야겠다고 고심한듯하다. 이 작품도 이전처럼 썼다면 “떨어져버린 록용”의 경우와 같았을것이다. 우선 여사여사해서 노루네 집에 큰 화재가 났소, 재더미만 남은 빈터에서 노루가 땅이 꺼지게 풀풀 한숨을 내쉬는데 곰이 찾아와서 “거참 안됐군!” 하면서 노루를 위로하는 말을 했소, 다음 메돼지 찾아와 “너무 괴로와말게!” 하고 동정하는 말을 했소, 그 다음 토끼와 다람쥐가 또 찾아와서 노루와 같이 한숨을 내쉬였소 이렇게 썼을것이다. 다시 그들이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은 사슴을 두고 흉보는 과정을 묘사했을것이고…. 그러나 작자는 친구를 위로한답시고 빈말들을 쏟아내는 그들의 행동을 구구이 라렬하지 않고 “풀풀 큰 한숨, 폴폴 작은 한숨”, 으로 깜찍하게 개괄했고 사슴을 흉보는 그들의 험담도 “찧고 빻고 께끼고” 세개 단어로, 또 제 무안에 쩔쩔맸을 각자의 모습은 “얼굴이 화끈”으로 한데 묶어 표현했다. 작품은 산문적이던 이왕의 구성을 완전히 타파하고 시적으로 되였으며 그 표현에서 정형시의 일종인 동요와 가깝게 되였다 보다싶이 허두남은 세번째 작품집에서는 과정을 전개서술하는 것을 극력 피했다. 이야기를 써도 사건을 따라가며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한 시점에 서서 그려냈다.  하지만 세번째 우화책도 생동성이 부족하고 재미가 적다.  역시 우화시 64수가 수록된 네번째 우화시집 《세수해선 뭘해, 또 때가 낄텐데》는 많은 새로운 특점이 있다. 첫째: 동식물을 쓰던데로부터 사람을 쓰는것으로 큰 개혁을 가져왔다.   64수가운데서  6편이 동식물을 쓰고 그외 고무줄을 하나, 연필을 하나 썼을뿐 나머지 56편이 아이들을 중심으로 사람을 쓰고있다 동물을 쓴것도 첫번째우화책이나 두번째우화책에서처럼 노루집에 화재가 났소 이런식이 아니고 새가 노래하고 토끼가 춤추는 정도이다. 이른바 “랑만주의우화시”로부터  “사실주의우화시”로 바뀐것이다. 둘째: 시어가 한층 세련된 것이다  우화시 곤충채집은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돌쇠하고 누나하고/ 곤충채집 간다야// 누나는야 맨손이지만/ 돌쇠에겐 포충망// 나풀나풀 꽃나비/ 또로록또로록 베짱이// 나무잎우에 앉아/ 그네뛰는 매미// 쑥초리끝에서 파르르/ 발레추는 잠자리// 누나는야 살금살금/ 발꿈치 살짝 매미 한놈// 돌쇠는야 우쭐우쭐/ 포충망 휙 잠자리 한놈// 누나는야 한나절에/ 열마리 잡았는데// 돌쇠는야 웬 일일가/ 살펴보면 빈 포충망// 포충망에 포충망에/ 구멍난줄 몰랐네.   이 우화시는 허두남에게서 늘 나타나는 산문화가 가장 잘 극복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주제를 볼때 전혀 새롭지 않다 가능하게 구멍난 독에 물 퍼붓기란 속담에서부터 구상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시어가 아주 잘 짜였다. “그네 뛰는 매미”,  “발레추는  잠자리” 등 구절이 생동한 외 운률히 매우 성공적이다  전반 작품이 이른바 산문적으로가 아니라 시적으로 언어구사가 이루어졌다. 셋째: 일상생활과 세부에서 제재를 찾고 “작은 일”을 쓰고있다     춰주면 좋아하는 아이/ 코흘리개는/ 숱한 애들이 앞다투어/ 너 참 힘세다 춰주니/ 너무 좋아 코를 풀쩍풀쩍/ ㅡ그래 너희들 말이 맞다/ 나 진짜 힘장사야/ 얼마나 센지 보련?/ 커다란 돌 척 들고서/ 다들 보라는듯 우쭐우쭐/ 국수오리 같은 코물이/ 발등까지 드리운줄도 몰랐어요   이는 우화시 “코흘리개”의 전문이다. 이 글의 주제는 “칭찬받기 좋아하는 사람은 나쁜놈에게 쉽게 리용된다.”로 될것이다. 이 주제를 표현하자면 “큰인물”의 “큰 사건”을 가지고 “큰소리”를 치는 페단이 생길수 있을것이다. 그런데 작자는 그와는 정반대로 코를 많이 흘리는 한 아이를 통해 그것을 생동한 만화처럼 잘 보여줬다. 자칫 꽛꽛하게 만들수 있는 문제를  작고 재미있는 해학으로 원만히 표현하였다   앞으로 이러루한 제재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    네째: 짧고 감칠맛있는 우화가 적지 않다  우화시 “쵸콜릿 많이 먹을래”는 모두 4행으로 이루어졌지만 아이의 성격과 주제를 쟁쟁히 표현하였다.   어머니 사 오신 꽃무늬 적삼/ 똥똥한 내 몸에도 품 너른 적삼/ 꽃적삼 내 몸에 딱 맞게스리/ 초콜릿 많이 먹고 더 실해질래     다섯째: “다 말하지 않는 방법”을 많이 썼다. 여기서 다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야기를 작자가 말하고 교훈은 독자가 도출해내게 하는것이 아니다.  이야기를 채 말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쵸콜릿 많이 먹을래”로 말해보자 이 작품의 주제는 작은것 지엽적인것을 추구하다가 더 손해를 봤다거나 주객전도 등이다 만약 이 작품을 재래의 일상적인 우화처럼 쓴다면 쵸콜릿을 너무 많이 먹어 참대곰처럼 뚱뚱해졌다거나 혹은 쵸콜릿을 너무 먹어 무슨 병을 얻었다로 되여야 한다. 이 우화시는  이른바 “코를 깨기전에 교훈을 일러주는 방법”을 쓴것이다. 이 역시 깜찍하고 “문명”한 좋은 방법이다. 여섯째: 유머감이 한층 진해졌다  우화시 “코끼리와 파리”는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동물의 다양성 강의하신후/ 선생님이 말씀했어요/ -코끼리와 파리의 구별점 말해 봐요// 다투어 쳐드는 손, 손…// 철이가 말했어요/ 코끼리는 코가 크지만/ 파리는 코가 없어요// 분이가 말했어요/ 파리에겐 날개가 있지만/ 코끼리에겐 없어요// 안경알 번뜩 번뜩/ 선생님께선 웃고계시는지/ 울고계시는지// 분이가 발딱 일어나더니/ 자신있게 말했어요/ 제일 큰 구별점은/ 파리는 코끼리 등에 앉을수 있지만/ 코끼리는 파리 등에 앉을수 없는것이예요   이 작품은 기성유머이야기에서 제재를 가져온것이다. 우화제재는 흔히 이야기나 속담, 격언 등에서 가져온다. 우화대가 라 퐁텐이나 끄릴로브의 우화를 보면 이솝우화에서 그 제재를 취한것이 상당히 많다. 허두남은 유머이야기를 재치있게 리용하여 예술적으로 가공했는데 이것은 잘한 일이다 이 작품도 주요한것과 부차적인것을 가릴줄 모르는 페단을 꼬집은 재미있는 우화시이다. 코끼리와 파리의 구별점을 코가 있고 없는것, 날개가 있고 없는것이나 잔등에 앉을수 있고 없는것으로 찾는다면 아마 승냥이와 양의 구별점은 털이 강굴강굴한가 그렇지 않은가, 똥이 동글동글한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것으로 찾아야 할것이다. 일곱째: 학교생활과 공부에 대한 내용을 많이 취급했다  흔히 아이들을 쓴 작품들에 학굫생활, 특히 공부에 대해 쓴것이 극히 적다 그만큼 중요하고 가장 일반적인 것일수록 쓰기 힘들다는 말이 되겠다 그런데 이 책에는 학교생활, 공부를 두고 쓴 우화시가 상당한 수를 차지한다.  “성급한 아이”, “사내애가 그럼 못써”, “구멍난 책장”,  ]”그런 로봇”, “락제생된 사연”, “두고보자”, “책을 많이 읽을테야”,  “빵점”,  “꾀보→“울보”,  “지각대장” 등이다  작자의 다섯번째 우화시집《사탕을 좋아하는 애》(우화시 80수)는 한국에서 출판하였다. 이 책에는 네번째책의 우화가 절반 넘게 들어있다 하지만 그대로 실은 우화는 기본상 없고 다시 손본것들이다 다섯번째책은 네번째에 비해 말을 많이 “미용”했다는 것이 가장 눈에 뜨이는 점이다 허두남은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지 절실히 느낀것같다  아무리 철리적이인 내용을 담는 우화라할지라도 표현이 깡깡 마르다면 독자들이 등을 돌릴것은 불보듯 뻔하다.  여기에서 언어가 잘 다듬어진 우화시 몇편을 실례 든다. 먼저 제목으로 단 “사탕을 좋아하는 애”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사탕 안 먹으면/ ‘사탕배’ 고파난다나// 메기입 넙적넙적/ 초콜릿도/ 우유사탕도/ 과일사탕도// 사탕 너무 먹으면/ 이 삭는다/ 귀띔해줄 때마다/ 히쭉 웃으며/ 래일부터 꼭…// 말로만 고치는 아이/ 날마다 그 본새/ 사탕에 이가 삭아/ ‘앞대문’ 빠꼼 열렸네// 오늘도 넙적넙적…// 그 버릇 언제 고칠가/ 나무랐더니/ 히쭉 웃는 그 아이/ ‘앞대문’에서 바람 새여/ 한다는 소리가/ 래이부터 꼬…   이 우화시는 표현수법에서 이주 예술적으로 처리되였다. 가장 재치있게 처리된 부분은 결말이다. 내용으로 보거나 이야기로 볼때 마지막 단락은 없어도 작품이 이미 완정하게 이루어졌다. 잘못을 제때에 고치지 않아서 랑패를보았다는 주제에 이미 이르렀다. 이는 이 작가의 다른 한 우화시 “안경”과 비슷한  주제이다. “안경”은 단자음이 쌍자음으로 보이고 홑모음이 겹모음으로 보일때 안경을 걸었어야 하는데  걸지 않았다가 눈이 더 나빠져서야 후회하는 내용이다. 그 우화시가 뒤에 가서 후회하는 것으로 했다면 “사탕을 좋아하는 애”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아이를 풍자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런데 필자가 여기에서 말하려는것은 그 주제가 아니라 표현방식의 예술성이다. 즉 빠꼼 열린 “앞대문”에서 말이 새여 “래일부터 꼭”을 “래이부터 꼬”로 발음했다는 여기에 작자의 기교, 예술적인 교묘한 처리가 잘 체현되였다. 만약  직설적으로 “이가 빠진 뒤에도 그애는 말로만 고치겠다고 하면서 그냥 고치지 않았다”고 썼다면 얼마나 맛갈스럽지 못하고 싱겁겠는가? 이 우화시는 결말을 이렇듯 매혹적으로 맺은 외 어휘사용에서도 깜찍한 재치를 보여주고있다. “사탕을 안먹으면 사탕배가 고파난다”거나 “앞대문 빠꼼 열렸네”같은 표현이야말로 진짜 사탕맛이다.   우화시 “만등로봇”도 결말이 재치있게 예술적으로  씌여진 좋은 작품이다.   해를 따다달라하면/ 해를 따다주고/ 달을 따다달라하면/ 달을 따다주는/ 만능로봇 있었으면// 숙제도 척척/ 시험답안도 척척/ 내가 제일 먼저 할텐데// 야, 그럼 얼마나 멋질가/ ‘공부왕후’ 분이도/ 내옆에 앉으려하고/ ‘핵주먹’ 강이도/ 나와 친하자고 히히거리겠지// 남자애들도 녀자애들도/ 내곁에서 뱅뱅/ 눈으로 애들을 잡아먹는/ ‘호랑이 눈’ 선생님도/ 나하고는 늘 상냥한 미소짓겠지// 팔짱끼고 앉아서도/ 학급일등 따내고/ 날마다 늦잠자고도/ 아빠, 엄마 칭찬만 받을거야// 뭐나 로봇이 다 하면/ 나는 뭐 하겠냐고?/ 내가 뭐 해야 하는지/ 그건 로봇더러 물어보아요   이 작품에서는 너무 로봇에 의거하는 “현대병”에 걸린 아이를 썼는데 결말의 4행에서 주제를 예술적으로 심화했다. 인젠 자신이 뭘해야 하는지조차 생각할 필요가 없는 로봇의 로봇으로 되여버린 아이, 로봇이 발달한건 좋은 일이지만 그런 좋은일을 나쁜일로 만드는 우둔한 행동을 따끔하게 꼬집었다. 이 작품은 또한 생동한 언어로 아이들의 생활과 동심을 잘 그려냈다. 언어가 제일 생동하고 재미있게 씌인 작품은 우화시 “약을 먹을 때”일것이다.   파리가 썰매 탈지경/ 윤기 반들 대머리 만지며/ 의사 선생님/ 한 눈 찡긋 일러준 말//ㅡ꼬마아가씨/ 이 약 먹을때/ 물 마시면 절대 안돼/ 물 마시는 날엔/ 이 할아버지처럼 대머리가 돼// 의사 선생님의 대머리/ 참기름이라도 칠했나/ 내 눈길도 미끄러져 떨어지는듯/ 몸이 오싹// (어마나! 롱구공 같네요/ 내 머리가 대머리 되면/ 작은 배구공 같을거야!)/ 머리가 대머리 될가봐/ 작은 배구공 될가봐/ 갈증이 나도/ 물 한모금 마시지 않았어요//해님이라도 삼킨듯/ 너무너무 목이 탈때면/ 한꺼번에/ 얼음과자 열대 먹었을뿐 이 작품은 풍자와 유머가 강할뿐 아니라 표현도 아주 훌륭하다. “파리가 썰매탈지경 윤기 반들 대머리” “의사선생님의 대머리 참기름이라도 칠했나 내 눈길로 미끌어떨어지는듯” “어마나! 롱구공 같네요. 내 머리가 대머리 되는 날엔 작은 배구공 같을거야!”. 해님이라도 삼킨듯 너무너무 목이 탈때면” 등 표현들은  극히 성공적이다. 이는 아이들의 시각으로 사물을 보고 천진란만한 동심에 비쳐진 사물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냈기때문이다. 이번에는 “뚝쇠의 자존심”을 보기로 하자   아이참, 저 뚝쇠/ 머리는 뚝 막혀가지고/ 자존심은 쇠처럼 강해서/ 이름도/ 뚝/ 쇠// 저보세요/ 상우에 숙제책 펼쳐놓고/ 책장우에 연필장단 똑똑/ 귀불만 만지작만지작// 녀동생 꽃분이 들여다보더니/ 오빠, 내 알려줄가?// 힐끗 동생을 지릅떠본 뚝쇠/ 까불지 마/ 쥐방울같은게 뭘 알아서…// 연필장단에/ 애꿎은 책장은 벌집 되여도/ 뚝쇠와 숨바꼭질하는/ 답안// 시계소리 재깍재깍/ 텔레비죤아동프로 이제 곧 시작한다/ 뚝쇠를 재촉하며 재깍재깍’’ 바빠 난 뚝쇠/ 궁둥이 들썩들썩/ 솥뚜껑우의 개미인가/ 안절부절/ (이 뚝쇠를 구해줄 사람은 없나?)// 이제 다시 동생에게/ 묻지도 못하고/ 묻지도 못하고   이 작품도 인물에게 꼭 맞는 어휘를 사금 일듯 골라서 주인공의 행동을 잘 묘사했다. 하나 능하게 없으면서 녀동생앞에서 으시대는 이웃집의 코흘리개와 비슷한 뚝쇠의 모습이 눈앞에 다가온다. “연필장단 똑똑”, “귀불만 만지작만지작”, “힐끗 녀동생을 지릅떠본 뚝쇠”, “쥐방울같은게”, “”연필장단에 책장은 벌집 되여도”, “뚝쇠와 숨바꼭질하는 답안”, “솥뚜껑우의 개미인가 안절부절”, 등 구절들은 머리는 뚝 막혀가지고 동생앞에서 오빠의 자존심을 세우려는 웃기는 아이의 성격을 표현하는데 아주 적격이다. 마지막 련에서 “묻지도 못하고”를 반복한것은 주제을 강조하는면에서도 좋거니와 문체론적효과도 충분히 나타냈다. 마지막련도 잘 처리했지만 이 작품이서 특히 훌륭하게 쓴 부분은 첫련이다. 첫행에서  “아이참, 저 뚝쇠”ㅡ이렇게 “문을 열자 산이 보이는” 수법으로 시작한것부터 좋다. 편폭이 짧은 우화시에서 “짧은 밤에 긴 노래 부를”것 없이 글줄을 아낀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첫 련에서도 가장 천금싸게 잘된 점은 이름도 뚝 쇠 이렇게 세개행에다 갈라놓은 것이다. 종이를 랑비하면서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형태이미지로 뚝쇠라는 주인공을 강조한것이다. 서로 상반되는 모순의 성격을 이 두 글자로 잘 표현했지 않은가? 그러니 두 글자에게 당당하고 분명한 자리를 드린것이다. 다른 사람이 시행을 한글자씩 뜯어서 내리배렬하니 자기도 한번쯤 그렇게 해본 그런 언어장난과는 전혀 다른 좋은 착상이고 설정이다.  “뚝쇠의 자존심”이 이름 두글자를 두행에 나눠놓은것이 형식상 성공적이라면 전반 우화시를 새로운 형식으로 쓴것도 있다.  우화시 “착한 일”이 그렇게 씌여졌다.   일과에서 빠짐없는/ 일기 적기/ 착한 일 적기// 보배둥이 일기책에/ 또박또박/ 연필도 신이났나/ 미끄럼질 쭉쭉// ㅡ오늘은 뜻깊은 날/ 낯선 할머니 도와/ 짐 들어다 드린 날/ 착한 일 찾아하니/ 칭찬받은것보다 더 기쁘다// 귓가에 속삭이는/ 자애로운 목소리/ 일기란 진실하게 써야 해!//! 뒤머리 썩썩/ 덧붙이는 몇줄// 아래 학급 돌이/ 자기가 할머니 돕겠다/ 짐 붙잡고 놓지 않았다/ 달래여도 듣지 않아/ 겁을 줘도 듣지 않아/ 빵! 한주먹 먹이고/ 제꺽 짐 빼앗았지 헤헤   웃지도 울지도 못할 사연, 그러면서도 너무너무 진실하게 아이의 성격을 그려낸 성공작이다. 내용도 새롭고 형식도 새롭다. 작자는 천진란만한 아이의 성격을 잘 그려냈을뿐만 아니라 그 그림을 일기라는 액틀에다 정히 넣어서 걸었는데 형식이 아주 맘에 쏙 든다     형식이 생신하고 독특한 우화시로는 또 “친구사귀기”가 있다. “친구사귀기는 인터넷사이트를 리용해서 친구를 사귀는 형식을 빌어 웃음거울에 비친듯 우습광스러운 주인공의 형상을 보여주고있다.   인터넷 사이트로/ 친구나 사귀여 볼가/ 아무렴!/ 나처럼 훌륭한 애에겐/ 친구도 많아야지// 제 자랑한다 말아/ 나하고 사귀고 싶은 애들은/ 검색 창에 내 간력 쳐보렴/ 내가 허풍 쳤나// 나는나는/ 장점은 하늘만큼/ 단점은 손톱눈만큼// 내 또래중 키도 껑충/ 학급에서 힘도 으뜸/ 성미 활달한 사내대장부// 밥은 아빠보다 더 먹고/ (애들은 잘 먹어야 잘 큰대)/ 잠은 하루 열시간/ (애들은 잘 자야 건강하대)/ 늘 토끼처럼 뛰놀지/ (애들은 잘 놀아야 밝게 자란대)// 장점은 무지무지/ 많고 많지만/ 단점은 고까짓것/ 공부하기 싫어하는 한가지뿐   이 작품의 주제나 언어에 대해선 더 말하자 않겠다. “친구사귀기”나 “착한 일”같은 형식은 아주 좋은 추구이다. 앞으로 이런 추구들이 많아져 허두남이 독자친구들을 더 많이 사귈수 있기를 바란다. 우화시집 “사탕을 좋아하는 애”에도 아쉬운 접이 있다. 그 하나는 아직도 생동성, 형상성이 모자란것이다. 다음은 좋은 내용에 비해 아직도 형식이 다양하지 못하고 표현수법이 다채롭지 못한것이다. 이상으로 우화작가 허두남이 30년간 땀으로 가꾸어온 5권의 우화시집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5권의 책에 나타난 특점은 각각 다음과 같다. 첫번째 책은 사건의 과정을 썼다. 두번째 책도 역시 과정을 썼지만 첫책보다 많이 함축했다 세번째 책은 과정서술을 피면하고  동요동시형태로 탈바꿈했다. 네번째 책은 동식물을 쓰던데로부터 사람을 쓰는데로 전변을 가져왔다.   다섯번째 책은 형식의 다양화와 언어의 형상화를 창조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허두남은 끄릴로브우화시와 조선의 우화시로부터 영양을 섭위하였으나 그의 우화시는 끄릴로브우화시와도 조선의 우화시와도 다른 자신의 특점을 갖고있다.. 첫째: 성인을 상대로 쓴 끄릴로브우화시와 달리 어린이를 상대하였다. 둘째: 이야기과정을 전개하는 조선의 우화시와 달리 동요동시로 개변했다. 셋쩨: 동식물을 주로 쓰던 전통에서 벗어나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하였다. 네째 형식면에서 다 말하지 않는 방법을 많이 썼다. 이상에서 보다싶이 허두남의 끈질긴 노력은 많은 결실을 맺었다. 없던것을 창조해내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성과에 대해 더없이 기껍게 생각한다.  허두남의 우화시에는 미숙한 점 또한 적지 않다. 첫째: 다섯권의 책에 공동으로 존재하는 부족점은 생동성과 형상성이 부족한것이다. 많은 우화시들은 형상이 론리에 묻히고있다. 결과 작품이 따분하고  재미가 적다 우화작품은 론리정연해야할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우화도 문학인이상 생동하고 형상적이여야 하며 재미있어야 한다..      둘째: 천편일률적이다  초기의 산문화되고 함축되지 못했던 약점은 없어졌는데 새로운 큰 약점이 나타난것이다. 다섯번째 우화시집을 살펴볼때 편폭이 제일 긴 “잊음 헤푼 아이”가 45행이고는 40행이 되는것이 하나도 없다. 짧은 것은 “쵸콜릿 많이 먹을래”가 4행이고는 8행짜리가 가장 짧다. 시행도 .그 길이가 대부분 엇비슷한데 제일 긴 시행이 17음절이다. 게다가 시마다 운률 역시  비슷하다. 우화시를 내용에 따라 길게도 쓰고 짧게도 쓰고  시행도 구속받지 말고 길게도 쓰고 짧게도 썼으면 좋겠다. 내용에 따라 자유분방하게 쓰면 다양한 운률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올수있을것이다. 형식상에서도 더 많은 탐구를 했으면 한다. 우화시를 극시로도 쓰고  지어 글자를 맞춘 정형우화시도 생각해보는게 어떨는지? 갱신을 위해 공을 들이는데 린색하지 않은 작자가 이제 꼭 자신의 약점을 장점으로 돌려놓을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앞으로의 타산에 대해 직업구연작가인 허두남은 구연작품의 특점을 우화시에 결부시키련다고 했다. 산문으로 된 우화에 구연작풍의 특점을 결부시키는건 이미 시험해보았고 또 상대적으로 쉽다고 할수 있는데 우화시에 그것을 옮기려면 또 간고한 진통을 각오한다고 했다. 우리 조선족문단에 한떨기 이색적인 꽃을 피운 우화작가 허두남, 그가 앞으로 구연작품의 특점을 우화시에 배합하여 완정하고 독특한 자신만의 스찔을 갖춘 우화작가로 거듭날지 기대해본다. 30년전,  하루아침에 작품집을 들고나와 우리 모두를 놀라게 하던 허두남이 또다시 남들이 상상못했던 일을 해낼수 있을는지?                                              2009년 부록: 조선족문단에서 지금껏 출판된 우화집(총 10책) 1979년 허두남 우화시집 《개미와 코끼리》 1981년 정덕교 우화집 《너구리네 떨렁방울》 1981년 정치수 우화집 《골방쥐의 단꿈》 1982년 허봉남 우화시집 《불에 타죽은 여우》 1984년 허두남 우화시집 《승냥이와 범》 1995년 허두남 우화시집 《춰주는바람에》 1997년 허두남 우화집 《술에 취한 쥐》 2002년 허두남 우화시집 《세수해선 뭘 해, 또 때가 질 텐데》 2006년 허두남 우화시집 《사랑을 좋아하는 애》 2006년 허두남 우화집 《코끼리와 개미》    
492    동시인들은 아이들을 위하여 랑송시 창작에 몰두해야... 댓글:  조회:2122  추천:0  2017-05-22
랑송동시 창작연구 작성자: 김만석 동시와 랑송동시 관계문제 시란 문학의 한 형태이다 시는 시인이 시적 대상을 보고 느낀 시적인 발견을 운률적인 언어로써 시적형상을 창조하는 문학의 한 형태이다. 동시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여 어른들이 동심적인 시각에서 아이들의 심리정서를 노래하는 서정시라고 할 수가 있다. 이런 동시에는 전통적인 동시와 현대동시가 있다 전통적인 동시에는 화적인 동시,회화적동시,동화적인 상상동시(의인화동시),사색적인 철리동시 등이 있고 현대동시에는 이미지 동시 등이 있다. 지금 중국,한국,조선의 을 살펴보면 동시의 분류에 랑송시란 따로 없다 그것은 랑송시란 여러 가지 동시작시법의 장점을 따다가 종합적으로 쓰는 시라고 보는데서 그렇게 취급하지 않나 생각된다. 특히 랑송시는 선전선동사업에서 필요한것이기에 그런 때마다 시적형식을 리용하여 대중을 선동하여 그 어떤 목표실현에 동원할 때 리용하는 것으로 구태여 독립시켜 분류하지 않은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사회생활에서 랑송시라는 형태가 확연히 존재하는것만은 사실이기에 우리는 랑송시를 외면할 수가 없다 특히 조선에서는 랑송시를 사회생활에서 많이 쓰는 상황이다. 우리도 1930년대부터 조선아동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아온 탓에 랑송시에 대하여서는 일정한 감성적인 리해를 가지고 있다 또 현재 학교마다에서 소선대활동에서 많이 리용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보면 랑송시는 보는것을 목적으로 하여 쓴것이 아니라 듣는것을 목적으로 하여 쓴 시를 따로 말한다 즉 시인이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들의 정서적 요구에 맞추어 청각적인 내용전달과 음성적인 정서전달을 직접 하면서 청중에게 감흥을 불러 일으켜 그 어떤 목표실현에 궐기시키는 그런 시를 랑송시라고 말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여 쓴 랑송시를 따로 랑송동시라고 하게 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것은 우리가 문학적인 동시를 감상하기 위하여 랑송하는 동시는 동시 랑송이지 절대 랑송동시는 아니라는것이다. 하기에 랑송동시는 우리가 말하는 문학적인 동시와는 일정한 거리를 둔 동시로 리해하는것이 좋을듯 싶다. 2, 랑송동시의 특징문제 랑송동시의 존재의거는 이른바의 선동성과 고동성에 있다 학교에서 그 어떤 목표실현을 위하여 학생을 조직동원할 때 이른바 여러 가지 선전형식을 취하게 된다. 그런 형식 가운데서 리론문에서는 연설이거나 웅변같은 것들이 있고 문학에서 보면 바로 랑송동시 같은것이 따로 있다. 랑송동시는 문학적인 작시법을 다각적으로 리용하여 창작한 형태로서 대중을 감화시키고 분발시키고 궐기시키는 작용을 하게 된다. 하기에 랑송동시의 존재의거는 선동과 고동에 있고 존재가치도 바로 이 선전과 고동에 있다고 하여야 할것이다 또 어떻게 보면 창작목적도 바로 선동과 고동에 있기에 이 선동성과 고동성은 랑송동시의 문체적 특성이라고 하여야 하겠다. 하기에 선동하고 고동하자면 그 어떤 주제가 선명히 나타나야만 한다 때문에 랑송동시에서는 그 주제가 뚜렷하게 표현되여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랑송동시는 주제선행론을 지향하게 된다. 그러나 현대이미지 동시는 그 주제가 이미지속에 용해되여 아리숭하게 나타날수록 그 예술성이 높아진다 하여 이미지 동시에서 그 주제가 선명하면 선명할수록 다시 말하면 그 주제가 벌거벗고 로출될수록 예술성이 약화되고 지어는 패작으로 취급되게 된다 이것이 랑송동시와 이미지 동시와의 원칙적인 다른 특징이 아닌가 생각된다. 랑송동시의 운률적 형식은 주로 자유를을 지향하면서 자유동시처럼 자유분방한 정서표현을 추구하게 된다 하기에 랑송동시는 자유시의 장점을 따오게 되는것이다 때문에 동요와 같은 정형률을 취하면 자유분방한 정서를 표현할 수 없게 된다. 랑송동시의 시적형상화에서는 반복법,전도법,병렬법,점진법 등 수사법을 가장 많이 쓰는것이 그 특징으로 된다. 반복법에서도 련속적인 반복과 축차적인 반복을 써서 격조를 높일수 있다 이를테면 련속적방법은 하여 학교 가는것을 강조하면서도 격조를 높일수가 있다 에서 가 반복되는데 그 사이에 과 이 끼여들어 축차적 반복을 이루고 있다 이렇게 하면 절주가 생기면서 흐름에 그 어떤 파도가 생기여 예술적효과를 나타낼수가 있다. 전도법을 써서 강조점을 환기시킬수가 있다 에서 술어 를 앞에 내다가 써서 작자의 강조점을 알려주면서 그 다음 아름운 이라는 환경을 펼쳐보이고 있다 여기서 작자의 강조점은라는데 력점이 찍히게 된다. 병렬법을 써서 시적흐름에 박력을 가할 수가 있다 여기서 병렬된 시구는 강약으로 울리여 펴지면서 그 어떤 박력을 가하여 시의 흐름을 거세차게 한다. 점진법을 쓰면 시의 깊이를 파면서 내용은 깊어지고 정서는 높아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여기서 점진법은 나어린 아이들이 병치료에 무슨 도움이 되련만 그래도 자기들의 선물을 가지고 선생님을 찾아와서 선생님을 부르는 그 내용은 깊어지고 그 정서는 눈물 날 정도로 승화되는것이다. 이런 수사법들은 시적흐름을 여울치게 하고 파도치게 하는 정서적 표현에 아주 좋은 효과를 가져올수가 있다. 랑송동시에서는 시적대상은 되도록 직관적인 형상으로 눈앞에 선명히 보여주고 시적인 내용은 되도록 알기 쉽게 전달되여야 한다. 하기에 전통동시에서 많이 쓰던 직접비유를 많이 쓰게 된다 그렇지 않고 은유처리를 하면 랑송을 들으면서 그것을 사색하고 음미할 여유시간이 없기에 랑송시 내용파악에 지장을 주게 되고 선동성효과를 보기 어렵게 된다. 텅빈 산골 운동장 물소리만 나와 놀고있다 * 삐꺽 삐꺽 새여 나오던 풍금소리는 창틈에 녹 쓸고 * 아이들이 닦아놓은 창에 거미줄 친 하늘이 끼워져 있다 이런 현대동시형태로 랑송시를 쓰면 청각으로 듣고서는 무슨 내용인지 대뜸 파악하기 어려웁게 된다 그러기에 시의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고 어떻게 시적인 감흥을 받을수 있겠는가? 하기에 랑송동시에서는 이미지 동시와 달리 듣고서 얼른 내용을 파악하고 정서를 가려잡을수 있도록 써야하는것이다. 랑송동시에서는 현대이미지 동시보다는 작자의 주정토로가 직접 사용 된다 그 주정토로는 감정정서의 론리에 맞게 그리고 자연스럽고 가슴속으로부터 우러져 나오게 된다. 현대적인 이미지 동시에서는 시적형상에 숨어있는 이미지를 사색하고 음미하는 과정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시의 정서를 뒤늦게 서서히 체험하게 된다. 그런데 랑송동시는 청각적으로 들려오는 시적내용과 흘러오는 소리의 정서를 통하여 직접적으로 시의 내용을 파악하게 된다 하기에 내용전달의 직접성과 정서전달의 직접성이 담보되여야 한다. 랑송동시는 상술한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은 완전히 독립은 되지 못한 그런 동시의 한 형태로 보게 된다. 3랑송동시창작에서 나서는 문제 가,시의 생명은 서정성에 있다 하기에 동시의 생명도 서정성에 있다고 하여야 하겠다 그런데 우리 동시에서의 이 서정성이 최근에 와서 약화되여가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현대 이미지 동시에서는 시적대상을 관조적으로 감상하고 거기에 형상을 꽃피우면서 되도록 감정의 표출을 절제하고 시적인 느낌을 은근히 유출하는데 신경을 쓰고있다. 이것은 우리의 동시가 혁신된 하나의 기꺼운 표현으로 된다 그러면서도 이것은 또한 시의 서정성을 어떻게 강화할것인가? 하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것으로도 된다. 솔밭을 /지날 때면/파랗게/파랗게 진달래산/지날 때면/빨갛게/빨갛게 마을 앞.지날 때면/하얗게/하얗게 이 동시는 절제된 언어로 함축된 시적형상을 창조하면서 그윽한 시적 이미지를 담아내고 있다 그런데 이 시를 읊어보면 그 어떤 서정성을 직접 반갑게 느낄수는 없는 것으로 되었다. 이것은 80년대까지 내려오던 우리의 낡은 동시 즉 작자의 주장을 적라라하게 표출하고 감탄사를 련발하던 그런 동시에서 해탈되여 나온 새로운 동시인것만은 틀림없다. 그런데 동시에서의 서정성을 어떻게 살릴것인가에 대하여서는 우리 함께 연구 할바를 동시에 제기하여 주고있다. 이면에서 랑송동시는 사그러져가는 동시의 서정성을 살리는데 어느 정도 도움을 줄수가 있다 지난 시기 정치가 판을 치던 시기 이른바 랑송동시에서의 서정성을 정치적 태도표시로 여긴다거나 정치적인 설교를 악청높이 하는 것으로 리해한 이것은 한낱 엄중한 페단이였다 그런 페단은 우리 마땅히 삼가야 한다. 그러나 그런 형식에서의 이른바의 서정성을 연구하여 교훈은 버리고 경험을 따온다면 우리의 동시의 서정성을 되살려내는데 일정한 도움이 되지 않을가 생각된다. 특히 랑송동시의 선동성과 고동성을 살리면 동시의 서정성을 얼마든지 강화할 수가 있는 여지가 있게 된다 현대 이미지 동시로써는 동시감상군체를 즉석적으로 감화시키고 분발시키기에는 너무나 역부족인것이 현실로 되고 있다. 현재 학교 같은데서는 학생들을 그 어떤 목표실현을 위하여 문학적인 힘을 빌어 다시 말하면 랑송동시를 리용하여 학생들을 조직동원하자고 하여도 랑송동시가 부족한 현실이 아닌가?. 우리 아이들은 현대이미지 동시를 조용히 읽고 사색하고 음미하면서 그 속에 숨어있는 정서적느낌을 서서히 체험하는것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또 그런 동시에 기승전결이 잘 나타나지 않아 아이들의 정서표현에 어울리지 않고 읊기에 알맞지 않고 또 그래서 읽기 싫어하고 있는것 또한 현실이다. 그들은 직접 감동을 받고 소리 높이 웨치고 마음껏 노래하면서 정서폭발을 수요하고 있다 하기에 우리는 랑송동시를 창작하여 그들에게 풍만한 정서를 안겨줄수가 있는것이다. 나,랑송동시를 창작할 때 기승전결의 감정정서의 흐름을 잘 조직하여야 한다 랑송동시는 현대이미지 동시와는 달리 시적정서가 외적으로 표출되기에 이런 감정정서는 마땅히 자연스럽게 표출되게 하여야 한다. 랑송동시에서 처음으로 시적제시를 잘하여 청중들의 주의를 대번에 확 끌어오고 시적인 발전을 상승적으로 꾀하며 시적절정에 감동적으로 치달아 올라 선동작용과 고동작용을 한껏 발휘하면서 긴 여운을 남기며 시를 마무리하여야 한다. 필자가 최근에 라는 랑송시를 써보았다. 시적제시는 병상에 누워서 창 너머 푸른 하늘을 바라본다 그 푸른 하늘에서 은은히 들려오는 이라는 목소리, 그것은 시의 발단으로 된다. 그 은 금방 아이들이 남기고 간 메아리,어떤 메아리인가? 금방 수술한 나에게 연필을 선물한 아이들의 목소리 손수건을,사과를 과자를 ...선물로 가지고 와서 선생님의 건강을 빌며 선생님을 안타까이 부르던 그런 아이들의 메아리, 그런 메아리가 깃든 선물들이 탁상우에 수북한데,그런 선물에 담긴 아이들의 뜨거운 마음,따뜻한 정성,간절한 소원이 지금 나의 가슴속에서 사품치며 흐른다고 시인은 높이 읊조리고 있다 시는 이처럼 직선적으로 상승적으로 발전 하다가 절정으로 치달아 오른다. 사랑하는 아이들아 선생님은 자리차고 일어 날거야! 그리운 아이들아 선생님은 교단으로 달려 갈거야! 이렇게 주인공은 시적인 충동을 받고 궐기하여 일어 나면서 금방 수술하고서도 아이들의 관심과 사랑에 목이 메여 교단으로 달려가려 떨쳐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 시 첫머리와 조응을 꾀하면서 다시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저 푸른 하늘을 향하여 그리운 아이들을 목놓아 부르며 긴 여운을 남기였다. 시 전반에 거칠매 없이 상승적인 감정조직을 하여 일정한 정도로 감동적이며 격정적인 시적정서를 유발하고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다, 랑송동시는 서사시의 장점을 따다가 흔히 감동적인 이야기의 한 대목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것이 그 특징으로 된다. 이때 이야기의 원인, 경과, 결과를 시시콜콜하게 서술할것이 아니라 감동적인 사건의 직선적인 발전을 비약적으로 상승적으로 정서적으로 펼쳐야 한다. 그리하여 감동적인 이야기 그 자체가 독자의 마음에 거침없이 흘러 들어가고 그 이야기에 담긴 내용자체가 청중들에게 정서적인 충격을 주어 독자에게 감흥을 주게 해야 한다 하기에 감동적인 이야기 한대목 자체가 서정성을 제고 하는 작용을 하게 되고 주인공에게 감흥을 주어 궐기시키는 작용도 겸하여 하게 되는것이다. 라,랑송시는 력사적으로 보면 격변의 년대에 적극적인 작용을 많이 하여 왔었다 구쏘련의 이사꼽쓰끼의 에서는 사회주의 나라의 주인된 그 영광을 자본주의 나라를 상대로하여 격정높이 읊조려 사회주의 존엄을 온 세상에 떨친 그 시는 정말로 전투적이였다. 천안문 사건 때 반당집단을 성토한 랑송시들은 사회주의가 위기에 처한 그 위험한 시기 열혈청년들이 천안문광장 화표에 올라가 자기의 피타는 목소리로 림표강청집단에 강렬한 시적 포탄을 퍼부었던것이다. 오늘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이 력사적 시기에 그리고 그런 사회에서 사는 우리들의 정의로운 정서를 어떻게 하면 랑송동시에 반영할것인가는 우리 모두가 연구할바이다. 동시에는 현대이미지동시 한가지 뿐만이 아니다 독자 혼자서 조용히 시적내용을 음미하는 그런 동시도 필요하지만 동시작시법을 종합적으로 리용하여 격정에 차넘치는 정서를 유발하여 감상군체를 선동하고 고동하고 궐기시키는 그런 격정적인 랑송동시도 필요한 시대이다. 오늘은 법치 시대로 온갖 사회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그런 준엄한 시대이다 총소리도 들리지 않고 포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전투는 계속되고 인민은 승리하는 시대이다. 격변의 시대, 승리의 시대에 우리 동시인들 모두 떨쳐나 아이들을 위하여 랑송시를 창작하여 소리 높이 읊어보자! 2017.4.17.  
491    시는 이미저리의 원형과 수사학적 기법을 잘 활용해야... 댓글:  조회:2621  추천:0  2017-05-22
2) 형식과 기법 ① 형식 시짓기에서 형식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 큰 줄기로 보아 짧은 서정시인지 서사시인지, 근자에 유행하는 장시, 연작시, 산문시 등 어떤 것을 쓰든지 그것은 작가가 주제나 소재에 대한 접근 의도에 따라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작은 가지로 볼 때 시 한편 한편이 모두 그 작품만의 고유하고 유일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지구에 태어나는 인간이 유일한 존재인 것처럼, 완성된 시 한편도 그것만의 고유하며 유일한 형식을 지니게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 시인이 동일한 제목, 또 동일한 주제로 비슷한 길이의 서정시를 또 한편 썼다고 하자. 그것도 엄연히 내용상 형식에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게 된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은 시의 무한한 형식적인 실험이 가능하다는 뜻도 담겨 있다. 한시(漢詩)나 영시(英詩)의 경우, 자유시일지라도 글자수나, 운(韻)등을 제각기 갖추어야하는 그 나름의 법칙이 있지만 우리 시의 경우, 외형상 그같은 제약이 없다. 자유시에서 외형상의 형식으로 쉽게 구별되는 것은 연(聯)의 구분에서 찾을 수 있다. 연 구분이 없이 전연(全聯)으로 된 것도 있다. 한 연을 몇 행으로 마무리 지었는가에 따라 형태상의 특징을 보여주기도 한다. 김소월(金素月)의 7·5조의 시들은 시조의 정형성을 잘 살려내 자유시이다. 정형성의 제한을 극복, 오히려 현대시로서 우리말의 멋을 잘 살려낸 것이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김소월, 「진달래꽃」부분 이 시에서 7·5조가 제1, 제2행으로 나누어진 것과 제3행에서 묶인 것은 이 시에 대한 작자의 기법에 해당한다. 작자는 형태상의 변화를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무엇을 강조하기 위해서, 또 내재율로서 호흡을 강조하기 위해서, 또 내재율로서, 호흡의 장단이나 활음에 따른 성조(聲調) 등을 감안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작자가 무엇에 역점을 두고 지었는가에 대한 평가는 감상하는 자의 몫이다. 소위 모더니즘을 표방했던 이상(李箱)의 「烏瞰圖(오감도)」는 현대시란 이름으로 시를 짓던 한국문단에 독특한 개성의 시를 제시했다. 발상에서 표현에 이르기까지 대담한 변화를 시도한 것이다. 시의 내용에서도 그 줄거리나 주제를 파악하는데 의견이 분분했고, 오늘에까지도 비평가들의 연구대상에 올라있는 것이다. 특히 이상이 일련의 시에서 시도한 띄어쓰기를 무시하고 붙여쓰기나 산문화한 구문이 연속으로 네모꼴의 형태 속에 채워 넣은 「꽃나무」같은 시가 있는가 하면 아라비아 숫자를 거꾸로 표시하거나 구문의 순서를 뒤에서부터 읽어야하는 것도 있다. 위의 김소월이나 이상이 시도했던 형식에 대한 시도는 한국 현대시의 형식성에 대한 어떤 고정관념을 깨고 무한한 실험의식을 추구함으로써 오늘에까지 크게 영향을 미치며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② 기법 시짓기의 기법은 언어의 수사학적 활용에 해당한다. 이는 무쇠를 용광로에 넣었다가 새로이 기능적 역할을 해낼 수 있는 형태로 주조(鑄造)해 내는 것처럼 시인은 어떤 수사학을 동원해 시적 의도를 완성시킬 수 있는가에 심혈을 기울인다. 도예가가 흙을 빚어 작품을 완성해내듯이 시인은 언어를 빚어 작품을 완성시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모든 문학작품이 언어매체에 의해 완성되기 때문에 문장마다, 시구마다 ① 문법적인 요건 ② 논리적인 요건을 전제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문법적인 요건이란 우리 글의 문법에 맞는 규칙을 지키는 일이다. 이 경우 시인들이 문법 규칙을 일부 벗어나고 관용적인 활용, 또는 의도적인 변형을 일삼는 경우가 있으나 초심자에겐 절대로 경계할 일이다. 논리적 요건이란 사람의 감정과 사상, 지향 의지 따위를 이치에 맞고 합리적으로 체계화할 수 있는 것을 뜻한다. 이 경우 외형적이고 과학적인 논리보다는 심리적인 논리 전개가 공감을 줄 수 있는 것에 유의할 수 있어야 한다. 시의 기법에서 수사학적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은 I. A. 리챠즈가 지적한 대로 현대시를 분석, 감상, 비평하는 데는 수사학적 방법에 대한 역(逆)추적에 해당한다는 데서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즉, 시에 드러나는 에스프리를 분석하고 이미저리의 원형을 해부하는 것이다. 시의 시상이나 역사 혹은 사회성과의 관계도 분별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시의 시상이나 역사 혹은 사회성과의 관계도 분별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시의 내면에 흐르는 심리적 의도와 작품마다 적용되는 고유의 수법에까지 수사학적 차원의 분석, 감식하는 과정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점이 그러하다. 시짓기에서 시인의 반의무적이리 만큼 빈번히 활용되는 비유법 몇 가지를 예문을 들어 설명한다. ㉠직유(simile) 하나의 사물을 그 의미나 성질을 다른 사물로 설명, 인지시키는 방법이다. 즉, 두 가지 사물을 비교하여 형용하는 수사법이다. 두 가지 사물을 대비하여 견주어 보는 것이 아니라 무엇과 무엇을 '―같다', '―처럼', '듯(이)', '마냥', '인양'등을 사용하여 동등하게 관계지우는 역할을 한다. 표현코자 하는 주(主) 사물을 그와 유사한 사물에 직결시켜 주된 사물을 강조하거나 그 개념을 선명히 하며 나아가서 증의(增義)의 효과도 얻을 수 있다. 단순한 방법으로 단순하고 일시적인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속된 표현이 될 가능성이 짙기 때문에 항상 참신한 것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된다. 가령 '보름달 같은 얼굴'이니 '갈대와 같은 여자의 마음'이니 하는 직유가 시에 쓰였다면 이것은 진부한 표현이 되고 만다. 아릿다운 그아미(娥媚) 높게 흔들리우며 그石속 〈같은〉입술 죽음을 입 맞추었네. ─번영로, 「논개(論介)」부분 파도가 산맥의 발목을 놓치고 썰물을 따라간다. 보아란 듯이, 상수리묵 〈같은〉뻘밭으로 간다. ─이향아, 「파도와 산맥」부분 「논개」의 〈같은〉은 석류 속이 붉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기에 직유로서의 효과가 직감으로 들어온다. 「파도와 산맥」의 〈같은〉은 '상수리 묵'에 대한 외형상의 개념이 없을 경우 읽는 이는 애매해진다. 그러나 읽는 이는 비유된 '뻘 밭'에서 '상수리 묵'의 모습을 연상하고 유추할 수 있는 감상 능력을 주게 된다. 「논개」에서는 색깔로써 변용시키고 있고 「파도와 산맥」에선 형태로써 변용시키고 있다. 직유에서는 이 외에도 소리, 향기, 관념 등을 자주 연결시킨다. 이처럼 직유는 '같은', '처럼'등의 관계사로 이뤄지는 것이다. ㉡ 은유(metaphor) 은유란 비유법 중에서 가장 고도의 상상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특히 문학의 테두리에서는 절대적이다. 그래서 은유 자체가 여러 가지 비유법을 총괄하는 의의를 지니기도 한다. 어반(W. M. Urban)은 「언어와 사실성」에서 언어의 발달 과정을 다음과 같이 나눈다. 첫째 모방적(疑聲)이거나, 모사적 단계, 둘째 유추적인 단계, 셋째 상징적 단계가 그것이다. 제1단계는 단순한 서술에 해당하고 제2단계는 직유의 비유가 성립된다. 언어의 비유적 기능이 드러난다. 다음 제3단계에 오면 은유로써 복잡한, 그래서 다양하게 상징성을 구현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른다. 상징적 단계가 가장 고도의 비유법이라 함은 직유가 A=B, 혹은 A≒B의 표현이 된다면 은유는 'A는 B이다'로 나타낸다. A≒B를 직유, (A=B는 은유로 표시하기도 함) =나 ≒의 표시는 같거나 유사한 상태로 이끌지만 'A는 B이다'라고 할 때 A가 본질적으로 바뀌어 B에 접근하므로써 A도 아니고 B도 아닌 새로운 본질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므로 은유는 주관적이고 직관적인 판단으로 모든 사물이나 관념에 대한 유사성과, 상상력을 폭 넓게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의미 심장하고 개성적이며 신선감을 주는 표현이 가능해진다. 남성은 늑대 여성은 여우 이는 속성, 개성 따위를 짐승에 비유한 것으로 가장 보편적인 예가 된다. 일찍이 우화에서 보여 주었던 것으로 사람의 인격과 인간성을 은유화한 것이다. 내 마음은 촛불이요 ─김동명,「내마음은」부분 네 슬픔이 오 비누거품이구나 ─안수환, 「廣德山·3」부분 이같은 시구가 있다면 이는 불가시적인 관념을 시각적으로 불 수 있게 은유화한 것이다. 사물의 본질, 관성, 개념 따위를 유사하거나 같은 의미로 결부시키게 된다. 사람이 아니올씨다. 짐승이 아니올씨다. 하늘과 땅과 그 사이에 잘못 돋아 난 버섯이 올씨다. 버섯이 올씨다. ─한하운,「나」부분 이 작품은 나환자였던 시인 한하운(韓何雲)이 자학적이리만큼 자신의 천형을 저주하는 대목이다. 이 시는 시의 내용 전부가 제목 「나」를 은유화하고 있다. 내 인생은 마비된 희망속의 잠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열려 있는 일찍이 빛났던 두 눈동자 귀는 쓰레기 통 입은 함정 ─정현종,「납속의 희망」부분 상징보다는 우화성(寓話性)을 취한 은유이다. 제목은 작자가 생각하는 관념이나 상상의 은유이다. "마비된 희망"과 "일찌기 빛났던"의 문맥으로 보아 "납속의 희망"이란 기대하는 어떤 희망이 아니라 이미 의욕이 끊긴 좌절된 체험적 인식을 뜻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처럼 모든 은유는 유사성과 동일성을 文面에 드러나는 내용과 그 속의 뜻하는 바를 나타내는 '겉과 속'의 관계인 것이다. ㉢ 의성·의태 原始語의 일차적 기능은 의성어나 의태어에서 비롯했을 가능성이 짙다. 짐승이나 새들의 소리를 흉내내어 감정을 나타내고 의사 소통의 구실로 삼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시에 와서도 이 의성어(onomatopoeia)나 의태어(mimesis)의 활용은 과거의 노래하는 시로 불리우던 시대와 마찬가지로 詩語로서 혹은 시의 기법으로 매우 유용한 위치를 차지한다. ──삐이 뱃쫑! 뱃쫑 하는 놈도 있고 ──호을 호로롯 하고 우는 놈도 있고 ──찌이잇 잴잴잴! 하는 놈도 있고 온통 산새들이 야단이었습니다. ─박두진, 「사슴」부분 바다, 바다, 바다, 바다, 無窮動 바다, 차츰 그 바다에 가까이 가서야 목청이 열렸다. 아아, 아아, 아아, 아아, 마치 처음으로 질러보는 음성인양, 진정 「아아」라는 母音이 있기에 구원이 되는 셈. ─박희진, 「바다」부분 "삐이 뱃쫑" "호을 호로롯" "찌이잇 잴잴잴" 등은 直喩的이다. 여러 가지 새들의 소리를 직접 흉내낸 것으로 낱말로서의 의미는 완전 배재되어 있다. 오직 소리만이 존재한다. 즉, voice가 아닌 sound의 상징인 것이다. 반면 박희진의 「바다」는 바다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를 간접적으로 擬聲化시킨 것이다. 즉, 실제의 소리가 아닌 관념상의 의미로 대치시킨 것이다. 작자의 恣意的인 음성기호로서 '바다'가 쓰였다. 이는 이센손(Jon Eisenson)이 그의 「The paychology of speech」의 개념으로 든 ㉠口頭表現(oral symbol) ㉡ 몸짓(gesture visible word) 중에서 ㉠에 해당하다. ① 텨-얼썩, 텨-얼썩, 턱, 쏴……아 ─최남선, 「해에게서 소년에게」 부분 ② 바다, 바다, 바다, 바다, ─박희진, 「바다」 부분 ③ 옥쪼록 빠쪼록 조래 조래…… 옥쪼록 빠쪼록 조래 조래…… ─신석정,「Nostalgia」 부분 결국 ②는 '바다;의 뜻이 아닌 바다의 소리를 은유로 쓴 것인데, 반복되는 리듬感으로 파도소리를 연상하게 한다. 소리뿐만이 아닌 의태적인 이미지도 동시에 제시된다. 이 역시 바다를 간접적으로 연상되게 한다. "아아, 아아, 아아, 아아,"의 경우도 실제로는 작자의 감탄사를 바다소리로 의성화시킨 간접적인 은유이며 상징이다. ③은 강남으로 돌아갈 제비들의 망향가로 들린다는 의성어로 나타낸 것이다. 심리적으로 향수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흰 옷자락 아슴아슴 사라지는 저녁달 썩은 초가 지붕에 하얗게 일어서 ─박목월, 「박꽃」 부분 얇은 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조지훈, 「僧舞」 부분 방점부분 "아슴아슴"과 "나빌레라"는 모두 간접적인 의태어들이다. 어둠 속으로 걸어가는 사람의 옷자락이 어떻게 보이는가를 "아슴아슴"하다는 형용태로 나타냈고 '나빌레라'는 춤추는 모습을 동작태로 나타낸 것이다. 의성어나 의태어는 단순히 소리를 모방하고 몸짓을 흉내내는 것만이 아니라 직유나 은유의 수법으로 시 속에 끌여들인 것을 볼 수 있다. 말라르메(Mallarme)가 "시는 아이디어로 쓰는 것이 아니라 말로 쓴다"고 언어의 외형적 기능──모음조화, 자음의 결합, 韻, 리듬, 율격등──에 詩的 성취욕을 보였었다. 즉, 內容語(content word)에 대한 고의적 의미 부여를 경계한 것이다. 이에 앞서 소위 순수시(pure poetry)라는 것도 언어의 내용보다는 "음악처럼 직감적이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추구한 사실도 유의해야 한다. 청각적 자극이나 시각적 자극에 관심을 두어 의성어나 의태어의 시적 활용 가치가 많아진 것이다. ㉣ 기타 위에 소개한 몇 가지 비유법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① 안으로 아슴한 설은 눈섭들을 하고 한그루 풀, 한덩이 돌, -유치환, 「역투(逆投)」 부분 ② 산에는 꽃피네 꽃이 피네 -김소월,「山有花」 부분 ③ 불러도 주인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김소월, 「초혼」 부분 ④ 낙엽끼리 누워 산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조병호, 「낙엽끼리 모여산다」 부분 ①은 압운법으로 볼 때 두운(頭韻)을 취한 것이요 ②는 각운(脚韻)을 취했다. '한 그루', '한 덩이'의 '한'이나, '꽃피네', '피네'의 '∼피네' 등을 압운법에 맞춘 것이라고 한다. 이들은 외형률의 압축을 보여 주기도 하지만 우리말 고유의 내적 운율미도 동시에 품고 있는 것이다. 시에서는 반복의 대구(對句), 대위(對位) 혹은 점층적인 기법에 의해 시의 형태미와 내적 운율미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것이다. ③은 "이름이여!"를 절마다 반복함으로써 호소력을 강화시킨다. ④는 두운을 염두에 두기도 했지만 절의 반복에 간결하고 깡마른 낙엽의 이미지를 드러낸다. ① 뛰노는 바다 앞엔 날개를 펴고 검은 구름 앞엔 태양을 부르라. ② 달이 지면 아무도 없는 뜰은 외로워 달이 뜨면 피리 소리 향그런 풀 밭. ①은 글귀가 서로 맞서서 같은 정조(情調)의 반복으로 대구를 이룬다. 아름다운 조화미를 창조하는 대구법이다. ②는 서로 반대되는 정취의 세계가 서로 대조되어 흥겨운 時의 맛을 돋군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明暗」의 대조에 의하여 들의 정취를 나타내는 대조법이다. 대구법은 두 가지 사실, 현상 혹은 이미지를 함계 연결시켜 나타낸다. 여기에서 문법적인 대구나 대조보다도 내적인 정조(情操)를 정리하고, 합리적으로 종합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내 귀는 소라껍질 바다의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쟝·콕토, 「귀」 "귀"가 "소라껍질"로 과장 비유되었으나 조금도 과장된 뉘앙스를 풍기지 않는다. 귀의 형상을 바닷가에 뒹구는 소라껍질로서 대신해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 그 바다에서 가까이 들리는 파도소리와 멀리 수평선 쪽에서도 무언가 들린다고 인식되는 순간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한없이 펼쳐지는 시적 상상력이 발동하게 되는 것이다. 당신의 너털웃음은 진정 쌀가마가 되고 진정 진정 돼지 뒷다리가 되고, 당신의 너털웃음은 여러 가지로 민족이 되는 꽃나무 앞에서 예이쌍 계집이란 금테를 둘른 계집이건. 자가용에 무거운 몸을 실은 계집이건 앞치마를 둘른 계집이건, 유듀분면이건. 바람과 꽃과 달과 에리지 그리고 E. A. 포우의 이야기를 들려 달라는 계집이건, 그리고. -전영경, 「인생이란 무엇인가 묻든 주책없는 靑年」 부분 역설적인 전개이다. 이 시는 6·25직후 좌절하고 찌든 사람들의 감성을 수평적으로 시화한 것이다. 무지하고 천박한 언어들을 엮어서 사람들의 심중에 흐르는 고결함, 절실함, 진실함의 본질을 역설적으로 추출해 낸 것이다. 당시의 시민의식이 어느 수준에 머물러 있었는가를 보여 주기도 한다. 역설법(Pradox)은 역어법, 반어법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번역되어 쓰고 있다. 이는 사상이나 감정을 정면으로 대응시키지 않고 반대로 말하는 수법이다. 희롱조가 되고, 준엄히 잘라하는 투가 되기도 한다. 그 내면에 있는 진실을 강조하게 된다. 인간의 감정이나 사상 또는 세태의 미묘한 것들을 진실되게 강조하는 기법이다.   -----------------------------------------------------------   여행자 ―전동균(1962∼) 일찍이 그는 게으른 거지였다 한 잔의 술과 따뜻한 잠자리를 위하여 도둑질을 일삼았다 아프리카에서 중국에서 그리고 남태평양의 작은 섬에서 왕으로 법을 구하는 탁발승으로 몸을 바꾸어 태어나기도 하였다 하늘의 별을 보고 땅과 사람의 운명을 점친 적도 있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눈먼 떠돌이 악사가 되어 온 땅이 바다고 사막인 이 세상을 홀로 지나가고 있으니 그가 지친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흐름을 멈추고 다시 시작하는 저 허공의 구름들처럼 말 없는 것들, 쓸쓸하게 잠든 것들을 열애할 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아프리카에서 중국에서 남태평양의 작은 섬에서, 거지였다가 왕이었다가 탁발승이었다가. 하늘의 별을 보고 운명을 점치는 사람이었다가 지금은 눈먼 떠돌이 악사.     ‘여행자’는 스케일이 큰 시다. 전지적(全知的) 화자가, 공간만 옮겨 다니는 게 아니라 생을 거듭하며 한없이 광활한 시간을 지나온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정말 환생이라는 게 있을까? 그것은 이 지친 떠돌이 악사의 환상이 아닐까? 눈멀어 그 자신은 볼 수 없는, 머리 위 허공 구름 같은.  어떤 생도 ‘저 허공의 구름들처럼’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을 테지만, 이 시 ‘여행자’는 그런 생에 덧없음이 아니라 가없음의 후광을 드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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