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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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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0    시는 식물과 동물이 말을 걸어 올때 써라... 댓글:  조회:2341  추천:0  2017-08-18
시(詩) 창작에 도움되는 창작기법     시(詩) 창작에 도움되는 창작기법   1. 식물이나 동물들에 늘 관심을 갖고 메모, 관찰하는 습관을 지녀라. (꽃, 나무, 풀, 조류, 곤충류, 어패류 등....多識於鳥獸草木之名) 모란꽃 / 박강남 봄바람 서둘러 지나간 / 간이역 같은 어머니의 텃밭에 / 장다리꽃 파꽃 쑥갓이 무성터니 귓불 빨갛던 꽃봉오리 / 오월 미풍에 환하게 웃었다.// 붉디붉게 목숨 불사룬 / 신라 여왕 우아한 그 웃음에 / 어머니댁은 궁정되고 구름 떠가는 드맑은 하늘 따라 / 아욱도 제 키를 쭈-욱 뽑는다.   2. 자연과 늘 친화하고 기후와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게 접근하라. (안개, 봄비, 꽃샘, 폭풍, 빗소리, 구름, 동서남북풍, 강바람, 산바람, 신바람, 솔바람 등) 윤사월(閏四月) / 박목월 송화(松花) 가루 날리는 / 외딴 봉우리 // 윤사월 해 길다 / 꾀꼬리 울면 // 산지기 외딴 집 / 눈 먼 처녀사 // 문설주에 귀 대고 / 엿듣고 있다. 푹 삭힌 홍어 맛에 콧등이 쏴 하듯이 추위 속 가지마다 봄비에 눈물 맺혀 꽃망울 곤지 찍고서 필듯 말듯 웃었다. - 이흥우,「꽃샘 추위에도 봄은 웃는다」 3. 시어의 선택에 늘 골몰하라, 선택을 엄격히 하여 참신성을 고조시켜라. 시는 언어의 예술이다, 시어사전이나 우리 고유어 사전을 비치해 놓고 창작시에는 순수한 우리말을 많이 활용하라(제목은 범위를 좁혀라(구체화): 꽃→유채꽃, 여우→불여우) 시인은 언어의 조련사, 함축적 시어들을 많이 활용해야 시다운 시다. (나무 전지→미적 가치) * 시의 3요소 : 음악적 요소(운율), 회화적 요소(심상,이미지),의미적 요소(주제,함축적 의미) 덥고 긴 날 / 조운 북방한계선에서/ 碧松 찌는 듯 무더운 날이 / 길기도 무던 길다 까마귀 노을타고 북쪽으로 넘어가고 고냥 앉은 채로 / 으긋이 배겨 보자 흰구름 바람결에 자유로이 흘러가니 끝내는 제가 못 견디어 / 그만 지고 마누나. 제발 좀 놓아들 다오 지긋한 이념에서 4. 때때로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라 (大人 赤子之心, 사람심기, 입치, 귀치) 5. 늘 고독을 벗 삼아라(고독은 진정한 자아발견의 찬스이며, 문예 창작 최고의 창작 환경이다.) 김형석 / 고독이라는 병 ---정신인은 그와는 반대다. 아름다운 예술이 탄생 되는 것도, 훌륭한 사상이 쳬계를 가지는 것도, 위대 한 학문이 주어지는 것도 모두가 이러한 정신인의 고독한 창조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범죄한 사람들을 교도소에 가둔다는 일은, 자연인에게는 무서운 처벌이 되나 정신인에게는 오히려 훌륭한 자기 완성의 도장이 되기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6. 발상의 전환(낯설게 하기의 기법)을 위해 늘 무엇이든 뒤집어서 생각하라. 넌센스, 알레고리(우의,풍유,풍자)의 미학, 패러독스(역설:소리 없는 아우성 등)에 접근하는 길이다. - 17 - 현대시는 낭송을 하거나 읽기 위한 시가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상상하고 공감을 느끼도록 이끈다. 때로는 뜻밖의 아이디어 진술, 엉뚱한 제목, 엉뚱한 발상, 시상 등은 시의 참신성을 더해 줄 것이다. 내용에 따른 상상력은 독자와 평론가의 몫이다.   바람만 가득히 찬 공은 / 다만 / 모나기를 거부한 존재 그렇기에 속없이 / 이리 둥글 저리 둥글/떠돌이의 넋으로 구르다가 / 발길에 차이는 존재 하지만, / 네 넋에 단 하나뿐인 / 바람기마저 없다면 / 네 생명은 끝이다. -진의하, 전문   7. 모든 사물을 생명체로 보고 감각적 교감을 나눠라. (만물에 눈,코,귀,입 다 있다. 나무가 걸어다닌다. 돌에서 피를 뽑아내니 신음 소리가 진동한다 등) 개성적 안목의 관찰로 특징을 터득하는 습관을 갖는다. 가을 이미지 / 이우종 잘 익은 가을볕이 / 창을 톡톡 두드리네 못 죽을 그리움에 / 갈잎이 굴러가네 때 묻은 기억들이 / 악수를 청해 오고 빈 방을 서성대다 / 절반쯤 문을 열자 하늘도 / 구름 사이로 / 엉덩이를 들썩이네. 남산이 / 발꿈치 들고 / 알몸으로 안겨 오네.   8. 사물에 이름표를 붙여줘라(새로운 의미 부여로 참신한 글이 되도록 노력하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   9. 문제의식을 늘 가져라.(어떤 사물을 대할 때, 어떤 생각을 할 때, 현실적․사회적 문제의식→ 이것이 시정신이며 작가정신이다.)---평범 속에 진실이 발견되는 진솔한 글 도루묵 / 변인숙 은어라 불러주면 비늘조차 황홀하다 도루묵 불러내면 그 맛조차 텁텁하고 얄궂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세상사가.   10. 농축된 체험을 돌려써라(진실성과도 연관, 자기만 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보면 독자들의 입맛을 돋울 것이다. 사람을 대할 때 우리는 진실성을 제일로 꼽는다. 진실한 글은 자기만의 체험에서 우러나왔기에 억지로 꾸밈이 없다. 문학기행에 의한 체험은 작문의 좋은 창의력을 제공해 준다.) 공원 벤치 풍경 / 이종철 자작나무 그늘 아래 추억이 머물던 곳 한 여름 매미 소리 그늘 속에 듣던 노인 찬바람 일렁이니 가을도 떠날 채비 백발도 낙엽지니 남녘 딸네 가시었나 낙엽은 가기 싫은지 벤치 위를 뒹군다. 가을비 심술궂게도 정든 노심 쓸어간다.   11. 늘 떠오르는 시상을 메모해 두는 습관을 지녀라.(베갯머리에도 필기도구 준비) 사랑(思郞)이 거즛말이 님 날 사랑 거즛말이 꿈에 와 뵈단 말이 긔 더욱 거즛말이 날 갓치 잠 아니 오면 어늬 꿈에 뵈리오. - 김상용(1561-1637)   - 18 - 12. 설명하려 들지 말고 사물의 특징으로 간접적으로 돌려 표현하라.(메타포-은유와 상징) 돌려쓰기(비유)의 기법을 시도해야 품격도 높아지고 문학성도 가미된다. 음식도 맛이 있어야 하는데, 적절한 수사법 활용은 한층 글의 맛을 더해 준다. (거짓말로 참말하기-유안진) * ~ 열릴 듯 닫힌 문으로 눈이 자주 가더라. (최남선), * 청산리(靑山裡) 벽계수(碧溪水)야~ (황진이)   13. 형상화, 구상화, 구체화시켜라 --추상적 관념적 대상을, 즉 안 보이는 대상을 보이는 것처럼 구 상화․형상화시켜 표현하라(방긋 웃는 아침 소망, 나뭇가지에 걸린 보름달 등)추상적 관념을 구체화 (형상화)시켜야 이미지가 형성된다.------(詩中有畵, 畵中有詩) * 나뭇가지가 흔들거린다. → 나뭇가지가 하늘을 빗질하고 있다. * 추억이 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벤취 위엔 소녀들이 남기고간 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져 있었다. 聖敎堂의 지붕 위에선 분수(噴水)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김광균)   14. 공감대가 형성되도록 글을 쓰라. 글은 누구나 공감을 느끼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도록 감수성의 동일화(원형상징)를 이끌어 내도록 써야 한다 분수도 모르고 하늘로 치솟는 물줄기 아래로 흐르는 것이 세상의 이치였음을 뒤늦게 / 깨달아 얻는 / 곤두박질의 저 미학(美學). - 조흥원, 「분수」전문   위의 글은 ‘분수’라는 제재의 발음이 지니고 있는 중의적 의미를 가지고, 재치 있게‘날뛰는 군상들’을 꼬집는 글이다. 이러한 글들은 대개 체험으로부터 우러나온 깨달음에 의해 창작된 것이기에 경구적 의미나 금언 ‧ 격언 등의 공감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좋은 기법이다   15. 시는 고심 끝에 고쳐서 내보내고 명시를 많이 읽어보라. 그리움/ 안영희 시장 길 / 접어들면 / 우체통 하나 있지 // 괜스레 / 울먹이는 / 마음 하나 집어넣고 // 뒤돌아 / 뒤돌아서면 / 따라오는 그리움   인생사 / 대우 문틈에 우는 바람 / 달래고 잠재운 건 // 들보나 기둥 아닌 / 문풍지 한 장인 걸 // 인생사 / 꿈의 무게도 / 이런 것이 아니던가.   16. 자신의 창작물을 늘 가까이 읽어 주며 충고해 주는 사람을 두어라.(스승이나 벗, 부부 등)    
649    동시로 엮는 어린 시절 색깔들... 댓글:  조회:2479  추천:0  2017-08-18
프랑스 동시문학의 세계   海外 兒童文學/프랑스  프랑스 동시문학의 세계  ―어린이 동심견문록, 童心, 어른의 Micro-Cosmos 『색깔들couleurs―시로 엮는 어린 시절enfnace en poésie』(청소년 갈리마르 출판사 Gallimard Jeuness, 에르베 뛸래Hervé Tullet 그림, 강금희 옮김) 姜金希(총신대 강사) 제1부 11명 프랑스 대시인들의 童詩   색깔들Couleurs / 모리스 카렘Maurice CAREME   -난 말이야, 보라색을 좋아해, 7월달 색이거든.   월귤이 흰족제비에게 말한다. -난 말이야, 주황색을 더 좋아해, 게다가 난 절대 변하지 않아 오렌지가 자랑스럽게 대답한다.   -난 빨강색이야, 딸기가 말한다.   -난 말이야, 노랑색이야, 참외가 말한다.   사과는 몹시 으스대며, -빨간색 아니면 노란색 난 경우에 따라 달라.   연못은 파란색으로 옷 입고 벚꽃 나무는 하얀 꽃으로 옷 입고 초록 잎은 나무 가지들을 즐겁게 하고 금은 불에게 마술을 건다.   그리고 목넘이 마을에 폭풍우가 지나가 급작스런 우박에 놀라지만 예쁜 꽃 드레스를 입고 무지개 목도리를 하고 총천연색으로 웃고 있다   ―시집 『레네뜨사과Pomme de reinette』에서   지나가는 시간Le temps qui passé / 앙드레 이베르노Andree HYVERNAUD   회색 월요일 수국의 분홍색 화요일 파란색 수요일 : 너 다시 올 거지? 주중 다른 날들은?   나무 아래서 티티새와 놀이하는 초록색 목요일   치즈에서부터 생크림에 이르는 하얀색 금요일   그리고 당근의 빨간색 토요일 일요일 그는 두 팔 사이 줄기 위에 태양을 붙들고 있을 것이다   ―시집 『투명성Transparences』에서   아이들을 위한, 그리고 세련된 사람을 위한 Pour les enfants et pour les raffinés / 막스 쟈콥Max JACOB   난 네 생일에 개암색 모자를 줄게. 네 손에 들고 다닐 사틴(반드러운 천)으로 만든 작은 가방이랑 손잡이에 술이 달린 하얀 비단 양산이랑 금빛 자락 달린 옷이랑 주황색 구두랑    그런데 목걸이 보석들은 일요일에만 해야 해! 티우! 근사할거야!   ―시집 『성-마토렐Saint-Matorel』   이 수수께끼 좀 풀어볼래Devine un peu la devinette / 끌로드 루와Claude ROY   쥐색인 수십만 잿빛 고양이들 다리 끝은 하얗다. 가만히 뻗고 있는 발톱을 감춘 벨벳 다리들 온통 잿빛 하늘에서 수십만 잿빛 고양이들 밤에 감추어진 수십만 잿빛 고양이들 천천히 눈이 내리고 있다   ―시집 『변덕스런 아이의 소설Nouvelles Enfantasques*』   *‘아이’라는 단어 ‘enfant’과 ‘변덕스러운’ 이란 형용사 ‘fantasque’의 합성어 파랑과 하양Bleu et Blanc / 모리스 카렘Maurice CAREME   하얀 물방울무늬 위의 파란 작은 고양이 하난 물방울무늬 위의 하얀 커다란 쥐 그들의 귀여운 꼬리들은 조금 다르다   그렇다 하지만  파란 고양이 코는 너무 너무 하얗다 하얀 쥐의 코는 너무 너무 파랗다. 그들의 뺨과 눈은 조금 다르다   그렇다 하지만 파란 고양이 눈썹은 아주 아주 하얗고 하얀 쥐의 눈썹은 아주 아주 파랗다   하양과 파랑의 이 조금 차이로 아주 적은 이 차이 때문에 그 둘은 전쟁을 계속할 것이다   ―시집 『귀뚜라미 초롱La cage aux grillons』   지구는 파랗다 오렌지처럼La terre est bleue cpmme une orange / 폴 엘루아르Paul ELUARD   지구는 파랗다 오렌지처럼 이건 결코 잘못 아니다 단어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단어들은 더 이상 당신에게 노래거리를 주지 않는다. 미친 사람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통하는 입맞춤으로 지구는 약속의 입 모든 비밀들 모든 미소들   그리고 발가벗고 믿게 하는 면죄부의 어떤 옷 말벌들이 초록색 꽃을 피우고 새벽은 목둘레에 窓 목걸이를 걸어주고 날개들은 잎을 덮고 너는 모든 태양의 기쁨을 지녔다. 지구 위에 온 태양을 너의 아름다움의 길들 위에   ―시집 『사랑 詩L’amour la poésie』   검은 땅 위의 푸른 밤/nuit bleue sur terre noire / 모리스 퐁뵈르Maurice FOMBEURE   검은 땅 위의 푸른 밤 푸른 땅 위의 검은 밤 모든 말(馬)들이 마시러 간다 내 기억의 물속으로   ―시집 『작은 고양이에게』   바다La mer / 폴 포르Paul FORT   바다가 빛난다 조개처럼 그것을 잡고 싶다 바다는 초록색이다 바다는 회색이다 쪽빛의 바다 은빛과 레이스의 바다다   편애 없이Sans manie / 뮈리엘 베르스티쉘Muriel VERSTICHEL   내가 말을 걸고 있는 것은 하얀색에게다 최상의 하얀색에게 순결무구의 신비의 하얀색에게 새벽의 눈의 하얀색에게 하얀색에게   내가 말을 걸고 있는 것은 검은색에게다 불타고 있는 내 친구 피부의 검은색에게 수천 년 묵은 석탄의 검은색에게 검은색에게 그 가운데서 검정색과 하얀색 사이에서 춤추고 있다 색깔들이 춤추고 있다   ―시집 『미발표Inédit』   바다La mer / 알렝 보스케Alain Bosquet   바다는 파란 물고기를 쓰고 회색 물고기를 지운다 바다는 불붙은 순양함을 쓰고 잘못 쓴 순양함을 지운다   시인들보다 더 시인 음악가들 보다 더 음악가인 바다는 나의 통역자이다   옛 바다 미래의 바다는 꽃잎의 대리모 모피의 대리모인 바다는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속에 자릴 잡는다   바다는 초록빛 태양을 쓰고 연보라 빛 태양을 지운다 바다는 황급히 도망가는 수 천 마리의 상어 위로 반쯤 입 벌린 태양을 쓴다   ―시집 『시,하나Poèmes, un』   노래Chanson / 마리 노엘Marie NOEL   히드가 무성한 땅을 가면서 -붉은 덤불, 하얀 덤불- 바람 가운데서 자라는 마지막 꽃을 꺾기 위해 붉은 덤불, 노란 덤불, 멀리서 덤불모양으로 자라는 덤불 참으아리 곁을 지나면서 -붉은 목 울새가 그 안에 있다-   나는 아이들을 숲으로 데려가는 유모를 만났었다 붉은 덤불, 노란 덤불, 멀리서 덤불모양으로 자라는 덤불 보다 예쁜 세 아이들은 뒤에 가고 보다 명랑한 세 아이들은 앞에 가고 그러나 맨 꼴찌 꼬마 여자에는 신발을 끌며 걸어가고 있다   붉은 덤불, 노란 덤불, 멀리서 덤불모양으로 자라는 덤불 토기풀밭을 지나면서 -걔 오빠들은 들 저 멀리 있는데- 그녀는 고개를 약간 숙인다.   그녀는 울면서 발걸음을 멈춘다 붉은 덤불, 노란 덤불, 멀리서 덤불모양으로 자라는 덤불         ―시집 『가을의 노래와 시편Chants et psaumes d’automne』   내일은 일요일이다C’est demain dimanche / 필립 쑤포Philippe SOUPAULT   미소 짓는 법을 배우라고 날씨가 잿빛으로 흐릴 때라도 말야   왜 울어야 하는데 오늘 태양이 빛나고 있어   내일은 친구들의 생일 개구리들과 새들 버섯들과 달팽이들 곤충들도 잊지 말자 파리들과 무당벌레들도 그리고 조금 있으면 정오다 난 무지개를 기다릴 테야 보 남 파 초 노 주 빨 빨 주 노 초 파 남 보 그리고 우린 돌차기-깨금집기 놀이를 할 거야   ―시집 『Julie의 새 화환La nouvelle Guirande de Julie』     2부. 해설 : 빛의 나라 색깔나라-색깔이야기 색은 혼자서 존재하지 않으며 빛이라는 존재와 함께 어울려야 한다. 색은 빛의 강도와 방향, 원근 등에 의해 확연하게 변신하는데 하지만 ‘색즉시공 공즉시공(色卽是空 空卽是色)’이란 말처럼 태초에 형체(色)도 없어 형상은 일시적인 모습일 뿐 실체는 없고 모든 사물의 참모습은 공일뿐 실체가 아니라는 데 사실인가? 게다가 실제로는 세상에 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과학적으로 자연에는 색이라는 관념조차도 없다. 색은 인간의 뇌가 사물을 특정한 공식으로 인지하면서 나타나는 결과 중의 하나다. 우리가 오렌지라고 부르는 과일의 색도 인간의 되가 만들어내는 오렌지라는 사물에 대한 인식 방법일 뿐 실제의 과일 오렌지는 색을 가지고 있지 않다. 색맹(色盲)은 빨강과 초록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뇌가 그 색들에 대한 정보를 다르게 인식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보는 색과 남이 보는 색도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결국 색은 인간의 뇌가 만들어낸다. 인간의 뇌는 정말 신기하고 놀라운 마술사”가 아닐 수 없다고 화가 김이산은 『똑!똑!똑! 그림책/현암사』에서 정의하고 있다. 태초에 땅이 혼돈하며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빛이 있으라!’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 한마디로 흑백 세계에서 드러난 칼라 세계는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옮겨감을 의미하지만 아이가 캄캄한 엄마 뱃속에서 10개월간 들어 있다가 거의 병실이지만 혹 방안 전구 불빛 아래 태어날 때 아이에겐 빛은 폭력에 가까운 카오스가 아닐까? 아이가 우는 첫 呱呱聲은 바로 어둠에 익숙해져 있다 갑작스런 빛에 노출되었을 때 확실한 건 잘 모르지만 일종의 두려움 때문이라고 해도 틀렸다 할 수 없을 것 같다. 흔히 영화관에서 밖으로 나왔을 때 환한 날빛에 맛보는 가벼운 현기증과 함께 일시적이지만 앞 못 보는 시각장애를 일으키는 것처럼……. 그 후 색맹이 아니면 누구나 반짝반짝 빛의 나라 알록달록 색의 나라에 살게 되면서 우리 오감 중 시각은 자연 주위의 모든 빛깔과 색깔에 적응하면서 자연스럽게 조화로운 색채를 배우게 된다. 자연은 가장 지혜롭게 색을 가르쳐 주는 좋은 선생이며 우리 정서에도 균형과 안정감을 준다. 그리하여 무슨 색인지를 물을 때 프랑스어론 ‘De quelle couleur est-il?’, 영어처럼 ‘What color is it? 이것은 무슨 색깔 인가?’로 묻는 것이 아니고 ‘de’라는 전치사가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색의 속성을 묻기 때문이다. 자연의 색에서 색을 구별했기에 이런 질문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하늘색, 금색, 살색, 쥐색, 오렌지색 가지색 등등.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지만 색은 無色을 빼고 온갖 색이 존재한다. 본색을 드러내지 않아도 원색에서 死色(사색)에 이르기까지 없는 색이 없다. 먼저 모든 빛깔을 재현할 수 있는 기본 적인 세 색깔로 물감의 三原色으론 빨강-노랑-파랑이 있고 빛의 삼원색으론 빨강-초록-파랑이 있다. 그 외 모색/사색/박색/정색/채색/주색/특색/희색 등등 색자(色字)가 들어간 상용 합성어들은 형형색색만큼이나 많다. 신현득은 「한 색깔만 없어도」안 된다고 한다.   크레용 스무 색깔에서 파랑 색 하나만 없어도 안돼/하늘 색깔을 칠할 수 없거든/무지개를 그려도 파랑, 한 색깔이 모자라지/노랑 색깔 하나만 빠져도 안돼/개나리 노랑 꽃도, 귀연 병아리도 못 그리지/우리 여럿 중에서 한 사람만 빠져도 골목 축구 뛰는 데서 편이 기울 듯.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白衣民族이라 무명실로 짠 무명베로 옷을 만들어 입었는데 1886년 6월 31일자 한성주보 22호에 일본 상인들의 광고 이후 염색법을 배운 후에는 달라졌다고 마정미는 『광고로 읽는 한국 사회문화사』에서 백의민족의 종말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염색약 제조법 광고에는 ‘감색 비색 기타 각색 염액 제조 급 염양법 전수광고’라는 제목으로 ‘일본 오사카에 있는 산기승차랑 이라는 사람이 염색법을 깊이 연구하여 가르쳐주고자 하는데 이를 배우면 생계를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보라색 꽃 색 등 여러 가지 색 제조법을 배우려면 지화 2원을 보내야 하고 붉은 비단 색, 매화 색, 복숭아 색 등의 여러 가지 색을 배울 사람은 1원 50전을 보내면 그 자세한 제조법을 기록해서 보낼 줄 것이다. 만일 염색법이 이치에 맞지 않으면 보낸 금액을 도로 환불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개항과 더불어 백의민족의 흰옷을 물들이려는 염료들이 밀려들어온 후 1905년 10월 경무사 신태휴는 독특한 법령을 발포했다는데 흰옷 대신 검정색 등 짙은 색 옷을 입으라는 것이었다. 그리해 흰옷을 입은 사람의 등에다 ‘흑’ 혹은 ‘묵’ 자를 써서 짙은 색으로 물들이지 않으면 입고 다닐 수 없게 했다는데 위생을 위해서 신문명 시세에 따라야 한다는 요지였다지만 일본의 염료산업이 한국에 진출하는 계기가 된 것은 틀림없다. 그 후 ‘흰옷은 더욱 희게’ 라는 슬로건으로 ‘청백분’ 이라는 표백제도 관심을 끌었다는데 명절이 돌아오면 형형색색 색동옷 때때옷을 입다가 평상복으로 돌아가는 한국 사람들의 생활습관을 동시에 이용한 일본사람들의 교활한 상술에 한국은 차츰차츰 알게 모르게 무색세상이 아닌 유색세상으로 바뀌어 간다.  하기야 우리나라에서 미스코리아를 뽑을 때 미인의 기준이 몸의 형태도 형태지만 색깔로 기준을 삼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즉 三色이 기준인데 黑色으론 눈동자와 머리털과 눈썹이 검고 白色으론 치아와 손과 피부가 하얗고 紅色으론 입술과 뺨과 손톱이 붉어야 미인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성형으로 몸이나 얼굴 형태는 바뀔지 몰라도 색으로 드러나는 건강상태는 숨길 수 없기 때문이리라. 윤극영의 「설」에서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드리고/우리언니 저고리 노랑 저고리, 우리 동생 저고리 색동저고리/아버지와 어머니 호사내시고’ 그리해 ‘나는 나는 설날이 참말 좋아요’라는 동요는 바로 이 사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흑백영화, TV에서 1981년 4월 1일을 기해 총천연색 영화, 텔레비전 컬러화는 화려한 영상세계를 열어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미적 감각을 한층 발전시켰다. 이미 미국에서는 1951년 CBS가 처음으로 컬러화면을 내보냈지만 그만큼 늦었어도 우리나라에선 컬러영상의 색 재현에서 질감의 문제를 극복하고 그 다음 단계로 표현의 차별화를 추구한 이래로 2000년 이후 디지털TV 시대에 이른 요즘 흑백사진 D.&P.가게가 폐점에 이르게 되고 영화에서도 흑백화면은 과거 기억용 화면으로 밖에는 삽입되지 않을 정도로 유색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 ‘부모님들이 보는 신문은 드라마와 사고들로 온통 흑백이지만 내가 보는 잡지는 재미있는 이야기들과 동시들로 아주 명랑하고 유치찬란 아니 오색찬란하다’는 ‘신문과 잡지’. 게다가 목장에서 오래 갇혀 사는 동물마저도 총천연색 자연을 보고 싶어 할 정도로. 아름다운 초록색이 끝없이 펼쳐진 목장에서 암소마저도 목장 너머로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날마다 초록 풀만을 먹고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초록색이어서 싫증난 데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미셀 피크말의 글, 에릭 바뛰의 그림 책인 『물총새와 색깔나들이』(원제: 색깔 낚시꾼Pecheur de Couleurs), 여명미디어, 2000)의 주인공 당딘느가 친구 물총새 마르탱에게 예쁜 다른 색의 나라를 가보고 싶다고 부탁하게 된다. 물총새와 함께 떠난 첫 여행은 검정색의 밤의 나라였고 둥근 달을 바라보면서 하얀 나라를 꿈꾸고 그 다음 나라는 목화송이보다 더 부드럽게 하얀 눈이 내리고 있는 나라였고 그 다음엔 청록빛깔, 짙은 남빛, 보랏빛을 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나라, 그 수평선 위를 지나고 있는 배를 보고 다시 꿈을 꾼다. 그 후 노란 모래사막을 지났고 모래 언덕위로 떠오르는 붉은 태양의 나라로 간다. 거기서 처음으로 보는 무지개 나라에 도착한다. 마르탱 물총새가 당딘느 암소를 열기구에 태워 노랑 파랑 빨강 까망 초록 그리고 하양 온갖 꽃으로 울긋불긋한 바둑판을 이루고 있는 무지개 나라 꽃밭을 보여주었다. 모처럼 물총새 덕분에 너무 근사하고 멋진 색깔나들이를 했지만 암소는 비로소 깨닫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깔은 역시 초록이고 초록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깔인데 그건 바로 내가 먹고 살고 있는 목장의 초록 풀 때문이라고 물총새에게 고백하게 된다. 그리고 물총새 날개에 색깔나라를 여행하면서 보았던 아름다운 색깔들이 다 들어 있어 문득 또 어디론가 여행을 가고 싶을 땐 다시는 건초 풀을 담아 애써 여행 가방을 꾸리지 않고도 물총새에게 와달라는 문자만 날리면 된다는 것도. 여기에 번역한 11명의 프랑스 대시인들의 어린이를 위한 아니 어른들의 어린시절 마이크로-코스모스인 동심으로 각인된 색깔에 관한 동시들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색깔에 대해 깊이 너비로 통찰 할 수 있게 한다. 여기 처음으로 옮겨 본 열 한 명의 프랑스 동시들은 독자의 명도-채색-보색 감각능력에 따라 글로 그린 색채론에 감응하는 반응이 어떠한지를 실험할 수 있도록 소개하는 걸로 그치고 따로 개인적인 해설을 하지 않을 생각이다. 다만 색 모음집을 기회로 프랑스 어린이를 위해 주변 환경에서 관찰하면 보고 느끼면서 색깔에 관해 자연스럽게 배우고 익힐 수 있도록 그림과 더불어 글로 시도한 꼬린느 알보Corinne Albaut의 『무지개 동시집Comptines Arc-En-Ciel』(악트 쉬드 주니어Actes Sud Junior출판사 1999)을 가지고 비교 분석하기로 한다  ‘사계절의 색깔, 무지개처럼 명랑하고 목화 솜처럼 가벼운 동시들, 변덕쟁이 변색의 귀재카멜레온의 모자이크 동시들, 아주 미묘한 구석이 많은 수채화이거나 악동의 연필로 크로키한 동시들을 맛보기 위한 것이다.’는 취지의 이 동시집은 도미니크 티보Dominique Thibault의 파스텔 톤 그림으로 색깔의 나라로 초대된 독자와 총천연색 색깔 나들이를 해보자. 프랑스는 국기가 삼색기ldrapeau tricolore로 파랑-하양-빨강인데 이 삼색은 각각 자유-평등-박애라는 국가의 3대 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폴란드 영화감독 키에슬로프스키는 이 삼색-파랑bleu/하양blanc/빨강rouge으로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관용이라는 톨레랑스tolerance가 프랑스에서 만연하는 데는 십인십색이기에 ‘취향이나 색깔은 문제 삼지 말아야 한다Des gouts et des couleurs on ne discute pas’는 속담에 기여한 건 아닐까? 예술의 나라 건축의 나라 프랑스에선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의 옷이나 갖고 노는 장난감이나 사용하는 물건에 원색을 잘 사용하지 않는데다 색에 대해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는 방법으로 으뜸인 많은 그림책과 색에 관한 동시를 통해 동시에 자연학습체험으로 아이들은 절로 색을 인지하게 된다.  네델란드 작가 리오니의 글/그림책 『파랑이와 노랑이』(물구나무, 2003)에선 개인과 개인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관계를 주제로 다루면서 어린아이의 독립된 자아의식을 보여준다. 손자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집안에 있던 《라이프》지의 종이를 찢어서 즉흥적으로 구성 시각적으로 명확하면서도 유머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종이들은 의인화되어 인간 세계와 비슷한 공간에서 살아 움직인다. 사람을 상징하는 종이는 색다른 종잇조각과의 접촉으로 가족 친구 놀이 하교 등과의 핵심적인 관계를 보여준다. 개성 있는 회화적 표현 방식과 한 장한 장 페이지마다 돌아가며 연결되는 의미는 굉장한 동질성으로 부드럽게 이어진다. 이야기의 완벽한 흐름은 새롭게 일어나는 사건을 전체적이며 단계적으로 완전하게 표현한다. 그림의 바탕색은 공간을 설정하여 색종이 조각을 포용하며 색종이 조각과 강한 색의 대비를 이루면서 각기 다른 색종이의 개별성을 잘 부각 시킨다. 텅 빈 하얀 배경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것을 자유롭게 상상하도록 만든다. 교실을 상징적으로 규정하는 검은 사각형에는 학생이 교실 책상에 얌전히 앉아 있듯이 여러 색의 종잇조각을 정렬해 놓았다. 무거운 느낌의 검정색은 어린이가 느끼는 지루함과 얌전히 앉아 있어야 하는 딱딱한 부동자세 등 학교에서 느끼게 되는 억압을 잘 나타낸다. 파랑이가 친구 노랑이를 정신없이 찾는다. 온통 검정색으로 덮인 배경을 통해 당황한 파랑이의 심리를 너무나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그 다음 장면은 갑자기 노랑이를 발견해서 기쁜 파랑이의 마음을 선명한 빨강색 바탕으로 표현한다. 색들은 무척 단순한 원색이고 간결하지만 색의 상호관계와 형태를 조화롭고 상징적으로 시각적으로 산뜻하고 아름다운 느낌을 준다. 어린이는 그림을 보면서 색과 형태를 통하여 사유하는 모험을 하면 시각의 조화를 배우게 된다. 먼저 활을 쏘는 과녁은 바깥 원주로부터 하양-까망-파랑-빨강-노랑으로 오방색인데 이 과녁 색으로 이미 고정되어 사용되는 합성어가 꽤 많이 사용되고 있다 :  하얀 거짓말, 흰구름, 백지, 백발, 백포도주, 백자/블랙 유머, 블랙 커피, 검은 고양이, 흑빵/파랑새, 청룡, 청마, 청기와, 푸른 수염, 청자/홍해, 적포도주, 적혈구, 붉은 군대, 홍삼/황인종, 누런 이빨, 황해, 황열, 노른자위처럼 여러 색은 그 단어를 구체적으로 상징 정의하는데 필수이다. 그리하여 코카 나뭇잎과 콜라 열매라는 이름으로 처음엔 소화제로 판매된 코카콜라가 음료수로 판매를 시도한 것은 사장 로버트 우드러프인데 , , , , 콜라가 세계의 대체음료로 장악하기까지는 초록과 빨강색의 힘이 작용한 셈이다. 콜라 병의 녹색은 ‘조지아 그린’이라 불리기도 하고 ‘코카콜라의 빨강’이라 불리는 색상도 상표로 등록되어 있을 정도이다. 빨강이 왜 눈에 잘 띄는가 하면 색채심리학적으로 스펙트럼의 적색 쪽의 색깔들은 눈의 망막 조금 뒤에서 초점이 만들어진다. 따라서 적색은 보고 있는 동안 눈 쪽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지고 청색은 눈의 망막 조금 앞에서 초점이 만들어져 멀어져 가는 듯이 나타난다. 적색은 정력과 흥분의 색이고 전세계 국기의 45%에 적색이 사용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겨울에도 산타가 코크를 마시는 광고 덕분에 청량음료 콜라는 계절을 모르는 갈증처럼 불황을 모르는 전천후 아니 철부지 음료가 되고 만 것은 그만큼 색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이처럼 이 세상은 온통 색이 지배하고 있다 : ‘반들반들 빛나는 토마토, 강렬한 초록색 상치, 하얗고 둥그런 버섯, 반으로 쪼개어 노른자에 마요네즈를 얹은 삶은 달걀, 검붉은 석류석 색의 무, 금빛 낟알의 옥수수, 양념의 구름과 파슬리의 살랑거림’이란 꼬린느의 「복합 샐러드」처럼 그리고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 잿빛 연못 위로 무지개가 미소 짓는다 총천연색으로/하늘이 울고 있다 큰 소리를 내며 무지개가 전보다 심하게 소리 내 웃는다 수채화처럼 명랑하게’라는 「즐거운 무지개」만큼이나 김용택의 섬진강 아이도 오줌으로 「무지개다리」를 놓을 만큼 ‘아주 많이 마려웠던 오줌을 참고 해가 쨍쨍 비칠 때 쪽 싸면 작은 줄기는 밑으로 떨어져 보라색과 파남색을 만들고 굵은 오줌을 네 가지 색을 만들어 무지개 다리를 만들었다.’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까지도 색 투성이다. 일찍이 시인 랭보는 심지어 5가지 모음(아-에-이-오-우)을 색으로 표현하지 않았던가! ‘아’에 해당하는 모음 ‘A’는 검정, ‘에’에 해당하는 모음 ‘E’는 하양, ‘이’에 해당하는 모음 ‘I’는 빨강, ‘우’에 해당하는 모음 ‘U’는 초록, ‘오’에 해당하는 모음 ‘O’는 파랑이라 했다 A는 새벽이 등장하는 어둠의 세계 동쪽하늘을 의미하고 E는 아지랑이, 안개 즉 흰 새벽빛을 치환한 것이다. I는 적색 새벽빛의 주홍빛 피 분노를 상징 U는 녹색의 바다 부지런히 밀려드는 물결의 해면 그리고 O는 오메가, 새벽의 절정을 알리는 나팔의 팡파레인데 나팔은 놋쇠의 황금색과 함께 그 앞면의 형태 O의 끝 오메가로 빛의 색깔과 소리의 조화correspondance를 이룬다. 보들레르가 ‘향기, 색깔, 소리들은 서로 반응한다.’고 말한 것처럼……. 랭보 이후 많은 장래가 촉망된 프랑스 어린이poete en herbe들은 자기만의 독특한  모음-색깔론을 피력하여 상상력을 풍부하게 하고 있다. 미리암이란 친구는 ‘I’ 는 풀잎의 초록이라 했다. I를 많이 그리면IIIIIIIII 혹은 iiiiiiiii처럼 풀처럼 보인다나 어쩐다나? 늘 푸르게 보이는 하늘만 해도 아침과 저녁 때 비가 올 때 와 눈이 내릴 때 달과 별이 빛나는 밤과 구름 낀 밤하늘 색이 다르다 : ‘아침 해가 떠오를 땐 빨간 하늘/소나기 비가 올 땐 검은 하늘/펄펄 눈 내릴 땐 하얀 하늘/해님 달님 없어질 땐 어두운 하늘/날마다 변해가는 요술 하늘’의 김신철의 「요술 하늘」과 ‘풀벌레 얘기하며 혼자 피는 하얀 들꽃처럼/내 마음 언제나 하얀색 될래요/별님과 얘기하며 몰래 피는 파란 산꽃처럼 내 마음 언제나 파란 색 될래요’의 김완기의「내 마음」처럼. 그리고 색의 착시현상으로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윤석중의 「꽃밭」을 들수 있다. ‘아기가 꽃밭에서/넘어졌습니다/정강이에 정강이에/새빨간 피/아기는 으아 울었습니다/한참 울다 자세 보니/그건 그건 피가 아니고/새빨간 새빨간 꽃잎이었습니다.’ 그리고 광속시대에 살고 있는 요즘 자연마저도 거의 다 바뀌어 가고 있어 누군가가 염려한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은 ‘자연’이란 단어밖에 남지 않을 거라지만 아직 색은 우리가 살고 있는 주위에서 자연스레 접할 수 있다. 권태응의 「감자꽃」의 ‘자주꽃 핀 건/자주 감자/파 보나 마나/자주 감자//하얀 꽃 핀 건/하얀 감자/파 보나 마나/하얀 감자’는 꼬린느 알보의 「아주 하얀」의 ‘하얗다 눈송이처럼 양처럼 목화처럼/하얗다 무처럼 우유잔처럼 은방울꽃처럼/하얗다 하얀 빵을 뜯어 먹는 네 치아처럼’과 비교해보면 권태응은 눈에 보이는 꽃과 보이지 않는 (불어로는 감자를 ‘땅의 사과pomme de terrre’라 일컬음) 땅 속에 감추고 있는 주먹, 감자 색이 일치함을 보여 주고 꼬린느 알보는 은유를 사용하여 하얀색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모기윤의 「눈꽃새」의 ‘하얀 눈 하얀 눈 어째서 하얀가 마음이 맑으니 하얗지. 빨강 꽃 빨강 꽃 어째서 빨간가 마음이 예쁘니 빨갛지. 파랑새 파랑새 어째서 파란가 파란 콩 먹으니 파랗지’, 그리고 어효선의 「파란 마음 하얀 마음」의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에요 산도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인 속에서 파아란 하늘 보고 자라니까요/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겨울엔 겨울엔 하얄거예요 산도들도 지붕도 하얀 눈으로 하얗게 하얗게 덮인 속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자라니까요’처럼 우리의 정신에게까지 색의 연금술은 그 영향을 미친다.  결정적으로 박경종의 「초록 바다」의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 파란 하늘빛 물이 들지요 어여쁜 초록빛 손이 되지요 초록빛 여울물에 두 발을 담그면 물결이 살랑 어루만져요 우리 순이 손처럼 간지럼 줘요’는 색과 혼연일체 가능함을 일깨워 준다. 그리고 ‘파랑도 아니고 초록도 아닌 투명한 유리잔은 절망한다. 빛이 자기를 통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안에 우유를 부으면 금새 하얗게 된다. 놀랍다’는 「무색 유리잔」은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속담으로 ‘옷은 중을 만들지 않는다L’habit ne fait pas le moine‘속담과는 반대로 유리잔은 내용물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신이 가능함도……. 하지만 색이 섞여 또 다른 색이 되는 경우 꼬린느는 ‘노랑이 빨강과 춤을 춘다 서로 몸을 흔들며 움직인다 오렌지색에게로 돌아간다. 거참 이상하다!/파랑이 노랑과 수영한다. 론 강에서 그들은 온통 초록이 된다. 이게 무슨 일이람!/빨강이 파랑을 바라본다. 두 눈을 똑바로 그들은 보라가 된다. 그것 참 지독히 따분한 일이군!’이라며 「뉘앙스」에서 색상이 다른 두 빛깔이 합하여 다른 빛깔로 변하는 것을 보여준다. 검정에 하양을 섞으면 회색이 되는데 꼬린느는 검정과 회색」에서 ‘나는 검정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회색을 좋아한다. 나는 저녁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밤을 좋아한다.’고 색깔과 현실을 동일시할 줄 안다. 그리고 「생쥐와 코끼리」에선 한 놈은 너무 작고 다른 놈은 너무 크고, 한 놈은 긴 코 다른 놈은 주둥일 가지고 있고, 한 놈은 큰소리로 울부짖고 다른 놈은 작은 소리로 찍찍대고, 생김새도 달라 차이가 많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 두 놈은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색깔이 회색으로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검정과 하양이 함께 있으나 섞이지 않는 걸로 피아노 건반이 있다. 피아노는 하얀 건반 52개, 검은 건반 36개, 전부 88개의 건반을 갖고 있다. ‘도-레-미-파-솔 하얀 건반은 재미있게 웃지만 반음 올림표, 샤프#기호와 반음 내림표, 플랫♭기호인 검은 건반은 상복을 입고 솔-파-미-레-도 슬픔에 잠긴다.’는 검정과 하양, 그리고 「신호등의 빨간 불과 초록 불」에선 색깔의 상징에 사람들이 따르는 것을 보여 준다. ‘빨간 꼬맹이다 :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보행자들 기다려요 우리/초록 꼬맹이다 : 이번엔 정반대다. 보행자들, 건너요 우리!’ 그리고 총천연색의 아름다움을 배우게 하는 동시로 「공작새」와 「극락조」그리고 「불꽃놀이」가 있다. ‘이것 봐, 공작새, 우린 널 기다리고 있어! 네 꼬리의 깃털 속에 초록-파랑 커다란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나는 것을! 제발 부탁인데 꼬리를 부채처럼 한번만 펴 우리에게 보여줘.’라는 「공작새」, 그리고 파라다이스의 새 ‘여기서 아주 먼 나라에 극락조가 살고 있다. 산불처럼 붉은 불 깃털이 파란 하늘에 타오르고 있다.’는 「극락조」또한 ‘색종이 조각 비처럼 조명탄 불꽃이 밤하늘을 번쩍이는 금속조각으로 콕콕 쪼아대면서 우릴 매혹시킨다. 두 눈엔 별들로 가득한 관중들은 박수갈채를 보낸다. 꽃불놀이 만세!’라는 「불꽃놀이」, 하지만 이 ‘불꽃놀이’로 태어난 시인이 있으니 그가 바로 쟈크 프레베르Jacques Préert이다. ‘엄마 뱃속 羊水속에서 내가 태어난 것은 겨울 2월 어느 밤이었다. 여러 달 전 봄이 한창일 때 엄마 아빠 사이 불꽃놀이가 있었는데 그건 생명의 태양이었다. 그리해 그 안 에 들어 간 내 몸 속에 그들은 피를 부어주었다. 그건 지하 술 창고의 것이 아닌 생명의 샘 포도주였다. 그리해 나도 언젠가 그들처럼 떠나가리라.’는 「축제」에선 불꽃놀이는 밤하늘을 잠깐 동안 찬란하게 아름답게 수놓고 이내 추락 사라지는 허망한 것이 아닌 생명의 꽃으로 환원된다. ‘밤이면 빛나고 반짝이는 저 빛의 정점은 무엇인가? 빛나는 이 작은 곤충은 바로 반딧불이’라는 「반딧불이」는 제 혼자서 조용히 소리 없이 요란스런 폭죽소리를 내지 않고 불꽃놀이를 한다. 캄캄한 밤에 불 밝힌 창호지문에 그림자로 드러나는 수놓은 여인의 침묵을 밤의 정적에 더해준다.  봄 여름 가고 가을 겨울을 지나노라면 사계절의 다양한 색들로 다채롭게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봄의 색깔들은 꽃들과 들판의 색들이다. 여름은 초록-파란색이다 바다 위 파도처럼. 가을의 색깔들은 바람에 바스락대며 떨고 있는 나뭇잎 색들이다. 겨울은 연못 위 얼음처럼 빛나는 하얀색이다’는 「계절의 색깔」처럼 사시사철 변하는 색을 알기 위해선 우린 기다림을 배워야 한다.  ‘새벽에 하얀 가벼운 베일이 들판, 시냇물들 길들 위로 펼쳐진다. 시골마을은 잠에서 태어난다. 색깔들을 되돌려 주려고. 나무들과 꽃들은 태양을 기다리고.’라는 「새벽에」처럼. 그런 다음 우리는 ‘난 제비 깃털로 온통 파스텔 톤으로 수채화를 그리고 싶다. 거기에 바다를 춤추게 해 가볍게 파도가 일렁이도록 파랑 색과 초록색을 칠할 것이다. 그리고 그 위다 구름들을, 내 그림책들만큼 역시 가볍고 역시 얌전한, 구름들을 살짝 올려놓을 것이다.’는 「수채화」처럼 이젠 색을 가지고 놀면서 이 세상이 색처럼 다양하게 조화롭게 때론 세탁기 통 속, 옷처럼 섞이기도 하고 때론 그냥 옆에 있어줘서 그 색이 돋보이게 해주며 ‘마가레뜨의 정원은 화가가 자기가 좋아하는 모든 색을 짜 놓은 팔레트를 닮았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가장하여 마가레뜨는 실제론 자기가 초대한 사람들에게 선물로 줄 꽃다발을 만들고 있다.’는 「마가레트의 꽃다발」처럼 서로 묶여 사는 법을 배울 일이다.  모리스 카렘(1899-1978) : 초등학교 교사를 지낸 후에 그는 시에만 전념했고 널리 아이들에 의해 인용되는 수많은 시작품들을 남겼다. 그는 시에 세상을 살면서 믿고 얻는 행복을 표현하고 있다. 앙드레 이베르노(1910-2005) : 이란 동시처럼 단순하고 통찰력 있는 시의 저자인 그녀는 그녀가 사랑했던 작가 죠르즈 이베르노가 죽고 난 후 그를 추억하며 그와의 변함 없는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저녁이면 오는 것Qui mene au soir』와 『죽은 물가에서Au bord des eaux  mortes』. 막스 쟈콥(1876-1994) : 근대주의 시인, 초현실주의 선구자, 아폴리네르Apollinaire와 피카소Picasso와 친구인 그는 뷔르레스크(고상하고 웅장한 주제를 비속화함으로써 희극적 효과를 자아내는 장르)하고 현학적인 그리고 의미로 가득하지만 제멋대로인 작품을 남겼다. 끌로드 루와(1915-1997) : 소설가, 수필가, 비평가, 시인, 대 여행가이면서 현대 세상에 대해 그리고 인간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것에 대해 아주 예민, 민감한 끌로드 루와는 그 중에서도 아이들을 위한 맛깔스러운 시들을 썼다. 모리스 카렘((1899-1978) : 초등학교 교사를 지낸 후에 그는 시에만 전념했고 널리 아이들에 의해 인용되는 수 많은 시작품들을 남겼다. 그는 세상에서 얻은 행복을 시에 표현하고 하고 있다. 폴 엘루아르(1895-1952) : 초현실주의 시인, 참여시인, 자유를 위해 투쟁한 엘루아르는 항상 이길 원했다. 소박하고 맑고 정열적인 그의 시는 사랑을, 찾아온 봄처럼 거듭남을, 욕망을 노래한다. 모리스 퐁뵈르((1906-1981) : 문학 교수인 그는 초현실주의자 측에서 우회한 후에 진짜 사물에 대한 취미를 되찾았다. 토지에 대한 취미랑, 언어의 순수성과 익살 그리고 말놀이에 대한 그의 사랑을 그대로 다 간직한 채…    폴 포르(1872-1960) :  온갖 인간성과 건강한 부드러움에서 영감을 얻는 다작 시인인 그는 1896년에 프랑스 발라드『Ballades Françaises』즉 짧은 시형의 일종라는 첫 시집을 출판했다. 1912년에 시인들의 왕자로 선출. 연극에 심취한 그는 파리에 예술극장le Théâtre d’Art을 창설했는데 이것은 작품극장le Théâtre de l’Oeuvre이 되었다. 뮈리엘 베르스티쉘 : 프랑스 북부 릴르Lille에서 태어난 그녀는 글쓰기와 낭독-공연 아틀리에 진행자, 『황혼과 새벽 사이Entre le crépuscule et l’aube』와 『시의 대기실에 있는 체크무늬 표범나비Damier, dans l’antichambre du poème』는 시집 외에 열 권의 시집을 출판했다. *알렝 보스케(1919-1998) : 그의 시에선 사람과 우주, 물질, 언어, 사람과 그 자신 사이의 새 관계를 새롭게 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작가이면서 문학 비평가인 그는 역시 수많은 소설을 출판하였다. 마리 노엘(1883-1967) : 1966년에 파리 시 문학 대상을 받은 그녀는 매일매일 일상의 단순한 언어로 신선함과 열정이 가득한 시들을 썼다. 가끔은 노래를 닮은 그런 시들 또한. 필립 쑤포(1897-1990) : 여행가, 기자, 라디오 진행자, 비평가인 그는 다다이즘 운동의 선전자 중 하나이고 후엔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과 더불어 초현실주의를 창설하였다 특히 자동글쓰기(1920년『매혹적인 들Les champs magnetiques』를 통해서. 강금희  1949년 서울 출생. 한국외국어대학 불문과 졸업. 프랑스 프로방스대학 불문학 박사 수료. 저서 『바이블팡세·불붙은 나무떨기』,번역서 『지나가는 슬픔』, 『다음 사랑』, 『영원의 계곡』외 다수. 현재 총신대 및 신학대학원에 출강.   
648    시는 바람을 그리는 작업이다... 댓글:  조회:2346  추천:0  2017-08-17
뼈아픈 별을 찾아서 /이승하  - 아들에게  취해서 귀가하는 어느 밤이 온다면  집에 당도하기 전에 꼭 한 번  하늘을 보아라 별이 있느냐?  별이 한두 개밖에 없는  도회지의 하늘이건  별이 지천으로 돋아난  여행지의 하늘이건  뼈아픈 별 몇이서  너를 찾고 있을 테니  그 별에게 눈 맞춘 다음에야  벨을 눌러야 한다  잠이 들어야 한다 아들아  천상의 별을 찾는다고 네 발 밑에서  지렁이나 개미가 죽게 하지 말기를  통증을 느끼는 것들을 가엾어하지 않는다면  네 목숨의 값어치는 그 미물과 같지  아들아 네 등뒤로 떨어지며 무수히 죽어간  별똥별의 이름은 없어 뼈아픈 별이기에  영원히 반짝이지 않는단다.  수상문학상 : 2002년 『뼈아픈 별을 찾아서』시집으로 제2회 《지훈문학상》수상               젊은 별에게 / 이승하  다시 밤이다  시야에 출렁이는 겨울 별자리 어디  자전과 공전의 질서를 깨뜨릴 수 없어 고뇌하는  젊은 별이 있다면, 지금 나에게 신호하라  내 짙푸른 꿈 하나 쏘아 올릴 터이니  광년의 거리 밖 너의 괴로움과  내 바람의 외투를 걸치고 길 나서던 날들의 절망감이  만나서 녹아 내릴 수 있다면  내 아무런 확신 없이 떠돌던 삶이  네 울분으로 들끓는 코로나  백만 도가 넘는 뜨거움을  만나서 녹아 내릴 수 있다면  고생대, 중생대, 참 얼마나 많은 화석된 시간을 지나  겨울 별자리와 나는 이 밤에  이 우주의 한 귀퉁이에서  대좌하고 있는가, 밤마다  내 참 얼마나 많은 별에다  기성(旣成)에 대한 증오의 화살을 쏘아 올렸던가  어디를 가도 안주할 곳은 없었으니  멀고 먼 시간의 바다인 황도  12궁이 가리키는 세상을 향해 떠났었다, 그날 이후  내 죄악의 유혹에 얼마나 자주 굴복했던가  소리내어 울면서 버린 동정을  얼마나 오래 저주했던가  나보다 더 오래 질서이신 신을 저주한 사람이 있으면  만나고 싶다, 그를 힘껏 포옹하리  지금은 밤이다, 끝 모를 어둠  몸부림치는 서로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밤이지, 시작 모를 어둠이  지상에 가득 찰 종말의 날이  내 생애의 어느 날이 될지라도  어둠 속에서 표류하는 젊은 별이여  너를 축복하리, 환하게 웃으며 반기리, 환히  환희의 날이 너와 나의 사후에 올지라도  왜 이리 두려울까, 두렵지만 지금은 밤이니  질서에 길들기를 거부하는 젊은 별이여  희뿌연 새벽이 오기 전에  내게 신호하라, 내 온몸으로 뜨겁게  뜨겁게 너와 결합하고 싶다.                짐진 자를 위하여 / 이승하  너의 짐을 져주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던가를  너는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나는 고통에 짓눌려 딱정벌레처럼 위축되어  이게, 기어가는 것인지 죽어가는 것인지  촉각 잘린 귀뚜라미처럼  관절염 앓는 어머니처럼  나는 살아가고 있는데  네가 캄캄한 밤에 돌이 되어  내 앞에 엎드리면  나는 너를 지고  너의 짐까지 지고  어디쯤에 이르러 숨돌려야 할까  울음 참으며 당도한 곳이 막다른 골목이면  울음을 그냥 터뜨려야 하는지  돌아서서 다시 걷기 시작해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이기 때문에 무력감에 절망하고  공포에 질려 부르짖기도 하지만  기적을 꿈꾸진 않으리라  부끄러움에 떨며 받아들이리라 너의 짐을  나의 짐 위에 너의 짐을 얹어  더 어두운 세계를 찾아서 갈 터이니  자거라 지금은 잠시 자두어야 할 때.                  바람 그리기 / 이승하  황혼의 감천*으로 너를 보낸다 누이야  네가 혼자 사분거리다 냇둑을 뛰어가면  다옥한 네 머리카락 황금빛으로 빛났다  망각의 시내 이편에서 나는 지켜보았다, 너는  아무런 수치심도 없이, 두려움 하나 없이  오롯이 옷을 벗었다  하나씩 발 아래 옷이 쌓이면  도리암직한 네 몸 청동빛이 났다  그때 감천은 무르춤하였고,  깊이깊이 한숨짓는 바람의 다발  울음 참고 나는 오래 지켜보아야 했다  그 무력했던 날들  누이는 어느 날부터인가  월경이 멎고, 식욕을 잃었다  낮에 웃고 밤에 바장이고  혼자 웃고 혼자 흐느끼고  잘 쉬어라 쉬어  네 곁에서 나직이 휘파람 불면  누이는 일어나 두 팔 아느작거리며  집을 나섰다 마을을 나서  혼자 가만가만 웃다 바람이 이끌면  네 혼을 불러내는 정든 시내  그 냇둑에 서서 바람을 그리겠다고  바람의 매무새를 그리겠다고  감천아, 감천의 바람아, 착란의 이 땅아  내 누이는 영원히 어린애란다  나와 누이를 연결시켜주는 끈은 없단다  버려진 내 누이, 너는 아직 곱게도 미쳐……  *감천(甘川):김천시 외곽을 흐르는 시내.                畵家 뭉크와 함께 / 이승하  어디서 우 울음소리가 드 들려  겨 겨 견딜 수가 없어 나 난 말야  토 토하고 싶어 울음소리가  끄 끊어질 듯 끄 끊이지 않고  드 들려와  야 양팔을 벌리고 과 과녁에 서 있는  그런 부 불안의 생김새들  우우 그런 치욕적인  과 광경을 보면 소 소름 끼쳐  다 다 달아나고 싶어  도 同化야 도 童話의 세계야  저놈의 소리 저 우 울음소리  세 세기말의 배후에서 무 무수한 학살극  바 발이 잘 떼어지지 않아 그런데  자 자백하라구? 내가 무얼 어쨌기에  소 소름 끼쳐 터 텅 빈 도시  아니 우 웃는 소리야 끝내는  끝내는 미 미쳐버릴지 모른다  우우 보트 피플이여 텅 빈 세계여  나는 부 부 부인할 것이다.              집짓기 / 이승하  비어 있는 들판에  돌을 실어 나른다  오래 가꾸어온  몇 조각 꿈도 실어 나른다  갈 데 없던 시절의  공연한 헛기침들  피붙이 같은 材木에게  이제는 체온도 전하여본다  널빤지를 딛고 올라서면  세상의 한쪽은 내 것이 될까  여백의 하늘이 곁에 와 설까  한없이 무거워져갈  동시대인의 작업복  내가 띄운 먹줄은  누구의 줄에 가 닿을 건지……  바닥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아올리면 너도 쉴 수 있는 곳  창을 내리라 아침 알리는 사랑의 빛  보잘것없는 이 터전에도  제 나름의 의미를 부여해야지  그러나 언젠가는  무너진다 무너져내려  먼지가 될 나와 우리와  모두의 험한 생계  비어 있는 들판에  다시 기둥을 세운다  먼발치에서 흘긋 보면  조붓하고 허약한 공간이지만  시멘트 반죽마다 들이는 구슬땀,  또 한 번의 진통을  기억하기 위하여.              늘 혼자였던 섬 / 이승하  혼자 잠든 긴 밤들이 있었다  바람 소리 물결 소리 자장가 삼아  앓아도 혼자 앓았던 많은 밤들이 있었다  독도를 삼키려 하지 말아라  독도를 내 것이라 말하지 말아라  내 돌품에 뿌리내린 식물들이 알고 있다  내 돌머리에 깃든 새들이 알고 있다  내 돌밭에 기어다니는 바닷게들이 다 안다  나 혼자서  밤에는 동해 저 큰 바다 다스렸고  낮에는 저 뜨거운 태양과 싸웠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죽도가 아닌 독도  독도는 온전히 내 것이로다               찬양 아침 / 이승하(李昇夏, 1960 ~ )  발작이 멎고……고비를 넘겼다  밤이 물러가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창 열고 하늘의 끄트머리를 본다  한 뼘의 하늘이 파들파들 떨고 있다  일찍 일어난 새의 무리가  먼동을 어슬어슬 트게 한다  갈증 날 때 마시는 물처럼 차디찬 공기  환호하며 뜀박질하는 공기의 입자들  수억의 폐포를 낱낱이 일깨우며  생명이 생명인 것을 확인케 한다  머리맡에 있는 몇 송이 꽃  힘겨운 밤을 함께 넘기느라  고개 푹 수그리고 있다  돋을볕 들자 그대 두 눈 가득 고인 눈물과  이마 가득 돋아난 땀방울이 반짝인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아침이다  너와 나의 머리 뒤로 놀빛이 번지는  이 경건한 아침을 위해  나 이제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살아난 것이다.  ㅡ이승하 시집,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문학사상사, 2005)에서     //       상처   산 개미가 죽은 개미를 물고 어디론가 가는 광경을 어린 시절 본 적이 있다   산 군인이 죽은 군인을 업고 비틀대며 가는 장면을 영화관에서 본 적이 있다   상처입은 자는 알 것이다 상처입은 타인한테 다가가 그 상처 닦아주고 싸매주고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상처입힌 자들을 향해 외치고 싶어지는 이유를   상한 개가 상한 개한테 다가가 상처 핥아주는 모습을 나는 오늘 개시장을 지나가다 보았다   어머니가 가볍다     아이고―    어머니는 이 한마디를 하고   내 등에 업히셨다     경의선도 복구 공사가 한창인데   성당 가는 길에 넘어져   척추를 다치신 어머니     받아내는 동안 이렇게 작아진   어머니의 몸 업고 보니   가볍다 뜻밖에도 딱딱하다     이제 보니 승하가 장골이네   내 아픈 니를 업고 그때……   어무이, 그 얘기 좀 고만 하소     똥오줌 누고 싶을 때 못 눠   물기 기름기 다 빠진 70년 세월 업으니   내 등이 금방 따뜻해진다.   아버지의 성기를 노래하고 싶다    볼품없이 누워 계신 아버지 차갑고 반응이 없는 손 눈은 응시하지 않는다 입은 말하지 않는다 오줌의 배출을 대신해주는 도뇨관(導尿管)과 코에서부터 늘어져 있는 음식 튜브를 떼어버린다면?   항문과 그 부근을 물휴지로 닦은 뒤 더러워진 기저귀 속에 넣어 곱게 접어 침대 밑 쓰레기통에 버린다 더럽지 않다 더럽지 않다고 다짐하며 한쪽 다리를 젖히자 눈앞에 확 드러나는 아버지의 치모와 성기   물수건으로 아버지의 몸을 닦기 시작한다 엉덩이를, 사타구니를, 허벅지를 닦는다 간호사의 찡그린 얼굴을 떠올리며 팔에다 힘을 준다 손등에 스치는 성기의 끄트머리 진저리를 치며 동작을 멈춘다 잠시, 주름져 늘어져 있는 그것을 본다   내 목숨이 여기서 출발하였으니 이제는 아버지의 성기를 노래하고 싶다 활화산의 힘으로 발기하여 세상에 씨를 뿌린 뭇 남성의 상징을 이제는 내가 노래해야겠다 우리는 모두 이것의 힘으로부터 왔다 지금은 주름져 축 늘어져 있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하나의 물건   나는 물수건을 다시 짜 와서 아버지의 마른 하체를 닦기 시작한다.   김천 우시장 탁배기 맛       이전 맛 같지 않구마     소 팔러 우시장에 나온 아부지를 따라와    승하야 니도 한 잔 묵거라    뜨물 같은 탁배기 한두 잔 얻어 마시던    그 술맛은 어데로 가삐맀는지    씹다 더 달싹해졌는데 더 씹다    어무이 치료비 마련할라꼬    큰맘 묵고 끌고 나온 한우 암소    하이고 나 원 참    200만 원도 안 준대여    또 소값 파동이래여?    소고기, 비육우 무데기로 수입한 탓이래여?    이번엔 우루과이라운드 때문이라네    내도 84년 폭락 때 죽은 뒷집 박씨 아저씨처럼    솔랑은 이 우시장에 두고 가까    우시장에 소 내삐리고 와    농약 묵고 탁 죽어삐리까    소야, 니는 죽어 괴기 될 자격이 없고    내는 살아 소 키울 자격이 없다 칸다    소야, 내 손으로 널 잡아먹긴 싫었는데    내가 널 백지 델꼬 왔다    에라이 속이 씨려 속 달랠라꼬    마시는 술맛이 왜 이 모양이고    움메에 우는 소 눈을 쳐다보며    우시장 한 켠에 앉아서 마시는 탁배기   어느 갓장이에게 들은 말       뭐 부끄럽지 않소    10년을 배와 재우 손에 익힌 것이    밤일꺼지 해가민서 한 달에    재우 두세 개 맨들어내는 것이    뭐 부끄럽지 않소이다    말총으로 날줄을, 쇠꼬리털로 씨줄을    절이고 절인 걸 또 절이고 절여    날줄 오백 열두 줄을 맨들기꺼지    기양 맨드는 기 내 일이라    눈 어둡어지는 것도 몰랐지만서도    배우로 온 사람 장사하겠다고 가고     공장에 다니는 기 낫겠다고 떠나고    이젠 늙은 마누라가 내 조수여    그래 자석새끼들한테 안 가르쳐준 것이    부끄럽다면 하냥 부끄럽소    개명한 시상에서 갓을 누가 쓴다냐    예를 누가 지킨다냐    조선色을 누가 돌본다냐    날 보로 왔으니 시인 양반    노래나 한 곡조 불러줌세    울 아배한테 배운 갓일 노래         한 코 떠라        두 코 떠라        세 코 떠라        속히 떠라               양태 뜨는 소동들아         한 코 떠서 어머님 젖값 갚고        두 코 떠서 아버님 술값 갚고     귀향       이승하 그리 멀지도 않건만  고향으로 가는 일이 참으로 힘들구나  허나, 세상의 모든 길은  저마다의 고향으로 나 있는 법  그대 태어난 곳 자라난 곳  꿈을 키웠던 그곳  사춘기 시절엔 줄곧 떠나고 싶었던 곳이어서  그대 고향을 버리고 비로소 어른이 되었지  연어도 때가 되면 모천으로 회귀하는데  한가위로다  타향의 하늘에서도 이국의 하늘에서도  두둥실 떠 있는 원반형의 달  어머니 등에 업혀 쳐다보았던 달  사랑을 잃고 술에 취해서 쳐다보았던 달  오늘밤 저 달은 한껏 발그레해지리라  인생행로 걸어도 달려도  어느 길 할 것 없이 험하기만 했다  망망대해 달려도 멈추어도  어느 뱃길 할 것 없이 무섭기만 했다  하지만 고향으로 나 있는 길에서는  지친 새도 날개를 접을 수 있다  그대 탯줄이 거기 묻혀 있기에  그대만을 기다리는 노모가 있기에  싸늘히 식은 가슴 지닌 이들이  고향에 돌아온 날은 왁자지껄하리라  따뜻한 고봉밥 넘치는 술잔  사투리가 갑자기 입에서 튀어나오고  잊어버린 친척 아이 이름을 묻는다  잃어버린 내 별명을 여기서 찾는다  내 인생의 남은 날들이여  이번 한가위만 같아라.    돌아오지 않는 새들을 기다리며           이승하 지금은 볼 수 없는 그 많은 물떼새들 왕눈물떼새, 검은가슴물떼새, 꼬리물떼새, 댕기물떼새...... 수염 돋은 개개비란 새도 있었네 물떼새 알을 쥐고 돌아오던 어린 날의 낙동강 내 오늘 한마리 물고기처럼 回遊해 왔네 아무것도 없네 그날의 기억을 소생시켜주는 것이라고는 나루터 사라진 강변에는 커다란 굴뚝이 도열, 천천히 검은 연기를 토해내고 있었네, 천천히 대지를 버린 내 영혼이 천천히 황폐해 가듯   시간에게 묻는다           이승하  시간이여 무수한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데 네가 필요한 것이냐 무수한 생명체를 소멸시키는 데 네가 필요한 것이냐 순간이 모여 영원이 되느냐 영원히 나누어져 순간들이 되느냐 가뭇없이 흘러만 가느냐 언제 출발하여 어디까지? 시간이여 고통에도 무슨 뜻이 있느냐 사후 세계에 아무런 고통이 없다면 천국이 아니냐 혹 열반이 아니냐 천국과 열반이 아닐지라도 오라 고통이여 인간들의 오랜 벗, 지층을 뚫고 별을 헤아리며 화석을 부수고 미라를 만들며.   어머니 발톱을 깎으며 유강희   햇빛도 뱃속까지 환한 봄날 마루에 앉아 어머니 발톱을 깎는다 아기처럼 좋아서 나에게 온전히 발을 맡기고 있는 이 낯선 짐승을 대체 무어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싸전다리 남부시장에서 천 원 주고 산 아이들 로봇 신발 구멍 난 그걸 아직도 싣고 다니는 알처럼 쪼그라든 어머니의 작은 발, 그러나  짜개지고, 터지고, 뭉툭해지고, 굽은 발톱들이 너무도 가볍게 툭, 툭, 튀어 멀리 날아갈 때마다 나는 화가 난다 저 왱왱거리는 발톱으로 한평생 새끼들 입에 물어 날랐을 그 뜨건 밥알들 생각하면 그걸 철없이 받아 삼킨 날들 생각하면       ―현장비평가가 뽑은『올해의 좋은시』(현대문학, 2009)     -----------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리며      이승하        작은 발을 쥐고 발톱 깎아드린다    일흔다섯 해 전에 불었던 된바람은    내 어머니의 첫 울음소리 기억하리라    이웃집에서도 들었다는 뜨거운 울음소리    이 발로 아장아장    걸음마를 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이 발로 폴짝폴짝    고무줄놀이를 한 적이 있었던 말인가    뼈마디를 덮은 살가죽    쪼글쪼글 하기가 가뭄못자리 같다    굳은살이 덮인 발바닥    딱딱하기가 거북이 등 같다    발톱 깎을 힘이 없는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린다    가만히 계셔요 어머니    잘못하면 다쳐요    어느 날부터 말을 잃어버린 어머니    고개를 끄덕이다 내 머리카락을 만진다    나 역시 말을 잃고 가만히 있으니    한쪽 팔로 내 머리를 감싸 안는다    맞닿은 창문이    온몸 흔들며 몸부림치는 날    어머니에게 안기어    일흔다섯 해 동안의 된바람 소리 듣는다       ―시집『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문학사상, 2005)          
647    쓰는 행위와 읽는 행위는 시간의 증언이며 자아의 확인이다... 댓글:  조회:1966  추천:0  2017-08-17
쓰는 행위와 읽는 행위 나호열 ■‘무엇을’과 ‘어떻게’의 문제 경상북도 고령읍 양전동 음각화는 높이 3미터 세로 6미터쯤 되는 바위에 상형되어 있다.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선사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당시의 생활상이나 제의祭儀의 풍습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라고 한다. 마을의 뒷산으로 올라가는 등성이 초입의 암각화를 바라보면서 나는 그 단단한 바위에 그림을 새겨넣고 있는 사람들과 완성된 암각화를 향하여 기도를 올리거나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의 환영을 따사한 봄볕 속에서 음미했다. 고고학자나 역사학자의 안목이 없으니 그저 땅바닥이나 도화지에 그린 어린아이들의 천진난만함으로 치부해도 좋을 법 하지만 아마도 옛사람들은 그들의 어떤 목적 때문에 힘든 노역을 자처했을 것이다. 돌보다 단단한 철을 발견하기 전이었으니 돌로 다른 돌을 깎아 정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그 목적이 굉장히 성스러웠거나 거부할 수 없는 희생을 요구할 만큼 권위적인 계층이 존재했을 것이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후대에 역사적인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대의 필요와 요구가 암각화를 제작하게 만들었고 아직도 그 내용과 뜻을 해독하지 못하는 미스테리를 속시원하게 풀 수 있는 현자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양전동 암각화나 울산 반구대 암각화가 지닌, 한 시대의 인간의 삶을 증언하는 자료로써의 가치를 인정하지만 예술작품으로 격을 높이는 데에는 주저하게 된다. 당면한 문제의 해결을 위한 모사 행위로부터 예술이 시작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고도의 직관적 심미안으로 완성되는 것이 또한 예술이기 때문이다. 더 범위를 좁혀 문학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문자를 매개로 무엇을 이야기하고 어떻게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예술로써의 품격은 다양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엇을’이 주제적 측면을 다룬다면 ‘어떻게’는 기법이나 기술의 문제가 될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기법이나 기술이 좁게는 수사학修辭學의 범위를 뜻할 수도 있고 장르적 분지分枝로 넓혀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선 ‘무엇을’의 문제를 생각해 보면 거대한 사회현상으로부터 지렁이나 제비꽃과 같은 작은 생물이나 석탄이나 암모니아와 같은 무정물에 이를 수 있겠으나 그 핵심은 인간을 둘러싼 환경에 대응하는 태도의 드러냄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인간과 인간과의 갈등과 화해, 인간과 자연과의 대립과 조화, 더 나아가서는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와 관념 간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겠고, 심리적으로 촉발된 의식의 분열이나 불안과 같은 현상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무엇을’에 해당하는 다양한 요소들의 층위를 섣불리 확정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꽃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고 해서 저급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고발하고 통일을 염원한다고 해서 무조건 고급한 작품으로 인정받는다면 이는 어불성설일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에 내포된 다양한 의미를 곰삭일 수 있는 내공을 어떻게 쌓아가고 닦아갈 수 있는가를 자각하는 일이다. 시인이나 작가는 부처나 예수가 아니다. 이미 성불을 하고 바늘구멍 같은 하늘의 문에 도달했다면 구태여 글을 쓸 이유가 없다. 그래서 여기서 내공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향해 가는 정신의 궤적이나 과정을 보여주는 일이고 거기에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미학을 성취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무엇을’에 해당되는 몇 개의 풍경들 일반적으로 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여기서는 운문의 특성이 소설에 비해 상대적으로 시공간적 제약을 덜 받는다는 것이다.─ 비유를 통한 이미지 중심적인 특성을 갖는 반면에 산문, 특히 소설은 시 보다는 다양한 메시지를 시간적 계기성을 가진 사건으로 이야기한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어느 면에서 시는 도덕지향적인 측면이 있고 소설은 그에 비해 좀더 표현의 자유를 지니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박세연의 소설 「꼬리」는 주목할 만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도시화되고 개인적 성향이 농후한 현재의 삶─가족의 의미, 성의 문제, 더 나아가서 익명을 요구하면서도 익명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고자하는 역설적인 관계를 파헤치고 있는 작품이 「꼬리」이다.  딱히 그 사람이 아니어도 좋을 것이다. 그 역시 내가 아니어도 상관없으리라. 그럼에도 지금 내게는 그가 유일한 환상이고 설레임인 것은 분명하다. 그에게 무엇을 바라거나 언제까지 함께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지금의 자유로운 사랑이, 내 안의 평화가 깨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나는 자위를 한다. 남편의 아내, 아들의 어머니는 없다. 지금 이 순간은 누구의 애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의 욕망, 절정에 이르고자 하는 간절함만이 절실할 뿐이다. 「꼬리」의 화자인 ‘나’를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위의 묘사에서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여러 주제들이 끈끈하게 서로 들러붙어 있는 형국을 만나게 된다. 솔직하게 ‘영원’보다는 내 앞에 주어진 ‘찰라’에 눈돌리지 않는 자가 어디 있는가? 누구의 무엇이 아니라 온전한 나로 존재함을 갈구하지 않는 자가 어디 있는가? ‘나’는 남편과 아들이 있는 유부녀이고, ‘나’의 남편은 한 달에 한 번 집으로 돌아오는 지방에 주재하는 회사원이다. ‘그’는 부동산 임대업으로 재산을 모은 재력가이며 기러기 아빠이다. 그들은 화요일에 만난다. 즉 그들은 서로에게 화요일의 사람일 뿐이다. 관계의 부재는 그들의 행동을 합리화시킨다. 그들은 육체적 허기를 채우고 아무도 그러한 사실을 모른다는 익명성에 안도한다. 그러나 ‘나’는 ‘그’와 결별할 것을 결심한다. 소설에 나타난 바대로는 그런 ‘나의 결심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같은 아파트에 살다가 실종된 여자와 그 아파트에서 발견된 유골이 끝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다는 ‘익명의 외로움’을 깨달아서인지 어미니가 의탁하고 있는 암자 스님의 행동 때문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티벳에 가고 싶은데 먹는 것 때문에 갈 수가 없어. 하루 두 끼 식사가 전부인데 배가 고파서 수련을 할 수가 있어야지. 보살은 배고파 봤어요?” (중략) 티벳을 모르는 나는 그런 스님을 이해하지 못한다. 40년을 수행하신 분이다. 하루 세끼 밥에 수시로 차를 마실 수 있는 정도의 여유 때문에 수행을 망설인다는 것이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도 늘 허기를 느꼈던 것 같다. ‘나’는 육체가 수반하고 있는 ‘허기’가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업業임을 깨닫고 있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나’는 교과서적인 양심 때문에 ‘그’와의 관계를 청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엔가 숨어있을 수밖에 없는 익명성이 참을 수 없는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고 자유를 처단하는 허기를 동반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나’의 남편은 조금 있으면 다시 타국으로 떠난다. 그럼에도 ‘나’는 그와의 단절을 위해 휴대전화를 던져버린다. 「꼬리」는 이렇게 끝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누군가의 가슴에는 사위어가던 불꽃이 일어서고, 어딘가에서는 그 불똥으로 재가 되어 쓰러지기도 할 것이다. 바람은 그렇게 변화무쌍한 비를 몰아오고 누군가의 삶을 바꿔놓을지도 모른다 이미 꼬리는 퇴화되어 우리에게는 없다. 없어졌지만, 그렇지만 꼬리는 우리의 정신 속에 틈입하여 여전히 바람을 일으키고 위선을 만든다. 그것이 순환되는 인간의 굴레이고 업인 것이다. 김신영의 시 「미안합니다」는 박세연의 「꼬리」가 탐색하고 있는 여러 주제 중에서 욕망과 시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 사이에 얼마나 많은 / 강물이 흘렀는지 모릅니다./ 세월이 흐르고 강물이 흐르고/ 두 번 다시 그 세월에/ 그 강물에 갈 수 없다는 아쉬움이/ 머리를 짓누릅니다./ 언제 우리가 만나서 즐겁게 웃었던 밤이/ 그렇게 빨리 지나가고/ 다시 눈 내리는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왔어도/ 다시 우리는 강물에 함께 발 담그는 세월을 낚지 못합니다.// 갈 수 없어 미안합니다/ 보고 싶어 꽃잎을 띄우며 잎차를 마시지만/ 아직 정리되지 못하고 잉태를 기다리는/ 뜻모를 날개와 씨름하고 있습니다.// 좋은 밤이 오면/ 언젠가 다시 같은 강물에/ 발 담그는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미안합니다」의 화자는 누구인가? 「꼬리」의 ‘나’인가? ‘나’의 ‘그’인가? 남편인가? 과거에 바람 났던 어머니인가? 그 누구도 아닐 수 있고 우리 모두일 수도 있는 화자는 도대체 무엇에게, 누구에게 미안함을 토로하고 있는 것인가? 「미안합니다」가 주는 노래와 서정의 즐거움과 「꼬리」가 주는 사건 훔쳐보기의 즐거움은 독자에 따라서 평가가 매우 다를 것이다. 만일 시 「미안합니다」를 엇나간 사랑의 회고라고 의미를 좁혀서 이해한다면 「꼬리」의 ‘나’가 가정으로 돌아오는 ‘허기’의 깨달음과 얼만큼 다른 것인가?  ■읽기의 즐거움 혹은 괴로움 현대적 삶의 특징은 쾌락으로 가는 통로가 다양하고 강렬한 자극을 충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망원경으로 멀리 내다보는 삶이 아니라 현미경으로 세포 하나하나를 짚어보고 그 세포 하나하나를 자극하지 않으면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없는 관성에 빠진다. 하나로 통합해서 조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를 각기 다른 조각들로 분해해서 그 미로 속에 스스로 함몰하는 것.  나는 가슴 속의 어떤 연애나 광기도/ 이 무시무시한 곳까지 함께 들어오지/ 않는다 목소리는 어디에 있고 몇 군데는/ 자아가 분리된 채 아무도 책을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는 배부르다/ 새벽이 울부짖는다/ 우리는 감출 것이 없다/ 우리는 무엇을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가/ 우리는 불평할 수 없다// 사랑했던 자리마다 폐허다// 수천 개의 불빛이 한 개의 의자를 밝혀주지 못하니/ 새벽을 사랑하는 자도 없다/ 어딘가 몇 군데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다만 미래에 만날 사람은 아직 사랑이 필요하다// 저녁이 울부짖는다/ 목소리는 날아간다/ 우리는 할 말이 없다/ 아무도 책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이 없는 길마다 폐허다 ──박순선 시 「건방진 독서」 전문 관계의 소멸을 노래하는, 아니 자아의 파멸을 증언하는 이 시는 전통적 시법으로 읽을 때 과연 시라고 할 수 있는 지 의문이 들만큼 난해하다. 박순선의 시를 평한 글을 읽어도 역시 난해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오늘의 시를 메타텍스트metatext라 했을 때, 박순선의 시는 여기에 해당된다. (중략) 박순선은 삶에서 마주치는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끊임없이 떠나고자 한다, 시에서 추구하는 것은 과거와 같은 복제된 현실이 아니라 오늘의 진실을 바르게 찾고자 하는 시각이다.(하략)  어떤 독해도 오독일 것이다. 아마도 어떤 독해에도 정답은 존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 시에서 단언하는 것은 모든 것은 불완전하고 관계를 맺는 순간 파괴되고 분절되며 ‘다만 미래에 만날 사람은 아직 사랑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이 시에서는 어떤 도덕적 가치나 계몽적 교훈을 암시하지 않는다. 날개 없는 새, 다리 없는 포유류, 인생이란 내용 없는 책을 읽는 맹목의 허위를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고백하는 절규일 뿐이다. 가치의 전복顚覆과 어법의 파괴는 전율을 일으킨다.  박주택이 『현대 한국시』 창간호 대담 「한국 현대시 100년, 파괴의 시학」에서 진단한 내용을 읽어보자.  최근의 시적 경향은 오랜 관습이었던 표현론적이고도 반영론적인 세계관을 넘어 하이퍼리얼리티의 세계관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전의 경향과는 다른 지점에 놓여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문화론적일 수도 있고 무의식적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현실 존재 저편을 접면하고 있다는 점에서 환각에 가 닿고 있기도 합니다. 현실과 존재의 해산을 통해서 의미의 해산에 이른 것입니다.  이미 하이퍼리얼리티의 세계는 우리에게 당도해 있다. 그 사실은 싫어도 인정해야만 하는 현실이다. ‘쓰는 행위’는 시간의 증언이며 자아의 확인이다. ‘읽는 행위’는 ‘쓰는 행위’의 동전의 앞면이면서 뒷면임을 인정해야 할 때가 되었다. ----------------------------------------------------- 나호열 / 1953년 충남 서천에서 태어났으며 198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낙타에 관한 질문』외 8권이 있고, 1991년 시와시학 중견시인상, 2005년 녹색시인상 수상을 수상했다. 현재 인터넷문학신문 발행인, 월간 『예술세계』 편집주간으로 있다.    
646    "풍랑, 아무도 휘파람을 불지 않는다"... 댓글:  조회:2193  추천:0  2017-08-17
  휘파람 시 모음           초록빛 휘파람 그리운 사람 그리운 날엔  초록빛 휘파람을 불자  하늘 한 모서리  지상 한 귀퉁이  해가 뜨고 지는 자리에서  원치 않는 슬픔과 고통이  우리의 삶을 그늘지게 하여도  그리운 사람이 그리운 날엔  초록빛 휘파람을 불자  민들레 홀씨처럼 가볍게  내 간절한 마음  그리운 사람에게 날아갈 수 있도록  날아가 그리운 사람의 가슴에  행복의 둥지를 틀 수 있도록  (이동식·시인, 1966-) + 휘파람 길을 걷다  주저앉고 싶어질 때면  아버지의 휘파람소리가  생각난다  비누방울로  톡톡 터지며  맑고, 투명하던 그 소리에  우리는 깔깔거리며  키가 자랐고  작업복 바지마다  풀물로 얼룩진 고단하고  누추한 생활을  동그랗게 모아  휘파람 불던  서서 꿈꾸는 나무처럼  아버지가 불렀던 휘파람소리는  어느덧 내 입으로 전해져  나는 초록으로  싱싱하게 풀물이 든다. (최대희·시인, 1958-) + 휘파람 소리 고통을 뱉어내는 소리  꿈을 이루는 소리  삶을 가꾸려는 포부를 담은 소리  염원을 지키려는 자신감에 찬 소리  피우지 못한 소망이 결국엔 꽃을 피우고  새 단장(端裝)으로 탑을 쌓는 석수장이의  안도의 한숨. (전병철·시인, 1958-) + 휘파람  풍랑이 심한 날  아무도 휘파람을 불지 않는다  (이생진·시인, 1929-) + 휘파람 불던 밤 잠 못 들고  적은 편지를  그대에게 보내오면,  편지를 읽으실 때  별처럼 눈빛 반짝이실까,  잔잔한 호수같이  웃음 지으실까,  겨울나무처럼  휘파람 불며불며  그대에게 가고 싶은 밤.  (차성우·교사 시인, 경남 거창 출생) + 휘파람새  막막한 어둠 저편, 아득히  소리내어 부를 누군가가 있다면  이 밤, 어둠만은 아니겠구나  (권경업·시인, 경북 안동 출생) + 휘파람새는 휘파람을 잘 분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휘파람새는 휘파람을 분다  휘파람새가 휘파람을 불 때  나무들은 새 쪽으로 걸어오고  구름은 새의 머리 위에 머문다  휘파람새의 휘파람은 알록달록하고  휘파람새의 휘파람은 따끈따끈하다  숲의 흔들림은 나무의 춤이다  휘파람새의 휘파람이 있는 숲은 깊고 아늑하다  젊고 아름다운 새는 젊고 아름다운 휘파람을 분다  휘파람새가 휘파람을 불면  젊고 아름다운 나무에는  젊고 아름다운 꽃이 핀다  (이기철·시인, 1943-) + 휘파람 속의 동행  그 사람은  어두운 거리를  휘파람을 불며간다  나는 그 뒤에서  조금만 떨어져  같이 걷는다  달도 없는  밤거리에서  서럽게 불어대는  휘파람 소리는  자꾸만 내 눈앞에서  힘없이 떨어지고  또 떨어지며  꽃처럼 피어나는  뜻 모를 아쉬움에  나도 몰래  나도 따라  휘파람을 불며간다  (이훈강·시인, 1960-) + 휘파람을 불며 간다. 간다. 모질게도 불던 겨울바람 휘파람을 불며 간다 봄이 온다고 매화꽃 핀다고 간다. 휘파람을 불면서 저 바다를 건너간다. 봄이 온다고 파도는 철썩이고 겨울바람은  휘파람을 불며 간다.  바다 저 멀리 간다. (자수정·시인, 1960-) + 휘파람새  그리움에 까닭 있나요  마음가는 까닭이지요  살아있는 증거지요  처음 본 순간  눈빛으로 갈망하고  가슴 뛰는 연유가  질긴 인연 아닌가요  연인의 넋을 그리워하며  평생 잊지 못해  휘파람을 분다는  새의 운명 같은 거지요  마음 하나 운영 못하는 미물이라고  사랑할 수 없나요  此岸차안과 彼岸피안을 날아다니는  매화를 사랑한다는 그 새처럼  휘파람 한번 불어보세요  우리들은 불쌍해요  이것저것 따질 일도 많고  눈치 볼일조차 많아서  휘파람조차 불지 못하잖아요.  사랑이 눈치 보이는 세상에는  휘파람새는 살지 않지요.  (김낙필·시인) * 차안(此岸) : 나고 죽고 하는 고통의 이 세상  피안(彼岸) : 이승의 번뇌를 해탈한 열반의 세계  + 알마타의 휘파람 - 어느 교포 이야기  천산 산맥 아래  몇 채의 지붕이 머리를 내밀고  사방엔  어느 시골집 안개 자욱한  저녁나절의 색채가 짙다  카자흐스탄 노인이  몇 마리의 낙타와  빙하수로 목을 축인다  오늘처럼  안개비 걷히는 날이면  보이지 않는 고향을 향해  목이 메이고  남쪽에서 오는 바람으로  고여드는 향수를  휘파람에 싣는다  별빛도 없는 밤  아무것도  아무도 없는  이 주검의 지평선에서  벽화 속의 사람처럼  너무 조용한 슬픔을 맞는다 (홍금자·시인, 1944-)              
645    나이테야, 나와 놀자... 댓글:  조회:2050  추천:0  2017-08-17
+ 둥근 시집   나무의 나이테 속에 벼려넣은 여름이 있고 겨울이 있다 천 개의 손끝에 송이꽃을 들고 불타는 햇빛을 연모하던 기억도 있다 뭇 바람의 제국주의자들이 흔들고 지나갈 때마다 박수를 치던 치욕의 기억조차 새기어놓았다 나이테는 그 여름의 연서이자 그 겨울의 난중일기이다   나이테는 밑동 잘린 고목의 유고 시집이다 천년 고찰은 저 둥근 시집을 읽으면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천년 불상조차 한 번도 저 시 낭독이 싫어 외출한 적이 없다 풍경을 두드리는 바람은 견디기 힘든 유혹이지만 붓다의 처음 깨달음도 저 나이테의 그늘 아래서였다   나이테는 제 가슴에 새긴 목판 경전이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좀벌레가 기어간다 저 느린 것들이 나이테의 경전의 마저 읽고 나면 곧 새로 늙은 젊은 기둥이 또 한 세월을 받치라 (반칠환·시인, 1964-)   + 나이테   동그라미 하나 산새소리   동그라미 둘 산바람 소리   동그라미 셋 산골짜기 물소리   동그라미 넷 산토끼 발자국 소리   동그라미 다섯 내 노랫소리 (전영관·아동문학가)   + 나이테에서 풀리는 산 소리   봄이 온 산길에 전나무 한 그루 지난해 감긴 산 소리를 풀어내고 있다.   뼈빗대는 새 소리 바위틈을 흐르는 개울물 소리 잎새를 누비는 바람 소리.   음반에서 풀리는 노래처럼 나이테에서 흐르는 산 소리, 봄 소리. (하청호·아동문학가, 1943-)   + 나이테   밤이 이슥하도록 꿈길 곱게 펴 주시는 어머니의 다듬이질 소리가 들린다.   꼭두새벽을 흔드는 귀에 익은 갓난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은물결처럼 출렁이는 깃발소리가 들린다.   세월의 목소리를 담아놓은 레코드.   나무 곁에 서면 안개 자욱한 먼, 먼 날의 고요가 들린다. (손광세·아동문학가, 1945-)   + 나이테를 바라보며   네 그늘엔 조각난 탄피가 박혀 있다. 네 그늘엔 깨어진 거울이 잠들어 있다 지금은 말이 없지만 그 내부를 나는 안다.   물결이 스미듯 풀잎들이 흔들리듯 지나가는 역사는 언제나 순간이지만 네 깊이 심어 둔 日月은 늘 피묻은 싸움인 것을. (이우걸·시인, 1946-)   + 나이테와 옹이   매서운 칼바람이었다. 바위도 녹을 것 같은 혹서였다. 가을엔 강물이 곱기도 했지만 어느 해 봄인가, 탄생하는 가지로 몸살을 앓았다. 그 깊은 진통이 옹이로 남아, 지금은 시퍼런 대팻날 물어뜯기도 하지만 아름다워라. 굽이치는 물결의 나이테와 소용돌이 붉은 옹이가 이제는 내 가슴 저리도록 예쁜 너. 너는 나의 분신이다. (설태수·시인, 1954-)   + 나이테   세월은 속절없는 것이라고 인간들이 똑똑한 척 말을 만들어 놓고 각다귀판에서 저마다 업을 쌓을 때 나무는 우두커니 서서 세월을 잡아 가슴에 옹골차게 쟁여놓았다   하 세월 똑같이 허비하고도 나의 속은 보이지 않는 나이가 그리움만 키워 아무짝에도 쓸모 없이 욕심과 뒤엉켜 보대껴온 것을   지구가 태양을 짝사랑하는 동안 음지와 양지, 포만감과 허기져 사경을 헤맨 계절까지 나무는 제 몸을 짐작만으로 더듬어 나이마저 보이게 꼼꼼히도 적었으니 지루했을 우주여행 기록이 참으로 아름답다 (권오범·시인)   + 나이테 속을 걸어   제재소 옆을 지나다가 담 옆에 켜놓은 통나무 하나를 본다 잘린 단면의 나이테가 선명하다 여러 굽이 에돌아 만들어진 나무 속 등고선 해발 몇백 미터의 산을 품고 걸어온 첩첩의 붉은 산을 품고 나무는 산정을 오를수록 점점 몸피와 나이를 줄인다 청명한 공기와 햇빛으로부터 아득히 멀고 먼 걸음을 옮길수록 숨막히고 어두운 나무의 안, 안 가는 실금의 첫 나이테가 제 생의 마지막 등고선, 최고의 산봉우리였다네 숨을 고르며 오랫동안 산정에 서 있다가 하산한 나무 한 그루가 뿌리, 제 신고 온 투박하고 낡은 신발을 산 속에 벗어놓고 가지런히 누워 있네 (고영민·시인, 1968-)   + 나이테   그 언젠가 깜깜한 둥근 오막살이집에서 안으로만 숨쉬어 온 열기들이 갑갑함을 못 이겨 사방을 허우적거리다 지친 나머지 그대로 타서 굳어 버린 흔적이 첩첩이 둘러 처져 있고   태양이 뱉어 버린 찌꺼기들이 버짐 되어 더덕더덕 들러붙어 있는 나무둥치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진실의 액을 빼앗아 가는 새들의 휘파람 소리만이 보이지 않는 사슬을 열심히 감고 있을 뿐. (전병철·교사 시인)   + 나이테   밑동 잘린 나무를 무심히 바라보다 몇 해나 살다 저리 베어졌을까 하나 둘 셋...... 나이테를 센다   나이테 세기를 마치고 제대로 세었는지 다시 한 번 세어보려고 처음 나이테로 간다 동그랗고 예쁘다   다시 하나, 둘, 셋...... 나이테를 센다 동그랗고 반듯이 돌던 나이테가 구부러진다 동그랗고 반듯이 돌던 나이테 앞에 옹이가 있다   나이테는 옹이를 뚫지 못하고 구부러져 돈다 다시 돌아와서도 구부러져 돌고 돌다 다른 옹이를 만난다 또 다른 틈이 생기고 또 다르게 구부러지는 나이테   옹이와 마주칠 때마다 옹이를 뚫지 못한 밑동 잘린 나무의 나이테를 유심히 바라본다   사람 사람 사이의 옹이를 뚫지 못했던 내 삶의 등고선이다. (정재현·시인, 충북 괴산 출생)   + 나이테   우리도 나무처럼 볼 수 없는 곳에 둥근 원을 긋고 살았겠지 가슴 깊은 곳에 희망의 금을 긋고 사랑의 금도 긋고 곰삭은 아픔도 좁은 가슴에 새기며 살았겠지   오늘 짚고 넘어온 세월의 둥근 금을 세다가 나이 탓만 하고 있다오 얼굴은 보이는데 이름이 떠오르지 않고 이름은 떠오르는데 얼굴이 흐려지고 아마도 나이테에 건망증의 금이 더해가네 보네 아니면 새겨 놓은 금 하나 지워지고 있나봐. (노태웅·시인)   + 나이테의 소리가 들리나요   시계 소리만 커지는 아침 열시 누군가 자꾸 벽을 두드리는 소리 그 울림 집안을 채운다 나가보니 머리에 빨간 모자를 쓴 딱따구리가 콘크리트 벽을 쪼고 있다 많은 나무 놓아주고 하필이면 벽을? 부리 아프게 두드려 보아도 벌레 한 마리 없는 집 한 칸 세들 수 없는 벽을.   눈 먼 새인가? 시각이 멀면 청각이 밝아진다는데 벽 속에 숨겨진 나무 소리를 듣나 보다 잠자고 있는 집안의 가구들을 깨워 그들이 먼 기억으로부터 일어나는 소리를 듣나 보다   저것 보세요! 책상 나무 무늬가 파도처럼 출렁인다 마루 바닥이 물씬 송진내를 토해낸다 창틀에는 푸른 가지가 피어난다 어떤 나뭇가지는 벌써 하늘을 가릴 만큼 커져 있다   빨간 모자 쓴 딱따구리가 휙 날아간다 나무 창틀이 솟아올린 숲으로. (유봉희·재미 시인)          
644    좋은 시는 개성적인 비유와 상징성에서 환기된다... 댓글:  조회:2194  추천:0  2017-08-17
좋은 시는 환기성이 우세하다  이상옥    시가 매혹적인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시가 갖는 특유의 환기성 때문이다. 좋은 시는 환기성이 우세하다. 일상적 삶 속에서 놓치고 사는 삶의 진실을, 시는 환기하는 것이다. 좋은 시를 읽을 때 무릎을 탁 칠 만큼 아 그렇지, 내가 그것을 잊고 살았지라고 감동하게 되는 것은 바로 시 특유의 환기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내가 사는 운수재는  우이동 골짜기에 있고  시인들의 사랑방 시수헌은  산마루 넘어 쌍문동에 있다.  세심천 고갯길로 질러가면 30분  솔밭 지나 언덕기로 돌아가면 40분  짧은 고갯길보다는  긴 언덕길로 돌아서 다닌다  언덕길 밑에는 꽃밭이 있기 때문  한 교회가 가꾼 작은 꽃밭인데  채송화 맨드라미 봉선화 백일홍  예쁜 꽃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그 꽃들 가운데서도 나를 붙든 것은  ‘천사의 나팔’이라는 이국종 꽃  어느 날 꽃밭을 지나다 발을 멈추고  나팔소리 들리나 한참 지켜보는데  나팔소리는 소식도 없고  나비 날개 단 천사의 얼굴이  열 살쯤 되어 뵈는 과수원집 딸이  꽃 속에서 가만히 내다보고 있었다  반 백년이 지나도 늙지 않은 채로  천사가 되어 꽃 속에 살고 있다니  시수헌 가는 길이 더딘 것은  꽃밭에서 잠시 길을 잃기 때문      -임보, 전문    본지 지난 호에 발표된 이 시를 읽으면 난데없이 지난 5월 별세한 수필가 피천득 선생이 생각나고, 이어서 그의 수필 이 생각난다. 그리고는 아사코가 생각난다. 그래서 다시 을 읽어본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이 마지막 대목이 눈길을 끈다. 그렇다. 세 번째 만났을 때의 아사코는 백합같이 시들어가는 모습이었다. 스위트피나 목련꽃 같은 아사코의 이미지가 바랬기 때문에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도 피천득에게 아사코의 추억은 소양강 가을 경치처럼 늘 아름답게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왜, 을 읽다가 피천득이 생각나고 이 그리고 아사코가 생각나고, 또한 사랑의 추억을 떠올리게 되는가. 이것은 바로 시의 환기성 때문이다. 시의 화자는 시인들의 사랑방 시수헌 가는 길을 일부러 짧은 고갯길보다는 긴 언덕길을 돌아서 다닌다. 언덕길 밑에는 채송화 맨드라미 봉선화 백일홍 예쁜 꽃들이 환하게 웃는 꽃밭이 있기 때문이다. 그 꽃들 가운데서도 화자를 붙든 것은 ‘천사의 나팔’이라는 이국종 꽃인데, 어느 날 꽃밭을 지나다 발을 멈추고 나팔소리가 들리나 한참 지켜본다. 그 때 나팔 소리 대신 나비 날개를 단 천사의 얼굴, 열 살쯤 되어 뵈는 과수원집 딸이 꽃 속에서 가만히 내다보고 있었다. 꽃 속에 과수원집 딸이라니, 이것은 현실 너머 신화의 공간을 환기한다. 현실의 꽃밭이 신화의 꽃밭으로 일변한 가운데 반  백년이 지나도 늙지 않은 채로 천사가 되어 꽃 속에 살고 있는 과수원집 딸을 만난 것이다.    과수원집 딸이나 아사코는 원형상징이다. 피천득에게는 아사코로, 임보에게는 과수원집 딸로 각각 다르게 드러나지만, 이들은 꼭 같은 첫사랑의 원형이다.      한둘 두셋 끼리끼리 대학 정문앞 놀이터에  젊은이들 앉아서 서서 몇 발짝 떠서  캔 마시고 갈갈거리고 걸걸거리고 두셋 서넛 끼리끼리  토요일 오후  놀이터 입구 양편에는 줄줄이  팔찌 발찌 귀걸이 목걸이 브로치 늘어놓고  좌대 위에 알전구 켜서  마음껏 반짝 반짝이  자잘자잘 고물고물 노리개들  노인 하나 야윈 어깨를 목에 붙이고  이들 속에 언제 들어왔는지,  찌든 점퍼의 주머니 뒤집어서  콩껍질 탈탈 털어낼 때마다  꼬약꼬약 날아들어 목을 뽑는 비둘기들이  노인의 발등을 쪼고  맨땅을 쪼고  아기를 끌어안듯 손을 내민 노인의  팔목에 손바닥에 비둘기들 앉는다  비둘기가 노인과 부자父子처럼  어르자  아작아작거리며 모여든 젊은이들  쳐다보며 노인은 고물처럼 붙은 나이를  조금씩 떼낸다  비로소 온전한 저 눈빛         -김규화, 전문    대학 정문앞 놀이터 풍경 속에 이질적으로 편입된 야윈 어깨의 노인의 환기성이 이 시의 핵이다. 제1연에 제시된 풍경은 그야말로 젊은이들의 삶의 풍속도다. 토요일 오후 캔을 마시고 갈갈거리고 걸걸거리는 젊은이들, 그들의 장신구인 팔찌 발찌 귀걸이 목걸이 브로치가  주변에 즐비하다. 그 속에 편입된 이방인 같은 노인에게 누구 하나 눈짓도 주지 않는다. 젊은이와 노인, 한 공간에 있어도 심리적으로는 도무지 하나가 될 수 없는 처지다. 그런데, 노인이 찌든 점퍼 주머니 뒤집어서 콩껍질을 탈탈 털어낼 때 비둘기들이 모여든다. 비둘기와 노인은 부자처럼 하나가 된다. 그때 그것이 신기해서인지 젊은이들이 노인을 주목하며 모여든다. 노인과 젊은이를 매개하는 것은 비둘기다. 이 비둘기의 표상성은 심상치가 않다.    예전에는 노인과 젊은이를 매개하는 것이 경로효친 같은 아름다운 정신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제는 정신이 아니라 물질이 되어버렸다. 가령, 노인에게 큰 재물이 있다면 그 재물을 보고 마치, 비둘기를 보고 모여드는 젊은이들처럼 가족이나 친지들, 아니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도 주변에 모여들 것이다. 그러나 야윈 어깨를 목에 붙이고 있는 노인에게 모여들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비둘기조차도 콩껍질을 얻어먹으려고 날아든 것 아닌가.     본지 지난 호에 발표된 이 시는 노인문제를 비둘기의 표상성과 조팝나무라는 제목으로 색다르게 환기한다. 이 시의 제목을 ‘노인문제’라고 달았으면 시적 환기성은 파산이 났을 것이다. 시의 환기성은 직접 드러내 놓고 전달되는 것이어서도 안 되고, 또한 관습적이거나 상투적이어서도 안 된다. 환기성의 생명은 역시 시의 본질인 개성적인 비유와 상징성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이 시의 제목 ‘조팝나무’도 시의 환기성 측면에서 주목을 요한다.    계간 2007년 여름호에 발표된 최광임의 의 환기성도 주목을 요한다.    대로를 가로지르던 수캐 덤프트럭 밑에 섰다  휘청 앞발 꺾였다 일어서서 맞은편 내 자동차 쪽  앞서 건넌 암캐를 향하고 있다, 급정거하며  경적 울리다 유리창 밖 개의 눈과 마주쳤다  저런 눈빛의 사내라면 나를 통째로 걸어도 좋으리라  거리의 차들 줄줄 밀리며 큼큼거리는데  죄라고는 사랑한 일 밖에 없는 눈빛, 필사적이다  폭우의 들녘 묵묵히 견뎌 선 야생화거나  급물살 위 둥둥 떠내려가는 꽃잎 같은, 지금 네게  무서운 건 사랑인지 세상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간의 생을 더듬어 보아도 보지 못한 것 같은 눈  단 한 번 어렴풋이 닮은 눈빛 하나 있었는데  그만 나쁜 여자가 되기로 했다  그 밤, 젖무덤 출렁출렁한 암캐의 젖을 물리며  개 같은 사내의 여자를 오래도록 꿈 꾸었다           -최광임, 전문    이 시는 우리 시대 현저히 위축되어버린 ‘남성성’을 환기하는 것이다. 대로를 가로지르던 수캐는 화자가 그리워하고 꿈꾸는 ‘남성성’의 표상이다. 앞서 건넌 암캐를 향하는 수캐는, 덤프터럭 밑에서 휘청 앞발이 꺾였다 일어서서 맞은편 화자의 자동차 쪽 앞서 건넌 암캐에게로 향한다. 그 때 화자는 그 수캐의 눈빛과 마주쳤다. 저런 눈빛의 사내라면 자신을 통째로 걸어도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수캐의 사랑은 폭우의 들녘 묵묵히 견뎌 선 야생화거나 급물살 위 둥둥 떠내려가는 꽃잎 같은 절박한 처지에서도 암캐를 향해서만 있다.    화자에게도 단 한번 어렴풋이 수캐 닮은 눈빛 하나 있었는데, 그만 나쁜 여자가 되기로 했다고, 그래서 그 밤 개 같은 사내의 여자를 오래 꿈 꾸었다고 고백한다. 이 시는 ‘개 같은 사랑’의 관습성을 부수는 통쾌한 아이러니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우리 시대의 무기력한 남성성을 강렬하게 환기한다.     
643    제재를 잘 잡으면 좋은 시를 쓸수 있다... 댓글:  조회:2003  추천:0  2017-08-17
제재를 잘 잡으면 좋은 시를 쓸 수 있다  잘 관찰하고 열심히 기록하기  ‘괄찰기록’과 ‘의미부여’라는 말을 했다 관찰기록 제재 찾기와 관련이 있고 의미부여는 주제의식과 연결된다  주변 사물을 유심히 바라보지 않으면 시의 제재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김기택 지하도‘걸인’ 제재를 삼았다  제1연은 단순묘사  제2연 제재에 힘을 불어 넣었다             꼽추                              김기택  하루는 무덥고 시끄러운 정오의 길바닥에서  그 노인이 조용히 잠든 것을 보았다  등에 커다란 알을 하나 품고  그 알속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곧 껍질을 깨고 무엇이 나올 것 같아  철근 같은 등뼈가 부서지도록 기지개를 하면서  그것이 곧 일어날 것 같아  그 알이 유난히 크고 위태로워 보였다  거대한 도시 소음보다 더 우렁찬  숨소리 나직하게 들려오고  웅크려 알을 품고 있고 어둠위로  종일 빛이 내리고 있었다                -꼽추- 제2연  꼽추일수도 , 꼽추같다고 생각한 것일 수도 있다  노인 제재로 삼기로 했다 노인 관찰 꼽추라 생각  알을 등에 품고 있다 생각, 알속으로 들어 태아처럼 웅크리고  자고 있다 생각, 제재를 놓고 꼼꼼히 살펴보면  생각을 확장 , 상상력 발휘 , 시가 되는 것  정동진역                      김영남  겨울이 다른 곳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닷가  그 마을에 가면  정동진 이라는 억새꽃 같은 간이역이 있다  계절마다 쓸쓸한 꽃들과 벤치를 내려놓고  가끔 두칸 열차 가득  조개껍질이 되어버린 몸들을 싣고 떠나는 역  여기에는 혼자 뒹굴기에 좋은 모래사장이 있고  해안선을 잡아넣고 끓이는 라면집과  파도를 의자에 앉혀놓고  잔을 주고받기 좋은 소주집이 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외로운 방들 위에 영롱한 불빛을 다는  아름다운 천정도 볼수 있다  강릉에서 20분 , 7번 국도를 따라가면  바닷바람에 철로 쪽으로 휘어진 소나무 한그루와  푸른 깃발로 열차를 세우는 역사  같은 그녀를 만날 수 있다                 -정동진역-  시의 생산 과정을 본인에게 들을 수 있었다 촬영장  경치가 아름다워 알려졌다 ‘알려지지 않는 곳’ ‘가볼만한 곳’  기사가 나와 김영남은 기사를 읽고 시를 썼다  물론 가본적은 없다 , 신문기사 한 쪼가리를 유심히 읽고  관찰력 시인 타이틀을 붙여주었다  세계 명작 중 신문기사를 읽고 모티브로 해서 쓴 것이 많다  텔레비전 , 영화든 관찰의 안테나를 세우고 유심히 보면  시의 제재가 나온다, 모든 사물 , 생명체가 시가될 수 있기에  시는 열려있는 총체입니다  어떤 인접 예술과도 교배할 수 있습니다.   
642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기 위하여... 댓글:  조회:2569  추천:0  2017-08-17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기 위하여 / 강은교 (1)단어 하나가 떨어져 온다. 가령 한밤중 같은 때라든가 새벽 무렵 같은 때 나는 손을 벌려 그 단어를 받는다. 책상 한 귀퉁이에 늘 놓여져 있는 붉은 색 바구니에 나는 그것을 집어넣는다. 하긴 요즘은 그런 순간이 잘 찾아오지 않는다. 그런 순간은 말하자면 아주 재수가 좋을 때이다.  그러니까 한때는 상당히 재수가 좋았다. 늘 단어가 공중에서 떨어졌고 나는 그것을 받느라 바빴었다. 내 바구니도 쉴새없이 자기의 등을 열고 그것들을 제 몸속에 집어넣느라고 애를 먹곤 했다. 때로는 단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단어가 줄줄이 이어져 마치 하나의 작은 마당이 내려오는 것처럼 쏟아져 내리기도 한다. 물론 아주 재수가 좋을 때이다. 떨어져 내리는 것이 하나의 흐릿한 이미지만일 때도 있다. 어떤 동사라든가, 또는 어떤 명사도 아니며 어귀도 아닌 희미한 어떤 그림 같은 것, 그것은 아주 낯선 어떤 것일 때도 있고, 낮에 보아 두었던 어떤 상황의 변형된 그림이거나 또는 지난 어떤 꿈속의 흐린 그림이거나 또는 오래 전에 읽은 어떤 신문 같은 것의 얘기들 속에서 나의 공중으로 옮겨온 그런 것들이다. 어느 날, 나는 나의 그 붉은 색 바구니의 뚜껑을 연다. 단어 하나가 잡혀 온다. 어귀 하나가, 또는 이미지 하나가 잡혀 온다. 그것은 나의 원고지 위로 올라온다. 이리저리 그것을 끌고 다닌다. 항상 내 오른손의 능력이 보잘것없음에 툴툴대면서 또는 절망하면서,  그것들이 스스로 말할 때까지, 또는 말하지 않으며 말할 때까지, 또 몇 개를 더 꺼내 온다. 그것들이 저희끼리 무슨 대화인가를 하도록 지켜본다. 아, 말이 없는 말을 하여라, 너희 스스로 정하여라. 그림을 그려라, 너희 스스로, 너희 스스로. (2)이런 방법도 있다. 사진 찍기다. 나는 사진사이다. 사진사는 피사체가 되는 어떤 대상으로부터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런 객관적 거리의 감각을 주는 이 방법과 아주 내 마음에 든다. 사진만 잘 찍어 놓으면 사진 속의 인물들 대상들은 스스로 말하리라. 그리고 그것은 또 내가 할 수 있는 세상에의 참여의, 어쩌면 가장 비이기적인 방법이 될 수 있으리라. 그래서 나는 매일 사진을 찍는다. 학교엘 가면서, 시장에 가면서, 강의하면서, 신문을 보면서, 밥을 먹으면서, 짧은 여행지에서, TV뉴스를 보면서 나는 가능한 한 그날 만난 모든 상황들, 인물들을 선명히 사진찍기를 바란다. 여자들의 사진을 찍고, 대자보들과 흐린 날씨가 함께 있는 사진을 찍고, 또는 리어카에 누워 있는 배추들과 상인을 찍고, 덤프트럭을 찍고, 도시의 거리에 엎드려 있는 운동화, 아기고무신, 죽은 고양이의 시체를 찍는다. 사소한 모든 것들, 작은 것들을 찍는다. 그리고 그것들은 필름째로 내 단어 바구니의 한 켠에 넣어둔다. 그것들의 원고지 위의 인화작업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이루어지곤 한다. 제일 먼저 인화하려고 점찍었던 것이 제일 나중에 인화되는 수도 있고, 개중에는 아직 손대지 않은 것 ― 아니 손대지 못한 것도 있다. 인화할 계기가 오지 않은 것이다. 더 좀 묵혀야 한다. 하긴 그러다 그것들의 빛이 아주 바래버릴 경우도 많다. 그러나 내 바구니에 단어와 함께 쌓인 현실의 필름들이 많으면 나는 괜히 희망에 쌓인다. 마약 같은 희망에 말이다. 그래서 그 보이지 않는 필름들을 밤새도록 들여다보고만 있을 때도 많다. 그런 날은 단어 하나도 건지지 못하고 밤만 보내 버린다. 버릇이다. 아, 참 쓸데없는 버릇이다. (3) 그러고 보니 들여다 보기도 많이 했구나. 아파트의 옥상에서 하루 종일 아파트의 뒷켠에 펼쳐져 있는 어느 대학교의 숲을 들여다보던 때가 생각난다. 그후에도 며칠 더 나는 숲을 들여다보러 옥상으로 올라가곤 했다. 그때 시를 한편 쓰기는 했다. 동요같은 시를. 그러나 들여다보는 방법에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들면 눈을 깜빡거린 다든가 하는 식의 우리는 그렇게 사물을 철저히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육안으로는 말이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곳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럴 때는 할 수 없다. 의식적으로 시인이 될 수밖에 없다. 가장 나쁜 상태이다.  나는 보이지 않는 깊은 강물 같은 곳을 들여다보고 있다. 눈을 깜빡이지 않도록 애쓰면서, 나는 그 강물의 밑바닥을 들여다본다. 내 생각의 가지에 맞는 어귀라든가 단어 하나가 걸리기를 기다리면서. 낚싯줄에 무엇인가 걸려 올라온다. 그러나 그것은 개펄의 흙덩이거나 라면 봉지거나 무슨 병조각 같은 것일 때가 많다. 좋은 게 걸려 올라오면 내 바구니에 담을 텐데 하는 생각이 앞서서, 그 생각을 자꾸 말하고 싶어 안달한다.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나의 그림을 위하여 ― 그럴 때 나는 비상 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  그림을 의식적으로 그리는 것이다. 나는 그림을 그린다. 내가 써보고 싶은 생각을 하나하나 백지 위에 풀어 놓는다. 길을 그리고, 사람을 그리고 그림을 달아나지 않도록 책상 앞에 붙인다. 온힘을 다하여 그림에 매달린다. 용을 쓰며 턱걸이를 하는 학생처럼. 이런 때 나는 정말 비참하다. 눈물이 흐른다. 그러면서 사전을 찾는다. 별로 성공한 기억은 없지만 비상탈출구 같은 것이 될 때는 있다. 단어를 만나는 것이다. 나는 단어와 껴안는다. 그리고 얼른 내 바구니에 집어넣는다. 그러다 그것이 내가 그전에 많이 쓴 낯익은 단어임을 알아버리고 다시 슬픔에 빠지긴 하지만, 그래서 기껏 그린 그림이 내가 이미 많이 그렸던, 그래서 익숙해진, 상투화된 그림임을 알긴 하지만, 그래도 그런 밤은 행복하다.  (4)그것이 어떤 단어들의 집합이거나 구절들의 집합이거나 서툰 필름이거나 그것들이 그래도 괜찮게 이어지도록 나는 끝없이 소리내어 읽는다. 단어들이 스스로 제 자리를 찾아 가도록 나는 끝없이 중얼거린다. 말하지 않으면 말할 때까지, 그것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종이 위에 설 때까지 내 바구니는 그럴 땐 열어 두어야 하리라. 소외감을 느끼는 단어는 스스로 바구니 속으로 다시 들어가리라.  그렇게 나는 오늘도 부질없는 밤을 보내고 있다.     
641    "한마디 시어때문에 몇달간 고민 고민해야"... 댓글:  조회:2186  추천:0  2017-08-17
4  "윤동주가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가 즐겨 거닐던 서강(西江) 일대에는 고층건물이 즐비하게 들어서고, 창냇벌을 꿰뚫고 흐르던 창내가 자취를 감추어 버릴 만큼, 오늘날 신촌(新村)은 그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다."  윤동주 시인의 연희전문 2년 후배인 정병욱씨가 1976년 《나라 사랑》23호에 발표한 회고담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 글 가운데 시인의 시작 태도에 대한 언급이 문득 눈길을 끈다.  "그는 한 마디의 시어 때문에도 몇 달을 고민하기도 했다. 유명한 에서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작용(風化作用)하는  백골(白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라는 구절에서 '풍화작용'이란 말을 놓고, 그것이 시어답지 못하다고 매우 불만스러워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고칠 수 있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그대로 두었지만, 끝내 만족하지를 않았다."  국어 사전에는 '풍화 작용'의 뜻을 "지표의 암석이 공기·물·온도 따위에 의해 차츰 부서지는 작용. 결정수(結晶水)가 있는 결정 따위가 공기 중에서 차츰 수분을 잃고 부서져 가루로 변하는 작용"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십대 청년 시인으로서 과학에 주로 사용되는 말인 '풍화작용'이 지닌 미약한 정서의 함축성 때문에 고심하는 모습이 충분히 짐작된다. 그는 단지 시에서 그 말 한 마디만 고쳐보려 하다가 스스로 포기한 것 같다. 그 시어 하나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가령 그 한 줄의 시행을 "검은 바람에 곱게 바스러지는"으로 바꿔 썼더라면 어떠했을까.  그러면 '검은 바람'이 '어둠'을 함축하면서 동시에 풍화작용의 의미에도 쉽게 연결될 수 있을 것이었다. 아울러 '검은 바람'과 '백골'의 색채 이미지의 선명한 대비도 본질적 자아를 상징하는 백골과 현실적 존재인 '나'와의 갈등이라는 주제 의식을 강조하는 데도 도움이 될 법하지 않을까.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검은 바람에 곱게 바스러지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고쳐 써 본 「또 다른 고향」  윤동주의 대표시 중의 하나인 의 마지막 연에서도 역시 미숙한 시어 하나가 눈에 걸린다.  푸로메디어쓰, 불쌍한 푸로메디어쓰,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푸로메디어쓰.  침전하는 푸로메디어쓰. '침전'은 "액체 속에 섞인 작은 고체가 밑바닥에 가라앉음, 또는 그 앙금"을 뜻한다. 그리스 신화 속에 나오는 푸로메디어쓰가 그렇게 작은 고체 덩어리밖에 안 될까.  이십대 청년 윤동주가 , 두 편을 요즘의 신춘문예나 권위 있는 잡지의 신인상에 응모한다면… 아마 낙선하고 말 것이다. '풍화작용', '침전'과 같은 적확성(的確性)이 결여된 표현이 치명적 결점으로 지적되었을 게 뻔하다.  푸로메디어쓰, 불쌍한 푸로메디어쓰,  불 도적한 죄로 맷돌을 지고  바닷속 깊이 가라앉는 푸로메디어쓰.  라고 퇴고해 볼 것을 청년 윤동주에게 나는 권하고 싶다.  5  현대시는 문자의 옷을 입어야만 그 생명을 얻는다.  구어(口語)가 아니라 문어(文語)로 표현되는 점이 고대의 시가와 현대시가 다른 차이점일 것이다.  문장의 규칙이 현대시에서도 올바르게 지켜져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바른 문장 표현이 언어 생활의 기초가 된다는 관점에서 근래의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언어영역에서도 비문(非文)과 부자연스러운 문장을 경계하는 문제를 매년 출제하고 있다. 요즘 세인들에게 회자(膾炙)되는 널리 알려진 시에서도 그런 어설픈 문장이 이따금 발견된다.  ①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②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륙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①은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로 고쳐져야 바르고,  ②에서의 '群'이라는 한자는 '대열' 혹은 '무리'로 바뀌어졌으면 싶다.  이 시 전체는 모두 한글로 쓰여졌는데 굳이 '群'만 한자로 쓴 것은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다.  이 시가 발표된 시대상과 관련해서 혹시 '軍'이라는 이음동의어를 연상시키기 위한 시인의 조심스런 배려였을까.  이 시는 한두 군데의 작은 결함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고, 눈물 나게 통쾌한 시임에는 틀림없다. 극장에서까지 애국가를 상영하며 애국심을 강요하던 그 시절에 특히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라고 한 냉소적 베이소스(bathos) 표현 기법은 감히 당대의 그 누구도 따를 수 없으리만큼 훌륭하다.  유명한 시가 단지 유명하다는 한 가지 이유로 신성 불가침의 턱없이 높은 평가와 옹호를 받는 일은 이제 재고돼야 한다. 좋은 점은 장양되어야 하며 좋지 않은 결점은 제대로 바로잡는 바른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시를 바로 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어떠한 선입견도 배제하고 거울같이 맑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 작품을 대해야 마땅할 것이다. 시의 어법도 결국은 합리적, 보편적 상식과 바른 문장 표현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기본을 떠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640    시인은 올바른 시어의 선택에 신경써야... 댓글:  조회:1937  추천:0  2017-08-17
올바른 시어의 선택을 위하여 / 강인한  1  요즘 들어 영화다운 영화를 본 적이 거의 없다.  기억에 남는 여운 있는 영화가 드물다. 그래도 작년에 본 가 제일 나은 것 같다. 영화가 거의 끝나 갈 무렵 반전의 묘미를 가장 잘 살린 영화로 꼽을 수 있는 것으로 나는 단연 를 들고 싶다. 내내 공포 심리 영화로 일관하다가 일순간 애절한 멜로드라마로 바꿔 놓는 인도 출신 젊은 감독의 연출 역량은 탁월한 것이었다.  그 영화를 생각할 때마다 '마이크'가 떠오른다. 배우의 대사를 동시 녹음하기 위한 마이크가 화면에 비쳐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주인공 소년이 공부하는 교실의 천장 가까이 내려온 마이크가 보이고, 심리학자 브루스 윌리스가 침대에 누운 소년과 대화를 나눌 때에도 그 마이크가 화면에 훤히 보이는 것이었다.  글로 치자면 퇴고의 과정이라 할 편집이 소홀했다는 증거이다. 그 사소한 '옥에 티'가 지금도 내 마음에 걸린다. 예술 작품이 어디 절대적으로 완벽할 수야 있을까마는 적어도 눈에 거슬리는 아쉬운 대목을 그냥 지나치는 건 철저한 장인정신(匠人精神)에 어긋난다.  2  어린 시절에 배운 두 편의 동요를 생각해 본다.  윤석중 선생의 작품이었을 것이다.  ① 학교 종이 땡땡 친다/ 어서 모이자.  ② 아버지는 나귀 타고 장에 가시고  할머니는 건너 마을 아저씨 댁에  고추 먹고 맴맴, 담배 먹고 맴맴.  지금은 ①이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로  ②는 "고추 먹고 맴맴, 달래 먹고 맴맴."으로 고쳐져서 노래로 불리고 있다.  "학교 종이 땡땡 친다."에서 '치다'는 타동사이다.  타동사는 목적어를 필요로 하는 것이므로 '학교 종을'이라고 해야 맞고, '학교 종이'라는 주어를 앞에 내세워야 한다면 '땡땡 울린다'고 해야 하기 때문에 그와 같이 고쳐졌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런 대로 수긍이 가는 얘기다.  그러나 두 번째 동요에서 '담배 먹고 맴맴'을 '달래 먹고 맴맴'으로 고친 것에 대해서 나는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 동요가 쓰여진 시기가 1940년대쯤이 아닐까. 아기를 혼자 집에 놔두고 어른들이 외출한 그 심심하고 지루한 한나절을 견디다 못해 아기는 이것저것 장난감을 찾아보지만 그 시절엔 적당한 놀잇감이나 간식거리가 없었다.  나귀를 타고 장에 가야 하는 가난한 시골집이라 아기는 부엌도 기웃거려 보고, 사랑방도 기웃거려 본다. 부엌에서 풋고추를 발견한 아기는 냉큼 그것을 입에 넣고 오물거린다. 아, 매워라. 퉤퉤. 또 사랑에 건너가서 아기는 나이 많은 어른들이 맛있게 피우는 쌈지 담배― 곰방대나 기다란 담뱃대에 꾹꾹 눌러 담아 피우는 그것을 발견한다. 호기심에 아기는 거친 쌈지 담배를 무심코 입에 넣어본다. 에이 쓰고 매워라. 퉤퉤. 작자는 이와 같이 귀엽고 장난스러운 장면을 그 노래에서 그려내었던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에도 그냥 그런 식으로 이해하고 동요를 불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담배'가 그만 '달래'로 바뀌어버렸다. 구체적인 이유는 잘 모르지만 어린이가 어른 몰래 흡연하고 매워하는 것이라 지레짐작한 어느 근엄한 교육학자의 고지식한 편견이 그렇게 고쳐 부르게 하였을 것 같다. 하지만 '달래'라는 봄나물을 혼자 집어먹고 맵다고 한다는 발상에 나는 동의할 수가 없다. 봄나물이란 것이 밑반찬으로 항상 부엌에 마련돼 있다는 전제가 우습고 또한 고추와 맞먹을 정도로 과연 달래가 매운 것일까. 단순히 원작의 '담배'와 '달래'의 어감이 비슷한 데서 무책임하게 고쳤다는 혐의를 벗을 길이 없다.  물론 담배란 피우는 것이지, 먹는 건 아니다. 항용 담배 피우는 일을 담배 먹는다고 일상적 대화에서는 허용된다 치더라도 그것은 견강부회(牽强附會)의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나라 청소년의 흡연 문제를 염려하는 차원에서의 충정에서 비롯된 불가피한 선택이라면 차라리 '마늘 먹고 맴맴'으로 고치는 편이 훨씬 낫다고 본다.  3  우리 모두가 잘 아는 김소월의 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것도 뜻 있을 것 같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이 시 속의 서정적 자아는 김소월이라는 남성이 아니라 전통적인 한국의 여성이다. 그래서 전체적인 시어들도 여성적인 것들로 가득하다.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진달래꽃, 아름 따다, 뿌리우리다, 걸음걸음,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눈물, 흘리우리다.  어느 강의실에서 김종길 시인은 이 시의 전반적인 여성적 어조 및 분위기를 말하면서 딱 한 개의 시어 '죽어도'가 쌀 속의 뉘처럼 몹시 거슬린다고 지적하였다. '죽어도'라는 결사 항쟁(決死抗爭) 식의 표현은 지극히 남성적이며 표독한 어김을 풍긴다는 연유에서였다. 소월이 못내 다정다감한 듯하면서도 눈에 띄지 않는 독한 일면도 간직하고 있었음은 그의 음독 자살에서도 충분히 유추가 가능하다. 여성적인 어휘들 속에 낀 이 '죽어도'를 어떻게 시 전체의 흐름을 다치지 않으면서 여성적 어휘로 대체할 수는 없을는지.  김소월 시의 연구에 단연 뛰어난 업적을 보인 오하근씨의 저서 《김소월 시어법 연구》를 찾아서 나는 '허투로, 다말고'라는 독특한 소월의 어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허투로'는 "아무렇지 않게 되는 대로", '다말고'는 "'모두 다 말고'에서 '모두'가 생략된 말이며, 다 그만두고"라는 뜻으로 밝혀져 있다. 덧붙여, 연구의 결과가 아직도 미지수라 할 시어 '즈려밟고'를 오하근씨는 "지레 밟다. 지리밟다. 발 밑에 있는 것을 힘주어 밟다."라고 밝혀 놓고 있는데 그 앞의 가벼운 동작의 표현인 '사뿐히'라는 말과의 관계를 살펴본다면 "힘주어 밟다"는 의미가 아무래도 부자연스러움을 떨치기 어려운 게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의 끝 연을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다말고/ 허투로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로 맺었더라면 '죽어도'의 서릿발 치는 느낌이 곱게 가셔지면서 시의 여성적 분위기를 일관되게 살려낼 수 있었을 것이다. 
639    "아름다운 시를 두고 차마 죽을수도 없다"... 댓글:  조회:2028  추천:0  2017-08-17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 곽재구 "아름다운 詩를 두고 차마 죽을 수도 없었지요"  와온 바다에 왔습니다. 지난해 3월 처음 이 바다를 만난 이후 이 바다는 내게 정서적인 혹은 정신적인 마음의 고향이 되었습니다.  처음 이 바다에 들어섰을 때, 저물 무렵이었습니다. 한없이 펼쳐진 개펄 위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저녁 노을들이 하늘 전체를 꽃밭으로 만들어 놓았더군요. 해 지는 쪽, 해 뜨는 쪽을 가리지 않고 말이지요.  그것뿐이 아니었습니다. 꽃밭들은 개펄 위에도 찬란히 펼쳐져 있었습니다. 개펄 위에는 여기저기 작은 물웅덩이들이 고여 있었고 그 웅덩이들 위에 노을들은 수없이 많은 꽃밭들을 이루어 놓았지요. 보리새우 새끼들이나 망둥이 새끼들이 조분조분 숨을 쉬고 있는 그곳… 지상 위의 꽃밭인 그곳. 나는 그곳의 방파제 위에 엎드렸습니다.  수평선을 넘어가는 마지막 햇살이 내 등을 따뜻하게 두드려줄 때 내 허름한 영혼 또한 이 바다의 꽃핀 개펄 위에서 한 마리의 금빛 보리새우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지요.  내가 왜 문학을 하는가. 이 질문의 초입에서 내가 지닌 가장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오르는군요. 그때 나는 기차여행 중이었습니다. 창 밖에는 시퍼런 물감 같은 어둠이 풀어져 있었습니다. 외삼촌의 무릎 위에 앉아 나는 그 어둠을 바라보았지요.  그때 나는 버려지는 중이었습니다. 무슨무슨 천사의 집이거나 아니면 아주 촌수가 낮은 어떤 친척집에 잠시 위탁되어야 할 형편이었지요. 그때 외삼촌이 내게 과자 한 봉지를 사 주었습니다. 바스락거리는 비닐봉지 안에는 색색의 별사탕들이 들어있었습니다.  초록색, 분홍색, 하늘색, 흰색, 노란색의 별사탕들을 바라보며 불안하기만 한 어린 영혼의 마음이 한없이 따뜻해졌습니다. 내게 희망이 있다면 언젠가 나는 색색의 별사탕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별사탕이 지닌 꿈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 어린 영혼은 별사탕 한 봉지를 가슴에 안고 여행의 목적지가 어디인 줄도 모른 채 푹 잠이 들었습니다.  세월이 조금 흘렀군요. 고등학교 1학년 가을날 나는 한 무리의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병구, 해철, 동석, 몽구, 용덕… 그들의 이름을 적어보는 이유는 그들이 내 글쓰기의 첫 스승들인 탓입니다. 나보다 두 세 단계 위의 시를 쓰고 있었던 그들은 내게 예술에 대해서, 그 혼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 언어와 이미지들에 대해서 가르쳐 주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나의 모든 글쓰기는, 그 시절 이미 지금의 내가 아는 모든 것들을 다 파악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시 생각만 했습니다. 눈 뜨면 시 생각하고 눈을 감아도 시 생각하고 길을 걸으며 늘 시를 썼지요. 시가 너무 사랑스러웠고 그래서 죽을 수도 없었지요.  고등학교 2학년 이후 나는 국어 교과서의 표지를 본 적이 없습니다. 가방 안에 문학 서적 외에 어떤 종류의 교과서건 들어 있는 경우도 없었지요. 그런 내가 어떻게 대학 시험에 합격했는지 나로서도 알 수 없습니다.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있습니다.  시의 신. 오직 그의 덕분이지요. 시 쓰기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내가 대학 시험에 떨어진다면 그것은 순전히 시의 신의 잘못이니까요. 그가 어느 날 입시의 신의 집에 찾아간 거지요. 두 손에 바리바리 선물을 싸들고….  대학 시절, 친구들은 다 뿔뿔이 흩어졌고 강의 시간은 아무 재미가 없었습니다. 한 가지의 기억이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그것은 나해철과의 두 번째 만남입니다. 의과대학에 진학한 그와 나는 매일 만나 함께 시를 썼습니다. 세 시간의 시간을 함께 비워두고 두 시간은 농과대학의 숲 속에 들어가 그 날 정한 제목으로 시를 쓰고 나머지 한 시간은 서로의 작품들을 바꿔 읽으며 둘만의 토론시간을 가졌지요. 아카시아 꽃향기가 가득 날리고 다시 싸리꽃이 은은하게 피어나던 그 숲길….  등록금 마련할 길이 더 이상 없어 군대를 가게 되었을 적 나는 전투경찰대에 지원했습니다. 남쪽 바다에서 서치라이트를 돌렸지요. 하늘 가득 원고지가 펼쳐져 있었고 그 깊은 먹물의 바다 속에 눈부신 서치라이트 광선으로 시를 썼습니다. 습작의 광기와 국방의 의무가 결합된, 나로서는 견딜 만한 의미가 있는 시간들이 지나갔습니다.  다시 학교로 돌아왔을 때 처음으로 내가 써야 할 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골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톨스토이와 타고르에 몰입했지요. 1905년쯤으로 기억됩니다. 눈보라가 펄펄 날리는 겨울날 톨스토이는 모스크바에서 자신의 장원이 있는 야스나야 폴랴나까지 도보여행을 합니다. 200㎞에 가까운 길이지요. 그 쪽의 살인적인 겨울 추위는 나폴레옹의 군대를 다 얼려 죽인 이력이 있지요.  며칠 전 해외뉴스 시간에도 모스크바 일대에서 수 백 명의 사람들이 얼어죽었다는 뉴스가 나오더군요. 인생의 모든 쓴맛 단맛을 다 경험한 그가 그 눈보라 길을 죽지 않고 보름 동안 걸어, 자신의 장원에 도착하여 한 일은 농노 해방이었습니다. 오체투지… 육체를 스스로 학대할 수 있는 사람만이 순결한 영혼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깨달았지요.  1995년 겨울, 야스나야 폴랴나에 찾아갔을 때 잠시 나도 모스크바에서 그곳까지 도보여행을 할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지요. 허름하기 이를 데 없는 나의 영혼이 그런 용기를 내게 불어넣어 줄 리 없었습니다. 어렵사리 숲길을 뒤져 장원 귀퉁이의 그의 묘소에 이르렀을 때 그 흔한 돌비석 하나 없더군요. 마른 꽃다발이 몇 개.  눈송이가 하나 둘 날리는 하염없이 낮고 작은 묘지에서 나는 그가 내쉬는 따뜻한 숨결들을 느끼고 또 느끼곤 했습니다. 자신의 영혼과 세상의 모든 생령들을 다 사랑한 그 꿈만으로 더 이상 치장할 수 없는 아름다운 묘역을 그는 이 지상에 마련한 것이지요. 그곳에 더 이상의 어떤 표지도 서 있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타고르의 시들은 그 자체가 꿈결이었지요. 신비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의 시에 나오는 달빛과 강물, 나룻배와 어린 소년의 노래, 엄마의 자장가, 라마야나 이야기와 챔파꽃 향기… 그런 모두가 떨리는 꽃 이파리처럼 가슴에 닿아왔습니다. 지상에 시가 있어서 행복했고 타고르가 있어서 지상 위의 어떤 길이건 끝없이 걸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매일 아침 눈을 떠 처음 쓴 시의 한 줄을 타고르에게 보여주고 싶었지요. 바람이 슬쩍 내 옷깃을 스치고 지나가면, 이것 좀 봐, 그가 왔어, 타고르의 혼이 내 곁을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간 거야, 라고 생각했지요.  밤하늘에 뜬 무수한 별들이 그의 빛나는 눈빛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쓴 허름한 시들은 그의 형형한 눈빛의 체에 걸러져 단 한 줄도 지상에 남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요. 그렇지만 언젠가는 그의 성긴 체에도 걸러지지 않고 남은 시를 꼭 써서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깊었습니다. 이봐, 타고르… 지금 얼른 내게 와요 내 시 좀 봐줘요….  어쩌자고 이런 위대한 두 영혼의 이름들을 지금 내가 붙들고 이야기하는지 모르겠군요. 기실은 꿈, 아닐런지요. 어릴 적 비닐봉지 안의 빛나던 별사탕들처럼 어떤 두렵고 쓸쓸한 영혼들에게도 따뜻함과 아름다움으로 남는 시. 삶이 너무 비참하고 굴욕적이어서 더 이상 존재라는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한심한 시간들 속에서도 먼 포구 마을의 불빛들처럼 가슴 안으로 안겨오는 그런 시. 그리운 그 시들을 나는 지금 여전히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와온 바다의 선착장에는 모두 18개의 가로등이 서 있습니다. 나는 그 가로등들에게 각각의 번호와 이름들을 붙여 주었지요. 그리고는 아침이거나 저녁이거나 눈이 오거나 바람 불거나 꽃이 지거나 가리지 않고 이 가로등 사이를 걷습니다.  걷다가 그 번호와 이름들에 걸맞은 시를 생각하고 잠시 주저앉아 음악을 듣다가 또 시 생각을 합니다. 지상에 언제부터 시가 있었을까요. 왜 내가 시를 쓰게 되었을까요. 왜 시를 쓰는 시간만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까요.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단 한 가지, 내가 당신들을 사랑하고 당신들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는 그 시간들이 지상 위에 지속되는 한 시는 우리들 마음 안에 영원한 집이 되어 줄 것입니다.   
638    문학하는 일은 "헛것"에 대한 투자, 태양에 기대를 꽂는 일... 댓글:  조회:2096  추천:0  2017-08-17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 안도현 거친 땅 딛고 서라는 세상의 주문에 오직 詩로 대답"  다섯 해 전, 이른바 전업작가가 되려는 마음을 품었을 때, 솔직히 나는 밥이 걱정이었다. 시인은 가난하게, 그리고 엄숙하게 살아야 된다는 통념이 널리 유포되어 있는 한국 사회에서 문학으로 밥을 얻겠다고? 그게 가당한 일이기는 할까? 내가 불순한 꿈을 꾸는 게 아닌가 하고 스스로를 의심한 적도 있었다. 문학에 비해 밥은 여전히 불경스러운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청탁이 오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서 밤새워 자판을 두드렸다. 호구지책이었다. 한 해 동안 이천 매 가까운 산문을 쓴 적도 있었다. 그렇게 하고 나니까 바닥이 보였다. 더 이상 물러설 데도 나아갈 데도 없었다. 기껏 한 공기의 밥을 위해 나를 소진시켜야 한다는 말인가. 또 다른 회의가 나를 짓눌렀고,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문학이 내 속에서 자꾸 꿈틀거렸다.  내가 문학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게 아니었다. 문학이 몽매한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글쓰기란, 나라는 인간을 하나씩 뜯어고쳐 가는 일이었던 것 같다. 문학에 의해 변화된 내가 흔들릴 때마다 문학은 다시 나한테 회초리를 갖다 댔다.  문학은 나에게 늘 초발심의 불꽃을 일으키는 매서운 매였다. 문학은 엄하고 무섭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문학을 가르쳐 준 세상에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  특히 나는 팔십년대와 함께 이십대의 청춘을 보냈다는 것이 더없이 고맙다. 팔십년대는 풋내기 문학주의자에게 세상이 모순으로 가득 찬 곳이라는 걸 충격적으로 보여주었다. 스무 살의 봄날, 시집을 끼고 앉아 새우깡으로 소주를 마시다가 계엄군에게 걸려 묵사발이 되도록 얻어터진 적이 있었다.  그날 이후, 시집보다 역사나 사회과학을 읽는 날이 더 많아졌다. 가슴에 ‘펜은 무기다’라는 문구가 쓰여진 티셔츠를 입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골방에서 광장 쪽으로 내 관심이 서서히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천연덕스럽게 드러내면서 말이다.  하지만 현실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수록 시대의 무거움이 버거워 나는 끙끙댔다. 그 끙끙대던, 그 전전긍긍하던 시간들을 나는 참으로 소중하게 여긴다. 문학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긴장하고 현실에 어떻게 기여해야 하는가.  어떻게 보면 단순한, 그렇지만 한 번은 반드시 통과해야 할 그런 고민을 어깨에 얹어준 것만으로도 팔십년대에게 빚진 게 많다. 지금은 아무도 그런 빚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 세상이지만, 그 빚을 갚으려고 나는 쓴다.  내 등단 작품의 제목이 ‘서울로 가는 전봉준’인데, 왜 하고 많은 인물들 중에 하필이면 시에다 전봉준을 불러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이 시를 쓰게 한 것은 역사책 속에 남아 있는 전봉준의 사진 한 장이었지만, ‘광주’로 일컬어지는 당대의 현실을 지나간 역사를 앞세워서라도 드러내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게 이 세상한테 시로서 빚을 갚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 시에도 상투적인 엄살이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예를 들면 ‘이름 없는 들꽃’과 같은 표현이 그렇다. 너무 유치하기까지 해서 지금 들여다보면 몸둘 바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에는 나한테 그것보다 더 절실한 노래는 없었다.  한국에서 시 쓰는 자가 ‘어둠’이라는 비유를 자기 검열 없이 쓸 수 있게 된 시기는 그리 길지 않다. 채 이십년도 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이 땅에서 시를 쓰는 일은 슬픔이자 또한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날 문득 ‘이름 없는 들꽃’이 ‘애기똥풀’로 보이게 된 시기가 있었다. 해직교사 생활을 마감하고 복직을 했을 때였다. 복직은 모처럼 찾아온 기쁨이었지만,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씁쓸한 절반의 승리였다. 전교조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신규 채용 형식으로 학교로 돌아간 것이었다.  우리는 거리에서 머리띠를 두르고 싸웠으나, 돌아간 학교는 변한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세상이 벽처럼 느껴졌다. 그 벽을 무너뜨리는 싸움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지쳐 있었다.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끼는 참담한 세월 속에서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시를 쓰는 일 뿐이었다. 돌아보면 팔십년대는 현실의 신명과 시의 신명이 일치하던 시기였다. 현실과 시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마치 기관차처럼 내달릴 수 있었다.  시가 예술성의 울타리를 넘어 탈선을 감행해도 용인을 해주던 시대가 끝나자, 기관차도 기관사도 승객들도 모두 길을 잃고 망연히 철길 가에 주저앉아버렸다.  삶과 문학, 두 가지를 앞에 놓고 나는 뭔가 전환의 기회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고 나 자신한테 주문했다. 그 주문의 목록은 대충 이런 것들이다. 시에서 지나친 과장과 엄살을 걷어낼 것, 너무 길게 큰소리로 떠들지 않을 것, 팔목에 힘을 빼고 발자국 소리를 죽일 것, 세상을 망원경으로만 보지 말고 때로 현미경도 사용할 것, 시를 목적과 의도에 의해 끌고 가지 말고 시가 가자는 대로 그냥 따라갈 것, 시에다 언제나 힘주어 마침표를 찍으려고 욕심을 부리지 말 것, 시가 연과 행이 있는 양식이라는 점을 분명히 제고할 것….  그러자 바깥에서 또 다른 주문이 들어왔다. 이 세상은 복잡하고 갈등으로 얽혀있는 곳인데, 당신의 시는 그런 갈등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너무 편안하고 화해하는 쪽으로 한 발 앞서가 있는 게 아닌가? 당신의 시는 낭만적인 구름 위에서 거친 땅으로 좀 내려와야 하지 않겠는가?  그 주문에 나는 이제 대답을 해야 한다. 하지만 술자리에서 취중에 떠들거나 어줍잖은 산문으로 나는 대답하지 않을 생각이다. 오직 시로 나는 말해야 한다. 그리고 서두를 필요도 없다. 시는 천천히 오래도록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편의 시를 위해서 무엇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래서인지 시를 쓰는 동안에는 시간이 잘 간다. 마치 애인 하고 함께 보내는 시간처럼. 남의 시를 읽을 때도 시인이 장인적 시간을 얼마나 투여했는지 유심히 살펴본다. 시간을 녹여서 쓴 흔적이 없는 시, 시간의 숙성을 견디지 못한 시, 말 하나에 목숨을 걸지 않은 시를 나는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시를 읽고 쓰는 것, 그것은 이 세상하고 연애하는 일이라고 종종 생각한다. 연애 시절에는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연애의 상대와 자신의 관계를 통해 수없이 많은 관계의 그물들이 복잡하게 뒤얽힌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리고 훌륭한 연애의 방식을 찾기 위해 모든 관찰력과 상상력을 동원해야 한다.  연애는 시간과 공을 아주 집중적으로 들여야 하는 삶의 형식 중의 하나인 것이다. 가슴으로만 하는 연애, 손끝으로만 하는 연애도 나는 경계한다. 가슴은 뜨겁지만 쉽게 식을 위험이 있고, 손끝은 가벼운 기술로 사랑을 좌우할 수도 있다. 가슴과 손끝으로 함께 하는 연애, 비록 욕심이라 할지라도 내 시는 그런 과정 속에서 태어나기를 꿈꾼다.  몇 해 전에 전주 근교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완주군 구이면이라는 지명을 따서 친구들이 붙여준 이름이 구이구산(九耳九山)이다. 겨우 시 몇 줄 끼적이는 시인 주제에 무슨 작업실이냐고, 누군가 핀잔을 준다 해도 괜찮다.  전업으로 글을 쓰면서 나는 시도 때도 없이 걸려 오는 전화 때문에 골머리를 앓곤 한다. 전화는 도대체 외로워할 틈을 주지 않고, 나를 지치게 만든다. 전화는 나를 불러내고, 나에게 독촉하고, 내가 전화기 옆에 붙어 살도록 명령한다. 그래서 나는 전화벨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으로 피신해서 외로움이라는 사치를 좀 누리는 중이다.  문학은 여전히 외로운 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외로움을 모르는 문학이 있다면, 외로움의 거름을 먹지 않고 큰 문학이 있다면 그 뿌리를 의심해 봐야 한다. 글을 쓰는 일은 외롭기 때문에 아름다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문학하는 일은 헛것에 대한 투자임이 분명하다. 미국의 어느 교육심리학자가 ‘태양에 플러그를 꽂는 일’이 창의성이라고 말한 것처럼 시를 쓰는 일 또한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헛것인 줄 알면서도 그것을 쫓아가는 동안 나는 시인이다.   
637    문학의 힘은 해답에 있지 않고 치렬한 질문에 있다... 댓글:  조회:2120  추천:0  2017-08-17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 고은  밤늦게 돌아오는 길에 별들을 본다. 그제서야 별들이 먼저 지상의 나를보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 어떤 비관론자와도 무관하다. 이 세상에는 다른 세상을 위한 종말이 있다. 이 세상은 수많은 흥망성쇠의 시간과 장소만이 아니라 마침내 흥망성쇠그 자체인 것이다. 그렇다 해서 종말이 언제냐고 섣불리 따지려 들지 말라. 다만 그런 세상에서 엄연히 살아가는 것이 너와 나이다. 나의 문학은 이런 세상의 일부분이다. 왜 문학을 하는가? 왜 시를 쓰는가? 비 온 뒤의 앞산처럼 확실한 이런 질문으로 나는 문학을 하지 않는다. 그저 시인이 되고 싶었을 뿐이다. 밀물이었다. 그저 시인이 되었을 뿐이다. 썰물이었다. 시인 노릇 45년이 어느덧 되어가는 오늘에도 이 노릇에 대한 어떤 가설도마련되지 않았다. 일의(一義)란 죽어라고 싫다. 굳이 말하자면 불가피성말고는 내 삶의 궁핍한 역정 가운데서 문학의 이유를 찾아낼 다른 여지가없는지 모른다. 풍경이 시작되었다. 1940년대 후반 중학생이 된 나는 4㎞ 거리의 학교와집 사이 황톳길을 걸어 다녔다. 비오는 날은 우산 대신 도롱이를 걸쳤다. 한국전쟁 이전까지 약 4년 동안 이런 길을 오고 갔으므로 길 가녘 우거진여름날의 각시풀과 꿀먹은 벙어리 같은 돌멩이도 한 핏줄인 양 정이 사뭇들었다. 저녁의 향수가 감수성 근원 방과 후 거의 혼자 돌아오는 시간이 누구에게도 발설하기 싫은 행복이었다. 호젓할 때면 나는 내 동무가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혼자서 복수(復數)였다. 길은 어쩌다 만나는 장꾼이나 소달구지 말고는 비어 있었다. 미술반은자주 늦게 끝났으므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저녁 무렵이기 십상이었다. 혼자 길을 걷는 동안 나는 학교와 집의 의무로부터 지극히 자유로웠다. 그런 시간으로 너무 일찍부터 낮 동안의 끝인 저녁에 익숙해졌다. 지나는 길의 마을마다 밥 짓는 저녁 냉갈이 저기압의 땅 위를 가득히 깔려 있을 때의 그 형언할 수 없는 경건한 향수는 한 소년에게 감수성의 근원이 되어 주었다. 새벽의 수탉 우는 소리, 아침 거미줄에 매달린 이슬 보석들과 동정(童貞) 같은 햇빛 소나기, 그리고 대낮의 갑작스러운 적막…들도 찬란한 환경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들이 어떻게 나의 저녁 무렵만 하겠는가. 하루 내내 들에서 일한 다음 해가 진 뒤의 연장을 물에 씻어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농부의 일과에 어느덧 나도 속해 있었다. 저녁은 그렇게 숭고하고 슬펐다. ‘돌아오다’, ‘돌아가다’라는 말이 나에게 달라붙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한자 ‘귀(歸)’자가 어쩌다 친정 나들이하는 여자의 기쁨을 담고있다면 인간의 본성 안에 그런 귀향의 심상이 바닥져 있는 것 아닌가. 나중에 내가 쓴 시 중에 유난히 저녁이 많이 나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시인들에게도 저녁은 하나의 주조(主調)였다. 그런 저녁 무렵 나는 꺼므꺼므한 어슬녘을 걷고 있었다. 집을 1㎞쯤 남겨놓은 길 한복판에서 한 물체를 발견했다. 그 우연이야말로 필연이었다. 그 물체는 마치 오랜 발광체처럼 팍 저물어버린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책이었다. 나는 사방을 두리번거릴 겨를도 없이 그 책을 집어 들었다. 새 책이었다. 시집이었다! 한하운(韓何雲) 시집이었다! 온몸이 전류에 휘감겨졌다. 그 시집 속의 글자 하나하나를 어둠 속에서뿌리째 뽑아내어 읽어갔다. 돌부리에 넘어졌다가 일어났다. 아마도 누군가가 사 가지고 가다가 그만 길에 잘못 떨어뜨린 것이리라. 그 시집의 임자를 찾아 나설 생각 따위가 전혀 없었다. 시집은 오직 나를위해서만 거기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시집을 읽고 또 읽었다. 읽으면서 엉엉 울었다. 가도 가도 황톳길…. 이 구절은 곧장 내 심장 속의 주술이 되어 주었다. 밤새 뜬눈이었다. 조영암과 최영해라는 사람의 발문도 몇 번이나 읽었다. 먼동이 텄다. 두 가지를 결심했다. 나도 한하운처럼 문둥병에 걸려야겠다는 것과 나도시인이 되어 이 세상의 모든 길을 걸어가며 떨어져나간 썩은 발가락을 노래하고 이 세상의 길을 노래하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내 심장속 주술이 된 구절 ‘한하운시초(韓何雲詩抄)’ 이후 나는 다른 학생들과 달랐다. 그들은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이고 나는 남몰래 철이 들어버린 ‘어른’이 되었다. 점점 미술반이 싫어졌다. 교내 미술 전시회에서 받은 일등상의 기쁨은시 앞에서 무색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수채화에서 유화로 옮겨가야 했다. 그 뿐 아니라 미대를 갓 나온 교사 안태훈은 나에게 풍경화, 정물화 그리고 인물화까지도 강요했다. 아니자신의 시내 작업실로 나를 데려다가 모델 그림까지 그리게 할 것이라고다그쳤다. 이렇듯이 학교에서는 장래의 화가였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는 내일의 시인이었다. 시인이기를 얼마나 열망했던가. 그런데 바로 1년 전만 해도 나는 화가가 되기를 꿈꾸고 있었다. 외삼촌의 서가에서 반 고흐 전기를 꺼내 보았을 때 나는 ‘오직 고흐이리라. 그렇지 않으면 무이리라’라고 책상머리에 써 붙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 다음에 시인에의 열망이 다른 것이 되고 싶은 나머지 한때의 열병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그런 가정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시 혹은 문학은 반드시 그 시대의 어떤 상흔에서 그 의미를 이끌어낸다. 시인은 그러므로 상처받은 혼신(魂身)이다. 나에게 시는 전쟁 이전의 꿈과 전쟁 이후의 절실성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북위 38도선이 무너졌다.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그해 6월 27일 학교는 무기 휴교조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걸핏하면발생하던 단정 반대의 좌익 동맹휴학도 그 뒤를 이은 이승만 지지의 우익결의대회도 사라져 버린 학교 운동장은 바람이 불면 먼지 구름이 몰려가거나 하루 내내 뻐꾸기 소리만 쌓여 있었다. 더 이상 나에게는 호젓한 저녁길이 없었다. 여름 3개월 동안 내 또래의 인민군 병사와 인민위원회 그리고 민청, 여맹 따위의 붉은 완장에 익숙해졌다. 담배를 배웠다. 엽연초를 잘게 썰어그것을 종이에 말아 피웠다. 좌익·우익 핏빛 학살 전선은 낙동강 중류까지 남하했고 진주 남강도 떨어져 나갔다. 9월의 인천 상륙과 함께 거듭된 후퇴가 역전되어 압록강 강물을 떠오기까지 했다. 다시 1ㆍ4 후퇴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내 고향은 우익의 좌익 학살, 좌익의 우익 학살, 다시 우익의 좌익 학살의 보복으로 살벌한 죽음의 지역이었다. 한국전쟁 인명 희생자 300만 중 1만분의1을 내 고향이 담당한 것이다. 몸에서 썩은 학살 시체 냄새가 15일 이상 없어지지 않은 채 살아 남았다. 나는 여름 나무 그늘에서 읽었던 신석정 시집 ‘촛불’을 아주 덮어버렸다. 시는 그 야만의 계절에 대해서 무능했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가 가능한가”라고 외친 아도르노의 말은 한반도에도 적용되고 남았다. 한국시 50년대 후반 또는 60년대 전반의 모더니즘은 그것이 서구 모더니즘의 뒤늦은 모방을 모면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국전쟁이라는 거대한 상황을 통한 전통 단절과도 깊이 관련된다. 요컨대 전쟁은 시를 묻어버렸고 역설적으로 다시 시를 불러들였다. 나는 널브러진 시체더미 앞에서 인간의 정체를 다 알아버린 듯한 허무에사로잡혔으며 고향을 떠난 뒤 내내 떠돌았던 모든 산야와 도시는 폐허에다름 아니었다. 내 문학은 그런 폐허를 떠도는 자의 비가(悲歌)이기를 자처했다. 그래서시의 본적지는 폐허이고 시의 현주소는 폐허의 기억을 가진 미완의 역사현장인 것이다. 세 살 무렵의 아이는 “왜?”로부터 세상을 시작한다. “왜 아빠의 젖은젖이 안 나와?” “왜 엄마 구두하고 아빠 구두하고 달라?” 이런 의문이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구별짓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문학에서, ‘왜 문학을 하는가’라는 질문은 세 살 무렵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것은 문학의 오늘에 있어야 할 새로운 해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문학의 힘은 해답에 있지 않고 치열한 질문에 있다. 
636    남다른 개성을 추구하는 시인은 참다운 시인이다... 댓글:  조회:2312  추천:0  2017-08-17
넷째, 자기 또래 수준의 시를 많이 읽어보십시오.  나보다 잘 쓴 시를 보면 주눅이 들기도 하겠지요만 겸손하게 배울 것이며  나도 이렇게 한번 써 보리라는 오기를 가져야 합니다.  또 나보다 못 쓴 글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서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글만 쓰고 남의 글을 읽지 않으면 발전을 기약할 수 없지요.  다섯째, 글쓰기의 시작은 데생, 즉 묘사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제 어린 시절에 그림을 꽤 잘 그린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미술 선생님이 교탁 위에 세워놓은 석고상을 그리는데,  나는 두 시간 걸려서 그리는 걸 다른 친구들은 이삼십 분에 다 그렸다면서 내가 그리는 것을 구경합니다.  눈썹 하나를 세 번 관찰하고 나서 선 하나 긋고,  여러 번 보고 한 번 그리고 이런 식인데… 딴 애들은 한 번 보고 단숨에 눈·코·입을 그리는 거예요.  그러니 자연 우스운 꼴의 그림이 되지 뭡니까.  글쓰기도 이모저모 대상을 살펴본 연후 꼭 거기에 맞을 표현을 찾아야 합니다.  글쓰기의 데생 방법으로는 감각적인 표현·변용(變容)하는 표현·비유적인 표현 세 가지를 권하고 싶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좀더 자세히 말해야겠군요.  감각적인 표현이라 하면 시각, 청각, 미각, 촉각, 공감각의 표현들입니다.  "잎 지고 잎 피는/ 나뭇가지 사이로/ 반짝반짝 건너가는 햇살" ―시각,  "나직이 물 끓는 소리가/ 마냥 귀를 적신다" ― 청각,  "희끗희끗 내리는 일악장의 무반주 첼로 연주곡" ― 공감각 같은 것 말입니다.  변용하는 표현은 대상을 비틀거나, 현실의 소재를 약간 달리 손질함을 뜻합니다.  내 이야기를 쓰면서 슬쩍 남의 얘기를 가져와서 보태기도 하고, 비유적인 표현의 방법은 직유, 은유, 의인 등 아주 많지요.  예를 들어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 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기형도, 「빈 집」  여기서 "…밤들아, …안개들아, …촛불들아"는 의인화한 표현, "장님처럼"은 직유입니다.  바람 부는 여름날에 청모시 적삼을 입고 나룻배로 강을 건너가는 여인을 박목월 시인은  "모란 여정(牧丹餘情)"이란 시에서 "강을 건너는/ 청모시 옷고름"이라고 썼습니다.  은유의 표현입니다. "석탄"을 "검은 침묵에 생성하는 꽃"이라 표현하는 건 공감각과 은유를 곁들인 것입니다.  구체어+추상어, 비생명+생명의 방법으로 은유를 구사할 수 있습니다.  현대시의 생명은 은유에 있다고 말한 시인도 있답니다.  여섯째, 상상력을 확대하기입니다.  문학은 상상력이 없으면 성립할 수 없는 예술입니다. 시는 더욱 그렇습니다.  상상력이란 과거에 체험한 어떤 이미지를 되살려내는 능력이지요.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로 바뀌고 또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일, 이것이 상상입니다.  나사 하나가 우연히 주방에서 발견됐다고 합시다.  이로부터 상상력을 발동하기로 합니다.  싱크대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는데 그 나사가 빠진 구멍이 보이지 않습니다.  매우 중요한 모임이 있는데 나는 그것을 잊고 있습니다.  그 모임이라는 나사 구멍에서 빠져 있는 것입니다.  집에서 나왔는데 어디선가 집으로 내게 중요한 전화가 걸려옵니다.  나는 그것을 모르는 채 딴 일에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그리고 기억의 한 귀퉁이에서 나사 하나가 슬그머니 빠져 나옵니다.  연상과 유추의 거듭되는 이러한 상상력이 한 편의 시로 쓰여질 수 있습니다.  어디서 빠져나왔을까  아침에 방을 쓸다가 빗자루에 걸려  뒹구는 나사 하나  주방에서 발견된 쇠붙이  팥알만큼 작지만  아무래도 위험한 누락  전기밥솥의 수상한 밑창에도  싱크대의 경첩에도  빠진 구멍이 없는데  누가 나를 찾았을까  내가 외출하고 없는 동안  빈 아파트에서 울렸을 전화벨 소리  빠져서는 안 될 중요한 시간에  나는 빠져나왔을까  시내버스에 앉아서  휴대폰을 귀에 대고 껄껄거리는  낯선 사내의 뒤꼭지를 보다가  문득 퓨즈가 나가버린  내 기억의 나사 하나를 들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엘리엘리 나의 하느님.  ― 졸시 「누락」  일곱째, 시 쓰기는 할 말을 감추는 일입니다.  꼭 하고 싶은 말을 시에다 직접적으로 쏟아내지 말아야 합니다.  두 남녀가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의 눈이 맑고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그대로 "너는 눈이 참 맑고 아름답구나." 이러면 코미디가 됩니다.  "네 눈 속에 내가 빠지고 싶다."고 하는 게 시적 표현입니다.  시는 할 말을 숨기고 감추는 데 묘미가 있습니다.  그것을 독자가 생각하면서 찾아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자기 감정을 꾹꾹 누르고 참아서 간접적으로 돌려 함축적으로 표현할 때 시를 읽는 이가 공감하는 법입니다.  그런 점에서 정지용 시인의 "유리창"을 예로 들어봅니다.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이 "유리창"은 어린 자식을 잃고 밤에 창밖을 내다보며 슬퍼하는 애절한 아버지의 심경을 쓴 시입니다.  "어린 나이에 사랑하는 내 아들은 저승으로 갔구나.  너는 폐를 앓다가 끝내 내 곁을 새처럼 날아가 버리고,  여기 남은 아비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린다.  인생이 이렇듯 허무한 것이냐.  밤 유리창에 비치는 흐린 그림자에서 너를 떠올리니 더욱 가슴 아프구나." 이러면 시가 안 됩니다.  시를 쓰는 이가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완곡하게 표현해야 읽는 사람이 제대로 느끼게 됩니다.  끝으로 한 말씀만 덧붙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모름지기 인생이나 현실에 대하여 자기 주관이 확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만의 안목으로 현실을 파악하고 사물의 의미를 해석하는 일,  그것이 그 사람의 글에 나타날 때 "개성"이 됩니다.  호박 같은 세상을 호박같이 둥글둥글 살아간다,  이런 것도 개성이라 할 수 있겠지요.  자기보다 나이도 한참 아래인 **령을 위해 생신 축하의 시를 써주고 세계 일주 여행의 선물을 받은 어떤 저명한 시인도 있습니다만,  저는 결단코 그런 개성을 추구하는 시인은 참다운 시인으로 생각지 않습니다.   
635    좋은 음악은 시를 쓰는데 령혼의 교감적 밑바탕이 된다... 댓글:  조회:1957  추천:0  2017-08-17
시를 찾는 그대에게 / 강인한  저는 우리 집사람보다 이십 킬로그램 정도 가벼운 체중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보시다시피 이렇게 깡마른 체구라 우리 학교 아이들은 저에게 "멸치"라는 별명을 붙여서 부르고 있는데,  그게 전 못마땅합니다. 그 이유는 아이들의 단순 사고 때문입니다.  "조용한 멸치"라든가 "이쁜 멸치" 혹은 "태평양 멸치"라고 불러준다면 좋겠는데 아이들은 너무 단순해요.  "조용한 멸치"라고 말하는 저변에는 단순 사고를 넘어서는,  복합적이고 차원이 한 단계 상승한 사고력에서 나온 나올 수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안경 쓴 여우", "썩은 미소" 같은 별명을 우리 고등학교 시절에는 많이 불렀고 즐겼습니다.  요즘 아이들 하향 평준화가 돼 가지고 해가 갈수록 바닥 모르는 주식 시세처럼  점점 더 미련해지고 멍청해지고 있는데, 이거 큰일 났어요.  책을 멀리하고 컴퓨터나 오락 게임에 빠져서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 소수의 몇 명은 뛰어난 아이들도 있으니 다행이지요.  우리 학교에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엄청나게 책을 많이 읽는 아이가 하나 있습니다.  학교 성적이 일 학년 때는 중간 정도였는데  삼 학년이 된 지금은 전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고 있습니다.  그런 소수의 엘리트가 결국 우리 나라를 이끌어나갈 것이므로  우리 나라가 유지되고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이 사, 오십이면 머리가 굳어져서 무엇을 해도 발전이나 향상이 없다고들 말합니다.  그거 틀린 말입니다. 제 경우를 하나 예로 들어보지요.  삼 년 전까지 저는 바둑 실력이 칠 급 정도였습니다.  인터넷이 학교에 들어오게 되면서 이런 저런 것들 구경을 하다가,  인터넷으로 바둑을 둘 수도 있다는 걸 알고 무척 반가웠습니다.  인터넷으로 바둑을 둔다는 것 그건 신대륙의 발견이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 동네 피씨방엘 갔습니다. 피씨방 주인은 나이 많은 사람이 찾아오니 어쩐지 떫은 기색이었습니다.  피씨방에 온 아들이나 누구를 데려가려고 찾아온 걸로 안 것 같았어요.  아, 나도 피씨방에 바둑을 두러 온 사람이라고 하니까 특별 대우를 해주대요.  엘에이에 사는 칠 급, 울산 칠 급, 서울 칠 급, 대구 칠 급을  인터넷으로 만나서 바둑을 두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었습니다.  그 해 겨울 방학 내내 피씨방을 다녔습니다.  언젠가는 함박눈이 내리는 밤 세 시에 집에 들어가기도 했어요.  하도 안 되어 보였던지 집사람이 인터넷 장난감을 우리 집에도 설치했습니다.  하루에 최소 서너 판, 많이는 열 판 정도 바둑을 두었지요.  나보다 잘 두는 고수들 바둑도 구경하고……. 지금은 제 바둑이 삼 급쯤 됩니다.  글쓰기도 마찬가집니다.  글쓰기에 미쳐서 한 삼 년 노력한다면 돌팔이 시인, 수필가가 넉넉히 되고도 남을 거예요.  요컨대 가장 중요한 게 그겁니다. 미쳐야 한다는 것!  바로 뜨거운 열정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저는 스물세 살에 문단에 등단하였는데요,  실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신춘문예에 응모해서 떨어지고 떨어지고 … 그랬지요.  심사위원들이 천재를 몰라주는구나 하고 야속하기도 했고 한편으론 오기가 생깁디다.  대학에 들어가서부터 본격적인 글쓰기를 하였습니다.  시도 쓰고 소설도 쓰고, 막 썼습니다. 그 무렵에는 화장실에 가서도 시를 끙끙거렸고, 신문을 보면서 신문 기사나 제목에서 시적인 영감을 떠올리기도 하였고  심지어는 꿈속에서도 시를 쓸 만큼 시에 온통 미쳐 있었습니다.  결국 그렇게 한 오 년 미친 셈입니다, 신춘문예에 당선되기까지.  사람들이 흔히 "피나는 노력"이라고 말하는 것―  그게 어떤 건지 감이 잡히지 않는 막연한 말 같은데요, 바로 이렇게 "미쳐도 곱게 미치는 것"을 이르는 것이라 봅니다.  제가 시를 쓰는 사람이니까 인제 어떻게 하면 제대로 시다운 시를 쓸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일곱 가지로 요약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많이 써봐야 합니다. 많이 쓰면서 항상 고치고 다듬어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 내가 쓴 글이 단박에 훌륭한 시로 되는 건 아니지요. 젊은 시인 안도현이 쓴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이 석 줄의 짧은 시를 쓰기까지 그는 백 번 이상 퇴고를 하였다고 합니다.  저 역시 많이는 열댓 번 퇴고한 시가 있습니다.  일필휘지로 단숨에 휘갈겨 쓴 시는 한 편도 없어요.  저는 총각 시절에 한 편의 시를 쓴 다음에는 어머니께 그 시를 보여드렸습니다.  시에 대한 독자의 반응을 알고 싶어서죠.  제 어머니는 초등학교만 졸업했을 뿐, 더 이상의 학력이 없는 분입니다.  그래도 제가 들려주는 시에 대해서 좋다, 안 좋다 간단한 응답을 항상 느낌으로 말해줬지요.  지금은 아내한테 시를 읽어주고 퇴고하는 데 참고를 하고 있어요.  여러분도 글을 써서는 가장 가까운 분에게 읽혀보고 그렇게 해 보십시오.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둘째, 좋은 시를 많이 베껴 써볼 일입니다.  자기 취향에 맞는 시인의 시집을 세 권 이상 손으로, 반드시 손으로 베껴 써보세요.  어느 신문에선가 소설가 신경숙의 습작 시절의 고백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등단 전 어느 여름 방학 때 자기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단편소설 일곱 편을 손으로 베껴 써봤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냥 눈으로 읽을 때와는 전혀 다르게 손으로 베껴 쓰면서 새로운 느낌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아하, 소설의 구성이라든가 묘사는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하고 저절로 알아지더라는 거였습니다.  어찌 보면 우직스럽겠지요. 하지만 못 속의 물고기를 잡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막고 품는 것 말고는 완벽한 방법이 있을 수 없어요.  신춘문예에는 적어도 천 명 이상이 응모합니다.  그 중에서 뽑힌 이의 시라면 우선 신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드는, 팔십년대나 구십년대 신춘 당선 시인을 택하여  그 시인의 시집을 고스란히 베껴 써볼 일입니다.  그에 앞서 우리말의 맛을 알기 위하여서는 오래 전의 시인들,  시문학 동인들과 청록파 시인들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셋째, 문학 아닌 인접 예술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영화, 미술, 음악. 좋은 영화에서 시의 소재가 얻어지기도 합니다.  전주고교 시절의 은사님이신 신석정 시인은 종종 영화에서 시의 소재를 구하셨습니다.  "영구차의 역사"라는 시는 "슬픔은 그대 가슴에"라는 영화에서 나온 시입니다.  이 영화를 최근 어느 텔레비전에서 방송한 적이 있지요.  마하리아 잭슨이라는 흑인 가수의 주제가가 퍽 인상적인 기억이 새롭습니다.  석정 시인의 "창"이라는 시는 영화 "안네의 일기",  그리고 "조가 삼장(弔歌三章)"은 "몬도가네"라는 영화에서 소재를 얻은 시입니다.  미술은 초현실주의 화가들― 살바도르 달리, 마르크 샤갈 그 외에 프리다 칼로, 에드바르트 뭉크 등의 그림을 알았으면 합니다.  그들의 그림을 말로 표현한다면 그게 은유를 구사한 시가 되기도 할 겁니다.  바흐, 슈베르트, 드뷔시, 스트라빈스키의 음악도 시를 쓰는 데 좋은 자양이 되어줄 거예요.  영혼의 교감(交感)이라는 점에서 좋은 음악은 시를 쓰는 데 밑바탕이 됩니다.   
634    사람들 놀라게 시를 써라... 댓글:  조회:2071  추천:0  2017-08-17
Ⅲ.  감기는 일종의 경고이다. 그래서 지친 심신을 안정하고 휴식하는 일 이외에는 특효약이 없다. 마음으로부터 온화한 정서를 생성시켜 주는 한편 세속의 잡다한 욕망으로 더럽혀진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준다는 점에서 시를 읽는 일 또한 경고라고 생각한다. 읽고 난 다음에도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해 주는 작품일수록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성찰과 다짐의 계기로 작용한다는 점에서이다. 보여주는 시이거나 말하는 시이거나 작품을 감기가 주는 경고로 인식한다면 갈등과 분쟁도 사라지지 않을까. 겨울이 쓰러지는 끝자락을 보았다. 겨울과 봄의 접점에서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경계 허물기의 자유로움에 대하여  주경림  (시인)  *유자효, 「새」(『시와사상』 04년 겨울호)  *박승미, 「마음 心 둘」(『문학과창작』 04년 겨울호)  *이나명, 「파릇하니 파란 집」(『문학과창작』 04년 겨울호)  *황상순, 「흔적 1」(『문학과창작』 04년 겨울호)  *박성우, 「접시」(『현대시학』 05년 1월호)  *이영식, 「이별연습」(『문학과창작』 04년 겨울호)  1  우리는 3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다. 3차원이란 지구상에서 전후, 좌우, 위 아래로 자유롭게 움직이며 이동이 가능한 세계를 말한다. 시의 세계에서 시인은 3차원의 세계에 몸을 두지만 상상력이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훌쩍 4차원의 세계로 넘나들 수 있다. 4차원의 세계에서는 3차원의 현실에 시간이라는 개념을 첨가해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세상 만물과 인간이 몸담고 있는 세상은 시간 따로 공간 따로 편을 갈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 함께 어울려 4차원 시공간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독자들은 자발적으로 혹은 권해서든 시인의 타임머신을 타고 ‘시’라는 공간으로 이동하게 된다. 한 편의 시는 그 공간에서 하나의 우주와 맞먹게 되어 시인이 먼지 한 톨을 들어도 우주가 몽땅 따라 들리며 티끌 한 개를 놓아도 우주가 모조리 함께 놓이는 새로운 세상을 보여준다. 그 공간에서는 시를 따라 자연과 독자가 하나가 되기도 하고 일체 경계가 없어 죽음과 삶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도 있다. 경계를 허물고 희노애락의 감정의 소통이 자유로운 시의 세계를 엿보기는 즐겁지만 이 땅에 시인으로 살아 남아야 하는 현실과 꿈의 부조리가 만만치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시인은 시대가 암울할수록 상상력의 변주를 더욱 화려하게 펼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시가 더욱 빛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몇 편의 시를 통해서 언어라는 날개를 달고 시공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세상을 엿보기로 한다.  2  산불이 났다  불의 바다 속에는  작은 새 한 마리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새는 나무 위를 맴돌며  애타게 울부짖었다  그 곳에는 새의 둥지가 있었다  화염이 나무를 타고 오르자  새의 안타까운 날개짓은 속도를 더해갔다  마치 그 불을 끄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둥지가 불길에 휩싸이는 순간  새는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리곤 감싸 안았다  갓 부화한 둥지 속의 새끼들은  그리고는 순식간에 작은 불덩이가 되었다  폼페이에는 병아리들을 날개 속에 감싸안은 닭의 화석이 있다  ―유자효, 「새」  유자효 시인은 2천년 전에 일어났던 베수비오 화산 폭발의 비극상을 현재의 시간으로 재생시키고 있다. 그러나 폼페이의 유적지에서 본 닭의 화석에서 그는 죽음이나 절망, 슬픔처럼 어두운 모습이 아닌 지극한 사랑의 모습을 보고 있다. 뜨겁게 잿빛이 된 돌멩이 하나에서 그 사랑의 유효함을 전달하고자 한다.  「새」에서 어미의 사랑은 목숨을 초월해 화석이라는 형태로 영구히 보존되고 있다. 갓 부화한 새끼들은 날갯짓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안타까운 운명이었지만 어미와 새끼들은 한 몸으로 오롯이 작은 불덩이가 되어 행복한(?) 산화를 했다. 그들 또한 화산재를 뒤집어쓴 인간 화석과 함께 ‘최후의 폼페이인’인 셈이다. 유자효 시인은 섣불리 연민을 표시하거나 슬픔을 드러내지 않고 동영상의 화면을 보여주듯 묘사로 일관하고 있다. 언어를 조종하는 감독으로서의 시인의 연출은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시간을 우리의 눈앞에 펼쳐 보여주고 있다.  여름이 다 끝나갈 무렵 소심 한 촉이 꽃을 피웠다  긴 수란치마 가즈런히 펴 놓고 앉아 조용히  가야금을 타는 듯  그 모습이 여름내 더위로 지쳤던 몸과 마음을 달래 주더니  지는 모습이 어찌 그리 다소곳한지  한 잎 또 한 잎 꽃이 질 때마다  차마 그 꽃잎 주워  버리지 못하고 기다렸다가  다 지고 난 다음  조용히 다가가 보니 떨어진 그대로  마음 심 자가 분명했다  그 마음을 이 마음속에 깊이 깊이 뿌리 내리기로 했다.  ―박승미, 「마음 心 둘」  「마음 心 둘」에서 시인은 조용히 꽃을 피워낸 소심 한 촉이 피었다 지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본다. ‘긴 수란치마 가즈런히 펴 놓고 앉아 조용히 가야금을 타는 듯’한 소심 한 촉의 고고하고 청아한 모습을 보고 있다. 수란치마는 궁중 나인들이 예식때 입던 수놓은 치마로 그 화려함 때문에 소심 한 촉과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긴 수란치마를 가지런히 펴 놓고 앉았을 때의 모습은 입고 서 있을 때의 화려함과는 사뭇 다르다. 입체적인 모습이 평면으로 깔리면서 눈에 확 띄는 화려함보다는 주위의 분위기까지 우아하게 고양시킨다. 소심 한 촉이 주위를 은은하게 물들이면서 몸과 마음을 달래주었다는 표현과 자연스럽게 잘 맞아 떨어진다. 그리하여 가야금 가락의 맑고 청아한 음색의 청각적인 효과가 그대로 ‘조용히’라는 시각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  시인은 또한 다 지고 난 꽃잎에게 ‘조용히’ 다가가 마음 심(心)자를 얻는다. 악보가 없었던 과거에 가야금을 배울 때는 ‘구전심수’(口傳心受:입으로 전하고 마음으로 받는다) 했듯이 떨어진 꽃잎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 속에 받기로 한다. ‘그 마음’인 소심 한 촉은 이제 ‘이 마음속’인 시인에게서 뿌리를 내리게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이른다. 심장의 모양을 본땄다는 표의문자인 한자어 마음 心자가 펼쳐 보여주는 시적 변용은 따스함이나 부드러움 같은 것으로 우리의 마음을 뿌듯하게 차오르게 해준다.  새들이 잎사귀처럼 모여드는 집  새들이 모여 파드득 파드득 잎을 피우는 집  먼 데 있는 새도 몇 번의 날개짓이면 금새 날아드는 집  집 없는 새도 지나가다 얼핏 깃드는 집  그 집 앞에서 누군가 발을 멈추고 쭈빗쭈빗 귓문을 연다  그의 꼬불랑한 귓속 길이 물 오른 나뭇가지처럼 뻗어나온다  어떤 새소리 한가락 파릇하니 새잎을 틔운다  가슴 갈피에 오래 접어두고 꺼내보지 못했던 모난 말 둥근 말  째구르르 깃털을 편다  입술이 벙긋 열리고 실핏줄이 팔딱 뛰고  아랫가지에서 윗가지로 올라앉는 높은 음의 가지  윗가지에서 아랫가지로 내려앉는 낮은 음의 가지  이 가지 저 가지 마음대로 옮겨앉는 마음의 가지  아아아 파릇하니 파릇한  너에게로 오래 뻗어서 그늘 드리운 집  그리움이라는 새들이 한참 지저귀다 뚝! 그치기도 하는 집  파릇하니 파란 나무집  ―이나명, 「파릇하니 파란 집」  이나명 시인은 사소한 주변의 풍경이나 일상의 사물에서 생명의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그는 시적 대상에게 시끄럽거나 과장되지 않게 조용히 다가가 미세한 것들에서부터 고유한 존재의 의미를 발견해낸다. 그 의미를 새롭게 엮어 보여줌으로써 잠시 분잡한 현실을 잊고 마음의 평안을 되찾게 해준다.  「파릇하니 파란 집」 역시 나무와 새, 집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소재에서 출발을 한다. 새들이 잎사귀처럼 모여드는 집, 그 집은 어느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집이 아니다. 그 집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자신이 먼저 귓문을 열어 깊숙하고 은밀한 마음 속 길을 꺼내는 것이다. 새소리같은 아름다운 새잎을 그 집의 나뭇가지에 내밀하게 틔우는 것이다. 그것은 “가슴 갈피에 오래 접어두고 꺼내보지 못했던 모난 말 둥근 말”인 것이다. 이 가지 저 가지에 마구 피워내고 싶은 잎사귀, 즉 ‘그리움’으로 마구 지저귀고 싶은 언어의 잎사귀인 것이다. ‘너에게로 오래 뻗어서 그늘 드리운 집’이라는 심정적인 표현처럼 그것은 우리의 마음 속 한 켠마다 남아 있는 그 모든 ‘그리움의 집’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나명 시인은 감각적인 상상력으로 독자들의 청각과 시각을 골고루 자극함으로써 높은 시적 성취도를 보여주고 있다.  네거리 횡단보도 아스팔트 위에  한 사내가 모로 누워 있다  (실은 여자였는지도 몰라)  아니다, 누워 있는 것은  흰 페인트로 그린 그의 윤곽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탈피를 하였던 것일까  비 마악 그친 뒤 햇빛 쏟아져내릴 때  맞아, 저 빌딩 창에 반사되어 날을 세운 빛이  그의 비상을 재촉하였을 거야  비에 젖은 옷 훌훌 벗어버리고  그는 여기서 처음 날개를 폈던 게지  탈피의 고통으로 군데군데 핏자국이 번져 있다  나비 되어 날기 위해서는  몇 개의 허물을 더 벗어야 하는 것일까  몰려나온 개미들이 걸음을 멈추고  사내가 남겨놓은 껍질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그가 걸어온 세상의 모든 길이  물결치는 차량들 위에서 잠시 일렁거렸다  ―황상순, 「흔적 1」  황상순 시인은 교통사고 현장에서 주검이 거두어진 자리에 남은 흰 페인트의 윤곽을 지켜본다. “아스팔트 위에 한 사내가 모로 누워 있”었을 그 자리에 이제 “그의 윤곽”만이 남아 있다. 시인은 여기에서 사내의 실재(實在)를 부정하면서 ‘탈피’라는 화두를 넌지시 끄집어낸다. 시인의 응시는 목숨을 빼앗아간 비극적인 장소에 동정어린 눈길을 보내는 대신 역설적으로 ‘그는 이곳에서 탈피를 하였던 것일까’ 라는 상상력을 발동시키고 있다. 실재와 부재 사이에 ‘탈피’를 끼워넣은, 시인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은 고층빌딩에서 반사된 ‘날을 세운 빛들이” 사내의 비상을 재촉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네거리 횡단보도나 유리창 가득한 빌딩들은 전형적인 현대도시의 모습으로 모든 것이 판에 박힌듯 숨막히는 공간일 수 있다. 이미 죽음을 맞이했지만 사내(혹은 여자)는 숨막힐 정도로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빨리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사내의 죽음이 자의적인 것이든 타의적인 것이든, 죽음은 현실의 억압으로부터 그를 자유롭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제 현실에 남겨진 흔적은 고통스러웠던 육체의 핏자국뿐이다. 그의 영혼은 ‘비에 젖은 옷’처럼 남루했던 삶에서 탈피하여 어디에선가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탈피’란 허물을 벗는 일, 또한 낡은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워짐을 이르는 말이다. 시인은 몇 개의 허물을 더 벗어야 우화등선(羽化登仙)할 수 있을까 라며, 자유롭고 일탈된 사유의 세계에 대한 동경심을 드러낸다. 그것은 죽음과도 같은 극한의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할 것이다. “그가 걸어온 세상의 모든 길들이” 죽음으로 상징되는 ‘차량’ 위에 일렁거리는 환상을 보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접시가 깨진다 하나 둘 쏟아지기 시작한 접시들이 테이블을 치며 깨지고 무릎을 치며 깨진다 밥알 퉁기며 깨지고 튀어 올랐다가 떨어지며 깨진다 속 깊이 쌓여 있던 접시들이 와그르르, 서로의 등짝을 밀치며 깨진다 어휴 놀래라, 귀를 막건 인상을 찡그리건 말건 신나게 깨진다 엉덩이 들었다놓으며 경쾌하게 깨진다 키득키득 입속에서 나와 쉴 새 없이 깨지는 접시! 침 튀기며 나온 접시들이 손뼉을 치며 깨지고 어쩜 좋아, 발을 구르며 깨진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깨져야 후련한 접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깨져서 안 보이는 접시  ―박성우, 「접시」  한 편의 시를 잘 읽어서 시가 가지는 의미를 온전히 알아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박성우 시인의 「접시」는 어떤 관념이나 의미없이 ‘접시가 깨진다’의 문장을 계속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깨져서 안 보이는 접시’가 될 때까지 말과 말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이미지의 변주에 집중하게 된다. 언뜻 보면 언어의 유희 같기도 하지만 ‘접시’를 통해 박성우 시인이 말하고 싶은 간절한 그 무엇이 궁금해진다. 접시가 깨진다는 것은 일종의 파괴 행위로 기존의 틀이나 질서를 무너뜨리는 일탈의 욕망에서 오는 야릇한 즐거움과 해방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입속에서 나와 쉴새없이 깨지는 접시!”에 이르면 접시가 시적 화자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눈치채게 된다. 접시는 시인의 말도 되고 마음도 되는지라 결국 자신의 내면의 그 어떤 것을 털어내는 작업일 것이다. 그것은 반복적으로 깨뜨리는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강박관념으로부터 벗어나 분열된 세계 속에서 자신을 찾으려는 끊임없는 몸부림일 수도 있다. 지금 있는 기존의 형체를 완전히 파괴하고 해체함으로써 어떤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일종의 구도 행위(?)처럼 읽혀지기도 한다. ‘접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리고 온전히 비웠을 때야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테이블을 치며/ 무릎을 치며/ 밥알을 퉁기며/ 서로의 등짝을 밀치며/ 엉덩이를 들었다 놓으며/ 발을 구르”는 접시들. 아무튼 독자들은 지면을 뚫고 나오는 접시 깨지는 소리의 소란함을 통해 억압된 것으로부터의 해방, 또는 발산 작용으로 속이 후련해지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했을 것이다.  중랑천 둔치  노부부 한 쌍 자전거와 한판 벌이고 계시다  할미는 페달 위에 안다리걸기를 시도하고  삼천리호 외궁둥이 샅바를 잡은 할배는  엉중겅중 두꺼비씨름 중이시다  뒤에서 밀면 몇 바퀴 구르다가, 기우뚱  곧추세워 놓으면 또다시 넘어질 듯, 비틀  그렇게 밀고 넘어지고 에돌아  함께 한 곳을 바라보며 걸어온 길  돌아보면 풋꿈인 듯 눈에 밟혀오는데  아이들 MTB자전거는 꼬리 물고 내달린다  목 길게 빼고 구경하던 해바라기  할배 등뒤에서 고개 꺾고 하품할 때쯤  웅크렸던 할미의 어깨가 펴지고  은빛 바큇살에 탱탱하게 힘이 실린다  할배가 슬며시 꽁지를 놓은 줄도 모른 채  차르르― 자전거도로 위로 날아가는 할미새  이제 되었네그려, 혼자라도  넘어지지 말고 싱싱 나가시게  서툰 씨름판 곁에 맘 졸이던 호박덩굴  이파리 세워 갈채를 보내는데  샅바 놓으시고 뒷짐진 할배의 빈손  그늘, 너무 깊다.  ―이영식, 「이별연습」  평생 해로한 부부가 죽음을 동시에 맞이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행운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영식 시인은 죽음을 앞둔 노부부의 심리를 자전거 타기에 비유하고 있다. “함께 한 곳을 바라보며 걸어온 길”이지만 이제 둘 중 누군가는 혼자 남아 자전거 타기를 해야만 할 것이다. 평생 할아버지에게 의지하며 살았던 할머니는 아직도 자전거 타기가 서툴다. 뒤에서 밀어줘도 기우뚱거리고 곧추세워 놓아도 비틀거린다. 그러한 할머니에 대한 염려 때문에 할아버지는 자전거와 의 싸움에서 쉽게 삽바를 놓지 못한다. 자전거 타기는 바로 삶을 살아가는 힘이기 때문이다. 두꺼비 씨름처럼 굼뜨고 하품이 날 지경이지만,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홀로 탈 수 있을 때까지 끈질기게 매달리고 있다.  마침내 웅크렸던 할머니의 어깨가 펴지고 자전거의 은빛 바퀴살에 탱탱하게 힘이 실린다. 이제 혼자서도 넘어지지 않고 싱싱 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정신적으로 홀로 설 수 있게 된 할머니를 보며 할아버지는 ‘이별연습’이 끝났음을 알고 샅바를 놓는다. 지루한 씨름이 끝나고 홀가분하게 빈손이 되었지만, 삶과 죽음에 드리워진 그늘은 할아버지에게 “너무 깊다.”  이영식 시인은 이미 「낮달」에서 영정사진을 찍는 노인들의 모습을 천연덕스럽게 잘 그려낸 바 있듯이 「이별연습」에서도 노인들의 삶의 한 단면을 잘 포착해 내고 있다. 아마 허장성세(虛張聲勢) 없이 사소한 일상에서도 삶의 의미를 보다 깊이 천착해내는 시인의 성실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3  유자효 시인은 최후의 폼페이인이 된 「새」의 화석에서 2천년이 지나도록,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유효할 어미의 사랑이라는 보석을 찾아냈고, 박승미 시인의 「마음 心 둘」에서는 표의문자인 ‘心’자의 이미지 변주를 통한 물아일체(物我一體)를 이루는 서정시의 정수를 맛볼 수 있었다. 이나명 시인은 독특한 감성으로 새소리와 새잎이 피어나는 「파릇하니 파란 집」 한 채를 선사했다. 「흔적 1」에서 황상순 시인이 주검이라는 탈피를 통해 비상하는 상상력의 세계를 보여주었다면, 박성우 시인의 「접시」는 깨뜨리기라는 파괴 행위를 통해 분열된 세계 속에서 자아를 찾으려는 모색을 보여주고 있다. 이영식 시인은 노부부의 자전거 타기에 비유한 「이별연습」으로 죽음과 삶의 깊은 그늘을 우리에게 펼쳐 보이고 있다,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평생을 견지한 시작(詩作) 태도로 ‘내 글이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서도 쉬지않겠다는 ‘어불영인 수사불휴’(語不營人 雖死不休)의 뜻을 되새겨보는 것으로 글을 마친다.     
633    보여주는 시와 말하는 시... 댓글:  조회:2085  추천:0  2017-08-17
보여주는 시와 말하는 시  박영호  (문학평론가, 협성대 교수)  Ⅰ.  시가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위주로 파악할 때 효용론적 관점은 성립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인의 목적이 효과적으로 전달되었는가의 여부와 독자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점이다. 시가 독자에게 미친 영향은 다시 ‘교시적 측면’과 ‘쾌락적 측면’으로 분류된다.  “시는 유용하고 즐거이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라는 아놀드(M.Arnold)의 진술이나, 『논어(論語)』 「양화(陽貨)」편에 나오는 “시는 흥을 일으키고, 인정을 살피게 하며, 무리 짓게 하고, 원망하게 하기도 한다. 가깝게는 어버이를 섬기게 하고, 멀게는 임금을 섬기게 하며, 조수초목(鳥獸草木)의 많은 이름을 알게도 한다” 라는 구절은 모두 시의 교시적 기능에 대한 설명이다. 반면에 쇼펜하우어는 “문학의 본질은 ‘미’의 추구에 있으며, 이때의 ‘미’는 세속적인 이해에서 벗어나 윤리 도덕과는 일차적으로 단절된 비목적적 차원의 체험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쇼펜하우어보다 앞서 예술활동이란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숭고한 지적 행위가 되어야 한다는 ‘무목적의 목적성’을 주장하였던 칸트의 견해는 시의 쾌락적 기능을 염두에 둔 설명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시의 기능을 구체화하는 방법에 있다. 필자는 ‘보여주는 시’와 ‘말하는 시’로 대별된다고 생각한다. 전자가 진술보다는 이미지 위주로 시를 형상화하는 방법이라면, 후자는 반대로 이미지보다는 진술에 의존한다. 어떤 방법을 활용하든 중요한 것은 심리적 안정과 정서적 쾌감을 제공해주거나 반성을 통한 신생(新生)의 의지로 작용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계절에 출간된 잡지에 수록된 작품들을 일별(一瞥)하면서 이와 같은 생각을 해보았다. 하여 그런 관점에서 작품을 선별하였다.  Ⅱ.  시인이 자신이 정서를 구체화할 때 대상과 자신의 체험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방법을 ‘보여주기’라고 한다면, 시인이 시적 화자가 되어 직접 진술하는 방식을 ‘말하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여주기’는 시인이 말하고 싶은 내용을 직접 말하지 않고 대상을 이미지로 승화시켜 간접적으로 제시하는 방법으로 ‘묘사’에 의존한다. 아치볼드 매클리쉬가 “시는 의미해서는 안 된다. 다만 존재할 뿐이다” 또는 “시는 사실 자체를 말해서는 안 되고 등가적이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 모두 이미지를 통한 간접적인 발화방식을 염두에 둔 진술이다. 가능한 한 진술을 배제하고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정서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작품을 보기로 하자.  청둥오리는 연푸른 수면 위에 목안처럼 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수면 밑에서 쉴새없이 물을 젓고 있다. 쌀쌀한 바람에 묻어 있는 연두색 미나리 냄새를 가려내는 내 시린 코끝처럼, 귤빛 오리발은 시시각각 변하는 물의 온도를 재고 있다.  시베리아 고원 자작나무 숲을 건너는 눈바람 소리를 찾아, 미지의 길을 날개 칠 순간을 기다리는 오리의 몸은 언제나 반쯤 수면 밑에 잠겨 있다. 한 번의 폭발을 위하여 화약가루가 머금고 있는 적막한 기다림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오리.  삭막한 겨울풍경에 대한 그리움을 접은 날개 밑에 품은 채 오리들은 비취색 물빛 위를 고요히 흐르고 있다. 바람은 언제나 미래 쪽에서 불어온다. 기다림에 서린 긴장을 견디지 못한 야생의 매화가 첫 꽃망울을 터뜨리는 순간, 오리들은 일제히 물을 차는 자욱한 깃 소리가 되어 눈부신 하늘에 퍼진다.  ―허만하, 「오리는 순간을 기다린다」  수면 아래로 반쯤 몸을 숨긴 채 날개 칠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오리의 긴장된 모습은 둘째 연까지 지속된다. 견고한 긴장은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리는 순간 물을 차고 비상하여 하늘로 퍼지는 셋째 연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원경(遠景)에서 근경(近景)으로 좁혀오며 점차 그 실체를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처럼, 오리가 비상하기까지의 과정을 조금씩 조금씩 근접해오고 있다. 점차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에 비례하여 밀도는 조밀해진다. 그래서 독자 역시 점차 숨이 막혀온다. 끝 부분에 이르면 결빙된 얼음이 깨져나가는 듯한 숨소리를 토해내게 된다.  여기서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시인의 의도이다. 무엇을 말하고자함이었을까? 수면 위로 드러난 오리의 형체는 비록 평온해 보여도 수면 아래서는 평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물갈퀴를 젓고 있다는 감추어진 사실을 인식하여야 한다는 것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림과 동시에 비상하는 오리처럼 격발(擊發) 직전과 같은 긴장감으로 무장하고 우리 삶을 응시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함이었을까? 그 어떠한 의미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려 할 때 작품이 갖는 의미는 오히려 반감된다는 사실이다. 낡은 의미로 덧칠하여 작품이 갖는 아름다움을 훼손시키는 오독(誤讀)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범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허만하 시인의 작품이 갖는 의미를 우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시인은 진술을 철저하게 차단하고 오직 정경만을 제시함으로써 오히려 많은 의미들을 생생하게 살려내고 있다. 행간과 행간,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관계, 원경에서 근경으로 집약해오는 시적 기법 그리고 이들 사이에 내재하고 있는 일촉측발과도 같은 긴장감, 이런 것들만으로도 훌륭한 시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가을이 와서 오래된 램프에 불을 붙인다 작은 할머니가 가만가만 복도를 지나가고 개들이 컹컹컹 짖고 구부러진 언덕으로 바람이 빠르게 스쳐간다 이파리들이 날린다 모든 것이 지난해와 다름없이 진행되었으나 다른 것이 없지는 않았다 헛간에 물이 새고 울타리 싸리들이 더 붉어 보였다  ―최하림, 「마음의 그림자」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상반된 이미지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라고 시인이 말한 울타리 싸리 역시 변한 것은 아니다. 더 붉어 보였다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시인이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근원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결국 달라진 것은 없다. 다만 세월의 흐름과 함께 조금씩 내가 퇴락해갈 뿐. 그렇듯이 산다는 것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러한 큰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조금씩 확인하고, 천천히 수용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이 인식한 사실을 작품 어느 곳에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다만 작품의 내면에 자신이 인식하기까지의 치열함과 그것을 기꺼이 수용하고자 하는 가슴 시린 숙연함만이 드리워져 있을 뿐이다.  상반된 이미지로 대립의 각을 세우고 이를 다시 통합하여 자신의 의도대로 이끌어 나가는 동안 자신의 정의(情意)를 직접 진술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작품으로부터 생성되는 서늘한 자장(磁場)은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  허만하 시인과 최하림 시인의 작품은 진술보다는 묘사에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처음 읽으면 그림을 보는 듯한, 그도 아니면 몇 장면의 영상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거듭 읽다보면 묘사 뒤에 숨겨져 있는 많은 의미들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말하고 있는 가도 그만큼 중요하다. 김소월의 「진달래 꽃」이 좋은 시로 평가되는 것은 이별의 정한을 노래해서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 시는 모두 다 좋은 시가 되어야 한다. 언어와 이미지 그리고 리듬 등 시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이별의 정한으로 형상화되기 때문에 좋은 시로 평가받는 것이다. 두 시인 모두 자신의 의도를 감춤으로써 오히려 독자들에게 의미가 여실하게 전달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묘사로 일관된 작품을 읽을 때 독자들은 시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거나 정반대로 파악하는 실수를 범한다. 이같은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 시인들은 이미지나 상징 그리고 비유와 대비 등과 같은 시적 기법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자신의 의도를 슬쩍 흘려놓는다. 다음에 인용한 두 편은 묘사에 의존하면서도 상반된 이미지를 대비시키거나 시적 대상에 자신의 정서를 응축시키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우리는 시인의 정서를 엿볼 수 있다.  지율(知律), 계율을 안다  거짓되고 그릇되게 행함을 막는 율법을 안다는 이 말,  참으로 무서운 말 아닌가  내가 아는 한 비구니의 법명이 지율이다  천 명의 성인이 나온, 천 가지 연꽃이 핀 것 같은  천성산(千聖山)  아래 내원사에서 조용히 수도하며 지냈던  눈매가 그윽하고 맑고 단단한 사람  그가 깊은 산 속 깨끗하고 차가운 물에만 산다는,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만 산다는 꼬리치레도롱뇽을 살리려고 생명을 내놓았다  형상이 있거나 없는 모든 것을 화엄이라 한다는데  산정에 펼쳐진 늦가을 화엄벌은 흰 눈이 덮인 듯 억새의 물결로 장엄해  관통 터널 공사도 도롱뇽 소송도 다 잊고 사람들 탄성을 지른다  이 화엄벌의 늪에 지율의 친구 도롱뇽이 산다  갈색 등에 노란 점무늬가 별처럼 펼쳐져 있는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꼬리치레도롱뇽은 겨울잠에 들었나  화엄늪의 화엄세계가 바로 너의 우주인데  팔색조야 황조롱이야 청딱따구리야 삼광조야  천성산은 천성산만의 근심이 아닌 것을 이제야 알겠구나  지율(知律), 어둑해져가는 부산 시청 앞에 앉아 곡기를 끊고  도롱뇽 수를 놓고 있다  한 땀 한 땀의 바느질로 뭇생명을 살리려 하고 있다  ―조용미, 「도롱뇽 수를 놓다」  경부고속철 노선이 천성산을 관통하는 것에 반대하여 석 달 넘게 단식으로 저항하고 있는 지율 스님에 시인은 자신의 의도를 투사하고 있다. 모두가 격의 없이 어우러져 사는 세상, 그것이 곧 ‘화엄의 세계’이다. 그런 화엄이 깨지는 것은 우리 삶의 근거지가 파괴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시인은 “천성산은 천성산만의 근심이 아닌 것을 이제야 알겠”다고 토로한다. 그렇지만 천성산 아래 속세는 어떠한가? 억새의 물결에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잊고 탄성을 지른다. 이들 속세의 사람과 한낱 도룡뇽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고 있는 지율 스님은 명백하게 대비된다.  시인의 의도는 분명하다. 순간의 고비를 넘기고 나면 모든 것을 잊고 마는 우리의 천박함과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뭇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부산 시청 앞에 앉아 곡기를 끊고 도룡뇽 수를 놓고 있을 지율 스님의 거룩함을 대비시켜 많은 것을 생각하도록 이끌고 있다. 필자가 위 작품을 눈여겨보았던 것은 시인의 의도 때문만은 아니다. 그 보다는 시인이 자신의 정의(情意)를 드러내는 법 때문이었다. 유사한 방식으로 씌어진 작품을 한편 더 읽어보기로 하자.  내 안에 오랫동안 닫아두었던 바느질함이 열렸다  사개 물려놓은 한쪽 귀퉁이가  밤새 울컥이며 삐걱거리더니  그 닫혀 있던 뚜껑이 털썩, 한숨 내려놓듯 열린 것이다  가득 붉은빛이다  내 안에서 들썩이던 바람을 꾹꾹 눌러 박음질 해둔  붉은 솔기들이 보인다  그가 차가운 눈빛으로 돌아설 때마다  내 속으로 들어와 촘촘히 박혀  망설임으로 새겨진 무늬들  그 붉은 날들을 내 안 깊숙이 넣어두고  오랫동안 재워 두었던 밤들  어쩌자고 그대로 넣어두려 했던 것일까  나를 비집고 나온 솔기들이  저렇듯 곱고 생생한데  아직 그대로 있는 마음  이제는 열어 두기로 한다  ―정진영, 「이상한 상자」  시를 읽고 상상을 한번 해보자. 그가 차가운 눈빛으로 돌아설 때마다 나는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왜 나는 할말이 없었겠는가. 망설이다 고작 침묵으로 대신했다. 그러나 침묵은 지워지지 않고 내 가슴에서 상처로 남아있다. 상처를 달래며 보낸 밤들 그 끝에서 결국 상처는 곪아터지듯 내 가슴에서 붉은 빛으로 터져나왔다. 막상 터져나오자 곱고 생생하다. 하여 이제는 내 마음을 열어두기로 했다.  앞에 인용했던 조용미 시인은 ‘지율’과 ‘사람’ 그리고 정진영 시인은 ‘바느질 함’과 ‘비집고 나온 솔기’라는 상반된 의미를 함유하고 있는 시어를 대립시켜 두 시인 모두 자신의 생각을 직접 말하지 않고 우회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이를 위해 묘사와 진술을 혼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지율 스님의 단식과 바느질함으로부터 비집고 나온 솔기를 말하고 있는 듯하지만 그 이면에는 시인이 말하고자 했던 진정한 의미가 감추어져 있다. 시를 읽는 일이 시인이 행간과 행간 사이 그리고 함축을 통해 숨겨놓은 사실을 찾아가며 시인과 공감대를 형성해 가는 과정이라면, 두 작품은 바로 시를 읽는 즐거움을 제공해 줄 것이다.  지금까지 묘사에 의존하는 ‘보여주기’ 방식으로 씌어진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이제 시인이 직접 시적 화자로 개입하여 자신의 의도를 진술하는 ‘말하기’ 방식으로 씌어진 작품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뭉개진 귀를 보면,  굳은살 하나 박히지 않은  말간 내 두 손바닥이 부끄러워진다  높은 곳을 향해 뻗어가는 벽 위의 덩굴손처럼  내 손은 지상의 흙 한번 제대로 움켜쥔 일 없이  스쳐 지나가는 헛된 바람만 부여잡았으니,  꼬리 잘린 한 마리 도마뱀처럼  바닥을 짚고 이리저리 필사적으로 기어다니는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비애를  나는 알지 못한다  고단한 생의 매트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머리에 깔려 뭉개져버린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슬픈 두 귀를 보면,  멀쩡한 두 귀를 달고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평형감각 없이 흔들리는  내 어리석은 마음이 측은하고  내 것 아닌 절망에 귀기울여 본 적 없는  잘 생긴 내 두 귀가 서글퍼진다  삶은 쉴새없이 태클을 걸어오고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몸은 둥근 통나무 같아  쓰러지고 구르는 것이 그의 이력이지만,  地球를 끌어안 듯  그는 온몸 바닥에 밀착시키며  두 팔 벌려 몸의 중심을 잡는다  들린 몸의 검은 눈동자는  水準器 유리관 속  알코올과 섞인 둥근 기포처럼  수평을 잡기 위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두 귀는  세월의 문짝에 매달려 거친 바람 소리를 듣는,  닫힌 내일의 문을 두드리는 마음의 문고리다  ―박후기,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슬픈 두 귀」  레슬링 선수의 뭉개진 귀와 말간 내 두 손바닥을 대비시켜 삶에 대하여 강건한 자세를 취할 것을 다짐하고 있는 위의 시는 주지하듯 묘사보다는 시인의 심회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진술이 주를 이루고 있다. 레슬링 선수와 자신의 대비는 지속되는데, 작품 중반부와 후반부에 이르면 귀가 짓뭉개지도록 꼬리 잘린 도마뱀처럼 이리저리 필사적으로 기어다니는 레슬링 선수의 비애와 내 것 아닌 다른 사람의 절망에는 귀기울여 본 적 없는 나의 이기심에 대한 반성으로 확장된다. 마지막 연에서 보여주고 있는 시인의 다짐이 울림을 낳을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준열한 반성을 전제로 했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대비를 통해 시인은 자신의 어리석었던 삶을 반성하고 새로이 강건한 삶의 자세를 취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지천명 넘어서면  먼 강 아스라한 적벽의 시간들이  아름다워질 때 있을 것이다.  억새밭 거기 상처투성이  아픈 급물살들이 풀어놓은 여울 곳에  이름없는 시인의 불우한 노래 한 편  홀로 숨어살 수 있어서  어진 농부 가난한 땅으로 돌아가  착한 시간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저 고향이나 지키면서 살아온 것이  큰 죄라도 진 것처럼  부끄러울 때 많이 있다는  여주땅 도리 이장 이경희씨  장차 무슨 농사를 지어야 할지 걱정이라며  남한강 건너 논밭 바라보는  그의 눈 바로 보지 못하는  나 또한 대죄인인 것이다.  시를 써서 세상을 속인 죄  얼마나 큰줄 아냐고  저 강물이 나에게 단호히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홍일선, 「시를 써서 세상을 그만 속이자」  홍일선 시인의 창작 모티프는 여주땅 도리 이장 이경희씨의 삶이다. 농산물 수입이 개방되면서 농사를 짓는 일이 더 이상 경제적으로 이익을 보장해주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농촌과 고향을 등지고 떠났다. 주변 사람이 하나 둘씩 떠나도 자신만은 고향을 지키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는 무슨 농사를 지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고 근심한다. 그러나 이경희씨가 정작 근심하는 것은 무슨 농사를 지어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라, 그러다 자신도 결국 고향을 떠나야할지 모른다는 불길함이다. 그래서 그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두려워하고 있다. 그런 그를 통해 시인은 오히려 자신이 더 큰 죄인임을 고백하고 있다. 세상을 바로 알리고, 때로는 어긋난 세상을 바로 잡는 것을 감당하여야 할 책무를 지닌 시를, 오히려 자신은 세상을 속이는 데 활용했던 것은 아닌가 뒤돌아보고 있다. 그런 그를 향하여 강물은 세상을 속인 죄가 고향을 떠나야 할지 모른다는 이경희씨의 근심보다 더 큰 죄라고 호통치고 있다.  박후기 시인의 작품과 홍일선 시인의 두 작품 모두 묘사보다 진술에 의존하고 있다. 시의 본질이 함축과 거기에서 파생되는 길고 긴 여운이라고 한정한다면, 두 작품은 시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 그렇지만 두 작품 모두 깊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 그것은 타인의 삶을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계기로 삼는 한편 결연한 의지로 확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님  그러시면 안 되지요  지도 제 잘못은 압니다  제가 화분을 쓰러뜨리자  주인님은 신문지 말아  툭툭 치며 주의를 주었지요  이러면 안 되는 거구나  그 후 화분 근처에선 발걸음도 무거웠지요  제가 어디 화분을 그곳에 둔  주인님을 탓하더이까  귀 닫고 남의 탓이라 하지도 않지요  개 주제인 제가 보기에도  주인님  그러시면 안 되지요  ―이길원, 「개 4 ―항변」  작품의 화자는 ‘개’이다. ‘개’가 ‘인간’인 주인을 일깨워주고 있다. 미물인 개조차도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은 물론 더욱이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전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주인님/ 이러시면 안 되지요”라는 구절에서 보듯 사람은 동일한 잘못을 되풀이하고, 자신의 잘못을 세상 탓으로, 다른 사람 탓으로 회피하려 한다. 이길원 시인의 작품 역시 우리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가 지켜야 할 덕목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주고 있다.  작품 전체가 진술로만 이루어져 있지만 시인의 말하고자 했던 위와 같은 사실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구절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독자들은 시인의 의도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의인화(擬人化)된 시적 화자의 입을 빌어 말하고 있는 비아냥거리는 어조가 이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길원 시인의 작품뿐만이 아니라 박후기, 홍일선 시인의 작품은 모두 진술에 의존하고 있으며, 새로운 각오와 다짐으로 종결하고 있다. 세 시인이 보여준 각오와 다짐이 깊은 여운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처절한 자기 반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공자(孔子)는 『시경(詩經)』에 수록된 삼백 편에 일관하는 정신을 ‘사무사(思無邪)’라 하였다. 사무사란 무엇인가? 세속의 욕망으로 인하여 더럽혀진 마음을 씻어내는 정화작용을 의미한다. 시를 읽는 행위를 처음의 순결한 상태로 돌아가게 하는 과정으로 인식할 때 교시적 기능은 성립된다. 박후기, 홍일선, 이길원 세 시인의 작품은 시가 교시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632    소통 불능의 시는 난해한 시가 될수밖에... 댓글:  조회:1922  추천:0  2017-08-17
3.    무의식을 전경화시킨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난해한 시가 될 수밖에 없다. 소통 불능의 시가 될 수밖에 없다. 무의식은 규율․규범에서 벗어나있는 욕망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욕망은 사회 경제적 여건에 따라, 성장 배경에 따라, 전혀 다른 양상들을 띠기 때문이다. 그러나 넓게 보면 새로울 것이 없는 ‘무의식의 전경화’이다. 프로이트 이래 ‘욕망’은 가려져서 나타난다고 했기 때문이다. 꿈에서는 압축과 전치로, 시를 꿈의 대체물로 본다면 시에서는 은유와 환유로. 의도적 난해시가 오늘에 와서 처음 시도된 것도 아니다. 크로스 리딩에 의한 병렬양식의 시, 몽타주, 콜라주들의 시들이 이미 20세기 초 서양에서 시도되었다. 표현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에서 이미 자유연상에 의한 통사구조 및 문법파괴가 있었다. 李箱 또한 난해시를 썼다. 이형기는 그의 대표적 시론중의 하나인 「소란한 無人島」에서 “시인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난해시”를 쓰고 싶다고 하였다.8) “소란한 無人島”는  정지용의 시 「海峽」에서의 한 구절이었다.    망토 깃에 솟은 귀는 소라 속 같이    소란한 無人島의 角笛을 불고  이형기가 주목한 것은 바로 “소란한 無人島”였다. 이형기는 소란한 無人島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시의 본류는 사실 현대적 실험시들이 아닐 것이다. 시의 본류는 전통적 서정시일 것이다. 전통적 서정시들은 유의미시들이다. 소통이 가능한 시들이다. 그리스의 수사학, 로마의 수사학들에서 중요한 항목들이 inventio, dispotio, elocutio, memoria, actio 등이었다. inventio는 주제 및 제재와 관계있고, dispotio는 구성과 관계있고, elocutio는 오늘날의 수사법들과 관계있다. memoria는 기억술로 번역된다. actio는 연설 행위 자체와 관계있다. 이를테면 독자의(혹은 관객의) ‘파토스를 건드리느냐, 에토스를 건드리느냐’하는 것이었다. 필자가 이중에서 주목하는 것이 memoria이다. 기억하게 하는 것이 수사학의 가장 중요한 목표 중의 하나였다. 이를테면 시에서 행을 들쭉날쭉하게 하는 것이 기억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산문에서 문단을 나누는 것도 기억하기 쉽게 하여서였다. 현대에 와서 이것은 독서 행위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중요한 구절에 밑줄을 긋고 형광펜을 칠하는 것도 메모리를 쉽게 하기 위해서이다.    디카詩는 전통시의 ‘철학’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계승’이라고 한 것은 일단 소통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소통은 그림으로 전달될 때(혹은 그림과 같이 전달될 때), 이미지로 전달될 때, 가장 잘 전달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문자시’에서 행을 들쭉날쭉하게 만든 것도 회화를 의식하는 것이다. ‘발전적으로 계승한다’고 한 것은 ‘시적 형상’에서 받은 인상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적 충동은 보통 일회적이다. 그 일회적 순간을 위하여 ‘시인은 산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의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일회성은 즉시 메모해두지 않으면 금방 휘발된다. 메모해두더라도 일회성이 주는 ‘일회적 아우라’는 영원히 사라질 수 있다. 그런데 일회적 시적 충동이 - 이상옥의 말을 빌면 ‘자연이나 사물에서 포착한 시적 형상’이 - 디카를 통해 영원히 보존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일회적 아우라를 보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볼 때마다 매번 다르게 생산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앞에서 디카詩로 인용한 「고성 가도(固城 街道)」, 「빈집」, 「낙조」 등을 계속해서 다르게 재생산해낼 수 있는 것이다.   4.     앞에서 ‘시를 묘사적 이미지의 시와 서술적 이미지의 시로 나눌 수 있다’고 하였다. 디카詩의 ‘문자시’는 묘사적 이미지의 시에 더 가까워보인다고 하였다. ‘묘사는 ‘객관적 묘사’이고 서술은 ‘주관적 서술’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진(술)은 객관적 묘사의 절정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디카詩는 전통시의 철학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있다’고 하였다. ‘계승이라고 한 것은 일단 소통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소통은 ‘그림으로 전달될 때’(혹은 그림과 같이 전달될 때), 혹은 이미지로 전달될 때, 가장 잘 전달된다고 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 견해들을 역사(미학)적으로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사실주의와 인상주의들이 재현의 미학을 추구하였다면 표현주의는 추상의 미학을 추구하였다. impressionismus는 말 그대로 외부에서 내부로 향하는 예술이었다. 외부가 중심이 되는 예술이었다. expression‎!!!ismus는 말 그대로 내부에서 외부로 향하는 예술이었다. 내부가 중심이 되는 예술이었다. 표현주의에서 현대 예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디카詩의 ‘문자시’는 촬영한 장면들을 언어로 옮겨놓는다는 점에서(묘사적 언어이든 서술적 언어이든)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미학에 더 근접해 있다고 볼 수 있다.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또한 자연주의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주의는 사실주의 양식이 극대화된 것으로서 순간문체의 예술, 시간확대경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다르게 볼 수 있다. 디카로 ‘촬영하고 싶은 욕구’에 주목하는 것이다. 욕구의 내면에 주목하는 것이다. 디카 사진을 표현주의처럼 내부에서 외부로 향한 예술로 보는 것이다. 이것의 예로 앞에서 주관적 서술의 구체화로 본 절창 「낙조」를 들 수 있다. 문자시 「낙조」는 내부에서 외부로 향한 사진 「낙조」의 구체적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디카詩의 ‘문자시’는 객관적 묘사의 시가 될 수도 있고, 주관적 서술의 시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전통적 서정시의 영역을 풍요롭게 할 수도 있고, 현대적 실험시의 외연을 확대시킬 수도 있다. 절대적 이미지 시를 파생시킬 수도 있고, 무의미시를 파생시킬 수도 있다. 이에 대한 극명한 예로 이상옥은 이상범의 디카詩 「용광로-선인장에게」를 들고 있다.    무쇠가 끓을 때 기능장은 빛을 읽는다        녹인 무쇠 쏟을 때의 그 순한 무쇠 빛깔    쇳물도 무르익으면 고요하고 고요하다    ― 「용광로-선인장에게」 전문 (디카 사진 생략)  이상옥은 이 시를 두고 “선인장 꽃 속에서 용광로 쇳물 속의 절정의 고요를 읽어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사물에 감추어진 시적 형상을 직관으로 읽어내거나 혹은 선험으로 읽어내는 놀라운 능력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였다.9) 이상옥의 이 말은 물론 ‘시적 형상의 포착’이 ‘선험적인 것’[혹은 무의식적인 것]에서 출발할 수 있다고 한 것이지만 이상옥의 이 말을 시적 형상에서 채취한 ‘문자들’에도 적용시킬 수 있다. 시적 주체인 시인에 의해서 묘사적 이미지의 문자시뿐만 아니라, 서술적 이미지의 문자시도 가능하다고 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무의식에 의한 선험적인 문자시도 가능하다고 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문제는 ‘유기체적 예술작품’의 부인 가능성이다. ‘전체로서의 부분’의 부인 가능성이다. 디카 사진은 대부분 현실의 한 단면만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디카詩는 그렇다면 파편적 예술작품을 심화시킬 수밖에 없다. (이때) 디카詩는 소통 부인의 디카詩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도 주체로서의 시인을 말할 수 있다. 현실의 한 단면에서 파편적 예술작품을 반영해낼 수도 있고, 아름다운, 혹은 구조적인, 유기체적 예술작품도 만들어낼 수 있는 주체로서의 시인을.     또 하나의 문제는 비록 이상옥 교수가 동일성의 개념으로 보아달라고 했지만 시의 사진(혹은 회화)에 대한 종속성․의존성이다. 문학의 위기․시의 위기라는 말이 회자하게 된 것은 영상매체의 승승장구가 주요 이유였다. 디카詩가 문학의 위기․시의 위기를 심화시키는 데 공헌할 것인가. 혹은 문학의 영상매체에 대한 의존성을 심화시키는 데 공헌할 것인가. 아니면 하이브리드의 시대정신에 부응해서 문학을, 시를, 다채롭게 하고 풍요하게 해서, 그들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데 공헌할 것인가. 시를 다시 대중에게 가져가는데 공헌할 것인가. 시의 대중화에 공헌할 것인가. 시의 소통을 윤활하게 하는데 공헌할 것인가.  -------------------------------------------------------------------------------------------------------- 1) 문덕수․이상옥 대담, 「디카詩의 전위성」, 실린 곳: 이상옥,
631    산이 태양을 삼키다... 댓글:  조회:2072  추천:0  2017-08-17
 2.    디카詩를 탈경계의 문학, 크로스오버 문학의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하이브리드 문학의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디카(혹은 디카 사진)와 시가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상과 문자가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서화 일치의 전통을 생각하면 전통의 맥을 잇는 것으로 보인다(“디카詩는 디카로 찍은 사진과 함께 쓴 시라고 볼 수 있으나, 그렇게 단순한 개념이 아니고, 즉흥적으로 명명된 것도 아니다. 디카詩는 예로부터 시서화 일치의 전통성에 기저를 두고 있는 것이다”3)).    ‘디카詩의 디카 사진과 시에서 중요한 것은 시이다. 시 없이 디카詩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진, 혹은 오래 전부터 있었던 사진 예술로만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상옥은 그러나 디카詩에서의 ‘사진에 대한 시의 우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에서 떠오른 이미지를 시로 쓴 것”이라는 포탈사이트 파란의 용어사전에 등재된 디카詩에 대한 정의를 부인하고, 디카詩를 “자연이나 사물에서 포착한 시적 형상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서 언어로 재현하는 것”(강조는 발제자)이라고 나름대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4) 문제는 ‘자연이나 사물에서 포착한 시적 형상’이고, 그리고 이것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서 언어로 재현하는 것’이다. 시적 형상[혹은 시적 이미지]의 포착이 먼저이고,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그 다음이라는 것이다. ‘시적 형상의 포착’이 없으면 언어로 재현하는 것도 없다고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옥이 그렇다고 ‘시에 대한 사진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상옥은 디카詩에서 시와 사진이 상호 대등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간주해주기를 요청한다. 혹은 상호 의존적인 것으로 간주해주기를 요청한다. 나아가 상호 융합적인 것으로 간주하기를 요청한다. 디카와 詩가 별개가 아니라는 것이다. 디카詩는 말 그대로 디카詩라는 것이다. ‘새로운 시’라는 것이다. 인터넷 상의 한 대담에서 이상옥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진을] 문자화하는 과정은 일종의 번역 개념으로 보면 됩니다. 혹은 신의 말씀을 전달하는 대언자(에이전트 agent)의 기능으로 보아도 좋고요. 사진영상(날시)과 문자는 동일성의 개념으로 보아주시기 바랍니다.5)  ‘동일성의 개념’이라는 말에 주목하는 것이다. 사진에 대한 시의 우위․시에 대한 사진의 우위가 아닌 ‘상호 융합적 성격’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옥의 디카詩에 대한 이러한 정의에 대해, 즉 ‘자연이나 사물에서 포착한 시적 형상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서 언어로 재현하는 것’이라는 정의에 대해 김규화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응원하고 있다.    디카시는 […] 디지털 카메라로 자연과 사물의 시적인 장면을 포착하고 그 사진(이미지)에 걸맞는 문자시를 덧붙이는 것이다.6) (강조는 발제자)  넓은 의미의 디카詩와 좁은 의미의 문자시를 말하였다.    “시적 장면”(혹은 시적 형상)의 “포착”은 전통적인 창작미학적 관점에서 보면 ‘시적 충동’과, 혹은 詩魔와, 다를 바가 없다.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그 충동 말이다. 시적 충동이 시적 충동을 불러일으킨 자연이나 사물에 디지털 카메라를 들이대게 하고, 시인은 그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문자시로 재현한다. 발제자는 시적 충동이 시에서 중요한 만큼 ‘자연이나 사물에서 포착한 시적 형상’ 또한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시적 충동이나 ‘자연이나 사물에서 포착한 시적 형상’은 신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다. 神性의 영역이다.    이 자리에서는 이상옥의 디카詩에 대한 정의, 즉 ‘자연이나 사물에서 포착한 시적 형상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서 언어로 재현하는 것’ 중 뒷부분 ‘디카 사진을 언어로 재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전개하려고 한다. ‘언어’를 - 넓은 의미의 디카詩에 대해 - ‘좁은 의미의 (문자)시’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상대적 이미지 시, 관념시, 절대적 이미지 시, 무의미시들에 대해 장황하게 이야기한 것도 이러한 의도와 무관하지 않다.      시를 또한 묘사적 이미지의 시와 서술적 이미지의 시로 나눌 수 있다. 디카詩의 ‘문자시’는 묘사적 이미지의 시에 일견 더 가까워보인다. 묘사는 ‘객관적 묘사’이고 서술은 ‘주관적 서술’이기 때문이다. 혹은 사진(술)은 객관적 묘사의 절정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진 예술에서도 객관적 묘사보다는, 절대적 이미지보다는, 주관적 서술이 강조될 수 있다. 레이M. Ray의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레이의 다다이즘 및 초현실주의 작품들은 인간의 내면성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디카詩의 ‘문자시’를 ‘사진 속의 재현물’과 동일화시켜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디카 사진을 주관적으로 서술(혹은 해석)할 수 있다.    디카詩의 ‘묘사적 문자시’는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①비 내리는 봄날 늦은 오후      구형 프린스는 통영 캠퍼스로 달린다      차창을 스치는 환한 슬픈 벚꽃들 아랑곳하지 않고      쭉 뻗은 고성 가도(固城 街道)의 가등은      아직 파란 눈을 켜고 있다.      ― 이상옥, 「고성 가도(固城 街道)」    ②이름 모를 꽃나무가 드리워진      녹색의 녹색      근심 없는      벌들만 잉잉거리는      산중 허니문      나뭇꾼과 선녀가 잠시      머물렀을 것 같은      ― 이상옥, 「빈집」         주관적인 서술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① 디카에 나타난 “통영 캠퍼스”를 향해 “달”리는 “구형 프린스”, “차창을 스치는 […] 벚꽃들”, “쭉 뻗은 고성 가도(固城 假道)의 가등”들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환한 슬픈 벚꽃들”이라고 한 것이 주관적 서술일까.    ② 역시 디카에 나타난 “산중” “빈집”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름 모를 꽃나무”, “벌”들과 함께. “근심 없는/ 벌”, “허니문”, “나뭇꾼과 선녀가 잠시/ 머물렀을 것 같은”이라는 표현이 주관적 서술일까.    이번에는 ‘서술적 문자시’의 예를 들어보자. 역시 이상옥의 「낙조」이다. 전문이다.    하루치의 슬픔 한 덩이    붉게 떨어지면    짐승의 검은 주둥이처럼    아무 죄 없이    부끄러운 산(山)      ‘언어 너머 시’(날시 raw poem)7)에 화자가 개입되어 날시에 새로운 내포를 부여한 경우이다. 간단히 주관적 문자시, 서술적 문자시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 행의 “붉게 떨어지면”을 제외하고 전부 주관이 개입되어 있다. “하루치의 슬픔 한 덩이”가 주관이고, 특히 ‘슬픔 한 덩이’가 주관이고, “짐승의 검은 주둥이처럼/ 아무 죄 없이/ 부끄러운 산(山)”이 주관이다. 압권은 “짐승의 검은 주둥이처럼/ 아무 죄 없이/ 부끄러운 산(山)”이라고 한 것이다. 세월을 가게 한 것이, 하루치의 태양을 떨어뜨리게 한 것이, 마치 산에게 책임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산이 태양을 삼키는 ‘시적 장면’을 포착하였기 때문일까.    ‘시와 소통’이란 테마로 문제를 국한시킬 때 ‘묘사적 문자시가 소통을 더 용이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사진을 옆에 두고 시를 감상할 때 이 소통은 훨씬 더 용이해진다. 서술적 문자시는 독자의 관점에 따라 동의하기 힘든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 같은 디카 사진을 보고 독자들에게 시를 - 주관성을 가미해서[혹은 느낀 점을 가미해서] - 만들어보라고 할 때 전혀 다른 시들이 나오게 되는 것과 같다.   
630    남자를 돌려주고... 녀자를 돌려다오... 댓글:  조회:2109  추천:0  2017-08-17
  시와 소통  박찬일(시인)  1.    시를 상대적 이미지 시, 절대적 이미지 시, 무의미시로 나눌 수 있다. 앞의 두 개는 수용미학상 소통에 문제가 없다. 그러나 무의미시의 창작미학에는 수용미학상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상대적 이미지 시는 문덕수의 말을 빌면 수퍼비니언스 원리의 시이다. “시에서 모든 관념은 어떤 형태든 물리적 존재에 실려 운반되어야 한다.”1) ‘물리적 존재’는 토머스 S. 엘리엇이 1919년 「햄릿과 그의 문제들」(1919)이라는 에세이에서 처음으로 언명한 ‘객관적 상관물’과 같다.    김춘수는 상대적 이미지 시와 관념시를 구분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미묘한 차이는 있다. 파울 첼란의 두 편의 시를 예로 들어보자. 첼란의 유명한 「죽음의 푸가Todesfuge」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그것을 저녁에 마신다.    우리는 그것을 한낮에 마시고 아침에 마신다 우리는 그것을 밤에 마신다    우리는 마시고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사람이 갇히지 않는다  “검은 우유”가 표상하는 것은 독가스였다. 유태인 대량학살에 사용된 독가스였다. 정확히 말하면 검은 우유는 ‘유태인 대량학살’을 표상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공중”은 경계를 지을 수 없는 곳, 그러므로 ‘자유로운 곳’[수용소 밖]을 표상하였다고 할 수 있다. 검은 우유와 공중은 물리적 존재로서, 혹은 객관적 상관물로서 독자와 소통하였다. 혹은 유태인 대량학살과 ‘자유로운 곳’은  물리적 존재로써, 혹은 객관적 상관물로써 독자와 소통하였다고 할 수 있다(검은 우유와 공중이 물리적 존재, 혹은 객관적 상관물이었다). 「죽음의 푸가」를 간단히 상대적 이미지 시라고 할 수 있다.    첼란의 다음 시 역시 상대적 이미지 시라고 할 수 있지만 물리적 존재나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지 않고 관념을 통해서 관념을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순수 관념시라고 할 수 있다. 순수 관념시는 상대적 이미지 시보다 소통을 더 어렵게 한다. 이 시에는 제목도 없다. 全文이다.    낯선 것이    우리를 그물로 가두고 있다    무상無常은 사정없이    우리를 꿰뚫고 쥐어오는데    헤아려 주렴 너는 나의 맥박을    네 안에서 내 것까지를    그러면 우리가 일어서리라    너를 향해 너를 넘고    나를 향해 나를 넘어서    무언가는 우리에게    피부처럼 낮과 밤을 입힌다    추락으로 끝내려는    더없이 집요한 유희를 위해  “그물”, “맥박”, “피부”처럼 물리적 존재들이 있기는 하지만 “낯선 것”, “무상”, “너를 향해 너를 넘고/ 나를 향해 나를 넘어서”, “무언가”, “추락”, “유희”라는 관념어들이 이것들을 가리고 있다. 관념이 승하다고 해서 이 시가 폄하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 시는 첼란의 존재론적 성찰을 담은 빼어난 시편에 속한다. 이런 시도 있고 저런 시도 있는 법이다.    상대적 이미지 시가 있다면 절대적 이미지 시가 있다.    날이 저물자    肋骨과 肋骨 사이    홈을 파고    거머리가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베고니아의    붉고 붉은 꽃잎이 지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다시 또 아침이 오고    바다가 또 한 번    새앙쥐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 김춘수, 부분  “거머리가 우는 소리”는 거머리가 우는 소리이고, “베고니아의 […] 붉은 꽃잎이” 진다는 것은 베고니아의 붉은 꽃잎이 진다는 것이다. “바다가 […] 새앙쥐같은 눈을 뜨고 있”다면 바다가 새앙쥐같은 눈을 뜨고 있는 것이다. 이육사의 「절정」 끝에 있는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와 비교해보자. ‘강철로 된 무지개’는 겨울의 은유이자 알레고리이다. 알레고리라고 한 것은 식민지 상황을 고려한 것이다. 알레고리는 1회적 알레고리, 역사적 알레고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용된 김춘수의 에서는 어떠한 알레고리도 찾을 수 없다. ‘저문 어느 날 거머리가 우는 소리가 들렸고, 베고니아의 붉은 꽃잎이 지는 것을 보았고, 새앙쥐같은 눈을 뜨고 있는 바다를 보았다’고 한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리듬만 남아있는 시, 이미지만 남아있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절대적 이미지 시이다. 의미나 정보가 아닌, 절대적 이미지로 독자와 소통하려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절대적 이미지의 아름다움으로.    이 지점에서 김종삼의 ‘내용 없는 아름다움’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북치는 소년」 전문이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에 “어린 羊들”이 인쇄되어 있었을 것이고 그 위에는 유리가루같은 것이 붙여져 있었을 것이다(그래서 “진눈깨비처럼” “반짝”인다고 했을 것이다). 일견 가난한 아희, 서양에서 온 크리스마스 카드, 어린 羊, 진눈깨비 등이 어떤 의미, 어떤 정보를 제공해주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제목 “북치는 소년”은? ‘가난한 아희, 서양에서 온 크리스마스 카드, 어린 羊, 진눈깨비’ 등과 ‘북치는 소년’의 관계는? ‘북치는 소년’과 끝의 두 연을 연결시켜주는 것이 바로 첫 연의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으로 보는 것이다. 이 시에는 시에 구조를 부여하려는 김종삼의 의도적 노력이 있었다. ‘제목’과 ‘끝 두 연’을 ‘내용 없는 아름다움’의 구체화라고 할 수 있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은 김춘수의 경우 절대적 이미지의 이름이다.    상대적 이미지 시(혹은 관념시), 절대적 이미지 시가 있다면 무의미시가 있다. 무의미시는 앞서 말했지만 수용미학상 소통 불가능을 목표로 하는 시이다. 물론 의미, 정보들의 소통이다. 역시 김춘수가 이에 대한 모범답안을 제시해주었다.    돌려다오.    불이 앗아간 것, 하늘이 앗아간 것, 개미와 말똥이 앗아간 것,    女子가 앗아가고 男子가 앗아간 것,    앗아간 것을 돌려다오.    불을 돌려다오. 하늘을 돌려다오. 개미와 말똥을 돌려다오,    女子를 돌려주고 男子를 돌려다오.    쟁반 위에 별을 돌려다오.    ― 부분  “불이 앗아간 것, 하늘이 앗아간 것, 개미와 말똥이 앗아간 것”을 돌려달라고 하다가 “불을 돌려다오. 하늘을 돌려다오. 개미와 말똥을 돌려다오”라고 하고 있다. “女子가 앗아가고 男子가 […] 앗아간 것을 돌려다오”라고 하다가 “女子를 돌려주고 男子를 돌려다오”라고 하고 있다. 한 술 더 떠 “쟁반 위에 별을 돌려다오”라고 하고 있다. 김춘수의 말을 빌면 의미가 고정되려고 하면 그 의미를 다른 의미로서 가차 없이 처단하고 있다.2)             
629    문학은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댓글:  조회:2222  추천:0  2017-08-17
단풍나무가 되는 나  너 보고 싶은 마음 눌러죽여야겠다고/가을 산 중턱에서 찬비를 맞네/ 오도가도 못하고 주저앉지도 못하고/ 너하고 나 사이에 속수무책 내리는/ 빗소리 몸으로 받고 서 있는 동안/ 이것 봐, 이것 봐 몸이 벌겋게 달아오르네/단풍나무 혼자서 온몸 벌겋게 달아오르네  안도현 시인의 ‘단풍나무 한 그루’라는 시입니다. 온 산이 붉게 물든 이 늦가을에 무척 어울리는 아름다운 시입니다. 가을은 그리운 누군가가 절실하게 더 그리워지는 계절입니다. 곧 퇴락의 겨울을 맞게 될 것이므로 지금 만나지 않으면 영영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조바심이 드는 것이지요.  시 쓰기에 앞서 남이 쓴 좋은 시를 많이 읽어 보는 것이 꼭 필요한데 이는 남의 좋은 부분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이며 시의 발상에서완성까지의 구체적인 방법을 익히는 공부가 됩니다. 남의 시를 읽다가 자기 마음에 와 닿는 작품을 만나면 그 시인의 시집을 구해서 꼼꼼히 읽는 게 좋습니다. 자신이 공감한 시를 쓴 시인은 자신의 체질이나 성향에 맞는 시를 쓰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므로 그만큼 배울 점이 많습니다. 문학의 스승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만나집니다.  그렇게 선택된 시를 읽을 때는 그 시를 쓸 당시의 시인의 마음이 되어서 읽어보십시오. 그 시인이 처한 환경 조건이나 심정을 유추하며 한 행 한 행 같이 시를 써 나가는 기분으로 읽는 것이지요. 위의 시 같은 경우는 가을비가 오는 날 단풍나무 아래 서 보는 것입니다.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 온통 몸이 달아 벌겋게 된 단풍잎, 그 사이에서 알절부절 못하고 찬비를 맞고 있는 나… 목석이 아니라면 누구나 처연한 심정이 될 것입니다. 처연한 심정이 되면 모든 것이 간절해지는 법이고 그러면 누군가가 못견디게 그리워질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수순은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도달할 수 있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그 정황들을 어떤 식으로 엮어 구체적으로 드러낼 것인가를 생각하면 그만 막연해집니다.  이제 그 한 해답을 안도현 시인에게서 얻어 봅시다. 우선 가을산 찬비와 나의 관계를 엮는 고리로 시인은 ‘너 보고 싶은 마음을 눌러 죽’이는 지독한 그리움의 감정을 설정해 놓았습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연히 아무도 없는 가을산에서 찬비를 맞고 있은 자신에게 무엇인가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이런 발상이 떠올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감정이 의도적이라고 해도 그런 발상을 거쳐 그런 마음을 먹은 시인은 더욱 처연한 심정이 됩니다. 빗소리만 들리는 고적한 산중턱, 그리운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 나. 이 정황은 비장한 정적이며 폭발 직전의 절정과도 같은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이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이 ‘너 보고 싶은 마음 눌러 죽’이려고 비를 맞으며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입니다. 그 하나의 발상이 가을산과 빗소리의 분위기를 시적인 정황으로 창조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단풍나무와 나의 관계는 어떻게 엮어가고 있습니까. ‘너 하고 나 사이에 속수무책 내리는/ 빗소리 몸으로 받고 서 있는 동안/ 이것 봐, 몸이 벌겋게 달아오르네’에서 드러나듯이 보고 싶은 마음을 더 이상 어쩌지 못해 몸이 벌겋게 달아올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비장한 인내와 비 오는 가을산의 정적이 드디어 단풍으로 폭발하고 만 것입니다. 시적 대상과 시 쓰는 자아가 동일시되는 서정시의 전형적인 방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개속에 묻힌 나를 찾아  어느새 일 년의 마지막 달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때쯤이면 늘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의 속도와 티끌만큼 남은 시간의 유한함에 몸을 떨게 됩니다. 한 장만 달랑 남아 있는 달력을 보며 괜스레 마음이 바빠지고 다 이루지 못한 일 때문에 아쉬움이 남는 달이기도 합니다. 정말 시간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잠시도 멈추거나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문학은 이런 세계의 유한함에 대항하는 방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유한한 시간을 인정해 버리고 거기에 무방비로 던져진 상태의 인간은 무력해지거나 즉물적인 쾌락을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올지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이 있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종말을 앞두고도 나무 한 그루를 심을 수 있는 사람은 내가 끝나더라도 세상은 끝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이 끝나면 세상도 끝나는 것으로 압니다.  문학은 이를테면 그런 현세적인 가치체계에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입니다. 자기만의 것에 골몰한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의 인생과 사고방식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 우리와 함께 공존하고 있는 삼라만상에 눈을 돌리도록 하는 것, 유한한 것이라고 믿는 인간의 시간을 무한한 순환의 수레바퀴로 돌려놓는 작업이 곧 문학이 추구하는 일입니다. 자기 살기도 바쁜 세상에 남의 인생까지를 참견해야 하는 문학은 그래서 고통스럽고 복잡다단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강의 물을 따라가며 안개가 일었다/ 안개를 따라가며 강이 사라졌다 강의/ 물 밖으로 오래 전에 나온/ 돌들까지 안개를 따라 사라졌다/ 돌밭을 지나 초지를 지나 둑에까지 올라온 안개가 망초를 지우더니/ 곧 나의 하체를 지웠다/ 하체 없는 나의 상체가/ 허공에 떠 있었다/ 나는 이미 나의 지워진 두 손으로/ 지워진 하체를 툭툭 쳤다/ 지상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가/ 강변에서 툭툭 소리를 냈다.  위의 시는 오규원 시인의 「안개」라는 시입니다. 여기서 우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안개가 나를 가린다’가 아니라 ‘안개가 나를 지운다’고 말한 점입니다. 나 위주로 판단하면 안개는 분명히 나의 시야를 가리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나’는 강과 돌, 초지와 둑, 망초같은 것들과 동격입니다. 그런 사물들과 함께 내 육체도 안개에 의해 서서히 지워지고 있습니다. 나의 의식은 내 몸을 강둑에 버려둔 채 팔짱을 끼고 그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는 중입니다. 이렇게 자기자신까지도 객관화시켜 전체의 맥락 속에 놓을 수 있어야 참다운 글쓰기가 가능해집니다.  여기서의 안개는 무심히 우리 앞을 스쳐 지나가는 시간일 수도 있고 우리의 존재를 지배하는 외부적인 힘이나 나태한 관습, 고정관념 따위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대로 두면 안개에 가려 길을 잃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때 위기 상황을 인식한 내가, 내 존재의 여부를 확인해 보기 위해 하체를 손으로 툭툭 쳐 보는 것입니다.  문학은 이렇게 끝없이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형체없는 안개가 자기 몸을 잠식해 들어오는 것까지도 감지할 수 있는 예민한 촉수로 무감각해진 자기 존재의 하체를 한 번 툭툭 건드려보시기 바랍니다.
628    시와 산문은 다르다... 댓글:  조회:2460  추천:0  2017-08-17
시와 산문은 어떻게 다른가  형식적인 면으로 보면 산문은 긴 줄글로 되어 있고 운문은 짧고 리듬이 있으며 행과 연을 나눕니다. 담는 내용에 있어서도 산문이 일관된 흐름을 갖춘 이야기 구조를 가진다면 운문은 주관적인 감정을 드러낸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서사와 서정의 차이라고 합니다.  물론 운문에도 서사적인 요소를 도입할 수 있고 산문에도 서정적인 문체를 구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시 소설이 문학의 양대 산맥으로 정착한 오늘날에는 시는 서정적인 특성을, 소설은 서사적인 특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쪽으로 발전해 가고 있습니다. 습작기에는 이런 시와 산문의 차이를 정확히 인식하여 자신의 감성이 어느 장르에 적합한지를 빨리 간파하는 것이 좋습니다.  흔히들, 시는 춤에, 산문은 도보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도보는 일정한 보폭으로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한 결음씩 나아가는 것이지만 춤은 아무런 형식의 구애 없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느리고 빠르기가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가 심하며 공중을 향해 훌쩍 솟구치기도 하고 쓰러지며 뒹굴기도 합니다. 춤은 일정한 방향을 염두에 두지 않으므로 제자리걸음이나 뒷걸음질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춤과 도보의 차이점을 시와 산문에 대입하여 생각해 보면 어렴풋이나마 그 특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런 형식적인 차이는 시 정신과 산문 정신의 차이에서 나오는 결과들입니다. 시 정신이 주관적인 진실을 추구한다면 산문 정신은 객관적인 진실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주관적인 진실은 말 그대로 자기 자신에게만 진실인 것이고 객관적인 진실은 누구나 합의할 수 있는 진실입니다. ‘만년필 속에 잉크가 들어 있다’고 쓰면 객관적인 진실을 드러낸 것이지만 ‘만년필 속에 옛사랑의 추억이 있다’고 쓰면 주관적인 진실을 드러낸 것이 됩니다. 만년필에서 옛사랑의 추억을 읽는 것은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인식이 발동한 것이므로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인식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서사적인 바탕이 없이 서정적인 요소를 무리하게 도입한 산문은 생경하고 황당한 서술이 되고 마는 것이며, 반대로 서정적인 바탕이 없이 서사적인 요소를 도입한 시는 감칠 맛이 전혀 없는 상식 수준의 뻔한 이야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리 행과 연을 나누어 형식을 갖추어도 이것은 시가 될 수 없습니다. 시 정신과 산문 정신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지지 못한 예를 초보자들의 작품에서 흔히 발견합니다.  저는 이것을 나무와 꽃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뿌리에서 몸통이 자라고 거기서 가지와 잎이 뻗어 가는데 여기까지는 나무 본연의 모습과 색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누가 보아도 뿌리와 몸통과 가지와 잎이 하나의 계통으로 일관된 연관성을 갖고 뻗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가끔 피워 내는 꽃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 나무에서 어떻게 저런 꽃이 피워났을까 싶을 정도로 형태와 색깔과 질감이 판이하게 다릅니다. 빨강 노랑 하양의 색색으로 보드랍기 그지없는 꽃망울을 터트립니다. 앞의 과정이 산문의 세계라면 뒤의 과정이 시의 세계일 것입니다.  시의 언어를 찾아  흔히 시를 언어 예술이라고 합니다. 시적인 체험과 느낌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니까요. 최근에는 실험적인 시의 한 양상으로 사진 그림 악보 등이 시의 한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문자가 주가 된 상황을 보조하는 차원이지 그 차제가 주 표현방식이 되지는 않습니다. 앞으로 시가 어떤 모습으로 변화해 갈지 모르지만 언어를 주 표현수단으로 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과 사상을 제한된 언어를 통해 표현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색깔이나 소리도 없고 움직임이나 형상도 없는 말들을 조합해서 이 세계의 복잡다단한 결들을 드러내는 일은 너무 막연하고 난감하게만 느껴집니다. 초보자들이 시에 접근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춤과 노래와 그림처럼 언어에도 희로애락이 있고 색깔과 소리, 형상과 움직임이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시 한 편을 읽고 환희와 격정과 비애를 느끼며 어떤 소리와 색채와 움직임을 감지합니다. 때로는 색채와 소리로 형상화된 예술보다 더 큰 진폭으로 그런 것들을 느끼기도 합니다. 또 더 나아가 우리의 모든 감각을 총체적으로 건드려 주는데 시가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합니다.  인간의 모든 감각을 언어를 통해 총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시의 장점이며 매력이겠지만 처음 시를 쓰려는 분들에게는 대단한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어를 캐내고 다듬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언어가 곧 시의 재료인 만큼 멋진 말들을 많이 알고 있는 것이 시 쓰기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더러는 국어사전이나 남의 작품 속에 있는 좋은 말들을 밑줄을 쳐가며 외우는 분들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말만 번드레한 사람이 남에게 오히려 거부감을 주는 것처럼 자신의 진심이 실리지 않은 언어는 남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문학에서의 언어는 곧 자신의 세계관입니다. 그래서 저는 자신이 가진 현재의 언어 밑천만을 가지고 시 쓰기를 시도하라고 권합니다. 시 쓰는 데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여러 분 속에 녹아 있는 언어만을 가지고도 충분히 시 쓰기가 가능합니다.  개인이 가진 언어군은 그 사람이 나고 자란 환경, 접촉한 사람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전라도에서 자란 사람과 경상도에서 자란 사람, 산골이나 바닷가에서 자란 사람과 도시에서 자란 사람의 언어군은 분명히 다릅니다. 이렇게 어떤 상황에 반응하고 갈등하면서 형성된 것이 그 사람의 언어 습관입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학습된 것이 아닌 오랜 시간 서서히 스며들어 자연스럽게 축적된 것들입니다.  그 언어들만 가지고도 일상 생활의 의사소통에 아무 문제가 없듯이 시를 쓰는데도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시를 쓰는데 사용되는 별도의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자신의 몸 속에 육화된 언어야말로 남이 흉내낼 수 없는 자신만의 개성적인 언어이며 자신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가장 적절한 시의 언어인 것입니다.       
627    글쓰는 재주는 비정상과 불당연에서 나온다... 댓글:  조회:2127  추천:0  2017-08-17
어떤 세계관을 가질 것인가  글쓰기는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글로 옮기는 작업입니다. 아무리 풍부한 지식과 아름다운 언어들을 알고 있다 해도 창조적인 생각이나 느낌이 없는 사람은 문학적인 글을 쓸 수 없습니다. 논리적이고 실용적인 글을 쓸 수 있을 뿐이지요.  그러므로 글을 잘 쓸 수 있느냐 없느냐는 높은 학식과 많은 경험이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 자신의 내부에서 저도 모르게 뭉실뭉실 피어오르는 어떤 생각과 느낌들이 많고 적으냐에 따라 좌우됩니다.  글쓰는 재주가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좀 비정상적이다 싶을 정도로 잡념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멍청해 보이기도 하고 건망증이 심하다는 놀림을 받기도 합니다. 여러분 중에 그런 증세를 가진 분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글을 잘 쓸 수 있는 가능성이므로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또 어줍잖은 연속극이나 신문기사 한 줄에도 쉽게 눈시울을 적시는 분이 있는데 그런 분들도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자신이 남보다 뜨거운 가슴을 갖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이며 그만큼 이 세계를 절실하게 느끼고 받아들인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한때 컴퓨터가 시를 쓸 수 있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주제로 시를 쓰라고 지시하면 미리 입력된 사랑과 관련된 여러 단어들을 불러들여서 컴퓨터가 조합하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하면 사람보다 훨씬 완벽하게 ‘사랑’과 관련된 언어들을 시의 형식으로 조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유와 느낌이 결여된 공산품의 가치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혼이 깃들어 있지 않습니다.  길에 아무렇게나 놓여 사람들의 발길에 채이는 돌멩이가 있다고 합시다. 보통 사람들은 이 돌멩이를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귀찮은 존재로 여기기도 할 것이고 기껏 관심을 갖는다고 해 봐야 주어다가 어디 써먹을 데가 없을까를 생각할 것입니다. 자기 중심, 더 나아가 인간 중심으로 그 돌멩이를 보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생긴 것입니다.  만약 돌멩이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까요. 무심코 자기를 걷어차는 사람들의 발길이 있기도 할 것이고 흙과 풀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할 것입니다. 또 대굴대굴 굴러서 자기 짝을 찾아갈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점점 돌멩이의 시각으로 생각을 확대해 나간다면 하찮게 보이는 돌멩이 하나를 통해 이 세계 전체를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삼라만상의 모든 물질들에게 생명을 부여하면 엄청나게 신비하고 새로운 상상의 세계가 열리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생명과 무생물, 어떤 현상까지를 포함해 세계 전체를 내가 지닌 자아와 동등하게 보는 시각은 글쓰기를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자연과 더불어 사는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도 꼭 필요합니다. 요즘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환경문제라는 것도 다 인간중심의 사고방식이 빚어낸 무서운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범신론적 세계관이 마음만 먹는다고 금방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대상을 향한 열린 시각, 치우침 없는 균형 감각, 부분을 보더라도 전체 속에서의 관계를 조망하는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 세계를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이 선행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어휘 문장 구성의 기본기  늦은 나이에 글쓰기를 시작하는 분들일수록 조급하게 서두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축적된 자기 이야기가 태산같이 쌓여있다보니 그것들을 단번에 그럴듯한 작품으로 만들어 보고 싶은 욕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설이나 시 창작으로 바로 들어가는 경우를 흔히 보는데 십중팔구는 뚜렷한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자포자기하게 됩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늦을수록 돌아가라는 말을 가슴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글쓰기는 이야기거리가 두둑하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음식을 만들기 위해 아무리 좋은 재료가 준비되었다고 해도 그것을 버무리고 조리할 줄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지요. 음식의 맛이 손끝에서 나온다는 말처럼 글쓰기도 글감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습니다.  우선 제가 권해드리고 싶은 방법은 간단한 산문 형식의 글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운문부터 시작하는 것은 축약과 비약의 요소에 먼저 길들여질 우려가 있으므로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 데생을 충분히 해두는 것과 마찬가지로 산문을 통해 기본적인 어휘력과 문장력, 구성력을 터득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든 문학 장르의 기본이 되는 요소입니다.  수필과 소설 같은 산문 장르는 말할 것도 없지만 시나 극본 같은 장르 역시 어휘력과 문장력, 구성력이 바탕이 되어있어야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습니다. 이런 기본기가 충분히 습득되지 않은 채 시를 쓰면 생경하고 난해한 시가 되기 쉽고 거칠고 짜임새 없는 극본이 되기 쉽습니다.  어휘력은 단어를 풍부하게 알고 그것을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우리나라 말은 워낙 그 표현이 풍부해서 한 가지 뜻 안에 여러 가지 단어군들이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어휘들을 충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있어야 하며 또 같은 종류의 말이라도 전체 문맥의 흐름과 분위기에 맞게 잘 골라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이를테면 ‘쓸쓸하다’고 해야 할 자리에 ‘고독하다’고 하면 의미의 단절과 과장을 불러오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지요. 한 문장 속에 스며들어 빛을 발하는 가장 적절한 어휘는 단 하나 뿐입니다. 가장 적절한 말을 골라서 쓸 줄 아는 능력이 어휘력인 것이지요.  어떤 분들은 이 어휘력 배양을 위해 국어사전을 외기도 하는데 문학에 있어서의 어휘는 문장 속에 융화되어 있어야 제 가치를 발휘하는 것이므로 뛰어난 작품을 많이 읽는 것이 어휘력 향상의 가장 바람직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그 말들이 자신의 무의식 속에 육화되도록 해야 합니다.  문장력은 어휘력이 바탕이 되고 남의 좋은 글을 많이 읽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습득됩니다. 좋은 문장은 필요없는 군더더기가 없고 읽기에 편하도록 적절한 호흡을 가진 것입니다. 너무 긴 문장이 장황하게 계속되면 문맥의 의미가 불투명해지고, 너무 짧은 문장이 반복되면 단조로운 느낌을 주게 됩니다. 탄력있는 문장은 사랑의 줄다리기를 하듯이 길고 짧은 문장이 적당하게 섞이면서 이어져야 합니다.  구성력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배치하는 능력입니다. 글을 기승전결로 배치하는 것은 너무 흔한 방식이므로 때에 따라 결말을 먼저 제시하거나 절정 부분을 글머리에 내세우는 등 여러 가지 구성의 변화를 시도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626    하이퍼시 창작론 / 최룡관 댓글:  조회:2128  추천:0  2017-08-17
하이퍼시창작론 프롤로그 필자의 저서 [이미지시창작론]에는 이런 말이 기록되여 있다. [시적상관물을 설정하는 방법은 이외에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으리라고 생각이 든다. 필자는 이 일곱가지 방법을 치중하여 설명하였을뿐이다. 이 일곱가지 방법은 어떤 근거를 잡으면서 한 방법이 다. 그러나 시적상관물을 설정하는데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하는것들이 있다. 이미지란 현실을 초월하여 쓰는것이 중점의 하나인데 무슨 근거가 필요한가? 이 말은 맞는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시적상관물을 설정하는것은 지적인 지위를 삭감해버리는것으로서 우리들이 연구할 과제라고 생각된다. 당대 영미 초현실주의자들이 이에 속한다고 생각 된다. 그들은 환상적이고 몽상적인 이미지를 제작해내고 파편문체를 많이 쓰는데 필자는 그런 이미지에 대한 연구가 너무 천박하여 여기에서 피력하지 못하고 과제로 남기면서 독자들에게 량해를 구하는 바이다.] 21세기 초에 필자가 [이미지시창작론]을 쓸 때 한 말이다. 그로부터 어느덧 또 10년이 지난 2015년 6월이 돌아왔다.   오늘부터 [독자들에게 량해를 구하던것을] 나름대로 풀어보려고 펜을 들었다. 그답을 한국의 하이퍼시클럽시인들 시와 그들의 시에 대한 글에서 찾게 되였고, 그 원천적인 근거를 조지P 란도의 [하이퍼텍스트3.0]에서 찾아볼수 있게 되였고, 그 리론적원칙들을 구조주의자들의 철학에서 찾아볼 수 있게 되였고,그 전통을 중국시문학력사와 현실에서 찾아볼수 있었다. 하이퍼시는 서양시문학의 최신 조류이다. 하이퍼시를 하는것은 국제적인 시와 연변의 시를 접목하는 대사일뿐만 아니라 중국시문학전통(중국시문학전통은 우리시문학전통)을 계승하고 발절시키는 대사이다.  필자는 21세기 시문학은 무의식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것이며 시문학에서는 하이퍼시가 새로운 붐을 일으키며 시문학발전을 이끌고 나갈것이라고 믿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하이퍼(hyper)시의 리해   1. 하이퍼시의 고리는 다선. 불연속.   하이퍼시란 어떤 시인가?  무의식으로 쓴 시이다. 고리는  다선. 불련속, 이것은 하이퍼시의  가장 독특한 핵심적 특성이다. 다선이란 개념을 어떻게 리해할것인가? 다선이란말그대로 여러개의 선이란 말이다. 한수의 시에서 한가지 이미지를 둘러싸고 쓰는 종적구성의 시인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차원이 다른 이미지로 구성된 횡적구성으로 된 시이다. 그런데 그 이미지들이 서로 련결되는것이 아니라 불연속적이라는것이다. 다선이란 말은 한국의 심상운시인이 하이퍼시를 론할 때 한말이다. 필자가 알건대는 서양에서다선시를 제일 처음으로 왕성하게 쓴 시인은 프랑스의 S.J 페르스이다. 전문적으로 다선으로 시를 쓰고 시집을 내고 노벨문학상을 받은 시인은 생종.페르스(1960년노벨문학상수상)다.  독일의 석학 후고. 프리드리히는 당년의  다선시를  파편문체시라고 했고 , 데드넬슨은 하이퍼텍스트라고 하였고, 한국의 심상운은 하이퍼시라고 하였고, 프랑스의 질 들뢰즈와 필릭스 가타리는 다양체라고 하였다,   이 모든 명제들이 죄다 무의식에서 발상되는것들이다.   2011년 수웨덴의 시인 토마스 트란스 트뢰메르 시인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는데 그의 시도  하이퍼시였다. 그러고 보니 21세기 시의 시대는 하이퍼시 시대가 도래한것이 아닐가 하고 필자는 생각해본다.어떤 시가 하이퍼시인가를 알기위하여 그들의 시부터 보자.  비 생종 페르스 비의 용수(榕树)는 거리에 뿌리 내리고 때이른 호수가의 탁한 물속의 벌레들, 산호의 혼인을 향해 솟아오르고 그물로 싸우는 투우사와 같이 벌거벗은 ‘사고’ 공중의 뜰에서 헝클어진 녀인의 머리카락을 빗긴다. 파도의 웨침에 주제의 절박함을 노래하라 시여, 파도의 출렁거림에 도망하는 주제를 노래하라 시여 예언하는 처녀들의 허리에 지나친 애욕 밤에 황갈색의 늪에서 부화하는 금빛의 알 오 기만이여! 이같은 꿈의 기슭에도 나의 정돈된 잠자리 그곳에서 음란한 장미는 시로 선명히 자라 바퀴되여 돌기 시작한다. 나의 비웃음인 무서운 주여, 여기에 있는것은 짐승의 고기맛에 김 뿜는 땅과 처녀수밑의 과부의 점토, 잠 못 이룬 내 사내의 발에 다져진 땅이니 포도주처럼 가까이 가 냄새를 맡을 때 그 땅은 진정 기억의 상실을 시인할것인가? 주여, 내 비웃음의 무서운 주여! 여기에 있는것은 층을 이룬 바다의 겹쳐진 부분의 높은 모래언덕의 응답과 같은, 지상에서 표현되는 꿈, 여기 이곳에 있는 땅은 모두 씁쓸한 땅 새로 태여남의 시간, 그리고 알수 없는 모음의 방문을 받는 나의 령혼. 생종페르스의 [비]를 읽노라면 무엇이 무엇인지 알수 없다. 시내용마다 거이 모두가 이질적인 이미지로 라렬되였다고 할수 있겠다.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는 련계되는것이 아니라 서로 단절되여 있고, 그런 단절들이 모여서 한수의 시를 구성하고 있는것이다. 시인은 독자에게 어떠한 통일적인 해석을 요구하는것이 아니라  의식에서의 생성의  흐름을 그림으로 그려놓고 있는것이다. 프랑스의 외교관이였지만 시에서 그가 추구한것은 어떤 윤리도, 사상도, 철학도 아니다. 그저 그의 령혼에서 생성되는 이미지들을 집합 하여 한수의 시로 만들었을뿐이다. 한국 태학당에서 출판한 생종페르스의 시집은 [이국의 녀인에게 바치는 시]라는 제목으로 되였는데 모든 시가 다 이런 하이퍼시 즉 이미지가 련결되지 않고 분리된 무의식시다.  주문처럼 흘러나오는 생소한 이미지들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진다. 그것은 상상력에 대한 자극으로써 반짝이는 이미지들이 장엄한 소리를 내면서 독자들을 아연해지게 한다.이미지들은 조밀하게 배렬되여 어느 한 이미지도 부정할수도 없다. 령혼속에서 끓고 있는 이미지들은 낯설고도 환각적이여서 이색적이고 괴상한 사물들의 움직임이며 언어들의춤이라고 할수밖에 없다. 아래에 2011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토마스 트란스 트뢰메르 시를 한수 보기로 하자 기상도 토마스 트란스 트뢰메르 시월 바다가 신기루등지느러미를 달고 차갑게 반짝인다. 아무것도 요트경기의 백색 현기증을 기억하지 않는다 어슴프레한 호박빛이 마을위를 비추고 온갖 음향들이 천천히 날아다닌다 개가 짖는 소리는 정원위의 대기중에 그려진 상형문자다 정원에는 노란 과일이 나무를 바보 만들며 제 멋대로 떨어진다.   [기상도] 전문이다. 기상도란 날씨를 알려주는 도해라고 해석할수 있다. 그런데 날씨를 알려준다는것이 오늘은 몇도며 바람이 몇급이며 구름이 어쩌며 하는 말은 한마디도없다. 비가 오는가 눈이 오는가 하는 말따위도 물론 없다. 기상도를 보면서 10월의 바다, 요트경기, 호박빛, 개짓는 소리, 정원의 과일나무들과 만나게 된다. 이러한 사실들은 또 너무 낯선 사물들로 변형되고 있다겠다. 10월의 바다는 신기루등지느러미로, 요트경기는 백색현기증으로, 호박빛은 음향으로 , 개짓는 소리는 상형문자로, 과일은 나무를 바보로 만드는것으로 변형되고 있다. 각련들은 하나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는데 이미지들마다 어떤 련계성도 보이지 않는다. 각자는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런 각자의 독존이 집합되여 한수의 시를 구성하고 있는것이 하이퍼시다. 한국의 조향의 시 [바다의 층계]도 이러하다. 바다의 층계 조향 낡은 아코오뎡은 대화를 관뒀습니다 --여보세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手话机 녀인의 허벅지 낚지 까만 눈동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랑데부우 그웅에 손을 흔드는 하얀 기폭들 나비는 기중기의 허리끝에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조향의 의 전문이다.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는 단절되여 있고 아무련 련계성도 없다.. 우리는 아주 괴상하고 기이한 그림앞에 서있게 된다. 여러가지 기이하고 괴상한 사물들이 모여 한수의 시를 구성하고 있다겠다. 여기서 그 어떤 사상을 추구한다는것은  불가능하다. 시인의 의식이 뛰여다니고 있다는것을 알수 있을뿐이다. 의식은 그 어떤 장애도 받지 않고 한순간에 자유자재로 번개처럼 하늘을 가를수도 있고, 산처럼 솟을수도 있고, 물처럼 흐를수도 있고, 천년만년을 거스를수도 있고, 고금중외를 빛의 속도보다도 더 빨리 날아다닐수도 있는것이다. 조향의 가 바로 이런 시라고 볼수 있을것 같다. 그래서 프랑스의 생종페르스의 나, 스웨덴의 토마스트란스 트뢰메르의 와 맥을 같이 하고 있는 시라고 볼수 있겠다.   이제까지 프랑스, 스웨덴, 한국의 시를 례로 들었는데 중국에는 이런 시가 없는가? 있다. 원나라의 마치원의 시 가 바로 이런 시다.   추사(秋思) 마치원   메마른 넝쿨 앙상한 고목 황혼의 까마귀   쪼끄만 돌다리 흐르는 시내물 한적한 농가집   청태 낀 길 스산한 서풍 빼빼 여윈 말   석양은 서산으로 기우는데 천애지각의 나그네 애간장만 끊어지네     의 련마다에서 부동한 사물의 라렬로  되여있다. 1련에서는 메마른 넝쿨,앙상한 고목, 황혼의 까마귀 등 사물이 대등한 관계로 라렬되여있고 , 2련에서는 돌다리, 시내물, 농가집이 대등한 관계로 라렬되여있고, 3련에서는 길, 서풍, 말이 대등한 관계로 라렬되여있고,마지막련에서는 석양과 나그네가 라렬되여있다. 모두 열한가지 사물들이 나타나는데 어느한 사물도 다른 한 사물과 직접련계를 가지고있지 않고 어느한 사물도 다른 사물때문에 존재하고 있는것이 아니다. 각 사물들은 모두 독립성을 갖고있다. 열한가지 사물은 등장하여 농촌의 풍속화를 그리고있다.각각의 사물은 풍속화의 한구도로 되고있을뿐이다.마치 참대와 같다. 참대는 속이 빈 껍질로 된것이다. 껍질의 어느 부위나 다 중심이라고 할수 없다. 그러므로 중심이 없는 참대라고 할수 있다.하지만 참대 는 언제나 꿋꿋하게 잘 자란다. 의 각련은 하나의 참대마디라 할수 있고  각련의 사물들은 바로 참대를 이룬 참대의 껍질이라고 할수 있다.어느것도 중심이 아니고  어느것이나 다 변두리다. 이러한 시를 우리는 하이퍼시라고 한다.  한수의 시에서 련계도 되지 않는 여러가지 사물들이 활동한다고 하겠다. 과거에 우리는 이러한것을 구성이 흩어졌소 째이지 못했소 이런 시가 어떻게 시로 되오 하면서 나무리였다. 그런데그런 비난을 받아야 할 시가 오늘은 탐구되고 있다. 김춘수시인이 에서 너의 이름을 불러주니까 너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였다는것처럼 데드넬슨이 하이퍼텍스트라고 불러주자 도, 도, 도, 도 우리에게로 와서 하이퍼시로 되였다.마치원의 는 에 실려있는 시다. 원나라때에 이런 시가 있었다는것은 지금으로부터 700여년전 일이다.  그러니까 중국문학에서 700년전에 하이퍼시가 있었다는것으로 풀이 된다. 오늘의 하이퍼시는 중국보다 약 650년후에 탄생되였다고 할수 있다. 이것만이아니다. 중국의 고대로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 시를 섭렵해보면 하이퍼시가 한줄기 산맥으로 이어져왔다는것을 알수 있다. 고대의 맹호연으로부터 오늘의 뻬이도나 망커에 이르기까지 하이퍼시작법을 쓰지 않은 시인들이 없으며 그것도 명시에 속하는시를 썼던것이다. 물론 파편문체요 하이퍼요 하는 이름을 달지 않았을뿐이다.필자는 부록에다 중국하이퍼시의 명시들을 편집해 놓았다.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한번 잘 읽어보기를 바란다. 그러면 하이퍼시작법이 우리의 전통이라는것이 환히 알게 될것이다.  필자가 올린것이 모두가 아니다. 그외에도 많고도 많을것이다.하이퍼시의 전통은 서구에서 찾을것이 아니라 중국고전에서부터 찾아야 할것이라는것을 시들이 말해주고있다겠다. 한마디로 말해 하이퍼시는 중국시문학의 한줄기대간 그것도 중요한 대간을 이루고있다고 하겠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2.하이퍼시와 현대시의 구별    하이퍼시를 다양체라면 현대시는 단일체라고 말할수 있겠다. 시로서살펴보자 문둥이 서정주 해와 하늘 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서정주시 [문둥이]에서는 전반시에 하나의 사물의 이미지에 대한 서술만 있는것이 특징적이라고 하겠다. 시는 문둥이가 어쩌는가만 쓰고있는것이다.아마 서정주시의 다른 시들도 거개가 이렇게 한가지 사물을 둘러싸고 씌여져있는 같다. 하지만 오늘의 하이퍼시를 쓰는 시인들의 시는 이와 구성이 완전히 다르다. 문둥이가 아주 짧은 시니까 [하이퍼시]시집에서 짧은 시 한수를 보자 북소리 김은자 Scene# 8 고무줄놀이를 한다 엄마는 장사 나가고 저녁이 줄을 뛰여넘는다 나는 엄마를 기다린다 지구를 한바퀴쯤 돌면 아빠가 나올가   이 시는 [문둥이]보다 한줄이 더 많다. 하지만 시에 등장하는 이미지는 단선이 아니라 다선이다. 소제목부터 야릇하다. 영어에다 우물정자같은 글이 아닌 부호에다 아라비아수자 8을 조합하여 쓴것이 이색적이 아니라 할수 없다.(필자는 한글시에 영어같은 외래어문자를 쓰는것을 좋아하지 않지만)시가 시작되자 북소리가 고무줄놀이를 한다는 변형부터 창의적이다. 청각을 시각화한 공감각의 응용이 이채롭다. 그아래에 엄마가 나오고 저녁이 나오고 지구가 나오고 아빠가 나온다. 시의 행마다 성질이 다른 사물들이 나 타난다. 이 성질이 다른 사물들 자체가 련계성보다도 불연속성이 강한 사물들이다. 차원이 다른 사물들의 이미지라렬로 시를 구성하고 있는,  이미지들의 횡적배렬로 된 시를 하이퍼시라고 한다. 한수의 시에서 성질이 다른 여러가지 이미지들이 공생하는 시를   심상운시인과 김규화시인은 [하이퍼시발간사]에서 이렇게 긍정하고 있다.  재래의 현대시와 하이퍼시  다른점 6가지를 론하였는데 우리가 심사숙고할만한 문제를 제기하였다고 할수 있다. 이 여섯가지 구별을 잘 인식하고 리해하는것은 하이퍼시에 대한 리해에 도움이 될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오늘의 시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되는가를 가리켜준다고 생각된다.   현대시와 하이퍼시의 구별표      현과 하 내용 구별종류   현대시   하이퍼시 주제 하나 여럿 구성 종적구성 횡적구성 형상명칭 이미지 리좀 중심문제 유중심 무중심 흐름 기승전결 중간채취 이음새 련결 분렬 체험자 자아 무아.타자 의경 유아경 무아경   현대시와 하이퍼시는 상기한 도표처럼 다른 점이 있지만 시적예술의 동일성 있다. 그것은 둘 다 변형이라는 매개물을 가진다. 둘 다가 무의식이라는 발원지를 가진다. 동일한 매개물과 발원지에서 태여난 시가 단일체일 때는 현대시가 되고, 다양체일 때는 하이퍼시가 된다. 하이퍼시는 현대시에서 탄생한 시다. 하이퍼시의 토양은 현대시이다. 하이퍼시는 현대시 토양위에 세워진 찬란한 건축물이다. 하지만 달걀과 병아리의 관계이다. 병아리는 달걀에서 나왔지만 달걀이 아니고 병아리인것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3.하이퍼시의 존재리유    1) 하이퍼시는 오늘의 경제시대에 부응하는 시적구조가 아닐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은 생산이 다국적인것이 많다. 자동차공장하면 여러나라에서 부속을 끌여들여 차를 조립하는가 하면 한나라에서 생산하는것도 여러지구에서 부속품들을 모아서 조립하는 경우가 많다.  어느 한 나라에 어떤 큰 일이 벌어져도 영향이 그 나라에만 미치는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반응을 일으키거나 세계적인 참여를 초래하게 되는경우가 많다. 시인이 시를 쓰자면 여러가지 인소들이 작동 하게 되는것이고 여러가지 사물과 사건들이 현실을 초월하여 상상도 되고 환상도 되는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사고의 바탕이 되고있다고 하겠다.   2) 인간의 사유는 언제나 다선적이다. 한사람이 동시에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는것이다. 누구와 대화하면서 그가 아닌 어떤 사람의 어떤 모습이나 일을 생각할수도 있고, 미국의 뉴욕이나 오스트라리아의 사자, 중국의 고궁…. 이러한것들을 거이 동시에 생각할수도 있고 련속적으로 생각할수도 있다. 이런 생각에 떠오른 사물들은 실제상 아무런 련계도 없고 성질이 완전히 이질적인것들이라고 아니할수 없다. 인간의 사유는 언제나 다각적이고 다시점이라고 할수 있다. 그것이 오늘의 하이퍼시에 사유의 기교를 주지 않을가고 생각된다.   3) 자연도 다종적으로 구성되였다고 할수 있다. 한마을이 있다고 하자. 거기에 사람이 있고  나무가 있고 흙이나 돌이 있고 또 도야지가 있고 닭이 있고 개가 있고 소가 있고,,,,,, 여러가지가 있다. 그것들을 종합하여 버들골이요 남평이요 도문이요 하고 말하게 된다. 손바닥만큼 자그마한 땅의 구조도 그렇게 된다. 거기엔 흙이 있고 풀이나 나무가 있고 또 귀뚜라미나 개미, 지렁이이나 해빛이  있게 마련이다. 이렇게 여러가지 사물을 통칭해서 어느한 자그마한 곳이 어떤 개념으로 떠오르게 되는것이다. 하나의 사물도 순수한 단종으로 구성된것이 없다. 죄다  여러가지 부동한 사물의 집성으로 구성되여있다. 물은 산소와 수소로, 돌은 여러가지 원소로, 나무나 풒도 마찬가지다. 하이퍼시란 이런 자연의 특성과 무관한것이라고 말할수  없게 된다.   4) 인간의 문화는 또한 다층차적이다. 연길하면 고층건물이 즐비한 거리가 있고 거리에선 차들이 꼬리를 물고 다니고 ,여러가지 백화나 가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게된다. 백화에 들어가면 적어도 수천수만종에 달하는 여러가지 상품들이 있는데 이러한 상품들은 다 성질도 다르고 용처도 다르다는것은 자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러 한 의미에서 하이퍼시는 현실문화에 부응하는것이라고 할수 있지 않을가.   5) 사람들의 얼굴마다에는 눈,  코, 입, 귀, 눈섭 등이 보인다. 이 눈귀코입눈섭은 다 성질이 다른 사물들의 모임이라고 할수 있으며 이것들이 모여 얼굴이라는 명명을 받게 된다. 사람의 배속에는 이물질인 똥까지 지니고 다녀도 사람은 사람인것이다. 어느 한 세상에나 순수한 한가지 요소로 구성된 사물이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수도 없다.  한수의 시에도 눈이 있고, 코가 있고, 귀가 있고, 입이 있고, 눈섭이 있게 되는것이 오늘의 하이퍼시라고 생각하게 되는것이 아닐가. 얼굴의 오관은 이질적사물들이 얼굴에 모임이고, 하이퍼시의 오관은 이질적인 언어들의 종의장위에 모임일것이다. 하이퍼시는  한 시인의 령혼속에서 생성되는 상상이나 환상일것이다.      6) 오늘의 시대는 디지털시대라고 하는데 이 디지털시대는 컴의 시대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컴은 인간의 사유를 초월한 마술을 부리고있다하여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것이다. 마우스로 툭 찍으면 술이 나오기도 하고, 노루가 나오기도 하고, 나비가 나오기도 하고, 삼국연회소설이 나오기도 하고,북경이 나오기도 하고, 미국이 나오기도 하고, 단마르크가 나오기도 한다. 그외에도 현실이나 력사적인 정치, 경제, 문화, 군사의 모든   미세한 상황까지 다 드러낸다.  툭 찍으면 변하는 컴은 우리에게 다시각, 다시점 사유를 부여하고도 남겠다. 이것도 하이퍼시의 한개 기초가 되지 않을가.   21세기는 21세기의 문학이 있어야 하고, 시가 있어야 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무의식문학이 21세기 문학이고 , 하이퍼시가 21세기 시가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625    "죽은 개는 짖어댄다"/ 박문희 댓글:  조회:1948  추천:0  2017-08-17
무의식과 하이퍼시 창작   □박문희      "하이퍼시 창작론 간담회 및 하이퍼시 세미나"가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 주최로 연길에서 열렸습니다. 최룡관선생의 은 에 이은 또 하나의 역작입니다. 현재 한국 지에서 연재중입니다.   최선생은 의 머리글에서“하이퍼시는 서양시문학의 최신 조류”이며 “하이퍼시를 하는것은 국제적인 시와 연변의 시를 접목하는 대사일 뿐만 아니라 또한 중국 시문학전통(중국시 문학전통은 우리 시 문학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대사”이기도 하다면서“21세기의 시문학은 무의식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것이며 시문학에서는 하이퍼시가 새로운 붐을 일으키며 시문학발전을 이끌고 나갈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나는 시 쓰기를 시작한 시간이 길지 않지만 공부를 하면서 최선생의 주장에 상당히 납득이 되었습니다. 시쓰기를 하면서 과 의 도움을 많이 받았음을 고백합니다.   최룡관선생은 에서“시는 무의식으로 쓴다. 하이퍼시는 무의식의 산물이고 무의식은 하이퍼시의 산모이다.”는 주장을 피력했습니다. 이 주장은 피뜩 보기에 리해가 잘 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의식”이란 개념으로부터 깊이 파고들면서 시창작 실천과 결부시켜 해득을 한 결과 이 주장에 도리가 있으며 실제 창작에서도 막대한 도움을 받을수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이퍼시 창작론 간담회 및 하이퍼시 세미나"에 참가하여 나의 학습체득을 발표했는데 원래 계획했던 학습을 잠시 뒤로 미루고 학습체득부터 시작할 생각입니다. 학습속도가 매우 늦으므로 체득발표 시간간격이 길어질 수 있다는 점에 널리 양해 바라며 기탄없는 비평(부동한 견해 포함) 을 기대합니다. ------ 발문     시는 무의식으로 쓴다. 하이퍼시는 무의식의 산물이고 무의식은 하이퍼시의 산모이다.                                                 -----최룡관의 에서   무의식----깊은 바닷물속의 거대빙산   프로이트 이전의 서구적 사고방식은 의식중심으로 특히 이성(理性)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지배적이었다. 의식에서 벗어난 모든 요소는 망상이나 광기로서 비정상적 영역에 불과했고 연구 대상이기보다는 거의 전적으로 배제 대상이었다. 모든 인간 행위는 의식에 따른 계획적 성격을 지녀야 했다.   그러므로 무의식의 발견은 당시에, 인간이 모든 행동을 자신의 의지와 의식 하에 한다는 기존의 상식을 여지없이 깨버려, 철학의 기반 자체를 흔들어버렸다. 특히 우리의 의식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며, 대개의 모든 상념과 기억들은 저 깊은 바닷물 속의 빙산처럼 무의식 속에 깊이깊이 내장되어 있으며 그러나 '무의식'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인간의 의식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 임상사례를 통해 증명되었을 때 그것이 서방철학계와 기타 모든 학술계에 가져다준 충격은 과시 원자탄 폭발에 못지않은 것이었다.   무의식이 의식과 갈등하면서 사고와 행위를 규정한다는 문제의식은 인간에게 접근하는 새로운 길을 열었는바 철학을 비롯하여 학문 활동 전 영역에서 새로운 접근이 시도됐고 또한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새로운 표현 욕구와 표현 방법을 자극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너머의 미지의 정신세계   여기서 각별히 특기할 것은 무의식이 의식의 자아와는 다른, 자율성과 창조적 조정능력을 가진 완전한“객체정신”이라는 학설이 있는데, 이 학설의 제창은 수년간 프로이드와 함께 연구 활동을 하다가 프로이드와 결별하고 분석심리학의 이론을 체계화시킨 칼 융에게서 비롯되었으며, 융의 분석심리학의 가장 큰 특징도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와 칼 융은 경험론자로서 다 같이 살아 있는 무의식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그 내용과 작용에 대하여 상당히 큰 견해 차이를 보였다.   무의식이란 융에 의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서 아직 모르고 있는 우리의 정신의 모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너머의 미지의 정신세계 그것이 무의식이다.   융의 정신분석학에“무의식의 발견”이란 개념이 있는데, 뜻인즉 의식 속의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한 인식(즉 발견)이다.의식적인 나는 무의식의 나를 모르지만 무의식의 나에서 발생하는 움직임이 의식적 나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주체(나)가 의식적 주체와 무의식적 주체로 갈라진다는 사실자체가 인간은 분열적 존재임을 증명한다.   무의식의 두 가지 층----“개인적 무의식”과 “집단적 무의식”   융은 무의식에는 두 가지 층이 있다고 보았다.    그 하나는 그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 겪은 개인 생활에서의 체험 내용 가운데서 무슨 이유에서든 잊어버린 것, 현실 세계의 도덕관이나 가치관 때문에 현실에 어울리지 않아 억압된 여러 가지 내용으로서 반드시 성적(性的)인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 그것을 포함한 모든 그 밖의 심리적 경향, 희구, 생각들, 고의로 눌러버린 괴로운 생각이나 감정, 그리고 의식에 도달하기에는 그 자극의 강도가 미약한 문턱 및 지각의 내용 등의 모든 것으로 구성된다. 이와 같이 태어난 이후 개인이 살아오면서 이루어진 무의식의 층들을 융은“개인적 무의식”이라 하였다.    융은 더 나아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마음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무의식의 층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개인의 특수한 생활사에서 나온 무의식의 층과는 달리 태어날 때부터 갖추어져 있는 인간 고유의, 그리고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있는 보편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원초적인 무의식이 심층에 깔려있다는 것, 이것을 이름하여 융은“집단적 무의식”이라 했다.   의식의 뿌리, 정신생활의 원천, 창조의 샘   이 “두 가지 층의 무의식”에 언급하면서 융은, 무의식은 자율성을 가진 창조적 조정능력을 지녔으며 또한 인간의 원초적 행동유형의 조건들을 갖추고 있다고 보는“집단적 무의식”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의식의 뿌리를 이루는 정신생활의 원천이라고 보았다.   한마디로 무의식은 충동의 창고, 의식에서 쓸어낸 쓰레기장이거나 병적인 유아기 욕구로 가득 찬 웅덩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성숙케 하는 창조의 샘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여기서 프로이트의 학설을 말하는 마당에 주로 칼 융의 주장을 소개하는 것은 그의 주장에하이퍼시의 창작에 직접 관련되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위에서 우리는 무의식이 개발되지 않은 무한한 창조의 원천임을 알았다. 그러한 무의식을 하이퍼시창작의 대상으로 하면, 우리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체험할 수 없는 세계를 그려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성(理性), 도덕 등에 억눌린 욕망의 세계를 드러낼 수 있겠다는 자신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맹목낙관을 가로막는 언덕   하지만 이점을 앎으로 해서 오는 맹목낙관은 절대 취할 바가 못 된다. 일단 창작과 연계시키면 수많은 실제 문제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선 무의식은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서 아직 모르고 있는 우리 정신의 모든 것,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너머의 미지의 정신세계, 말하자면 아직 개발되지 않은 것이라는 언덕이 금방 우리 앞을 가로 막는다. 당연히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을 창작에 이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 앞에는 개발되지 않은 무한한 창조의 원천인 무의식을 창조에 도입하자면 무엇부터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불가피하게 나서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부터 해야 할까?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말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1. 시창작의 원천으로서의 무의식에 대한 인식작업   우선 무의식은 창조의 샘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안 그러면 강대한 무의식의 지배 앞에서 시인은 피동에 처하게 되어 그것을 활용할 수가 없게 될 터이니.   무의식은 개인생활의 경험자료 뿐 아니라 인류의 태곳적부터 끝없이 반복되어 경험되는 일정한 인간적 체험의 조건들을 갖추고 있으며 그것은 수많은 신화적 상징으로 표현되고 경험된다. 이 모든 것은 무진장한 창조의 원천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을 인지했을 때만이 가능할 것이다.   인지하는 그 순간, 무의식은 바로 의식으로 전환되는 길 어구에 서게 된다. 이때 깨어난 무의식은 원동력으로 되어 모든 의식된 마음에 활력을 주고 그 기능을 조절하여 의식과 무의식의 통일을 완성하는 작업에 나설 수 있는 가능성을 지어준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여전히 가능성이 열려있는 것뿐이지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2. 무의식 세계의 발굴 작업   바로 상기의 문제가 제기되는 까닭에 무의식이 의식으로 전환되는 길 어구에 서게 되었을 때, 시인은 반드시 자신의 무의식 세계를 발굴하는 작업에 착수해야만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평소에 무심코 나타나는 무의식의 바다”에서, 번뜩이는 계시를 의식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능력을 갖추고 그것을 꾸준히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발굴시의 무의식은 몽롱한 상태일 수가 있다. 이를 테면 영감(靈感) 같은 것이다.   ● 영감과 주의력   [영감]  영감(靈感)이란? 창조적인 일의 계기가 되는, 번득이는 착상이나 자극이며, 무의식중에 갑자기 일어난 신묘한 능력이다.   ▲영감은 초의식(超意識) 또는 무의식의 한 종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감이 자의식(自我意識)의 반대라는 것이다. - 아론 코플랜드(Aaron Copland)  ▲영감은 완강한 노동으로 얻어진 포상이다.--바딤 레핀 ▲영감은 게으름뱅이의 방문을 반기지 않는 손님이다. ——니꼴라이 체르니셰프스키  ▲영감은 무의식과의 대화가 필요하다. 자신의 무의식 세계에 항상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으면, 영감의 기회는 적어진다. 자기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를 항상 의식하고 감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 모기 켄이치로   고로 영감은 의식적인 노력을 행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것으로서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피나는 수련 과정을 거친 사람이라야 비로소 자기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생명의 소리”를 계시 받게 되는 것이다.   [주의력]  위에서 언급된 의식적인 노력이 바로 주의력이다.   하이퍼시의 창작은 실제로 봐서 영감과 주의력을 엄밀히 구분할 수는 없는 것, 이 두 가지가 혼연일체로 이루어져야 훌륭한 시를 써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날마다 뜨고 지는 해와 달과 별에 대한 이러한 평범하고 세밀한 성찰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모든 것에 미치는 '창조적 발견'을 할 수 있는 마음눈(心眼)과 신비한 생명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한다.   3. 무의식의 세계를 의식적 창작의 세계로 비약시키는 작업   하이퍼시의 중심에는 시종 의식의 흐름이 놓여 있다. 이 의식의 흐름은 “의식과 무의식의 뒤섞음”이 만들어내는 이중 삼중의 다차원의 공간을 만들어 내고 지어 시간의 질서도 바꾸어 놓는다. 하이퍼시는 의식의 흐름 속에서 발생하는 이미지의 덩어리지만 현실과의 관계 속에 생명력을 얻는다.   하이퍼시의 특성은, 상관성이 별로 없어 보이는 이미지들의 불연속적 결합이며 상상력에 의한 시적 공간의 무한정한 확장이다. 논리적 인과관계가 없는 이미지들은 연과 연, 행과 행의 순서를 바꿔놓아도 상관없이 각기 독립성을 가지며 그런 이미지들은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넘나드는 자유를 갖는다. 그러나 시인의 “의식 혹은 무의식의 흐름”이 시의 저변에 깔려 있어 하이퍼시의 전체적 통일성을 유지해준다.   하이퍼시의 에너지는 의식의 흐름, 탈 관념, 다선구조, 가상현실 등을 바탕으로 한 새롭고 다양한 감각과 상상의 무한한 확대에서 분출되는 것이다. 시인이 가상현실을 만들어 내지만, 가상현실은 “스스로의 내부에 갇혀 있는 무의식”을 복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이미지를 구성해 내고 창조한다.   상상력, 의식과 무의식의 조화운동   “'영감'과 '주의력'이 협동하는 창조적 무의식”을 우리는 '상상력'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상상력은 심상(心象)을 의식 위에 비추는 작용, 다시 말하면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기능”이다. 눈앞에 없는 사물의 이미지를 만드는 정신 능력, 즉 상상력은 하이퍼시를 창조하는 근원적 능력이다. 여기서 수동적 상상력이 능동적 상상력에 포섭되고 언어를 빌어 소생할 때 영감과 주의력은 일체를 이루고 상상력이 실현되어 우리는 비로소 한수의 하이퍼시를 잉태하게 되는 것이다.   이른 바의 합리적인 사고체계와 자아의식 범람의 거세 ​  이성(理性)과 자아의식의 범람을 막아야 시 창작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인의 머릿속에서 자아의식이 지나치게 살판 치면 그를 지배하는 뇌리 속에는 합리적인 사고체계 이외의 다른 어떤 특권도 들어앉을 수가 없게 된다. 이 경우 그가 관심하는 것은 무엇일까? 대개 다음과 같은 것들일 것이다.   --이 시는 의미가 있는 것인가, 혹은 없는 것인가? --이 시는 옳은가, 아니면 그른가? --이 시에 반영된 현상이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은가? --이 시는 유익한 것인가, 해로운 것인가?   그러나 이런 질문에는 무슨 깊이라는 것이 없다.   “죽은 개가 짖어댔다.”   이른바 의식(意識), 이성(理性)의 눈빛으로 보면, 이런 묘사는 어처구니없는 병문(病文)일 것이다. 그 눈빛에 죽은 개는 죽은 개일 뿐일 것이다. 그런 고로 어떤 의식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무의식의 세계는, 무의식이 갖는 자체내의 의미를 통해서 의식의 권한을 몰수해야만 하이퍼시 창작의 길은 비로소 트이게 되는 것이다. ♣
624    안개꽃아, 나와 놀쟈... 댓글:  조회:2313  추천:0  2017-07-27
안개꽃                          /복효근 꽃이라면 안개꽃이고 싶다 장미의 한복판에  부서지는 햇빛이기보다는 그 아름다움을 거두는 안개이고 싶다 나로 인해 네가 아름다울 수 있다면 네 몫의 축복 뒤에서 나는 안개처럼 스러지는 다만 너의 배경이어도 좋다 마침내 너로 하여 나조차 향기로울 수 있다면 어쩌다 한 끈으로 묶여 시드는 목숨을 그렇게 너에게 조금은 빚지고 싶다       정연복의 '안개꽃' 외 + 안개꽃  '맑고 깨끗한 마음'이라는 꽃말 그대로 자신이 돋보이기를 바라지 않고 은은한 배경 되기를 좋아해 다른 꽃들의 빛남을 오히려 자신의 기쁨으로 아는  참 착하고  겸손하기 짝이 없는 꽃.  욕심에 눈이 어두워 서로  경쟁하고 짓밟는 세상 사람들에게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다소곳이 얘기하는 마음이 천사같이 깨끗하고 어른스러운 꽃. + 안개꽃과 장미  안개꽃과 함께 있으면 장미가 달라진다 그냥 예쁜 장미가 아니라 사랑에 빠진 모습이다.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사랑의 미로 같은  안개꽃에 둘러싸여 장미도 문득 사랑에 눈뜬다. + 장미와 안개꽃  장미와 안개꽃은  찰떡궁합이다 둘이 함께 있으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다. 장미의 돋보이는 예쁨과  안개꽃의 기품 있는 은은함 장미의 불타는 정열과 안개꽃의 하얀 겸손. 모양과 빛깔과 향기가 전혀 다른 둘이 만나 서로가 서로를 떠받치면서 기막힌 한 쌍이 된다. 세상에는  장미와 안개꽃같이 썩 잘 어울리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 장미가 안개꽃에게  세상 사람들은 네가 나의 은은한 배경이라고  네가 있어 내가 더욱 눈부시게 아름답다고 별 생각 없이 말하지만  나는 안다. 어쩌면 나도 너의 배경이라는 것 내가 있어 말없이 착한  너의 모습이 더 빛난다는 것 그래서 나는  행복한 장미라는 것을. + 안개꽃 당신  햇살 밝은 베란다 창가에 앉아 당신을 생각합니다 한겨울 추위에 얼어붙은  온 누리의 구석구석 은은한 생명의 빛을 선사하는  저 눈부신 불덩이 언제였던가 가끔은 외로움으로 그늘졌던 나의 고독한 청춘에  당신의 존재가 햇살처럼 와 닿은 그때 안개꽃 같이 말없이 화사한  당신의 모습을 살며시 훔치며 나의 심장은 한순간 멎는 듯했지 그렇게 우리는 만나 마음과 마음을 잇대어  행복한 사랑의 불꽃을 피웠네  장밋빛 불타는 사랑의 계절은 지나 어느새 우리의 사랑살이에도  세월의 그림자가 꽤 길게 드리웠지만  오!  첫사랑 그 시절의 우리의 티없이 순수했던 사랑만은 영원히 변함없으리            
623    시를 찾아가는 아홉갈래 길이 없다...? 있다...! 댓글:  조회:2096  추천:0  2017-07-27
시를 찾아가는 아홉 갈래 길 / 최영철  새로운 이미지 찾아내기  흔히 사람들은 시 창작을 전문적이며 특별한 훈련이나 지식이 필요하고 천성적으로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되는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시라는 것은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와는 동떨어져 있어서 평범한 생활인의 경험이나 생각으로는 범접할 수 없다고 아예 담을 쌓아 버린 분도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학교에서의 문학 교육이 잘못된 탓입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대부분의 시들이 비일상적인 것인 데다 그것을 획일적으로 밑줄을 그어가며 배웠으니 시를 골치 아픈 존재로 여길만도 합니다. 그러나 시가 생성된 배경이나 본래의 기능은 오히려 골치 아픈 것을 해소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또 갈수록 일상적인 소재와 평이한 화법을 구사하며 발전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쁠 때나 슬플 때 노래를 흥얼거리듯이 눈물과 함성과 탄식을 토하듯이 시 역시 인간의 마음속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희로애락을 담고 해소하는 기능을 합니다. 다른 감정 표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발산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입니다. 노래를 예로 들면 자신이 창조한 가락을 흥얼거리는 것이지요. 여러분도 아마 무의식적으로 그런 즉흥곡을 콧노래로 흥얼거렸던 경험이 있을 줄 압니다.  그것처럼 시를 쓸 수 있는 마음도 이미 모든 사람이 갖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아직 발견해 내지 못한 것이지요. 시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느낌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마다 수많은 느낌에 휩싸여 살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상쾌하다는 느낌, 잠을 좀 더 자고 싶다는 느낌, 물이 차갑다는 느낌, 이빨이 시리다는 느낌, 음식이 짜다는 느낌… 또 밖으로 나가면, 바람이 시원하다는 느낌, 하늘이 푸르다는 느낌, 누군가 보고 싶다는 느낌… 그뿐 아니라 잠든 시간에도 우리는 꿈을 꾸며 어떤 느낌들에 계속 사로잡혀 있습니다.  시를 쓰기 위한 첫 단계는 우선 이런 느낌들을 그냥 흘려 버리지 말고 마음속으로 되새겨 보라는 것입니다. 바람이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면 속으로 ‘바람이 시원하다’고 한 번 중얼거려 보십시오. 그러면 짧은 느낌으로 그냥 흘려 버렸을 때보다 바람의 시원함을 몇 곱절 더 강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바람이 시원하다’는 느낌은 누구나 갖는 것이니까 바람이 어떻게 시원한지를 느껴 보기 바랍니다. ‘막혔던 가슴속 응어리를 뚫어 주듯이 시원하다’ ‘바람에 실려 그리운 사람의 향기가 전해져 오는 것 같다’ … 이와 같은 방식으로 순간 순간의 느낌을 반추하는 습관을 가진다면 여러분은 다른 사람보다 몇 곱절 더 풍부한 인생을 사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계속하다 보면 느낌의 양이나 질이 점차 향상되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물과 현상들 모두에게 어떤 느낌을 가지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대문 앞의 쓰레기통을 보며 ‘너는 매일 그렇게 음식을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구나.’ 라든지, 이리저리 뒹구는 휴지 조각을 보며 ‘너는 아직도 이렇게 배회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부여해 보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여러분은 저도 모르게, 우주 삼라만상과 대화하고 그것들에게 새로운 가치와 생명을 부여하는 시인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남과 다른 글쓰기  문학지망생들을 만나면 예외없이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기성문인들은 뭔가 자기 나름대로 글을 잘 쓰는 비법이 있다고 여기는 모양입니다. 글 쓰는 일이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막연한 작업이기는 하지만 거기에 비법이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세상 모든 일처럼 정도가 있을 뿐이지요.  그 정도라는 것은 여러분도 다 알다시피 읽고 생각하고 쓰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 그런 과정에서 자신만의 내밀한 요령을 터득하는 수도 있지만 그것은 아주 미세한 경험과 깨달음들의 결과이기 때문에 남에게 뭐라고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이 못됩니다.  대학마다 문학에 관한 전공학과가 설치되어 있고 시중에는 많은 문예창작 지침서들이 나와 있지만 그런 것들이 정작 자기 글을 쓰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글쓰기는 정해진 공식이나 이론에 대입시킨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글쓰기는 자신만의 독특한 시행착오를 통해 얻어지는 필연과 우연의 만남입니다. 여기에 글쓰기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그저 우직하게 우리가 다 알고 있는 3多의 과정을 좇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가’하는 문학지망생들의 질문이 ‘어떻게 하면 글을 남과 다르게 쓸 수 있는가’ 하는 질문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봄이 오면 산과 들에 온갖 꽃들이 피어납니다. 아름답습니다. 그 꽃을 보고 글을 쓴다고 합시다. 여러분 중의 대부분은 꽃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그 아름다움을 글로 표현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러나 꽃의 아름다움은 문학이라는 형식이 존재하고부터 수많은 문장가들이 온갖 미사여구로 찬탄한 것이어서 여간해서는 그 수준을 뛰어넘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 꽃이 아름답다는 발견은 이미 일반화된 사실이어서 새롭지도 않습니다. 다른 이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바른 방식으로 쓰는 것이 관건이 되는 것입니다. ‘꽃이 기지개를 켠다’든지 ‘꽃이 하늘로 가고 있다’든지……  이렇게 남과 다르게 쓰려면 남과 다르게 볼 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이 어렵지 않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글쓰기가 단순히 좋은 말로 매끈한 문장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는 것만 깨달으시면 가능합니다. 처음에는 어색하겠지만 세계를 보는 자기 시각을 가지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남과 다르게 본다는 것은 남과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은 남과 다르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다른 정도가 남과 비교해 판이하게 다를 때도 있고 거의 차이를 느끼지 못할만큼 미세할 때도 있지만 분명 여러분은 이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과 비교해 다릅니다.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아무리 닮은 일란성 쌍둥이라도 다른 부분이 있기 마련이지요. 생김새도 그렇지만 생각이 각기 다른 것은 성장한 환경과 그동안의 체험이 각기 다르기 때문입니다.  삶의 과정에서 생성된 이런 독특한 체험들을 우리가 쓰려고 하는 대상에 투영하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자신만의 글, 남과 다른 글쓰기가 가능해 집니다. 자신이 어떤 체험공간을 가지고 있느냐를 잘 판별해서 자신이 쓰고자 하는 글에 적극적으로 반영해보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또 하나의 절대적 가치를 지닌 새로운 시인의 요건입니다.  무엇부터 써야 할까  평소에 줄곧 독서를 해온 분들은 누구나 자기 글을 한 번 써 보고 싶은 욕구를 가집니다. 그런 욕구를 부추기는 동기는 대략 몇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첫번째는 나도 이런 멋진 글을 한 번 써보고 싶다는 막연한 기대감이고, 두번째는 내가 쓰면 이보다는 더 잘 쓸 것이라는 자만심이고 세번째는 이런 이야기도 글이 되는 걸 보면 내 인생도 충분히 글이 되겠구나 하는 자신감입니다.  그러나 이런 동기를 가졌다 해도 대부분은 시작도 해 보지 않고 포기하는 수가 많습니다. 첫번째 경우는 기대감이 열등감으로 바뀌어서 그렇고, 두번째 경우는 욕심과 의욕만 앞서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스스로의 한계에 부딪쳐서 그렇고, 세번째 경우는 게으르거나 용기가 없어서 그렇게 됩니다.  그래도 이 중에서는 마지막 경우가 가장 성실하게 글쓰기를 해 나갈 수 있는 여지를 갖고 있습니다. 앞의 두 경우는 막연한 동경이나 지나친 자만심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제동 장치가 없는 자동차가 되기 쉽습니다. 저는 출판 일을 오래 해 온 탓에 그런 유형의 분들을 더러 만났습니다. 대부분 자기 글에 대한 맹신을 갖고 있어서 책으로 출판하기만 하면 곧 베스트셀러가 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단순한 열정이나 치기로 글쓰기를 시작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남의 글을 읽으며 우리는 오만해지기도 하고 위축되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해 문학작품은 절대적인 평가가 불가능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눈물을 쏟게 하는 감동일 수 있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유치한 신파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모든 독자를 감동시키는 글이란 그만큼 어려운 것이지요.  그렇지만 최대치는 항상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고 감동을 받은 글들은 주제나 소재가 유별나서가 아니라 대체로 자신의 세계를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냈기 때문에 깊은 울림을 준 것들입니다. 부끄럽고 추한 부분,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치미는 미세한 감정의 변화까지도 숨김없이 보여주기 때문에 독자는 흥미와 감동을 느끼는 것입니다.  글이 아주 먼 나라의 이야기이거나 원대하고 초월적인 세계를 쓰는 것이 아니라 대수롭지 않은 자기 이야기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있어 내 경험은 진부하고 의미가 없는 것이지만 타인에게는 그것이 새로운 충격과 간접 경험의 단서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는 부끄럽고 자존심 상하는 생각들이지만 타인에게는 남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즐거움을 주는 것입니다.  글감을 먼 곳에서 찾지 말고 자기 주변에서부터 찾아보십시오. 빨래하고 설거지한 일, 친구를 만나고 시장을 한바퀴 돌아보면서 느낀 것, 남을 증오하고 시기한 것, 그런 것들을 우선 하나도 놓치지 말고 단 한 두 줄이라도 좋으니 적어보십시오. 형식은 일기나 편지가 되어도 좋고 문장 구조를 갖추지 않은 메모가 되어도 좋습니다.  지금부터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디에 있더라도 필기구를 늘 가지고 다니는 것입니다. 가능하다면 필기구는 꿈속에라도 가지고 들어가야 합니다.       
622    할미꽃아, 나와 놀쟈... 댓글:  조회:2266  추천:0  2017-07-27
    할미꽃 - 이해인 손자 손녀 너무 많이 사랑하다 허리가 많이 굽은 우리 할머니 할머니 무덤 가에 봄마다 한 송이 할미꽃 피어 온 종일 연도를 바치고 있네 하늘 한 번 보지 않고 자주빛 옷고름으로 눈물 닦으며 지울 수 없는 슬픔을 땅 깊이 묻으며 생전의 우리 할머니 처럼 오래 오래 혼자서 기도 하고 싶어 혼자서 피었다 혼자서 사라지네 너무 많이 사랑해서 너무 많이 외로운 한숨 같은 할미꽃 할미꽃 이야기 / 최소라 뒷동산 양지 바른 무덤가에 외롭게 피어난 할미꽃 두명의 손녀딸 곱게 곱게 키워 시집 보내고 지팡이 짚고 찾아가니 부자집 시집간 손녀딸 문전박대 푸대접하고 서러운 할머니 가난한 손녀딸 찾아 가다가 산허리 넘지 못하고 돌아가셨네 이듬해 봄날 할머니 무덤가에 꼬부랑 할미꽃 피어났다네 슬픈 전설 할미꽃 이야기에 눈물 짖던 철부지가 이제 할머니 되었네 노오란 양지꽃 사이 흰머리 풀어 헤치고 굽은 허리 펴고 섰는 저 할미꽃 흰머리 되도록 꽃으로 살다가 내 살붙이 바람에 날려 보내곤 힘에 겨워 한숨 짖는 저 할미꽃  할미꽃 쓸쓸한 그 마음이 어미 마음 같았어라 어미 마음 같았어라 할미꽃 / 천영극 도둑놈도 보고도 손가락질 아니하고 화냥년 보고도 웃지 아니하며 허리굽힌 한평생 곱게 늙어가서라 새 봄 고개넘어 양지바른 무덤가 품었던 단심(丹心) 백발되어 날리며 고개숙인 할미꽃 자자손손 찾아가리 할미꽃 / 라정희 꽁꽁 얼어서도 깊이 간직한 말 못할 사연 언 몸 녹으면  님 그리워 목 길게 뽑았건만 수줍어 부끄럼에 고개숙여.... 산들 바람결에  못이기는 척 님을 훔쳐 보내 어느새 백발 되어 기다림에 지친 님 놓칠세라 고개 들고 님 찾은 들 아~! 애타는 추억이리 할미꽃 / 조양래 할머니 저 왔어요 금잔디에 봄볕이 따스해요 가는 솜털에 보랏빛 두툼한 할미꽃이 무덤에 할미꽃이 할머니 넋으로만 봐져요 어린날  고향땅 하고한날 늦잠 잔 날 깨길 기다리다 뒷방까지 베개 맡에 밥상 차려 갖다 주시던 날들 나고 들 때 없는 당신이 무작정상경 서울길 가만히 내게 주시던 푸른 지폐  고칠수 없음 눈에 훤한 당신의 실명한 외눈 진료라도 받아보자 말이라도 꺼내보지 않은 이 때늦은 후회 지금 내 이 눈물도 내 위안에 못 이겨 흘리는 것인지 그래 당신의 일방적인 온정 받기만을 전제로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지하에서 지금도 못난 날 슬퍼만 하여 커다란 할미꽃 당신께서 내게  보랏빛에 깨우쳐라 피어나신 건 아닌지요 할미꽃 / 김승기 이름부터 바꿀까 정결한 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부드러운 살결 붉은 입술 아름다운 몸짓으로 예쁘게 예쁘게 꽃 피우면서 구충제까지 대신한 세월을 밀쳐 두고 할미꽃이어야 하는가 털어야지 딸네집 찾아가다 눈 속에서 얼어 죽은 할머니의 전설은 하늘에 넋이 오른 지 오랜 지난 일이야 새롭게 살아야지 슬픈 역사는 바람에 날려 보내고 새 바람 부는 새로운 날 젊게 꽃을 피워야지      
621    련금된 말과 상상과 이미지화된 말과 만나 만드는 시세계... 댓글:  조회:2070  추천:0  2017-07-27
말은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가장 혼란스럽고 저속한 것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어디 그 뿐인가. 종종 시에서 아름답고 매력적인 말은 어느 순간 길을 잃기도 하고, 엉뚱한 길로 우리를 유혹하기도 한다. 가끔 너무나 많은 가상(假像)을 가지고 있는 이 말들을 믿어야 하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그러니 이 말들이 진실한 세계를 보여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말은 근본적으로 불안정하다. 그런데 정말로 말은 우연에서, 그리고 우연으로만 끝나는가. 말의 우연성과 불안정을 극복하는 길은 없는 것일까.    물론 시가 지속적으로 현전하는 무엇(말하자면 이데아, 절대 정신, 혹은 물자체와 같은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의 역사를 온전히 다 기록할 수도 없다. 미미한 우리의 정신(예컨대 시에서 일인칭 화자)이 온전하게 세계를 이해할 수도 없겠지만 빈약한 우리의 말(시어)이 어떻게 그것을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말이 곧 진리라는 헛된 사실을 증명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대신 그 기록은 수없이 많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일(가령, 순간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을 발견하는)이 생길 수도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있다. 단언하건대, 시란 수없이 많은 그 기록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지만 시가 형이상학처럼 본질적인 것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 때도 있었다. 언어(말)를 아직도 그렇게 여기는 이가 없는 것도 아니다(몇몇 음성주의자들의 후예들이 그렇다). 그러나 시란 우리의 말로 설명되지 않는 현실을 특별히 의미론적으로 설명해주는 그런 장르가 아니다(그 쪽이라면 오히려 소설이 적당하다).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을 보여주기 위해 뭔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과거부터 그것이 ‘시’라고 고집하는 이들은 대체로 시에서 말의 가치를 잘 모르는 편에 속했다.   말이 곧 진리와 같다는 인식론에서 비롯된 미학적 자기중심주의로부터 이탈하는 유일한 길은 다양한 관점을 수용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중심과 주변을 가로막고 있는 보이지 않는 경계를 허물 수 있다. 이때, 말의 주체(시에서 일인칭 화자)뿐만 아니라 말이 겨냥하는 한없이 무거운 의미(시의 주제)는 그 이전까지 가지고 있었던 중심적 지위를 잃게 된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할까. 그 해답은 역시 말에 있다. 그 말은 역사적인 것 속에서 시적인 것을, 순간적인 것 속에서 영원한 것을 추출한다. 물론 모든 말이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아주 드물게 시인은 세계의 존재를 말로 옮겨서 우리 앞에 환하게 밝힌다. 독일의 비극적 시인 횔덜린(F. Hölderlin, 1770~1843)은 그 말을 모든 자산 가운데 가장 위험한 자산이며, 시인만이 그것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놀라운 일이다.    말로 세계의 존재를 환하게 밝히는 것은 시인의 특권이다. 시인은 가장 직접적인 현실과 과감하게 맞서서 현실로부터 존재의 영원한 의미를 드러내 보이는 말의 세계를 만든다. 오직 순수하게 말의 세계에 빠졌던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말라르메(S. Mallarmé 1842~1898)는 말과 말 사이의 공백을 일종의 시각적 ‘휴지(休止)’로 이용하여 말과 이미지의 리듬감 있는 운동감을 창출한 바 있다. 역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이 휴지의 가치는 시각적인 차원에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말과 말 사이의 침묵, 곧 청각적 부정을 발견하게 된다. 소리와 침묵이 이러저러하게 교체될 때 시의 리듬이 만들어진다. 예컨대, 천둥이 칠 때 우리가 듣는 것은 순수한 천둥 그 자체가 아니다. 정적을 깨고 그 정적과 대비되는 순간을 천둥으로 듣는 것이다. 말과 말 사이에 있는 침묵이 중요하고, 침묵과 침묵 사이에 있는 말의 움직임이 소중하다.   그러므로 말라르메가 창조한 이 공백의 진정한 가치는 다른 데 있다. 시각적 휴지는 일종의 사유에 뚫려 있는 구멍과 같다. 좀더 확대하자면 그것은 일상적 의사소통에서의 의도적 단절이며, 더 나아가서는 모든 발화를 둘러싸고 있는 침묵이다. 이 침묵 저 아래로 늘 말이 움직인다. 실제로 시의 구조는 감추어져 있지만 말과 말이 만드는 공백 속에, 말이 환기하는 어떤 것으로 현존한다. 그것을 읽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가 짐작하는 의미와 시에 사용된 말 사이에서 어긋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울림이 생긴다. 그 울림이 바로 시의 이미지고 비유다. 시인은 이미지들과 비유의 테크닉에 의해, 또는 말들이 만드는 소리의 조화에 의해 독자의 감정에 호소한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말에 대한 이성의 동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가령,  당신이 처음으로 서쪽 하늘을 쳐다보았을 때  그 아래 어디선가 나는 유리 넥타이를 매고  조용히 앉아 책을 읽고 있었을 것인데, 당신은                               ― 졸시, 「루시」(『국외자들』) 부분 에서, ‘내’가 “유리 넥타이를 매고 / 조용히 앉아” 읽고 있는 바로 그 “책”은 이성의 동의가 필요한 물건이다.    그런데, ‘내’가 읽고 있는 “책”과 상관없이 “당신”은 있다. ‘나’는 “당신”을 이성의 질서인 “책”에서, “책”이 안내하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만났다. 하지만 “당신”은 “책”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세계에 무수히 많은 “당신”으로 산다. 비약하자면 여기서 “당신”은 “책” 속의 “루시”이자, 도널드 요한슨이 1974년 11월 30일 아프리카 하다르의 아와시 강가에서 발견한 인류 최초의 화석이다. “당신”은 320만 년 전에 살았던 25세의 여성으로 키는 약 1백7cm 몸무게는 28kg 정도에 불과한 여자다. 동시에 그녀는 비틀즈가 부른 아름다운 노래며, 그 노랫말이 만드는 슬픈 리듬이다. 노래 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사랑하는 여인이며, 노래가 생기기 전에 반짝였던 먼 우주의 어느 별이다. 그러나 그녀는 마지막으로 시다. 말들은 무엇보다 먼저 그것들이 갖는 의미에 의해 가치를 가지며, 그 다음에 말들의 환기력과 울림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하이데거(M. Heidegger, 1889~1976)가 말한 비은폐성(非隱蔽性 alētheia)은 사물과 작품, 진리, 예술이 모두 비은폐성으로 그 존재를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시란 언어가 환하게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위의 시에서 “당신”은 스스로 자기를 드러낸다. 그 드러남은 그 자체로 우주적인 한 현상(사건 Ereignis)이며 낡은 관념의 피라미드에 비치된 어떤 해설이나 주석보다 투명하고 예리하게 우주의 한 면모를 우리 앞에 불러온다. 그 드러남 속에 뭔가 미심쩍은 것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드러나지 않는 것 역시 당연하다. 비은폐성과 은폐성을 동시에 지니는 것이 존재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드러나기도 하고 숨기도 한다. 비약이란 이와 같은 존재의 본질을 환기하는 말의 특성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이성에서 해방될 때, 말은 거칠어지기도 하지만 비로소 매우 강한 느낌을 전달할 수 있게 된다. 당연하게도 시란 뭔가를 환기하고 충동질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사물이 아닌 그것이 빚어내는 효과란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암시와 환기는 독자가 자신의 심상과 연상을 가지고 자유롭게 반응할 수 있게 해준다. 오직 존재하는 것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말이 말과 만나 만드는 세계, 시란 바로 그것이다.  죽지 않은 꽃들은 쉬지 않고 빨리 자라  하늘의 별에 닿았지, 책에 그렇게 적혀있어도  나는 어둡고 검은 눈으로 한 자씩 손을 짚어가며  새끼를 낳는다는 해변의 나무와 죽은쥐나무와  날카로운 발톱의 짐승들  있지도 않은 이름을 소리내어 천천히 읽고  또 읽고 있을지도                   ―졸시, 「루시」(『국외자들』) 부분   “당신”이라는 “루시” 때문에, 노래 때문에, 사랑 때문에, 아름다움 때문에 ‘나’는 “책”을 읽으면서 상상한다. 역으로 “책”을 읽으면서 “죽지 않은 꽃들”과 “새끼를 낳는다는 해변의 나무와 죽은쥐나무와 / 날카로운 발톱의 짐승들”을 상상한다. 그것은 모두 “있지도 않은 이름”들이다. 우리는 산문의 말로는 이성의 범위와 깊이를 벗어난 느낌을 표현할 수 없다. 말은 그 극한으로 갈 수 없지만 가려고 한다. 말의 구조가 도달할 수 없는 극한에 이르고자 하는 끝없는 방황의 연속이 인간의 삶 그 자체다. 아니 인간의 목적이 태어나면서 거기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현실의 말로 극한의 상태를 묘사할 수 없으므로, 그것을 표현하려고 하는 말은 난해할 수밖에 없다. 말의 능력은 한정되어 있다. 말이란 인간을 떠나면 더 이상 말일 수 없다. 그러나 일상어와 일상어 아닌 것 사이의 간극, 그 간극에 있는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 간극이 어쩌면 현대성일 수도 있다. 말의 바깥에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말과 말 사이에 세계가 있다.  말과 말 사이를 메우는 것은 신이 사라진 상황에서 은폐된 채로 있는 것,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을 찾는 일이다. 말과 말 사이는 ‘나’가 가고 오는 그 사이다. 이 사이는 시간의 사이이기도 하다. 또 그 사이에 모든 존재가 있으며, 사건이 있다.  복숭아 향기 나는 오렌지색 이층버스를 타고  인공의 구릉과 호수를 건너  당신이 거닐었던 검은 땅으로  비행기, 버스, 밤하늘, 다이아몬드  내 입안에서 굴러다니는 이 새로운 단어들의 감촉을  어떻게 전해줄 수 있을까  루시, 내 말을 듣지 못하는                              ―졸시, 「루시」(『국외자들』) 부분   시는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 과거와 미래 사이의 이행 지점이다. 이 사이에 때로 역사가 들어앉기도 한다. “입안에서 굴러다니는 이 새로운 단어들”이 그 사이에 가득하다. 그래서 잠정적이고 흘러가는 영역을 가로질러 영원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것들이 불쑥 솟아오르기도 한다. 현재와 과거, 현재와 미래의 거리는 너무 멀어서 그 사이에 난 길을 걸어본 이가 아무도 없다. 그 길을 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 산에서 저 산으로 가는 길은 매우 험하지만, 우리는 단번에 봉우리에서 봉우리로 비약할 수 있다. 시인이 종종 말을 타고 다니면서 이런 일을 한다. 그때 말이 지니는 가장 순수한 의미가 진리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나’는 그 인상들을 기록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620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참새야, 나와 놀쟈... 댓글:  조회:2329  추천:0  2017-07-25
참 새 박 멸 운 동 이  남 긴  계 시       채 영 춘 우리 나라에서 가장 저명한 자연과의 전 국민도전을 꼽는다면 참새 박멸운동이 아닐가 한다.     수령의 동원령에 의해 1958년 전국의 도시와 농촌에서 성세호대 하게 펼쳐진 참새박멸운동은 공화국 사상 남녀로소 총출동한 전무후 무의 인민전쟁이였다. 소학교 1학년생이였던 필자 또한 참새 소탕의 일병으로서 그 신나고 이색적인 전쟁에 참가했던 추억을 가지고 있다.     도회지 모든사람이 집을 뛰쳐나와 마당에서, 길거리에서, 집지붕 에서, 나무우에서 대야와 바게쯔를 두드려대고 고함을 질러대며 참새들을 죽음에로 몰고간 이 전쟁의 정당성은 어른들이 판단할 몫이였고 우리는 하냥 신바람만 났었다. 그러나 참새들에게는 인간의 이 기이한 작전이 그 이전의 허수아비 우름장이나 새총의 산발적인 저격, 미끼 덫의 게릴 라식 나포작전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일종의 인류생활권 범접 불허라는 공포의 피로전으로서 결국 참새세계는 인류의 전방위적인 무자비한 타격앞에서 여지없이 허물어지는 대재난을 맞이한다.     통계에 따르면 1958년 양력설부터 그해 12월까지 전국범위에서 박멸된 참새는 21억마리에 이른다고 한다. 인류의 참새박멸전역은 일단 대승을 거둔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 1959년 봄, 병충해가 전국을 휩쓴다. 참새박멸로 초래된 생태균형훼손에 따른 자연의 보복응 징이 발동된것이다. 참새를 단순한 고립적인 조류동네로 인식한 판단 실책을 뒤늦게 깨달은 대 참새작전 수뇌부는 10년계획의 참새박멸 인민전쟁에 긴급제동을 건다. 자연생태 련결고리의 구성부분인 참새에 대한 박멸운동은 사실상 인간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인간이 자기 삶을 지키고저 벌린 생물계 침입자들에 대한 응징은 인류차원에서 보면 너무나 당연한선택일수 있다. 하지만 자연은 인간 의 가장 합리적인 변명마저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어떤 동기에서든 결 과적으로 자연생태 련결고리를 훼손한다면 자연은 가만있지 않는다는 점을 시사한 사건이다. 자연에는 용서가 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세계 최다인구보유국으로서 국민의 먹는 문제보다 중대 사가 어디 있으랴. 경제발전우선이라는 대전제 앞에서 그 어떤 찬란한 리론도 설자리가 없으며 생태보호라는 진지한 리념도 사치하고 허황한 희망사항일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참새따위야 말해 뭘하랴.     나라의 경제부흥이 현실화되면서 비로서 JDP우선이 문제시되고 과학발전관이 정착함에 따라 생태환경보호가 대접을 받게 되였는데 그 력사가 불과 10년 남짓하다. 상당히 오랜 세월 나라의 모든 생태자원은 경제개발이라는 대전제하에서 얼마든지 훼손가능한 대상물일 뿐이였다.     그 당시 연변의 생태문명관은 어떠했을가?  50~60년대에 흥행했던 “연변타령”노래가사가 그 답이 아닐가 생각한다 –     “두만강 칠백리에 경치도 좋지만 / 쇠돌을 캐여내는 남포소리가 더 좋구나.” “장백산 밀림속에 산삼도좋지만 / 목재를 베여내는 전기톱소리 더 좋구나.” “해란강 넓은 벌에 안개도 좋지마는 / 제련소 하늘가에 검은 연기가 더 좋구나.”     오늘의 생태관에서 보면 생태환경훼손의 “남포소리”, “전기톱소리”, “검은 연기”를 자연경관보다 더 좋다고 자랑하는 그 억지에 눈이 뒤 집힐 법도 하지만 그 당시 개발관에서 보면 사람들의 머리속에 안주한 당연지사로 “타령화”되여 있었다. 그런데 생태훼손주제의 “연변타령” 을 흥얼거리면서 우리선인들이  후대들에게 친환경생태도시를 물려주고 저 애써왔다는 점이 무척 감격스럽다. 그 대표적인 생태유산으로 매력 과 운치를 뽐내는 모아산삼림공원, 수목이 울창한 연길공원, 록음 짙은 도심의 서광장, 수양버들 우거진 하남늪 (청년호), 사계절 정취를 만끽 할수 있는 활엽수종의 가로수들이였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강조하며 생태보호를 중요시하는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후세들은 오히려 친환경도시화를 웨치면서 “참새박멸전쟁” 년대에나 있을법한 사유로 선인들이 만들고지켜내고 전승해온 아름다운 생태 도시부호들이 하나둘 우리시야에서 사라져버리게 하는 가슴아픈현실을 만들어가고 있지 않는가?     친환경생태관의 정착을 위해 우리는 너무나 엄청난 수험료를 치뤘다. 어떤 수험료는 치루지 않을 수도 있은 부당하고 엉뚱한 것이였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참새박멸”황당쇼는 생태관에 무지했던 지난세월 우리모두의 씁쓸한 추억으로 되면서 동시에 오늘날 우리의 생태관을 점검해보는 맑은 거울로 된다. 참새박멸운동은 두번다시 없겠지만 자연 과 인간의 조화를 무시하고 저지르는 제2, 제3의 황당쇼는 언제든지 출현가능하다는게 필자의 생각이다.      만민이 우러르는 연룡도신구역프로젝트가 올해부터 정식 가동된다. 총투자액이 290억원에 이르는 연룡도신구역건설이 록색전환발전을 추진하는 선도적공사라는 점이 우리모두의 가슴을 설레이게 한다. 초유 의 생태연변건설이 연룡도신구역기획에 힘입어 천재일우의 급물살을 타면서  인간과 자연의 조화 방정식풀이에 도전하는 연변의 리념이 중 대한  시험대에 오르게 되였다.     생태관의 무지가 “참새박멸운동”을 파생시켰다면 조류학자를 망라한 생태전문가들 량심적인 참여의루락이 문제시되는 대목이라고 가끔 생각해본다. 진정한 과학은 우리에게 의문을 품게하고 무지를 삼가하 도록 가르친다고 누군가 지적하였다.  연룡도신구역의 “록색전환발전” 이 무지와 담을 쌓고 21세기 비전을 제시하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공생 모델로 되였으면 하는 바람이 결코 허황한 꿈이 아니기를 기대해본다.     2017년 2월 27일    ///해란강닷컴에서 ===========================                                         중           7월 17일 1년에 1번 개최되는 량산(涼山) 훠바제(火把節, 횃불축제)  
619    5 + 7 + 5 = 17자 = 3행 댓글:  조회:2343  추천:0  2017-07-24
'5·7·5' 3행의 17자로만 구성돼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라 불리는 일본의 전통시 '하이쿠.'   단지 열일곱 자로 이루어진 하이쿠는 세계 문학에서 가장 짧은 형태의 시다. 4백 년 전 일본에서 시작되어 오늘날에는 세계의 많은 시인이 하이쿠를 쓰고 있고, 서양에는 하이쿠 시인으로 활동하는 문인들이 증가하고 있다. 짧은 시가 가진 함축미와 선명한 이미지는 일찍이 에즈라 파운드에게 영향을 미쳐 20세기 영미시를 주도한 이미지즘 운동을 촉발시켰으며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 월레이스 스티븐스, 릴케 등도 이 시 형식에 자극을 받은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이쿠는 정통파 시인뿐 아니라 앨런 긴즈버그, 게리스나이더, 잭 케루악 같은 비트 계열의 시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이들은 영어로 된 하이쿠를 썼으며 이는 동양사상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이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 번개처럼, 우리들 생애 파고드는 침묵의 언어들!   너무 울어 텅 비어 버렸는가, 이 매미 허물은 - 바쇼 이 숯도 한때는 흰 눈이 얹힌 나뭇가지였겠지 - 타다토모 가을이 깊었는데 이 애벌레는 아직도 나비가 못 되었구나 - 바쇼 벼룩, 너에게도 밤은 길겠지, 밤은 분명 외로울 거야 - 이싸 봄에 피는 꽃들은 겨울 눈꽃의 답장! - 오토쿠니   하이쿠는 우리를 다른 시간, 다른 장소로 데려간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삶 속에 깊숙이 내려놓는다. 하이쿠는 하나의 신비, 단지 일상의 풍경을 묘사하는 것으로 사물의 본질을 분명하게 표현한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 로버트 스파이스(미국의 하이쿠 잡지의 편집자)          지금부터는 모든 것이 남는 것이다 저 하늘까지도 (쉰 살 생일을 맞아 - 이싸)     얼마나 운이 좋은가 올해에도 모기에게 물리다니! (이싸)     홍시여, 이 사실을 잊지 말게 너도 젊었을 때는 무척 떫었다는 것 (소세키)     거지가 걸어가고 그 뒤에 나란히 나비가 따라 간다 (세이 세이)     걱정하지 말게, 거미여 나는 게을러서 집안청소를 잘 안 하니까 (이싸)     이슬의 세상은 이슬의 세상 하지만, 하지만...... - 어린 두 딸을 잃고 아들마저 죽은 뒤 쓴 시 (이싸)     이 덧없는 세상에서 저 작은 새조차도 집을 짓는구나 (이싸)       몹시 춥겠지만 불가에서 몸을 녹이지는 말게 눈부처여! (소칸)     달에 손잡이를 매달면 얼마나 멋진 부채가 될까? (소칸)      저 나비, 무슨 꿈을 꾸길래 날개를 파닥거릴까? (치요)     꺽어도 후회가 되고 꺾지 않아도 후회가 되는 제비꽃 (나오조)     내 귓가의 모기는 내가 귀머거리인줄 아는 걸까? (이싸)     달팽이 얼굴을 자세히 보니 너도 부처를 닮았구나 (이싸)     '여름이라서 마른 거야'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 그녀는 이내 눈물을 떨군다 (키킨)     장마비 내리자 물가에 서 있는 물새의 다리가 짧아지네 (바쇼)     한낮의 정적 매미 소리가 바위를 뚫는다 (바쇼)     흰 이슬이여 감자밭 이랑마다 뻗은 은하수 (부손)     저 뻐꾸기는 여름동안 한 곡조의 노래만 부르기로 결정했구나 (료타)       이상하다 꽃그늘 아래 이렇게 살아 있는 것 (이싸)     인간이 있는 곳 어디에나 파리가 있고 부처가 있다. (이싸)     오늘이라는 바로 이날 이 꽃의 따스함이여 (이젠)     세상은 사흘 못 본 사이의 벚꽃 (료타)      생선 가게 좌판에 놓인 도미 잇몸이 시려 보인다 (바쇼)     밥을 지어라 산 자와 죽은 자에게 올해의 쌀로 (에자키 요시히토)     모두 거짓말이었다며 봄은 달아나 버렸다 (산토카)     두 사람의 생 그 사이에 피어난 벚꽃이어라 (바쇼)        하루 종일 부처 앞에 기도하며 모기를 죽이다 (이싸)     마음을 쉬고 보면 새들이 날아간 자국까지 보인다 (사초)     지는 벚꽃 남은 벚꽃도 지는 벚꽃 (료칸)     내가 경전을 읽는 사이 나팔꽃은 최선을 다해 피었구나 (쿄로쿠)       이 첫눈 위에 오줌을 눈자는 대체 누구인가? (기가쿠)     허수아비 뱃속에서 귀뚜라미가 울고있네... (이싸)     꽃잎 하나가 떨어지네 어, 다시 올라가네 나비였네 ! (모리다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번개를 보면서도 삶이 한 순간인 걸 모르다니... (바쇼)     나는 떠나고 그대는 남으니 두 번의 가을이 찾아오네 (부손1716~1827)     한밤중에 잠이 깨니 물항아리 얼면서 금 가는 소리 (바쇼)       이 가을 저녁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가볍지 않다 (이싸)     죽은 자를 위한 염불이 잠시 멈추는 사이 귀뚜라미가 우네 (소세키)     도둑이 들창에 걸린 달은 두고 갔구나 (료칸)     이 눈 내린 들판에서 죽는다면 나 역시 눈부처가 되리 (초수이)       아이들아, 벼룩을 죽이지 말라 그 벼룩에게도 아이들이 있으니 (이싸)         밤은 길고 나는 누워서 천년 후를 생각하네 (시키)        내 집 천장에서 지금 자벌레 한 마리가 대들보 길이를 재고 있다 (이싸)        저세상이 나를 받아들일 줄 미처 몰랐네... - 죽음을 맞이하며 (하진)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우산 위의 눈도 가볍게 느껴지네 (기가쿠)       내 전 생애가 오늘 아침은 저 나팔꽃 같구나... - 생애 마지막으로 쓴 시 (모리다케 )     너무 울어 텅 비어 버렸는가 이 매미 허물은... (바쇼)       눈사람에 대해 나눈 말 눈사람과 함께 사라지네 (시키)           쌀을 뿌려 주는 것도 죄가 되는구나 닭들이 서로 다투니 (이싸)     오래된 연못 개구리 풍덩! (바쇼)        우리가 기르던 개를 묻은 뜰 한구석에서 귀뚜라미가 울고 있네... (시키)       눈 내린 아침! 얼마나 아름다운가 평소에는 미움받는 까마귀조차도 (바쇼)     겨울비 속의 저 돌부처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이싸)       한 번의 날카로운 울음으로 꿩은 넓은 들판을 다 삼켜 버렸다 (이메이)       나무 그늘 아래 나비와 함께 앉아 있다 이것도 전생의 인연 (이싸)       이 숯도 한때는 흰 눈이 얹친 나뭇가지였겠지 (타다토모)        봄의 첫날 나는 줄곧 가을의 끝을 생각하네... (바쇼)       너무 오래 살아 나 역시 춥구나 겨울 파리여! - 인생의 마지막 시 (타요조)        내가 죽으면 무덤을 지켜 주게 귀뚜라미여... (이싸)       이 미친 세상에서 미치지 않으려다 미쳐 버렸네... (시메이)       사립문에 자물쇠 대신 달팽이를 얹어 놓았다 (이싸)       은하계 어디에서 기다리고 있는 나의 떠돌이 별은... (이싸)       땔감으로 쓰려고 잘라다 놓은 나무에 싹이 돋았다... (본초)     물고기는 무엇을 느끼고 새들은 무엇을 느끼는가 한 해의 마지막 날... (바쇼)     대문 앞에 난 단정한 노란 구멍, 누가 눈 위에 오줌을 누었지? (이싸)     모든 종교와 말들을 다 떠나니 거기 자두꽃과 벗꽃이 피었구나... (난후꼬)       태어나서 목욕하고 죽어서 목욕하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 임종때 남긴 시 (이싸)       절에 가니 파리가 사람들을 따라 합장을 하네... (바쇼)       너의 본래 면목은 무엇이니, 눈사람아...... (소세키)     매미 한 마리 우는데 다른 매미들은 더 이상 울지 않는다 이 늦은 가을... (이싸)         뻐꾸기가 밖에서 부르지만 똥 누느라 나갈 수가 없다.... - 정치인의 초대를 받고서 답장으로 쓴 시 (쇼세키)       그녀가 젊었을 때는 벼룩에 물린 자리조차도 예뻤다네... (이싸)     작년에 우리 둘이 바라보던 그 눈은 올해도 내렸는가...... (바쇼)       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 - 류시화의 하이쿠 읽기        두 사람의 생 그 사이에 피어난  벚꽃이어라 命二つの中に生きたる 哉  ‘모든 사물의 끝은 허공인데 그 끝이 허공이 아닌 것이 꽃’ 이라고 서정주 시인은 썼다. 여행 중인 자신이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고향 친구와 19년 만에 재회했을 때 지은 하이쿠이다. 이전의 벚꽃을 함께 본 사람을 다시 그 나무 아래서 만난 감회, 먼 날의 추억과 지금 이 순간에 살아 있음의 경이를 읊고 있다. 더불어 두 사람이 같은 미의식을 공유하는 정신적 기쁨까지 담겨 있다. 모두가 좋아하는 바쇼의 대표작중 하나이다. 원문의 ‘이키타루(生きたる)’는 단순히 ‘살아 있는’ 이 아니라 재회의 기쁨에 잠긴 두 사람의 눈으로 올려다보니 ‘더욱 눈부시고 생생하게 피어 있는’ 꽃의 의미이다. ‘두 개의 생’ 사이에 그 둘을 이어 주는 또 하나의 생을 가진 벚나무의 꽃이 만발해 있다. 우리가 이곳에 부재해도 꽃은 변함없이 필 것이다. ( '바쇼' 중에서/ p.10) 나비 한 마리 절의 종에 내려앉아  잠들어 있다 釣鐘に止まりて眠る胡蝶かな 언제 누가 종을 칠지 모르는 상황, 나비의 평화로운 잠과 예고된 결말의 대비가 강렬하다. 독일어로는 ‘절의 종에 / 나비가 앉아 있다 / 그 종을 칠 때까지는’으로 번역되었다. 전쟁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이 작품에 영감을 받아 마지막 장면을 대포 포신에 앉은 나비로 끝맺었다.  이 하이쿠는 불교학자 스즈키 다이세쓰가 영문판 [선과 일본 문화]에 소개해 서구에 충격을 안겨 주었다. 다이세쓰는 "우리는 나비에게 인간의 판단을 적용하려고 하지만, 우주적 무의식의 생명을 상징하는 나비는 어떤 상황에서도 분별심을 버리고 걱정과 번민과 의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절대 믿음과 두려움 없는 생을 누리고 있다."라고 해석한다. 근대 하이쿠 시인 마사오카 시키는 고서점에서 우연히 부손의 시집을 발견해 읽고는 ‘바쇼 이후 최고의 시인’이라고 확신했다. ( '부손' 중에서/ p.15) 여윈 개구리 지지 마라 잇사가  여기에 있다 蛙まけるな一茶是に有り 여름은 개구리의 번식기, 암컷을 두고 수컷들이 사투를 벌이는 계절이다. 잇사는 힘없는 마른 개구리를 응원한다. 힘내라고, 여기 너처럼 말랐지만 널 응원하는 잇사가 있다고. 강자를 선호하는 사회에 허약한 잇사의 개구리가 맞서고 있다. 파리, 벼룩, 개구리처럼 약하고 천대받는 존재를 향한 동정심과 연대감이 잇사 하이쿠의 강점이다. 그는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약자에게 친밀감을 갖는다.   이 하이쿠는 일본과 미국의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다. ‘여윈 개구리’는 잇사 자신이면서 병약하게 태어난 자신의 첫아들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 시인 옥타비오 파스 는 말한다. "잇사는 인간과 벌레와 동물과 별들의 운명 사이에 존재하는 날카롭고 고통스러운 관계를 발견한다. 그의 시에는 고통을 나누는 우주적 형제애, 인간이든 곤충이든 세계 속에 사는 유한한 생명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담겨 있다." ( '잇사' 중에서/ p.21) 몇 번씩이나 내린 눈의 깊이를  물어보았네 いくたびも雪の深さを尋ねけり 밖에서는 폭설이 내리고 있고 시인은 눈이 얼마나 내렸는지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묻는다.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이유는 몸을 움직이지 못할 만큼 병이 깊기 때문이다. 눈은 내리고 죽음을 눈앞에 둔 한겨울 고독이 깊다. 눈 내리는 풍경을 내다볼 수 있게 제자가 장지문을 유리문으로 바꿔 주었으나 시키는 얼마 후 숨을 거두었다. 하이카이로 불리던 것을 ‘하이쿠’라는 명칭으로 확립시킨 마사오카 시키는 스물세 살에 폐결핵에 걸려 서른다섯에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잊혀져 가는 하이쿠의 세계를 세상에 알리는 일에 혼과 열정을 바쳤다. ( '시키' 중에서/ p.25) 꽃잎이 떨어지네  어, 다시 올라가네  나비였네 落花枝に と見れば胡蝶かな 원문을 직역하면 ‘떨어진 꽃잎 가지로 돌아가길래 보니 나비여라’이다 . 허공에 날리며 지는 꽃잎들 중 하나가 다시 나뭇가지로 돌아간다. 놀라서 자세히 보니 나비이다! 그 순간 허무가 생명으로 도약한다. 에즈라 파운드는 이 하이쿠를 영역 소개하며 말했다. "옛날 중국의 어느 시인은 말해야 할 것을 12행으로 말할 수 없다면 차라리 침묵하는 편이 낫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하이쿠는 더 짧게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모리타케의 이미지 중첩 기법을 이용해  ‘군중 속 얼굴들의 혼령 / 젖은 검은 나뭇가지의 꽃잎들’이라는 2행시를 썼다. 그리고 긴 시보다 선명한 이미지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해 이미지즘 운동을 일으켰다. ( '모리타케' 중에서/ p.34) 손바닥에서  슬프게도 불 꺼진  반딧불이여 手の上に悲しく消ゆるか  슬픈 일은 어떤 존재가 내 손에 앉아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이 꺼지는 일이다. 그 한 가지 슬픔이 천 가지 기쁨을 사라지게 만든다. 교라이에게는 지네조라는 이름의 여동생이 있었다. 교양 있는 집안에서 자란 지네조는 재주 많은 여성이었으며 하이쿠에도 뛰어 났다. 교라이는 여동생을 무척 아꼈지만, 그녀는 불행히도 결혼 1년 만에 죽고 말았다. 이 하이쿠 속 반딧불이는 그 여동생 지네조이다. 지네조는 세상과 하직하며 다음의 하이쿠를 썼다. 쉽게 빛나고/ 또 쉽게 불 꺼지는/반딧불이여  もえ易く又消え易きか ( '교라이' 중에서/ p.140) 재 속의 숯불 숨어 있는 내 집도  눈에 파묻혀 うづみ火や我かくれ家も雪の中 불은 화로의 재 속에 있고, 화로는 나의 오두막 안에, 오두막은 눈 내리는 밤의 어두운 세상안에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중심에 내가 앉아 있다. 눈에 파묻힌 오두막은 재 속 숯불처럼 따뜻하다. 커다란 차가움과 작은 따뜻함, 큰 어둠과 작은 불빛이 공존한다.   비교문학자 히라카와 스케히로는 이렇게 묘사했다. "한 곳에 불씨가 있고, 그것을 덮은 재가 있으며, 그 위를 덮듯이 화로에 붙어 앉은 주인이 있고, 그 작은 방을 에워 싼 작은 집이 있다. 그리고 그 집을 덮은 눈이 있다. 오두막 지붕 위에는 눈 내리는 밤하늘의 어둠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따뜻함을 간직한 재 속의 불씨를 중심으로 한 줄의 시가 동심원을 그리며 우주를 향해 뻗어나간다." ( '부손' 중에서/ p.160) 다음 생에는  제비꽃처럼 작게  태어나기를 菫ほどな小さき人に生まれたし "불유쾌함으로 가득 찬 인생을 터벅터벅 걷고 있는 나는 자신이 언젠가 반드시 도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죽음이라는 경지에 대해 항상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죽음이라는 것을 삶보다는 더 편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어느 때는 그것을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지고한 상태라고 여길 때조차 있다. " (김정숙역, 나쓰메 소세키[유리문 안에서])  일본 근대 소설의 최고 작가인 나쓰메 소세키는 불행한 유년기를 보낸 뒤 도쿄대학 영문학부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문학 동료 시키를 만났다. 졸업할 즈음 가족들의 잇단 죽음을 겪으며 폐결핵과 고질적인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심한 염세주의에 빠진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 '소세키' 중에서/ p.360) 불을 켜는  손가락 사이  봄밤의 어둠 をとも 指の間の春の闇  누구나 자기만의 불을 켜고 있고, 손가락 사이의 어둠을 가지고 있다. 달 없는 봄밤, 아무것도 없는 것 같고 무언가 있는 것도 같은 어렴풋한 어둠을 응시하는 일도 삶의 한 부분이다. 방 밖의 어둠을 말하는 것이 보통인 ‘봄밤의 어둠’을 자신의 손가락 사이로 가져온 감각이 섬세하다.     눈을 감으면 / 젊은 내가 있어라 / 봄날 저녁  眼つむれば若き我あり春の宵 그 청춘의 날들, 반짝이던 봄날의 감성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기억을 꺼내다가 그 불에 데는 날들만 남아 있을지도. 다른 계절도 아닌 봄밤의 언저리,어슴푸레한 어둠속에 젊은 날의 내가 서 있다. ( '교시' 중에서/ p.387) 비처럼 쏟아지는 매미 소리 아이는 구급차를  못 쫓아오고 時雨子は 送車に追ひつけず ‘세미시구레(?時雨)’는 비처럼 한바탕 쏟아지는 매미 소리를 일컫는 말로 ‘눈물을 쏟는다’의 은유적 의미도 있다. 요란한 매미 울음 속에 윙윙거리며 달리는 구급차를 아이가 쫓아온다. 얼굴이 눈물로 뒤범벅된 채. 결국 아이는 엄마가 탄 차를 따라잡지 못하고 애타게 멀어진다. 이시바시 히데노는 교시 문하의 대표 여성 시인이었으나 전쟁 중에 폐결핵을 앓아 서른아홉에 세상을 떴다. 환자 수송 침대에 누워 운반되는 자신과 쫓아오다 뒤처진 외동딸, 그리고 슬픔을 열창하는 매미들.   봄날 새벽 / 내가 토해 낸 것의 / 빛 투명하다  春の我が吐く のの光り澄む  ( '히데노' 중에서/ p.502) 힘주고 또 힘주어  힘이라고 쓴다 つぎつぎに力をこめて力と書く 산토카와 문학적 교류를 했으며 훗날 [산토카의 생애]를 쓴 하이쿠 시인 오야마 스미타(大山澄太)가 산토카의 오두막을 찾았을 때였다. 산토카는 스미타에게 점심을 먹었느냐고 물었다. 먹지 않았다고 하자 산토카는 쇠로 된 밥그릇에 잡곡밥을 담아 고추 하나와 함께 내놓았다. 고추가 너무 매워 스미타가 눈물을 흘리며 먹는 동안 산토카는 앞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왜 당신은 먹지 않는가?" 하고 묻자, 산토카는 "밥그릇이 하나뿐."이라고 대답했다. 스미타가 다 먹자 산토카는 그 그릇에 다시 밥을 담아 스미타가 먹다 남긴 고추와 함께 먹었다. 그리고 쌀 씻은 물에 밥그릇을 씻은 다음 그 물을 텃밭에 부었다. 산토카의 바람은 ‘진정한 나의 시를 창조하는 것’과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죽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가 살아갈 힘, 시를 쓸 힘을 얻는 방식이었다. ( '산토카' 중에서/ p.541)       
618    나팔꽃아, 어서 빨리 띠띠따따 나팔 불며 나와 놀쟈... 댓글:  조회:2277  추천:0  2017-07-24
  +== 나팔꽃 ==  햇살에 눈뜨는 나팔꽃처럼 나의 생애는 당신을 행해 열린 아침입니다 신선한 뜨락에 피워 올린 한 송이 소망 끝에 내 안에서 종을 치는 하나의 큰 이름은 언제나 당신입니다 순명(順命)보다 원망을 드린 부끄러운 세월 앞에 해를 안고 익은 사랑 때가 되면 추억도 버리고 떠날 나는 한 송이 나팔꽃입니다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나팔꽃 ==  한쪽 시력 잃은 아버지 내가 무심코 식탁 위에 놓아둔 까만 나팔꽃 씨를 환약인 줄 알고 드셨다 아침마다 창가에 나팔꽃으로 피어나 자꾸 웃으시는 아버지 (정호승·시인, 1950-) +== 나팔꽃 ==  나팔꽃의 꽃말이 덧없는  사랑, 허무한 사랑인 것은  한 번도 가닿지 못한 언제나  마음뿐인 혼자 사랑이기 때문이다  저 홀로 생각하며 꽃을 피우다,  아니다 싶으면 이내 접어버리는  그러다가도 떨치지 못한 미련이  집착으로 남아 외줄타기를 하는 까닭이다  마음의 바지랑대를 칭칭 감고 올라가보지만  길 없는 허공이기 때문이다 (이정자·시인, 1964-) +== 나팔꽃과 개미 ==  나팔꽃 속을 들여다보니 그 속  개미 서너 마리가 들어 있다  하나님은 가장 작은 너희들에게 나팔을 불게 하시니  나팔꽃은 천천히 하늘로 기어오르고  그 하루하루의 푸른 넝쿨줄기,  개미의 걸음을 따라가면  나팔꽃의 환한 목젖  그 너머  개미는 어깨에 저보다 큰 나팔을 둘러메고  둥둥, 하늘 북소리를 따라  입안 가득 채운 입김을 꽃 속에 불어넣으니  아, 이 아침은 온통 강림하는  보랏빛 나팔소리와 함께 (고영민·시인, 1968-) +== 나팔꽃의 기도 ==  줄사다리에 몸을 싣고  당신이 그리워  오르고 또 오릅니다.  밤길이 어두워  혹시라도 미끄러질까  보랏빛 등을  길목마다 밝혔습니다.  바람이 부는 날이면  내 마음도 크게 흔들려  여기서 그만 멈출까  그러나 그럴 수 없습니다.  된서리가 내리기 전에  나는 당신을 보고 싶지만  그리 못할지라도  내년에 다시 오르기 위해  작은 씨앗을 묻어 두었습니다. (박인걸·목사 시인) +== 폐차와 나팔꽃 == 폐차는  부활 같은 건 꿈꾸지 않나 보다  쓸 만한 부품은 성한 놈들에게 내어주고  폐차장엔 끝끝내  끌고 온 길들을 놓아주어 버린  분해되는 낡은 차가  그래서 평화스럽다  영생을 믿지 않아 윤회가  시작된 것일까 벌써  나팔꽃 한 가닥이 기어올라  안테나에 꽃을 피웠다  비켜라 경적을 울려대며  회생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고  달릴 줄만 알았던  한참 광나던 시절엔 어찌 알았으리  필요로 하는 것들에게  하나하나 내어주고  마지막 끝자리마저 나팔꽃에게 내어주고  제 몸이 비어갈수록 채워지는 햇살의 따스함  폐차는 성자처럼  나팔꽃이 시들 때까지만  지상에 남아 있기를 기도할지도 모른다  폐차가 아름다운 어느 아침  (복효근·시인, 1962-) +== 나팔소리 ==  새날 새 아침이 밝아와요 이제 잠에서 깨어나요 생명은 보석보다 귀해요 목숨의 시간을 살뜰히 아껴요 그늘진 슬픔 따윈 잊어요 희망에 환히 깨어 있어야 해요 늘 명랑한 웃음 잃지 말아요 그러면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 마음의 창문을 활짝 열면 세상은 아름답게 보여요.  신선한 이슬에 흠뻑 젖은  연보랏빛 나팔꽃이 온몸 곧추세우고  새벽 미명  아직은 흐릿한 어둠 속  힘차게 부는  나팔소리. (정연복·시인, 1957-)   나팔꽃 - 송수권       바지랑대 끝 더는 꼬일 것이 없어서 끝이다 끝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나팔꽃 줄기는 허공에 두 뼘은 더 자라서 꼬여 있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아침 구름 두어 점, 이슬 몇 방울 더 움직이는 바지랑대는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덩굴손까지 흘러나와 허공을 감아쥐고 바지랑대를 찾고 있을 것이다. 이젠 포기하고 되돌아올 때도 되었거니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가냘픈 줄기에 두세 개의 종까지 매어달고는 아침 하늘에다 은은한 종소리를 펴내고 있는 것이다. 이젠 더 꼬일 것이 없다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우리의 아픔도 더 한 번 길게 꼬여서 푸른 종소리는 나는 법일까         나팔꽃                       나태주     여름날 아침, 눈부신 햇살 속에 피어나는 나팔꽃 속에는 젊으신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어있다.   얘야, 집안이 가난해서 그런 걸 어쩐다냐. 너도 나팔꽃을 좀 생각해보거라. 주둥이가 넓고 시원스런 나팔꽃도 좁고 답답한 꽃 모가지가 그 밑에서 받쳐주고 있지 않더냐. 나는 나팔꽃 꽃 모가지밖에 될 수 없으니, 너는 꽃의 몸통쯤 되고 너의 자식들이나 꽃의 주둥이로 키워보려무나. 안돼요, 아버지. 안 된단 말이에요. 왜 내가 나팔꽃 주둥이가 되어야지, 나팔꽃 몸통이 되느냔 말이에요!   여름날 아침, 해맑은 이슬 속에 피어나는 나팔꽃 속에는 아직도 대학에 보내달라 투덜대며 대어드는 어린 아들을 달래느라 진땀을 흘리는 젊으신 아버지의 애끓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팔꽃                 오세영     땅이 아니라 아스팔트 위에서 피는 꽃도 있다. 어깨와 어깨를 메고 팔과 팔을 엮어 와와! 바리케이트를 넘는 그 향일성(向日性), 넝쿨들의 부단한 항쟁, 너에게 억압이란 있을 수 없다. 항상 푸른 하늘을 향해 자라는 너는 오히려 장벽을 꽃밭으로 일구는구나. 초연(硝煙) 가신 광장의 깃발들처럼 울타리 가득 뻗어 올라 빛을 향해서 만세! 총궐기한 빛 고운 우리 나라 6월 나팔꽃.   -6月 항쟁을 보고-         나팔꽃 - 김건일        뼈가 없는 나 큰 뼈의 해바라기를 감고 타고 올라 해바라기와 같이 세상을 본다   질긴 힘줄로 친친 감고 올라 해바라기보다는 못하게 보이지만 해바라기가 보는 세상은 다 본다   큰 얼굴로 환히 웃는 해바라기 작은 얼굴로 그 턱밑에 딱 붙어서 웃는 눈길보다 더 찬찬히 세상을 본다           나팔꽃               강 세 화     세상에 제일 먼저 빛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생겨난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아침에 햇살과 나란히 나팔꽃이 피었습니다.         나팔꽃/박덕중       굳은 땅, 가녀린 목숨 박고 찌든 공간 권태로운 마당 한줌씩 웃음 피어 울린다.   가녀린 목숨의 마디마디 피어내는 웃음꽃 삶의 頂点을 향해 쭉쭉 뻗어 나가고   네 웃음 송이 어두운 마음 자락 밝혀 주면 네 목숨의 줄기 만큼 뻗어 가는 내 마음.   나팔쫓 네 화사한 웃음 천리만리 뻗어 가라 뚜뚜뚜 나팔 불어라.       나팔꽃   허영자     아무리 슬퍼도 울음일랑 삼킨 일 아무리 괴로워도 웃음일랑 잃지 말 일 아침에 피는 나팔꽃 타이르네 가만히.     * 에 수록       나팔꽃                            김명배     아침마다 눈물로 꽃을 빚어도 네 가슴속의 꽃으로 피어나지 못한다면, 한세상 오래 사느니보다 또 한세상 더 사는 게 낫지 않니. 태초의 하늘 그 푸른 약속만 다시 지켜진다면.       나팔꽃                     김명배   먼 산을 바라보면, 왜 눈물이 고일까. 그 너머 그 너머를 생각하면, 왜 서러울까. 가고 오는 것이 무엇이길래. 오요요 나팔꽃, 왜 먼 산을 바라보는가. 오요요 나팔꽃, 왜 그 너머 그 너머를 생각하는가.           나팔꽃                     문효치     담벼락을 부여잡고 부르는 노래는 무엇일까? 한사코 달아나는 하늘의 꼬리를 잡고 늘어지며 부르는 노래는 무엇일까?   나팔 소리에 귀 시끄러운 세상 이제도 더 불러야 할 노래가 있느냐.           나팔꽃                     백우선     나팔을 불어 버릴까 아침부터 용용 나팔을 불어 버릴까 간밤 이 방의 꽃불 회오리 열대야로 달구던 뒤엉킴의 꽃잠을 동네방네 죄다 까발려 버릴까   짙붉은 이 방의 불봄 속내 깊고 큰 입으로 내벌려 보지만 밤내 염천봄 홀로 앓다가 말의 길, 말의 문 왼통 막혀 그놈의 꽃입만 벙긋벙긋         나팔꽃   詩/명서영     어느 바람에 실려 여기까지 왔을까? 아파트 잔디에 싹을 낸 나팔 꽃 나무 감아 밟고 벽 꼭 붙잡고 서있다   지나는 사람들이 제비꽃 쳐다보며 예쁘다 하니 나팔꽃 보라색 띄었을까? 분홍 장미 어루만지는 사람들 바라보고 분홍빛 띄었을까? 분홍도 보라도 아닌 푸르스름한 나팔꽃   분홍에서 보라로 보라에서 분홍으로 가는 길에는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피어 있다 그 아이들 중 교통사고로 부모 잃고 고아원에 있다 큰집으로 온 인혜, 하얀 덧니 쌩긋 보인다   말수는 적지만 오래전부터 사귄 친구처럼 인혜는 아이들 속 소담소담 피어있다 땡볕 더욱 진한 색의 나팔꽃 하늘 향해 두 손 번쩍 들고 까르르 웃다 도담도담 한 뼘 더 자란다   (2004. 6.14)         나팔꽃/목필균       어둠에 지쳐 새벽 창문을 열면 나를 불러 세우는 붉은 나팔 소리   나이만큼 기운 담장을 타고 음표로 그려진 푸른 잎새의 노래   밤새 쏟아지던 비에 말끔하게 닦여진 환한 미소 따라 달려가는 귀바퀴         나팔꽃 씨                         정병근     녹슨 쇠울타리에 말라 죽은 나팔꽃 줄기는 죽는 순간까지 필사적으로 기어간 나팔꽃의 길이다 줄기에 조롱조롱 달린 씨방을 손톱으로 누르자 깍지를 탈탈 털고 네 알씩 여섯 알씩 까만 씨들이 튀어나온다 손바닥 안의 팔만 대장경, 무광택의 암흑 물질이 손금을 빨아들이고 있다 마음에 새기는 것은 얼마나 힘겨운 일이냐 살아서 기어오르라는, 단 하나의 말씀으로 빽빽한 환약 같은 나팔꽃 씨 입속에 털어넣고 물을 마셨다 오늘 밤, 온 몸에 나팔꽃 문신이 번져 나는 한 철 환할 것이다                나팔꽃 우체국 / 송찬호 요즈음 간절기라서 꽃의 집배가 좀 더디다 그래도 누구든 생일날 아침이면 꽃나팔 불어준다 어제는 여름 꽃 시리즈 우표가 새로 들어왔다 요즘 꽃들은 향기가 없어 주소 찾기 힘들다지만 너는 알지? 우리 꿀벌 통신들 언제나 부지런하다는 걸 혹시 너와 나 사이 오랫동안 소식이 끊긴다 하더라도 이 세계의 서사는 죽지 않으리라 믿는다 미래로 우리를 태우고 갈 꽃마차는 끝없이 갈라져 나가다가도 끊어질 듯 이어지는 저와 같은 나팔꽃 이야기일 테니까 올부터 우리는 그리운 옛 꽃씨를 모으는 중이다 보내는 주소는, 조그만 종이봉투 나팔꽃 사서함 우리 동네 꽃동네 나팔꽃 우체국 1959년 충청북도 보은 출생 경북대학교 독문과 졸업 1987년 우리 시대의 문학 6호 시 '금호강' 발표 수상  2008년 제8회 미당문학상 , 김수영 문학상 시집등   //                       
617    "이 진흙별에서 별빛까지는 얼마만큼 멀까"... 댓글:  조회:2213  추천:0  2017-07-24
   난로 위에 머리카락 하나가 떨어진다.    머리카락은 타면서 액체가 된다.    액체는 거품을 물고 격렬하게 꿈틀거린다.    그 꿈틀거림 속에서 고약한 냄새가 뿜어져나온다.    뿌리를 뻗으며 식물인 양 얌전하게 자라던 것이    불에 닿자마자 슬픈 몸짓 역한 냄새로     제 뜨거운 동물성을 있는 대로 드러내니,    눈 달린 것 이빨 달린 것 숨쉬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독한 냄새를 지우려고 창문을 열자     차고 커다란 겨울바람이 들이닥친다.    머리카락 속에서 용쓰던 힘과 냄새는    그 바람 속으로 고분고분하게 빨려들어간다.    -김기택,「머리카락 하나」부분   김기택 시의 특징은 우리가 사소하게 여기는 것을 예리하게 붙잡아 사물의 외양 뿐만 아니라 속성까지 치밀하게 재생산해 내는 데 있다. 고요하고 번득번득한 삶의 통찰자로서의 표정이 짙게 배어 있는 그의 시는 몸 안의 아물지 않은 상처를 온몸으로 삭혀 그 스스로를 무기화한다. 이런 까닭으로 그의 시는 부드러움보다는 강인함이, 낭만보다는 리얼리티가 문면에 자리잡는다. 남성적 자아로서의 세계 인식을 보여주며 육체의 건강함을 복원하고 있는 그의 시는 우리 시에서 부족한 논리로서의 시의 미감을 건강하게 보여주며 서정을 맥락화시킨다.「머리카락 하나」역시 난로 위에 머리카락이 떨어져 액체가 되는 단순한 사실을 치밀하게 관찰한 후 급기야 죽음으로 인식하는 그의 태도는 그가 시를 형상화 하는데 있어 얼마나 집요한가를 보여준다. 이에 반해, 80년대 거대 서사가 붕괴된 이후 독특한 서정의 세계를 펼쳐 보인 장석남은 시류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신만의 시세계를 아름답게 펼쳐 보인다. 완성도 높은 시를 써온 그의 시에서 드러나는 아름다움은 ‘순수 서정’과 ‘탁마된 언어’이다.    요즘은    바람 불면 뼈가     살 속에서 한쪽으로 눕는다    꽃잎이 검은 무늬를 쓰고     내 눈에서 떨어져    발등을 깨친다    나는 안보이는 나라를 편애하는 것이 틀림없어    이 진흙별에서 별빛까지는 얼마만큼 멀까     -장석남「진흙별에서」부분   장석남의 서정은 우리가 잃어 버리고 있던 꽃, 별, 나무, 바다 등과 같은 자연적 소재를 시 속에 끌어들인다. 디테일한 정서를 자연적 소재에 호흡을 입히고 있는 그의 시는 언어의 미감에 공을 들이는 한편 행과 행 사이, 연과 연 사이의 울림이 주는 여운적 감동에 힘을 기울인다. 그는 사물의 세계나 속성을 핍집하게 그리기보다는 재현적 세계를 무효화시키며 시가 주는 관념의 모형을 제시한다. 영롱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들로 우리들 심층에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순수 서정을 일으켜 세우고 있는 그의 시는「진흙별에서」에서도 잘 드러난다. 진흙별은 “뼈가/ 살 속에서 한 쪽으로 눕”고 “꽃잎이 검은 무늬를 쓰고/ 내 눈에서 떨어져/ 발등을 깨치”는 현실의 세계이다. 그러나 이 현실의 세계는 시적 언어에 전화되어 시의 내면에서는 관념화되어 나타난다. “이 진흙별에서 별빛까지는 얼마나 멀까”라는 구절이 의미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그가 현실 속에서 지향하는 이데아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어렴풋하게만 제시할 뿐이다. 장석남이 시 속에 현실의 문제를 용해시키며 융화된 순수 서정을 아름답게 펼쳐 보이는데 반해, 박용하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나 위기의 문제들을 시 속에 적극적으로 끌여 우리를 사로잡는다. 유년 체험에서부터 자아를 둘러싸고 있는 역사와 사회적 상황까지, 에두르지 않고 문맥화시키고 있는 그의 시는 우리에게 시를 읽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다.     숨소리라니!    국가에 물들어 있지 않은    無爲의 나무들이 문을 잎여는    믿음의 전화 소리가 들린다.    국가가 괴물일진대    교회가 더 큰 죄를 키우는 휴식일진대    나에게 넉넉한 교회는     나무들의 뽐내지 않는 품.    나무들은 세상 밖과 안의 경계에서     인간들을 만난다.    그 경계의 밖으로 떠나지 않는 나무들의 마음    그 복판에서 나는 자연의 국가를 숨쉰다.    -박용하「靑銅 구리빛 나무들의 노래」부분   박용하가 노래하고 있는 나무는 국가와 교회, 인간들과 구별되는 비세속적 대상이다. 나무는 박용하에게 있어 자신을 넉넉하게 받아 주는 무구(無垢)한 존재이며 무구한 국가이다. 박용하는 현실과 자아의 대립을 통해 자신이 속하고 있는 현실의 허위를 부정하고 냉소한다. 그는 자신이 꿈꾸고 있는 행복에 가깝게 가기 위해 역사와 사회 속의 불안정한 자아를 투명하게 그려내며 과거와 현실의 문제를 희망과 전망으로 전이시킨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아와 사회가 서로 길항하면서 발견되는 세계의 모순을 적의적으로 바라보면서 영혼을 억압하는 인간의 헛된 욕망을 조소한다. 우리들 삶에 대해 반성을 요구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승리로 이끌려는 그의 ‘정체성의 시학’은 세계의 균열을 해석화하고 참된 질서를 실현시키고자 한다는 의미에서 매우 주체적이라 할 수 있다.    김기택, 장석남, 박용하의 시는 인간의 존재를 문제 삼으면서 순수 서정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는다. 이들에게 있어 현실은 불화와 허위의 대상이며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다. 이를 통해 이들의 시는 육체와 정신의 건강함을 되찾는 한편 폭력과 허위로부터 우리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폐허의 서정을 구출하고자 한다. 생명과 그 생명 속에 깃든 영성(靈性)을 찾아내 이를 사려 깊게 펼쳐 보이는 이들의 시에서 우리는 오늘의 현실에서 시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눈여겨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화산에서           오래전부터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기이한 산으로 불리는 ‘서악[西嶽:  오악(五嶽)의 하나]’ 화산(華山)산. ‘서악’ 화산산 남쪽 봉우리 절벽에 위치한 ‘장공잔도(長空棧道)’는 100m 정도의 길이를 자랑하고 절벽에 구멍을 낸 후 그 구멍에 나무판자를 고정시키는 형태로 제작되었다. 잔도의 위, 아래로는 가파른 절벽이 이어져 있고 관광객들은 위험천만한 절벽에 달라붙어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데, 그 모습이 너무 위험천만해 보인다.최근 여름 방학이 다가오면서 화산산을 찾는 관광객들이 점점더  늘어나고 있다. (신화망) 
616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댓글:  조회:2618  추천:0  2017-07-24
한용운 시 모음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 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 (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 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 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배기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알 수 없어요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 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잎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 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뿌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 는 구비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나룻배와 행인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사랑하는 까닭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주검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나의 꿈    당신이 맑은 새벽에 나무 그늘 사이에서 산보할 때에 나의 꿈은 작은 별이 되어서 당신의 머리 위에 지키고 있겠습니다 당신이 여름날에 더위를 못 이기어 낮잠을 자거든 나의 꿈은 맑은 바람이 되어서 당신의 주위에 떠돌겠습니다 당신이 고요한 가을밤에 그윽히 앉아서 글을 볼 때에 나의 꿈은 귀뚜라미가 되어서 책상 밑에서 「귀뚤귀뚤」 울겠습니다       복 종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 더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 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행 복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행복을 사랑합니다. 나는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행복을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정발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미워하겠습니다.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을 미워하는 고통도 나에게는 행복입니다, 만일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미워한다면, 나는 그 사람을 얼마나 미워하겠습니까. 만일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나의 일생에 견딜 수 없는 불행입니다. 만일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고자 하여 나를 미워한다면, 나의 행복은 더 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나를 미워하는 원한의 두만강이 깊을수록 나의 당신을 사랑하는 행복의 백두산이 높아지는 까닭입니다.       사랑의 존재    사랑을 사랑이라고 하면, 벌써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을 이름지을 만한 말이나 글이 어디있습니까. 미소에 눌려서 괴로운 듯한 장미빛 입술인들 그것을 스칠 수가 있습니까. 눈물의 뒤에 숨어서 슬픔의 흑암면(黑闇面)을 반사하는 가을 물결의 눈인들 그것을 비칠 수가 있습니까. 그림자 없는 구름을 거쳐서, 메아리 없는 절벽을 거쳐서, 마음이 갈 수 없는 바다를 거쳐서 존재? 존재입니다. 그 나라는 국경이 없습니다. 수명은 시간이 아닙니다. 사랑의 존재는 님의 눈과 님의 마음도 알지 못합니다. 사랑의 비밀은 다만 님의 수건에 수놓는 바늘과, 님의 심으신 꽃나무와, 님의 잠과 시인의 상상과 그들만이 압니다.       고적한 밤    하늘에는 달이 없고 땅에는 바람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소리가 없고 나는 마음이 없습니다. 우주는 주검인가요. 인생은 참인가요. 한 가닥은 눈썹에 걸치고, 한 가닥은 작은 별에 걸쳤던 님 생각의 금실은 살살살 걷힙니다. 한 손에는 황금의 칼은 들고 한 손으로 천국의 꽃을 꺽던 환상의 여왕도 그림자를 감추었습니다. 아아, 님 생각의 금실과 환상의 여왕이 두손을 마주잡고, 눈물 속에서 정사(情死)한 줄이야 누가 알아요. 우주는 주검인가요. 인생은 눈물인가요. 인생이 눈물이라면 죽음은 사랑인가요.       해당화     당신은 해당화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봄은 벌써 늦었습니다.   봄이 오기 전에는 어서 오기를 바랐더니 봄이 오고 보니 너무 일찍 왔나 두 려합니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뒷동산에 해당화가 피었다고 다투어 말하기로 듣고도 못 들은 체하였더니   야속한 봄바람은 나는 꽃을 불어서 경대 위에 놓입니다그려.   시름없이 꽃을 주워서 입술에 대고 "너는 언제 피었니"하고 물었습니다.   꽃은 말도 없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도 됩니다.      
615    시인은 자아를 속박하고 있는 억압을 끊임없이 해방시켜야... 댓글:  조회:2165  추천:0  2017-07-24
    이 밤 죽은 자를 태운 배가 내 집 앞에 도착했다    새벽이 오기 전 그 배에 불을 질러     더 먼 바다에 떠나보내야 한다    그 배가 삐걱이며 내 잠 속으로 가라앉아버리기 전에    죽은 자들과 한 모든 계약을 끝마쳐야 한다    식인 상어와 암초들을 피해 어렵게 흘러든 해안    간신히 잠에서 빠져나온 내가 눈을 비비고 일어서면    희미하게 밝아오는 창문 저편    죽은 자를 태운 배는 서서히 떠나고 있다    -남진우「검은 돛배」부분   죽은 자를 태운 배가 집 앞에 당도했다고 믿는 그의 죽음에 대한 의식은 세계를 인식하는 그의 태도가 단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를 지배하고 있는 죽음에 대해 사로잡힌 망령은 지극히 병적이다. 그에게 공간은 죽음을 인식하는 기제에 불과할 뿐 그가 죽음을 인식하는 공간이 도시이거나 그의 집 혹은 그의 내부이거나 하는 것은 그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시간 역시 그의 죽음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시적 환경에 불과할 뿐 시간이 주는 의미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의 집요한 죽음에 대한 천착은 그러나 우리들 의식 저 편 깊숙히 허무로 자리잡고 있는 세계를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다는 것 외에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무의식 속에서 역동적으로 파동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상징적이고 침묵적이다.    남진우가 우리들 삶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죽음의 세계를 비정하게 파헤치며 음울의 벽화를 통일성 있게 그려내고 있다면 유추의 언어로 건조한 서정을 펼치고 있는 송찬호는 비약과 절제 같은 지적 조작을 통해 시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의 시는 감정을 최대한 감춘 채 대상을 장면화시킨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시는 시적 해석의 다양성을 제공하는 한편 이러한 난해성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조합을 보다 새로운 시각에서 맥락화시키고 보다 심원하게 의미 확장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누가 저기다 밥을 쏟아놓았을까 모락모락 밥집 위로 뜨는 희망처럼    늦은 저녁 밥상에 한 그릇씩 달을 띄우고 둘러앉을 때    달을 깨뜨리고 달 속에서 떠오르는 고소하고 노오란 달    달은 바라만 보아도 부풀어오르는 추억의 반죽덩어리    우리가 이 지상까지 흘러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빛을 잃은 것이냐     먹고 버린 달 껍질이 조각조각 모여 달의 원형으로 회복되기까지     어기여차, 밤을 굴러가는 달빛처럼 단단한 근육 덩어리    달은 꽁꽁 뭉친 주먹밥이다 밥집 위에 뜬 희망처럼, 꺼지지 않는     -송찬호,「달은 추억의 반죽 덩어리」전문   송찬호의 서정은 고정되어 있는 사물의 관념을 일탈시키며 시적 주제까지 관습적 의미로부터 탈골시키는 상상력을 발휘한다. 그의 시는 언어가 서로 충돌하면서 빚어내는 환상적인 이미지를 텍스트 내 숨기거나 허구화된 관념을 코드화시킨다. 이로 인해 그의 시는 현실이 현실로서 읽히지 않은 채 우리에게 새롭게 부가되는 낯선 힙들을 강화한다.「달은 추억의 반죽 덩어리」도 마찬가지다. 이 시 역시 우리의 보편적 인식을 거세시키며 관념들이 빚어내는 추체험 인식을 요구한다. 그의 시는 명료성을 유예하는 대신 의미를 다중화시킨다. 뿐만 아니라 그의 시는 언어가 빚어 내는 미적 세계로 관습적 시 문법에 감금되어 있는 담화 방식을 깨뜨린다. 송찬호가 언어적 상상력으로 낯선 힘들을 강화는데 비해, 박형준은 자신을 둘러싼 존재들의 불화를 드러내며 자아를 속박하고 있는 억압을 끊임없이 해방시키고자 한다.     자전거를 타고 방죽에 왔다.    들끓는 잎의 물결이 바퀴살에 갈라져    빛이 사방으로 퍼졌다.    섬을 지고 있는 거북처럼 논 사이에서     파닥거리는 수금 방죽에 자전거를 타고 왔다.    침례교도들이 차가운 물을 헤치며    소름이 돋는 몸을 움직여 세례를 받는다.    (····················)    아침 방죽을 자전거에서 내려 천천히 거닌다.    산책만이 살아 있는 유일한 형식,    누군가 모과나무 사이에서 바라본다면 좋으리라    -박형준,「수금 방죽」부분   박형준 시의 균형은 자아와 시적 대상과의 거리를 적당히 유지하며 상호 교환적 태도를 유지하는 데 있다. 자아와 대상이 어느 한 곳에 치우치지 않고 서로 습합되고 있는 그의 시는 흥분이나 과장 대신 치밀한 질서를 계량하고 차분하면서도 진지한 어조로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되살려 놓는다. 이완과 긴장을 번갈아 가며 시의 전면에 펼쳐는 그의 서정은 시적 대상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불순과 모멸을 정화시킨다. 그의 세계관은 우울하면서도 힘이 있다. 자아의 비극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음울하게 드러나는 그의 시는 우리의 감성적인 에너지를 자극하며 자아의 내부에서 충돌하고 있는 정서를 스팩타클하게 보여준다.   남진우, 송찬호, 박형준의 시는 자아 내부에서 일고 있는 감정을 감춘 채 현실에서 유추된 세계를 언어 미학적으로 구조화시키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들의 시는 현실의 세계가 거의 거세된 채 상상력과 추체험적 인식들로 채워지는 은유 구조를 갖는다. 비록 생경스럽지만 우리 시의 관습에서 벗어나 현대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시는 우리 시의 영역을 한층 더 넓히며 독자적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할 것이다.     
614    나무야, 네 나이테 좀 알려주렴... 댓글:  조회:2427  추천:0  2017-07-24
  + 감나무  참 늙어 보인다  하늘 길을 가면서도 무슨 생각 그리 많았던지  함부로 곧게 뻗어 올린 가지 하나 없다  멈칫멈칫 구불구불  태양에 대한 치열한 사유에 온몸이 부르터  늙수그레하나 열매는 애초부터 단단하다  떫다  풋생각을 남에게 건네지 않으려는 마음 다짐  독하게 꽃을, 땡감을, 떨구며  지나는 바람에 허튼 말 내지 않고  아니다 싶은 가지는 툭 분질러 버린다  단호한 결단으로 가지를 다스려  영혼이 가벼운 새들마저 둥지를 잘 틀지 못하고  앉아 깃을 쪼며 미련 떨치는 법을 배운다  보라  가을 머리에 인 밝은 열매들  늙은 몸뚱이로 어찌 그리 예쁜 열매를 매다는지  그뿐  눈바람 치면 다시 알몸으로  죽어 버린 듯 묵묵부답 동안거에 드는  (함민복·시인, 1962-) + 푸른 나무·1  막 잎 피어나는 푸른 나무 아래 지나면 왜 이렇게 그대가 보고 싶고 그리운지 작은 실가지에 바람이라도 불면 왜 이렇게 나는 그대에게 가 닿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는지 생각에서 돌아서면 다시 생각나고 암만 그대 떠올려도 목이 마르는 이 푸르러지는 나무 아래 (김용택·시인, 1948-) + 나무에게 말을 걸다  우리가 과연 만난 적이나 있었던 걸까  나무에게 말을 걸어본다  서로가 사랑한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아주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가진 것을 모두 주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다  과연 우리가 만난 적이나 있었던 걸까  바람도 없는데 보일 듯 말 듯  나무가 몸을 비튼다.  (나태주·시인, 1945-) + 서 있으면서 가는 나무  땅에 누운 것들은 모두 싱싱해진다 썩을수록 무無 가까이서 맑아진다 잎 떨어진 가지 사이로 보니 구름이 산을 밟았구나 아무도 아파하지 않는구나 구름 밟은 산을 머리에 이고 있는 나무 저 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니다 누구에게 길을 묻지 않아도 어디로 가고 있는 나무다 서 있으면서 가고 있는 산 풀잎도 여기 앉아서 구름 냄새가 난다 내가 죽으면 어떤 냄새가 날까 나뭇잎 떨어져 햇살에  몸 말리는 냄새? (이성선·시인, 1941-2001) + 나무   길가  나무 두 그루  같은 날  같은 나이로  심어졌을 텐데  한 놈은 튼실하게  한 놈은 비실하게  너 때문이다  그늘만 없었다면  원망 마라  찌는 태양  갈증이 더할수록  뿌리를 깊이 내렸을 뿐이다  깨죽대는 놈에게  일갈을 한다  게으른 자여  내 그늘에 눕지 마라  (공석진·시인, 1960-) + 나무   인간인 내가 인간이 아닌 나무에게 음악을 들려주고 싶을 때 나무는 고요히 춤을 춘다 모르는 이들은 만행 중인 바람이 나무의 심연을 헤적인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나무는 제 앞에 선 인간에게 더덕꽃 향기 짙은 제 몸의 음악을 고요히 들려주고 싶은 것이다 나무는 춤을 출 때 잎사귀 하나하나 다른 춤의 스텝을 밟는다 인간인 당신이 나뭇잎 속으로 들어와 춤을 출 때 외로움을 느끼지 않도록 그러다가 홀연 당신 또한 온몸에 푸른 실핏줄이 퍼져나간 은빛 이파리가 된다 인간이 아닌 나무가 인간인 내게 시를 읽어주고 싶을 때 나무는 고요히 춤을 춘다 세월이 흘러 나무가 땅에 누우면 당신도 나란히 나무 곁에 누워 눈보라가 되거나 한 소쿠리 비비새 울음이 된다 먹기와집 마당을 뒤덮는 채송화 꽃밭이 된다 (곽재구·시인, 1954-) + 고목  오동은 고목이 되어갈수록  제 중심에 구멍을 기른다  오동뿐이랴 느티나무가 그렇고 대나무가 그렇다 잘 마른 텅 빈 육신의 나무는  바람을 제 구멍에 연주한다 어느 누구의 삶인들 아니랴  수많은 구멍으로 빚어진 삶의 빈 고목에 어느 날  지나는 바람 한 줄기에서 거문고 소리 들리리니 거문고 소리가 아닌들 또 어떠랴 고뇌의 피리새라도 한 마리 세 들어 새끼칠 수 있다면 텅 빈 누구의 삶인들 향기롭지 않으랴 바람은 쉼 없이 상처를 후비고 백금칼날처럼  햇볕 뜨거워 이승의 한낮은 육탈하기 좋은 때 잘 마른 구멍 하나 가꾸고 싶다 (복효근·시인, 1962-) + 나무에 대한 생각  오래된 나무를 보면  삶 속의 나이테가 보인다  줄기는 줄어들고 뿌리만 깊다  사는 게 이런 거였나 중얼거린다  도대체 뿌리가 어디까지 갔기에  가도 가도 뿌리내리지 못하는지  참을 수 없이 가볍게 살고 싶지만  삶이 덜컥, 뿌리 뽑히는 것 같아  무지하게 겁이 난다  마지막이란 그렇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닐 테지  나무 중에서 제일 굽은 나무들도  이름 모를 잡목들도  숲속으로 몸을 들이미는데  시퍼런 참, 나무가  아, 안 된다 바람에도 아니 흔들려야 한다  뿌리박고 곧게 서 있을 때 너는 너인 것이다  절대로 굽히지 않는 그게 너 자신인 것이다  (천양희·시인, 1942-) + 겨울나무의 독백  오늘밤은  바람이 몹시 차갑다 하늘의 초승달도 추위에 사르르 떨고 있다 겨울이 더욱 깊어 가는 모양이다. 이 밤이 지나면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고 따스한 햇살 한줄기도 나를 찾아오리니   마음의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인내해야지. 세상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겨울 너머 오는  꿈같은 초록의 봄이 이 밤도 내 몸 속에서 몰래 자라고 있으니.  (정연복·시인, 1957-)       + 나무  나무는 실로 운명처럼 조용하고 슬픈 자세를 가졌다. 홀로 내려가는 언덕길 그 아랫마을에 등불이 켜이듯 그런 자세로 평생을 산다. 철 따라 바람이 불고 가는 소란한 마을길 위에 스스로 펴는 그 폭넓은 그늘...... 나무는  제자리에 선 채로 흘러가는  천 년의 강물이다. (이형기·시인, 1933-2005) + 나무를 위하여  어둠이 오는 것이 왜 두렵지 않으랴  불어닥치는 비바람이 왜 무섭지 않으랴  잎들 더러 썩고 떨어지는 어둠 속에서  가지들 휘고 꺾어지는 비바람 속에서  보인다 꼭 잡은 너희들 작은 손들이  손을 타고 흐르는 숨죽인 흐느낌이  어둠과 비바람까지도 삭여서  더 단단히 뿌리와 몸통을 키운다면  너희 왜 모르랴 밝은 날 어깨와 가슴에  더 많은 꽃과 열매를 달게 되리란 걸  산바람 바닷바람보다도 짓궂은 이웃들의  비웃음과 발길질이 더 아프고 서러워  산비알과 바위너설에서 몸 움츠린 나무들아  다시 고개 들고 절로 터져나올 잎과 꽃으로  숲과 들판에 떼지어 설 나무들아  (신경림·시인, 1936-) + 세상은 나무가 바꾼다 이 세상은 나무의 것이다 사람 사는 일이 아름답지 못할 때 숲에 들면 나무는 얼마나 많은 목숨을 살리는지 내 뼈마디가 다 꺾인다 햇빛을 향해 속살 말랑말랑한 가지는 휘어지고 문득 방향을 틀었지만 그건 억지도 도식도 아니다 햇빛도 나무 때문에 지구에 온다 나무는 햇빛의 속마음을 제 잎사귀에 적어두고 나머지는 온갖 꽃이나 벌레들의 색깔과 뭇 짐승의 체온으로 돌려준다 그래서 만산홍엽이다 사람들은 세상을 위해 무엇 하나 하는 일이 없는데 나무는 제 일이 세상일이고 세상일이 제 일이다 지난여름 그 무서운 태풍과 겨뤄본 듯 내 허벅지만한 나무 한 그루, 입동 가까운 세상에게 제 몸을 말려 건네주고 있다 이 세상은 나무가 바꾼다 (황규관·시인, 1968-) + 나무가 흔들리는 것은 나무가 이파리 파랗게 뒤집는 것은 몸속 굽이치는 푸른 울음 때문이다 나무가 가지 흔드는 것은 몸 속 일렁이는 푸른 불길 때문이다 평생을 붙박이로 서서 사는 나무라 해서 왜 감정이 없겠는가 이별과 만남 또, 꿈과 절망이 없겠는가 일구월심 잎과 꽃 피우고 열매 맺는 틈틈이 그늘 짜는 나무 수천수만 리 밖 세상 향한 간절함이 불러온 비와 바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저렇듯 자지러지게 이파리 뒤집고 가지 흔들어댄다 고목의 몸 속에 생긴 구멍은 그러므로 나무의 그리움이 만든 것이다 (이재무·시인, 1958-) + 나무들의 마을 마을 한 바퀴 들러보니 나무들 거기 서 있습디다 뒷동산에 청솔나무 동구밖에 정자나무 맑은 바람과 투명한 햇살 그 싱그런 초록 전류에 갱변의 미루나무로 차르르 당산의 배롱나무도 차르르 어디 그뿐 아니라 사람도 거기 깨어 여전합디다 참등나무집 과수댁 오동나무집 보성영감 등꽃 달고 오동꽃 보며 그런 대로 거기 살 듯 은행나무집 할매도 성성히 대추나무집 노총각도 팽팽히 (고재종·시인, 1959-) + 나무의 꿈  내가 직립의 나무였을 때 꾸었던 꿈은 아름다운 마루가 되는 것이었다 널찍하게 드러눕거나 앉아있는 이들에게 내 몸 속 살아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낮과 밤의 움직임을 헤아리며 슬픔과 기쁨을 그려 넣었던 것은 이야기에도 무늬가 필요했던 까닭이다 내 몸에 집 짓고 살던 벌레며, 그 벌레를 잡아먹고 새끼를 키우는 새들의 이야기들이 눅눅하지 않게 햇살에 감기기도 하고, 달빛에 둥글게 깎이면서 만든 무늬들 아이들은 턱을 괴고 듣거나 내 몸의 물결무늬를 따라 기어와 잠이 들기도 했다 그런 아이들의 꿈속에서도 나는 편편한 마루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자라서 더 이상 내 이야기가 신비롭지 않을 때쯤, 나는 그저 먼지 잘 타고 매끄러운 나무의 속살이었을 뿐, 생각은 흐려져만 갔다 더 이상 무늬가 이야기로 남아 있지 않는 날 내 몸에 비치는 것은 윤기 나게 마루를 닦던 어머니,  어머니의 깊은 주름살이었다 (문정영·시인, 1959-) + 나무의 밀교  누군가 내게 보낸 봉인된 엽서들을 손에 쥐고 흔드는 저 나무의 애틋한 눈길은 천상의 우체부를 닮았다 지난 겨우내 썼다 지우고 지웠다 다시 쓴 생명의 시간, 나무는 수도 없이 잎들을 땅에 떨구며 자신을 버리고 한번 버렸던 잎들을 봄마다 다시 주워들어 지나는 이들에게 애타게 손을 흔드는 것이다 그럴 때 세상은 볕에 물들고 빈 나무의 풍요한 밀교를 기억한다 길을 가다가 살펴보면 나무는 한 권의 책이 되어 있다 미처 건네주지 못한 숱한 사연과 온기들을 둥근 나이테 사이에 두툼하게 끼워 두고 새파란 우체통이 되어 우두커니 서 있다 자물쇠 없는 우체통에서 오래 잠들었던 내 사랑을 흔들어 깨울 때, 몸에서는 짙푸른 잎사귀가 돋아나고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다가가 불쑥, 초록 손을 내밀어보는 것이다 (권영준·시인, 1962-) + 나무의 詩 나무에 대한 시를 쓰려면 먼저 눈을 감고 나무가 되어야지 너의 전 생애가 나무처럼 흔들려야지 해질녘 나무의 노래를 나무 위에 날아와 앉는 세상의 모든 새를 너 자신처럼 느껴야지 네가 외로울 때마다 이 세상 어딘가에 너의 나무가 서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지 그리하여 외로움이 너의 그림자만큼 길어질 때 해질녘 너의 그림자가 그 나무에 가 닿을 때 넌 비로소 나무에 대해 말해야지 그러나 언제나 삶에 대해 말해야지 그 어떤 것도 말고  (류시화·시인, 1958-) + 나무의 몸 나무를 자르고 나서 나무의 몸 안을 본다. 나무의 몸 속은 티끌도 없이 눈부시다. 뿌리의 하얀 뼈를 세우고 세월의 둥근 집을 새겨온 나무의 몸. 잘려진 나무의 몸 속에 싸한 향기 가득하다. 몸 밖의 비바람을 키우며 몸 안의 그리움을 따라 돌고 돌아온 나무의 세월 나무는 알았을까 아득히 멀어 끝도 없이 이어진 세상 속 길 잘려진 나무의 둥근 길 따라 몸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한 줌의 눈물마저 침묵으로 다져 놓은 하얀 빛. 나무의 몸 안에는 천년의 세월 견디며 켜 놓은 둥그런 등불 하나. (고현수·시인) + 믿음에 관하여  나무를 보니 나도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겠다  어떠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기둥이 있어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다가 가야겠다  그러려면 먼저 깊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땅에  내 마음의 나무 한 그루 심어야겠다  눈과 비, 천둥과 번개를 말씀으로 삼아  내 마음이 너덜너덜 닳고 헤질 때까지  받아적고 받아적어 어떠한 소리에도 귀 기울이지 않는  침묵의 기도문 하나 허공에 세워야겠다  남들이 부질없다고 다 버린 똥, 오줌  향기롭게 달게 받아먹고 삼킬 수 있는 나무,  무엇을 소원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나무,  누구에게나 그늘이 되어주는 나무,  그런 나무의 믿음을 가져야겠다  하늘 아래 살면서 외롭고 고독할 때  눈물을 펑펑 흘리며 울고 싶을 때  못 들은 척 두 귀를 막고 눈감아 주는 나무처럼  나도 내 몸에 그런 믿음을 가득 새겨야겠다  (임영석·시인, 1961-)  + 나무의 생애 비바람 드센 날이면 온몸 치떨면서도 나지막이 작은 신음소리뿐 생의 아픔과 시련이야 남몰래 제 몸 속에 나이테로 새기며 칠흑어둠 속이나 희뿌연 가로등 아래에서도 고요히 잠자는 나무 보이지 않는 뿌리 하나 목숨의 중심처럼 지키면 그뿐 세상에 반듯한 집 한 칸 장만하지 못하고서도 햇살과 바람과 이슬의  하늘 은총 철석같이 믿어 수많은 푸른 잎새들의 자식을 펑펑 낳는다 제 몸은 비쩍 마르면서도 혼신의 힘을 다해 기른 것들과 늦가을 찬바람에 생이별하면서도 새 생명의 봄을 기약한다 나무는 제가 한세월  잘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할까 (정연복·시인, 1957-)        
613    시는 쉽고 평이한 언어로 독자의 감흥을 불러 일으켜야... 댓글:  조회:2313  추천:0  2017-07-24
    섬진강 끝    하동에 가 보라    돌멩이들이 얼마나 많이 굴러야     저렇게 작은 모래들처럼     끝끝내 꺼지지 않고     빛나는 작은 몸들을 갖게 되는지    겨울 하동에 가 보라    물은 또 얼마나 흐르고 모여야    저렇게 말없는 물이 되어     마침내 제 몸 안에 지울 수 없는     청청한 산 그림자를 그려내는지    -김용택「강끝의 노래」부분    김용택 서정의 특징은 사물과 자연에 대해 따뜻한 마음을 지닌다는 데 있다. 그의 시는 우리를 따뜻하면서도 풍요로운 감성의 세계로 인도한다. 시적 체계를 이루는 공간이자 근대 공간인 ‘섬진강’을 주로 노래해 ‘섬진강의 시인’이라고 불러도 좋을 그에게 자연은 삶의 원천이며 근원의 공간이다. 그의 대지적 상상력은 자연의 오염이나 황폐를 노래한 문명 비판류의 시와는 다르다. 그는자연이 본래 지니고 있는 아름다운 풍경과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온기를 꾸밈없이 그려낸다. 우리가 잃어 버리고 있던 마음의 고향을 섬세하게 복원시켜 놓는 그는 산벚꽃이 희게 핀 모습에서 고독을 발견하기도 하며 달빛이 하얗게 쏟아지는 들판에서 가슴을 적시는 애틋한 서러움을 발견한다. 돌멩이가 수억 겁의 세월을 구른 뒤 작은 모래로 빛나는 것, 혹은 수없는 물이 모여 제 몸 안에 청청한 산그림자를 그려내는 것을 발견해내는 그의 서정은 건강하고 맑디 맑은 이데아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에 비해, 작고 사소한 것으로부터 그윽한 사유를 이끌어 내고 있는 안도현은 시의 서사성을 중심축으로 하여 선명한 메세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그의 시는 어렵거나 애써 무거운 주제를 선택하지 않는다. 대신 산문적인 형식을 띠면서도 함축적인 여운을 주는 주제를 선택해 장면적이면서도 정확한 의미 전달을 지향한다.「가을의 전설」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의 시는 재미성이 표징을 이룬다. 저수지 물가에 배 한 척이 매어 있어 단풍놀이를 즐겨볼까 싶은 심산으로 주인집을 찾아 갔더니 고추를 매만지던 주인 아낙이 “대낮에 일도 없이 뭔 배를 탈라고 헌다요?” 하는 말에 그만 아내가 부끄러워 불이 붙은 단풍나무가 되었다는 이 시는 언어 유희적 요소가 시의 곳곳에 교묘하게 배치되어 있어 그의 시가 지니고 있는 재미성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타는 배와 사람의 배, 매운 고추와 사람의 고추 그리고 “대낮에 일도 없이 뭔 배를 탈라요?”에 함의된 해학적 의미 등은 시적 품위를 잃지 않으면서도 우리에게 시를 읽는 재미가 무엇인지를 제공한다.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안도현「겨울 강가에서」부분   강물이 세차게 뒤척이는 까닭을 ‘어린 눈발이 사그러져지게 되는 것이 안타까워서’라는 그의 시각은 독특하다. ‘어린 눈발’을 의인화시켜 우리에게 연민을 이끌어 내며 무형의 존재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그의 시적 방법은 신선하기까지 하다. 사소하게 흘러만 가는 강물에서 따스하고도 넉넉한 모성성을 이끌어내는 그의 서정은 그윽한 사유에서 나오는 통찰력이 아니면 만나지 못하는 삶의 예지다. 복잡하기 짝이 없는 오늘날의 시에서 쉽고 평이한 언어로 독자의 감흥을 불러 일으키는 그의 시는 ‘시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물음에 답하고 있는 시에 다름 아닐 것이다.   김용택과 안도현이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주변을 맑고 결고운 서정으로 따뜻한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면 오늘의 시의 한 징후를 보여주고 있는 이윤학의 시는 근대 체험과 과거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자신 안에 숨어 있는 황폐의 감정을 현동화(acturlization)시킨다. 시적 대상에 자신의 감정을 투사시키는 그의 언어적 인식은 대상에 자신의 입김을 불어 넣어 대상과 자신이 구별하기 힘들게 만든다. 자아와 대상이 서로 교호하며 삼투하여 동일화를 이루는 그의 시는 사물이나 풍경을 막연히 그려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통해 대상의 뒤에 숨은 의미를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알레고리의 시학’을 보여주는 그의 시는 상징과 지시 대상이 중층화되며 입체성을 이룬다. 이를 통해 그의 시는 소읍과 변두리 도시 공간을 주 배경으로 삼고 이와 연계하여 음울한 자아의 모습을 흐린 흑백 필름처럼 아련하게 보여 준다.    잠을 이룰 수 없는, 겨울,    낮은 키의 울타리를 넘어오는 사람.    이불을 둘둘 말아 가슴속에 구겨넣고    먼 곳으로 보내는 편지를 써야 했다.    밤새, 우리의 죄는 먼 곳에 있고······    뼈 속으로 스미는 빗물에     그 무엇도 지울 수가 없었다.    입술의 푸른 멍이 몸 구석구석으로    녹아들고 부르튼 열매들이 붉은    꽃을 피워냈다. 시퍼렇게    도는 피를 닮은 잎들, 문신들,    -이윤학「사철나무」부분   시적 대상에 자신의 감정을 전이시켜 문맥화시키는 그의 시는 주관적 감정과 체험이 강조되는 특징을 보인다. 추억이 주는 통점과 자아와 세계와의 불화를 조직화된 감수성으로 농밀하게 그려내는 그는 공허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내면의 공간에서 발화하고 발효된 이미지들을 하나씩 불러내 어두운 영혼의 그림자를 시의 전면에 유포시킨다. 그의 시는 김용택과 안도현의 시와 구별된다. 김용택과 안도현의 시가 세계와 동화하며 조화와 균형을 노래하고 있다면 이윤학의 시는 세계와 대응하며 세계에 끊임없이 위협받는 자아의 불안과 불화를 노래한다.    이윤학과 같은 시적 공간에 잇대어 있으면서 구수한 충청도 방언과 위트 넘치는 입담으로 어둡게 보일 수도 있는 삶을 밝고 명랑하게 그려내는 특징을 보이고 있는 이정록은 가늘지만 질긴 생명력을 사물에 불어 넣는다. 믿음직스럽고 신뢰할 수 있는 그의 목소리가 시의 곳곳에 포진하면서 완성미를 갖추고 있는 그의 시에는 밝은 사랑과 진솔한 삶이 묻어 있다.    큰애야 이따 돌아갈 때에는     네 아비가 마지막으로 묵었던    수덕여관엘 가봤으면 좋겠다    가슴 속 빨랫방망이를 꺼내어 눈물 찍으신다     피서 와서까지 그러시냐고 투덜거리자     나는 여기와서도 피가 서는구나 하신다    앞산이 갑자기 캄캄해지더니    도토리만한 소나기를 훑고 지나간다    한바탕 빨래를 마친 하늘에 된장잠자리들 가득하다     저것이 다 먼저 간 것들이여 한참을 올려다보신다    광목 홑청처럼 하늘이 팽팽하다    -이정록「피서」부분   할머니가 영면하시 전 ‘가곡’라는 곳으로 피서를 가서 건너편 산의 도토리는 누가 따갈까 걱정하시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군더더기 없이 기술하고 있는 이 시는 부풀리거나 축소시키는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를 그려냄으로써 시적 호기심을 유도해 낸다. 슬픔을 슬픔으로 그리지 않고 슬픔 속에 깃들어 있는 강한 페이소스를 드러내 보이는 그의 시는 시적 주제에 압도당하지 않는 그의 감성적 여과력을 보여준다. 시적 대상을 통어하며 서정의 건강함을 드러내고 있는 그의 시는 시인의 체험과 음성이 짙게 배어 있다는 점에서 시는 곧 그 사람이라는 텍스트적 의미를 지닌다.    김용택, 안도현, 이윤학, 이정록의 시는 각각 산, 강, 농촌, 도시 변두리와 같은 근대 공간을 배경으로 자신의 서정을 표현한다. 그들의 시는 서로의 개성에도 불구하고 늘상 부딪치는 현실의 체험을 어려운 수사를 동원하지 않으면서도 우리 시에서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서정의 세계를 미감 있게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가 잃어 버렸거나 혹은 잊어 버리고 있던 자연의 아름다운 서정과 원체험적 인식들이 진실하게 그려내고 있는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이러한 미의식이야말로 하루가 다르게 전자 정보화되어 가는 오늘날, 우리에게 참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일깨워 줄 것이 틀림없다.     
612    여름아, 네가 아무리 더워봐라 내가 아이스크림 사 먹는가... 댓글:  조회:2688  추천:0  2017-07-24
  여름이 오면 생각나는 여름시,여름시모음   여름이라고 할 만큼 요즘 날시 푹푹 찌네요.  교실에서는 벌써 에어콘을 틀고 수업하니 이번 여름엔 더 더울 것이라 생각나니 여름이 오는 것만으로도 아찔하네요. 여름이 오면 생각나는 여름시,여름시모음   여름 /임영준 작열하는 태양이  축복으로 느껴진다면 만끽할 수 있다   세찬 장대비 속  환희를 안다면 누릴 자격이 있다   노출이 자랑스럽고 자연에 당당하다면 깊게 빠진 것이다   풀밭에 누워  별들과  어우러질 수 있다면 즐길줄 아는 청춘이다     쓸쓸한 여름 /나태주    챙이 넓은 여름 모자 하나  사 주고 싶었는데  그것도 빛깔이 새하얀 걸로 하나  사 주고 싶었는데  올해도 오동꽃은 피었다 지고  개구리 울음 소리 땅 속으로 다 자즈러들고  그대 만나지도 못한 채  또다시 여름은 와서  나만 혼자 집을 지키고 있소  집을 지키며 앓고 있소 *    여름날-마천에서/신경림 버스에 앉아 잠시 조는 사이  소나기 한줄기 지났나보다  차가 갑자기 분 물이 무서워  머뭇거리는 동구 앞   허연 허벅지를 내놓은 젊은 아낙  철벙대며 물을 건너고  산뜻하게 머리를 감은 버드나무가  비릿한 살냄새를 풍기고 있다 * * 마천은 경남 산청군에 딸린 지리산 아래 마을이다. * 신경림시집[이래서 이 세상에 꽃으로 피었으면]-랜덤하우스 한여름 새벽에/박재삼  二十五坪 게딱지 집 안에서  三十 몇 度의 한더위를  이것들은 어떻게 지냈는가  내 새끼야, 내 새끼야  지금은 새벽 여섯 시  곤하게 떨어져  그 수다와 웃음을 어디 감추고  너희는 내게 자유로운  몇 그루 나무다  몇 덩이 바위다   여름밤 /이준관  여름밤은 아름답구나 여름밤은 뜬눈으로 지새우자 아들아, 내가 이야기를 하마 무릎 사이에 얼굴을 꼭 끼고 가까이 오라 하늘의 저 많은 별들이 우리들을 그냥 잠들도록 놓아주지 않는구나 나뭇잎에 진 한낮의 태양이 회중전등을 켜고 우리들의 추억을 깜짝깜짝 깨워놓는구나 아들아, 세상에 대하여 궁금한 것이 많은 너는 밤새 물어라 저 별들이 아름다운 대답이 되어줄 것이다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 열 손가락에 달을 달아주마 달이 시들면 손가락을 펴서 하늘가에 달을 뿌려라 여름밤은 아름답구나 짧은 여름밤이 다 가기 전에 (그래, 아름다운 것은 짧은 법!) 뜬눈으로 눈이 빨개지도록 아름다움을 보자 * 담쟁이 /목필균 누구냐 내 마음의 벽을 잡고 올라서는 너는 7월 태풍, 모진 비바람 속에도 허공을 잡고 올라서는 집착의 뿌리 아득히 떠내려간 내 젊음의 강물 쉼 없이 쌓여진 바람벽을 기어오르는 무성한 그리움의 잎새 어느새 시퍼렇게 물든 흔들림으로 마음을 점령해가는 네 따뜻한 손길 *   여름날 /김사인  풀들이 시드렁거드렁 자랍니다 제 오래비 시누 올케에다 시어미 당숙 조카 생질 두루 어우러져 여름 한낮 한가합니다   봉숭아 채송화 분꽃에 양아욱 산나리 고추가 핍니다 언니 아우 함께 핍니다   암탉은 고질고질한 병아리 두엇 데리고 동네 한 바퀴 의젓합니다   나도 삐약거리는 내 새끼 하나하고 그 속에 앉아 어쩌다 비 갠 여름 한나절 시드렁거드렁 그것들 봅니다 긴 듯도 해서 긴 듯도 해서 눈이 십니다 * * 김사인시집[가만히 좋아하는]-창비   여름꽃/ 이문재  그대와 마주 서기는 그대 눈동자 바로 보기는 두렵고 또 두려운 일이어서   저기 뜨락에 핀 꽃 여름꽃을 보고 있다 어둠의 끝에서 몸을 활짝 열었던 아침꽃들 정오가 오기 전에 꽃잎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 안으로 돌아가 있다 해를 바로 보기가 어려운 것이다 어려워서 여름꽃은 꽃잎을 모아 합장한다 여름꽃은 자기 안으로 들어가 해의 눈동자가 된다 *   비의 냄새 끝에는/이재무   여름비에는 냄새가 난다  들쩍지근한 참외 냄새 몰고 오는 비  멸치와 감자 우려낸 국물의  수제비 냄새 몰고 오는 비  옥수수기름 반지르르한  빈대떡 냄새 몰고 오는 비  김 펄펄 나는 순댓국밥 내음 몰고 오는 비  아카시아 밤꽃 내 흩뿌리는 비  청국장 냄새가 골목으로 번지고  갯비린내 물씬 풍기며 젖통 흔들며 그녀는 와서  그리움에 흠뻑 젖은 살 살짝 물었다 뱉는다  온종일 빈집 문간에 앉아 중얼중얼  누구도 알아듣지 못할 혼잣소리 내뱉다  신작로 너머 홀연 사라지는 하지(夏至)의 여자 *   여름 편지/한영옥   그해 여름 유난히 짱짱한 날이 있었다  그날 좋은 햇빛 속에 들어서서  대책 없는 우리 사이 두들겨 말리려고  회암사에 올라 흘린 땀 식히고 있을 때  마당 한쪽, 약수 물 동그랗게 고인 곁에  동자승 한 분도 동그랗게 웃어주었다  동자승 고운 얼굴 반쪽씩 나눠갖고  이 길, 그 길로 우리는 내달았다  이 길이 그땐 그토록 먼 길이었다  어느덧 그때처럼 또 여름이다  그쪽이여, 그 길엔 연일 비단길 꽃잎 날리는가  이쪽 이 길에도 잡풀 꽃 그럭저럭하고  올 여름 다행히 실하여 노을도 잘 흐르고  장단 맞추며 나도 이리 흥겨운 모양이니  기절한 우리 사이 가만히 내다 버리겠네  그토록 먼 길이었던 이 길로 오던 길에  흥건히 불어 빠졌던 발톱도 이젠 내다 버리겠네  그해 여름 그날, 가뭇없으라고 불어오는 밤바람  아득한 그쪽으로 그어진 능선 모조리 덮어가네. *  * 오광수엮음[시는 아름답다]-사과나무       수국/ 이문재 여름날은 혁혁하였다   오래 된 마음자리 마르자 꽃이 벙근다 꽃 속의 꽃들 꽃들 속의 꽃이 피어나자 꽃송이가 열린다 나무 전체 부풀어오른다   마음자리에서 마음들이 훌훌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열엿새 달빛으로 저마다 길을 밝히며 마음들이 떠난다 떠난 자리에서 뿌리들이 정돈하고 있다   꽃은 빛의 그늘이다       여름 한때/조성국   가문 마당에  소낙비 온 뒤  붉은 지렁이 한 마리  안간힘 써 기어가는  일필휘지의 길  문득  길 끝난 자리  제 낮은 일생을  햇볕에 고슬고슬하게 말려  저보다 작은 목숨의 개미 떼  밥이 되고 있다   또 한여름/ 김종길  소나기 멎자 매미소리   젖은 뜰을 다시 적신다   비오다 멎고   매미소리 그쳤다 다시 일고   또 한여름 이렇게 지나가는가   소나기 소리 매미소리에   아직은 성한 귀 기울이며   또 한여름 이렇게 지나보내는가 *     칠팔월(七八月) /문태준 여름은 흐르는 물가가 좋아 그곳서 살아라 우는 천둥을, 줄렁줄렁하는 천둥을 그득그득 지고 가는 구름 누운 수풀더미 위를 축축한 배를 밀며 가는 물뱀 몸에 물을 가득 담고 있는, 불은 계곡물 새는 안개 자욱한 보슬비 속을 날아 물버들 가지 위엘 앉는다 물안개 더미같이, 물렁물렁한 어떤 것이 지나가느니 상중(喪中)에 있는 내게도 오늘 지나가느니 여름은 목 뒤에 크고 묵직한 물주머니를 차고 살아라   여름/최영철 쌈 싸 먹고 싶다 푸른색을 어쩌지 못해 발치에 흘리고 있는 잎사귀 뜯어 구름 모서리에 툭툭 털고 밥 한 숟갈 촘촘한 햇살에 비벼 씀바귀 얹고 땀방울 맺힌 나무 아래 아, 맛있다.          
611    모든 비유는 다 시가 될수는 있다?... 없다!... 댓글:  조회:2166  추천:0  2017-07-24
모든 비유가 다 시가 될 수는 없다/ 김춘수  비유에는 크게 나누어 직유와 암유가 있다. 직유를 명유라고도 하고, 암유를 음유라고도 한다. 직유는 처럼, 마냥, 와(과), 같이(은), 보다, 망정 등의 보조형용이 중간에끼어 뭣을 뭣에 비교하여 말하고 있는가를 환히 알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직유에는 또한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를 단일 직유라고 한다. 단일 직유는 단어와 단어가 서로 비교되고 있는 경우를 말한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수주 변영로의 [논개]라고 하는 시의 한 부분인데, 이라는 단어를 라는 보조형용을 매개로 해서 이라고 하는 단어에 비교하고 있다. 그런데 이 경우, 읽어 보면 알 수 있다시피 단순히 의 뜻을 강조하기 위해서 을 들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이런 경우는 시적 비유라고 할 수가 없다. 산문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따.  미당 서정주의 [문둥이]이라는 시의 전문이다. 을 에 비유하고 있는 이 단일 직유는 시적 비유가 되고 있다. 단순한 울음이 아니라 아주 열정적인 격렬한 울음인데, 그러한 상태를 이라고 비유함으로써 그 상대가 한층 생생하게 호소되어 온다. 이런 경우 주의할 것은 비유의 부분만 볼 것이 아니라,시 전체의 분위기를 통해서 비유를 봐야 한다. [문둥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시는 시 전체의 분위기로 봐서 비유가 시적으로 살아있음을 짐작하게 된다. 이렇게 같은 단일 직유라도 시인에 따라 시적이 되고, 시적이 덜 되고 한다. 언어는 그러니까 순전히 그것을 다루는 시인의 손에 따라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떤 단어가 문(文)과 비교된다든가, 어떤 문이 다른 어떤 문과 비교되는 경우 중간에 보조형용이 끼면 확충 직유가 된다.  옥안(玉顔)을 상대하니 여운간지명월(如雲間之明月)이요,  [춘향전]에 나오는 이 대목은 을 에 비유하고 있는 확충 직유다. 여기서도 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수식의 역할밖에는 더 못 하고 있는 것이 임을 알 수 있다.  어름 우희 댓닙자리 보와 님과 나와 어러주글만뎡  정둔 오낤밤 더듸 새오시라 새오시라.  고려속요인 [만전춘]의 이 대목은 을 매개로 문과 문이 비교되고 있는 확충 직유다. 그 애타는 심정이 시적으로 잘 살아 있다.  시적 비유로 성공하고 있다.  비유가 시에서 많이 쓰인다는 것은, 시는 미묘한 세계를 미묘한 그대로 절실히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유를 통해서 암시적으로, 또는 함축적으로 전달하지 않고는 별로 전달할 방법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일상 언어의 의미 그대로를 가지고는 안 된다. 언어가 이중 삼중의 의미를 가지고 미묘 복잡한 빛깔을 드러내 주어야만 한다. 비유는 이렇게 해서 시가 된다.  미당의 시 [문둥이]의 경우, 을 에 비유하고 있다. 울음은 곧 슬픔을 연상케 되고, 슬픔은 꽃과는 아주 먼 거리에 있다. 꽃은 화려하고 기쁨이 넘치는 표상이다. 그런데도 문둥이가 참회하며 몸부림치는 그 울음은 아주 뜨겁고 아름답게 비친다(처절할 정도로 생에 대한 뜨거운 긍정을 느낀다). 이렇게 느껴질 때 과 은 밀접한 연대성을 가지게 되고, 새로운 (사물 서로 사이의)관계지어 줌이 신선하게, 또는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만전춘]의 경우는 특히 그렇다.  사랑은 뜨거운 것이다. 뜨거움의 극은 불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랑의 뜨거움을 얼음에 비유하고 있다. 얼음 위에 댓닢으로 자리를 보아 사랑하는 남녀가 눕는다. 얼어죽을 것이 필연인데도 이 시의 숨은 의도는, 두 사람의 사랑의 뜨거움이 얼음까지 녹인다는 열정을 역으로 보여 주려고 한 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 우리(독자)에게는 별안간 얼음이 불보다 더 뜨겁게 느껴진다. 가장 싸늘한 것으로 가장 뜨겁게 느낄 수 있도록 해 주고 있다. 매우 신선하고 놀랍다. 단순한 의미 강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새로운 상태의 창조라고 해야 하리라.  암유는 직유와는 달라 보조형용이 전연 끼이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한층 상징성이 짙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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