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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문학의 길과 창작관

사막의 마라토너 김장혁
2023년 12월 29일 14시 11분  조회:784  추천:1  작성자: 김장혁

                          사막의 마라토너

                                    김장혁

    나는 사막과도 같은 문학권에서 장장 50년 동안 파란만장한 문학창작의 외나무다리 길에 들어서서 상처도 많이 입었고 곡절도 많이 겪었다. 또 그만큼 한도 많았다. 그래 정녕 가슴에 한이 맺혀야 글을 쓸 수 있는가?
    나는 한 맺힌 가슴의 상처를 매만지면서 사막의 모래바람을 무릅쓰고 한편, 또 한편의 글을 쓰면서 외롭게 한걸음, 한걸음 힘겹게 앞으로, 앞으로 걸어나갔다.
    원래 나는 일찍 조선 궁정어의를 지낸 고조부와 증조부의 의술을 물려받아 아픈 사람의 병을 치료해주고 죽는 사람을 구하는 착한 의사로 되려는 꿈을 꾸었다. 대학시험을 치기 전까지도 지망을 연변의학원에 썼지만 불행하게도 색망이여서 어린 시절의 의사 꿈을 접고 청년시절의 꿈인 문학을 지향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나는 문학의 사막에서 매냥 마라톤을 해야만 한 숙명적인 리상개변을 후회하지 않는다. 비록 문학이란 사막에 들어서서 별의별 고생을 다 했지만 오히려 민족을 위해, 인류의 정신세계를 개조하고 정신재부를 창조하는 문학창작사업에 한생을 바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더욱 보람찼다고 생각한다.
     나는 고중에 입학한 후 김재권, 김설봉, 김철환, 김진산, 리광평 등 계몽은사님들의 가르침을 받아 점차 기자와 작가로 되려는 푸른 꿈을 꾸게 되였다. 대학에서 문학개론을 공부하면서 김만석교수님의 아동문학강의도 귀동냥해 들은 후부터 나는 곡절도 많았던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고 장편아동소설을 쓰려는 강한 충동을 받았다. 그리하여 나는 대학교 시절에 나는 장편아동소설 "려명전야의 샛별"를 쓴 적이 있다. 그때 허룡구교수와 최문식 교수는 내 습작소설을 읽어보고 잘 다듬으면 성공할 수 있는 소설이라고 힘을 북돋아주었다. 그러나 출판사에서는 1979년도 그때까지 전례없는 장편아동소설을 한 문학애숭이에 의해 출판하긴 이르다고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러나 나는 그  미발표작 장편아동소설 원고를 버리지 않고 35년 동안이나 보관해두었다가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제 6권과 제 7권에 나눠 삽입하여 끝내 발표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부터 외람되게 외나무 다리를 건너 사막에서 작가의 수업을 시작하게 됐다. 
    나는 문학창작의 길이 어려운 사막에서의 외로운 마라톤인줄은 몰랐다.
    나는 풍파도 많고 곡절적인 인생길에 질투와 무함, 상처를 받을 때마다 이를 악물고 상처를 매만지면서 교훈을 섭취하고 아픔을 원동력으로 삼아 한편, 또 한편의 글을 써냈다.
    고중시절에 당시 조양공사 당위 선전위원으로 계신 김철환선생님과 방송소 소장으로 계신 리광평선생님 그리고 고중 어문교원 김진산선생님을 모시고 신문과 방송에 두부모만한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일로 해 “글을 써서 이름을 날리려는 야심가”라는지, “독서벼슬론”의 류독이 깊은 학생이라는지 별의별 모자를 다 쓰고 억울하게 고중을 졸업할 때까지 질투와 무함에 의해 입단도 하지 못하였다.
   1976년에 억울함을 한 가슴 품은 채 귀향한 후 나는 당시 조양공사 문화소 소장으로 계신 김재권선생님을 문학스승으로 모시고 수많은 소설책을 읽고 문학에 어섯눈을 뜨기 시작하였고 민담정리와 소설창작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밭에 나가 일할 때도 김재권선생과 김철환, 김설봉 등 선생님들이 빌려준 누런 소설책을 호주머니에 넣고 가서 가물에 물을 만난 사람처럼 쉼시간이면 웃고 떠드는 농사군들을 피해 물도랑이거나 눈두렁에 숨어 책을 읽었다. 나는 소몰이군으로 산야를 달아다니면서도 책을 가지고 다니면서 가물에 물을 만난 사람처럼 소설책을 읽었다. 일부 무식한 사람들은 나를 두고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잘 받지 않는다는지, 빈농의 아들인데 농촌에 뿌리박고 새 농촌을 건설하려 하지 않는다는지 이러쿵저러쿵 하면서 헐뜯어댔다. 그러건 말건 나는 고된 농사일에 지쳐도 밤이면 독서와 창작을 멈추지 않았다. 대학입시가 회복돼도 입시복습마저 마음놓고 할 수 없어 저수지공지에서 도망쳐 외지 큰누나네 집에 가서 숨어 공부하지 않으면 안됐다.
    나는 대학을 졸업한 후 현문화관에 들어가려던 최저한도의 희망마저 물거품이 되여 중학교에 가서 코흘리개들을 마주 했을 때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그때 룡정시 문련 주석으로 계신 김재권선생님은 나를 불러놓고 힘을 실어주었다.
    “딱 문화관에 들어가야만 문학창작을 할 수 있느냐? 교원사업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문학창작을 할 수 있다.”
    그 말씀에 삶의 용기를 얻고 절망에서 간신히 헤쳐나온 나는 그때부터 룡정시 문화관 원로작가들인 김재권, 리태수, 황병락 등 선생님들을 모시고 “보름회”라는 문학단체에 다니면서 문학창작수업을 하였다.그런데 소속 중학교 일부 책임자들은 “교수연구를 하지 않으면서 자기 글만 쓴다.”고 비평하면서 글을 쓰지 못한다고 제한했다. 이는 작가를 꿈꾸는 나의 문학생명을 짓밟는 조폭한 간섭과 더러운 수작이 아니고 뭔가? 비록 생물로서의 목숨은 붙어 있어도 작가로서의 령혼과 생명은 죽고 말것이 아닌가. 문학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없는 세상은 곧 지옥에서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나는 그제야 알것 같았다, 창작자유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아니, 민주와 자유가 없으면 얼마나 암담한가를!
    나는 물 한모금도 없고 불볕이 홧홧 달아오는 사막에서 마라톤 달리기를 잠간 멈추고 애어린 문학생명을 살려내려고 무등 모지름을 쓰지 않으면 안됐다. 교편을 잡고 합법적으로 문학창작을 해나기 위해 나는 담임교원 사업에 눈코뜰새 없으면서도 초중과외작문써클 지도교원을 주동적으로 맡고 수많은 학생작문을 지도해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였다. 학생들은 주와 성, 전국급 여러가지 작문콩쿠르에서 우수중학생작문상을 수두룩이 안아왔다. 그때 학생들 속에서 수많은 대학생들이 배출됐으며 그들 속에는 오늘날의 대학교 학원 원장, 교수, 박사, 이름난 가수, 성악교수도 있으며 중국조선족문단의 어마어마한 작가도 있다. 나는 그들의 지명도가 너무 높아서 줄곧 내 입으로 학생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마치 그들의 지명도를 빌어 후광을 보려고 하는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은 언제나 나를 스승이라고 널리 외우고 있다. 인간수양을 제대로 닦은 그들이 장하기만 하다. 당시 나도 수차 교육잡지사와 전주 교육론문발표회에서 우수작문지도교원상과 우수작문지도론문상을 탔으며 학교에서 우수담임교원상도 탔다. 짤막한 소설도 신문과 잡지에 륙속 발표했다. 학교 책임자들과 교원들은 전교 교원성과전시회 때 전시된 나의 수두룩한 작품과 전주 우수교연론문상 그리고 학생들의 작문과 상장들을 둘러보고 나의 작문지도교수사업을 충분히 긍정했다. 나는 그때라고 나는 “교원이 글을 잘 써야 학생작문을 잘 지도할 수 있다.”, “글짓기에서 사로개척의 예술수법” 등 교수론문을 써서 여론조성을 했다. 기실 “교원이 글을 잘 써야 학생작문을 더 잘 지도할 수 있다.”는 것은 어문교원으로서의 간단한 상식이지 그 무슨 철리가 아니다. 더욱이는 대서특필할 론문거리도 아니였다. 그러나 나는 아주 힘들게 따낸 작문지도 성과로 그 간단한 상식적인 도리를 증명하고 내가 과외로 문학창작을 하는 것을 합법화해야만 하였다. 나중에 학교에서는 나를 보고 전주교수연구론문회의에서 우수상을 탄 교수론문을 전교 년말총화회의에서교류하게 하였다.

    그후부터 학교와 조선어문교연실에서 더는 나의 과외창작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후에 부임돼온 주천을 교장과 유재환 교장은 나에게 고중교수와 전교 작문써글 지도교원을 맡기고 나의 문학창작을 지지해주었으며 어문교연실 교원들에게 문학창작활동을 폭넓게 벌릴 것을 호소하였다. 문학창작 연성환경을 마련한 후 나는 다시 용기를 얻고 퇴근한 후 세집에서 밥상을 놓고 곤한 눈을 집어뜯으면서 한편, 또 한편의 글을 써냈다. 그러나 작품은 써놓아도 발표하기는 아주 힘들었다. 중편련정소설 “사랑환상곡"은 지금 다시 읽어봐도 괜찮은 예술작품인 것 같다. 나는 소설원고를 가지고 숱한 잡시사를 찾아다녔고 편집들이 제기한 수개요구대로 16번이나 수개했다. 진짜 그 두툼하고 부동한 내용으로 된 수개원고로 전람회라도 열만 하였다. 하지만 그 중편소설은 국내에서 끝내 발표되지 못했다. 20년이 지난 후 나의 그 소설은 중단편소설수필집 "사랑환상곡"에 수록돼 한국에서 출판돼 한국에서도 제일 큰 서점인 교보문고에서 버젓이 팔렸다. 지금도 컴퓨터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나의 그 소설집 판매광고를 찾아볼 수 있다.    몇십년이 지난 후 결과가 보여주다싶이 작품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소설이 당시 편집들의 눈에 들지 못한 것 밖에 없다. 내 작품이 명작이라고는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한점만은 짚어놓고 지나가고 싶다. 편집은 명작가를 키울 수도 있고 명작을 죽일 수도 있다. 편집은 편집 도덕과 량심을 지켜야 한다. 작자의 문단서렬이나 권세와 면목을 보고 작품을 살생하면 한 작가에게, 아니,  문학사에 죄를 짓게 된다. 
    그 소설을 국내 편집부에서 퇴고를 맞은 그날 나는 뻐스를 타고 모아산 고개를 넘어 룡정에 돌아오면서 절망에 빠졌다. 필을 꺾으려고까지 했다. 나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 발표되지 못한 그 소설 원고를 한장 한장 찢어 차창 밖으로 날려 보냈다.
이런 일은 기수부지이다. 35년 전 교원시절에 발표하지 못했던 문예평론 “리근전의 소설 ‘고난의 년대’에서 력사반영의 예술특징”은 한글자도 고치지 않았지만 그 잡지사 편집과 주필이 바뀌자 딱 그 잡지에 발표됐다. 그때 편집권세의 문턱이 얼마나 높은가를 실감했으며 편집이라면 문학초보를 살려내기 위해서 어떻게 원고를 처리해야 하겠가하는, 편집의 직업도덕과 좌우명, 원칙도 깨닫게 되였다.
    당시 나는 작품 발표가 좌절될 때마나 너무 애나 몇번이고 필을 꺽으려고 했다. 그때마다 김재권 선생님과 리태수 선생님이 계속 창작용기를 북돋아 주군 하였다. 그 덕분에 나는 완강한 의지로 문학창작에 달라붙었다. 지난 세기 80년대 초 교원시절에 나는 당시 "천지"잡지사 부총편 조성희, 료녕성 "새마을"잡지사 주필 전정환, 연변일보사 문예부 주임 리임원과 허봉남선생, "별나라" 편집부 주임 최문섭과 허호범, 허춘희, 리태학 등  편집선생님들, "청년생활"편집부 황기철주필과 김철환 부주필 등 선생님들의 방조하에 단편소설 “의심병 후유증”, “재수령감”, “꿈많은 향화”, 실화"참된 삶", 실화 "백만장자의 길" 등 수두룩한 작품을  “천지”, “연변일보”, “별나라” , "청년생활". "새 마을" 등 잡지와 신문에 발표하였다.
    나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훌륭한 문학창작 환경을 마련하려고 무려 15년 동안이나 또 전근마라톤을 해야 했다.  나는 천방백계로 노력해 연길시병원에 안해를 먼저 전근시키고 김철환, 김재권선생님의 방조하에 끝내 모아산 열두 아리랑고개를 넘어 연길에 들어와 청소년 시절의 꿈대로 연변인민방송국 당당한 기자로 되여 맹활약하게 됐다.
    1988년부터 1996년까지 연변인민방송국 기자로 활약하는 한편  당시 연변인민출판사 부총편 리성권선생의 방조하에 연변인민출판사 특약편집으로 되여 아리랑에 실화 "중국조선족의학교육의 창시자 정규창교수"를 비롯한 실화 10여편을 문예총서 "아리랑"에 발표했다. 또 조성희 부총편, 장경숙  부총편과 허영순부총편 등의 방조하에 "천지"와 "연변녀성" 등 잡지에 단편소설이나 수필, 실화 같은 문장을 수두룩이 발표하였다. 그중 실화 "한 골과의사의 길"은 "아리랑문학상"을, 실화 "동북아황금삼각주-훈춘"은 "백두컵문학상"을 받았다. 또 리성권선생과 "천지"잡지사 소설편집부 김창석주임의 방조하에 실화 "동북아황금삼각주- 경신"을 천지에 발표하였다. 그후 신심을 가진 나는 연변인민출판사 김철환 주임의 배려하에 장편실화소설 "3.8선에서 싸우던 나날에"를 펴냈고 당시 연변인민출판사 문예부총편 리성권선생의 배려하에 장편실화 "인민의 훌륭한 법관 록도유"를 펴냈다. 나는 지금도 리성권 부총편은 눈보라치는 엄동설한에 사업이 그렇게 다망하면서도 나를 데리고 왕청에 가서 왕청현법원 록도유 취재를 지도해주던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는 사비를 털어 려비에 보태라고 200원을 내 손에 쥐워주기까지 하면서 나의 취재를 지지해주었다.  80년대말 당시 200원은 한달로임이나 되는 목돈이였다. 그는 심장병으로 불행하게 입원해사선을 헤매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자마자 문안을 간 나에게 첫마디로 "네 실화를 내준다던게 하마트면 못낼 번했구나. 그 책을 낼 때도 됐다."하고 말했다. 출원한 후 그는 진설홍 선생한테 위탁해 나의 장편실화 "인민의 훌륭한 법관 록도유"를 한문으로 번역해 출판해 연변중급인민법원과 왕청현당위 선전부의 지지하에 연변주 각급 인민법원과 왕청현 각 향진에 도합 6천부나 발행했다.
    방송국에 있을 때 나는 또 연변인민출판사 김철환 주임의 방조하에 장편실화소설 "38선에서 싸우던 나날에"를 냈었다. 림금산 부총편은 이 소설을 "료녕조선문보"에 련재되였으며 문예부 석화 주임은 이 소설을 연변인민방송국에서 2년 동안 련속랑독하게 하였다.
    9년 후에 리성권 사장과 최일균 사장의 방조하에 나는 연변인민출판사에 전근해 편집사업을 하게 하였다. 그때로부터 22년 동안 나는 본격적으로 문학창작을 하였으며 창작과 본직사업에서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물론 사업의 수요로 줄곧 그렇게 하고 싶었던 문예편집을 하지 못해 유감스럽지만 나는 종합간행물 "로년세계", "농가" 등 잡지 주필과 광고사업 그리고 신입편집들 양성 등 과중한 사업을 하면서도 여가에도 부지런히 문학작품을 창작해 창작과 사업의 황금기를 맞이했다.
    일부 아동문학작가들은 소년아동들을 대상한 종합간행물 편집으로 갓 나선 나를 두고 “성인문학작가이기에 아동문학을 창작할 줄 모른다.”, "출판사에 온지 1년도 안돼 부주필을 시켜? 뭘 안다고?" 하고 헐뜯었다. 하긴  그 로편집은 나를 헐뜯을만도 했다.  
한뉘 편집해도 소조장도 못했으니까.
    나는 “성인문학작가인 나도 아동문학작품을 창작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본때를 보이려고 아동소설 창작에 몰입하였다. 나는 공원에 가서 잰내비랑 호랑이랑 노는 걸 구경하면서 어떻게 인간세상의 소설감을 동물로 이인화하여 보여줄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령감에 따라 한편 또 한편의 동화를 써냈다.
    그러나 동화 "꼬리 긴 토끼"는  한 로편집에 의해 총살당할 줄이야.
    알고 보니 그 로편집은 나를 뒤에서 늘 헐뜯고 있었다.
     "네놈이 무슨 아동문학을 안다고 한뉘 아동문학을 한 이 전문가 머리 위에 앉아 주임 행세를 해? 주임이면 다냐? 동화는 그래도 내가 전문가지. 네 놈의 작품을 안내주면 네가 아무리 주임인들 어쩔테야?"
   그 로편집은 소인배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배심을 먹고 내가 애나게 쓴 동화를 깔아둔게 뻔했다.   
    나는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그럴수록 나는 상처 자국을 매만지면서 한편 또 한편의 동화를 써나갔다. 또 교원사업을 할 때 관찰해두었던 학생들을 모델로 애들의 눈높이로 한편 또 한편의 아동소설을 창작해냈다. 
총살맞았던 동화 "꼬리 긴 토끼"는 20여년이 지나 김선화 주필(현재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아동문학창작위원회 주임)의 손을 거쳐 <<소년아동>>잡지에 실렸다.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꽃동산"잡지사 주필 리영옥녀사와 "은하수"잡지사 주필 김성우 선생의 지극한 방조에 의해 나는 끝내 2002년에 첫 포로 아동문학작품집 “호랑이와 사냥군”을 출판했다. 그 작품집에는 그 편집이 깔아놓았던 동화 "꼬리 긴 토끼"도 번듯하게 실렸다.
    지난해에는 단편과학환상아동소설 "조왕돌 모험기"를 한문으로 번역해 한문잡지 《小小说天池》에 발표하였다. 편집부에서는 나의 과학환상아동소설을 한족 어린이들도 아주 즐겨 본다면서 반응이 꽤나 좋다고 하였다.
   나는 민족의 사명감과 의무감을 안고 우리 민족에게 자그마한 기념비라도 세워줘야 하겠다는 의욕 밑에 필승의 신념으로 밤중까지 소설창작에 혼신을 불태웠다. 어떤 때에는 새벽부터 도정신해 글을 쓰다나니 시계를 올려다보고 출근 시간이 돼 짝짝 신을 다 신고 단위로 달려가서 편집들의 웃음거리를 만든 적도 있었다. 토요일과 일요일 휴식일이면 하루에 열 몇 시간씩 컴퓨터에 마주 앉아 까딱하지 않고 글을 수개하다나니 엉덩이에 썩 살이 배기고 부스럼과 종기까지 나서 너무 아파 엉덩이를 들고 쪼그리고 앉거나 가슴에 베개를 받치고 엎드려 글을 쓴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 창작에 너무 열을 올리다나니 눈이 너무 피곤해 피가 지고 고기가 동공에 씌우기 시작해 수술까지 했다. 그래도 나는 어디로 출장 가든지 핸드 컴퓨터거나 필기장과 필을 가지고 다니면서 소설 창작을 멈추지 않았다. 한번은 인천공항에서 글 쓰기에 도정신 하다나니 그만 항공편을 놓칠 번 한 적도 있었다. 한번은 길림신문사에서 수필문학상시상식이 있었는데 나는 시간이 아까워 수상하러도 가지 못했다.  또 한번은 길림신문사 로인수기상 평심위원으로 돼 50여편의 수기를 다 평심했지만 시간이 아까와 시상식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렇게 나는 시간을 짜내  "로년세계" 편집사업을 하면서 소설창작에 몰두하였다. 제일 한심한 것은 그렇게 밤낮 애타게 창작한 파일이 컴퓨터 건판을 하나 잘 못 눌러 50만자나 없어진 사고이다. 그때 나는 컴퓨터기술이 차해 되돌리기를 할줄 몰라 파일을 원래대로 복원하지 못했다. 나는 너무나도 애나고 실망하고 맥이 풀려 한 주일이나 다시 컴퓨터에 마주 앉아 글을 쓰지 못했다.
      나도 칠정육욕이 있는 사람이다. 남들처럼 술도 마음껏 마시고 장기도 놀고 싶고 아내와 함께 명승고적을 유람하기도 싶었다. 허나    항상 “놀 걸 다 놀고 언제 글을 쓰냐?”라고 하던 김재권 은사님의 가르치심을 되새기면서 부글부글 끓어번지는 놀고 싶은 야마를 정복하고 기나긴 “글 감방”에 갇혀 글을 쓰고 또 썼다.
    리성권 사장과 한국 교문사 리완주 사장님, 김만석 교수님 등의 지극한 배려하에 중국조선족문단에서 첫 3부작 대하과학환상소설 (약 100만자) “야망의 바다”, “욕망의 천지”, “황천의 유령”을 창작해내 각각 연변인민출판사와 한국 교문사에서  출판하였다. 이런 아동소설은 한국 “아동문학세상”과 “서울문학”에도 소개되였고 “네이버”, “다음”, “모이자”, “조글로” 등 인터넷 블로그에도 널리 소개되였으며 15집 련속드라마로 각색돼 연변인민방송국에서 련속 방송되였다. 나는 선후하여 “웰빙아동문학상”, “동심컵 한중아동문학상”, “전국소년아동문학우수상” 등 국내외에서 10여개 아동문학상을 비롯한 30여개 문학상을 받아안았다.
   일부 문우들은 내가 아파트 한채는 실히 쓸어넣고 소설책 20여권이나 냈다고 "바보"라고 했다. 경제시대에 아까운 돈을 팔아 보지도 않는 책을 냈다고 비웃는 것이였다. 하긴 한 수필가는 "작가는 돈을 받고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글을 쓸수록 돈이 엄청 들어갔다. 나는 문화사막에 돈을 처넣으면서 책을 하나 또 하나 낸 그런 바보-마라토너작가이다.
  나는 진승의 명언으로 나를 바보라는 사람들한테 화답하고 싶다.     
  "참새가 어찌 고니의 큰 뜻을 알리오?" 

나는 이전에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총 7권)을 한국에서 애나게 내서 국내로 반입할 때 겪은 고행을 생각하면 몸서리칠 지경이다. 20여 상자나 되는 책을 한국 우정국에 가져다 부치니 우편료만 해도 200여만원(한화)이나 들었다. 거기에 출판비용까지 하면 진짜 자그마한 집 한채는 들어갔다. 
 
나는 우편료를 하나라도 남으려고 책을 꽉 채워넣은 배낭을 메고 책트렁크를 끌고 귀국의 길에 올랐다. 그런데 신도림역에서 지하철을 갈아타려고 책트렁크를 안고 낑낑거리며 높은 층계를 올라가다가 그만 허리띠가 툭 끊어지는 바람에 괴춤마저 훌 내려가고 말았다. 숱한 사람들 앞에서 참, 창피하기로서니. 그때 한국의 착한 한 녀대생이 책짐을 봐주어서 지하철매대에 가서 허리띠를 사서 띠고서야 간신히 책짐을 메고 끌고 공항까지 나갔다. 
 
 그렇게 애나게 책짐을 메고 끌고 지하철을 갈아타고 비행기를 타고 귀국해 가져온 책을 동료들과 문우들한테 나눠주었다. 그러나 어떤 이는 먼지 새뽀얗게 끼도록 한페지도 펼쳐보지 않았다. 그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보았을 때 내 심정인들 어떻겠는가. 참 안타깝다. 또 어떤 이는 책을 드리려고 하니 짐이 된다면서, 서재에 그 책을 둘 공간마저 없다면서 받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로실해서 좋긴한데 난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어 가슴이 미여지는 것만 같았다. 
 
    그때 그 일들을 생각하면 다신 책을 인쇄해 낼 생각도 나지 않는다. 내가 짧은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온라인시대에 조글로 작가 블로그나 핸드폰 위챗그룹에 올리면 복잡한 심열과정도 필요없고 출판비용도 들 필요없이 국계를 벗어나 숱한 독자들이 직접 소설을 볼 수 있지 않는가. 그런데 왜 하필 돈 팔아 책을 내고 그렇게 책짐을 메고 돌아다니며 고생하면서 수모를 당해야 하겠는가.그러나 나는 그런 간단한 도리도 모르고 시대의 무거운 책짐을 메고 다녔다.
    나는 나를 질투하고 무함하고 나의 창작자유를 박탈한 분들한테도 감사를 드리고 싶다. 터덜터덜하고 거친 숫돌을 만나야 칼은 더 날카롭고 서슬푸르게 날이 서는 것이 아니겠는가! 허허허. 그들이 아니였더라면 내가 어찌 창작자유가 얼마나 귀중한가를 알았겠는가! 그들이 아니였더라면 어찌 강한 문학창작의 의지를 련마했겠는가! 그들이 아니였더라면 내가 어찌 물 한 모금도 마시기 힘든 문학사막에서 상처를 매만지면서 아픔을 딛고 한편 또 한편의 문학작품을 창작해낼 수 있었겠는가!
   나는 아파트 한채를 쓸어넣고 소설책 20여권 낸 바보, 무거운 책짐을 메고 사막의 외나무다리를 달리는 사막의 바보. 
   나는 그런 바보가 좋다.  난 사는 날까지 사막의 마로토너로 뛸 거야. 물 한방울 없는 사막의 한방울 단비로 될 거야. 책에 민족의 혼을 불어넣어 사막에 기어이 옹달샘물이 퐁퐁 솟게 할 거야.  진달래 만발하는 오아시스를 눈 앞에 그려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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