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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말은 한자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한자로 이루어진 단어가 많기는 하지만 한자로는 적을 수 없는 고유어도 적지 않습니다. 또한 한자로 문장을 이룬 한문과 우리 문장의 어순은 완전히 다르지요. 우리말에 맞는 우리 글자는 1443년에야 만들어졌지요. 그전까지 우리 민족은 우리말을 사용하면서도 글자는 한자를 쓰는 이중적인 언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노래와 시까지 한자로 적는 것에는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한자로 표현하는 순간 우리말이 지닌 고유한 느낌은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나라의 시를 영어와 같은 다른 언어로 번역하면 고유의 아름다움이 사라져 버리는 것과 같지요.
신라 시대 때 사람들은 이런 문제들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우리말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향찰입니다. 향찰이란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서 우리말을 적는 방법이었습니다. 기존에 사용하는 한자를 이용해서 우리말을 적을 수도 있겠다는 참신한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우리나라 도로 표지판에 지명을 로마자로 표기한 것을 본 적이 있지요? 우리말의 발음과 비슷한 해당 영문자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향찰 표기도 이와 유사합니다. 다만 로마자가 소리만 빌려 온 것에 비해 향찰은 뜻까지 빌려 온 것에 차이가 있습니다. 실제로 한 작품을 살펴보겠습니다. 어려운 작품이 아니니 너무 겁낼 필요는 없습니다.
이 작품은 백제 30대 임금이었던 무왕의 어린 시절과 관련된 노래입니다. 무왕의 어린 시절 이름은 서동이었지요. 기록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연못가 근처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곳의 용과 정을 통해서 서동을 낳았다고 합니다. 서동이란 이름은 그가 어릴 때부터 마를 팔아서 생활했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합니다.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로 건너가 아이들에게 마를 공짜로 나누어 주며 노래를 부르게 시켰다고 합니다. 그 노래가 바로 「서동요」입니다. 이 노래가 유행가처럼 퍼져 나가 선화공주는 궁궐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쫓겨난 그녀를 서동이 아내로 삼습니다. 이후 서동은 집 근처에서 발견한 금을 진평왕에게 보내어 사위로 인정받았으며 차차 인심을 얻어 백제의 임금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자, 그럼 이제 한자로 표기된 향찰을 우리말로 읽어 볼까요.
일단 1구의 선화공주와 3구의 서동방은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신라 향가는 현대 시의 ‘행’에 해당하는 것을 ‘구’로 부릅니다.) 어차피 인물을 가리키는 말이니까요. 1구의 한자를 읽으면 “선화공주주은”이 됩니다. 이때 ‘主’는 ‘주인 주’ 자이지요. 따라서 ‘主’는 높은 사람을 가리키는 ‘님’, 아니면 존경과 사랑의 대상을 가리키는 ‘임’과 통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主’는 ‘주’라는 소리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임’이라는 뜻을 빌려 온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隱’은 ‘숨을 은’ 자인데, 여기서 뜻을 빌리면 의미가 이상하게 되겠지요. 따라서 이 글자는 뜻을 빌린 것이 아니라 ‘은’이라는 소리를 빌린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1구는 ‘선화공주님은’이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구까지만 살펴볼까요? 두 번째 구는 한자를 “타밀지가량치고(他密只嫁良置古)”로 읽을 수 있습니다. ‘他’는 남이라는 뜻을, ‘密只’는 ‘그윽할 밀’과 ‘다만 지’인데, 이 중에서 ‘密’ 자는 뜻을, ‘只’ 자는 음을 빌려 왔습니다. 그래서 ‘그지’라는 단어로 해석했지요. ‘그
지’라는 말은 ‘그윽하게’의 옛 표현이며, ‘몰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嫁’는 ‘시집가다’라는 의미이고, ‘置’는 ‘두다’라는 의미이므로 두 글자는 모두 뜻을 빌린 글자입니다. 나머지 글자는 모두 한자의 음을 빌려 왔지요. 여러분이 익히 아는 쉬운 글자 ‘古(고)’의 의미는 ‘옛’이지만 작품에서는 ‘옛’의 의미는 사라지고 오로지 ‘고’라는 음만 사용되었지요.
이처럼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쓰는 것이 향찰입니다.
향찰은 비록 한자의 음과 뜻을 빌리기는 했지만 시가를 표현하는 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향찰로 표기된 시가를 향가라고 부르지요. 비록 많은 작품은 아니지만 우리가 신라 향가를 감상할 수 있는 것은 향찰 덕이 크지요.
하지만 향찰의 운명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고려 시대에 가서 자연스럽게 사라져 버렸으니까요. 고려의 귀족은 향찰로 작품을 창작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고려의 평민은 어려운 한자를 익힐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고려 시대에도 『균여전』에 실린 「보현십원가」라는 향가가 쓰이기도 했지만 이후에 계속 창작되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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