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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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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111)
2018년 07월 24일 11시 03분  조회:1165  추천:0  작성자: 김장혁








                       2. 탈출

       5.7(함흥)대대에서 한 10킬로미터 떨어진 돌문 안에 깎아지른듯한 벼랑이 눈 뿌리 아찔하게 치솟아 있다. 덕돌이 돌문 안에 들어서자 병풍 같이 둘러선 저 멀리 두 벼랑 사이에 높은 저수지 언제가 바라보였다. 저수지 언제에서는 민공들이 개미처럼 바글거리고 있었다.
언제 아래 서쪽 산비탈에 게딱지처럼 자그마한 초막들이 서너줄 늘어섰다. 그 초막들에 진수해공사에서 뽑혀온 200여명 민공들이 들어 있었다. 말이 집이지 대충 지은 초막이어서 벽에 여기저기 구멍이 나 써늘한 가을바람이 초막에 스며들었다. 커다란 구들에 20여명 민공들이 두터운 이불을 들쓰고 드러누워 해가 밥상만한 뙤창문을 꿰뚫고 궁둥이를 비출 때까지 곤하게 자고 있었다. 전날 낮에 이어 새벽에도 흙짐을 지어 나르고 금방 들어와 곤해 떨어졌던 것이다.
저수지 공사장의 책임자 김영기는 공지를 얼기 전에 끝내려고 민공들을 낮과 초저녁 대대, 낮과 새벽대대로 나눠 윤번으로 흙을 파 올리게 하면서 마무리 공사를 다그치고 있었다.공사 무장부 부장 이인학은 전 진수해에서 모집해온 민공들 가운데 싸움꾼이 많은 형편에 따라 싸움꾼 두목들로 직속 반을 내왔다. 직속반 민공들로 민공들을 관리하는 묘수었다. 민공들은 싸우다가도 직속반 싸움꾼들이나 무장부 이인학 부장이 왔다고 하면 호랑이를 본 노루들처럼 와- 하고 몽땅 달아났다. 잡히기만 하면 또 숱한 여민공들 앞에서 창피하게 투쟁당해야 하니까.
      숱한 민공들이 고된 흙짐메기에 시달려 생산대로 달아나군 했다. 그때마다 저수지공사의 힘꼴이나 쓰는 승환과 광철 등 직속반의 애들이 손잡이트랙터를 몰고 마을에 쫓아가서 도망친 민공을 붙잡아다가 200여명 민공들 앞에서 도망분자라고 비판했다. 직속반의 애들은 싸움을 잘한 덕에 고된 일을 하지 않고 초막과 돌문 안의 초소에서 보초만 서면서 거들먹거리며 세월을 보냈다. 그들은 민공들이 달아나지 못하게 감시했을 뿐만 아니라 도망친 민공들을 붙잡아 들이면서 갖은 행패를 다 부리었다. 그리하여 민공들은 힘들어도 감히 도망칠 엄두를 내지도 못했다.
(쳇, 신형의 로투구 만인갱이구먼.)
덕돌은 한 마을의 친구 송철에게서 저수지 공지의 강압적인 관리방법을 듣고 납득되지 않았다.
그는 또 개 잡은 포수들처럼 거들먹거리는 직속반의 광철과 승환이 눈에 거슬렸다. 하지만 저수지 공지에서까지 싸우면 입단도 못하고 전도를 그르칠까봐 억지로 참으며 속을 끙끙 앓았다. 승환도 굴뱀 같은 덕돌을 아는지라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숱한 민공들이 밤에 낮을 이어 개미떼처럼 바글거리며 언제 아래 물 함지를 판 흙을 45도나 되게 가파른 발판을 타고 멜대로 메어 올렸다.
후에 덕돌을 따라 순임과 순희 그리고 동림과 허춘도 이렇게 힘든줄도 모르고 저수지 공지에로 올라왔다.
"어째 생지옥 같은 델 왔니? 얼마나 일이 고된지 알기나 하고 왔니?"
덕돌이 근심돼 말하자 순희는 히쭉 웃으면서 개의치도 않았다.
"다 사람 하는 일이겠지."
.발판이 어찌나 가파른지 순희와 순임도 문푸레 광주리에 흙을 담아 멜대로 메고 발판을 밟으며 올라가기 힘들다는 것을 느꼈다. 한번은 흙짐을 메고 물 함지 위로 올라가다가 그만 발이 미끄러 철써덕물함지에  떨어졌다. 온 몸이 물함지에 빠져 물참봉이 돼버렸다. 그래도 순희와 순임은 초막에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돌아와  계속 멜대로 흙을 메 올렸다.
공지 이론 보도원을 맡은 덕돌은 쉼에 한어신문을 당장에서 조선말로 번역해 민공들에게 읽어주었다. 민공들은 그의 높은 한어 수준에 입을 딱 벌릴 지경이었다.
덕돌은 신문을 다 읽자마자 조용히 일어나 소변을 보러 가는 척 하면서 산굽이를 에돌아가 민공들의 눈을 피해 버드나무 밑에 가서 드러누워 책을 보았다.
그때 순희도 소변을 보러 온 척 하면서 덕돌한테 살금살금 다가왔다.
덕돌은 책을 보다 말고 일어나 앉았다.
“왜 이런 생지옥으로 왔니? 어서 구실을 대고 마을로 돌아가라.”
허나 순희는 덕돌의 옆에 와 나란히 앉더니 수건으로 어깨 먼지를 털며 생글방글 웃었다.
“괜찮아. 난 네가 무슨 일을 하나 궁금하더라.”
덕돌은 콧방귀를 뀌었다.
“여긴 진짜 일제 때 로투구 만인갱보다 나은 데 없다. 여기 와서 고생할 게 뭐야?”
허나 순희는 진정어린 말을 했다.
“사실 네 입단을 하나라도 도와주고 싶더라.”
덕돌은 머리를 숙이고 나무꼬챙이로 발밑을 죽죽 긋는 방순희를 보고 코마루가 시큼해날 정도로 고마웠다. 허나 입으로는 투박하게 내쏘았다.
“별 걱정을 다 한다. 남이 입단을 하든 말든 네가 쓸데없이 이런 골 안에 와서 고생할게 뭐야?”
순희는 머리를 들어 보름달 같은 얼굴로 덕돌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덕돌아, 넌 중학교에서 이미 입단할 자격을 갖추었다고 본다. 학교에서도 네 입단지원서를 공사에  올려보냈는데 어째 공사 단위에서 비준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원, 참. 널 입단시키지 않으면 어떤 청년을 입단시킨단 말이냐?"
     순희는 덕돌의 입단사안이 왜 공사단위에서 비준되지 못한 내막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사실 장영웅은 입단소개인으로서 학교 단총지 서기 김명호선생의 지시에 따라 입단소개인 소개란에 "덕돌은 '독서벼슬론'에 물젖었기에 오래동안 고험이 필요한 동무이다. 때문에 소홀히 입단시킬수 없다."라고 써넣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덕돌의 입단은 비준되지 못했다. 
그럼 김명호 단총지 서기는 왜 한사코 덕돌의 입단을 저지하려고 했는가? 그는 황승연한테서 덕돌의 뒷말을 들어 공감을 형성했었다. 그는 공부는 잘하지만 학교에서 이른바 말썽을 일으키는 덕돌이 눈에 거슬렸던 것이다. 그런데 덕돌이 학교에 돌아와 이전에 한족애들을 데리고 싸움질하던 잘못을 고치고 표현이 너무 좋은데다가 글짓기써클에서 소식이랑 써서 신문과 방송에 내 학교 위신도 올려가게 했다. 그 바람에 덕돌의 입단을 학교에서 비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덕돌의 입단을 저지하면 말을 듣기 쉬웠다. 그리하여 김명호는 학교에서는 부득불 비준하고 사생들의 눈을 피해  암암리에 장영웅을 시켜 새 입단지원서 소개인란에 덕돌을 나쁘게 써넣게 하고 공사 단위에 올려다가 덕돌의 입단을 부결해 저지했던 것이다.
힉교 단위에서 토론할 때 원 덕돌의 입단지원서에 영웅도 덕돌을 제대로 잘 평가해 써넣었었다. 순희도 그 지원서를 보았는지라 장영웅이 김명호의 지시에 따라 새 입단지원서를 바꿔 그렇게까지 나쁘게 평가해 써넣었을줄은 깜깜부지였던 것이다.
 

    덕돌은 순희한테 모든 내막을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자기와 딱친구느라고 떠드는 장영웅을, 자기가 어떻게 입단을 도와 소개란에 좋은 말을 다 써넣었는데 입단이 비준 안돼 미안하다는 말을 횡설수설하는 "친구" 장영웅씨를 창피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덕돌은 그 내막을 전혀 모르는 척하며 한마디 말도 꺼내지 않고 장영웅이 언젠가는 량심의 가책을 느끼는 날 스스로 말할 때까지 몇년이고 몇십년이고 먼저 말하지 않고 사이좋게 보내려고 마음먹었다. 애들은 졸업할 때 영웅또 내막을 알려준 공사단위 조직위원 오영순 누나에게 루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장영웅은 공부도 잘하고 정치도 아주 능란하게 했다. 그런데 애들은 영웅이 학교 당서기하는 아버지를 믿고  삐뚤렁정치를 하면서 으시댔다고 눈에 든 가시처럼 여겼다. 그래서이랑 때려놓을 궁리를 했다. 그리하여 영웅은 덕돌을 찾아와 보호해달라고 했다. 덕돌은 지금도 애들한테 보복당해 물매를 맞은 영웅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자책했다. 그래도 허울은 보기 좋은 개살구처럼 "친구"인데 왜 영웅을 빼돌리기만 하고 함께 집까지 가면서 보호하지 못했는가 검토하군 했다. 덕돌은 영웅을 너그럽게 량해했다. 영웅인들 "어찌 단서기선생의 지시를 어길 수 있었겠는가. 선생의 말대로 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해 시키는대로 했을 것이었다. 그것이 한 청년의 전도엔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가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도 인간인만큼 덕돌한테 말하진 못해도 속으로 량심의 가책을 받을 날이 있으리라. 
    덕돌은 다만 영웅의 좋은 면만 생각했다. 다 함께 공부를 잘하는 친구라고 여겼다. 그의 아버지는 항상 "덕돌은 총명한 애야.  공부를 잘하지. 아무때든 덕돌은 사회에 쓰일 인재야."라고 외우군하면서 덕돌을 견결히 고중에도 입학시켜주었던 것이다. 덕돌은 영웅의 아버지 은공을 잊지 않고 후에도 종종 영웅의 아버지를 찾아가 인사했고 영웅의 아버지가 세상 떴을 때도 찾아가 관을 치면서 엉엉 어린애처럼 울었다. 그 불운의 시기에 곤경에 처한 덕돌을 제대로 평가하고 자기 앞날까지 내다봐준 영웅의 아버지를 생각하고 슬프게 울고 또 울었다. 덕돌은 영웅의 아버지 은공을 생각해서라도 넓은 흉금으로 영웅의  모든걸 양해했다. 덕돌은 시대를 잘못 만난 피해이다. 그 시대에는 공부를 너무 특출하게 해도 죄였다. 덕돌은 "독서벼슬론"이란 것이 뭔지도 몰랐다. 그런데 김명호 단서기는 그에게 "독서벼슬론"에 물전은 "사상이 나쁜 학생"이라는 억울한 모자를 씌워놓고 입단을 막아버렸다. 아니, 전도를 막아버리려고 혈안이 돼 미쳐 날뛰였다.
     결코 영웅의 잘못이 아니었다. 공부를 너무 잘해도 "독서벼슬론"에 물젖은 애라고 보는 그 새대의 잘못된 판단이었다. 그리하여 덕돌은 영웅과 계속 친구로 사귀기로 마음먹었다. 다만 믿던 도끼에 발등을 찍히운다고 영웅이나 다른 애들과도 사귈 때는 너무 믿지 말고일정한 거리를 두고  주의해야 되겠다고 느꼈다. 
덕돌은 마음 속으로 몇번이고 영웅에게 물었다.
(영웅아, 친구라면 진심으로 도와야지. 뭐냐? 아무리 단서기선생이 압력을 가해도 그렇지. 어쩜 그렇게 입단소개란에 소개이란게, 친구라는게 그렇게 친구를 무함해 써넣는단 말이냐?)

      덕돌은 순희한테 그 내막을 말하고 싶어도 친구를 헐뜯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순희는 덕돌의 속내는 모르고 건의했다.
" 이제라도 이 공지에서 입단하자고 노력해라. 내가영웅이랑 공지에 왔으면 좋겠다. 그와 내가 힘껏 도와줬으면 널 입단시키겠는데. 어쩌겠니? 내하고 동림이라도 소개인으로 나서서 널 꼭 입단시키련다.”

덕돌은 “고맙다.”라고 하고나서 산새들이 날아예는 맑고 푸르른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이런 말을 꺼냈다.
“공사 성환 형님이 그러던데. ‘4인무리’를 짓 부신 후 화국봉 주석을 위수로 한 당 중앙에서는 대학 입학 제도를 개혁해 이젠 시험을 쳐서 입학시킨다더라. 경산 선생님도 전번에 국경절에 갔을 때 나보고 공지에 가지 말고 대학시험복습이나 하라고 하더라. 전번에 순임도 아버지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하더라. 정규상 교수 말은 확실히 믿을 만한 정보다.”
순희도 동을 달았다.
“전번에 생산대 맨발의사 조영희도 약재를 캐러 여기 산으로 왔다가 들려서 대학시험제도가 회복된다고 말하더라. 그 애 아버지는 진수해중학교 교도처 주임이 아니고 뭐냐?”
“그럼 확실히 대학입학제도가 바뀐게 아니야?”
순희는 볼우물을 옴폭 파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나도 마을에서 도는 풍문을 들었다. 정규상 교수는 시내 병원으로 돌아간다더라. 그리고 송선 아줌마도 가무단으로 되돌아간다더라.”
“진짜 천지개벽이 일어났는가?”
“그럼 얼마나 좋겠니? 우리 둘은 이런 고생을 하지 않고 무조건 대학에 갈수 있지 않니?”
순희는 20세 청년이 아니라 천진난만한 10대 초반의 소녀 같았다. 그녀의 보름달 같은 얼굴에는 아름다운 미래가 사품쳐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부끄럼도 없이 턱을 고이고 옆에 앉은 덕돌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게 백일몽이라고나 해라. 아직도 ‘문화대혁명’ 여독이 독즙처럼 남아 있어 정치 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니?”
순희는 눈을 곱게 흘기면서 종알거렸다.
“글쎄. 저수지 공지 책임자라는 사람을 봐라. 저수지에서 일을 잘 하면 대학에 무조건 추천해 보낸다고 사기친다.”
“그게 얼리는 수작이 아니고 뭐야?”
덕돌과 순희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후 내쉬었다.
태평강 바닥의 조약돌마저 환히 들여다보이는 가을의 맑은 시내물이 조잘조잘 노래하며 흐르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승환이랑 또 우리 연애한다고 놀리겠다."
덕돌의 말에 순희는 피씩 웃었다.
"우리 무슨 어린애들이냐?"
"그래도 이전에 우린 연애하지 않았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 지금 진짜 연애한다면 그때 억울함당한게 당연한 걸로 되잖겠니?"
"그때는 철부지여서 그렇지만, 지금은 우리 선택에 달린 일이지. 누가 연애했다고 하겠으면 하라지. 호호호." 
덕돌은 순희의 당돌함에 놀랐다.
순희는 또 뜻밖의 일을 알려주었다.
"저 승환이 웃기지. 입단하겠다고 나한테 도움을 청하지 않겠니?"
"그래?"
"응, 나한테 코를 꿰웠어. 입단하지 못할가봐 우릴 놀리지 못해."
"음."
덕돌은 허구픈 코웃음을 쳤다.

    그들은 그래도 남들의 눈이 무서워 순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가고 덕돌이 뒤에서 스적스적 물 함지를 파는 곳으로 다가갔다.
“어험, 연애대장이 왔다.”
광철이가 빈정거리자 승환이가 맞장구를 쳤다.
“원래 학교 때부터 연애야 이름이 있지? 누굴 속이려고 가만히 산굽이에 가서 연애를 해?”
덕돌은 호랑이 코를 슬슬 쑤시고 건드려도 가만 놔두었다.
그러자 승환이랑 꼭뒤에 올라 앉아 똥을 쌀 지경이었다.
숱한 애들 앞인지라 덕돌은 더는 물러 설 곳이 없었다. 허나 한숨을 길게 내쉬며 광철을 보고 나직이 말했다.
“난 일하러 왔지 싸움질을 하러 오지 않았다. 이전에 덜 혼났구나. 작작 건드려라.”
덕돌이 멜대로 흙짐을 지려고 할 때었다.
갑자기 승환과 광철이 멜대로 양쪽에서 내리치고 찌르면서 덮쳐들었다.
덕돌은 발판 위에서 저쪽 발판 위로 시라소니처럼 껑충 뛰어 넘어가 냉소했다.
“정말 싸우겠니? 조용한데 가서 붙어보자!”
“개 소리 치지 말고 덤벼라!”
승환은 발판에 뛰어올라 멜대를 휘둘렀다. 허나 덕돌은 정수리를 겨누고 날아 내리는 멜대를 턱 받아 쥐어 콱 당겼다. 그 바람에 승환은 높은 발판에서 물 함지에 철써덕 떨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사태에 광철은 감히 멜대를 휘두르지 못하고 을러메기만 했다.
“오라, 둔덕에 나와 싸워보자! 네놈 새끼 이전엔 한족 애들을 믿고 우쭐거렸지. 그 새끼들이 없는 여기서 한번 붙어보자!”
덕돌은 빼앗은 멜대를 쥐고 발판에서 둔덕 위로 훌쩍 날아 올라갔다.
질겁한 광철은 멜대를 허망 휘두르며 뒤로 비실비실 물러섰다.
“저녁에 다시 보자.”
말을 맞치자 덕돌은 동림과 함께 멜대로 문푸레광주리에 담은 흙을 메 날랐다.
승환은 숱한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하고 허리를 치는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겨우 물 함지에서 기어 둔덕에 올라갔다.
“어디 두고 보자!”
승환은 비를 맞은 햇병아리처럼 돼가지고서도 입만은 살아 있었다.
덕돌은 물에 빠진 개 같은 승환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날 낮에 승환과 광철은 자기 패거리들과 함께 배를 타고 저수지의 물고기를 잡아 술이나 실컷 처먹으면서 덕돌을 까 눕힐 꿍꿍이를 쳤다.
해가 뉘엿뉘엿 지자 덕돌은 지친 몸을 끌고 공지 식당 쪽으로 걸어갔다.
동림과 덕돌이 금방 밥술을 들자 저쪽이 떠들썩하며 부산해졌다. 승환과 광철이 기세등등해 한 무리나 되는 직속반 애들을 끌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야, 나와!”
덕돌은 밥사발을 놓고 일어섰다.
“할 수 없구나. 사전에 똑똑히 말해둔다. 이번 싸움은 너희들이 먼저 걸었다. 누가 맞아 죽든지 서로 형사죄를 추궁하지 말자.”
서슬이 퍼런 말에 광철은 커다란 쌍까풀눈에 겁기를 띠더니 뒤로 비실비실 물러섰다.
“저 새끼 지금 우리하고 죽기내기 하자구 걸고 들잖니?”
“허허허.”
덕돌은 허구픈 웃음을 지으면서 독기어린 눈으로 직속반 애들을 쓸어보았다.
“담이 있으면 숱한 여자들이 보는 식당에 와서 떠들지 말고 조용한 곳에 가서 사내 대 사내로 붙어보자."
승환은 덕돌을 노려보며 방망이로 왼손바닥을 탁탁 치며 빈정거렸다.
“네 각시 순희랑 숱한 여자들이 있는 앞에서 사내노라고 큰 소리를 탕탕 치지 말라. 가자!”
덕돌이 싸우러 떠나려고 하자 옆에서 동림이 말렸다.
“저 새끼들이 저렇게 많은데 가지 말라.”
허나 덕돌은 냉소했다.
“저런 허수아비 같은 새끼들을 걱정하지 말라.”
허나 동림은 팔소매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밥이나 먹고 가라! 저 새끼들은 온 하루 고이 놀고 배때 터지게 먹고 왔다.”
“괜찮다.”
덕돌은 저수지에 와서 싸우려고 하지 않았지만 더 이상 물러설 자리가 없는 것을 보고 핍박에 의해 양산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승환과 광철은 저수지 언제로 올라갔다. 덕돌이 나는 재간이 있어도 달아나지 못하게 퇴로를 막고 생사결단을 낼 꿍꿍이였다. 허나 덕돌은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동림과 허춘도 뒤따라 왔다.
직속반의 다른 민공들은 평소에 자기들과 우쭐거리는 승환과 광철의 솜씨를 구경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승환의 포치대로 둑 양쪽을 막고 팔짱을 끼고 좋은 구경을 할 참이었다.
덕돌은 먼저 웃통을 벗고 나서는 승환을 보며 픽 코웃음을 쳤다.
“야! 이 새끼야!”
승환은 악이 받쳐 고함치더니 몸을 좌우로 시계추처럼 흔들며 8자 형으로 쌩 덮쳐들었다.
덕돌은 까딱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갑자기 그가 몸을 훌 날려 승환의 머리 위로 허공잡이로 뛰어 넘어서며 뒷발로 승환의 뒤 골을 탁 걷어찼다.
“야따! 멋있다.”
직속반 민공들이 환성을 질렀다. 그러나 눈알을 부라리는 광철을 무서워 입을 싸쥐고 구경했다.
승환은 제 힘에 걷어 채워 앞으로 엎어질 듯이 몇 발자국 비틀거리다가 나가 떨어졌다. 허나 필경 승환도 한다하는 권투수기에 인차 몸을 홱 돌렸다. 그는 맹호처럼 덮쳐드는 덕돌의 면상을 후려쳤다. 덕돌은 슬쩍 자세를 낮추며 승환의 아랫배에 무쇠주먹으로 강타를 안겼다.
“억!”
숨이 꺽 막힌 승환은 배를 부둥켜안고 허리를 꾸부리며 한쪽 무릎을 털썩 꿇었다. 덕돌은 숨돌릴 틈도 주지 않고 발길을 날려 승환의 턱주가리를 걷어 차올렸다.
쿵!
승환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대가리를 젖히며 엉덩방아를 찧고 너부러졌다.
“개새끼!”
광철과 응철이 동시에 방망이를 휘두르며 덕돌에게 덮쳐들었다.
그러나 덕돌이 하늘 공중에 훌쩍 몸을 날리더니 두 발로 동시에 광철과 응철의 턱주가리를 차 넘겼다.
“야! 멋있다!”
"진짜 주먹왕은 저 놈이구나!"
직속반 애들은 구경하다가 저도 몰래 감탄이 나왔다.
그새 숨을 돌린 승환과 광철은 자기 짝패들을 돌아보며 고함쳤다.
“뭐 하니?”
직속반 민공들은 사전 밀모대로 와 하고 동시에 덕돌에게 덮쳐들었다.
“비겁한 새끼들!”
덕돌은 하나도 겁기 없이 몸을 훌 날려 직속반 민병들의 머리 위로 날아넘어갔다. 그는 둑을 타고 동으로 달아나다가도 말머리를 돌려 창으로 찌르는 회마창(回马枪)을 날리는 전술을 썼다. 어쨌든 애들은 많아도 닫는 속도가 다른지라 제일 먼저 추격하던 애는 주먹에 얻어맞지 않으면 발길에 채워 너부러졌다. 손을 쓸 새만 좀 있어도 덕돌은 날아드는 직속반 애들의 주먹을 잡아 비틀어 저수지 둑에 보기 좋게 둘러메쳐 태를 쳐 놓았다. 저쪽에서 동림과 허춘도 직속반 민병들을 말리는 척 하다가 덕돌의 편을 들어 싸웠다.
덕돌은 허수아비처럼 휘두르던 광철의 방망이를 빼앗아 둑 아래에 내던지며 무쇠주먹으로 정수리를 탁 내리쳤다.
“앗!”
광철은 비명소리와 함께 푹 꺼꾸러졌다.
“서라!”
웬 고함소리가 산골짜기를 메우며 울렸다.
덕돌이 머리를 들어보니 공사 무장부 이인학 부장이 권총을 빼 휘두르며 뛰어오는 것이 피뜩 보였다.
그제야 덕돌과 직속반 민병들이 손을 떼고 "우야-" 하고 달아났다.
어둑어둑해지는 뚝 저쪽으로 도망치는 민병들을 보고 이인학은 권총을 넣으며 옆에서 구경하는 애들과 물었다.
"금방 싸움 솜씨 대단한 놈은 누구냐?"
민병들은 이구동성으로 “함흥대대 덕돌입니다.” 하고 소리치며 손가락질을 했다.
자초지종을 듣고 이인학 부장은 "아니, 그래 직속반 10여명이나 되는 민공들이 그까짓 덕돌을 당하지 못해!" 하고 믿어지지 않아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덕돌을 아는 민병들은 웅성거렸다.
“리 부장은 잘 모릅니다. 저 덕돌 무리는 진수해에서 굴 뱀으로 불릴 지경으로 무서운 독사무리입니다.”
“굴 뱀을 건드렸으니 직속 반 민공들이 이제 혼날 겁니다."
“멍청이 같은 새끼들이, 덕돌을 하나 이기지 못해?”
이인학은 권총집을 뒤로 밀어붙이고 뚝 아래 민공들의 초막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덕돌은 파출소에 잡혀가거나 또 비판투쟁을 받을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해 났다.
(씨, 정 비판하려고 하면 교하로 도망쳐 대학시험복습이나 해야지. 이 골 안에서 입단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사실 덕돌이 국경절에 집으로 내려갔을 때었다.
그가 마을 앞의 샘물터에서 손을 씻는데 경산선생이 그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덕돌아,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됐다. 그 골 안에서 쓸데없는 일을 하지 말고 어서 내려와 대학시험복습을 해라.”
경산 선생까지 그렇게 말하자 덕돌은 세상에 상상도 하지 못한 천지개벽이 일어났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알게 됐다. 허나 저수지 공지에서는 민공들이 달아나면 직속반 애들을 시켜 손잡이트랙터를 몰고 와서 붙잡아 가고 있었다.
“달아나도 되잡혀 갈 판인데 어떻게 달아난단 말인가? 간고한 대로 저수지에서 일하면서 복습도 하고 입단도 하자.”
요즘 날마다 이런 궁리를 하며 승환과 광철이 자꾸 집적거려도 참고 참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대판 싸우고 말았던 것이다.
(차라리 잘 됐다. 이젠 이 골 안에 아무런 미련을 둘게 없다.)
덕돌이 어떻게 투쟁을 받을까 이 근심 저 근심할 때었다.
저녁에 이인학 부장이 전등불이 희미한 초막으로 와 덕돌을 만났다. 그는 다른 민공들을 다 내보냈지만 동림과 허춘만은 놔두었다.
이인학 부장은 예상외의 말을 하는 것이었다.
“덕돌이, 참 잘했소. 개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는 놈새끼들 기를 잘 꺾어놨소. 저는 정당방위를 했소. 아무런 잘못도 없소.”
그제야 동림과 허춘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덕돌은 손에 수갑이나 차려니 하고 바늘방석에 앉은 듯이 옴찔옴찔 했다. 그 말에 편안히 엉덩이를 차가운 구들에 떡 붙이고 앉았다.
원래 사태가 엄중하면 이인학 부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교하로 도망치려고 했다. 여기서 붙잡혀 파출소에 가는 날에는 그렇게 고대하던 대학입학시험장에 가보지도 못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덕돌은 이인학 부장의 옆구리에 찬 권총집을 흘금흘금 곁눈질하면서 혹시 안심시켜놓고 돌연 습격해 잡아갈까 봐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인학 부장은 생각 외로 친절히 대하면서 덕돌의 손을 잡아 쥐고 손등을 매만지면서 소탈하게 웃었다.
“허허허. 이 무쇠주먹을 보오. 썩 살이 더덕더덕한 게 어디 우리 공지 이론 총보도원의 손 같은가? 덕돌이 힘이 세단 말은 들었지만 그렇게 날랜 줄은 몰랐소.”
그는 덕돌을 진정어린 눈으로 바라보면서 뒷말을 이었다.
“문무가 겸비된 아까운 인재 이 골 안에 파묻혔구먼. 덕돌처럼 땅을 밟고 하늘을 떠인 사내대장부를 좋아하오.”
덕돌은 오늘 직속반의 민병들을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을 보고 적이 신경이 스르르 풀렸다.
“덕돌이, 난 성환과는 친구요. 내일부터 우리 저수지공지 직속반 반장을 맡소.”
“허허허. 사람을 잘 못 보았습니다.”
덕돌의 말에 이 부장은 인차 “아니, 낮다고 시시해 그러오? 그럼 민병 연 연장을 시킬까?” 하고 물었다.
그때 덕돌은 묵묵부답하고 앉아 있었다.
옆에서 동림과 허춘은 대답하라고 자꾸 눈짓했다.
허나 덕돌은 이 골안에서 민병 연장이 아니라 영장, 아니, 저수지 공정 책임자를 시켜도 할 생각이 없었다. 이 골 안을 하루 속히 벗어나 대학시험을 쳐서 질척질척한 진흙탕 속에서 짓밟히고 업신여김을 당하는 비참한 운명을 개변하고 기자로 되는 새 인생의 행로를 개척해야 했다.
그런 속내는 모르고 이인학 부장은 덕돌을 기어이 직속 반 반장을 하라고 명령했다.
덕돌은 이 부장의 지청구에 못 이겨 조건을 내걸었다.
“승환이네하구 함께 직속 반에서 일하지 못하겠습니다. 싹 다 내보내십시오. 대신 동림과 허춘을 직속 반에 넣어 주십시오."
그러자 이 부장은 한참 궁리하더니 통쾌하게 대답했다.
“좋소. 그렇게 하오. 지금 직속반 민병들로는 400여명이나 되는 민공들을 관리하기 어려우니까. 승환이네 직속반을 놔두고 한 개 반을 더 증가하겠소. 덕돌은 직속 2반 반장을 하오.”
이인학 부장은 분명 덕돌을 이용해 패왕노릇을 하는 직속 반 승환이랑 대치시켜 제약하고 또 승환을 이용해 신생 두목 덕돌을 제약하려는 의도였다.
동림은 다른 민공들이 일하러 나간 틈을 타서 이인학 부장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덕돌을 입단시켜 주십시오.”
“덕돌이 아직도 입단하지 못했소? 내 저수지 단 총지 서기하고 부서기 방순희에게 말하겠소.”
그 말에 덕돌과 동림은 서로 눈을 맞추며 웃었다.
이튿날부터 덕돌은 직속반 반장으로 돼 팔자를 고쳐 흙짐을 메지 않고 동림과 허춘을 데리고 순라를 하게 됐고 입단지원서를 쓰게 됐다.
순희는 입단지원서를 가지고 와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고쳐 쓰라고 알려주고 나서 일어났다.
“조금만 말썽을 부리지 말고 참아라. 입단이 비준되는 날까지만.”
“허허허. 고맙다.”
덕돌은 갈퀴 같은 손으로 순희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자 순희는 귀밑까지 홍당무처럼 발개지더니 손을 빼냈다.
“야, 또 연애했다고 놀림을 당하자고 이러니?”
덕돌은 코웃음 쳤다.
“이제 누가 또 감히 나를 놀린다더니?”
순희는 초막 구들에서 일어나면서 비양거렸다.
“주먹이 세니 좋구나. 직속 반 반장 되고 입단도 하고. 흙짐도 지지 않는 게.”
덕돌은 순희를 보고 속심의 말을 했다.
“우리 이 저수지에서 달아나 대학시험을 치자.”
그러자 순희는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야. 정말 시험쳐 대학에 갈 수 있는지 누가 아니? 난 여기서 입당하고야 마을에 내려갈 테다.”
덕돌이 뭐라고 말하려는데 승환과 광철이 초막에 들어오더니 덕돌이 네를 눈에 든 가시처럼 쏘아보았다. 그러나 감히 건드리지 못하고 문을 쾅 닫고 가버렸다.
어느 날 공사에서 황종연 주임이 찌프를 타고 저수지에 와서 거들먹거리면서 공지를 둘러보았다.
공지 김 서기는 주먹 왕 덕돌을 보고 직속반 민병들을 데리고 배를 타고 저수지 물고기를 잡아오라고 했다.
덕돌은 동림과 허춘을 데리고 저수지에 가서 배를 타고 그물을 쳤다. 그때 승환과 광철이 빈들거리며 저수지에로 다가왔다. 그들도 다른 쪽배를 타고 노를 저어 그물을 늘이는 덕돌 네 배로 다가왔다.
“물에서 한번 붙어보겠니?”
승환이 또 걸고 들었다.
덕돌은 그물을 치면서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이 개 새끼야, 헤염칠 줄 모르는 모양이구나. 덤벼들어라!”
광철은 노로 물을 탁 튕겨놓으면서 걸고 들었다. 허나 직속반의 다른 애들은 누구도 덕돌에게 덤벼들지 못했다.
“작작 시끄럽게 굴어라. 어르신님이 물고기를 잡는 걸 방애했다간 네놈을 저수지 물귀신을 만들어 놓을 테다.”
덕돌의 두툼한 입에서 몇 마디 굵직굵직한 말이 나가자 질겁한 승환과 광철은 노를 저어 꼬리 빳빳해 도망쳤다.
덕돌이 네가 물에 뛰어들어 그물을 메고 헤염을 쳐 저수지 물이 낮은 막치기로 올라갈 때다. 점점 죄어드는 그물에 든 물고기들은 황급히 그물 옆으로 해 덕돌 네 허벅다리를 탁 치고 나갔다. 그물에서 빠져나간 물고기들은 이젠 살았다고 물 위에 한 키씩이나 풀렁 뛰었다가 떨어졌다. 아주 장관이었다.
그물을 다 걷고 보니 숟가락만한 허연 은빛비늘을 번쩍이는 물고기를 십여 마리나 잡았다. 그날 덕돌 네는 다섯 마리를 저수지 김 서기네 집에 가져다주고 나머지는 풀숲에 숨겨뒀다. 해질 녘에 그들은 풀숲의 물고기를 물초롱에 담아가지고 저수지 방목장에 가서 한가마나 부글부글 끓여 시뿌연 생선국을 배 세간나게 실컷 먹어줬다. 난생 처음 잘 먹고 나니 눈이 나오고 온 몸에 힘이 용용 솟구쳤다.
덕돌은 저수지에 하루도 더 물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이 생지옥 같은 저수지를 탈출할 구멍만 노리고 있었다.
어느 날, 덕돌은 공지에서 퇴근해 내려오는 순희를 만나 조용한 강변으로 데리고 갔다.
"얘, 우리 오늘 밤에 공지를 탈출하자. 어렸을 때 말한대로 함께 시험쳐 대학에 입학하자."
"오래잖으면 입단 비준 나오겠는데."
"입단은 차차 해도 되지만 입학복습은 더 미룰 수 없어."
순희는 머리를 숙이고 한참 궁리했다.
"오늘 저녁에 이 생지옥을 탈출하자."
"네 가면 나도 여기 있을게 없지."
"그럼 밤 10시쯤에 공지 서산 쪽에 오라."
순희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들은 누가 눈치채기라도 할가봐 인차 자리를 떴다.
덕돌은 해가 지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마가을 해가 드디여 서산으로 맥없이 뉘엿뉘엿 넘어갔다.
덕돌은 저녁을 다 먹자 순라를 나가는 척하면서 덕돌은 동림과 허춘을 불러 바깥으로 나갔다.
마가을 하늘에는 뭇별이 총총하고 가냘픈 초생달이 걸려 초막과 산기슭에 은빛을 내리 뿌리고 있었다.
은빛 달빛을 밟으면서 저수지 언제에 오른 덕돌은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한숨을 후 내쉬었다.
“동림아, 허춘아, 난 아무래도 마을에 내려가 대학입학시험복습을 해야겠다. 너희들도 생각이 있으면 나와 함께 이 밤으로 도망치자.”
그러자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투쟁 맞자고 도망쳐?”라고 했다.
동림은 덕돌의 손까지 잡고 정중히 말했다.
“내나 허춘이나 다 대학시험을 쳐도 희망이 없다. 너나 대학시험을 쳐라.”
덕돌은 진정을 토로했다.
“그럼, 나를 좀 도와달라.”
“무슨 일이 있으면 말해라. 우리 목숨을 걸고 너를 도울게.”
덕돌은 동림과 허춘의 손을 꽉 잡고 간곡히 부탁했다.
“얘들아, 내가 도망치다가 승환이랑한테 들키면 다른 데로 유인해 뒤를 막아 달라.”
“근심하지 말라.”
“혹시 뒤쫓는 애들이 있어도 상하게 치지는 말라. 나를 뒤쫓아 오지 못하게 뒷다리나 붙잡으면 돼. 괜히 너네 연루돼 투쟁 받지 말라.”
“걱정마라. 우리 알아서 할게.”
뒤이어 덕돌은 오랫동안 궁리한 도망칠 계획을 일일이 말하며 빈틈이 없는가 토론하고 재점검했다. 동림과 허춘은 덕돌의 면밀한 계획에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한밤중이 돼 민공들은 지친 몸을 끌고 초막으로 들어와 털썩털썩 들어 눕자 코를 드렁드렁 골며 곯아빠졌다.
(이 때면 직속반의 승환이랑 광철이랑 곯아 빠졌을 거야.)
옷도 벗지 않고 자는 척 하던 덕돌은 이불 밑에서 야광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밤 10시정각이었다. 순희와 약속한 시간이 됐다.
덕돌은 옆에 누운 동림과 허춘의 이불 안에 손을 넣어 툭툭 쳤다. 동림과 허춘도 자는 척 하다가 슬그머니 일어났다. 덕돌은 동림과 허춘의 베개까지 자기 이불안에 넣고 이불을 덮어 놓고 슬그머니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등 뒤에서 누군가 하품을 하면서 두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밤중에조용히 나갈 게지. 씨, 잠을 깨우면서.”
허춘이 뒤에 남아 초막의 동정을 살폈다. 덕돌과 동림은 바깥에 나가자 오줌을 누는 척 하며 사위를 둘러보았다.
     마가을 초생달빛이 어두운 하늘에 가냘프게 떠서 바르르 떨고 있었다. 적막한 사위에 인기척이라고는 없었다. 그런데 서산 기슭 절벽 밑에 이르렀는데 순희가 오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보이지 않았다.
(순희 다른 생각하는가?)
“어서 떠나라!”
그러나 덕돌은 좀 더 기다리기로 했다. 

“누구야?!”

갑자기 초막 앞에 승환과 광철이 나타났다.

“동림이다!”
덕돌은 사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순희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별수 없다고 생각한 덕돌은 동림과 덕돌을 와락 끌어안고나서 황급히 초막 뒤로 해 서쪽산기슭으로 부랴부랴 사라졌다.
“여기서 뭘 하니?”
“보초 선다.”
“어째 덕돌이 보이지 않니?”
“잔다.”
승환은 좀 이상해 초막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자 허춘이 뚱뚱한 몸으로 막아섰다.
“어디로 들어가? 민공들이 곤하게 잔다.”
광철도 이상한 감을 느꼈는지 전지로 사처를 이리 저리 비추었다. 그때 덕돌은 허리를 치는 마른 가둑나무 사이에 납작 엎드렸다. 전지불이 어지럽게 덕돌의 머리 위로 스쳐지나가며 허둥거렸다.
동림과 광철은 시간을 버느라고 고의로 승환과 광철과 걸고 들어 밀고 닥쳤다. 결국 그들은 승환이랑하구 치고 박으면서 다른 쪽으로 유인해갔다.
“저수지 언제에 가서 한판 붙어 보자.”
"이 새끼, 감히 덤벼?!"
승환이 동림의 멱살을 틀어쥐어 흔들었다.
"승환아, 손을 떼지 못하겠니?!"
갑자기 순희가 나타나지 않았겠는가!
덕돌은 절벽을 기어올라가다가 안타까워 돌틈에서 손을 멈췄다.
"어허, 방서기 어떻게 돼 왔소?"
승환은 입단이 걸려 순희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입단하겠으면 그만하고 직속반에 가서 당직이나 잘 서라."
"덕돌이 보이지 않는데두."
"당직실에서 기다리면 어데 갔는지 오겠지."
순희는 분명 승환을 떼서 말리고 있었다.
(순희야, 여기 오라. 빨리 도망치자.)
덕돌은 절벽을 기어오르면서 몇번이고 속으로 이렇게 고함쳤다.
승환과 광철은 시어미 역정에 개 배때를 찬다고 덕돌이 보이지 않자 동림과 허춘을 업신여기면서 저수지 언제로 뒤따라 갔다.
동림과 허춘은 한밤중에 승환과 광철과 맞붙어 싸우면서 덕돌을 쫓아가지 못하게 뒷다리를 꽉 붙잡고 늘어졌다. 순희는 입단을 올가미로 승환의 추격을 가로막아섰다.
      덕돌은 그 틈을 타서 사전 계획대로 경계가 제일 허술한 서산 절벽을 톱아올라 산꼭대기 보초망마저 교묘하게 벗어났다. 그는 산마루에 오르자  산아래를 바라보며 안타까움에 가슴을 탕탕 쳤다.
(순희야, 왜 안와?)
덕돌은 자기를 탈출시키려고 도망치지 않고 엄호한 순희를 생각하자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그때 전지불이 또다시 어지러이 절벽이며 산마루까지 어지러이 비췄다.
(안돼. 어서 도망치자.)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령 길을 타고 쏜살같이 도망쳤다.
돌문 안 산꼭대기에 마주 서 있는 망루까지 벗어나자 덕돌은 어둠 속에 잠긴 저수지 쪽을 돌아보며 숨을 돌렸다.
“생지옥을 승리적으로 탈출!”
허나 덕돌은 시름놓지 못했다.
주먹을 불끈 쥐고 10킬로미터나 떨어진 조개덕을 바라고 마라톤식 달리기를 계속했다. 어둠 속에서 돌부리를 걷어차 넘어져 발가락 끝에서 피 흘러 모질게 아파나도 상을 찡그리며 일어나 길 옆의 야들야들한 풀잎을 훑어 피를 쓱 닦아버리고는 절룩거리며 계속 끈질기게 달렸다.
“달아나야지. 빨리 책을 가지고 고하로 달아나야지.”
닫다가 숨이 차 좀 걷다가도 중얼거리면서 또 달렸다.
한참 달릴 때었다.
묽어진 어둠 저편으로 동녘하늘이 희붐히 동트고 있었다. 새날을 갈망하던 덕돌의 한숨에 퍼렇게 멍이 들었던 하늘이 점차 어둠을 부시며 찬란한 햇빛을 빛 뿌리며 밝아오고 있었다.
“날이 밝기 전에 조개덕을 벗어나야 해.”
덕돌은 연신 되뇌이며 조개덕을 바라고 달리고 또 달렸다.
그가 조개덕에 이를 때까지 령 길에서 달리면서 보니 손잡이트랙터 헤드라이트 불빛도 보이지 않았고 엔진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덕돌은 조개덕 마을 어귀에 이르러 마을 동정을 살피다가 마을 서쪽 마른 수수대가 서있는 밭으로 해 슬금슬금 허춘의 집 구새 목에 이르렀다. 벽에 몸을 기대고 아무리 살펴봐도 자기 집 주위에 이상한 인기척이 없었다.
그제야 덕돌은 숨을 죽이고 허춘 네 집 앞마당을 꿰질러 나가 자기 집 뒤울안 바자 안으로 몸을 날려 뛰어 들어갔다. 뒤이어 그는 슬금슬금 뒷벽 밑에 다가가 고방 문을 살며시 열고 고방으로 들어갔다.
잠이 적은 상순은 고방에서 무슨 인기척이 나는 것을 듣고 윗방에서 문을 뚝 떼고 고방에 들어왔다.
“누구야?!”
공안국 국장 출신인 상순은 순간 경각성을 높였다.
“냅니다.”
나직이 대답하는 소리를 듣고 상순은 놀랐다.
“아니, 덕돌이 아니냐? 어찌된 일이냐?”
덕돌은 어둠 속에서 책궤를 들춰 주머니를 찾아 쑤셔 넣었다.
“길게 말할 새 없습니다. 직속 반에서 추격해 올 겁니다. 일체 모른다고 하십시오. 온 적도 없다고 하십시오.”
명옥도 정지에서 달려 들어왔다.
“아니, 무슨 일을 쳤니?”
“아니오. 난 대학시험 복습을 하러 교하로 달아나야겠습니다. 저수지 직속 반에 붙잡히면 난 전도를 망칩니다.”
덕돌은 정작 시험제도를 회복했는데도 시험을 한달 앞두고 쫗겨다니는 자기 신세가 서러워 어린 애처럼 아버지 품에 안겨 “엉엉.” 대성통곡쳤다.
진짜 싸움꾼 두목 같지 않게 어린 애처럼 엉엉 울었다.
“이제 복습해 어떻게 대학에 붙는다고 이러니? 괜히 잡히면 투쟁 받겠다. 저수지로 돌아가렴.”
“난 달아나야 합니다. 만약 저수지 직속 반 민병들이 들이닥치면 아버지와 어머니 그 놈들이 뒤 다리라도 붙잡아주십시오.”
“알았다. 빨리 가라!”
명옥은 두 손으로 머리를 쓸어 뒤로 다듬어 올리더니 까래 밑을 들춰 치워 두었던 돈 5원을 꺼내 덕돌의 손에 쥐어 주었다.
“차비를 해라.”
덕돌은 책 주머니를 둘러메고 고방 문을 살며시 열고 나가면서 “근심하지 말고 잘 있으십시오.”라고 하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
덕돌이 뒤울안 바자를 뛰어 넘어 동틀 무렵에 수수밭으로 사라졌다. 그는 혹시 직속 반 승환이랑 뒤쫓아 올까봐 진수해 기차역 쪽으로 가지 않고 진수해 서쪽 기차역을 바라고 뛰었다. 그가 패용천산 앞까지 뛰어 갔을 때다.
통통통 손잡이트랙터 다급한 엔진 소리가 조개덕 쪽에서 울리더니 마을 개들이 자지러지게 짖어댔다.
진짜 저수지 직속 반의 승환과 광철이 뒤쫓아 왔던 것이다.
사실 승환과 광철 등 직속1반의 민병들은 한밤중에 한 식경이나 싸워 동림과 허춘을 쳐 눕히고 황급히 초막에 돌아와 덕돌의 이부자리를 훌 들어보고 이불안의 베개 셋을 발견하고서야 꼬임 수에 든 것을 뒤늦게나마 알게 됐다.
“이 새끼, 어디로 달아나!”
그들은 그 길로 손잡이트랙터를 몰고 조대덕으로 쫓아왔던 것이다. 허나 덕돌은 집에도 없었다. 덕돌의 부모와 물어보아도 시치미를 뚝 따는 것이었다.
“어허, 이 자식이 하늘로 올라갔니? 땅 속에 기어들어갔니? 정말 신출귀몰하는구나. 우리 손잡이트랙터보다 더 빨리 뛰었단 말인가?”
그들은 닭 쫓던 개 지붕을 쳐다보는 격이 돼 맥없이 저수지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됐다.
덕돌은 책 주머니를 둘러메고 직속 반 민병들이 혹시나 쫓아올까봐 패용천산을 넘어 칼산 뒤 령길을 타고 줄행랑을 놓았다.
희뿌옇던 동녘하늘이 붉게 불타오르더니 구리바라 같은 뻘건 해가 불끈 솟아오르며 꽃구름송이들을 붉게 물들였다.
덕돌은 직속 반 민병들을 따돌리고 마수에서 벗어나자 훨훨 날듯이 홀가분함을 한 마음으로 느꼈다.
그는 시원한 이른 아침 산 공기를 한 가슴 뿌듯이 한껏 마시며 중얼거렸다.
“아, 끝내 새 날이 밝아왔구나. 얼마나 기다리던 새날인가?”
그날은 덕돌의 한뉘에 잊을 수 없는 1977년 10월 25일이었다.
맑고 푸른 가을 하늘에 매 한 마리가 가없이 파도치는 황금물결 위로 자유로이 훨훨 날아예고 있었다. 산새들도 새날을 반겨 재잘거리며 노래하고 제비들도 강남으로 날아갈 준비로 나래를 굳히려고 훨훨 나래치고 있었다.
아, 새 가을날의 하늘은 형언하기 어렵게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3.개천에서 난 용


    해 서쪽에서 떴는가?
    생산대 빈농들의 추천을 받아 대학에 가려고 으스대던 성욱은 대학에 가기는커녕 대학입시 낙방의 고배를 마시게 됐다. 성욱은 생산대 회계에 손잡이트랙터 운전수이기에 가히 생산대 청년들 속에서 벼슬이 제일 높다고 할 수 있었다. 기실 상순은 뭘 보아도 성욱은 덕돌과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허나 그는 생산대 정치대장을 하면서 자기 아들을 회계나 손잡이트랙터 운전수를 시킬 수 없어 성욱을 시켰던 것이다. 남 보기도 좋고 집안 화합도 도모할 것 같았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성욱은 자기 잘난 척 하면서 온 동네를 개 턱 쳐들고 돌아다니면서 청년들을 쥐락펴락 했던 것이다. 특히 집체호 조영희랑 앞에서 자기가 어떻게 대학시험을 잘 쳤노라고 한바탕 자랑했다. 반년 넘어 집에서 주산 알이나 튕기면서 공부한 그가 낙방하리라고는 누구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한 달 밖에 복습하지 못한 덕돌이 시험을 쳐 대학에 입학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덕돌은 성욱이, 영웅이, 광철이, 순희가 첫해에 대학입시에 락방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아무리 옥신각신 다툴 땐 있었다 해도 좋은 시대에 다 함께 농촌을 벗어나 대학에 가면 얼마나 좋겠는가!"
덕돌은 모교 선생님들 말처럼 나는 놈은 나는 놈이었다. 그러나 덕돌은 아주 간고하게 복습해 대학으로 갔다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아, 글쎄 저수지 공지에 갇혀 흙짐을 메 나르다나니 시험 날자 11월 27일을 한 달 앞두고 교하로 도망쳐 복습하지 않았는가? 그것도 한 달 밖에 없는 복습시간에 처음에는 복습방향을 제대로 정하지 못해 리과를 복습하다가 반달 앞두고 문과로 대학입학 지망을 바꿨던 것이다. 사실 문과 복습은 반달 밖에 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느 날, 춘자는 초불을 두 대나 켜놓고 눈을 집어 뜯으면서 덕돌의 한문복습제강을 조선어로 번역했따.
그녀는 피뜩 “얘, 혹시 넌 눈이 일 없니?” 하고 물었다.
덕돌은 화확 문제를 풀다가 “괜찮소. 시력이 1.5인데. 어째 그러오?”라고 하며 개의치 않았다.
춘자는 귀여운 동생을 마주보며 근심했다.
“아니야, 혹시 색맹이 아닌지 해서 묻는 거야. 이전에 나도 의학원에 가려고 했는데 색맹이 돼서 의학원으로 가지 못하고 농학원으로 갔다.”
     덕돌은 화학책을 놓더니 얼굴이 굳어졌다.
“전번에 군 입대 신체검사를 할 때 색맹이 돼서 입대하지 못했소.”
춘자는 번역하던 화학복습제강을 놓았다.
“그럼 지망을 고쳐야 해. 색맹은 의학원에 가지 못해. 색깔을 가리지 못하면 약물이나 실험관 화험 결과를 제대로 볼 수 없어.”
“양? 이젠 시험 날자가 반달 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래도 넌 문과를 해야 한다. 나처럼 농학원에 가겠니?”
덕돌은 반날 동안 궁리하다가 누나와 토론하고 문과시험을 치기로 하고 지망을 YB대학 정치학부로 고치기로 합의를 보았다.
지망을 고치기 위해 덕돌은 동곽 선생처럼 책 주머니를 둘러메고 다시 함흥 대대 조개덕으로 돌아왔다.
그때 함흥중학교로 가서 문과복습제강을 가지러 가니 경산 선생은 아주 맥이 풀려 했다.
“어쩌겠니? 처음부터 문과를 해도 시간이 모자라겠는데 시험 날자를 반달 앞두고 문과로 치겠다고 하니.”
경산 선생은 복습제강을 내주면서 위안해 주었다.
“괜찮다. 올해 입학하지 못하면 명년에 또 치지. 명년에는 천천히 잘 복습하면 꼭 입학할 수 있을 거야.”

덕돌은 현 교육국 학생모집 사무실에 찾아가 대학입학 지망을 YB대학 정치학부로 고쳤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위방 문을 탄자로 막고 두문불출하고 정치복습제강을 암송하고 나서 지리와 역사 교과서를 가져다 들여다보았다. 조선어 복습은 별로 하지도 못했다. 복습제강의 작문제목 40여개를 몇 개 유형으로 나눠 서너 개 작문을 지어보았을 뿐이다. 기실 평소에 조선어문법책과 문예창작이론 책을 놓지 않은데다가 평소에 소식이나 통신, 시, 소설도 써 보았기에 다시 별로 들여다보지 않아도 됐던 것이다. 
문과 복습을 반달도 하지 못한 덕돌이 대학에 입학하다니?
온 마을 사람들과 함흥중학교의 사생들이 놀랄 일이 아니겠는가!
“소몰이를 하던 덕돌이 대학에 붙을 줄은 누가 알았겠소.”
온 동네에 소문이 자자하게 났고 감탄이 끝이 없이 뒤따랐다.
“덕돌은 총명한 놈이야.”
“한 달도 복습을 하지 못하고 대학에 붙다니?”
“글쎄 말이오. 집체호 애들은 모두 진수해중학교 교원 자식들이어서 시험제도가 회복될 거 안지도 오래오. 집체호 청년들은 반년 넘어 복습했는데도 입학하지 못했는데 소를 몰던 농사군의 아들 덕돌이 대학에 붙었단 말이오.”
“기적이오. 기적!”
“그래서 개천에서도 용이 난다는 거요.”
덕돌은 후에 친구 영웅과 순희가 대학입시에 락방했다는 비보를 듣고 마음이 아팠다.
"공부를 잘한 학생들이 대학으로 가는 좋은 시대를 만나 영웅과 순희가 함께 대학에 갔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덕돌은 참 아쉬웠다. 후에 덕돌은 친구로서 영웅과 맹광철한테 대학입시복습자료랑 얻어 가져다 주면서 성심성의로 지원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순희는 그때 덕돌을 무사히 저수지 공지에서 탈출시킨 후 승환과 이인학 부장한테 일 보러 집에 간다고 청가맡고 공지를 유유히 떠나버렸다. 그녀는 그 길로 기차를 타고 둘째오빠가 있는  북경으로 도망쳐 복습했다. 그녀의 둘째오빠는 국가 모 부에서 사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수도 북경 유명중학교 복습제강을 그녀에게 수두룩이 가져다 주어 복습시켰다. 그런데 한어로 시험치다나니 급제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덕돌은 자기보다 공부도 잘하고 정치도 잘한 순희가 만약 연변에서 조선어로 쳤다면 꼭 첫해 대학입시에 입학했을 것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항상 손잡이트랙터를 몰고 공지에서 도망친 민공들을 쫓아가 공지로 붙잡아들이던 승환이랑 광철이랑 만행을 한없이 증오하게 됐다. 만약 그 애들이 공지로 붙잡아간다고 날치지만 않았어도 순희는 북경으로 도망칠 필요 없었고 뒷근심없이 연변에서 조선어로 시험치지 않았겠는가.
(정말 괘씸한 놈새끼들이야. 입단도 하지 못하면서 숱한 애들을 노역화한 공지에 붙잡아들이고 전도를 해치면서 애먹이지 않았는가.) 
사실 덕돌도 시험을 칠 때 아슬아슬한 고비른 넘긴 일도 있다.
시험을 친 첫날 오전에 수학을 치고 오후에 정치 시험을 치게 됐다. 덕돌은 점심에 둘째외삼촌 근룡의 집에서 점심을 대충 먹고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정치 복습제강을 쥐고 윗방에 들어가서 문을 꼭 닫고 복습했다.
그는 한 문제라도 더 복습하려고 드문드문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면서 복습제강을 한 문제 한 문제 암송해내려 갔다.
“야, 어째 아직도 시험치러 가지 않았니?”
정옥이 바깥에서 들어오더니 소리쳤다.
“엉?”
덕돌이 황급히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이제 12시 30분이구나. 한 10분 더 복습하고 가도 된다.”
“야, 남들은 다 가더라. 어째 이제 12시 반이냐?”
그제야 덕돌은 손목시계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아차, 이게 손목시계 잤구나.”
뜻밖의 사변에 덕돌은 복습제강을 활 던지고 시험장으로 부랴부랴 손살같이 뛰어갔다.
시험장을 지키는 선생은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빨리 뛰어들어가라고 했다. 1분만 더 늦어도 시험시간이 지난 지 10분 넘어 시험장에 들어가지 못할 번했다. 만약 정치시험성적이 없었더라면 대학에 입학하지 못했을 것이 아닌가?
손목시계가 우연히 잘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외사촌 여동생 정옥이 들어와 알리지 않았어도 큰 일 날 번했던 것이다. 그러게 아버지 말이 맞지.
"뭐나 여지를 둬야 한다."
  그의 아버지 상순은 항상 이렇게 말하면서 회의를 가도 반시간전에 가서 앉아 기다렸다. 교통히 불편한 때 기차를 탈 때는 더했다. 한 둬 시간 전에 가서 기다린다.
그럴 필요없다면 항상 이렇게 말하군 했다. 
"뭐나 여지를 둬야 해. 의외 일이 생기면 기차를 놓칠 게 아니냐?"
그 말은 완전히 맞았다. 딱 시간을 맞춰 여지를 두지 않으면 차를 놓치는 때가 수두룩하다.
외삼촌댁은 자기네 집에 들어있으면서 대학시험을 치는 덕돌이 저녁에 윗방에서 복습하면서 배고플 까봐 늘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와 깎은 무를 쪼개어 들여다 주군 했다.
“목이 마르겠는데 무를 먹으면서 복습해라.”
덕돌은 코마루가 시큼할 정도로 외삼촌댁과 정옥이 고마웠고 은정을 잊을 수 없었다.
5.7(함흥)중학교 수학과, 물리과 선생들도 덕돌을 두고 의논이 분분했다.
“아까운 애가 문과생으로 됐소.”
“색맹이 아니었더라면 수학이랑 물리랑 공부를 잘한 덕돌은 의학원에 갔을 게요.”
덕돌은 대학입학통지서를 받아 쥐자 제일 처음으로 철봉과 성환 그리고 경산 선생을 찾아가 삶은 돼지고기와 닭 알로 간소하게나마 술상을 차려 드렸다.
그는 무릎을 꿇고 술잔을 찰찰 넘치게 세 분에게 부어 올리고 나서 감격에 넘쳐 인사말을 올렸다.
“정말 고맙습니다. 선생님과 형님들의 가르침이 없었더라면 오늘 제가 소를 몰지 않고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겠습니까? 정말 백골난망입니다.”
철봉은 의젓한 대학생으로 된 동생을 보면서 기쁜 술을 쭉 들며 연신 찬탄을 금치 못했다.
“덕돌은 총명하고 은공을 잊지 않는 애야.”
성환도 고개를 끄덕이며 덕돌을 타일렀다.
“충효와 의리는 이 세상에서도 위인의 기본인 거야. 꼭 명심해라.”
스승이자 형님들인 그들 셋은 마음껏 기쁜 술을 마셨다.
진수해중학교에 전근해간 경산 선생은 상순에게 소식과 통신 쓰기를 가릋쳤을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작성한 역사, 지리, 정치 등 중점복습제강을 얻어다 덕돌에게 주었던 것이다. 철봉과 성환 두 형님은 동생에게 지식과 시, 재담 등 글쓰기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인생의 도리까지 가르쳤던 것이다.
덕돌은 그들의 은공을 한뉘 평생 잊을 수 없었다. 사제 간과 형제는 마음의 대문을 활짝 열고 소설 같은 인생살이와 세상만사를 좌담하며 소탈하게 마음껏 술을 마셨다.
한편 예순 고개에 오른 상순은 너무나도 기뻐 온 얼굴의 주름살이 쫙 펴지도록 무시로 혼자 웃었다.
명옥은 널다란 집 안 구들에서 너울너울 어깨춤까지 혼자 출 지경이었다.
상순은 외동아들이 대학에 간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몰랐다. 더구나 세상이 바뀌어 이계삼 서기와 허영주 부현장이 현인민정부로 돌아가게 된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몰랐다. 그는 자기를 위대한 중국 공산당 당원으로 양성해주었고 한뉘 수십 년 동안 희로애락을 함께 하면서 혁명해온 노간부들을 환송해야 했다.
(진짜 천지개벽이 왔다. 우리 세상이 다시 온 것이 아닌가?)
상순과 덕돌은 한창 자라는 중돼지를 잡고 온 마을 남녀노소와 함흥중학교 교원들을 몽땅 청해 술잔치를 베풀고 함께 기쁨을 나눴다. 오랫동안 생산대에서 단지부 서기를 맡은 집체호 최희랑 덕수랑 덕돌의 입단소개인을 하면서 덕돌을 정치상에서 도왔다. 그들은 또 함께 소방목을 하던 소몰이군친구였다. 그들은 비록 대학에 입학하진 못했지만 친구의 입학소식에 기뻐 덕돌이네 집에 찾아왔다. 그런데 함께 기쁨을 즐겼으면 좋을 것 같은 친구 영웅과 맹광철, 심지어 순희도 오지 않은 것이 섭섭했다.
(혹시 대학입시에 락방돼 오지 않았는가?)
     이때 상순은 이계삼과 허영주 두 분을 위방 상좌에 모시고 술잔을 들었다.
“김 대장, 있소?”
이때 뜻밖에도 흥수가 조개턱을 쳐들고 위방 문을 떼고 들어섰다. 모두들 눈을 흘길 뿐 앉을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이 서기, 미안합니다.”
흥수는 옛날과는 달리 이계삼의 옆에 붙어 앉으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다 ‘4인무리’의 죄악입니다. 그 놈들이 계급투쟁을 부르짖으면서 노 간부들을 못살게 굴게 했습니다. 한때 나는 착오적인 노선을 집행해 노 간부들을 푸대접했는데 용서하십시오.”
상순은 속으로 오뉴월 소불알처럼 이 다리 짝에 붙었다 저 다리 짝에 붙었다 하는 더러운 새끼라고 욕했다.
이계삼과 상순의 흘기는 눈길을 보고 흥수는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았다. 허나 오랜만에 생긴 술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술상에 김이 몰몰 나는 돼지고기 점을 담은 사라를 보고 마른침을 꼴깍 삼키는 위인이었으니 되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미운 놈을 떡 하나 더 준다고 상순은 흥수에게도 술잔을 권했다.
이계삼 서기는 흥수를 쓸어보면서 엄숙하게 말했다.
“이날이 오리라는 걸 몰랐지? 과거 잘 못을 알았으면 됐소. 이후에는 권력다툼에 쌍불을 켜지 말고 권세욕을 작작 부리오. 백성들을 잘 살게 하는 게 최대의 정치요.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 하지 시계추처럼 정치파도에 휘말려 이랬다저랬다 양면수법을 쓰면 못 쓰오. 정치라는 건 진리를 파악하고 올바른 길로 나가야 하지 눈앞의 세도에 아부굴종해선 안되오.”
“예, 예, 예. 명심하겠습니다.”
옆에 앉은 허영주는 묵묵히 날카로운 눈길로 흥수를 쏘아볼 뿐이었다.
흥수는 오시러와 더 앉아 있지 못하고 정지에 나가 한쪽 구석으로 가서 앉았다.
허영주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나쁜 놈 새끼, 문화대혁명 때 황종연이랑 황승연이랑 반란 파들과 짜고 들어 우리 간부들을 얼마나 못 살게 굴었소. 더러운 새끼, 이젠 우리한테 알락 거려? 허백호 서기랑 다 저 놈들의 피해를 받아 억울하게 감옥에 갔소.”
이계삼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이제 억울하게 고깔모자를 쓰고 투쟁 받고 피해 받은 노 간부들의 원한을 갚을 날이 오겠지.”
상순은 좌중을 둘러보더니 올 분들이 다 온 것을 보고 술잔을 들고 일어섰다.
그는 숱한 마을 사람들이 들어앉은 위방과 정지에 대고 목청을 돋우어 말했다.
“여러분,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천지개벽이 일어났습니다. ‘4인무리’의 박해를 받아 우리 마을에 내려와 이른바 노동개조를 하던 이계삼 서기와 허영주 부현장께서 다시 현인민정부로 돌아가게 됐습니다. 또 겸사하여 오늘 내 아들 덕돌이 어엿한 대학생으로 됐습니다. 모두 여러분들이 도와준 덕분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이 두 가지 기쁜 일을 경축해 기쁨을 나누려고 이 자리에 청했습니다. 자, 여러분 오늘 실컷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춥시다!”
상순은 우선 이계삼과 허영주와 잔을 마주치고 마을 여러분께도 잔을 들어 인사했다.
“자, 앞의 잔을 비웁시다.”
뒤이어 덕돌이 마을 여러분께 술을 부어 올리고 간단히 말했다.
“여러분, 오늘 아주 기쁩니다. 여러분들의 방조에 힘을 입어 저는 파란만장한 어지러운 세상을 헤쳐오고 오늘 끝내 대학에 입학하게 됐습니다. 저는 ‘4인무리’를 짓 부시고 대학 입시 제도를 회복해 오늘의 찬란한 미래를 개척해준 화국봉 주석을 위수로 하는 당 중앙에 감사를 드립니다. 하늘땅이 지동치더니 천지개벽이 일어났습니다. 개천에서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고 가을에 칼산의 사과배꽃이 피었습니다. 해가 서쪽에서 뜨는 그날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이제껏 저를 사람으로 만드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덕돌의 말에 모두들 “대학생이 다르긴 달라.” 하고 머리를 끄덕이며 엄지를 내 휘둘렀다.
덕돌은 여러분의 요청에 의해 “도라지”를 건드러지게 불렀다.
그 노래 소리는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와 흐르는 기쁨의 노래, 축복의 노래여서 아주 건들건들 하고 흥겨웠다. 그 노래 소리에 맞춰 어머니 명옥은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상순은 너무 기뻐 유일한 주제가 “호미가”를 흥겹게 불렀다.

동산천리 돋으신 해는
점심때가 되어 온다
에라 에라 에라 호미야
호미 호미를 메고 가자

알뜰하게 가꾸어라
땀에서 나오는 곡식이다
에라 에라 에라 호미야
호미 호미를 메고 가자


덕돌은 아버지가 노래를 그렇게 즐겁게 부르는 모습을 난생처음 보았다. 어머니가 흥겨워 도라지를 부르며 어깨춤을 추자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허영주와 정규상도 일어나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이계삼은 도라지를 출줄 몰랐으나 엉거주춤 일어나 팔과 다리를 들었다 놨다 하며 양걸 비슷하게 춤을 추었다.
그들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천지개벽이 일어나 글쎄 며칠 후면 현인민정부로 돌아가게 됐다. 그보다도 역경 속에서 환난을 함께 겪으며 자기들을 보호해온 상순의 아들이 대학에 가게 된 것이 너무나도 기뻤다.
조영희와 순희 그리고 순임도 춤판에 끼어들었다. 그들은 대학 시험에 급제하지 못했지만 마음속으로부터 덕돌의 대학입학을 축하하며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정규상은 자기 딸 순임이가 대학에 가지 못해도 덕돌이랑 함께 놀면서 건실히 자라나서 마음이 놓였다.
동림과 허춘도 얼근히 마시고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게다가 상선마저도 찾아와 목책까지 기념품으로 주고 축배를 들었다. 다만 성욱이가 왠지 덕돌이 청해도 낯도 내밀지 않았다.
송선은 오랜만에 일어나 도라지에 맞춰 우리 민족의 무용 도라지를 너울너울 추었다. 모두 눈이 휘둥그래 마흔 고개에 오른 송선이 날씬한 몸을 버들가지처럼 놀리며 추는 우아한 온돌무용을 구경하며 연신 박수갈채를 보냈다. 송선은 기쁨의 눈물을 머금고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쁜 마음을 손과 몸에, 얼굴의 표정에 담아 최고의 기교로 도라지를 너울너울 춤추었다. 때로는 꽃나비 같이 나풀나풀, 때로는 경쾌하게 나래치는 학 같이 너울너울.
“덕돌의 대학입학을 열렬히 축하해요.”
춤을 마친 송선은 덕돌과 상순을 번갈아 보면서 허리까지 굽혀 경례까지 올렸다. 상순과 덕돌도 바삐 벌떡 일어나 인사를 받으며 답례했다. 송선은덕돌과 함께 수레로 수수단을  실어오다가 소수레가  번져져 고생하던 일을 말하면서 덕돌을 치하했다.   

이때 정지가 소란스러워졌다. 
“나도 덕돌이 대학에 간 걸 축하한다.”
모두들 춤을 추다가  문께를 바라보았다. 덕돌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희나 영웅이 오는가고 눈뿌리 빠지게 내다보았다. 그런데  해월이 애를 업고 춤판에 끼어들었다.
그는 춤을 추다가 잔등 포대기에서 애를 꺼내 들어 덕돌에게 안겨주려고 내밀며 떠들어댔다.
“야, 네 아들이다. 안아 봐라! 아들애도 당신이 대학에 간 걸 축하한다. 이걸 봐라, 헤쭉헤쭉 웃는다. 헤헤헤.”
순간 마을 사람들의 춤판은 깨졌다.
덕돌은 저으기 긴장해졌다.
“야, 너 미쳤니? 건 네 장충국과 살아서 난 애야. 다 아는데 왜 생사람 잡니?”
허나 해월은 발을 동동 구르면서 떼를 썼다.
“충국이 싸질렀든지 네가 만든 애든지 대학생인 네 아들이래야 잘 살게 아니야? 이 애를 책임져라!”
해월은 기어이 포대기에 싼 애를 덕돌에게 떠맡기려고 밀어주었다.
그때 장충국이 뛰어 들어와 야단쳤다.
“정신 나갔어? 건 내 아들이야!”
해월은 때 괴죄죄한 충국의 낯빤대기를 찰싹 후려갈겼다.
“이 더러운 지주 새끼야, 얘가 어찌 네 아들이야? 지주 손자라구, 전도 망친다, 망쳐! 얜 내 첫사랑 덕돌과 난 앤데.”
덕돌은 입을 하 벌리고 서 있었다. 순간 순희와 조영희 그리고 정순임의 눈길이 모두 해월과 덕돌에게 쏠렸다. 마을 사람들 수십 쌍의 눈길도 일시에 쏠렸다.
이때 흥수가 뛰어나와 어색한 장면을 타개했다.
“여러분, 미안. 얘는 정신 나갔으니 양해하라니께.”
해월은 애기를 마구 덕돌에게 안겨주고 나가려고 했다. 허나 덕돌은 애를 흥수에게 안겨줬다.
돌도 안 된 불행아의 울음소리가 귀청을 아프게 때렸다.
마을 사람들은 흥수 뒤통수에 대고 손가락질 했다.
“산아제한한다고 남의 아낙네 배를 가르겠다고 날뛰더니. 흥! 제 딸은?”
“그러게 말이 아니오? 결혼도 하지 않고 지주네 애를 낳다니?”
“쯧쯧쯧, 어쩜 저런 미친 딸을 두었소?”
개꼴 망신을 당한 흥수는 애를 해월에게 안겨 가지고 자리를 떴다. 춘실도 더 앉아 있을 면목이 없어 훌쩍 일어나 문을 쾅 닫고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충국은 때가 덕지덕지 붙은 허연 머리카락을 보란 듯이 손으로 쓱 씻어 올리더니 헤벌쭉 웃어 보이며 따라 나갔다.
“너희들도 내처럼 늘그막에 새파란 처녀한테 장가들어 아들을 놔봐라!”
상순은 충국의 잔등을 흘겨보더니 술맛이 없어 머리를 홰홰 돌렸다.
한편 흥수는 뒤따라오는 충국을 보자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올랐다. 밸 같아서는 죽여 치우고 싶었다. 이젠 충국은 집도 없이 벽돌공장 당직실에서 홀로 살다나니 때도 온전히 끓여먹지 못하고 세수도 하지 않아 때 투성이였다. 이젠 너무 투쟁을 받아 정신이 나갔는지 모든 장소에서 항상 중얼거리지 않으면 미친 소리를 마구 쳐댔다.
흥수는 충국과 같이 더러운 놈에게 딸이 짓밟힌 것을 생각하면 속에 불이 활활 타올랐다.
“저 새끼를 어떻게 하면 원수를 갚을까?”
이때 충국이 또 따라와 팔소매를 잡아 당겼다.
“가시아버지, 가시아버지, 우리 여동생 집에 가서 술이나 한잔, 응?”
충국은 손을 입에 가져다 대고 술을 마시는 시늉을 했다.
“가라, 누가 가시아비냐? 다시 내 딸을 건드렸다간 목을 썩뚝 잘라버릴 테다!”
허나 충국이 팔소매를 잡고 놓지 않는 바람에 장미련 네 집 쪽으로 마지못해 끌려갔다.
그런데 뒤에서 해월은 충국을 보고 졸라댔다.
“신랑, 빨리 우리 집에 가서 자자. 응?” 

이때 애가 “앙~” 하고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해월은 횡설수설했다.
“오- 그래, 네 아빠 온다. 우리 먼저 가자. 장 서방, 인차 오라고. 괜히 술을 많이 마셔서 맥을 추지 못하겠다.”
해월은 앞서 토성 동쪽으로 허둥지둥 달려갔다.
“근심하지 말라! 술 한 근 마셔도 문제없어! 뚫어놓은 구멍도 들어가지 못하겠니? 흐흐흐.”
충국의 개소리에 흥수는 눈앞에서 불티가 튕길 지경이었다.
충국에게 끌려 미련이네 시꺼먼 집 안에 들어섰다.
잘칵!
전등불이 켜졌다.
“누구야?!”
“내다, 내. 얼른 우리 가시아버지께 술상을 차려?”
미련은 자다가 일어나 앉아 흥수를 보자마자 겁부터 집어먹더니 이불부터 머리까지 감싸며 핸들 누워버렸다.
“야, 일어나 김치에라도 술상을 차려! 옥 같은 딸을 내게 준 이 치보야.”
충국이 지껄여댈수록 흥수는 앙갚음을 하려고 이를 악물었다. 그는 집안을 둘러보다가 미련의 아들애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기뻤다.
“토함산은 어데 갔소?”
미련은 귀찮은듯이  “패용천촌 고모 집에 갔소.”라고 대답하고는 이불을 더 푹 들썼다.
흥수는 미련이 쪽을 쓸어보다가 불현듯 희미한 전등불을 빌어 이불 밑에 드러난 미련의 허연 허벅다리를 보는 순간 아래배로부터 야욕이 불타오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오냐, 충국아. 내 딸을 짓밟은 원수를 열배, 백배로 갚아주마.)
그는 윽윽 벼르며 구들에 올라가 앉았다.
그래도 미련은 일어도 나지 않았다. 충국은 하는 수 없이 밥상을 내려놓고 술상이라고 차렸다. 김치 움에 들어가 배추김치 한통을 대야에 담아 가져다 식칼로 썩썩 썰어 대야채로 밥상에 덜렁 올려놓았다.
식탁을 아무리 들춰도 술이 보이지 않았다.
“미련아, 술병을 어디에다 뒀니?”
“몰라! 언제 사다 놓았소? 아낙네만 사는 집에 무슨 술이 있다고 그러오?”
미련은 몸을 들추더니 볼 멘 소리를 쳤다.
충국은 술상이고 뭐고 모르겠다고 일어나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그도 진작 흥수가 자기 여동생을 간음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터였다. 허나 네 좋고 나 좋고 엎음 갚음이라고 눈을 감아 주었다.
흥수도 매 한가지였다. 충국이 또 해월을 쫓아가는 것을 알면서도 때마침 잘 됐다고 여겼다.
“가라!”
이때 미련이 돌아누우면서 발로 다가드는 흥수의 아랫배를 콱 걷어찼다.
“으흠, 이 년아, 어디다 발길질이냐?”
절칵!
흥수는 일어나 문 걸개를 걸고 전등불마저 꺼버리었다.
“어으, 차가라. 억, 억. 그만두지 못해?”
투 닥, 투 닥 소리에 뒤이어 이불을 마구 차버리는 소리가 들리었다.
먹칠한 집안에서는 고양이가 우는 것 같은 신음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그만 해! 시라지, 시라지 같은게 계속이야?”
“좀 가만있지 못해?”
귀 쌈인지 엉덩인지 찰싹 치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여인의 흐느낌 소리인지 신음소리인지 어둠 속에서 들리었다…
은빛 달빛이 서서히 온 동네를 비추었다.
한편 마을 사람들은 덕돌의 대학입학을 축하해 밤중까지 놀고 밤참까지 들고 하나 둘 헤어져 갔다. 덕돌과 상순은 문 밖에 나가 그들을 일일이 바래었다.
덕돌이 손님들을 다 바래고 집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었다.
울바자 뒤에서 “덕돌이, 좀 보기요.”라고 하는 처녀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리었다.
(퍽 귀에 익은 목소리인데.)
덕돌이 돌아서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집체호의 조영희가 머리를 다소곳이 숙인 채 사뿐사뿐 잔설을 밟으면서 나타났던 것이다.
“어째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소?”
조영희는 대답 대신 호주머니에서 뭔가 꺼내 내밀었다.
“대학입학을 축하하오. 이건 내 성의니까 받아주오.”
덕돌은 별로 다른 생각도 없이 “감사하오.”라고 하며 손수건에 싼 무엇을 받았다.
“이게 뭐요?”
허나 조영희는 직답을 피하고 “풀어보면 알겠지요.”라고 하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은빛 달빛 속으로 뛰어 사라졌다.
덕돌은 가슴이 뭉클해나 손수건에 싼 것을 풀어 달빛을 빌어 보았다.
꽃담배쌈지가 아닌가.
정말 코바늘로 한 뜸 한 뜸 꽃을 수놓은 꽃담배쌈지였다.
덕돌은 꽃담배쌈지를 만지작거리며 조영희가 사라진 자기 집 동쪽에 있는 집체호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는 꽃담배쌈지를 만지작거리다가 그 안에 무슨 종이가 들어있는 것 같은 감을 느겼다. 확실히 제비꼬리처럼 곱게 접은 쪽지가 들어 있었다. 펼쳐 보려고 했지만 달빛을 빌어 볼 수 없었다.
“허, 대학생이 되니 좋기는 좋다. 집체호 처녀가 연애를 다 걸고.”
덕돌은 영원한 승자였다. 이전에 그가 소몰이를 할 때에는 어느 처녀가 연애를 걸었겠는가. 연애는커녕 농촌 둼무지에 박힐가봐 둼무지 피하듯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천지개벽이 일어나면서 대학입시제도를 개혁하자 대학에 입학하자 숱한 처녀들이, 집체호 시내 처녀들도 연애를 걸지 않겠는가.
      덕돌이 흐뭇해 꽃담배쌈지를 만지작거리면서 윗방에 올라갔을 때다.
     똑똑똑
   윗방 문께서 노크소리가 조용히 들렸다.
   덕돌은 착각인가고 하면서도 꽃쌈지를 치우고 문께로 다가갔다.
"누구요?"
(영웅인가? 맹광철인가?)
"내야."
귀에 익은 목소리었다.
문을 열고 보니 이게 누구냐? 뜻밖에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희가 아니겠는가.
"어서 들어오라."  
"내 어찌 들어가겠니? 네 나오너라."
덕돌은 정지에 나가 신을 대충 꿰고 바깥으로 나갔다.
순희는 수깃했던 머리를 천천히 들더니 뭔가 내밀었다. 
"너의 대학입학을 축하한다. 이걸 기념으로 받아라. 만년필이다."
덕돌은 미안한 마음으로 정이 폭 밴 만년필을 순희 손에서 받았다.
"아니, 감사하면서도 미안하다. 네가 락방해 마음이 아프다. 우리 학창시절 꿈대로 함께 대학 갔으면 얼마나 좋겠니?"
덕돌은 어느결에 저도 몰래 순희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절대 포기하지 말라. 넌 공부 잘하기에 명년엔 꼭 입학할 거야."
달빛아래 순희 표정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분명 머리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래, 내 근심은 말라."
그녀는 뒷말을 이었다.
"한가지 기쁜 소식을 알려주마. 일성저수지공지 단총지서 네 입단 통과됐다. 이제 공사 단위 비준 받으면 돼."
그 뜻밖의 소식에 덕돌은 순희의 두 손을 덥썩 잡고 환성을 질렀다.
"감사하다."
"단서기인 집체호 최희랑 빅찰수랑 소개인으로 나서서 힘썼다."
"오- 알았다. 네가 많이 힘쓴 거 짐작간다. 정말 감사하다. 입단은 얼마나 오랜 내 소원이었니?"
"대학교에 가서 공부 잘해라."
순희는 머리를 수깃하며 몸을 돌렸다. 달빛아래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들먹이는 것이 보였다.
"우리 대학에서 다시 만나자."
덕돌은 이렇게 말하고나서 무슨 생각이 피뜩 떠올랐는지 순희를 만류했다.
 "잠간 기다려라."
덕돌은 부랴부랴 집에 들어가더니 윗방에서 책 한꾸러미 들고 나왔다.
"옛다. 내 복습하던 자료인데 복습할 때 참고해라. 넌 꼭 대학에 입학할 수 있어. 내보다 공부도 잘했고 정치도 잘하잖았니?"
"감사하다. 믿어줘서. 건데..."
순희는 뭔가 말하려다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꼴깍 삼키었다.
덕돌이 대학에 간 후에야 알게 됐는데 이튿날 순희네는 구대현으로 이사가게 됐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눈물이 앞을 가리어 차마 이사간다는 말을 덕돌한테 하지 못했던 것다.
    모든 것은 불운한 운명의 조화랄까. 둘째오빠에게 얹혀살던 그녀는 부득불 둘째오빠네를 따라 한족곳인 구대현에 이사해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래서 한어로 시험치다나니 이듬해에도, 그 이듬해에도 연속 시험쳤는데도 대학에 입학하지 못하고 말지 않았겠는가.
        덕돌의 친구 장영웅과 맹광철은 다 이듬해 대학에 입학했다. 그런데 공부를 그렇게도 뛰여나게 잘하고 정치도 잘하던 순희가 락방되였다. 덕돌은  일성저수지에서 자기를 탈출하라고 엄호하던 순희, 대학에 입학하지 못한 순희를 두고  마음이 아팠다.
       그는 두손 모아 빌고 또 빌었다.
      "하느님이여, 비나이다. 비나이다, 순희를 꼭 대학에 가게 도와주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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