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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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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44)
2016년 06월 17일 09시 26분  조회:2250  추천:0  작성자: 김장혁



               9. 무죄석방

        하늘도 울고 산도 몸부림치고 들판도 흐느낀다.
근형은 어릴 때 동갑인 막내고모와 함께 기운봉에 가서 돌 버섯을 캐던 일로, 함께 놀던 일이 눈물 흐르는 눈앞에 삼삼히 떠올랐다.
(오늘 오전에만 해도 살구를 먹겠다고 살구나무 우에 올라가 바가지에 살구를 뜯어가지고 내려오던 막내고모, 그 막내고모가 큰물에 세상을 떠나다니?)
그는 최구장을 따라 가마골 앞산에 올라 걸으면서도 자꾸 손등으로 눈시울을 적시는 뜨거운 피눈물을 훔치었다.
뒤이어 그는 피뜩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할아버지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할아버지, 이대로 저 산 아래 보이는 운주동엔 갈 거 같지 못합구마. 내 여기로 오는데 운주동 개울가 버드나무숲 속에서 개를 만났습니다.”
최구장은 이상하다는 듯이 눈을 치켜뜨더니 “개라니? 사냥개보다도 일본 놈의 개가 더 무섭지.” 하고 두덜거리었다.
“내 뒤를 밟는 거 보니 일본 놈의 개가 틀림없습구마. 집에 갔다간 영락없이 붙잡힐 겁니다.”
장손의 말에 최구장은 손으로 나무를 잡고 몸을 의지하더니 아무것도 개의치 않았다.
“붙잡겠으면 붙잡으라지. 딸을 앞세우고 살아서 뭘 하겠나? 내 이젠 칠순이 넘었으니 살만큼 다 살았어. 집에 가 볼테니 넌 저 고모부랑 함께 먼저 만주로 들어가라. 나도 처리할 걸 다 처리하고 인차 들어갈게.”
최구장은 노친을 데리고 곧추 운주동쪽으로 발길을 돌려 산 아래로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근형은 따라 가면서 계속 위험하다고 말리었지만 최구장은 대수로워 하지도 않았다.
“저 노친이랑 계순이랑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제 고향의 버섯을 뜯어먹어도 죄란 말이냐? 고향의 버섯도 몽땅 날강도 같은 일본 놈들의 거라더냐?”
근형은 별수 없이 할아버지를 따라 운주동으로 떠나기로 했다.
야마다 면장 놈을 죽인 형만과 석수 그리고 용기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럼 가시아버지, 인사를 드리고 떠나가겠습구마.”
형만은 진창에 털썩 꿇어앉아 최구장과 순금에게 절을 올리고 둥실한 어깨를 들썩이면서 흑흑 흐느껴 울었다.
최구장은 두 손으로 사위를 부축해 품에 끌어안고 잔등을 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허리가 꼬부장한 순금이도 사위가 불쌍해 빗물과 눈물이 줄줄 흐르는 얼굴을 매 만졌다.
“자네들이 잘 사는 걸 보자 했는데 이게 웬 일이요? 죽은 사람이야 어쩌겠소. 빨리 만주에 들어가오. 일본 놈들에게 붙잡히면 죽고 마오.”
형만은 손등으로 눈물을 쓱 닦더니 떨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령 길을 타고 북으로 떠나갔다. 그는 떠나가면서도 자꾸 산 아래로 내려가는 최구장과 저 가마골 중턱에 누워있는 계순과 흥기의 봉분을 번갈아 보았다. 그의 눈길을 따라 한 가닥의 피눈물과 슬픔이 줄줄 흘러내렸다.
최구장네는 두려울 것 없이 비바람을 무릅쓰고 운주동의 집으로 돌아왔다.
뭉청 끊어진 창살과 펑 구멍 뚫린 창호지, 여기저기 박산 나 나뒹구는 오지동이, 고리짝을 보면서 최구장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순금은 깨진 물독을 매만지면서 주름살이 죽죽 간 눈시울에 눈물을 줄줄 흘리었다.
근형은 부랴부랴 뒤울안에 가서 사닥다리를 가져다 중천정구멍에 대놓았다.
“여보, 내려오오.”
중천정 위에서 신음소리에 가까운 새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내려가겠소.”
이윽고 중 천정 구멍이 열리더니 새단의 얼굴이 보이었다. 뒤이어 치마에 둘린 가는 다리가 사닥다리 위에 조심스레 내려왔다.
새단은 근형을 따라 방에 나와 최구장과 성단을 보고 문안인사를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무사히 왔습둥?”
최구장은 손비를 보고 “응, 너희들이 무사한 것만 해도 다행이야.” 하고 인사를 받았다.
새단은 근형과 함께 깨진 물독을 주어치우고 가마를 부시었다. 그런데 순금이 어디 불편한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이때 갑자기 어두워지는 바깥에서 말발굽소리가 요란하고 말 호용 소리가 들렸다.
근형이 바깥을 내다보고 새된 소리를 질렀다.
“왜놈들이 왔습구마. 할아버지, 할머니 천정에 어서 피신합소.”
새단은 비명소리를 지르면서 고방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최구장은 까딱하지 않고 타리대를 치고 편안히 앉아 있었다.
“죽이겠으면 죽이라지. 우리 무슨 죄가 있대?”
근형은 황급히 할아버지를 부축하여 일으켜 고방 쪽으로 모셔가려고 했다.
최구장은 근형의 팔을 뿌리치면서 고함쳤다.
“이걸 놔! 난 안 달아나. 여기서 저 놈들이 어쩌나 꼬락서니를 보겠어.”
이때 구멍이 펑 뚫린 문구멍에 숱한 꺼먼 그림자들이 언뜰거리었다.
드디어 다 찌그러진 문이 벌컥 열렸다.
“참 좋아, 네 놈들이 몽땅 여기 있었구나.”
응삼이 졸개들을 데리고 뛰어 들어왔다. 근형은 새단의 손목을 잡고 고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들은 고방 문을 박차고 뒤울안으로 달아났다. 근형은 울바자 밑에 가서 울바자에 매달려 바둑거리는 새단을 받쳐 들어 나무울바자 밖에 내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울바자가 높아 인차 들어 올려 내보내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새단의 허벅지에서 거무스름한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새단이 이를 옥물더니 상을 찡그리면서 신음소리를 냈다.
근형은 새단의 엉덩이를 나무바자우로 떠밀었다.
이때 응삼의 무리가 고방 문을 쾅 박차고 뛰어들 나왔다.
근형은 더 지체할 수 없어 나무울바자를 화닥닥 기어 올라가 뛰어 넘어갔다. 그는 울바자 밖에서 나무 사이로 피 흘러내리는 새단의 다리를 쥐여 우로 춰 올렸다.
“어디로 달아나! 이년!”
울바자 안에서는 응삼이 울바자를 거의 넘는 새단의 종아리를 쥐여 아래로 당기면서 을러멨다.
새단은 통곡치면서 울바자를 틀어쥔 손을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악착스레 두 다리를 바둑거리었다. 그러나 마수를 벗어나지 못하고 퉁 땅바닥에 떨어지었다. 졸개 한 놈이 근형의 손을 칼로 찍어댔다. 다른 놈은 새단의 뒷다리를 마구 끌어내리어 집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여보!”
근형은 손을 뻗치며 고함쳤다.
졸개 몇이 울바자에 기어 올라갔다. 그러나 근형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비바람 속에 나무들이 몸부림칠 뿐이었다.
소낙비가 억수로 퍼붓자 응삼과 졸개들은 더 쫓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한길수와 야마모도 소장 놈이 살기등등해 졸개들을 데리고 들어왔을 때 집안에는 최구장과 성단 밖에 없었다.
야마모도 소장은 손을 홱 휘둘렀다.
“젠부 다바네(몽땅 묶엇)!”
영팔 등이 우르르 덮쳐왔다. 성단이 비명을 쳤다.
최구장이 안간힘을 다하여 고함치면서 팔을 뿌리쳤다.
“닥쳐라! 우리 무슨 죄 있다고 이러는 거냐?!”
응삼이 개를 잡은 포수처럼 우쭐거리었다.
“황군을 칼로 찍어 죽인 죄를 모르는가?”
수길과 림호가 졸개들과 함께 최구장과 성단을 묶었다.
야마모도 소장은 근형과 형만을 놓쳐서 속이 내려가지 않았다. 하지만 늙은 최구장 양주와 손비를 붙잡았으니 분풀이를 할 데 있어 좋았다.
야마모도 소장과 한길수 등은 최구장 양주를 말 뒤에 매 끌고 곧추 상우남면 사무소 옆에 있는 일본 파출소로 돌아갔다.
파출소안에 들어서자 끼무라 국장이 사무상 정면에 코 수염을 잔뜩 살리고 콩 알 눈깔을 부릅뜨고 살기등등해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는 일본 놈들을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통역 류강철이 서있었고 그 앞에는 좌우로 스까다 이찌분로 경찰과 개다리경찰 등이 죽 늘어서있었다.
야마모도 소장은 끼무라 국장에게 뭐라고 일본 말로 지껄여댔다.
끼무라 국장은 코 수염을 쓱 만지더니 머리를 끄덕이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비에 후줄근히 젖은 최구장을 쏘아보면서 호통쳤다.
“영감, 타고난 이름이 구장이라. 구장에서 떨어졌다고 대일본제국에 불만이 있는 거지? 맞지?”
강철이 통역해 주어도 최구장은 끼무라 국장놈을 쓴 외 보듯 하면서 머리를 조금도 숙이지 않았다.
끼모라 국장은 의자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음흉한 눈길로 최구장 네를 쏘아보았다.
“이에(말해)! 네 놈의 막내사위 형만이 어데 갔소까? 석수, 용기 어데 갔소까?”
최구장은 목석처럼 서서 입에 빗장을 지른채 끄덕하지 않았다.
“이찌분로, 히도꾸 다다께(호되게 족쳣)!”
“하잇(옛)!”
이찌분로는 다짜고짜 덮쳐와 몽둥이로 최구장의 잔등을 땅 내리쳤다.
칠순이 넘는 최구장은 “억!” 비명소리와 함께 걸상에서 푹 꼬꾸라져 땅바닥에 맥없이 쓰러졌다.
성단이 묶인채 비명소리를 지르면서 영감 쪽으로 다가왔다.
“우리 영감이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치느냐?”
새단도 “할아버지!” 하며 다가왔다.
새단은 최구장이 입귀로 피를 흘리자 닦아주고 싶었지만 두 손을 뒤로 묶이어 용빼는 수가 없었다.
야마모도는 성단의 가슴을 발길로 걷어차 넘기었다.
“이년아,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고함쳐? 네년이 우리 대일본제국의 버섯과 딸기를 뜯어먹고서도 죄를 승인하지 않아?”
순금은 가슴을 부둥켜안고 너무 억이 막혀 “내 고향의 버섯을 뜯어먹어도 죈가?” 라고 대들었다.
열이 부쩍 오른 한길수는 채찍으로 성단의 얼굴이고 목이고 사정없이 내리치며 고함쳤다.
“이년아, 지금 이 곳이 어데 옛날 조선 땅인가 하니? 이젠 대일본제국의 땅이 됐단 말이야. 대일본제국의 버섯을 도적질해 먹고서도 계속 악다구니질 할 테냐?”
한길수는 상전들에게 잘 보이려고 채찍으로 성단의 잔등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그 호된 채찍질에 순금의 베적삼이 째지면서 핏자국이 나는 잔등이 드러났다. 성단은 비명소리를 지르면서 땅바닥에 쓰러졌다.
새단은 새된 소리를 지르며 자기 몸으로 시어머니에게 날아드는 채찍을 막았다. 한길수의 채찍질에 베저고리가 째지면서 새단의 하얀 잔등이 드러났다.
음흉한 눈길로 까만 무명치마 밑으로 드러난 성단의 피에 젖은 하얀 허벅다리를 본 끼무라 국장 놈이 하얀 장갑을 낀 손을 척 쳐들었다.
“가만! 그 년이 정말 예쁘구먼. 하하하.”
끼무라 국장 놈은 의자에서 일어나 성단의 옆으로 다가왔다. 성단은 겁기어린 눈으로 끼무라를 쏘아보면서 엉덩이 걸음으로 뒤로 비실비실 물러앉았다.
“어우, 혼또니 우쯔꾸씨이네(정말 예쁘네).”
끼무라 국장 놈은 장갑을 벗고 손으로 새단의 턱을 고이더니 야수의 눈빛이 번쩍이는 사발눈깔을 희번뜩거리며 새단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히히, 난 조선에서 이처럼 예쁘고 순수한 색시를 처음 봐.”
끼무라 국장 놈이 히죽거리면서 수작을 하였다. 색마 한길수는 옆에서 새단의 피 묻은 허벅지와 가슴을 노려보면서 괜히 닭 알 침을 꼴깍 넘기었다.
야마모도 소장은 끼무라와 한길수를 번갈아 보다가 채찍으로 사무 상을 짱 쳤다.
“끼무라 국장! 난 형님의 원수도 갚지 못했는데 이게 뭔가? 심문은 하지 않고 히히거리다니?"
이찌로 경찰도 맞장구를 쳤다.
"무슨 심문? 아예 한 칼에 한 놈씩 칼 탕을 쳐버리면 다지?”
그제야 끼무라는 창피해 한숨을 후 내쉬면서 엉거주춤 일어나 사무 상 앞으로 되돌아갔다.
“야마모도 소장, 범인을 심문하는 건 우리 파출소에서 할 일이지 당신 임산파출소와는 상관없네. 당신은 가서 삼림이나 잘 지키게. 내가 어련히 이 범인들을 심문해 당신 형을 죽인 형만을 잡아올게. 당신에게 칼을 휘두른 그 이름 모를 그 놈도 다 잡아오지 않으리라고 그래?”
야마모도는 벌컥 성을 냈다.
“나와 한길수가 비바람을 무릅쓰고 저 연놈들을 잡았으니 그렇지. 자네들은 쥐 새끼처럼 비를 피해 집안에 떡 들어앉아있기나 했지. 언제 잡을 궁리나 했는가?”
끼무라는 어이없다는 듯이 “아하, 야마다 소장, 말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상전을 보고. 쯧쯧.”
이때 입에서 피를 흘리면서 쓰러졌던 최구장이 천천히 정신을 차리면서 일어나 땅바닥에 앉았다.
“그래, 이 영감두상이 어디 얼마나 질긴가 보자.”
끼무라는 책상을 땅 치면서 위엄을 돋우어 소리쳤다.
“최 두상! 거기 걸상에 앉게. 거 당신네 집에 온 그 스무살 푼한 자는 누군가?”
“난 몰라. 지나가던 길손이겠지.”
그제야 최구장이 입의 빗장을 뽑더니 입귀의 피를 손바닥으로 쓱 닦았다.
“그래, 이제야 입을 여는구먼. 저런 나약한 선비 놈에게는 매가 제일이야. 생떼를 쓰지 말고 어서 말해! 그렇잖으면 당신의 손비를 부하들에게 줘 버릴 줄 알라!”
최구장은 똑바로 앉더니 끼무라를 증오에 찬 눈길로 쏘아보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죽이겠으면 나를 죽일게지 내 손비를 욕보이지 말라! 머리카락 하나 까딱 다쳐 봐. 내 죽어서라도 악귀로 돼 네놈들을 물어뜯어 황천에 보내 줄거야.”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오른 끼무라 소장은 군도를 쓱 뽑아들었다.
옆에서 통역하던 강철이 끼무라를 말리면서 귀에 대고 일본 말로 뭐라고 지껄였다.
그러자 끼무라는 “요로씨이. 요로씨이.” 하고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옆에서 구경하던 실 돌피 같은 응삼이 끼무라에게 귀속 말로 “어째 거 보지 못했던 길손이 어데서 딱 본 것 같다니까. 아, 옳지, 거 세 귀 눈이랑 주먹코랑 생김새가 영월동에 있던 병완 영감이나 기준이란 놈처럼 생겼단 말이야.”라고 했다.
그 소리에 끼무라는 뭐가 집히는 데가 있었던지 교활한 눈길로 최구장을 쏘아보더니 능구렁이처럼 지껄였다.
“최 영감, 당신이야 직접적인 죄가 없어. 난 영감을 풀어주겠네. 그 길손이 다시 오면 우리 파출소에 알리게. 다시 숨겨놓으면 안 돼.”
최구장은 응삼이 일본 말로 끼무라에게 뭐라고 하였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피투성이로 된 노친과 손비를 돌아보면서 “가기요.”라고 말하고 걸상에서 일어났다.
야마모도는 최구장 네를 가지 못하게 두 팔을 벌려 막으면서 일본말로 야단쳤다.
“우리가 저 비바람을 무릅쓰고 어떻게 잡아 왔다구 놓아줘? 안 되오. 이 놈들을 내놓아서는 안 되오.”
그러자 끼무라 국장은 실망스럽다는 듯이 도리머리 질 했다. 뒤이어 그도 일본말로 지껄였다.
“야마모도 소장은 하나만 알았지 둘은 몰라. 저 놈들을 고와서 내 놓는 거 같은가. 큰 그물을 넓게 쳐서 큰 고기를 낚자는 게요. 저 비틀거리는 늙은 영감태기나 노친이나 나약한 아녀자를 붙잡아 둬 무슨 소용 있어? 관건은 형만과 그 길손인지 하는 자를 잡는 거야.”
야마모도는 더 할 말이 없었다. 형사범죄자를 다스리는 권리는 끼무라 국장에게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하여 최구장과 성단은 하신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새단을 데리고 파출소 밖으로 비칠거리면서 간신히 걸어 나왔다.
그들은 휘몰아치는 비바람도 무릅쓰고 어두운 밤에 주린 배를 달래면서 비칠비칠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뒤로 보이지 않는 그물, 그리고 섬나라 오랑캐들의 감시의 눈길, 생사고비를 넘나드는 공포가 엄습하고 있었다.

                             10.야습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새단은 시조부모를 양팔로 부축해 모시고 비바람을 무릅쓰고 질척질척한 진창길로 비틀거리며 걸었다.
운주동 동쪽 산모퉁이를 돌아 걸을 때다.
산마루에서 번개가 번쩍 하더니 우르르 꽝꽝 천둥소리가 울렸다. 바람이 휙- 소용돌이치자 주먹 같은 비방울이 빗발치듯 쏟아져 기름종이우산도 들지 못한 가여운 세 사람의 몸을 덮쳤다. 그들 셋은 그래도 정신을 가다듬고 비칠거리면서 한사코 마을 쪽으로 걸어갔다.
그들이 이제 거의 운주동 마을 어귀에 들어설 때 웬 일인지 억수로 퍼붓던 소낙비기 둑 끊었다.
갑자기 앞에서 웬 검은 그림자들이 마주 오는 것 같았다. 뒤에서도 말발굽 소리가 급촉하게 들리더니 전지불이 이쪽을 어지러이 비추며 덮쳐왔다. 앞의 검은 그림자들은 인차 길옆 수풀 속에 쓸어 들어갔다.
그들 셋은 머리끼 곤두설 지경이었으나 조심스레 버스럭거리는 수풀 곁을 지나갔다.
이때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더욱 요란스럽게 들려왔고 전지불이 환하게 비추면서 가까이 다가왔다.
“서라!”
뒤에서 한 무리 검은 그림자들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최구장, 어디로 가?!”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전지불이 쭉 이쪽을 비춘다. 순간 비를 흠뻑 맞은 최구장 양주와 새단이 비틀거리면서 겨우 몸을 지탱하며 주춤 멈춰 섰다. 한길수가 졸개들을 데리고 덮쳐왔던 것이다.
“우릴 더 못 살게 굴지 말고 죽이겠으면 어서 죽여라.”
어둠속 에서 한길수가 지껄여댔다.
“끼무라 국장은 네 놈을 놔주지만 우리 야마모도 소장님은 절대 놔두지 못해.”
한길수의 옆에서 실 돌피 같은 응삼이 손을 홱 휘둘렀다.
“저 놈들을 당장 묶어라!”
최구장은 어둠 속에서 그자를 손가락질하면서 욕했다.
“응삼이, 자넨 내 제자건만 왜 왜놈들의 개다리로 돼 이다지도 못살게 구는가?”
그러자 응삼은 “날 나무라지 마쇼. 황군을 죽인 죄인의 가시아버지니까. 나도 별수 없습구마.”라고 지껄였다.
“잔말 말고 어서 묶어!”
한길수가 재차 나무숲이 떠나갈듯이 을러메자 검은 그림자들이 말에서 뛰어내려 최구장에게 바 줄을 들고 욱 덮쳐들었다.
쉭!
딱!
쉭! 쉭!
딱! 딱!
“앗!”
“아이쿠!”
숲속에서 날아온 돌멩이에 먼저 응삼이 대갈통을 붙잡고 비명을 질렀다. 뒤이어 연신 대여섯 놈이 삼대 쓰러지듯이 꼬꾸라졌다. 뒤이어 돌멩이가 날아와 말을 탄 한길수의 이마빼기에 딱 맞았다.
“아이쿠!”
“웬 놈들이야?”
숲속을 전지불로 비추었다. 그러자 숲속에서 복면한 사람들이 방망이며 검이며 몽둥이를 들고 뛰쳐나왔다.
“이 놈들아, 칼을 받아라!”
“죽여라!”
한길수와 야마모도는 황급히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 괴한들을 겨누었다.
딱! 딱!
한길수와 야마모도는 돌멩이에 손목을 맞고 권총마저 떨어뜨렸다.
“이크!"
"웬 놈들?”
겁을 집어먹은 야마모도와 한길수는 날 살려라고 말 배때기를 두 발로 차더니 꼬리 빳빳해 달아났다. 응삼과 졸개들은 최구장 네를 놓고 말을 탈 새 없이 다리야 날 살리라고 도망쳤다. 이때 웬 사내가 말에 훌쩍 뛰어 올라 검을 휘두르면서 뒤쫓아갔다.
다른 한 그림자도 말에 뛰어올라 쫓아가면서 소리쳤다.
“오빠, 쫓지 말아요!”
앞에서 쫓던 오빠란 사람은 계속 뒤쫓아 갔다. 그는 전지 불을 쥐고 달리는 응삼을 쫓아가 검을 번쩍 휘둘렀다.
“어이쿠!”
비명소리와 함께 응삼이 어깨에 칼을 맞고 썩박나무 넘어가듯이 쿵 떨어져 쓰러졌다. 전지불이 질척한 땅바닥에 떨어지면서 앞에서 달려가는 한길수가와 야마모도 등뒤를 비췄다.
복면괴한이 말을 타고 쏜살같이 뒤쫓아 갔다. 검이 휙 소리와 함께 번쩍했다.
“앗!”
한길수가 비명소리와 함께 팔을 붙잡고 말 잔등에 납작 엎드려 도망쳤다.
괴한은 검을 휘두르면서 야마모도에게 덮쳐들었다. 야마모도는 뜻밖에도 말머리를 돌리더니 시퍼런 군도를 빼들었다. 괴한은 검으로 야마모도의 목을 내리 찍었다. 검이 내려오다가 야마모도의 칼날에 맞아 불꽃을 튕겼다. 괴한의 검이 재차 날아 내려오는 척 하더니 독사처럼 야마모도의 눈깔을 팍 찔렀다. 비명소리와 함께 야마모도는 눈깔을 싸쥐고 군도를 발악적으로 휘둘렀다. 괴한은 날아오는 군도를 검으로 비켜치우고 야마모도의 목을 찔렀다. 야마모도는 목을 틀어 검을 피하더니 말을 놓아 꼬리 빳빳해 도망쳤다. 뒤에서 웬 여자가 말을 타고 달려오면서 돌멩이를 날렸다.
“앗!”
야마모도는 눈깔을 붙들었던 왼손으로 뒤통수를 싸쥐고 말 잔등에 납작 엎드려 꼬리 빳빳해 도망쳤다.
졸개들은 몽둥이고 칼이고 버린 채 숲속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숲속에서 복면한 괴한들과 부딪쳐 난투를 벌리다가 죽은 놈은 죽고 몇몇 놈만이 간신히 살아 면사모소 쪽으로 달아났다.
“오빠, 더 쫓지 말아요!”
“알았어. 진달래야, 빨리 큰아버지를 말에 모시고 이 자리를 뜨자.”
“알았어요.”
그들이 말머리를 돌려 돌아올 때였다. 앞에서 한 괴한이 응삼의 손에서 전지 불을 빼앗아 비추었다.
괴한은 진창에 쓰러져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응삼의 목덜미를 틀어쥐더니 시퍼런 칼을 목에 들이대는 것이었다.
“이 놈아, 네 놈이 응삼이란 개다리 놈이겠구나.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잘 만났어. 우리 일가를 제 고향에서 못살게 굴더니 내 손에 죽어봐라.”
응삼은 검에 찍힌 팔을 붙잡고 기어일어나 앉으면서 애걸복걸했다.
“장수님, 누군지 제발 살려주오.”
“옳아, 죽어도 알고 죽어라. 난 네놈들이 못살게 굴어 일곱 살에 만주로 쫓겨 간 상순이야. 네 놈들이 우리 조손 삼대를 얼마나 못살게 굴었냐? 다 알았지? 에이, 죽어라.”
상순이 칼로 응삼의 가슴을 찌르려는 순간 최구장이 말리였다.
“이보게, 상순이, 그자를 살려주게. 내 제자니까.”
그러나 그 말을 들을 상순이 아니었다.
그는 칼로 응삼의 가슴이고 낯이고 마구 찍으면서 고함쳤다.
“이 놈이 어디 가시할아버지를 선생으로 알아줍디까? 이 놈 개다리하구 길수가란 놈의 성화에 못 이겨 우리 온 집 조손 3대가 고향에서 못살고 풍설이 이는 날에 만주로 갔댔습니다. 오늘 원수를 갚겠습구마.”
근형도 달려왔다.
“에이, 이 일본 놈의 개다리야, 어디 죽어봐라!”
그는 고함치면서 몽둥이로 응삼의 대가리를 땅땅 내리쳐놓고도 성차지 않아 마구 차놓았다.
응삼은 피 못이 낭자하게 된 채 네 각을 쭉 뻗었다. 그는 비바람 속에서 상순의 칼을 열네 차나 맞고 일본 놈의 개다리 구장을 하던 더러운 일생을 끝장보고 말았다.
“놈들이 되 쫓아오기 전에 이곳을 떠나야 하오.”
한 괴한이 소리치자 진달래와 괴한들은 졸개들이 버리고 달아난 말에 최구장 양주와 새단을 태우고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금방 검을 휘두르면서 끼무라와 한길수를 쫓아가던 괴한은 경인이었고 돌팔매질을 한 여자는 최구장의 동생 최구철의 딸 진달래였다. 그리고 한패의 괴한들은 진달래가 백두산에서 데리고 내려온 항일유격대 대원들이였다.
원래 낮에 형만은 지친 몸을 끌고 먼저 불붙이에 있는 처남인 경인이네 집으로 찾아 갔다. 그곳에서 상순과 명옥이 그리고 죽순도 만났던 것이다.
경인은 형만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후 수염을 쓱쓱 내리쓸더니 상순의 부부를 보고 말했다.
“처남, 여긴 위함하네. 형만과 함께 만주로 빨리 떠나오.”
상순은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매형, 이제 그 놈들이 되돌아와 나를 잡지 못하면 가시할아버지를 해치자고 하지 않겠소? 그 놈들과 생사결단을 내고 싶소.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어째 고향에서 쫓겨났소? 다 그 한길수와 응삼이 놈이 일본 놈들을 등에 업구 못살게 군 때문이요. 이번에 왔을 때 복수를 하지 않고 또 언제 하겠소?”
어금이 말렸다.
“오라비, 어쩌자고 그래? 매형 말을 들어라. 내 마른 누룽지와 미시가루를 한주머니 줄 테니 얼른 각시를 데리고 만주로 떠나라.”
큰누나까지 말하자 상순은 앉아 곰곰이 생각을 하더니 무겁게 입을 떼였다.
“가시고모 내 각시와 함께 먼저 가오. 내 일을 쳐 놓고 가시할아버지를 혼자 고생하게 놔두고 혼자 살겠다고 만주로 빠져갈 순 없소.”
형만도 동감을 표시했다.
“내 야마다 면장 놈을 죽였소. 나도 가시아버지를 혼자 남겨두고 갈순 없소.”
그들이 어떻게 최구장 등을 안전한 곳으로 모셔오겠는가고 한창 궁리하고 있을 때 운주동에서 근형이가 헐떡거리면서 달려왔다.
“삼촌, 큰일 났소. 할아버지랑 할머니랑 일본 놈들에게 잡혀갔소.”
“뭐라고?”
경인과 상순이 놀라 벌떡 일어났다.
경인은 “얘, 천천히 말해라.”라고 하면서 근형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근형은 숨이 차 헐떡거렸다.
“해질녘에 우리 집에 들어섰을 때 야마모도 소장 놈과 한길수의 패거리들이 욱 쓸어 들어 와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묶었소. 나는 바삐 고방 문을 열고 뒤울안으로 해서 달아났댔소.”
이때 진달래가 한패의 괴한들을 데리고 집안에 들어섰다.
“너는 어떻게 돼 여기로 왔냐?”
경인이가 마중 나가면서 묻자 진달래는 철색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며 “일이 있어서 지나가다가 들리었어요.”라고 하였다.
그녀는 뒤에 따라 들어오는 괴한들은 자기 친구들이라고 덧붙였다.
진달래는 사촌오빠 경인에게서 큰아버지 최구장 등이 일본 놈들에게 붙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펄쩍 뛰었다.
“의논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요. 어서 큰아버지를 구해야지요.”
경인도 아버지가 붙잡혔기에 더는 참을 라야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오래 동안 쓰지 않았던 검을 찾아들고 복면한 후 진달래와 함께 아버지를 구하러 나섰다. 상순과 근형도 각기 식칼과 몽둥이 찾아들고 보자기로 복면한 후 비바람을 무릅쓰고 떨쳐나섰다.
그들은 최구장을 찾아 면사무소로 가다가 운주동 마을 어귀에서 면바로 최구장네를 만났고 최구장 네를 뒤쫓아 온 끼무라 국장과 한길수의 패거리를 딱 마주쳐 접전을 벌렸던 것이다.

                            11. 핍박에 고향을 떠나

       최구장은 집에 돌아와 쥐마당같이 돼버린 쓸쓸한 구들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등잔불을 켠 어두운 집안을 둘러보았다.
경인은 “아버지, 일이 이 지경이 됐으니 먼저 우리 집에 피신하깁소. 일본 놈들이 꼭 덮쳐 올겝구마.”라고 했다.
최구장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거기 간들 쫓아가지 않겠냐?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어? 이젠 정말 운주동에서 다 살았구나.”
성미가 불 같은 상순이 최구장 앞에 나서서 권고했다.
“가시할아버지, 아예 우리 만주국 함흥촌에 들어갑시다. 설마 일본 놈들이 그곳까지 찾아오겠습둥?”
그 말에 온 집안이 웅성거렸다. 여기저기서 만주국으로 가는 게 옳다고 했다.
그때 진달래가 나섰다.
“큰아버지, 함흥촌이라고 일본 놈들이 없겠어요. 전번엔 일본놈들의 소탕까지 받았습구마. 아예 우리 아빠랑 사는 장백산에 들어가죠. 거기엔 유격대도 있어 보호받을 수 있어요.”
최구장은 진달래를 피뜩 쳐다보더니 머리를 가로저었다.
“공자 성인이 가로사대, ‘자기를 억제하고 예에 맞게 행동하라.’ 그래, 중용지도가 제일인 거야. 일본 사람들도 자기들을 해치지 않는 나를 어쩌겠냐? 그놈들도 사람인데 어찌 량심을 항상 개한테 맡기겠나?”
유격대 대장 최동욱은 썩 앞에 나서면서 권고했다.
“처음엔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영월동을 떠나지 말고 살려고 머리를 숙였습구마. 그러나 일본 놈들은 우리 나라를 빼앗았고 착한 마음을 가진 우리를 어디서도 못살게 짓밟고 있습구마. 심지어 내 앓는 안해마저 짓밟았습구마. 우린 일본 놈들의 철 발굽 아래서 자기 여편네도 가정도 지키기 어렵게 됐습구마. 그래서 나도 총칼을 들고 일어섰습구마. 지금 일본 놈들은 만주국에까지 쳐들어가 우리 조선 사람들을 못살게 굴고 있습구마. 일본 놈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기전엔 우린 고향에서도 살 수 없고 만주국에서도 허리를 펴고 살 수 없습구마.”
“그만하게. 건 알만하네. 그러나 칠순이 넘은 내가 이제 총칼을 들고 일본 놈들과 어떻게 싸우겠는가? 우린 좌우간 운주동에선 못 살고 나앉게 됐네. 만주국에 들어가지 않으면 칼에 피를 묻힌 경인이랑 어떻게 하겠어?”
한숨을 후- 하고 땅이 꺼지게 내쉬던 최구장은 가슴을 탕탕 치며 통탄했다.
“어떻게 돼 이 좋은 조선 강산을 두고서도 고향에서마저 살지 못하게 됐는고? 하늘도 너무 무심하구나. 창천이여, 굽어 살피옵소서. 으 흐 흐 흑, 흑흑.”
최구장은 천정을 쳐다보면서 땅바닥을 탕탕 쳤다. 등잔불 밑에 비낀 그늘진 그의 두 볼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줄줄 흘렀다. 뒤이어 그는 애들에게 공부를 배워주던 서당방의 마루를 어루만지더니 어깨를 들먹이면서 흑흑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었다.
경인은 뒷근심이 컸다.
“아버지, 먼저 불붙이에 있는 신설집 형내네 집에 가서 숨어 있으면 어떻습둥? 아버지 상처하구 며느리 병도 치료하고.”
최구장은 맥없이 진달래와 경인을 번갈아보면서 조금 궁리하다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얼른 운주동을 떠나자.”
최구장은 피와 빗물로 흠뻑 젖은 옷을 활활 벗어 버리고 농짝에서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경인과 근형은 집안에서 입을만한 옷이랑 농짝에서 꺼내 보자기에 쌌다. 소문을 듣고 달려온 셋째 경민과 넷째 경욱은 어안이 벙벙해 했다.
“밤중에 어디로 간다고 야단들이오?”
경욱이 밤중에 홍두깨를 내밀듯 하는 말에 최구장은 핀잔부터 했다.
“일본 놈들의 등살에 어디 운주동에서 살겠냐? 차차 만주로 달아나야겠어. 맏사위 사는 만주국 함흥촌에 가든지. 너희들도 준비하거라.”
경민은 납득되지 않았다.
“이 팔간집이랑 어쩌고?”
그는 좁은 얼굴에 마땅찮은 표정이 흘렀다.
“상순이 말하지 않더냐? 만주에는 땅이 넓고 황무지가 많아서 부지런히 밭을 일구기만 하면 기장밥에 감자 국을 먹는다더라.”
어느 결에 앞집에 있던 막내 경석도 들어왔다가 그 소리를 듣고 빈정거렸다.
“만주에 가면 목침을 베고 누워 있어두 된장국에 기장밥이 입에 마구 쏟아져 들어오겠구먼.”
그 말에 경욱이 제 딴에는 고명한 방법으로 동생을 훈계했다.
“너, 이 놈, 목침을 베고 약 담배 질이나 해서야 어떻게 살아? 약 담배장사래도 해야 살지!”
“넷째야, 너 언제 그 놈의 약 담배 질을 그만 두고 살림살이나 온전히 해라.”
“아버지도 웬 말씀인가요? 나도 살림살이를 잘하자고 약 담배장사를 합니다.”
최구장은 하얀 머리를 홰홰 가로저었다.
“너 언제든지 그 놈의 약 담배로 경을 치겠다. 일본 놈들이 오겠다. 어서 떠나자. 끼무라란 놈의 상통을 생각만 해도 치 떨려.”
모두들 우르르 집을 나섰다. 최구장은 등불을 쥐고 이 구석 저 구석 살피다가 팔간 집 한가운데 어두커니 서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는 정든 팔간 집을 떠나기 아쉬웠고 마음이 여간 아프지 않았다.
경숙이가 들어와서 다급히 소리쳤다.
“아버지, 빨리 떠납시다. 일본 놈들이 들이닥치면 어쩌겠습둥?”
“그래, 어서 가자. 이젠 영영 떠나가야 될 것 같구나.”
최구장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대답은 해놓고서도 발 뿌리가 내린 듯이 계속 어두커니 서있었다.
경숙이 억지로 아버지를 부축해 집 문을 나섰다. 경숙이가 비칠거리는 아버지를 옆에서 모시고 기름종이우산을 들었지만 비바람에 하얀 바지가 빗물에 젖어들었다. 새단이 자꾸 까무러쳐서 봉인이 아예 둘쳐 업고 불붙이 쪽으로 황급히 떠났다.
그들은 비 내리는 밤중에 신설집 병권이네 집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먼저 경인이네 집으로 들어갔다. 최동욱과 진달래는 유격대를 거느리고 바람결처럼 비바람 치는 수림 속으로 사라졌다.
경인이네 고방에 들어간 새단이 가는 앓음 소리를 냈다. 뒤이어 근형이가 방으로 들어와 상순을 찾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네. 내 처가 하신에서 자꾸 피가 흐르오. 신설집에 찾아가 형내를 불러오든지 하오.”
상순은 한마디 대답하고는 인차 떠나갔다.
근형과 경인은 최구장의 옆에서 머리상처의 피 자국을 솜으로 닦아드렸다.
한참 후 상순이 큰아버지 관준과 칠촌조카 형내를 데리고 비바람을 무릅쓰고 경인이네 방에 들어섰다.
“가시할아버지, 큰아버지와 조카가 왔습니다.”
최구장은 몸을 일으켜 일어나려고 했다.
“사돈어른 누운 대로 계십소.”
관준은 최구장의 손을 잡으면서 구들에 앉았다. 그래도 최구장은 일어나 간신히 앉았다.
“내 근심은 하지 말구 먼저 내 손비를 봐 주오.”
관준은 먼저 근형과 함께 고방에 들어가 새단의 병을 보았다.
그 사이 형내가 최구장의 손맥을 짚어보고 머리도 손으로 매만져 보았다.
“스승님, 세상에 둘도 없이 착한 선생님께서 어쩌다가 이런 봉변을 당하셨습니까?”
최구장은 그저 눈을 지그시 감고 한숨만 후~ 내쉬었다.
한참 후 관준이 고방에서 근형과 함께 나왔다.
“새 색시가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낙태할 번했습니다. 허나 안궁 약을 몇 첩 쓰고 지혈제를 쓰면 될 것 같습구마.”
최구장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우리 손비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일본 놈들이 저렇게 모질게 굴어? 에이, 고약한 놈들이라고. 제 놈들이 우리 운주동 주인행세를 하고 있단 말이요. 어디 될 말인가?”
관준도 눈을 지그시 감고 최구장의 손맥을 보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사돈어른, 외상이니깐. 지혈제를 쓰면 되겠습구마.”
관준은 침통을 꺼내 최구장의 머리와 볼, 어깨 등 여러 부위에 침을 쏙쏙 꽂아놓았다.
“에이, 내야 이젠 팔순고개를 바라보니까 죽어도 괜찮지만 저 손비나 좀 살려 주오.”
관준은 침을 하나하나 뽑아 약솜에 닦아 침통에 걷어 넣으면서 말했다.
“무슨 소릴 하오. 우리 다 살아서 만주국으로 들어가 잘 살기요. 만주국에 먼저 들어간 내 조카가 몇해 전 생전에 고향에 왔다가 하는 말이 일본 놈들이 적은 만주국에 가면 땅도 넓고 사람이 적어서 지나가던 길손에게도 기장밥에 토장국을 대접한다고 했소.”
최구장은 도리머리를 가로저었다.
“만주국에 일본 놈들이 없으면 몰라도.”
관준은 침통을 주머니에 넣고 새하얀 염소턱수염을 슬슬 만지면서 최구장을 보고 말했다.
“글쎄, 직접 들어가 제 눈으로 똑똑히 봐야 알지. 여기서 소문만 들어서야 어찌 제대로 알겠소? 그러나 저러나 최구장과 손비는 우리 집에 가 있으면서 치료해야 되겠소. 인차 떠나도록 하기요. 손비 병은 중하오. 다시 놀라면 애도 떨어지게 되오.”
그 말에 최구장은 “그럼 먼저 내 손자하구 손비나 데리고 가서 잘 치료해 주오. 난 내일 날이 밝으면 약을 가지러 경인을 보내겠소.” 하고 말했다.
이튿날 이른 새벽에 상순은 최구장과 경인 등과 일일이 인사하고 만주국을 바라고 떠났다. 그는 매형 경인과 어금을 이슬 맺힌 눈길로 바라보면서 떠나기 아쉬워했다.
“매형과 누님도 인차 만주로 들어오오. 가시할아버지랑 가시부모랑 모시고 다 함흥촌에 들어오오. 함흥촌에서 우리 함께 살기요.”
상순의 말에 경인은 머리를 끄떡이었다.
“그래기요. 우리도 인차 들어가야 하겠소. 내 검에 피를 묻혔으니 일본 놈들의 등살에 어디 고향에서 더 살 수 있겠소?”
상순은 고향을 떠나면서 계속 한숨만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야, 내 고향 운주동이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였는가? 다 일본 놈들 때문이야. 이제 성칠 큰아버지를 만나면 총 한 자루를 달라고 해야지. 일본 놈들을 하나하나 쏘아 죽일 테야.)
상순은 명옥을 데리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떠났다. 그는 령마루에 올라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고향 산천을 휘 둘러보았다. 저 멀리 바라보이는 구름 속에 우뚝 솟은 기운봉과 치마봉 허리에 은띠를 두른듯이 사품 치며 흐르는 운주하, 고향마을 뒤에 뻗은 산발 따라 조상들의 선산도 바라보였다. 마치 눈에, 마음에 고향 산천을 다 담아가지고 떠나가지 못하는 것이 아쉬워 오래도록 눈을 떼지 않았다.
그는 명옥의 손을 잡고 장탄식했다.
“여보, 우리 언제 고향으로 또 돌아오겠소?”
“글쎄. 일본 사람들과 싸우지만 않아도 몇해 후에 오겠는 걸 그랬소.”
명옥이 하는 말에 상순은 벌컥 성을 냈다.
“개소릴 작작 치오. 섬나라 오랑캐들을 몽땅 몰아내야 우리가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는게야.”
상순은 씩씩거리면서 령길을 씨엉씨엉 앞질러 걸어 나갔다. 명옥은 나그네의 성질을 아는지라 감히 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뒤따라갔다 …
처남 상순이 떠나간 후 경인은 약을 가지러 신설 집으로 떠나가고 최구장과 근형은 삽과 괭이를 들고 산속으로 몸을 숨기었다.
경인이 신설집 팔간 집 삽작문에 들어서니 형내의 아버지 상철이 널마루에서 내려오면서 반겨 맞았다.
“어이구, 불붙이 검객사돈이 왔구먼. 그래 사돈어른 병은 어떻소?”
“아버진 괜찮은데 큰조카네 색시가 하혈이 심하오.”
이때 관준과 그의 아들 상철이 안방에서 들어오라고 경인을 불렀다.
“사돈, 어서 들어오오. 약을 다 지어놓았소.”
상철의 고조부 수종, 증조부 승중, 조부 병권, 아버지 관준 그리고 그의 맏아들 형내까지 6대를 내려오면서 이 집안은 대대로 명의였다. 고조부 수종과 증조부 승중은 모두 리씨 왕조의 궁중어의였다. 승종영감은 궁정에서 오줌약을 왕후에게 썼다가 왕후의 병은 치료하였지만 사실진상이 발각된후 왕에게 축출당하였던것이다. 그는 이 명천 골안에 낙향한 후 맏아들 병권에게 의서를 물려주었고 둘째아들 병완에게는 힘과 목수재간을 물려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큰집 신설집은 병권으로부터 대대로 조상이 물려준 비방으로 병을 보면서 여유있게 살았고 둘째집 성남집은 병완으로부터 시작하여 대대로 목수재간과 뚝심을 믿고 어렵게 살아왔다.
경인이 황급히 인사를 드리고 약 첩을 들고 나오면서 보니 상철의 열둬 살 푼한 둘째아들 경학과 일여덟 살 돼 보이는 셋째아들 광학이가 피뜩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새까만 눈알을 때굴때굴 굴리면서 입을 꼭 닫아 맨 채 종내 인사할 줄 몰랐다.
(저 애들은 뜨거운 형내와는 달리 차지고 꽁한 애들이야. 이런 집에 어떻게 우리 할아버지네가 와있겠는가.)
이런 궁리 저런 궁리 하다나니 어느덧 불붙이에 이르렀다. 그런데 개 짓는 소리가 요란했다.
경인이 소나무 뒤에 몸을 숨기면서 자기 집 쪽을 내려다보았다.
“앗!”
경인은 하마터면 고함칠 번했다.
(저게 뭐야? 일본 헌병대 놈들이 아니야?)
경인은  깜짝 놀랐다. 
야마모도 놈은 왼눈 통을 붕대로 싸매고 헌병들을 데리고 자기 셋째동생 경민과 넷째동생 경욱을 묶어 앞세우고 자기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뒤이어 한길수도 졸개들을 끌고 들이닥쳤다.
집 마당에서 경욱이 목에 지렁이 같은 핏줄을 살려가지고 고함치고 있었다.
“우리 형님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이렇게 못살게 구오?”
경민은 그저 겁이 나서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이윽고 한길수는 경인의 집에서 쌍검을 찾아냈고 복면하였던 검은 보를 찾아냈다.
“물증이 다 있는데도 떼를 쓸 테야? 이게 바로 어제 저녁에 저 야마모도소장의 눈을 찌른 검이야. 이 피를 보아라. 아직 채 마르지도 않았어.”
영팔이 고함쳤다.
“맞소. 건 경인이란 놈 거 틀림없어!”
야마모도 소장 놈은 외눈깔 통에 불이 이글이글거렸다.
그는 한길수 손에서 쌍날 검을 빼앗더니 씽 덮쳐가 경민을 내리찍었다. 경민이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막다가 왼손이 뭉청 끊어져나갔다.
“앗!”
비명과 함께 그의 손이 피바람과 함께 땅바닥에 떨어졌다. 경민도 쓰러져 대굴대굴 굴렀다.야마모도가 내리찍으려는데 끼무라 국장이 말리였다.
“이 놈들을 잡아가둬야 범을 산에서 끌어낼 수 있단 말이요. 그만해.”
야마모도는 허우적거리면서 검으로 하늘을 마구 찍어대며 고함쳤다.
“당신들은 또 그물을 넓게 쳐서 큰 고기를 낚겠어? 난 동생과 눈마저 잃었어.저놈들을 요정내고 말겠어.”
야마모도가 미쳐 날뛰자 끼무라소장은 부하들을 시켜 야마모도마저 묶어가지고 경민이 형제 그리고 근형의 색시까지 함께 끌고 산 아래로 내려갔다. 어금은 잡혀가는 시동생들과 시조카들을 바라보면서 어쩔 줄 몰라 마당에서 두 손으로 앞섶 잡고 발을 동동 굴렀다.
경인은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떨었다.
(안 되겠어. 도망쳐야지.)
그는 일본 놈들이 사라지기를 기다려 아내와 딸 해옥을 데리고 약 첩을 쥔 채 산속으로 달아났다.
“이보, 근덕은 어쩌고 이렇게 달아나오? 그 애도 데리구 달아나야지.”
경인은 숨이 차 헐떡거리면서 말했다.
“당신은 먼저 해옥을 업고 신설집 쪽으로 피하오. 내 우시장에 가서 인편에 근덕을 만주국에 가자고 기별하겠소.”
어금은 해옥을 업고 뒷산 속으로 사라지고 경인은 령길을 타고 남쪽으로 사라졌다.
한편 우시장의 일본 놈의 상점에서 일하던 근덕은 그날도 상점에서 일하다가 면목 모를 사람이 찾아와 쪽지를 한 장 주고 가는 걸 받아 쥐었다.
근덕은 뒷간으로 가는 척 하면서 뒤울안에 가서 쪽지를 가만히 펴보았다. 쪽지에는 이런 글이 또박또박 씌어있었다. 분명 아버지의 필적이었다.
 
      근덕아, 우리는 사고를 쳐서 부득이 만주국으로 들어가게 된다. 너도 속히 기차를 타고 외할아버지랑 계시는 만주국 함흥촌으로 들어오너라.
 
쪽지를 받자마자 근덕은 일본 상점의 주인을 보고집에 급한 일이 있어 돌아가야 하겠다고 했다.
"차비를 하게 봉금을 주오."
일본 주인은 안경알 밑으로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동전 몇 잎을 달랑 내놓았다.
“중도에 나가면 없어. 불쌍해 주는줄 알아."
근덕은 원통한 대로 동전 몇 닢을 받아 넣고 우시장 역으로 나갔다.
그는 아버지가 직접 오지 못하고 쪽지를 보냈을 때에는 집에 꼭 무슨 일이 생겨 먼저 떠나갔으리라고 짐작했다. 그리하여 그는 고향에도 들리지 않고 그날로 기차를 타고 명천을 떠나 만주국으로 떠나갔다.
정든 고향을 떠나는 근덕의 눈에는  고향을 빼앗긴 슬픔이 피눈물로 흘렀다. 나어린 그도 나라를 잃은 망국노의 아픔이 마음속 깊이 폐부에 맞혀오는 것을 가슴깊이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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