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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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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29)
2016년 01월 13일 14시 22분  조회:2241  추천:1  작성자: 김장혁
 



                     5. 일제의 발굽 밑에서 신음하는 용정
       두만강변의 버드나무들은 발가벗은 채 추운 초겨울 바람에 몸부림 치고 있었다.
       기준은 관준 형님이 무사히 쪽배에 앉아 두만강을 건너간 후에야 시름 놓고 발길을 돌렸다.
       그는 반나절이나 걸어서야 명동교회당에까지 이르렀다. 숱한 신자들이 교회당에서 꾸역꾸역 밀려나오고 있었다. 금방 예배가 끝난 것 같았다.
       기준은 시장기가 엄습하여 견딜수 없었다. 나중에는 더 걷기 힘들게 모질 지쳤다.
       그는 비틀거리면서 명동교회당에 들어갔다.
        한창 예배당에서 청소하던 하규가 빗자루를 든 채 반갑게 맞이했다.
        “아니, 참 오랜만이구만. 어서 가서 점심이나 들게나.”
        기준은 맥없이 문안하며 하규를 따라 교회당 위방에 들어가 앉았다.
정지의 아줌마가 점심상을 들여오자 기준은 하규와 함께 맛나게 식사하면서 허기진 배를 달랬다.
기준은 숟가락을 놓고 숭늉으로 입가심을 한 후 물었다.
“그간 사위 최봉설이랑 왔다 갔소?”
하규는 밥상을 물리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나직이 말했다.
“군자금과 군량을 얻어가려고 며칠 전에 왔소.”
기준은 앉음걸음새로 하규한테 다가앉았다.
“혹시 최봉설은 유격대 소식을 모르오?”
하규는 기준에게 바깥으로 나가자고 눈짓했다.
기준은 하규를 따라 스적스적 뒷동산에 올랐다.
하규는 기준을 되돌아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잖아도 인편에 기별하자고 했네. 최봉설은 항일유격대와 연계가 있는 모양이더군. 자네 혹시 유격대에 들어갈 생각은 없소?”
“유격대?”
“음.”
도척 같은 기준이도 적이 놀랐다.
“그럼 최봉설이 유격대 아니오?”
“쉿- 누가 듣겠네.”
하규는 식지를 입에 대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귀속 말을 했다.
“이전에 말하잖았소? 내 사위는 후에 적기단에 들어갔다가 김 대장이 영도하는 항일유격대로 들어갔네. 최봉설의 말에 의하면 자네 같은 힘장사가 필요하다오.”
기준은 한참 궁리하더니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 전번에 물레방아골 원삼이네 집에 들렸을 때오. 지주들이 소작료를 빡빡 걷어갈 때면 유격대에 가서 총을 들고 그 놈들을 몽땅 쏴죽이고 싶습데. 그런데 내 가면 우리 처자들은 누굴 믿고 살겠소? 황차 성칠 형님도 행방불명이 돼 아버지가 날마다 형님 생각에 한숨만 푸푸 쉬면서 세월을 보내오. 아버지는 항상 우리를 보고 고향에서 한길수나 일본 놈들과 등져서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간도로 들어왔는데 여기서 새 원수를 맺지 말라고 타이르곤 했소. 에이, 이 놈의 지루한 고난의 세월이 언제면 끝나겠소?”
기준은 의로운 효자니까 아버지의 명을 어길 수 없을게 뻔했다.
하규는 더 말해봤자 부질없는 노릇이라는 걸 짐작하고 입을 꾹 다물어버리었다.
그때 기준이 입을 열었다.
“혹시 김 선생님은 우리 형님 소문을 듣지 못했습둥?”
하규는 도리머리 질 하다가 뭔가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는 모양으로 머리를 들어 기준을 마주보았다.
“혹시 김 대장이 자네 형님이 아닌지 모르겠네. 김 대장은 얼굴모색이 딱 자네를 닮았더란 말이오.”
“김 대장이?”
기준은 귀가 번뜩 뜨여 다가앉으면서 물었다.
“이름이 뭐라오?”
하규는 기억을 더듬으면서 “전번에 우리 사위 봉설과 함께 왔을 때 성칠이라고 하지 않고 김인섭이라고 한 것 같은데.” 하고 말했다.
기준은 다소 실망하였지만 그래도 일루의 희망을 품고 한 가지만 더 물었다.
“그래 김 대장이랑 어디에 거점을 잡고 있다고 하더군.”
하규는 기준을 믿기에 곧이곧대로 말해주었다.
“유격대는 딱 어느 곳에 머물러있지 않고 이동성이 강한가 봐. 어쨌든 이 동만 지구에서 활동하는데 어떤 때엔 용정에도 오고 진수해 부근에도 오구 왕청 쪽에도 가구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니까 종잡기 힘드네. 전번에는 훈춘에 가서 최현 대장을 만난 거 같데.”
기준은 호기심이 가 한 발자국 더 다가들며 물었다.
“훈춘은 최현 대장네 고향이 있지 않소?”
“그렇지. 훈춘 경신의 장고봉은 쏘련 홍군이 일본 놈들을 처음 맞붙어 싸운 곳이지. 전투가 벌어진 곳이지. 일본 놈들이 중쏘조 접경지인 훈춘 경신에서 제일 높은 산봉오리인 장고봉 부근에서 쏠락거리니까 쏘련 홍군들이 가만 놔둘 수 있겠어? 쏘련 홍군은 자기네 국경을 넘보는 일본 놈들을 여지없이 족친게지.”
“김 대장이 진수해 부근에는 어째 갔을까?”
김하규는 은수염을 슬슬 매만지면서 “아마 유격대 군량을 얻으러 돌아다녔다는 거 같소. 피뜩 들어보면 자네네 소서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도 돌아다닌 거 같네. 전번에 내가 사위 보고 그 많은 군량을 어디다 두는가 근심했소. 진수해 부근 어느 토성을 한 집에 뒀다가 먹을 만큼 산에 날라 간다고 합데.” 하고 말했다.
“예? 그럼 혹시 우리 함흥촌의 토성 안 집이?”
기준은 적이 놀랐다.
“그 토성 안 집은 농사도 짓지 않지만 숱한 쌀을 날라 들였소. 무슨 장사를 하는지 숱한 낯모를 사람들이 드나들구.”
김하규는 도리머리 질 했다.
“진수해 부근에 토성안집이 숱한데 딱 자네 함흥촌 토성 안 집인지 어찌 알겠소?”
기준은 뒷덜미를 쓱쓱 긁었다.
“글쎄. 진수해 부근 토성 안 집이라고 했는데 진수해 토성안집은 기생집이니까 아닐 거고. 조개덕의 두 토성안집은 한족지주니까 아닐 거고. 소서구의 장지주네 토성 안 집에는 누구도 다니는 게 없고. 대체 어느 집일까?”
하규는 기준에게 부탁했다.
“내 한 말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구 가만히 찾아보라구. 다음에 사위가 오면 김 대장을 알아볼게. 혹시 김 대장이 자넬 아는가도 알아보지.”
기준은 하규의 두 손을 잡고 신신당부했다.
“꼭 우리 성칠 형님 어데 있는가 알아봐 줍소. 겨울이면 내 용정에 와서 목수 일을 하겠으니까. 드문드문 찾아오겠소. 김 대장이 내 형님이 옳으면 용정 장마당에 와서 나를 알려줍소.”
“그러지.”
기준은 할 말은 많았지만 큰집 소값을 만들어야 하겠기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하규는 기준이 교회당 앞의 징검다리를 건너 떠나갈 때까지 바래주었다.
“종종 오게나.”
기준은 허리를 굽히면서 “편안히 계십시오.” 하고 작별인사를 하고는 용정을 바라고 걸음을 다그쳤다.
육도하를 따라 서쪽으로 내리 걷고 걸어 용정에 이르렀을 때는 초겨울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시내 큰길에서 목수라는 걸 눈치 채면 좋지 않은데. 혹시 똘만 같은 밀정 놈들이 암암리에 뒤를 밟으면 큰일 날게 아닌가.)
기준은 버들방천을 두리번거리다가 문뜩 꾀가 떠올랐다. 그는 마른 삭정이를 주어다가 목수도구상자 위에 얹어 목수도구를 가리어버렸다. 제창 목수가 아니라 땔나무장사군 같아 보이었다.
그는 땔나무로 가린 목수도구상자를 지고 용정 시내로 스적스적 걸어 들어갔다. 그가 장마당골목에 들어서자 어떤 나그네가 다가와 흥정을 걸었다.
“땔나무를 얼마에 팔겠소?”
기준은 손사래를 쳐댔다.
“아니, 이건 임자가 있소.”
그는 장마당에 목수도구상자를 내리워놓고 일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땅거미가 어둑어둑 져 가는데 일을 시키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장마당에는 장군들과 일거리를 기다리는 막벌이일군들이 서로 마주 보고 서있었다.
옆에서 온돌을 손질할 일거리를 기다리던 한 사나이가 기준을 보고 “여보, 땔나무를 팔지 않겠소?” 하고 물었다.
“아니, 이 땔나무는 팔게 아니요. 임자가 있소.”
그 사나이는 히죽이 웃으면서 “보나 마나 목수 일을 기다리는 거 같은데 땔나무를 파오.” 하고 한술 더 떴다.
그 말에 기준은 별수 없이 “그럼 가져가오.” 하고 시원히 땔나무 단을 내놓았다.
“얼마요?”
기준은 어두워진 시내 골목을 둘러보면서 “난 먼 외지에서 와서 잘 데도 없소. 하루 밤 자면 안 되겠소?” 하고 물었다.
“거 좋소. 지나가던 행인이라도 쉬게 해야 하는데. 어험, 이거 땔나무를 공 가져 가는 거 같아 미안하오.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을 잘 대접하지.”
기준은 땔나무를 목수도구 위에 얹어 지고 따라가면서 감사하다고 했다.
그 사내는 도끼를 쥐고 걷는 기준을 돌아보면서 “우리 알고 지내기오. 난 세린하에서 온 정성문이요.” 하고 손을 내밀었다.
기준은 초면강산의 정성문에게 제대로 말할 수 없었다.
“난 함흥에서 온 허동팔이요.”
그들은 어려운 세상살이를 얘기하면서 정성문의 손바닥만 한 집에 들어섰다. 집안에서는 십대중반의 남학생이 한창 밥상에 마주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내 아들 정규상이오. 인사해라. 함흥에서 온 삼촌이다. 얘는 징금 대성중학교를 다니고 있소.”
정규상은 보던 책을 내려놓고 우쭐 일어나 허리를 굽히면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기준은 넉가래 같은 손으로 규상의 어깨들 다독이면서 “오, 그래. 얼굴이 길쭉한 게 정말 영특하게 생겼구나.” 하고 덕담을 해주었다.
저녁에 그들은 죽 한 사발에 시라기국 한 사발씩 들고 상을 물렸다.
기준은 공부를 하는 규상을 보자 이전에 상순이랑 상길이랑 공부를 하고 싶어 하던 일이 떠올랐다. 그는 정성문에게 용정의 학교 형편을 두루 알아보았다.
“이 학생이 다니는 아까 어느 학교라던가. 월사금이랑 많이 드오?”
정성문은 담배를 붙여 물며 한숨을 후 내쉬었다.
“많이 드오. 쟤가 다니는 대성중학교는 옛날에 애국지사 이상설이 차린 서전의숙자리요. 그런데 이상설지사가 떠나간후 일본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일어를 억지로 배우게 한단 말이요.”
기준은 한숨을 후~ 내쉬면서 “일본 사람들이 진짜 억지를 부리는구먼.” 하고 동을 달았다.
“일본 사람들은 진짜 노화교육을 한단 말이요. 월사금을 어찌나 많이 받는지 모르오. 내 글쎄 온돌쟁이로 돼서 날마다 낯에 숯 검댕이 칠을 하면서 구들을 뜯어 고쳐주고 서도 얘 월사금을 내구나면 우리 부자간이 입 살이 하기도 힘드오.”
그 말에 기준은 속으로 상순과 상길을 공부시키지 못 하겠구나 생각했다.
(에이고, 이 세월에 배가 불룩한 여편네가 또 애를 낳으면 입이 하나 더 생겨서 어쩌는가? 아직 큰집 소 값도 만들지 못했는데.)
그러나 기준은 허리띠를 조여 매고서라도 막내아들을 공부시키고 싶었다.
“용정에 그 학교보다 월사금이 더 눅은 데는 없소?”
정성문은 한숨을 후~ 내쉬면서 용정의 학교들을 죽 얘기해주었다.
“우리 조선에 향학열이 불어칠 때 용정에는 십여 년 전에 이상설 등 조선의 지명인사들이 세워놓은 서전의숙이 있었소. 1906년도에 서전의숙이 갓 섰을 그때만 해도 몽땅 조선선생님들이 배워줬기에 월사금도 아주 눅었소. 서전의숙은 중국에세 세운 첫 조선족학교요. 서전의숙이 일본 놈들에 의해 불타버린 후 그 터전에 대성중학교라는 학교를 세웠는데 일본 사람들이 관리하면서부터 월사금이 엄청 많아졌소.”
정성문은 숭늉그릇을 들어 꿀꺽꿀꺽 마시더니 뒤 말을 이었다.
“용정에는 대성중학교를 내놓고서도 저 대성학교앞쪽에 광명여자중학교가 있고 영국덕에 은진학교가 있소. 룡문교 서쪽에는 또 동흥학교가 있소. 그런데 월사금은 거의 피장파장이요.”
기준은 정성문의 말을 들으면서 속으로 먹물을 먹은 양반 같구나 생각했다.
“당신도 공부를 많이 한 거 같소. 세상 아는 것도 많고.”
정성문은 아주 겸손하게 말했다.
“난 겨우 원산에서 중학교를 졸업했을 뿐이오.”
“양?”
기준은 눈이 휘 동그래졌다.
“아니, 지금 난세에 중학교를 나왔으면 대단한 유지인사지우. 허허. 눈이 있어도 태산을 알아보지 못 했구먼 그래.”
“사실 내 할아버지 때부터 우리 가문에는 자식을 너무 공부 시키고 세상을 널리 보면 고향과 부모 곁을 떠난다고 소학교 정도만 공부시키는 집안의 전통이 있었소. 그런데 내 아버지만은 나를 큰 뜻을 세우고 큰 일을 하라고 고향 산골에서 머나먼 원산중학교에 보내 공부를 시켰소. 그런데 정말 고향을 떠나 이렇게 먼 간도에 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소.”
기준은 그 말을 듣고 고향생각이 저절로 나서 한숨을 푸 내쉬었다.
“우린 어디 공부나 하고 고향을 떠났소. 다 일본 놈 새끼들이 우리 고향에 쳐들어오는 바람에 핍박에 의해 고향을 떠나왔지.”
정성문이 제꺽 동을 달았다.
“정말 일본 놈 새끼들이 아니면 우리 무슨 조선 고향을 떠나 부모형제와 이별해서 이런 간도에 와서 고생하겠소.”
그때 정규상이 끼어들었다.
“일본 선생들은 정말 말이 아닙니다. 우리 조선말만 하면 대나무패쪽을 하나 빼앗아갔습니다. 한 학생에게 패쪽 다섯 개씩 나눠줬는데 다 빼앗기면 개패를 목에 걸어놓고 구더기 욱실거리고 구린내 나는 변소 청소를 시킵니다.”
정성문이 동을 달았다.
“학생들은 서로 개패를 걸지 않고 변소 청소를 하지 않으려고 누가 조선말을 하기만 하면 서로 물어먹으면서 제꺽 패쪽을 빼앗아 가질 내기 한다오.”
“에이, 일본 놈들은 우리 고향에서도 학교를 세우고 그런 짓을 한답데. 그 놈들은 못하는 짓이 없소.”
그들 둘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그들은 나직이 이 말 저 말 하다가 기름등잔불을 빌어 밥상에 마주 앉아 공부를 하는 규상을 보고 지장을 주지 않으려고 일찍이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 죽을 먹고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정규상은 책보를 싸들고 학교로 떠나갔다.
기준은 문께로 내려가 목수도구를 챙기다가 부엌 쪽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이 집에 식장이 없구먼. 그릇을 저렇게 부엌이마에 쭉 널어놓았다가 쥐며느리라도 들어가면 음식을 어떻게 먹겠소? 내 식장을 짜 줄게.”
정성문은 대수롭잖게 머리를 절레절레 가로 저었다.
“언제 식장을 다 놓고 살겠소?”
기준은 사람 좋게 웃으면서 “내 하루 밤 신세를 졌으니 공짜로 짜줄게.” 라고 했다.
정성문은 손사래까지 저었다.
“관두오. 식장을 짤 널도 없소.”
기준은 목수도구상자를 둘러메면서 “그럼 널을 얻어놓으면 아무 때나 짜줄게.” 하고 말했다.
그들은 어깨 나란히 장마당에 일거리를 찾으러 갔다.
기준이 정성문과 이 말 저 말 하면서 웬 큼직한 대문 앞을 지나갈 때였다.
웬 일본 경찰이 얼룩사냥개를 데리고 놀고 있지 않겠는가.
기준은 속이 꿈틀해 머리를 숙이고 황급히 파출소 앞을 지나갔다.
경찰과 멀어지자 기준은 간신히 머리를 들면서 “정 선생, 저게 혹시 경찰국이 아니오?” 하고 물었다.
정성문은 “저게 용정 통감부 간도파출소라는데요. 금방 얼룩사냥개를 데리고 놀던 놈은 악명 높은 소장 사이또란 놈이오.” 하고 일러주었다.
그 말에 기준은 사이또란 놈의 낯이라도 익혀 둘 듯이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코수염쟁이 사이또 소장은 꽤나 훤칠하게 생긴 놈이었다.
“에이, 저 놈들이 여기에 1907년도에 파출소를 세운지 이젠 20년도 훨씬 넘었소. 저 놈들은 이층짜리 용정 영사관 울안 지하 감방에서 수많은 항일투사들을 고문하구 살해하고 있소. 사이또 소장 놈은 이 일대에서 악명이 자자한 악당 우두머리 놈이요.”
정성문의 말을 듣고 기준은 몸서리쳤다.
기준은 “일본 놈들의 용정영사관이란 건 뭐 하는 데요?” 하고 물었다.
정성문은 장마당주위를 살피면서 나직이 말했다.
“한마디로 일본 놈들의 간도통치중심일세. 저 놈들이 용정 영사관을 지을 때 어쨌는지 아오? 제일 처음에는 간사한 일본 놈들이 부패 무능한 만청정부와 용정에 소가죽만한 땅만 달라고 했다오. 그래서 고만한 땅이야 주지 못하겠는가고 만청 길림성정부 관원이 제꺽 대답해버렸지. 그런데 간사한 일본 놈들은 소가죽을 실오리만큼 오려내 이어서 소가죽 줄을 쭉쭉 늘여놓고 지금 영사관을 지을 널다란 땅을 내놓으라고 해서 가졌다오.”
기준은 억이 막혀 입을 딱 벌렸다.
“보아하니 당신은 내처럼 일본 놈들을 아주 미워하는 거 같구먼.”
성문은 기준을 돌아보았다.
“당신을 믿고 솔직히 말하는데 난 강원도 원산중학교를 다닐 때 나팔을 불었소. 후에 독립군을 알게 되면서 독립군 나팔수로 산으로 들어갔다가 일본 놈들의 지명수배에 배기지 못해 간도에 도망쳐 왔소.”
기준은 머리를 끄덕였다.
“당신이나 내나 마찬가지 신세구만. 난 고향에서 일본 놈의 개다리를 괭이로 찍어 죽이려다 죽이지도 못 하고 고향을 떠나 여기 간도로 도망쳐 왔소.”
정성문은 왼손에 구들 긁개를 바꿔 쥐더니 기준의 손을 굳게 잡았다.
“후에 우리 손을 잡아보기요.”
기준은 사위를 둘러보며 나직이 말했다.
“길바닥이라 길게 말하지 못하겠는데 후에 자주 만나서 속심 얘기를 하기요. 일본 놈들을 조선과 간도 땅에서 몰아내지 않고선 잘 살 날이 없소.”
정성문은 믿음에 차 기준의 손을 잡고 머리를 끄덕이면서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언제 저놈새끼들을 다 없애버리겠소.”
장마당에 간 후 거의 둬 식경이나 초조하게 기다렸는데도 기준의 손을 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한참 후에 웬 만또를 입은 뚱뚱한 한족사내가 기웃거리면서 오더니 구들긁개를 쥐고 있는 성문을 보더니 멈춰 섰다.
“따캉(구들) 손질했소?”
“쓰아(예.)”
“껀 워 쩌우바(날 따라가자).”
정성문은 기준을 돌아보고 “후에 장마당에서 다시 만나기오.” 하고 작별인사를 하고 한족사내를 따라 떠나갔다.
기준은 반나절을 기다리다가 일거리가 없자 집에 해산달이 된 사련을 두고 온 것이 적이 근심됐다. 게다가 통감부 파출소 앞을 지나다가 사이또 소장 놈을 본 후 용정에 한식경도 더 서 있고 싶지 않았다.
기준은 장마당에서 해산할 아내에게 미역국을 끓여 먹이려고 마른 멱을 좀 사 목수도구 상자 안에 넣어 둘러메고 져가는 땅거미를 밟으면서 집으로 부랴부랴 돌아왔다.
6. 가난한
해가 진지도 몇 식경이 지난 후에야 기준은 비칠거리면서 겨우 소서구에 있는 집에 들어섰다.
그때 집안에서 애기 울음소리가 자지러지게 났다.
“에이고, 이 살기 바쁜 세월에 우리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또 어떻게 한뉘 고생하겠느냐?”
기준은 중얼거리면서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애기에게 젖을 물리고 누워 있는 사련에게 “수고했소.” 하고 인사하고 나서 물었다.
“사내요? 계집애요?”
사련은 맥없이 “딸애요.” 하고 대답했다.
그 말에 기준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면서 중얼거렸다.
“입에 풀칠도 하기 어려운 세월에 입이 하나 더 생겨서 어찌겠니?”
사련도 갓난 애기를 내려다보며 “글쎄 말이요. 애를 낳으라는 며느리는 애를 낳지 못하고 시어미 늦둥이를 낳다니? 어이고, 어처구니 없어요.” 하고 중얼거렸다.
기준은 아래 방을 내려다보며 월금에게 “넌 목수도구 상자 안에서 멱을 꺼내 멱국이나 끓여라.” 하고 당부했다.
월금이 위방에 놓은 목수도구 상자 안에서 미역을 꺼내 들고 정지로 나가자 며느리 새금이 가마를 부시였다.
상순은 애기를 보고 좋아 생글방글 웃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요거, 아이고, 오물오물 젖을 빠는 거 봐라. 야~ 내한테도 여동생이 있어. 야~ 좋다야.”
기준은 상순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응, 그래. 상순에게 여동생이라도 있어야 하지.” 하고 장해했다.
한참 뭔가 궁리하던 기준은 “애 이름을 금옥이라고 짓기요.” 하고 말했다.
사련은 얼굴에 희색을 띄우면서 쌔근쌔근 자는 갓난애를 안고 안간힘을 쓰면서 일어났다.
“금옥아, 아~ 그~ 딱. 우리 금옥이 참 귀엽구나.”
옆에 있던 상순은 손뼉까지 치면서 좋아 야단쳤다.
기준은 사련의 손에서 금옥을 받아 안고 손 그네를 태워주면서 놀았다.
사련은 딸을 보고 만면에 춘풍이 흐르는 기준을 보고 무거운 입을 뗐다.
“여보, 저 아래 주현경이 월금에게 혼사 말을 하러 왔습디다. 뭐 망석이란 박씨 총각이라 했소.”
정지에서 월금은 미역을 씻어 가마에 넣으며 부모가 주고받는 말을 듣고 가슴이 당장 튀어나올 듯이 콩콩 뛰었다.
“그래 총각은 어떻소?”
“인기는 잘 썼소. 튼튼한 게 농사도 잘 지을 거 같고.”
“가문은?”
“당신이 없어 자상히 물어보지 못하고 보냈소. 피뜩 들으니 여주 박씨 네 셋째아들인데 집안 내력이 괜찮은 거 같소.”
“음.”
그때 위방에서 한숨소리에 뒤이어 사련의 목소리가 나직이 들리었다.
“그런데 장가갔는데 반년도 안 돼 색시가 급병으로 죽었다오.”
“뭐라고 그럼 홀아비지 않소?”
위방 안에서 씩씩거리는 거친 숨소리에 뒤이어 땅방울 같이 을러메는 고함소리가 들리었다.
“안 되오. 딸을 시집보낼 데 없다고 홀아비와 혼사 말을 하겠소? 이 혼사 말은 절대 안 되오!”
고함소리에 갓난 애기가 놀라 “응아~ 응아~” 하고 자지러지게 울었다.
“응~ 금옥아, 울지 마라. 애를 여기 주구 좀 조용조용 얘기하오.”
“개 소릴 치지 말라. 그 자리로 딱 잘라 버릴 게지. 뒤를 질질 달게 뭐야?”
“당신 오면 보자고 했소.”
“주현경이 그 놈 새끼, 우릴 어떻게 보고 홀아비를 다 중매한단 말이냐?”
월금은 미역국을 끓이면서 눈물을 하염없이 줄줄 흘리었다. 두 볼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눈물방울은 가마 안의 미역장국에 방울방울 굴러 떨어졌다.
이튿날 기준이네 딸을 보았다고 기별하자 웃새집과 아래사랑집에서 갓난애를 보러 왔다.
병완은 위방에 앉아 한참 몸을 녹인 후 두 손을 내들면서 “막내손녀를 어디 좀 안아보자.” 하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버지가 금옥을 안고 반가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준과 창준은 마주 보며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기준은 “성칠 형님이 소식이 있을 거 같소. 하규가 그러던데 항일유격대 대원들이 오랑캐령에서 용정 일본 놈들이 조선에 날라 가는 쌀 수레를 습격한 적이 있었답꾸마.”
병완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허, 아무 때건 성칠이 집에 찾아오겠지.”
기준은 병완을 보고 “저 토성 안 집이 성칠 형님과 뭇근 관계있지 않는지 모르겠습꾸마.” 하고 말했다.
창준은 “그게 무슨 소리냐? 토성 안 집은 장지주가 조선 양아들에게 지어준 집이잖니?” 하고 물었다.
기준은 “형님이 아마 토성안 집 인삼이네 집으로 드나드는 것 같소. 유격대 양식이랑 인삼이네 집에다 숨겨둔 것 같소.” 하고 말했다.
창준은 머리를 끄덕였다.
“음~ 글쎄 이상하게 토성 안 집에 숱한 사람이 드나든다 했더니.”
병완은 곰방대를 물고 뻑뻑 빨다가 “언제 인삼을 찾아가 물어보자. 성칠을 찾겠는지.” 하고 말했다.
창준과 기준은 머리를 끄덕였다.
정지에서 지새금과 웃새집 맏며느리는 점심준비에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돋았다.
소서구 골 안에서는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쳤지만 집안에서는 웃음소리가 멎지 않았다.
기준은 아버지를 보고 “저 아래 집 주현경이 남자애까지 달린 홀아비를 월금에게 혼사 말을 하던데 어찌 하겠는지 모르겠습꾸마.” 하고 근심을 터놓았다.
창준은 도리머리를 가로 저었고 병완은 갓난 금옥을 기준에게 안겨주면서 말했다.
“사람만 좋으면 돼. 총각이라고 다 좋고 홀아비라고 다 나쁘겠느냐?”
기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벽쪽으로 머리를 돌려 외면했다.
며칠 후 눈보라가 사납게 휘몰아치는 엄동설한을 무릅쓰고 주현경이 진짜 그 박씨 네 젊은이를 데리고 혼사 말을 하러 또 왔다.
기준이 흘끔 보니 젊은이는 길쭉한 얼굴에 꽤나 패기가 넘쳐 보이었다. 그러나 그는 주현경을 보자 눈알을 부라리며 노발대발했다.
“자네 아는가? 혼사 말은 잘하면 술이 석 잔이고 잘못하면 칼이 석 자루라는 거?”
기준은 당장 주현경을 잡아먹을 듯이 펄쩍 뛰었다.
“자네 나를 어떻게 보고 홀아비를 데리고 와서 혼사 말을 하오? 이 혼사 말은 아예 꺼내지도 마오.”
기준은 정지 조왕 쪽으로 두 다리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앉아있는 월금한테 머리를 돌리며 쏘아보았다.
주현경이 머리를 쳐들었다.
“당자끼리 마음이 들어 하는 거 같은데 허락하오.”
기준은 주먹으로 구들을 탕탕 치면서 주현경을 쏘아보았다.
“당신, 정말 나를 기를 채워 죽일 예산이오? 당장 저 홀아비를 데리고 가오. 도끼로 족대기를 찍어 버리기 전에 썩 물러가지 못 할까!”
범처럼 펄펄 날뛰며 고래고래 고함치는 기준을 보고 주현경은 어이없다는 듯이 도리머리 질 하면서 박범석를 데리고 자리를 떴다.
기준은 손님들이 떠나간 후 월금을 닦아세웠다.
“얘야, 아버지도 널 생각해 하는 말이야. 처녀인 네가 신랑감이 없다고 홀아비한테 시집가겠느냐? 만약 저 사람들이 다시 오면 이번에는 너도 싫다고 똑똑히 말해라. 알만하니?”
월금은 아버지의 독살에 겁을 집어먹고 머리를 수기면서 끄덕였다.
옆에서 사련은 기준에게 한마디 했다.
“여보, 월금이 이젠 나이도 어리지 않은데 신랑감이 나졌을 때 주기요.”
기준은 그 소리에 세 길 네 길 펄쩍 뛰었다.
“그 주둥아리를 다물지 못할까? 이 혼사 말은 절대 안 되오.”
며칠 후 주현경은 이번에는 박범석의 아버지와 형 둘까지 데리고 또 찾아왔다.
기준은 곰방대에 담배를 쑤셔놓으면서 딱 잘라 말했다.
“어째 또 왔는가? 이 혼사는 절대 안 되오. 내가 동의하지 않는 한 우리 둘째딸을 데려가려니 하지도 마오.”
박범석의 아버지는 희죽이 웃으면서 인사를 드렸다.
“사돈어른, 애들이 서로 좋아하는 거 같은데 오늘 매듭을 지읍시다.”
“어, 어. 누가 당신과 사돈을 맺는다오. 바꿔 놓고 당신이면 좋은 제 딸을 홀아비한테 주겠소? 흥, 염치도 소 볼기짝 같소. 정말.”
상우는 혼사 말에 삐치지는 못하고 바깥에서 서성거리면서 위방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박범석의 아버지는 염치를 불구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럼 이 집 딸 말이나 받아보고 그만두든지 어찌든지 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 말에 기준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물어 보겠으면 물어보오.”
그는 정지를 내려다보면서 월금한테 물었다.
“네 의향은 어떠냐?”
월금은 머리를 두 무릎 사이에 파묻고 쳐들지도 못했다.
“얘, 어서 말해라!”
월금은 귀밑까지 빨개나면서 쥐구멍으로 들어가는 소리로 겨우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기준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뭐라? 네 지금 뭐라니? 싫으면 싫다고 딱 찍어 말해라.”
월금은 용기를 내서 머리까지 들고 똑똑히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기준은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야단쳤다.
“에이, 한뉘 고생할 연이라고. 시켜준 말도 온전히 못하니?”
그때라고 박범석의 아버지는 좋다고 마구 떠밀었다.
“봅소. 싫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건 좋다는 말입니다. 새기 어떻게 내놓고 제 신랑감을 좋다고 하겠습둥?”
박범석의 아버지는 더 염치없이 나왔다.
“얘, 가시부모에게 절이나 해라.”
그러자 기준은 손사래를 치면서 벽 쪽으로 돌아앉으면서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우리 집안을 깔보지 마오. 우린 2천년전부터 조선을 천년 동안이나 쥐락펴락하던 신라 경순대왕 왕족의 후손이오. 아무리 신랑감이 없으니 좋은 제 딸을 홀아비한테 줄 거 같소? 흥!”
박범석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아버지 명을 어길 수 없어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는 벽 쪽으로 돌아앉은 기준의 등 뒤에 대고 “가시아버지, 절을 받으십시요.” 하고 말했다.
기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누가 절을 하라고 했소? 괜히 절값을 내라고 떼질 쓰지 마오.”
허나 박범석은 자존심을 꺾으면서 기준의 잔등에 대고 절을 꾸벅 했다.
박범석의 아버지는 싱겁게 떠들어댔다.
“됐소. 이젠 우린 사돈 간이 됐소. 이제 택일해서 결혼잔치만 하면 되오.”
기준은 박범석 네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코웃음 쳤다.
“흥! 별난 사람들을 다 보겠소. 혼자 부르고 쓰고 하오.”
기준도 용빼는 수가 없었다.
그 후 반년 동안 신랑 쪽에서 염치를 불구하고 달려드는데다가 기준의 아버지까지 동의해 버렸던 것이다.
이듬해 음력설을 쇠고 한 달 후 월금은 훈훈한 봄날에 아버지 욕설 속에 눈물을 비 내리듯이 흘리면서 망석촌의 여주 박씨 네 범석에게 시집갔다.
범석은 결혼잔치 전에는 예쁜 월금을 데려가려고 묵묵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가시아버지에게 듣지 못할 쌍욕을 먹은 후 다시는 가시집에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월금은 한 동안 본가 집 아버지와 남편 사이에서 속을 썩이면서 마음고생을 했다.
7. 종적을 찾아
뼈 속까지 오싹 스며드는 칼바람이 간도의 황야를 휩쓸며 감때사납게 불어쳤다.
토성 안 집에서 토성 밖에 우물을 파놓는 바람에 조선에서 이사해온 사람들이 우물과 가까운 토성 안 집을 중심에 두고 돌아가면서 집을 짓고 살았다. 하여 함흥 촌은 이젠 20여 호가 모여 사는 꽤나 큰 마을로 번져갔다.
병완은 성칠의 소식을 알려고 창준과 기준을 데리고 토성 안 집으로 갔다. 병완은 이제껏 지주네 집이라고 한 마을에서 살면서도 거래하지 않고 그저 마을에서 떠도는 소문만 묵묵히 듣고 있었다. 병완은 처음으로 방틀 팔간 집으로 지은 토성 안 집으로 들어갔다.
대문 짝에 난 작은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머슴인 듯 사내가 문의 빗장을 열고 나왔다.
“무슨 일이요?”
병완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집주인을 만나러 왔네. 있는가?”
“예, 내 알리지. 들어오오.”
병완 등이 대문 안에 들어서서 몸채 쪽으로 들어가면서 보니 토성 안에는 몸채 외에도 토성 안 서쪽과 동쪽에 커다란 창고가 둘이나 있었고 사랑채와 마당에는 말로는 머슴이라고 하는 숱한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집안 집 병완이 왔다는 말에 토성안집 인삼은 미닫이문을 열고 황급히 마루로 내려와 마중했다.
억대우 같은 인삼은 잘 생긴 미남자였다. 너부죽한 얼굴에 예지가 반짝이는 눈, 우뚝 일어선 코 날, 어디를 보아도 늠름해보였다.
“어이구, 집안 집 어른이 어떻게 왔소?”
병완 등은 인삼이 안내하는 대로 마루우로 올라가 위방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정하고 앉자 병완은 정색해 말했다.
“내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묻네. 혹시 성칠이란 사람을 본적이 있는가?”
그러자 인삼은 뒤로 물러앉으면서 “본 적이 없습니다. 왜 그럽니까?” 하고 병완과 창준의 표정을 살폈다.
병완은 나직이 말했다.
“사실 성칠은 내 맏아들이네. 조선에서 오기 전에 우리 우시장 일대의 사냥꾼들을 데리고 포수대를 조직했다가 항일 독립군에 들어갔네.”
순간 인삼은 놀라운 기색이 너부죽한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완연히 드러났다.
“이젠 거의 8년이 되도록 종무소식이네. 어쩜 자식 놈이 어시를 찾아보지도 않는단 말인가?”
기준도 한마디 조용히 했다.
“난 명동의 하규한테서 성칠 형님이 이 토성 안 집에 드나든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소. 자네도 우릴 근심하지 말게나. 우린 고향에서 일본 놈들의 피해를 받아 핍박에 의해 조선 고향을 떠나 간도로 들어왔네. 우리 일가는 일본 놈들과 한 하늘을 떠이고 살지 못할 원한이 있는 집안이네.”
창준도 속심을 터놓았다.
“우린 이 집에 성칠 형님이랑 선바위와 오랑캐령 부근에서 일본 놈들의 쌀을 탈취한 숱한 쌀을 무져 두고 있는 것도 알고 있네. 근심하지 말게나. 우리도 유격대를 도울 테니까. 후에 유격대에서 쌀이 필요하면 우리도 한몫을 담당하겠네.”
기준은 한술 더 떴다.
“성칠 형님이 어데 있는지 알려주게나. 유격대 김 대장이 우리 성칠 형님인가?”
인삼은 한참 병완이네 부자들의 솔직한 말을 듣고 나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오늘 집안 집 큰아버지와 형님들의 말을 듣고 놀랐습니다. 우린 원래 영월 김씨 피를 나눈 한집안인데다 항일사상도 같다는데서 절친하게 됐습니다.”
그 말에 병완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지, 우린 피를 나눈 한 집안이야. 우린 목숨 걸고 유격대, 자네들을 돕겠네. 후에 무슨 일이 있으면 우리 할 수 있는 건 알리게나.”
그러나 인삼은 조금 에둘러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린 이 마을에 온 후 어느 집이나 다 살펴보았습니다. 큰아버지 일가는 정말 양심적인 조선의 백성이고 의리심이 강한 분들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병완의 부자간들은 인삼이가 알고 싶은 성칠의 행방은 말하지 않고 자꾸 동문서답하는 식으로 왕청 같은 말을 하는 것이 답답했다.
“우리도 어떤 형님의 부탁을 받고 형님의 보모형제들을 찾으려고 여러 모로 알아보았습니다. 허나 마을 형편을 알아보면서 살펴보았지만 이름이 같지 않습디다. 경칠, 문칠, 김진 모두 생소한 이름이었습니다.”
병완은 그 말에 인삼에게 다가앉으면서 “건 다 애명을 부른 거네. 난 병완이고 얘들은 내 둘째아들 창준이고 셋째아들 기준이오. 김진이란 애는 내 넷째손자 상순이요.” 하고 말했다.
“예~ 이제야 맞습니다. 명함들이 다 맞습니다.”
그제야 인삼은 통쾌하게 말했다.
“우린 확실히 성칠 대장이 영솔하는 유격대입니다.”
그러자 병완과 창준, 기준은 서로 눈길을 맞추었다.
인삼은 속 시원히 말하기 시작했다.
“성칠 형님은 항상 고향에 있는 부모형제들을 외웠습니다. 형님은 조선에 군사행동을 하러 몇 번 나갔을 때 고향의 부모형제 소식을 여러모로 알아봤습니다. 그런데 간도로 떠나갔다는 소식 밖에 없다면서 애타게 찾았습니다. 그런데 여기 와 계실 줄은 정말 천만뜻밖입니다.
그러자 병완은 다그쳐 물었다.
“그래 성칠은 지금 어데 있는가?”
인삼은 엉거주춤 일어나 미닫이문을 스르르 열고 바깥을 둘러보고 나서 미닫이문을 꼭 닫고 긴장한 얼굴을 풀면서 돌아와 앉았다.
“성칠 형님은 조선 본토와 장백산 일대 남만과 동만 지어 북만까지 주름잡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일본 놈들을 족치기에 그가 딱히 어데 있는 건 누구도 모릅니다.”
인삼은 군사비밀이기에 초면강산이나 다름없는 병완 등에게 성칠의 거점을 아직은 말해 줄 수 없었던 것이다.
기준은 그런 어렴풋한 대답에 답답해났다.
“혹시 성칠 형님은 지금도 그 여대장과 같이 있는가?”
인삼은 머리를 끄덕였다.
“우리 유격대에는 김 대장도 많고 여대장도 많소. 혹시 최진달래 대장을 묻는 말인지 모르겠소만.”
기준은 인삼의 손까지 잡고 말했다.
“맞소. 이전에 우리 성칠 형님네는 그 진달래 여대장과 함께 저목장을 기습하였소.”
인삼은 소리를 더욱 낮춰 말했다.
“후에 성칠 형님을 만나면 여기에 큰아버지 계신다고 알려주겠습니다.”
병완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인삼의 손을 으스러지게 꽉 잡았다.
“후에 무슨 일이 있으면 알리게나.”
인삼도 일어나 병완의 부자들과 일일이 손을 굳게 잡아주었다.
“큰아버지와 형님들을 믿고 이 마을에서 마음 놓고 항일활동을 하겠습니다.”
인삼은 대문 밖에까지 그들을 연의했다. 그는 대문 안에 되돌아들어가면서 함흥촌 일대에서 영향력이 있는 병완 일가를 호흡할 수 있어 마음이 든든해났다.
집으로 돌아온 병완은 성희와 하옥을 위방에 불렀다.
그는 먼저 성희를 보고 “여보, 성칠이 소식 있소.” 하고 단마디로 알렸다.
“예? 어데 있대요?”
병완은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허리까지 성희 쪽으로 숙이면서 나직이 귓속말을 했다.
“토성 안 집 인삼과 함께 유격대에 있는데 대장을 한다오.”
하옥은 그 말에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조금 외면하더니 동전으로 뜨거운 눈물을 닦으며 어깨를 들먹였다.
병완은 애 하나 낫지 못하고 십년 가까이 독수공방하면서 성칠을 기다리는 맏며느리가 여간 불쌍하지 않았다.
그는 하옥의 손을 잡으면서 “맏며느리, 근심하지 마오. 이제 우리 맏아들이 언젠가는 찾아올 게요.” 하고 위안해주었다.
하옥은 어깨들 들먹이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뒤 고방으로 달아 들어갔다.
성희는 “쯧쯧” 하고 혀를 끌끌 차더니 뒤 고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병완은 땅이 꺼지게 후~ 내쉬었다.
한편 인삼이네 집에서 나온 기준은 큰집 둥글 소 값을 마련하려고 엄동설한을 무릅쓰고 주먹밥주머니를 목수도구상자에 넣어 둘러메고 용정으로 갔다.
그는 저녁에는 교회당을 찾아가 죤슨의 덕에 교회당에서 돈 일전도 내지 않고 잘 수 있었다. 어떤 때에는 교회당에서 죤슨 목사가 서툰 조선말로 하는 설교를 듣기도 했다.
(명동의 하규나 용정의 죤슨이나 교회당의 양반들은 참 마음씨 착한 분들이야.)
등잔불 밑이 어렵다고 기준이가 용정통감부 간도파출소 앞을 지나다니면서 목수 일을 찾아 해도 그를 발견한 자는 한 놈도 없었다.
가을부터 새해 늦겨울까지 목수 일을 하여 기준은 꽤나 적잖은 돈을 모았다. 그간 이전에 말한 대로 정성문의 식장도 짜주었다. 이젠 기준은 정성문과 자별한 구면친구로 됐다.
장마당에서 기준은 정성문과 나란히 서서 일거리를 기다리면서 이런 저런 궁리를 했다.
(한 보름 목수 일을 하면 소고기를 판 돈에 보태 암소는 살 수 있겠다.)
그때 쌀 마대를 꽉 박아 실은 수레가 여러 대 장마당골목을 지나 육도하 쪽으로 지나갔다.
기준이가 피뜩 보니 제일 앞에서 수레를 모는 억대우 같은 사나이가 별로 낯이 익어보였다.
“아니, 저게 원삼이?!”
정성군도 머리를 그쪽으로 돌렸다. 장총을 멘 일본 경찰 셋이 앞뒤에 서서 쌀 수레를 압송하고 있었다. 기준이 다시 찬찬히 수레를 모는 조선 사내들을 살펴보아도 확실히 맨 앞에서 수레를 모는 사나이는 어깨가 쩍 벌어진 원삼이었다.
기준은 원삼과 몇 해만에 만났는지라 그간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쌀 수레를 압송하는 일본 경찰들에게 발각돼 체포될까봐 그만두었다.
기준은 그날 목수 일을 마치고 교회당으로 돌아가다가 인삼이가 일한다는 정미소로 가보기로 했다. 혹시 정미소로 가면 쌀 수레를 습격하는 유격대 종적을 찾겠는가는 일루의 희망을 품었던 것이다.
그는 이 골목 저 골목 돌아다니면서 물어서야 겨우 자그마한 골목에서 정미소를 찾을 수 있었다. 정미소 대문기둥에는 고약딱지 같은 일본기발이 휘날리고 대문 양옆에는 일본 놈이 총칼을 빼들고 왔다 갔다 하면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기준이가 정미소안을 기웃기웃 하며 들어가려고 하자 일본 놈이 총칼로 가로 막았다.
“나니까(뭐야)?”
기준은 손짓으로 쌀 마대를 메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와깠다(알았어), 하이레(들어가)!” 하고 안으로 총칼로 들어가라고 가리켰다.
기준이가 정미소 울안에 들어가면서 둘러보니 마당 안에도 일본 놈 서넛이 총칼을 잡고 왔다 갔다 하면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마당 양옆에 기둥이나 세우고 천정이나 누른 창고에는 소잔등 같은 쌀 마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연자 돌로 저 많은 곡식을 어떻게 다 찧겠니?)
기준이 정미소에 들어서 둘러보니 정미소안에서도 일본 놈 둘이 총칼을 잡고 정미일군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어두운 정미소 천정에 희미한 등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등잔불도 아닌데 아주 빤했다. 기계소리 요란한 정미소에서 온 몸에 겨 먼지를 새뽀얗게 쓴 인삼이가 달아 맨 나무상자 옆에서 한창 마대 안에 쏟아져내려오는 쌀을 손으로 받아 쥐어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쪽진 상투머리가 없어진 것이 참 우스웠다. 몇몇 낯모를 한족일군들이 쌀 마대를 바깥으로 분주히 나르고 있었다.
기준은 다가가 “인삼이, 바쁘지 않소?”
인삼은 반가와 입쌀을 마대 안에 처넣고 악수했다.
“어떻게 돼 내 여기 있는걸 알았소?”
“전번에 물레방아 골에 가서 원삼한테서 들었소.”
이때 작달막한 사내가 건 가래를 떼면서 이쪽으로 힐끔거리면서 다가왔다.
“우리 주인 이주림이요.”
기준이가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인삼을 많이 도와줘 고맙소.”
주림은 거만하게 머리를 꺼떡거리고는 “에헴.” 하고 기계를 쳐다보면서 저쪽으로 가버렸다.
인삼은 못 마땅해 하는 주림의 눈치를 보더니 기준을 보고 “내 요걸 제꺽 찧어 놓고 얘기하기요.” 하고 말했다.
기준은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바깥으로 나가 묵묵히 기다렸다.
한참 후 인삼이 나왔다.
기준은 인삼을 조용히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물었다.
“정미소를 보니 희한하다. 당나귀를 메워 연자 돌로 찧는가 했더니 저건 뭔가?”
인삼은 쌀 마대를 한 팔에 하나씩 안아 정미소안으로 들여가면서 말했다.
“전기로 돌리는 정미기루 찧으니 얼마나 쉬운지 모르겠소. 용정에는 전기라는 게 들어와서 정말 편리하오.”
기준은 목수도구를 놓고 인삼을 도와 쌀 마대를 안아 정미소에 들여다 두면서 이것저것 물었다.
“전기라는 게 좋긴 좋구나.” 하고 신기해 물었다.
“옳소. 전기정미기계로 쌀을 찧으니 절구로 연자방아로 빻는 것보다 힘도 덜 들고 빨리 찧어서 얼마나 편리한지 모르오.”
기준은 쌀 마대를 쌓아놓은 창고에 들어가면서 나직이 물었다.
“인삼이, 아까 원삼이가 일본 놈들의 압송을 받으면서 쌀 수레를 몰고 가더군.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인삼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물레방아골의 지주는 새 해부터 소작료를 8할로 올려 받는다 하오. 원삼이네 여덟이나 식구들이 뭘 먹고 살겠소? 그래서 이 정미소에 왔다가 일본 놈들이 개산툰으로 해서 조선에 실어가는 쌀 싣기를 하오.”
“음~”
기준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구만. 아까 일본 놈들이 있어서 원삼과 인사하지 못하였소. 그럼 이 숱한 쌀 마대는 모두 일본 놈들이 실어가는 쌀이겠구먼.”
인삼은 머리를 끄덕였다.
“하루살이 일이라도 여기서 이것저것 하는 게 농사를 짓는 것만 나은 거 같소. 품삯이야 소작 농사처럼 반작이요 8할이요 하면서 뜯어가는 게 없잖소.”
“글쎄 말이오. 나도 요즘 목수 일을 해보니 그런 거 같소. 그런데 난 죄 지은 몸이어서 어디 일본 놈들의 코밑에서 마음 놓고 일할 수 있소?”
기준의 하소연 같은 말에 인삼이도 두덜거렸다.
“원삼은 원래 우리 정미소에서 쌀 마대나 메자고 왔는데 일본 놈들이 힘깨나 쓰는걸 보고 쌀을 운송하는 쌀 레 몰이꾼들의 우두머리로 쓰고 있네. 그런데 떼도적들이 나타나 총을 들고 와서 쌀을 수레 채로 빼앗아가는 일이 종종 생겨 머리기 곤두선다오.”
기준은 피뜩 들은 말이 떠올라 골목길을 둘러보고 나직이 물었다.
“혹시 그게 떼도적이 아니고 유격대 아닐까?”
“글쎄~”
인삼이도 머리를 끄덕이면서 뭔가 생각해보았다.
정미소 주인 리주림은 기준이가 한참 인삼을 도와 쌀 마대를 날라주면서 이말 저말 하는 것을 여겨보다가 피뜩 이런 속궁리를 굴렸다.
(보아하니 인삼과 친구 같은데 목수인데다가 힘꼴도 쓰는구나.)
주림은 스적스적 기준한테 다가가 쌀 마대를 내려놓으라고 손짓하더니 “아예 우리 정미소에서 일하는 게 어떤가?” 하고 넌지시 물었다.
그러나 기준은 쌀 마대를 나르면서 “난 봄이 오면 농사를 지으러 가야 하오.” 하고 대답했다.
“그럼 봄이 오기전만 우리 집에서 일하지 않겠는가? 인삼이 혼자 밤낮 저 숱한 쌀을 미처 찧기 바쁜데.”
그러자 기준은 인삼을 생각해서라도 마음을 고쳐 먹었다.
“겨울 한철에 일해 보겠소.”
“삯전은 꼭꼭 줄 테니 금심하지 마오.”
주림은 선선히 말했다.
이렇게 되여 기준은 주림의 정미소에서 인삼과 함께 일하면서 유격대와 성칠의 종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정미소에서는 정미기가 돌아가는 요란한 소리가 윙윙 듣기 바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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