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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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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28)
2016년 01월 05일 16시 55분  조회:1863  추천:0  작성자: 김장혁




                           2. 오누이의 생이별
        성단은 애들을 데리고 기운봉 기슭으로 갔다.
       “할머니, 오늘 뭘 따러 갑둥?”
       성단은 하얀 머리를 흩날리며 명옥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돌 버섯을 따러 가지.” 하고 말했다.
       명옥은 똥그래진 외까풀 눈으로 할머니를 쳐다보면서 “돌 버섯? 돌 버섯은 돌입니까?” 하고 종알거렸다.
       성단은 명옥과 계순의 손을 잡고 걸으면서 “이제 가 보면 어떤 겐가 알 수 있어.” 하고 말해주었다.
       그들이 기운봉 기슭에 가자 깎아 세운 절벽이 나타났다. 산새들이 사람들이 오자 포르릉 날아 푸르른 가을하늘을 날아옜다.
성단은 절벽의 얼룩덜룩한 바위 돌 톰을 가리키면서 “봐라, 저게 돌 버섯이란 게야.” 하고 알려주었다.
근형과 명옥은 신기해 “아이유, 저걸 사람이 먹을 수 있습둥?” 하고 이구동성으로 종알거렸다.
성단은 허리를 펴더니 바위 돌 우에서 누르께한 돌 버섯을 몇 잎 뜯어내 애들에게 보였다.
“이봐라. 이건 바위 돌에 난 버섯이다. 그래서 돌 버섯이라 해.”
      “야, 신기하다.”
애들은 할머니를 도와 키 자라는 대로 바위 돌에서 돌 버섯을 뜯어 바구니에 담았다.
      "이건 고양이 발톱이라고 해."
      성단은 바위돌 위에서 딱 고양이발톱 같기도 하고 파 같은 이파리가 마늘대가리처럼 촘촘 들어박힌 풀을 뜯어 애들에게 쳐들었다. 근형이가 보니 자기 머리 위쪽으로 해 고양이발톱이란 풀이 있어 뜯어 입에 넣고 씹었다. 
     "야, 시쿨다. 시쿨어."
      "배 고픈데 언제 시쿤 거 나무릴게 있냐?" 
     그 말에 근형은 고양이발톱을 입에 넣고 상을 징그리면서도 씹어 먹었다.
한참 돌 버섯을 뜯던 근형은 지루하고 심심해 나무 우에 올라가 나무 가지를 타고 앉아 흔들거리면서 놀았다.
“야, 재미있다. 흔들흔들 그네를 뛰는 거 같다야. 흥, 흥, 좋다야.”
성단은 허리를 펴고 나무우의 근형을 보고 다급히 소리쳤다.
“내려라! 내려. 우리 집 장손이 떨어지면 어쩌니?”
계순은 갑자기 질투 났다.
“엄마는 거저 '장손', '장손' 하면서 근형 밖에 모릅둥?”
성단은 손가락으로 계순의 볼을 꼭 집어놓았다.
“요놈의 계집애야, 네 같은 년 열 주고도 우리 장손 바꾸지 못해.”
근형은 우쭐해졌다.
“계순아, 넌 이런 나무에 올라오기나 하니?”
그 소리에 계순은 나무 가지를 쥐고 올라가려고 바둑거렸지만 안됐다. 그러자 명옥도 나무 가지를 쥐고 바둑 거렸다. 그런데 명옥은 나무 가지를 쥐고 나무 우에 올라갔다.
“야, 떨어지겠다.”
성단은 소나무를 올려다보며 소리치다가 손으로 가리켰다.
“거 소나무에 솔방울이 많구나. 가만있어라.”
성단은 바구니를 내려놓고 근형이 올라간 소나무로 올라가 솔방울을 뜯기 시작했다.
“너네는 내려가라.”
근형은 “명옥이나 내려가. 난 할머니를 도와 이걸 뜯겠다. 할머니 이건 뭐라구 합둥?” 하고 물었다.
“솔방울이라고 한다.”
명옥은 기어이 내려가지 않고 솔방울을 뜯어 할머니와 근형처럼 땅바닥에 떨궈 놓았다.
“할머니, 솔방울도 먹습니까?”
“그래. 솔방울이 마르면 딱딱 버러지면서 솔 씨가 나온다. 이 놈의 세월에 산나물이나 돌 버섯이랑 캐먹지 않고서야 어디 살겠냐? 다 굶어 죽겠다, 굶어죽어.”
성단은 애들에게 “떨어지겠다. 주의해라.” 하고 재삼 귀띔해주었다.
한참 후에는 계순까지 승벽심이 나서 나무에 바라 올라 가는 바람에 솔방울도 적잖게 땄다.
성단은 애들을 데리고 돌 버섯이랑 솔방울이랑 고사리랑 바구니에 듬뿍 캐가지고 귀로에 올랐다.
산새들도 그들이 떠나가는 상공에서 나래 치며 둥지를 털리지 않아 한시름을 놓은 듯이 즐겁게 노래를 불렀다.
그들이 집으로 돌아오니 웬 낯모를 어른이 위방에서 최구장과 뭐라고 중얼중얼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른들 옆에는 일여덟 살 되는 남자애가 앉아있었다.
성단은 쌀이 모자라는 세월에 손님이 싫었다.
(어떻게 점심을 차린다?)
큰며느리도 세상 떠서 없지. 막내아들을 잃었지. 엉망진창이 된 이 집에 최구장의 낯을 보고 운주동에만 오면 최구장네 집에 손님이 끄칠 새 없었다.
최구장은 산나물바구니를 이고 금방 정주에 들어서는 노친을 보고 “여보, 올라와 사돈어른을 인사하오.” 하고 말했다.
성단은 머리 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위방으로 올라가며 허리 굽혀 인사했다.
최구장은 구레나룻이 더부룩한 나그네를 가리키며 “병완 사돈어른의 큰 처남이라오.”라고 했다.
“예, 구차한 세월에 폐를 끼치겠어요.”
리성군은 일여덟살 돼 보이는 어린애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요건 내 맏손자죠. 병수, 인사해.”
어린애는 일어났다가 넙적 절을 올렸다.
“안녕하세요?”
최구장은 “에이, 그놈이 인사성이 밝군. 너 아버지 이름 뭐냐?”
병수는 일어서서 까만 눈을 깜빡이며 “이명호라고 불러요.” 하고 대답했다.
위방 마루에 기여와 가만히 들여다보던 근형과 계순, 명옥은 병수를 말똥말똥 훔쳐보았다.
“재, 눈 밑에 짐이 저렇게 보기 싫게 있어?”
근형의 말에 계순이가 “듣겠다.” 하고 종알거렸다.
명옥이가 보니 확실히 애 눈 밑에 팥알만 한 짐이 있었다.
근형은 “어른들이 그러던데 눈 밑에 짐이 있으면 울 일이 많단다.”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최구장은 손으로 바깥을 가리키면서 “사돈총각은 나가서 저 애들과 놀아라.” 하고 말했다.
병수가 성단과 함께 바깥에 나가자 애들은 좋다고 뛰놀았다.
성군은 “내 눈 밑에 짐이 있다더니 넌 볼에 짐이 있구나.” 하고 말하면서 근형의 얼굴을 가리켰다.
명옥은 “볼에 난 짐은 괜찮다. 눈 밑에 기미 있으면 울보 되는 거지.” 하고 말했다.
병수는 근형과 명옥이 어찌나 잘난체하는지 뭘 자랑할까 한참 궁리하다가 죄꼬만 입을 열었다.
“네 고향은 왜 일케 산골이여?”
그 말에 근형이가 다리를 배배 꼬고 서서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그럼 네 고향에는 산도 없고 골짜기도 없니? 그럼 얼마나 멋이 없겠니? 평평한 들판인 게.”
병수는 길쭉한 얼굴을 쳐들면서 “우리 고향 마을은 해변 가야. 산도 있고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가 있어. 바다의 물고기도 낚시질해 잡아먹지. 굴, 조개, 미역, 고마이 없는 게 없어.” 하고 한바탕 자랑했다.
명옥은 듣다가 끼어들었다.
“오, 옳다. 바다가는 참 멋진 거야. 이전에 바다 가에 있는 외가 집에 간적이 있다. 모래에 구덩이를 파놓고 있으면 집채 같은 파도가 덮쳐 왔다가도 무너지면서 밀려나가더라. 물구덩이에 미처 바다로 되나가지 못한 물고기가 파닥거리지. 어떤 때에는 물구덩이에 게가 꾸물거리지.”
“우리 충청도에선 있제이. 낚시로 큰 바다 물고기를 잡지. 참치도 어른들의 다리만큼 큰 거 잡아. 난 어떤 때 낚시로 내 다리만큼 한 참치를 잡아 집에 겨우 메고 왔댔어.”
근형은 낚시로 자기 다리만큼 한 참치를 잡아 메고 집으로 가는 병수를 연상하며 혀를 끌끌 찼다.
“참 멋지구나. 우리 여긴 니 말처럼 산골이 돼서 운주하에는 큰 고기도 별로 없어. 일본 사람들이 들어와서 물고기를 잡아도 바치라고 강박한다. 너희들 고향에는 일본 사람 없니?”
죄꼬만 병수는 길쭉한 머리로 도리머리 질 했다.
“에이, 우리 고향에도 일본 사람들이 많아. 바다 고기를 마음대로 잡지 못해. 고기 잡은 거 있자노, 들키면 절반 넘어 바쳐야 해. 매만 맞지 않아도 재수 좋제이.”
근형은 입을 싸쥐고 웃었다.
“얘는 말할 때마다 ‘있제이’, ‘있제이’ 한다. 우스워 죽겠다. 야, 야.”
근형이랑 병수랑 마루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거리면서 웃고 떠들며 인차 친해졌다.
위방에서 리성군은 병수에게서 눈을 떼 최구장에게 돌리면서 한숨을 푸 내쉬었다.
“어쩜 매형은 어데로 간다는 말두 하지 않고 누나를 데리고 훌쩍 가버렸어요?”
최구장은 바깥동정을 살피더니 나직이 말했다.
“그때 그렇게 됐습니다. 일본 놈들이 병완 사돈어른 일가를 다 체포해 죽이려고 들었습니다.”
리성군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무슨 죄를 졌다고 그랬어요?”
최구장은 곰방대를 길게 빨아 후 속이 탄 연기를 내뿜었다.
“사돈도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병완 사돈네 맏아들은 항일유격대에 들어갔습니다.”
최구장은 병완 일가가 핍박에 의해 간도로 들어가게 된 일을 죽 이야기했다.
리성군은 섬직해 베적삼 호주머니에서 수건을 꺼내 이마의 식은땀을 훔쳤다.
“아, 그간 그런 일도 있었구먼요. 아, 누님과 매형은 어디로 갔을까요?”
최구장은 조용히 말했다.
“그때 당신 누님은 가지 않겠다고 야단쳤습니다. 충청남도 서현군 한산면에 있는 친정집과 오라버니한테도 어디로 간다는 말을 하지도 않고 가겠어요?”
성군은 눈 확에 글썽해진 눈물을 수건으로 훔치면서 물었다.
“누님은 어디로 간 것 같아요?”
최구장은 조용히 귀속 말로 알려주었다.
“아마 간도로 간 것 같소. 류강철이라고 경찰국에서 통역을 하는 제자가 있소. 그한테서 들으니 소문에 일본 놈들은 병완 어른네 간도 어디 소서구란 곳에 있다고 하던데. 딱히 모르겠습니다. 일본 놈들이 관동군에 병완 어른 나포하라고 포고를 보내 그들을 찾아내자고 서캐 훑듯 한답디다. 그런데도 아직 찾지 못했답니다.”
리성군은 누님생각에 흑흑 흐느껴 울었다.
“야, 손자를 데리고 몇 천리를 걸어서 이 한끝 함경도까지 왔다가 누님을 만나지도 못하고 이게 뭔가요? 으흐흑, 흑흑.”
최구장도 서러워하는 리성군을 보고 안타까워 한숨을 푸푸 내쉬었다.
“이렇게 갈라지면 언제 누님을 또다시 만날까? 어허허. 기막힌 세상이지. 이렇게 누님과 생이별하다니. 허 허 헉.”
리성군은 체면도 잊고 대성통곡 쳤다…
리성군은 충청남도 한산군의 마을로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병완의 집 자리에 찾아가 보았다. 그를 맞아준 것은 상냥한 누나 대신 쓸쓸한 폐허더미였다. 집 자리에는 여기저기 흙속에 파묻힌 수수대가 드러나고 마른 쑥대가 한 키도 넘게 자라 가을 바람에 스산하게 술렁대고 있었다.
성군은 집터를 마주해 풀썩 무릎을 꿇고 물앉아 대성통곡 쳤다.
“누님, 매형, 날 버리고 어디로 갔어요? 성칠아, 창준아, 기준아, 조카들은 지금 어디로 갔냐? 이렇게 생이별 하다니? 언젠가는 충청남도 한산군에 오면 외삼촌을 찾아오라.”
병수는 할아버지 얼굴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함께 울음보를 터뜨렸다.
“할아버지, 울지 마. 응? 울지 마.”
“응, 그래. 병수야,”
“집에 가자.”
성군은 눈물을 닦으며 병수의 애고사리 손을 잡고 일어났다.
“응, 그래. 가자. 고향으로 돌아가자. 여긴 이젠 큰할아버지와 큰할머니가 없다. 이담 네가 크면 꼭 큰할머니랑 삼촌들이랑 상순이랑 상길이랑 형님들을 찾아봐라.”
“응. 내겐 형님도 많구나. 상길이랑 상순이랑 다 내 형님이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주고받는 말을 들으면서 최구장과 경숙이도 눈시울을 닦았다.
근형은 계순과 명옥의 귀에 대고 “봐라. 내 말이 맞지. 눈 밑에 기미가 있으면 울 일이 많다 하지 않던? 병수는 울보가 되겠어 하고 중얼거렸다.
뒤이어 근형과 계순, 명옥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병수를 울지 말라고 랬다.
성군은 더 놀다가 가라는 최구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날로 머나먼 한산을 바라고 떠나갔다. 떠나가는 그들의 뒤로 친 혈육과 생이별의 아픔과 슬픔이 파도치며 뒤따라가고 있었다.
3.풍작을 거두었건만
고향 명천의 밭 자리는 진짜 황야를 방불케 했다. 밭 자리에는 고개를 숙인 곡식이삭 대신 새로 심은 애 어린 적송들이 허리를 치면서 자랐다.
고향의 황야와는 달리 병완과 자손들이 땀 동이를 쏟아 부어 걸군 간도 소서구의 황무지에는 조 이삭들이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고 애기를 업은 어머니들처럼 강냉이들이 강냉이 이삭을 업고 가을바람에 마른 이파리들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어느 날 병완은 노친과 고향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성희는 기침을 쿨룩쿨룩 하며 “고향 말은 하지도 말라고. 괜히 친정집과 고향이 생각나게 굴지 말라니께.” 하고 손사래를 쳤다.
병완은 마늘을 머리채처럼 땋아 마루 기둥에 걸면서 중얼거렸다.
“보오. 여길 오길 잘했지. 고향 명천에 있었더라면 진작 염라대왕을 보러 갔을 거요.”
성희는 감자를 깎으면서 “오라버니와 조카 명호랑 얼마나 보고 싶다고요. 어데 간단 말두 남기지 못하고 왔으니 이젠 그 애들과 생이별 한 거죠.” 하고 아직도 마음이 아파했다.
병완은 노친이 너무 고향 생각할까봐 화제를 바꿨다.
“우린 여기 와서 잘 보내는데 물레방아골 원삼 삼 형제는 잘 보내는지 모르겠소.”
성희는 구부정한 허리를 펴면서 일어나 남쪽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궁금하면 가 보죠.”
병완은 마루가 꺼지게 한숨을 쉴 뿐이었다.
“용정을 지나가기 등곬이 다 싸늘해지오. 전번에 용정에 집 지을 일이 있어 가볼까 했소. 그런데 끼무라 국장 놈과 한길수 낯이 자꾸 떠올라 그만뒀소.”
“그 놈들이 간도에서 당신을 잡자고 집 짓는 곳마다 살필걸.”
병완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사실 물레방아 골짜기에 남은 원삼 형제들도 조선 고향에 있을 때보다 더 잘 보냈다.
조선 지주 리영룡이 처음에는 황무지를 개간하면 8할을 먹게 하여 생활이 좀 펴졌다.
가을에 원삼이네는 리영룡의 소와 수레를 빌어 조이와 기장을 산에서 실어 내리게 됐다. 그런데 워낙 가파른 산비탈 길에서 황소도 조단을 싣고 내리막을 받지 못해 눈깔을 희 번뜩거리며 두발을 떡 뻗치고 옮겨 디디지 못했다.
원삼이가 수레 멍에를 내리누르며 아무리 고삐로 소 궁둥이를 치면서 “헤이!” “헤이!” 하고 고함쳐도 좀처럼 발을 떼지 못했다.
그는 “이 놈 소 새끼, 이러고서도 황소냐?” 하고 멈춰서 내리막길을 내려다보았다.
산 아래서 리영룡도 속이 타 주먹으로 손바닥을 치며 왔다 갔다 하다가도 머리 들어 원삼과 소를 쳐다보며 소리쳤다.
“원삼이, 괜히 소나 상하겠네. 수레나 마스면 어쩌겠소.”
원삼은 조를 산더미처럼 실은 수레를 돌아다보다가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놈 소 새끼, 안 되겠어.”
원삼은 수레에서 황소를 벗겨냈다.
“괜히 소나 상하면 올해 농사를 지은걸 다 줘도 안 되겠다.”
산 아래에서 리영룡이 손나발을 해대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원삼이, 자네 어쩌자는 건가? 작작 실을 거지 욕심 쓸게 있소?”
원삼은 산 아래에 대고 “근심 마소.” 하고 소리치고 나서 베적삼을 벗어 허리를 질끈 동여맸다.
“뭐 하자는 거야?”
영룡 지주가 아래에서 소리치건 말건 원삼은 손바닥에 건침을 퉤 뱉아 비비더니 꿈틀거리는 룡 같은 두 팔로 수레 채를 안더니 “어차!” 소리와 함께 들어 올리더니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아래로 옮겨 디뎠다.
영룡은 억이 막혀 산 아래에서 입을 함지만큼 딱 벌렸다.
“아, 저 우둔한 게. 황소도 받지 못하는 내리막길을 저 놈이, 저게!”
원삼은 조 수레채를 안고 꾸불꾸불하고 가파로운 산비탈 내리막길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소처럼 뻗디디며 내려왔다.
숱한 사람들이 자기 눈을 의심할 광경을 보고 혀를 끌끌 찼다.
“쯧쯧, 실로 힘장사는 장사로구나!”
“저게 어디 사람이오?”
“꼬리 없는 황소요. 황소!”
원삼은 멈춰 서서 한숨도 돌려 쉬지도 않고 산비탈 아래로 내려왔다.
리영룡은 손에 비지땀을 그러쥐고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입을 함지만큼 떡 벌린채 다물지 못했다.
수레 채를 슬쩍 내려놓는 원삼을 보고 영룡은 자기야 먼저 긴장이 풀려 땅바닥에 풀썩 물앉았다.
“에이, 사람도 도깨비구만. 도깨비!”
원삼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허허허. 주인이 아끼는 둥글 소가 상할까봐 그럽구마.” 하고 웃으며 그 길로 산비탈 길로 씨엉씨엉 올라갔다.
그는 산에서 황소를 끌고 내려와 조 수레에 메워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다나니 원삼은 험한 비탈길이 있는 밭의 조와 기장을 몽땅 소 대신 자기 힘으로 수레에 실어 내리었다.
그때부터 소문난 원삼은 부근에서 모두들 힘장사라고 엄지를 내둘렀다.
리영룡은 뚱뚱한 배를 뚱기적거리면서 탈곡장에 와서 원삼이네 삼형제가 애들을 데리고 도리깨로 타작하는 것을 구경했다. 그는 꼬리 없는 소처럼 일이 푹푹 축나게 일하는 그들 삼형제를 보고 개기름이 유들유들한 웃음주머니가 흔들흔들 했다.
“자네들 만나서 황무지도 많이 일구고 곡식도 많이 거둬들여 정말 감사하네.”
원삼은 팔에 힘이 들어가 도리깨를 탁탁 휘두르며 마주 인사했다.
“다 주인이 우리 삼형제한테 황무지를 일구게 준 덕분입구마.”
“허허허, 그래. 사람들이 해박하기도. 쯧쯧쯧.”
영룡은 날마다 탈곡장에 와서 일손을 구경하는척했지만 기실 곡식무지가 축나지 않나 흘끔흘끔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지어 그는 목이 말라 집안에 들어가 물을 마시는척하면서 위방과 고방을 흘끔흘끔 살피기까지 했다. 20명이나 넘는 삼형제네 식구가 빈대 굴 같은 집에서 사는 집에 어데 쌀을 감출 곳도 없었고 또 감춘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눈치를 챈 원삼은 속으로 버섯목이라고 뒤집어 보이겠는가 이리저리 못내 근심됐다.
어느 날 영룡이 또 나타나서 흘끔거리자 원삼은 도리깨질을 멈추고 집 벽에 도리깨를 세워놓았다.
“주인님, 탈곡장을 아예 주인집 마당에 옮겨 가깁소.”
영룡은 네모 번듯 한 낯에 당황한 그림자가 번개 불처럼 스쳐지나갔다.
“어, 어허허. 건 불시에 무슨 소리요? 자초에 난 여기에 탈곡장을 닦으면 자네 삼형제가 타작하기 쉽다고 그랬네.”
춘삼은 아예 썩 뚝 잘라 말했다.
“오늘로 곡식을 몽땅 주인집에 옮기기요. 주인집 마당은 넓어서 타작하기도 좋소.”
영룡은 흡족해 너털웃음을 웃었다.
“어허, 허, 허허허. 그래, 그럼 자네들 생각대로 하게나. 저 숱한 곡식을 어떻게 옮기겠나?”
그러나 원삼은 씁쓸해했다.
“산비탈 밭에서도 여기까지 실어 왔을라니 100미터도 안 되는 주인집에 가져가지 못 하겠습둥?”
작달막한 인삼이도 팔을 걷고 나섰다.
“수레에 나르면 하루면 되겠지. 황차 내리막아래에 주인집이 있어서 빠를 거요.”
원삼이네 삼형제는 그날로 곡식을 주인집 앞마당에 실어갔다. 타작해놓은 곡식은 마대에 담아 실어갔고 조이단과 기장단은 수레에 실어 내려갔다.
해가 질 무렵에는 원삼이네 삼형제가 사는 우두막집 앞마당에는 곡식 단 한단, 조이이삭 하나, 낟알 한 알 남지 않았다.
그날로부터 한 보름 원삼이네 삼형제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타작해 곡식더미가 산더미 같았다.
영룡은 뚱뚱한 배를 쑥 내밀고 개기름이 번지르르한 낯을 슬슬 매만지면서 곡식무지를 빙빙 돌았다.
(어떻게 나눠야 내게 더 차례질까? 곡식무지를 봐선 어느 쪽으로 쭉 짜개 나눠도 더 가질데 없어.)
한참 궁리하던 영룡은 낯을 들고 원삼이네 삼형제를 번갈아보더니 슬쩍 외면하면서 혀를 날름거리었다.
“자네들도 얘기했다시피 내가 황무지를 개간하라고 주지 않았으면 이 많은 곡식을 거둘 수 있었겠나?”
“그거야 그렇습지.”
원삼이네 삼형제는 이구동성으로 중얼거렸다.
“자네 삼형제를 8할이나 주고나면 난 서북풍이나 먹으래?”
“건 연초에 우리가 일군 밭에서 난 곡식은 8할을 준다고 하지 않았소?”
춘삼의 말에 영룡은 귀밑까지 뻘개나면서 말했다.
“그랬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안 되겠네. 반작을 해도 좋은 줄 아오?”
“예?”
인삼은 눈이 동그래졌다.
“그래, 올해는 절반씩 나눕세.”
원삼은 원래 말수가 적은 양반이여서 너무 억울해 쓴 입을 쩝쩝 다실뿐 한마디 말도 나가지 않았다.
“뭘 하는가?”
영룡은 뒤에 서고 있는 머슴들을 둘러보면서 소리쳤다.
“어서 곡식무지를 딱 절반 끊어 나눠놔라!”
머슴들은 가래를 쥐고 원삼이네 삼형제 눈치를 보면서 감히 곡식무지에 손을 대지 못했다.
“얼씨덩!”
머슴들은 우레 같은 고함소리에 못 이겨 원삼이네 삼형제의 이글거리는 눈길을 피해 머리를 숙이고 곡식무지에 달려들어 가래로 딱 절반을 쭉 긋더니 퍼 번지기 시작했다.
한참 역사 질 하니 곡식무지에 골짜기 하나가 생겨났다.
“서쪽무지를 자네들이 가져가게.”
춘삼은 볼 부은 소리를 쳤다.
“뼈 빠지게 황무지를 개간해 농사를 지어놓으니 가을에 와서 이렇게 하는 법이 어데 있소?”
리영룡은 자기 쪽에서 뚱뚱한 볼에 살기를 띄우면서 고래고래 고함쳤다.
“명년에 반작농사를 하지 않겠으면 그만둬. 반작농사를 짓자는 사람이 쌔고 버렸어. 배부른 흥정을 다 하게 든다. 별것들이 원, 흥!”
원삼 형제는 억울한 대로 절반으로 나눈 곡식무지를 수레에 실어 집으로 가져갔다.
춘삼은 분이 풀리지 않아 그날로 다른 곳으로 농사지으러 가겠다고 했다.
“아무튼 우리 삼형제가 한 집에서 살기도 힘든데. 난 기준형제들을 찾아가보든지 하겠다.”
풍작을 거두었건만 쌀 몇 마대를 가지지 못한 원삼 삼형제는 물레방아 골에서 지주 영룡을 믿고 살기 힘들다는 것을 점차 느끼게 됐다.
가을해가 소서구 동쪽 령 마루에서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풍작은 거두었지만 소서구의 기준 일가는 황무지를 개간한 것이 많지 않은데다 식구가 많이 늘어나 목수일이라도 찾아 해 보태지 않으면 보릿고개를 넘기 힘들 것 같았다.
기준은 맏아들 상우와 함께 땔나무와 목수도구를 수레에 싣고 진수해로 떠났다.
그때 상순이가 따라 나와 몸을 배배 탈면서 “아버지, 나도 가게 해 주오.” 하고 서적을 부렸다.
“아니, 십여 리나 되는 호박 길을 어떻게 따라 간다고 그래?”
기준이가 눈을 부라리는데도 상순은 계속 떼를 썼다.
“아빠 모는 수레에 앉아 가면 되지. 응~”
상우 동생을 안아주면서 얼렸다.
“얘, 어떻게 저 높은 수레 꼭대기에 앉는다고 그래? 집에 있어라. 장마당에 갔다가 올 때 형님이 엿사탕 사다줄게.”
“엿 사탕? 아, 좋아라! 약속해야 돼, 꼭 사온다고.”
“오, 그래.”
상순과 상우는 깍지걸이를 했다.
기준은 울퉁불퉁한 호박 길로 수레를 겨우 몰고 둬 식경 내려가자 진수해 북쪽에서 세차게 흐르는 부르하통하 강물이 앞을 가로 막아 나섰다.
“와.”
소를 세워놓고 기준은 강물 가에 가서 수심을 여겨보았다. 조약돌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물은 그리 깊지 않아보였다.
기준은 둥글소 쪽에 돌아가 고삐를 쥐고 멍에를 팔꿈치로 지그시 누르면서 “이라!” 하고 소를 몰았다.
둥글 소는 기준의 명이 떨어지기 바쁘게 머리를 숙이고 소 수레를 끌고 앞으로 힘차게 나아갔다. 소 앞다리의 근육이 불뚝불뚝 일어섰다. 둥글 소는 용케도 나무를 산더미같이 실은 수레를 끌고 강심까지 들어갔다. 그런데 강심을 벗어나려는 곳에서 그만 웬 돌에 오른쪽바퀴가 턱 걸려 옴짝달싹 못했다.
“상우야, 소를 몰아.”
기준은 소고삐를 상훈에게 넘겨주고 오른쪽바퀴 쪽에 가더니 두 손으로 수레 살을 잡고 건뜻 들었다.
“몰아라!”
“이라!”
그제야 둥글 소는 수레를 끌고 겨우 앞으로 나갔다.
한참 기준과 둥글 소가 끙끙 애써 간신히 부르하통하를 건넜다.
그들은 겨우 버들방천을 벗어나 진수해 북쪽에 있는 토성 안 집 앞을 지나가게 됐다.
“에에, 고이(오게나).”
토성 안에서 일본군복을 입은 자가 나오면서 손짓하여 불렀다.
“와.”
기준이 수레를 세우는데 상훈은 나지막이 말리였다.
“아버지, 일본 놈입니다. 혹시 우릴 알아보면 어쩝니까?”
“설마, 땔나무를 사자고 그러는지 아니?”
그자는 가재수염을 슬슬 내리쓸며 수레를 빙 돌아가면서 땔나무를 여겨보더니 땔나무를 손짓하면서 뭐라고 지껄였다.
“뭐라는지 알아들어야 어쩌지.”
기준이가 중얼거리는데 토성 안에서 요염하게 치장한 여인이 나오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땔나무를 사겠다고 해요.”
일본 군인은 손가락 두 개를 펴대더니 “니엔(2원)!” 하고 지껄였다.
“3원이면 팔겠다고 알려주오.”
그러자 보름달같이 생긴 창녀가 일본 군인에게 전해주었다.
일본 군인은 기어이 손가락 두개를 꼿꼿이 펴 쳐들었다.
“그럼 안 팔겠소.”
기준은 땔나무수레를 몰고 떠나려고 했다.
그러자 창녀가 “2원이라도 주겠다고 할 때 팔아요. 괜히 일본 놈들 성질을 건드렸다가 빼앗기지 말고.” 하고 종알거렸다.
그 말도 비슷하여 기준은 별수 없이 2원을 받아 쥐고 땔나무를 넘겨주기로 했다.
그와 상우는 수레를 몰고 토성 안으로 들어갔다.
토성 안에 들어서니 덩실한 기와집이 여러 채 남향하여 “ㄷ”자형으로 들어앉아있었다. 푸른 기와를 얹은 위안소는 추녀가 도고하게 하늘 높이 건뜻 쳐들려있어 위엄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유리창문까지 달아 깨끗하고도 산뜻해보였다. 마당에는 아침해 볕을 쪼이느라고 한복이거나 화복을 걸친 숱한 종군위안부들이 왔다 갔다 거닐고 있었다.
기준과 상우는 땔나무를 창고 앞에 부리어놓은 후 목수도구를 수레에 되 싣고 떠나려고 했다.
일본 놈은 가재수염을 만지면서 목수도구를 보고 “거 목수도구 아닌가?” 하고 물었다.
그 위안부가 통역해줘 그 소리를 알아듣자 기준은 등 곬에 싸늘하게 소름이 쪽 끼쳤다.
“어, 어. 그렇소. 우린 일이 바빠 가야 되겠소.”
위안부의 통역을 듣고 일본 놈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우리 마사진 문을 손질해주게나. 오까네 이빠이 아게(돈 많이 줄게).” 하고 씨부렁거렸다.
일본 놈이 어찌나 찰거머리처럼 들어붙는지 용빼는 수가 없었다.
“어느 걸 손 질 하라오?”
일본 놈은 몸채의 정문으로 다가가더니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찌그러진 문을 손질하라고 했다.
기준은 찌그러진 문짝을 내려다본 후 머리를 끄덕이더니 상우를 보고 부탁했다.
“넌 먼저 수레를 몰고 집으로 가라. 내 제꺽 손질해놓고 가마.”
기준은 일본 놈이 준 땔나무 값을 상훈에게 줘 보냈다.
상우가 수레를 몰고 소서구로 떠난 후 기준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대패질할 때였다.
이때 한패의 일본 헌병들이 징그럽게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토성 안에 들어섰다.
기준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개새끼들이, 어찌 문턱이 다슬게 드나들었으면 문이 다 찌그러져?)
기준은 부러진 널판을 도끼로 팡팡 찍어내면서 두덜거렸다.
“개자식들이, 어떻게 주정을 부렸으면 문을 다 차서 끊어버려?”
뒤이어 그가 부러진 나무 대신 새 널을 바꿔 넣었다.
일본 군경들이 우르르 쓸어들어 위안부들을 끼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아까 가재수염에게 통역을 해주던 보름달같이 동글납작한 위안부가 일본군관을 밀어놓으면서 상을 찡그리며 종알거렸다.
“소대장님, 어제 손님 열일곱이나 받고 보니 몸이 불편해 오늘은 안 되겠어요. 만금과 해요.”
(만금이?)
기준은 어데서 듣던 이름 같아 피뜩 쳐다보았다.
걀쭉하게 생긴 만금은 꽤나 예쁘장하게 생겼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일본 놈들에게 몸을 팔아?”
기준은 자귀로 쐐기를 깎아 옹이구멍에 박아 넣으면서 중얼거렸다.
“우리라고 몸을 팔고 싶어 그러게?”
“누군 고향을 떠나 섬나라 오랑캐들의 깔개가 되고 싶어 간도에까지 왔게?”
“별 나그네 다 있어.”
만금은 종알거리면서 일본군 소대장의 팔을 끼고 방으로 들어갔다. 잔등에 탄자 같은 걸 띠고 화복을 입은 일본 위안부들도 밀가루주머니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낯을 해가지고 일본 군 장병들을 모시고 이간 저간 들어갔다.
여기저기서 위안부들의 고통스런 울음소리와 신음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기준은 마사진 문을 제꺽 손질해놓고 떠나려고 가재수염을 보고 손질해놓은 문을 손가락 질 한 후 손을 내밀었다.
“삯전을 달라고? 이놈, 정말 우리 황군의 돈을 벌고 싶은 모양이지.”
가재수염은 삯전을 주기는 고사하고 기준의 얼굴에 대고 손가락질하면서 욕지거리를 해댔다.
“네놈의 땔나무를 샀으면 문을 손질해주면 안 돼?!”
이때 보름달같이 동글납작하게 생긴 아까 그 위안부가 나와 말리였다.
“오가와센세이, 그만하세요.”
오가와란 놈은 기준을 손가락질하면서 “옥설인 저 도척 같은 놈을 알아?” 하고 물었다.
“몰라요. 내가 어찌 저런 가난한 사내를 알겠어요?”
오가와는 기준의 아래위를 훑어보면서 “그래도 혹시 명천에서 봤는지 알 턱이 있는가?” 하고 빈정거렸다.
(옥설이? 분명 명천에서 온 위안부들이구나. 이전에 병권 큰아버지가 말하던 불쌍한 여자들이 여기까지 끌려왔구나.)
기준은 오가와가 혹시 알아볼까봐 삯전이구 뭣이고 기생집에서 나왔다.
이때 등 뒤에서 웬 웅글진 조선말소리가 들려왔다.
“명천이라니? 누가 명천에서 왔다고?”
뒤에서 옥설의 말소리가 들리었다.
“아니예요? 똘만이, 오가와 센세(선생)이 저 나그네를 명천에서부터 아는가 물었어요?”
(저건 똘만이 경찰이구나! 이걸 어쩌지?)
기준은 토성문안을 나서자 걸음아 날 살려라고 도망쳤다.
(아차, 소서구 쪽으로 달아나면 따라올 게 아닌가?)
기준은 발길을 돌려 진수해 남쪽으로 달아났다. 그는 작은 골목을 굽이굽이 돌다가 남산으로 올라 서쪽으로 달아났다.
둬 식경 헤매 패랑천산과 칼산 앞에 이르자 부르하통하를 건너 북으로, 북으로 버들방천 속으로 숨어들었다.
해가 거의 넘어갈 저녁녘에 기준이가 집으로 돌아오니 집식구들이 누워있는 둥글소를 둘러싸서 야단쳤다. 그가 다가가보니 둥글소의 배가 남산만큼 컸다.
“어떻게 된 일이오?”
상우가 눈물이 글썽해 두 손을 맞잡아 싹싹 비비면서 말했다.
“웃새집 둥글 소가 글쎄 콩을 먹고 배가 불러 쓰러졌습구마!”
기준은 상우의 뺨을 찰싹 갈겼다.
“이 놈아, 수레를 몰고 와서 어찌 했기에 소 배때 이 모양이냐?”
상우는 손으로 볼을 만지면서 눈물을 뚝뚝 떨궜다.
“수레 채에 소를 매 놓았는데 수레 옆의 콩꼬투리를 먹은 거 같습니다.”
“자식, 소를 어떻게 매놓았으면 콩꼬투리를 먹니?”
기준은 황소숨을 몰아쉬면서 가래 같은 손을 쳐들었다가 맏며느리 지새금이 돌아서서 어깨를 들먹이는 것을 보고 내리웠다.
“에이, 황소 없으면 명년에 어떻게 농사를 짓겠느냐?”
철부지 상순은 어른들 속에 끼어들어 듣다가 “둥글 소 죽으면 잡아 고기를 먹지 뭐? 얭 얭 맛있다. 오래오래 맛있다 하지.” 하고 종알거렸다.
사련은 제꺽 손으로 상순의 입을 막으면서 기준의 눈치를 살폈다.
기준은 한숨을 후~ 땅이 꺼지게 내쉬더니 집안으로 들어가 털썩 드러누웠다.
(저걸 어쩌느냐? 큰집에 뭐라고 말해?)
한 시간에도 두 번씩이나 나가 둥글 소를 보아도 배만 점점 더 커져갔다.
그때 상훈이가 들어와 무릎을 꿇고 앉아 말했다.
“아버지, 소가 죽으면 소를 잡아 고기를 팔구 모자라는 돈은 겨우내 땔나무를 해다 진수해에 팔아 만듭시다.”
기준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진수해 북쪽길목에 토성안집이 있어서 어떻게 시내로 들어가겠냐? 오늘 문짝을 서너 개 손질해주고 삯전을 한푼도 받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명천경찰국에서 온 똘만이 경찰을 마주 띄워 하마터면 붙잡힐 번했다.”
“예?”
그 소리에 상훈이나 사련이나 온 집식구들이 모두 놀라 일어나 앉았다.
이튿날 둥글 소는 끝내 배불러 죽어버렸다. 별수 없이 기준은 상훈을 보내 큰집 웃새집에 알리였다.
농사군의 목숨과도 같은 둥글 소가 배불러 죽었다는 말에 웃새집에서는 깜짝 놀랐다.
“그게 무슨 소리냐?”
병완은 기침을 쿨룩쿨룩 하며 위방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창준은 외양간에서 상훈과 함께 작두로 소를 먹일 풀을 썰다가 이마에 돋은 식은땀을 닦으며 바깥에 나왔다.
“뭐라니? 황소가 어쨌다고?”
상우는 머리를 숙이고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소를 수레 채에 매놓았는데 그만 콩 먹고 배불러 죽었습니다.”
“아이고, 이 일을 어찌 하느냐?”
창준은 손의 먼지를 투다투닥 털고 병완을 따라 소서구로 헐금씨금 달려갔다.
병완과 창준은 소서구 기준이네 집에 이르러 마당에 쓰러진 배 뿔룩한 황소를 보고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형님, 미안하오. 내 꼭 소 값을 만들어 주겠소.”
창준은 기준의 손을 잡고 “얘, 형제간에 무슨 소리냐? 소를 잡아 고기를 진수해에 가서 팔아라. 두루 보태 둥글 소를 사야 너희들도 명년에 농사를 짓지.” 하고 말했다.
기준에는 울며 겨자먹기로 둥글 소를 잡아 고기를 팔고 나머지 내장은 큰집과 나눠 먹었다.
4. 흑영
기준은 늦가을부터 목수일이라도 해서 황소를 살 돈을 보태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진수해의 토성안집이 두려워 가지 못하고 목수도구상자를 메고 대담히 용정으로 떠나갔다.
도시락에 마른 누룽지를 싸가지고 길을 떠난 그는 반나절이나 걸어서야 해란강변에 이르렀다. 기준은 목수도구상자를 메고 용정 시내를 빙빙 돌아다니면서 일감을 찾았다.
(목수도구상자를 메고 돌아다니는 걸 보면 부르겠지.)
기준은 코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영국덕과 토성포까지 한식경이나 돌아다녔지만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
교회당 부근을 돌아다니는데 까만 신부복을 서양신부가 안경알을 닦으면서 그를 불러 세웠다.
“핼로(여보세요). 목수일 하지 않겠어요?”
서양신부 같은데 조선말을 꽤나 잘했다.
“예. 하겠습꾸마.”
애타게 일을 찾던 기준은 아주 반가워하면서 신부를 따라 교회당으로 들어갔다.
신부는 기준을 데리고 십자가가 걸린 넓은 예배당을 지나 옆칸으로 들어갔다.
부엌에서 여성들이 한창 남새를 다듬다가 건장한 사내가 뭘 메고 들어서자 모두 이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신부는 식장을 가리키면서 “저런 식장을 둬 개 더 짜줄 수 있겠어요?” 하고 물었다.
“예. 한 일여덟 날 걸릴 것 같은데 괜찮겠습둥? 그런데 난 잘 데도 없어 안 되겠는데.”
기준은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가지고 온 도시락도 얼마 남지 않았고 돈도 몇 푼 없었던 것이다.
“일주일? 괜찮아요. 삯전은 푼푼히 주겠으니까. 근심하지 말아요. 교회당에서 우리와 함께 숙박하면서 식사해요.”
신부는 마음이 아주 너그러웠다. 신부는 기준을 데리고 뒤울안으로 들어가더니 숙사 한간을 내주었다.
“일주일 동안 여기서 쉬면서 식장을 짜주세요.”
기준은 감지덕지하여 “감사합꾸마. 꼭 일주일안에 멋있는 식장을 짜 드립지비.” 하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기준은 목수도구상자와 도시락을 숙사에 두고 나서 신부에게 “식탁을 짤 목재는 어데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신부는 어깨를 들썩하더니 “따라오세요.” 하고 서쪽 마당으로 갔다.
거기에는 마른 목재들이 쌓여있었다. 기준은 가꾼 목을 하나 골라 들고 보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예. 몽땅 홍송이구먼. 좋은 식장을 짤 수 있습꾸마.”
이윽고 기준은 점심을 교회당 식당에서 잘 먹고 목수도구상자를 메고 목재 무지 옆에 가서 일을 시작했다.
이튿날 기준이 한창 일할 때 교회당 예배당 안에서 아주 들어보지도 못했던 음악소리가 은은히 들리었다. 그 음악소리가 어찌나 맑고 부드러운지 기준은 귀가 솔깃해졌다. 하여 그는 대패질하다가 유리창문으로 교회당 예배당 안을 들여다보았다. 비단옷을 입은 숱한 부자들이 앉아있는가 하면 남루한 한복을 입은 여성도, 떠꺼머리도 수태 들어앉아 있었다.
앞무대 위에서는 한창 서양신부가 뭐라고 연설을 하고 있었다.
(밥을 먹고 할 일도 없는 모양이지.)
기준은 다시 대패질을 썩썩 했다.
한주일 동안 부지런히 대패질하고 쐐기를 박아 넣어 식장 두개를 다 짜놓았다.
서양신부와 조선신부들이 몇이 와서 식장을 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주방장 조선족아줌마는 키 넘는 식장을 매만지면서 찬탄을 금치 못했다.
“어쩌면 요렇게 빤질빤질하게 짰을까? 요기다 음식그릇을 얹어 놓으면 음식 맛이 다르겠다. 야~”
신부는 호주머니에서 뭔가 꺼내더니 기준의 손바닥에 쥐어주었다.
“자, 받으세요. 10원입니다.”
기준은 돈을 받아 쥐자 “감사합꾸마.” 하고 허리 굽혀 인사했다.
주방장아줌마는 “아니, 내 두 달 일해도 그만큼 받지 못하는데.” 하고 아까워했다.
신부는 주방장아줌마에게 “우리 교회당 주방에 멋진 식장을 짜줬으니 두고두고 얼마나 잘 쓰겠어요?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죠.” 하고 말했다.
주방장아줌마는 너무나도 창피하여 머리를 들지 못하고 웃으면서 “감사합니다. 목수.”하고 거듭 사과하는 마음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기준은 허리를 굽혀 인사를 드리고 교회당에서 나왔다. 신부는 문밖에까지 배웅했다.
“난 죤슨이라고 부릅니다. 이후에 혹시 용정에 왔다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찾아오세요. 저희가 있는 힘껏 도와드리죠.”
“예. 고맙습꾸마.”
기준은 다시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교회당을 떠났다.
그는 한참 걷다가 다시 십자가가 꽂힌 교회당의 뾰족한 지붕 쪽을 되돌아보았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죤슨 신부는 선 자리에 있다가 되돌아보는 기준에게 손을 저었다.
“참, 이렇게 살벌한 세상에 별나게 착한 사람도 다 있군 그려.”
기준은 중얼거리고 나서 또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일거리를 찾았다.
그는 한낮이 돼 한 아름이나 되는 버드나무 아래에 갔는데 우물이 있었다. 그는 갈증이 나서 나무에 걸린 드레박을 풀어 우물에 풍덩 처넣고 슬슬 잣아 올렸다.
그가 드레박의 시원한 물을 부어 마실 때였다.
“이게 누구야?”
기준은 물을 마시다 말고 입을 쓱 닦으면서 허리를 펴는 순간 자기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글쎄 관준 형님을 용정에서 만나다니.
관준은 주위를 흘끔흘끔 살피면서 기준을 끌고 작은 골목으로 슬밋슬밋 숨어들어갔다.
기준은 너무나도 반가와 사촌형님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
“아니, 형님. 여기는 어떻게 돼 왔소? 큰아버지랑 잘 있소?”
관준도 반가워 어쩔 줄 몰라 했다.
“야, 한입으로 어떻게 다 말하겠니? 정말 간도에서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다.”
기준은 관준 형님을 데리고 자그마한 개장 집으로 들어갔다. 그는 개고기 한 접시에 막걸리를 둬 잔 시켰다.
“그래 큰아버지랑 무사하오?”
그러자 관준은 아주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 나직이 말했다.
“일본 놈들에게 붙잡혀 무너진 우시장 경찰국 청사자리 폐허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양?!”
기준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곁에 사람들이 있는 것도 눈치를 볼 새도 없이 대성통곡을 쳤다.
“아이고, 큰아버지!”
숱한 손님들이 그들을 쳐다보았다. 관준은 허리를 앞으로 약간 굽히면서 미안하다는 뜻을 표시했다.
기준도 소리를 낮춰 흑흑 흐느껴 울다가 그쳤다. 분김에 기준과 관준은 막걸리를 들어 쭉 굽 냈다. 그는 개고기를 도시락에 싸 넣고 황급히 개장 집을 나와 작은 골목에 굽어들었다.
기준은 관준에게서 그간 큰아버지 일가가 당한 봉변을 듣고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 쥐었다.
“일본 놈 개씨끼들을 어떻게 해야 원수를 다 갚겠소?”
이때 캡을 쓴 한 땅딸보가 그들의 뒤를 따라오더니 빈대 눈으로 쏘아 보는 것이었다.
“형님, 빨리 이 곳에서 빠져 나가기요. 저 캡을 쓴 자가 수상하오.”
관준은 제꺽 눈치를 채고 기준을 따라 주먹을 쥐고 작은 골목길로 이리저리 굽이를 돌아 달아났다.
그들은 단숨에 해란강을 건너 버들방천 속에 몸을 숨기였다. 뒤를 돌아다보아도 뒤를 따라오는 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삼봉동 고개에까지 뛰어가다 싶이 했다.
“형님, 여기까지 온 바 하고는 우리 소서구에 가기요.”
관준은 쾌히 응낙했다.
“그래, 오랜만에 삼촌도 만나봐야겠다. 사실 간도가 살만 한가 내 먼저 왔다.”
그들은 진수해에 들리지 않고 뒷산에 올라 곧추 함흥촌에 이르렀다.
윗방에서 관준을 본 병완은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얘, 이게 몇 해 만이냐? 어이구, 이젠 영영 다시 만나지 못 하는가 했는데. 흑흑.”
관준은 위방에 올라가 병완과 성희를 나란히 모시고 넙적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그간 삼촌과 삼촌댁 평안히 계셨습둥?”
병완은 “그래, 잘 있었다. 형님은 잘 있느냐?” 하고 물었다.
관준은 머리를 툭 떨어뜨리면서 “아버지는 일본 놈들에게 교살당했습니다.” 하고 무거운 입을 떼더니 그간 있었던 일을 죽 말했다.
나중에 그는 “아버지는 돌아가기 전에 ‘성칠 조카랑 꼭 돌아와서 일본 놈들을 쳐 죽이고 원수를 갚을 것이다.’고 외치시면서 '내 조선의 고향에 묻힐 수 있어 다행이다"고 했습니다.”
그 비보를 듣자 병완은 형님의 불행에 가슴을 치며 “어이, 어이. 형님~ 이 동생 때문에 형님이 억울하게 돌아갔소. 어이, 어이, 형님.” 하며 대성통곡 했다.
기준은 “내 간도로 들어올 때 큰아버지도 들어왔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둥? 큰아버지는 고향을 떠나기 싫다고 하시더니, 에이고, 큰아버지가 불쌍합구마.” 하고 중얼거렸다.
창준과 성희도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정주간에서 아낙네들도 저고리 동전으로 눈물을 닦았다.
이윽고 성희는 “혹시 내 오라비랑 명천에 왔댔어요?” 하고 물었다.
관준은 자리에 앉으면서 삼촌댁을 바라보며 “최구장이 그러는데 삼촌네 떠나간 후 손자를 데리고 운주동에 왔다가 대성통곡치고 돌아갔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성희는 본가 집 오라비가 생각나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더니 정주간으로 나갔다.
병완은 곰방대에 담배를 쑤셔 넣으며 물었다.
“최구장 사돈어른은 잘 계시느냐?”
관준은 바깥을 내다보며 말했다.
“에이고, 그 사돈어른 막내아들은 약담배 매매를 했다고 끼무라 놈이 교수형에 처했습꾸마. 일본 놈들 말도 하지 맙소. 아버지를 교살한 교수대에서 달마다 거의 십여 명씩 별의별 죄명을 다 들씌워서 교살했습꾸마.”
병완은 담배연기를 후 내뿜으며 이를 갈았다.
“일본 놈새끼들을 어떻게 원수를 다 갚겠느냐?”
관준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일본 놈들은 경찰국 사무 청사와 다리가 수태 무너지자 누구 탈만해서 미쳐 날뜁니다. 삼촌과 기준 탓이라면서 지금 잡자고 미쳐 날뜁꾸마. 듣는 말에 그 놈들은 간도에도 기별해서 삼촌과 기준을 잡으라고 했답더구마.”
기준도 한마디 했다.
“이번에 용정에 갔을 때 우리 뒤를 쫓아다니던 놈이 별루 명천 경찰국의 조선 경찰 똘만이 같았습꾸마. 캡을 썼지만 땅딸보가 누구 눈을 속인단 말입둥? 전번에 진수해 기생집에 같다가 피뜩 뒤돌아보니 땅딸보 똘만이 같습더구마.”
“개자식들, 여기까지 쫓아와 우리를 못살게 굴자구?”
병완이 욕설을 퍼 부었다.
“성칠 동생은 어데 있소?”
병완은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몇 해째 행방불명이다. 아무리 유격대에서 바쁘더라도 제 애비 어미는 찾아봐야지. 사람자식이. 참.”
병완은 담배 재를 재떨이에 털더니 관준을 보고 “이제라도 여기 들어오너라. 일본 놈들이 성화에 어떻게 배기겠느냐?”
관준은 눈물을 닦으면서 진정을 토로했다.
“사실 이번에 그래 왔습니다. 간도가 어떤지 알아보고 집 식솔들을 데리고 들어오겠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산소를 고향에 모셔두고 오기도 죄송스럽습니다.”
병완도 속을 털어놓았다.
“나도 할어버지와 부모 산소를 고향에 두고 온 게 죄송스럽다. 핍박에 의해 고향을 떠난 불효를 조상들께서도 구천에서 용서하겠는지.”
관준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용정도 보니 일본 놈들의 세상이 다 됐더구먼. 여기 소서구는 어떻습니까?”
병완은 담배를 풀썩풀썩 피우면서 대답했다.
“아직 여기는 일본 놈들이 들어오지 않아 편안하다. 한족지주들도 조선 지주들보다 마음이 후하고.”
관준은 흥미가 당겨 가까이 다가앉았다.
“소작료를 얼마나 바칩니까?”
창준은 볼 부은 소리를 했다.
“몇 해 전엔 우리 황무지를 일군 밭에서 난 곡식은 우리 8할 먹으라고 했소. 그런데 이젠 절반 밖에 주지 않소.”
기준도 씩씩거리며 울분을 토했다.
“우리 애나게 나무를 뽑아 버리고 황무지를 개간했는데 이제 조선 지주들처럼 8할을 떼 낼 지 누가 아오? 원삼도 물레방아 골에서 반작농사를 짓는다던데.”
관준은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천하의 까마귀는 다 까맣다고 조선 지주나 중국 지주나 세상의 지주들이 다 그렇지. 많이 줄 상 하면서 황무지를 기껏 개간하게 해놓고는 제 배때를 채우자고 들지. 후~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겠소?”
병완은 관준을 보고 정색해 말했다.
“일본 놈들이 그래도 널 감방에서 내놓은 게 다행이야.”
관준은 도리머리질을 했다.
“내 대신 상철을 잡아갔습니다. 놈들은 우릴 미끼로 삼촌 일가 꼬리를 밟자고 미쳐 날뜁니다. 이번에 간도에 들어올 때에도 난 꼬리를 떼버리느라고 혼났습니다.”
저녁에 아래사랑집 석은과 석철 두 내외간이 와서 집안집 종친회를 방불케 했다.
석은의 아내 죽순은 관준에게서 막내 동생 경석의 비보를 듣고 동전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마당으로 조용히 나갔다.
석은이 따라 나가 들먹이는 아내의 어깨들 다독이며 위안했다.
죽순은 머리를 들고 석은을 바라보며 눈물을 빗물 내리듯 줄줄 흘리며 흐느껴 울었다.
석철과 병완은 관준과 밤늦도록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관준은 열흘이나 있으면서 기준이네 집에도 가보고 황무지를 개간한 밭들도 돌아보았다.
병완은 관준 앞에서 창준과 기준을 돌아보며 “새해부턴 형제간의 밭을 나눠 다루면 어떠냐?” 하고 물었다.
창준과 기준은 서로 마주보며 이구동성으로 좋다고 했다.
병완은 손으로 소서구 막바지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아무리 형제간이라도 나눠 다루면 말썽도 없고 힘이 더 난다. 저기 막바지등성이로부터 기준이네 집으로 쭉 내려오면서 금을 긋고 그 남쪽으로부터 천지꽃산까지 기준이네가 개간해 다루고 북쪽 산비탈 밭은 창준이네 다루도록 하자.”
창준과 기준은 다 좋아했다.
관준은 소서구에는 붙힐 땅이 없는 것을 보고 큰 골 안의 동쪽으로 쑥 들어간 골 안을 가리키며 물었다.
“삼촌, 저기 동쪽 골안은 사는 사람이 없습니까?”
병완은 머리를 절레절레 가로 저었다.
“사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의사 질 하는 너희들이 밭을 해 뭘 하겠니? 만약 너희들이 여기 오면 개간할 황무지는 쌔고 버렸다. 내 저 동쪽 골안을 장학산 지주에게 말해서 붙이게 할게.”
관준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인적도 드문 이 골 안에서 무슨 환자를 보겠습니까?”
“그렇긴 하다.”
며칠 후 관준은 고향으로 떠나갔다.
병완은 5원이나 쥐어 보내면서 부탁했다.
“내 대신 할아버지와 아버지한테 제주를 부어 달라. 형님 산소에 가서 이 동생이 직접 고향에 찾아가 제주를 붓지 못해 죄송스럽다고 전해라.”
병완은 눈물을 주르르 흘리었다. 창준이네와 기준이네도 동전잎을 쥐어주었다.
“형님네도 여기 들어오오. 우리 함께 간도에서 살기요.”
“알았다. 돌아가 집식구들과 토론해보겠다.”
관준이가 몸을 돌려 떠나가려 할 때였다.
성희가 기침을 콜록콜록 하며 신신당부했다.
“혹시 내 오라버니 명천에 오면 이 누이 여기서 산다고 전해주세요.”
“예, 알았습니다.”
관준은 병완과 성희에게 큰절을 올리고 떠나갔다. 기준은 관준을 배웅하는 길에 용정에 가서 일하려고 함께 길을 떠났다.
집 동쪽에 있는 늙은 비수나무 꼭대기에서 까마귀 몇 마리가 까욱, 까욱 울었다.
싸늘한 늦가을 바람에 낙엽이 우수수 떨어졌다. 기준과 관준은 누런 낙엽을 밟으면서 길을 다그쳤다.
기준은 육도하 강변을 따라 선바위 골 쪽으로 올라가면서 관준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이 근방을 달라재라는 한다오.”
“건 왜 그렇게 부른다니?”
그러자 기준은 허무한 웃음을 지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달라하자 근방에 오누이가 살았지요. 어느 날 그들 오누이는 육도하를 건너 산나물 캐러 가게 됐다오. 그런데 큰 비가 억수로 퍼부어 물이 불어 세차게 사품 치면서 흘렀다오. 그래서 오라비가 누이를 업고 강을 건너게 되였지. 누이를 업고 강을 건너던 오라비가 불시에 남근이 꿋꿋하게 살아났다오. 오라비는 강을 건넌 후 누이를 내리워놓고 버들방천에 뛰어 들어갔지. 오라비는 누이를 보고 짐승처럼 살아난 자기 남근을 돌에 대고 돌로 쳐 끊어버리고 죽어버렸다오. 누이는 그 사연을 알고 죽은 오라비를 안고 ‘누이를 보고 달라 할 게지, 달라 할 게지.’ 하며 통곡 쳤다오. 그때로부터 그 애탄 사연을 담아 이 근방을 ‘달라하자’라고 불렀다오. 그 후 달라하자는 달라재라고 불렀다오.”
관준은 그 이야기를 듣고 어처구니없어 했다.
“그 오라비 그 누이구나. 인륜이란 천륜인거야.”
그들은 이 말 저 말 하다나니 어느 새 오랑캐 령을 넘어 오후에야 두만강 변에 이르렀다.
기준은 몇 해 전에 한을 품고 고향을 떠나 두만강을 건너던 일을 되 돌이키자 한숨만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이전에 어린 조카를 데리고 이 두만강을 건너 간도에 첫발을 들여놓았고 이듬해에는 아버지와 형님을 이 두만강에서 마중했다.
오늘은 또 살 길을 찾아 간도에 왔던 사촌형님을 생사이별을 기약할 수 없는 조선으로 바래여야 했다.
그는 고향 명천 운두동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고향 산천이 그립고 조상들의 산소가 그립고 고향의 모든 것이 그리웠다.
(아, 두만강, 한 많은 두만강이여, 너는 우리와 조선, 우리와 혈육을 갈라놓은 강이구나. 일제와 네가 없으면 우린 자유로운 새처럼 조선을 드나들고 고향으로 찾아갈 수 있을게 아니냐.)
관준은 살 얼음조각이 둥둥 떠 동으로 유유히 흐르는 두만강을 멍해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기준이 관준의 손을 잡고 나직이 말했다.
“형님, 고향이 아무리 좋아도 일본 놈들의 세상이 된 판에 우리 소서구에 들어오오.”
그러나 관준은 도리머리 질 했다.
“아버지 3년 제사도 지내지 못하고 어떻게 고향을 떠나겠니? 또 우리까지 떠나면 아버지와 할아버지 산소를 누가 모시겠냐?”
기준은 한참 궁리하더니 귀띔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끼무라 놈이랑 한길수랑 형님을 가만 놔둘 거 같지 않소. 잘 생각해보고 선손을 써 우리 여기로 들어오는 게 옳은 거 같소.”
관준은 믿음에 찬 눈길로 기준을 바라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 놈들이 우리 뒤를 밟아 너 일가를 발견할까봐 근심돼 그런다.”
“그런 막연한 근심을 하지 말고 들어오오.”
관준이 머리를 끄덕이며 기준의 손을 굳게 잡았다.
“형님, 이제 갈라지면 언제 또 만날까?”
기준은 형님을 꼭 끌어안았다.
그들은 눈물을 휘 뿌리면서 두만강 변에서 작별했다.
아, 눈물 젖은 두만강아, 그대는 그 얼마나 많은 부모형제들의 생이별을 묵묵히 바라보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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