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jiangxiaosan 블로그홈 | 로그인
강효삼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홈 > 전체

전체 [ 73 ]

53    달라진 조선족의 설맞이 풍경 댓글:  조회:2474  추천:2  2014-01-30
     1년에 한번밖에 없는 설은 타향에 가 있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날이며 헤여졌던 가족들이 한데 모여 즐기는 날이다. 하지만 코리안드림과 도시진출이라는 특정된 환경속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은 그렇지 않다.이제 대가족이 핵가족이 되면서 설을 맞아 온 가족이 한데 모여 북적이며 설을 쇠는 풍경은 거의 찾아 볼수가 없다.대신 새로운 풍경이 눈에 보여지고 있다.   오는 사람보다 가는 사람이 늘고 있다   몇년전만 해도 설 림박이면 그래도 타향에서 고향으로 설 쇠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하지만 이제는 설쇠러 오는 사람보다 가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남방으로 가기도 하지만 주로는 한국으로 가는데, 한국에 있는 부모에게 설쇠러 가는 학생들, 남편 혹은 안해에게 설 쇠려가는 외짝 부부들,그 밖에 자식집으로 설쇠러 가는 로부부들…어떤 이들은 설을 계기로 잔치나 환갑,진갑 등 가족행사를 치르러가고 효도에 이끌려 설도 쇨겸 관광도 하러 가는것이다. 할빈공항 국제항공편도착 출구를 빠져나오는 귀향객들.(자료사진)   모 려행사의 조사에 의하면, 근년 설기간 오는 사람보다 가는 사람들의 수자가 눈에 뜨이게 늘고 있는것이 항공권 예약에서 여실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김모녀인은 이번 설을 한국에 가 보내면서 그곳에 아들딸 친척들이 많아 설명절과 함께 환갑잔치를 치른다고 한다.그밖의 리유로 한국에 가서 설 쇠는 사람들이 부쩍 늘고 있는것은 이젠 고향에 있는 사람보다 나간 사람들의 수자가 훨씬 많기때문이다. 한 가정을 놓고봐도 아들 며느리, 딸 사위로 등 가정성원 대부분이 한국에 가 있다. 하여 이제 조선족은 설이라 하여 그 많은 사람들이 비행기를 타고 고향에 오느니보다 이곳에 있는 적은 사람들이 가는것이 훨씬 경제적으로도 편리하다는 계산하에 설에 오는 사람보다 가는 사람이 많은것이다. 하여 온 가족 실솔이 고향에 모여 북적거리며 설을 쇠는 가정은 가족 성원들 거의가 출국하지 않고 가까운 곳에 사는 공부원, 도시 직장인 등 생활이 부유한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설이 되여 집집마다 음식을 해놓고 서로 청하던 풍경은 언녕 볼수 없고 도시라 해도 마찬가지 조선족들의 설은 점차 조용한 설이 되고있다.   그래도 편안한것이 좋다고 ?   현실에 적응하여 사는것이 인간이다. 조선족들의 설쇠기도 마찬가지다.가족 성원들이 멀리 떠나 외롭게 설 쇠는 이들이 하나 둘이 아닌 상황에서 이제 그렇지 않기를 바란들 무슨 소용있으랴! 해서 조용히 외롭게 간단하게 설을 쇠는데 눈이 익어 거부감도, 불평도 느끼지 않는것이 보편적인 심리상태다. 그것은 밖에 나가있는 사람중에 설이 되여도 올수 없는, 이를테면 일본, 미국 등지에 가 정착하는 자식들의 수도 늘고있기때문이다. 그리하여 설에 잊지 않고 택배나 돈을 부쳐오면 고맙고 설날아침 전화라도 걸려오면 반갑고…그런데 이렇게 외롭게 지나는 사람중엔 일부러 혼자지내기를 소원하는 사람도 있다.   한 로부부의 고백이다. 설에 몰려왔던 자식들이 다 떠나니 섭섭하기도 하지만 한편 시원하다는것이다. 리유를 알아보니 밖에 나갔던 자식들이 왁자하니 몰려와 있는동안 오랜만에 만남은 좋으나 어쩌다 집에 온 그네들에게 부엌일을 시킬수없어 부모가 대신 식모노릇, 보모노긋 하느라고 아주 힘이 들었다는것이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오지 말라고 했다 한다.부모들이 오지 말라니 대신 자식들이 부모더러 자식집에 와서 함께 지내자고 하는데 그래도 가지 않겠단다. 외로와도 편히 지나는것이 좋다고. 할빈시조선족로인문화협회 로인들이 설맞이 사물놀이를 선보이고 새해축복을 전하고있다.(자료사진)   너무 오래동안 부모 자식이 헤여져 살면서 그리움은 잠간이고 인간의 정마저 무디여졌는가.요즈음 외롭게 설 쇠는 로인들에게 새로운 신조어가 하나 있다. "설이고 머고 건강하면 된다,아프지만 않는다면 그게 바로 설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 설의 이미가 달라졌기때문일수도 있겠다. 물질이 궁핍하던 년대엔 설이 되여야 좀 잘먹을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평소에도 잘먹고 잘사니 날마다 설인 셈이다. 그래서 구태여 설, 설 하지 않는다는것이다. 지어 아예 설이라는것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사람가운데는 내심 설날의 외로움에 대한 심적고통이 있을수 있기때문이지만, 여하튼 설을 맞이하는 중요성이 우리 생활에서 많이 빛 바래지고있다는것만은 사실이다. 한해를 보낸다는 의미일뿐 물질적으로는 그립지 않은 설이다.   새로 나타 나는 풍경 ㅡ 더불어 함께 쇠는 설   하지만 설명절은 어쨌든 누구인가 만나야 하고, 사람이 사람과 함께 지나는것이 가장 설명절다운것이다. 지난날 비록 가난했지만 가족 ,친족은 물론 이웃과 더불어 설을 쇠는것이 설명절의 광채도 더 하고 설도 한결 더 의미가 있지 않았던가. 리별 많은 세상,각박해지는 인심이지만 그럴수록 명절만이라도 사람이 사람을 만나 함께 보낼수있다면? 하여 요지음 우리 항간에 비록 남남이지만 설날 아침부터 외로운 사람끼리 한데 모여 설을 쇠면서 그 옛날 '녀자들은 정초에 남의 집 울안에 발을 디디지 않는다'는 규레가 저절로 타파되고 있다.   지난해 모 로인협회에서는 정월 초하루날도 여늬 날과 똑같이 로인협회 대문을 활짝 열어놓았다고 한다. 그것은 설이 되여도 가족을 만나지 못하고 외롭게 집에서 텔리비와만 싸름하면서 사람이 그립지만 옛날 관념때문에 (정초에는 남의 집에 가지 않는다는) 감히 바깥돌이를 못하는 사람들에게 평소처럼 로인협회 모여 함께 명절을 쇠게 하자는 의미에서였다. 결과 10여명이 로인들이 손수 술이며 음식들을 가지고와서 즐거이 먹고 마시고 놀며 고독을 풀었다고 한다.   이런 풍경은 완전히 무의무탁한 경로원에서나 있을법한데 이제 로인협회에서 외롭게 설을 쇠는 로인들의 심정을 감안하여 이렇듯 협회를 공동히 명절맞는 집이 되고 서로가 가족이 되게 하니 이거야말로 우리 조선족들이 더불어 설을 쇠는 새로운 풍경이 아닐가. 이에 올 설 이 로인협회에서 올해는 더 크게 설날의 모임을 조직하려 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설날의 기쁨을 만끽하게 될것이다. 이는 제창할만 하다. 설사 로인협회가 아니라 해도 공공장소에서 문화오락활동을 한다면 설이 더욱 설같을것이다. 기대해본다 . 흑룡강신문 2014.1.29  
52    (시) 민들레 (외2수) 댓글:  조회:1917  추천:2  2014-01-13
민들레   늘 거기 있기때문이다 가장 낮은 곳에 너른 세상 갈 곳 많아도 민들레는 아예 흙에 자신을 맡겨버리고 제 본래 태여난 땅 그 한구석에서 순하고 천해도 항상 밝게 살기로 했다   누굴 닮았나 묻지 말자 무심히 보기엔 너무 고상한 꽃 그렇게 많이 모여있어도 서로 헐뜯는것 보지 못했다 그렇게 가혹하게 짓밟혀도 신음소리 한마디 듣지 못했다 흘리는 눈물은 더구나 없는 아, 우리 겨레 녀인들 같은 꽃이여   외로운것들은 외로움을 모른다 외로운것들은 외로움을 모른다 깊은 산 수림속에 오똑 솟아있는 작은 집 한채 망망한 바다 한가운데 홀로 둥둥 떠가는 섬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것들은 늘 스스로의 아름다움에 취해 산다   외로운것들은 외로움을 모른다 달은 태여나자부터 홀로고 버섯은 종래로 외기둥에 받쳐있다 그래도 얼마나 명랑한가 또 도고한가  외로운것들은 외로움을 모른다   나도 모른다 바깥세상 아무리 외로와도 내 안에서부터 자꾸  커지기에   《마지막》이란 말씀   한여름 뜨거운 뙤약볕서 김 매시던 아버지 늘찬 논배미 이랑 끝머리 벼속에 숨은 돌피 뽑아던지면서 말씀하셨다 이것이 《마지막》이다 섣달 그믐날 일력장을 뗄적마다 어머니도 말씀하셨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한줌 남은 쌀독의 쌀을 긁어내시면서도 남은 한접시의 반찬을 상에 올리면서도 이것이 《마지막》이라 하시며 새로운 시작을 하셨던 그네들   죽음을 내놓고는 진짜 《마지막》이 없는데 《마지막》, 《마지막》 하시면서 짧고도 긴 생을 살아오셨네 힘들고 고달팠던 《마지막》을 끝내고 정작 《마지막》 가는 날은 《마지막》이란 말씀도 못하시고  
51    민들레화단을 보면서 댓글:  조회:1574  추천:0  2013-09-24
민들레화단을 보면서  아빠트앞 손바닥만한 화단에 다른 꽃은 심지 않고 몽땅 민들레만 심었는데 문득 민들레만 골라서 심어놓은 작은 민들레화단을 보면서 민들레에 대하여 새삼스레 생각해보게 되였다. 이 작고 보잘것 없는 수수한 꽃을 얼마나 많은 시인들이 시줄에 담았으며 얼마나 많은 작곡가들이 오선보에 담아 노래했는가? 그래도 끝없이 나오는 민들레에 대한 시, 민들레에 대한 노래, 민들레처럼 작고 보잘것 없는 꽃이 이렇게 많고많은 시와 노래를 가지고있는것도 드물것이다. 더우기 우리 겨레의 예술가들이 민들레를 사랑하여 민들레를 두고 많은 시와 노래를 창작한데는, 그네들이 이 작고 보잘것 없는 꽃에 그렇듯 심취하는데는 과연 어떤 리유가 있어서일가? 평범하고 소박해도 밝고 명랑하기때문일거다. 민들레는 작고 여리고 단일한 색갈의 평범한 꽃이지만 어쩐지 대하면 마음이 편하고 너그러워진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날에도 매양 민들레를 보면 항상 밝은 그 얼굴이여서 우울한 기분을 가질수 없다. 흔해도 사랑스럽기때문일거다. 워낙 많고 흔한것은 천스럽다하지만 민들레는 그렇게 많은데도 볼수록 귀엽다. 너무 수수하고 흔해서 공원같은데 따로 옮겨심어지지 못하고 자연 그대로 방치해두어도 하느님의 배치에 대해 원망도 불평도 없는지 어디에서든 들꽃으로의 사명을 다 한다. 봄날 파아란 잔디우에 그 누가 줄을 세운듯 그렇게 줄느런히 수북히 늘어서서 길가는 행인을 반겨주는 소담한 민들레, 그래서 지나던 걸음에도 무심히 지나칠수 없어 한번 더 보게 되고 때론 가까이 얼굴을 맞대고 쓰다듬으며 입을 맞추고 그와 무엇인가 살뜰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진다.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하기때문일것이다. 때로 짐승에게 사람에게 밟히고 짓눌리우기도 하는데 그러나 그 약한것이 쉽게 구겨지거나 흐트러지지 않고 다시 고개 들고 일어선다. 시름을 털듯이 툭툭 털고 일어서서 민들레꽃으로 무성한다. 민들레는 대개 한곳에 모여 집단적으로 피기를 즐기지만 때론 혼자도 핀다. 외로워도 외로움을 탓하지 않는 민들레, 나는 언젠가 빈집의 처마밑에 외롭게 딱 한송이가 피여있는것을 보고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쓰다듬어준적도 있다. 그리고 마당의 풀을 깎아내면서도 민들레만은 다치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었다. 어디에 있어도 항상 순수한 자태로 조용한 모습으로 열심히 사는 꽃이다. 그러기에 떠들지 않고 뽐내지 않고 어질고 순박한 민들레를 보면 소문없이 살더라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난다. 한편 민들레는 그 하나하나가 인간의 심성을 무르익혀주는 작은 태양 같다. 그래서 시인들과 작곡가들이 민들레를 곧잘 자신들의 예술속에 담아 민들레가 더욱 고상한 꽃으로 인정받는것은 아닌지. 아, 서리가 내린 뒤에도 그 여린것이 그냥 그 밝은 얼굴을 견디면서 끝내 자신을 성숙시켜 하얗게 여물리고야 조용히 삶의 종지를 끝내는 책임있는 생명력을 가진 민들레꽃, 역경속에서 대접받거나 떠받들리지 못해도 강하게 사는 민들레꽃, 그러고보니 인간이 민들레를 사랑하는 리유는 부드럽지만 억세고 귀중하지만 흔하여 쉽게 접촉할수 있고 감상할수 있기때문인지 모르겠다. 소문없이 열심히 살면서 자신에 충실한 민들레꽃은 또한 어질고 밝은 지성을 가지고 사는 예술인, 지성인 같기도 하고 시골에서 소문없이 몇세대를 살면서도 시종 게으름없이 향토를 사랑하고 로동을 사랑하며 생활을 사랑하는 우리네 소박하고 아름다운 성품의 농부들 같아 더욱 사랑스럽다. 그래서 민들레를 보면서 다시금 인생의 도리를 깨우쳐본다. 인간의 심성을 아름답게 정화시켜주기에.
50    연변노래에 대한 생각 댓글:  조회:1725  추천:0  2013-09-05
  한때 산골동네의 노래였지만 연변과 기타 조선족산재지구는 물론 전국을 상대로 인기를 누리던 연변조선족들의 노래가 많았다. 필자의 어린시절만 해도 “제비”, “병아리”, “새봄”, “고개길” 등 아이들의 심경에 맞는 연변에서 창작된 동요들을 배워서 부르며 동심을 키웠고 따라서 이런 동요를 통해 우리 말과 글을 더욱 새기게 되였고 민족심도 키웠다. 성인가요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연변의 작곡가들이 처음부터 우리 민족의 정서에 맞는 노래를 창작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였겠는가? 물론 연변이 이렇게 할수 있는것은 나라의 민족정책 좋아 민족자치를 실시하기때문이지만 민족예술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하는 지도자나 예술가들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였을가?   물질생활이 가난하다 하여 정신생활마저 가난할수는 없었다. 돌이켜보면 지지리 가난한 속에서도 우리 민족이 이 땅에서 락천적으로 살아올수 있었던 리유중의 하나는 음악 즉 대중가요를 꼽을수 있는데 그런 가요의 창작과 공급이 바로 연변으로부터 왔기에 나는 연변의 노래가 음악이라는 이 예술형식을 통해 중국조선족들의 정체성과 동질성을 보존하고 살려나가는데 아주 큰 역할을 한 고마운 음악이였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같은 성과는 한때 민족음악을 고집한탓에 온갖 고초와 억울함을 겪으면서도 오로지 민족음악을 살리려는 끈질긴 의지와 열정을 가지고 분발해온 연변의 수많은 조선족음악인들로 하여 이루어낸 성과임을 더욱 긍정하고싶다.      연변 하면 민족자치주로도 그렇겠지만 노래와 춤으로 이름난데는 텔레비죤이 보급되지 않은 세월 방송매체를 통해 대중들이 쉽게 우리 민족 노래를 접촉할수 있은데 있다. 노래로 말할 때 연변은 집단적거주지를 형성하면서부터 음악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자연 그들속에서 그들만의 음악이 존재하게 되였는데 해방후 새로운 조건하에서 그들은 서둘러 자신의 음악을 발전시킨것이다. 하여 남들은 아직 음악에 대해 생각도 못할 때 연변에서는 벌써 자신의 음악체계를 갖추고있었다. 연변에서는 이러한 지방적특성때문에 각종 음악단체들이 일찍부터 성립되였는데 특히 연변가무단의 조기건립은 연변음악의 급성장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였는가싶다. 연변가무단은 당지의 예술공연은 물론 산재지구로 다니며 민족예술의 씨앗을 뿌려 민족의 문화를 자래우는 좋은 터밭이 되였다. 그래서 흑룡강내지에서는 연변가무단이 한번 온다 하면 그렇게 반가와 몇십리 먼길도 서슴없이 걸어가서 관람하군하였다. 그리고 그네들은 한번 왔다간후면 그곳에 곧 새로운 노래들이 보급되면서 대중문화생활이 활기를 띠군 하였다.      특히 새로운 력사시기에 들어서면서 전에 이룩한 기초상에서 연변의 음악은 더욱 발전하여 참으로 대중들이 즐겨부르는 좋은 가요들이 많이 창작되여 전례없는 호황을 이루었는데 80년대초에 창작되고 불리워진 많은 노래들은 연변노래의 황금기를 이루지 않았나싶다. 그동안 이런저런 제약으로 구속받고 갇혀있던 예술혼이 해방된 기쁨과 함께 터져나오면서 “내 고향 오솔길”, “장백의 새아리랑”, “산간의 봄은 좋아”, “오래오래 앉으세요”, “선생님 들창가 지날 때마다”, “고향길”, “장백의 새 아리랑” 등 대중들의 귀맛을 돋구는 좋은 노래들이 라지오방송을 통해 혹은 전문예술단체의 공연을 통해 조선족들이 사는 곳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는데 이런 노래들은 새로운 시기를 맞아 새로운 희망을 바라보며 자신있게 사는 조선족들에게 생활의 기쁨과 함께 삶의 활기를 보태주었다. 그중에서도 가요 “오래오래 앉으세요”는 흑룡강조선족으로 말할 때 환갑날이면 어김없이 부르는 지정곡으로 되였다. 가요 “선생님의 들창가 지날 때마다”는 “4인무리”에 의해 고린내 나는 아홉째로 기시받던 많은 교원들이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자신의 성스러운 로동가치를 이렇게 음악으로 인정받음으로 하여 눈물을 흘리며 경청하는 명곡의 하나로 되였던것이다. 이밖에 참으로 많은 가요들이 대중들의 입에 올라 한때 연변의 노래는 흑룡강조선족들의 삶에 없어서는 안될 엔도르핀이였음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코리아드림이 시작되면서 연변의 노래가 충격을 받지 않았나싶다. 요즘 들어 연변위성TV방송을 흑룡강 각지에서도 시청할수 있어 여려가지 프로중에서도 특히 음악프로를 즐겨보는데 음악프로그람에 나오는 매주일가를 비롯하여 다른 가요들이 웬 일인지 전처럼 광범한 대중들의 호감을 얻지 못하는것 같다. 물론 음악에 대한 평가기준이 사람마다 다를수 있고 사람마다 자기가 즐기는 기호의 노래가 있기때문일수도 있고 전과 달리 지금은 대중들의 음악에 대한 체험이 다양한데다 많고많은 영상매체들의 충격때문에 가요 한가지에만 사람들의 심미적추구가 쏠리지 않은 때문일수도 있겠다. 그리고 워낙 한류 말하자면 한국의 대중가요들이 대중의 마음을 붙잡는 예술적묘미(특히 가사에서)가 있는 등 여러가지 요소가 있을수 있겠지만 주관적인 요소에서 문제를 찾는다면 연변노래의 예술적특성과 그 질이 전만 못해진때문은 아닐가?전에 창작된 연변의 노래들은 조선, 한국과 달리 다같은 민족의 피줄이면서도 특정된 연변나름의 향토적 미와 정서가 특색이 있어서 어디에 가도 구분할수가 있고 또한 그 노래들의 울림이 중국조선족들의 정서와 매우 어울려 연변나름의 독특한 브랜드를 갖추고있지만 요즈음 연변에서 창작되는 노래들은 국적불명, 지방불확실의 선률들이 많지 않는가싶다. 얼핏 들으면 조선노래 같기도 하고 한국대중가요 같기도 하고 지어 한족노래 같기도 하여 자신의 독특한 개성과 매력을 잃어가고있는듯 싶다. 물론 근래에 창작된 노래중에 좋은 노래가 없는것은 아니다. “고향의 봄”, “타향의 달밤”같은 노래들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서적욕구와 맞기때문에 곧잘 부르며 공감하는것이다. 그리고 이미 지난 노래지만 “내 고향 오솔길”이며 “수양버들”같은 서정가요와 우에서도 말했지만 “오래오래 앉으세요”와 같은 전통도덕을 찬양한 가요들의 생명력은 지금도 의연한것이다.    노래가 보급되는데는 자신의 특정미 있다. 어찌 보면 사람들이 좋다기보다 시골의 이름없는 녀인이 시내가에서 빨래를 하면서 흥얼거리는 노래가 명곡일수도 있다. “도라지”, “아리랑” 등 우리 민족의 우수한 민요가 바로 이렇게 서민들의 입과 입을 통해 지금까지 류전되여 내려오면서 그 독특한 생명력을 과시하는것은 아닐가.    물론 대중들의 노래에 대한 심미표준도 많이 달라져 공적인것에서 개성적인것으로 다양화되면서 전처럼 어느 한가지 풍격의 노래에 치중하지 않는다. 필자도 이제 로년기에 들어서 지난 시대를 살아오며 쌓이고 구축된 감정세계가 낡아서 새것을 받아들이기 어렵기때문에 이런 판단을 할수도 있다. 하지만 누가 부르든 누가 듣든 좋은 노래는 어디까지나 좋은 노래이다.    50년대 중기에 연변에서 창작된 “안해의 노래”는 연변의 혁명성이 너무 강해 그런지 몰라도 흑룡강조선족들은 그것이 “독초”로 지적받고있다는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즐겨불렀다. 그것은 대중의 감정세계에 그 노래가 어울렸기 때문이다.    창작은 자유지만 불리고 못 불리고는 강박할수 없다. 대중이 스스로 호감을 가지고 불러야 한다. 이제 대중은 정치적인 설교나 그 어떤 리념적인것을 들씌우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진 노래보다 진실한 감정이 배인 생활적인 노래들을 더 즐긴다. 가사로부터 곡에 이르기까지 대중의 희로애락을 대신할수 있는 노래들을 즐겨 선택한다.    중국조선족의 음악이 존재하고 발전하자면 연변의 음악이 발전해야 하는데 원인이 무엇일가를 이런 기회를 통해 한번쯤 곰곰히 생각해보는것도 나쁘지는 않을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족음악의 한 토양으로서의 연변음악이 력사와 현실에 존재하는 그 가치와 의의에 대한 절실한 진단과 뼈아픈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가. 연변음악의 발전을 위하여 노래에 대한 투자를 늘여야 한다. 연변축구와 함께 음악을 부흥시켜 연변을 세계에 알리는 밑거름이 되게 하자. 그리고 진정 연변의 음악발전을 위해 헌신하고 분투할 결의를 가진 음악인의 능력과 지혜를 최대한 발휘시키며 고무해야만 연변은 물론 중국조선족 더 나아가서 세계 우리 민족속에서도 당당하게 내놓을수 있는 중국조선족의 명곡이 나오게 되지 않을가.  
49    강효삼 프로필 댓글:  조회:1044  추천:0  2013-08-21
강효삼 간력: 1943년 3월 흑룡강성 연수현출생 1959년 상지조선중학 중퇴 1961,5월 연수현에서 교육사업참가 1963년부터 작품 창작,발표 1982년 상지시 하동중학전근 1983년부터 상지시 하동향 문화소 공무원 1986년 연변대학 통신학부 조문 전업 졸업 1995년 정년퇴직 지금껏 동시,시,노래말가사.수필, 등 쟝르의 작품 5백여편 발표.7인 시잡 “칠색무지개” 시집: “먼 훗날. 저 하늘 너머”와 아동시집 “봄비”가 있음. 윤동주문학상등 한국 문예시대 해외동포문학상 등 수상 연변작가협회회원, 흑룡강작가협회회원 , 현 흑룡강성 상지시 자유기고인
48    꽃들의 이어달리기 댓글:  조회:1172  추천:1  2013-08-21
꽃들의 이어달리기 진달래가 맨 먼저 연분홍 운동복 떨쳐 입고 거친 산등성이에서 시작한 꽃들의 이어달리기 맥 빠진 진달래 발걸음 흐트러지자 노란 운동복차림의 민들레가 계주봉 이어 받았네 봄코스 비우지 않게 오솔길 따라 총 총 달릴 때 배꽃, 사과꽃, 앵두꽃, 살구꽃 숱한 과일꽃도 줄느런히 뒤를 잇고 나리꽃 은방울꽃 …산꽃들 뒤따르니 야하 여름은 울긋불긋 보기 좋은 꽃들의 멋진 이어달리기 ㅡ 와 ㅡ 와 푸른 잎 구경군들 환호성이 오른다 한 여름 무더위와 소나기도 무릅쓰고 달리고 또 달리다가 가을 찬 서리에 몸을 오싹 기진해 물러 앉아도 국화꽃, 코스모스 그냥 달려 꽃의 이어달리기는 멎지 않지요 이제 늦가을 된서리에 꽃들 다 지고 말았으니 꽃의 이어달리기는 끝나고 말았는가 아니래요, 봄, 여름, 가을 그 많은 꽃들의 넋이 눈꽃이 되여 하늘땅에 펑 ㅡ 펑 꽃보라를 날리니 일년 사계절 시간의 계주봉 잡은 꽃들의 이어달리기는 계속 되지요
47    부호표식 댓글:  조회:1366  추천:0  2013-08-21
부호표식
46    나팔꽃 댓글:  조회:1135  추천:0  2013-08-21
나팔꽃 앉아서도 불고 서서도 불고 아무 때고 따ㅡ 따 ㅡ따 나팔부는 나팔꽃 힘주어 불어서 얼굴 붉히나 ? 밤낮으로 불어도 한 곡 밖에 못 부니 부끄러워 그러지
45    보름달 댓글:  조회:1147  추천:0  2013-08-21
보름달 하늘에만 보름달 있나 우리 집에도 보름달 있지 밤상은 둥글어서 이요 식솔들 빙 둘러 앉아 이요 그 보다 둥글둥글 얼굴들 저마다 환해서 “보름달”이지 하늘의 보름달은 한 달에 한번 웃어도 우리 집 “보름달”은 날마다 웃어요
44    밤과 낮 댓글:  조회:1032  추천:0  2013-08-21
밤과 낮 밤과 낮은 번갈아 하늘 땅을 가지네요 밤이면 까막나라 까맣게 색칠해서 제 것 만들고 낮이면 하얀 나라 하얗게 빨래해서 제 이름 걸고 그래도 타투는걸 못 보았으니 밤과 낮은 딱친구인가 그들은 서로서로 약속했대요 아침 되면 밤을 몽땅 낮에게 주고 밤이 되면 낮을 전부 밤에게 주며 화목한 이웃 되여 나누면서 살아가기로
43    할아버지 주름살 댓글:  조회:1165  추천:0  2013-08-21
할아버지 주름살 아른아른 참빗살 같은 밭고랑은 할아버지 괭이로 친 줄 호미를 붓 삼아 할아버진 한평생 농사라 제목하고 비지땀 먹물 찍어 쓰고 또 썼지요, “풍년”이란 글짓기를. 마침표 없는 글이라서 쓰고 써도 모자라 할아버지 이마에도 썼어요. 주름살 가득 글짓기
42    하늘의 공 댓글:  조회:1277  추천:0  2013-08-21
하늘의 공 하늘나라에도 축구가 있는지 넓은 운동장엔 공이 두 개 낮에는 빨간 공 밤에는 하얀 공 빨간공은 하루 한번 바꾸고 하얀 공은 한 달에 한번 낮에는 오락가락 구름들 시합 밤에는 총총 별들의 시합 축구 시합 자주해도 공은 단 두 개.
41    산 길 댓글:  조회:1050  추천:0  2013-08-21
산 길 아무 옷도 입지 않아 부끄러운지 알몸뚱이 산길은 숲을 보자 얼른 쏘 ㅡ옥 숨어버리네 ㅡ 꼭 꼭 숨겨라. 그래도 보인다 그 긴 ㅡ 꼬랑지
40    잔디 댓글:  조회:999  추천:0  2013-08-21
잔디 누구의 주머니에서 솔 ㅡ솔 흘러 나왔나 봄 씨앗 넣고 오솔길 걸어가던 장난꾸러기 봄바람 주머니 구멍이 퐁 뚫어진줄 모르고 그대로 흘러버린 거지.
39    고개 숙인 벼이삭 댓글:  조회:1081  추천:0  2013-08-21
고개 숙인 벼이삭 꼿꼿이 서있던 파란 표들이 모두가 노오란 표가 되였어요 ?...?...?... 이상한 기후에도 어김없이 풍년 드니 묻고 싶어 알고 싶어 저마다 꼬부랑 물음표가 되였죠
38    “아리랑” 우리의 노래 댓글:  조회:1498  추천:0  2013-04-23
“아리랑” 우리의 노래 (상지) 강효삼 우리 민족은 아리랑민족 천년을 거슬러 올라가도 함께 부른 노래는 아리랑 만년을 앞질러 나간대도 모두 부를 노래는 아리랑 하나의 노래가 하나의 하늘아래 하나의 족속을 만들었고 하나의 피줄로 엉키여 하나의 력사를 살아오면서 하나의 미래를 열게 하네 어제날 깊은 산 험한 고개 서러운 리별의 아흔아홉고개 넘으며 그리움으로 달랬던 애절한 노래 아리랑이 사랑에 울고 웃는 우리 족속 애절함 물씬 풍긴 공동의 정서 되여 얽히고 설키고 합쳐지면서 오늘은 마침내 한 민족의 가락이 되였으니 들으면 찡해나는 사랑의 노래 아리랑은 그 어디에 내놓아도 그 누가 불러도 분명 백의민족 우리의것 아무도 가져가지 못한다 겨레의 혈맥으로 겨레의 선률로 이젠 온 세상이 공인하는 우리만의 노래 되여 세계에 보태는 문화의 재부ㅡ 울려라, 울려라 아리랑 노래여 더 크게 더 확실하게 세상을 울려라 이 한 노래 겨레의 통일 불러모아 더 넓고 큰 세계화의 고개 넘으리니 아,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 넘어간다 우리의 아리랑고개는 넘을수록 넉넉한 고개 갈수록 새로와지는 고개
37    서탑을 그리며 댓글:  조회:1349  추천:1  2013-03-20
.수필. 서탑을 그리며 서탑이란 이름을 알았지만 정작 서탑에 와보기는 1960년 초봄, 황고구에 계시는 고모님의 집에 놀러왔다가 심양에 조선사람이 제일 많이 모여 사는 곳을 가보지 않고는 심양에 와본 의미가 없다고 하여 일부러 전차를 타고 서탑을 찾아갔다. 당시는 불끈 솟은 탑외에 소위 대도시의 한거리라지만 초라함을 감출수 없었다. 좁은 골목에 촘촘히 들어앉은 낮은 단층집들가운데 어떤 집은 시간이 오래되여 땅속으로 주저앉으면서 집안이 오히려 바깥보다 낮아 이른 봄 눈석이물이 질질 마당으로 흘러들고있었다. 몇십년이 지나 개혁개방이 되면서 서탑이 낡은 면모를 일신하고 멋드러진 코리안드림으로 부상했다는 굉장한 보도를 신문에서 보았다. 그러나 정작 서탑을 찾는 나의 발걸음은 가볍지가 않았다. 그때는 2003년 가을, 그것은 화려한 모습으로 변신한 서탑의 풍경을 즐겁게 감상하기에는 내 몸을 파고 든 병이 너무 엄중했기때문이다. 그때 나는 서탑에 유명한 조선족의사가 있다고 하여 그를 찾아갔는데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아파서 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어찌 서탑의 풍경을 즐길수 있는 여유가 있었을가! 후에 나는 다시 서탑을 찾게 되였는데 그때도 나는 환자의 몸이였다. 그때 나는 병을 고쳐도 심양에 와서 고치고 싶어 일부러 먼 북방에서 심양 고모의 아들과 짜개바지친구인 장모가 원장으로 있는 심양적십자병원에 와서 입원치료를 받게 되였다. 그러나 치료기를 놓쳐서인지 이 병원에서 죽음선고를 받고 퇴원하였는데 그래도 행여나 하는 희망을 가지고 성병원을 찾아가니 마침 그곳에서 입원을 시켜주어 신부전의 마지막 치료방법인 혈액투석을 시작했지만 저혈압인 나는 도저히 진행할수 없어 물러나오면서 이제 죽음은 완전 결정이 되였다고 생각하였다. 했지만 아마도 살 운명이였는지 투석을 하지 못했는데도 나는 죽지 않고 병이 점차 호전이 되자 서탑에 한번 와보고싶어 일부러 택시를 타고 왔었는데 정작 서탑은 보았지만 일어설 맥도 없어 한겨울인데도 땅바닥에 한참 드러누워있다가 기운이 조금 회복되자 간신히 일어나 차에 올랐다. 그러한 서탑을 한때는 심양에 이사를 오게 되면서 비록 서탑가에 살지는 않아도 일부러 서탑을 구경하러 먼곳에서 차비를 쓰고 와서 려관에 묵으면서 서탑을 감상하는 부담없이 어느때고 서탑을 보고싶으면 뻐스를 타고 와서 서탑거리를 흔상하군 했었다. 명실공히 서탑은 코리안타운으로 손색이 없는 곳이다. 하지만 우리 말 속담에 “근처 색시 고운줄 모른다”고 서탑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좋은 곳에 사는가를 미처 깨닫지 못할수 있다. 더구나 누군가는 서탑거리를 화려한 소문과는 달리 복잡하고 시끄럽고 박하다고까지 한다. 하지만 나는 서탑을 그런 시선으로 보지 않는다. 기실 너무 쉽게 이 풍경을 볼수 있으니말이지 멀리 사는 사람들은 일부러 한번 찾아가기도 쉬운 일이 아니기때문이다. 이제 나도 그런 처지의 사람이 되였다. 조선족이라면 심양행차에 서탑을 들러보려 하지 않는 사람이 별반 없을것이다. 심양 하면 서탑을 떠올리고 서탑 하면 우리 겨레들을 떠올릴만큼 서탑은 가히 조선족의 상징이라고도 할수 있다. 그리고 서탑을 통해 심양이 변하였고 우리 조선족들의 삶이 변하였다는것을 일목료연하게 알수 있다. 농경민족인 우리 겨레들이 흙을 생명의 근원으로 알면서 도시를 포기하고 농촌에 가 살 때 어찌하여 이곳 겨레들은 그때 도시의 이 터전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고 그처럼 어려운 력사의 고비들을 넘기면서도 끈질기게 우리의것으로 만들어왔는지… 그래서 서탑이 더욱 자랑스럽고 귀중하다는것이다. 민족특색을 갖춘 우리의 건물들과 새로 선 아빠트단지들, 민족의 먹거리가 그대로 살아숨쉬는 로천시장과 서탑거리에 줄줄이 늘어선 우리 글 간판과 평안도, 함경도, 서울 말씨와 더불어 우리 민족의 숨결이 물씬 풍기는 곳… 서탑이 그립다, 서탑에 가고싶다. 단지 중국조선족만이 아닌 한반도 남북의 겨레들이 다 함께 모여 꾸리고 빛내는 그런 서탑이기에 늘 가고싶은 마음이다. 서탑이여, 세월이 가도 우리의 전통, 우리의 문화, 우리의 향기가 더더욱 뿌리내리고 만발하라! 그리운 마음 먼 북방에서 축원을 보낸다.
36    효도는 못해도 최저한 천대만은 말았으면… 댓글:  조회:1762  추천:4  2013-02-04
 대낮인데 아래층에서 웬 울음소리가 나기에 상사가 났나 하여 내려가 무작정 문을 두드렸다. 눈물을 훔치며 안에서 로인이 문을 열어주기에 웬 울음소린가 물으니 손자녀석이 하도 할미를 구박해서 서러워 운다는것이다.   아들 며느리 다 한국 가고 손자를 맡아 키우는데 전자유회만 놀면서 공부를 안하기에 무어라 했더니 할머니 코앞에 대고 주먹질을 하면서 아버지 엄마 벌어 보내는 돈쓰며 사는 주제에 무슨 잔소리냐 하더란다. 너무 기막히고 분해서 울수밖에 없다는 로인.   로인의 말을 들으니 문득 어느 책에서 본 글이 생각난다. 시골 살던 아버지가 도시 아들의 집에 얹혀사는데 가만 보니 아들 집에서 첫째로 우대를 받는것은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고 두번째는 손자녀석, 세번째는 아들이고 자신은 네번째란다. “항렬”이 네번째라 몸이 불편해도 무관심이여서 병원에 가자는 소리가 없었지만 “첫째”는 조금만 몸이 어떻다 해도 인차 안고 태우고 병원에 “모시고” 간단다. 하도 꼴불견이여서 참다못해 다시 시골 제 집으로 내려가면서 다음과 같은 쪽지를 남겼다고 한다. “셋째야, 잘 있거라 넷째는 간다.”   주변에서 들은 얘기다. 외아들녀석 애지중지 키워 대학공부 시키고 장가 들여주고 집까지 사주었는데 색시가 싫어한다며 아버지보고 양로원에 가있든지 아니면 세집 잡고 따로 나가란다. 그래 대답을 안했더니 어느날 외출한 짬에 집열쇠를 바꾸는바람에 부득이 려관방신세를 지고있다는것이다.   우리의 자식들이 죄다 이렇다는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에 비해 효자가 줄어들고 불효자들이 늘어난것만은 사실인듯싶다. 그래서 요즘 로인들간에는 “이제 돈 있으면 자식한데 주지 말고 꽁꽁 묶어둬라. 그저 돈이 효자다. 그러지 않고 있는 돈 다 주고 빈털털이 되면 자식에게 천대받다못해 가난뱅이라고 쫓겨날수도 있다”라는 말들을 주고받는다고 한다.   우리 민족은 원래 그 어느 민족보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례절밝은 민족이였다. 그런데 인조위성이 우주를 날아다니는 초첨단시대에 오히려 도덕품성만은 땅바닥에 떨어지고있으니 계속 이 지경으로 추락한다면 인간사의 그 끝은 어디일가?   최저한 부모에게 효도는 못해도 천대만은 말았으면!    료녕신문
35    부모는 죽어야 자식을 “만난”다? 댓글:  조회:2298  추천:2  2012-08-13
부모가 세상을 떴다는 기별을 받고 부랴부랴 비행기를 타고 많은 돈을 써가면서 장례식에 모든 자식들이 다 참가하여 장례식을 아주 크게 치렀다는 말을 듣고 새삼스레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요즈음 세상은 부모와 자식의 리별이 밥먹듯하여 부모가 살았을 때 자식을 만나기는 쉽지 않고 죽어서야 “만날수” 있는것은 아닌지? 살았을 때는 바쁘다는 구실로 와보지 않다가도 이젠 진정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지 세상을 떠났을 때 찾아와 “효도”하는 자식들이 늘고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다행, 어떤 자식들은 부모가 죽었다 해도 오지 않는것이다. 온다고 이미 죽은 부모가 살아나겠는가, 그래서 장례식에 수고한 사람들에게 돈이나 부쳐보내고 아니면 그것마저도 잊고… 그래서 어떤 부모는 외롭게 혼자 있다가 세상을 떠서 며칠이 되여서야 이웃에서 알게 되여 장례가 치러지는 경우도 있다.   하긴 부모와 자식간의 리별이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한것이라 어떤 부모들은 자식한테 끼칠 경제적부담때문에 마지막 가는길까지도 자식에게 될수록 알리지 않는다. 한편 언제 눈을 감을지 모르는 인생에 부모만을 위해 자식들을 오래 곁에 붙들어둘수도 없는것이 오늘의 상황, 그리고 장병엔 효자가 없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하여 부모곁을 지켜서서 그 림종을 보는 자식들이 많지 않고 그래서 요즈음 늙은 부모들은 살았을 때는 자식들을 만나보지 못하고 죽어서야 비로소 “만나게” 되는 경우가 많은것이다.   문득 이런 구절이 떠오른다. 나무는 가만 있자고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효도하려 하나 어버이가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가슴에 다가오는 말€?”있을 때 잘해”, 그리고 “살았을 때 와보아!”
34    [시] 성에꽃 댓글:  조회:1701  추천:1  2012-08-11
성에꽃 강효삼 뿌리없어도 꽃이 되고싶은 욕망이 밤새도록 지우고 그리며 유리창을 가득 메웠다 저렇듯 진지한 노력이 없다면 꽃을 보기 힘든 이 겨울 바깥세상 어디 가서 쉽게 꽃의 형태를 볼수 있을가 꽃의 모양을 다 갖추었지만 색갈과 향기가 없어 나비와 꿀벌은 찾아오지 않아도 성에꽃은 만족이다 망각된 꽃의 형상을 상기시켜주는 그것만으로도 변덕스런 해빛때문에 하루밤 애써 피운 꽃들의 형상이 하루아침에 물거품된다고 해도 봄의 꽃들이 쉽게 피는것이 아니라 이렇게 겨울부터 꽃을 그리는 련습끝에 드디여 완성되는것임을 알릴수 있어 성에꽃은 비록 색과 향은 없어도 꽃답게 살다가 꽃답게 죽는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