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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효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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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두만강에 대한 시 댓글:  조회:1440  추천:1  2012-08-11
두만강에 대한 시 강효삼 저 푸른 물에 그리도 많은 사연 가라앉아 두만강은 세월따라 그 깊이를 더하길래 어쩌면 우리 겨레에게서 제일 깊은 강일지도 모른다 허지만 내 지금껏 두만강을 두고 쓴 그 많은 시들 아직 저 물결에 담긴 말 못할 사연들을 뚜져낼수가 없어 그 깊이에는 이르지 못하고 그저 이쪽저쪽을 흘끔거리면서 생각나는대로 쓴 시들을 두고 두만강이 나더러 묻는다, -당신은 시인이라면서 도대체 나를 얼마나 알고있는가고? 너의 가슴깊이가 바로 나의 깊이로 되기전엔 두만강에 대한 시는 적게 쓰거라
32    부모는 죽어야 자식을 “만난”다? 댓글:  조회:1395  추천:0  2012-08-11
부모가 세상을 떴다는 기별을 받고 부랴부랴 비행기를 타고 많은 돈을 써가면서 장례식에 모든 자식들이 다 참가하여 장례식을 아주 크게 치렀다는 말을 듣고 새삼스레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요즈음 세상은 부모와 자식의 리별이 밥먹듯하여 부모가 살았을 때 자식을 만나기는 쉽지 않고 죽어서야 “만날수” 있는것은 아닌지? 살았을 때는 바쁘다는 구실로 와보지 않다가도 이젠 진정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지 세상을 떠났을 때 찾아와 “효도”하는 자식들이 늘고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다행, 어떤 자식들은 부모가 죽었다 해도 오지 않는것이다. 온다고 이미 죽은 부모가 살아나겠는가, 그래서 장례식에 수고한 사람들에게 돈이나 부쳐보내고 아니면 그것마저도 잊고… 그래서 어떤 부모는 외롭게 혼자 있다가 세상을 떠서 며칠이 되여서야 이웃에서 알게 되여 장례가 치러지는 경우도 있다. 하긴 부모와 자식간의 리별이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한것이라 어떤 부모들은 자식한테 끼칠 경제적부담때문에 마지막 가는길까지도 자식에게 될수록 알리지 않는다. 한편 언제 눈을 감을지 모르는 인생에 부모만을 위해 자식들을 오래 곁에 붙들어둘수도 없는것이 오늘의 상황, 그리고 장병엔 효자가 없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하여 부모곁을 지켜서서 그 림종을 보는 자식들이 많지 않고 그래서 요즈음 늙은 부모들은 살았을 때는 자식들을 만나보지 못하고 죽어서야 비로소 “만나게” 되는 경우가 많은것이다. 문득 이런 구절이 떠오른다. 나무는 가만 있자고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효도하려 하나 어버이가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가슴에 다가오는 말€?”있을 때 잘해”, 그리고 “살았을 때 와보아!”
31    제 자식은 한족학교에 보내면서 댓글:  조회:2213  추천:4  2012-05-18
 최근 필자가 료해한데 의하면 흑룡강성 모 조선족학교 교직원들의 자녀들중 조선족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단 한명도 없는것으로 나타나 개탄하지 않을수 없다.   개혁개방과 더불어 민족교육은 많은 진보를 가져옴과 동시에 새로운 문제점들도 안고있다.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것이 학생래원의 부족으로 민족학교가 문을 닫는것이다. 물론 학생래원문제의 책임을 교원들에게 돌릴수는 없다. 출산률 하강으로 아이들의 수가 적어질수록 현재 있는 아이들만이라도 제 민족학교에 다녀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것이 문제이다. 불완정한 수자이지만 필자가 살고있는 곳의 한 한족학교에 조선족학생이 백여명이라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조선족학교는 학생래원문제로 존페가 달려있는 상황이니 한심할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들 조선족학생가운데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있는것이 바로 조선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는 교원직원들의 자녀들이라니 답답함이 더해진다.   물론 자녀가 한족학교에 가는 현상을 두고 천편일률적으로 몰아붙일수는 없다. 주위에 조선족학교가 전혀 없는 남방의 대도시들이나 연해지구라면 자식을 조선족학교에 보내고싶어도 그럴수가 없는 사정이여서 리해가 간다. 그러나 문제는 력사도 깊고 교육질도 괜찮은 당당한 민족학교가 근처에 있는데도 일부러 거리가 먼 타민족학교에 자녀들을 보낸다는것은 쉽게 리해할수가 없다. 더구나 민족학교에 몸담고있는 교직자로서 자식을 앞장서 타민족학교에 보낸다는것은 리치에 맞지 않는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요즘 적지 않은 사람들속에서 우리 말과 글을 배워서 쓸모가 적다는 민족언어무용론이 다시 머리를 들면서 련쇄반응으로 민족교육의 존재에 대하여 그 필요성과 전망을 두고 회의적인 사람들이 늘고있는것도 사실이다. 나는 이런 사람들에게 말하고싶다. 지금껏 민족교육이 존재해왔기에 수많은 민족후대들이 응분의 지식을 쌓을수 있었고 나라의 인재로 성장할수 있었다. 현재 교직에 몸담고있는 상기 학교의 그 자신도 민족교육의 혜택을 받았기에 가능한것이라고 생각된다. 만일 누구나 자녀를 타민족학교에 보내고 그로 인하여 민족학교가 페교된다면 민족의 미래는 암담해질것이고 교원들 자신이 설 자리도 사라지게 될것이다. 민족교육의 전초지에 선 사람들마저 이렇듯 민족에 대한 애착심과 책임감이 부족하니 민족교육의 장래가 걱정되지 않을수 없다.
30    코리안드림과 조선족의 삶에 대한 사고 댓글:  조회:2000  추천:10  2012-03-08
       중국 조선족사회에 코리안드림 즉 한국행만큼 사람들의 주의력이 집중되고 이목을 끄는 화제는 없는 것 같다. 이는 또한 월경민족으로 인접하고 있는 고국인 남북이 항상 중국조선족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으로 작용하기 때문으로 인식된다. 현재 코리안드림은 중국 조선족에게 희와 비의 명과 암이 엇갈리는 삶의 결과를 수없이 만들고 있는데喜보다는悲,明보다는暗에 쏠리어 대우받고 사랑받는 일보다는 멸시받고 소외받는 일이 더 많은 듯 싶어 중국 조선족을 위해 정의와 양심을 호소하는 언론이 주도를 이루고 있다.   세상만사는 복잡다단하다.한국에 체류중인 중국 조선족들의 실상을 들여다 볼 때 그들은 그들 나름의 욕망이 있다. 한마디로 아무리 이렇다 저렇다해도 그들은 그래도 한국에 오래 머물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확실히 한국에는 아직 일자리가 많고 소비도 높지만 임금 또한 상대적으로 높아 있을 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책이 제정한 범위내에서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면 얼마든지 잘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더 관심을 가지고 주목해야 할 것은 한국에 나가 있는 재한동포들의 상황보다는 우리가 직접 몸담고 사는 중국 조선족사회의 현황이다.   조선족사회는 중국 조선족으로서의 그 동질성과 정체성을 보존해 가려는 의지와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근간이되어 유지되고 발전되어야 할 것 같다..민족사회를 굳건히 견지해 나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요즈음 민족사회에 관심과 애호를 가진 사람들이 민족의 동질성과 정체성을 두고 날이 갈수록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은 개혁개방으로 나라의 발전속도는 아주 빠르고 따라서 이에 힙입어 주체민족은 잘되어 나가지만 어쩐지 그에 비해 우리는 못해가고 있지 않느냐는 위구심때문이다.때문에 정체성 유지는 이상으로 멀어져가고 대신 현실적 삶이 더욱 유혹적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 중국조선족은 그 어느때보다 심각한 역사의 갈림길에 놓여있는 것 같다.가장 두려운 것은 지금까지 우리 민족 앞에 닥친 어떤 어려움들이 전 민족적인 것의 영향권에 있었다면 이제 이 어려움은 월경민족인 중국조선족 ㅡ우리만의 어려움이라는 것이다.그리하여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들이 이 난관을 헤쳐나가야 할 역사적 임무가 가로 놓여 있다. 우리는 자칫하면 코리안드림으로 경제적인 실리는 챙겼지만 정신적으로는 혼란을 가져와 우리가 오래 몸붙이고 산 이 땅의 믿음도 놓쳐 버릴 수 있다.   이러한 실제 난관을 헤쳐나갈 돌파구를 객관적 원인에서 찾기보다는 바로 우리 민족 자신에게서 찾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지난날 우리는 우리 부형들이 이룩한 공로의 발판을 딛고 나라에서 주는 소수민족 우대정책에 의거하여 살면서 자생력을 많이 잃고 살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장기간 평균주의 의식속에 자신도 모르게 잠재해 있던 이러한 약점은 한국에 가서도 자연스럽게 발로가 되어 한 민족,한 동포이기에 마땅히 한국정부로부터 돌봄을 받고 우대를 받아야 된다는 관념을 가지게 된 듯도 싶은데 우리는 조선민족이면서도 그누구 아닌 바로 중국의 조선족이다.이 점을 명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부딪치는 많은 난관 앞에서 쉽게 방황할 수 있다.항상 우리는 중국조선족이라는 이 점을 명기하고 그러한 자세로 사고하며 지혜와 방법을 모색하여 우리 나름의 길을 열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29    아름다운 시작 댓글:  조회:2387  추천:2  2011-12-02
《료녕성조선족시선집》을 읽고서       필자가 《료녕성조선족시선집》을 받은쥐기는 지난 6월이다. 시간이 좀 경과됐지만 료녕땅에 살고있는 조선족시인들로 말할 때 처음으로 발간된 자체의 시집으로, “료녕조선족문학사에 하나의 찬란한 리정표”로 자리매김할 력사적의의가 있는 대사다. 지금까지 몇백권의 시집을 읽은 나지만 《료녕성조선족시선집》에서 풍기는 특별한 맛과 향기를 떨쳐버릴수 없다. 그것은 내가 한시기 그곳에 몸담고 살아서일가? 아니면 시는 그 사람이라고 내가 그네들을 잘 알고있기때문일가? 그보다도 내가 생각해볼바에는 비록 지금은 료녕의 조선족문학이 개혁개방의 성과와 민족문화에 대한 지대한 사명감을 지닌 기업인들의 대폭적인 지지와 성원으로 상대적으로 산재지구문학가운데 앞서나가고있어 세인의 주목과 부러움을 받고있지만 지난 한시기는 그렇지 못하였다는것이다. 그러한 리유는 그들 자신의 문제라기보다 객관환경의 지배때문이였다. 동북3성치고 조선족이 제일 적었고 그것도 조선족이 집중된 심양과 몇개 도시를  내놓고는 수자가 많지 않았기에 소수민족이 대민족의 포위속에 살면서 자기민족문화를 고집한다는것 자체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이렇듯 문학환경이 곤핍한 현실에서 그래도 굳이 문학을 지향하고 문학을 고집하는 작가, 시인들이 있었다는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여느 곳과 달리 료녕의 문학인들이 더욱 돋보이고 그래서 또한 여느 곳에 비해 문화풍토가 빈약한 곳에서 오랜시간의 잉태끝에 출간된 《료녕성조선족시선집》이라서 더욱 값진것 같다. 이 시집에는 도합 30명 시인의 시 183수가 들어있는데 시를 낸 사람들중 시만 쓰는 시인도 있지만 시도 쓰고 수필도 쓰고 지어 소설을 쓰는 사람도 있다. 문학쟝르를 놓고 볼 때  상대적으로 시를 쓰는 사람들이 많아 시는 료녕문인들의 보편적인 애호로 되고있다는 점을 알수 있다. 더우기 문학을 전문직업으로 하지 않고 과외창작으로 하는데도 이만한 수준을 보유하고 또 당당하게 시인의 반렬에 오른 수준있는 하나의 군체를 이루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돼야 한다. 이 한권의 시집은 료녕시인들 삶의 투영이다. 시에서는 평범한 자신들의 생활체험을 시로 승화시켜 밝고 환하고 투명한 시적세계를 각자 자기나름의 시적추구로 개성이 있으면서도 소박하고 진실하게 표현하였다. 대부분 시들이 뜻이 감추어졌거나 아리송한것 (물론 그런 기법을 시에 도입하려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시들도 있다)이라기보다 알기 쉬우면서도 깊은 뜻을 담았거나  담으려는 시도가 보여지는 시들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때로는 신선한 아침이슬을 보는듯 때론 훈훈한 평안도숭늉을 마시는듯 시적정서의 푸근함과 맑은 호수에 반짝이는 해빛같은 재치있는 발견의 신선함들로  그리고 김 안나는 숭늉이 뜨겁다는 격으로 내심의 감동을 차분하게 내비친 부드러운 시들이다. 누군가 시는 만드는것이라고 하지만 료녕조선족시인들의 시는 물을 추기지 않은 벼짚으로 새끼를 꼬듯 억지로 비벼냈다는 감각을 느낄수 없다. 시상이나 시어가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기교를 부린 흔적이 없기에 쉽게 공감할수 있다. 요즘 우리 시단에서 류행하는 일부 시를 보면 상대가 모호할수록 그것이 창조고 혁신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시는 어디까지나 독자들이 알아보기 쉽게 쓰면서도 그속에 깊은 철리가 담겨져 인간을 뜨겁게 고무하고 격려하는 사상감정을 내포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들의 시는 시에 앞서 인간으로서 그네들의 순박하면서도 겸허한 삶의 성격이 고스란히 내비치여 더욱 친근한가싶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시집은 각자 자신들의 삶의 현장에서 떠들썩하지 않으면서도 열심히 닦아온 시적성숙을 가늠하는 시험에서 합격된 점수를 따낸것이 아닌가싶다. 시집은 자기만의 독특한 가치와 무게를 갖고 지금껏 료녕시단에 대해 별로 료해가 없거나 관심이 부족했던 사람들에게 료녕시단을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되였다. 또한 시인은 있는데 자체의 시집이 없었던 료녕조선족시문단의 공백을 메움과 아울러 이제부터 료녕의 시인들도 당당히 시단에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낼수 있는 하나의 군체가 형성되였다는것을 만천하에 알리는 하나의 좋은 계기가 되고있다. 또한 이들이 새로운 도약에로 가는 새로운 길을 열어 이러한 시적성과를 바탕으로 새로운 탐구를 거듭한다면 료녕땅에도 조선족시단 그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을 좋은 시들이 쏟아져나올것이란 새로운 기대와 희망을 갖게 된다. 하지만 시집에는 이런저런 아쉬움도 보여진다. 시집은 오늘의 료녕조선족시인들의 현주소를 알리는데(편집후기에도 적혀있듯이) 력점을 둔것같은데 빈약했던 료녕시단이 오늘에 이를수 있은것은 지난날의 모지름과 진통이 있었으며 초기 료녕땅에서 시문학을 정립하기 위해 애쓴 박화, 리창영과 같은 시인들을 빼놓을수 없다고 본다. 박화시인의 주지시는 현대시작품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으며 리창영은 산문시로서 그만의 독특한 풍격을 갖춘 시인이다. 물론 1978년에 나온 종합시집 《꽃피는 봄》에 그 력사발자국이 찍혀있지만 이번 시집에 반영되였더라면 한권의 료녕조선족시단을 반영하는 좋은 시집이 아니였겠는가 한다. 또 단지 호적이 근원적으로 료녕사람이 아니라는데서 다년간 료녕땅에 거주하면서 시창작에 누구보다 열을 올려 성과도 많이 냈고 중국조선족문단에도 이름있는 대련의 김파같은 시인이 빠진것도 아쉽다. 또한 자기울타리안에 만족하면서 대담하게 료녕문단을 떨치고 중국조선족문학전반에 도전하는 패기와 열정이 부족하다는 느낌도 든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한사람의 일가견이다. 《료녕성조선족시선집》€쀀?한권 책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시는 한개 사회, 한개 민족의 흥망성쇠를 짚어보는 청우계라고 할 때 이 한권의 시집은 그야말로 료녕조선족시단은 물론 전반 중국조선족시단을 부흥시키는 아름다운 시작이라고 할수 있다. 이 한권의 책이 료녕문단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당당히 나서는 든든한 고임돌이자 첫 발단이 되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28    아름다운 줄서기 댓글:  조회:2069  추천:2  2011-12-02
       줄을 선다는 것은 정해진 순서에 따라 차례가 오기 때문에 줄을 서있는 것인데 줄서기를 시키는 목적은 사람들이 사회생활에서 공공질서와 공중도덕을 자각적으로 지키기 위한 올바른 습관을 키워주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문명이 뒤지고 물질이 곤핍한 연대에는 줄을 제대로 선다는 것은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지나간 세월은 오늘에 비해 상대적으로 각오도 낮지만 물질 또한 너무 부족한 것이 많아 각오만으로 줄을 제대로 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다 살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를테면 먹고 사는 것의 필수품인 식량,기름, 천과 고기,술,사탕, 과자. 등 생필품을 살 때 그밖에 유일한 문화생활인 영화관람을 할 때 또 나들이 할 때 필수인 기차표나 버스표를 살 때 만일 줄을 섰다해도 차례가 오는것이 없다고 할 때? 그래서 줄서기가 난장판이 되곤 했는데 그럴 때일수록 질서를 지키려는 정직한 사람, 체면있는 사람이 늘 손해를 보곤 했었다   현재는 줄을 서서 기다리는 현상도 많이 줄어들었거니와 새치기를 하는 현상도 전에 비해 많이 줄었다. 하지만 선진국에 비하면 아직 많이 뒤떨어져있는 것 같다.   지난해 청명 때였다. 폭설이 내리면서 달리던 열차가 한 역에서 열시간이나 멈춘 적이 있다. 열차 안에서 소동이 일어났는데 필수품인 물과 식품이 다 떨어지면서 할 수 없이 역전 가까운 곳의 소매점에 가서 물건을 사는데 사람은 많고 물건은 적어 그만 난장판이 됐다.   자질높은 국민이라면 물건이 부족할 때일수록 오히려 질서를 더 잘 지키면서 서로 양보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폭설에 길이 잠시 막힌 것을 두고도 이렇게 밀고 당기며 싸움판을 벌이는데 만일 우리에게 이보다 더 큰 재앙이 닥쳤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생각해보니 약간 두려움이 앞섰다.   그 누구의 말처럼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재앙보다 인간 스스로의 양보없는 충돌로 하여 빚어지는 재난이 더 크지 않을까?   아름답고 감동적인 줄서기는 인류의 문명을 잘 보여준다. 예상을 초월하는 전대미문의 재난을 겪는 불행한 나라 사람들을 돕기 위해 너도 나도 길게 늘어서서 성금을 넣는 줄서기이다.여기서 모금액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다. 엄마가 무얼 사먹으라고 준 용돈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성금함에 넣으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담겨있는 줄서기 , 세상에 이것처럼 아름답고 감동적인 줄서기가 또 어디있을까.   요 몇 해 사이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대재난이 자주 덮치면서 세계 각국에서 국적과 민족 종족을 가리지 않고, 그리고 과거의 원한이나 분규도 고려하지 않고 피해를 입은 나라, 다른 민족을 돕는 오로지 사랑 나누기 모금 줄서기가 점점 자주 또 길게 늘어서고 있다.   재난이 닥쳐도 침착하게 대응하여 서로가 남을 배려하기 위해 양보하는 줄서기와 그리고 그가 누구든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늘어선 줄서기 , 이는 인류의 문명과 도덕이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는 평화와 사랑의 질서가 보여주는 아름다운 줄서기라고 말하고 싶다.  
27    타민족간 결혼의 비와 희 댓글:  조회:2188  추천:3  2011-11-07
   요즘 왜서인지 결혼청첩을 받으면 경하하는 마음보다 심정이 자꾸 무거워남을 어쩔수 없다. 결혼식을 올리는 신랑이나 신부의 이름중 한켠이 타민족인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있기때문이다. 불과 몇년전만 해도 “어쩌다가” 하던것이 최근에는 “거의다”로 되여 오히려 동민족끼리인 경우가 “어쩌다가”로 되고있다.    그래서 누구네 집 사위는 한족이요, 누구네 집 며느리도 한족이요 하는 말은 보통으로 들리고 청첩을 들고 결혼잔치에 가면 한족과 결혼하기에 손님 대부분이 한족들이다. 결혼식순은 한어, 지어는 축가마저 중국노래가 위주로 되고있다. 이제 우리의 오랜 잔치문화마저 사라질 위기에 놓인것이다.    대민족속의 소수민족으로 사는 조선족총각처녀들이 타민족 총각처녀를 신랑, 신부로 맞아들이니 한 가정이나 한 민족구성원으로 놓고보면 득이 분명하지만 후세계승에 있어서는 결국은 실이 된다. 왜냐하면 남편이 타민족일 때 그 자식은 남편의 민족성분을 따르는것이 자명한것이고 설사 남편이 조선족이고 안해가 타민족이라 할지라도 아이를 직접적으로 양육하고 생활을 지배하는 현실능력이 남자보다 녀자에게 더 있기때문에 자식은 “껍질만 남은 조선족”으로 될 가능성이 많다. 조선족이 극히 적은 연해지구나 남방도시들에 사는 사람들은 설사 부부쌍방이 조선족이라 해도 학교가 없어 그 자식은 결국 “타민족”으로 변하고있는데 이 수자가 도대체 얼마되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안타까운 현실에 대한 태도는 각이하다. 울며겨자먹기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 후자의 견해인즉 중국에 살바에는 하루빨리 동화되는것이 살아가는데는 훨씬 좋다. 한민족이라 하여 모국을 찾아가도 외국인대우 받으니 차라리 “이방인”으로 잘 살아보겠다는것이다. 그러나 전자는 외국나들이로 조선족처녀들이 많이 빠져나가는데다 또 대상을 찾는 눈높이가 너무 높아 웬간한 수준선에서는 취할수가 없기때문이라는것이다. 그런가하면 먹물을 꽤나 먹었다는 처녀총각인 경우 동민족은 한족보다 못한데다 혼인이 감정에서 점차 실리를 추구하면서 출세와 부를 위해서는 인맥관계가 좋은 한족이 더 낫다는것이다. 그래서 한때 타민족과의 통혼을 극력 반대하던 부모들도 이젠 어쩔수 없다는 립장이다.    또 한편으로 민족심이 강하다고 자부하던 조선족들이 타민족과의 결혼이 점차 보편화되여가는데는 순발력이 강한 그들이 주류사회에 뛰여들려는 욕망과 기개가 누구보다 강해 보다 나은 삶을 위해 타민족과 쉽게 조화하는 적응력과 가변성을 갖고싶기때문일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큰 위기는 민족인구의 급감이라는 이 극복하기 어려운 과제를 해결할 방도가 없는것이다. 일찍 우리 민족은 이 땅에 와 살면서 모진 세월의 풍파속에서도 타민족에게 동화되지 않고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삶을 영위해왔다. 그것은 강한 민족정신과 생명의식에 의거하여 백의겨레의 말과 풍속을 잃지 않으려고 몸부림쳐왔기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대민족과 조화를 추구했어도 결혼만은 꼭 동민족을 고집해왔고 긴긴 세월속에서 중국조선족사회를 형성하고 발전시켜왔다. 헌데 이제 타민족과 결혼이 늘면서 민족의식마저 쉽게 흔들리고 민족자부심의 최후보루도 인젠 무너져내리고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강한 민족 의식과 사명을 갖고 자식만은 동민족끼리 혼인시키는것을 철칙으로 리행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인지 이들의 고집과 노력이 더 돋보인다. 이러한 노력과 소망이 하나의 민족을 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가싶다.
26    무소유와 소유 댓글:  조회:2269  추천:2  2011-09-23
최근 미국의 부자들로부터 시작된 “내 세금을 더 거두세요”라는 훈훈한 바람이 유럽으로까지 번져 유럽의 부자들도 세금을 더 내겠다고 해서 전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그래서 ‘무소유’란 개념에 대하여 관심이 점점 깊어진다. 무소유란 말 그대로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소유하지 않는단 말인가?   인간은 삶을 위하여 무엇이든 가져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가지는가가 매우 중요한데 ‘욕심을 내지 말고 필요한 것만 가진다’ 는 것이다. 가진다는 의미는 자기가 가져도 되는 것, 자신이 노력하여 얻은 것 등등의 정당한 소유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감동을 주는 사람이 많고도 많다. 짠지장사로 한푼두푼 모은 돈을 몽땅 기부하거나 불우이웃 아이들을 위해 쓰게 하는가 하면 독거노인들의 식사를 무료로 공급하는 사람, 자신이 평생 모은 재산을 이름도 밝히지 않고 사회에 헌납하고 떠나는 사람. 심지어 돈과 재산을 몽땅 기부하고 죽은 후에는 자신의 장기마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연장하는데 기부하고 떠나가는 사람도 있다.   전세계가 이런 기부문화에 자주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을 보면 이제 무소유란 이 숭고한 개념이 그 얼마나 인심에 진리와 영광으로 누적되어 있는가를 알고도 남음이 있다. 기부는 인간이 아름답게 사는 하나의 방식으로 돋보이고 있다.   많거나 적거나 자신의 노력으로 이룬 소유들을 아낌없이 털어놓는 무소유를 말없이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민족사업이 유지가 되고 발전돼온 것이다.   한편 비교가 있어야 변별할 수 있다고 이런 감동적인 기부를 보면서 인간의 다른 한 현상 지나친 소유를 목적으로 하는 탐욕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가져야 한다. 살기 위해 무엇이든 소유해야 한다.물론 그렇다고 가지고 또 가지고도 만족을 모른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필요 이상의 한계를 넘어 욕심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은 끝없는 탐욕에 집착하는 사람들로 하여 사회의 공동재산인 재물이 한쪽으로 몰려 소수 사람이 많은 것을 가지게 되고, 다수 사람들이 가난하게 되는데 정녕 재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가진자는 너무 많이 가지고 없는 자는 너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도의 한 보통 인간의 말이 새삼스럽다. 그는 돈이 많은 한 부자가 아주 인색하여 돈을 자기 손에만 움켜쥐고 내놓으려하지 않자 “너의 손에 돈이 있다하여 그것이 네 것인 줄 아느냐? 하느님이 잠시 네 손에 맡긴 것일 뿐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젠 인류는 사랑이 아닌 탐욕으로 하여 인류자체가 멸망한다고 경고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럴 때 일수록 무소유란 말이 그 얼마나 신선하고 의미있게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인류의 재앙을 막을 근본적인 대책은 인간이 가진 탐욕을 버리고 무소유로 접근해 가는 것이 아닐까.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기 마련이고 죽으면 그만인데 왜 자꾸 욕심을 낼까? 지금껏 욕심내고 산 사람 가운데서 죽지 않고 산 사람이 있던가?   무소유와 허무는 통하면서도 다르다. 허무는 삶의 욕망에 대한 부정으로 자칫 실의에 빠질수 있다. 하지만 무소유는 삶을 깨끗하고 아름답고 편안하게 산다는 거다.   가령 사람마다 무소유의 사상으로 자신을 절제하고 마음을 비우며 더불어 함께 사는 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면서 자신은 물론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여 사회를 보다 건전하고 깨끗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많은 것을 얻는 것이다.   이런 무소유는 더불어 사는 인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한 소유다.
25    한국문, 드디어 조선족에 활짝 열리나? 댓글:  조회:2778  추천:3  2011-09-20
문은 드디여 활짝 열리는것인가?  ㅡ코리안 드림과 중국조선족 삶에 대한 또 하나의 사고 한국법무부가 홈페이지를 통해 밝힌 기사에 따르면 만 25주세 이상 조선족은 한국에 친족의 유무와 관계없이 누구나 입국 신청이 가능하다고 했다. 다만 전산당첨을 실시하여 당첨자에게 3년 유효한 방문 복수비자를 발급한다는 것이다. 이에 동포언론매체들에서는 즉각 “시험치지 않고도 한국갈 수 있다”고 대서특서로 보도했고, 전문 한국행을 취급하는 여행사들에서는 이제 누구나 가고싶은 사람은 다 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는 광고를 펴내면서 요지음 한국에 가고 싶어도 조건과 기회가 없어 안달아하던 많은 중국조선족들의 행렬이 줄을 서고 있다. 돌아보면 9십년대초부터 시작된 코리안드림은 이를 바라보는 중국조선족의 시각에 득과 실, 희와 비라는 엇갈리는 평가를 산출했다. 어떤이들은 한국행은 중국조선족에게 경제적실리뿐아니라 시장경제에 대한 관념을 갱신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사고방식과 생활방법을 개진하여 한평생 밑바닥에서 소외받고 기시받던 많은 민초들이 새로운 시대 진정한 인간가치를 찾아 향수하게 되였다고 긍정한다.그런가하면 이와 반대로 어떤 이들은 얻은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다고 절규하면서 지어는 한국행때문에 중국조선족이 망한것이나 다름없다고까지 한다. 전혀 근거 없는 말이 아니다. 지금 중국조선족은 중국이란 이 땅에서 새로운 시대적 어려움에 직면하고있다. 민족 존재의 구심점이나 다름없던 농촌집거지가 점차 해체되고 학교가 문을 닫으며 도덕수준이 하강되는 등 조선족들 삶의 지반이 날로 흔들리면서 이 땅에서 그토록 앞서가려 노력하던 조선족들이 창조적정신이 많이 쇠퇴해지고 대신  찰나주의와 향략주의 등등 잘못된 가치관이 점차 팽창하면서 중국조선족의 이미지가 상대적으로 하강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조선족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들의 처지만을 놓고보아도 지금 농민들은 대부분 코리안드림을 믿고 농사를 짓지 않는데 설사  농사를 짓는다해도 많은 토지를 임대했거나 소유한 “지주”가 아니고는 수입을 올릴수없다. 그 밖에도 조선족지구에 가 보면 생태자원도 이젠 대부분 조선족소유가 아니다. 워낙 가진 것이 많지 않은데다 상품경제시대를 살면서도 타민족에 비해 장사머리가 떨어지는데다 인맥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해 창업을 하는데도 적지 않은 난관에 봉착하고있는것이다. 설사 이러한 것들이 코리안드림으로하여 중국조선족에게 오랜 세월 잠식되여있던 찰나주의 한탕주의가 가져다준 병페적인 발로하치더라도 이미 현실은 어디까지나 현실이여서 우리는 부득이 현실을 정시하고 현실에서 그 해결책을 찾는 수 밖에 없는데 그 지당한 해결책이 바로 지금까지 지속된 코리안드림이 아닐가. 헌데 만일 지금까지 한국정부가 경제적인 면과 사회혼란을 빙자하여 중국조선족이 열심히 행해온 코리안드림이 멈추어서게 된다면 이보다 더 큰 어려움을 가져올수도 있다. 비록 연해지구나 대 도시에 진출하여 성과를 올리는 조선족들이 적지 않고 그 밖에  두터운 로임계층이나 기업이나 장사에 미립이 트고 경제기초가 튼튼한  개별적인 사람들이 점차 늘어난다고는 하나 아직 중국조선족사회의 근본을 이루는 수 많은 농민들이 숙련된 기술과 자본이 없어 도시에 와서 경제활동에 종사할수없는 한  얼마 안되는 토지에 매여달리기보다는 한국행이 훨씬 더 빠른 치부를 가져다 줄수있다 는 세인이 다 긍정하는 것이다.이제 가난은 어디나 통하지 않는다.그런데다 조선족은 경제적으로 대민족에게  뒤지고 있는데다 오늘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것마저 위협받고 있으니 중국조선족의 미래 운명에 빨간불이 켜진것은 아닌가. 현실처럼 각박한것은 없다.오늘 중국조선족존재의 승패는  많이는 코리안드림과 련관되여있음을 경시할 수 없다. 지금 경제적급장성에 힘 입은 데다 워낙 부지런하고 일욕심많은 주체민족이 앞서 가고 있는 상황에서 경제적 실력마저 뒤떨어진다면 우리는 더 빨리 대민족에게 먹히울 수 있는바 이 땅에 와서 수고는 많아도 워낙 가진 것도 별로 없는데다 상품경제시대를 살면서 장사머리도 별로 뾰족하지 않고 게다가 인맥조차 없는 조선족이라 애써 중국땅에서 잘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귀중하지만  다른 뾰족한 치부방법이 없는 이들에게는 그래도 가장 빠르고 쉬운 길은   한국에 가서 부지런하고 건강한 사람이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체력로동에 종사하여 돈을 버는 것인데 그것도 다른 나라보다는 같은 언어,같은 풍속습관을 가진 한국이 가장 적임한 것이다.  하여 어찌보면 한국에 가서 로무에 종사하는것은 중국조선족으로 말 할때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고 할수도 있다. 물론 그것이 최종의 목적은 아니고 돈을 벌어다 중국에서 조선족으로 잘실기위한 과정으로 되여야하지만.… 한편 코리안드림은 우리가 잃어져가던 정체성을 살려가는데도 좋은 밑거름이 아닐수없다.지금 민족집거지가 점차 사라져가고 교육과 문화가 쇠퇴되여 가면서 중국조선족은 심각한 정체성갈등을 겪고 있다. 솔직히 말해 아무리 정책이 좋다해도 소수민족으로써의 동화는 피면할수없다. 이것은 강박이 아니라 자연동화다. 우리 자신이 한족중심권의 주류사회에서 보다낳은 삶을 살기위해 자신을 변신시키는 방법의 하나이다. 하여 타민족으로 동화가 되느냐? 아니면 그냥 조선족으로 살아가느냐? 하는 준엄한 갈림길에서  중국조선족의 대량적인 코리안드림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런 자연동화를 많이  지연시키거나 막아 소수민족을 상실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는 기폭제로 작용할수있다 할때 정체성의 흔들림으로 날따라 심각해지는 민족동화의  위험앞에서 이를 해소하고 민족의 의지를 새롭게 가다듬을수있는 환경적여견이 또한  한국행일수도 있겠다. 하여 먹거리로부터 시작하여 언어 문화에 이르기까지 많은것을 배워 알게됨으로하여 정체성이 크게 고양된것이다. 그래서 이 모든것을 위해서도 우리의 코리안드림은 지속되여야 하는데 최근 한국법무부가 사이트를 통해 밝힌 사실에 의하면 만 25주세 이상 조선족은 한국에 친족의 유무와 관계없이 누구나 신청 가능하다는것, 다만 전산당첨을 실시하여 당첨자에게 3년 유효한 방문 복수비자를 발급한다는것이야말로 한국정부에서 실시하는 또 하나의 동포애적 배려가 아닐수없다. 이에 이름없는 한 언론인으로써 새로운 조치에 감사를 드린다. 누구는 한국에서 문을 열면 열수록 가뜩이나 침채상태의 조선족사회가 이로하여 더 침체될것이라하고 우려하지만 나는 이번의 새로운 조치는 조선족이 조선족으로 살아가는 것에  새로운 활력을 부어넣을것이라 생각한다, 때문에 앞으로도 중국조선족의 보편적경제리익과 그리고 정체성공고를 위한 미래 전략적비전을 감안하여 길이 막혀서는 안된다.하면 이제  그처럼 오래 기다렸던 자유왕래의 문은 드디여 열리는것인가? 2011,9,17일  
24    책가방부터 메게 하라 댓글:  조회:2785  추천:1  2011-07-26
요즘 아이의 등하교길을 함께 해주는 부모들을 보면 거의가 아이의 책가방을 대신 들어준다. 큰 아이나 작은 아이나 예외가 아니다. 힘들게 공부하는 아이들에 대한 부모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란다.   어느날 큰 손자를 학교에 바래다주는 길에 아이의 책가방을 메고 가는 어른에게 버릇 들이지 말고 아이 스스로 메고 가게 하라고 일렀더니 부모가 하는 말이 가방이 무거워서 안된다는 것이다.   물론 전에 없이 요즘 아이들의 가방이 무거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무거우면 얼마나 무겁겠는가? 아이들이 메지 못할 정도로 무거운 것은 아니다. 더구나 요즘 아이들의 건강상태로 보아 그만한 가방은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 그런데도 부모들은 아이들의 가방을 대신 들어주는 과잉보호를 하고 있다.   그것을 보니 문득 언젠가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한,중.일 세 나라 어린이들이 여름캠프를 가는데 비록 부모들이 함께 가지만 일본의 아이들은 자기짐을 자기가 지고가면서 끝까지 부모에게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부모들 역시 중도에 대신 짐을 들어주지 않더란다. 헌데 중국이나 한국의 부모들은 그렇지 못하였다. 힘들어 하는 아이가 애처로워 갈수록 대신 가방을 들어 주는 부모들이 늘어나더란다.   어느 명인은 이런 말을 했다. "아이들에게 아무일도 시키지 않는 것은 기실 도둑을 배양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누군가는 아이들에게서 최고의 스승은 고난이라고 했다. 고난속에서 단련되어야 비로소 강하고 독립적인 인간으로 성숙될 수 있다는 말이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이렇게 어른들의 보호 아래 자신이 메야 할 책가방마저 메지 않고 약하게 자란다면 필연코 창의력과 독립성이 모자라는 약자가 되어 험한 세상에 도전하며 역경을 헤쳐나가는데 걸림돌이 될 것이다. 현재의 가방을 맨다는 것은 곧바로 미래를 짊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책가방 안엔 미래의 꿈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헌데 자신의 꿈이 부모의 어깨에 짊어져 있다니? 언젠가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살아야 할 때가 오게 될 것이니 그 날을 대비하여 미리부터 미래의 짐을 질 수 있게 단련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부모들에게 말한다. 자식들이 커서 인생의 큰 짐을 지고 가게 하려거든 미리 가방부터 메게 하라고.
23    엄마의 존재와 가치 - 강효삼 댓글:  조회:2293  추천:0  2011-07-25
엄마의 존재와 가치 강효삼 가정에서 엄마(어머니)의 존재와 가치가 얼마나 대단하고 귀중한지 (아주 섬약한 녀인이지만) 나이가 들면서 더욱 절실하다. 내가 여덟살되던 해 엄마가 집을 뛰쳐나갔기에 한창 엄마의 사랑을 무르익히고 살아야 할 나이에 사랑을 모르고 자랐다. 듣는 말에 엄마가 집을 뛰쳐나간 리유는 애정이 없는 혼인이기때문이라고 한다. 부모가 (외할아버지) 독단한 혼인이기에 비록 아들딸을 낳고 살지만 아버지와 엄마사이엔 사랑의 기초가 너무나도 부족했다. 아버지는 늘 섬약한 엄마를 개패듯했고 엄마는 그 매를 견디다 못해 목숨을 살리기 위해 할수없이 집을 뛰쳐나가게 되였다고 한다.   나는 어려서 엄마의 비참한 사정을 몰랐기에 집을 나간 엄마를 미워하고 저주하였었다. 후에 철이 들면서 남들로부터 이런 사정이야기를 듣고 엄마에 대한 미움은 사라졌고 대신 엄마를 동정하게 되였다. 엄마가 곁에 없었기에 부딪치는 온갖 난관과 불행을 나는 일찍부터 뼈저리도록 체험하게 되였다. 어찌 보면 한 가정의 행복지수는 엄마의 존재여부에 달려있지 않을가? 우리를 낳고 키우면서 언제나 곁에서 사랑을 챙겨주어야 할, 세상에 제일 친절한 엄마가 곁에 없었기에 우리 4남매는 얼음장 같이 찬 구들에서 손바닥만한 이불 한채를 덮고 그 추운 겨울을 지내야 했다.   엄마가 없기에 나는 중학교를 다닐 때 그 추운 북방의 겨울에도 솜바지도 변변히 못입고 여름운동화를 신고 덜덜 떨면서 학교를 다녀야 했다. 당시 숙사는 모두 널판자를 깐 《방》이였는데 나는 솜이 낡을대로 낡아 또글또글 뭉쳐있는 헌 이불을, 그것도 크지 않은 이불이지만 절반을 덮고 절반을 깔고 자야 했다. 옷을 입고 자는데도 밤중이면 너무 추워서 잠을 못이루고 일어나 불길이 점점 사그러져가는 난로곁에서 그나마 온기를 채우려고 앉아서 밤을 지새운적이 한두밤이 아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다보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여 호르몬분비가 잘 안되여 한창 키가 클 나이인데도 크지 못해 지금도 겨우 난쟁이나 면한 체구이다. 아, 엄마가 있었으면 이런 고통은 겪지 않았겠는데. 엄마가 있었으면 당신이 이불을 못덮어도 나에게는 꼭 두툼한 새 이불을 덮게 했을것이다.   비록 아버지가 있었다 하지만 자식들한테 정이 없어서인지 너무도 데면데면하고 몰인정하여 이런 자세한 고통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엄마가 없으니 성년이 되여 교육사업을 할 때도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입맛이 떨어져 입술이 말라터질듯 까칠까칠해도 누가 살뜰히 음식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 힘든 교원사업을 하면서도 때론 굶고 한두개의 과자로 끼니를 에때운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이른봄 반찬이 너무 귀할 때는 (그때는 가난한 60년대 초) 점심밥을 싸가지고 갈 반찬이 없어서 마른 고추를 반찬으로 했다. 그것을 입에 넣고 씹노라면 무섭게 혀바닥을 자극하여 매운 김에 모래알 같은 밥을 넘길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엎친데 덮치기로 키가 작은데다 약골이 되여 장가가기 힘들었다. 선보러 가면 모두가 퇴짜를  놓는 원인이 바람에 날려갈듯한 약골이라는것이다.   엄마가 없으면 자식들은 결혼에도 지장을 많이 받는다. 나는 60년대에 30이 다되였어야 장가를 갔는데 솔직히 엄마만 곁에 있었더면 좀더 일찍 마음에 드는 대상을 골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이따금 해본다. 가정에서 엄마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엄마가 없음으로 하여) 웬만하면 참고 견디고 살아야 했으니 이 역시 엄마의 존재와 가치가 나에게 준 피의 교훈이라 하겠다.   인간은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 애정이라는 이 청신한 에너지를 배부르게 흡수하지 못하고 늘 굶주리고있는 사람들은 심신에 병이 들기 마련이다. 엄마의 헌신적인 노력과 숭고한 령혼이 더욱 큰 사랑을 낳아 건실한 인간을 만드는데 그런 원예사가 곁에 없으니 어떻게 꽃씨앗이 튼튼하게 자랄수 있으랴. 가정의 해볕은 엄마의 미소에서 넉넉해진다. 엄마가 없으니 우리 형제들은 자애를 배우지 못하여 늘 불안과 우울속에서 살았기에 가슴이 넓고 마음이 부드러운 사람으로 크지 못했다.   엄마는 사랑을 만들뿐만아니라 사랑을 가르쳐주는 최초의 스승이다. 스승이 없이 제자들이 어떻게 사랑의 지혜와 능력을 배울수 있겠는가. 가정의 평화는 대부분 엄마가 심고 키우며 가꾸고 지킨다. 엄마는 주요한 변수가 된다. 물론 아버지의 작용을 홀시하는것은 아니다. 엄마가 곁에 없었기에 우리는 가정의 평화를 거의 느껴보지 못했다. 모든 사랑과 관용은 대부분 엄마께서 몸으로 행동으로 가르치는것이다. 엄한 교양과 옳바른 례절을 배우지 못하여 저도 모르게 이따금 버릇 없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된다. 지금 생각할 때 이것이 정신적으로 느껴지는 가장 큰 손실이 아닌가싶다. 단순히 먹이고 입히고 자래우는것도 사랑이지만 사랑하며 사는 법을 가르쳐주는것이 가장 큰 사랑이다. 이런 사랑은 엄마의 가슴에서 솟구치는 교양의 샘물이다.   물론 모든 엄마가 다 사랑을 배워주는것은 아니다. 비록 엄마가 곁에 있다 해도 사랑을 가르쳐주지 못하여《에밀레》 자식이 화를 입게 되는 슬프고 안타까운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것이라 생각한다.(아버지에 비교해서 말이다.) 엄마의 존재는 늙고 병들어 누워있어도 의연히 가정에서 귀중한 존재이다. 한 불효자가 나에게 진솔한 고백을 하기를 엄마가 장기간 반신불수로 누워계시기에 귀찮아서 어서 세상을 떠버렸으면 하고 바랬는데 정작 세상을 뜨고 엄마께서 계시지 않으니 집이 갑자기 텅빈것 같더란다. 그러면서 설사 누워계신다 해도 가정에는 엄마가 계셔야 바람벽에 기대인듯 믿음이 있게 된다는것이였다. 이젠 없지른 물이라며 평소의 불효를 그토록 후회하는것이였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을 너무 무시해서는 안된다. 엄마가 주추돌이라면 아버지는 그우에 세운 기둥과 같은 존재이다. 기둥이 세워져야 비로소 집을 짓게 되는것이 아닌가. 그러나 가정엔 그래도 엄마가 있어야 한다. 근로와 인내와 사랑과 흉금으로 식솔을 어우르고 보듬어주는 조용하지만 자상하고 소박하지만 웅심깊은 엄마의 가슴이 없다면 밖에 나가 일을 저지르고 들어와도 누가 따뜻이 위안해줄것인가. 혹시 먼 길을 떠난다 해도 누가 제일 자식의 안위를 근심하고 걱정하는가. 어릴 때 엄마의 등에 업혀본 사람들은 평생 기억할것이다. 바람 세찬 날 엄마의 등이 얼마나 큰 바람막이가 되는가를. 그 등에 업히면 얼마나 편안하고 미덥던가! 아버지의 엄격함과 엄마의 자상함이 잘 결합된 가정을 우리는 리상적인 가정이라 할것이다. 이런 가정이면 더욱 좋고 설사 아버지가 계시지 않거나 아버지의 인품이 모자라더라도 좋은 엄마만 있으면 리상적인 가정이 될수도 있다.   이제 다 같은 부모인데도 엄마를 더 따르는 리유를 알만하겠다. 항상 가슴을 열어놓고 그 넓은 가슴에 자식을 심어 키우며 자식에게 모든것을 다 바치는 엄마는 《녀인은 약해도 엄마는 강한》 부류에 속하는 녀자들이다. 아마 자식들더러 막부득이한 경우에 엄마와 아버지중 누구를 선택하려는가 물으면 모르긴 해도 대부분 엄마를 선택하겠다 할것이다. 이는 다 같은 부모로써 아버지의 슬픔이기는 하지만 어찌하랴. 자식들한테는 그 누구보다 엄마가 제일 귀중하고 필요되는것을. 나도 자식들한테 아버지도 있어야 하지만 우리 가정엔 엄마가 없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엄마를 더 따르고 생각해주라고 솔직히 말한다. 엄마는 흙이고 온상이다. 자식의 수양과 덕성이 많이는 엄마에게서 유전된다. 약하지만 강한 엄마의 존재, 《작지》만 큰 엄마의 가치, 엄마의 사랑이 없으면 착하고 옳바른 인간으로 거듭나기 쉽지 않다. 특히 딸들이 그러하다. 그래서 예로부터 딸을 보려면 그의 엄마를 보라고 하지 않았던가. 엄마가 현숙해야 자식도 현숙하다. 그래서 남자들이  안해를 맞을 때 인물도 보지만 그보다 지혜롭고 교양 있는 녀자를 맞아들이고싶어한다. 그것은 자식들의 앞날을 위해서이다.   자식을 공부시키기 위해 세번 이사를 간 맹자의 어머니, 그리고 한석봉의 어머니… 세계의 걸출한 명인들과 인재들이 배출된 리유중의 하나가 엄마의 영향과 작용이 컸기때문이다. 가정에서 엄마가 잘못하면 그 멀리 후손들한테까지 나쁜 영향을 끼친다. 때문에 나는 며칠전 출가한 딸애한테 처음으로 아버지로서 교훈적인 전화를 했다. 이제 엄마가 되였으니 꼭 노력하여 현숙하면서도 강하며 몸과 마음으로 사랑을 만들어 사랑을 가르칠줄 아는 능력 있고 교양 있는 엄마가 되라고. 그래야 자식이 훌륭한 인간으로 성장할수 있다고 가르쳤다. 일거수일투족― 엄마의 행동이 아버지보다 더 가까이 더 일상적으로 아이한테 다가서기에 그 누구보다 엄마가 본보기로 된다.   지금껏 많은 가정들이 혼란을 거듭하던 끝에 파렬까지 되는 리유의 하나가 아버지의 문제도 있겠지만 엄마 의 책임이 크다. 요즈음 우리 민족의 가정파괴의 문제점이 어쩌면 엄마의 역할이 하강된것이 아닌가싶다. 물론 남자들이 제 구실을 못해 생기는 련쇄반응이라 하지만 확실히 조선족 엄마들의 인간적인 자질이 도시진출과 해외나들이로 하여 많이 색바래지고있지 않는가. 하여 엄마를 잃은 많은 자식들이 물질적으로는 넉넉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사막 같이 허허로운 고통을 감내하고있다. 바라건데《에밀레》하는 뼈저린 하소연과 목갈린 분노를 자식들로부터 받지 않게 엄마다운 처신을 잘해야 할것이다. 녀성이 잘되여야 민족도 잘된다는 말이 이제 절실할 때다. 엄마는 분명 최초의 스승이고 또 마지막 스승이다. 엄마의 소질이자 자식의 소질이고 자식의 소질이자 민족의 소질이거늘 엄마의 존엄과 가치를 더더욱 피부로 감안해야겠다.   
22    [시] 아버지의 초상화 댓글:  조회:3278  추천:40  2009-11-23
아버지의 초상화 강효삼 한평생 락을 바라고 허위 허위 쫓았지만 그건 꿈에 본 신기루 쫓고 쫓아도 그냥 그만큼 멀리 있어 가다가다 지쳐누운 나지막한 산비탈에 허리 착 꼬부라진 늙은 비술나무 한구루 - 삼밭처럼 숨막히는 오두막,찢어진 문풍지를 비집고 젓가락처럼 새여드는 빛을 거친 피부에 바르던 못난 사나이였다. 산해진미는 평생 팔자에 없어 다마토리 술 석잔 - 그것에도 취해서 목침베고 뽑는 가락은   그나마 앞에선 노래도 못 넘기고... 가파론 산을 톱는 초부처럼 암벽을 쪼아대는 석공처럼 힘들고 아프게 흙을 뚜져 참께 기름같은 땀을 동이로 짜냈던 누렇게 말라도 독한 잎담배였던걸 그래도 때묻은 동저고리 옷고름 잡아 풀면 장작개비처럼 말라가는 가슴에도 남은 것은 비취색 하늘같이 깨끗한 마음 - 젖은 장작같이 바른 금 쫙쫙 서는 참나무였다. 옹배기는 숭늉같이 근심과 걱정을 증발시키며 인내를 연덩이로 굳혀들고 굴종을 담배로 말아피우며 근로와 선을 새끼처럼 꼬아서 뒤로뒤로 넘겨주고 태여날 때처럼 맨주먹 저세상을 가시였다. 아, 흙을 앗기고 흙에 미쳐 흙을 찾아 지구를 류랑한 나그네 - 그때문에 고향도 혈육도 다 잃는 눈물에 젖은 무명수건아, 무지와 순박, 근로와 인내를 한데 버무려 소여물처럼 새김질한 늙은 황소여.
21    [시] 북방의 8월 댓글:  조회:1299  추천:30  2009-11-16
북방의 8월강효삼아이들의 숨결이 흩어진 운동장엔잔디만 제멋대로 즐겁고볕에 녹아 시들어진 록음만 맥없이 축 어깨 처져젊음 한결 물 낡은 숲에선산딸기만 부지런히 불을 켜 쌓는다나붓기는 초록색치마의 겉치장보다노란 젖꼭지같이 안으로 여무는무게가 좋아, 숨은 속살 더듬어근육 탄탄히 다지는 북방의 8월은계절이 이성에 눈 뜬 성숙의 고개마루흐린 하늘 한겹한겹 벗겨파란 속심이 부드러이 웃고계절 바뀌는 옷차림 그 여문 몸뚱이가노란 볕에 타다못해 거멋게 될가봐8월은 가끔 선들부채를 흔들어라오,내려서면 9월린접한 고개마루에노란 웃음이 와그르르 쏟아져나와햇병아리처럼 들에 쫙 널릴상싶다빨간 꽈리빛으로 이제 막계절도 포옥-익어번질상싶다.
20    [시] 님의 눈빛 댓글:  조회:1436  추천:37  2009-11-16
님의 눈빛강효삼말없이 은근히날 좋아하는님의 눈빛은 무엇이기에내 가슴에 와 닿으면이리도 뜨거울가소리없이 이글거리는님의 눈빛그건 아마도 불을 품은 성냥꼬투리-난 성냥갑인가봐하기에 님의 눈빛과 부딪치면팍-하고 내 가슴에 불이 달리군 하지.
19    불법체류단속, 이제는 사라져야 댓글:  조회:1811  추천:27  2009-10-14
  최근 신문을 보니 한국정부에서 년말이 다가오면서 또 불법체류외국인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을 벌인다고 한다. 우리말 속담에 ‘듣기 좋은 봄노래도 세 번 들으면 듣기가 싫다\"는데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불안과 공포를 주는 이런 ‘불법체류단속’이란 말이 한국에서는 거의 해마다 한 번씩 여론에 공표되어 부산을 떤다는것 이다…아마 중국조선족의 코리안드림이 시작되어서부터 진행 되고 있는, 한국법무부가 불법체류 외국인을 상대로 벌리는 이런 캠페인의 주요 단속대상은 많이는 한국에서 아직도 불법체류로 견디고 있는 같은 동포인 중국 조선족(한족 포함)들일 것이다. 한국의 외국인 체류법을 위반하였으니 단속을 받아야 하는 것은 응당하다. 하지만 이런 불법체류가 생기게 된 근원이 무엇일가를 곰곰 생각할 때 부득불 법을 위반하게 되는 동포들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그보다 애초부터 법을 위반하도록 입국제도를 잘못 만든 한국정부에 책임이 더 크지 않는가 싶다. 말하자면 그 시작은 지금까지 한국정부의 잘못된 출입국정책에 있다고 불 수 있다. 돌이켜 보건대 중국조선족의 대량적인 한국행은 사상과 이념의 틀을 넘어서 삶의 지반인 경제적 실리를 추구하는데서 더욱 비롯되었다. 하기에 고국을 가는 목적은 극히 개별적으로 오랜 세월 헤여 진 가족과 친지를 만나는 밖에 대부분은 이런 이유를 계기로 잘산다는 고국에 가서 돈을 벌어다 자신들의 가난한 삶을 개변시켜보려는 것이 주되는 목적이며 동기였다. 다 같은 동포로서 이러한 욕념을 잘못된 것이라 볼 수는 없다. 더구나 동포이기에 서로 이해를 해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불을 보듯 이를 번연히 알면서도 한국정부는 왜 처음부터 중국동포들의 고국방문의 길을 막으면서, 체류기간을 야박하게 많아서 3개월, 적어서 15일밖에 안 되는 단기비자를 주었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인력부족을 해결하기위해 때로 눈감아주기(어떤 이는 인도주의 차원에서 묵인하기도 하는 등)하였다. 바로 이렇게, 현실과 법이 여러 가지로 모순되면서 한국에 가 노무에 종사하는 외국인들의 \"불법체류\"가 시작이 된 것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 한번 가기도 그렇게 힘들고 또 중간브로커들로 하여 막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한국행에서 어찌 눈 뜨고 손해를 본단 말인가? 그래서 하루라도 더 체류하며 돈을 벌기위하여 경찰의 단속을 피하며 가지가지 모험을 하는 과정에 요행 단속에서 벗어나면 다행이요, 아니면 노동현장에서 일하다 붙잡히는 사람으로 지어 길을 가다가 붙잡힌 사람 등등 이 불법체류단속 때문에 중국조선족들의 코리안드림에는 울지도 웃지도 못할 기막힌 사연들이 그 얼마나 많고 많았던가! 길림성에서 갔다는 한 동포는 입국한지 한 달 만에 불법체류자가 되어 붙잡혀 본국으로 호송당해 오게 되였는데 한국에 가기위해 남에게 꾼 돈만 자그마치 10여만 위안, 중국에 들어와 그 많은 빚을 갚자면 한평생을 허위적 거려도 못 다 갚을 돈이기에 사나이의 체면도 잊고 비행기에 올랐었는데 강제 송환 돨 때 엉엉 소리 내어 울더라고 한다. 아마 이런 실례를 들자면 많고도 많을 것이다. 어떤 가정은 불법체류단속에 걸려 붙잡혀 오면서 한국에 가기위해 쓴 숫한 빚을 물지 못해 파산된 가정도 있다. 이같이 중국 조선족코리안드림에서 인기된 많고 많은 비극과 치유하지 않으면 안 될 허다한 약점들은 코리안드림이라는 그 자체보다는 \"불법체류\"라는 이 딱지로 하여 초래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불법체류단속은 중국조선족을 함한 한국에 체류하는 많은 외국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면서도 저주하는 조치였다. 법을 위반하지 않도록 제도를 만들지 않고 오직 단속으로만 해결하려 하면서 붙잡힌 불법체류자들을 죄인취급하여 수쇄까지 채워 쫓아 보내는, 이런 비인간적인 처사는 많은 중국조선족들의 불만을 야기 시켰고 고국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렸으며, 지어 심한 거부감까지도 갖게 하였다. 한편 불법채류단속을 함에 있어서 공정성과 형평성이 파괴되어 재수 없이 붙잡힌 사람과 요행 잡히지 않는 사람과의 차별은 한 나라의 엄숙한 법과 질서가 요행에 의해 판가름됨으로써 그 존엄성에도 손상을 주게 되었다. 후에 한국정부로부터 골칫거리나 다름없는 이 외국인 불법체류를 타결해볼 목적으로 노무현 정부시절 자진 신고하는 사람에게 재입국의 기회를 준 것으로 하여 불법체류가 많이 줄어들고 출입국이 점차 제 궤도에 오르고는 있으나, 아직도 불법체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동포들을 포용한다면서 돌 볼바에는 통 크게 시원하게 볼보지 못하고 늘 이것저것 제한하면서 불법체류가 그냥 존재하여 해마다 이런 단속을 벌리느라 해마다 숱한 인력물력을 낭비하는 것일까? 물론 불법체류가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요, 발전한 나라에는 다다소소 존재하는 것이지만 한국에 더더욱 엄중한 것은 재외동포들이 한국을 선호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다면 이제 중국조선족들의 코리안드림은 물론 모든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한국행을 피곤하고 불안하게 만들고 법치국가를 표방하는 한국의 위상에도 손상을 주는 불법체류외국인 단속 ㅡ이것을 이제는 근본으로부터 다스릴 그 어떤 획기적인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야말로 해마다 한 번 씩 언 발에 오줌 누는 격으로 단속을 벌이는 데만 신경쓸 것이 아니라 \"불법체류\"라는 말이 없이 해외동포들이 마음 놓고 고국을 드나들게 할 근본적인 대책이 절실히 필요할 때다. 바로 그네들은 타국을 자유로이 왕래함으로써 불법체류단속이란 말이 소용없듯이 한국을 다녀가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 불법체류라는 이 말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 그런 날을 말이다. 2009,10
18    [단상] 고향이 있기에 댓글:  조회:1219  추천:36  2009-10-11
고향이 있기에강효삼 시인중국조선족의 대부분은 농민이고 설사 도시에 살아도 거의가 농민의 자손들이기때문에 삶의 발판을 거의 고향땅에서부터 마련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지만 고향이 우리에게 그저 차레진것은 아니다. 땅이 넓고 황무지가 많다하여 죄다 우리가 마음대로   살수 있는 땅은 아니였기때문이다. 망향민족으로 이 땅에 와서 고향을 찾아 오랜 세월 떠돌아봤기에 우리는 안다. 우리 겨레에게서 고향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가를!  좋든 궂든 가난하든 부유하든 우리 삶의 착실한 터전인 고향이 있었기에 우리가 뿌리를 내리고 더는 떠돌이가 되지 않았다.고향이 있었기에 우리 서로 낯설어도 한겨레로  살면서 우리의 말과 글을 사용하고 우리의 전통과 습관을 보존하면서 살아왔다. 고향이 있었기에 조상들이 묻힐 곳도 있게 되였고 후대들이 태여나 자랄 요람도 있게 되였다. 고향에는  우리 삶의 력사가 있고 우리 삶의 방식이 있고 우리 삶의 개성이 있다. 고향이 있기에 떳떳이  이 땅의 주인으로 살수 있었으니 우리의 생명이 존중되고 우리의 존재가 인정받은 고향이자 바로 우리이고 우리자 바로 고향이다. 우리에게  자신의 당당한 고향이  있기에 조국에도 그 한 몫이 있는것이다.허지만 지금 우리들의 고향은 새로운 위기를 맞고있다. 산업화로 매진하면서 이제 고향은 더 이상 가치가 없는듯 우리는 그렇게 어렵게 이룩한 우리의 고향을 너무 쉽게 버리고있다. 이제 고향을 떠나 제각기 살아보면서 우리에게서 고향상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절실히 알게 될것이다.그것은 단지 땅을 잃는것만 아니다. 마치 그릇이 없는 물과 같아 고향을 잃으면 우리는 자칫 자신을  잃어버릴수도 있다. 수구초심(”首邱初心)이란 말이 있다. 여우가 죽을 때 그 머리를 고향 향해 돌린다고 짐승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인간이랴! 당장 래일에 가서  고향을 잃은 가슴저린 후회없게 미리미리 오늘의 고향을 더더욱 귀중하게 여기자, 농촌이 아니면 도시 그  어디든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고향이  있어야 한다!
17    해안선 댓글:  조회:1361  추천:23  2009-09-28
해안선강효삼서로가  만남을 위해 먼 길을 어렵게 달려오고도 만남의 포옹은 어찌해 저리도 조용할가끝이 끝을 범한다, 서로가 허물없이 열리고 열어주며.후미진 곳 어디라 없이 숨가쁘지 않는 조용한 섹스ㅡ 바다와 육지가 새롭게  잉태한다 ---------------------------  
16    추락과 상승 댓글:  조회:1300  추천:20  2009-09-28
추락과 상승 강효삼  ㅡ 어느 위인의 죽음을 두고 딴딴한 바위가 아니였더면 아찔한 벼랑이 아니였더면 있을가, 당신의 그  안타까운 죽음이 산 정상에서 반짝이던 별 하나추락하는 락엽인양 아찔한 벼랑 아래로 몸을 던져  별찌같이 긋는 그  순간의 획은 삶과 죽음을 하나로 잇는 마지막 뉴대인가이 찰나의 순간은 아주 짧아도어쩌면 그 기나긴 생의 과정을 이 한 줄에 다 이어놓은듯 삶과 죽음이 결국은 한 조각임을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남기고 가는 마지막  긴 여운의 “ㅡ “부호같구나아, 한 몸 던져 추락하면서 높이 더 높이 영원의 정상에 떠오른 찬란한  별, 하나여 -------------------  
15    [수필] 내가 살던 고향 댓글:  조회:1300  추천:28  2009-06-28
나는 연수에서 태여나 그 곳에서 교편을 잡고 문학꿈을 키우며 열심히 살아왔다.허나 문화대혁명이라는 이 전대미문의 동란을 겪으면서 오히려 열심한 대가를 불행으로 떠안게 된적이 있었다.그리하여 다시 교단에 서는것은 말할것도 없고 자신의 진득한 소망인 문학꿈마저 접어야 했던 엄혹한 시기가 있었다.헌데 이러한 때  쥐구멍에 볕이 들듯 나에게 참으로 생각지모 못했던 삶의 해빛을 준곳이 바로 상지였다.그것은 1972년 초봄이였다. 정치적으로 조금만 문제가 있어도 교원은 커녕 천한 농군도 바로 못되던 그 세월에 그때까지 아직 듣기에도 무시무시한 \'반동분자\'의 모자를 쓰고 있던 내가  도랑하나 사이 둔 상지땅에 초빙되여 와서 다시 교단에 섰던적이 있다. 그것은 나로 말하면 하나의 인생기적이였다. 어찌해  다 같은 하늘아래 다 같은 민족끼리인데도 사람을 보고 써주는것이 이렇게도 판이할수가 있았던가? 그 세월에 어벌 크게도  나에게 이런 감동적인 은헤를 베풀어준 이가 바로 당시 상지하동중학교교장이셨던 정호덕선생님과 김창룡교도주임이였다. 그래서 나는 상지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였고 상지의 겨레들을 고마운 안광으로 보게 되였다.비록 일년이란 짧은 시간밖에 머물러있지 못했지만 그것은 내가 다시 사람의 대접을 받은 일년이였고 사람같이 산 일년이였다. 더구나 그것이 그후 나의 인생에 전환점이 되여 다시 상지땅으로 와서 보람찬 나의 \'제 2의 인생\'을 실현하면서 최선을 다 하게한 삶의 터전이 되여준것이다. 상지땅에 와서 옹군 25년이란 세월을 보냈다.비록 상지역시 사람사는 곳이라 어느 구석에선가는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못하고 한때는 비틀린 인간관계의 잡음에 시달려 고뇌한적도 있었으나 이러한 고놔와 곤혹은  내가 상지에 옴으로하여서만 충실하게 이루어낼수있었던 그 모든 사업성과와 인생가치와 자식들의 출세등을 놓고볼때 이러한 곤혹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마 그래서 인간은 한 고장에 살다가도 자주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가나보다. 생각하면 나는 내 후반생에 여늬 고장보다도 상지를 잘 선택한것같다. 돌아보면 상지땅에서의 20여년 세월은 얼마나 보람차고 의미있던 세월이였던가! 나는 상지의 물을 마시고 상지의 쌀을 먹고 상지의 공기로 숨쉬면서 참으로 많은 감사와 배려를 받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감사는 내가 교원으로부터 문화사업을 하게 된것이다. 문화사업에 종사하고 싶은것은 나의 오랜 숙망이였다. 그러나 인맥이 없어선지 아니면 사람됨이 모잘해서인지 고향에서는 어찌해도 그러한 욕망을  실현할수가 없었다. 그것이 늘 허전하고 유감스러웠는데 상지땅에 와서 어렵지 않게 그 꿈을 현실로 만들수있을줄이야!  한 보통사람이 낯선곳에 와서 당당하게 발붙이고 자신의 취미와 능력에 쫓아 마음껏 기능을 펴간다는것은 쉬운일이 아니다.흔히 살아보면 지방마다 터세라는것이 따로 있어 지역에 따라 사람을 차별시하는것이 보통의 상황인데 나는 상지에 와서 전혀 그런것을 느끼지 못했다. 비록 굴러온 돌이지만 여기엔 인맥이나 친분여하에 관계없이 사업을 앞에 놓고 적극적으로 나를 문화부문에 추전해준 많은 민족간부들과  결정권을 가지고 나를 문화소에 전근시켜준 안무순녀사(당시 문교를 책임진 부현장)를 그 실레로 들수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그토록 하고싶어 하던 문화사업을 하게됨으로써 자신의 인생가치를 충분히 실현할수있게 되였던것이다. 비교가 있어야 감별이 있다.   문화대혁명기간 번연히 정치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임을 알면서도 대담하게 써주던 정호덕교장같은 분들과 친분이야 있던 없던 한 인간이 가진 꿈과 포부를 존중하여 그의 특장에 발휘하게끔 배려해준 안무순녀사와 같은 분들이 상지땅에 있다는 그 자체는  나로 하여금 상지땅 우리 겨레들의 앞서가는 생각과 더불어 후더운 인간풍토를 피부로 느끼게 한다.이러한 인간사랑의 풍토는  비단 사업뿐 아니라 실 생활면에서도 잘 표현 되였다. 나는 상지로 전근되여 오면서 가족이 향소재지에 소속이 되여 농민이 아니였기에 국가 상품량을 타먹는 나를 내놓고 나머지 네식솔은 식량을 주는곳이 없었다. 지금처럼 식량을 마음대로 사먹는때라면 몰라도 80년대까지는 국가로부터 량식을 엄격하게 통제하던 때여서 내 힘으로는 어디가서 한톨의 량식도 얻거나 살수 없었다. 그래서 가족을 먹여 살릴 근심걱정에 잠못드는 날도 많았는데  이 일을 알게된  당시 하동향부서기로 있던 김창히씨께서 (현 정협주석)가족의 량식문제를 해결하여 주어 그때의 기분은 마치 가물에 비를 만난격이였었다. 더욱이 두고두고 잊을수 없는것은 당시 공안국책임자의 한분인 김치경님께서 주동적으로 나의 네식솔의 호적을 도시호적으로 바꾸어주면서(당시 이 일은 공안국에서 관리했음) 가족이 몽땅 국가배급량을 타게되여 더는 먹는 문제를 가지고 걱정하지 않아도 되였다. 당시로 말할때 이는 대단한 인간적 배려이다.  만일 이렇게 사업적으로 생활적으로 아니 인간적으로 나를 관심하고 배려해주는 고마운 분들이 없었다면 내가 어찌 문화사업은 물론 문학창작과 자식농사에서 만족한 성적을 일구어낼수있었을가.지금 생각해도 실로 상지땅에서의 25년은 내 인생의 최 고조기요 황금시기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나는 상지를 또 하나의 고향으로 간주하면서 상지땅  겨레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연수가 나의 꿈을 잉태시키고 자래운 요람이라면 상지는 그 꿈을 활짝 꽃피워 열매맺게 해준 드넓은 동산임에는 틀림이 없다. 고향 하면 산천도 그렇지만 그 인간의 풋풋한 정때문에 두고두고 외우는곳인데 다 같이 사람사는 고향이지만 특별히 상지를  \'내가 살던 고향\'이라 부르고 싶음은 그 인간적인 배려와 관심과 사랑때문이다. 한 인간을 그 직위나 인맥을 떠나서 재능이 있어도 깎아내리지 않고 작은 능력이나마 깊이 헤아려 한 인간이 꿈꾸는 그 실천 가능성을 한껏 발굴하여 인간이 인간답게 자신의 인생가치를 마음껏 실현하며 살수있도록 배려해준 곳은 모두 \'고향\'이다. 나에게 상지는 그런 아름답고 순후한  곳이고 영원히 잊지못할 고향이다. 2009/06/26 흑룡강신문
14    진달래꽃살롱 댓글:  조회:1213  추천:23  2009-06-17
뭇꽃들이 피여나는 오월에 “꽃” 하면 가장 보고싶은 꽃은 진달래꽃이다. 왜 진달래꽃이 더 보고싶었을가? 그것은 연분홍 이 꽃이 아름답기도 하겠지만 교과서에서 진달래꽃은 우리 민족의 얼과 넋을 상징하는 꽃이라는것을 배워서 알았기때문에 더욱 사랑하고 동경한것 같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도 나는 봄이 되면 늘 고향의 앞산에 핀 진달래꽃을 보고싶어 한번씩 찾아가 꽃을 감상하는것을 습관아닌 습관으로 키우며 자라났다.헌데 매양 혼자서 꽃구경을 하게 되니 무언가 심심하고 부족한것 같아 성인이 된후부터는 마을에서 문학과 음악에 취미가 있는 사람들을 휘동하여 봄철이면 함께 진달래꽃구경을 가게 되였는데 꽃구경을 가는 날은 마치 산보놀이나 가듯 술과 음식을 가지고 직접 진달래꽃밭에서 꽃의 아름다움을 관상하며 음식을 나누었는데 술잔에 진달래꽃잎을 따서 넣고 마시는 술은 참으로 별맛이였고 또 별로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후에는 정식 “진달래꽃살롱”이라 이름을 달고 고향의 문학애호자들은 물론 외지의 문학도들까지 불러다가 함께 진달래꽃을 감상하며 문학을 론하고 인생을 론하며 즐기였는데 지금에 와서는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았다.어느 한해였다. 그때도 진달래꽃살롱을 하고저 우리 일행이 마을을 떠나려 하는데 비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갈가 말가 망설이다가 하늘을 보니 큰 비는 올것 같지 않아 산으로 향했는데 진달래꽃이 무더기로 핀 산 정상에 오르기 바쁘게 하늘이 온통 까맣게 어두워지더니 대줄기같은 장대비가 쏟아져내리는것이 아닌가! 그래서 부랴부랴 우리들은 진달래꽃나무우에 가지고 간 비닐천으로 비막이 “천장”을 만들어 씌우고 그 아래에 모여앉았다. 날이 흐리고 비가 쏟아지니 몸이 오싹오싹 떨렸지만 술로 몸을 덥힌데다 억수로 비가 쏟아지는 날도 개의치 않고 꽃구경을 한다고 생각하니 더욱 사기가 나서 기분은 마냥 좋았다. 헌데 참으로 놀랍고 반가운것은 하늘도 우리들의 꽃사랑에 감복이 되였는지 하루종일 퍼부을것만 같던 비가 뚝 그치고 언제 비가 왔더냐싶게 하늘이 개이기 시작하더니 드디여 맑고 푸른 원상의 하늘이 우리의 머리우에 환히 열리는것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우리들은 너무 기쁜나머지 비닐”천장”에 고인 비물을 툭툭 털면서 이구동성 “진달래꽃만세 ㅡ!”까지 웨쳤고 그 어느때보다 재미있고 열렬하게 그날 하루를 즐겼다. 그리고 이날을 특별히 기념하기 위하여 술을 마시고 난 빈 병안에 “모년 모월 모일 누구누구가 이 산에 와서 비를 맞으면서도 열심히 진달래꽃구경을 한것을 력사에 길이 남기노라 ㅡ.”라는 글을 종이에 또박또박 써서 병안에 넣고 밀봉을 하여 땅에 묻어놓기까지 하였던것이다.우리들의 진달래꽃살롱은 2002년까지 해마다 거의 빼놓치 않다싶이 자연스럽게 진행이 되다가 한국나들이로 연해지구이주로 하나 둘 동아리들이 떠나가고 나 또한 병으로 신음하면서 조직자가 되지 못하여 그후로는 무산되고말았지만 그래도 해마다 봄 하면 진달래꽃이 생각나고 진달래꽃 하면 고향의 문학도들이 생각난다. 우리가 묻어놓은 병은 지금도 진달래가 무덕무덕 핀 그 아래 어느 뿌리속에 고스란히 묻혀있을것이다. 언제고 다시 모여 감회깊게 추억을 하며 그 병을 꺼내여 그때 그 글이 그대로 남아있는지 확인해볼 날이 있을가? 비록 그런 날이 다시 오지 못한다 해도 진달래꽃을 감상하면서 고향을 사랑하고 겨레를 사랑했던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만은 죽을 때까지도 잊지 못할것이다.이른 봄 피여 남먼저 봄을 알리는 진달래꽃은 이 땅 어디에 피여도 우리 겨레 넋의 상징으로 취급되기때문에 무궁화와 더불어 명실공히 우리의 꽃이다. 듣자니 료녕에도 진달래가 만발한 산천이 많다 하니 올해는 먼 북극 흑룡강의 진달래꽃을 보는것처럼 문우들과 함께 새로운 고향인 료녕의 진달래꽃을 보며 “꽃살롱”의 걸음을 다시 떼고싶다.              2009. 5인터넷료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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