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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진리 ・ 2018. 6. 14. 17:00
윤동주(尹東柱, 1917년 12월 30일 ~ 1945년 2월 16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시인, 작가이다. 본관은 파평(坡平). 중국 만저우 지방 지린 성 연변 용정에서 출생하여 명동학교에서 수학하였고, 숭실중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숭실중학교 때 처음 시를 발표하였고,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소년(少年) 지에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윤동주의 이 시집은 그의 가족과 친구들이 스물 여덟의 젊은 나이로 일본 감옥에서 옥사한 고인을 추모하기 위하여 유고작을 모아 세상에 내 놓게 된 것이다.
이 시집에 수록된 첫 작품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서시"이다.
이 시에는 '1941년 11윌 20일'이란 창작 일자가 남아 있는데 이 때는 윤동주가 연희 전문의 졸업을 앞두고 진로에 고민하던 때로서 그의 나이 스물 넷이었다.
"서시"는 2연 9행으로 된 짧은 작품이다.
그러나 비록 짧지만 우리는 양심과 사랑을 추구하여 마침내 도덕적 순결보다 더 위에 있는 하나님 사랑의 자기 수행을 다짐하는 시인의 고뇌와 만날 수 있다.
시상의 전개상 1연은 1행-4행 / 5행-6행 / 7행-8행 등의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과거 시제로 쓰여진 첫 4행은 식민지인으로서의 시인의 고뇌를 절절이 느낄 수 있으며, 조선인을 말살시키기 위해 급기야 창씨개명과 신사 참배를 강요했던 일제 말기에 조국과 민족, 무엇보다도 자신의 양심 앞에서 부끄러운 변절이나 타락을 하지 않으려는 도덕적 순결 의식. 민족 정기가 나타나 있다.
1,2행의 표현은 <맹자>의 '군자 삼락(君子三樂)' 가운데 하나로 '우러러 하늘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고, 굽어보아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다(仰不愧於天 俯不作於人)'의 인용이다. 바로 이런 군자의 마음으로 시인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한 점'의 잘못조차 허용하지 않고, 부끄럼 없는 삶을 위해 고뇌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3행의 '잎새에 이는 바람'은 2행의 '한 점 부끄럼'을 비유하고 있는 시구로 '부끄럼'이란 추상적인 관념을 시각화시켜 감각적으로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다.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인은 점. 티. 주름. 흠이 없기를 바라는 것을 담고 있다.
데살로니가 전서 5:22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이러한 시인의 도덕적인 순결과 양심의 추구는 5,6행의 다짐과 7,8행의 강한 결의로 이어진다. 5,6행은 현재 시제로 쓰여진 점으로 보아 시인이 처한 현재에 대한 다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별'의 심상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별'은 순수, 영원, 희망, 빛, 불변의 가치, 지고지순(至高至純)의 진리 등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별을 노래하는 마음'이란 '도덕적인 순결의 가치를 추구하는 마음' 또는 '불변의 가치를 예찬하는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죽어 가는 모든 것' 즉 '소멸되고 사그라지는 생명'들을 밝히는 사랑의 등불이 될 것을 다짐하고 있다. 하나님 사랑. 영원한 사랑. 무한한 그 사랑. 아가페 사랑을 말이다.
'십자가'에는 윤동주 시인의 신앙관과 역사관, 인생관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시에는 욕되고 부끄러운 자신을 인식하고 괴로워한다. 욕되지 않은 삶,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자 하지만 그런 삶을 방해하는 세상 속에서 번민하는 자아(自我)의 목소리가 드러나 있다. 이는 윤동주 시에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무기력하지만 진실한 자아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 '십자가'는 자기희생으로 완전하게 사명을 감당하신 예수님을 본받고 싶어 하는데, 그 십자가에 자기는 오를 수 없는 데 해는 다가가 있다. 휘파람이나 불면 그 주변에서 서성거리며 마음으로만 괴로워하는 무기력한 자기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십자가'는 자기희생을 의미하는데, 자기도 예수님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목을 바치고, 피를 토하며 예수님처럼 영원히 행복한 길을 가기 원한다고 고백한다. 성도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이 시처럼. 윤동주는 27세 나이인 1943년 7월 일본 도시사 대학 재학 중 여름 방학 때 귀향하기 직전 독립운동 했다는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2년형을 언도받고 복강(福岡) 형무소에서 복역 중 사망했다. 일본 형무소에서 13일 동안 독주사를 맞고 고통을 당하다 천국으로 갔다.
이 시는 예수가 너무나도 인류를 사랑하여 스스로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듯이 시인도 이 조국과 민족을 사랑한 나머지 기꺼이 어두운 시대의 속죄양이 되어 시대를 밝히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의 그 지고지순한 사랑이 바로 "서시"의 '모든 죽어 가는 것'에 대한 사랑과 일치한다.
이처럼 시인이 추구하는 사랑은 죽음을 각오하고 죽음을 사랑하는 종교적 사랑인 셈이다.
윤동주는 날 때부터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할아버지 윤 장로가 주재하는 개신교적 가정생활 방식에 따라 가정 예배를 보았고 주일에는 교회 집회에 참석하였고 청소년 시절과 대학 시절에도 기독교 학교에 다니면서 매주 몇 번씩의 기도회(채플)에 참석했다. 기독교적 생활 방식은 그에게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저 높이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려 있’다. 교회당도 현실적 삶과 좀 떨어진 곳이지만 교회당 첨탑 꼭대기의 십자가는 높아서 도저히 오를 수 없는 곳이다. 게다가 십자가는 단순한 고난의 표상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 자신이, 그리고 진정한 예수의 제자들이, 스스로 선택한 고난으로서 악에 대한 궁극적 승리를 의미한다. 민감한 청년 윤동주에게 그것은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어려운 부름이요, 사명이었다.
식민지인으로서의 시인의 고뇌를 절절이 느낄 수 있으며, 조선인을 말살시키기 위해 급기야 창씨개명과 신사 참배를 강요했던 일제 말기에 조국과 민족, 무엇보다도 자신의 양심 앞에서 부끄러운 변절이나 타락을 하지 않으려는 도덕적 순결 의식이 나타나 있다.
할아버지 윤하현은 기독교 장로로 부유한 농부였고, 아버지 윤영석은 명동학교에서 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독교인인 할아버지 윤하현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고모 윤신영은 송창희에게 시집갔는데, 그 고모의 아들이 독립운동가이자 그의 친구였던 송몽규였다.
당숙은 윤영춘으로 후일 가수가 되는 윤형주는 그의 6촌 재종이었다.
윤동주(尹東柱;1917-1945) 시인의 당숙 윤영춘 장로.
윤동주는 북간도 명동(明洞)에서 기독교 장로의 장손으로 출생. 어릴 때 이름은 해환(海煥).명동 소학교,은진 중학,평양 숭실 중학,용정(龍井)의 광명 중학 등에서 공부했고,연희 전문 학교 영문과를 마치고 일본에 유학,립교(立敎) 대학과 동지사(同志社)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1943년 7월 여름 방학 때 귀향하기 직전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2년형을 언도받고 복강(福岡) 형무소에서 복역 중 사망했다.
그의 시는 소년다운 순결한 의식과 기독교적 참회의 정신을 시의식의 바탕에 깔고 있다.1948년 유고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나왔다.
이 책에 실린 문익환 목사의 말에 따르면 "이 사진은 은진중학교 출신으로 숭실에 전학 간 학생들끼리 모여서 찍은 것이다. 앉아있는 친구는 이영헌이라고 장로회신학대 교수를 지낸 사람이고, 내 왼쪽은 잘 아는 윤동주, 오른쪽은 얼굴은 기억이 나는데 이름은 잊었다. 그 사람은 숭실시절 이후 전혀 보지 못했다."라고 하였고,
1925년 명동소학교(明東小學校)에 입학하여 재학 시절 고종사촌인 송몽규 등과 함께 문예지 《새 명동》을 발간하였다.
6년 뒤인 1931년, 14세에 명동소학교(明東小學校)를 졸업하고, 중국인 관립학교인 대랍자학교(大拉子學校)에 다니다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여, 용정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35년 소학교 동창인 문익환이 다니고 있는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전학하였다.
그해 10월, 숭실중학교 학생회가 간행한 학우지 숭실활천(崇實活泉) 제15호에 시 공상(空想)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신사참배 거부로 숭실중학교가 폐교되어, 문익환과 함께 용정에 있는 광명중학교로 편입하였다.
광명중에서 그는 정일권 등을 만나게 된다.
1942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 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10월 교토 도시샤 대학 영문학과에 편입하였다.[4] 도시샤대학은 윤동주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정지용이 다닌 학교로 일본 조합교회에서 경영하는 기독교계 학교였다.
1943년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전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듬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4년 3월 31일 교토지방재판소 제1 형사부 이시이 히라오 재판장 명의로 된 판결문은 징역 2년형을 선고하면서 “윤동주는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했으며 친구 감화 등에 의해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일본과 조선)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망동을 했다.”라고 적혀 있다.[10] 교토지방 재판소에서 송몽규와 함께 치안유지법 제5조 위반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뒤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그가 죽고 10일 뒤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오라' 는 전보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시신을 인수, 수습하러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뒤늦게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만일 사망시에는 시체를 가져가거나 아니면 큐슈제대(九州帝大) 의학부에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 속답 바람' 이라는 우편 통지서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후일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는 이를 두고 "사망 전보보다 10일이나 늦게 온 이것을 본 집안 사람들의 원통함은 이를 갈고도 남음이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한편,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은 결과이며, 이는 일제의 생체실험의 일환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1938년 2월 17일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京城)으로 유학, 그해 4월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숙생활을 하며 그는 저녁밤 하숙집 근처를 산책하며 시상을 떠올리고 시를 짓거나 담론을 하였다.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기숙사를 나와 북아현동, 서소문 등지에서 하숙생활을 했다.
이때 그는 친구 라사행과 함께 정지용 등을 방문, 시에 관한 토론을 하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 해 《소년(少年)》지에 시를 발표하며 처음으로 원고료를 받기도 했다.
2년여 뒤인 1941년 12월 27일에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이때에 틈틈이 썼던 시들 중 19편을 골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내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연희전문, 이화여전 성서연구반과 함께 (뒷줄 우측 1번째)
윤동주의 장례식윤동주가 어린시절 뛰놀던 마당에서 윤동주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영정 왼쪽 첫 번째 사람이 문재린 목사(문익환의 부친)다. 사진에는 장례식 날짜와 사망 날짜, 29세에 사망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사업회
위 - 일본 도쿄 릿쿄대에 다니던 윤동주(뒷줄 오른쪽)가 1942년 여름방학 때 귀향해 송몽규(앞줄 가운데) 등 가족들과 찍은 사진. 일본에 도착한 윤영석과 윤영춘은 송몽규를 면회하였다. 싸리나무처럼 여위어 있던 송몽규는 매일 이름 모를 주사를 맞는다고 하소연하면서 옥에 갇힌 조선청년들과 윤동주도 주사를 맞았다고 알려주었다. 송몽규도 윤동주가 사망한 지 23일 만에 옥사하였다.
아래 - 윤동주 장례식 사진. 서기 1945년 2월 16일에 일본 후꾸오까 감옥에서 작고하였다. 묘비는 같은 해 6월 14일에 세워졌다.
청년문사와 시인'청년문사 송몽규지묘'와 '시인 윤동주지묘'. 떨어져 있지만 같은 묘역에 안장된 두 분의 묘지. 이제는 용정 현지인들이 들러 참배도 하고 조선족 학생들도 더러 찾아온다. 묘지석도 새롭게 단장된 모습이다. 왼쪽 송몽규의 묘지석에는 '용정중학교 동창회'가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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