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kim631217sjz 블로그홈 | 로그인
시지기-죽림
<< 4월 2025 >>
  12345
6789101112
13141516171819
20212223242526
27282930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문학

나의카테고리 : 文人 지구촌

미국 시인 - 프로스트
2017년 05월 01일 01시 18분  조회:4614  추천:0  작성자: 죽림
 
출생 1874. 3. 26, 미국 샌프란시스코
사망 1963. 1. 29, 보스턴
국적 미국 -프로스트

요약 일상적인 언어와 익숙한 리듬, 평범한 생활에서 취한 상징을 사용하여 뉴잉글랜드 지방 생활의 평온함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시인이 된 뒤 결핵일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듣고 농촌으로 이주해 가축을 키우며 살다가 영국으로 건너갔다.

프로스트(Robert (Lee) Frost)
프로스트(Robert (Lee) Frost)

미국의 시인이다.

생애

아버지 윌리엄 프래스콧 프로스트 2세는 뉴잉글랜드 출신으로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루이스타운의 한 사립학교 교장으로 일하다가 스코틀랜드 태생의 교사 이자벨 무디와 결혼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가 그곳에서 신문기자가 되었다. 1885년 그가 폐결핵으로 죽자 미망인과 두 아이들(여동생은 1876년에 태어났음)은 장례를 치르기 위해 매사추세츠의 로렌스까지 가야만 했다. 그후 가난했던 프로스트의 어머니는 캘리포니아로 돌아오지 못하고 매사추세츠와 뉴햄프셔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돌보았다.

그녀는 아들 로버트의 성격과 문학 발전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어머니의 스코틀랜드인다운 성실함과 강한 신앙심이 실용성과 신비주의를 혼합한 프로스트의 시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으리라 짐작된다.

어린시절 프로스트는 야구와 축구를 무척 좋아했고 책에는 별 취미가 없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어머니의 열성으로 그는 뉴햄프셔의 세일럼 그래머 스쿨을 가까스로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로렌스에 있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그의 태도는 바뀌어, 1892년 그 학교를 졸업할 때는 후일 그가 결혼하게 된 엘리노 미리엄 화이트와 함께 졸업식 고별사를 할 만큼 뛰어난 학생이 되었다.

시에 대한 관심은 그가 편집인이던 학교신문에 이미 여러 편의 시를 발표했던 사실에서 잘 드러나며, 졸업식 고별사에서도 그는 시인의 경험에 대해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프로스트의 할아버지는 그가 법률가가 되기를 바라고 졸업하던 다음 해 가을 그를 뉴햄프셔의 하노버에 있는 다트머스대학으로 보냈다. 그러나 단조로운 학과 공부에 적응하지 못한 프로스트는 한 학기가 채 못 되어 학교를 떠났다. 그뒤 몇 년 간 로렌스에 있는 집에서 시를 쓰며 때로 학교교사, 방적공, 신문기자로 돈을 벌면서 지냈다.

1895년 결혼한 뒤 2년 동안 그와 그의 아내는 어머니를 도와 조그마한 사립학교를 운영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잡지 등에 시를 기고했으나 빛을 보지는 못했다. 그가 처음으로 시를 써주고 원고료를 받은 것은 1894년 주간 문학잡지 〈인디펜던트 The Independent〉에 실린 〈나의 나비 : 비가 My Butterfly : An Elegy〉였다.

1897년 가을 프로스트는 고등학교 수준의 라틴어와 그리스어 교사가 되기 위해 하버드대학에 들어갔다.

그는 이들 과목에서 훌륭한 성적을 얻었으나 병 때문에 2년이 채 못 되어 공부를 중단했다. 결핵일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듣고 그는 생활방식을 철저히 바꾸어 매사추세츠 머슈언에서 가금 사육사가 되었다. 이런 모험은 처음에는 성공적이었다. 그는 1900년 할아버지가 그를 위해 사두었던 뉴햄프셔 데리의 한 농장으로 이사했다. 프로스트의 첫 아들은 1896년에 태어났으나 그가 이사하기 전에 죽었고, 2번째 아이인 딸은 당시 1세가 채 안 된 때였다.

데리에 살면서 4명의 아이가 더 태어났고 농부로서 실패한 프로스트는 다시 교사가 되었다(1906~12). 프로스트의 훌륭한 걸작시 대부분은 그가 데리에 있을 때 씌어진 것이지만 그때는 어느 편집자도 그의 글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911년 프로스트는 1901년에 죽은 할아버지로부터 농장을 물려받았지만 즉시 농장을 팔고 그 다음해에는 시작(詩作)에만 전념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갔다. 그는 버킹엄셔의 비컨스필드에 정착한 뒤 데리에서 썼던 서정시를 모아 정리했다. 이 원고는 런던의 한 출판업자에 의해 1913년 〈소년의 의지 A Boy's Will〉로 출간되었다.

그 다음해 같은 출판업자에 의해 이야기체 시모음집 〈보스턴의 북쪽 North of Boston〉이 나왔다. 영국 비평가들의 열렬한 찬사가 있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출판업자 3명이 출판의뢰를 해올 정도였다. 영국에서는 E. 파운드, E. 토머스, W. W. 깁슨, T. E. 흄, L. 애버크롬비 등과 친교를 가졌다. 전원으로 오라는 조지아의 시인 깁슨과 애버크롬비의 권유를 받아들여 1914년 글로스터셔의 시골로 이사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이후 1915년 2월 프로스트는 미국으로 돌아왔으며, 그무렵 그의 시집 2권이 뉴욕에서 출판되었다. 그후 뉴햄프셔의 프랭코니아에 한 작은 농장을 샀고, 그의 시가 미국인들에게 따뜻한 환대를 받게 되자 그의 무명시절도 막을 내렸다. 그는 암허스트대학의 영문학 교수(1916~20), 미시간대학교의 시학 교수(1921~23), 애머스트대학(1923~25), 미시간대학교(1925~26)의 교수로, 그후 1938년까지는 애머스트대학의 시간강사로 일했다.

1939~43년 하버드대학교의 랠프 왈도 에머슨 펠로, 1943~49년에는 다트머스대학의 인문과학교수로, 1949년부터 죽을 때까지는 애머스트대학에서 심프슨 렉처러로 한직(閑職)을 유지했다.

생애와 활동

프로스트는 지극히 복잡한 사람이었다.

친구라고 부를 정도로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인정이 많고 적극적이며, 남을 돕는 일에 열심이었다고 한다. 이런 우애관계는 1909년 프로스트가 뉴햄프셔 데리빌리지의 핑커턴 아카데미에 있을 때 그의 제자였던 존 바틀릿과 맺은 친교가 대표적이다. 이 우애는 바틀릿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마거릿 바틀릿 앤더슨의 〈로버트 프로스트와 존 바틀릿 : 그 우정의 기록 Robert Frost and John Bartlett : The Record of a Friendship〉(1963)에 기록되어 있다.

데리의 농장시절에도 프로스트는 자질이 별로 없는 농부였다. 그후 그는 자기가 너무 게을러 농부로 성공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곤 했다. 데리의 농장으로 가기 전에 이미 그는 열정적인 식물학자가 되어 있었다. 그결과 농장경영보다는 농장에 심었던 각종 식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아이들이 식물학에 관한 흥미를 나눌 수 있을 만큼 자라자, 그는 산책 길에 아이들을 데리고 자기 농장보다 더 먼 곳까지 다녀오곤 했다. 〈소년의 의지〉에는 농사보다는 식물에 관심을 보인 시가 더 많다.

프로스트는 계속 농장 일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농사일을 직접 하는 것은 잘 하지 못했으나 농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했고, 또 뉴욕에서 출간된 2권의 시집에는 농부다운 목소리로 노래한 시들이 많다. 그러나 프랭코니아에 농장을 산 지 몇 개월이 못 되어 그는 애머스트대학의 교수직을 받아들였고 가족과 함께 매사추세츠로 이사했다.

그후 수년 간 프랭코니아의 농장은 별장일 뿐이었다. 그가 고향을 떠나 타관을 떠돌면서 시 낭송회를 열 때도 시와 연설에서 자신을 뉴잉글랜드의 농부라고 소개하기를 좋아했다. 비록 프로스트가 농사일을 잘하는 농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농부가 되고자 했던 그의 욕망만이 시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결론지으면 안 된다. 농장은 그의 동료 교수들과 그의 독자들과의 사교에 별장 이상의 역할을 했다. 프로스트에게서 자연은 종교적인 중요성을 지닌 것이었다.

그는 매일 넓은 풀밭을 건너고 농장의 숲을 지나, 때로는 그보다 더 멀리 친구의 농장까지 돌아다니기를 좋아했고, 그의 이웃들은 프로스트가 그들 농장을 방문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러한 산책이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고 새로운 시를 발견하게 했다. 그의 걸음걸이는 식물학자와 꼭 같았고, 그는 놀라울 정도로 많은 들꽃의 이름을 댈 수 있었다.

1939년 부인이 죽던 해에 그는 버몬트 립턴의 브레드로프 영어학교 근처에 상당한 규모의 농장을 샀다.

프로스트에 대한 평가

프로스트의 시는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층의 독자에게 호소력을 갖는다. 이는 그의 시가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해석될 수 있어 읽는 사람마다 그의 시에서 기쁨을 발견하기 때문인 듯하다. 그는 20세기의 여러 시인들이 시도했던 실험적인 방법을 피했고 '새로운 옛 방법'에 만족한다고 거듭해서 말했다.

그는 19세기 영국의 낭만파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로부터 일상생활의 사건이나 상황, 그리고 보통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것에 가까운 언어를 서정적인 시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는 그의 시를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유행하던 감성적인 시와는 달리 '시적이지 않은 시'가 되게 했다. 또 19세기의 영국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에게서 극적인 독백과 대화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웠다. 고대 그리스와 라틴 작가들 중 특히 테오크리토스와 베르길리우스를 공부했으며 그결과 대화체 전원시, 즉 에클로그의 목가적인 전통을 세웠다.

프로스트를 읽는 이들은 대부분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자연적인 대상의 외양과 시골 사람들의 행동을 정확하게 관찰한 그의 기록에서 기쁨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의 시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자연과 사람에 대한 관찰 그 이상이다. 문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부터 그는 그가 상상하는 시골풍경에 상징적·형이상학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그결과 그의 대표적인 시들은 그의 외적 자아와 내적 자아의 관계, 또한 타인·자연·우주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뛰어넘어 심오한 종교적 신념에 바탕을 둔 가치를 설명한다. 폭넓은 그의 시에는 공포와 두려움의 분위기를 지닌 것도 있지만 확신이 주류를 이룬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2283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1803 중국 조선족 문단 "문화독립군"들 2016-11-11 0 3565
1802 "은진"과 동주 2016-11-11 0 3983
1801 "명동"과 동주 2016-11-11 0 3566
1800 詩人은 삶이란 진액을 증류해서 뽑아내는 련금술사이다... 2016-11-11 0 3258
1799 詩를 배우려는 초학자에게 보내는 편지 2016-11-11 0 3540
1798 詩란 의지와 령혼의 몸부림이다.../ 시의 흥취 10 2016-11-11 0 3448
1797 토템문화를 알아보다... 2016-11-11 0 3754
1796 가사창작할 때 <<아리랑>>을 람용하지 말자... 2016-11-10 0 3824
1795 개성이 없는 예술작품은 독자들의 호감을 살수 없다... 2016-11-10 0 3291
1794 가사창작도 예술품 제작이다... 2016-11-10 0 3860
1793 가사가 대중성이 없이 독서적인 향수를 느낄수 있어도 좋다... 2016-11-10 0 3868
1792 시조짓기에서 3장6구는 완결된 뜻의 장(章)을 이루어야... 2016-11-10 0 3786
1791 詩作할 때 민족의 정서와 녹익은 가락을 집어 넣어라... 2016-11-10 0 3810
1790 심련수, 27세의 짧은 생애에 근 250여편의 문학유고 남기다... 2016-11-10 0 3974
1789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2016-11-10 0 3682
1788 일기책에 늘 단시를 적으라... 2016-11-10 0 3578
1787 詩는 그래도 탁마해야 제맛이 난다... 2016-11-10 0 3511
1786 세우는데는 석삼년, 허물어 버리는데는 "단 하루 아침" 2016-11-10 0 3668
1785 노루 친 막대기를 석삼년, 아니 30년 더 넘어 우려먹다... 2016-11-10 0 3947
1784 중국 조선족 문학사에서 첫 "단행본아동작가론" 해빛 보다... 2016-11-10 0 3591
1783 詩人은 시시비비, 진진허허의 대문을 여는 도인이다... 2016-11-10 0 4171
1782 詩人이라 하여 모두가 詩人인것은 아니다... 2016-11-10 0 3705
1781 늦둥이 시인 하이퍼시집 낳다... 2016-11-10 0 4386
1780 중국 조선족 문단 생태문학을 알아보다... 2016-11-10 0 3763
1779 참된 문학은 머물러있는 문학, 가짜문학은 흘러가는 문학 2016-11-10 0 3906
1778 중국 조선족 시조문학을 파헤쳐보다... 2016-11-10 0 4064
1777 리상각 / 김관웅 / 조성일 / 허동식 2016-11-10 0 4119
1776 중국 조선족 록의 왕 - 최건도 음유시인 아니다?... 옳다...! 2016-11-10 0 3740
1775 윤동주의 시는 현실적 모순의 내면적인 목소리이다... 2016-11-10 0 4110
1774 "내 령혼이 내 말 속으로 들어간다"... 2016-11-09 0 4080
1773 詩는 감각과 정신을 제거한 무아에서 령감을 얻어 詩作해야... 2016-11-09 0 3479
1772 작문선생님들께 보내는 편지; 시에 젖은 아이들은 아름답다... 2016-11-07 0 4278
1771 詩는 삶의 구석구석에 숨어 있다... 2016-11-07 0 4031
1770 그는 그람이라는 칼을 집어 두 사람 사이에 놓았다... 2016-11-07 0 4151
1769 거대한 장서더미속에서 맹인으로 보낸 인생의 후반부 빛났다... 2016-11-07 0 3910
1768 詩는 말을 넘어서 상징과 음악성속에 존재한다... 2016-11-07 0 5633
1767 최고의 작품은 최대의 상상에서 생긴다... 미국 포우 2016-11-07 0 4394
1766 가장 오랜전 <<령감>>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者 - 플라톤...?...! 2016-11-07 0 3806
1765 중국 당나라 녀류시인 - 설도 2016-11-07 0 4027
1764 중국 유명한 시인들을 알아보기 2016-11-07 0 3829
‹처음  이전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