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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녀류시인 - 무라사키 시키부
2017년 02월 02일 22시 03분  조회:4192  추천:0  작성자: 죽림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 973-1016)

     헤이안 시대의 여류 시인으로,

궁중 생활에서 얻은 모티프를 토대로

일본 문학사 최고(最古)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겐지 이야기〉를 집필했다.

11세기에 지어진 이 소설은

다양한 인물들의 성격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정치적 암투까지 담은 작품으로,

세계 최초로 완결된 형식을 갖춘 사실적인 산문 로맨스이다.

이는 서양의 소설 형식보다 8세기나 앞선 것이다.

기존의 매우 단순한 수준의 성격 묘사와 단조로운 이야기 형식에 그치지 않고,

그보다 한 차원 높은 상상력으로

현대적인 소설의 형식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일본뿐만 아니라 오늘날 서구 문학계에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문학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무라사키 시키부는 973년경 교토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하급 귀족 후지와라 다메토키의 1남 2녀 중 둘째 딸로,

이름은 후지와라 다카코라고 알려져 있으나 이것도 확실하지는 않다.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라는 이름에서

'무라사키'는 어린 시절의 이름이거나

《겐지 이야기》의 여주인공 중 한 사람인 무라사키노우에(紫の上)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며,

'시키부'는 당시 학문을 가르치던 궁중 여관(女房)을 지칭하는 말이다.

즉 무라사키 시키부는 '무라사키라는 이름으로 불린 여관'이라는 의미가 된다.

 

무라사키의 집안은

대대로 유명한 학자 집안으로,

아버지 후지와라 다메토키는 명망 높은 한학자였다.

 

무라사키는 이런 집안 환경 때문인지 일찍부터 한학에 뛰어난 자질을 드러냈다.

당시 한학을 비롯한 학문은 남자들만 배울 수 있었고,

상류 계층의 여자만이 가나(일본 문자) 정도를 간신히 익힐 기회를 가졌다고 한다.

 

무라사키는 어린 시절 남동생 노부노리가 《사기》를 배울 때

옆에서 귀동냥을 했는데,

항상 남동생보다 먼저 그 뜻을 해독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녀가 사내아이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크게 안타까워하면서

그 재능을 아깝게 여겨 한학 공부를 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높은 학문 수준은 여자로서의 일생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무라사키는 998년

중급 귀족이던 후지와라 노부타카와 결혼했는데,

이때 그녀의 나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늦은 26세였다.

더구나 남편은 45세에 이미 처도 있었다.

이런 남자와 결혼한 것은 그녀의 학식에 대한 소문 때문에

남성들이 청혼을 꺼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때의 결혼이 무라사키에게도 재혼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으나 확인된 바는 없다).

 

무라사키는 후지와라 노부타카와의 사이에서 딸 하나를 낳았으나,

결혼 생활은 원만하지 않았다.

학자적이고 자존심이 높은 무라사키에게

남편 노부타카가 거리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1001년,

결혼한 지 3년 만에

노부타카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이때 세간에서 '옛날에는 여자들이 경을 읽는 것조차 금했는데,

여자의 몸으로 한학서들을 읽으니 복이 없지'라고 수군거렸다고

무라사키는 일기에 적고 있다.

 

성 교육을 환영하지 않았던 당시 그녀의 높은 지적 수준은

사람들과의 교유에도 장애로 작용했던 것이다.

남편과의 사별, 세상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

그녀는 집 안에 틀어박혀 홀로 일기를 쓰고 한학서들을 읽으며 고독하게 지냈다.

 

그러던 중 1005년 12월

당시 정권을 쥐고 있던 대귀족 후지와라 미치나가가

그녀의 학식에 대한 소문을 듣고,

여관으로서 궁에 들어와 자신의 딸이자

이치조 천황의 중궁(中宮, 황후와 동격인 천황의 부인)인

쇼시의 문학 선생이 되어 줄 것을 청했다.

 

무라사키는 궁에 들어간 이듬해 7월 무렵부터

《무라사키 시키부 일기》를 쓰며 궁중 생활을 기록했다.

 

《겐지 이야기》는

후대 작가가 창작한 것이라는 설부터

복수의 작가가 집필한 것이라는 설 등이 제기되고 있는데,

무라사키 시키부를 저자로 인정하는 것은 이 일기의 내용에 따른 것이다.

 

중궁 쇼시는

그녀의 문학적 재능을 아껴 주었지만,

정치적이고 화려한 궁정 생활은 무라사키에게 잘 맞지 않았다.

그녀는 궁중 사람들을

"남을 비난하고 자기만 잘났다고 떠드는 사람들 앞에서

나중에 시끄러울 것을 생각해 입을 열기도 심란하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적응하지 못했다.

 

또한 그녀뿐만이 아니라 궁중 사람들 역시

고고한 태도와 높은 자존심을 지닌 무라사키를 꺼렸다.

특히 황후의 여관으로,

후일 그녀와 나란히 헤이안 시대의 문학가로 꼽히게 될 세이 쇼나곤과 사이가 나빴다.

드러내 놓고 서로를 비난할 정도여서,

무라사키는 전형적인 궁중 여관이었던 세이 쇼나곤에 대해

 '거만한 얼굴로 잘난 척하는 여성',

'혼자 똑똑한 척 한자를 써대지만 자세히 생각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무라사키는 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나 이런 궁중 생활은 《겐지 이야기》에 많은 모티프를 제공했다.

친정으로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궁 쇼시의 부름으로 다시 궁에 들어간 무라사키는

순탄치 않은 궁중에서의 생활을 《겐지 이야기》를 쓰는 데 몰두하면서 이겨 냈다.

 

이 작품은 무라사키가 궁에 들어오기 전부터 썼다고도 하는데,

이 작품의 초안을 본 후지와라 미치나가가

그녀의 학문 수준을 높이 사 궁중 여관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소설을 지으라는 쇼시의 명으로 이야기를 구상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이 설에 따르면

그녀는 명을 받고 이야기를 구상하기 위해

이시야마데라(石山寺)라는 절에 7일 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새로운 발상이 떠오르지 않아 고심하던 무라사키는

달 밝은 밤 호수의 수면에 떠 있는 달빛을 무심히 바라보다

빛과 같은 존재인 히카루라는 귀공자의 이야기를 구상해 냈다.

이 설화를 토대로

이시야마데라에는 그녀가 《겐지 이야기》를 집필했다고 전하는 방도 보존되어 있다.

 

《겐지 이야기》는

기리쓰보 천황의 둘째 황자인 히카루 겐지의 연애담과 궁중 생활,

겐지 사후 자손들의 이야기를 담은 후일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4대 천황, 70여 년간에 걸쳐 일어나는 일로,

일대기적 모노가타리들과 795수의 와카(和歌, 일본의 정형시)로 구성된,

200자 원고지 4천 매가 넘는

세계 최고(最古), 최장(最長)의 작품이다.

 

인물들이 지닌 욕망과 그들의 세밀한 심리 묘사,

궁정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암투와 사건들이

현대소설만큼이나 짜임새 있고 현실감 넘치게 그려져 있으며,

작품 전반에 인간의 운명과 인간성에 대한 통찰력이 빛난다.

 

기존의 단순한 설화식 이야기 구조에서 탈피해 견고한 구성을 갖추고

다양한 인간 유형을 그린 최초의 소설 작품으로,

이런 소설적 표현 방식은 후대의 역사소설에 영향을 끼쳤다.

또한 미려하고 한시적인 문장들 역시

일본의 서정시인 와카와 렌카(連歌, 와카를 토대로 발전한 시 형식으로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창작한다)에 영향을 미치는 등

일본 문학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무라사키 시키부가 《겐지 이야기》를 통해 이룩한 성과는
양에서는 8세기나 지난 후에야 가능했다.

 

- 청아출판사(이하닝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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