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농부인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한 어머니는 직접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가족이 그라나다 시로 이사한 뒤 그곳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 다녔다. 아버지의 강요에 못이겨 그라나다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곧 그만두고 문학·회화·음악에 몰두했다. 조숙한 작곡가이자 뛰어난 연주가로서, 친구들 사이에서 '음악가'로 통했다. 1918년 카스티야 여행에서 영감을 얻어 〈인상과 풍경 Impresiones y paisajes〉이라는 산문집을 펴냄으로써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
이 책은 '작가'로서의 가르시아 로르카를 예고해주었다.
1919년 스페인 수도의 문화적 중심이던 마드리드대학의 기숙사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화가 살바도르 달리, 영화제작자 루이스 부뉴엘, 시인 라파엘 알베르티를 비롯한 그와 같은 세대의 예술가 및 작가들과 사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인 후안 라몬 히메네스를 비롯한 기성세대 저명인사들과도 만났다.
대학 기숙사에서 보낸 첫 2년 동안 스페인 문단 전체에 가르시아 로르카의 시가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출판한 시는 거의 없었는데, 그것은 "시는 입으로 읊어야 한다. 책 속의 시는 죽은 것이다"라는 그의 생각 때문이었다. 따라서 대학 기숙사와 마드리드의 여러 지역에서 중세 음유시인처럼 자신이 쓴 시와 희곡을 낭송했다. 그리하여 작가생활 내내 그의 작품은 출판되기 훨씬 전부터 입으로 창작되어 전파되었다.
이당시 그는 뒷날 〈시집 Libro de poemas〉(1921)·〈첫번째 노래 Primeras canciones〉(1936)·〈노래 Canciones〉(1927)로 엮어져 나오게 될 실험시들을 쓰는 한편 첫 희곡 〈나비의 장난 El maleficio de la mariposa〉을 쓰고 있었다.
이 희곡은 1920년 마드리드의 에슬라바 극장에서 처음으로 무대에 올려졌으나 첫날 공연 뒤 막을 내리고 말았다.
가르시아 로르카는 1922년 그라나다에서 열린 민속음악축제(Fiesta de Cante Jondo)에서 저명한 작곡가 마누엘 데
파야와 공동으로 작업한 것이 계기가 되어, 자신이 지닌 천재성을 깨닫게 되었다. 민속음악과 집시음악의 전통 속에서 자신의 음악적·시적·영적 충동의 해답을 발견한 듯했다.
〈칸테 혼도의 시 Poema del cante jondo〉(1922 집필, 1931 출판)와 〈집시 노래집 Romancero gitano〉(1924~27 집필, 1928 출판)은 이러한 해답을 서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집시 노래집〉에 실린 18편의 시에는 전통 시형식인 스페인 발라드(romance)가 지닌 전통적인 매력과 새롭고 놀라운 이미지가 결합되어 있다. 그 예로 〈스페인 민병대의 발라드 The Ballad of the Spanish Civil Guard〉에서 민병대가 집시 마을을 향해 불길하게 진군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검은 말들/검은 편자/검은 망토 위에 번들거리는/잉크와 밀랍 얼룩/두개골이 납으로 되어/그들은 울지 않네/칠피 가죽으로 된 영혼을 달고/그들은 길을 따라 내려가네"
〈집시 노래집〉을 쓰면서 그는 희곡도 썼다.
1927년 살바도르
달리가 무대를 꾸며 시적이고 낭만적인 운문극 〈마리아나 피네다 Mariana Pineda〉를 바르셀로나에서 공연함으로써 극 부문에서 처음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같은 해 역시 같은 도시에서 대중을 상대로 한 그림전시회도 열었다.
1928년에 펴낸 〈집시 노래집〉은 하루아침에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으나 행복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단순한 집시 기질을 과장된 신화로 만든다고 불쾌하게 여겼으며, 그 스스로 "내 평생 가장 고통스러웠던 상태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 정서적 위기에 시달린 끝에 위안과 새로운 영감의 샘을 찾아 1929~30년을 미국과 쿠바에서 보냈다.
이 여행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 1940년 그의 사후에 발간된 〈뉴욕의 시인 Poeta en Nueva York〉이다. 이 작품에서는 기계화된 문명에서 느끼는 생명의 말살을 잔인하고 뒤틀린 이미지들의 부조화스러운 결합을 통해 표현한다.
"숟가락으로/그는 악어의 눈을 파냈다/그리고 원숭이의 엉덩이를 때렸다/숟가락으로"
1931년 그는 스페인으로 돌아와 나중에 〈타마리트 시집 Diván del Tamarit〉(1936)으로 펴내게 된 시들을 쓰기 시작했으며, 다시 희곡을 썼다.
어렸을 때부터 지녀온 꼭두각시에 대한 열정을 표출하여 〈빌리클럽 꼭두각시 Los títeres de cachiporra〉와 〈돈 크리스토발의 인형극 Retabillo de Don Cristóbal〉이라는 2편의 인형극을 썼다. 이 인형 소극(笑劇)까지도 우울한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스페인 공화국의 출범으로 가르시아는 연극 부문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수 있게 되었다.
문교부는 교육받지 못한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고전희곡 가운데 명작들을 접할 수 있게 해준 학생극단 '바라카'(La Baraca)에 보조금을 지급했다(1932~35). 가르시아는 바라카의 설립자·지도자·연출자·음악가로서 로페 데 베가, 칼데론 데 라 바르카, 세르반테스의 작품을 무대에 올려 폭넓은 연극경험을 쌓았다.
이러한 결실이 민속극 3부작 가운데 제1편인 〈피의 결혼식〉(1933)이다.
이 작품은 결혼식날 신부가 몰래 사랑해온 남자와 달아나는데 결국 두 경쟁자는 싸우다가 서로 상대방의 손에 죽었다는 뉴스 기사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가르시아의 희곡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비운의 인물들로, 원초적인 열정과 문명사회의 단호한 명예규범 사이에서 갈등을 겪다가 결국은 죽고 만다.
1934년 자신의 친구였던 한 투우사가 쇠뿔에 받혀 죽은 사건을 바탕으로 〈이그나시오 산체스 메히아스를 애도하며 Llanto por Ignacio Sánchez Mejías〉(1935 출판)를 썼다.
이 시는 그의 가장 뛰어난 시이며 현대 스페인 문학뿐만 아니라 세계문학에서도 가장 뛰어난 애가로 손꼽힌다. 여기에서 "오후 다섯 시에"(A las cinco de la tarde)라는 공허하고 슬픈 후렴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오후 다섯 시에/정각 오후 다섯 시에/한 소년이 참회자의 흰옷을 샀네/오후 다섯 시에/한 바구니의 석회는 이미 준비되었다네/오후 다섯 시에/나머지는 죽음 그리고 죽음뿐이네/오후 다섯 시에"
1934년말 발표한 〈예르마〉는 3부작 가운데 제2편이며, 〈피의 결혼식〉과 더불어 20세기에 성공을 거둔 몇 안되는 시비극(詩悲劇) 중 하나이다.
'비극적 시'인 이 희곡은 아이가 없는 것에 절망해 불임 남편을 죽이는 한 여자의 고통을 다루고 있다. 가르시아는 1936년 6월의 어느날 밤 친구들의 집에서 3부작 가운데 마지막 작품인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을 발표했다. 거의 모두 산문으로 쓴 이 희곡은 독재적인 어머니에 의해 상가(喪家)에 갇혀 지내는 4자매가 분노와 욕망으로 몸부림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1936년 7월 내전이 터지자 불안을 느끼고 마드리드를 떠나 그라나다로 갔다.
그러나 작품에 계속 등장하는 참혹한 죽음의 전조는 운명으로 다가왔다. 그라나다에서 지내던 어느날 밤 그는 재판도 받지 않은 채 민족주의자들에게 총살당했다.
* 낱장 / 20세기 스페인 문학의 최고로서 `좌절한 스페인 양심`으로 추앙 받고 있는
요절한 시인이며 극작가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탄생 100주년 기념, 스페인, 1998
* 낱장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스페인, 1980
* 낱장 / 로르카 탄생 100주년 기념, 이탈리아, 1998
* 낱장 / 로르카, 알바니아, 1998
===@@=======벙어리 소년
소년이 제 목소리를 찾고 있었다.
(귀뚜라미들의 왕이 그걸 찾고 있었다)
물방울 속에서
소년은 제 목소리를 찾고 있었다.
말하려고 그걸 원하는 게 아니에요;
나는 그걸로 반지를 만들 거예요
그래서 그가 자기 작은 손가락에
내 침묵을 끼게 하려구요.
물방울 속에서
소년이 자기 목소리를 찾고 있었다.
(유폐된 목소리가, 멀리서,
귀뚜라미의 옷을 입는다)
―《강의 백일몽》(정현종 옮김, 민음사)에서
때로 언어는 얼마나 무의미한가. 당신들이 지껄이는 언어는 자주 아무것도 의미하지 못하는 잡음이기 쉽다. 우우, 당신들은 너무 많은 잡음들에 둘러싸여 있다. 진정한 언어는 침묵 안에 존재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침묵을 읽어내기란 잡음들의 인간들에게는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
그러므로 이 시의 ‘말하려고 그걸 원하는 게 아니에요’ ‘내 침묵을 끼게 하려구요’ 구절은 남다르다. 이미 침묵으로 모든 걸 말하는 벙어리 소년에게 목소리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은 반지로 만들어 손가락에 낄 침묵 이상도 아니다. ‘물방울 속’이라는 공간의 설정은 이 시의 시적 공간이 침묵으로 가득찬 곳이라는 것을 극대화시키면서 이 시를 환상적으로 만들어준다. 그가 찾고자 하는 목소리는 그럼, 멀리서 들리는 귀뚜라미 소리 같은 것일까?
풍경
실수로 저녁은
추운 옷을 입었다.
창유리의 演舞를 통해
애들은 모두
노란 나무 한 그루가
새들로 변하는 걸 본다.
저녁은 저 아래
강가까지 퍼져 있다.
그리고 사과의 紅潮가
타일 지붕 위로 떨고 있다.
로르카는 집시민요시에서 보여주는 정열과는 또다른 아주 극단적인 서정을 지니고 있다. 그의 서정은 말이 별로 없이 아주 적막하기 이를 데 없다. 그는 마치 앞의 시에 나온 벙어리 소년처럼 겨우 얘기하지만, 행과 행 사이 연과 연 사이 그가 잠시 언어를 거두고 침묵하는 사이 아주 많은 말을 한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곧 모든 것일 수도 있는 그런 말이다. 그 말들은 그가 창조해낸 기이하고 아름다운 세계로 우리를 데려간다.
자살
(그의 기하학을
몰랐기 때문인지)
어느 날 아침 열시
그 젊은이는 잊었다.
부서진 날개들과 造化로
그의 심장은 가득 차 올랐다.
자기 입 속에 말을 간직했으나
한마디 하찮은 말만이 남았다.
장갑을 벗자
손에서 더욱 엷은 재가 떨어졌다.
발코니에서 그는 탑을 보았다.
그는 자기가 발코니이자 탑이라고 느꼈다.
물론 그는 탑신의 시계틀 속에서
멎은 시계가 어떻게 자기를 보고 있는지를.
흰 빛으로 반짝이는 소파 위에 제 그림자가
조용히 뻗어 있는 걸 그는 보았다.
단단하고 기하학적인 그 젊은이는
도끼로 거울을 깼다.
그게 깨지자, 거대한 그림자의 흐름이
그의 환상의 방에 넘쳤다.
로르카의 세계는 기이하고 환상적인 것들로 가득차 있다. 그 환상은 언어와 언어가 만들어내는 긴장에서 만들어지기도 한다. 환상으로 가득찬 세계란 궁극적으론 시의 세계일지 모른다. 당신들이 그 세계로 들어가길 멈칫거린다면 그 세계는 영원히 잊혀질지 모른다. 당신들은 삶의 귀중한 경험 하나를 잃어버릴지 모른다. 그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머리 따위는 필요없다. 거추장스런 당신들의 텅 빈 머리일랑은 잠시 발 밑에 내려둬라. 당신들의 가슴만으로 충분하다. 당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도끼로 거울을' 깨는 일뿐이다. 당신들이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당신들이 도덕이라고 믿고 있는 그 허상과 허영들과 맞대면하고 그것을 가차없이 깨버리는 일이다. 그러면 당신들의 방에 얼마나 많은 환상들이 존재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환상이 사실은 진실이었다고, 그 거울을 깨기 전에는 당신들은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을 거다. 거울을 깼다면 이제 당신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 환상들이 그 세계의 매혹들이 서서히 가슴으로 흘러들어와 온 몸을 감염시키기까지, 매독처럼. 그 불온한 감염이 시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이란 사실을 당신들은 알까. 우우, 당신들은 너무 많은 잡음과 거울들에 둘러싸여 있다. 내가 보기엔 여간해서는 그 허울 좋은 당신들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처럼 보인다. 후후, 당신들은 영원히, 그렇게, 살게, 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규리의 시와 함께] 진심이다/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
진실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것이
아, 이토록 힘이 들까!
너를 향한 사랑 때문에 바람이 아프다.
가슴이 아프다,
모자가 아프다.
누가 나에게 네 허리의
이 허리띠를 사 갈까?
누가 이 하얀 실오라기
슬픔을 사서, 하얀 손수건을 만들까?
진실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것이
아, 이토록 힘이 들까!
9월이 왔어요. 도저히 물러갈 것 같지 않던 여름이 뒤를 보이고 도저히 변치 않을 것 같던 사랑도 어느덧 뒤를 보이며 가고 있겠어요. 참 슬프지만 아름다운 순리예요.
가는 여름에 싸여 긴 여행을 했어요. 먼 곳에서 이곳을 다시 바라보았어요. 그곳에도 바람이 불고 해가 졌어요. 아침저녁 서늘한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며 아득한 이름들을 불러보기도 했어요. 한결같이 그 이름들이 너무 멀어 어떻게 돌아갈지 막막했어요. 나무가 옮기는 그늘들, 바람이 데려가는 시간들 아래서 낯선 언어들에 깜짝깜짝 놀라며 중얼거리던 시에 로르카가 접혀 있었어요.
그리고 돌아왔어요. 9월이 짐가방처럼 함께 도착했어요. 어떤 사랑은 두고 오기도 했고 어떤 사랑은 다시 데려오기도 했어요. 슬픔의 실오라기 하나하나로 하얀 손수건을 짜야 하는 시간이 오더라도 또 견디어 갈 거예요. 진심으로 이곳의 시간들을 사랑했으니까요. 그리하여 가는 여름의 뒷모습에 대고 말해 보겠어요. 그 무덥던 날들의 행간들 진심이었다고, 또한 진심일 거라고. (시인)(매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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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夢遊)의 민요시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녹색 나 그대 사랑하네 녹색으로.
녹색 바람. 녹색 가지들.
바다엔 배
산에는 말.
허리에 그림자를 감고
난간에서 꿈꾸는 그녀.
싸늘한 은빛 눈.
녹색. 나 그대 사랑하네 녹색으로.
집시의 달 아래.
세상은 그녀를 아무것도 보지 못하네.
... ... .
녹색 나 그대 사랑하네 녹색으로.
녹색 바람 녹색 가지들.
두 명의 대부가 올라갔네
긴 바람이 입 속에
쓸개. 박하. 알바아카의
묘한 냄새를 남겨놓네.
대부여! 말씀해주세요. 어디에 있나요?
당신의 가련한 딸은 어디에 있나요?
그녀가 얼마나 그대를 기다렸는지!
그녀가 얼마나 그대를 기다릴 것인지!
싱싱한 얼굴 검은 머리칼이
이 녹색 난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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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의 로맨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파랗게 사랑해 파랗게.
파란 바람, 파란 잎가지.
바다에는 배
산에는 말.
허리에 어둠을 두르고
베란다에서 꿈꾸는 여인,
그 파란 살결, 파란 머리칼,
차가운 은빛 눈동자.
파랗게 사랑해 파랗게.
집시의 시뻘건 달이
불길한 세상사를 예언하지만
차마 달을 바라볼 수 없는 그녀.
파랗게 사랑해 파랗게.
성에가 만든 커다란 별 모양이
어둠의 물고기를 몰고
여명의 길을 연다.
무화과 나무가 줄질을 하듯
나뭇가지를 바람에 드르럭거리고,
산은 살쾡이처럼
가시나무 끝을 곤두세운다.
누가 오는 걸까? 어디로......?
그녀는 베란다에서 기다리고,
그 파란 살결, 파란 머리칼.
꿈에도 무서운 쓰라림의 바다.
형님, 저의 말과 형님 집을
바꿨으면 좋겠네요.
제 말안장 대신에 형님 집 거울 하나,
제 칼 대신에 이불 하나만 주세요.
형님, '염소 재' 너머에서부터
제가 피를 많이 쏟고 오누먼요.
내가 할 수만 있다면, 젊은이,
당장이라도 그렇게 해 주지.
하지만 이제 나도 내가 아니고
내 집도 이제 내 집이 아니라네.
형님, 저도 죽을 때는
점잖게 잠자리에서 죽고 싶구먼요.
침대는 되도록이면 쇠 침대,
이불은 네덜란드 최고급 이불.
이거 보세요, 이 가슴부터
목구멍까지 피투성이 상처를.
검붉은 3백 송이 장미꽃이
자네 하얀 셔츠에 피었구먼.
피가 스며들어, 허리에는
온통 피비린내뿐.
하지만 이제 나도 내가 아니고
내 집도 내 집이 아니라네.
어떻든 저 좀 올라가게 해 주세요,
저 높은 베란다까지만요!
저 좀 꼭 올라가게, 올라가게 해주세요,
저 파란 베란다까지요.
달이 있는 베란다 난간에
물소리가 메아리치네요.
마침내 두 친구가 위로 올라간다
그 높은 베란다 있는 곳까지.
줄줄 핏자국을 남기며
줄줄 눈물자국을 남기며.
지붕 위에서는
양철 등이 떨고 있었다.
수천 수만의 빛살인지 북소리인지
새벽을 찢고 있었다.
파랗게 사랑해 파랗게.
파란 바람, 파란 잎가지.
두 친구가 위로 올라갔다.
긴 바람이 입에 씁쓸하고
야릇한 입맛을 남겼다,
박하 냄새, 여뀌풀 냄새 같기도 한......
형님! 어디 있습니까, 어디요?
그 불쌍한 형님 딸이 어디 있습니까?
자네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그 상큼한 얼굴, 그 검은 머리칼로
이 파란 베란다에서......
큰 빗물받이 통 표면에
집시 아가씨가 떠돌고 있었다.
파란 살결, 파란 머리칼,
차가운 은빛 눈동자.
달빛 한 줄기 고드름이 되어
그녀를 물 위에 떠받들고 있었다.
밤은 그녀를 아우르며
자그만 안방 마루처럼 아늑하게 감쌌다.
술 취한 민병대 몇 명이
꽝꽝 대문을 두들겼다.
파랗게 사랑해 파랗게
파란 바람, 파란 잎가지.
바다에는 배
산에는 말.
*줄질: 톱질
*집시 아가씨의 죽음과 두 사내의 분투, 그리고 스산하고도 아름다운 자연의 조응이 두드러지는 시입니다.
*프랑코 독재시대 임을 알 수 있는 '민병대'. 스페인 시인 로르카는 실제로 그의 몇몇 시에 드러난 프랑코 독재에 대한 부정적 시선과 '민병대'에 대한 혐오 표현으로 인해('소련의 첩보원'이라는 무고한 죄명으로) 정부에 쫓기고 결국엔 붙잡혀 총살 당하게 됩니다. 로르카는 한국에서의 입지로 비교하면, '김소월'에 해당하는 스페인 국민 시인이자 대표적인 서정시인입니다. 대표 시집으로는 유명한 '집시 이야기 민요집'이 있습니다. 그가 최후를 맞이하기 전에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격언에 따라 극우파 친구의 집에 숨어들었다가 붙잡혔다고 하네요......
시의 줄거리는 이렇다. ‘집시 아가씨’와 혼인하기 위해 ‘젊은이’가 집시 아가씨의 아빠인 ‘형님’ 집에 찾아간다. 이에 호응해 집시 아가씨도 그녀를 설레게 하는 방문객을 예감한다. 아마 이 두 사람이 천생연분임을 시는 말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시뻘건 달’이 불길한 세상사를 예언하듯 젊은이는 누군가에게 공격받고, 형님은 ‘민병대’로 예상되는 사람들에게 집을 빼앗기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그 집에 집시 아가씨를 놓아둔 채였다. 이런 상황 속에 젊은이는 형님을 만나지만, 딸과 함께 집을 빼앗긴 형님은 이미 넋이 나간 상태로 ‘나도 내가 아니고, 내 집도 내 집이 아니라네.’라고 되풀이 한다. 어떻게든 집시 아가씨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젊은이’는 형님과 함께 집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집시 아가씨는 민병대의 행패에 의해 이미 물에 빠진 채 죽은 뒤였다(젊은이가 올라가게 해달라고 하는 부분에 불길한 ‘물소리’가 메아리친다). 그녀의 죽음을 슬퍼할 새도 없이 또다시 ‘술 취한 민병대’가 죽음의 그림자처럼 대문을 두드린다.
이 시는 이중구조로 되어있다. 줄거리를 이루는 시부분과 “파랗게 사랑해 파랗게”로 대변되는 반복부로 나뉘는데, 언뜻 보면 이해하기 힘든 반복구절이 심부를 깊게 파고든다. ‘파랗게 사랑해 파랗게’, 한 겨울의 차가운 바람을 번역할 수 있다면 이런 말이 되지 않을까? 또 ‘파란 바람, 파란 잎가지’는 무엇이고 ‘바다에는 배, 산에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완전히 해석되지는 않지만, 나는 이 반복부의 목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에 어울리는지에 대해 느낀 바가 있다. 이 구절들은 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악몽의 로맨스’를 둘러싼 자연의 흐느낌이 아닌가한다. ‘파랗게 사랑해’라는 섬뜩한 말 속에는, 핑크빛이어야 했을 사랑이 시대의 총검(민병대)에 찢어져버린 채 나뭇가지에 걸려 파랗게 질려 황량하게 흩날리는 모습을 슬퍼하는, 말 못하는 자연의 ‘한(恨)’이 있다.
프랑코 독재시기 스페인에서는 집시에 대한 학살과 탄압이 이루어졌다. 손기술이 뛰어나고 예술가 기질이 있는 집시들의 많은 수가 도둑이나 밀수, 강도질 등 암적인 일에 종사하고 있었던 게 명분이 되었다. 스페인의 국민시인이자 미남시인이었던 로르카의 고향은 집시들의 본고장 ‘그라나다’였다. 집시가 미운 짓을 한다고 해도 그가 살면서 보아온 집시들의 정체는 도둑이나 밀수범이 아닌 재주 있고, 몸에 치명상을 입고도 결혼식 예물을 조율하는 모습으로 묘사되듯, 익살을 좋아하는, 정감있는 ‘사람’이었다. 그들에게 다른 길을 제시할 지언정 죽여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특히, 위 시에서와 같은 경우는 ‘혼사’라는 인생에 있어 가장 큰 경사가 고작 술 취한 누군가들에 의해 죽음의 현장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집시들을 죽이는 민병대원들을 그는 그의 시 이곳저곳에 등장시키며 간접적인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리고 후에 이것이 문제가 되어 국민시인 로르카도 ‘소련의 첩보원’이라는 거짓 죄명으로 총살당한다. 나는 그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에 대한 분노를 존경한다. 이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독일의 시인 횔덜린은 시를 써서 말하기도 했다. 사람들의 생활과 사랑과 생명을 앗아갈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아무튼, 시는 그런 생활의 큰 단면인 사랑이 무참히 파괴되는 현실을 그 누구의 슬픔이 아닌 ‘자연’의 슬픔으로 표현하고 있다. 시의 곳곳에서 스산한 자연의 묘사는 죽은 사랑에 대한 ‘조의(弔意)’다. 마지막으로 ‘바다에는 배, 산에는 말’의 존재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는데, 두 가지가 어울린다. 배와 말은 각각 바다와 육지의 이동수단이다. 그럼 누군가가 이동을 준비하고 있거나 이동수단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 아닐까? 시에서 이미 죽은 사람은 아직 집시 아가씨 하나뿐이다. 나머지 둘은 곧 그녀를 따라갈 것처럼 위태롭다. 어쩌면 배와 말은 젊은이와 집시 아가씨의 사랑이 안타깝게도 다른 한명마저 죽음을 맞음으로써 이어지는 것을 상징할 수도 있다. 또 하나는 자연이 남은 두 사람에게 애처럽게 속삭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어디어디에 배와 말이 있으니 이것들을 타고 멀리 멀리 도망치렴”하고 말이다.
[출처] 악몽의 로맨스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
작성자 시와 달과 사람
뉴욕에서 달아나다: 문명을 향한 두 개의 왈츠 - 작은 빈 왈츠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스페인 시인)
빈에는 열 명의 소녀와
하나의 어깨가 있다. 그 어깨 위에서
박제된 비둘기 숲과 죽음이 흐느끼지.
성에 낀 박물관에는
아침 잔영이 남아 있지.
천 개의 창이 있는 살롱이 있지.
아이, 아이, 아이, 아이!
쉬잇, 이 왈츠를 받아 줘.
이 왈츠, 이 왈츠, 이 왈츠,
바다에 꼬리를 적시는
코냑과 죽음과 “좋아요!”의 왈츠.
널 사랑해, 널 사랑해, 널 사랑해,
우중충한 복도 언저리,
안락의자와 죽은 책까지;
여기는 백합의 어두운 다락방,
달이 있는 우리의 침대에서
거북이가 꿈꾸는 춤 속에서, 사랑해.
아이, 아이, 아이, 아이!
부서진 허리의 이 왈츠를 받아 줘.
빈에는 너의 입과 메아리들이
노는 네 개의 거울이 있지.
소년들을 푸른색으로 그리는
피아노를 위한 하나의 죽음이 있지.
지붕 위로는 거지들이 있지.
통곡의 신선한 화관들이 있지.
아이, 아이, 아이, 아이!
내 품 속에서 죽어가는 이 왈츠를 받아 줘.
왜냐하면 널 사랑하니까, 널 사랑하니까, 내 사랑아,
아이들이 노는 다락방에서.
아이들은 따스한 오후의 소란한 소리들을 듣고
헝가리의 오래된 빛들을 꿈꾸고,
네 이마의 어두운 고요를 느끼고
눈빛 백합들과 양떼들을 본단다.
아이, 아이, 아이, 아이!
“영원히 널 사랑해”하는 이 왈츠를 받아 줘.
빈에서 나는 너와 춤을 추리라,
강의 머리를 그린
가면을 쓰고.
히아신스 꽃이 가득한 나의 강변들 좀 봐!
내 입을 너의 두 다리 사이에 두고,
내 영혼을 사진들과 수선화들 사이에 두리라.
그리고 네 발등의 어두운 물결에는
내 사랑아, 나의 사랑아, 바이올린과
무덤, 왈츠의 테이프를 선사하리라.
(번역: 민용태)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1898년 스페인 그라나다 근처 마을
푸엔테 바케로스에서 출생. 시집 『시 모음』『노래집』
『집시 이야기 민요집』『이그나시오 산체스 메히아스의 죽음』등.
희곡 「피의 결혼」「예르마」「베르나르다 알바의 집」등.
1936년 8월 19일 생을 마감함
(스페인 내전 초기, 공화주의자였던 로르카는 파시스트
반란군에 체포돼 사흘 뒤 총살당함).
시‘뉴욕에서 달아나다: 문명을 향한 두 개의 왈츠 - 작은 빈 왈츠’는
문화예술진흥원 황인숙의 시 배달로 온 시임.
===@@===한 인간의 죽음은 비극이다. 거기엔 무수히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며, 제각기 다를 것이다.
한 시인의 죽음 또한 비극이다. 그러나 시인의 죽음은 사람의 죽음과는 다르다. 워즈워스나 휘트먼 같이 살만큼 살고, 우리에게 그 천재성을 충분히 보여준 시인들의 죽음은 한 인간의 죽음과 같다. 적어도 그들에게 몇 년의 시간이 더 주어졌어도, 그들이 우리에게 이미 남겼던 것 이상을 더 줄 수는 없을 것이다. 한 마디로 이미 시인으로서 그들은 우리에게 충분히 많은 것을 남겨주었다. 그렇기에 시인의 죽음이 우리에게 비극적으로 다가서는 이유는 그가 우리에게 약간의 천재성을 보여주었고, 살아있었더라면 일부가 아닌 전체를 남겨주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에서 나오는 슬픔일 것이다. 우리는 그가 천재라는 것을 알고, 더 뛰어난 것들을 남겼을 것이란 것 또한 알기에, 우리가 결코 보지 못할 시들을 그리는 것이다.
물론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하는 것이 슬픔이요, 비극이지만, 키츠와 같이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는 요절은 어느 정도 이해는 갈 만한 죽음이다. 그렇기에 로르라의 죽음은 더욱더 비극적으로 다가온다. (물론 죽는다는 것 자체에서 이성을 따지는 것이 부조리하지만 말이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는 세르반테스 이후, 20세기 스페인 문학의 최대 스타이자 작가지만, 그는 비극적이게도 젊은 나이에, 스페인 내전에서 스페인 국민군 측 민병대에 의하여 살해당한다. 이미 스페인은 물론, 유럽에서도 손꼽힐만한 대작가가 된 그였지만, 고작 38세의 나이에 로르카는 죽었다. 로르카가 왜 살해당했는지는 아직도 논란이 많다고 한다. 그가 굳이 국민군 측에게 살해당할 만한 이유도 모호하며, 아직도 처형당한 이유는 논쟁의 대상이라고 한다. 하지만 논쟁이 무슨 소용인가? 이미 로르카는 살해당했고, 우리가 결코 읽지 못할 책들은 불태워졌는데.
로르카는 시와 희곡 모두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지만, 나는 시만을 다루고자 한다.
로르카는 놀라울만큼 다양한 목소리의 소유자다. <집시 발라드> 같이, 서정적이며 낭만적이고, 말 그대로 집시들의 애환과 안달루시아의 풍경을 담은 노래들부터, <뉴욕의 시인> 같이, 현대적이면서 고독의 정서를 담은 시들까지 이 시인이 보여주는 다양한 스펙트럼은 독자들에게 감동과 아쉬움을 동시에 준다.
<오 집시들의 도시여! / 누가 너를 보고, 너를 잊지 않을 수 있으랴?>
로르카는 확실히 영국 낭만주의 시인들에 더 가까운 시인처럼 보인다. 그의 어조 자체는 셸리나 키츠와 같은 낭만주의 시인들을 연상시킨다. 모두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점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로르카가 영문학에서도 인기가 많다는 점이 그 증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스페인적인 시인이 아닌 것은 아니다. 집시 발라드와 같이 안달루시아 산골짜기의 이미지를 그대로 시 속에 담는 것이 바로 이 스페인 국민시인의 재능이다.
그가 '집시'를 소재로 택한 것 또한 이해가 간다. 실제 집시가 아닌, '집시'라는 상징 자체는 흥겨운듯 보이면서도, 고독을 속에 감추고, 말 그대로 보헤미안 그 자체가 아닌가? 이러한 내면의 자리잡은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고독은 그가 미국에서 있으면서 느낀 감정을 담았다는 <뉴욕의 시인>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마치 집시처럼, 그 또한 뉴욕에서 이방인이며 언제나 고독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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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고독은 자연스레 '사랑'과 연관된다. 그의 대부분의 시들은 결국 연애시들이라고 불릴만한 조건들을 갖춘다. 물론 꼭 사랑의 대상이 애인이거나, 꼭 대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인이라면, 언제나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 시인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 점에서 그는 충실한 시인이다.
물론 로르카가 살해당하지 않고, 늙어죽었어도, 그의 시 세계 자체가 크게 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더욱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젊은 천재의 비극적인 죽음에 슬퍼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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