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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1□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김승희, 민음의 시 99, 민음사, 2000 그릇이 큰 시인이다. 할 말도 그렇고 상상력도 그렇고 거침이 없다. 걸음걸이가 크고 활달하다. 자신이 의도한 대로 상상력을 동원시켜서 할 말을 단호하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런데 너무 조급하다. 조급성이 말의 뼈다귀를 드러내서 흉하게 만든다. 시가 흉기가 될 수 있고, 그것이 인류를 위해서 쓰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것이 자신의 손을 해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하거나 모른 체하고 있다. 아마도 무언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조급함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러나 정말 큰 흉기는 감동이다. 감동을 가져가야만 외다리로 위태하게 서있는 제국주의도 넘어지고 신자유주의의 방패도 뚫린다. 그것은 시가 문학이라는 아주 허약하기 짝이 없는 흉기이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주의들이 이런 조급함으로 넘어갔을 것 같으면 벌써 끝장났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다.★★★☆☆[4337. 2. 22.]
502□무소유보다 더 찬란한 극빈□김영승, 나남포에지 1, 나남출판, 2001 영혼이 참 맑은 시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 전체에 걸쳐서 어려 가지 상황을 설정하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밑을 흐르는 정서는 세상의 어처구니없는 짓들에 물들지 않고 스스로 지켜야 할 그 어떤 것을 지키고자 하는 순결하고 고결한 마음이다. 이런 마음들이 사악한 이 문명 속에서 상처받지 않을 리 없건만 그런 상처마저 개의치 않고 가볍게 넘기는 자세가 아름답다. 자신의 삶과 사고를 실험대상으로 하여 쓰는 시는 시인의 영혼을 갉아먹는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형식으로는 담을 수가 없고, 그런 실험성 때문에 시가 어지러워진다. 그건 불가피한 일이다. 이미 있는 것을 거추장스러워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대상으로 실험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미 있는 것을 편하게 따라가면 될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것에 시인의 세계가 있고 영혼이 있다. 첫 시집 “반성”에 비해 날카로움은 많이 줄었다. 그러나 그 맑은 영혼은 오히려 더 순수해진 듯한 느낌이 있다. 그런 순수한 정신이야말로 서정시의 본령이다.★★☆☆☆[4337. 2. 23.]
503□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김재진, 그림같은세상, 2001 절망의 교과서 같다. 이런 시집을 보면 절망이나 염세는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고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미 태어나기 전의 생부터 절망에 익숙하여 모든 인식과 사고가 그 방향으로 정해져서 스스로는 그런 인연의 고리로부터 벗어날 힘도 없는 것이다. 미리 예견하고 하는 사랑은 실패할 수밖에 없고 그것을 노래하기 위해서 세상을 좌절의 창으로 비춰보는 시는 깊은 우울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런 관점에 의하면 시야말로 나약한 자의 전유물이고 슬픔과 좌절을 노래하기 위한 가장 알맞은 갈래일 수밖에 없다. 생각의 초점을 절망으로 맞추고 그 안에 들어온 내면 풍경을 정직하게 노래하는 방법은 이미 확실하다. 그러나 네팔 언저리까지 가서 절망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싶다. 거기까지 가는 의지가 그 노래의 절망과는 상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인연의 탓이라면 모르겠지만.★★☆☆☆[4337. 2. 23.]
504□나무□김용택, 창비시선 214, 창작과비평사, 2002 이런 시집을 보면 1980년대에 왜 목청 높여 싸웠으며, 그런 목청들이 한 때의 유행에 지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결국 유행에 따라서 목소리를 냈고, 철이 지났으므로 버린 것이 1980년대의 사상이었고 뜨거움이었다는 얘기다. 진보를 향한 갈증과 진군의 등짝에 배신의 칼을 찔러버린 것이다. 그 배신 위에서 피는 것은 어설픈 꽃노래이고 식물성 깨달음이니, 그것이 감동을 줄 턱이 없다. 시를 쓰다보면 자신의 사고와 행동 모든 것이 시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 움직임과 숨소리 하나하나까지 적어놓으면 시가 된다는 묘한 믿음이 지배하는 것이다. 이 시집 속의 시들은 그런 착각 속에서 나온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으면 시가 된다는 생각이 자신을 망치고 결국 독자들로부터 시 자체를 격리시킨다는 생각은 그 후에도 하지 못하는 중증 환자가 된다. 시가 아름답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노래해서가 아니라 세상과 사물을 보는 상상력의 구도가 작품에 서려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이 곧 시가 된다는 오만은 바로 이런 구도를 작품에 싣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가 안 되는 것이다. 시가 안 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민중의 등짝에 찍혀있는 배신의 칼을 어떻게 뽑아야 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이다.★☆☆☆☆[4337. 2. 23.]
505□거미는 이제 영영 돼지를 만나지 못한다□김중, 문학과지성 시인선 260, 문학과지성사, 2002 학문의 안경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진리의 세계가 있다. 그 세계는 학문이라는 안경을 벗어야 갈 수 있는, 학문과는 층이 완전히 다른 곳인데, 그런 것이 있는지 어쩐지 안다는 것도 어렵거니와,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안경을 벗을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은, 안경을 벗었다가는 거기로 가는 길마저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유일무이한 생각의 전통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길은 끊어진 곳에서 나타나는 법이다. 백척간두에서 한 발짝 더 나가지 않으면 길은 나타나지 않는다. 길은 백척간두의 낚싯대 끝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는 학문의 경계가 사라져버린다. 그런데 안경을 벗지도 않고 거기에 가 닿겠다는 것은 오만이고 착각이다. 상상력을 작동시킨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곳도 아니고 유학 간다고 해서 볼 수 있는 세계도 아니다. 독일이나 영국에는 그 허깨비들을 잔뜩 갖다놓고서 박물관을 만들었다. 진리는 바벨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배꼽 밑에 있고, 의문의 실 끝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안드로메다 바깥까지 연결된 그 끝을 잡지 않으면 영원히 닿지 못한다. 상상력으로 연막을 친다고 해서 그곳으로 가는 길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도 장담할 수 없는 거친 상상력으로는 길만 어지러울 뿐이다. 한자에서 그 길을 구하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4337. 2. 23.]
506□부론에서 길을 잃다□김윤배, 문학과지성 시인선 258, 문학과지성사, 2001 상상력에는 결이 있고 질서가 있다. 그것이 묘사로 나타날 때도 마찬가지이다. 묘사는 그냥 그림이어서는 안 되며, 내면의 의식을 포착하고 담아내는 대상물로서 정밀한 그림이 되어야 한다. 그냥 이미지를 나열해서 그 정서가 전달되는 시대는 이미 1980년대로 끝났다. 따라서 제대로 시가 되려면 주제가 좀 더 분명해지거나 묘사의 방향과 의도가 의식의 촉수로 작용할 수 있도록 사고를 깊이 가다듬어야 한다.★☆☆☆☆[4337. 2. 23.]
507□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황인숙, 문학과지성 시인선 216, 문학과지성사, 1998 자신감이 때로 자신의 무덤자리가 되는 법이다. 내가 도달한 곳이 남들과 색깔이 다른 특별한 곳이라고 해서 그 색깔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시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은 착각이거나 오만이다. 시의 긴장을 잃게 하고 상상력마저 흐리게 한다면 그것은 오만이 아니라 착각일 것이다. 처녀의 뱃살이 아름답다고 해서 늘어진 내 나이의 뱃살까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은 때로 자신이 딛고 선 곳의 특수성에 너무 자신을 갖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설명을 해도 시가 되고, 넋두리를 해도 시가 되며 보기만 해도 시가 되는 경지에서 나온 시이니 이미 해탈의 경지에 든 고승의 눈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입은 닫혀있는가? 사리는 익어가고 있는가? 한자와 함께.★☆☆☆☆[4337. 2. 23.]
508□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장석남, 문학과지성 시인선 156, 문학과지성사, 1995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존재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연관과 인연의 고리를 갖고 있고, 그것은 마음속의 그 어떤 불가사의에 의해 낱낱의 연결을 갖는다. 그때 세상은 모든 것을 하나로 연결한 그 어떤 관계의 순서에 의해 질서정연한 원근을 갖추게 되며 그 원근을 혼돈이 아닌 세계를 구성하는 지고지순의 섭리로 받아들일 때 세상은 아름다운 충만으로 빛난다. 거기에도 슬픔은 있고, 기쁨도 있다. 물론 자신을 벗어난 슬픔과 기쁨이다. 자신을 몸담은 세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발견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언어에 예속된 시인으로서는 더더욱 힘든 일이다. 어쩌면 이 시를 쓴 시인은 그것을 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그렇다면 그것은 남들이 이루지 못한 큰 일을 이룬 셈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만족에 그치고 있으니, 어쩌면 한 순간에 말짱 도루묵이 될 수 있어 못내 아쉽다. 남들이 보기 힘든 것을 봤으니 시가 복잡해지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상상력의 질서야 선택의 몫이겠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양보다 너무 촘촘히 동원되는 이미지들과, 독자들의 이해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불필요한 배려까지,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곳이 여러 곳 있어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든다. 기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마지막 균형이 아슬아슬하지만 그것은 머잖아 곧 기울어지고 말 것이다. 꿀단지 속으로 점점 깊이 들어가는 개미 한 마리가 보인다. 머지 않아 꿀 속까지 들어갈 것이다. 돌아서기에는 꿀이 너무 달콤하기 때문이다. 한자에서도 꿀 냄새가 난다.★★★☆☆[4337. 2. 23.]
509□평범에 바치다□이선영, 문학과지성 시인선 231, 문학과지성사, 1999 일상 속에서 놓치기 쉬운 주제를 놓치지 않고 용케 잡아내는 재주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적용되고 있는 수법이어서 지루하지만 그래도 안정된 시작의 원리이기도 하다. 우선 주제가 선명하고 복잡하지 않다는 것이 이 시집의 장점이다. 그런데 너무 설명투가 많고, 그러다 보니 일관되기는 하지만 군더더기가 많다. 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너무 많은 말들이 동원되어야 하고, 때로는 자신이 빠진 채 묘사로만 끝나는 경우도 있다. 한자는 피해야 할 이미지이다.★☆☆☆☆[4337. 2. 25.]
510□나는 식물성이다□김규린, 문학과지성 시인선 232, 문학과지성사, 1999 뿌리를 빼면 아무 것도 안 될 만큼 뿌리에 관심이 많은 시집이다. 그것은 뿌리를 아직 찾지 못했다는 역설이다. 시를 만드는 수법이 나름대로 확립돼 있다. 그리고 말하고자 하는 세계도 일정한 선을 그으면서 형성돼있어서 발전이 엿보이는 시인이다. 그런데 원관념으로부터 보조관념이 멀어질 때 어느 선까지 허용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한계가 분명치 않아서 혼란스럽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시집 한 권 안에서 색깔이 다른 시들이 들어있고, 수준도 다른 시들이 섞여있다. 한자는 꼭 필요하지 않다면 쓸 일이 아니다.★★☆☆☆[4337. 2. 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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