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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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내 사유의 둥지, 혹은 알
2013년 01월 29일 08시 30분  조회:3901  추천:23  작성자: 김문학

김문학《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6. 내 사유의 둥지, 혹은 알

11살 때 인가 나는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들이 부러웠다.

새들은 날개가 있는데 인간은 왜 날개가 없을까 제법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고리키의 산문시 <해연>을 읽으면서 격량을 가르며 창공을 비상(飛翔)하는 새들에 대하여 사색하는 일은 그 작품 감상만큼 재미있었다.

쉬는 날에 나는 참새를 잡아서 날개의 모양을 관찰하려고 반나절이나 야외에서 참새를 쫓아 다녔다. 나는 놈에게 뛰는 놈이 당해내랴! 그때 나는 날개와 인간의 양각(兩脚)의 운니의 차이를 처음으로 실감했다.

그래서 결국 할머니가 기르는 퇴화된 날개를 갖춘 닭을 잡아서 날개를 찬찬히 관찰 하였다. 닭은 놀라서 고꼬댁 거렸고 안간 힘을 쓰다가 닭털을 많이 뽑혔다. 나중에 질겁한 닭이 줄기차게 똥을 배설하는 바람에 내 얼굴에 에노구 (수채물감) 같은 그림을 그려 놓았다.

골계의 장면을 바라 본 할머니는 몹시도 꾸지람 하셨다. 그것도 씨암탉의 날개털이 뽑힌 “봉변”을 할머니는 가만 둘리 없었다. 나는 할머니를 피해서 집으로 들어와서 책을 찾았다.

아무래도 책 속에 그런 비밀이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날 내가 읽은 책속에는 새들이 나는 날개의 비밀이 적혀 있지 않았다. 나는 결국 홀로 그것을 깊이 사색 하는 길 밖에 없었다.

닭털을 뽑은 나, 새를 쫒아 다니던 내가 지금 돌이켜 보아도 꽤 어리석은 아이였다고 생각 한다. 지금 생각해도 그것이 부끄럽지는 않다. 11살의 나에게도 사색이라는 “둥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생이 되면서 많은 독서와 사유를 통해 나는 깨달음과 상상의 날개를 키울 수 있었다. 지성과 미성의 둥지를 꾸준히 마련해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나는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었기에 뭐든지 다 스스로 궁리하고 개척 해나가야 했던 운명이었던가 보다. 형이 있는 급우생들이 부러웠지만 한편 나는 형이 있는 동생을 생각하면 나의 兄長의 날개가 꽤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개척하는 날개, 이것이 내 가족적 ,그리고 운명적 인생 도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 편했다.

자고이래로 새는 곧 날개를 갖추어서 창공을 날아가는 동물로서 혼과 정신의 승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해왔다. 이는 지상의 동물이 고정, 정착된 물리적인 것의 상징과 대조를 이룬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는 날개를 갖춘 인체의 神들이 사랑과 승리, 행복의 관념을 나타냈다. 에집트 문화에서도 새는 인간의 얼굴을 지닌, 인간 사후의 육체에서 이탈된 혼을 상징했다. 힌두교에서도 새는 태양에서 탄생된 神 그자체이기도 하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새는 원래 男根의 심벌로서 그것이 이윽하여 승화를 이루어 정신적 사랑의 행동을 의미하게 됐다고 한다. 우화나 동화, 만화 속에도 새는 은인이나 연인이 되어 나타나서 지상의 인간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스토리가 수없이도 많이 등장하지 않은가.

새가 넋을 의미하는 민화(民話)역시 많은 유럽민족들 사이에서 정시(呈示)된다. 새의 날개는 사유, 상상력과 지성(知性), 천사를 상징한다.

인간이 새들보다 더 발달되고 위대한 “날개”를 갖게 된 것은 사유, 상상과 지성이라 불리는 것들이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날개”를 키운 것은 아무래도 “둥지”의 덕분이다. 그 둥지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이런 천진난만한 사유의 문제를 사유하기를 즐긴다. 동심으로 문제를 사고하노라면 의외로 성인들의 굳어진 사유보다 더 유난하여 쉽게 풀리는 경우가 많다. 성인들은 자신의 경험 자체가 자신의 행위를 규정짓는 모종의 감옥이 되기 십상이다. 견고한 담벼락의 감옥같이 사유의 유연성과 분방성을 막기에 맞춤이다.

이런 두터운 담벼락의 콘크리트둥지에서 유연한 발상이 탄생하기는 지난(至難)하다.

어렸을 때 중국에서 자라면서 받은 교육은 거의가 두터운 담벼락이 둘러쌓인 “이념”에 맞추기를 강요한 요소가 다수였다. 내가 문학공부를 했을 때였다.

애써 쓴 습작을 어떤 어른에게 가져가 보이니, 그는 “글이란 이렇게 쓰는 게 아니야. 글 속에 반드시 우리 시대의 이념, 공산주의 빛나는 사상을 불어 넣어야 제대로 된 작품이 될 수 있다....” 라고 가르쳤다.

결국 나는 이날까지 이념이요, 공산주의 빛나는 사상이요 하는 것이 내 사유의 반경 속에 비치되지 못한 까닭에, 그 어fms이 요구하는 작품을 생산하는 작가로 성장되지 못한다.

소학교 때 나는 암기는 잘 했으나, 억지로 암기하여 그것의 틀에 맞춰야 한다는 위로부터의 (由上而下)강요가 그렇게 싫었다. 거기에는 “왜? 무엇을 위해? 그래서”? 하는 등등의 사유에 해답 줄 만한 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산 사람이 그 옛날 죽은 글을 암기하고 모방해다 하고 그 틀은 벗어나서는 아니 된다는 주입식 교육방식에 나는 질리고 말았다.

대학시절에 문학공부를 하면서 송정환 선생님 댁으로 자주 찾아가서 시 공부를 했다. 역사학자이며, 시인인 송 선생님은 중한 당뇨병 탓으로 손수 주사기로 인슐린을 맞아 가면서도 억척스럽게 살아간 지식인이었다. 인자하시고 사유 또한 학식과 감성을 경비한 유연한 것이 있어서 나는 문학이외에도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었다.

“죽은 공부를 하지 말고 산 공부를 해야 한다” 송 선생님의 말씀이었다. 시도 그렇고 글도 그렇고 삶도 그렇다.“

송 선생님의 이 교시에서 나는 당시 “죽은 사유의 둥지는 죽은 사유의 말밖에 부화시킬 수 없다” 라는 말을 만들어 보았다. 만들어 놓고 보니 제법 그럴 싸 했다.

그때 같이 같던 연인에게 이 말을 했더니, “음, 멋있는 말이네요. 철학자다운 맛이 있어서 좋아요.” 하고 반겼다.

나는 나름대로 내 사유의 둥지를 틀어가면서 암탉같이 알을 낳는 격으로 사색하고 책 읽고 또 글을 써내려 왔다.

지금도 나는 중국 자유주의 지식인으로서 40대에 아깝게 타계한 왕소파(王小波)의 작품과 사상을 좋아한다. 미국에서 유학 공부해온 그는 동시대 지식인들 중에서 발군의 유연성 사고를 갖춘 엘리터였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지식인에게 있어서 사유의 엘리트로 되는 것이 도덕의 엘리트로 되는 것보다 퍽 중요하다.” (<<침묵하는 대다수>>1994)

사유가 도덕 즉 정치적 이념, 주의를 강조하는 윤리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은 참 심원한 의의를 갖고 있다.

사람들은 글쓰기를 그냥 글 쓰는 자체, 문장력, 단어력, 구성 등 문필활동에 노정된 외곽에서만 사유, 터치하고 있다. 기실 나는 글쓰기에 있어서 무엇보다 선행적 역량, 능력은 글쓰기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글 쓰는 작가의 머릿속 즉 사유라고 생각한다.

문장은 곧 사고가 글자의 뀜으로 표현 되는 것이다. “글쓰기의 비결이 무엇인가?”란 질문을 잘 받는다. 그때마다 나는 글쓰기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사유 사고한 내용을 글로 표현하는 것 뿐이다 라고 대답해준다.

글쓰기를 살펴보면, 많은 사람들은 사유도, 구상도 잘 하지 않고 또는 설익은 사고로 쓰는데 급급해 하는데 이것은 본말 전도이다. 사유를 깊이 하고 구상을 익히면 사실 글을 써 내려가는 것은 그 차적이며, 또 잘 써내려 갈수 있다. 산모가 10개월을 회임하고 고생한 뒤라야 하루아침에 출산하는 것과 비슷하다.

어떤 사유가 있으면 어떤 글이 태어난다. 경직한 사유자는 그냥 죽을 때까지 경직한 글만 양산한다. 결국 쓰레기에 가까운 글을 쓰면서도 주옥같은 명문을 쓴다고 하는 이들이 바로 경직된 사유의 작자들이다.

대조적으로 유연사유의 작자는 늘 신선하고 독특한 견해를 듬뿍 담은 글을 써내기 마련이다.

인생 역시 마찬가지다. 유연한 사랑은 유연한 인생을 살게 되며, 경직한 사람은 경직된 인생을 살아간다. 유연하지도 경직하지도 않은 사람은 또 유연하지도 경직되지도 않은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나는 이 세상이, 이 우주가 꼭 인간이 생각하는 “과학적으로 이렇다” 라는 “상실적”인 사유에 매인 사유로 보지는 않는다. 과학은 세계를 풀어가는 많은 열쇄와 코드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간조 한다. 따라서 과학은 “절대유일”의 기준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하나의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적 근거”로 풀지 못하는 사상(事象)은 수 없이도 많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능력으로서는 아직 그 수수께끼를 풀 코드, 방법을 찾지 못했거나 눈앞에 있는데도 경직된 상식의 사유탓으로 보고도 안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과학까지도 일종 가설(假說)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그 가설이 과학이란 이름으로 눈에 가시적으로, 손에 가촉적이기 때문에 무한한 사실(事實)에 가까운 것 같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인식하는 3차원 세계 밖에도 4차원, 5차원의 세계도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물론 그것도 일종의 가설로서 말이다. “가설”이야 말로 모든 과학의 기본일 것이며, “가설”이 되면 “과학”으로 고정되는 것이다.

“우리의 세계관, 학교에서 배운 것, 국가가 정부가 세뇌하는 것, 모든 상식, 통념, 모든 것을 가설에 불과하다.

나는 이런 사유를 토대로 세계를 인식하고저 한다. 그래서 터브를 부수고 가설을 부수거나 또는 입증하려고 하는 자세가 나의 인생과 글쓰기, 학문의 기본자세이며 방식이다.

글쓰기에만 한정해서 이야기 하자면, 나의 글쓰기는 사유의 작은 둥지에서 알을 낳는 것이다.

내가 자주 암닭이라 자신을 비유한 레토릭은 이 “둥지가 있는 까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알이 부화되면 아마 또 병아리가 태어나고 병아리가 자라면 또 암탉으로 성장하여 알을 낳을 것이다.

낳다보면 노란 자위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낳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리 심히 우려하지 않는다.

다음번 더 좋은 알을 낳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인터넷에 발표되는 자신의 졸문 아래 많이 달라붙는 댓글에 대해서 요즘에야 조금씩 읽게 되었다. 그야말로 “안화요란(眼花瞭亂)”의 댓글이 줄줄이 끝없는 포도송이 같이 달리고 또 달린다. 읽다보니 그것도 일종 낙(樂 )이 된다.

그중에 최근 등장한 “최수정”이란 닉넴의 댓글이 하나 재미있어서 여기에 옮겨보겠다.

내가 암탉이라 배유한 데 대한 평가적인 댓글이다. “최수정”님은 이렇게 쓰고 있다.

“김 선생님이 단지 계란만 낳는 암탉이 아닌 부화하여 삐악〜거리는 병아리를 거느리는 母情이 강한 엄마 암탉이라는 便命感을 지니세요.... 책임감 있고 사명감 있는 암탉이 되어 보다 영양가 있는 계란을 낳아 부디 나머지 병아리들을 견실히 잘 키워주세요! 병아리들이 8색 조로 성장하여 조선족의 신지평을 열어주세요!”

그리고 작가에 대한 건강에도 신경써주는 매너와 배려가 돋보인다.

“계란 부화 성공하시고” “영양실조에 유의하여 스스로 영양가 식단 배분을 잘해드시길.!”

고마운 댓글이다. 아마 용의주도한 배려까지 잊지 않은 것을 보면 여성분일까 생각된다.

(따라서 오늘 이 졸문을 빌어 지금까지 물심양면으로 성원해 주신 독자들. 생명부지의 조선족 독자 제현씨께 심심한 고마움의 말씀 전하고 싶다.)

“최수정”님 진정어린 성원과 기대가 좀 부담스럽다. 내가 그런 “사명감”을 갖춘 암탉으로 성큼 성장 할 수 있을 런지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독자님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노력을 해야겠다는 마음은 오늘도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괴테는 “오, 신비로운 동양의 힘이요!”

하고 노래했는데 나는 “오, 사랑스런 내 사유의 둥지여!” 하고 읊어 본다.

그리고 또 이렇게 이어진다. “둥지에서 알을 부지런히 낳고 또 부지런히 부화 시켜야지.”

 

물론 나는 둥지가 오래돼서 구조적으로 썩기 전에 새 둥지를 만들겠다. 또한 욕심 같아서는 천사 같은 병아리들을 키워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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