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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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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졸혼(19) 김장혁
2022년 06월 16일 21시 53분  조회:1305  추천:0  작성자: 김장혁



             

       29. 신기루
 

  문걸이 눈을 살며시 뜨자 온통 새하얀 세상이 안겨왔다. 쇠살창 문이 흐리마리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감옥인가? 무슨 죄를 졌는가?)

 문걸은 눈을 번쩍 떴다.

 “아빠, 깨났습니까?”

 “리선생님, 깨났군요.”

귀에 익은 여자들 목소리.

(누군가?)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사위를 둘러보았다.

침대 옆에서 지예와 만금이, 춘희의사가 자기를  바라보고 있지 않겠는가.

“지예야, 여긴 어디냐?”

지예는 자기를 알아보는 아빠를 보고 너무나도 기뻐 어쩔줄 몰랐다.

“아빠, 여긴 병원입니다.”

지예는 아빠 곁에 앉아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춘희박사,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문걸은 미소를 짓는 춘희를 쳐다보았다.

“네. 잠시 특수병실에 입원했습니다.”

“왜 감옥처럼 쇠살창 있소?”

춘희는 문걸의 옆에 다가와 내심하게 설명했다.

“이제 리선생님 병세가 호전됐으니깐요. 여기서 나가면 돼요.”

“오-”

문걸은 신경과에 입원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춘희를 보고 물었다.

“여기 며칠 누워 있었소?”

춘희는 눈물이 글썽해 수척해진 문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장장 석달이나 누워 있었어요. 이젠 나갈 때도 됐는데요. 제가 이제 담당의사한테 퇴원신청을 넣어보죠.”

문걸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이젠 모든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이윽고 담당의사가 병실에 들어섰다.

그 남자의사는 문걸의 병상에 다가와 문걸을 이리저리 살피였다.

“의사실에 갑시다.”

“예.”

문걸은 의사를 따라 갔다.

의사는 사무상 맞은켠에 있는 걸상에 문걸을 앉으라고 했다. 문걸은 순순히 걸상에 앉았다.

“이제부터 묻는 말에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남자의사의 딱딱한 물음에 문걸은 인차 대답했다.

“예.”

“이름이 뭡니까?”

“아니, 입원할 때 다 등록했겠는데 왜 이런 걸 묻습니까?”

“묻는 말에 대답하십시오.”

문걸은 남자의사의 엄숙한 표정을 흘끔 쳐다보고는 나직이 대답했다.

“네.”

“이름?”

“리문걸입니다.”

“나이는 얼마입니까?”

“62살입니다.”

“퇴직 전 직업은 뭡니까?”

“고급설계원, 화가입니다.”

의사는 지예와 춘희의사를 건너다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무슨 병으로 우리 입원했죠?”

“건...”

“무슨 병에 걸렸습니까?”

“아니, 병원 의사들 치고 저의 병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 몇입니까? 다 알면서 묻습니까?”

의사는 무표정하게 재차 물었다.

“무슨 병에 걸렸습니까?”

“아마 정신이상인가 해서 날 신경과에 입원시킨 거 같습니다.”

“오- “

담당의사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때 황선희 주임도 들어섰다.

그들은 문걸의 전신을 회진한 후에도 시름놓지 못하고 문걸의 전신 화험과 채색CT를 비롯한 여러가지 기계검사를 재차 체계적으로 하였다. 

검사결과 암치료도 깨끗하게 되였지만 코로나 후유증은 주의해야 하였다.

김춘희의사가 문걸한테 다가와 친절하게 말했다.

“오늘 출원해도 되겠는데요. 후에 시간 나면 함께 등산도 하고 춤도 춥시다.”

황선희 주임은 춘희와 문걸이 조용하게 말하게 자리를 비웠다.

지예는 따라나가면서 인사했다.

“선생님들의 정성 덕분에 아빠를 구해냈습니다. 구명은혜 감사합니다.”

문걸은 춘희를 응시할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유를 되찾게 되였다. 이젠 집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그는 지예의 부축을 받으면서 택시에 앉아 세집에 돌아왔다. 

만금이 반가와 말을 잇지 못했다.

“리선생님, 건강이 회복돼 돌아오시게 돼 기쁩니다.”

“수고 많았소.”

실로 그간 만금은 문걸을 간병원처럼 간호하고 밥도 지어가고 하면서 정성을 다해 뒤시발을 했던 것이다.

그는 침실에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누워 천정 한 곳을 멍하니 바라보며 또다시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만금이 커피잔을 침대머리에 가져다 살짝 놓고 나갔다. 그녀는 주방에 나가 점심준비를 하느라고 분주히 서둘렀다. 

지예는 침대 옆 쏘파에 앉아 아빠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빠가 한없이 불쌍했다. 

문걸의 뇌리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번개가 치고 우뢰가 울었다.

(모든 걸 잃었다. 영희를 잃고 사랑도 잃었다. 집과 화실도 다 잃어버렸다. 아들과 손자 둘을 몽땅 잃고 말았다. 군철이, 그 새끼, 항상 에미 역세를 들면서 날 집 호적에서 긁어버리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진짜 그렇게 되지 않았는가. 그 놈새끼 에미 남긴 돈마저 몽땅 가지고 상해로 갔다고 하지 않는가.)

순간 그는 자기가 30년 가까이 한평생 아글타글 하면서 꾸려온 가정이  무너진 신기루처럼 떠올랐다. 그러나 그 꿈만 같던 신기루는 정호가 30여년 동안 사기치며 일으킨 허위광풍에 단번에 와그르르 무너지는 감을 느꼈다. 그 가정신기루는 파도도 사나운 바다 위 구름처럼 산산히 박산났다. 형체도 찾아볼길 없이 흐리멍텅한 하늘나라로 사라졌다.

순간 징그럽게 웃는 번대머리가 불쑥 떠올랐다. 

“군철은 정호 새끼하구 심통해. 종지달은 속일 수 없어. 지독한 놈이야. 인정머리라곤 하나도 없는 랭혈동물이야. 독사야.  그런데 난 여직껏 그 놈을 친아들로 여기지 않았던가. 애나게 그림을 한장한장 그려 그 놈새끼한테 그 비싼 상해 아파트를 다 사주지 않았던가. 그러나 군철은 내 절망에 빠져 쓰러졌는데도 상해로 훌 달아나 기별도 없잖은가. 에미한테서 돈과 마노목걸이랑 비취팔목걸이랑 채가지고 도망쳤잖아?”

문걸이 쉼없이 중얼거리자 지예는 또 병이 발작하는가 하여 쏘파에서 오쫄 일어났다.

“아빠, 자꾸 지난 일을 생각하지 마세요. 이젠 오빠를 잊으세요. 그러게 내 뭐라 했습니까? 미리 유서라도 써놓으라고 했잖았는가요?”

문걸은 지예 손을 덥석 잡았다.

“어쩜 군철이 정호새끼를 닮은줄도 몰랐을가? 내 혼자 오리무중에 빠져 아무것도 모르고 속여 살지 않았니? 그 년놈들이 짜고 들어 날 속이고 뒤에서 개짓을 하지 않았니? “

지예는 아빠가 불쌍해 울었다.

“아빠, 모든 걸 다 훌 잊어버리세요. 쓸데 없는 걸 다 버리세요. 엄마와 오빠도 다 잊어버리세요. 어머니 이젠 다른 세상 사람인데 과거를 자꾸 생각하지 마세요. 아빠 건강에 나빠요. 이젠 아빠만의 인생을 찾으세요. 이젠 진짜 졸혼하셨으니깐요. 새 인생을 홀가분하게 사세요.”

문걸은 지예를 꼭 껴안았다.

“그래. 지예야, 이젠 내겐 너 밖에 없다. 안해도 없고 아들과 손자도 없다. 인정미 있는 딸이 있어 참 다행이구나.”

문걸은 눈물을 텀벙텀벙 내쏟았다. 

구슬픈 울음소리에 지예도 아빠 품에 안겨 대성통곡쳤다.

“아빠, 근심하지 말아요. 제가 아버지 여생을 옆에서 지켜드릴게요...”  

그는 지예를 놓고 또다시 침대에 쓰러졌다.

“안된다, 안돼! 넌 재혼해야 해. 내 때문에 네 인생을 망칠 순 없어. 그럼 아'빠는 더 마음이 아파.”

“아빠, 저도 이젠 졸혼했어요. 가정이고 나그네고 하나도 필요없어요. 이젠 효녀로 돼 아빠한테 효성을 다해 잘 모셔드릴게요.”

문걸은 벌떡 일어나더니 지예의 귀쌈을 찰싹 갈겼다.

지예는 뺨을 맞으면서도 아빠한테서 물러나지 않았다. 까딱하지도 않고 앉아 있었다.

“얘, 내 널 쳤니?”

“치세요. 아빠 속이 풀리면 치세요. 딸이 아까우면 엄마를 친다고 생각하고 호되게 치세요.”

지예는 도리여 얼굴을 아빠 앞에 내대고 외까풀눈을 살풋이 내리깔았다.

“널 치다니? 아프잖느냐?”

문걸은 지예의 뺨을 매만지면서 중얼거렸다.

“안돼, 너만은 영희처럼 살지 말라.”

“무슨 말입니까?”

문걸은 자못 정색했다.

“너네 엄만 가정도 모르고 무용 밖에 모르는 그런 바레리나야. 동네집 나그네들과 마작이나 땅땅 놀고 그런 녀자야. 멋이나 빼고 시내돌이나 좋아하는 그런 녀자야. 새끼들도 모르고 그런 쌍년이야...”

그러나 지예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아니, 지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칫하면 아빠를 마음이 아프게 할 수 있었다. 신경병이 도지게 할 수 도 있기 때문이였다.

문걸은 엄마 흉을 한다고 덤덤히 앉아 있는 딸의 심정을 읽기라도 한듯이 말머리를 홱 돌렸다.

“너 에미처럼 가정을 깨면 나쁜 녀자야. 새끼도 다 던지고 달아나는 녀자 얼마나 나쁜 녀자냐? 넌 절대 그런 뺑덕이에마 되지 말라.”

지예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나직이 대답했다.

“알았습니다. 아빠. 좀 쉬십시오.”

문걸은 또다시 침대에 누워 또다시 끝없는  절망의 블랙홀에 빠졌다. 아무리 모지름을 써도 좀체로 헤여나오기 힘들었다. 

(내 그렇게도 사랑한 영희, 영희가 어쩜 그렇게 고약하게 날 속일수 있어. 그것도 30년이나 배신했단 말인가? 숫처녀인 척하면서 내 아래서 허리를 요리조리 탈며 신음소리를 내면서. 날 얼려? 사랑한다고? 련애편지는 얼마나 많이 썼던가.)

그는 침대에서 부시시 일어나 옷궤 쪽으로 걸어갔다. 옷궤을 열고 무언가를 뒤졌다. 

지예가 다가가보니 아빠가 옷궤 밑에 있는 자그마한 함에서 숱한 누런 편지봉투를 들춰냈다.

“뭔가요?”

“옛다, 봐라. 뭔가.”

지예는 조심스레 편지봉투를 받아 편지를 하나 하나 뽑아 보았다. 

아빠와 엄머가 30여년 전에 주고 받은 련애편지가 아니겠는가. 지예는 읽으면 읽을수록 눈물이 없이는 내리 읽을 수 없었다. 

아빠는 엄마가 보내온 그 련정이 담긴 한글자, 한글자마다 진정한 사랑으로 믿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절절한 사랑으로 가슴에 받아들여 못박혀 빼버리기엔 너무나도 가슴이 쓰리지 않겠는가. 숫처녀로 안 엄마가 글쎄 이모부 애까지 낳았다는 청천벽력 같은 충격에 정신기둥이 와그르르 무너져버리지 않았던가.

지예는 필경 영희가 배아프게 난 딸이기에 아빠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엄마 처지도 불쌍했다. 아니, 엄마가 한없이 가여워 동정하기까지 하였다.

(엄마는 아빠 먼저 이모부를 사랑했을 수도 있어. 그래서 이모부한테 먼저 숫처녀의 모든 것을 주었을 수도 있지. 그래서 오빠도 임신했구...)

여끼까지 생각하자 지예는 이모부 정호가 얄미웠다. 아니, 가증스러웠다. 

(어쩜 미성년학생인 엄마를 그렇게 짓밟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대낮에 자기가 숱한 녀학생들한테 무용을 가르치던 무용강당에서 밤을 타서 강간하듯 한단 말인가.)

순간 지예는 엄마 대신 정호에 대한 분노가 가슴에서 폭발하는 것 같았다.

(날강도 같은 놈, 어쩜 엄마와 아빠 인생을 그렇게도 무참히 짓밟을 수 있단 말인가. 얼마나 후안무치한 인면수심 독사인가? 허위적인 위군자. 자기가 롱간해놓고 엄마를 책임지지도 않고 진상을 모르는 아빠한테 소개해 보내버려? 그래서 생긴 비극이 아닌가. 엄마는 누구 앤지도 모르고 품에 오빠를 열달이나 잉태해 낳지 않았던가. 오빠가 자라면 자랄수록 엄마는 얼마나 속이 조마조마했겠는가. 아빠한테 정호 새끼를 낳았다는 것이 들통나면 무슨 일이 발생할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지 않았겠는가. 그런 시한폭탄 같은 오빠를 키우면서 엄마는 얼마나 속을 태웠겠는가. )

손바닥이 다르고 손등이 다르다고 지예는 필경 영희가 낳은 딸이니깐. 문걸의 생각과는 달랐다. 그는 아빠와 엄마가 겪은 비극을 다 가슴이 아파하면서도 엄마의 불행한 처지도 동정하고 있었다.

문걸은 침대에서 일어나 창 밖을 내다보며 계속 상념에 잠겼다.

(영희는 군철이 자라면서 정호를 닮았다는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어. 그런데 나를 줄곧 속이지 않았는가. 영희 유서에서 말한 일 외에도 년놈이 무슨 지랄을 다 했는지도 몰라. 영희는 유서에서 왜 정호를 폭로했을가? 무용강당에서 자기를 억지로 간음한 사실을, 상해에서 돌아올 때 지하주차장에서 영희를 지껄인 사실을, 망아산 소나무숲 속 방공굴에서 간음하려 했을 때 강도를 만난 일도 다 토설하지 않았는가. 죽어가면서도 영희는 정호가 강도들한테 자기를 버리고 혼자 도망친 비굴한 모습까지도 폭로했다. 이제 와서 정호한테 속히운 것에 격분했을가. 그럼 영희는 정호를 마음 속으로 사랑하지 않았단 말인가? 아니야, 더러운 년, 변강쇠 같은 정호 새끼 걸 한번 맛을 보면 내 걸 좋아하기 만무했어. 짐승처럼 어떻게 미친듯이 짓밟아놓았으면 그게 그렇게 헐럭했지. 내 처음 헐럭하다는 감각이 맞았어. 그런데 영희, 그 년 사기치는 말에 얼리워 의심하지 않고 눈 감고 결혼해 살았지. 죽기 전에 정호를 물어먹는 걸로 날 사랑했다는 걸 보여주고 위안하려는 거였을가? 영희 말해보오. 날 징정 사랑이나 했소? 전생에 지은 죄 두려워 저세상에 가기 전에 모든 거 폭로했어? 정호를 공소했어? 정호를 증오한 건 맞기나 하니? 날 보고 정을 떼게 하자고 그랬느냐?”

문걸은 생각하면 할수록 깊고 깊은 사랑의 블랙홀의 비밀을 알 길 없이 묘연했다.

(영희, 나도 그리 깨끗한 사람은 아니야. 나도 인기모델 정희하구 그러루한 일이 있었어. 어쩌겠느냐? 암캐가 살살 꼬리를 치는데 열혈청년때 참을 수 있어?”

 

그날 문걸은 정호한테서 인기모델이라는 정희를 소개받았다. 

문걸은 눈웃음을 새물새물 살살 치는 정희 표정에 홀딱 반하고 말았다.

“라체모델을 설 수 있겠소?”

“어마나!“

정희는 짐짓 아닌 보살을 떨었다.

“처음 만나자마자 어떻게 그런 라체모델을 설 수 있겠습니까?”

“예술을 위해서 좀 희생하면 안 되오?”

정희는 그런 소리를 영호한테서도 들은 적이 있었다.

(화가는 다 이런가?)

“그래요?”

정희는 문걸의 눈치를 핼끔 보면서 아양을 떨었다.

“모델비용은 얼마나 주겠는가요? 저는 인기모델이여서 어진간해선 옷을 벗을 수 없는데요."
    "돈은 근심하지 마십시오."
   "네. 알았습니다. 그럼 예술을 위해 어떻게 희생햐야는지요? 리화가께서 좀 가르쳐주시면 몰라도요. ㅎㅎㅎ.”

그만하면 된다는 말이였다.

문걸은 그날로 정희를 데리고 화실로 갔다. 

정호는 친구한테서 소개비마저 째째하게 받아가지고 마른 기침을 깇으면서 자리를 떠났다.
     (잘코사니야.)
    그는 정희가 어찌나 돈을 달라고 칭칭 감겨드는지 신물이 났다. 그러던차 문걸한테 모델로 붙여놓고 혹을 떼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정호는 혹을 뗀 것 같아 홀가분한 마음으로 한숨을 후- 내쉬면서 화실에서 나와버렸다.  

문걸은 정희를 보고 저고리로부터 옷견지를 하나, 하나 벗게 하면서 사진부터 찍었다.

찰칵, 찰칵.

정희가 눈웃음을 살살 치며 짧은 치마를 홀랑 내리는 순간, 문걸은 정신나간 사람처럼 멍해 서 있었다.

“어서 샷타를 눌러요.”

정희가 나직이 귀띔해서야 샷타를 찰칵 눌렀다.

“아, 우유빛 허벅다리, 풍만한 젖무덤, 예술조화를 이룬 저 섹시한 육체미!”

문걸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번했다.

정희는 추파를 보내면서 인기모델의 육체무기를 휘둘렀다.

그녀가 라체로 서서 아주 능란하게 각종 매력적인 조형포즈를 취하기 시작했다.

문걸은 감탄하며 촬영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니, 정희 육체미를 구경하며 감탄에 뒤이어 신음소리를 마구 냈다.

“호호호. 보기만 해서야 어찌 유명모델의 진선미를 제대로 알겠습니까?”

정희는 대담히 제안했다.

“어서 와서 인기모델의 몸을 만져보세요.”

그제야 제정신이 펄쩍 든 문걸은 실 한오리 걸치지 않은 정희한테 다가가 체취를 맡으면서 따뜻하고 보들보들한 손부터 잡아 매만졌다. 뒤이어 야들야들한 팔과 하들하들한 우유빛허벅다리를 매만져보았다.

정희는 문걸의 손을 잡아 자기 가슴에 스르르 가져갔다.

“여긴 더욱 매력적인데요. 그림 그릴 때 미리 손감각을 찾으세요.”

문걸은 오홍 신음소리를 내며 손을 빼갔다.

“아니, 리선생님도 남자인가요?”

“난 화가요.”

“이렇게 참을게 뭔가요? 금욕주의자가 무슨 그림 제대로 그리겠어요? 세계 유명화가로 되긴 다 틀렸군요. 사상을 활짝 개방하세요.”

정희는 미친듯이 구호까지 불러댔다. 

“성자유 만세!”

칠정육욕이 있는 사내대장부가 어찌 갈보가 눈웃음을 새물새물 지으면서 알랑거리는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겠는가.
( 어디까지나 주동이 된 건 아니였어. 간사한 요정이 날 유인해 간음한 거나 다름없어. 변명이 아니야. 난 수동적이였어. 딱 그때 한번이였어. 정희는 돈 밖에 모르는 간나새끼야. 그후 다신 찾지도 않았어. 그래도 항상 너한테 미안했다. 영희야, 죄송해. 구천에서 용서해달라. 미안해서 널 더 사랑했고 내 모든 걸 너한테 걸고 다 주었지.)
   ...  

  

“영희, 미안하오. 널리 량해하오. 나도 잘못했소.”

순간 또다시 재색염라전에 휘말려들어가던 영희가 떠올랐다. 염라전에 들어가면서도 영희는 바레리나노라고 정호 어깨 위에 외발로 올라서서 모둠발뜀까지 하면서 바레를 추지 않았던가. 

(미국에 가선 뭐 “호수가의 백조와 독수리 련가”를 췄다지 않는가. 독수리 번대머리에 날아올라가 외발로 모둠발을 뛰면서, 해쭉해쭉 웃으면서. 바레를 추며 사진까지 찍지 않았던가.  날 골려주자고?)

지금 보면 염라전은 영희를 연기로 날래보낸 화장터 같았다.

문걸은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야. 화장터 아니야. 안락사형장 같아. 저승사자가 주사를 놓아 총살하는 안락사형장이야. 그 사형장은 화장터 토성 밖에 있는 낮다란 재색벽돌과 기와를 지은 집이야. 바로 그거야. 그게 사형장이야. 염라전이야. 정호새끼 염라전에 가야 했는데. 에잇, 영희가 글쎄 바로 거기로 들어가 온몸이 화신이 돼 염라전으로 훌 날려들어갔어. 불이 활활 타오르는 염라전으로 들어가 한가닥의 새까만 연기로 돼 하늘나라로 날아올라갔어.”  

그는 이를 쁙쁙 갈았다.

“정호, 그 놈새끼를 놔둘 수 없어. 량심도 없는 개새끼, 뭐? 둘도 없는 친구? 자기 짓밟은 영희를 소개해주고 마치 친구를 생각하는 척하지 않았는가. 그땐 어째 소개비는 받지 않았어? 린색한 놈, 정희를 모델로 소개해주고 소개비까지 받은 친구. ㅋㅋㅋ.”

지예는 아빠가 병이 도지지 않는 것을 보고 못 들은 척하며 일어나 침실에서 나갔다. 그녀는 화장실에 들어가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닦고 말끔히 씻었다.

구구구, 구구구...

문걸이 착잡한 생각에서 깨나며 창 밖을 내다보았다.

아니, 저게 뭔가? 하얀 비둘기 두마리가 오랜만에 찾아와 창문 턱에 앉아 집 안을 들여다보며 구구거렸다.

“참 오랜만이구나. 넌 재혼했니? 우리 집에서 홀로 외롭게 살더니. 어데서 짝을 무어 데리고 왔니? ”

문걸은 중얼거리면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창문께로 다가갔다.

그는 바빠 창문을 열고 손을 뻗쳐 비둘기를 잡아 집 안에 들여놓았다.

“만금이! 만금이!”

“예- 주인님.”

만금이 바삐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주방에서 침실로 달려들어왔다.

“만금이, 집 떠났던 비둘기 돌아왔소. 종지에 새우깡을 가져오오. 쟤들이 쪼아먹게.”

“불시에 없는데요.”

구구구, 구구구.

비둘기들은 알아들었는지 문걸의 손바닥을 똑똑 쪼았다.

“좀 기다려.”

문걸은 오랜만에 만난 식구처럼 반가워했다. 미녀로봇도 창가에 다가가 반겼다. 문걸은 비둘기를 놓으면 날아날가봐 근심하듯이 조심조심 침실 창턱에 놔두었다.

그는 끌신을 짝짝 끌고 바깥에 나거더니 밑층식품상점으로 달려내려갔다. 

그는 새우깡을 사다가지고 돌아와 종지에 담아 침실 쏘파 앞의 차탁 위에 올려놓았다.

“자, 실컷 먹어라.”

그는 차탁 위에 날아올라가 새우깡을 똑똑 쪼아먹는 비둘기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너희들이 어떻게 세집까지 다 찾아왔니? 진짜 반갑구나.”

구구구, 구구구.

비둘기들은 머리를 쳐들고 뭐라고 구구거렸다.

“우린 병원에도 찾아가 유리창에 매달려 주인님을 찾았거든요.”

“오- 그래, 그래. 그랬지. 우린 한집 식구니깐. ㅎㅎㅎ. 귀여운 요것들아.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

문걸은 비둘기를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정신병자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비둘기들아, 귀여운 아가들아, 너희들 말해보렴. 영희 날 사랑했니? 사랑하지 않았니?”

구구구. 구구구.

“아직도 몰라요? 주인님, 녀주인님은 근본 주인님을 사랑하지도 않았어요.”

“구구구, 어서 빨리 잊어버리세요. 고통의 블랙홀에서 헤매지 마십시오”

“그래?”

문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을 해야겠구나.”

지예는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면서 노는 아빠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빠는 가방에 련애편지를 걷어넣고 침실에서 나가는 것이였다.

그녀는 아빠 손을 잡았다.

“뭘 하려고 그래요?”

“너하구 상관없다. 가만 놔둘 수 없어.”

문걸은 신궤에 다가가더니 시퍼런 조막도끼와 자그마한 공병삽을 꺼내들었다. 

“아빠, 어쩌려고?”

“아니, 아무 일도 없어.”

문걸은 지예를 뿌리치고 신을 신고 문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지예는 황급히 말렸다.

“아빠, 무슨 일 치자고 이래요?”

“아니, 근심하지 말라.”

그는 검은 그림자가 흐르는 지예 외씨 얼굴을 보고는 손을 내밀었다.

“가자, 나하구 같이 가자.”

“누구와 싸우려는가요?”

“아니야. 절대 싸우지 않으니깐. 근심하지 말라. 날 따라가면 알 거야.”

문걸은 영희와의 누런 련애편지봉투를 몽땅 가방에 넣더니 둘러멨다.

지예는 아빠가 광기를 부리면 혼자 말릴 거 같지 못해 춘희의사한테도 전화로 알리고 만금까지 불러 함께 따라나섰다.
"나도 갈래."
미녀로봇도 따라나섰다.

문걸은 그녀들을 데리고 택시를 잡아타고 망아산 수림으로 달려갔다. 춘희의사는 지예와 핸드폰으로 위치추적공유를 해놓았기에 인차 택시를 타고 망아산 수림으로 뒤쫓아갔다.

울긋불긋한 수림에는 한가닥의 오솔길이 나타났다. 그 오솔길은 정호라는 색마가 갖은 비렬한 수단을 다해 숱한 미녀들을 유인해 와서 생긴 더러운 오솔길이였다. 얼마나 많은 녀성들이 여기 방공굴에 얼리워와서 청춘을 짓밟히고 억울한 강간과 간음을 당했는지 모른다.

황선희, 영희, 순정, 나영, 정희, 하영, 그리고 이름도 모를 녀인들이 여기 와서 변강쇠 같은 색마의 허위사랑에 사기당해 짓밟혔다. 돈을 주고 권력을 주겠다는 함정에 빠져 숱한 미녀초보정객들이 참사랑의 블랙홀에 빠지고 말았다. 그녀들은 다시는 그 지옥 같은 정신블랙홀에서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게 됐다.

문걸의 귀에는 여기저기서 영희의 신음소리, 흐느낌소리, 대성통곡치는 소리 들리는 상 싶었다.

“난 색마한테 숫처녀 정조를 억울하게 빼앗겼어요.”

영희 한 많은 소린가?
(그래, 30년 전에 여기서 영희는 부래지어와 팬티 바람으로 강도들한테 쫓기웠지. 영희 유서에도 명확히 여기서 정호한테 간음당하고 강도들한테 쫓기웠다고 하지 않았는가. 량심 없는 놈, 어찌 강도들한테 영희를 버리고 비굴하게 혼자 살자고 도망쳐버렸단 말인가?)
어디선가 분명 영희의 목소리가 우렁우렁 울려왔다.  
"여보, 당신, 정호가 여기서 저를 간음한 정체를 폭로하는 건 진실을 당신한테 알리는 량심고백입니다. 30년 동안 당신을 속여와서 죄송해요. 원래 무덤까지 내막을 가지고 가려고 했는데요. 이번만은 진실을 고백했습니다. 저를 죽여주십시오."
문걸은 코방귀를 뀌었다.
"뭐? 량심선언? 흥! 죽기 전에 한번만은 진심이란 말이냐? 네가 콩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믿을 머저리 없다."
또 한 녀인의 목소리가 반공중에 들렸다. 

“절대 자원해 여기 끌려온게 아니예요.”

나영의 목소린가.

“아니야. 넌 첨엔 사무실에서 정호한테 당했지만. 변강쇠 허위적인 성애에 푹 빠져 따려다녔어.”

하늘에서 누군가 꼬집는 소리. 

(하늘에 무슨 판관이라도 있는가?)

“색마 정치사기군의 감언리설에 얼리웠어요!”

뺑덕이에미 거짓말인가? 아니면, 미녀로봇의 작간인가?
문걸이 미녀로봇을 뒤돌아봐도 묵묵히 따라 올뿐이였다.

'”돈 밖에 모르는 간나새끼! 죄를 만나 강도 칼에 찔려 입원해 있잖아? 흥! 퉤!”

하늘에서 또 욕한다.  

“전 억울하게 당했어요! 가무단 단장 시켜준는 말에 20대 처녀를 바쳤어요!”

하영의 목소린가.

“하영이, 더러운 권세욕에 눈이 먼 년, 천벌맞아 싸다. 강도들 쇠몽치에 맞아 쓰러졌잖아. 뭐? 부끄러워 경찰들 앞에서 입에 빗장을 질렀다고? 정호와의 더러운 권색거래를 숨기려고?  에이, 더러운 년아.”      

문걸은 그 한 많은 망아산 수림 속 방공굴 어귀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갔다.

“아빠, 여기 와서 뭘 해요?”

지예는 사위를 둘러 보며 공포에 몸이 오싹해나 바들바들 떨었다.

“겁나 말라. 이 곳은 내가 너네 엄마와 첫사랑을 불태우던 곳이야. 얼마나 유서 깊은 곳이냐?”

지예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무심히 볼 소나무숲이 아니였다.

문걸은 한숨을 후- 길게 내쉬며 숙연히 머리를 숙였다.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져갔다. 

(얼마나 날 오리무중에 빠지게 한 곳인가. 얼마나 어둡고 침침하고 깊고 깊은 수렁인가! 나를 그 얼마나 절망에 몰아넣은 참사랑의 블랙홀인가! 그 얼마나 참된 사랑으로 오인하고 청춘을 불태웠던 사기와 허위로 차넘치는 함정인가.)

그는 방공굴 어귀 둔덕 위에 아직도 “사랑” 글자를 박은 채 서 있는 소나무에 도끼를 들고 다가섰다. 그는 “사랑”이란 글자를 어루만지면서 지예를 돌아보았다.

“이 글자는 30년 전에 너네 엄마와의 사랑을 기념해 이 비수로 새긴 거야.”

“네-”

지예도 아빠와 함께 철갑을 두른듯한 소나무의 송진을 머금고 빛나는 “사랑”이란 글자를 어루만졌다.

“물러나라.”

문걸은 지예와 만금을 한쪽으로 물러서게 했다.

“뭐 하려고 그래요?”


     문걸은 대답 대신 손바닥에 침을 퉤퉤 뱉더니 도끼를 휘둘러 송진을 머금은 채 울고 있는 “사랑” 글자 박힌 소나무를 팡팡 찍기 시작했다.    
     “얼마나 허위로 물든 글자냐!”
    미녀로봇이 옆에서 박수까지 치면서 응원했다.
    "잘 한다, 잘해! 진작 싹 다 찍어버려야 했어요."

문걸은 도끼을 거두고 “사랑” 글자를 찍어낸 나무껍질을 주어 방공굴 어귀에 무져놓았다. 가방에서 싯누런 련애편지를 꺼내 나무껍질 위에 올려놓고 후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달았다.

“허위적인 사랑아, 퉤! 싹 타버려라!”

순간 송진을 먹은 소나무껍질과 싯누런 련애편지들이 불타면서 시꺼먼 연기가 삽시에 소나무숲 상공에 타올랐다.

문걸은 타오르는 불길과 타래쳐오르는 연기를 눈물이 글썽해 바라보며 목놓아 고함쳤다. 
     “어, 씨원하다. 한뉘 평생 날 속인 개쌍년아, 이젠 다신 찾아오지 말라. 영영 천국에 가라! 퉤!”
    "뭐 하는 짓인가?"
    갑자기 삼림경찰 서넛이 나타났다.
   "어서 불 끄지 못하겠는가?!"
    뢰성 같은 호령이였다.
   문걸은 멍해 삼림경찰들을 둘러보았다.
    만금과 지예가 부랴부랴 가방에서 샘물병을 꺼내 모닥불에 끼얹었다. 
   칙-
   모닥불에서 김이 피여오르면서 불이 꺼져갔다. 지예는 아버지 손에서 삽을 빼앗아 흙을 파 마구 모닥불을 뒤덮었다. 만금은 나무가지를 주어 모닥불을 마구 두드렸다. 미녀로봇은 할끔거리면서 삼림경찰을 곁눈질했다.
   모닥불이 잘 꺼지지 않았다. 누런 편지와 사랑 글자가 박힌 소나무껍질은 다 타버렸다.
  삼림경찰들이 소방도구로 꺼서야 불은 간신히 꺼져버렸다. 그러나 아직도 연기와 김이 모락모락 피여올랐다. 
  삼림경찰은 문걸을 쏘앙보며 경고했다.
  "다시 방화하면 체포하겠소." 

이윽고 불이 다 꺼지자 삼림경찰들은 눈을 부라리며 가버렸다.
    문걸은 도끼에 찍힌 소나무를 주먹으로 마구 꽝꽝 치며 대성통곡쳤다.
"하느님이여, 이 세상에 참사랑이 있습니까? 대답해보십시오."
그때 미녀로봇이 종알거렸다.
"쳇, 인간세상에 무슨 참사랑이고 떡대가리고 있다고 이래요. 진작 저와 살면 될 걸. 미녀로봇은 인간세상의 미녀들처럼 간사하지 않고 솔직한데요."
    만금은 미녀로봇을 주제넘게 논다고 흘겨보았다.

“아빠!”

지예는 아빠 팔을 붙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아빠- 이젠 몽땅 끝났어요. 싹 다 잊어버리세요. 네?"

문걸은 지예를 물리치고 도끼를 휘둘러 사랑이 새겨졌던 소나무 밑둥을 팡팡 내리찍었다. 허위로 꽉 찬 가짜 “사랑”을 쾅쾅 찍어내는 순간이였다.

지예는 아빠 심중을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녀는 내심으로 기뻤다. 아빠는 분명 허위로 찬 “사랑”을 찍어버리고 새로운 출발하려는 것이였다.

지예의 전화를 받고 황급히 뛰여온 춘희가 먼 발치에서 이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걸은 소나무를 찍어눕히고서도 성차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소나무를 끌어다가 방공굴 어귀에 쑤셔넣었다. 뒤이어 그는 공병삽으로 죄악적인 방공굴에 흙을 파서 마구 처넣었다.

“아빠, 왜 이래요?”

문걸은 정신나간 사람 같았다. 그러나 정신이 나가지 않았다. 너무나도 정신이 똑똑했다.

“여긴 더러운 교역을 벌린 함정이야. 숱한 녀자들을 훌러덩 빠지게 한 추악한 수렁이야. 죄악의 구렁텅이야!”

지예는 소나무에 가려진 방공굴 어귀를 들여다보면서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빠, 방공굴인데요. 함정이라니요?”

문걸은 삽으로 흙을 처넣으면서 중얼거렸다.

“여긴 참사랑의 블랙홀이야! 몽땅 파묻어버려야 해.”
     지예는 억이 막혔다.
     "언제까지 파묻어야 이 깊은 방공굴을 다 파묻는다고 이래요?"

그제야 지예는 조금 알아들은 것 같았다. 그러나 어찌 분통이 터지는 아빠의 심정을 다 알 수야 있으랴!  
     혹시 춘희 박사나 알가?

춘희박사는   저 먼 발치에 오도카니 서서 묵묵히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미녀로봇은 문걸이 하는 행세가 납득되지 않아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삼림경찰들은 먼 발치에서 다가오면서 불편한 말을 주고 받았다.

"저 사람, 저게 미쳤잖아?"
     "애꿎은 소나무는 왜 찍어?"
     "함정이라니?"
     "정신병자야!"
     "아니오. 체포하기오."
    문걸이 아글타글하면서 한뉘 쌓아올린 참사랑 신기루가 억장이 무너지듯이 와그르르 무너져 참사랑의 블랙홀을 파묻어버리고 있었다.

산새들이 놀라 포로롱포로롱 날아났다. 깸알을 물어들이던 다람쥐도 놀라 소나무 위로 쪼르르 바라올라갔다. 고놈은 나무가지를 타고 매달려 놀란 눈을 깜빡이며 문걸이 방공굴에 삽으로 흙을 퍼치는 것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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