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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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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소설

대하소설 진달래 소야곡 (25)
2019년 03월 31일 07시 28분  조회:1356  추천:0  작성자: 김장혁








                          47. 사랑과 원한
        범송은 시들어가는 예화의 마음을 살려내려고 모든 정성을 다하였다.
        예화가 조개살을 즐겨 먹는다는 것을 알고 범송은 늘 생선관으로 데리고 갔다. 둘이 해산물을 어지간히 먹어도 200원  밑은 내밀어야 했다. 그러나 범송은 그 순간이라도 그녀가 비통과 고독 감에서 벗어나 조개살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놓였다.
“자, 예화의 찬란한 앞날을 위해!”
“고맙습니다.”
예화는 맥주잔을 들어 범송의 잔에 달라당 부딪치고 시원하게 마셨다.
대낮같이 환한 불빛 아래 수척한 예화 얼굴을 보는 범송의 마음도 쓰라렸다. 그는 될수록 예화를 최성균교수 그늘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해산물을 자꾸 저가락으로 집어 그녀의 접시에 놓아주었다.
예화는 이쑤시개로 조개 살을 쏙쏙 뽑아먹으면서 잠시나마 수척한 얼굴에 미소를 떠올렸다. 그 웃음은 진짜 예화의 얼굴에서 오랜만에 떠오른 값진 미소였다.
범송은 생선관을 나서자 그녀를 데리고 찜질방으로 갔다. 그들은 시원히 샤와를 하고 잠옷 바람에 따뜻한 찜질방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마주 앉아 시원한 음료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문뜩 예화가 애를 두고 나왔다는 대목이 피뜩 떠올랐다.
“애는 어쩌고 나왔소?”
“본가집 엄마한테 맡겼어요.”
기실 예화의 어머니는 범송이 실습을 갔던 천수해중학교 생물교원이였다. 알고 보니 예화의 어머니도 리혼하고 홀로 나서 예화를 고생스레 키웠던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예화도 어머니 옛길을 힘겹게 걷고 있지 않는가.
모든 것은 운명의 조화란 말인가?
예화는 요즘 고민에서 벗어나 홀가분해진 것 같았다. 범송은 스승으로서의 의무를 다 완수한 것 같아 내심의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천정의 오색령롱한 전등불빛이 빙글빙글 돌더니 빠른 절주의 격렬한 음악이 자지러지게 울렸다. 모두들 디스크를 추느라고 야단법석였다. 예화는 일어나 범송의 손을 잡아 일으키더니 디스코마당에 뛰여들었다. 그녀를 기쁘게 해주려고 범송은 그녀와 함께 디스코를 춰댔다. 두팔을 추켜올리고 몸을 잽싸게 탈며 흔드는 그녀의 매혹적인 모습을 보고 모두들 신났다.
예화는 흥이 나서 정신을 잃고 여러가지 섹시한 몸놀림으로 디스코를 추었다.
“그래, 마음껏 춰라! 모든 고민을 몽땅 털어버려라!”
범송은 예화의 생기발랄하고 매력적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응원했다.
다른 춤군들은 모두 예화가 열광적으로 멋지게 춤을 추는 것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참 디스코를 춘 예화는 수건으로 땀을 닦으면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녀는 조용하고 좀 서늘한 칸으로 범송을 이끌고 갔다.
예화는 따뜻한 찜빌방 바닥에 모로 눕더니 범송을 오라고 손짓했다.
“선생님, 오세요.”
범송은 하얀 잠옷을 입고 누운 예쁜 예화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순간 가슴이 뭉클 하며 높뛰였다.
그는 예화가 오늘 따라 해당화처럼 아주 예쁜 감이 들었다.
“오늘 기분이 아주 좋아요.”
“기분이 좋으면 됐소.”
그녀는 생글 웃으면서 범송을 정답게 마주 바라보았다.
“선생님, 돈을 많이 팔게 했어요.”
“아니, 예화 기쁘면 돼.”
“사모님한테 미안해요. 선생님의 곁을 이렇게 오래 차지해서요.”
범송은 묵묵히 예화를 바라볼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 이제야 선생님의 넓은 흉금과 고상한 품성을 알게 되였어요. 선생님께서 저를 고통의 심연에서 구하려고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보낸 진정 고마와요. 어떻게 은정을 다 갚을가요? 선생님, 선생님-”
그녀는 뭔가 말하려다가 말끝을 흐리며 웃몸을 일으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누우면서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선생님, 너무너무 사랑해요.”
예화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라 옆에 나란히 누운 범송을 꼭 끌어안았다.
뜻밖의 거동에 범송은 어리뻥뻥해 밀어내지도 못한 채 그녀가 하는대로 놔두었다.
“딱 목석 같군요. 호호호.”
그녀는 범송의 뻣뻣한 목을 끌어안고 초롱초롱한 포도눈으로 마주 바라보다가  스르르 팔을 풀었다.
그녀는 한숨을 호~ 내쉬더니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집으로 돌아갑시다. 밤도 깊었는데 사모님이 기다리겠어요.”
그 후부터 예화는 사흘이 멀다하게 범송을 불러내 다방에서, 불고기집에서, 찜빌방에서 만났다.
그들은 노래방에 가서 마이크를 쥐고 은은한 악곡에 맞춰 노래를 부르면서 복잡한 마음을 주고받았다. 시원한 음료로 닳아오르는 가슴을 지지고 서로 부둥켜 안고 막춤도 추었다.
예화는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리고 마음이 홀가분해진 기분에 푹 빠졌다. 그녀는 이날 범송과 함께 노래방에서 목이 터지도록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다.
뒤이어 그들은 전번에 갔던 찜질방에서 시원히 닳아오른 몸을 샤와에 식히고나서 나란히 누워 별의별 말을 다하였다.
“전번에 우연히 점쟁이로파를 만난 적이 있어요. 점쟁이로파는 관상을 보더니 이러지 않겠어요.
‘음, 이쁘구만. 삼십대 새파란 나이에 긴 머리카락을 흩날리면서 줄낚시로 숱한 사내들을 줄줄이 낚아서 혼을 빼겠구나.’
또 내 손금을 보더니 이렇지 않겠어요. ‘평생에 사내들을 많이 사귈 팔자구나. 네번째 남자가 천생배필이구나.’
호, 그 말이야 어찌 믿겠어요. 저는 곰곰히 생각해봤어요. 누가 그 네번째 남자겠는가 말이죠. 이젠 제 운명을 믿어요. 전번에 떠나간 시인은 세번째 남자니까 아마 전생에 연분이 없는 분인가 봐요.”
범송은 예화가 비통 속에서 서서히 벗어나 해맑은 모습과 삶의 용기를 되찾은 것을 보고 기뻤다. 그런데 의문도 떠올랐다.
최교수가 세번째 남자면 네번째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
예화는 계속 가슴 속으로 우러나오는 열변을 토하였다.
“이번에도 선생님이 삶의 용기를 복돋아주었어요. 선생님은 저에게 세번째 생명을 준 은인이고 신 같은 존재죠.”
“아니, 제우스나 푸로메튜스 신이나 된 것 같소.”
“그래요. 선생님은 저에겐 신 같은 존재죠. 전번에 한 사이트에서 선생님의 글을 본 적이 있어요. 얼마나 딸을 낳고 싶었으면 그런 글까지 썼겠어요. 사모님은 어쩜 딸을 낳아주지 않아요? 나 같으면 딸을 둘이라도 낳아주련만요…”
예화는 진지한 표정을 짓는 범송을 보고 버릇처럼 혀를 홀랑 내밀었다.
저쪽에서 자지러진 디스코곡이 울렸다. 그녀는 전번처럼 범송을 이끌고 또  그리로 갔다. 하얀 잠옷을 입은 청년남녀들이 열광적으로 디스코를 추고 있었다.
예화는 그 세찬 디스코파도 속에 뛰여들어 열광적으로 디스코를 추었다.
디스코판이 끝나자 예화가 범송의 옆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밤을 새울가요?”
“아니, 래일 출근해야 하오.”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도 활기를 띠였던 예화의 얼굴에 실망과 망설임이 넘실거렸다.
“밤도 늦었는데 돌아가기오.”
밖에 나오자 예화는 범송한테 청을 들었다.
“집에까지 데려다주겠어요?”
“그래, 끝까지 책임져야지.”
범송이 택시를 부르려고 하자 예화가 말렸다.
“아니, 전 오늘 밤 선생님과 함께 어디까지라도 멀리멀리 걷고 싶은데요.”
“이게 몇시오?”
범송은 주춤 멈춰서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자정이구만. 바깥이 꽤나 쌀쌀한데 택시를 타고 가기오.” 하고 망설였다.
“괜찮아요.”
예화는 범송의 팔을 끼고 딱 붙어서서  걸었다.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그녀의 풀어헤친 긴 머리카락이 범송의 볼을 간질렀다. 예화는 신난듯이 어린애처럼 흥얼흥얼 코노래까지 부르면서 엉덩이를 덜썽거리면서 걸었다. 범송은 그 신난 모양을 보고 피씩 코웃음쳤다.
예화는 끝없이 이 말 저 말 늘여놓았다.
그는 부지중 말말간에 “첫번째 남자도 그저 그래. 멋적게 헤여졌지.”하고 말끝을 흐렸다.
범송은 더 물으려다가 이번에도 그만두었다.
그는 예화의 집 문 앞에 이르자 속으로 예화에게 삶의 용기를 북돋아준 것으로 해 스승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였다고 생각하면서 돌아서려고 했다.
“선생님, 어쩜 차 한잔도 마시지 않고 가요?”
“그래? 밤이 깊었어. 난 돌아가야 해.”
“알았어요.”
“오늘로 끝난 것도 아니고. 래일 다시 봅시다.”
“그래. 래일 다시 보지.”
“약속을 어기지 말아요. 래일 좋은 이야기 들려주지요.”
“그래? 그럼 꼭 오지.”
그들은 깍지 걸이까지 하고 헤여졌다.
밤중에 집으로 돌아간 범송은 문을 살짝 열고 죄를 지은 도적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침실로 들어갔다. 그는 전등불도 켜지 않고 옷을 벗어버리고 스리슬쩍 선금의 옆에 기여들어가 번듯이 들어누웠다.
“왜 이렇게 늦었습니까?”
“일이 있어서.”
찰칵, 전등이 대낮같이 환히 켜졌다.
선금은 일어나 앉더니 범송을 똑바로 마주 보면서 물었다.
“또 그 녀학생인지 뭔지 만났어요?”
범송은 개의치 않고 두팔을 깎지걸이를 해 벤채 선금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대답했다.
“양, 자살하겠다는 걸 가만놔둘 수 있소?”
선금은 범송의 주먹코를 마구 비틀어놓았다.
“에이고, 이 싱거운 나그네야. 그래 당신 말을 듣고 자살하지 않겠다고 하던가요?”
“그래, 죽지 않았어. 지금 삶의 용기를 되찾고 새 삶을 살려 한단 말이요.”
“죽는 거 살려냈으면 이젠 모든게 끝나지 않았는가요? 왜 사흘이 멀다하게 찾아가는가요?”
범송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 혹시 예화를 구하다가 사랑에 빠지는 건 아닌가요?”
“어째 겁나오?”
“아니, 그런 무직업자들은 근본 경쟁대상이 안돼.”
“그런데 왜 그리 관심이 과하지?”
범송의 말 속에는 간사한 비난이 물결치고 있었다.
선금은 자리에 누워 묵묵부답하였다.
한참 후 그녀는 전등불을 잘칵 꺼버렸다.
“당신, 대학문을 나왔으니 그렇지. 어데 가서 시내 공안국 과장네 귀공주와 살기나 하겠소? 농민의 아들이 이쁜 색시를 얻었으면 만족할줄 알리라 믿습니다. 잡시다.”
선금은 전에 없이 먼저 손을 써서 범송을 꼭 끌어안았다.
“당신, 다른 생각을 하는 날엔 우리 오빠 가만놔두지 않을 거야. 알았지?”
“에이고, 요것아, 난 널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우리 영철이 엄마 제일 예뻐.”
“호호호.”
“또 한가지. 난 그집 오빠처럼 바람둥이 아니오. 허허허.”
“뭐라고? 다시 우리 오빠 말을 해보지.”
범송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며칠 후 범송은 구입과 사무실 문을 잠그다가 또 예화의 전화를 받았다. 주춤 멈춰서서 갈가 말가 망설였다.
“또 선금한테 뭐라고 거짓말을 하지?”
핸드폰에서 예화의 호들갑을 떠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제가 한턱 내지요. 재미나는 얘기도 들려주고요.”
그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에라, 모르겠다. 가보자.)
그가 택시를 타고 예화와 항상 만나던 찜빌방으로 달려갔다.
예화가 찜질방의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반갑게 맞았다.
범송은 버릇처럼 화장실부터 들어갔다.
“어, 이게 누구야?”
화장실에서 뜻밖에도 승호를 만날 줄이야.
승호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밤중에 뭐야? 저 계집애 작작 만나라.”
“녀학생이야.”
“학생이라도 그렇지. 왜 사흘이 멀다하게 만나?”
범송은 개의치 않았다.
“선금한테서 뭘 들었는 모양이구나. 저 앤 우리 최성균 선생을 짝사랑했다가 자살하겠다는 걸 어쩌겠니?”
“허허허. 널 믿어. 그래서 녀동생도 줬지.”
승호는 아주 로련하게 자기 할 말은 다 하고 슬쩍 어색한 기분을 전환하면서 물러섰다. 진짜 탕탕 주먹을 안기고 살짝 빠져나가는 묘수였다.
“무슨 일로 여기 왔니?”
“오, 백화상점 광장군무 때문에 안무가들을 만났어.”
“그래? 저 학생도 춤을 죽여준다. 보지 않겠니?”
“그래, 그럼 합석하면 어떻니?”
“좋아.”
범송이 화장실에서 나오자 예화가 조용한 방에 안내했다.
범송이 예화한테 승호를 인사켰다.
“예화, 인사하오. 백화상점 공회 주석을 하는 내 동창생이오.”
“안녕하세요?”
“안녕? 리승호라고 부르오.”
승호는 예화와 악수를 나누는데 벌써 눈빛이 달랐다.
(색마 같은 놈, 예화를 털끝 하나 다쳐보지.)
범송과 예화는 승호를 데리고 조용한 방으로 들어갔다.
범송은 아가씨를 불러 시원한 맥주와 안주를 주문했다.
주안상이 들어오자 범송은 맥주잔에 술을 돌리고 맥주잔을 들었다.
“자, 한잔!”
“건배!”
술잔을 잘라당 마주치는 소리 귀맛좋게 들렸다.
이상하게 예화와 승호가 그윽한 눈길을 마주치는 것 같았다.
(진짜 추파를 보내는구나.)
범송은 이상야릇한 기분에서 빠져나오려고 모지름을 썼다.
“리주석, 예화는 춤실력이 이만저만 아니오. 오간부와 말해서 백화상점 무용교원으로 데려오면 어떻소?”
승호는 기다렸다는듯이 “오, 그래, 그래. 지금 한창 군무를 련습하는데 솜씨 펴보오.”라고 하면서 예화의 걀죽한 미모를 슬쩍 훔쳐보는 것이였다.
“이렇게 하기오. 먼저 우리 백화상점 녀무용수 옥설과 함께 군무를 리드하오. 전근수속은 후에 하지.”
“고맙습니다.”
예화는 걀죽한 얼굴에 장미꽃을 활짝 피웠다.
“백화상점을 무대로 삼아 한바탕 즐겨보죠.”
범송은 손사래를 쳤다.
“그래, 백화상점에 아름다운 형상을 돋궈주오.”
예화는 쌔무룩이 웃었다.
“예, 알았어요.”
예화는 범송의 옆자리에서 살짝 일어나 승호한테 맥주를 따라드리면서 습관처럼 아양을 떨었다.
“오늘 또 귀인을 만났네요. 리주석, 분부만 하세요. 뭐든 잘 해드리겠어요.”
승호는 기다렸다는듯이 입귀가 째질 지경이면서도 범송의 눈치를 슬슬 엿보면서 맥주잔을 굽냈다. 그도 범송과의 사적관계를 밝히지 않고 지껄여댔다.
“최 과장, 허허허. 예쁜 무용수를 우리 공회에 소개해줘서 고맙소. 예화라지?”
“예.”
“예화, 우리 무용대에 와서 잘하오. 뒤근심은 하지 마오. 빵도 있고 우유도 있을 거요. 허허허.”
승호는 녀인을 홀리는데는 이골이 텄다. 그는 범송의 눈치를 보면서도 예화와 서로 부둥켜안고 교배주까지 마시면서 놀아댔다. 아예 예화를 범송한테서 떼내가려는 눈치였다. 녀동생에게도 좋고 자기에게도 예쁜 예화가 생겨서 일거량득이 아닌가.
범송은 년놈들이 노는 것이 진짜 눈골사나왔다.
(개꼬리를 삼년 파묻어놔도 그 개꼬리라더니. 쳇, 저래서 영희가 시름놓지 못하지.)
범송도 외롭게 맥주잔을 들어 쭉 굽을 냈다.
이때 찜빌방대청 쪽에서 요란한 댄스곡이 울렸다.
승호는 범송을 보고 예화를 데리고 가서 춤실력을 보자고 했다.
번쩍번쩍 빛나는 오색령롱한 불빛 아래 숱한 청춘남녀들이 자지러진 음악에 맞춰 신나게 디스코를 췄다. 얼근히 마신 예화도 춤판에 뛰여들었다. 그녀는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리고 요동치면서 실버들가지처럼 날씬한 허리와 탄력있는 엉덩이에  허벅지까지 비틀고 흔들며 열광적으로 디스코를 춰댔다. 그녀의 섹시한 몸매와 디스코실력은 완전히 뭇사람들의 눈알을 몽땅 빼갈 지경이다.
“좋지! 좋다!”
승호도 춤판에 뛰여들어 예화와 함께 디스코를 추었다. 예화의 부드럽고 섹시한 춤에 걸맞게 승호의 춤은 강인하고 열렬해서 기복과 조화를 이루었다. 나중에 다른 춤군들은 빙 둘러서서 박수 치며 응원하고 예화와 승호가 쌍무를 추는 격으로 됐다.
탕!
갑자기 천정에서 샨데리아가 박산나며 땅바닥에 와르르 흩어져내렸다.
모두들 깜짝 놀랐다. 여기저기서 녀인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제길할, 썩 꺼지지 못해?!”
골프채와 야구방망이를 든 거머칙칙한 깡패들이 우르르 뛰여들었다.
“쳐라!”
깡패들은 다짜고짜 승호한테 씽 덮쳐들었다.
“쳐라!”
깡패들은 골프채와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며 승호를 구석에 몰아넣었다. 승호는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몰라. 몸을 훌쩍 날려 벽을 마구 톺아오르다가 뒤로 공중잡이로 먼저 덮쳐온 깡패 어깨우로 날아넘어가며 발길을 날렸다.
“악!”
깡패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나동그라졌다.
고양이처럼 바닥에 날아내린 승호는 그 놈이 떨군 골푸채를 주어들고 호랑이처럼 깡패들과 맞서 싸웠다. 그새 범송은 질겁해 바들바들 떠는 예화를 빼내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춤군들도 재수없다고 두덜거리면서 사처로 헤여졌다.
깡패들은 수적우세를 믿고 승호를 물샘틈없이 포위하고 각일각 조여들며 골프를 휘둘렀다.
“얏!”
기합소리와 함께 한 청년이 깡패들의 뒤에서 밥상다리를 뽑아들고 바람개비처럼 휘두르며 깡패들을 쳐눕혔다.
승호가 피뜩 보니 뜻밖에도 하늘에서 날아내린듯이 성호가 아니겠는가.
기실 성호는 가시아버지 전화를 받고 허송파네가 승호와 범송을 치러 간다는 것을 알고 급히 택시를 타고 찜질방으로 달려왔던 것이다. 물론 전번에 광고 때문에 백화상점에 갔을 때 승호가 괘씸하게 놀았다. 하지만 성호는 위험에 처한 승호와 범송을 구하지 않고 이리떼 같은 깡패들한테 맞아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하늘에서 신병이 내린듯 성호가 합세하자 힘을 얻은 승호는 골프채를 휘둘러 서넛을 쳐눕혔다.
“뛰쳐나가자!”
승호가 고함치며 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깡패들은 뜻밖에 뛰여든 승호와 쌍둥이처럼 생긴 성호를 보고 주춤거리다가 제 정신이 펄쩍 들어 고함치며 쫓아왔다.
“서라!”
“어디로 도망쳐!”
뒤에서 깡패들이 악마처럼 맹추격했다.
범송은 예화를 빼보내고 찜질방 밖에서 승호와 합세했다.
그들 둘은 닫다가도 제일 먼저 달려드는 깡패를 쳐눕히며 어둠 속에  사라져버렸다.
예화는 먼발치에서 용감한 최 과장과 리승호의 모습을 보고 못내 탄복했다.
며칠 후 예화는 백화상점 광장에서 집체댄서를 추는 옥설를 비롯한 녀무용수들 속에 나타났다.
백화상점을 지나가던 숱한 행인들이 미녀들의 집체댄스를 추는 것을 구경하였다. 그녀는 녀무용수들의 절주 있는 집체댄스 뒤끝에 격조 높은 음악에 맞춰 디스코를 분방하게 췄다. 진짜 관객들의 눈길을 모았다. 아니, 숱한 사람들의 찬탄 속에 그녀의 디스코는 춤판을 고조에로 이끌어갔다.
그후부터 날마다 오전 10시 좌우와 오후 3시 좌우이면 그녀를 비롯한 미녀들의 집체춤판이 펼쳐졌다. 하여 백화상점은 손님들의 열렬한 인기를 끌었고 매출액도 눈뜨이게 올라갔다.
모두들 공회 주석 리승호는 재간 있고 능력이 있다고들 감탄할 지경이였다.
안수련 총경리는 웃음주머니가 흔들거렸다.
그녀는 뜻밖에도 승호가 전근하겠다는 말을 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리주석, 왜 전근하려오?”
“백화상점에서 할 일이 없습니다.”
“아니, 주석을 시켰는데 좀 좋아 그러오?”
“아무런 실권도 없는 필마옹을 그만두겠습니다. 전번에 성호가 찾아왔을 때도 보십시오. 백화상점의 리익과 광고회사와의 신용을 위해 동창생인 것도 체면을 가리지 않고 충고했건만. 제 의견은 받아들였습니까?"
“어디로 가려고?”
 “제발 놔주십시오. 경옥을 해친 나쁜 놈입니다.”
안수련 총경리는 서류가방을 챙기다가 손을 멈추고 승호를 유심히 마주보았다.
“어머니 뭐라더냐?”
성호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그는 갑자기 머리를 번쩍 쳐들며 정색해 따지고 들었다.
“솔직히 말하십시오. 절 죽여치우고 싶었는데 왜 중용했습니까?”
안수련 총경리는 정색하더니 서류가방에서 손을 떼고 의자에 되앉았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개인 감정으로 사업을 대하지 않아. 네 능력을 봐서…”
“건 전부가 아닙니다.”
안수련 총경리는 아주 태연자약하게 조용히 말했다.
“그래, 널 보는 순간 누군가 련상되더구나. 딱 그 사람을 닮았어.”
“누구를?”
“아니, 아니야. 리과장을 닮았단 말이야.”
“의사질하던 그 사람 말인가요? 그 사람 때문에 우리 어머니와 사랑싸움까지 했잖았습니까?”
“더는 속이지 않을게.”
안수련 총경리는 단정히 앉더니 승호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그래. 넌 리과장의 아들이 아니야.”
“?”
“넌 리공석의 아들이야! 공석을 딱 떼닮았어.”
“리공석?”
“그래. 리공석은 의사였어. 나와 네 어머닌 그이 고중동창생이였어. 그이 아버지는 우리 현 공안국 국장이였어.”
“네 엄마와 난 누구도 그이를 가지지 못했어. 그는 앓아서 죽었으니까.”
성호는 정신이 아찔해났다.
안수련은 온몸을 전률하는듯 하더니 떨리고 격앙된 목소리로 뒤말을 이었다.
“아, 그이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아. 네 에미한테 숱한 사랑과 정을 주고 떠나갔단 말이야. 미남이였어. 아주 천하미남이였지.”
그녀는 돌아서더니 분명 어깨를 들먹이고 있었다.
“공석의 죽음으로 모든게 끝났어. 그런데 네가 우리 딸을 해쳤어. 금이야, 옥이야 하는 내 딸 경옥을 네 놈이 다쳐? 가라, 다시 순진한 처녀애들을 해치면 죄를 만날 거야.”
그녀는 승호를 외면하면서 창가에 다가가더니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쳤다.
“난 널 보는 순간 공석을 보는 같아 해치지 않았다. 모든 건 허황한 꿈이였어.”
승호는 번개를 맞은듯 뇌리에서 우뢰가 진동쳤다.
“리공석?!”
누구일가?
승호는 안수련 총경리한테 허리 굽혀 인사하고 총경리실을 나오면서도 그 이름을 외웠다.
그러나 어머니도 안수련 총경리도 더는 마음의 상처를 긁으면서 알려주려고 하지 않았다.
한편 그는 범송이 처지도 근심스러웠다.
(어머니와 나에 대한 원한의 골짜기가 저렇게 깊은데 내 매부라고 놔둘가?)
승호가 길거리를 나왔을 때는 모든 것이 자오록한 안개 속에 잠겨 있었다. 그가 근 10년이나 몸을 잠그었던 백화청사, 아니, 온 시내가 몽롱한 안개와 연기 속에 꿈틀거리고 있었다.
성난 사자와 같은 정열이 삼복염천의 무더위처럼 휩쓸고 지나간 뒤에 고독이 흐느끼며 꼬리를 물었다.
 
             48. 간판광고의 달인

        여우도 추워 발을 동동 구르면서 눈물을 흘릴 겨울이 덮쳐왔다. 동장군의 랭랭한 입김이 대지를 핥으면서 지나가자 하늘땅이 몽땅 꽁꽁 얼어붙었다.
        성호는 맵짠 추위에도 광고를 물어들이러 뛰여다녔다. 그는 어쩌다가 마수걸이로 백화상점의 “장백산금술”광고를 얻어들여 단통 광고수입 만원을 올렸다.
김범수 총경리는 성호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참 잘했소. 이제 그런 큰 ‘고래’를 몇개만 더 걸여오면 올해 광고임무를 완수하겠군. 힘내오, 젊은이.”
이때 경리실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김범수가 전화기를 들자 욕설부터 울렸다.
“김경리, 당신 정 재미 없게 놀겠어?
“무슨 소리오? 리경리.”
“백화상점광고를 빼앗아갔더구만.”
“우리 언제 빼앗았소?”
“그래도 시치미 딸 작정인가?”
“백화상점에서 결정했지. 우리 빼앗아온 건 아니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남의 광고를 빼앗아간단 말인가? 엉?”
“작작 떽떽거리오. 우린 절대 빼앗지 않았소.”
“개소릴 작작 쳐. 우리 광고회사가 쫄딱 망하게 생겼다니까. 백화상점 광고를 몽땅 성호한테 위탁한다고 하더군.”
“시장경제시대엔 뭐나 신용과 능력으로 첫째지. 눈물에 의거해선 안되네. 하하하.”
“당신 진짜 기를 채울래? 그따위 짓 해보라우. 언제 된방매를 맞지 않나!”
“그쪽이 망하면 이쪽으로 전근해오게나. 허허허.”
“개소릴 작작 치라우!”
김경리는 이쪽으로 건너왔다.
“성호, 잘했소. 저 굉팔은 너무 치사하오. 저자가 보기 싫어 상급에 말해서 혼자 나와서 이 광고회사를 따로 차렸소. 헌데 이젠 우리 회사와 경쟁해서 지게 생겼소. 허허허.”
그는 성호의 손을 잡아주었다.
이튿날 성호는 백화상점의 가전제품광고를 계약하려고 자전거를 타고 백화상점으로 재차 달려갔다.
도중에 굉팔의 희번뜩거리는 우멍눈이 떠올라 저도 몰래 잔등에 식은 땀이 돋아났다.
(리경리와 정면충돌하면 어쩌지?)
그는 백화상점 광장에 이르러 자전거에서 내렸다. 섹시한 녀무용수들이 집단으로 댄스를 절주나게 추고 있었다.
그는 궁리를 번개같이 굴렸다.
(다른 백화상점도 찾아가서 광고를 동원해볼가?)
그러나 인차 주춤 멈춰섰다.
(거기서도 리경리를  만나면 어쩔가?)
이윽하여 그는 간신히 마음을 굳혔다.
(이게 바로 현실도피주의라는 거야. 언제까지 굉팔을 피해야 하는가? 안총경리가 나를 믿는 한 리경리와 경쟁해서 이길 수도 있잖은가.)
그는 백화상점에 들어가 승강기에 올랐다.
그런데 뜻밖에도 승호와 딱 마주칠줄이야.
“안경리를 찾아가지?”
“응.”
“가지도 말라. 백화상점 광고는 내가 도맡았어.”
뜻밖의 말에 성호는 주춤 멈춰섰다.
그는 원래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승호 말이 미덥지 않았다.
“얘, 네가 웬 광고냐?”
승호는 총경리실을 흘끔 쳐다보더니 긴 목을 빼들고 목소리를 낮췄다.
“굉팔 경리네 광고회사로 가기로 했어.”
“오~”
성호의 머리는 삼검불같이 복잡해졌다.
승호는 비난사정을 들이댔다.
“좀 양보하면 안되겠니? 굉팔 경리는 꽤나 까다롭다. 큼직한 광고를 들고 들어가야 내 앉을 자리 있을게 아니냐?”
성호는 뒤더수기를 긁적거리다가 “그래라. 백화상점 광고는 네가 더 잘할 수도 있지.”라고 했다.
“안돼!”
문이 벌컥 열리더니 안수련 총경리가 얼굴이 퍼러뎅뎅해 나타났다.
“우리 백화상점 광고는 성호를 내놓곤 누구한테도 주지 않아.”
승호는 머리를 천천히 쳐들었다.
“안총경리, 절 한번 봐주면 안됩니까?”
“꿈도 꾸지 마오.”
안총경리는 승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성호를 보고 반색했다.
“자, 어서 들어가기오.”
성호는 승호의 눈치를 보면서 차마 발을 떼지 못했다.
그때 범송이 나와 승호의 팔소매를 잡아당겼다.
승호는 범송의 손을 뿌리치면서 안총경리를 보고 돌직구를 퍼부었다.
“이제야 본질이 드러났구만.”
범송은 승호를 마구 끌고 구입과 쪽으로 갔다.
숱한 직원들이 복도에 나와서 이쪽을 보았다.
안수련 총경리도 질세라 욕설을 퍼부었다.
“넌 성호의 발치에도 못 가! 량심 없는 놈.”
그는 성호를 돌아보며 상냥하게 말했다.
“성호는 ‘정의용사’죠. 우린 ‘정의용사’와 손잡겠소!”
성호는 마지못해 총경리실에 스적스적 따라들어갔다.
“백화상점 광고를 승호한테 맡기면 안됩니까? 괜히 싸움이라도 나면 어쩝니까?”
안총경리는 조금전보다 정서가 퍽 안정됐다.
“파리 무서워 장 담그지 못하겠소? 그런 탐욕스럽고 허위적인 놈들한테 광고를 맡길 순 없소.”
그녀는 광고계약서에 통쾌하게 싸인하고 도장을 뚝 찍어주었다.
“행인들의 눈에 확 뜨이게 광고를 잘 설계해주오.”
“예, 가전제품광고에 이쁜 아가씨를 배경으로 세울가 합니다.”
안수련 총경리는 반색했다.
“참 창의적인 설계오. 행인들 눈길을 끌 수 있겠소. 죽은 가전제품이 살아나는 감도 나지 않고 뭐요.”
성고가 광고계약서를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수련 총경리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성호, 아예 우리 백화상점에 와서 일하면 어떻소?”
성호는 섬찍해났다.
승호를 실컷 리용해 먹고 가차없이 썩뚝 잘라버리는 그녀와 어쩐지 함께 일하기 싫었다.
“믿어줘서 고맙습니다. 전 광고를 좀 해봐야겠습니다.”
안수련 총경리는 성호한테 다가오면서 정색했다.
“우리 백화상점은 이젠 주식회사로 탈바꿈하게 되오. 우리 백화상점 상품광고비만 해도 한해에 20만원 빠져나가야 하오. 우리 백화상점에 광고회사를 차리면 광고비를 남아도 번 것이 아니고 뭐요? 우리 광고회사 경리를 하면 어떻소?”
성호는 그녀의 시대에 앞선 경영의식에 놀랐다. 그러나 성호는 그녀가 능란할수록 더욱 싫어졌다.
그는 능란하고 교활한 인간들 속에서 갈등을 겪으면서 살기 싫었다. 그래서 우직한 소 궁둥이나 치면서 살려고 고향 산속으로 들어간 적도 있지 않았는가.
안수련 총경리는 제 좋은 궁리만 굴리고 있었다.
“백화상점 주식을 많이 사면 장차 부리사장이 될 수도 있지.”
성호는 허구픈 웃음을 지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되겠습니다. 백화상점 광고를 맡겨줘서 감사합니다.”
“아까운 인재 자그마한 광고회사에서 썩겠구만.”
등뒤에서 안경리의 탄식소리가 들렸다.
성호는 광고회사에 돌아오자 곧추 경리실에 들어가 광고계약서를 김범수 경리 사무상 우에 내놓았다.
“아니, 이게 뭐요? 단번에 12만원 계약했소?”
김범수 경리는 광고계약서를 들고 보면서 만면춘풍이 흘렀다.
“진짜 기적이요. 우리 광고회사에 광고달인이 나타났구만. 하하하.”
성호는 숙였던 머리를 들더니 자못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김경리, 굉팔은 지금 승호를 내세워서 우리 광고를 빼앗아가려고 합니다.”
김범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성호는 금방 백화상점에서 벌어진 일을 쭉 이야기했다.
“보오. 뭐나 믿음이 중요하오. 굉팔이 아무리 욕심 써도 되오? 안경리는 정의용사를 믿는단 말이요.”
김범수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의자에 되앉았다.
성호는 한마디 더했다.
“2백화상점에 가서 광고동원을 할가 하는데 어떻습니까?”
“아니, 아니오. 그러지 마오.”
“예?”
김범수 경리는 의자등받이에 잔등을 대더니 성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정색했다.
“백화상점 사이에 원래 상업경쟁이 심하오. 2백화상점 광고 나가면 안경리가 좋아하겠소? 괜히 곰이 옥수수이삭을 따는 격이 되겠소.”
듣고보니 도리가 있었다.
“너무 욕심을 부렸구만.”
“그래, 만약 2백화상점 광고동원을 가더라도 내 가는게 훨씬 낫을 수 있지.”
“예?”
“들어보라구.”
김범수는 의자등받이에 잔등을 기대더니 허리를 쭉 폈다.
“제 가면 두 백화에 가전제품광고경쟁을 불러일으키는게지.”
성호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나 내 가면 경쟁을 붙인다는 말은 듣지 않을 수 있잖소?”
“예, 알았습니다.”
김경리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내쉬였다.
“지금 상급 오간부는 우리 두 광고회사가 무리한 경쟁을 하기에 총체적인 광고수입에 영향준다고 하오. 오간부가 막다른 조치를 댈 수도 있소.”
“예~ 광고가 이렇게 복잡할줄은 몰랐습니다.”
“잘 해보오. 전도 창창한 대학졸업생인데 뭐나 전면적으로 고려해야 하오.”
“예, 명심하겠습니다.”
김범수 경리는 만족스레 웃음지으면서 나가보라고 손짓했다.
성호는 뒤더수기를 긁적거리면서 경리실을 나와 촬영실에 들어갔다.
“큰 광고를 얻어왔다면서?”
선희가 일어나더니 허리를 비꼬면서 사뿐사뿐 다가와 아양을 떨었다.
“명모델을 어떻게 써먹으려는 건가요? 섹시한 창의설계를 했나요?”
성호는 겸손하게 나왔다.
“명모델 선희 얼굴에 먹칠을 하지 말아야지. 우리 잘 설계해보기오.”
“그러죠.”
성호와 선희는 촬영실에서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모아 멋지게 설계해나갔다…
며칠 후 백화상점 높은 벽에 환한 간판광고가 높이  걸렸다.
커다란 간판광고에는 이런 장면으로 장식됐다. 섹시한 모델 선희가 짧은 치마 바람에 두 손으로 색텔레비죤을 받들어 가리키고 있다. 그 옆에 선희가 한쪽 다리를 뒤로 살짝 비꼬고 한손으로 랭장고 문을 열고 한손으로 랭장고 안을 가리키고 있다.
처음 섹시한 아가씨를 배경으로 가전제품을 홍보하는 파격적인 간판광고는 퍽 인기를 끌었다.
며칠 후 안총경리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성호, 감사하오. 간판광고 덕분에 숱한 손님들이 가전제품을 사러 몰려왔소. 구입과에서 미처 판매수요를 만족시키지 못할 지경이오.”
“예, 저도 기쁨니다. 광고비는 언제 주겠습니까?”
“깜빡 잊었구만요. 오늘 당장 가져가오.”
“고맙습니다.”
성호는 그 자리로 자전거를 타고 쏜살같이 백화상점에 달려갔다.
그는 재무과에 가서 5만원짜리 돈표를 받아가지고 광고회사로 가면서 베아링처럼 속궁리를 굴렸다.
(백화상점 광고에만 매달려선 안돼. 꼭 새 광고를 개척해야지.)
성호는 광고회사에 돌아와 재무과에 들어가 해연한테 은행 수표를 내밀었다.
“우~와~ 5만원짜리야?!”
해연은 수표를 쳐들고 보면서 야단쳤다.
“수고비만 해도 만원이야. 만원. 한턱 내.”
성호는 사람좋게 웃었다.
“모델아가씨도 한턱 있겠죠?”
선희가 문을 떼고 들어서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그럼.”
“어머, 군침부터 난다. 호호호.”
성호는 선희가 어쩐지 이상한 녀자로 보였다. 광고를 설계할 때 “아이유, 더워라.” 하면서 고의로 짧은 치마 폭을 들어 부채질하면서 우유빛 허벅지를 드러내보이지 않겠는가.
그렇다, 해연과 선희는 이전에 조과장과 승호한테 찰싹 들어붙어 질탕하게 놀아난 아가씨들이 아닌가. 그때도 선희는 초면강산에도 승호 무릎에 마구 올라가 앉지 않았는가.
성호는 그녀들의 정체를 다 몰랐지만 자기 감각을 믿었다.
(이런 녀자들과는 매사에 주의해야지. 자칫 함정에 빠지겠어.)
성호는 그녀들과 금을 쪽 그어놓고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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