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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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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78)
2017년 08월 26일 11시 56분  조회:1510  추천:1  작성자: 김장혁



                               

                10. 검은 그림자
 

      해가 서산으로 그물그물 져갈 때 공학과 벽선이 공안일군들의 트럭에 앉아 함흥촌 촌공소에 들어섰다.

상순이 황급히 마주 나가보니 천룡구 국장이 보이지 않고 대신 허영호 과장이 공안일군 대여섯을 데리고 오지 않았겠는가.
상순은 허백호 서기와 관계를 윤활하게 처리하려고 허영호를 현공안국 정철과 과장에 진수해파출소 소장을 겸임시켰던 것이다. 

“보고, 김 국장. 명을 받고 달려왔습니다. 전투임무를 맡겨주십시오.”

허영호가 군례를 척 붙였다.

상순은 인차 답례하고 나서 허영호 일행을 데리고 촌공소 안에 들어가 할아버지한테 인사시켰다.

서로 인사를 끝내고 자리에 앉자마자 상순은 영호과장에게 물었다.
“어째 천 국장은 오지 않았소?” 

“천 국장은 로야령 일대에 또 미제 남조선 특무들이 날아내려 현 공안국의 대부분 공안일군들을 데리고 간다고 알리라고 합디다.”

상순은 허영호의 대답에 머리를 끄덕였다. 이젠 천용구는 오래잖아 국장으로 제발될 것이었다. 상순은 자기가 제발시킨 천용구의 발전에 마음 속으로 얼마나 기쁜지 몰랐다.

상순은 눈길을 옆에 서 있는 공학과 벽선에게 돌렸다.

“인차 저 트럭에 앉아 도문과 개산툰 병원에 가라. 요즘 조선에서 병원에 들어온 조선 부상병들에게 용천과 이병수라는 조선인민군 군관이 왔는가 알아보고 오너라.”

“용천 대장이 의심스럽습니까?”

떡 서서 자기를 바라보는 공학을 보고 상순은 여럿을 둘러보며 의심되는 몇 가지를 말했다.

“용천 대장이 찬 권총은 조선인민군 소련제 권총이 아니고 미제 모젤권총이었다. 그들이 신은 군화는 남조선괴뢰군이나 미군이 신는 군화인 거 같아. 내 소서구에 숨어서 볼라니 그들 둘은 조개덕 뒤 한족묘지에 숨어서 망원경으로 우리 마을을 한참 살피다가 들어왔다.”

그제야 공학은 황급히 바깥에 뛰어나가 트럭에 올라탔다. 바깥에서 트럭이 급히 떠나는 엔징 소리가 요란히 들리더니 점점 멀어져갔다.

이윽고 진수해파출소에서도 공안일군들 넷이 찌프에 앉아 동선의 안내를 받으며 달려왔다.

“난 영월구 공안 분국 국장 김상순이오. 마을의 민병들까지 합세하면 이 병력으로 이 부근에 날아 내린 특무들을 붙잡기는 문제없소.”

상순은 자기 작전방안을 내놓았다.

“지금 용천과 병수가 특무라는 확실한 증거를 쥐지 못한 형편에서 풀을 건드려 뱀을 놀래지 말아야 하오. 그물을 좀 더 넓게 쳐 큰 고기를 낚아야 하오.”

그 말에 모두들 머리를 끄덕였다.

상순은 좌우를 둘러보며 뒷말을 이었다.

“먼저 우리 마을에 뛰어든 불청객들을 면밀히 감시하는 한편 가능하게 바깥에 있을 다른 특무들을 수색해내야 하겠소.”

그는 뒤이어 민경들에게 이리이리 하라고 지시했다. 민경들은 상순의 지시대로 분조를 나눠 어둠이 깔린 산으로 수색하러 올라갔다.

병완은 마을의 흥수와 상진, 보준, 한봉 그리고 외손자들인 동길, 명길까지 불러 민병들을 조직해 전투를 포치했다. 민병들은 분조를 나눠 먼발치에서 용천과 병수가 들어있는 덕성이네 집을 물 샐 틈도 없이 에워싸고 감시했다.

자정이 돼 공학과 벽선이 민경과 함께 트럭에 앉아 웃새집 앞 큰길에 들어섰다.

그런데 병완은 어데 갔는지 집에 없었다.

공학과 벽선은 황급히 상순 삼촌의 집으로 뛰어갔다. 그때 상순은 마당의 울바자 안에 숨어서 서쪽 덕성이네 집을 살피고 있었다.

“그래, 알아 봤느냐?”

“예.”

“집에 들어가 얘기하자.”

상순은 어둠이 두텁게 덮인 주위를 둘러보더니 윗방으로 들어갔다.

공학은 목소리를 낮춰 정황을 알렸다.

“도문과 개산툰 병원에 가서 알아봤습니다. 그런 군관 온적이 없답니다. 부상병을 호송한 간호사들과 전사들, 심지어 부상병들도 용천과 병수라는 군관은 전혀 들어본 적도 없다고 합디다.”

상순은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내 그럴 줄 알았다. 부상병은 간호사들과 병사들이 호송하는 게 상례지. 용천과 같은 군관이 전선에서 싸우지 않고 후방으로 부상병이나 호송할 순 없다. 별로 이상하다 했더니. 흥!”

상순은 무슨 궁리를 하더니 숙였던 머리를 들었다.

“할아버지한테 가자.”

“노할아버지가 어디로 나가고 계시지 않습디다.”

“이 밤중에 어디로 갔을까? 병수도 보이지 않고. 아차, 할아버지가 위험하다.”

“웃새집 큰어머닌 소서구 쪽으로 올라갔답디다.”

“뭐라고?”
“넌 윗집 용천의 동태를 살펴라.”

상순은 공학에게 부탁하고 권총을 빼들고 후닥닥 뛰어나갔다.

그는 쏜살같이 태평강을 건너 천지꽃산 비탈로 오르기 시작했다. 할머니 산소로 거의 올라갈 때 할아버지가 대성통곡 치면서 하는 말소리가 어둠을 타고 울렸다.

“여보, 노친~ 내 오래 사니 별 일을 다 보겠소~ 으흑흑, 자식을 앞세우고 내 무슨 멋에 산단 말이오? 황소 같던 맏아들을 조선 전쟁터에서 미군 비행기 폭격에 잃었소. 그 놈이 이 추운 겨울에 어느 산에서 어는지? 승냥이들이 물어갔는지 알 길이 없, 없소~ 저 애비 없는 장손 경수가 불쌍하오.”

상순은 할아버지가 맏아들을 그리며 할머니 산소에서 대성통곡치고 계시는 것을 보고 마음이 칼로 에이는 듯이  아팠다.
      그가 산소로 달아가려고 할 때다. 갑자기 나무숲 속에서 버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상순은 멈칫 멈춰서며 허리를 굽히고 어둠속의 나무 숲속을 살피며 귀를 도사렸다.

“할아버지!”

나무 숲 속에서 누군가 나오며 소리쳤다.

“누구야?”

“손자 이병수예요.”

“손자?”

“그래요. 전 할아버지 손자벌 돼요. 기억나요? 한산섬의 이성군 할아버지 말이예요.”

“큰 처남 말인가?”

“예. 제가 바로 이성군 할아버지 맏손자예요. 기억나죠. 이전에 제가 할아버지랑 아버지랑 함께 명천 운주동에 갔죠.”

“아, 그래. 기억난다. 네가 그럼 큰처남의 손자란 말이냐?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병완은 병수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래, 네로구나. 정말 꿈만 같구나.”

병완은 병수를 끌어안고 노친의 산소에 대고 울면서 말했다.

“여보, 노친, 보았소? 이게 꿈이오? 생시오? 당신이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본가집 손자 병수가 왔소. 으흐흑, 오래 살아야 할 당신이 가고 내 이렇게 오래 살아 뭘 하오?”

병수는 권총집을 잔등 뒤로 돌려놓고 넓적 엎드려 큰 절을 올렸다.

“할머니, 고향에서 이제야 찾아온 손자의 절을 받으세요. 왕고모할머니― 어허헉, 할아버진 생전에 할머니를 얼마나 찾으셨다고 그래요. 허헉헉, 헉헉.”

상순은 그제야 병수가 바로 이전에 운주동에 와서 자기와 놀던 형님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형님, 나 상순이오.”

상순이 다가가자 병수는 일어나 팔소매로 눈물을 닦으면서 상순을 와락 끌어안았다.

“진작 알았어. 네가 바로 성칠 큰아버지가 외우던 공안국 국장 동생인 걸 진작 알았다.”

“헌데 왜 이제야 말하오?”

병수는 상순을 끌어안고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뒤이어 그는 병수와 함께 할머니 산소 옆에 나란히 앉았다.

병수는 거짓말 절반 정말 절반 꺼냈다.

“성칠 큰아버지는 우리 조선인민군 연대장이죠. 난 저 용천 대장과 함께 성칠 큰아버지네 조선인민군에 입대했지. 그때 성칠 큰아버지는 조선인민군을 영솔해 경남에까지 쳐들어갔어요. 후에 용천 대장은 전선에서 큰아버지 연대의 부연대장을 했고 난 큰아버지가 봐줘서 대대장으로 됐어요. 전 잘 몰랐던 건데요. 왜 용천과 성칠 큰아버지가 진달래 어쩌고 경주와 경수 저쩌고 하면서 고양이와 쥐처럼 싸우는지 영문을 정 몰랐댔는데요.  지금에야 알 것 같아요. 원래 진달래 아주머니 때문이야. 서로 자기 아내라고 아귀다툼한 거지.”

욱 하면 벽도 마구 차고 나가는 성미인지라 상순은 길게 늘여놓는 병수의 말을 중둥무이를 시켰다.

“그래 대체 어쨌단 말이오? 성칠 형님은 확실히 미군 폭격기 폭격에 희생됐소?”

“바로 그거 때문이야.”

어둠 속인지라 병수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말만은 아주 똑똑했다.

병수는 한숨을 후 땅이 꺼지게 내쉬었다.

“난 누가 큰아버지를 살해했는가를 알려주자고 이 곳에까지 용천 대장을 따라 온 거예요.”

“그래 누가 우리 큰아버지를 살해했소?”

“저 용천이란 놈이 죽였어.”

“뭐라고?”

“내 말 들어요.”

병수는 산소 주위를 둘러보더니 끝내 큰마음을 먹고 무거운 입을 열고야 말았다.

“왕고모 돌아가신 걸 알고 모든 걸 무덤에 가지고 가려고 했던기여. 허나 할아버지께서 할머니 산소에서 대성통곡치실 때 내 마음 비길데 없어졌어. 저 용천이 무명고지에서 큰아버지 가슴에 총을 놔서 살해했던게라.”

“사실인가?”

“그래.”

“절대 그럴 수 없어. 큰아버진 어떤 명사수 사냥꾼이라고. 용천에게 다 당해?”

“사실이라니께. 무명고지에서 성칠 큰아버진 산 위에서 달려 내려가며 총을 쏘았지. 용천은 산 아래에서 올리쏘았지. 용천은 어깨에 관통상을 맞고 쓰러졌어. 허나 큰아버진 가슴에 총을 맞고 눈 덮인 무명고지에 쓰러졌어. 가슴에서 뻘건 피가 쿨쿨 쏟아져 허연 눈을 뻘겋게 질벅하게 물들였지.”

“넌 조카라는 놈이 왜 용천을 죽여 버릴 게지. 놔뒀어?”

“개인 원수를 어떻게 갚아? 조선인민군은 강철 같은 기율이 있어요.”

“네 놈이 가슴에 피가 흐른다면 친혈육을 살해한 원수를 갚지 않는단 말이냐?”

병수는 자기 멱살을 틀어쥐어 마구 흔드는 병완의 손을 풀면서 중얼거렸다.

“그런 형편이 있었어요.”

“뭐야?”

상순은 반말이 나갔다.

“용천의 힘을 빌려 한국군에 혼입한 친일주구 한철주와 한선주 형제를 처단했던 거야.”

“뭐라고?!”

“천천히 들어봐.”

병수는 잔등 뒤에 돌려갔던 권총집을 앞으로 끌어 돌려오고 뒷말을 이었다.

“용천 연대장은 친일주구를 한없이 증오했어. 서울에서 한철주와 한선주 형제를 발견하자 우린 조선인민군에 입대한 사실을 속이고 한국군에 입대하는 척 하면서 그 놈 형제들의 군부대에 잠입했댔어.”

“그래서?”

상순은 대뜸 경각성을 높이며 사위를 둘러보았다.

“우리 둘은 기회를 노리다가 눈 내리는 날에 그 놈 형제 뒤를 밟아 쇠파이프로 대갈통을 까서 죽여버렸던 거야. 우린 적정까지 정찰해 가지고 자기 부대로 돌아왔어. 그래서 우린 무명고지와 508고지를 몽땅 점령했어.”

“우리 마을에서 간 칠백이랑 최동욱이랑 잘 알겠구만.”

“알다뿐이겠어? 다 죽었어. 칠백 대대장은 한국괴뢰군과 육박전을 벌려 여섯 놈이나 찔러 죽이고 장렬히 희생됐어. 용천 연대장은 사촌동생을 잃고 대성통곡쳤지.”

병완은 믿어지지 않았다.
“무슨 말이야? 용천 대장이 자기 사촌동생 칠백을 죽였다니?”

“에이, 처참했어요. 무명고지 백병전에서 용천 연대장이 총창으로 칠백의 총창을 막는 새 다른 한국군 병사가 칠백을 찔러 죽였어요.”

“그랬구나.”

병수는 횡설수설 말도 많았다.

“난 함흥촌에 와서 할아버지랑 친척들을 찾아보려고 부상병을 호송한 후 여기 왔제이. 용천 연대장은 아마 진달래 아줌마와 경주를 고향에 데려 갈락꼬 왔죠.”

상순은 병수의 그럴듯한 말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병완은 병수의 어깨를 다독였다.

“너 잘 왔어. 아무튼 남조선은 가난한 사람이 살 고장이 아니야. 여긴 가난한 사람이 살기 좋은 세상이야.”

상순도 병수를 꿰뚫어보면서도 할아버지를 따라 눅잦혔다.

“와 보니께 함흥 촌은 확실히 살기 좋아요. 빈부차 없이 모두 평등하게 사는제(지)라.”

병수는 아주 그럴듯하게 엮어댔지만 숱한 의문을 누설했던 것이다. 경주에서 조선 인민군에 입대했다는지, 조선인민군 신분으로 서울에서 한국군 연대장을 하는 한철주와 한선주 형제 뒤를 밟아 쇠파이프로 때려 죽이었다는지, 한국군에 입대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변복하고 뒤를 밟아 권총으로 한철주와 한선주를 죽일 수 있지 않는가? 그런데 하필 우둔하게도 파이프로 때려 죽여? 한국 괴뢰군에 거짓 입대했다는지 용천은 조선인민군이라면서 진달래와 경주를 한국 고향 경주에 데려가려고 왔다는지 하여간 빈틈이 벌집처럼 숭숭했다.

상순은 아직 다른 특무의 꼬리를 밟지 못한 형편에서 소홀히 풀을 건드려 뱀을 놀래지 않으려고 했다. 허나 나라의 적일뿐만 아니라 성칠 큰아버지를 참살한 원수 용천은 처단해야 했다.

상순은 한숨을 땅이 꺼지게 후― 내쉬었다.

“형님, 잘 알았소. 큰아버지를 살해한 원수는 용서할 수 없소.”

“그래 될까? 당 조직에도 기율이 있잖아?”

“전우를 죽인 원수 놈은 죽어 마땅하오. 그 놈은 큰아버지를 살해한 죽을 죄를 졌어.”

병수는 산 아래로 내려가기 전에 왕고모 이성희의 산소에 엎드려 큰 절을 올렸다.

“할머니, 고향을 떠나 이 머나먼 간도 땅에 묻히다니오? 내 어떻게 아버지한테 말해라우? 흑흑, 할머니 왜 우리 가문은 이렇게 사처에 흩어져 살아야만 해요?”

병수의 흐느낌 소리는 병완과 상순의 코마루를 시큼하게 만들었다. 병수는 혈육의 정으로 될 수 있는 한 자기를 은폐하고 보호를 받고 싶어 별로 정도 없는 할머니 산소에 이마가 깨지게 조아리며 절을 꾸벅꾸벅 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원래 병수는 용천의 명에 따라 마을 동정을 살피다가 수림 속에 가서 다른 특무들에게 밥을 전해주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병완의 동정을 살피러 갔다가 뒤를 밟아 산소에까지 왔고 뒤에 상순이네가 따르는 인기척을 느끼고 산소에 나왔던 것이다. 그는 언제든지 용천이 큰아버지 성칠 연대장을 살해한 진상을 까밝혀주려고 했지만 자기 정체도 누설될 가봐 주저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렇게 찾던 할머니 산소 앞에서 대성통곡치는 할아버지 병완을 보고는 더는 참을 수 없어 거짓말 절반 진짜 절반 섞어 용천이가 성칠을 살해한 진상을 반이나마 밝히고 말았던 것이다.

“얘들야, 돌아가자. 지금 사처에 남조선 특무들이 널려 있어 위험하다.”

“예? 특무라니오?”

아닌 보살을 하는 병수를 보고 병완은 코웃음이 나왔다.

그는 상순을 따라 산 아래로 내려가는 병수의 비틀거리는 잔등을 보다가 일부러 뒤로 떨어져 걸었다.

“먼저 집으로 내려가라.”

병완은 일부러 한어로 말했다.

“내 충국이네 집에 가봐야겠다. 남조선과 대만 특무 놈들은 이 곳 지주들과 내통할 수도 있어.”

“아닙니다. 제 가 보겠습니다.”

병완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민경과 함께 병수를 데리고 마을로 내려가고 상순은 충국이네 토성안집으로 다가갔다.


11. 대의멸친(大意灭亲)
 

      자정이 퍽 넘었는지라 골짜기 어귀를 지키며 순라하던 민병들도 집으로 가버리고 없었다.

토성 안은 너무 조용했다. 다만 토성 밖의 벌거숭이비술나무들이 초겨울 바람에 무섭게 윙윙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상순은 권총을 빼들고 슬금슬금 장학산이 든 몸채에 들어갔다. 서쪽에는 지금 마을의 한족집이 들어 살고 있었다. 그는 불시에 동쪽 방문을 떼고 불쑥 들어갔다.

“불을 켜!”

“이 밤중에 누구요?”

버스럭 바스락 어지러운 소리에 뒤이어 등잔불이 희미하게 켜지면서 남쪽구들에서 장미련이 이불로 가슴을 가리며 놀란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상순은 권총을 빼든 채 북쪽구들에서 옷을 주섬주섬 주어 입는 장학산과 장충국을 쏘아보았다.

“무슨 정황이 있으면 알려라! 까딱 대만특무들과 한바지를 입고 춤췄다간 용서 안 할테다!”

“형님!”

“또, 또. 형님은 무슨 놈의 형님이야!”

충국은 입을 헤 벌리고 상순을 쳐다보았다.

“너희들은 우리 할아버지가 담보를 서고 지방 관제를 한다는 거 잊지 말라.”

충국은 피씩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장학산은 김이 빠진 공처럼 주저앉아 중얼중얼 입귀로 이런 말을 흘리었다.

“너네 할아버지야 정말 감사하지. 옛날 너희들 집에서 조선에서 올 때 엉덩이를 들여놓을 초가집도 없었고 손바닥만한 땅도 없었지.  우리 집에서 묵으면서 밭도 붙이게 했어. 그 은정을 깡그리 잊지 않고 우리를 감옥에서 꺼내준 게지. 자초에 국민당이 이기지 못할 걸 알았더라면 충국이 뭐 삼도만으로 갔겠니? 토비질 하러 간 건 정말 잘못한 일이지. 허나 우리가 항일유격대를 도와주고 충국도 항일유격대에 들어 너와 함께 일본 놈들과 싸우지 않았느냐? 그 공적은 잊지 말아야지. 너네 할아버진 아주 좋은 공산당원이야. 옛날 배은망덕하지 않는 진짜 땅을 밟고 하늘을 떠인 사내대장부야.”

상순은 권총을 잡고 장학산이 하는 푸념 질을 들으면서도 희미한 등잔불을 빌어 여기 저기 살폈다.

그는 충국이 이불을 이상하게 왼손으로 꽉 누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상순은 구들에 후닥닥 뛰어 올라갔다.
“이게 뭐야?” 
그는 이불을 홱 젖혔다. 순간 이불 밑에서 인민페 한 묶음이 드러났다.

“어데서 난 돈이냐? 로실히 탄백해라!”

상순은 돈을 쳐들고 권총을 충국에게 들이댔다.
충국은 장학산의 눈치를 살폈다.

“얘야, 발편잠을 자면서 살자.”

허나 충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네 놈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 대만특무들이 왔다 간게 분명해. 너희들이 무보수로 노동개조를 하면서 어디에서 이렇게 많은 새 돈이 생길 수 있겠는가?”

상순은 그들 부자가 벴던 베개도 들고 보았으나 총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 저기 살펴보아도 북쪽구들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하여 상순은 남쪽 구들에로 시선을 돌렸다.

(이 놈들이 돈을 미처 치우지 못한 걸 보면 금방 누군가 왔다 갔구나.)

상순은 남쪽 구들에 몸을 날려 건너갔다. 장미련은 고의적으로 그때까지 웃옷을 입지 않고 이불로 가슴을 가리며 살 냄새를 풍겼다.

상순은 바들바들 떠는 장미련을 보고 수상해 이불을 활 들어 젖혔다. 미련의 허연 허벅다리로 누르고 있는 담요 밑에서 뻘건 수시 드러났다. 요대기를 활 젖히니 그 밑에서 권총 한 자루가 나왔다.

“이게 뭐야?”

상순은 요 밑의 권총을 제꺽 잡고 충국을 겨누었다.

충국은 그때까지 멍해 앉아 있다가 입을 뗐다.

“상순아, 대만특무들을 잡게 협조할 게. 제발 목숨만 살려다구.”

“이 놈아, 비굴하게 놀지 말고 입공속죄하면 과거를 묻지 않을테야.”

그제야 장충국은 금방 대만 특무들이 왔다간 일을 낱낱이 탄백했다.

“삼도만 토비 두목 전 소교는 길림 신개령 전역에서 죽었다. 전소교 동생 전소광이 료심전역 때 영구로 해 대만으로 도망쳤댔다. 이번에 그가 ‘왕발’과 ‘장광우’ 라는 대만특무를 데리고 금방 우리 집에 왔댔어. 그는 우리 부자를 보고 이 부근의 지주들로 유격대를 조직해 장백산 원시림 속에 들어가 유격전을 하자고 했다.”
상순은 저으기 놀랐다. 그러나 그런 내색을 내지 않고 따져 물었다.

“그 놈들이 어디로 갔어? 三道弯 小虎한테 갔는가?”
"전소광이 삼도만에 갔댔어. 그런데 조소호랑 모두 다 망해빠진 국민당 특무질을 하기 싫어하더란다."
"왜  제때에 보고하지 않았어?"

“내일 날이 밝으면 너를 찾아가 보고하자고 했다. 그런데 돈묶음이 아까워서. 에헴.”

상순은 세 귀 눈을 굴리면서 적정을 파고들었다.

“이제라도 이실직고해라. 전소광이 남조선 특무들은 오지 않았다더냐?”
장충국은 입을 연바하고는 살자고 다 불어댔다.

“우리한테 남조선 특무들도  왔으니 신심을 가지고 지주유격대를 조직하라고 하더라.”

“어디에 있다더냐?”

“이름은 모르겠는데 남조선 특무 셋이 함흥촌에 갔다더라.”

상순은 머리를 끄덕였다.

“우린 특무 놈들의 정체를 다 알고 있어. 네 놈이 정녕 살고 싶으면 아는 대로 이실직고해라. 뉘네 집에 들었다더냐?”

“거 김덕성이네 집에 들거라고 하더라. 너도 알지만 덕성이 조카는 용천대장 아니고 뭐냐? 용천은 이전에 장백산 항일유격대에 있다가 북만으로 가지 않았고 뭐야?”

“알았다.”

상순은 미련의 요대기 밑에서 들춰낸 권총 탄창의 탄알을 다 빼내고 빈 탄창을 맞춰 충국에게 뿌려 주었다.

“잠시 빌려 줄테니 대만 특무들이 오면 티를 내지 말고 우리한테 기별해라.”

“할 수 있느냐?”

“그럴게. 꼭 립공속죄할게.”

“이번에 대만특무를 잡는데 공을 세우면 너희들도 반혁명 모자를 벗는데 좋을 거야.”

장학산과 장충국은 머리를 끄덕였다. 미련은 그제야 옷을 주섬주섬 주어 입으면서 상순에게 추파를 던졌다.

(더러운 년, 미쳐두 한 두 가지 아니야. 내가 누구라고? 공산당원은 강철의 전사라는 것도 모르고 추파를 던져? 쳇!)

상순은 충국에게 물었다.

“특무들이 언제 또 오겠다더냐?”

“그자들은 먹을 게 없어 이틀 후면 또 오겠다더라.”

“미군 비행기는 오지 않는다더냐?”

“미군 비행기 한 대가 격추된 후 미군 비행사들이 질겁해 차일피일 미루면서 잘 오지 않아 먹을게 다 떨어졌다더라.”

“그 놈들이 무전기가 있는 것 같더냐?”

“있는 것 같더라.”

“전소광은 삼도만에 재차 가서 당지 지주와 옛 토비들을 긁어모으러 가겠다고 하더라.”
"조소호랑 지금도 평강촌에 있다더냐?"
"아니야, 그는 지금 삼도만향 소재지에 내려와 산다더군."

상순은 머리를 끄덕였다.
후에 상순이 사람을 파견해 조사해봐 안 일이지만, 조소호는 확실히 망해빠진 국민당에 절망을 느꼈기에 두번 다시는 국민당 따라 특무질하지 않으려고 작심하였다. 그는 전소광 등 대만 특무들이 재차 찾아올가봐 삼도만 소재지에서 살다가 어느 산골에 은신해버렸다고 하였다. 

한편 상순은 혹시 특무들이 충국이네 집에 들이닥칠 가봐 근심되였다. 그는 충국을 데리고 사랑방에 가서 한족농민 진씨를 시켜 할아버지와 허영호 과장에게 기별해 민경들을 데리고 충국이네 집 주위를 포위하라는 명령을 전달하게 했다.

약 20분 후에 허영호 과장이 민경 셋을 데리고 달려 왔다.

상순은 허영호에게 장충국에게서 들은 적정을 알려준 후 충국이네 집에 특무들이 들어가기를 기다려 포위 습격해 특무들을 생포하라고 했다.

어느 결에 동녘이 희붐히 밝아왔다.

상순은 허영호 과장에게 자기 할머니 산소 부근에 높은 유리한 지형의 나무숲 속에 숨어 장충국이네 집을 감시하게 하고는 함흥 촌으로 내려와 곧추 촌공소로 가서 할아버지를 만났다.

상순은 구들에 올라가자마자 엊저녁에 발견한 일을 알린 후 “할아버지, 용천과 병수를 즉시 체포합시다.”라고 했다.

병완은 한참 궁리하다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지금 시기상조야. 혹시 전소광이랑 삼도만에 가는 척 하고 우리 마을 주변에 숨어 있으면 어찌니? 용천과 병수가 나포된 것을 안다면 그 놈들이 달아날 수도 있어. 될 수 있는 대로 동시에 잡으면 좋아.”

상순은 머리를 끄덕였다.

“예, 그게 좋겠습니다. 그럼 이틀 후에 충국이네 집에 나타날 놈들을 먼저 나포한 후 총을 쏘아 신호를 보내면 용천을 나포하면 어떻습니까?”

“좋을 거 같다. 그 새 아무런 티도 내지 말고 용천과 병수를 잘 감시해야 한다. 좋기는 덕성이를 시키면 좋겠지만 자기 조카라고 그럴 거 같지 않다. 용천이가 그 나그네를 보고 고향 경주에 가자고 해서 붕 들떴더라.”

노련한 할아버지를 감탄하며 상순은 “진달래 아주머니를 시켜 용천을 감독하면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병완은 바깥에 나가면서 “아예 용천을 우리 촌공소에 데려다 얘기를 하면서 감시하자.”라고 했다.

“범을 굴에서 끌어내 연금이라도 하려는 겝니까?”

병완은 머리를 끄덕였다.

“경수는 내 손자야. 용천이 경수를 해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상순은 “근심하지 마십시오. 내 진달래 아주머니한테 침을 놓겠습니다.”라고 하며 바깥으로 나갔다.

집에 돌아가 대충 아침을 먹은 상순은 윗집으로 씽 하니 곧추 찾아갔다.

“용천 대장 있소?”

상순은 경각성을 높이며 권총집에 손을 대고 집안에서 대답도 하기 전에 윗방문을 뚝 떼고 쑥 들어갔다.

그러나 용천은 윗방에 없고 다만 병수가 곤해서 쿨쿨 자다가 손으로 눈을 비비면서 일어났다. 정지를 내다봐도 용천은 보이지도 않았다.
"용천 대장은 어디로 갔소?"

덕성은 조왕칸 쪽으로 돌아앉아 설거지를 하며 어물거렸다.
“진달래네 집으로 갔어. 경주를 데리고 놀겠다고 하더라.”

상순이 바깥으로 되나가다가 경주 손을 잡고 울바자 안에 들어서는 용천과 딱 마주쳤다. 그들 둘은 모두 반사적으로 권총집에 손이 가다가 멈췄다.

“허허, 난 또 누구라고?”

상순은 어색하게 웃는 용천을 보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전쟁터 이야기를 듣자고 촌공소로 오라고 합데다.”

“그래? 곧 가지.”

이때 뒤에서 진달래가 경수를 업고 오다가 상순을 쳐다보았다. 상순이 피뜩 보니 어째 진달래의 철색얼굴에 복잡하고 검은 그림자가 스쳐지나가는 것 같았다.

용천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경주 손을 잡고 상순을 따라 촌공소로 갔다. 그는 아직도 상순을 몇해전 애숭이로 보았다.
(네놈이 공안국장이면 뭐라나? 까짓, 네놈들 몽땅 잡아치워 후환을 없앨테야. 흥!)
용천은 원래 함흥촌에는 병완이나 민병들이나 있는가 하고 들어섰댔다. 그런데 군복차림의 상순이 나타나자 저으기 긴장했다. 그러나 자기들 특무동료들을 생각하자 차츰 침착성을 회복했다.

상순은 용천을 촌공소에 들여보내고 뒤에 떨어졌다. 그는 진달래 아주머니를 불러 집 서쪽모퉁이를 돌아가 나직이 말했다.
"용천은 남조선 특무입니다. 용천은 성칠 큰아버지를 살해했답니다."
"뭐라고?"
진달래는 그 충격적인 말에 깜짝 놀라했다. 그러나 그는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아니, 용천과 성칠 오빠는 항일전쟁 시기 생사전우인데. 아무리 전쟁판이라도 그렇지. 용천이 차마 전우를 살해까지 했겠느냐? 넌 용천이 성칠을 살해했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
상순은 병수에게서 들은 진실내막을 쭉 이야기해주었다.
"오빠!"
진달래는 풀썩 물앉으면서 경수를 끌어안고 서럽게 울었다.
"큰어머니, 우리 함께 큰아버지  원수를 갚읍시다."
진달래는 경수를 놓고 천천히 일어나며 이를 옥물었다.
"용천, 그 워수놈 절대 용서할 수 없어!"
그러나 그녀는 경주를 떠올리는 순간 마음이 약해졌다. 용천은 불쌍한 아들 경주의 친아버지 아닌가.
(경주 아버지를 어찌 내 손으로 죽여야 해?)
그녀는 차마 손을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아, 구경 무엇이 항일유격대 전우였던 그들 부부를 원수로 만들어놓았는가. 계급립장문제인가? 용천은 지주 아들, 진달래는 빈고농 사냥군의 딸, 아, 그렇지. 무산계급과 지주계급 투쟁의 산물인 것 같았다.  계급투쟁은 출신이 다른 그들을 다른 길로 갈라놓았다.  또 부동한 향토애는 그들 부부를  남조선 사람과 북조선 사람으로 갈라놓았던 것이다. 몇년 후 남편은 남조선 특무로 등장하였고 안해는 조선인민군 연대장의 안해로 나타나지 않았던가. 남과 북의 전쟁으로 그들은 철천지 원수로 되여 서로 죽이지 않으면 안될 생사결판의 길에,  운명의 관두에 처박히게 만들었다.
       진달래는 그 어떤 비장한 결의를 다진듯이 머리를 쓰다듬더니 상순과 갈라져 경수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장농에서 그의 탄알- 조약돌을 하나, 둘 꺼내 호주머니에 주어담았다.  그리고 용천을 놀래우지 않으려고 경수는 웃새집에 맡겨두고  경주만 데리고 촌공소로 향하였다.  

진달래는 촌공소에 들어가 철색 얼굴에 긴장한 빛을 띠우더니 깜장 눈으로 상순을 빤히 바라보며 머리를 끄덕이었다.

한편 병완은 촌공소에서 용천을 보자 눈에 불이 일었다. 허나 진작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억지로 웃음을 지으면서 맞이했다.

“김 연대장, 밤새 무고했소?."
"예, 덕분에 대접 잘 받았시우."
용천은 병완에게 눈길도 보내지 않고 경주한테 손을 내밀었다.
"에이구, 내 아들 경주 왔구나.”

병완은 애비를 잃은 막내손자를 생각하자 불쌍해 저도 몰래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그는 불의 상황에 경주를 보호하려고 들었다.

“그래 지금 조선 전쟁형세는 어떻소?”
용천은 진달래 표정을 살피며 대충 대답했다.

“지금 대치상태라. 아마 오래잖아 정전협정을 조인할 거 같아요.”

용천도 어제 병수가 나갔다 온 후 이상한 조짐을 얼마간 눈치 챘다. 그는 경주를 꼭 끌어안았다. 그는 병완과 상순을 쏘아눕히고 경주를 방패로 삼아 촌공소에서 빠져나가려고 작심했다.
그는 병완과 상순의 눈치를 흘끔흘끔 살폈다.

“그래 언제 부대로 돌아갈 예산이오?”

“요 놈 아들애한테 정이 폭 들어 부대로 천천히 돌아갈 예산인데이.”

철없는 경수는 이제 어른들한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고사리손으로 아빠 코 밑 흰 수염을  매만지면서 놀았다.

병완은 용천을 마주 보며 권고했다.
“그럼 우리 촌공소에 들어와 있소. 어떻게 홀애비 삼촌이 손님 둘이나 치겠소? 우리 마을에서 사람을 내서 밥을 지어 드리게 하지.”

“허허허, 김촌장, 감사한데요. 난 그래도 작은 아버지 집이 좋은데이.”

“사양하지 마오. 오늘 점심부터 촌공소에서 삼촌까지 데리고 와서 식사하오. 이 널직한 윗방에서 쉬오.”

용천은 자기에게 그물이 서서히 덮씌워져 독안에 든 쥐처럼 연금되고 있음을 느끼었다. 그러나 용빼는 수 없어 병완의 권고를 거절할 수 없었다.

그는 그날 점심부터 덕성과 병수를 데리고 촌공소에 들어와 유숙했다. 그런데 병완은 밤낮 용천의 곁에서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고 지키는 것이었다. 딱 진절머리 나게 무서웠다. 밥을 짓는 30대 초반의 아줌마가 촌공소에 들어와 밥을 지어줘 먹을 근심은 없었다. 그런데 대문 밖은 민병들이 총을 쥐고 번갈아 보초를 서고 있어서 외계와 련계가 단절된데다가 경주까지 데리고 도망 칠 방법이 없게 됐다. 사실상 강제연금되나 다름없었다.

용천은 자기들이 이젠 꼼짝 달싹 하지 못하게 촌공소 안에 갇히게 됐다는 것을 느꼈다. 진짜 빤질빤질한 독안의 게처럼 갇혔다는 것을 잘 알았다. 진달래는 상순의 부탁대로 경수를 데리고 웃새집으로 간 후 머리도 내밀지 않았다. 다행히 경주만은 제 애비 옆에서 놀게 했다.

이튿날 저녁에 미군 비행기가 오기로 된 날이 돌아왔다.

상순은 종전처럼  촌공소로 일찍이 들어섰다. 그는 술병까지 들고 왔다. 이윽고 진달래도 홀로 들어섰다.

“오늘 술이나 한잔 하기요.”

상순은 아침 밥상에 술병까지 척 올려놓았다.

“자, 남조선 특무들이 오겠으면 오라지. 우린 여기서 술이나 마시면서 태평성대를 누리기오.”

남조선 특무라는 말에 용천은 적이 속이 띠끔해났다. 그러나 위기일발의 시각에도 용천은 인차 노련하게 냉정한 표정을 지었다.

“아침부터 술을 마시는기여? 온 하루 띵 하겠는제라.”

“용천 연대장, 온 하루 경주나 데리고 놀면 되겠는데 뭘 그리 근심하오? 무슨 일이 있소?”

“아, 없시우, 없어.”

용천은 황망히 도리머리를 흔들며 손사래를 쳤다.

병완은 술상에 다가와 술병 마개를 열고 용천과 병수 앞의 사발에 소주를 쭈르르 붓고 자기 사발에도 부었다.

“자, 들게. 이 난세에 사람의 일은 모르오. 그 먼데서 왔는데 술을 푹 마시고 쉬게나.”

용천은 간도의 술이 독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쭉쭉 들이켰다. 병수는 옆에서 할아버지가 오늘은 맏아들의 원수를 갚으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 채고 별로 마시지 않았다.

용천은 대개 눈치를 챘으면서도 개의치 않았다.

(네깐 놈들이 증거 없이 체포해?)

용천은 취하지 않고서도 취한 척 했다.
“어, 중국술이 독하긴 독하다. 나 좀 누워야겠당께.”
그는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더니 스르르 드러눕는 것이었다.

“허, 사람이. 술을 고거 마시고 취하다니.”

병완은 용천을 쏘아보더니 병수를 보고 분부했다.
“저 권총집이나 벗겨 건사하게나. 배겨서 어떻게 자는가.”

병수는 인차 “예.” 하고 용천의 허리에서 권총을 빼내려고 했다.
(아니, 이 놈, 친척한테 반변했어?)

그때 쓰러진 척 하던 용천이 와닥닥 일어나면서 권총을 빼들어 병완과 상순을 번갈아 겨눴다.

“이 시골 놈들아, 내가 누구야? 항일전쟁 때 일제 놈들과 목숨 걸고 싸우던 김 대장이야. 네깐 놈들이 왜 나를 의심하고 지랄인기여?!”

병수가 불시에 덮쳐들어 용천의 권총을 잡은 손을 꽉 눌렀다.

땅!

총소리와 함께 총알이 술상 위 술 사발을 박산 냈다. 유리쪼각이 사처에 튕겨났다.

그때 상순이 권총을 뽑아 용천의 머리를 겨누었다.

“꼼짝 마라!”

허나 용천은 병수를 발길로 걷어차 넘기고 권총으로 머리를 내리까 눕혔다.

“퉤! 역적놈!”

병수는 쓰러졌다. 그의 머리에서 뻘건 선지피가 흘러 넘쳤다.

용천은 엉엉 우는 경주를 끌어안아 방패로 삼았다.

“애를 내려놔!”

진달래는 새된 소리를 지르며 경주를 빼앗으려고 달려들었다. 상순은 진달래나 경주가 상할 가봐 사격하지 못했다.

용천은 경주를 끌어안고 뒷걸음질 치며 문 밖으로 나가 마루 위에 섰다.

“경주야!”
진달래는  통곡하며 따라 나갔다.

경주도 엉엉 울었다.
"엄마!"

“여보, 애를 내려놔요!”

“애를 데리고 가자!”

“어디로 간다고 그래요?”

“남조선에 가자!”

“갈테면 당신이나 가! 경주를 내려놔!”

이때 민경들과 민병들이 토성 문 안으로 총을 들고 달려 들어왔다. 그러나 경주와 진달래 때문에 쏘지 못했다.

이때 진달래가 호주머니에서 돌멩이를 주어 휙 날렸다.

딱!

용천은 머리를 맞고 비칠 했다. 그는 진달래가 돌멩이를 재차 날리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멍해 서서 진달래를 쏘아보았다.
"네년, 차마 내캉 돌멩이질 해?!"
용천은 돌멩이를 날리며 덮쳐드는 진달래를 멍해 쏘아보며 권총을 뽑아들었다. 

위기일발의 시각에도 진달래는 달려나가 용천의 권총을 쥔 손을 꽉 잡아 내리 눌렀다.

땅!

총알이 진달래 허벅지를 꿰뚫고 나갔다.
"아니, 내 당신 쐈어?"
용천은 그 권총으로 성칠도 쏴눕히지 않았던가. 그는 권총을 쥔 자기 손을 내려다 보았다. 그 죄악적인 손으로 사촌동생 칠백도 총창으로 찔러눕혔다. 이젠 자기 사랑하는 아내도 쏘았다.
허나 살기 위해선 아내고 뭐고 쏴눕히고 촌공소에서 도망쳐야 했다.
"이걸 놔! 이 가시나새끼!"
용천은 진달래를 발길로 차넘겼다.
그러나 진달래는 용천의 총을 놓지 않았다.

“더러운 남조선 특무 놈아! 네 놈은 성칠 오빠를 살해한 원수놈이야, 악당 놈이야!”
부처간이 싸우는 걸 흐리멍텅한 하늘도 멍해 내려다보며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덕성은 어쨌으면 좋을지 몰라 두 팔을 벌리고 말뚝처럼 어정쩡 서 있었다.

위기일발의 시각에 어느 결에 병완이 씽 호랑이 양을 덮치듯이 덮쳐들어 용천의 아랫배를 탁 걷어찼다. 용천은 경주를 탈싹 떨어뜨리고 허리를 굽혔다. 상순이 뛰어 들어오면서 권총으로 용천의 머리를 내리 깠다. 용천은 권총을 절컥 떨어뜨리며 풀썩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상순이 땅바닥의 권총을 주어 들었다.

“빨리 이 놈을 촌공소에 끌어들여가오.”

민병들이 달려들어 용천을 촌공소 안에 끌고 들어가 바로 꽁꽁 묶었다.

상순은 할아버지에게 한어로 물었다.
“병수는 어쩌겠습둥?”

병완은 눈을 질끈 감고 손을 홱 휘둘렀다.
“대의멸친(大意灭亲)!”
상순은 권총을 쥐고 정신을 잃었다가 겨우 깨여나 안간힘을 쓰며 일어나려는 병수의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냈다. 뒤따라 온 민병들이 손수 바로 병수를 결박해 꽁꽁 묶었다.

병수는 놀란 눈길로 병완을 쳐다보았다.

“할아버지! 왜요?”

“너 같은 남조선 특무 손자가 없어!”

“빨갱이들이 정말 인정머리도 없어. 육친불인(六亲不认)이군.”

병완은 병수를 쏘아보았다.

“우리 공산당원은 강철전사야. 우린 혁명을 위해 대의멸친한다!”

“대의멸친? 속았구나. 날 잡아 바치고 현장 벼슬이나 해먹구려.”

병수는 어이없어 촌공소 천정을 쳐다보며 한탄했다.
       저 소서구 남산에 묻힌 이성희도 자기 오빠 손자를 잡아묶는 영감을 보고 욕하고 있었다.
"몰인정한 영감! 진짜 지독하구려. 어쩜 내 친정집 맏손자도 잡아 먹어요. 그 놈은 오라버니 씨붙이 장손이야. 하늘도 무심하지."
그러나 병완은 노친의 욕설을 념두에 두지도 않았다.
그는속으로  중얼거렸다.
(여보, 노친, 널리 양해하오. 나라 안정을 위해선 남조선 특무는 남김없이 붙잡아야 하오.  남조선 특무놈에겐 절대 털끝만한 인정도 베풀어선 안 되오.) 

용천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병수를 흘겨보며 이를 뿌드득 갈았다.

“비루한 배신자! 배신자 끝장은 그래!”

“아버지!”

경주는 결박당해 대들보에 매달린 용천의 다리에 매달리며 대성통곡 쳤다.

“얘야, 아빠 원수 잊지 말라. 네 어미가 아빠를 붙잡아 빨갱이들한테 바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용천은 저쪽에 멍해 서 있는 삼촌을 쳐다보며 말했다.
"삼촌, 미안하이, 칠백은 내 손으로 죽였소. 난 천번만번 죽어도 마땅한제라. 절대  섭섭해하지 마세요."
덕성은 결박당한 용천한테 한발 다가섰다.
"웬 소리냐? 네가 칠백을 죽이다니?"
"네,  칠백인줄 모르고 날창으로 찔렀시우, 아이구, 난 동생도 모르고 찔렀어. 이 손으로 찔렀시우."
덕성은 무릎을 꿇더니 아예 펑덩 물앉아 애들처럼 두 다리를 버둥거리며 통곡쳤다.
"아이고, 이게 웬 세상인고? 사촌형제끼리 서로 죽이다니? 아이고, 원통해라. 흐흐흑, 흑흑흑..."

진달래는 절룩거리며 다가가 애비 다리를 붙잡고 엉엉 우는 경주를 뜯어내며 팔소매로 뜨거운 눈물을 닦았다.

“누가 당신 보고 남조선으로 가라고 했어요? 누가 당신 보고  적군으로 되라고 했어요? 누가 당신 보고 남조선 특무로 되라고 했어요? 누가 당신 보고 성칠 연대장을 살해하라고 했어요?”

그러나 용천은 껄껄 웃었다.

“나와 성칠 형님은 깨끗하게 결투를 했어. 내가 형님을 죽이지 않으면 그가 나를 죽였어. 나도 그가 쏜 총에 어깨에 관통상을 입어 한해 반이나 부산 육군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 겨우 살아남았어. 누가 그보고 내 아내를 빼앗아 살아서 경수까지 낳으라고 했어? 당신도 더러운 화냥년이야! 퉤! 다만 경주와 삼촌을 데리고 고향 경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 한일 뿐이여. 상순아, 어서 죽여라! 나를 더는 괴롭히지 말라.”

병완과 상순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급변사태에 따라 병완과 상순은 임기응변해 원 작전방안을 포기하고 용천과 병수를 생포했다.

“총소리를 듣고 전소광은 충국이네 집으로 오지 않을 거야. 혹시 놈들이 멀리 달아났을 수도 있다.”

병완이 상순을 보고 말하는데 용천은 천정을 쳐다보며 냉소했다.

“이제 우리 동료들이 와서 내 원수를 갚을 거야!”

상순은 세 귀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쳤다.

“저 놈 주둥아리를 수건으로 틀어막아라!”

“옛! 김 국장!”

민병들은 상순의 명령에 따라 용천과 병수의 입을 수건으로 틀어막고 바로 입을 마구 휘감아 동여매놓았다. 용천과 병수는 이젠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 없게 됐다.

      촌공소, 아니, 함흥촌에는 일촉즉발의 팽팽한 기운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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