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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21) 꿍꿍이 김장혁
2024년 02월 18일 12시 14분  조회:699  추천:0  작성자: 김장혁

    김장혁 작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


            4. 꿍꿍이
 
 
 
 
 
 
    바깥에서는 아직도 눈보라가 윙윙 사납게 휘몰아쳐 게딱지 같은 초가집들이 날려 갈 것만 같았다. 엄동설한에 여우가 눈물을 다 흘리고 박달나무가 얼어서 탁탁 터질 지경이었다. 허나 높다란 토성 안에 자리 잡은 한길수의 집 안에는 불을 어찌나 땠는지 봄날처럼 후끈후끈했다.
    본 채에서 응삼은 한길수와 마주 앉아 음흉한 꿍꿍이를 꾸미고 있었다.
   그는 뱁새눈이 실눈이 돼가지고 길쭉한 말상을 찌푸리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병완이 우리 집 도감을 하지 않을 거 같소이다.”
     길수는 반쯤 모로 돌아앉으면서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건 무슨 소리야? 먹은 소 똥을 눈다고 은덩이까지 받았지. 은녀까지 찾아갔는데 안해?”
    그는 속으로 응삼이 괜히 병완이가 들어와 자기 위에 앉는 것을 시샘한다고 여겼다.
    한길수의 속내를 모르는 응삼은 뱁새눈을 콩알처럼 동그랗게 뜨고 정색해 말했다.
    “옛날에 토끼새끼가 용왕을 속여 넘긴 이야기 기억나지 않습둥? 토끼는 거부기 등에 앉아 바다에서 빠져나가 뭍으로 오르자마자 간이고 뭐고 하나도 주지 않고 달아나지 않았고 뭡둥?”
    길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건 다 옛말이지. 병완이 그렇게 쉽게 신의를 저버릴 사람은 아니야. 내가 그렇게 잘 대해주는데 언감 변심한단 말이요?”
    그래도 응삼은 계속 쏭알거렸다.
   “은덩이는 주더라도 은녀는 인질처럼 붙잡아둘 걸 그랬소이다.”
    월선은 길수 옆에 앉아 며느리와 함께 밥상을 손수 거두다가 신경질을 썼다.
     “뭐 어째? 그년을 내보낸 건 잘된 일이야. 그 굼뜬 년을 내보내고 이제 나이도 듬직하고 역빠른 여자를 들여와야네.”
    월선은 밥상을 거두면서 속으로 두덜거렸다.
   (저 나그네 곰의 열을 먹더니 그게 놀랍게 세졌단 말이야. 항상 은녀 몸을 흘끔흘끔 훔쳐보군 하던데 언제 일을 칠지 몰라. 은녀를 첩으로라도 들여앉히기 전에 내보낸 건 잘된 일이야.)
   “닥치지 못할까!”
   한길수가 밥상을 탁 치는 바람에 국물그릇들이 왱그랑 절그랑 부딪쳐 국물이 주르르 구들에 흘러 떨어졌다.
   “제길 할, 은녀를 빼가고도 들어오지 않아만 봐라. 내 살려두는가!”
    길수는 퉁방울눈알을 부라리었다. 번들이마의 피줄마저 노기에 지렁이처럼 살아나 풀떡풀떡 뛰었다.
    뜻밖에도 이튿날에 병완이 또 찾아왔다.
    그는 너부죽한 얼굴에 웃음을 짓고 길수의 집에 들어와 밤중에 홍두깨 내밀듯이 물었다.
     “오늘 무슨 할 일이 없소?”
    한길수는 응삼을 흘겨보았다.
    (봐, 내 말 맞지? 신의를 저버릴 병완이 아니지? 흥!)
    길수는 병완을 돌아보며 알은체 했다.
    “오, 왔는가? 병완이, 자넨 낯만 보이면 되네.”
    병완은 허리에서 보자기를 풀어내더니 길수 앞에 쓱 밀어주는 것이었다.
    “이건 뭐요?”
    한길수는 우멍눈이 휘둥그래났다.
    “은녀를 내갔으면 됐지. 친구지간에 은덩이는? 어련히 한 주인의 도감이 되지 않을라고.”
    병완의 말에 길수는 어쨌으면 좋을지 몰라 했다. 은덩이를 도로 받자니 자존심에 허락되지 않았고 도로 줘 보내자니 병완이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백설같이 반짝이는 은덩이가 아깝기도 했다.
     그때 응삼이 뽀족한 턱을 쳐들고 끼여들었다.
      “주인어른, 정 받지 않겠다면 먼저 받아 둡소.”
    길수는 짐짓 “에끼, 이 사람아, 내 어찌 줬던 걸 도로 받는단 말인가!” 하고 능청스레 아닌 보살을 떨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은덩이를 싼 보자기를 스리슬쩍 응삼의 앞에 밀어 보냈다.
   주인의 눈치를 챈 응삼은 제꺽 그 보자기를 받아 쥐었다.
   “이후에 수고비로 드려도 늦지 않을 것 같소.”
   철주는 병완이 빈 손으로 문 밖을 나가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자기 꾀가 드는 것 같아 속으로 흐뭇해했다.
    한길수는 응삼과 철주를 불러놓고 다음 일을 상논 했다.
    “얘들아, 아무리 봐도 성칠에게 속힌 것 같다. 창렬 네 빚 대신 그 곰의 열을 받아 먹은 게 영 속에 내려가지 않는단 말이야.”
     응삼은 뱁새눈을 간사하게 뜨며 끼어들었다.
    “이젠 병완이 우리 사람이 됐으니 창렬이 누굴 믿고 빚을 갚지 않는단 말입니까? 이번 기회에 창렬을 보고 은녀를 되돌려 보내라고 하든지, 아니면 빚 문서를 다시 꾸며 돈을 내라고 하든지 합세다.”
    길수는 조왕 쪽의 월선과 며느리 눈치를 힐끔 보면서 중얼거렸다.
    “에이고, 빚 문서를 다시 꾸며서야 언제 그 가난뱅이한테서 받아내겠소? 아예 다시 은녀를 붙잡아 오는 게 상책이야.”
    “안돼! 그년을 데려다 첩년이라도 시킬 예산인가요? 이제 내보낸 지 며칠이라고 그년을 또 끌어들인단 말이요? 그저 은녀, 은녀 하면서. 원,  더러운 꼬락서니를 못 보겠어.”
    월선은 구들에서 일어나 호랑이 궁둥이를 흔들면서 발까지 탕탕 구르며 야단쳤다.
    그때 철주가 나서서 난처한 기분을 돌려세웠다.
    “엄마 말에도 도리 있습니다. 이제 은녀를 들여다 앉히려면 병완이가 또 은녀 역세를 들 수도 있습니다. 그 일은 덮어놓고 있다가 우리 빚 문서에 그대로 적어두었다가 아무 때 건 병완이 눈을 감아주게 한 후 받아내면 됩니다. 문제는 병완이 이 마을 가난뱅이들의 역세를 들기에 우리 집에서 빚을 받아내기 어려운 것입니다.”
    응삼은 그러지 않아도 그 놈 우직한 병완이 자기 우에 와서 누르고 앉는 것이 속에 걸렸는데  한술 더 떴다.
   “아예 저 병완 놈을 없애치우면 우리가 이 마을에서 쥐락펴락 하면서 살겠는데.”
   그러자 철주 손사래를 치며 말렸다.
   “누가 듣겠습니다. 이 일은 천천히 의논해봅시다. 그래도 병완이 우리 집에 들어와 도감을 하겠다고 하니 천만다행입니다. 이후에는 창렬의 빚을 받아도 아버지가 나설게 없습니다.”
    “그럼 누굴 내세우겠니?”
    “병완을 내세우십시오. 빚도 받아내고 병완과 창렬을 리간 놀면 일거량득이 아니겠습니까? 흐흐흐.”
    철주 말에 길수는 번들이마를 끄덕였다.
    며칠 후 길수는 병완을 불렀다.
    병완이 길수네 으리으리한 울안에 들어서니 길수가 번들 이마에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아주 반갑게 맞아주었다.
    “우리 집 도감이 왔소? 오늘 내 요긴한 일이 있어 자네를 불렀네. 자, 안에 들어가 의논합세.”
   길수는 병완의 손을 잡고 안방으로 들어가 마주 앉았다.
    “이런 일이오. 저, 전번에도 말이 있었지만 그 곰의 열이 되면 몇 원이나 되겠소? 그러니 자네가 응삼과 함께 창렬의 집에 가서 빚으로 한 십 원이라도 받아오게나.”
   병완은 건 가래를 떼더니 도리머리질했다.
   “이보,  너무 염치없이 놀지 마오. 그 곰의 열은 우리 성칠이 창렬의 폐병을 떼라고 준 게요. 그걸 가져다 먹고 빚을 받지 않겠다구 했으면 다지. 이제 와서 또 번져 누우면 이후에 영월동의 몇 백 집에서 누가 자네의 말을 믿겠소. 난 그런 일을 돕지 못하겠네.”
    병완은 아예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려고 했다. 길수는 어이없다는 듯이 멍해 앉아서 떠나가는 병완의 떡돌같이 넓은 뒤 잔등을 닭 쫓던 개 지붕 쳐다 보듯 했다.
    길수는 어린 아들 철주의 말을 들어 병완에게 놀림을 당한 듯 하는 감이 들었다.
“제길 할, 병완에게 도감을 맡기니 이 집안 일이 더 시끄러워!”
그 말에 철주의 색시 단춘이 정주에서 입귀를 비쭉했다.
    안방에서 철주는 아버지를 일깨워 주려고 들었다.
    “아버지, 지금 서울이고 어디고 일본 사람들이 게다짝을 딸까닥거리면서 욱실거리고 있습니다. 전번 3월 1일에 조선 사람들이 서울에서 독립하겠다고 ‘만세’를 부르면서 야단쳤습니다. 여기서는 아무도 ‘만세’를 부르지 않았습니까?”
    길수는 우습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내 명천과 우시장에 내려가니까 몇몇 조선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만세!’ 하고 외치더라. ‘만세!’ 하고 소리쳐 뭘 한다니? 쪽발이들이 만세소릴 듣고 도망간다더니?”
     철주는 답답하다는 듯이 머리를 홰홰 돌렸다.
     “일본 사람들이 우리 나라를 빼앗았기에 장차 살기 더 힘들게 될 것입니다. 맨 우리 조선 사람들만 살아도 손바닥만 한 땅에서 살기 힘든데 일본 사람들까지 들어와 빼앗아 먹으니 말입구마.”
     한철주는 한숨을 후 내쉬더니 뒷말을 이었다.
    “사실 나도 3.1운동 때 서울 광화문 앞에서 시위행진을 했다가 일본 놈들한테 쫓겨 고향으로 피신해 왔습구마. 이다음 이 골 안에도 일본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을 거 같습니까? 지금 우리는 이 마을의 인심을 틀어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눈앞의 이익을 너무 차리지 말구 인심을 내야 합니다. 병완 같은 힘장사들도 도감자리를 주어서 손아귀에 쥐고 있는 것이 옳습니다. 이거야 말로 눈앞의 작은 이익을 버리고 이 골 안의 큰 이익을 통 채로 챙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뭡니까? 인심이 천심이라고 이 골 안에서 병완에게 인심이 쏠렸기에 자칫하면 이 골 안의 실제 주인은 병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자가 일본사람들과 먼저 손을 잡는 날엔 우리 땅이고 뭐고 다 빼앗아 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엄중한가? 그런데 네가 일본 사람들과 등을 졌으니 큰일이고나.”
    철주는 개의치 않았다.
    “근심 마십시오. 일본 사람들이 나를 알아볼 수 없을 겁니다.”
    아들의 말에 길수는 번들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씃더니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었다.
    한참 후 길수는 선수를 치려고 들었다.
   “그럼 우리가 먼저 명천 고을에 가서 일본 사람들을 친해 놓는 게 옳지 않는가?"
    철주는 입을 함박만큼 딱 벌리었다.
     “아닙니다. 일본 사람들은 우리 나라를 통 채로 먹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자들이 삼림이 우거진 우리 이 골 안을 와서 보면 놔 둘 것 같습니까?”
    “그럼 어찐단 말이냐?”
   아버지가 난감해 상을 찡그리자 한철주는 마른기침을 하더니 뒷말을 이었다.
    “당면에 이 골 안의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빚을 받지 못할 까봐 너무 근심하지 마십시오. 기실 일본 사람들을 더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내 말은 일본 사람들을 친해놓자는 게다.”
    그 말에 응삼이가 말대가리를 흔들면서 찬동했다.
    “주인어른의 말씀이 옳습구마. 일본 사람들도 사람이겠지요. 우리가 그자들을 잘 친해놓으면 등에 업고 병완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이 골 안을 쥐락펴락할 수 있습지요.”
    “음.”
   길수는 번들이마를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우멍 눈을 흡떴다가 떼룩거리면서 속궁리를 굴리고 있었다.
   응삼이 길쭉한 말대가리를 길수의 귀에 대고 뭐라고 중얼거리자 길수는 말 이발을 드러내면서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음, 그렇지, 그래. 음, 그 수가 참 좋아. 눈앞에 이익만 볼게 아니구나. 음, 그래, 그거야 말로 돼지들에게 겨를 주고 통째로 잡아 돼지고기를 먹는 격이지. 허허허.”
    토성 안 집에서는 해 질 때까지 간사한 웃음소리,  음흉한 꿍꿍이 끊이지 않았다.
   토성 밖에서는 밤  늦게까지 음산한 눈보라가 온 마을에 공포와 날벼락을 휘몰아 오고 있었다. 공포에 얻어 맞은 벌거숭이 나무와 초가집들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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