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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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한복을 입은 이토 히로부미
2013년 04월 29일 10시 13분  조회:5493  추천:12  작성자: 김문학
 

6. 한복을 입은 이토 히로부미

 

1. 일본에
2. 이등박문이란 사람이
3. 삼천리 금수강산을
4. 사방에서 바라보고
5. 오적을 매수하여 나라를 앗아 갔기에
6. 육연발 권총으로
7. 칠발 쏘아서
8. 팔도 강산을 다시 찾으니
9. 구사일생의 왜놈들은
10. 십만리 밖으로 뺑소니치네.

 

 한국 통감으로 사실상 조선의 지배자로 군림했던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10월 26일 오전 할빈역두에서 조선 청년 안중근에게 암살당했을 때, 조선인들이 지어 불렀던 숫자풀이 노래였다. 한국 통감 이토의 지배에서 받았던 그 울분의 한을 이렇게 민중들을 풀었던 것이다.
 

 <한국 통감부 통치의 明과 暗>에서 기술했듯이 1905년 제2차 日韓協約(을사조약)에 따라 한국통감부를 설치한다. 당시 초대통감인 이토히로부미에 의한 보호정치가 시작된다.
 

 최근 한국과 일본 및 서양학자들의 연구 (한명근, 이토 유키오, Beasley)에 따르면 이토는 한국을 독립국으로 하여 “자치 육성 정책”을 실시하며 일본이 실권을 쥔 지배방식을 시도했다. 따라서 그는 의도적으로 한국인에게 親韓 의 이미지를 만들려고 애썼다.
 

 《大邱物語》(가와이(河井朝雄)1929)에 따르면 1905년 11월 일본정권대사로 한국에 온 그는 한성근처의 농민에게 다가가서 친절하게 인사를 나누고 천진난만하게 담화를 즐겼다는 일화가 등장한다.
 

 이 같이 한복차림으로 노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등 행동에는 자신이 한국을 매우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의 소유자이며 따라서 “일본과 한국은 한집안이라는 정치적 은유가 숨어있다.(최재묵)”
 

 《伊藤博文傳》(春畝公追頌會1940)에 그가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은 에피소드가 나온다. 1906년 1월 이지용, 박희병과 그들의 부인들과 나란히 한복차림으로 사진을 찍은 이토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에서 이토의 왼쪽 앞줄에 앉은 여성이 이토의 부인 우메코(梅子)인데 역시 한복차림을 하고 있었다.

 한복이 한민족 전통의 상징이며 민족의 심벌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토는 숙지하고 있었기에 그는 한복을 입고 한국을 사랑하고 존중한다는 표상을 적극 자작하였다.
 

 그의 각종 전기, 회상기를 섭렵해 보면 이토는 명예욕과 자부심이 유난히 강했는데 자기 현실욕과 그 표현력의 강한 성격의 인물이었다. 금전욕에는 담박했으나 색욕과 현시욕에는 출중했다고 정평이 나있기도 하다.
 

 자연히 그런 이토가 한복차림으로 자신의 “親韓ㆍ知韓ㆍ愛韓” 표상 수립에 적극 자작자연 했을 것이리라.
 

 영남대학 최재묵 교수의 말을 빌면 “한복을 입는 이토의 행위는 한국의 제도나 전통을 존중하며 일정한 자치를 인정한다는 정치적 제스처(시늉)였다. 그것은 한국 민심 향배(向背)에 부심한 일종의 계산된 정치적 연기이기도 했다.”
 

 “한복차림의 이토”, 문인답고 선비다운 풍모를 100년이 지난 우리에게도 느낄 수 있는 사진이다. “한국 침투의 선두주자”란 한국교과서의 기술은 맞다. 그런데 침범하여 그가 무엇을 어떻게 했느냐 하는 구체적 내용에 대해 우리 자신도 모호하다. 그리고 “극악무도”의 인물이란 평은 사실과 어긋난다. 최근 속속 등장되는 이토 연구서나 전기에 의하면, 필자는 우리 동포가 표상으로 막연히 인식하고 있는 이토의 인물상은 너무나 조잡하고 편향적이다 라는 것이다.
 

 이토가 중요한 것은 한국식민의 설계자적인 위치의 대극에 있는 원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족 교육의 “신성한”차원에서 이토는 반드시 “악의 상징”으로 평가 절하해야 되고, 지어 왜곡해도 무관하다는 태세다. 이런 문화상태주의가 결핍한 민적정서의 “유치성”이 곧 우리 민족의 이토관 내지는 한일역사에 투영된 한계이기도 하다. 역사는 단순히 민족 정서와, 민족의 뜻으로 풀이 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룰을 우리는 짓밟고 있다.
 

 필자가 새로 발견한 이토의 인물상, 한일관계에서 노정된 이토는 “극악무도”로 일축한 인물이 아니며 안중근이 우리 민족의 영웅이듯, 그 역시 일본의 근대를 만든 영웅적 거물이며, 또한 일류의 정치가, 사상가, 정략가란 당대의 대표적 인물이란 것이다.
 

 이토의 이름 博文은《論語》의 “君子博 學於文, 約之以禮”에서 따 온 것이며, 文을 숭상한 문인, 시인형 정치인이었다. “文明”, “立憲國家”, “國民政治” 가 그가 노린 평생의 이상이었으며, 한국 통치의 정치적 철학은 “일본국민을 문명의 인으로 계몽하듯이 문명정치를 한국에서 실시하고 싶은 것”이였다.

 1906년 그는 니이토베 이나조(新戶渡)에게 이렇게 말한다. “조선인은 대단하다. 이 나라 역사를 보아도 그 진보는 일본보다 월등 앞선다. 이런 민족이 나라를 스스로 경영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인민이 나쁜 것이 아니라 정치가 나빴기 때문이다. 나라만 잘 되면 인민은 양과 질에 있어서도 부족한 점은 없다.”(《니이토베전집5권》)
 

 이토는 한국의 기존 질서, 가치관을 되도록 존중하며 점진적 문명국으로 전환 시킬 꿈을 안고 있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한국 유교 소양에 애착을 갖고 있었으며 한국 유림을 활용하려 했으나, 한국 유교적 사상이 하나의 보수 사상으로 한국의 개혁을 막고 있는 보수파라는 것을 실감한다. 마치 중국 무술변법시 유교적인 보수파층과 같이 한국에도 중압적인 존재가 되었다. 유교에 대한 회유책을 시도했으나 드디어 실패한다. 그의 “문명화”는 유교권에서 지지를 얻지 못한 채 흐지브지 해진다.
 

 그러나 이토는 한국 전통과 민족성에 대해 관심을 돌려 한국에서 교육에 종사한 일본인 교사들에게 한국국민성 존중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가 한국통치구상에서 새로 발견된 메모에 다음과 같은 플랭이 보인다. “①한국 8도에서 각 10명씩 의원을 선출해 중의원(衆議院)을 조직한다. ②한국 문무양반 중에서 각 50명 원로를 호상 선출하여 上院 을 조직한다. ③한국 정부대신(大臣)은 한인으로 조직하고 책임내각을 구성시킨다. ④정부는 부왕의 수하에 속 한다”. (<<末松子爵 家所歲文書>> 堀口修等編)
 

 이토는 1909년 4월에야 한국병합을 인정하며 병합 후에도 한국의 정치자치를 주장했으며 의회 정치를 통해 한국의 문명화를 실현하여 장래 한일 동맹을 구상했다고 밝혀졌다. 그런데 이토의 암살로 그의 플랭은 편의 종이조각으로 남고 말았다. 이토가 자신을 저격한 인물이 조선청년이라는 것을 알고 절명직전에 남긴 “바보 같은 자식”이란 말의 뒤에는 자신의 진의를 모르고 자신을 원수로 저격 했다는 뜻이였을까? 그 뒤 합방이 정식 이뤄지고 이토의 구상과는 달리 데라우치(寺內)초대 조선 총독의 가혹하고 강압적인 무단(武斷)정치에 들어선다. 이토가 살았다면 조선은 어떻게 됐을까? 상상으로 그 공백을 매울 뿐이다. 그러나 안중근이 이토의 진의를 몰랐다 해도 그의 죄가 아니다. 죄는 수단의 이하를 불문하고 이 민족을 지배하려 했던 이토와 일본제국주의에게 문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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