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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을 만나다(2)
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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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거에 대한 많은 기록을 보면 안중근이 이토를 권총으로 쏘아 쓰러뜨리고 난다음 이토의 시신을 밟고 “코리아 우라(한국 만세)”를 세번 목놓아 부른다. 그리고 로씨야병사들에게 결박당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간결하고 판에 박은 묘사로 돼있는것이 많다. 어딘가 조잡하고 사실과 어긋나는 부분도 있어서 아쉽다.
이제 그날 의거에 대해서 한번 객관적으로 기술해보자. 안중근에 대한 일본측의 취조기록, 로씨야측의 증언기록이 다수 있어 이런 방대한 자료를 종합하여 쓰자면 적어도 단행본 한권의 분량이 된다. 편폭의 제한도 있고 그 방대한 자료를 면밀히 여기다 제시하기도 어렵기때문에 나는 제3자 즉 일본측도 한국측도 아닌 로씨야측의 보고를 중심으로 서술키로 한다.
이토가 1909년 6월 1일 한국통감을 사임한 뒤 추밀원의장을 맡았는데 원래 대만 식민지경영 경험이 있는 현 만주철도주식회사 총재 고토신페이의 권유로 만주의 리익을 확보하기 위해, 로씨야의 대장상 코코프체프와 면담하기 위해서 만주를 일주, 할빈으로 왔던것이다.
10월 26일 아침 9시에 이토가 탄 특별렬차가 할빈역에 도착하자 코코프체프, 콘스탄티 미텔 등 로씨야측 일행이 이토가 있는 귀빈차량에 올라 인사를 나누고 20분정도 회담을 했다. 그런후 코코체프가 플래트홈에서 로씨야철도수비군 의장대의 열병을 청원했다. 그러나 이토는 정장을 갖추지 않았다는 리유로 거절했으나 상대의 간청에 이기지 못해 응하여 9시 25분쯤 차에서 내렸다. 그때 동석했던 로씨야국경재판소 검사 콘스탄티 미텔은 안의사의 의거장면을 직접 현장에서 지켜보았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이토공이 로씨야의장병을 사열하고 5보내지 7보 걸어서 일본인 집단환영대렬에 다가갔을 때 로씨야의장병사이에서 몇차례나 총소리가 들렸다. 처음 두차례 발사소리가 난 뒤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총을 발사한 곳으로 달려갔다. 그때 범인으로 보여지는 자가 왼손으로 오른 팔을 받쳐들고 의장병앞을 지나가는 이토공을 향해 또 한발 쏘았다. 그리고는 급히 뒤돌아서서 이토공을 뒤따르고있는 수행자들에게 발사했는데 아마 3, 4발인가 발사했다. 마지막 발사는 땅을 향해 쏜것 같은데 생각컨대 이 총알이 타나카 세이조(만주철도 리사)를 맞혀 부상시킨것 같다.(중략)
발사가 끝나자마자 동청철도회사 철도경찰서장대리 기병대위 니키트로프가 2회 발사때 범인에게 덮쳐들었으나 범인의 완력이 하도 강해 쓰러뜨릴수 없었다. 격투끝에 다른 장교의 도움으로 권총을 빼앗았다. 그때 범인은 로씨야어로 “코리아 우라”하고 세번이나 웨쳤다. 범인의 발사시간은 30ㅡ40초가 넘지 않았다. 정거장에 있는 철도경찰의 숙직실에서 안정을 되찾은 범인은 자신의 흉행에 대한 동기를 진술했다. 약 20분뒤에 이토공의 사망을 알려주자 범인은 미친듯이 기뻐하며 숙직실벽에 걸려있는 십자가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한편 이토는 어떻게 되였는가? 안중근의 총탄에 맞은 이토는 코코프체프와 무로다 요시아야 등에 의해 부추켜 렬차안으로 운송되였다. 급기야 이토를 쏘파에 눕힌후 그의 옷을 벗기고 상처에 응급처치를 감행했다.
당시 수행의원으로 처치를 했던 코야마 여시(鬼??)의 중언에 따르면 피탄된 흉부와 복부에서 선지피가 샘솟듯 했으며 이미 치명적인 상임을 즉각 알았다고 한다. 정신이 좀 들라고 코야마가 전해주는 브랜디 두컵을 마시고난 뒤 혈색을 잃고 안색이 종이장같이 창백해진 이토는 3번째 컵은 끝내 들이마실 기력마저 없었다. 통역한테서 한국청년이 저격자라는 말을 듣고 이토는 “바보같은 자식!”하고 한마디 뱉고는 더이상 말을 못했다. 그리고 피탄 30분만인 10시에 절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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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안중근의사는 결코 이토가 숨지기직전에 남긴 “바보”가 아니다.
아쉽게도 지금까지 일본인에게 있어서 안중근은 근대 일본의 건국원훈을 암살한 “테러리스트”이며 “바보”같이 용맹한 적으로 일축하는 경우가 많다.
항일투사의 일면만 알았지 그 리면에 있는 문인, 선비, 지식인다운 인물상에 대해서는 아직 깊은 인식을 못하고있다. 이것은 일본인만 탓할바가 못된다. 우리 자신도 사실 안중근의 “투사”를 넘은 위대한 사상에 대해 얼마나 알고있는가?
이번 3월의 나의 특강은 안중근의 평화사상 및 사상가적인 심층의 안중근을 알리고자 행해지는것이다. 그리고 나는 금년안으로 《사상가 안중근》이란 제목의 책을 펴낼 예정으로 지금 일본어로 집필중에 있다.
한마디 아쉬운 소리 더 부언하자면 유감스럽게도 일본인보다 우리 민족의 많은 동포들도 안중근을 단지 상무정신이 강한, 용맹무쌍한 독립투사로쯤 표면적인식에 머무르고있을뿐이다. 문인이자 사상의 동서를 통찰한 선각자로서의 심층적인 안중근에 대해서는 아직 인식이 결여하다.
이제 우리는 안중근에 대한 단선적이면서도 피상적인 리해에서 탈피해야 한다.
나는 “독립”유묵과의 만남을 통하여 단순히 만용만 자랑하는 투사 안중근이 아니라 동양평화를 독립자주지향으로 내세웠던 사상가 안중근선각자와 만나는 실감을 느꼈다.
사상가 안중근, 그는 구경 누구인가?
안중근 순국 100주년을 계기로 우리는 모르고있던 안중근의 리면, 심층에 대해 재리해를 해야할 시점에 와있지 않은가. 나의 이 졸고에서 안중근의 위대한 사상가의 전체상을 다 표현하기에는 미치지 못할것이오나 총체적, 개략적인 모습을 그려보고자 한다.
안중근의 31년의 짧은 인생은 한손에 붓, 또 한손에 총을 쥐고 우선 민족교육계몽운동을 통해 민족을 일깨웠고 단지동맹으로 독립과 동양평화를 지향했다. 무장투쟁을 벌이던 그는 적의 리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기에 이른다. 또한 그는 려순감옥에서 5개월간 공판투쟁끝에 일본군국주의에 의해 교수형을 당하고 순국한다. 개괄하면 안중근은 단순히 무인, 군인, 투사로서 독립을 이룩하는 위업에 헌신했을뿐아니라 교육자, 문인, 지식인, 평화주의자, 천주교신도, 유교와 불교사상을 종합시키고 동서양의 사상을 관통하고있는 사상가, 선구적인 예언가이기도 하다.
그는 려순감옥의 심문에서 “한 나라라도 독립자주하지 못하면 동양(아시아)의 평화를 이룩할수 없으며”, “모두가 독립하는것이 평화를 달성하는것이다”고 소리높이 주장한다. 독립자주평화는 안중근의 유일한 화두이며 그가 평생 겨냥했던 리상이다. 그의 사상이 가장 명쾌하고 직설적으로 발로한것이 바로 이 “독립”유묵이 아니였던가!
안중근은 또 일본검사의 취조중 한중일 동양 3국을 세형제로 비유한 우화를 술회하면서 셋째동생 일본이 둘째아우 한국을 향해 악행으로 괴롭히고있다고 비유하면서 지금 동양의 평화가 깨여진 결과는 이토의 강제정책이 렬악했기때문이라고 규탄하였다. 또 이토 본인을 간웅(쇤衿)이라고 지탄, 그를 제거한것은 동양평화실현을 위한 행위라고 당당히 주장했다.
더우기 1909년 1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은 날부터 1910년 3월 26일 순국당시까지 그는 개인전기인 《안응칠 력사》와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다. 특히 그의 사상을 구상화한 후자 저술은 결국 미완성으로 끝나는것이 너무 아쉽고 가슴아픈 일이다. 결국 3월 25일까지 써서 서문부분에만 그쳤는데 고등법원원장 히라이시(틱柯)와의 면담내용을 기록한 《청취서》 등을 종합하면 그 전면모를 대강 알수 있어서 다행이라 하겠다.
(5면에서) 안중근의 사상, 전략은 아래와 같다. 동아시아의 최대 분쟁의 중심은 려순을 중립지대로 개방하고 한, 중(청), 일이 공동으로 대표를 파견하여 관리하며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상설위원회를 조직하여 이 지역을 아시아평화의 근거지로 만드는것이다.
동아시아평화회의의 재정확보책으로 원만한 금융을 위해 공동은행을 설립하고 각국 공통류통의 공용화페를 발행하는것, 그리고 3국의 청년들이 2개국 3개국 언어를 배우게 하고 우방, 형제적 제휴련맹관념을 형성시킨다. 그뿐만아니라 3개국 공동기술개발센터와 동아시아 동양평화군대를 창설할것까지 제안한다.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동아시아지역의 동쪽끝에 위치한 점을 감안하여 서양의 로마교황청에 각국 대표를 파견하여 서양과의 협력관계를 도모할것을 권유한다. 이래서 세계적시야에서 신뢰를 얻을수 있고 평화의 유지를 이룩할수 있다고 신념을 수립한다.
그는 또한 일본이 주장하는 일국중심의 제국주의 및 군국주의의 동아시아평화정책의 제한성을 간파하고 일본제국주의가 한국과 아시아를 파괴하고 로씨야, 미국으로 전쟁을 확장시킨다면 일본 자신의 괴멸을 기필코 초래한다고 그 시점에서 이미 예언한다. 결과적으로 안중근의 예언은 너무나 적중하지 않았던가!
안중근은 사상뿐만아니라 정치, 군사적인 탁월한 예견적안목을 갖춘 예지에 찬 예언가이기도 했다. 안중근이 그 당시 제안한 동아시아의 제휴, 련대적인 동아시아평화회의, 공동개발체계, 다중언어교육체계, 공동은행개발책, 공용화페제도 이같은 구상은 너무나도 탁월한 견식이며 선구적인 구상이였다.
력사를 돌이켜볼 때 일본은 동아시아공영권을 소리높이 주장했지만 일본 중심의 일국내셔낼리즘적인 강제적 정책이였기에 동아시아의 공명을 일으키기에는 력부족, 결국 1945년 8월 15일 전쟁의 패배와 함께 무산되고 말지 않았던가! 현재 유럽의 EU련합이나 동아시아가 추진중인 동아시아공동체나 APEC 등 세계적인 공동체제휴의 흐름추세를 안중근은 그 탁견과 예지력으로 이미 100년전에 발안했던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안중근은 유럽공동체의 아버지라 불리는 장.모네보다. 중국근대의 국부로 추대된 손중산보다, 그리고 아시아평화의 리더였던 칸트보다 더 선구적인 대사상가, 대정략가임이 틀림없다.
안중근, 그는 100년앞을 내다본 영지(亶列)의 사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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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가 되자 이시마루회장은 시다라로인과 나를 위해 일본료리정에다 푸짐한 오찬을 마련했다.
식사중 우리의 화제는 당연히 안중근에 관련된 내용으로 꽉 차있었다.
“왜 안중근이 일본의 원훈을 암살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려순감옥에서 그렇게 우대를 받고 존경을 받았을가요?” 나의 물음에 시다라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작은 할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안중근의 고결한 성품과 당당한 신앙심에 매료된다는겁니다. 그래서 법원과 감옥, 통역사 그리고 일반 관리들까지도 다 일본인인데 안중근에게 글을 써달라고 요구했답니다. 려순옥중에서도 안중근에게 상등백미밥에다 끼니마다 반찬에 맛있는 과일이 배급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삼일에 한번씩 목욕도 시키고 리발도 해주고∼ 일본의 최고실력자 원로를 죽인 범인에 대한 존경이 이렇듯 깍듯했다는것은 정말 경탄할 일이지요.”
화제는 또 안중근의 품위있는 유묵으로 되돌아왔다. 1910년 2월 14일 사형판결이 난 뒤 주위의 일본인중 비단이나 일본화지를 지참하여 안중근에게 휘호(?봐)를 요구한 사람이 엄청 많았는데 안중근은 번마다 상대를 고려하여 어구를 선택하고 정성껏 써주었다고 한다. 생각컨대 안중근은 이 기회를 일본인에게 자신의 품은 뜻을 전달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는지도 모른다.
1910년 3월, 안중근은 옥중에서 “박학어문, 약지이례”(널리 학문을 배우고 례로써 자신을 단속한다)라는 《론어》[옹야편]의 문구를 한 일본인 관리에게 써준적이 있는데 기하게도 이토 히로부미의 이름 박문은 이 론어 옹야편에서 두 글자를 따온것이라고 한다. 말이 나온김에 한마디 더 하자면 이토는 유교의 한학에 조예가 깊고 한시에 능했으며 서예가로서도 일본 근대서예사에서 능서가로서 알려진 인물이다. 내가 소장하고있는 몇점의 이토 유물을 보면 그는 행서나 초서에 능했는데 성격같이 활달한 글씨를 썼다. 한국통감, 인감이 찍힌 그의 유물은 또한 일본식민지화의 생생한 증거물이기도 하다.
이토는 조선의 유교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이 당시 일본의 여느 정치가보다 깊었으며 조선유교문화가 일본문화보다 앞섰다고 거듭 말했다.
(료녕조선문보에서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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