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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효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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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내가 살던 고향
2009년 06월 28일 07시 33분  조회:1301  추천:28  작성자: 강효삼

나는 연수에서 태여나 그 곳에서 교편을 잡고 문학꿈을 키우며 열심히 살아왔다.허나 문화대혁명이라는 이 전대미문의 동란을 겪으면서 오히려 열심한 대가를 불행으로 떠안게 된적이 있었다.그리하여 다시 교단에 서는것은 말할것도 없고 자신의 진득한 소망인 문학꿈마저 접어야 했던 엄혹한 시기가 있었다.헌데 이러한 때  쥐구멍에 볕이 들듯 나에게 참으로 생각지모 못했던 삶의 해빛을 준곳이 바로 상지였다.

그것은 1972년 초봄이였다. 정치적으로 조금만 문제가 있어도 교원은 커녕 천한 농군도 바로 못되던 그 세월에 그때까지 아직 듣기에도 무시무시한 '반동분자'의 모자를 쓰고 있던 내가  도랑하나 사이 둔 상지땅에 초빙되여 와서 다시 교단에 섰던적이 있다. 그것은 나로 말하면 하나의 인생기적이였다. 어찌해  다 같은 하늘아래 다 같은 민족끼리인데도 사람을 보고 써주는것이 이렇게도 판이할수가 있았던가? 그 세월에 어벌 크게도  나에게 이런 감동적인 은헤를 베풀어준 이가 바로 당시 상지하동중학교교장이셨던 정호덕선생님과 김창룡교도주임이였다. 그래서 나는 상지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였고 상지의 겨레들을 고마운 안광으로 보게 되였다.비록 일년이란 짧은 시간밖에 머물러있지 못했지만 그것은 내가 다시 사람의 대접을 받은 일년이였고 사람같이 산 일년이였다. 더구나 그것이 그후 나의 인생에 전환점이 되여 다시 상지땅으로 와서 보람찬 나의 '제 2의 인생'을 실현하면서 최선을 다 하게한 삶의 터전이 되여준것이다.

상지땅에 와서 옹군 25년이란 세월을 보냈다.비록 상지역시 사람사는 곳이라 어느 구석에선가는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못하고 한때는 비틀린 인간관계의 잡음에 시달려 고뇌한적도 있었으나 이러한 고놔와 곤혹은  내가 상지에 옴으로하여서만 충실하게 이루어낼수있었던 그 모든 사업성과와 인생가치와 자식들의 출세등을 놓고볼때 이러한 곤혹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마 그래서 인간은 한 고장에 살다가도 자주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가나보다.

생각하면 나는 내 후반생에 여늬 고장보다도 상지를 잘 선택한것같다. 돌아보면 상지땅에서의 20여년 세월은 얼마나 보람차고 의미있던 세월이였던가! 나는 상지의 물을 마시고 상지의 쌀을 먹고 상지의 공기로 숨쉬면서 참으로 많은 감사와 배려를 받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감사는 내가 교원으로부터 문화사업을 하게 된것이다. 문화사업에 종사하고 싶은것은 나의 오랜 숙망이였다. 그러나 인맥이 없어선지 아니면 사람됨이 모잘해서인지 고향에서는 어찌해도 그러한 욕망을  실현할수가 없었다. 그것이 늘 허전하고 유감스러웠는데 상지땅에 와서 어렵지 않게 그 꿈을 현실로 만들수있을줄이야! 

한 보통사람이 낯선곳에 와서 당당하게 발붙이고 자신의 취미와 능력에 쫓아 마음껏 기능을 펴간다는것은 쉬운일이 아니다.흔히 살아보면 지방마다 터세라는것이 따로 있어 지역에 따라 사람을 차별시하는것이 보통의 상황인데 나는 상지에 와서 전혀 그런것을 느끼지 못했다. 비록 굴러온 돌이지만 여기엔 인맥이나 친분여하에 관계없이 사업을 앞에 놓고 적극적으로 나를 문화부문에 추전해준 많은 민족간부들과  결정권을 가지고 나를 문화소에 전근시켜준 안무순녀사(당시 문교를 책임진 부현장)를 그 실레로 들수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그토록 하고싶어 하던 문화사업을 하게됨으로써 자신의 인생가치를 충분히 실현할수있게 되였던것이다.

비교가 있어야 감별이 있다.   문화대혁명기간 번연히 정치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임을 알면서도 대담하게 써주던 정호덕교장같은 분들과 친분이야 있던 없던 한 인간이 가진 꿈과 포부를 존중하여 그의 특장에 발휘하게끔 배려해준 안무순녀사와 같은 분들이 상지땅에 있다는 그 자체는  나로 하여금 상지땅 우리 겨레들의 앞서가는 생각과 더불어 후더운 인간풍토를 피부로 느끼게 한다.이러한 인간사랑의 풍토는  비단 사업뿐 아니라 실 생활면에서도 잘 표현 되였다.

나는 상지로 전근되여 오면서 가족이 향소재지에 소속이 되여 농민이 아니였기에 국가 상품량을 타먹는 나를 내놓고 나머지 네식솔은 식량을 주는곳이 없었다. 지금처럼 식량을 마음대로 사먹는때라면 몰라도 80년대까지는 국가로부터 량식을 엄격하게 통제하던 때여서 내 힘으로는 어디가서 한톨의 량식도 얻거나 살수 없었다. 그래서 가족을 먹여 살릴 근심걱정에 잠못드는 날도 많았는데  이 일을 알게된  당시 하동향부서기로 있던 김창히씨께서 (현 정협주석)가족의 량식문제를 해결하여 주어 그때의 기분은 마치 가물에 비를 만난격이였었다. 더욱이 두고두고 잊을수 없는것은 당시 공안국책임자의 한분인 김치경님께서 주동적으로 나의 네식솔의 호적을 도시호적으로 바꾸어주면서(당시 이 일은 공안국에서 관리했음) 가족이 몽땅 국가배급량을 타게되여 더는 먹는 문제를 가지고 걱정하지 않아도 되였다. 당시로 말할때 이는 대단한 인간적 배려이다.  만일 이렇게 사업적으로 생활적으로 아니 인간적으로 나를 관심하고 배려해주는 고마운 분들이 없었다면 내가 어찌 문화사업은 물론 문학창작과 자식농사에서 만족한 성적을 일구어낼수있었을가.지금 생각해도 실로 상지땅에서의 25년은 내 인생의 최 고조기요 황금시기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나는 상지를 또 하나의 고향으로 간주하면서 상지땅  겨레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연수가 나의 꿈을 잉태시키고 자래운 요람이라면 상지는 그 꿈을 활짝 꽃피워 열매맺게 해준 드넓은 동산임에는 틀림이 없다. 고향 하면 산천도 그렇지만 그 인간의 풋풋한 정때문에 두고두고 외우는곳인데 다 같이 사람사는 고향이지만 특별히 상지를  '내가 살던 고향'이라 부르고 싶음은 그 인간적인 배려와 관심과 사랑때문이다. 한 인간을 그 직위나 인맥을 떠나서 재능이 있어도 깎아내리지 않고 작은 능력이나마 깊이 헤아려 한 인간이 꿈꾸는 그 실천 가능성을 한껏 발굴하여 인간이 인간답게 자신의 인생가치를 마음껏 실현하며 살수있도록 배려해준 곳은 모두 '고향'이다. 나에게 상지는 그런 아름답고 순후한  곳이고 영원히 잊지못할 고향이다.

2009/06/26 흑룡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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