修行하는 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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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살구꽃필때---에치투오를 찾아온 사람들1 댓글:  조회:2351  추천:1  2015-03-29
  어제는 연길공전국(供电局)에서 전화가 와서 오늘 아침으로 약속을 잡았다. 오늘 오전에 일찍 그분들이 다녀갔다. 실은 내가 지난 정협(정치협상회의의 줄임말, )회의때 올린 제안(社情民意提案)때문이였다. 요즘은 정협의 역할이 상당히 커져서 예전처럼 전화나 몇줄 답장으로 답해서는 안되게 돼있기 때문이다. 답복을 해야하는 단위나 기관에서는 그 기관의 책임자가 직접 방문해서 제안을 올린 위원의 의견을 잘 경청한후 그에 맞는 해답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만약 해답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 위원은 언제든지 퇴짜를 주어 돌려보낼수 있다. 또 해답에 대해서 불만족제안을 다시 할수 있도록 돼있고 그런것은 바로 행정기관의 행정능력점수와 연결돼있어서 요즘은 제안의 힘이 상당히 크게 작용하고 있는 편이다.   내가 올린 제안은 에 관한 내용이였다. 는 내용이였다。 물론 공전회사를 하나 더 만드는것은 지방의 작은 시에서나 지역 정협에서 해결할수 있는 일이 아닐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시민들의 의견을 시정협에 제안하면 시정협에서 성정협에 올리고 성정협에서 다시 국가정협에 올린다면 충분히 개선이 되고 민생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때문이다. 내가 더욱 강조했던것은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을 만들려고 애쓰는 우리나라 지도자의 결심에 따라서 우리 작은 지역에서부터라도 한구석을 밝히기 시작한다면 충분히 이 사회가 밝아지고 따뜻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실은 이 제안을 쓰게된 계기가 나한테는 한가지 있었다. 작년 겨울에 있었던 일인데 에치투오리더십강의를 하고 있는 어느 저녁에 교실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우리 직원이 나가보니 어떤 반백의 아주머니가 문밖에 서있었다. 강의중이라 만날수 없어서 잠시 기다려달라고 부탁하고 이어서 강의를 마쳤다.  그리고 그분을 사무실로 불러들여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야기 내내 눈물이 흘러서 저도 몰래 옷깃을 적셨다. 남자가 무슨 눈물이 그렇게 많냐고 웃을지 모르지만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세상에 아직도 이렇게 소외된 계층이 있고 어렵게 사시는분들이 있다는것에 나는 심한 충격을 받기도 했다. 그 아주머니는 나이는 삼십대 중반밖에 안되였는데도 머리는 절반가량 희끗희끗해져있었다. 남편하고 사별하고 외아들데리고 혼자 살고 있는데 산후풍으로 아들을 해산하고부터는 손에 찬물만 닿으면 간질병같은 질환을 일으키는 병을 앓고 있었다. 게다가 온갖 종합병증을 앓고 있는데 금방 중학교에 간 아들이 학교가야하는데 가방을 사줄돈마저 없었다. 그런데 사지는 멀쩡해보여서 민정부문에 저소득 후원금을 신청하면 번번히 퇴짜를 맞는다는것이였다. 그래서 이제는 완전히 포기했는데 문제는 지난밤에 생겼다. 아들이 학교다녀와서 다 해진 가방을 가지고 다닌다고 친구들이 놀린다면서 학교 안간다고 하는데 엄마로서 때리고 욕하고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란다. 철없는 아들을 탓할 일만 아닌데 엄마로서 서러워 죽겠다고 펑펑 울었다. 집에는 며칠째 난방비를 내지 않아서 집중난방마저 끊어버렸는데 바닥은 얼음장같고 한겨울의 추위가 그대로 전해져와 살을 에일지경이였다. 다행히 낡은 전기담요가 하나있어서 아들하고 같이누웠는데 한밤중에 전기회사에서 정전을 시켜버린것이다. 너무 기막히고 억울해서 밤새 아들을 붙잡고 울었단다. 그래서 울다울다 그만 이런 세상죽어버리는게 낮다고 생각들어서 아들과 같이 죽을려고 액화가스를 틀려다가 문뜩 나를 찾아볼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후에 가봐서 알지만 그분의 집에는 요즘 세월같으면 한두대씩 다 있을만한  TV한대마저 없었다. 그분은 주로 라디오를 많이 들었는데 몇년전부터 내가 방송국에서 정기적으로 해오던 상담프로를 애청하고 있었다. 내가 그 방송상담에 나가는것은 보수를 받는 일은 아니였다. 하지만 매주마다 기다리고 상담을 해오는 시청자들을 위해서 즐겁게 다녔던 프로였다. 요즘은 일이 바뻐서 그 정기적인 프로는 중단하고 한달에 한두번정도 가끔씩 진행해오고 있지만 그 아주머니가 문뜩 그 어려운 순간에 그렇게 내 생각을 했다고 하니 정말 다행이 아닐수 없었다. 그렇게 찾아와서 두드린 문이 바로 강의도중에 두드린 그 문이였다.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사회에 소외된 이웃들도 참 많구나하는 생각에 가슴이 시리고 아팠다.   이튿날 우선 전기세를 내드리고 일부 생활비 그리고 학용품을 사서 방문을 했는데 정말 말그대로 어렵게 살고 있었다. 그 아주머니는 삶과 세상에 용기를 잃고 있었고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다. 당장 돈이 없는것은 다시 살아날수 있어도 용기와 희망을 잃으면 미래가 없어짐을 알아야 겠는데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전액 장학생으로 내가 진행하는 에치투오 리더십코스를 다녀보라고 교재를 선물했다. 처음에는 “이 나이에 공부는 무슨...하시던 분이 정작 개강할때 우리 직원이 전화를 하니 불이나게 달려왔다. 제일 먼저와서 제일 앞자리에 앉아있는데 그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내가 쓴 교재를 읽어보고 감명이 깊었다면서 연신 감사했다. 그렇게 공부를 하는 내내 그분의 굳어졌던 얼굴이 밝아지기 시작했고 얼굴에는 웃음이 피기 시작했다. 그분은 에치투오 강의를 받고나서 자신이 완전이 180도 변했다고 한다. 용기와 희망뿐이 아닌 도전과 노력을 할 마음이 생겼고 긍정적이고 명랑하던 소녀시절로 돌아간것 같다면서 어린애들처럼 즐거워했다. 네번째 강의때는 자신의 사례를 직접 이야기하면서 오래동안 끊어졌던 아들과의 대화도 잘 된다면서 울면서 감사를 했다.   내가 진행하는 에치투오리더십코스는 그 소제목이 “인맥으로 성공하는 7가지 법칙”이라는 내용의 리더십 강의다. 그 강의가 그분에게는 잘 먹혔나본다. 강의 끝나는 날에는 머리를 까맣게 물감까지 들이고 파마까지 했는데 제일 처음 나를 찾아왔을때와는 천양지차로 모습이 달라져 있었고 젊어보였다. 네번째 강의때 그 소감발표로 인해 함께 공부를 하던 어느 보험회사 경리가 그분에게 보험설계를 해볼 의향이 없는지 제안을 했는데 지금은 아주 훌륭한 보험영업원이 되였다고 한다.   그분의 그런 사연을 듣고 겨울밤에 전기를 끊은 그 회사 직원이 얼마나 밉던지… 그래서 적었던 사연을 정협에서 제안을 했던것이다. 단순이 어느 한 개인을 위한것이 아닌 우리 주변의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제안을 해야겠다는 사명감에서였다. 그런데 정작 공전회사 서기와 주임이 나의 사무실에 찾아와서 자신들의 고충을 이야기하는데 그분들도 역시 딱한 사정들이 있었다.       다행스러운것은 그래도 그분들이 적극 개선해보려고 애쓰는 마음이 보였고 또 그저께는 그 아주머니를 위해서 저소득보장금을 지불해주겠다고 민정국에서도 다녀갔다. 민정국분들께 내가 그 아주머니를 대신해서 고맙다고 골백번 인사를 했는데 더 많은 어려운분들께 혜택이 갔으면 좋겠다.   오늘은 하루내내 소중한 친구들과의 중요한 등산 약속도 뒤로하고 손님접대로 시간을 다 보냈다. 연변라디오 경제상담프로의 김련화PD가 전화로 연락이 왔다. 내일 오전에 있는 경제상담프로에 나올수 있느냐는 내용이였다. 기꺼이 된다고 대답했다. 어딘가에서 방송을 듣고있는 누군가에게 용기가 되고 작은 희망이라도 되여줄수 있다는 기대감에서였다.   아침에 출근길에 보니 길가에 심은 살구나무에 꽃망울이 빼꼼히 나오고 있어서 보기 좋았는데 시간이 급하다고  그냥 지나쳐버렸었다. 퇴근할때에는 향기라도 한번 맡아봐야겠다. 벌써 살구꽃이 피는 봄이 왔나부다.
14    삶의 중도 댓글:  조회:3749  추천:1  2015-03-20
  오늘은 가끔씩 바람이 불었다. 어제까지 화창한 날씨가 계속되더니만 봄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봄바람이라고는 하지만 따뜻하기보다는 쌀쌀한 기운이 더 해서 몸을 움츠리게 된다. 드디여 꽃샘추위가 시작되려나본다.   무척 바쁜 하루 일과를 마무리짓고 사무실에서 컴퓨터에 저장된 파일들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본래 쓰던 컴퓨터가 너무 속도가 느려져서 새로 하나 바꾸었는데 하드에 저장된 내용들을 옮기면서 순서가 바뀌여서 어디에 저장했는지 찾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몇주동안 고생했었는데 오늘 마침 시간이 있던터라 마음먹고 정리하기로 했다.   컴퓨터를 정리하면서 보니 온갖 잡동사니 문건들이 가득하다. 오래동안 열어보지도 않은 많은 자료들을 지우면서 디지털 혁명을 통한 삶의 변화를 느낄수 있었다.   정보화 사회이기때문에 뭐든지 너무 빠르다. 비행기도 더 빨라지고 기차도, 배도, 자동차도 다 빨라졌다. 사람들의 걸음걷는 속도도 빨라졌고 심지어 말하는 속도마저 빨라졌다고 한다.   예전에는 편지로서 소식을 전했기에 기다리는 마음과 그런 기다림속에서 사랑을 싹틔우거나 마음의 공간을 다지는 시간을 가졌지만 요즘같으면 지구촌이 모두 하나가 되여 휴대폰으로 번호만 누르면 여기저기서 소리가 터져나오고 인터넷만 오르면 얼굴보면서 대화를 맘대로 하니 빨라지기는 정말 빨라졌다.   어릴적 보았던 “미래에서 온 아이”라는 책에서 묘사된 미래에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것이다. 디카로 숱한 사진들을 찍었지만 실지 인화하는것은 한두개도 안된다. 며칠 보다가 한쪽 구석에 저장해둔다. 그러다가 필요없거나 자리가 부족하다싶으면 그냥 지워버리는데 순간순간을 소중히 사진으로 저장해두고자 했던 옛날의 그 마음이 이제는 퇴색한지 오래다.   물질이나 풍요로움에 빠져 즐기다보면 마음을 다스릴 시간이 없다. 그래서 너무 돈이 많은것도 별로 좋은 일이 아니라고 옛 성현들이 말씀하셨던것이다. 뭔가 너무 지나치면 좋지 않다.   중용이란 책에는 이런 말이 있다. “知者过之,愚者不及也”라는 말이다. 우리말로 풀어보면 ‘지혜로운 자는 너무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는 미치지 못한다.’라는 말이다. 중용의 미덕을 이야기한 말이다.   ‘중용’(中庸)이란 사물을 보는 방법이나 행동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일, 즉 균형을 잘 잡는다는 의미로서 유가에서 가장 존중하는 개념중의 하나이다.   21세기인 지금은 모두가 영악하고 똑똑한척 해서 그 중도를 지키는 지혜로운 자를 찾기 어렵다. 본래 똑똑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은 서로 길이 다르기에 중도를 지켜야 하는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소위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탐구심이나 호기심이 왕성해서 중요한 일은 뒷전으로 돌리고 쓸데없는 일을 캐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과는 반대로 어리석은 자는 이해수준이 낮기 때문에 어쨌든 미치지 못하는 경향이 있기 마련이다. 본래 중용이란 이처럼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은 것이다. 그래서 너무 잘사는 대가집 자식으로 태여나는것은 오히려 좋은 일이 아니다. 너무 풍요로워서는 자신을 찾는 소중한 시간을 가질수 없기 때문이다.   어릴적에 읽었던 “로빈손 크루소”라는 책의 서두에 로빈손의 아버지가 자꾸만 배를 타고 길을 떠나고자 하는 아들에게 중산계급의 좋은 점에 대해서 말하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그런 부모의 부탁을 뒤전으로 하고 길을 떠난 로빈손은 조난을 당하게 되고 수십년간 무인도에서 고생해야만 했다. 자기 분수를 벗어나는 행동은 언제나 화를 부른다는 말은 정답이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육체를 가지고 있는 동물학적인 유기체이기에 생물학적인 충동을 느끼지 아니할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끔 관능적인 유혹에 빠지거나 그런 유혹을 절대적인 믿음처럼 믿고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 돈을 벌고 또 벌고 잘살고 또 잘살다가 죽는것, 그것이야 말로 이 생을 잘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인양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로매진한다. 그러다가 문뜩 죽는 날이 왔을때 허무함과 아까움을 이기지 못해서 더욱 삶을 갈망하면서 고통스러워 하는것이다. 때로는 나도 그냥 훌쩍 어딘가 떠나서 아무것도 구애됨이 없고 근심도 없는 무애무우(无碍无忧) 의 생활을 해보고 싶을때가 있다. 물론 아주 가끔씩 일어나는 충동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삶이 나한테 부여한 무거운 책임을 지지 않기위한 경향일 것이고 내 마음을 찾기 위해서는 삶의 책임과 마음의 수련을 함께 해야하는것이 정답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것이 삶의 중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억지로 어딘가에 숨어서 수련을 하거나 출가를 해서 공부를 하는것만이 깨달음을 얻을수 있는것은 아닐것이다. 깨달음이란 하늘에 있는것도 아니고 땅밑에 있는것도 아닌 바로 우리 삶속에 하나로 융합되여 있기때문이다. 도시로부터 도피하여 산속에서 홀로 사는 은자(隐者)는 아직도 여전히 환경에 끌려다니는 2류급 은자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 큰 대덕이나 은자는 오히려 시중에 숨는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주위 환경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만큼 충분히 유유히 자기를 지키며 생활할수 있는 힘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로 돌아와 돼지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고 여자와 사귀나 자기 마음을 더럽히지 않는 사람이야 말로 대덕(大德)이고 대은자(大隐者)이고 고승(高僧)인것이다. 그래서 ‘大隐隐于市’ 라는 말이 나왔나본다.   에치투오 강의에서 항상 이야기했던 다섯가지 성공양식을 돌아본다. 그 첫번째가 ‘마음의 자유’이다. 내 마음이 편안하고 자유로울때 우리는 행복을 느낄수 있다. 아무리 돈이 많고 권력이 있어도 마음의 자유가 없다면 무슨 행복을 운운할수 있겠는가?   두번째가 ‘건강의 자유’다. 육체가 건강하고 자유로워야 비로소 삶을 꾸미고 내 자신의 속뜰을 풍요롭게 꾸밀수 있다.   세번째는 ‘사랑의 자유’ 이다. 누군가를 사랑할수 있고 또 누군가의 사랑을 받아들일수 있을때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느낄수 있을것이기 때문이다.  네번째가 ‘경제적인 자유’이다. 에치투오 리더십과정을 개발해서 처음 교재를 만들면서 썼던 말이 있다. 라고 적었다. 그걸 지금까지 강의 제강으로 쓰고 있다. 물이 너무 많으면 홍수진다. ‘십년가뭄에는 살수 있어도 한번 홍수에는 망한다’ 는 옛말이 있다. 돈이 너무 많으면 그렇게 홍수처럼 우리 마음속에 겨우나 세워두고자 했던 꿈과 희망과, 노력을 통한 풍요롭고 행복한 마음을 싹 쓸어버린다.   다섯번째가 ‘영의 자유’이다. 영이란 바로 우리의 영혼이다. 이것을 마음과 동일시 하면 큰 착오다. 우리의 육체는 영혼을 빼면 그냥 고기덩이일 뿐이다. 그때면 우리도 동물과 다름없는 동물적인 존재일 뿐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것은 더 큰 영적인 성숙을 위해서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하늘과 땅사이에 인간세상이 있다는것은 우리에게 하늘과 땅의 그 중간에서 바른 길을 찾도록 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너무 생계가 걱정될 정도로 가난하다면 우리의 마음은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 마음이 자유롭지 못하면 그 마음이 깃든 육신에 그늘이 지기마련이다. 너무 좋은 집에 살지도 않고 너무 형편없는 집에 살지도 않고, 너무 화려한 옷이나 자동차를 사지 않고 그러나 또 너무 초라하지도 않게 다니며, 너무 좋은 음식을 탐하지도 않고 너무 나쁜 음식을 먹을 지경도 아니고 부모에게 바라지도 않고 자식에게 기대지도 않으며 친구도 너무 많지 않고 전혀 없지도 않으며, 술도 너무 과음하지도 않고 전혀 입에 대지 못할 지경도 아니라,미훈의 경지를 즐길줄 아는 삶을 살고 싶다. 너무 잘살지도 않고 또 너무 가난하지도 않으며 너무 똑똑해서 전문가노라고 으스대지도 않고 또 너무 바보스러워서 내 자신의 속뜰을 들여다 볼줄을 모르지도 않는 그런 삶이 중도의 삶이다. 이런것을 ‘위대한 평범’이라고 말해도 좋을것이다. 논어에도 오직 한마디 뿐이지만 중용에 대해서 평한 말이 있다. ‘중용의 덕은 최고의 미덕인데 사람들은 오래 그것을 잊고 있다.’ 라는 말이다. 거기에 관련된 논어의 이야기가 있다.   공자의 제자 중 자공(子贡)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머리가 뛰어나며 말재주가 좋아 실업가로서도 대성한 인물이였다. 이 사람은 또 인물평도 좋아한듯 싶다. 어느날 공자의 젊은 제자 자장(子长)과 자하(子夏)를 가지고서 공자의 의견을 구했다. “자장과 자하는 누가 더 뛰어납니까?” 공자가 대답하기를 “자장은 도가 넘치고 있고 자하는 도가 부족하다.” 자장은 요즘 현대인 같으면 앞에서 분수나 도를 분별못하고 먼저 달리는 경향이 있었던것 같다. 자하는 반대로 적극성이 없고 소극적인듯 하다. 이때 자공이 “그러면 자장 쪽이 뛰어나다는 말씀입니까?”하고 물었더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과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过犹不及)라고 한말로 유명하다.   지나쳐서도 않되고 부족해서도 안된다. 균형잡힌 인간상이 이상형이라고 공자는 보고 있는것이다. 내 육신의 자유와 영의 자유를 위해서 해야하고 배워야 할 일들이 아직 많이 남았다. 컴퓨터안의 쓰레기 파일을 지우듯이 내 마음속 한구석에 가득 차있는 썩은 생각들도 잘 찾아내여 깨끗이 버려야 겠다.
13    우리시대 우리교육 댓글:  조회:2186  추천:0  2015-03-15
  오늘은 방송국의 경제상담프로에 출연했다. 사교육에 관한 상담프로였는데 현재 우리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는 내용이였다.   정부에서는 과외공부를 못하게 하고 또 숙제를 많이 내는것을 엄금함으로서 학생들의 부담을 덜려고 하지만 그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것임을 모든 백성들은 잘 알고 있다. 그것은 학부모나 아이들에게 혹은 학교의 선생님이나 학교교육에 있는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국가교육체제에서 문제를 찾아봐야하기 때문이다. 점수중심으로 대학에 가는 체제가 계속되는한 학부모들은 아이들의 공부에 신경을 쓸수밖에 없고 성적을 강조하지 않는다면 학교의 등급평가에서 떨어질수 밖에 없으니 학교에서는 어쩔수없이 숙제를 더 많이 내거나 공부를 강요할수밖에 없다. 학부모로서의 입장도 그러할것이다. 아이가 공부를 잘 못하면 좋은 대학에 갈수 없고 좋은 대학에 갈수 없다면 좋은 직장을 찾을수 없기에 어떡하나 공부를 시켜 좋은 대학에 보내고자 하는것이 현재 이시대 부모들의 입장이다. 그러다보니 사교육이 난무하고 학교에서는 숙제를 산더미처럼 내주게 돼있다. 소학교 4학년 다니는 우리 아이들이 저녁에 열시넘게까지해야 숙제를 마칠수 있으니 휴식이나 놀이를 논다는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대학입시를 앞둔 학생들보다도 더 늦게 공부를 해야하는 소학생들은 행복하기보다는 오히려 불쌍하게 보인다. 그러나 학부모들은 또 자기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성적이 떨어지면 남들이 머리나쁘다고 웃을까 두렵고 또 아이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할까 두려워서 더욱 악착스럽게 공부를 시키려고 하는것이 현재의 현실이다.   상담프로를 마치고 나오면서 마음이 저으기 무거웠다. 요즘 공부는 지식을 배우는 공부가 아니라 지식을 억지로 쏟아넣으려는 공부이다. 지식을 익혀서 지혜를 찾으려는 공부가 아니고 지식을 모아서 출세를 하는데 쓰려는 공부일뿐이다. 그래서 더욱 가슴이 아프다. 어쩌다 이 사회가 이렇게 가고있는지 걱정이 가고 또 그걸 스스로 변화하도록 힘을 쓸수 없다는 무기력함에 더욱 안타까워지는것이다.   논어에는 이런 말이 있다. “学而不思则罔,思而不学则殆”라는 말이다. 우리 말로 풀이하면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배움을 기만하는 것이고 생각만하고 배우지 않는다면 그것은 위태로운 것이다”는 말이 된다. 아주 유명한 말이기때문에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르지만 다시 더 깊이 풀어본다면 “독서에 너무빠져 사색을 게을리 하면 지식을 익힐수 없으며 사색에 빠져 또한 독서를 게을리한다면 독선적이 된다.”는 뜻이 된다. 지식을 익힐수 없다는것은 지식의 단편만이 잡다하게 들어있을뿐 살아있는 지혜로서의 작용을 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사람을 과일나무에 비교한다면 갖가지 과일을 가득 키우고 있지만 종당에 시고 여물지 못한 과일만 달려 있을뿐이고 벌레먹고 크지못한 과일만 있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하는것이다. 과일이 익듯이 지식도 익어야하는것이다.   요즘아이들은 거의다가 소화불량에 걸려있는 상태라고 볼수 있다. 잡다한 지식들을 가득 주입시키고 있으나 그것들이 제대로 소화되지 못해서 모두 앓고 있는것이다. 점수를 잘 받는다고 해서 잘 소화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점수일뿐  점수가 인생을 대신하지는 않기때문이다.   요즘 뉴스를 보면 더욱 걱정이 커진다. 여기저기 자연재해도 많아 지고 있지만 인간의 도덕을 상실한 행위로 인한 문제가 현재 중국의 당면한 더 큰 과제로 다가오고 있는것이다. 우리나라 총리가 지난번 상무국회의에서 현재 유독식품을 만들어서 팔고 있는 사람들을 도덕성의 타락으로 분류하여 말씀했다는 보도가 나온걸 본적있는데 공부만을 강조하고 그 생각함을 주지않는 우리 사회교육의 페단을 보여주는 일면이라고 할수 있겠다.   소고기의 값을 더 받겠다고 살아있는 소의 입으로부터 수도관을 연결해서 소의 위속에 고압수도물을 주입시키는 사람들의 잔인함이나, 발암물질을 일으키는 공업화학품으로 콩나물을 길러 파는 악덕업주나, 독이 섞여있는줄 번연히 알면서도 팔아서 수많은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우유업체나 모두가 이런 강압적인 점수위주의 교육에서 나온 도덕성결여로 나온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로자는 “大道废有仁义”라고 했다. 직역을 한다면 대도가 없어진 까닭에 인의가 있다고 풀이할수 있다. 물론 그 뜻을 바르게 풀이한다면 인(仁)이다. 의(义)다 하고 현재의 나처럼 도덕에 대해서 우리가 이야기 할때면 이미 대도(大道)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는 작위나 영리함을 버리고 무위자연(无为自然)의 태도록 돌아가야한다고 강조했다.   행복을 약속받는것은 점수도 아니고 남한테 보여주려는것도 아니고 스스로 자연과 같아지려하고 자연을 본받아 돌아갈때 행복해지는것이라고 한다. 인간이 억지로 만들어가고 있는 문명이라는 탈아래 자행되고 있는 자원수탈은 자연을 침해하는 결과를 나타내고 그 자연을 통해 다시 과보를 받아들이는것은 종당에는 인간 그 자신임을 알려주는것이다.   로자는 이어서 이렇게 덧붙혔다. “커다란 허위가 만연하는것은 인간의 영리함이 제멋대로 날뛸때 이다. 자부출(出慈父)이니, 효자출(出孝子)이니 하고 외치는 것은 육친의 애정이 엷어졌을때 하게 되고 충신이 나타나는것은 나라의 정치가 혼란스러워졌을때이다.” 라고 했다. 딱 맞는 말씀이다.   지금 인간의 영리함으로 자연은 파괴되고 지식주의를 부르짓는 서양의 교육때문에 동방의 문화가 말살되고, 인륜이나 도덕보다는 실용주의나 물질에 눈이어두워지는 것은 우리 사회의 교육의 바탕이 어지러워졌다는 의미로 볼수 있다. 학교에서는 도덕이나 품성보다는 성적에 바탕을 두고 선생님들은 학생간부등용할때 학부모의 가정형편을 중심으로 살피는 풍토를 우리가 어찌 없다고만 하겠는가? 그것이 눈감고 아웅하는격이 아니고 무엇일까. 또 사회에서는 부패한 관원들이 남벌하고 당과 국가의 제일 큰 과제가 부패척결로 나설지경에 이르렀다는것은 사회의 병패가 얼마나 심해졌는지 짐작할만한것이다.   윗물과 아랫물이 모두 그러하니 그 중간의 백성들의 도덕성을 우리가 어찌 나무람만 할것인가. 인간의 힘으로 도시를 만들고 큰 집을 짓고 아파트를 쌓아올리지만 사람과 사람지간에는 철근 콩크리트에 가로 막혀서 대화가 없어지고 인정은 메말라만 가는것이 어떻게 자연과 어울려 사는것이겠는가.   집은 넓어졌어도 감정은 멀어지고 돈은 많이 벌렸어도 인정은 말라가고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휴대폰으로 통신이 쉬워졌어도 오히려 교감이 없어졌다면 우리는 발전하고 있는것이 아니라 퇴화하고 있는것이리라. 문명이라는 미명하래 인간은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는것일지도 모른지 않는가.   칼이란 살인자가 들면 흉기가 되고 주방장이 들면 멋진 요리를 만드는 도구로 되는것인데 우리 교육도 어쩌면 미래의 우리 사회를 밝게 만들어가는 훌륭한 교육이 될수 있을가 하고 오래도록 고민해보았다.   요즘은 흐리터분한 날씨때문에 봄을 맞은 기분보다도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다. 겨울한때보다도 오히려 더 스산하다. 이런 날씨에는 아파트 보다는 어릴때 살던 재래식 온돌이 더욱 그립다. 추우면 군불만 지피면 방안에 화기가 돌고 우리 가족들은 작은 방에 가득 모여서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었다. 그때가 문뜩 너무 그리워 난다.
12    스승의 역할 댓글:  조회:3077  추천:0  2015-03-13
  토요일 오전에는 아이들을 영어학원에 보낸다. 토요일은 휴일이라고는 하지만 요즘 아이들에게는 휴일이 없다. 그런 아이들과 함께 하는 부모들에게도 휴일은 없는듯 하다. 아이들은 여름방학 내내 쉬지못하고 각종 써클을 다녀야 한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시절에는 그렇게 공부가 바쁘지 않았는데 요즘 아이들은 정말 대학생들보다도 더 바쁘다. 오전에는 영어써클을 하고 오후에는 태권도 써클 다닌다. 공부를 하는것은 좋으나 자라나는 어린아이들의 심신건강에는 휴식과 놀이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다행히 아이들이 태권도나, 미술 등 써클은 취미로 즐기는듯 해서 조금이나마 안심할수 있었다.   영어학원의 영어강사는 캐나다에서 온 원어민이라고 한다. 아이들이 비록 비싼 학비를 내고 다니고 있지만 좋은 선생님한테서 외국어를 잘 배워낼수만 있다면 부모로서는 그만한 즐거움도 없을것이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은 어쩐 영문인지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이나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 학비를 내고 학비를 받는 단순한 고용과 피고용의 관계인듯, 적나라한 금전적인 관계처럼 냉정한듯하다.   내가 학교다닐때까지만해도 선생님은 존경의 대상이였고 선망의 대상이였다. 그런데 요즘들어 점점 선생님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지고 존경과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옛날에는 선생님을 사부라고 불렀다. “사”(師)와 부(傅)가 합쳐져서 사부가 된다. 어떤 사람들은 사부의 부자를 아버지 부(父)자를 쓰기도 했다. 스승은 어버이와 같다는 뜻이 되겠다. 사부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존경받는 사람이여야 한다. 자신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사람이면 존경해야한다. 큰 일을 이루는 사람은 사부가 있다고 했다. 한 사람의 성취에 도움을 주는 사부는 캄캄한 밤중에 길 안내를 해주는 등불과도 같은 존재이다.   중국의 역사를 돌아봐도 알수 있듯이 진시황에게는 리사(李斯)가 스승으로, 모사로 있었고 한의 고조 유방에게는 장량(張良)이라는 군사가 참모로 되여 주었다. 또 송의 태조 조광(趙匡)은 조보(趙普)가 보좌해서 마침내 나라를 세웠고 명의 태조 주원장(朱元璋)에게는 유기(劉基)라는 명보자관이 함께 해주었다. 우두머리로 되고자하는 사람은 이런 군사나 보좌역을 잘 찾아야 한다는것을 단편적으로 말해준다.   옛날 순자(荀子)는 國將興,必貴師而重傅라고 했다. 즉 장차 나라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스승을 귀히 여기고 중히써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창업을 하고 사업을 함에 있어서 자신의 능력도 최대한 발휘해야 하겠지만 주변의 힘이 되여주고 길을 가르켜주는 사람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것이 기본이다. 그래야만 비로서 더 큰 성공을 거둘수 있고 바른 성취를 이룰수 있는것임을 말해주는것이다.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인 미식축구에서 우승팀이 단상에 올라 들어 올리는 우승컵이 있다. 그 우승컵의 이름은 ‘빈스 롬바르디 트로피’다. 빈스 롬바르디는 슈퍼볼이 처음 열렸던 1967년 부터 2년간 우승을 차지한 그린베이 페커스의 감독이었다. 사람들은 생전에 74퍼센트라는 경이적인 승률을 올렸던 그를 기르기 위해 우승 트로피에 그의 이름을 붙혔다. 빈스 롬바르디 감독은 선수들을 잘 다루는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하지만 빈스 롬바르디 감독의 팀 상황이 결코 좋지 않던 때도 있었다. 경기에서 지고 있었고 선수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특히 키가 큰 수비선수의 경우에는 수비를 할때마다 실수를 반복해 시합에서 뺄수 밖에 없었다. 룸바르디는 그를 교체시키고 라커룸으로 불러 호되게 질책했다. “너는 나약한 선수다. 상대편 선수를 막지도 않고, 맞붙는 게 두려워 슬슬 피하기만 했어. 네 모든 걸 바쳐 싸우지 않았단 말이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거라면 너의 선수 생활은 오늘로 끝난 것이다. 내 말 알아 듣겠나?” 장신 수비수는 호된 질책에 잔뜩 주눅이 들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빨리 들어가서 샤워나 해” 빈스 롬바르디 감독은 그에게 소리쳤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탈의실로 향했다. 경기가 끝나고 감독이 탈의실로 갔을 때 그는 여전히 운동복을 입고 사물함 앞에 앉아 고개를 떨구고 서럽게 울고 있었다. 이를 본 빈스 롬바르디 감독이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다독여 줬다. 그가 깜짝 놀라 쳐다보자 감독이 말했다. “이봐! 너는 나약한 선수다. 쿼터백을 제대로 보호해 주지 못했고 수비도 잘 안됐지, 공격 전개도 엉망이었어. 또한 혼신을 다해 싸울 생각도 하지 않았어.” 그의 말을 듣는 수비수는 계속 울고 만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 마음은 이렇게 말하는구나. 너는 마음에 공을 지닌 선수라고 말이야.” 감독의 말에 깜짝 놀란 선수는 그를 쳐다봤다. 감독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네 안에는 위대한 축구선수가 있어 그 공을 지닌 선수지. 아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군. 난 그 위대한 선수가 밖으로 튀어 나와 네가 위대한 선수라 불리는 걸 보고 싶어.” 그 수비수는 그의 말을 듣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빈스 롬바르디 감독의 그 말은 그 선수를 변화시켰다. 실제로 그는 나중에 프로 미식축구계의 독보적인 인물이 됐다. 그리고 프로 미식축구선수 중에서 최근 50년 동안 가장 뛰여난 수비수라 불리는 영광을 안았다. 그 선수를 일으킨것은 바로 빈스 롬바르디 감독의 조언이었다. 그는 선수들 속에 잠들어 있는 능력을 발휘할수 있도록 도왔고 그 결과 선수들은 세번이나 그에게 슈퍼볼 우승을 안겨 주었다. 성공한 사람들의 삶을 살펴보면 그들이 반드시 가지고 있는것 중의 하나가 바로 훌륭한 스승이다.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사람은 드물다. 스승이란 그들이 자기 이상을 실현하고 목표를 이룰수 있도록 끊임없이 도왔던 사람들이다. 당근도 있었지만 때론 채찍도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에게 길안내를 해주고 때로는 채찍으로 때로는 당근으로 우리의 미래를 열어준 그런 스승이 있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을 본보기로 우리는 한수 배운다. 상황에 맞는 질책과 칭찬으로 우리의 잘못을 찾게 하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스승이 있다. 나한테 부족한 면을 채워주는 사람이 있을수 있고 오랜 시간동안 축적된 경험과 노하우로 굽은 길을 가지않도록 길안내를 하는 스승이 있다. 꼭 대외적으로 존경받거나 신망이 두터워서만 스승이 되는것은 아니다. 내가 배울수 있고 나한테 가르침을 주었다면, 그리고 그로 인해서 내 인생에 긍정적인 변화가 왔다면 우리는 그러한 스승을 존경하고 따라야만 한다.   나한테 가르침을 주셨던 스승들을 생각해 보았다. 초등학교 시절 내 글쓰기 재능을 발견해주셨던 반주임 선생님이 문뜩 떠오른다. 나는 어릴적에 아주 개구장이 였다고 한다. 나절로는 잘 몰랐으나 하루에 한번씩 어머니가 학교에 불리워 갈 정도로 애먹이는 학생이였다. 학급을 재편성할때가 있었는데 어느 선생님도 나를 맡지 않겠다고 해서 어머니가 무척 속을 썩이셨다고 한다. 그런 나를 기꺼이 받아들인 선생님이 바로 문(文)선생님이시다. 우리 반 반주임으로 오실때에는 외지에서 오셔서 내가 얼마나 애꾼인줄 몰랐나본다. 그때 초등학교 4학년 때인데 내가 글쓰기에 재간이 있다면서 나를 학교 글쓰기 경연에 내보낸적이 있었다. 학교에서 소대장 한번 해보지 못하고 애만먹이던 나에게는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내가 학교에서 반항적이고 장난이 심한것은 자신을 표현하려는 욕구가 강한 것이였다고 생각된다. 그런 나의 내면의 욕구를 어떤 선생님도 미처 발견하지 못했을때 문선생님은 나의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면을 먼저 보아내고 그것을 발굴해주셨다. 나는 제일 처음 참가한 교내 글씨기 경연에서 일등을 하였고 그후부터는 거의 모든 글씨기 대회를 석권하다 싶이 하면서 초등학교를 졸업했었다. 그런데 그런 문선생님이 일년만 반주임을 하시고 도문의 어느 학교로 전근을 가신것이다. 그때 그 섭섭하던 마음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중에 초등학교를 졸업할때 학교을 위해 공헌을 가장 많이 한 학생을 뽑게 되였는데 나는 전국 글짓기 경연대회 금메달1개, 주내 일등상 십여개, 현과 학교내 일등상 수십개 합쳐서 가장 많은 상을 탄 학생이 되였다. 그런데 그때 우리 반을 맡은 반주임 선생님은 학교를 위해 상을 가장 많이 타온 나를 제쳐버리고 우리 반급에서 공부를 가장 잘했던 어느 여학생에게 그 상을 주었다. 더욱 심한것은 내가 전국 일등상을 받은 작문이 월요일 국기계양식에서 낭독을 하고 계양식을 올리기로 되였었는데 선생님은 내가 쓴 작문을 학급의 대대장을 맡고 있는 공부잘하는 다른 학생에게 읽히고 나는 국기만 올리라는것이다. 당연히 나는 내 자신이 쓴 글을 왜서 다른 사람을 읽히느냐고 항의했다. 그랬더니 국기계양식마저 취소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여기 저기서 상을 받아올때마다 국기계양식을 해왔기에 그것까지는 참을 수 있었으나 내가 조금도 존경할수 없는 선생님을 위해서 “나의 선생님”이라는 주제로 작문경연에 참가하라고 했을때 나는 그 당시의 반주임을 쓰지 않고 4학년때 반주임을 주제로 글을 써서 또다시 곤욕을 치렀던 적이 있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지만 그때 첫 서두는 이렇게 썼었다. “나의 4학년때 반주임 선생님은 참 훌륭한 분이시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습고 철없는 행동들이였던것 같지만 성장하는 아이들에게는 더욱 스승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반증이 될듯싶다.   우리 인생을 바꾸어주고 성공과 행복으로 이끄는데는 스승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한것이다. 내 초등학교 4학년때 그 반주임선생님을 한번 찾아뵙고 싶다. 자라나는 내 감성과 그후 전반 인생길에 큰 힘이 되여주신 분이시다. 아이들의 방학이 끝날즈음 도문에 가서 한번 수소문 해보야겠다. 그리고 꼭 문안 인사를 드려야 겠다. “그때 참 고마웠습니다”라고.
11    내 인생의 중심은 무엇일가? 댓글:  조회:2038  추천:0  2015-03-12
  음력설이 지나간지도 벌써 한달째 가까워온다. 21세기에 들어설때는 설레임도 참 많았다. 그러던것이 벌써 어느덧 20015년의 봄을 맞는다.   에치투오리더십 강의를 하면서 항상 시간의 무상함에 놀라군한다. 짧은 인생길이라는 생각에 언제나 가슴이 조여오지만 한편 짧은 인생길에 이것저것 두려워서 머뭇거려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봄을 가까이 해서인지 오늘따라 날씨가 화창하다. 새해를 맞이하는 이러한 날 이러한때 사람들은 새해를 꿈꾼다. 당연히 아름다운 내일의 비상을 꿈꾸어야 할것이다. 모름지기 사람으로서 꿈을 가지고 있다면 그 꿈을 위하여 한번 도전해봐야 할것이다. 그러나 꿈을 꾸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아리숭할때가 많다. 비젼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으나 그것이 진정 자신이 원하는것이고 필요한것인지를 알기 또한 쉽지 않다. 그것은 남을 알기는 쉬워도 진정 자기 자신을 알기가 더 어렵기 때문이리라.   사람들은 자기를 알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언제나 자기를 돌이켜보고 미래를 예지할수 있도록 자기 내면을 들여다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동양철학에는 이미 수천년전에 벌써 인생과 자기 내면 세계를 들여다보고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 생각한 철학자들이 많았다. 솔직히 내가 이러한 글을 쓸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글을 쓰면서 수십번도 더 든다. 그것은 이미 수천년전에 우리의 선조들은 우리의 인생 성공에 대한 저서를 수도 없이 냈기 때문이다. 그 책들을 현대판으로 새롭게 분류하여 이런저런 인생성공학에 관한 책을 만든다면 아마 수천권도 만들어 낼수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오늘날 새삼스레 철학자가 될 이유는 없다. 철학자라는 것은 어느 사람이 말한것처럼 이 시대에서는 성인이 아니면 미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현실적인 사람을 더 많이 만들고자 함이다. 그러자면 유심론적인 철학보다는 성패득실 (成敗得失) 만이 진정한 것이라고 굳게 믿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말하는 현대판 성공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부단히 자기한테 질문 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중국 고대 철학자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어찌하면 좋은가. 어찌하면 좋은가 하고 스스로 물어보지 않는 사람은 나 역시 이러한 사람을 어떻게도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공자의 말 가운데서는 정말로 찾기 어려운 해학적인 표현이라고도 하겠다. 모든 동서양의 철학자들의 생각은 저마다 다르지만 그런 만큼 또한 일치되는 점도 많다. 즉 인간은 현명해야만 하며 유쾌한 생활을 보내기를 망설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맹자의 생각은 비교적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것 처럼 보이고 노자의 생각은 고요한 평화주의로 보이지만 두 사람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이 두사람의 사상은 서로 결합되여 이른바 중용의 철학속에 하나로 융합되고 만것이다. 자사(子思)의 중용철학을 한마디로 개괄해보면 바로 자기 중심을 가지는것이다.   중용은 비뚤어짐이 아닌 위도 아니고 아래도 아닌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요 앞도 아니고 뒤도 아닌 바로 중심이다. 하늘과 땅사이에서 자기 중심을 찾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자사의 중용철학에서는 그 방법을 가르쳤다.   요즘에는 바쁜 일상 중에서도 명상의 시간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정말 다행이다. 명상의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재 충전 시간이다. 우리는 조용히 앉아서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이 질문이 이번 장절의 중심이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해 본다.   중국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옛날 건륭 황제(乾隆皇帝)가 중국의 강남으로 여행을 하여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올라가 많은 돛단배가 부지런히 지나해(支那海)를 오가는 것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황제는 곁에 있는 신하들에게 저 몇 백척의 배 속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때 한 신하가 대답하여 이르기를 “저에게는 두척의 배가 보일 따름이옵니다. 배의 이름은 명성(名聲)과 부귀(富貴)라고 하옵니다.”라고 하였다고한다. 이 세상에서 부귀와 명성을 뿌리칠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은 역시 성인 아니면 바보다. 부의 유혹은 그런대로 뿌리칠수 있으나 명성에 대한 유혹을 뿌리친다는 것은 매우 위대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다.   옛날 어떤 스님이 세속적인 번뇌의 두개의 원천에 대하여 그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명성을 얻고 싶은 욕망을 버리기 보다는 금전을 얻고싶은 욕망을 버리기가 보다 쉬운것이다. 조용히 물러나 있는 학자나 스님조차도 여전히 자기네 동료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이름을 떨치기를 원하는 것이다. 많은 청중이 있는 공적인 자리에서 설교를 하고 싶어하며, 너와 나와 단둘이 있는… 스승도 하나 제자도 하나인 이런 작은 절에서 숨어 살려는 생각을 하지 않은 법이다.” 그러자 제자가 대답했다. “스님, 정말 그 말씀이 맞습니다. 스님이야말로 명성을 얻으려는 욕망을 이겨내신 오직 유일한 분이십니다.”그러자 그 스님은 빙그레 웃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부귀와 명성에 대한 추구는 우리 사회의 곳곳에 뿌리내렸다.현실적인 의미에서 볼 때 인간이 부귀와 명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경쟁이 생기고 또 사회의 발전이 따르는 것이다. 그 옛날 봉건군주사회에서 부귀와 명성이 인간의 주요한 추구 목표였다면 현대 민주화사회에서는 권력에 대한 추구 또한 강력하다. 지금 내가 어느 나라 대통령을 모시고 중국의 상해항구나 한국의 부산항, 인천항에 갔을 때 대통령이 나한테 묻는다고 치자 “저기 분주히 오고 가는 수천 척의 배속의 사람들은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요?”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 할 것 이다. “저의 눈에는 세척의 배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권력과 부귀와 명성이라는 배입니다.” 해학적으로 들리겟지만 우선 우리 내면에 있는 욕망을 먼저 찾아 보는것이 좋을것이다. 욕망이 없으면 사람은 진보하지 못한다. 우리는 아주 현실적으로 내면의 자기를 둘러볼 필요가 있다. 옛날 사람들이 말하는 부귀와 명성이나 현대인이 쫒아 다니는 부귀와 명성과 권력을 우리는 한마디로 개괄할 수가 있다. 바로 성공이라는 단어이다. 총적으로 우리는 성공을 위하여 분주히 돌아다니고 우리가 참가했던 많은 세미나와 특강 모두 우리를 성공 시키기 위한 전주곡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공하기 위해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자기 내면에 있는 권력욕과 부귀와 명성에 대한 추구를 적나라하게 드러낼 필요가 있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부귀인지 권력인지 아니면 명성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세가지 다 가지고 싶다고 생각해도 좋다. 우리가 원하고 얻으려고만 한다면 우리는 얻을 수가 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성공을 초개같이 버리는 능력을 심어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글을 읽고있는 당신이 무엇인가를 강력히 원하기만 한다면 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얻을수 있을것이다.   겸손하고 열린 마음이 있어야만 하고 사색할수 있는 이성이 있어야 하고 바램 그리고 삶 가운데서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로 볼 수 있는 것도 능력이기 대문이다.   내가 나를 과연 가장 잘 아는가? 내 안에서 요구하는 욕구가 부귀이냐 권리이냐 명성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가의 문제일 뿐이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고 또 그것을 위하여 최선을 다 한다면 당신은 분명히 성공 할 것이다.   새해 벽두에 모두들 꿈을 꾼다. 꿈을 꾸는데 돈이 드는것도 아니다. 꿈을 꾸고 다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한낮 개꿈일 뿐이다. 그러나 그 꿈을 현실화 시키기위해 노력하는 신념어린 행동이 따를때 비로서 인생은 아름다워진다.   사무실 난방이 너무 무더워 창문을 여니 시원한 바람과 함께 멀리 어디에선가 음악소리가 들려온다. 아름다운 리듬에 맞추어 오늘도 멋진 춤을 추어야 겠다.
10    매화향이 가득한 술잔 댓글:  조회:2145  추천:0  2015-03-10
  을미년 정월 대보름이 왔습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계획은 크고 꿈도 가득합니다. 그러나 일년을 바삐 돌아다니다 뒤돌아 보면 정말 해놓은 일이 없어 안타깝고 답답하군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가족을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많은 일들을 하려고 젊은 꿈을 키웠습니다. 꿈은 크고 갈길은 먼데 마음이 참 급했나 봅니다.   에치투오 리더십 강의를 진행하면서 정말 정신없이 달려왔습니다. 뒤돌아 보니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스물아홉에 시작한 강의가 이제는 10년철에 들어서는군요. 연인수로 만명의 수강생을 배출했습니다. 처음에는 취미로 시작한다고 시작한 일이 본업처럼 자리잡히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꾸진히 발전되여 왔습니다. 모임도 다양하게 발전하고 조직도 점점 커졌습니다. 청년실업인 연합회 회장을 맡은지도 꽤 되였지만 에치투오 모임은 어쩐지 그쪽보다도 오히려 더 활동이 활발이 진행되고 발전되여 왔습니다. 공동된 목표와 정신적인 힘이 작용이 되였었나봅니다. 그러다가 가끔씩 일이 뒤틀리기도 했습니다. 조직이 커지니 사람수도 많아지고 그에 따른 구설수 또한 많았습니다. 그동안 보수도 따지지 않고 욕심없이 진행되여온 코스였는데 뒤에서 헐뜯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조직원들중에서 조직체계를 이용해서 사업을 해보겠다는 건의가 나왔고 오래동안 함께 해온 사람들의 바램을 물리칠수도 없었습니다.   참 이제는 다 지난 이야기여서 웃고 넘어가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작은 이익을 위해서 욕설과 비방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큰 비젼과 조직마저도 서슴없이 쓰러뜨리는 몇몇 사람들때문에 그때는 많이 힘들었었습니다. 다행스러운것은 변함없이 옆에서 지지하고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지탱해오고 이겨낼수 있었습니다.   이름은 일일이 거론안하겠지만 진심어린 마음으로 그분들께 고맙고 감사합니다. 본업에 매진해서 반년넘게 일하고 보니 사업은 다시 궤도에 들어서고 안정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쩐지 마음 한구석은 허전하기만 합니다. 못을 빼도 못자리가 남듯이 상처난 자국이 아직도 메어지지 않았나봅니다. 그래서 오래동안 강의를 시작하지 못했습니다.   어제는 에치투오를 수료하신 김형욱 사장님께서 보름을 맞아 대게 한박스 보내오셨습니다. 그러시면서 해주시는 말씀에 큰 힘을 얻었습니다. “회장님, 힘을 내셔야 합니다. 에치투오같은 비영리 코스를 운영하시면서 고생많으신걸 다 압니다. 옆에서 헐뜯고 욕하는 사람들도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담그겠습니까. 지금 힘을 놓으시면 않됩니다. 강의 꼭 다시 시작해주십시오. 그때면 제 직원들부터 전부 보내겠습니다. ” 그렇게 안부전화가 오고 새해 인사를 찾아오는 사람들때문에 다시 용기를 찾게 되였습니다.   밤 하늘을 쳐다보니 보름을 맞아 휘영청 밝은 달이 겨울의 추위를 걷우는군요. 저 보름달은 둥글었다 이지러졌다를 반복하지만 언제나 저 위에서 빛을 뿌립니다.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라는 생각을 해온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이제는 바램도 보답도 바라지 않고 흐르는 저 강물처럼 그냥 순수하고 자연스럽게 살아야겠습니다. 좋은 안주에 혼자서 술을 마실수 없어 시골에 있는 별장에 친구를 불러 술 한잔 기울였습니다. 지난해 정월 대보름에는 큰 눈이 내리더니 금년에는 달이 밝아서 좋았습니다. 달을 벗삼아 술잔을 기울이는데 창가에 심은 매화 나무가 추위를 잊은듯 꽃봉우리를 맺는군요. 술잔에 어느덧 매화향이 가득합니다. 이 역시 아름다운 인생이 아닐까요.^-^
9    내 안의 음악 댓글:  조회:2107  추천:0  2015-03-10
  소귀에 경읽기라는 말이 있다. 중국 속담으로는 소귀에 금(현악기 일종)을 탄다고 한다. 즉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아둔한 사람을 비유해서 하는 소리다. 그러나 요즘 과학자들은 젖소에게 음악을 들려준 결과 젖소의 산유량이 대폭 증가했다는 연구 결과를 제시했다. 지어는 농민들이 채소를 키우면서 음악을 들려준 결과 채소의 숙성과 크기가 훨씬 월등했다는 연구결과도 나왔다. 식물이 음악을 듣고 있고 젖소도 음악을 이해한다는 뜻이 되겠다. 그러한 의미에서 보면 나도 완전한 음치는 아닌가 싶다. 그래도 음악 애호가 정도는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 일요일날 창고를 정리할 일이 있어서 일을 하다가 옛날 레코드기와 레코드판을 찾아냈다. 내가 아주 어릴때 아버지가 상해에 출장다녀오시면서 사오신걸로 기억나는데 그후 록음기와 CD등이 유행하면서 창고에 틀어박혔던 것들이였다. 레코드 기계를 잘 닦아서 전기를 이으니 그대로 잘 돌아갔다. 일하면서 음악을 듣는것도 괜찮을듯 싶어서 레코드판을 찾아보니 베토벤의 교향곡이 있었다. 그런데 웃음이 나는것은 지금은 CD 한장이면 다 될 음악을 14장이나 되는 레코드판에 나누어 담은것이다. 레코드판의 용량이 적은 탓이리라.   음악을 들으면서 일을 하려니 오히려 일손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또한 레코드판이 다 돌아가서 음악이 끊기면 다시 달려가서 바꾸어주어야 하는 번거로움에 또한 귀찮아지기도 한다. 그래도 교향곡이 긴 탓에 레코드판 14개를 다 듣기 전에 일손이 끝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교향곡을 들으면서 일을 한다는것은 아닌듯 싶었다. 이렇듯 우아한 음악을 그냥 일하면서 듣는다는것은 청각을 낭비하는게 아닌가 싶기도하다. 일할때는 요즘 유행하는 댄스곡이나 정신못차리게 하는 재즈같은 음악들이 더 어울리지 않을가 싶다. 음악의 율동에 리듬을 맞추어 일손을 놀린다면 훨씬 빨리 끝날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은 어떤 폭발적인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음악을 만들어내는 작곡가들은 그러한 폭발적인 영감이 없으면 아름다운 음악, 감동적인 음악을 만들수 없으리라. 어릴때 글쓰기를 배우면서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떠오른다. 고 말씀하셨다. 자연이나 우리 주변의 모든 사물을 민감한 감수성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에 공감을 일으키고 그러한 공감을 바탕으로 씌여진 글이라야 읽는 사람의 마음도 동요시킬수 있다는 뜻이 되겠다.   잘된 음악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 음악이 사람들의 마음에 공명과 감동을 오래동안 주고 여운을 남기는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유행가는 처음에는 재미있게 듣다가도 얼마안있으면 바로 시들해져버린다. 유행을 따른 공감이라서 그만큼 공감의 힘이 작나본다. 그 이유는 유행곡을 만드는 작곡가들은 음악을 만든다기보다는 음악을 생계와 금전으로 연결짓고 있기에 냉정하고 타산적이다. 그런 작곡가들한테서 남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음악을 기대한다는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그러나 세계명곡들을 듣다보면 그것이 얼마나 오랜 세월이 지났더라도 마음은 그 음악의 세계에 빠져든다.   예술가에 국한되는것은 아닐것이다. 어떤 직업일지라도 자신이 만든 제품, 파는 상품에 대해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기쁨을 줄수 있는 훌륭한 것이라는 감동이 먼저 있지 않으면 안된다. 최종 수혜자의 행복과 만족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진정 다른 사람에게 오래동안 여운을 남기고 감동을 줄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수 있을 것이다. 고 밀레는 말했다. 참으로 깊이있는 말이다.    옛날것이였지만 레코드기와 LP판을 잃지 않고 다시 찾아내고보니 기분이 여간 상쾌하지 않다. 돌아오는 길에 저도 몰래 콧노래가 나온다. 그런데 의외로 입속에서 흥얼대는 곡조가 세계명곡이 아니고 고등학교때 친구들과 함께 부르던 그 시절 유행곡이였다. 맘속으로 의아했지만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면서 운전을 했다. 문뜩 고등학교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다. 세월을 거슬러 고등학교때 친구들과 어깨 동무하면서 함께 부르던 노래가 저도 몰래 흘러 나온다. 옆자리 앉았던 철이, 공부잘하던 쌍가매, 싸움대장 돌이의 모습이 그냥 스쳐지나간다.   음악이 있음으로 우리의 삶이 윤택이 나고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는게 아닐까 싶다. 유행곡은 또 그러한 역할을 하나본다.
8    갈증 댓글:  조회:1866  추천:0  2015-03-07
   방송국의 정기자한테서 연락이 왔다. 채방을 하겠다는것이다. 청소년 관련문제에 대한 녹음이 있으니 시간을 내달라는 것이다. 정기자와의 인연은 몇년전 내가 진행하는 리더십강의인 에치투오 강의부터였다. 에치투오 리더십강의를 듣고나서 더 열정적으로 살게 되였다면서 가끔씩 찾아와서 차 한잔 하면서 한담도 나누곤 했었는데 그렇게 된 인연으로 나의 방송국 출입이 오히려 잦아졌다. 거의 2년넘게 정기자에게 붙들려 매주 한번씩 창업관련 생방송에 나가야 했던것이 작년까지 일이다. 그러다가 사업이 너무 바쁘고 출장이 잦은 관계로 금년에 들어와서는 그냥 한달에 한두번꼴로 방송에 나간다. 간단한 녹음을 마치고나서 다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았다. 우리 지역의 청소년문제에 대한 취재였는데 그 이야기로부터 나온 주제였다.   내가 연변의 현재 청소년들은 가장 불행한 시기에 태여난 한세대라고 말했더니 정편집(PD)도 그 점에 동의했다. 중국의 개혁개방과 한국과의 수교로 인한, 물질을 위한 조선족의 대 이동으로 말미암아 엄청나게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버리고 외화벌이에 나섰다. 그런 그 한세대의 어린이들이 벌써 이제는 청소년으로 자라났다. 일부는 청년줄에 들어섰다. 부모의 사랑한번, 따뜻한 품에 한번 안겨보지 못하고 자란 고아가 아닌 고아들인것이다. 미국의 경제붕괴로 말미암은 전세계적인 경제공황이 중국의 각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때 방황하는 이 세대, 이 지역의 청소년들을 위해서 일주일에 한번씩이라도 시간을 내서 무료봉사 방송을 해달라는 요청이였다. 그럴때 보면 정편집은 참으로 마음이 따뜻한 분이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물론 방송의 필요로 그럴수도 있겠지만 이야기 나누는 과정에서 항상 지역사회를 걱정하고 조선족 사회의 청소년들을 걱정하는 그 마음을 읽을수 있어서 자못 흐뭇했다. 이제는 서로 친해져서 무람없는 사이라 그렇게 부탁을 하겠지만 나한테는 큰 부담이 되는 선택이다. 선뜻 대답을 못하고 돌려보냈지만 하루종일 그 부탁이 떠올라서 마음이 편치않았다.   내 성격상 어떤일을 맡게 되면 잘 하든 못하든 최선을 다하는 성격이다. 그래서 더 걱정이 크다. 요즘은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속에서 우리 회사도 편하지만은 않다. 여러가지로 신경 쓸 일들이 한두가지 아니여서 방송에나가 생방송으로 계속 상담을 해줄만한 여유가 있을까 고민을 하게 되는것이다. 나는 겨울도 무척 좋아한다. 풍요로운 가을을 거쳐 겨울에는 나눔과 여유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은 벌써 겨울을 거쳐 새해 봄이지만 봄같지가 않다. 외국에서 일하여 외화를 벌어들이는 사람들은 환율이 떨어져서 힘들어한다.   자식들을 버리고 먼먼 외국땅에 가서 돈이라도 많이 벌었으면 그나마 좋겠는데 그것마저 안되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옛날 책 “대학”(大學)에는 이런 말이 있다. 이라는 말이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이다. 그 뒤를 계속 보면 이런말이 잇는다. 로 돼있다. 문뜩 머리속에 대학의 이 구절이 떠오른데는 이유가 있을듯 싶어서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많은 재산이 있으면 그 집의 모양을 훌륭하게 꾸밀수 있다. 덕을 갖추고 있으면 안으로 살펴 꺼림직한 곳이 없게 되어 마음은 언제나 넓어지고 몸도 편안하여 안정된 태도가 된다. 따라서 군자는 언제나 성의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성의있는 사람이란 자신을 속이지 않는 사람이다. 사람은 남을 속일수 있을지라도 자신을 속일수는 없다. 자신의 본심을 속이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뜻을 진실로 하는 길이며 자기를 닦는 첫걸음인것이다.    내가 비록 조금은 어렵고 힘들지만 아직 할수 있다면 적극 남을 돕은 일에 나서야 한다는 나자신에게 주는 대답이나 다름없다. 내 맘속에는 두가지가 싸우고 있다. 사업을 해서 돈을 벌어 내 집과 내 가정을 윤택나게 하는것과, 좀은 어렵더라도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을 위해서 시간과 돈과 열정을 쏟아부을것인가와의 충돌이다.   하늘을 우러러 보니 보름달이 어느새 환히 빛난다. 주위에 작은 별들도 차겁게 빛을 뿌리고 있다. 별없는 밤보다 별있는 밤이 항상 사람들에게 더 안전감을 준다. 그것은 별 있는 밤에는 희망의 빛을 볼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희망의 끈을 놓지말라고 청소년들에게 가르치고 싶다. 이제 누가 우리의 청소년들에게 그 별빛이 되여주고 달빛이 되여 줄것인가? 그이들에게 자그마한 희망이라도 심어줄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지 않을까?   조선족사회는 아직도 이성을 찾지 못했다. 많은 지식인과 학자들이 대성질호 하고 있지만 강력한 물질의 충격하에 이성을 찾기에는 시간이 필요할듯 싶다. 그러나 이미 부모들이 곁에 없는 상황에서 자라난 청소년들은 PC방과 게임방, 그리고 도박과 마약등에 절어들고 있다. 날로 늘어나는 청소년 범죄가 우리를 당혹하게 하고 있다.   자녀를 두고 멀리 떠난 부모들은 언제인가는 후회를 하게 될것이다. 우리 학원에 다니는 한 초등학생 처녀애는 어머니가 금방 외국으로 돈벌러 갔다고 한다. 그 애는 어머니 말만 나오면 눈물을 펑펑 쏟는다. 그런데 이제는 중학교 3학년이 된 한 남학생은 부모님 둘다 외국에 나간지 7년이 된단다. 이제는 부모에 대해서 물어봐도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다. 부모님들이 용돈을 잘 보내고 이제는 제법 크고보니 부모님의 관섭이 없이 자유롭고 편하니 그만한것이 없는듯 싶은것이다. 지난번 언젠가 그애의 부모가 전화가 와서 받는것을 옆에서 우연히 듣게 되였던적 있다. 한국에서 불법체류를 하다나니 오래동안 자식을 보지못해서 많이 보고 싶었나본다. 그래서 전화를 했나 싶었다. 한국에서 이번에 고용허가제도가 나와서 중국에 들어가겠다고 했더니 그 애가 하는말이 걸작이다. “지금 중국도 물가 올라서 먹구살기 바쁩니다. 오느라 하지 말고 거기서 몇년 더 버세요.” 라는것이다. 아직 어린애라 깊이 생각없이 한 순진한 말이지만 우리에게 경종을 주는 말이다. 부모에 대한 보고싶은 마음이나 정은 없고 이제는 금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메시지인것이다.   옛날 ‘고려장’이야기를 모두 다 잘 알고 있을것이다. 늙은 부모를 버리는 나쁜 풍속을 가지고 있었던 고려시절에 늙은 부모를 버리러 지게에 메고 갔던 아버지가 낡은 지게를 버리고 돌아오는데 뒤따라갔던 어린 아들이 그 지게를 메고 돌아오니 그 지게를 버리지 그러느냐 했더니 아이가 하는말 “이제 아버지가 늙으면 이 지게로 버려야지 않겠어요.” 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아버지가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늙은 부모를 지게로 집으로 모셔와서 잘 모셨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 현대 조선족 사회에는 그와 다른듯하지만 비슷한 사연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돈을 위하여 자식을 버리고 외국에 가서 돈을 벌어오지만 더 이상 자식과의 깊은 정과 사랑의 관계는 없다. 돈을 가득 벌어온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몇십년전까지만 해도 조선족은 중국사회에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던 민족이였다. 그만큼 전반적인 어려운 경제환경속에서도 자식농사에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말 속담에 소팔아서 자식 공부시킨다는 말이 있는데 우리의 옛날 어르신들은 소팔고 집팔아서라도 자식 공부를 시켰다. 그만큼 자식들의 교육에 힘을 쏟은것이다. 그래서 다른 민족들에게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되였었다.   가정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작은 사회조직이지만 그 작은 사회조직이 전반적으로 붕괴되면 전반 사회가 죽어가는 것이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자식농사를 망치면 인생농사를 망치는것이나 다름없다. 단순한 유교적인 사상에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식덕에 살겠냐고 하지만 잘못된 후대때문에 나머지 인생내내 후회하고 걱정하고 두려움에 떨면서 산다면 어찌 성공된 인생을 운운할수 있을것인가. 진정 우리 아이들이 필요한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줄수 있는것이 부모의 역할이 아니겠는가. 브라이언 트레이시라는 미국의 학자는 이런 말을 한적있다. 라고 했다. 양육한다는 사육한다는 말과는 다르다. 먹을 음식이나 던져주고 키우는 동물과는 다르다는 말이다. 집에서 키우는 애완동물에게 조차 우리는 애정을 가지고 돌보아주는 정신이 필요함을 알고 있다. 하물며 우리의 어린 아이들에게 얼마나 부모의 사랑과 애정어린 가슴이 필요할까?! 조선족부모님들이 찾아야 하는 이성이 여기에 있는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하지 그 이상 필요한것이 없다. 사랑과 관심이 자부심을 만들어 주는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부모님들은 아직도 사랑에 목마른 아이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너 배고프지? 아빠 엄마가 외국에 가서 돈 많이 벌어 나중에 맛있는 빵 가득 사줄께.” 사랑에 목마른 사람에게 물질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목마른 사람에게 빵을 주는것 만큼 잔인한 행동이 어디 있을까? 지금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지 않나 반성해볼 필요가 있는것이다. 글을 쓰다가 보니 내 마음은 그래도 이 지역과 이 민족과 이 사회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음을 느낄수 있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가정을 사랑할줄 모른다고 한다. 사랑을 가지지 못한 자가 사랑을 줄수도 없다는 말이다. 가정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민족을 사랑할수 있겠는가? 민족을 사랑할줄 모르는 사람이 어찌 국가를 생각할수 있겠는가? 자신앞에 주어진 책임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최선을 다해서 할때 비로서 복과 덕이 겹치는것이다.   내일은 아침일찍 정기자에게 전화를 넣어야 겠다. 누군가가 해야하고 언젠가는 해야할 일이라면 미루지 말아야지. 내 작은 사랑이 목말라 헤매는 저 길거리와, PC방과, 오락실을 전전(轉戰)하는 청소년들에게 조금이라도 갈증을 풀어줄수 있다면 내가 빵을 좀 적게 먹는다 한들 뭐가 대수겠는가!
7    미워하지 말아야 하는 리유 댓글:  조회:2172  추천:0  2015-03-06
  미워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미워지는 사람이 있다. 이제는 정말 미워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또 미워질때는 아직도 내 마음의 수련이 부족함을 깊이 느낄때다. 우리는 바로 곁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미워지는데 부처님은 어떻게 중생을 다 사랑하실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누구는 내돈을 꾸고서도 갚지 않아서 밉고, 누구는 나를 뒤에서 욕을 해서 밉고, 누구는 너무 잘난체 해서 밉고, 누구는 그냥 주는것없이 밉기만 하다. 그렇게 사람의 마음이 요상하다.   오늘은 바쁜하루였는데 그 와중에서도 내 강의를 듣고 상담을 해온 에치투오리더십 코스 수강생한분을 만났다. 수강생이라고는 하지만 나이는 나보다 한참이나 이상인데 참다참다 그래도 나한테 털어놓고 싶어서 무작정 찾아왔다고 했다. 그분의 말로는 안해가 한국에 돈벌러 간다고 갔는데 8년이 넘게 한번도 오지 않고 연락하면 전화도 받지 않는다고 한다. 몸이 멀어졌으니 마음도 멀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래도 그분은 실날같은 희망을 안고 있었다. 아직 어린 딸애의 면목을 봐서라도 한번쯤은 찾아오리라고 생각하고 있는것이다. 그녀의 친정쪽으로는 가끔씩 연락온다고는 하지만 집에는 연락한번 없단다. 심지어는 친딸에게마저 전화한통 없다고 하니 참으로 모진 여자구나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분의 하소연을 한시간 넘게 듣고 있는데 그분의 딸애한테서 전화가 왔다. 학교공부가 끝났다고 알리는 것이다. 열살이 갓넘긴 딸애걱정에 부랴부랴 자리를 차고 일어나는 그분의 뒤모습을 보면서 그분 마음속에 가득찬 원망과 사랑으로 인한 미움을 읽을수 있었다.   순간 ‘사랑은 본래 미움의 시작’이다는 말이 떠올랐다. 무슨 유행가 가사 같지만, 사실은 지금부터 2천여년전에 정리된 “管子”라는 책에서 나오는 말이다. ‘관자’는 “爱者憎之始也,德者怨之本也” 라는 말을했다. 우리말로 풀어보면 “사랑은 미움의 시작이고 덕은 원망의 근본이다.”는 말이 된다. 예나 지금이나 오랜세월의 바램속에서도 변하지않는 인간관계의 진수라고 할수 있는 말이다. 이 말의 깊은 뜻은 그 내면을 파헤쳐 봐야알수 있다. 왜서 사랑은 미움의 시작이되고 덕은 원망의 근본이 되는것일까? ‘관자’에는 그 대답이 나와있다. 바로 사람들의 보답을 기대하는 마음때문이라고 한다. 즉 욕심이 얽혀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부모가 자식에 대한 애정이다. 처음에는 순수한 애정에서 출발해도, 점점 자식에 대한 부모의 기대는 커지고 거기에 반항하는 아이들과의 세대차이를 느끼면서 부모와 자식은 갈등을 빚어낸다. 모처럼의 애정도 미움으로 변할때가 있다. 덕에 있어서도 그렇다. 원래는 자신을 위한것이라고 한다. 그것을 착각하면 그 또한 원망의 근본이 될수 있기때문이다. ‘관자’는 이 말을 한후 ‘다만 현자는 그러하지 아니한다’라는 말로 마무리 지었다.  즉 현자라면 뭔가를 바라는 사랑을 하거나 보답을 바라는 덕행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된다. ‘관자’가 말하는 현자는 현명한 사람을 가르킨다. 현명해진다는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마음을 비울수 있고 스스로 밝힐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사랑에는 여러가지 형태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가장 이기심이 없는 사랑이다.’는데는 이견(异见)이 없을것이다.   언젠가 ‘유대인들의 교육법’이라는 책을 보다가 기억남은 말이 있었는데 이런 말이 있다. ‘신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는것이 아니다. 그래서 신은 어머니를 만들었다.’라는 말이다. 어머니의 사심없는 사랑을 표현한 훌륭한 말인듯 싶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것에는 그것을 소유하고 싶은 욕심이 따른다. 가지고 싶은 마음이 욕심을 일으키는것이다. 그 욕심이 깊어진 경계를 사랑이란 말로 우리는 표현한다. 사랑은 보답을 바라지 않는 무상(无偿)의 것일수록 나누는 사람의 마음에 스며들어 생명의 힘이 된다. 나는 오히려 불쌍한 사람은 남편과 아이를 버리고 떠난 그 여자라고 생각했다. 부모로서 어찌 자식이 보고 싶지 않을것인가? 어떤 이유에서든지 혼자만 행복해지려고 애써서는 행복해지지 않는것이 삶임을 언젠가는 깨칠날이 있을것이다. 그때는 땅을 치며 후회해도 소용없는 짓이 되고 말것이기때문이다.   내 주변에는 부부가 갈라져서 십수년을 사는 사람들이 참 많다. 외화벌이 나가서 돈을 많이 가져와서 집사고 차사고 떵떵거리며 살려고 하지만 인생의 아름다운 세월은 그렇게 돈에 쫒겨 살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오래 살아봐야 백년이라고 하는데 부부가 결혼해서 아름다운 십년,이십년을 갈라져서 살고, 아이들은 태어나서 얼굴보고 나서는 십년에 한번씩 안아보는 정도라면 정도 없고 교감도 없다. 돈만 벌어서 준다는것은 자녀를 양육하는것이 아니라 사육하는것이다.   여기저기 초청받아 우리 조선족의 현재 삶에 대해서 강의를 해오면서 가끔씩 해온 말이있어서 여기에 옮겨 적어본다.   옛날 우리는 남녀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할때 사랑한다는 말보다는 정분이 났다고 표현했다. 우리 민족은 다분히 정을 가진 민족이다. 중국글로 씌여진 정(情)자를 보면 왼편에 심자변을 세워놓았다. 그 오른쪽을 보면 푸를 청자가 있다. 즉 바른 마음이 서있어야 항상 푸를수 있다는 뜻이 되겠다. 다시 청자를 아래위로 뜯어보면 주(主)와 월(月)자로 나누어 볼수 있다. 바른 마음을 가지고 정을 유지하여 서로의 정분을 푸르게 가꾸려면 적어도 한달에 한번씩은 만남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 된다. 스스로 해학적인 풀이를 해본것이지만 옛 사람들의 지혜에 다시 감탄할 따름이다. 사람은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서로 미워도하고 아껴도 주면서 부딛치고 엇갈리는 사이에 정이들고 친해지는것이다. 우리 민족의 리혼율이 요즘 높아지는것도 그때문이리라.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그것도 배우고 익혀야 한다. 미워하기보다는 사랑하는것이 낮다는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잘 하지 못한다. 그래서 인생을 통해서 우리는 배워가는것이다. 내가 개발하고 15년넘게 진행해온 에치투오리더십코스의 슬로건이 “원망보다는 감사하고 미움보다는 사랑하라.”인데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강사가 오히려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으니 반성해야할 일이다. 불혹의 나이에 가까워지면서 요즘은 부쩍 민감해졌다.  불혹이라는 말뜻대로라면 (공자같으면) 의문이 없어질 나이인데 나는 오히려 의문이 더욱 많아지기만 한다. 남을 사랑하는 마음을 배우기 전에 나자신이라도 충분히 사랑할줄 알아야 할듯싶다. 때로는 누군가를 위한다는 마음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는 마음에, 자신을 혹사해서 일에만 매진할때가 있다. 비즈니스를 할 때에는 몸을 버려가면서 술을 마시기도 한다. 그래서 뭔가를 해줬는데 받은 사람들이 몰라주면 서운함과 함께 아쉬움이 깃든다. 그래서는 행복해 질수 없다. 정말 우리는 행복을 원하면서 행복을 찾는 방법이 어설프다. 미워해서 행복해질수 없고, 미워한다고 그 미워하는 사람이 죽어주지도 않는다. 용서는 이기적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미워할때 아픈것은 내 마음이다. 자신이 행복해지고 싶으면 우선 용서하는것이다. 용서는 내 자신을 위한것이지 미워지는 그 사람을 위해서는 아니다.     옛날에 읽었던 프랑스의 사상가 ‘알랭’의 유명한 명구 한구절이 떠오른다. “우리가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위해 할수 있는 최선의 일은 역시 자신이 행복해지는 일이다.”
6    정월 보름에 눈을 맞으며 댓글:  조회:1695  추천:0  2015-03-05
  아침부터는 눈까비가 내리는듯 하더니 오후가 되니 큰 눈이 되여 흩날렸다. 새해 정월 대보름날 큰 눈이 내리는것이다. 일기예보에서 밤새 큰 폭설이 내린다고 한다. \   봄눈이다. 눈이 내릴때면 즐거워하는 족속들이 있다. 애들이 좋아하고 강아지가 좋아한다. 연인들도 좋아한다. 금년 정월대보름은 일요일에 맞춰져서 휴식하기가 좋다. 회사에서 당직을 서는 직원들을 다 휴식시키고 나만 별일도 없고 해서 대신 교외에 있는 공장에 가서 당직을 섰다. 앞뜰에 매놓고 있던 강아지를 풀어놓으니 좋아서 이리저리 날뛴다. 눈더미위를 뛰여다니며 펄쩍펄쩍 뛰다가는 내품에 덥석 안긴다. 입고간 옷에 얼룩이 갔지만 자못 흐뭇하고 즐겁다. 눈이 오면 나도 즐겁다. 꼭 아이가 된 기분이다. 강아지처럼 저기 눈밭에서 뒹굴고 싶어진다. 어릴적 아버지와 누나들과 함께 눈사람을 만들던 기억이 난다. 누나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눈덩이를 굴리면 아버지도 함께 일손을 거든다. 큰 눈사람 하나 만들어서는 거기에 눈섭을 그리고 코를 만든다. 어머니는 언제나 처럼 멀리 서서 우리들이 즐거워하는걸 보며 함께 즐거워 하신다. 혼자서 정원에 쌓이는 눈을 보며 어릴적 기억을 떠올리려니 세월의 무상함을 새삼느낀다. 그 아름답던 시절이 어제같은데 부모님은 이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셨다.   오늘은 과거의 결과이며 내일은 오늘의 연장선이다. 우주의 알수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 태어나고 죽는 생명의 계보는 무엇일까? 그 시간속의 생명의 어느 고리 하나가 빠져나가도 오늘의 나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좀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과거의 모든 생명은 오늘날 이 생명 때문에 있다. 따라서 우리의 지금,바로 오늘은 연결되어 있는 별자리처럼 미래에도 영원히 계속 살아있을지도 모른다. 라고 말한 아우구스티누스도 이러한 생각하에서 말한게 아닌가 싶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놀기를 좋아하는 젊은이였으나,성인을 만나 기독교에 귀의하여 중세를 대표하는 신학자로서 마침내 후세에 영향을 미쳤다. 등 많은 명구가 있다.   어릴때는 무심히 지나쳤던 말들이 나이가 들면서 차츰 이해가 가고 동감이 간다. 혼자서 눈사람을 만들어 보려고 한참을 낑낑댔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금방 내린 눈이라 잘 붙지를 않아서 눈이 덩이가 지지 않았다. 눈이 내려서 공기의 압력에 의해 약간 굳어졌을때 눈사람을 만들기 딱 좋은때다. 손에 잡히는대로 책한권을 들고 보다가 누운것이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깨여보니 벌써 해가 서산을 넘은 시간이다. 오랜만에 자는 낮잠이라 혼곤히 잘 잔듯하다. 그러나 눈빛에 바깥은 그대로 환하다. 밤새 눈이 내리면 새해 보름달을 볼수 없을 같다. 올해는 보름달을 보면서 소원이라도 빌어보고자 했는데 눈때문에 안될것 같다. 마음이 가르키는 방향을 향해서 눈내리는 하늘을 쳐다보며 하고 빌어보았다.   봄눈이 오면 새해 풍년이 든다고 한다.(瑞雪兆豊年)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 풍작을 거두는 한해가 되였으면 좋겠다. 이제 또 하루가 지나가면 새로운 하루가 올것이다. 그 날은 내일일까 오늘일까?
5    개같은 사람 댓글:  조회:3248  추천:2  2015-03-04
  재작년에 공장부근에 민가를 하나 사들였다. 공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가끔씩 휴식을 취하려고 해도 겨울에는 공장안이 추운데다 워낙 사람들이 많아서 식사시간에도 너무 법석대기 때문이다. 다행히 공장에 붙어있는 마을에서 한집을 판다고 해서 사들여서 담장을 다시 쌓고 수선을 해서 직원들의 휴식터와 식당으로 썼다. 그런데 공장안에는 야근이 있어서 괜찮으나 새로 사논 집에까지 사람을 둘수가 없어서 강아지 한마리를 사놓았다. 그런데 그 강아지가 지난밤에 쥐약을 먹고 죽어버렸다. 누군가가 쥐약이 든 닭고기를 담장안으로 던져넣어 강아지를 죽인것이다. 도적질하려고 강아지를 죽인 도적은 비록 담을 넘어왔지만 본래 그냥 직원식당으로 쓰는 집에서 가져갈것이 없어서 한참을 망설였나본다. 식당아줌마가 두고간 핸드폰 한개와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가져갔을 뿐이다. 삼년동안 가족처럼 키워온 강아지의 죽음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프고 서운했다. 내가 이 글의 제목을 욕하는 말로 적었다고 모두들 이상하게 생각하지만 실은 욕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이 제목이 칭찬하는 말로 들렸으면 좋겠다. 우리는 배신을 당했거나 미운사람들을 욕할때 이런말을 많이 쓴다. 권력의 앞잡이로 우쭐거리던 사람을 우리는 그렇게 불렀다. 불의를 저지른 사람들을 우리는 그렇게 욕했다. 그러나 왜서 그런 사람들을 개에 비교하는지 나는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개를 무척 좋아한다. 그것은 개가 가지고 있는 충성스런 성품때문이다. 개는 배신하지 않는다. 자기를 먹여키운 주인을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과 개는 친구가 됐나본다. 나쁜사람을 개에 비교하는것을 가끔씩 보는데 참 잘못됐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 주변에 개보다도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서 그렇다. 지난번 독우유를 팔아서 숱한 아이들을 죽인 악덕업주들은 그 사건이 불거져서 매스컴에 떴을때까지도 사과하고 개선하기보다는 숨기고 덮어감추려고 발악을 했다. 공업용수를 논밭에 마구뿌려서 하류의 수많은 농가들이 집단 암에 걸린 사연들을 볼때는 치가 떨렸다. 자신들은 절대 먹지 않는다는 짠지공장의 주인은 짠지위에 파리가 날아다닌다고 분무기로 농약을 뿌려댄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판다는것이다. 중앙tv(CCTV)의 기자가 가만히 찍은 영상에서 그 주인은 자기는 절대 그것을 먹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소고기의 근을 불리겠다고 살아있는 소의 배안에 수도관을 꼳아놓고 물을 쏘아넣어서 소가 고통스레 몸부림치고 있는데도 저희들끼리 희희닥거린다. 돼지고기의 비게를 줄이겠다고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이 되는 (瘦肉精)화학약품을 쓰지 않겠는가, 자동차에 치인 사람이 자신을 알아볼까봐 칼을 휘둘러 죽여버리지 않나, 이 사회는 지금 도덕성의 결여로 몸부림치고 있다.     도덕이라는것은 삶의 질서이고 법칙이다. 도덕을 높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우주는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고 그 질서에 따라서 움직인다. 그 질서속에 은하계가 있고 그 은하계의 질서에 태양계가 있고 그 태양계의 질서에 지구가 있고 그 지구가 태양을 에워싸고 도는 질서속에 춘하추동의 질서가 생기고 그 질서속에 만물의 삶이 있고 만물은 나름대로의 질서를 지키면서 공존해왔다. 그런 질서를 깨고 있는것이 바로 우리들이라는데 나는 가슴이 아프고 분노를 느끼군한다. 인간 삶의 질서가 바로 도덕이다. 도덕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지켜야할 기준이고 그러한 질서를 통해서 인간은 보다 인간답게 성장할수 있는것이다. 물질과 돈에 집착해서 그 질서를 깨뜨리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가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것이다.   도덕을 인간이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도덕이란것은 본래부터있었고 지금도 있고 미래에도 있는것이다. 그것을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스스로 발견하고 삶에 적용했을뿐이다. 다만 도덕이라는 미명아래, 그것을 핑계로 자행돼온 나쁜 일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삶의 질서에 대해서 잘못 이해해온 인간들의 문제이지 도덕자체에 문제가 있었던것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길거리의 신호등을 봐도 그렇다. 인간이 만든 질서같지만 거기에는 자연의 섭리가 있다. 서로를 양보하다보면 더욱 편하고 빨라짐을 알려주는것이 신호등이다. 그런 질서를 깨뜨려서 바로 사고로 이어지는 상황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만물의 질서를 살펴보면 동물을 잡아죽이고 그 시체를 먹는 육식동물의 창자는 3미터도 채 안된다고 한다. 그것은 고기를 먹고 소화를 빨리 해내기 위해서이다. 고기는 우리 체내온도인 36_38도 사이에서 가장 쉽게 부패한다. 옛날 사람들은 고기에 사독(尸毒-시체에 있는 독)이 있다고 해서 먹지말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사람의 체내에 들어가있는 그 고기덩이가 창자속에 오래 있는다면 육식동물은 병에 걸리기 쉽기 때문에 창자가 짧게 변화한것이다. 초식동물은 그와 달리 창자가7메터가 넘는다고 한다. 영양분을 충분히 흡수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먹는 곡식은 씨앗이다. 그 씨앗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나중에 심었을때 또 다른 씨앗을 가득 담은 열매인것이다. 그것을 먹는다면 우리의 건강은 훨씬 더 좋아질것이 뻔하다. 그런것이 질서이고 우리가 지켜야할 도덕이다. 그런데 그런것을 깨뜨려서 혼자만을 배불릴려하고 혼자만 잘 살려고한다면 종당에는 스스로 돌을 들어 자기 발등을 깨는 격이 되고 마는짓임을 아직도 깨우치지 못한 인간들이 너무 많다.   우리가 개를 귀여워 해주기 때문에 개 또한 주인이 하는 일에는 충성을 다해서 따른다. 그리고 개가 주인을 진심으로 따르기 때문에 주인들은 더욱 개를 사랑하려고 드는것이다. 개는 본능적으로 참다운 경애(敬爱)의 길을 알고 있어서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것이다.       어릴때 영화에서 배신자들이나 나쁜놈들의 앞잡이를 중국어로 주구(走狗)라고 표현하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리고 나쁜 사람을 개보다도 못한 사람이라고 욕하는 소리를 듣고는 그냥 그런가부다 생각했는데 어제 일을 겪고 보니 그런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가 무슨죄가 있다고 그런 나쁜놈들을 개에 비교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단지 짐승이라는 이유때문에 그런 쓰레기같은 인간들을 개에 비유한다면 개한테는 너무나 큰 모욕이다. 개의 충성심을 그런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하는 소인들의 소위과 비교한다면 개들한테는 너무나도 억울하고 원통한 일일것이다. 개는 짐승이지만 엄연히 생명체다. 개처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고 우정을 나눈다면 인간세계가 이렇게 도덕에 타락하지는 않을것이다. 개처럼 남의 일보다는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 노력한다면 우리가 스스로 반성할 일도 적어질것이다. 그런 훌륭한 개를 독식품을 만들고, 환경오염을 스스럼없이 저지르고 생명을 마음대로 유린하는 인간들과 비교한다는것은 너무 개한테는 불공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개보다도 못한 인간이면 안된다. 그런 사람들이 개같은 사람이 된다면 오히려 다행스런 일이다.
4    공명(功明) 댓글:  조회:1908  추천:1  2015-03-04
  오늘 시간을 내여 마음도 쉬울겸 교외게 한번 나가 봤다. 산중턱 길에 내려서 보니 멀리 마을이 보인다. 맞은편 산에서 양떼가 구름같이 몰려간다. 양치는 아저씨의 모습이 여유로워 보인다. 길손을 안내하는 시골동네 개짖는 소리가 오늘따라 정겹게 들려왔다.   길을 가다보면 쉬고 싶을 때가 있다. 힘들면 쉬여가는것이 더 빨리 가는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쉬다보면 게으름이란 큰 함정이 기다리고 있다. 게으름을 피우다보면 우리는 아무곳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새해를 맞은것이 어제 같은데 벌써 3월에 들어섰다. 아무것도 해놓은것이 없어서 마음이 아프다. 내가 게으름을 피운탓이리라. 요새 많이 게으름을 피운것 같다. 내 마음 때문이다. 마음이 우리의 육신을 움직이는 주인임에는 틀림이 없는 같다.마음이 힘들면 육신도 힘들어진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마음의 경영을 그렇게 많이 강조했던것이다. 좀 여유를 부리고 휴식을 할라치면 꼭 떠오르는 경구가 한마디 있다. 맹자의 이다. 기(骥)란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말이다. 인간으로 치자면 천재라 해도 좋을것이다. 여기에 비해 노마(驽马)란 둔재이다. 천재에 비한다면 10분의1밖에는 능력이 없다. 그러나 그런 노마라 해도 열흘동안 계속 달린다면 기의 하루 행정을 추격할 수가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부단한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아무리 멋진 목표를 세워도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면 그림의 떡이리라. 또 실행에 옮겼다고 해도 중도에서 그만둔다면 이것 역시 아무것도 되지 않는것과 같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든지 꾸준히 계속 한다면 풍요로운 결실을 기대할수 있다. 옛날에 어떤사람이 천리마 한필을 얻었다. 그는 그 말을 애지중지해서 좋은 사료를 먹이고 아까워서 얼마 타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전쟁이 나서 그 말을 몰고 나갔는데 천리마가 달리지를 못해서 패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천리마라고 해도 매일 먹고 놀기만 했으니 살이찌고 체력과 끈기를 잃어버렸던것이다. 천리마라도 끊임없는 단련이 필요하다. 말을 잘 달리게 하기 위해서는 매일 일정한 거리를 계속 달려줘야 한다고 한다. 그래야 체력도 보존되고 속도도 따라간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특히 이처럼 계속적인 노력이 요구되는것이 자기 계발이다. 리더가 되려는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를 본받아서 하루라도 자신을 채찍질하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목표를 세웠으면 모름직이 그 목표를 위하여 노력을 기울여야 할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뜻이나 글은 잘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행동과 실천에 옮기기를 어려워한다. 자기를 계발하고 마음을 닦는데도 게으름은 금물이다. 너무 빨리 가려고 서두르다보면 때론 더 많은걸 잃을수도 있다. 빠르지는 않더라도 꾸준히 변함없는 노력이 우리 인생에는 더욱 필요할듯 싶다. 일년지계는 봄에 있다고 했다. 그만큼 일년의 시작에서 봄은 중요하다. 우리 인생에도 4계절이 있다. 유년기가 봄이고 청년기가 여름이 될것이고 중년기가 가을이 될것이고 노년기가 겨울이 될것이다. 유년기에 공부에 노력하지 않고 청년기의 높은 성취를 기대하기 어렵다. 청년기에 노력하지 않고 중년기의 전성시대를 누릴수가 없으리라. 가을에 수확을 거두지 못한다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수 또한 없을것이다. 이렇듯 우리의 인생은 마디마디 고리고리가 이어져 있다. 하루에도 사계절이 있다. 아침이 봄이라면 점심은 여름에 비할수 있고 오후가 가을이라면 저녁은 겨울에 비할수 있을것이다. 하루가 길어지고 인생이 충만되기를 바란다면 뭔가를 해야한다. 우리 말 시조 한편이 떠오른다. 잘 가노라 닫지 말며 못 가노라 쉬지 말라 부디 긋지 말고 촌음을 아껴쓰라 가다가 중지 곳 하면 아니 감만 못 하리라. (긋지: 그치지 촌음:잠시 동안의 시간 곳: 만)   오늘도 흘러가는 하루가 아깝다. 사과나무가 바람에 흐나린다. 이제 이 사과나무도 봄 이삭이 돋아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힐것이다. 사과나무의 일년이 우리의 반복되는 일상과 너무 닮았다. 그러나 사과나무는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는다. 사람은 열매도 결실도 없이 죽는 사람이 많다. 봄이 온것 같다. 이제 뭔가를 해야할 때다. 봄은 사랑의 계절이다. 사랑이라도 해야할가보다.
3    뭘 버리고 뭘 구할까? 댓글:  조회:1813  추천:2  2015-03-04
   바쁜 일상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차한잔 마실때면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싶을때다. 오늘의 홍차는 유난히 그 맛이 그윽하다. 나는 녹차보다도 홍차를 좋아한다. 홍차는 녹차보다 맛이 짙고 향이 강하다. 녹차는 비 발효차인 방면 홍차는 발효를 거친 차여서 장에도 좋다고 한다. 친구가 외국을 다녀오면서 가져온 홍차를 오래동안 아껴 마신다. 원산지는 스리랑카로 되여 있는데 그 맛이 일품이다.   차의 그윽한 향기는 천천히 음미해야 한다. 그래서 차는 마신다 하지않고 품(品)한다 했을것이다. 상형 문자인 중국글로 보게 되면 입이 세개인 모양이 품자다. 차를 세개의 입으로 그 맛을 느끼면서 마셔야 세곱절의 향을 느낄수 있다는 뜻이리라. 차를 마시다보면 일손을 놓아야한다. 일을 하면서 차를 마실수는 없다. 이건 완전히 내 생각이지만 차를 마실때는 일을 하면 안된다. 차는 향수다. 인생을 향수하는 순간이다. 짤막한 순간이지만 인생을 즐겁게 한다. 뭔가를 손에 쥐고서 다른걸 쥘수는 없다. 사람의 욕심은 참 끝이 없다. 이것저것 다 가지고 싶어서 안달이다. 가질때는 좋으나 그걸 버리기는 아까워한다. 내가 강의하는 에치투오 리더십코스의 마지막 시간에는 이라는 시간이 있다.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섭리를 나누는 시간이다. 우리는 자연에서 가져오는것이 참으로 많다. 먹을것 입을것을 비롯해서 모든것을 자연은 제공한다. 그러나 우리가 자연에게 돌려주는 것은 가래, 침, 똥 , 오줌과 같은 오물들이다. 그래도 자연은 반갑게 받아준다. 그것을 거름으로 삼아 수풀이 무성하게 해준다. 인간은 너무 오만하다. 자연에 감사할줄 모른다. 자연은 은밀하게 우리에게 비밀을 속삭인다. 그 비밀을 읽을수 있는 사람은 극 소수다. 그 비밀은 바로 자연의 법칙, 우주의 법칙이다. 인간의 희로애락과 생로병사도 그 법칙을 떠날수는 없다. 우리도 자연의 일부분이다. 우리가 먹기만 하고 배설하지 못한다면 어찌 될것인가? 병원신세를 면치못할것이다. 우리가 들숨만 들이키고 날숨을 내쉬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것인가? 몇분안에 목숨이 끊길것이다. 그게 바로 자연의 은밀한 속삭임이다. 가지기만하고 베풀줄 모르면 먹기만 하고 배설할수 없는 사람과 다를배가 없다. 들숨만 들이쉬고 날숨을 안쉬겠다는 사람과 다를배가 없다. 우리는 얻은걸 베풀줄 알아야 한다. 베풀기 위해서는 버릴줄 알아야한다. 버리는것도 배워야한다. 인도의 어느 경전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어느 성인을 숭배하는 젊은 신도가 열심히 천잎의 금화를 모았다. 천잎의 금화라면 그때 당시면 대단한 돈이였다. 한 도시를 살수있을 만큼의 돈이라고 한다. 그렇게 많은 돈을 모은 신도는 그것을 전부 자신이 숭배하는 성인에게 바쳤다. 그때 그 성인은 아무런 사양도 하지 않고 그 금화를 받아서는 다시 그 청년에게 말했다. 그 청년은 깜짝 놀랐으나 이제 금화는 자신의 것이 아니였다. 그래서 성인의 말대로 떠나갔다. 그런데 강변까지 다녀온다해도 반식경이면 될 거리인데 청년은 한나절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성인은 제자를 시켜 알아보게 하였다. 그 제자가 돌아와서 올리는 말이. 그 청년은 그 금화를 한잎 한잎 세여보면서 하나씩 강속에 던진다고 한다. 그때면 구름같이 그 주위에 모여든 동네 사람들이 강속에 자맥질해 들어가서 금화를 건져내온다고 했다. 그 청년은 그걸 즐기는것 같더라는 것이였다. 이때 성인은 한마디 했다. 라고 했다. 정말 의미있는 말이다. 뭔가를 버릴수 있다는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버리지 않고 어찌 얻을수가 있겠는가? 버리지 않고 모든걸 가지고 가려면 그건 우리 인생의 짐이 된다. 어느때건 우리 모두는 가지고 있는 모든것을 버리고 떠나야 한다. 누구에게나 그럴때가 있겠지만 그전에 준비를 하고 싶다. 그런데 무엇을 놓고 무엇을 버릴지를 또 고민한다. 가지고 싶은것도 많다. 가지고자 생각하면 많이 얻을수도 있겠지만 다 가지고 가다보면 인생은 무거움에 허덕인다. 인생이 무거울때면 사람들은 힘들어한다. 그러나 힘든것을 즐거움인줄로 착각하고 사는것도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버리라하면 코웃음을 친다. 무엇을 버리라기보다 무엇을 얻으라 하면 좋아한다. 그래서 많은 강의를 해오면서 가장 먼저 사람들에게 전달하는것은 무엇을 얻으라이다. 얻고나면 여유로워지고 여유로와지면 베풀줄도 알것이라는 기대감에서다. 그러나 어떻게 얻고 어떻게 베풀지는 생각하지도 않는다. 누군가 강의중에 이런 질문을 한적이 있다. 나는 내가 진행하는 리더십코스를 통하여 사람들이 변화된 삶, 더 충만되고 발전적인 삶을 가지기를 바란다. 그래서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리더십의 원조는 누군가 물어보면 이리라든가 아니면 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라고 말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그 원조를 캐기에는 너무 애매모호한것들이 많다. 우리 선조들의 옛날 책에는 이미 현대 리더십의 모든 내용들이 있기때문이다. 심지어 성경에까지 그 기본적인 내용은 다 포함되여 있다. 성서의 마가복음 11장 24절에는 라는 말이 있다. 그 앞의 23절에는 또 라는 유명한 말도 있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그 말이 비과학적이라는 생각으로 가르침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바로 리더십코스에서 강조하는 이 나타나 있기때문이다. 누구라도 자신의 소원이 확실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한다면 무관심하게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성경에는 여러군데에 예수의 훌륭한 비유가 전개되어 있다. 예를 들어 여기서 말하는 은 자신의 힘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죄라든가 고난이나 장애를 가르킨다. 란 죄의 용서나 고난의 타개를 의미할것이다. 그 고난은 언젠가 타개 될것이라는 생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타개된 고맙다고 말하는 감사의 기대를 가지라고 예수는 가르치고 있다. 다른 종교에도 비슷한 가르침들이 많다. 불교의 경전에도 그러한 말들이 참 많다. 우리가 잘 아는 관세음보살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아픔과 질고의 소리를 보고 듣고 구원해준다고 한다. 관세음보살께 기도하고 구하면 모든 소원이 이루어 진다는것이다. 물론 이슬람경전에도 그와 비슷한 내용들이 많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미 인간의 소원과 버릴것에대해서 다 가르쳐 주고 있었다. 그걸 깨닫지 못하는 중생들이 불쌍할 따름이리라.   많은걸 얻었지만 오늘도 버리기에는 용기가 없다. 마치 금화를 버리는 청년처럼 하나,둘 세이면서 버리는 내가 바보인줄을 알게 됐다. 그러나 알면서 깨우치지 못하는것은 더 큰 고통이다. 수련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차를 마시면서 명상을 하면 깊이 내 안으로 빠져든다. 이제 난 뭘 구하고 뭘 버릴것인가? 차의 향기는 그윽하다. 그러나 그 향기도 언젠가는 흩어질때가 있다. 향기가 오래가고 흩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냄새일뿐이다. 가지고 있다보면 버리고 싶을때도 있다. 버려야만 더 소중한것을 많이 담을수 있다. 내 마음속 그릇속에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담을것인가?
2    별밤의 생각 댓글:  조회:1571  추천:2  2015-03-04
  생각이 많으면 잠이 안 온다는 말이 있다. 잠이 안올때면 생각이 많아서다. 생각은 멈추지를 않는다. 이 생각 저 생각 굴리다 보면 어느덧 밤은 무르익는다. 창문을 내다보니 반달이 환하다. 아는 것이 많아서 생각이 많은것일까? 아니면 너무 무식해서 생각이 많은 것일까? 아무 생각없이 사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다. 마냥 세속적인 돈과 권리와 명예를 쫒아서 산다면 걱정이 없을것인가? 그럴리가 만무하겠지만 어쩐지 이것저것 생각이 많은것이 싫어지기도 한다. 밖에 나오니 새해 보름을 며칠 앞둔 밤이라 그런지 달이 무척 밝다. 소슬한 겨울바람에 옷깃을 여민다. 별을 구경하기에는 여름밤이 제격이다. 여름에 저 깊은 시골에 가서 나무에 매달려 우는 매미 울음소리를 들으며 별밤을 구경하는것도 인생의 즐거움중의 하나이리라. 여름에 별을 구경할때에는 누워서 하는것이 좋다. 팔베개를 하고 하늘에 걸린 별무리들을 보면서 북두칠성을 찾고 삼태성을 찾는다. 문뜩 여름밤이 그립다. 그러나 겨울에 별구경하는것도 괜찮은 재미다.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하다. 겨울의 별은 차거운 느낌이 강하다. 자정이 지나서인지 북두칠성이 길게 꼬리를 드리웠다. 북두성이 유난히 반짝인다. 상고시대에 사람들은 자연을 신비하게 여겼고 전 우주에는 지고무상(至高無上)의 주재자(主宰者), 곧 제(帝) 혹은 상제(上帝)가 있다고 보았다. 상고의 문헌속에는 천과 제는 항상 동의어이었다. 고대인들은 그들을 인격화하고 아울러 일정한 이름을 붙였다. ‘구요성관’이요. ‘이십팔수’요 하는 것들이 바로 이러한 관념의 반영이다. 이러한 신화적인 색채를 띤 이름들은 고대의 작가들에게 그대로 사용되어 고전시가와 사부(辭賦) 가운데에서도 많이 응용되여 왔다. 별은 옛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꿈이였고 희망이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라는 명언이 한구절 떠오른다. 사람은 희망에 사는가 본다. 그리고 꿈을 가지고 있다. 란 말은 미국영화 에서 나오는 대사이다. 인생을 믿고 스탭을 밟는다면 세계는 내것이라고 노래하는 주제가는 어디까지나 락천적인 미국인의 꿈 바로 그것이다. 꿈, 그리고 희망을 내일에 건다면 사람은 살수 있다. 실지 어디에서인가 발생했던 일이다. 탄광의 갱밑에서 일하던 탄부들이 사고로 굴속에 갇히게 되였다. 굴은 완전히 외부와 단절되였고 갱속에는 9명의 광부가 7시간 마실 공기가 남아있었다. 광부들 중에는 시계를 찬 사람이 한명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 시계를 가진 사람에게 한시간에 한번씩 시간을 통보해줄것을 부탁했다. 시계를 가진 사람은 한시간 반이 지나면 한시간이 되였다고 통보했다. 구조대가 도착하기전에 질식사한다는것은 무시무시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시간은 일분일초 흘러갔다. 아홉시간이 지나서 갱에 같혔던 사람들은 한사람을 제외하고 전부 구조되였다. 죽은 그 사람은 바로 시계를 가지고 있은 사람이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한시간 반에 한번씩 한시간이 왔다고 알린 사람이였다. 나머지 8명에게 희망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독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는 질식해서 죽었다. 우리에게 큰 의미를 가져다주는 사건이기도하다. 플라톤의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철학에만 머물지 않고 생물학의 실증적 연구와 자연, 과학, 륜리, 론리학을 모두 섭렵했었다. 라고 말한 헬런 컬러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했지만 그러한 삼중고(三重苦)속에서 라 불리운데는 바로 이 말의 힘이 아니였을가 생각한다.    별밤을 보노라면 어릴때 성좌를 배우던 생각이 난다. 오리온 성좌, 북극곰 자리, 전갈성좌가 어디 있는지 찾으려고 하염없이 하늘을 쳐다보던 기억이 어제같다. 중국고대에도 성좌가 있었다. 중국의 성좌는 주역의 영향을 많이 받은것 같다. 일단 동서남북 네개 방위에따라 청룡(靑龍),백호(白虎), 주작(朱雀).현무(玄武) 로 나뉜다. 거기에 맞추어 별의 자리들이 사계절에 따라 움직인다.  어찌됐든 별밤에는 누군가가 그립다. 그리운 사람이 있다. 누군가가 그립다는것은 마음의 울림이리고 한다. 이럴때면 떠오르는 어느 시인의 시 한구절이 있다. 참으로 내 마음을 울리게 한다. 세상을 살아 가면서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 세월이 흘러 흘러도 문뜩 문뜩 생각에 설렘이 일어나는 막연한 그리움,그러한 그리움 하나쯤은 가슴속 깊이 심어두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리움이 깊어지지만 만날수 없을 때면 우리의 인생은 그늘이 진다. 그러나 사람은 다시 만날수도 있다는 희망을 안고 산다. 희망이 있다는것은 인생을 충만되게 한다. 오늘따라 하늘가에 금성이 유난히 밝은것 같다. 시경(詩經)의 시 한수가 떠오른다. 그대 일어나셔서 밤하늘을 보세요 샛별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네요. 황혼에 만나기로 기약하였는데, 샛별이 휘황하게 반짝이네요. 옛사람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그리고 가까이에서 반짝이는 저 별을 품에 안고 싶다.
1    하루의 시작 댓글:  조회:1517  추천:2  2015-03-04
  꿈은 참 이상 타. 문뜩문뜩 뭔가를 깨우쳐 주려는듯 다가 왔다가는 그걸 잡으려 할때면 어디론가 사라지군 한다. 인생도 그런게 아니겠는가 뭔가를 잡으려고 하면 그건 저 멀리 있다. 잡았다고 생각할때 꿈은 깬다.   아침 일찍 꿈에서 깨여보니 날이 아직 밝지 않았다. 어제는 내가 진행하는 에치투오 리더십코스 20기 수료식이였다. 멋지고 아름다운 밤이였다. 수료를 마치고 늦게 까지 모임을 가졌다. 아침에 시계를 보니 새벽4시가 좀 지났다. 잠을 좀 더 잘가 누우려다가 그냥 옷을 걸치고 밖에 나왔다. 밖은 별들이 총총하다. 이제 곧 날이 밝을 같다. 이걸 아마 려명전의 어둠이라 하는것이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아산기슭에서 등산을 준비할때가 되여서야 날이 희붐이 밝아 온다. 산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인적이 없다. 2월의 새벽 산길은 으스스 춥기도 하다. 나는 혼자서 등산할때가 참 좋다. 하루 일상에 쫒겨 살다보면 내 삶을 돌이켜볼 시간 조차 없었는데 등산을 하면서 참 많은 것을 생각할수 있는 시간을 가질수 있어서 더 좋다. 한참을 올라가니 몸에서 서서히 땀이 났다. 산정상까지 오르고 나니 여간 개운하지 않다. 저 멀리서 태양이 불끈 솟아 오른다. 크게 심호흡을 하면서 새벽의 기운을 들이켰다. 붉은 태양이 눈덮은 넓은 룡정벌을 비춘다. 감회가 새롭다. 눈덮인 소나무밭이 멀리 까지 뻗어있다. 또 하루가 시작 되였다. 저 붉은 태양처럼 내 인생도 붉게 타오르고 열정과 정열로 타올라야 할텐데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태양의 그 뜨거운 열정을 받아들이기라도 하듯 심호흡이 한결 힘있다. 어릴때 읽었던 사서오경중의 대학이란 책의 한구절이 떠올랐다. 이란 글이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는 뜻이다. 이는 자기 개발의 연속이다. 리더십도 이만한 리더십이면 더 이상이 없다. 이라는 책은 전체 문장이 한자로 175자밖에 안되는 짧은 책이다. 그래도 그걸 외우느라 혼났던 기억이 새롭다. 뜻도 모를 내용을 외운다는것이 쉽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문뜩 문뜩 그 뜻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고 느끼게 될때면 그 즐거움이 말로 형용할수가 없다. 옛사람들은 그 짧은 글속에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큰 뜻을 담았다. 그 것을 이해한다는것은 의외로 어렵다. 수신이라든지 수양이라고 말하면 처음부터 괜히 싫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내가 리더십코스를 강의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현대인들은 돈이나 명예는 열심히 쫒으나 실지 중요한 마음을 닦는데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 말의 뜻은 자기 스스로 노력하라는 뜻을 품고 있다. 밖에서 강요하는것이 아닌 자신이 훈련하도록 하는 자각적인 노력을 가르킨다. 인간은 육신과 정신으로 만들어졌다. 육신이 없으면 정신의 의탁이 없을것이요. 정신이 없으면 육신은 한낱 고기덩이에 불과할것이다. 물질적인 사회에서 우리가 쫒는것이 물질일지라도 우리가 그 물질을 더 값지게 하고 빛을 내게 하는데는 정신의 힘이 필요하다. 자기 스스로 갈고 닦는 사람은 더 빛을 내기 마련이다. 옛날,은(殷)의 탕왕(湯王)이라는 명군은 이 말을 세면기에 새겨 넣고 의 결의를 새롭게 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결의가 없다면 인간에게는 결코 진보의 희망이란 없을것이다. 등산길을 내려오면서 는 말이 다시 떠올랐다.   눈에 덥힌 등산길이 미끄러워 몇번이나 넘어질번했다. 오르다보면 내리막이 있기 마련이다. 살다보면 죽는날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살면서 해야할 일들이 있다. 그걸 모르고 죽는다면 삶을 허송한것이 아닐까? 그걸 알고도 못한다면 그 아쉬움은 또 얼마나 클까? 하산하면서 보니 벌써 봄기운이 느껴진다. 떠오른 아침 햇살에 눈이 녹아 땅을 적신다. 삐쬬롱 삐쬬롱 새소리가 정답다. 저 새들도 하루를 일찍 시작한것 같다. 눈이 온 이 벌판에 먹이는 있을는지? 새들한테도 보리고개는 있으리라. 오늘 나오면서 빈손에 나온것이 자못 후회됐다. 내일 등산길 나설때는 쌀이라도 한톨 넣어가지고 나와야겠다. 내 귀를 즐겁게 해준 저 새들도 즐겁게 해주고 싶다. 그래 그래야지. 오늘 하루도 새롭게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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