修行하는 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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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입동의 준비 댓글:  조회:2438  추천:2  2015-11-05
   입동을 몇일 앞두고 있는데도 오전날씨는 그나마 따스했다. 고기압의 영향때문인지 아니면 연길의 지형이 분지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아직 집중난방이 들어가지 않은 민가나 여기저기 상가의 보일러에서 뿜어나오는 연기가 도시전체를 뿌옇게 만들어놓고 있다.    내가 회장을 맡고 있는 불교연구회에서는 일요일마다 정기 회원모임이 열린다.  일요일에 시간맞추어 나가보니  오늘따라 꽤 많은 회원들이 모여있었다. 몇달전부터 계획했던 일이긴 하나 오늘부터 정식으로에 “지장보살본원경”대한 강의를 하기로 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도 모른다.    지난주까지“유마경”대해서 강의를 했는데 대승경전이여서 그런지 많은 신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워하고 신심을 내지 못하는듯했다. 그래서 이번에 소승경전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보았다.  한시간 정도 강의를 하고 10분 휴식하고 질문을 받는 시간을 가졌다. 질문이 계속이어져서 점심11시가 되여서 마무리 지었다. 새로온 몇몇 회원들도 있었는데 오늘 강의에 참가하고 나서 환희심을 얻어 삼보에 귀의한다고 한다. 나로서는 기쁜일이 아닐수 없다. 신앙이 있다는것은 기쁜일이다. 아무 신앙도 없이 세월이 가는대로 육신을 맡기고 육신이 가는대로 정신이 끌려다닌다면 그건 바른 삶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신앙이란 우리의 주관적인 확신이 아니라 확실하게 존재하는 일이나 물체를 바라면서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는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성경의 히브리서에도 이런말이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서 증거를 얻었느니라”라고 한다. 그 뒤에는 “우리는 믿음이 있으므로 이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것, 곧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는것을 안다”로 계속된다. 성경 히브리서 11장 1절에 나오는 말이다. 서양에서는 옛날부터 신앙의 정의로 널리 알려져온 명구이기도 하다. 이는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바라는 대상이 결코 가정된 사실이 아니라 바라거나 바라지 않거나간에 확실히 존재한다는 것에대한 믿음이다.  그 엄연한 존재에로의 바램과 확신을 신앙이라고 하는것이다. 즉 “아직 보이지 않는 사실을 확신한다”라는 말이 될수 있다. 그러면 엄연히 있는 그것은 또 무엇일까? 같은 장에서 예수가 말한다. “하느님께서 설계자가 되시고 건축가가 되셔서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주실 도시이며 하늘에 있는 더 나은 고향”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사는 지상의 이 세계는 가공이며 허망하다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은 현재 내 마음은 변함이 없는데 우리의 육신은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은 이 세상에 변화를 거치지 않는 사물은 없다. 모든것은 움직이고 있고 변화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도 경제도 모두 빠른속도로 변화하고 있는것이다. 물론 우리의 마음의 변화가 더욱 무섭고 빠르다. 그걸 많은 사람들은 감지못하고 있는것이다. 마치 따스한 물속에서 끓이는 개구리처럼 우리는 변화에 둔감하다가 그 변화속에서 죽고마는것이다.   불교연구회에서 “지장보살본원경”에대해서 강의를 해놓고는 여기서는 또 예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으니 남들보기에는 이상한 일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내 마음이 신앙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내 자신을 반성하기 위함이다. 지금까지 많은 강의을 해왔다. 리더십 과정을 개발해서 지금까지 10년넘게 강의해왔고 주역이나 음양오행에 대해서도 대학에서나 지역 클럽에서 강의해왔다. 엉뚱하게도 불교에 대한 강의 또한 몇년을 해왔는데 아직 내 신앙의 받침이 부족한듯한데 대한 반성이다. 법구경에는 이런말이 있다. 虽诵习多义 放逸不从正 如牧他牛 难获沙门果 时言少求 行道如法 除淫怒痴 觉正意解 见对不起 是佛弟子    현대 백화문으로 풀이하면 이렇다.   경전을 아무리 많이 외워도 행하지 않는 방일한 사람은 남의 소를 모는 목자와 같아 사문된 결과를 얻기 어렵다.   경전을 아무리 적게 알아도 법을 따라 도를 행하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버리어 지식은 정당하고 마음은 해탈해서 이승에도 저승에도 집착이 없으면 그야말로 부처님의 제자이니라.     내가 여기저기서 경전을 얻어듣고 몇구절 외우고 있어서 건방지게 법문을 한답시고 강의를 한답시고 하고있지만 진정 수행하는 사람들에 견줄봐가 되지못함에 대한 반성이다. 이 시대의 많은 인텔리들이 그렇다. 아는척 배운척 자랑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일종의 창백한 비애일 뿐이기도 하다. 지식이 많아도 행하지 않는 자는 진정한 지성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잘못을 유창하게 변명할수는 있어도 참다운 삶을 살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경전을 모를수록 해탈한것이라고 떠드는 강변자들도 더러있다. 그것은 어리석음으로 자신을 토로하는 사이비 제자들이다.     부처님의 참다운 제자라라면 집착하지 않음을 행하는 자이다. 경전도 이승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의 해탈을 얻는 자가 되는것이 진정한 수행인이고 신앙인이다.    가을도 다가고 입동에 들어선다고 하니 마음이 왠지 서글프다. 입동은 24절기 중의 19번째 절기이다. 겨울이 시작하는 날인것이다. 양기가 가장 약해지고 음기가 막 성하는 때여서 양생을 하는 옛사람들은 이날 보약을 많이 먹었다고 한다. 우리 민족같으면 대체로 입동을 전후하여 김장을 담그기도 하고 햇쌀로 시루떡을 빚어 이웃과 나누어 먹기도 했다. 그러한 풍습도 도시화 시대에서 어디갔는지 사라져 버렸다. 겨울을 맞는 해는 빨리도 어둠속에 자취를 감춘다.                    농사군은 겨울에 들어설때 내년 봄을 준비한다. 씨앗을 가리고 쟁기를 거둔다. 지금 나는 무엇을 할까?   준비를 하기위한 준비는 또 무엇일까?!
34    스스로 돕는자 댓글:  조회:2601  추천:3  2015-10-21
   가을비가 한줄금 내렸다. 공기가 자못 상쾌하다. 요즘은 건강을 위한 걷기 운동을 한다. 퇴근후 혹은 이른 아침에 집에서 나와서 한시간반 정도 걷다가 돌아오는데 어느새 그 운동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오늘도 퇴근후 한시간반 정도 걸었다. 금방 비가 내리고 난후라서 그런지 자동차 매연도 적고 먼지도 적어서 걷기에는 딱 적격이다. 걸으면서 사업과 미래와 비젼을 생각하는데 옆으로 쉴새없이 경적을 울리면서 지나가는 자동차만 아니라면 그야말로 멋진 향수라고 할수 있을것 같았다. 비가 내린뒤라서 그런지 걷기 시작할때는 추운듯 했는데 한참을   씨엉씨엉 걸었더니 등에 땀이 나기 시작한다.   서리가 내린지도 이제는 이슥히 지났지만 몇일 따뜻한 날씨가 계속되여서 참 좋았다. 역경에는 履霜坚冰至 (서리를 밟고 단단한 얼음에 이른다)라는 말이 있다. 서리가 내리고 나면 이어서 단단한 얼음이 어는 겨울에 이른다는 말이다. 가을이 되어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면 이윽고 단단한 얼음이 펼쳐지는 추운 겨울이 온다. 그러나 겨울은 가을을 뛰어넘어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니다. 그전에 서리가 내리는 전조가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서리가 내리는 것을 보면 겨울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 자연의 한부분인 인간세계의 일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어떤 큰 사건이라도 반드시 그것을 예고하는듯한 작은 사건이 일어난다. 따라서 하찮은 전조라도 그것을 그냥 넘겨버릴것이 아니라 즉시 그 조짐을 알아채고 재빨리 대처해야 한다. 역경에서 ‘서리를 밟고 단단한 얼음에 이른다’는 이 말은 그러한것을 경고한 말이다. 미약한 전조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신경을 세워 긴장감을 가지고 일에 임하지 않으면 안된다. 서리가 내려도 아직 겨울이 오는것을 알지 못해서는 곤란하다. 재작년 봄까지 주식시장과 펀드는 천정부지 치솟았다. 따라서 부동산도 끊임없이 뛰여 올랐다. 전 세계 시장이 그렇게 들끓었다. 대학의 교수님들도 부동산의 미래시장을 에언하면서 부동산 투자를 부추겼고 일반 시민들도 펀드와 주식에 혈안이 되여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부동산 가격은 오르면 오르지 절때 떨어질수 없다고 호언장담을 해댔다. 그런데 미국발 금융위기가 21세기의 대문을 들이치자 세계의 경제는 주춤하고 펀드와 주식에 투자했던 자금들은 거부기의 목처럼 움추려들어가고 부동산에 투자한 사람들은 하루밤새 길거리에 나앉았다.   재작년부터 죽 에치투오코스에서 강의한 비디오 자료를 보면 부동산과 펀드에 투자하는 사람들에게 경제하락을 조심하라고 경고했던 내용들이 그대로 있다. 연길은 소비형 도시이고 중국의 가장 변두리에있는 산골도시이다. 연변경제를 떠멜 그럴듯한 기업 한개 찾기 힘든 지역이다. 그런 도시의 주택가격이 평방미터당 4천원에서 8천원가까이 하니 놀라지 않을수 없다. 작년에 할빈에 겨울빙등 관광갔다가 가이드의 안내로 하얼빈시 신도시 개발지역을 가 보았는데 아파트 가격이 평방미터당 5천800원좌우라고 했다. 심양의 기타 개발 아파트 단지들도 보통 8000원좌우(평방미터당)가 기본이다.  물론 일부 고급아파트도 있었지만 대부분 그러한 수준이였다. 동북삼성에서 할빈은 공업도시이고 러시아와 인접한 대도시이다. 흑룡강성의 수부이기도 하다. 그 도시의 집값과 연길시의 집값이 같으니 거품이여도 형편없는 거품인것이다. 심양시는 동북삼성에서 가장 큰 도시이고 료녕성의 수부이기도 하다. 그런 심양시의 아파트 가격과 연길시의 아파트 가격이 같다는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제 거품이 빠지기 시작하는듯 싶다.    지난2008년 당시 올림픽을 앞두고 많은 사람들은 경제에 대한 전망을 모두 긍정적으로 보고 있을때였다. 주식과 펀드가 한창 올라갈때 나는 많은 수는 아니지만 일찍 손을 뗐다. 동네아줌마들까지 주식을 사려고 덤벼들때는 손을 떼야한다는것이 상식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경의 생생불식(生生不息)라는것이 나를 욕심에서 발을 떼게 했던것이다. 역경의 생생(生生)은 사사(死死)가 아니다. 언제나 생생불식하는것이 역경이지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생생사사가 아니다. 천지 자연의 모습을 보면 양은 음을 낳고 음은 양을 낳는다. 그처럼 끊임없이 교대로 낳고 만들어지면서 변화를 멈추지 않는다. 그 음양의 변화를 역이라고 하는것이다. 가장 잘된다고 할때는 이미 내리막을 걸을 조짐인것이다. 달이 차면 이지러지는 도리와 같다. TV뉴스에서 증시가 올라가고 있다고 할때 투자하면 이미 늦은 투자다. 뉴스는 아무리 실시간 뉴스라하더라도 과거형이기 때문이다.   에치투오는 그런면에서 보면 현실적인 경험과 지식이 쌓인 코스라고 자부할만하다. 그러한것들이 축적되여 운영된 코스이기에 18년간 진행되였고 만명넘게 진행되여 온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서로서로 믿음과 신뢰가 부족하다. 자신에 대한 오만과 편견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더 중요하게는 자신의 욕심을 주체할수 없기때문이리라.   장사를 시작하여 삼일도 안되여 이득을 보겠다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남의 하는것이 다 잘못된듯 해서 자신이 직접한다고 덤볐다가 전부를 잃어버리는 사람들 또한 있다. 독일 관념론의 시조 칸트는 고 말하였으며  르네상스시대의 천재 다빈치는 라고 말하기도 했다. 공상공론이나 고정관념에 매달리는 어리석음을 웃을수 있겠지만 진정 우리 자신은 또한 그러한것에서 자유로울수 있을까 반문해본다.   어제 저녁에는 수요세미나를 가졌다. 요즘 당면한 전 세계적인 경제상황과 문제에 대해서, 그리고 인민페 환률저하로 인한 연변경제과 각 개인의 사업투자등에 대해 회원들과 교류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투자나 사업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 우리 수요세미나를 통해서 한달만에 부동산 시장의 변화를 읽고 많은 돈을 절약한 분들을 말할라치면 참으로 많다. 작은 세미나 비용으로 큰 소득을 얻은셈이다. 그렇듯이 모든 선택은 개인의 몫이다. 내 삶의 개척자는 나 자신이고 내 삶을 무너뜨리는것도 나 자신인것이다. 분명한 인생의 사명을 찾고 그 사명에 따라 최선을 다한다면 내 운명은 내가 결정하게 되여있다. 이탈리아의 베니스 지역에 마테오라는 청년이 살았다. 이제 서른이 다 된 그는 자신이 언제쯤 성공해 예쁜 여자와 결혼할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다 친구에게서 삶에 대한 통찰력을 지닌 노인이 베니스의 작은 산에 산다는 얘기를 듣게 됐다. 그는 누가 어떤 문제를 내든 다 맞힐수 있으며, 세상의 모든 이치에 통달한 사람이라고 했다. 마테오는 결국 친구와 함께 노인을 찾아갔다. 마테오의 표정은 간절했다. 노인은 당황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노인이 자리를 뜨고, 그의 친구가 제 풀에 꺾여 돌아갔지만 마테오는 끝까지 남았다. 다시 돌아온 노인은 그가 아직도 제자리에 있음을 알고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는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노인은 꽉 쥐고 있는 자신의 손 하나를 마테오에게 내밀었다. 마테오는 답을 알수 없었다. 곰곰히 생각하던 그는 고개를 저었다. 노인은 마테오의 답변을 듣고는 웃으며 답했다.   마테오는 깜짝 놀라 노인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도무지 알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우리는 마음속에 씨앗을 품고 있다. 이 씨앗을 어떻게 심고 가꾸는가에 따라 성공이란 열매를 맺을수도, 실패라는 결과를 만들어 낼수도 있다. 새의 생사를 쥐고 있던 노인의 손처럼 당신의 운명을 쥐고 흔드는것은 바로 당신 자신이다. 그러니 운명을 탓하는건 어리석은 일이다. 운명을 만들어 가는 사람은 애초부터 우리 자신이다. 만약 결과가 좋지 않았다면 그것은 잘못된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고, 결과가 좋았다면 올바른 방향으로 걸어갔기 때문이다. 당신의 손이 언제든 새를 죽일수도, 살릴수도 있다는 걸 기억하라. 스스로의 힘으로 운명을 개척해나가야 하는것이다.   중국의 오경중의 하나인 역경(易經)에는 는 말이있다. 하늘의 운행은 철저해서 1초도 쉬는 일이 없다. 군자도 이와같이 힘씀을 그만두는 일없이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는 뜻이 되겠다.  우리 운명이 자신에게 달렸다면 쉽사리 남의 의견에 동요되여 따라가면 안될것이다. 그래서 지식보다 중요한것이 견식이라고 한다. 옳바른 판단력이 우리의 인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려면 자신이 원하는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에치투오 강의에서 나는 수강생들이 자신의 사명과 인생의 목표를 찾을수 있도록 도와준다. 누구나 실패할수는 있다. 사람이라면 가끔 흐린 판단을 할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그 일의 결과 때문에 자신의 선택을 후회해서는 안된다. 후회한다고 해서 변화되는것은 없기때문이다. 실패를 운명으로 여기지 않고 실패에서 배우는데 힘을 쏟아야만한다. 내가 잘못한 선택으로 인간관계가 나빠졌다거나 잘못된 결과가 나왔다면 사과를 하고 개선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된다.    운동을 한답시고 급히 걸었더니 등에 땀이 흥건히 돋았다. 돌아오면서 방송국 앞길을 건널때였다. 차 한대가 붉은 등이 켜질려고 노란등이 반짝이는 사이 급히 길을 건너려고 속력을 다하다가 마침 횡단보도의 녹색등이 켜져서 인행도에 내려선 사람을 들이쳤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행인은 저만치 뿌리워 나가서 쓰러졌다. 그 광경을 마침 목격한 어떤 할아버지가 놀라서  차에서 내리는 그 사고친 기사를 손가락질 하면서 욕을 한다. 바로 그 옆이 병원이여서 사람들이 상한 사람을 급히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그런 강한 충격에 살아날 사람은 아무도 없을것이다. 운전기사의 잘못된 작은 선택이 다른 한사람의 시퍼런 생명을 앗아가고 그런 한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그리칠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떠오르며 가슴이 섬찍해났다. 러시아의 소설가 니콜라이 시체드린의 말이 다시 떠오른다.  
33    운명 댓글:  조회:2704  추천:5  2015-10-06
   가을이 오면 하늘이 유난히 높아보인다. 여기저기서 시원함을 느낄수 있다. 이맘때면 언제나 가을의 하늘처럼 내 마음도 넓고 높아진다. 요즘 집에서 기르는 관상용 버드나무가 꽃이 활짝 피였다. 몇주전부터 버드나무가지의 여기저기에 꽃봉오리가 맺히더니 어느새 나무가지마다 흐드러지게 연분홍 꽃잎을 펼쳤다. 가을에 피는 꽃은 봄에 피는 꽃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귀하기 때문이리라. 다른 꽃들은 다 꽃잎을 지울때 꽃망울을 피니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듯싶다.  버드나무꽃은 향기가 진하지 않다. 그러나 그 꽃은 망울을 터치고 꽃이 피기 시작하면 작은 나무가지마다 가득 연분홍 꽃잎을 피운다. 그냥 보기만해도 즐겁다. 옆에 다가가서 코를 대고 향기를 맡을라 치면 알릴락말락한 싱싱한 꽃향기가 가슴 가득 들어온다. 하루의 피로가 말끔히 가신다.   그 옆에 있는 란초는 꽃은 자줄 피지 않지만 그냥 그 꿋꿋하고 푸른 기상으로 집안에 푸름과 활력을 더한다. 옛사람들은 란(蘭)을 사군자중의 하나로서 표현했다. 매화, 란초, 참대, 국화를 사군자라 칭했던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보니 과연 난초는 군자답고 그 옆에 키는 훨씬 크지만 가느다란 버드나무는 오히려 미녀의 형상을 닮았다.   늦은 밤 귀가하여 꽃에 취해있다가 창문가로 하늘을 쳐다보니 서남쪽 하늘가에 태백성이 반짝인다. 가을밤의 밤하늘이 가장 아름답다. 하늘이 높고 푸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건 유난히 밝은 태백성 하나뿐이다. 태백성을 볼때면 어릴때 보던 ‘서유기’의 이야기가 떠오르군 한다. 자신의 분수도 모르고 날뛰다가 태백금성에게 천거되여 하늘에 올라가서 ‘필마온’이라는 벼슬을 받았으나 그 관직이 낮음을 나무라서 천궁을 분탕치고 지상에 돌아왔는데 이번에도 태백금성이 나서서 천거하여 ‘제천대성’까지 된다. 그러나 욕심은 끝이 없어서 하늘의 반도대회를 망치고 어주를 훔쳐먹고 삼십삼천까지 올라가서 태을진인의 금단까지 한 호로박 전부 먹어버린다. 그러다 끝내는 부처님의 높은 법술에 오행산에 갇혔다가 삼장법사의 제자가 되여 서천으로 경 가지러 다녀오는 이야기를 적은 ‘서유기’는 그야말로 모험과 낭만의 세계이다. 그리고  그 주인공 손오공은 내가 성장하는 과정 내내 멋지고 동경하는 모습이였다.  그런 손오공을 두번이나 천거를 한 태백금성이 바로 창문가에 반짝이며 꽃향기와 어울려 가을의 풍치를 더하는듯 싶다.   옛날 사람들은 밤중에 길을 잃으면 하늘의 북두성을 쳐다보면서 길을 찾았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은 북두성을 찾을수가 없다.  날씨가 나빠서인지 아니면 이 도시의 공기질량이 나빠서인지 밤이면 별을 볼수가 없다. 요즘은 GPS나 핸드폰 위치추적기라든가 위성안내기 같은 것들이 너무 보편화되여서 별을 보면서 길을 찾는 일은 없겠지만 옛날 같으면 하늘의 별이 길안내 작용을 많이 했을것이다.   오늘 어머님이 전화가 와서 바쁘지 않으면 다녀왔다 가라시기에 (실은 좀 일들이 있었지만 미루고^^) 가보았더니 어머님의 친구분이 와 계셨다. 그분은 나도 좀 안면이 있는데 가끔씩 어머님한테 놀러오시는 분이셨다. 나를 부른 사유인즉 이러했다. 어머님의 친구분은 성이 구씨인데 딸과 아들 두 자녀를 두고 있었다. 그분이 자녀들의 장래가 걱정돼서 이번 연휴에 점치러 여기저기 다니다가 부근의 어느 사찰의 관음영험점(觀音靈驗占)이라는것이 용하다고 보러갔다고 한다. 그런데 거기에서는 한족말로 설명하고 이상한 글이 가득적힌 쪽지를 주던데 뭐라는지 몰라서 그런다며 쪽지를 내밀었다.  특히 믿고 부르신듯한데 바쁘다고 그냥 갈수도 없고 어머님하고 친한 분이시라 대충 넘길수 도 없었다. 그래서 그 글쪽지를 받아 보니 중국 사찰에서 숫자가 적힌 저가락같은것이 가득 꽂힌 통을 흔들어서 그중 하나가 나오면 그에 맞는 점쾌를 보는 그런것이였다. 중국 민간에서 많이 신앙하는 형태로서 백사문관음(百事問觀音)이라고 모두 백가지 점쾌로 나뉜다. 주역에서 64쾌를 분석하는것과 비슷하게 만들어 졌으나 말로는 아주 영험하다고 한다. 사람들은 길이 보이지 않으면 길을 찾고자 노력한다. 그러는 과정이 바로 이러한 점을 치러다니고 미래를 알고자 하는 과정이 생겨난게 아닐까 싶다.   어떤 사람들은 일괄적으로 이 모든것을 부정하고 미신이라고 일축 시켜버리는 경우가 있다. 미신(迷信)을 중국글로 풀이하면 미혹할 迷자에 믿을 신자가 붙혀져 있다. 즉 미혹된것, 모르는것을 믿는것을 가르켜서 미신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자신에 대해서 또 얼마나 알고있는가? 스스로를 미신하는것이 또한 가장 큰 미신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글쪽지는 ‘제 32 중첨(中簽)’이였다.(번역상 중첨이라는 표현을 썼다. 첨이란 하나를 뽑아서 나타난 숫자를 가르킨다. 보통 주역에서는 쾌(卦)라고 하지만 여기서는 첨이라고 표현한다.) 일단 중첨은 상첨(上簽)보다는 못하지만 하첨보다는 좋은 것이다. 32첨의 제목은 유비구현(劉備求賢)이였다. 삼국연의나 삼국지를 보게 되면 유비가 천하를 얻을 꿈을 가지고 현인을 모시려고 고민하던중 관우 장비와 함께 삼고초려를 한 이야기가 있다. 그 내용이 있듯이 그 쪽지에는 풀이도 돼 있었는데 ‘돌중에 옥이 있듯이 이인은 쉽게 알아볼수가 없다. 분명해지기를 기다려서 움직이면 모든것이 잘 되리라’로 돼있었다. 물론 내용에 대한 시(詩)도 있고 더 상세한 분석내용도 있었다. 거기의 내용대로 상세히 분석해주고 역사이야기도 해주면서 설명을 해주었더니 어머님의 친구분은 자못 흡족해하셨다. 비록 상첨은 아니지만 그나마 중첨이라도 나왔고 설명을 들으니 귀인을 만날수도 있고 여러가지로 좋은듯 싶어서 아주 만족해 하셨다. 나는 점을 치는것을 나쁘게 보지 않는다.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점은 우리에게 힘이 되여줄수 있고 발전적이 될수도 있다. 깜깜한 한밤중에 길을 잃은 사람을 생각해 보라.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고싶은 그런 심정일 것이다. 그럴때 누군가가 길을 알려주고 방향을 가르쳐주고 구명대를 던져준다면 얼마나 고마울것인가.   옛날 프랑스에 어떤 젊은이가 있었는데 하는일마다 안되고 실패를 계속해서 자살을 시도하려다가 마지막으로 점쟁이를 찾아가서 점이라도 치고 죽자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 젊은이가 점을 치는 집시여인을 찾아가서 점을 치는데 그 집시여인이 깜짝 놀라면서 말하기를 “젊은이 당신은 옛날 세계를 뒤흔들던 나폴레옹 황제의 환생이요”라고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믿은 젊은이는 피가 끓어 오르고 용기가 북받쳐 올라서 다시 사회에 돌아가서 열심히 노력한 결과 프랑스에서 제일가는 사업가로 성장했다. 그러고 나서 그가 다시 그 집시여인을 찾아가서 물어볼때 집시여인이 말하기를 실은 당신이 그 당시 너무 실망하고 힘들어해서 내가 당신이 나폴레옹의 환생이라고 말했을뿐 실은 나폴레옹의 환생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그 점쟁이한테 다시 후한 보수를 주고 나왔다고 한다. 비록 자신이 믿고 있었던 환생의 이야기가 가짜이긴 했지만 그가 소극적이고 인생을 포기하려는 마당에 그한테 힘과 용기를 준 선의의 거짓말이 였기 때문이였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비록 자신이 나폴레옹의 환생이 아니라는걸 알았지만 그는 이미 자신에 대한 자신감과 자부심 그리고 열정을 찾았고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였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때 점을 보는 사람들은 ‘인생컨설팅설계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물론 엉뚱한 소리로 사람을 위협하고 얼토당토않는 말로 돈이나 얼려내는 사기군들을 말하지 않는다. 아쉬운것은 현대 우리 사회에 정말 긍정적이고 제대로된 인생설계사나 인생컨설팅전문가가 많지 못하다는데 있다. 우리가 직접 찾지 못하는 인생의 방향이나 진로를 가르켜주고 아픈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져준다면 그것은 어두운 밤중에 길잃은 나그네가 북두성을 찾고 물에 빠진 사람이 구명대를 잡은것과 같을것이다.  ‘타임머신’이라는 유명한 영화가 생각난다. 3부작으로 된 영화인데 주인공과 과학자는 시간을 뛰여넘는 기계를 발명하여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잘 되게 하려는 일들이 운명의 장난처럼 뱅뱅꼬이면서 오히려 어렵고 복잡하게 만든다. 나중에 원상태로 돌아와서 타임머신이 기관차에 부딪쳐 박산이 난다. 주인공의 여자친구가 미래에서 가져온 나쁜 의미의 글들이 사라지고 백지로 변한다. 그때 과학자가 나타나서 하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라는 말이 기억에 오래동안 남는다.  운명은 중국글로 번역하면 명운(命運)이라고 한다. 나는 명운이라기 보다는 운명이라고 부르는 순서배열이 더 맞다고 생각한다. 명운은 숙명론적으로 들릴수 있지만 운명은 우리의 명을 리드한다는 의미가 더 잘 나타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명은 우리가 운전하는것이다.   밭에 곡식을 심지않고 수확을 거두기를 바란다면 바보라고 할것이다. 지금 어려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자그마한 씨앗부터 심는다면 좀 더 큰 수확을 거둘수 있고 그걸 기초로 차근차근 발전시킨다면 언젠가는 충분히 큰 수확을 이루게 될것이다. 자신의 재주를 믿고 오만과 욕심 방자함으로 가득찼던 손오공도 나중에는 자신의 진정 가야할 길을 찾고 나름대로의 정도를 찾아서 당승을 보호해 온갖 험난을 헤치고 서천에 이르지 않았는가?! 미래를 불안해하고 떨기보다는 용감히 맞서나가는것이 우리가 해야할 일일것이다. 전에 이런저런 여의치 않은 일들이 많아서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많았었는데 버드나무의 피여나는 아름다운 꽃과 꽃봉오리를 보면서 기분이 한결 상쾌해졌다.   꽃은 하루밤사이에 피고 버드나무는 하루밤 사이에 푸르러진다는 말이 있다. 하루밤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 준비하는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가?!   인생의 이치는 사람이나 버들이나 모두 같다. 운명은 기다릴줄도 알아야 하지만 준비하면서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버드나무 꽃을 보고 있으려니 어릴적 강가에서 뛰놀면서 버드나무가지로 모자를 틀어 만들어 쓰고 수양버들, 능수버들 하느적 거리는 강가에서 물장구치며 뛰여놀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시절이 어제같은데 벌써 몇십년이 흘렀다. 살짝 열린 창문가로 가을 바람이 밀고 들어오며 버드나무의 가지를 날린다. 문뜩 시흥이 일며 시조 한수가 떠올라 지어본다.   능수야 버들아 시골강가 뭐좋다고 추풍낙엽 이 시절에 꽃봉오리 맺고지고 길떠난 님 오실날 어이알고 꽃피느냐.     옛사람들은 자연의 풍치를 즐기며 시조를 지었다지만 집안 베란다에서 시조를 지어보는것 역시 아름다운 인생이 아니겠는가?
32    원망보다는 감사를 댓글:  조회:2656  추천:4  2015-09-11
  백로가 들어서부터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제법 쌀쌀하다. 따뜻한 날씨에 익숙해 있다가 불시에 찬기운이 닥치니 그 체감추위가 더욱 심하게 느껴지는가 본다. 오전에 출근하여서 내내 사무실에서만 일을 보았다.  이제 시작할 사업건의 대리점 계약서를 손질하고 이런저런 잡일을 보고 있을사이에 또 하루가 후딱 지나갔다. 점심시간에 대충 사무실에서 배달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옆방의 안마침대에 잠간 누워 생각한다는것이 잠이 들었나본다. 직원들의 말대로라면 내가 코까지 골더란다. 요즘 많이 피곤했나본다. 그리고 계절이 바뀌여서 그런지 자꾸 피곤하고 잠이 오는데 정작 누우면 잠이들지 못한다. 아까도 실은 잠이 들지 않고 뭔가 생각하고 있었던듯 했는데 코를 골았다니까 잠간 잠이 들긴 들었나 본다. 그러고 보니 그새 깜빡 비몽사몽간에 꿈같은걸 꾼것같기도 하다. 내가 큰 돼지 한마리를 타고 달리는 꿈을 꾸었다. 낮에 인터넷 사이트를 뒤지다. 경마하는 장면을 피끗 보았는데 그때문에 꾼 꿈인지 모르겠다. 오후 퇴근시간에는 불교연구회의 법당에 잠간 들러 향을 올리면서 짤막한 명상시간을 가졌다. 요즘은 일때문에 십여년간 진행해오던 리더십 강의를 미루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퇴근시간이 잘 맞춰져서 나도 퍽 편하다. 불교연구회에서는 어제 지장보살상을 모셔왔는데 그 모습이 온화하고 장엄해서 무척 맘에 들었다. 지난주 일요일부터 진행해온 에 맞추어서 후원이 들어온것이다. 그것도 법당부근의 사무실에 출근하는 한족아주머니인데 매일 오전이면 법당에 들러 향을 사르다가 발심하여 후원한것이라고 한다. 중국에는 그래도 한족신자들이 많기에 중국어로된 강의도 해야된다고들 하는데 내가 아직 준비되지 못한듯해서 계속 미루고 있다.   오후 5시가 넘어서 아이들 학교앞에가서 아이들을 마중하여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이들이 학교에서 잘해서 선생님한테 칭찬받았다고하니 또한 기분이 좋았다. 사람들은 그렇게 칭찬받기를 좋아하는가 본다. 나도 아이들이 학교선생님한테 칭찬을 받았다고 하니 좋은데 직접 칭찬을 듣는 사람들은 더 어떻겠는가. 우리 아이들은 조금만 진보했거나 상을 받거나 하면 언제나 아빠한테와서 칭찬받기를 원한다. 나도 기꺼이 기쁘게 칭찬을 해주고 애들을 안아주고 엉덩이를 척척 두들겨준다. 아들은 아빠에게 인정받기를 원하고 그 아버지는 또 사회에서 인정해주기를 원하는게 아닐까 싶다. 사람들이 모여사는 사회에서 서로의 인정을 갈구하는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도 어찌보면 우리 아이들처럼 사회의 인정이나 얻고 싶어서 강의도 하고, 일을 하고 있었던게 아니였던가 싶다. 그러나 열심히 일에 몰두하여 노력하였는데 그만한 보상이 오지 않을때 우리는 불평을 하게 되고 투덜거리게 된다. 그러나 불평과 불만을 토로한다고 해서 보상이 돌아온다면 모를까. 오히려 역 효과로 나쁜 결과만을 초래하는것이라면 그런것을 빨리 버리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학창시절에 나에게 가장 존경하는 분이 있다면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고 답하군 했다. 주은래라면 모두들 잘 아니까 길게 말하지 않겠지만 기를 전후해서 보통사람들이라면 언녕 불평불만을 폭발시키게 될 경우에도 불평없이 잘 해냈다. 그런것들이 그분이 점차 주위의 신뢰를 얻는 이유가 되였던것이다. 내가 존경했던 그분의 생활방식을 배워야겠다. 논어에도 이런 말이 있다. 라는 말이다. 우리말로 풀이한다면 다. 남들이 나를 전혀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것은 도리에 어긋난다는것이다. 나 자신이야말로 남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않나 생각해볼 일이다. 이말은 인간관계학에서 너무나도 지당한 말씀이다. 이것과 같은 말이 에 세군데나 나온다. 공자는 때에 따라서 제자들에게 이 말을 들려주었던것 같다. 초기 불교경전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 라고 한다. 문뜩 시흥이 나서 시한수 적어보았다. 이름은 라고 달았다.   불평은 언제나 모자라는 저울추 저울이 기우는것이 당연한것인줄 우리는 왜 모를까   저울추는 올라갈수도 또 내려올수도 있는것 오르고 내려감이 스스로의 무게때문인줄 우리는 알면서도 모른다.   불만은 밑빠진 항아리를 채우려는 미친생각 욕심의 항아리가 밑빠진줄 우리는 왜 모를까 애써 채우고 채워도 차지 않을것을 우리는 알면서도 모른다.   동전의 양면이 있듯이 음양의 변화를 알고 남북의 차이가 있듯이 동서의 역할을 알고 사물의 영원함이 없듯이 마음의 변화를 안다면   원망보다는 감사하고 미움보다는 사랑하게 될것을.     우리주변에는 환경과 타인을 불평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듯 싶다. 나도 그중의 한사람이 되지 말기를 기도해 보았다.    새벽에 일찍일어나서 어제 일기를 적다보니 머리가 더욱 맑아지는듯 하다. 따뜻한 이불속에 있을때도 좋겠지만 새벽녘에 일찍 일어나서 동네 길가를 산책하고 돌아오는것도 하루 일과에 무척 도움이 되리라. 하루를 짧다고 원망하기 보다는 하루를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는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아이들이 깨는 소리가 들린다. 주방에서는 아내의 즐거운 아침 요리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하루가 또 시작한다. 오늘도 행복하고 활기찬 하루가 될것같다.
31    아버지의 <비밀> 댓글:  조회:2741  추천:12  2015-08-26
   70년대 후반에 우리나라는 무척이나 어렵게 살았다. 내가 아주 어릴때였는데 그때는 집에서 밥을 지으면 수수밥과 약간의 이밥을 섞어서 만들군했다. 중국어로는 꼬량미(소리발음 高粱米)라는 것인데 그때는 그것이라도 배불리 먹을수 있다면 다 괜찮은 집안이였다. 어쩌다 시골에 계신 외할머니네 집에 가면 조밥을 먹을수 있어서 무척 좋았던 기억이 남는다. 그때는 배급제로 쌀을 나누어 주었고 돈이 있어도 쌀을 살수 없었다. 양표(양식표-粮票)라는것이 돈을 대신하여 있었는데 그 당시 중국에만 있은 특별한 유통화페였다. 양표도 전국통용되는것이 있었고 성급에서 통용되는것이 있었고 지방에서만 통용되는것이 있었다. 양표가 많으면 그나마 배불리 먹을수 있었다. 지금도 우리집 어느 서랍속에는 그때 아껴서 모아두었던 양표가 한묶음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걸 아끼지 말고 다 먹었으면 좋았을텐데 하고 후에 와서 생각해보았지만 부모님들의 그런 근검절약하는 정신이없었으면 어떻게 우리 삼형제에 할머니까지 여섯식구가 그 세월을 날수 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군한다.   할머니는 옛날 사람이여서 남존여비사상이 깊숙히 배여있었다. 그래서 집에서 밥을 해도 한쪽 구석에 약간의 이밥과 수수가 섞인 밥은 우리 아버지와 장손인 내 몪이고 그냥 수수밥 혹은 옥수수밥은 당신과 나의 어머니 그리고 두 누나들의 몪이였다. 그래도 그때 세월에는 서로 군소리 없이 한가마밥을 가득 퍼서 잘들 먹었다. 채소는 마당에 심어서 조금 먹을수 있었으나 콩기름같은것은 사기가 힘들었다. 어쩌다가 궈즈(한족들의 기름튀김 음식)에 콩물을 팔때면 새벽부터 누나들과 내가 나가서 길다랗게 줄을 서야했다. 그렇게 먹던 그 음식들은 모두 별미였고 천하 일품이였다. 그래서 천하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산해진미도 아니고 배고플때 먹는 것이라고 했나본다.    아버지는 그때 문화혁명의 억울함이 풀려서 시골양봉장에서 다시 현 토산공사에 오게 되였다. 그때 토산공사는 지역의 토산품과 특산물을 통일로 거두어들여서 큰 도시에 가져다 파는일을 했는데 장사를 못하게 하는 세월이라 대부분 국영 아니면 집체 기업이였다. 아버지는 중국글이든 우리 글로된 문장이든 뭐든지 잘쓰시고 또 붓글씨도 명필이시라(적어도 내가 볼때는 명필임이 틀림없다.) 얼마안돼서 고장(지금의 과장에 해당함)이 되셨다.  그때는 종축장이라는데서 통일로 소를 잡았는데 고기와 뼈는 팔아도 소가죽은 국가에 바치게 돼있었다. 그걸 거두는 일을 토산공사에서 했던것이다. 그런데 요즘 세월같으면 한국바람에 연변에서도 소꼬리값이 천정부지 올리솟아서 비싼 요리가 되였지만 그 당시 우리 풍습에는 소꼬리를 먹지 않았다.   소가죽을 팔러오는 농민들은 대부분 소꼬리가 그냥 디룽디룽 달린 소가죽을 가져오군 했다. 지금도 대부분 한족지역의 한족들은 소꼬리를 먹지않는다. 그때 토산공사에서는 소꼬리는 가죽공장에서 받지 않으니까 그냥 끊어서 버리군 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는 그런 소꼬리를 끊어서 자전거 뒷짐싣는곳에 끼워 가지고 오셨다. 어머니가 웬 소꼬리를 가져왔느냐고 물을때도 아버지는 아무 말씀 않으셨다. 한참지나 우리가 숙제를 마치고 있을라니 어디선가 고기굽는 고소한 냄새가 났다. 그때는 고기한점을 먹을려면 설날이 돼야 겨우 한두점 맛볼 정도였다. 우리가 마당에 뛰여나가보니 아버지가 화로불에 소꼬리를 굽고 계셨다. 털을 다 그슬리고 있었는데 고기가 같이 타면서 나는 냄새에 군침이 스르르 돌았다. “아버지,이걸 먹을수 있는거예요? ” 하고 물어보는 내 물음에 아버지가 하고 입을 막는 시늉을 하셨다. 우리가 사는 집은 회사에서 통일로 지은 집이였는데 단층 구조로 줄줄이 서있는 구조였다. 비록 널판자로 서로 담장은 만들었지만 한 회사에 근무하는 사람들 지간이라 소리나 냄새가 나기 마련이였다. 나는 혀를 홀랑내밀고는 입맛을 다시며 아버지 주위를 뱅뱅 돌았고 저녁이 되여 우리는 뜨끈한 소꼬리 곰탕에 밥을 말아먹을수 있었다.   그렇게 몇년동안 우리는 고기걱정없이 잘 먹으면서 컸다. 어떤때는 토산공사로 팔려 가져오는 가죽이 하루에 열장씩 들어올때가 있는데 꼬리가 열개씩 들어오면 냉장고도 없는 세월이라 그냥 큰가마에 넣어서 푹 고와먹었다. 그때 그맛을 정말 말로 표현할수 없다. 그렇다고 누구와 나누어 먹을수도 없는 입장이였다. 그 어려운 세월에 그런 이 폭로되면 언제 우리한테 꼬리에 붙은 털오리라도 차례지겠는가?   아버지가 회사의 신문종이에 소꼬리를 싸서 자전거에 달고 올때면 어떤사람들이 의아해서 물어보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면 아버지는 재치있게 “어디 누가 약재에 쓴다고 구해달라고 해서 그러오.”라고 했단다.    요즘같으면 자기자식이나 손주들을 “귀여운 내새끼, 우리 강아지”하면서 안아주고 보듬어주었지만 그때는 어림도 없었다. 아버지는 비록 우리에게 그런 사랑표현을 하지 않으셨지만 우리 형제자매는 그냥 눈빛만으로도 부모님의 사랑을 읽을수 있었다.   그렇게  어머님이 정성들여 끓여주는 음식을 먹으면서 아버지의 사랑이 담긴 그가 우리에게는 최고의 보신탕이되였고 부모님의 사랑을 피부로 느끼는 순간순간이였다.  지금 내가 아버지가 되고보니 내 자식이 어쩌다 학교에서 장난을 치다 점심이라도 거르면 그만큼 가슴 아픈일이 없다. 지가 장난치다가 점심시간을 잊어먹고 지났다해도 가슴이 아픈데 그 없던 세월에 자식들한테 맛있는 음식은 혹 아닐지라도 그냥 배불리 먹일수만 있다면 세상의 아버지들이 누군들 마다하셨을까.    그렇게 나는 언제나 맛있는 소꼬리 곰탕에 지금은 웰빙음식이라고 찾아먹는 수수밥을 말아먹으면서 행복한 동년을 보낼수 있었다.   그때 생각을 할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지혜가 너무 돋보이군한다.
30    도전과 변화 댓글:  조회:2427  추천:4  2015-08-15
   크리스토퍼리더십코스가 오는 9월22일에 중국에서 개강하게 되였다. 연변에서만 벌써63기째다. 내가 크리스토퍼리더십코스를 받은지도 벌써 10년이 넘는다. 그새 한국의 크리스토퍼도 많은 발전을 해왔을것이지만 중국연변의 크리스토퍼리더십도 그 씨앗이 뿌려져 어느덧 새싹이 돋아나고 있다.   한국크리스토퍼리더십코스는 캐나다로부터 한국에로 한국에서 다시 중국연변에로 진출하게 되였다. 그간 정말 많은 분들이 연변에서의 강의를 위하여 봉사차 다녀갔는데 우리 중국의 조선족사회 발전에 이름할수 없는 큰 힘을 심어놓았다. 정신적 씨앗의 힘은 물질적인것보다도 더 소중하고 가치가 있다. 물론 받는 사람들은 바로 물질을 받듯이 순간적인 느낌이 덜하더라도 우리 지역사회의 건전한 발전과 전반 조선족사회의 미래에는 그만한것이 없다고 생각든다. 크리스토퍼리더십센터의 김동수 원장님은 참으로 존경할만한 분이시다. 실은 그분과 이렇게 오래동안 함께 어떤 일을 진행하게 될줄은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크리스토퍼리더십센터 연변센터를 내오면서부터 김동수 원장님의 리더십과 실행력 그리고 삶의 바탕으로 깔린  그분의 인격에 감복해온지가 오래되였다. 한 사회를 바꾸는데는 많은 사람들의 참여가 필요하지만 그 시작은 언제나 몇명의 리더로부터 시작한다. 뜻이 있는곳에는 길이 있다고 했듯이 생각이 같은 사람들이 모이면 어떤 일도 해낼수 있다.   크리스토퍼리더십코스는 11주간 진행되는 효과적인 의사소통을 기본 목적으로 하는 코스인데 연변에서는 줄곧 집중코스로 10일 연속 진행되는 코스로 해왔다. 그러다나니 코스 참가자들한테는 엄청난 부담이 아닐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 연변의 많은 분들은 아주 어려운 코스였지만 너무나도 잘 완성하였다. 처음 대인연설을 위하여 파워포지션에 나갈때면 떨리고 두려웁지만 용기를 가지고 따라하면서 우리는 용기를 배웠고 도전을 통한 성취감을 맛보았다.   어떤것이든 시작이 있어야 그 결과가 있다. 도전을 하는 자에게 비로서 성취가 있는것이다. 이런 우화한편이 기억난다. 봄이 되니 막 씨앗들이 싹을 틔우기 위해 분주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비옥한 땅에 누워있던 두알의 씨앗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첫번째 씨앗이 말했다. “너는 얼마만큼 자라고 싶니?” 두번째 씨앗이 대답했다. “나는 솔직히 밖에 나가기가 좀 겁나, 바람도 많이 불고 때론 비도 올 거고 뜨거운 태양 아래서 어떻게 견뎌 내야 할지 너무 걱정돼.” “왜 그런 걱정을 하니? 그런 바람이나 비, 태양은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주는 친구야. 그들이 있어야 우리는 밖에 나가서 더 강하고 튼튼한 열매가 될수 있어” 그래도 두번째 씨앗의 표정에서는 어두움이 사라지지 않았다. 씩씩한 첫번째 씨앗은 계속 말했다. “나는 열심히 자랄거야! 뿌리를 길게 내리고 줄기는 곧게 뻗어서 바람을 따라 몸을 흔들며 봄을 노래할거야. 봄의 따스함을 맘껏 느끼고 잎사귀에 떨어지는 아침 이슬의 희열을 맛볼테야. 가을이 되면 풍성한 열매를 맺어 사람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싶어.” 첫번째 씨앗은 풍성한 열매를 맺겠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하루하루 열심히 토양의 영양분을 빨아들여 자랐다. 얼마 뒤 그 씨악은 새싹을 틔웠고 조금씩 위로 뻗어 나갔다. 옆에서 지켜보던 두번째 씨앗이 말했다. “나는 여기 좀 더 있다가 나갈래. 땅속으로 뿌리를 내리면 단단한 돌에 부딪힐거고. 힘껏 땅위로 뚫고 나간다 해도 연약한 줄기가 다치고 말거야. 여린 새싹이 돋아나면 소가 먹어 버릴지도 몰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면 아이들이 뿌리까지 뽑아 버리겠지. 아무래도 상황을 좀 더 지켜보다가 안전해지길 기다려야겠어.” 그래서 두번째 씨앗은 땅속에 계속 숨어 있었다. 며칠후 암닭 한마리가 모이를 찾아 먹으며 마당을 이리저리 쪼아 대고 다녔다. 땅속에 숨어 있던 두번째 씨앗은 그렇게 암닭의 배속으로 들어 갔다.   그새 한국의 많은 조직과 자선단체에서 중국의 조선족 사회를 위하여 돈과 정력을 쏟고 있지만 크리스토퍼처럼 꾸준하게 말도 없이 십년가까이 연변과 중국에서의 리더십 발전을 위해 노력해온 회사는 없을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연변에 올때 연변과학기술대학의 학생들을 상대로 코스가 시작되였다. 한국크리스토퍼의 김원채 사무총장님이 이 코스를 이끌고 중국을 십여차례 다녀갔다. 무보수로 봉사차원에서 강의를 위해서 많은 강사님들이 함께 해주셨다. 그 당시 크리스토퍼의 중국진출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부정적인 시각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김동수원장님의 강한 리더십과 김원채 사무총장님의 강한 집념으로 연변에서 매년 끊이지않고 크리스토퍼는 진행되여 왔다. 많은 사람들은 어떤 일이 안전한지의 여부를 확인한후에야 비로서 일에 착수하려고 한다. 이는 새로운 일에 대한 두려움이 크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자리잡은 두려움은 실패를 만드는 원인이 된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보면 결국엔 어떤 일도 시작하지 못하게 된다. 한국크리스토퍼리더십센터 김원채 초대사무총장님은 크리스토퍼리더십코스 강의중 쓰러지셔서 영영 일어나시지 못하셨다. 그러한 그분의 정신이 씨앗이되여 연변에서는 점차 크피스토퍼의 꽃이 피여나고 있다. 후임을 맡으신 한용현 사무총장님도 매년 수차례 한국의 강사님들을 이끌고 연변에 오신다. 일년에 한두번도 아니고 4차 5차씩 연변에 오셔서는 매번 보름가까이 강의를 진행한다. 오전에는 과학기술대학의 학생들을 상대로 진행하고 저녁에는 지역사회의 리더들을 상대로 진행한다. 이제는 크리스토퍼도 연변에서 집중코스뿐이 아닌 정규과정으로 진행하려고 준비하는 단계이다. 에치투오 리더십코스를 진행하고 강의해오면서 항상 느끼는 여러가지 메시지가 있다. 에치투오가 발전하고 지역에서 자리잡기까지 크리스토퍼가 없었다면 과연 그렇게 잘 진행될수 있을가하는 생각이다. 한용현 사무총장님은 에치투오 강의에 방청하시면서 많은 조언과 방법을 제시해주신다. 그분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현재의 크리스토를 발전시켰으리라는 생각이들고 내가 스스로 개발하고 진행해온 에치투오리더십의 발전에도 크리스토퍼의 공헌이 다분히 담겨있다. 몇년전 크리스토퍼리더십센터 연변센터소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에 나는 십분 망설였던적 있다. 그러나 고민은 잠간이고 기꺼이 그 직책을 맡아 오늘까지 진행시켜왔다. 잘 되였는지 잘 될지는 그 다음 문제이다. 기꺼이 어떤 일을 맡아서 하려는 자세가 우리를 발전시킨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만히 방 안에만 있으면 자신을 발전시킬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오히려 퇴보할 뿐이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이 기회가 될수 있다는 사실을 크리스토퍼를 진행하면서 깊이 느꼈다. 스페인의 사상가 오르테가 이 가제트는 “노력이야말로 진짜 스포츠이다”라고 말했다. 오르테가는 사상가였지만 사냥도 좋아했다. 말과 일체가 되어 들과 산을 돌아다니며 사냥을 했다. 말은 숨을 헐떡이고 사람은 떨어지지 않으려고 꼭 매달린다. 때로는 호수가에 군생하는 갈대숲에 앉아 있기도 하고 몇 시간이나 할일없이 사냥감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무엇을 위해 이런 고생을 하는가 하고 자문자답해 본다. 일과 달리 그런 노력이 돈과 명예를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냥이나 낚시질의 고생을 불평하지 않는 것은 왜서 일까? 영혼의 자유가 있기 때문일것이다. 돈이나 명성과는 달리 순수한 기쁨이 있기때문이 아니겠는가? 누군가가 강제로 시키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장애와 고통을 극복해 갈때 그 과정 자체가 즐거운 것이다. 사냥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스포츠에 공통되는 즐거움이다. 이 세상은 빠르게 발전하고, 변하고 있고 우리도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옛날 우리의 할아버지들이 평생동안 하셨음직한 결정들을 우리는 일년안에, 한달안에 다 하기도 한다. 가만히 있기에는 변화는 무서운것이다. 육체의 변화도 그렇지만 우리 마음의 변화가 더욱 그렇다. 모든 일에 도전할때 일이 아닌 스포츠를 즐기는 마음으로 한다면 능률은 엄청나게 향상 될것이다.  크리스토퍼를 하는 모든 강사님들은 그러한 마음으로 하고 있는듯 하다. 에치투오를 진행하는 모든 강사님들과 봉사자들, 모두 스포츠를 하는 마음으로 봉사의 의미를 가진다면 영혼의 즐거움은 훨씬 커질것이며 봉사가 순수할수록 인생은 더 아름답고 느끼는 행복의 크기도 더 커질 것이며 영혼이 자유로울수록 성취감은 더 깊어질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일은 한국 크리스토퍼리더십센터 한용현 사무총장님 일행이 새로운 개강을 위해 오시는 날이다.  은근히 잠이 오질 않는다. 월요일의 도전적인 한주가 기다리고 있기때문이리라. 한주가 모여 한달이 되고 한달이 모여 일년이 되고 그 일년들이 모여 우리의 인생이 만들어진다. 내일의 도전 오늘의 도전들이 모여 성공과 성취를 만드는것이 아니겠는가. 소중한 내 인생, 도전을 받기보다는 도전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고 매일 매일 도전과 성취로 가득 채우고 싶다.  
29    아버지의 빈자리 댓글:  조회:2558  추천:2  2015-07-31
   꿈결에 가끔씩 아버지를 보면 나는 꺼억꺼억 많이 운다. 그렇게 울다가 깨나군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도 벌써 일년이 가까워 온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그것이 사실같지 않다.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려고 할때면 한없는 슬픔이 밀려들어와서 나는 스스로 다른 일들을 찾아서 함으로서 그 생각을 외면하군 했다.   아버지의 빈자리가 이렇게 클줄 나는 미처 몰랐다. 어려서부터 엄청난 개구쟁이였던 나에게 아버지는 한결 같으셨고 언제나 하늘같은 분이셨다.   내가 어릴때 가끔씩 엉뚱한 사고를 지르고 들어오면 아버지는 사건의 경위를 꼼꼼히 물으셨다. 그리고나서야 꾸중도 하고 벌도 내리셨다. 아버지는 엄하고 가끔씩 꾸중도 하셨지만 한번도 매를 드신적은 없으셨다.   한번은 꼬마 친구들과 강변에 수영하러 갔다가 하마트면 물에 빠져 죽을번한 사고를 당했다. 물속에서 쥐가 나서 물을 몇모금 먹은후 나는 허우적거리다 하얀 을 봤다. 그때 다행히 우에 학년에 다니던 형이 강물에 뛰여들어 우리를 구해냈다. 혼쭐이나게 꾸중을 들었지만 나는 물속에서 본 그 하얀옷을 입은 여인이 계속 생각났다.  그때 아버지한테서 에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물귀신은 물속에 빠져죽은 사람의 혼인데 억울하게 죽은것이 원통해서 그 자리에 남아있는다고 했다. 다른 사람을 대신 끌어들여서 자기 자리를 메워야만 다시 왕생할수 있다는것이다. 나는 깜짝 놀라서 그 다음부터 다시는 강변에 수영하러 가지 못했다.   또 한번은 우리 학교 어느 선생님이 미워져서 가만히 그 선생님네 집 자물쇠 구멍에 성냥가치를 밀어넣어 끊인후 자전거 기름까지 가득 발라놓은 일이 있었다. 그때 함께 일을 진행했던 친구중에 가 나타나서 전체 학교대회에서까지 비평을 받은적이 있었다. 그때도 아버지는 크게 책망하지 않았다. 사건의 경위를 다 들으신후 벌로서 내가 매달 꼭 사군했던 그림책 를 살 용돈을 취소했다. 나는 어릴때부터 책읽기를 좋아해서 용돈만 생기면 서점에 달려가서 책을 사군했는데 그렇게 책을 살수없으니 정말  답답해 미칠지경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가쓴 아동소설이 발표되였는데 글 속의 주인공의 이름은 나와 달랐지만 글 속의 내용은 내가 저지른 실수들이 대부분이였다. 아버지는 시도 쓰시고 소설도 쓰셨지만 그때부터 아동소설을 쓰기 시작했던같다. 그렇게 아버지 글속에서 나의 스스로의 잘못을 다시 들여다보며 나는 용케도 바르고 꿋꿋하게 잘 자라났다.   내가 처음 좋은 직장을 버리고 사업을 시작할때 아버지가 나한테 권고한것이 있었다. 였다. 그때 나는 스스로 내가 가장 똑똑한줄 알고 있을때였다. 그래서 그 말뜻을 리해하지 못햇다.  아니 리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지나가는 말로 들었고 귀등으로 흘려들었을 뿐이였다. 그러다가 정말 많은 실수에 실패를 경험하면서 나는 비로서 아버지의 그 말씀을 이해할수 있었다. 세상사람들은 정말 모두 나보다 총명했다. 내가 비록 작은 총명으로 그들을 속이려 했지만 그들은 한번도 속지 않았고 속은듯 했지만 최종 결과는 내가 속은것임을 나중에야 알아차리군 했다.  이제야 그걸 알고 바르고 정직하게 사업을 하니 그제서야 사업이 성장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내 아들이 그렇듯이 나는 언제나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를 원했다. 아들의 성공을 가장 기뻐하시던 아버지가 옆에 계셔서 나는 언제나 든든하고 행복했었다. 아버지는 전원주택을 좋아하셨고 양봉을 좋아하셨다. 요즘도 친구들과 가끔 어떤 산장이나 시골에 놀러가면 <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이런곳에 별장을 지어드렸을텐데.>하고 가슴을 어루쓸군한다.   어제는 아버지의 생일 제사날이여서 어머님을 모시고 큰누나와 작은 누나네 그리고 우리 부부가 함께 산소에 다녀왔다. 어머님이 더 슬퍼하실까봐 나는 울수 없었다. 모르쇠를 대고 별로 슬프지 않은척했다. 내 슬픔을 숨기고 싶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때 비록 어떤 종교를 믿으신건 아니였지만 우리는 가까이에 있는 사찰에서 아버지가 극락왕생하시길 기원했다. 그리고 가지고 갔던 제사 음식과 작은 들것들을 누나와 안해에게 들려내려보내고 혼자서 속으로 하면서...부처님께 절을 하며 그냥 펑펑 울었다.  
28    인생의 즐거움 댓글:  조회:2705  추천:2  2015-07-25
   8년동안 한 사무실에서 일을 하던 왕진풍 선생이 퇴직을 했다. 민정국에서 근무하다가 퇴직한후 집에 외롭게 있기보다는 일하는것이 편하다고 하여서 우리 협회 기관지였던 신문사 (후에 잡지사로 개편) 편집으로 오게 되였었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여  8년넘게 함께 일하게 되였다. 나이는 많지만 그야말로 부지런하고 재간있는 분이셨다. 비록 한족이였지만 우리 글과 우리 말을 할줄 알았고 예순살이 넘어서 우리 협회 사무실에 왔지만 사무실에 오는날 부터 컴퓨터를 학습하여 각종 자료와 일상 사무는 컴퓨터로 다 할수 있었다. 또한 아침에 일찍 나와서 일본어 공부를 하고 저녁에는 영어공부까지 한다. 그렇게 열심히 사시는 분과 옆에서 함께 일하니 젊은 우리가 게으름을 피우려 하다가도 다시 몸가짐을 바로 하게 되군했다. 요즘 그분이 없는 사무실은 한자리가 빈듯하고 은근히 보고싶기도 하다. 그분은 나가시면서 그간 고마웠다고 나한테 선물로 건강식품을 주고 갔다. 그걸 받고 참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본래 그렇게 만나고 헤여지는것이지만 정작 오래동안 일해온 사람과 헤여지게 되니 아쉬움이 크다. 인연이란 언젠가는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그 무엇일지도 모르지만 함께 했던 모든 사람들과의 소중했던 인연들을 그냥 물거품처럼 꺼버리기에는 인간으로서 한계가 있다. 인생은 그렇게 만나고 헤여지는 연속이다. 우리는 계속 만나고 계속 헤여진다. 사랑하던 사랑하지 않던, 미워하던 미워하지 않던, 모든 생겨난 사물은 언젠가는 소멸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인생이 참으로 허무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허무할지라도 주어진 인생에는 즐거움이 있다. 옛날 공자와 맹자는 사람을 두가지 부류로 나누어 보았다. 하나는 소인이고 하나는 군자이다. 그들은 군자를 이상적인 사람의 형태로 부각시켰다. 군자는 훌륭한 인물이며 우리는 군자가 되기위해서 배워야 한다는것이 전반적인 공맹사상이라 할수 있다. 군자와 같이 훌륭한 인물에게는 세가지의 즐거운 일이 있다고 한다. 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부모가 모두 살아계시고 형제가 무고한것이 첫번째 즐거움이요,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아래로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는것이 두번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 이를 교육함은 세번째 즐거움이라.’고 했다. 이것을 우리 현대적은 표현으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부모가 함께 살아계시고, 형제가 모두 건강한것. 둘째 언제 어디서나 양심에 꺼리낌이 없이 살아가는것 셋째 훌륭한 영재를 발견하여 그 성장을 도와주는것. 이와 같이 인생을 즐기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수 있겠지만 맹자가 말하는 군자로서의 세가지 즐거움은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나로보아도 부모님이 함께 살아계시고 형제가 모두 건강하고 화목하게 지내고 있으니 그 즐거움이 크다고 하겠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서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줌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성인의 경지에 이르려면 아직은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죽는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그렇게 자신을 다지고, 고치고 배워나간다면 그것이 맹자가 말하는 군자의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내가 개발하고 진행하는 에치투오 리더십교육도 이제는 루계로 만여명에 이르렀다. 내가 즐거워서 하는 일이니 비록 적자 교육이지만 즐거움이 가득하다. 이런 의미로 보니 나도 군자와 가까와지는듯해서 잠시 나마 또한 자아도취되여 기분이 자못 흡족하다. 모든 사람들은 그러한 자아도취적인 즐거움을 가지고 있는듯하다. 오늘은 이달 말 한국출장을 위해 티켓을 예매했다. 교육에 발이 묶여서 외국출장 한번 다녀오기가 여간 쉽지 않았었다. 그래서 언제나 여러가지 여건들을 한데 묶어서 출장을 시도한다.  세계 한상대회가 한국에서 열리고 국제 ‘영 리더포럼’에 마침 초대되였다. 크리스토퍼리더십센터의 연말 한국의 전체모임이 한편 한국 경기에서 열리고 비즈니스 차원에서 여러명과 또한 미팅을 예약해놓은 상태이다. 그렇게 출장도 그냥 편하지만은 않지만 그안에도 즐거움은 있다. 출장을 걱정해주시는 부모님이 계셔서 행복하다. 미국의 경기불황으로 전세계에 경제 위기의 찬바람이 불어치고 있는 이때 전 세계적으로 주가가 폭락하고 부동산이 침체되고 경기가 가라앉는것이 보인다. 이럴때 한국으로 출장가서 큰 성과가 없을터이니 조용히 본업을 지키면서 경기회복을 기다리는것이 정도라고 옆의 어르신들이 타이르신다. 그러나 내 맘은 그렇지 않다. 아직 젊고 정열이 끓어올라서 더욱 가만히 있지 못한다.   실은 나도 이번 출장길에 비즈니스에는 크게 승부를 걸지 않는다. ‘한상대회’나 ‘영 리더 포럼’에 참가하지 않는다 한들 나한테 손해 올것도 없다. 크리스토퍼 모임에도 금년에 참가못하면 내년으로 미뤄도 된다. 그러나 이럴때일수록 도전에 응하고 작은 힘으로라도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자 하는것이다. 그것이 내가 해야할일이고 우로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려는 나의 노력이고 의지인것이다. 그렇게 하는것이 즐거운데 누가 어쩔것인가. 돌아오는 11월29일은 에치투오 리더십코스를 개발하여 개강한지 만 15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에치투오의 생일인것이다. H2O교육을 개발하여 사람들에게 진행하다보니15년이란 세월이 눈 깜짝할사이에 흘러가버렸다. 에치투오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참 목표를 찾고 큰 발전을 가져왔다고들 한다. 그런분들의 사례를 들으면서 참으로 에치투오 교육을 진행하게 된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할때가 많다.     지난기에 어느 한 아주머니는 몇년전 내가 방송에서 진행하는 프로를 듣고 찾아왔다고 한다. 강의중 휴식시간에 예약도 없이 문뜩 찾아오신 분이셨는데 그분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특별 장학생으로 학비를 면제하고 코스를 이수시켰다. 그분은 건강이 아주 나쁜 상황에서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하나를 데리고 살고 있었다. 학비때문에 아들도 휴학한지 일년이 넘었고 그분도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서 집에서 누워앓는 오랜 환자였다. 자신의 삶과 인생에 비관하다가 아들과 함께 자살까지 하려고 가스를 틀어놓은적까지 있는 분이였다. 그런 그분이 우연히 에치투오와 인연이 되였던 것이다. 에치투오를 받고 다시 삶의 용기를 찾고 병마와 싸워 자리에서 일어나서 아들의 학업을 위해 뛰여다니신다. 요즘은 어느 보험회사의 보험설계사로 들어가셔서 새로운 삶을 사신다. 얼굴도 밝아지고 에치투오 강의때면 언제나 찾아와서 방청을 하면서 소감을 이야기하신다.   물론 이러한 사례를 들려면 끝도 없다. 남편과 이혼하려고 법정까지 갔다가 에치투오를 받고 다시 가정을 찾은 사람, 경제난때문에 헤매이다가 코스에서 투자자를 만나 창업에 성공한 사람, 대남자주의이던 남편이 안해의 양말을 세탁하고, 집에 들어오면 손가락하나 까딱하지 않던 남편이 직장 생활하는 안해를 위해서 아침을 하는등 정말 셀수가 없을 지경이다. 우리 인터넷 카페의 ‘에치투오 소감’란에 보면 그들이 올린 소감이 가득 올라있다.  이런 하나하나의 사례가 나를 감동시키고 내가 계속 이 교육을 운영하게끔 하는 동기로 된것이다. 경제가 어려울때는 적자교육이 참 힘들다. 그러나 내가 개발하고 내가 강의를 해서 그런지 이 교육이 마치 내가 낳은 자식처럼 애정이 간다. 힘들지만 즐거운것이다. 일하다가 힘이 들때면 나는 항상 스스로에게 격려하군 한다.  “지금 나는  분명하고도 잘못 될수 없는 법칙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 H2O의 법칙은 분명하고 완전한 우주의 법칙이다.” 에치투오의 마지막 강의인 ‘자연의 법칙’의 내용이다. "우리는 시작하기전에 그 결과를 알고 있다. 성공할거라는 분명한 확신이 열정을 최대한 끌어올리는것이다. "나는 언제나 열정으로 충만돼 있고 내가 즐거워하는 일에 몸을 담고 있다. 그래서 더욱 인생이 신이난다.   왕진풍 선생과 김일 과장등은 내가 에치투오 리더십강의를 시작할때부터 지금까지 함께 해준 사람들이다. 여러가지 경제적인 여건도, 교육 환경도 좋지 않았고 어려움도 많았지만 끝까지 옆에서 지켜주었고 함께 해준 분들이다. 출장다녀와서는 에치투오의 생일을 우리끼리라도 조촐하게 치러야겠다. 나한테는 나의 생일보다도 에치투오의 생일이 보다 뜻깊다. 아니 그전에 왕선생의 퇴직 파티를 먼저 열어주는것이 순서일듯 싶다. 오래동안 좋은 동료, 친구, 어르신으로서 우리에게 도움과 힘이 돼주신 분이시다. 얼마안되는 센터의 직원들끼리라도함께 내일 왕선생을 모시고 술 한잔 해야겠다.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난 이야기 나누며 술잔을 나눌걸 생각하니 출장길이 벌써 즐겁다.  
27    묵언(默言) 댓글:  조회:2439  추천:0  2015-06-21
 날씨가 너무 무더워서 에어컨을 켰더니 대뜸 시원해난다. 벗어두었던 웃옷을 다시 껴입으며 이런 사치가 어디있을까 싶다. 아마 옛날의 제왕들도 여름밤에는 더위에 시달렸으리라. 그런데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현대문명의 산물로 자연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고 있다. 시원한 여름밤을 보낼수 있어서 좋았지만 그 이튿날 아이들 전부가 코물을 흘리며 기침이 멎지 않는다. 감기에 걸린것이다. 안해는 내가 밤새 에어컨을 켠탓이라고 말했다. 여름감기가 훨씬 무서운듯 했다. 아이들에게 미안하기도 했지만 무더운 여름밤을 그냥 보낼 자신이 없었다. 밤새 샤워를 세번이나 하고났지만 그래도 무더위는 물러가지 않는다. 이튿날 일찍 백화점에가서 선풍기 하나를 사왔다. 백오십원하는 자그마한 선풍기다. TV를 놓은 작은 탁자 옆에 선풍기를 놓고 돌리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런데 한참을 바람앞에 앉아 있을라니 저도 몰래 기침이 났다. 선풍기의 머리를 돌려서 바람의 방향을 이리저리 돌게끔 해놓았더니 아까보다는 시원하지는 않았지만 기침은 더 이상 나지 않는다.   자연은 그런것인가 본다. 억지로 만든 시원함이나 억지로 만든 바람 모두가 그렇게 좋은것만은 아닌듯싶다. 동전의 양면이 있듯이 모든 물건에는 반대되는 면이 있기 마련이다. 음양학자들은 그런것을 음양의 법칙이라고 하고 주역학자들은 그런것을 역(易)의 법칙이라고도 한다. 즉 변화의 법칙이라는것이다. 모든것은 변화하고 고정불변의 것은 없다는 말이다. 이십여년전에 장춘에 있는 사찰 반야사(般若寺)에 갔다가 얻어온 “육조법보단경” (六祖法寶壇經) 이란 책을 읽었었는데 거기에 있는 한구절이 오래동안 기억에 남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쉽게 변하는것이 바로 마음이다” 는 말이다. 그 구절을 읽는 순간 아주 충격으로 다가왔던 기억이 난다. 그전까지는 내 자신의 마음을 믿고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가장 쉽게 변하는것이 마음이라는”그 말이 너무나 맞는 말이여서 더 충격이 컸었던것같다. 우리의 마음은 가만히 앉아있는 순간에도 수백가지 생각으로 충만되였다 사라진다. 마치 하늘가득 뭉게구름이 피였다가 사라지듯이, 바다의 물결이 넘실대듯이, 절주가 없고 규칙도 없다. 그냥 왔다가 사라지는것이다. 그만큼 우리의 마음은 믿을수가 없고 뜬구름같다. 수천만번 사랑한다고 외치다가도 또 다른 사랑이 생기는 순간 어이없이 떠나가는 사람들이 있듯이 우리 마음속의 사랑이나 우정이나 모든 감정들은 저 바다속의 파도나 하늘가의 구름처럼 넘실댈뿐이다. 그렇게 변화가 빠르고 변덕스러운것이 우리의 마음이다. 그러한 마음을 대표하는것 중의 하나가 있다면 바로 우리의 말이다. 말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항상 떠오르는 속담이 있다.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이다. 그만큼 비밀은 없다는 말이 되겠다. 나는 스트레스가 쌓이거나 심신이 피곤할때면 어김없이 목욕탕을 찾는다. 목욕탕에서 뜨거운 물속에 잠겨서 지친 피부를 쉬우고  휴식실에서 한숨 자면서 밀린 피로를 풀고나면 몸과 마음 모두 거뜬해진다. 그런 즐거움도 요즘은 제대로 누릴수 없게 되였다.   지난번 있었던 일이다.  목욕을 마치고 가운으로 갈아입고 휴계실에 들어갔더니  휴일이 아니여서인지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다행이다 싶었다. 편한 자리를 찾아서 누워서 잠을 청하는데 옆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뒤따라 들어온 아줌마 둘이 앉아서 입담을 벌여놓기 시작한것이다. 각자 아이들 자랑에서부터 남편자랑을 해대더니 이어서 시누이 욕을 해대기 시작한다. 도무지 참을수 없어서 몸을 뒤척이면서 돌아 누웠지만 막무가내이다. 이어서는 시어머니와 시아버지 흉을 보고 욕을 하는데 도무지 사람의 입을 가지고는 담지 못할 욕까지 곁든다. 내가 잠든줄 아는지 하는 말들이 꺼리낌이 없다. 그렇게 욕을 해댄다해서 마음이 후련해질지는 모르나 자신들의 인생이나 주변에는 어떤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될는지는 모르는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불평과 불만을 가진 사람의 눈에는 상대의 나쁜면만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심코하는 말이건 뜻을 담은 말이건 간에 든는 귀가 바로 곁에 있다. 불교의 초기경전인 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은 태여날때 입안에 도끼를 가지고 나온다. 어리석은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함으로써 그 도끼로 자기 자신을 찍고 만다.” 우리는 말을 안해서 후회되는 일보다도 말을 해버렸기 때문에 후회되는 경우가 더 많다. 불교 일화가 한편 있다. 부처님의 십대제자중의 하나로서 신통제일로 알려진 “목련존자”에게는 구설이 많은 어머니가 있었다. 그녀는 생전에 남을 비방하고 헐뜯고 자신의 생각과 다른점이 있으면 반드시 그 사람을 욕설로 비난하기를 업으로 삼았다한다. 그런 그녀의 아들이 부처님에게 출가하여 큰 능력을 얻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염려되여 능력을 열어서 세상 뜬 어머니의 영혼을 살폈는데 어머니는 죽어서 이미 지옥으로 내려갔고 생전에 남을 헐뜯고 욕한 대가로 지옥에서 엄청난 고통에 모대기고 있었다. 그런 어머니를 구하려고는 하나 자신의 힘이 부족하여 부처님께 사정을 이야기하고 빌었더니 부처님께서 친히 제를 지내서 그의 어머니를 지옥에서 구출했다는 이야기이다. 그것이 바로 불교에서 해마다 한번씩 꼭 진행하는  “우란분회”의 유래라고 한다. 그만큼 불교에서는 우리의 말을 단속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가톨릭의 관상수도자였던 토마스 머톤 신부는 그의 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침묵으로 성인들이 성장했고, 침묵으로 인해 하느님의 능력이 그들 안에 머물렀고, 침묵안에서 하느님의 신비가 그들에게 알려졌다” 그만큼 그는 침묵을 칭찬하고 웅변을 거부했던 사람이였다. 어느 마을에 화를 잘내는 청년이 있었다. 그 청년은 조금만 비위가 상해도 화를 버럭버럭 내고 자신의 생각과 조금만 틀려도 남을 비난하고 욕을 했다. 그러다나니 진정한 친구 한명도 옆에 남지를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 청년의 아버지가 그의 그런 나쁜버릇을 고쳐주기 위해서 아들을 불렀다. 그는 아들에게 매번 화가 날때면 다른 사람에게 화낸것만큼 나무담장에 하나씩 못을 박으라고 하였다. 아들은 아버지 의 말대로 매번 남들에게 화를 내고는 담장에 못을 하나씩 박아나갔다. 그렇게 자신을 단속하다나니 이제는 점점 못을 박는것이 줄어들게 되였다. 이번에 그 아버지는 다시 아들에게 말했다. “이제 네가 매번 다른 사람들로 화가 일어났으나 한번 잘 참았다면 절로 저기 박힌 못을 빼도록하거라.” 아들은 아버지가 시키는대로 하기로 약속하고 언행에 주의하고 화를 참고 다른 사람에게 심하게 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다나니 담장에 가득 꽂혀있던 대못들도 점차 줄어들게 되더니 어느덧 하나도 남지 않고 깨끗하게 되였다. 아버지에게 와서 그 아들은 기쁜 심정으로 말했다. “아버지 덕분에 이제는 내 마음을 다스려서 내 언행에 무척 주의할수가 있게 되였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의미심장한 말투로 말씀하셨다. “담장에 꽃혀있는 못은 다 빼냈지만 그 못자리는 남아있는 법이란다. 니가 다른 사람에게 준 상처도 비록 치유되겠지만 그 자국은 남는법이란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언행에 더욱 조심하도록 하거라.” 그 말에 그 아들은 더욱 열심히 수련하여 나중에 큰 인물이 되였다고 한다.    나는 매년 여름휴가철이면 여기저기 사찰을 돌면서 심신을 쉬우면서 수행연습을 하군한다. 지난 여름 서울에 출장차 다녀오다가 ‘화계사’ 국제선원에서 짤막한 수련을 했던적이 있다. 담당스님이 묵언패를 줄때까지만해도 심심찬게 받았는데 정작 그걸 실행하려니 여간 불편한것이 아니였다. 이것저것 궁금한걸 물어볼수도 없고 한방에 든 수행자한테도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지 물어볼수가 없었다.  그렇게 몇일을 보내는 동안 휴식시간이면 신도들이 가끔씩 길을 물어보거나 스님들의 행방을 물어보기도 하는데 묵언수련중이라고 패쪽을 보여주면 모두들 잘 아는지 벙긋 웃고는 떠나간다. 그곳에서는 몇일동안 말 한마디 못하고 묵언을 실행하면서 명상수련을 했는데 더없이 큰 도움이 되였다. 그때 비로서 침묵은 금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평가하는 열마디 말보다 자기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을 반성하는 시간이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게 더 필요하지 않을까.
26    거북과 달팽이 댓글:  조회:2512  추천:0  2015-06-13
 무더위가 계속된다. 선풍기를 돌려도 더운바람이 불어오는듯 하다. 국가의 개혁과 부정부패척결에 온 사회가 떠들썩한 분위기이다. 요새는 또 그런 사회분위기에 맞추어서 사회 각 계층에서 열리는 회의나 세미나 등이 어찌나 많은지 눈코뜰새 없다.        그것이 진정 내 인생에 얼마나 도움 될지는 알수 없으나 당분간은 벗어날수 없는 상황이다. 벗어날수 없을때는 일단 즐기는것이 좋을듯 해서 모든 행사에 적극 참여하기로 했다. 지난 일요일에는 에치투오 축구팀과 기업인연합회 옛날 회원들간의 축구경기를 진행했다. 축구를 나는 잘 차지를 못한다. 그러나 연합회의 활동을 재개한다는 의미에서 보면 축구만큼 남자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것도 없지않나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연합회 축구팀은 기업하는 사람들이 위주여서 그런지 축구장에서는 일방적으로 밀리웠다. 4대1로 형편없이 졌지만 회원들은 즐거운 분위기였다. 점심에 시원한 맥주로 운동후의 땀을 식히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오래만에 서로 만난 회원들은 정말 기분이 좋은듯 했다. 축구도 좋지만 함께 했던 그 옛날 이야기도 흥이난듯 했다. 에치투오의 사업을 발전시킨답시고 연합회 활동을 소홀히 한것이 한편 후회되였다. 오늘 오전에는 주 정부 모부문에서 개최한 국가급 큰 행사에 참가했다. 국가급행사인것만큼 높은 자리에 계시는 분들도 많았고 행사가 중,한 양국간의 기술합작에 관한것이였기에 참가한 사람들도 의외로 많았다. 지난번에 주정부의 관련 부서의 책임자분이  단체 부회장을 맡으라고  강력히 추천하셔서 어쩔수 없이 그것마저 문뜩 맡게 됐다.  국가의 정책에 따른 새로운 조직의 탄생을 알리는 를 회의에서 낭독하고나니 하루 오전이 다 지나갔다. 그렇게 이런 저런 사회의 직책을 맡게 된것이 이제는 A4용지 두세장 정도에 나누어 적어야할 만큼 가득하다. 그러나 직책은 직책일 뿐 그것이 나의 인격을 대표하지는 못한다. 사람은 사람으로서의 책임과 역할이 있고 사회인으로서의 역할 또한 필요할것이다. 훌륭한 사회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하나는 재능(능력)이 아닌가 생각한다. 재능이 없다면 각박한 현실을 헤쳐나가는데 힘들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재능만 있으면 충분하냐하면 결코 그렇지만도 않다. 또 하나가 더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덕’이다. 덕은 인격적인 조건을 필요로 한다. 재능과 인격, 이것은 사회인으로서의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부분일것이다. 그러나 항상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것이 있다. 옛날 보았던 이라는 책에는 인격이 주인이고 재능은 하인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재능이 뛰어나도 인격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사람은, 주인 없는 집에서의 하인처럼 기세등등하다” 라고 표현하였다. 재능보다는 인격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인격을 중요시하다보면 현실적인 사회에서는 오히려 손해볼수도 있다.   몇해전에 에치투오 강의를 진행할 당시 몇몇 사람들이 모여서 사업을 한적이 있었다. 한사람이 몇만원씩 모아서 장사를 시작하려 한것이다. 나의 강의중에 창업의식에 대한 내용이 있었는데 그것을 듣고 동기생들끼리 모여서 사업을 한다는 것이다. 회사 대표 및 총경리는 당시 반급의 회장을 맞았던 사람이 했고 부총경리는 당시 부회장을 맡았던 사람이 책임졌다.  회사의 회계와 출납은 그들 두 사람의 와이프가 각각 책임을 맡았다. 그런데 내가 강의를 해준 강사이고 또 사업경험이 있다고 나한테 주식을 더러 주겠으니  명예 회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얼떨결에 동의를 했는데 그게 문제가 되였다. 사업이 뭔지조차 모르는 오합지졸들이 모여서 뭔가를 한다는게 말이 안되는 일이 된것이다. 서로 투자된30여만원을 다 부려먹고는 급기야 회사가 파산하기에 이르렀다. 그중에 한사람은 내가 진행하는 강의를 듣고 사업을 시작했기에 나한테 책임있다고 나더러 자기 돈을 물어내라고 법원에 기소장을 냈다. 처음 장사를 시작한다고 그들이 모금할때 은행구좌가 없다고 실업인연합회 구좌를 빌려달라고 해서 빌려준것이 빌미가 된것이다. 자기는 돈을 회사에 넣은것이 아니고 연합회에 넣었으니 연합회에서 물어내라는 식이다. 실업인연합회는 비영리단체이고 사단법인조직으로서 그런일에 참여할 일이 없었다. 다행히 은행총부의 당안을 뒤져서 연합회에 들어왔던 그 돈이 다시 그들이 만든 회사에 송금된 자료를 확보했다. 그렇게 두번의 말도안되는 법원소송끝에 법원은 끝내 내 손을 들어줬다. 소송에서 지자 그들은 음흉한 이빨을 드러냈다. 듣건대 여러명이 떠들면 연길시의 어느 영도가 다 들어준다고 소문이 나서  그들은 몇몇이 뭉쳐가지고 새벽부터 가서 떠들어댔다. 영문을 모르는 영도는 한쪽 말만듣고 아예 내 이야기는 듣지도 않은채 나더러 돈을 물어주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 영도 및에서 일을하는 다른 한 영도는 나와 나의 회사에 트집을 걸고 부당한 행정명령을 계속 내렸다..   그 일을 겪고나서 나는 문뜩 한단계 성장한 나를 발견했다. 그래서 고난이 사람을 성장시킨다고 했을것이다. 어려움이나 심적인 고통을 통해서 마음수련을 하게 된것이다. 내가 믿고있는 불교적인 입장에서 보면 나한테 억울함을 주고 고통을 가한 그들이 나한테는 선지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금전적으로는 손해를 봤지만 내 인생수련에는 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못을빼도 못자국은 남는 법이다. 마음에 남은 상처때문에 강의를 그만두고 사업에만 열중했다. 그러면서 비로서 내 마음속에 가득했던 원망, 오해, 편견같은것들을 서서히 버릴수 있게 되였다.   사람에게는 이해심이 필요하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해야할것이다. 서로 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모든것은 편해지고 인간관계도 잘 진행될수 있다. 그러나 이기심을 가득 채워서 자신의 원하는대로 타인을 평가하고 행동한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는 격이 되고 만다.   이라는 책에는 “사람의 작은 허물을 나무라지 않고 남의 사사로운 비밀을 파헤치지 않고 남의 옛날 악을 생각하지 않는다”(不責人小過, 不發人陰私, 不念人舊惡)라는 말이 있다.  인간관계학의 최고의 명언이 아닐수 없다. “사람의 작은 허물을 책하지 않는다”는 것은 작은 과실을 나무라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 일에 일일이 흠을 잡으면 사람이 모여들지 않는다. “사람의 사사로운 비밀을 밝히지 않는다”는것은 숨긴 일을 파헤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누구라도 남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은것이 있다. 알아도 살짝 덮어두라는 말이다. “사람의 옛날 악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은 옛 상처를 잊어주라는 말이다. 이런 일을 끈질기게 파낸다면 인간관계는 파탄에 이르고 만다. 에서는 이 세가지를 지적한 뒤에 이런 말로 마무리를 했다. “남에 대해서 이 세가지의 일을 명심하면 자신의 인격을 높일 뿐만 아니라 사람의 원한을 살 일도 없다” 라고 하였다. 내가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남의 허물을 나무라면 안되겠고 내가 사회인으로서 책임과 의무가 있으니 남의 옛날 악을 생각하면 안될것을 알기에 오늘도 더 근신하고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문뜩 딸그닥거리는 소리에 살펴보니 거실에서 애완용으로 키우는 거북이가 어항속에서 기여나오려고 버둥대다가 떨어지는 소리이다. 얼마전 아이들이 시장에 나갔다가 사달라고 졸라서 70원을 주고 두마리를 사왔었다. 함께 달팽이 세마리까지 샀는데 아이들은 밖에서 흙과 돌멩이를 얻어다가 그것들을 위해서 “멋진” 하우스를 만들어 주었다. 내가 보기에도 거북과 달팽이가 살기에는 근사한 집이다. 거북과 달팽이는 유리한장을 사이두고 따로 산다. 서로 서로에게 페해를 줄수가 없다. 투명한 유리 창에 붙어있는 달팽이를 가끔 거북이 공격하기도 하는데 매번 실패한다. 그러나 실패를 하고서도 또 다시 공격을 해댄다. 그런 거북의 눈에는 그 한장의 유리창이 어떤 존재로 받아들여질까?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그러한 투명한 유리창이 있다. 서로 서로를 볼수 있지만 더 가까이 다가가서 파헤치면 상처만 남게 되는 그러한 유리창이 있는 법이다. 잘난 거북이나 꼼지락거리면서 조금씩 배추잎을 먹고 있는 달팽이나 모두 우리 아이들에게는 큰 의미로 다가가는듯 싶다. 큰 아들놈은 거북을 좋아하는데 작은 아들놈은 달팽이를 좋아한다. 그 이유는 거북은 큰 아들의 이름으로 샀고 달팽이는 작은 아들놈의 이름으로 샀기때문이다. 아이들은 거북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달팽이 한마리 한마리에게도 이름을 지어주고는 좋아서 어쩔줄을 몰라했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바쁜 일상에 육신도 피로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영문모를 의문마저 가득 피여오른다. 저 거북과 달팽이에게 사람은 어떤 존재일까? 사람에게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투명한 유리나 또 거북의 목을 움츠러뜨리게 하고 달팽이에게 생각지 않던 먹이가 불쑥 생기게끔 음식을 던져주는, 우리 아이들같은 그러한 신비한 존재가 있지는 않을까? 그건 또 무엇이란 말인가?
25    용기 댓글:  조회:2176  추천:0  2015-06-08
 밖에서는 연일 비가 내리고 있다. 보름가까이 연속 찌뿌둥한 날씨에 많은 사람들이 짜증을 낸다. 양봉장의 꿀벌들도 마음이 있다면 짜증을 낼듯 싶다. 봄꿀을 따온것도 다 먹고 자칫 굶어죽을 위기에 놓인것이다. 고에 저장해 두었던 꿀을 꺼내서 벌통마다 넣어주었더니 꿀벌들은 그제야 다시 활기를 찾는듯 싶었다. 사람들과 꿀벌은 그렇게 서로 유기적인 연결을 가지고 있다. 꿀벌은 달콤한 꿀을 인간에게 전해주고 인간은 또 꿀벌들에게 집을 지어주고 겨울나이를 도와준다.   오늘 크리스토퍼 연변24기 개강식을 마치고 나니 자정이 가가워왔다. 하늘을 쳐다보니 아직도 찌뿌둥한 날씨이다. 첫개강식에 수강생들로 가득차면 강사들은 힘이 생긴다. 지금까지는 한국의 강사님들과 함게 진행해온 코스였다면 이번 24기만은 순수 우리 연변의 강사님들끼리 진행하는 코스여서 더욱 그랬다.  그러나 코스가 끝날때면 항상 뿌듯한 성취감과 함께 한편 허전함이 함께 한다. 수강생들이 수료를 하면서 이벤트를 만들어서 그동안 노력과 수고를 아끼지않고 봉사를 해준 강사들에게 선보일때면 교육기간내내 함게 호흡하고 숨쉬였던 사람들과 서로 헤여지는것이 못내 섭섭하기도 하다. 이 세상에는 헤여지지않는 연석이 없다고 한다. 아름다운 파티도 끝날때가 있고 아름다운 청춘도 지나가고 세상을 뒤흔들던 권력도 언젠가는 역사의 뒤안길에 사라진다. 헤여짐을 아쉬워하기보다는 만남을 기대하고 미래를 두려워 하기보다는 현실에 서서 미래를 준비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로망 롤랑은 ‘영웅이란 자신이 할수 있는 일을 한 사람이다.’ 라고 하였다. 로망 롤랑은 지난세기를 대표하는 세계 최대의 문학자로 불려지고 있다. 그의 대표작 에서 이 말이 나온다.  ‘자신이 할수있는 일을 했다.’란 자신이 해야할 일을 관철 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힘을 행사하는 그런 자라는 말은 설령 아니다. 스땅달은 ‘평범한 사람이 놓은 레일에 자신의 레일을 올리지 않는 사람’이 천재이며 영웅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 시인 하이네는 ‘영웅은 일정한 제도에 맞춰 그릴수가 없다. 그 제도는 모든 비판적 평가 밖에 있다.’라고 영웅에 대한 묘사를 하고 있다. 스스로의 궤도를 만들어 자신이 해야 될 일을 관철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도처에 장애와 어려움으로 인해 항상 고립되고 뭔가를 헤쳐나가야 한다. 그때 영웅을 지탱하는 힘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어떤‘도덕적 용기’가 아닐까 싶다. 즉 사람으로서 옳은 일을 행한다는 신념이다. 신념을 가진 사람을 이길수 있는것은 없다. 진정한 용기는 신념에서 나온다. 어릴때 읽었던 ‘붉은 바위’라는 책에서 중국의 근대 혁명의 선구자들인 허운봉, 강설금과 같은 영웅들은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모진 고문과 혹형을 이겨낸것이다. 나도 언젠가 손가락에 작은 가시가 들었는데 아파서 애를 먹었던적이 있었다. 강설금 누나(우리는 초등학교때부터 그렇게 불렀음)의 두손 열손가락의 손톱눈에 참대로된 침을 꼿아넣는 고문을 행할때 그 아픔과 고통이 어땠을가? 소름이 끼친다. 그들이 그러면서도 변절하지 않고 정절을 지킬수 있었던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굽힐수 없는 위대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일것이다. 오래전에 보았던 소설가 김용의 무협지 ‘독수리사냥 영웅전기’(射雕英雄传)라는 책에서 세계를 제패하려던 칭키스칸이 중원의 도사 구처기(丘处机—全真派道士)에게 장생법을 묻던시기 주인공 곽정과 영웅에 대해서 담론하는 장면이 나온다.   무용(武勇)을 가지고 힘자랑하는 자를 영웅이라 할수 없다. 권력을 가지고 위협으로서 얻는 강토는 언젠가는 다시 잃는다. 그런자를 영웅이라 할수 없다. 살륙과 공포를 일삼는자의 마음은 실은 두려움에 떤다고 심리학적으로 분석이 나와있다. 그런자를 용기있다고 말할수는 없다. 끓는 가마뚜껑을 돌로 누른다고 눌러지지 않는다. 강폭과 힘, 권력과 재산으로 만들어진 걷모습으로 영웅을 논할수는 없다. 이 시대에 영웅이 적은 이유는 바른 신념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악행을 하는 자는 항상 외롭다. 그러나 영웅의 신념을 이해하는 사람들도 이 시대에는 너무나도 적다. 그래서 이 세상에 영웅이 많지 않나본다. 영웅이 많지 않기에 우리는 영웅의 모습을 기린다.   늦어서 집에 돌아왔는데 아들놈들이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잠자기 전에 들려주던 이야기를 듣고자 기다린다는 것이다. 불시에 뭔가 해줄것도 없고 해서 아들들에게 이라는 동화 이야기를 읽어줬다. 나의 아들놈들은 세살때부터 듣던 이야기지만 잠자기전에 아빠가 읽어준다니 둘다 좋아서 펄쩍뛰며 이불속으로 들어간다. 이란 책은 꿀벌 마야가 태어난 날부터 집을 나와 겪게 되는 여러가지 모험을 통해, 생명에 대한 깨달음과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아름다운 장편 동화이다. 어릴적에 그 동화책을 읽으면서 긴장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책 페이지를 펼치던 기억이 났다. 꿀벌 마야는 모험심이 강하고 호기심도 강하다. 어려움을 이기고 땅벌들의 진공을 여왕벌에게 알려서 자기의 가족을 지키는 이야기이다.   모름지기 큰일을 하는 사람들은 용기가 있다. 어떤 일을 해보겠다는 꿈도 중요하지만 그 꿈을 이루기위해서 하는 도전적인 행동이 필요한것이다. 용기는 말로만 해서는 안된다. 용기는 도전이다. 이라는 동화가 비록 동화책이지만 우리 어른들에게도 잘 적용되는 품성이 적혀있다.  친구와 가족을 사랑하고 불의를 반대하고 정의를 위해서 용감히 도전하는 마야의 용기와 지혜를 어린 내 아들에게도 심어줘야 겠지만 아빠인 나도 필요한 덕목이다.   진정한 용기는 바르고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만이 가질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바르지 못하고 옳지 못할때는 사과할줄 알고 먼저 다가가서 용서를 빌줄도 안다. 오랜만에 아들과 함게 용기에 대한 깊은 공부를 해본다. 어느새 잠이 든 쌍둥이 두 아들의  얼굴이 마냥 천사같다.
24    질투 댓글:  조회:2223  추천:0  2015-06-04
   요즘은 을씨년스런 날씨가 계속된다. 오늘따라 오전부터 내리던 비가 오후 두시즈음 되니 아예 소낙비로 쏟아졌다. 여름 장마비를 연상시키는 큰비다. 이러다가 장마가 지는게 아닌가하는 불안마저 든다. 어제 하루 어쩌다 바짝 개여서 모두들 좋아했는데 오늘 다시 비가 내리니 사무실에서도 뭔가 다르게 부산하다. 물론 밖은 더욱 스산해서 기분이 여간 말이 아니다. 오전에는 정협홈페이지 개통식이 있어서 정협회의에 다녀왔는데 거기서 고등학교때 동창생을 만났다. 학교때는 그렇게 가깝게 보낸사이는 아니였는데 오랜만에 만나니 그래도 무척 반가웠다. 서로 지나간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잠간 나누고 일때문에 연락처만 서로 남기고 헤여졌다. 오후에는 비즈니스관련 손님들과 상담을 마치고 나오는데 그 친구한테서 연락이 왔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술이나 한잔하자는것이다. 마침 저녁 약속도 없던터라 기꺼이 시간을 잡았다. 둘이서 오랜만에 학교때 이야기를 나누며 잔을 기울였다.   솔직히 나는 학교를 나온후부터는 사업에만 정신이 팔려있다보니 동창들한테 약간 소홀함이 없지않아 있었다. 그러다보니 동창들의 소식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그 친구는 그 많은 동창들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누구는 어디서 뭘하고 있고 누구는 어디에 가 있고, 누구는 어떻게 돈을 벌었다는 등 거의 모르는게 없었다. 심지어 학교때 한반도 아니였던 아이들의 사정까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궁금했던 학교동창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척 기쁘게 술을 마셨다. 실은 재작년에 우리도 동창모임을 가지려고 했었는데 무산됐던적있다. 동창모임을 시작하는 목적부터 불순했던것이다. 모임을 이끄는 사람들이 그간 자신의 성공한 모습을 자랑하려는것이 목적이 되니 모임을 만들기도 전에 시끌시끌했다. 그통에 나는 아예 참가를 포기하고 말았다. 요즘 실태를 보면 거의 그렇다. 동창모임에서 누구는 무슨차를 타고 왔는지? 누가 권력이 있고 급이 있는지? 누가 돈많고 빽이 센지를 살피고 있는 실태이니 그야말로 ‘자기자랑 대회’다.   동창모임은 학생때 원모습으로 돌아가서 순수해야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를 가르쳐주신 선생님을 모시고 함께 성장해온 친구들을 만나서 서로 격려하고 도웁는 그런 모임이 되여야하는데 자기 과시에 들떠있고 힘있는 사람은 힘자랑하고 돈있는 사람은 돈 자랑하고, 돈없고 힘었는 사람은 주눅이 들어있는 그런 동창모임이라면 참가하지 않는것이 낳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누구나 질투심이 있다. 질투는 항상 남과의 비교에서 생긴다고 한다. 영국의 철학자인 프란시스 베이컨이 한 말이다. 그뒤에 그는 ‘비교없는 곳에 질투는 없다’라고 했다. 인간은 질투할때 자신과 남을 비교하고 있다. 자신이 남보다 열등할때, 욕심이 많은 사람은 질투의 노예가 되여버리기가 쉽다. 베이컨은 영국의 철학자로 데카르트와 나란히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불려진다. 그는 정치가이며 재판관이기도 했다. 관찰과 경험이야 말로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하는 베이컨이기 때문에 많은 인간의 사는 모습을 냉철한 눈으로 바라보고 그런 말을 하였을 것이다.   질투를 해학적인 중국말로 번역하면 홍안병(红眼病)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을 질투한 번뇌로 눈이 빨갛게 되는 상태를 상징적으로 비유한것이다. 질투는 인간의 어떤 심리적인 질병이다. 인간은 본래부터 불완전하니까. 그런 마음이 있는것도 어찌보면 당연한것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이런 질투심은 몇개 단계로 나누어 볼수 있다. 첫번째 단계는 비교해서 마음이 산란해지는 단계이다. 옆집에 심은 과일이 내가 심은 과일보다 더 붉고 열매가 더 크다면 마음속으로 이웃집의 과일나무가 바람에 확 날려갔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생긴다. 이런 기형적인 질투 심리가 바탕이 되면 잠을 자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잠을 자지 못하니 눈이 벌겋게 출혈될수 밖에 없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질투하는 사람을 홍안병에 걸렸다고 하는것이다. 그렇게 눈이 벌겋게 될 정도가 되면 벌써 2단계에 올라가는 상태다. 1단계가 심리적이 상태에 그쳤다면 2단계에서는 적어도 말로 표출을 해야 마음이 편해진다. 이때 어떤 사람들은 아예 적나라한 비방과 욕설을 서슴치 않는다. “걔가 돈 많이 벌었다며? 그 돈을 어떻게 벌었는지 너는 아니? 다 그렇고 그런일을 해서 번돈이 라더라, 그런 돈이라는거야 한손으로 들어와서 다시 한손으로 나가는 거지. ” 라고 한다. 또 어떤사람들은 “너 부자가 됐는데 한턱 내야되지 않겠니. 본래 돈 많은 사람이 내야 하는거지 뭐.” 라고 부추긴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상대를 쓰러뜨리기 어렵다. 이때가 되면 세번째 단계로 접어드는것이다. 이때는 그냥 말로하는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행동으로 옮겨지는것이다. (니가 나보다 자리가 높은데 얼마나 잘 사나 보자, 나는 더 높은 상급에게 익명편지를 써서 니가 탐오를 하고 나쁜일을 했다고 고발할테다.)라고 행동에 옮긴다. 질투를 행동에 옮긴다는것은 평등해지려는 즉 공평해지려는 야릇한 심리현상때문이다. 자기가 그 사람을 끌어내리는것은 자신이 그 자리를 대체하려는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긁어내림으로서 나하고 같아지거나 낮아진다는데 만족감을 얻는것이다. 이런 심리를 들여다보면 이상하게 느낄지 모르겠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크게작게 가지고 있고 자비감과 자존심이 짬뽕되면서 만들어진 기형적인 심리상태인것이다. 특히 조직 속의 인간관계에서 질투심이 생기는것은 예로부터 피할수 없는것으로 되여왔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질투는 인간에게 타고난 준비된 것’이라고 말하고 아이스큘로스(그리스 비극작가)는 ‘질투심을 조금이라도 갖지 않고, 친구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성격의 소유자는 없다.’라고 관찰하고 있는것이다.   동창모임에서 잘난척 하는 사람들은 질투를 받을수 밖에 없다. 우리는 친구가 많으면 좋다는것쯤은 이제는 상식으로 잘 알고 있을것이다. 그런 친구를 가장 많이 만나는 동창모임에서 잘난척 하는 사람들, 부를 자랑하려는 사람들, 권력을 자랑하려는 사람들은 존경을 얻기보다는 질투를 얻어갈수 밖에 없다. 질투와 함께 따라 다니는것은 항상  비방과 중상,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원수로까지 된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한다. 주는것이 없이도 괜시리 밉고 해꼬지 하고 싶어지는것은 질투때문이다. 동창모임에 참가했던 친구들은 돈많은 친구들의 술을 실컷 얻어먹고 와서는 한다는 소리가 ‘그자식 그렇게 안봤는데, 오늘 동창모임 가보니 완전 나쁜놈으로 변했더라구. 잘난척하고 흰소리나 치고. 나원 더러워서…….’ 그래서 동창모임에서는 더 근신하고 조심해야 한다. 잘난척해서 득될게 없음을 알아야한다. 잘난척해서 우리는 질투를 사고 그런 사람들의 말밥에 오르면 씹혀서 처참해지기 쉽기 때문이다. 부와 권력이 그렇지만 재능도 그렇게 숨길줄 알아야 한다. 질투를 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출사하기전에 우선 재능을 숨기는 법부터 익혔다. 오래전에 읽은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录)’에 나오는 말인데 韬晦无露圭角라는 말이있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숨겨서 뾰족한 모서리를 드러내지 말라는 말이다. 여기서 도회(韬晦)란 감싸서 밖으로 나타내지 않는 것, 규각(圭角)이란 뽀족한 모서리를 말하나 여기서는 사람의 재능을 상징한다. 송대에 두언(杜衍)이라는 재상이 있었다. 문하생 중 한 사람이 어느 현의 지사에 임명되었다. 이때 이 말을 인용하여 가능하면 눈에 띄지 않는 행동이 좋다는 충고를 해준것이다. 그 문하생이 “왜 그래야 합니까?”라고 물었더니 두연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지금 자네의 경우는 작은 현 지사로 임명되였는데, 앞으로 승진은 상사의 사소한 평가 하나하나에 달려 있는것이다. 따라서 섣불리 재능을 펼친다면 상사에게 미움을 받을 뿐이다. 쓸데없이 화를 부르는것은 어리석다. 그런 이유로 가능하면 눈에 띄지 않는 행동을 하라는것이다.” 조직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느 시대에서도 통하는  행동지침서다. 두연의 이런 충고를 괜히 노파심이라고 웃어넘긴다면 큰코 다칠일이 눈앞에 있다.   본래부터 술이란 안주가 좋으면 더 잘 마시게 된다. 오늘따라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서 좋은 안주에 술한잔 기울이니 밖의 궂은 날씨도 잊어버린채 늦게까지 함께 보냈다. 멀리서 번쩍이는 번개의 불빛이 술집벤치까지 환하게 비춘다. 이어서 땅이 꺼지게 우뢰소리가 울렸다. 흠칫 놀라 들었던 술잔을 내려놓는데 "삼국연의"의 한 장절이 떠올랐다. ‘청매안주로 술을 마시며 영웅을 논하다’의 장절이다. 그 영웅 조조도 유비의 재능을 질투했나본다.
23    부러운 사람 댓글:  조회:2506  추천:0  2015-05-23
   매주 일요일이면 불교연구회에 나가서 강의를 한다. 법당의 스님께서 나더러 강의를 해보라고 적극 추천하셔서 시작한것이 어언 10년가까이 된다. 다행인것은 비록 아마추어 거사(居士)가 대신하고 있는 강의지만 매번 법당에는 청강을 위해 오는 사람들로 붐빈다. 내일모레가 부처님 오신날이라서 이것저것 준비로 시끄럽다. 법우님들의 준비열정 또한 대단해서 나는 별로 신경을 쓸데가 없다. 어는새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새 나도 참 많은걸 배웠다.   옛말에 남을 가르치려면 자신이 먼저 배워야 한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는듯 싶다. 오전에 법문이 끝난후 법당에서 쓸 전자피아노를 사려고 악기상점들을 두루 돌아보았다.  그제서야 나는 악기들이 그렇게 비싼줄 알았다. 하기야 특수제품들이니까 가격을 많이 받는것은 당연하겠지만 어떤것은 그 가격에 입이 딱 벌어질 지경이였다. 법당에서 찬불가 교실을 만들려고 전자피아노를 사놓으려고 했는데 너무 엄청난 가격에 그만 주춤하고 말았다. 법당의 경비로는 엄두도 못낼 거금이였기 때문이다. 다음에 개인적으로 사서 법당에 기부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집에 돌아와서도 그 일이 내내 머리를 돌며 마음이 산란해났다. 그냥 발심을 했을때 샀어야 하는데 하면서 후회를 했다. 잠간 책을 뒤적이는데 둘째아들 윤민이가 금방 ‘야생사자 엘자’라는 책을 다 읽었다면서 다른 책을 추천해달라고 졸랐다. 책장에서 ‘별나라 손님’(ET) 이라는 책을 꺼내 주려다말고 ‘위쨔와 꼬스쨔’라는 책을 꺼내주었다. 내가 어릴적 아주 재미있게 읽었던 책인데 러시아(구 소련) 작가 ‘엔 노쏘브’의 아동소설이다. 아직 4학년밖에 안된 아들놈이 잘 읽을수 있을가 걱정하면서 건네줬는데 재미있는듯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   책이 사람을 만든다고 하는데 나는 그 말에 충분히 공감한다.   사람은 모름지기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다행히 두 아들놈은 모두 책귀신들이라는 소리를 들을만큼 독서를 좋아해서 그만한 다행이 또한 없다. 나 또한 책을 통해서 많은걸 배웠고 또 책을 통해서 인생관이 수립되고 또 책을 통해서 삶의 태도를 바꾸게 된것이기 때문이다.   잘난척만하던 나에게 존경할만한 사람이 생긴것도 책을 통해서였다. 누구를 존경하냐고 물어보면 어릴때는 막연하게 부모님이라고 했는데 부모님은 가족으로서 필수 우리가 아끼고 존경해야할 상대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사람은 사회인인것만큼 사회에서 존경할만한 사람을 찾지못했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의 발전이 없음이 틀림없다. 돈을 벌고 세속적인 명예를 잠시 얻을지는 몰라도 영혼심처의 발전은 더 이상 있을수 없기때문이다.   내가 초등하교 졸업할때쯤에는 인물전기를 읽고 중국의 주은래총리를 참 존경했었다. 정치인으로서는 훌륭한 업적을 많이 쌓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몇년전에 우연히 책 한권을 선물받았는데 그 책이 나의 삶을 바꾸기 시작했다. 법정스님이 쓴 ‘버리고 떠나기’라는 책이였다. 산문집이였는데 그 구절구절에서 스님의 ‘무소유’의 정신이 묻어나면서 존경하는 마음이 그대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어딘가에게 종속된 삶이 아닌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 자유인으로서 사는법이 적혀 있었다. 글을 읽는 내내 순간순간 내 영혼의 깊이에 던지는 주옥같은 말씀들은 순수와 인간의 본질의 세계를 발견하는 영적 지침서같은 책이였다. 그렇게 법정스님과 인연을 맺어서 그분의 책을 많이 찾아 읽었다. 그때 ‘텅빈충만’을 읽었고 ‘무소유’를 읽었다.   홀로 강원도 산골 작은 오두막에서 청빈과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고 계시는 그분이 너무 존경스러웠다. 한국에로 출장갈때마다 한번 찾아뵈였으면 하고 생각을 했지만 그분의 책에서 묻어난 그대로 홀로 수행하고 계시는 분의 청정한 수행을 깨뜨릴것같아서 그러한 인연을 만들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도 서운함이 가득하다. 그런 법정스님의 본명은 박재철이다. 1932년10월8일 전라남도 해남(海南)에서 태어났다. 1956년 전남대학교 상과대학3년을 수료한뒤, 같은해 통영 미래사(弥来寺)에서 당대의 고승인  효봉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셨다.  그로부터 1970년까지 많은 수련을 하시다가 그해 송광사 뒷산에 직접 작은 암자인 불일암(佛日庵)을 짓고 청빈한 삶을 실천하면서 홀로 살았다. 1994년 부터는 순수 시민단체인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이끄셨다. 1996년에는 서울도심의 대원각을 시주받아 길상사를 세우고 회주로 있다가 2003년 12월 회주직에서 물러났다. 그분은 아름답고 쉽게 읽히는 정갈하고 맑은 글로 많은 책을 출간했는데 책마다 베스트셀러에 올랐다고 한다. 그런 책중 ‘버리고 떠나기’를 내가 받아보게 된것이다. 그것을 계기로 그분의 많은 책들을 읽었는데 나한테 준 영향력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그런 법정스님 또한 책을 통해서 삶을 정하셨다고 한다. 법정스님이 쓰신 ‘내가 사랑한 책들’을 사서 보는데 제일 첫장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월든)가 쓴 ‘월든’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소로우가 쓴 "월든"을 사서 읽었다. 소로우는 철저한 무소유를 지키려고 했던 사람이였다. 그리고 사람들의 무리를 떠나서 월든호수가에서 홀로 살면서 청빈의 즐거움을 만끽한 사람이였다.  법정스님은 수년전에 두차례 월든호수를 방문한적있다. 소로우의 삶을 반영한 월든이 준 영향이 스님에게는 엄청난 것이였던가 본다.   소로우는 “나는 시간의 대부분을 혼자 보내는것이 건전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소로우 자신의 체험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는 숲으로 둘러싸인 연못가에 오두막을 세우고, 콩을 심어 생활하였다. 독신으로 교회에도 나가지 않았고 당시 노예제도를 승인하는 국가(미국)에 대해 납세를 거부했다. 그때 기록한 “숲의 생활”이란 책에 씌여있는 말이 앞에서 말한 그 말이다. 칸트는 ‘나는 고독하다. 나는 자유이다. 나는 스스로의 왕이다.’라고 말했으나 소로우는 그것을 실행했다. 라고 프랭클린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서만 시간을 사용하는 사치는, 고독에 견디는 강한 인간에게만 허락된다는것이다.  우리같은 범인(凡人)들에게는 소로우처럼 ‘타인과 교제하는 일은 곧 심심해져 맥이 풀린다.’라는 심경에 이르기가 쉽지 않다. 그러기에 적어도 하루 중 잠간만이라도 고독한 시간을 자신에게 할애해보는것이 좋다. 그러면서 지나온 과거와 돌아올 장래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수 있다면 더 멋진 인생을 설계할수도 있을듯 싶다.  소로우는 하버드를 졸업할때 졸업장을 위한 수수료1달러를 내기 거부했다. 졸업장이 양가죽으로 만든것이기 때문이었다. “양가죽은 양들이 갖고 있게 내버려두라”고 그는 말했다. 문명사회를 떠나 자연속에서 자주적인 삶을 실천하는것이 목표였던 그는 “내가 숲으로 들어간것은 삶을 나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 보기 위함이 었다. 다시 말해 오직 삶의 본질적인 문제들만을 마주하면서, 삶이 가르쳐 주는 것들을  내가 배울수 있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을 때 헛되이 살지 않았노라고, 깨닫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또 산다는것은 그토록 소중한 일이기에 나는 진정한 삶이 아닌 삶은 살고 싶지 않았다.” 라고 말한다. 그런 소로우의 정신을 이어서 참소유가 무소유임을 실천하고 계시는 분이 우리 곁에서 한시대를 살고 계셨다는것이 다행스럽고 영광스럽다. 작년 겨울 한국출장갔을때 법정스님의 책들을 한가득 사가지고 돌아왔었다. 그리고 가까운 친구들과 친지들에게도 선물로 나눠주기도 했었다. 그런데 지난(2010년) 3월11일에 법정스님이 열반에 드셨다. 누군가가 선물한 한포기의 난(兰)을 키우다가 부주의로 난이 죽자 홀연이 이 세상의 덧없음을 깨우치고 무소유를 실천하시게 되셨다는 스님의 말씀과, 당신이 쓰신 글로서 유명세를 타자 그것마저도 욕심이라고 버리시고 깊은 산골 오두막을 찾아가서 직접 화전을 일구시고 땔감을 주어서 때면서 홀로 외롭게 수행을 해오셨다. 그런 스님같으신 분들이 이 세상에 계시기에 우리 사회가 맑고 향기롭게 되는것이 아니였는가 싶었는데 그렇게 가셨다니 그 허전함과 아픔이 뭐라 말할수 없다. 돌아가신후 돌아보니 가진것이라고는 고무신 한쌍과 입고 계시던 낡은 옷 그리고 나무로 대충 만든 의자가 전부였다고 한다. 아끼던 책마저도 사람들에게 선물했고 330만부나 팔려나간 ‘무소유’ 책에 대한 인세는 본인이 아닌, 대학교를 다닐 등록금이 없던 학생들을 위해 주위분들을 통해 전달되였다고 한다. 삶 전체가 무소유셨기에 ‘아무것도 갖지 않을때 진정한 행복이 찾아옵니다.’라는 말씀을 부끄럼없이 할수 있기에, 우리는 그 말씀에 머리가 숙여지는것이다. 법정스님께서 열반에 드셨다는 소식을 중국에서 얻어듣고 비애와 함께 한가득 떠오르는 시가 있어서 법정스님 영전에 바쳐본다. 제목은 “부러운 사람”이라고 달았다.   유혹을 물리치는 그 사람이 부럽습니다 무소유를 실천하는 그 분이 부럽습니다. 빈공간에 가득채우신 그분이 부러워 오늘도 잠을 못 이룹니다.   다 가지려고 해도 다 가질수는 없겠죠. 다 버리려고 해서 다 버린님은 그렇게 다 가지고 가셨습니다. 그래서 너무 부럽습니다.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고 그렇게 가르치고 당신은 갔습니다. 마무리도 아름답게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그렇게 사뿐히 우리곁을 떠나셨습니다.   책을 사랑했어도 그책을 주셨고 글을 사랑했어도 그 글을 버리셨습니다. 이따금씩 가슴을 조여오는 이 비애는 부러워서 입니다.   삶은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라고 하셨죠 또 그 순간순간이 새로운 시작이라고도 하셨죠 삶에서는 삶을 다 하셨고 죽음앞에서는 죽음을 다하셨습니다. 그래서 부럽습니다.   다 버리고 가시고 텅빈 마음만 남기셨습니다. 그 텅빈충만속에 울리는 메아리는 오래도록 여운을 남깁니다.   그 여운이 오래됐으면 좋겠습니다. 그 울림이 계속됐으면 좋겠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님을 부러워할수 있게.  
22    약속 댓글:  조회:2344  추천:0  2015-05-20
  요즘은 짓꿎은 날씨때문인지 마음이 침침하고 무겁다. 아직도 며칠 비가 더 내릴것이라고 한다. 실은 날씨때문에 내 맘이 무거운것이 아니고 내 마음이 무거워서 날씨가 싫어지는줄 안다. 이럴때면 허구한날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서 바람처럼 훌쩍 떠나고 싶다. 출장을 다녀온지  한달도 채 안되지만 그냥 떠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것은 아마 일상을 탈출하고 싶은 내 맘이 아닐까 싶다. 출장이 아닌 여행을 떠나고 싶다. 자유로이 저 멀리 하염없이 걸을수 있는곳으로 가고싶을 뿐이다. 라는 말이 떠오른다. 독일의 작가 괴테가 한 말이다. 이 말은 여행 그 자체가 아니라 인생을 나그네길에 비유하고 있는듯 하다.  괴테는 정치가로서도 바이마르 공화국의 재상까지 지낼 정도였으므로 공무여행이 많았다. 그가 다닌 많은 여행중에서도 강렬한 인상을 받은것이 이탈리아 여행이였다고 한다. 이때 그는 그 남쪽 나라의 풍물과 고대 이탈리아의 높은 예술성에 충격을 받아 그의 세계관이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지난 음력설때 친구들과 함께 어딘가 여행을 가기로 했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약속을 해놓고 지키지 못한다면 약속을 안하기만 못하다는 친구의 말에 정말 부득이한 사정때문이였지만 차마 변명을 할수 없었다. 정말 부득이해서 어쩔수 없이 약속이 취소되는 경우가 있기에 나는 약속을 가급적 피한다. 약속한다는것은 상대나 자신에게나 모두 큰 부담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러한 부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야 진정 약속을 지킬수 있다. 약속은 지켜져야한다. 그래야 진정 당신의 인격이 돋보일수 있다. 인간은 이 세상속을 한때 지나갈 뿐인 나그네와 같은 것이라고 중국 도교의 시조로 일컷는 로자는 말했다. 그 깊은 뜻이 따로 있겠지만 나는 다른 생각을 해보았다. 즉 사람의 삶이란 인생의 종점에 도착하기를 서두르지 않고 가장 풍성하고 성실한 여행을 즐겨야 하는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나니 더 여행이 그립다. 독일의 작곡가 바그너는 라고 말했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방랑과 변화를 구하는 감정이리라. 약속을 어기는 사람은 야속하기도 하다. 약속은 누군가와 함께 하고 있다는 증명이라고도 한다. 정말 내 곁에 아무도 없다면 그 흔한 약속도 할 사람이 없을것이다. 약속이 많은 사람은 주위사람들로 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것은 약속은 하는것보다는 지키는것이라고 한다. 누구나 약속을 어길때면 다 이유가 있겠지만 고의로 약속을 어기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본의 아니게 약속을 어기면서 살아가고 있다. 남한테 피해를 주고 상처를 주고 있다는것을 의식하지도 못한채 무심코 해버리고 지키지 않는 약속으로 인생은 멍들어 가기도 한다. 신뢰가 무너지기도 한다. 가까운 사이라도 서운함이 깊어지기도한다. 긴 인생길을 함께 여행한다는 약속은 쉽게 할수 있는것이 아닐것이다. 서로를 사랑하는 남녀가 있었다. 어느날 그 남자는 군에 뽑혀 전쟁터에 나가게 되였다. 그는 길을 떠나면서 거울 하나를 여자에게 주었다. 거울이 비춰주듯이 서로를 비출수 있기를 바라면서 다시 만나는 그날을 기약했다. 그때 남자가 말했다. < 이 거울은 마술 거울이라오. 나도 하나 똑 같은걸 가지고 있는데 내가 죽어서 피가 거울에 튀면 당신의 거울에도 똑 같은 붉은점이 생길 것이오. 그리고 백일만 기다려 주오. 내가 백일후에도 오지 못하면 정말 내가 죽은줄 알고 다른 남자를 찾아 여생을 행복하게 살기 바라오.> 하고 길을 떠났다. 그렇게 일년이 지나고 이년이 지났다. 멀리 전쟁터에 나간 청년을 일편단심 기다리던 처녀는 어느날 거울을 들여다 보다가 그만 기절해 쓰러졌다. 거울이 벌겋게 물들었기 때문이였다. 청년이 죽은줄로 생각한 처녀는 그 청년을 따라간다는 생각에 자결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청년은 죽지 않았다. 거울에 나타난 피는 적군의 피였다. 승전을 하고 돌아온 청년은 하고 피타는 소리를 쳤지만 이미 늦었다. 그 처녀를 양지바른 언덕에 묻고 나서 얼마 안지나 그 무덤우에는 아름다운 꽃이 피여났다. 그런데 곱게 핀 그 꽃은 백일이 지나야 시들군했다. 백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처녀의 혼이 서린 꽃이라 하여 사람들은 그 꽃 이름을 백일홍이라고 불렀다한다. 백일홍의 이야기는 참으로 처량하지만 아름답다. 어릴때 민속이야기집을 읽으면서 약속만 서로 지켰어도 그리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거울을 처녀한테 주면서 약속을 한 그 청년이 참으로 미웠던 기억이 난다. 약속은 함부로 하면 안된다. 백일이 아니라 한달반도 기다리지 못하고 저버리는 약속은 안하기만 못하다. 이육사 시인의 꽃이라는 시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 제비 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여. .......................   살아가면서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 꼭 해야할 약속은 있나부다. 바야흐로 여름이 다가온다. 여행을 떠나고 싶다. 누군가와 여행을 떠나자는 약속이라도 하고 싶다. 저 하늘을 날고싶다. 높은 고원의 하늘을 우러러 함성이라도 지르고 싶다.  오늘은 비에 젖은 내 마음이 감기에 걸린듯 하다.
21    술의 경지(境界) 댓글:  조회:3208  추천:2  2015-05-03
  어떤것에도 그 깊이가 있다. 그 깊이를 경지라고도 한다. 경지는 마음속 느낌의 깊이이기도 하다. 술을 마시는데도 그 경지가 있다. 어제는 너무 무더운 날이였다. 많은 사람들이 더위를 피한다고 거리에 나와 맥주를 마시고 있다. 무더운 여름밤에 야시장을 돌다보면 여기서기서 흥분한 사람들의 왁작지껄 소리가 들린다. 술은 사람을 흥분하게 한다. 술은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이라는 사람들을 가끔씩 본다. 동시에 어떤것이든 그 반대면이 있듯이 술은 인류역사상 가장 잘못된 발명이였을수도 있다는 지적이 있다. 어찌되였건 술은 발명이 되였고 우리는 그렇게 발명된 술을 마시고 있다.   술을 즐긴다는것과 마신다는것 역시 그 깊이가 다르다. 취하는데도 경지가 있다. 언제나 몸을 가누지 못할 지경으로 마구 퍼마시는 사람은 술의 묘미를 모르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술은 얼근히 취하는 미훈(微薰)의 상태가 가장 술의 묘미를 느낄수 있을때다. 얼근히 취했을때는 누구나 의기양양해진다. 이런 얼근한 묘미는 자신감을 동반한다. 단순하고 규칙적인 일상을 벗어날수 있는 멋진 선택일수도 있다. 이러한 자신감이 술을 깨고나서도 이어질수 있다면 술이란 정말 대단한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술을 깨는 순간 사람들은 다시 주눅이 들고 자신감을 잃어버린다. 우리 마음이 알콜의 흥분상태에서 원상복구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술에 취했다가 깨여나서도 남는것은 있다. 그것은 아마 문학일것이다.   술에 얼근히 취하면 감수성이 예민해져서 현실과 공상과의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창조적인 사고력이 여느때보다 활발하게 움직인다. 우리가 잘 아는 당조때 시인 이백이 가장 전형적인 예가 아닐가 싶다. 얼근한 기분에 시흥이 넘치고 얼근한 기분에 불후의 명작을 남긴 사례가 부지기수인 원인이 여기에 있다. 술의 어떤 경지에 도달하면 창조적인 심경에 도달하여 필요한 자신감과 넓고 큰 마음이 생겨나는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집집마다 경조사때면 술을 한잔씩 마셨고 풍작을 이루는 추석을 맞아 술을 즐기고 새로운 한해를 맞이하면서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실때는 그 장소와 때에 맞추어서 마셔야 제격이다.   어떤 작가는 술에대해 이렇게 분석했다.   술이 발견된후 세계 어디에나 술마시는  사람들이 있다. 나의 친구중 누군가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그 친구는 나한테 차를 마시는 방법을 가르쳐주면서 술을 끊을 것을 권했던 친구이다. 그러나 술을 끊자고 결심하고 차를 마시기 시작해서 나는 불현듯 차와 술은 서로 다른 종류의 삶의 방식임을 깨달았다. 술은 차를 대신할수 있어도 차는 술을 대신할수 없음을 느낀것이다. 어느 작가가 말했던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 구절이 떠오른다.   중국 사람들은 술 마실때의 장소와 환경에 대한 강조를 많이 한다. 옛날 어느 작가의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술마시는 진수를다 가르쳐준 셈이다. 그래서 요즘따라 노래방이 흥성하는게 아닌가 싶다. 즐거움을 더하는데는 술 한잔 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가락을 뜯는만큼 한것이 없기때문이다. 가을철 소슬한 바람을 맞으며 강가에 배를 띄우고 술한잔 마시면서 인생을 논한다면 그러한 즐거움을 어찌 술마시지 않는 사람으로서 이해할수 있으랴.   그러나 술도 비난해야할것은 있다. 중국의 술문화에는 더 이상 마실수 없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마시게 하고 좋아하는 악습이 있다.   외국을 많이 돌아다녀 보았지만 여태 중국사람들처럼 술을 떠들썩 마시면서 억지로 권하는 나라는 아직 보지 못했다. 언젠가 사람들이 가득 모인 주연에 갔는데 처음에는 조용히 눈치를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더니만 한참후 술이 몇순배 돌고나니 여기저기서 시끄러운 소리가 일어나고 술좌석은 혼란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이 한결 주흥을 돋구기는 했지만 너나할것없이 제정신을 잃고 손님들은 큰 소리로 술을 더 가져오라고 재촉을 하고 자리를 떠나기도하고 비꿔 앉기도 하면서 누가 주인이고 주연의 의미가 뭐였던지도 분간이 서지 않는다. 그러다가 끝내는 술마시기 내기로 떨어지고 말았는데 사람들은 저마다 굉장한 주량 자랑과 간사한 지혜와 책략과 어떻게 해서든지 상대를 항복시키겠다는 생각으로 서로 겨루게 된다. 그러다보면 모두 녹초가 되고 여지없이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한다. 이튿날 서로 만난다 하더라도 얼굴마저 기억나지 않는것이 다반사다. 나는 술은 마시는 사람으로서 가져야할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유교사상으로 가득 찬 우리의 문화를 볼때 술을 권하는 풍토를 다소 이해할수도 있다. 술을 마시고 싶어도 비싼술을 권하지 않으면 마시지 못하는것이 정례였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술을 권할때 비로서 마음놓고 량껏 마실수 있었다. 손님이 사양을 하면 주인은 더 정성껏 권한다. 그렇게 권커니 작커니 하면서 술상이 무르녹고 서로의 관계는 돈독해진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시대가 지나갔다. 술이 귀한것보다는 건강이 귀하고 사람이 귀한시대에 들어섰다.  더 이상 술을 마시지 못하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마시게 하고 그 사람이 괴로워하는걸 보고 즐거워하는 풍토를 없애야 한다.   술은 주량보다도 술이 지닌 신비로운 가치를 존중하는것이 더 중요하다. 물론 술을 억지로 권한다는것도 유쾌하고 흉허물없는 친밀한 기분에서 나온 행동으로 그 때문에 술좌석이 흥이 도는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술자리에 참석하는 것은 단지 먹고 마시는것만을 위함이 아니다. 차례로 음식이 들어오는 사이사이에 이야기도 주고받고 농담도 서로 나누고, 여러가지 비즈니스에 대한 제안도 하면서 우리는 술의 매력에 듬뿍 빠진다. 술한잔 들어가면 우리는 마음을 연다. 서먹하던 사이가 한순간 가까와 짐을 느낀다. 인맥을 만들고 친한 사이를 만드는데는 술만한것이 없다. 유쾌한 즐거움속에 흠뻑 취해서 형님을 찾고 동생을 만든다. 그러다보니 비즈니스도 용의해 진다. 그러나 무턱대고 주는대로 받아마셔서 내 건강을 해치고 매일이다싶이 술에 빠져있으면 인생은 무너진다. 술에도 그 경지가 있는것이다. 술을 마셔야하는 상황을 나는 나름대로 세가지로 나눠어봤다.  적당한 시기, 적당한 장소, 훌륭한 사람들, 이 세가지가 다 구비된 상황에서 술을 마신다면 참으로 인생을 즐기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술을 마시는 깊이 또한 따로 있다. 적당한 시기, 적당한 장소, 훌륭한 사람들과 함게 한다해도 내 몸이 받지 못할만큼 취하게 마신다면 나한테 득될것이 없다. 실수를 연발할것이고 내 건강 내 인생에도 역작용을 놀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술은 폭음하면 안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미훈의 상태가 가장 적당한 양라고 생각한다.   나도 술을 약간하기에 그것이 내 친구의 말대로 도덕적인 약점이될수 있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나 그 반면에 약점이 없는 그런 사람은 또한 조심해야 한다. 약점이 없는 사람은 신용을 할수 없다. 성자가 아니라면 누구나 약점이 있을것이다. 그러나 약점을 남한테 보이지 않으려고 억지로 애를 쓰는 사람들은 남한테 자신의 마음을 열지않고 남의 열린 마음만 들여다 보겠다는 이기적인 사람일지도 모른다. 많은 책에서 보았겠지만 먼저 마음을 열어야 상대도 마음을 열고 서로 가까워 질수 있는것이다. 약점을 없는척 감추려는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라도 지나치게 냉정해지기 쉬워서 실수라고는 전혀 저지르지 않는다. 그들의 습관은 대체로 규칙적이며 술 마시는 사람보다 생활이 기계적이고 언제나 이성이 감성을 지배하고 있다.   나도 약간은 이성적인 사람은 좋아하지만 완전한 이성인이란 아주 질색이다. 언젠가 어느집에 초대되여 갔는데 방안은 물론 지나칠 만큼 깨끗하게 정돈이 되여있어서 아무렇게 앉기가 민망스러웠고 또 그 집 식구들은 누구나 단정해서 따뜻한 인정미라고는 찾아 볼수 없는것 같았다.  주인양반이 어떤 종교를 믿고 있다고 술을 마시지 않는단다. 물론 손님이 마실술도 없다. 온집식구가 식전기도를 한다고 그들과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까지 억지로 끼워서 기도를 한다. 손님을 접대함에는 주인의 입장보다는 손님의 입장을 생각하고 나보다는 남을 먼저 배려하는것이 사람의 살아가는 도리라고 나는 배웠다.   나는 내가 술을 마신다고 해서 술마시는것을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너무 근엄하고 완전 무결한 도덕가들과 종교 광신도들, 그리고 감정이 없고 시적인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보다는 다소 실수도 하고 틀리기도 하면서 술을 마실줄 아는 사람과 어울리는것이 더욱 유쾌하다는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술을 체질적으로 마시지 못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고 들었다. 그런 체질을 가지고 태여났다고 해서 힘을 잃을 필요는 없다. 중국의 유명한 시인 도연명은 현(鉉)이 없는 악기를 켜면서 즐겼다고 한다. 술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술을 못 마신다 하더라도 술의 정서를 느낄수가 있다. 그것이 더욱 중요하다. 이러한 사람이야 말로 시인, 성자, 애주가, 화가와 한자리에 앉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생각한다고 어느 작가가 말했다. 강태공도 낚시코가 없는 낚시를 고래희(古來稀)가 넘도록 즐겼다고 한다. 그것이 그 사람의 경지인것이다. 술은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고 술은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신비로움과 결부된, 술마시는 사람의 경지와 함께 한다.  내가 볼때 술을 마실줄 아는 사람은 지혜롭고 따뜻한 사람들이다. 지혜롭고 따뜻한 사람들과 함게 인생을 사는것이 무슨 죄라도 된단 말인가?
20    기다림의 지혜 댓글:  조회:2809  추천:0  2015-04-26
  무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나 본다. 창문을 열면 오히려 뜨거운 열기가 확확 불어 들어온다. 다들 퇴근한 오후라 사무실은 조용하고 마음은 평화롭다. 창밖을 보니 태양이 붉게 타오르며 도시를 벌건 그 빛속에 감싸 안았다.  높은 사무실에서 내려다보면 저 멀리 퇴근길이 바쁜 차량들이 길을 메우며 바삐 움직이는 모습들이 아름답다. 평화로 가득찬 내 마음의 경지가 주위를 아름답게 보는게 아닌가 싶다.   요즘은 가뭄 때문에 여기저기서 난리들이다. 비가 잘 내리지 않아서 농사에 큰 영향을 주는가 본다. 도시에서도 물이 부족하다고 비상이 걸렸다. 이틀째 물을 시간제로 주고 있단다. 동업을 하는 친구는 요즘따라 돈타령이 많다. 사업하는 사람치고 돈때문에 고민하지 않는 사람 얼마나 있으련만 그 친구의 그런 마음을 읽는 나로서는 안타깝기도 하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불붙듯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것은 때가 있고 준비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자연의 법칙을 거슬로 올라가려는 인간들의 미련함 때문에 우리는 다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기다림의 법칙을 잊고 사는듯 하다. 씨앗을 심고 바로 수확을 거둔다는것은 불가능한줄 잘 알지만 뭔가를 시작해놓고는 바로 일확천금을 꿈꾸기도 한다.   옛날에 들었던 이야기 한편이 떠오른다. 어느 산속에 은거하여 살고 있는 스님 수하에 동자중 한명이 있었다. 어느날 동자중은 사찰주위의 농장을 돌다가 알을 품고 있는 암탉을 발견했다. 암탁은 부화를 마침 마치고 우리를 떠나 먹을걸 찾으러 가고 없었다.그 짚더미속에는 곧 부화될 병아리들이 알속에서 톡톡 밖으로 알을 깨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애썼지만 계란껍질은 잘 깨여지지 않았다. 이를 숨죽여 가만히 지켜보던 동자중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손에 쥐고 있던 목탁채로 병아리가 빨리 나올수 있도록 계란 껍질을 깨주었다. 하지만 그 순간 껍데기에서 나온 병아리는 날개를 늘어뜨리고 한참을 떨더니 뛰놀기는 커녕 얼마 안 돼 죽고 말았다. 깜짝 놀란 동자중은 스님에게 뛰여가 말했다. 스님은 동자중의 한 행동을 차분히 듣고는 이야기 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동자중은 병아리에게 미안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며 죽은 병아리를 고이 묻어 주었다. 열매는 익어야 떨어지는 법이다. 익지 않은 열매을 억지로 따서 먹어보았자. 쓴맛만 날 뿐이다. 기다림과 인내를 거쳐서 알맞게 익은 열매라야 그 맛을 제대로 낼수 있다.  천여년전 맹자(孟子)도   (雖有磁基,不如待時) 라는 멋진 말을 남겼다. 쟁기란 밭을 가는 농기구를 가르킨다. 어떠한 좋은 농기구가 갖추어져 있더라도 때가 되지 않아서는 수확을 기대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 보다는 때를 기다려 일을 시작하는 편이 좋은 농기구를 가진 것보다 더 많은 수확을 올릴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농사뿐만 아니라 모든 일, 더구나 인생의 사는 방식과도 통하고 있다. 쟁기란 말하자면 그 사람의 실력에 해당되는게 아닌가 생각한다. 만약 충분한 실력을 갖추고 있어도 때가 오지 않는다면 그것을 발휘할 수 없다. 반대로 때를 잘 만나면 어느 정도 실력이 없어도 그것을 몇배 몇십배 살릴수 있는것이다. 실력도 있고 때도 잘 만나면  더 이상 바랄것은 없으나 인생이란 그렇게 순조롭게 풀리는것이 아니다. 실력을 쌓으면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 좋은 때를 잡는자가 마지막에 웃는 자가 되는것이다.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것은 너무나도 많다. 이제 우리는 그 기다림의 지혜로 스스로를 갈고 닦아야 할것이다. 때로는 좌절하고 참고 연마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런 것들이 모두 성장의 과정이 아니겠는가?! 글을 쓰고 있으려니 어느덧 땅거미가 지고 도시에는 여기저기서 불들이 밝아온다. 밝게 창을 비추는 반달옆에 어느새 장명성이 반짝인다.   우리 말 시조 한편이 떠올라 혼자 읖조려 본다. 언젠가 한국에서 강의차 연변에 왔던 크리스토퍼리더십코스의 강사님들과 함께 백두산에 올랐을때도 외웠던 시조다.   장검을 빼여들고 백두산에 올라보니 일엽(一葉)제잠이 호월(胡越)에 잠겼어라 언제나 남북 풍진을 헤쳐볼가 하노라.     큰뜻을 품고 인생을 헤쳐가려는 우리가 작은 일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한다면 어찌 그 큰 꿈을 다 이룰수 있을것인가?! 인생의 끝은 저 멀리 산너머에 있다. 한걸음에 그 목표에 도달할수는 없을것이다. 그러나 매 한걸음 내디딜때마다 우리는 그 성공과 목표와 한걸음 더 가까와지고 있다. 이제 해야할 일은 한걸음 더 다가서는 것일 뿐이다.
19    항룡유회(亢龍有悔) 댓글:  조회:2684  추천:0  2015-04-22
  봄은 기다릴새도 없이 후딱 다가 왔다. 따뜻한 기운에 대지는 생기가 넘친다. 거리에는 벌써 반팔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도 많다. 오후에는 교외에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 양봉장에 다녀왔다. 화창한 봄날이라서 그런지 벌써 꿀벌들은 분주히 날아다닌다. 무겁고 힘든 임무를 당분간 마무리 하고나니 문뜩 여유가 생겼다. 일의 여유와 마음의 여유는 뭔가 다른듯 싶다. 일을 하다가 쉬다보면 여유롭다기보다는 걱정에 쫒기는 마음이 강하지만 마음이 여유로워지면 일에 대한 걱정이 없다. 꿀벌은 부지런함의 상징으로 많이 알려져왔다. 그러나 부지런하지만 꿀벌은 휴식할줄 잘 모르는듯 싶다. 그래서 꿀벌은 30일좌우밖에 살지못한다고 한다. 부지런해야겠지만 문뜩문뜩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미래의 꿈과 비젼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진다면 더 효율적인 인생을 만들수도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주변에 있던 작은 돌멩이들을 주어서 장난삼아 점쾌를 벌려봤다.(주역 관련 연구나 점술같은것은 내 취미생활중의 하나임^-^)    의 점쾌가 나왔다. 항룡 (亢龍)이란 승천하는 용을 가르킨다. 이를 인생에 비유하면 존귀한 지위에 오른 사람을 일컫는다. 정상까지 올라간 사람은 이윽고 전락의 길을 걸쳐 후회를 낳게 된다는 가르침의 말이기도 하다. 역경의 전반에 걸쳐 가르치는 말이지만 음의 극에 이르면 양을 태동하게 되고 양의 극에 이르면 음을 부르듯이 는 깊은 뜻을 알려주고 있다. 주역은 사서오경중 오경의 제일 첫 경으로서 그 가르침의 깊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항룡유회의 뜻을 현재 나의 생에 맞춰 점을 맞춘다면 로 풀이된다.   역(易)이란것은 원래 변화를 나타내는것이라서 이 세상 속에는 무엇하나 일정불변의 것은 없다는 인식을 알려주려고 한다. 왕성함 속에서 쇠퇴의 조짐을 볼수 있어야 한다는 사상을 전파하려고 하는것이다. 꼭대기까지 올라간후의 전락을 면하기 위해서는 물러설 시기를 그리쳐서는 안된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늦어도 꼭대기까지 올라간 그 때에는 물러날 때를 생각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 된다. 지금 올라간듯 하나 올라감이 없고 큰듯하나 크지가 못하고 튼튼한듯하나 내실이 없고 왕성한듯하나 쇠퇴의 조짐을 보이니 장차 후회할수 있으니 어서 준비하고 잘 정돈하라는 점쾌이다. 현재의 상황과 잘 맞아떨어져서 문뜩 뭔가 깨치는데가 있어서 한참 하늘을 쳐다보며 그 여운을 즐겼다.   유명한 연설가 하르세 윌슨의 어린시절을 회억하면서 했던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가 미국 텍사스주의 동부에서 어린시절을 보낼 때 그는 친구 두명과 함께 여느 때처럼 페쇄된 철로 위를 걷고 있었다. 한 친구는 마른 체격으로 그와 비슷했고 자크라는 다른 한 친구는 그와 반대로 뚱보였다. 철로 위를 걷다 세 아이는 철로 위에서 떨어지지 않고 누가 제일 멀리까지 가는지 시합을 하기로 했다. 하르세는 최소한 뚱보는 이길수 있을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만만했다. 그의 머리속엔 오직 마른 체격의 친구뿐이였다. 어떻게 하면 그를 이길수 있을지 온갖 전략을 짰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그와 마른체격의 친구는 몇걸음도 가지못하고 미끄러졌다. 몇번을 시도해 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반면 뚱보친구는 흔들리지 않고 계속 철로 위를 걷고 있었다. 그를 얕보고 있던 하터는 놀라 물었다. 그랬다. 쟈크는 뚱뚱한 체형때문에 두 친구처럼 자신의 발을 보면서 걸을수 없었다. 발을 보지 못해 불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결국 철로 위의 먼 지점을 바라보며 그곳을 목표로 잡았다. 그러고 나서 목표점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그 목표에 다르면 또 먼곳에 목표를 정하고, 계속 새로운 목표를 잡아 걸었기에 철로 위를 떨어지지 않고 걸을수 있었다. 하르세 윌슨은 훗날 어른이 돼 강연을 할때면 이런 말을 자주 했다.
18    청명절 일기 댓글:  조회:2535  추천:0  2015-04-06
  청명절에 할머니 산소에 다녀왔다. 할머니가 세상뜨신지도 벌써 30년이 돼간다. 부모님을 모시고 차로 한시간 반 넘게 달렸다. 다시 반시간 가까이 등산하듯이 산발을 타서 산소에 도착하니 점심시간이 다 되였다. 아버님도 이제는 여든이 가까워온다. 그러나 할머니 산소는 청명절, 추석명절 빼놓지 않고 다니신다.   산소에 흙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고 나니 벌써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다. 산소앞에서 집에 담가두었던 앵두술 한잔 마시며 옛 고향의 하늘을 쳐다보니 구름이 둥실 떠가는 저 하늘이 마냥 푸르기만 하다.   어떤 사람들은 청명절과 추석에 산소에 간다고 하면 미신을 믿는다고 웃는다. 조상숭배요 , 우상숭배요 하면서 말리기까지 한다. 조상숭배라고 해도 좋고 우상숭배라고 해도 좋다. 내가 어릴적 그렇게 사랑해주시던 할머님께 일년에 두번 찾아뵙는것이 형식이면 어떻고 숭배라면 어떻겠는가?! 이미 저 세상간 어르신에 대한 예의이고 효도를 갖추는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풍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작은 외삼촌의 생각이 떠오른다. 외삼촌은 언제부터인가 어떤 종교를 믿더니만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는날 제사상에 술 한잔 붓지않고 절 한번 안했었다. 지금은 옛날처럼 먼길 떠날때 절을 하지는 않지만 옛날에는 먼길 갈때 부모님께 절을 하는것이 예의였다. 하물며 다시 못볼 먼길을 떠나는 부모님께 절을 올리는것이 어찌 조상숭배로 생각해야 하는것일까?.   영원한 사별을 하게 될 부모님께 인사 한번 올리지 않고 머리돌려 외면하는 자식이 사랑의 종교라는 그 사랑을 뭘로 어떻게 하며 효도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어찌 제대로된 삶을 기대할수 있을가 싶어진다. 하면서 할머니 산소에 말씀하시고 돌아서시는 아버지의 뒤모습을 보면서 나도 어쩐지 서러워 났다.
17    여섯가지 시험 댓글:  조회:2716  추천:1  2015-04-04
  밖에서는 부슬부슬 봄비가 내리고 있다. 을씨년스런 날씨가 밖에 나다니고 싶은 마음을 없앤다. 하루동안 몸을 움츠리고 사무실에만 박혀 있으면서 차를 마셨다. 요즘은 그렇게 좋아하던 홍차도 버리고 영지버섯과 상황버섯을 달여서 마시는 건강차를 대신했다. 영지버섯과 상황버섯을 조금만 많이 넣어도 차물이 쓰고 턻어서 여간 맛이 없는것이 아닌데 한 일주일간 양을 조절하면서 끓여보았더니 그제사 어느정도 넣어야 하고 어느정도 끓어야하는지 감을 잠을수 있었다.   그렇게 무엇이든 시간이 필요하고 노력이 필요하고 과정이 필요한것이다. 차 달이는것이 그러할진대 인생사 또한 그렇지 않겠는가. 여름에 한줄금 내리는 비는 시원하고 공기를 정화하는 효과가 있지만 봄비는 농사짓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수나 다름없다.   우리 지역은 언제나 봄 가뭄때문에 무척이나 고생하던 곳인데 이렇게 여느해와 다르게 봄비가 내리고 있으니 농사하는 사람들에게는 다행이 아닐수 없다.   봄이되니 회사일도 다소 바빠지기 시작했다. 지난번 거래하던 회사와 새로운 계약을 했었는데 그 회사에서 오늘 우리 구좌에 계약금을 입금한것이 확인됐다. 계약서를 써놓고 계속 입금이 늦어져서 무척 마음을 썼는데 이렇게 입금확인이 되니 그 기쁨이 말할수 없이 컸다. 그것이 사업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아닐가 싶다.   돈을 쫒아가는것이 아닌 일을 찾아서 하면서 한건한건의 일들이 성취될때마다 느끼는 성취감과 자부심은 사업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느낄수 없는 기쁨인것이다. 그러나 계약을 맺고 계약금이 들어왔다는것은 그 일에 대해서 이제 비로서 시작한다는 의미이니 더욱 조심하고 노력해서 우리한테 믿음을 준 회사에 더 큰 신뢰를 심어줘야한다는 깊은 뜻도 내포되여 있는것이다.   중국의 “동주열국지”를 읽어보신분들은 다 잘 아시겠지만 여불위가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 썼던 라는 책이 있다. 물론 여불위가 쓴것이 아니라 그의 문객들이 쓴걸 집필한것이지만 말이다.   중국 사상의 원류라고 말해도 좋은 이 에는 논인(论人)이라는 장이 있다. 여기에서는 사람을 그 출처진퇴로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팔관육험”(八观六验)이라는것을 지적했다. 여덟가지의 관점과 여섯가지의 방법으로 검토하여 그 인물의 실력이나 각오 등을 종합 판단할수 있다는것이 그것이다. 그중에 여섯가지 시험이 무척이나 흥미롭다. 그중 첫번째가 “그를 기쁘게 함으로써 그 지킴(守)을 시험한다.” 는 말이 있다. 인위적이든 아니면 하늘의 뜻이든 돈을 벌게 해준다든가 승진,승급을 해준다던가 등 바라던 어떤 일들이 이루어지게 해주고 그 사람이 어떻게 “자제”를 할수 있는지를 살펴볼수 있다는것이다. 의외의 즐거움이 주어졌을때, 무조건 좋아한다거나 감격에 목이 메이는것이 인정인데, 그때 자제할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신뢰할수 있다는것이다. 맞는 말인듯 싶다. 우리도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작은 승진이나 승급을 했다고 해서 큰일이나 한것처럼 우쭐렁거리고 폼을 잡고 다니다가 패가망신하는걸 보아왔다. 그럴때 사람들은 애석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손벽을 치며 좋아한다. 인품을 갖추지 못한 사람에 대한 답보이리라. 그 두번째 시험은 “그를 즐겁게 해서 그 치우침(僻)을 시험한다.”로 돼있다. 여기서 벽(僻)은 ‘버릇’이 아니고 ‘치우치는 것’을 뜻한다. 즐거운 일을 시켜 그 일에만 열중하여 사회인으로서 균형감각을 잃는지 어떤지를 보려는 뜻이다. 사람이 어떻게 좋아하는 일만을 하면서 살수 있겠는가? 즐거운일은 즐거워서 해야겠지만 때로는 궂은일도 찾아서 할줄 알아야 사회인으로서의 인정과 스스로의 인격의 발전을 거둘수 있는것이다. 요즘 아이들이 게임에 빠져서 헤여나오지 못해서 부모들이 상담을 해올때면 현대인들에게 다가오는 점점 더 커지는 유혹을 어떻게 이겨내야하는지에 대한 걱정이 든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자력으로서 그 유혹을 이겨내야만 하는것이다. 우리는 마음수련이 그 어느 시대보다도 더 필요한 시점에 직면한것이다. 세번째는 “그를 화나게 하여 그 절제(节)를 본다”로 돼있다. ‘절’이란 절조, 절도이다. 자기주장을 너무 강하게 내세우는 사람들, 즉 일이 잘되면 자기가 잘해서고 일이 안되면 남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이다. 각종 핑계로 책임을 회피하려는 사람은 사회인으로서의 척도를 자기 기준으로만 생각하기에 자신의 가치기준이 없다. 그런 사람들은 절제의 도를 모른다. 젤제는 스스로의 가치기준이나 사회의 척도에 맞추어서 한발 물러서는 용기인것이다. 네번째는 “그를 두렵게 하여 그 독립(独)을 본다.” 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공포를 느낄때 흔히 무엇인가에 매달리게 되거나 도망치거나 아니면 굴복하게 된다. 두려움앞에서 독립심을 가지고 대항하는지 어떤지를 살펴보라는것이다. 현대로 말하자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위기관리’ 능력을 시험해보는 것이라고 할수 있다. 다섯번째는 “그를 슬프게 하여 그 사람됨을 시험한다.” 이다.’ ‘인’이란 인품, 인간으로서의 내용을 말한다. 사람은 정이 있어야 하고 정이란 인품에서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의 인품은 슬픔에 빠졌을때 가장 잘 나타난다고 보고 있는것이다. 여섯번재는 “그를 괴롭게하여 그 뜻(志)을 본다.”로 돼있다. 역경에 빠졌다고 녹초가 되어버리는것은, 확실한 목표와 빈틈없는 계획의 부족으로 선인들은 보고 있는것이다. 맹자의 유명한 말 한마디가 기억난다. “天将降大任于斯人也,必先苦其心志,劳其筋骨,饿其体肤,空乏其身”이라는 말이다. 하늘이 중요한 임무를 모 사람에게 주려한다면, 꼭 그 사람의 의지를 괴롭히고 그 사람의 근육과 뼈를 단련시키고 그 사람의 장과 위에 굶주림을 가하고 그 사람의 신체를 구차하게 만듬으로서 그 사람의 능력을 증가시킨다는 말이된다. 그렇게 본다면 인간이 역경에서 성장하고 어려움속에서 발전을 하는것임에는 틀림 없는듯 싶다. 학생시절 가끔씩 다니던 교회에서의 기도생각이 난다. 불교의 법회에 나가거나 다른 어떤곳에서는 잘 듣지못하는 기도가 있는데 그때 교회에서 사람들은 목사따라 기도를 하는데 “저희를 시험에 들지말게 해주소서”하는 말이 있었다. 그때는 무슨말인지 잘 몰랐었는데 썩후에 가서야 그 말이 ‘별탈없이 평안하게 해주소서’하는 기도를 좀 더 기독교적으로 하는 말임을 알게되였다. 누구나 시험에 들기를 원하지 않을것이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아마 하느님도 시험을 쳐봐야 비로서 사람의 됨됨이를 아나본다.   내 직업이 직업이니 만큼 매일 만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일일이 시험을 쳐서 사람됨됨이를 알수는 없겠지만 간단한 언행이나 행동거지에서 우리는 그 사람을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물은 건너가야 그 깊이를 알수 있고 사람은 지내봐야 그 마음을 안다고 했듯이 서뿔히 독단하는것도 바람직하지만은 않을것이다.   예전에는 손님이 오면 커피를 많이 올렸는데 요즘은 영지버섯차로 대신한다. 의외로 사람들의 반응이 좋다. 영지차는 너무 뜨거울때보다는 끓인후 약간 식혀서 마시는것이 좋다. 그래야 비로서 영지의 순수한 자연의 향기를 음미할수 있기때문이다. 영지버섯만 끓일때는 모르는데 상황버섯과 같이 끓이면 차에서 약간의 흑냄새가 난다. 아니 흑냄새라기 보다는 시골산길에서 한줄금의 비가 내린후 나는 그런 청신한 향기가 난다.   봄비가 내리는 이런날 차를 마시는 나에게는 차향기와 함께 따뜻한 인연의 향기가 피여오른다.
16    숙명 댓글:  조회:2768  추천:1  2015-04-03
  오늘은 음력 이월 십팔일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날이다. 오늘따라 청명을 맞아서인지 봄비가  내리는가 싶더니 밤새 봄눈이 가득 내렸다.  부처님 열반날은 예수님 오신 날과는 달리 선물을 주고 받는 명절 분위기가 없다. 그러나 오히려 장엄하고 숙연한 분위기가 나는 이날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벌써 봄이 오는가부다. 봄비가 대지를 적신다. 풍년들 징조이리라. 풍년이 들고 흉년이 드는 어떤 숙명이라는것은 있는것일까? 인간은 숙명을 거슬러 보고자 노력한다고 한다. 정말 숙명이 있는것일까? 숙명이 있다면 어떤것일까? 숙명론자들은 그것을 인정할지도 모른다. 사람은 사람의 힘의로 어쩔수 없는것들이 있다. 비행기를 만들어서 자연을 정복하려고 하나 비행기가 언제 추락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생명을 연장하려고 갖은 애를 다 쓰지만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 그게 숙명이라면 숙명이라고 할수도 있을것이다.   사랑을 시작하나 사랑이 언제 떠날지도 알수 없다. 그것도 숙명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통속에서 산다고 부처님께서 그리 가르쳤을것이다. 만남이 무르익으면 떠나감이 기다린다. 사랑을 심는 계절에 사랑은 떠나간다. 그게 운명의 장난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아니면 사랑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집에서 늦은시간까지 컴앞에 앉아 일을 하다가 창문을 여니 시원하고 습윤한 바람이 가슴 가득히 들어온다. 요새는 이것저것 일을 한답시고 멈추어 보지를 못했다. 사람은 가끔씩 휴식하면서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할듯 싶다. 나무베는 나무군에게는 도까나 톱같은 연장을 가는 시간이 필요하듯이 우리의 삶에도 휴식하면서 미래를 계획하는 시간이 필요할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정신을 충전하는 방법중의 하나가 아닐까 ?   오늘은 왠지 가슴이 많이 아프다. 창문가에 흐르는 빗물처럼 내 맘속에서도 비가 내린다. 멀리 빗속을 걸어가는 여인의 뒷모습이 보인다. 저 빗속에서도 가야할 길이 있나부다. 뒤못습이 무척 애처롭다. 부처님은 자비를 품고 오셨고 자비를 실천하셨고 자비를 가르쳐 주셨다. 부처님께서는 삼보에 귀의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삼보에 귀의한다는 말은 부처님께 귀의하고 부처님의 말씀에 귀의하고 부처님께서 창건하신 승단에 귀의한다는 말이다. 부처님은 그로써 우리에게 인생의 참된 길을 가르치려고 애쓰셨다.   인간이 그냥 숙명대로 사는것이라면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가르침을 주실 필요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숙명을 바꾸고자하는 인간의 노력에 응답하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가르치고 있기때문에 우리는 그 말씀을 따르고자 노력하는게 아닐까 싶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또 엄연히 숙명이 있다고도 한다. 그건 우리가 전생과 금생에 쌓은 업보에 의한 것이라고도 한다. 업에 의한 숙명, 그것은 참으로 무섭고도 자비로운 것이라는 생각이든다. 그것을 벗어날수 있는 길을 부처님께서 오셔서 가르치신것이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어가신 지금에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것을 기록한 경전을 가지고 믿고 따라야한다고 불교에서는 가르치고 있다. 불교에서는 부처님께서 오셔서 설법하시던 시대를 가리켜서 정법(正法)시대라고 한다. 부처님께서 입적하신후 경전을 가지고 공부하는 시대를 상법(像法) 시대라고 한다. 그 이후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가는 시기가 있다고 한다. 그때를 말법(末法)시대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곁을 떠나가셨지만 부처님 계시던 그때를 우리는 생각한다. 잠이 오지 않는다. 내게 주어진 숙명이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나의 삶, 나의 사랑, 나의 우정, 나의 모든것을 생각해본다. 내가 살아온길과 이제 살아가야 할길을 찾아본다. 창문으로 내려다보니 아래층 화단에 심은 꽃나무들이 봄눈에 애처롭다. 문뜩 소시적 아름다워서 기억해두었던 노천명 시인의 시 한수가 떠오른다. 들녘 경사진 언덕에 네가 없었던들 가을은 얼마나 적적했으랴 아무도 너를 여왕이라 부르지 않건만 봄의 화려한 동산을 사양하고 이름 모를 풀 틈에 섞여 외로운 절기를 홀로 지키는 빈 들의 새악시여 갈꽃보다 부드러운 네 마음 사랑스러워 거치른 들녁에 함부로 두고 싶지 않았다 한아름 고이 꺾어 안고 돌아와 책상위 화병에 너를 옮겨 놓고 거기서 맘대로 화창하라 빌었더니 들에 보던 그 생기 나날이 잃어버리고 웃음 거둔 네 얼굴은 수그러져 빛나던 모양은 한 잎 두 잎 병들어 가는구나 아침마다 병이 넘게 부어주는 맑은 물도 들녘의 한 방울 이슬만 못하더냐? 너는 끝내 거치른 들녘 정든 흙 냄새 속에 맘대로 퍼지고 멋대로 자랐어야 할 것을..... 뉘우침에 떨리는 미련한 손은 이제 시들은 마른 너를 다시 안고 높은 하늘 시원한 언덕 아래 묻어주러 나왔다 들국화야! 저기 너의 푸른 천정이 있다 여기 너의 포근한 갈(葛) 방석이 있다   국화제(菊花祭)라는 제목으로 된 참으로 처량하고 아름다운 시다. 여성 시인의 자상함과 사랑의 마음이 가득 담긴 시인듯하다. 국화는 국화답게 들에서 살아야 하나보다. 그게 국화의 숙명이라면 그리 살아야 할것이다. 모든 생겨난것은 소멸된다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우리는 언제나 이별을 준비해야한다. 그것이 인간의 숙명이리라. 그러나 준비하고 있어도 슬픈것이 이별이다.   아니 모든 이별은 준비를 허락하지 않는다. 인연은 문뜩 왔다가 문뜩 떠나가는 숙명적인 뭔가가 있는것 같다. 그래서 더 슬프다. 아~님은 나를 떠나갔지만 나는 님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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