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섭[金珖燮, 1906.9.21 ~ 1977.5.23] 시인. 그는 1906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출생했다. 호는 이산(怡山)이다. 서울, 당시의 경성(京城)에 있는 중동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그는 그 시절에 같은 대학 불어불문학과에 적을 둔 이헌구(李軒求)와 친교를 맺었으며, 이어 정인섭(鄭寅燮)과 알게 되어 해외문학연구회, 극예술연구회 동인으로 활약했다. 1933년 《삼천리》에 「현대영길리시단」을 번역 발표했으며, 같은 해에 「개 있는 풍경」을 《신동아》에 발표하며 등단했다.
1932년 대학졸업 후 귀국하여 1933년 모교인 중동학교의 영어교사가 되었다.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하여, 1941년에 일본경찰에 붙잡혀 3년8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44년 출감하여 그후 대통령 공보비서관도 지냈다. 경희대 교수, 세계일보 사장 등을 역임했다.
그의 문단 활동은 크게 해방 전후로 나눌 수 있는데, 해방 전의 문단 활동은 해외문학파로서의 활동, 연극평을 중심으로 한 평론 활동, 시작(詩作) 활동 등으로, 또 해방 후의 문단 활동은 해방문단에서의 좌익과 대항한 민족주의 문학 운동, 6·25 이후의 문단 활동, 투병기의 창작 활동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의 초기시는 꿈과 관념의 세계를 노래하는 한편 일제하의 암담한 시대 상황에서 오는 고독, 허무, 불안이 반영된 작품을 썼으나, 후기에 와서 생경한 관념 세계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원숙한 경지의 작품을 썼다.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가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리하여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 위에 뜨고
숲은 말없이 물결을 재우느니.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ㅡ「마음」 전문, 월간 『文章(문장)』제5호, 1939년 6월호
그의 시 「마음」은 『文章(문장)』6월호(1939)에 발표되고, 제2시집 『마음』의 표제가 된 시로서 이산(怡山)의 초기 작품에 속한다.
자기의 마음을 고요한 물결에 비유하여 심리적 갈등과 함께 항상 파문을 일으키기 쉬운 마음을 지키려는 경건한 자세를 잘 나타내고 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이산(怡山)은 당초 <해외문학파>의 일원으로 해외시(海外詩)의 수입․소개를 주로 하였으나 후에 창작시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의 초기 작품은 사변적(思辨的) 경향을 띤 것이 많았다. 즐겨 쓰던 어휘도 불안․고독․비애 등을 내용으로 하는 것들이 많았다. 이 시 또한 자기의 꿈을 잃지 않고 ‘밤마다 덮음’으로써 지키고 있는 시인의 고요한 지적 관조(知的觀照)를 곱게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우리는 이 시에서 조용한 관조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사념(邪念)이 없이 고요한 심경으로 시심이 찾아들기를 기다리는 시인의 자세가 경건하게 느껴진다.
은유와 상징이 조화 있는 배합을 이룬 이 시에서 우리는 모진 현실의 삶을 떠나 어떠한 외부 세계에도 흔들리지 않는 명경지수(明鏡止水) 같은 심경을 얻으려 했던 시인의 인생관 읽을 수 있다.
내
하나의 生存者로 태어나서 여기 누워 있나니
한 間 무덤 그 너머는 무한한 氣流의 波動도 있어
바다 깊은 그 곳 어느 고요한 바위 아래
내
고달픈 고기와도 같다.
맑은 性 아름다운 꿈은 잠들다.
그리운 世界의 斷片은 아즐타.
오랜 世紀의 지층만이 나를 이끌고 있다.
神經도 없는 밤
時計야 奇異타.
너마저 자려무나.
ㅡ「고독」 전문,『시원』 2호(1935.4) / - 시집 「憧憬」(1938)
김광섭 시인의 이 시 역시 그의 초기시에 해당되는 작품으로 대표시이며 또한 그를 출세시킨 작품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 시에는 주지적 경향과 관념적 표현이 두드러지며, 식민지 시대의 지성인이 겪는 자의식과 지적 고뇌가 심각하게 표출되어 있다. 그러므로 단순히 철학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시대 상황과 관련된 존재론적 성찰이라는 점에서, 이 시는 그의 시대 인식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자유를 잃고 외세의 지배를 받던 사회에서 모든 생활을 버리고 그날 그날 생존만을 이어갈 수 밖에 없었던 지성인의 자의식과 고민이 심각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는 일제 치하의 가장 양심적인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일제의 모진 압박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자신을 지켜온 김광섭은 창씨 개명(創氏改名)을 거부하다 끝내는 영어(囹圄)의 몸이 되기도 하였다.
당시 자신이 깨어 있는 것은 밝은 미래에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인간 역사 과정에서 터득한 오랜 세기의 지층(知層)과 같은 관념적이고 표피적인 지식에 근거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제 치하를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맹목적으로 돌아가는 시계 바늘과 같은 것으로 인식한 자기비판적 성찰의 결과로, 시계처럼 사물화되어 맹목적 생존의 상태와 다를 바 없는 식민지 치하의 무의미한 삶을 이 시를 통해 비판하고 있다.
그의 시에는 내면적인 슬픔이 담겨져 있다. 그가 즐겨 택한 주제는 이별이고 슬픔이라는 어휘를 끊임없이 사용하였다. 그의 세계는 기본적인 자유가 박탈된 채 감옥에 가야했던 일본 식민지의 슬픈 세계였다. 그는 그러한 상징을 감상적인 시에 담았다. 식민지와 실향의 비애를 그려낸 그의 시를 통한 자연으로의 도피, 사랑과 슬픔의 관계는 비참한 세상으로부터 탈출하려는 그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모두에 대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해방 직후 그는 우익 문학단체인 ‘중앙문화협회’와 ‘전조선문필가협회’를 결성해 활동했다. 1946년 그동안 운영해오던 광산의 재정 적자가 쌓이자 정리하고, 1947년에는 민중일보 편집국장과 미군정청 공무국장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같은 해 《백민》에 평론 「문학과 현실」을, 1948년에는 《민성》과 《백민》에 각각 시 「겨울밤」과 평론 「문학의 현실성과 그 임무」를 발표하고 정부수립을 할 즈음, 이승만 대통령의 초대 공보비서관으로 임명되어 관직과 집필생활을 병행하는 바쁜 와중에도 1949년에 두 번째 시집 『마음』을 간행하고, 1950년에는 당시 김송이 발간하던 문예지 《백민》을 거둬들여 《문학》으로 제호를 바꿔 펴내었다.
그러나, 《문학》은 곧이어 터진 한국전쟁 탓에 휴간했다. 김광섭은 피난처에서 ‘공보처’가 발행하는 대한신문의 사장으로 취임해 갑작스런 전쟁으로 말미암아 어려움에 빠진 문단을 간접적으로나마 돕는 계기가 되었다.
1951년, 대통령 공보비서관직을 사임하는 것을 계기로 정계에서 물러나온 그는 1952년에 경희대학교 교수에 임용되어 대학에서 후학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이즈음 《문예》에 시 「푸른 상처」 등을 발표하고, 1954년에는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중앙위원과 1956년 ‘한국자유문학자협회’ 회장에 피선되어 활동했다. 1956년에는 문학잡지 《자유문학》을 창간하고, 1957년 제7회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며, 세 번째 시집 『해바라기』를 발간하는 등 역동적인 문단 활동을 했다. 초기부터 여러 단계에 걸쳐 그토록 현실과 추상의 균형미를 이루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시는 추상과 관념 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1958년 김광섭 시인은 세계일보 사장에 취임하면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원작 『서정시집』을 번역 발간하고, 1960년에는 《사상계》에 시 「하루의 공동된 희망 속에서」, 1961년에는 《현대문학》에 시 「동백꽃」 등을 발표했다. 이즈음 서울 성북구 성북동 168번지 34호에 2층 양옥을 지어 입주했다.
그 무렵은 그가 1956년에 자신의 손으로 창간해 꾸려오던 《자유문학》이 1960년대에 들어 재정난을 겪다가 마침내 휴간에 들어가는 등 주변의 일들로 골머리를 앓다가 그 여파로 고혈압 증세를 보이던 시기였다.
그러던 중 1965년 4월, 60세의 나이에 서울운동장에서 벌어지던 경희대학교와 고려대학교의 야구경기를 관전하다 뇌출혈로 쓰러져 메디컬센터에 서둘러 입원한 뒤로 병·죽음과 고투를 벌였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주변을 정리하고 비로소 온전히 자기의 시간을 문학을 위해 쓸 수 있었다고 한다.
4년여의 투병생활을 격으면서 그의 문학적 업적의 결정이라 할 수 있는 제4시집 『성북동 비둘기』를 1969년 범우사(汎友社)에서 출간했다.
이 시집 속에는 <산> <성북동 비둘기> <무제> 등 그의 정신의 특질인 근원에의 향수와 사회비평의식이 격렬히 맥동하고 있다. 현대적 의미의 관념을 간직하면서도,관념어의 구사나 추상적 표현이 말끔히 가시어 구체적인 표현의 아름다움과 세련된 솜씨를 보인다
질병, 가난 등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오히려 참된 인간의 의지, 정신력의 절대성 위에서 건강하고 생명력있는 작품들을 계속 발표하고 있으며 초기부터 현재까지 시의 내용과 형식에 아울러 관심을 가지고 그 어느 한편에만 치우치지 않는다. 내용에 있어서도 어느 한 사상이나 정신만을 추구하여 집중하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고 광범하고 다채로우면서도 인간의 삶과 시대에 밀착된 관념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정치적인 이상이 주제를 이루며 『성북동 비둘기』는 그의 현실인식과 사색의 깊이를 잘 보여주고 있는 그의 대표적인 시집이다.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ㅡ「城北洞 비둘기」전문, 시집 『성북동 비둘기』(범우사, 1969)
이 시는 1960년 중반 이후 급격히 진행된 산업화, 도시화로 인해 황폐해진 자연으로부터 점차 소외되어 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성북동 비둘기」를 통해 보여 주는 작품이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근대화, 산업화에 따르는 자연 파괴와 인간성 상실이라는 현실 인식이 이 시의 시작 동기(詩作動機)다. 그리고 김광섭 시인의 초기 시에서 보이던 사변성(事變性)이나 관념성에서 벗어나 서민과의 일체감 속에서 격조 높은 문명 비평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
결국, 시인은 인간 스스로 창조한 물질 문명 앞에서 자연의 훼손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인간성마저 박탈당하는 아이러니컬한 현상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가 목표하는 것은 현대 문명에 대한 야유나 비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물질 문명 시대에 자연의 소중함과 사랑과 평화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더욱 소박하고 겸허한 일상인의 자세로서 삶을 이야기하고, 나아가서는 달관의 미적 공간을 열어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김광섭 시의 부드러움과 따뜻함 뒤에는 우리 사회가 산업사회로 이행하면서 드러내 보인 비인간화에 대한 준엄한 비판정신이 도사리고 있다. 그는 갈수록 강퍅해지는 인간관계와 산업화사회에서 불가피했던 인간의 물화에 대한 저항정신을 숨기려 하지 않았고, 삶의 진실을 감추고 위협하는 일체의 위선과 허위에 대해서도 비판정신을 발휘했다.
그는 그동안 몸담아오던 경희대학교를 퇴직하고, 1970년에 ‘국민훈장모란장’을 수상했다. 1971년 《현대문학》에 시 「장미」 등을 발표하던 즈음에 아내의 죽음을 맞이하는데, 자신의 투병생활과 아내의 죽음, 그리고 오랫동안 거처로 삼았던 성북구를 떠나 동대문구 중화동으로 이사하는 번거로운 일을 치르면서도 다섯 번째 시집 『반응』을 펴내었다
그의 마지막 이 시집 속엔 시가 개인적 정서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사람이 사는 사회의 가슴일 수도 있다는 주장이 밑받침된 행사시, 사건시 등 사회성을 띤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는 대부분의 시인이 젊은 시절 한껏 불꽃을 태우며 의미있는 작품을 남긴 것과 달리 나이가 들면서 더욱 새롭고 가치 있는 시들을 써낸 보기 드문 시인이다. 그의 시는 시간이 지나면서 확연하게 변모 되는데 이러한 변모양상은 그의 일제 치하 식민지 체험과 병중 체험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김광섭의 시에 만남과 헤어짐의 대조적인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시는 궁극적으로 각 작품마다 제각기 완결을 이루지만 시인의 생애라는 통시적인 면에서 살펴본다면 그의 시적 생애는 어느 한 시점에 해당 되므로 앞 뒤의 작품은 시인의 인식에 따라 연관을 맺을 수 밖에 없다.
김광섭 시인은 자신의 속한 시대의 요구에 시의 적절하게 대처해 나갔고 이를 시로서 체화 했던 시인이였다. 그가 시인으로서 인간으로서 겪어야 했던 체험들은 시에 잘 녹아 있다.
1974년에 『김광섭시전집』을, 1975년 70세의 나이로 《창작과비평사》에서 시선집 『겨울날』을, 이듬해인 1976년에는 『나의 옥중기』를 펴내는 등 해마다 거름 없이 한 권 정도의 저서를 내놓는 의욕을 보였었다. 그러다가 1977년 서울 여의도 삼부아파트 차남의 집에서 72세로 생을 마감했다.
김광섭 시인! 그는 우리시대를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야 할 시인이다. 그는 자신의 다양한 체험을 시에 다양하게 적용시켜 아름다운 언어와 운율로 노래했고 그의 시는 자체로도 빛이 나고 그의 생애 또한 우리에게 삶의 의지를 일깨워 준다. 그의 시 초기에 보였던 관념과 고독을 비판하는 비평가들이 있지만 그것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 김광섭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였다.
그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의 대표시「성북동 비둘기」만을 기억한다면 그것은 우리 시대의 큰 시인을 잃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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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섭 [金珖燮, 1906.9.21 ~ 1977.5.23] 시인
1905년 함북 경성에서 출생하였으며 중동학교 및 와세다 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문학활동은 1927년 창간한 순문학 동인지 《해외문학(海外文學)》과 1931년 창간한 《문예월간(文藝月刊)》 동인으로 시작했다. 1933년《신동아》에 「개 있는 풍경」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45년 중앙문화협회를 창립했고, 1946년 전조선문필가협회 총무부장, 1948년 이승만 대통령 공보비서관, 1956년 자유문학가협회 위원장을 지냈다. 1957년 자유문학사를 세워 〈자유문학〉을 창간했으며, 1958년 세계일보사 사장이 되었다. 1959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1952~70년 경희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시집으로 첫시집 『憧憬』(1938) 이후 『마음』(1949), 『해바라기』(1957), 『성북동 비둘기』(1969), 『反應』(1971) 등이 있다. 그밖의 저서로 『김광섭시전집』(1974), 시선집『겨울날』(1975), 자전문집 『나의 獄中記』(1976) 등을 간행했다. 대한민국문화예술상, 국민훈장모란장,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했다. 1977년 타계했다.
김광섭[金珖燮, 1906.9.21 ~ 1977.5.23] 시인. 그는 1906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출생했다. 호는 이산(怡山)이다. 서울, 당시의 경성(京城)에 있는 중동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그는 그 시절에 같은 대학 불어불문학과에 적을 둔 이헌구(李軒求)와 친교를 맺었으며, 이어 정인섭(鄭寅燮)과 알게 되어 해외문학연구회, 극예술연구회 동인으로 활약했다. 1933년 《삼천리》에 「현대영길리시단」을 번역 발표했으며, 같은 해에 「개 있는 풍경」을 《신동아》에 발표하며 등단했다.
1932년 대학졸업 후 귀국하여 1933년 모교인 중동학교의 영어교사가 되었다.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하여, 1941년에 일본경찰에 붙잡혀 3년8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44년 출감하여 그후 대통령 공보비서관도 지냈다. 경희대 교수, 세계일보 사장 등을 역임했다.
그의 문단 활동은 크게 해방 전후로 나눌 수 있는데, 해방 전의 문단 활동은 해외문학파로서의 활동, 연극평을 중심으로 한 평론 활동, 시작(詩作) 활동 등으로, 또 해방 후의 문단 활동은 해방문단에서의 좌익과 대항한 민족주의 문학 운동, 6·25 이후의 문단 활동, 투병기의 창작 활동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의 초기시는 꿈과 관념의 세계를 노래하는 한편 일제하의 암담한 시대 상황에서 오는 고독, 허무, 불안이 반영된 작품을 썼으나, 후기에 와서 생경한 관념 세계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원숙한 경지의 작품을 썼다.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가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리하여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 위에 뜨고
숲은 말없이 물결을 재우느니.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ㅡ「마음」 전문, 월간 『文章(문장)』제5호, 1939년 6월호
그의 시 「마음」은 『文章(문장)』6월호(1939)에 발표되고, 제2시집 『마음』의 표제가 된 시로서 이산(怡山)의 초기 작품에 속한다.
자기의 마음을 고요한 물결에 비유하여 심리적 갈등과 함께 항상 파문을 일으키기 쉬운 마음을 지키려는 경건한 자세를 잘 나타내고 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이산(怡山)은 당초 <해외문학파>의 일원으로 해외시(海外詩)의 수입․소개를 주로 하였으나 후에 창작시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의 초기 작품은 사변적(思辨的) 경향을 띤 것이 많았다. 즐겨 쓰던 어휘도 불안․고독․비애 등을 내용으로 하는 것들이 많았다. 이 시 또한 자기의 꿈을 잃지 않고 ‘밤마다 덮음’으로써 지키고 있는 시인의 고요한 지적 관조(知的觀照)를 곱게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우리는 이 시에서 조용한 관조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사념(邪念)이 없이 고요한 심경으로 시심이 찾아들기를 기다리는 시인의 자세가 경건하게 느껴진다.
은유와 상징이 조화 있는 배합을 이룬 이 시에서 우리는 모진 현실의 삶을 떠나 어떠한 외부 세계에도 흔들리지 않는 명경지수(明鏡止水) 같은 심경을 얻으려 했던 시인의 인생관 읽을 수 있다.
내
하나의 生存者로 태어나서 여기 누워 있나니
한 間 무덤 그 너머는 무한한 氣流의 波動도 있어
바다 깊은 그 곳 어느 고요한 바위 아래
내
고달픈 고기와도 같다.
맑은 性 아름다운 꿈은 잠들다.
그리운 世界의 斷片은 아즐타.
오랜 世紀의 지층만이 나를 이끌고 있다.
神經도 없는 밤
時計야 奇異타.
너마저 자려무나.
ㅡ「고독」 전문,『시원』 2호(1935.4) / - 시집 「憧憬」(1938)
김광섭 시인의 이 시 역시 그의 초기시에 해당되는 작품으로 대표시이며 또한 그를 출세시킨 작품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 시에는 주지적 경향과 관념적 표현이 두드러지며, 식민지 시대의 지성인이 겪는 자의식과 지적 고뇌가 심각하게 표출되어 있다. 그러므로 단순히 철학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시대 상황과 관련된 존재론적 성찰이라는 점에서, 이 시는 그의 시대 인식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자유를 잃고 외세의 지배를 받던 사회에서 모든 생활을 버리고 그날 그날 생존만을 이어갈 수 밖에 없었던 지성인의 자의식과 고민이 심각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는 일제 치하의 가장 양심적인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일제의 모진 압박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자신을 지켜온 김광섭은 창씨 개명(創氏改名)을 거부하다 끝내는 영어(囹圄)의 몸이 되기도 하였다.
당시 자신이 깨어 있는 것은 밝은 미래에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인간 역사 과정에서 터득한 오랜 세기의 지층(知層)과 같은 관념적이고 표피적인 지식에 근거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제 치하를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맹목적으로 돌아가는 시계 바늘과 같은 것으로 인식한 자기비판적 성찰의 결과로, 시계처럼 사물화되어 맹목적 생존의 상태와 다를 바 없는 식민지 치하의 무의미한 삶을 이 시를 통해 비판하고 있다.
그의 시에는 내면적인 슬픔이 담겨져 있다. 그가 즐겨 택한 주제는 이별이고 슬픔이라는 어휘를 끊임없이 사용하였다. 그의 세계는 기본적인 자유가 박탈된 채 감옥에 가야했던 일본 식민지의 슬픈 세계였다. 그는 그러한 상징을 감상적인 시에 담았다. 식민지와 실향의 비애를 그려낸 그의 시를 통한 자연으로의 도피, 사랑과 슬픔의 관계는 비참한 세상으로부터 탈출하려는 그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모두에 대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해방 직후 그는 우익 문학단체인 ‘중앙문화협회’와 ‘전조선문필가협회’를 결성해 활동했다. 1946년 그동안 운영해오던 광산의 재정 적자가 쌓이자 정리하고, 1947년에는 민중일보 편집국장과 미군정청 공무국장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같은 해 《백민》에 평론 「문학과 현실」을, 1948년에는 《민성》과 《백민》에 각각 시 「겨울밤」과 평론 「문학의 현실성과 그 임무」를 발표하고 정부수립을 할 즈음, 이승만 대통령의 초대 공보비서관으로 임명되어 관직과 집필생활을 병행하는 바쁜 와중에도 1949년에 두 번째 시집 『마음』을 간행하고, 1950년에는 당시 김송이 발간하던 문예지 《백민》을 거둬들여 《문학》으로 제호를 바꿔 펴내었다.
그러나, 《문학》은 곧이어 터진 한국전쟁 탓에 휴간했다. 김광섭은 피난처에서 ‘공보처’가 발행하는 대한신문의 사장으로 취임해 갑작스런 전쟁으로 말미암아 어려움에 빠진 문단을 간접적으로나마 돕는 계기가 되었다.
1951년, 대통령 공보비서관직을 사임하는 것을 계기로 정계에서 물러나온 그는 1952년에 경희대학교 교수에 임용되어 대학에서 후학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이즈음 《문예》에 시 「푸른 상처」 등을 발표하고, 1954년에는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중앙위원과 1956년 ‘한국자유문학자협회’ 회장에 피선되어 활동했다. 1956년에는 문학잡지 《자유문학》을 창간하고, 1957년 제7회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며, 세 번째 시집 『해바라기』를 발간하는 등 역동적인 문단 활동을 했다. 초기부터 여러 단계에 걸쳐 그토록 현실과 추상의 균형미를 이루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시는 추상과 관념 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1958년 김광섭 시인은 세계일보 사장에 취임하면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원작 『서정시집』을 번역 발간하고, 1960년에는 《사상계》에 시 「하루의 공동된 희망 속에서」, 1961년에는 《현대문학》에 시 「동백꽃」 등을 발표했다. 이즈음 서울 성북구 성북동 168번지 34호에 2층 양옥을 지어 입주했다.
그 무렵은 그가 1956년에 자신의 손으로 창간해 꾸려오던 《자유문학》이 1960년대에 들어 재정난을 겪다가 마침내 휴간에 들어가는 등 주변의 일들로 골머리를 앓다가 그 여파로 고혈압 증세를 보이던 시기였다.
그러던 중 1965년 4월, 60세의 나이에 서울운동장에서 벌어지던 경희대학교와 고려대학교의 야구경기를 관전하다 뇌출혈로 쓰러져 메디컬센터에 서둘러 입원한 뒤로 병·죽음과 고투를 벌였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주변을 정리하고 비로소 온전히 자기의 시간을 문학을 위해 쓸 수 있었다고 한다.
4년여의 투병생활을 격으면서 그의 문학적 업적의 결정이라 할 수 있는 제4시집 『성북동 비둘기』를 1969년 범우사(汎友社)에서 출간했다.
이 시집 속에는 <산> <성북동 비둘기> <무제> 등 그의 정신의 특질인 근원에의 향수와 사회비평의식이 격렬히 맥동하고 있다. 현대적 의미의 관념을 간직하면서도,관념어의 구사나 추상적 표현이 말끔히 가시어 구체적인 표현의 아름다움과 세련된 솜씨를 보인다
질병, 가난 등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오히려 참된 인간의 의지, 정신력의 절대성 위에서 건강하고 생명력있는 작품들을 계속 발표하고 있으며 초기부터 현재까지 시의 내용과 형식에 아울러 관심을 가지고 그 어느 한편에만 치우치지 않는다. 내용에 있어서도 어느 한 사상이나 정신만을 추구하여 집중하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고 광범하고 다채로우면서도 인간의 삶과 시대에 밀착된 관념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정치적인 이상이 주제를 이루며 『성북동 비둘기』는 그의 현실인식과 사색의 깊이를 잘 보여주고 있는 그의 대표적인 시집이다.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ㅡ「城北洞 비둘기」전문, 시집 『성북동 비둘기』(범우사, 1969)
이 시는 1960년 중반 이후 급격히 진행된 산업화, 도시화로 인해 황폐해진 자연으로부터 점차 소외되어 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성북동 비둘기」를 통해 보여 주는 작품이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근대화, 산업화에 따르는 자연 파괴와 인간성 상실이라는 현실 인식이 이 시의 시작 동기(詩作動機)다. 그리고 김광섭 시인의 초기 시에서 보이던 사변성(事變性)이나 관념성에서 벗어나 서민과의 일체감 속에서 격조 높은 문명 비평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
결국, 시인은 인간 스스로 창조한 물질 문명 앞에서 자연의 훼손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인간성마저 박탈당하는 아이러니컬한 현상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가 목표하는 것은 현대 문명에 대한 야유나 비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물질 문명 시대에 자연의 소중함과 사랑과 평화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더욱 소박하고 겸허한 일상인의 자세로서 삶을 이야기하고, 나아가서는 달관의 미적 공간을 열어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김광섭 시의 부드러움과 따뜻함 뒤에는 우리 사회가 산업사회로 이행하면서 드러내 보인 비인간화에 대한 준엄한 비판정신이 도사리고 있다. 그는 갈수록 강퍅해지는 인간관계와 산업화사회에서 불가피했던 인간의 물화에 대한 저항정신을 숨기려 하지 않았고, 삶의 진실을 감추고 위협하는 일체의 위선과 허위에 대해서도 비판정신을 발휘했다.
그는 그동안 몸담아오던 경희대학교를 퇴직하고, 1970년에 ‘국민훈장모란장’을 수상했다. 1971년 《현대문학》에 시 「장미」 등을 발표하던 즈음에 아내의 죽음을 맞이하는데, 자신의 투병생활과 아내의 죽음, 그리고 오랫동안 거처로 삼았던 성북구를 떠나 동대문구 중화동으로 이사하는 번거로운 일을 치르면서도 다섯 번째 시집 『반응』을 펴내었다
그의 마지막 이 시집 속엔 시가 개인적 정서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사람이 사는 사회의 가슴일 수도 있다는 주장이 밑받침된 행사시, 사건시 등 사회성을 띤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는 대부분의 시인이 젊은 시절 한껏 불꽃을 태우며 의미있는 작품을 남긴 것과 달리 나이가 들면서 더욱 새롭고 가치 있는 시들을 써낸 보기 드문 시인이다. 그의 시는 시간이 지나면서 확연하게 변모 되는데 이러한 변모양상은 그의 일제 치하 식민지 체험과 병중 체험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김광섭의 시에 만남과 헤어짐의 대조적인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시는 궁극적으로 각 작품마다 제각기 완결을 이루지만 시인의 생애라는 통시적인 면에서 살펴본다면 그의 시적 생애는 어느 한 시점에 해당 되므로 앞 뒤의 작품은 시인의 인식에 따라 연관을 맺을 수 밖에 없다.
김광섭 시인은 자신의 속한 시대의 요구에 시의 적절하게 대처해 나갔고 이를 시로서 체화 했던 시인이였다. 그가 시인으로서 인간으로서 겪어야 했던 체험들은 시에 잘 녹아 있다.
1974년에 『김광섭시전집』을, 1975년 70세의 나이로 《창작과비평사》에서 시선집 『겨울날』을, 이듬해인 1976년에는 『나의 옥중기』를 펴내는 등 해마다 거름 없이 한 권 정도의 저서를 내놓는 의욕을 보였었다. 그러다가 1977년 서울 여의도 삼부아파트 차남의 집에서 72세로 생을 마감했다.
김광섭 시인! 그는 우리시대를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야 할 시인이다. 그는 자신의 다양한 체험을 시에 다양하게 적용시켜 아름다운 언어와 운율로 노래했고 그의 시는 자체로도 빛이 나고 그의 생애 또한 우리에게 삶의 의지를 일깨워 준다. 그의 시 초기에 보였던 관념과 고독을 비판하는 비평가들이 있지만 그것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 김광섭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였다.
그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의 대표시「성북동 비둘기」만을 기억한다면 그것은 우리 시대의 큰 시인을 잃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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