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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리고 자르고 깁고 다듬고
―동시의 리듬을 중시한다
문 삼 석
1. 몇 가지 전제들
어떤 글이든 그 글에는 쓰는 목적을 갖게 마련이다. 비뚤어진 세상을 바로잡는다거나 도탄에 빠진 인류를 구제해 보겠다는 원대한 목적으로부터 그저 무료함이나 달래보려는 심심풀이 글쓰기에 이르기까지 그 폭과 깊이는 다를지언정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가 쓰는 동시 또한 예외일 수는 없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간단치 않다.
오랫동안 동시라는 걸 써 왔는데도 나는 왜 동시를 쓰고 있는지 혼란을 겪을 때가 많다. 더러는 내가 좋아서 동시를 쓰노라고 얼버무리고 마는 적도 있지만 그냥 그러고 말기에는 뭔가 개운치 않은 점이 있다.
아직도 그런 푸념이나 늘어놓고 있다니 참 한심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생각이 더 드는 건 또 어찌된 일인가?
언필칭 우리는 아동문학은 아동을 위한 문학이라고 얘기한다. 수용자 측면에서 정의한 이 정의를 부인할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아동만이 아니라 동심을 지닌 어른들도 독자 대상에 넣어야 한다는 견해가 있지만 그렇더라도 아동을 주 독자층으로 삼는다는 조건은 변치 않는다. 아마도 아동이라는 한정어를 떼어 버리고 그 성격을 새롭게 정립하려는 시도가 개입하지 않는 한 그런 정의는 앞으로도 게속 유효할 터이다.
나도 이에 대해서는 별 이의가 없다.
그런데 아동을 위한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아동을 위하는 일이 되는가? 나를 혼란에 빠뜨리는 대목은 바로 이 부분이다. 아동을 위하는 일이란 아무래도 아동들이 건전하게 성장해 나가도록 긍정적인 돕는 일을 말할 것이다. 즉 아동들의 정서나 인지 영역의 발달에 올바른 영향을 끼침으로써 건전한 인격 형성에 효과적으로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과연 내가 쓴 동시가 얼마만큼이라도 아동들의 건전한 성장 발달에 긍정적으로 기여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못하다면 나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하는 일에는 응당 실패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실패는 반성하고 바로잡는 것으로서 용서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일에는 실패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바탕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긍정적인 영향이 아니라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면 그건 약이 아니라 독일 터이다. 잘 쓰면 약이 되는 비상도 잘못 쓰면 목숨을 앗아가는 독이 되지 않는가? 과연 내가 주는 작품들은 아동들에게 약인가? 독인가?
이처럼 아동을 위한다는 단서는 나로 하여금 한시도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게 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아동들이 대하는 세상은 호기심으로 가득 찬 미지의 공간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호기심의 촉수를 뻗어 해면처럼 세상의 실상을 빨아들인다. 그런데 그들의 촉수는 비판이나 선별의 기준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들에게는 세상의 온갖 현상들이 단지 수용의 대상이 될 뿐이다. 문학작품도 다를 수 없다. 있는 그대로 그들의 가슴에 투영되고 각인된다. 여과 장치 하나 없이 그대로 흡수되고 양분이 되는 문학, 그것이 아동문학이고 또한 동시다. 결국 아동을 위한다는 글이 순기능으로 작용하지 못하고 역기능으로 작용할 때, 인격 형성이 아니라 인간 파괴라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역설적 추론은 그래서 가능하다. 아동을 위한다는 말은 결코 가볍게 치부되어서는 안 되는 개념이다.
아동문학은 꿈을 가꾸는 문학이다. 현실을 뛰어넘어 이상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인간다운 마음을 가꾸는 문학인 것이다. 현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면 굳이 문학일 필요가 없다. 우리 인간이 인간다운 점은 꿈을 가지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현실에 함몰하지 않고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가공의 세계를 창조해 냄으로써 모든 난관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얻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동들은 모름지기 꿈을 꿀 수 있어야 한다. 아동문학은 그들의 마음 속에 아름다운 꿈을 심어주어야 한다. 동시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도록 정서적으로 자극하고 부추겨 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세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으로 묶어진 공존 사회의 실현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화해와 조화의 섭리가 존중되어야 한다. 자연은 바로 이런 화해와 조화의 섭리가 지배하는 이상적인 현장이다. 그러므로 자연을 파괴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공존의 섭리를 파괴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아동문학은 모름지기 자연 속에 내재된 화해와 조화의 섭리를 찾아내고 이를 일깨우는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아동들이 주 독자가 되는 문학이라는 전제는 작가들에게 방법론적으로 많은 제약을 안겨주고 있다.
아동들은 인식의 방법이나 내용 등 모든 면에서 성인들과는 매우 다른 양식과 체계를 가지고 있다. 수용 통로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아동들을 단지 어른의 축소물이나 미숙한 존재로만 보는 견해는 옳지 않다.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특질과 특성에 대한 탐구는 그래서 아동문학가들에겐 필수적인 과제가 된다.
성인의 세계와는 유별난 아동들의 정신 세계를 전제하지 않고는 아동문학은 유치한 인간들을 위한 유치한 문학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2. 그물 던지기
내가 부러워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즉흥시를 쓰는 일이다. 아름다운 경치를 대할 때마다 친구들은 말한다.
"기막힌 경치로구먼. 어이, 시 한 수 읊어 봐."
"이런 걸 보면 머릿속에서 시가 그냥 줄줄 나오지 않나?"
그럴 때마다 나는 픽 웃어버리거나 '시는 무슨….' 하면서 얼버무리고 말지만 내심으론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단 몇 마디라도 그럴싸한 구절을 읊조릴 수가 있었으면 좋을 텐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오히려 내 입은 꽉 막히고 만다. 시선이나 마음을 몽땅 빼앗긴 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기가 일쑤인 것이다.
아무리 좋고 아름다운 모습일지라도 그게 뭔가 의미 있는 존재가 되려면 평소에 설치해 놓은 생각의 그물에 걸려든 게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거미줄을 지나가는 바람처럼 무의미한 현상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생각의 그물이란 아동과 동시에 관한 내 나름의 생각들을 가리킨다. 아동들의 건전한 성장을 위해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어야 하고, 공존이라는 가치를 지향해야 하며, 조화와 화해라는 섭리에의 눈뜸이어야 하고, 그리고 어디까지나 동시는 감동의 구조물이어야 하며 그 재료는 언어여야 한다는 등의 생각들이 얽히고 설킨 복잡한 그물인 것이다. 그 그물에 뭔가 걸려들 때까지 나는 입을 다물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등단 초기에 '산골물'이라는 연작시를 쓴 적이 있다.
산 가까이에서 살았던 나는 맑고 깨끗한 산골물을 대할 때마다 마음을 몽땅 빼앗기곤 했다. 그야말로 맑음 자체인 산골물은 아무리 오랜 시간을 들여다보고 있어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때로는 온통 머릿속이 산골물이 흘러가는 모습과 소리로 가득 찰 정도가 되도록 들여다보기도 했다. 이는 첫 동시집 '산골물'에 수록한 스물한 편의 연작시를 쓰게 된 동기가 되었다.
하도/ 맑아서//
가재가 나와서/ 하늘 구경하니다.//
하도/ 맑아서//
햇볕도 들어가/ 모래알을 헵니다.//
―<산골물·12>
물 밑바닥에 사는 가재도 높은 하늘을 구경할 수 있도록 투명하고, 햇볕이 물 밑바닥까지 내려가 모래알을 하나하나 셀 수 있을 정도로 맑은 물을 형상화해 본 작품이다. 맑은 물이 물의 본연의 모습이라는 것, 본연의 모습을 지녔을 때 자연은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 자연끼리도 서로 관심을 주고 받으며 관계를 갖고 살아나갈 때 서로 따뜻하고 정다운 이웃으로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나름대로 담아본 것이었다. 가재와 햇볕을 의인화하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구상화한 것은 물론 수용자인 아동들의 발달 단계를 고려한 기법이었다.
내 동시집 「바람과 빈 병」은 바람에 대한 연작시를 묶은 책이다. 바람은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진 존재다. 꽃을 피워주는 따뜻한 봄바람으로부터 땀을 식혀주는 시원한 여름 바람, 그리고 곱게 물든 단풍잎을 날리는 가을 바람과 하얀 눈송이 춤을 연출하는 겨울 바람 등등 바람은 무척 다양하게 우리와 어울려 살고 있는 가까운 존재다. 그런데 그 무렵 태풍이 우리 나라를 훑고 지나가면서 바람에 대한 원망들이 높았다. 한순간에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리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하고 만 것이었다. 이 바람의 양면성을 두고 나는 어느 쪽으로든지 한 편이 되어줄 필요를 느꼈다. 억울하게 매도되고 있는 바람의 변호사가 되자. 아동들에게는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만약 바람이 부정적인 의미를 동반하여 아동들의 머리에 각인된다면 큰일이 아닌가? 언어를 습득하는 단계에 놓인 아동들에게 그 단어가 어떤 의미를 수반하여 기억되느냐 하는 문제는 결코 소홀히 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나는 착하고 아름다운 바람의 행적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바람이/ 숲 속에 버려진 빈 병을 보았습니다.//
"쓸쓸할 거야!"//
바람은 함께 놀아주려고/ 빈 병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병은/ 기분이 좋았습니다.//
맑은 소리로/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바람과 빈 병>
동시집 「바람과 빈 병」에 실린 쉰 편의 동시는 결국 바람의 착한 행적 찾기 기록이다. 그렇게 해서 바람은 결코 원망이나 들어야 할 천덕꾸러기가 아니라 고마운 자연의 일부임을 드러내려고 한 것이다. 나는 아동들에게만은 어떤 자연 현상일지라도 부정적으로 인식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내가 쓴 동시에는 자연을 소재로 삼은 작품이 많다. 그러면서 관계지움이라는 양식을 많이 사용한다. 일견 아무런 관계가 없는 듯이 보이는 사물들일지라도 어떤 끈으로 묶어 병치시킴으로써 공생이나 보완적인 삶의 가치를 지닌 존재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참/ 맑지?/ 단풍나무가 빨간 얼굴로/ 시냇물을 내려다봅니다.//
―참/ 곱지?/ 시냇물도 빨개진 얼굴로/ 단풍나무를 올려다봅니다.//
―<산골에서>
빨갛게 물든 단풍나무가 시냇가에 서 있는 모습을 보고 형상화한 작품이다. 물이 맑기 때문에 빨간 빛이 반사되고, 그 아름다움은 한결 고조된다. 이는 상호보완적인 아름다움이다. 이처럼 아름다움이란 서로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관계 설정에서 배가 된다는 메시지를 나는 담고 싶었던 것이다.
3. 굴리고 자르고 깁고 다듬고
퇴고의 중요성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특히 심한 편이다. 지금까지 초고를 그대로 내보낸 일은 거의 없다. 고치고 또 고친다. 결국 능력의 탓이겠지만 더 큰 이유는 앞에서도 밝혔던 것처럼 동시라는 제한성 때문이다.
일단 생각의 그물에 걸려 뭔가 어렴풋이 시상이 잡히면 그것을 머릿속에서 굴리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주제를 생각한다. 왜 이걸 쓰려고 하는가? 아동들에게 무엇을 느끼도록 할 것인가? 그러다 보면 몇 가지 주제가 떠오르는데, 소재와의 관련성을 고려하여 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다. 선택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아동이 주 독자라는 관점을 최우선으로 한다. 그리고 난 다음에 얼기설기한 시상을 종이에 옮겨 초고를 작성한다.
머릿속에서 오래 굴릴수록 초고 작성의 속도는 빨라진다. 오래 굴려도 뭔가 형태가 잡히지 않으면 그냥 간단한 메모 형식으로 처리해 둔다. 몇 개의 단어일 수도 있고 한 두어 줄의 단문일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씌어진 초고는 일단 책상 서랍 속으로 밀어 넣어 둔다.
일단 잊어버릴 만한 시간을 보내고서야 나는 다시 그 초고를 꺼낸다. 그러면 착상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던 몇몇 오류가 쉽게 눈에 들어온다. 몰두로 인해 어느 한 곳으로 치우쳤던 생각이나 느낌들이 시간의 경과로 인해 어느 정도 회복된 객관적 안목에 의해 균형을 되찾는 것이다.
먼저 감동소의 타당성을 검토한다. 시의 본령은 감동이다. 동시 또한 아동들에게 뭔가 마음을 흔들어주는 감동적인 요소가 있어야 한다. 아동들은 새로운 사실의 발견에서 쉽게 감동한다. 즉 새로운 사실에 접하거나 막연하게 인지하고 있던 사물 속에 감추어져 있던 참 모습이 드러났을 때 쉽게 흥분하고 환호하는 것이다. 그건 비단 아동만이 아닐 것이다. 인식의 확산이 가져다주는 희열감은 우리 인간들이 지닌 보편적인 정서일 터이다. 그런데 사물의 참 모습이란 다분히 주관적인 시각에 의해 그 성격을 달리하기 마련이다. 특히 가치라는 의미 부여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객관적인 사물의 속성을 어떻게 정의하고 어떤 가치를 부여하느냐 하는 것은 작자의 몫이지만 과연 그러한 의미 부여가 감동의 차원으로까지 자리매김할 수 있느냐는 온전히 독자의 몫일 수밖에 없다. 특히 작자가 성인이면서 아동이라는 독자를 대상으로 해야하는 동시의 경우에는 더더욱 이 문제에 대한 대처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성인이 아니라 아동들이 감동할 수 있는 소재나 주제인가 하는 검토는 그래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우선적으로 행해져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아동들의 눈높이에 맞춘다는 이야기는 바로 아동들의 심리적 발달 단계를 고려한다는 말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동들의 관심사나 인지 가능한 사고 영역에 대한 탐구는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대부분의 아동들은 활달하고 자유분방한 기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끝없는 상상의 세계를 좋아하고 현실적으로도 어떤 제약이나 한계를 뛰어넘는 일에 흥미를 갖는다.
획일적인 삶이나 지나친 윤리 의식에 얽매이는 것을 기질적으로 싫어하는 것 또한 그들의 특성이다.
초고에서 검토해야 할 사항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점이다. 너무 엄숙해서 그들의 자유분방한 기질과 거리가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럴 경우 아동들은 아예 외면하거나 눈치만 보다가 아예 슬금슬금 도망을 치고 말 것이다. 반대로 그들의 기질에 너무 영합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자칫 정서적 일탈이나 방치 상태로 내모는 위험한 도구로 전락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동시는 아동들의 관심이나 흥미를 끌어당기면서도 적절한 교화적 요소를 갖추는 작품이 될 수 있도록 초기 단계에서부터 면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일단 주제나 소재에 대한 검토가 끝나면 이번에는 표현에 대한 검토에 들어간다. 사실 주제나 소재에 대한 검토는 대부분 머릿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가시적으로 명확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표현에 대한 검토는 분명하고 또한 에누리없이 이루어지는 핵심적인 검토 사항이 된다.
아동문학의 아동이라는 한정어가 가장 크게 위력을 발휘하는 곳도 바로 이 표현 부분이 아닐까 한다. 그들의 인지 체계나 수용 능력은 분명히 어른들과는 구별되기 때문이다.
아동들의 정서적 특징의 하나는 단순 소박성이다. 그래서 나는 간결하게 다듬는 일에 우선 초점을 맞춘다.
아무래도 초고 상태의 원고에는 군더더기가 많게 마련이다. 시적 분위기를 조성할 의도로 상황 설명이 길게 되어 있는 부분, 필요 없이 중복된 부분부터 가차없이 잘라내기 시작한다. 꼭 필요한 부분 외에는 수식어도 자른다. 그러면서 시어에 대한 검토를 병행한다. 가급적이면 쉽고 아름다운 고유어를 쓰고 한자어는 배제하기로 한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현양하는 것 또한 문학을 하는 사람들의 책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감 또한 검토 대상이다. 아무리 우리 고유어라고 할지라도 어감이 나쁜 단어는 다른 말로 대체한다.
그렇게 하고 나면 지면에는 겨우 의미가 통할 수 있을 정도의 뼈대만 남게 된다. 이 엉성한 글은 호흡을 조정하는 단계에서 다시 살이 붙는다.
시는 운율이 있는 글이다. 나는 시의 리듬을 특히 중시한다. 아동을 위한 글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아동들은 기본적으로 율격을 가진 존재다. 호흡이 그렇고 또한 규칙적인 맥박이 그러하다. 어머니의 규칙적인 심장 박동 소리는 그들에게 정서적인 안정감을 주는 인자가 되어 있다.
행과 연의 구분, 음보의 고려는 필수적이다. 긴장과 이완의 반복 배치 또한 무시할 수 없다.
현대 동시는 거의 내재율에 의존하고 있다. 낭송보다는 심미적 감상을 더 우선하기 때문일 것이다. 외형률이냐 내재율이냐 하는 문제는 아무래도 주제의 성격에 따라 결정할 문제이긴 하나 나는 가급적 외형률의 강점을 많이 응용하는 편이다. 낭송하기 좋은 글이라야 아동들의 기질에 더 부합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적절한 호흡으로 무리 없이 읽혀지는 동시라야 기억이 잘 된다. 동시 몇 구절이 기억 속에 살아 남아 끝없는 동심의 발원지가 되어 준다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나는 대구와 반복법을 많이 쓰는 편이다. 이것 또한 아동들의 심리적 특성을 고려한 결과이다. 아동들은 단일한 대상보다는 병치된 두 사물 사이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관계에 흥미를 더 많이 갖는다. 비교를 통한 공통점 찾기나 상이점 찾기는 그들의 왕성한 탐구욕을 충족시켜주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그런 의도를 잘 반영할 수 있는 방법이 곧 대구법이다.
아동들은 또 이미 인지하고 사실을 다시 접했을 때도 흥미와 재미를 느낀다. 익숙한 것에 대한 확인은 그들을 심리적으로 안정시키는 요인이 되어준다. 그래서 반복법은 아동들로 하여금 즐거움의 정서를 불러 일으키는 효과적인 수사법이다. 단지 엄마라는 말을 반복하는 행위만으로도 아동들은 얼마나 즐겁고 행복해 하는가?
4. 내놓기
처음 발상 단계에서 씌어진 초고가 이처럼 요란스런 퇴고의 과정을 거쳐 한 편의 동시로 완성될 때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렇지만 그런 과정을 거친다고 하여 꼭 마음에 드는 작품이 되어주는 것은 아니다. 항상 느끼는 점이지만 동시도 창작이 아닌가? 소박하게 풀이하더라도 창작이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냄을 뜻한다. 생각이 새로워야 하고 기법이 또한 새로워야 한다. 그리고 그 새로움이란 감동을 유발해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을 발표하는 일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내 작품이 발표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무엇을 아동들에게 주고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게 하기 위해서 발표를 하는가? 과연 내가 느끼고 생각하고 의도했던 대로 아동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인가? 오히려 그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닌가?
그런 우려에게 불구하고 나는 많은 글을 발표해 왔고 또 발표하고 있다. 작품이란 결국 시장에서, 다시 말하면 독자들에 의해서 걸러지게 마련이라는 통념에 기대서다.
'네가 쓴 작품이 좋지 않다면 시장에서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작품의 성패는 독자에게 맡기고 너는 작품이나 열심히 써라…'
그러나 그게 온당한 지론인가? 성인문학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우열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아동들을 대상으로 자율적인 정화를 기대한다는 것은 분명히 무책임한 말이 아닐수 없다
그래서 나는 가급적 작품을 내놓기 전에 퇴고에 퇴고를 거듭한다. 내가 작품을 쓰는 시간은 거의 퇴고의 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퇴고는 때나 경우에 따른 제한이 없다. 잡지나 동인지 등에 이미 활자화된 작품일지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발견되면 다시 고친다. 고쳐진 작품은 나중에 개인 작품집을 엮을 때 반영한다. 그리고 개인 작품집에 수록한 작품일지라도 고칠 것이 있으면 또 수정을 해 둔다. 먼 훗날 전집 출판시를 대비해서다.
동시도 예술 작품인 이상 감동을 바탕으로 하여 아동들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해야 할 것이다. 감동이란 좁은 의미의 윤리적 개념에서만 우러나오는 것은 아니다. 구구한 설명이 붙지 않아도 흠뻑 빠질 수 있는 동시가 좋은 동시가 아닐 것인가?
아동문학은 책임이 수반되는 문학이다. 혼자 좋아서 쓰고 혼자서 만족해하는 그런 문학이 아니라는 아동문학의 속성은 오늘도 나를 팽팽한 긴장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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