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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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국경을 넘은 혁명가 손문의 뒤모습 (김문학)
2010년 09월 23일 10시 20분  조회:5670  추천:31  작성자: 김문학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16)

국경을 넘은 혁명가 손문의 뒤모습


김문학


  1911년 10월 10일, 무창봉기로 신해혁명의 총성이 울렸을 때 손문은 미국에 있었다. 독립한 청국 각 성은 파벌로 나뉘여 혁명정부의 소재지 및 지도자를 누구로 꼽을가 쟁의를 일으켰다. 무창봉기 기사를 신문에서 읽은 손문은 쌘프란시스코에서 귀국선에 올라 12월 25일 상해에 도착, 일주후인 1912년 1월 1일 남경에 나타난다. 중화민국정부와 림시대통령의 탄생이다.

  손문(1866년 11월 2일~1925년 3월 12일)은 호가 “중산(中山)”이고 자는 “재원(載元)”이며 “일신”은 구미에서 알려진 그의 이름이다. 대만에서  “국부”로, 중국대륙에서는 “혁명선구자”로 널리 존중받는 손문은 “손중산”으로 통한다. “중산”이란 호는 일본 망명시절 동경의 히비야공원근처의 려관에 묵을 때 우연히 “중산”이란 집의 패말을 보고 숙박부에 적은것이다. “중산초(中山樵, 나카야마쇼)라 칭했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손중산은 혁명가로서 그 국경을 뛰여넘은 세계적인 활동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일본에 망명했다”는 간략한 서술만 나올뿐 구체적인 궤적이나 상세한 내실에 대해서는 자상한 소개가 잘 안나온다.

  그의 40년 혁명일생중 3분의 1의 시기를 일본에서 활동했는데 그 부분이 자세하게 기술되지 않는것은 너무 아쉽다.

  손문은 참으로 다중성격, 다층면의 얼굴을 갖고있는 근대의 거물이다. 그는 민주주의자이기도 하지만 또 친일적인 혁명가이며 또한 대아시아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는 중국혁명의 제1보를 “명치유신”으로 간주하고 제2보를 중국공화혁명으로 보고있었다.

   젊은 시절의 그는 당시 일본이 아시아 각국 독립운동가들이 박해를 받으면 망명터로서 몰려드는 집결지라는 점을 잘알고 여기서 활동을 하여 “동산재기”를 하군 했다. 그가 처음 1895년 광주봉기에서 실패하자 곧 동경으로 망명한것으로 일본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그가 1905년 8월 동경에서 동맹회를 건립하고 총리로 피선, 《민보》를 창간하고  3민주의의 기치를 걸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있다.

  이렇게 엄숙한 혁명가로서의 앞모습은 “교과서적”기술로 강조되지만 그의 인간적 심층이나 그 국경을 넘은 활동의 인물적인 뒤모습에 대해서는 모호하기만 하다. 그래서 피와 살이 붙은 더 인간적인 그의 모습에 접근해보자는 소박한 념원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인물상에 대해서 고찰하겠다. 이로써 앞뒤모습을 립체적으로 볼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사실 손문이 청년혁명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계기는 그가 1895년 광주봉기실패후 일본망명과 미국을 거쳐 영국에 이른다음 청국공사관에 구속되여 그 실체험을 본인이 《런던피난기》로 발표하면서부터이다.

  1900년 5월, 손문은 재다시 일본에 상륙하여 친하게 사귀던 일본인 녀성과 하코네려관에 투숙한다. 일본을 근거지로 혁명활동을 재개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신해혁명 성공까지 도합 10차례의 봉기를 일으키나 번마다 실패로 끝나 “실패의 혁명가”란 라벨이 붙기도 한 인물이다. 그는 “혁명”에 불타는 욕망으로 꽉찬 인물이다. 아무튼 오랑캐의 청나라 왕조를 붕괴시키고 한족중심의 신설공화국을 수립하는것이 장대한 로맨이였다.

  신장 156센치메터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그는 열변을 토하고 혁명의 리상을 도도하게 이야기하군 했는데 화교들은 그를 “손대포(孫大砲, 뻥튀기)”로 장난삼아 부르기도 했다. 그는 또한 성격적으로 급하고 정서적기복이 심한 인물이였다는 증언이 많이보인다. 그가 돈이 딸릴 때면 “박애”라는 등 글씨를 휘호하여 주위 일본인들에게 “얼마라도 좋으니까 사주세요”하면서 푸접좋게 간청하기도 했다는 에피소드 역시 일본인의 회상기에 등장한다. 덕분에 그의 유묵이 일본에 많이 남은것은 오히려 행운이 아니겠는가.

  그의 활달한 성격만큼이나 휘호한 유묵 역시 가관이였다. 이누카이 츠요시(犬養毅)의 회상기에 의하면 손문이 생전에 가장 즐긴 화제는 두가지였는데 하나는 “혁명”이고 하나는 “녀성”이였다고 한다. 중국인 학자 림사운의 론고에 의하면 1895년 일본에 온 그가 동경이나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혁명활동을 벌일 무렵 “영웅호색” 이미지가 이미 주위에 각인돼 있었다고 한다.

그가 돈이 딸릴 때면 “박애”라는 등 글씨를 휘호하여 주위 일본인들에게 “얼마라도 좋으니까 사주세요”하면서 푸접좋게 간청하기도 했다는 에피소드 역시 일본인의 회상기에 등장한다. 덕분에 그의 유묵이 일본에 많이 남은것은 오히려 행운이 아니였는가.

  그의 활달한 성격만큼이나 휘호한 유묵 역시 가관이였다. 이누카이 츠요시(犬養毅)의 회상기에 의하면 손문이 생전에 가장 즐긴 화제는 두가지였는데 하나는 “혁명”이고 하나는 “녀성”이였다고 한다. 중국인 학자 림사운의 론고에 의하면 1895년 일본에 온 그가 동경이나 요꼬하마를 중심으로 혁명활동을 벌일 무렵 “영웅호색” 이미지가 이미 주위에 각인돼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결혼생활에 로모정이란 안해가 있었는데 1896년 요꼬하마에서 16세의 일본녀성 오츠키(大月薰)와 결혼식을 올려 1906년 5월 그사이에 후미코(富美子)라는 딸이 태여나기도 한다. 후미코는 일본어발음으로 “후미(文)”를 따서 지은것이라고 한다. 그외 아사다라는 녀성을 사랑하여 일본 각지에 늘 동반하여 활동했는데 그녀가 죽을 때 손문은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이런 녀성관계에서도 손문의 인간다운 따스한 뒤모습을 체감할수 있다.

  국민당의 청천백일기를 디자인했을 때 당시 황홍이 일본의 일장기와 류사한 리유로 반대했지만 손문은 그것을 고집하여 통과시켰다. 손문의 제자격인 호한민은 후날 회상기에서 “손선생님이 왜 청천백일기에 집착했는지 모르겠다”고 수상쩍어했다고 한다. 손문의 머리속에는 중일련대에 의한 아시아의 흥성을 지향한 원대한 목표와 구상을 이 디자인속에 담았던것이다.

  손문의 리상과 정열은 일본인을 감동시켰고 공감을 형성시켰다. 물론 일본인속에서는 손문을 리용하려는 자도 있었지만 그런 일본인의 지원을 손문은 역리용했던것이다. 특히 지금돈으로 환산하면 10조이상의 일본엔을 지원한 실업가 우메야(梅屋庄吉)나 평생 손문의 절대 지지자였던 혁명가 미야자키 도오텐(宮崎滔天), 그리고 원 총리대신 이누카이(김옥균을 지원한 인물이기도 함) 등 수십명의  리스트가 줄줄이 이어진다. 지어 신해혁명때 전쟁에 자진하여 참전, 전투속에서 헌신한 일본인들도 수십명 있다.

  1912년 3월, 선통황제 퇴위를 조건으로 총통의 대좌를 원세개에게 넘긴 그는 토원(討袁)혁명에 실패하고 1913~16년 일본에서 송경령과 결혼하게 되면서 혁명적반려를 얻는다. 그뒤 그는 수차례 혁명을 궐기하지만 1925년 “혁명은 아직 미완성이다”는 유언을 남기고 파란만장의 생을 마친다.

  사망전인 1924년 겨울, 일본 코베에서 한 “대아시아주의”연설은 구미의 침략주의에 대해 동양의 왕도평화를 강조하지만 일본제국주의는 손문의 경계를 무시하고 중국대륙을 침략하게 된다. 국경을 뛰여넘은 손문은 세계적혁명가로서 그의 동양평화사상은 오늘에도 자못 유효적의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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